* * *
다음 날,
방과 후 신병철이 나를 불러냈다.
용건이야 안 봐도 뻔했다.
"야, 전에 심층부 던전 말인데."
"어떻게 됐냐."
신병철은 다소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게 좀.... 일이 복잡해졌다. 누님이 한번 보재."
"뭐 그럽시다. 지금?"
"지금 오면 좋고."
"바로 가지."
그렇게 신병철과 함께 다시 찾은 도둑 동아리 부실.
또 어디서 주워 왔는지 중고 가구들이 잔뜩 늘었다.
인테리어가 전보다 더 난잡해진 느낌이다.
부실이 부원들로 붐비는 것도 그 난잡함에 한몫을 더했다.
동아리 부실보다 선술집에 더 가까운 분위기.
가죽이 까진 소파에 쌍둥이를 비롯한 남정네 여럿이 구부정하게 앉아서 카드를 치는 중이고, 태블릿 여학생은 한쪽 구석에서 바쁘게 태블릿을 두들겨 댄다.
그리고 당규영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나무 테이블 위에 같은 자세로 걸터앉아 있었다.
할 일 없는 한량 같은 자세인데 묘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인기척을 느끼곤 까만 눈동자가 천천히 우리 쪽으로 움직인다.
그와 동시에 신병철이 말했다.
"누님, 데려왔습니다."
"어, 왔냐."
당규영은 반갑게 인사하려다가,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 표정 관리를 했다.
쌍둥이 하나가 카드에서 시선을 떼고 내 얼굴을 기웃거렸다.
"이 친구가 그 친구요? 누님이 요즘 작업한다던?"
그가 말하는 '작업'이란 나를 도둑 동아리로 영입하는 것을 말한다.
임시 보관소 침입 후에 제안이 들어왔었지.
사실이기는 했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당규영이 눈썹을 찡그렸다.
"작업? 너 단어 선택이 좀 그렇다?"
"아, 맞지 않소. 마법공학 동아리하고도 한바탕 하셨더만, 우리 후배한테서 손 떼라고."
다른 쌍둥이가 추가타를 넣었다.
"내 말이. 봉재석 선배 까였다니까 아주 좋아 죽던데, 누님 그런 모습은 내 살다 살다 처음 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아래에서부터 큼지막한 그림자 손아귀가 솟아올라 얼굴을 콱 움켜잡았기 때문에.
아이언 클로가 아주 제대로 들어갔다.
- 드드드드득,
인간의 두개골에서 나기에는 다소 험악한 소리가 울리고, 버둥거리던 쌍둥이가 축 늘어졌다.
그림자 손이 검지를 펴서 문 쪽을 가리켰다.
"다 나가."
도둑 동아리 부원들이 자리에서 우르르 몸을 일으켰다.
태블릿 여학생도 그들과 함께 나가려 했으나 당규영이 그녀를 불렀다.
"다빈이는 남아. 병철이도."
순식간에 조용해진 동아리실.
그림자 손이 내 근처에 의자 하나를 빼 주었다.
의자에 편하게 기대자 당규영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흠, 흠, 방금 들은 건 신경 쓰지 마라."
"예. 선배님."
"...조금은 신경 써."
"생각해 볼게요."
두루뭉술하게 답하자 당규영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도둑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같은 대답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어림도 없는 소리.
곧장 본론으로 넘어간다.
"일이 복잡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응, 문제가 좀 생겼어. 외적인 문제."
던전 공략이나 보수 같은 세부적인 사항들을 논하기 전에, 내 의뢰를 받을 수 있냐 없냐부터 논하는 게 순서다.
그리고 당규영이 말하는 '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의뢰가 성사되지 않는다.
지하층 관련해서 외적인 문제라면 십중팔구,
"입찰이 걸렸나 보네요."
"그래."
"일반 입찰입니까, 우선 입찰입니까?"
"우선 입찰이야."
입찰.
지하층 던전들은 한번 핵심이 파괴되면 시간이 흘러 재생성될 때까지 입장이 불가능하다.
고현우와 내가 [깃털뱀 제단]을 공략한 후, 포탈이 회색이 되며 막혀 버린 것이 좋은 예시다.
이처럼 일정 주기 내에 특정 던전에 도전할 수 있는 인원수는 제한적이고, 좋은 보상을 드랍하는 던전에는 반드시 경쟁이 붙는다.
이 경쟁을 원만한 방식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용살학원에서 도입한 것이 입찰 제도.
입찰하는 파티들의 전투력, 기존 공략의 성공률, 예상 공략 기간 등의 데이터들을 취합하고, 가장 적합한 파티부터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입찰 방식이고,
각 동아리마다 일정 횟수의 [우선 입찰권]을 보유하고 있다.
[제작 VIP 티켓]을 쓰면 대기열을 무시하고 최우선으로 제작 의뢰를 넣을 수 있듯이, 우선 입찰권을 쓰면 모든 조건을 무시하고 가장 먼저 던전에 도전할 자격을 얻는다.
그리고 지금 [흑사방]에 이 우선 입찰권이 걸려 있단다.
우선 입찰권이 걸렸다는 건 해당 동아리가 그 던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뜻.
이를 무시하고 들어가 버리면?
