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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사무실.

약속대로 한별 상사에서 경영을 도와줄 사람이 파견되었다.

"한별 상사 기획조정실장 오재엽이라고 합니다.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준우 대표입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희끄무레한 머리의 오재엽 실장은 꽤나 온화한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여긴 우리 직원들입니다. 이쪽은 행정팀 그리고 이쪽은 파견팀... 아, 지금 3팀과 1팀은 파견 중이라 나중에 따로 소개하겠습니다."

"아, 넵.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재엽 실장은 직원들을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경계하던 직원들도 그 모습에 마음이 열렸는지 모두가 그를 환영해주었다.

한편 이아영 실장이 나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이거 저만 이해 안 가요? 무슨 기조실 실장이 경영 지원을 나와요?"

"그럼 설마 진짜 전문가를 보내겠습니까. 그냥 적당히 본인들 말대로 움직여줄 사람으로 앉혀두려는 거겠죠."

"...그런 사람한테 맡겨도 되는 거예요?"

"저희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입니까."

그렇게 소곤거리고 있자니, 한상혁이 손뼉을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이제야 좀 살아나겠네! 나 솔직히 여기 망하는 줄 알고 본부에 이력서 넣으려고 했다니까?"

그로선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의미였지만… 오재엽 실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재엽 실장은 그에게 다가가 명찰을 살폈다.

"한상혁 씨…?"

"넵!"

"아무리 대표님과 친분이 있다지만 공적인 자리에선 말씀을 높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아… 네 알겠습니다."

흠칫하는 한상혁.

그 모습에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조차 포기한 한상혁을 한 번에 휘어잡다니....

역시 기업 출신은 다르다 이건가?

생각보다 꽤 마음에 드는데…?

"한상혁 씨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모든 분도 신경 써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회사가 성장하기 위해선 각자 맡은 바 책무를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청소팀은 청소를, 관리자는 관리를 해야겠죠. 그 사이에는 어떤 사적인 관계도 개입돼선 안 됩니다."

"네, 네...."

"조직의 힘은 위계에서 나오고, 위계가 무너지면 조직은 힘을 잃습니다. 수평적 구조, 평등 조직, 다 말은 좋지만… 그건 결국 회사를 무너뜨리는 지름길입니다."

"...."

"그러니 앞으로 모든 직원분들은 김준우 대표님께 건의할 사항이나 보고드릴 게 있다면 저를 통해서 해주십시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음성.

그 카리스마에 압도된 것인지, 사무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모두가 아무 말 못 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아, 한 가지 더."

오재엽 실장이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오늘부터 제때 퇴근하기는 힘드실 것 같습니다. 모두 참고해주십시오."

"...."

"...."

그 모습에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사업은 저렇게 하는 거라는 것을.

***

[위기의 협회, 이대로 괜찮은가?]

['이럴 때야말로 정부가 나서야 할 때', 미래민주당 정훈 의원 '토벌권 민간 관리' 법안 발의.]

[통칭 '던전 민영화' 그 핵심은? '협회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

[金 전 작전 본부장 曰 '던전 민영화는 협회와 시민들 모두에게 있어 꼭 필요한 법안' 단독 인터뷰.]

[여태까지 전국 모든 토벌권은 이능차원협회에서 독단적으로 관리해왔다. 물론 체계적인 토벌 시스템과 국내 최정상급 인력을 통해 문제없이 작전을 진행해왔지만, 큰 위기가 닥친 지금에서도 그것을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해선 전 작전 본부장이었던 나로서도 부정적이다.]

[만약 '토벌권 민간 관리' 법안이 발의된다면 현재 협회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길드 및 프리랜서 헌터들 또한 보다 적극적인 활동이 가능해질 것이다.]

[토벌권을 매입할 수 있는 요건은 기업 및 개인 또한 가능하게 하여 경제 순환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행정본부 건물이 터져나간 후, 임시로 작전본부로 이전한 기획 본부장실.

"...이게 뭡니까?"

이두식 이사를 독대한 편창현 팀장이 물었다.

"뭐긴! 이때다 싶어서 미래민주당에서 협회 죽이기 들어간 거지!"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편 팀장이 당황스러운 건 정부의 입장이나 법안의 내용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김준우가 저런 발언을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왜 김준우 대표가 이 법안에 이런 인터뷰를 한 겁니까? 그분이 이런 법안에 절대 찬성할 리가 없는데...."

편 팀장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협회는 그야말로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건, 누구보다 김준우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대체 왜?

"설마 미래민주당에서 로비라도 들어온 건...."

"자넨 김준우 그놈이 그런 거에 먹힐 놈이라 생각하나?"

"...절대 아니죠."

"어찌 됐든 지금 협회가 오늘내일하는 건 사실이야. 솔직히 우리끼리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

편 팀장은 말을 아꼈다.

무언의 동의였다.

협회 내외적으로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

이두식 이사는 조금이나마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전국에 흩어졌던 주요 인사들을 다시금 불러 모았다.

그렇게 통제팀의 편창현 팀장, 작전팀의 김민주를 필두로, 한때 '드림팀'이라고 불렸던 이들이 다시 본부로 복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현 사태를 해결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행정본부의 부재가 너무나도 컸다.

예산 편성이 어려워지니 무기 공급부터 시작해서 헌터 케어, 장비 지원 등 작전에 필요한 요소들이 줄줄이 멈추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영향은 고스란히 작전팀에 집약되었다.

현재 협회는 작전 수행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놈은 진심으로 이게 협회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한 거야. 자존심 챙기고 망하는 것보다 힘을 뺏겨도 살아남으라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희랑 한마디 상의도 없이...."

"상의했으면 우리가 찬성했겠나?"

이두식 이사가 쏘아붙이자 편 팀장이 입을 꾹 닫았다.

"딱 봐도 기를 쓰고 반대할 게 뻔하니까 독단으로라도 진행한 거 아니겠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건 우리한테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누가 아니래나. 나도 같은 생각이네."

협회가 힘드니까 이때다 싶어 별의별 놈들이 다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두식 이사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네도 알겠지만, 이 법안이 발의되면 우린 더는 힘을 못 쓰게 돼. 아랫놈들은 어떻게든 던전 하나 더 따내려고 토벌이 아니라 영업을 뛸 거고. 시벌… 이참에 작전팀이 아니라 아예 영업팀으로 이름을 바꿔야 하나."

"그럼 이제 우린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김준우 고놈이 붙어버리니까 기를 쓰고 반대하던 야당들도 이젠 안 되겠다 싶은지, 슬슬 눈치 보고 있는데."

다시금 울려 퍼지는 깊은 한숨 소리.

"어쩔 수 없지. 배알은 꼴려도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우리야 따르는 수밖에."

"...."

"아무튼, 직원들한테도 잘 말해줘. 앞으론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편 팀장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로서도 마땅한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이두식 이사는 편 팀장이 나서자 핸드폰을 들었다.

「예, 이사님」

이윽고 김준우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여긴 어떻게든 됐다."

「설득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그거 알았으면 너 그 해외 지부 사업인가 뭔가 무조건 성공시켜. 이거 잘못되면 우리 진짜 싹 다 쪽박 찬다."

「물론입니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바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김준우에게서 연락이 온 건 어젯밤의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협회장 선출 건 때문에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김준우가 거기에 기름을 붓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국제 협회가 산하에 비밀 조직을 두고 본인들에게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암살하고 있다는 이야기.

PB 코퍼레이션에 대한 정보.

최호성 본부장 습격과 행정본부 테러의 진실.

황동휘 대리의 정체.

처음엔 이 새끼가 야밤에 술 처먹고 헛소리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이두식 이사는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헛소리라고 하기엔 여태껏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전부 설명되었다.

-그래서 전 기존 국제 협회를 무너뜨리고, 한국 협회를 제2의 국제 협회로 만들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말을 들었을 땐 차마 놀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또한, 김준우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설명했다.

바로 해외 지부 사업에 관한 이야기였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이를 위한 비밀 산하 조직이었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이미 새하얗게 질린 머릿속에서 나온 말은, 왜 이제 와서 나에게 털어놓냐는 물음뿐이었다.

그에 대해 김준우는.

-이제 곧 있으면 협회장 자리에 앉으실 거 아닙니까. 최소한 그 자리에 계신 분은 알아야 할 이야기입니다.

쿨하게 답했다.

이 상황에 협회장 자리가 당연히 득보단 실이 많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의 극비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는 걸 알았으면, 아마 후보에 출마하지 않았을 것이다.

'쯧, 어쩐지 한창 잘나가고 있던 와중에 뜬금없이 퇴사하더라니.... 협회장님이랑 했던 비밀 이야기가 이거였구만.'

그래, 이 정도 스케일이면 비밀로 할 만하지.

오죽하면 지금도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 거라 후회하는 중이겠는가.

'에휴, 모르겠다. 그놈이 헛소리할 놈도 아니고. 어떻게든 해주겠지.'

이두식 이사는 고개를 털며 걱정을 접기로 했다.

***

"역시 전문가는 다르군요."

재무제표를 확인하던 나는 정말 오랜만에 화색을 띤 목소리로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오재엽 실장이 오자마자 일주일 만에 매출이 무려 30% 가까이 상승한 것이다.

아직 정산하지 않은 계약까지 모두 합하면 50%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하,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습니다."

"직원들 숨통은 막히는 거 같던데요."

그때, 이아영 실장이 굉장히 날이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아침부터 왜 저리 저기압인가.

"왜 또 심술입니까. 상황도 꽤 좋아졌고, 특별한 문제 없이 잘 되고 있지 않습니까."

"잘 되고 있죠. 수치만 보면요."

그럼 다른 부분은 잘 안 되고 있다는 건가?

"일주일 동안 직원들 평균 퇴근 시간이 새벽 4시에요. 한 팀이 하루에 작업하는 던전은 7개가 넘고요. 예전 본부 청소팀도 이렇게까진 안 했어요."

"...."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그런데 뭐… 딱히 다들 아무 말 없잖습니까. 괜찮겠죠."

"참고 있는 거예요. 당신 회사라서."

"에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 씨 남매가 그럴 성격은 아니잖습니까. 불만이 있으면 그 녀석들이 이야기해줄 겁니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네요...."

이아영 실장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오재엽 실장은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거예요?"

"글쎄요. 그래도 최소한 한 달은 데리고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한 달이라...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직원들 말입니까?"

"아뇨. 회사가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기에 대답을 아꼈다.

하지만 이아영 실장은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재엽 실장이 거의 모든 업무에 개입하고 있어요. 솔직히 이젠 누가 대표인지 모를 정도로요. 무엇보다 여기저기서 투자자들 끌어오는 것도 심상치 않고요."

"...."

"그 투자자들이 죄다 한별 그룹 계열사들인 건 알고 있죠? 이거 자칫하다가 당신 해임당하고 회사 통째로 넘어갈 수도 있어요."

진심으로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어째 회사가 수익 악화로 망하기 직전일 때보다 심각하다.

"뭐, 너무 걱정 마시죠."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한별 그룹 지분이 과반이라도 넘으면...."

"이아영 씨."

그녀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설마 눈 뜨고 당할 놈으로 보이십니까?"

"...."

이아영 실장은 그제야 입을 꾹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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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어느 일식집.

하성태 본부장은 정훈 의원의 호출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오늘이 의원 총회 날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법안 통과 여부도 이미 결정이 났겠지.

하성태 본부장에겐 당연히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사업이고 나발이고, 결국 통과되지 못하면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었다.

"야당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는 통에 발의는 보류됐네."

정훈 의원의 첫 마디는 충격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이번에도 기각된 겁니까?!"

하성태 본부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정훈 의원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또 아닐세. 한 달간 시범 운영하기로 했으니."

"시범 운영이요?"

"그래. 뭐, 운영 중에 큰 사고만 없으면 통과될 걸세. 결과적으론 발의된 거랑 다를 바 없지."

"...그렇군요."

하성태 본부장은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물론 정훈 의원의 말에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지금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래서, 준비는 잘돼 가나? 듣자 하니 이참에 한별 상사에서 나와서 아예 새 계열사를 만들 거라면서? 이름이...."

"한별 던전입니다."

하성태 본부장이 즉답했다.

"구색은 갖췄습니다. 작전팀도 프리랜서랑 길드 쪽에서 괜찮은 놈들로 세 팀 정도 꾸려놨고요."

"세 개 팀으로 되겠나. 노다지가 될 사업인데."

"뭐, 앞으로 차차 늘려갈 예정입니다."

"그렇구만. 그나저나, 자네는 가만히 있어도 한별 상사를 먹을 수 있을 텐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사업을 시작한 이유가 있나?"

정훈 의원은 언젠가 생각했었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가 보기엔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한별 상사는 아버지가 키운 회사잖습니까. 젊은 놈이 벌써부터 얻어먹을 생각만 해선 안 되겠죠."

"하하하! 맞는 말이네. 무릇 사내가 돼서 본인 손으로 업적 하나는 일궈야지. 좋은 생각일세."

정훈 의원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하성태 본부장은 말을 아꼈다.

사실 미래가 보장된 한별 상사에서 나와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 것은, 꼭 도전정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단 그의 할아버지, 하덕수 회장에게 인정을 받기 위함이 더 컸다.

총수의 인정을 받고, 한별 그룹의 꼭대기에 서기 위해서.

동생들이 작지만 본인의 독자적인 사업을 키워나가고 있는 마당에, 언제까지 아버지 밑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 기회에 자신만의 사업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뭐, 굳이 여기서 꺼낼 필요는 없겠지.'

그때 사케를 홀짝이던 정훈 의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민영화가 시행되면 기업이고 지자체고 죄다 던전 사업에 뛰어들 걸세. GT그룹이랑 오각그룹도 낌새를 눈치챈 건지 부랴부랴 사업에 착수하는 모양이더군."

"지금부터 준비한다고 해서 저희를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겁니다."

"알지, 아는데.... 내가 볼 땐 이 던전 사업의 경쟁력은 작전팀이 아니고 청소팀에 있다고 보네. 작전팀이야 널리고 널린 게 헌터들이니 쉽게 꾸릴 수 있겠지만...."

"네. 청소팀은 아니죠."

작전에 꼭 필요하지만, 누구도 쉽게 하려고 하지 않는 일.

던전 민영화가 시행되면 품귀현상이 일어날 게 불 보듯 뻔했다.

모르긴 몰라도 거의 유일에 가까운 청소부 파견 업체인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손에 넣는 기업이 주도권을 잡게 될 것이다.

'그런데 뭐, 이미 우리 쪽으로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으니....'

원하는 패가 전부 모였다.

이건 질 수 없는 판이다.

하성태 본부장은 애써 미소를 숨겨야 했다.

"아무튼, 잘해 보라는 소리일세. 카르마 코퍼레이션만 잘 잡으면 국내 최고 민간 던전 업체가 될 테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하태식 본부장은 겉으론 감사를 표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알아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정치인이면 정치나 할 것이지, 어디서 주제넘게 사업을 조언하는가. 그것도 사업가한테.

"그래서... 시행일은 언제입니까?"

"다음 주 월요일부터."

드디어 시작이군.

하성태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따로 마련된 오재엽 실장의 개인 사무실.

한참 업무를 보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어떻게, 일은 좀 할 만한가?」

볼 것도 없이 하성태 영업 본부장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더할 나위 없습니다. 초장부터 기를 팍 잡아놔서 딱히 어려울 것도 없고요."

「내부 상황은 어떤가.」

"꽤 좋습니다. 대부분 업무에 제가 관여하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대표가 생각보다 이쪽 방면에 상당히 무지합니다. 역시 청소부 출신답다고 해야 할까요."

「출신 가지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건 안 좋은 버릇이야. 그래 보여도 협회에서 짧게나마 전성기를 이끌었던 사람이니까.」

"뭐… 그쪽으로는 전문가일지 몰라도 확실히 사업가 체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핸드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락한 건 다른 게 아니라, 던전 민영화 말이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범 시행이 된다고 하더군.」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그래. 뭐, 밑 작업도 충분히 된 것 같으니 슬슬 우리 쪽으로 잡아놔야지. 그때까지 착실하게 준비에 신경을 써.」

"여부가 있겠습니까."

「뭐, 김준우 대표가 순순히 우리 쪽으로 붙어주면 상관없겠지만, 조금이라도 거슬리게 나오면....」

"잘라내야죠."

오 실장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미 서로 사전에 충분히 상의한 탓에 긴말은 필요 없었다.

「우리 쪽 지분, 과반은 넘었나?」

"아직입니다만... 본부장님 16%, 한별 손해보험 앞으로 12%, 한별 장학 재단 앞으로 12%, 그리고 회장님 앞으로 8% 해서 저희 쪽이 총 48%를 쥐고 있습니다."

「금방이군. 아무튼, 조금만 더 수고해줘. 아시다시피 한별 던전이 성공하려면 오 실장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니. 아… 이젠 이사라고 불러야 하나.」

"하하하! 그럼 저도 이제 사장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벌써부터 설레발을 치는 대화가 오가며 둘은 성공을 확신했다.

똑똑―.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

"저… 실장님."

1팀의 문소연 팀장이 대뜸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예.... 지금 직원 한 명이 찾아와서… 예예,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오재엽 실장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제가 들어와도 좋다고 했던가요?"

"아… 죄,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

"급한 건 급한 거고, 예의는 지켜주십시오."

"네, 네...."

오 실장은 혹시 통화 내용이 들렸을까 하는 불안함에 날카롭게 쏘아붙여 무마하려 했다.

다행히 먹힌 듯, 문소연 팀장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뭡니까?"

기세를 잡은 오 실장이 본론을 물었다.

"저 내일 병가 좀 쓸 수 있을까요?"

"병가? 갑자기요?"

"네... 요즘 너무 무리했는지 몸이 안 좋아서...."

"하아."

오 실장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소연 씨만 무리했어요?"

"네, 네?"

"소연 씨만 야근했냐고요. 직원들 모두 힘든데 병가를 쓰면 소연 씨 일은 누가 대신 합니까. 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그녀의 고개가 푹 떨어진다.

하지만 오 실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쓸 거면 최소한 3일 전엔 말해주셔야 일정을 조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병가를 전날 와서 신청하나요."

"죄, 죄송합니다."

"암튼 내일은 안 되니까 일단 돌아가시고...."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나 했다.

쾅―!

"개염병 지랄을 떨고 있네, 시발놈이."

문이 부서질 듯한 소리와 함께 귀를 의심하게 하는 거친 언성이 들렸다.

입에 걸레라도 문 건지, 격한 발언과 함께 등장한 사람은 3팀의 한유빈 팀장이었다.

"...지금 뭐라 그러셨습니까?"

"시발놈이라고 했습니다. 시발놈아, 아파서 병가 쓰겠다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그럼 뭐, 아플 걸 예상하고 쓸까?"

