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과거의 영광을 모두 잃고 폐허가 되어 버린 신전.
반쯤 무너진 천장을 통해 붉은 노을이 흘러든다.
붉은 노을이 온통 잔해뿐인 신전의 모습을 더욱 적나라하게 비추는 가운데, 덩그러니 세워진 여신상만이 쓸쓸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쪽 손에는 검, 반대쪽 손에는 천칭을 든 전쟁의 여신.
세월에 풍화되어 이곳저곳에 금이 가고 부서졌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움과 강인함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묘한 감상을 느꼈는지 송천혜는 한동안 멍하니 여신상을 올려다보았다.
"준비되면 말해."
당규영의 목소리가 정신을 일깨울 때까지.
지시를 내린 당규영이 제자리에서 훌쩍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짐작건대 기척을 숨긴 채, 이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래야 지휘하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마음먹고 뒤져 보면 찾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당규영은 공략전 외적인 존재로 취급되기에 헛수고다.
신경 끄고 디펜스 자체에 집중하는 게 낫다.
나는 송천혜와 함께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작전 짜기에는 조금 이르지?"
"네, 그래 보이네요."
여신상 이외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이 없었다.
신전 자체의 면적이 그리 넓지 않은데다 장애물도 적은 편이다.
몬스터들의 공격 루트로 짐작되는 곳은 정문 하나.
이곳만 제대로 틀어막으면 디펜스 성공이다.
—라고 생각하는지 송천혜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일단 한번 해 볼까?"
"그러죠."
어차피 연습 모드로 여러 번 도전할 수 있으니, 초기에는 일단 부딪혀 보면서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하기로 했다.
[3]
[2]
[1]
[Start!]
[여신상 100%]
[남은 시간 9:59]
공략전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무수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정문 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면, 문짝이 떨어져 나가 그 너머의 풍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먼 곳에서부터 접근해 오는 고블린 군단.
"케륵, 켁."
"케켁!"
본래 고블린이란 놈들은 아둔하기 짝이 없어서 엉망으로 뭉쳐서 달려오다가 저들끼리 넘어지고 밟고 지나가고 난리도 아닌데, 이놈들은 질서정연하게 오와 열을 맞춰 전진한다.
당규영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척척 발맞춰 다가오는 놈들의 구성을 확인해 보면,
단검이나 손도끼 따위의 짧은 근거리 무기를 든 놈들이 대부분, 그리고 일부는 엉성하게 깎은 나무창이나 투척하기 좋은 돌멩이를 들었다.
근거리와 원거리가 적절한 비율로 섞인 구성이다.
송천혜 역시 고블린들을 응시하며 그런 자잘한 정보를 수집하는 듯했다.
전투가 임박하자 품에서 검은빛이 도는 장갑을 꺼내 착용한다.
깨알같이 박힌 토파즈가 미약한 전류를 흘린다.
"어떻게 할래?"
"제가 메인 딜러를 맡죠. 그쪽이 서포트해 주세요."
"그럽시다."
어려운 역할을 자진해서 맡는다는데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 치지직,
토파즈가 점점 더 강렬한 전류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술식을 조립해 나가는 송천혜.
술식이 복잡한 것으로 보아 나름 강력한 광역 마법으로 짐작되는데,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근거리] 제약이 걸리면 위력이 반은 나올까 모르겠다.
'그래도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적들이 코앞에 밀어닥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는 것보다는 반이 아니라 반의반이라도 피해를 입혀 두는 게 낫다는 계산일 거다.
술식을 완성시킨 송천혜가 선두의 고블린을 가리키고, 한 줄기 가느다란 전격이 쏘아져 나갔다.
[체인 라이트닝]
- 지지직!
전격이 대상을 사슬처럼 칭칭 휘감아 버렸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 고블린, 또 다음 고블린으로 옮겨 다니며 삽시간에 무리 전체로 퍼져 나간다.
- 파지지지지직!
[근거리] 제약이 걸리지 않은 상태에서 시전한 체인 라이트닝이었다면 눈앞의 고블린들 절반가량은 그대로 삭제되었을 거다.
나머지 반수는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쳤을 테고.
그러나 위력이 뚝 떨어진 탓에 전열의 몇 놈만 픽 쓰러지고, 나머지는 약한 마비 상태에 빠져 속도가 늦춰지는 효과가 고작이었다.
"케륵,"
"켁."
그렇게 느려진 상태에서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전진하는 고블린들.
이윽고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생각했는지 몇몇 놈이 나무창과 돌멩이를 투척했다.
"...."
송천혜가 가만히 한 손을 앞으로 뻗자, 날아오던 투사체들이 바로 앞에서 스파크를 튀기며 정지했다.
서예인과의 대결에서도 선보였던 마력 장벽이었다.
반대쪽 손에는 점점 크기를 키워 가는 벼락 한 줄기.
선발대가 정문에 도달하자 장벽을 해제하고, 마주 달려들며 완성한 벼락을 내리꽂는다.
- 콰르르릉!
고블린들은 눈앞의 동족들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화했음에도 주춤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곧바로 빈 자리를 채우며 밀고 들어온다.
송천혜 역시 그런 놈들을 보고 잠깐 의외라는 눈빛을 했을 뿐 침착하게 다음 마법을 시전했다.
또다시 전격이 쏟아지며 전방을 뒤덮는다.
- 파지지직!
한편 나는 느긋하게 뒤에 선 채, 송천혜가 아낌없이 마법을 난사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건 타고났군.'
배치 고사 때도 마력 괴물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는데, 지금 보니 더 확실하다.
[코어]부터가 B랭크.
1학년 중에서는 유일할 테고, 마력만으로는 2, 3학년과도 견줘 볼 만한 수준이다.
'특성도 최소 3개.'
내가 익힌 [서풍의 가호]와 비슷한 속성 보조 특성이 최소 셋.
단기간에 눈에 띄는 것만 이 정도고, 티가 안 나는 것들까지 포함하면 대여섯은 되지 싶다.
사실상 걸어 다니는 대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이 대포에도 두드러지는 단점이 있었는데,
'컨트롤이 아쉽네.'
온갖 다양한 마법들을 펑펑 쏟아붓는데도 깔끔하게 전부 처리하지 못하고 한두 마리씩 흘리곤 한다.
열차와 배치 고사에서 허밍버드를 다루는 걸 봤을 때도 컨트롤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마력도 많고 특성도 많은 만큼 정교하게 휘두르기가 더 어려운 것도 이해하지만,
'저 선배는 그런 거 없지.'
당규영은 이해 안 해 준다.
오히려 거기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작전을 변경한 듯했다.
"크르륵,"
고블린들의 눈빛이 돌변하더니 일부는 계속 송천혜를 노리고, 일부는 여신상을 목표로 밀고 들어왔다.
변화를 눈치챈 송천혜가 다급하게 전격 마법을 쏟아부었다.
- 콰르르릉!
또다시 한 무더기가 잿더미로 화했으나, 이번에도 살아남은 두어 마리가 송천혜를 지나쳐 달렸다.
송천혜가 다급하게 외쳤다.
"막아요!"
"예 막겠습니다~"
터벅터벅 걸어가 앞길을 가로막자 고블린들이 방해된다는 듯 단검을 찔러 왔다.
가볍게 피한 다음 붙잡아서 대충 정문 쪽으로 집어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고블린 하나가 발치에 떨어지자 송천혜가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힉. 아니 뭐 하시는 거예요!"
"막으라며."
내 막는 방식은 이래.
