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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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본부, 본부장실.
구조조정이 시행된 직후부터 최호성 본부장은 꽤나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대단하십니다. 그 외골수인 협회장님을 설득하시다니."
때를 놓치지 않고 유영수 수행비서가 격양된 어투로 아첨을 떨었다.
"됐어. 뭐 큰일이라고."
최호성 본부장은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지만 내심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싫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근래 들어 최고로 기분이 좋았다.
물론 구조조정으로 예산이 꽤나 확보된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철옹성 같던 김준우 사단을 보란 듯이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이사회는 물론 협회장까지 굴복시켰다.
이건 김준우의 뒤를 이어 막 본부장이 된 그에겐 굉장히 시사하는 바가 컸다.
곧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대로만 가면 김준우의 영향력을 넘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설레발 치지 마. 녀석이 해 놓은 게 워낙 많아서 아직은 멀었으니까. 무엇보다 작전 1팀의 그 여자랑 통제팀장도 김준우 사단이잖아."
"김민주 팀장이랑 편창현 팀장 말입니까? 에이, 협회가 뭐 친구 놀이하는 곳도 아닌데 언제까지 나간 사람 편에 있겠습니까.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본부장님한테 붙겠죠."
"그것도 그렇긴 하지."
최호성의 얼굴에 숨겨왔던 미소가 번졌다.
이미 협회장도 넘어온 마당에 아랫놈들 몇 명이 움직인다고 방해될 리가 없다.
방해는커녕 서로서로 달라붙으려 애를 쓰겠지.
본부의 실권을 쥐는 것도 금방이겠군.
최호성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사실 두 남자의 장기 말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 못 한 채.
"그나저나 청소팀이 절반이나 사라져서 이제 김준우 때 같은 기획은 힘들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뭐 별거 있겠어. 지부에서 했던 것처럼 하면 되겠지."
"작전팀 중심 토벌 말씀이십니까?"
"그래. 애초에 청소팀이 많다고 토벌이 효율적으로 된다는 것부터가 근거 없는 거 아니냐. 토벌은 무조건 작전팀만 중점이 되면 돼."
유영수는 조금 떨떠름했지만 내색할 순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시작이 좋으니까 이대로만 계속 밀고 나가자고."
"네."
***
전라도 순천 지부.
청소팀 파견 계약의 첫 번째 타깃으로 이곳을 선택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내 추천으로 최호성이 서울 본부로 가게 됐으니, 아직 지부장이 비어 있는 틈을 타 계약을 체결하려는 것뿐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작군요."
이아영과 함께 지부 앞에 도착하자마자 처음으로 든 감상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아영도 동감하는 듯했다.
행정 본부, 작전 본부 모두 고층의 건물을 두고 있는 서울과 다르게 구청 정도의 크기였다.
현관으로 들어서 2층으로 향하자 약속 시각에 맞춰 총무부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강형원 부장입니다."
지부장이 없으니 지부 내 업무를 도맡아 관리하는 모양이다.
"반갑습니다. 연락드린 김준우 대표입니다."
"이아영 실장입니다."
인사와 함께 명함을 건넸다.
내 이름을 듣고 명함을 받은 강형원 부장이 눈썹을 올렸다.
그리곤 내 얼굴을 살피길 잠시.
"혹시 서울 전 작전 본부장의 그 김준우 님...?"
"아… 네. 맞습니다."
뜨억 하는 표정.
"이, 이거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본부장님이 직접 오실 줄 알았으면 대접을 해드렸어야...."
"진정하십시오. 사퇴한 지 벌써 한 달이 다 돼갑니다. 지금은 일개 작은 회사의 사장일 뿐이니 부디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그, 그래도 어떻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강형원 부장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 그럼 이쪽으로...."
그는 여전히 쩔쩔매는 목소리로 우리를 접견실로 안내했다.
곧바로 준비한 서류를 건넸고, 그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저희 쪽에서 조금 알아보니 순천 지부의 몇 년 사이 토벌량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더군요."
"인원이 부족해서 하루 토벌량에 한계가 있다 보니… 토벌 대부분을 거의 민간 길드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덕분에 길드 입김도...."
"입김도?"
"아, 아닙니다. 하하."
강형원 부장이 적당히 얼버무렸다.
어째 혼나고 있는 학생 같은 태도에 퍽 답답해질 정도였다.
무슨 들키면 안 되는 문제라도 있는 건가.
"뭐… 아무튼 8개 작전팀이 적은 수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작전 효율이 나지 않는 건 청소팀 때문일 겁니다."
"...그런가요?"
"작전팀의 토벌량은 청소팀의 작업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까요. 현재 순천 지부 내 청소팀은 세 팀밖에 없죠? 그마저도 팀당 인원이 3명씩이고."
"네."
"만약 청소팀 지원을 받으신다면 하루 토벌량도 눈에 띄게 상승할 겁니다. 저희 추정으로는 하루 토벌량은 50% 상승, 월 기대 수익은 200%가 넘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관련 자료는 그 뒷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가 들고 있는 서류를 가리켰지만, 강형원 부장은 더 살필 생각도 없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본부장님이 하는 말씀이니 정확하겠죠."
"...."
이게 지금 계약을 하러 온 건지, 업무 지시를 하러 온 건지.
'사람 참 물렁물렁하네.'
뭐, 담당자의 성향이 어떻든 간에 계약만 순조롭게 풀린다면 더 신경 쓸 건 없지만.
나는 준비해뒀던 계약서를 내밀었다.
강형원 부장은 계약서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사인을 휘갈겼다.
"그럼 바로 다음 주부터 필요하실 때마다 사무실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연락 주실 땐 던전 등급이랑 몬스터 정보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에 대한 건 다른 분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은 무슨....
누가 보면 대통령이라도 온 줄 알겠네.
우린 그렇게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첫 계약을 마쳤다.
"생각보다 너무 쉬운데요?"
이아영 실장이 기지개를 쭈욱 켜며 입을 열었다.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나 모르겠습니다."
그냥 네네 대답만 하다가 바로 사인을 휘갈기지 않았던가.
원래 저렇게 잘 휘둘리는 성격인가 싶을 정도였다.
"뭐, 그래도 나름 지부 책임자인데 알아서 잘하겠죠."
꽤나 긍정적인 마인드네.
저러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누가 고생하는 건지 모르는 건가.
"다음 계약은 어디로 할 거예요? 생각해둔 곳 있어요?"
"돌아가서 알아봐야죠. 청소팀 인원과 스케줄을 고려했을 때 너무 많이 계약을 따도 다 소화할 수가 없으니, 일단 5개 지부와만 계약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이제 겨우 하나 했으니 4개 남았네.
서류를 펼치며 계약할 지부들과의 면담 스케줄을 다시 한번 확인하던 중.
"뭐야. 처음 보는 얼굴들이네?"
멀찍이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정면에서 한 무리의 헌터가 우리를 흘기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이아영 실장을 향해 물었다.
"...아는 사람들입니까?"
"아뇨? 지부 작전팀 아닐까요."
"그런 것 치곤 복장이 좀 프리한데."
티 나지 않게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때.
"못 뵈던 분들이신데, 혹시 작전팀 신입?"
무리의 선두에 있던 한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빼빼 마른 체형에 후드티 복장의 남자였다.
나는 거리를 두고 경계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뇨. 외부 업체 직원입니다. 청소팀 파견 계약 건 때문에 총무부장님을 만나 뵙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청소팀 파견…? 그런 것도 있어?"
남자는 의아한 얼굴로 동료들을 돌아봤다.
"그 왜 저번에 뉴스에도 잠깐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 난 처음 듣는데."
그리곤 자기들끼리 무어라 떠들어댔다.
아니, 다 좋은데 왜 불러놓고 지들끼리 떠드는 건가.
최소한 인사라도 하든가.
보다 못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그쪽은...?"
"아, 이런 소개가 늦었습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순천 관할 백제 길드, 심현수 대표입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놀랍게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물론 남자의 이름 말고 길드 이름을.
백제 길드.
순천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길드이자 국내 16위 길드.
그런데 왜 백제 길드가 순천 지부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걸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정말 청소 파견 업체 맞으시죠?"
심현수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물었다.
기세가 묘하게 날카롭다.
"...예?"
"다른 게 아니라 간혹가다가 다른 지역 길드나 프리랜서 헌터들이 침범하는 경우가 있어서요. 모쪼록 불편한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정식으로 허가받은 업체입니다. 여기 명함...."
"아, 그럼 됐습니다."
명함을 꺼내려고 하자 심현수 대표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불과 15초 정도 마주했지만 확실하다.
이 새끼, 싸가지가 매우 없다.
심현수 길드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외부 업체라면 이쪽 상황은 잘 모르시겠군요."
"특별히 알아야 할 사항이라도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여긴 대부분의 토벌이 작전팀보단 길드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부 또한 길드에 많이 의존하는 실정이고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저희야 너무 감사한 일이긴 하지만… 사실 힘들기도 합니다. 해야 할 토벌은 많은데 인원은 한정적이고, 무엇보다 지부처럼 본부에서 지원금이 꼬박꼬박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가 나를 슬쩍 흘겼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대답을 아끼고 있던 그때.
"혹시 길드 발전 기금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하."
나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짚었다.
어째 심하게 빙빙 돌린다 했더니 결국 이런 말을 꺼내려고 했던 건가.
"죄송합니다. 들어본 적 없군요."
"하하하! 잘 모르시니 그럴 수도 있죠. 이쪽 업계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걷어주는 기금인데, 적은 금액이어도 상관없으니 혹시 생각 있으시다면...."
"거절하겠습니다. 저흰 외부 업체라 딱히 관계도 없는 것 같군요."
"...."
그의 얼굴이 갑자기 굳었다.
누구를 호구로 보는 건가.
발전 기금이라는 명목으로 길드에서 돈을 뜯어가는 일로 이미 수도권에서는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문제가 발생하며 공식적으로 금지된 지가 벌써 몇 년째였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러고 있는 놈들이 있을 줄이야.
지방이라 아직 풍조가 남아 있는 건가.
"흐음, 외부 업체라고 해도 길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그쪽 입장에서도 나쁘진 않을 텐데요. 말씀드렸다시피 여긴 지부보다 길드의 입김이 셉니다. 청소팀도 작전팀보다 저희를 더 많이 마주치실 텐데...."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는 참이었기에 나는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심현수 길드장은 오히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도 좀 뭐하지만… 제가 최호성 전 지부장님과도 잘 아는 사이거든요. 아시죠? 이번에 서울 작전 본부장으로 취임하신 분. 제가 좀 부탁드리면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실 겁니다."
"마음은 고맙게 받겠습니다만, 다시 생각해 봐도 저희와는 딱히 상관없을 것 같군요."
"...뭐, 알겠습니다. 기금을 강요할 순 없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갑자기 표정을 풀고는 호의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기세가 꽤나 께름칙했다.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네. 그럴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그가 다시 손을 내밀었지만, 이아영을 데리고 그들을 가로질렀다.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따라붙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어요? 길드가 돈을 요구해? 그것도 일반 시민한테?!"
상당히 뿔이 난 목소리.
이아영 실장은 방금 상황이 꽤나 납득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뭐, 누군 안 그러겠느냐마는.
"그만큼 길드의 입김이 세다는 거겠죠. 그쪽도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지방 지부일수록 텃세가 심하다고. 뭐, 그런 것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저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것도 결국 믿는 구석이 있다는 소리겠지.
실제로 길드의 도움 없이는 모든 토벌량을 소화할 수 없을 테니까.
그걸 알고 이용해 먹고 있는 거겠지.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좀 같잖긴 하네.
"그나저나 괜히 길드랑 척을 졌다고 불이익이 있지는 않겠죠?"
"저희가 토벌에 참여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불이익이 있겠습니까. 해봤자 눈치 주는 것 정도겠죠."
보아하니 지부에도 입김이 좀 닿는 것 같은데.
하여간 이래서 어중간한 놈이 힘을 가지면 귀찮다니까.
"일단은 두고 봅시다. 먼저 나서서 문제를 만드는 것도 좀 그렇고."
"...그래요."
다시금 주차장으로 걸음을 떼려던 차였다.
"근데… 바로 서울로 돌아갈 거예요?"
이아영 실장이 그 자리에 서서 물었다.
"그럼 뭐 또 할 게 남았습니까?"
"근처에 간장게장 맛집 있던데, 먹고 가죠?"
"...."
대체 그건 언제 찾아본 거야.
뭐....
여기까지 와서 꿀꿀한 마무리로 끝내는 것도 좀 그렇겠지.
"…그럽시다."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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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지부 건물.
"그놈들 표정 보셨어요?"
심현수 길드장과 함께 복도를 가로지르던 길드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아주 싹수가 노랗네요. 그래 봤자 청소 회사 주제에."
"보아하니 이 바닥에 뛰어든 지도 얼마 안 된 놈들 같은데."
그 뒤를 따라 다른 길드원들이 한 마디씩 덧붙였다.
굉장히 아니꼬운 듯한 말투로 씹고 있는 가운데 심현수 길드장은 어딘가 께름칙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왠지 낯이 익은 얼굴이어서."
어디서 봤더라? 머리를 쥐어짰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뉴스에서 스치듯 본 게 전부였으니 기억이 안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째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떻게, 신고식이라도 좀 해둘까요."
"어떻게?"
"별거 있겠습니까. 청소부한테 청소 일 시키는 거죠, 뭐."
"뭐… 니들이 알아서 해."
심현수 길드장은 생각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오셨습니까."
2층에 도착하자 강형원 부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음에도 심현수 길드장의 고개는 상당히 빳빳했다.
강형원 부장은 더 대꾸하지 않고 사무실로 안내했고, 이내 둘은 테이블을 두고 서로 마주 앉았다.
심현수가 지부를 찾은 건 이번 달 작전팀과의 작전 조율을 위해서였다.
거의 20%에 달하는 던전을 민간 길드에 기대고 있는 실정이기에 이처럼 매달 협의가 필요했다.
순천 내에서 가장 덩치가 큰 길드의 대표인 심현수는 지부로부터 던전을 양도받아 주변 길드에 분배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사실 원칙대로라면 양도할 던전의 개수는 지부에 결정권이 있었지만....
"이번 달 작전은 저희 쪽에서 10% 더 가져가겠습니다."
이미 주객이 전도된 지 오래였다.
"왜 이러십니까. 가뜩이나 저희도 적자라 힘든데...."
"적자라면서 청소팀 파견 업체 계약은 무슨 돈으로 하셨는지 모르겠군요."
"...."
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강형원 부장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던전 토벌이야 작전팀도 길드도 같이 하고 있지만, 청소는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외부 업체와는 계약하시면서 생사를 함께하고 있는 저희는 내버리시겠다는 겁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습니까."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그러실 거면 지부 혼자서 다 토벌하시던가."
"...하아."
쓰레기 같은 놈들.
본인들이 없으면 토벌량을 채울 수 없다는 걸 안 이후부턴 늘 저런 태도다.
'작전팀 인원만 충분했어도 저런 양아치들한테 걸릴 일도 없었을 텐데....'
강형원은 속으로 신음했다.
이미 본부에 몇 번이나 인원 충당을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답변은 '발령 인원 부족'이었다.
하기야, 돈 많이 주고 큰 도시에 있는 지부 두고 누가 이런 변두리 지부까지 오려고 하겠는가.
이해는 하지만 상황이 힘든 건 힘든 거였다.
'저것들은 왜 또 맨날 따라오는 거야.'
