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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5주 차.

월요일.

누군가에게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대인전 주간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조금 더 큰 의미가 있는 주간이었다.

이번 주부터 멘토링이 시작되기 때문에.

학사 일정에는 변동이 없고, 멘토링을 신청한 사람에 한해서 둘을 병행하게 된다.

이수독이 수업을 마치며 공지 사항을 전달했다.

"1차 멘토링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지금 즉시 아레나로 이동한다. 정확한 장소는 학생증 뒷면을 확인하도록."

절반이 조금 안 되는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앉아 있는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번 멘토링을 신청하지 않았겠지만, 한 달쯤 지나서 신청한 학생들과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면 생각이 바뀔 거다.

2차 멘토링부터는 참여율이 껑충 뛸 테고.

고현우, 서예인과 함께 느긋하게 아레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아레나'인 것은 모두 같다.

어차피 멘토링을 받으면서 대인전도 같이 치를 예정이라, 학사 측에서 아예 아레나를 약속 장소로 정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아레나 어디'로 가는가는 제각각이다.

이수독의 말대로 학생증 뒷면을 확인해 보면,

[163-H]

관중석의 좌석 번호를 받았다.

고현우와 서예인이 받은 좌석 번호는 또 다르고.

이렇게 지정된 좌석에서 각자의 멘토를 만나게 된다.

고현우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본인 말고도 그 멘토라는 분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있지 않소?"

"당연히 있지. 한 서너 명 정도."

"그들도 본인과 같은 검사들이오?"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그러려고 신청서를 까다롭게 써서 낸 거니까."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클래스가 최대한 비슷하도록 좁혔으니, 결과적으로 배우는 사람들의 클래스도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고현우 말고 다른 멘티가 네 명이라면, 네 명 모두 검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고현우의 얼굴에 더욱 기대감이 차올랐다.

"선배 고수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의 솜씨까지 볼 수 있다니, 과연 멘토링에 참여하길 잘한 것 같소."

"기회 봐서 대련도 하고 그래."

"물론 그럴 생각이오."

다만 고현우와 대련을 할 만한 실력의 검사가 그의 조에 포함되어 있을지는 가 봐야 안다.

멘토를 기준으로 매칭되기 때문에 조의 구성원은 완전히 무작위니까.

생각보다 별 볼 일 없어서 실망할지도 모르지.

그때, 어깨너머에서 질문이 날아왔다.

"너희도 멘토링 신청했어?"

시선을 돌려 보니 어느새 한소미가 근처에서 보조를 맞춰 걷고 있다.

아무래도 같은 반이다 보니 다 같이 걷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소미와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송천혜도 있었는데, 한소미가 나에게 말을 건 시점에서 조금 거리를 벌리고 애써 우리를 외면하는 중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회잖아. 안 할 이유가 없지."

"너, 캐스터 계열이지?"

"어."

"배틀 메이지 맞아? 올라운더."

"맞는데, 그건 왜?"

내가 되묻자 한소미가 송천혜를 척 가리키며 답했다.

마치 짜잔! 하는 효과음이 들리는 것 같다.

"천혜도 올라운더로 신청했거든! 잘하면 둘이 같이 멘토링 받을 수도 있겠다!"

그 말에 먼 곳에 관심을 두는 척하던 송천혜가 질색 팔색을 했다.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진짜!"

"잉? 왜 이상한데?"

"그건...."

한소미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송천혜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인페르노 피스트나 지하층 침입 등, 나에 대한 의혹들을 다 털어놓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직 뚜렷하게 확정된 것이 없기도 하고, 2, 3학년 선도부들이 입단속을 시켰을 수도 있고.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결국 말하지 않기로 한 듯했다.

"...그런 게 있어!"

얼버무리기와 쏘아붙이기의 중간쯤이었다.

홱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가다가,

"으힉."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발을 헛디디고 비틀거린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나서 우리 쪽을 째릿 쏘아보곤 두 배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간다.

나는 한소미에게 물었다.

"쟤 자주 저러냐?"

"응, 맨날 저래."

맨날 저러는구나.

전에도 느낀 거지만 생각보다 맹한 구석이 있었다.

몇 가지 사소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레나가 코앞이었다.

우리도 각자의 좌석을 찾아 흩어지기로 했다.

"멘토링, 대인전 다 잘들 하고, 나중에 봅시다."

"응! 안뇽!"

"김 형에게도 무운이 함께하길 바라겠소."

"...."

한소미가 해맑게 인사하고 떠나고, 고현우도 빙긋 웃더니 한소미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서예인도 나른한 눈으로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인사하고 제 갈 길을 나섰다.

관중석 곳곳에서 3학년 혹은 졸업생 멘토들은 자리를 잡고 대기하다가, 1학년들이 머뭇거리며 다가오면 반갑게 맞이했다.

일부는 벌써 모든 인원이 다 모인 것 같았는데, 멘토 주위로 네다섯 명 정도가 둘러앉아 설명을 듣고 있었다.

나도 내 자리를 찾아 좌석 배치도를 확인했다.

'163-H는 저쯤이겠네.'

위쪽 자리여서 제법 시선을 들어 올려야 했다.

그 부근이 텅 빈 걸 보면 우리 멘토는 아직 안 왔나 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자는 마음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막 계단에 첫발을 올리려는데,

"...."

조금 앞서 올라가던 송천혜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표정이 대번에 못마땅해진다.

"왜 따라와요."

"너 따라가는 거 아닌데."

"그럼 먼저 지나가세요."

"그러지 뭐."

나는 멈춰선 송천혜를 지나쳐 163-H 좌석까지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아주 편한 자세로 걸터앉았다.

송천혜는 내가 자리를 잡는 걸 확인한 후에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다시 움직여서 걸음을 멈춘 곳이 내 바로 앞이었다.

불신이 가득 차오른 얼굴로 자기 학생증과 좌석 번호를 번갈아 확인한다.

"설마...."

"너도 163-H니?"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어떡해요."

내가 돌려줄 반응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뿐이었다.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나?

"하...."

송천혜는 한숨을 푹 쉬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물론 감은 척만 했을 뿐, 이따금씩 실눈을 뜨고 나를 몰래 훔쳐보는 티가 난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느긋하게 다음 사람들을 기다렸다.

같이 멘토링을 받는 게 송천혜 하나일 리가 없다.

또 누가 올라올까?

흥미진진한 심정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다 아는 얼굴들이구만.'

79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2)

곽지철은 계단을 오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안색이 조금 창백해지더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바닥에 마구 패대기쳐지던 그 날의 악몽이 떠올랐으리라.

반면 나는 더 이상 곽지철에게 해묵은 악감정이 없었다.

이미 충분히 발산했기 때문에.

그래서 서로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먼저 질문을 던졌다.

"163-H?"

"...그렇다."

"제대로 오셨네."

송천혜가 곽지철을 대하는 태도는 나를 볼 때처럼 질색을 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여러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듯했다.

그중 하나는 곽지철과 내 조합에 대한 걱정인 것 같다.

결투까지 한 사이인데 한 달간 다 같이 멘토링이라니, 이거 괜찮은 거 맞나 싶겠지.

그리고 마지막 멤버는 더욱더 가관이었는데....

어깨까지 닿는 붉은 중단발, 루비가 박힌 지팡이,

그리고 지난주에 나와 함께 공략전을 치렀던,

홍연화였다.

