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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10)

홍연화는 요즘 들어 매우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 화르르륵!

홍연화가 빠르게 뒷걸음질 치며 전방에 화염 마법을 쏟아붓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시야가 불길로 가득 찼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당규영이 튀어나와 주먹을 내질렀다.

날아오는 주먹들을 가까스로 하나하나 방어하는 홍연화.

그러나 점점 힘에 부치는지 방어가 허술해진다.

- 퍼억!

이윽고 커다란 그림자 발이 그녀를 뻥 걷어찼다.

"켁."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리며 바닥을 구르는 홍연화.

얼마나 세게 걷어찼으면 굴러가는 거리가 제법 길었다.

한참이나 데굴데굴 구르다가 철퍼덕 엎어져선 죽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다.

당규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차갑게 한 마디 내뱉었다.

"일어나."

"...."

구르고 엎어지는 거야 이미 일대일을 하면서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고, 그럴 때마다 당규영의 한 마디에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미적거릴수록 더욱 고달파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홍연화가 지금 계속 멈춰 있다는 건, 더 이상 손 하나 까딱할 기력조차 안 남았다는 뜻이었다.

당규영도 그 사실을 알기에 오늘치 대련을 마무리 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쉬어."

"...."

홍연화는 당규영이 원형 투기장을 나선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껌딱지처럼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이내 껌딱지에서 처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어어어엉...."

멘토링이 시작된 지 3일째.

오늘도 어김없이 당규영과 일대일로 근접전 대련을 했다.

당규영은 그림자 마법을 활용해서 근접 계열 클래스가 펼칠 수 있는 온갖 다양한 공격들을 구현해 냈다.

이미 멘토링 첫날부터 증명되었듯, 홍연화가 당규영을 일대일로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여기에 근접전이라는 제약까지 걸리니 더욱 턱도 없어졌고.

결국 내내 먼지 나게 두들겨 맞기만 할 뿐이다.

그래도 두들겨 맞는 보람은 있었는지, 실력이 너무나도, 가파르게, 쑥쑥 잘 늘었다.

한 대라도 덜 맞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몸을 뒤틀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근접전이 몸에 익어 가는 것이다.

가령 첫날에 100대를 맞았다면 둘째 날은 99대, 그다음 날은 98대, 97대....

다만 중요한 문제 하나를 꼽자면, 정신력이 버텨 줄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분명 내일도 실력은 빠르게 늘겠지만, 어찌 됐든 96대를 처맞는다는 소리가 아닌가?

게다가 하루 이틀이면 이해를 하겠는데, 멘토링 기간은 4주 아닌가?

'이제 겨우 수요일이라고...?'

앞으로 멘토링이 3주하고 4일이나 더 남았다고...?

생각할수록 눈앞이 캄캄해지는 홍연화였다.

또 하나 홍연화를 암담하게 만드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데도 아직 스티커에는 손도 못 대 봤다는 점이다.

안 맞으려고 용을 쓰는 것만 해도 힘겨운데 그사이에 어떻게 스티커를 떼란 말인가?

아직 한참은 더 실력을 키워야 할 것 같으니, 대인전은 엄두도 못 내 보고 50점 감점으로 끝낼 가능성이 컸다.

다른 조원들은 몰라도 여태 이곳저곳에서—주로 김호한테 져서—대인전 점수를 많이 까먹은 홍연화에게 50점은 치명적이었다.

"푸...."

두 배로 우울해진 홍연화가 엎드린 채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서 쉬자....'

힘겹게 몸을 일으킨 다음 터덜터덜 루비 마탑 동아리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실에 갖다 놓은 케이크라도 먹으면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지 않을까?

터덜터덜 걷던 발걸음이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 * *

그러나....

운명은 결코 홍연화가 편히 쉬는 꼴을 두고 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부실로 들어선 홍연화가 평소처럼 가장 먼저 제 언니를 찾았다.

"언니 어제 내가 사 둔 케이... 헛."

내가 사 둔 케이크 안 건드렸지? 하고 물으려 했으나, 그 말은 도중에 헛숨을 들이키며 끊기고 말았다.

"...."

결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점잖게 앉아서 찻잔을 기울이는 김호.

홍연화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시선을 돌린다.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조건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든다.

맞은편에는 홍연화의 언니이자, 루비 마탑 동아리 부장인 홍예화가 앉아 있다.

그리고 둘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홍연화의 케이크.

막 포크질을 하기 직전에 도착한 듯했다.

원래 같았으면 불같이 화를 냈을 상황이지만, 홍연화는 화낼 틈도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뭐, 대체."

하도 당황해서 말이 드문드문 끊겨 나왔다.

반면 홍예화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홍연화를 맞이했다.

"타이밍 맞춰서 잘 왔네. 안 그래도 네 얘기 하던 중이었어."

"언니, 언니, 언니, 잠깐만 나와 봐."

"왜?"

"그냥 빨리, 잠깐만."

홍연화는 막무가내로 제 언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김호의 이목이 닿지 않는 부실 밖까지 나온 다음에 물었다.

"뭐야?"

"뭐가?"

"저거!"

"저거가 뭔데?"

"저 사람!"

홍연화가 김호가 앉아 있을 방향으로 마구 삿대질을 해 댔다.

마치 부실에 흉악한 괴수라도 한 마리 풀어놓은 것처럼 다급한 태도였지만, 홍예화의 반응은 그저 미적지근했다.

아니, 오히려 김호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애가 꽤 괜찮더라. 선배한테 깍듯하고, 매너도 좋고."

"뭐, 뭐?"

홍연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애가 괜찮아...?

매너가 좋아...?

내가 아는 김호랑 다른 사람인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혀 버린 홍연화였다.

사실 자매간에 온도 차이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대인전에서 김호를 직접 겪어 본 홍연화와는 달리, 홍예화는 그저 제 동생이 몇 번 졌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김호가 갑자기 루비 마탑을 찾아왔을 때 아주 조금 경계를 하기는 했지만, 이야기 정도는 들어볼 수 있다 생각해서 손님으로 맞이했다.

홍연화에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큼지막한 루비 역시 손님으로 맞이할 이유로 충분했고.

그렇게 한동안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솔직히 꽤 유익하고 만족스러웠다.

