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5주 차 멘토링, 대인전 (14)
파이어 필라는 홍연화가 배운 수많은 화염 마법 중에서도 꽤 강력한 축에 속한다.
그만큼 오버히트로 흡수했을 때의 육체 능력 증가 폭도 제법 높은 편이었다.
물론 육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아직 준비가 더 필요했다.
홍연화가 연이어 주문을 외우자 한 손에 든 완드에서 주르륵 용암이 흘러내려 채찍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반대쪽 손에는 커다란 화염 구체가 생성되고 있었다.
[라바 윕]
[플레임 오브]
- 화르르륵,
마지막으로 활활 타오르는 화염구에 한 가지 술식을 가미한 후, 그것을 당규영에게 힘껏 집어던졌다.
"...."
당규영은 사람 몸집보다 더 커다란 불덩이가 날아오는데도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플레임 오브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즈음, 발밑에서 가늘고 기다란 그림자 장검을 한 자루 쓱 뽑아냈다.
장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후 가볍게 내려 긋자 구체가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지고,
- 퍼퍼퍼펑!
당규영의 양옆에서 강렬한 화염 폭발이 일며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홍연화가 플레임 오브에 슬쩍 가미한 술식, [아웃버스트]의 효과였다.
화염구로 당규영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니, 최대한 넓은 범위를 화염으로 뒤덮어 놓고 시작하겠다는 의도.
홍연화가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당규영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마련이고, 그만큼 그림자를 제어하기도 어려워진다.
밑 작업을 해 둔 셈이다.
당규영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어떤 면에서는 정답에 근접해 가는 후배에 대한 기꺼움 같은 것도 엿보였다.
옅게 웃으며 물음을 던지자,
"이제 들어올 거지?"
"갈게요."
홍연화가 짤막한 대답과 함께 첫발을 내디뎠다.
땅을 강하게 걷어차며 앞으로 쏘아져 나간다.
- 팟! 팟!
당규영과의 거리가 훅훅 좁혀 들어 금세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동시에 서로에게 용암 채찍과 그림자 장검을 휘두르고, 장도에 채찍이 얽혀 들며 상쇄된다.
홍연화가 손을 쭉 뻗자 당규영도 마주 손을 뻗으며 손목을 잡아채려 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홍연화의 노림수.
손과 손이 닿기 전에, 용암 채찍이 당규영의 손목에 감겨들고 팽팽하게 당겨진다.
재차 스티커를 향해 손을 뻗는 홍연화.
그러나 다음 순간 강렬한 위화감을 느낀다.
'...?'
전투는 이제 시작인데 이상하리만치 일이 쉽게 풀린다는 위화감을.
홍연화는 그 위화감을 믿고 즉시 모든 것을 회수하며 멀찍이 물러났다.
- 펑!
간발의 차이로 까만 나비가 폭발하며, 그림자 한 뭉텅이가 홍연화가 방금까지 있던 곳을 옭아맸다.
일부러 허점을 보이는 척하면서 은밀하게 접근시켰던 나비였다.
계속 몰아붙였으면 자칫 크게 손해를 볼 뻔했다.
[영접비행]
홍연화를 쫓아 팔랑거리며 날아드는 그림자 나비 세 마리.
작지만 온갖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라, 다시 근접전에 들어가기 전에 요격해 둘 필요가 있다.
'침착하게, 한 마리씩.'
가장 앞서 날아오는 영접에 용암 채찍이 휘둘러졌으나, 유려한 움직임으로 피해 냈다.
즉시 채찍을 회수해 다시 휘두르자 영접이 불타며 흩어진다.
그사이 두 번째, 세 번째 영접은 더욱 가까이 접근한 상태.
홍연화가 그것들을 피해 빠르게 발을 놀리며 다음 주문을 시전했다.
- 휘잉—
그런데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두 번째 영접이 저 혼자 허공에서 부르르 떨곤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저건....'
김호가 항상 쓰는 정체불명의 바람 마법이 분명하다.
대인전 시작 전에 얘기했던 대로, 홍연화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서포트하는 것이다.
'좋았어.'
이렇게 되면 부담이 훨씬 줄었다.
원래는 두 번째 영접에게 쓰려고 준비했던 마법을 마지막 한 마리에게 발현한다.
- 콰아아아—!
전방으로 화염이 뿜어져 나가며 그림자 나비를 집어삼켰다.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걷어 냈으니 다시 원래 목표로 돌아갈 차례.
홍연화가 완드로 당규영을 가리키자, 점차 사그라들어가던 불꽃이 다시 맹렬하게 치솟아 올랐다.
그럼에도 당규영은 여전히 불길 속에 여유롭게 서서 미소 지을 뿐이다.
"좋네. 계속 들어와."
- 팟!
다시 홍연화가 파고들며 근접전이 재개되었다.
용암 채찍으로 보조하며 반대쪽 손을 휘둘러 당규영을 공격하고, 중간중간 스티커를 노린다.
당규영은 날아오는 공격들을 아주 능숙하게 막고, 스티커를 노리는 손은 탁탁 쳐냈다.
그때,
— 휘잉—
한 줄기 바람이 당규영을 감싸듯 스쳐 지나갔다.
바람에 담긴 물리력 탓에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뚝뚝 끊긴다.
당규영의 짜증 섞인 시선이 잠시 홍연화의 어깨 너머, 김호가 있는 곳을 향했다.
'저거 또 시작이네.'
3학년이 되도록 수많은 적과 스킬들을 겪어 봤지만, 귀찮고 성가시기로는 저 바람 마법이 한 손에 꼽혔다.
대체 저런 건 어디서 배워 온 거지?
반면 홍연화의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당규영이 귀찮고 성가시게 느낄수록 신경이 분산되고, 허점이 노출될 테니까.
잽싸게 파고들어 공세를 이어 간다.
"칫."
당규영이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대인전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3학년의 저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불쑥 솟아오른 그림자 손발과 보조를 맞추며 홍연화의 공격들을 하나하나 침착하게 막아 냈다.
근접한 상태에서 계속 공방이 오가자 기세가 다시 당규영 쪽으로 빠르게 넘어온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그림자 주먹이 홍연화를 힘껏 후려치려는 순간,
- 펑!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 주먹이 목표를 한참이나 빗나갔다.
이번에도 김호가 절묘하게 개입한 것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계속 물리력이 담긴 바람이 불어오며 당규영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아, 저걸 진짜, 아.'
끼어들어도 저렇게 얄밉게 끼어들 수가?
분명 멘토링 대인전이고 2대1이 당연한 걸 아는데도 마음의 앙금이 남을 것 같았다.
