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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No.104 흑사방 (2)

객잔을 나서서 흑사방 말단 무사 둘의 발자취를 좇았다.

금방 검은 무복 둘과 점소이의 뒤통수를 발견했다.

저쪽에서도 금세 우리의 기척을 눈치챘는데, 대놓고 티를 내면서 추적해서 그렇다.

놈들은 지원을 요청하지 않고 우리를 어딘가로 유인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 역시 순순히 놈들을 따라 이동했고, 곧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흑사방 무사 A가 우리를 알아보고 말했다.

"객잔에 있던 놈들이군. 협객 놀이를 하러 왔느냐?"

"어. 불의를 보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고."

히든 피스는 더 못 참고.

옆에다 동의를 구하는 시선을 보내자 고현우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소. 어찌 눈앞에서 죄 없는 청년이 끌려가는데 지켜만 보겠소."

"용기는 가상하다만 어리석구나. 그 의협심이 네놈들의 명을 재촉할 것이다."

- 스릉,

즉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드는 무사 A.

한편 무사 B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A에게 말한다.

"근골이 제법 튼튼하군. 써먹을 수 있겠어."

"이놈들도 방으로 끌고 가나?"

"그래, 최대한 상처 없이 제압해라."

"팔다리 한두 개 정도는 잘라도 상관없을 테지?"

"물론."

마치 우리를 제압하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는 태도였다.

나 역시 고현우와 신병철에게 언질을 주었다.

"옷은 안 상하게."

"알겠소."

쟤들 무복은 써먹어야 하니까.

아무 예고도 없이 무사 A에게 [윈드포스]를 시전하자 전투가 막을 열었다.

"무슨—"

바람이 내 쪽으로 불며 몸이 끌려가자 놈은 잠시 당황했으나,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되레 바람을 타고 날아와 내 팔을 자르려 했다.

나는 고개를 슬쩍 기울인 다음 놈의 멱살을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 쾅!

제법 맷집이 좋은 놈인지 거기서 바로 무력화되지 않고, 바닥에 누운 채로 검을 휘두른다.

나는 발목이 잘리기 직전 한 뼘 가볍게 뛰어올라 칼날을 피해 내고, 다시 윈드포스를 시전하며 놈을 들어 올린 뒤 바닥에 메다꽂았다.

- 쿵!

그러고도 아직 정신이 남아 있길래 머리를 붙잡고 관자놀이에 무릎을 찍어 버렸다.

- 콰직!

저쪽 상황은 어떤가 시선을 돌려 보니, 고현우와 말단 무사 B가 손속을 교환하는 중이다.

주먹과 손이 허공에서 빠르게 얽힌다.

신병철은 그 근처를 서성대며 다리를 걸거나 뒤통수를 갈기려는 시도를 하다가 한 대씩 얻어맞곤 했다.

'어째 싸움이 조금 지저분한데.'

고현우가 주무기인 검을 안 써서인지, 신병철이 본래 싸움을 지저분하게 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눈 뜨고 못 봐 줄 촌극은 결국 신병철이 뒤에서 헤드락을 걸고, 고현우가 명치에 일권을 꽂아 넣으며 끝났다.

제압한 두 말단 무사의 무복을 홀랑 벗기고, 꽁꽁 묶은 다음 대충 던져 놓았다.

저들이 깨어나거나 저들의 부재가 알려졌을 즈음에는 이미 우리가 던전을 뜨고 난 뒤일 것이다.

신병철은 그 짧은 전투에서 이곳저곳 많이도 얻어맞았는지 온몸이 쑤시는 기색이었다.

연신 자기 어깨며 팔다리를 주물러 대며 묻는다.

"아니, 얘네가 말단 무사라고? 간부급 아니고?"

"어. 얘네가 여기서 제일 약해."

말단 무사는 맞지만 심층부, B급 던전의 말단 무사.

어지간한 하급 던전의 정예나 중간 보스급쯤은 된다.

나나 고현우는 몰라도 신병철은 일대일이 안 될 거다.

그러니 가능한 전투를 피해야 하는 거고.

어쨌든 첫 단계는 해냈다.

나는 엉거주춤 서 있는 점소이에게 말했다.

"돌아갑시다."

* * *

"아들아!"

"아버지!"

두 부자는 몇십 년은 못 본 것처럼 와락 끌어안고 가족 상봉의 시간을 가졌다.

제법 애틋한 장면이라 하겠지만 나는 너무 여러 번 봐서 별 감흥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처음 봤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무례하게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감동적인 와중에 미안한데, 계산할 건 계산해야죠."

"아, 예! 제가 뭘 해 드리면 될지...?"

"이거 가져가도 돼요?"

내 손에는 자그마한 조각상 하나가 들려 있었다.

객잔 한구석을 장식하던 달마상을 주워 왔다.

주인장은 '대체 저게 왜 필요하지?'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달마상쯤이야 무리한 요구도 아니고,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것도 아니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가십쇼."

"감사합니다. 오리탕은 돼요? 만두로는 조금 부족하네."

"당연히 됩니다. 바로 준비하지요."

주인장과 점소이가 요리를 마저 하러 주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달마상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곳저곳이 마모되고 깨져나가 매우 볼품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마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면 묘한 정취가 느껴진다.

곁에서 같이 달마상을 뜯어보던 고현우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듯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구려."

신병철 역시 기웃대다가 한마디 했다.

"그거 진법에 쓰는 거 같은데, 아니야?"

"맞아. 진법에 쓰는 거."

정확히는 특정한 진법을 파훼하는 용도로 쓰인다.

일종의 열쇠라 생각하면 된다.

뿐만 아니라,

"뭐가 보이냐."

질문과 함께 달마상을 건네자, 고현우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고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다소 아리송한 태도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을 진지하게 굳혔다.

"이건...!"

고현우의 짐작대로, 이것을 조각한 자는 보통 고수가 아니다.

한낱 달마상을 조각하는 데에 자신의 무리(武理)를 담을 정도의 실력자.

조각상을 이루는 선 하나하나가 마치 예리한 검기가 지나간 흔적 같다.

긴 세월 상당 부분이 풍화되었음에도 그 흔적이 선명하기 그지없다.

계속 관찰하고 연구하다 보면 무리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터.

고현우 같은 무인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보물이다.

반면 나한테 중요한 건 진법을 파훼하는 부분뿐.

해서 나중에 쓸 일이 생길 때까지 고현우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당분간 갖고 있어. 여러모로 연구도 해 보고."

"이런 귀한 걸 본인에게 빌려줘도 괜찮소?"

"목숨 걸고 들어온 던전인데, 그 정도는 얻어 가야 셈이 맞지."

항상 나를 믿고 따라오는 고현우라면 그만한 보상을 받을 가치가 있다.

고현우가 감격해서 나에게 예를 갖추었다.

"김 형의 배포에는 항상 감탄하게 되는구려. 고맙소."