"그쪽과는 아무 상관 없을 텐데요. 왜 유빈 씨가 나서는 겁니까?"

"듣던 사람 복장 터지게 생겼는데, 그럼 시발 참고 있을까요? 지금 당신 이러는 거, 대표도 알고 있습니까?"

"그건 그쪽이 걱정할 사항이 아닌...."

쾅―!!

오 실장의 눈앞에서 책상이 두 동강 났다.

"내가 요즘 화낼 일이 별로 없었는데, 굴러들어온 버러지 새끼가 간만에 야마 제대로 돌게 하네."

"당신...실수하시는 겁니다."

"실수고 나발이고 당장 대표 불러와."

한유빈은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기세였다.

물론 이 정도 협박에 말릴 오재엽이 아니었다.

"본사의 경영 및 회계를 비롯한 사내 권한 대부분을 저에게 위임해주셨습니다. 그 말은 인사권도 제게 있다는 말이죠."

"...뭐?"

"한유빈 씨는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유는... 뭐 본인이 가장 잘 알겠죠?"

"하, 하하하!"

한유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날 자르면 밖에서 나 어떻게 보려 그래?"

그녀가 바짝 앞으로 다가갔다. 기세로 억누를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모욕에 협박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시는군요. 이렇게 되면 누가 더 고생할 거라 생각합니까?"

"...!"

그가 보여준 핸드폰엔 음성 녹음 기능이 켜져 있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대표님만 곤란하실 겁니다."

"지금 협박하냐?"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겠죠. 어떻게, 협박해볼까요, 아니면 그냥 곱게 나가실래요?"

"...."

한유빈은 이내 작게 미소를 지으며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리곤 문을 쿵 차며 나갔다.

그 뒤를 문소연이 걱정스레 헐레벌떡 따라갔다.

다시금 조용해진 사무실.

오재엽 실장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됐다.

안 그래도 제일 눈엣가시였던 녀석이었는데... 스스로 목을 들이밀다니.

한유빈만 내보낸다면 더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이는 없다.

무능한 대표.

멍청한 직원들.

이젠 정말 때가 됐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한별 던전으로 흡수할 때가.

***

"이건 말도 안 돼요!!"

이아영 실장이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멋대로 남의 회사 직원을 자르는 게 어디 있어요?! 주객전도도 정도가 있지!!"

"...."

나는 말을 아꼈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대놓고 활개를 칠 줄은 몰랐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이건 정말 아니에요. 수당도 제대로 안 주면서 죽어라 굴리는 것도 참았는데... 이건 선을 넘었어요! 투자금 다 토해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식 당장 돌려보내야...."

"일단 진정하시죠. 말처럼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하게 생겼어요?!"

진정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회사 망하라고 제사라도 지낼 심산인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나라고 좋아서 내버려두는 게 아니다.

이미 회사도 위기를 넘겼겠다, 더는 데리고 있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지금 우리 회사 주식 지분이 어떻게 됩니까?"

"...당신이 34%, 제가 9%, 나머진 외부 기업들이에요. 그건 왜요?"

"그중에 한별 그룹 지분은요."

"오늘 기준으로 48%를 넘겼어요."

"내일이면 과반을 넘기겠군요."

"...."

이아영 실장은 그제야 내가 뭘 말하려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 실장... 아니, 한별 그룹에 반기를 들었다간 내 모가지만 날아갈 겁니다."

이아영 실장은 아까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듣자 하니 내일부터 민영화가 시범 운영된다더군요. 그에 맞춰 저번에 만났던 하성태 본부장이 한별 던전이라는 새로운 계열사를 만들었고요."

"...그런데요?"

"아마 본격적으로 저희를 본인들 회사와 전속으로 계약하려고 들 겁니다. 뭐, 말이 전속 계약이지 실질적으로는 한별 던전에 흡수되는 거나 다름이 없겠죠."

"설마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은 아니죠?"

"그럼 어쩌겠습니까. 말했듯이 반기를 들면 제가 잘릴 텐데."

현재로선 둘 중의 하나다.

대표 자리를 유지한 채 개가 되느냐, 아니면 대표직에서 내려오느냐.

물론,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표직을 내려놓는 건 생각할 가치도 없다.

물론 저쪽이 원하는 대로 개가 되는 순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겠지.

당연히 해외 지부 사업도 수포로 돌아간다.

"그럼 어떡해요.... 방법이 없는 거예요?"

"뭐, 없겠습니까?"

어느 상황이든 방법은 있긴 마련이다.

"우리도 백기사를 구해야죠."

핸드폰을 꺼내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렸다.

"김준웁니다. 예, 다른 게 아니라...."

한동안 통화를 이어나갔다.

이미 생각해놓은 거긴 해도 실제로 전화할 곳이 많다 보니 시간이 좀 걸렸다.

겨우 모든 연락을 마친 후, 나는 멍하니 기다리는 이아영 실장에게 입을 열었다.

"우리도 슬슬 준비해봅시다."

단물은 다 빼먹은 것 같으니, 이젠 때가 됐다.

꼬리를 자를 때가.

118

118

[한별 그룹의 새로운 시작, (주)한별 던전]

[전 한별 종합 상사 하성태 영엽 본부장 曰 '시민에, 시민의, 시민을 위한 토벌 산업']

[위기에 놓인 협회 대신 토벌 산업에 나선 기업들, 시민들 '한시름 덜었다']

[GT그룹, 오각그룹도 잇따라 뛰어든 토벌 사업, 주목해야 할 팀은?]

[전국 유일 청소팀 파견 업체, 카르마 코퍼레이션. 한별 던전과 전속 계약 화제]

[김준우 대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한별 던전 이대로 독주하나?]

던전 민간관리 법안 시범 운영 첫째 날.

모두에게 주목을 받는 법안인 만큼, 벌써부터 여론은 시끌벅적했다.

물론 불안한 시각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주식회사 한별 던전은 무사히 설립됐다.

"축하드립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하성태 대표 이사를 비롯한 여러 인사가 한별 던전 대표 이사실에서 만남을 가졌다.

물론 나 또한 그 자리에 함께였다.

엄연히 한별 그룹의 일원으로서 참가한 자리지만....

'본심은 서열 정리를 하고 싶은 거겠지.'

내가 잘 보여야 할 사람들. 혹은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할 사람들을 미리 소개해주는 자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겠지.

"아, 우리 김준우 대표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흔쾌히 계약을 받아주실 줄 몰랐습니다."

그때, 하성태 사장이 나를 향해 말했다.

"한별 그룹 같은 대기업과의 전속 계약인데 마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야망이 매우 크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전속 계약을 하신 이상 개인적인 목표는 잠시 미루셔야 할 텐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사업가에게 야망이란 돈이죠. 그 외엔 부수적인 것이지 않겠습니까."

"멋진 대답이군요."

마음에 들었는지 하성태 대표 이사가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매출이 상당히 많이 올랐던데. 그동안 마음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한 거겠습니까. 다 오재엽 실장님 덕분이지."

"뭐, 이제부터가 중요하겠죠."

오 실장을 살짝 날카로운 눈초리로 보자, 내 시선을 눈치챈 듯 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내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아마 앞으로는 카르마 코퍼레이션으로 출근하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시겠죠. 엄연히 한별 던전 이사님이신데."

"이제부턴 대표님에게 믿고 맡기겠습니다. 부디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해주시길 바랍니다."

"하하하."

나는 입만 웃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해달라고?

까고 있네.

앞으로 딴생각 말고 자기들 말에 고분고분 따르라는 거잖아. 잘리기 싫으면.

'아주 지 회사야, 시발.'

하긴 지분도 기어이 과반을 넘겼고 전속 계약까지 됐으니, 본인들이 철저한 갑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아랫사람 취급하는 건 기분이 상당히 뭣 같다.

"아, 오늘 오후에 첫 작전이 잡혀 있습니다."

서열 확인도 끝났겠다, 오 실장이 입을 열었다.

"자세한 사항은 저희 쪽 통제팀이 따로 연락을 드릴 겁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십시오. 업무 때문에 꽤나 바쁘시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를 봤나....

'밖에서 만났으면 벌써 몇 대는 얻어터졌을 텐데.'

벌써부터 목줄을 쥔 것처럼 행동하는 꼬라지가 상당히 고까웠지만... 그래, 어쩌겠는가.

아직 준비도 안 된 마당에 이빨을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단념하며 사무실을 나서려고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물어볼 게 있었는데...."

불현듯 정리하지 않은 일이 떠올라 다시금 오 실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유빈 팀장은 왜 해고하신 겁니까?"

"제가 보내드린 경위서에 다 적혀 있지 않았나요? 상사에게 폭언과 협박을 가했다고."

그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왜 유빈 씨가 오 실장님에게 폭언과 협박을 했는지입니다."

"...네?"

"이유도 없이 그럴 사람은 아닙니다. 근데 어째 경위서에 그 내용만 쏙 빠져 있더군요."

굳이 따지자면 쓰레기를 보면 짖는 개랄까.

성격은 뭣 같아도 사람 자체가 나쁜 녀석은 아니다.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안다.

만약 그걸 넘었다고 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게 분명하다.

이미 한유빈 본인에게 물었지만, 시원하게 이야기 않고 말을 돌렸다.

그래서 싸운 당사자에게 직접 듣고 싶었던 건데....

'입에다가 본드를 붙였나.'

어째 그 또한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이내 하성태 사장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오 실장은 그제야 상황을 수습하듯 급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도 워낙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던 터라.... 문소연 씨와 면담 중이었는데 난데없이 들이닥친 것만 기억나는군요."

"그럼… 이유도 없이 오 실장님에게 욕을 했다는 건가요?"

"뭐, 그동안 스트레스가 좀 있었나 봅니다.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조직에서 그냥 넘어갈 순 없죠."

오 실장은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누굴 호구로 보나.

그 이야길 믿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나저나 전 직장에서도 같은 이유로 해고당했다면서요. 채용 때 인적성 검사라도 좀 하시지, 어떻게 데려와도 그런 사람을 데려오셨습니까."

가만히 두니까 가면 갈수록 가관이다.

뭘 숨기고 있는지 몰라도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과거를 들추는 걸 봐서는 분명 찔리는 게 있는 거다.

하지만 여기선 굳이 상대해주지 않는다.

시기나 장소가 그리 좋지도 못하고.

나는 애써 미소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미련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아영 실장이 냉큼 다가왔다.

"어땠어요?"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습니다."

"뭐… 애초에 목줄을 쥐고 있는 게 누군지 확인시켜주려고 부른 걸 테니까요."

"연락 온 건 없습니까?"

"아직이요. 액수가 액수인 만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한별 던전에 목줄을 잡힌 이상, 내가 계속 대표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우리 쪽 지분을 반수 이상 확보하는 것.

따라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에게 연락을 돌렸다.

이두식 이사 또한 두 팔 걷고 나서서 백기사를 끌어모으고 있지만, 갑작스럽게 큰돈을 모으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마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

"더 지체되면 영영 한별 그룹에서 못 벗어날 거예요. 당연히 해외 지부 사업은 꿈도 못 꿀 거고요."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핸드폰을 꼭 쥔 채 대답했다.

물론 당장이라도 오 실장 뺨을 후려치며 꼬리를 끊어버리고 싶지만... 아직은 안 된다.

감정적으로 나서다간 모든 게 도루묵이다.

최소한 우리 쪽 지분을 확보할 때까진 잠자코 기다려야 한다.

"인내심을 좀 가져보죠. 일단 사무실로 돌아갑시다."

나와 이아영은 사무실로 복귀했다.

그 후로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저 가만히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

「한별 던전 통제팀입니다. 방금 종로구 작전 종료했습니다. 청소팀 투입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등급과 몬스터 타입이 어떻게 됩니까?"

「블루 등급, 인간형 몬스터입니다.」

"바로 파견해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는 이아영 실장을 향해 물었다.

"지금 대기 중인 팀 있습니까?"

"소연 씨 팀이 남아 있어요."

"그럼 바로 투입하죠. 아, 그리고… 괜히 약점 잡힐 만한 행동은 하지 말아 달라고 전해주시고요."

"알았어요."

이아영 실장은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급히 1팀을 투입하고 불과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대, 대표님! 소연 씨가 쓰러졌어요!!」

1팀에 소속된 직원의 다급한 연락이 왔다.

"...예?"

「요 며칠 몸이 안 좋아 보이긴 했는데… 해체 작업 중에 갑자기 쓰러져서....」

"지금 어딥니까?"

「성은 병원이에요.」

결국, 일이 터진 건가.

나는 외투를 챙겨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병원에 도착하자, 응급실에 누워 있는 문소연과 1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곧바로 담당 의사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급성 위염입니다."

의사가 차트를 훑어보며 덤덤히 대답했다.

"최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입니다. 뭐, 큰 문제는 아닙니다만, 이 정도면 며칠째 열이 펄펄 끓었을 텐데.... 이 상태로 던전에 들어갔던 겁니까?"

"...."

나는 대답 대신 문소연에게 다가갔다.

"제가 아프면 반드시 말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 오 실장님에게 말했는데, 병가는 안 된다고 하셔서...."

"그렇다고 그 몸으로 일을 합니까?"

"그럼 어떡해요. 전속 계약하고 첫 작업인데 빠질 순 없잖아요."

문소연은 시선을 피하면서도 꿋꿋이 대꾸했다.

그 한심한 모습에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대표님...."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습니다."

"여태까지 참았지만… 그쪽이랑은 더는 일 못 하겠습니다."

한편 기다렸다는 듯 1팀의 성화가 쏟아졌다.

"일단 진정들 하시고, 조금만 더 버티면...."

그때 전화가 울렸다.

오재엽 실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대표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왜 그러십니까?"

「아니, 파견해주신 1팀이 지금 작업도 안 하고 던전에서 빠져나왔다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문소연 팀장이 쓰러졌습니다. 지금 병원입니다."

「병원이요…?」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니, 대표님이 병원에 계시면 어떡합니까! 그러면 바로 다른 팀이라도 파견해주셔야죠!」

"하아.... 오 실장님."

「첫 작전부터 이게 지금 뭡니까! 적자 나면 책임지실 수 있으세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직은 안 된다.

때가 될 때까진 참아야 한다.

"오 실장님, 일단 진정하시고...."

「그리고 말입니다. 일하다가 쓰러질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리 대수라고 병원까지 달려가십니까! 그렇게 사리 분별이 안 돼서 앞으로 저희랑 같이 일할 수....」

"야, 이 개새끼야!"

왜 자꾸 말을 끊어, 시발.

「무, 무슨...!?」

"지금 일하다가 사람이 쓰러졌는데, 뭐 대수냐고? 실장이라고 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

사업에서 자본은 곧 권력이다.

당연히 돈을 주는 사람이 권력을 갖고, 돈을 받는 사람은 권력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게 인간을 포기하라는 건 아니다.

"이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대안이 없다고 사람보다 일이 먼저라고 한다면... 그건 일이 아니라 노역입니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습니까.」

"네. 뭐 실장님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하신 말씀이 아닌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랬다면 이미 내 손에 죽었겠지.

누굴 노예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더는 참기가 힘들군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더는 X 같아서 너네 똥꼬 못 닦아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턴 니들끼리 청소하든 말든 알아서 하시죠."

「....」

충격을 받았는지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후회하실 겁니다.」

이내 진심으로 경고하는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까는 소리 말고 더는 간섭할 생각 마. 모가지 비틀어 버리기 전에."

더는 할 이야기가 없어 전화를 끊었다.

문소연을 포함한 1팀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구경났습니까. 뭘 그렇게 쳐다보고 그럽니까."

"다, 당신… 어떡하려고...."

이아영 실장 또한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쩔 수 없지.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떡하겠는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그 말을 남기고 응급실을 뒤로했다.

***

"역시 대표님도 참고 있었네요."

"그렇겠죠. 저분이 어떤 사람인데...."

김준우가 빠져나간 응급실에 남은 1팀원들이 한마디씩 했다.

조금 놀라긴 했어도 다들 내심 반기는 모습이었다.

"화 많이 났나 봐요. 준우 씨가 저렇게 욕하는 거 처음 봐요."

문소연이 걱정하는 투로 말하는 가운데, 이아영의 표정이 어째 상당히 어두웠다.

"아영 언니? 왜, 왜 그래요?"

"준우 씨... 해임될지도 몰라요."

"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문소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턱이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겠다만....

이아영 또한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본인이 조금만 참자고 할 땐 언제고....'

아직 준비도 안 된 마당에 어쩌자고 여기서 터트려 버리는가.

이러면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이아영은 미간을 꾹꾹 눌렀다.

분명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내심 통쾌했다.

뭐. 이래야 저 사람 답지.

"어쩔 수 없죠. 이미 벌어진 일, 더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무, 무슨 소리예요?"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다는 거죠."

이아영은 걱정을 털어내듯 미소를 지었다.

"조금 도와드리자고요."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이전 김준우에게 받아놓은 번호를 눌렀다.

"아, 구상찬 기자님?"

「엥? 이 실장님께서 연락을 다 하시고… 어쩐 일이십니까?」

"다른 게 아니라, 기자님이 좋아할 만한 제보를 하고 싶어서요."

「장르가 어떤 겁니까?」

"내부 고발."

「크으으으!!」

순간 생리적 혐오감에 전화를 끊을 뻔했다.

...미친놈.

「지금 바로 만나 뵙죠. 어디 십니까?!」

"아, 그리고 수첩보단 녹음기를 가져오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인터뷰할 사람 많으니까요."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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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별 던전은 초비상이었다.

당장 청소를 진행해줄 팀이 필요한 마당에, 김준우 대표가 일방적으로 파견 중지를 선언해버리고 잠수를 타 버렸다.

오재엽 실장은 김준우에게 몇 번이나 더 전화를 걸었지만....

"안 받습니다."

"하아...."

하성태 대표의 미간이 마구 찌그러졌다.

귀찮게 하네, 진짜.

반기를 들 거면 계약 전에 할 것이지, 왜 하필 이제 와서 드러눕는 건가.

이미 민간 토벌 시장이 열린 이상, 청소팀이 파업하고 나서면 본인들로서도 손해가 막심했다.

이렇게 되면 돈을 아끼기 위해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흡수하려던 의미가 없지 않은가.

아군이 될 줄 알았는데, 결국 이렇게 등을 돌리다니.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감성적인 놈일 줄이야.

"어쩔 수 없군."

"...네?"

"잘라내야겠어."

하성태 대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건 둘째치고, 당장 청소 작업은 어떻게 할까요. 다른 파견 업체가 있는 것도 아닌데...."

"협회에 연락은 해봤나?"

"네. 칼같이 거절했습니다."

"거절했다고?"