'대놓고 싸우자는 소리지.'
분쟁이 발생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때문에 의뢰주 측에서도 이런 던전은 가급적 피해 가려는 편이고, 도둑 동아리 측에서도 내 의향을 확인하고자 부른 것이고.
"어쩔래? 다른 데 알아봐 줘?"
다만 여기서 문제라면, 지금 나에게 흑사방 공략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흑사방에서 획득할 수 있는 특정 보상이.
다음 기회를 노리기도 애매한 것이, 심층부 던전같이 막대한 에너지를 내포한 던전은 한번 핵심이 파괴되면 재생하는 데 매우 오래 걸린다.
그렇다고 비슷한 보상을 주는 다른 던전을 공략하기에는 난이도가 훨씬 높고.
해서 나는 상대측 동아리와의 충돌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아니요, 강행했으면 합니다."
당규영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우선 입찰이 걸렸는데도 뚫어 달라고?"
"예, 안 돼요?"
"...."
웬만하면 피해 가려 하지만, 보수만 충분하다면 안 될 것도 없다.
나에게 보수를 지불할 능력이 충분하다는 것도 보여 줬었다.
그럼에도 당규영은 여전히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
우선 입찰을 건 세력이 도둑 동아리를 주저하게 만들 정도의 거대 세력이라는 뜻이다.
내가 다시 물었다.
"어느 동아리인데 그래요."
"...좀 큰 데야."
이어지는 당규영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검술 동아리."
...거긴 좀 크긴 하지.
67화 심층부 (1)
검술 동아리.
4대 세력 중 무림연맹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동아리다.
가입 조건은 오직 하나, 검을 주 무기로 사용할 것.
검은 만병지왕이라는 말이 있듯, 검을 쓰는 생도의 수는 다른 무기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덧붙여 검을 쓰기만 한다면 무림연맹 외 세력에 속해 있더라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렇게 검사들이 한 곳에 모여 형성한 것은 용살학원 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초거대 세력.
그나마 백마법 동아리가 그에 견줄 만하고, 아래 동아리들과는 체급 차이가 엄청나다.
전면전에 들어간다면 도둑 동아리 같은 중견급 동아리는 순식간에 압사당할 테니, 당규영이라도 아예 눈치를 안 볼 수는 없다.
물론 동아리 부장급 정도면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무마할 수단 몇 개쯤은 갖고 있다.
아마 당규영의 걱정은 대부분 나를 향한 것이리라.
"너도 알 만큼 알겠지만, 검술 동아리한테 찍히는 건 에메랄드한테 찍히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 그래도 할 거야?"
"예, 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없이 답하자 당규영이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쯤 되면 물러나겠지 싶었나 보다.
"...한다고? 진짜로?"
"진짜로요."
조금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지금 이 시점에 정확히 검술 동아리와 내 목표가 겹칠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뿐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무림연맹 쪽과도 거래를 하든, 충돌을 하든, 접점이 생길 예정이었다.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지는 것 외에는 대수로울 게 없다.
"뒷감당은 제가 다 합니다. 진행해 주세요."
"...."
당규영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그래. 우리 200번 넘게 졸업하신 후배님한테 또 무슨 방법이 있으시겠지. 그럼 진행하는 걸로 하고, 언제 내려갈 건데?"
"시간 꽤 잡아먹는 던전이니까 금요일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응, 내가 보기에도 금요일이 괜찮겠다. 누구누구 가? 저번에 본 잘생긴 애랑 회색 머리 예쁜 애?"
아마 고현우와 서예인 얘기인 것 같다.
에메랄드 마탑과의 결투에 참관하며 서로 가볍게 안면 정도만 터놓은 상태다.
"잘생긴 친구만 같이 가요."
"월요일에도 걔랑 D급 갔었지? 병철이 길잡이로 세우고. 심층부는 거기에 두 명이 더 붙을 거야. 나랑 얘."
당규영이 자신과 태블릿 여학생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신병철이 흠칫 놀라서 반문했다.
"누님이 직접 가신다고요?"
"이왕 할 거 확실하게 하는 게 좋지. 대신 인건비 더 받고. 어때?"
그러면서 당규영이 내 의향을 물었다.
나야 동아리 부장쯤 되는 실력자가 커버해 준다면 인건비가 더 나온다 해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저도 확실한 게 좋습니다."
"좋아."
당규영은 그림자를 써서 동행하는 인원들의 기척을 없애 줄 테고, 물리적인 장치들은 신병철이 해결할 것이다.
그리고 수정구 같은 마법공학 장치를 무력화하는 건 당연히 태블릿 여학생의 몫.
한편 태블릿 여학생은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한쪽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었다.
손만 쉴 새 없이 태블릿을 두들기면서.
당규영이 나와 태블릿녀를 번갈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
얘네 왜 이리 어색하지? 싶은 표정이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올렸는지 눈썹이 반짝 치켜 올라갔다.
'어색한 게 아니라 초면이거든요.'
임시 보관소 침입 때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복면을 쓰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혼자 태블릿을 들고 다녀서 알아봤지, 아니었으면 감도 못 잡았을 거다.
당규영이 그 점을 뒤늦게 눈치채고 소개했다.
"아, 얘는 채다빈이다."