홍연화는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런 상태로 좌석 배치도를 훑어보고,

163-H가 어디인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

온몸이 석상처럼 굳어져 버린 홍연화.

동공만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마구 흔들리는 홍연화.

이내 등이 보이도록 몸을 홱 돌리더니 주섬주섬 뭘 꺼내서 확인한다.

아마 학생증 뒷면을 다시 확인하는 거겠지.

그러나 송천혜가 그랬고, 곽지철이 그랬듯, 정해진 운명이 바뀔 리가 없었다.

그냥 받아들이렴. 마음이 편해질지는 모르겠지만.

홍연화는 두 다리에 모래주머니라도 잔뜩 찬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

"...."

혼자서만 세상 편하게 앉은 나, 그리고 조금씩 거리를 벌리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세 사람.

제삼자가 보기에는 은근히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그래서, 우리 멘토는 누군데?'

배울 사람이 다 모이도록 가르칠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도 기다림이 길지는 않았다.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각자 다른 곳을 보던 네 명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시선들을 받으며 한없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관중석 계단을 오르는 우리 멘토.

바로 3학년이며 도둑 동아리 부장 되시는,

당규영이었다.

"안녕? 내가 너희들 멘토다."

당규영은 짤막하게 자기소개를 하며 내 앞 좌석 등받이에 기대듯이 앉았다.

그러면서 나한테 몰래 눈웃음을 치는데,

'어때, 놀랬냐?' 하고 묻는 것처럼 보였다.

'월요일에 보자는 게 이런 뜻이었구만.'

깜짝 놀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의외이기는 했다.

도둑 클래스에 속한 이들은 대체로 무언가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고, 부지런한 것보다 한량같이 느긋한 것을 선호하곤 한다.

반면 멘토링에 참여하면 용살학원과의 계약에 얽매이는 데다 가르치는 학생들의 일정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니, 도둑의 성향과는 완벽하게 상극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당규영은 동아리 부장을 맡는 몸이라 일반 부원들보다 몇 배는 바쁠 텐데,

내 예상을 뒤엎고 멘토가 된 것이다.

'무슨 숨겨진 내막이 있나 본데.'

물론 그냥 받아들였을 것 같지는 않고, 학사 측에서 그만한 메리트를 제시했다고 봐야겠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보자.

"...."

당규영이 우리 네 명을 한 명씩 차례대로 눈에 담았다.

몰래 눈인사를 한 이후로는 더 이상 아는 척을 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멘토다 보니 일부 학생만 편애하는 인상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송천혜는 3학년 학생회장 송천기의 여동생.

임시 보관소 침입 때 오갔던 가시 돋친 대화를 생각하면 송천기와 썩 사이가 좋지는 않은 것 같다.

곽지철은 곽승재의 동생.

도둑과 선도부의 관계임에도 당규영은 곽승재에 대해 나름대로 괜찮은 인식을 갖고 있다.

상대하기는 까다롭지만 인정할 만한 호적수.

하지만 그 동생인 곽지철에 대한 인식은 글쎄.

나와의 결투에서 3학년 골렘과 장비들을 빌려 쓰고, 그러면서도 우주 방어까지 하는 졸렬한 모습을 보였던 탓에 아마 매우 부정적인 쪽에 가까우리라 추측한다.

우리 넷 중에서 가장 당규영과 접점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홍연화였지만, 루비 마탑과 도둑 동아리의 관계를 자세히 모르니 이건 계속 지켜볼 일이었다.

종합하면 보기만 해도 골이 아파 오는 조합.

그러나 멘토링으로 들어온 이상 조합이 어떻든 모두 포용해야 하리라.

물론 당규영은 동아리 부장을 맡을 만큼의 공사 구분은 되는 사람이었다.

감정을 배제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입을 연다.

"너희는 올라운더형 마법사를 목표로 내 밑에 들어왔다. 마법으로는 다들 한가락 하겠지만 올라운더는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마법사의 역할은 역할대로 충실히 해내면서도, 상황에 따라 파티의 전, 중, 후위를 오가며 추가적인 역할을 수행할 줄 알아야 한다.

당규영이 말을 이었다.

"너희가 어느 부분에서, 얼마나 부족한지 나는 몰라. 그러니까 오늘은 그걸 확인해 볼 거다."

이번 주 대인전을 통해서.

당규영이 자기 옆에 대인전 환경과 규칙을 띄워 올렸다.

MAP:[원형 투기장]

RULE:[강적][임의 규칙]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규칙은 [강적].

2주 차 공략전의 강적은 일반 고블린의 규격을 벗어나 몇 배는 강화된 보스 몬스터, 참수자 고블린이었다.

이번 대인전의 강적 역시 그만큼 어려운 상대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그게 누구일지는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적은 당연히 나야."

"...!"

당규영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척 가리켰다.

실력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직접 부딪히고 싸워 보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으니까.

한편으로는 멘토들이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 가르칠 자격을 갖췄음을 확인시킬 기회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기강 다지기 타임이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송천혜, 홍연화, 곽지철은 비록 1학년이지만 제법 이름난 집단 소속이다.

그만큼 자존심도 비대하게 크며, 멘토의 출신이나 신분의 고하 등을 문제 삼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당장 이들이 당규영에게 은근히 못 미더운 시선을 보내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도둑 클래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있고,

당규영은 마탑회가 아니라 길드연합 소속 마법사 아닌가.

위와 같은 불필요한 잡음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지금 확실하게 기강을 다져 두는 것이 최선이다.

"아무리 그래도 3학년을 쓰러뜨리라는 건 너무 가혹한 요구겠지. 그러니까 [임의 규칙]을 추가할 거야."

일부 규칙은 멘토의 재량으로 조정이 가능하다.

당규영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규칙이 추가되었다.

MAP:[원형 투기장]

RULE:[강적][제한][스티커][2인]

"우선 난 이걸 차고 싸운다."

언제부터인가 당규영의 손가락 끝에 팔찌 하나가 걸려서 대롱대롱 흔들거리고 있었다.

전자 팔찌 비슷한 생김새에 화면에는 큼지막하게 'C'자가 떠올라 있다.

공략전 배치 고사의 [픽스 존]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팔찌로, 스펙의 최대 상한을 C랭크로 고정한다.

스킬과 특성의 위력이 하향되고, 일부 고등급 스킬은 사용이 불가능하다.

가령 마법사들의 최고 범용기이자 이동 마법인 [블링크]는 태생부터 B급인데, 여기서는 사실상 못 쓴다고 보면 된다.

물론 전부 C랭크로 고정되더라도 1학년들과의 스펙 차이는 여전하다.

익힌 스킬의 개수 차이만 해도 엄청난 데다,

1학년들이 가진 스킬들 대부분은 최고 랭크가 C, 숙련도가 낮은 건 E, F랭크도 있을 테니까.

그런 까닭에 다음 규칙인 [스티커]도 우리 쪽에 유리한 규칙이다.

당규영이 손바닥만 한 스티커 세 장을 꺼내 보인 다음 하나는 허벅지 바깥쪽, 하나는 옆구리, 하나는 쇄골 위에 착착 붙였다.

그 모습을 보고 곽지철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너 무슨 생각 하니?

이런 음흉한 녀석 같으니라고.

내가 본 것을 당규영이 못 봤을 리가 없지만, 내색하지 않고 설명을 계속했다.