당연히 공짜로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제 코가 석 자인 마당에 파견을 거절한다고?

어차피 그쪽은 지금 정상적인 작전 진행도 안 돼서 인원이 남다 못해 놀고 있을 거다.

게다가 작전팀도 아니고 청소팀 파견을 거부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하성태 대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 언질이라도 한 것일까.

"카르마 코퍼레이션 쪽에서 입김을 넣었나 보군."

"김준우 대표가 말입니까?"

"협회 실권을 쥔 이두식 이사랑 꽤 친분이 있다 했으니까. 청소팀 인원이라곤 국내에 카르마 코퍼레이션, 협회 이렇게 딱 두 곳뿐이니, 그 두 곳을 막으면 우리로선 당장 청소팀을 구할 방법이 없겠지."

"하,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제 딴에는 이렇게라도 보복하려는 모양이야. 아니면 뭐… 청소팀이 필요해지면 우리가 먼저 고개를 숙일 거라 생각하는 걸 수도 있고."

먹힐 짓을 해야지, 참나.

하성태 대표가 혀를 찼다.

누가 청소부 출신 아니랄까 봐, 생각하는 것도 일차원이군.

고작 해봐야 청소 회사 주제에 어딜 한별 그룹 계열사를 상대하려는 건가.

그깟 청소팀 없다고 우리가 눈 하나 꿈쩍할 것 같은가.

"그건 그렇고… 지금 당장이 문젭니다. 토벌된 지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나서 어떻게든 청소 작업은 해야 할 텐데...."

"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하성태 대표가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 고 팀장님."

연락을 한 건 한별 던전 소속의 고준식 작전 1팀장이었다.

그는 꽤나 다급한 목소리였다.

「대, 대표님,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연락을 안 받습니다! 이거 빨리 청소해야 하는데…!」

"알고 있습니다.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파견 중지하겠다고 해서 저희도 지금 꽤 곤란한 상황이고요."

「네, 네?! 파견을 중지했다고요? 그, 그럼 청소는....」

"그런고로 죄송하지만 당분간 작전팀이 청소를 병행해주셔야겠습니다."

하성태 대표가 말하자 대답이 잠시 멈췄다.

「아니 무슨 저희가 청소를 합니까!」

"그럼 어떡합니까. 당장에 할 사람이 없는데.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 그래도 좀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해본 적도 없고....」

"고 팀장님."

「...네, 네.」

"제가 현장까지 신경 써야겠습니까?"

「....」

"그리고 뭐, 청소가 뭐 별거 있습니까? 그냥 닦고 치우면 되는 거지. 추가 수당 챙겨 드릴 테니 좀 도와주십시오. 아니 뭐, 작전팀이 그쪽밖에 없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고준식 팀장은 어쩔 수 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은 하성태 대표가 혀를 쯧, 찼다.

'하여간 헌터놈들, 자존심만 세 가지고.'

아직도 본인들이 특별한 존재인 줄 아는 건가 싶었다.

지들이 길드에 있을 때나 헌터지, 기업에 고용된 이상 남들과 다를 바 없는 노동자일 뿐이다.

노동자는 노동자답게 상부의 말을 잘 따르면 될 일이지.

"어쨌든 던전 쪽은 대충 될 거 같고, 그럼 이제...."

이내 하성태 대표가 오재엽 실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주주총회 소집하지."

슬슬 칼을 던질 때가 됐다.

"그런데… 주주 소집 권한은 김준우 대표에게 있지 않습니까?"

"계약서에 명시했잖아. 지금처럼 갑이 정당하게 요청하는 업무를 특별한 사유 없이 수행하지 않을 경우, 이사가 대신 소집권을 가진다고."

하성태 대표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신을 건드리는 건 곧 한별 그룹을 건드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작 해봐야 청소부 출신 주제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이빨을 들이밀다니.

이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

사무실로 돌아가는 차 안.

"접니다, 이사님."

나는 급히 이두식 이사에게 연락을 넣었다.

"준비는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최대한 백기사를 끌어모으는 중이긴 한데... 금액이 금액인지라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네. 왜?」

"다른 게 아니라, 대표이사 해임 안건이 아마도 이번 주 안으로 올라올 것 같습니다."

「이, 이런 미친…!」

핸드폰 너머로 한껏 격양된 목소리가 마구 울려 퍼졌다.

그대로 듣고 있자니 귀가 아파 핸드폰을 좀 뗀 채 전화를 이어갔다.

「너, 너 인마 그새를 못 참고 뭔 짓을 한 거야?!」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면 더 싫은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우선 급한 것부터 처리하는 게 먼저니까.

"일단 한별 던전에서 청소팀 파견 요청 오면 무시해주십시오."

「그놈들이 우리 쪽에 파견 요청을 왜 해?」

"국내에서 청소팀을 충당할 수 있는 곳이 저희랑 협회 말고 또 어디 있겠습니까. 어쨌든 급한 불은 꺼야 할 테니, 분명히 그쪽으로 연락이 갈 겁니다."

「...너 설마 청소팀 파견만 막으면 저쪽에서 먼저 고개를 숙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뭐, 썩 틀린 말은 아니군요."

「야 이놈아. 아무리 신생 회사라고 해도 한별 그룹 계열사다. 청소 정도야 어떻게 해서든 대타를 구할 수 있을 거야. 하다못해 작전팀한테 병행시킬 수도 있고.」

"글쎄요. 그렇게 우습게 생각할 만한 일이 아닐 겁니다."

「뭐…?」

"제가 해봐서 알거든요. 던전 청소, 그거 쉬운 일 아닙니다."

명색이 전직 SSS랭크 헌터였던 나조차도 처음 며칠은 계속 버벅댈 정도였다.

애초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매뉴얼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굳이 돈 써가며 직원들 교육에 열을 올리지도 않았다.

장담할 수 있다.

청소팀 파견이 막힌 이상,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우리뿐만이 아니다.

「그래.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일단은 넘어가자는 투로 이두식 이사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주총은 어떻게 할 거냐? 파업이고 뭐고 자네가 잘려 나가면 다 끝이잖냐. 우리 쪽이 과반 확보하려면 최소한 한 달은 걸릴 텐데, 이대로라면 해임을 막을 수가 없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긴 인마! 그럼 뭐, 이대로 순순히 잘릴 거야?!」

"이사님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해임은 막을 수가 없다고. 제가 던진 일인데 그 정도는 각오해야죠."

그깟 대표 자리, 얼마든지 넘겨줄 수 있다.

다만, 그놈들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꼴은 죽어도 못 보지.

당연히 그놈들 생각대로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혹시 저희 쪽 투자자들한테 연락 좀 돌려주실 수 있습니까?"

「왜? 돈 좀 더 풀어달라고?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닌....」

"아뇨. 그 반대입니다. 그동안 매입해놓은 저희 쪽 주식, 도로 매각하라고 해주십시오."

「...뭐?」

"어차피 이대론 과반 못 넘습니다. 괜히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죠. 대신 그 돈으로 다른 곳에 투자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디에.」

"한별 던전."

「...?」

"한별 던전 주에 올인해주십시오."

순간 대답이 끊겼다.

대체 무슨 말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잠시, 대충 이해가 간 듯 이두식 이사가 물었다.

「지금 말이냐?」

"아뇨. 정확히 언제라고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만... 이때다 싶을 때가 올 겁니다. 그때 해주시면 됩니다."

「시벌, 난 모르겠다. 이게 한두 푼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예."

당당하게 대답했다.

「알았다. 그 부분은 내가 어떻게든 설득해볼 테니까, 넌 주총 준비나 잘 해봐.」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던전 청소부를 칭하는 은어들이 있었다.

최하층, 천민, 노예.

하지만 던전 민영화가 시행된 이상, 그건 다 옛말이 될 것이다.

너도나도 토벌 사업에 뛰어들어 수많은 던전이 우후죽순으로 토벌되고 있는 시점에서, 던전 청소부는 작전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인원이니까.

하지만 그 중요도에 비해 전국 청소부의 인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그것을 충당할 방법은 우리밖에 없다.

한별 던전을 비롯한 많은 기업이 그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깟 청소부, 우리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

종로구에 위치한 블루 등급 던전.

고준식 팀장을 포함한 한별 던전 소속 작전 1팀이 이미 한 시간 전에 토벌을 완료한 던전이었지만... 상부의 명령에 다시 돌아와 청소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사실 던전에 다시 들어가기 전까진 다른 것보다 귀찮은 마음이 더 컸지만, 작업에 착수하고 나서부터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저, 이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야… 가스 계속 차는데 이거 괜찮은 거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몬스터는 잘라서 옮기는 거야, 아니면 그냥 통째로 들고 가는 거야?"

분명 본인들이 토벌한 던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저, 팀장님? 이거 벽에 묻은 피까지 다 닦아야 하는 겁니까?"

"이, 이거 안 지워지는데 어떻게 하는...?"

"나도 몰라, 새끼들아!"

고준식 팀장은 결국 참다못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분명 던전 청소는 어려울 것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 일이에도 분명한 순서와 방법이 존재했다.

아무리 같은 던전에서 일한다고 해도, 기본적인 지식이 없으면 헤매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별거 없긴, 뭐가 별거 없다는 거야....'

고준식 팀장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이런 일이나 하려고 길드 탈퇴하고 대기업 들어온 줄 아나.

답답함과 억울함이 교차했지만, 언제까지 구시렁거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던전 소멸까지 불과 15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래서야 제시간 안에 끝낼 수 있을까…?'

고준식 팀장은 던전 내부를 슥 훑었다.

작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몬스터를 치우긴커녕 내부에 튄 부산물조차 어찌하지 못한 상태.

이대론 안 된다.

그렇게 판단한 고준식 팀장은 결국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야. 그냥 다 태워버리자."

"네, 네?"

"그냥 태워버리자고. 이걸 언제 일일이 다 치우고 있냐?"

"그래도 되는 겁니까?"

"되겠지. 태워서 없애든 닦아서 없애든 결과는 똑같은 거 아니야."

"아, 알겠습니다."

얼핏 들으면 일리 있는 말이었다.

팀원들이 고준식 팀장의 지시에 맞춰 스킬을 사용했다.

――!!!!

그리고....

던전 내부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120

120

[긴급 속보입니다.]

[던전 민영화가 시범 시행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한별 던전이 맡은 종로구 블루 등급 던전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한별 던전 소속 작전팀이 임의로 청소를 병행하려다 발생한 사고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해당 사고로 작전 1팀의 고준식 팀장을 포함한 헌터 19명이 부상을 입었고....]

[전국 민간 토벌에서 이와 같은 사고가 계속해서 발생하는 가운데, 시민들의 불안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 사고로 인해 한별 던전 상장 하루 만에 주가가 대폭 하락하고 있으며....]

"...이게 뭐야!"

하성태 대표의 싸늘한 시선이 오 실장에게 향했다.

"그게… 시간이 부족했는지, 스킬로 한꺼번에 소각하려고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필 던전 내부에 가스 수치가 많이 올라간 상태여서...."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거야! 던전 밥 먹는 헌터라면 응당 알아야 하는 사항이잖아."

"...보통은 청소 일까지 알진 않습니다."

하성태 대표는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오 실장, 당신은!"

"...네?"

"작전팀은 몰라도 최소한 오 실장은 알아야 하잖아. 청소 업체에서 한 달 동안 뭘 한 건데. 최소한 기본적인 매뉴얼 정도는 숙지했을 거 아니야."

"그... 저는 직원 관리와 경영에만 신경을 썼던 터라...."

지금 저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하성태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이내 이마를 꾹꾹 누르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여기까지는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다.

헌터들의 부상도 찰과상에 불과하다.

시민들에게 피해가 발생한 것도 아니니, 그리 큰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현재 민간 기업들은 뒤늦게 청소팀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내 유일 청소 업체인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온갖 단체가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그로 인해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주가가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한편, 한별 던전과 전속 계약을 맺은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왜 갑자기 파견을 중지했는지에 대해 많은 추측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너도나도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주식을 사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저희 쪽 지분이 오늘 장 마감 기준으로 과반에서 떨어졌고요."

"빌어먹을...."

간신히 유지 중이던 지분이 기어이 밀려나 버렸다.

이렇게 되면 대표이사 해임은커녕, 정말로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고개를 숙여야 할지도 모른다.

'설마 여기까지 예상한 건가....'

요행으로 작전 본부장까지 올라간 건 아닌가 보군.

하성태 대표는 슬슬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과반은 유지해야 해. 가능한 만큼 더 매입해봐."

"그게... 카르마 코퍼레이션 주가가 많이 올라서 과반 확보까지는 예산이 조금 부족합니다."

"얼마나?"

"20억 정도...."

별 푼돈이 발목을 잡는군.

쯧, 어쩔 수 없지.

"내가 가진 한별 던전 지분, 얼마나 되지?"

"41%입니다."

"10억 정도 맞춰서 매각하고, 그 돈으로 카르마 코퍼레이션 주 추가 매입해."

"그, 그래도 되는 겁니까? 지금 저희 주가가 너무 하한가라 10억이나 맞추시려면 꽤 손해를 보실 텐데...."

"지금 이거, 수습할 수 있는 곳이 카르마 코퍼레이션밖에 없어. 계속 사고 나면 민영화고 나발이고 백지화될 텐데, 주식 몇 주 파는 게 그것보다 더 손해겠어?"

오 실장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 주식 내가 팔겠다는데 지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쨌든 이걸로 10억은 됐고. 나머지 10억은....'

이미 돈을 아끼기 위해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흡수한다는 처음 계획은 틀어진 지 오래였다.

지분 사수를 위해 쏟아부은 돈만 해도 초기 예상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하성태 대표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잠시 고민 끝에 핸드폰을 들었다.

"예, 할아버님. 성태입니다."

한별 그룹의 총수, 하덕수 회장.

그에게 연락하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뉴스 봤다. 문제없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이게 무슨 일이냐?」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무엇이냐.」

"카르마 코퍼레이션 주가가 많이 올라서 과반이 안 됩니다. 급하게 맞추고는 있는데… 조금 모자랍니다."

「그래서? 나보고 대신 매입해달라는 게냐?」

"…안 되겠습니까?"

「네놈 사업한다고 했을 때 나한테 손 안 벌리고 알아서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

하성태 본부장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그래서 얼마나 모자라는데?」

"10억입니다."

「쉽게도 말하는구나. 1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클클클 웃는 쇳소리.

「알고 있지? 그냥은 못 준다는 거.」

"제가 가진 한별 던전 지분, 10% 드리겠습니다."

「하한가 치고 있는 주식으로 퉁 치겠다?」

"그, 그럼 한별 종합 상사 지분도 추가로...."

「됐다, 됐어. 한별 던전 지분으로 충분해. 10억 매입해주마.」

"가, 감사합니다!"

「대신 너 이 사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물론입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됐다.

하성태 대표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주주총회는 잡혔나?"

"네, 내일 오후로 잡아뒀습니다."

"좋아."

하성태 대표의 눈빛이 변했다.

***

우리가 파견 중지를 선언한 지 이튿날.

예상대로 한별 던전 세미나실에서 주주총회가 소집되었다.

당연히 상정 안건은 대표이사 해임 건.

이유야 어쨌든 계약 사항을 어긴 건 사실이었고, 무엇보다 한별 던전에 피해가 발생했기에 해임 명분은 내가 봐도 충분했다.

하지만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고로, 전체 지분의 과반이 넘는 주주들이 안건에 찬성함에 따라, 현 시간부로 통보합니다."

의사장을 맡은 한별 던전의 정수혁 이사가 입을 열었다.

"김준우를 대표 이사직에서 해임한다."

"...."

이아영 실장을 비롯한 우리 쪽 투자자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이어,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차기 대표이사를 선출하겠습니다. 오재엽 실장과 이아영 실장, 두 분이 후보 등록을 하였으니 출석 주주분들의 의결권에 따라 선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이건 볼 것도 없었다.

애초에 참가한 주주들의 과반이 저쪽 놈들이었다.

"...오재엽 실장이 대표 이사직에 선임되었습니다."

뻔한 결과지.

세미나실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진다.

동시에 이아영 실장의 고개가 뚝 떨어졌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이 인간은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아닌 게 아니라, 온다고 한 지가 언젠데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건가.

이대로 주총이 끝나면 말짱 도루묵인데.

"그럼 이걸로 주주총회를 모두 마치겠...."

"…잠시만요."

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시선이 내게 쏠렸다.

당연히 할 이야기는 없다.

이미 끝난 마당에 결정이 번복될 리도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쯧, 어쩔 수 없지.'

대충 아무 말이나 해볼까.

"고작 청소 일인데 뭐 그리 어려울 게 있겠어. 고작 청소부인데 일 좀 더 시킨다고 뭐 문제라도 되겠어. 혹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서며 되는 대로 말하자 하성태 대표를 비롯한 한별 던전의 이사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일을 더 시키신 덕에 우리 직원이 쓰러졌고, 우습게 보고 경험도 없는 작전팀에게 청소 작업을 맡겼다가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저에게만 묻겠다는 게 좀 웃기지 않습니까?"

"하하, 난 또 뭐라고."

하성태 대표가 실소를 뱉었다.

"변명을 늘어놓기엔 좀 늦지 않았나요? 이미 대표이사에서 해임되셨습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결과가 바뀌진 않아요."

"압니다. 전 대표이사가 아니라 한 시민으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아시다시피 저 또한 청소부 출신입니다."

"압니다."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근데 주총 끝나면 다시 청소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하하!"

노골적인 조롱이 쏟아졌지만 상관없다.

"그래서 그런지, 청소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너무 쉽게 여기는 그 마인드가 참으로 역겹기 그지없군요. 당신들은 오늘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될 겁니다."

"뭐, 뭐…?"

"당신, 지금 말 다 했어?!"

"더 들을 필요도 없네."

"일어나지!"

쿵―.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그 순간, 이두식 이사가 드디어 주총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다들 앉으십시오. 아직 상의할 사항이 남았습니다."

그의 등장에 세미나실에 있던 모두가 의아한 반응을 내비쳤다.

"뭐야? 지원군이야?"

"다 끝난 마당에 이제 와서 뭘 어쩌려고 그럽니까?"

"많이 늦으셨군요. 이미 대표이사 안건은 끝났습니다."

모두가 소용없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정작 이두식 이사는 태연한 모습이었다.

"압니다. 전 새 안건을 상정하러 온 겁니다. 마침 주주분들이 대부분 겹치시더군요."

"...?"

준비한 서류를 꺼내 의회장에게 내밀었다.

"한별 던전의 하성태 대표이사 해임 안건입니다."

"...?!"

"뭐, 뭐…?!"

"하, 하하하!"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하성태 대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죠? 주총이 애들 장난입니까? 아무리 우리 주가가 떨어졌다고 해도 당신들이 과반을 넘길 수 있을 리가...."

