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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행정본부.
최호성 본부장은 곧바로 박인범 협회장을 찾았다.
의아한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칼이 들어온 이상 지체 없이 일을 진행해야 했으니까.
"다른 걸 좀 알아보다가 우연히 찾은 자료들입니다."
최호성이 협회장 앞에 자료를 들이밀었다.
협회장이 굳은 표정으로 이를 훑었다.
"...이게 뭐지?"
"금빛 기부 재단, 청소년 헌터 육성 재단 등등. 협회 산하 기구 이름으로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입금된 내역입니다. 경영부에 확인해보니 본인들은 모르는 내용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게 다 내가 지시한 사항이라 이건가?"
"설마 아니라고 하실 겁니까?"
최호성 본부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알아보니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가 김준우 전 본부장이더군요. 뭐, 두 분이 꽤 각별한 사이니 뒤를 봐주는 것 정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이건 도를 넘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검찰에 넘겨버리지, 왜 굳이 이걸 나에게 가져온 건가?"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까 해서 협회장님에게 직접 듣고 싶은...."
"하하, 하하하!!"
협회장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오해는 염병. 그냥 솔직하게 말하게. 그걸 빌미로 날 협박하고 싶다고."
"...."
최호성의 예상과 달리 협회장은 너무나 침착했다.
마치 이런 상황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살짝 주춤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야기가 빨라서 나쁠 건 없지.'
굳이 포장할 필요 없이 바로 본심을 내비쳤다.
"분당에 던전 박람회를 추진하고 싶습니다."
"...박람회?"
협회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거야 어렵진 않은데... 수지가 안 맞는군. 박람회 정도야 날 날려버리고 난 다음에 직접 추진할 수도 있지 않나."
"뭐하러 일을 크게 만들겠습니까. 서로 원하는 것만 깔끔하게 쥐고 돌아설 수 있는데 말이죠. 조건만 들어주신다면 자료는 깔끔하게 폐기하겠습니다. 물론 언론에도 제보하지 않을 거고요."
협회장이 신음하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속만 좁은 줄 알았더니 그릇도 작군."
"...네?"
"고작 그거 하나 얻자고 날 찾아왔나? 어이가 없어서 원... 공개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게. 굳이 그렇게 하면서까지 연명하고 싶지 않으니."
"...?!"
최호성의 얼굴이 순간 팍 굳었다.
대체 뭔가.
저건 침착한 게 아니라, 아예 관심조차 없는 수준이 아닌가.
본인 목이 날아가게 생긴 마당에 배짱을 부리다니.
자존심은 있다 이건가.
최호성은 작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봅니다, 협회장님. 이게 세간에 공개되면 협회장님은 물론이고 본부 전체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경고에도 협회장은 실소를 뱉었다.
그러자 되려 최호성은 다급해졌다.
"저도 본부 사람입니다. 본부가 잘못되는 걸 바라진 않습니다. 이 이상 일을 키우지 말고 저희끼리 조용히 해결하는 게...."
"이봐. 최호성이."
협회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를 꿰뚫었다.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나?"
"...예?"
"그런 미지근한 태도로 할 거면 이쯤에서 그만둬. 평생에 두 번 없을 칼을 쥐었는데 어쭙잖은 협박이나 할 생각이야? 물어뜯을 거면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야지."
"...."
최호성은 그제야 자신이 상대를 너무 만만히 봤다는 걸 깨달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애초부터 이 사실을 세간에 공개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계좌 내역은 어디까지나 거래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으니까.
애초에 이 자료가 언론에 뿌려지면 협회는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날 것이다. 당연히 본부장인 자신에게도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
굳이 그러한 귀찮은 것들을 감수하면서 이걸 공개할 이유가 있을까. 딜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최호성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꽤나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그냥 거래를 받아들이시면 아무 문제 없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지금 당장이야 그렇겠지. 보아하니 자네 지금 급하게 꺼야 할 불이 있는 모양인데, 그걸 해결하고 나면 또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겠나?"
"...."
최호성의 말문이 막히자 협회장이 피식 웃었다.
"어림도 없지. 내 장담하는데, 자네는 앞으로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이번 일을 빌미로 나를 계속 이용해 먹으려고 들 거야. 그 좋은 칼을 한 번 쓰고 버리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나."
"...."
"이미 그 자료가 자네 손에 들어간 순간부터 다 끝난 거야. 자네한테 놀아나면서 구질구질하게 연명할 바에야 그냥 여기서 끝을 보겠네."
"그 말 후회하실 겁니다."
"지랄 말고, 퍼트릴 깡 없으면 그냥 놓고 가던가."
쐐기를 박는 도발.
최호성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알겠습니다. 정 뜻이 그러하시다면."
최호성은 자료를 콱 움켜쥐며 협회장실을 박차고 나갔다.
복도를 빠르게 가로지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대체 뭔가.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분명히 본인이 계획한 일인데....
왜 자신이 놀아나는 기분이 드는 걸까.
***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협회의 박인범 협회장이 수억 원대의 예산을 횡령한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익명의 내부자가 보낸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계좌 내역 자료엔 금빛 재단, 청소년 헌터 육성 재단 등 이능차원관리 협회 산하 재단들 이름으로 받은 자금 내역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해당 업체의 대표가 김준우 전 서울 작전 본부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충격을 더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김준우 대표와 박인범 협회장 사이에 모종의 유착 관계가 있었는지 중점을 두고 조사를....」
이후 앵커가 몇 마디를 더 떼자 내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볼 것도 없이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뭐, 안 봐도 내 주변 사람들이겠지.
지금 뉴스 진짜냐, 대체 무슨 일이냐 등등… 할 말은 뻔하지만, 굳이 사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말한다고 해서 믿을 것도 아니고.
└뭐야? 지금 뉴스 실화임??
└시발 뭐임????
└와 씨 존나 충격이다ㅅㅂ
└응~ 다 똑같은 놈들이었죠? 무슨 희대의 영웅인 것마냥 신격화하던 놈들 벙쪘죠?
└김준우도 권력 맛 한번 보더니 사람이 바뀌네;; 진짜 존나 실망이다...
└?? 이해가 안 가는 게, 김준우가 뭘 잘못했다는 거임? 대놓고 개인 계좌에 꽂아준 것도 아니고 지원금 받은 것도 죄임?
└그니까;; 그냥 주니까 받은 걸 수도 있잖아. 김준우가 협회장한테 지원금 달라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음?
└이게 맞지. 어쨌든 협회장은 예산 횡령 빼박인데, 김준우는 좀 애매함.
└이게 뭔 개소리들이냐ㅋㅋㅋㅋㅋ 그럼 달라고 하지도 않은 거액을 협회장이 횡령까지 해서 지원을 해줬다고? 이게 말이 됨?ㅋㅋㅋㅋㅋㅋ
└그거야 심증이고;; 어쨌든 김우준 쪽에서 돈 달라고 했다는 증거가 없으면 몰아가기도 좀 그럼;;
└ㅂㅅ들ㅋㅋㅋ 횡령에 로비까지 빼박인데 뭔 이걸 실드를 치고 있어ㅋㅋ
└야 이거 김준우랑 박인범 말고 그 주변 인물까지 싹 털어봐야 한다 분명 뭐 더 있을 듯
└작전 1팀에 김민주도 김준우랑 친하지 않음?
└작전팀뿐임? 현역 때 지원팀이랑 통제팀도 죄다 김준우 사단이었는데
└또 거물이라고 흐지부지 끝낼 생각 말고 먼지 한 올까지 다 털길
뉴스에 대한 인터넷 반응 또한 뜨거웠다.
어째 이렇게 보고 있자니 옛날 일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회귀 전엔 댓글 한 줄, 기사 한 줄에 노발대발했었는데... 지금 뭐 딱히 별생각이 안 든다.
심지어 그땐 억울할 것도 없었는데 말이지.
"주변 사람 모두가 적으로 돌아서겠네요."
"익숙합니다. 그리고 뭐...."
슬쩍 시선을 옮겼다.
"최소한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선수네, 선수."
어째선지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좀 귀찮은 일이 있긴 했어도 계획대로 진행되기 시작했으니.
"이거 수습은 되려나 모르겠네요."
"계획대로 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참 나, 그 말이 제일 무서워."
탐탁지 않은 반응.
뭐, 이해는 간다.
솔직히 제정신이고서야 협회를 터트리는 게 계획이라고 하는 놈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거기에 토씨 하나 안 달고 동참하는 사람도 제정신은 아니겠지만.
"그래요. 뭐…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그녀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다.
***
강원도 산골 어딘가.
버려진 빌라에 있는 세이프 하우스.
양민호가 이곳에 은신한 지도 벌써 몇 달째였다.
적대적 인수합병 건 당시, 임무 실패와 함께 김준우에게 PB 코퍼레이션의 존재를 들켰을 땐 솔직히 죽겠구나 싶었다.
PB 코퍼레이션의 제1 수칙인 보안을 깨트렸으니, 그에 따른 처벌은 감수해야 했다.
제거를 당하든 입막음을 당하든.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PB 코퍼레이션은 양민호에게 그 어떠한 처분도 내리지 않았다.
그저 다시 부를 때까지 대기하라는 명령만 떨어졌다.
낌새를 보아하니 일단 살려는 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만약 제거하려고 했다면 진즉에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긴 해도 결국 이러나저러나 목줄이 걸려 있는 신세.
현재는 뭔가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계속 이대로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양민호는 선반에 올려둔 술을 꺼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똑똑―
그때 누군가 현관을 두드렸다.
'시발....'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길 찾아올 수 있는 이는 정해져 있었다.
때문에 양민호는 문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길 잠시.
그들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살아 있네요?"
"다, 당신…?"
저도 모르게 꽤나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문밖에 서 있는 남자는 양민호 또한 아는 얼굴이었다.
"설마… 당신도 현장직이었던 겁니까?"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뭐… 엄밀히 따지면 현장 관리 감독직이긴 한데."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뭐 그리 대수냐는 듯한 투였다.
"본부에도 내부자가 있다고는 듣긴 했지만...."
"그럼 더 이야기할 게 있겠습니까. 아무튼, 복귀 준비나 하십시오. 조만간 움직여야 할 것 같으니까."
남자는 작은 상자를 건넸다.
상자 안에는 문서와 권총이 들어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양민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웬 총?"
"조심히 다루세요. 반능석을 가공한 총알이 장전되어 있으니까."
"...예?"
"총알이 표적에 맞는 순간부터 상대의 이능력이 차단될 겁니다. 뭐, 상대의 랭크와 가공 농도에 따라서 차단 시간이 달라지긴 하지만… S랭크 기준으론 5발만 박아도 30초는 차단할 수 있을 겁니다."
양민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반능석? S랭크?
그게 무슨 소리인가.
국내 랭킹 1위인 자신이 A랭크인데, S랭크를 상대할 일이 어디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기도 잠시, 녀석이 누굴 염두에 두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설마 김준우, 그 새끼한테 쓰라고 주는 겁니까?"
"저번에 처참하게 발리셨잖습니까. 이쯤 되면 인정하셔야죠. 당신보다 몇 배는 강한 사람이라는 거."
남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번엔 다른 현장직들도 함께 움직일 겁니다."
"...날짜는요."
"일주일 뒤. 서울에 리젠 던전이 출현하는 때에 맞춰서."
"리젠 던전…? 그거 확실한 겁니까?"
"본부에서 직접 감지한 이능파입니다. 뭐, 서울 본부 쪽은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등급이 꽤 높을 거로 예상됩니다. 아마… 레드 정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양민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리젠 던전이고 나발이고, 재앙에 가까운 레드 등급 던전을 두고 남 일처럼 무덤덤하게 말하는 걸 보면 정상인지 의심스러웠다.
"리젠 던전이 출현하면 본부 인력 전원이 참가할 거고… 그러면 자연스레 김준우도 움직이겠죠. 그 인간 성격상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니까."
"결국,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작전을 진행한다는 소리군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엔 실수 없이 잘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볼일은 다 봤다는 듯 곧바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검찰은 추가적인 유착 관계를 조사하기 위해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대표와 박인범 협회장과 연루된 모든 인물을 집중 수사할 것이라 발표했으며, 필수 불가결하게 서울 본부 내 대대적인 인사 개편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양민호의 방에 있던 텔레비전에서 격양된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동시에 두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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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범 협회장의 예산 횡령 건이 언론을 탄 직후.
매스컴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협회 대리인과 정부까지 나서서 이번 사건에 깊은 유감을 표했지만, 한번 불이 붙은 여론은 쉬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간 좋은 모습만 보여왔던 협회였기에, 사람들에게 더욱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으니.
협회장은 책임을 지고 사퇴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순 없었다. 결국, 전 직원을 상대로 전수 조사가 이루어졌다.
동시에 혹시 모를 기존의 유착 관계를 끊는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인사이동 또한 이루어졌다.
김민주 팀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작전팀 소속 인원들은 지방으로 발령 났고, 편 팀장을 비롯한 통제팀 직원들 또한 뿔뿔이 흩어졌다.
현재 서울 본부에는 최호성 본부장과 소수의 이사 그리고 직원들뿐.
모자란 인력은 추후에 확보한다는 모양이었지만, 현재 본부는 텅 빈 상자가 되었다.
그렇게 큰 사건 이후 뒤처리로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서초역 인근 거리.
"시발!!!"
결국, 그날이 다가왔다.
[고유 스킬 : 퀘이사]
[고유 스킬 : 황제의 무덤]
[고유 스킬 : 소드 마스터]
쾅, 콰광―!
콰과광―!!
퍼벙―!!
몇 분 전, 던전이 출현했다는 정보를 듣고 출동한 헌터들은 눈앞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기존 던전의 공식을 모두 무시한 전무후무한 상황.
아비규환을 넘어 지옥 그 자체였다.
"대체 왜 몬스터가 벌써 빠져나오는 거야!!"
"몬스터가 끊이질 않습니다! 진입조차 불가능합니다!!"
"이런 시발! 대체 언제까지 쏟아지는 거야!"
작전 4팀, 2팀, 5팀이 모두 토벌에 나섰지만,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통제팀으로부터 이능파가 불안정하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이런 던전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번 작전의 리더를 맡은 작전 4팀의 추지연 팀장 또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건 뭐야....'
나름 오랫동안 헌터 생활을 한 그녀로서도 난생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아주 오래전 남미 쪽에서 불안정 차원 던전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제대로 된 기록도, 정보도 없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이런 던전일 줄이야.
"팀장님! 지금 인원으론 어림도 없습니다! 빨리 지원 요청을…!"
"뭔 헛소리야! 지금 본부 상황 몰라?! 작전팀 다 잘려 나간 마당에 지원 요청을 어디다 해!!"
"그,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 저희끼리 계속 토벌해야 하는 겁니까?!"
추지연 팀장이 이를 으득 갈았다.
애초에 본부에 남은 작전팀이 모두 나와 있다.
지원 요청을 할 곳도 없고, 길드에 협력 요청을 하려고 해도 몇 시간은 걸린다.
그렇다고 계속 작전을 진행한다?
던전 진입도 불가능한 마당에 작전이고 나발이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본부가 박살 나자마자 이게 무슨....'
이건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들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자칫하다간 넋이 나갈 것 같았기에, 스스로 뺨을 쳐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더 이상 토벌이 아니다.
작전을 성공시킬 생각보다… 살아남을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추지연 팀장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시민들 대피는 어떻게 됐어?"
"던전 출현 지역으로부터 반경 5km까지 대피 완료했습니다."
"대피 반경 10km로 늘리고, 해당 구역 봉쇄해. 트럭이고 버스고 다 빌려와서 길이란 길은 무조건 다 막아!"
"네?! 구, 구역을 봉쇄하면 토벌은...."
"불가능한 작전에 도박을 걸 순 없어."
추지연 팀장은 굳은 표정으로 무전기를 들었다.
"모든 작전팀에 알린다. 현 시간부로 작전 4팀을 포함한 모든 작전팀은 지금 당장 작전을 중지하고 후퇴한다. 반복한다. 지금 당장 작전을 중지하고 후퇴한다."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작전팀 인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공격을 멈추고 등을 돌렸다.
작전팀들이 아예 맞서 싸울 생각 자체를 포기한 상황.
이전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인원과 정보가 압도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이보다 더 적절한 판단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김준우가 의도한 상황이었다.
***
구역을 봉쇄한 지도 이틀째.
그사이 계속해서 토벌을 시도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번번이 후퇴하기를 수십 번.
결국, 최호성 작전 본부장을 비롯해 각 작전팀장과 협회 상부 인사가 모두 소집되어 긴급 작전 회의를 열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최호성 본부장이 일어나 상황을 보고했다.
"현재 서초역 일대를 포함해 던전 반경 10km 이내에 있는 방배동, 서초동, 역삼동까지의 구역을 봉쇄한 상태입니다. 다행히 신속하게 판단한 덕분에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다행?"
이마를 짚고 있던 하승만 이사가 눈을 부라렸다.
"서울 한복판이 몬스터한테 점령당했는데 다행? 작전팀이라는 새끼들이 그 연봉을 받아 처먹으면서 이틀째 진척도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몬스터 하나하나가 옐로우 등급 이상의 보스급입니다. 무리하게 작전을 진행했다간 오히려 더 위험해집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위험 감수하라고 그 돈을 주는 거 아니야!!"
그의 목소리가 격양됐다.
다행히 신속하게 봉쇄한 덕분에 몬스터가 구역 밖으로 탈출하는 것은 막았지만… 이미 해당 지역 일대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무엇보다 이틀 동안 몬스터가 끊임없이 던전에서 쏟아지고 있다.
내일이면 수용 한계점을 돌파할 것이고, 최악의 경우엔 봉쇄 구역이 뚫릴 수도 있었다.
"최호성 본부장."
"...네, 네."
"방법은 있겠지?"
"지금 본부 인원으로는 도저히 작전 수행이 불가능합니다. 전국 작전팀 소집 허가를 요청했는데...."
잠시 망설이던 끝에 말을 이었다.