"날 쓰러뜨릴 필요까지는 없고, 스티커만 3개 다 떼면 성공으로 친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스티커를 떼려면 당연히 손 닿는 거리까지 접근해야 할 테고, 당규영은 다가오는 상대를 얼마든지 견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 규칙인 [2인]은 너무 뻔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두 명이 재주껏 힘을 합쳐서 스티커를 떼 보라는 소리지.

"여기까지. 궁금한 거나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해."

"...."

핸디캡을 이렇게까지 걸어 주는 데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있더라도 옆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하는데 혼자 투정을 부리기엔 자존심이 상할 테고.

당규영이 우리를 데리고 경기장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순간이동 마법진 위에 발을 올린 채 말했다.

"준비되면 두 명씩 들어와. 짝은 알아서들 정하고."

그런 다음 슉 하고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

"...."

남겨진 네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구 교차했다.

숨 막히는 눈치 싸움 끝에, 송천혜가 곽지철에게 제안했다.

"페어 하시죠."

"그게 좋겠군."

곽지철이 이 중에서는 그나마 덜 불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나 보다.

곽지철 역시 마찬가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랑 같이하기는 싫을 테고, 견원지간인 루비 마탑보다는 토파즈 마탑과 함께하는 게 낫겠다 싶었겠지.

즉석에서 팀을 짠 두 사람이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경기장 안으로 이동했다.

"...."

그리고 홍연화는 반쯤 울상을 짓고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송천혜와 곽지철 앞에서는 평소의 당당하면서도 약간은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나와 단둘이 남게 되니 급격히 쭈굴해져서 눈치를 살핀다.

'쟤는 아직도 저러네.'

지난주에 소탕 공략전을 같이 잘 풀어 나가면서 내가 조금은 편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아무튼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비슷하게 가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송천혜와 곽지철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방금 도착했던 알림 메시지들을 다시 불러냈다.

[이벤트:1차 멘토링](진행 중....)

[남은 기간:27일]

▷멘토의 도움을 받아 더욱 빠르게 성장하세요.

▷스킬/특성 습득 확률 증가

▷스킬/특성 성장 속도 증가

[서브 퀘스트:5주 차 대인전]

▷목표:스티커 떼기(-/3개)

▷기한:~일요일 자정

▷보상:달성 시기에 따라 차등 지급

멘토링 이벤트는 잠시 제쳐 두고.

당규영이 아직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강적한테서 스티커 떼기' 대인전의 경우 여러 번 도전이 가능하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달성 시기'에 따라 보상이 달라진다는 점.

첫날인 오늘 성공하는 것과 일요일이 다 끝나 갈 때쯤 가까스로 성공하는 것에는 제법 큰 보상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니 깔끔하게 첫 도전에서 스티커 세 개를 모두 떼는 걸 목표로 삼는다.

"크엑."

그때, 곽지철이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나오며 내 상념을 깨뜨렸다.

데굴데굴 구르다가 속도를 잃고 바닥에 대자로 뻗는데, 몸에서 미약한 전류가 파직거린다.

뒤이어 송천혜가 급격히 피로해진 모습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털썩 주저앉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우리를 의식하더니 최대한 멀쩡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어 경기장 쪽을 가리켰다.

"다음, 들어오시래요...."

80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3)

홍연화와 함께 순간이동 마법진에 올랐다.

원형 투기장은 배치 고사에도 등장했고 앞으로도 꽤 자주 보게 될 지형이다.

다만 이번 원형 투기장은 대인전을 세 사람이 치른다는 점을 감안해서, 전체적인 면적이 훨씬 넓다.

멀찍이 맞은편에 당규영이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곽지철과 송천혜의 상태를 보면 짧은 시간이나마 제법 격렬하게 싸운 걸로 짐작되는데, 당규영에게서는 그런 격전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스티커는 물론이고 옷차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하다.

그만큼 실력 차이가 난다는 뜻.

당규영이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준비하고, 아무 때나 들어와."

"...."

시작하기에 앞서 홍연화가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무슨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예전에도 봤던 표정이라 속뜻을 짐작하기는 쉬웠다.

이왕이면 같이 싸워 줬으면 좋겠는데,

그걸 요구하자니 내가 부담스럽고,

부탁을 안 하고 혼자서 싸우자니 상대가 3학년이라 너무 어려워 보이고.

이도 저도 못 하고 머뭇거리길래 내가 방향키를 잡기로 했다.

"일단 싸워 봐라."

"...나 혼자?"

"...."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홍연화의 표정이 또다시 다채롭게 변화했다.

- 이걸 나 혼자 하라고? 진짜로?

울상이 되었다가,

- 에휴, 저 인간이 그럼 그렇지....

체념했다가,

- 그래도 저번처럼 위험해지면 도와주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홍연화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첫 도전은 소극적으로 임할 생각이다.

'쟤도 뭘 배우긴 해야지.'

아무리 퀘스트가 걸려 있더라도 나 혼자서 덜컥 다 해결해 버리면 홍연화가 얻어 가는 게 없다.

기껏 멘토링을 신청해 놓고 시간 낭비만 하는 격이다.

모름지기 진정한 고인물이라면 뉴비의 성장을 배려해야 하는 법.

공략전에서 쌍둥이 트롤을 상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팀워크를 맞추는 건 홍연화가 직접 부딪히고 깨져 본 다음의 일이 될 거다.

그런 면에서 홍연화는 배울 자세가 된 뉴비였다.

내가 도와주든 말든 최선을 다해 보기로 마음먹은 듯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 번쩍!

완드에 박힌 루비가 붉게 빛났다.

화염 마법이 활활 타오르더니, 홍연화의 온몸으로 흡수되고 퍼져 나가며 에너지를 공급했다.

[오버히트]

육체 능력이 대폭 강화되었으나 그렇다고 당장 접근전을 걸 자신까지는 없나 보다.

완드가 또다시 붉은빛을 발하고, 끄트머리에서 가느다란 한 줄기 용암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용암은 바닥에 웅덩이가 되어 고이는 대신 완드와 연결된 채 뱀이 똬리를 틀듯 바닥에 늘어졌다.

홍연화가 완드를 슬쩍 휘젓자 그것을 따라 채찍처럼 움직인다.

[라바 윕]

"...."

당규영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 소환했는지 자그마한 그림자 나비 두 마리가 손등과 어깨 부근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당규영이 고개를 까딱이는 것을 신호로,

"와 봐."

"!"

홍연화가 곧바로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상대를 사정거리 내에 두는 즉시 힘껏 채찍을 휘두른다.

얼핏 당규영의 몸통을 노리는 것 같지만, 아마 진짜 목표는 스티커 셋 중 하나.

- 휘리리릭!

그러나 마지막 순간 당규영이 팔을 척 들어 올리자 채찍이 거기에 감겨들었다.

용암 속에 팔을 담근 것이나 다름없는데 당규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홍연화가 그 상태에서 추가로 화염 마법을 흘려보내려 했으나, 당규영의 발밑에서 솟아오른 그림자 손이 할퀴듯 용암 채찍을 찢어발겼다.

"...."

홍연화는 기대도 안 했다는 기색으로 자연스럽게 채찍을 회수했다.

반으로 줄어들었던 용암 채찍을 바닥에 가볍게 휘두르자 길이가 원상 복구되었다.

- 휘리릭!

재차 당규영을 공격해 들어간다.

당규영은 두 번은 안 통한다는 듯 마력을 그러모은 손으로 탁 쳐 냈다.

