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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간만에 한 청소 작업이 마무리된 직후.
해체한 부산물을 가지고 던전 밖으로 나오자 배 팀장이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야, 대표님 정말 이겁니다, 이거! 웬만한 청소부보다 훨씬 잘하시는데요?"
"하하, 감사합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게 감사해야 할 일인가 싶다.
청소부 출신이 청소 잘하는 게 그리 놀랄 일이야?
"그럼… 이제 부산물 운반은 어떻게 하십니까?"
내가 묻자 김동혁 대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운반하겠습니다. 원래 제 담당이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하하, 대표님이 가시는데 저희가 안 따라갈 수 없죠. 이번엔 다 같이 가는 걸로 합시다."
배 팀장이 다급하게 말했다.
결국, 배 팀장과 김 대리 그리고 우범진 사원까지 부산물을 실은 트럭에 모두 탑승했다.
"그래서, 운반은 어디로 합니까?"
트럭에 오르자마자 운전대를 잡은 김 대리에게 물었다.
"원래는 근처에 있는 19구역 보관소로 갔었는데... 그 근처가 싹 다 폐쇄돼서 강남에 있는 12구역 보관소로 갑니다."
"12구역이면 좀 멀지 않습니까?"
"그렇긴 해도 뭐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다른 구로 넘어가지 않는 게 어딥니까! 하하하!"
김 대리가 과장되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린 그렇게 15분가량을 달려 12구역 보관소에 도착했다.
작은 상가 건물 지하에 위치한 보관소다.
모두가 트럭에서 사체를 내려 그곳으로 운반하려던 그때.
"오늘 학원 안 가면 안 돼?"
"쓰읍! 또 이상한 소리 한다!"
마침 주변을 지나던 한 모자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신경 쓸 만한 일도 아니었기에 무시하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엄마가 뭐랬어? 학원 안 가고 공부 안 하면 저기 저 사람들처럼 된다 그랬지?"
"우...."
"저 사람들처럼 죽은 몬스터나 만지면서 살고 싶어? 돈도 얼마 못 벌면서?"
그 순간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 들려왔다.
"...."
"...."
동시에 배 팀장과 김 대리가 또다시 얼어붙었다.
"하, 하하! 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쇼, 대표님."
"마, 맞습니다. 저희보고 하는 소리지, 절대 대표님한테 하는 말이 아니니...."
"그건 무슨 소립니까?"
내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내가 여러분들이 길거리에서 욕이나 처먹으라고 그 돈 주고 데리고 있는 줄 아십니까?"
"예, 예…?"
"스스로 품격도 못 지킬 거면 내 돈은 왜 받아 가십니까? 그럴 거면 도로 뱉어내시던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모자를 향해 돌아섰다.
"저기, 잠시만요. 거 방금 뭐라고…!"
그렇게 입을 뗀 순간.
"아니! 지금 뭣들 하는 거야!! 내가 여기 닫으라고 오늘도 가서 말하고 왔는데!!"
어디선가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니 웬 중년 여성이 성이 잔뜩 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봐요! 여기다가 보관하지 말라니까?! 위에서 얘기 못 들었어?! 초등학교도 있고 아파트도 있는데, 우리가 대체 언제까지 참아줘야 해! 이거 빨리 치워!!"
"...누구시죠?"
"어머어머, 이것 봐라? 나 몰라? 하, 참 나 직원 교육 개판이네, 진짜."
중년 여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뱉으며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나 요 앞 플래티넘 파크 부녀회장이야! 강순옥 몰라, 강순옥? 내가 니네 부장을 얼마나 찾아갔었는데!"
"글쎄요, 처음 듣는 성함인데."
"이거 안 되겠네, 진짜. 너 여기 딱 기다리고 있어. 내가 지금 당장 네 상사한테 다 얘기할 테니까!"
상사?
나한테 상사가 있었나?
대체 뭐가 그렇게 화가 난 건지 모를 그 여자는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박근태 부장님. 강순옥이에요. 아니 글쎄! 내가 오늘 여기 보관소 이용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 또 여기다가 보관하고 있잖아요!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여성은 숨도 안 쉬고 할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직원 이름? 야, 너 이름 뭐야."
"...김준우라고 합니다."
"김준우래요! 나 모르는 거 보니까 신입인 거 같은데!"
곧바로 핸드폰 너머로 전달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너 이제 큰일 났다. 네 상사가 이리로 온다니까, 너 여기서 딱 기다려!"
"아... 예."
나는 무신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근태 부장이라....'
차라리 잘됐네.
안 그래도 내가 큰맘 먹고 내려준 예산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사람들한테 쓰고 있는 건지, 단단히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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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구역 임시 보관소.
그 앞에서 나와 청소 2팀, 그리고 강순복 부녀회장은 잠자코 박근태 부장을 기다렸다.
한편 강순복 부녀회장은 여전히 두고 보자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청소 2팀원들은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까.
"허억, 허억...."
저 멀리서 박근태 부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어째 박근태 부장 혼자가 아니었다.
문소연 청소과장, 한상혁 청소 1팀장.
그리고 기획본부장, 한유빈까지.
청소팀이 소속된 부서의 책임자들이 총출동한 것이다.
"그렇지, 그렇지! 내가 전화 한 통 하니까 아주 싹 달려오는 거 봐."
그들을 보자마자 강순복 부녀회장이 나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너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지?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감이 좀 와?"
"...."
"사람 무시하는 것도 봐가면서 해야지. 너 오늘 아주 임자 제대로 만났어."
내가 퍽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 강순복 부녀회장이 이때다 싶었는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당황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설마 다 달려올 줄이야....
그야 난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이지 않은가.
'농땡이 치고 있는 거, 들키는 건 아니겠지....'
빌어먹을.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잠시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기획본부장 한유빈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내 한유빈이 나를 슬쩍 흘기더니, 강순복 부녀회장에게 물었다.
그러자 강순복 부녀회장이 눈썹을 쭉 올렸다.
"본부장? 그럼 박 부장보다 높은 건가?"
"...직책으로 따지면 그렇습니다."
"그럼, 말 잘 통하겠네. 아니 글쎄! 내가 오늘 분명히 박 부장한테 여기 보관소 이용하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이 인간들이 또 여기다가 사체를 보관하고 있잖아요!"
"이 인간들…?"
한유빈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그 날카로운 표정에 내가 더 놀랐지만, 강순복 부녀회장은 눈치가 없는 건지 제 할 말만 계속해서 쏟아냈다.
"아유, 이 징그러운 걸 어떻게 사람 사는 동네에다가 보관할 생각을 하는 건지! 아무튼, 빨리 이 인간들 다른 데로 보내고, 이제부턴 여기 이용 못 하게 해요!"
"그렇게 바로 처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빠른 시일 내에 해결책을 마련해볼 테니...."
"아니! 저기 옆 동네 골든 팰리스 쪽은 말하자마자 폐쇄했다면서! 나만 무시하는 거야 뭐야! 자꾸 이러면 나 구청에 민원 넣어요? 시민을 위해서 일해야 할 회사가 시민 요청 무시한다고?"
"...."
한유빈의 어깨가 착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말이 쉽게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았다는 듯, 머리를 쓸어넘긴다.
그리고 그때.
"아 그리고! 대체 이 인간은 뭐 하는 놈이에요?! 아니, 내가 지 상사한테 다 말해 놓은 거라고 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갈 것이지! 얻다 대고 두 눈 똑바로 뜨고 말대답을 해?"
"...."
"...."
"...."
강순복 부녀회장의 역정에, 한유빈을 포함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일동 얼어붙었다.
"직원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건지 참. 이건 나 그냥 못 넘어가! 당신들이 대신 사과하던가, 아니면 내가 당신들 대표한테 직접 가서 얘기할 거야!"
"...."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이내 한유빈이 담담한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시겠다는데요, 대표님."
"그래! 당신 대표한테 내가.... 잠깐, 대표…?"
강순복 부녀회장이 나를 바라봤다.
에휴.
괜히 귀찮아질까 봐 일부러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이쯤 되면 일부러 멕이는 건가 싶다.
쯧, 어쩔 수 없지.
"소개가 늦었습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 김준우입니다."
"...그, 그쪽이 대표라고?"
"그렇습니다."
"아, 아니 무, 무슨 대표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강순복 부녀회장이 갑자기 말끝을 흐린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벙찐 표정을 지었다.
"요즘 임시 보관소에 관련된 컴플레인이 많이 들어와서 직원들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확인 중이었습니다. 뭐, 상황을 보니 더 확인할 것도 없긴 하군요."
"...."
강순복 부녀회장은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듯, 한유빈을 비롯해 한걸음에 이곳으로 달려온 이들을 바라봤다.
조금 전과 다르게 바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기세를 되찾으며 목청을 높였다.
"대, 대표면 뭐?! 오히려 잘됐네! 내가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여기 보관소 앞으로 이용 못 하게 해요!"
"이유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왜긴 왜야. 아파트 근처에 이런 게 있으면 당연히 불편한 거 아니에요?! 몬스터 사체랑 같은 동네에서 먹고 잔다고 생각하면…!"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강순복 부녀회장이 미소를 지었다.
"이해했다니 다행이네. 그럼 알아들은 거로 알고...."
"요컨대, 아파트를 없애버리면 된다는 말씀이시죠?"
"...어?"
순식간에 동그래진 눈.
뭘 들은 건가 싶은 반응이다.
"아파트 근처에 보관소가 있는 게 싫으시다면, 아파트가 없어지면 해결되는 문제 아닙니까. 뭐, 마침 잘 됐군요. 안 그래도 직원들 사택이 필요했는데, 이참에 통째로 사버리도록 하죠."
"아,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하하, 강순복 부녀회장님."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습니까?"
친절한 미소로 되묻자, 어째선지 그녀의 표정이 바싹 굳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임시 보관소 폐쇄는 없습니다. 현재까지 폐쇄된 보관소 또한 다시 복구할 생각이고요. 아시겠습니까?"
"아, 아니… 이게 우리만 불편해서 하는 소리예요? 근처에 초등학교까지 있는데, 애들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그럼 초등학교도 없애... 아 그건 아이들에게 너무하겠군요."
"...."
어디서 핑계인가.
그냥 본인들이 싫어서 막무가내로 구는 거면서.
몬스터 사체랑 같은 동네에서 먹고 자는 게 불편하다?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
그래, 말 잘했다.
"거기, 선생님."
근처에서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여성과 그녀의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우리를 대놓고 모욕한 그 모자였다.
"에…? 저, 저요?"
"아까 뭐라고 하셨죠? 공부 안 하면 우리처럼 된다? 돈도 얼마 못 번다?"
"아, 그… 교육 차원에서 한...."
"따지려는 게 아닙니다. 아직 그런 인식이 남아 있다는 건 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실언한 건 사실이지만, 이걸 그들의 탓만으로 돌릴 순 없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어디 그녀 한 명뿐이겠는가.
이번 일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에 발생한 것이다.
이번 일은 절대 눈앞에 있는 것만 처리해선 답이 없다.
그냥 직원들이 참고 멀리 떨어진 보관소를 이용하든, 아니면 지원금 명목으로 입을 닫게 하든, 딱 그 순간만 효과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인식이 박혀 있는 한 같은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겠지.
그러니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아무런 피해를 주지도 않는 임시 보관소를 그저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폐쇄하려는 게 얼마나 이기적인 일인지.
던전 청소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왜 필요한지.
그리고 그들이 내 돈을 얼마나 빨아먹는지.
그 모든 걸 한 번에 때려 박을 수 있는 해결책.
"뭐, 그걸 한 명 한 명 찾아가서 설득할 수는 없겠죠. 무엇보다 백 번 듣느니,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말도 있고."
이내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한유빈 본부장님."
"네."
"바로 다음 달에 전국 초, 중, 고 대상으로 던전 박람회를 개최할 생각이니 준비해 주세요."
"박람회요?"
"예. 토벌이라는 게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진행하는지. 기획 단계부터 청소와 부산물 처리까지 어떤 과정이 있는지, 이번 기회에 자세히 알릴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대답은 알겠다면서 표정은 왜 저래.
뭐, 일단 그건 둘째치고.
곧바로 강순복 부녀회장과 모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세 분에겐 제가 VIP 표를 드릴 테니, 부디 꼭 참석해주십시오. 물론 선택은 자유지만, 만약 참석하지 않으시겠다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직원 사택, 이번 기회에 마련하겠습니다."
"...."
"...."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겠지.
"대충 이야기도 끝난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갑시다. 여기 다 나와 계시면 일은 누가 합니까?"
먼저 발걸음을 떼자, 곧바로 한유빈이 뒤를 바짝 따라왔다.
"제발 오지 마라...."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순 또라이 아니야 저거.
***
"그래서…."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한유빈이 나를 기획 본부실로 끌고 갔다.
그녀는 상석에 앉아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거기 있었는지부터 설명해 봐요."
"아까 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직원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건지 확인을...."
"그렇다고 청소 작업에 보관소까지 따라가요? 뭘 얼마나 자세하게 확인하려고?"
"...."
"서류 작업은 다 끝냈어요?"
"...."
"아영 씨가 알면 진짜 가만 안 둘 텐데."
"...그 사람한텐 제발 말하지 말아 주시죠."
아니, 어이가 없네.
이래 봬도 대표인데 직원들 눈치 보는 게 정상이야?
아니 그것보다 대체 지금 직원이 대표를 혼내고 있는 게 정상이야?!
'회사 꼴 아주 개판이네....'
나 땐 상상도 못 하는....
"하아, 알았어요. 비밀로 할게요."
"...감사합니다."
시발.
천하의 김준우가 이런 거에 감사해야 한다니.
"그런데... 제가 비밀로 한다고 해도, 아영 씨 귀국하면 어차피 들킬 텐데요."
"그러니까 그 전에 끝내야죠."
"박람회가 그렇게 하루 이틀 만에 뚝딱 나오는 거예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봅니까? 어차피 그쪽이 할 일인데."
"...."
표정 한번 살벌하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숨을 팍 내쉬며 그녀가 말했다.
"뭐, 알았어요. 어떻게든 준비해볼게요."
"정말입니까?"
"그럼 뭐 어떡해요. 대표님 지시인데. 그리고 뭐...."
멋쩍은 표정으로 턱을 긁적이며 말을 잇는다.
"저도 솔직히 아까 좀 짜증 났거든요. 잘됐죠, 뭐."
그리곤 어깨를 으쓱인다.
"그런데 저는 그렇다 쳐도… 대표님은 이유가 뭐예요?"
"뭐가 말입니까...?"
"이번 일요. 농땡이 피우려고 한다기엔 너무 본격적이고.... 그리고 사실 컴플레인이 들어와도 무시하면 그만이잖아요. 물론 욕은 좀 먹겠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어요?"
"뭐, 굳이 따지자면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은 제가 청소팀한테 주는 월급이 꽤 많다는 겁니다."
"돈을 주는 것만큼의 가치는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엄연히 제 돈을 투자하는 건데, 그 가치가 개판이면 어떡합니까. 무엇보다 신입 받는 데도 문제가 있을 거고요."
"흐음."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요?"
"그건 뭐...."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피식 실소를 뱉었다.
"그쪽이랑 같은 이유입니다."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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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제 와서 하는 소리지만 사실 박람회 개최에 대해선 꽤나 걱정이 많았다.
조금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른 부서에서 강력하게 반대할 게 뻔했으니까.
토벌의 전체적인 메커니즘과 그것을 구성하는 팀들의 역할을 알리려는 목적이긴 해도... 사실상 다른 팀보단 청소팀이 메인이지 않은가.
당장 토벌에만 신경 쓰기도 바쁜 팀들에겐 박람회가 그다지 달가운 소리는 아닐 것이었다.
그런데 웬걸, 예상외로 작전팀을 비롯한 타 부서 또한 흔쾌히 협조해주었다.
무엇보다 총 책임자인 한유빈이 기획부터 진행까지 진두지휘하면서 신경을 써준 덕에, 정작 말을 꺼낸 나는 딱히 손을 델 게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오늘.
양재역 근처, 어느 컨벤션 센터.
모두가 열과 성을 쏟은 박람회가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던전 토벌 박람회를 방문한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 협회의 정신을 이어받은 아시아 최대 민간 토벌 기업,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주최한 이번 던전 토벌 박람회는 총 8개관, 16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1관에선 던전 토벌의 시작, 지휘통제팀의 역할에 대해....」
이곳저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녹음된 음성.
그걸 가만히 듣다가 한유빈을 향해 물었다.
"저거 누가 녹음한 겁니까? 어째 익숙한 목소린데."
"민주 씨요."
"...?
"해보고 싶었대요. 저런 거."
"허, 그럴 성격으로는 안 보이는데...."
적잖은 충격에 잠시 멍하니 서 있자, 한유빈이 슬쩍 물었다.
"그런데 축사 같은 건 안 해도 돼요? 들인 돈을 떠나서 이거 꽤 공들인 일이잖아요. 사람들한테 이번 박람회의 취지나 의미 정도는 설명해줘야죠."
"의미를 설명해주면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런 의미가 있다, 저런 의미가 있다, 백날 말해주면 뭐 하는가.
애초에 그게 통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고.
'본인들이 직접 경험해봐야지.'
입장 줄에 선 사람들을 바라봤다.
대부분이 학교 단체로 현장 체험학습을 온 학생들이었고, 간혹 가족이나 친구끼리 온 개인 관람객도 있었다.
여느 박람회가 그렇듯, 우리 또한 개별 관람과 단체 관람으로 나누어 진행할 예정이다.
당연히 단체 관람이 직접 안내를 받으며 설명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단체 관람은 아무나 신청할 수 없다.
내가 직접 초청한 VIP들에게만 주어진 특별 서비스니까.
그 VIP들의 안내를 맡아줄 이는 박근태 부장, 문소연 과장, 한상혁 팀장을 비롯한 청소팀 직원들이다. 그리고....
"정말 직접 안내하실 거예요? 일도 많으시다면서."
나 또한 이번 박람회의 안내를 맡았다.
"뭐, 어차피 한 회차만 하는 거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왜 하필 구문 고등학교 애들을 맡으시겠다는 거예요? 거기 애들 질 안 좋기로 꽤 유명하잖아요. 스트레스 좀 받으실 것 같은데."
"배 팀장님한테 듣자 하니, 그쪽 구역으로 작업을 나가면 구문 고등학교 애들이 그렇게 조롱을 한다는군요."
"...그래요?"
"뭐, VIP 대접은 직접 해야죠."
난 마이크를 착용했다. 그리곤 입구 앞에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던전 토벌 박람회 안내를 맡은 김준우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
"...."
아무도 반응이 없다.
그 대신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준우?"
"김준우라면… 대표 아니야?"
"무슨 개소리야. 설마 대표가 직접 안내하겠어?"
내가 니들 친구냐.
시작부터 어째 정수리가 따끔따끔하네.
"원래 지금 바로 관람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아직 오지 않은 분들이 계셔서 조금만 더 기다릴까 합니다. 괜찮을까요?"
"아뇨!"
"안 괜찮은데요~."
"누가 또 와?"
"몰라. 아 시발, 기다리기 싫은데."
"빠르게 한 대, 고?"
역시 잡음이 많다.
한유빈이 괜히 한 소리는 아니었구만.
'쯧. 애들한테 화내 봤자 나만 손해지.'
학생들의 반응을 애써 무시하며 아직 오지 않은 손님을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을 더 기다리길 잠시.
"오셨군요."
"...."
"...."
강순복 부녀회장, 그리고 일전에 우리에게 실언한 모자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다 오신 것 같으니까, 안내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들어가시죠."
모두를 이끌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
서울의 한 카페.
이두식 이사는 오랜만에 박인범 전 협회장을 만나 근황을 주고받았다.
"던전 박람회?"
이두식 이사의 말에 박인범 전 협회장이 흥미롭다는 듯 반응했다.
"네. 김준우 그놈이 직접 개최했다더군요."
"이야, 그걸 여는 놈이 있긴 하구만. 우리 때도 말은 계속 나왔었는데 결국 다 엎어졌잖냐.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뭣보다 예전에 최호성이가 분당에 개최하려고 했다가 그렇게 되고 나선... 뭐, 그 후론 완전히 백지화됐죠."
최호성 본부장 이야기에 분위기가 순간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박인범 전 협회장이 애써 목소리를 키우며 물었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지금 와서 개최한 거냐? 조금 뜬금없지 않나?"
