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방과 후.
어제와 마찬가지로 던전동에 모였다.
오늘은 곽지철과 홍연화 페어가 먼저 신전에 입장해 도전 중이었고, 나와 송천혜는 대기하는 입장이었다.
이미 아침에 어느 정도 진로를 잡아 놓았기에 지금에 와서는 따로 상의할 필요가 없어졌고, 우리가 살갑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이도 아니었다.
해서 쓸데없이 이곳저곳에 눈길을 주며 기다리는데,
"슉-"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던 송천혜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것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다.
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입을 꾹 다물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계속 쳐다보자 되레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왜 그렇게 보시죠?"
"-하고 탁. 바로 그거다."
"...."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양 계속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송천혜.
그러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다행히도 부끄러운 한때는 금방 지나갔다.
포탈이 열리며 곽지철과 홍연화가 걸어 나온 것이다.
평소보다 한층 표정이 밝은 걸 보면 공략전이 잘 풀렸나 보다.
언제나 둘 사이에 감돌던 험악한 분위기도 많이 화기애애해진 상태였고.
확인 차 곽지철에게 짧은 물음을 던지자,
"성공?"
"그렇다."
지난주에는 말도 잘 안 하던 녀석이 당당하게 대답한다.
우리보다 앞서 나간다는 확신이 있어서인지 조금은 자신감이 붙었나 보다.
홍연화 역시 말은 안 해도 한껏 콧대가 높아진 기색이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잠깐 겸손해졌다가, 다시 송천혜를 보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
송천혜의 반응은 여전히 무심하기만 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포커페이스를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도 들어갈까. 슬슬 성공할 때도 됐지?"
내가 넌지시 묻자,
"네. 성공시키죠, 이번에는 꼭."
송천혜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듯, 나를 잡아끌며 함께 던전에 입장했다.
100화 6주 차 멘토링, 공략전 (7)
[3]
[2]
[1]
[Start!]
[여신상 100%]
[남은 시간 9:57]
송천혜는 공략전이 시작되자마자 마법 장판부터 펼쳤다.
라이트닝 필드로 이전 도전에서 제법 재미를 봤으니 같은 방식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바닥을 흐르는 전류가 넓은 원형 마법진을 형성했고 그 안에 술식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곧 정문에 도달한 고블린들이 장판에 발을 들이자,
- 치직, 치지직!
"케륵."
"키익!"
몸에서 마구 스파크가 튀긴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진하는 놈들에게 전류의 파도가 쏟아졌다.
뇌전 마법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접근하는 모든 고블린을 새까맣게 태워 버리는 송천혜.
'확실히 발전하는 중이군.'
세 번째 도전이라 그런지 마법의 연계가 보다 자연스럽고 명중률도 조금 올라갔다.
- 쿠르르릉,
나는 나대로 측면 벽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벽이 무너지며 구멍이 뚫리자 윈드포스를 써서 틀어막았다.
'여기까지는 순조롭고.'
[남은 시간 4:53]
"그르르륵...."
5분이 조금 지나자 어김없이 나타나는 참수자 고블린.
허나 이번엔 송천혜의 대응이 조금 달랐다.
"속전속결로 끝내겠습니다. 커버해 주세요."
"그럽시다."
놈이 정문으로 접근하길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달려들며 굵은 벼락을 휘둘렀다.
"그륵?"
참수자가 식칼을 교차시켜 막자 강렬한 충돌음이 일었다.
결과적으로 한 수는 막았지만, 충돌의 여파 탓에 식칼을 든 팔째로 옆으로 젖혀졌다.
자세가 무너진 놈의 가슴팍에 벼락이 정통으로 꽂혔다.
- 쿠르릉, 쾅!
그럼에도 놈을 쓰러뜨리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연이어 다음 마법을 시전하는 송천혜.
참수자가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인다.
속전속결.
즉흥적으로 떠올렸을 테지만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방법이다.
이번 디펜스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참수자 고블린.
이놈만 일찌감치 화력을 집중해서 치워 버린다면, 그 뒤에 남는 것은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F급 고블린들뿐이다.
'나쁘지는 않은 생각인데.'
그러나 아쉽게도 송천혜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그르륵...!"
참수자가 고블린치고는 상당히 터프한 놈이라는 점.
근거리 계열 보스인데다 맷집도 뛰어나서, 송천혜가 거의 일방적으로 피해를 주는데도 쉽사리 쓰러지지 않는다.
그것은 곧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했던 싸움이 길어짐을 의미했고,
"케르륵!"
"케륵!"
정문이 적들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라이트닝 필드는 계속 유지되며 조금씩 피해를 주고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었으나, 마법진의 범위를 넘어선 고블린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신전 안으로 진입했다.
'별수 있나.'
내가 커버하는 수밖에.
송천혜의 선택이 맞든 틀리든, 그로 인해 생겨난 공백을 최대한 메꾸는 게 파트너인 내 역할이다.
피드백을 하고 작전을 보완하는 건 어디까지나 도전이 끝난 뒤의 일이다.