홍연화가 세 번째로 공격하기 전에 그림자 나비의 역공이 들어왔다.

힘없이 팔랑거리는 모습과 곡선을 그리는 동선을 보고 착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속도가 엄청나다.

지금처럼 아차 하는 순간 코앞까지 날아오고 만다.

"윽...!"

홍연화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채찍으로 그림자 나비를 후려치려 했다.

그러나 나비는 이리저리 잘도 팔랑거리며 유유히 채찍을 피해 냈다.

홍연화는 가느다란 채찍으로는 어렵겠다 싶었는지 재빨리 다음 주문으로 넘어갔다.

보다 넓은 범위를 커버하는 쪽으로.

용암 채찍이 커다란 화염으로 변해 전방을 불태우고, 동시에 그림자 나비에서 한 움큼의 그림자가 뿜어져 나와 충돌했다.

- 펑!

그러나 당규영이 소환했던 그림자 나비는 두 마리.

두 번째 나비는 여전히 바짝 따라붙는 중이다.

게다가 언제 소환했는지 한 마리가 뒤따라오고 있어 날아다니는 나비의 수는 여전히 둘.

나는 연신 뒷걸음질 치는 홍연화를 보며 생각했다.

'이건 완전히 말려들었는데.'

홍연화가 눈앞의 나비를 피하는 데만 급급해서 잊고 있는 사실.

그림자 술사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가장 쉬운 대상은?

바로 그림자다.

그렇다면 그림자 술사를 상대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곳은?

'발밑이지.'

"...!"

홍연화가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래에서 솟아오른 그림자 손이 다리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힘주어 떨쳐 내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사이 시시각각 접근해 오는 나비 두 마리.

홍연화가 다급히 불덩이를 쏘아 냈다.

- 펑!

한 마리는 어떻게 태워 버렸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커다란 그림자 주먹으로 변해서 홍연화를 강타했다.

- 퍼억!

둔탁한 소리와는 달리, 홍연화의 몸이 부드럽게 뒤로 날아가 사뿐 내려앉았다.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더니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을 보낸다.

굳이 따지자면 고마운 쪽에 가까웠는데, 얻어맞는 순간 [윈드포스]로 충격을 줄여 줘서 그렇다.

나는 계속해 보라는 의미로 턱을 까딱였다.

"...."

홍연화는 계속 고마워해야 할지 짜증을 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시 자세를 잡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쯤 외우다 말고 땅을 걷어차 자리를 벗어난다.

다음 순간 그림자 손아귀가 빈 곳을 잡아챈다.

한번 당하고 난 뒤로는 발밑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핵심은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발을 놀리는 것.

'여기까지는 좋고.'

그렇게 계속 기동성을 유지하면서 홍연화가 다음 카드를 꺼내 들었다.

[플레임 애로우]

- 화르륵!

완드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며 활 모양을 형성했다.

쫓아오는 나비와 발목을 잡아채려는 손아귀들을 피해 달리며, 당규영을 조준하고 시위를 놓았다.

- 피잉!

당규영은 계속 그 자리에 팔짱을 낀 상태.

대신 근처를 날아다니던 그림자 나비가 열심히 팔랑거리며 불화살 앞으로 날아들었다.

- 펑!

제법 커다란 화염 폭발이 일었다.

폭발이 가시기도 전에 두 번째 화살이 쇄도했다.

이것 역시 그림자 나비가 몸으로 막았지만, 또 세 번째가 날아온다.

'이런 거 보면 유망주가 맞기는 해.'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화살 하나 만들 때마다 한참씩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데, 홍연화는 거의 활시위를 놓는 것과 동시에 다음 불화살이 완성된다.

그림자 나비가 보충되는 속도보다 화살을 연사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결국 몇몇 개가 방어를 뚫고 당규영에게 직접 쏘아져 들어왔고, 마침내 당규영은 팔짱을 풀더니 귀찮다는 것처럼 팔을 휘저어 불화살을 걷어 냈다.

홍연화는 일정 거리를 두고 원 모양으로 겉돌면서 계속 불화살을 쏘아 보냈다.

'의도는 알 것 같은데....'

아마 원거리 견제를 하다가 틈이 보이면 들어가려는 심산일 것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두 사람의 역량 차이가 너무 커서 좀처럼 빈틈이 나오질 않는다는 점.

당규영은 또 불화살 하나를 걷어 내고,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하는지 홍연화에게 물었다.

"언제 들어올 거야?"

기껏 핸디캡도 여럿 걸어 줬는데, 떼라는 스티커는 안 떼고 멀찍이서 마법만 쏘고 있으니.

그럼에도 홍연화가 가까이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자, 당규영이 처음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안 오면 내가 간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빠르면서도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도둑걸음에 그림자 술사 특유의 보법이 더해진 결과다.

랭크는 팔찌의 제한을 받았어도 둘 다 C급.

홍연화 역시 오버히트로 육체 능력을 강화하기는 했으나 C급 이동기술 둘에 비하면 손색이 있어서,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져 버렸다.

그림자 술사의 특징 하나 더.

가까운 그림자일수록 영향을 더 빠르고, 강하게 줄 수 있다는 점이다.

홍연화가 멀찍이서 도망 다닐 때야 손아귀로 잡는 게 한 박자 느렸지만, 지금은 몇 걸음밖에 떨어지지 않은 상태.

당규영이 허공에 주먹을 뻗자, 발밑의 그림자가 불쑥 커다란 주먹을 만들어 홍연화를 강타했다.

홍연화가 황급히 불로 장벽을 만들어 막아 냈으나, 뒤이어 커다란 발이 재차 장벽을 뻥 걷어찼다.

장벽이 흩어지고 충격을 입은 홍연화가 비틀거렸다.

이번에는 홍연화의 양옆에서 곧게 편 그림자 손바닥이 하나씩 솟아오르더니 손뼉을 치듯 마주쳐 가까워져 갔다.

- 짝!

"악!"

홍연화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그림자 박수에 끼기 직전 내가 윈드포스로 확 잡아당긴 탓이다.

상황이 급박했던 만큼 거칠게 잡아당겼기에 바닥을 여러 번 데굴데굴 구르고서야 멈추었다.

홍연화는 순간 성질이 뻗쳤는지 일어나면서 내 쪽으로 왁! 소리를 지르다가,

"살!!! ...살살 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머리가 차갑게 식는지 급격히 볼륨을 줄였다.

내가 방금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을까 연신 눈알을 굴리지만, 나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러면 끝난 것 같은데.'

이번 도전에서 홍연화가 스티커를 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면 될 것 같다.

그럼 이왕 불가능한 김에.

"근접전 해 봐."

"...?"

홍연화의 낯빛이 불가사의하게 물들었다.

여태까지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는데 근접전을 하라고?

반면 당규영은 내 제안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좋은 생각이야. 질 땐 지더라도 시도는 해 봐야지."

이제 홍연화는 조금 억울해 보였다.

표정을 해석해 보면 대충 이렇다.

- 여태까지 피 터지게 싸운 건 난데 왜 쟤가 칭찬을 받아?

그러나 이내 뭐 어쩌랴 싶었는지 한숨을 푹 내쉬고, 마음을 다잡고 투지로 눈빛을 번뜩인다.

이번에는 홍연화가 마법을 시전하는 시간이 길었다.