"뭐, 저도 보고만 받은 거라 자세히는 모르는데... 청소팀 쪽에 임시 보관소를 폐쇄해달라는 요청이 너무 많이 들어온다더군요."
"임시 보관소를? 허, 이기적인 놈들."
"인식이 예전보다 좋아졌다곤 해도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니까요. 이번 기회에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취지가 아니겠습니까."
"새끼.... 하여간 지 직원들 관련된 일에는 아주 앞뒤 없이 달려든다니까."
언뜻 뒷담화를 하는 것 같지만, 박인범의 표정을 보면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뭐, 그런 취지라면 잘 생각했네. 언젠가 한 번쯤은 필요한 일이긴 했지."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직접 안내까지 한다더군요."
"김준우 그놈이?"
"네. 대표가 안내라니, 모양새가 좀 웃기긴 해도… 뭐, 보기 좋지 않습니까?"
"흐음...."
이두식 이사가 꽤나 자랑스레 말했지만, 어째선지 박인범은 이번엔 꽤나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아니 다른 게 아니라. 그놈 성격에 고분고분 안내만 할 것 같진 않아서 말이지."
"...네?"
"설마 관람객들이 신경 좀 긁었다고 화내고 그러진 않겠지?"
"하하, 설마요. 그놈도 나름 대푠데."
"...."
"...."
곧바로 이어지는 침묵.
사실 두 남자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지 않은가.
김준우라면 그러고도 남는다는 걸.
"…몰래 한 번 가볼까요?"
"...그러자."
결국, 두 남자는 아직 반도 안 마신 커피를 내버려둔 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
7관 마지막 구역.
이제 관람까지 1관만을 앞둔 그곳에서, 나는 관람객들을 향해 말했다.
"자, 이렇게 해서 통제팀, 지원팀 그리고 작전팀의 역할과 전체적인 토벌 시스템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야, 시발! 이거 진짜 칼이냐?"
"병신아 진짜겠냐."
"야, 이거 봐봐! 여기 총도 있음!"
"미친, 저건 리얼 진짜 같네."
물론 제대로 듣는 놈은 없었다.
'후우....'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저 상태다.
고작 20명밖에 안 되는 인원인데, 통제도 안 될뿐더러 심지어 몇 명은 아예 중간부터 보이질 않는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설명 사이사이에 헛소리가 너무 심하다.
질문이라도 하는 순간 답은커녕 별별 개소리가 날아드는 통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괜히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섰나....'
그냥 사무실에서 일이나 할걸.
하지만 후회도 잠시.
나는 애써 표정을 숨기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8관에서는 비토벌팀, 그러니까 던전 청소와 부산물 관리를 맡은 던전 후속 관리팀들에 대해 알아볼...."
"아 뭐야, 끝났네."
"이제 그냥 나가면 안 돼요?"
"시발, 개 웃기네. 청소부 얘기를 우리가 왜 들어."
...쥐어팰 수도 없고.
"하하, 거의 다 끝났습니다. 자자, 마지막까지 집중해서 따라와 주세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탄식을 애써 무시하며 8관으로 들어섰다.
"뭐야, 여기 존나 어두워."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존나 던전 같네."
"던전 들어가 본 적은 있음?"
"있겠냐 시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공간.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우선 던전 청소팀의 역할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작전팀 따까리?"
"크크크. 아, 미친놈 개웃기네."
"근데 청소부 얼마 벌어요?"
"왜, 많이 벌면 너 하게?"
"아니? 월급 싸면 나도 고용해서 내 방 청소 좀 시키게."
"시발 미친놈이네, 킥킥킥."
후우.
"던전 청소팀은...."
"응~. 작전팀 따까...."
"아 시발, 진짜 거 말 드럽게 많네."
지이잉―.
마이크가 바닥에 떨어지며 공명했다.
동시에 정적이 찾아왔다.
"니들 꼬라지 보니까 백날 공부해도 사람 되긴 글렀다."
"...?"
"...?"
"아까 청소부분들이 얼마 받냐고 물었죠? 아마 학생이 쌔빠지게 공부해서 들어가게 될 회사보다 두 배는 더 받을 겁니다. 아니, 보니까 세 배는 더 받겠네."
"...뭐, 뭐요?"
"그리고 작전팀 따까리? 토벌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게 청소팀 일정이라는 거 다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제대로 쳐 듣질 않으니 그렇게 머리에 똥 찬 소리나 하죠."
"...."
지금 본인들한테 하는 말인지 의심이 가는 듯한 표정들이다.
암, 본인들한테 하는 말이고 말고.
나는 8관의 불을 켰다.
"왓, 시발!"
"뭐, 뭐야 이거!!"
"이거 시발 몬스터야?!"
그제야 눈에 들어온 광경에 모두가 경악했다.
뭐, 이해한다.
설마하니 박람회에 몬스터 사체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물론 실제 몬스터와 비슷하게 제작된 모형이지만. 뭐,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여기가 바로 이번 박람회의 메인이자, 청소팀이 공을 쏟아부은 구역.
실제 던전 후속 처리 과정을 체험해볼 수 있는 특수관.
"원래 개별 관람객들은 담당자의 안내에 따라 간단히 체험만 하는 곳인데. 단체 관람객, 그러니까 여기 계신 VIP분들은 조금 다릅니다."
나는 그들에게 장비를 던져 주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직접 청소를 하셔야 합니다."
"...?"
"...?"
어리둥절해 하는 학생들과 강순복 부녀회장.
하지만 곧바로 여기저기서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아니, 지금 장난하세요?"
"우리보고 이걸 치우라고요?"
"응, 안 해~."
거드름을 피우는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
그래.
아무리 백번 박람회를 열고, 설명해 봐야 애당초 들어먹지 못할 놈들에겐 의미가 없다.
"제가 지금 장난하는 거로 보이십니까?"
"...."
"...."
직접 경험해 보는 게 아닌 이상.
"뭣들 하십니까. 시작하십쇼."
다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이게 진짜 VIP만을 위한 특별 서비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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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당연히 처음엔 반발이 심했다.
하긴, 관람하러 온 이들한테 갑자기 일을 하라는데,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한 10분이 지날 때까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배 째고 버티면 알아서 끝내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쉽게 끝내줄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다.
내 시간 할애해서 귀찮은 짓을 하는 만큼, 끝장을 볼 생각이다.
내 VIP들이 그걸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건, 실습을 지시한 지 20분이 경과하면서부터였다.
"이거 진짜 해야 해…?"
"미쳤음?"
"시간 뻐기면 알아서 끝내줄걸?"
"아니 근데 20분 동안 가만히 있잖아."
"시발, 진짜 해야 끝내주나?"
슬슬 반응이 오기 시작한다.
그들의 예상과 다르게 20분째 끝내줄 기미가 보이질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눈치만 보고 있던 그때였다.
내 예상을 깨고 나선 이가 있었다.
"아유, 진짜! 사람 데려다가 이게 뭐 하는 거예요! 하면 될 거 아니야, 하면!"
다름 아닌, 강순복 부녀회장이었다.
그녀는 호기롭게 장비를 챙겨선 모형 사체 앞으로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곧바로 코를 틀어막았다.
모양부터 질감, 그리고 냄새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사체였으니.
당연히 일반인들에겐 만지기조차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일단 징그러운 건 둘째 치더라도, 손이며 옷에도 냄새가 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학생들! 뭐 하고 있어! 그냥 후딱 하고 나가자고!"
"...아 씨."
"존나 더러운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하는 학생들.
그들은 결국 모형 사체 앞으로 모여 해체를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특별관에서의 마지막 설명을 이어갔다.
"토벌 후 약 10분이 지나면 사체에서 유독성 가스가 방출되기 시작합니다. 보호 장비를 착용하더라도 약 1시간 30분 이상 노출된다면 피부와 호흡기에 피해를 받는 수준이죠."
물론 내 말을 귀담아듣는 이는 없었다.
귀에 들어올 리도 만무했고.
그럼에도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가스 때문에 목숨이 위험할 수 있지만, 사실 몬스터 해체에 비하면 안전한 수준입니다. 죽은 몬스터에 치명적인 독이 남아 있을 수도, 혹은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죠."
"...."
"...."
"그렇기 때문에 단 1초라도 집중이 흐트러진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뭐, 문제없이 사체를 해체했다고 하더라도 던전 유지 시간을 넘겨버리면 마찬가지로 목숨을 잃을 거고요."
작전팀에 가려져 있을 뿐, 청소팀 또한 매 순간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모르면 몰랐지, 알고 있는 이상 그 점은 인정해줘야 한다.
나 또한 처음에 우습게 보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
"그럼에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 위험한 곳에 뛰어듭니다. 헌터들이 토벌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요. 그런 직업입니다. 헌터들이 칼과 총으로 여러분들을 지킬 때, 빗자루와 걸레로 헌터들을 지키는 직업."
"...."
"...."
뭐, 이 지루한 설명으로 그들의 인식이 바뀔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나도 형식상으로 설명해준 것뿐이고.
"하아, 하아...."
"돼, 됐죠? 이제 빨리 끝내요!"
한창 혼자서 설명을 중얼거리고 있자니, 드디어 다들 해체를 마치고 나를 바라봤다.
조각조각 난 모형 사체를 훑으며 말했다.
"엉망이네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토막을 내면 주변에 피가 많이 튀어서 오히려 더 작업하기 까다로워집니다."
"아, 아니 우리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요?!"
"체험 실습이라면서!"
"진짜 빡 치려 그러니까 적당히 하고 보내주시죠?"
"뭐, 맞습니다. 실습이니까 너무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죠.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그제야 험악했던 표정들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아 참,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는데.... 오늘 실습에 참가하셨던 분들에겐 별도의 실습 비용이 지급될 겁니다."
"실습 비용…?"
"돈을 준다고요?"
"어, 얼마 주는데요?"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돈다.
"뭐,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한 분당 100만 원씩 지급해드릴 예정입니다."
"...!"
"...!"
"옷에 냄새도 뱄을 거고. 무엇보다 조금 강압적이었던 실습에 대한 사과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비용 받으실 계좌번호 적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입막음용에 가깝다.
나중에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가 자신들을 감금하고 강제로 하기 싫은 일을 시켰다고 고소라도 하면 귀찮아질 테니.
내민 종이에 허겁지겁 계좌번호를 적곤 입꼬리가 귀에 걸려선 곧바로 출구로 향하는 찰나였다.
"아, 잠시만요. 마지막으로 해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그들이 해체한 사체 모형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건물 나가시면 임시 보관소라고 적힌 창고가 있습니다. 해체하신 사체를 그곳으로 옮겨 놓으셔야 실습을 모두 수료하신 거로 인정됩니다."
"...옮겨다 놓기만 하면 되는 거죠?"
"예. 다만 한 분이라도 도중에 버리고 가시면 전체 인원의 수료가 인정되지 않으니 주의하시고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각자 해체한 모형들을 곧바로 주워든다.
100만 원을 준다는데 그 정도야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반응들이다.
다들 싱글벙글 미소를 지은 채, 부산물을 짊어지고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지금 VIP들 퇴장하십니다."
곧바로 한유빈에게 무전을 날렸다.
"그럼 준비한 대로... 임시 보관소 폐쇄해주십시오."
「알겠어요.」
짧은 무전을 마치자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VIP를 위한 특별 서비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짜 실습은 모든 관람이 끝난 후,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
"뭐, 뭐야…?"
강순복 부녀회장은 창고 앞에 붙은 쪽지를 발견하자마자 표정을 구겼다.
분명 김준우가 임시 보관소라고 안내해준 그곳은, 어째선지 폐쇄라는 문구와 함께 단단히 잠겨 있었다.
"아, 시발 뭐야!"
"폐쇄? 그럼, 여기가 아니라는 거야?"
"그럼 이거 어디에다가 놓으라고?!"
"야, 저기 담당자 지나간다. 쟤한테 물어봐봐."
때마침 명찰을 차고 그 근처를 지나가던 작은 체구의 여성.
한 학생이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기, 저기요! 이거 임시 보관소에 갖다 놓으라던데, 여기 왜 잠겨 있어요?"
"아, 죄송합니다. 컴플레인이 들어와서요. 관람객분들이 냄새가 난다고 하셔서 부득이하게 여기는 이용이 힘드실 것 같습니다. 다른 곳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담당자는 매우 친절한 목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다, 다른 곳이요? 어딘데요?"
"부지 밖으로 나가셔서 오른쪽으로 쭉 올라가시면 다른 임시 보관소가 있습니다."
"아, 시발!"
갑자기 터지는 욕설에 담당자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애써 접대용 미소를 유지했다.
"X 같아서 못 해 먹겠네, 시발!"
"아, 나 그냥 버리고 갈래."
"미쳤냐? 한 명이라도 버리면 다 수료 못 한다잖아!"
"그럼 시발, 이 냄새 나는 거 들고 밖으로 나가겠다고?"
"학생들! 요 앞이라잖아! 잔말 말고 들고 와!"
의견이 충돌했지만, 강순복 부녀회장이 곧바로 중심을 잡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불만이 서린 표정들이었지만, 이내 다시 부산물을 짊어진 채 담당자가 안내해준 다른 임시 보관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담당자가 피식 실소를 뱉었다.
목에 걸린 명찰에는 한유빈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금 2차 보관소로 이동 중이에요. 슬슬 거기도 준비해주세요."
곧바로 문소연 과장에게 무전을 날린다.
「준비는 다 했는데... 이거 정말 이래도 될까요?」
"뭐가요?"
「그래도 엄연히 일반인인데... 조금 너무한 것 같기도 하고....」
"뭐, 따지고 보면 저희가 강제로 시키는 건 아니잖아요. 본인들이 하기 싫으면 언제든 버리고 가도 되는 건데."
「....」
"하여간 사람 굴리는 덴 도가 텄다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했던가, 김준우 대표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유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평정심을 찾으며 대답했다.
"큼큼, 2차 보관소로 이동했어요."
"문소연 과장 담당 보관소군요. 연락은 해뒀습니까?"
"당연하죠."
"그럼 그다음은...."
"한상혁, 개새… 아니, 한상혁 팀장 담당의 3차 보관소, 박근태 부장 담당의 4차 보관소까지 순서대로 진행할 거예요."
"좋습니다. 그럼 우린 카페 가서 구경이나 합시다."
"...."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이 인간,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어떻게 일반인을 상대로도 봐주는 게 없냐.
한유빈마저 혀를 내두르던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야, 김준우, 이놈아!!"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니, 니들 일반인들 상대로 뭔 짓거리하는 거냐?!"
"야, 인마. 왜 소리를 치고 그러냐. 딱 봐도 재밌는 거 하고 있구만! 크하하!"
"이, 이두식 이사님…? 협회장님까지? 두 분이 여긴 왜...."
이두식 이사와 박인범 협회장.
뜬금없는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가 안내를 맡는다고 해서 뭔 일이 있겠거니 싶긴 했는데, 설마 이런 것까지 준비했을 줄이야. 재밌네, 재밌어!"
"형님! 이게 지금 웃을 일입니까? 이거 잘못하다가 저희 회사 큰일 날 수도 있습니다!"
"야 인마, 니 회사지 내 회사냐? 크하하하!"
"...."
상반된 반응 속, 김준우 대표는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먼."
"흐음...."
박람회 내부에 있는 카페테라스.
박인범 전 협회장과 이두식 이사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자, 그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와 합병되면서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이사가 된 이두식에겐 간략히 보고를 올리긴 했지만. 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을 테니.
그때, 박인범 전 협회장이 넌지시 물었다.
"근데 설마 그 몇 명 때문에 박람회를 연 거냐? 수지가 너무 안 맞는데?"
"설마요. VIP 실습은 그냥 겸사겸사 한 겁니다. 시민들에게 토벌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한 번쯤은 알릴 필요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긴 하지. 잘 생각했어."
박인범 협회장이 한쪽 입꼬리를 쓱 올린다.
한편 이두식 이사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런데… 요즘 일 많다고 하지 않았나? 박람회 준비할 시간이 있었어?"
"…하하하."
대답 대신 멋쩍은 웃음을 흘리자, 이두식 이사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영이가 알면 너 죽었다, 이놈아."
"모르면 그만 아닙니까. 어차피 한국에 돌아오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
온몸에 소름이 돋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박인범 협회장과 이두식 이사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바짝 긴장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 하고 있냐니까?"
"...."
그곳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이아영 본부장이 있었다.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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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설마설마했는데! 어떻게 그새를 못 참고 농땡이를 펴요?!"
"...."
대표이사실.
이아영 본부장의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려 퍼졌다.
"당장 다음 달까지 중동 쪽 지부 결산도 해야 하고, 일본 지부 사업 기획도 검토해야 하는데! 다 내팽개치고 박람회나 열고 있다니?! 제정신이에요, 진짜?!"
"그게 사실 이유가 다...."
"네, 이유야 있겠죠! 그런데 당신이 왜 거기서 안내를 하고 있는 건데요?!"
"...."
할 말이 없어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 어떻게 거기서 딱 걸리냐.
여기서 더 변명을 늘어놓다간 날이 새도록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기에,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다음 달 귀국 예정 아니었습니까. 왜 벌써 오신 겁니까?"
"말 돌리는 거예요?"
"...."
귀신이 따로 없네 진짜.
곧 화를 거두고, 이아영 본부장도 한발 물러나 입을 열었다.
"뭐, 생각보다 안정화가 빨랐어요. 하라무라 씨도 예상보다 잘해주고 있고요. 급한 건 일단 다 처리했고, 나머진 성일 씨가 하겠다고 해서 저 먼저 온 거예요. 뭐, 불안하기도 했고...."
또 한 번 나를 흘긴다.
그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물었다.
"국제 협회 쪽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예?"
"없었다고요. 매각 제안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정말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그건...."
"좀 이상하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쇼이치 지부장을 속여서 일본 지부를 넘겨받았다는 걸 그쪽이 모를 리도 없고. 이전 같았으면 무력을 쓰든 아니면 수작을 부리든 다시 회수하려고 했을 텐데.... 이상하리만치 아무 반응도 없어요."
"흐음...."
확실히 그녀 말대로다.
이미 우리와 국제 협회 본부는 얽힐 대로 얽히지 않았던가.
전부는 아니지만, 서로가 어떤 민낯을 가졌는지 얼추 알고 있고.
심지어 무력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벌써 몇 번이고 부딪쳤다.
왜 이제 와서 반응이 없는 걸까.
일본 지부라면 거액을 들여서라도, 아니 또다시 무력 충돌을 강행해서라도 다시 회수할 만한 가치가 있을 텐데.
나는 잠시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뭐, 귀찮았을 수도 있죠."
"국제 협회가요?"
"그동안 우리와 충돌한 게 한두 번이었습니까. 결과가 다 좋았던 것도 아닌데, 또 우리를 건드리기엔 본인들이 더 피곤했겠죠."
"그런 거면 다행이고요."
"뭐, 아니면 이제 우리를 신경 쓸 이유가 없어졌을 수도 있겠죠."
지나가듯 한 이야기지만 이아영 본부장의 표정이 퍽 굳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건 절대 좋은 징후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그편이 더 신빙성이 있다.
국제 협회의 목적은 단순히 전 세계에 지부를 세우는 게 아니라, 뱅크 아이템을 모으는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짓지 않았던가.
저번 일로 모든 뱅크 아이템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우리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다는 걸 수도 있다.
뭐, 만약 정말 그런 이유라면....
'이미 목표를 이뤘다는 소리겠지.'
그게 뭔지는 몰라도... 느낌이 좋진 않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그들이 뱅크 아이템을 전부 가지고 있는 건 아무래도 불안하군요."
"동감이에요."
"되도록 빨리 거래를 진행해야겠습니다."
"...무슨 거래요?"
"저번에 노아와 했던 거래 말입니다."
여동생 사건에 대해 알려줄 테니, 우리가 넘긴 뱅크 아이템을 다시 넘기라는 거래였다.
잠시 미뤘지만, 지금이라도 진행한다면 최소한 이능석과 시간석은 다시 회수할 수 있다.
뭐, 노아가 정말로 가져올 거란 보장은 없지만....
'그놈이라면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무엇보다 전생에서 여동생 일 때문에 국제 협회 본부를 상대로 전쟁까지 벌인 놈이지 않은가.
각오로만 따지면 사무총장을 죽여서라도 가져올 것이다.
