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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박 기사를 낸 지 고작 1시간도 채 안 된 시각.

GT 던전의 사무실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고택수 부사장은 이번 건을 어떻게든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서로가 추태를 드러내며 지리멸렬하게 싸움을 이어간다면, 조금씩 사람들의 입에선 이런 말이 나올 테니까.

'저놈이나 이놈이나 똑같음'.

그럼 모든 걸 무마할 수 있다.

나쁜 놈도, 착한 놈도 없어지는 그 마법 같은 한마디를 위해, 입장표명 대신 반박 기사를 먼저 낸 것이었는데....

└ 응~ GT 던전 언플 개 추하죠?

└ 병신들ㅋㅋ 이 타이밍에 카르마 까는 기사 내면 우리가 바로 눈 돌릴 줄 알았냐?

└ 저 새끼들은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갓르마를 건드리냐 ㅅㅂ

└ ㄹㅇ 머가리 수준 개텅텅

└ 독점은 ㅅㅂㅋㅋ 지들이 하고 있던 게 독점이지

└ 지들이 먼저 처맞을 짓 해놓고 이제 와서 발악하네

└ 저 인터뷰 한 교수 알아보니까 GT 던전 부사장 사촌임ㅋㅋㅋㅋ

└ 그걸 어케 찾았누…?

댓글을 확인하던 비서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보시다시피 저희 쪽에서 대응 기사 아무리 쏟아내도 씨알도 안 먹혀요."

"...시발."

고택수 부사장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건 뭐 기업이 아니라 종교 수준이잖아....'

대체 저쪽이랑 우리랑 다를 게 뭐라고 여론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건가.

저쪽도 결국 다 돈이 목적이지 않은가!

"여론이 너무 안 좋습니다. 슬슬 정부 쪽에서도 움직일 것 같고요."

"...자네 생각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을 것 같나?"

고 부사장이 묻자, 비서실장이 그늘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때, 싸움이 길어질수록 저희만 손해입니다. 일단 지금 상황을 끝내는 게 급선무인데...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곤 있지만, 아무리 봐도 방법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고소 취하... 말인가?"

"...네."

고 부사장이 쓰게 웃었다.

그래, 하청 업체 고소로 시작된 싸움이다.

불씨를 제거하면 연기는 사그라들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군....'

법정 문제로 넘어가면 불리하니, 아예 시작도 못 하게 만들겠다는 건가.

고 부사장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고소를 취하하면 모든 시설이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넘어갈 게 불 보듯 뻔하다.

그럼 더 볼 것도 없이 이쪽은 망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싸움을 계속 이어나가기도 힘든 상황이다.

법정 싸움 이전에 정부가 나설지 모른다.

'시발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냐....'

고작 하청 업체 좀 건드렸다고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이야.

닥치고 따라야 하니까 하청이고, 우린 그 대가로 돈을 주는 건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건가.

'이게 다 김준우, 그 미친놈 때문에....'

고 부사장의 이가 으득 갈렸다.

그래도 이대로 무릎을 꿇을 순 없다. 모든 걸 건 싸움이다.

여기까지 어떻게 올려놓은 회사인데, 고작 하청 놈들 때문에 망할 수는 없다.

"서 실장."

고 부사장의 시선이 비서실장에게 향했다.

"타깃 바꾸자."

"네, 네?"

"카르마 코퍼레이션 말고, 김준우를 노리자고. 단체보단 개인을 노리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으니까."

지금 상황에서 꺼낼 수 있는 묘수라 여겼다.

하지만 정작 비서실장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글쎄요. 워낙 흠잡을 게 없는 사람이라, 노릴만한 게...."

"그놈이 협회에 있을 때 본부 개혁에 가담해서 윗놈들 다 날려버렸다면서?"

"네, 네 그렇죠."

"그중에 연락되는 사람 없나?"

뭔가 떠올랐는지 그는 곧바로 이곳저곳에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당시 사건에 관련된 인물 하나를 물어왔다.

"서민철 지부장이라고, 본부 개혁 때 잘려 나간 대표 격인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은 울릉도 지부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 연락처입니다."

고 부사장은 곧바로 쪽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착신음이 흐르길 잠시.

「여보세요.」

힘이 쭉 빠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GT 던전의 고택수 부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다른 게 아니라 뭣 좀 여쭤보려고 하는데.... 혹시 과거에 김준우 대표한테 불합리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신 적이 있습니까?"

「....」

상대방의 대답이 끊겼다.

고 부사장은 뒤늦게 너무 갑자기 본론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없습니다.」

짤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제보자 신원은 저희가 철저하게 보호를 해드릴 테니, 그 점은 염려 마시고 편하게...."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혹스러울 만큼 단호했다.

고 부사장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재차 입을 열었다.

"기, 김준우 대표 때문에 작전 본부장 자리에서 물러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자세한 건 모르지만, 분명 무슨 사정이...."

「고택수 부사장님. 제가 조언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예, 예. 말씀하십시오."

긴말을 끊고 수화기 반대편에서 돌아온 말은 이전보다 더 단호했다.

「당장 그만두십시오.」

"...예?"

「뭘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그 인간을 건드릴 생각이시라면 지금 당장 그만두라고요.」

"그게 무슨...."

「장담컨대, 절대 좋은 꼴을 못 보실 겁니다.」

"...."

말속에 뼈가 있음을 느끼고 고 부사장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 반응이 답이었던 건가.

「아니면, 뭐… 이미 늦었을 수도 있겠군요.」

"...."

「아무튼, 더 용건이 없으시면 이만 끊겠습니다.」

전화는 어이없게 끊겼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잠시 인지하지 못한 채 고 부사장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방문자를 확인하고 고 부사장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회, 회장님?!"

GT 그룹의 총수, 오강태 회장이 직접 행차한 것이다.

"회, 회장님이 여기까진 어쩐 일로...."

"자네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오 회장의 목소리에 바짝 날이 서 있었다.

유구무언.

뭘 묻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고 부사장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자네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일을 어떻게 이 지경까지 만들어?"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게 다 회사를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지금 이 꼴이 회사를 위한 건가?"

"...."

날카로운 눈초리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제, 제가 어떻게든 수습하겠습니다."

"이미 늦었어."

"네…?"

턱―.

수행원이 건넨 서류 몇 장을 고 부사장에게 던졌다.

"국정감사 날짜 잡혔다."

"...!!"

"이번 일에 대한 책임, 모두 자네가 져줘야겠어."

이윽고 청천벽력 같은 지시가 떨어졌다.

"사퇴해."

***

"이게 정말 되는군...."

천하의 하덕수 회장조차 당황스러운 소식이었다.

싸움이 벌어진 지 단 하루 만에 GT 던전이 백기를 든 것이다.

세부 자료를 확인하던 하성일 사장이 입을 열었다.

"모든 고소를 취하했습니다. 그리고 시설을 돌아다니며 사과를 한다네요.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계약을 다시 진행하겠다는군요."

"소 잃고 부랴부랴 외양간 고치고 있군."

"네. 이미 대다수 업체가 다시 계약하지 않겠다는 반응입니다."

"그럼... 끝났구만."

부산물 처리가 막혀버렸으니 더 이상의 토벌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GT 던전의 토벌 사업은 사실상 끝났다 봐도 무방하다.

"대가를 치른 게야."

하덕수 회장이 클클 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게 다 업보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제 방해꾼도 사라졌겠다... 본격적으로 먹어보자고."

하덕수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국 토벌 시장."

판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남은 건 입맛대로 세팅하는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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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어제 오후, GT 던전에 대한 국정감사가 열렸고, 하청 갑질 논란에 대한 진상규명이 시작되었다.

던전 시세 조작, 매출 위조 같은 생각지도 못한 내용들이 줄줄이 밝혀졌다.

결국, 공식적인 발표가 나오기도 전에 고택수 부사장은 해임을 당했다.

GT 던전의 사장은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진 사퇴했다.

이후 GT 던전은 부랴부랴 부산물 처리 시설에 진심 어린 사과와 배상을 약속했지만....

'본심이야 안 봐도 뻔하지.'

이대로라면 토벌 사업을 통째로 접어야 할 판국이니, 어떻게든 본인들과 계약을 이어가 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일 뿐이다.

물론 씨알도 안 먹힐 짓이지만.

당연히 GT 던전과의 재계약을 수락한 시설은 전무했다.

그렇게 부산물 처리를 맡길 곳을 모두 잃은 GT 던전은 결국 토벌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래도 대기업은 대기업이었던 건지, 곧바로 작전팀 파견으로 노선을 변경하더니 간신히 전신은 유지하고 있다.

물론 지원 사업으로는 예전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힘들겠지만.

'이렇게 금방 꼬리 내릴 거였으면 애초에 건드리질 말던가....'

결과적으론 원하는 대로 됐지만…, 그동안 고생깨나 했던 걸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접견실.

테이블에 놓인 계약서를 정리하며 곽 대표와 최 반장에게 번갈아 악수를 건넸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곽 대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은 계약을 갱신하기 위해 방문했다.

여태까진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주 단위로 의뢰를 맡겼지만, 방해할 놈도 사라진 마당에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번을 계기로 아예 강안 물류와 10년 단위로 계약을 체결했다.

'뭐… 난 10년까지 볼 일도 없겠지만.'

중간중간에 또 갱신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이왕 하는 거 통 크게 가면 서로서로 좋을 테니까.

물론 강안 물류뿐만이 아니다.

이곳을 시작으로, 전국 42개 시설과 같은 조건의 계약을 제안했고, 다행히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사이, 한창 공사 중이던 연구소가 완공됐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국 출현 던전 지분은 약 80%.

거기에 전국 모든 시설과의 우선 납품 계약.

무엇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아이템 제작 연구소까지.

필요한 건 모두 모였다.

이제 곧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국내 최대… 아니, 세계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토벌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다.

'클클클....'

무엇보다 독점하다시피 토벌 시장을 장악한 이상, 이제 우리를 막을 수 있는 놈은 없다.

그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도, 그 어떤 압박을 넣어도 하청 업체를 비롯한 모든 토벌 관련 업체는 찍소리도 못할 것이다.

우리 외엔 선택지가 없으니까.

GT 던전이 떨어져 나갔으니 이제 좀 편해질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모양인데... 참으로 멍청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유감스럽지만, 결국 그놈이 그놈이다.

이제부턴 우리가 철저하게 이용할 생각이니, 각오하는 게 좋을....

"감사합니다, 대표님."

"...?"

그때, 최 반장이 영문 모를 소리와 함께 고개를 꾸벅였다.

"솔직히, 기업은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익이 목적인 조직이니까요. 우리 같은 하청, 절대 도와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대표님 같은 분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뭐래?

내가 무슨 편을 들어줬다는 건가.

그냥 부산물 납품 싸움에서 GT 던전을 배제하기 위해 움직였을 뿐인데.

"그럼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살펴 가십시오."

영 떨떠름한 얼굴로 그들을 배웅하자, 이아영 이사가 곧바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얘기가 잘 됐나 봐요."

"지 하고 싶은 말만 하던데요."

"글쎄요, 제가 듣기론 맞는 말이던데?"

"...?"

자꾸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튼, 무슨 볼일이십니까?"

"이번 달 전국 토벌 현황이에요. 한 번 검토하시고 다음 달 기획 결재해주세요."

이아영 이사가 건넨 서류를 천천히 살펴봤다.

'오우야....'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질 뻔했다.

이번 달 우리 회사에서 토벌한 던전은 총 2,342개.

토벌 매출은 무려 1,200억에 달했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뭐, 이번엔 많이 번 만큼 또 많이 나가야 해요. 저번에 한별 상사에서 빌린 돈도 갚아야 하고… 한별 건설 계약금도 줘야 하고요."

"그거 다 줘도 꽤 많이 남을 것 같군요."

"설마 그것뿐이겠어요? 이제 연구소도 완공됐으니 장비도 준비하고 인원도 채워 넣어야 해요. 한국에선 전문 인력 구하기가 힘들어서 핵심 연구원들은 전부 해외에서 스카우트해야 하니까요."

"..."

"그리고 또 부산물 처리 시설 42곳에 대한 계약금이랑, 작전팀 케어 비용, 청소팀 장비 교체 비용에...."

"그래서, 그거 전부 다 합치면 얼맙니까?"

"대략… 2천억 정도 나오겠네요."

"...."

시발.

이렇게까지 했는데 800억 적자라고?

X 같아서 못 해 먹겠네.

참으로 암담한 기분에 절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뭐, 앞으로 기대 수익이 어마어마하니까요. 이제부터 열심히 하면 되죠."

"...위안이 되는군요."

떨떠름하게 대답했지만, 이아영 이사는 별걱정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제 정말 준비가 끝났네요."

"뭐가 말입니까?"

"국제 협회를 먹을 준비 말이에요."

"...."

그렇지.

인원과 장비까지 모두 준비가 끝나면, 그때부턴 최고 수준의 토벌 시스템을 필두로 현 국제 협회와 전면전에 나설 때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이긴다면....

'드디어 돌아갈 수 있겠군.'

나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기쁜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

나는 말 없이 사무실을 쭉 훑었다.

이곳에 놓인 물건 하나하나를 천천히 살펴보던 끝에, 내 시선은 마지막으로 이아영 이사에게서 멈췄다.

"...뭐, 뭐예요? 갑자기 왜 그렇게 봐요?"

"...."

대답을 아끼길 잠시.

"아무것도 아닙니다."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돌아갈 생각 하나로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시발, 여태까지 번 돈이 얼만데… 이거 다 두고 가야 해?'

존나 아까웠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오히려 회귀 전보다 잘 나가고 있는 거 아닌가?

헌터는 아니지만 스킬도 전부 복구했고, 지금은 어엿한 회사 대표에 협회까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헌터 때 벌던 돈보다 수십 배를 벌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반이라도 가져갈 방법 없나....'

뭔가 방법이라도 없을까 생각하고 있는 사이, 이아영 이사가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이번 실적 내기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실적 내기 중이었지.

다른 일이 워낙 급해서 나도 깜빡하고 있었다.

뭐… 당연히 1등은 물 건너갔겠지만, 그동안 빡세게 쌓아놓은 게 있으니 최소한 순위권에는 들었을....

"당신이 꼴찌에요."

"...?"

"모든 팀 성과금에 전체 회식, 약속 지켜야 해요."

"...."

다 필요 없으니까 지금 당장 돌아갔으면 좋겠네.

***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 협회 산하 아이템 제작 연구소.

통칭, 이클립스.

명칭은 그럴듯했지만,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저 완공 날짜가 동지였기에 누군가 대충 붙인 것이다.

이클립스의 목적은 토벌 아이템 제작과 수리 그리고 특수 부산물에 대한 연구였지만, 지원팀이 전신인 만큼 헌터 관리 및 케어도 업무에 포함되어 있었다.

연구소 직원들은 하나 같이 이쪽 바닥에서 날고 긴다 하는 전문 인력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들의 리더이자, 연구소 소장으로는....

"대체 왜 맨날 이런 건 나한테 시키는 거래?!"

이아영 이사가 임명되었다.

"연구소 전신이 지원팀이잖아요. 아영 씨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죠."

김민주가 애써 웃으며 달랬지만, 턱도 없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몇 갠데, 이것까지 맡기냐는 거죠. 이럴 거면 아예 대표 자리를 넘겨주던가! 거의 뭐 노예 수준이라니까?!"

첨단 최신 장비가 즐비한 연구소 한복판에 이아영 이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김민주는 괜히 맞장구를 쳐주다간 끝도 없을 것 같았기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저는 왜 부르신 거예요?"

"뭐, 연구소 구경도 시켜줄 겸 줄 것도 있어서요."

"줄 거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이아영 이사가 검 한 자루를 건넸다.

"검신 121cm, 손잡이 28cm. 전체적인 사이즈는 흑랑지도랑 똑같이 맞췄고, 전용 그립에 미끄럼 방지를 위해 특수 소재를 입혔어요. 검신은 오렌지 등급 이상 몬스터에서 추출한 금속을 바탕으로 프렉탈 포함, 온갖 최상급 강화 재료가 다 들어간 검이에요."

"그, 그래요…?"

"뭐예요? 그 반응은. 주는 사람 섭섭하게."

"...네?"

"받아요. 민주 씨 거예요."

김민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검을 받아들었다.

사실 이리 반응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무기 지원을 받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애초에 C급까지는 보급형 외엔 전용 무기 지원이 안 되고, B급이 돼도 꽤나 거액의 돈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에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검이 있었고, 딱히 더 좋은 무기에 대한 욕심도 없었기에 그냥저냥 써 왔는데....

"고마워요, 아영 씨...."

"감사는 제가 아니라 대표님한테 하세요. 연구소 첫 제작으로 민주 씨 무기를 부탁한 거거든요."

"…선생님이요?"

"네. 참고로 그거 등급으로 따지면 SS+급은 되는 거예요."

김민주는 감격에 겨운 얼굴을 애써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자 이아영은 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싸울 때 보면 아주 괴물이 따로 없으면서… 이럴 땐 또 귀엽다니까.'

이내 감정을 추스른 건지, 김민주가 다시 이아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 검… 이름이 뭐예요?"

"없어요. 뭐, 이제 민주 씨 거니까 민주 씨가 직접 붙여요."

"으음...."

김민주는 검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지그시 훑어보았다.

이아영이 말했던 것처럼 무게와 사이즈는 흑랑지도와 똑같았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검은색이었던 흑랑지도와 달리 새로운 검은 영롱한 붉은빛이 맴돌았다.

그렇게 검에 혼을 뺏긴 채 생각에 잠겨 있길 잠시.