"빨리 강해져라. 다른 던전도 같이 가게."

"최선을 다하겠소."

달마상이 고현우의 인벤토리로 들어가고.

때마침 점소이가 쟁반에 오리탕 셋을 받쳐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주문하신 오리탕이요."

그리고 우리 앞에 하나씩 내려놓는데....

그릇 안에 용암색 액체가 펄펄 끓어오르고 있다.

척 보기에도 엄청 매워 보인다.

게임으로서 접하던 때에도 이 집 오리탕은 맵기로 유명했었다.

객잔 이름이 <얼큰 오리탕>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숟가락을 들어 동시에 한 입씩 떠 넣고 동시에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공통적으로 매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거 좀 매운데?'라고 말하려는 찰나, 신병철이 허세를 부렸다.

"하나도 안 맵네. 이 정도면 그냥 맹물이지."

나와 고현우가 시선을 교환하고,

"이만하면 먹을 만하구려."

"먹다 보니까 괜찮네."

사나이들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원래는 이 집 오리탕이 그렇게 맵대서 호기심에 맛만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나이, 아니, 되다 만 어린애들 자존심 싸움이 벌어진 탓에 전투적으로 오리탕을 흡입했다.

결과는 모두 꾸역꾸역 다 비워서 무승부.

이런 경우 오리탕을 팔아먹은 가게 쪽이 승리하는 셈이지만, 주인장이 돈을 받지 않았으니 그렇지도 않았다.

오리탕을 해치우고 나서는 장난기를 다 빼고, 본격적으로 작전을 점검했다.

흑사방의 공략법은 큰 틀에서는 깃털뱀 제단과 비슷하다.

흑사방주를 비롯한 주력을 내가 묶어 두는 동안, 고현우와 신병철이 목표 아이템들을 확보하는 것.

깃털뱀 제단과 결정적인 차이점을 하나 꼽자면, 흑사방주가 너무 강해서 처치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꺼내 봐."

내 말에 고현우가 탁자 위에 아이템 두 개를 올렸다.

학생 상점에 비싼 포인트를 지불하고 구매한 것들이다.

작전 도중 서로의 상황을 전달받기 위해 귀에 꽂는 조그마한 통신 기기를 샀고,

다른 하나는 복잡한 마법진이 각인된 양피지 한 장.

[긴급 탈출 스크롤(B)]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고도 탈출할 수 있도록 임의로 출구를 생성하는 일회성 아이템이다.

엄청나게 강력한 효과를 가졌지만, 뚜렷한 제약이 존재해서 함부로 썼다간 골로 가는 수가 있다.

이 부분이 중요하기에 스크롤을 가리키며 재차 강조했다.

"어떤 상황이 닥치든, 반드시 안전지대까지 나와서 써야 돼."

"엄한 데서 쓰면 어떻게 되는 거요?"

"정말 운이 좋으면 탈출 포탈이 열리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포탈이 어디로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정체불명의 다른 던전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확실하게 출구를 열려면 모든 일을 끝내고, 안전지대에서 스크롤을 써야 한다.

가령 우리가 처음 발을 들인 폐가 같은 곳에서.

신병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하여간 공략대로만 따라가면 된다는 거네."

"본인도 숙지했소."

그 외에도 공략의 중요 요소 몇몇을 거듭 되새긴 다음,

객잔을 나서서 두 사람과 갈라졌다.

"그럼 김 형, 무운을 빌겠소."

"너네도. 중간중간 연락들 하고."

고현우와 신병철이 이번 공략의 시작 지점인 '비밀 통로'로 이동하는 사이, 나에게는 잠깐의 시간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저잣거리를 거닐며 선물 몇 개를 샀다.

당규영과 채다빈이 올 때 간식을 사 오라고 말한 게 떠올라서 대부분 그쪽 위주로.

인벤토리 한켠을 간식으로 가득 채울 즈음, 귀에 꽂아 둔 통신기를 통해 고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소.]

"그래, 시작합시다."

짤막하게 답한 뒤 흑사방으로 직진했다.

정문에는 문지기 둘이 삐딱하게 기대고 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물음을 던졌다.

"웬 놈이냐?"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다가갔다.

문지기들은 내 걸음걸이가 당당하고 똑바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온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듯했다.

질문을 던진 놈의 표정이 험악해지더니, 즉시 칼을 뽑아 들어 겨누었다.

"웬 놈이냐고 물었다!"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다가갔다.

그러자 문지기가 돌진해 오며 칼을 휘둘렀다.

놈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게 있다면, 내 주먹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미약한 연기를 흘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목을 베어 오는 칼을 슬쩍 흘리며 파고들어 그대로 주먹을 뻗자,

- 콰콰콰콰콰—!!

화염 폭풍이 내달리며 눈앞의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다.

문지기 두 명도 함께.

정문이 자리했던 곳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휑해졌고, 전각에 옮겨붙은 불길이 점점 크기를 키워 간다.

나는 잠시 그 광경을 구경했다.

"잘 타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싸움을 건 것도 나고 불을 붙인 것도 나지만 그런 건 사소한 문제다.

곧 안쪽이 벌집을 들쑤신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 뭐야! 무슨 일이냐?

- 정문 쪽이다!

- 불! 얼른 불부터 꺼라!

갑자기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싶겠지.

나는 흑사방도들의 상황 파악을 도와주기로 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한껏 목청을 끌어 올려 외쳤다.

"적습이다—!"

이리 오너라!

71화 No.104 흑사방 (3)

일단의 흑의인들이 불길을 넘어 정문(이었던 것) 앞으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사람이 많으니 군데군데 실력자들도 눈에 띈다.

조장급, 대주급, 단주급....

개중 단주급으로 보이는 무사가 방금 들었던 질문을 또 던졌다.

"웬 놈이냐?"

"적습이라니까."

"...미친놈이군."

"그 말도 맞다."

지금 하는 짓이 반쯤 미친 짓이기는 했기에 선선히 수긍했다.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단주급 무사가 명령을 내렸다.

"쳐라."

흑의인들이 부채가 펼쳐지듯 옆으로 늘어서며 나를 포위하고, 일제히 공격해 들어왔다.

칼날 여러 개가 사방에서 나를 노린다.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른 후, 한 손에 [윈드포스]를 담아 오른쪽 흑의인을 후려쳤다.

- 펑!

흑의인의 신형이 뒤에 있는 동료들의 몸과 뒤엉키며 함께 나가떨어졌다.

나는 잠깐 벌어진 틈을 비집으며 포위망을 빠져나왔고, 가장 가까이 추격해 온 놈에게 두 번째 [인페르노 피스트]를 갈겼다.

- 콰콰콰콰콰—!

흑의인 십수 명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화했다.

반면 조장급 이상 무인들은 재빨리 화염 폭풍의 범위에서 몸을 피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확실히 B급 던전쯤 되니 잘 안 통한다.