"본인들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전혀 감이 없으신가 봅니다. 너무 우리 쪽 일에만 신경 쓰신 거 아닙니까?"

"...뭐라고요?"

내 말에 하성태 대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 대표님!"

누군가 하성태 대표를 부르며 회의실로 들어왔다.

"지금 뉴스에서…!"

[한별 던전의 직원 혹사 논란, 한 달 동안 미지급된 수당만 억대?]

['아파도 병가 못 써'. 결국 병원 신세 진 카르마 코퍼레이션 직원]

[한별 그룹, 또다시 불거진 논란, 이대로 괜찮은가]

[잇따르는 카르마 코퍼레이션 직원들의 제보. 이제야 밝혀진 일방적 파견 중지 이유?]

[바닥 밑에 바닥, 연이은 하한가의 한별 던전 주가. 전날 대비 무려 -100%?]

"...."

그 여유롭던 하성태 대표가 뉴스를 확인하자 드디어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참 나, 설마하니 구상찬한테 연락했을 줄이야.'

그 많은 직원의 인터뷰를 어떻게 다 땄대.

뭐, 시키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번 건은 도움이 됐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었으니까.

나는 굳어버린 하성태 대표를 돌아봤다.

"당신들 휴지 조각된 그 주식,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조금 더 매입했습니다. 더불어 이능차원관리 협회, 베트남 하노이 지부, 금빛 재단, 청소년 헌터 육성 재단 등등… 뭐, 나머진 직접 확인해 보시고."

이두식 이사에게 서류를 받아 하성태 대표에게 전달했다.

빈집털이.

그것도 일개 청소 업체가 대기업 계열사를 상대로.

"대충 계산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저희 쪽 지분이 총 47%입니다."

"마, 말도 안 돼! 애초에 내가 40%를 쥐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최근에 10%나 파셨더군요. 거기에 10%는 하덕수 회장님께 양도했고."

"그래도 과반이 안 넘는…!"

쿵―.

"제가 3% 추가 매입했습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한유빈이었다.

"3프로...?"

"아무리 휴짓조각이라지만 개인이 3%를 매입할 수 있을 리가…!"

"아, 모르셨나 보군요."

잘 생각해 보니, 그들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어디까지나 회사 내부 기록으로만 알고 있겠지만, 거긴 국내에서의 활동밖에 없을 테니까.

"저 사람, 저보다 돈 많습니다. 저래 봬도 한때 국제 협회 작전팀장 출신이라서 말이죠. 애초에 이쪽에서 일하는 것도 반쯤 심심풀이인 사람인지라...."

"...그런 건 아닌데요."

아니긴 개뿔.

협회에서 일하는 건 좋은 경력으로 남을지 몰라도, 이런 작은 기업에서 일하는 건 어디에서도 잘 알아주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규율 위반입니다! 계열사와 전속 계약된 개인은 해당 계열사의 주총에서 1% 이상의 지분을 행사할 수 없는...."

"오, 실장님. 벌써 잊으셨습니까?"

기억력이 금붕어 저리 가라군.

"당신 손으로 직접 해임하셨지 않습니까!"

"...!"

"그녀는 법적으로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다, 이겁니다."

이걸로 50 대 50이 되었다.

물론 세밀한 수치까지 합치면 우리가 조금 더 유리했지만, 아직 하성태 대표에게는 비장의 수가 남아 있었다.

"하, 할아버님...!"

한별 그룹의 총수, 하덕수 회장.

하성태의 시선이 그 노신사에게 향했다.

저 사람이 관여하고 있을지는 조금 예상 밖이었다.

설마하니 총수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했을 줄이야. 사이가 그리 좋은 것도 아니라던데.

그가 움직이면 이딴 촌극,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하덕수 회장이라면....

"배 실장."

상황을 지켜보던 하덕수 회장이 자신의 비서를 불렀다.

"예."

"우리 쪽에서 가지고 있는 한별 던전 주식, 전부 매각해."

"알겠습니다."

"하, 할아버님?!"

역시.

하성태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딴 식으로 돈을 벌면 내가 인정해줄 줄 알았느냐?"

"제,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십니까! 주가가 떨어진 것도 저놈들이 파견 중지해서 일어난 사고고…!"

"글러 먹었군."

회장이 고개를 젓는다.

"이 시간부로 한별 그룹은 한별 던전에서 손 뗀다."

그 말을 끝으로 하덕수 회장은 세미나실에서 빠져나갔다.

상황이 그리되자 주주들 사이에서 눈치싸움이 시작됐다.

의회장 또한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호, 혹시 이견 있으신 분 있습니까?"

"...."

"...크흠."

"그럼 과반 이상 주주분들의 의결에 따라... 현 시간부로 하성태를 대표이사직에서 해임하겠습니다."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결정 앞에 하성태 대표와 오 실장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바, 바로 이어 한별 던전 대표이사를 선출하겠습니다. 후보 등록하실 분은...."

나는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손을 들었다.

한별 던전과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갑을 관계가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121

121

한별 던전과의 불화로 인한 인수전이 끝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민영화 시행 첫날부터 발생한 사고들 때문에 민영화 철회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한별 던전을 흡수해서 토벌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뉴스가 퍼지더니, 어째선지 반대 여론이 잠잠해진 것이다.

└'그'가 나선다면야...

└ㄹㅇ토벌계 국밥ㅋㅋ

└든든하누ㅋㅋㅋㅋ

└어이, 김 씨! 왜 이제 온 거야! 얼마나 기다렸다고!

└솔직히 내가 민영화 반대했던 게, 토벌해 본 적도 없는 기업들이 이제 와서 협회 대신 토벌하겠다는 게 불안해서였는데ㅋㅋㅋㅋ

└사람들 다 그랬음ㅇㅇ 근데 '그'가 직접 하겠다고 하면 믿을만하지ㅋㅋ

└이쯤 되면 김준우는 ㄹㅇ세계정복 가능할 듯

└뇌절 금지

'....'

내 이미지는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뭐, 외부적으론 이런 상황이다.

물론 내부적으로도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대기업 계열사를 빈집털이했으니, 당연히 잡음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꽤나 조용했다.

아무래도 하덕수 회장이 한별 던전에서 손을 떼겠다는 발언 때문인 듯싶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부분이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관계를 잘라낼 줄은 몰랐다.

아무튼, 우린 자연스레 민간 토벌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기존 한별 던전 소속이었던 작전팀과 지원팀 또한 통째로 넘어왔으니, 사실상 따로 준비할 것도 없었다.

기존 청소팀은 우리 쪽 토벌과 함께 전국 모든 기업을 상대로 파견을 이어갔다.

덕분에 평판은 물론 매출까지 수식 상승.

하지만 우리와 다르게 협회의 사정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뭐, 민간 기업들에 던전을 다 뺏기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결국, 이두식 이사는 몇 명의 헌터들을 상대로 권고사직을 내렸고, 그 중엔 김민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우린 돈뭉치를 준비했다.

국내 랭킹 4위... 아니 이젠 3위 헌터의 FA가 떴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최고 대우로 그녀에게 스카우트를 제안했고, 그녀 또한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무튼, 완전체로 다시 모인 우리의 던전 사업은 나날이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작전 기획에 나.

작전 수행에 김민주.

지원 및 보조에 이아영.

그리고 청소 작업에 한유빈을 비롯한 팀원들.

작전에 'ㅈ' 자도 모르는 민간 기업들이 감히 따라올 리 만무했다.

한편 이러한 상승세에서 유일하게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형식상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대표가 된 오재엽 실장이었다.

'뭐, 얼마 안 가서 뛰쳐나갈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곧 대표직에서 자진 사퇴하고 제 발로 걸어 나갔다.

본인 편이 모두 사라진 회사에 뭣 하러 남아 있겠는가.

그동안 한 짓 때문에 눈치 보여서 뭉개고 있기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그 틈을 타서 곧바로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중심으로 두 회사의 통합을 진행했다.

동시에 한별 던전 본사로 쓰이던 건물까지 덩달아 매입해 사무실을 이전했다.

한별 던전과 합쳐지면서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국내에서 독보적인 민간 토벌 기업으로 입지를 굳혔다.

"매출은 뭐… 이전이랑은 비교조차 못 할 정도네요."

이아영 실장... 아니, 이아영 이사가 서류를 확인하며 말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그녀의 직급도 올랐다.

대표인 나도 그대로인데 꽤나 출세했네.

"그거야 당연하겠죠."

"이 정도면 슬슬 해외 지부 사업도 시작해볼 수 있겠어요."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아영이 미심쩍은 눈으로 날 봤다.

"그런데... 설마 여기까지 다 예상한 거예요?"

"뭘 말입니까?"

"청소 파견을 중지하면 사고가 날 거라는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청소가 쉽진 않을 거라는 건 알았죠."

작전팀이야 돈 많은 기업이 국내외로 내로라하는 헌터들을 영입했을 테니 당연히 문제야 없겠지만... 청소팀은 다르지 않은가.

돈을 쓰자니 아까운데, 그렇다고 뺄 순 없는 팀.

'그래 봤자 청소 일'이라는 생각으로 작전팀이나 지원팀에 청소 일을 병행시키겠지.

그런 안이한 판단에 문제가 생기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이다.

애초에 던전 지식 좀 있다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굳이 파견 업체를 선택하지도 않았겠지.

그런 꽤나 당연한 걸 그들은 간과했다.

아무튼, 모든 걸 예상한 건 아니라도 확신을 가질 정도의 수준이었다.

다만 진짜 의외였던 점은....

"그런데 직원들은 왜 나선 겁니까? 혹시 그쪽이 시킨 겁니까?"

"뭐, 그렇긴 한데... 가만히 있었어도 나섰을걸요?"

이아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던전 사고로 인해 주가가 폭락했다곤 해도 국내 1위 기업의 계열사다. 그것도 회장의 장손이 직접 세운 회사.

아무리 우리가 돈을 쏟아붓는다고 한들, 사실상 한별 던전 지분의 절반을 넘기기는 아슬아슬했을 거다.

그런데 때마침 직원들의 내부 고발이 언론을 탔고, 크게 공론화된 덕에 충분히 과반이 될 수 있었다.

그간 직원들에게 제발 회사 일에 신경 끄고 시키는 일이나 하라고 했었는데...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야겠지.

어쨌든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때, 이아영 이사가 퍽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당신 하나 보고 참느라 직원들 엄청 고생한 거 알죠?"

"뭐… 모르진 않습니다."

"그럼 사과의 의미로 한 턱 쏴요."

"하아...."

돈 맡겨 놨나?

고생은 내가 제일 많이 했는데, 뭔....

하지만 남자 자존심에 무시하고 넘어갈 순 없는 일이다. 그래도 나름 고생한 값도 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개인 카드를 꺼냈다.

이아영은 그걸 바로 낚아채더니 직원들을 향해 달려갔다.

"대표님이 오늘 소고기 쏘신답니다!!"

"네?!"

"정말입니까?"

"와아아!"

...어?

***

구로로 이전한 행정 본부, 기획 본부장실.

"...그렇게 돼서, 결과적으로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주가가 많이 올랐습니다."

편 팀장은 이두식 이사에게 그간의 상황을 정리하여 보고했다.

"그럴 줄 알았지. 암, 그놈이 어떤 놈인데!"

"...한별 던전 주에 올인하라고 했을 땐 미친놈이라고 욕이란 욕은 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큼큼."

멋쩍은 헛기침.

사실 따지고 보면 누구든 그리 반응할 거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 잘못했으면 우리랑 베트남 지부까지 단체로 개털 될 뻔했다."

"뭐, 말은 그렇게 하셔도 투자자들 설득은 제일 열심히 하시던데요."

"크흠, 그동안 보여준 실적이란 게 있잖냐. 그놈이 그렇게 당당하게 말한 것 중에 안 된 게 하나라도 있어?"

"없죠. 이번에도 그렇고요."

편 팀장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덕분에 협회도 좀 숨통이 트였습니다. 행정 본부도 어느 정도 회복했고요. 김민주 팀장이 나간 건 좀 아쉽긴 한데...."

"아, 맞다. 그 사실 김준우한텐 비밀로 해야 한다."

"...뭘 말입니까?"

"김민주 팀장, 제 발로 걸어 나간 거 말이야. 그놈한테는 우리 쪽 사정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내보냈다고 했거든."

"네? 왜 그런 거짓말을...."

"같이 일하고 싶어서 나가겠다고 하면 김준우가 곱게 받아주겠냐? 기를 써서라도 협회에 남게 하지."

하긴, 그런 사람이니까.

편 팀장은 납득했다.

"이젠 저희도 슬슬 기존대로 작전 진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

"쯧, 그 사이에 민간 기업들한테 던전 다 뺏겼는데 작전은 무슨 작전이야."

"어, 못 들으셨습니까?"

"뭐가?"

"이번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던전 사업의 주도권을 잡지 않았습니까. 서울 내 던전의 80%는 거의 그쪽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데, 협회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매달 출현 던전의 20%를 무료로 배분해주겠다고 했습니다."

"...?"

토벌 사업가라는 놈이 공짜로 던전을 배분해준다고?

'김준우 이 자식... 아무리 봐도 사업엔 소질이 없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두식 이사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그럼 우리도 받은 만큼 일해 줘야지. 작전팀 다시 소집시켜. 오랜만에 던전 구경이나 가자."

협회 또한 다시금 굴러가기 시작했다.

***

아프리카 콩고 민주 공화국.

그곳에 위치한 국제 협회 소속 중앙아프리카 통합 지부.

"잠비아 쪽 국경에서 또다시 충돌이 발생했답니다. 콩고 정부에서 이번에도 헌터들을 파견해달라고 하는데...."

"빌어먹을."

케일럽 비서실장의 보고에 브루스 지부장의 표정이 마구 구겨졌다.

'대체 언제까지 이 지랄을 해야 하는 건데!'

브루스 지부장은 계속되는 상황에 환멸을 느꼈다.

헌터들을 전쟁 병력으로 사용하는 건 엄연히 국제법으로 금지된 사항이었다.

하지만 이곳, 아프리카에선 국경 분쟁에 군인 대신 헌터들을 이용하는 것도 모자라, 정부가 나서서 파병을 요청하고 있다.

그 요청에 못 이겨 작전팀을 파견해준 것도 벌써 몇 번째였다.

파견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이번에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보아하니 이젠 아주 뻔뻔하게 나오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만약 국제 협회 지부가 국가 분쟁에 헌터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다른 나라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맨몸으로 던전에 기어들어 가는 게 더 낫겠군.'

브루스 지부장이 고개를 털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헌터를 죄다 전쟁터에 파견하면 토벌은 대체 누가 하라는 거야.'

작전팀이 자꾸 전쟁터로 나가는 통에 작전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미국 지부에서 제이슨 팀장의 뒤를 이어 통제팀장을 맡은 지 불과 2개월.

국제 협회 본부에서 지부장을 맡아보겠냐고 했을 땐 웬 떡이냐 싶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이런 곳으로 오게 될 줄이야.

계속되는 분쟁, 토벌 인프라는 전 세계 최하위.

통합 지부인 탓에 토벌 범위는 말도 안 되게 넓은데,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작전 인원.

심지어 그마저도 계속해서 전쟁터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본부는 아예 손을 놓은 건지, 그 어떤 지원도 해주지 않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미국에 남아 있는 건데....'

브루스 지부장은 이를 으득 씹었다.

"저… 지부장님."

그때, 케일럽 비서실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외부 업체에 의뢰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외부 업체?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 한국에서 던전 민영화로 민간 토벌 기업들이 생겨났답니다. 그쪽이랑 한 번 얘기를 해보는 건...."

"명색이 국제 협회 지부가 검증도 안 된 민간 기업에 토벌을 맡기자고? 미쳤나!"

비서실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브루스 지부장은 코웃음을 쳤다.

무엇보다 본부는 현재 한국 협회를 굉장히 안 좋게 보고 있지 않은가. 뭐,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상황에 한국에서 외부 업체를 들이자니,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였다.

"그런 거 가릴 처지가 아니잖습니까. 제가 알아보니까 진짜 괜찮은 기업이 하나 있습니다."

"기업이 그래 봤자 기업이지. 체계도 없이 그냥 돈만 처발랐을 게 뻔한데."

"아닙니다. 혹시 김준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한국 협회에서 청소부 출신으로 작전 본부장까지 간...."

당연히 브루스 지부장 또한 들어본 적 있다.

자신의 선임이었던 제이슨 통제팀장이 그의 손에 잘려 나갔는데 모를 리가 없지.

"지금 한국에서 명실공히 1위 기업이 그 김준우가 대표로 있는 곳입니다."

"...."

순간 브루스 지부장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준우랑 같이 한국 협회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멤버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작전, 지원, 통제, 모두 한 나라의 협회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고요."

"...."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만 맡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전쟁이 오래갈 것 같지도 않은데."

"본부가 알면 가만히 안 있을 걸세."

"비밀로 하면 되죠."

브루스 지부장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대로 한참을 고민하길 잠시.

"회사 이름이 뭐라고?"

"카르마 코퍼레이션입니다."

"후우...."

브루스 지부장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연락해봐."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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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 미래민주당 정훈 의원 집무실.

"뭐…?"

이른 아침, 귀를 의심케 하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하성태가 잘려 나갔다고?!"

"그렇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김준우 대표 이사 해임 주총이 불과 어제 소집되지 않았던가.

과반도 확보했으니 문제없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카르마 코퍼레이션 지분의 과반을 맞추려고 본인의 한별 던전 지분을 무리하게 팔았다나 봅니다. 김준우 쪽에선 그 틈을 노리고...."

"허!"

기가 찬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고작 해봐야 신생 청소 업체 주제에 빈집털이를 했다고?

그것도 국내 1위 기업의 계열사를 상대로?

'아니, 하덕수 회장은 그걸 보고만 있었던 건가....'

정훈 의원의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대기업을 상대로 빈집털이를 계획한 김준우였다.

단순히 주식 시장을 예측하는 정도론 어림도 없다.

모든 걸 철저하게 의도하지 않은 이상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작전이다.

아니, 설령 본인이 모든 걸 예측했다고 해도 주변 사람이 믿어줄 리가 없다.

그런데 과반의 백기사들이 김준우의 말만 믿고 수십억을 태웠다고?

'미친놈이다. 완전 미친놈이야....'

사람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놈만큼 무서운 인간은 없다.

그건 기업인도, 정치인도 마찬가지.

정훈 의원은 진심으로 김준우가 정치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놈이 잘렸으면 내가 받을 건 어떻게 되는 거지?'

법안을 밀어주는 대가로 한별 건설이 개발 중인 신도시 땅을 약속받지 않았던가.