"내일 오전이나 돼야 허가가 떨어질 것 같습니다."
"내일? 그럼 그때까지 손 놓고 있겠다 이거야?! 그러다가 봉쇄 구역 뚫리면 어떡하려고!"
"저라고 가만히 있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아십니까! 이번 게이트로 주축 인원이 다 날아간 마당에 저보고 뭐 어쩌라는 겁니까!"
진심으로 울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최호성은 애써 침착을 되찾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서울 내 몇몇 길드가 작전 참가에 지원했습니다. 인원이 많진 않지만… 일단은 소집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길드와 함께 조금씩이라도 토벌을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아레스랑 아프로디테 길드 빼면 나머진 다 하꼬들이잖아. 게네들 데리고 가능하겠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휘는 누가 할 건데?"
회의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가 애써 외면했던 사안이 노골적으로 언급된 것이다.
"C, D급 몇 명 데리고 이미 점령당한 구역에 들어가야 해. 이거 실패하면 니들만 죽는 게 아니라 서울 전체가 무너진다. 이 작전, 니들 중에 맡을 수 있는 놈 있냐?"
"...."
모두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선뜻 나서지 못했다.
당연했다.
재앙을 두 눈으로 목격하며 모두가 이미 한 번 처절한 무력감을 느꼈는데, 어느 누가 자신 있게 나설 수 있겠는가.
그저 말을 아끼는 가운데, 하승만 이사가 입을 열었다.
"이 작전 맡을 수 있는 놈… 내가 볼 땐 한 명밖에 없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승만 이사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호성 본부장은 그가 누구를 이야기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자, 잠시만요! 그 사람은 이제 협회 소속이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번 게이트에도 연루된 놈인데, 그런 사람한테 지휘를 맡기는 건 협회 이미지에도…!"
"이미지고 나발이고 일단은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아니면 뭐, 니가 지휘할래?"
"그, 그건...."
하승만 이사의 시선이 작전팀장들을 훑었다.
"어차피 니들도 지금 다 똑같은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닫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사태 파악 좀 하자. 이 작전 하나에 너무 많은 게 달려 있어.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라고."
하승만 이사의 단호한 목소리에 최호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박인범 협회장이 날아가면서 자연스레 그놈과 협회와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길 바랐다.
그래야만 자신을 방해할 수 있는 놈이 모두 사라질 테니까.
그게 그나마 비리 게이트 이후에 뒤탈 없이 본부를 장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그를 불러들인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키운 게 모두 헛짓거리가 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최호성 본부장의 이가 바득 갈렸다.
"아무튼, 동의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너, 너 인마…!"
"어차피 모든 작전 지시는 제 권한입니다. 참가를 희망한 길드와 오늘 밤에 토벌을 진행하겠습니다."
최호성 본부장은 그 말을 남기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평소 같으면 가당치도 않은 행동이었지만, 토를 달 수는 없었다.
어쨌든 모든 토벌과 작전의 총 책임자는 최호성이었다.
던전 하나 때문에 서울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작전 본부장 본인이 지휘를 맡겠다는데, 무슨 명분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쯧,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이 안 되는 새끼네.'
그런 와중 최호성이 나간 자리를 씹어 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가 있었다.
'하, 시발. 이러면 나가린데....'
편 팀장이 천안 지부로 날아가고, 현 통제팀의 실권을 쥐게 된 황동휘 대리였다.
그는 고개를 뒤로 팍 젖히며 깊은 한숨을 쏟아 냈다.
***
'던전이 출현하자마자 구역 봉쇄 후 작전 철수라....'
나는 우두커니 앉아 핸드폰으로 실시간 뉴스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모든 게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회귀 전, 리젠 던전 출현으로 피해를 본 가장 큰 이유는 자만심이었다.
우리만으로도 토벌할 수 있다는 자만심.
그 덕분에 던전 출현 직후 봉쇄 타이밍도 놓쳤을뿐더러, 3일 만에 수십 명의 헌터가 현장에서 사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다르다.
협회가 날아간 덕에 인원은 턱없이 부족, 게다가 상위 랭크 대부분이 지부로 날아갔으니 소극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 덕에 늦지 않게 구역을 성공적으로 봉쇄할 수 있었다.
이틀이 지난 지금 시점까지 헌터들의 피해 또한 발생하지 않았다.
이제 전국 작전팀이 소집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 후에 잘만 지휘한다면 아무런 피해 없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때까지 봉쇄 구역이 버텨줄 수 있느냐겠지.
'구역 면적 대비 리젠 속도를 고려해보면... 오늘 밤이 고비겠네.'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할 시기인데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아직 협회 쪽에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다.
한편 그와는 별개로 인터넷은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본부 터지자마자 이게 뭔 일임???
└본부 터지고 서울도 터졌네 엌ㅋㅋㅋㅋ
└지금 이게 웃을 상황임?? ㄹㅇ 사이코패스인가?
└작전팀 공중분해 돼서 인원도 부족하다매 이거 리얼 ㅈ된 거 아님?
└ㅇㅇ개심각한 거 맞음;; 이 새끼들 지금 사태 심각성을 몰라;;
└최호성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ㅅㅂ 이러다 몬스터 밥 되게 생겼는데
└ㄹㅇ 김준우랑 ㅈㄴ 비교되네;;
└김준우였으면 벌써 토벌 끝내고 팀원들이랑 국밥 한 그릇 뚝딱하러 갔음
└최호성 ㅂㅅ아 이럴 거면 김준우 다시 불러와라
└ㅆㅇㅈ '그'라면 수습 가능하다
└근데 이번에 협회장 나가리 돼서 복귀는 힘들 듯?
└ㅇㅇ지금 본부 거의 다 반 협회장 세력인데, 친 협회장 세력의 대표격을 다시 부를 리가 없음
└아니 뭔 이런 상황에서까지 정치질이냐;; 라인이고 나발이고 일단 살고는 봐야지;;;;
금방이라도 몬스터가 시내 곳곳을 활보할 상황이다 보니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고 있었다.
물론 협회 본부에 대한 의견은 그야말로 최악.
비리 게이트에 맞물려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인터넷 반응을 지켜보면서 팔짱을 낀 채 잠시 상황을 정리했다.
당연하겠지만 봉쇄 구역이 뚫리면 그 후론 걷잡을 수가 없다.
개체수를 줄이긴 해야 하는데... 최호성이 알아서 해주기를 기다리자니 불안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무엇보다 지들끼리 토벌하겠다고 깝치다가 사상자라도 나오기 시작하면 여태까지 애쓴 게 모두 도루묵이다.
쯧, 어쩔 수 없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지금 바쁘십니까?"
「계속 뉴스만 보고 있어요. 상황이 생각보다 많이 심각하네요.」
이아영 실장이 푹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실히 그렇죠. 저, 그래서 말인데...."
「네?」
"무기 몇 개만 좀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등급은 딱히 상관없고 아무거나 다 좋은데."
「...?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설마 아직도 제가 지원팀 소속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압니다. 근데 뭐… 생각나는 사람이 그쪽밖에 없어서요."
「그거 불법인 건 아시죠?」
"예."
「...뭐가 이렇게 당당해.」
한숨을 내쉬길 한 차례.
「알았어요. 한번 구해볼게요.」
"뭘 하려는 건지는 안 물어보십니까?"
「뻔하죠 뭐....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녀가 힘이 바짝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끼워줘요.」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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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봉쇄 구역 인근.
버스와 승용차를 쌓아 만든 바리케이드 앞에서 조심스레 구역 내부를 살폈다.
우글거리는 몬스터 떼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구역 내의 도로와 건물 또한 멀쩡한 게 거의 없었다.
던전이 출현한 지 불과 12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서울이라곤 믿기 힘들 만큼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래도 공격성은 많이 죽었군.'
숨을 죽인 채 몬스터를 주의 깊게 살폈다.
몇 시간째 공격 대상이 없었으니 활동이 저하된 듯 보였다.
확실히 빠르게 구역을 봉쇄한 건 매우 적절한 판단이었다.
'근데… 너무 많긴 하네.'
이 정도면 최호성 말마따나 작전팀이 소집되기도 전에 구역이 뚫릴 게 확실했다.
「현재 리젠 속도는 5분당 한 마리꼴이에요. 출현 직후 12시간 정도 지났으니까, 구역 내 144마리 정도가 있을 거예요.」
귀에 꽂아 넣은 무전기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봉쇄 구역 면적 상 200마리가 넘으면 구역이 완전 포화 상태가 될 거예요. 계산해보면 대충… 작전팀이 소집될 때까지 50마리는 잡아야 해요.」
"많기도 하군요."
「혼자 가능하겠어요? 유빈 씨라도 부르시지.」
"언제 기다리고 있습니까. 혼자 후딱 하고 나오면 되는걸,"
「…어련하시겠어요.」
그녀가 학을 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조심해요. 자칫하다간 구역 내 몬스터들이 죄다 달려들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바리케이드를 풀쩍 뛰어넘었다.
그르르르―.
근처에 있던 몇몇 몬스터들이 곧바로 반응했다.
놈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바닥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이아영 실장이 급하게 챙겨 준 무기들.
그래 봤자 죄다 C급들이지만... 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나는 이내 배낭에서 가장 먼저 검을 꺼내 들었다.
키에에에에―!!
무기를 보자마자 몬스터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게 심호흡하길 한 차례.
[습득 스킬 : 한계돌파]
[시전자의 모든 스테이터스가 일시적으로 한계치를 넘어섭니다.]
[습득 스킬 : 과몰입]
[전투 중 시전자가 사용하는 모든 스킬의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습득 스킬 : 타천사]
[일시적으로 시전자의 마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과몰입 스킬로 인해 마력 상승률이 증가합니다.]
[클래스 각성]
[고유 클래스 : 마검사]
이내 검에 푸른빛이 번뜩였다.
[습득 스킬 : 극초식 - 어검술]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스윽―
콰과광―!!!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검격을 따라 전방에 강렬한 폭발이 터져나갔다.
"하나."
이윽고 구역 전체에 귀를 찢는 듯한 포효소리가 울려 퍼졌다.
***
최호성 본부장은 머리를 싸맨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김준우를 불러들이기 싫어 조금 억지를 부리긴 했지만, 사실 그는 자신이 없었다.
그로 그럴 게, 이런 대규모 작전은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고개를 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 회의 때 통보한 대로 작전팀을 대기시켰다.
작전에 지원한 길드도 모두 소집을 마쳤다.
어림잡아 총인원은 250명 정도.
작전 구역과 몬스터 수를 생각했을 때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이제 남은 건 그 지옥으로 들어가 토벌을 진행하는 것뿐.
'슬슬 시간이 다 됐군.'
작전 시간이 다가오자 최호성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서던 그때였다.
"보, 본부장님!"
유영수 보좌관이 다급하게 최호성을 찾았다.
"뭐야. 왜 그래. 변수라도 생겼어?"
"이, 이걸 변수라고 해야 할지...."
"...?"
"구역 내 몬스터 수가 줄어들고 있답니다."
"...뭐?"
유영수 보좌관은 방금 통제팀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했다.
최호성 본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뭔 소리야. 몬스터가 왜 줄어들어? 설마 딴 놈들이 토벌을 진행하고 있는 건가?"
"프리랜서들이 움직인 걸 수도 있습니다."
"이런 미친놈들…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건가...."
최호성 본부장이 혀를 찼다.
본부 작전팀마저 후퇴한 구역에 기어들어 가다니. 돈에 미쳐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건가.
"빌어먹을 새끼들. 지금 당장 대기 중인 놈들 전원 출동시켜!"
"저… 그러지 말고 내버려두는 건 어떻습니까. 이대로 몬스터가 계속 줄어들면 작전팀 소집 때까지 안전하게 기다릴 수 있을 텐데...."
"그랬다가 사상자 나오면 우리한테 죄다 덮어씌울 게 뻔한데 무슨 헛소리야! 아니, 설령 프리랜서들이 토벌에 성공해도 문제야. 사람들이 협회를 뭐로 보겠어!"
최호성 본부장의 호통에 유영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반박할 여지도 없는 말이었으니.
그렇게 서둘러 작전팀으로 향하려던 그 순간.
"잠시만요!"
이번엔 통제팀 소속 황동휘 대리가 최호성을 찾았다.
"또 뭔데!"
"출동할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뭐?! 이것들이 아까부터 왜 자꾸 헛소리를...."
"지금 구역 내에서 프리랜서들이 몬스터를 토벌하고 있는 게 아니라, 몬스터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최호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랫동안 공격 대상이 없는 상황에서 점점 개체수는 늘어나니 아무래도 자기들끼리 구역 싸움이 난 것 같습니다."
"확실해?"
"예. 제가 직접 현장에 나가서 확인한 겁니다."
황동휘 대리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 굳이 무리하게 토벌을 진행하지 않아도 작전팀 소집 전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직접 확인한 거라니 믿어도 되겠지.
물론 한시름 덜긴 했지만,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작전팀 계속 대기하라고 하고, 황 대리는 계속해서 구역 관찰해.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황동휘 대리가 떠나자 최호성은 한숨을 돌렸다.
물론 갑자기 벌어진 이상 상황에 대해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지만.
***
사무실을 나온 황동휘 대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본부 출동은 막았습니다. 이제 당분간은 구역에 혼자 있을 테니 실수 없이 처리하세요."
「뒤처리는 어떻게 할까요?」
"몬스터한테 먹이로 던져주면 되겠죠."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황동휘 대리.
서울 본부 통제팀 소속이자 편창현 팀장의 직속 부하.
그리고 PB 코퍼레이션 밸런스 조정팀 소속 현장직, 한국 파트장.
두 곳에 소속되어 있는 그는 한국 파트 현장직을 관리 감독하는 역할이었기에, 직접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해봤자 지시를 받고 특정 인물을 감시하는 것 정도였지만…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마르크 팀장이 이번 작전을 본인에게 직접 맡긴 것이다.
'이번 작업에 이를 갈긴 갈았나 보네.'
며칠 전, 마르크 팀장과의 미팅을 떠올렸다.
그는 가공한 반능석과 함께 작전 파일을 전해주며, 리젠 던전 출현에 맞춰 헌터들이 소집된 동안 김준우를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위험한 던전이기에 김준우의 성격상 참가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은밀하게 처리하는 편이 위험부담도 적고 성공 가능성도 가장 컸으니까.
황동휘는 양민호를 비롯한 각 현장직을 찾아가 필요한 물건을 전달하며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설마하니 던전 출현을 앞두고 협회가 터져버릴 줄이야.
'누가 예상이나 했겠냐고, 시발.'
어떻게든 김준우를 작전에 참여시켜야 했는데, 최호성 그 새끼마저 훼방을 놓았으니 더는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손도 못 써보고 물러나야 하나 싶던 그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오늘 구역 내에 남아 있는 CCTV를 확인하던 중 홀로 토벌을 진행하고 있는 김준우를 발견한 것이다.
이때다 싶었던 황동휘는 곧바로 작전을 속행하기로 했다.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우글대는 봉쇄 구역에 홀로 있는 상황.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하지만 정작 마르크 팀장의 반응은 어째 떨떠름했다.
-그놈은 혼자 있을 때 더 위험한 놈이야. 저번에도 말했잖아. 오히려 본인을 건드리는 걸 더 바랄 놈이라고.
-게다가 이레귤러잖아. 클래스도 스킬도 전혀 파악이 안 되니,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몰라.
황동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레귤러라 불안한 건 알겠다만, 그렇기에 반능석까지 지급해준 것이 아닌가.
그놈도 결국 이능력인 이상 반능석 앞에선 모든 게 무용지물일 텐데, 대체 뭘 그리 불안해하는 건지.
'...쯧.'
그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동 중입니까?"
그리곤 양민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거의 다 왔습니다.」
"당신은 빠지세요. 따로 할 일이 좀 있으니까."
「뭡니까?」
"뭐… 보험을 좀 들어놓으려고요."
황동휘는 몇 가지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마침 밤하늘에서 천둥 번개와 함께 거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봉쇄 구역, 서초역 인근.
[습득 스킬 : 헤이스트 레일건]
지이이잉―.
파앙―!
푸른 광선이 번쩍이는 동시에 가져온 총기가 박살이 났다.
'쯧, 이래서 좋은 무기를 써야 한다니까.'
길게 투덜댈 시간은 없었다.
곧바로 다음 무기를 꺼내 들곤 몸을 움직였다.
"몇 마리 남았습니까?"
「28마리 남았어요.」
와, 시발 아직도?
'누구라도 좀 데리고 올걸....'
쉴 새 없이 토벌을 진행하기도 벌써 몇 시간째였다.
당연히 쉬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빡세네.
체력도 체력이지만 비 때문에 시야각이 좁다.
상황이 퍽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내빼는 것도 모양 빠지고....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전투 중 시전자의 이동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파앙―!
최대한으로 가속해서 일부러 좁은 길목으로 몬스터들을 유인했다.
수십 마리의 몬스터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없는 이상, 사방에서 몰려들지 못하게 많이 움직이면서 토벌을 진행해야 한다.
건물 사이사이를 이동하며 몬스터를 교란했다.
[S랭크 스킬의 안전장치 해제 시퀀스를 시작합니다.]
[발동 조건 확인 중.]
[시전자 본인 확인.]
[시전자의 랭크 확인.]
[전투 상태 확인.]
[발동 조건이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스킬의 안전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습득 스킬 : 롤링 페이퍼]
[시전자가 지정한 대상이 10분간 명령대로 움직입니다.]
"닥치는 대로 물어뜯어."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 몬스터가 동족을 향해 달려든다.
서로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나는 재빨리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허억, 허억...."
최대한 빨리 진행하고 싶었기에 S랭크 스킬을 난사한 탓인지 급속도로 몸에 부담이 오고 있었다.
'이제 24마리....'
다시금 숫자를 상기하는 사이 무전기에서 이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이거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요. 이제 후퇴하세요. 아니면 제가 지원을 부를 거예요!」
"그러지 말고 좀만 더 해봅시다."