금세 다시 포위망이 형성되었으나, 방금 보고 겪은 게 있다 보니 쉽사리 치고 들어오지 못했다.

나에게 처음 말을 건넸던 단주가 대화를 시도했다.

방금 전에 미친놈 취급을 한 것치곤 상당히 정중한 말투로,

"귀하는 혹시 염패(炎覇)의 후인이 아닌가?"

'염패?'

저건 또 무슨 소리래.

인페르노 피스트 때문에 화염 계열 무공에 능한 전대 고수의 별호가 튀어나온 걸까?

이렇게 오해를 해 준다면,

'오히려 좋아.'

저들의 이목을 끌기가 더 쉬워진다는 뜻이니까.

나는 일부러 한층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파 나부랭이 따위에게 돌려줄 대답은 없다."

"...."

그 말에 저들끼리 알아서 납득을 하며 시선을 교환하는 흑의인들.

분위기가 팽팽하게 긴장되는 걸 보니 나는 염패의 후인으로 확정된 듯하다.

일반적인 사파 무인이라면 이 시점에서 제 한 목숨 건사하겠다고 뿔뿔이 도망쳐야 정상인데, 흑의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자리를 지켰다.

단주가 발이 빨라 보이는 자에게 지시하고,

"너는 서둘러 방주님을 모셔 와라."

모두 결사 항전을 각오한 듯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 쉬익!

이번에는 단주가 앞장서서 검을 찌르며 들어왔다.

내가 간발의 차로 칼날을 피하며 파고들었으나, 단주는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도 나와 몇 합을 교환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러나 몇 합 다음에는 결국 가슴팍에 윈드포스를 얻어맞고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물론 내 상대는 단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즉시 땅을 걷어차 몸을 피하자, 방금 내가 자리했던 곳을 흑의인들의 검이 갈가리 찢었다.

바짝 쫓아오는 흑의인 하나를 붙잡고 날려 보내며 압축된 공기를 함께 쏘아 냈다.

흑의인의 몸이 대포알처럼 쏘아져 나갔으나, 다른 자들은 받아 주지 않고 비켜났다.

결국 흑의인은 먼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거, 좀 받아 주지.'

매정한 놈들 같으니.

아무튼 그로 인해 잠깐의 틈이 만들어졌고, 그 틈을 노려 주먹을 꽉 움켜쥐고 앞으로 뻗어 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치자,

"피해랏—!"

복면인들이 내 정면에서 우르르 몸을 피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인페르노 피스트를 안 썼으니까.

나는 주먹을 앞으로 뻗은 채 피식 웃었다.

"쫄기는."

"!!"

"이놈이...!"

몇몇 흑의인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지만, 끝내 평정심을 잃지 않고 대기한다.

저런 모습만 봐도 얼마나 훈련이 잘되었는지 알 만하다.

그러나 흑의인들의 차례는 당분간 오지 않을 듯했다.

휑해진 정문 쪽에서 무거운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흑의를 입은 중년인 하나가 서 있었는데, 뱀 같은 인상이나 날카로운 분위기 등이 똬리를 튼 한 마리 구렁이를 연상시켰다.

방주, 흑사(黑蛇).

마침내 흑사방의 우두머리이자 이 던전의 최종 보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흑사방주는 다른 자들이 했던 질문을 반복하지는 않았다.

오면서 부하들한테 전해 들은 게 있나 보다.

"염패의 제자라고?"

"아닌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아저씨 제자 아닌데. 쟤들이 오해한 건데.

흑사방주가 단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염패의 제자가 확실합니다. 단지 정신이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장내의 모든 이가 무언의 동의를 표했다.

흑사방주가 다시 나에게 말했다.

"잔뜩 행패를 부려 놓고 인제 와서 발뺌하면 살려 보내 줄 성싶으냐?"

"이러나저러나 살려 보낼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요."

"그렇다. 본 방에 입힌 피해는 네 목숨으로 갚도록 해라. 염패의 제자라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겠지."

"가능하시다—"

나는 말을 하던 도중 고개를 홱 젖혔다.

새까만 것이 간발의 차로 내 턱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면. 말은 다 끝내게 해 주시지."

"그걸 피하다니, 제법이구나."

흑사방주의 손가락은 먹잇감을 움켜쥐려는 매의 발톱처럼 휘어져 있었다.

그의 무공은 조(爪)법 계통.

상대를 할퀴어 상처를 내는 데 특화된 무공이다.

또한 손가락 끄트머리와 손톱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는데, 이는 매우 지독한 독공을 연성했다는 증거다.

긁히는 즉시 극독이 상처로 스며들고, 오리탕 한 그릇 할 시간도 되기 전에 한 줌 핏물로 화할 것이다.

"어디 이것도 피해 보거라."

극독을 머금은 다섯 손가락이 내 가슴팍으로 뻗어 왔다.

나는 미세하게 옆으로 이동하며, 윈드포스를 집중해 스쳐 지나간 팔을 툭 밀어냈다.

조금 밀려나나 싶던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며 나를 할퀴어 왔다.

하는 수 없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으나, 흑사방주가 조금도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바짝 따라붙었다.

두 손을 뻗어 내 왼 어깨와 오른팔을 동시에 노린다.

나는 뒤로 달리기 대회를 하는 사람처럼 열심히 뒷걸음질 쳤다.

흑사방주가 계속 따라붙으며 두 손을 할퀴었지만 애꿎은 허공만 긁어 댈 뿐이었다.

부득 이를 가는 흑사방주.

"미꾸라지처럼 잘도 도망치는구나."

"제가 좀 빨라요."

딴에는 뒷걸음질 정도야 금방 따라잡겠지 싶었던 모양인데, 내가 잡힐 듯 말듯 잡히지 않으니까 점점 열이 뻗치나 보다.

그렇다면 불난 데 기름을 붓지 않을 수 없지.

막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검은 손톱을 보고 감상평을 남겼다.

"어우, 손톱 좀 봐. 아주 씨꺼멓네. 좀 깎고 다니세요. 아니면 칫솔 갖다가 빡빡 문지르든가."

"뭐, 뭐라—"

흑사방주의 얼굴이 한순간 멍해졌다.

살면서 저런 폭언은 처음 들어 보는 듯한 반응이다.

하기야 누가 저 인간 앞에서 함부로 손톱이 어쩌고 했겠는가.

조금만 심기를 거슬러도 극독을 퍼먹일 텐데.

어쨌거나 나는 하던 트래쉬 토크를 마저 했다.

"그런 손으로 뭐 집어 먹으면 병 걸려요, 병! 식중독 걸리면 고생한단 말입니다!"

"...네놈에게는 아주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해 주마."

흑사방주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손끝이 덜덜 떨리기까지.

이내 한층 더 매서워진 기세로 나를 공격해 왔다.

'응, 그래도 내가 더 빨라.'

그래 봤자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건 나도 마찬가지라, 이전과 같은 구도가 펼쳐졌다.

