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규영은 애매하던 차에 내가 알아서 방향을 제시해 주니 오히려 잘됐다는 반응이었다.
"그래, 한번 해 보지, 뭐. 준비해."
그림자들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투가 막 시작되려는 찰나, 내가 다시 손을 들어 당규영을 제지했다.
"선배님."
"왜. 또 뭐."
"팔찌를 벗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당규영의 눈을 깜박거리더니 자기 팔을 들어 올렸다.
이번 대인전 용으로 착용한 C랭크 제한 팔찌를 보이면서,
"이거?"
"네, 그거요."
"랭크 제한 없이 하자고?"
"그래야 얻을 가능성이 올라가요."
"대체 뭐 하는 특성인데 그래? 이름이라도 들어 보자."
습득 조건에 '3학년이 온 힘을 다해 쏟아붓는 공격을 피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평범한 특성일 리가 없지 않은가.
당규영의 짐작대로였다.
이 특성은 <용살학원>을 플레이하던 당시, 날고 기는 랭킹 10위권에서도 나를 포함해 두세 명 정도만이 겨우 익혔던 걸로 기억한다.
귀찮은 조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존재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존재가 알려진 이후에도 조건이 안 맞으면 아예 익히는 걸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익혔을 때의 위력은 그야말로 막강해서, 무수히 많은 방어 계열 특성 중에서도 상대하기 까다롭기로는 한 손에 꼽혔다.
이 특성의 이름은.
"[왜곡]입니다."
"또 신기한 게 나왔네. 효과가 뭔데?"
"익힌 다음에 직접 보여 드릴게요."
"뭐, 그러자."
당규영이 C랭크 제한 팔찌에서 손목을 뺐다.
족쇄가 풀리고 스킬들이 본래의 랭크를 되찾자 발아래의 음영이 더욱 짙고 어두워져 간다.
"피할 자신은 있는 거지?"
"그럭저럭요."
"흥, 알았다. 잘해 봐."
음영이 크게 한차례 꿈틀거리더니,
팔찌를 벗기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양의 그림자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 콰아아아아—!
83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6)
나는 전력 질주로 달리는 중이었다.
- 카가가가각!
그림자 칼날들이 간발의 차이로 내 뒤쪽을 마구 할퀴고 지나갔다.
계속 전속력을 유지하며 달리다가 돌연 방향을 90도로 홱 꺾었다.
당규영이 그림자에서 불쑥 솟아오르며 단검을 쓱 그었다가, 간발의 차이로 내 발목을 베는 데 실패하자 혀를 찼다.
"칫."
다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고, 칼날들이 빗발친다.
이번에는 내가 나아가는 경로 앞으로 그림자 나비 두 마리가 날아들었다.
나는 즉시 다리에 힘을 집중해 땅을 강하게 박찼다.
- 퍼펑!
그리고 폭발하는 나비들 사이로 겨우 몸을 빼내고 나니....
대여섯 마리가 더 날아든다.
- 퍼퍼퍼퍼펑!
우스꽝스럽게 몸을 휘청거리고 지그재그로 달려서 폭발 사이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방금 건 살짝 위험했다.'
팔찌를 벗은 당규영은 스티커를 뗄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강해졌다.
당장 주력 스킬 중 하나인 [영접비행]만 해도, 겨우 세 마리 소환하던 걸 제한 없이 쭉쭉 뽑아내고 있으니.
마나 제한이 걸렸던 스킬들도 마음껏 난사한다.
대표적으로 지금 당규영이 그림자에 숨은 뒤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림자 도약]이라는 B급 스킬이다.
마법사들의 주력 이동 기술인 [공간 도약]과 호환되는 스킬인데, 마나 소모가 엄청나서 [코어]가 C랭크일 때는 엄두도 못 낸다.
아마 당규영이라면 코어는 A급을 찍었겠지.
이렇게나 강해진 당규영의 공세를 어떻게 다 피할 수 있냐면.
적어도 스피드만큼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
S급 영웅을 1,000명 키우면서 나 자신도 컨트롤이 극에 달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당규영의 스킬들을 훤히 꿰고 있다는 점 덕분이었다.
'그림자 술사도 키워 봤으니까.'
은근히 희귀한 클래스라 두 명뿐이었지만, S급까지 육성은 해 봤다.
- 카가가가각!
그런 컨트롤과 경험을 토대로 삼아, 또다시 현란한 움직임으로 칼날들을 피해 낸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열심히 피해야 하나?
당규영도 비슷한 궁금증이 일었는지, 계속 그림자 단검을 날려 대며 물었다.
"특성 배워지고 있는 거 맞아?"
"네, 계속 이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수치가 없어도 나에게는 고인물 특유의 확신이 있었다.
착실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라는 확신이.
[왜곡]을 익히는 방법 이전에.
여느 게임이 그렇듯, <용살학원>에도 숨겨진 수치가 여럿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스택.
스택은 어떤 행동을 연속으로 성공하면 하나씩 쌓인다.
가령 10번 연속으로 공격을 명중시켰다면 명중 10스택.
내가 지금 쌓는 것은 당연하게도 회피 스택이었다.
명중과 비슷하게, 한 번 공격을 피할 때마다 회피 1스택.
그리고 [왜곡]을 습득하기 위한 최소 전제 조건은 회피 1,000스택 이상을 유지하는 것.
그 이후부터는 회피를 할 때마다 특성을 습득할 가능성이 주어진다.
다만 정확히 1,000스택일 때를 기준으로 보면, 그 일정 확률이 거의 0에 수렴할 정도로 말도 안 되게 낮다.
그러면 이 확률은 어떻게 높이느냐.
'스택을 더 쌓아야지.'
스택을 많이 쌓을수록 확률도 계속해서 상승한다.
회피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확률의 문을 계속 두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왜곡]을 익히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스택을 더 빨리 쌓는 방법은?
나 자신보다 격이 높은, 즉 보유한 스킬이나 장비 등의 랭크가 높은 상대에게서 회피를 하면 된다.
랭크 차이가 크게 나면 한 번에 3스택, 4스택씩도 쌓인다는 말이다.
'조기 교육이 중요하거든.'
1학년 초반부인 지금 얻어 두는 게 나중보다 훨씬 유리한 이유였고,
조건을 알고서도 대부분의 랭커들이 포기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스킬의 평균 랭크는 D에서 C 사이로, B급 정도의 상대에게서 3스택 이상을 받아 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등급을 더 올린다면?
같은 스택을 얻으려고 해도 A랭크 적을 상대로 회피를 해야 한다.