당장 현물화해도 수십억짜리 노다지인데… 이걸 그냥 포기해야 하나?

'흐음....'

정훈 의원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선택을 굳혔다.

그래, 포기하자.

하성태가 잘려 나간 마당에, 괜히 무리해서 받으려고 하다간 자신까지 꼬리를 밟힐 수도 있다.

정말이지 너무나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개털 된 놈이랑 붙어먹어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을뿐더러, 당장 몇 푼에 위험을 감수할 만큼 멍청하진 않다.

크게 봐야지, 크게.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누, 누구십니까…?"

"어어?! 자, 잠시만요!"

"막 들어가시면 안 되는…!"

쿵―.

갑자기 집무실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이내 문을 열고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정훈 의원 앞에 신분증을 내밀었다.

"서울중앙지부 검찰청에서 나왔습니다. 정훈 의원님 맞으십니까?"

정훈 의원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예, 맞습니다만."

"뇌물수수 혐의로 압수 수색 영장 발급되었습니다.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예?"

이내 청천벽력 같은 말이 들려왔다.

***

종로,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업무를 보던 중,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쥐 잡듯 털리고 있으려나....'

뭐, 증거들은 꼭꼭 숨겨놨겠지만 결국 시간문제다.

조만간 정훈 의원에 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겠지.

정훈 의원과 하성태 본부장이 오랜 기간 붙어먹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둘의 관계는 꽤나 돈독했었으니까.

물론 그들의 꼬리가 잡힌 건 훨씬 나중 일이었지만... 뭐, 몇 년 빨리 잡힌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감방도 빨리 갔다 나오고, 더 좋지 뭐.'

그래서 야당인 바른통합당에 슬쩍 제보를 넣었다.

당연히 단번에 믿어주진 않았지만, 그동안 받아 챙긴 부동산과 현금의 구체적인 액수를 읊어줬으니 안 믿곤 못 배겼을 거다.

뭐, 나머진 그들이 알아서 움직여 주겠지.

'사실 정훈 의원까지 건드릴 필요는 없긴 했는데.'

내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것도 없고, 무엇보다 굳이 적을 만들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관계를 맺고 있는 하성태가 마음에 걸렸다.

그놈은 아무래도 위험하다.

이래 봬도 한별 그룹 총수의 장손이 아닌가.

재기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놈일뿐더러, 만약 재기에 성공한다면 물불 안 가리고 나를 물어뜯을 놈이다.

그러니 애초에 다신 기어오르지 못하게 밑바닥까지 털어놓을 필요가 있다.

뭐, 가뜩이나 이번 싸움으로 돈도, 자리도 잃은 마당에 그의 조부인 하덕수 회장과 그의 조력자인 정훈 의원까지 모두 본인 곁을 떠났으니....

이젠 그냥 이빨 다 빠진 호랑이 새끼 신세겠지.

이젠 내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겠구먼.

"좋은 소식!"

그때, 이아영 이사가 들이닥쳤다.

"드디어 해외 협회에서 연락이 왔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그녀가 자료를 책상에 턱 내려놨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도 잠시, 눈앞의 자료에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프리카 통합 지부?"

"네."

"거긴 국제 협회 소속 아닙니까?"

"그렇긴 하죠."

...감이 떨어진 건가?

국제 협회 소속을 다짜고짜 건드리면 어쩌자는 건데.

"아니, 국제 협회 지부를 물어오면 어떡합니까. 우리가 인수할 수 있는 곳을 찾아와야죠."

볼멘소리를 했더니 이아영은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아보니까 그게 좀 애매해요."

그리곤 자료를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프리카 쪽은 원래 사정이 그나마 괜찮은 나라들 중심으로 소규모 독립 협회만 몇 군데 있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사실 말이 독립 협회지, 민간 길드보다 못한 수준이었죠. 그런데 작년쯤에 국제 협회가 중앙아프리카 쪽 협회를 싹 통해서 통합 지부를 세웠잖아요."

뉴스로 보도되진 않았지만, 업계 사람이면 다 아는 이야기다.

근데 그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거지?

"그런데… 그게 다예요. 본사에서 지부장이랑 관리직 몇 명만 파견 보내고 신경을 끈 지 오래라고 하네요."

"신경을 껐다고요?"

"네. 굳이 돈 들여서 통합해놓고 손을 놨다는 게 저도 좀 의아하긴 한데.... 뭐 아무튼 그런 실정이에요. 그래서 작전 인원이랑 장비도 다 자체적으로 충당하고 있다고 하고요."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단순히 봐선 돈과 인력 낭비로밖에 안 보이는데.... 혹시 무슨 다른 목적이라도 있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해외 지부 상황 좀 알아둘걸....'

회귀 전엔 관심이 없었던 일인지라 가진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하긴, 그땐 랭크 업에만 신경이 팔려서 주변 상황 따윈 관심도 없었으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자체 토벌이 힘든 모양이에요. 뭐, 그러니까 저희한테까지 연락이 왔겠죠."

"그쪽 지부장은 우리랑 국제 협회 관계에 대해선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슬쩍 한 번 떠봤는데 그쪽 지부장은 본사랑 저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고, 무엇보다 PB 코퍼레이션 쪽이랑은 아예 관련이 없는 모양이에요."

"자리만 지키고 있는 말단이라는 소리군요."

"저, 그래서 말인데요."

이아영 실장이 넌지시 말을 이었다.

"국제 협회가 아예 손을 뗐다고 하면... 우리가 빼앗아 올 수 있지 않을까요?"

"...."

꽤나 과격한 발언에 나조차 흠칫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국제 협회 지부라고 해도 어쨌든 임시가 아닌가.

마음만 먹는다면 못 뺏어올 것까지야 없다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진 않은데.'

대놓고 선전포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묘하게 구린 냄새가 너무 난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일단 조금만 더 생각해봅시다."

"네?! 어렵게 연락 온 곳인데 왜요!"

"우리만 들어가기엔 명분이 부족하잖습니까."

"명분이요?"

"고작 해봐야 토벌 지원해주는 회사가 갑자기 국제 협회를 탈퇴하고 한국 협회로 오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 안 하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설령 인수해도 문제입니다. 당연히 국제 협회 본부 귀에 들어가게 될 텐데, 그러면 제가 움직였다는 것도 알게 되겠죠.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럼 뭐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열심히 준비해왔는데 어떻게 뻰찌를 놓을 수 있냐는 듯한 반응이다.

"뭐 어떻게 하자는 건 아닙니다. 인수합병을 제안할 만한 명분이 있으면 좋겠다는 거지. 예를 들면... 비슷한 목적이 있는 다른 회사가 우리랑 같이 움직여 준다거나?"

여러 관계가 얽히기 시작하면 사람은 본인에게 더 이득이 되는 상황을 찾기 마련이다.

우리 회사와 국제 협회,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여러 조직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굳이 우리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더 이득이 되는 쪽에 붙을 거다.

무엇보다 다른 회사가 전면에 나서준다면 우리가 하는 짓도 그나마 눈에 덜 띌 테고.

'뭐, 그런 구실 좋은 회사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이대로 진행하긴 좀 그러니 일단 보류해둬야겠지.

"...알았어요."

"기분 상한 건 아니죠?"

"제가 왜요? 어차피 결정은 당신이 하는 건데."

표정부터 어떻게 하고 말하지.

"아, 그리고 오늘 손님이 오시기로 했어요."

"…예?"

손님?

그런 약속이 있었나.

아니 뭐 얼마나 대단한 손님이길래 사전 스케줄 상의도 없이 찾아오는 거지.

...라고 생각하기도 잠시.

똑똑―.

"벌써 오셨나 보네요."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문을 열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 회장님?"

한별 그룹 총수, 하덕수 회장이었다.

"앉게."

인사도 생략한 채 던진 첫 마디.

그는 내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앉곤 나와 눈을 맞췄다.

70은 넘은 노인임에도 박인범 협회장과 견줄 정도의 카리스마를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회장님이 여기까진 어쩐 일로...."

"내 장손을 쫓아낸 사람이 어떤 놈인지는 한 번 봐야 하지 않겠나."

"...."

서슬 퍼런 눈빛이 나를 관통했다.

설마 이제 와서 지난 일을 물고 늘어질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근데 먼저 손을 뗀 건 본인 아닌가?

"하하. 농담일세. 그냥 개인적으로 대화를 좀 하고 싶었네. 제안하고 싶은 것도 있고."

"...."

어째 성격까지 박인범 협회장이랑 비슷한 느낌인데.

"듣자 하니 청소부 출신이었다지?"

"예… 그렇습니다."

"청소부에서 4개월 만에 한국 협회 작전 본부장. 두 달 만에 사퇴 후 청소 업체 설립. 그리고 석 달 만에 대기업 계열사를 흡수...."

그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응시했다.

"뭐, 나도 고물상으로 시작한 입장이니 출신 가지고 뭐라 할 생각은 없네만, 자넨 상식을 벗어나도 아득히 벗어났군."

"전 그저 흘러가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농담도 심하군.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 저번 주총에서 그런 도박 수를 던졌나? 만약 내가 그 자리에서 성태 손을 들어줬으면 어쩌려고?"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기업의 총수이자 조부가 지켜보는 곳에서 손자를 대놓고 잘라내려고 한 건 도박도, 운에 맡긴 것도 아니었으니까.

"기업의 최고 자산은 직원이다."

"...뭐?"

"회장님께서 평생을 해온 말씀이잖습니까. 그런 분께서 구설에 휘말린 계열사를, 아무리 장손이라고 편들어줄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작 그거 하나 믿고 수십억을 태운 건가?"

"그거 하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전생에서도 하덕수 회장은 한국에 두 번 없을 인격자로 유명했다.

하루가 멀다고 미담이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무엇이 아쉽다고 거하게 사고를 친 손자를 도와주겠는가.

"하하… 하하하! 역시, 성태 그놈이랑은 그릇부터가 달라."

"과찬이십니다."

"아니, 난 오히려 지금까지도 자네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나 보네. 아주 마음에 드는군. 뭐, 그래서 말인데...."

이내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퍽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나와 사업 하나 같이 해볼 생각 있나?"

"...."

꽤나 당황스러운 제안에 잠시 대답을 아꼈다.

대기업 총수가 자신의 계열사를 빼앗아간 장본인한테 동업을 제안한다고? 대체 왜?

"어떤 사업인지 먼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핵심부터 말하자면, 아프리카 통합 지부와 전속으로 아이템 수입 계약을 따내는 걸세."

"...."

뭐지?

여기도 아프리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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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회장님 말씀은... 아프리카 통합 지부와 전속으로 아이템 수입 계약을 체결해서 국내 토벌 시장에 납품하자는 거군요."

"맞네.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민간 토벌 사업 때문에 만들어진 작전팀만 해도 100개가 넘네. 이게 고작 일주일 만에 이 정도니 앞으로는 더 늘어나겠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대충 감이 왔다.

민간 작전팀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지만, 그에 비해 무기와 장비 그리고 아이템의 수요에 비해 공급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

그런 상황에 한별 그룹이 국내 아이템 납품을 독점한다면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릴 수 있겠지.

"그래서, 정확히 어떤 아이템을 계약하시려는 겁니까?"

"'프렉탈'이라고 들어봤나?"

당연히 들어봤다.

A랭크 이상의 무기를 만들 때 반드시 필요한 아이템이지만, 매장지가 매우 한정적이어서 굉장히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듣자 하니 콩고 민주 공화국 인근이 프렉탈의 최대 출토지라고 하더군. 우리 목표는 그 프렉탈의 독점 수입 계약일세."

말은 쉽지.

저게 대기업 총수의 마인드인가.

"그런데… 이미 한별 종합 상사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굳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물론 이런 일은 한별 상사가 전문이긴 하지만, 이번 일은 그들만으로는 좀 힘들 걸세. 아프리카 통합 지부가 상황이 매우 안 좋거든."

순간 아프리카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곧 그 이야기가 하덕수 회장 입에서 흘러나왔다.

"반복되는 내전에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토벌 인원은 부족하지, 정부 개입은 심하지.... 무엇보다 분쟁 지역을 중심으로 아이템 밀거래가 성행한다는 소문도 있고."

그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안정적으로 아이템을 납품하기 위해선, 통합 지부가 꾸준하게 아이템을 채굴할 수 있어야 해.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안정적으로 토벌할 수 있는 상황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런데 지금 그쪽 상황으로선 안정적인 토벌은 불가능하겠죠."

"맞네. 그래서 지부 상황을 먼저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어. 그리고 그건...."

"저희가 전문이죠."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다.

"그럼 저희가 얻는 건 뭡니까?"

"국내 아이템 납품 매출의 10%."

생각보다 조건이 굉장히 파격적인데.

"어떻게, 해볼 건가 말 건가?"

"흐음."

이아영 이사를 슬쩍 보았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알아서 하라는 의미인 듯했다.

물론 하덕수 회장의 제안은 확실히 구미가 당긴다. 애초에 내가 원하던 명분과도 딱 맞아떨어졌다.

아프리카 통합 지부와 아이템 수입 계약을 체결해서 국내에 납품하는 것.

이를 위해선 지부의 토벌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안정화하고 더 나아가 한국 협회로 뺏어올 수 있느냐인데....'

나 혼자 인수를 진행하는 것보다 대기업이 사업을 명분으로 인수를 제안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긴 하다.

무엇보다 본부가 손을 뗀 상황에서 대기업이 내민 손을 잡는 것 정도야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니까.

기업이 직접 나서서 진행한 계약이라고 하면 국제 협회도 뭐라 할 말은 없겠지.

생각을 마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일정은 최대한 빠르게 잡도록 하게. 우리 쪽에서 한 명을 붙일 테니, 자네 쪽에서도 한 명 데려오도록 하고. 비용은 모두 지원하겠네.

"알겠습니다. 준비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게."

하덕수 회장은 그 말을 끝으로 쿨하게 사무실을 나섰다.

***

강남 어느 바.

점심부터 술을 퍼마시던 하성태는 이미 거나하게 취해있는 상태였다.

'빌어먹을 새끼들....'

테킬라 병을 부서지라 쥐며 중얼거렸다.

상황이 이렇게 됐어도 정훈 의원에겐 값을 치를 생각이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주식을 모두 매각한다면 약속한 대가를 주는 건 문제가 없었다.

아니, 사실 약속한 것보다 더 줄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올라가기 위해선 계속 그의 손을 잡고 있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미래민주당 정훈 의원, 수십억 원대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 소환]

[기업과의 유착 관계 및 뇌물 출처 행방은? 검찰, 본격적인 수사 착수]

갑자기 검찰이 뜬다고?

'대체 왜 나한테만 지랄들이야....'

꼬리가 길면 언젠간 잡힌다지만, 이건 타이밍이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작정하고 고발을 한 것처럼.

하지만 본인과 정훈 의원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병실에 누워있는 아버지와 오재엽 실장밖에 없다.

당연히 의식도 없는 아버지가 정보를 흘렸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오 실장이 이제 와서 본인의 뒤통수를 칠 이유도 없었다.

피차 낙동강 오리알이 된 신세인데, 고발한다고 한들 아무런 이득이 없으니까.

어쨌든 정훈 의원이 잡혀 들어간 이상, 본인 차례가 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조부는 이미 자신에게서 손을 뗐고,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형제들이 도와줄 리도 만무했다.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이다.

'시발…!'

하성태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됐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저 술만 벌컥벌컥 들이켜며 현실을 애써 부정하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톡톡―.

그때,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웬 중년의 백인 여성이 서 있었다.

"하성태 씨?"

"...누구?"

"프랑스에서 작은 사업을 하고 있는 에마 켈린이라고 합니다."

여성은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순백의 배경에 회사 이름과 방금 소개한 이름만이 적혀있었다.

"PB 코퍼레이션…? 처음 들어보는 곳인데."

"그럴 만도 하죠. 그냥 작은 인력 파견 업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런 곳에서 저한테 무슨 볼일로…?"

"음, 단도직입적으로."

여성이 하성태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저희랑 같이 일해 볼 생각 없나요?"

순간 번뜩이는 여성의 눈빛.

사업가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름 끼치는 기세에, 하성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떤 일인지?"

"뭐, 핵심만 말하자면... 중앙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아이템 납품 계약을 따내는 일입니다."

"뭐?"

쉽게 이해하기 힘든 내용에 하성태의 눈썹이 물결쳤다.

이내 여성은 자신의 사업 계획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 말은...."

대략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하성태는 이마를 턱 짚었다.

"국내에서 나오는 아이템을 중앙아프리카 분쟁 지역에 납품하자는 겁니까?"

"그렇죠."

"제가 오해하는 거면 죄송한데... 마치 밀매 사업을 하자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정확히 들으셨네요."

뭐지 이 미친 사람은?

"물론 아프리카 지역의 아이템이 훨씬 가치는 높지만… 그쪽은 지금 제대로 된 토벌을 못 하는 상황이라서 말이죠. 한국의 아이템이라면 충분히 수요가 있을 겁니다."

"잠깐, 잠깐만요. 지금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 제가 이래 봬도 한국에선...."

"한국에선 어떻다는 거죠?"

여성이 하성태의 말을 끊으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한별 그룹 오너의 손자, 한별 종합 상사의 영업본부장이었지만 민간 토벌 사업을 추진하려다 웬 청소부 출신한테 밀려나지 않았던가요?"

"...?!"

"더불어 조부에게는 손절 당하고, 친구였던 정치인은 잡혀가고. 지금은 자리도, 명예도, 돈도 모조리 뺏겨 가진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 이런 데도 아직 당신이 한국에서 뭐라도 좀 되는 것 같나요?"

"지금 싸우자는 겁니까…!"

"설마요. 난 지금 당신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는 거예요.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뇌물수수 혐의로 잡혀갈 텐데, 그럴 바엔 차라리 뭐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나요?"

"...."

여성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말이지 기분 나쁜 솔직함이었지만, 하성태는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이내 그는 힘이 쭉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이젠 가진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에 조만간 철창신세일 겁니다."

"만약 저랑 손을 잡는다면 지금 당신 혐의, 풀어줄 수도 있는데요."

"뭐요…?"

"뭐, 그건 차차 얘기하고. 대신 조건이 있어요."

이내 여성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아무것도 없는 당신에게 이런 일을 제안하는 건, 당신에게 한별 상사가 있기 때문이에요."

"무슨 소립니까. 전 한별 상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거긴 아직 아버지가...."

말을 하다 말고 하성태가 흠칫했다.

설마 하는 눈빛으로 여성을 바라봤다.

"특별한 유언장 없이 당신 아버지가 사망할 경우, 장남인 당신이 경영권을 주장할 수 있지 않나요?"

"당신 설마...!"

"처리는 저희 쪽에서 해줄게요. 당신은 한별 상사를 가져오기만 하세요."