심현수를 따라온 길드원들을 슬쩍 흘기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사실 강형원 부장 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길드가 지부에 던전을 가지고 딜을 하는 건 사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 않은가.
굳이 길드원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냉정한 판단을 못하게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려는 거겠지.
"아무튼,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힘든 시기, 서로서로 잘 이겨내 봅시다."
"...."
심현수 길드장이 주먹을 불끈 쥐곤 힘 있게 말하며 볼일은 다 봤다는 듯,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형원 부장은 더욱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돌아가나 싶던 그때, 심현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맞다. 그 이번에 계약한 청소팀 업체 말입니다."
"...네."
"그쪽 작업은 저희가 토벌한 던전으로 좀 배치해주십시오."
강형원이 순간 흠칫했다.
저의를 알 수 없는 요청이었다.
혹시 저 인간, 청소팀 파견 업체 대표가 김준우 전 본부장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건가?
그래서 어떻게든 눈에 좀 들어보려고?
"...이유라도 있습니까?"
"별건 아닙니다."
심현수 길드장은 스리슬쩍 대답을 넘겼다.
"그럼 이번 달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뒤로하고 백제 길드는 우르르 사무실을 나섰다.
"하, 개 같은 새끼들...."
홀로 남은 강형원 부장의 한숨 소리만이 길게 울려 퍼졌다.
***
서울로 복귀한 후, 우린 계속해서 다른 지부를 돌며 계약을 진행했다.
그러던 중에 순천 지부에서 의뢰 연락이 왔고, 나는 곧바로 문소연이 맡고 있는 1팀을 파견했다.
공식적인 첫 번째 업무인 만큼 나 또한 내심 긴장했지만....
그들이 맡은 던전은 그린 등급의 '고대 개미' 던전.
특별한 위험 요소도 없는 데다, 무엇보다 벌써 본부에서 수백 번은 같은 일을 해온 베테랑들이 아니던가.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작업을 끝내고 사무실로 복귀한 1팀을 보고 생각을 바꿔야 했다.
"표정이 왜들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문소연을 비롯한 팀원들 모두가 낯빛이 퍽 어두웠다.
단순히 첫 업무의 긴장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심상치 않았다.
"아, 아니에요. 작업 잘 마무리하고 왔어요."
문소연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런데 왜...."
"정말 괜찮아요. 설마 첫 파견부터 문젯거리 만들고 왔겠어요? 그냥 먼 거리 왔다 갔다 해서 좀 피곤한 거예요."
그녀가 양손을 연거푸 휘저으며 부인했다.
단호하게 말하니 더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네. 그럼요."
이내 문소연이 싱긋 웃었다.
...그래, 첫날부터 뭔 일이라도 있었겠는가.
첫날은 그렇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 후로도 순천 지부에만 다녀오면 안색이 굉장히 좋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아무것도 아니다, 피곤해서 그렇다 등 같은 대답만 할 뿐, 통 입을 열질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모두가 퇴근하고 단둘이 남은 사무실.
이아영 또한 그간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말했다.
"아무래도 첫 계약 업체고 하니 문제 생기지 않게 말을 아끼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말이나 됩니까."
"소연 씨 성격 알잖아요. 괜히 말을 했다가 당신한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확실히 일리 있는 이야기다.
문소연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니까.
아주 답답하기 그지없다.
"담당자가 강형원 부장이라고 했죠? 무리한 작업을 요구할 사람은 아니던데."
"어느 쪽이냐고 하면 오히려 휘둘릴 만한 인상이었죠."
그렇게 대꾸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저희가 직접 가볼까요?"
"그것도 방법이긴 한데...."
우리가 가면 똑같은 문제가 있을 거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나중이면 몰라도 지금으로선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니다.
'하아, 뭐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양손을 뒤통수에 가져다 댔다.
사실 문제고 뭐고 다 신경 끄고 싶다.
나야 파견 업무가 주목적도 아니고, 입지만 다지면 밑에서 무슨 문제가 있든 알 바는 아니다.
'근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란 말이지....'
저러고 있다가 결국 못 참고 나가버리면 그땐 문제가 된다.
당장 파견할 인원 부족도 문제고, 덩달아 앞으로 계약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골칫거리다.
저만큼의 경력자들을 또 어디서 데려올 수 있겠는가.
'뭐 이런저런 문제 다 어떻게 한다고 해도, 사실 제일 무서운 건 협회장이긴 한데....'
잘 대해주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대거 이탈해버리면 그 꼰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일단은 다음 파견에는 한상혁이 맡고 있는 2팀에 맡기죠. 뭔 일이 있으면 숨길 성격은 아니니."
"차라리 유빈 씨는 어때요?"
"그 인간은 문제가 없어도 만들어올 사람입니다."
"...그렇긴 하네요."
"아, 그리고 1팀 전원 하루 위로 휴가 주시고요."
"네."
이아영 실장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렇게 파견 일정을 조율하고 며칠 후.
한상혁이 퇴근 후 나를 조용히 불러냈다.
어째 평소와 다르게 상당히 우물쭈물하는 모습이었다.
"뭔 일이 있긴 했나 보네."
내가 먼저 적당히 운을 떼자 한상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 있긴 있었는데.... 그쪽 지부는 원래 작전팀보다 길드가 대빵이냐?"
"...음?"
상당히 뜬금없는 질문이 돌아왔다.
"그렇긴 한데.... 그거랑 상관있는 일이냐?"
"우리가 맡은 던전이 죄다 백제 길드인가 뭐시긴가 하는 놈들이 토벌한 던전이더라고."
"흐음."
그건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고정으로 파견팀을 배정할 이유가 있나?
"근데 그 새끼들 아주 악질이더라고."
"예를 들면?"
"일단 토벌을 너무 지저분하게 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덕분에 던전 상태도 완전 엉망이라 작업량이 만만치 않아."
그것 가지고 문제가 있다고 보긴 힘들다. 그야말로 토벌은 토벌일 뿐이니까.
일부러 지저분하게 토벌을 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던전 안에 본인들 쓰레기를 버리고 가."
"뭐?"
"왜 초코바 껍질, 물통 그런 거. 심지어 한두 개도 아니고 죄다 하나씩은 버리고 간 것 같더라."
"허, 이런 양아치 새끼들을 봤나...."
"그리고 가정 쓰레기도 있더라."
"...?"
순간 내 눈썹이 요동쳤다.
"종량제 봉투부터 시작해서 플라스틱, 캔 등등, 그냥 본인들 집에 있는 쓰레기는 다 가지고 와서 버리는 것 같아. 음식물 쓰레기도 몇 개 있었고."
백제 길드가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야 뻔했다.
첫 만남에 밉보인 것에 대한 시답지 않은 보복이겠지.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을 봤나.
개인감정은 그렇다고 해도 엄연히 업무 중에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지.
"설마 가만히 있었냐?"
"솔직히 거기까진 그냥 그러려니 했어. 뭐… 본부에선 더한 꼴도 당했는데 그 정도쯤이야."
"뭐가 더 있었다는 거냐?"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원래 길드한테 배분된 던전은 돈을 내야 던전에 진입할 수 있는 거냐?"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우리가 작업하러 던전 들어갈 때 돈을 요구하더라. 길드에 배분된 던전에 진입하려면 길드 발전 기금을 내야 한다고...."
"...그래서 줬냐?"
"안 주면 못 들어간다는데 그럼 어떡해."
"허, 이런 시발 생 양아치 새끼들을 봤나."
엄밀히 따지면 길드에 던전을 배분하면 그 길드가 해당 던전의 토벌권을 갖는 게 맞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토벌을 진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뿐, 던전의 소유자가 되는 게 아니다.
던전 진입에 돈을 요구하는 길드?
내 생에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잠깐. 그럼 문소연은 그동안 계속 사비로 돈을 내고 작업을 했다는 소리야?'
그 녀석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난 솔직히 걔 이해가 가."
"이해가 간다고…?"
"나도 돈을 요구하는 건 아니지 않냐고, 지부에 항의하겠다고 했는데.... 할 거면 하라더라. 이 바닥에서 영영 일 못 하고 싶으면.... 보니까 지부 총무부장님이랑 꽤 친한 사이 같더라고."
"이 정도로 아무 말 하지 못하는 거면 친한 게 아니라 책을 잡혀 있는 거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렇게까지 나오면 문소연 성격에 말 못 할 만도 하다.
괜히 일을 키웠다가 정말로 계약 해지라도 당해버리면 모두 본인 때문이라고 생각할 녀석이니까.
나한테 피해를 줄 바엔 본인이 손해를 보더라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그냥 멍청한 건지....'
그래 봤자 고용된 직원 주제에.
회사 손해를 왜 한낱 직원이 감당하려는 건가.
한상혁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사실 나도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말 안 하면 뭐, 그럼 계속 남의 집 쓰레기 치워줄래? 사업은 이미지야. 여기서 아무 말 못 하고 가만히 있으면 우리만 호구 되는 거라고."
"...."
뭐, 사실 양아치 놈들이 하는 짓이야 무시하는 게 상책이지만.... 돈을 요구했다면 이건 사안이 달라진다.
이걸 그냥 넘어갔다간 체면이 안 선다.
그렇다고 어쭙잖게 대응하면 책을 잡힐 명분만 만들어줄 뿐이겠지.
앞으로 계약을 하는 데 있어 약점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이제 신경 꺼."
한낱 직원이 어떻게 하기에는 이미 한참 벗어난 상황이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려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야, 야! 뭐 어쩌려고! 괜히 그러다 정말로 계약이라도 해지당하면...."
"당하면 뭐?"
"...어?"
"계약 해지하면 뭐 어쩌라고. 어차피 거기 아니어도 계약할 데 많아. 그리고 네가 뭔데 그런 걸 신경 써. 주제넘게 회사 일까지 생각하지 말고, 넌 그냥 시키는 대로 청소나 해."
조금 날 선 말투에 한상혁이 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거친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명백한 이유가 있는 만큼 개인감정까지 생각해줄 마음은 없다.
"원래 이런 건 책상에 앉은 놈이 해결하는 거다."
깝치는 것도 정도가 있다.
그걸 모른다면 손수 가르쳐주는 수밖에.
095
095
순천 지부, 총무부 사무실.
나는 마주 앉은 강형원 부장에게 그간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곤 물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데. 알고 계셨습니까?"
"아, 아뇨 전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이전부터 불화는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온 경우는 처음인 듯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요?"
"그거야 대표님에 관해 이야기를...."
"제가 주변 사람들한테 말씀드리지 말라고 부탁했잖습니까."
강형원 부장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뭐, 이해는 한다.
그로서도 마땅한 방법이 없을 것이다.
몰상식한 짓은 그만두라고 권고는 가능하겠지만, 강제성이 없는 이상 무의미하다.
애초부터 지부 말을 들어 먹을 녀석도 아닐 테고.
아마 지들이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계속하겠지.
지부 입장에서는 인원도 모자란 실정에 무턱대고 백제 길드와 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
특히나 다른 길드를 회유해서 단체 행동이라도 벌였다가는 문제가 커진다.
잘못하면 던전에서 몬스터가 탈출하는 꼴을 대한민국에서 10년 만에 다시 보게 될지 모른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쳐들어가서 길드 채로 공중분해 시켜버리고 싶지만....'
단순하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저쪽에서 그랬다고 우리 또한 감정적으로 대응한다면 피해를 보는 건 순천 지부가 되겠지.
그렇게 되면 당연히 우리와 맺은 계약도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저 행패를 가만히 두고 볼 수도 없고....'
일단 당사자와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심현수 길드장을 불러줄 것을 요청했고, 강형원 부장은 곧바로 연락을 넣었다.
심현수 길드장은 어딘가 떨떠름한 얼굴로 지부에 나타났다.
그렇게 성사된 삼자대면.
가타부타할 거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글쎄요. 전 처음 듣는 일인데. 뭐, 어쩌다 주머니에 있던 쓰레기가 떨어진 게 아닐까요."
"백제 길드원들은 주머니에 음식물 쓰레기를 넣고 다니시나 보군요."
"...."
심현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던전 출입에 금전까지 요구하셨다더군요."
"황당한 이야기군요. 저희가 무슨 동네 양아치도 아니고 설마 그런 짓까지 하겠습니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지 실실 쪼개며 대답한다.
당장이라도 저 턱주가리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지만....
참자, 참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여기서 쿨하게 인정하고 서로 원만하게 해결을 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우린 그런 사실 모른다니까, 참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네."
"그럼 저희 직원들이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죠. 아무튼, 난 모르는 일이니까 괜한 일로 트집 잡지 마시고 그쪽 일이나 제대로 하십시오. 이 바닥에서 길게 일하고 싶으면."
"...."
그래, 이게 대답이라 이거지.
"그럼 뭐… 얘기 다 끝난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가시기 전에, 심현수 길드장님. 제가 충고 하나 하겠습니다."
"...?"
자리에서 일어난 심현수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길드장님은 오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실 겁니다."
나름 진심이었지만, 그는 코웃음을 치며 퇴장했다.
"그,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최호성 지부장님이랑 호형호제하는 사이랍시고 아주 순천 바닥이 지 세상인 줄 아는 놈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적어도 대화는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정도가 심하다.
우물 안 개구리가 가장 용감하다더니.
"이, 이제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뭐, 일단은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렇게 모르쇠로 나오면 더는 대화로 해결하는 건 힘들 것 같고.... 그러면 저희도 계속 계약을 유지하는 건 어렵겠군요."
"...!"
그래, 똥이 무서워서 피하겠는가 더러워서 피하지.
우리 입장에서도 일을 더 크게 벌이지 않고 이쯤에서 발을 빼는 게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좋다.
무엇보다 길드와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부 내의 구조적인 문제부터 갈아엎어야 할 테니까.
다만....
이걸 그냥 넘어가야 하나?
합리적으로 물러나는 게 맞는지 알면서도 뒷맛이 안 좋다.
저런 새끼가 겁 없이 나 대는 꼴을 보고만 있자니 마음에 안 들고.
"뭐, 너무 걱정 마십시오. 당장 계약을 끊겠다는 건 아닙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당분간은 길드에 던전 분배를 중단해주셨으면 합니다."
"네, 네?! 하지만 저희 쪽 인원만으로는 토벌을 감당할 수가...."
"강형원 부장님."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제는 선택하셔야 합니다. 부장님도 아시겠지만, 더 이상은 저희 업체와 백제 길드 둘을 모두 데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둘 중 하나는 포기를 하셔야죠."
"...."
"물론 이해합니다. 청소와 토벌 중 고르라면 당연히 토벌이 우선이겠죠. 그러니 저희 쪽에서 추가로 제안하겠습니다."
"...어떤?"
"저희와의 계약을 유지하시겠다면, 지부 내 구조적인 문제 또한 함께 해결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추가 비용 없이."
강형원 부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그게 가능한 겁니까?"
"불가능해 보이십니까?"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탐탁지 않으신가 보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로선 백제 길드와 척을 지는 건 되도록 피하고 싶긴 합니다. 터무니없는 배분율을 요구하긴 해도 결국 그들이 없으면 손해를 보는 건 지부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지부의 손해는 점점 더 커질 겁니다. 썩어가는 살이 아깝다고 잘라내지 않으면 온몸이 썩고 맙니다."
"...."
이내 그가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대표님을 믿어 보겠습니다. 던전 배분, 당분간 멈추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토벌을 지원해줄 팀을 먼저 구해야겠군요."
나는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 협회장님. 접니다. 다른 게 아니라, 내일 바로 순천 지부로 작전 1팀 파견해주실 수 있습니까. 뭐, 해외 나가기 전에 예행 연습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통화를 마치고 나자 강형원 부장의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자, 작전 1팀이라면... 김민주 팀장님이 있는 그 작전 1팀 말씀이십니까?"