뒷걸음질 치는 나를 흑사방주가 열심히 뒤쫓으며 허공을 할퀴는 구도.

또 한참이나 기묘한 추격전이 이어지다가, 흑사방주가 문득 나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도망만 칠 셈이냐?"

'고현우 쪽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요.'

연락이 오면 뒷걸음질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게 아니라, 아예 등을 돌려서 전력 질주로 도망칠 거다.

그때까지는 이렇게 시간을 끌 거고.

하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티를 내면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흑사방주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 시작하는 모양이니, 이쯤에서 나도 한 방 정도는 먹일 때가 됐다.

"정 실력이 보고 싶으시면 보여 드려야지."

"...!"

내 주먹이 검붉게 물들자 흑사방주가 대응을 위해 잠시 공세를 늦추었다.

그러나 주먹에 깃든 불꽃은 내질러지는 대신 고스란히 내 몸으로 흡수되었다.

[오버히트]

불길이 온몸으로 번져 나가며 막대한 힘을 공급했다.

흑사방주가 안면을 굳히고 그 불길을 관찰했다.

"...과연 염패의 제자가 맞기는 하구나."

"아니라니깐 그러네."

"아직도 부인할 셈이—"

이번에는 흑사방주가 말을 끝내기 전에 내가 기습적으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공간을 압축하며 이동해 등 뒤에서 나타난다.

흑사방주가 즉시 몸을 돌려 나를 할퀴었으나, 한 박자 늦은 반응이었다.

내가 다시 반대쪽으로 이동해서 손을 뻗자 흑사방주의 눈앞에서 한 줌의 압축된 공기가 폭발했다.

- 펑!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 단순히 눈만 살짝 찡그리게 하려는 의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주 짧은 찰나 시야에 사각을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으니까.

나는 그 사각을 절묘하게 파고들며 흑사방주의 정면으로 이동했다.

[인페르노 피스트]

[윈드포스]

흑사방주의 복부에 불타는 주먹, 그리고 물리력이 가미된 권풍이 정통으로 꽂혔다.

- 콰콰콰콰콰—!

흑사방주의 신형이 순식간에 흑사방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뒤따라 화염 폭풍이 몰아치고, 처박힌 부근의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

그럼에도 흑의인들의 반응은 지나치게 건조했다.

자기네 방주가 막 날아간 참인데 모두 굳은 얼굴로 서서 포위망을 유지할 뿐이었다.

하다못해 '방주님!' 하고 외치는 자도 없었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겨우 이 정도로 쓰러질 리 없다는 절대적인 믿음이다.

나 역시도 별 기대는 안 했다.

'이걸론 턱도 없지.'

[인페르노 피스트]는 페널티가 강한 스킬인 만큼 랭크 대비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지만, 그럼에도 B랭크 던전의 최종 보스를 쓰러뜨리기에는 조금 아쉽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제법 큰 부족의 제사장이 D등급 보스인데, 어떻게 일개 흑도방파의 방주가 B등급을 받는가?

그리고 어떻게 인페르노 피스트를 정통으로 맞고도 무사한가?

정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일개 흑도방파가 아니거든.'

- 콰아아아아!

흑사방주가 처박힌 곳에서 시커먼 기운이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무너져 내린 건물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검은 기운으로 뒤덮인 인영이 나에게 똑바로 걸어왔다.

흑사방주의 온몸에서 지독한 마기(魔氣)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과거 정마대전에서 패해 사분오열된 천마신교.

그리고 흑사방주의 정체는 한때 그 천마신교의 흑사각을 맡았던, 이른바 간부급 인사다.

흑사방주, 아니 흑사각주가 나를 노려보며 씹어 뱉듯이 말했다.

"오늘 네놈을 찢어 죽이지 않으면 내가 성을 갈겠다."

그리고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런 말은 잡은 다음에나 하시고."

72화 No.104 흑사방 (4)

한편, 고현우와 신병철은 좁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 비밀 통로는 흑사방이 처음 세워졌을 당시 만들어졌지만, 세월이 흐르며 점점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그리고 급기야는 전대 흑사방주를 비롯한 수뇌부가 모조리 '교체'되며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것을 김호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잠입 경로로는 아주 제격이었다.

- 쿠쿵!

먼 곳에서 울린 굉음이 통로를 타고 전달되고, 부스스 흙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김 형이 시작했구려."

"요란하구만."

김호가 정문에서 난리를 피운다는 증거.

잠입하기 더욱 수월하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니, 그 기회를 살리려면 서둘러야 했다.

두 사람이 더욱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밀 통로를 넘어 들어선 흑사방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웬 괴한이 정문에 벽력탄 비슷한 것을 터뜨렸는데 혼란스럽지 않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 뭐야! 무슨 일이냐?

- 정문 쪽이다!

- 불! 얼른 불부터 꺼라!

바쁘게 뛰어다니는 흑사방 무사들은 고현우와 신병철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는데, 앞서 빼앗은 흑의 무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손등의 뱀 문신은 신병철이 대강 따라 그렸고.

어쩐지 뱀이 조금 어설퍼 보였지만 고현우는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서 소저보다는 나을 테지....'

서예인이 그렸다면 뱀이 아니라 지렁이였으리라 생각하며.

그들이 목표로 하는 흑사방의 비고는 지하 깊은 곳에 자리했다.

해서 정문 쪽으로 몰려드는 여타 무사들과 정반대 방향으로 걸으니, 간혹 마주치는 자들이 '이놈들은 어딜 가는 가지?' 싶은 눈초리를 보내며 지나갔다.

일부는 잠시 멈춰 서서 고현우와 신병철을 자세히 뜯어보려고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영 생소하다는 표정으로.

그럴 때마다 신병철이 정문 쪽에 삿대질을 하며 버럭 외쳤다.

"이봐! 못 들었나? 정문이다, 정문!"

그 뒤 고개를 갸웃거리는 흑사방 무인들을 뒤로하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물론 이런 얕은 수작은 본격적으로 지하에 들어선 뒤부터는 통하지 않았다.

초입 부근에서 경계를 서는 흑의인 둘.

이 난리 통에도 전혀 영향받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실력을 가늠해 보니 객잔 쪽에서 상대한 자들보다 반수에서 한 수 정도 더 뛰어난 듯하다.

아마 흑사방의 정예 무사이리라.

고현우와 신병철이 접근하자, 무사 하나가 고현우를 잠시 응시하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침입자로군."

"...."

고현우가 어떻게 한눈에 알아봤는지 눈짓으로 묻자, 정예무사가 답했다.

"이곳에 발을 들였다가 목이 날아간 자가 몇인데, 방도라면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않나. 또...."

그는 썩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너같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은 본 기억이 없다."

기생오라비 같다는 말은 남정네들 언어로 번역하면 재수 없게 잘생겼다는 뜻.

옆에서 대화를 듣던 신병철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구겨졌다.

'시발 인생 불공평하네. 너무 잘생겨서 걸렸다고? 나도 좀 걸려 보자.'