"선생님한테 지어달라고 할래요."

"...얼씨구?"

저건 또 무슨 주접인가.

이아영 이사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럼에도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진 채였다.

따르릉―.

그때 이아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 이두식 협회장에게 온 전화였다.

「나다. 연구소는 어떠냐?」

"아주 좋아요."

「다행이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그거 엄연히 협회 소유다.」

"하지만 소장은 저죠."

「야 이…! 장난하지 말고 인마! 그런 거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감당 안 돼!」

"알고 있어요. 농담해본 거예요."

「하아....」

이두식 이사가 한숨을 푹 내쉬길 한 차례.

「아무튼, 본론은 그게 아니고....」

조심스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저번에 지원팀 날려버린 그 정체불명 부산물, 기억하냐?」

"뭔지 몰라서 이것저것 해보다가 터졌다면서요."

「그래, 그거 말이다. 우리 쪽에서 나름 계속 조사해봤는데... 뱅크 아이템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어.」

"...네, 네?"

이아영 이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시간석, 반능석에 이어서 또 다른 뱅크 아이템이라니.

「그래서 말인데, 지금 연구소로 보낼 테니까 네가 한번 봐줄 수 있겠냐?」

"...물론이죠."

「그래, 뭐 좀 나오면 바로 연락줘라.」

"네."

이아영 이사는 통화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다른 곳에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당연히 수신자는 김준우 대표였다.

"뱅크 아이템, 하나 더 찾은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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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연락으로 인해 한걸음에 달려온 연구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뱅크 아이템을 찾았다뇨."

이클립스로 들어서자마자 이아영 이사부터 찾았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농담인 줄 알았다.

최근 뱅크 아이템의 최소 출현 등급인 오렌지 이상의 던전 출현도 없었을뿐더러, 희귀 아이템 출현 보고도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회귀 전 기억으로는 시간석 외에 추가적인 뱅크 아이템이 발견됐다는 이야긴 들어본 적도 없었다.

물론 죽고 나서 발견됐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따라와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나를 안내한 곳은 중앙 연구실에서 더욱 안쪽에 위치한 구역이었다.

공간에 들어서자 푸른빛으로 빛나는 부산물이 눈에 들어왔다.

보자마자 농담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몇 달 전에 앙골라 지부에서 보내온 부산물 기억나요?"

"지원팀이 실험하다가 사고 냈던 그거 말입니까?"

이아영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말하길, 그 부산물이 뱅크 아이템인 것 같다고 해서 확인차 여기로 보냈는데...."

"어떻게 나왔습니까?"

"뱅크 아이템 맞아요. 그것도 전 세계 통틀어서 여태까지 딱 하나 발견된 이능석이에요."

"미친...."

이능석.

뱅크 아이템 중 가장 희귀한 녀석이자, 가장 위험한 효과를 가진 아이템.

기본적으로는 이능력을 부여해주는 효과지만, 그 대상이 사람, 동물 등 모든 사물을 가리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을 무기화시킬 수 있는 물건이자, 마음만 먹는다면 수십만 명의 이능력 부대를 만들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 아이템이 한국에 들어오다니.

'쯧,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했는데....'

작은 건물 하나를 날려버릴 정도의 강력한 폭발이었는데, 정작 부산물은 멀쩡하지 않았던가.

평범한 부산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만, 설마하니 그게 뱅크 아이템... 그것도 이능석이었을 줄이야.

'아프리카 쪽 물건이라 그냥 좀 특별한 부산물인 줄 알았지....'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러자 이아영 이사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하지 않으시네요?"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니까요."

"안 좋을 건 또 뭐예요. 이능석이잖아요. 전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던 물건인데. 무엇보다 이걸로 한국은 뱅크 아이템을 두 개나 보유한 국가가 되는 거잖아요. PB 코퍼레이션 놈들 총알에서 추출한 반능석까지 합치면 3개나 되고요. 뭐… 극소량이긴 하지만."

"그래서 문제라는 겁니다."

여전히 의아하다는 반응.

그걸 설명하기 위해선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할 게 몇 가지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알아낸 내용을 잠시 정리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국제 협회가 예전부터 전 세계의 토벌권을 통합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가는 시간과 자본 대비 메리트가 없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토벌권 하나 통합했다고 정말로 전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돈은 많이 벌겠죠. 그런데... 돈이 목적이라기엔 배꼽이 너무 큽니다. 조금만 방해가 된다 싶으면 전 세계 거물급 인사도 가차 없이 죽여 버리고 있는데, 그 이유가 돈 때문이다?"

"그건 수지가 안 맞죠."

"사실 마르크 팀장한테도 슬쩍 물어봤는데… 그놈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이아영 이사 또한 덩달아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뭐…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사실 정황상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

그제야 이해했다는 얼굴.

"뱅크 아이템이 목적이라는 거예요?"

"물론 추측이긴 하지만.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저번엔 시간석을 회수하겠다고 협회 작전팀 절반을 수장시켜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서, 설마 그때 수중 던전도 PB 코퍼레이션에서 움직였던 거예요?!"

아, 이건 말 안 했었나.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헷갈린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아무튼, 지금 국제 협회는 이상하리만치 뱅크 아이템 회수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엔... 그동안 국제 협회의 목적을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토벌권을 통합하기 위해 뱅크 아이템을 회수하는 게 아니라, 뱅크 아이템을 회수하기 위해 토벌권을 통합하려는 거다?"

"그렇죠."

이아영 이사가 머리를 짚으며 신음했다.

그제야 내가 곤란하다고 말했던 게 이해가 간 모양이었다.

국제 협회와 전면전을 위해 전력증강을 한 거지만, 말 그대로의 전쟁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헌터들로 전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설령 그런 짓을 벌인다고 해도 우리 또한 너무나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전면전은 말 그대로의 전쟁이 아닌, 보다 수준 높은 토벌 경쟁력을 앞세워 국제 협회와의 인수전을 벌이겠다는 뜻에 가까웠다.

그놈들도 결국 토벌권 통합을 위해선 전쟁이 아닌, 비즈니스를 해야 할 테니까.

'그런데… 국제 협회의 진짜 목적이 뱅크 아이템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앞으론 굳이 비즈니스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수틀리면 무력으로 뺏어오는 방법이 있으니까. 수중 던전 사건 때처럼.

'시간석 하나만으로도 그런 짓을 벌였는데, 다른 뱅크 아이템을 획득했다는 게 저쪽 귀에 들어가면....'

심지어 다른 것도 아닌 이능석이다.

사용 조건과 범위가 매우 까다로운 다른 뱅크 아이템과 달리, 가장 활용도가 높다.

한국에 있다는 걸 알면 정말 전쟁을 벌이려 할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그뿐이면 다행이지.'

전 세계 각 지부가 거기에 가세하기 시작하면, 최악의 경우 세계 대전으로까지 확대되고 만다.

그럼 내 손으로 해결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니, 그 누구도 멈추지 못할 테지.

"혹시 협회장님한테 보고하셨습니까?"

"아뇨. 아직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일단 확인 결과 뱅크 아이템은 아니었다고 보고해주세요."

"...알겠어요."

별 이견 없이 그녀는 수긍했다.

아직은 비밀에 부치는 데 동의한 것이다.

"아, 그리고 시간석은 아직 협회에서 보관 중입니까?"

"그럴 거예요."

"그럼 그것도 여기로 가져와서 같이 보관합시다. 여기서 같이 관리하는 편이 더 낫겠죠."

"...저 그런데 말이에요."

이아영 이사는 목소리를 팍 죽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이거 그냥 우리가 가공해서 쓰면 안 돼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물론 불법이긴 한데, 국제 협회도 이미 뱅크 아이템을 가공해서 쓰고 있잖아요. 우리라고 안 할 이유가 없지 않아요?"

뱅크 아이템은 사회에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어 2차 가공 및 무기화가 금지된 아이템이다.

하지만 먼저 약속을 어긴 건 어디까지나 국제 협회다.

앞으로의 분쟁을 생각하면....

그녀 말마따나 우리라고 못 할 건 없다.

무엇보다 이능석을 사용한다면 전 세계의 군대를 상대로도 대항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최악의 경우에는 강제로 제2의 국제 협회를 세우는 것도 가능하다는 소리다.

얼핏 들으면 너무나 쉽고 빠른 방법이지만....

"저쪽이 먼저 했다고 우리도 똑같이 할 필욘 없지 않습니까. 자존심이 있지."

"자존심 챙길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요."

"자신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네?"

"그런 꼼수 안 써도 국제 협회, 충분히 박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려고 이렇게까지 준비한 거 아닙니까."

"...."

"그리고 말입니다."

리스크 관리 차원도 있지만, 내겐 헌터로서 자존심이 있었다.

"헌터의 적은 몬스터지, 사람이 아닙니다."

"...."

내 대답에 이아영 이사가 잠시 대답을 아꼈지만, 곧 미소를 띠었다.

"뭐, 맞는 말이네요."

***

"하아...."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사무총장실에 한숨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철창만 없다 뿐이지 감옥이 따로 없군.'

웨슬리 사무총장은 천장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아프리카 지부 건 이후 조사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본부 내 모든 업무를 감시당하는 것도 모자라, 무언가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곧바로 서류 검토부터 들어가고 있다.

'그렇게 애써 봤자 잡힐 만한 것도 없는데.'

들킬 염려는 없지만 맘대로 하지 못한다는 건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답답한 건, 본부가 이렇게 주춤하는 동안 김준우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불안이다.

다행히 최근엔 한국 내에서만 움직이는 것 같은데... 혹시 모르는 일이다.

우리와의 전면전을 위해 전력을 가다듬고 있을지.

그동안 본부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가 정상들 눈에 찍히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가운데, 노크 소리와 함께 수행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이번에 한국 협회가 인수한 앙골라 지부 쪽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말해보세요."

"저, 그게...."

수행비서가 문 쪽으로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N-1 사항입니다."

"...."

순간 웨슬리 사무총장의 표정이 굳었다.

그 또한 사무실 문을 슬쩍 흘겼다.

본부 내에 조사원이 쫙 깔린 이상, 여기서 대화는 어려웠다.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고유 스킬 : 천지창조]

[11차원의 고유 공간을 창조합니다]

지이이잉―.

사무실의 외벽이 마구 뒤틀리며 어딘지 모를 공간으로 변했다.

수행비서는 동그래진 눈으로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을 두리번거렸다.

우주, 혹은 심해처럼 어둡고 울렁이는 공간.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떠 있는 건지, 서 있는 건지도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N-1 사항이면 뱅크 아이템 관련 보고입니까?"

"...네, 네."

그녀 또한 사무총장의 고유 공간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기에 내심 당황했지만, 이내 곧바로 정신을 다잡고 말을 이었다.

"앙골라 지부에서 오렌지 등급 던전이 토벌되는 순간, 통제팀에서 엄청난 이능파를 감지했습니다."

"원래 던전이 소멸할 땐 꽤 많은 이능파를 방출하지 않나요? "

"확인 결과, 통상 던전이 소멸하며 발생하는 이능파에 15배에 이르는 수치였다고 합니다."

"...!"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확실히 비정상적인 수치다.

그 정도의 이능파를 내뿜을 만한 현상은 많지 않다.

강한 몬스터가 소멸했다거나, 아니면 말도 안 되게 강력한 아이템이 출현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만약 후자라면 수행비서의 말대로 뱅크 아이템일 확률이 너무나 높았다.

'확실히 의심이 가긴 하는데....'

직접 확인해볼 수가 없으니, 아직 확신할 순 없다.

"그런데 며칠 전 서울에서 같은 크기의 이능파가 감지되었다고 합니다."

"...뭐?"

"그 시간대 한국 기사를 확인해보니, 서울 본부 지원팀에서 부산물 하나가 폭발을 일으켰다고 하더군요."

"...앙골라 지부, 한국 협회가 인수한 지부 맞죠?"

"네."

"두 곳에서 똑같은 이능파가 감지됐고?"

"...."

수행비서는 이번엔 대답을 아꼈다.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던 까닭이었다.

"하, 하하하…!"

이윽고 그는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우리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려고 했는데... 기어이 이렇게 되는군."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라는 듯 그는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마한테 연락해서, 밸런스팀 인원 빨리 모집하라고 하세요."

"네, 네…?"

"선전포고를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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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때, 에마 대표에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N-1 상황 발생했습니다. 한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 같습니다. 인원 모집을 되도록 빨리 부탁드립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었지만, 에마 대표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뱅크 아이템이 발견됐다. 한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밸런스팀 인원 모집을 서둘러 달라.

'대체 무슨....'

당황스러운 이야기였지만, 당장 자세히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때,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성이 물었다.

에마 대표는 표정을 관리하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업무 지시가 내려와서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역시 비밀 조직의 수장님이라서 그런지 바쁘시군요."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명백히 비꼬는 말투였지만, 일일이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계약 조건은 어떠신지? 원하는 게 있다면 더 말씀하셔도 좋아요."

"흐음."

남자는 앞에 놓인 계약서를 힐긋거렸다.

다름 아닌 PB 코퍼레이션 밸런스 조정팀 스카우트에 관한 내용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계약을 받아들이신다면 바로 팀장직을 맡으실 수 있습니다. 현재 티오가 난 상황이라."

에마 대표가 덧붙였다.

그러자 남자가 씨익 웃었다.

"사실, 그쪽에 대해선 저도 들은 게 좀 있습니다."

"그런가요."

"유명하잖습니까. 국제 협회에 방해가 되는 놈들은 다 죽이는 비밀 조직이 있다, 그 조직을 통해 전 세계 토벌권을 통합하려고 한다.... 솔직히 다 도시 괴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설마하니 진짜일 줄은 몰랐군요."

남자가 에마 대표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런 살벌한 곳의 팀장 자리가 공석이다? 그건 아무리 봐도 좋은 소식이 아닌 것 같군요."

"...."

"혹시 수틀리면 나도 그렇게 죽여 버리실 건가?"

남자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물론 그런 도발에 넘어갈 그녀가 아니었다.

"말씀을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하,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그래서, 내가 거기서 뭘 하면 됩니까?"

"어려운 건 없습니다. 일단 주요 인물 암살이 주된 업무에요. 경우에 따라 수색, 납치, 정보 수집 그리고 때때로 전투를 벌여야 할 때도 있을 겁니다."

남자의 표정이 어느 한 단어에 크게 반응했다.

그리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재밌을 것 같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에마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차에 남자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업무는 무조건 내 방식대로. 그리고 팀원도 내가 꾸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 정도야 뭐."

그제야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노아 웨스턴우드.

현 미국 1위 길드인 노아 길드의 대표이자, 세계 최초 S랭크를 달성한 헌터.

현 미국 랭킹 1위.

현 세계 랭킹 1위.

한때 PB 코퍼레이션 타깃 1순위였던 그가, 밸런스 조정팀에 정식으로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계약 성사 기념으로 에마 대표가 한 가지 조언을 던졌다.

"참고로 우리 쪽에서 예의주시하고 있는 남자가 한 명 있는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S랭크 입니까?"

"헌터는 아니에요."

"그럼?"

"뭐라 딱 잘라 말하긴 어려워요. 던전 청소부 출신의 미친놈이라고 해야 하나?"

"...하하하하!"

너무나도 뜬금없는 이야기여서일까.

노아는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명색이 비밀 조직인데 고작 청소부 한 명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니, 너무 모양 빠지지 않습니까?"

"자만하지 마세요. 혼자서 밸런스팀 전체와 싸우고도 멀쩡한 놈이었으니까."

"그래봤자 청소부잖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었죠."

에마 대표의 얼굴이 순간 팍 굳었다.

그래, 그럴 때가 있었지.

한국 파트 현장직들을 혼자서 쓸어버리기 전까진.

"조심하세요. 그 미친놈, 잘못 건드렸다간 당신 월급 나오기도 전에 목이 먼저 잘릴 수도 있으니."

"수준 알 만하군."

"전 경고 했어요."

에마 대표는 그의 무례를 애써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버릇없는 애송이.... 시간석만 회수했으면 이미 진작 내 손에 뒈졌을 텐데.'

에마 대표는 그를 영입하는 게 무척이나 못마땅했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토벌권 회수팀, 뱅크 아이템 관리팀은 몰라도 밸런스 조정팀은 지금 당장 필요했으니까.

무엇보다 웨슬리가 직접 내린 명령이기도 했고.

'그나저나 한국에 뱅크 아이템이 또 흘러 들어갔다는 건....'

조금 전 문자 내용을 곱씹었다.

시간석도 모자라, 그새 뱅크 아이템을 하나 더 획득한 건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웨슬리 성격상 더는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만에 하나 그 뱅크 아이템이 이능석이라면... 그땐 정말 일이 커진다.

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할지도 모르니까.

'뭐… 이젠 괜찮으려나.'

물론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젠 딱히 상관없다.

노아를 영입했으니까.

저놈을 조금이라도 긴장하게 만들기 위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경고는 필요 없었다.

저 미친놈이 날뛰기 시작하면 전 세계 군대가 출동해야 할 정도니까.

***

"하암...."

서울 기획 본부, 이두식 협회장의 사무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자 이두식 협회장이 곧바로 면박을 던졌다.

"하품은 좀 가려서 해라, 이놈아."

"죄송합니다. 제가 며칠 잠을 잘 못 자서."

"왜? 일이 많이 바빠?"

"예. 이아영 씨랑 할 게 좀 있어서요."

"...?"

이두식 이사의 눈이 갑자기 동그래졌다.

"야, 야, 이 씨…! 너 그게 지금 내 앞에서 할 소리야?!"