김호에 대해 궁금했던, 그러나 홍연화가 통 말을 안 해서 답답했던 것들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었으니까.

"너 쟤랑 멘토링도 같은 조라며?"

"저 사람이 얘기했어?"

"내가 먼저 물어봤다, 왜."

김호 역시 1학년이었기에 대화의 흐름이 자연스레 멘토링으로 넘어갔다.

가볍게 '멘토링은 받니?' 정도의 질문을 던졌는데, 설마하니 제 동생과 같은 조가 걸렸을 줄은 몰랐다.

이것 역시 '홍연화가 통 말을 안 하던' 것 중 하나라 더욱 자세히 캐물었고, 김호는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자기가 아는 한도 내에서 정보를 공유했다.

"너 스티커 하나도 못 뗐다며. 평소에 근접전 연습 좀 하래도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아니이, 나만 그래? 다른 애들도 다 못 뗐어!"

"좋겠다, 아주? 비슷한 친구 많아서?"

자매가 평소처럼 마주 보고 으르렁거렸으나, 손님이 와 있는 상황인 만큼 서로에게 불덩이를 집어 던지는 일은 없었다.

홍예화가 명령조로 말했다.

"아무튼, 이번 대인전에서는 네가 스티커 다 떼. 쟤한테 부탁도 해 놨어."

벌써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까지 오고 간 모양이었다.

페어를 이룬 이상 김호가 그녀를 돕는 건 당연하지만, 결정적으로 스티커를 떼는 역할만 홍연화에게 양보하도록.

대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홍예화가 지불했을 테고.

홍연화는 더욱 기가 차서 헛바람을 터뜨렸다.

"그걸 왜 내가 다 해?"

"그럼, 안 하려고? 대충 버스 타려고 그랬어?"

홍예화의 표정이 점점 차갑게 굳어지자, 홍연화가 찔끔해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건 아닌데.... 아씨, 알았다고, 내가 다 떼면 되잖아."

"그래야지. 그리고, 조원 중에 송천혜, 곽지철도 있다면서."

홍예화의 눈에서 이글이글 불꽃이 타올랐다.

"김호한테는 당분간 져도 이해해. 그런데 걔네 둘은 무조건 이겨야지."

김호와는 실력 차이가 꽤 많이 나는 것 같으니 당장 뛰어넘으라는 건 무리한 요구다.

애초에 그것을 위해, 실력을 키우라고 신청한 멘토링 아닌가.

게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소문이 잘 퍼지지는 않는 것 같으니, 급하게 설욕전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송천혜와 곽지철은 얘기가 조금 다르다.

송천혜는 선도부지만 토파즈 마탑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곽지철은 에메랄드 마탑 소속.

같은 마탑회로서 협력하는 관계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경쟁하는 라이벌 관계이기도 하다.

만약 '루비 마탑이 토파즈, 에메랄드보다 아래다'는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면, 홍예화가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홍예화가 거듭 강조했다.

"스티커 세 개, 다 못 떼도 괜찮아. 그런데 무조건 걔네보단 많이 떼. 알았어?"

"나도 알아."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홍연화도 제 언니와 생각이 같았다.

절대로 마탑회한테 만큼은 질 수 없다.

특히 평소에 송천혜와 비교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이기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적을 낼 심산이었다.

홍연화의 눈빛이 불타오르기 시작하자 홍예화는 내심 기꺼워졌다.

김호와 마주치자마자 지레 겁부터 집어먹는 걸 보고 조금 걱정했는데, 아직 투지가 죽지는 않은 것 같다.

"당연히 그래야지. 이제 들어가자."

"어? 들어가자고...?"

문득 누구 얼굴을 다시 보게 될지 떠올린 홍연화.

순간 동공이 좌우로 빠르게 흔들리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그런 홍연화의 손목을 홍예화가 덥석 붙잡았다.

빙긋 웃으면서,

"여기가 부실인데, 어디 가게?"

"아, 아니이, 나 오늘은 그냥 기숙사 가서 쉴까 봐. 몸 상태도 조금 그렇고—"

"빨리 와. 손님 계속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니야."

홍예화가 제 동생을 질질 잡아끌고 부실로 들어섰다.

김호는 아까 앉은 자리 그대로, 같은 모습으로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직전까지 홍연화가 불태우던 투지가 급격히 사그라드는 것이 느껴진다.

홍예화는 동생에게 못마땅함 반, 걱정 반이 섞인 시선을 보내다가, 이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멘토링을 하면서 계속 부대끼다 보면 알아서 극복하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으며.

빠르게 표정을 관리하고 입가에 영업용 미소를 머금는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아닙니다. 저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럼 아까 상의한 대로, 연화 좀 잘 부탁할게."

"예, 선배님."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어조의 홍예화, 점잖고 예의 바른 김호.

평소 봐 왔던 모습들과 심각한 괴리감이 느껴진다.

홍연화는 그저 할말을 잃고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봐야 했다.

88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11)

나는 홍예화와 마주 앉아서 몇 가지 합의를 봤다.

먼저 홍예화의 요구 사항은 이번 주 대인전 한정으로, 스티커를 떼는 역할을 모두 홍연화에게 맡기는 것.

지금 홍연화의 성장세라면 십중팔구 실패로 끝나겠지만, 어려운 역할을 맡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당연히 내 대인전 점수 50점이 덩달아 깎이는 것도 거래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내 요구는 만년한철 합금을 녹이는 것.

부장급인 홍예화, 또는 '특별한 특성'을 가진 화염술사가 손을 써 주길 바랐다.

그런데 이야기를 다 들은 홍예화가 불쑥 자기 동생을 언급한다.

홍연화가 내가 찾는 '특별한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 마음껏 데려다 써.

본인 의사는 아직 물어보지 않았지만, 일단 보호자(?) 동의는 받은 셈이다.

중요한 부분은 이렇게 합의가 끝났고.

약간의 덤으로, 홍연화가 가능한 많이 배우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다.

다소 소유권이 큼지막한 루비의 소유권을 완전히 넘겨주면서.