내 쪽에서 주기로 한 정보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말이지.
"그런고로, 우리 쪽에서도 슬슬 본격적인 조사를 해봐야겠군요."
"...네?"
"미국 지부에 연락해서 미팅 날짜 좀 잡아주세요. 직접 가서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으니."
"...."
의문투성이의 사건.
여동생이 투입됐던 던전에서 분명 뭔가가 발견되었고, 국제 협회 본부는 그것을 찾으려 했다.
그것을 결과적으로 얻었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그날 이후로 노아의 여동생은 사망하고 함께 작업에 투입됐던 동료들 또한 모두 자취를 감췄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국제 협회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그 던전에서 대체 무엇을 발견했던 건지.
모든 걸 알아내기 위해선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겠지.
"또 농땡이 피우려고요?"
"...."
"가더라도 일은 다 하고 가세요."
"...."
하, 누가 보면 맨날 도망치는 줄 알겠네.
난 의자에 걸어둔 외투에 슬그머니 손을 가져다 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아영 본부장."
"왜요?"
"저 없는 동안 수고 좀 해주시죠."
"아, 인간아!!"
귀청이 떨어질 듯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
"정말 괜찮은 거야?"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사무총장실.
에마 대표가 웨슬리 사무총장을 바라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음?"
"일본 지부 말이야. 김준우 그놈한테 눈 뜨고 코 베인 셈이잖아. 우리한테도 꽤 요충지였는데, 이렇게 내버려둬도 괜찮은 거냐고."
"...."
웨슬리 사무총장은 대답을 아꼈다.
에마 대표는 그 모호한 반응이 퍽 답답한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우리 애들 보내서 싹 쓸어버리고 다시 회수하는 게...."
"그럴 필요 없어."
"뭐?"
"그럴 필요 없다고. 이젠 딱히 상관없어졌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에마 대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웨슬리 사무총장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반능석, 차원석... 그리고 한국에 있던 이능석이랑 시간석까지. 이제 모두 우리 손에 들어왔잖아."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에마 대표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뭐, 애초에 그게 웨슬리의 목표였으니까.
하지만 아는 것과 별개로 목적이 이해되진 않았다.
"아직도 세계 정복, 뭐 그런 거에 로망이 있는 거야?"
"음. 틀린 말은 아니네."
"어이가 없네. 애도 아니고."
대놓고 비웃자 웨슬리 사무총장은 고개를 저었다.
"세계 정복이라는 거 말이야. 단어가 좀 유치하긴 하지만, 실제로 지난 수천 년간 힘 좀 있다 하는 놈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시도해온 일이야."
세계 정복.
단순히 꿈이라면 망상쯤으로 치부하겠지만.
현실성이 생기면 그보다 좋은 목표도 없다.
"처음 시도는 말 타고 돌아다니면서 각 나라에 깃발을 꽂는 방법이었지.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너무 비효율적이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거야. 무엇보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말짱 도루묵이고. 그러다 보니 점점 사람들도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한 거지."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소 하나만 손에 넣으면 되는 거야. 얼마나 쉽고 간단해. 실제로 몇천 년 전에는 종교를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했어. 몇백 년 전에는 탱크를 가진 이가, 몇십 년 전에는 석유를 가진 이가 차례로 물려받았지."
"...."
"그럼 지금은 뭘까?"
사실상 답은 정해져 있었기에 에마 대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던전, 이능력 그리고 헌터. 이 세 가지를 손에 넣으면 전 세계를 손에 넣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뱅크 아이템에 그렇게 목숨을 걸었던 거야?"
"당연하지."
던전과 이능력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단순히 토벌해야 할 대상을 떠나 누군가에겐 직업이고, 누군가에겐 사업 아이템이며 또 누군가에겐 국가 전체였다.
그런데 헌터들의 이능력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고, 또 원하는 대로 던전을 여닫을 수 있는 리모컨이 있다면?
그리고 드디어 그 리모컨을 손에 넣었다면?
"우린 이제 국제 사회를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어. 그깟 지부 몇 개?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해."
"하...."
에마 대표가 실소를 터트리길 한 차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뭐, 괜찮은 생각이네."
"그렇지?"
"'에덴'이 끝까지 발견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
에덴.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웨슬리 사무총장의 표정이 순간 싸늘해졌다.
에마 대표는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해본 소리야.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
"...."
여전히 웨슬리 사무총장은 심기가 굉장히 불편한 듯했다.
결국, 에마 대표는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차원석은 던전을 컨트롤 하고, 이능석, 반능석은 이능력을 컨트롤 하는 용도라고 하면..., 시간석은… 그건 대체 용도가 뭐야?"
"브레이크."
"...뭐?"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에마 대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군가가 그 리모컨을 쥐지 못하게 막는 용도라고."
"그게 무슨...?"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웨슬리 사무총장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김준우 말이야...."
이윽고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여기 사람이 아니야."
***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아영 씨, 화 많이 났던데...."
도착하자마자 김민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쏟아냈다.
"난 분명 일 다 마무리하고 오자고 했어요. 나중에 가서 우리 탓하지 마요."
한유빈 또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참 나, 다들 왜 이렇게 겁이 많습니까. 그 사람이 뭐 잡아먹기라도 합니까?"
"저희가 아니라 선생님을 잡아먹겠죠...."
"...."
너무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네.
"이렇게 된 거 그냥 확 고백해버리죠? 내가 볼 땐 살 방법은 그거밖에 없는 거 같은데."
"한 번만 더 개소리하면 해고입니다."
"...나한테만 그래."
단번에 정색하고 말하자 한유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있자니, 김민주가 슬쩍 물었다.
"그래서, 미국 지부에서 마중 나온다던 사람은 도착했대요?"
"글쎄, 시간 맞춰 나와 있겠다고 했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때였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분들이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녀를 보고 우리 모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앞으로 여러분들을 안내할 미국 지부 소속 지원팀장, 클로이라고 합니다."
"...."
"...."
대체 무슨 깡으로 우리 앞에 낯짝을 들이민 건가 싶었으니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노려보기만 했다.
그때, 한유빈이 넌지시 말했다.
"죽여 버릴까요?"
"...사람 안 보는 데서 하죠."
여기선 좀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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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긴 한데...."
공항을 떠나 미국 지부로 향하고 있는 리무진.
적막한 공기가 흐르던 가운데 클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불만이 있으면 말씀을 하세요. 그렇게 죽어라 노려보지만 말고."
"말하다가 죽일 것 같아서 말이죠."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저번 거래 때 죽이지 그랬어요?"
"그땐 공적으로 만난 거니 봐 드린 겁니다."
"지금도 충분히 공적으로 만난 거예요. 나라고 좋아서 당신들 안내나 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녀가 대놓고 쏘아붙인다.
김민주와 한유빈은 주먹이 나가려는 걸 애써 참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럼 뭡니까? 아무리 봐도 우리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 같은데."
"당신들 덕분에 제이슨 통제팀장 그렇게 되고 나서, 미국 지부 윗선이 줄줄이 잘려 나갔어요. 당연히 지부장도 바뀌었고요."
"그런데요?"
"그 새 지부장님이 보낸 거예요. 작년 합동 작전에 참가했다는 걸 알았는지, 내가 맡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왜, PB 코퍼레이션 소속이 감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지금 지부장님은 우리 쪽이랑 관계없는 사람이에요."
클로이가 한숨을 팍 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미국 지부에요?"
"…뭐요?"
"당신들, 지금 해외 협회를 닥치는 대로 인수하고 있잖아요. 일본 지부 뺏어간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이번엔 미국 지부를 노리는 거냐고요."
"그렇다면? PB 코퍼레이션에서 막으러 오나?"
"착각하지 마요. 우린 이제 당신한텐 별 관심 없으니까. 인수하든 뭔 짓을 하든, 내 알 바 아니니까 볼일이나 보고 조용히 돌아가시죠."
"...."
나는 한유빈과 김민주를 번갈아 바라보며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관심이 없다, 그 한마디로 국제 협회의 상황을 알려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목표를 이뤘다, 이건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인수는 무슨… 미국 지부가 뭐가 아쉬워서 저희한테 지부를 넘기겠습니까. 전 그냥 거래를 좀 하려고 온 겁니다."
"무슨 거래요?."
"당신 알 바 아니라면서요."
"...."
받은 걸 그대로 돌려주자 클로이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통쾌해진 그때.
"기사님."
클로이가 리무진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손님들이 관광도 할 겸, 지부까진 걸어서 가겠다고 하시네요. 여기서 내려주세요."
"알겠습니다."
끼이익―.
차가 길가에 정차했다.
"내려요."
"...."
"...."
진짜 치졸의 끝을 달리네.
됐다, 더러워서라도 걸어간다.
나머지 두 사람도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아무렇지 않게 차에서 내렸다.
리무진은 이내 우리를 남겨두고 휑하니 떠나 버렸다.
우린 뉴욕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래도 유빈 씨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길 알고 있죠?"
김민주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긴 알죠."
"그럼 뭐, 관광도 할 겸 천천히 걸어...."
"지부가 뉴욕에 없어서 문제지."
"...?"
뭐라고?
"뉴욕에 없다는 게 뭔 소립니까?"
"작년에 제이슨 그렇게 되고 나서 롱아일랜드로 옮겼다던데요."
"...."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네.
그냥 좀 참을걸.
"...택시 타고 갑시다."
이아영 본부장이 결제 내역 확인하면 또 뒤집어지겠구먼.
***
PB 코퍼레이션 본사.
에마 대표는 사무실에 틀어박힌 채 연신 이마를 꾹꾹 눌러댔다.
어젯밤, 웨슬리 사무총장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도저히 본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김준우가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니.
해도 해도 망상이 지나치지 않은가.
에마 대표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빌어먹을.'
그녀 또한 이젠 긴가민가했다.
전부 망상으로 치부하기엔, 그가 해준 설명이 맞아들어가는 부분이 상당했다.
던전은 물론, 몬스터와 사물 그리고 인간에게까지 루프를 걸 수 있다고 알려진 시간석.
웨슬리 사무총장은, 김준우가 그것을 이용해 미래에서 현재로 왔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젊은 나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단호한 판단력.
전 세계 어느 헌터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실력.
예지 수준의 무시무시한 촉.
무엇보다 돈을 위한 것도,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닌 도저히 목적을 알 수 없는 행동들.
웨슬리는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의 능력들이 증거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미래의 김준우가 그렇게 뛰어난 능력자였다면, 굳이 시간석을 사용해서 과거로 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능력으로 돈도 명예도 모두 거머쥐었을 텐데, 뭐가 아쉬워서 그것들을 다 내려놓고 과거로 온단 말인가.
에마 대표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웨슬리 사무총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뱅크 아이템을 독점하는 걸 막기 위해 희생을 한 거라고.
그 대답을 들은 에마 대표는 머리에서 스파크가 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그제야 시간석의 용도가 브레이크라는 웨슬리의 말도 납득이 갔다.
전 세계 모든 던전과 이능력 그리고 헌터를 컨트롤 할 수 있게 되면, 그가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다.
물론 그 영향력으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세계 평화를 위해 힘쓸 위인은 아니다.
만약 가까운 미래에 국제 사회 전체가 그의 발아래에 놓이게 된다면,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먼 세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웨슬리에게 저항하기 위해 반란 세력이 생겨났다면?
김준우가 그 반란 세력의 우두머리이고, 웨슬리를 막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서 과거로 돌아온 거라면…?
'빌어먹을, X벤저스도 아니고....'
에마 대표가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녀 또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말이 안 되진 않는다는 것을.
무엇보다 김준우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그래서, 그놈을 막을 방법은 있는 거야?
대화 막바지쯤, 에마 대표가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웨슬리 사무총장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까진 몰라. 어쨌든 시간석이랑 연관되어 있는 건 확실하니, 그걸 좀 더 연구해보면 뭔가 답이 나올 것 같은데....
에마 대표는 웨슬리가 말끝을 흐린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다.
뱅크 아이템을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전문가.
뱅크 아이템 관리팀장, 클로이가 현재 미국 지부에 가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쪽 지부장이 손님 안내를 부탁했다고 했던가…?'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에마 대표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노아 팀장, 물어볼 게 좀 있는데...."
「말씀하시죠.」
"혹시… 최근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미국 지부를 인수하려는 움직임이 있나요?"
「아직 그런 정보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그건 갑자기 왜…?」
"이번에 미국 지부에 손님이 왔다고 해서요. 클로이가 안내책으로 불려간 걸 보면 아무래도 한국 놈들인 것 같은데,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
"됐어요, 이제 뭐 인수를 하든 말든 사무총장님은 관심도 없을 테니… 그냥 무시하세요."
노아 팀장의 대답이 끊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혹시, 제가 전해드린 이능석이랑 시간석... 아직 본부에 있습니까?」
"네. 사무총장님이 직접 관리하고 있어요. 그건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흐음...."
에마 대표는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며 미심쩍은 한숨을 쏟아냈다.
***
"흠, 지역 토벌권을 매입하고 싶으시다고요?"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미국 지부.
마이클 지부장을 만나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예. 현재 미국은 던전 출현이 너무 잦아서 오히려 곤란한 상황이라고 들었습니다."
마이클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 전국 곳곳에 작전 지부를 두고 있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죠. 그렇다고 무작정 작전 지부를 늘리기가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저희한테 지역 토벌권을 매각하신다면 신경 쓰기 어려운 지역의 토벌을 저희가 관리하는 셈이니, 미국 지부 입장에선 부담이 조금 덜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우린 지역 토벌의 부담을 줄이고, 당신들은 추가적인 토벌로 수익을 내겠다는 거군요."
"정확합니다."
"아시겠지만, 저희가 수익성이 좋은 지역의 토벌권을 매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시골과 사막 지역 위주가 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수익성이 떨어진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토벌 활동이 가능한 지역이 늘어나는 셈이다.
초기 토벌 시스템만 갖춘다면 이후로는 무조건 수익을 뽑아낼 수 있다.
뭐, 따지자면 틈새시장인 거지.
'물론 그게 진짜 목적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기선 철저하게 장사꾼인 척을 해둘 필요가 있다.
"...좋습니다."
이내 마이클 지부장의 허가가 떨어졌다.
"네바다주에 토노파라는 소도시가 있습니다. 그 근방 50km까지의 토벌권을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물론 저희 쪽에서만 결정할 순 없고, 국방부의 허가도 필요합니다. 신청은 저희 쪽에서 해둘 테니, 허가가 떨어질 동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한 일주일 정도 걸릴 겁니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다, 문득 뭔가 떠오른 척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청소팀은 되도록 현지에서 구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신입보단 경력자가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혹시 추천할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글쎄요. 지금 지부에 소속된 인원 외에 경력 있는 던전 청소부가 그리 많진 않아서...."
"기존에 퇴사하신 분이어도 괜찮습니다."
"...."
그의 눈썹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3년 전쯤에 퇴사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굉장한 베테랑들이었죠. 실력도 매우 좋았고요."
"그럼 그분들을 좀 만나봐야겠군요. 혹시 연락처를 가지고 계신가요?"
"가지고는 있지만... 아마 만나기는 어려울 겁니다. 듣자 하니 아예 사람이랑 담을 쌓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좋은 일로 퇴사한 게 아니라서 다들 상태가 좀...."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모르고 한 소리가 아니다.
애초에 정말 청소팀으로 고용할 생각도 아니고.
그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알아내면 그만이다.
"뭐, 일단 만나보겠습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연락처는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곤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사람들은 왜 찾아요?"
"...!"
갑자기 튀어나온 클로이가 나를 가로막았다.
시발, 너무 놀라서 소리도 못 냈다.
낌새를 보아하니 안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 들은 모양이다.
"신입보단 경력직이 여러모로 편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 이유에요?"
"…그럼 또 뭐가 있습니까?"
"...."
그녀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당신, 정말 거래하러 온 거 맞아요?"
"참 나… 아까는 뭘 하든 신경 안 쓴다면서요. 이제 와서 왜 이렇게 관심이 많으실까?"
"그건 어디까지나 선 안에서 이야기고. 선을 넘을 생각이라면 말이 좀 달라지죠."
"...."
"가령 3년 전 사건을 이제 와서 조사하겠다거나."
"...."
…허.
이것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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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의 사건이라니?"
대놓고 떠보는 질문에 나는 일단 모른 척 입을 열었다.
하지만 클로이는 그것마저 의심하는 건지,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알아듣게 설명을 하시죠. 진짜 궁금해지려고 그러니까."
"...."
클로이는 가만히 서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더 이상 에너지를 소비하기 싫은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어요. 가서 볼일 봐요."
"...."
그리곤 먼저 자리를 떴다.
나는 그녀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모른 척 표정을 유지했다.
'…뭔가 있긴 있구만?'
이내 피식 실소를 뱉었다.
어떻게든 감추려고 하는 모양인데... 저렇게 대놓고 티를 내주면 오히려 더 알려주는 꼴이 아닌가.
괜히 더 파헤치고 싶어지네.
"연락처는 알아냈어요?"
마침 다가온 김민주가 물었다.
"응. 차량도 빌려준다고 하니 바로 한번 만나보자고."
"좋네요. 시간도 널널하니...."
한유빈이 대신 대답했지만,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세 명이 다 같이 움직이면 분명 저쪽에서도 이상하게 볼 겁니다. 클로이도 벌써 의심하기 시작했고요."
"...?"
"엄연히 토벌 사업을 위해서 온 거 아닙니까. 최소한 한 명 정도는 일하는 척이라도 해줘야죠."
"그래서요…?"
"한유빈 씨는 매입할 지역으로 가서 토벌 시스템 검토해주세요."
"...."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혼자 가요?"
"뭐, 클로이라도 붙여드립니까?"
"...."
도끼눈을 뜨고 날 바라보길 잠시.
그녀는 옅은 한숨과 함께 털레털레 복도를 걸어 나갔다.
"여기 직원들이 보면 까무러치겠네요."
"뭔 소리야?"
"상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지부를 다 뒤집어엎고 나간 분인데, 선생님 말에 저렇게 고분고분 따르는 걸 보면 충격 먹지 않겠어요?"
"...."
그 정도야?
***
"역시 대표님이라니까!"
카르마 코퍼레이션 지원본부장실.
방금 막 귀국한 하성일 본부장은 그곳에서 박람회 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가 감탄사를 터트리자, 이아영 본부장이 꽤나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감탄할 일이에요?"
"당연하죠. 임시 보관소 하나 때문에 박람회까지 여는 대표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
"솔직히 대표님이 정말 농땡이 피우려고 그런 거겠습니까. 이 본부장님도 잘 아실 거 아니에요. 본인 직원한테 문제 생기면, 절대 그냥 못 지나치는 분이라는 거."
"...알죠."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김준우한테는 농땡이다 뭐다 하면서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그가 정말 농땡이 필 생각으로 일을 벌인 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청소팀에 대한 인식이 바닥이라는 것을 참을 수 없었겠지.
그리고 과정을 떠나서 박람회 개최는 결과적으로 꽤나 효과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가 합동해서 임시 보관소 폐쇄를 요청하고 있다는 걸 굳이 사람들에게 알리진 않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인터넷상에서 알음알음 퍼져나기 시작했다.
박람회를 갔다 온 사람들은 이기적인 그들의 행태를 맹렬하게 비판했고, 점점 여론이 과열되자 결국 지자체까지 나서주었다.
그 결과, 모든 임시 보관소를 다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덤으로 던전 청소팀이 작전팀, 지원팀과 마찬가지로 엄연히 토벌 인원이라는 인식이 이제야 자리 잡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임시 보관소 폐쇄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심에 강순복 부녀회장이 있었다던데....
뭐, 아직 사실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런데 청소팀과 지역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 대체 어떻게 인터넷에 퍼진 겁니까? 우리 쪽에서 기사화한 적도 없다면서요."
이아영 본부장이 목소리를 팍 죽이며 대답했다.
"박근태 부장님 아드님이 X튜버래요."
"아...."
하성일 본부장은 그 한마디에 모든 걸 납득했다.
"어쨌든 이렇게 손수 직원들을 챙기는 분이 어디 흔합니까. 모든 직원에게 인정받고 있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뭐… 그렇긴 해요."
"이대로만 가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도 시간문제 아니겠습니다. 머지않아 정말 국제 협회를 집어삼킬지도 모르겠네요."
"글쎄요...."