넥타이핀을 보니 2학년이었다.
채다빈이 눈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의뢰니까 같이 내려가는 건 상관없는데, 얘 1학년이잖아요. 얘가 B급을 깬다구요?"
"그게.... 이거 그냥 설명하려니까 복잡하네. 야, 나 '그거' 말해도 되냐?"
당규영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나에게 허락을 구했다.
나는 '그거'가 무슨 뜻인지 캐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채다빈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성격 같지는 않았고, 만에 하나 떠벌리더라도 수습할 자신이 있었다.
당규영이 나를 소개했다.
"얘가 인페르노 피스트야."
"!!"
채다빈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봤다.
설마 곽승재를 쓰러뜨린 실력자가 1학년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나 보다.
"그게 너였어?"
"예, 그게 접니다."
"그러면.... B급이 가능할 수도 있... 나? 가능해요?"
자기 수준에서는 확신이 안 가는지 당규영에게 묻는다.
그러나 당규영 역시 확신이 안 가는 건 마찬가지인가 보다.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김호야, 솔직히 말해 봐. 너 나보다 쎄?"
"당연히 아니죠. 제가 어떻게 3학년을 이겨요."
"그럼 어쩌려고? B급은 내가 들어가도 엄청 고생하는데."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이거 보시죠."
당규영에게 서류 하나를 건넸다.
[흑사방] 공략본.
빠른 이해를 위해 고현우에게 준 것에서 내용을 많이 간추렸다.
첫 장부터 당규영의 눈이 이채를 머금었다.
슥슥 넘길 때마다 입가에서 연신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이야....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해 왔대?"
궁금해진 신병철과 채다빈이 뒤쪽에 서서 어깨너머로 공략본을 훔쳐봤다.
점점 세 사람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게 변해선, 나를 흘끔거리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요약하면, 들어가서 알맹이만 쏙 빼먹고 나온다? 이거 완전....
- 완전 도둑놈 마인드네요.
- 도둑놈이 따로 없네.
- 내가 말했지. 쟤는 딱 우리 동아리에 걸맞는 인재상이라니까?
- 지금 보니까 조금 야비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 저는 처음부터 알았거든요. 동족의 기운이 느껴졌달까?
어쩐지 다시 영입 제안이 들어올 타이밍 같아서, 당규영이 입을 열기 직전에 선수를 쳤다.
"어때요, 가능할 것 같아요?"
"...! 하여간 눈치 하나는 귀신같아선. 그래, 네 공략대로면 싸울 일이 적기는 하겠다."
이어서 당규영이 공략본의 한 부분을 짚었다.
"그런데 이 부분 보니까, 기관진식 해체해 줄 사람이 하나 필요하겠더라."
"안 그래도 그것까지 부탁드리려 했습니다."
"멀리 갈 필요 있나, 여기 계시는데."
모두의 시선이 신병철에게 집중되었다.
신병철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들어가라고요? B급 던전에요?"
"너 저번에 그랬잖아. 이 몸한테 걸리면 기관진식 그딴 거 애들 장난이지! 하고."
"아니, 그러기는 했는데요, B급은 좀 아니죠.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네가 위험할 게 뭐 있어? 공략 봤으면서. 그리고 여차할 땐 긴급 탈출 쓴다잖아."
"잘못되면 어떡해요? 그럼 그냥 훅 가는 건데!"
"잘못 안 되게 잘해야지!"
한동안 당규영과 신병철의 티격태격이 이어졌다.
항상 동아리 부장의 권위에 눌려 찍소리도 못하던 신병철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인지 쉽게 물러서지 않고 맞선다.
당규영도 던전 내에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강압적으로 나가기보다 가급적이면 설득을 하려고 하는 편이었다.
그 균형이 매우 절묘해서 이대로 놔두면 하루 종일 갈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도중에 내가 대화를 끊었다.
"보수 얘기를 해 볼까요.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라."
"아, 난 안 해. 보수로 뭘 주든 절대 안 해. 진짜 안 해. 때려죽여도 안 해. 그냥 안 해."
신병철이 온몸으로 B급 던전에 들어가기 싫음을 표현했다.
"그래? 후회할 텐데."
"차라리 후회하고 말지. 나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사람이야. 미안한데 진짜 다른 선배님 알아보는 게—"
"유령무영(幽靈無影)."
"...!"
"...!"
도둑 동아리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유령무영]은 은밀함을 중요시하는 직업군이라면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히든 피스다.
살수인 장삼과 왕필마저 덥석 물었고, 눈앞의 도둑들도 마찬가지다.
당규영이 물었다.
"그거 실존하는 거였어? 도시 전설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실존합니다."
찾는 방법도 알고 있다.
다소 시간은 걸려도 이번 학기 내로는 찾겠지.
그리고 그 히든 피스를 눈앞의 세 명과 공유하는 것.
그게 내가 내걸은 보수였다.
"물론 심층부 한 번에 유령무영이면 제가 손해니까 몇 번 더 부탁을 드릴 거고요."
"그건 당연한 거고. 다빈이는?"
"...."
채다빈은 생각 중인지 미간을 좁힌 채 대답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엄청난 히든 피스가 보수로 걸리니 믿기 힘든가 보다.