"...무슨 생각하시는 겁니까. 연구소 일입니다, 연구소."

"...."

뒤늦게 멋쩍은 듯 괜히 큼큼 헛기침한다.

뭘 생각한 건데....

"그래서, 요즘 부산물 납품은 잘 되고 있나?"

"문제없습니다. 양이 워낙 많아서 직원들이 고생 좀 하고 있긴 하지만요. 뭐 그러라고 그 돈 주고 데려온 거니 감수해야죠."

"다행이군."

그가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국내 던전 지분도 압도적이고, 부산물 납품도 거의 독점을 했고. 토벌 인력도 국내 최고에, 전원 최상급 장비까지...."

뭘 말하려는 건지 상당히 뜸을 들인다.

"정말 그거 전부 우리한테 넘겨줄 생각인가?"

"못 믿으시겠습니까?"

"설마! 내가 자네를 못 믿을 리가 있나. 딸내미면 몰라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이내 그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는 말이야."

"...예?"

"아프리카 건 이후로 국제 협회도 주춤하고 있지 않나. 그 덕에 큰 방해 없이 이렇게 몸집을 키울 수 있었고."

"그렇죠."

"그런데... 커져도 너무 커졌어. 솔직히 말해서, 그걸 홀랑 받아먹기엔 내 배포가 그렇게 크지 않네."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는 발언.

본인도 그걸 아는지, 내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난 지금 협회, 꽤 만족스러워. 그거 아나? 민영화가 발의되고 나서 다른 기업에 던전 뺏길까 봐 이사들이 두 팔 걷어붙이고 토벌권 매입에 힘쓰고 있다는 거."

"그 꼰대들이 직접 영업을 뛴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뭐, 협회가 망하면 본인들도 개밥그릇 신세가 될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한데...."

놀라운 일이다.

자리싸움에만 관심 있던 놈들이 일을 하다니.

"그런데 갑자기 자네 회사가 우리 쪽에 흡수되면 어떻게 되겠나."

"뭐… 훨씬 안정화 될 테니, 다들 예전처럼 돌아오겠죠."

"안 봐도 비디오지."

"그래서 이사님 말씀은... 지금의 협회를 유지하기 위해 지금까지 진행한 프로젝트를 엎자는 겁니까?"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빌어먹을....'

여태까지 내가 한 모든 일은 전부 한국 협회를 제2의 국제 협회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것 때문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설립했고, 지부 사업도 벌였으며, 전국 토벌 시장을 장악했다.

근데 이제 와서 지금 상황이 좋으니 엎어버리자고?

'대놓고 떠먹여 준다는 대도 뱉어버리면 뭐 어쩌자는 건데....'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려고?

절대 그렇겐 안 되지.

"이사님. 아니... 협회장님."

"음?"

"국제 협회는, 협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악랄하고 무서운 놈들입니다."

"...."

"지금이야 당연히 조사가 진행 중이니 주춤할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그게 언제까지 갈 것 같습니까?"

그가 대답을 아꼈다.

당연히 할 말이 없겠지.

"장담컨대, 조사가 끝나고 눈치가 시들해지면 바로 다시 치고 나올 겁니다. 이전보다 훨씬 대범하고 강경하게. 그때 가서 대응하려고 하면 늦습니다."

"...무조건 그런다는 보장도 없지 않나. 누가 알아, 이번 일로 국제 사회 눈치 때문에 잠잠해질지."

"아니, 제가 방금 말씀드렸지...."

"일단은."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우리, 다시 생각해보자고."

"...."

아무래도 이번은 만만치 않을 듯싶었다.

귀찮아지겠네.

***

본부를 빠져나온 직후, 답답한 마음에 한숨부터 쏟아냈다.

'시발, 진짜....'

이두식은 한번 결정을 내린 사항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인간이다.

설득하려면 최소한 국제 협회에서 우리에게 선전포고라도 해야 할 것이다.

'하여간 저 외골수....'

그런 점이 회귀 전엔 방해가 돼 잘라버렸고, 지금에 와선 도움이 되었기에 옆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방해가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다시 칼을 드는 수밖에.

그렇게 마음을 먹은 그때, 전화가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아영 이사였다.

「뉴스 봤어요?!」

"갑자기 뭔 소립니까 또."

「빨리 뉴스 봐봐요! 큰일 났으니까!」

평소 같지 않은 격한 말투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나는 곧바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뭔 일이 있었는지 새로운 기사가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메인 토픽에서 떠오른 동영상을 눌렀다.

[국제 헌터 협회 사무총장, 웨슬리입니다.]

한 남자의 연설 녹화본이 흘러나왔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저희 국제 헌터 협회는 전 세계 시민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세계 각국에 총 78개의 지부를 세우고, 적극적인 토벌 지원 및 헌터 육성에 힘 써온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물론 그 긴 시간 동안만큼 많은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린 굴복하지 않고, 시민의 안전만을 생각하며 활동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목이 메는 듯, 물을 마시곤 다시 말을 잇는다.

[저번 중앙아프리카 사건 당시, 한국에서 퍼트린 터무니없는 소문 때문에 우린 무척이나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부산물 유통 육로 독점, 중앙아프리카 지부 강탈까지.... 한국 협회는 지속적으로 우리를 괴롭혀오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 소속 헌터들이 사망하거나 크게 다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뭐?

[하지만 조사 결과, 우리에겐 그 어떠한 혐의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젠 떳떳하게 다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국제 헌터 협회는 근거 없는 소문으로 우리 명예를 실추시키고, 나아가 그것을 빌미로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힌 점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할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국제 헌터 협회 사무총장으로서 이 자리를 빌려 선언하겠습니다.]

[현 시간부로 국제 헌터 협회는, 한국 협회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토벌 기업을 '토벌 조직'이 아닌, '카르텔'로 판단. 국내외에서 벌이는 모든 토벌 행위를 국제 토벌법 위반으로 간주하겠습니다. 해당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국 협회가 지속적으로 토벌을 시도할 시....]

[국제 헌터 협회는 국제 토벌법에 따라, 카르텔 소탕을 위해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습니다.]

"이런 개...!"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정말로 국제 협회에서 선전포고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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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이제 어떻게 해요...."

"...."

이아영 이사가 물었지만 나는 대답을 아꼈다.

아니,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여태까지 국제 협회의 압박이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최대한 비밀리에 일을 처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협박, 습격, 혹은 전투.

지금껏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쉽고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런 방법들이 먹혔겠지만... 나에겐 아니었다.

협박하면 무시하면 되고, 습격하면 쓸어버리면 됐으니까.

공개적으로 사건을 드러낼 수 없는 만큼, 그 녀석들이 쓸 수 있는 방식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오면 답이 없는데....'

이젠 그들도 인정한 셈이다.

더는 비밀리에 처리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노선을 바꾼 거겠지.

지금까지의 상황이 어땠든, 누가 뭐래도 국제 협회는 전 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구다.

우리가 지닌 영향력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다.

그런 기구가 공식 석상에서 우리를 '카르텔'이라고 선언했다.

그 한마디로 우린 전 세계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물론 한국 협회와 정부가 나서서 반박했지만,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울 거다.

무력으로 나오면 무력으로 대응하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정치적으로 나온다면....

우리로선 방법이 없다.

"국내 토벌 조직들의 반발이 어마어마해요. 다들 우리에게 책임지라고 난리 치고 있고… 한국 협회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한 곳도 있고요."

"하루아침에 토벌 사업이 막혀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죠."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잖아요! 사업은 둘째치고, 당장 출현 던전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이대로 두면 당장 다음 주부터 몬스터가 탈출하기 시작할 텐데…!"

"그걸 노린 겁니다."

"...네?"

"일방적으로 한 나라의 토벌권을 막아버리면,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지금에야 토벌 사업이니 뭐니 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토벌은 국가와 시민의 안전을 위한 행위이다.

그러니 더 이상 토벌을 못 한다는 건, 단순히 사업적인 문제를 넘어 몬스터로부터 국가를 지킬 수단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대로라면 반년... 아니, 한 달도 못 가서 한국은 무너져 내린다.

그걸 막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국제 협회에 토벌권을 넘겨주는 수밖엔 없습니다."

"...."

국제 협회 지부가 들어서고 국내 모든 토벌과 던전을 그들이 관리하게 될 것이다.

베트남에 있는 허브도, 중앙아프리카 지부들도, 그들이 납품해주는 부산물도, 불과 며칠 전에 완공된 이클립스도, 모조리 국제 협회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들 또한 바로 그걸 원한 거겠지.

한순간에 한국 협회를 포함한, 국내 모든 토벌 기업을 없애버릴 수 있을 테니까.

"정말 그 방법밖엔 없는 거예요?"

"협상의 여지가 없는 한 그렇습니다."

"...."

이아영 이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녀 또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납득했는지,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전화를 들었다.

이두식 협회장에게 결정된 사항을 전달해야 했다.

"예, 협회장님."

「...방법을 찾았나?」

"뼈아프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밖엔 없군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국내 토벌권을 비롯한 던전 관리 및 협회의 모든 권한, 국제 협회에 넘겨...."

"잠깐만요!"

다짜고짜 내 말을 끊으며 사무실로 들이닥친 건, 다름 아닌 한유빈이었다.

"잠깐 제 말 좀 들어봐요."

"뭡니까…?"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제가 미국 지부 소속이었을 때, 클로이 지원팀장한테 들은 게 있어요. 국제 협회는 늘 목적을 위해서만 행동한다고."

"...?"

"처음엔 그냥 전 세계 시민들의 안전만을 생각한다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카르텔로 몰아가면서까지 토벌권을 빼앗으려는 걸 보면 절대 그런 목적은 아니겠죠. 아마 뭔가 다른...."

한유빈이 애써 추측을 내놓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리 도움이 되는 이야긴 아니었다.

결국, 국제 협회에 대해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니까.

하긴, 그녀는 아직 그동안 나와 국제 협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니까.

"유빈 씨한테는 아직 얘기하지 않았지만, 사실 우린 여태까지 국제 협회를 계속 방해해왔습니다. 지금 이건 지금까지의 행동에 대한 보복인 거지,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뇨. 생각해보니까 이상하긴 해요."

그때, 내 말을 끊은 건 이아영 이사였다.

한유빈의 이야기를 듣고 난 직후,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우리한테 보복하는 게 목적이었으면, 카르텔로 규정하자마자 관용 없이 무력을 쓰려고 했겠죠. 굳이 우리가 선택하도록 유예를 둘 이유가 없지 않아요?"

"...그럼 국제 협회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겁니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죠. 가령, 지금 우리가 가진 것들을 온전하게 손에 넣어야 한다거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그럴 만한 게...."

"...."

그 순간, 동시에 같은 게 머릿속에 떠오른 듯했다.

"설마...."

"이클립스…?"

우리가 뱅크 아이템을 추가로 확보했다는 것이 그쪽 귀에 들어간 건가.

'협회에 보고조차 거짓으로 했는데, 대체 어떻게 그놈들이 알아차린 거지....'

아니, 일단 그건 제쳐두고, 만약 정말로 뱅크 아이템을 회수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거라면....

"아직...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을 수도 있겠군요."

"...네."

우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뭐, 뭐…?!"

서울 기획본부, 협회장실.

이두식 이사에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게 이능석이었다고?! 근데 왜 나한테는 그냥 부산물이라고 보고한 거야?!"

"우리 선에서 정보를 차단하려고 했습니다. 뭐… 결과적으론 무용지물이었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는...."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쨌든 그쪽 귀에 들어갔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닙니까."

"끄응...."

그가 앓는 소리를 내길 잠시.

"근데 대체 어떻게 그쪽 귀에 들어간 거지? 저번에 자네 말로는 한국 파트는 해체됐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아직도 협회에 스파이가...."

"그건 아닐 겁니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아영 이사에게 대신 설명을 부탁했다.

"뱅크 아이템은 활성화될 때마다 어마어마한 이능파를 방출해요. 정말 짧은 순간이지만요. 국제 협회에서 저번 사고 때 발생한 이능파를 감지했다면, 충분히 눈치챘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걸 알고 있었으면 더 철저하게 감췄어야지!"

"결과론적인 이야기잖아요. 들켰으니까 이유를 찾은 거지, 그러지 않았으면 우리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예요."

이두식 협회장이 머리를 짚었다.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아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정말 그들이 원하는 게 뱅크 아이템이라면, 저희도 선택지가 늘어난 셈이...."

"야, 야, 너 설마...."

"시간석이랑 이능석, 넘겨줍시다."

"...."

물론 국제 토벌법상, 뱅크 아이템은 협회 간 양도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가 제 손으로 넘겨주겠다는데 국제 협회가 마다할 리도 없을 거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 들키지만 않는다면 건네줄 방법이야 수도 없이 많다.

물론 그들이 왜 이토록 뱅크 아이템에 집착하는지는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 상황에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어차피 이대론 국제 협회에 저희가 쌓아온 모든 걸 넘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뱅크 아이템만 넘겨주고 토벌권이라도 지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협회장님…!"

"조용히 해 봐. 생각 중이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사실 그 또한 이미 마음속에선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의 성격상, 뱅크 아이템 두 개와 국가의 안전은 비교해볼 것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쉽게 말을 뱉지 못하는 이유는....

'뱅크 아이템을 넘겨준 이후가 불안한 거겠지.'

모은 뱅크 아이템으로 국제 협회가 뭔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어 불안할 거다.

마음은 이해한다만, 지금 상황에 고민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쨌든 우리의 선택지는 정해져 있으니까.

"국제 협회에는 내가 연락하면 되겠나."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이두식 협회장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넘겨주자. 뱅크 아이템."

"알겠습니다."

"하, 시벌...."

불안감이 섞인 그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

"저번 중앙아프리카 사업, 김준우 대표가 진행한 거 맞죠?"

한별 종합 상사는 국제 협회의 믿을 수 없는 발표에 긴급하게 이사회를 소집했다.

하성일 사장 또한 그 자리에 참석해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청소부 출신이 하는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잖아!"

"지금 카르마 코퍼레이션 때문에 몇 개 기업이 망하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사장님, 더 늦기 전에 손절해야 합니다."

이사들이 목소리를 높였고, 하성일 사장은 머리를 짚었다.

국제 협회의 발표 직후, 현 상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뉴스를 비롯한 모든 매체가 보도를 이어갔고, 인터넷은 폭발 직전이었으며 정부는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전국 토벌 기업들의 주가가 고작 30분 만에 어마어마하게 폭락했다.

'어떻게 한순간에 이런 일이....'

하성일 사장은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공식 입장은 없지만, 아마 협회를 포함한 모든 토벌 조직들이 조만간 사업을 처분할 것이다.

당연하겠지. 이제 한국에선 토벌이 불가능해졌는데.

물론 국내 부산물 유통 사업을 하고 있는 한별 상사 또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거야 수많은 사업 중 하나일 뿐.

타격은 입겠지만 가볍게 손 놓고 다른 사업에 집중하면 된다.

하지만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아니다.

그들은 한순간에 모든 걸 잃은 거나 다름이 없다.

하성일 사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한국 협회와 정부가 국제 사회에 계속해서 이의제기하고 있습니다. 카르텔로 규정된 건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처사라고 말이죠. 무엇보다 김 대표님이 국제 협회에 지속적인 테러를 가했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말이고요."

"근거가 없다뇨! 그럼 설마 국제 협회가 근거도 없이 공식 석상에서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네."

하성일 사장의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한 겁니다."

"...."

"...."

김준우 대표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아프리카 지부를 통합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제3자를 이용하여 자작 테러를 벌이려 했다고.

만약 김준우 대표가 그걸 막지 않았다면 훨씬 큰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물론 그 상황을 하성일 사장이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다. 그 또한 김 대표에게 전해 들었을 뿐.

하지만 같은 시기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그 직후, 그의 형이 익명의 해외 투자자와 손을 잡고 벌인 암거래 사업.

그 두 가지만 놓고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누구 말이 사실인지 정도는.

'그렇다고 지난 일을 이사들에게 일일이 설명해줄 수도 없고....'

설명해준다고 해도 믿어줄 리도 없다.

이미 그들은 어떻게든 카르마 코퍼레이션과의 동맹을 끊고, 피해를 최소화할 생각뿐일 테니까.

이렇게 되면 밀고 나갈 수도 없다.

무엇보다 김준우는 현재 전국 토벌 기업에 공공의 적이 됐다.

본인 혼자 그를 믿는다고 해도, 본인 외의 모든 사람이 김준우에게서 등을 돌린다면 그 또한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럼 뭐... 나도 방법이 없지.'

이내 하성일 사장이 피식 실소를 뱉었다.

"회사를 위해서라면 카르마 코퍼레이션과의 관계를 끊는 게 당연히 옳은 일이겠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 사장님!"

"지금 정에 연연하실 때가…!"

"그러니 전 이제부터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거기에 회사까지 끌어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하성일 사장이 미소와 함께 결심을 내비쳤다.

"역시… 전 애초에 사장 재목이 아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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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헌터 협회 본부, 사무총장실.

공식 입장 표명을 한 지 불과 1시간 만에 전화가 울렸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담담하게 수화기를 들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 김준우라고 합니다.」

아, 웨슬리 사무총장이 작게 감탄했다.

여태껏 보고로만 전해 들었던 남자가 직접 연락을 준 것이다.

그는 반가운 건지, 분노한 건지 모를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 대화하게 되는군요. 토벌권이 막히니까 협상이라도 하려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동안 당신이 우리한테 했던 짓을 생각해 보세요. 이 정도 결과는 각오하셨어야죠."