그리고 A, S급에 오른다면 비슷한 수준의 상대에게서 연속회피를 이어 나가야 하는데, 그래 봐야 얻는 스택은 고작 1.
이마저도 자칫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허용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라, B급만 돼도 왜곡은 사실상 포기해야 할 지경이었다.
2주 차 대인전을 기점으로, 나는 단 한 번의 유효타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보다 수치상으로는 더 강력한 목종화의 골렘, 깃털뱀 제사장, 흑사방주 등과 열심히 술래잡기를 했다.
일부러 두 던전에서 보스 어그로를 끄는 역할을 맡은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한 4천 쌓았나.'
0에 수렴하던 확률도 나름 걸어 볼 만한 정도까지 끌어올리고, 그 확률을 멘토링 이벤트 보너스로 한 번 더 뻥튀기했다.
'이래도 부족하면 스택을 더 쌓으면 그만이고.'
B랭크 정도 되는, 스택 쌓기 딱 좋은 상대가 눈앞에 있으니까.
결국 시간문제라 보면 된다.
빠르면 이번 주, 늦어도 이번 멘토링 기간 내.
- 펑!
또다시 폭발하는 영접을 피해 방향을 트는데, 내가 향하는 곳을 예측하고 당규영이 대기하고 있었다.
미끄러지듯 바짝 다가와서 연신 단검을 찔러 댄다.
찌르면서 한 마디씩.
"이게, 왜, 안, 맞지?"
계속 따라붙으며 손을 젓자, 그림자 칼날들과 나비들이 일제히 나에게 쇄도한다.
전후좌우 피할 곳이 아무 데도 없다.
남은 곳은,
'위쪽으로.'
무릎을 슬쩍 굽힌 다음, 순간적으로 강하게 도약해 공중으로 솟구쳤다.
- 팟!
사실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공중전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나비들이 훨씬 유리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림자 칼날과 나비들이 뒤따라 날아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내 노림수는 다른 데에 있었다.
- 펑!
미리 준비해 둔 [윈드포스]를 나 자신에게 시전해 강하게 밀쳐 냈다.
내 신형이 대포알처럼 쏘아져 나가 한참 떨어진 곳에 사뿐 착지했다.
"...."
당규영은 그 광경을 보더니 더 공격해 오지 않고, 질린 표정을 하고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선배님, 계속 가시죠."
"...나 안 해. 쉴래."
그리고 철퍼덕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내내 도망만 다닌 나보다 더 지친 기색이었다.
하기야 허공에 대고 스킬을 있는 대로 난사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피로감이 엄청나겠지.
한 번도 못 맞혔다는 정신적인 피로감도 한몫할 테고.
당규영이 자기 옆 바닥을 탁탁 쳤다.
"너도 일루 와."
"넵."
옆에 가서 똑같이 철퍼덕 주저앉는 걸 보고 당규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 좀 잘 피한다? 나중에는 나도 완전 진심이었는데, 어떻게 한 번을 못 맞히네."
팔찌를 벗은 이상 아무리 1학년이 날고 기어도 자신이 우위라 생각했는지 처음에는 가볍게 손을 썼다.
그러나 내가 계속 간발의 차이로 피하자 오기가 생기는지 점점 진지해지더니, 나중에는 정말로 갖은 수단을 다 써 가며 나에게 유효타를 넣으려 들었다.
"졸업을 200번 넘게 하면서 쌓은 실력입니다."
"컨셉 확실하네. 그거 계속 밀고 가는 거야?"
"당분간은요."
당규영은 내가 '졸업 200번'이라는 거짓말 뒤에 다른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굳게 믿는 눈치였다.
굳이 뭘 증명하기보다 놔두는 게 편해서 이대로 유지하는 중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근데 이거, 생각할수록 내가 손해 같아."
"왜 손해입니까. 이것도 다 멘토링에 포함인데."
"숨겨 주는 건 포함 안 되잖아. 이거 다 리플레이 찍어서 올려도 돼?"
당규영이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그렸다.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역시 안 통하는군.
[왜곡]은 용살학원에서도 극도로 희소한 특성이었던 만큼, 이 게임 속 세상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당규영은 나름 도둑 동아리 부장이라 정보상도 겸할 텐데, 아예 들어 본 적이 없다지 않은가.
그러니 내가 왜곡을 익히는 중이라는 사실도, 그 과정에서 B랭크 정도 되는 3학년의 공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피한다는 사실도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학사 측에 보고하지 않는 대가로 바라는 게 있는 눈치라, 어쩔 수 없이 되물었다.
"뭐가 필요하신데요."
"글쎄다? 지금은 딱히?"
당규영이 배시시 웃으면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대신 소원권 하나 받아 놓을래. 자, 손가락."
그러나 나는 섣불리 손가락을 걸지 않았다.
원래 무담보 대출이 더 무서운 법.
어둡고 다크한 꿍꿍이의 냄새가 풍긴다.
"수상한데. 나중에 이상한 거 시키는 거 아니에요? 동아리 가입이라든가."
"이상한 거 안 시켜! 그리고 동아리 가입이 이상한 거냐?"
"그래도 좀 안 내키네. 그냥 저도 근접전 연습하는 걸로 하죠. 다른 애들이랑 똑같이."
스택이야 다다익선이지만, 이만큼 쌓았으면 적당히 피하면서 확률 싸움만 해도 상관없다.
당규영이 본 실력을 다 내지 않더라도 크게 아쉽지 않다는 말이다.
아예 발을 쑥 빼려 들자 당규영이 나를 살살 구슬렸다.
"야, 뭘 그렇게 쉽게 포기해. 좋은 거 팍팍 익혀서 너가 한다는 그, 세계 평화에도 힘쓰고 그래야지."
"다시 생각해 보니까 천천히 힘써도 될 것 같아요."
"아이씨, 그럼 나중에 들어 보고 정 아니다 싶으면 말아. 됐냐?"
"좋습니다."
나는 그제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안전장치를 걸어 둔다면 괜찮겠지.
당규영이 기분 좋게 웃었는데, 내 눈에는 흑막들이 짓는 음흉한 웃음보다 더 수상해 보였다.
왜 소원권을 받아 두고 싶어 하는 걸까?
'나중에 뭘 시키려고.'
* * *
비슷한 시각.
또 다른 원형 투기장.
서예인은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하고, 반쯤은 졸린 얼굴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끝에는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이 여성을 처음 본다면 누구나 '유능함'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비단 완벽하게 각이 잡힌 커리어 우먼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어떤 일을 지시하더라도 완벽하게 수행할 것만 같다.