당규영은 다짐했다.
끝나면 또 김호의 등에다 잔뜩 낙서를 해 주기로.
한편, 이번에도 김호가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해 들어가는 홍연화.
눈 깜짝할 사이에 마법을 영창하고,
[플레임 애로우]
용암 채찍을 불타는 활과 화살로 바꿔 지근거리에서 연사한다.
하나둘 생성되던 그림자 나비와 그림자 손발 등에 불화살이 퍽퍽 꽂힌다.
그림자 마법 상당수가 제대로 시전되기도 전에 차단당하고,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온다.
당규영의 얼굴에서 점점 여유가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홍연화의 눈에는 견고한 철벽에 조금씩 금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만 더!'
앞으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된다.
땅을 강하게 박차며 더욱 저돌적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 콰아아아!
당규영의 발밑에서 커다란 그림자 가시가 불쑥불쑥 솟아오르며 홍연화에게 짓쳐들어왔다.
그림자 손발이나 둔기 등에 비해 직접적으로 상처를 입히는 형태.
홍연화는 그것을 여유가 없어진 증거라고 해석했다.
계속 불화살을 날려 가시들을 태워 버렸지만, 그럼에도 남아서 쏘아져 오는 숫자가 제법 된다.
홍연화는 그 가시들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다 피할 순 없어.'
하지만 앞서 그랬듯 거리를 벌리고 물러난다면.
당규영도 재정비할 시간을 갖게 될 테고, 김호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만들어 낸 기회가 물거품으로 돌아갈 거다.
선택의 기로에서 홍연화는 선택했다.
일부는 감수하기로.
홍연화가 빠르게 스텝을 밟으며 그림자 가시들 사이사이를 가로질렀다.
어떤 것은 간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갔으나, 몇몇 가시는 팔다리나 뺨을 긁으며 생채기를 냈다.
그럴 때마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시선은 줄곧 목표인 당규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홍연화가 제법 접근했다 싶은 순간, 당규영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 콰아아아!
발밑에서 아까의 몇 배나 되는 그림자 가시가 벽을 이루었다.
이렇게 잔뜩 견제를 당하고도 숨겨 놓은 패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홍연화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어.'
이것마저도 예상했으니까.
불끈 움켜쥔 주먹에서 화염이 확 타올랐다.
그것을 그대로 앞으로 뻗어 내자,
[파이어 펀치]
- 펑!
그림자 벽에 구멍이 뻥 뚫리며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 방어선마저 돌파당한 것을 확인한 당규영은 내심 흡족해졌다.
'제법이네.'
그림자의 형태를 가시로 바꾼 것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덜해졌던 이유도 있지만, 홍연화를 시험하려는 의도 역시 있었다.
그리고 홍연화는 목표를 뚫기 위해 피해를 감수하는 것으로 그 시험을 훌륭하게 통과했다.
뿐만 아니라 당규영이 벽을 하나 더 세우리라는 것까지 예상하고 다음 수를 준비해 두었다.
다른 멘토라면 이것만으로도 합격점을 줬을 테지만,
'아직 살짝 부족하지.'
계속 근접전을 벌이며 스티커를 떼는 건 별개다.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당규영이 막 반격에 나서려는 찰나,
- 툭,
무언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놀라서 홱 고개를 돌려 보니 김호가 어깨 위에 손을 얹은 상태다.
"어."
뭐야 저거. 언제 여기까지 왔어.
홍연화를 보조하면서 야금야금 가까이 다가오더니, 당규영이 빈틈을 보인 순간 한달음에 바로 옆까지 따라붙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티커를 떼는 역할을 전부 홍연화에게 맡긴다고는 했지만, 계속 멀찍이서 보조만 한다고는 안 했다.
그러나 다소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 휘잉—!
어깨에 얹은 손을 기준으로 사방에서 모여들듯 바람이 불어왔다.
여태까지 김호가 쓰던 바람 마법과 같았으나, 거기에 담긴 물리력은 이전과 차원이 다르게 무거웠다.
몇 초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나마 당규영이 옴짝달싹도 못 할 정도로.
C급일 때도 성가시기 짝이 없던 스킬이, [증폭]을 통해 랭크가 두 단계나 더 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규영은 어떻게 스킬의 위력이 갑자기 껑충 뛰었는지 의문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진... 짜 짜증 나는... 스킬....'
나는, 정말로, 저 스킬이, 싫어.
그렇게 당규영이 윈드포스에 대한 혐오감을 쑥쑥 키워 가는 사이,
'지금!'
홍연화는 스티커를 향해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손끝에 걸린 스티커 끄트머리를 집고, 온몸을 뒤로 잡아 빼며 물러났다.
- 찌이—익!
"...."
사방이 정적에 잠긴 것 같았다.
홍연화가 멍하니 시선을 내리자 스티커가 시야에 들어왔다.
분명히 손에 찰싹 붙어 있었으나 보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곧 조금씩 실감이 나며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해, 해냈다...!'
일주일간의 고생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기에 꾹 참았다.
홍연화가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쓰고 있자니 당규영이 말했다.
"하나 뗐네. 잘했어."
그러면서 덧붙인다.
이제 나머지도 마저 해야지?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 스티커 대인전은 세 개를 떼야 성공이다.
'남은 두 개도... 가능할까?'
확신하기 어려웠다.
김호에게 어떻게 할지 묻는 시선을 보내자 가볍게 턱을 까딱여 답한다.
하고 싶은 대로 계속 맞춰 주겠다는 것처럼.
홍연화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는 데까지 최대한 해 보자!'
그리고 또다시 불꽃을 피워 올리며, 강하게 땅을 박차 당규영에게 짓쳐 들었다.
- 파아앗!
* * *
그러나....
홍연화가 끝까지 분전했음에도 스티커는 한 개가 끝이었다.
준비해 온 수단을 첫 번째 스티커에 거의 다 써먹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힘이 쭉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 이상은 전투를 이어 나가 봐야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홍연화가 패배에 승복했다.
"졌습니다."
"수고했어."
당규영이 대인전을 종료하자 스코어보드에 결과가 떠올랐다.
[대인전 673 -50점]
'응, 깎였네.'
피 같은 대인전 점수가 50점이나 깎였는데도 홍연화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홀가분했다.
평소처럼 분한 생각이나 미련이 남지 않는 까닭은 아마도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한계까지 쏟아부었기 때문이리라.
홍연화는 김호에게 시선을 돌려 어렵사리 입을 열었고,
"그.... 수고했어."
"수고했다."
김호 역시 짤막하게 답했다.
홍연화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걸렸다.