일부러 거기다 던진 건 아니야.
송천혜의 얼굴에 불만이 한가득 묻어나왔으나, 그 순간에도 고블린들은 계속해서 몰려오는 중이었다.
다시 집중하며 정문을 방어한다.
[여신상 100%]
[남은 시간 6:40]
송천혜가 전격 마법을 난사하고, 한두 마리씩 흘릴 때마다 내가 그걸 주워서 송천혜에게 도로 토스하는 양상의 전투가 반복되고, 남은 시간의 삼분지 일 가량이 지났다.
아직까지는 한 마리도 여신상에 도달하지 못한 상황.
이대로 남은 시간이 다할 때까지 계속 버티기만 하면 된다.
뭐야, 이거 생각보다 할 만하네.
—라고 송천혜는 생각하고 있겠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거든.'
이게 전부라면 애초에 학사 측에서 공략전 주제로 선정하지도 않았을 거다.
당규영이 이대로 싱겁게 끝나게 놔둘 리도 없고.
- ...!
- ...!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방어하는 정문과는 다른 곳에서 몬스터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바로 신전 측면, 막혀 있는 벽 너머에서.
- 쿵, 쿵,
연신 울리는 충돌음이 묵직하다.
아마 몸으로 들이받는 걸로 짐작된다.
충돌음이 울릴 때마다 벽돌이 조금씩 어긋나고 돌가루와 먼지가 부스스 쏟아진다.
고블린들의 의도, 정확히는 당규영의 의도를 파악한 송천혜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 쿠르르릉,
그리고 설마 했던 낡은 신전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큼지막한 구멍을 통해 한 무리의 고블린들이 추가로 등장했다.
"케르륵."
"...이런 게 어딨어요."
어이가 없어져서 혼잣말처럼 묻는 송천혜.
내 귓가에는 마치 당규영의 대답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 내 맘이야.
96화 6주 차 멘토링, 공략전 (3)
구멍을 통해 우르르 몰려나오는 고블린들.
정문 쪽과 비교하면 적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우리한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여신상으로 직행한다.
나는 세상 태연한 어조로 송천혜한테 물었다.
"제가 가서 막아야겠죠?"
"빨리, 빨리 가요."
벽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윈드포스를 시전했다.
여신상을 향해 신나게 달려가던 놈들에게 물리력이 담긴 바람이 불어닥친다.
"케륵?"
"껙?"
투명한 벽에 막히기라도 한 듯 주춤거리며 제자리걸음만 하는 고블린들.
내가 다가갈수록 점점 강제로 뒷걸음질 친다.
윈드포스의 위력 역시 근접전 제약의 영향으로 감소했는데,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점점 원래 위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고블린들을 계속 뒤로 밀고 또 밀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쓰레기를 모으는 것처럼 모아서 도로 구멍으로 욱여넣었다.
"케엑!"
발악하듯 손에 든 나무창 따위를 집어던지는 놈들도 있었으나 피할 가치도 없었다.
윈드포스를 유지하기만 해도 날아오다가 저절로 힘을 잃고 바닥에 툭 떨어진다.
그걸 주워다가 가볍게 던지자 빠르게 날아가서 푹하고 꽂힌다.
송천혜는 바쁘게 정문을 방어하는 와중에도 계속 이쪽 상황을 살피고 있었는데, 이런 일련의 광경을 보고 불신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저게 어떻게...."
벽면의 구멍이 정문과 비교하면 좁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손쉽게 틀어막았다는 사실이 안 믿기나 보다.
'어쨌든 이쪽은 이제 해결했고.'
문제는 송천혜 쪽이었다.
고블린들이 한두 마리씩 새어 나갈 때마다 내가 잡아서 던져 주었는데, 내가 새로 뚫린 구멍을 틀어막으러 가면서 그 역할에 공백이 생겨난 것이다.
"케켁!"
"아!"
걱정했던 그대로, 또다시 고블린 한 마리가 전격 세례를 운 좋게 피해 가며 송천혜를 지나쳤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여신상으로 달려가서는 손에 든 돌덩이를 마구 내려친다.
[여신상 98%]
[여신상 96%]
[여신상 93%]
"큭."
송천혜의 손에서 뇌전의 벌새가 날았다.
한 줄기 섬광이 신전을 가로질러 고블린에게 적중한다.
- 파지직,
'랭크 올렸네.'
E급에서 D급으로.
그사이 마법 수련도 꾸준히 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랭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근거리 제약에 걸려서 F급만도 못한 수준으로 떨어지는 건 같을 테니까.
"켁?"
D급 허밍버드가 정통으로 꽂혔는데도 고블린은 간지럽다는 듯이 몸을 한 번 털고는 계속 돌덩이를 찍어 댔다.
오히려 허밍버드를 날려 보내서 역효과가 났다.
신경을 분산시킨 탓에 정문 쪽의 방어가 더 허술해진 것이다.
겨우 한두 마리씩 통과하던 고블린들이 이번에는 네댓 마리나 송천혜를 지나쳐 달렸다.
"아, 안 돼."
"키키킥!"
"케에엑!"
여신상에 나무창과 돌팔매질이 날아들고, 가까이 달라붙은 놈들은 손에 쥔 게 단검이든 손도끼든 일단 휘두르고 본다.
공격이 집중되면서 체력 게이지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여신상 83%]
[여신상 75%]
[여신상 67%]
"큭."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송천혜가 땅을 박찼다.
한 줄기 뇌전으로 화해 순식간에 여신상에 도달하고 전격 마법이 고블린들을 휩쓴다.
- 파지지직!!
대다수가 숯덩이로 화했으나, 살아남은 몇몇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여신상만 두들겨 댔다.
이런 맹목적인 집요함도 당규영의 지휘를 받는 영향이 크다.
[여신상 51%]
[여신상 45%]
게다가 송천혜가 자리를 비우며 정문 부근의 고블린 무리가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초록색 물결이 파도처럼 여신상을 덮쳤다.
'이건 끝났네.'
송천혜가 이를 악물고 사방으로 전격 마법을 난사했으나 숫자에는 장사가 없었다.
하물며 자신이 아니라 여신상만을 노리는 상황에서야 더욱 답이 없었고.
[여신상 0%]
결국 쩍 하는 소리와 함께 큼지막한 균열이 여신상을 가로지르고, 여러 갈래로 나뉘면서 무너져 내렸다.
[남은 시간 5:03]
[여신상이 파괴되었습니다.]
디펜스 실패를 알리는 메시지가 출력됨과 동시에 부서진 잔해와 몬스터들을 포함한 모든 것이 먼지처럼 증발해 버렸다.
다음 순간 언제 전투가 벌어지기라도 했었냐고 묻는 듯, 원상 복구된 여신상이 그 자리에 세워졌다.
던전 자체가 초기화되었다는 뜻이다.
곧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당규영이 근처에 사뿐 내려앉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이동 포탈을 열며 말했다.
"곽지철이랑 홍연화 들어오라 그래. 기다리는 동안 방금 했던 거 복기해 보고."
"네, 선배님."
* * *
던전 밖으로 나와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곽지철에게 당규영의 말을 전달했다.
"들어오라신다."
"알았다."
홍연화는 정말 곽지철과는 페어를 짜기 싫었는지 한참 거리를 벌리고 투명 인간 취급을 하는 중이었지만, 멘토가 한 팀으로 묶어 버린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둘은 마지못해 함께 던전에 입장하다가 시선이 마주치곤 서로 으르렁댔다.