캐스팅 속도로는 여태까지 봐 온 마법사 중 제일 빠른 홍연화가 저렇게 시간을 잡아먹는다면 제법 고위 마법일 것이다.

[오버히트]로 증가하는 육체 능력은 흡수하는 화염 마법의 위력에 비례한다.

그러니 최대한 강력한 것을 흡수해 육체 능력을 배가시키겠다는 의도다.

이내 홍연화의 온몸에서 선명한 불길이 타올랐다.

후, 하고 심호흡을 하곤, 곧장 땅을 박찼다.

당규영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홍연화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바로 앞까지 근접한 홍연화가 주먹을 휘두르는 척하더니, 당규영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이 대인전에서는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스티커를 떼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것이다.

'당규영의 근접 공격을 막거나 흘리면서'라는 전제 조건이 붙지만.

홍연화의 공격은 오버히트로 강화되어 분명 엄청나게 빨라졌다.

다만 여전히 아쉽게도, 동선이 단순해서 예측하기 쉬웠다.

산전수전 다 겪은 3학년이 그걸 예측하지 못할까.

당규영이 홍연화의 손목을 붙잡고 확 잡아당기자 균형이 흐트러졌다.

빠르게 자세를 고치고 다시 손을 뻗는다.

스티커에 겨우 닿나 싶은 순간, 당규영의 몸이 빙글 회전하며 홍연화의 등 뒤로 이동했다.

툭 밀자 볼썽사납게 바닥에 엎어지는 홍연화.

"헉."

짜증 날 틈도 없었다.

홍연화가 기함하더니 급하게 몸을 옆으로 데굴 굴렸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몇 바퀴를 추가로 구른다.

그 자리를 커다란 그림자 주먹이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 쿵! 쿵! 쿵!

겨우 몸을 일으켰더니 코앞에 당규영이 쇄도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 이후부터는 일방적인 구타에 가까웠다.

'쟤도 갈 길이 멀구만.'

나는 신나게 뻥뻥 걷어차는 당규영과 공이 되어 굴러다니는 홍연화를 지켜보며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끊어야 할 것 같다.

저렇게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하는 상태로 정신없이 얻어터지기만 하면, 배우기는커녕 트라우마만 깊어질 테니까.

두 사람에게 다가간 다음, 사이에 쏙 끼어들며 손을 내밀었다.

당규영이 탁 쳐 내려는 순간 손이 휙 뒤집히며 당규영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당규영은 굳이 빼려고 들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붙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반대쪽 손에 윈드포스를 그러모아 응수했다.

주먹과 손바닥이 충돌하고,

- 팡!

바람 터지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서로 일정 거리 떨어졌다.

그사이 홍연화는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추스른 상태였다.

홍연화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하지."

그러면서 순간이동 마법진으로 가볍게 눈짓했다.

나가 있으라는 뜻.

홍연화가 소심하게 반항해 봤지만,

"아직 더 할 수 있는데...."

"...."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실 홍연화 본인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당규영을 상대로 갖은 수단을 써 봤지만 상대도 안 됐고, 그마저도 내가 위급한 상황에 세 번이나 도와준 덕에 여기까지 할 수 있었던 거니까.

2인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마찬가지였다.

홍연화가 두 명으로 늘었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힘을 합쳤으면 가능이야 했겠지만, 결국 자신은 짐만 됐으리란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알았어...."

결국 홍연화가 터덜터덜 경기장 밖으로 나가고, 당규영과 나 둘만이 남았다.

당규영이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럼 우리 후배님 실력 좀 볼까?"

81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4)

"멘토링은 어쩌다 하시게 됐어요?"

"프흫흫, 놀랬냐? 놀랬지?"

당규영이 즐거운 웃음을 흘렸다.

"멘토 하면 징계 빼 준다잖아. 생각해 보니까 이게 더 나을 거 같더라."

"얼마나 빼 줬는데요?"

"전부 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빼 주면 할 만하지.

임시 보관소에 침입하고 금지 아이템들도 잔뜩 해 먹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꽤 많이 받았을 텐데, 그걸 다 제해 준다면 멘토링의 귀찮음도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다.

그래도 설마하니 전면 탕감일 줄은 몰랐는데.

선도부장 오세훈은 내 생각보다 더 화끈하게 타협하는 스타일인가 보다.

"얘기는 나중에 마저 해. 밖에 애들 기다리잖아."

홍연화만 경기장 밖으로 내보냈으니, 내가 당규영과 단둘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밖에서 기다리는 세 명이 의아하게 생각할 가능성이 커진다.

빨리 끝내고 나가는 게 상책이다.

다만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제안하기로 했다.

"리플레이를 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태까지 나를 지켜봤던 당규영이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리플레이를 꺼 준다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일 수 없는 실력을 내보이겠다는 뜻.

당규영은 구미가 당기면서도 조금 고민되는 눈치였다.

"솔직히 궁금하기는 한데.... 내가 지금 멘토란 말이야? 리플레이는 꼬박꼬박 올려야 되거든."

대인전뿐이라면 몰라도 멘토링이 함께 진행 중이다.

학사 측에서 학생들의 진척도를 파악하길 원하는 까닭에, 모든 리플레이를 기록하고 제출하는 것이 권장된다.

반드시까지는 아니지만, 당규영의 멘토링 성과에 반영되니 최대한 맞춰 주는 게 좋다.

해서 나는 다시 제안했다.

"그럼 이번만 비공식으로 하고, 공식전은 리플레이 돌아갈 때 한 번 더 치르죠. 다른 애랑 같이."

"그럴까?"

[서브 퀘스트:5주 차 대인전]

▷목표:스티커 떼기(-/3개)

▷기한:~일요일 자정

▷보상:달성 시기에 따라 차등 지급

서브 퀘스트의 목표는 '스티커를 떼는 것.'

퀘스트 보상만 받고 나면 대인전 자체는 느긋하게 해도 상관없다.

당규영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었다

결과적으로 학사 측에 제출할 리플레이는 확보가 된다는 소리였으니까.

리플레이 수정구를 회수한 다음, 나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와 봐, 그럼."

뭘 보게 될까 기대감에 부푼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와는 달리, 이번에 내가 보여 줄 건 많지 않다.

속전속결로 끝낼 생각이니까.

['증폭'을 사용합니다.]

['오버히트'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D->B)]

[인페르노 피스트]를 시전하고,

주먹에서 불타오르는 화염을 [오버히트]로 흡수했다.

오버히트는 흡수하는 화염 스킬이 강력할수록, 또는 오버히트 자체의 랭크가 높을수록 효과가 극대화된다.

인페르노 피스트에 B급 오버히트까지 썼으니 그 결과는.

- 화르르륵,

곧 내부에서 막대한 힘이 끓어오르며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당장 내 그릇, 육체의 수준에 비해 과한 힘이라 컨트롤이 조금 어려울 것 같다.

'그러니 더욱 속전속결로 끝내야지.'

자세를 잡은 뒤 땅을 강하게 걷어찼다.

- 팟!

한 호흡 만에 당규영의 모습이 성큼 가까워졌다.

또다시 땅을 걷어차자 코앞에 다가왔다.

당규영은 조금은 대비를 하고 있었으나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치 못한 듯 눈을 치켜떴다.

"어, 어?"

- 찌익!

내 신형이 순식간에 당규영을 스쳐 지나가며 무언가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어느새 내 손에는 스티커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당규영이 스티커를 보고, 시선을 내려 제 허리 쪽을 확인했다.