「비밀 조직까지 만들어서 사실을 은폐하고 우리에게 누명까지 씌우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군요.」

"미스터 김."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는 김준우의 목소리에, 웨슬리 사무총장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뭐가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누구의 말이 더 사실처럼 들리는지가 중요하죠."

「....」

그런 세상이다.

제아무리 누명이라고 울부짖어도, 내가 카르텔이라고 하면 카르텔이 되는 세상.

국제 협회 사무총장인 본인의 말을 더 신뢰할지, 아니면 어느 나라 출신인지도 모를 청소부의 말을 더 신뢰할지는 안 봐도 뻔하지 않은가.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나요?"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협상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겠군요. 뭐, 마음 같아선 더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지만, 저도 바쁜 몸이라. 그만 끊겠...."

「이능석입니다.」

"...?"

웨슬리 사무총장의 손이 뚝 멈췄다.

「우리가 최근에 추가로 확보한 뱅크 아이템, 이능석이 맞습니다. 그걸 시간석과 같이 넘겨드리겠습니다.」

"...."

웨슬리가 잠시 대답을 멈췄다.

도대체 뭔 생각인 거지? 갑자기 그 귀한 걸 넘긴다고?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협상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뱅크 아이템을 넘겨드릴 테니 한국 협회를 카르텔로 규정하신 거, 철회해주십시오.」

"하하...."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국의 모든 토벌 활동을 카르텔로 규정한 건 보복성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그들의 모든 토벌 권한을 넘겨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자연히 현재 한국 협회가 보유하고 있는 뱅크 아이템을 회수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저쪽에서 먼저 뱅크 아이템으로 협상을 들어온다는 건....'

이미 우리의 진짜 목적도 눈치를 챘다는 뜻이리라.

설마하니 정면 돌파로 나설 줄이야.

웨슬리 사무총장의 입가에 진심 어린 미소가 지어졌다.

서로의 관계를 제쳐두고, 그의 결단력과 행동력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저놈이 옆에 있었다면 내 목표는 진작 달성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건 그거고.

마음에 든다고 해서 이득 없는 거래를 할 순 없었다.

"수지가 안 맞는군요. 어차피 급한 건 그쪽이고, 우린 가만히 있어도 뱅크 아이템을 포함한 모든 걸 넘겨받을 수 있는데 우리가 굳이 협상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김준우의 대답이 끊겼다.

잠시 고민하는 듯한 시간이 흐르길 몇 초.

「뭐… 맞는 말씀입니다.」

그가 순순히 인정했다.

「사무총장님이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국제 협회는 조만간 저희가 그동안 인수한 지부들을 포함해, 저희 직원들, 장비, 연구소를 모두 손에 넣게 되겠죠.」

"그걸 알고 있는 분이 왜 이런 협상을...."

「다만, 뱅크 아이템은 손에 넣지 못하실 겁니다.」

"뭐라고요?"

「협상이 결렬되면, 뱅크 아이템을 파괴할 생각이니까요.」

"...하, 하하하!"

정면 돌파로도 모자라, 절벽 끝까지 내몰린 상황에서 도리어 협박을 하겠다?

이제야 PB 코퍼레이션 전체가 이놈 한 명에게 휘둘린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애초에 그놈들과는 그릇부터가 다르잖아.'

이런 놈이 PB 코퍼레이션... 아니, 본부에 있어야 하는데.

정말이지 너무 아깝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줄 때 받으시죠. 이렇게까지 일을 벌이셨는데,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가져가면 상당히 배가 아프실 것 같으니.」

"...신기하군요. 분명 칼은 우리가 쥐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까지 당당할 수 있는 거죠?"

「무슨 소립니까.」

김준우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죽다 살아났을 때부터 칼은 줄곧 내가 쥐고 있었습니다.」

"...?"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냥 흘려듣기에는 말속에 뼈가 있었다.

온갖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대가 대답을 재촉했다.

마침 더 고민해도 그럴듯한 답이 없을 거라 생각한 참이다.

"…뭐, 좋습니다. 협상을 받아들이죠."

「그럼 거래 날짜는 일주일 뒤로 하겠습니다. 장소는....」

"인천항으로 하죠. 서로 편하게."

「아뇨. 장소도 제가 정합니다.」

"...."

「당장은 정하기 힘들겠군요. 내부적으로 상의하고 정해지면 다시 연락드리죠. 전달 루트는 그쪽에서 준비해주시고요.」

"뭐,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아, 잠깐만."

웨슬리 사무총장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거래 중에 뒤통수칠 생각은 하지 마세요. 한국이 통째로 날아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웨슬리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곧바로 에마 대표의 번호를 눌렀다.

「웨슬리? 바쁜데 왜 자꾸 연락이야.」

"저쪽에서 거래가 들어왔어. 뱅크 아이템, 넘겨주겠다고."

「...정말?」

그녀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뭐 문제 있어?"

「아니, 그런 것보다... 굳이 거래할 필요가 있어?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게 손에 들어올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김이 협상이 안 되면 뱅크 아이템을 파괴하겠다더군."

「하! 미친놈, 그게 어떤 물건인지도 모르면서 말은 쉽게 하네.」

"내 말이. 어쨌든 그놈 성격상 수틀리면 정말로 파괴할 놈이야. 좋든 싫든 협상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

에마 대표가 흐음, 길게 신음했다.

「아쉬운데. 물론 뱅크 아이템이 목적이긴 해도.... 결국 또 김준우 그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꼴이잖아. 무엇보다 순순히 내어주겠다는 것도 뭔가 불안하고.」

"뭐,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우리도 준비해둬야지."

「그 말은?」

"뭐겠어. 뱅크 아이템만 넘겨받고 입 싹 닦자는 거지."

「거래를 엎자고? 김준우를 상대로?」

"못 할 게 뭐 있어."

웨슬리 사무총장은 이때다 싶어 준비해둔 칼을 꺼내 들었다.

"노아가 들어왔는데."

***

"거래 날짜, 일주일 뒤로 잡혔습니다."

전화를 끊으며 이아영 이사에게 내용을 전달했다.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도 이아영 이사는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쪽이 과연 순순히 철회해줄까요? 아무리 봐도 물건만 받고 시치미 뗄 것 같은데...."

"뭐,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죠."

모든 걸 손에 넣을 수 있음에도 이런 거래를 하는 건 그들로선 퍽 아쉬울 테니까.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봐선 곱게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쨌든 저쪽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둘 수는 없지.'

그걸 알고 있는 이상, 당연히 순순히 넘겨줄 생각은 없다.

"우리도 준비를 해둬야겠군요."

"준비한다고 될까요? 저쪽에서도 분명 칼을 갈고 있을 텐데. 괜히 어쭙잖게 수작을 부리다가 잘못되면...."

"한국을 통째로 날려버리겠다는군요. 뭐,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 거래는 우리가 조금 더 유리합니다."

"…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거래 장소를 저희 쪽에서 정하기로 했거든요."

"...?"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이클립스부터 굴려봅시다. 직원들한테 전달해주세요. 앞으로 일주일 동안 모든 추출, 제작, 강화 공정 풀 가동 들어가 달라고."

"...."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 있습니까?"

"있죠. 아주 큰 문제가."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이클립스를 굴릴 돈이 없어요. 모든 투자자가 저희 쪽 투자를 철회했거든요."

"...아."

"무엇보다 직원들도 대부분 다 나갔어요. 회사 상황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대론 월급도 못 받을 거 뻔히 아는데, 굳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죠."

"...."

"뭐, 공정 담당은 제가 맡으면 된다지만, 라인을 서 줄 직원이 없으니... 더 이상 이클립스는 가동이 불가능해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국제 협회와의 거래는 둘째치고 지금 우리는 어쨌든 카르텔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의 모든 토벌 사업이 전면 중지됐으니 투자가 빠져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큰일이군요."

"저도 아버지한테 슬쩍 도와달라고 부탁해보려 했는데... 협회도 상황은 마찬가지예요."

그렇긴 할 거다.

우리보다 못하면 못했지 좋은 상황은 아닐 거다.

"저희, 이제 한 푼도 없어요. 아니, 한 푼도 없는 수준이면 오히려 다행이죠. 하루 만에 빚만 수백억이 됐으니까."

"...."

국제적으로 누명을 쓴 것도 모자라 하루아침에 빚쟁이 신세라니.

"한별 상사한테... 연락해도 소용없겠죠?"

"기업 동맹은 결국 서로에게 이득이 있을 때나 성립하는 거니까요. 한별 상사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국내 토벌 시장을 평정한 상황이라면 모른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미지도 꽤나 좋았고, 많은 이들 또한 우리를 지지해주기도 했고.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 때문에 한국은 한순간에 토벌 불가 국가가 되어버렸고, 모든 던전 관련 기업들은 카르텔이 되어 버렸다.

순식간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이젠 우리에게 붙어도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빨리 손절을 칠수록 본인들의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뭐, 없진 않습니다."

그 순간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한 남자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다름 아닌, 하성일 사장이었다.

"하 사장님? 여긴 어쩐 일로...."

"이사님 말씀대로, 한별 상사는 앞으로 카르마 코퍼레이션과의 동맹을 철회할 겁니다. 더 이상 한별 상사는 대표님을 도와주지 않겠지만... 저는 아니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장직, 사퇴했거든요."

"...?"

그가 씨익 웃으며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아시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안 하려고 했던 거. 이사회 등쌀에 어쩔 수 없이 맡았는데, 아무래도 사업은 저랑 안 맞는 것 같네요."

"그럼 지금은...."

"그냥 백수입니다."

벙찐 우리와 다르게,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실실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표님이 가장 잘 아시겠지만, 지금 상황이 정말 좋지 않습니다. 혹시 대책이 있습니까?"

"예. 다만, 준비할 여건이 안 됩니다. 금전적으로도 그렇고, 인력적으로도."

"...그렇군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하성일 사장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뭐, 금전적인 부분은 제가 어떻게든 해드리죠."

"예?"

"퇴직금이랑, 넣어두었던 제 주식, 모두 빼서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투자하겠습니다."

"...?"

"...?"

나와 이아영 이사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 잠시만요. 아직 저희가 뭘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무턱대고 큰돈을...."

"대책이 있으시다면서요."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투자자 설득은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얘도 어지간히 미친놈이네.

뭐, 확실히 이 정도면 이클립스를 굴릴 돈은 되겠다만....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네? 왜죠?"

"돈이 있어도 직원이 없으면 준비할 수 없습니다. 이제 와서 다시 고용하고 싶어도, 당장 언제 망할지 모를 회사에 지원자가 있을 리도 없고요."

하 사장은 지그시 바라보며 쓴웃음을 흘렸다.

"대표님, 너무 본인을 과소평가하는 거 아닙니까?"

"...예?"

"아까 여기 들어오면서 보니까, 직원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던데요."

그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시선을 사무실 밖으로 옮겼다.

때맞춰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하는 소란스러운 발소리들.

이윽고 그 소란의 정체들이 사무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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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현재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아직 행정 절차만 밟지 않았을 뿐 사실상 파산한 거나 다름없다.

주력인 국내 토벌 사업이 막혔다.

해외 지부 또한 한국 협회와 엮여 카르텔로 규정되어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우리 때문에 피해를 입은 국내 기업 및 투자자들은 이미 등을 돌렸다. 나아가 이번 일에 대한 피해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거액의 손해배상 판결이 내려질지도 모른다.

물론 가만히 손 놓고 있진 않았다.

국제 협회와 거래를 하려는 것도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게 잘 풀릴 것이라곤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애초에 대립하던 관계이기도 하고.

다시 말해, 내게 붙어봤자 기대되는 이득이 없다. 사태 수습 자체도 현재로선 장담하기 힘들고.

오히려 괜히 엮여서 큰 피해를 보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겠지.

그런데....

"아, 회사 망한 줄 알고 짐 싸고 있었는데. 용케도 이 상황에서 뭘 더 하려고 하시네요."

"직원이 필요하다는 건 아직 일거리는 있는 거지?"

"어차피 이제 청소도 못 하는데,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대체 뭔가 이 머저리들은.

한유빈과 한상혁 그리고 문소연.

이 답 없는 셋과 함께 카르마 코퍼레이션 청소팀이 사무실에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마치 자신들을 불러주길 기다렸다는 듯 말이다.

근데 이들이 다가 아니었다.

"에잇, 계약 체결한 게 엊그제인데 우리 대표님 말 믿었다가 쫄딱 망하게 생겼네."

"정말 누가 아니랍니까."

"토벌이 막혀서 납품도 안 들어오고… 우리도 완전 쪽박 찼지 뭡니까."

"이렇게 된 거, 대표님이 우리 다 책임지셔야 합니다?"

전국 부산물 처리 시설의 직원들 또한 그 자리에 끼어 있었다.

어림잡아 수십 명에 가까운 인원이 좁아터진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은 아니다.

평소에 모이라 해도 이 좁은 곳에 모든 인원이 온 경우는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들인 건지.

이야기하는 걸 봐서는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닌 건데....

"뭐겠습니까. 하루아침에 백수 돼서 일자리 구하러 왔죠."

"일자리야 있긴 합니다만, 급여를 줄 상황은...."

"참 나, 대표님. 우리가 상황 모르는 것도 아닌데 정말 돈 벌려고 왔겠습니까?"

"그럼...."

곽철수 대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한 번 받은 게 있지 않습니까. 그거 갚는 셈 칩시다."

"하아...."

얼핏 들으면 감동할 소리다.

문제는....

"다들 생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내겐 안 먹힐 이야기다.

"도와주는 건 고마운데, 생각들은 하고 나온 겁니까? 냅다 감성적으로 나올 일이 아니잖습니까. 일이 장난도 아니고."

"...."

"...."

본인들이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살짝 주춤하는 모습이다.

"일이 잘 풀릴 거란 보장도 없고, 잘 풀려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설사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절 도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바닥을 영영 떠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쉽게 해결될 일이었으면 이렇게까지 가지도 않았을 거다.

모르긴 몰라도 이들은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데도 도와주겠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

"...."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온 거네. 다음은 어떻게 될지 생각도 안 하고.

물론 내가 이들을 걱정해서 한 이야긴 아니다.

누굴 걱정할 정도로 여유도 없거니와, 솔직히 이들이 미래에 어떻게 되든 내 알 바도 아니고.

다만, 괜히 저 어쭙잖은 선의 때문에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행여라도 일이 진행된 후에 도망이라도 친다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다.

그러니 도와준다고 모두 도움이 된다는 건 어린애 같은 발상이다.

어떨 때는 차라리 도와주지 않는 게 나을 때도 있다.

말 그대로 괜히 방해하지 마라, 이거다.

그런 생각에 듣기 기분 나쁠 정도로 말했지만, 분위기가 이상했다.

'왜 반응들이....'

어째 다들 듣는 둥 마는 둥이다.

"설득력이 없는데요, 선생님."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모두를 대표해 목소리를 낸 사람은 뒤늦게 나타난 김민주다.

"여태까지 선생님이 우리 때문에 한 일을 옆에서 다 봐온 사람들한테 그런 말 해봤자 씨알이나 먹히겠어요?"

"그러니까! 저놈 가끔 보면 좀 이기적이야. 지는 우리 때문에 맨날 목숨 내놓고 일하면서, 왜 우린 못하게 하냐?"

"여기까지 끌고 왔으면 준우 씨가 책임지셔야죠."

"...?"

단체로 약을 처먹었나.

내가 끌고 왔어?

지들이 맘대로 따라온 거지.

이기적인 건 인정하겠는데, 이건 억울한 누명이거든?

"애초에 이번 일 해결할 수 있는 사람, 선생님 말고 더 있어요?"

김민주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가."

"그럼 생각하시는 대로 하세요. 나머진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요."

다들 한 발자국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말해도 못 알아듣는 건가.

어떻게 좀 해보라는 심정으로 이아영 이사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절 왜 봐요? 당신이 저렇게 만든 건데."

"...."

"다 본인 업보지, 뭐."

이젠 뭐가 내 업보인지 모르겠다.

***

국제 협회가 한국 토벌 조직을 카르텔로 규정한 지도 벌써 5일이 지났다.

그동안 대부분의 토벌 기업이 사업을 접었고, 민간 길드 또한 90%가 해체됐다.

예상대로 그들 모두가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더불어 기업 인사들을 비롯해 정부, 언론, 시민들 사이에선 김준우를 이 바닥에서 영구 퇴출하라는 목소리도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한편 오직 협회만이 한국 전체가 적으로 돌린 김준우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나마 정부에서 해외 독립 협회에 도움을 요청해 어떻게든 토벌은 이어가고 있습니다만, 비용이 비용인지라 오래가진 못할 것 같습니다."

서울 본부, 협회장실에서 편 팀장이 이두식 협회장에게 그간 상황을 보고했다.

"...김준우한테선 무슨 얘기 없나?"

"뭐, 열심히 준비하고는 있다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이두식 이사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잘 되려나 모르겠군. 저번에 아영이가 돈 좀 빌려줄 수 있냐고 물어보던데, 솔직히 우리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거절했거든. 뭘 하려는 건진 몰라도 인력도, 자금도 없을 텐데...."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하성일 사장이랑 전국 부산물 처리 시설 직원들이 발 벗고 도와주고 있다고 하거든요. 당사 청소팀이랑 작전팀도 그렇고요."

"...?"

이 상황에서 아직 그놈을 도와주려는 놈들이 있다고?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의문을 갖다가 이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준우이지 않은가.

여태까지 그놈이 어떤 생각으로 일을 해왔는지 아는 놈들이라면 쉽게 등을 지기는 힘들 것이다.