소름 끼치도록 무덤덤한 목소리.

하성태는 자기도 모르게 다리가 덜덜 떨려오는 걸 느꼈다.

***

"웨슬리. 나야."

영입을 마치고, 먼저 바를 나온 에마 대표가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를 받은 이는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동업자. 동시에 현 국제 헌터 협회 사무총장, 웨슬리였다.

「어떻게 됐어?」

"괜찮은 놈으로 물었어."

「다행이네.」

"그런데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가. 아프리카 지부 말이야. 왜 굳이 돈 들여서 통합해놓고 손을 뗀 거야?"

「돈이 안 되니까.」

"음?"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곳에 매장되어 있는 프렉탈만 해도 어마어마한 양이지 않은가. 돈이 안 될 것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곳이면 처음부터 건들지 않았을 것이다.

「뭐, 정확히 말하면 다른 곳이 더 돈이 되니까? 그쪽은 분쟁이 심해질수록 우리한테 더 이득이 되거든.」

"글쎄, 네가 정말 돈만 보고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닐 텐데."

「하하, 눈치가 빠르네.」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이 말을 이었다.

「옛날에 그런 음모론이 있었어. 혹시 들어봤나 모르겠네. 어느 강대국이 눈엣가시였던 타국을 합법적으로 침략하기 위해 자국 시민을 상대로 위장 테러를 펼쳤다는....」

"...."

무슨 소린가 싶기도 잠시.

"하! 하하하!"

이내 그녀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것 때문이었나.

그래서 본인에게 직접 부탁한 건가.

"명분이 필요하다 이거지? 우리가 전 세계 토벌권과 헌터를 관리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명분."

「그렇지.」

"좋아, 마음에 들어. 이런 거라면 확실히 우리 쪽 애들한테 맡기기도 뭐하네."

에마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김은 만나봤어?」

"아니. 시간이 없더라고."

「그래도 한국까지 갔는데, 얼굴이라도 한번 봐두는 게 어때. 나름 밸런스 팀 한국 파트를 해체 시킨 원흉인데.」

"뭐, 상황 좀 지켜보고."

에마 대표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보고 싶지 않아도 언젠간 또 볼 테니까."

이내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

"그럼 이걸로 정기회의를 마칩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월말 정기회의.

청소팀, 작전팀이 모두 모인 그 자리가 끝이 나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김민주와 한유빈 그리고 이아영은 자리를 지켰다.

김민주가 먼저 운을 뗐다.

"선생님은 이번에 아프리카 통합 지부로 가신다면서요?"

"네. 상황이 어려운지, 그쪽에서 먼저 토벌 지원 제안이 오더라고요."

이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자 한유빈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거긴 국제 협회 지부 아닌가? 사이도 별로 안 좋은데 왜 굳이 거기로 간대."

"뭐, 그렇긴 하죠. 대표님도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원래는 거절하시려고 한 것 같은데… 한별 그룹에서 손을 내밀어서요."

"한별 그룹?"

"토벌 지원이랑 그쪽이 원하는 일이랑 이해관계가 겹치기도 하고… 딱히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흐음, 한유빈이 팔짱을 끼곤 고개를 끄덕였다.

"통합 지부가 있는 곳이면... 콩고 민주 공화국이죠?"

"네."

"분쟁 지역인 곳이라 꽤 위험할 텐데...."

김민주가 눈치를 살피며 슬쩍 말을 이었다.

"누구를 데려가실지 궁금하네요."

그 말에 회의실엔 순식간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아영 이사는 순간 흠칫하는 반응이었고, 한유빈은 슬쩍 김민주와 이아영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그들이 진심으로 경쟁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김준우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리라.

김준우가 혼란스러운 곳에 함께 데려간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이내 이아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참고로 전 업무 때문에 못 갈 것 같고요. 아마 둘 중 한 분이지 않을까 싶은데."

"...."

"...."

김민주와 한유빈이 서로를 힐끔거리길 잠시.

"어, 마침 다들 모여 계셨군요."

때마침 김준우가 들어왔다.

한꺼번에 쏠린 시선들.

김준우는 무슨 상황인가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유빈 씨, 혹시 다음 주부터 시간 되십니까?"

"...."

그녀가 주변을 훑으며 애써 미소를 숨겼다.

물론 티를 낼 순 없었기에 평소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될 거 같긴 한데... 왜요?"

"그럼 김민주 팀장 대신 토벌 좀 나가주시죠. 저랑 며칠 자리 좀 비울 예정이라서요."

"...!"

개새끼.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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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언제와도 더운 곳이군요."

콩고 민주 공화국, 은질리 국제공항.

게이트를 나서자 한별 종합 상사, 하성일 영업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괜찮으신가요? 제가 물을 좀 사 올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김민주 팀장님은요? 아, 짐은 이리로 주세요.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우린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비행기에서부터 이어진 그의 과한 친절에 불편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모르는 사람 같았으면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딱 잘라 말하기라도 했을 텐데,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마하니 막냇손자를 붙여줄 줄이야....'

하성일 팀장.

하덕수 회장의 막냇손자이자, 내 손으로 날려버린 하성태의 친동생.

악취미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사람을 붙여준 건가.

-그 아이가 나이는 어려도 많은 도움이 될 걸세.

뭐, 하덕수 회장이 그렇게 말할 정도니 믿을 만한 놈이긴 하겠지.

무엇보다 인턴부터 시작해서 본인 힘으로 팀장까지 올랐다고 한다.

언행에도 꽤 매너가 배어있는 걸 보면 하성태와는 궤가 다른 놈인 건 확실하다만.

"지부에서 마중 나오기로 한 직원이 조금 늦는다나 봅니다. 일단 여기 앉아계시면 제가 한 번 연락해보겠습니다."

"아, 예...."

"...."

그래도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네.

하성일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연락을 넣었다.

유창한 영어로 짧은 통화를 마친 직후,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거의 다 왔다고 합니다. 5분 내로 도착할 것 같다네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던 분들이었는데, 이렇게 함께 일하게 되니 너무 긴장되네요."

"아하하… 그렇게 띄워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하 일가 출신이 저러니 더 부담스럽다.

정작 본인은 자각이 없는 모양이지만.

"띄워주다뇨. 이 업계에선 전설적인 두 분 아니십니까. 동종 업계라고 하긴 뭐하지만, 그래도 던전 관련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죠. 하하하."

"...."

"...."

진심으로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봐서는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이게 재벌의 사회생활인가…?'

넉살이 좋은 건지, 수완이 좋은 건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김민주가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번 일은 팀장님이 더 전문가시니까, 조금 더 편하게 대해주세요. 콩고도 몇 번 와보셨다면서요?"

"아, 네. 출장 차 몇 번 오긴 했지만, 소규모 계약 몇 개 진행한 것밖엔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겠습니까."

그리곤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저 그런데 김민주 헌터님...."

"네?"

"그, 실례인 건 압니다만...."

하성일이 상당히 쑥스러운 표정과 함께 말끝을 흐린다.

그렇게 우물쭈물하기도 잠시.

그는 얼굴까지 붉히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악수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개인적으로 정말 팬이어서... 하, 하하!"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저건.

김민주는 조금 당황한 듯, 날 봤다.

알아서 하라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이자 이내 흔쾌히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짧은 악수를 마치자 하성일은 옛쓰, 하는 표정과 함께 주먹까지 쥐어 보인다.

"많이 컸네. 팬도 생기고."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

그래.

확실히 지 형처럼 구린 놈은 아니다.

형보다 이상한 놈이라는 게 문제지.

"미스터 김 되십니까?"

때마침, 정장 차림의 백인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아, 예.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중앙아프리카 통합 지부장, 브루스입니다."

"반갑습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 김준우입니다."

지부장이 직접 마중을 나온다라....

이거 느낌이 좀 싸한데.

"저쪽에 차를 대기시켜 놨습니다. 바로 지부로 가시죠."

"...."

"...."

브루스 지부장이 주차된 리무진을 가리켰지만, 나와 김민주는 주춤거리며 망설였다.

그러자 하성일 팀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물쩍 대답하곤 김민주를 향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모르니까 이번엔 졸지 마."

"...네."

굳은 각오와 함께 차에 올랐다.

다행히도 우리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콩고 민주 공화국의 수도, 킨샤사.

그 외곽에 위치한 국제 협회 중앙아프리카 임시 통합 지부.

우린 브루스 지부장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 그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 일단 상황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많이 안 좋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 브루스 지부장의 첫 마디였다.

"오죽하면 국제 협회 지부가 외부 기업에 지원을 요청하겠습니까. 어느 정도는 상정하고 왔습니다."

"글쎄요. 상정하신 것보다 더 심할 겁니다."

"...."

뭐 얼마나 안 좋길래 벌써부터 밑밥을 까는 거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브루스 지부장이 슬쩍 물었다.

"그나저나 토벌 지원 비용은 어떻게 됩니까? 저희가 사정이 그렇게 좋지 못해서 비용이 너무 크면...."

"뭐, 기간과 인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번 건에 한해서 비용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약금 포함, 지원 비용은 일절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네, 네?! 정말입니까?"

"예.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브루스 지부장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서렸다.

"...말씀해보십시오."

"만약 저희 쪽 토벌 지원으로 추후 안정적인 토벌이 가능해진다면, 한별 상사와 프렉탈 독점 수출 계약을 약속해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니까... 프렉탈을 당신들에게 독점 납품하는 조건으로 토벌 지원을 해주겠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흐음...."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지길 잠시.

이내 옆에 있던 비서와 짧게 대화를 하던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어차피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니까요."

생각보다 쿨하게 받아들이는군.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제 작전 현황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러죠."

브루스 지부장은 비서에게 손짓했고, 그가 서류를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서류를 확인하던 도중, 나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선생님, 이거...."

김민주 또한 이상한 점을 한 번에 눈치챈 듯했다

"네가 봐도 말이 안 되지?"

"네. 이 수치가 나올 수가 없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통합 지부에 소속된 작전팀은 총 43개.

작전 구역이 중앙아프리카 전체인 걸 감안했을 때 그리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부족한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어째선지 전체 토벌량이 그에 한참 못 미치고 있다.

수치로 따지자면 잘 쳐줘 봐야 10개 작전팀 수준.

물론 급하게 통합한 임시 지부이고 부족한 인프라와 지원, 주변 상황 때문에 원활한 토벌이 힘들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이 정도 작전팀으로 이런 토벌량은 말이 안 된다.

"브루스 지부장님."

결국, 내가 입을 열었다.

"작전팀, 정말 이 인원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확실히 말씀해주셔야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작전팀이 43개나 있는데 월평균 토벌량이 300개라니. 한 개 작전팀이 월 10개도 토벌 못 하는 수준 아닙니까."

"...."

그가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국경 분쟁이 한창입니다. 내전도 종종 일어나고 있고요."

"...그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작전팀 소속 헌터 중에 그쪽으로 빠지는 인원이 많습니다."

"...네?"

"파병을... 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미친...!"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헌터를 전쟁 병력으로 쓰고 있다고?

그것도 단순 분쟁도 아니고, 국가 분쟁에서?

이래서 그렇게 밑밥을 깔았던 건가.

'진짜 미치게 돌아가고 있군.'

충격도 잠시.

회귀 전 기억을 되짚어봤다.

그때도 분명 임시 통합 지부는 존재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분명 언젠간 꼬리가 잡혀도 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임시 통합 지부가 헌터를 파병했다는 보도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대신 다른 보도는 들은 적이 있지만....

'일단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나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거… 국제 협회 본부는 알고 있습니까?"

"모를 겁니다. 알았으면 제가 아직도 여기 앉아있지 못했겠죠."

말하는 거 봐라.

지부장씩이나 돼서 사태 심각성을 모르는 건가?

"설마 당신이 직접 내린 결정은 아니겠고, 누가 지시한 겁니까?"

"콩고 정부에서...."

"쯧."

그럼 그렇지.

"명색이 국제 협회 지부인데, 정부 간섭을 받는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냥 무시하면 안 됩니까?"

"저희는 한 국가에 소속된 지부가 아닙니다. 중앙아프리카 전체를 토벌해야 하는데, 파병 요청을 거절하면 정부에서 출국 허가를 내주질 않습니다."

"예? 그럼 주변 국가 토벌은 어떻게 합니까?"

"콩고 정부는 당연히 나 몰라라 하는 입장입니다. 그것 때문에 분쟁이 더 악화하였고요."

"후우...."

시발 귀찮게 돌아가네, 진짜.

내가 토벌 지원하러 와서 국가 분쟁까지 해결해줘야 해?

'지금이라도 그냥 엎을까…?'

짧은 순간 수백 번도 더 고민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반쯤 포기하고 있던 그때.

"뭐,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진행하도록 하죠."

대뜸 하성일 팀장이 입을 열었다.

"저,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

"...."

화색을 띠며 감사를 전하는 브루스 지부장과은 다르게, 나와 김민주는 굉장히 어이가 나간 채였다.

아니, 여기서 니가 왜 나서?!

***

"하아...."

이야기를 마치고 복도로 나오자마자 한숨부터 쏟아냈다.

명색이 기업가 후손이라는 놈이 그걸 고민도 없이 받아버린다고?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호, 혹시 제가 실수한 건가요?"

죽을상을 짓고 있자, 하성일 팀장이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

그걸 몰라서 묻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애써 분을 삭이며 대답했다.

"최소한 고민은 해볼 사항이었습니다. 정부와 주변국 상황까지 얽혀있어서 저희끼리 해결하기엔 역부족이고요."

"아… 죄,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

그러더니 이내 변명을 늘어뜨린다.

"저, 저는 그냥 콩고 정부에 파병 요청을 중지해달라고 하면 다 해결되는 문제가 아닐까 해서...."

"중지해달라고 해서 들을 것 같았으면 저희를 불렀겠습니까?"

"새, 생각이 짧았습니다. 사실 제가 콩고 정부랑 연이 좀 있어서 어떻게든 될 줄 알았는데... 너무 자만했나 봅니다."

"...뭐라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출장 차 콩고에 몇 번 온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때 콩고 정부와 토벌 장비 납품 계약을 하면서 그쪽 높은 분들이랑 친분을 좀 쌓았는데...."

"하성일 팀장님."

"네, 네."

"앞으로 그런 건 좀 미리미리 말합시다."

이래서 하덕수 회장이 도움이 될 거라 했던 건가?

빌어먹게 마음에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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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콩고(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국회의사당.

통합 지부가 건설된 이후, 이곳저곳에서 몰아치는 반발 때문에 기자는 물론 거물급 인사들에게도 쉽게 면담 허가를 내주지 않는 상황이었다.

헌데 외국인이 버젓이 있으니 주변 시선이 쏠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후우....'

하성일 팀장은 한 정당의 사무실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김준우 대표와 김민주 헌터는 따라오지 않았다.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방문한 거라 혼자 가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맞는 말이었지만 한편으론 한별 상사와 카르마 코퍼레이션, 두 회사의 사업이 모두 본인에게 달렸다고 생각하니 평소와 달리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김준우 대표와 김민주 헌터를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았고.

똑똑―.

마음을 다잡곤 조심스레 사무실로 들어섰다.

"성일! 마이 프랜드!"

40대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세드릭 상원 의원.

현 대통령과 총리를 배출한 당 소속으로, DR콩고에선 꽤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세드릭! 잘 지냈어?"

"물론이지. 킨샤사엔 언제 온 거야?"

"어제 도착했어."

"그럼 바로 연락을 했어야지!"

"그래서 이렇게 왔잖아?"

세드릭 의원이 소리 내어 웃었다.

퍽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하성일 팀장이 자리에 앉자 세드릭 의원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때 계약 덕분에 이렇게 출세했지 뭐야. 아직도 고맙게 생각해."

"무슨 소리야. 좋은 조건으로 받아줘서 내가 더 고맙지."

벌써 5년은 더 된 이야기였다.

콩고가 아직 독립 협회였을 시절, 당시 세드릭은 콩고 협회의 지원팀장이었다.

세드릭은 노후화된 토벌 장비를 교체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가난한 협회와 계약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 한국 협회와 다리를 놔준 사람이 바로 하성일 팀장이었다.

그 계약을 기점으로 세드릭은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 짓도 골치 아픈 게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성일 팀장은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위해 계속해서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때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야?"

"무슨 일이긴. 친구한테 인사하러 온 거지."

"하하하!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긴 한데… 정말 그것뿐이었다면 네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올 리가 없잖아."

하성일 팀장은 입만 웃었다.

그리곤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이 하나 있어."

"그래? 어떤 사업인데."

"통합 지부와 아이템 독점 수입 계약 건이야. 이미 준비도 얼추 끝나긴 했는데, 문제는 계약을 진행하려면 어느 정도 토벌이 안정화될 필요가 있어."

"...."

세드릭 의원의 입가에서 미소가 점점 지워졌다.

하성일 팀장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단번에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세드릭, 당분간만이라도...."

"성일."

세드릭 의원이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널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밖에서 이야기야. 자꾸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곤란해."

"...."

꽤나 신사적인 대답이었지만, 어찌 됐건 명백한 거절이었다.

하성일 팀장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러자 세드릭 의원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성일, 우린 지금 전쟁 중이야. 국제 협회가 지부를 통합하면서 중앙아프리카에 있던 독립 협회들을 모조리 없애버린 건 알고 있지?"

"...물론."

"그때부터 주변국들의 반발이 계속되고 있어. 우간다, 르완다, 앙골라, 잠비아 등등.... 그쪽 협회들이 규모는 작았어도 토벌로 인한 수입은 나름 괜찮았으니까."

영업을 뛰고 있는 입장으로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날이 갈수록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던 상황에 던전 토벌은 그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죽하면 모두가 재앙이라고 하는 던전 출현을, 그들은 하늘의 축복이라고까지 할까.

"그런데 우리가 중앙아프리카의 모든 토벌권을 가져오게 됐으니, 본인들은 먹고 살길이 막혔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군...."

하성일 팀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정이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아무튼, 요즘엔 충돌이 더 격해지고 있어. 지부를 해체하고 다시 토벌권을 돌려주지 않으면 직접 무너뜨리겠다고 하면서. 덕분에 이쪽 피해도 만만치 않고."

"이해가 잘 안 가는데? 통합 지부를 정부에서 진행한 것도 아니고, 국제 협회가 추진한 사항이잖아. 차라리 국제 협회 본부에 직접 항의하는 게 빠를 텐데."

"그럴 용기는 없으니까 괜히 우리한테 화풀이하는 거지."

세드릭 의원이 쯧, 혀를 찼다.

"솔직히 우리도 억울해. 네 말대로 통합 지부를 우리가 세운 것도 아니고, 국제 협회가 멋대로 세운 건데… 피해는 우리만 보고 있잖아."