92화 왜곡
세 사람이 원형 투기장 밖으로 이동하자 대기하던 곽지철과 송천혜가 가까이 다가왔다.
당규영이 1학년 네 명을 앞에 모아 두고, 홍연화의 손에 붙은 스티커를 가리켰다.
"그래도 어떻게 떼는 사람이 나왔어. 이런 거 보면 내가 아주 헛수고만 한 건 아닌가 봐."
'뗐다고? 스티커를?'
'홍연화가?'
뜻밖의 소식에 송천혜와 곽지철이 눈을 치켜떴다.
이번 주 대인전은 정말 지독하게 어려워서 내심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놀란 얼굴들을 보자 홍연화는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드디어 넘었어.'
용살학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송천혜보다 좋은 성적을 냈다.
고작 1개와 0개 차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긴 건 이긴 거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만 한다면 '홍연화보다는 송천혜가 한 수 위다'라는 헛소문도 쏙 들어갈 것이다.
'흠, 흠, 그래도 너무 티 내면 안 되지.'
홍연화는 자꾸만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다만 표정 관리를 잘 못 하는 성격상 그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고, 다른 이들의 시선에는 마치 가소로운 비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송천혜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규영은 하던 말을 이어 갔다.
"못 뗀 애들도 근접전이 꽤 늘기는 늘었어. 그래도 아직 보완할 부분이 한참 남았으니까, 일대일 대련은 앞으로도 꾸준히 하는 게 좋겠다."
"...?"
"예?"
뭐를 앞으로도 꾸준히 한다고요?
1학년들의 시선이 일제히 당규영에게 꽂혔으나, 당규영은 새삼 뭐가 그리 놀랍냐는 태도였다.
"당연히 계속해야지. 끝난 건 스티커 대인전이고."
멘토링은 아니란다.
아직 3주나 더 남았단다.
빈도수는 이전보다 줄어들겠지만, 멘토링 기간 중에 틈틈이 일대일 근접전 대련을 끼워 넣을 거다.
당규영은 모두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본 체도 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럼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 또 보자."
다들 당규영의 충격 발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잠시간 제자리를 지켰으나, 결국 하나둘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송천혜였다.
홍연화가 스티커를 뗐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그녀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리플레이 남아 있을까?'
멘토링 대인전인 만큼 비공개로 돌렸을 가능성은 낮다.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저 당규영 선배의 방어를 뚫고 스티커를 뗐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빨리 가서 리플레이부터 확인해 봐야지.
"...."
다음으로 곽지철이 뜻 모를 시선을 김호에게 보낸 후 자리를 뜨고, 홍연화 역시 발걸음을 재촉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할 말이 남았다.
홍연화가 김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말문을 열었다.
"저기, 그...."
무심한 시선을 마주하자 습관처럼 몸이 굳어졌지만, 어째서인지 이전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
이번 대인전 덕분에 두려운 감정이 조금은 희석된 것 같다.
그래서 용기를 내 계속 말할 수 있었다.
"그, 고, 고맙다고. 스티커 떼게 도와줘서...."
"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 다 네가 노력한 결과지."
김호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홍연화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작은 성취조차 불가능했으리라는 사실을.
분명 노력도 했고, 결과적으로 실력이 훨씬 늘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스티커를 떼는 건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 역부족이 가능하게 된 것은, 순전히 김호가 계속 당규영을 견제하며 빈틈을 만들어 준 덕분이다.
특히 스티커를 떼기 직전에 당규영에게 가까이 붙어 움직임을 완벽히 묶었던 한 수가 결정적이었다.
김호가 이런 부분들을 언급하며 전부 자기 덕이라고 주장했어도 홍연화는 순순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 오만하게 굴 자격이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노력을 인정해 주었다.
'어쩌면....'
나는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알고 보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은 아닐까?
여태까지 가졌던 인식과 새로운 평가가 이리저리 뒤엉켜 홍연화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상하게 가슴 한 켠이 간질간질한 것도 같았다.
'헛!'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려 보니, 한참이나 넋 놓고 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홍연화가 횡설수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뒷수습을 했다.
"아무튼, 고, 고마워! 내, 내일, 봐? 보자!"
그리고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이따금씩 속도를 늦추며 힐끔힐끔 김호 쪽을 돌아보았다.
* * *
힐끔거리며 멀어지는 홍연화를 지켜보고 있는데, 뭐가 자꾸만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곁눈질로 보니 당규영이 불퉁한 얼굴을 한 채 검지로 나를 연신 찔러 대는 중이다.
콕콕콕.
일부러 무시하고 홍연화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 응시하고 있으니, 이제는 장소를 옮겨 양쪽 볼을 번갈아 가며 꾹꾹 누른다.
그러다가 살짝 꼬집고 위아래로 죽죽 잡아당기기까지.
"선배님, 제 볼은 찹쌀모찌떡이 아니거든요."
"...."
"또 왜 심통이 잔뜩 나셨습니까."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당규영이 왜 저러는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스티커 대인전 내내 윈드포스로 집요하게 괴롭혔으니까.
화가 나야 정상이다.
하지만 화가 나는 이유는 알아도 죄까지는 아니었기에, 나는 자기변호에 들어갔다.
"말씀드렸잖아요, 쓸 만한 스킬이 이것밖에 없다고."
"야, 근데 이거 말이 안 돼. 졸업을 수백 번 했다면서 왜 스킬이 그것밖에 없어? 한 50개는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다시 입학하면 다 초기화돼요."
"그런 게 어딨어."
"저도 그게 불만입니다."
내 대답이 막힘없이 술술 나와서인지 당규영이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스읍, 이거 잘 빠져나가네. 컨셉에 구멍이 없어."
"컨셉이 아니니까 그렇죠."
"예에, 그렇겠지요—"
그리고 이번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넘어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사실 졸업을 수백 번씩 한 보상은 이미 받았다.
'환생 퀘스트 특전'이라는 명목으로 들고 시작한 [복사], [증폭], [군주]가 바로 그것들이다.
물론 이건 내가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왔다는 점만큼이나 남에게 밝힐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당규영이 기지개를 쭉 켰다.
"아고고— 이제 겨우 한 주 끝났네. 멘토 이거 은근히 극한직업이야. 무슨 주말도 휴일도 없어."
"하수구 청소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멘토링 안 했으면 받던 징계를 고스란히 다 받아야 했을 텐데.
그럼에도 당규영은 조금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글쎄, 요새는 그냥 징계받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어. 적당히 피곤해야지. 아무튼 우리도 가자."
가서 조금이라도 쉬겠다며 걸음을 옮기는 당규영이었다.
그러나....
"선배님, 어디 가십니까."
"응?"