「당신 그러다 죽어요!」
격양된 잔소리가 들려오던 그때였다.
탓―.
어디선가 나타난 무리가 나를 둘러쌌다.
'뭐야 이건 또.'
대여섯 명쯤 되는 그 인원들을 바라보며 이아영에게 물었다.
"지원을 벌써 불렀습니까?"
「아뇨? 왜 그래요? 뭐 문제 생겼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날 찾아올 만한 놈들은....
뭐, 하나밖에 없겠지.
"국제 협회 쪽 새끼들이구나?"
물론 대답은 없었다.
뭐, 그때 한 번 실패했으니 다시 찾아와도 오겠거니 싶었는데... 이렇게 떼로 몰려올 줄은 몰랐네.
"보아하니 날 도와주러 온 건 아니겠고. 왜, 혼자 있으니까 이번엔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
"...."
여전히 묵묵부답.
「뭐예요? 무슨 일이에요?! 대답을 좀…!」
무선 이어폰을 뽑아 바닥에 던졌다.
설명해줄 시간도, 여유도 없을 것 같았으니.
"상황이 좀 그렇지만… 너희들한테 물어볼 게 좀 많아. 뭐, 다른 건 다 제쳐두고라도… 대체 왜 날 노리는 거지?"
"...."
"됐다, 시발. 기대도 안 했어."
그럼 그렇지.
사지 멀쩡히 달려 있는데 대답해 줄 리가 없지.
뭐, 상관없다.
[습득 스킬 : 썬더 피스트]
[시전자의 모든 근접 공격에 강력한 번개가 발생합니다.]
공격 태세를 갖추자, 그들이 꺼내 든 것은… 총이었다.
이능운용총기도 아닌, 일반 총기.
정확하게 나를 겨눈 총구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어이가 없네. 기껏 가져온 게 무슨...."
더 볼 것도 없이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푸른빛의 번개가 전신을 감쌌다.
한 놈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지른 그 순간.
타앙―!
허공에 울린 단발의 총성.
"...?"
뒤늦게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시발.'
아랫배에 저릿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습득 스킬 : 로우 패닉]
[스킬 시전 중]
계속 두르고 있던 방어 스킬은 여전히 작동 중이었다.
하급 방어 스킬이긴 해도 총알 따위를 못 막을 리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때 찾아온 기시감.
그래.
나는 이 감각을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다.
회귀 직전, 내가 죽던 그 날.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던 그때와 같았다.
"죽여."
그 순간, 누군가 입을 열었다.
[고유 스킬 : 기요틴]
동시에 두 개의 거대한 검을 꺼낸 괴한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걱―.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다.
[히든 스킬 : 업보]
[스킬 효과 발동]
107
107
"크윽…!"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팔이 떨어져 나간 곳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습득 스킬 : 극초식 - 어검술]
[스킬 발동]
그 떨어져 나간 팔의 주인은, 다름 아닌 나를 향해 달려든 괴한이었다.
"뭐, 뭐야…?"
"어떻게 스킬을...!"
"부, 분명 정확히 맞았는데...."
남은 괴한들이 당혹감을 내비쳤지만,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히든 스킬 : 업보]
[스킬 효과 발동]
괴한이 나에게 달려든 그 순간, 머릿속에 이해할 수 없는 음성이 재생되었으니.
[이미 시전자에게 하나 이상의 뱅크 아이템 효과가 발동 중입니다.]
[추가적인 뱅크 아이템의 효과는 무효화 됩니다.]
'뱅크 아이템…?'
여전히 피가 나는 배를 부여잡은 채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고작 총알 따위가 내 방어 스킬을 뚫을 순 없다. 그럼에도 순간적으로 스킬을 무효화시키고 내 배에 적중했다는 건…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다.
'반능석인가....'
시간석, 차원석에 이어 국제 협회가 가지고 있는 뱅크 아이템 중 하나.
이능력을 일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아이템.
그제야 조금씩 아귀가 맞춰졌다.
회귀 전, 그들이 나를 향해 화기를 발사하던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감각을 느꼈다.
힘이 빠지고 정신이 멍해지는 그 감각.
그 덕분에 반격을 하긴커녕, 방어 스킬 하나 시전할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패닉에 빠져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야 확실하게 알았다.
'그때 나에게 쏟아부었던 화기 또한 반능석이었군....'
이 새끼들… 정말로 뱅크 아이템을 가공하고 있었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분명히 다르다.
순간적으로 스킬이 무효화 되긴 했지만… 몸에 반능석이 박히고도 스킬을 쓸 수 있는 걸 보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아마도....
'추가적인 뱅크 아이템의 효과는 무효화 된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미 나한테 뱅크 아이템의 효과가 발동 중이라는 건, 일전의 가설에 확신을 심어주는 셈이었으니.
'빌어먹을 스킬인 줄만 알았는데… 쓸 만한 점도 있네.'
뭐, 이미 배에 빵구가 나긴 했지만....
"쏴! 계속 쏘라고!!"
탕, 탕, 타앙―!
다시 한번 총구들이 번쩍였다.
영향을 주진 못한다고 해도 스킬을 일시적으로 무효화시킬 수 있으니... 바람구멍이 나지 않으려면 막기보단 피해야겠지.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빠른 속도로 파고들어 가장 앞에 있는 한 명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습득 스킬 : 원 카운터]
빠각―!
정확히 명치에 꽂힌 공격.
무언가가 안에서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녀석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비, 빌어먹을…!"
그 순간 욕지거리와 함께 작은 키의 남성이 허리춤에서 기괴한 검을 꺼내 들었다.
[고유 스킬 : 귀검 - 이매망량]
검신을 따라 스멀스멀 흐르는 검은색 기류.
캉―.
캉, 카강―!
저돌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걸 뒷걸음치며 어렵사리 공격을 막아냈다.
[고유 스킬 : 귀검 - 이매망량]
[각성 - 두억서니]
순간 검은 기류가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스스스스스슥―!
이어 가공할 속도의 협공이 이어졌다.
검사... 아니, 귀검사 클래스.
'베이는 순간 곱게 죽진 못하겠군.'
속도를 올려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중이었지만....
'큭, 시발…!'
복부의 통증 때문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뒤로 도약하며 최대한 거리를 벌리는 순간.
[고유 스킬 : 메카트로닉 앙상블]
[트랜스 폼 - 모데라토]
가로등과 철골.
주변의 온갖 쇠붙이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변형하기 시작했다.
메카닉 클래스에게 필수인 트랜스 폼 웨펀 없이 공격이 가능한 클래스, 하이퍼 메카닉.
'이 새끼도 고유 클래스야?'
한국에 인재가 많네.
퍼버버버벙―!!
캉, 카강―!!
콰광―!!
온갖 형태로 변형된 로봇들이 화기를 쏟아부었다.
나는 여전히 막는 것보다 피하는 걸 선택했다.
'괜히 맞대응하다가는 한 번에 가겠군.'
반능석 총알도 문제지만, 고유 클래스를 가진 다수를 정면으로 상대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고유 스킬 : 망가진 인형극]
턱―!
'뭐야 이건 또…?!'
난데없이 땅속에서 나타난 손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시발 네크로맨서까지....'
순간 발이 묶여 주춤거리는 사이.
[고유 스킬 : 귀검 - 이매망량]
[각성 - 어둑서니]
스윽―.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검날이 정확하게 내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크윽…!"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로 젖혀 공격을 피했다.
콰과광―!!
일직선으로 후방의 모든 것들이 깔끔하게 절단됐다.
가만히 구경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놈들이 다시 공격을 준비하는 틈을 타 재빨리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피하는 거 하나는 S랭크네."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툭 던지듯 감상을 내뱉었다.
"칭찬 고맙네. 그래도 뭐… 덕분에 15마리밖에 안 남았어."
"...뭐?"
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자, 괴한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설마 네까짓 것들 몇 명 못 죽여서 피하고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는 괴한들.
그곳엔 그들의 멋진 공격 덕에 나가떨어진 몬스터의 사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아무래도 혼자선 힘들 것 같으니 도움을 좀 받은 것뿐.
"좀 더 분발해봐. 이거 해뜨기 전에 50마리 채워야 돼."
"...."
"...."
여태껏 무표정했던 이들이 이번엔 확실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거리를 둔 채 대치를 이어갈 뿐, 방금처럼 달려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머리는 쓸 줄 아네.'
움직임이 빠른 상대로 계속 공격을 이어가는 건 저들에게도 소모전일 뿐이다.
그보단 차라리 때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끝을 보는 게 낫다는 판단이겠지.
'뭐, 그게 먹힐 것 같진 않지만.'
검사 두 명, 네크로맨서랑 메카닉.
뭐, 검사 한 명은 팔이 없으니 내버려두고.
보아하니 메카닉과 네크로맨서는 메인 전력이 아니다.
메인은 저 검사 한 명뿐.
김민주처럼 빠른 공격으로 쉴 틈 없는 연계를 이어가는 스타일이 아닌, 한 방 한 방 강력한 공격을 노리는 놈이다.
물론 그만큼 움직임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저 둘은 검사가 공격할 틈을 만들어주기 위한 역할일 뿐이다.
그건 다시 말해서 서포팅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거겠지.
탓―!
정적이 흐르던 대치를 깨고, 예상대로 괴한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고유 스킬 : 귀검 - 이매망량]
[각성 - 백귀야행]
[고유 스킬 : 메카트로닉 앙상블]
[트랜스 폼 - 안단테]
[고유 스킬 : 망가진 인형극]
[각성 - 마리오네트]
이번 한 번으로 끝내겠다는 듯한 공격.
나는 제자리에 선 채로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다들 그 자리에서 대기."
[습득 스킬 : 롤링 페이퍼]
[시전자가 지정한 대상이 10분간 명령대로 움직입니다.]
"...!"
"...!"
동시에 인형과 로봇들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메카닉과 네크로맨서.
둘 다 기본적으로는 소환 계열 클래스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지만… 어째 멈춰 선 건 소환물뿐만이 아니었다.
"...뭐야? 니들은 왜 멈춰."
"...."
"...."
괴한들 또한 달려들다 말고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그들의 표정이 마구 구겨졌다.
이대론 이길 수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 것인지, 지들끼리 눈치를 살핀다.
"...후퇴한다."
곧바로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굳이 추격하진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것보다 회복이 먼저다.
애써 참고 있었는데,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습득 스킬 : 글로리 큐어]
[습득 스킬 : 안티 블리딩]
지이이잉―.
"후우...."
몇 개 없는 사제 스킬로 응급처치를 하며 길게 심호흡했다.
좋아, 이거면 당분간은 괜찮다.
그럼 남아 있는 걸 처리해 볼까.
시선을 아래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야, 살아 있냐?"
"...."
입을 꾹 닫은 채 날 바라보고 있는 그는, 가장 먼저 공격을 시도하고 팔이 잘려 나간 녀석이다.
부상으로 인해 홀로 현장에 남아 있었다.
내가 굳이 쫓지 않았던 이유도 이 녀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어볼 게 많았는데… 다 도망쳤으니까 너라도 대신 대답해줘야겠다."
"...나보고 배신을 하라고?"
하, 헛웃음을 뱉는 그 순간.
그가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들어, 곧바로 자신의 머리에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물론.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이 새끼가 어디서 편하게 죽으려고."
"...."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말했잖아. 묻고 싶은 게 많다고. 그거 다 듣기 전까지 넌 죽고 싶어도 못 죽어."
주변에 널브러진 파이프를 주워들었다.
괴한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지, 실실 웃고 있었다.
"뭐, 고문이라도 하게? 허세 부리지 마. 너 같이 착해 빠진 놈이 해봤자 별것도 아닌...."
"누가 그래?"
"그걸 꼭 들어야 아나? 딱 보면...!"
푹―.
순식간에 귀를 찢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내가 착한 놈이라고 누가 그러냐고."
***
포항 지부, 작전 3팀 사무실.
김민주는 며칠 전 물갈이 명분으로 시행된 대대적인 인사이동 덕에 이곳에 떨어진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그녀 또한 지금 서울의 상황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고 하는데, 다행히 피해 없이 구역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아마 소집 허가만 떨어진다면 상황이 크게 악화하진 않을 터였다.
오늘도 별거 없이 업무를 정리하려던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
「미, 민주 씨! 큰일 났어요! 지금 준우 씨가 혼자 봉쇄 구역에 들어가서 토벌을 진행하다가 연락이 끊겼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하게 쏟아지는 목소리.
"자, 잠깐만요. 아영 씨,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요. 뭐가 어떻게 됐다고요?"
「훌쩍....」
지금… 우는 건가?
그 천하의 이아영이?
김민주는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내 이아영 실장은 애써 침착하며 김민주에게 현재 상황을 전달했다.
그러자 이번에 다급해진 건 김민주 쪽이었다.
"선생님 혼자 토벌을 하다가 연락이 끊겼다고요?!"
「네, 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현장에 나가봐도 찾을 수가 없어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선생님이 거길 왜....'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몬스터가 득실대는 구역에서 연락이 끊겼다는 건....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상황이 좋지 않다.
물론 그라면 어떻게든 살아남겠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김민주의 주먹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도와줘야 한다.
지금 당장 작전팀을 이끌고 가서 구출을 하든, 뭐라도 해야 한다.
문제는 아직 소집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
만약 허가도 없이 작전팀을 소집한다면... 앞으로 평생 헌터와는 연을 끊어야 할 것이다.
물론 김민주에게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었지만.
「민주 씨. 우리 그동안 도움 많이 받았잖아요.」
"...."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니고, 자칫하다간 본인이 옷 벗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를 도와줬잖아요.」
"...."
「그러니까... 우리도 이번엔....」
"...."
「...민주 씨?」
이아영의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이미 김민주는 진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간 후였다.
108
108
봉쇄 구역, 어느 건물 안.
김준우를 습격했던 무리는 작전을 정비하기 위해 이곳에 몸을 숨겼다.
"반능석이 왜 안 먹혔던 겁니까!"
한국 파트 현장직, 서형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작전이 엉망이 되기 시작한 건 거기서부터였다.
반응석으로 스킬을 모조리 봉인한 후 무방비한 김준우를 쓰러뜨릴 계획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대체 그 새끼 정체가 뭡니까! 아무리 이레귤러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반능석을 맞고도 스킬을 쓸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낸들 아냐고!"
이번 작전에서 팀장을 맡은 현장직, 고성수가 버럭 소리쳤다.
기세에 눌린 건지, 이내 서형민이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어떡합니까."
"애초에 그놈, 혼자서 몇 시간 째 토벌을 진행한 상태잖습니까. 그런데도 상처 하나 못 냈어요. 이거… 우리 전력으로 저놈을 죽일 수 있긴 한 겁니까?"
팀원들이 각자 한 마디씩 내뱉었지만, 고성수 팀장은 물론 그 누구도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고성수 팀장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양민호 이 새끼는 왜 안 온 거야....'
국내 랭킹 1위의 그놈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전력으론 힘들다.
고성수 팀장은 통신기를 꺼내 황동휘 파트장을 호출했다.
"파트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김준우, 그놈... 반능석이 안 먹힙니다."
「....」
"파트장님, 듣고 계십니까? 지금 반능석이…!"
「근데요?」
무미건조한 대답에 고성수 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안 먹히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요.」
"자, 작전을 변경해야...."
「당신들, 현장직 아닙니까? 이번 임무가 뭐예요. 김준우를 처리하는 거잖습니까. 그럼 상황이 어떻게 됐든 완수해야지, 무슨 반능석이 안 먹힌다고 징징대고 있습니까.」
"...."
생각지도 못했던 황당한 대답.
고성수 팀장은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임무 완수하십쇼. 만약 실패하거나 후퇴하면 목숨이 붙어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뚝―.
일방적으로 통신이 끊겼다.
동시에 팀 전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저기...."
"뭡니까?"
"이거… 정말 반능석일까요?"
"...!"
한수빈 헌터의 의문에 팀원 모두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잖아요. 이거… 우리를 미끼로 힘을 빼놓고 양민호 그 새끼가 마지막에 처리하려는 거 같은데."
"뭐하러 그런 짓을 한답니까."
"저번 실패로 목숨이 간당간당한 놈이잖아요. 이번 기회로 실수를 만회하려는 거겠죠!"
한수빈 헌터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됐다.
모두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우리를 미끼로 쓴 거라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제 정말 뒤는 없다.
미끼의 말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 번 쓰고 처분되는 존재.
이번 작전에 실패해도 죽고, 성공해도 죽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도망쳐야 하나?
도망친다고 벗어날 수는 있을까?
모두가 사색이 되어 불안에 떨고 있을 때였다.
"국제 헌터 협회 비공식 산하 기구, PB 코퍼레이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밸런스 조정팀 소속 한국 파트 현장직... 시발, 이름 한 번 거창하네. 그래 봤자 범죄자 집단 주제에."
"뭐, 뭐야...!"
"여길 어떻게...?"
이윽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알았다. 개새끼들."
다름 아닌, 김준우였다.
***
반능석까지 준비한 녀석들이다.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꽤나 공들인 작전인 것 같으니 어떻게든 오늘 안에 끝을 보려 하겠지.
나는 서둘러 주변 건물을 뒤졌고, 금세 녀석들을 찾을 수 있었다.
"옹기종기 잘도 모여 있네. 다과회 하냐?"
발각된 녀석들은 공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대체 뭘 고민하는 건지....
"그래서, PB 코퍼레이션이 뭐 하는 데야? 어디처럼 청소팀 파견 업체는 아닌 것 같은데."
"...."
"...."
애써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자세는 퍽 어색했다.
대답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뭐 됐다.
이미 그간의 행적만 봐도 대충 감이 잡혔다.
고개를 들어 건물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방금 소란으로 구역 내 몬스터가 자극을 받았는지 움직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더 지체했다가는 꽤 귀찮아지겠지.
잴 것 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반능석까지 준비해온 거로 봐선 꽤나 작정하고 달려든 거 같은데.... 혹시 니들 중에 타이탄 가지고 있는 놈 있냐?"
