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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 코퍼레이션이 움직이고 있다.

그 소식에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국제 협회 소속인 통합 지부를 내버려두고, 굳이 대립국과 밀거래를 한다?

그것도 당장에 본인들의 지부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나라를?

이건 한 가지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본인들 지부가 외부 세력에 의해 공격당했으면 하는 거지....'

명분이 필요한 거다.

전 세계 토벌권을 국제 협회가 관리할 명분.

그렇다면 지금 상황도 모두 이해가 간다.

굳이 지부를 통합시켜 놓고 손을 뗀 건 일부러 주변국들의 반발을 유도하기 위해서였겠지.

토벌권을 빼앗긴 주변국들은 당연히 통합 지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럼 그때, 그들에게 조금만 힘을 보태주면 된다.

그러면 그들이 알아서 통합 지부를 무너뜨려 줄 테니까.

아마 지부가 공격당하면, 그때 비로소 본부가 움직이겠지.

유감을 표하며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모든 토벌권을 본인들이 관리하겠다고.

'진짜 생각하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빌어먹을 놈들이네.'

이젠 몇 번을 보기도 했는데, 여전히 학을 떼게 만드는 방식이다.

아무튼, 국제 협회가 토벌권 통합에 성공한다면… 그땐 해외 지부 사업이고, 제2의 국제 협회고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다.

외부인 입장으로 국가 문제에 관여한다는 게 여전히 떨떠름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눈치만 보다가 다 날릴 수도 없는 일이다.

일단 무슨 일이 있더라도 거래를 막아야 한다.

"저, 정말 확실한 겁니까? 지금 분쟁을 모두 본부가 유도하고 있다는 게...."

브루스 지부장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잠시 접견실을 나와 김민주와 브루스 지부장을 불렀다.

그리곤 세드릭과 나눴던 이야기를 전달했다. 덧붙여 내가 알아낸 사실도 함께.

물론 PB 코퍼레이션에 관한 이야기는 제외했다.

"확실합니다. 한국에 있는 하 팀장님이 직접 확인한 사항입니다."

"설마 본부가 그럴 리가...."

브루스 지부장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하긴, 자리만 지키고 있는 말단이 국제 협회가 사실 어떤 놈들인지 알 턱이 없을 테니.

충격이라면 충격이겠지.

"거래를 막을 방법은 있나요?"

잠자코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김민주가 물었다.

"있기야 하지. 내가 아니라 한국에 있는 그 사람이 잘 해줘야겠지만...."

"하성일 팀장님이요?"

"하 팀장이 한별 상사가 암거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만 포착해주면 거래 자체를 막을 수 있을 거야."

"그 전에 거래가 성사되면요?"

"그러면...."

방법이 없다.

애초에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문제는 하 팀장이 무조건 증거를 포착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고, 무엇보다 PB 코퍼레이션이 끼어 있다면 민간인인 그 혼자서는 솔직히 위험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 팀장에게 모든 걸 맡기는 건 어렵다.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일단 지금 파견 중인 작전팀,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내."

"...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우리도 강경하게 나가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래하기 전에 다 쓸어버리자."

무기를 쥘 사람이 없어지면 분쟁도 끝나겠지.

***

DR콩고 대통령 관저.

한눈에 봐도 최고급으로 꾸며놓은 그곳에서 한 남자가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콩고 민주 공화국의 대표이자 책임자인 로마나 대통령이었다.

그때, 그의 개인 전화가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로마나 대통령은 화색을 띠며 전화를 받았다.

"아, 사무총장님."

상대는 국제 협회의 웨슬리 사무총장이었다.

「어떻게, 잘 지내고 계십니까?」

"덕분에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조만간 시간 되면 또 한 번 초대하겠습니다.」

"저야 영광이죠."

로마나 대통령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최근 사무총장에게 직접 초청을 받아 국제 협회 본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통합 지부 관리 안건에 할 말이 있나 싶었지만, 사무총장이 전한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충격적인 안건이었다.

물론 로마나 대통령에게 내건 조건 또한 그에 걸맞게 어마어마했지만.

「그나저나… 잠비아와의 분쟁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현재 소강상태입니다. 뭐, 암거래 현황이 포착되었다는 보고가 있긴 했습니다만."

「설마… 관여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무총장님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요. 그냥 가만히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생각입니다."

「다행이군요.」

웨슬리 사무총장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일만 끝나면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를 하나의 협회로 묶을 생각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통합 아프리카 협회의 지부장 자리는 약속대로 로마나 대통령님께 드리겠습니다.」

"하하,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제가 그렇게 큰 자리를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별로 한 것이 없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의를 위해 나라를 바치셨는데, 당연히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하하하...."

로마나 대통령은 입만 웃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 말을 뒤로하곤 전화를 끊었다.

로마나 대통령은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내가 나라를 바쳤다고…?'

웃기고 있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게 누군데.

어차피 자신이 개입하든, 가만히 있든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걸 선택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한 대륙의 지부장은 비교해볼 가치도 없다.

'차라리 잘 됐지, 뭐.'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던 그때.

"각하."

비서실장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뭔가?"

"통합 지부와 계약했던 해외 토벌 지원 업체 말입니다. 모두 본국으로 복귀했답니다."

"난 또 뭐라고. 당연한 거 아니야? 여기 계속 있어봤자 사업 진행도 안 될 텐데."

"그런데... 업체 대표는 아직 남아 있다고 합니다."

"...?"

로마나 대통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째서?"

"자세한 건 아직 파악 중입니다. 다만, 뭔가를 꾸미고 있는 듯합니다."

로마나 대통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듣자 하니 그 업체 대표가 한국에서 꽤 유명한 해결사라던데....

'설마 남의 나라에서 뭔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의 얼굴에 불안감이 서려왔다.

***

잠비아 - DR콩고 국경 인근.

잠비아 임시 협회가 위치한 곳이자, 분쟁 지역에서 불과 5km도 떨어지지 않은 그곳에 도착하자 보초를 서고 있던 헌터들이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여긴 민간인 통제 구역이다. 돌아가!"

대답 대신 주변을 훑었다.

말이 임시 협회지, 건물도 없이 수십 개의 A형 텐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다.

사실상 협회라기보단 캠프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한눈에 봐도 턱없이 열악한 환경.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고장 난 장비와 무기들.

우리를 막아선 헌터들 또한 꽤나 앙상한 몰골들이었다.

여건을 보아하니 여태까지 분쟁을 이어온 것만으로도 기적인 수준이었다.

'나름 마지막 발악이라 이건가....'

한 차례 혀를 차곤 보초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쪽 지휘관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내해주시죠."

"소속부터 밝혀라."

"그것도 당신 지휘관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군."

보초병은 험악한 표정과 함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로 할 때 좋게 합시다. 남의 나라에서 사고 치고 싶진 않으니."

"...하!"

그는 비웃음과 함께 스킬을 발동했다.

[고유 스킬 : 문라이트 세이버]

지잉―.

보초병의 무기가 거대한 검으로 변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쯧, 처음부터 힘으로 밀고 나갈 생각은 없었는데.'

시작부터 피곤해지겠네.

어쩔 수 없지.

나는 김민주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녀가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으려고 했다.

"무슨 일이야?"

그때 한 남자가 중앙 텐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협회장님."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던 보초병이 차렷 자세를 취했다.

협회장이라.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군.

"에녹 팀장, 무슨 일인가?"

"신원 불명의 침입자가 있어서 제지하던 중이었습니다."

남자가 우리를 바라봤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물었다.

"당신이 임시 협회 지휘관입니까?"

"누구지?"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

남자는 재빨리 눈을 굴리더니 이내 보초병을 향해 손짓했다.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이윽고 에녹 팀장이라 불린 그는 우리를 중앙 텐트로 안내했다.

그렇게 따라 들어간 텐트 안에는 협회장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케네디 협회장이라고 불린 남자가 이내 탁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온다면 언질을 좀 주고 오시지 그랬습니까."

"그럴 여유가 없어서."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케네디 협회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일단… 물건부터 좀 보시죠."

남자가 말했지만 나와 김민주는 그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우리를 거래처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뭡니까? 물건부터 보자니까요."

"물건은 없습니다."

"...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니들 뭐야!"

"중앙아프리카 통합 지부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협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곧바로 병사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동시에 김민주도 움직이려 했지만, 나는 제지하며 말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당신들이 진행하려는 거래, 당장 취소하십시오."

"이 새끼들이 겁대가리를 상실했군. 적진 한복판에 기어들어 와서 뭐가 어쩌고 어째?!"

"당신들, 그 거래 진행하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니들이 뭘 안다고 떠들어. 우리가 뭐 심심해서 이 짓을 하는 줄 알아?!"

그의 목소리에 담긴 처절함이 느껴졌다.

사실 그들로서도 억울한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가만히 있는데 협회가 해체되질 않나, 토벌권도 하루아침에 빼앗기질 않나.

그들 또한 먹고 살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야 내 알 바는 아니지.

"당신들이 이대로 통합 지부를 공격한다고 토벌권을 되찾는 거 아니니까, 괜히 서로 피 보지 말고 여기까지 하자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뭐 이대로 죽으라고?"

"그 반대입니다. 살려드리겠다는 겁니다."

"...뭐?"

협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길게 말할 시간은 없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그래서 거래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협회장은 잠시 고민하던 끝에.

"죽여."

실소와 함께 명령을 내렸다.

순식간에 우리를 둘러싼 인원을 훑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쯧. 하여간 말로 끝나는 법이 없어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빨리 하자."

[고유 스킬 : 마왕]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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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비아 - DR콩고 국경 인근.

하성태 사장과 에마 대표는 잠비아 임시 협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곧 둘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이상하네요. 뭐 지키는 사람도 없고.... 원래 이렇게 텅 빈 곳인가요?"

"...."

하성태 사장의 물음에 에마 대표는 침묵했다.

잠시 상황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거래도 하기 전에 백기를 든 게 아니고서야, 전력의 요충지인 이곳을 비워둘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거래 장소를 이곳으로 잡은 건 임시 협회 측이다.

중요한 거래를 앞두고 모습을 감출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니, 이건 모습을 감췄다기보다....'

에마 대표가 캠프 안으로 더 들어가자, 완전히 무너져 내린 텐트들과 이곳저곳 파괴된 흔적들이 보였다.

마치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것처럼.

'설마....'

순간 에마 대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도대체 뭐가 어떻게...!"

"...."

"대표님? 대표님! 뭐라 말씀 좀 해주시죠!"

무슨 상황인지 가늠조차 못 한 하성태 사장이 연신 조잘댔지만, 에마 대표는 일일이 대꾸해줄 여유는 없었다.

만약 그녀의 예상이 맞다면, 일이 꽤 귀찮아질 예정이었으니까.

'일단 연락을 넣어놔야겠군.'

에마 대표가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작성하고 있던 그때였다.

"늦었네?"

무너져 내린 텐트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 김준우 대표…? 당신이 여기 어떻게?!"

***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역시나 하성태 사장이었다.

그는 상상도 못 했다는 듯, 눈과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게 딱 이 꼴이겠지.

"오랜만입니다. 저 없는 새에 사장님이 되셨다면서요."

"이, 이게 대체 무슨.... 당신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그건 그쪽에게 물으면 알 것 같군요."

중년 백인 여성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부터 잠자코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하성태와 같이 있다는 건 PB 코퍼레이션 관계자라는 소리겠지.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여자는 피식 실소를 뱉었다.

웃어?

현장에서 걸리고도 꽤나 여유만만이네.

"죽였어요?"

"누굴 말입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말이에요."

"궁금하면 좀 빨리 오지 그랬습니까."

여성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 때문에 우린 한국에서 많은 피해를 봤는데... 이젠 설마하니 우리 거래처까지 건드릴 줄이야. 대체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거죠?"

"하하하, 시발. 누가 보면 제가 나쁜 놈인 줄 알겠습니다."

미친 건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가만히 청소하고 있는 사람 건드리기 시작한 게 누군데.

"그래서, 당신은 왜 여기 남아 있어요?"

에마 대표는 주위를 쭉 둘러보곤 나를 향해 물었다.

"거래를 막으려는 거라면 굳이 남아서 우리를 기다릴 이유가 없을 건데요."

"혹시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인가 싶어서 말입니다. 뭐… 겸사겸사 볼일도 있고."

"음? 누구죠? 황동휘 파트장?"

"그런 잔챙이는 이제 관심 없고."

나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조금 더 높은 분."

"…그런 거라면 제대로 찾았네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만나서 반가워요. 맨날 보고로만 듣다가 이렇게 직접 만나니 또 새롭네요."

그녀가 나를 향해 한 발짝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PB 코퍼레이션 대표, 에마라고 해요."

"...."

나는 애써 표정을 숨겼다.

대표라니.

끽해봐야 팀장급인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대표가 직접 움직이고 있을 줄이야.

'이걸 횡재라고 해야 할지....'

복잡한 심경을 뒤로하며 본론을 상기했다.

"그래서? 그 대단하신 대표님께서 왜 이런 뒤가 구린 거래를 하려는 겁니까?"

"뭐야. 진짜 몰라서 묻는 거예요, 아님 떠보는 거예요?"

대답을 아꼈다.

에마 대표가 하성태 사장을 슬쩍 흘기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진짜 목적에 대해선 함구한 모양이다.

"됐군요. 이제 와서 말해 뭐 하겠어요. 어차피 여기 아니어도 거래할 데는 많고."

"통합 지부를 공격해줄 놈들이면 누구든 상관없다 이겁니까?"

"...뭐야, 역시 알고 있었네요."

"아프리카 전체 토벌권을 통합하기 위해선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죠. 내가 진짜 궁금한 건 그런 것보다...."

내가 기다린 본론은 이거다.

"국제 협회는 왜 이렇게까지 해서 토벌권을 통합하려는 걸까, 그뿐입니다."

"...하아."

질문을 받은 에마 대표가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삼자도 있는데 그 얘길 해버리면 어떡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검지가 하성태를 향했다.

"좋은 동업자였는데... 들어버린 이상 어쩔 수가 없네요."

"네, 네?! 자, 잠깐…!"

[습득 스킬 : 핑거 피스톨]

그녀의 손가락에서 빛이 번쩍였다.

아니, 이 노빠꾸 여자가!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피융―!

곧바로 달려들어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날카로운 빛이 허공을 꿰뚫었다.

단발의 총성과 함께 찾아온 정적 속에서 에마 대표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 분 사이 안 좋지 않았나요? 한때 적이었던 사람마저 구해줄 줄은 몰랐는데."

"책임질 사람을 죽게 놔둘 순 없죠."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미 손에 힘이 실리고 있었다.

끄그극―

동시에 에마 대표의 표정 또한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이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전생에서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던 그때의 심경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나를 죽인 놈들의 수장과 마주했는데, 평정심을 유지할 만큼 난 점잖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다.

'...시발.'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유감스럽지만 여기선 그 누구도 죽어선 안 된다.

하성태가 죽으면 이번 일의 책임을 질 사람이 사라진다.

그렇다고 에마 대표를 제거하면 PB 코퍼레이션의 정체와 국제 협회의 민낯은 영영 수면 아래로 묻히고 만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습니까?"

분노를 꾹 참으며 애써 입을 열었다.

에마 대표는 무슨 소릴 하는지 이해 못 한 모양이다.

"...뭐가 어떻다는 거예요?"

"당신 말고. 뒤에 있는 분들 말입니다."

시선을 그녀 등 뒤로 던졌다.

"어떻게, 이제 제 말이 신뢰가 좀 됩니까?"

몸을 숨기고 있던 케네디 협회장, 그 외의 인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내 계획을 위해서라도 이 여자는 아직 살아 있어야 한다.

"...정말이었군."

"애초에 처음부터 모두 국제 협회가 유도한 거라고…?"

"마, 말도 안 돼...."

"빌어먹을… 멍청하게 놀아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케네디 협회장의 뒤를 이어 잠비아 임시 협회 인원들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천하의 PB 코퍼레이션의 대표인 에마도 이 상황은 예상 못 했는지 당황한 듯 보였다.

물론 하성태야 말할 것도 없고.

설마 내가 미쳤다고 사람 수십 명을 죽이겠는가.

그것도 전혀 상관없는 국가 간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한복판에서 말이야.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내가 이곳에 있는 건, 또 다른 거래 때문이다.

예정된 무기 거래를 중단하고 당장 통합 지부와의 분쟁을 멈춰준다면, 뒤처리는 우리가 해주겠다는 조건이었지만....

'뭐, 나 같아도 안 믿었을 것 같긴 한데.'

그 과정에서 작은 다툼이 있긴 했지만, 합의점은 찾을 수 있었다.

진실을 보여줄 테니, 잘 보고 재고해 보라고.

그래.

내가 굳이 여기서 저 두 명을 기다린 건, 거래에 필요한 신뢰를 얻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쯧."

"심기가 많이 불편한가 보군요.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서인가요? 그럼, 뭐 여기 있는 사람을 다 죽이기라도 할 겁니까?"

"후, 뭐... 못할 거야 없긴 한데."

뭐래, 이 여자가....

"그것보다, 대체 무슨 조건을 걸었길래 저들이 당신 말에 따르는 거죠? 이렇게 대놓고 우리를 적으로 돌리면, 그 뒤처리는 어떻게 하려고?"

"그쪽이 알 거 없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거부하자 에마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보아하니 이젠 대화로 어떻게 해볼 상황이 아니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물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를 제지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뭣?!'

손이 그녀의 팔을 통과해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한편 그녀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통화를 이어갔다.

"아, 케인 팀장. 계획에 차질이 생겼어요. 플랜 B로 진행하세요. 지금 당장 토벌권 회수팀 전원 콩고 통합 지부로 진격하세요."

"...."

토벌권 회수팀?

역시 혼자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었나.

"그리고 당신들은...."

용건만 전달하고 전화를 끊은 에마 대표가 우리를 슥 훑었다.

어느새 붙잡았던 그녀의 팔도 내 손아귀를 벗어난 뒤였다.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올리는 동시에 에마 대표 뒤에서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마르크 팀장, 마침 딱 맞춰왔네요."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쪽은 잘 처리 좀 해줘요. 제 볼일은 끝났으니까."

"알겠습니다."

둘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중무장한 인원이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하, 저쪽도 일단 대비는 해놨다, 이건가.

"뭐, 뭐야…?!"

"지원군이 숨어 있었나…!"

놀란 잠비아 협회 병력이 혼란스러워졌다.

우리 앞에 나타난 인원은 얼마 되지 않는다. 많아 봐야 20명 정도.

그럼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딱 봐도 어떤 놈들인지 알 수 있다.

저들은 양민호, 황동휘가 속해 있던 밸런스 조정팀이다.

'그렇다면 저 남자가....'

마르크 팀장이라고 불린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전 세계 곳곳에서 암살 임무를 맡은 놈들과 그들의 책임자.

만만히 봐선 안 되겠지.

"그럼 먼저 실례하죠. 만나서 반가웠어요, 미스터 김."

"대, 대표님! 대표님?! 어디 가십니까!!"

짧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에마 대표는 등을 돌렸다.

하성태가 놀라 부르짖었지만 응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냥이 끝났으니 개는 필요 없을 테니까.

"저 여자... 가만히 둬도 되는 건가?"

어느새 내 옆으로 온 케네디 협회장이 넌지시 물었다.

당연히 아쉽긴 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PB 코퍼레이션의 대표이지 않은가.

붙잡아서 밑바닥까지 탈탈 털어내거나 당장이라도 처리해버리면 속이 다 후련하겠다만, 상황상 그러긴 어렵다.

아까 그녀가 쓴 스킬도 그렇고, 밸런스 조정팀장이라는 놈을 앞에 두고 딴 데 정신을 팔 수는 없다.

"정황상 붙잡긴 힘들 것 같네요. 그보다, 아까 제가 말한 조건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안 믿는 것도 말이 안 되지. 받아들임세."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잠비아 임시 협회는 정식으로 한국 협회 지부가 된 겁니다."

아까 내건 계약 체결을 구두로 확인했다.

분쟁을 멈추고 한국 협회 지부가 된다면 당신들의 토벌권을 보장해준다.

상황적으로 진실을 안 이상, 그들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계속 토벌만 할 수 있게 해준다면 소속이 어디든 상관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어쨌든 목적의 반은 이뤘고....'

나머진 일단 저놈들부터 어떻게 하고 생각해볼까.