"아직 제 한 주는 끝나지 않았어요."
대인전은 끝났지만, 일대일 대련은 계속해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왜곡]을 습득할 때까지는 말이다.
당규영이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아, 나도 좀 쉬자. 주말 수당도 못 받고 일하는 선배가 불쌍하지는 않니? 멘토한테도 인권이란 게 존재한단 말이야."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얼마나 조금만 더?"
"조금만 더요."
물론 그 '조금만 더'에는 아무 기약도 없었기에, 당규영은 영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최대한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은 채 그 시선을 마주했다.
"...에휴, 내가 왜 쓸데없는 약속은 해 가지고. 너 진짜 이번만이야."
당규영은 투덜투덜 볼멘소리를 해 대면서도 약속은 약속이라 여겼는지 나와 함께 원형 투기장에 입장했다.
그리고 각자 자리를 잡자마자 그림자 단검들을 뭉텅이로 꺼내서 날려 대기 시작했다.
- 파파파팟!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검은 칼날들.
거기에 그림자 나비 대여섯 마리가 소환되어 추격해 온다.
나는 바쁘게 발을 놀리면서 말했다.
"오늘따라 서두르시네요."
"이왕 하는 거 후딱 해치우고 쉬어야지."
- 퍼퍼퍼펑!
그림자 나비들이 일제히 폭발하며 갖가지 그림자 흉기들을 쏘아 냈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린 원형 투기장.
그러나 빠르게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나도,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는 당규영도 표정만큼은 느긋했다.
'실력이 늘었어.'
이번 주 초에만 해도 당규영은 한참 공격을 이어 나가다가 제풀에 지쳐 멈추곤 했다.
미꾸라지처럼 도망 다니는 나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절로 심신이 피로해졌던 탓이다.
하지만 한 주 내내 비슷한 양상으로 대련을 하다 보면 그것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지금은 물 흐르듯 공격을 이어 가면서도 피로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편안하게 잡담을 나누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번에도 그림자 비수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대화를 잇는다.
- 파라라라락!
"나 소원권 있잖아."
"네, 있었죠."
"그거 어따 쓸까 생각해 봤거든."
당규영도 몰래 내 수련을 도와주는 대가로 소원권을 하나 갖고 있었다.
송천혜와의 내기에 걸렸던 소원권과는 단어만 같고 내용에는 제법 차이가 있다.
전자는 단순히 질문이나 사소한 부탁 선에서 그치니 소원권(소)라면, 후자는 조금 더 강도가 센, 소원권(중) 정도일까.
"무슨 소원을 들어 드리면 될까요."
"너, 다다음 주쯤에 뭐 없지?"
"멘토링 말고는 없죠."
"그럼 그때 시간 좀 내.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어디 가십니까? 소원권까지 쓰시면서."
평범한 곳이라면 그냥 가자고 해도 되는데, 굳이 소원권까지 쓴다면 어떤 목적이 있다고 봐야 한다.
당규영이 바짝 달라붙어 단검을 그어 대면서 답했다.
"미리 다 얘기하면 재미없잖아. 자세한 건 그때 얘기해 줄게."
"알겠습니다."
조금 수상쩍기는 했지만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소원권 얘기를 꺼내면서 당규영이 자기 입으로 '나중에 들어보고 정 아니다 싶으면 말아.'라는 조건을 붙였으니, 거절당할 가능성이 높은 요구를 하지는 않을 거다.
덧붙여 대인전이 다 끝나고도 시간을 쪼개서 수련에 어울려 주었다는 점, 그리고 앞으로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내 쪽에서도 최대한 맞춰 주는 게 낫다.
한동안 공격과 회피, 그리고 시답잖은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또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는지 당규영이 물었다.
"특성 아직 멀었냐."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아까도 그 소리 했잖아. 너 이거 설마...."
불길한 예감에 미간을 좁히는 당규영.
"설마.... 멘토링 기간 내내 하는 거 아니지?"
"그건 아닐 겁니다."
멘토링 전에 쌓아 둔 회피 스택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일주일 동안 당규영과 추가로 쌓은 것도 적지 않다.
이제는 거의 터지기 일보직전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리 운이 없어도 다음 주에는 결판이 나겠지.
그런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던가.
날아오는 단검을 고개를 살짝 기울여 피하는 순간,
시야 한 켠에 알림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왜곡'을 습득합니다.]
'이거 봐.'
거의 다 왔었다니까.
나는 바쁘게 움직이다 말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때 당규영은 주먹에 마나를 잔뜩 그러모아 뻗어 오는 중이었는데, 나는 특성의 성능도 시험할 겸 피하지 않고 두었다.
여태까지처럼 아슬아슬한 순간에 피할 줄 알았던 내가 멀뚱멀뚱 서 있으니 당규영의 눈이 놀람으로 치켜 떠졌다.
"어?"
그러나 이미 가속도가 붙을 대로 붙은 공격을 도로 거두기에는 너무 늦었다.
마나가 실린 주먹이 그대로 내 안면을 강타하려던 찰나,
당규영의 팔 전체가 연체동물처럼 구불텅 휘어지며 옆으로 비껴 지나갔다.
"헉!"
당규영이 사색이 되어 즉시 손을 잡아 빼고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다.
"뭐야, 뭐야, 뭔데, 뭔데."
저 혼자 파닥거리며 구부러졌던 팔을 더듬어도 보며 확인하지만,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
당규영은 조금 머쓱해졌는지 파닥임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방금 뭐였어?"
"특성 막 익혔어요."
"아! 이게 그거구나?"
[왜곡]
▷공간을 왜곡시켜 적의 공격을 회피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24시간
귀하디 귀한 공간 계열 특성.
1회에 한해 '어떤 공격이든' 회피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제자리에 멀뚱멀뚱 서 있어도 암살자가 찔러 오는 단검이나 저격수의 화살이 저절로 비껴 지나간다.
한 번 발동할 때마다 24시간 쿨타임이라는 제약이 걸려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사기적인 효과다.
특성에 대한 설명을 듣고 당규영은 어이가 없는 얼굴이 되었다.
"아니, 이거 완전 사기 아니야. 나도 익히면 안 돼?"
"됩니다."
"진짜? 어떻게?"
"제가 선배님이랑 했던 걸 그대로 교직원 분들이랑 하시면 돼요."
회피 스택을 빠르게 쌓으려면 자기보다 두세 단계 높은 상대에게서 쌓는 게 최선.
1학년인 내가 3학년 부장급을 상대로 한 번도 적중하지 않고 다 피했다.
그러니 당규영 기준으로는 B급, A급에 준하는 영웅, 즉 교직원들 상대로 다 피하면 되는 거다.