"타이탄…?"
"그 왜, 이능운용총기. 전 세계에 5개밖에 없는 거."
영문 모를 표정들.
"없나 보네. 뭐… 알았어."
최소한 회귀 전에 나를 습격했던 놈들은 아니다.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군.
그럼 그건 넘어가고.
"그래서, 대체 왜 자꾸 날 찾아오는 거야? 아직도 시간석을 노리고 있는 거라면 딴 데 가서 알아봐. 난 이제 협회 사람이 아니니까."
"시간석? 글쎄. 그건 우리 부서 업무가 아니라."
부서?
조직 체계까지 나뉘어 있다는 건가.
"그럼 대체 이유가 뭐야? 설마 진짜 니네한테 방해가 된다는 것 때문에 죽이려고 하는 거냐? 아니… 그렇게까지 해서 대체 뭘 하고 싶은 건데?"
"죽을 놈한테 알려줘서 뭐 하겠나."
나도 모르게 실소가 지어졌다.
"허세는 시발. 딱 보니까 니네들도 모르는구만 뭐."
"...."
"원래 윗분들은 아랫것들한테 절대 자세한 얘기 안 해줘.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
"...웃기지 마. 고작 청소부 출신이 뭘 안다고 지껄여."
"하하, 하하하! 아직도 이런 병신들이 다 있네."
그들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왜, 그럴싸한 이름 달고 비밀스럽게 움직이니까 니들이 뭐라도 된 거 같아? 천만에. 이 쓰다 버려질 도구 새끼들아."
하등 의미 없는 감투라도 씌워주면 지들이 뭐라도 된 줄 알고 개처럼 충성을 다하는 법이다.
결국, 지들도 똑같은 노예라는 건 새카맣게 잊은 채.
솔직히 방해되는 놈들 쳐내는 것 가지고 뭐라 하고 싶진 않다.
나 또한 그랬었으니까.
다만, 나를 적으로 돌린 건 크게 실수한 거지.
"족쇄 자랑 그만하고 어서 덤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그들이 다시 전투태세를 갖췄다.
사실 체력도 그렇고, 몸 상태도 썩 좋지 않다. 지금 상태로 시간을 끌면 내가 오히려 불리하다.
"달라붙어!!"
리더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전원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S랭크 스킬의 안전장치 해제 시퀀스를 시작합니다.]
나는 남은 체력을 모두 끌어내며 숨을 골랐다.
[발동 조건 확인 중]
[시전자 본인 확인]
[시전자의 랭크 확인]
[필요 클래스 : 네크로맨서]
[전투 상태 확인]
[발동 조건이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스킬의 안전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습득 스킬 : 이계 소환]
[차원에서 10분간 하수인을 소환합니다]
드드드드―.
스킬이 시전됨과 동시에 건물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고.
[시전자 능력치를 분석합니다.]
[분석 완료]
[해당 능력치에 비례하는 하수인이 소환됩니다.]
지이잉―.
보랏빛이 번쩍이길 한 차례.
[소환 완료]
"최, 최상급 소환 스킬?!"
"아직도 저런 힘이 남아 있다고…?"
모두가 아연실색하며 시선을 고정한 그 자리에.
[대원수 - 파이몬]
낙타를 탄 고귀한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이몬.
레드 등급 던전에서도 보기 힘든 최악의 몬스터.
그런 존재와 이 좁디좁은 방 안에서 마주했다는 건... 살아 돌아가는 걸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뭐, 솔직히 날 죽인다고 너네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매번 귀찮게 찾아오지 마."
자세를 고쳐 잡으며 선언했다.
"조만간 내가 직접 찾아갈 테니까."
귀를 찢는 악마의 울음소리가 모든 걸 집어삼킬 듯 울려 퍼졌다.
***
쾅, 콰광―!!
콰직―!
주변 땅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양민호는 근처 골목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쿠구구궁―!
이윽고 김준우가 들어간 건물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내려앉기 시작했다.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건 더 이상 전투가 아니다. 그저 일방적인 학살일 뿐.
나름 베테랑이라고 하는 현장직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청소부라.
대체 국제 협회는 어쩌자고 저런 놈을 적으로 돌린 걸까.
'막상 오니까 좀 쫄리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동시에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그의 몸은 일전에 느꼈던 극도의 공포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떨고 있는 건 두려움 때문이라기보단... 희열이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황동휘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상황 어떻습니까?」
"선두 팀 전투 곧 종료될 것 같습니다. 레벨 차이가 너무 확연하네요."
「쯧, 설마 했는데 정말로 역부족일 줄이야.」
황동휘는 굉장히 못마땅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선두 팀이 꽤 체력을 빼놓은 것 같습니다. 공격도 몇 번 성공시켰고.... 뭐, 반능석이 통하지 않는 건 이해가 안 가긴 하는데, 그래도 상처는 줄 수 있을 정도니 이제부터라도 잘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군요.」
"네."
「지시했던 보험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준비해뒀습니다."
양민호는 그렇게 대답하며 주머니에 넣어둔 무선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명심하세요. 이번에도 실패하면… 한국 파트 개편될지도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시고, 팀원들한테도 잘 말해주세요.」
황동휘 파트장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때마침 봉쇄 구역에서 울리던 충격도 멈췄다.
상황이 모두 종료된 모양이었다.
"그럼… 다들 준비하세요."
양민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철컥―.
수십 명의 현장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방을 빠져나올 때쯤엔 이미 건물의 반이 날아간 후였다.
응급처치 한 부분이 터진 모양이다.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무리하게 소환 계열 스킬을 사용했기에 자업자득이었지만....
'역시 부담이 너무 크네.'
소환을 유지하기 위해 남아 있는 체력을 모조리 갖다 바쳤다. 덕분에 지금은 서 있는 것조차 기적이었다.
'뭐, 그래도 무리한 보람이 있긴 하네.'
국제 협회 산하 비밀 조직, PB 코퍼레이션.
주요 업무는 암살, 뱅크 아이템 가공 및 무기화.
부서가 나뉘어 있다는 걸 봐선 각자 담당자가 다르다는 거겠지.
최종 목적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매우 큰 수확이다.
드디어 괴담이라는 커튼에 가려진 놈들의 민낯을 확인했으니.
이제 남은 건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나가는 순간,
탕―!
갑자기 몸이 왼쪽으로 기울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뭐야 시발....'
또다시 순간 멍해진 시야.
애써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왼쪽 다리에 총알이 박혀 있었다.
곧바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오랜만이네요."
미소를 짓고 있는 양민호가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제히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눈 수십 명의 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쯧, 산 넘어 산이라더니.
"시발, 올 거면 좀 한 번에 올 것이지...."
"나름 보스 레이드인데, 이 정도는 준비해야죠."
"…하, 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피가 흐르는 다리를 무시한 채 애써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미 바닥인 체력.
컨디션도, 몸 상태도 최악.
이런 상태로 지금 저 인원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레이드 할 보스를 잘못 골랐네."
[습득 스킬 : 전능]
하지만 물러설 생각 따윈 없었다.
똑같은 놈들한테 두 번 죽어줄 생각은 일절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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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S랭크 스킬의 안전장치 해제 시퀀스를 시작합니다.]
[발동 조건 확인 중.]
[발동 조건이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스킬의 안전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습득 스킬 : 전능]
슈우웅―.
순백의 창이 수십 명의 인원 사이로 정확히 날아들었다.
[습득 스킬 : 트라이앵글 실드]
[습득 스킬 : 옵저빙 프로텍트]
[습득 스킬 : 수프림 미러]
콰과과광―!!!
하지만 곧바로 사제와 가디언 클래스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최상위 방어 스킬들이 줄줄이 펼쳐져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물론 아쉬워할 틈은 없었다.
[습득 스킬 : 과몰입]
[전투 중 시전자가 사용하는 모든 스킬의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습득 스킬 : 썬더 피스트]
파지지지직―!!
남아 있는 체력을 끌어올리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고유 스킬 : 스톤헨지]
쿵쿵쿵쿵―!
그 순간, 하늘에서 거대한 비석들이 떨어지며 녀석들을 감쌌다.
[해당 비석 안에서 아군의 피해가 80% 감소합니다.]
'빌어먹을....'
아예 작정하고 사제와 가디언을 중점으로 조합을 맞춘 건가.
이 정도 규모의 팀이 후발 주자로 나왔다는 건... 아까 놈들은 내 힘을 빼놓기 위한 미끼였다는 거겠지.
탱커와 힐러가 많은 조합을 혼자서 파고드는 건 무조건 불리하다.
일대 다수의 전투에선 본인에게 유리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상대가 원거리 포지션 중점이라면 거리를 좁히고, 근거리 중점이라면 거리를 벌리는 식으로 유동적인 대처를 해야 한다.
근데 이 녀석들... 거리를 잴 틈은커녕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러다간 내가 먼저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
일단 공격을 거두고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녀석들은 그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전투 경험이 뛰어난 놈이다! 절대 놈에게 유리한 거리를 주지 마!!"
"최대한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
"메카닉, 저격수 클래스! 계속 견제해!!"
[고유 스킬 : 레일 건]
[고유 스킬 : 슬링 샷]
피융―!
"큭…!"
거리를 벌리자 바로 날아드는 원거리 스킬.
한 번에 거리를 벌리지 못하고 어중간한 위치에서 공격을 피하고 있자니 쉴 새 없이 다음 공격이 날아든다.
[고유 스킬 : 전사의 창 - 기에보르가]
[고유 스킬 : 천마귀검(天魔鬼劍)]
캉, 카강―!
카가가강―!!
근접 고유 클래스, 창기병과 마검사가 달려들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쇠파이프를 주워 간신히 공격을 막았지만... 전세가 퍽 좋지 못하다.
'정말 작정하고 준비했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한 명을 상대로 무슨 이딴 조합을 짜냐.
진짜 레이드 나온 거야 뭐야.
이제 마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위험하다.
이 시점에서 어떻게든 끝을 봐야 한다.
하지만 저 견고한 진영을 무너트릴 방법이... 있을까?
[고유 스킬 : 디스인챈트 필드]
지이이잉―.
아차 하는 순간, 발밑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해당 영역 안에서 상대방의 모든 이로운 버프를 해제합니다.]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사용 불가]
[습득 스킬 : 과몰입]
[사용 불가]
[습득 스킬 : 타천사]
[사용 불가]
[습득 스킬 : 한계돌파]
[사용 불가]
신체에 걸어놓았던 이로운 버프가 일시적으로 해제됐다.
"드디어 잡았네요."
"...!"
이도 저도 못하는 사이 가장 유리한 거리를 내어주었고, 그 순간 양민호가 앞으로 나섰다.
[습득 스킬 : 원인치 익스플로전]
쾅, 콰광―!
콰과광―!!
그는 준비한 공격을 퍼부어댔다.
역시 전투 마법사답게 한 방 한 방이 꽤나 위협적인 마법 공격이 날아든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
아무런 피해 없이 피하긴 늦었다. 어쭙잖은 공격 몇 번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전방에 강력한 폭발 마법을 발사합니다]
쾅―!
쾅―!!
두 번을 연달아 날린 공격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제대로 보고 쏘십쇼. 아무렇게나 난사한다고 맞을 것 같습니까?"
"알아서 할 테니까 네 걱정이나 해."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쾅, 쾅, 쾅―!
날아오는 공격에 대항해 스킬을 난사하듯 쏘면서 움직였다.
하지만 그 어느 스킬도 유효한 타격 없이 폭죽처럼 허공에서 의미 없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때.
'...윽!'
결국, 한계가 찾아왔다. 기어이 다리에 힘이 빠지며 몸이 크게 휘청였다.
양민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같지 않은 여유 부리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뻐억―!
쾅―!!
내 복부에 정확하게 꽂힌 주먹.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쿨럭!"
입가로 피가 흘러나왔다.
방어 스킬 없이 맞으니 아프긴 더럽게 아프네....
"어째 예전만 못하시네?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으신가 봐요."
"...힘 다 빠진 사람 상대로 다구리 치면서 말은 잘하네."
겨우 몸을 일으켰다.
정말이지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아직도 웃음이 나옵니까? 허세도 그 정도면 병입니다."
"웃긴 데 어쩌라고. 청소부 하나 잡으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꼬라지 봐. 너라면 안 웃기겠냐."
"그래요. 뭐, 웃으면서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그런데… 조합, 포지션, 구성, 실력 다 좋은데, 장소 선정이 조금 아쉽네."
난 시선을 양민호의 등 뒤로 던졌다.
눈치 빠른 녀석이 그걸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이왕 고를 거였으면 변수가 없는 곳을 골랐어야지."
키에에에엑―!
카아아아―!!
그르르르―!
아까 허공으로 날아갔던 폭발 소리에 반응한 몬스터의 울음소리.
양민호의 얼굴이 팍 굳었다.
"설마 처음부터...!"
"그럼, 내가 두 눈 멀쩡히 뜨고도 진짜로 못 맞춘 거겠냐?"
애초에 스킬 몇 번으로는 저들을 쓰러트리긴커녕, 진영을 무너뜨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움직여. 뒤지기 싫으면."
쿵쿵쿵쿵―!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타난 몬스터들이 개떼처럼 한꺼번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피, 피해!!"
"피하지 마!! 그냥 받아쳐야 해!"
"전투 포지션이 부족해서 안 돼!! 흩어져!!"
돌연 몬스터의 등장에 당황하기 시작한 인원들.
누굴 노리고 할 정신 없이 몬스터를 피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습득 스킬 : 디스인챈트 필드]
[스킬 해제]
자연스레 진영은 무너지며 내 발목을 잡고 있던 스킬도 사라졌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파앙―!
곧바로 남겨놓았던 마력을 사용해 혼란에 빠진 진영으로 파고들었다.
"잡았다."
"뭐?!"
아까부터 눈여겨봤던 사제 클래스 한 명을 붙잡고 스킬을 발동했다.
[습득 스킬 : 레플리카]
[타인의 고유 스킬을 1분간 복제합니다.]
[레플리카 - 고유 스킬 : 퍼펙트 큐어]
[일시적으로 시전자의 체력을 모두 회복합니다]
사아아아―.
스킬 발동과 함께 밝은 빛이 머리 위로 쏟아지길 한 차례, 떨어졌던 체력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어후… 이제 좀 살겠네."
물론 응급처치 수준의 스킬.
게다가 스킬 효과가 끝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겠지만... 딱히 상관없다.
"...비, 빌어먹을."
"X 됐다...."
효과가 끝나기 전에 정리하면 되니까.
[습득 스킬 : 타천사]
[일시적으로 시전자의 마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과몰입 스킬로 인해 마력 상승률이 증가합니다.]
[현재 마력 수치 : 921,240 (913,440↑)]
[습득 스킬 : 플레임 버스트]
────!
대지가 터져나가며 용암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습득 스킬 : 링크]
[50% 감소한 대미지로 모든 스킬을 연계할 수 있습니다.]
[링크 : 썬더 피스트 - 원 카운터 - 극검 12절기 - 금강불괴]
뻐억―!
콰직, 쾅―!
콰과과광―!!
완전히 포지션을 잃은 인원들 사이로 파고들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날렸다.
"끄윽…!"
"으아아악!!"
"모, 모여! 모이라고…! 으아악!!"
귀를 찢는 절규와 비명.
힐러와 탱커를 중심으로 짠 포지션.
그 진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가히 무적에 가까운 조합이겠지만....
그 진영이 무너진 이상 더는 이들에게 승산은 없다.
이 순간부터는 그저 회복하는 샌드백과 조금 단단한 샌드백일 뿐.
"컥…!"
"끄아아악!!"
"욱, 우욱…!"
그렇게 한 명씩 착실하게 몬스터와 함께 조지던 차였다.
"그만… 그만합시다."
양민호가 두 손을 올리며 항복을 선언했다.
이건 뭐 개 같은 태세 전환이야....
"이제 와서 항복? 장난하냐?"
"…인정하겠습니다. 역시 힘으로는 못 이기겠네요."
묘한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리기도 잠시.
양민호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형태를 보아하니 무선 리모컨인 듯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써야겠네요."
"뭐?"
"작전 본부와 행정 본부에 폭탄을 설치해뒀습니다."
난데없는 선언에 내 표정이 굳었다.
이 새끼가 뭐라 떠드는 거야....
"저도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가 없네요."
"...."
퍽 굳은 얼굴.
궁지에 몰렸다고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럼에도 반신반의했다.
명색이 국제 협회 산하 비밀 조직이라면, 궁지에 몰렸다고 눈에 띄는 짓을 할 리가 없다.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콰과과광―!!!
물론 그것도 금세 사라졌지만.
"...!!"
멀찍이서 굉음과 함께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정확히 행정 본부가 위치한 여의도 방향이다.
검은 연기와 함께 화염이 미친 듯이 솟구쳤다.
"윗분들의 보험입니다. 오늘 여기서 당신을 죽이지 못하면, 당신의 입지라도 무너트리라고요."
"이런 미친 새끼가...."
"어허, 너무 과민반응하지 마세요. 어차피 행정 본부는 지금 시간이면 다 퇴근하고 아무도 없을 텐데요."
양민호가 다른 리모컨을 꺼냈다.
"하지만 작전 본부는 어떨까요?"
"...."
주먹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이라면 행정 본부엔 아무도 없을 시간이지만… 작전 본부는 다르다.
긴급 작전 상황인 만큼, 모든 인원이 작전 본부에 대기 중일 것이다.
그런 와중에 만약 저 폭탄이 터지면....
'리젠 던전 토벌하기도 전에 폭삭 내려앉겠군.'
안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작전 본부마저 사라지면 그때부턴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물론 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겠지.
"원하는 게 뭐야?"
"말했잖습니까. 당신 입지라도 무너뜨리겠다고."
"고작 협회를 테러하는 거로 내 입지가 무너질 것 같진 않은데."