에마 대표를 놓치긴 했지만, 더는 아니다.

나는 마르크 팀장에게 다가갔다.

"방금 들어서 아시겠지만, 현 시간부로 잠비아 임시 협회는 한국 협회 소속입니다. 그러니 잠비아 협회를 향한 공격은 엄연히 한국 협회를 향한...."

탕―!

돌연 울린 총성.

허공으로 빗나갔지만, 무척이나 가깝다.

바로 근거리로 지나간 걸 보면 일부로 빗맞힌 거겠지.

"말이 많군."

"...."

"대화는 이미 충분히 하지 않았나."

녀석은 애초에 싸울 생각이 넘쳤다.

뭐, 그러긴 해.

나도 같은 생각이고.

게다가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소리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밸런스 조정팀장, 마르크.

그가 나를 향해 쏜 그 총.

"드디어 찾았다."

이능운용총기, 타이탄이었다.

130

130

"잠비아 쪽에서 병력이 진격하고 있다고?"

케일럽 비서실장이 방금 들어온 소식을 브루스 지부장에게 전달했다.

"그렇다고 합니다."

"거래를 막지 못한 건가...."

브루스 지부장은 이를 으득 씹었다.

'...김 대표가 무사하려나 모르겠군.'

거래에 실패했다는 건, 곧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는 뜻일 테니까.

그럼 김 대표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을 거다.

최악의 경우엔 포로로 붙잡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이곳 상황이 우선이었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어림잡아 하루면 충분할 겁니다."

"후… 지금 당장 분쟁 지역에 파견 보낸 작전팀들, 전원 복귀시켜. 우리끼리라도 어떻게든 막아보자."

각오한 케일럽 실장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미 복귀 명령은 내렸습니다. 다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수송기가 필요한데, 정부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아마 모두 복귀하려면 최소한 이틀은 걸릴 겁니다."

"지부에 남아 있는 인원은?"

"전투 가능 인원은 모두 합쳐서 20명 정도입니다."

"하...."

방법이 없군.

브루스 지부장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작 20명으로 공격을 막아야 하는 상황.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묵묵부답인 본부.

게다가 본부와 붙어먹은 건지, 계속 방해하는 정부.

'...끝났군.'

브루스 지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라면 지부는 곧 무너진다.

당연히 브루스 지부장 탓이 아니다.

만약 본부가 조금이라도 지부에 신경을 썼더라면, 이런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본부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겠지.

'애초에 책임을 질 생각이었으면 지부에서 손을 떼지도 않았을 거고.'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모두 본인의 책임이다.

끝까지 싸우기라도 한다면 최소한 중징계는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복한다면... 최악의 경우엔 국제 협회에서 퇴출당하겠지.

어딜 봐도 외통수인 상황.

'그냥 처음부터 총알받이가 필요했던 거네.'

브루스 지부장은 말단이었던 자신에게 이런 직책을 맡긴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뒷돈이라도 좀 받아 놓을걸.

뒤늦게 후회하지만 부질없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브루스 지부장은 이내 선택을 내렸다.

"직원들 다 대피시켜."

"...네?"

"병력이 올라오기 전까지 지부 다 비워두라고. 어차피 인원도 달리는데, 뭣 하러 굳이 피해를 감수해."

"설마 항복하시려는 겁니까...."

"그럼 뭐 더 좋은 방법 있나?"

"...."

케일럽 실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 오고 나서부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는데, 드디어 처음으로 지부장다운 일을 할 수 있겠군."

"...."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직원들이나 빨리 대피시켜."

브루스 지부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치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 같았다.

물론 어딘가 홀가분한 표정과 다르게, 실제론 많은 걸 각오한 발언이었다.

"...알겠습니다."

지시 사항을 확인한 케일럽이 곧바로 지부장실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누군가 지부장실로 들어왔다.

깔끔한 양복 차림에 캐리어를 끌고 나타난 인물은 처음 보는 동양인 여성이었다.

브루스 지부장과 케일럽 실장의 눈이 동시에 가늘어졌다.

"누구…?"

"카르마 코퍼레이션 지원 본부장, 이아영 이사라고 합니다."

자기소개를 했음에도, 여전히 의아한 얼굴들이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추가 인원이 온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아, 혹시 대표님을 구하러 온 거면… 조금 늦었습니다. 아무래도 잠비아 쪽에 피랍되신 것 같은...."

"그쪽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그것보다 대표님을 대신해서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 어떻게 시간 괜찮으실까요?"

"어떤...?"

그녀는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브루스 지부장에게 건넸다.

브루스 지부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 협회와 중앙아프리카 통합 지부의 인수합병 동의서였다.

***

한별 종합 상사, 경영관리실.

"헌터 전용 무기를 죄다 끌어갔다고요?"

하성일 팀장이 재차 묻자, 서류를 살피던 강주한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원래 성남 지부랑 수원 지부에 납품하기로 했던 무기들인데… 하 사장님이 직접 취소하시고 다른 사업으로 끌어가셨어."

"두 개 지부에 납품할 정도면 양이 상당할 텐데?"

"그렇지. 무기뿐만 아니라 기타 토벌 장비들도 있고. 뭐 이번에 하 사장님이 직접 준비하고 있는 해외 사업이 있다잖아. 거기에 필요한 거겠지."

하성일 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해외 쪽과 무기 거래라니… 평생 출장 한 번 안 가본 그 인간이?

"거래하기로 한 국가, 어딘지는 확인이 안 되나요?"

"글쎄. 그것까진 아직 잘...."

"이번에 출국했잖아요. 비행기 표라도 확인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거야 가능은 한데… 개인 카드로 구매한 거면 확인 안 되는 거 알지?"

아뿔싸, 하성일 팀장은 이마를 탁 쳤다.

설마하니 수상한 사업을 벌이면서, 멍청하게 법인 카드로 비행기 표를 구했을 리 없다.

"아, 법인 카드로 구매했네. 잠비아행… 퍼스트 클래스로 두 장."

"...?"

어째 밑바닥을 한 번 찍더니 사람이 더 멍청해졌군.

'뭐, 그건 둘째치고....'

하성일 팀장이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잠비아라면 현재 콩고와 분쟁이 한창인 나라가 아닌가.

무엇보다 이미 기존 협회가 해체 상태라, 무기 거래가 금지되어 있을 텐데....

'만약 그쪽이랑 무기 거래를 하려는 거라면....'

암거래.

그것밖엔 생각할 수가 없다.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갔네.

아버지가 어떻게 키운 회사인데, 한별이라는 이름을 걸고 암거래를 진행해?

하성일 팀장이 이를 으득 씹었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울렸다.

「여기 강남경찰서 강력 1반입니다. 하성일 씨 맞으시죠?」

며칠 전 방문했던 경찰서에서 온 연락이었다.

"네, 네 맞습니다."

「요청하신 대로 병원 CCTV를 조사해봤는데.... 하동배 씨 사망 한 시간 전에 하성태 씨가 다녀갔네요. 혹시 본인한테 뭐 들은 거 있으세요?」

"...아뇨. 그 인간, 아버지 그렇게 되고 나서 병원에 한 번도 안 간 놈입니다."

「아, 그래요? 스읍, 그럼 좀 이상하긴 하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 미친 새끼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뭐, 아무튼 조금 더 조사해보겠습니다. 진척이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죠.」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하성일 팀장은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이내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예, 할아버님."

그의 조부, 하덕수 회장이 대답했다.

「뭐냐?」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놀라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

잠비아 임시 협회 캠프.

"찾았다고? 날 알고 있나?"

"알다마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잊을 수가 없지.

어떻게 잊겠는가.

전직 SSS랭크 헌터를 하루아침에 청소부로 처박아준 장본인인데.

오죽 보고 싶었으면 꿈에도 나오더라.

"저들도 국제 협회 소속인가?"

케네디 협회장, 아니 잠비아 지부장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시는 편이 좋습니다. 엮여서 좋을 게 없는 놈들입니다."

밸런스 팀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는 잠비아 병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들도 괜히 다치지 말고 물러나 계세요. 그 인원으로 어찌해볼 상대가 아닙니다."

"뭐, 뭐…?"

"그, 그럼 저 인원을 혼자서 상대하겠다고?!"

"이봐, 이봐!"

대꾸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밸런스팀 전원이 전투태세를 갖췄다.

신경 쓰지 않고 마르크 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팀장님? 오늘부로 밸런스 조정팀은 해체될 것 같은데."

"누구 마음대로."

곧바로 총을 치켜드는 마르크 팀장.

[고유 스킬 : 퍼스트 스나이퍼]

[모든 공격이 시전자가 지정한 대상에게서 절대 빗나가지 않습니다]

[탄환 - 머큐리]

[장전 확인]

철컥, 소리와 함께 타이탄이 장전되었다.

그리고....

[고유 스킬 : 블러드 카니발]

[고유 스킬 : 슈퍼노바]

[고유 스킬 : 성검 - 다마스커스]

[고유 스킬 : 어쌔신 섀도우]

탕―!!

쾅, 콰과광―!

퍼버벙―!!

밸런스팀의 공격이 일제히 쏟아졌다.

"누구 마음대로겠습니까."

[고유 스킬 : 마왕 - 강자 독식]

[고유 스킬이 지속하는 동안 시전자보다 마력이 낮을 경우, 모든 공격은 무효화 됩니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류에 닿자마자 모든 공격이 수포로 돌아갔다.

"...!"

"...!!"

녀석들이 주춤했다.

하지만 정작 당황스러운 건 나다.

"고작 이 정도로 날 잡으러 온 겁니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또 나를 상대하겠다고?

심지어 저번엔 반능석까지 준비했던 놈들이?

"...."

"...."

모두가 침묵하던 가운데, 마르크 팀장이 피식 실소를 뱉었다.

"그럴 리가."

이내 그의 시선이 내 등 뒤로 향했다.

아차 싶은 순간.

밸런스 팀 전원이 내 뒤에 있던 잠비아 병력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시발, 처음부터 이걸…!'

재빨리 몸을 틀어 잠비아 병력을 가리켰다.

[습득 스킬 : 형상 - 우리엘]

[형상이 유지되는 동안 시전자가 지정한 아군은 사망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50명의 인원을 슥 가리켰다.

[아군 지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해당 아군의 사망 면역까지 앞으로 10초]

콰과과광―!!

거대한 충격이 땅을 타고 전해지길 잠시.

다행히 잠비아 병력 전원이 무사했다.

"입만 막으면 그만이다 이거야?"

"그럼? 반능석도 안 통하는 놈을 왜 굳이 상대하겠나."

"날 무시하고 저들을 죽일 수 있을 거 같아?"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마르크 팀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저들을 지키면서 우리와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

놈의 말이 맞다.

다른 놈들도 아니고, 헌터들을 죽이는 게 일인 밸런스팀이다.

게다가 어중이떠중이 같은 잔챙이가 아니라 팀장이 직접 움직이고 있다.

오로지 저들만 상대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누군가를 지키며 싸우는 건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고유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그것도 비슷한 수준일 때나 먹히는 얘기지."

[스킬 제작 완료]

[제작 스킬 : 가위손]

"압도적으로 강하면 딱히 의미가 없어."

스윽―.

검은 기류가 순식간에 거대한 칼날로 변하며 밸런스팀 전체를 갈랐다.

피할 수 있음 피해 봐.

[고유 스킬 : 퍼스트 스나이퍼]

[탄환 : 비너스]

[장전 확인]

[탄환에 맞은 상대의 이동속도가 최대치로 상승합니다]

탕―!

그 순간 마르크 팀장의 총에서 빛이 한 차례 번쩍였다.

스스스슥―

눈앞에서 밸런스팀 전원이 사라졌다.

아니.

움직임을 눈으로 좇는 게 불가능한 거다.

"멍 때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커헉…!"

잠비아 병력 중 한 명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스킬 효과가 끝난 틈을 제대로 노린 것이다.

이 새끼들이 진짜...!

날 둘러싸고 있던 검은 기류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타앗―!

이 순간, 나 또한 녀석들과 같은 시간 속에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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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샤사, 중앙아프리카 통합 지부 앞.

토벌권 회수팀 소속의 아프리카 파트 인원들과 함께 도착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건가."

토벌권 회수팀장, 케인.

어째 쥐 죽은 듯이 조용한 통합 지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병력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을 테니, 항복하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옆에서 토벌권 회수팀 아프리카 파트장, 안톤이 의견을 내놓았다.

케인 팀장은 흠, 작게 신음했다.

사실 항복을 하든 말든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

어쨌든 본인들의 역할은 잠비아 병력인 척, 지부를 공격하기만 하면 됐다.

"지부 소속 작전팀 복귀 예정 시각은?"

"수송기 사용 허가가 안 났으니, 아마 하루는 더 있어야 할 겁니다."

"그렇군. 뭐, 싸울 필요가 없으면 우리야 잘 됐지."

회수팀은 비전투 직군인 만큼,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전투는 되도록 피하는 편이 좋았다.

물론 PB 코퍼레이션 소속이라는 것 자체가 평균 이상의 능력을 지닌 이들의 조직이었으니, 싸워야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오죽하면 연구 직군에 가까운 뱅크 아이템 관리팀조차 웬만한 작전팀보다 높은 수준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개인적인 볼일이라더니... 이런 걸 준비하고 계셨군.'

아닌 게 아니라, 며칠 전 에마 대표의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이번 계획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건 마르크 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마 대표는 포석은 전부 깔아 놨으니, 만일의 사태에만 대비해달라는 지시를 내렸다.

개인적으로 가장 에마 대표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는데, 일이 이렇게 진행될 때까지 자신에게도 아무 말이 없었단 사실이 조금 떨떠름하긴 했지만....

'하긴, 클로이랑 마르크가 두 번이나 계획을 말아먹었으니 못 믿을 만도 하시지.'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쩌겠는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전원 전투태세 갖춰라. 지부 안에 있는 건 보이는 대로 다 때려 부숴. 혹시라도 잔존 인원 있으면... 죽여버리고."

"알겠습니다."

"예.

케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전원이 일제히 복면을 착용했다.

그렇게 무기를 꺼내 들며 지부 안으로 진격하려던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건물 안에서 한 동양인 여성이 걸어 나왔다.

"돌아가세요. 이미 늦었으니까."

"...?"

당당한 그녀의 목소리에 케인 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길 공격해도 당신들이 원하는 명분은 못 만들 거예요. 그러니 괜히 힘 빼지 말고 돌아가세요."

"...."

"...."

마치 본인들의 계획을 모두 꿰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뭐야, 저 여자....'

정말 다 알고 있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본인조차 이 계획을 알게 된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

전혀 모르는 제삼자에게 정보가 새어 나갔을 리는 없다.

'괜히 제 발 저리지 말고, 일단은 계획대로 진행하자.'

케인 팀장은 일부러 어색한 영어로 말을 뱉었다.

"우린 잠비아 임시 협회 소속으로서, 우리를 이렇게 만든 국제 협회 지부에 복수를...."

"아니잖아요, 잠비아 소속."

"...!"

단번에 정체가 들킨 케인 팀장을 비롯한 파트원들 전원이 흠칫했다.

"그리고... 여기, 더는 국제 협회 지부 아니에요."

"...뭐?"

그녀가 케인 팀장을 향해 서류 하나를 들이밀었다.

"오늘부로 여긴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 협회 소속 킨샤사 지부입니다."

수십 명의 인원이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자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러니 이곳을 공격하려 한다면, 한국 협회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강경 대응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유 스킬 : 천수관음(千手觀音)]

스릉―.

회수팀 뒤에서 소름 끼치는 발검 소리가 들려왔다.

"딱 맞춰왔네요."

"선생님은 남아서 기다릴 사람이 있다고 해서요. 저 먼저 출발했죠."

두 여자는 서로 눈을 맞추곤 씨익 웃어 보였다.

***

"뭐라고?"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사무총장실에 귀를 의심하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중앙아프리카 통합 지부가 방금 국제 협회 탈퇴 서류를 보내왔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보좌관이 내민 서류에는 온갖 사유와 함께 국제 협회를 탈퇴한다는 성명이 적혀있었다.

물론 브루스 지부장의 서명이 서류에 떡하니 있었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일단 반려하세요."

"저… 그게 국제법상 어렵습니다. 저희가 운영 지원에 손을 뗀 지 1년이 넘어서... 자체 탈퇴 가능 조건에 부합하긴 합니다."

"빌어먹을...."

웨슬리 사무총장이 미간을 잡았다.

이건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다.

아무리 조건상 탈퇴가 가능하다고 한들, 브루스 지부장이 쉽사리 탈퇴 결정을 내릴 리가 없다.

지부 탈퇴는 곧, 지부 내의 모든 인원 또한 국제 협회를 탈퇴하겠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브루스 지부장은 불과 1년 전까지 미국 지부의 말단이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이 아무리 지부 상황이 힘들다고 한들 제 발로 국제 협회를 나갈 리가 없다.

'애초에 탈퇴를 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지부를 거둬주겠다는 조건을 걸지 않은 이상....

'잠깐, 설마...!'

웨슬리 사무총장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

그리곤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대통령님."

콩고 민주 공화국의 로마나 대통령과 전화가 연결되었다.

「아, 사무총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최근에 통합 지부에서 외부 지원을 받은 일이 있습니까?"

「예? 예… 제가 알기론 해외 업체에 토벌 지원을 받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 업체 이름... 알고 계십니까."

「잠시만요.」

핸드폰 너머에서 로마나 대통령이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라고 하는군요.」

"...빌어먹을."

웨슬리 사무총장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대체 그 이야기를 왜 안 하셨습니까."

「네, 네? 아, 아니…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무엇보다 그 업체는 며칠도 안 돼서 다 철수했습니다.」

"혹시 대표는 남지 않았습니까?"

「그, 그걸 어떻게....」

"대통령님!"

웨슬리 사무총장의 목소리 온도가 확 떨어졌다.

"아프리카 통합 협회 지부장 자리... 약속 못 지켜드릴 것 같습니다."

「네, 네?! 자, 잠깐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뚝―.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역시 김준우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이 없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다시 한번 핸드폰을 들었다.

"에마, 나야."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잠비아 협회랑 예정되어 있던 거래에 문제가 좀 생겼어. 우리 쪽 애들 풀었으니까 계획에는 크게 문제없을 거야.」

"아니. 문제는 이미 터졌어."

「...무슨 소리야?」

에마 대표의 목소리가 퍽 굳었다.

"김준우가 통합 지부를 먹었어."

「...뭐?」

"정황상 한국 협회로 인수한 것 같아."

에마 대표의 대답이 끊겼다.

그녀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소식이었다.

이렇게 되면 더는 통합 지부를 공격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국제 협회가 공격당했다는 명분을 만들기는커녕, 타국 지부를 공격했다는 오명을 쓰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김준우, 그놈이 이렇게까지 선수를 친 걸 보면....

'이미 우리 계획은 전부 들통났다는 뜻이겠지.'

이를 으득 씹었다.

"이대로 계속 진행하면 오히려 우리가 위험해. 자칫하다간 자작극을 벌이려고 했다는 걸 전 세계가 알게 될 수도 있어."

「그럼 어떡하자는 거야?」

"어차피 슬슬 물갈이할 때 되지 않았어?"

「....」

"지금 이 시간부로 PB 코퍼레이션 내 모든 팀을 해체해."

「자, 잠깐만…!」

"에마."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건 명령이야."

***

잠비아 임시 협회 캠프.

"잠비아 병력만 처리하면 돼!"

마르크 팀장의 명령에 밸런스팀 전원은 다시금 잠비아 병력을 향해 돌진했다.

'칫…!'

[습득 스킬 : 수프림 미러]

카가가강―!!

속도를 올린 덕에 놈들의 공격은 아직 잠비아 병사에게 닿지 못했다.

'빌어먹을 놈들....'

아까부터 계속 잠비아 인원들만 노리고 있었다.

내 공격은 피하거나 넘겨버리며 전혀 상대하지 않는다.

지금까진 방어 스킬로 보호해주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다.

가진 방어 스킬이 모두 쿨타임인 탓에 더는 보호에 쓸 스킬이 없다.

그렇다면....

[고유 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스킬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몇이라도 머릿수를 줄이는 수밖에.

[제작 스킬 : 메두사]

검은 기류가 수백 마리의 뱀이 되어 일제히 밸런스팀을 향해 날아들었다.