"그나저나 이거... 정말 김 대표님이 해결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데."

"모르지."

"...네?"

"모른다고. 너도 몰라서 물어본 거 아니야?"

"그, 그렇죠."

정말 거짓말처럼 거래가 잘 이뤄져서 카르텔 규명을 철회해준다면, 그나마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

물론 여태까지의 손해만으로도 이미 유례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거래가 성사되면 자리 자체는 유지할 수 있다. 다른 문제는 그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현재로선 거래가 성사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 거래가 불발 나거나, 혹은 국제 협회 쪽에서 뒤통수를 친다면....

'그땐 정말 답이 없겠군.'

이두식 협회장은 지난 결정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미리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흡수하지 않은 걸 말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놈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야겠네....'

이두식 협회장은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며 그렇게 다짐했다.

***

일주일 동안 모든 준비를 마치고, 국제 협회에 시간과 장소를 알렸다.

혹시 딴죽을 걸지 않을까 했지만,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여 주었다.

그렇게 찾아온 거래 당일, 인천항.

약속 시각 한참 전부터 이아영 이사와 함께 인천항에서 상대를 기다렸다.

우리 뒤로 한유빈과 김민주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대기 중이었다.

"은근 떨리네요, 이거."

"떨릴 게 뭐가 있습니까. 그냥 중고 사이트 직거래한다고 생각하세요."

"...이거랑 그거랑 같아요?"

"다른 건 또 뭡니까. 물건 있고 상대 있으면 다 똑같지."

"...."

어이없다는 시선을 뒤로하고 옆에 놓인 커다란 슈트케이스를 확인했다.

"벌써 나와 계셨네요."

마침내 상대가 도착했다.

어느 여성과 함께 검은 양복 무리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구면이죠?"

"...."

"...."

그 여성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미국 지부와 합동 작전 때 지원팀장으로 토벌에 참여했던 클로이였다.

'이건 몰랐네....'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지만,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조심했다.

"PB 코퍼레이션 소속 뱅크 아이템 관리팀장, 클로이에요. 뭐, 이름은 알고 계시겠지만."

"물갈이한 거 아니었습니까? 아직도 살아 있다니 의외군요."

"뱅크 아이템을 다루는 전문 인력은 구하기 어려우니까요."

"운이 좋군요."

"실력이죠."

실력 많아서 좋으시겠네.

나는 미소 띤 그녀와 동행한 양복 무리를 쭉 훑어봤다.

"사무총장은 안 온 겁니까?"

"오만하시네요. 고작 이 정도 거래로 사무총장님이 직접 움직이실 것 같나요?"

"...."

잠시 주변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클로이의 가방에 시선이 멈췄다. 작긴 했지만, 가방 손잡이에 무언가 보인다.

미소를 지으며 가방 손잡이 앞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어떻게, 잘 보이십니까?"

"...!"

곧바로 그녀의 표정이 굳는다.

정말 허접하기 짝이 없네.

"뭘 놀라십니까. 이 정도 거래에 사무총장이 참관하지 않는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데."

손잡이에 붙은 작은 렌즈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뭐 나름 숨긴다고 고급품을 쓰긴 했네.

"그래도 직접 오실 줄 알았습니다. 사무총장님 드리려고 준비한 것도 많은데. 직접 못 보여드려서 아쉽긴 하지만 거기서 잘 지켜보고 계십...."

"거기까지."

그때 클로이의 뒤에서 나타난 한 거구의 흑인 남성이 날 제지했다.

"분수에 맞게 행동해라."

"...."

당장이라도 한 대 후려칠 기세였다.

'어째 낯이 익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을 바라보던 끝에 작게 감탄했다.

확실하다, 그놈이다.

"이야, 여기서 다시 볼 줄은 몰랐네. 설마 당신도 국제 협회에 붙은 겁니까?"

"...? 날 아나?"

"아… 뭐, 유명하잖습니까. 하하하."

나도 모르게 격하게 반응한 것 같아 급하게 얼버무렸다.

뭐, 당연히 알고 있는 놈이다.

노아 웨스턴우드.

회귀 전, 세계 랭킹 2위이자 내 뒤를 이어 두 번째로 SSS랭크에 근접했던 인물이다.

'뭐, 그것보다 더 유명한 건 다른 거지만.'

국제 협회를 무너뜨리고 본인의 길드 '노아'를 그 자리에 올려놓으려고 했던 혁명가.

물론 그의 혁명은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갔다.

국제 협회가 나한테 도움을 요청했었거든.

'그나저나 국제 협회 녀석들은 이놈이 뭔 생각을 하는지 알고 영입한 건가?'

설마 모르고 데려온 거면....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때, 클로이 팀장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빨리 진행합시다. 일단 물건부터...."

"아뇨."

"거래 장소는 여기가 아닙니다."

"...?"

"조금만 기다려보십쇼, 이제 곧 나타날 거니까."

시계를 확인했다.

마침 시간이 되었다.

지이잉―.

눈앞에 던전이 출현했다.

"뭐, 뭐야…?"

"더, 던전?!"

"지금 던전이 출현할 걸 예측했다고?!"

모두가 당황했다.

뭐, 당연한 일이다.

제아무리 최첨단 이능파 감지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던전의 등급과 대략적인 출현 시기만 알지 분 단위로 예상할 순 없으니까.

이번 거래를 위해 고심해서 고른 던전이다.

오랜 기억을 뒤지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던전 안에서 거래하자는 건가요?"

"싫으십니까? 던전 안보다 보안이 철저한 곳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긴 하군요."

"아,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밖에 대기시켜주시겠습니까. 혹시 모르니 서로 보험은 들어놔야죠."

말뜻을 바로 이해한 그녀가 동행한 직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나 또한 김민주와 한유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시죠."

나와 이아영 이사가 먼저 던전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클로이와 노아가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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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으로 들어간 건가...."

작은 모니터로 거래 현황을 지켜보고 있던 웨슬리 사무총장이 퍽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리곤 곧바로 실소를 터트렸다.

'설마하니 거래 장소로 던전 안을 고를 줄이야....'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계획을 짜놓은 건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곧바로 옆에 있던 수행비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저놈들 들어간 던전, 무슨 던전인지 빨리 알아보세요."

"네, 네?"

"던전 성격에 맞춰 무슨 준비를 해뒀을지 모르잖습니까."

"그, 그냥 보안 문제 때문에 던전을 고른 거 아닐까요…? 아무리 김준우라고 해도 어떤 성격의 던전이 출현할지 파악해서 미리 거기에 맞춰 준비한다는 건 불가능한...."

그 순간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지금 제 지시를 무시하겠다는 건가요?"

"아, 아니 그런 건...."

그녀는 더 대꾸하지 않고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수신자는 본부 통제팀이다.

"지금 한국 인천항에 출현한 던전 정보 파악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무총장님 지시입니다. 네네. 되도록 빨리 부탁드립니다."

통화를 마치고 나서야 웨슬리 사무총장의 살기가 사그라졌다.

그는 다시금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했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

혹시 모를 수상한 낌새가 있을지 모른다.

1초도 눈을 떼선 안 됐지만, 머리 한쪽에선 자꾸만 다른 생각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던전 출현을 예측하고 거래 날짜와 장소를 잡았다고?

그래 뭐, 던전 출현을 예측하는 건 한국 협회의 도움을 받았다고 치자.

하지만 정확한 출현 시각까지 예측하는 건, 최고의 감지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국제 본부도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그건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아무리 머리가 비상하고, 혜안이 뛰어난 놈이라고 해도, 같은 던전을 한 번 겪었던 아닌 한....

'...잠깐.'

그 순간, 이전 통화에서 김준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죽다 살아났을 때부터 칼은 줄곧 내가 쥐고 있었습니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두 손을 포개어 입에 가져대 댔다.

그대로 생각에 빠져있던 그때였다.

수행비서가 사색을 띤 채 입을 열었다.

"정보 확인됐습니다. 저 근데 이게...."

"왜 그래요.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그런 것보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길 잠시.

이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엄밀히 말하면 던전...은 아니라고 합니다."

"...뭐?"

사무총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

던전 내부로 들어오자 어두컴컴한 중세 지하 감옥의 풍경이 드러났다.

현실과는 다른 공간에 생성되는 차원형 던전.

클로이와 노아는 던전 내부를 유심히 살피며 이동했다.

당연한 일이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해 최대한 던전의 정보를 파악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좁고 긴 통로의 중간까지 다다랐을 때,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충분하겠죠. 이제 진행해봅시다."

"물건부터 보죠."

클로이의 요구에 이아영 이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두 개의 슈트케이스를 내밀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조심스레 가방을 열었다.

노란빛과 푸른빛 광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본 클로이의 두 눈이 같은 색으로 반짝거렸다.

"...확인해 봐도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클로이는 장갑을 끼곤 자신이 가져온 기기를 꺼내 들었다.

기기를 이용해 아이템이 진품인지 확인하는 거다.

"물건은 확실하군요."

"그럼 이제 그쪽도 값을 지불해야겠죠. 한국 토벌 조직을 카르텔로 규정한 거, 철회해주십시오."

"그건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일단 돌아가고 나서 차후에...."

"아뇨. 지금 당장 해주셔야겠습니다."

누굴 호구로 아는 건가.

어디서 물건만 받고 내빼려고.

"그렇게 억지를 부린다고 될 게 아니에요. 저희 쪽에서도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암,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그럴 시간은 없을 겁니다."

나는 그녀의 가방에 달린 렌즈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던전 정보는 확인하셨겠죠?"

"...."

"뭐, 확인하셨다면 제가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아실 겁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사무총장님. 지금 당장 기자회견 열어서 카르텔 규정, 철회하셔야 할 겁니다."

설마 불가능하더라도 되게 만들어야 할걸?

"여긴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분할 던전'이니까요."

"...!"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클로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부분의 던전은 하나의 공간에 하나의 완결성을 띠고 있다.

그 말은 곧, 각각의 던전끼리는 그 어떤 연관성도 없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분할 던전은 다르다.

여긴 유일하게 다른 던전과 상호작용을 하는 던전이거든.

'원래는 그렇게 위험한 던전이 아니긴 한데....'

사실 분할 던전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보스가 없는 비활성화 던전이며, 시간이 지나면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고 소멸하는 곳이니까.

그래서 일반적으로 발생했다면 협회에서도 굳이 토벌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입장을 해버렸다면 말이 달라진다.

입장은 쉬워도 퇴장은 맘대로 못하거든.

분할 던전은 그 자체로는 던전이라기보단 그저 차원 어딘가에 뻥 뚫린 빈 공간에 가깝다.

따라서 토벌이 완료되기 전에 밖으로 나갔다간 차원의 틈새에 갇혀버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이상, 나가기 위해선 무조건 던전을 활성화해야 한다.

그리고 분할 던전을 활성화하는 방법은....

"분할 던전과 상호작용하는 특정 던전을 모두 토벌해야...."

"잘 알고 계시는군요. 다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죠."

시간만 충분하면 특정 던전을 알아내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분할 던전이 비활성화 상태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고작 1시간뿐이라는 사실이지.

만약 그 안에 활성화하지 못하면 이 공간은 완전히 소멸한다.

즉, 1시간 안에 상호작용 던전을 모두 토벌하지 못하면, 여기 있는 모두가 뱅크 아이템과 함께 이곳에 영영 갇히게 된다는 뜻이다.

"물귀신 작전인가? 위험을 감수한 것치곤 볼품이 없는데. 특정 던전이고 나발이고, 우리가 먼저 알아내서 토벌하면 그만이잖아."

노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클로이가 고개를 저었다.

"특정 던전을 모두 알아내려면 최소한 하루는 필요해요. 1시간으로는 턱도 없어요."

"뭐? 그럼 애초에 여기서 못 나간다는 거야?"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미 모든 특정 던전 앞에 저희 쪽 인력이 대기 중이니까요. 값만 제대로 치르시면 바로 토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클로이가 피식 실소를 뱉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던전 출현 전부터 그걸 다 알아냈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

"그럼 제 말은 거짓말이라 치고, 다른 방법 있으면 알아서들 해보시죠. 물론 뭘 하든 1시간 안에 해야 할 겁니다."

"...."

클로이와 노아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 말이 믿기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방법을 찾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여기엔 내 목숨도 걸려 있다.

모르긴 몰라도 내 쪽에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자신의 목숨을 미친 거래에 태우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그들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살려면, 믿기 싫어도 믿어야겠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클로이가 한 가지 의문을 던졌다.

"그런데 우리가 입장 표명하는 즉시 토벌이 가능하긴 해요? 최소 옐로우 등급 이상들일 텐데."

"물론입니다. 최근 필요한 전력은 증강해놓았거든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저희가 카르텔 신분이라 토벌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토벌을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입장 표명은 필요합니다."

나는 다시 한번 렌즈를 향해 말했다.

"입장 표명이 늦을수록 토벌도 늦어지고, 그렇게 되면 자칫 뱅크 아이템도 여기서 잃게 되겠죠."

노크하듯 렌즈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잘 듣고 있는지 모르겠네.

꽤나 중요한 이야기인데 말이야.

"만약 우리가 끝까지 나서지 않으면 그쪽도...."

"뭐가 더 있겠습니까. 다 같이 죽는 거죠."

"이해가 안 가는군요.... 이게 뭐라고 목숨까지 거는 건가요?"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어떻게 국제 협회를 상대로 거래를 하겠습니까."

"당신 부하들이 그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진 않을 텐데요."

"제 부하들이 말 하나는 잘 듣거든요. 제가 말할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애써 아닌 척하고 있지만, 사실 그녀의 말이 맞다.

밖에서 대기 중인 김민주와 한유빈의 성격상, 나를 살리기 위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시간이 되면 독단적으로 토벌을 진행할 게 뻔하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지금 거래는 물 건너가겠지.

그러니 이제부턴 치킨 레이스다.

내 직원들이 날 살리기 위해 언젠간 토벌을 해줄 거라 믿고 버티든지.

아니면 그 전에 저들이 거래를 받아들이든지.

그렇게 서로 끝까지 버티다 보면… 마지막 순간엔 더 쫄리는 쪽이 먼저 꼬리를 말겠지.

만약 최후의 최후까지 아무도 꼬리를 안 말면....

'김민주가 알아서 움직이겠지, 뭐.'

내가 죽을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둘 녀석은 아니니까.

***

던전 밖, 인천항.

"...."

"...."

김준우가 던전에 들어간 직후부터 김민주와 한유빈은 아무 말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초조한 눈빛으로 던전 입구를 응시할 뿐이다.

"...괜찮겠죠?"

오랜 정적을 깨고 김민주가 먼저 입을 뗐다.

그러자 한유빈은 애써 여유로운 척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한유빈도 확신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누가 이 상황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저 믿고 기다리는 거지.

'정말 무모하신 것도 정도가 있지....'

처음 김준우가 작전을 설명해줬을 땐, 당연히 그녀를 비롯한 모두가 뜯어말렸다.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 영영 던전에 갇힌다는데, 누가 그런 정신 나간 작전에 찬성하겠는가.

하지만 김준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 정도로 나오지 않는다면, 국제 협회는 반드시 뒤통수를 치고 나올 겁니다.'

본인이 너무 단호하게 나오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자신이 동행하겠다고 김민주는 이야기했지만, 김준우는 단칼에 거절했다.

토벌 인력이 같이 들어가는 건 전력 손해라는 이유에서였다.

같은 이유로 한유빈도 기각.

그렇게 동행자는 자연히 이아영 이사로 정해졌다.

죽을지도 모르는 그 계획에 이아영도 기꺼이 동참했다.

'설마하니 우리를 위해 정말 목숨까지 내걸 줄이야....'

마음속 깊이 경외를 표하던 중이었다.

한유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근데 있잖아요. 만약에, 진짜 만약에. 끝까지 저쪽에서 요구를 안 들어주면... 그땐 어떻게 할 거예요?"

"...."

"난 아무리 생각해도 거래보단 목숨이에요.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우리 쪽에서 먼저 토벌을...."

"아뇨."

김민주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지금 우리를 위해서 죽음까지 각오했어요. 우리가 멋대로 나서면 그 각오가 뭐가 돼요."

"...."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먼저 토벌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김민주의 눈빛은 무언가를 각오한 듯 굳건하고 경건했다.

그녀는 결코, 김준우를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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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특정 던전. 소재 파악됐습니까?"

결국, 웨슬리 사무총장은 기다리다 못해 통제팀에 직접 발걸음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직원들 사이로 통제팀장이 직접 그를 맞이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직 파악된 게 없습니다. 일단 최대한 찾아보고 있긴 한데...."

"그래도 몇 개는 찾았을 거 아닙니까?"

"그, 그게...."

통제팀장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이었다.

"아직... 하나도 못 찾았습니다."

"...."

웨슬리 사무총장 이마의 핏줄이 꿈틀거렸다.

"20분이나 지났는데 하나도 못 찾았다는 게 자랑입니까?"

"하, 한국에 미토벌 던전이 너무 많아서 특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희 쪽 감지 시스템만으로는 그걸 전부 파악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지부들의 도움을 받으면 모를까, 저희들만으로는...."

저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뜨리는 통제팀장.

하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빛이 관통하자, 통제팀장은 아차 싶었는지 곧바로 입을 틀어막았다.

"후우...."

사무총장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물론 억지를 부린다고 해결될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애초에 특정 던전을 그냥 찾아내는 것도 힘든데, 심지어 다른 미토벌 던전들까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카르텔로 규정해 버려서 국내 토벌을 할 수가 없었을 테니 당연한 상황이다만....