나는 측면 방어를 포기하고 여신상으로 다가갔다.
윈드포스로 바람을 넓은 범위에 걸쳐 불게 만들자 고블린들이 낙엽처럼 신전 바닥을 굴러다닌다.
이전 도전에서는 이것만으로도 시간을 꽤 많이 벌었었다.
그러나....
'저 선배님이 그냥 지켜만 볼 리가 없지.'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고블린들이 당규영에게 새로운 지시를 받은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정 거리를 두고 여신상을 둥글게 포위하더니,
"케르륵."
"케륵! 켁!"
가져온 돌덩이나 창 따위를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즉시 맞바람을 불게 해서 투사체들을 떨어뜨렸으나 몇몇은 약하게나마 여신상을 두들겨 댔다.
[여신상 93%]
[여신상 91%]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나는 잠시 신전 한구석에 눈길을 주었다.
당규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선이 마주쳤다면 메롱하고 혀를 날름거렸을 것 같다.
당규영도 멘토로서의 체면이 있어서, 내가 윈드포스 하나로 다 휘젓고 다니게 놔둘 수는 없다.
따라서 나름대로 내 스킬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허점을 찌를 방법을 가져온 것이다.
[근거리] 규칙이 적용 중이기에 아무리 강력한 마법이라도 일정 사거리를 넘어서면 위력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당규영은 그 점을 이용해, 나 혼자서는 모든 것을 다 커버할 수 없도록 고블린들을 넓게 퍼뜨렸다.
결과적으로 나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원거리 공격을 일부 허용하게 되었다.
돌멩이가 여신상을 툭툭 때릴 때마다 체력 게이지가 야금야금 줄어든다.
[여신상 84%]
[여신상 81%]
"키익!"
"케르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휑하게 뚫린 측면 구멍과 정문을 통해 고블린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더 많은 공격이 여신상에 집중되자 체력이 깎이는 속도도 점점 가속화되었다.
[여신상 77%]
[여신상 73%]
[여신상 68%]
상황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지만 나는 내내 침착했다.
조급하게 군다고 뭐가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할 일 역시 달라진 게 없었다.
최대한 여신상을 보호하고 시간을 버는 것.
송천혜가 여신상이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만 합류하면 아직 승산이 있다.
'거의 다 잡은 것 같기는 한데."
- 쿠르릉!
정문 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과연. 참수자가 거의 반죽음까지 간 상태였다.
등장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송천혜가 쉬지 않고 퍼붓는 공격을 받아서 온몸이 너덜너덜해졌다.
'이제 정타 몇 번만 더 들어가면 되겠네.'
"크아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참수자의 마지막 패턴이 튀어나왔다.
허공에 대고 크게 포효하더니, 식칼을 쥔 팔을 뒤로 힘껏 젖히고 온몸을 내던지듯이 투척했다.
"아."
송천혜는 순간 움찔하고 대응하려 했으나, 아쉽게도 행동이 한 박자 늦었다.
황급히 전격 마법을 쏟아부었을 때는 이미 식칼이 참수자의 손을 떠난 뒤였다.
'잘 보고 막으랬더니.'
슉 하고 탁 실패구만.
송천혜는 빙글빙글 회전하며 멀어져 가는 식칼을 그저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신상 근처에 자리를 잡은 나는, 한 줄기 푸른빛이 되어 다가오는 식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성공하게 해 줘야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이쯤에서 한 번 보상을 받고 가야 앞으로 능률도 오르지 않겠는가.
푸른빛의 경로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식칼이 막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찰나, 손끝에 바람을 압축시켜 툭 위로 쳐올렸다.
그 탓에 일직선으로 날아오던 식칼의 궤적이 조금 위쪽으로 휘었고,
- 콰득—!
여신상의 허리가 부러지는 대신 머리가 뎅겅 잘려 나갔다.
전쟁의 여신의 목이 바닥에 뚝 떨어지며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났다.
[여신상 32%]
[여신상 17%]
체력이 한 방에 15%나 뭉텅 깎이기는 했지만 디펜스 실패까지는 아니다.
여신상은 목이 잘려도 죽지 않기 때문이다.
미관상 심하게 흉해 보인다는 단점은 있지만....
"미안합니다, 빨리 끝낼게요."
사실 던전이 초기화되면 어차피 머리도 다시 자라날 터라 별로 안 미안했다.
아무튼 다시 송천혜 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
여전히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져 있다.
또 실패했다는 생각에 제법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런 송천혜를 윈드포스를 써서 옆으로 슬쩍 밀었다.
- 휘잉—
멍한 상태에서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반 걸음 움직인 송천혜.
다음 순간 참수자의 주먹이 눈앞 허공을 때린다.
식칼을 던져서 손이 비었으니 주먹이라도 휘두른 건데, 내가 시기적절하게 서포트해서 빗나갔다.
"그르륵...."
"핫."
그제야 송천혜는 흠칫 놀라 제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몇 초 만에 상황 파악을 마친다.