그러나 애석하게도 흑의 무복을 입은 신병철의 모습은 위화감이 전혀 없는, 완벽한 흑사방 말단 무사 C였다.

신병철이 마음속으로 세상을 욕하는 한편,

고현우는 빙긋 웃더니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본인의 외모를 칭찬해 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오. 허나 부디 이해해 주길 바라오."

"무엇을?"

- 번쩍!

순간 고현우의 손에서 금빛 섬광이 번뜩였다.

정예 무사의 반응도 보통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검을 들어 올려 막았으나, 이내 자신의 검과 함께 두 쪽이 나 버렸다.

어느새 고현우의 손에는 황금빛 주술검이 들려 있었다.

허물어지는 상대를 내려다보며 고현우가 말을 끝맺었다.

"당신을 베어야 함을."

그리고 신병철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야, 야! 도움! 헬프! 빨리!"

수세에 몰려 연신 뒷걸음질 치는 중이다.

말단 무사 상대로도 두들겨 맞을 실력인데 정예무사는 오죽하랴.

하는 수 없이 고현우가 가세해서 검을 휘둘렀다.

쓰러지는 정예 무사를 뒤로하고, 그가 장난스레 말했다.

"신 형은 더욱 정진해야겠소."

"아니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솔직히 이건 너네가 괴물같이 센 거지."

1학년이 B급 던전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나?

또 신병철은 나름대로 할 말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칼 쓰러 온 거 아니고 기술자로 불려온 거거든? 고급 인력이란 말씀."

"알고 있소. 신 형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오."

고현우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 역시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르다는 사실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신병철의 실력이 자기 분야에서는 상당히 뛰어나다는 사실도.

'어설프게 숟가락만 얹을 실력이라면 김 형이 진작 쳐 냈을 터.'

그게 아니니 이 작전에 참여한 것이고.

김호의 보증을 받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대가 크다는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신병철이 길다란 젓가락 같은 공구를 꺼내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기관 장치가 나오기만을 벼르는 기색이다.

"금방 보여 준다, 딱 기다려."

비고로 향하는 길은 여러 형태의 통로가 미로처럼 얽힌 구조.

정예 무사들이 진을 치고 대기하는 통로도 있고, 기관 장치가 가득한 통로도 있다.

그리고 공략본에서는 기관이 설치된 곳만 집중적으로 뚫으라고 언급되어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복도가 좋은 예시였다.

겉보기에는 말끔하나 벽 너머로 미약한 덜그럭거림 같은 것이 감지된다.

높은 확률로 기관 장치.

마침내 신병철이 활약할 순간이 온 것이다.

신병철이 흑사방 무사의 근엄한 말투를 따라 했다.

"똑똑히 봐 두도록. 이 신병철 님이 활약하는 모습을."

"하하...."

신병철은 한쪽 벽에 붙어서 게걸음으로 나아가더니, 잘 보이지도 않는 틈새에 느닷없이 젓가락 두 개를 쑤셔 넣고 마구 휘저었다.

이내 안쪽에서 뚜렷하게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귓가에 잡히던 미약한 덜그럭거림이 일제히 멎었다.

"끝난 거요?"

"어. 갑시다."

신병철이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된 게 맞나 의심이 들었기에 고현우는 만에 하나 기관 장치가 발동될 것을 대비했다.

그러나 통로는 끝내 잠잠하기만 했다.

또다시 함정이 의심되는 통로가 나오고,

이번에는 신병철이 태연하게 나아가다가 갑작스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닥을 몇 군데 콩콩 두드려 보고는 고현우를 손짓으로 부른다.

"여기 밟아 봐."

고현우는 신병철이 가리키는 부위에 한쪽 발을 갖다 댄 다음, 천근추의 묘리를 이용해 지긋이 내리눌렀다.

- 콰직,

발이 푹 꺼지며 자그마한 공간이 드러났다.

언뜻 보기에도 기관의 중추처럼 생긴 것이 설치되어 있다.

신병철이 거기다 아무렇지도 않게 젓가락 하나를 푹 꽂아 넣더니 몸을 일으켰다.

"다음. 넘어갑시다."

그 뒤로도 신병철은 연이어 등장하는 함정들을 너무나 쉽게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고현우가 솔직한 심정을 담아 감탄했다.

"신 형의 기관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구려."

"봤냐? 봤냐고. 사람이 기술을 쓸 줄 알아야 한단 말이야. 칼만 휘두르면 그거 안 돼."

우쭐거리며 자기가 아는 지식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신병철.

고현우는 사람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설명을 들어 주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손을 들어 올려 말을 끊고, 전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기역 자로 굽어진 통로 모퉁이 너머, 접근하는 기척이 셋.

고현우가 기세를 끌어올리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단숨에 돌파하겠소.'

예상대로 정예무사 셋이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고현우를 발견하자 그들도 앞서 경계를 서던 자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침입자!"

그 즉시 두 놈은 검을 뽑아 달려들고, 한 놈은 등을 돌려 자리를 피하려 했다.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그러나 그들이 반응했을 때는 이미 고현우가 출수한 후였다.

[급류(急流)]

바람 한 점 없는 지하에 돌연 한 줄기 강풍이 불어 갔다.

고현우가 그 강풍과 하나가 된 것처럼 순식간에 쏘아져 나갔다.

정예무사 둘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으나, 고현우가 스쳐 지나가는 게 더 빨랐다.

다음 순간 그들의 가슴팍에 깊은 검상이 생겨났다.

"억!"

"크헉!"

그리고 쏘아져 나가는 속도를 그대로 살려 도망치는 자의 등을 꿰뚫었다.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쾌속했는지 세 명의 몸이 거의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고현우가 신병철을 뒤돌아보며 옅게 웃었다.

"기술도 좋지만 무력을 함께 보완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렇게 합죠."

다시 겸손을 되찾은 신병철이었다.

번갈아 활약하며 계속 나아가다 보니 어느덧 흑사방의 비고에 다다랐다.

정확히는 비고의 한쪽 벽면에.

입구에는 이제까지 만난 무사들보다 더욱더 뛰어난 실력자들이 보초를 서고 있을 테니, 일 처리를 조용히 하려면 쥐구멍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신 형, 잠시 물러서 계시오."

신병철이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리자 고현우가 검을 부드럽게 몇 번 그었다.

두꺼운 석벽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며 기관 장치로 이루어진 한 겹의 벽이 드러났다.

당연히 이 부분은 신병철의 몫이었고.

신병철이 젓가락 몇 개를 푹푹 꽂아 넣고 신호를 보내자 고현우가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제야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과연 비고 안에는 귀하고 값진 물건들로 가득했다.

금은보화, 도자기, 명검, 비급, 영약....

이곳저곳 둘러보며 신병철이 입에서 군침을 줄줄 흘렸다.

"크으으.... 이거 하나라도 갖다 팔면 대체 얼마냐...."