"걸리적거리기만 해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송천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당규영이 시킨 대로 전투를 복기해 보는 듯했다.
나는 방해하지 않고 충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내버려 두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송천혜가 나에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벽이 뚫릴 줄 알고 있었나요? 분명 돌발 상황이었는데 너무 침착하시더군요."
'당연히 알고 있었지.'
구ˑ신전도, 디펜스도 질리도록 해 봤다.
어떻게 진행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외워 둔 상태.
그러나 '엄청 많이 해 봐서 다 외우고 있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다른 이유를 갖다 댔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 너무 술술 풀리니까 수상하다 싶어서. 꼭 벽이 뚫린다고 특정은 못 해도 뭐가 더 있지 않았겠냐."
어떤 경우든 일이 너무 쉽다 싶으면 조금은 의심을 해 봐야 하는 법.
아마 내가 구ˑ신전 디펜스를 해 본 경험이 없었더라도 비슷하게 대처했을 거다.
송천혜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거기까지는 생각이 안 닿았어요. 그런데, 그다음에는 너무 소극적이셨던 거 아닌가요?"
측면 구멍을 아주 손쉽게 틀어막은 걸로 보아 다른 행동을 할 여력이 남았을 텐데, 어째서 여신상이 부서질 때까지 손 놓고 방관만 했느냐는 뜻.
추궁하는 눈빛을 보낸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번에는 일부러 안 끼어들었어."
"왜죠?"
"어떻게 대처하나 보려고. 어디까지가 한계인지도 궁금했고."
정문을 방어하다가 고블린을 한두 마리씩 흘렸을 때,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처리하는가.
몇 마리까지 처리하는가.
가능성을 시험해 보았다.
앞으로 송천혜의 어떤 부족한 부분을 커버해야 할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의도는 알겠습니다. 그래도 디펜스 부분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셨으면 좋았을 거예요. 다른 정보도 수집해야 하는데 너무 일찍 실패했어요."
송천혜가 말하는 '수집해야 하는 다른 정보'란 이후 고블린들이 얼마나 더 나오는가, 혹은 다른 몬스터가 등장할 여지가 있는가, 벽이 하나 더 뚫리지는 않는가, 등을 정보들을 말한다.
역시 구ˑ신전 디펜스를 숱하게 해 본 나는 다 알아서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적당히 둘러댔다.
"기회는 앞으로도 많으니까, 여러 번 도전하다 보면 그것도 해결되겠지."
그리고 이 말은 송천혜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표정이 못마땅해진 걸 보면.
훈계하는 어조 반, 설득하는 어조 반으로 나에게 말한다.
"그건 안일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기회가 많더라도 한 번 한 번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매 순간에 충실한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가 찾아오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언제 비슷한 걸 들었던 것 같은데.... 조부님 말씀이셨던가?"
기억을 되짚어 보니, 배치 고사에서 기권했을 때도 조부인 우레군주의 어록을 인용해서 한 소리 했었다.
송천혜가 계속 잔소리를 하려다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눈을 몇 번 깜박거리고 되묻는다.
"...기억하고 계셨나요?"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저는 금방 한 귀로 흘리고 잊으셨을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있나. 다른 분도 아니고 무려 우레군주인데. 한 귀로 흘리면 안 되지."
"...흠, 흐흠. 역시 그렇죠? 뭘 좀 아시는군요."
송천혜의 입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우레군주가 조부인 동시에 롤 모델이기도 한 것 같은데, 남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면 당연히 기분이 좋겠지.
엄격해지려던 태도가 빠르게 누그러진다.
대화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되돌려 놓으려면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해서 재빨리 운을 뗐다.
"아무튼 내가 첫 도전이라고 소극적으로 참여한 건 인정해. 지난 일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 어떻게 풀어 나갈지 상의해 봅시다."
"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고블린 한두 마리씩 흘리는 거, 여러 번 반복하면 어느 정도 보완이 될까?"
실패 요인을 되짚어 보자면 송천혜가 컨트롤 부족으로 놓친 고블린 한 마리가 시작이었고, 거기에서 점점 스노우볼이 굴러가 정문이 완전히 뚫리고 말았다.
게다가 이건 첫 도전이라 익숙하지 않은 탓도 컸다.
여러 번 해서 익숙해지면 분명 더 나아질 거다.
송천혜가 잠깐 생각하다가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더 줄일 수 있어요. 그래도 10분 동안 한 마리도 안 놓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하는 데까지 최대한 해 보고, 그래도 흘리는 건 내가 막는 걸로 하지."
"그 정도만 해 주셔도 충분하죠."
이외에도 몇 가지 다른 돌발 상황이나, 정문이 완전히 뚫렸을 때 등의 방침을 미리 상의해 두었다.
송천혜가 흡족해져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은 대화가 좀 통하네요. 평소에도 이렇게만 해 주시면 좋을 텐데요."
"너도 오늘 상당히 협조적이다? 저번에는 소원권 들이밀면서 겨우 시켰는데."
"실기 평가에 사적인 감정을 집어넣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저번에도 잘 도와드렸거든요?"
송천혜한테 내기에서 얻은 소원권(소)를 써서 시켰던 '저번' 일이란, 고현우와 한소미의 친선 대련을 주선했던 것을 말한다.
나중에 두 사람이 몇 번인가 대련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얘기가 잘 풀렸구나 싶었다.
당과를 그렇게 많이 넘겨 줬는데 안 됐으면 조금 손해 보는 느낌이었을 거다.
"그래, 잘 도와주긴 했었지. 근데 나 소원권 또 있다. 알지?"
"왜, 왜요?"
"우리가 스티커 하나 뗐잖아. 1대 0으로 이긴 거지."
"그건 그쪽이 아니라 홍연화가 뗀 거잖아요."
"응, 우리 페어였어~"
꼬우면 짝을 잘 만나시든가~
송천혜가 분함에 몸을 떨었다.
"다시, 다시 해요, 내기."
"싫은데? 너무 이기기만 하니까 재미가 없네. 긴장되는 맛이 있어야 되는데."
"와, 진짜 밉상이야."
가볍게 티격태격거리고 있는 와중,
포탈이 열리며 홍연화와 곽지철이 걸어 나왔다.
실패한 것은 우리와 같아 보였지만 던전 내에 머무른 시간이 더 길었다.
그만큼 오래 버텼다는 의미다.
'상성부터가 유리하긴 하지.'
신전처럼 한정된 공간을 제어하는 데에는 뇌전 마법보다 화염, 목토 마법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
홍연화가 화염 마법으로 넓은 범위에 지속적으로 피해를 주고, 곽지철이 여신상 주변에 토속성 마법으로 벽을 세우든 골렘을 소환하든 하면 적어도 우리보다는 방어가 훨씬 쉬울 거다.
물론 그 뒷부분을 해결하지 못해서 쟤네들도 실패했을 테지만.
어쨌든 우리보다 앞서 나가는 중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했고, 저쪽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
홍연화가 지나가는 것처럼 슬쩍 송천혜에게 눈길을 주었다.
분명 의도는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한 것 같은데, 자기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려 올라간다.
쟤는 참 표정 관리를 못 해.
의도치 않은 도발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송천혜의 이마에 빠직하고 힘줄이 돋는 것 같았다.
이내 송천혜는 나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이건 이겼으면 좋겠네요."
97화 6주 차 멘토링, 공략전 (4)
전쟁의 여신상은 그 자리 그대로, 노을빛을 받으며 폐허가 된 신전을 굽어보고 있었다.