그야말로 유능함으로 똘똘 뭉친 결정체 같은 인상이었다.
정장 여성의 눈빛이 서예인을 응시했다.
서예인은 변함없이 무심한 태도로 그 눈빛을 받았다.
두 사람이 침묵 속에서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하다가, 마침내 정장 차림의 여성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제가 왔습니다."
그리고 매우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안정미.
혜성그룹 미래전략실 전략2팀장이자,
오래전부터 서예인의 가문을 섬겨 왔던 '집사'들 중 하나였다.
84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7)
시간을 약 2주 전으로 되돌려서.
안정미는 그날도 모든 업무를 빈틈없이 처리하던 중이었다.
그녀의 두 손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로, 그러면서도 기계처럼 정밀하게 움직이자 그녀 앞에 놓인 서류의 산이 빠르게 줄어들어 갔다.
맡은 일을 전부 처리하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는 손들이었으나, 그날만큼은 예외였다.
"뭐라고요?"
안정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안면이 경악으로 떨리고 있었다.
둘 다 쉽게 보기 힘든 모습이었는데, 그만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그 놀라운 일이 무엇인가 하니, 용살학원 내에 심어 둔 '믿을 만한 정보원'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아가씨가 멘토링을?"
바로 서예인이 멘토링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믿을 만한 정보원'이 안 믿겨질 만큼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안정미가 긴 시간 모시며 지켜본바, 서예인은 '학구열'이라는 단어와 가장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새로 배우거나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을 극도로 귀찮아하는 성격.
아니, 따지고 보면 학구열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서예인은 단순히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
어디 한구석에 틀어박혀 자는 것만 제외하고 말이다.
어떻게 저토록 찬란한 재능과 가능성을 갖고서도 저렇게 게으를 수가 있는지, 지켜보는 이들로서는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서예인을 가르치는 일 대부분을 안정미가 도맡아 했었기에 그녀의 답답함은 다른 이들보다 더했다.
그런 가운데 미래전략실에서 궁여지책으로 시도해 보기로 한 것이, 바로 서예인을 용살학원에 입학시키는 것.
- 또래의 여러 학생을 만나고, 어울리고, 경쟁하고, 부딪치다 보면 조금은 자극을 받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갖고 보냈지만, 당시 안정미가 거는 기대는 썩 크지 않았다.
또 하루 종일 도서관 한구석이나 기숙사에서 낮잠이나 주무시겠지.
수업이라도 꼬박꼬박 나가 주시면 고마울 것이다.
그런데 서예인이 용살학원에 입학하고 한 달.
'믿을 만한 정보원'이 계속해서 믿기 힘든 근황들을 보내왔다.
서예인이 매일같이 수업에 나가는 것은 물론, 매주 대인전, 공략전도 열심히 치르고 있단다.
심지어 성적이 그럭저럭 괜찮단다!
정말로 또래 학생들이 서예인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킨 걸까?
'아무리 그래도 멘토링은.'
하지만 멘토링을 신청하고, 자발적으로 가르침을 청하는 건 너무 나가지 않았나?
해서 안정미는 멘토링 소식만큼은 도저히 믿지 못했다.
그러나 몇 번이나 교차 검증을 거치고, 소식이 진실로 굳어지자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잘 됐어.'
안정미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며 즉석에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마침 용살학원 측에서 멘토를 모집한다는 공문을 돌렸었다.
또 마침 안정미는 고랭크 '총사'이며, '졸업생'이라는 조건에도 정확히 부합한다.
'이건 기회야.'
아무리 가르치려 들어도 사람 말을 들어 먹질 않던 아가씨를 가르칠 절호의 기회.
심지어 이 멘토링은 서예인이 직접 신청했다지 않던가?
이전과는 달리 본인에게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니, 두 배로 좋은 기회였다.
해서, 안정미는 만사를 제쳐 두고 멘토를 하겠노라 용살학원에 연락을 넣었다.
학사 측에서도 그녀 정도의 실력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에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원거리 계열 클래스를 놓고 보면 궁사에 비해 총사의 숫자가 현저히 적은 편이다.
그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총사의 수는 더욱 적고,
또 그중에서 멘토링을 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한가한 총사는 더더욱 적다.
이런 인력 부족 탓에 서예인은 어쩔 수 없이 궁수 멘토 아래로 편입될 예정이었으나, 안정미가 멘토를 맡으며 그녀 아래로 배정된 것이다.
이 또한 정확히 의도대로였고.
결과는 안정미가 꿈에도 그리던, '의욕이 있는 아가씨를 가르치는' 일대일 과외 시간이었다.
안정미가 벅차오르는 감동에 몸을 떨었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내 모든 것을 전수하리라!
그러나 일단은 본심을 숨기고 평범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저와 함께 대인전과 공략전을 치르실 겁니다."
"...."
서예인은 여전히 무표정하니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안정미는 그 안에 숨겨진 미세한 감정 변화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저건 뭐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드실 때의 표정인데....'
서예인이 벌써부터 이 상황을 귀찮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멘토링을 하고 싶으신 게 맞나?
무슨 오해가 있어서 잘못 신청된 건 아닌가?
여러 의구심이 스쳐 지나갔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안정미가 빠르게 설명을 이어 갔다.
"이번 주 대인전의 [강적]은 저입니다. 그리고 대인전의 세부 내용을 설명해 드리기 전에, 아가씨께서 그동안 얼마나 성장하셨는지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아무리 믿을 만한 정보원을 썼다고 해도, 용살학원 외부로 유출할 수 있는 정보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기껏해야 '서예인이 대인전에서 몇 승 몇 패를 했다' 같은 단편적인 것들뿐이었고, 리플레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멘토링에 앞서 서예인의 정확한 성장도를 측정해 볼 필요가 있었다.
안정미가 손 위에 한 뭉치의 마나를 그러모았다.
마나가 팔각형 형태로 얇게 펼쳐지며 과녁 겸 방패가 완성되었다.
"이번에도 이걸 쓰겠습니다."
안정미가 소환한 마나 방패는 과거 숱하게 서예인의 사격을 막아 낸 전력이 있었기에, 실력을 측정하는 용도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안정미는 거기에 약한 도발을 곁들였다.
"아가씨께서 조금은 성장하셨을 거라 믿고 방패를 강화했습니다. 아마 못 뚫으실 겁니다."