그러나 목숨이 아깝다면 군침을 흘리는 것에서 그쳐야 한다.

모든 물건에 검은색 부적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 흑사방주의 무공을 통해 특수하게 제조한 하독부(下毒符)다.

손가락 하나라도 닿으면 부적들이 일제히 독무를 뿜어내고, 이 자그마한 방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독무로 가득 차 버릴 것이다.

독공에 대한 만반의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안 건드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리고 이 방에서 부적이 붙어 있지 않은 물건은 오직 하나.

'저기 있군.'

고현우는 안력을 돋우고 비고 내부를 구석구석 살피다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자그마한 궤짝을 발견했다.

온통 검은 칠이 되어 있어서 하마터면 보고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어쩌면 당대 흑사방주도 무심코 지나치는 바람에 부적을 못 붙인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방주의 검은 궤짝]

신병철이 궤짝을 넘겨받고 좌우로 슬슬 흔들어 보았으나, 안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더 맹렬하게 흔들어 보려는 찰나 고현우가 제지했다.

"나중에 하고, 서두릅시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소."

"그건 그래."

여기까지 오면서 베어 넘긴 흑사방도의 숫자가 제법 되니, 시간을 끌수록 발각될 확률도 올라간다.

해서 두 사람은 빠르게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이미 기관 장치들을 무력화해 놓은 상태라 제법 속도가 붙었다.

이대로 흑사방을 나가 안전지대로 이동하면 끝.

신병철은 벌써부터 긴장이 풀려서 헛소리를 해 댔다.

"야, 진짜 쉽긴 쉽네. 뭐 이상한 거 튀어나오지도 않고."

"신 형, 부정 타는 말 마시오."

"아, 넵. 제 주둥이가 방정입죠."

신병철이 장난스레 자기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말이 씨가 된다고....

얼마 가지 않아 선두를 뚫던 고현우가 급격히 속도를 줄이고, 이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왜, 또 뭔데 그러...."

신병철이 묻다가 입을 다물었다.

고현우의 시선 끝에 서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그 노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백색 일색이었다.

피부는 핏기가 전혀 없어 창백하며, 두 눈의 동공마저 새하얗다.

보통 백색은 깨끗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어야 정상인데, 이 노인은 그것이 과해서 오히려 섬뜩했다.

고현우는 이런 특이한 인상착의를 가진 노인이 누구인지, 김호에게 정체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 한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고현우가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어지간하면 마주칠 일이 없다 하였거늘, 일이 어렵게 되었구나....'

노인은 죽은 흑사방도의 몸에 난 상흔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올려 고현우를 마주 보았다.

"솜씨가 매우 깔끔하구나. 네가 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고현우가 솔직하게 수긍한 뒤, 정중히 예를 갖추며 되물었다.

"혹시 노인장께선 천마신교의 장로, 백혁서 선배님 아니십니까?"

본명이 언급되자 노인의 눈빛에 이채가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혁서. 그의 정체는 흑사방의 부방주.

과거에는 마교의 원로 고수이자 흑백쌍사 중 하나였다.

"노부가 바로 백사(白蛇)다."

히든 보스, 백사.

흑사방 공략에서 만날 수 있는 최악의 상대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73화 No.104 흑사방 (5)

백사(白蛇).

사분오열되어 수면 밑으로 숨어든 마교의 몇 안 남은 장로.

방주인 흑사조차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로, 흑사방 공략에서는 매우 불확실한 변수로 작용한다.

어떤 뚜렷한 규칙성 없이 흑사방 내부를 정처 없이 배회하다가, '정말 운이 없으면' 마주치게 되는 것.

그리고 지금이 바로 정말 운이 없는 상황이었다.

고현우가 백사의 경지를 가늠해 보려 했으나, 그의 안목으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B급 던전의 히든 보스답게 실력이 고현우보다 한참은 윗줄인 것이다.

'승부를 겨룬다면 필패.'

그것도 열 합 이내에 승부가 갈릴 것이다.

무공의 차이가 월등하니 도주 또한 불가능할 터.

그러나 아직 절망하기는 이르다.

'아직은 활로가 남았다.'

김호는 공략본을 만들 때 이 희박한 확률 역시 계산 내에 두었다.

당연히 백사를 마주치는 상황의 대처법도 존재했다.

다만 그 대처법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는 문제가 남았고, 그건 앞으로 고현우가 하기에 달렸다.

한편, 백사 역시 새하얀 동공으로 고현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고현우의 기도가 읽히는지 나지막이 감탄한다.

"약관도 안 되는 나이에 그 정도 성취라니 대단하구나."

"전부 스승님과 친우들의 덕입니다."

"좋은 스승과 친우를 두었다. 허나 아쉬운 일이야."

백사는 고현우를 제법 좋게 보는 듯했으나, 그럼에도 흑사방의 일원으로서 할 일을 다하려는 모양이다.

갈무리된 기세가 조금씩 풀려나며 장내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10년, 아니, 5년만 더 주어졌어도 뛰어난 검수로서 이름을 날렸을 터인데, 오늘 노부를 만나게 되었으니.... 네 운이 없음을 탓하거라."

백사의 소매가 펄럭이려던 찰나.

고현우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선배님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선배님께서는 현양진인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하다마다."

백사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가 과거 정마대전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

이는 당시 그를 제압했던 도가의 고수, 현양진인이 마지막 순간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백사와 약속한 것이, 언젠가 전도유망한 후기지수를 죽일 일이 생기거든 그 역시 한 번 자비를 베풀라는 것.

고현우가 하는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목숨 빚 갚아라, 우리 보내 줘라'가 되겠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전대 고수들 간의 약속을 들먹이자니 마음이 한켠이 불편한 고현우였으나, 이 또한 공략의 일부려니 여기고 넘어가기로 했다.

백사가 답했다.

"노부가 분명 그런 약속을 하기는 했다. 허나 너에게 자비를 베풀 가치가 있는지는 확인해 보기 전까지 모르는 일 아니겠느냐."

'전도유망한 후기지수'를 살려 보내기로 했으니,

전도유망하지 않으면 그냥 죽이겠다는 뜻.

신병철이 속으로 항의했다.

'아니, 방금은 대단한 성취라면서요? 노친네가 말을 막 바꾸시네?'

그러나 왠지 지금 입을 열었다간 처맞을 것 같아서 잠자코 찌그러져 있었다.

고현우가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실력을 보는데 복잡하게 돌아갈 필요 있겠느냐? 노부의 손에서 삼 초식을 버틴다면 보내 주도록 하마."

'...여기까지는 됐다.'

고현우가 늘어뜨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공략대로 어떻게든 삼 초식 버티기로 끌고 가는 데는 성공했다.

백사와의 정면 승부는 절대 상대가 안 되지만, 삼 초식이라면 가능성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이 상황에서 활로를 여는 유일한 방법이다.

"선배님의 시험을 치르겠습니다."