[고유 스킬 : 퍼스트 스나이퍼]

[탄환 : 플루토]

[장전 확인]

[해당 탄환에 맞은 상대는 7초 동안 최상급 보호막을 얻습니다.]

탕―!

캉, 카강―!

하지만 마르크 팀장의 탄환 덕에 제대로 된 공격도 불가능했다.

역시 웬만한 공격으로는 씨알도 안 먹힌다.

잠시 공격을 늦추는 정도다.

'그냥 한 번에 다 날려버리고 싶은데....'

한 방에 모든 걸 끝내는 게 정답이지만, 그랬다간 잠비아 지부도 무사하진 못할 거다.

게다가 적인 녀석을 재도 안 남기고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말했듯, 저들의 민낯을 까발리기 위해선 책임을 질 놈들은 남겨놔야 하니까.

'쯧, 핸디캡이 너무 많네.'

애써 실소가 흘러나오는 사이.

"모두 물러나."

마르크 팀장의 명령과 함께 그의 총구가 나와 잠비아 인원들에게 향했다.

[고유 스킬 : 퍼스트 스나이퍼 - 각성]

[원샷 올킬]

[탄환 : 유피테르]

[장전 확인]

쿠구구구구―!!

타이탄에서 엄청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빛을 본 순간 직감했다.

저거 피했다간 다 죽는다. 막아야 한다.

타앙――!!!

생각할 틈도 안 주고 거대한 빛 덩어리가 발사됐다.

아나, 시발.

[고유 스킬 : 마왕 - 강자 독식]

[고유 스킬이 지속하는 동안 시전자보다 마력이 낮을 경우, 모든 공격은 무효화 됩니다.]

몸으로 탄환을 정면으로 막아섰다.

콰과과광―!!

"커억…!"

엄청난 대미지가 몸뚱이에 직격했다.

아 씨, 이건 뭐 자살 희망자도 아니고...!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한 그 충격에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팍 풀렸다.

'시발, 순간적으로 내 마력을 상회했다고?'

확실히 여태까지 봤던 잔챙이들이랑은 클래스가 다르다.

"...말도 안 돼."

근데 어째 공격을 날린 마르크 팀장이 당황한 반응이었다.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살아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괘, 괜찮나…?"

뒤에 있던 케네디 지부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시발, 그걸 지금 보고도 묻는 건가?!

"전 괜찮으니까 본인들 걱정이나 하시죠."

"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기껏 인수했는데 당신들이 죽으면 운영은 누가 합니까?"

애써 감정을 억제하고 몸을 일으켰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아니다.

고작 한 방 맞았을 뿐인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

'애초에 내가 피할 줄 알고 다 날려버릴 생각으로 쏜 거였나....'

하긴, 이런 공격을 몸뚱이로 막는 정신 나간 놈이 어디 있겠는가.

큰일이네. 회복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한데.

"보아하니 필살기였던 거 같은데… 설마 이 정도로 뭐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허세 부리지 마라."

"그럼 다시 공격해보던가."

강하게 나가자, 마르크 팀장도 망설이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회사 내에서도 두 발밖에 없는 건데… 아깝지만 어쩔 수 없군."

철컥―.

[고유 스킬 : 퍼스트 스나이퍼 - 각성]

[원샷 올킬]

[탄환 : 유피테르]

[장전 확인]

"...."

시발.

이게 아닌데.

쿠구구궁―!!

다시금 타이탄에 그 어마어마한 빛이 모여들었다.

이거 살살 맞으면 안 아플까?

쿵―

그때, 돌연 마르크 팀장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에? 뭐야 갑자기...!

쿵, 쿵, 쿵―

그리고 뒤를 이어 밸런스팀의 모든 인원이 마치 스위치가 꺼진 로봇처럼 일제히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

쓰러진 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발…!"

곧바로 마르크 팀장에게 달려가 강제로 입을 벌리고 혀를 꺼냈다.

응급조치는 했지만, 녀석의 눈은 이미 돌아가 있었다.

확실하다.

이거 지금....

본부에서 꼬리를 잘라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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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스킬 : 천수관음(千手觀音) - 각성]

[육관음중사(六觀音中四)]

김민주의 전신을 따라 붉은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제4격 -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스스스스슥―!

눈으로 좇기 힘들 만큼 엄청난 속도의 연속 공격이 진영을 파고들었다.

"으아악!!"

"크으윽!"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

이미 대부분 인원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남은 건 고작 서너 명.

김민주는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육관음중일(六觀音中一)]

몸에 흐르던 기류가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제1격 - 성관음(聖觀音)]

스윽―.

부드럽고 깔끔한 일격이 정확하게 케인 팀장의 목에 향했다.

"칫…!"

[고유 스킬 : 킹 아서]

캉―!!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기세로 울려 퍼졌다.

그그그극―!

케인 팀장의 대검과 김민주의 검이 서로 이를 부딪치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고유 스킬 : 킹 아서 - 원탁]

[네 번째 기사 : 퍼시벌]

스스스스―

"...!"

이를 깨버린 건 케인 팀장이었다.

그의 검에서 소름 끼치는 기류가 흘러나와 김민주의 검을 감싸기 시작했다.

불길한 낌새를 눈치채고 김민주가 곧바로 거리를 벌렸다.

다시금 호흡을 가다듬고 공격 태세를 갖췄다.

[고유 스킬 : 천수관음]

[사용 불가]

"...뭐, 뭣?!"

하지만 스킬이 발동하지 않았다.

그제야 자신의 검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퍼시벌에 잠식된 무기로는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김민주의 단짝이자, 헌터였던 아버지가 물려줬던 흑랑지도.

검 본래의 영롱한 빛을 잃은 채였다.

"검사가 검을 못 쓰게 됐군."

"...."

케인 팀장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고유 스킬 : 킹 아서 - 원탁]

[세 번째 기사 : 랜슬롯]

검이 발광하길 잠시, 그는 곧바로 김민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는 검사는 초짜 헌터보다 못한 존재다.

캉―!

"...!"

하지만 결과적으로 공격은 막혔다.

케인 팀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스킬이 막힌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검으로 자신의 공격을 받아낸 것이다.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돼."

김민주가 여유로운 미소로 대꾸했다.

"검사가 검만 있으면 됐지. 꼭 스킬이 필요해?"

"네 녀석...!"

황당한 도발에 케인 팀장이 이를 으득 씹었다.

[고유 스킬 : 킹 아서 - 원탁]

[첫 번째 기사 : 아서]

캉, 카가강―!

카강! 카가강―!

분노가 더해진 어마어마한 위력의 검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어느 것 하나 김민주에게 닿지 못했다.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돼먹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상에 공격은 갈수록 거칠어졌다.

냉정을 잃어버림에 따라 검로가 흔들렸다.

스윽, 슥―.

한편 그와 반대로, 김민주는 갈수록 유연하게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다.

스킬이 하나도 더해지지 않았음에도 검은 물처럼 역동적이고 명확하게 공격을 받아내고 쳐냈다.

-기본기가 중요해.

김준우가 늘 강조했던 이야기가 그녀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린다.

가르침에 따라 하루도 빠짐없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스킬 없이도 검을 쓸 수 있게 단련했고, 때론 이를 토벌에 사용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근 몇 달간의 노력은 범접할 수 없는 꽃이 되어 화려하게 피어났다.

촤악―!

"크아아아악!!"

순수한 무(武)로 스킬을 압도하는 괴물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스킬도 못 쓰면서…!"

"노력하면 다 돼."

김민주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물론 노력만으로 가능한 게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김민주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검에 재능을 지닌 김민주이기에 가능한 신기였다.

그걸 알아본 김준우가 시킨 거지만, 물론 본인에게 설명은 일절 하지 않았다.

'아쉽게 됐군. 저런 인재가 고작 한국 협회에서 썩고 있었다니....'

케인 팀장이 아쉬움에 고개를 젓는 순간이었다.

[습득 스킬 : 인비저블 단델리온]

퍽―!

"...커헉!"

돌연 등 뒤에서 날아든 투명한 검들이 김민주의 몸을 관통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풀썩 주저앉았다.

"스킬도 없이 보이지 않는 걸 피하는 건 아무래도 어렵지."

어느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어선 케인 팀장이 김민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에서 끊임없이 피가 새어 나오는 탓에 김민주는 대꾸할 수 없었다.

스킬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죽이기 아까운 인재긴 한데… 어쩔 수 없지."

케인 팀장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렇게 최후의 일격이 김민주의 목을 향해 떨어져야 했다.

쿵―.

갑자기 케인 팀장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컥! 커억!"

"커억… 크어억...."

그뿐만 아니라 남아있던 적들 또한 목을 부여잡으며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이...."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김민주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서울 한복판, 커다란 전광판에서 브레이킹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성일 팀장은 가던 길을 멈추고 꽤나 복잡한 표정으로 그 뉴스를 시청했다.

「지난주 사망한 한별 종합 상사 고 하동배 사장의 부검 및 추가적인 조사 결과, 경찰은 그의 사망이 타살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유력한 용의자로 하동배 사장의 장남, 하성태 전 영업본부장을 지목했습니다.」

「그는 현재 잠비아로 출장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현지 대사관을 통해 강제 입국 명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전광판에서는 하성태의 사진이 떠올랐다.

'개새끼....'

아버지의 사망에 대해 수사를 의뢰한 건, 다름 아닌 하성일 본인이었다.

시기적으로도, 정황상으로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물론 수사가 진행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형이 범인이 아니길 바랐다.

사이가 좋진 않아도, 최소한 가족으로 남아주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실낱같은 바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조부인 하덕수 회장은 큰 충격을 받은 건지, 연락이 되질 않고 있고... 무엇보다 콩고 쪽에서도 연락이 끊긴 지 벌써 며칠째였다.

'대표님은 무사하시려나 모르겠네.'

그를 믿고 있었지만, 하성일 팀장은 진심으로 걱정했다.

연락이 없다는 사실에 없던 불안감마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혀를 차곤 다시금 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추가적인 소식입니다.」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국제 헌터 협회가 잠비아 임시협회를 부추겨 본인들의 지부를 공격하려 한 정황이 한 지원업체 대표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

하성일 팀장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모 대표는 아프리카 대륙을 통합하기 위해 이러한 일을 벌인 것이라 주장하며, 직접 확보한 관계자 및 몇 가지 증거를 추가로 제출했습니다.」

「국제 헌터 협회는 즉각 모든 혐의에 강력히 부인하고 있지만, 제보된 증거와 정황의 신빙성이 높은 탓에 인터폴에서 대대적인 수사에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대륙 통합?

국제 협회의 자작극?

한 업체 대표에 의해 드러났다고?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략적인 이야기를 아는 그가 보기에도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소식이 아직 남아있었다.

「한편, 이번 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중앙아프리카 통합 지부와 잠비아 임시협회는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 협회에서 모두 인수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엥…?"

다름 아닌 한국 협회의 아프리카 지부 인수 소식이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하고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찰나, 전화가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고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대, 대표님!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겁니까?!"

「뭐… 이런저런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요!"

「자세한 건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은 하 팀장님이 진행하시던 프렉탈 독점 계약 건 말입니다.」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듯, 김준우 대표는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콩고로 오실 필요 없이, 서울 본부에서 계약 진행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인수했다는 게 정말이라고?

어떻게 국제 협회 소속의 지부를 하루아침에....

하성일의 이해력이 따라갈 틈도 없이 이야기는 계속 진행됐다.

「뭐, 협회장님한텐 제가 잘 말씀드려놨으니까 아마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하실 필욘 없습니다. 저희가 공짜로 하는 일도 아니고요.」

"예…?"

「뭐, 일단 그 얘기도 나중에 하기로 하고.」

김준우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개인적인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네, 네. 하십시오."

「...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

하성일 팀장은 혹시 잘못 들은 건가 순간 의심했다.

"도, 돈이요?"

「예.」

"왜 갑자기…?"

「여기 병원비가 꽤 비싸서요.」

대체 뭔 소리야.

***

콩고 통합 지부 부설 병원.

김민주가 입원해 있는 병실 문 앞.

"...하여간 쓸데없이 돈이 많이 드네."

하 팀장과의 통화를 끊자마자 볼멘소리가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옆에서 듣던 이아영 이사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본다.

"우리 회사 에이스잖아요. 이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죠."

"그 에이스가 자기 몸 하나 간수 못 하잖습니까. 본인 다치면 다 누구 손해인데. 돈은 또 누구 돈이고. 게다가 여기 병원비는 뭐 이리 비싼 겁니까."

"비용은 그렇다 치고, 이번엔 정말 위험했어요. 나중에 깨어나면 야단칠 생각 말고 잘 좀 대해줘요."

이아영 이사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듣자 하니 위험하긴 했던 모양이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아영 이사의 말로는 중간에는 스킬도 봉인돼서 맨몸으로 싸웠다고 하고....

'아니, 맨몸이면 적당히 상대하고 물러나도 됐잖아. 뭣 하러 팀장급에게 덤빈 건데....'

그러고도 이긴 게 용하다.

미친 건가?

아니, 그 정도면 오히려 안 죽은 게 더 신기한 거 아니야?

'정말 융통성 제로라니까.'

나는 학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이아영 이사가 주변 눈치를 살피곤 넌지시 입을 열었다.

"상대는... 토벌권 회수팀이라고 했죠?"

"그렇게 들었습니다."

"아쉽게도 생존자가 없어요. 시신을 보니까 몸에 뭘 심어둔 모양이에요. 아마 원격으로 한 번에 처리한 거겠죠."

"그럴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밸런스팀 쪽은 한 명 살았죠? 당신이 인터폴에 넘긴 그 관계자."

"아뇨."

"...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놀란 반응이 돌아왔다.

"두 명이 살았습니다."

"…두, 두 명이요? 그게 누군데요?!"

"마르크 팀장."

"...!"

이아영 실장이 놀란 눈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저쪽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저희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습니다."

"...좋은 거 맞죠?"

"당연하죠. 무엇보다 이제 국제 협회는 지금처럼 대범하게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상대가 버린 패라도 일단 쥐고 있으면 상대는 움찔할 수밖에 없다.

그러려고 애써 살려서 빼돌린 거니까.

"이제 우리 쪽에서 치고 나갈 타이밍이라는 소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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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협회가 언론을 탄 지 일주일.

이젠 엄연히 한국 협회의 공식적인 두 번째 지부가 된 킨샤사 지부에서 브루스 지부장과 대면했다.

이번 사건에 대한 마무리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고로 앞으로는 토벌 현황을 한국 협회에 주기적으로 보고해주시면 됩니다. 수익금 분배는 8:2 계약이고 부산물은 원칙적으로 지부 소유지만, 프렉탈은 한별 상사와 독점 계약이 체결됐으니 그 점만 유의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부 팀은 지부장님이 직접 관리하셔도 되지만, 이전처럼 전쟁에 파병하는 일은 절대 용납 못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세부 계약 내용을 모두 확인한 직후, 그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한국 협회에서 꽤나 영향력 있는 분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퇴사하신 지금도 전권을 갖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대리인이라 생각해주십시오."

근데 생각해보니까 진짜 내가 다 하고 있긴 하네.

"하하, 일주일 새에 인수한 지부가 대체 몇 개인데 그런 겸손을."

"...."

대답을 아꼈다.

결과를 떠나서 어째 나만 개고생한 것 같은 기분이라 괜히 씁쓸해졌다.

국제 협회가 언론을 탄 직후, 한국 협회가 콩고, 잠비아 지부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중앙아프리카의 수많은 국가에서 인수 요청이 쇄도했다.

국제 협회의 통합 지부 건설로 인해 토벌권을 빼앗겼던 우간다, 르완다, 앙골라 등등.

모두 토벌권을 잃은 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이었다.

통합 지부가 국제 협회를 탈퇴했다는 소식은 그들에겐 최고의 희소식이었겠지.

이때다 싶어 다시금 독립 협회를 세우려 했겠지만, 이미 오랜 분쟁 때문에 내부적으로 꽤나 힘들어 현실적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외부 협회의 지원을 받는 것뿐이었고, 모두가 예외 없이 한국 협회를 선택해주었다.

뭐, 나로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기에 흔쾌히 모든 인수 요청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 때문에 업무가 배로 늘어나긴 했지만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찰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이두식 협회장은 예산 부족에 우려를 표했지만, 결과적으로 적자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다는 내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한국 협회는 고작 일주일 새에 중앙아프리카 모든 국가에 지부를 세우는 기염을 토했다.

그건 단순히 지부가 늘었다는 것 말고도, 아프리카의 희귀한 아이템과 부산물들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군요. 설마하니 아프리카 통합을 위해 처음부터 본부가 분쟁을 유도하고 있었을 줄이야...."

브루스 지부장은 여전히 얼떨떨한 듯했다.

"아직은 혐의일 뿐이지만요."

"그래도 이번에 덜미를 잡혔으니 앞으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모르죠. 공식적으로 혐의가 입증돼야 제재할 수 있을 텐데, 워낙 주도면밀한 놈들이라 이미 대비책을 마련해뒀을 수도 있습니다. 뭐, 인터폴이 잘해주길 바라는 수밖에요."

답답한 일이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이번에 국제 협회를 저격할 수 있었던 건, 잠비아 지부 인원들이 나와 에마 대표의 대화를 모두 목격한 정황이 있었으니 가능했다.

하지만 그들을 아프리카에서 잠시 물러나게 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정황이나 증언은 있지만, 무엇보다 실질적인 증거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겨우 살려낸 밸런스 팀원 중 한 명은 인터폴에 넘어가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하니.

결국 중요한 건, 국제 협회가 잠비아 협회와 무기 거래를 진행하려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냐인데....

PB 코퍼레이션 팀장급도 망설임 없이 물갈이할 정도면 이미 모든 꼬리를 끊어놨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지.

'그래도 최소한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엔 허튼짓은 못 하겠지만....'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그 기간만큼 우리가 몸집을 키울 시간을 번 셈이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불가침 영역이었던 국제 협회가 도마 위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목적의 반은 이뤘다.

혐의가 입증되든 안 되든, 국제 사회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으니 전처럼 쉽게 움직이진 못할 거다.

"꼭 입증됐으면 좋겠군요. 그동안 놈들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참...."

"뭐…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긴 합니다."

"네?"

"로마나 대통령이 있지 않습니까."

브루스 지부장은 작게 감탄했다.

"이번에 헌터 파병 지시 혐의로 로마나 대통령도 수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의 행동을 보면 아마 그도 정황상...."

"국제 협회와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요."

"본부의 지시를 받고 분쟁을 유도했을 확률이 높죠."

내부 동조자가 없이 움직였을 리가 없다.

아마 그가 제일 의심되는 인물이겠지.

"로마나 대통령을 잘만 캔다면, 국제 협회가 이번 일을 주도했다는 걸 입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말하기 무섭게 누군가 사무실로 들어오며 곧바로 초를 쳤다.

고개를 돌리니, 다름 아닌 세드릭 의원이었다.

"그거야 모르지 않습니까. 잘만 조사한다면...."

"조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방금 서거하셨거든요."

"그게 무슨...?"

이건 또 뭔 개 같은 소리인가.

"관저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습니다. 유서도 나왔고요."

"...."

충격적인 소식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현재 저희 소속 지부들 사이에서 탈퇴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사무총장실.

수행비서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특별한 사유 없는 요청은 모두 거절했지만, 탈퇴 조건에 부합하는 지부도 몇몇 있어서...."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치를 살폈다.

벌써 소속을 탈퇴한 지부가 5곳이 넘었다는 소식을 차마 전달하기 힘들었다.

"...."

"...."

웨슬리 사무총장은 에마 대표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둘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너무나도 무거운 분위기 속에 수행비서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이내 오랜 정적을 깨고 웨슬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잠비아 협회 입을 막기 위해 밸런스팀을 보낸 거 아니었어?"

"그랬지."

"심지어 마르크 팀장도 끼어 있었다면서."

"맞아."

담담하게 대답하는 에마 대표.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왜 실패한 거지?"

"...김준우가 있었으니까."

"변명하지 마. 김준우를 상대하라는 것도 아니고 잔챙이 몇 명 죽이는 것뿐이었잖아."

"...."

"심지어 물갈이를 했는데도 한 명이 멀쩡히 살아서 인터폴에 넘겨졌어. 에마, 난 너를 믿고 맡겼는데 이게 대체 무슨 결과지?"

에마 대표는 말이 없었다.