아무래도 조건이 두루뭉술하고 내 재량에 의존하는 부분이 큰 만큼 거래가 아닌 부탁에 가깝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받은 물건의 가치가 높으니, 값어치만큼은 일할 생각이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들 탓에, 다음날 홍연화와 당규영의 일대일 근접전 수련에는 나도 같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뭘 한 것은 아니고, 원형 투기장 한구석에 멀거니 서서 두 사람의 근접전을 지켜보기만 했다.

정확히는 당규영이 그림자 마법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마구 때리고, 홍연화가 다양하게 투기장 바닥을 굴러다니는 모습을.

"윽."

"큭."

"악!"

한 대라도 피하려고 사력을 다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이내 큼지막한 그림자 손이 홍연화를 붙잡고 힘껏 집어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널브러진 홍연화.

당규영이 또다시 홍연화를 일으켜 세우고 전투를 재개하기 전에, 슬쩍 끼어들며 말문을 열었다.

"선배님."

"응? 왜."

"방법을 조금 바꿔 보면 어떨까요."

"방법을? 어떻게."

"공격도 병행하는 쪽이 스티커 대인전에는 더 잘 맞지 않나 싶습니다."

당규영의 구타 수련법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마구 때려서 잠재력을 끌어내는 수련법은 전통적으로 효과가 좋았고, 나도 은근히 자주 써먹었다.

실제로 홍연화의 근접전 실력이 며칠 전보다 눈에 띄게 늘어났을 정도고.

다만 아쉬운 점을 하나 꼽자면, 실력이 막고 피하는 쪽으로만 빨리 늘어났다는 거다.

이번 주 대인전의 목표가 스티커를 떼는 것인 만큼, 공격도 연습하게 해서 공수의 균형을 적절하게 맞춰 줄 필요가 있다.

"...!"

곁에서 듣던 홍연화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사막 횡단 도중에 오아시스를 발견한 여행자의 표정이 이럴까.

이번 주 내내, 혹은 이번 멘토링 내내 먼지 나게 맞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내가 다른 수련법을 제안했으니 벌써부터 고통이 줄어든 느낌일 거다.

당규영도 곰곰이 생각해 보곤 일리가 있다 싶었는지, 나에게 스티커 한 장을 휙 날렸다.

"그래? 네가 한번 해 봐. 일단 보고."

내가 어떻게 하나 지켜본 다음 할지 말지 정하겠다는 뜻.

나는 마다하지 않고 스티커를 내 팔뚝에 척 붙였다.

당규영도 남을 가르치는 게 능숙하다곤 말하기 어려우니, 처음 한 번쯤은 숙련된 조교로서 시범을 보이는 게 나을 것 같다.

스티커를 가리키며 홍연화에게 말했다.

"와서 떼 봐라. 나는 피하기만 하지."

홍연화의 입장에서 나는 당규영 만큼은 아니라도 쉽지 않은 상대.

따라서 다가오는 걸음걸이가 신중했다.

어느 정도 거리에 이르자 속도를 붙이며 스티커로 손을 쭉 뻗어왔다.

손끝이 닿으려는 찰나, 나는 도둑걸음을 시전하며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났다.

헛손질을 한 홍연화가 다시 성큼 다가서며 손을 뻗었으나, 나는 그럴 줄 예상하고 오히려 마주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서로를 교차하며 지나치게 되었다.

"...!"

당황한 듯 아주 짧은 찰나 그 자리에 멈춘 홍연화.

이내 몸을 홱 돌리더니 빠르게 마법을 영창하며 손가락을 딱 튕긴다.

[컴버스천]

- 펑!

순간적으로 작은 화염 폭발이 일었으나 이미 나는 폭발 범위 밖으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그 짧은 찰나 또 마법 하나를 더 시전했는지 홍연화가 용암 채찍을 휘둘러 왔다.

나는 슬쩍슬쩍 몸을 기울여 가며 피하고, 홍연화는 계속 채찍을 휘두른다.

'실력이 늘기는 늘었어.'

월요일에 당규영을 상대할 때는 용암 채찍으로 스티커를 직접 노렸었다.

채찍의 달인쯤 되면 모를까, 평소에 제대로 쓰지도 않는 스타일의 무기로 까다로운 목표를 노렸으니 상당한 무리수를 뒀던 셈이다.

반면 지금은 내 움직임을 제한하는 견제 용도로만 써먹고, 스티커는 직접 떼려는 모습.

더 효율이 좋은 방법을 찾았다는 점에서 칭찬할 만하다.

'그래도 아직 멀었지.'

중-근거리 경험치는 나름 쌓인 것 같지만, 아직 스티커를 떼려면 한참 더 연습해야 하니까.

홍연화는 계속 견제를 이어 가며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다시 손을 뻗어 왔다.

나는 닿을 듯 말듯 여지를 주다가, 또 손끝이 닿기 직전 빙글 몸을 돌려 범위를 벗어났다.

"큭...!"

약이 오르는지 더욱 격하게 용암 채찍을 휘둘러 대는 홍연화.

중간중간 작은 화염 마법까지 곁들인다.

- 펑! 퍼펑!

홍연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견제하면서 접근하고 스티커를 노리고, 나는 모든 공격을 다 피하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규영이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오...."

"저건 나도 한 수 배웠다."

"저걸 저렇게 피해?"

처음에는 애들 투닥거리는 거 구경할 겸, 잠시 휴식도 취할 겸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내가 하는 양을 보고 깨닫는 바가 있었는지 지금은 진지한 눈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새기고 있었다.

사실 내가 홍연화에게 '나는 피하기만 한다'고 못을 박아 놓고 시작해서 그렇지, 멘토가 꼭 다 피할 필요는 없다.

당규영이라면 방어와 회피를 적절히 섞는 쪽으로 알아서 방법을 떠올릴 것이다.

그 방법이 잘 통하는지는 다음 차례인 송천혜나 곽지철이 몸소 겪게 될 테고.

* * *

오늘치 멘토링이 끝나고 아레나 밖으로 나왔을 때,

홍연화는 반쯤 영혼이 빠져나간 모습이었다.

스티커는 그렇다 쳐도 견제용으로 넣는 화염 마법 몇 번은 적중시킬 줄 알았는데, 끝까지 나를 건드리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내 실력이 겨우 이 정도였나 하는 자괴감에 휩싸인 듯하다.