당규영에게 재차 확인을 구한다.
"얘 믿어도 되는 거 맞아요?"
"적어도 없는 말 지어내는 성격은 아니야."
"...그럼 놓칠 수 없죠. 저는 이 의뢰 받을게요."
"나도. 병철이가 빠졌으니까 그 자리만 새로 구하면 되겠다. 기관진식 잘 뚫는 애가 누가 있더라."
당규영과 채다빈은 벌써부터 신병철을 인선에서 제외한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신병철이 순식간에 태세를 180도 전환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에헤이, 잠깐 타임, 타임. 빠지긴 누가 빠진다고 그래요? 기관진식은 이 신병철을 빼먹으면 이야기가 성립이 안 된다니까?"
"목숨이 왔다 갔다 해서 안 간다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공략 잘 보고 따라가면 괜찮을 것 같거든요. 그치?"
신병철이 내 동의를 구했다.
나는 방금 들었던 신병철의 말을 되돌려 주었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지 않았니?"
"내가? 언제? 모름지기 사나이라면 짧고 굵게 가야 하는 법이지. 암."
시치미를 뚝 떼는 신병철.
얼굴 거죽이 어찌나 두꺼운지 야만족이 창을 던져도 안 박힐 것 같았다.
나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신병철의 함정 해체 능력만큼은 2, 3학년에 버금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배를 타겠다면 환영한다.
대신 기본은 해 줘야겠지.
나는 빙긋 웃으며 서류 한 뭉치를 더 꺼내 들었다.
"이거, 금요일까지 다 외워."
[흑사방] 공략본.
당규영이 들고 있는 요약본이 아니라, 고현우에게 외우게 한 것과 같은 원본이다.
신병철이 서류의 두께를 확인하곤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양이 좀 많은데, 이틀 만에 다 외우기는 조금 빡세지 않을까?"
직접 던전에 입장하는 입장에서는 숙지할 것이 훨씬 많으니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심층부 던전 공략을 대충 외우는 것도, 시간을 더 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다른 걸 포기해야겠지? 심부름센터 일을 덜 받든가, 잠을 줄이든가."
"...."
"싫으면 안 하는 방법도 있는데."
그러자 신병철이 더없이 공손한 태도로 공략본을 받아 들었다.
"싫을 리가요. 이리 주십쇼. 아주 그냥 머릿속에 싹 다 입력해 놓을라니까."
"나중에 시험 본다. 틀리면 안 데려가."
"걱정하지 마셔. 다 외운다니까 그러네?"
당장 시작하려는지 신병철이 서류를 갖고 부실 구석으로 향했다.
작게 하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내가 살면서 공부를 하는 날이 다 오네...."
68화 심층부 (2)
철 인형이 주먹을 뻗어 왔다.
고현우는 마주 달려들며 손에 든 주술검을 휘둘렀다.
일순간 허공에 금빛 궤적이 그려지고,
- 깡—!
주먹과 검이 충돌하며 철 인형이 반걸음 물러났다.
고현우는 그 기세를 살려 빠르게 전진하며 철 인형의 머리를 후려쳤다.
- 깡—!
철 인형의 신형이 옆으로 휘청 굽으며 쓰러졌다.
또 다른 인형이 길쭉한 쇠막대기를 휘둘러 왔다.
고현우는 내력을 검에 집중한 뒤, 놈의 목 부위를 강하게 찔렀다.
- 콱!
뒤로 나가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철 인형.
고현우는 주술검을 허공에 가볍게 몇 번 그었다.
'제법 손에 익었군.'
길이나 무게감 등이 철검과 많이 달라 처음에는 약간 어색했으나, 며칠간 철 인형들과 대련을 하며 감을 잡았다.
이제는 실전에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으리라.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아침.
오늘도 어김없이 트레이닝 센터에서 밤을 새웠다.
아직 수업까지는 시간이 꽤 널널하니, 특수연공실에서 마나 연공을 하다가 등교하면 될 듯했다.
하지만 그 전에 간단하게나마 요기를 해 두는 게 좋겠지.
오늘 아침 메뉴도 평소와 같이 칼로리바 아니면 벽곡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공간을 뒤지던 고현우가 미간을 좁혔다.
'불찰이군.'
벽곡단도, 칼로리바도 다 바닥나 버렸다.
근래 여러 일로 바빠서 채워 놓는 걸 깜빡한 것이다.
아무리 수련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끼니를 걸러서는 안 되었다.
몸의 균형이 무너지면 기량도 함께 무너지게 마련이니까.
'오랜만에 아침 식사를 하겠군.'
칼로리바 따위가 아닌 제대로 된 아침 식사를.
하산하여 용살학원에 입학한 이래로, 식도락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고현우의 마음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만 실력을 배양하고 사문의 숙원을 이루는 목표가 우선이었기에, 아쉬워도 많이 참고 포기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아공간이 텅 비었다면, 학생 식당에서 칼로리바를 보충하는 김에 한 끼 식사 정도는 해도 괜찮을 것이다.
고현우는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트레이닝 센터를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저 앞에 걸어가는 김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밤새 수련을 했던 모양이다.
고현우가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오, 김 형."
"일찍 나왔네. 평소엔 더 늦게 나오지 않나?"