"팀장이 직접 나섰는데 고작 그 정도 임무도 수행하지 못하는 주제에 뭐가 밸런스팀이라는 건지."

웨슬리는 다 들으라는 듯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현재 국제 협회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이했다.

전 세계 토벌권을 통합하기 위해 비밀리에 진행 중이던 계획이 이번 사건으로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설립 이래 처음으로 전 세계의 좋지 않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인터폴에서도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나마 꼬리가 잡힐 만한 건 미리 끊어놨다는 게 다행인 점이다.

조금만 늦었다면 PB 코퍼레이션의 존재와 그간의 행적까지 모두 드러날 뻔했다.

어떻게든 급한 불은 껐지만… 그 마지막 대상이 로마나 대통령이라는 건 좀 아쉬웠다.

그 사람만큼 이용하기 쉬운 인물도 찾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인터폴에 넘어간 밸런스팀 소속 놈은....'

그놈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뭐라도 발설하는 순간 어떻게 처분될지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직원들 시신은 모두 수습했어?"

"토벌권 회수팀 쪽은 모두 수습했고, 밸런스팀은 아직 진행 중이야. 그런데...."

"또 뭐가 있는 거야?"

"인원이 두 명 모자라. 뭐, 한 명은 김준우가 살려서 인터폴로 넘긴 놈일 테고."

"그럼 나머지 한 명은?"

웨슬리 사무총장이 날카롭게 쏘아붙였지만, 에마 대표는 전혀 움츠러든 기색 없이 대답했다.

"마르크 팀장 시신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어."

"...."

웨슬리 사무총장의 낯빛이 서늘해졌다.

그의 시선이 보좌관에게 향했다.

"각 부서에 연락해서 당분간 본부 내 모든 활동 중지시켜. 이사진들 입단속 시키고. 혹시라도 딴소리하는 놈들은 알아서 처리해."

"...알겠습니다."

이어서 그는 에마 대표를 향해 말했다.

"그동안 PB 코퍼레이션은 모조리 새로 교체하자고. 명칭도 인원도 전부."

"지금부터 인원을 다시 채우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미국에 괜찮은 놈 있잖아. 그놈한테 먼저 연락해봐."

"누구?"

"세계 랭킹 1위."

에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놈이라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요주의 인물이라며 처리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미 상황은 변했다.

에마 대표는 결정에 트집을 잡지 않고 받아들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웨슬리의 목소리가 곧바로 따라붙었다.

"아, 에마."

"…왜?"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계속 친구로 남긴 힘들 거야."

"...."

에마 대표는 대답 대신 등을 돌렸다.

'지랄.'

그리 중얼거렸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듣지 못했다.

***

어두운 공간.

깜빡거리는 조명 하나뿐인 곳에서 마르크 팀장이 눈을 떴다.

"뭐, 뭐야...."

여긴 어디인가.

아니 그보다... 살아 있는 건가?

마르크 팀장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쇠사슬로 온몸이 결박된 채였다.

이런 거로 자신을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마르크 팀장은 코웃음을 쳤다.

[습득 스킬 : 헤라클레스]

[스킬 사용 불가]

"...?"

[습득 스킬 : 업 파이어]

[스킬 사용 불가]

몇 번이고 여러 스킬을 사용하려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하던 찰나, 뒤늦게 자신의 팔에 연결된 링거가 눈에 들어왔다.

"반능석 용액이라 당분간 스킬은 못 쓸 거야."

익숙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다름 아닌, 김준우였다.

"반능석? 그걸 네가 어떻게...."

"너희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잔뜩 뿌려놓고 갔잖아."

김준우는 껍데기만 남은 총알을 보여줬다.

"실력 있는 연구원이 추출한 거니까 너무 걱정 마. 뭐, 양은 얼마 안 돼서 해봤자 효과는 몇 시간이겠지만...."

소름 끼치는 눈빛이 날아들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기엔 충분하지."

"나한테서 뭘 캘 수 있을 것 같나?"

"어차피 넌 이미 죽은 목숨이잖아. 여기서 살아 돌아간다고 해도 이미 PB 코퍼레이션이 물갈이했는데, 널 살려둘 것 같아?"

"...."

맞는 말이다.

몸속에 심어 놓은 칩이 발동했다는 건, 비상 프로토콜이 진행됐다는 뜻일 테니까.

그 말은 더는 PB 코퍼레이션 소속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길게 얘기할 것도 없어. 딱 두 가지만 물어볼게."

"...."

침묵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김준우는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위험인물을 처리하는 작업을 할 때, 시간석을 써서 작업할 때도 있냐?"

"크흐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시간석은 네놈이 가지고 있는…!"

탕―!

"끄아악!!"

허벅지에 총알이 박혔다.

반응할 틈도 없이 총구가 다른 쪽 허벅지에 올라갔다.

"아는 사람끼리 왜 그래.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잖아. 매뉴얼 상 시간석을 사용해야 할 때가 있냐, 그 말이지."

"...모, 모른다."

탕―!

여지없이 총알이 반대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찢어지는 고통에 이를 꽉 물며 고개를 들자, 김준우의 눈이 보였다.

한 치의 자비라곤 없는 눈빛.

"...랭크, 스킬, 능력치를 살피고 죽일 수 없다고 판단한 타깃은 시간석을 쓴다."

"이유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니까."

왜 이런 게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애초에 원인도 메커니즘도 알 수 없는 거였다.

단지 실험상으로 그랬으니까, 그렇다고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 혹시 너희들이 시간석을 회수하려고 한 것도, 사용해야 할 타깃이 있어서 그랬던 건가?"

"...."

"설마 내게 쓰려고?"

"웃기는 소리."

실소를 내뱉었다.

애초에 시간석을 사용할 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세계 랭킹 1위."

"...?"

"그놈을 처리하기 위해서 시간석이 필요했다."

김준우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자신의 예상과는 달라서 그런 건가.

"좋아. 그럼 다음 질문. 사무총장은 왜 전 세계 토벌권을 통합하려는 거지?"

"...모른다."

"하아.... 한 번에 대답하는 법이 없네."

"지, 진짜 몰라! 사무총장이 우리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줬을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알지."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의 총구는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뭐?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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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있었군요."

나와 마주 앉은 하성일 팀장이 턱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는 내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사무실을 찾았다.

중간에 생긴 사고로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와 함께 계약을 진행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들어올 때부터 벌써 궁금해 미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던 걸 보면....'

본심은 그냥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현지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전달해주었고, 그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하성태 사장은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친히 대사관에 넘겨드리긴 했는데... 이후 소식은 듣질 못해서."

"한국 땅 밟자마자 검찰로 직행했습니다."

어쨌든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은 잡았지만, 범인이 친형이라는 사실에 이래저래 심란해 보였다.

"살해 혐의는 워낙 증거가 명확해서 실형은 확정일 겁니다. 다만, 암거래 혐의는 입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뭐, 실제로 거래가 진행된 게 아니니 증거가 없겠죠."

"그래도 무기를 불법 루트로 밀매한 정황은 포착했으니 그 부분은 추가적으로 조사가 들어가겠죠."

하성일 팀장이 애써 웃으며 희망적인 관측을 내놨다.

"해외 투자자에 대한 조사는 어떤가요?"

"듣자 하니 전부 그 사람이 시킨 거라고 주장하고 있긴 한데,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회사도, 계좌도, 이름도 전부 불명이라고...."

"그렇군요."

뭐, 대표가 직접 움직인 사항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뭐, 저 혼자라도 좀 알아봐야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안됩니다. 혹여라도 그러지 마십시오."

멋도 모르고 하는 발언을 딱 잘라 저지했다.

그러자 하성일 팀장은 왜 그리 과민반응하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 사람은 유능하면서도 가끔 어설픈 데가 있다니까.

어딜 겁도 없이 발을 집어넣으려는 건데.

"하 팀장님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경찰도 정보를 못 찾을 정도면 뒤에 엄청난 거물이 있을지 모릅니다. 개인이 건드리기엔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직접 만나자는 것도 아니고 좀 알아보는 수준인데요.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네."

"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하자 하성일 팀장은 그제야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PB 코퍼레이션의 뒤를 파겠다니... 죽으려면 뭔 짓을 못 해.'

각국의 거물급 인사도 아무렇지 않게 제거하는 놈들이다.

일개 기업인이 멋모르고 건드렸다간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다.

"그래도 일이 잘 해결돼서 다행입니다. 프렉탈 독점 수입도 결국 따내셨잖습니까."

분위기가 퍽 가라앉은 것 같아, 주제를 환기했다.

"그게 어디 제가 한 일입니까. 모두 대표님 덕이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하하...."

하성태가 검찰에 송치된 직후, 또다시 빈집이 된 한별 종합 상사는 돌고 돌아 결국 하성일 팀장에게 넘어갔다.

물론 그의 성격상 몇 번이나 고사했다는 모양이지만, 하덕수 회장까지 나서서 회유한 끝에 결국엔 사장직을 받아들이기로 했단다.

"그나저나 프렉탈을 들여오긴 했는데… 이걸 취급할 수 있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걱정입니다."

하성일이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최고급 재료라고 해도, 결국 무기로 가공하지 못한다면 그냥 비싼 돌멩이일 뿐이니까요."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하급 아이템이면 몰라도 최고급 재료를 민간 기업이 취급하기엔 설비도, 인원도 마땅치 않을 테니까.

"협회 지원팀이 있지 않습니까. 이래 봬도 아시아에선 최고 수준의 팀입니다."

"민간 기업이 지원팀한테 수주를 맡겨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얘기해보겠습니다."

그제야 하성일 팀장… 아니, 하 사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뭐, 딱 보니까 이게 본론이었네.

역시 장사꾼이라 이건가.

"그나저나 대표님은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계속 해외 쪽으로 움직이실 건가요?"

"원래는 그럴 계획이었습니다만...."

나는 말끝을 흐렸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랬다고, 인수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지부 사업을 벌이기에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며칠 더 아프리카에 머무르면서 다른 지역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싶었지만....

무턱대고 너무 많은 지부를 인수한 탓에 한국 협회가 과부하가 걸린 것인지, 이두식 이사가 당분간은 한국에 붙어 있으라고 못을 박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해 현재 이 상태다.

'쯧, 왜 잘하고 있는 사람 발목을 잡냐고.'

심기가 이래저래 불편했지만, 겉으로 드러낼 순 없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뭐, 급한 것도 아니니 당분간은 한국에 있을 예정입니다. 처리할 일도 좀 있고요."

"그러시군요."

하 사장이 작게 웃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움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조부님께서도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전폭적으로 지원해드린다고 하셨으니."

"하하. 저야 영광입니다."

악수를 나누곤 하성일 사장은 사무실을 떠났다.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네요."

구석에 있던 이아영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뭐, 사실상 옆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써먹겠다는 뜻이겠지만요."

"그게 어디에요. 국내 1위 기업이 지원해준다는데. 그래도 하덕수 회장이 직접 동맹 제안을 한 거 보면 당신 일하는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봐요."

"직접 봤으면 그런 소리 못할 텐데 말이죠."

이아영이 실소를 지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뭔데?

"아무튼, 이번에 한별 그룹이랑 한국 협회랑도 동맹을 체결했으니, 오히려 이전보다 상황이 더 좋아질 수도 있겠네요."

"그건 좀 아쉽군요."

"...네?"

"협회가 어려워야 우리가 돈을 벌 수 있지 않습니까?"

"...."

반은 농담이었는데 어째 표정이 심상치 않다.

"큼큼. 그래서, 중앙아프리카 지부들 상황은 어떻습니까?"

나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

"뭐, 다들 반응은 좋아요. 무엇보다 현지 직원들 위주로 팀을 꾸려서 일자리를 뺏었다는 불만도 거의 없고요."

"다행이군요."

"아, 민주 씨도 많이 회복됐다고 해요. 아마 이번 주에는 귀국할 것 같던데요."

그 소식에 살짝 안심했다.

아닌 게 아니라, 부상으로 귀국이 힘들어 그녀 혼자 콩고에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거액을 주고 데려온 에이스가 며칠째 공석이어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게다가 콩고 쪽 치료비도 만만치 않고 말이지.

"그럼 귀국하는 대로 바로 업무 복귀하라고 전해주시죠."

"바로요? 좀 쉬게 해주는 게 낫지 않아요?"

"그 녀석 성격에 쉬라고 한들 얌전히 쉴 것 같습니까?"

"...그렇긴 하네요. 뭐, 알았어요."

이아영 이사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김민주 얘기가 나와서 그런지 내 시선이 사무실 구석으로 향했다.

영롱한 빛을 잃고 거무튀튀하게 변한 흑랑지도였다.

김민주를 대신해 내가 챙겨온 그녀의 무기였다.

'흠....'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길 잠시, 이아영 이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한별 상사에 연락해서 프렉탈 몇 개만 보내 달라고 해줄 수 있습니까?"

"...."

이아영 이사가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뒤늦게 이해했다는 듯 씨익 웃었다.

"선물이라도 해주려고요?"

"이것도 다 복지 아니겠습니까."

"제작은 어디에 맡길까요?"

"제가 아는 곳이 한 곳밖에 없군요."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알았어요. 지원팀에 연락해볼게요. 제작실 쪽에 아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이번 주 안으로 부탁한다고 전해주세요."

"바라는 것도 많네."

그녀가 볼멘소리하는 사이 내 핸드폰이 울렸다.

이두식 이사에게서 온 전화였다.

「준우야... 일 났다.」

다짜고짜 불길한 말부터 꺼낸다.

국내에 잡아놓은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또 뭐지....

"...또 뭐가 말입니까?"

「앙골라 지부에서 납품받은 부산물이 하나 있는데, 그거 정제하다가 지원팀에 사고가 났다.」

"...예?"

「다친 사람 없는 게 다행이다만... 장비가 죄다 타버린 모양이다.」

"...."

「앞으로 작전팀에 장비 지원 어떻게 하냐...?」

아니, 그걸 저보고 어쩌라는....

자연히 아파지는 골머리에 이마를 턱 짚었다.

***

"해외 7곳에 지부를 두고 있는 협회 지원팀이 부산물을 정제하다가 연구실을 통째로 날려 먹다니...."

서울 본부.

꽤나 큰 화재였던 건지 온통 새카맣게 타버린 현장은 처참했다.

"언론에 알려지면 제대로 쪽 당할 만한 일이군요."

"...."

이두식 이사는 말이 없었다.

나도 황당해서 어떻게야 할지 모르겠는데, 협회 소속인 그는 더 어이가 없겠지.

"기자들한텐 뭐라고 설명하셨습니까?"

"연구 설비 합선으로 인한 화재라고 해뒀네."

"그럴싸한 변명이군요."

발에 걸리는 쇳덩이를 툭 찼다.

무기 제작 장비고 뭐고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광경에 뒤따라온 이아영 이사도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부산물이었습니까?"

내가 묻자 이두식 이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예?"

"지원팀 직원들도 처음 보는 거라더군. 그래서 이것저것 시도해보다가 이 꼴이 난 거지."

"그 부산물은 어디 있습니까?"

"지하실에 보관 중이네."

"...보관 중이라고요? 연구실이 홀랑 타버릴 정도의 화재였는데 그건 멀쩡하답니까?"

"그러니까 말이다."

이두식 이사가 혀를 찼다.

당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딘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할 틈도 없이 이두식 이사가 말을 이었다.

"그것보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크다. 일단 급한 대로 수리 시설만이라도 먼저 복구할 생각이긴 한데...."

"그것도 임시방편일 뿐이죠."

"그래. 임시 시설만으론 무조건 작전팀 토벌에 지장이 생기겠지.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재건하자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최근에 누가 무턱대고 인수를 해버려서 예산도 없다."

"...."

이두식 이사가 나를 힐끔거렸다.

어이가 없어서 원.

말이야 맞긴 한데, 그걸 왜 내 탓으로 돌리는 건가.

뭐, 책임 운운은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일단 눈앞에 문제 해결이 먼저다.

안 그랬다간 이두식 이사의 징징거림을 계속 들어야 할지 모르니 말이다.

미리 조사 지시를 해 놓은 이아영 이사에게 물었다.

"재건 비용은 어느 정도 들 것 같습니까?"

"글쎄요. 못해도 몇천억은 들걸요?"

"...."

이건 단시간에 어떻게 할 금액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녀석한테 제때 선물해주기는 글렀네.'

뭐, 내 사정을 떠나서 확실히 문제가 크다.

나름 동아시아 지원팀 중에선 최고의 시설을 갖춘 곳이었는데… 이렇게 폭삭 주저앉아 버렸으니.

어떻게든 재건은 해야 할 텐데....

'잠깐....'

그 순간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이건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다.

최근 지부 인수 덕분에 최고급 부산물들이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기존 지원팀 설비로는 그걸 모두 관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무기 제작이라 해봐야 A급이 최대였고, 그 이상은 항상 해외 업체에 수주를 맡기지 않았던가.

넘쳐나는 최고급 부산물.

국내 최고 기업인 한별 그룹과의 동맹.

아직까지 시행 중인 던전 민영화.

그리고 현재 그 어느 때보다 궁지에 몰린 국제 협회.

이 조건들이라면....

"이사님."

"왜?"

"저번에 말씀드린, 한국 협회를 제2의 국제 협회로 키우는 안건 말입니다."

"...."

"정말로 시행할 생각 있으십니까?"

이두식 이사의 눈썹이 물결쳤다.

"갑자기 그건 왜?"

"이참에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해서요."

"...뭐?"

어리둥절해 하는 이두식과 이아영 이사를 번갈아 보았다.

"지금이 딱 한국 협회의 전력을 증강할 기회입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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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거 아니에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이아영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 쏘아붙였다.

"토지랑 건설비용, 장비 구매까지 다 우리가 부담하겠다뇨! 그게 다 얼만데!"

"돈이야 뭐 한별 그룹에서 빌리면 되죠."

"쉽게도 말하네...."

당연히 돈 빌리는 것 자체는 쉬운 일이니까.

단지 갚는 게 문제일 뿐이지.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그쪽 아버지 일 도와드리는 건데 오히려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거든요? 몇천억이 오가는 일인데!"

잘해준다는데 뭐라 하니 한숨밖에 안 나왔다.

가끔 보면 공사를 구분하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남 대하듯 한다니까.

"슬슬 국제 협회로 키우려는 건 이해하는데, 드는 비용이랑 시간에 비해서 우리 쪽 손해가 너무 커요. 여기까지 어떻게 성장했는데... 이러다간 협회가 성장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파산할 수도 있어요."

"뭐, 그거야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간 할 일이었잖습니까.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면 이건 협회보다 우리한테 이득인 일입니다."

"...네?"

"100% 우리 자금으로 만든 지원팀이, 실질적으로 어디 소속일 것 같습니까?"

"...."

결국, 시스템을 만들고 자본을 쥐면 실질적 소유권은 자연스럽게 넘어오게 된다.

설사 공식적으론 다른 소속이라 하더라도.

"공식적으로는 협회 소속이겠지만, 실질적인 관리 권한은 우리에게 있을 겁니다. 민간 기업이 세계 최고 수준의 공방 시설을 갖춘 지원팀을 손에 넣는다면 나쁜 투자는 아니죠."

"...파급력이 어마어마하겠네요."

"국내에서 유통되는 모든 장비를 우리가 관리하게 될 겁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이득이겠지만, 사실 이건 시작일 뿐이죠."

거기서만 끝낼 거면 굳이 돈까지 빌리면서 진행하지 않았을 거다.

"최고 수준의 지원팀을 필두로 작전팀도 다시 한번 개혁할 필요가 있겠죠. 애초에 우리나라 헌터 수준 자체는 이미 국제 협회 저리가라인데, 지금까지 장비가 그걸 따라가지 못했죠. 이번 기회에 그 밸런스를 맞추는 겁니다."

"전 세계 토벌 시장에 영향을 끼치겠네요...."

"거기에 마지막으로 청소팀."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서류를 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체계적인 던전 청소 매뉴얼을 가진 건 우리가 유일합니다. 이미 직원들도 상당한 베테랑들이고요. 여기에 최첨단 청소 장비까지 갖추면 세계 최고 토벌 기업이라 자부할 수 있게 되겠죠."

여기까지가 내가 원하는 단단한 기반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다시 협회와 합치겠다는 거죠?"

"...예."

그래, 애초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만들어진 이유는 협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였다.