한편으로는 나를 보는 시선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예전에는 마법이 '무언가'에 막혀서 안 들어갔다면, 방금 전 일대일 대련을 통해 한 가지를 더 깨달은 것이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아예 안 맞는 것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표정을 보건대 속마음을 짐작해 보자면,

'저런 괴물 같은 인간....'

이래저래 내 근처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보인다.

슬쩍 눈알을 굴려 내 눈치를 살피더니,

"그럼 난 가 볼... 게?"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그냥 도망가게 놔둘 순 없지.

나는 아직 볼일이 남았거든.

"홍연화."

제 이름이 불리자, 홍연화의 움직임이 누가 뒷덜미를 콱 잡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우뚝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왜, 왜, 나...?"

"같이 어디 좀 가자."

"같이? 어디...?"

벌써부터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 간다.

내 목적지가 차마 못 갈 곳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턱대고 끌고 가려고 하면 도망갈 것 같으니, 약간의 설명과 동기부여를 해 줄 필요가 느껴진다.

"[아쿠아플레임]을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언니한테 들었어?"

만년한철 합금을 녹이고자 홍예화에게 요구했던 특성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쿠아플레임.

화염술사들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 중의 극소수에게만 발현되는 특성이다.

루비 마탑의 명문가인 홍 씨 가문에서조차 드물게 계승될 정도다.

이 특성을 보유한 화염술사는 모든 물, 얼음 속성에 대해 압도적인 상성 우위를 갖게 된다.

심해 깊은 곳에서 불꽃을 피워 올리는 것이 가능해지며, 상대방의 수 속성 방어 수단을 무시하고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거기에 랭크가 일정 이상으로 올라가면 수 속성 외의 방어 수단에도 얼마간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막강한 특성이다.

홍연화가 마탑회에서 유망주 타이틀을 받은 데에는 이 특성의 영향이 제법 컸다고 한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E랭크에서 성장이 멈췄다면서."

"...그것도 들었구나."

홍연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부끄러운 사실을 가르쳐 준 언니에 대한 짜증도 조금 엿보였다.

아쿠아플레임처럼 강력한 특성은 흔치 않다.

그러나 이토록 강력한 특성도 랭크가 낮으면 무용지물.

전해 듣기로 홍연화의 아쿠아플레임은 오래전부터 E랭크에 정체된 상태란다.

뚫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봤지만, 차도가 없어서 지금은 반쯤 포기했다고.

나로서는 딱 좋은 상황이었다.

"D랭크를 뚫을 방법이 있다면?"

"뭐? 정말?"

"그래."

홍연화가 가까이 달라붙어서 마구 질문을 쏟아부었다.

"진짜 뚫을 수 있어? 아쿠아플레임? 다른 특성 아니고? 어떻게?"

얼마나 흥분했으면 상대가 나라는 것도 잊었나 보다.

오랫동안 갈망하고 찾아 헤매던 해답을 얻을 수 있다니 흥분될 만도 하지.

그래도 설명은 조금 진정된 뒤에 하는 게 나아 보였다.

잠시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바라보자, 정신이 번쩍 든 홍연화가 후다닥 몇 걸음 물러났다.

어느 정도 이성이 돌아온 것 같았기에 다시 말문을 열었다.

"기본적으로, 스킬과 특성의 랭크는 시스템이 세워 놓은 벽을 넘을 때마다 상승해. 이건 너도 알고 있을 거다."

"응, 상식이니까."

"그리고 스킬이 가지는 고유한 성질에 따라 넘어야 하는 벽의 종류가 달라지지. 이것도 알 거고."

"응, 그것도 알아."

[괴력]을 예로 들면.

근력을 대폭 강화시켜 주는 특성이니 넘어야 하는 벽은 '현재 랭크로도 옮기기 버거운, 더욱 무거운 대상을 옮기는 것'이 되겠다.

같은 맥락으로, 수 속성 및 빙 속성에 대한 강한 관통력을 가진 [아쿠아플레임]이 세운 벽을 넘어서려면 당연히,

"화염 마법으로 강한 냉기를 머금은 대상을 열심히 불태우면 되는데.... 그렇게 하다가 E랭크에서 막혔겠지."

"...맞아."

홍연화가 그 방법을 시도해 보지 않았겠는가.

나름대로 열심히 해 봤지만 안 된 것이다.

다른 벽을 넘어야 하나 싶어서 여러 방면으로도 시도를 해 봤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 방법이 잘못된 게 아니야. 다른 벽을 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래?"

반신반의하는 홍연화.

내 어조가 확신에 가득 차 있으니 맞는 말처럼 들리기는 하는데, 여태까지 그게 안 돼서 E랭크였던 것 아닌가.

내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방향을 제대로 잡았는데 성과가 없다면 원인은 둘 중 하나다. 질이 부족하거나, 양이 부족하거나."

아쿠아플레임에 빗대 이야기한다면, 태우는 대상의 수준이 너무 떨어졌거나, 혹은 랭크가 오를 정도로 충분한 양을 태우지 않았거나.

"...."

홍연화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한 말과 자신의 기억을 대조해 보는 듯했다.

그런 홍연화에게 물었다.

"랭크작 할 때 뭐 썼나 말해 봐."

"아이스 골렘이랑, 빙정이랑, 또...."

몇 가지 빙 속성 몬스터나 재료 등이 언급되었다.

가문의 힘을 빌려 구했을 테니 수준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그걸 써도 수련 시간이 얼마 안 됐겠지."

"맞아."

아쿠아플레임 앞에서는 모두 한순간에 녹아서 사라져 버리는 것들이다.

수련 시간을 오래 가져가려야 가져갈 수가 없다.

빙 속성 재료를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무한정 쏟아부을 수도 없는 노릇.

당시에는 그게 통한다는 확신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내가 던질 제안은 홍연화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강한 냉기를 가지면서도 쉽게 녹지 않는 아이템이 있다면?"

"...!"

반드시 아쿠아플레임을 성장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게 진짜 있어?"

홍연화가 되물었으나, 나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홍연화가 무언가에 홀린 듯 나를 졸졸 따라왔다.

89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12)

홍연화를 뒤에 꼬리처럼 붙이고 계속 걸었다.

대장장이 공방에 도착할 때까지.

"!"

순간 홍연화의 머리 위에 느낌표가 떠오른 것 같았다.