"그럼 또 누가 더 있겠습니까."
이럴 때 부려먹기 좋은 녀석들이 걔들 말고 또 어디 있다고.
***
삼자대면 후 사무실로 날아든 공문을 확인한 심현수 길드장은 심기가 매우 좋지 못했다.
[본 지부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해당 길드에 당분간 던전 배분을 중지한다]
콱, 종이가 구겨졌다.
동시에 심현수 길드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이런....
"야."
심현수가 날 선 목소리로 직원을 호출했다.
"주변 길드에 연락 돌려서 당분간 지부 던전 일절 받지 말라고 전해라."
"네, 네?!"
"우리랑 척을 지면 누가 손해인지 아직 감이 없는 것 같다. 이번 기회에 톡톡히 경고를 해주자고."
"아, 아무리 그래도 던전 배분을 거부하는 건 좀.... 저희한테도 손해 아닙니까? 피차 던전 밥 먹고 사는 입장인데 굳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오실 필요가...."
"야 인마, 다른 지역 길드는 어떤지 몰라? 지들끼리 던전 하나 더 배분받으려고 뇌물에 로비에 아주 지랄들을 하고 있는 거?"
협회와 정식 협력 업체 계약을 체결한 서울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지만, 여전히 지방에서 길드는 지부에 비해 약자의 입장이다.
딱 여기만 빼고.
"여기서 우리가 약하게 나오면 다른 지역 놈들처럼 호구 잡히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우리 없으면 토벌량 못 따라가. 거기 상황 알잖아? 그냥 허세 부리는 거야."
"그, 그렇습니까?"
"그래. 며칠 버티고 있다 보면 먼저 연락 올 거다. 그때 가면 던전 배분 50%로 올려달라고 하면 돼."
애써 담담한 척 말했지만 사실 아직까지 분이 삭지 않았다.
그 청소팀 파견 업체 사장.
마치 이 바닥이 제 것인 양, 자신감에 찬 눈빛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봤자 하룻강아지 새끼가.
잠시 망설이던 끝에 결국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 형님, 심현수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어 그래. 어쩐 일이냐.」
핸드폰 너머로 최호성 본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형님 안부 듣고 싶어서 연락했죠."
「까고 있네. 왜, 뭐 또 필요한 거 있어?」
"아하하.... 역시 눈치 빠르십니다. 형님, 혹시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뭔 청소팀 파견 업체라던데."
「아, 그 뉴스에 나온 거? 들어봤지. 그게 왜.」
"사실 이번에 순천 지부에서 그 업체랑 계약을 맺었는데… 저희랑 마찰이 좀 있었지 뭡니까."
「니들이 또 뭔 사고를 친 건 아니고?」
심현수는 살짝 대답을 주춤거렸다.
「나 있었을 때도 시민 단체에 발전 기금 뜯어내다가 일 커질 뻔한 거 겨우 커버쳐줬더니, 또 그러냐. 내가 인마 적당히 하랬지.」
"...."
「그래서, 뭔 일인데.」
"지부 쪽에서 저희 길드에 던전 배분을 중지했습니다."
「…뭐?」
"파견 업체랑 뭔 얘기가 오간 것 같은데… 뭐, 솔직히 조금만 버티면 지부 쪽에서 먼저 머리 숙이고 들어올 거 뻔하긴 해도, 좀 괘씸해서 말입니다. 마음 같아선 이 바닥에서 내쫓고 싶은데, 저 혼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하하하."
「야 인마, 나는 뭐 다르냐? 파견 업체가 지부 상대로 활동하는 걸 내가 어떻게 막아.」
"어려울 거 있겠습니까. 그냥 지부에 외부 청소팀 파견 업체는 전문성이 입증되지 않아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계약을 재고하라고만 해주시면 깔끔하잖습니까."
「흐음....」
최호성 본부장이 대답을 아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알았어. 그 정도야 뭐. 내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사업 때문에 좀 바쁘니까, 그거 마무리부터 좀 하고.」
"어떤 사업입니까?"
「성남 지부에 작전팀 연수원 좀 세워보려고 하는데.... 뭐, 너랑은 상관없는 거니까 신경 꺼.」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제가 한 번 올라가 뵙겠습니다!"
심현수 길드장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인생은 실전이다.
그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청소부에게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톡톡히 보여줘야겠지.
***
다음 날,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지부 근처에서 하루를 보냈다.
시간에 맞춰 지부로 가자, 강형원 부장과 함께 그새 서울에서 작전팀이 온다는 소문을 들은 건지 지부 소속 헌터 몇 명이 건물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어째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보면 대통령이라도 오는 줄 알겠네.
"오셨다!"
누군가 소리쳤고, 동시에 건물 앞으로 봉고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에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내렸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본부도 바쁠 텐데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게 됐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되는데... 나가신 후로 연락 한 통 없는 건 좀 심했어요."
"...."
과장되게 째려보길 잠시, 그녀는 다시 표정을 풀며 강형원 부장에게 다가갔다.
"강형원 부장님이시죠? 최호성 본부장님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서울 본부 작전 1팀장, 김민주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서울 본부의 전설적인 두 분과 같이 일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김민주 또한 단번에 대하기 불편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다음으로 고개를 돌려 한데 모여 있는 후배 헌터들을 바라봤다.
"지부 작전팀 소속들인가요? 잘 부탁드릴게요."
"아, 안녕하십니까! 순천 지부 작전 1팀장, 고창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허리가 일제히 90도로 접혔다.
김민주는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하러 와서 뭣들 하는 건지.
얼빠진 광경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096
096
순천 지부 사무실에 모여 고창수 작전 1팀장과 김민주를 중심으로 작전 현황에 관해 이야기가 시작됐다.
나와 이아영 실장은 객원이었기에 그 자리에서 빠져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지켜봤다.
"흐음… 도시 외곽 던전까지 다 합치면 월 150개가량 출현하네요."
"네. 일주일 당 25~30개 사이가 할당량인데, 저희가 작전팀이 5팀 밖에 없습니다. 팀당 인원수도 본부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고요. 무엇보다...."
고창수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리곤 주변 눈치를 살피며 작게 말을 이었다.
"지부 특성상 신입 헌터들이 많아서 작전 효율이...."
"그렇군요."
김민주는 단번에 이해한 듯 말을 끊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다들 지부에 첫 발령을 받은 이들이겠지만, 그중에 평생 지방에서 일하고 싶은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조금만 짬 좀 차면 죄다 서울이나 부산으로 가 버리니 지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늘 신입 헌터만으로 토벌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은 저희 팀이 일주일간 토벌 지원해주면서 급한 불부터 끄는 거로 하고. 그다음엔...."
김민주가 말을 하다 말고 나를 돌아봤다.
"...왜 날 봐."
"그다음은 선생님이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
어째 못 본 새 더 뻔뻔해진 것 같다.
이제 짬 좀 찼다 이건가.
"상황이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아요. 저희가 며칠 토벌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결국 서울로 돌아가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거고요."
"그래서 말했잖아. 근본적인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할 거라고."
"베트남에서 썼던 방법을 써볼까요?"
"청소팀 증원? 지금 상황에선 별로 효과 없을 거야."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동시에 팔짱을 끼며 신음했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길 잠시, 내가 물었다.
"출현 던전의 평균 난이도는 어때?"
"음… 평균적으로 블루 정도에요. 높은 등급 빈도는 그렇게 많지 않네요. 해봤자 옐로우 등급 이상이 1년에 서너 번 정도."
"난도는 높지 않네."
"네. 경력 있는 헌터라면 지금 인원으로도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다들 반년 이하의 신입들이라는 게 아무래도...."
"그럼 신입이어도 인원만 충분하면 된다는 소리지?"
"그…렇긴 하겠죠."
신입.
부족한 인원.
낮은 난도의 던전.
그럼 가능한 방법이 있었다.
"판을 좀 키우자."
"네?"
"협회 작전팀 신입 연수원. 여기에 세우는 거야."
내 제안에 김민주를 비롯한 사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상하반기 신입 공채 3개월, 분기별 경력 채용 1개월. 그 정도면 인원도 충분할 거고, 던전 난도가 낮으니 실습용으로도 딱이지."
"공식 작전보다 실습 토벌로 밀고 나가자는 거죠?"
"그렇지."
"가능만 하다면 확실히 괜찮을 거 같네요. 어차피 수익 나는 건 실습이든 작전이든 똑같으니까요. 그런데...."
김민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뭐 문제 있어?"
"다른 것보다... 허가가 날까요?"
"어차피 연수원 건은 벌써 몇 년째 검토만 하는 사업이잖아. 아니면 뭐 최근에 딴 곳으로 확정 나기라도 했나?"
"아뇨. 아직 확정 난 건 없는데 듣자 하니 최근에 최호성 본부장님이 성남 지부 쪽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무엇보다 작전팀 연수원 건은 작전 본부장 권한이기도 하고요."
성남 지부에 추진하고 있다라....
그러고 보니 그랬다.
이맘때쯤, 최호성 본부장이 온갖 로비를 받고 분당 쪽을 밀어주기 시작했지 아마.
그래도 뭐....
"걱정 마. 설득은 내가 해볼 테니까."
어떻게든 될 것 같다.
"이아영 씨는 사업 계획서 좀 부탁합니다. 그사이 넌 계속 토벌 지원 나가줘. 그리고 사업 착수될 때까지 스케줄 조정은...."
"편 팀장님한테 부탁해볼까요?"
"그게 좋겠다. 통제팀에 연락 좀 해줘."
"오랜만에 다들 얼굴 보겠네요."
김민주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겁나게 일해야 하는데, 뭐가 저리 좋은지 모르겠다.
우린 곧바로 각자 역할에 착수했다.
***
"최호성이 있나?"
한창 최호성 본부장이 업무를 보던 중, 난데없이 협회장이 본부장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쩐 일이십니까…?"
"앉아, 앉아."
퍽 긴장한 표정의 그를 쓱 흘기곤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업무는 할 만한가?"
"네 뭐...."
"다행이군. 뭐 다른 게 아니라… 그 작전팀 연수원 건설 건 있잖냐. 몇 년째 검토만 하는 중인데… 너무 질질 끄는 거 아닌가. 이젠 슬슬 결정해야 할 것으로 보이던데."
협회장의 말에 최호성 본부장이 화색을 띠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적절한 곳을 알아봤습니다. 아무래도 성남 지부 쪽에 추진하는 게...."
"아니. 순천 지부 쪽으로 추진하지."
"...네?"
물론 기쁜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쪽 작전팀 인원이 부족해서 길드 의존도가 너무 높다더군. 듣자 하니 그걸 빌미로 이래저래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고 해서 말이야."
"...."
"그래도 협회 지부 자존심이 있지, 그래서야 쓰겠나."
최호성 본부장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왜? 뭐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냐?"
"...작전팀 연수원 추진은 제 권한이잖습니까. 제가 여러모로 알아본 바로는 성남 지부에 건설하는 게...."
"그거야 그렇지,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더 시급한 곳이 있는데 굳이 성남을 고집할 이유가 있나? 아직 건설사 계약 따 놓은 것도 아니고, 확정 떨어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아니면 뭐...."
협회장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받아 챙긴 거라도 있나?"
"...그, 그럴 리가요."
최호성 본부장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순천으로 추진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누가 봐도 굉장히 떨떠름한 대답이었지만, 협회장은 아무 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빌어먹을!"
쾅―!
그와 동시에 최호성은 책상을 거세게 내리쳤다.
구렁이 같은 늙은이. 촉이 장난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성남 지부장과 이번 연수원 건설 추진을 잠정적으로 약속해놓은 상태였으니까.
여기저기 공사도 다 쳐놓았고, 건설사와 미리 계약을 진행하곤 리베이트까지 받아 챙겼다.
애초에 연수원 건설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으니 위험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지역을 바꾸자니....'
단순 변경이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원래 계획대로 추진을 강행했을 거다.
하지만 저쪽에 그럴듯한 명분이 있는 상황에서 억지 논리를 폈다가는 오히려 꼬리를 밟힐 수도 있다.
무엇보다 슬쩍 떠보는 게 눈치가 심상치 않다.
괜히 의심받을까,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알았다곤 했지만....
이대로 진행되었다간 리베이트로 받은 돈을 토해내야 함은 물론 위약금까지 물어줘야 할지도 모른다.
'시발, 어떡하지.'
이건 본인 선에선 막을 수 없다.
막는다고 하면... 그쪽 당사자들이겠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다."
「형님,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일전에 부탁드린 건 어떻게....」
"그건 둘째치고, 순천 지부에 연수원이 건설될 것 같다."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나도 갑자기 들은 말이니까 그냥 잠자코 들어."
한숨을 내쉬길 한 차례. 마음을 진정시키고 최호성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협회장이 갑자기 쳐들어와서 기존 계획을 엎어버리고 순천 지부 쪽으로 하자고 하더라. 근데 잘 들어보니까, 이거 아무리 봐도 협회장이 단독으로 결정한 게 아니야."
「그럼...?」
"누가 협회장한테 귀띔해준 거라고."
「....」
"게다가 타이밍도 이상해. 파견 업체랑 지부와 마찰이 생기자마자 그 지역에 연수원을 지으라고 협회장이 직접 움직인다…? 넌 이게 우연이라고 보냐?"
최호성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애써 참으며 말했다.
"너 시발 대체 누굴 건드린 거야?"
「....」
핸드폰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아무튼, 순천 지부에 연수원이 들어서지 못하게 어떻게든 막아."
「하, 하지만 저희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게 지금 나 혼자만 엿 된 거 같냐? 이거 잘못되면 니들도 한 방에 가는 거야."
이 정도면 알아들을 법도 한데..., 답답한 녀석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그쪽 지부에 인원이 모자라서 문제였지, 알고 보면 던전 난이도는 평범해. 인원만 충분하면 토벌량 떡을 치고도 남을 텐데, 연수원 덕에 수백 명의 헌터들이 매일 상주하고 있어 봐. 너네한테 던전 배분해줄 거 같냐?"
「안... 해주겠죠.」
"이거 내 쪽에선 막을 명분이 없어. 그러니까 너희가 어떻게든 막아."
「어, 어떻게 말입니까?」
"시위하든 지부 앞에 드러눕든 막아! 그거 막으면 전에 네가 부탁한 거,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 순간 최호성이 쾅, 책상을 내리쳤다.
"이런 시발, 지금 너 때문에 나까지 X 되게 생겼는데 딴말이 나와?! 너나 나나 둘 다 살고 싶으면 어떻게든 하라고!"
「...알겠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최호성은 불안한 마음에 자리에 앉아 손톱을 깨물었다.
점점 일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불안감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
강형원이 마련해준 사무실에서 한참 일을 보는 가운데 핸드폰이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박인범 협회장이었다.
"잘 됐습니까?"
「그래. 이사회 최종 허가도 났고 며칠 안으로 예산도 떨어질 거야. 최호성 그놈 자식, 뭔가 낌새가 이상하던데. 설마 진짜로 뭐 받아 처먹은 건 아니겠지?」
"그거야 본인만 알고 있겠죠."
사실 협회장이 의심하고 있는 게 맞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이미 성남 지부 쪽에 건설 추진을 약속하고 온갖 업체에서 리베이트를 받아 챙긴 후일 것이다.
회귀 전 연수원 추진을 도운 게 나였으니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지.