허리가 부러졌을 여신상은 목만 떨어졌고, 던전이 초기화되었다면 사라졌을 고블린들과 참수자도 그대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에 생기가 돌아온다.
"집중합시다. 거의 다 왔다."
"아! 네, 네!"
또다시 날아오는 참수자의 주먹을 송천혜가 간발의 차이로 회피했다.
그리고 전류가 줄기줄기 흐르는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 파츠츠츠츠!
참수자의 몸이 새까맣게 탄 재가 되어 흩어지고.
즉시 송천혜가 등을 돌려, 한 줄기 번개가 되어 신전을 가로질렀다.
다음 순간 여신상 근처에 내려앉아 전류를 뿜어내자 고블린들이 순식간에 한 무더기나 쓸려 나간다.
윈드포스로 고블린들을 몰아주며 송천혜에게 말했다.
"슉 하고 탁, 막으라고."
"아,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거든요."
"우리 벌써 3회차인데?"
"참수자는 두 번째로 잡는 거잖아요."
"일리가 있군. 그럼 다음에는 성공하겠지요?"
"다, 당연하죠."
- 파지지지직!
전류의 파도가 또다시 고블린들을 덮쳤다.
송천혜와 정신없이 여신상 주변을 청소하다 보니,
[여신상 15%]
[남은 시간 0:00]
마침내 10분을 모두 소진했다.
신전 내에 바글거리던 고블린들이 순식간에 씻은 듯 사라지며 던전이 초기화된다.
공략전 성공.
[여신상 체력 15/100% = 75점]
+ [처치한 고블린 수:84 = 42점]
+ ['강적'처치 = 100점]
+ [클리어 보너스 = 300점]
——————
[총 점수:517점]
그러나 성공했다는 기쁨도 잠시,
점수를 바라보는 송천혜의 눈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그녀 기준에서 보면 여신상이 파괴되기 직전까지 갔다는 건 사실상 낙제점이나 마찬가지다.
그 낙제점이 본인의 판단에 대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만족스럽지 못할 테고.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한다.
"...속전속결은 안 되겠네요."
"생각보다 잘 버티지? 참수자."
"네, 원래 하던 대로 수비적으로 운영해 볼게요."
그렇게 들어간 4차 시도.
중요한 부분만 간추리면, 송천혜는 이번에도 종이 한 장 차이로 식칼을 놓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에도 내가 식칼을 처리해 주었고, 여신상의 목 대신 팔이 날아갔다.
'당연히 막는다'고 호언장담해 놓고 실패한 것이 부끄러웠는지, 송천혜는 공략전이 끝난 뒤에도 나를 똑바로 못 보고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곤 했다.
그래도 결과만 놓고 보면 4차 시도 역시 성공.
수비적으로 운영한 덕분에 여신상의 체력도 조금 더 남길 수 있었다.
앞으로도 비슷한 방식으로 조금씩 기록을 갱신해 나가면 될 것이다.
공략전 도전은 일일 2회에서 끊고,
이후는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한 명씩 당규영과 근접전 대련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 역시 당규영이 몰아주는 고블린들을 상대로 윈드포스와 트위스터를 연마했다.
* * *
다음날.
평소처럼 수업을 마치고 각자 갈 길을 나서려는데, 교실 밖이 소란스럽다.
슬쩍 내다보니 오가는 학생들 사이로 언뜻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다.
수군거리는 소리도 하나둘 귀에 꽂힌다.
- 홍연화가 왔네?
- 홍연화가 우리 반엔 왜?
- 누구 보러 왔겠지.
- 아니, 그러니까 누구?
그 누구는 바로 나였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하면, 홍연화의 시선이 정확히 나에게 꽂히고 있어서 그렇다.
'올 게 왔구만.'
101화 뿌리
루비 마탑주는 눈매가 날카로운 편인 데다, 대부분 무표정이거나 조금 찡그린 얼굴을 유지하는 탓에 항상 무언가에 화가 난 것처럼 보이곤 했다.
그리고 홍연화는 보면 볼수록 그 루비 마탑주를 많이 닮았다.
이런 이유로, 홍연화가 전투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교실 앞에 서 있으니, 지켜보는 이들로서는 누구한테 싸움을 걸러 온 것은 아닐까 지레짐작하게 된다.
- 야야, 쟤 결투 신청하러 온 거 아니야?
- 진짜? 누구한테?
- 당연히 송천혜겠지.
- 와, 드디어 붙나?
- 빅 매치 떴냐?
그리고 그 상대는 십중팔구 홍연화의 맞수로 꼽히는 송천혜일 터.
그들의 짐작에 대답이라도 하듯, 송천혜가 말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교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장내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 결투...?
- 신청하나...?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둘은 서로에게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게 전부였다.
그럼 대체 누구한테 볼일이 있어서 왔지?
의문을 담은 시선들이 집중되었다.
그러자 쏟아지는 관심이 슬슬 거슬린다고 느꼈는지, 홍연화가 매섭게 눈을 번뜩이면서 한 마디 내뱉었다.