어쨌거나 그런 곳에서 1시간 안에 특정 던전을 모두 파악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빌어먹을....'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 채웠던 족쇄가 도리어 본인의 발목을 붙잡을 줄이야.

여태껏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얼굴에 기어이 분노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때 통제팀장이 넌지시 의견을 던졌다.

"일단... 기다려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쪽도 설마 죽을 생각은 아니겠죠. 마지노선까지 가면 저쪽에서 먼저 토벌할 겁니다."

"그러다 던전이 닫히면. 뱅크 아이템은 당신이 만들어 줄 건가요?"

"그, 그건...."

통제팀장이 말끝을 흐린다.

사실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김준우는 야망가이지, 도박꾼이 아니다.

여태까지 그가 해온 일들을 보면 그 어느 것 하나 확신 없이 벌인 일이 없었다.

언뜻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항상 철저한 계산과 작전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목숨까지 걸 만한 일도 아니다.

우리가 뱅크 아이템을 안 넘기면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해봐야 토벌권을 막았을 뿐이지 않은가.

심지어 그마저도 우리에게 전권을 넘긴다는 선택지가 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전권을 넘긴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쉽게 생각한다면 이러나저러나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다.

그러니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걸 막을 만한 이유가, 최소한 그들에겐 없다.

김준우는 지금 치킨 레이스를 하는 중이다.

시간이 아슬아슬해지면 먼저 꼬리를 말지도 모른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발....'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추측일 뿐.

불확실한 추측에 도박을 걸기에는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컸다.

어쨌거나 뱅크 아이템이 두 개나 걸려 있는 일인 만큼, 급한 건 이쪽이다.

그래, 뱅크 아이템이 목적인 이상... 결국 김준우의 요구를 따르는 수밖엔 없다.

"이런, 시발!!"

콰광―!!

콘크리트 벽이 종잇장처럼 무너져 내렸다.

통제팀 직원들 모두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 사무총장님...."

"...어쩔 수 없지."

분노에 찬 거친 숨을 내뿜길 잠시, 다시 입을 열었다.

"카르텔 규정… 철회합시다."

"…네, 네?"

"방법이 없잖습니까. 지금 우리한텐 뱅크 아이템이 더 중요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무총장의 눈빛은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기자회견 준비하겠...."

"아뇨. 녹화로 준비하세요."

"예…? 노, 녹화 말입니까?"

사무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뱅크 아이템도 뱅크 아이템이지만, 또다시 김준우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게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더미를 녹화해서 클로이한테 전송합시다. 김준우만 속이면 나머진 다 해결될 테니까."

그는 끝까지 김준우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

던전 안으로 들어온 지도 30분이 지났다.

그간 한마디도 없이 어색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

물론 살갑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만.

'흠....'

클로이와 노아를 힐끔거리며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시도라도 해볼까....'

그래, 저 둘이면 혹시 설득이 가능할지도 모르니까.

침묵을 깨고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클로이 씨는 어쩌다가 PB 코퍼레이션에 들어가게 됐습니까?"

"...."

말을 건 게 의외였던 건지, 나를 슬쩍 흘겼지만 대답은 없다.

뭐, 충분히 예상한 반응이다.

"아니, 뭐 들어간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돈이라든지, 명예라든지. 아, 비밀 조직이라 명예는 아니겠네. 그럼 대체 얼마를 주길래 그런 똥통에 있는 겁니까?"

"...."

"거참, 대화 좀 하자는데... 이러고 있는 것도 좀 아깝잖습니까. 마지막을 같이 할 사람일지도 모르는...."

"연구하려고요."

클로이가 포기한 듯 대답했다.

"연구? 뱅크 아이템을 말입니까?"

"네. 애초에 영입 조건도 뱅크 아이템을 마음대로 연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고."

"흠… 그럼 연구만 할 수 있으면 딱히 PB 코퍼레이션이 아니어도 된다는 소립니까?"

그녀의 시선이 가방에 달린 렌즈로 향했다.

싱긋 웃으며 그녀는 대답했다.

"그럴 리가."

"...그거 아쉽게 됐군요. 마침 우리 쪽에 신설 연구소가 들어와서 스카우트 좀 해보려 그랬는데."

"들어봤어요. 이클립스? 연구소장이... 그쪽이라던데."

클로이가 이아영 이사를 슬쩍 흘기며 실소를 뱉었다.

"되지도 않는 사람을 앉혀 놨네요."

"저기요. 혹시… 뒤질래요?"

"성질하고는."

"쓰읍, 진짜 성질 한번 보여줄까요?"

얘넨 왜 갑자기 싸워?

"그만들 하시죠. 어차피 30분 후면 저승길 동행할 사이인데."

신경전을 벌이는 두 여자를 말리며, 곧바로 노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럼 그쪽은 이유가 뭡니까?"

"뭐?"

"당신은 왜 PB 코퍼레이션에 들어간 겁니까. 세계 1위잖습니까. 굳이 남의 밑에 들어갈 이유가 없는데."

"세상이 많이 편해졌군."

그가 묘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청소부 출신이 말도 다 붙이고."

"하, 하하하...."

꽤나 노골적인 반응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적대적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듣자 하니 당신 여동생도 청소부라던데."

"...!"

"국제 협회 소속 청소부라면서요. 거긴 뭐 나름 처우도 좋고 연봉도 세다던데? 아무튼, 부럽습니다. 나도 이왕 청소 일 할 거였으면 국제 협회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나중에 혹시 괜찮으시면 여동생분한테 저 좀 꽂아달라고...."

그리곤 일부로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죽었댔나?"

그 순간이었다.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 각성]

[최후의 생존자]

[상대의 수와 전투 시간에 비례하여 시전자의 모든 스테이터스가 대폭 증가합니다]

"힘 좀 쓰는 놈이라고 해서 기대했더만..., 그냥 주둥이만 나불거리는 놈이었군."

드디어 기대했던 반응이 나왔다.

서슬 퍼런 눈빛이 정확히 나에게 날아든다.

그래, 저 정도는 돼야 세계 랭킹 2위 하지.

"혼자서 밸런스팀을 박살 냈다면서?"

"소문이 벌써 났습니까."

"너 같은 놈한테 당한 거 보니, 무슨 수준인지 알 것 같군."

"그쪽도 다를 거 없을 겁니다."

"하! 하하하!"

과장된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그가 눈을 부릅뜨며 나에게 손짓한다.

"일어나. 죽여줄게."

"흠, 이제 30분 남았는데...."

담담한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어떻게, 그 안에 가능하시겠습니까?"

[고유 스킬 : 마왕]

스스스스―.

검은 기류가 던전 안에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노아는 잠시 경계하듯 주춤했지만, 그것도 잠시.

쿠구구구―!

그의 주변을 따라 공간이 진동했다.

"...."

"...."

우린 가만히 서서 서로를 응시했다.

서로를 관찰하며 기 싸움을 이어가던 그때.

"그만 하세요."

클로이가 나서서 노아를 제지했다.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이지?"

"상황종료 됐어요. 이제 그만 하세요."

"...뭐?"

그녀가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기자들 앞에 선 웨슬리 사무총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마이크 앞에서 입을 열었다.

「조금 전 한국 협회를 비롯해 책임자를 만나 대화를 해본 결과, 양측 간에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담담한 목소리.

「그러므로 현 시간부로 한국 토벌 조직을 카르텔로 규정했던 발언을 정식으로 철회하는 바이며, 아울러 정확한 확인 절차 없이 섣불리 판단한 것에 진심 어린 사과를....」

화면을 보다 보니 자연히 미소가 지어졌다.

"당신 요구대로 규정 철회했습니다. 이제 물건 넘기고 토벌 진행하세요."

클로이의 요구에 나는 핸드폰을 꺼내 김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말씀하세요, 선생님.」

"아직 애들 던전 앞에 대기 중이지?"

「네. 지금 바로 토벌 진행하면 되나요?」

"아니… 전원 철수시켜."

그 순간, 클로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새끼들이 끝까지 수작질이네."

"...."

설마 내가 모를 줄 알았는가.

내가 기자회견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사무총장이 이전 발언을 철회하는데 플래시 하나 안 터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냥 끝까지 가보지, 뭐."

전화를 끊었다.

협상은 결렬이네.

***

"철수… 하래요."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에 김민주는 퍽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물론 전해 들은 한유빈 또한 마찬가지였다.

"네, 네?! 이제 20분도 안 남았어요! 지금 당장 토벌 시작 안 하면, 정말 소멸할 거라고요!"

"...."

"정말 토벌 안 할 거예요?! 저러다 진짜 죽어요! 우리가 누구 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한유빈이 격양된 목소리로 설득했지만, 김민주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고작 이런 일 때문에 대표님 죽는 꼴 못 봐요. 민주 씨가 안 하면 나라도 토벌 진행 요청할 거예요!"

"...."

김민주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나서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가 멋대로 토벌해 버리면, 김준우가 목숨까지 걸고 진행하려던 거래가 무용지물이 된다.

하지만 토벌하지 않으면, 김준우를 잃는다.

그녀로선 무엇 하나 고를 수 없는 상황.

그렇게 인생 최악의 선택지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죄송해요, 선생님....'

이내 그녀가 마음을 굳혔다.

"토벌… 진행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준우의 명령을 어기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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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던전 소멸까지 불과 15분밖에 남지 않은 시각.

전국 각지에 분포해 있는 총 7개의 상호작용 던전 앞에서 대기 중이던 병력에게 드디어 지시가 내려왔다.

"…토벌, 진행하래."

천안에 위치한 상호작용 던전 토벌을 맡은 '흑랑'의 금찬영 부팀장이 짧은 무전을 마치고 팀원들에게 말했다.

"거래가 끝난 겁니까?"

"아니."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국제 협회 쪽에서 무슨 수작을 벌인 모양이야. 대표님은 후퇴하라고 하셨대."

"네, 네?! 그럼 누가 토벌 지시를…?"

"김민주 팀장님이."

"아...."

팀원 모두가 납득이 간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토벌 진행이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팀장님 지시라고 해도 대표님이...."

"저, 정말 진행해도 되는 거 맞습니까?"

"거래도 아직 안 끝났는데 저희 멋대로 토벌해버리면 준비한 게 다 물 건너가는...."

아니나 다를까, 팀원들이 불안한 목소리로 계속 토를 달았다.

"그럼 뭐, 진짜 대표님이 죽게 내버려두자고?"

"그, 그건 아니지만...."

금찬영 부팀장이 옅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 또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닌 게 아니라, 대표님은 이번 거래를 위해서 목숨까지 걸지 않았던가.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 게 최소한의 도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건 내가 판단할 게 아니지.'

1분 1초를 다투는 상황이다.

어쭙잖은 독단을 부릴 여유도, 자격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도박수였어. 걸려들면 다행이지만, 걸려들지 않으면 우리도 어쩔 수 없잖아. 애초에 목숨까지 걸만한 일도 아니었고.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

"우린 지시대로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부팀장의 말에 팀원들도 마음을 다잡은 듯했다.

"대표님이 주신 정보 파일, 다 숙지했지?"

"네!"

"그대로만 하면 10분 안에 토벌할 수 있을 거야. 다들 전투 준비해."

이내 흑랑팀 전원이 무기를 빼 들었다.

"작전 개시한다."

모든 인원이 일제히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토벌을 시작한 건, 비단 흑랑팀뿐만이 아니었다.

전국 7개 상호작용 던전 모두가 같은 수순으로 토벌이 진행됐다.

물론 그들이 멋대로 토벌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제 협회 본부가 알 리 만무했다.

***

"사, 사무총장님!"

통제팀에서 상황을 관찰하고 있던 웨슬리 사무총장에게 수행비서가 헐레벌떡 다가왔다.

"방금 현장 모니터 확인했는데… 김준우 대표가 대기 인원 후퇴 명령을 내렸습니다."

"뭐라고요?"

"아무래도 더미 영상이 안 먹힌 것 같습니다."

웨슬리 사무총장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의 작전은 클로이에게 더미 영상을 보내서 김준우의 요구를 들어준 것처럼 꾸미는 것이었다.

물론 밖에서 대기 중인 놈들한테 확인시켜 보면 금방 들통 날 눈속임이긴 했지만, 확인하는 것도 결국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인 만큼, 영상을 보자마자 바로 판단을 내렸을 거다.

그런데 망설임도 없이 후퇴 명령을 내렸다고?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판단력인가!

"던전 소멸까지 몇 분 남았죠?"

"15분 남았습니다."

"하…!"

본인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물론 김준우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서 국제 협회가 손해를 보는 건 아니다.

어쨌든 1순위는 뱅크 아이템 회수였으니, 사실 그 외 것들은 개인적인 욕심이다. 그저 뱅크 아이템과 함께 한국 협회의 모든 걸 손에 넣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울 뿐.

하지만 지금 웨슬리 사무총장이 진심으로 분노하는 건, 그 아쉬움 때문이 아니다.

손익을 떠나서... 또다시 김준우를 이기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체 어떻게 해야 저놈을 한 번이라도 이길 수 있는 건가.

아니… 애당초 이길 수는 있긴 한 건가.

"하하… 하하하하!!"

쾅, 쾅―!!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주먹이 연신 콘크리트 벽으로 향했다.

벽은 금이 가다 못해 반대편 공간이 훤히 드러날 만큼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모든 직원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깔렸다.

"기자들 부르세요...."

수행비서는 대답조차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이겼다.

하지만 두 번은 없을 것이다.

뱅크 아이템 회수만 완료되면, 그땐 가장 먼저 네놈의 목을 쳐줄 테니.

***

여전히 어두컴컴한 던전 안.

던전 소멸까지 5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각, 우린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서로를 가만히 노려보는 중이었다.

특정 던전의 정보는 이미 며칠 전에 각 팀에게 전달해뒀다. 또한, 각 던전 특성에 맞춰 인원 배치와 구성까지 완벽하게 기획해두었다.

만약 그대로 토벌을 진행한다면 최소 토벌 가능 시간은… 대략 15분.

하지만 이미 그 시간마저 훌쩍 넘겼다.

'후우....'

애써 여유로운 척했지만, 사실은 굉장히 초조했다.

물론 던전에 갇힐까 봐 불안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토벌이 될까 불안했다.

아닌 게 아니라, 김민주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지 않았던가.

'그 녀석 성격상 분명히 다시 연락해서 확답을 받아내려고 했을 텐데....'

근데 1분 1초가 급박한 상황에서 회신조차 없다?

확실하다.

이것들… 백 프로 토벌 진행 중이다.

물론 그걸 저놈들이 알 리 없으니, 일단은 계속 모른 척하고 있긴 하지만....

만약 저쪽에서 어떤 액션을 취하기도 전에 던전이 활성화되면... 모든 게 도루묵이다.

'제발, 제발....'

토벌되기 전에 제발 먼저 움직여라.

"아까 여유는 어디로 갔어요? 죽을 각오 한 거 아니었나?"

클로이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슬쩍 입을 열었다.

"뭐, 막상 죽으려니 무섭긴 하군요."

"되지도 않는 연기하지 마요. 지금 토벌 중인 거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러십니까? 사실 저도 국제 협회에서 부랴부랴 기자회견 준비하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거 아니고요?"

"뭐, 아니면 끝까지 가보든가."

"...."

"...."

계속해서 서로를 떠보며, 목숨을 건 눈치 싸움을 이어가던 그 순간.

띠링―.

내 핸드폰으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조심스레 확인했다.

「토벌 완료 1분 전.」

그 텍스트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시선이 클로이와 노아 쪽으로 향했다.

"...."

"...."

그렇게 싸늘한 정적이 이어지길 몇 초.

뒤늦게 아차 싶어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본부, 본부!!"

"시발…!"

낌새를 눈치챈 클로이가 곧바로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이 새끼들 토벌 중이야!! 사무총장님한테 절대 기자회견 열지 말라고…!"

그 순간.

[긴급 속보입니다.]

켜두었던 내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클로이의 동작이 뚝 멈췄다.

[조금 전, 국제 헌터 협회의 웨슬리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 토벌 조직을 카르텔로 규정한 것을 공식적으로 철회했습니다. 또한, 그는 양측 간에 오해가 있었다고 덧붙이며 앞으로는 좋은 관계를 이어나갈 것을 소망한다고....]

"늦었네."

"...."

"...."

클로이의 손에 있던 통신기가 툭 바닥에 떨어졌다.

쿠구구구궁―

동시에 던전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분할 던전이 활성화된 것이다.

불과 몇 초 차이.

국제 협회와의 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

카르마 코퍼레이션 사무실.

"...됐다."

실시간 뉴스를 확인하던 하성일의 입에서 그 말이 새어 나왔다.

[한국 협회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눈 결과, 양측 간에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를 빌려 한국 토벌 조직에 내려진 카르텔로 규정하였던 입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하는....]

"됐다! 됐다고!!"

화면 속 웨슬리 사무총장이 그 발언을 하는 순간, 하성일은 고함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승리를 자축하기도 잠시, 하성일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하덕수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님 됐습니다! 대표님이 해냈어요!"

「봤다. 역시 끝까지 버텨보길 잘했어.」

버티는 자가 이기는 거라고 했던가.

모두가 토벌 사업에 발을 뺀 이 시점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기어이 상황을 뒤집어버렸다.

「이제부턴 진짜 카르마가 독주하겠구먼....」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제 방해할 놈들도 없으니,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사업에도 박차를 가해줄 겁니다!"