휑하게 빈 옆구리.

'이래서 랭크를 올려야 하는 거지.'

현재 당규영은 팔찌를 착용해서 모든 스킬과 특성이 C급으로 제한된 상태다.

반면 내가 당규영에게서 복사한 도둑걸음의 랭크는 B인데다, 서예인이 준 신발의 보너스를 받아 B+.

이것만 해도 속도 차이가 엄청난데, 오버히트로 육체 능력까지 잔뜩 끌어올렸다.

오버히트가 D급이었을 때도 흑사방주와 술래잡기를 하면서 털끝 하나 안 다쳤으니, B급은 말할 필요도 없을 터.

나는 바로 자세를 다잡았다.

"다음 가겠습니다."

"야, 야, 잠깐. 잠깐 기다려 봐."

"승부에 잠깐이 어딨어요."

- 팟!

다시 공간을 압축하여 짓쳐 든다.

당규영이 다급하게 뒷걸음치며 허공에 손을 긋자, 아래에서 여러 개의 그림자 손발이 솟아올라 나를 저지하려 했다.

나는 손 위에 마나를 그러모은 뒤, 덮쳐 오는 그림자 손발을 강하게 후려쳤다.

- 펑!

그림자가 흩어지며 당규영에게도 제법 충격이 전달된 듯했다.

아주 잠깐이나마 몸이 경직될 만한 충격이.

그 짧은 틈에 나는 빠르게 그림자를 우회해서 당규영의 측면으로 돌아 들어갔다.

"...."

3학년이 되도록 쌓은 경험치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 당규영도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스티커를 향해 뻗는 손을 옆으로 밀쳐 내면서 되려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내가 뻗는 척만 하고 손을 회수했기에 당규영은 허공만 움켜쥐었다.

내가 다시 손을 뻗고, 당규영이 응수한다.

한 걸음조차 안 되는 짧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손이 마구 부딪히고 얽힌다.

그러다가 내가 돌연 훌쩍 뒤로 물러나서,

- 쿵!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그림자 망치가 꽂히는 것을 보고, 다시 땅을 강하게 걷어차 돌진했다.

- 팟!

당규영이 즉시 반응했지만, 몸이 따라와 주지 않는지 방어가 아주 조금 늦었다.

- 찌익!

그리고 그 작은 차이를 이용해 두 번째 스티커를 떼는 데 성공했다.

거리를 벌리고 스티커들을 내 몸에 척척 붙이니, 당규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와, 벌써 두 개나 뜯어 갔어. 근데 김호야, 준비할 시간은 좀 주지."

"드릴수록 제가 불리해지거든요."

"뭐, 그렇기는 해."

스티커 두 개를 손쉽게 뗄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내 속도가 팔찌를 낀 당규영보다 월등히 빨랐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허를 찌르고 나서 계속 몰아쳤다는 점도 꽤 컸다.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는 그리 쉽지 않을 듯하다.

당규영이 부드럽게 손을 젓자, 발밑의 그림자가 파도처럼 위아래로 출렁거리며 범위를 넓혀 가기 시작했다.

스킬의 성능을 C급의 최대치까지 잔뜩 끌어올린다는 의미였다.

"내가 앞에 애들 때문에 너무 긴장을 놨나 봐. 생각해 보면 흑사방에서도 손만 다치고 나왔는데. 마지막이라도 맞게 대우해 줘야지."

계속 범위를 넓혀 가던 그림자가 이내 정사각형 모양의 텃밭을 만들었다.

[음영화원(陰影花園)]

꽃 대신 그림자로 이루어진 팔다리가 불쑥불쑥 솟아 있고, 그 위로는 나비 세 마리가 정찰하듯 날아다닌다.

스펙이 C급으로 제한된 상태에서도 영역 마법에 나비 세 마리까지.

당규영의 저력이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미련한 짓이기도 했다.

저렇게 온갖 마법을 잔뜩 펼쳐 놓으면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실시간으로 쭉쭉 빠져나간다.

거기다 [음영화원]은 굉장히 수비적인 마법이라,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으면 당규영 역시 나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

멀찍이서 지켜보면 제풀에 지쳐 주문을 거두어들이게 되어 있다.

하지만 과연 당규영이 이 사실을 모를까?

자기가 마법을 시전한 당사자인데.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빙긋 웃는다.

"뭐 해, 안 들어오고."

두 눈이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설마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멀뚱멀뚱 서 있지는 않겠지?' 하는 눈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럴 때 멀리서 기다리는 스타일이었다.

기왕이면 기다리는 동안 약간의 트래쉬 토크까지 곁들이면서.

그것이 상대를 가장 열 받게 만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당규영이다 보니, 장기적인 인간관계 유지를 위해 그 방법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원하는 대로 해 줘야겠지.'

당당하게 제 발로 음영화원에 걸어 들어간다.

척척 걸음을 옮겨 경계선을 밟자, 그림자 손발들이 일제히 사방에서 덮쳐들었다.

꽉 움켜쥔 그림자 주먹들이 휘둘러지고, 발들이 걷어차거나 다리를 걸려 하며, 손들이 나를 움켜쥐려 한다.

나는 주먹들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기울이고 비틀고, 발들을 타 넘거나 폴짝폴짝 뛰고, 움켜쥐려는 손들은 마나를 모아 마주 후려쳤다.

- 펑!

잠시 그림자가 흩어지며 공간이 생기자 잽싸게 조금 전진한다.

뒤따라 사방에서 몰려드는 그림자 손발들.

열 사람, 스무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는 느낌이다.

어느 곳을 보든 새까만 그림자가 득실거려서 기가 질릴 지경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에 기가 질리기에는 너무 닳고 닳은 고인물이었다.

게다가 마냥 불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한 손이 열 손을 이길 수 없는 법이라고는 하나, 스킬의 랭크 차이는 여전히 내 쪽이 우위였다.

한 손으로 열 손의 힘을 낼 수 있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것이다.

침착하게 피하고, 따돌리고, 뿌리치면서 야금야금 전진한다.

몇 번 반복하다가 화원 중심의 당규영과 거리를 재 보니,

'이제 뛰어도 되겠는데.'

크게 한 번만 뛰면 닿을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발에 힘을 주어 땅을 강하게 걷어찼다.

- 팟!

당규영은 예상했다는 듯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어느새 화원 곳곳을 날아다니던 그림자 나비 세 마리를 모두 자기 앞으로 불러 모은 상태였다.

나비들이 일제히 폭발하며 온갖 날붙이들이 비 오듯 우수수 쏟아졌다.

'안 되네. 취소.'

- 팟!

재차 땅을 걷어차 이전 위치로 돌아왔다.

쉴 틈을 주지 않고 몰려드는 그림자 손발을 피하고 후려치며 생각했다.

'이젠 진짜 뛰어도 되겠는데.'

나비 세 마리를 다 썼으니까, 보충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

- 팟!

또 당규영 바로 앞으로 뛰어들었다.

당규영은 자기 영역 안을 제 안방처럼 드나드는 내 모습을 보고 기가 막힌 듯했다.

C급에서 선보일 수 있는 최선의 수를 꺼냈어도 랭크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랭크에서 우위를 점하는 게 나라면 더욱.

그러나 투지를 잃지 않고 주먹을 내질러 왔다.

나는 옆으로 비켜서며 스쳐 가는 주먹을 더 옆으로 밀어냈다.