"국제 협회 본부에 연락해 봤어?"

"당연하지. 그런데 조치하겠다고만 한 게 벌써 1년이야. 주변국은 계속해서 무력 도발을 하는 중이고, 국제 협회는 손을 뗐고. 그럼에도 토벌은 이어가야 하고. 그러니 우리라고 별수 있어?"

세드릭 의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했지만, 하성일 팀장은 포기하지 않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헌터를 파병하는 건 좀.... 본부에 들키면 너희들한테도 위험하지 않아?"

"주변국도 하고 있는 짓이야. 국제 협회도 지부에서 손을 뗀 마당에 들킬 이유도 없고. 아니면 뭐...."

세드릭의 날카로운 눈빛이 하성일을 향했다.

"성일, 네가 국제 협회에 신고할 거야?"

"...농담이 심하네, 세드릭."

"하하하! 미안, 미안."

세드릭은 금세 표정을 풀었다.

"아무튼, 우리 사정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건 성일, 널 위해서도 하는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 나도 어쩔 수 없네."

하성일이 애써 담담한 척을 하자 세드릭이 조심스레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욘 없어. 조금만 기다리면 네 사업도 진행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점점 승기를 잡고 있거든."

세드릭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끌고 가면 주변국만 손해야. 아마 이번 달 안에 항복 선언할걸?"

"그래…? 그건 다행이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성일 팀장은 전혀 다행인 표정이 아니었다.

***

"...역시, 그렇게 됐군요."

통합 지부 내에 마련해준 사무실에서 내 한숨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씀드려놓고...."

"너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김민주가 위로했지만,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러다 이내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래도 그 친구 말에 의하면 분쟁이 거의 소강상태라고 합니다. 앙골라랑 우간다 쪽은 이미 후퇴했고, 현재는 잠비아만 남아 있는데… 그것도 한 달 안에는 끝이 날 것 같다더군요."

"그건 꽤나 의외군요. 주변국들을 동시에 상대하면서 승기까지 굳히다니. 콩고가 그렇게 군사력이 좋았던가?"

"뭐… 지부 소속의 헌터를 죄다 파병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겠죠."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곤란하게 됐네.'

어쨌든 정부가 헌터 파병에 대한 입장을 굽히지 않겠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직접 전쟁에 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전쟁이 끝나면 다시 계약을 진행하는 것이지만....

'이미 계약을 해버렸으니, 쯧.'

좋든 싫든 지원은 진행해야 한다.

혀를 차곤 입을 열었다.

"일단 전쟁이 누그러질 때까지는 우리 쪽 인원으로 최소한의 토벌이라도 진행해봅시다. 너는 이아영 이사한테 연락해서 작전팀 파견 요청해줘."

"몇 팀이면 될까요?"

"대충 다섯 팀 정도면 돼. 아, 청소팀은 파견 목록에서 빼줘."

"네? 왜요?"

"현지 팀으로 꾸리는 게 좋을 것 같거든."

"알겠어요."

인원은 이 정도면 당분간은 될 것 같고.

토벌 장비는....

"하 팀장님. 혹시 한별 상사에서 토벌 장비 지원 가능할까요?"

"한번 연락해 보겠습니다. 뭐, 김준우 대표님이 말씀하신 거라고 하면 바로 될 겁니다."

현재 상황에서는 이 정도면 되겠지.

나머지는 추이를 지켜보고 움직이면 될 거다.

"다들 알겠지만, 분쟁이 끝날 때까진 너무 열 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지부가 최소한으로만 굴러갈 정도면 충분하니까. 본격적인 사업은 그 이후부터 준비하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린 각자의 임무에 착수했다.

곧바로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딱 지부가 유지될 정도의 토벌 가능 인원을 파견했다.

한별 상사 또한 포션을 비롯한 여분 무기, 케어 장비를 곧장 지원해주었다.

그에 맞춰 신규 청소팀 채용 또한 이어졌다.

물론 통합 지부에도 몇 개의 청소팀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본격적인 사업이 시작되면 증원이 필요했기에 미리 신설하는 편이 나았다.

계약직으로 몇 개 팀을 추가로 꾸리고 나서야 나름의 구색은 갖춰졌다.

이를 바탕으로 우린 곧바로 작전에 돌입했다.

***

DR콩고 - 잠비아, 국경 인근.

잠비아 임시 협회, 작전통제팀.

"최근 일주일 새에 통합 지부 상황이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점차 토벌량도 늘어나고 있고요."

공식적인 협회는 아니었지만, 전선은 유지하고 있는 그곳에서 전 잠비아 협회 에녹 통제팀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좋아지고 있다고…?"

보고를 듣던 한 남자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전 잠비아 협회의 총수이자, 현재 국경에서 잠비아군을 지휘하고 있는 사령관.

케네디 협회장이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그쪽도 작전팀을 죄다 이쪽으로 파병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토벌을 하고 있다는 거지?"

"그게… 해외 토벌 지원 업체를 고용했다고 합니다."

"...뭐?"

케네디 협회장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응했다.

우리한테서 멋대로 토벌권을 빼앗아 가놓고 본인들만 살 궁리를 하다니.

빌어먹을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저...."

그때, 에녹 통제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전세가 영 좋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밀리고 있는 상황인데, 저쪽 지부 상황은 점점 좋아지고.... 이대로 가면 저희만 손해를 보는 게...."

나름 일리 있는 걱정이었다.

어떻게든 지부를 무너뜨려 토벌권을 회수하는 게 목적이지만, 이대로라면 지부를 무너뜨리긴커녕 도리어 자국의 상황만 악화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케네디 협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도 믿을 구석은 있으니까."

"...네?"

"어떤 놈들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에게 헌터 전용 무기랑 아이템을 납품해주겠다고 하더군. 그것도 한국제로."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공식적인 협회가 없는데, 헌터 무기를 납품받는 건...."

"암거래나 다름이 없지. 그런데 뭐, 우리가 지금 물불 가릴 처지인가?"

에녹 통제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보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한국이지 않은가.

세계 최정상급 토벌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그들이 무기를 납품해준다면, 이 불리한 전세도 역전시킬 수 있었다.

"어쨌든 그쪽에서 이번 주 안으로 계약하러 온다고 했어. 그때까지만 버티자."

"...."

"그리고 무기만 받으면 이번에야말로 킨샤사까지 진격해서 통합 지부를 무너뜨린다."

굳은 결의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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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 지원 현황은 무난했다.

여전히 내외적으로 어수선했고, 여전히 정부 간섭도 심했지만.

다행히 외부 업체 입장이라 상대적으로 영향이 덜했다.

덕분에 일주일 새에 토벌량도 조금씩 상승했다.

덩달아 지부 상황도 보다 안정화되었다.

물론 아직 적자에 허덕이는 중이지만.

'토벌도 제대로 못 하고 파산 일보 직전이었던 거에 비하면 뭐....'

분쟁만 끝난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수준이다.

곧바로 분쟁이 끝나는 시기에 맞춰 주변 국가 던전 토벌에 착수할 수 있도록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중요한 시기에.

하성일 팀장에게 뜻밖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갑작스레 전화를 받은 하 팀장이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 어.... 알았어. 나 지금 출장 중이라서 조금 걸릴 거야. 최대한 금방 갈게."

전화를 끊고는 가장 먼저 나와 김민주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먼저 물었다.

"병세가 악화되신 겁니까?"

"글쎄요. 자세한 건 저도 잘...."

그가 황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심경이 꽤나 복잡한 듯 보였다.

"죄송하지만, 잠시 한국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러시죠. 이쪽 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 잘 정리하고 오십시오."

"네, 네. 감사합니다."

하 팀장은 그렇게 인사를 하곤 곧바로 사무실을 떠났다.

"...갑작스럽네요."

둘만 남은 사무실에서 김민주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야."

"하 팀장님도 상심이 크시겠어요."

"글쎄. 그렇진 않을걸."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

사정을 모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하지.

"저 집안 형제들이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거든. 장남인 하성태만 이뻐라 했고, 그 밑으로는 거의 신경도 안 썼다고 하니까."

"...그렇군요."

뭐, 남의 집 사정이야 내 알 바는 아니다만....

'뭔가 찝찝한데.'

뭐랄까,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달까.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열었다.

[(1보) 한별 종합상사 하동배 사장 별세]

[지병 악화? 전문의 曰 '어제까지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하동배 사장의 장녀이자 (주)한별 건설의 하미연 상무, '부검 요청']

아니나 다를까, 벌써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기사 중 신경 쓰이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하성태 전 영업 본부장, 한별 상사 경영권 주장.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겠다', 논란의 세습?]

[하덕수 회장, '원치 않는다'. 하지만 이사회 반응은 '긍정적']

[이사회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는 하성태 전 본부장, 이사회가 갑자기 돌아선 이유는?]

[익명의 해외 투자자, 경영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한별 상사에 '거액 투척']

[하성태 본부장이 물어온 해외 투자자, '정체를 아는 사람이 없어' 하 본부장과 대체 무슨 관계?]

다름 아닌, 하성태의 재기 소식이었다.

'이 새끼 봐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표직에서 해임당하고, 하덕수 회장도 손절한 그가 대체 어떻게?

무엇보다 정훈 의원이 잡혀간 마당에 검찰에 덜미를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을 텐데....

대체 어떻게 꼬리를 자른 거지?

'그보다 이제 와서 한별 상사 경영권을 노린다고?'

나는 기사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익명의 해외 투자자'란 단어에 집중했다.

해외 투자자라니.

시발, 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빽이길래....

"이대로라면 한별 상사는 꼼짝없이 하성태한테 넘어가겠네요."

내 옆에서 같이 기사를 보던 김민주가 말했다.

"그렇겠지."

"설마 우리한테 무슨 문제가 생기진 않겠죠?"

"...뭐, 문제야 있겠어."

어물쩍 대답하며 핸드폰을 내려놨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알게 모르게 불안한 기분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

서울의 한 대학병원, 장례식장.

기자 행렬과 엄청난 조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하성일이 인파에 끼어 헤매고 있자 한 여성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성일아, 여기."

"아, 누나."

그의 누나이자 한별 건설의 상무, 하미연이었다.

"잘 지냈어? 지금 콩고에 가 있다면서."

"어, 사업 때문에 잠깐. 누나는?"

"나야 뭐 늘 그렇지."

하미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짧은 대화 후, 하성일은 하덕수 사장의 영정 앞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그 정도면 오래 사셨습니다.'

미묘한 표정으로 마지막 인사를 전하길 한 차례.

하미연이 다시금 그에게 다가왔다.

"며칠 있다가 갈 거지?"

"정리될 때까지는 있어도 될 것 같아. 대표님도 그러라고 해주셨고."

"김준우 대표랑 같이 일하고 있다면서? 어때, 소문대로 괴팍해?"

"아냐. 좀 딱딱하시긴 하셔도 좋은 분이야."

무겁지 않은 대화가 오가던 그때였다.

"다들 오랜만이네?"

장남, 하성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남매의 시선이 곧바로 그에게 향했다.

물론 시선이 마냥 곱진 않았다.

하미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별 상사 먹었다며? 축하해."

"하하, 고마워."

"대체 얼마나 대단한 빽을 물었길래 그 잘난 이사들을 설득한 거야?"

"그런 분이 있어. 다음에 기회가 되면 소개해줄게."

재수가 없을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말투였다.

사업 시작하자마자 쪽박 찬 지가 얼마나 됐다고 사람이 저렇게 되는 건지.

하미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윽고 하성태 사장의 시선이 막냇동생에게 향했다.

"아, 맞아. 성일아. 내가 이번에 새로운 사업을 하나 시작할까 하는데."

"무슨 사업…?"

"뭐, 해외 납품 건 비슷한 거."

애매한 대답에 하성일 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해?"

"너도 엄연히 한별 상사 소속이잖아. 그런데 종목이 네가 진행하고 있는 건이랑 겹쳐서 말이야. 듣자 하니 이번에 아프리카 지부 계약 건으로 한별 상사에서 장비를 지원받고 있다면서?"

"그런데?"

"그거 이제부터 지원 못 해줄 것 같다고."

"...뭐?"

하성일 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봐도 내 쪽이 돈이 더 되거든. 뭐… 투자자랑 약속한 것도 있고."

"...."

하성일 팀장의 눈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원 사업이 이제야 겨우 안정권에 들어섰다.

그런데 여기서 장비 지원을 끊는다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게 뻔했다.

'이 새끼가 진짜....'

하성일 팀장은 욕지거리를 애써 참았다.

"대체 어디에 납품하려는 건데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야?"

"그건 네가 알아서 뭐 하게."

하성태 사장이 재수 없는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인다.

그리곤 영정사진 흘기길 한 차례,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하성일 팀장은 장례식장을 빠져나가는 그의 등을 가만히 노려봤다.

'미친놈, 대체 뭔 짓을 하려는 거야....'

본인은 누구보다 저 인간의 민낯을 잘 알고 있다.

그룹 총수 자리에만 온 신경이 팔린 놈.

그걸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고 할 놈이다.

그래.

무슨 짓이든 하기 위해서라면 가족도 신경 쓰지 않을 인간이다.

"누나."

묘한 불안감에 그는 자신의 누나에게 물었다.

"혹시, 아버지 부검 결과 나왔어?"

"아, 응. 나왔는데... 직접적인 사인은 호흡곤란으로 인한 산소 부족이라고."

"호흡곤란?"

갑자기 산소마스크가 고장이라도 난 걸까?

'흐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고.

타이밍 좋게 나타난 의문의 해외 투자자. 동시에 곧바로 진행된 경영권 승계.

마치 처음부터 준비한 것처럼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이래선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잖아.'

따르릉―

그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다름 아닌 세드릭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

DR콩고 국회의사당.

"마캄보 인근 국경에서 7차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세드릭 의원의 보좌관이 분쟁 현황을 보고 중이었다.

"피해는?"

"없습니다. 다행히 도발 수준이었고, 저번처럼 전면전으로까진 번지지 않았습니다."

"슬슬 꼬리를 내리고 있구만."

세드릭 의원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전력 차를 생각해보면 오래 갈 싸움도 아니었다. 통합 지부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건 알고 있다만, 이대로 간다면 오히려 잠비아만 더 손해였다.

"이 짓거리도 드디어 끝이 나겠군."

아무리 멍청한 놈들이어도 이득도 없는 싸움을 계속할 리가 없으니까.

"저… 그런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

그런데 보좌관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뭐? 무슨 문제?"

"현재 잠비아 임시 협회에 침투해 있는 저희 쪽 공작원이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보좌관이 잠시 말을 끊곤 목소리를 팍 낮췄다.

"일주일 뒤, 잠비아 임시 협회에서 무기 거래가 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뭐?!"

순간 세드릭 의원이 눈이 동그래졌다.

"무기 거래라니? 공식적인 협회도 아닌데 대체 누가 무기를 납품해준다는 건데?! 중동이야? 아니면 북한?"

"한국… 이라고 합니다."

"...?"

한국에서 불법 무기 거래를 진행한다고?

그놈들이 뭐가 아쉬워서?

"한국에 그럴 만한 곳이 있을 리가...."

"한별 상사가 있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거기가 어떤 기업인데, 암거래 사업을 할 리가 없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요 며칠 움직임이 조금 수상합니다. 최근에 오너가 사망하면서 장남이 익명의 해외 투자자를 등에 업고 경영권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동시에 몇몇 팀의 아이템 납품 건을 중지했다고 하고요."

"...."

그건 확실히 수상하긴 한데.

"만약에 잠비아 임시 협회가 무기를 입수하는 데 성공한다면... 전세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자칫하다간 정말 킨샤사까지 진격해올 수도...."

빌어먹을.

세드릭 의원은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각하. 세드릭입니다."

이번엔 콩고의 우두머리,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잠비아 임시 협회에서 암거래가 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확실한 건가?」

"저희 쪽 요원이 확인한 겁니다. 확실합니다."

「아니, 그니까. 그 요원 말이 정말 확실한 거냐고.」

"...네?"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세드릭의 표정이 팍 굳었다.

「뭐, 그놈 말만 믿고 잠비아에 침투라도 할 생각인가? 가뜩이나 지부 때문에 주변국 시선도 곱지 않은데, 우리 쪽에서 먼저 움직였다가 만약 아니면? 그땐 자네가 책임질 건가?」

"가, 각하!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두면 저희가 위험할 수도...."

「그럼 그때 가서 다시 연락하게.」

뚝―.

세드릭은 이미 끊긴 수화기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 상황에서까지 주변국 눈치를 본다고?

'며칠 전 국제 협회 본부에 다녀온 이후로 좀 이상해지긴 했는데....'

대체 본부랑 무슨 이야기가 오갔길래 나라마저 뒷전인 건가.

'시발, 설마 다 한통속인 건....'

세드릭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나저나 정말 한별 상사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설마 성일도?

일단은 확인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세드릭은 개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친구, 나야."

이윽고 하성일의 대답이 들려왔다.

「세드릭, 무슨 일이야?」

"한별 상사에서 해외 쪽이랑 진행하고 있는 무기 거래, 혹시 네가 담당하고 있어?"

돌려 말할 것 없이 정면으로 물었다.

물론 떠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만약 정말 성일이 추진하고 있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반응이 올 테니까.

「....」

대답이 끊겼다.

그러길 잠시.

「…무기 거래인지는 모르겠는데, 해외 쪽이랑 준비하고 있는 사업이 있긴 해.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지만. 그런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어?」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의심은 기우였다.

확실히, 같은 배를 타고 있는데 쉽게 배신하긴 힘들 거다. 애초에 그만한 이득도 그에게는 없는 상황이고.

"자세히 말해줄 순 없지만… 그 사업이 우리랑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

「...뭐?」

"그래서 말인데, 혹시 네가 막아줄 수 있을까?"

하성일은 망설이던 끝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아.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혹시 급한 거야?」

"상당히. 우리뿐만 아니라, 네 사업도 위험해질 수 있어."

「흠....」

하성일 팀장도 곤란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럼 그 사람이랑 한 번 이야기해보는 게 어때.」

"누구?"

「김준우 대표.」

하성일은 친절히 치트키를 알려주었다.

「그분이라면 어떻게든 해결해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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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콩고, 통합 지부.

한국에서도, 콩고 정부에서도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다.

변수가 있다면 그에 맞춰 빨리 조정을 해야 했지만, 현재로선 아무런 이야기가 없으니 일단 기존대로 토벌 지원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대표님, 하성일입니다.」

그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아, 예. 어떻게 잘 정리하셨습니까?"