"글쎄요. 오늘이야 작전 본부뿐이겠지만, 그걸로 끝이 아닐 겁니다. 잔존 현장직들이 계속 움직일 거예요. 당신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물리적으로 죽일 수 없다면 사회적으로라도 죽이겠다는 건가.
"...기어이 니들이 선을 넘는구나."
"어차피 여기서 실패한다면 죽은 목숨인 건 매한가지인데, 못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게 싫으면...."
양민호가 총을 겨누며 말했다.
"오늘 좀 죽어주시던가. 그럼 없던 일로 해줄게요."
"...후."
작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내 불찰이다.
저 새끼를 살려두는 게 아니었다.
다친 사냥감을 풀어서 둥지를 찾을 생각이었는데... 설마하니 궁지에 몰렸다고 다 죽으려고 들 줄이야.
[레플리카 - 고유 스킬 : 퍼펙트 큐어]
[지속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마침 빼앗았던 회복 스킬의 지속 시간이 끝났다.
스킬로 무시되었던 통증이 다시 일었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더 이상 전투를 벌일 체력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죽어줄게."
"정말입니까?"
"대신, 한 번에 죽여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니 목이 날아갈 테니까."
이내 총구가 정확히 내 머리를 향했다.
녀석이 손가락을 방아쇠에 올렸다.
여기서 이렇게 또 죽으라고?
그것도 두 번이나 같은 놈들 손에?
천하의 김준우가?
아니. 억울해서라도 그렇겐 못 하겠다.
저 새낀 분명 스킬을 쓰지 않는다.
확실히 날 보내기 위해 반능석을 머리에 꽂아버릴 생각밖에 없을 거다.
현재 내 몸 상태로 쓸 수 있는 스킬은 하이퍼 부스트.
딱 한 번뿐이지만… 이 정도로 충분하다.
총을 쏘는 동시에 안으로 파고들어 리모컨을 빼앗는다면 충분히....
"준우 씨!!"
"...?!"
하지만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런 젠장...."
동시에 양민호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그곳엔 사색이 된 채로 나를 부르고 있는, 이아영 실장이 있었다.
"빌어먹을! 여길 왜 왔습니까!"
"연락이 안 되니까 걱정돼서 왔죠! 저놈들은 또 뭐예요!!"
그녀의 등장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양민호 또한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등장에 쯧, 하고 혀를 찼다.
"나중에 얘기해줄 테니까 당장 여기서 나가십…!"
그 순간 양민호의 총구가 이아영 실장에게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탕―!
울려 퍼지는 단발의 총성.
"...쿨럭."
동시에 내 입에서 핏덩이가 쏟아졌다.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전투 중 시전자의 이동 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시발, 답지 않게....'
이건 뭐 사격 표적지도 아니고....
"주, 준우 씨!!"
"와... 진짜 대단하시네요. 설마하니 몸으로 막을 줄 몰랐습니다."
"...."
머리에 뻗치는 분노와 달리 모든 게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 ...!!"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여전히 이아영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아씨, 존나 억울하네....'
그걸 끝으로 떨어지는 의식과 함께 바닥에 꼬꾸라졌다.
[해금 조건 달성]
[???]
그 순간, 이상한 음성이 들려 왔다.
110
110
양민호는 황동휘 파트장의 갑작스러운 작전 변경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보험이라니....'
선발대를 미끼로 쓰는 것도 모자라 현장직 수십 명을 소집했는데, 대체 여기서 뭐가 더 필요하다는 것인가.
무엇보다 그 보험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체가 드러나는 걸 피해야 하는 조직이, 대놓고 독립 협회를 상대로 테러를 한다면 정체가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말이다.
별로 탐탁지 않았지만, 위에서 내려온 지시인 이상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선발대에 합류하지 않고 행정 본부와 작전 본부에 폭탄을 설치하기 위해 움직였다.
본부에 침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협회장 게이트와 리젠 던전 출현으로 온통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있었으니.
그렇게 사전 작업을 마치고 후발대와 함께 합류해서 봉쇄구역으로 향했다.
이윽고 선발대와의 전투가 끝나고 김준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예상대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체력도, 컨디션도 바닥.
무엇보다 부상까지 입은 터라 이전과 같은 기세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변수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를 쓰러트렸다.
그런데 대체....
[해금 조건 달성]
[???]
"어떻게...?"
[고유 스킬 : 마왕 -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다 죽어가던 놈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 것인가!
[축하드립니다. 현 시간부로 시전자의 모든 능력이 해금되었습니다.]
[시전자의 고유 클래스에 도달했습니다]
[고유 클래스 : 최종 보스]
고오오오오―.
"비, 빌어먹을...!"
김준우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류.
마치 악마와 같은 그 모습을 마주하자, 양민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오기 시작했다.
눈앞의 스킬은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클래스도, 계열도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양민호의 얼굴에 헛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보험이니 뭐니, 준비한 것들이 전부 하등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걸,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그그그그―!!
김준우에게서 흘러나오던 검은 기류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
사람이라기보단... 말 그대로의 괴물에 가까웠다.
"윽...!"
양민호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건 고사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맘대로 할 수 없었다.
전에 느꼈던 것 이상의 엄청난 위압감.
"저, 저게 무슨...."
"우리보고 저런 놈을 죽이라고 한 거야…?"
양민호뿐만 아니라 다른 현장직들도 느낀 건지 모두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죽는다.
정말 죽는다.
양민호는 일전에 김준우에게서 느꼈던 공포를 다시금 느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한없이 압도적인 존재를 마주했을 때의 그 원초적인 공포.
"시, 시발...."
하지만 이번엔 움직이지 않으면 정말로, 정말로 죽는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어떻게든 움직이며 스킬을 발동한다.
[고유 스킬 : 이그드라실]
[첫 번째 샘 - 미미르]
바닥에 푸른빛의 물웅덩이가 깔렸다.
[미미르의 샘을 밟고 있는 동안 시전자의 마력은 소모되지 않습니다.]
양민호는 최상급부터 하급까지, 가능한 모든 방어 스킬을 몸에 둘렀다.
탓―!
[습득 스킬 : 라이트닝 블로우]
엄청난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반응할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시도했다.
[고유 스킬 : 마왕 - 강자 독식]
[고유 스킬이 지속하는 동안 시전자보다 마력이 낮을 경우, 모든 공격은 무효화 됩니다.]
텅―.
텅, 텅텅―.
타격이 제대로 들어갔지만, 마치 풍선으로 친 것처럼 허무한 소리만이 울렸다.
"마, 말도 안 돼...."
"...."
한 박자 늦게 김준우가 양민호를 인식했다.
모기가 귀찮게 구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태도.
양민호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게 같은 이능력자라고?
아니… 이걸 사람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시발, 대체 뭐야!! 대체 뭔데 청소부 주제에 그딴 힘을 가지고 있는 거냐고!"
양민호는 이를 꽉 물었다.
[고유 스킬 : 이그드라실]
[두 번째 샘 - 흐베르겔미르]
[흐베르겔미르의 샘을 밟고 있는 동안 시전자의 전투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세 번째 샘 - 우르드]
[우르드의 샘을 밟고 있는 동안 시전자에게 가해지는 피해를 지속적으로 회복합니다.]
지이잉―
연계 스킬 이그드라실의 두 번째, 세 번째 능력을 발동시켰다.
바닥에 붉은빛과 검은빛이 동시에 뿜어져 나오며 그의 전신에서 거센 기류가 터져 나왔다.
그를 국내 1위로 만들어준 스킬.
이그드라실이 뿌리를 담그고 있는 세 개의 샘.
마력 소모 제로.
전투력 대폭 상승.
피해 회복 대폭 상승.
이 세 개의 샘 위에서라면 양민호는 가히 무적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식선의 이야기였다.
"내가 말했지."
머릿속에 직접 때려 박히는 듯한 음성.
[고유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한 번에 못 죽이면 니 목이 먼저 떨어져 나갈 거라고."
[제작 스킬 : 능지처참]
김준우가 손을 들어 한 차례 휘둘렀고.
스윽―.
전방의 모든 것들이 잘려 나갔다.
***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에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후우...."
숨을 고르며 주변을 훑어봤다.
수십 명의 인원이 모두 바닥에 널브러진 채였고, 양민호가 소환했던 샘은 바짝 말라 있었다.
눈앞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고 있는 녀석 한 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쿨럭…!"
빈사 상태였지만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재빨리 품속에서 리모컨을 꺼내 들었지만.
스윽―.
"끄아아악!!"
손목이 잘려 나갔다.
"끝까지 개수작이네. 왜, 죽기 전에 작전 본부는 꼭 터트리고 싶어?"
"...크흐흐."
"어쭈, 웃어?"
한참 웃음을 흘리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여기서 절 죽인다고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는다고 해도 PB 코퍼레이션은 계속 움직일 테니까."
"...?"
"말했잖습니까. 내일부터 한국 현장직 전원이 당신 주변 사람들을 한 명씩 죽여 나갈 거라고. 뭐, 당신이 그걸 다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알겠습니까? 오늘 당신은 이겨도 진 겁니다."
"...하하, 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만.
"마음대로 해봐."
"...?"
"내 주변을 건드리든 뭘 하든 니들 맘대로 해보라고. 할 수 있으면."
나는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PB 코퍼레이션은 계속 움직일 테니까. 말했잖습니까. 내일부터 한국 현장직 전원이 당신 주변....」
내 핸드폰에서 본인의 목소리가 들려 오자 양민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처음 나를 찾아온 놈들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내용이 녹음되어 있었으니까.
"내일이 되면 온 세상에 너네들 정체가 까발려질 거야. 뭐… 궁금하긴 하네. 정체가 까발려져도 그 멋진 계획이 너희 뜻대로 될지."
"이런 시발…!"
스윽―.
양민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가만히 누워 있는 그의 품속에서 핸드폰을 찾아 챙겼다.
[고유 스킬 : 마왕]
[지속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때마침 스킬 사용 시간이 끝났다.
한꺼번에 부하가 몰아친 건지, 다리에 힘이 팍 풀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준우 씨!!"
"...!"
그때 이아영 실장이 달려들며 와락 끌어안았다.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요!"
"...당신 때문인 건 아십니까?"
"그, 그건... 그것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저놈들은 또 누구고요! 왜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물어볼 거면 하나씩 물어보던가.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죠.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다, 당신은요?"
"전 할 게 좀 남아서."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주춤했던 몬스터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
어쨌든 할 건 해야지,
"잠깐만요! 그 몸으로 뭘 더 하려고! 이러다가 진짜 죽어요!"
"어쩔 수 없잖습니까. 저것들을 뚫어야 나가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다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던 차에 한 가지 정리하지 않은 일이 떠올랐다.
이 몸으로 몬스터 토벌하는 것도 문제지만, 작전 본부에 설치된 폭탄이 마음에 걸린다.
리모컨을 한 놈만 가지고 있으라는 법도 없고. 또 누가 장난질을 하기 전에 서둘러 해체를 해야 할 텐데....
고민하던 끝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다른 게 아니라, 부탁 하나 하고 싶은데...."
***
임동빈 팀장은 요 며칠간 꽤나 마음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뿌린 적도 없는 회사 내부 자료가 언론에 뿌려진 것이다.
설사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해도 1순위로 의심받을 게 뻔하다.
사실 입사 직후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당연하겠지.
제 발로 청소팀으로 기어들어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할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일이 터지면 모든 화살은 자신에게 쏠릴 게 뻔했다.
그걸 걱정해서 이후 최호성과 연락을 끊은 건데, 결국 자료가 터져버렸으니....
이미 최호성과 연을 끊은 마당에 김준우까지 자신을 내친다면 정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럼 다시 그 지옥 같던 밑바닥 생활로 돌아가게 되겠지.
어떡해야 하지?
솔직하게 털어놔야 하나? 내부자는 맞지만, 자료는 내가 넘긴 게 아니라고?
당연하겠지만 곱게 믿어줄 리 만무했다.
이도 저도 못하고 며칠 밤을 지새우고 있던 그때.
띠리링―.
핸드폰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김준우에게 온 연락이었다.
"여, 여보세요."
「접니다.」
"예, 예… 무슨 일입니까?"
저도 모르게 존대가 나왔다.
「다른 게 아니라, 부탁 하나를 좀 하고 싶은데.」
"...무슨 부탁 말입니까?"
「그 전에… 자세한 내용은 묻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물론 다른 사람한테도 말하지 마시고요. 잘만 해주신다면 자료 빼돌린 건 모른 척해드리겠습니다.」
"...!"
임동빈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역시 알고 있었나.
"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자료를 빼가긴 했어도 넘겨준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넘겨줬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제 부탁 들어주실 겁니까, 말 겁니까?」
"...."
「고민하실 게 있습니까? 보아하니 최호성 본부장과는 연을 끊으신 것 같던데, 여기서 저마저 내치시면 어디로 가시려고?」
임동빈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본인만 알고 있던 사실이 줄줄 흘러나오자 임동빈은 더는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무슨 부탁입니까?"
「작전 본부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걸 좀 수거해주십시오.」
"...에?"
자신이 뭘 들은 건지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괜히 건드렸다가 터질지도 모르긴 한데… 아, 뭐 그 정도야 알아서 해주셨으면 합니다.」
"...."
「그럼 이만 끊습니다.」
"자, 잠깐...."
뚝―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임동빈은 생각했다.
그냥 나가 죽으라는 건가…?
111
111
"왜 연락이 안 되지...."
황동휘 파트장은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분명 작전이 끝나도 진작에 끝났을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양민호를 포함한 현장직 그 누구와도 연락이 닿질 않았다.
'설마 실패한 건....'
혹시 모를 불안감이 스쳤지만, 얼른 고개를 털었다.
혼자 몇 시간 동안 토벌을 진행했던 것도 모자라 선발대와 전투까지 벌였다.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고, 체력도 완전히 바닥이었다.
아무리 김준우라고 해도 그런 상태로는 수십 명의 현장직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콰과과광―!!!
그때, 어디선가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릴 만큼 거대한 충격이 느껴졌다.
"...!!"
양민호는 곧바로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 검은 연기와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이는 것이 보였다.
'빌어먹을....'
정확히 여의도 행정본부가 있는 방향.
그곳에서 폭발이 발생했다는 건....
'기어이 최후의 수단을 쓴 건가....'
물론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를 상정하고 들어놓은 보험이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그걸 쓰게 될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후퇴는 없다.
정체가 발각될 것을 각오하고 모든 걸 쏟아부은 상황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불안한 마음에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황동휘 파트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이 온 것이다.
"걱정했잖습니까! 어떻게, 잘 처리했습니까?"
「어, 뭐야. 익숙한 목소리네?」
전화 너머 목소리에 황동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양민호가 아니다.
누가 들어도 김준우의 목소리다.
「파트장이라고 저장돼 있길래 혹시나 해서 걸어봤더니... 웬 생각하지도 못한 대어가 걸렸네.」
"대체 어떻게...."
「그러게. 나도 순간 죽는 줄 알았는데, 평소에 안 하던 짓 하니까 누가 선물을 주더라고.」
영문 모를 소리에 인상이 일그러지길 잠시.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김준우 대표님, 지금 실수하시는 겁니다."
「실수는 시발, 니들이 먼저 했지. 나 하나 죽이겠다고 행정본부를 날려버려?」
"그게 우리 방식입니다."
「그래. 마음껏 씨불이고...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니들 제대로 터트려 줄 테니까.」
"하하하. 마음대로 하시죠. 근데 뭐라고 터트리실 겁니까? 뭐, 국제 협회가 당신을 죽이려 했다고 언론에 뿌리시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그거 사람들이 믿어줄 것 같아요?"
「...뭔 개소리야?」
김준우가 무슨 소리냐는 듯 말을 이었다.
「난 니들 뚝배기 말한 건데?」
"...!"
미친놈.
황동휘는 학을 뗐다.
그에게 상식을 기대한 자신이 바보다.
「말단 직원 한 명을 터니까 파트장이 걸렸는데, 널 털면 누가 걸릴까? 중간 간부? 아니면 니들 대가리?」
"...."
「마음 같아선 지금 바로 찾으러 가고 싶은데... 뭐, 네가 그동안 얌전히 기다리진 않겠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느긋한 목소리의 김준우였다.
「어디 한 번 꼭꼭 숨어봐. 머리카락 보이는 순간 죽여 버릴 거니까.」
뚝―.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끊겼다.
황동휘는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술래가 바뀌었다.
당장 몸을 숨겨야 할 사람은 본인들이 되었다.
곧바로 마르크에게 연락을 넣었다.
"팀장님… 작전 실패했습니다."
「...설마 노출됐나?」
"그런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
"저를 포함해서 본사까지...."
「하하하.」
황동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르크 팀장의 웃음소리가 마치 사형선고처럼 느껴졌다.
「자네도 오래 살긴 글렀군.」
"...."
「지금 당장 본사로 귀환해. 자세한 얘기는 그때 가서 하지. 올 때 뒤처리 확실하게 하고. 혹시라도 김준우 외에 눈치챈 놈이 있으면 바로 처리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 순간, 황동휘 파트장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국 파트는 오늘부로 해체한다.」
그렇게 끊긴 전화.
황동휘는 핸드폰을 꽉 움켜쥐던 끝에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 들었다.
마르크 팀장이 말한 뒤처리는, 결국 작전본부 또한 터트려버리고 모든 흔적을 없애버리라는 뜻이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황동휘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지만.
....
"뭐야 시발 왜 안 터져…?"
이미 누군가 목숨을 걸고 폭탄을 해체했다는 사실을, 그가 알 리 없었다.
***
봉쇄구역 한복판.
'설마하니 이 새끼가 내부자였을 줄이야.'
이곳저곳에 사람을 심어놓았을 거라 예상은 했는데... 설마 통제팀의 그 사람일 줄이야.
'이번 일로 대충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그쪽 일은 이 정도로 마무리했으니....
크르르르―.
끼에에에에―!
그으으윽―!
이제 저것들만 어떻게 하면 되겠군.
'에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지금 몸 상태로는 후퇴하는 게 맞긴 한데....