내가 말한 특수한 재료가 무엇인지 슬슬 감이 오나 보다.

공방에 왔으니 매우 높은 확률로 금속이지.

다만 냉기를 지닌 금속이 무엇인지는 조금 긴가민가한 눈치다.

곧바로 대장장이 부장을 찾았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바쁘게 일하는 중이었는데, 내 의뢰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던 동안에도 다른 아이템은 계속 제작해야 해서 그렇다.

기별이 닿자 잠시 작업을 멈추고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대뜸 나에게 물었다.

"준비해 왔나?"

앞뒤를 다 자른 질문이지만, 우리 사이에 공통된 관심사가 하나뿐이다 보니 생략된 문장은 뻔하다.

만년한철 주괴를 녹일 방법을 준비해 왔나 묻는 거다.

대답 대신 홍연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따라서 부장의 시선도 움직였다.

"홍연화."

"안녕하세요...."

반응을 보아하니 서로 아는 사이 같다.

대장장이와 불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만큼 루비 마탑과도 제법 교류가 활발하니, 오며 가며 마주칠 일도 종종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홍연화로서는 썩 마음이 편한 상대는 아니었는지 태도가 조금 어색한 편이었다.

대장장이 부장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홍연화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네가 염두에 두었다던 해결책인가?"

"그렇습니다."

확답하자 실망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공연한 짓을 했군. 화염술사의 도움은 벌써 받아 봤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화염술사 몇몇을 불러다 화력을 퍼부어 봤겠지.

그러나 부장급이나 아쿠아플레임 급의 특성이 아니면 녹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니,

"그분들도 실패했겠지요."

"그걸 알면서도 홍연화를 데려왔나?"

"예, 한번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부장의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또 홍연화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홍연화라고 뭐가 다른가?

아무리 1학년 유망주라곤 해도, 이전에 그가 도움을 요청해 봤을 2, 3학년 화염술사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점이 있나? 하는 의문이 담겨 있다.

그러나 내 바람대로, 한번 시켜 봐서 손해 볼 것은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듯했다.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만에 하나 성공하면 그것대로 좋고.

이내 검은 광택을 뿌리는 주괴를 꺼내서 턱 올려놓는다.

"좋다. 해 봐라."

홍연화 역시 곁에서 대화를 들으며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눈앞의 주괴가 만년한철 합금이라는 것은 몰라도, 내가 말한 특별한 재료라는 것쯤은 곧바로 알아챘을 거다.

한눈에 봐도 고등급 금속인데다, 후끈한 공방 내에서 서늘함이 느껴질 정도의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대장장이 부장이 이 주괴를 녹이기를 원한다는 것도 대화에서 유추했을 터.

어떤 면에서는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아쿠아플레임의 랭크를 올릴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 보인다.

홍연화가 나에게 허락을 구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워 봐."

즉시 마법을 영창하는 홍연화.

만년한철 합금 밑에 둥그런 마법진이 떠오르고 기하학적인 문자들이 새겨진다.

예전에도 몇 번 썼었던 [파이어 필라]다.

공방을 불바다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법진의 크기를 일부러 조그맣게 만들었지만, 범위를 작은 공간으로 한정한 만큼 위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곧 홍연화가 마법을 완성하자,

- 화르르륵!

마법진에서 작지만 선명한 불기둥이 피어올랐다.

모두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기둥 속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

이만큼이나 강력한 화염 속에서도 만년한철 합금은 여전히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화염이 일부러 저곳만 피해 가려는 것처럼 갈라지는 모양새.

그러자 홍연화가 진지한 표정으로 빠르게 마법을 중첩했다.

[파이어 필라] 마법진 둘레에 원 하나가 더 그려지고,

- 화르르륵!

불길이 한층 더 격렬하게 치솟았다.

홍연화가 완드를 저으며 그 불길을 제어하고 주괴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드디어 조금씩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만년한철 합금의 표면부터 화기가 조금씩 침식해 들어간다.

"...!"

대장장이 동아리 부장이 눈에 이채를 머금었다.

마법을 유지하는 홍연화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한테 말한다.

"네 말대로 되는 것 같군. 다만 너무 더디다. 가공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

"조금 더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시작이니 말입니다."

진행 속도가 더딘 이유는 아직 홍연화의 아쿠아플레임이 E랭크밖에 안 돼서다.

랭크가 올라갈수록 주괴를 녹이는 속도도 가속될 것이다.

만년한철 합금의 가공 난이도는 A랭크 안팎이지만, 아쿠아플레임의 위력을 생각하면 C랭크 정도만 찍어도 어렵지 않게 녹여 버릴 수 있으리라.

일단 소기의 성과를 거뒀기에 대장장이 부장은 내 말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지."

짧게 답하곤 하던 작업을 재개하러 떠나 버렸다.

나 역시 굳이 이곳에 남아서 시간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홍연화에게 말했다.

"나도 간다."

"어? 가게?"

조금 당황한 눈치로 되묻는다.

홍연화의 말에서 빠진 부분들을 채워 보면,

'나만 여기 이렇게 놔두고 너 혼자 어디 가는데?'일 거다.

나는 어려울 것 없다는 투로 답했다.

"원하면 계속 있고."

홍연화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나 혼자 해도 돼. 내 특성 키우는 건데. 가서 쉬어! 응!"

내가 부담스럽게 옆에서 지켜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혼자 남는 게 백배는 낫다는 생각이리라.

나는 두 번 묻지 않고 홀가분한 걸음으로 공방을 나섰다.

홍연화는 희귀한 재료로 특성을 성장시킬 기회를 얻어서 좋고,

대장장이 부장은 일시적으로 중단됐던 아이템 제작을 재개할 수 있으니 좋고,

나는 부장이 무기 제작에 더해 자그마한 보너스까지 만들어 주니 좋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윈윈 전략이었다.

* * *

금요일에도, 토요일에도 멘토링은 계속 이어졌다.

당규영에게 공격과 방어 수련을 병행하도록 요령을 가르쳐 주었기에 수련에는 참여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한 주가 거의 끝나가니, 수련이 끝날 무렵마다 홍연화와 스티커 대인전에 한 번씩 도전해 보았다.