서예인이 매사 귀찮아하는 성격과는 상반되게, 일단 불이 붙으면 은근히 지기 싫어한다는 점도 알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마력을 써서 간단한 방패를 만들고,
그걸로 서예인의 사격을 막은 뒤,
'아가씨, 고작 이것도 못 뚫으십니까?'로 2차 도발.
그러면 최소한 한동안은 열심히 배우곤 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 굳게 믿으며, 안정미가 신호를 보냈다.
"오십시오."
"...."
서예인은 말없이 주섬주섬 쌍권총 두 자루를 꺼내 라이플로 조립하고, 마력탄을 만들어 장전했다.
'응?'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정미의 눈썹이 저도 모르게 치켜 올라갔다.
한 달 전만 해도 서예인의 마력탄은 대충 뭉친 마력 덩어리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지금 서예인의 손 위에서 푸른빛을 발하는 탄환은 흠잡을 구석이 전혀 없는,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하게 조형된 마력탄이었다.
'저 정도 마력탄이라면....'
지금 안정미가 띄워 올린 마나 방패를 부수고 들어올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했다.
지금이라도 방패를 더 강화한다?
'그건 안 돼.'
이미 도발을 던져 놓지 않았던가.
뒤늦게 마나를 추가로 불어넣다가 걸리면, 서예인의 호승심을 자극하기는커녕 역효과만 날 것이다.
게다가 이런 면에서 서예인은 귀신같은 구석이 있었다.
눈은 또 얼마나 좋은지, 아주 작은 마나의 유동이라도 즉시 잡아내곤 했던 것이다.
결국 소환해 놓은 마력 방패로 승부를 봐야 했다.
안정미가 다른 방향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격중되는 순간 일점에 마나를 집중시키면....'
막아 낼 확률이 크게 증가한다.
제법 세세한 컨트롤이 필요하겠지만, 그녀 수준의 총사라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길쭉한 라이플이 자신을 향해 겨누어지자,
안정미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퉁-!
그리고 총구가 푸른 불을 뿜었다.
이때, 안정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점이 둘 있었다.
아무리 서예인의 엄청난 재능이라도 [마력탄]을 저 정도 완성도까지 단련하는 데에는 엄청난 수고가 들어갔으리라 생각했기에.
설마하니 다른 스킬까지, [사출]까지 배웠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는 서예인의 실력이 조금 늘어난 게 아니라, 엄청나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점이었다.
서예인은 지난 한 주 내내 김호가 시킨 대로, 남는 시간을 모조리 [마력탄]과 [사출]의 단련에 쏟아부었다.
엄청난 재능으로 노력까지 곁들이니 스킬이 성장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덧붙여 알게 모르게 B랭크 쿠션의 효과로 수면 효율이 올라가다 보니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 시간 역시 고스란히 수련에 투자하게 되었다.
결과는 D랭크였던 [마력탄], E랭크였던 [사출] 둘 다 C랭크 달성.
김호가 '말도 안 되지만 어쩌면 가능할 것 같다' 생각했던 성취를 기어이 이루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서예인의 라이플에서 쏘아져 나온 것은 안정미의 예측을 아득히 뛰어넘는 강력한 한 방.
한 달 전보다 조금 더 나아졌겠거니, 생각하고 띄워 올린 방패로는 무슨 수를 쓰든 절대로 막을 수 없는 한 방이었다.
라이플 총구와 마력 방패 사이에 한 줄기 푸른 실선이 그려졌다.
다음 순간 마력탄은 얇은 방패를 산산이 깨부수며 안정미의 미간에 틀어박혔다.
- 쾅!!
안정미는 머리를 뒤흔드는 엄청난 충격을 못 이기고 천천히 뒤로 나자빠졌다.
직접 맞아 보니 깨달을 수 있었다.
'[사출]까지 익히셨군요....'
그것도 꽤 높은 랭크로.
까맣게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안정미가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렸다.
"아가씨.... 정말 훌륭하십니다...."
겨우 한 달 사이에 이렇게나 멋지게 성장하시다니.... 털썩.
* * *
안정미는 예상 밖의 강력한 일격을 맞고 요란하게 넘어지기는 했지만, 졸업생답게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마 한가운데에 불룩한 혹을 단 채로, 여러 궁금한 것을 물었다.
"[마력탄]은 어떻게 익히신 겁니까? [사출]은요?"
어떻게 한 달 만에 스킬을 두 개나 익혔는지,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라 C급까지 단련할 수 있었는지.
안타깝게도 서예인은 말수가 매우 적은 편이었고, 대부분의 대답을 단답형이나 고개를 흔드는 걸로 대신했기에, 거의 스무고개를 방불케 하는 문답이 오가야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도중에 못 참고 때려치웠을 테지만, 안정미는 서예인을 오래 겪은 집사답게 단련이 될 대로 된 상태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서예인이 대충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단어 몇 개만으로도 전체적인 문맥을 파악하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하여, 전후 사정을 모두 파악한 안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호라는 분이 가르쳐 주셨다고요."
"응."
"그렇다면 아가씨, 혹시 멘토링도?"
"걔가 하랬어."
"...!"
안정미는 마음속에서 김호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이 인간 나무늘보 같은 아가씨에게 동기 부여를 했단 말인가?
비결이 뭐지?
혹시나 물어보면 가르쳐 주지 않을까 싶어, 안정미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아가씨께서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 모습을 보니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하군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서예인은 잠시 멍하니 정지한 채 허공을 응시했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슬쩍 기울이기도 했다.
한참이나 생각한 끝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냥."
그냥 그렇게 됐다는 것이었다.
서예인에게 김호는 특별한 존재다.
'눈'에 보이는 상태창이 물음표로만 채워져 있는, 극소수의 특별한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이 한 달간 김호와 어울린 것이 그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또 어떤 이유로?
서예인 자신도 정확한 답을 낼 수 없었다.
김호를 따라다니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매일 빠지지 않고 수업에 나가게 됐고, 대인전 공략전도 치르게 됐고, 열심히 수련도 하게 됐고, 멘토링도 하게 됐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될 거다.
그래서, 이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뭉뚱그려서 '그냥'이다.
당연히 안정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답변이었다.
하지만 답변을 들을 사람이 서예인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 김호라는 분을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85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8)
화요일.
점심시간 이후의 짧은 쉬는 시간.
고현우, 서예인과 한적한 곳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내용은 말할 것도 없이 어제 시작된 멘토링.
"그래서, 너네 멘토는 어때."
"만족스럽소, 무척이나. 선배 고수분도 훌륭하고, 다른 분들에게서도 배울 게 많이 보이더구려."