늘 자신감에 차 있던 이아영 본부장이 뜻밖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연히 하성일 본부장은 퍽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있죠. 국제 협회가 기어이 뱅크 아이템을 모두 소유하게 됐잖아요."
"...?"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물음이 얼굴에 쓰여 있는 표정이었다.
"지금 던전과 헌터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에요. 수에 차이만 있을 뿐, 헌터와 던전이 없는 나라는 없죠. 심지어는 토벌 사업이 유일한 국가 산업인 나라들도 있고요."
"그, 그렇죠. 그 덕에 우리도 돈을 벌고 있는 거고요."
"그런데 어느 한 명이 모든 뱅크 아이템을 소유하게 되면, 전 세계 모든 던전과 헌터를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게 돼요."
"...!"
"가령 전 세계 던전 출현 숫자를 임의로 조정해서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할 수도 있고, 그걸 빌미로 모든 국제 정세에서 주도권을 쥘 수도 있겠죠."
"그건... 확실히 위험하군요."
"뭐,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다행이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더한 것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하성일 본부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막을 방법은 없는 겁니까?"
"뱅크 아이템을 다시 회수한다면 막을 수 있겠죠. 대표님도 그걸 위해서 미국에 간 거고요. 물론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실패한다면 차선책은 있습니까?"
"글쎄요."
이아영 본부장이 말끝을 흐렸다.
이걸 차선책이라고 해야 할지 본인도 망설여진 까닭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건 거의 도시 괴담 수준의 이야기였으니까.
"에덴, 이라고 들어봤어요?"
"...아뇨."
하성일 본부장의 눈썹이 물결친다.
"50년 전, 그러니까… 전 세계에 차원이 열리고 이능력이 생겨난 그 날, 지구에 혜성이 하나 떨어졌어요."
"아, 그건 알고 있습니다. '시니아'라는 혜성이었죠?"
"맞아요. 전 세계 과학자들은 그 혜성 때문에 지금의 현상이 일어났다고 추측하고 있고요. 그래서 혜성을 조사해보면 다시 세상을 원래대로 돌릴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나오고 있죠."
이아영 본부장은 펜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아쉽게도 혜성의 잔해들을 아무리 연구해봐도 특별한 점은 찾지 못했어요. 그냥 죄다 얼어붙은 돌멩이였죠."
"이 현상이 일어난 게 혜성과는 아무 연관도 없다는 소리군요."
"확신할 순 없어요. 아직 연관성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당시 연구원 중 한 명이 내놓은 가설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꽤 유행을 타기도 했고요."
"가설이라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시니아의 핵이 이 모든 현상을 일으킨 원인이다, 라는 가설이죠."
이아영 본부장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네. 에덴은 그 시니아의 핵을 말하는 거예요."
하성일 본부장의 표정이 꽤나 복잡해졌다.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던 까닭이었다.
이아영은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빼며 말했다.
"에덴을 파괴한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 뭐 그런 이야기에요."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건...."
"말 그대로 던전도, 헌터도, 이능력도 없던 그 시절 말이에요."
"...."
"하지만 결국 가설일 뿐이고, 실제로 에덴이라는 게 있는지조차 모르니.... 그냥 괴담 수준의 이야기죠."
말을 마친 이아영이 손을 휘이 저었다.
깊게 생각할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미였지만, 하성일 본부장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이었다.
"만약 그 에덴이라는 걸 발견한다면, 뱅크 아이템은 무용지물이 되겠군요."
"그렇겠죠. 던전도, 이능력도 모두 사라질 테니까. 물론 발견한 사람이 에덴을 파괴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당연히 파괴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네…?"
"전 세계에 던전 관련 종사자만 수억 명이에요. 던전이 사라지면 그 사람들 모두 일자리를 잃는 셈인데, 누가 그걸 쉽게 파괴하겠어요. 하 본부장님이랑 나도 마찬가지고. 하물며 청소팀이 발견해도 절대 파괴 안 할걸요?"
"...."
하성일 본부장은 대답을 아꼈다.
반박할 여지도 없이 맞는 말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국제 협회가 먼저 에덴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뭐, 그건 가장 최악의 상황이겠죠."
"어려운 문제군요."
"그렇죠. 실존하는지도 모르고, 설령 있다고 해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발견한다고 해도 국제 협회 손에 들어간다면 그땐 정말 방법이 없고."
"...만약 그게 발견된다면 말입니다."
이내, 하성일 본부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왕이면 대표님이 발견했으면 좋겠군요."
이아영 본부장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동감이에요."
***
"여기 맞아?"
"네, 주소는 여기 맞아요."
뉴욕 근처 도시, 트렌턴에 위치한 주택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서류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올리버 존슨, 34살. 청소 2팀 소속으로 5년간 근무. 그러다 3년 전 개인 사정으로 인해 퇴사...."
3년 전의 청소 2팀이라면 확실하다.
그 던전에 있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담을 쌓고 있다길래 어디 꼭꼭 숨어 있는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군.'
나는 어딜 봐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집을 슬쩍 훑었다.
어쩌면 쉽게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택의 초인종을 누르는 순간.
탕―!!
"...?"
"...?"
분명 집안에서 총성이 들렸다.
동시에 웬 총알이 문을 뚫고 내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갔다.
'...하.'
쉽긴 개뿔.
"서, 선생님… 일단 뒤로 좀 피하죠."
"아니, 괜찮아."
정말 죽일 생각이었으면 한 발로 끝내지 않았겠지.
이건 그냥 위협용이다.
물론 위협용이라고 해도, 벨을 누르자마자 총을 갈기는 게 정상은 아니지만.
'대체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걸까.'
잠시 기다렸다가 굳게 닫힌 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김준우 대표라고 합니다."
"...."
"이번에 저희 쪽에서 청소팀을 하나 신설하는데, 마이클 지부장님이 선생님을 추천해주시더군요. 혹시 이야기 좀 나눠볼 수 있을까요?"
"...돌아가."
그 대답을 원한 게 아닌데.
"저희 팀으로 와주신다면 기존보다 높은 연봉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관심 없으니까 돌아…!"
"더불어 선생님의 안전도 보장해드리죠."
"...!"
순간 대답이 끊겼다.
무거운 정적이 이어지길 잠시.
"너, 너… 국제 협회에서 온 거 아니야…?"
드디어 그가 제대로 된 말을 뱉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흰 국제 협회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저흰 그저 신설될 청소팀에 선생님을...."
"거짓말하지 마! 퇴직한 청소부라면 나 말고도 수백 명이잖아! 날 찾아온 진짜 목적이 뭐야!!"
"진짜 목적이라...."
극도로 겁에 질려 있는 만큼 눈치도 빠르군.
에휴, 어쩔 수 없지.
경계를 풀려면 나 또한 본심을 내비치는 수밖에.
"전 국제 협회를 없애려고 합니다."
"...?!"
"어떻게, 이제 대화를 좀 나눠볼 생각이 들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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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는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마주한 남자는 꽤나 피폐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움푹 팬 두 눈과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살아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마른 몸.
누가 봐도 족히 몇 달은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두 명이 끝이냐? 더 없는 거지?"
"예. 이쪽은 저희 작전 본부장...."
"관심 없으니까 입 닥치고 들어와."
올리버가 말을 끊으며 손짓을 한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몇 번이나 더 주변을 살핀 후에야 문을 닫았다.
'아이고....'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모든 창문을 암막 커튼으로 가린 탓에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한 거실.
청소와는 담을 쌓고 사는 듯 어수선한 물건들과 눈에 띄는 곳곳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총기들.
무엇보다 시선이 가는 건, 모든 문에 달려 있는 자물쇠.
'어떻게 사는지 대충 감이 오네.'
집 안을 한 차례 훑어보곤 올리버를 향해 물었다.
"혼자 사시는 겁니까? 아내분과 아이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집안 꼴이 이런데 어떤 여편네가 붙어 있겠어. 진즉 이혼했지."
"…유감입니다."
"맘에도 없는 소리 집어치워."
올리버는 술병이 널브러진 소파에 풀썩 몸을 던졌다.
"국제 협회입니까?"
"...뭐?"
"이렇게까지 두려움에 떨면서 지내시는 이유 말입니다."
"...."
올리버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내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언제든 찾아와서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상적인 생활이 안 되더군."
"죽일지도 모른다니요. 협박이라도 받고 있는 겁니까?"
"...."
대답을 아끼길 잠시.
"그 전에, 네 이야기 먼저 해봐. 국제 협회를 없애버리겠다니,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을 뻔했다고. 설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도리어 그가 질문을 던진다.
'믿을 만한 놈인 건지 확인해 보겠다 이건가…?'
하여간 번거롭게 하는군.
"물론입니다."
"계획은 있고?"
"전 세계 국제 협회 지부를 비롯한 모든 독립 협회를 인수할 계획입니다."
"그게 다야? 만약 지부들이 인수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떡하려고?"
"해당 국가의 지역 토벌권을 매입해서 자체 토벌을 진행할 겁니다. 지부를 굳이 인수하지 않아도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겠죠. 때문에 곧바로 작업에 투입할 수 있는 경력직이 많이 필요합니다. 선생님을 찾아온 것도 그 이유 때문... 이라는 게 일단 표면상의 이유입니다."
"흠."
이해한 건지, 못 한 건지 알 수 없는 반응이다.
뭐, 어쩌면 처음부터 내용 따윈 신경도 안 쓰고 있었던 걸 수도 있고.
"국제 협회를 없애려는 이유는 뭐야. 사업적인 야망, 뭐 그런 건가?"
"조금 더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뭐?"
"죽기 전에 사무총장 한번 해보고 싶어서 말이죠. 그런데 기존 국제 협회와 영 사이가 안 좋아서... 이렇게 된 거 제가 새로 하나 만드는 게 빠를 것 같더군요."
"...하! 별 미친놈을 다 보겠군."
"종종 듣습니다."
올리버가 처음으로 웃는 표정을 보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최근 국제 협회가 아주 중요한 물건을 손에 넣었다더군요."
"...뭐?"
"그걸 가지고 있는 한, 제가 국제 협회를 없애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국제 협회 직원 한 명과 거래를 했습니다. 국제 협회가 가지고 있는 그 물건을 우리에게 넘기는 대가로, 3년 전의 사건을 알아봐 주겠다고요."
"...!"
"이게 선생님을 찾아온 진짜 목적입니다."
나는 올리버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대체 3년 전, 그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올리버는 또다시 입을 닫았다.
무척이나 고민하는 듯한 표정.
"...그래 시발 말해줄게. 대신 국제 협회를 없애겠다는 말, 반드시 지켜."
"물론입니다."
불안한 얼굴로 나와 김민주를 계속 힐끔거리던 끝에,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에덴."
"...예?"
"3년 전, 그 던전에서 에덴을 발견했어."
"...."
시발, 지금 뭐라고?
***
"이능석이랑 시간석이 필요하다고요?"
국제 협회 본부, 사무총장실.
웨슬리 사무총장이 노아 밸런스 팀장을 향해 되물었다.
"네."
"당신이 그게 왜 필요하죠?"
"김준우를 죽일 생각입니다."
"...."
웨슬리 사무총장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제 와서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우린 필요한 걸 모두 얻지 않았습니까."
"저번에 만났을 때 위험한 놈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그 뒤로 계속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더 큰 화를 불러올 겁니다."
"...."
웨슬리 사무총장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아닌 게 아니라, 노아 팀장의 말마따나 아무리 뱅크 아이템을 모두 가지게 됐다고 해도 여전히 김준우는 신경 쓰이는 존재이긴 했으니.
우리가 유일하게 컨트롤 할 수 없는 존재.
예측할 수조차 없는 이레귤러.
그놈이 정말 자신을 막기 위해 과거로 온 기사라면, 분명 머지않아 또다시 필사적으로 덤벼들 것이다.
죽여준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겠지만....
"알고 있습니까? 당신 이전에도 몇 번이나 김준우를 죽이려고 시도했고, 모두 실패했어요. 그 덕분에 PB 코퍼레이션에 대대적인 물갈이도 있었고요."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죽일 수 있는 겁니까?"
"제 작전대로라면 확실히 죽일 수 있습니다."
"그 작전을 위해서 이능석과 시간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고요?"
"네."
"하하, 하하하!"
웨슬리 사무총장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타이밍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당신, 혹시 김준우랑 거래했습니까?"
"...!"
"뭐, 김준우가 당신 여동생이 죽은 이유라도 알려주겠다던 가요? 그 대가로 뱅크 아이템을 다시 가져와달라고?"
그 순간, 노아 팀장이 웨슬리에게 달려들었다.
콱, 멱살을 잡아 올렸다.
"...알고 있었나?"
"뭘 말입니까? 3년 전 미국 지부에서 사망한 청소부가 당신 여동생이라는 거? 아니면 그때부터 당신이 우리 뒤를 파고 있었다는 거?"
"알면서도 날 영입한 거야? 뭐, 옆에서 감시하려는 생각이었나?"
"설마요. 저는 정말 당신의 힘이 필요해서 영입한 겁니다. 애초에 당신이 우리를 의심하고 있다고 해도... 전 딱히 켕기는 게 없으니까요."
"뭐라고?"
멱살을 쥔 노아의 손에 힘이 빠졌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옷깃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 여동생, 우리가 죽인 게 아닙니다."
노아 팀장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3년 전 그 던전에서 에덴이 발견됐었습니다. 작전팀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이후 청소팀이 던전을 청소하다가 우연히 손에 넣게 됐죠."
웨슬리가 말을 이었다.
"당연히 지부에 보고해야 하는 게 절차였지만... 알게 뭡니까. 정말 에덴이라면 암시장에서 부르는 게 값일 텐데. 무엇보다 본인들만 입 싹 닫으면 들킬 리도 없을 테니, 더더욱 보고할 이유가 없었겠죠."
"소피아는 그럴 아이가...."
"네. 그녀는 반대했던 모양입니다."
노아 팀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본인이 다 지부에 보고할 거라고 나섰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을 실랑이가 벌어졌고, 한 남자가 그녀를 밀치는 순간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뭐, 뭐…?"
"당신 여동생을 죽인 건 우리가 아니라 그녀의 동료였다는 소립니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에덴의 이능파를 감지한 밸런스팀이 뒤늦게 던전 앞에 도착했고, 던전을 빠져나오던 그들과 딱 마주쳤죠. 그런데 웬걸, 갑자기 에덴을 던전 안으로 던져버리더군요."
"...."
"아무래도 밸런스팀을 경찰로 착각하고, 증거를 인멸하려고 했던 거겠죠. 이후엔 모두와 거래를 했습니다. 당신들이 한 짓을 덮어줄 테니, 에덴에 대해선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웨슬리 사무총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아직 에덴은 당신 여동생과 같이 던전 속에 갇혀있습니다. 빨리 재출현을 해야 할 텐데... 소식이 없으니 원."
"...."
"어떻습니까. 서로 오해도 풀렸겠다, 이 정도면 김준우와 거래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여동생을 죽인 놈이나, 그걸 덮은 놈이나 내 기준에선 모두 똑같은 놈이야."
순간 노아의 눈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분명 똑같은 놈들이지만, 누굴 먼저 처리할지는 정해져 있었으니까.
"소피아를 죽인 그 남자… 이름이 뭐지?"
"뭐였더라...."
웨슬리 사무총장이 턱을 쓰다듬으며 기억을 헤집길 잠시.
"올리버!"
이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올리버 존슨이라고 했던 것 같군요."
"...."
그 이름을 듣자마자 노아 팀장은 대답도 없이 등을 돌렸다.
사무실을 벗어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웨슬리 사무총장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올리버가 이야기를 마쳤지만, 우린 아무런 반응도 못 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시발, 에덴이 실존하는 거였다고…?'
아니 그것보다....
노아의 여동생을 죽인 게, 이 새끼였어?
상상도 못 했던 상황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한유빈을 딴 데 보내 놓길 잘했군....'
이 자리에 있었다면, 십중팔구 이야기를 듣던 중에 올리버를 피떡으로 만들어 놨을 것이다.
빌어먹을.
생각보다 일이 너무 지저분하다.
이걸 노아한테 그대로 전달하는 게 과연 맞을까?
보나 마나 죽인 놈이랑 덮은 놈이랑 똑같다면서 다 쓸어버리려고 할 것 같은데....
'시발, 모르겠다.'
어쨌든 뱅크 아이템을 회수하는 게 우선이다.
그가 납득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다음 문제고.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지만… 네가 국제 협회를 없앤다고 해서 말해준 거야. 찾아올 것 같아서 불안해 죽을 것 같다고. 이 꼴을 봐! 지금 이게 어떻게 사람 사는 거야!"
"그럼, 본인 욕심 때문에 사람을 죽여 놓고 편하게 살 생각이셨습니까?"
"...뭐?"
"제가 국제 협회를 없애는 것과 별개로 선생님은 그 값을 치러주셔야겠습니다."
"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뭐 경찰에 꼰지르기라도 하게?! 그걸 국제 협회가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아?! 어차피 증거도 없어서 기소도 안 돼!"
올리버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됐다.
"법적으로 날 처넣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국제 협회나 빨리 없애 버리...."
"제가 언제 법으로 처리하겠다고 했습니까."
"...뭐, 뭐?"
"그렇게 편하게는 안 되죠."
앞에 놓인 남자를 어떻게 써먹을지 고민하던 그때.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쾅―!!!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집의 절반이 터져나갔다.
177
177
"선생님!!"
[고유 스킬 : 천수관음]
슥, 스윽―!
갑작스러운 공격에 터져 나간 올리버의 주택.
김민주가 무너지는 잔해를 모조리 베어버리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됐어, 괜찮아."
[습득 스킬 : 로우 실드]
쿵, 쿠궁―.
물론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예상도 못 한 공격에 당황하기도 잠시, 무너진 잔해 한복판에서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먼지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대체 어떤 새끼가....'
또다시 공격이 들이닥칠지 몰랐기에 집중해서 주변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던 그때.
바닥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 살려…!"
고개를 숙이니, 올리버의 다리가 잔해에 깔려 있었다.
콘크리트를 치우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그 순간이었다.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고유 스킬이 지속되는 한, 시전자의 모든 스테이터스가 지속적으로 상승합니다]
[생존 - 제1 법칙]
[무관용]
뻐억―!
콰과과광―!!!
"윽…!"
흙먼지 속에서 난데없이 주먹이 날아들었다.
반사 신경으로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딱 그것뿐.
생각보다 꽤 강력한 충격이 온몸에 전해졌고, 뒤로 한참을 날아가 잔해 속에 파묻혔다.
'크윽…!'
공격을 막은 팔조차 저릿저릿한 감각이 느껴진다.
하지만 쉬고 있을 틈은 없다.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한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저 새끼....'
노아 웨스턴우드.
현 랭킹 1위이자, 밸런스 조정팀장.
'저 새끼가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여기 있을 리가 없는 놈이 다짜고짜 나타나서 공격을 한다고?
아니 그것보다....
방금 공격... 정말로 죽이려고 작정한 공격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이를 으득 씹자, 노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지?"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겁니까?"
"사무총장에게 들었다. 3년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이 발견됐었는지, 누가 소피아를 죽였는지까지 전부."
"...!"
이제 와서 그걸 노아한테 털어놓았다고?
어째서?
'설마 나랑 거래했다는 걸 들킨 건가…?'
뱅크 아이템을 뺏기지 않으려고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런고로 유감스럽지만, 거래는 불발이다."
"...그건 약속이랑 다른데."
"억울하면 더 빨리 알아냈어야지."
나는 대답을 아꼈다.
맞는 말이다.
선수를 빼앗긴 이상, 저놈은 더 이상 나와 거래할 이유가 없다.
'시발, 이러면 말짱 도루묵인데....'
일이 점점 꼬이는군.
"그럼 여긴 왜 온 겁니까. 저 남자를 죽이기라도 하려고요?"
"설마 막을 생각이냐?"
"...그렇다면?"
"같이 죽여줘야겠지."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3 법칙]
[강탈]
다시 공격 태세를 갖춘 그의 몸을 따라 거센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김민주가 검을 꺼내 들었다.
"선생님, 여긴 저에게 맡기고...."
"됐어. 너한텐 아직 버거운 상대야."
나설 때 나서야지.
요령으로 랭킹 1위에 오른 자가 아니다.
오직 살아남는 것에만 중점을 둔 고유 스킬.