어림도 없는 것은 여전해도 세 번이나 남은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리기는 아깝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시도는 해 보는 게 낫다.

지금 수준으로 작전을 짜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서 홍연화에게는 딱 한 마디만 했다.

"들어가 봐."

홍연화가 최대한 자유롭게 하게 두고, 내가 거기에 맞춰 서포트를 하는 방식으로.

[윈드포스]

- 후웅!

순간적으로 강풍이 불며 홍연화와 당규영 사이를 갈라놓았다.

당규영이 휘두른 사람 몸통만 한 그림자 방망이가 헛스윙으로 끝났다.

홍연화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서 재정비를 하고, 손에 든 짧은 완드가 붉은빛을 뿜는다.

- 퍼퍼퍼펑!

연쇄적인 화염 폭발이 당규영의 위치를 뒤덮는다.

그렇게 피어오른 커다란 불길 속으로 주저 없이 뛰어드는 홍연화.

불길 속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춤을 추듯 일렁거린다.

나와 처음 보조를 맞춰 본 금요일에는 윈드포스로 구해 줄 때마다 멈칫거렸고, 그 탓에 좋은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반면 지금은 제법 내 방식에 적응해서, 구해 줄 때마다 즉각 즉각 반응하고 기회를 살리려 든다.

- 후웅—!

계속해서 이리저리 불어 대는 강풍에 당규영의 움직임이 고장난 장난감 인형처럼 뚝뚝 끊겼다.

내 쪽으로 얄미워 죽겠다는 눈빛을 보내지만 당장은 바로 앞에서 달려드는 홍연화가 우선순위.

가볍게 손을 휘젓자 그림자 손발 여럿이 솟아오르며 덮쳐 온다.

홍연화는 물러나지 않고 침착한 태도로 대응했다.

근거리에서 화염 마법을 뿜어내거나 손에 마나를 담아 후려친다.

그렇게 그림자 손발을 걷어 낸 다음 적극적으로 치고 들어가 스티커를 떼려 드는 홍연화.

그리고 능숙하게 반격하는 당규영.

나는 접전이 일어나는 곳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지켜보다가, 또 위험하다 싶은 순간에 윈드포스를 시전했다.

- 펑!

당규영과 홍연화 사이에서 압축된 공기가 폭발했다.

충격을 완화하는 쿠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둘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밀쳐 낸다.

그리고 붕 떠 있는 홍연화를 더욱 내 쪽으로 끌어왔다.

별다른 상처 없이 바닥에 사뿐 내려앉았지만, 방금까지와 달리 바로 달려들지 않는 홍연화.

숨소리가 고르지 못하고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진 걸 보니 체력이 다한 듯하다.

'여기까지군.'

이쯤 되면 억지로 더 대인전을 진행해 봐야 아무 성과가 없을 거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 손끝이 스티커에 살짝 스치는 것을 봤으니, 내일은 조금 기대해 봐도 좋을 듯했다.

당규영 역시 금방 홍연화의 상태를 파악하곤 오늘치 멘토링을 마무리 지었다.

"여기까지. 수고했어."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홍연화가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려면 아직 멀었다.

아쿠아플레임 수련은 별개니까.

다음 행선지는 대장장이 공방이었다.

"오늘도 잘 부탁하지."

"...."

홍연화가 내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답한 뒤,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원형 투기장 밖으로 사라졌다.

단둘이 되자 당규영이 즉시 '근엄한 선배 멘토 모드'를 해제하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투덜거렸다.

"야, 나 그 스킬 마음에 안 들어."

"선배님, 이거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윈드포스는 태생부터 남에게 미움을 사기 딱 좋은 스킬이다.

강제이동 계열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타의에 의해 밀쳐지고 당겨지는데 사람이라면 열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다.

그것이 전투 중의 중요한 순간이라면 열 받음이 두 배일 테고.

"그러니까 다른 스킬 좀 쓰면 안 되겠니?"

"저도 그러고 싶은데, 제대로 된 게 이거밖에 없거든요."

당장은 쓸 만한 스킬이 정말로 윈드포스밖에 없다.

다른 스킬을 복사해 와도 되지만, 도둑걸음과 오버히트는 워낙 잘 써먹는 중이라 보내기 아깝고.

"아이, 솔직히 딴 스킬 있잖아. 진짜로."

"솔직히 딴 스킬 없습니다. 진짜로요."

물론 당규영은 내 말을 요만큼도 안 믿는 표정이었다.

일부러 다른 스킬들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잠시 입술을 삐죽거리며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부질없다 싶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화제를 전환했다.

"맞다, 어제부터 궁금했는데 못 물어봤네. 갑자기 홍연화는 왜 도와줘?"

"저쪽이랑 주고받은 게 있어서요."

"저쪽이면 루비 마탑? 홍예화?"

"예."

"아항."

당규영은 대충 알 만하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쟤가 스티커 떼는 거구나? 나는 쟤 보조시키고 네가 할 줄 알았는데, 반대라서 뭔가 했지."

"그렇게 됐습니다."

"근데 이건 네가 안 하면 3개가 아니라 1개도 어려워 보이던데. 점수 깎여도 돼?"

"예, 크게 신경 안 써요."

"그래? 너는 홍예화한테 뭐 받는데?

"그건 말씀 못 드리죠."

"칫."

당규영이 짧게 혀를 찼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캐내려 시도하던 것 같지만 쉽게 안 가르쳐 주는 정보도 있는 법이다.

그래도 도둑 동아리 부장의 정보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내지 않을까?

"송천혜랑 곽지철은 좀 어때요."

"홍연화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어. 너 빼곤 다 고만고만해."

그 둘도 고전하나 보다.

홍연화에게 스티커 떼는 역할을 넘기면서 송천혜와의 소원권 내기에서 질 가능성이 조금 생겼는데, 당규영에게 듣는 대로라면 여전히 승산은 내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걔네는 걔네고, 이제 우리도 우리 거 하자. 나 빨리 끝내고 쉴래."

몸이 찌뿌둥한 듯 당규영이 쭉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C랭크 제한 팔찌를 벗어던지자 발밑의 그림자가 격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스티커 대인전과 별개로, 당규영과 나의 일대일 대련도 계속 이어진다.

내가 [왜곡]을 익힐 때까지.