고쳐쓰기 힘드니, 외부에서 새로 만들어 적용하는 게 더 간편하니 말이지.

이번에야말로 그 계획을 위한 중심 설계와 더불어 전력을 증강할 필요가 있었다.

그 목적을 알고 있는 이아영은, 회사를 키워놓고 남에게 홀랑 넘기겠다는 말도 안 되는 발언에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전력증강을 할 필요가 있어요? 조금 과하지 않나요. 어차피 국내 토벌은 지금 수준으로도 충분하잖아요."

"딱히 토벌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럼요?"

나는 대답을 아껴야 했다.

토벌이 아닌, 사람과 싸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은 차마 뱉기 힘들었다.

'우리가 몸집을 키울 동안 국제 협회가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모르긴 몰라도, 그쪽 역시 전력증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PB 코퍼레이션이 통째로 물갈이를 하지 않았던가.

이참에 조직 자체를 새롭게 개편하고 단단히 준비하겠지. 이미 당한 게 있으니까.

다만, 어떤 인원으로 어떤 조직을 만들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건, 엄청난 기술력과 자본력을 바탕으로 상상 이상의 모습으로 나타날 거란 사실이다.

그런 놈들과 아무 준비 없이 다시 붙게 된다면... 나라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도 그에 맞춰 대비해야겠지.'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진 이상 한시라도 지체할 필요는 없다.

"일단 하 사장님한테 연락해서 사업 설명해드리고, 투자자 모집 좀 요청해주세요."

"대표님은요?"

"저는 부산물 처리 시설을 좀 돌아보면서 납품 계약을 진행하겠습니다."

아프리카 지부들에서 최상급 부산물을 계속 납품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장비를 제작하는 건 수지가 맞지 않는다.

국내 헌터 중 80%가 B급인데 모든 장비를 S랭크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보급형부터 최고급 프리미엄까지, 등급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더 많은 헌터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당연히 하급 부산물도 납품받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둬야겠지.

"뭐 하고 있습니까. 빨리빨리 움직여야죠."

***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협회의 지원팀 재건을 맡았다고?"

한별 그룹의 전신, 한별 물산 본사.

하성일은 하덕수 회장을 대면하여 김준우가 일러준 이야기를 전달했다.

하지만 하덕수 회장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왜지? 그쪽이 협회를 도와줘서 이득 될 게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만, 김 대표는 협회 출신 아닙니까. 도의적인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 하하하...."

미친놈인가?

퇴사하는 순간부터 회사 방향으로는 오줌도 안 누는 세상에, 전 직장을 위해 몇천억을 태우겠다고?

"그래서? 그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거지."

"사실… 김 대표님이 저희한테 해당 사업에 대한 투자를 부탁했습니다."

"흐음, 돈을 빌린다는 건 단순히 도의적인 차원에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소린데."

뭔가 꿍꿍이가 있나 보군.

하덕수 회장은 클클, 웃었다.

"어떻게 할까요? 아무래도 액수가 조금 크다 보니...."

"넌 어떻게 하고 싶으냐?"

"뭐,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협회와도 동맹을 체결했으니 투자를 해주는 게 아무래도...."

"말이 길구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라."

"...네?"

하덕수 회장은 뭘 고민하냐는 듯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 원하는 만큼 최대한 투자해줘. 연구소 재건은 한별 건설이랑 다리 좀 놔주고. 그리고 너도 부산물 납품 업체 아는 곳 많지? 거기도 좀 소개해 주는 것도 좋겠지."

"그, 그렇게까지요?"

"내 예상이 맞다면, 앞으로 국내에서 던전 관련된 모든 사업은 그놈들을 통해서 이뤄질 게다. 우리도 미리미리 줄을 대놓아야지."

"...김 대표를 꽤나 신뢰하고 계시는군요."

"동업하자고 했지, 우리 사업을 도와달라고 안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됐냐. 아마 그놈이 아니었으면 프렉탈 독점 수입은 물 건너갔을 게다."

"...맞습니다."

하성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말은 곧,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마음 상하는 일이 아니긴 해도, 회장인 할아버지 앞에서는 창피한 이야기였다.

"그놈,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 놈이야. 다른 젊은 대표들처럼 기껏 회사 키워놓고 다른 놈한테 홀랑 넘겨버릴 놈도 아니고. 이득이 있는 한 우린 무조건 그놈 편에 선다."

"알겠습니다."

하 사장은 그 말을 끝으로 인사를 하곤 조심스레 회장실을 나왔다.

그리곤 곧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대표님! 투자 따냈습니다!"

한껏 들뜬 목소리.

하지만 전화를 받은 김준우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담담했다.

「그렇습니까?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요. 조부께서 이미 대표님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하하하. 이것 참 부끄럽습니다.」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일단 국내 부산물 처리 시설이랑 납품 업체는 저희 쪽에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지원팀이 만들어지면 전국에서 모든 부산물을 납품받을 수 있도록 말이죠."

「가공한 아이템이랑 무기의 납품권은 다시 한별 상사에 넘겨 드리면 되겠습니까?」

"하하하! 역시 시원시원하십니다!"

하성일 사장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 규모의 사업에서 내 것과 네 것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서로 본심을 숨기고 뒤에서 이득을 챙기려는 여느 사업가들과는 그릇부터가 다르다.

「그럼 어디 한번 해봅시다.」

"넵!"

국내 토벌 시장의 판도를 바꿀 사업이 시작됐다.

***

충청남도, 아산.

어느 시골에 위치한 부산물 처리 시설, 강안 물류.

"오늘 몇 구나 들어왔냐?"

시설 반장 최용구가 작업 준비를 마치며 직원들을 향해 물었다.

"글로리 길드에서 9구, 화랑 길드에서 11구, GT 던전에서 17구, 협회 천안 지부에서 33구 들어왔습니다."

"시벌, 많기도 하네. 납품 기한은?"

"길드 쪽은 닷새, GT 던전은 모레까지입니다. 협회 쪽은... 지원팀 사고 때문에 당분간 납품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자, 빨리빨리 작업 들어가자."

최 반장이 손뼉과 함께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시설 내 장비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가동되기 시작했다.

몬스터 부산물 처리 시설.

던전 청소팀이 수거한 몬스터 사체가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곳이다.

몬스터의 갑피나 이빨, 뿔 그리고 몬스터의 몸속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아이템을 추출해주는 토벌의 마지막 공정이 이곳에서 처리된다.

부산물 처리는 일반적으로 공식 토벌에 포함되진 않는다.

따라서 사설 업체에서 처리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곳 시스템은 간단하다.

협회와 민간 길드, 민간 던전 업체에서 수거한 몬스터 사체를 맡기면 부산물을 추출해 각 업체에 다시 납품한다.

작업 자체는 어렵거나 복잡하진 않다.

하지만 원체 토벌되는 몬스터 수가 많아 작업량이 상당하다.

정해진 일정을 맞추기 위해선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 당연히 업무 강도도 상당했다.

부산물 처리 시설 직원의 하루 평균 근무 시간은 14시간.

심지어 그마저도 제때 퇴근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런 살인적인 근무 시간보다 정작 그들을 괴롭히는 건 따로 있었다.

"최 반장님 계십니까?"

정장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시설에 모습을 드러냈다.

GT 던전의 강상우 상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강 상무로 인해 최 반장을 비롯한 직원 일동은 곧바로 경계심을 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직접 찾아오는 일은 늘 좋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납품 기한을 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까지 가능하겠습니까?"

"네?! 안 됩니다! 작업량이 17구나 되지 않습니까. 저희가 GT 던전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곳에도 납품을 해야 하는데...."

"그럼 그건 잠시 미루시고 저희 쪽을 먼저 처리하면 되잖습니까."

"그게 말처럼...."

"최 반장님."

강 상무가 한숨을 쉬었다.

"최근에 전북 쪽에 부산물 처리 시설이 새로 하나 생겼답니다."

"...."

"최 반장님의 결정 때문에 저희가 다른 곳과 계약을 하게 되면, 여기 대표님께서 참 달가워하시겠군요."

"...."

최 반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직접 말만 안 했을 뿐이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클라이언트 쪽에서 납품 기한을 당기는 일은 부지기수였으니, 새삼 화를 낼 일도 아니다.

하지만 GT 던전은 특히 심했다.

늘 말도 안 되는 일정을 강요하다 못해, 조금이라도 기한이 늦어지면 계약 자체를 가지고 마구 흔들어댔다.

부당하다 항의하기도 힘들었다.

어디까지나 저쪽이 갑인 이상 을은 아무런 힘도 없다.

더욱이 한낱 작업반장인 자신은 더욱 그렇다.

이렇게 나오면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해보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격한 마음을 꺾고 받아들였다.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일정 조율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합니까?"

그런데 생각지 못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시설로 들어오고 있었다.

"GT 던전, 그렇게 안 봤는데… 참 일을 주먹구구식으로 하는군요."

"...누구시죠?"

강 상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남자는 대답 대신 명함을 내밀었다.

"김준우라고 합니다."

현재 최고 주가를 달리는 민간 던전 기업.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수장이 직접 행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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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여긴 무슨 일로?"

명함을 건네자, GT 던전 관계자로 보이는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업무차...."

"그럼 각자 업무에 집중하도록 하죠.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마시고."

남자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명백히 경계심을 보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GT 던전.

던전 민영화에 발맞춰 신설된 GT 그룹의 계열사이자, 국내 토벌 시장에서 꽤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이다.

'하청 업체들을 쪼아서 성장세를 올렸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보니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긴 하네.

물론 당하는 입장에서는 X 같겠지만.

"저도 남의 일에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업무 내용상 그래야 했습니다."

"...네?"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돌렸다.

"최용구 반장님?"

"네, 네?"

"카르마 코퍼레이션도 강안 물류에 부산물 수주를 맡기고 싶습니다. 양은 꽤 되겠지만, 그에 맞춰 비용은 섭섭지 않게 쳐 드리겠습니다."

준비해둔 서류를 건넸다.

서류를 받아든 최 반장은 두 번 놀랐다.

적혀 있는 금액에 한 번.

그리고 월 추정 수주량에 한 번.

뭐, 당연한 반응이리라.

대충 민간 길드와 기업이 맡기고 있는 수주의 배가 훌쩍 넘는 양이니까.

"...저, 저희 일정상 이 정도 양은 소화하기 힘듭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청도 지역에서 부산물 처리를 맡길 곳이 여기밖에 없지 않습니까. 부디 재고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부탁하신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양을 맞추려면 다른 업체랑 계약을 해지해야 하는 수준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

최 반장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하는 표정이다.

"어쨌든 이곳도 이익이 우선 아닙니까? 좀 더 돈이 되는 계약을 선택하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닙니까?"

"...."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GT 던전 쪽 남자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듯, 곧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자, 잠깐만! 이건 상도가 없어도 너무 없지 않습니까! "

"...? 왜 그러십니까? 최 반장님은 아직 그쪽이랑 계약 해지하겠다곤 한마디도 안 하셨는데."

"지금 어디서 말장난을…!"

"그리고 말입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계약 해지로 협박을 하셨으면, 최소한 그럴 각오는 돼 있으셨던 거 아닙니까?"

"...."

그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협상에 쓸 무기는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걸 써야지, 왜 책임도 못 질 말로 협박을 해.

다시 최 반장을 바라봤다.

아직 망설이는 듯했다.

그의 직책으로 볼 때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이긴 할 거다.

뭐, 애초에 이 자리에서 바로 계약할 수 있을 거라 생각 안 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게 목적이다.

이 정도면 잘 먹힌 거겠지.

"제 선에서 판단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표님과 상의 후에 다시 연락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최 반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 상무를 쏘아보곤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한별 그룹이 뒤에 있다고 너무 막 나가시는 거 아닙니까?"

그 직후, GT 던전의 남자가 날카롭게 각을 세웠다.

제 딴에는 경고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이 바닥에서 이런 식으로 일하시다간, 언젠간 크게 당하실 겁니다."

"그쪽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강상우 상무입니다."

갑자기 이름을 물어서 그런지 퍽 당황한 듯 보였다.

너무 당황하지 마, 안 잡아먹어. 당장은.

"강 상무님, 이미 당하신 분에게 그런 말 들어도 별로 와 닿질 않는군요."

"뭐, 뭐요?! 지금 뭐 싸우자는…!"

"그리고 말입니다."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제 뒤에 한별 그룹이 있는 게 아니라, 한별 그룹이 제 뒤에 붙은 겁니다."

"...."

"잘못 알고 계신 거 같아서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이 정도면 끝났을 거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상대는 근성이 있었다.

따라붙듯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 아니면 다른 시설 없는 줄 압니까?"

"네, 네. 다른 곳 열심히 돌아다니십시오."

나는 손을 휘저으며 시설을 나섰다.

일도 끝났는데 괜한 도발에 발이 묶일 필요는 없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다고.

수첩을 펼쳤다.

하성일 사장에게 받은 전국 부산물 처리 시설 리스트였다.

'시작이 좋네.'

가장 윗줄에 가로선을 긋곤 걸음을 옮겼다.

***

GT 던전과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다녀간 직후, 최 반장은 급히 대표에게 연락을 넣었다.

강안 물류, 곽철수 대표는 두 업체가 왔다 갔다는 소식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곧바로 사무실로 출근했다.

최 반장을 통해 그간 일을 전해 들었다.

"그러니까…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대놓고 전속 계약을 제안했다는 건가?"

"직접적으로 제안한 한 건 아니지만, 정황상 그렇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 강 상무가 있었는데도 그렇게 나온 걸 보면요."

"흐음...."

회사를 설립한 이래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였다.

사실 곽 대표 입장에서도 GT 던전이 썩 마음에 안 들었다.

원청의 입장을 내세워 쪼아 먹는 걸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계약을 끊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섣불리 행동했다가 어떤 역풍을 맞을지도 모르고....'

제아무리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라고 해도 그래봤자 중소기업. 상대는 GT 그룹이 아닌가.

그리고 이 바닥에서 하루 이틀 사업할 게 아니라면 괜히 대기업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

그 심정을 잘 안다는 듯 최 반장이 슬쩍 거들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도 한별 그룹의 지원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커버 정도는 쳐주겠죠."

"커버라...."

곽 대표가 쓰게 웃었다.

"여태까지 대기업이 하청 업체를 상대로 커버를 쳐준 적이 있나?"

"...."

최 반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솔직히 난 카르마 코퍼레이션도 못 믿겠다. 원래 기업이라는 게, 겉으론 다 같은 가족인 척하면서 막상 문제 생기면 남의 자식 취급하는 놈들이잖나."

"그래도 김준우 대표는...."

"다른 놈들이랑 다르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아. 같이 일해본 적 있나? 그래봤자 뉴스에서 몇 번 본 게 다 아니야?"

"...그렇죠."

"뉴스에서 말하는 거 다 믿으면 우리나라에 나쁜 놈이 없어요."

"...."

최 반장이 입을 다물자, 곽 대표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김 대표의 지난 커리어와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행보를 볼 때, 분명 다른 기업과는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 믿고 GT 그룹의 심기를 건드리는 도박을 할 순 없다.

'그래.... 기분은 좀 더러워도 안전하게 가는 게 낫지.'

"어쩔 수 없다. 거절하자."

"...알겠습니다."

결국, 곽 대표는 안전을 선택했다.

그리고 같은 선택을 한 업체는 비단,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

GT 던전, 기획본부.

"김준우 대표를 만났다고?"

"네."

강상우 상무는 고택수 부사장에게 현 상황을 보고했다.

"어쩌다가?"

"며칠 전에 납품 일정 조율차 강안 물류에 방문했는데, 마침 김 대표도 계약차 그곳에 왔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대놓고 계약 해지를 권고하더군요."

"하, 하하…! 이런 상도 없는 놈을 봤나."

"듣자 하니 이후로도 전국 부산물 처리 시설을 돌아다니면서 똑같은 제안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친놈이 따로 없군."

고택수 부사장은 기가 찼다.

배짱이라 해야 할지, 객기라 해야 할지 모를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해가 안 되는 건 따로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국내 토벌에는 별로 관심 없지 않았나? 왜 이제 와서 부산물 처리 시설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지?"

"저도 그게 좀 이상해서 살짝 알아봤습니다."

강 상무가 몇 가지 서류를 꺼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이번에 한국 협회가 중앙아프리카 쪽 지부를 인수하면서 그쪽 부산물 수입권을 따냈다고 합니다. 한별 상사도 '프렉탈' 독점 수입을 체결했고요."

"흐음...."

한국 협회, 한별 상사 그리고 카르마 코퍼레이션.

세 곳이 최근 동맹을 맺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공동의 목적을 위해 협력이나 동맹을 맺는 거야 흔한 일이다. 이 일만 두고 보면 딱히 상관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쪽 사업에 관심을 갖고 발을 들이려고 한다면 간과할 수 없다.

세 곳 모두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보니, 그 파급력도 어마어마할 거다.

"며칠 전에 협회 지원팀에서 사고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원팀 연구소를 재건하게 됐는데, 그 사업을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맡았다고 합니다. 한별 상사에서 이미 투자도 따냈고요. 듣자 하니 세계 최고 규모로 만들 거라고...."

역시 하고 부사장이 중얼거렸다.

"최첨단 시설에 최고급 부산물이 만나게 되겠군."

아니나 다를까, 한 가지 일에 이미 세 곳이 모두 얽혀 있다.

'어쩌다가 그놈들끼리 손을 잡아선....'

상대하기 귀찮은 연맹이 만들어졌다.

강 상무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이번 기회로 국내 부산물까지 모조리 끌어모은다면… 상황이 더 심각해집니다."

"쯧, 그렇겠지. 국내 모든 토벌 시장이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통해 움직이게 될 테니까."

그건 곤란하다.

삐그덕거리던 시작을 어떻게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시장을 홀랑 뺏길 순 없는 노릇이다.

"카르마 쪽이 계약을 따내지 못하게 막을 방법은 있나?"

"사실 따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저희가 움직일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뭐? 왜?"

강 상무가 꽤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듣자 하니 시설 대부분이 그쪽 제안을 거절하고 있답니다. 뭐, 하청 업체 입장에선 굳이 저희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도박을 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요."

"하, 하하하! 그렇지. 암."

그래, 그러니까 하청이지.

제아무리 쪼아대고 굴려도 결국 먹이를 주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는 이상, 설설 길 수밖에 없다.

'뭐… 국내 시장은 이미 우리가 다 먹어뒀으니.'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기껏 한별 던전을 흡수해놓고 협회 엉덩이나 닦아주고 있는 동안, 국내 토벌 시장은 GT 던전이 거의 다 장악했다.

당연히 전국 대부분의 부산물 처리 시설도 모두 다리를 뻗어 놓았다.

이제 와서 그들이 국내 토벌 시장에 끼어들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었다.

'그러게, 회사를 차렸으면 사업을 해야지.'

뭔 해외 지부 인수 같은 일이나 하고 있는가.

그런 짓을 해봤자 결국 협회 좋은 일일 뿐인데.

"물론 연구소 재건은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국내 부산물 처리 시설을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완공된다고 해도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할 겁니다."

"하긴, 최고급 장비만 만들어선 경쟁력이 없지."

고택수 부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선 무언가가 거슬리는 모양인지 표정이 편치 못했다.

'할 수 있는 한 견제를 해두고 싶은데....'

머리 굴리길 잠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각 시설에 연락해서 납품 기한 최대한으로 당기라고 통보해."

"네?"

"그놈들이 연구소 완공하기 전에 국내 부산물, 우리가 독점하자고."

혹시 모르는 일이다.

여지를 남겨줄 거 없이 확실히 해두는 거다.

"나쁠 거 없잖아. 나중에 가서 그쪽 놈들한테 비싸게 팔 수도 있고."

"알겠습니다."

절대 남 좋은 일 시킬 수 없지.

고택수 부사장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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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사무실에 깊은 한숨만이 울려 퍼졌다.

직접 두 발로 뛰어다니며 고생한 결과가 암담하기 그지없었기에, 퍽 마음이 착잡했다.

"설마하니 다 거절할 줄이야...."

"그러게요. 뭐, GT 던전 눈치를 안 볼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모두 거절할 줄은 몰랐어요."

이아영 이사 또한 당혹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전국 거의 모든 부산물 처리 시설과 컨택을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론 모두 거절.

대부분이 현재 상황으로선 우리 수주까지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쯧, GT 던전이 어디가 그렇게 이쁘다고....'