「네. 덕분에. 그런데 그....」

하성일 팀장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혹시 소식 들으셨습니까? 저희 형이 한별 상사 경영권을 승계받았다는....」

"예, 기사로 봤습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변경된 부분이 있습니다. 형이 말하길, 저희 쪽 장비 지원을 중지하겠다고 합니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본인이 해외 투자자랑 준비하고 있는 사업이 있는데, 저희랑 종목이 겹친다고....」

"빌어먹을...."

이를 으득 씹었다.

그놈이 뭔 짓을 하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이미 진행 중인 사업까지 건드린다고?

무엇보다 이제 겨우 안정권에 들어섰는데, 여기서 지원을 끊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런데 대표님, 이거 뭔가 느낌이 안 좋습니다.」

"느낌이 안 좋다는 건...?"

「엊그제 콩고 상원의원 친구한테서 연락이 오더군요. 혹시 한별 상사에서 최근 준비하고 있는 사업이 있지 않냐고.」

"...?"

그쪽에선 어떻게 알고?

「듣자 하니 우리 쪽 일이랑도 연관이 있다는 거 보니까… 심상치 않은 일인 건 확실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대표님과 한번 상의해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쪽으론 믿을 만한 분이라고. 아마 오늘 안으로 대표님을 찾아뵐 겁니다.」

"...하아."

어째 점점 귀찮아지는 것 같은데.

「저도 여기서 나름대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 해외 투자자가 누구인지, 대체 무슨 사업을 하려는 건지.」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는 미간을 꼬집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럴 틈도 없다는 듯,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당신이 김입니까?"

이윽고 흑인 남성 하나가 수행원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예, 맞습니다. 혹시 세드릭 상원의원…?"

"성일한테 연락을 받으셨나 보군요."

세드릭 의원은 꽤나 심각한 얼굴로 내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망설이던 사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드릴 이야기는 콩고 민주 공화국 1급 기밀입니다. 다른 곳에 발설할 시 안전을 보장해드릴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1급 기밀이란 단어까지 꺼낼 정도로 중요한 일인 건가.

역시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잠비아 임시 협회에서 암거래 현황이 포착되었습니다. 뭐, 정확히 말하면 예정이지만...."

"예?"

"일주일 뒤에 한국의 어느 업체와 무기 거래가 잡혀 있다고 합니다."

가히 충격적인 소식에 잠시 벙찐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재빨리 머릿속에서 아귀를 맞춰갔다.

"설마… 그 암거래에 한별 상사가 끼어 있는 겁니까?"

"정황상 그렇습니다. 성일한테 확인해보니 마침 그쪽도 몰래 준비하고 있는 사업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것만으로는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한별 상사나 되는 곳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거래를...."

그때,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하성태.

그가 경영권을 쥐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새끼라면 못할 것도 없긴 한데....'

무엇보다 그놈 뒤에 붙어 있는 해외 투자자라는 놈도 꽤나 미심쩍고.

두 가지 요소를 조합한다면 꼭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신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 이야기를 왜 제게 하시는 건지.... 아무리 봐도 외부인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국제 협회 본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고, 상부는 사태 파악을 못 하는 건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세드릭 의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어째 불안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혹시 대표님께서 거래를 막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아."

이럴 줄 알았다.

"듣자 하니 이전 베트남에서도 해외 지부끼리의 분쟁을 해결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아니 그건 저희 사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쪽으로 무기가 흘러 들어가는 순간 전세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심할 경우, 본격적인 전면전에 돌입할 수도 있습니다. 자칫하다간 킨샤사까지 진격해올 겁니다. 당연히 대표님의 사업도 물거품이 되겠지요."

"...."

이렇게 나오시는군.

뭐, 맞는 말이다.

지금이야 우리가 어떻게든 토벌을 이어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이후 프렉탈 수입 계약을 하든 한국 협회로 인수를 하든, 지부가 안정화 되어야 한다.

당연히 그 전에 분쟁이 끝나야 가능한 이야기다.

콩고 주변국이 힘을 얻는 건 우리로서도 달가운 소식은 아니다.

그런데… 그걸 왜 내가 나서서 막아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무슨 심부름 업체야?

이건 애초에 토벌과도 상관없는 이야기잖아.

'해외 나올 때마다 왜 이렇게 귀찮은 일들만....'

해외 기업인에게 적국의 암거래를 막아달라니, 도저히 제정신이 박힌 부탁이 아니다.

나로서도 섣불리 받아드릴 수가 없다.

우리가 콩고를 도와준다는 건 다시 말해 잠비아를 적으로 돌린다는 뜻이니까.

자칫하다간 분쟁에 휘말릴 수도 있다. 사업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지도 모른다.

'...아니야.'

이건 아니다.

아무리 봐도 득보다 실이 많다.

"죄송합니다. 일개 사업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맨입으로 드리는 부탁은 아닙니다. 도와주신다면 돈이든, 자원이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현재 누가,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정보도 없는 마당에 제삼자가 낄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굳이 낄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닌가.

새우가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간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고 만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당신들 사업도...."

"저는 사업가지, 외교관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계속 사업을 감행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더 진행할 수 없다면 여기서 철회하는 게 맞겠죠."

단호하게 말하자 세드릭 의원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았습니다. 하긴, 외국인에게 이런 부탁을 드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하죠."

"이해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세드릭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띠링―.

때마침 하성일 팀장에게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곧바로 그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

표정이 바짝 굳어졌다.

동시에 사무실을 나서려던 세드릭 의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막아드리겠습니다."

"네?"

"거래, 막아드리겠다고요."

국가 분쟁.

암거래 현황.

의문의 사업.

아무리 봐도 내가 낄 이유가 없었다.

최소한 이 문자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 시발....

***

서울, 한별 종합 상사 본사.

하성태 사장은 사무실에서 한참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장례식은 갔다 왔나요?"

익명의 해외 투자자, 에마 대표가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하성태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다녀왔습니다."

"상심이 크시겠어요."

"…짓궂은 농담이군요."

하성태 사장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자, 에마 대표가 입꼬리를 쓰윽 올렸다.

"어떻게, 준비는 잘되고 있나요?"

집무실 책상 위를 손으로 쓸며 그녀가 물었다.

"이능운용검 30자루, 이능운용총기 20정, 마나충전형 스태프 10자루. 기타 클래스 무기 10개씩. 그리고 이능운용중갑 20기에 포션이랑 이능폭탄, 리페어 도구까지 모두 준비해뒀습니다."

"좋아요. 유통 루트는 제가 미리 준비해뒀으니까, 그쪽으로 보내면 될 거고.... 이제 클라이언트만 만나면 되겠군요."

"잠비아행 표는 미리 끊어뒀습니다. 퍼스트 클래스로."

"...이제야 제대로 할 맘이 생겼나 보네요."

하성태 사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엔 솔직히 반신반의했는데… 이렇게까지 저를 도와주시는 분을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뭐, 좋아요."

"저,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그때 하성태 사장이 넌지시 물었다.

"계약금, 정말 제게 80%를 주실 겁니까?"

"문제 있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계약처도 당신이 물어왔고, 유통 루트에 뒤처리까지 맡으셨는데 고작 20%만 가져가신다고 하니...."

"물건은 당신 쪽에서 대준 거니까요. 그리고 사실 저는 사업가라기보다 상황을 만드는 사람이라서. 그쪽이 무기를 가지는 것만으로 제 역할은 다하는 겁니다."

의미심장한 말.

물론 하성태 대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묻진 않았다. 그러는 게 좋다고 여겼다.

에마 대표도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이번 거래만 성사되면 나머진 각자 알아서 해야 합니다. 받은 돈으로 사업 밑천에 보태든지, 아니면 지속적인 거래를 유지하든지."

"벌써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뭐죠?"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인수할 겁니다."

"생각보다 뒤끝이 심하네요."

에마 대표의 비아냥에 하성태 사장은 그저 웃어 보였다.

그렇게 한창 사업 이야기가 오고 갔다.

끼익―

"오, 마침 있었네."

느닷없이 불청객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다름 아닌, 막냇동생 하성일 팀장이었다.

하성태 사장과 에마 대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하성태 사장이 곱지 않은 투로 묻자, 하성일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냥 오랜만에 인사라도 할 겸. 장례식장에선 제대로 얘기도 못 했잖아. 이번에 해외 출장 간다면서? 아, 혹시 이분이 그 말로만 듣던 해외 투자자분…?"

하성일 팀장이 에마 대표를 향해 묻자, 그녀의 표정이 대번에 서늘해졌다.

제삼자에게 정체를 드러내는 건 위험하다.

여기선 그냥 둘러대는 수밖에.

에마 대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먼저 악수를 건넸다.

"반가워요. 작은 파견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똑바로 인사드려. PB 코퍼레이션에 에마 대표님이다."

"...."

이런 시발.

"PB 코퍼레이션? 처음 들어보는 곳인데."

"네가 뭘 알겠어. 앞으로도 우리랑 종종 같이 일할 분이니까 정중히...."

"하성태 씨."

그때 에마 대표의 싸늘한 시선이 하성태 사장에게 꽂혔다.

"거기까지만."

"...네, 네."

여태까지 본 적 없는 표정에 하성태 사장은 크게 주춤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에마 대표는 다시금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형제끼리 이야기 나누시고, 전 이만...."

"대, 대표님? 대표님!"

불러도 대꾸 없이 사무실을 벗어나는 에마 대표.

하성일 팀장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곤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김준우 대표에게 문자 한 통을 넣었다.

「대표님, 그 해외 투자자라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PB 코퍼레이션 대표라는데,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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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 코퍼레이션이 움직이고 있다.

그 소식에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국제 협회 소속인 통합 지부를 내버려두고, 굳이 대립국과 밀거래를 한다?

그것도 당장에 본인들의 지부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나라를?

이건 한 가지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본인들 지부가 외부 세력에 의해 공격당했으면 하는 거지....'

명분이 필요한 거다.

전 세계 토벌권을 국제 협회가 관리할 명분.

그렇다면 지금 상황도 모두 이해가 간다.

굳이 지부를 통합시켜 놓고 손을 뗀 건 일부러 주변국들의 반발을 유도하기 위해서였겠지.

토벌권을 빼앗긴 주변국들은 당연히 통합 지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럼 그때, 그들에게 조금만 힘을 보태주면 된다.

그러면 그들이 알아서 통합 지부를 무너뜨려 줄 테니까.

아마 지부가 공격당하면, 그때 비로소 본부가 움직이겠지.

유감을 표하며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모든 토벌권을 본인들이 관리하겠다고.

'진짜 생각하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빌어먹을 놈들이네.'

이젠 몇 번을 보기도 했는데, 여전히 학을 떼게 만드는 방식이다.

아무튼, 국제 협회가 토벌권 통합에 성공한다면… 그땐 해외 지부 사업이고, 제2의 국제 협회고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다.

외부인 입장으로 국가 문제에 관여한다는 게 여전히 떨떠름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눈치만 보다가 다 날릴 수도 없는 일이다.

일단 무슨 일이 있더라도 거래를 막아야 한다.

"저, 정말 확실한 겁니까? 지금 분쟁을 모두 본부가 유도하고 있다는 게...."

브루스 지부장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잠시 접견실을 나와 김민주와 브루스 지부장을 불렀다.

그리곤 세드릭과 나눴던 이야기를 전달했다. 덧붙여 내가 알아낸 사실도 함께.

물론 PB 코퍼레이션에 관한 이야기는 제외했다.

"확실합니다. 한국에 있는 하 팀장님이 직접 확인한 사항입니다."

"설마 본부가 그럴 리가...."

브루스 지부장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하긴, 자리만 지키고 있는 말단이 국제 협회가 사실 어떤 놈들인지 알 턱이 없을 테니.

충격이라면 충격이겠지.

"거래를 막을 방법은 있나요?"

잠자코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김민주가 물었다.

"있기야 하지. 내가 아니라 한국에 있는 그 사람이 잘 해줘야겠지만...."

"하성일 팀장님이요?"

"하 팀장이 한별 상사가 암거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만 포착해주면 거래 자체를 막을 수 있을 거야."

"그 전에 거래가 성사되면요?"

"그러면...."

방법이 없다.

애초에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문제는 하 팀장이 무조건 증거를 포착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고, 무엇보다 PB 코퍼레이션이 끼어 있다면 민간인인 그 혼자서는 솔직히 위험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 팀장에게 모든 걸 맡기는 건 어렵다.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일단 지금 파견 중인 작전팀,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내."

"...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우리도 강경하게 나가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래하기 전에 다 쓸어버리자."

무기를 쥘 사람이 없어지면 분쟁도 끝나겠지.

***

DR콩고 대통령 관저.

한눈에 봐도 최고급으로 꾸며놓은 그곳에서 한 남자가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콩고 민주 공화국의 대표이자 책임자인 로마나 대통령이었다.

그때, 그의 개인 전화가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로마나 대통령은 화색을 띠며 전화를 받았다.

"아, 사무총장님."

상대는 국제 협회의 웨슬리 사무총장이었다.

「어떻게, 잘 지내고 계십니까?」

"덕분에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조만간 시간 되면 또 한 번 초대하겠습니다.」

"저야 영광이죠."

로마나 대통령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최근 사무총장에게 직접 초청을 받아 국제 협회 본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통합 지부 관리 안건에 할 말이 있나 싶었지만, 사무총장이 전한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충격적인 안건이었다.

물론 로마나 대통령에게 내건 조건 또한 그에 걸맞게 어마어마했지만.

「그나저나… 잠비아와의 분쟁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현재 소강상태입니다. 뭐, 암거래 현황이 포착되었다는 보고가 있긴 했습니다만."

「설마… 관여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무총장님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요. 그냥 가만히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생각입니다."

「다행이군요.」

웨슬리 사무총장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일만 끝나면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를 하나의 협회로 묶을 생각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통합 아프리카 협회의 지부장 자리는 약속대로 로마나 대통령님께 드리겠습니다.」

"하하,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제가 그렇게 큰 자리를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별로 한 것이 없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의를 위해 나라를 바치셨는데, 당연히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하하하...."

로마나 대통령은 입만 웃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 말을 뒤로하곤 전화를 끊었다.

로마나 대통령은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내가 나라를 바쳤다고…?'

웃기고 있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게 누군데.

어차피 자신이 개입하든, 가만히 있든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걸 선택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한 대륙의 지부장은 비교해볼 가치도 없다.

'차라리 잘 됐지, 뭐.'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던 그때.

"각하."

비서실장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뭔가?"

"통합 지부와 계약했던 해외 토벌 지원 업체 말입니다. 모두 본국으로 복귀했답니다."

"난 또 뭐라고. 당연한 거 아니야? 여기 계속 있어봤자 사업 진행도 안 될 텐데."

"그런데... 업체 대표는 아직 남아 있다고 합니다."

"...?"

로마나 대통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째서?"

"자세한 건 아직 파악 중입니다. 다만, 뭔가를 꾸미고 있는 듯합니다."

로마나 대통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듣자 하니 그 업체 대표가 한국에서 꽤 유명한 해결사라던데....

'설마 남의 나라에서 뭔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의 얼굴에 불안감이 서려왔다.

***

잠비아 - DR콩고 국경 인근.

잠비아 임시 협회가 위치한 곳이자, 분쟁 지역에서 불과 5km도 떨어지지 않은 그곳에 도착하자 보초를 서고 있던 헌터들이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여긴 민간인 통제 구역이다. 돌아가!"

대답 대신 주변을 훑었다.

말이 임시 협회지, 건물도 없이 수십 개의 A형 텐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다.

사실상 협회라기보단 캠프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한눈에 봐도 턱없이 열악한 환경.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고장 난 장비와 무기들.

우리를 막아선 헌터들 또한 꽤나 앙상한 몰골들이었다.

여건을 보아하니 여태까지 분쟁을 이어온 것만으로도 기적인 수준이었다.

'나름 마지막 발악이라 이건가....'

한 차례 혀를 차곤 보초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쪽 지휘관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내해주시죠."

"소속부터 밝혀라."

"그것도 당신 지휘관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군."

보초병은 험악한 표정과 함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로 할 때 좋게 합시다. 남의 나라에서 사고 치고 싶진 않으니."

"...하!"

그는 비웃음과 함께 스킬을 발동했다.

[고유 스킬 : 문라이트 세이버]

지잉―.

보초병의 무기가 거대한 검으로 변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쯧, 처음부터 힘으로 밀고 나갈 생각은 없었는데.'

시작부터 피곤해지겠네.

어쩔 수 없지.

나는 김민주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녀가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으려고 했다.

"무슨 일이야?"

그때 한 남자가 중앙 텐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협회장님."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던 보초병이 차렷 자세를 취했다.

협회장이라.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군.

"에녹 팀장, 무슨 일인가?"

"신원 불명의 침입자가 있어서 제지하던 중이었습니다."

남자가 우리를 바라봤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물었다.

"당신이 임시 협회 지휘관입니까?"

"누구지?"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

남자는 재빨리 눈을 굴리더니 이내 보초병을 향해 손짓했다.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이윽고 에녹 팀장이라 불린 그는 우리를 중앙 텐트로 안내했다.

그렇게 따라 들어간 텐트 안에는 협회장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케네디 협회장이라고 불린 남자가 이내 탁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온다면 언질을 좀 주고 오시지 그랬습니까."

"그럴 여유가 없어서."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케네디 협회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일단… 물건부터 좀 보시죠."

남자가 말했지만 나와 김민주는 그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우리를 거래처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뭡니까? 물건부터 보자니까요."

"물건은 없습니다."

"...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니들 뭐야!"

"중앙아프리카 통합 지부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협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곧바로 병사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동시에 김민주도 움직이려 했지만, 나는 제지하며 말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당신들이 진행하려는 거래, 당장 취소하십시오."

"이 새끼들이 겁대가리를 상실했군. 적진 한복판에 기어들어 와서 뭐가 어쩌고 어째?!"

"당신들, 그 거래 진행하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니들이 뭘 안다고 떠들어. 우리가 뭐 심심해서 이 짓을 하는 줄 알아?!"

그의 목소리에 담긴 처절함이 느껴졌다.

사실 그들로서도 억울한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가만히 있는데 협회가 해체되질 않나, 토벌권도 하루아침에 빼앗기질 않나.

그들 또한 먹고 살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야 내 알 바는 아니지.

"당신들이 이대로 통합 지부를 공격한다고 토벌권을 되찾는 거 아니니까, 괜히 서로 피 보지 말고 여기까지 하자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뭐 이대로 죽으라고?"

"그 반대입니다. 살려드리겠다는 겁니다."

"...뭐?"

협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길게 말할 시간은 없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그래서 거래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협회장은 잠시 고민하던 끝에.

"죽여."

실소와 함께 명령을 내렸다.

순식간에 우리를 둘러싼 인원을 훑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쯧. 하여간 말로 끝나는 법이 없어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빨리 하자."

[고유 스킬 : 마왕]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