"좋다. 너는 준비하도록 해라."

물론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보인다 뿐이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겨우 삼 초식에 불과할지언정 자신보다 몇 단계는 더 뛰어난 고수의 손에서 버텨야 할 테니까.

백사가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언뜻 보기에는 일반적인 장검과 비슷했다.

다만 자루에서부터 검병, 검날까지 모든 것이 하얗고, 끄트머리가 뱀의 혓바닥처럼 둘로 나뉘어 있었다.

백사의 독문 무기, 사설검(蛇舌劍).

백사가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말했다.

"선수를 양보하겠다."

"그럼 한 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고현우가 공력을 잔뜩 끌어올렸다.

다음 순간 불어 가는 거센 바람에 올라타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공격이 곧 최선의 방어.'

강하게 일점을 찔러 상대방의 방어 초식을 유도한다.

그걸로 삼 초식 중 하나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급류(急流)]

"...."

백사의 새하얀 동공이 찔러 들어오는 고현우를 눈에 담았다.

찰나에 불과한 짧은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친다.

"...바람뿐만 아니라 기의 흐름까지 제어하는군. 보통 절기가 아니로다. 허나."

백사의 미간이 고현우의 주술검에 꿰뚫리려는 찰나.

백사가 검세를 취하더니 이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초식의 형태가 매우 낯익었기에 고현우는 보는 즉시 그것을 알아보았다.

'독사수동?'

독사수동(毒蛇守洞).

독사가 똬리를 틀고 동굴을 지키는 모양새를 흉내 낸 초식이다.

삼재검법 같은 기본공 다음으로 잘 알려진, 매우 단순한 초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백사가 펼치는 독사수동은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식이 펼쳐지는 순간, 그의 손에 들린 사설검이 뱀 혓바닥처럼 양옆으로 쩍 갈라졌다.

사설검은 칼날이 유연하게 휘는 연검(軟劍)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갈래로 휜 칼날들은 각기 다른 두 개의 검로를 그려 냈다.

주술검에 한껏 집중한 검기가 독사수동 하나와 충돌하더니 서로 상쇄되어 사라졌다.

뒤이어 두 번째 독사수동이 고현우를 덮쳐 왔다.

전신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지고, 고현우의 신형이 뒤로 날아가서 벽을 부수고 처박혔다.

- 콰지직!

"크으으으...."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뻔했다.

거대한 뱀 꼬리에 후려 맞은 느낌.

백사가 고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맹한 맛은 있으나 뒷일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 초식이구나. 동귀어진에나 쓸 법하다."

"...."

"다음 준비하거라."

두 번째 초식.

선수를 양보했으니 지금부터는 백사가 공격할 것이다.

고현우가 안 움직이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즉시 백사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가까워져 온다.

아래로 늘어뜨린 사설검에서 어떤 초식이 펼쳐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끄트머리가 부르르 떨리며 갈라지는 모습을 보면 그 순간이 임박했음은 분명하다.

어차피 보고 대처한다고 대처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최선의 한 수로 맞설 뿐.'

[청류(淸流)]

고현우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이 점차 칼날에 감겨들었다.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백사를 향해 겨누어졌다.

백사의 사설검도 구불거리며 둘로 갈라졌다.

백사는 그것을 그대로 앞으로 뻗으며 찔러 들어왔다.

이번에도 매우 눈에 익은 초식이었다.

[독사출동(毒蛇出洞)]

투로가 훤히 보이는 찌르기 둘.

그러나 고현우의 눈에는 굵은 뱀 두 마리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짓쳐 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 기세가 무척이나 압도적이라 투로가 보인다 한들 쳐 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해내야만 한다.'

고현우의 눈이 굳은 결의를 머금었다.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사설검의 아주 미세한 구부러짐 하나까지 읽으려 했다.

그렇게 마주 청류를 휘두르기 직전.

문득 그의 머릿속에 아까 보았던 달마상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달마상을 이루던 무수한 선들.

그중 하나가 눈앞 허공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고현우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선을 따라 청류를 그었다.

- 번쩍!

순간 스쳐 지나간 깨달음 덕일까.

방금 그의 청류는 여태까지 그가 펼쳤던 어떤 것보다도 완벽했다.

그럼에도 백사의 독사출동을 방어하기에는 완벽함이 부족했다.

백사는 한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반면, 고현우의 신형은 한참이나 주르륵 밀려났다.

"쿨럭."

내부가 진탕되어 코와 입에서 죽은 피가 터져 나왔다.

찢어진 손아귀에서 흐르는 피가 주술검을 타고 흐른다.

'이렇게까지 해도 역부족이란 말인가....'

자신의 역량을 뛰어넘는 검초를 펼쳤는데도 상대를 단 한 발짝도 물러나게 하지 못하다니.

아직 둘 사이에 그만큼 아득한 격차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 사실에만 집중한 탓에 고현우는 깨닫지 못했다.

방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백사를 한자리에 멈춰 세운 것만 해도 엄청난 성과였다.

백사 역시 그렇게 생각한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 나이에 노부의 독사출동을 이리도 수월하게 막아 내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너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백사가 사설검을 칼끝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늘어뜨렸다.

그 상태에서 공력을 더욱 끌어올리자,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압박감이 장내를 짓눌렀다.

"노부도 실력을 더 보이는 게 옳겠지. 마지막이다. 받아 보거라."

유형화된 기운이 압축되며 점차 백사의 외견과 같은 백색을 띠었다.

백색 투기를 두른 백사의 모습은 한 자루 날카로운 명검 같기도 했고, 똬리를 튼 거대한 구렁이 같기도 했다.

눈앞의 구렁이가 고현우를 노려보며, 곧 튀어 나가려는 것처럼 한껏 몸을 웅크렸다.

고현우는 직감했다.

백사가 곧 절기를 펼칠 것이며, 그 절기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막아 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그러나 아직 쓰러지기에는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사부가 남긴 뜻이 있었고, 해결해야 할 사문의 숙원이 있었으며, 자신을 믿고 기다리는 친우들이 있었다.

아직은 그것들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

이내 고현우는 어떤 결심을 한 듯했다.

주술검을 중단으로 세우고 기세를 끌어올린다.

어디선가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며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

백사의 눈이 바람과 하나 된 기의 흐름을 읽었다.

그리고 고현우가 지금 펼치려는 것이 매우 수비적인 초식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적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극도로 유(柔)에 치중한 초식.

그러나....

'이게 전부인가?'

백사의 눈에는 영 차지 않았다.

차라리 두 번째 격돌 때 사용한 초식이 나아 보였다.

공격적인 측면에서든 수비적인 측면에서든.

'저게 다일 리가 없다.'

백사 자신이 더 강력한 초식을 꺼내는데, 고현우가 더 약한 초식으로 대응한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분명 다른 수단을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노부의 알량한 자비심을 기대하는 거라면.... 너는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다.'

마침내 백사가 초식을 전개했다.