그로부터 파생된 '생존' 스킬들은 그 하나하나가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상대가 많을수록, 그리고 전투가 길어질수록 무적에 가까워지는 특성.
지금의 김민주로는 상대조차 안 된다.
'귀찮게 됐네....'
시선을 돌려 여전히 잔해에 깔려 있는 올리버를 바라봤다.
벌벌 떨리는 몸과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
살려달라는 뜻인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다.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본 소립니다. 당신 복수에 끼어들 생각은 없으니,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죠."
"뭐…?! 이, 이봐! 이러는 게 어디 있나!"
올리버가 마구 고함을 질러댔다.
하지만 노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를 죽인 다음에는 어떡하실 겁니까?"
"...뭐?"
"당신 여동생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다 복수하고 나면, 그다음 타깃은 국제 협회냐고 묻는 겁니다."
"그렇겠지. 죽인 놈이나, 그걸 묻은 놈이나 똑같은 놈들이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순서가 잘못됐습니다."
그 순간, 노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무총장이 왜 이제 와서 당신한테 그 이야기를 해 준 것 같습니까. 복수할 거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뭐?"
"당신이 3년 전,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다 죽여줬으면 한 겁니다."
"하! 웃기는 소리군. 그랬으면 3년 전 그 당시에 죽였겠지."
"그때는 에덴의 유일한 목격자인 만큼, 에덴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죠. 뱅크 아이템을 모두 손에 넣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미 국제 협회는 전 세계를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습니다. 전 세계 모든 던전과 헌터를 관리하게 되겠죠. 설령 에덴이 다시 발견된다 해도, 무조건 국제 협회 손에 들어갈 겁니다."
"...그래서, 더 이상 단서를 가지고 있는 놈들은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국제 협회 또한 에덴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는 걸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순순히 넘어가 준다? 그건 그냥 국제 협회를 무적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
노아의 기세가 점점 수그러들었다.
거래는 불발, 뱅크 아이템 회수는 실패.
이제 국제 협회는 뱅크 아이템을 이용해 국제 사회의 주도권을 잡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 국제 협회를 상대하겠다는 건, 전 세계를 상대하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린다?
그건 단순히 승패를 떠나서 그동안 쌓아온 모든 걸 잃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현재로선 국제 협회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딱 한 가지를 제외하곤.
"우리가 먼저 에덴을 찾아야 합니다. 그게 국제 협회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그래서 순서가 잘못됐다는 겁니다. 국제 협회를 먼저 치고, 그다음에 복수하든 말든 해야죠."
"에덴을 찾아서, 국제 협회를 먼저 무너뜨리라는 거냐?"
"그렇습니다."
그래, 우리가 에덴을 찾는다면 말이 달라진다.
아니, 찾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에덴마저 국제 협회 손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아무리 탐탁지 않아도 이 남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노아가 최소한의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뭐가 더 중요한지 정도는....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1 법칙]
[무관용]
"...!!"
콰과광―!!
또다시 날아드는 주먹.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존나 마음에 안 드네."
"...?"
"이 새끼고 저 새끼고 날 휘두르려고 하는 게 존나 마음에 안 들어."
"그게 무슨...."
"시발, 내가 만만해?"
그의 눈빛이 번뜩인다.
"에덴이고 나발이고, 이제부턴 그냥 내 마음대로 한다. 막을 생각이면 지금 덤벼. 죽여줄 테니까."
"하...."
성격 한번 개차반이네.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무너져 내린 천장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가 안 통하니....
"…어쩔 수 없지."
[고유 스킬 : 마왕]
"경고했습니다. 조심하세요."
생각을 고쳐먹을 때까지 두들겨 패주는 수밖에.
"죽이고 싶진 않으니까."
***
"노아가 김준우랑 거래를 했었다고?"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웨슬리 사무총장을 마주한 에마 대표가 되물었다.
"여동생 일에 미친 놈이잖아. 아마 3년 전 사건을 알아봐 주는 대가로 뱅크 아이템을 요구했겠지."
"그래서 그놈한테 다 말해 준 거야? 선수 치려고?"
"그런 것도 있고...."
웨슬리 사무총장이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그놈이 알아서 다 죽여줄 거 아니야.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지."
"클로이 팀장한테 연락이 왔어. 김준우가 미국 지부에서 3년 전 사건을 캐고 있다고. 아마 둘이 부딪히는 것도 시간문제일 거야. 그놈 성격상 노아가 청소부를 죽이게 둘 것 같진 않으니까."
"그럼 오히려 더 잘됐네."
"...뭐?"
웨슬리 사무총장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김준우가 죽든, 노아가 죽든... 아니면 3년 전 에덴을 발견했던 청소부들이 죽든, 결과적으로 우리한텐 다 좋은 일이니까."
"만약 아무도 죽지 않으면?"
"흠, 그건 조금 곤란하겠네.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실소를 뱉었다.
현 세계 랭킹 1위의 헌터.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자로, 국제 사회에서도 가장 위험인물로 분류된 최강의 헌터가 아닌가.
물론 김준우도 만만히 볼 놈은 아니다.
등록되지 않은 이능력자이기에 정확한 수치를 판단할 수 없지만. 여태까지의 행적으로 봤을 때, 김준우의 실력은 노아와 견줄 수준이라는 건 분명하다.
서로 호각인 이들이 진심으로 부딪친다면 누가 누굴 살려줄 여유 따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둘이 맞붙는 순간,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죽는다.
***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전투 시간 30분 경과]
[현재 스테이터스]
[근력 : 29,635]
[체력 : 14,193]
[민첩 : 15,563]
[마력 : 25,343]
[생존 – 제2 법칙]
[무기 습득]
슈우우웅―.
노아가 천장을 아슬아슬하게 받치고 있던 기둥을 뽑아 나를 향해 휘둘렀다.
쾅―!!!
휘두른 궤적을 따라 땅이 들고 일어날 수준의 위력.
하지만.
[고유 스킬 : 마왕 - 강자 독식]
[고유 스킬이 지속하는 동안 시전자보다 마력이 낮을 경우, 모든 공격은 무효화 됩니다.]
내겐 전혀 대미지를 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유 부리고 있을 틈은 없다.
놈의 스킬 때문에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내 쪽이니까.
[고유 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제작 스킬 : 행맨]
촤라락―.
"크윽!"
튀어나온 밧줄이 노아의 몸을 휘어 감았다.
[습득 스킬 : 한계돌파]
[시전자의 모든 스테이터스가 일시적으로 한계치를 넘어섭니다.]
[습득 스킬 : 과몰입]
[전투 중 시전자가 사용하는 모든 스킬의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쾅―!!!
그의 복부에 강력한 폭발이 직격했다.
하지만....
"끄으으으…!"
기절조차 안 한다고?
대체 어떻게 돼먹은 몸뚱이....
투두둑―.
"...!"
노아가 곧바로 밧줄을 끊고는 나를 향해 달려든다.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4 법칙]
[세력 확장]
쿠구구구구―!!
그의 주변을 따라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나라도 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면 무사하진 못하겠지.
[습득 스킬 : 하이퍼 부스트]
파앗―.
최소한 근접전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여유 부리면서 상대할 만한 놈은 아니다.
조금은 진지하게 해 볼까.
[S랭크 스킬의 안전장치 해제 시퀀스를 시작합니다.]
[발동 조건 확인 중]
[발동 조건이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스킬의 안전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습득 스킬 : 전능]
슈욱―!
그를 향해 순백의 창이 날아들었다.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3 법칙]
[강탈]
[상대방 스킬의 제어권을 뺏어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창의 궤도가 180도 바뀌었다.
슈욱―!
"뭐, 뭣…?!"
쾅―!!
곧바로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노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생존 – 제1 법칙]
[무관용]
[생존 – 제2 법칙]
[무기 습득]
쾅―!
콰과광―!!
맹렬하게 파고드는 공격.
실시간으로 위력이 강해지고 있다.
지금도 놈의 스테이터스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고 있으니까.
'이대로 놈에게 페이스를 빼앗기면....'
그건 정말 위험하다.
"쯧…!"
나는 서둘러 거리를 벌렸다.
[습득 스킬 : 이계 소환]
[차원에서 10분간 하수인을 소환합니다.]
[시전자 능력치를 분석합니다.]
[분석 완료]
[고유 스킬 - 마왕 활성화]
[해당 능력치에 비례하는 하수인이 소환됩니다.]
지이잉―.
바닥에서 보랏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5 법칙]
소환을 기다려 줄 생각은 없다는 듯, 곧바로 나를 향해 달려든다.
하지만 충분하다.
[고유 스킬 : 마왕 - 강자 독식]
[고유 스킬이 지속하는 동안 시전자보다 마력이 낮을 경우, 모든 공격은 무효화 됩니다.]
달려드는 노아를 향해 팔을 치켜들었다.
쾅―!!!
"...?"
시야가 빙글 돌았다.
깜빡이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았고, 그제야 비로소 내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시발, 뭐야.
지금 저 새끼....
[시전자보다 높은 마력이 감지되었습니다.]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 각성]
[최후의 생존자]
기어이 내 스테이터스를 넘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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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정체가 뭐야, 저 새끼....'
노아는 나가떨어진 김준우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분명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지만, 오히려 당황스러운 쪽은 노아 본인이었다.
그도 그럴 게 고작 한 방이었다.
무려 30분 동안 전력을 다해서, 고작 한 방을 먹인 것이다.
그전까진 제대로 된 공격은커녕 이렇다 할 대미지조차 줄 수 없었다.
'시발, 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길래....'
무엇보다 소름 끼치는 건... 저놈, 자신에게 죽일 생각은 없다고 했다.
정말 죽일 각오로 덤비고 있는 자신과 다르게 죽이지 않을 만큼만 힘을 쓰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랭킹 1위인 자신을 상대로 힘을 아껴 가면서 싸울 수 있는 헌터?
그게 존재한단 말인가.
"이거 놀랍군요."
그때, 잔해 속에서 김준우가 몸을 일으켰다.
"순수하게 힘으로만 저한테 한 방 먹인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확실히 세계 랭킹 2위 딱지가 그냥 붙은 건 아니군요."
"…어이가 없군. 네놈이 비공식 1위라는 소리냐?"
"비공식이라뇨?"
김준우의 시선이 노아를 향했다.
"아직도 감이 안 오십니까?"
여전히 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여태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눈빛이다.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빌어먹을....'
그가 이를 으득 씹었다.
슬슬 몸에 무리가 오고 있다.
스테이터스를 이렇게까지 끌어올린 건, 1년 전 레드 등급 던전 이후로 처음이었다.
다시 말해, 저 새끼는 지금 혼자서 레드 등급 몬스터에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다.
과연 그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 새끼의 스킬은 어중이떠중이 같은 헌터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무엇이다.
'강자, 그 위의 강자인 건가....'
그간 수많은 세계 랭커들을 만나왔지만.
저놈을 마주한 지금, 그 모든 게 애들 장난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다.
'이길 수 있는 건가....'
잠시 의문이 생겼지만 그뿐이다.
노아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래, 언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싸워왔는가.
매일 같이 양부모에게 두들겨 맞았을 때도, 소피아와 함께 집을 나왔을 때도, 처음 던전에 들어갔을 때도, 랭킹 1위에 올랐을 때도 딱 하나만 생각했다.
그저 살아남는 것.
오늘도 그 연장선이다.
"하아압!!"
노아는 우렁찬 기합과 함께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1 법칙]
[무관용]
쾅, 콰광―!!
내지른 주먹 한 방에, 주변의 잔해가 하늘로 솟구쳤다.
하지만 김준우는 또다시 빠른 속도로 그 공격을 피했다.
현재 노아의 스테이터스 총합은 19만.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다.
김준우도 이를 안 건지 피하는 데 집중했다.
콰직―!
쾅, 콰광―!!
퍼버버벙―!!
노아는 피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김준우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고유 스킬 : 마왕 - 독재자]
[제작 스킬 : 마검 소환]
허공에서 커다란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3 법칙]
[강탈]
슈우우욱―!
검은 노아가 아닌, 김준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쾅―!!!
"…크윽!"
땅이 흔들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충격.
모든 공격을 회피하던 김준우도 이번만큼은 꽤나 대미지를 받은 듯했다.
공격을 소멸시키는 김준우의 스킬은 이제 무용지물이 된 듯했다.
즉석에서 스킬을 만들어도 뺏으면 그만이다.
당장에 놈을 쓰러트릴 수 없지만, 스테이터스가 최대치에 도달하면 가능성은 있다.
최대치에 도달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10분.
공격을 막아내며 딱 10분만 버틴다면....
이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건 좀 위험하겠군요."
김준우의 소름 끼치는 눈빛이 노아를 관통했다.
전신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움츠러들기도 잠시.
"그럼 그 전에 날 죽여 보던가."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5 법칙]
[강행돌파]
파앙―!!
땅을 박차고 다시 한번 앞으로 달려들자, 공간이 흔들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일었다.
[생존 – 제1 법칙]
[무관용]
온 힘을 주먹에 실어 넣으며 김준우를 향해 내뻗었다.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김준우의 전신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기류가 터져 나왔다.
[각성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시전자는 기존의 클래스를 초월합니다.]
[각성 클래스 : 절대 군주]
"...어?"
노아의 몸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순간 김준우의 스킬 효과인가 싶었지만.
'아니, 이건....'
본능이다.
본능이 몸을 막아선 것이다.
더 다가가면 정말로 죽는다는, 그 압도적인 공포심을 느낀 본능이.
"시, 시발…!!"
노아는 고함을 내지르며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3 법칙]
[강탈]
하지만....
[...스킬 시전 불가]
"...뭐?"
[올바른 시전 대상이 아닙니다.]
[대상을 다시 지정하십시오.]
"시, 시발, 무슨 말도 안 되는...."
당혹감에 노아의 머리가 순간 하얘졌다.
그사이 김준우의 손가락이 자신에게 향했다.
눈을 마주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엄청난 위압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떨어졌다.
[절대 군주 : 디스트로이어]
────!
이내 주변 소리가 사라졌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웨슬리 이 미친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놈을 적으로 둔 건가.
***
올리버의 집을 포함해 완전히 초토화가 된 걸 보고, 난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설마하니 각성 스킬까지 쓰게 될 줄이야.
하지만 나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 노아의 스테이터스는 총합 25만을 돌파했었으니까.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희미하게 느꼈던 위기감을 털어내자 김민주가 다가왔다.
"서, 선생님…?"
"걱정 마. 안 죽였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노아를 흘기며 대답했다.
사실 마지막 공격에 녀석이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어쭙잖게 힘 조절을 하면서 싸울 만한 놈이 아니었으니까.
'이걸로 죽으면 어쩔 수 없겠거니 했는데....'
겨우 의식을 잃은 것으로 끝날 줄이야.
이놈이었으니까 가능했지, 다른 놈 같았으면 이미 저세상행이었을 거다.
'확실히 강한 놈이긴 하네.'
녀석의 끈질긴 생명력에 절로 고개가 저어진다.
"여, 역시! 말은 그렇게 해도 구해줄 줄 알았다니까!"
그때, 김민주가 구해준 올리버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놈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착각하지 마시죠. 아직 쓸모가 있어서 살려둔 것뿐이니까."
"어 어…?"
"당신도, 저기 쓰러져 있는 놈도, 국제 협회에 대항하려면 아직은 필요합니다. 물론 도움이 안 된다면 그땐 제 선에서 처리하겠지만."
"...."
올리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노아를 여기서 죽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PB 코퍼레이션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여동생의 복수다.
그 복수 대상에 국제 협회가 들어가 있는 이상, 그의 칼날은 언젠간 본부를 향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본부 입장에서도 껄끄러운 존재겠지.
여기서 노아를 죽인다면, 본부의 골칫거리를 하나 줄여주는 것밖엔 안 된다.
무엇보다....
'저놈도 생각이라는 게 있으면 이제 아군, 적군 정도는 구분하겠지.'
도와주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녀석이 국제 협회에 맞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이니까.
'하아....'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뱅크 아이템은 결국 회수하지 못했고, 국제 협회는 전 세계 던전과 헌터를 컨트롤 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에덴까지 그놈들 손에 들어가게 되면... 더는 국제 협회를 막을 방법이 없다.
제2의 국제 협회.
5년 이내에 사무총장 취임.
업보 스킬 해제.
원래 몸으로 복귀.
전부 불가능한 일이 되겠지.
그러니 일단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먼저 에덴을 손에 넣는 게 우선이다.
"3년 전 에덴이 발견됐던 던전 정보, 혹시 기억하십니까?"
"어… 그, 그게… 옐로우 등급의 차원형 던전이었던 것 같은데...."
차원형 던전.
던전 중에서 재출현 기간이 가장 긴 던전이다.
하긴, 그러니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겠지.
차원형 던전의 평균 대기 기간은 3년....
딱 재출현할 시기다.
문제는 미국 어디에 재출현할지 모른다는 건데....
'운 좋게 우리가 매입한 지역에 출현하면 좋겠지만.'
말도 안 되는 확률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운에 기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접니다."
「어떻게 됐어요?」
전화를 받은 이아영 본부장이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거래는 불발됐습니다."
「...네?!」
"거기다 3년 전에 에덴이 발견됐다더군요."
「에, 에덴이요? 그게 정말 실존했다고요?!」
"그런 모양입니다. 뭐, 알고 계시겠지만 만약 에덴이 국제 협회 손에 들어가게 되면 다 끝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하는데... 우리가 미국 전역 던전을 관리하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하겠죠.」
「그 말은....」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미국 지부, 우리가 인수합시다."
***
국제 헌터 협회, 본부.
"방금 미국 트렌턴에서 전투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들어 왔습니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고 하는데...."
웨슬리 사무총장에게 보고하던 수행비서가 그의 눈치를 보며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이후로 노아 웨스턴우드와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연락이 끊겼다고요? 사망한 게 아니라?"
"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걸 보면 사망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기어이 아무도 죽지 않은 건가.
'쯧, 이러면 귀찮아지는데....'
그 인간은 머릿속에 오로지 여동생의 복수밖에 없는 놈이다.
그 대상에 국제 협회가 들어 있는 한, 언젠간 반드시 우리를 공격하려 들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김준우와 손이라도 잡는다면... 그건 확실히 곤란하다.
어쩔 수 없지.
예정보단 이르지만, 슬슬 움직이는 수밖에.
"지금 당장 기자회견 준비해주세요."
"네, 네?"
수행비서가 화들짝 놀랐다.
"아, 아직 에덴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벌써 움직이시는 건 조금 위험한...."
"그때까지 기다리다가 김준우나 노아가 공격이라도 해오면, 당신이 책임질 건가요?"
"...."
"그들이 이빨을 드러내기 전에 국제 사회를 장악해둬야 합니다. 때를 기다리는 건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수행비서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일단 우리 소속 지부 이외, 모든 국가의 던전 출현을 제한하는 것부터 시작하죠."
웨슬리 사무총장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이제부턴 전 세계 모든 던전과 헌터... 우리가 관리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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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네바다주에 있던 한유빈을 다시 호출해서 그간의 이야기를 전달하자, 그녀가 사뭇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미국 지부 인수는 불가능해요."
"...너무 극단적이군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일본 지부 때랑은 상황이 달라요. 그때는 우리가 개입할 구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명분이 없잖아요."
"...."
사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다.
나 또한 그걸 모르고 말한 것도 아니고.
한유빈이 계속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새로 부임한 지부장이 꽤나 엄격한 사람이라 건덕지 잡을 것도 없을 거고.... 게다가 미국 지부는 본부와 사이도 좋아서 국제 협회를 탈퇴할 이유가 없어요."
"그렇다고 우리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도 아니죠."
"맞아요. 지역 토벌 문제도 사실 골칫거리 수준인 거지, 그것 때문에 지부가 휘청거릴 정도도 아니고요."
한마디로, 우리가 아무리 인수하겠다고 떠들어대도 미국 지부가 그걸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다는 소리다.
"방법이 없는 걸까요...?"
김민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유빈은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상식 밖의 액수를 제안한다면 혹시 모르긴 하겠는데...."
"우리에게 그 정도 거액은 없죠."
내가 대신 대답했다.
미국 지부가 혹할 만한 금액을 제시하려면 우리 회사를 통째로 팔아도 모자랄 것이다.
'돌고 돌아 산이로군.'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에덴을 우리가 먼저 발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미국 전역의 던전을 뒤져야 하는데... 인수를 하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방법이 없는 건가, 싶은 그때.