혼자라면 몰라도 그녀를 데리고 여길 빠져나가는 건 아무래도 힘들다.
벌써 소란을 듣고 몬스터가 모여들고 있었다.
"어, 어떡하죠?"
그녀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내게 바싹 달라붙었다.
모든 능력치가 회귀 전으로 돌아온 덕에 조금은 움직일 수 있지만… 그것도 잠깐뿐이다.
부상도 부상이고, 이미 체력이 너무 바닥이었다.
해봤자 10분이나 싸울 수 있을까.
그런데 뭐…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쯧, 귀찮게.
"일단 뒤에 붙으시죠."
"서, 설마 싸우려는 건 아니죠?!"
"그럼 뭐, 대화로 해결할까요?"
점점 우리를 포위하는 몬스터들.
탐색하는 건지, 거리를 두고 이빨만 드러내고 있었다.
다행히 조금 전 사용했던 고유 스킬 덕에 움츠러든 기색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최대한 속전속결로 한 놈씩 처리한다면....
스으으으으―.
열심히 긍정 회로를 돌리고 있던 사이, 한 몬스터가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기며 유령처럼 나타났다.
"...아."
3m가 넘는 크기의 마녀형 몬스터를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바바야가.
마법 계열 스킬을 모두 무효화하는 특성 때문에 회귀 전에도 꽤나 애를 먹었던 레드 등급 몬스터.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하필 여기서 저것과 마주치다니.
사아아아아―.
바바야가가 그 창백한 얼굴로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에 응답하듯 주변 몬스터가 일제히 포효하기 시작했다.
"이건 안 되겠네요."
"…네?"
"도망칩시다."
이아영의 손목을 낚아채고 등을 돌린 순간.
쾅―!
"윽!"
무언가가 내 등을 직격했다.
앞으로 튕겨 날아가며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주, 준우 씨! 준우 씨!!"
이아영이 바로 나를 부축했다.
동시에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바바야가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아아아악―!
바바야가가 뿜어대는 검은 기류가 날카로운 창의 형태로 변했다.
"쯧, 그러게 도망치라니까...."
그 순간, 수십 개의 송곳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고유 스킬 : 천수관음]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쾅―!!!
하지만 공격은 내 몸에 닿지 못했다.
대신 두 개의 그림자가 내 앞으로 뚝 떨어졌다.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어요."
"어휴, 죽으려면 뭔 짓을 못 해."
익숙한 목소리.
일부러 타이밍을 맞춘 건가 싶을 정도로 참 극적인 등장이었다.
이럴 거면 좀 더 빨리 오던가.
"웃으시는 거 보니 아직 멀쩡하시네요."
김민주가 돌아보며 말했다.
"...여길 어떻게 알고 왔어?"
"아영 씨가 불렀어요. 선생님이 봉쇄구역에 혼자 들어갔는데,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고. 아주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요."
그 말에 이아영 실장을 흘겼다.
뭐, 아무 대책 없이 혼자 달려온 건 아니었나 보네.
근데… 울었다고? 그 이아영이?
한편 한유빈이 날 위아래로 훑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싶었는데.... 좀만 늦었으면 진짜 가셨겠네.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부르지 그랬어요. 아직도 우리가 그렇게 못 미더워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와선 변명밖에 안 되겠지만, 솔직히 혼자서 충분히 가능했다.
단지 중간에 웬 사고가 나서 그렇지.
물론 구차해질 것 같으니 말은 아꼈다.
"근데 두 명으로 되겠어? 내가 볼 땐 그냥 안정화만 시키고 작전팀 소집 떨어지면 그때 같이...."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엉?"
"다들 늦지 않게 와줬거든요."
김민주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했다.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부산 지부, 총 8개 작전팀 도착했습니다!"
"천안 지부 총원 250명, 도착했습니다!"
"강릉 지부, 인천 지부, 대전 지부, 순천 지부 외 5개 지부 이하동문!"
저 멀리에서부터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작전팀.
한눈에 담지도 못할 만큼 수많은 헌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카르마 코퍼레이션과 계약하고 나서 이래저래 도움을 받은 지부들이었다.
"...소집 허가가 벌써 났냐?"
"그럴 리가요."
"...? 이것들이 단체로 잘리고 싶어 환장을 했나."
"그 정도 각오도 없으면 선생님이랑 같이 일 못 하죠."
꽤나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얘가 원래 이렇게 뒤가 없었나?
이거 걸리면 얄짤 없이 최소 헌터 자격 정지라고. 심한 경우에는 감옥 간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선생님이 위험하다고 하니 다들 자진해서 모인 거예요. 엄밀히 따지면 정식 소집은 아니죠."
"윗분들에게 그딴 변명이 잘도 통하겠다."
"어림도 없겠죠. 그래도 뭐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되지 않겠어요?"
"...."
모르겠다.
솔직히 지금 내가 누굴 걱정할 형편도 아니고.
제 발로 참가한 거니, 잘리든 말든 뒷일도 본인들이 알아서 하겠지.
"이제부턴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선생님은 좀 쉬고 계세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구역이 뚫리기 전에 전국 작전팀이 소집됐으니, 어쨌든 내 역할도 여기서 끝이다.
나머진 알아서들 하겠지.
빨리 집에 가서 한숨 푹 자고....
"기, 김준우 대표님!"
그때, 통제팀 직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다급하게 나를 찾았다.
"...뭡니까?"
"그, 서울 본부에서 무전이 왔는데... 최호성 작전 본부장님이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
최호성 본부장이 나한테?
퍽 의아한 표정으로 무전기를 건네받았다.
"예, 김준우입니다."
무전기 너머로 몇 마디 이야기가 전달됐다.
'아오, 시발....'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
서울 작전본부에 믿을 수 없는 보고가 들어왔다.
"행정본부가 뭐가 어째…?"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고요!!"
최호성 본부장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폭탄 테러?
그것도 협회 수뇌부가 죄다 모여 있는 행정본부를? 대체 어떤 미친놈이?!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전국 작전팀이 봉쇄구역으로 모여들고 있답니다."
"뭐…? 아직 소집 허가도 안 떨어졌잖아!"
"본인들 말로는 김준우 대표 구조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뿐이고, 의도적으로 모인 건 아니라고 하는데...."
"시발, 그딴 변명이 위에 먹히겠냐고!"
최호성이 쾅, 책상을 내리쳤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아니, 그런 것보다....
왜 하필 자신이 본부장일 때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야....'
엄연히 작전 본부장이다.
협회의 모든 작전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총 책임자.
그런데 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어떻게 단 하나도 없는가.
"이렇게 된 거…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벌인 일도 아닌데, 괜히 나섰다가 오히려 피를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미쳤냐?! 테러는 둘째 치고, 작전팀 소집은 엄연히 우리 책임이야. 이거 까딱하다간 내가 독박 쓸지도 모른다고!"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미 해산 명령을 내리기엔 늦은...."
"나도 알고 있으니까 좀 닥치고 있어 봐."
신경질적으로 말을 자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모인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허가도 떨어지지 않은 마당에 작전팀이 소집됐다는 게 윗선에 알려지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작전 본부장인 본인이 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불법 소집은 둘째 치고, 만약 지들끼리 토벌 진행하다가 사상자라도 나오면 그 책임 또한 본인 몫이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왜 자꾸 이딴 개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인가.
'시발,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사실 이미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다만, 정말이지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시발....'
이를 꽉 깨물기를 한 차례.
"지금 김준우 대표 연락되냐?"
"네, 네? 김준우는 갑자기 왜...."
"...이거밖에 방법이 없다. 그 새끼한테 작전 지휘권을 넘기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선 책임자를 넘기는 것뿐.
그런데 그때, 최호성 본부장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어, 잠깐.... 지금 모인 작전팀 놈들 봉쇄구역에 고립된 김준우를 구조하려고 모인 거라고?"
"네, 네. 그렇답니다."
"김준우는 봉쇄구역에 왜 들어가 있는 건데?"
유영수 보좌관이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 황동휘 대리가 봉쇄구역엔 아무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직접 확인했다고까지 못을 박았다.
그런데 어떻게....
최호성 본부장의 눈이 빠르게 돌아가길 잠시.
"가서 황동휘 대리 좀 불러와 봐. 이거 잘하면 그놈한테 뒤집어씌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건 최호성 본부장 인생에 있어서 가장 최악의 선택이었다.
112
112
행정본부에서 의문의 폭탄 테러가 발생하고 협회를 비롯한 서울 전체가 패닉에 빠진 상황.
그럼에도 여전히 작전을 속행 중인 봉쇄구역에선 가까스로 탈환에 성공한 서초역에 임시 작전 지휘실이 마련되었다.
최호성 본부장이 나에게 작전 지휘권을 넘긴 지도 3일이 지났다.
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해댔지만....
본심이야 안 봐도 뻔했다.
'본인이 책임지고 싶지 않으니까 나한테 떠넘기려는 거겠지.'
하여간 이 상황에서까지 밥그릇 걱정이라니.
과연 전생에 내 멘토다운 역량이다.
시발, 덕분에 쉬지도 못하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강릉 지부입니다. 슬슬 내부 교대 시간인데 허가 부탁드립니다.」
때마침 무전이 울렸다.
모니터를 확인하며 심드렁하게 답신했다.
"지금 그쪽 구역 몬스터는 활동이 많이 줄어들었으니 괜찮을 겁니다. 빠르게 교대하시고 현재 위치 사수하세요."
「넵, 알겠습니다!」
"인천 지부는 방배역을 기준으로 몬스터가 다른 구역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최대한 막아주시고요."
「네!」
"전체적으로 상황이 좋습니다. 다들 조금만 더 힘내주시고, 조금이라도 이상 상황 생기면 바로 무전 주십시오."
그 무전을 끝으로 다시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물론 내가 직접 현장에 뛰어들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작전팀도 소집된 마당에 굳이 힘든 몸 이끌고 애쓸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러니 업무래 봤자 지휘실에서 무전이나 때리는 일이었다.
앉아서 입이나 놀리는 거야 어려울 것도 없지만, 규모가 규모인지라 몸은 편해도 머리는 터질 지경이었다.
작전에 참여한 수십 개의 작전팀과 길드.
모든 지부에 각자의 세부 구역을 배정해주었고, 그 안에서 로테이션을 돌려 24시간 토벌을 진행하게 했다.
길드는 구역 사이사이에 배치하여 어느 한 구역에 몬스터가 쏠리지 않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맡겼다.
그렇게 시작된 토벌은 단 1초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첫날은 이미 리젠된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뚫고 최소한의 작전 구역을 탈환해야 했기에 꽤나 애를 먹었지만... 어려웠던 건 그 정도뿐이다.
이튿날부턴 전국 지원팀이 자진해서 작전에 참여했고, 토벌 진행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몬스터 수가 줄어듦에 따라 조금씩 안정 궤도에 올라섰다.
던전 출현 5일째이자 작전 개시 3일째가 된 오늘.
던전 소멸까지 남은 시간은 단 3시간.
3일 밤낮을 계속된 작전에 많이들 지쳐 있었다. 간혹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공포에 패닉이 오는 인원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3시간 남았다고 말을 해줄 수도 없고....'
그걸 설명할 수도 없을뿐더러, 자칫 방심을 유도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현재까지 사상자는 0명이다.
이대로만 버텨준다면 아무런 피해 없이 마무리할 수 있다.
한숨을 돌리며 기지개를 쭉 켜던 그때였다.
덜컹―.
"어떻게 되고 있어요?"
이아영 실장이었다.
그녀 또한 나를 따라 3일 밤낮을 새우며 작전을 지원해주었다.
자업자득이긴 해도 그런 일이 있어 돌아가 쉬라고 했지만, 고집스럽게 붙어 있었다.
고집 하나는 세계 제일이지 않을까 싶다.
"뭐, 무난합니다. 다들 많이 지치긴 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문제도 없고요."
"당신이 걱정하던 일은 안 일어나겠네요."
"예. 다행히도."
"만약에 이번 작전이 아무 피해 없이 완료되면, 진짜 어마어마한 일이에요. 국제 협회에서 러브콜 올 수도 있을걸요?"
"...듣던 중 끔찍한 소리군요."
내가 학을 떼자,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이아영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모르고 있을 땐 그러려니 했지만, 이젠 다 알고 있는데도 저런 농담이 나오나 싶었다.
'말해주지 말 걸 그랬나....'
아닌 게 아니라, 나는 결국 그녀에게 국제 협회에 대해 그동안 알아낸 걸 모두 털어놓았다.
양민호의 습격 이후, 대체 무슨 일인 건지 설명하라고 닦달하는 걸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무엇보다 눈앞에서 습격 장면을 들킨 마당에 더는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국제 협회, PB 코퍼레이션, 헌터 밸런싱, 한국 현장직.
그 모든 내용을 들은 이아영 실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충격적인 이야기였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생각에 빠져 있던 끝에, 그녀가 물었다.
-혹시 회사를 세운 이유도 그쪽이랑 관련이 있는 거예요?
역시 촉이 남달랐다.
협회장과의 극비 프로젝트.
제2의 국제 협회 건설.
해외 지부 사업.
그것을 위한 위장 사업.
이아영 실장은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내가 회귀했다는 건 빼고.
"그나저나...."
이아영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생각하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해외 지부 사업, 시작해야죠."
단호하게 대답하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국제 협회는 예전부터 전 세계 토벌권을 통합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중이에요. 뭐… 대부분 합법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거라, 다들 크게 신경 안 쓰고 있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는 소리죠."
어찌 됐건 한 나라의 협회를 상대로 테러를 감행했다. 더한 짓도 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었다.
"우리가 해외 인수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국제 협회와 정면으로 맞붙게 될 거예요. PB 코퍼레이션도 그렇고요. 당신도 이전보다 더 위험해질 수 있어요."
"이미 충분히 맞붙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길 잠시.
"안 하면 안 돼요?"
"...?"
"제2의 국제 협회니, 사무총장이니 하는 거 안 하면 안 되냐구요."
그녀는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냥 우리끼리 소소하게 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요? 굳이 위험한 일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말했잖습니까. 개인적인 목표라고."
"...."
"마음에 안 들면 여기까지 하셔도 됩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도움받았으니까요."
"...."
이아영 실장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한다.
뭐,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결국 민간인이다.
나는 몰라도 굳이 제삼자가 목숨 내놓고 일할 이유는 없다.
그러니, 더는 할 수 없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해는 해도 순순히 내보내 줄 생각은 없지만.
"뭐, 해본 소리예요."
그때, 이아영이 피식 실소를 뱉으며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내가 설마 그런 것 때문에 그만두겠어요? 당신 사업이 좋아서 온 게 아니라 당신 때문에 온 건데, 이제 와서 나가는 것도 웃기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해보죠, 뭐."
"괜찮겠습니까?"
"까짓거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내가 과소평가했나 보다.
얜 진짜로 제정신이 아니다.
"아, 그러고 보니… 부탁할 게 좀 있습니다."
"뭔데요?"
"이걸 조사해주겠습니까?"
몇 발의 총알을 건넸다.
"듣자 하니 반능석을 가공한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
이아영 실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PB 코퍼레이션 출처에요?"
"정황상 그렇죠. 어찌 됐건 일단 확인은 필요합니다. 어떻게, 가능하시겠습니까?"
"뭐, 확인하는 거야 어렵진 않은데...."
그녀가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뱅크 아이템을 가공한 물건이라... 걸리면 바로 철창행이에요."
"그럼 안 걸리게 부탁드리죠."
"...말 참 쉽다."
그녀가 볼멘소리를 냈다.
뭐, 철창행이고 나발이고 어쨌든 맡길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이아영 실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총알을 고이 챙겼다.
"기, 김준우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그때, 본부 직원 중 한 명이 다급하게 지휘실로 들어왔다.
"뭡니까. 작전에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아, 아뇨! 본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부?"
직원은 아연실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최, 최호성 본부장님이... 습격당하셨습니다."
"...뭐?"
무척이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
최호성 본부장이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가히 충격적인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나와 이아영은 곧바로 서울 본부로 향했다.
우리가 본부에 도착했을 땐, 이미 출동한 경찰들과 수사관들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찰에게 다가가 물었다.
젊은 경찰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본부 관계자 되십니까?"
"지금은 아닙니다."
"그럼 자세한 사항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최소한 어떻게 된 건지라도 알려주시면...."
"죄송합니다. 현재 수사 중입니다."
젊은 경찰이 연신 단호한 표정으로 제지했다.
아, 이거 말이 안 통할 사람인데.
"야 인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대뜸 선배로 보이는 경찰이 화들짝 놀라며 끼어들었다.
언뜻 봐도 아버지뻘인 경찰은 어째선지 자세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녀석이라, 전 본부장님도 몰라뵙고...."
"저, 전 본부장님?!"
젊은 경찰의 눈이 뒤늦게 동그래졌다. 그리곤 얼른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수를...."
"아니, 죄송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떤 상황인지나 알려주시죠."
젊은 경찰이 겸연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유영수 보좌관이라는 분이 시신을 처음 목격하고 신고해주셨는데... 듣자 하니 어제 오후부터 연락을 안 받으셨답니다. 그래서 직접 사무실로 찾아갔더니 피를 흘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사인은요?"
"일단은 흉기에 의한 외상인데...."
젊은 경찰이 주변에 몰려든 기자와 시민의 눈치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팍 낮춰 말했다.
"총기 사건이라는 것 같습니다."
"총기?"
"예. 그것도 정확하게 심장에 한 발. 저항 흔적도 없고, 외상도 하나밖에 없어서 저희 쪽에선 주변 인물에게 습격을 당한 것 같다고...."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지만 나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거기까지만 듣고도 범인이 누군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최호성 본부장과 안면이 있고, 본부 안에서 작전 본부장을 대놓고 습격할 만한 미친놈.
게다가 총기를 사용해 단발에 심장을 노릴 수 있는 전문가.
'황동휘 대리....'
아니, 이젠 파트장이라고 해야 하나.
설마하니 이 정도로 미친놈이었을 줄이야.