잠시 여신상을 올려다보던 송천혜가 나에게 준비가 되었는지 묻는 눈짓을 보냈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3]
[2]
[1]
[Start!]
[여신상 100%]
[남은 시간 9:59]
척척 진격해 오는 고블린들의 군세.
놈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송천혜가 정문으로 걸어 나갔다.
- 치지직,
손에 낀 묵빛 장갑이 스파크를 튀기며 바닥에 전류를 흘려보냈다.
송천혜를 중심으로 그려지는 커다란 원.
점차 빛을 발하는 마법진과 그 안의 기하학적인 문자들.
고블린들이 접근해 오건 말건 송천혜는 계속해서 마법진을 그리는 데에만 집중했다.
곧 완성된 마법진이 환한 광채를 뿜어냈다.
[라이트닝 필드]
노을빛으로 붉게 물든 일대가 조금 더 밝아진 느낌이 들지만, 그것 말고는 뭐가 달라졌는지 알아보기 어렵다.
마법의 진가는 고블린들이 신전 바로 앞까지 접근해서, 돌진해 오기 시작했을 때 발휘되었다.
- 치지지직! 치지직!
"케엑?"
"끼익!"
고블린들이 마법진의 범위 내에 발을 들이는 순간 몸 주변에서 스파크가 마구 튀겼다.
위력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피해를 주고 몸을 마비시켜 움직임을 더디게 만든다.
'장판 마법.'
송천혜는 첫 도전에 이따금씩 한두 마리를 놓친 이유가 자신의 컨트롤 부족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그 부족한 컨트롤을 보완하기 위해 시전한 스킬이 바로 이 장판 마법, 라이트닝 필드.
아예 일정 범위를 전격으로 뒤덮어 놓는 데에는 컨트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마법진의 유지에 들어갈 막대한 양의 마나만이 중요할 뿐.
그리고 송천혜는 나조차도 인정하는 마력 괴물이라 마나 소모량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케에엑!"
"케르륵!"
고블린들은 고블린들대로 독한 놈들이었다.
원래는 제 몸에서 스파크가 튀기면 앗 뜨거 하고 발을 떼고 도망쳐야 정상인데, [지휘관] 규칙이 놈들을 강제로 꾸역꾸역 전진하게 만들었다.
물론 전진하는 속도가 느려졌다는 점만큼은 분명했고, 뒤이어 더 강력한 전격 마법이 놈들을 뒤덮어 버렸다.
- 파츠츠츠츠!
마법진의 중심에 선 송천혜가 순차적으로 광역 마법 몇 가지를 사용하며 정문 방어를 이어 갔다.
- ...!
- ...!
그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으니, 측면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와, 쿵쿵 몸으로 들이받는 충돌음.
곧 벽이 뚫릴 것이기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쿠르르릉,
벽이 무너지고 구멍이 뚫리는 즉시 그곳에 윈드포스를 집중시켰다.
구멍 너머에서 당황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껙?"
"케륵?"
우르르 몰려나오려는 시도를 하기도 전에 턱 막혀 버린 고블린들.
당규영의 지휘를 받아 꾸역꾸역 전진하려 하지만, 강제로 시킨다고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
물리력이 담긴 바람을 거스르기에 F급 몬스터의 육체는 너무 나약했다.
계속 바람을 불게 해서 벽을 틀어막아 두고, 다시 송천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파지지직!
'그런대로 잘 막네.'
송천혜는 고블린들이 접근하는 족족 전격 마법으로 지져 버리는 중이었다.
아직까지 정문을 통과한 놈은 단 한 마리도 없다.
이제 두 번째 도전인데 벌써 약점을 상당 부분 보완한 것이다.
[여신상 100%]
[남은 시간 4:46]
첫 도전은 5분을 넘지 못하고 실패했었지만, 지금은 가뿐하게 지나쳤다.
'여기까지는 순조롭고.'
슬슬 다음 난관이 등장할 때가 됐지.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선명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
송천혜는 뒤이어 등장할 적을 예견하고 긴장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다.
비슷한 존재감을 분명히 어디서 한 번 겪어 봤는데, 그게 어디였는지 잘 떠오르질 않는 듯하다.
"...!"
그러나 머지않아 머리 위에 느낌표를 띄워 올렸다.
시야 저편, 고블린들의 무리 사이로 당당하게 걸어오는 그것을 보고.
일반적인 고블린들보다 머리 두어 개는 크고, 근육질의 다부진 체격을 가졌으며, 한 손에는 커다란 식칼을 든 그것.
"그르르륵...."
참수자 고블린.
타임어택 공략전의 강적이 여기서 튀어나온 것이다.
'등장 시기가 조금 이르긴 한데.'
이번 구ˑ신전 디펜스에 [강적] 규칙이 안 붙은 이유는 참수자가 거의 끝부분, 마지막 1분대에나 잠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시기가 당규영의 개입을 받아 앞당겨졌다.
공략전이 시작하자마자 바로 튀어나오지 않는 게 최후의 양심이라 해야 할까.
어차피 쓰러뜨려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송천혜와 참수자 고블린이 몇 초간 서로를 노려보고,
"그르륵."
참수자가 속도를 붙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푸른 마나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와 식칼을 감싼다.
송천혜도 한 손에 굵은 벼락을 소환해서 쥐고 마주 걸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 들고, 마나를 머금은 식칼과 벼락이 충돌했다.
- 쩌엉!
결과는 한눈에 보기에도 송천혜의 우세.
송천혜는 그 자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반면, 참수자는 정신없이 몇 걸음 물러났다.
식칼을 쥔 손에서 전류가 파직거린다.
이내 놈은 자기가 힘 싸움에서 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다는 듯,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아아아—!"
"...."
침착하게 다음 벼락을 꺼내 들고 대응하는 송천혜.
몇 번이나 강한 충돌이 일어나며 마나와 스파크가 튀겼고, 그때마다 물러나는 것은 참수자 쪽이었다.
실력 차이가 제법 난다는 뜻.
새삼 떠올리는 거지만 송천혜는 1학년 선도부였다.
다만 문제라면,
'지금은 이기고 지고가 중요한 게 아니지.'
이번 공략전의 목표는 디펜스니까.
정말 중요한 건 적들을 막는가 못 막는가.
지금 상황에 대입하면 '참수자를 상대하면서 고블린들을 막아 낼 수 있는가'다.
송천혜가 우세인 것은 맞았지만, 참수자가 설렁설렁 상대해서 쓰러뜨릴 정도로 손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놈과의 공방에 꽤 많은 전력이 집중된 탓에 견고하던 정문 수비에 조금씩 빈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케르륵!"
이내 고블린 한 마리가 라이트닝 필드를 지나, 광역 마법을 요리조리 피해, 기어코 송천혜를 지나치고 말았다.
정말 고블린답지 않은 집념과 끈기였다.
여신상으로 내달리기 전 송천혜를 한 번 돌아보며 비웃음을 흘리기까지 했다.
"키히힉!"
"저게...!"
송천혜가 발끈했으나 한창 참수자와 싸우다 말고 놈을 뒤쫓을 수는 없었다.
고블린이 계속 실실 비웃으며 펄쩍 앞으로 점프했다.
아니, 점프하려 했다.
"키히... 히?"
놈의 신형이 허공에서 무언가에 막힌 듯 정지하더니, 이내 튕겨 나가듯 뒤로 나동그라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한 송천혜가 나를 슬쩍 바라보고,
"이러면 됐지?"
"충분해요."
- 쿠르릉! 쾅!