"이번 지부장이 꽤나 엄격한 사람이라고요?"
한유빈을 향해 되물었다.
"그렇대요. 뭐, 저도 들은 거긴 한데.... 원리원칙주의에 융통성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좋게 말하면 신념이 있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외골수죠."
"그런 사람이라면 오히려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뭐가요?"
"정면 돌파."
내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면 돌파로 가봅시다."
정말 원리원칙주의자에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뭣들 합니까. 당장 지부로 갑시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지금 뭐라고요…?"
마이클 지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국제 협회를 탈퇴하시고, 저희에게 지부를 매각해주십시오."
"하, 하하. 대체 갑자기 그게 무슨...."
마이클 지부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뱉었다.
뭐 당연한 반응이다.
어떤 미친놈이 아무런 조건 없이 인수합병을 제안하겠는가.
물론 조건이 없는 거지, 이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국제 협회는 현재 뱅크 아이템을 이용해서 전 세계 던전과 헌터를 컨트롤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 세계가 국제 협회 손아귀에 놓이게 되겠죠."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오히려 한 기구에서 통합적으로 토벌 활동을 관리한다면 더 효율적인 것 아닌가요?"
마이클 지부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언뜻 그럴듯한 이야기였지만, 그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겠죠. 국제 협회가 정말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조직이라면요."
협회 모두가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국제 협회의 진짜 목적은 시민들의 안전이 아닌, 국제 사회를 통제하는 겁니다. 이를 위해 산하 비밀 조직까지 만들어 움직이고 있죠. 저 또한 그들에 의해 몇 번이나 죽을 뻔했고요."
실제로 한 번은 죽었고.
"물론 그들이 전 세계 던전을 통제하게 되면 이전보다 안전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안전을 핑계로 목줄을 채우는 것뿐입니다. 그걸 정말로 안전해졌다고 하진 않죠."
"...."
마이클 지부장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믿기 어렵군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이라는 게 아니라, 국제 협회가 그런 조직이라는 게 믿기 어렵다는 겁니다."
"증거가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하아...."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아끼길 잠시.
"그나저나... 그 이야기를 왜 저한테 하는 겁니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또한 이래 봬도 엄연히 국제 협회 소속입니다. 설마 제가 당신 이야기만 듣고 국제 협회를 배신할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배신이 아니라, 무엇이 더 시민을 위한 일인지 이성적으로 판단하실 거라 믿는 겁니다. 지부장님이라면요."
"...."
원리원칙주의에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회귀 전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다.
박인범 전 협회장.
이두식 이사, 등등.
그들 모두가 원리원칙주의자였으니까.
이들의 공통점은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작전팀 위주의 토벌 시스템을 바꾸려 한 것이고, 보다 안전한 토벌을 위해 조직을 개편하려고 했다.
당연히 회귀 전의 나에게는 그것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현재 우리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미국 지부를 인수할 수 없다.
미국 지부 또한 그 어떤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인수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하지만 정말 마이클 지부장이 그들과 같은 부류라면, 정말로 시민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대로라면 국제 협회의 통제를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에덴을 먼저 손에 넣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죠."
"에, 에덴이요…?"
마이클 지부장의 눈이 동그래진다.
역시나 그는 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다.
"곧 에덴이 존재한 던전이 재출현할 시기입니다. 그리고 국제 협회의 눈을 피해서 에덴을 먼저 발견하려면... 말씀드렸다시피 국제 협회를 탈퇴하셔야 합니다."
"흐음...."
그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의 다 넘어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지, 지부장님!"
수행비서로 보이는 한 남성이 난데없이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뭡니까. 지금 손님 와 계시는 거 안 보이는...."
"보, 본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아, 아무튼 지금 당장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행비서가 우리 앞에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단상 앞에 서 있는 웨슬리 사무총장의 모습이 보였다.
「국제 헌터 협회 사무총장, 웨슬리 다비드입니다.」
그가 무척이나 엄중한 표정과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저희 국제 협회는 설립 이후 오로지 시민의 안전을 위해 활동해왔습니다. 하지만 몇몇 국가의 독립협회 및 민간 토벌 업체가 토벌을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국제적인 혼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화면에 집중했다.
「물론 각 협회의 사정을 고려하여 최대한 개입을 자제하려고 했지만, 그 정도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이대로 내버려두면 시민의 안전 또한 위협받을 거라 판단, 저희 국제 헌터 협회는 이 시간부로 두 가지 특단의 조치를 내리려고 합니다.」
그때 웨슬리 사무총장이 검지를 치켜들었다.
「첫째, 현 시간부로 전 세계 모든 이능력자는 국제 협회 소속으로만 활동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헌터는 서둘러 국제 협회에 가입 신청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만약 유예 기간 동안 가입 신청을 하지 않은 분들은 헌터 자격을 박탈, 동시에 이능력을 제한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뭐라고…?"
"하, 시발...."
마이클 지부장과 내가 동시에 반응했다.
전 세계 헌터를 모조리 집어삼키겠다니.
국제 협회 편에 서지 않으면 아예 반능석으로 이능력을 없애버리겠다, 이건가?
'얼마나 욕심쟁이들인 거야.'
치를 떨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둘째, 현 시간부로 전 세계 토벌권은 저희가 일괄적으로 관리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국제 협회 소속이 아닌, 독립협회 및 민간 토벌 업체는 앞으로 자체 토벌이 불가능합니다. 만약 이를 위반하고 자체 토벌을 계속할 시... 해당 국가의 던전 출현을 제한하겠습니다.」
"...."
"...."
이렇게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빌어먹을....'
이렇게 되면 전 세계 독립협회, 기업, 헌터 모두가 국제 협회에 붙으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헌터 입장에선 영영 일자리를 잃는다. 조직 입장에선 영영 토벌을 못 하게 될 테고.
지금의 상황에서 던전을 제한하는 걸 반길 조직은 없다.
던전이 벌어다 주는 이익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리고 그건.
"이렇게 된 이상 국제 협회 탈퇴는 힘들 것 같군요."
미국 지부도 마찬가지겠지.
"대표님의 말씀은 이해했지만, 저희로도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유감스럽지만 인수합병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
설득할 방법이 없다.
여기서 국제 협회를 탈퇴해버리면 앞으로 토벌 자체가 불가능해질 테니, 거절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단념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알겠습니...."
"국제 협회를 탈퇴할 수는 없지만, 대표님에겐 협력하겠습니다."
"...예?"
그게 뭔 소리야?
"어쨌든 에덴만 발견한다면 국제 협회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국제 협회 눈에 띄지 않게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아시다시피 출현하는 던전 대비 인원이 많이 부족합니다. 토벌을 지원해줄 인원이 상당히 필요한데...."
"아, 그건 걱정 마십시오."
내가 뒤에 있던 김민주와 한유빈을 슬쩍 보며 말했다.
"저희 쪽 인원도 꽤 되니."
"흐음, 그래도 부족할 것 같은데."
마이클 지부장이 턱을 쓰다듬었다.
"믿을 만한 길드가 더 필요할 것 같은...."
"도와주지."
그때였다.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다름 아닌 노아 웨스턴우드가 서 있었다.
"웨, 웨스턴우드? 당신이 어떻게?!"
마이클 지부장이 펄쩍 뛰었다.
노아는 그의 반응 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제 말을 듣기로 하신 겁니까?"
"X까. 국제 협회를 견제해야 한다느니, 난 그딴 거 관심 없어. 당연히 에덴 따위 발견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그럼 왜 굳이 도와주시려는 겁니까?"
"...."
그가 대답을 아끼길 잠시.
"에덴을 찾으면, 소피아도 찾을 수 있으니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알겠습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도와주신다면 감사하죠."
"그 전에 이거, 누가 지휘할 거야."
노아가 다짜고짜 쏘아붙였다.
"대륙 규모의 작전이야. 지휘해야 할 인원도 수만 명일 거고. 어지간한 놈이 아니면 사지로 내몰릴 거야."
"마침 딱 어울리는 인재가 있습니다. 김민주라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시발.'
조별 과제 조장 뽑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알겠습니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번 작전,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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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무슨 개소리야?!"
한국,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긴급 뉴스를 확인하던 이아영 본부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거 지금... 국제 협회 소속 외에는 토벌을 통제하겠다는 겁니까?"
하성일 본부장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이아영 본부장은 이를 으득 씹으며 말했다.
"본격적으로 전 세계 던전과 헌터를 통제하려는 거예요. 차원석으로 던전 수를 조절하고, 이능석과 반능석으로 헌터를 관리하겠다는 건데...."
"그러면 남아 있는 독립협회들은...."
"모두 국제 협회에 가입하려고 하겠죠. 살아남으려면."
이아영 본부장이 주먹을 꽉 쥐었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이 시간부로 독립협회, 토벌 기업, 헌터를 포함한 전 세계가 국제 협회 편에 설 것이다.
물론 그들 또한 스스로 목줄을 차는 꼴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던전은 곧 그들의 밥줄이고, 국제 협회가 그 밥줄을 쥐고 협박을 하는 이상 그들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쨌든 살아는 남아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그건.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카르마 코퍼레이션도 마찬가지겠지.
하성일 본부장의 물음에 이아영 본부장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국제 협회 가입 유예 기간은 단 한 달.
만약 그 안에 국제 협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저번에 카르텔로 지정되었을 때처럼 자체 토벌이 아예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카르마 또한 그 안에 국제 협회에 붙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죠."
이아영이 말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대표님이 국제 협회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에요. 그런 조직이 국제 협회 아래로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어요."
"하지만 토벌권을 국제 협회가 관리하게 되면, 저흰 더 이상 토벌이 불가능해집니다."
"...."
알고 있다.
하지만 김준우는 여태까지 우리를 위해 목숨마저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살겠다고 그를 저버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계속 국제 협회에 대항한다는 건, 전 세계와 맞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정말 가능할까요?"
이아영 본부장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왜, 쫄려요?"
"...."
하성일 본부장은 순간 당황했다.
"어차피 지금 국제 협회에 가입해봤자 결국 놈들 손아귀에서 놀아날 거예요. 조금이라도 눈 밖에 나면 또다시 토벌권으로 협박을 하겠죠. 국제 사회는 점점 본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겠고.... 그렇게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샌가 목줄이 채워져 있을 거예요."
"...."
"그럴 바엔 그냥 죄다 물어뜯고 알거지 되는 게 낫지."
이아영 본부장이 뚝심을 굳히자, 하성일이 미소를 지었다.
"하, 하하! 맞는 말씀이군요. 좋습니다. 버텨보죠!"
"우리는 그렇다 쳐도, 직원들이 문제에요. 토벌이 막혀버리면 월급 줄 돈도 없을 거예요. 어쩔 수 없이 구조조정을 해야 할 수도...."
"에이, 직원들이 회사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우리 욕심 때문에 그들을 버릴 순 없죠."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요?"
"제가 있잖습니까."
"...?"
하성일 본부장이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래 봬도 저 재벌입니다."
"...."
그게 뭐? 어쩌라고?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성일 본부장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접니다.」
다름 아닌 김준우 대표였다.
"뉴스 봤어요?"
「봤습니다. 일단 회사는 유지해야 하니까, 지금 당장 국제 협회에 가입하는 게 좋을 것....」
"아뇨."
단호한 목소리로 김준우의 말을 끊었다.
"버틸 거예요. 하 본부장님도 동의했고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럼 회사는 어떻게 하려고요. 토벌이 막히면 당장 직원들 월급도 못 주는....」
"제가 있잖습니까, 대표님."
그때, 하성일 본부장이 끼어들었다.
"회사는 걱정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
"당신이 만든 회사지만, 우리가 키운 회사에요. 누구 마음대로 국제 협회에 넘겨 버리려고?"
「이게 지금 자존심 부릴 일입니까?」
"자존심 때문이 아니에요."
이아영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 때문이지."
「....」
"제2의 국제 협회, 만들고 싶다면서요."
「...참 나, 알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죠.」
"그래서, 미국 지부 인수는 어떻게 됐어요?"
「불발 났습니다.」
"또?!"
「그래도 협력은 해주겠다고 합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미국 전역 던전을 모조리 토벌할 겁니다. 인원이 많이 필요한 만큼, 우리 쪽에서도 작전팀을 좀 파견해야 할 것 같군요.」
"얼마나요?"
「가능한 만큼.」
"...알았어요."
이아영 본부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만약에 한 달 안에 에덴을 못 찾으면요?"
「한 달이 지나면 우린 토벌 활동이 불가능해질 테니, 영영 못 찾겠죠.」
이아영 본부장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뭐, 당신이 알아서 하겠죠. 파견 가능한 인원 집계되면 다시 한번 연락 줄게요."
「알겠습니다.」
"수고해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 직후, 이아영과 하성일 본부장이 동시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 아빠."
"예, 할아버님."
각자 이두식 이사와 하덕수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국내 토벌 가능한 최소 인원만 남기고 모든 지부랑 길드, 모조리 미국으로 파견해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할까?"
"예예, 저흰 버티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자금 지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혹시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각자 무어라 대답을 듣길 잠시.
"오케이, 땡큐."
"감사합니다!"
두 명 다 원하는 걸 얻고는 통화를 종료했다.
***
"일단 미국 전역을 크게 네 구역으로 나눌 겁니다."
미국 지부, 작전 기획실.
마이클 지부장과 글렌 통제팀장, 숀 작전팀장.
노아와 한유빈, 김민주까지 모두 자리한 가운데 입을 열었다.
"동쪽은 미국 지부가 맡아주십시오. 그리고 서쪽은 노아 길드가, 북쪽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그럼 남쪽은?"
"남쪽은 다른 분들이 도와주실 겁니다."
"다른 분이라니…?"
"뭐, 제가 도움을 청할 곳은 한국만 있는 게 아니라서. 그나저나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리자, 타이밍 맞춰 그들이 도착했다.
"김!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한 달 만에 뵙는군요."
베트남 지부의 비엣 지부장.
콩고 지부의 브루스 지부장.
그리고 일본 지부의 하라무라 지부장까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락을 돌렸는데, 다들 흔쾌히 한걸음에 달려와 주었다.
받은 게 있으니 당연히 도와주겠다나 뭐라나.
"남쪽은 이쪽 연합이 맡아주실 겁니다."
"...."
"...."
그들을 마이클 지부장과 노아에게 소개하자, 두 명 다 퍽 당황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던 중, 노아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도와준다는 거야? 자칫하다간 국제 협회에 찍힐지도 모르는데...."
"그런 게 무서웠으면 애초에 김이랑 손을 잡지도 않았을 겁니다."
비엣 지부장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른 이들 또한 표정을 보아하니 같은 생각인 듯했다.
예전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어째 다들 나사가 하나씩 풀린 것처럼 보인다.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지도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던전이 출현하면 한 시간 내에 바로 토벌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 이상 지체되면 국제 협회가 에덴의 이능파를 감지하고 움직일 겁니다."
"한 시간이면... 꽤나 빠듯하군요."
"그걸 한 달 동안 계속 진행해야 합니다. 루틴은 제가 맞춰드릴 테니, 제 지시대로만 움직여 주시면 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덴의 외형에 대한 정보는 각 팀에 전달해 놓겠습니다. 발견 즉시 저에게 보고해주시면 됩니다. 단, 절대 던전 밖으로 가지고 나오면 안 됩니다."
던전 밖으로 나온다면 국제 협회가 곧바로 이능파를 감지할 테니까.
"한 달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던전이 토벌될 겁니다. 당연히 뒤처리해줄 청소팀도 많이 필요합니다."
"일단 저희 쪽에서 공고는 올려놨습니다."
"좋습니다. 이젠 각 구역에 가서 대기하고 계십시오. 인원이 준비되는 대로 즉시 작전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모두가 해산했다.
이어서 김민주와 한유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슬슬 준비합시다."
"네."
"알았어요."
작전에 참가한 국가만 총 5개국.
토벌 참가 인원은 약 3만 명.
비토벌 인원까지 합치면 총 5만 명의 인원이 투입된 전무후무한 규모의 작전.
만약 한 달 내에 에덴을 찾지 못하면, 나를 도운 그 5만 명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그러니 무조건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한다.
실패하면 제2의 국제 협회는커녕, 평생을 웨슬리의 개로 살아야 할 테니까.
***
기자회견 후 일주일이 지난 현재.
국제 헌터 협회, 본부.
"현재 중국, 러시아를 포함해 총 19개 협회가 추가로 가입했습니다. 헌터 등록은 총 86%가 완료됐습니다."
수행비서가 웨슬리 사무총장에게 현황을 보고했다.
"한국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수한 해외 지부들 또한 마찬가지고요."
"뭐, 아직 3주나 남았으니 천천히 생각해보겠죠."
"만약에 끝까지 가입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기업은 토벌이 막히고, 헌터는 일자리를 잃을 텐데, 뭘 그런 걸 신경 씁니까. 알아서 도태될 겁니다."
수행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전 세계가 국제 협회 손에 들어왔다.
더 이상 본인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이는 없다.
이제부턴 모든 것이 국제 협회에 의해 결정되고, 움직일 것이다.
그렇게 미소가 지어지던 그때.
"웨슬리!"
에마 대표가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뭐야?"
"요 일주일 새에 미국 내 토벌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고 있어."
"난 또 뭐라고. 열심히 토벌하면 좋은 거지,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야."
"지난주 대비 1,500%가 상승했는데도?"
"...뭐?"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상식을 벗어난 수치다.
애초에 현재 미국 지부 인원으로 일주일 만에 그 정도 토벌은 불가능하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인원이 닥치는 대로 토벌을 진행한다면 모를까.
'...잠깐.'
어마어마한 인원이 닥치는 대로 토벌을 진행하고 있다?
그것도 미국 내에서?
'설마, 이 새끼들....'
에덴을 찾고 있는 건가....
"지금 당장 노아 팀장한테 연락해서, 마이클 지부장 처리하라고 해."
"그게... 연락이 안 돼."
"뭐?"
"며칠 전에 전투가 있었는데, 그 뒤로 연락이 끊겼...."
"이런, 시발!!"
웨슬리 사무총장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에마."
"...."
"나 여기까지 정말 어렵게 왔어."
이내 그가 화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덴만큼은 안 돼. 그놈들이 에덴을 발견하면 모든 게 끝이야. 그러니까...."
그의 시선이 이내 에마를 관통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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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작전 시작 일주일째.
이례 없는 규모의 동시 토벌 작전은 아직까지 큰 문제 없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나 또한 이 정도 규모의 작전은 지휘해본 적이 없었기에 꽤나 걱정이 많았지만, 다행히 각 구역을 담당하고 있는 팀장들이 꽤나 잘해주고 있다.
동부는 미국 지부 소속의 숀 작전팀장.
서부는 노아.
북부는 김민주 그리고 남부는 비엣 지부장.
모두가 상당한 베테랑들이었다.
내가 일정과 인원에 맞춰 전체적인 토벌 루틴을 만들어주면 각 구역 팀장들은 알아서 본인들의 상황에 맞게 조정하여 진행했다.
덕분에 세부적인 사항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그만큼 전체적인 작전 루틴에 더 힘을 쏟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토벌된 던전은, 평균 대비 1,500% 이상의 토벌량을 기록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
그만큼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는 부산물은 한유빈과 하라무라 지부장이 담당하고 있는 청소팀이 처리해주고 있다.
이대로만 간다면 에덴을 찾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물론 한 달 안에 에덴 던전이 재출현해준다면.
"동부 토벌량이 어제 대비 5%가량 떨어졌는데, 무슨 문제 있습니까?"
사무실에서 현황을 확인하며 묻자, 이아영 본부장이 태블릿 PC를 보며 입을 열었다.
"미국 지부 소속의 작전 4팀에서 그린 등급 던전 토벌 중 부상자가 발생했어요. 큰 부상은 아닌데… 다른 팀이 4팀 대신 토벌 지원을 나가면서 일정이 조금 꼬였나 봐요."
"스읍. 치료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최소한 3일은 휴식을 취해야 할 거예요."
"그건 좀 곤란하군요. 다른 구역에서 지원을 좀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여유가 있는 구역이 있습니까?"
"북부가 던전 출현이 많지 않아서 아직은 여유로워요. 민주 씨한테 토벌지원팀 편성해달라고 연락해놓을까요?"
"그게 좋겠습니다."
"알았어요."