당규영은 잠시간 눈을 깜박거리며 서 있었다.
내가 말한 조건과 여태까지 했던 대련들을 대조해 보는 듯했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안 해."
93화 서예인은 쉬고 싶다
[김호:아가씨]
[서예인:???]
[서예인:(어리둥절한 비둘기 이모티콘)]
[김호:(정중한 집사 이모티콘)]
[김호:아가씨 아침이 밝았습니다]
[김호:아가씨 이만 일어나십시오]
[서예인:!!!]
[서예인:(깨달은 비둘기 이모티콘)]
[김호:식사하러 가시지요]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함께 교실로 향하는 길.
서예인의 발걸음에서 이전과 달라진 점이 보인다.
걸음걸이 자체는 평소와 같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벼워진 느낌.
게다가 이따금씩 발끝이 잔상이 남는 것처럼 흐릿해진다.
[깃털걸음]을 시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번 볼까.'
길목에 늘어선 나무에서 이파리 한 장을 뗀 다음 슬쩍 날려 보냈다.
나풀나풀거리며 날아간 나뭇잎이 서예인의 머리에 내려앉기 직전, 머리 한 치 위쯤에서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며 춤을 추더니 그대로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마치 난기류에 휘말리기라도 한 듯한 모습.
깃털걸음의 효과 중 하나였다.
"...?"
서예인은 나뭇잎이 지나가고 약 3초 정도 뒤에 반응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빤히 바라보는데,
'나뭇잎은 왜?' 하고 묻는 것 같다.
"깃털걸음 얼마나 익혔나 궁금해서. 벌써 D급이네."
"응."
스킬을 시전하는 동안 발생하는 난기류의 수준을 보고 대략적인 랭크를 유추해 봤다.
'잘 배웠군. 역시 빨라.'
안정미를 만나서 앞으로의 방침을 정한 게 화요일이고, 스킬북을 구하는 데에 걸린 시간까지 감안하면 습득한 지 며칠도 안 됐을 거다.
그런데 벌써 D랭크.
몇 번이고 느낀 거지만 정말 독보적으로 뛰어난 재능이다.
물론 배운 사람의 재능도 재능이지만, 가르친 사람의 노고 역시 빼놓을 수 없겠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 말은 서예인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뒤쪽에 대고 했다.
그러자 정중한 어조의 답변이 돌아왔다.
"맡은 바 소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이내 허공이 한 차례 옅게 일렁거리더니 안정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 같은 정장 차림과 손에 들린 반투명한 옷가지.
투명 길리슈트로 몸을 숨긴 채 서예인을 경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정미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알고 계셨군요."
"제가 이런 데에는 쓸데없이 감이 좋습니다. 긴가민가했는데 맞췄네요."
"단순히 감만 좋아서는 제 은신을 간파하기 어렵습니다. 전부 김호 님의 실력이겠죠."
안정미는 내가 어떻게 투명 길리를 감지했는지 묻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나로서는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냥 척 보면 아는데.'
고인물 플레이어라서 어지간한 건 대충 보기만 해도 알아요! 라고 설명해 봤자 납득할 리가 없으니까.
해서 은근슬쩍 처음 주제로 돌아왔다.
"보니까 깃털걸음이 벌써 D급인 것 같던데요."
"예, 주말에 달성하셨습니다."
서예인을 바라보는 안정미의 시선에서 대견함과 뿌듯한 감정이 듬뿍 묻어나왔다.
흡사 장인이 필생의 역작을 보는 시선과 비슷했다.
그렇게나 말을 안 들어 먹던 아가씨가 수련을 고분고분 잘 따라오고, 가르치는 대로 랭크까지 쭉쭉 오르니 대견할 수밖에 없겠지.
"C랭크도 금방 가겠죠?"
"물론입니다. 이 성장세라면 이번 주 중에 가능하리라 예상합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훈련 역시 기동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진행 중이며—"
안정미가 지난주 훈련 내용과 앞으로의 일정을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전부 보고했다.
나는 매우 흡족해져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게 유능할 데가.'
굳이 내가 끼어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짜여진 커리큘럼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세워진 계획에 보완을 거듭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계획은 세워졌으나 당사자인 서예인이 준비가 안 돼서 여태까지 보류되었던 거겠지.
다만, 이 완벽해 보이는 커리큘럼에도 하나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그런데.... 이거 너무 강행군은 아닌가 싶은데요."
계획이 하도 빈틈없이 짜여진 탓에, 과연 서예인이 이 강행군을 완주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는 점.
멘토링은 따로 듣지만 수업은 항상 같이 들어가니 매일 옆자리에서 상태를 지켜보는데, 하루가 다르게 물에 젖은 미역처럼 축 늘어져 가는 중이다.
지금도 상태가 썩 좋지는 않고.
그런데 멘토링은 이제 겨우 한 주 끝났으니, 앞으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
"...실은 김호 님과 그 부분에 대해 상의해 보고 싶었습니다."
"좋습니다. 마침 당사자도 옆에 있으니 같이 합의점을 찾아보죠."
먼저 서예인에게 주먹 마이크를 갖다 대며 물었다.
"한 말씀 하시죠. 집사님과의 멘토링 일주일. 소감이 어떻습니까?"
"재미없어."
서예인이 곧바로 안정미의 가슴에 비수를 푹 꽂았다.
안정미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못 본 척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재미가 없다, 그렇군요. 구체적으로 어디가 재미없으신가요?"
"자꾸 똑같은 거 시켜."
이 발언에는 도저히 못 참겠는지 안정미가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아가씨, 반복 숙달은 모든 수련의 기본입니다. 김호 님과 수련하실 때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으셨습니까?"
"집사가 시키는 건 재미없어."
"그렇다면 김호 님은—"
"김호는 괜찮아."
"?"
"???"
안정미와 내가 혼란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똑같은 수련을 시켜도 집사가 시키는 건 재미없고, 내가 시키는 건 괜찮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다.
이건 더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것 같지가 않다.
일단 넘어가고.
다시 주먹 마이크를 갖다 댄다.
"또 불만 있으신 점,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죠."
"낮잠도 못 자게 해. 자꾸 깨워."
안정미의 안면이 미약한 경련을 일으켰으나 가만히 눈을 감고 울컥하는 감정을 억눌렀다.
마인드 컨트롤이 거의 수도승의 그것에 필적한다.
그리고 다시 차분하게 반론을 펼친다.
"아가씨, 낮잠은 4시간 이상 주무시면 안 됩니다."
'솔직히 그건 맞지.'
4시간 넘게 자면 그건 더 이상 낮잠이라 부를 수 없지.