"구경났어?"
- ....
- ....
더 쳐다보면 눈알을 불태워 버릴 것만 같은 살벌한 기세.
학생들의 시선이 삽시간에 뿔뿔이 흩어지고 각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홍연화는 자신을 향한 관심이 줄어들 때까지 주변 곳곳에 눈빛을 번뜩이다가, 이내 가만히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댔다.
이런 모습도 루비 마탑주랑 판박이다.
"진짜 닮았네."
"...?"
내 혼잣말이 들렸는지, 그때까지도 단잠에 빠져 있던 서예인이 부스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고, 내 시선을 따라 천천히 교실 밖으로 시선을 돌려 홍연화를 발견하고, 또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 철컥,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마력총을 꺼내 들려 하길래 급하게 제지했다.
"아니야. 쟤 싸우러 온 거 아니야. 총 집어넣자."
"그럼 결투?"
"결투도 아니야."
그간 나를 찾아온 손님들이 대부분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기는 했다.
곽지철과 정지수는 나를 반 강제로 에메랄드 부실로 끌고 갈 심산이었고, 에메랄드와 대자연은 협상 겸 결투 신청이 목적이었으니.
반면 홍연화는 나름대로 좋은 의도를 갖고 나를 찾아왔으리라 짐작된다.
싸울 생각은 요만큼도 없을 테고.
해서 일단 마력총을 도로 집어넣게 하고 서예인을 먼저 보냈다.
그리고 홍연화에게 다가가면서 묻자,
"어, 왜."
"아, 안녕."
불같던 기세가 삽시간에 사그라들고 온순하게 변한다.
목소리도 방금 전에 '구경났어?'하고 말할 때와 비교하면 절반가량 줄어든 상태.
"그게, 줄 게 있어서.... 왔는데에...."
나는 슬쩍 주위를 훑어보았다.
찾아온 이유는 대강 감을 잡았지만, 이야기를 나누기에 교실 앞은 별로 좋은 장소가 아니다.
홍연화가 한 번 눈을 부라려서 쫓아냈는데도 여전히 몰래몰래 훔쳐보는 눈들이 많다.
"가면서 얘기하자."
"응."
어차피 멘토링도 같이 듣겠다, 나는 홍연화와 함께 던전동을 향해 걸었다.
"...."
걷는 내내, 홍연화는 곁눈질로 내 눈치를 살폈다.
눈치를 살피는 것 치고는 곁눈질하는 빈도수가 많기는 했다.
나름대로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이겠거니 싶어서 일단은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러자 마침내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홍연화가 작게 심호흡을 하고 말문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
"어. 줄 거 있다면서."
"응, 부장님이 이거 전해 달라고 했는데...."
여기서 '부장님'이란, 언니인 홍예화가 아니라 대장장이 동아리 부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장장이 부장이 나에게 전해 달라는 '이거'란.
길쭉한 상자 하나, 그리고 자그마한 상자 하나였다.
'완성됐군.'
긴 상자는 [제작 VIP 티켓]을 제시하면서 의뢰한 장비 아이템.
그리고 작은 상자는 대장장이 부장이 만년한철과 블랙 미스릴 합금을 녹이는 데 실패했을 때,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남는 재료로 따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일단 작은 상자는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메인 디쉬인 긴 상자를 열자,
푹신한 쿠션 위에 30cm를 조금 넘는 아주 짧은 봉이 놓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검은빛을 띠며 은은하게 과하지 않은 광택을 머금었다.
언뜻 보면 단순한 금속 막대기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다른 장비와 연결하거나 부품을 장착할 접합부가 아주 정밀하게 구현되어 있다.
[뿌리(A)]
▷매우 높은 마나 전도율
▷손상 방지(A) 적용
▷내구도 자동회복
▷업그레이드 가능
▷업그레이드 가능
▷업그레이드 가능
▷업그레이드 가능
'역시 장비 제작은 재료가 반이야.'
주 재료로 만년한철을 집어넣었더니 바로 A급이 튀어나왔다.
3학년을 넘어 졸업한 이후에도 통하는 고등급.
파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높은 전도율 덕분에 마법을 시전할 때도 낭비되는 마나가 없다.
다만 당장은 이 옵션들 외에 특별한 능력은 없다.
[뿌리]는 내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EX급 무기의 부품 하나.
그림에 비유하면 한 귀퉁이만 겨우 그린 수준에 불과하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말도 된다.
업그레이드 슬롯이 무려 4개나 되니까.
보석을 붙이면 완드가 될 것이요, 날붙이를 붙이면 병장기가 될 것이다.
생각난 김에 한 자리를 채우기로 했다.
미리 마법공학 동아리에서 제작해 두었던 부품을 장착하자,
[뿌리(A)]
▷내구도 자동회복
▷레비테이트 존(C) 상시 발동
▷업그레이드 가능
▷업그레이드 가능
옵션이 하나 추가되었다.
레비테이트 존.