「그거 계속 앉혀놔도 되는지 모르겠다. 워낙 능구렁이 같은 새끼라 뭐 좀만 잘못된다 싶으면 바로 꼬리부터 자르고 보니 건덕지 잡기도 뭐하고....」
"그렇게 계속 꼬리를 자르다 보면 끝내는 자기 몸통까지 갉아 먹게 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협회장이 흠, 하곤 신음했다.
「그런데 이번 일이 자네한텐 무슨 이득이 있나? 아무리 봐도 시간 낭비에 인력 낭비 같은데.」
"왜 이득이 없겠습니까. 곪을 대로 곪은 순천 지부를 건져주면 다른 지부들에도 좋은 예시가 되겠죠. 저희를 찾는 지부가 늘어날 겁니다."
「...홍보 목적이다, 이거야?」
"또 뭐가 있겠습니까."
협회장이 파하, 웃음을 터트린다.
「자네 직원들 때문이 아니라?」
"...예?"
「백제 길드가 꽤나 못되게 굴었다면서. 그걸 보고도 그냥 넘어갈 자네가 아니지.」
...뭐라는 거지?
「말하기 부끄러운가? 알았어, 내 모른 척해줌세. 클클클.」
"...."
드디어 노망이 났나 보군.
"아무튼, 갑작스레 이런 요청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무슨. 자네 말대로 곪을 대로 곪은 지부 대신 구해주겠다는데 협회 입장에서야 오히려 고맙지.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봐.」
"여부가 있겠습니까."
암튼 좋게좋게 전화를 끊었다.
097
097
연수원 건설 이야기가 나온 지 일주일째.
일은 꽤나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가장 중요한 사업 예산을 받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역만 확정되지 않았을 뿐, 건설 자체는 상정되어 있는 안건이었기에 예산이 이미 책정되어 있었다.
이아영의 사업 기획서 때문인지, 아니면 전화 한 통 때문인지, 그마저도 속전속결로 처리되어 건설 허가가 났다.
김민주는 그동안 지부를 도와 작전에 투입됐고, 한유빈이 맡은 3팀이 그들을 지원했다.
또한, 편 팀장이 그 모든 팀의 스케줄을 도맡아 조율해주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강형원 부장도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더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저 입만 벌린 채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당연히 지부 소속 직원들 또한 덩달아 바빠졌지만, 불평을 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본부의 주축들이 모두 나서서 도와주고 있는데 어찌 불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뭐, 그렇다고 모두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나저나… 우리 일도 바쁜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 모르겠네요."
지부 옆, 이제 막 시작된 공사 현장에서 이아영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냥 계약 해지하는 게 이래저래 덜 피곤했을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선 우리가 도망치는 것 같잖습니까."
"참 나, 사업에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뭐, 우리한테도 이번 일은 터닝 포인트가 될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더 할 말이 없지만요."
이아영 실장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대, 대표님! 김준우 대표님!"
그때, 지부 직원이 황급히 나를 찾았다.
"뭡니까?"
"지금 지부 앞으로 시위대가 모여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길드 놈들이 들고일어난 것 같은데...."
"뭐, 예상한 부분이군요."
애초에 최호성 빽으로 어떻게 비벼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그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목소리를 키우는 것뿐이겠지.
그래도 일주일은 버텼네.
"잠깐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러세요. 사과 꼭 받아오시고."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지부 건물로 향하자 역시나 몇 개의 길드가 자리를 깔고 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연수원 건설 결사반대!]
[신입 헌터에게 우리 목숨을 맡길 수 없다!]
[시민의 목숨은 실습용이 아니다!]
[시민 구하는 협회? 시민 죽이는 협회!]
'역시 이렇게 나오는구먼.'
보아하니 길드만 있는 것도 아니다.
입김이 닿았는지, 온갖 시민 단체까지 참여한 듯했다.
증명되지 않은 신입 헌터를 실제 토벌에 투입하는 거니, 저들의 의견이 썩 틀렸다곤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좋은 구실일 뿐이지.
'할 거면 최소한 속이라도 안 보이게 하던가.'
당연하겠지만, 저들이 시위하는 이유는 시민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대로라면 눈 뜨고 밥그릇 뺏길 게 뻔하니 적당한 이유를 찾아서 짖는 것뿐이다.
모여든 인파 사이에서 심현수 길드장을 포함한 백제 길드원들이 보였다.
"어, 그 청소 업체 사장!!"
"여러분! 저놈이 강형원 부장을 살살 꼬드긴 겁니다!"
"철회하라!"
"철회하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경찰이 다급하게 통제하며 충돌이 발생하진 않았지만,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모습엔 절박함까지 보일 정도였다.
"하아...."
깊은 한숨을 쉬며 그들을 슥 둘러봤다.
여기서 뭔 말을 하든 들어 먹을 것 같진 않고,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끝은 봐야 하니.
좀 귀찮겠지만, 어쩔 수 없나.
"알겠습니다. 그럼 협상을 해보죠."
***
며칠 뒤 순천 지부, 대회의실.
나는 그곳에 심현수 길드장을 포함한 타 길드의 대표들을 불러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당연히 현 순천 지부의 책임자인 강형원 부장 또한 참석했다.
비장한 눈빛들.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여기서 밀리면 죽는다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럼 빨리 본론으로...."
"잠깐만요."
꽤나 급했는지 심현수 길드장이 입을 열었지만, 내가 막아섰다.
"아직 더 오실 분들이 있습니다."
"...또 누가 온다는 겁니까?"
"보시면 알 겁니다."
똑똑―.
"마침 오셨네."
말하기 무섭게 회의실 문이 열리며, 두 남자가 들어섰다.
"하하, 간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표정을 보니 길드장님도 여전하신가 봅니다."
"저야 늘 그렇죠, 뭐. 하하!"
여전히 호쾌한 웃음소리.
첫 번째 손님은 현 대한민국 1위 길드 아레스의 대표, 차석현 길드장이었다.
"얼굴이 좀 폈군. 바깥 물이 좋긴 한가 봐?"
"오랜만입니다, 이사님."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두 번째 손님은 현 이능차원협회 기획 본부장, 이두식 이사였다.
"...뭐, 뭐야!"
"차, 차석현 길드장님?!"
"이두식 이사면 협회 거물 아니야…?"
난데없는 두 거물의 등장에 회의실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차석현 길드장과 이두식 이사는 각자 자리에 착석했고, 동시에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럼 다 온 것 같으니 협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브라보 길드의 김상우 대표가 발언했다.
"아무리 던전 난도가 낮은 지역이라도 해도 신입 헌터들에게 토벌을 맡길 순 없습니다. 시민들이 위험해지는...."
"까지 마시고. 우리 솔직하게 갑시다, 솔직하게."
조금 과격하게 그의 말을 끊으며 말을 이었다.
"연수원 들어서면 당신들 밥그릇 뺏길까 봐 그러는 거, 여기에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
"...."
참 정직한 반응들이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순천 지부는 이제부터 민간 길드에 던전을 배분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왜 그런지는 심현수 길드장님이 가장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
대놓고 지목하자, 그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게 괜한 행패를 부리지 않았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최소한 재고라도 해주시면...."
사정을 모르는 브라보 길드의 김상우 길드장, 직녀 길드의 차연주 길드장이 번갈아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번엔 이두식 이사가 단숨에 고개를 저었다.
"협회는 길드보단 지부가 우선일세. 순천 지부를 위해서라도 우린 연수원 건설 건을 철회할 생각이 없네."
"그럼… 저흰 진짜 다 죽습니다. 설마 서울 내 모든 길드와 협력 업체 계약도 체결한 협회가 지방 길드는 무시하겠다 이겁니까?"
"설마. 협회도 그대들의 고충을 무시하고 무작정 진행하려는 건 아닐세."
이두식 이사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온 겁니다."
차석현 길드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뭐, 제가 전국 길드를 관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최소한 도움 정도는 드릴 수 있습니다. 순천 내 모든 길드와 전국 각 지부에 다리를 놔드릴 생각입니다. 단, 지부와 정식으로 1대1 계약을 맺는다는 조건으로."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처럼 어느 한 길드가 독점적으로 던전을 배분받고, 그걸 주변 길드에 재분배하는 행위를 금지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유착 관계가 어느 한쪽으로 힘이 쏠리게 해 계속해서 양측 모두에게 불합리한 일이 발생하는 겁니다."
차석현 길드장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간 백제 길드가 독점적으로 던전을 배분받아 주변 길드에 나눠주는 관행을 없애고, 이제는 공식적으로 각 길드와 계약을 맺고 던전을 배분하겠다는 소리.
당연히 이제까지 던전 배분을 오로지 백제 길드를 통해서 받을 수밖에 없었던 주변 길드에겐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물론 그렇게 되면 백제 길드는 더 이상 그 어떤 길드와도 교류할 수 없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되겠지만.
"자, 잠깐만요! 차석현 길드장님은 저희 편에서 생각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심현수 길드장이 바로 눈치채고 들고 일어났다.
차석현 길드장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편?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상생해야 한다고 한 건 심현수 길드장님 아닙니까? 어느 한쪽이 유리하게 편을 들어주는 게 당신이 말하는 상생입니까?"
"...."
"듣자 하니 심현수 길드장님은 그간 순천에서 활동하면서 길드 발전 기금을 강요했다는데, 사실입니까?"
"...강요는 아니었습니다."
"길드 발전 기금을 걷는 행위가 공식적으로 금지된 건 아십니까? 불법을 요구하는데 강요가 아니면 뭡니까?"
"...."
"또한, 파견된 청소부에게 심한 갑질과 심지어 던전 출입비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돈을 갈취했다고요. 이거 엄연히 범법 행위인데 말이죠."
차석현 길드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심현수 길드장의 시선은 점점 바닥으로 향했다.
"이것 참, 이래서야 앞으로 던전을 믿고 맡길 수가 있나."
그때, 이두식 이사가 거들었다.
이두식 이사는 팔짱을 낀 채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닌 것 같고… 이건 우리로서도 도리가 없군."
"…네, 네?"
"백제 길드는 앞으로 전국 지부의 던전 배분 명단에서 제외하겠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 듯한 표정.
더불어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당연한 반응이다.
배분 명단 제외.
백제 길드는 앞으로 그 어디에서도 던전을 배분받지 못한다는 선고가 떨어진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
끝났군.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갑자기 그가 무릎을 꿇었다.
"다,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일이 이렇게까지 돼서야 사과를 하는 꼴이라니.
그 추하고 한심한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이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심현수 길드장님."
"네, 네."
"그러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날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실 거라고."
"...."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급기야 울먹이는 목소리로 감정에 호소한다.
그렇게 인정을 찾는 사람이었던 건가.
"글쎄요. 제 직원들한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으셨습니까?"
"...."
"너무 걱정 마십시오. 이번 달 던전 배분 취소 위약금은 제대로 지급해 드릴 테니까. 뭐… 일전에 못 드린 길드 발전 기금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대답이 없는 그의 뺨을 툭툭 몇 차례 치고 등을 돌렸다.
"협상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들 이견 없으시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각자 계약을 맺으실 지부는 추후 공문을 내릴 테니 그때까지 대기하고 계십시오."
길드장들이 입을 꾹 다물고 서둘러 회의실을 벗어났다.
098
098
순천 지부에는 예정대로 작전팀 연수원과 연수생들의 기숙사가 들어섰다.
연수원 강사로는 각 지부 베테랑 헌터들이 교대로 파견되었다.
물론 김민주 또한 선임 강사로 차출되었다.
역시나 효과는 예상대로 나타났다.
신입들이 무조건 거쳐 가야 하는 곳이 되면서 실습을 통해 토벌량을 충분히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뭐, 신입들이라곤 해도 강사진이 워낙 탄탄했던 터라 문제가 발생할 여지도 없었고, 덕분에 연신 못 미더워하던 시민 단체는 잠잠해졌다.
그럼에도 아직 고쳐나가야 할 문제는 있었지만... 거기서부턴 지부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겠지.
"그래서... 다들 요즘 일하는 건 어떻습니까?"
사내 정기회의 날.
회의실엔 문소연과 한상혁, 한유빈을 비롯한 총 10명의 청소팀장이 참석했다.
"강릉 지부는 크게 문제없어요. 그리 작업하기 어려운 던전들도 아니라 빨리빨리 작업할 수 있고요."
문소연이 먼저 대답했다.
뒤를 이어 각 팀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저희도 별문제는 없습니다. 뭐, 계약금 일부를 부산물로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요."
"아, 전주 지부에서 사체를 조금 더 잘게 해체해줄 수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 장비로는 30cm 이하로 해체하는 건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7팀의 홍용표 팀장이 말했다.
"특수 절단기 하나 장만해드리겠습니다. 다른 건 또 뭐 없습니까?"
"다른 건 문제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혹시 애로사항이나 더 건의할 건...?"
사실 회귀 전엔 직원들 건의 사항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전처럼 혼자 끙끙거리며 참다간 일만 더 커질 게 뻔하니 이제는 미리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못 버티고 나가버리면 그것만큼 손해도 없고.
"...."
"...."
그런데 어째 다들 멀뚱멀뚱 눈만 끔뻑이고 있다.
"정말 없습니까?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씀해도...."
"저...."
그때, 문소연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꽤나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보니 꽤 중대한 사항인 것 같아 나 또한 덩달아 긴장했다.
"탕비실에 과자... 더 채워주실 수 있나요…?"
"...."
후.
"...알겠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곤 작게 예스! 하곤 외친다.
참… 소박하네.
"그거 말곤 더 없습니까?"
"...."
"...."
또다시 찾아온 침묵.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없는 거로 알고...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회의실을 나섰다.
나는 목 근육을 풀며 통유리로 둘러싸인 회의실을 둘러봤다.
이전 사무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깨끗하고 넓은 공간.
행정 직원도 무려 10명이나 추가로 채용한 덕에 이젠 제법 회사다운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고작 몇 달 만에 이런 변화가 생긴 것 또한 모두 순천 지부 일 덕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 회사에 대한 이상한 미담이 인터넷에 돌기 시작하며 입사 지원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덕분에 기존 3개 팀에서 10개 팀까지 신설할 수 있었다.
덩달아 어떤 청소팀 업체가 다 말라가던 순천 지부를 소생시켰다는 소문이 지부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퍼지며, 전국 각지에서 우리를 찾는 이들이 늘었다.
이아영 실장의 말로는, 덕분에 이번 달 매출은 설립 첫 달 대비 10배 이상 오를 것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터닝 포인트.
전국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이름을 톡톡히 각인시킨 것이다.
그리고 백제 길드는... 뭐, 망했다.
길드원 전원이 실직자가 됐다.
개중엔 다른 길드로 이직을 시도했지만, 이전 경력이 발목을 잡았다.
난 이도 저도 못하고 밑바닥까지 떨어진 백제 길드를 헐값에 사들였다.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부턴 헌터가 아닌 청소부로 지내야겠지만... 그런 거 가릴 처지가 아니지.
"…생각해보면 그냥 조용히 처리해도 됐을 것 같기도 하고."
좀 과하게 깽판 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뭐, 당신이 아니었어도 언젠간 터질 일이었어요. 다 지 업보지 뭐."
옆자리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이아영이 바로 딴죽을 걸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모니터에, 손은 키보드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할 게 많나 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동안 순천 지부에만 신경 쓰느라 우리 일도 제대로 못했는데 당연하죠! 하… 이게 청소부 파견 업체인지, 경영 매니지먼트 업체인지...."
"그래도 뭐, 결과적으론 제 말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더 짜증 나."
나를 째릿 눈으로 흘긴다.
잘 해결됐으면 됐지, 참 불만도 많네.