물론 그들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을이 쉽사리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이미 내가 청소부로 협회 내에서 숱하게 당해왔던 거기도 하고.

하지만 한편으론 그렇기에 왜 그들은 현상 유지를 선택하는 건가 의문이다.

부당한 게 확실하고,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이참에 바꿔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못마땅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굳이 GT 던전과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비교하자면, 시가총액 외엔 모든 면에서 우리가 훨씬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거기다 한별 그룹과 동맹도 맺었고, 협회와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으니 당연히 우리를 선택해줄 줄 알았는데....

안일했다.

생각보다 GT 던전의 눈치를 심하게 보고 있다.

"애초에 시설들이 원청 기업에 대한 불신이 기본적으로 높아서, 우리나 GT 던전이나 별반 다를 거 없는 놈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아영 이사가 첨언했다.

"뭐, 이해는 갑니다. 괜히 미디어에서 떠는 것만 믿고 도박을 할 순 없겠죠. 둘 다 계약이 가능하다면 모를까,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더욱이 안정적인 걸 선택할 수밖에 없고요."

"...그렇게까지 알고 있었으면서 거절할 줄은 몰랐다고요?"

"예."

아무리 안정을 생각한다고 해도… 이미 흘러나온 정보들이 있지 않은가.

중앙아프리카 대규모 지부 인수.

프렉탈을 비롯한 최고급 부산물 납품 계약 체결.

한별 그룹과 한국 협회 그리고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동맹.

"아무리 하청 업체여도 최소한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시점에 어디에 붙어야 할지 정도는 과감하게 판단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

"근데 뭐, 제가 과대평가했나 보군요."

냉정한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이아영 이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럴 여유가 없는 거예요."

"예?"

"시설 상황, 당신도 잘 알잖아요. 당장 납품 기한 맞추기도 바쁜데 그런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겠어요."

"...."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꽤나 정곡을 찔렀다.

"...경솔했군요."

"그럴 수도 있죠. 뭐, 그런 것보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부터 고민해봐요."

이아영 이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물론 우리도 몇 군데 시설과는 이미 계약이 되어 있다.

우리 또한 나름 민간 토벌 기업인 만큼, 당연히 사체를 처리할 루트는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앞으로 만들어질 연구소 규모를 고려해본다면 그 몇 군데로는 공급을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계약을 따내야 하는데....

다들 GT 던전이 더 안전빵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앞으로의 토벌 시장 동태를 설명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곤란하게 됐네.

"그나저나 연구소 착공일은 언제입니까?"

"한별 건설에서 벌써 준비는 마쳤대요. 빠르면 이번 달 안에 공사 들어갈 거라던데요."

"최소한 그 안엔 계약을 따내야겠군요."

"가능하겠어요?"

"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죠."

"...."

"너무 걱정 마시죠.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표정 봐라.

이젠 아주 대놓고 미심쩍어하네.

뭐, 나 또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많지 않다.

하루아침에 인식이 바뀔 리도 없고....

GT 던전에서 뻘짓을 하지 않는 이상 계약을 따낼 방법은....

따르릉―.

"음?"

때마침 울리는 전화.

하성일 사장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예, 하 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대표님! 지금 GT 던전에서 시설들의 부산물 납품 일정을 엄청 앞당기고 있답니다.」

...?

갑자기 뭐라는 거야.

"...그런데요?"

「아마 저희 쪽 계획을 눈치채고, 연구소가 세워지기 전에 국내 부산물을 독점하려는 움직임 같습니다.」

저쪽에서 먼저 움직인 건가.

「이건 좀 문제가 큽니다. 가뜩이나 국내 토벌 시장은 GT 던전이 좀 더 우세한 상황이라, 토벌되는 던전 양도 상당하고요. 이렇게 되면 아마 이번 달 안으로 국내 부산물 80%는 GT 던전으로 들어갈 겁니다.」

"...연구소가 완공되기 전에 어떻게든 우리를 견제하려는 거군요."

「맞습니다. 아니면 후에 독점한 부산물을 몇 배나 부풀려서 되팔려고 하는 걸 수도 있고요.」

어느 쪽이건 달가운 소식은 아니군.

"그런데 시설들은 군소리 없이 그걸 받아들였답니까? 그쪽 상황으로 봐선 무턱대고 일정을 당긴다고 소화할 수 있을 양이 아닐 텐데요, 반발은 없었습니까?"

「뭐… 그들로선 도리가 없을 테니까요. 머리를 꽤 잘 썼습니다.」

"...글쎄요."

먼저 과감하게 움직인 건 칭찬해주겠는데 말이지....

"제가 볼 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 같군요."

「...예?」

"일단 기다려봅시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황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래도 하늘이 우릴 도우려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GT 던전은 우리를 견제할 생각에 혈안이 된 나머지 중요한 걸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토벌 사이클은 어느 한 곳을 쪼아댄다고 효율이 올라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수록 역효과만 난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비핵심 팀이라 할지라도, 어느 한 곳이 삐거덕거리기 시작하면 반드시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

'나도 회귀 전엔 한 번도 고려해본 적 없는 사항이긴 한데.'

청소부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올라온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고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건 우리에게 기회다.

"방법이 좀 생겼어요?"

이아영 이사가 내 표정을 읽은 건지, 대뜸 물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뭘 하면 돼요?"

"일단… 이번 분기 예산 좀 털어서 국내 던전 매입 좀 합시다."

"얼마나요?"

"가능한 한 많이."

알아들었다는 듯 그녀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리고 김민주 팀장이랑 한유빈 팀장한테도 연락 좀 부탁합니다."

"그쪽은 왜요?"

"간만에 합을 맞출 기회가 생길 것 같아서요."

이미 내 머릿속에서 몇 가지 그림들이 빠르게 스쳐 가고 있었다.

***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강한 물류 안에서 때아닌 고성이 터졌다.

"일주일 치 양을 던져 놓고 모레까지 맞추라뇨! 이렇게 일하다간 누구 한 명 죽습니다!"

최 반장이 GT 던전에서 날아든 통보를 확인하곤 곧바로 대표 사무실로 찾아가 항의했다.

하지만 정작 곽 대표도 곤란하긴 매한가지였다.

"나도 몇 번이나 안 된다고 했는데… 끝까지 밀어붙이더라. 어쩌겠어, 시벌. 원청이 하라는 대로 해야지."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이럴 바엔 차라리 계약 해지하고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붙는 게 낫죠!"

"하아...."

곽 대표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어디까지 달래줘야 하나 싶었다.

이러라고 반장 달아준 것도 아닌데.

"어차피 일정 조율 통보, 우리한테만 온 것도 아니야. GT 던전이랑 계약된 시설들은 전부 같은 상황이라더라."

"...그래서요."

최 반장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에 맞춰 곽 대표의 인내심도 슬슬 한계에 도달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겁니까? 뭐, 다 힘드니까 참고 해라 이겁니까?"

"마음에 안 드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말조심해라. 그리고, 그렇게까지 역정 부릴 일이야? 일정 당긴 만큼 돈도 더 준다잖아."

"참 나, 그 돈을 저희가 받습니까?"

"...뭐?"

그 순간 곽 대표의 표정이 크게 요동쳤다.

"어차피 월급쟁이 신세, 상여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센티브가 붙는 것도 아닌데, 계약금으로 얼마를 받든 제가 알 바 아닙니다."

"야! 너 지금 말 다 했냐?"

"예, 다 했습니다."

최 반장이 그 자리에서 작업복을 벗어 던졌다.

"그동안 강 상무, 그 개새끼 눈 밖에 날까 봐 어떻게든 애들 다독여가면서 작업했는데… 이젠 일 시키는 것도 미안해서 못 하겠습니다."

"너, 너 인마…!"

"저희요, 하루 종일 몬스터 사체 만지고 한 달에 꼴랑 180 받아 갑니다. 근데 그중에 반이 병원비로 나가요. 눈병이고 피부병이고 안 걸린 놈들이 없습니다."

"...."

"우리 사정, 조금이라도 생각하셨으면 그 요청 어떻게든 거절하셨을 겁니다."

최 반장은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등을 돌렸다.

곽 대표는 끝내 그를 붙잡지 못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 비단 강안 물류뿐만이 아니었다.

경북, 경주의 편백 부산물 처리 시설.

전남 목포의 빅토리.

강원, 원주의 하이테크 및 기타 등등....

이외에도 총 42개 시설에서 GT 던전에서 일방적인 일정 조율 통보가 내려온 후 일주일 만에, 총 171명의 직원이 파업을 선언하거나 퇴사를 신청했다.

***

"부, 부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GT 던전 부사장실에 강 상무가 급히 방문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시설에 인원이 모자라서, 납품 일정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답니다."

"뭐?! 어디 시설이?"

"...저희랑 계약된 모든 시설이 같은 상황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고 부사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뭐 사고라도 났어?! 인원이 왜 갑자기 모자라!"

"그, 그게… 일정 조율에 반발한 직원들이 대거 이탈했다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고택수 부사장의 눈썹이 마구 요동쳤다.

원청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하청의 역할이지 않은가.

근데 그걸 못 참고 나가버린다고?

그것도 한두 곳도 아니고 전국 시설에서?

'이게 대체 무슨....'

납득하기 어려워 황망한 표정도 잠시, 아쉽게도 나쁜 소식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 부사장님!"

GT 던전 소속의 작전 A팀장, 금혁수 또한 다급하게 그를 찾았다.

"토벌을 잠시 중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 토벌은 또 왜?"

"몬스터 사체를 처리할 수가 없어요. 지금 임시방편으로 창고에 쌓아두고 있긴 한데, 부피도 그렇고, 부패가 너무 심해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굉장히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때.

"저, 부사장님...."

마지막으로 비서실장이 쐐기를 박는 소식을 전달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이번 달 국내 출현 던전... 70%를 매입했다고 합니다."

"...."

휘청하는 틈을 타서 치고 올라오겠다는 건가.

하지만 부사장은 그 상황을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이건 차라리 잘 됐어."

"...네?"

"지금 전국 부산물 처리 시설이 작동을 멈췄는데, 그놈들이라고 그 많은 양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

"...."

"이때다 싶어서 멋모르고 매입한 것 같은데, 시설들이 멈춘 이상 그놈들도 사체 처리는 불가능해."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멋모르는 말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GT 던전과 카르마 코퍼레이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하나의 선택지가 사라졌다.

이제부턴 시설들이 누구 편에 설지는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

"예, 카르마 코퍼레이션 김준우 대표입니다."

"아, 예예. 어떻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럼 저희야 감사하죠. 일정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달 안에만 해주시면 되니."

"예예, 부디 안전하게만 작업해주십시오."

"네, 그럼...."

전화를 끊곤 이아영 이사를 향해 물었다.

"이걸로 몇 개나 붙었습니까?"

"편백, 빅토리, 골리앗, 금화… 그리고 강안 등등. 총 19개 시설과 가계약 체결했어요."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이제 맘 놓고 토벌이나 해봅시다."

"민주 씨랑 유빈 씨도 대기 중이에요. 일단 기획은 두 팀 메인으로 잡고...."

"아뇨. 세 팀이 필요합니다."

"...네?"

"저도 참가할 거니까."

어깨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로 오랜만의 현장이다.

옛 기분 좀 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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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분당에 위치한 옐로우 등급의 동굴형 던전.

"사제 클래스는 뒤로 빠져서 백업해주고, 가디언, 마법사 클래스는 매핑 완료되는 대로 보스방 리딩해줘! 나머진 날 따라 전진한다!"

김민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이능토벌부 소속, 제1 작전팀.

통칭 흑랑(黑浪).

김민주의 검에서 이름을 딴 이 팀은, 토벌부의 에이스답게 모두가 B급 이상의 헌터들로 구성되어 있다.

개개인의 실력 또한 서울 본부의 작전 1팀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이들을 이끄는 건 국내 4위의 최연소 A랭크 헌터인 팀장이다.

흑랑은 가히 국내 최고 작전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팀의 전신이자 김민주의 마스코트였던 무기, 흑랑지도가 생명을 잃었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후우...."

[고유 스킬 : 천수관음- 각성]

[육관음중삼(六觀音中三)]

[제3격 - 마두관음]

스윽―.

퍼버버버벙―!!

보급형 무기를 사용함에도 그녀의 실력은 여전히 빛났다.

"이대로 보스방까지 계속 진격한다!"

"네!"

"알겠습니다!"

일사불란하게 팀원들이 움직였다.

흑랑팀 전원은 김민주를 깊게 신뢰하고 있었다.

토벌 경험과 현장 지휘는 웬만한 중견 팀장급을 훨씬 웃돌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맡았던 작전 대부분이 루프 던전, 수중 던전, 리젠 던전 등, 업계에서도 꺼리는 특수 던전이지 않았던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쌓아온 그 경험은, 헌터들 사이에서 존경과 경외를 받기에 충분했다.

물론 정작 본인은 그 공을 다른 이에게 돌리고 있었지만.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겠지.'

김준우가 흘리듯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는 아직도 이수용 팀장 밑에서 만년 B급 생활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팀장님, 매핑 완료했습니다. 현 위치에서 벽 너머가 바로 보스방입니다!」

그때, 후방 인원에게서 무전이 울렸다.

김민주는 곧바로 눈앞에 있는 벽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쾅―!!

굉음과 함께, 동굴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던전의 보스, 에이션트 레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끼익―.

끼이이이익―.

관절을 기괴하게 꺾고 있는 고스트형 몬스터.

팀원 모두가 그 소름 끼치는 형상을 보고 잠시 주춤했다.

고스트형 몬스터는 대부분의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문제는 흑랑팀은 검제, 김민주를 필두로 거의 모든 팀원이 물리 공격 클래스 속했다.

그들이 당황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외(六觀音中外)]

물론 김민주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망설임 없이 다음 동작으로 이행한다.

호흡을 크게 가다듬길 한 차례.

[접신 - 관세음(觀世音)]

[정법명왕여래(正法明王如來)]

이윽고 그녀의 전신을 따라 흐르던 공기가 흐름이 바뀌었다.

스릉―.

인간의 모습을 벗어난, 접신 그 자체.

이내 가공할 만한 검격이 에이션트 레이스를 직격했다.

끼아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비명과 함께 유령 몬스터는 형체를 잃고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흑랑, 방금 토벌 완료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복귀해서 다음 작전까지 좀 쉬고 계십시오.」

"아뇨."

그녀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바로 다음 작전 넘어가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늘 하던 대로였다면 이렇게까지 열을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무리 선생님이라고 해도... 내기가 걸렸으면 말이 다르지.'

질 수 없다.

"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수원으로 이동해주십시오. 토벌 완료한 던전에는 청소 1팀을 배정하겠습니다.」

"네."

짧은 대답과 함께 곧바로 팀을 이끌고 던전을 빠져나갔다.

***

안양, 동안구.

그린 등급의 차원형 지하 던전.

땅속 깊은 곳에 형성된 던전에는 카르마 코퍼레이션 이능토벌부 소속의 특수작전팀, 통칭 레드독이 배정되었다.

"야! 뭐 하는 거야! 누가 나보다 앞장서래?! 뒤지고 싶어?!"

보스방에 들어서자마자 레드독의 팀장, 한유빈의 격한 목소리가 팀원을 때렸다.

"보스 정보도 확인 안 했어? 골렘형 몬스터라 뭉쳐 다니다간 다 같이 사이좋게 뒤질 수도 있다고!"

"...."

"...."

"뭐 하고 있어! 멍 때리지 말고 빨리 퍼져서 공격해!"

"네, 네!"

호령에 따라 레드독 또한 토벌을 시작했다.

특수작전팀이라는 명칭답게 그들의 역할은 기획부터 청소까지, 모든 작전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올라운더 팀이었지만....

실상은 그저 김준우가 여기저기 부려먹을 수 있게 편성한 팀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정작 팀장인 한유빈은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 빨리빨리 안 해?! 이러다가 우리가 꼴찌 하면 니네가 책임질 거야?!"

"죄, 죄송합니다!"

"아 씨, 비켜! 답답하게 진짜!"

한유빈은 팀원들의 시원찮은 공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골렘형 몬스터, 스톤 피스트.

본인의 체격에 족히 몇십 배는 넘는 거대한 사이즈였지만, 한유빈은 안중에도 없었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스테이터스 해제]

[모든 스테이터스가 근력으로 전환됩니다.]

[근력 : 18,955 (9,107↑)]

[체력 : 1 (2,289↓)]

[민첩 : 1 (5,799↓)]

[마력 : 1 (1,019↓)]

뻐억―!

퍼버버버벅―!

콰과광―!!

가공할 파괴력의 육탄전.

골렘형 몬스터는 방어력과 공격력이 높은 대신 속도가 매우 느렸다.

초 단위로 꽂아 넣는 그녀의 주먹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카아아아악―!

그리고 이내, 공간을 뒤흔드는 거대한 포효와 함께 골렘이 쓰러졌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후우...."

한유빈이 몇 방울 흘린 땀을 닦으며 숨을 골랐다.

솔직히 이곳에서의 일은 꽤나 고됐지만… 힘들다는 체감은 거의 없었다.

그야 미국 지부에서 작전팀장으로 일할 때보다 훨씬 재미있었으니까.

'뭐,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지.'

아닌 게 아니라, 김준우의 능력을 한 번에 알아보고 그에게 붙지 않았던가.

아마 그건 본인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내기가 걸린 이상 봐줄 생각은 없지만.

설령 그 상대가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김준우라고 해도.

"끝났으면 바로 다음 던전으로 넘어가자."

"네, 네?! 바로요?!"

"일단 본부로 복귀해서 조금 쉬었다가 가는 게...."

한유빈의 눈빛이 돌변했다.

"니들이 한 게 뭐 있다고 쉬어?"

"...."

"...."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에 팀원 모두가 말을 삼켰다.

이미 팀원들에게 그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듣자 하니 폭력 때문에 전 직장에서 몇 번이고 잘렸다는 소문도 있었고, 베트남에선 혼자서 전쟁까지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복종하는 건, 리더십보단 공포에 의한 학습효과에 가까웠다.

그게 올바른지 아닌지 떠나서 효과 하나만큼은 좋았다.

***

"하암...."

오랜만에 던전에 들어오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송파구의 그린 등급 던전.

이곳에 배정된 내 팀의 이름은 무려, 임시.

이아영 이사가 서류에 정말로 '임시', 딱 두 글자만 올려놓은 것이다.

'나 혼자뿐인 팀이라고 하는 것도 좀 웃기긴 하네.'

보스방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현재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봤다.

GT 던전이 부산물 처리로 주춤하고 있는 지금이 치고 올라갈 타이밍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예산을 털어서 이번 달 국내 출현 던전 지분의 70%가량을 끌어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걸 모두 토벌하지 못하면 결국 고스란히 우리 손해가 된다.

어떻게든 소화를 해야 했지만... 사실 우리가 작전팀을 많이 보유하고 있진 않았다.

'단기간에 팀 숫자를 늘릴 수 없다면, 효율을 올릴 수밖에 없지.'

동기를 부여하고, 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토벌을 위해 서울 본부에서 하던 '정산 시즌'을 도입했다.

실제 내용은 조금 바꿨지만, 어쨌든 목적은 똑같았다.

일주일 동안 나보다 실적을 많이 올린 팀은 모두 성과금.

그리고 꼴찌를 한 팀은 전체 회식비용 지불.

처음엔 나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까 아무래도 실수가 좀 있었다.

이미 억대 연봉을 받는 김민주나, 나보다 부자인 한유빈이 고작 성과금에 혹할 리가 없지 않은가.

뭐, 어쨌든 그 녀석들은 딱히 열심히 할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작전팀이 나보다 실적이 높을 리도 없겠고.

'그냥 설렁설렁해도 충분하겠지....'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자니, 어느샌가 보스방에 도착했다.

지네형 몬스터, 혼 스마일.

이름 그대로 온몸에 수천 개의 뿔이 달린 몬스터였다.

'이건 시설에서 작업할 때 애 좀 먹겠는데?'

몬스터를 보자마자 뒤처리가 꽤나 신경 쓰였다.

토벌에 앞서, 통제팀에 먼저 무전을 넣었다.

"임시팀입니다."

「아, 대표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뇨. 다른 게 아니라... 지금 이쪽 던전에 배정될 청소팀한테 뿔 뽑는 장비 미리 챙겨두라고 전달해주셨으면 해서요."