상승기류를 일으켜 범위 내의 모든 것을 떠오르게 만드는 바람 마법이다.
싸구려 철봉이 토대였을 때에는 F급이던 것이, 마나 전도율이 훨씬 높은 뿌리에 장착하니 C급으로 확 뛰어올랐다.
당장 실전에서 써먹어도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다.
만족스럽게 뿌리를 이모저모 뜯어보고 있으니 홍연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들어?"
"잘 나왔네. 기대 이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홍연화가 드물게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주괴를 녹이는 데 자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거기에 들인 시간과 수고가 적지 않다 보니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이 뿌듯한가 보다.
덕분에 이후에는 분위기가 훨씬 덜 경직되고 부드러워졌다.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던졌다.
"아쿠아플레임 랭크는?"
"올렸어. 이제 C랭크야."
예상했던 대로, C랭크를 달성했을 때부터 만년한철 합금이 빠르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단다.
"랭크작은 앞으로도 비슷하게 하면 돼."
"응, 그러려고. 마탑 쪽 반응도 긍정적이야."
아쿠아플레임은 상당히 희소한 특성인 만큼 랭크를 올리는 방법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었다.
해서 루비 마탑 측에서도 무작정 자원을 쏟아붓기가 망설여졌을 테지만, 홍연화가 확실한 성과를 낸 이상 앞으로는 보다 전폭적으로 지원하려 들 거다.
그럼에도 홍연화는 썩 희망적이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무리 루비 마탑이라도 만년한철 같은 고등급 재료를 쉽게 구할 리가 없다.
덧붙여 홍연화의 아쿠아플레임은 랭크가 올라가며 더 강력해진 상태.
만년한철 수준의 재료는 순식간에 사르르 녹아 버릴 테니, 그 이상 가는 무언가를 써야 제대로 랭크작이 된다.
이런 이유로 기회가 그리 자주 오지는 않으리라 보는 것 같은데,
"꼭 재료를 써서 랭크작을 하라는 법은 없지."
"...그럼?"
나는 대답 대신 전방으로 눈짓했다.
우리가 향하는 목적지, 던전동이 그곳에 있었다.
"던전도 많고, 몬스터도 많고."
"아...!"
홍연화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번에 만년한철을 통해 이득을 너무 많이 봤기에, 계속 재료 쪽으로만 생각이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쿠아플레임 성장의 핵심은 '강한 냉기를 머금은 무언가'를 꾸준히 태우는 것.
그 조건에만 부합한다면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가령 설원 지대를 배경으로 하는 던전에서는 빙속성 몬스터들이 잔뜩 몰려나온다.
던전에 입장해서 내내 몬스터들을 때려잡아도 좋고, 강력한 보스를 노려도 좋다.
"재료랑 던전 말고도 방법은 많아. 급할 것 없으니 하나씩 상의해 보자고."
"...! 언니랑도 얘기해 볼게."
홍연화의 얼굴이 설렘으로 상기되었다.
말은 얘기해 본다고 하지만 이미 성사된 거래나 마찬가지였다.
'거절할 리가 없지.'
아쿠아플레임의 성장을 돕는 대가로 나에게 뭘 주든, 만년한철 이상 가는 재료를 구하는 것보다는 싸게 먹힐 테니까.
앞으로도 루비 마탑과 지속적으로 거래를 주고 받으며,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 * *
"케르륵?"
고블린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놈의 몸은 바닥에서 한 치쯤 붕 떠오른 채였다.
그런 상황은 주위의 다른 고블린들도 비슷했다.
레비테이트 존의 효과.
범위 내에 상승기류를 발생시켜 모든 것을 띄워 올린다.
바람의 세기는 그리 강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지속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떠오른 놈들을 윈드포스로 슬쩍 밀자 아주 손쉽게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그르륵...."
참수자 고블린은 조금 더 버텼으나 결과는 비슷했다.
한참 전부터 식칼을 마구 휘두르며 나에게 돌진해 오고 있었으나, 맞바람에 부딪혀 하릴없이 제자리걸음만 해댈 뿐이었다.
거기다 대고 슬쩍 뿌리를 젓자,
- 휘잉—
사방에서 바람이 집중되며 놈을 옴짝달싹도 못 하게 만들었다.
회오리치는 바람에 따라 자세가 조금씩 옆으로 틀어진다.
비슷한 양상으로 바람 마법을 반복해서 시전하던 중, 시야 한켠에 출력되는 알림 메시지.
['트위스터(F)'를 습득합니다.]
'익혔군.'
근 며칠간 수도 없이 많은 회오리를 만들고 고블린들을 날려 보낸 결과, 마침내 새로운 스킬을 습득한 것이다.
당규영은 여신상 근처에 걸터앉아 멍하니 상념에 빠져 있었는데, 바람의 흐름이 갑작스레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벌써 익혔어?"
"네."
"아니, 그게 3일 만에 돼? 쉬운 스킬 같지도 않던데."
"집중해서 열심히 하면 됩니다."
"...너 가끔 보면 재수 없을 때가 있어."