90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13)

- 화르르륵!

홍연화의 눈앞에 작은 불기둥이 활활 타올랐다.

불기둥 안에는 검은 광택을 뿌리는 주괴가 겉 부분부터 아주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홍연화의 시선이 하릴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뚱한 표정, 팔짱을 낀 두 팔, 탁탁 바닥을 두들기는 한쪽 발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랭크. 왜. 안 올라.'

김호의 제안에 넘어가, 대장장이 공방에서 만년한철 합금을 녹이기 시작한 지 3일째.

[아쿠아플레임]의 랭크는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E급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물론 홍연화도 스킬 랭크업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 정도야 알고 있었다.

그게 됐으면 온 세상이 S급 영웅들로 가득했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대치라는 게 있다.

E급이면 F 바로 아래, 사실상 초기 단계 아닌가.

성장 속도가 빨라야 정상이다.

또한 홍연화가 과거에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였던 것까지 포함하면, 길어야 하루 이틀 중으로 랭크업을 하리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3일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으니.

슬슬 조바심과 함께 부정적인 생각이 고개를 치켜든다.

'나 속은 거 아냐?'

사실 특성 랭크업을 시켜 주겠다는 건 거짓말이었다면?

단순히 화염 마법을 써 주길 바란 거라면?

처음부터 자신을 휴대용 용광로로 써먹을 속셈이었다면?

이래 놓고 김호 본인은 어디 다른 데서 편히 쉬는 중이라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홍연화는 엄청난 허무함을 느꼈다.

안 그래도 요즘 멘토링 때문에 휴식 시간이 줄어들었는데, 그렇게 줄어든 휴식 시간마저 이렇게 대장간 한구석에서 보내고 있다.

오직 특성을 키워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고 있었던 건데,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자 급격히 의욕이 떨어져 갔다.

'그냥 때려 칠까?'

홍연화가 처음부터 하나하나 따져 보았다.

김호는 자신과 따로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그저 갑자기 '특성을 성장시킬 방법을 알려 주겠다'며 저를 멋대로 데려다 썼을 뿐이다.

거기에 혹해서 쫄래쫄래 따라온 자기 잘못도 없잖아 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한다는데, 뭐라 하겠어.'

그러나 순간 김호의 싸늘한 얼굴이 스쳐 지나가자, 홍연화가 오한에 몸을 떨었다.

여태까지 이곳저곳에서 마주치며 봤던 모습들.

자신의 화염 마법을 간단히 뚫고 들어오고, 백준석을 휙 바닥에 던져 버리고, 쌍둥이 트롤의 손도끼를 가볍게 잡아채서 날리고....

그런데 내가 안 한다고 하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홍연화가 빠르게 고개를 붕붕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래, 관두자.'

더욱 굳게 결심을 다진다.

그리고 막 불기둥을 거둬들이려는 순간.

홍연화의 시야 한 켠에 알림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아쿠아플레임'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E->D)]

"어...?"

홍연화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지, 진짜 되네...?'

곧 정지했던 사고가 다시 회전하며 오만가지 감정들이 홍연화의 머리를 지배했다.

여태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못 뚫던 아쿠아플레임의 벽을 드디어 뚫었다는 감격스러움과 홀가분함.

이 방법대로라면 D급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과 기대감.

그리고 김호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흠, 흠."

고마움 뒤에는 부끄러움이 뒤따라와서, 홍연화는 저 혼자 헛기침을 해 댔다.

김호는 순수하게 도와주려는 의도에서 방법을 알려 주고, 심지어는 귀중한 재료를 쓰도록 기회까지 주었는데, 자신은 섣불리 그를 판단하고 의심했으니.

'하긴, 조금 무섭기는 해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으니까.'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더 협조적으로 대해야겠다고 다짐하는 홍연화였다.

파이어 필라를 시전하는 손짓에 의욕이 넘쳤다.

한층 선명해진 불꽃이 빠르게 주괴를 녹여 갔다.

- 화르르르륵!

* * *

일요일.

홍연화는 스티커 대인전에 마지막으로 도전하기 위해, 약속된 시간에 아레나에 도착했다.

경기장 근처로 다가가니 김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대뜸 한마디 한다.

"랭크 올렸네."

"어떻게 알았어!?"

홍연화가 흠칫 놀라서 되물었다.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는데?

공방에 수정구라도 설치해 놨나?

김호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답했다.

"표정에 다 드러나."

'표정에?'

홍연화는 빙글 등을 돌리고 손거울을 꺼내 제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그리고 눈썹을 조금 찡그렸다.

'...그냥 똑같은데.'

평소와 다른 점을 모르겠다.

물론 모르는 것은 홍연화 본인뿐이었고, 주변 사람들은 진작에 달라진 점을 눈치챈 뒤였다.

한 주 내내 죽을상을 하고 다니던 그녀가 어제부터 내내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채 실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지 않고서야 이런 급격한 변화를 보일 리가 없다.

특히 김호는 이번 주 그녀의 행적을 거의 파악하고 있던 터라, 그 '좋은 일'이 특성 랭크업이라는 것을 곧바로 눈치챈 것이고.

"C급에 오르면 주괴가 다 녹을 거다."

"그래?"

그 말에 홍연화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대장장이 동아리 부장에게 넌지시 물어 주괴의 정체가 무려 만년한철과 블랙 미스릴의 합금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참이었다.

특성을 성장시킬 방법을 알게 되었다 한들, 그런 고등급 금속을 다룰 기회가 흔히 오지는 않을 터.

주괴가 다 녹으면 당분간 다시 성장이 멈춘다는 뜻이다.

'그래도 C급이 어디야.'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D급조차 못 뚫고 있었는데.

욕심을 부린다고 기회가 더 주어지는 것도 아니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 나으리라.

"...."

김호는 거기서 대화를 끊고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홍연화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막으로 뒤덮여 있어 벽이나 다름없었지만,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좋은 기회였다.

곧 홍연화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들보다 한발 앞서 대인전을 치르고 있을 송천혜, 곽지철 페어였다.

'걔네는 몇 개나 뗄까 모르겠네.'

당규영과의 근접전 대련은 각자 시간을 정해 한 명씩 진행했기에 조원들끼리 마주칠 일이 적었다.