'내빼기 전에 나한테 본보기를 보여주려는 건가.'
습격도, 협박도 모두 실패했으니 최호성이라도 죽여서 경고하려고?
아니, 내게 이미 들킨 마당에 굳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
최대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게 그로서도 좋았을 테니까.
그런데도 굳이 이런 눈에 띄는 일을 벌였다는 건....
'설마 최호성한테 꼬리가 잡힌 건가.'
그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빌어먹을 새끼들....
대범해지는 걸 넘어 도를 넘었네.
들킨 마당에 더는 눈치 볼 게 없다는 거겠지.
이를 으득 씹은 그때, 무전이 울렸다.
「선생님! 던전 소멸했어요!」
「강릉 지부 C-1 구역 잔존 몬스터 토벌 완료했습니다!」
「A-3 구역도 토벌 완료했습니다!」
「A-2, B-1… 전 구역 토벌 완료된 것 같습니다.」
「총 부상자 231명, 사망자는 제로입니다」
「작전 종료하겠습니다!」
작전 종료를 알리는 격양된 목소리.
아직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턱이 없는 이들은 순수한 기쁨에 환호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난 기쁨을 만끽할 수 없었다.
큰 피해 없이 작전을 마무리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론 피해가 발생했으니까.
"작전 본부장이 본부 안에서 습격을 받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퍽 씁쓸한 눈빛으로 본부 건물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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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PB 코퍼레이션 본사.
모든 팀이 이전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중 가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역시나 밸런스 조정팀.
굉장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마르크 팀장이 언성을 높였다.
"내부 데이터는 1kb도 남기지 마! 지출 내역서든 식단표든 싹 다 지워!"
"밸런스 명단은 어떻게 할까요?"
"당분간 밸런스 업무는 올 스탑이다. 어차피 남아 있어봤자 꼬리만 잡혀!"
"아, 알겠습니다."
지시에 따라 직원들이 모든 자료를 파기했다.
가장 중요한 자료인 헌터 밸런싱 명단을 파기하는 만큼 사안이 시급하고 중대했다.
그렇게 자료란 자료는 모조리 삭제하고 있던 와중에, 한 남자가 느긋한 표정으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아직도 안 끝났나? 꽤나 처리할 게 많은 모양이군."
토벌권 회수팀장, 케인이었다.
그를 보자 마르크 팀장이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도와줄 거 아니면 나가."
"적반하장이군. 자네 팀 덕분에 회사 전체가 난리가 났는데 어디서 성질인가."
"...."
반박할 수 없는 말에 마르크 팀장의 낯빛이 더욱 험악해졌다.
"대표님도 화가 단단히 나셨어. 그러게 처음부터 김준우인가 뭔가 무시하자고 했잖나. 느낌이 안 좋다고"
"자네가 언제 그런 말을...?"
"기억 안 나면 말고."
"...."
마르크 팀장은 기가 찼다.
앞으로 토벌권 회수 작업에 방해될 게 뻔하니 빨리 처리하라고 눈치를 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나마 이 정도면 다행이라 생각하게. 하마터면 자네 팀 전체가 물갈이될 뻔했어. 뭐, 본보기로 몇 명은 잘리겠지만."
"대표님은 뭐라고 하시나?"
"뭘 뭐라고 하겠나. 감사팀만 대기시켜 놓으셨지."
마르크 팀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PB 코퍼레이션의 감사팀.
내통자 색출 및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그들을 대기시켰다는 건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하니 한국 파트를 바로 해체할 줄은 몰랐네. 그놈들 교육한다고 꽤 공들이지 않았나?"
"어쩌겠어. 현장직 말로가 다 그런걸. 애초에 쓰다 버릴 놈들이야. 대체할 놈들도 얼마든지 있고."
"어이구. 무시무시해라."
케인 팀장이 과하게 호들갑을 떨며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그럼 파트장은 왜 살려뒀나? 미스터 황 말이야."
"최소한 김준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놈 한 명은 남겨둬야지."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건가?"
"그런 감정적인 게 아니야. 그냥 일일 뿐이니까."
물론 속내는 달랐다.
어떻게 미련을 갖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 새끼 덕분에 애지중지 키워놓은 부하들을 제 손으로 처리해야 하게 생겼는데.
하지만 애써 본심을 숨기며 물었다.
"어디로 이전할지는 정해졌나?"
"아직. 이곳저곳 알아보고는 있는데... 마땅한 곳이 없긴 해."
"이번에 아프리카 쪽 독립 협회들 통합해서 한꺼번에 인수 진행한다면서. 그쪽도 괜찮을 것 같은데."
"우리 팀 업무에 관심이 많네? 뭐, 그것도 나쁘진 않긴 하지. 어쨌든 최종 결정은 대표님이 하실 테니, 너무 앞서가지 말게."
케인 팀장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준비되는 대로 대표님한테 연락드려. 며칠 자리 비우실 거라 대면 보고는 힘들 테니까."
"자리를 비우신다니? 이 상황에 어디 출장이라도 가시는 건가?"
"나도 자세히는 몰라. 듣기론...."
케인 팀장이 뜸을 들이다가 미묘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한국에 개인적으로 볼일이 좀 있으시다고."
"한국?"
마르크 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런 상황에 한국에 가신다고?
대체 왜....
'설마 김준우를 직접 처리하시려는 건.'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뭐가 아쉬워서 직접 현장 일을 하겠는가.
'개인적인 일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길래.'
속으로 중얼거리는 마르크 팀장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째 느낌이 좋지 않다.
마치 본인의 턱 끝 바로 앞에 칼이 드리워진 느낌이었다.
***
점심시간이 막 지난 오후.
직원 대부분이 아직 복귀하지 않아 한적한 사무실에서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슬아슬했던 리젠 던전 작전이 무사히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큰 피해 없이 대규모 작전을 성공시켰음에도, 어째 뒷맛이 썩 좋지 못했다.
작전은 둘째치고, 행정본부 폭탄 테러에 작전 본부장 습격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협회를 비롯해 시민들과 언론 또한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 터졌다, 터졌다 하더니 진짜 터져버렸네?
> ㄹㅇ;; 그나마 사상자 없어서 다행이지 작전본부 터졌으면 우리나라 망했음;;;
└ 그래서 범인 잡혔음?
└ ㄴㄴ아직 못 잡음
└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협회를 테러할 생각을 하냐;;
> 것보다 차기 작전 본부장은 누가 하냐?
└ 아무도 안 하려고 할걸? 두 달 만에 습격당해 죽었는데 누가 하고 싶어 하겠냐
> ㅅㅂ 이래서 앞으로 토벌은 제대로 할 수 있겠냐
└ 내 말이; 그나마 김준우가 도와주고 있어서 버티고 있는 거지, 김준우마저 등 돌리면 ㄹㅇ망할 듯;;
└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정부 기관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 그러면 최소한 토벌은 계속할 수 있을 텐데
└ 안 그래도 미래민주당에서 토벌권 정부에서 관리하는 법안 추진 중이라 함ㅇㅇ
무슨 일이 있어도 늘 농담 따먹기나 하던 누리꾼들도 이번에는 심각성을 인지한 듯, 불안한 반응을 보였다.
당연하다.
협회는 지금, 사상 초유의 위기에 봉착했다. 단순히 농담으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몬스터로 인해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당신은 오늘 이겨도 진 겁니다.'
양민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물론 폭탄 테러와 본부장을 습격한 범인을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 중이었다.
벌써 몇 명이 용의 선상에 올라왔지만... 아마 범인이 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파트장인 황동휘 대리는 이미 모든 걸 던지고 튀었고. 무엇보다....
「협회에서 발생한 연이은 사건 사고로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가운데, 전국 각지의 헌터 사이에서 의문의 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부산의 함제원 기자 만나보시죠.」
「어제 새벽 3시경. 광안대교를 지나던 고 모 씨 앞에서 탱크로리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사고로 인해 피해자는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경찰은 폭발 경위 조사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헌터들의 갑작스러운 사고가 발생한 것도 이번이 서른 번째로....」
TV에서 기자의 격양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길드, 지부, 프리랜서.
소속을 가리지 않고 전국 각지의 헌터들이 의문의 사고를 당하거나 실종되기 시작했다.
언뜻 불행한 사고로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 수가 30명을 넘어서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간 숨어 있던 인원을 PB 코퍼레이션에서 물갈이 중이란 걸 말이다.
그거 말곤 설명할 수가 없다.
'협박한 게 먹히긴 했나 보네....'
그렇다고 설마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꼬리를 자를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움직여도 의미가 없다. 이미 실체가 사라져버렸으니까.
에휴.
답답한 심정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있었다.
어쨌든 PB 코퍼레이션이 최소한 한국에서는 손을 뗐다는 거다.
물론 이걸 그대로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아직 미지수겠지만.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박인범 전 협회장이 학을 떼며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행정본부가 테러를 당한 것도 모자라 작전 본부장이 습격을 당하고, 전국 각지에선 헌터들이 죽어 나가고 있으니...."
"그러게 말입니다."
"오죽하면 협회에서 잘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니까."
살다 살다 별일이 다 있다고 협회장은 중얼거렸다.
협회장에게 적용된 횡령 혐의는 결국 유죄판결이 떨어졌다.
다만 특정 인물과의 유착 관계나 사익을 추구한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 정상 참작되어, 결과적으로는 벌금형에 그쳤다.
"본부나 지부나 당분간은 제대로 굴러가긴 힘들 것 같구만."
"힘든 정도가 아니라 오늘내일하겠죠."
"그러니까 말이다. 상황이 이런데 이두식 고놈은 협회장 자리를 받아들이질 않나...."
"그랬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다지 좋은 자리가 아니잖습니까."
"누가 아니래나. 협회가 내려앉게 생겼으니 책임지고 독박 써줄 사람이 필요한 게 눈에 뻔히 보이는구만. 이사회가 선심 쓰는 척 떠넘기려고 한 것 같은데...."
"이사님이 그걸 모를 리 없겠죠."
"쯧, 그러니까. 알고도 나선 게야. 하여간 철없는 놈이라니까."
"뭐, 이사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믿는 거랑 잘하는 거랑은 또 다르지."
협회장은 연신 불안한 눈치였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협회가 위태로우면 정부든 기업이든, 온갖 것들이 이때다 싶어서 움직일 거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자칫하다간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까지 홀라당 뺏길 수도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협회장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뜻을 곧바로 알아채곤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보셔도 소용없습니다. 복귀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참 나."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득보다 실이 많을 자리에 다시 기어들어 갈 이유는 없다.
어쨌든, 녀석들이 한국에서 모두 철수한 이상 어느 정도 원했던 목적을 달성했다.
회귀 전과 다른 형태로 협회가 위태로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국제 협회가 간섭할 여지 자체가 사라졌으니 만족할만한 결과였다.
물론 그 과정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당장 이번 주 작전부터 문제겠구만. 인원 부족도 문제지만, 이를 지휘할 사람이 없으니 말이야. 혹시 토벌만이라도 도와줄 생각은 없나?"
협회장은 날 다시 협회에 앉힐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다.
참 포기를 모르는 양반이네.
"그렇지 않아도 이두식 이사님한테 연락 한 번 왔었습니다. 임시라도 좋으니 조금만 도와달라고."
"그럼...."
"죄송하지만, 제 코가 석 자인 걸 어떡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전 따로 해야 할 일도 있고요."
"해외 지부 사업 말인가?"
"예. PB 코퍼레이션이 한국에서 철수했고, 꼬리도 잡았으니 더는 미룰 이유가 없죠.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좀 있습니다."
"뭔가?"
"...자본이 없습니다."
"...."
뭘 그렇게 도끼눈으로 쳐다보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돈줄이었던 협회가 개차반인데 영향이 없을 리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어려워질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지원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회사 운영 문제였다.
본부가 어려워지면서 계약 대상인 지부들도 덩달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파견 계약을 해지, 또는 연장이 어려워졌다.
덕분에 매출은 전달 대비 마이너스 150%에 달했다.
사실 여기까진 어떻게 버틸 만했다.
진짜 어려워진 이유는 리젠 던전 사건 이후, 도심에 널린 몬스터 사체 처리를 우리 회사가 담당하게 된 것이다.
원래라면 당연히 계약금을 받아야 하겠지만... 협회가 내려앉은 마당에 지급할 돈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어려운 거 뻔히 아는데 소송을 걸기에도 좀 그렇고....'
폭락한 매출에, 최후의 보루였던 계약금까지 미지급.
상황이 이러하니 당장 이번 달 직원들 월급조차 밀릴 수준이었다.
"그간 운영이 좋았잖나. 모아둔 여유 자본은 없나."
"작은 회사에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버는 대로 인원이랑 장비에 썼죠. 장비 유지 및 수리비에 잔업 수당, 야근 수당, 특별 수당, 성과금, 파견 출장비, 유류비 등등 이것저것 떼주고 나면 남는 게 없습니다."
"...."
"무엇보다 협회 자금줄도 막혔으니… 상황이 좀 어렵습니다."
그제야 협회장도 상황이 심각한 걸 받아들이는 듯했다.
"기업 투자라도 받아보지 그러나. 자네 네임밸류면 뭐든 안 붙겠어?"
"요즘 세상에 누가 이름만 보고 투자를 한답니까. 심지어 딴 것도 아니고 청소팀 파견 회사인데. 뭐, 일단은 인건비라도 좀 아껴봐야죠."
"알고 있겠지? 처음부터 안 주는 것보다 줬다 뺏는 게 더 반발이 심하다는 거."
"제가 왕년엔 마른오징어에서도 물을 뽑아냈습니다. 아랫놈들 쥐어짜서 돈 뽑아내는 거엔 도가 튼 몸입니다."
욕은 좀 먹겠지만... 어쩔 수 없다.
회사가 어려우면 다 같이 고생하는 거지.
나만 해도 특별한 수당 없이 지금까지 일만 하고 있구만.
아무튼, 앞으로 단단히 각오들 해야 할 거다.
악독하고 무지막지했던 왕년의 '김준우'로 돌아갈 때가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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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거...."
이른 아침 사무실.
전 직원들 상대로 공문이 내려간 직후, 문소연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날 찾아왔다.
"앞으로 정말 이렇게 할 거예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저로서도 어쩔 수 없군요."
"아, 아무리 그래도...."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건가.
뭐, 직원들 사이에서 반발이 있으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했다.
회귀 전, 내가 작전 팀장으로 있었을 때도 이 건으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다.
헌터들도 들고 일어났는데 하물며 이들은 오죽할까.
하지만 사정 봐줄 생각은 없다.
저들이 아무리 반발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다짐하기도 잠시.
"야근을 금지하는 건 오히려 회사에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물론 저희야 좋긴 한데...."
"야근 수당을 아끼겠다는 건데 그게 왜 회사에 안 좋은 겁니까?"
뭔가 내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아, 아니... 그 야근 수당이라는 게 원래 잘 안 주는 건데...."
"그건 불법이잖습니까?"
"그, 그러니까 그게 불법이긴 한데, 보통은...."
문소연은 뭔가 설명하기 어렵고 답답한 건지 말을 얼버무렸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하네.
"하아, 사람이 좋은 건지 아니면 그냥 바보인 건지...."
한편 옆에서 듣고 있던 한유빈이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직원들 다들 난리인 건 알아요?"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말했잖습니까, 어쩔 수 없다고. 이대로 가다간 직원들 월급도 못 주게 됩니다. 힘들더라도 당분간은 강행할 생각입니다."
"그게 문제에요! 회사가 힘드니까 더 일을 해야지, 야근 금지에 철야 금지, 잔업까지 금지하면 일은 누가하고 돈은 누가 벌어요?!"
한유빈이 언성을 높였다.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러다가 망한다니까요?! 오죽하면 돈 안 받아도 좋으니까, 야근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겠어요?!"
"아니... 지금 이해가 안 가는데.... 왜 돈을 안 받고 일하겠다는 겁니까? 회사가 망하든 말든 직원들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누구 회사인지가 중요하죠."
"...?"
누구 회사인지가 왜 중요해. 회사는 회사지.
일한 만큼 돈을 받는 데가 회사잖아.
설령 회사가 망한다고 해도 나야 투자한 게 있으니 손해가 있겠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일이 줄어든 만큼 수당이 적다고 불평할 줄 알았더니... 일개 사원들 주제에 뭔 회사 걱정을 하고 있어.
"하아... 됐어요. 결정된 사항이라는데 우리 마음대로 우길 수도 없고. 일단 알았어요."
더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한유빈이 멋대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제가 한소리 들을 거라 그랬죠?"
가만히 듣고 있던 이아영 실장이 그제야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돈을 더 달라고 할 줄 알았지, 돈을 안 받겠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작전 팀장일 땐 야근 금지 때리자마자 헌터들이 개 난리를 쳤단 말이지.
이런 식으로 불만을 표출하니, 솔직히 어느 장단에 춤추라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헌터와 똑같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죠? 그쪽은 야근 수당이 억 단위잖아요."
"단위가 다른 거지, 결국 돈 더 받는 건 똑같지 않습니까?"
"저들에게는 그거 몇 푼 받는 거보다 회사가 더 중요한 거예요. 왜,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게 이해가 안 간다는 겁니다.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해서 진짜 그러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드라마도 아니고."
"그러게요.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있긴 하더라고요."
"...."
"기본 연봉부터 협회랑 비교도 안 되잖아요. 거기다가 수당은 다 챙겨주지, 교통비랑 식비도 나오고, 필요한 장비 있으면 바로 지원해주고요. 그리고 혹시나 불미스러운 일 생기면 당신이 어떻게든 해결해주잖아요."
"...."
"나 같아도 뼈를 묻겠는데요?"
이아영 실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래도 아주 문제가 없는 건 아니죠. 리더로선 완벽해도 사업가로선 영 아니니까."
칭찬할 거면 칭찬만 할 것이지.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일단 아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줄였지만..., 유빈 씨 말 대로 경영이 힘들어질 거예요. 비는 시간만큼 매출이 떨어질 테니까요. 결국,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금을 확보해야 해요."