고현우는 아침부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운 좋게도 실력이 뛰어난 멘토와 조원들을 만났나 본데, 무인이라면 누구든 들뜰 만한 일이었다.
"그래? 누구누구 있는데?"
"한 소저가 같은 조원이더구려."
"한소미?"
"그렇소."
어쩐지 어제 가는 방향이 같더라.
혹시나 했더니 진짜 같은 조가 됐네.
"잘됐다. 대련하자고 해 봐."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았다오. 헌데 거절하더군."
"벌써? 왜 싫대?"
"불필요한 싸움은 원하지 않는다 하더이다."
돌이켜 보면 열차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싸움은 안 좋아하지만 승부는 피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굳이 대련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대련은 승부가 아니거든.
그래도 선도부에 대인전 상위권까지 유지하는 걸 보면 할 때는 하는 성격이라 봐야겠지.
"잘만 부탁하면 해 주지 않을까? 가령 맛있는 걸로 살살 꼬셔 보면."
"음, 그럴 것도 같소. 허나 한 소저가 뭘 좋아할지 도통 모르겠군."
"송천혜한테 슬쩍 물어보지 뭐. 걔는 또 우리 조거든."
"정말이오? 그럼 부탁하리다."
송천혜와 한소미는 같은 선도부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꽤 친해서 항상 붙어 다니기도 하니, 서로 관심사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거다.
그걸 나한테 순순히 알려 주겠는가 하는 건 다른 문제지만, 그에 관해서도 계획이 있었다.
고현우의 근황은 대강 일단락된 것 같아서, 이번에는 말없이 대화를 지켜보기만 하던 서예인에게 대화를 돌렸다.
"너는 어땠냐. 멘토링."
"...재미없어."
그러시겠지요. 재미없으시겠지요.
저쪽 멘토가 고생하는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멘토가 뭐라 말은 안 하고?"
"너 보고 싶대."
"나를?"
"응."
총사 멘토가 나는 무슨 일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금방 들을 수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아가씨."
"?"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이 그곳에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뭘 시키든 기본으로 2인분 이상 하겠군.'
이 사람이 엄청나게 유능하다는 사실을.
교직원 같지는 않고, 멘토링 한다고 들어온 졸업생일 확률이 높다.
거기다 서예인에게 '아가씨'라는 호칭을 쓴다는 건 예전부터 인연이 있다는 뜻이겠지.
정장 여성이 먼저 우리에게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의 친구분들이시군요. 저는 안정미라고 합니다. 이번에 멘토를 맡게 되었습니다."
"고현우입니다."
"김호입니다."
우리도 예를 갖추어 답했다.
그런데 내 이름을 듣는 순간, 안정미의 눈이 강렬한 안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거의 레이저가 쏘아져 나올 지경이라 조금 부담스러웠다.
"...김호 님이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고현우가 순식간에 눈치를 챙기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는 제가 자리를 비켜 드리는 것이 좋겠군요."
"배려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그럼 김 형, 서 소저, 나중에 봅시다."
그리고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서예인의 멘토라니 대화 주제는 사실상 정해진 셈이었다.
또 당사자를 옆에 두고 못 할 말을 할 것도 아니라, 굳이 서예인을 다른 데로 보낼 필요는 없었다.
안정미가 나에게 명함 하나를 건넸다.
"다시 소개 올리겠습니다."
명함 위에 정갈한 글씨체로 적혀 있는 직책과 이름.
[혜성그룹 미래전략실 제2팀장]
[안정미]
'혜성그룹이라.'
혜성그룹은 <용살학원>에서 1, 2위를 다투는 거대 군수산업체로, 마력총을 비롯한 각종 고등급 마법공학 장비들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서예인이 이들과 연관이 있다면 [광학미채 길리슈트]나 [구름밟이] 등의 온갖 고등급 장비로 무장한 것도 상당 부분 설명이 되었다.
무려 팀장급이 찾아와서 아가씨라고 부를 정도라면 못해도 간부급 인사의 손녀딸일 테니까.
게다가 안정미는 유능해 보이는 인상만큼 맡은 직책도 팀장뿐만이 아닌 듯했다.
예상대로, 서예인이 안정미를 가리키며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집사야."
"집사? 이분이?"
"응."
"예, 과분하지만 집사의 업무 역시 병행하고 있습니다."
안정미가 긍정했다.
이 사람이 그 집사구나.
몇 주 전 서예인과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해 보았다.
- 갖고 싶은 거 있어?
- 갑자기?
-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된대.
- 누가?
- 우리 집사가.
서예인이 마력탄 특강의 보답이라고 신발을 선물한 것은 집사에게 이런 상식을 배운 덕이 컸다.
누군지는 몰라도 가끔 언급될 때마다 존경심이 솟아오르곤 했는데, 눈앞의 안정미가 바로 그분이시란다.
존경스러운 분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김호 님을 찾아뵙고자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가씨의 진로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일개 학생인데, 진로 상담이라면 저보다 나은 분이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짐짓 겸손한 척 한발 물러섰으나, 안정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김호 님 외에는 적임자가 없습니다. 겨우 한 달 만에 아가씨께 [마력탄]과 [사출]을 가르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물론 숱한 가정교사분들 중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셨으니, 매우 훌륭한 선생님이십니다."
어조가 단정적인 걸 보니 이 용건을 꺼내는 건 나를 만나기 한참 전부터 계획해 둔 듯했다.
그런데 안정미의 말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마력탄]과 [사출]이면 사실 총사 클래스 스킬 중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것들인데, 여태까지 제대로 가르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가정교사들 실력이 부족했을 리도 없고, 서예인이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얘 집에서는 말 잘 안 들어요?"
"...."
안정미가 순간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난감한 질문이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 수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빠르게 적절한 단어들을 고르는 듯했다.
대답이 몇 초 이내에 나왔으니 확실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인 것 같다.
"...조금 더 관심이 가는 분야에 시간을 투자하시는 편입니다."
나는 '관심이 가는 분야가 뭔데요?'라고 물어서 안정미를 더욱 난감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보나 마나 낮잠일 게 뻔하거든.
정말로 하고 싶은 말 역시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했다.
'네, 집에서는 더럽게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런 서예인을 내가 가르쳤다니, 누군지 궁금해서라도 한 번은 찾아올 법하지.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얘는 제 친구기도 하니까, 힘닿는 데까지 최대한 해 볼게요."
"감사드립니다. 어제 아가씨의 실력을 조금 더 정확히 확인해 보니, 마력탄과 사출을 C랭크까지 올리셨더군요."