흐름을 끊임없이 제어해야 하는 바람 마법인데다, 회오리를 만드는 구조의 복잡함 때문에 습득 난이도가 제법 높기는 했다.
다만 내 컨트롤은 고인물의 경지를 넘어 화석 수준이고, 트위스터는 그런 내가 몇 번이고 걸어 봤던 길이다.
거기에 멘토링 보너스까지 듬뿍 받는 중이니 3일 만에 못 익힐 것도 없었다.
"근데 정확히 뭐 하는 스킬이야?"
"직접 보시죠."
"아니 나한테는 쓰지—"
- 휘잉—!
나는 다분히 고의적으로 트위스터를 시전했다.
회오리가 당규영을 감싸 안으며 움직임을 제한하려 든다.
"악!! 너 진짜!"
당규영은 스티커 대인전에서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질겁하다가 자기 발밑의 그림자와 하나가 되어 아래로 꺼지듯 사라진 뒤 등 뒤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그리고 두 손을 쭉 뻗더니 내 양 볼을 잡고 주욱 잡아당겼다.
"내가 그거, 바람 마법, 하지 말랬지."
"므은흡느드—"
웃음기를 머금고 사과하자 당규영이 뾰로통해져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곧 못 이기겠다는 양 표정이 점점 풀리더니, 볼을 약하게 위아래로 몇 번 잡아당기고 놓아주었다.
"요새 틈만 나면 기어올라. 아주 그냥 볼따구를 다 잡아 뜯어놔야 돼."
"그런데 왜 자꾸 볼만 잡아당기세요."
"말랑말랑 땡기기 좋아서 그런다, 왜."
당당하게 밝히니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당규영이 출구를 반쯤 열면서 물었다.
"아무튼 끝난 거지, 이제? 나 가도 돼?"
"안 끝났습니다. 랭크 올려야죠."
"에휴, 그래라. 우리 후배님 하고 싶은 거 다 해!"
당규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도로 여신상 옆에 걸터앉고,
- 휘잉—!
나는 [트위스터]로 만든 회오리에 고블린들을 끌어당겨 가두었다.
안에 갇힌 고블린들이 세탁기 속 빨래 돌아가듯 격렬하게 회전한다.
초록색 빨래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장비 얻었고, 스킬 익혔고.
'다시 특성을 손봐야겠지.'
▷복사-특성[2/2]
1. 원소 저항(S)
2. 제사장(D)
두 번째 슬롯에 등록해 둔 특성, 제사장.
마나 수련에 꽤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코어]가 C랭크에 오른 현재는 다른 특성을 덮어씌워 활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다만 곧바로 덮어씌우기는 살짝 아쉽고, 한 번 더 써먹을 데가 남았다.
나는 발밑으로 시선을 주었다.
'또 내려갈 때도 됐지.'
지하층으로.
102화 튼튼이 볼펜
고현우는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미동 하나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기의 파동과 함께 옅은 미풍이 불었고, 특수연공실의 농도 짙은 마나가 파도치듯 일렁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의 파동도 잠잠해지고 미풍도 점차 정돈되며 가라앉았을 무렵.
고현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침이로군.'
고현우의 하루는 이렇듯 특수연공실에서 밤새 운기조식을 하다가 눈을 뜨면서 시작되었다.
벽곡단 한 움큼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단백질 쉐이크를 원 샷한 다음 교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실력을 배양하는 것만큼이나 지식을 쌓는 것 역시 중요하기에, 수업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들어가는 고현우였다.
몬스터와 던전, 스킬과 특성, 각종 아이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그에게는 더없이 유익하게 느껴졌다.
수업이 끝나면 멘토인 선배 고수의 지도를 따라 수련을 하며, 주어진 실기 평가를 수행한다.
이쯤 되면 벌써 하루의 절반가량이 지나간 상태.
그러나 아직 휴식을 취하기에는 이르다.
틈틈이 한소미와 목검을 휘두르며 대련한다.
한소미는 여전히 별로 안 내키는 기색이었지만, 일단 대련에 들어서면 건성건성 하지 않고 끝까지 진지하게 임했다.
한바탕 검을 섞고 나면 고현우가 빙긋 웃으며 말한다.
- 한 소저, 오늘도 고생 많으셨소. 그럼 다음에 또.
- 흥, 당과 다 떨어지면 안 해 줄 거야.
콧방귀를 끼고 떠나는 한소미.
그러나 김호에게 듣기로는 당과를 꽤 많이, 한 아름 안겨 줬다 하니 다 떨어질 때까지는 한참 남지 않았나 싶다.
다음으로 조용한 곳에 홀로 앉아 명상에 들어간다.
수업, 멘토링, 공략전, 대련....
배우고 겪은 모든 것을 되새기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싶어서 고현우가 눈을 뜨면, 바로 앞에 세워 둔 달마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름 모를 기인이 조각한 달마상.
흑사방에서 김호가 얻은 뒤 통 크게도 제게 빌려준 것이다.