그러면서 스티커로 손을 뻗었으나 그 손을 당규영이 붙잡으려 하고, 그 손을 탁 쳐 내면 또 그 손을 막는 등 허공에서 빠르게 공방이 오갔다.

한곳에 오래 머물며 공방을 나눌수록 내가 불리했다.

당규영에게는 두손 두발 말고도 거들어 줄 손이 무수히 많았으니까.

등 뒤에서 짓쳐 드는 그림자들을 피해 또다시 자리를 바꿨다.

- 팟!

바닥에 발자국 하나가 깊이 찍히고.

다음 순간 나는 당규영의 반대쪽 측면에서 나타났다.

먼저 그림자 손들을 강하게 후려쳐서 치워 둔 다음, 스티커를 떼려는 것처럼 앞으로 손을 쭉 뻗었다.

"...?"

순간 당규영의 얼굴에 의문스러운 기색이 스쳤는데, 내가 손을 뻗도록 놔둬도 아직 자신과는 제법 거리가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찰나,

- 펑!

등 뒤에서 압축된 공기가 폭발하며 당규영의 신형을 한순간 내 쪽으로 확 밀쳤다.

처음 음영화원에 발을 들일 때부터 은밀하게 조금씩 준비해 왔던 윈드포스였다.

"!!"

당규영의 눈이 놀람으로 치켜 떠졌다.

다급하게 자세를 수습하려 했으나 그전에 내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가슴께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스티커 끄트머리가 손가락에 걸리는 순간 붙잡고 힘껏 잡아 뜯었다.

- 찌익—투둑.

"?"

나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워 올렸다.

스티커 뜯어지는 소리는 알겠는데 투둑은 무슨 소리지.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투둑 하는 소리와 동시에 손톱만 한 크기의 무언가가 내 얼굴을 노리고 쏘아져 나왔다.

이건 또 뭐지. 당가의 암기인가.

고개를 홱 옆으로 기울여 피한 다음 멀찍이 물러났다.

그리고 당규영을 보니,

"...."

상당히, 많이 언짢은 듯 안면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 뺨이 약간 붉어 보이기도 한다.

스티커 다 뗀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

내가 뭘 놓쳤나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니, 당규영이 한 손으로 셔츠 칼라를 여민 채 움켜쥐고 있다.

마치 놓으면 큰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나는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챘다.

'아, 단추.'

가슴께에 붙은 스티커를 너무 세게 잡아 뜯은 탓에 교복 셔츠 단추가 뜯어진 것이다.

당가의 암기라고 생각하고 피했던 것이 그 단추였고....

'너무 열심히 했나?'

나는 잠시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내 귓가에 당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평소보다 높낮이가 낮고 싸늘한 어조로.

나는 곧바로 허리를 굽혔다.

"미안합니다."

82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5)

"야, 김호."

"예, 선배님."

"이건 선 넘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너 일부러 그랬지."

"아닙니다, 선배님."

"근데 왜 이렇게 세게 뜯어?"

"싸움이 격해지다 보니 힘이 들어갔습니다, 선배님."

"...."

당규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하면 내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간파할 수 있을 것처럼.

'진짠데.'

도둑걸음에 B급으로 증폭한 오버히트까지 쓰다 보니 지금의 나로서는 완벽하게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거기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는 당규영에게서 스티커를 떼려니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실수로 단추를 같이 뜯어 버린 것 외에는 떳떳했기에 당규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

몇 초마다 눈썹 모양이 휙휙 바뀌는 당규영.

화가 나는지 V자로 찡그려졌다가,

잠시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완만하게 휘었다가,

다시 화가 나는지 찡그려진다.

당규영의 현재 심리를 추측해 보자면 이런 것이다.

방금 벌어진 해프닝이 불의의 사고였다는 점은 당연히 안다.

하지만 알아도 기분은 조금 상했다.

그렇다고 나한테 계속 화풀이를 하자니 진작 몇 번이나 사과를 받았고.

선배가 돼서 속 좁은 모습을 보이기는 싫다.

그래도 이대로 넘어가기에는 아직 화가 덜 풀렸다.

그렇게 화를 냈다, 곰곰이 생각했다를 반복하던 당규영이 문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직 뜯어진 셔츠를 움켜쥔 상태.

빨리 이것부터 해결하고 보자 싶었는지 짧게 한마디 한다.

"스티커."

"넵."

스티커 세 장을 도로 떼서 내밀자 그림자 손이 솟아올라 그것들을 홱 낚아채 갔다.

다른 그림자 손이 반대쪽을 가리켰다.

"저쪽 봐."

"넵."

나는 아예 등을 돌리고 원형 투기장 벽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푸 하고 한숨 쉬는 소리도 났다.

소리들을 대충 한쪽 귀로 흘려 넘기면서 퀘스트를 확인했다.

[서브 퀘스트:5주 차 대인전](완료)

▷목표:스티커 떼기(3/3개)

▷보상:멘토링 이벤트 보너스 강화(대)

[이벤트:1차 멘토링](진행 중....)

[남은 기간:27일]

▷멘토의 도움을 받아 더욱 빠르게 성장하세요.

▷스킬/특성 습득 확률 증가

▷스킬/특성 성장 속도 증가

▷보너스 강화(대) 적용 중....

퀘스트 보상은 멘토링 이벤트의 성장 보너스 증가.

첫 시도 만에 바로 성공해서 보너스 강화(대)가 붙었다.

일반적으로 약 20%가량의 보너스를 받는다면, 대폭 강화된 지금은 100% 이상.

성장 속도가 두 배를 넘어가는 셈이다.

이번 멘토링을 통해 몇몇 강력한 스킬과 특성을 배워 두려는 나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보상이었다.

물론 이것은 '멘토링' 이벤트이기 때문에, 보너스를 받았더라도 당규영의 협조가 없으면 진행이 안 된다.

빨리 화가 풀렸으면 좋겠는데.

- 콕,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다 보니 뭐가 내 등을 콕 찔렀다.

느낌이 손가락 같은데, 그대로 등을 이리저리 슥슥 긁어 댄다.

등에다 글씨를 쓰는 듯했다.

무슨 글자인가 짐작해 보면.... '바?'

그 옆에 또 슥슥 뭘 쓴다.

"선배님?"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리자 잔뜩 심통이 난 당규영의 얼굴이 있었다.

검지로 내 볼을 쿡 찌른다.

"누가 뒤돌아도 된대. 앞에 봐, 앞에."

검지가 재촉하는 것처럼 내 볼을 꾹꾹 눌러 댄다.

나는 지은 죄가 있다 보니 고개를 원위치시키고 순순히 등짝을 낙서장으로 내어 주었다.

그래요, 화 풀릴 때까지 마음껏 쓰십쇼.

"...."

당규영은 내 등에 '보'를 마저 적어서 '바보'를 완성하고, 그 아래에 '말미잘,' '시골똥개'를 포함한 각종 하찮은 나쁜 말들을 계속해서 써 내려갔다.

그 후에야 조금 화가 풀렸는지 한층 누그러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당규영이 셔츠 위에 후드집업을 덧입은 상태였다.

지퍼를 끝까지 다 올리고.

상의에 붙인 스티커 두 장은 후드집업에 가려 안 보이고, 허벅지의 스티커만 원래 자리를 되찾았다.

"너, 다음에 또 그래 봐."

"조심할게요."

"나가자."