이아영 본부장은 곧바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본사에 파견 요청 직후, 한걸음에 날아온 그녀는 간단한 작전 개요만 듣고 곧바로 본인이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각 구역 토벌 현황과 헌터 상태를 체크하여 나에게 실시간으로 보고해주고 있는 덕에, 꽤나 신속하게 작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작전에 발 벗고 나선 이는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예. 김준우입니다."
「대표님, 하성일입니다. 지금 한별 상사에서 추가적인 무기랑 포션, 항공편으로 보내준다고 합니다.」
"아, 다행입니다. 마침 아슬아슬했는데."
하성일 본부장 또한 이번 작전에 도움을 자처했다.
「그리고 한별 건설 쪽에서도 임시 숙소랑 임시 통제본부는 본인들이 지어주겠다고 합니다. 혹시 추가로 더 필요한 거 있을까요?」
"각 구역으로 작전팀 이동 수단과 부산물 유통 루트가 부족합니다. 도로를 새로 깔기엔 시간이 부족하니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네, 그것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대표님은 다른 걱정 말고 작전에만 신경 써 주세요.」
하 본부장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하덕수 회장에게 직접 부탁한 건지, 한별 그룹 전체가 파견 비용 및 장비, 케어 등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래놓고 나중에 일괄 청구할까 봐 좀 무섭긴 한데....
어쨌든 지금만큼은 비용에 대한 부담 없이 작전을 진행하고 있다.
이외에도 부산물 처리 시설 직원들, 편 팀장이 이끌고 있는 통제팀, 이클립스 직원들까지.
모두가 이번 작전에 아무런 보상 없이 손을 보태주었다.
...어지간히 할 일도 없나 보다.
작전에 실패하면 다 같이 길바닥에 나앉는 건데 뭔 생각으로 나를 돕겠다는 건지.
나로선 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내젓고 있던 그때.
"김, 상황은 어떻습니까?"
마이클 지부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진행 상황도 순조롭고... 다만, 아직 에덴 소식은 없군요."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봅시다. 분명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겠죠."
내가 대답하자, 마이클 지부장이 조금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조금 걱정이긴 합니다."
"어떤 게 말입니까?"
"토벌량이 말도 안 되게 상승하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 수치면 분명 국제 협회 본부에서도 눈치를 챌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아니면 뭐, 벌써 챘을 수도 있고."
전 세계 토벌 현황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는 놈들인데 모를 수가 없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으려 할 겁니다. 어떻게 할 생각이죠, 김?"
"그건...."
마이클 지부장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저보단 지부장님이 더 잘 해결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내가 그것까지 신경 써야 하겠는가.
작전 지휘만 해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그래서 본인도 뒷짐 지고 구경만 할 생각 말고, 뭔가 도움이 되라는 의미로 한 소리였지만.
"...알겠습니다."
어째 표정이 결연하다.
뭔가 의미 전달이 잘 안 된 것 같긴 한데... 알았다니까 상관없겠지.
***
정말이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군.
마이클 지부장의 머릿속에선 일주일 내내 그 말이 깊게 박혀 있었다.
김준우 대표.
던전 청소부 출신.
전 한국 협회 최연소 작전 본부장.
그리고 현재 아시아 최대 민간 토벌 기업의 대표.
워낙 이 바닥에서 유명한 남자였으니, 그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이력이지 않은가.
처음엔 인맥과 뒷배로 성장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편견은 단 하루 만에 박살이 났다.
김준우는 작전 시작 하루 만에, 미국 전역의 토벌 루틴을 만들어 낸 것이다.
총합 250개에 달하는 팀의 모든 일정을 고려한 최고 효율의 루틴을 단 하루 만에.
그것도 모자라 일주일 내내 각 구역 인원 배치와 일정까지 완벽하게 조율하고 있다.
절로 감탄이 나오는 지휘력.
본인 또한 나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군....'
무엇보다 본인을 경악게 한 건, 그의 주변 모두가 그를 도와주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그를 도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 이 바닥을 뜨게 될지도 모른다.
토벌로 먹고사는 이들에게 그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도 기업, 협회, 심지어 개인까지 정말 많은 이들이 자진해서 발 벗고 그를 도와주고 있다.
김준우....
대체 이 남자는 그동안 어떤 행보를 해온 것일까.
'업보라는 게 정말 있긴 한가 보군....'
마이클 지부장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모두의 존경과 신임을 받고 있는 김을 보니 어째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느낀 감정은 경외보단 질투심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어마어마한 토벌 이해도.
총 5개국을 혼자서 이끄는 지휘력.
모두가 믿고 따르게 만드는 리더십.
정말이지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그런데.
'본인보다 내가 더 잘 해결해줄 거라 믿는다니....'
그것도 가장 중요한 국제 협회 본부와의 마찰을.
마이클 지부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기본적으로 사람을 신뢰하는 남자다.
그런 이를 실망시킬 순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마이클 지부장님."
사색을 깨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정장 차림의 남성들이 보였다.
물론 모두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누구시죠…?"
"본부 감사팀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
올 게 왔구나.
마이클 지부장은 마음을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잠시 자리를...."
"아뇨. 여기서 하십시오."
마이클 지부장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기세를 잡기 위해서였지만, 남자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한발 물러서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주 토벌량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더군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정산 시즌이라 그렇습니다."
"정산 시즌이요?"
남자들이 실소를 뱉는다.
"이 정도 토벌량이면 미국 전역 던전을 동시 토벌하는 수준입니다. 정산 시즌이면 작전팀 인원이 갑자기 수십 배가 늘어납니까?"
"...."
"마이클 지부장님, 사실대로 말씀하시죠."
한 남자가 마이클 지부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지금 에덴을 찾고 있는 겁니까?"
"...."
역시 알고 있었군.
"이 정도 규모의 작전이면 현재 미국 지부 인원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테고. 보아하니 한국이랑 몇몇 협회가 함께 진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남자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작전, 당장 중지하십시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미국 내 토벌 권한은 제가 가지고 있는...."
"마이클 지부장님."
남자가 마이클의 말을 끊으며 품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본부 발령 공문입니다. 작전을 중지한다면, 본부에 자리를 마련해드릴 겁니다."
"...하, 하하."
"언제까지 지부에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지부장님쯤 되시면 위로 올라가셔야죠."
마이클 지부장이 피식 실소를 뱉었다.
마이클은 본인을 잘 알고 있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인간.
덕분에 직원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특정 직군의 편의를 봐주지도, 그렇다고 소외 직군을 편애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걸 원리원칙에 따라 처리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하지만 대개 그런 부류는.
"설마… 제가 그런 거에 혹할 거라 생각한 겁니까?"
이런 같잖은 회유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말씀드렸다시피, 현재 미국 지부는 정산 시즌입니다. 당연히 작전은 계속할 거고 그것을 막을 권한은 당신들에게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순간 남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이내 그가 품속에서 또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었다.
"국제 협회 탈퇴 명령 공문입니다. 당장 작전을 중지하지 않으면 미국 지부, 국제 협회에서 강제 탈퇴시키겠습니다."
"...!"
"어떻게, 이건 좀 혹하십니까?"
마이클 지부장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강제 탈퇴 명령.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웨슬리 사무총장이 통보하길, 국제 협회 소속이 아닌 조직은 더 이상 토벌권을 가지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국제 협회에서 탈퇴시킨다는 건 곧 미국 지부의 토벌을 막아버리겠다는 뜻이다.
'빌어먹을....'
이를 으득 씹었다.
"작전을 중지하고 본부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국제 협회에서 쫓겨나시겠습니까?"
남자가 두 개의 서류를 마이클 지부장에게 내밀었다.
"지부장님이 직접 선택하십시오."
"...."
마이클 지부장의 흔들리는 시선이 남자가 내민 서류에 고정됐다.
국제 협회 탈퇴를 감수하고 작전을 진행해서 운 좋게 에덴을 찾는다면 현재 본부의 통제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에덴을 찾지 못한다면... 본부의 통제도 막지 못한 채 미국 지부는 영영 토벌권을 빼앗기겠지.
본인은 그렇다 쳐도 미국 지부에 소속된 수천 명의 직원이 한꺼번에 길바닥에 나앉게 되는 것이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걸려 있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럼 이대로 작전을 중지해야 하는가.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마이클 지부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이렇게 하겠습니다."
본부 발령 공문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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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뭡니까?"
갑작스레 내 사무실을 찾은 마이클 지부장이 담담한 표정으로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무어라 적힌 건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진 서류였다.
"저에게 내려온 본부 발령 공문입니다. 조금 전에 본부 감사팀에서 찾아와선 작전 중지를 명령하더군요. 본부에 자리 하나 마련해주겠다고 하면서요."
"역시 눈치챘나 보군요."
마이클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공문의 상태가 이렇다는 건...."
"거절했습니다."
"본부 놈들이 거절했다고 조용히 돌아갔을 리는 없겠죠."
"네. 아마 미국 지부는 조만간 국제 협회에서 강제 퇴출당할 겁니다."
"...?"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서류 말고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작전을 중지하지 않으면 강제 탈퇴시키겠다고 했으니... 빠르면 내일 안으로 공문이 내려올 겁니다."
"그건… 좀 곤란하게 됐군요. 국제 협회에서 쫓겨난다는 건 결국 토벌권도 빼앗긴다는 의미니...."
"아직 유예 기간까지 3주가 남지 않았습니까. 그 안에 찾으면 그만이죠."
"하아...."
이 무슨 대책 없는 소리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일단 작전 중지를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 대책을 세우는 게 맞지 않나?
한 번 탈퇴 당하면 되돌릴 수도 없을뿐더러, 만약 에덴조차 찾지 못하면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인데?
'뭐, 선택권을 떠넘겼으니 결과는 어쩔 수 없는 거긴 한데....'
아주 예상을 못 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다만, 듣자 하니 마이클 지부장은 절대 리스크를 지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는데. 어째서 이런 위험한 선택을 한 걸까.
그런 생각에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압니다. 제 성격이랑 안 어울리는 짓이죠. 저도 처음입니다. 이렇게 대책 없이 결정을 내린 건."
"그런데 대체 왜…?"
"그냥 묘하게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뭐라는 거야, 시발.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이런 중요한 일을 그런 어쭙잖은 감정에 맡기는 건가.
"그런 고로 당신이 전에 했던 제의, 받아들이겠습니다."
"…예?"
"카르마 코퍼레이션과의 인수합병 제의 말입니다."
그의 입에서 결국 그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 지부는 전 세계 협회 중 가장 몸집이 큰 지부이자, 매년 토벌 매출 탑을 찍는 곳이다.
흡수한다면 당연히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일이지만, 이걸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유예 기간이 끝나면 국제 협회 소속 외에는 토벌조차 불가능해질 테니까.
때문에 이제 와서 이도 저도 안 되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뭐,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내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미국 지부를 본부에서 강제 탈퇴시킨다 해도, 3주 동안 계속 작전을 진행하는 걸 보고만 있을 리 없습니다."
"그렇겠죠."
"강제로 지부를 점거해서 통제 시스템을 빼앗거나, 작전 현장에 본부 인원을 투입해서 무력으로 토벌을 방해하거나... 아니면 두 가지를 동시에 할지도 모르죠."
마이클 지부장의 표정이 덩달아 어두워졌다.
그렇기에 일단 작전 중지를 받아들이는 게 나았을 거란 것이다.
현재 우리에겐 무력 충돌을 준비할 만한 인력도, 시간도 없다.
대놓고 작전을 속행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것보단, 차라리 작전을 중지하는 척하면서 몰래 진행하는 게 며칠이라도 더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뭐… 이미 지난 일을 아쉬워해봤자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쉽진 않겠지만 준비를 해둬야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국제 협회를 무너뜨리려는 이상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한 발짝 빨리 찾아왔다.
물론 피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이도 저도 안 될 테니.
이제는 국제 협회와 정면으로 맞붙을 때가 됐다.
***
"마이클 지부장이 작전 중지 명령을 거부했어."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에마 대표가 첫마디를 열자 웨슬리 사무총장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그걸 지금 보고라고 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든 막으라고 했잖아."
"너무 그렇게 보지 마.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지부장 자리에 마이클은 아니라고 했잖아? 그 인간 너무 고지식하다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의 날카로운 말투에도 에마 대표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뭐, 사실 마이클이 고지식하긴 해도 용감한 놈은 아니다. 리스크를 감당할 성격은 더더욱 아니고.
그런 놈이 대책도 없이 중지 명령을 거부할 리가 없다.
김준우가 옆에서 바람을 넣은 게 아닌 이상.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그놈 성격상 이렇게까지 대놓고 우리를 거스르는 짓을 할 리가 없지.'
에마 대표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뭐? 작전 중지 명령을 거절했으니 이젠 어쩔 수 없다 이거야? 본부에서 탈퇴 당한다고 해도 유예 기간 동안엔 계속 토벌을 진행할 텐데?"
"날 뭐로 보는 거야."
에마 대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 마이클이 뭘 선택하든 딱히 상관없었어. 그저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뭐…?"
"얌전히 작전을 중지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거부해도 큰 의미는 없어. 미국 지부가 우리 소속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우리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
그제야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어렴풋이 이해한 듯했다.
현재 미국 지부는 국제 협회의 손에서 벗어났다.
얼핏 보면 국제 협회의 통제권에서 벗어났으니, 본부가 더는 관여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일전에 웨슬리가 전 세계에 통보했듯, 이제 독립협회를 비롯해서 국제 협회에 소속되지 않은 모든 조직은 토벌권이 인정되지 않으니까.
미국 지부도 결국 비소속 조직이 되었으니, 엄밀히 따지면 미국에는 현재 공식적인 토벌 조직이 없는 셈이다.
오히려 본부가 손을 대기에 더없이 좋은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유예 기간이 아직 3주 남았지만.
어쨌든 토벌 주도권이 본부에 있는 이상, 거기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토를 달 순 없겠지.
"미국 땅에서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필요하다면."
에마 대표가 어깨를 으쓱였다.
"감당할 수 있겠어? 자칫하면 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을 텐데."
"그건 내가 아니라 네가 감당해야지. 네가 그랬잖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라고."
웨슬리 사무총장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나저나 PB 코퍼레이션에 그럴 인력은 있어? 노아도 연락 두절이라면서. 지금 팀원만으로는 뭘 하든 턱도 없지 않나?"
"인력 걱정을 왜 해. 전 세계 토벌 조직의 80%가 우리 소속이 됐는데."
이내 에마 대표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다름 아닌, 세계 랭킹 2위부터 50위까지의 헌터 목록이었다.
"랭커들, 이럴 때 부려먹어야지."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
"보고드립니다."
미국 북부, 미네소타주에 위치한 한국 토벌대 임시 작전본부실.
북부 구역을 맡은 김민주 팀장에게 아레스 길드의 대표, 차석현이 정자세로 보고를 올렸다.
"오늘 자 북부 구역 출현 던전 총 510개, 당일 토벌 던전 총 510개, 미토벌 던전 0개입니다. 엘로우 등급 던전에서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크게 다치진 않아서 내일 토벌도 계속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부로 지원 나간 파견팀은 어떻게 됐어요?"
"잘 마무리했답니다.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복귀할 겁니다."
"그렇군요. 수고하셨어요. 차 대표님."
"하하하! 수고는 팀장님이 하셨죠."
형식적인 보고가 끝나자 차석현 길드장이 이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 작전에 참여한 길드는 아레스뿐만이 아니다.
이아영 본부장이 급하게 파견 인원을 모집하던 당시, 김준우가 지휘하는 대규모 작전이라는 정보에 전국 길드가 너도나도 모여들었다.
그렇게 '김준우의 작전'이라는 이유만으로 전국 총 22개 길드 1,500명에 달하는 인원이 자진해서 이번 작전에 참여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소속 작전팀은 유예 기간 동안이라도 국내 토벌을 계속 진행해야 했기에, 파견할 수 있는 팀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수많은 민간 길드가 자발적으로 나서준 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당연히 그간 선생님이 쌓아온 덕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
김민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김 대표님은 여전히 대단하십니다. 하다 하다 미국 전역 동시 토벌 작전을 맡으시다니!"
"그러게요. 이젠 조금 따라잡나 싶었는데… 그럴 때마다 한참을 더 앞서가시네요."
김민주는 속상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입가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 피곤해 죽겠네."
때마침 청소와 부산물 처리를 담당하고 있는 한유빈이 작전본부실로 들어왔다.
한켠에 놓인 소파에 몸을 푹 던진다.
"다 끝났어요?"
"겨우겨우 했어요. 아… 이 짓거리를 며칠 더 할 생각하니까 치가 떨리네."
한유빈이 표정을 구기며 구시렁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나저나 미국 지부, 국제 협회에서 탈퇴 당했다면서요?"
"그렇다고 하네요. 마이클 지부장님이 작전 중지 명령을 거절한 모양이에요. 그 덕에 마지못해 인수합병에도 동의했고요."
"그게 의미가 있나… 어차피 3주만 지나면 토벌 길 막히는 건 똑같은데."
"아직 유예 기간이 있으니까 그동안에 에덴을 찾으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한유빈이 시큰둥하게 반응했지만, 그럼에도 김민주는 그녀를 다독였다.
"대표님한테서 무슨 말 없었어요?"
"있었죠. 중요한 게."
"뭔데요?"
한유빈이 묻기 무섭게, 작전본부실로 몇 명의 인원이 추가로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이 시간에 소집이라니."
"무슨 일 있습니까?"
다름 아닌, 아르테미스 길드의 유지우 대표를 비롯한 각 작전팀의 팀장들이 모두 소집된 것이다.
한유빈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꽤나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팀장들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지휘 본부에서 급히 전달받은 사항이 있습니다."
모두 모인 걸 확인하자, 김민주가 여태까지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분은 비상 방어 체제에 돌입해서...."
이윽고 김민주가 본론을 꺼내던 그 순간.
콰과광―!!!
어디선가 날아든 폭격에 작전본부실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순식간에 커다란 화염과 검은 연기에 휩싸인 건물.
모든 게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무너져 내린 잔해 앞으로 두 명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면 되나?"
"아마도?"
두 남녀의 담담한 목소리가 처참한 현장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데이빗 에반스와 솔트 에반스.
세계 랭킹 11위, 12위의 쌍둥이 헌터.
세계적인 길드, 로스트 길드를 이끌고 있는 이들이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
"그러게."
잿더미가 된 건물을 보며 임무 완수를 확인한 후, 그들이 김이 샌 표정으로 등을 돌리던 찰나였다.
"비상 방어 체제에 돌입해서, 습격해오는 이들을 모두 처리하라...."
잔해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전달하셨습니다."
"...후우."
"흐흐, 토벌만 해도 벅찬데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당연히 추가수당은 주겠죠?"
[고유 스킬 : 천수관음]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고유 스킬 : 스팀 펑크]
[고유 스킬 : 아르테미스]
무너져 내린 잔해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오는 이들.
검은 먼지를 뒤집어쓴 팀장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183
183
미국 유타주, 솔트 레이크 시티.
서부 임시 작전본부실.
"공격에 대비하라는 말은 들었지만...."
노아가 무장을 한 수십 명의 인원 앞에서 넌지시 입을 열었다.
시선은 가장 앞에 있던 한 여성을 향했다.
"설마 네가 올 줄은 상상도 못 했군."
"안녕. 오랜만이네?"
이윽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화답하는 여성.
이름은 단 샤오화.
현 국제 헌터 협회 중국 지부 작전 1팀장.
중국 랭킹 1위.
세계 랭킹 5위의 헌터로, 노아와는 과거 국제 협회에서 주최한 세계 랭커 회의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옛날엔 그나마 봐줄 만했는데… 어째 못 본 새에 국제 협회의 개가 됐네."
노아가 대놓고 조롱했지만, 샤오화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제일 먼저 제 발로 국제 협회에 기어들어 가 놓고."
"동급으로 보지 마. 난 스카우트 당한 거니까."
노아가 어깨를 으쓱이자, 샤오화가 미소를 지었다.
언뜻 오랜 친구 사이처럼 보이는 편한 대화가 오갔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순간, 노아의 눈빛이 번뜩였다.
"진심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온 건 아니겠지?"
"그 쓸데없는 자신감은 여전하네."
샤오화가 피식 실소를 뱉었다.
"본부에서는 작전본부만 파괴하고 철수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가기엔 좀 아쉽네. 랭킹 1위가 될 수 있는 기회인데, 그치?"