나동그라진 고블린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에 냅다 벼락을 꽂아 버렸다.
이어서 송천혜가 참수자 고블린과 몇 수를 교환하다 보니 이번에는 두 마리가 방어선을 돌파했다.
"케륵?"
"켁?"
지나쳐서 그대로 달리려던 고블린들이 제자리걸음만 해 댔다.
분명 앞으로 발을 내딛고는 있는데 나아가질 못하는 모습.
내가 시전한 윈드포스에 막혀서 그렇다.
나는 나대로 측면 벽을 틀어막는 중이라 멀찍이서 시전해야 했지만, [근거리] 규칙에 걸려도 잠깐 움직임을 막는 정도는 가능했다.
그리고 그 잠깐이 송천혜에게는 빈틈을 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당황해서 허우적거리는 고블린들을 전격 마법이 휩쓸고 지나갔다.
- 파츠츠츠!
막 다음 마법을 연계하려던 송천혜가 몸을 확 옆으로 틀었다.
마나가 담긴 식칼이 빈 허공을 베고 지나간다.
"그르륵...."
어딜 자꾸 한눈을 파냐는 듯 낮게 으르렁대는 참수자.
이내 식칼을 마구 휘두르며 공격을 이어 간다.
"큭...."
이때만큼은 계속 우세하던 송천혜도 막는 데에만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빈틈이 더욱 크게 벌어진다는 의미였다.
"케르륵,"
"키익!"
정문 방어선을 돌파하는 고블린이 두 마리, 다음은 네 마리, 그다음은 다섯 마리....
윈드포스로 잠깐 멈춰 세워도 송천혜가 미처 정리하지 못하는 고블린이 생겨난다.
첫 도전과 비슷하게, 한 번 커지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어지는 빈틈.
그럴수록 송천혜 역시 빠르게 평정심이 흐트러지고 손발이 어지러워진다.
그런 송천혜를 불렀다.
"송천혜."
"네?"
"참수자만 쓰러뜨려. 얼마나 걸리나 보게."
"...! 알겠습니다."
송천혜가 금세 내 의도를 파악했다.
화력을 집중해서 참수자만 빠르게 정리하고, 거기에서 얻는 경험과 데이터를 다음 도전에 써먹자는 것이다.
- 치지직....
정문을 뒤덮던 라이트닝 필드가 희미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그 대신 송천혜의 온몸이 파직거리며 강렬한 전류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에 공급하던 마나를 끊고 오롯이 본신에 집중시킨 것이다.
다음 순간, 송천혜의 신형이 한 줄기 뇌전이 되어 쏘아져 나갔다.
- 팟!
"그르륵?"
참수자 고블린이 반사적으로 식칼을 들어 올렸으나, 안면에 벼락이 꽂히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 쿠르르릉! 쾅!
'나도 슬슬 가서 막아야지.'
[여신상 48%]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여신상에 들러붙은 고블린들이 체력 게이지를 절반이나 깎아 버렸다.
이대로 놔두면 순식간에 남은 체력까지 다 떨어져서 실패.
던전이 리셋되어 버린다.
적어도 송천혜가 참수자를 쓰러뜨릴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 줘야 한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러나 여전히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여신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증폭'을 사용합니다.]
['윈드포스'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C+->A+)]
계속 다가가며 윈드포스를 넓은 범위에 걸쳐 시전했다.
물리력이 담긴 바람이 일대를 한 차례 휩쓸자, 고블린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와르르 넘어져서 한쪽으로 굴렀다.
또다시 넓게 바람을 불게 하자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데굴데굴 구른다.
"케륵!"
고블린 한 마리가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고 손에 든 나무창을 내던졌다.
나를 노리고 똑바로 날아오는 것이 의외로 명중률이 높다.
나는 놈을 일별한 후 계속 윈드포스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데에만 집중했다.
나무창이 내 가슴팍에 틀어박히기 직전, 저절로 구불텅 휘더니 바닥에 꽂혔다.
['왜곡'이 발동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23:59:54]
나무창을 던진 고블린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이내 윈드포스에 휩쓸려 넘어지고,
"케엑!"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하릴없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이쪽은 일단락되었으니 다시 송천혜에게 시점을 돌려 보면,
- 파지지직! 콰쾅!
막강한 뇌전 마법들을 연발하며 참수자를 압박하고 있다.
고블린들과 참수자를 동시에 상대할 때도 싸움 자체는 송천혜가 유리했는데, 지금은 참수자 하나만 상대하면 되니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르륵...."
점점 저항이 줄어드는 참수자 고블린.
식칼에 맺힌 마나가 희미해지고 움직임이 둔해진다.
비틀거리는 모습이 놈의 체력이 거의 다했음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송천혜가 강한 일격으로 마무리를 짓기 직전,
"그아아아!"
참수자 고블린이 크게 단말마를 내질렀다.
그리고 남은 모든 마나를 끌어모아 식칼에 집중한 뒤 있는 힘껏 내던졌다.
푸른빛을 머금은 식칼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신전을 가로질러 날아가더니,
- 콰직—!
그대로 여신상의 허리를 두 동강으로 자르고 지나갔다.
잘려 나간 상반신이 바닥에 떨어져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내고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져 버렸다.
[여신상 42%]
[여신상 0%]
[남은 시간 1:21]
[여신상이 파괴되었습니다.]
"...?"
송천혜는 한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하체만 남은 여신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현실이 자각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입이 크게 벌어진다.
"...?!?!?"
엄청난 충격에 도저히 말문을 못 열고 뻐끔뻐끔 입을 열었다 닫았다만 반복한다.
던전이 완전히 초기화돼서 여신상이 원상 복구된 뒤에도.
당규영이 근처에 사뿐 내려앉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더 잘했다. 조금만 더 보완하면 다음 도전에는 성공하겠어. 나가서 홍연화랑 곽—"
그러나 송천혜의 얼굴을 보자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
무표정을 가장하지만 파르르 경련하는 입꼬리까지 감추지는 못한다.
필사적인 웃음 참기에 들어간 당규영.
어금니를 꽉 물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힌다.
이내 완벽하게 평정심을 되찾은 당규영.
그리고 송천혜의 얼굴을 다시 보는 순간,
"트흚!"
웃음 참기 실패.
당규영이 황급히 입을 가리고 등을 돌렸다.
이따금씩 조그맣게 흐느끼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어깨가 들썩거린다.
"흐흚, 픏, 크흥!"
"...."
송천혜는 울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같이 웃어야 할지 헷갈리는 표정이 되었다.
98화 6주 차 멘토링, 공략전 (5)
"내가 좀 심했나?"
"선배님, 왜 그러셨어요. 애가 거의 울기 직전까지 갔던데."
"아니, 내가 진짜 일부러 그런 건 아니거든? 거기서 칼을 던질 줄은 몰랐지."
당규영이 머쓱해져서 볼을 긁었다.
마지막 순간 참수자 고블린이 식칼을 집어 던진 것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지휘관] 규칙을 통해 내릴 수 있는 지시는 어디까지나 단순한 것들뿐.
가령 어느 장소로 이동해서 무엇을 목표로 공격하라 같은 것들 말이다.
'멀찍이 거리를 벌리고 원거리 공격만 하라,' 또는 '다 무시하고 여신상만을 일점사 하라' 정도가 최대 상한선이라 보면 된다.
그 뒤는 몬스터가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기에 크고 작은 변수가 발생하게 마련이고.
비슷한 맥락으로, 당규영에게 참수자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컨트롤할 권한은 없었다.