"아침 식사를 하려고 말이오."
"네가 웬일이냐, 아무튼 같이 가자."
함께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고현우는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서 소저는 오지 않소?"
김호와 서예인은 거의 매일같이 붙어 다니곤 했으니 당연히 오늘 아침 식사도 같이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물은 건데,
"벌써 먹었다네?"
김호는 자기도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그러면서 서예인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여 준다.
[김호:밥?]
[서예인:(도리도리 토끼 이모티콘)]
[김호:먹었어?]
[서예인:(끄덕끄덕 토끼 이모티콘)]
"서 소저가 이리도 일찍? 별일이구려."
고현우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서예인이 일찍 일어나는 건 그가 아침을 먹으러 학생 식당까지 가는 것과 비슷하게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김호는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교실 가면 있겠지. 우리 밥이나 먹자고."
아침 메뉴는 보통 삼각 김밥보다 몇 배는 큰 대왕 삼각 김밥.
안에는 한 움큼이나 되는 고기 폭탄으로 채워져 있었다.
고현우에게는 그야말로 호재였다.
'운이 좋군....'
효율을 중시하는 것은 두 남정네가 같았기에, 교실로 이동하면서 대왕 삼각 김밥을 먹었다.
도착할 즈음에는 모두 깔끔하게 빈손이 되었다.
3반에 도착하자 과연 서예인이 먼저 등교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익숙한 종이봉투가 들린 게 보인다.
동시에 고소한 냄새가 고현우의 코끝을 스쳤다.
'과자로군.'
오늘 아침 식사를 따로 한 것이 이것 때문이었는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쿠키를 구운 듯했다.
쿠키를 구운 이유도 어렵지 않게 짐작되었다.
김호가 엊그제 랜덤박스에서 나온 베개인지 쿠션인지를 선물이라고 서예인에게 줬는데, 나름대로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려는 모양이었다.
'선재(善哉)로다, 선재로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고현우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흐뭇해하는 것도 잠시....
김호가 쿠키를 입으로 가져가려는 찰나, 서예인이 슬며시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런 다음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거 뭐 같아?"
"...!"
'저 질문은!'
고현우가 속으로 기함했다.
자신에게 저 질문이 날아왔던 때를 회상해 보면,
- 이거 뭐 같아?
- 마치 도마뱀이 살아 숨 쉬는 것 같구려.
- ....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답했건만, 돌이켜 보면 매우 심각한 오답이었다.
언제나 무표정한 서예인의 미간이 꿈틀거리는 광경을 보게 되었으니.
그 결과 지금 자신에게는 과자는커녕 과자 부스러기조차 안 떨어지게 되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문제는 2차전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2차전의 향방에 따라 김호 역시 자신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고현우가 눈에 공력까지 집중해 가며 쿠키를 관찰했다.
초코칩 쿠키.
초코칩이 균등하게 박혀서 맛 부분에서는 이전보다 발전했다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미관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이전보다 퇴보한 느낌이었다.
'실로 불가사의한 형태로다....'
그나마 가장 흡사한 것을 꼽자면 물고기? 혹은 몸을 웅크린 토끼?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느 쪽이란 말인가?
확신하기 어려웠다.
"...."
김호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듯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시간을 끌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상황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도통 못 알아보겠다는 말과 같고, 그것은 오답이나 다름없으니.
시간제한이 걸린 셈이다.
"...."
대답이 늦어지자 서예인의 낯빛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눈매가 알아보기 힘들 만큼 살짝 가늘어진 것도 같다.
'지금 나서야 한다.'
김호가 마지못해 입을 열려는 찰나.
고현우가 두 사람 사이에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크흐흠.... 물고기가 제법 생동감이 있구려. 방금 호수에서 건져 올린 것 같소."
그런 다음 곁눈질로 슬쩍 서예인의 반응을 살피니, 미간이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보인다.
오답.
그렇다면 남은 정답은 하나.
"토끼, 맞지?"
"...!"
서예인의 낯빛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김호가 자신은 아무 고민도 안 했다는 양 매우 자연스럽게 쿠키를 입에 집어넣고 음미했다.
"맛있네. 실력이 더 늘었어."
"더 먹어."
서예인은 김호가 쿠키 하나를 해치우기 무섭게 다음 쿠키를 입에 물려 주었다.
여전히 고현우에게는 부스러기조차 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떨어지지 않을 테지만, 그에게 후회는 없었다.
'충분히 가치 있는 희생이었다.'
* * *
쿠키 모양 맞추기 챌린지는 고현우의 적절한 개입 덕분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종종 느끼는 거지만 고현우도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운이 좋았고, 서예인의 일그러진 미적 감각이 발휘되는 한 언제든 3차전, 4차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마음의 준비를 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는 특별한 일 없이 금요일까지 흘러갔다.
2 대 2 대인전 보고서를 일필휘지로 써서 내고, 공략전 숙제인 던전 지도 그리기 역시 순식간에 그려서 제출했다.
앞으로도 필기 부분에서는 거의 만점을 먹고 들어갈 생각이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내내 트레이닝 센터에 틀어박혀 지낸 결과,
['코어'의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D->C)]
금요일에 맞춰 코어의 등급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만하면 심층부 던전에서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마나량은 확보한 셈이다.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마쳤다.