"계약 현황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총 22곳 계약했어요. 지방 18곳, 광역시 한 곳, 수도권 세 곳. 이 추세면 법인 전환도 고려해볼 만해요."
"글쎄요. 아직 1년도 안 됐는데 거기까지는 시기상조 같고.... 일단은 계속 추이를 지켜보는 거로 합시다. 지부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전반적으로 만족하는 것 같아요. 클레임도 딱히 들어온 것도 없고. 뭐, 다들 베테랑들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그건 다행이군요."
"무엇보다 직원들 만족도가 되게 높아요. 뭐... 이것도 당연한 거겠네요."
"...? 그건 왜 당연합니까?"
눈썹이 올라간다.
마치 몰라서 묻는 거냐는 표정.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닫았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그러자 이아영 실장이 금세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해외에 더 중점을 두고 싶다고 했잖아요. 바로 나가볼 예정이에요?"
"흐음...."
상승세를 올리고 있다고 해도 아직은 부족하다.
어느 정도 선에서 안정화가 돼야 정확한 지표를 확인하고 사업을 추진해도 추진할 수 있으니.
"뭔가 쐐기를 박을 만한 게 있으면 좋겠군요."
"쐐기라뇨?"
"대체 불가 수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만큼 큰 건 말입니다. 뭐, 예를 들면... 본부가 풍비박산 나는 걸 막아준다거나."
"...."
표정이 썩 좋지 않다.
"...불길한 소리 하지 말아 줄래요? 지금만으로 충분히 벅차거든요?"
이아영 실장이 학을 뗐다.
해본 소리였기에 피식 웃음을 던졌다.
'...풍비박산?'
근데 순간 내가 뱉은 말에 무언가 머릿속을 스쳤다.
곧바로 달력을 확인하고 몇 번이고 날짜를 계산했다.
아... 젠장....
"...갑자기 왜 그래요?"
이아영이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지만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큰 건이고 나발이고....
'시발....'
어느새 그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회귀 전, 처절했던 그 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스멀스멀 떠오르기 무섭게 핸드폰을 꺼냈다.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혹시… 한 달 뒤에 전국 모든 작전팀을 서울로 소집시켜 주실 수 있습니까."
협회장은 어리둥절해 하는 반응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일이 좀 생길 것 같아서...."
「무슨 일?」
"...."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망설이자, 협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뭔 일인지는 몰라도, 전국 작전팀을 소집하는 건 불가능해. 내가 안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법이 그렇잖냐.」
물론 알고 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총 15개 팀 이상의 작전팀이 한곳에 모이는 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위기 상황일 때는 전원 소집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대체 어떤 위기 상황이 있는 건데?」
"...."
내가 사실 회귀했는데 아무튼 이맘때에 위험한 던전 하나 열린다고 말하면....
시발, 나 같아도 안 믿는다.
「요즘 사업이니 뭐니 무리하더니 많이 피곤한가 보네. 그러지 말고 며칠 좀 쉬어라. 쉬는 것도 일이야.」
"...알겠습니다."
도저히 이걸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갓 A랭크를 받고 기고만장했던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재생되었다.
***
회귀 전 서울, 서초역 근처.
카아아아악―!!
쿠구구궁―!!
콰광, 쾅―!!
서울 한복판은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갑자기 출현한 리젠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도심으로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다.
"진영 유지해!! 흩어지면 다 죽는다!!"
작전 1팀 헌터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내 말을 들을 만한 이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으아아악!!"
"끄으윽!"
"쿨럭…!"
몬스터 한 마리 한 마리가 보스 수준이다.
겪어본 적 없는 상황에 정신이 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시발....'
이를 으득 씹었다.
그리곤 이수용 팀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 이대론 전멸합니다. 최대한 시간만 끌면서 후퇴한 다음에 후방에서 다른 팀이랑 합류해야 합니다!"
"...."
하지만 명색이 작전 1팀장이라는 새끼는 이미 넋이 나가 있었다.
"팀장님! 팀장님!!"
"...후, 후퇴하자."
그가 겨우 목소리를 내는 순간, 내가 소리쳤다.
"후퇴! 다들 후퇴해! 최대한 다가오지 못하게 견제하면서 코엑스까지 빠진다!"
"네, 네!"
"하동수! 너는 사제 클래스들 집중해서 보호해! 조원재는 마법사 클래스들이랑 뒤에서 백업해주고! 나머진 다 나 따라와!"
"알겠습니다!"
정예라 불리는 작전 1팀은 던전에 진입하지도 못한 채 후퇴를 감행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최연소 A랭크를 받은 나로서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동안 레드 등급 토벌에서도 리더를 맡았다. 젊은 나이지만 던전 경험은 웬만한 팀장급 이상이었다.
그런데 이건 던전이 아니다.
그저 재앙.
작전이고 기획이고 아무 소용없는 재앙 그 자체.
그 뒤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정말 죽을 각오로 싸웠고, 같은 각오를 한 팀원들이 사방에서 죽어 나갔다.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몬스터를 막기만 한 게 사흘.
그럼에도 여전히 우린 던전 입구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서울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제야 심각성을 인지한 서민철 본부장은 뒤늦게 길드와 전국 지부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고, 조금씩 몬스터에게 빼앗긴 구역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윽고 다시 던전 입구까지 도달했을 때.
던전이 자연 소멸했다.
끝났다.
하지만 그 누구도 기쁨에 소리치거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못했다.
우린 승리한 게 아니라,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뿐이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들.
갈기갈기 터진 몬스터 사체와 헌터의 시신이 섞여 서울 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
나는 무표정하게 동료들의 시신을 바라봤다.
개중엔 곧잘 따르던 후배도, 많이 도와줬던 선배도 포함되어 있었다.
뒷담화를 하던 동기도 있었고 고등학생 시절부터 같이 헌터 시험을 준비했던 친구도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우두커니 서 있던 그때.
"저...."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뭡니까?"
"던전 청소팀인데.... 어디서부터 청소를 하는 게 좋겠습니까?"
"...당신들도 협회 소속입니까?"
"네, 네. 그렇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당신들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어디 있었습니까?"
"네? 하, 하지만 저희는 비전투 인원...."
손을 휘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알고 있다. 괜한 화풀이다.
그저 이성적으로 생각할 만한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을 뿐.
그들 때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왜인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099
099
"...준우 씨? 준우 씨!"
"예, 예?"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옛 기억에 잠시 멍하니 있던 그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아영이 코앞에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으면 말을 하던가."
"아뇨. 옛날 생각이 좀 나서."
"뭔 일이 있었길래 표정이...."
살짝 고개를 돌리니 모니터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꽤나 살벌한 얼굴에 나 또한 흠칫했다.
누가 보면 벌써 큰일 난 줄 알겠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 시선은 연신 달력으로 향했다.
회귀 전, 갑작스럽게 닥쳤던 재앙이 불과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리젠 던전.
정식 명칭은 불안정 차원 생성 던전.
하나의 갇힌 공간에 정해진 몬스터가 상주하고 있는 일반 던전과 다르게 차원이 갈라져 계속해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특수 던전.
전 세계 던전 역사상 단 두 번밖에 출현하지 않은 던전으로, 40년 전 처음 남미에서 출현했을 당시 토벌 시스템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기에 정보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특수 던전이니, 나발이니 다른 건 다 제쳐 두고라도 이 던전은 나에게 있어 매우 특별한 곳이다.
현역 시절, 내가 유일하게 토벌에 실패했던 던전이었으니까.
'던전 진입은커녕 탈출하는 몬스터를 막기에도 급급했지....'
나중에야 분석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리젠 던전에는 애초에 보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보스만 처리하면 던전이 닫히는 일반적인 구조가 아니다. 그저 끊임없이 쏟아지는 몬스터를 막아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애초에 토벌이 불가능한 던전이었고, 전 세계 최초로 실질적 토벌 불가 판정인 '오메가' 등급을 받았다.
사실 차원 자체가 불안정한 던전이었기에 딱 5일이면 자연히 소멸했지만... 그 5일 동안 해당 던전이 일으킨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일반 시민들은 물론이고 본부에서만 전체 작전팀원 중 40%가 사망하는, 그야말로 사상 초유의 재앙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회귀 전 나는 그때 일을 기점으로 크게 상승세를 탔다.
최전선이니, 최종 병기니 하는 별명이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S랭크로 승급한 것도 그 직후였다.
그때부턴 거의 승승장구했다고 봐야겠지.
다만, 내 상승세와는 다르게 협회는 그 일을 기점으로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뭐, 그런 사건을 겪고도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없긴 했지만.
겨우 숨통이 붙어 있는 정도로 정상적인 운영은 힘들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국제 협회가 내사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엔 많은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타 협회 헌터는 절대 스카우트하지 않는 그들이 나를 스카우트 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공식적으로 인수하지 않았을 뿐, 거의 국제 협회의 꼭두각시였으니까.
'뭐, 그땐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현재 내가 청소팀 파견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해도 결국 진짜 목적은 따로 있지 않은가.
국제 협회의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지금, 그들에게 덜미를 잡힐 만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
'어떻게든 고비를 넘겨야 할 텐데....'
문제는… 지금으로선 앞으로의 사태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리젠 던전을 막으려면 최소한 30개 이상의 작전팀을 소집해야 한다.
하지만 법적으로 그만한 작전팀을 소집하기 위해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긴급 재난 사태를 발표했을 때만 가능하다.
결국, 리젠 던전이 출현한 이후에야 소집령을 내릴 수 있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이미 늦은 후다.
하루 이틀 만에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하겠지.
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고 있던 그때.
똑똑―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오늘 면접 잡혀 있었습니까?"
"아뇨.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이아영이 의아한 목소리를 내던 찰나, 사무실 문이 덜컥 열렸다.
"저...."
조심스레 들어온 남자를 보자마자 누구랄 것 없이 눈이 동그래졌다.
"아직 청소부 지원할 수 있습니까…?"
"...."
"...."
말문이 막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그 지원자는 다름 아닌, 전 서울 본부 작전 2팀장.
임동빈이었다.
***
서울 작전 본부장실.
'X 됐다. 시발.'
최호성 본부장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결국, 순천 지부에 연수원이 들어섰다.
심현수 그놈이 힘도 못 써보고 떨어져 나간 덕분에 며칠간 쳐놓은 공사가 도루묵이 되어버린 것이다.
연수원 건설 건이 언론을 타자 성남 지부장과 가계약을 맺었던 건설사 그리고 미리 언질을 놓았던 온갖 업체들에서 전화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받은 건 뱉어내겠다고 그들을 진정시켰지만... 사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최호성 말만 믿고 각 업체에서 이미 사업을 벌여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업이 드랍 되자마자 각 업체는 그 모든 위약금을 최호성에게 청구했다.
사실 그것들이 모두 최호성의 책임이라곤 할 수 없지만, 물어주지 않으면 리베이트를 챙긴 걸 폭로하겠다고 나오는 이상 최호성으로서도 도리가 없었다.
문제는 그 금액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거다.
'시발....'
최호성 본부장의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심현수 그 새끼 한 명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도움이 되진 못할망정 최소한 본인 일에 재는 뿌리지 말아야 할 거 아닌가.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쓸었다.
'이제 어떡하냐....'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사비로 물어주든 입 다물고 버티다가 비리를 폭로 당하든, 어느 쪽이든 길바닥에 나앉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예산에 손을 대는 수밖에.
'이것까지 걸리면 진짜 끝이긴 한데....'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러나저러나 X될 바에야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대놓고 예산을 빼돌릴 순 없고, 적당히 확인하기 힘들고 내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업을 찾아봐야겠는데....
최호성은 컴퓨터를 켜 내부 전산망에서 이런저런 문서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근 예산 편성 내역에서 흥미로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외부 사업 지원?'
이전에 얼핏 들은 적은 있다.
최근 협회장이 직접 추진한 안건으로, 협회와 관련된 외부 업체를 지원해서 다양한 분야의 발전을 도모하자는 취지의 지원 사업.
뭐, 당시엔 사실 별로 관심도 없었고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닌 내용이라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책정된 예산이 왜 이렇게 많아…?'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뭔가 이상하다.
뭐 대체 얼마나 지원을 해주려고 수십억가량 예산이 책정된 건가.
최호성은 해당 예산으로 지원 중인 업체 목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주에 부산물 처리 시설.
인천에 장비 및 재료 가공 하청 업체.
수원에 아이템 수출입 담당 운송 회사.
그리고 서울에 청소팀 파견 업체.
'카르마 코퍼레이션....'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대한 지원금이 타 사의 거의 3배가 넘게 책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순천 지부에서 해당 업체와 심현수 사이에 마찰이 생기자 갑작스럽게 연수원 건설이 추진되지 않았던가.
마치 어떤 거물이 직통으로 윗선에 지시를 내린 것처럼.
그에 맞물려 갑자기 위에서 작전 1팀 파견 지시가 내려왔고...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나름 순천 바닥을 꽉 잡고 있던 길드가 통째로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흡수되었다.
이걸 과연 우연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그 업체와 협회 윗선이 유착 관계가 있는 건....'
최호성 지부장은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검색했다.
기사도 확인해 보고 공식 홈페이지도 검색해봤지만, 어찌 된 건지 업체 대표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친분이 있는 지부장들에게도 연락을 돌려봤지만, 계약은 실장이라는 사람이 진행해 그들 역시 대표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마치 작정하고 정체를 숨기려는 건가 싶을 정도.
그렇게 한참 동안 조사를 이어가던 그때.
"허...."
드디어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대표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 봐라…?"
최호성 본부장이 헛웃음을 뱉었다.
김준우.
익숙한 이름 석 자가 눈에 들어오자 최호성의 머릿속에서 아귀가 맞춰졌다.
분명하다.
지금 협회장은 지위를 이용해 비밀리에 김준우를 푸시해 주고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의도치 않게 대물이 걸렸다.
'이거 잘하면....'
언론에서 신격화 되고 있는 김준우 전 본부장과 현 협회장의 비리.
이게 단순히 협회장 목이 날아가는 것만으론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본부 전체가 풍비박산이 나겠지.
그러니 이걸 가지고 협회장과 딜을 한다면....
수습할 수 있다.
수습하는 걸 넘어서 잘만 하면 본부를 손에 쥘 수도 있다.
최호성 본부장의 입가로 희미하게 미소가 번져갔다.
하지만 딜을 하기 위해선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지급되는 지원금이 타 사보다 많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푸시를 해주고 있는 게 맞는다면 절대 이것만 있진 않겠지. 분명 알게 모르게 더 새어 나가는 게 있을 것이다.
보다 확실하고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협회 내부에서 알아보는 건 한계가 있고... 한다면 그쪽 업체 쪽에서 알아봐야 하겠지.
"내부자가 필요한데...."
그쪽 직원 놈들을 꼬드겨볼까?
아니. 그건 의미가 없다.
최근 구조조정 당한 청소부들이 죄다 그 업체로 가지 않았던가.
한때 김준우 덕을 톡톡히 본 놈들이 돈 몇 푼 쥐여 준다고 움직이려 들진 않겠지.
무엇보다 이쪽 꼬리가 잡힐지도 모른다.
준비 단계에서 들통나면 시작도 못 해보고 죽을 쑤게 될 테니.
'그렇다면....'
최호성은 핸드폰을 들었다.
"어, 오랜만이다. 잘 지내냐?"
「…선배님께서 웬일입니까?」
전 작전 2팀장, 임동빈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일 하나만 도와줄 수 있나 싶어서."