"그래요?"
이건 나도 의외인데.
그냥 목표를 높게 잡으면 열심히 할 것 같아서 C랭크로 잡은 건데, 그걸 진짜로 해 버리네.
서예인에게 시선을 보내자 나를 마주 보며 천천히 손가락을 들더니, 어설픈 V자를 그려 보였다.
다시 안정미와 시선을 교환했다.
신기하게도 눈빛만으로 뜻이 통한다.
'쟤 평소에도 저래요?'
'아니요, 저도 오늘 처음 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둘 다 프로였다.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고 하던 대화로 돌아온다.
"둘 다 C급이면 이제 파괴력은 필요한 만큼 확보했다고 보는데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력탄을 계속 상대에게 적중시켜 피해를 줄 수만 있다면 1학년 중 누가 오든 골로 보내 버릴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계속.'
현재 서예인은 저격 두세 번이 실패하는 시점에서 승률이 급격하게 떨어지는데, 전투를 이어 나갈 유지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파괴력은 뛰어나지만, 그 파괴력을 유지해 줄 기동성이나 방어력 등이 없다시피 해서, 역공이 들어오면 고스란히 다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화력전에 들어가 힘겨루기를 하면 먼저 나가떨어지는 거고.
가령 2 대 2 대인전에서 붙었던 홍연화-백준석 듀오는 마력 방패를 소환해 저격을 막아 내고, 서예인의 위치를 파악해 반격했었다.
그다음에 내가 판을 엎어 버리지 않았다면 금방 체력이 깎여 전투 불능이 됐을 거다.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나오지 않도록 가장 먼저 보완해야 할 것은,
"먼저 이동스킬을 하나 익혀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제 생각과 같군요. 추천하시는 스킬이 있으십니까?"
안정미가 물었다.
여느 원거리 계열처럼 [도둑걸음]을 익혀도 괜찮겠지만....
이왕이면 프리미엄을 붙이는 게 어떨까.
나는 다른 스킬을 입에 담았다.
"[깃털걸음]이 적당할 것 같아요."
깃털걸음(Featherwalk).
시전자의 몸을 가볍게 하고 이동속도를 빠르게 한다는 점에서는 도둑걸음과 비슷하다.
차이점을 꼽자면 깃털걸음을 시전하는 동안 시전자 주위에 약한 난기류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상대의 공격을 일부 빗겨 내고 흘려 내는 역할을 한다.
적게나마 방어스킬의 역할도 겸하는 셈이다.
당연히 바람 계열 스킬들과 시너지도 좋다.
내가 앞으로 익힐 스킬들과 조합하면 보너스를 더 크게 받을 거다.
반면 단점은 딱 하나.
'비싸지.'
[깃털걸음] 스킬북은 [도둑걸음]에 비해 극도로 희소하다.
<용살학원>을 플레이할 당시의 시세는 100배가 넘었는데, 이곳은 어떤지 몰라도 비슷하지 않을까?
도둑걸음보다 좋은 맞지만, 그렇다고 쳐도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
대부분의 경우 100배나 되는 값을 치르고 깃털걸음 스킬북을 구매하느니, 비슷한 도둑걸음을 익히고 그 재화를 다른 데에 투자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근데 얘네는 혜성그룹이라며.'
혜성그룹쯤 되는 대기업 영애가 모처럼 스킬 하나 배워 보겠다는데, 그까짓 돈이 대수겠는가.
과연 안정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스킬북을 구해 보겠습니다."
나는 거기에 한 가지 요구를 덧붙였다.
"당분간은 무기도 바꾸면 어떨까 싶어요."
이동스킬을 배우는 동안은 한자리에 오래 머물러야 하는 저격 소총보다는, 조금 더 기동성을 살리는 계열의 마력총을 쓰는 게 어떻냐 하는 말이다.
이것 또한 혜성그룹에는 어려운 요구가 아니었다.
총기라면 넘치도록 쌓여 있을 테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걸로 당분간 서예인의 수련 방침은 정해진 셈이었다.
그 뒤는 경과를 보고받으면서 계속하든 바꾸든 하면 될 테고.
나는 서예인에게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스킬 열심히 배우고, 집사님 말 좀 잘 듣고 그래."
서예인이 나를 몇 초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정미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나를 향해서는 감탄과 존경심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서예인을 보는 눈빛은 어딘가 배신감과 허탈함이 담긴 듯했다.
'알 만하지.'
왠지 모르게 안정미의 입장도 이해되었다.
고양이를 예로 들면, 몇 년씩이나 오냐오냐하고 최선을 다해 키웠는데 자신한테는 관심조차 안 주다가, 낯선 사람이 나타나자 즉시 배를 깔고 드러눕는 모습을 보는 그런 느낌 아닐까.
그러나 다시 말하듯, 안정미는 프로였다.
또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대화를 잇는다.
"이번 멘토링은 미래전략실에서도 관심을 두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김호 님이 아가씨의 성장에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주시는 점, 잊지 않고 반드시 사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래 봬도 필요한 게 많아서요."
"충분히 만족하실 만한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벌써 뭔가 좋은 걸 준다니.
역시 안정미는 인의예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86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9)
서예인의 수련은 당분간 안정미에게 맡기고.
고현우 역시 멘토와 같은 조원들이 마음에 든다고 하니 크게 관여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도움을 줄 만한 부분이라면 한소미와의 대련을 주선하는 것 정도겠지.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당규영과 [왜곡] 수련을 하러 아레나로 향하는 길.
먼 저편에 송천혜의 모습이 보였다.
'근데 상태가 영 별로네.'
모진 고생을 한 것처럼 완전히 초췌해진 기색이다.
평소의 야무지고 빈틈없는 모습과는 달리, 창백한 안색을 한 채 비틀비틀, 흐느적흐느적하면서 걷는다.
흡사 한 마리의 연체동물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멘토링하고 오는 길인가 본데.'
온몸 곳곳에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당규영한테 얼마나 시달렸을지 안 봐도 뻔하다.
아무튼 송천혜에게 볼일이 있었기에, 내가 먼저 다가가며 말을 건넸다.
"송천혜."
"!!!"
송천혜는 아예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내 목소리를 듣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다음 순간 나를 발견하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의 변화를 보였다.
구부정하던 자세를 꼿꼿이 세우고, 반쯤 풀어져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을 순식간에 정돈해 묶었으며 옷매무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깔끔하게 다졌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3초 미만.
"무슨 일이시죠?"
"멘토링하고 오나 봐. 너도 고생하네."