「뭐, 우리한테도 좋은 소식이야.」

하덕수 회장이 희미하게 웃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투자를 아끼지 않던 그들로선, 로또를 맞은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무튼, 이제부터가 중요할 게다. 토벌 쪽은 카르마에 맡기고, 우리가 유통 쪽을 독점하자고. 준비할 게 많으니 너도 이제 그만 복귀하거라.」

"...."

「...왜 대답이 없느냐?」

하성일은 잠시 망설이던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복귀... 안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사실 그동안 아버지나 할아버님의 뒤를 잇는다는 생각은 일절 없었습니다. 그럴 능력도, 자격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김 대표님 옆에 있으니 욕심이 생기더군요."

하성일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할아버님의 뒤를... 제가 잇고 싶다는 욕심 말입니다."

「내 자리를 노리기엔 아직 한참 이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어떤 줄 아십니까? 대표님에 대한 직원들의 신뢰가 어마어마합니다. 오죽하면 상황이 어려울 때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서더군요."

직원들은 리더를 신뢰하고, 그 리더는 능력으로 보답하는 조직.

하덕수 회장이 평생을 목표로 하던 조직이었다.

"배워가겠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지? 내가 그동안 널 도와줬던 건, 네가 욕심이 없어서였다는 거. 내 자리를 욕심내는 순간부터 혼자서 해야 할 거다.」

"물론입니다. 다만… 혼자는 아닐 겁니다."

「…하, 하하하!」

하덕수 회장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내 손자 같구나.」

"감사합니다."

「그래, 거기서 뭘 할 생각이냐?」

"제 지분을 모두 털어서, 전국 토벌 관련 업체를 카르마 코퍼레이션 앞으로 인수할 생각입니다."

「하하하! 이제부턴 적으로 만나겠구나.」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입니다. 사실 그런 건 다 둘째치고...."

하성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여기 취직부터 해야겠죠."

***

"혀, 협회장님! 김 대표님이 해냈습니다!!"

서울 기획 본부에도 같은 소식이 전달됐다.

편 팀장이 격양된 목소리로 환호하자, 이두식 협회장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해낼 줄이야."

이내 피식, 실소를 뱉었다.

설마하니 국제 협회를 상대로 공식 입장을 번복하게 만들 줄이야.

감히 상상조차 못 할 일이지 않은가.

그 사실이 믿기지 않는 건 편 팀장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사무총장이 번복하게 만든 겁니까?! 이거 진짜…!"

"지금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때야?! 기회라고! 기업들이 이때다 싶어서 다시 토벌 시장을 노리려고 할 거야!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지!"

"뭐, 뭘 하시려고요…?"

이두식 협회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전국 던전 토벌권, 싸그리 매입해서…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넘겨줘."

"네?! 그러면 저희가 토벌을 못 하는...."

"상관없어. 어차피 흡수될 거잖아."

"아,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흡수할 거라고 하셨죠."

"아니. 그 반대야."

이두식 협회장이 무언가를 각오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흡수하는 게 아니라… 흡수될 생각이다."

그래, 이번 일을 총대 메고 해결한 것에 대한 보상이다.

어디 한번 네 마음대로 해보라고.

국제 협회를 무너뜨리든, 아니면 직접 정상에 올라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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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총장이 카르텔 규정을 공식적으로 철회함으로써 거래가 정상적으로 완료된 직후.

"...."

"...."

클로이는 계획이 틀어진 게 퍽 못마땅한 듯 표정을 구겼다.

한편 클로이와 달리, 노아는 애당초 어찌 되든 딱히 상관없다는 반응이었다.

'하긴… 저놈 성격상 국제 협회가 손해를 보든 말든 알 바는 아닐 테니까.'

여기 온 것도 혹시 모를 무력 사태에 대비해서 억지로 보낸 걸 테니.

거래가 어떻게 되든 저놈과는 딱히 상관없는 일이겠지.

나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우리도 슬슬 토벌 진행합시다. 거래도 끝난 마당에 계속 남아 있을 것도 아니고."

"...우리보고 같이 토벌을 하자고요? 제정신이신가."

"같이 하자고는 안 했습니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앉아 계시지요."

혼자서 충분하니 굳이 싫다는 사람까지 데리고 갈 필요는 없지.

괜히 방해만 될 게 뻔하고.

"이아영 씨도 여기서 기다리실 겁니까?"

"아, 아뇨. 같이 갈게요."

저 사람들과 있는 건 죽어도 싫다는 듯, 곧바로 나를 따라 일어난다.

그렇게 이아영 이사와 함께 먼저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나도 가지."

"...?"

노아가 우리를 따라 일어섰다.

그가 같이 토벌을 나서겠다는 건 꽤나 의외였지만, 곧바로 그의 본심을 알아차렸다.

"마침 물어볼 것도 좀 있고."

"그러시죠."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미리 깔아둔 밑밥에 슬슬 반응이 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노아가 나서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지 클로이 또한 바로 태도를 바꿨다.

"...그럼 나도 갈게요."

"같이 토벌 못 하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착각하지 마요. 난 감시하러 가는 거니까. 당신들이 또 무슨 수작을 벌일 줄 알고."

의심하는 눈초리로 빨리 안내하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아깐 안 간다더니만, 아주 상전이 따로 없네.

앞장서서 지하 감옥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는 중에 이아영 이사가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왔다.

"또 나중에 가서 번복하진 않겠죠?"

클로이와 노아의 눈치를 살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순 없을 겁니다. 입장을 두 번이나 바꾸면 본인들의 말에 신뢰성만 떨어질 테니까."

"그래도 지고는 못 사는 놈들이잖아요. 절대 가만히 안 있을 것 같은데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이젠 마음처럼은 안될 겁니다."

이아영 이사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끔뻑인다.

"저번에 저희 회사랑 협회 흡수 건으로 이두식 협회장님을 찾아갔을 때, 협회장님이 거절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네 들었어요. 그게 왜요?"

"그땐 국제 협회가 주춤하고 있을 때니 그런 선택을 하셨겠지만, 아마 이번 일로 협회장님도 경각심을 느끼셨을 겁니다.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인수합병을 추진하시겠죠."

"그럼...."

"예."

다시 한번 뒤에서 따라오는 이들의 눈치를 살피곤 말을 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사라질 겁니다. 복수하고 싶어도 대상이 사라져버리면 어쩔 도리가 없죠."

그제야 알았다는 듯 이아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거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카르텔 규정도 철회했고, 한국 토벌 시장도 이제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겠지.

물론 국제 협회는 또다시 이를 바짝 갈겠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우린 흔적도 없이 사라질 예정이지 않은가.

필요한 것만 먹고 바로 빠지는 셈이니, 뒤탈이 생길 여지는 없다.

그럼에도 이아영 이사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그녀는 클로이 손에 들어간 슈트케이스를 연신 힐끔거렸다.

역시 신경 쓰이는 건가.

"뱅크 아이템을 넘겨주는 게 불안하십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국제 협회가 이렇게까지 집착할 정도면… 분명 뭔가 있지 않겠어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맞는 말이다.

이전에 우리를 상대로 벌였던 적대적 인수합병도 그렇고, 전 세계 토벌권을 회수하면서까지 뱅크 아이템을 수집하려는 걸 보면 분명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을 확률이 높다.

"당장 걱정할 건 없습니다. 밑밥은 다 쳐놨으니까."

"...?"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여기서 말해줄 상황은 아니었기에 침묵을 지켰다.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복도 끝에 다다르자 두꺼운 철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앞에 선 나는 두 여자를 향해 말했다.

"두 사람은 뒤에 계십시오. 토벌은 나와 노아 씨 둘이서 맡겠습니다."

노아와 함께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진 것을 확인한 후, 보스 방에 들어가기 직전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물어볼 게 뭡니까?"

"...난 기자들이랑 별로 안 친해. 아니, 애초에 친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 없지. 당연히 개인사에 대해선 아무한테도 이야기한 적도 없고."

뒤에 있는 두 사람을 의식하는 건지 목소리는 작았다.

"그런데... 넌 대체 어떻게 내 여동생이 죽은 걸 알고 있는 거지?"

"...."

그 질문에 애써 미소를 숨겼다.

역시, 예상대로 미끼를 물었다.

이렇게 되면 칼자루는 내게 넘어온 셈이다.

"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요."

"상관없어."

"일단 토벌부터 합시다. 뭐, 그리 급한 이야기도 아니고."

그는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토벌을 바로 앞두고 느긋하게 이야기나 나누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모양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서로 신호를 맞추고 철문을 열며 보스 방으로 들어섰다.

파앙―!!

예상치 못한 거센 파동이 문밖까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꺄아아악!"

"크읏!"

그 충격에 이아영 이사와 클로이는 순식간에 뒤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르르르르―.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두꺼운 쇠사슬에 봉인된 6개의 팔과 두 쌍의 날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렌지 등급의 분할 던전 보스.

베엘제붑.

"더럽게도 생겼군."

"속전속결로 갑시다. 별로 오래 보고 싶은 면상은 아니니."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 각성]

[최후의 생존자]

[고유 스킬 : 마왕 - 강자 독식]

[고유 스킬이 지속하는 동안 시전자보다 마력이 낮을 경우, 모든 공격은 무효화 됩니다.]

곧바로 두 개의 스킬을 발현시켰다.

끼잉, 끼이이잉―.

동시에 베엘제붑이 겁에 질린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

'빌어먹을 놈....'

기자회견이 끝나고도 웨슬리 사무총장은 분을 식힐 수가 없었다.

사실 결과적으로 볼 땐 예정대로 거래가 진행되었을 뿐, 딱히 잃은 건 없다.

하지만 정말로 뱅크 아이템만 받고 깔끔하게 손을 뗄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노아를 보내는 번거로운 짓까지 하진 않았을 거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규정을 풀어줄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런 가운데 저들이 순순히 아이템을 건네줄 리도 없겠지.

그렇기에 노아를 같이 보냈다.

만약 저쪽에서 수작을 부린다면 무력으로 저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설마 무력조차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 줄이야.

'그냥 다시 카르텔로 규정해버리면....'

아니, 그것만큼은 안 된다.

재차 입장을 바꾸면 국제 사회 안에서 신뢰만 떨어뜨릴 뿐이다.

장기적인 흐름을 생각하면 불이익이 크다.

여기선 패배를 인정하고 한발 물러나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시지요. 큰 손해 없이 단순히 이전 발언만 철회하신 거 아닙니까. 무엇보다 아직 견제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으니...."

수행비서는 사무총장이 너무 과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했는지 넌지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멋모를 소리에 그는 짜증이 올라왔다.

"우리가 한국을 카르텔로 규정하고 나서, 몇 개의 토벌조직이 무너져 내렸는지 아십니까?"

"네, 네?"

"총 18개의 기업과 9개의 지자체, 그와 관련된 61개의 하청기업이 전부 토벌 시장에서 발을 뗐습니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버티고 있던 놈들이 카르마 코퍼레이션입니다."

"...."

"이제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토벌 시장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미친 듯이 반등할 겁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수행비서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살아남으면 강해진다.

경쟁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할 게 불 보듯 뻔했다.

물론 몸집이 커지면 이전처럼 대응하기 힘든 건 당연했다.

만약 그렇게 성장한 회사가 협회와 하나가 된다면....

'다시 이전처럼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겠지....'

규모도 규모지만, 공적 영역의 입장까지 가져간다면 단순한 방식으로는 견제나 위협 자체가 어려워진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한 국가에 대한 간섭으로 여겨져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협회가 카르마 코퍼레이션 쪽으로 흡수되는 거면 그나마 어떻게든 해볼 여지가 있겠다만....'

한국 협회가 누구 좋으라고 그런 선택을 할까.

'진짜 제대로 말렸군....'

이번 기자회견은 단순히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달아뒀던 족쇄를 풀어준 게 아니다.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거나 다름없다.

이젠 김준우 한 명만의 문제를 넘어서고 말았다.

"...그나저나 김준우 대표는 대체 어떻게 이런 작전을 세운 걸까요?"

그때, 수행비서가 잠시 잊고 있던 의문을 상기시켰다.

"분할 던전이 출현할 것을 미리 알고 거래 장소를 정하질 않나, 상호작용 던전까지 미리 파악해서 병력을 대기시켜 놓질 않나.... 이게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한 걸까요?"

"...아뇨."

"네?"

"단연코 불가능합니다. 이건 단순히 혜안이 있다고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건 혜안이 아니라, 미래를 완벽하게 예지한 수준이지 않은가.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났다고밖에 볼 수 없다.

'설마 미래를 예지하는 스킬이 있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런 능력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능력은 토벌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저마다 차이는 있어도 결국 전투를 위한 도구일 뿐이니까.

"그럼 김준우 대표는 대체 어떻게 알고 이런 계획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죠."

웨슬리 사무총장이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며 겨우 입을 뗐다.

"정말 미래에서 왔다거나...."

"...하하."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수행비서가 애써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전혀 농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지금 저쪽에서 넘겨준 뱅크 아이템, 시간석이랑 이능석이 확실합니까?"

"네, 네.... 일단은 그렇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시간석…. 시간석이라...."

웨슬리 사무총장은 연신 그 말을 중얼거리며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이내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지금 클로이 팀장한테 연락 좀 해주세요."

"네?"

"입국하는 대로 뱅크 아이템 저한테 가져오라고."

"...알겠습니다. 아직 분할 던전 토벌 중인 것 같으니, 복귀할 때쯤 연락해 보겠습니다."

수행비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떠났다.

'내 생각이 맞다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김준우를 아예 없애 버릴 수 있는 방법이.

그렇다면 지금 무리해서라도 뱅크 아이템을 손에 넣은 게 오히려 호재로 작용할지 모른다.

점차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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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은 예상대로 금방 끝이 났다.

오렌지 등급의 고위험도 던전, 게다가 패턴 분석이 어려운 악마형 몬스터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토벌 인원이 전 랭킹 1위와 현 랭킹 1위인데.

'애초에 저놈 한 명이 웬만한 길드급 전력과 맞먹는 수준이니....'

가벼운 운동을 한 것처럼 작게 숨을 헐떡이는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토벌도 완료됐겠다, 슬슬 마무리하고 나가려던 그때였다.

"이제 대답해 줄 때가 된 것 같은데."

노아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보아하니 애초에 토벌 따윈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이다.

"내 여동생에 대한 일,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흐음… 설명하기 좀 어렵긴 한데."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아영과 클로이를 슬쩍 흘긴 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실 당신에 대해선 이것저것 아는 게 많습니다. 어린 시절 동생과 함께 백인 부모에게 입양되었지만, 줄곧 가정폭력에 시달렸다. 뭐 그런 것들...."

"...!"

"그러다가 이능력이 발현되고 나선 양부모를 던전에 처박았다죠, 아마?"

순간 노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뭐 아무튼 그렇게 동생과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당신은 운 좋게 꽤 괜찮은 길드에 들어가게 됐고, 동생도 미국 지부 청소부로 들어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작업 중 사고로 사망했죠."

"시발. 대체 어떻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끝을 흐린다.

참 나, 어떻게 알고 있긴.

회귀 전에 네가 국제 협회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걸 막으러 갔을 때, 본인이 직접 다 말한 건데.

"뭐,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설명해드릴 순 있는데.... 그것보다 진짜 궁금해야 할 건 따로 있지 않습니까?"

"뭐?"

"당신 여동생… 정말로 사고로 죽었을까요?"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고유 스킬이 지속되는 한, 시전자의 모든 스테이터스가 지속적으로 상승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스킬을 발동하며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노아 웨스턴우드.

가디언 클래스로 세계 랭킹 1위를 달성한, 역대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인 헌터.

하지만 높은 방어력과 체력으로 아군을 지켜주는 여느 가디언들과 달리, 그의 클래스는 조금 특별하다.

그가 지키는 건 아군이 아니라, 오직 본인 한 명뿐이다.

'특히나 각성 스킬이 꽤 까다로운 놈이기도 하고....'

아포칼립스 각성 스킬, 최후의 생존자.

스킬의 효과로 놈은 상대가 많을수록, 그리고 전투가 길어질수록 무적에 가까워진다.

덕분에 쉽게 죽일 수도 없을뿐더러, 만약 스테이터스가 최대치에 다다르면... 나조차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너…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간 그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묻는다.

"글쎄요. 여기서 더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똑바로 대답해! 죽고 싶지 않으면!"

"보는 눈이 있지 않습니까. 정 더 듣고 싶으시면… 따로 날짜를 잡도록 하죠."

"아니, 난 지금 당장 들어야겠어. 말 못 하겠다면 죽여서라도 불게 할 거야."

"쓰읍. 저 없이 던전을 나가면 밖에 있는 제 직원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그놈들이 날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나?"

"...."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아무리 김민주, 한유빈 듀오라고 해도 이놈한테는 어림도 없겠지.

"그러니까 제 말은 그 이후 말입니다. 거래도 끝난 마당에 멋대로 남의 나라에서 전투를 벌이는 건 본부에서도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자칫하다간 당신이 원하는 걸 찾기도 전에 잘릴지도 모르죠."

"...."

다행히 그 설득은 먹힌 건지 노아의 기세가 점차 사그라졌다.

아무렴, 본인도 의심하고 있지 않은가.

동생의 죽음에 본부가 개입돼있을 거라고.

그래서 회귀 전, 국제 협회를 상대로 그렇게 난장을 벌인 거다.

아마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국제 협회에 잠입했을 거다.

기껏 들어갔는데 아무런 수확도 없이 나갈 수는 없겠지.

"...날짜 잡아."

"그건 추후 연락을 드리죠."

"만약 이러고 그때 가서 모른 척하면... 정말 각오해야 할 거야."