내가 안정미라도 깨웠을 거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협상 테이블에서 칼자루를 쥔 쪽은 서예인이었고, 옳은 말은 이곳에서 아무 쓸모가 없었다.
따라서 나는 겉으로라도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기로 했다.
안정미 쪽으로는 몰래 동의와 격려를 보내고.
서예인에게는 또 주먹 마이크를 갖다 댄다.
"음, 그렇군요. 그러면 아가씨의 의욕을 회복할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쉬고 싶어. 재충전의 시간."
"재충전의 시간이라...."
안정미와 슬쩍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 그냥 쉬게 해 주죠.
- 하지만 일정이....
- 달리 방법이 없어요.
서예인이 쉬는 만큼 혜성그룹 미래전략실에서 준비한 '완벽한 커리큘럼'에 조금씩 오차가 생긴다.
안정미가 멘토링 기간 동안 가르치려던 것을 다 못 가르칠 가능성도 더욱 커진다.
하지만 소탐대실이라고, 작은 손해를 피하려다가 더 큰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벌써 서예인의 의욕은 가파르게 떨어지는 중이니,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커리큘럼에 오차가 생기는 게 아니라 아예 멘토링 자체가 엎어질지도 모른다.
슈퍼 갑인 서예인이 '재미없어. 안 해.'하고 드러누워 버리면 안정미가 무슨 수로 수련을 더 시키겠는가.
그게 됐으면 진작에 시켰지.
- ...알겠습니다.
안정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협상 테이블에 서예인이 원하는 것을 올렸다.
"쉬고 싶으면 쉬어야지. 하루 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잘래?"
"...."
그러나 의외로 서예인은 도리도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제시한 해결책이 오답이었다는 뜻.
"그럼?"
서예인이 잠시 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튀어나온 단어는 나도, 안정미도 전혀 예상조차 못 한 것이었다.
"번화가. 나가 봤어?"
"...!"
번화가.
던전섬에는 학생들과 교직원들 외에도 수많은 관계자가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용살학원의 시설들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유지하는 수많은 관계자.
이 관계자들의 주거지는 대개 던전섬 외곽 부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거지역에는 필연적으로 유동 인구가 밀집되는 번화가가 생기게 마련이다.
온갖 상점과 시설들이 늘어서 있어 살 거리도, 먹을거리도, 놀고 즐길 거리도 잔뜩인 곳.
예를 들면, 학기 초에 운 좋게 구해서 서예인과 나눠 먹었던 딸기 생크림 케이크.
그 케이크를 들여오는 제과점이 바로 번화가에 자리하고 있다.
즉, 서예인의 요구 사항은,
"번화가 나가서 놀고 싶다고?"
"응."
"너 혼자 가서 재밌게 놀 것 같지는 않고...."
"같이 가."
"아가씨, 번화가라면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안정미의 제안에 서예인은 즉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집사랑 가면 심심해. 재미없어."
"...."
안정미는 시무룩해져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꼬리가 있었다면 바닥에 축 늘어졌을 것 같다.
그렇게 안정미를 한 방에 물리친 다음, 나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요구하는 서예인.
회색빛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반짝 빛난다.
랜덤박스에서 나온 깃털 쿠션을 봤을 때보다 더 빛나는 것 같다.
안정미 역시 시무룩한 와중에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내 시간을 지나치게 뺏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은근히 내가 같이 가 줬으면 하는 눈치이기도 했다.
'이건 가야겠지.'
서예인의 멘토링에는 내가 차지하는 지분이 꽤 크다.
원래 귀찮다며 안 하려던 걸 살살 꼬드겨서 집어넣은 장본인이 바로 나였으니까.
그러니 의욕이 떨어졌을 때의 애프터 서비스도 내가 책임지는 게 맞다.
게다가 실리적으로 따져 봐도 손해가 아니었다.
수련 시간이 조금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 손해는 저쪽에서 히든 피스 몇 개 주워 먹는 걸로 충분히 메꿀 수 있다.
결론. 하루 정도는 충분히 투자할 만하다.
주고받는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서예인에게 말했다.
"그래, 주말에 같이 나가자. 대신 집사님 말 계속 잘 듣고, 이번 주 성적도 잘 내는 걸로?"
"...."
서예인이 슥 고개를 돌려 안정미 쪽을 응시했다.
마치 '저거랑 일주일 더 있어야 돼?'하고 묻는 것처럼.
그래도 결국에는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알았어."
안정미가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거래를 성사시킨 덕분에 최소 한 주는 벌었으니.
가까이 다가와서 나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한다.
"많이 번거로우실 텐데 이렇게까지 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친구니까 힘닿는 데까지 최대한 돕겠다고 했잖아요."
겸사겸사 번화가에서 저도 좀 놀고, 맛있는 것도 먹고요.
그럼에도 안정미는 내가 서예인을 위해 숭고한 희생이라도 하는 듯 감격한 얼굴이었다.
이내 굳게 결심을 다진다.
"김호 님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94화 6주 차 멘토링, 공략전 (1)
공략전 수업.
서청용 선생님이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 교실에 들어섰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종이 더미를 한 아름 꺼냈다.
"숙제 채점이 다 끝났단다. 돌려줄게."
4주 차 [소탕] 공략전.
던전의 사소한 부분까지 주의 깊게 관찰하고, 매복한 몬스터들을 찾아내 처치하는 규칙이었다.
그리고 숙제는 리플레이를 돌려 보면서 지도를 그리고 매복지를 표시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채점이 끝났단다.
서청용이 교탁에 종이 더미를 내려놓자, 숙제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원래 주인을 찾아 날아갔다.
학생들이 점수를 확인하고 옆 사람과 비교하면서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 100점 만점에 몇 점?
- 92점인데, 너는?
- 아니, 뭐야. 언제는 하나도 안 했다며.
- 당연히 구라였지.
분위기상 자연스럽게 양 옆자리의 서예인, 고현우와도 점수를 비교하게 되었다.
내심 궁금했는지 고현우가 먼저 내 쪽을 기웃거렸다.
"김 형의 성적은 어떻소?"
나는 대답 대신 지도를 들어 보였다.
던전 내부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기록한 지도다.
[김 호 100/100]
점수는 당연히 만점.
필기에서 딸리면 고인물 실격이지.
고현우가 지도 곳곳을 살펴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과연 김 형답군. 언제나 배울 것이 많소."
"그래, 너네는 몇 점이니."
이번 숙제는 내용이 상당히 단순한 편이었다.
리플레이 보면서 대강 따라 그리기만 해도 기본적인 점수는 보장된다.