「...저 협회 나간 이후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고 있습니다. 제가 뭔 힘이 있다고 선배님을 도와드리겠습니까.」
"그렇겠지.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땐 내 코가 석 자여서... 미안하다. 그래도 인마, 잘만 해주면 너 복귀할 수도 있어."
「....」
침묵이 이어지길 잠시.
「어떤 일입니까?」
"어려운 거 아니야. 그 요즘에 청소팀 파견 업체 유행하고 있는 거 알지?"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너 거기 좀 들어가서 자료만 몇 개만 빼 와라."
최호성의 눈빛이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
100
100
본부에서 지원받은 네이비 등급의 실습 던전.
내 참관 아래, 문소연 팀장이 임동빈의 교육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던전 청소에서는 몬스터를 크게 세 분류로 나눠요. 갑피형, 피부형, 무피형. 갑피형은 딱딱한 외피가 있는 거고, 피부형은 인간형 몬스터처럼 부드러운 외피. 그리고 무피형은...."
"스켈레톤이나 고스트계 몬스터처럼 피부가 없는 거겠지?"
"...맞아요."
문소연은 새삼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작전팀장 시절의 임동빈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녀 또한 알고 있었을 테니, 성실하게 실습에 임하는 모습이 꽤 낯선 모양이었다.
문소연은 애써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분류마다 해체 방식이 꽤 다른데, 이건 인간형 몬스터니까 머리부터 해체하면 돼요. 최대한 한 번에 자른다는 느낌으로...."
"이렇게?"
"네네, 맞아요."
임동빈은 문소연이 말하는 대로 곧잘 따라 하며 몬스터를 능숙하게 해체해나갔다.
'썩어도 준치라더니만....'
확실히 던전과 몬스터에 대한 이해도는 일반인들에 비할 수준이 못 된다.
작업 메커니즘에 대해서만 익숙해지면 한유빈이랑 비슷한 수준까진 올라갈 수도 있겠군.
"그나저나 던전 청소가 이렇게 체계적으로 잡혀 있는 작업인 줄은 몰랐군."
홀로 해체를 마친 임동빈이 땀을 닦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원래부터 이렇진 않았어요. 우리 대표님이 회사를 차리면서 직접 분석, 분류하셔서 매뉴얼화 하신 거예요."
문소연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긴 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설립하면서, 보다 빠르고 효과적인 교육으로 최대한 빨리 현장에 투입하기 위해서 매뉴얼을 만들긴 했다.
'애초에 본인들도 도와준 거잖아.'
이아영 실장은 물론, 한 씨 남매와 문소연 또한 모두 공들여준 덕에 꽤나 완성도 높은 매뉴얼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군. 뭐, 역시...."
임동빈이 나를 슬쩍 흘겼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제 오후, 그가 사무실을 찾아와 청소팀에 지원하겠다고 했을 땐 진심으로 장난치는 건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몇 개월 전에 청소팀을 엿 먹이려다 내쫓긴 사람이 이제 와서 청소팀에 들어가겠다는데 누가 그걸 믿어주겠는가.
그래도 뭐, 어쨌든 면접 보러왔다는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그의 근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힘들게 지내는 중이었다.
랭크가 해제된 덕에 헌터로서의 활동은 더 이상 할 수 없었으니 아무 길드나 들어가서 작전 기획자를 맡았다고 한다.
물론 그마저도 징계를 받고 퇴사한 게 소문이 퍼져 큰 길드에 들어가는 건 꿈도 못 꾸고, 소규모 길드만 전전했다고.
뭐, 측은하긴 한데... 결국 다 본인 업보 아닌가.
동정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일에 경중을 나누는 건 하등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네. 결국,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인데 말이야.
나는 임동빈의 그 말에 채용을 결정했다.
나름 걱정했지만, 그래도 꽤 진지하게 교육에 임하는 걸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할 만은 하십니까?"
첫 번째 실습을 마치고 던전을 빠져나오는 임동빈을 향해 슬쩍 물었다.
"그런 게 어디 있겠어. 그냥 하는 거지."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번 주까지 교육받으시면 바로 현장에 투입되실 겁니다. 배정은... 아마도 문소연 팀장이 있는 1팀으로 가실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당연하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 생활이 익숙하진 않으시겠지만, 차차 팀 개수를 늘릴 예정이라 열심히만 해주신다면 다음번 팀을 맡길 생각이니 그때까지만 참아주세요."
"에이, 그런 걸 벌써부터 말하면 어떡하나."
"믿는다는 소립니다."
가타부타 말이 많은 인간이지만 어쨌든 작전팀장 출신이 아닌가.
던전 지식과 돌발 상황에 관한 판단은 감히 그를 따라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유빈을 제외한다면 팀장으로선 이만한 인물도 또 없겠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럼 나는 다음 교육이 있어서 이만...."
"아, 예. 그럼 계속 수고해주세요."
임동빈은 그 말을 뒤로하곤 문소연과 함께 다음 던전으로 향했다.
그들이 멀어지길 기다리다 등을 돌리던 차에 때맞춰 핸드폰이 울렸다.
「끝났어요? 어때요?」
"뭐, 나름 열심히 하려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작전팀장 출신이라 도움이 많이 되겠죠. 잘 다독여서 유빈 씨처럼 핵심 전력으로 키워 봐요.」
"하하하."
이아영 실장의 말에 진심으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농담은 그만하죠. 내부자를 어디에 써먹습니까."
농담이라도 해도 할 게 있고 안 할 게 있다.
'경중을 나눌 것 없이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회귀 전 최호성 본부장의 어록 중 하나였다.
당연히 직군의 경중을 나누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아무리 더러운 일이어도 본인에게 이득이 된다면 망설이지 말라는 뜻으로 쓰던 말이었다.
임동빈이 마지막에 그 말만 안 했어도 솔직히 긴가민가했을 텐데, 저 말로 확실해졌다.
최호성의 어록을 뱉으며 내 앞에 나타났다는 건, 분명히 둘이 연관되어 있다는 소리겠지.
"그래서 조사는 해봤습니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임동빈과 최호성의 관계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었다.
전생에서도 딱히 눈에 띄는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대충 찾아보니까 둘은 대학교 선후배 사이였어요. 과는 달랐는데, 최호성이 통제팀으로 입사하고 난 후 동문회에서 처음 만났다나 봐요.」
"흐음."
「이후에 임동빈이 헌터 등록 후 작전팀으로 들어가고 나서 이래저래 도움을 좀 받았대요.」
그래서 신입 때부터 말도 안 되는 실적을 쌓을 수 있었던 거군.
「그런데 임동빈 팀장이 그렇게 나가리 될 때는 움직이지 않았잖아요?」
"말했잖습니까. 최호성 그 인간, 본인한테 해가 될 거 같으면 가차 없이 꼬리부터 자르는 놈이라고. 당연한 일이죠."
「그러면 최호성 본부장이 심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 본인이 원해서 온 걸 수도 있지 않아요?」
"임동빈 팀장이 정말 본인이 원해서 청소부로 일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차마 빈말로라도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뭐, 어떤 거래가 오가지 않았겠습니까. 가령 복귀를 빌미로 우리한테서 뭔가를 좀 캐오라고 했다거나."
「...우리한테 그럴 만한 게 있어요?」
"있으니까 왔겠죠."
뭐, 솔직히 켕기는 게 없진 않다.
다른 걸 다 떠나서, 협회의 자금을 끌어다 쓰고 있는 것만 들켜도 파장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이만저만 수준이 아니라 풍비박산이 나겠지.
목적이 어쨌든 간에 결국 횡령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내 주변 사람이라고 해도 이걸 이해해줄 수 있을 리가 없겠지.
그래서 이아영 실장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 난 분명 말한 적이 없었다.
「협회 예산으로 자금 지원 받고 있는 거요?」
"...!"
근데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인사관리부터 회계까지 제가 다 담당하는데, 설마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
생각해 보니 그렇네....
회귀 전에 자잘한 일을 그녀에게 맡기던 습관 때문인지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좀 미안하게 됐군.
'...아니, 생각해 보니 내가 미안해야 할 일인가?'
본인이 같이 일하고 싶다고 찾아왔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걱정 마요. 솔직히 당신이 배 채우려고 그럴 사람은 아니라는 거 아니까. 애초에 그렇다고 해도 협회장님이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금을 대줄 분도 아니고요. 분명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거겠죠.」
다행히도 내가 알고 있는 대로 그녀는 입이 무거운 여자였다.
물론 믿는 근거가 좀 이해가 안 됐지만, 문제가 아니면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가끔 보면 그쪽 좀 무섭습니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아무튼, 최호성 본부장도 그걸 의심하고 있다는 거죠?」
"정황상 그럴 겁니다."
최호성은 명확한 증거를 잡기 위해 임동빈을 심었을 확률이 높다.
만약 증거를 잡는다면 언론에 퍼트리든 우리를 협박하든, 유리한 칼자루를 쥘 수 있을 테니까.
「그럼 그냥 안 받으면 됐잖아요. 내부자인 걸 아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어요?」
"예.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네?」
"뭐…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설명이야 나중에 하면 된다.
이쯤하고 전화를 끊었다.
리젠 던전 출현까지 이제 3주밖에 남지 않았다.
작전팀을 모아 대응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쪽을 생각해봐야 한다.
'나중에 좀 귀찮긴 하겠지만, 아예 망가지는 것보다야....'
지금 전력으로 리젠 던전을 맞이하면 본부 대다수가 피해를 본다. 그리고 남은 건 고스란히 국제 협회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겠지.
여기서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결국, 리젠 던전의 등장으로 피해를 보는 게 본부라고 한다면, 차라리 본부를 와해시키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설사 피해를 본다고 해도 전부 대미지를 입지는 않을 테니.
그러기 위해선 적당한 사건이 필요하다.
한 방에 협회가 흔들리더라도 완전히 붕괴하지 않을 정도의 큰 사건이.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너무나 적절한 타이밍에 임동빈이 등장해주었다. 그것도 최호성의 내부자로.
이건 절호의 기회다.
그가 횡령 증거를 최호성에게 갖다 바쳐 세간에 드러나게 된다면, 본부가 뒤흔들릴 정도의 큰 사건이 될 것이다.
'이게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어.'
당장 부족한 시간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행되게 만들어야 한다.
설사 내가 키운 본부를 내 손으로 끌어내려서라도.
***
임동빈 전 작전팀장은 온종일 이어진 실습을 마치고 밤늦게 귀가 중이었다.
'시벌, 뭔 청소 일이 이렇게 빡세....'
삭신이 쑤셔오는 통에 제대로 허리를 펴는 것도 힘들었다.
교육이었는데도 이 정도면 실제 작업을 나가면 어느 정도일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복귀를 위해서라곤 해도, 증거를 찾기 전까지 자신이 버틸 수 있을지부터 미지수였다.
물론 저버릴 수 없는 기회임은 틀림없었지만.
조금만 버티자.
그렇게 다짐하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예, 선배님."
「교육은 끝났냐?」
"예. 방금 끝나고 퇴근하고 있습니다."
최호성 본부장.
그에게 이번 일을 부탁한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어떤 것 같아? 들키진 않았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예 의심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힘들겠지만 수고 좀 해줘. 외부 지원금 내역서만 손에 넣으면 바로 본부에 자리 하나 마련해 놓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때까진 어떻게든 의심받지 않게 최대한 신뢰를 쌓아둬. 현장 나가서도 열심히 하고.」
"그럼요."
이내 전화가 끊기려던 직전.
"저… 그런데 말입니다, 선배님."
「음?」
임동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협회장이 예산을 빼돌리고 있는 게 아니면 어떡합니까?"
「야 인마! 그럴 리가 없잖....」
"그러니까,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고 하면 어떡하냐는 말입니다."
임동빈의 목소리가 퍽 무거웠다.
그는 확답이 필요했다.
만약에라도 일이 잘못되면 또다시 자신을 내치지 않겠다는 확답.
본인한테 해가 되면 꼬리부터 자르는 거로는 서민철보다 더한 인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임동빈의 저의를 눈치챈 건지 최호성은 대답을 망설였다.
「...만에 하나라도 그럴 리가 없다고 인마. 자꾸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네 일에 집중해.」
"...."
임동빈의 표정이 굳는 것도 잠시.
"알겠습니다."
복잡 미묘한 얼굴로 대답했다.
통화를 마친 후, 임동빈은 깊은 생각에 빠진 채 계속해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101
101
본부장실.
어제저녁, 임동빈 팀장과 통화한 이후로 최호성은 계속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새끼, 한 번 나가리 되더니 의심만 늘어선....'
아닌 게 아니라, 계속 확답을 요구하는 꼴을 보니 내심 불안했다.
물론 그렇다고 임동빈의 마음이 바뀔 리는 없다. 애초에 그놈에겐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불안하다고 해도 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계속 청소부로 남아 있어야 할 텐데, 그놈 성격에 청소 일을 계속할 리가 없다.
제아무리 의심한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애써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
똑똑―.
노크와 함께 김민주 팀장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음? 무슨 일인가."
"그, 다른 게 아니라...."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작전팀의 토벌량이 너무 많습니다."
"...뭐?"
"기존보다 30%나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너무 과한 것이 아닌지...."
최호성 본부장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작전팀장이라는 새끼가 토벌량이 많다고 징징대다니.
"지금 작전팀 인원이랑 길드 인력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양이지 않나?"
"저희는 그렇겠죠. 하지만 청소팀은 이 작업량을 못 따라갑니다."
"하...."
최호성 본부장이 이마를 짚었다.
기껏 와서 한다는 말이 결국 또 청소팀 이야기라니.
'대체 김준우 그놈은 뭔 생각으로 애들을 이렇게 만들고 나간 거야....'
왜 쓸데없는 걸 주입해서 일을 귀찮게 하는가.
"작전팀 위주의 기획 때문인가? 그동안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
"아무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문제가 조금씩 생기고 있는 것 아닐까요. 저번 구조조정으로 반 토막이 났는데 거기에 토벌량까지 오르니… 다들 많이 힘들어합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점점 더 힘들어지겠죠."
"그게 지금 자네랑 무슨 상관인데."
"...예?"
"자넨 작전팀장이잖나. 청소팀이 힘들건 말건 그게 자네랑 무슨 상관이냐고. 청소팀 힘든 건 그쪽이 알아서 할 일 아니야?"
"그게 무슨...."
본부에서 이런 말을 또다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본부에 저희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 너희만 있는 건 아니지. 근데 나머지 팀은 전부 너희를 보조하기 위해 있을 뿐이야. 같이 가는 게 아니라 너희를 밑에서 받쳐주는 거라고."
"..."
얼핏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김민주는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청소팀 모두가 다들 밤낮없이 일하고 있는데도 청소 작업이 밀리고 있어요. 이대로 계속 토벌을 진행하면 사고가 일어날 겁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청소팀 인원을 늘려주세요. 그게 힘드시면 파견 업체라도 고용해주세요."
"하하...."
또 청소팀 파견 업체 이야기인가.
최호성은 이 연결고리가 슬슬 지긋지긋해지고 있었다.
"김준우 대표가 그렇게 말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디?"
"...? 아뇨. 제가 직접 판단한 겁니다."
대답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당연하겠지만, 절대 김준우 그놈한테 좋은 일을 시켜주고 싶지 않다.
지금 그대로 밀고 나가도 되겠지만… 아직까지 김준우 세력이 본부에 남아 있는 이상 그랬다간 반발이 거세지겠지.
어차피 임동빈이 횡령 증거만 잡으면 협회가 손에 들어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테니...여기선 한발 물러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알았어. 검토해볼 테니까 그만 나가봐."