「...네?」

"지금 보니 보스가 뿔이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시설에 넘기기 전에 할 수 있는 건 해주면 시간도 아낄 수 있잖습니까."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전달하겠습니다.」

"예, 그럼 토벌 진행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대표님.」

그때, 통제팀 실장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대표님이 실적 꼴등인 거, 알고 계시죠?」

"...?"

「현재 흑랑이 1등이고 레드독이 2등인데... 대표님이랑 거의 세 배 이상 차이가 나는군요. 다들 오늘 컨디션이 좋나 봅니다.」

"...."

이런 미친놈들을 봤나.

***

한별 종합 상사.

하성일 사장은 가만히 앉아 결재가 올라온 서류들을 검토했다.

그의 성격상 따분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요즘은 별로 불평하지 않았다.

"사장님."

"예."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매입한 이번 달 국내 던전, 거의 다 토벌됐다고 합니다."

"...벌써요?"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이 그의 흥미를 자극하며 기분 전환이 된 덕분이다.

"네. 뭐, 내부적으로 성과금을 걸고 정산 내기를 했다고 하는데.... 아무튼 덕분에 GT 던전과 비교했을 때, 이번 달 토벌 지분은 단연 압도적입니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몇백 개나 되는 던전을 일주일 만에...."

하 사장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역시 본인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첫 계약이 줄줄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다른 사람 같았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김준우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GT 던전이 무리한 움직임을 벌이는 타이밍에 맞춰 국내 던전을 최고치로 매입한다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물론 매입한 던전을 모두 처리하지 못한다면 자칫 독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작전본부장 출신답게 강제성 없이 헌터들의 작전 효율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 결과, 민간 토벌 시장 지분은 단 일주일 새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넘어왔다.

이대로라면 연구소가 지어지기 전에, 국내 부산물을 독점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GT 던전 상황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부산물 처리가 곤란해서 작전도 올스탑 상태고요. 추가 매입도 없었고.... 무엇보다 아직 남아 있는 던전도 다 소화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재고로 풀리겠군요."

"그럴 것 같아서 저희 쪽에서 미리 예산을 잡아두려고 합니다."

"좋습니다."

싸게 사서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넘길 생각이다.

이번 성과에 대한 선물이라고 할까.

"한별 건설 쪽에선 연락 없었습니까?"

"다음 주부터 착공 들어간다고 합니다."

"착착 진행되는군요."

하 사장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 사장님!"

그때, 헐레벌떡 사무실로 법무팀장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GT 던전에서 본인들과 계약된 부산물 처리 시설들을 모조리 고소했답니다!"

"...예?"

궁지에 몰린 쥐가 결국 이빨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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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장이 접수됐다고?"

강안 물류, 곽철수 대표에게 정 경리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달했다.

"네, 네. GT 던전에서 계약 내용 불이행 및 업무방해 건으로 계약된 시설을 단체로 고소했다고...."

"시발...."

곽 대표가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럴 줄 알았다.

그래, GT 그룹이 어떤 놈들인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아니… 근데 이게 우리 탓이야?'

따지고 보면 인원들이 대거 이탈한 것도 저쪽에서 무리하게 일정을 밀어붙인 탓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지금 상황에 가능한 거래만 맡은 것뿐인데....

'시발, 역시 갑은 갑이라 이건가....'

그의 시선이 사무실 밖으로 향했다.

직원들은 오늘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들어온 몬스터, 혼 스마일의 분해 작업에 한창이었다.

수천 개의 뿔이 난 지네형 몬스터.

…라고 보고가 들어왔지만, 어째선지 이미 뿔이 모두 분해된 채로 입고됐다.

보아하니 카르마 코퍼레이션 청소팀 쪽에서 미리 작업을 해둔 모양이다.

'....'

곽 대표의 심경이 복잡했다.

여태껏 GT 던전이 한 번이라도 저렇게까지 해준 적이 있던가?

아니, 기본 해체조차 안 된 사체를 넘겨준 적은 있어도 손수 밑 작업을 해준 적은 단연코 없었다.

물론 저건 순수한 호의다.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건 멍청한 짓이지만....

결국, 이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지 않은가.

이쪽 입장을 이해해주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전자에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다.

'마음 같아선 계속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랑 하고 싶긴 한데....'

확실히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그릇이 큰 곳이다.

하지만 고소장이 접수된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나서서 하청 업체의 법적 문제를 도와줄 리는 없으니, 유감스럽지만 여기선 꼬리를 내리고 GT 던전의 요청을 어떻게든 수용해야....

"곽 대표님 계십니까?"

그때, 심장을 강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강상우 상무였다.

곽 대표는 사무실 문을 열고 그를 맞이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소식 들으셨나 모르겠습니다."

"고소장이요?"

강 상무가 미묘한 미소를 띠었다.

물론 곽 대표는 그 반대였지만.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직접 오셨습니까?"

"너무 날이 서 계시는군요. 이래 봬도 좋은 소식을 들고 왔습니다."

"...네?"

"저희 부사장님께서 호의를 베푸셔서, 몇 가지 요구 사항을 지킬 수 있는 시설은 고소를 취하해주신다고 합니다."

곽 대표의 눈이 가늘어졌다.

강 상무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앞으로 GT 던전이 요구하는 계약 내용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약속하는 각서입니다. 당연히 공증도 받아놨고요."

"...."

"여기에 서명만 해주신다면 고소는 없던 일로 해드리겠습니다."

곽 대표는 이 각서가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을은, 갑이 요청하는 모든 계약 내용에 성실히 이행할 것.

다시 말해, 말 잘 듣는 개가 될 건지 아니면 고소당해서 영업정지 당할 건지 정하라는 소리였다.

'개새끼들....'

이게 호의라고?

이건 진짜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것밖엔 안 되지 않은가.

'하지만 문을 닫는 것보다야....'

한참을 망설이던 곽 대표는 결국 펜을 쥐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명란에 펜을 가져다 댔다.

"대표님!"

그때, 조금 전 자리를 비켜주었던 경리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강 상무의 싸늘한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뭡니까. 지금 중요한 이야기 하고 있는 거 안 보여요? 어딜 감히 경리가 문을 벌컥벌컥 열고...."

"대표님! 지금 인터넷 확인해보세요!"

대놓고 무시하며 말을 전하자 곽 대표와 강 상무는 잠시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진짜 갓이란 말밖에....

└ 김준우 진짜 미쳤네ㅋㅋㅋㅋㅋ

└ 한국에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나오냨ㅋㅋㅋㅋ

└ ㄹㅇ인성이랑 영향력 둘 다 갖추니까 진짜 불도저가 따로 없네ㅋㅋㅋㅋ

└ GT 그룹 예전부터 하청 ㅈㄴ쪼는 거로 유명했잖아

└ ㅇㅇ맞음 예전에도 저러다가 하청에서 인명 사고 났는데 바로 모르쇠 시전 했음

└ 와;; 천하의 개놈들이네;;;

└ GT 던전 개똥줄 타죠?

이게 무슨 소리인가.

뒤늦게 기사 제목을 확인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김준우 대표, '무리한 일정 요구 거절하니까 고소? 상식 밖의 짓' 일축]

[한별 종합 상사 하성일 사장 曰 '21세기에 있어서는 안 될 일' 김준우 대표 발언에 맞장구]

[카르마 코퍼레이션과 한별 종합 상사, 'GT 던전에 고소당한 모든 부산물 처리 시설 상대로 법무팀 지원하겠다' 화제]

[네티즌, '진짜 갑이 나섰다']

[최근 기업 동맹을 맺은 카르마 코퍼레이션과 한별 종합 상사가 부당하게 고소당한 부산물 처리 시설들을 상대로 법정 싸움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동시에 하성일 사장은 '횡포에 굴복하지 않았으면 한다'라며 하청 업체에 위로를 전했으며....]

확인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

강 상무와 곽 대표가 서로를 지그시 바라봤다.

한쪽은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고, 다른 쪽은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저, 저기 곽 대표님.... 일단 저희 다시 이야기를...."

"X 까."

부욱―.

곽 대표는 곧바로 각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

"허억, 허억...."

토벌을 마치고 던전을 빠져나오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오, 시발....'

오늘 하루만 벌써 4번째 토벌.

그런데도 격차가 도저히 좁혀지질 않는다.

'이것들… 대체 기획을 어떻게 했길래 효율이 이 정도야?'

이미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모든 작전팀에 성과금을 주는 건 물론, 내 사비로 전체 회식비까지 지불해야 한다.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전직 SSS랭크 헌터가 정산 싸움에서 진다는 걸 용납할 수가 없다.

그래, 질 수 없다.

조금 더 무리해서라도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데....

'꼼수를 좀 써볼까.'

이래 봬도 대표가 아닌가.

대표가 본인 권한 좀 쓰겠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어?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

번호를 확인하니 이아영 이사였다.

"이아영 씨, 마침 잘 됐습니다. 부탁할 게 좀 있는데... 그 흑랑이랑 레드독 앞으로 배정된 던전, 10%만 취소하세요."

「...그렇게 이기고 싶어요?」

"예."

「....」

반응이 왜 이래.

이기면 좋잖아. 적어도 손해는 없다고.

「그런 것보다… 당신이 토벌에 미쳐있는 동안 일이 좀 있었어요. 연락을 수백 통을 했는데도 안 받아서 일단 제가 알아서 처리는 했는데....」

"무슨 일인데 그럽니까?"

「GT 던전에서 부산물 처리 시설들을 고소했어요.」

"...?"

그렇게까지 나온다고?

'쓰읍....'

이건 좀 위험하다.

고소라는 최후의 수를 꺼내든 이상, 단단히 각오했다는 건데.

이렇게 되면 시설들은 어쩔 수 없이 GT 던전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는 순위에서 밀리겠지.

이대로 계속 진행해봤자 우리만 손해다.

작업 쳐놓은 게 아쉽긴 하지만 여기서 발을 빼는 수밖에....

「그래서 저희 쪽이랑 한별 상사 쪽 법무팀을 지원하기로 했어요.」

"...예?"

「물론 언론에는 당신이 결정한 거로 했고요. 어차피 끝까지 데리고 갈 생각이었잖아요?」

시발, 지금 뭐라는 거야?

「어때요, 당신 흉내 좀 내봤는데. 괜찮죠?」

"...."

「뭐, 아무튼 우리가 이렇게 나오니까 GT 던전에서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지, 협의 좀 하자고 연락이 왔어요. 하청 업체 쪽 대표랑 당신이랑요. 그건 꼭 참석하셔야 하니까, 토벌은 미리미리 끝내 놓으시고요.」

시발.

***

익일, GT 던전 회의실.

경황도 없이 참석하게 된 협의회.

난 뚱한 표정으로 연신 펜만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 자리에 있는 거야....

"그럼… 하청 업체 계약 내용 불이행 및 업무방해 건에 대한 협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의장을 맡은 GT 던전 관계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강상우 상무가 먼저 발언했다.

"이건 애당초 시설들이 계약 내용을 이행하지 않아서 저희도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입니다. 왜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끼어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

알 게 뭔가.

애초에 내가 내린 결정도 아닌데.

"강 상무님, 말씀이 좀 너무하십니다. 20구가 넘는 물량을 맡기면서 납품 기한을 일방적으로 당긴 건 생각 안 하십니까?"

곧이어 강안 물류의 곽철수 대표가 입을 열었다.

"계약서에 명시돼있지 않았습니까. 을은 갑이 요청하는 납품 기한에 최대한 맞출 수 있도록 한다고요."

"그 앞줄은 왜 빼먹습니까? '부당하거나 불가능한 상황이 아닌 한'이라고 돼 있지 않습니까!"

"납품 기한을 당긴 만큼 비용을 더 지불한다고 했으니 부당한 건 아니지요."

"상황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GT 던전 수주만 받는 것도 아닌데, 그런 일정을 어떻게 소화하라는 겁니까!"

"본사 기획부 쪽에서 검토해본 결과,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판단을 왜 그쪽이 합니까?! 처리 작업을 당신들이 해요?!"

1분도 안 돼서 벌써 분위기가 과열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잠자코 그들의 싸움을 구경했다.

괜히 싸움에 왜 끼어들어.

가능하면 싸움 구경이 최고지.

"어쨌든 고소하실 거면 고소하시죠!"

"협의가 안 되면 말씀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예, 마음대로 하십시오. 김 대표님이 법무팀을 지원해준다고 하셨으니 저희도 끝까지 갈 겁니다!"

동시에 나한테 몰려드는 시선.

빨리 입장을 밝히라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이쯤 되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쉽다.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깊은 한숨으로 포문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법무팀 지원은 저희로서도 꽤나 많은 걸 감수해야 합니다."

"네, 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그래서 서로 합의점을 찾기 위해 연 협의회 아닙니까.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면 GT 던전은 고소를 하지 않아도 되고, 저흰 법무팀을 지원하지 않아도 되겠죠."

강 상무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자신의 편을 드는 거로 들린 모양이다.

"제가 볼 땐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한 일인 것 같군요. 그래서 말인데… 이건 어떻습니까?"

강상우 상무, 너무 기대하지 마.

딱히 너희 편 드는 건 아니거든.

난 이 상황이 귀찮을 뿐이라고.

"여기 계신 강 상무님께서 일주일 동안 부산물 처리 시설에서 직접 작업해보시는 겁니다."

"...예?"

"직접 분해도 해보고, 납품 기한도 맞춰보는 게 어떻겠냐는 겁니다. 직접 겪어보고도 여전히 고소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그땐 정말 하청 업체가 특별한 이유 없이 계약 내용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뜻이니, 그땐 저희도 군말 없이 빠지겠습니다."

"법무팀 지원을 취소하겠다는 겁니까?"

"그때 가서도 고소를 진행하시겠다면."

강 상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약속, 꼭 지키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곽 대표님은 어떠십니까?."

"...."

곽 대표에게 시선이 쏠렸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미묘한 표정.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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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의회에 참석하느라 또다시 벌어진 격차를 메우기 위해, 한창 토벌에 열을 올리고 있던 그때였다.

「김 대표님, 하성일입니다.」

하 사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하 사장님. 웬일이십니까?"

「그… 이번 협의회에서 법무팀 지원을 재고하겠다고 하셨다는데, 진짭니까?」

벌써 거기까지 소식이 들어간 건가.

빠르기도 하군.

"맞습니다. 물론 강상우 상무가 일주일 동안 시설에서 일해 보고, 그 뒤로도 고소를 취하할 생각이 없다면요."

「스읍… 괜찮겠습니까?」

그가 미심쩍은 목소리를 냈다.

「강 상무 성격을 보면 일주일 일 한다고 생각이 바뀔 사람은 아닙니다. 일주일 후에도 고소 취하는 절대 안 해줄 텐데요.」

"뭐,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네?」

말꼬리가 크게 올라간다.

「그럼 왜 그런 합의안을 제안하신 겁니까? 법무팀 지원도 철회하면 법정 싸움에서 하청이 이길 리가 없잖습니까.」

"그렇겠죠. 결과적으로는 위약금을 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엔 영업 정지 처분까지 받을 수도 있겠죠."

그렇게 되면 연구소가 완공되기 전까지 국내 부산물을 미리 납품받아 놓는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이후로도 어려울 거고.

그리고 강 상무의 성격상 고소 여부는 이미 정해둔 상태일 것이다.

일주일 동안 시설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던 그는 고소를 취하할 생각은 절대 없겠지.

하지만.

"협의안에는 분명히 일주일 동안 일을 해본 뒤에 결정을 내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 말은 고소를 취하하든 진행하든, 어떤 결정을 내리려면 최소한 일주일은 무조건 버텨야 한다는 소립니다."

그렇다.

GT 던전이 결정권을 가지기 위해선 최소 조건인, 일주일 근무를 만족해야 한다.

만약 그 전에 떨어져 나간다면 자동적으로 결정권은 소멸, 더 이상의 고소는 진행할 수 없다.

처음부터 그걸 노린 제안이었지만, 어째 하 사장은 여전히 미심쩍은 듯한 반응이었다.

「에이… 그래도 일주일은 버티겠죠. 강 상무가 보기엔 그래도 뒷배도 없이 GT 그룹 임원까지 올라온 놈입니다. 꽤 독종이에요.」

"글쎄요."

사람 일이란 닥쳐보지 않고는 모르는 법이다.

"아무리 독종이라고 해도, 여태까지 목숨 내놓고 일한 적은 없을 거 아닙니까."

「죽을 만큼 열심히 하긴 했겠죠.」

"아뇨 제 말은… 진짜 죽을지도 모르는 일 말입니다."

「....」

하 사장의 대답이 끊겼다.

「설마… 죽일 생각은 아니시죠…?」

"하하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죽이긴 왜 죽이겠는가. 뭐 얼마나 큰 잘못을 했다고.

물론... 정말로 죽어버리면 어쩔 수 없겠지만.

***

"상무님! 아직도 다 안 됐습니까!"

강안 물류.

방금 들어온 파충류형 몬스터, '헬리게이터' 분해 작업에 한창이던 그때 최 반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일찍이 사표를 던지고 시설을 나간 그였지만, 곽 대표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 어떤 설득보다 '강 상무가 일주일 동안 근무하러 온다'라는 한 마디에 반응한 것이긴 했지만.

"재촉하지 마십쇼! 하고 있는 거 안 보입니까?!"

"무슨 이빨 뽑는데 하루 웬종일 걸리십니까?"

"이거 독 있다면서?! 서두르다가 찔리면 어떡합니까?"

"장갑 제대로 끼고 있으면 절대 찔릴 리 없으니까 걱정 말고 하십쇼."

"아니, 그게 무슨...."

강 상무는 기가 차다는 반응이었다.

근무 첫날째.

출근하자마자 강 상무가 맡게 된 업무는, 헬리게이터의 이빨을 모두 분해하는 것이었다.

언뜻 보면 그리 어려울 게 없는 작업.

하지만 헬리게이터의 이빨은 그 개수만 족히 수백 개에 달했다. 무엇보다 이미 목숨이 끊겼음에도 이빨 하나하나가 여전히 치명적인 독을 내뿜고 있었다.

자칫 손에 찔리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는 작업.

하지만 최 반장은 그런 사정 따위, 일일이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튼, 10분 내로 완료해주십시오. 다른 공정 늦어집니다."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최 반장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무슨 소리십니까!"

최 반장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강 상무님도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사고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 납품 기한은 맞추라고."

"...."

강상우 상무의 표정이 바싹 굳었다.

"지금 나 맥이려고 일부러 이러시는 겁니까?"

"...뭐라고요?"

"설마 내가 지금 여기 있다고 진짜 최 반장님 부하 직원인 줄 아는 건 아니죠? 그동안 좀 섭섭하게 굴었다고 이렇게 나오는 건 좀 유치하시네."

"아, 그러니까 강 상무님 말씀은… 제가 강 상무님 맥이려고 일부러 더 빡세게 굴리고 있다, 이 말입니까?"

"그럼 아닙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습니까. 무슨 독니를 10분 만에 뽑으라고 하질 않나. 순 억지지 이건."

그 순간, 주변에서 쿡쿡거리는 웃음소리들이 들려왔다.

강 상무가 눈을 부릅뜨고 주변으로 시선을 옮기자, 대화를 엿듣고 있던 직원들이 부리나케 고개를 돌렸다.

"강 상무님이 이쪽 바닥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때, 최 반장이 입을 열었다.

"저희 원래 이렇게 일합니다. 억지는 제가 부리는 게 아니라, 그동안 그쪽이 부렸던 거겠죠."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거, 카르마 코퍼레이션 쪽에서 밑 작업을 해줘서 그나마 할 게 없는 겁니다."

최 반장은 그 말을 끝으로 잔말 말고 일이나 하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등을 돌렸다.

'저 새끼가 진짜....'

강 상무는 이를 으득 씹었다.

며칠 전만 해도 찍소리도 못하던 놈이 이젠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군.

강 상무는 다시 GT 던전에 복귀하면 저 새끼부터 날려버리리라 다짐했다.

'일단 그건 둘째치고....'

강 상무의 시선이 다시금 헬리게이터의 사체로 향했다.

찔리는 순간 바로 비명횡사할지도 모르는 사체를 10분 만에 처리하라니.

이게 억지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그리고 뭐?

본인들은 원래 이렇게 일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대체 어느 인간이 쥐꼬리만 한 월급 받으며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일을 한단 말인가.