그래서 다들 어련히 잘했겠지 싶었지만, 그래도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한 게 사람 심리.
내 물음에 고현우와 서예인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지도를 내보였다.
[고현우 86/100]
[서예인 91/100]
뜻밖인 점 하나.
서예인의 점수가 조금 더 높다.
뜻밖인 점 하나 더.
서예인의 지도가 그럭저럭 멀쩡하다.
쿠키를 구울 때처럼 일그러진 미적 감각이 발휘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도로써 필요한 구색은 다 갖추었다.
자를 갖다 대고 슥슥 그었는지 이곳저곳 각이 많이 져 있었지만, 보는 사람이 어디에 몬스터가 매복했는지 확인할 수만 있으면 그만 아닐까.
서청용도 그렇게 생각해서 점수를 후하게 준 것 같고.
다음으로 고현우의 지도로 시선을 옮겨 보니....
예술적 가치는 이쪽이 상대적으로 더 높았는데, 붓으로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 놓은 것 같았다.
문제는 알아보기가 다소 난해하다는 점이었다.
던전 지도보다는 마치....
'...장보도?'
그것도 상당히 암호화된 장보도 같다.
몬스터의 매복지를 표시하는 지도인데 알아보기 힘들어서야 말이 안 되니, 서청용으로써도 점수를 후하게 줄 수는 없었을 거다.
점수를 비교하고 나자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허어. 놀랍구려."
아무리 그래도 제 점수가 조금은 더 나으리라 예상했는지 조금 충격받은 고현우.
서예인은 슬며시 한 손을 들어 올리더니 V자를 그려 보였다.
저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 왔대.
고현우가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본인의 패배로군. 허나 서 소저, 다음에는 이렇게 쉽지 않을 거요."
얼굴이 받쳐 줘서인지 삼류 악역 같은 대사를 읊는데도 훈훈하기만 했다.
서예인은 말없이 고개를 까딱이곤 다시 책상에 반 늘어짐, 반 엎어짐 상태가 되었다.
- 짝짝.
그 순간 서청용의 박수 소리가 울렸다.
나지막한 소리임에도 묘한 힘이 담겨 있어 단번에 교실 내의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이목이 집중되었다.
"다 확인했지? 일반적으로 던전에서는 시야를 넓게 가지는 게 좋지만, 이렇게 사소한 부분도 꼼꼼히 살펴 주면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이건 나중에 다시 한번 다뤄 보도록 하고."
서청용이 칠판에 단어 하나를 적었다.
[가디언]
"오늘의 주제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단어, 바로 가디언입니다. 가디언이란 뭘까? 대답해 볼 사람?"
학생 두 명이 동시에 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중간보스요."
"최종보스요."
그리고 무슨 희한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빛으로 내 말이 맞네, 네 말이 틀리네 주장한다.
서청용이 부드럽게 웃었다.
"둘 다 맞아. 맡은 역할에 따라 중간보스가 되기도 하고, 최종보스가 되기도 하지. 보스 몬스터들마다 성향이 제각각이니까 말이야. 하수인을 거느리는 보스들은 당연히 중간보스급 가디언을 두겠고, 홀로 던전을 지키면 최종보스가 곧 가디언인 셈이지. 그렇다면 가디언의 역할은?"
이번 질문은 정답이 너무 뻔하다 보니 오히려 대답이 늦게 나왔다.
다들 질문에 뭔가 숨겨진 의도가 있나 짐작하느라 그렇다.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도 나서질 않자, 결국 가장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긴가민가한 태도로 손을 들어 올렸다.
"지키는... 거요?"
"맞아. 가디언의 역할은 글자 그대로 무언가를 지키는 거야. 중간 관문이든, 보스 몬스터든, 아니면 던전 그 자체든. 하나 확실한 건, 던전을 공략하려면 그 지키는 게 무엇이든 뚫어 내야만 한다는 거지."
그리고 그걸 효율적으로 해낼수록 던전 공략도 수월해지겠지? 하고 덧붙이는 서청용이었다.
"자, 그러면 이번 주 공략전은 가디언의 역할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MAP:[구ˑ신전]
RULE:[디펜스][2인][임의 규칙]
"가디언의 역할을 대신하는 시간을 가져 볼 겁니다."
제대로 공격하는 법을 배우려면 공격만 여러 번 반복하기보다 한 번 제대로 처맞아 보는 게 효과가 더 뛰어난 법.
안 좋은 경험은 더 강렬하게 기억에 각인되기 때문이다.
직접 적의 공세를 막으면서 까다로웠던 부분들을 기억해 두고 나중에 역으로 써먹어 보라는 의도다.
서청용이 손을 젓자 칠판에 간단한 그림이 떠올랐다.
폐허가 된 신전과 한가운데에 위치한 여신상.
그리고 그 여신상을 향해 사방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들.
공격이 집중되자 여신상에 쩍쩍 금이 가고 결국에는 무너져 내린다.
칠판이 지워지고 똑같은 그림이 떠올랐다.
여신상을 목표로 몰려드는 몬스터들.
그러나 이번에는 칼과 방패를 든 전사가 몬스터들을 쓰러뜨리며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다.
"제한 시간 동안 이 여신상이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는 게 이번 [디펜스]의 목표야."
여신상의 손상이 덜할수록 고득점이 주어지며, 지키는 과정에서 처치하는 몬스터 역시 점수에 포함된다.
"그리고 지난주 대인전과 마찬가지로, 이번 주에도 [임의 규칙]이 추가되지. 멘토링을 안 듣는 경우 랜덤, 참여하는 경우 멘토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게 될 거야."
이 말에는 멘토링에 참여하는 학생들 대부분의 표정이 구겨졌는데, 지난주에 좋은 꼴을 못 봐서 그렇다.
우리 조만 해도 마법사들한테 근접전으로 스티커를 떼라는 규칙을 내걸어서 온갖 고생을 다 시켰었다.
그 고생이 이번 주에도 비슷하게 반복된다는데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한 명 있긴 하네.'
다들 얼굴 명암이 한 톤씩 어두워진 가운데 고현우 혼자만 기꺼워 보인다.
"기대되는구려.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즐겁지."
의욕을 불태우는 긍정의 화신, 긍정보스, 컵에 물이 반이나 남은 고현우였다.
한편 서예인 쪽을 확인해 보면 완벽하게 그 정반대.
공략전이고 멘토링이고 임의 규칙이고 그냥 만사가 귀찮은 듯하다.
'집사님이 고생하겠구만.'
나는 어딘가에 있을 안정미에게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굳세어라, 집사님.
* * *
수업을 마치고.