당시 잠시 살펴본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어 백사의 삼초식 시험을 견뎌 낼 수 있었다.
시간을 두고 관찰한다면 그 이상을 얻을지도 모른다.
"...."
달마상의 웃는 얼굴을 뚫어져라 마주 보는 고현우.
어느 날은 별다른 소득 없이 시간 낭비만 하고 끝났지만,
어느 날은 아주 조금이나마 그 무리(武理)의 끝자락을 엿볼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얻는 것이 꽤 많아, 그 흥취를 못 이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너울너울 검무를 추기도 했다.
달마상과 한참 눈싸움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덧 밤이 깊어 밖이 어두컴컴하다.
그때부터는 특수연공실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간다.
또다시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련 또 수련.
장래의 영웅을 꿈꾸는 용살학원 학생들조차 학을 뗄 듯한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고현우는 요즘이 가장 즐거웠다.
하루하루 강해진다는 느낌을 이토록 뚜렷하게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일취월장이라는 단어가 그야말로 제격이었다.
이런 나날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면 수련의 고통도 웃으면서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김 형에게 감사해야겠군.'
그리고 이토록 빠른 성장에 대해 즐거워하는 만큼, 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 준 김호에 대한 고마움도 컸다.
돌이켜 보면 어느 하나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수연공실 시즌 패스, 튼튼이 클립, 주술검, 멘토링, 달마상, 한소미와의 대련....
김호는 그것들이 '합당한 대가'라고 말했다.
등을 맡길 수 있는 믿을 만한 동료로서 던전에 함께 들어가, 목숨을 걸고 싸워 주는 대가라고.
그러나 고현우가 받아들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친우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손을 보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또한 무인이라면 강자와의 싸움에 기꺼이 목숨을 걸 줄 알아야 한다.
대가를 받을 게 아니라, 오히려 기회를 마련해준 김호에게 고마워해야 맞다.
그렇다면 그 당연한 것들을 모두 빼고, 그가 김호에게 해 준 것은 무엇이 있는가?
언제나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은 느낌이었다.
'이 빚은 두고 두고 갚아 나가야 할 것이다.'
고현우가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천풍문의 제자는 은(恩)도 원(怨)도, 결코 잊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 * *
"받아."
고현우는 김호가 불쑥 내미는 물건을 조건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받고 나서 확인해 보니 손바닥만 한 작고 가느다란 상자였다.
"웬 것이오?"
"네 거."
김호가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빨리 열어 보라는 듯 눈짓했다.
또 뭘 자꾸 주나 싶으면서도 내용물이 궁금하기도 했기에 고현우가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진 볼펜 한 자루.
뚜껑을 여닫는 형태이며 전체적으로 은은한 검은 광택을 머금었다.
"허어."
고현우는 천성이 무인으로 학용품 따위에 가치를 두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이 볼펜을 봤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물건임이 느껴졌다.
멍하니 볼펜을 들여다보던 고현우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전체적으로 검은빛을 띠고 있어 다른 금속인 줄 알았으나,
"이것은 만년한철이 아니오?"
흑사방에서 온갖 고난 끝에 얻은 [방주의 주괴 상자].
거기에 서예인의 엄청난 행운이 더해져서 뽑은 만년한철.
이 볼펜은 바로 그 만년한철로 제작한 것이었다.
김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찬가지로 은은한 묵빛을 머금은 단봉을 내보였다.
새로 제작한 무기인 듯했다.
"이거 만들고 재료가 조금 남더라. 낭비하기도 아깝고 해서 대장장이 아재—선배님한테 따로 부탁을 드렸지."
"으음...."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으나, 고현우는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장인이라는 작자들이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부탁 몇 마디 한다고 뭘 더 만들어 줄 리가.
분명 모종의 거래가 오갔을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호가 고현우의 앞주머니에 꽂아 둔 클립을 가리키고,
[튼튼이 클립(D)]
▷무기 내구도 보호
▷무기 내구도 자동회복
다시 볼펜을 가리켰다.
"그거랑 그거, 붙여 봐라."
"...?"
고현우가 의아함에 볼펜을 자세히 확인해 보니, 과연 뚜껑 부분에 아주 작고 정교한 홈이 마련되어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클립을 장착하자 처음부터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애초에 두 아이템을 합치는 것을 상정했던가.
고현우가 김호의 설계에 감탄하며 아이템 설명을 확인했다.
그리고 또다시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엄청난...!"
[튼튼이 볼펜(A)]
▷매우 높은 마나 전도율
▷손상 방지(A) 적용
▷무기 손상 방지(C) 적용
▷무기 내구도 자동회복
만년한철이 재료로 들어갔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무려 A급이다.
고현우가 하산하고 본 아이템 중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
[튼튼이 클립]의 '무기 내구도 보호' 옵션은 분명 도움은 주는 듯했으나 크게 체감은 되지 않았었다.
어렴풋이 [깃털뱀 주술검]의 높은 내구도와 상호 보환된다는 사실만 짐작할 뿐.