"고생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방금 보니까 얼굴에 고생이 덕지덕지 묻었던데."
"전혀요. 뭘 잘못 보신 거 아닌가요?"
요만큼도 안 힘들다며 시치미를 뚝 떼는 송천혜였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그런가 보다. 내가 잘못 봤네. 요새 눈이 좀 침침하긴 해."
...라고 말을 하면서, 동작은 방금 봤던 송천혜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지만.
비틀비틀, 흐느적흐느적.
자신의 추태가 재현되자 송천혜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그만해."
"이 인상 깊은 장면을 수정구로 기록해 놨어야 하는데, 참 아쉬워. 그치?"
"실기 평가 외 수정구 사용은 교칙 위반입니다. 다른 학생의 동의 없이 촬영하는 것은 더욱!"
"나도 알지. 그냥 증거로 못 써먹는 게 아쉽다고."
"...."
방금 내 재현이 너무 완벽했기에 송천혜는 더 이상 발뺌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전부 인정하진 않았다.
"...오늘만 조금 피로가 쌓이기는 했습니다. 그래서요. 힘든 사람 놀리려고 부르신 건가요?"
"아니. 가면서 보이길래 가볍게 인사나 하려 그랬지. 겸사겸사 물어볼 것도 있고."
"제가 대답해 드릴 의무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인사했으면 이제 서로 갈 길 가자며, 찬바람이 쌩쌩 불도록 매몰차게 등을 돌리는 송천혜였다.
하지만 이대로 보내 줄 순 없지.
막 발걸음을 떼려는 송천혜에게 물었다.
"대답할 의무는 없는데, 뭐 하나 잊은 거 같다."
"제가요? 그럴 리가요."
송천혜가 허튼소리 말라는 듯 작게 콧방귀를 뀌었으나,
"소원권."
"...!"
다음 순간 내가 던진 단어에 멈칫하고 굳어지더니, 고개가 끼긱거리며 내 쪽으로 돌아간다.
내가 빙긋 웃으며 다시 물었다.
"기억났나?"
4주 차 [소탕] 공략전, 누구의 완성도가 더 높은가 가볍게 내기를 했었다.
내기에 걸렸던 것은 사소한 부탁이나 질문에 답해 주는 소원권.
다만 이 내기는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
내가 한 마리도 빠짐없이 던전을 깨끗하게 청소해 최고점인 100%을 받은 것에 비해 송천혜는 97%로 조금 떨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얻은 소원권을 지금 쓰려는 거고.
송천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어보시죠. 미리 말해 두지만 선도부 기밀 같은 건 안 됩니다."
"그런 거 안 물어봐. 그냥 간단한 거야."
"뭔데요."
"한소미. 걔는 뭐 좋아하냐?"
"...예에?"
내 질문이 뜻밖이다 못 해 한참이나 예상을 벗어난 듯, 송천혜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조심스럽게 되묻지만,
"그쪽, 혹시 소미한테...."
"관심 있냐고? 그건 아니고."
나는 딱 잘라 끊었다.
검후의 제자라고 들었으니, 미래의 S급 영웅 후보로서는 관심이 있다.
하지만 지금 송천혜의 질문은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냐는 쪽일 테니까 당연히 없다고 말할 수밖에.
송천혜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면 더 이상한데요. 관심도 없는데 소미가 좋아하는 게 왜 궁금하신데요?"
나는 달리 켕기는 부분도 없었기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고현우와 한소미가 같은 조가 되었고, 두 사람이 친선 대련을 하며 실력을 쌓도록 주선하고 싶다고.
"그럼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야죠. 제가 그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려고 했는데 네가 안 듣잖아. 지금도 소원권 아니었으면 확 가 버리려고 했으면서."
송천혜가 슬며시 내 시선을 피했다.
"...어쨌든, 소미한테도 도움이 되는 거라면 기꺼이 도울 의향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과자 같은 거 알려 드리면 되나요?"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해 봅시다."
간식으로 꼬시기.
단순하지만 제법 효과가 좋으니 가장 먼저 시도해 볼 만하다.
다만 한소미가 좋아하는 간식거리 목록은 조금 의외였다.
양갱, 전병, 부각, 화과자, 당과....
나는 침음을 흘리며 답했다.
"양갱이라.... 특이한 취향이군."
"양갱도 먹다 보면 맛있거든요?"
"맛없다고 한 적 없어. 그냥 특이하다고."
어쨌든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양갱이나 전병이라면 마침 흑사방 저잣거리에서 사 둔 게 있으니, 굳이 힘들게 구하러 다닐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둥그런 통에 든 전병 세트를 꺼내 보였다.
"이런 거?"
"예, 그런 거요."
"주면서 부탁하면 들을까?"
송천혜가 잠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 보는 듯하더니, 가망이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내 작게 한숨을 쉬며 손을 내민다.
"차라리 저한테 주세요, 제가 한번 말해 볼게요."
"그래 주면 고맙지."
나보다는 송천혜가 말을 꺼내는 편이 더 효과가 좋을 테니까.
하는 김에 재고 처리까지 하자는 심산으로 남은 과자를 아예 한 아름 꺼내 안겨 주었다.
그것들을 자기 인벤토리로 옮겨 담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송천혜가 내 시선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마디 했다.
"왜 그렇게 보시죠. 부담스럽네요."
"그냥, 어쩐지 평소보다 친절한 것 같아서."
"착각하지 마세요. 소미한테 도움이 되니까 하는 겁니다."
"아무렴요, 그러시겠지요. 그래도 고맙다."
소원권 한번 알차게 써먹었군.
서로 볼 장은 다 봤으니 더 이상 나 싫다는 사람 앞에서 알짱거릴 이유가 없었다.
해서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잠깐만요."
이번에는 송천혜가 나를 불러세웠다.
나는 송천혜의 말투를 따라 했다.
"무슨?? 일이시죵???"
"그거 하지 마세요."
"쏘리. 아무튼 왜."
송천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해요."
"뭘?"
"내기요."
"나야 좋지. 뭐로 하게?"
"이번 주 대인전이요. 누가 스티커를 더 많이 떼나 하시죠."
'나는 벌써 다 뗐는데?'
그리고 송천혜의 실력이 홍연화와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이번 주에 겨우 하나 떼면 다행일 텐데?
자기 무덤을 깊게 깊게 파고 들어가는 송천혜였다.
하지만 굳이 알려 줄 이유도 없었기에, 짐짓 모르는 척 세부 조건에 대해 물었다.
"너랑 곽지철, 나랑 홍연화 페어 그대로 해서?"