아마 마지막에 내린 지시도 '죽기 직전에 어떻게든 여신상에 피해를 줘라' 비슷한 거였겠지.
"근데 상황이 조금, 웃기게, 프흫, 흐흫흫."
또다시 웃음 주머니가 터져 버린 당규영.
설마하니 참수자 고블린이 식칼을 집어 던질 줄은 몰랐고,
그 식칼이 여신상의 허리에 정통으로 꽂힐 줄도 몰랐고,
체력 40% 가량이 한 방에 날아갈 줄도 몰랐다.
질리도록 디펜스를 해 본 나와 지휘하는 입장인 당규영조차 당혹스러움을 느낄 정도였으니, 마지막까지 참수자와 사투를 벌이던 송천혜의 충격은 그야말로 엄청났으리라.
그렇게 멍해진 얼굴은 평소의 엄격, 근엄, 진지한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고, 그 때문에 당규영이 웃음 참기에 실패한 건지도 모른다.
다시 떠올리니 또 웃긴지, 당규영은 한참이나 흫흫거리면서 내 어깨를 찰싹찰싹 때려 댔다.
그리고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야 조금 진정을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 배 아파. 아무튼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오늘은 뭐 해?"
오늘 공략전은 2회 도전으로 끝났고, 이후는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당규영이 일대일로 수련을 봐주기로 했다.
물론 나는 다른 조원 세 명과 달리 일대일 근접전에서는 제외다.
이미 스티커 세 개를 다 떼고 인정을 받았으니까.
그렇다고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생각은 없다.
[이벤트:1차 멘토링](진행 중....)
[남은 기간:20일]
▷멘토의 도움을 받아 더욱 빠르게 성장하세요.
▷스킬/특성 습득 확률 증가
▷스킬/특성 성장 속도 증가
▷보너스 강화(대) 적용 중....
멘토링 이벤트는 한 달 내내 이어지고, 지난주 서브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보너스도 계속 유지되는 중이다.
이럴 때 수련을 안 하면 손해다.
"당분간은 스킬을 손볼 생각입니다."
"스킬? 랭크작 하게?"
"네."
현재 주력스킬인 윈드포스가 C랭크로 정체 구간에 도달한 상태다.
B급까지는 이전까지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오래 걸리지만, 그럴수록 꾸준히 수련에 매진하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랭크작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는 김에 스킬도 하나 익히려고 합니다."
[스킬]
▷윈드포스(C+)
▷인페르노 피스트(C)
▷증폭(D)
▷복사-스킬[2/2]
1. 도둑걸음(B+)
2. 오버히트(D)
쓸 만한 스킬의 종류는 많을수록 좋다.
[인페르노 피스트]는 금지 스킬이라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봉인,
복사 슬롯에 등록해 놓은 [오버히트]와 [도둑걸음]은 매우 뛰어난 육체 능력과 기동성을 제공해 주기에 아직 다른 스킬로 덮어씌우기는 아깝다.
지금은 윈드포스를 온갖 방법으로 활용하면서 틀어막고 있지만, 슬슬 다른 스킬을 익힐 때도 됐다.
기억 속에서 바람 계열 마법들을 떠올리고 분류했다.
스킬북이나 유물 등의 도움 없이, 오롯이 수련만으로 익힐 수 있는 것.
그러면서도 내 기준치 이상의 성능을 발휘하는 스킬이라면,
'[나선폭발]이 좋겠군.'
나선폭발은 게임 속 세상에 들어오기 전 내 주력스킬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내가 데리고 다녔던 바람 마법사의 주력스킬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이것 하나만 보고 데리고 다녔을 정도.
그만큼 효용성이 높고 상대 입장에서 까다로운, 번역하면 열받는 마법이라는 뜻이다.
물론 아무리 멘토링 이벤트가 진행 중이라도 그런 강력한 스킬을 하루아침에 뚝딱 완성하는 건 불가능하고,
'하나씩 차근차근 배워야지.'
하위 스킬 여러 개를 익혀서 최종적으로 나선폭발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그중 윈드포스의 수련과 동시에 진행할 만한 스킬이라면,
'트위스터.'
바람을 꼬아서 회전력을 발생시키는 마법.
쉽게 말하면 회오리바람 마법이다.
회오리를 바깥쪽으로 발생시키면 적의 공격을 튕겨 내고 흘려 내는 효과, 안쪽으로 발생시키면 흡수하고 끌어당기는 효과를 낸다.
만약 적이 회오리바람의 중심에 위치했다면 그 자리에 묶어 두는 것도 가능하다.
마지막 예시는 윈드포스를 응용해서 두어 번 써먹었던 방법이기도 하다.
한 번은 던전동 지하층 깃털뱀 제단에서 제사장을 인페르노 피스트로 마무리하기 전.
다른 한 번은 바로 지난주 스티커 대인전에서, 홍연화가 스티커를 떼기 직전 당규영의 움직임을 제한할 때 썼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응용해서 썼기에 효율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손수 한땀 한땀 여러 방향에서 바람을 불게 만드는 수고를 들여야 했고, 증폭으로 랭크를 두 단계 강화했는데도 당규영을 아주 잠깐 멈춰 세우는 선에서 그친 것이다.
만약 당규영이 C랭크 제한 팔찌를 착용하지 않았다면 그 잠깐조차도 불가능했을 터.
팔찌를 벗은 당규영을 비롯해 더 강력한 적을, 더 오랜 시간 묶으려면 온전히 스킬로써 구현된 트위스터가 필요하다.
"음, 새 스킬이라고."
당규영이 혼잣말처럼 말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무슨 생각이 스쳤는지 불안한 눈빛이 되었다.
"...혹시 바람 마법?"
"네, 맞습니다."
"...."
당규영이 말없이 몇 걸음 떨어지더니, 내가 무슨 못 할 짓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방어 자세를 취했다.
"왜 그러세요, 선배님."
"나 안 해. 분명히 말했어. 나 안 해."
"이유부터 좀 들어 봅시다. 왜 안 하시는지."
"너 그거, 바람 마법 나한테 쓸 거지."
나는 몇 초간 뜸을 들이다 답했다.
"강한 상대한테 쓰는 게 익히는 속도가 더 빠르긴 한데요."
"즐, 뜨, 은, 흐!"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이까지 갈면서 말한다.
윈드포스의 수련 대상이 되는 게 정말 어지간히도 싫은가 보다.
당규영한테는 그렇게 많이 쓴 것 같지도 않은데, 강제이동 스킬의 인식이 이렇다.
미움 받는 스킬 넘버 원.
안 하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데려다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차선책을 제안했다.
"어쩔 수 없죠. 그러면 아쉬운 대로 몬스터들이나 몰아 주십쇼. 걔네한테 쓸 테니까."
이번 주가 공략전이라는 점이 호재였다.
멘토인 당규영이 지켜보고만 있으면 이벤트 보너스 조건은 성립하는 셈이니, 연습 대상이 몬스터라도 큰 상관은 없다.
게다가 몬스터의 숫자가 많은 디펜스 공략전이고, 지휘관 규칙을 써서 나에게 공격을 집중시킬 수도 있다.
여러모로 윈드포스를 연마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당규영은 내가 제안한 차선책을 아주 흔쾌히 수락했다.
"응, 그건 괜찮아."
아무리 짜증 나는 스킬도 자기한테만 안 쓰면 된다는 마인드.
덤으로 자기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편안히 앉아서 지켜보면 되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함께 구ˑ신전에 입장하고.