멘토링 약속 장소인 던전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릴없이 걷는 도중, 제법 떨어진 곳에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붉은 중단발, 짧은 완드에 박힌 루비.
홍연화였다.
"...?"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라도 받았는지 홍연화가 걸음을 늦추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평소에 나를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 보아 그대로 던전동으로 빠르게 도망치지 않을까 싶었는데, 쭈뼛쭈뼛거리면서 다가오더니 조심스레 인사를 건넨다.
"아, 안녕...?"
지난주 대인전에서 같이 합을 맞춰 본 게 공포심 극복에 조금은 도움이 된 걸까.
여태까지 인사는커녕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 걸음 전진한 셈이다.
루비 마탑과 거래를 하며 조금씩 접점을 만들고 있고, 같이 멘토링도 듣는 사이기도 하니 관계가 개선되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없다.
그리고 이러나저러나 인사는 무시하는 게 아닌지라 나도 가벼운 인사로 답했다.
"안녕."
"...!"
홍연화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인사 받아 주는 걸로 저렇게 기뻐할 일인가 싶기는 하지만, 본인이 좋다면 그만 아닐까.
다만 아무래도 그 이상으로 넘어갈 용기는 나지 않는 모양이다.
어쩌면 인사도 제법 용기를 쥐어짜서 했던 건지도 모른다.
같이 걷는 내내 계속 꼼지락거리면서 눈치만 살피길래, 시험 삼아 내가 먼저 말문을 열어 보았다.
"할 말 있나?"
"어? 하, 할 말? 아니, 어, 없는데! 하, 하하...."
더듬더듬 답하더니 또 급격히 쭈굴해진 홍연화.
역시 이 이상은 아직 어려운가.
나는 충분히 시간을 주기로 했다.
인사라도 매번 하다 보면 조금씩 말수가 늘어나겠지.
* * *
어색한 침묵 속에 던전동 상층에 도착하니 당규영과 송천혜, 곽지철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다 왔네. 시작한다."
당규영이 나를 비롯한 멘티 4인조를 앞에 세워 놓고 환경과 규칙을 띄워 올렸다.
MAP:[구ˑ신전]
RULE:[디펜스][2인][임의 규칙]
"기본적인 설명은 공략전 선생님께 다 들었을 테니까 바로 추가 규칙으로 넘어간다. 괜찮지?"
안 그래도 방금 막 듣고 온 참이라 모두 무언의 긍정을 보냈다.
당규영이 손가락을 딱 튕기고,
MAP:[구ˑ신전]
RULE:[디펜스][2인][근접전][임의 규칙]
추가된 규칙, [근접전].
다들 올 게 왔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지난주 내내 했던 게 근접전인데다 '아직 보완할 부분이 많다'는 말까지 나왔는데, 비슷한 게 나와야 정상이지.
당규영이 나를 약하게 잡아끌어서 한 곳에 세워 두고 두어 걸음 떨어졌다.
나를 기준점으로 당규영까지의 거리,
"여기까지를 '근접' 거리로 친다. 이 거리 내에서는 스킬의 위력이 100% 발휘돼."
당규영이 천천히 한 걸음씩 물러나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그리고 상대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스킬의 위력이 계속 감소하지. 너희가 평소에 마법을 쓰는 안전거리에서 적중시킨다면 절반 이하."
위력이 절반 이하라면 대부분의 경우 안 쓰느니만 못하다.
즉 [근접전]은 이런 뜻이다.
어떤 스킬을 쓰든 가까이 붙어서 써라.
분명 까다로운 제약이기는 했지만, 표정들이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비슷한 게 나올 줄 예상했기에 충격이 덜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
혹독한 지난주를 견뎌 낸 덕분에 조금은 근접전에도 단련이 되었다는 게 두 번째 이유,
그리고 근접전을 해도 상대가 당규영이 아니라 몬스터들이라 해 볼 만하다는 게 세 번째 이유다.
다만, 환경과 규칙 창의 [임의 규칙]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추가할 게 남았다는 뜻.
"그리고 다음으로."
당규영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 딱,
MAP:[구ˑ신전]
RULE:[디펜스][2인][근접전][지휘관]
"몬스터들 지휘는 내가 한다."
95화 6주 차 멘토링, 공략전 (2)
던전동 상층의 몬스터들은 대개 F급, E급으로, 수준이 낮은 만큼 지성도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다.
네임드급의 특수한 개체가 통솔하지 않는 무리의 결속도 약하고, 숫자가 많아져 봤자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하지만 당규영이 직접 지휘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떨어지는 지성은 지휘로 보강이 되고,
오합지졸이던 몬스터들이 한 몸처럼 움직인다.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위협적이다.
'그리고 저 선배님은 적당히를 모른단 말이야.'
그리고 지난주에 당규영이 보여 줬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이번에도 자비 따위는 없다.
방어에서 허술한 부분이 보인다면 즉시 찌르고 들어와서 인정사정없이 후벼 팔 것이다.
'이것도 꽤 어렵겠네.'
나는 몰라도 눈앞의 병아리들은 고생깨나 할 거다.
그런데 그걸로도 끝이 아니었다.
"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번 주 페어는 다른 사람하고 짜 봐. 너희 둘, 그리고 너희 둘."
당규영이 '너희 둘'이라고 하면서 홍연화와 곽지철을, 다음 '너희 둘'에는 나와 송천혜를 지목했다.
송천혜가 손을 들어 올렸다.
"질문 있습니다."
"응, 뭔데?"
"페어를 바꾸는 이유를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지난주에 합을 맞추면서 서로 익숙해졌으니 계속 같은 조합을 유지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당규영이 몇 초간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럼 왜...."
"내 맘이야."
"...."
송천혜로서는 말문이 막혀 눈만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멘토 마음대로인 건 맞으니까.
배우는 입장에서는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게다가 짝을 바꾸라는 게 딱히 불합리한 지시도 아니라서, 송천혜는 납득은 못 해도 그런대로 수긍하고 넘어가는 듯했다.
한편 홍연화는 뭔가 아쉬운 듯한 눈치였다.
항상 나만 보면 덜덜 떠는데 짝이 바뀌는 걸 좋아해야 맞지 않나?
어쩌면 나보다는 곽지철과 페어를 짜기가 더 싫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대놓고 서로에게 혐오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걸 보면 말이다.
루비와 에메랄드, 화염술사와 목토술사의 감정의 골은 그만큼 뿌리가 깊다.
이렇게 새로운 분란을 조장해 놓고 당규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한 팀씩 들어와. 먼저 김호랑 송천혜부터."
그리고 순간이동 포탈에 먼저 발을 들였다.
뒤따라 들어가자 눈앞의 시야가 확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