[흑사방]에서 내가 원하는 보상을 얻기만 하면,
'드디어 무기다운 무기가 나오겠지.'
일전에 제1공방에서 만든 [부유의 철봉]을 꺼냈다.
부품의 수준에 비해 철봉을 이루는 금속의 질이 낮아 E랭크밖에 못 받았었다.
그 탓에 여태 별다른 활약을 못 하던 참이었고.
마나를 슬쩍 불어 넣자 미약한 상승 기류가 앞머리를 들어 올리고 사라졌다.
마치 나에게 빨리 제대로 된 본체를 구해 달라고 항의하는 듯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최고의 금속을 써서 만들어 줄 테니까.
* * *
금요일 밤.
던전동 근처에서 도둑 동아리 부원들과 고현우를 만났다.
당규영은 우리를 쓱 훑어보더니,
"다 왔냐? 가자."
하고 태연하게 앞장섰다.
고현우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선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무언가 잊은 것 같지 않소?'
월요일에는 나름 넥타이핀도 바꾸고 아무개 뱃지도 달았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없으니 준비가 부족한 느낌이 드나 보다.
심지어 오늘은 던전동 심층부라는 지극히 위험한 곳으로 향하는데 말이다.
나는 길게 설명하는 대신 앞장서는 도둑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계속 지켜봐.'
다른 건 몰라도 의뢰에는 언제나 철저한 이들이다.
그렇게 신뢰도가 쌓여야 다음 의뢰도 들어오니까.
게다가 도둑 동아리 부장이 직접 나서는 의뢰인데 허술하게 처리할 리가 없었다.
의뢰주인 우리는 괜한 걱정 말고 마음 편히 따라가면 그만이다.
그래도 고현우의 질문에 짧게 대답하자면,
'어설픈 눈속임은 안 통하거든.'
아무개 뱃지 따위가 심층부에 상주하는 실력자들에게 먹히겠는가.
덧붙여 이런 눈속임은 대부분 '내려가는 도중에' 누군가를 마주치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내려가면서 아무도 안 마주칠 자신이 있다면?
굳이 눈속임할 필요도 없다.
그 자신감을 확인시켜 주겠다는 듯, 당규영은 지하층에 들어서자마자 실력을 발휘했다.
발밑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더니 작고 까만 나비 몇 마리가 날아올랐다.
[영접비행(影蝶飛行)]
나비들이 작은 날개를 열심히 팔랑거리며 원형 계단 아래나 통로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당규영은 날려 보낸 그림자 나비의 경로를 따라 일행을 이끌다가, 이따금씩 정지하거나 방향을 틀곤 했다.
그러면서 또 영접을 만들어 곳곳에 퍼뜨린다.
정찰병.
먼저 그림자 나비를 보내 놓고, 누군가가 걸려들면 일행을 이끌고 멀찍이 피해 버린다.
술식을 극도로 집중해서 만들어 낸 정찰병이기에, 일반적인 탐색 계열 마법보다 훨씬 먼 곳의 상황까지 파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나비가 매우 은밀하게 움직여서 순찰을 도는 선도부 등에게 발견될 가능성도 매우 낮다.
아마 당규영과 비슷한 수준의 실력자가 아니라면 잡아내지 못할 것이다.
채다빈 역시 자기 실력을 십분 발휘했다.
그녀의 손은 원형 계단을 밟을 때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태블릿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우리가 지나가는 곳곳에 설치된 수정구나 방범 장치 등이 단 하나도 작동하지 않았다.
두 선배가 길잡이를 맡은 덕분에 오래 걸을 필요도 없어졌다.
당규영이 일행을 승강기 앞에 멈춰 세우자,
신병철이 재빨리 달라붙어 장치 몇 개를 만지고 채다빈이 태블릿을 조작했다.
그러자 학생증을 찍지도 않았는데 승강기가 저절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승강기를 타고 한참 내려가서, 또 당규영의 안내를 따라 다음 승강기까지 이동한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니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거리를 이동했다.
신병철을 따라 뚜벅거릴 때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거의 다 왔네.'
마지막 승강기가 우리를 심층부 초입 부근, C급 던전들이 모인 곳에 내려 주었다.
심층부로 직행하는 승강기는 발각될 확률이 매우 크기에, C급에서 걸어 들어가기로 정한 상태였다.
"...."
던전동 하층과 심층부의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모두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느긋하던 당규영 역시 제법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퍼뜨려 두었던 그림자 나비를 모두 회수한다.
아무리 은밀한 그림자 나비라고는 하나 발각될 여지가 조금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작은 여지 때문에 심층부 전체에 비상이 걸릴 수도 있으니, 지금부터는 안 꺼내는 게 낫다.
우리는 여태까지보다 확연히 조심스러워진 걸음걸이로 계단을 밟았다.
그리고 드디어 심층부 초입에 들어섰다.
69화 No.104 흑사방 (1)
초입에 불과한데도 심층부의 경계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일정 간격마다 교직원들이 상주하는 초소가 세워져 있고, 천장에 박힌 수정구의 숫자도 지하층의 두 배 이상이다.
게다가 당장 눈에 띄는 3학년 선도부만 둘.