당규영은 몸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여신상 근처에 세상 편하게 걸터앉았다.
그리고 나는 송천혜가 방어했던 정문에 자리를 잡고 섰다.
[3]
[2]
[1]
[Start!]
"케르륵!"
"키익."
앞다투어 몰려오는 고블린들.
차이점이라면 정문도, 여신상도 아닌 나만을 노리고 몰려온다는 것이다.
나는 지루한 눈으로 놈들을 쳐다보다가, 어느 정도 접근했을 때 윈드포스를 시전했다.
- 휘잉—
바람이 여러 방향에서 불어오며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케엑?"
"끽?"
그리고 고블린들도 한곳으로 뭉쳐지고, 또 뭉쳐지기 시작했다.
고블린 주먹밥이던 것이 곧 고블린의 산이 되었다.
나는 윈드포스를 계속 시전하며 고블린의 산을 높게 높게 쌓아 올렸다.
* * *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서예인과 학생 식당에서 만났다.
주위를 가볍게 훑어보았으나 안정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기야 멘토가 항상 한가한 것도 아니지.
오늘 아침 메뉴는 갓 구운 베이글.
거기엔 온갖 토핑도 함께 늘어서 있었는데, 기호에 따라 지신의 입맛에 맞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
서예인은 베이글을 하나 집고, 크림치즈를 하나 집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더 안 집어?"
"...."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민하는 기색.
나는 그러려니 했다.
아침 식사인 만큼 식욕이 덜할 수도 있고, 베이글에 크림치즈만 발라 먹는 것도 방법이지.
하지만 나는 이왕 먹을 때 든든하게 먹자는 주의다.
베이글 위에 토핑을 척척 쌓아 올렸다.
치즈, 스크램블 에그, 약간의 야채, 얇게 썬 햄....
이내 아침 식사 치고는 제법 두툼한 베이글 샌드위치가 완성되었다.
"...."
서예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내 접시에 고정되었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이건 뭔가가 갖고 싶을 때의 눈빛인데.
"하나 만들어 줘?"
- 끄덕.
"접시."
서예인이 베이글과 크림치즈만 올려진 접시를 내밀자, 나는 그것을 받아 들어 토핑을 척척 쌓아 올렸다.
그러자 금세 내 것과 똑같은 베이글 샌드위치가 완성되었다.
막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안뇽 안뇽!"
귓가에 해맑기 그지없는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손을 붕붕 젓는 한소미, 그리고 바로 옆의 송천혜가 눈에 들어온다.
송천혜는 시선이 마주치자 사무적인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평소와 같은 도도하고 차가운 모습.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소보다 얼굴 명암이 반 톤 어둡고, 눈가에도 옅게 음영이 졌다.
눈이 조금 부은 것도 같다.
'간밤에 마음고생을 좀 했나 본데.'
어제 두 번째 도전을 실패한 충격이 크긴 컸나 보다.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신경 쓰는 스타일 같은데, 아마 눈을 감아도 어제의 하이라이트가 자꾸만 반복 재생돼서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송천혜는 친구를 잘 둔 셈이다.
고현우 이상 가는 긍정의 화신, 한소미.
존재만으로 주변 분위기를 띄우는 재주가 있어서, 지금도 아주 조금씩이나마 송천혜의 기분도 나아지고 있는 듯하다.
"오! 베이글!"
한소미가 우리 접시 위의 베이글 타워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천혜야, 오늘 베이글이야, 베이글 샌드위치!"
"뭐 그렇게 놀라, 베이글 나올 수도 있지."
그러나 관심 없다는 말투와는 달리 송천혜의 시선은 빠르게 내 접시를 스캔하고 있었다.
음영이 졌던 얼굴이 조금 밝아지고 슬쩍 입맛을 다신다.
그런 송천혜에게 물었다.
"밥 먹으면서 공략전 얘기나 할까?"
"그러죠."
한소미와 송천혜가 자기 몫의 베이글을 집으러 떠나고.
서예인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내 쪽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친해?"
앞뒤 생략된 말까지 포함하면 '너네 언제 그렇게 친해졌니?'가 아닐까 싶다.
"친하진 않지."
어떻게 보면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현실이 그랬다.
한소미는 사람 자체가 쾌활하고 친화력이 엄청나서 항상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오는 편이지만, 그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비슷할 거다.
나와 특별히 더 친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송천혜도 일시적으로 멘토링이라는 관계로 묶였을 뿐, 서로에게 이렇다 할 호감은 품고 있지 않다.
인페르노 피스트에 대한 수사도 여전히 진행 중일 텐데, 나에 대한 의심을 거뒀을 리도 없고.
"그래도 밥 한 끼 같이 못 먹겠냐. 괜찮지?"
"응."
서예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먼저 네 명 자리를 확보하고 앉아 베이글을 한 입 두 입 먹고 있으니, 한소미와 송천혜가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아주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시작하려는 두 사람이었으나, 나는 접시를 보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생긴 게 다 똑같냐, 베이글이."
"헤헤...."
겸연쩍게 웃는 한소미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송천혜.
내가 만든 베이글 샌드위치의 완벽한 복제품이 그곳에 있었다.
둘씩이나 더.
99화 6주 차 멘토링, 공략전 (6)
"...."
"...."
서예인은 기본적으로 말수가 적은 편이고, 송천혜는 그런 서예인을 대하기가 약간은 어색하고 껄끄러운 눈치였다.
따라서 두 사람은 말없이 연신 베이글 샌드위치만 베어 물었고, 대화의 주체는 그런 것에 조금도 신경을 안 쓰는 나, 그리고 한소미였다.
사소한 질문 1호.
"당과 잘 먹고 있냐?"
"응, 맛있어! 엄청! 어디서 사 온 거야?"
"목숨 걸고 굉장히 위험한 곳에 들어가서 구해 왔지. 그것 때문에 아주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단다."
"그럴 수가!"
한소미가 과장되게 놀란 척하더니 곧바로 히히 웃었다.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하기야 흑사방에 들어가서 사 왔을 거라고 어떻게 짐작하겠는가.
"맛있기도 한데 양도 많지?"
"응, 아직 반도 못 먹었어!"
"그거 사실 일부러 많이 준 거다. 뇌물이거든. 나중에 교칙 위반해도 한 번 봐주기?"
"그건 안 돼."
"안 통하는군. 유감."
"고현우랑 대련은 가끔 할게!"
"그거면 됐지."
뇌물 역시 반 농담이었고, 원래 목적인 '고현우와 한소미 대련시키기'는 진작에 달성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사소한 질문 2호.
송천혜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 또 궁금한 거 있는데. 당과, 송천혜랑 너 중에 누가 더 많이 먹었냐."
"...!"
때마침 송천혜는 베이글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문 상태였는데, 질문을 듣자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내 입에 든 것을 비우려고 다급하게 턱을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야속하게도 한소미는 전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천혜가 더 많이 먹었는데?"
"그래? 얼마나 많이?"
"몰라, 아무튼 많이!"
나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차라리 저한테 넘겨주세요' 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다 사심이 있었네."
"천혜가 단 거 되게 좋아하거든!"
"...!"
나와 한소미의 합공에 정신을 못 차리는 송천혜.
가까스로 입에 든 것을 다 넘기고 반론을 펼치려 했으나, 이미 대화가 다음 주제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뒤늦게 변명을 해 봐야 오히려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뿐.
억울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한 듯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다.
아무튼 슬슬 공략전 얘기를 할 때가 됐다 싶어서 송천혜에게 물었다.