김민주는 가볍게 목례하곤 사무실을 나섰다.
최호성은 카르마 코퍼레이션 홈페이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찾았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급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쩔 수 없다.
'쯧, 그래 뭐 별일 있겠어.'
전화를 걸자 짧은 착신음 이후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능차원관리 협회 작전 본부장 최호성이라고 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청소팀 파견 계약 차 연락드렸는데."
***
퇴사 후 오랜만에 들어선 서울 본부장실에서 마주 앉은 남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잠시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저쪽에서 먼저 계약을 제안하리라는 예상도 못했으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본부에서 요청이 올 줄이야.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최호성 작전 본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부들 사이에서 청소팀 파견 업체가 유행하고 있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설마하니 대표가 제 선임이셨다니."
"하하."
어쭙잖은 연기.
내부자까지 심은 마당에 어디서 모르는 척인가.
"제가 좀 알아보니까 지부와 계약할 땐 모두 실장이 진행하고 대표님은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으신다던데.... 이렇게 직접 뵈니 영광이군요."
"본부와의 계약 아닙니까. 큰 건인데 직원에게 시킬 순 없죠."
지부와 계약할 땐 내가 대표인 걸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 이아영 실장을 보낸 거고....
지금은 어차피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굳이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
뭐, 영양가 없는 탐색전은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서… 원하시는 파견 주기가 있으십니까?"
"글쎄요. 청소팀이 어떻게 작업하는지 저는 잘 몰라서."
"한 팀당 하루 평균 3개 던전을 작업할 수 있도록 맞추는 게 가장 효율적일 겁니다. 지금 팀당 하루 평균 5개를 작업하고 있으니까… 저희 쪽에서 1개월에 총 10회 파견으로 계약하시는 게 가장 좋을 것 같군요."
"비용은 어떻게 됩니까?"
"대충 이 정도...."
계약서를 내밀자 그의 턱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금액이었던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대로 진행해주십시오."
"그러죠. 아, 혹시 원하시는 팀이 따로 있으십니까?"
내가 묻자 최호성 본부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팀마다 뭐가 또 다릅니까?"
"작업 스타일이 다르죠."
"아무 팀이나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침 이번에 신입이 들어온 팀이 있는데, 그 팀을 파견해드리겠습니다."
"...신입이요?"
"예. 아, 걱정 마십시오. 그분이 사실 작전팀장 출신이시라 던전 바닥은 꽤 베테랑이거든요. 저를 믿고 한 번 맡겨보십시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미소를 지었다.
최호성은 재빨리 당황한 기색을 숨겼다.
설마하니 내 쪽에서 먼저 임동빈을 본부에 붙일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 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면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쉽게 접촉할 수 있을 테니까.
'일부러 신경 써 주는 거니까 잘 좀 해라....'
나는 추가적인 설명과 함께 계약을 마치고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자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이아영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임동빈 팀장을 본부로 파견시켜주면 너무 저쪽에 좋은 조건 아니에요? 가까워지면 연락하기가 더 수월해질 텐데."
"...들렸습니까?"
"안 들으려고 해도 들리던데요."
이아영 실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참 귀도 좋은 여자라니까.
"뭐,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대체 뭐가 그럴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말 좀 해주면 안 돼요? 슬슬 답답해지려고 하는데."
"...."
귀찮게 하네.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겠지만… 자세하게 이야기해줘봤자 어차피 안 믿을 게 뻔한데 의미가 있나 싶다.
하지만 말을 안 해준다고 가만히 있을 여자도 아니고.
언질만 좀 해둘까.
"3주 뒤에 서울에 던전 하나가 출현할 겁니다."
"무슨 던전이요?"
"위험한 던전입니다. 협회가 무너져 내릴 만큼 위험한 던전."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하하, 설마 협회가 던전 때문에 망할 거라는 소리는 아니죠?"
"망하진 않을 겁니다. 다만, 협회의 실권이 바뀌겠죠."
다 쓰러져가는 협회를 국제 협회가 냉큼 집어삼킬 테니까.
"이해가 잘 안 가는데요...."
"그럼 그냥 이해하지 말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아무튼, 제겐 지금의 협회가 중요합니다. 실권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군요."
"그럼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알고 있다면 막는 건 어렵지 않을 텐데?"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겠죠. 하지만... 솔직히 지금으로선 그걸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피해를 최소화할 수밖에."
"...어떻게요?"
뭔가 위험한 기색을 느꼈는지 이아영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던전이 출현하기 전에 협회를 흩어놓을 겁니다."
"...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이내 격하게 반응하며 흔들린다.
"자, 잠깐만요! 당신 설마... 일부러 최호성이 증거를 잡게 해서 협회장님을 끌어내릴 생각이에요?!"
확실히 눈치 하나는 빠르네.
뭐, 정확하다.
이번 일을 위해서 필요한 건, 협회가 뒤흔들릴 만큼 큼직한 사건과 그 책임을 뒤집어쓸 우두머리다.
대가리가 잘려 나간 조직만큼 와해하기 쉬운 게 또 없으니.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지.
"협회장님뿐이겠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본부 주요 인력들을 모조리 끌어내릴 생각인데."
"그, 그건 배신이잖아요! 어떻게 그런...."
"죽는 것보단 차라리 한발 물러나는 게 낫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녀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 있을 때였다.
"지금 뭐라고 했나?"
난데없이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시선을 옮기니 복도 끝에서 굳은 얼굴로 다가오고 있는 박인범 협회장이 보였다.
"헉…!"
이아영의 숨이 거꾸로 넘어갔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날 끌어내린다니...."
"혀, 협회장님… 그, 그게 아니라…!"
이아영이 나서서 변명을 시도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동안 좀 예뻐라 해줬더니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나?"
하지만 협회장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하자, 답지 않게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기어이 패닉에 빠진 듯한 모습.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장난은 그쯤 하시죠. 옆에 있는 사람 간 떨어지겠습니다."
"하하하! 나도 모르게 좀 놀려주고 싶어서 그만."
"...??"
이아영 실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와 협회장을 번갈아 봤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미 다 이야기된 사항이니."
"설마 제가 이런 중요한 일을 멋대로 진행하겠습니까."
"...."
순간 이아영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빠악―.
내 어깨에 주먹이 내리꽂혔다.
"한 번만 더 놀리면 진짜 가만 안 둬요!"
"...."
아니, 내가 놀린 것도 아닌데 왜 날....
'미친, 힘이 뭔....'
이 정도면 헌터 해도 되겠네.
저릿저릿한 통증에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래서, 진행 상황은 어떻습니까?"
"믿을 만한 놈 시켜서 내역은 대충 조작해 놨어. 물론 작정하고 뒤지면 찾을 수는 있을 정도로만."
"이제 정말 직진뿐이군요."
협회장이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참 아이러니하군. 협회장 자리에 다시 앉힌 것도 자네인데, 이젠 협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도 자네라는 게."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일이 끝나고 다시 복귀하기 힘드실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천년만년 해먹을 것도 아니지 않나. 내가 협회장 자리만 몇십 년을 있었어. 이 정도면 충분히 오래 했지. 하하하!"
호쾌한 웃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난 오히려 자네가 걱정이군. 내가 자리에서 물러나면 이제 더 이상 자네 뒤를 봐줄 사람이 없지 않은가. 미리 말하는데, 설령 내가 복귀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 프로젝트는 중단하지 않을 거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자신만만하군."
"언젠 아니었습니까."
협회장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아영 실장은 그러지 못했다.
"자, 잠깐만요! 우리 프로젝트라뇨? 또 뭐가 더 있어요?!"
"...."
"...."
하여간 뭐하나 놓치는 법이 없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이아영 실장이 머리를 턱 짚었다.
"...대체 두 분이서 뭘 꾸미고 있는 거예요?"
"그, 그게...."
"아니, 됐어요. 생각해 보니까 그냥 모르고 있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지금 일만으로도 충분히 골치가 아프니, 더는 말하지 말라는 듯한 반응.
눈치를 살피던 협회장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머진 잘 부탁함세."
"걱정 마십시오."
"그래. 그럼 난 이만 볼일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곤 등을 돌리나 싶었는데....
"아, 그런데 말이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입꼬리를 쓱 올렸다.
"둘이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군."
"...."
"...."
이 사람...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농담이야, 농담. 너무 정색하지 말게. 하하하!"
102
102
모두가 퇴근한 늦은 저녁.
카르마 코퍼레이션 사무실.
불이 모두 꺼져 있는 가운데 한 자리의 모니터 불빛만이 은은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시발....'
홀로 모니터 화면에 집중하던 임동빈이 혀를 찼다.
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무실에 보안 시스템은 아직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덕분에 몰래 들어오는 것까지야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무것도 없잖아....'
이아영 실장의 컴퓨터로 외부 지원금 내역서를 찾아보는 중이었지만, 이렇다 할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해봤자 청소 장비 업체에서 장비 몇 개 지원받은 것과 몇몇 중견 기업에서 스타트업 지원을 받은 게 전부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임동빈이 답답한 마음에 손톱을 깨물었다.
설마 최호성 그놈, 심증만으로 캐보라고 한 건가?
아무것도 없는데, 확인차 부탁한 거야?
아니... 최소한 최호성은 도박할 양반은 아니다. 분명 뭔가를 찾았으니까 부탁을 한 거겠지.
임동빈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복귀는 물 건너간다. 또다시 밑바닥을 전전해야 한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찾아야 한다.
'다른 놈한테 맡겨 봐야겠군.'
혹시 몰라 챙겨온 USB를 본체에 꽂았다.
몇 분 후, 백업이 완료된 USB를 챙겨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나와 이아영 실장이 출근하자 건물 경비원이 급하게 우리를 찾았다.
밤늦게 어떤 직원이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근데 행동거지가 수상했다.
그러한 보고와 함께 CCTV 화면을 보여 주었다.
임동빈이 어젯밤 한 일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이아영 실장은 곧바로 자신의 컴퓨터를 확인했다.
"어떻습니까?"
"아주 깔끔하게 털어갔네요."
뭐,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애초에 털어가라고 보안 시스템도 설치하지 않은 거니까.
"이 정도면 확실히 증거를 찾을 수 있겠죠?"
"뭐, 외부 지원금 내역은 조작해놔서 아무것도 없겠지만, 계좌 내역은 조작이 안 되니까요. 거기까지 털 수 있으면 증거는 빼박이죠."
"계좌 내역을 어떻게 텁니까? 영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뭔지 알아요?"
이아영 실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공용 컴퓨터로 은행 업무를 보는 거예요. 뭐, 제 경우엔 일부러 그랬지만."
"...일부러 기록을 남겼다는 겁니까?"
"당연하죠. 전문가한테 가져다주면 아이디, 비밀번호, 공인인증서까지 싹 다 털어줄 거예요. 그러면 뭐...."
"계좌 내역 털리는 건 시간 문제겠군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일이 임동빈 팀장 손에 넘어간 이상 이젠 정말 우리 손을 떠났어요."
"압니다. 뭐, 그놈들이 예상대로 움직여주길 바라야죠. 우리 직원들한테도 말해놓으셨습니까?"
"네. 다음 달부터 공사가 있으니 며칠 휴가 좀 갔다 오라고 했어요. 다들 좋아하죠, 뭐."
"잘했습니다."
옅은 한숨과 함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사실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물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악물고 키워놓은 본부를 내 손으로 끌어내리는 게 아닌가.
아마 이번 게이트가 터지면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던 반 협회장 세력이 이때다 싶어 들고 일어설 것이다.
서민철을 비롯한 각 지부의 인사들이 움직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협회장을 포함해 나와 유착 관계가 있었던 모두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물론 김민주도.
아마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지부로 날려 보내겠지.
그렇게 되면 협회는 한동안 텅 빈 상자가 될 것이다.
그때라면 리젠 던전이 출현해도 협회 전체의 피해는 줄일 수 있다.
"...저."
이아영 실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뭡니까?"
굉장히 묘한 분위기 속, 묘한 목소리가 들이닥쳤다.
"그… 당신 말이에요."
말 꺼내기가 유독 조심스러워 보였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예?"
"한 달 뒤에 던전이 출현할 거라는 거 말이에요. 솔직히 혜안이나 짐작 수준을 넘어서... 이 정도면 그냥 예지잖아요."
"...."
갑자기 훅 들어오네.
"여태까지 말은 안 했지만, 본부에 있을 때도 그랬어요. 종종 이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니까요?"
꼭 예전에 한 번 겪었던 사람처럼.
그녀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생에 살해당하고 10년 전으로 회귀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업보라는 스킬을 해제해야 한다.
솔직히 나조차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그녀라면 어떨까.
믿을지 아닐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 진지하게 듣긴 할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간 같이 해온 것도 있고, 실력만큼이나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굳이 몰라도 될 걸 알 필요가 있을까.
그 때문에 위험에 빠지면 오히려 도움받기가 더 힘들어질지 모른다.
"뭐...."
나는 잠시 망설이던 끝에.
"제 업보입니다."
그냥 그런 대답만을 내놓았다.
그녀는 농담이라고 생각한 건지 피식 웃음을 뱉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무슨 업보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확실히 이전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도 않은데....
과연 이게 업보이긴 한 걸까.
"그런데 뭐… 요즘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
서울 삼성동 인근 그린 던전.
작전 1팀과 함께 첫 파견을 나온 임동빈은, 던전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젯밤 백업한 데이터는 실력 있는 놈한테 맡겨 놨다.
몇 년 전까지 통제팀에서 일하던 놈이었지만 내부 시스템을 해킹해서 민간 길드에 팔아먹으려다 적발돼 현재 백수인 녀석이다.
'실력은 확실한 놈이니 뭐라도 건져주겠지. 건덕지라도 나오면 바로 최호성한테....'
아니, 아니지.
그 인간을 뭘 믿고 바로 건네줘.
일단은 쥐고 있다가 확실하게 복귀시켜주면 그때 가서 주는 게 맞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그때.
"동빈 씨! 집중해주세요!"
1팀장 문소연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새 보스 방에 들어선 뒤였다.
"희영 씨, 약품 농도 맞춰주세요."
"네!"
"상호 씨는 외벽 관리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해체는 동빈 씨가 해주세요. 할 수 있으시겠죠?"
"네, 뭐...."
"그럼 해체해서 부산물 잘 담아주세요. 나중에 잊지 말고 꼭 가지고 나가시고요."
임동빈은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지시를 내린 그녀를 몇 번 흘겼다.
문소연.
자신이 작전팀장이던 당시 청소팀의 막내.
공동 프로젝트 당시엔 자신이 현장 책임자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정반대가 됐다.
무력감과 굴욕감.
이 기분은 느껴보지 못한 놈이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임동빈은 이를 갈며 어기적어기적 몬스터 사체로 향했다.
슬라임 계열 몬스터.
크지는 않았지만, 토벌 당시 대미지를 많이 입어서인지 부산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슬라임이면… 단일 해체는 어렵겠고. 그러면 분할 해체해서 포장한다고 했나…?'
그간 교육받았던 내용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올랐고, 동시에 자연스레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슬라임 계열이면 독성이 강하니까… 아 씨, 독성이 강한 몬스터는 어떻게 처리한다고 했더라. ...아, 맞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임동빈의 머릿속엔 조금 전 느꼈던 기분이나 증거 자료 같은 잡생각이 점점 사라져갔다.
그 대신 오로지 눈앞에 놓인 몬스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집중했다.
"후.... 대충 마무리된 것 같네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작업이 끝나 있었다.
"이제 다들 장비 챙겨서 나갈까요?"