"흐음...."
"물론 당신 성격에 누구 도움받는 거 싫어할 건 아는데… 지금은 고집부릴 때가 아니에요. 필요하면 도움도 받을 줄 알고 그래야죠."
애초에 고집부릴 생각 따윈 없다.
돈 앞에 자존심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저 내가 당장 비용을 최대한 줄일 방법을 내놓은 것뿐이다.
'그래서 더 반발할 줄 알았는데....'
하여간 제정신인 놈들이 없다.
아무튼, 어찌어찌 한동안 버티는 건 가능하지만 이대론 위험하다.
협회장이 말했던 것처럼 기업 투자라도 따내야 할 실정인데... 가장 돈에 환장한 놈들이 뭘 보고 우리에게 투자하겠는가.
'쯧, 어디서 돈뭉치 좀 안 떨어지나.'
역시 돈 버는 건 어려운 문제군.
똑똑―
자금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는 가운데 한 남자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미래민주당 소속 정훈 의원님 보좌관 배현수라고 합니다. 혹시 김준우 대표님 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다른 게 아니라, 의원님께서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
국회의원이 날 만나고 싶어 한다고?
갑자기 왜?
***
서울 종로에 위용을 뽐내듯 건물 하나가 높이 세워져 있다.
한때 부도 위기까지 갔지만, 최초 던전의 출현에 맞춰 부산물과 아이템 무역을 통해 국내 최고 주가 기업으로 급부상한 곳이다.
한별 종합 상사.
"테러 및 습격 사건 이후 협회 내외적으로 꽤나 심각한 상황이라는 듯합니다. 그에 맞춰 미래민주당에서 던전 민영화 법안을 준비하는 모양입니다."
영업 본부장실.
오재엽 실장이 준비해온 서류를 한 남자에게 전달하며 설명했다.
던전 민영화 법안의 자세한 내용이 담긴 서류였다.
"흐음...."
서류를 건네받은 남자가 턱을 집었다.
한별 종합 상사, 하성태 영업 본부장.
무척이나 젊은 나이지만, 그가 한별 그룹 하덕수 회장의 장손이자 한별 종합 상사 하동배 사장의 장남이라는 걸 생각하면 나이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최근 하동배 사장이 지병으로 쓰러져 의식 불명인 상태였기에, 한별 상사의 실질적인 총수나 다름이 없었다.
하성태 본부장이 서류를 훑어보고 있던 그때, 오재엽 실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물론 아직 찬반 여론이 갈리고 있는 법안입니다. 기업 입장에서야 당연히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아무래도 협회와 시민들이...."
"그렇겠죠. 여태까지 협회 고유 권한이었던 토벌권, 던전 소유권이 민간 기업에 풀린다는 거니까."
원래 처음부터 안 주는 것보다 줬다 뺏는 게 더 반발이 심한 법이니까.
무엇보다 토벌권은 협회의 근본이자 영향력의 원천이지 않은가. 그걸 빼앗겠다고 하니 반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성태 본부장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 어쨌든 확실하게 통과가 될 건가가 관건이겠군요. 협회야 어찌 됐건 우리에겐 놓칠 수 없는 기회니까요."
"속단하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전문가들 의견으로는 통과될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발맞춰 움직여야겠군요."
하성태 본부장이 품격 있는 미소로 답했다.
던전이 민영화된다면 기업들은 물론 민간 길드와 일반 시민들까지 모두가 던전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럼 작전 수행이 가능한 인원만 있다면 기업들 또한 토벌이 가능하다.
그 말인즉슨, 이젠 토벌 또한 하나의 사업이 된다는 뜻이었다.
'민간 토벌 사업이라....'
그의 촉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돈이 된다고.
그것도 어마어마한 돈이.
"뭐, 헌터들이야 프리랜서랑 길드 쪽에서 데려오면 되겠고...."
하성태 본부장의 머릿속엔 벌써부터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어 오재엽 실장도 합세했다.
"지원, 통제팀은 해외에서 스카우트해오면 될 것 같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그런데... 청소팀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아… 그렇군요. 그런 것도 있었죠."
청소팀이라....
"사실 그게 제일 애매합니다. 스카우트하기엔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입지가 너무 두텁고, 그렇다고 자체적으로 팀을 만들기엔...."
"예산이 문제겠죠. 그래봤자 청소부인데."
오재엽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성태 본부장이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아예 만들어진 회사를 우리 쪽으로 끌어오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말입니까…?"
"그거 말고 청소팀 업체가 또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거기 대표가 김준우 전 본부장입니다. 인수에 동의할 것 같진 않은데...."
"흐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쭙잖은 수로는 그를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그를 구슬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던 그때, 하성태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곤 오재엽 실장을 향해 눈짓했다.
그 뜻을 단번에 알아 차라니 오재엽 실장은 곧바로 자리를 피해주었고, 하성태는 그제야 전화를 받았다.
「날세. 어떻게, 기사는 확인했나?」
전화를 건 인물은 미래민주당 정훈 의원이었다.
"예, 의원님. 방금 확인했습니다."
「뭐, 지금 분위기가 좋아. 이번에는 진짜 통과될 거 같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성태 본부장이 목소리를 죽이며 말을 이었다.
"값은 어떻게 드리면 될까요. 요즘은 부동산보단 주식을 추천해 드리긴 합니다만...."
「하하하! 역시 회장님 손자라 그런지 시원시원하구먼!」
정훈 의원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해당 법안은 이미 오래전에 발의됐지만, 몇 번의 고배 끝에 미래민주당 내에서도 폐기 직전까지 간 법안이었다.
하지만 하성태의 입장에서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회였다.
그래서 먼저 정훈 의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영화 법안을 끝까지 밀어주는 조건으로, 지원금과 거액의 선물을 약속한 것이다.
정훈 의원은 이미 부친인 하동배 사장과 오래전부터 연을 이어온 사이였기에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정훈 의원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그 얘긴 접어두고…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혹시 김준우 대표라고 아나?」
"예 뭐,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 사람이 무슨 문제라도?"
「아무래도 그 인간이 복병이야. 누가 뭐래도 협회의 전성기를 이끈 놈이잖나. 분명히 법안에 반대할 텐데.... 솔직히 다른 놈들이야 무시해도 그만이지만 그놈은 아니야.」
"다른 협회 인사들과는 영향력의 차원이 다르긴 하죠. 시민들의 신뢰도 어마어마하고요."
「그런 놈이 협회 측에 서서 반대하고 나서면 우리가 불리해져. 그래서 어떻게든 그놈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없더군.」
하태식 본부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끝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잘됐군요. 마침 저희도 그 사람 회사에 관심이 가던 중이었는데."
「음…?」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정말인가?」
"네, 뭐… 일단 한번 만나서 얘기하시죠. 물론 김준우 대표도 같이."
하성태 본부장은 그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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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고급스러운 한식당, 프라이빗 룸.
음식이 나오기도 전부터 나와 이아영 실장은 그곳에 앉아 얌전히 대기 중이었다.
이아영 실장이 살짝 주위를 둘러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제가 정치는 잘 모르는데... 정훈 의원이면 꽤 거물 아니에요? 차기 유력 대선 후보라던데."
"듣자 하니 그런 모양이더군요."
"그런 사람이 왜 보자고 한 걸까요?"
"뭐, 그거야 뻔하지 않습니까."
정부가 협회에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 관심은 두 가지로 나뉜다.
편승, 혹은 견제.
독립 기구라고는 해도 국가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건 항상 적과 아군이 양립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협회는 언제나 숟가락을 얹으려는 자와 협회를 견제하려는 자가 늘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중 협회를 견제하려는 대표 주자가 바로 미래민주당, 정훈 의원이다.
"여당인 미래민주당이 호시탐탐 협회를 정부 산하 기구로 흡수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이아영 실장의 눈이 허공을 향한다.
"협회가 내외적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으니 이 기회에 어떻게든 협회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거겠죠. 뭐 최근에 무슨 법안도 준비하고 있다지 않습니까."
"그럼 저희랑은 대립 구도 아니에요? 더더욱 저희를 만나자고 할 이유가 없잖아요...."
"원래 적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만큼 든든한 게 없잖습니까. 이럴수록 지원군으로 두고 싶은 거겠죠."
추측을 쏟아내고 있자니, 곧 양복 차림의 두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와 이아영 실장은 벌떡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다.
"아이고, 처음 뵙겠습니다."
중후한 분위기의 남성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음에도 단번에 그가 정훈 의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 김준우라고 합니다."
짤막한 인사와 함께 정훈 의원과 동행한 젊은 남자를 흘낏 보았다.
남자는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한별 종합 상사 영업 본부장 하성태입니다."
"...아 예, 처음 뵙겠습니다."
한별 상사?
기업인이 이 자리에는 왜?
그런 의문이 떠오르기도 잠시, 정훈 의원이 먼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을 텐데 이렇게 자리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이런 좋은 곳에 언제 또 와보겠습니까."
"하하하. 마음껏 드시지요. 여기 장어죽이 아주 괜찮습니다."
꽤나 영양가 없는 대화만이 오고 갔다.
답답하군.
정치인들이 원체 속내를 안 비치는 놈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결국, 참다못해 내가 먼저 물었다.
"그나저나 저를 만나자고 하신 건...."
"음."
정훈 의원은 역시나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협회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그래서 우리 당에선 현재 상황으로는 협회 홀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토벌권 민간 관리 법안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단 어떤 법안인지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아뇨. 설명은 괜찮습니다. 대략 알고 있습니다."
토벌권 민간 관리.
통칭 던전 민영화.
회귀 전에도 몇 번 언급되었던 법안이다. 물론 끝내 통과되진 못했지만.
국내에 출현하는 모든 던전의 토벌권을 기본적으로 정부가 관리하며, 일정 금액을 받고 토벌권을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
이 법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토벌권을 매입할 수 있는 건 협회나 길드 같은 작전 세력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자체와 기업, 심지어는 일반 시민들까지 돈만 있다면 정부로부터 토벌권을 매입할 수 있게 된다.
여태까지 협회만이 가지고 있던 권한을 민간인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니 자연스레 협회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협회를 견제하고 있는 미래민주당에선 어떻게든 통과시키고 싶을 법안이겠지만....
그걸 나한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뭘까.
"대표님은 누가 뭐래도 협회의 아이콘 같은 분 아닙니까. 저희 편에 서주신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해가 잘 안 가는군요. 이래 봬도 협회 출신에 작전 본부장까지 했던 놈입니다. 당연히 협회 편일 수밖에 없는 저에게 협회를 무너뜨리는 법안을 추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건...."
"이전엔 본부장이셨을지 몰라도 지금은 엄연한 사업가시죠."
그때, 줄곧 잠자코 있던 하성태 영업 본부장이 대신 대답했다.
"...뭐, 그렇긴 합니다만."
"게다가 이번 리젠 던전 때문에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많이 알고 계시는군요."
"그 부분을 저희가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의도를 살피려고 눈을 가늘게 뜨자, 하성태 본부장은 기다렸다는 듯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법인 설립부터 투자자 모집, 또한 내부 경영도 저희 쪽에서 지원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하하하...."
나는 멋쩍게 웃으며 서류를 훑어보았다.
그러던 중, 이아영 실장이 먼저 의사를 내비쳤다.
"이걸 받는 대신 당신들 편에 서라는 건가요? 죄송하지만 대표님은 그런 거에 협회를 배신하실 분이...."
"좋습니다."
"...?"
"말씀해주신 제안은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말씀만 해주십시오."
이아영 실장이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이걸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하늘은 간절한 자의 편이라고 했던가.
정말로 돈뭉치가 뚝 하고 떨어질 줄이야.
***
김준우가 돌아가고 난 직후.
정훈 의원은 후식으로 나온 차를 홀짝이며 입을 열었다.
"저렇게 순순히 받아들이니 오히려 당황스럽군."
"사업하는 놈들이 다 그렇죠. 특히나 저런 스타트업 대표는 더더욱 그렇고요."
하성태 본부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이야기가 잘 돼서 다행이야. 이걸로 한시름 덜 수 있겠어."
"하하, 서로서로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의원님께선 김준우를 얻고, 저는 김준우의 회사를 갖고. 그리고… 김준우는 회사를 살리고."
"하하하! 역시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비상하구먼!"
"과찬이십니다."
정훈 의원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몇 번이고 해당 법안의 발의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번번이 기각.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청소부'를 찾았다.
국내 랭킹 1위의 프리랜서 헌터.
동시에 돈만 주면 뭐든 한다는 양민호를 말이다.
정훈 의원은 그에게 협회의 신뢰를 떨어뜨려달라는 의뢰를 던졌고, 결과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쯤 되니 더는 밀어붙일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하늘이 도운 것인지 기회가 찾아왔다.
협회 테러, 작전 본부장 습격, 의문의 사고들까지.
여론은 이미 협회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해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민영화를 반대할 놈은 없다.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면 김준우.
협회는 안 믿어도 김준우는 믿는 놈들이 너무 많다.
만약에 그가 복귀하거나, 혹여 야당에 붙어버린다면 당연히 이쪽 입장은 불리해진다.
물론 그가 정말로 현재 협회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해결하든 못하든, 시민들이 그를 신뢰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협회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에게 협회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법안에 찬성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백기사의 등장으로 모든 상황이 역전되었다.
'젊은 놈이 영악하기 그지없군.'
정훈 의원은 하성태 본부장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김준우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실행뿐이었다.
"김준우 대표를 끌어들이긴 했어도 야당 쪽에선 여전히 거세게 반대할 겁니다. 어떻게든 협회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사람들이니."
"이미 칼이 우리한테 넘어왔는데 그놈들이 뭘 어쩌겠나. 그 부분은 걱정 말게."
정훈 의원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무튼… 이제부턴 내 역할이겠구먼."
"그래서, 김준우에겐 뭐부터 부탁하실 겁니까?"
"크게 벌일 것도 없어. 그놈은 한마디만 해줘도 제값은 할 걸세."
영향력이 큰 인물에게 부탁할 건 뻔했다.
"일단 기자 몇 명 불러서 인터뷰부터 진행하지."
정훈 의원은 차를 목구멍에 털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정훈 의원과 헤어지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차 안.
"그렇게 덜컥 수락하실 줄은 몰랐어요."
운전대를 잡은 이아영 실장이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쪽도 외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건이 말도 안 되잖아요. 우리 살겠다고 협회를 버리겠다고요?"
"그럼 협회 살리자고 우리가 죽을까요?"
"그건 아니지만...."
그녀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사실 다른 것보다… 하필 한별 상사인 게 제일 불안해요. 거기 이래저래 악명 높잖아요.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 누가 알아요."
"뭐, 아닌 게 아니라 분명히 있을 겁니다."
"...네?"
"다른 꿍꿍이 말입니다."
하성태 본부장이 꽤나 파격적인 조건을 내밀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다.
물론 나를 끌어들인다면 정훈 의원에겐 분명한 이득이겠지만, 돈을 대주는 한별 상사 입장에선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법안 발의를 위해 정훈 의원을 푸쉬해 주는 거라고 하기엔 내민 조건이 너무 과하다.
과연 그러한 조건을 내걸 만큼, 그들이 이득 볼 수 있는 게 있을까.
'뭐, 대충 추측은 되는데....'
던전이 민영화되면 당연히 기업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너도나도 나서서 토벌 사업을 벌이겠지.
그렇기에 지금부터 작전 인원을 모집할 필요가 있다.
작전, 지원, 통제는 스카우트하든 뭘 하든 제값을 할 테니 그렇다 쳐도... 문제는 청소팀이다.
스카우트하자니 아직까지 입지가 없고, 자체 신설을 하자니 아까운 팀.
그렇다면 차라리 만들어진 회사를 통째로 흡수하는 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겠지.
우리한테 내민 조건도 그걸 위한 포석일 확률이 높고....
게다가 전문가까지 파견해서 경영을 직접 도와주겠다고 하는 거로 봐선 확실하다고 봐야겠지.
"그걸 알면서도 수락한 거예요?!"
이아영 실장이 격양된 목소리로 다그쳤다.
뭘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뭔지 모르는 건가.
"어찌 됐건 돈이 필요한 건 맞지 않습니까. 법인 설립에 투자자까지 모아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죠."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업 체질은 아니라고 당신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저희한테도 훨씬 나을 겁니다."
"...그래도 뭔가 불안하네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허튼짓은 못 하게 할 거니까."
이아영 실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나에게도 안전장치 정도는 있다.
당연하겠지만, 두 눈 시퍼렇게 뜬 채로 회사를 뺏길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뭐가 어찌 됐건 우리 숨통부터 트는 게 우선이다.
"협회는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민영화가 되면 그쪽은 정말 텅 빈 껍데기가 될 텐데요."
"그건 어디까지나 국내에서 이야기죠. 어차피 저희 목표는 해외 곳곳에 지부를 두는 거잖습니까."
"...해외 인수 사업을 시작하면 국내 사정이야 상관없다는 거예요?"
"맞습니다. 국내 토벌권 정도야 얼마든지 넘겨줄 수 있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그렇긴 하네요."
그제야 수긍이 된 건지 이아영 실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고작 인터뷰 한 번으로 값이 되는지 모르겠군요. 말 몇 마디에 수십 억대 지원을 거의 거저 받는 수준인데."
"에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하는 말이잖아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당신이 하는 한마디가 협회 전체보다 영향력이 더 커요."
"...대체 언제 그렇게 됐답니까?"
"몰라서 묻는 거예요, 아니면 겸손 떠는 거예요? 모르긴 몰라도 그 기사 나오면 아마 전 국민이 찬성할걸요?"
언제부터 우리나라 국민이 이렇게 말 잘 듣는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다.
뭐, 어쨌든 나야 말 한마디 하고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 개이득이지만.
"아무튼, 한별 상사에서 내일부터 사람을 보낸다니까 미리 준비해둬요. 청소도 좀 해놓고."
"그러죠."
이아영 실장은 이내 깜깜한 도로를 막힘 없이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