"명심하도록 하죠. 아,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예. 만날 때 당신이 가져오셔야 할 게 있습니다."

애초에 내 미끼를 물어버린 이상, 처음부터 놈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

분할 던전을 빠져나온 직후, 우린 별다른 인사도 없이 각자 갈 길로 걸음을 옮겼다.

노아와 클로이가 멀어진 걸 확인한 이아영 이사가 곧바로 물었다.

"토벌하고 나서 그 남자랑 무슨 얘기한 거예요?"

"뱅크 아이템이 그쪽으로 넘어가는 게 불안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미끼를 좀 던졌습니다. 물지 않곤 못 배길 미끼."

"...네?"

흠,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최대한 짤막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저 노아라는 사람 말입니다. 사실 국제 협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동생이 미국 지부에서 일하다가 사망했거든요."

"음? 그런데 왜 지금은...."

"의심하고 있는 겁니다. 사고가 아니라,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거라고. 그래서 PB 코퍼레이션에서 영입 제안이 왔을 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겠죠. 직접 조사해볼 수 있을 테니까. 그걸 빌미로 관심을 좀 끌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여동생 이야기를 꺼낸 거예요?"

"예. 뭔가 알고 있는 듯 이야기를 흘리면 분명히 반응이 올 테니까요."

실제로 바로 반응이 오기도 했고.

"아무튼, 토벌 끝나고 정보를 조금 흘려줬습니다. 아마 조만간 소식이 오겠죠."

"그 말은… 당신은 그 사람 여동생이 왜 죽었는지 알고 있는 거예요?"

"...아뇨."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거기까진 본인이 말 안 해줬는데.

"네, 네? 본인도 모르면서 막 던진 거예요?! 그것도 가족 일을?!"

"그렇게 막돼먹은 놈은 아닙니다. 뭐… 저도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그 사건, 솔직히 좀 구린 냄새가 나긴 하거든.

뭔가가 있는 건 분명하다.

무엇보다....

'뭐… 저쪽 친구 일이랑 비슷한 부분도 있고.'

"어쨌든 그건 나중 일이고. 그때까진 우리 일에나 집중합시다. 오늘부터 꽤나 바빠질 테니."

"...알았어요."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과 합류했다.

"죄송합니다...."

김민주가 나를 보자마자 곧바로 허리를 푹 숙인다.

왜 이러나 싶어 당황하기도 잠시, 금세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내가 분명 후퇴하라고 지시했을 텐데."

"...."

"왜 토벌을 진행한 거야?"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김민주가 끝내 입을 열었다.

"아직...."

"뭐?"

"아직 월급 못 받아서요."

"...."

…뭐라고?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귀를 의심케 하는 대답에 잠시 생각이 멈췄다.

하지만 하루 이틀 이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라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쯧... 그래, 어차피 예상한 일이기도 했고.'

물론 내 명령을 어긴 건 사실이다.

자칫하면 계획이 틀어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목적은 이뤘고....

'덕분에 산 것도 사실이고.'

한마디 더 해줘야 하나 싶었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진 않았기에 그만두기로 했다.

이전처럼 일일이 지적받을 정도로 본인 잘못을 모를 애도 아니고.

"됐다. 다음부턴 잘해."

"…네, 네!"

그녀를 뒤로하고 준비해뒀던 차량에 탑승했다.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뉴스 봤다, 어떻게 잘 마무리했냐?」

"네, 협회장님. 잘 마무리했습니다."

「수고 많았다. 네 덕분에 우리뿐만 아니라, 한국 전체가 살았어.」

"칭찬이 너무 과합니다."

「과하긴 시벌, 너 아니었으면 진짜 X 됐어 인마!」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럴까.

「그, 아무튼 이번에 수고한 대가로 선물을 좀 준비해뒀다.」

"...예?"

「저번에 네가 말한 그 흡수 건 있잖냐.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협회에 넘겨준다는....」

"아, 네네. 어떻게, 생각해보셨습니까?"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건 별로 메리트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예 이참에 협회를 해체할 생각이다.」

"...."

뭐?

지금 뭐라고?

"협회장님… 혹시 약주 하셨습니까?"

「아니? 맨정신이다.」

"...."

저딴 개소리를 맨정신에 뱉었다는 게 더 충격이네, 시발.

"협회장님, 지금 어디십니까?"

「본부인데.」

"거 꼼짝 말고 계십쇼. 제가 지금 바로 갈 테니까."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제정신인 사람이 없다니까.

***

거래를 마친 후, 클로이와 노아를 태운 배가 인천항을 출발한 지 얼마 안 된 시각.

"그래서...."

뱃머리에서 생각에 잠긴 노아에게 클로이 팀장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죠?"

"이야기라니?"

"토벌 직후에 말이에요. 멱살까지 잡으시던데."

"...그냥 또 시비를 걸어와서."

노아는 애써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다.

"당신 성격에 잘도 참으셨네요."

"나도 공과 사는 가릴 줄 알아. 엄연히 PB 코퍼레이션 소속이니, 업무 내용만 따라야지."

무난하게 대답했건만.

클로이는 여전히 꽤나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던전에서 김 대표가 말했던 여동생 이야기는 뭐죠?"

"...별거 아니야."

"국제 협회 소속 청소부였다고요? 난 그런 소리 처음 듣는데."

"이봐."

계속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던 노아가 슬그머니 노기를 드러냈다.

"별거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선배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요."

"대접 바라는 거면 관둬."

"기대도 안 했어요."

클로이는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등을 돌렸다.

한편 노아의 시선은 자꾸만 슈트케이스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울리는 전화.

에마 대표에게 온 거였다.

「뱅크 아이템, 확보하셨나요?」

"네. 문제없이 받았습니다. 그… 거래 과정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 두려움에 가까운 사죄였다.

그녀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거래 현장에 있었다.

진행 상황을 보았다면 사무총장이 상당히 분노했을 게 분명했다.

자칫하면 그 화가 자신에게까지 번져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무총장님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하니까. 뭐 그건 둘째치고....」

에마 대표가 본론을 꺼냈다.

「확인해볼 게 있어서 그러니 뱅크 아이템은 도착하는 대로 본부로 가져오세요.」

"통관에서 걸리지 않으려면 연구 장비로 들여와야 합니다. 그러면 무조건 연구소로 직행할 수밖에...."

「노아 팀장에게 맡기면 될 거예요. 세계 랭킹 1위의 아이템이라면 그렇게 까다롭게 검사하진 않으니까.」

통화 내용이 들렸는지 노아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알겠습니다."

클로이는 전화를 끊곤 잠시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노아에게 슈트케이스를 내밀었다.

"당신이 본부로 가져다줘야 할 것 같네요."

"그러지."

노아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마치 뱅크 아이템이고 뭐고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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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두식 협회장의 한마디에 한걸음에 달려온 기획 본부.

"협회를 해체하시겠다뇨? 뭐, 외부에서 압력이라도 들어온 겁니까?"

전화로 들었던 이야기에 대해 되물었다.

이두식 협회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압력은 무슨… 이제 와서 우리한테 압력을 넣는다고 이득 볼 게 뭐가 있다고. 그냥 아무리 생각해도 그편이 맞는 것 같아서. 뭐, 사실 해체라기보단 개편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잘 생각해봐. 민영화가 시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협회 외엔 던전을 토벌할 수 있는 조직이 없었으니 당연히 우리가 전선을 유지해야 했지만, 이젠 그것도 아니지 않아."

이두식 협회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에는 '협회'라는 이름이 갖는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너도 잘 알 거 아니야."

"...예."

"그런데 지금 협회를 봐봐. 위치도, 역할도 사실상 애매해졌지. 무엇보다 시민들도 이젠 딱히 우리한테 거는 기대도 없어."

나는 대답을 아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협회는 대한민국의 중심인 조직이었다.

그러다 보니 과장 조금 보태서 '협회'라는 이름이 갖는 영향력은 청와대와 견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그 찬란했던 명성은 모두 사라졌다.

민간 토벌 기업들이 생겨나면서 협회의 영향력은 점점 축소되었고, 사람들의 관심 또한 사그라들었다.

아마 민영화가 폐지되지 않는 한, 협회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이두식 협회장도 그 사실을 인지한 건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네 회사를 흡수해봤자 다시 예전처럼은 못 돌아가. 또 시간이 지나면 쟁쟁한 토벌 기업들이 생겨날 테고, 또 우린 한편으로 밀려나겠지."

"...."

"그래서 생각한 게, 협회의 역할은 그대로 두고 위치만 바꾸자는 거야. 한마디로… 협회를 브랜드화하자는 거지."

"그러니까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인수합병을 하자는 겁니까?"

"그렇지."

"싫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애초에 내 목표는 한국 협회를 국제 협회로 키우는 것이지, 내 사업을 성공시키는 게 아니다.

한국 협회는 설령 영향력을 잃고 이름만 남는다고 해도, 반드시 그 전신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래야 제2의 국제 협회로 키우든, 사무총장이 되든 할 거 아닌가.

하지만 갑자기 협회가 기업이 되어버리면… 내 목표를 달성할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

안 된다.

절대 그럴 수 없다.

협회는 협회로 남아있어야 한다.

여기선 이두식을 내쳐서라도 강하게 밀고 나가야....

"참고로 이거 내 아이디어 아니야."

"...예?"

이두식 협회장이 갑자기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안을 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설마 이제 와서 책임을 떠넘기겠다는 건가.

하지만 이두식이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안다. 오히려 남이 제안한 것도 자신이 맞다 여기면 다 책임질 사람일 테니까.

그럼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그게 누굽니까? 혹시 박인범 협회장님...?"

"아뇨."

그 순간, 내가 입을 열기 무섭게 다른 곳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제안한 안건입니다."

검은 양복 무리를 이끌고 누군가가 협회장실로 들어섰다.

"...!"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남자.

그를 마주하자마자 하마터면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도 그럴 게,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김준우 대표님."

조현민, 바른통합당 당 대표 출신.

현 대한민국 22대 대통령이었으니까.

***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은 협회장실.

나와 이두식 협회장 그리고 조현민 대통령은 서로 침묵을 지키며 차가 나오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난 조심스레 갑자기 동석하게 된 현 대통령을 살폈다.

'예전에도 몇 번 만난 적은 있긴 하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들이닥치니 당황스럽긴 하네.

그런데 대통령이 직접 행차할 정도로 중요한 일인 건가?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김준우 대표님."

애써 담담한 척을 하고 있는데, 조현민 대통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그렇습니까. 영광입니다."

"제가 더 영광이죠. 대한민국에서 저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으신 분 아닙니까."

"하하… 과찬이십니다."

적당히 인사치레를 마치고, 이번엔 내가 먼저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나저나… 이 건이 대통령님께서 제안한 아이디어라고요?"

"그렇습니다. 사실 며칠 전부터 협회 상황과 관련해서 협회장님과 꾸준히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마침 카르마 코퍼레이션과 합병할 계획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나도 모르게 시선이 이두식 협회장에게 돌아갔다.

뭐야. 대통령이랑 연락도 하는 사이였어?

생각보다 더 거물이었네, 저 양반....

"그래서 제가 차라리 협회가 아니라 카르마 이름으로 합병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드리니, 본인보다 김 대표님을 설득해야 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직접 설득하러 왔습니다."

조현민 대통령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정상에 있는 사람은 그 분위기부터가 다르다더니… 설득이라고 했는데도 강요처럼 느껴질 수가 있군.

"어떻습니까, 대표님. 협회를 흡수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글쎄요.... 다른 걸 떠나서 대통령님의 저의를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정부는 협회의 영향력을 계속 견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부 입장에선 이대로 그냥 내버려두는 게 오히려 더 좋은 거 아닌가요?"

"흠,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막상 그렇게 되고 보니 생각과는 많이 달라져서 말입니다."

"어떤 부분이 말입니까?"

"민영화가 시작되고, 협회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온갖 사건 사고들이 터지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다 중심을 잡아줄 조직이 사라졌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이번 일까지 겪고 나니... 더욱이 그 필요성을 통감했습니다."

"그럼 민영화를 폐지하면 되지 않습니까. 협회가 다시 중심을 잡기까지 일주일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건 힘들 겁니다."

조현민 대통령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에겐 너무 돈이 되는 시장이거든요. 무엇보다 이젠 카르텔 규정도 철회하지 않았습니까."

"...."

돈이 된다.

그건 곧 이 시장 하나에 얽힌 집단과 개인이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이다.

당연히 그만큼 폐지를 반대하는 이도 많다는 뜻이고.

지금 당장은 토벌 기업들이 모두 발을 뺀 상황이라지만, 민영화가 계속 유지되는 한 머지않아 또다시 여러 기업이 생겨날 것이다.

당연히 협회는 영리 목적의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결국, 이두식 협회장이 말했던 것처럼 지금 당장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인수한다고 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영향력을 잃을 것이다.

지금이야 우리가 그 역할을 어느 정도 대신해주고 있지만, 협회에 흡수된다면 그럴 수도 없을 거고.

경쟁력이 없는 협회.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부재.

이 두 조건이 계속 이어지면, 국내 토벌 시장 전체가 중심을 잃고 혼란에 빠지리라는 건 안 봐도 뻔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협회라는 이름을 잃더라도 기업화를 하는 게 낫다는 건가....'

그렇게 하면 예전처럼 토벌 시장의 중심을 잡아 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기업의 형태라면 정부 입장에서도 견제하기가 훨씬 수월할 테니까.

"결국… 여전히 협회의 몸집이 커지는 건 싫지만, 중심을 잡아줄 조직은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그들의 제안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조현민 대통령은 조금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중심을 잡아줄 조직이 필요하다기보단...."

그는 나를 손가락으로 콕 가리켰다.

"김 대표님, 당신이 중심을 잡아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

"저는 대한민국을 더 좋은 나라로 만들 책임이 있고, 그러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그 수단과 방법이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 대통령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하하! 생각 외로 꽤 유머가 있는 분이시군요. 조금 전에 저보다 영향력 있는 분이라고 말씀드린 건 농이 아닙니다."

"...?"

"부디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십시오."

그가 사뭇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민하는 척했다.

사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뭐, 중심이 되어달라느니 하며 열심히 띄워주고 있지만, 여전히 내겐 메리트가 없다.

당연히 받아들일 생각 따윈....

"사실 네가 처음에 제안했던 것과 크게 다를 건 없어. 그냥 형태만 기업으로 바꾸자는 거고, 나머진 그대로 유지할 생각이니까."

그때, 낌새를 챈 건지 이두식 협회장이 말을 덧붙였다.

"뭐 굳이 차이점을 꼽자면... 카르마 이름으로 인수합병을 하게 되면, 네가 협회장이 된다는 것 정도겠지."

"...."

"그리고 해외 지부 사업도 지금보다 훨씬 수월해지지 않겠냐. 힘 다 빠진 독립 협회보다 빵빵한 기업이 인수하는 게 지부들 입장에서도 더 좋을 거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뭐가 그렇게 문제냐. 왜, 기업화되면 국제 협회가 못 될까 봐 그러냐?"

그 순간, 조현민 대통령의 표정이 바뀌었다.

"잠깐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무거워진 목소리.

"...."

"...."

순식간에 험악해진 분위기에 나와 이두식 협회장은 서로 빠르게 눈을 굴렸다.

***

비공식 회담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자마자 의자에 몸을 푹 던졌다.

"어떻게 됐어요?"

이아영 이사가 슬그머니 묻자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X 될 뻔했습니다."

"...?"

"대통령까지 행차했거든요."

"네, 네?!"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나도 이유가 다르긴 해도 비슷한 심정이라 뭐라 설명해 줄 여력이 없었다.

'그 양반도 참,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대통령 앞에서 한국 협회를 국제 협회로 키우겠다는 말을 꺼낸단 말인가.

만약 우리가 정말 국제 협회가 되면, 그땐 국내 정부고 뭐고 더는 우리를 간섭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당연히 한 나라의 수장인 대통령 입장에선 좋게 보일 리가 없는데 말이지.

그나마 이두식 협회장이 그냥 포부일 뿐이라며 둘러대서 겨우 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 협회를 흡수할 생각이에요?"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계획에서 너무 틀어졌네요. 대통령까지 등장해서 설득할 정도면 막무가내로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연히 협회 산하 조직인데… 본부를 잡아먹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배꼽이 배를 잡아먹는 꼴이네요."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고 있던 그때였다.

"대표님 계십니까?"

연락도 없이 하성일이 사무실을 찾았다.

"아, 예… 어쩐 일이십니까?"

"전해드릴 게 좀 있어서 말입니다."

그가 서류를 내밀었다.

확인하자마자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뭡니까?"

"보시다시피, 이력서입니다."

"...?"

"자신 있는 분야는 영업입니다.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까지 가능하며, 한별 상사에서 대리로 2년, 팀장으로 1년 근무했고 사장직으로 2개월 근무했습니다."

아니 그니까 그걸 왜 나한테....

"뽑아만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예, 예?"

이런 미친.

지금 한별 그룹 막내아들이 우리 회사에 들어오겠다는 건가?

그것도 전직 한별 상사 사장이?!

'시발, 이게 대체 무슨....'

위장으로 시작한 사업이 본부를 잡아먹어야 하질 않나, 대기업 손자가 달라붙질 않나.

'하아....'

대체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까지 날 괴롭히는 건가.

"...좋습니다."

쯧, 시벌 모르겠다.

"이아영 씨는 계약서 들고 협회로 가시고… 하성일 씨는 내일부터 출근하도록 하시죠."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다 먹고 내 마음대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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