* * *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밖으로 나와 보니, 먼저 나간 세 사람 사이에 무겁게 가라앉은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당규영에게 두들겨 맞은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이 생각보다 컸던 탓이다.

송천혜는 처음에는 짐짓 멀쩡한 척했어도 계속 그러기는 힘들었는지 관중석 앞자리에 다소곳이 앉고, 곽지철은 아예 두세 칸을 차지하고 드러누워 버렸다.

홍연화는 내가 위급한 순간에 여러 번 도와준 덕분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고, 굳이 관중석에 모여 있을 필요를 못 느껴서인지 무대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당규영과 내가 나타나니 우르르 주위로 몰려든다.

당규영이 들어갈 때와는 달리 후드집업을 입고 나왔음에도 곽지철은 별 이상함을 못 느끼는 듯했다.

막연하게 추워서 입었겠거니 하는 눈치다.

반면 송천혜는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와 당규영을 번갈아 보았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춥다고 후드집업을 입었을 리는 없을 테고, 추워서 입었다 하더라도 불편하게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홍연화는,

"...!"

거기에서 하나를 더 발견한 듯 가늘게 몸을 떨었다.

시선이 당규영의 허벅지, 정확히는 허벅지에 붙은 스티커를 향해 있었다.

얼핏 보면 별 차이를 못 느끼겠지만, 조금 더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스티커의 위치가 아주 미세하게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한번 뗐다가 도로 붙였다는 뜻.

홍연화가 나에게 보내는 눈빛은 십중팔구 이런 의미이리라.

'저 인간이 기어이 해냈구나...!'

이렇게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가운데,

당규영이 1학년들의 면면을 다시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침음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음.... 원래는 매뉴얼대로, 실력 보면서 한 명씩 개인적으로 피드백을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

개인적인 피드백 이전에 공통적으로 두드러지는 단점이 너무 컸다.

당규영은 그걸 보완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나 보다.

그 단점이란,

"근접전이 너무 약해. 너희 다. 그냥 약한 게 아니라 실망스러울 정도로 약해. 마법사인 걸 감안해도 약해."

"...!"

"방금 나랑 붙었을 때 어떻게 했나 곰곰이 생각해 봐. 스티커에 손이라도 갖다 대 봤나."

"...."

실력이 형편없다는 소리에 순간 발끈했으나, 이어지는 당규영의 말에 세 사람은 도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테니까.

곁에서 지켜본 홍연화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나름 기세 좋게 공격해 들어가기는 했다.

그러나 처음 작전과는 달리 당규영에게서 이렇다 할 빈틈을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 의미 없는 견제만 넣다가 역으로 접근하는 당규영에게 당하고 말았다.

마지막에 내가 억지로 근접전을 시키자 스티커에 손을 뻗어 보기는 했는데, 글자 그대로 손만 뻗었을 뿐 유효한 행동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 뒤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고.

송천혜와 곽지철이 어떻게 했을지는 잘 모르지만, 짐작건대 홍연화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거다.

당규영의 비판이 이어졌다.

"올라운더 할 거면 근접전은 기본 아니야? 아니 그래, 백번 양보해서 올라운더 안 하고, 평범하게 포대형 마법사 한다고 쳐. 그래도 최소한의 근접 대비책은 세워 둬야지."

'그건 맞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눈앞의 병아리들에게 유용한 조언이다.

"가령 너희가 돌진기나 이동기가 강한 상대를 만났어. 그게 물러나기만 한다고 뿌리쳐지겠니? 아주 잠깐이라도 버티다가, 빈틈을 만든 다음에 거리를 벌려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생기지."

"...!"

당규영은 그냥 예시를 들었을 뿐인데, 세 사람은 마치 자기를 콕 집어서 이야기한 것처럼 움찔거렸다.

분명히 비슷한 시나리오로 진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곽지철과 홍연화는 무슨 기억이 떠오르는지 몰라도, 나를 흘끔거리다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이번 멘토링은 아예 근접전에만 집중하자. 근접전만으로 최소 2~300점 아래까지 잡는 걸 목표로. 내가 봤을 땐 해 볼 만해. 다들 토대는 충분히 갖춰져 있어."

각자 마탑에서 배워 온 스킬과 특성이 한두 개가 아닐 테니까.

당장 홍연화만 봐도 오버히트라는, 아주 근접전에 걸맞는 스킬을 갖고 있지 않던가.

제대로 써먹지를 못해서 그렇지.

그렇다면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명확해진다.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시키면 뭐라도 되겠지."

무식하게 싸우고 또 싸워서 경험을 쌓는 것.

그리고 그 상대는 대부분 당규영이 될 예정이다.

저들로서는 몸이 매우 고달파지겠지만, 실력이란 것은 몸을 열심히 비틀어 댈수록 빨리 느는 법이니까.

"그리고 대인전 말인데. 앞으로 3번 더 도전할 기회를 줄게. 그 안에 스티커 다 떼면 50점, 못 하면 50점 감점."

배우다가 슬슬 자신감이 붙는다 싶으면 도전해 보란 소리다.

그랬다가 깨지면 다시 당규영과 대련을 반복하면서 실력을 키우고, 그러다가 또 도전하고.

대인전 50점이라면 비슷한 점수대에게 두 경기를 이기거나 졌을 때의 점수다.

실패하더라도 아주 타격이 크지는 않지만, 적당히 긴장감을 줄 정도는 된다.

"팀이랑 작전은.... 솔직히 이것도 할 말이 많은데, 지금은 근접전만 볼란다. 알아서들 잘 짜 봐."

* * *

이번 한 주간의 일정을 간추리면 이렇다.

학사 일정과 개인 수련은 평소대로.

그 외 남는 시간을 쪼개 멘토링에 쓴다.

우리 조의 경우 근접전이 약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당규영과 일대일 대련을 반복하며 경험을 쌓는다.

한 사람당 하루 30분 정도씩.

"근데 넌 멘토링 뭐 하러 받아?"

단둘이 되자마자 당규영이 물었다.

이번 주 일정은 '근접전이 약하다'는 전제 조건하에 짜여진 것이다.

그런데 그건 나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스티커도 진작에 다 뜯어 버렸고.

결국 나한테만 다른 걸 가르쳐야 하는데, 당규영이 보기에는 그게 뭘까 감이 안 오는 모양이다.

나는 아주 당연하다는 어조로 답했다.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저도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멘토링 받는 거죠."

"나한테 배울 게 있기나 해? 그냥 놔둬도 쑥쑥 잘 크겠구만."

"배울 거 많아요. 이번에는 특히 선배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기 도움이 필요하다니 당규영이 눈을 빛냈다.

"그으래? 뭔데?"

"특성을 하나 익히려고 합니다."

"무슨 특성?"

"다 설명하려면 길어지니까, 일단 회피 계열이라고만 말씀드릴게요."

"회피 계열이라.... 그럼 내 도움이 필요하긴 하겠네."

무언가를 피하면서 익히는 특성이니, 당연하게도 누군가는 나를 공격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당규영이 대련 상대여야만 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었는데,

[이벤트:1차 멘토링](진행 중....)

▷보너스 강화(대) 적용 중....

서브 퀘스트 보상으로 성장 속도를 두 배 이상까지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붙는다.

멘토의 '도움'을 받을 것.

어떤 수련을 하든 멘토를 동반해야만 보너스를 받는다.

이래저래 당규영이 대련 상대여야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