순찰을 도는 듯 일정한 구역을 규칙적으로 배회한다.
우리가 이곳을 뚫을 수 있을까?
'저 둘이면 될 것도 같은데.'
당규영과 채다빈이라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임시 보관소 침입 당시는 3학년 선도부 하나 뚫기도 버거웠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 지옥부 선배는 보관소 문 앞을 떡하니 지키고 있었던 반면, 저들은 우리가 오늘 밤 이곳에 침입하리라는 사실도, 목표가 104번이라는 사실도 모르니까.
넓은 공간에 늘어선 던전들을 모두 경계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규영쯤 되는 실력자라면 그런 빈틈을 파고드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고.
다만,
'혹을 달고서는 어렵지.'
그 혹이란 당연히 나를 비롯한 1학년들이다.
나는 [도둑걸음] 외에 기척을 죽이는 스킬이나 특성이 없고, 고현우는 말할 필요도 없다.
신병철은 그나마 몇 개 배웠겠지만 전체적인 수준이 낮고.
이런 혹이 셋이나 달렸다면 아무리 도둑 동아리 부장이라도 무리다.
'그러니 혹을 집어넣어야지.'
당규영이라면 그 방법을 갖고 있을 테고.
"...."
"...."
당규영과 채다빈은 준비해 온 약도와 눈앞의 풍경을 대조하며 입 모양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선도부 두 명의 동선을 살펴보고, 어떻게 따돌릴지 즉석에서 작전을 보완하는 듯했다.
짧은 대화가 끝나는 즉시 채다빈의 손이 미친 듯이 태블릿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다다다다다닥,
너무 빨라서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
수정구의 숫자가 두 배로 늘어난 만큼 두 배로 바빠진 것 같다.
당규영 역시 마나를 끌어모아 제법 큰 규모의 마법을 준비했다.
발밑의 그림자가 점점 새까맣게 짙어진다.
신병철이 당규영 근처로 다가가 우리에게 손짓했다.
'모여, 이쪽으로.'
그새 저 수많은 수정구들을 모조리 무력화했는지, 채다빈의 손이 우뚝 멎었다.
그리고 짧게 한마디 하는 것을 신호로,
'됐어요.'
당규영도 준비한 술식을 해방했다.
[쉐도우 파우치(Shadow Pouch)]
발밑에서 그림자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더니 커다란 그림자 주머니가 생성되었다.
주머니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입을 벌리고 우리를 날름 집어삼켰다.
시야가 새까만 그림자로 뒤덮였다.
바로 옆에 있는 고현우와 신병철만 어렴풋이 보이는 상태.
곧 몸이 좌우로 흔들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당규영이 우리를 그림자 주머니 속에 넣어 놓고 이동하는 모양이다.
고현우가 신기했는지 벽면을 더듬거리려고 했으나 내가 제지했다.
'가만있어.'
'크흠....'
괜히 소란을 피웠다간 바깥에서 이동하는 당규영과 채다빈에게 영향이 갈지도 모른다.
최대한 잠자코 있는 게 상책이다.
잠시 후, 그림자 주머니가 우리를 퉤 뱉는 느낌이 들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No.104] [흑사방]
목표로 하는 던전 포탈이었다.
나는 고현우와 신병철에게 눈짓하며 입구를 가리켰다.
'바로 들어간다.'
미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언제 선도부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당장이라도 입장해야 한다.
당규영과 채다빈이 입 모양으로 한마디씩 했다.
'살아서들 보자.'
'행운을 빌어.'
그리고 신병철에게는 추가로 한마디씩 더.
'올 때 선물.'
'올 때 간식.'
'...예, 누님.'
우리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뒤, 곧장 순간이동 포탈에 발을 들였다.
* * *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은 낡은 민가 같은 곳이었다.
버려진 지 오래된 듯 바닥이 두꺼운 먼지로 뒤덮인 채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고현우는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아련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감상에 젖게 내버려 두고 신병철 쪽을 살피니,
"...."
평소의 장난기 많은 표정은 어디 가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자신이 기어코 B급 던전에 들어와 버렸다는 실감이 나나 보다.
실제로 위험한 곳이라 이해를 못 할 일은 아니지만, 계속 저렇게 움츠러든 채로 두면 성공할 작전도 실패할 거다.
사기를 북돋울 필요가 있었다.
이럴 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존재하는데,
"쫄?"
한 글자로 사나이 호승심 자극하기.
효과는 매우 뛰어났다.
신병철이 즉시 표정 관리를 하며 피식 웃는다.
"에헤이, 또 뭔 소리여. 쫄기는 누가 쫄았다고."
"다리가 막 덜덜 떨리는데?"
"습관이야, 습관. 난 원래 서서도 떨어."
"습관은 어쩔 수 없지."
나는 대충 납득한 척하고 넘어갔다.
어쨌든 신병철의 표정이 한결 풀린 걸 보니 사나이 호승심 자극은 성공적이라 하겠다.
민가 밖으로 나와서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점점 길이 넓어지고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저잣거리에 들어선 것이다.
곧 우리는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사람이 이렇게 많으면 자연스레 활기가 넘치고 시끌시끌해야 하는데, 기이하리만치 가라앉은 분위기에 소음이 적었다.