때문에 송천혜와 곽지철의 실력이 한 주간 얼마나 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홍연화의 짐작으로는 자신보다 더 급격히 늘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 개, 아니면 두 개?'

"크억!"

그 순간, 곽지철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밖으로 튕겨 나왔다.

경기장에 설치된 안전장치가 전투 불능 판정을 내리고 쫓아낸 것이다.

홍연화는 그 꼴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쟤는 월요일이랑 달라진 게 없네.'

한 주 동안 그 지옥 같은 일대일 대련을 겪었다면 맷집이라도 더 늘어야 하는데, 퉁겨나온 시간대를 가늠해 보면 첫날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발전을 하기는 한 걸까?

반면 송천혜가 마법진을 타고 걸어 나온 것은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월요일에 곽지철이 리타이어하고 곧바로 뒤따라 나왔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에는 혼자 남아서도 꽤 오래 버틴 셈이다.

"...."

송천혜는 바닥에 널브러져서 신음하는 곽지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팀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 못하고 일찌감치 리타이어 해 버렸으니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그렇게 지나치다가 홍연화와 눈이 마주치자 짧은 시간 싸늘한 시선을 교환했으나, 둘은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천혜가 그대로 김호도 지나치려는 찰나,

"송천혜."

"무슨 일이시죠."

"얘기 좀 하지."

송천혜가 승낙하는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두 사람이 인적이 뜸한 관중석 한 켠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홍연화가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둘이 무슨 사이야?'

저 조합은 상당히 의외였기 때문이다.

홍연화가 아는 것이라곤 배치 고사 당시 김호가 송천혜와의 대결을 피했다는 것뿐이다.

그대로 붙었으면 분명 김호가 이겼을 걸 왜 기권했는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었다.

둘 사이의 접점은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저렇게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홍연화는 곁눈질로 두 사람을 계속 바라보았다.

- ...!

- ...!

마나로 청각을 강화해도 들리지 않을 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었기에 대화 내용은 엿들을 수 없었으나, 서로를 대하는 태도나 표정 등으로 관계 정도는 추측해 볼 만했다.

'별로 친하지는 않은 거 같네.'

방금 김호가 말을 걸었을 때도 마지못해 가는 태도였고, 대화 중인 지금도 송천혜의 얼굴이 계속 차갑게 굳어 있으니 말이다.

또 하나는 대화에서 주도권을 가져가는 쪽이 김호라는 점이다.

김호가 느긋하게 한 마디씩 툭툭 던질 때마다 송천혜가 그에 반응해 쏘아붙이거나 부들부들 떤다.

하기야 저 괴물 같은 인간이 누구한테 쩔쩔매는 꼴은 상상이 안 가기는 했다.

3학년 선배들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는 것 같고.

그러다가 송천혜가 갑자기 홍연화 쪽을 가리켰다.

홍연화는 뜨끔해서 시선을 피하며 생각했다.

'내 얘기해?'

대체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길래 자신이 언급되는 걸까?

궁금증이 두 배로 증폭된다.

몰래 다가가서 조금이라도 엿들어 볼까 고민하던 차에 대화가 끝나고, 송천혜는 찬바람이 쌩쌩 불도록 팩 고개를 돌리더니 관중석에 가서 앉았다.

'아, 진짜 궁금한데....'

지나가는 것처럼 슬쩍 물어볼까?

내 얘기 같으니까 물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을 거듭하는 홍연화였지만, 상대가 김호다 보니 좀처럼 엄두가 안 났다.

그런데 웬일로 김호가 먼저 다가오면서 말문을 연다.

"저쪽은 스티커 몇 개인가 물어봤다."

방금 전 송천혜가 자신을 가리키며 뭐라 했던 것이 스티커 대인전과 관련된 것이었나 보다.

홍연화 역시 몹시 궁금하던 부분이었는데 이렇게 말해 주면 고마울 따름이다.

"뭐래? 몇 개?"

"한 개도 못 뗐다는군."

도전 횟수 세 번을 다 쓰고도 스티커 한 개를 못 뗐다고?

정말 이번 주 대인전은 어지간히도 어려운 것 같다.

이미 몇 번이나 생각한 거지만 갑자기 마법사에게 근접전을 시키는 것부터가 엄청나게 어려운 요구였다.

그러나 어쩌랴, 탓하려면 올라운더형 마법사로 진로를 정해 버린 자신을 탓해야지.

아무튼 송천혜와 곽지철이 0개로 이번 주를 마무리했으니, 그렇다는 말했다는 건 곧,

'한 개. 어떻게든 한 개만 떼면.'

저들보다 우위에 선다는 뜻이다.

홍연화의 심장 박동이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빨라졌다.

세 개는 몰라도 하나라면.

하지만.... 해낼 수 있을까?

고작 하나조차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야, 해내야만 해.'

홍연화가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옆으로 시선을 보내자 김호가 고개를 살짝 까딱여 답했다.

그리고 함께 순간이동 마법진에 발을 올렸다.

원형 투기장에 들어서니 당규영이 언제나와 같은 자리에 여유롭게 서 있었다.

언뜻 무방비하게 느껴질 만큼 편한 자세로.

그러나 홍연화는 이미 수도 없이 겪어서 알고 있었다.

막상 전투에 돌입하면 저 무방비한 모습에서 조금의 빈틈도 찾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바로 곁에 하나 더.

다행히도 이번 주는 그 사람과 같은 편이다.

때마침 자신과 시선을 맞춘 김호가 짧게 한마디 했다.

"어제랑 똑같이."

하고 싶은 대로, 네 모든 것을 펼쳐 봐라.

내가 거기에 맞춰 서포트할 테니까.

그 말에 홍연화는 묘한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다.

평소에는 근처에만 와도 자신을 위축시키는 김호지만, 강적을 앞에 두고 함께 선 이 순간만큼은 그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있어.'

홍연화가 한쪽 손에 든 완드를 가볍게 젓자, 발밑에 둥그런 마법진이 새겨졌다.

곧이어 발현된 마법은 남김없이 홍연화의 전신에 흡수되었다.

[파이어 필라]

[오버히트]

- 화르르륵!

홍연화의 전신이 선명한 불꽃으로 뒤덮였다.

91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