[백리등천(白螭登天)]

거대한 백색 이무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며 고현우에게 짓쳐 들었다.

그에 비하면 검 한 자루를 내세우고 서 있는 고현우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한없이 미약해 보였다.

- 콰아아아아—!

내세운 주술검이 부르르 떨리며 금이 쩍쩍 가고 고현우의 코와 입가에서 죽은 피가 줄줄 흘렀다.

백사의 예상대로, 고현우의 방어 초식은 백색 이무기를 흘려보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또한 예상대로 백리등천을 흘려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대로 이무기가 눈앞의 먹잇감을 단숨에 집어삼키는 착각이 드는 찰나,

고현우가 검을 쥐지 않은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 파아앗!

모든 것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잠깐의 정적.

"...."

백사의 표정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것이었다.

고현우는 여전히 주술검을 세운 자세 그대로였다.

그러나 반대쪽 손에는 어느새 길쭉한 것이 들려 있었다.

낡은 천으로 돌돌 말고 쇠사슬로 감아 두었던 것이, 일부가 찢어져 묵빛 광택이 드러났다.

검집째로 든 장검.

그것이 백사의 마지막 절초를 해소해 버린 듯했다.

"쿨럭."

고현우가 또 한 움큼 죽은 피를 게워 냈다.

조금 전보다 안색이 훨씬 파리해진 것으로 보아 잠깐 저 장검을 쥔 것만으로도 제법 큰 대가를 치른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대단한 명검이로다....'

백사가 감탄했다.

보통 경지에 오른 고수를 보면 잘 벼려진 한 자루 검 같다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이건 그 반대였다.

검 대신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사이를 가로막는 느낌.

도대체 저 장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장검을 소유한 고현우의 정체는?

궁금한 건 많았으나, 승부는 끝났다.

더 물어봤자 구차할 뿐이었다.

백사가 사설검을 회수하며 말했다.

"노부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길을 열어라."

이미 장내에는 소란을 듣고 흑의인들이 잔뜩 몰려든 상태였는데, 백사의 명령에 썰물처럼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고현우는 바로 발걸음을 떼지 않고, 백사에게 더없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기대하마."

그리고 신병철과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흑의인들 중 대주급 무사 하나가 백사에게 말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놈들의 수급을 취해 돌아오겠습니다."

말장난을 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현양진인과의 약속을 되짚어 보면, '백사'가 살려 준다고 했지, '흑사방 무사'가 살려 준다고 한 적은 없다.

또한 백사가 살려 준다고 한 것은 고현우지, 그 옆의 신병철과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수하를 보내 해한다 한들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나 백사는 고개를 저었다.

"가게 두어라. 노부를 졸렬한 필부로 만들 셈이냐?"

이미 넘치도록 자격을 증명한 고현우였다.

백사는 방금 전의 승부를 더럽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정파와 사파, 마교를 나누기 이전에 그 또한 한 사람의 무인인 것이다.

이토록 백사의 의지가 확고함에도, 대주급 무사는 추격조를 보낼 것을 더욱 강하게 요구했다.

"비고가 뚫렸습니다. 이대로 보낸다면 방주께서 가만있지 않으실 겁니다."

- 서걱!

사설검이 쭉 갈라지더니 대주의 몸을 휘감고 단숨에 세 토막을 내 버렸다.

이제 백사의 음성에는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노부의 은원보다 그깟 비고의 물건 몇 개가 더 중요하단 말이냐?"

"...!"

"...!"

흑의인들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더 이상 없었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백사가 고현우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다 죽어 가는 몸으로도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모습.

투지로 불타오르는 눈빛.

저런 자는 자신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저놈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 * *

고현우는 비틀거리면서도 빠르게 통로를 걸었다.

신병철이 연신 뒤쪽을 살폈으나 흑사방 무사들은 정말로 더 쫓아오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노친네가 말장난은 안 하네."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기는 이르지만, 촌각을 다툴 정도로 급한 상황은 지난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한 신병철은 인벤토리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

고급진 유리병 안에 붉은 액체가 찰랑거린다.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가자. 마셔."

고현우는 신병철이 넘겨주는 포션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맛이 보통 쓴 게 아니었는지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으나, 곧 얼굴에 서서히 혈색이 돌아왔다.

"후우.... 한결 낫구려. 고맙소."

"한결 나아야지. 안 나으면 이상하지."

회복을 확신한다는 어조였다.

고현우가 그제야 시선을 내려보니 빈 유리병부터가 보통 고급진 게 아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물의 가치도 결코 낮지 않을 터.

"이건...."

"하이포션이라는 물건이시다."

"신 형의 출혈이 컸겠소. 이런 귀한 물건을 내주다니."

"컸지. 대출혈이지. 근데 별수 있나?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언젠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상황을 대비해 인벤토리에 고이 모셔 둔 하이포션이었다.

신병철 본인은 한 방울도 못 마셔 봤다.

그러나 운이 지지리도 없게도 히든 보스를 조우했고, 고현우가 목숨을 걸고 싸워 준 덕분에 두 사람 모두 사지 멀쩡히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리 손해 득실에 민감한 신병철이라지만, 뒷짐만 지고 모른 척하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생각해도 고현우가 내상을 잔뜩 입은 채로는 도저히 속도가 안 나고, 만에 하나 추격대가 붙었을 때 답이 없을 테니 선뜻 하이포션을 꺼낸 것이다.

고현우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 형도 중요한 순간에는 배포가 크군. 진정 사나이라 할 수 있소."

"나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다, 이 말씀이야. 잘 기억해 둬."

"하하, 이를 말이오?"

다만 하이포션의 가치가 가치이다 보니 미련이 아예 안 남을 수는 없었다.

신병철은 차라리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마침 고현우와 백사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떠올라서 물었다.

"근데, 다시 찾아뵙는다고?"

"그렇소."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어차피 다음에 오면 저 양반은 너 기억 못 할걸?"

이 던전에는 이미 검술 동아리의 입찰이 걸려 있다고 한다.

가까운 미래에 그들이 던전을 파괴할 것이고, 시간이 흘러 재생성된 흑사방에서 백사는 고현우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고현우는 굳게 다짐한 듯했다.

"그가 본인을 기억하고 못 하고는 중요치 않소. 중요한 것은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지."

백사가 과거의 은원 때문에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은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그가 과거의 은원만을 중요시했다면 구태여 '전도유망한지 시험해 보겠다'라는 핑계를 대며 손속을 섞을 필요가 없었다.

실력 차가 그 정도나 난다면 한눈에 기도가 보이고, 손속을 섞더라도 한 수로 충분했을 테니까.

아마도 삼 초식이나 교환하게 된 진짜 이유는, 언젠가 성장한 고현우와 제대로 겨루어 보고 싶다는 무인의 호승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번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한들, 전후 사정을 설명한다면 기꺼이 승부에 임하리라.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74화 No.104 흑사방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