"어제 공략전은 복기해 봤냐."
"네, 해 봤습니다."
"1분 남기고 실패했으니까, 큰 틀에서는 그대로 가도 될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거의 10분을 다 채워 가는 상황에서 실패했으니 당장 작전을 변경할 필요는 없다.
같은 구도를 반복하면서 숙련도를 올리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일 거다.
이제 겨우 2회 도전한 상태고, 앞으로 발전할 여지는 상당히 많이 남았으니까.
"어떻게 참수자만 잘 처리하면 되지 않을까?"
"...."
'참수자'라는 단어를 듣자 송천혜의 몸이 움찔거렸다.
순간적으로 어제의 그 장면이 스쳐 지나간 모양이다.
마나를 듬뿍 머금은 식칼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가서 여신상의 허리를 콰직! 박살 내는 장면이.
"끝나고 당규영 선배한테 물어보니까 일부러 그런 건 아니래."
"의도했다기엔 너무 공교롭기는 했죠."
이미 짐작했다는 듯 태연한 어조의 송천혜.
그러나 표정은 안도했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풀어지고 있었다.
"근데 비슷한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지."
"...."
송천혜의 표정이 반쯤 풀어지다가 도로 굳어졌다.
지난주에 파악한 바, 당규영은 멘토링에 한해서는 인정사정이 없다.
약점이 드러나면 보완하기 전까지 무자비하게 후벼 파는 스타일.
달리 말하면 강하게 키우는 스타일이다.
그러니 어제와 비슷한 상황이라면 무조건 같은 지시를 내릴 거다.
참수자가 무조건 식칼을 집어 던진다는 말이다.
"참수자 얘기를 그냥 꺼내신 것 같지는 않고, 대안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럼, 당연히 있지."
"...."
진지한 눈으로 주목하며 다음 말을 기다리는 송천혜.
나는 아주 중대한 기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비장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말했다.
"잘 보고 막으면 돼."
"...네?"
"잘 보고 막으면 된다고."
"그게 대안인가요?"
"아주 전통적으로 효과가 좋은 해결책이지. 그치?"
한소미에게 동의를 구하자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손을 빠르게 슉슉! 움직이면서,
"맞아! 슉, 보고 탁, 막으면 돼!"
"...."
송천혜의 얼굴이 짜게 식었다.
'내가 이 인간들한테 기대할 걸 기대했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눈치다.
그러나 곧 한소미와 나를 번갈아 보고, 우리가 그저 농담으로 던진 말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묻는다.
"슉 보고 탁 말고,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기억나? 식칼 던지기 전에 참수자가 어떻게 했는지."
송천혜는 잠시 베이글 샌드위치를 내려다보며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여신상이 부서지는 장면은 수십 번씩 떠올렸을 테지만, 그 전의 일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 찡그려진 상태로 유지되던 눈썹이 이내 서서히 치켜 올라간다.
"그러고 보니...."
- 그아아아!
회상 속, 포효를 내지르는 참수자 고블린.
남은 모든 마나를 손에 든 식칼에 집중시킨 후, 있는 힘껏 여신상에 내던진다.
즉, 잘 보고 막으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사전 동작이 있었군요."
"그렇지."
식칼을 내던지는 패턴 직전에 제법 큰 동작이 존재한다.
그것을 읽고 대처한다면 어제와 같은 불상사는 피할 수 있을 터.
"알겠습니다. 이번 도전부터는 그렇게 해 보죠."
고개를 끄덕인 송천혜가 시간을 확인하고, 한소미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는 선도부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교실에서 봬요."
"안뇽! 이따 봐!"
한소미는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해맑게 붕붕 손을 흔들면서 떠났다.
"...."
서예인은 그때까지도 말없이 아침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베이글 샌드위치를 보통 뚱뚱하게 쌓은 게 아니다 보니, 내내 한마디도 안 하고 야금야금 먹었는데도 아직 끝이 안 났다.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누가 이길 것 같아?"
"뭐, 송천혜랑 너랑 다시 붙으면?"
"응."
"글쎄."
이 질문에는 누가 이긴다 단정 지어 말할 수가 없었다.
스킬과 특성 등 스펙상으로는 송천혜가 한참 앞서 나간 상태.
서예인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송천혜의 재능도 충분히 천재의 반열에 들어가는 수준이다.
그러니 둘 사이의 격차가 하루아침에 좁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해 보기 전까진 모르지."
"응...."
"그래도 확실한 건 하나 있다. 계속 열심히 수련하면 언젠간 네가 이겨."
하루아침은 불가능하더라도, 멈춰 서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기만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송천혜를 추월할 테니까.
서예인이 내 눈을 마주 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열심히, 알았어."
여전히 근처에서 안정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감격해서 눈가를 훔치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 * *
송천혜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골몰히 생각에 잠긴 채였다.
방금 들었던 말을 혼잣말처럼 되뇌면서.
"슉 보고 샥 막는다...?"
"슉, 보고 탁, 이야!"
한소미가 조금 틀렸다는 것처럼 정정해 주었다.
저건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고.
송천혜가 김호의 조언을 떠올렸다.
'사전 동작을 보고 막으라고.'
참수자 고블린이 식칼을 투척하기 직전 동작이 커진다는 건 의외의 맹점이었다.
이걸 어떻게 놓쳤나 싶을 만큼 간단한 정보였으나, 김호가 언급하지 않았다면 깨닫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다만 사전 동작을 보고 막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하고, 실전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슉, 보고 탁....'
말은 쉽지만,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솔직히 털어놓자면, 송천혜는 이번 공략전 내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신경 쓸 것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마법진에 계속 마력을 불어넣으랴, 이 마법 저 마법 연달아 시전하랴, 그 마법들을 제대로 컨트롤해서 적중시키랴, 고블린들이 한 마리도 못 지나치게 막으랴, 참수자와 공방을 교환하랴....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하려고 하니 저절로 손발이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 '참수자의 패턴을 읽고 대처하라'라는 목표까지 추가되었다.
동작이 커진다고는 하지만, 급박한 전투 중에 그 한순간을 잡아내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어려워도 해 봐야지. 아니, 해내야지."
송천혜가 마음을 굳게 다졌다.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해 임한다.
그것이 우레군주의 방식이었으며, 그 뜻을 이어받은 송천혜의 방식이기도 했다.
그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여태까지 그녀가 겪은 수많은 경험이 증명했으며, 이번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송천혜가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날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한소미.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천혜의 눈빛이 급격히 서늘하게 식었다.
왜인가 하면, 베이글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문 순간, 김호와 한소미의 기습적인 합공에 당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당과, 송천혜랑 너 중에 누가 더 많이 먹었냐.
- 천혜가 더 많이 먹었는데?"
- 어쩐지, 다 사심이 있었네.
- 천혜가 단 거 되게 좋아하거든!"
한소미가 때 묻지 않은, 순수하기 그지없는 영혼이라는 건 송천혜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친하지도 않은 애 앞에서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야?
나를 당과에 환장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 셈이야?
악의가 없었다고는 하나 필히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갈 문제였다.
"그런데 아까 너—"
송천혜의 잔소리가 막 시작되려는 찰나,
한소미가 인벤토리를 뒤적거리더니 김호에게 받은 과자를 꺼냈다.
말린 과일 종합 선물 세트.
"천혜야, 말린 복숭아 먹을랭?"
"—먹을래."
생각해 보니 잔소리는 나중에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단 것 앞에서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송천혜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