"네."
"양쪽 스티커 개수가 같으면?"
"먼저 대인전을 치른 쪽이 이기는 걸로 하죠."
"좋지. 뭐 걸어?"
"저번하고 똑같이 소원권이요."
슬쩍 송천혜의 표정을 살펴보니 이렇다 할 감정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한테 졌던 게 분해서 설욕전을 하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어 보였다.
"왜, 물어볼 거 있냐?"
"있습니다."
"그럼 그냥 물어보지, 왜."
"알려 주실 건가요?"
내가 순순히 답하지 않을 것 같으니 소원권을 쓰면서 물어보겠다는 뜻이다.
무슨 질문을 할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아까부터 자꾸만 내 손을 힐끔거리고 있으니, 지난 주말 흑사방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손에 남았던 화상이 궁금한 거겠지.
든든하게 백년하수오 먹고 마나연공하니까 깔끔하게 나았으니 증거는 더 이상 없지만, 질문을 하고자 하면 방법이야 많다.
'그때 화상은 어쩌다 입었나요?' 정도로 물어보지 않을까.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래. 소원권 걸고 하자, 내기."
그게 더 재미있으니까.
* * *
해결할 문제 또 하나.
대장장이 동아리 쪽에서 연락이 왔다.
분명 장비 제작 의뢰에 어림잡아 일주일은 걸린다고 했었는데, 겨우 며칠 만에 나를 다시 찾은 것이다.
만년한철과 블랙 미스릴이 다루기 쉬운 재료도 아닌데 벌써 완성했을 리는 없고.
'그 반대겠지.'
무슨 문제가 생겨서 부르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의뢰를 넣을 때부터 예상한 바였다.
곧장 대장장이 공방을 찾아갔다.
문 앞에서 대기하자 며칠 전처럼 액면가 3학년 선배가 걸어 나왔다.
오늘은 울퉁불퉁한 근육질 몸 위에 교복을 번듯하게 갖춰 입었는데, 넥타이 핀을 확인해 보니 2학년이다.
사람은 망치를 들면 늙는다는 가설에 한층 힘이 실린다.
"왔구나."
3학년 같은 2학년 선배는 내 얼굴을 곧바로 알아보았는데, VIP티켓으로 의뢰를 넣은 게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안녕하십니까."
"따라와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선배가 나를 공방 한쪽에 마련된 작은 동아리방으로 안내했다.
동아리 부실보다는 사무실이나 상담실 비슷하게 꾸며 놓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쓰이는 것 같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대장장이 동아리 부장이 부실로 들어섰다.
그는 터벅터벅 걸어와 내 맞은편 자리에 걸터앉곤, 인사치레 하나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가공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러면서 대뜸 탁자 위에 주괴를 턱 올려놓는다.
묵빛 광택을 흘리는 주괴.
내가 건넸던 만년한철과 블랙 미스릴의 합금이다.
"두 아이템을 융합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더군."
부장이 주괴를 꺼냈을 때부터 서늘한 기운이 피부에 닿고 있었다.
탁자와 제법 거리가 떨어졌는데도 이 정도다.
"냉기가 보통이 아니군요."
"그래. 여러 차례 가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만년한철도, 블랙 미스릴도, 기본적으로 냉기를 띤 금속.
다만 따로따로 놓고 봤을 때는 가공이 까다롭기는 해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장장이 동아리 부장도 그렇게 생각하며 의뢰를 받았을 테고.
그러나 막상 두 금속을 융합한 결과물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냉기의 수준이 어지간한 빙속성 재료에 비할 만큼 강해졌고, 그로 인해 가공 난이도가 한층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화로의 열 대부분을 흘려 버리더군."
제대로 열을 가할 수 없다면 녹여서 변형시킬 수도 없다는 뜻인데, 그걸 어떻게 봉 모양으로 가공하겠는가.
심지어 내가 의뢰한 것은 일반적인 봉도 아니고, 마법공학 부품을 장착할 정도로 정교한 것인데.
나는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
대장장이 부장은 내가 무덤덤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자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예상한 것 같은 반응이군."
"다루기 어려우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했습니다. 그래도 부장님이라면 가능할 거라 생각했고요. 어렵지 않을 거라 말씀하시기도 해서, 한번 믿어 보자 싶었죠."
사실은 실패하는 쪽에 더 비중을 두었지만, 일부러 반대로 말했다.
앞으로도 종종 볼 텐데 굳이 체면을 구길 필요는 없겠지.
대장장이 동아리 부장은 잠시 내 속내를 살피는 듯하다가,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다른 해결책도 마련해 두었을 것 같은데, 아닌가?"
"혹시 몰라서 염두에 둔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솔직히 저도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이것 역시 사실은 처음부터 해결책을 마련해 두고 시작한 일이지만, 일부러 자신 없는 척했다.
"그런가. 네가 염두에 둔 것이 통한다고 치고, 원하는 걸 말해 봐라."
마법공학 동아리 부장 봉재석도 밀고 당기는 걸 별로 안 좋아했는데, 이 양반은 그보다 더하다.
바로 원하는 것부터 말하란다.
나는 또 조금 고민하는 척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봉을 다 만들고 재료가 조금 남지 않겠습니까."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그래서?"
"남는 재료로 조그만 거 하나만 더 만들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부장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내 제안을 수락했다.
"좋다. 네 방법이 통한다면 하나 더 만들어 주지. 해 봐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빠르게 약속을 주고받았다.
물론 저쪽에서 막 지른 것 같아 보여도, 나름대로 계산이 들어간 것이다.
대장장이 동아리 부장쯤 된다면 슬슬 장인 타이틀이 붙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될 일은 피하고 싶을 터.
'장인이 재료 가공이 어려워서 의뢰를 포기했다'면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기 딱 좋으니 말이다.
그러니 돌파구를 찾아내야만 하는 상황인데,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면 차라리 내줄 걸 내주고 수고를 덜 하는 편이 이득이라는 계산이다.
'나야 잘됐지.'
이미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만년한철 합금을 녹이는 방법은 크게 둘 중 하나.
3학년, 동아리 부장급 정도의 강력한 화염술사가 화력을 최대 출력으로 쏟아붓는 것.
또는 극히 소수에게만 계승되는, 특별한 특성을 보유한 화염술사가 피워 올리는 불꽃이다.
그리고 둘 모두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당연히,
'루비 마탑.'
나는 홍연화에게 받은 큼지막한 루비를 만지작거렸다.
가져가면 손님 대접 정도는 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