문소연이 소매로 땀을 훔치며 말했다.
고된 작업이었음에도 여전히 미소 띤 얼굴.
임동빈에게 그 웃음은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놀리는 비웃음으로 보였다.
그래, 한때 작전팀장이었던 자신을 손가락 하나로 부려먹고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아니면 뭐, 그때 당한 거 복수라도 하는 심정일 수도 있고.'
이 바닥은 철저한 약육강식이다.
그거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밑바닥을 굴러보니 더욱 피부에 와 닿았다.
지금 약자는 본인, 그리고 강자는 저 여자다.
저 여자 또한 그걸 알고 있겠지.
임동빈의 불편한 심기는 작업을 마치고 던전을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던전을 나와 마지막 작업 결산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동빈 씨."
"네?"
문소연이 퍽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산물 어디 있어요...?"
"아, 여기에...."
고개를 틀어 뒤를 바라봤지만, 텅 빈 바닥만 보였다.
임동빈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그제야 부산물을 포장해 놓은 봉투를 던전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빨리 돌아가서 수거해오죠."
재빨리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따라 모든 팀원이 다시 던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던전 입구에 다다르자....
"하아...."
문소연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
"뭐라고요?"
문소연과 임동빈은 작전 4팀장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부산물 수거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다시 수거하려 했지만 이미 던전이... 닫혀버렸습니다."
"아니, 유명한 업체라고 해서 믿고 맡긴 건데 이게 대체 무슨...."
작전 4팀장, 추지연이 기가 차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당신이 실수한 거예요?"
"...."
임동빈은 대답을 피했다.
팀장 외에 같이 보고하러 온 인원이 있다면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녀는 임동빈을 잘 알고 있다.
그가 한창 본부에서 날렸을 때 본부 헌터로 일했었으니까.
실적에 눈이 돌아서 양아치 짓을 일삼았던 최악의 팀장.
굉장히 아니꼬운 인간이었지만, 당시 작전 2팀장이라는 직급이었기에 대놓고 무어라 할 순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장난해요? 무슨 작전팀장 출신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합니까?"
"...."
"대체 무슨 정신으로 일을 하는 거예요? 네? 가만히 있지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보세요!"
날 선 감정에 묘한 통쾌함이 섞여 있었다.
임동빈은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무어라 입을 열 명분이 없었다.
과거야 어쨌든 현재 저쪽이 갑이었고, 그는 을이었다. 게다가 문제를 일으킨 건 이쪽이다.
그저 지금은 참는 수밖에.
"하여간 당신 예전부터 그랬어. 능력도 없이 실적이나 탐내고 말이야.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팀장 달고 떵떵거릴 땐 좋았지?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미청소 던전 나오면 당신이 단독 토벌이라도 할...."
"제가 실수한 거예요."
과거까지 들먹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모욕을 한 목소리가 잘라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문소연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선 것이다.
"오늘 첫 파견을 나오신 분이에요. 당연히 실수할 수 있다는 걸 현장 책임자인 제가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팀장인 제게 해주세요."
격양되었던 추지연은 조금 당황했다.
상대가 임동빈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진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는 걸,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한편 그녀보다 더 당황한 이가 있었으니.
'...뭐야 저건.'
바로 임동빈이었다.
왜 굳이 부하를 감싸고도는 건지, 그로선 퍽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번 파견 비용은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추후 미청소 던전 출현 시 토벌 또한 지원해드릴게요."
"...그쪽은 그런 일도 가능하다고요?"
"네! 최근 꽤 실력 있는 길드를 모두 영입했거든요."
상대가 이리 나오니 추지연 팀장의 기가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감정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그리 화낼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청소는 완료했고, 단순히 모아둔 부산물만 수거하지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 포장까지 되어 있는 상태라면 가스가 샐 염려도 없다.
최대한 융통성을 발휘하자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저쪽에서 환불과 토벌 지원까지 약속한 이상, 더 이상 화를 낼 명분은 없었다.
하지만 문소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갔다.
"거듭 죄송합니다. 다신 이런 실수 없을 거예요. 대표님께도 이번 일에 대해선 빠짐없이 보고 드리겠습니다. 혹시 윗선에 보고하셔야 하는 일이라면 제 책임으로 말씀해주세요."
"...."
추지연 팀장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쪽에서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도 똑같은 실수가 반복되면 그땐 본부장님께 보고해서 계약을 해지할 거니, 그렇게 알아두세요."
"물론입니다."
그 말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작전 4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하아...."
문소연은 한꺼번에 긴장이 몰려온 건지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아까의 당당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그녀는 되려 임동빈을 먼저 위로했다.
"아까 이야기는 너무 귀담아듣지 마세요. 옛날 일은 옛날 일이고, 일을 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
한참은 어린 녀석이 자신을 위로하는 상황이라니.
크게 자존심 상할 일이었지만, 임동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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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빈은 본부 앞 벤치에 홀로 앉아 핸드폰을 꽉 쥐었다.
데이터 해독에 대한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지만… 어딘가 불안한 듯 연신 다리를 떨었다.
하지만 무엇이 불안한지는 스스로 잘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까 봐 불안한 건지.
아니면 정말 뭐라도 나올까 불안한 건지.
'시발, 지금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암, 당연히 뭐라도 나와야지.
그래야 이 밑바닥 생활을 청산하고 복귀도 하지 않겠는가.
고민할 건덕지도 없었다.
뭐라도 걸리면 바로 최호성 본부장에게 전송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하필 상대가 또 김준우라니....'
김준우.
뭣 모르고 건드렸다가 랭크 등록이 해지되고 본부에서 제 발로 걸어 나온 게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자신을 밑바닥에 빠트린 원흉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복수심보단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조금 더 컸다.
무엇보다 자신이 퇴사한 이후에도 김준우는 멈추지 않고 협회 윗대가리들을 속속히 잘라내지 않았던가.
그런 미친놈을 또다시 건드려야 한다니.
한차례 호되게 당했던 충격이 너무 컸던 걸까, 마치 몸이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뭐, 그것도 그렇고....'
...사실 그리 썩 내키는 일도 아니었다.
요 몇 달간 전전긍긍해온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 일이 오히려 천직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름 경력도 살릴 수 있고 월급도 괜찮고.
무엇보다....
-옛날 일은 옛날 일이잖아요. 일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죠.
왠지 모르게 그녀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띠링―.
씁쓸한 기분에 빠져 있을 때 문자 한 통이 날아들었다.
다급하게 내용을 확인했다.
「확인해보니까 다른 문서에는 별로 특이사항이 없는데, 계좌 내역이 좀 이상하다. 금빛 재단, 청소년 헌터 육성 재단… 이거 다 협회 산하 기구 아니냐? 얘네 외부 사업지원금 말고도 더 받아먹은 거 확실한 듯. 일단 자료 너한테 전송해 놓을게.」
아니나 다를까, 해독을 맡겼던 그놈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이어서 첨부파일 하나가 전송됐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계좌 내역서였다.
끝났다.
이걸 전송하기만 하면 협회장이고 김준우고 모두 끝이다.
그 둘뿐이랴.
그간 김준우와 붙어먹었던 모든 인사도 이 여파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
해야 할 일은 간단했지만, 임동빈은 심경은 복잡하기만 했다.
"쉬는 시간 지났어요!"
마침 문소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것도...."
"에이, 아까 일은 신경 쓰지 마시라니까!"
사람 좋은 미소.
여전히 속 편한 여자였다.
임동빈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혹시 땡땡이치고 있었어요?"
"설마 혼자 뚱해가지고 점심도 안 드신 건 아니죠?"
"그러게 그냥 같이 먹자니까~."
이어서 1팀의 청소부들이 한마디씩 건넸다.
하지만 여전히 임동빈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문소연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 그러시면 오늘은 이만 들어가실래요? 대표님한테는 제가 말해놓을게요."
"...."
임동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길 잠시.
"...아닙니다. 이동하죠. 다음 작업은 어딥니까?"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뭔가 이상하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임동빈이 사무실 컴퓨터를 해킹한 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그런데 왜 아무런 반응이 없지…?'
턱을 괸 채 손가락으로 연신 책상을 두드렸다.
데이터를 전부 백업해갔다는 건 다른 전문가한테 맡긴다는 뜻일 텐데, 만약 그랬다면 원하는 걸 못 찾았을 리가 없다.
최호성에게 자료가 들어갔어도 벌써 들어갔을 시간인데 대체 왜 가만히 있는 건가.
뭐 아꼈다가 퍼트리겠다 이건가?
아니, 지금 본인이 그럴 여유가 있어?
'아니면 설마....'
임동빈이 아직 최호성에게 자료를 전송하지 않은 건가?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지 않은 이상....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해요."
그때 이아영 실장도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가 말입니까."
"임동빈 말이에요. 뭐랄까...."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요즘 일을 너무 열심히 한다고 해야 하나?"
"그게 뭔 소립니까?"
"말 그대로예요. 일주일 전에 이슈 한 번 발생한 이후론 다른 실수 없이 잘하고 있어요. 팀원들이랑 잘 지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아니고요."
"...."
내부자로 들어온 놈이 열심히 청소일을 하고 있다고? 그것도 천하의 임동빈이?
그건 확실히 수상하네.
"혹시 개과천선한 게 아닐까요? 아무 소식도 없는 걸 보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어떻게 복귀할 기회를 포기하고 청소일을 선택합니까."
"저야 모르죠. 막상 해보니까 적성에 맞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최호성 본부장이 분명 꼬리를 자를 거라 의심하고 있는 걸 수도 있고요."
"하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임동빈이 개과천선했다는 건 믿기 힘들지만,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일주일 만에 사이가 그렇게 틀어지는지 모르겠지만.
'둘 사이가 어찌 되건 내 알 바 아니긴 한데....'
답답한 마음에 달력을 집어 들었다.
이젠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쪽에서 뿌릴 수 있는 미끼는 모두 뿌렸고, 준비도 모두 마쳤다.
남은 건 저쪽에서 집어먹기만 하면 되는데,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해서야 원.
주먹을 쥐어 입에 가져다 댔다.
본부를 뒤흔들만한 칼은 이미 제삼자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자꾸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리젠 던전이 출현해버리면 최악의 상황이 된다.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는 걸 막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본부는 본부대로 터져버리는 상황.
'그랬다간 그냥 국제 협회에 대놓고 먹어달라고 하는 꼴이겠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꼴은 못 본다.
"어떻게 할까요. 좀 더 기다려볼까요?"
"시간도 없는데 그걸 언제 기다리고 앉았습니까."
"그럼 뭘 어떡하게요?"
어쩌긴 뭘 어째.
"계좌 내역. 우리가 직접 보내줘야죠."
"...?"
머저리 같은 놈들.
내가 떠서 먹여줘야겠냐.
***
"대체 뭐야, 시발...."
최호성 본부장은 머리를 움켜쥔 채 안달이 난 상태였다.
일주일째 임동빈과의 연락이 두절됐다.
듣자 하니 출근은 꼬박꼬박하고 있다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전화, 문자, 메일을 모조리 씹고 있다.
어떻게 되고 있는지 소식이라도 알아야 준비를 하든 말든 할 텐데.
파견 나왔을 때 접촉하고 싶어도 보는 눈이 많아서 위험하고....
아니 근데 이렇게까지 연락을 안 받을 이유가 있나?
'이 새끼 설마....'
그새 마음이 바뀐 건 아니겠지…?
마침 그 순간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최호성 본부장님! 아직도 준비 안 됐습니까?!」
통화버튼을 누르자 잔뜩 격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성남 지부 연수원 건설 추진 때 리베이트를 받고 계약을 진행했던 건설 업체 사장이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큰 거 한 방 터질 겁니다. 그때가 되면 제가 위약금은 물론이고 성남 지부에 박람회 건도 밀어 드리겠습니다."
「기다려달라는 말만 벌써 몇 주째입니까! 아니, 진짜 뭐가 있긴 한 겁니까?」
"물론입니다. 정말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아 씨, 모르겠고. 이번 주 안까지 기초 공사 진행된 거 위약금 안 물어주면 전부 언론에 제보합니다? 솔직히 우린 여기서 뭐 더 잃을 것도 없어요.」
반대편에서 콱, 소리와 함께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X 됐다.
정말로 X 됐다.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임동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제발 받아라. 제발....'
간절하게 기도하며 기다리길 잠시.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이 빌어먹을 새끼가!!"
콰직―!
참다못해 핸드폰을 집어 던지곤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직접 찾아가야 하나?
아니, 그건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다.
그럼… 이걸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사실 그는 알고 있었다.
칼을 쥐고 있는 임동빈이 잠수를 타 버린 이상, 모든 게 끝이라는 것을.
'하하....'
짧고 짧았던 본부 생활도 이젠 끝이다.
그런 생각에 실성한 웃음이 흘러나오려던 그때였다.
"보, 본부장님!"
유영수 보좌관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영수야. 짐 싸둬라. 우리 다 X 됐으니까."
"아뇨! 안 싸도 될 것 같습니다!"
최호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군가 익명으로 본부장님 앞으로 소포를 보냈는데...."
유영수가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확인해보니 카르마 코퍼레이션 계좌 내역입니다."
"...?"
하늘이 그를 도운 것이다.
***
"리젠 던전? 서울에서?"
PB 코퍼레이션 본사.
마르크 밸런스 조정팀장에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확실한 건가?"
"네. 본부에서 직접 감지한 이능파입니다. 파장이 매우 불안정한 것으로 보아 레드 등급의 리젠 던전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거긴 땅덩어리도 작으면서 별의별 던전이 다 나오는군...."
리젠 던전이라면 40년 전 남미 빈민가에 딱 한 번 출현한 적이 있는 매우 특수한 던전이다.
알려진 것이라곤 그저 던전에서 끊임없이 몬스터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뿐.
토벌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다시피 한 그 던전을 과연 한국 협회 놈들끼리 해결할 수 있을까?
가만히 머리를 굴리고 있길 잠시.
'이거 잘하면....'
마르크 팀장은 이내 앞에 있던 직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클로이한테 연락해서 저번에 말했던 반능석 가공 어떻게 됐나 좀 물어봐!"
"네, 네? 그건 갑자기 왜...."
"리젠 던전이 출현할 거라면서. 분명 서울 본부 전체가 토벌에 참여하게 될 텐데. 그러면 한동안은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있지 않겠냐?"
"그, 그렇죠."
"가뜩이나 예상 등급이 레드라면 토벌이 쉽지 않을 거야. 작전을 위해 본부 전체 인원이 모여든다면 꽤나 혼란스러워지겠지. 그럼… 그때가 기회야."
수백 명의 인원이 참가하는 작전이라면 오히려 움직이기 더 편하다.
혼란스러울수록 눈에 잘 띄지 않을뿐더러, 온 신경이 작전에만 쏠려 있다면 방심을 유도할 수도 있을 테니.
무엇보다 이런 대규모 작전에서 사상자가 나오는 거야 예삿일이고.
무척이나 시의적절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직원은 여전히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는 협회 소속이 아니잖습니까. 작전에 참여할 리가...."
"아니, 그 새끼라면 무조건 나올 거야. 내가 말했잖아…."
마르크 팀장이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동료들이 위험하면 스스로 목을 들이밀 놈이라고."
"...."
"지금 당장 한국 파트 현장직들 소집시켜. 아, 그리고 이번 작전 지휘는 한국 파트장한테 맡긴다."
"파트장이요? 서울 본부 내부자가 직접 움직이는 건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반능석까지 준비해 놨어. 현장직 놈들한테만 맡기기엔 불안해."
마르크 팀장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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