'시발 때려치울 수도 없고....'

이내 해체용 나이프를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GT 던전이 결정권을 가지기 위해선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일주일을 버텨야 한다는 걸.

무엇보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이번에 추진 중인 GT 던전 부산 지부를 맡기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아무리 X 같아도 무조건 버텨야 한다.

'그래, 시발… 못할 게 뭐 있어.'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곤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그 생각에 강 상무는 그 어느 때보다 바짝 긴장한 채로 최대한 집중을 이어갔다.

그렇게 한 30분쯤 지났을까.

'…다 했다.'

겨우 모든 이빨을 분해했다.

최 반장이 말한 시간에서 세 배나 더 걸렸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최대인걸.

이내 긴장이 풀리자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지만....

"뭐 하고 있습니까! 다음 작업 안 하세요?!"

"...?"

쉴 틈도 없다는 듯, 강 상무 앞에 다른 몬스터가 들어왔다.

"...바로 이어서 하라고요?"

"네. 안 그럼 시간 못 맞춥니다."

최 반장이 즉답했다.

"...오늘 몇 개나 더 해야 합니까?"

강 상무의 질문에 최 반장이 손가락을 차례로 접는다.

"8구요. 오늘은 좀 적은 편이군요."

"...."

이 짓을 여덟 번이나 더 해야 한다고?

강 상무의 황망한 시선이 방금 들어온 거대한 애벌레형 몬스터에 고정됐다.

이미 다른 직원들은 곧바로 분해 작업에 착수했다. 마치 머릿속에 작업 외에 다른 생각은 없다는 것처럼.

'쯧....'

어쩔 수 없지.

강 상무는 다시금 해체용 나이프를 쥐었다. 그렇게 몬스터를 향해 다가가던 그때였다.

그르르르―.

"어, 어…? 이거 왜 이래?"

몬스터가 갑자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안에 가스가 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몬스터, 체액이 강한 산성이라 터지면 다 위험합니다!"

"빌어먹을… 일단 호스 연결해서 압력부터 낮춰!"

"아, 안 됩니다! 너무 빠르게 팽창하고 있어요!!"

그르르르―.

손 쓸 틈도 없이 팽창하는 몬스터.

결국, 최 반장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안 되겠다! 피해!!"

"3단계 상황 발생! 모두 대피해!"

"장비 챙기지 말고 다 밖으로 나가!"

이윽고 평소 훈련했던 대로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대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한 명은 그러지 못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당혹감에 판단력이 흐려진 건지, 강 상무 홀로 그 자리에 바싹 얼어있었다.

"강 상무님! 뭐합니까!!"

"빨리 피하라고요!"

이미 그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거대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사체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런 시발…!"

밖으로 대피하던 최 반장이 다시 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GT 던전, 본사.

부사장실.

"...그리고 오늘 오후에 한별 건설에서 연구소 착공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비서실장이 고택수 부사장에게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고했다.

동시에 고 부사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벌써? 아니 뭐, 동네 구멍가게 짓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빨리 들어갔다고?"

"저쪽에서도 워낙 이를 간 사업이라.... 완공도 빠르면 두 달 안에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쯧...."

고 부사장은 꽤나 아니꼽다는 표정이었다.

하청 업체 건도 제대로 마무리가 안 됐는데, 벌써 착공에 들어가다니.

게다가 두 달 안에 완공이라면 더욱 시간이 없다.

만약 완공되기 전까지 이번 일을 어떻게든 해결하지 못하면, 국내 부산물은 죄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쪽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여태까지 국내 토벌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했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청 업체 고소를 진행해야 한다.

사전에 하청 업체들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본인들과의 계약을 이행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강 상무, 그놈 일주일에 우리 회사 존망이 걸려 있군."

"상무님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지."

그래, 그놈이 어떤 놈인데.

그 흔한 연줄 하나 없이 악바리로 임원까지 올라온 놈이 아닌가.

그깟 하청 일 따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부, 부사장님!"

그때 한 직원이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강안 물류에서 사고가 났답니다!"

"사고…?"

"네, 네. 작업 중이던 몬스터 사체가 폭발했다던데... 피해가 꽤 큰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 강상우 상무도 있었다나 봅니다."

"...뭐?"

직원은 꽤나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고 부사장은 퍽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강 상무가 다친 건가?"

"아, 아뇨. 다치진 않으셨는데...."

직원은 잠시 망설이던 끝에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꽤 충격을 받으셨는지, 도저히 못 하겠다고...."

"...?"

이런 시발.

"이제 어떻게 합니까...?"

고 부사장이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고작 사고 한 번에 회사 존망이 달린 일을 엎는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그게 말이나 되는가.

'시발, 다 된 일에 재를 처뿌리고 앉았네.'

자연스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잠시, 이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 상무, GT 축산으로 보내버려. 강원도 지부에 자리 하나 만들어서."

"…알겠습니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기까지 한참을 망설였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협의 무시하고 고소 진행해."

회사를 위해서라면 그깟 약속이 뭐가 대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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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뒤늦게 사고 소식을 듣고 현장에 방문했다.

이미 하루가 지난 후라 다른 직원들은 보이지 않았고, 최 반장을 비롯한 관계자와 소방대원들 몇 명이 뒷수습을 하는 중이었다.

"애벌레형 몬스터 내부에 가스가 차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갑자기 팽창하더니 폭발해버려서...."

최용구 반장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사실 오기 전에 대강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직접 와서 보니 사태가 더욱 심각해 보였다.

시설은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내부는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설비가 대부분 흔적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녹아내렸고, 사방에 코를 찌르는 악취가 진동했다.

'강철까지 녹여버리는 체액이 시설 한복판에서 터졌으니....'

본부 지원팀이 터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런 일이....

재수가 없으려니 참.

착잡한 마음을 달래며 상황을 확인했다.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매달 대피 훈련을 해왔거든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저 그런데...."

최 반장이 우물쭈물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강상우 상무가 사고 이후로 연락이 안 됩니다. 사고가 사고였던 터라 아무래도 충격을 먹고 잠수를 탄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안타까운 사고 가운데 달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사고 현장에서 티를 낼 순 없었다.

애써 담담히 말을 이었다.

"어쨌든 약속한 일주일을 못 버티고 나갔으니, 고소는 취하하겠군요. 사고 때문에 상심이 크시겠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

"아뇨."

그때, 이제 막 현장에 도착한 이아영 이사가 대뜸 초를 쳤다.

"…뭐가 아닙니까?"

"GT 던전에서 하청 업체 고소, 진행했어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협의한 대로라면 당연히 취하해야...."

그 순간,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기분에 말끝이 흐려졌다.

일주일을 못 버티고 도망쳤는데, 고소를 한다?

이건 한 가지로밖에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그냥 대놓고 뒤통수를 치겠다는 소리다.

'이 새끼들 봐라....'

나도 모르게 이가 으득 씹혔다.

"설마 강 상무 쪽에서 벌인 겁니까?"

"그건 아닐 거예요. 알아보니까, 어제부로 GT 축산 강원도 지부로 발령 났거든요."

"그럼 그놈보다 윗선에서 결정한 일이겠군요."

"그럴 거예요. 아마... 고택수 부사장이 아닐까 싶네요."

정말 이렇게 나오자는 건가.

이쪽에서 편법을 쓰긴 했지만,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판은 엎어?

"어이가 없군요. 그래도 나름 대기업 계열사니까 최소한의 신뢰는 지킬 줄 알았는데...."

"뭐, 그쪽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테니까요. 회사 존망이 달린 일이니, GT 던전도 선택지가 없었겠죠."

"하아...."

물론 그놈들이 뒤통수를 칠 거라는 걸 예상 못 한 건 아니다만...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나올 줄이야.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지질 않나, 강 상무는 한 큐에 좌천을 가질 않나, GT 던전은 협의 따위 쌩 까고 고소를 진행하질 않나.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군.

"저, 대표님...."

내가 잠시 녹아버린 시설을 보고 있자니, 최 반장이 다시 조심스레 불렀다.

"말씀하십쇼."

"아무래도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일정에는 못 맞출 것 같습니다. 장비도 다 망가져서.... 그리고 무엇보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맡긴 몬스터 사체랑 부산물까지 다 녹아내렸습니다."

"...."

"그, 그래도 너무 걱정 마시죠. 그 부분은 저희가 어떻게든 배상을...."

"신경 쓰지 마십시오."

"...네?"

"일정이고 배상이고 딱히 상관없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최 반장은 어째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아영 이사 또한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 잠깐만요! 어떻게 상관이 없어요?! 여기 맡긴 부산물 다 합치면 액수가 얼만데?!"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떡하겠습니까. 손익 따진다고 녹아내린 부산물이 다시 원상 복구되는 것도 아닌데."

시설이 이렇게 된 이상 보상을 받더라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깟 부산물, 좀 모자라면 어떻고 늦으면 어떻습니까. 작업할 사람들만 멀쩡하면 되죠. 뭐, 장비야 새로 사면 그만이고."

어차피 중요한 건 연구소 완공 이후에 지속적으로 부산물을 납품받는 거다.

지금 당장 작업이 늦어진다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

"...그러네요. 당신 말이 맞아요."

조금 당황한 듯했던 이아영 이사도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금은 대놓고 뒤통수를 친 GT 던전 놈들을 어떻게 할지부터 생각해봅시다. 이대로라면 전국 부산물 처리 시설들이 GT 던전과의 계약을 강제 이행하게 될 겁니다."

"...법무팀, 지원해줘야겠죠?"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나오는 걸 보면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는 걸 텐데, 그만큼 법정 싸움에 자신이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아영 이사의 표정이 퍽 어두워졌다.

그래, 나도 그 부분이 걱정이다.

다른 건 몰라도 법정 싸움은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솔직히 이길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지고 이기고를 떠나서 시간만 끌어도 저쪽이 무조건 이기는 싸움입니다."

짧아야 1년, 길면 5년 이상 이어질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 기간 동안 시설이 제대로 가동될 리 없다.

연구소가 완공되어도 부산물 독점은 고사하고 처리 자체도 힘들어질지 모른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시간은 안 된다.

내게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히든 스킬 : 업보]

[제한 시간 : 약 3년 11개월]

대략 4년 정도.

그 안에 한국 협회를 키워서 국제 협회를 잡아먹은 후 사무총장까지 달아야 한다.

추후 해야 할 다른 작업까지 생각하면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이 일을 빠르게 마무리 지어야 한다.

물론 문제없이 깔끔하게.

"조금 더 확실하고 빠른 방법으로 가보죠."

"…그게 뭔데요?"

"감성팔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

저쪽이 흙탕물 싸움으로 갔으니, 우리라고 신사답게 해줄 필요는 없겠지.

"우리도 아군을 좀 모아봅시다."

기업은 법보다 이미지를 더 무서워한다고 했던가.

설마 내 뒤통수를 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

"우리 이제 어떻게 합니까…?"

김 대표 일행이 돌아가고 난 후, 최용구 반장은 곽철수 대표를 만나 의견을 물었다.

곽 대표는 꽤나 복잡한 표정이었다.

협의회까지 열렸고, 강 상무도 도중에 도망을 쳤으니 이젠 정말 해결됐다고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협의를 무시하고 고소를 진행할 줄이야.

"나도 모르겠다...."

그냥 처음부터 GT 던전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나,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후회할 시간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하청 업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건 한정돼 있다.

'결국 GT 던전에 고개를 숙이냐, 아니면 문 닫는 한이 있더라도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랑 가느냐인데....'

곽 대표는 그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최 반장을 향해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뭐가 말입니까?"

"카르마 코퍼레이션 말이야."

곽 대표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우리가 그쪽을 믿으면, 그쪽도 끝까지 우리를 도와줄 것 같아?"

"...."

최 반장은 잠시 대답을 아꼈다.

그리곤 불과 며칠 새의 일을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처음 계약서를 들고 왔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여태껏 그런 금액을 제시한 기업이 얼마나 됐던가.

하물며 위험한 작업은 미리 청소팀 선에서 밑 작업을 해주질 않나, 이쪽 일정과 작업량을 이해해주고 납품 기한을 조율해주질 않나.

무엇보다 사고가 터졌을 때 GT 던전은 바로 뒤통수칠 생각부터 한 반면, 김 대표는 직원들의 안전부터 확인했다.

이미 둘의 차이는 명백했다.

게다가 조금 전 김 대표가 무심하게 던진 한마디.

'사람만 멀쩡하면 다른 건 상관 없다라....'

이미 최 반장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라면 분명 끝까지 우릴 도와줄 겁니다."

"...여태까지 그런 기업이 있긴 했나?"

"여태까지 없었으니 이제 하나쯤은 나올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최 반장이 씨익 웃었다.

하지만 곽 대표는 여전히 고민스러웠다.

직원 신분이야 당연히 지 좋다는 놈 편을 드는 게 당연하지만, 대표의 입장에선 그렇게 간단히 결정을 내릴 만한 사항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고민도 잠시뿐이었다.

"그래, 시벌. 죽기밖에 더 하겠어."

어차피 더는 물러날 곳도 없다.

많은 걸 잃은 상황에서 더 잃어봤자 뭐 잃을 게 있겠나 싶었다.

"우린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랑 끝까지 간다. 지금 당장 전국 시설 대표들에게 연락 돌려. 고소고 나발이고 앞으로 GT 던전 수주, 절대 받지 말자고."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말하다 문득 떠오른 게 있어 물었다.

"너 혹시 인터넷 같은 거 잘하냐?"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요즘 인터넷에 글 하나 쓰면 파장이 어마어마하다면서. 하루 만에 전 세계 사람들도 다 보고."

"그렇죠...?"

"우리도 여론몰이 좀 해보자."

웬일로 곽 대표답지 않게 꽤나 신세대적인 발상.

최 반장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목을 물어뜯을 거면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

"어떻게 되고 있어?"

GT 던전, 고택수 부사장의 물음에 비서실장이 서류를 건넸다.

"강안 물류 외 42개 업체에 대한 고소장, 전부 접수했습니다. 빠르면 이번 주 안으로 검찰 송치될 겁니다."

"오케이."

고 사장이 손가락을 튕겼다.

하지만 비서실장은 어딘가 불안한 표정이었다.

"저... 그런데 이래도 될까요?"

"뭐가?"

"이건 기존 협의를 완전히 무시하는 거잖습니까. 카르마 코퍼레이션 쪽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그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쩔 건데?"

"한별 상사와 손을 잡고 법정 싸움에 나선다면...."

"하라 그래. 어차피 재판 결과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시간만 끌어도 우리가 무조건 유리하니까."

고 부사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엔 하청들에게 결정권은 없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좋든 싫든 본인들과의 계약은 계속 이행해야만 한다.

그것만으로도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부산물 독점을 완벽히 견제할 수 있을뿐더러, 운이 따라준다면 아예 이 바닥에서 뜨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후의 승자는 버티는 자라 했다.

고작 개미들이 거대한 바람에 버틸 재간이 없다.

고 부사장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냥 처음부터 이렇게 갈 걸 그랬어.'

괜히 협의회니, 뭐니 해서 시간만 버렸군.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비서실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저쪽에서 무슨 반응이 오든 싹 다 무시해. 괜히 일일이 대응해주면 오히려 약점 잡힐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이 인사와 함께 사무실을 나가려던 그때.

"부, 부사장님!"

경영팀 직원이 사무실로 뛰쳐 들어왔다.

"지금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아 난 또 뭐라고. 무시해, 무시해."

"아, 아뇨!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저희랑 계약된 전국 하청 대표들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인터넷에선 하청 직원들의 글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고요!"

"...?!"

"뿐만 아니라 한별 상사랑 한국 협회에서도 계속해서 저희에 대한 제보가...."

보고가 끝나기가 무섭게, 비서실장이 먼저 핸드폰을 열어 인터넷을 확인했다.

머지않아 잿빛이 된 얼굴로 고 부사장을 바라봤다.

"부사장님...."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GT 던전 토벌권 압수… 청와대 청원 서명이 20만 명이 넘었답니다...."

"...."

고택수 부사장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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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 던전, 총 42개 시설에 고소장 접수 확인]

싸움은 기사 한 줄에서 시작되었다.

계획대로 곧장 시절 대표들을 모아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하청 업체와 GT 던전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이것만으로도 GT 던전에 한 방 먹인 셈이다.

여태껏 찍소리도 못 내다가 대놓고 이빨을 드러내리라곤 생각 못 했을 테니까.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강안 물류 최용구 반장 曰 '우린 그저 값싼 노예였다.' 발언, 충격의 기자회견]

[납품가 후려치기, 무리한 일정 조율,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직접 찾아와 횡포… 하청 업체 직원들의 제보 잇따라]

[GT 던전이 짧은 시간에 상승세를 올릴 수 있던 이유는 '도 넘은 하청 압박?']

[계속해서 불거져 온 GT 그룹의 갑질 논란, 이대로 괜찮은가]

[이능차원관리 협회, 李 협회장, 'GT 던전의 행동은 명백히 토벌 시장을 무너뜨리는 갑의 횡포' 발언 화제]

[한별 상사 하성일 사장, 개인 SNS에 GT 던전 맹비난]

미리 준비한 아군들이 예정대로 사정없이 물어뜯고 있다.

하성일 사장과 이두식 이사 또한 가세해주었고, 의도하진 않았지만 수많은 하청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인터넷에 올린 글 또한 한몫해주었다.

이런 현상은 연쇄작용을 일으켰다.

과거 GT 그룹 계열사에서 일했던 사람들과 계약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썰을 풀어놨던 것이다.

'얘넨 그동안 뭔 짓을 한 거야. 어떻게 파도 파도 괴담만 나오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인터넷 반응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심할진 몰랐지.

"뭐, 그만큼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았던 거겠죠. 누구랑 달리."

"...?"

옆에 있던 이아영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게 누군데? 라며 쳐다봤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뭐, 딱히 중요한 건 아니니까.

"어쨌든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끝났습니다. 이제부턴 그냥 앉아서 싸움 구경이나 합시다."

"네? 여기서 끝이라고요? 더 세게 나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과유불급이라 했습니다. 너무 욕심부리다간 오히려 역풍을 맞을 겁니다."

"그래도... 이걸로 끝내기엔 좀 애매하지 않아요? 결국 여론몰이만 한 셈인데, 저쪽에서 그냥 무시해버리면 아무 의미도 없잖아요."

"최소한 눈치는 보게 할 순 있죠."

그럼에도 이아영 이사는 여전히 불안한 듯했다.

"눈치만 보게 하면 뭐해요. 실제로 GT 던전에 타격을 주는 것도 아닌데! 아마 조금만 잠잠해지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걸요?"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여론은 사실상 그 자체만으론 GT 던전에 어떠한 대미지도 주지 못한다.

일반 시민을 상대로 하는 사업도 아니니 불매 운동 같은 움직임이 일어날 리도 없고.

무엇보다 이미 다져놓은 발판이 워낙에 튼튼하니 이 정도의 이슈로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거 없습니다. 이제부턴 우리 대신 다른 쪽에서 움직여 줄 테니."

"...다른 쪽이요?"

중요한 건, GT 던전은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공분을 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몇천 명, 몇만 명 수준이 아니라 수십만 명 수준으로.

그리고 대개 이 정도 상황까지 오면....

[GT 던전 토벌권 압수 청원, 벌써 35만 명 돌파]

[청와대 '해당 청원에 대해 면밀히 검토 중' 입장 발표]

정부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

"전국적인 기업 이슈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도 없을 테니까요."

조금 있으면 세무조사든 국정감사든 들어가겠지.

물론 거기서 뭔가 꼬투리가 잡힌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사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상관없다.

정부의 타깃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GT 던전은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테니까.

GT 던전은 지금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국내 토벌 시장 독점 야망? '토벌 시장에 빨간불']

[서울대학교 이능차원학과 천승호 교수, '토벌은 시민들의 목숨이 달린 문제,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순간 균형 무너져' 발언]

[국내 부산물 유통까지 장악? 카르마 코퍼레이션 독주 막는 게 급선무]

[협회와 손잡고 해외 지부 인수 사업 벌인 카르마 코퍼레이션, 국민보다 해외가 더 중요한가]

바로 이것처럼.

반박 기사, 화제 전환, 감정 호소.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길 바란다.

계속해서 헛짓거리하다 보면, 결국 한 가지 선택지밖에 안 남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