또한 사람들의 면면에 떠오른 표정에도 불만, 슬픔, 두려움, 체념 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득했다.
원인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다.
근방에서 안 좋은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면 이런 현상으로 이어지곤 한다.
가령 일대를 다스리는 문파나 방파의 횡포가 심하다거나, 매일같이 사람들이 사라진다거나, 시체를 치운다거나.
그리고 그 방파는 말할 필요도 없이,
'흑사방.'
먼발치에 커다란 전각이 떡하니 세워져 있다.
이 일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원흉이자 던전의 핵심.
저 흑사방을 무너뜨리고 방주와 부방주를 처치하는 것이 이 던전의 목표다.
'원래 목표는 그렇고.'
지금 우리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소리.
고로 우리들의 목표는 알맹이만 쏙 빼먹고 빠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첫 번째 알맹이를 찾아 저잣거리를 계속해서 걸었다.
한구석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객잔을 발견할 때까지.
<얼큰 오리탕>
색 바랜 간판은 읽기가 어렵고, 낡은 나무 문이 반쯤 닫혀 있어 영업을 하기는 하는지 의심이 든다.
그러나 나는 주저 없이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가게의 내부 역시 외관과 마찬가지로 낡고 허름했다.
밖에서부터 짐작했지만 우리 말곤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신경 쓰지 않고 탁자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다리다 보니 점소이가 주방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손님을 발견하고 놀라는 모습을 보면 장사가 얼마나 안되는지 알 만하다.
그래도 점소이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다가와서 주문을 받는다.
"뭐 드려요?"
"오리탕 셋에 만두."
"예, 잠시만요."
점소이가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곧 뜨끈한 만두 한 접시를 갖고 나왔다.
"금방 막 쪘어요."
탁자 한가운데에 접시를 놓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다.
그 뒷모습을 신병철이 가만히 응시하다가 나에게 물었다.
"쟤 잡으러 온다고?"
"어."
신병철 역시 반강제로 공략본을 외웠기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 해야 할 일들을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우리가 이 객잔을 찾은 이유는 바로 흑사방의 다음 목표가 저 점소이이기 때문.
무슨 특별한 구석이 있어서 목표로 삼는 건 아니다.
흑사방은 단순히 육식 동물이 식사를 하듯 주기적으로 청년들을 한 명씩 데려갈 뿐이고.
공교롭게도 이제 점소이의 차례가 되었을 뿐이다.
셋이서 만두를 먹으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접시가 거의 깨끗해졌을 무렵,
낡은 나무 문이 열리며 새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 손님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가에 버티고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검은색에 가까운 어두운색 무복을 입은 사내 둘.
손등의 검은 뱀 문신이 그들의 소속을 말해 준다.
'흑사방의 말단 무사.'
무사 하나가 우리 쪽을 탐색하려는 듯 날카로운 기세를 보냈으나, 우리는 일단 반응하지 않고 남은 만두를 마저 먹었다.
그때, 점소이가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더니 그들을 발견하고 뻣뻣하게 굳어졌다.
흑사방 무사가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그리며 말문을 열었다.
"장사 좀 되나? 웬일로 손님이 있군."
점소이가 쩔쩔매면서 대꾸했다.
"이, 이번 달 상납금은 다 채웠잖아요."
"아니, 오늘은 다른 일로 왔다."
"...!"
그 다른 일이 무엇인지 짐작한 듯, 점소이의 표정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반면 말단 무사의 입에 걸린 미소는 한층 짙어졌다.
"우리와 함께 가자."
"그, 그건...."
"안 됩니다!"
주방에서 숙수로 보이는 중년인이 헐레벌떡 뛰쳐나와 외쳤다.
점소이를 보호하려는 듯 감싸고 돈다.
"...."
그러나 흑사방 무사가 기세를 피워 올리며 노려보자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무인이 가하는 압박감을 일반인이 이겨 내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중년인은 필사적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흑사방으로 끌려간 청년 중에 돌아온 이가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부들부들 떨며 겨우 입을 열지만,
"제, 제 아들만은 안 됩니다. 부, 부디—"
- 퍼억!
중년인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말단 무사가 뻗은 발길질에 얻어맞고 바닥을 굴렀다.
말단 무사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중년인을 일별하고, 우리 쪽으로 다시금 날카로운 기세를 보냈다.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의미.
그런 다음 점소이에게 말한다.
"따라와라."
"...."
"계속 미적거리면 베겠다."
허리춤의 검을 슬슬 쓰다듬으면서 말하니, 아무 힘도 없는 점소이로서는 선택권이 없었다.
여기서 더 반항했다간 중년인의 시체를 치우게 될 테니, 얌전히 흑사방으로 끌려가는 수밖에.
"아아...."
흑사방 무사들과 점소이의 모습이 밖으로 사라지고,
중년인은 망연자실해서 주저앉은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까.
나는 그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중년인이 나를 의식하고 시선을 들어 올린다.
내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가서 데려올까요?"
중년인의 낯에 일말의 희망이 피어올랐다.
상대가 그 흑사방의 무사들이라 내심 별 기대는 안 되는 눈치였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듯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해 주면요?"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
나는 씩 웃었다.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
70화 No.104 흑사방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