이제는 그 '무기 내구도 보호'가 '무기 손상 방지(C)'로 바뀌었다.
확실하게 랭크로 매겨지는 C급.
C급이 결코 낮지 않은 등급임을 감안하면, 앞으로 고현우가 강한 초식을 연이어 사용하더라도 주술검이 파괴되는 모습은 보기 어려우리라.
게다가 볼펜은 볼펜이지만 무려 만년한철로 제작한 볼펜이다.
만년한철의 강도를 생각하면 누구 머리를 찍어 버리기에는 충분하니 부무장으로 써도 좋을 듯했다.
다만 아이템의 성능은 성능이고....
이미 김호에게 조금씩 부채감이 쌓여 가는 고현우의 입장에서 이 튼튼이 볼펜은 마냥 달갑기만 한 선물은 아니었다.
고현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김 형에게는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소. 허나 계속 이렇게 받기만 하는 것도 마음이 편치 못하구려."
그러자 김호가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계속 받기만 한다니, 계산이 왜 그렇게 되냐. 흑사방에 같이 들어갔는데 너한테도 지분이 돌아가야 맞지."
"그렇지 않소. 본인의 지분은 달마상만으로도 차고 넘친다고 생각하오."
"그건 잠깐 빌려준 건데 왜 차고 넘쳐?"
"빌려준 것은 달마상이지만, 김 형이 실제로 본인에게 준 것은 기연을 얻을 기회 아니오? 목숨을 걸 가치는 충분하지."
"음. 그러냐."
고현우가 뜻을 굽힐 기미를 보이지 않자 김호가 잠시 침음하더니, 이내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찾았다는 듯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정 그러면 선금이라고 생각해."
'선금'이라는 말은 다음에 그들이 얻을 무언가에서, 고현우의 지분을 볼펜으로 대신한 셈 치자는 말이다.
그 무언가는 십중팔구 던전 보상이 될 테고, 그것은 곧 조만간 던전에 들어갈 일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건 듣던 중 반가운 말이로군. 지하로 내려가는 거요?"
"어. 가서 가져올 게 있어."
"좋소. 본인의 검이 필요하다면 언제고 말만 하시오."
"그래?"
김호가 고현우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럼 오늘 밤."
* * *
늦은 밤.
고현우와 김호가 던전동 인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 장소에는 이미 신병철이 대기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한없이 뺀질거리지만 의뢰 하나는 철저하게 수행한다.
신병철이 인기척을 느끼고 두 사람을 쳐다보는 것과 거의 동시에 고현우가 인사를 건넸다.
"신 형."
"아이고 고객님들, 어떻게 저녁 식사는 잘들 하셨는지.... 자! 이것들 받으시고."
신병철이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아무개 뱃지]와 2학년 넥타이핀을 하나씩 나누어 준다.
인식방해 마법을 통해 혹시나 마주칠 선배들의 의심을 피해 가기 위함이다.
김호가 교복에 뱃지를 달며 물었다.
"이번에도 선배들 세 번씩 보고 그러는 거 아니지."
"아유, 당연히 아니지요. 선배가 뭐야, 쥐새끼 한 마리 안 마주치게 스무스하게! 모시겠습니다."
"저번에도 비슷한 소리 하지 않았니?"
"아잇, 이번에는 진짜다. 한번 믿어 보셔."
신병철이 호언장담하더니, 앞장서면서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일행은 신병철이 안내하는 대로 원형 계단을 밟고, 이따금씩 다른 통로로 방향을 틀며 지하 깊은 곳으로 향했다.
듬성듬성 숱이 빠진 깍두기 머리를 보며 걷다가 고현우가 말문을 열었다.
"확실히 신 형의 길잡이 역할이 상당히 능숙해진 듯하오. 이전과는 여러모로 다르구려."
신병철이 처음 그들과 지하층에 내려왔을 때는 중간중간 멈추거나 오른쪽 통로를 선택할지, 아니면 왼쪽 계단을 타고 내려갈지 고민하는 등, 다소 헤매는 느낌을 받았었다.
반면 지금은 주저함이 거의 없고 내려가는 속도도 가볍게 달리는 정도로 빠른 편이다.
고현우의 칭찬에 신병철이 우쭐거렸다.
"요즘 내가 지하에 한두 팀 데려다 주는 게 아니란 말이야. 이쯤 되면 나도 경력자 아니겠냐?"
"하하하,"
다만 여전히 유감스러운 점 하나는 이번에도 뚜벅이 신세라는 것이다.
당규영처럼 기막힌 은신 스킬을 가졌거나 채다빈처럼 마법공학 장비들을 무력화시킬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승강기를 이용할 수가 없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1학년 길잡이를 고용하면 퀄리티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김호도 고현우도 던전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이런 사소한 불편함은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스타일이었기에, 그저 열심히 뚜벅거리며 내려갈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D층.
목적지에 도달하자, 불길하게 입을 벌린 포탈이 그들을 반겼다.
[No.353] [깃털뱀 사원]
103화 No.353 깃털뱀 사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