그녀의 말에 뒤에 있던 인원들이 일제히 공격 태세를 갖췄다.
노아 길드 또한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들 역시 무기를 꺼내며 전면전을 준비했지만....
"방해되니까 가서 불이나 끄고 있어."
노아는 그들을 밀쳐내며 앞으로 나섰다.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덤벼봐."
거센 기류가 그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와 동시에 샤오화 또한 스킬을 시전했다.
[고유 스킬 : 소화홍극(小花紅棘)]
이내 그녀의 주변을 따라 수백 개의 작은 칼날들이 떠올랐다.
검을 쓰지 않는 유일한 검사 클래스.
고유 클래스, 검무.
허공에 흩날리는 수백, 수천 개의 칼날을 다루는 이능력자.
스으으으―!
이윽고 붉은 칼날들이 소용돌이치며 노아를 향해 불어 닥쳤다.
[생존 - 제5 법칙]
[강행돌파]
노아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수백 개의 칼날 사이로 몸을 던졌다.
파바바바박―!!
노아의 급소만을 노리며 파고든 칼날들.
하지만.
"…간지럽네."
가디언 클래스인 그에게 그런 자잘한 공격은 큰 의미가 없었다.
이윽고 노아가 칼날 폭풍을 그대로 통과했고, 샤오화가 아차 하는 순간.
콰악―!
"…크윽!"
눈 깜짝할 새에 거리를 좁힌 노아가 샤오화의 목을 움켜쥐었다.
"딱 1분 지났군."
"…하여간, 맷집만 더럽게 좋아 가지고."
목을 붙잡힌 샤오화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1분만 더 지나면 넌 절대 날 못 이겨."
"…알아. 딱 5분만 지나도 전 세계에서 널 이길 수 있는 놈은 없겠지. 그런데...."
[고유 스킬 : 소화홍극(小花紅棘)]
[개화]
촤악―!
노아의 몸에 박혀 있던 수백 개의 칼날이 그의 살을 찢으며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너, 지금은 B랭크 수준밖에 안 되잖아."
"...."
예상치 못한 공격에 노아의 동공이 흔들리길 잠시.
샤오화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동시에 그의 무릎이 땅으로 털썩 떨어졌다.
"세계 랭킹 1위도 다 거품이네."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널브러진 노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샤오화가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내 품속에서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북부 작전본부, 임무 완료했습니다."
"...."
"…알겠습니다."
짧은 통신을 마친 샤오화가 이내 뒤에 있던 인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현장 마무리하고, 남아 있는 인원은 다 죽여."
"네."
"알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샤오화는 등을 돌렸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국제 협회의 공격.
이와 같은 습격을 받은 건, 비단 노아 길드뿐만이 아니었다.
미국 전역에서 같은 지시를 받은 이들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네."
미국 지부, 중앙통제실.
들이닥친 국제 협회 소속 헌터들과 대치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남의 나라에서 너무 대놓고 활개 치는 거 아닙니까? 국제 사회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텐데요."
내가 묻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활개는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이 치고 있는 거죠. 공식적으로 미국 지부는 해체된 거 모르십니까? 우린 무단으로 미국에서 토벌 행위를 하고 있는 비공식 조직을 철수시키려는 것뿐입니다."
"아직 유예 기간이 3주나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건 뭐,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거고… 늘 예외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참 나.
그냥 되는대로 막 갖다 붙이는군.
그냥 더는 에덴을 찾게 둘 수 없으니, 싸그리 밀어버리려는 걸 누가 모르는가.
뭔 비공식 조직 철수가 어쩌고저쩌고... 어이가 없어서 원.
"아무튼, 현 시간부로 이곳은 더 이상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국제 협회가 관리하게 됐으니 순순히 비키십시오."
"거절한다면?"
"무력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진지하게 뱉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게 남자의 심기를 건드린 듯,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쯤이면 각 작전본부에도 병력이 도착했을 겁니다. 아마 모두 철거됐겠죠. 물론 순순히 철수 명령에 따른다면 위협을 가할 생각은 없으니...."
"그깟 건물, 다시 세우면 그만입니다. 중요한 건 작전본부가 아니라 작전 인원이겠죠."
내가 그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작전 인원이 남아 있는 한, 우린 계속 작전을 진행할 겁니다. 당신들이 정말로 우리 작전을 막을 생각이라면 다 죽여야 할 겁니다."
"...진심입니까?"
"제가 허세 부리는 것 같습니까?"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남자가 이내 품에서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각 파트장에게 추가 지시 사항 전달합니다. 현 시간부로 각 작전본부에 남아 있는 인원들... 전원 사살하십시오."
그 한마디를 마치고 남자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저흰 최대한 무력 충돌은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럴 리가요."
어깨를 으쓱였다.
무력 충돌은 피하고 싶었다?
개소리하고 있네.
지들 마음대로 우리 작전에 훼방을 놓고 있으면서, 우린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그 어떤 구역도 그 꼴은 못 볼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끝을 보고 말지.
그런데 만약에.
"시작하기 전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만약에 우리가 당신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면...."
남자에게 바짝 다가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땐 어떻게 되는 겁니까?"
"...."
그 순간 남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럴 일은 없을...."
"길고 짧은 거야 대보면 알겠죠."
내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가서 사무총장한테 전하십시오. 지금이야 당신들이 칼자루를 쥐었으니 다들 눈치를 보고 있지만, 우위에 섰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모든 걸 통제하려고 하면 언젠간 반드시 돌려받을 거라고."
경험자인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아, 생각해보니...."
깜빡하고 있던 게 떠올라, 내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여기서 다 죽으면 전달할 입이 없겠군요."
[고유 스킬 : 마왕]
***
미국 북부, 미네소타주.
무너져 내린 임시 작전본부 앞.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일(六觀音中一)]
[제1격 - 성관음(聖觀音)]
슥, 스슥―!
김민주의 검격이 연신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그 어느 공격도 에반스 남매에게 닿지 못했다.
그들은 가볍고 빠른 발놀림으로 능숙하게 공격을 피했다.
회피력만 본다면 김준우와 견줄만한 움직임.
"칫…!"
김민주는 더욱더 속도를 올려야 했다.
[육관음중삼(六觀音中三)]
[제3격 - 마두관음]
슥, 스스스슥―!
"...!"
세 개의 검을 휘두르는 듯한 엄청난 속도의 검격에 에반스 남매가 순간 흠칫했다.
[육관음중육(六觀音中六)]
[제6격 - 여의륜관음]
스윽―.
김민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장 고요하고 날카로운 일격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고유 스킬 : 비스트 - 케르베로스]
쾅―!!
그 회심의 일격은 난데없이 나타난 괴물에 의해 허무하게 막혀버렸다.
짐승의 형태로 모습을 변형하는 비스트 클래스, 데이빗 에반스의 스킬.
지옥의 파수꾼 케르베로스를 실제로 마주한 김민주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동시에 세 개의 머리가 그녀를 향해 입을 쩍 벌리는 순간.
"정신 놓지 마!"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뻐억―!
한유빈의 주먹이 괴물의 턱을 강타했다.
이어서 차석현과 유지우 또한 그 틈을 타서 공격에 가세했다.
[고유 스킬 : 스팀펑크]
[트랜스 폼 : 펑크 독]
[고유 스킬 : 아르테미스]
[탄환 - 보름]
[장전 확인]
콰과광―!!
그들의 공격은 정확히 괴물에게 직격했다.
괴물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한 번 더 가요!"
"네!"
한유빈의 외침에 김민주는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육관음중육(六觀音中六)]
[제6격 - 여의륜관음]
그렇게 다시 꺼내든 일격.
하지만 이번에도 그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고유 스킬 : 비스트 - 스핑크스]
카아아아아―!!
이번엔 데이빗의 여동생, 솔트가 그녀를 막아선 것이다.
거대한 사자 괴물이 입을 쩍 벌렸다.
지이이잉―.
큰 입에 강렬한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피, 피해!"
"뒤로! 무조건 뒤로 빠져!!"
"민주 씨!!"
한유빈과 차석현 그리고 유지우가 소리쳤지만 어째선지 김민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후우...."
피하긴커녕, 공격이 날아오는 한복판에서 눈을 감고 온 신경을 검에 집중할 뿐이었다.
이윽고 작전본부실을 단숨에 날려버린 브레스가 그녀를 향해 정면으로 쏘아졌다.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오(六觀音中五)]
[제5격 - 준세관음]
틱―.
순간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김민주의 검이 브레스의 궤도를 틀어버렸다.
"…미친."
"저, 저게 말이 돼?!"
"어떻게 볼 때마다 괴물이 돼가냐, 저 사람은!"
뒤로 빠져 있던 한유빈과 차석현, 유지우는 그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정작 김민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비스트 클래스 중에 이런 녀석들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대개 실존 동물로 변형하는데 아주 가끔 전설 속 존재로 변형하는 놈들이 있어요. 게다가 케르베로스에 스핑크스라면… 랭킹 12, 13위의 그놈들일 거예요."
한유빈은 시선을 쌍둥이에게 고정했다.
그들은 어느샌가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별로 싸우고 싶지 않은데."
"그냥 보내주면 안 돼? 어차피 할 일도 끝났고."
그들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검을 쥔 김민주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현재 다른 본부 상황이 어떤지 모른다.
아직 공격을 받지 않았을 수도, 혹은 이미 전투를 벌이고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저들을 보내줬다간 다른 곳이 공격받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절대 보내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어디선가 통신기가 울렸다.
다름 아닌 데이빗 에반스가 들고 있는 통신기다.
"응."
통신기를 꺼내든 데이빗이 여전히 졸린 목소리로 응답했다.
"건물은 부쉈어. 근데 얘네가 안 보내주는데."
"...알았어."
이내 무전기를 내려놓고는 귀찮은 표정을 짓는다.
솔트가 슬쩍 물었다.
"뭐래?"
"다 죽이래."
"귀찮네."
"그러니까."
쌍둥이는 누구랄 것 없이 깊은 한숨을 한 차례 내쉬었다.
[고유 스킬 : 케르베로스]
[고유 스킬 : 스핑크스]
카아아아악―!!!
시야에 다 담기지도 않을 만큼 거대한 생명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김민주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죽이라고?
그럼 여태까지는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건가?
'빌어먹을....'
세계 랭커는 다르다 이건가.
그동안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세계 랭커 발끝에도 못 미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잠시.
"쫄지 마요."
한유빈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툭 올렸다.
"우리가 쫄면 믿고 맡긴 대표님은 어떡해요."
"...그러네요."
김민주는 그제야 실소를 뱉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포기하고 철수하면 더 이상의 작전 진행은 불가능하다. 당연히 국제 협회를 견제할 마지막 수단도 놓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국제 협회는 명실공히 전 세계의 통제권을 쥐게 된다.
모든 독립 협회, 길드, 기업은 사라지고 오로지 국제 협회에 의해서만 토벌이 가능해질 것이다.
국제 협회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협회를 만들기 위해 김준우가 목숨 걸고 노력해온 지난 시간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셈이다.
그래.
김준우가 그동안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건 것만 몇 번인가.
그러니 이제 와서 무섭다고 내뺄 수는 없다.
"차석현 길드장님, 유지우 길드장님."
"말씀하십쇼."
"남자 쪽은 저희가 맡을게요. 두 분은 여동생 쪽을 맡아주세요."
두 길드장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김민주의 전신을 따라 푸른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해보죠."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외]
[접신 - 관세음(觀世音)]
[정법명왕여래(正法明王如來)]
184
184
"끄으윽…!"
미국 지부, 중앙통제실.
그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고르고가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그가 대동한 헌터들은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모조리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듣던 대로다.
랭크도 불명, 이능력에 대한 정보도 불명.
여태까지 이레귤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여태껏 없었던 이레귤러.
'과장이 아니었군....'
고르고는 자꾸만 희미해지는 정신을 애써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본부는 여태까지 김준우와의 전투를 분석하여, 그를 비공식적인 SS랭크로 구분했다.
현재 공식적인 SS랭크의 헌터는 세계 랭킹 1위와 2위, 단 두 명밖에 없다.
다시 말해 김준우는, 최소한 그들과 동급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강한 존재라는 소리다.
이를 인지하고 있던 웨슬리 사무총장은, 고르고에게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으니 괜한 객기부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솔직히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본인도 나름 세계 랭킹 15위의 헌터가 아닌가.
하지만 그 모든 게 과장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압도적이다.
같은 이능력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저건 그냥… 괴물이 아닌가.
고르고의 두려움이 섞인 눈빛이 김준우를 향했다.
"솔직히 이해가 안 되네."
그때, 김준우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못 죽인다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자꾸 쓸데없이 인력을 낭비할까."
"...흐, 흐흐."
"웃네?"
"우린 당신을 죽이러 온 게 아닙니다. 애초에 본부에서도 당신이랑은 전면전을 벌이지 말라고 했고요."
김준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왜 굳이 찾아와서 목숨을 버리려는 거지?"
"모르시겠습니까? 우리 작전의 변수는 당신뿐이라는 거."
고르고가 어렵사리 말했다.
그래, 못 이긴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밸런스팀이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을 본인이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다.
그럼에도 본부가 김준우에게 인원을 보낸 이유는 단 하나.
그를 처리하는 게 아닌, 발목을 붙잡아 두기 위해.
이번 작전의 변수는 김준우 한 명뿐이다.
작전 본부가 공격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김준우는 바로 지원하러 갈 테니, 그것만 막으면 된다.
그가 시간 안에 다른 구역을 지원하러 가지 못하게만 막는다면 작전은 성공한다.
"당신이 아직도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제 역할은 끝입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동안 이미 각 작전 본부는 초토화됐을 테니까."
"...."
"지금 가도 늦었습니다. 그쪽으로 파견된 이들은 저보다 훨씬 강한 헌터들이니...."
"하하, 하하하!"
그 순간, 김준우가 갑자기 폭소를 터트렸다.
"그래서, 내 발목만 붙잡아 두면 나머진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다?"
"설마 당신 직원들이 세계 랭커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죠? 고작 국내 상위 랭커들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내 김준우가 자세를 낮춰 쓰러져 있는 고르고와 눈을 맞췄다.
"우리가 국제 협회와 척을 지지만 않았어도, 내 직원들 몇 명은 이미 세계 랭커 딱지를 붙이고도 남았어."
"…무슨 근거로?"
"근거?"
김준우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인정했다는 게 근거야."
이윽고 김준우의 전신에서 다시금 검은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마지막으로 고르고의 의식이 끊어졌다.
***
"어딜 가?"
미국 서부, 임시 작전 본부.
뒤늦게 울려 퍼진 목소리에 철수하려던 샤오화의 다리가 우뚝 멈췄다.
"...!"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던 노아가 어느샌가 벌떡 일어나 있었다.
"...말도 안 돼."
"왜, 설마 내가 이런 거로 죽을 줄 알았나?"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 각성]
[최후의 생존자]
[시전자의 생존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대미지는 분명히 들어갔다.
애초에 온몸이 찢겼는데 멀쩡할 리가 없다.
그런데 대체 뭔가.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인 저 기세는.
그 괴물 같은 모습 앞에 샤오화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짜 바퀴벌레가 따로 없네."
[고유 스킬 : 소화홍극(小花紅棘)]
[만개]
스스스슥―!
그녀의 칼날이 다시금 허공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노아에게 칼날들이 불어닥쳤다.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6 법칙]
[우두머리]
파바바바박―!
노아는 마치 보란 듯이 모든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어느 칼날도 몸에 상처를 내지 못했다.
"똑같은 공격이 언제까지 통할 것 같나?"
"...!"
파앗―!
노아가 정면으로 무섭게 달려들었다.
샤오화는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빌어먹을…!"
[고유 스킬 : 소화홍극(小花紅棘) - 각성]
[발아]
샤오화는 결국 그 스킬을 꺼내 들었다.
이윽고 수백 개의 칼날이 땅속에 박혔고, 그 자리에서 거대한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사아아아―.
순식간에 꽃밭으로 뒤덮인 대지.
샤오화가 주먹을 움켜쥐는 순간.
[폭화]
퍼버버버벙―!!!
꽃봉오리가 모조리 터져나가며 달려오던 노아를 집어삼켰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공격.
제아무리 랭킹 1위라고 해도 절대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생존 – 제5 법칙]
[강행돌파]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콰악―!
"끄윽…!"
온몸이 피범벅이 된 노아가 기어이 그녀의 목을 다시 움켜쥐었다.
그래.
그에게 대미지를 얼마나 입히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죽이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대.
죽지 않는 이상, 끊임없이 강해지는 존재였으니.
"야."
이윽고 살기가 아른거리는 노아의 눈빛이 샤오화에게 향했다.
"5분 지났다."
"...자, 잠깐!"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스킬 시전 5분 경과]
[현재 시전자의 스테이터스는 총합 128,372입니다.]
[생존 – 제1 법칙]
[무관용]
자비가 없는 그의 주먹이 바로 눈앞에서 날아들었다.
***
미국 북부, 임시 작전 본부.
슥―.
스스스슥―!
김민주가 휘두르는 검은 눈으로 좇는 것조차 불가능한 속도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접신의 경지.
정법명왕여래.
인간의 형상을 초월한, 가히 검의 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고유 스킬 : 비스트 - 스핑크스]
[수수께끼 - 오답]
지이잉―.
쿠구구구궁―!!!
"크읏…!"
또다시 날아든 브레스에 김민주는 어렵사리 좁힌 거리를 다시 벌려야 했다.
단단한 갑피.
아무리 베어도 눈 깜짝할 새 원상복구 되는 미친 회복력.
1초라도 주춤하는 순간 곧바로 날아드는 절멸기.
무엇보다 두 남매의 합이 너무 잘 맞는다.
어느 한쪽을 공격해도 금세 다른 한쪽이 치고 들어온다.
물론 김민주 또한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붓고 있지만, 그저 견제할 정도의 수준일 뿐.
이렇게 자잘자잘한 공격으로는 절대 놈들을 쓰러뜨릴 수 없다.
여기선 두 놈을 동시에 보낼 만한 강력한 일격이 필요하다.
'1분... 아니 30초라도 집중할 수 있다면....'
김민주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괴물들은 그 몇 초의 순간마저 허락해주지 않았다.
[고유 스킬 : 비스트 - 케르베로스]
[지옥불]
[고유 스킬 : 비스트 - 스핑크스]
[수수께끼 - 오답]
쿠구구구궁―!!
닿는 순간 온몸을 태워버릴 화염과 스치기만 해도 빈사인 브레스가 쉬지 않고 날아든다.
"민주 씨!!"
물론 다른 이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스테이터스 해제]
[모든 스테이터스가 근력으로 전환됩니다.]
[근력 : 18,955 (9,107↑)]
[체력 : 1 (2,289↓)]
[민첩 : 1 (5,799↓)]
[마력 : 1 (1,019↓)]
[고유 스킬 : 스팀 펑크 - 각성]
[혁명 군단 - 집중포화]
[고유 스킬 : 아르테미스]
[탄환 - 그믐]
[장전확인]
콰과과광광―!!
한유빈과 차석현 그리고 유지우 또한 그녀를 도와 총공에 가세했다.
조금씩이나마 괴물들의 공격을 최대한 늦춰주었다.
물론 막는 것에 급급한 수준이었지만.
"이렇게 따로 공격해선 끝이 없어요. 두 놈을 한 번에 보내야 해요!"
그때, 김민주가 한유빈을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자 한유빈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생각에 빠져 있길 잠시.
"시간 벌어주면 할 수 있어요?"
"...네."
김민주가 고개를 끄덕였고, 한유빈은 피식 실소를 뱉었다.
"알았어요. 어떻게든 해볼게요."
파앗―.
그와 동시에 한유빈은 무언가를 각오한 듯 홀로 두 괴물을 향해 도약했다.
'죽을 수도 있겠는데....'
지금 상황에서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한유빈은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시뻘건 기류가 전신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각성]
비로소 그녀를 버서커 클래스 1위로 만들어 준 스킬이 시전됐다.
승패, 생사,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눈앞의 적을 처치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
[현 시간부로 시전자의 모든 공격이 체내 혈액을 소모합니다.]
[자살행위]
이윽고 한유빈의 살기가 두 괴물을 관통하는 순간.
콰앙―!!!
붉게 묽든 그녀의 주먹이 케르베로스의 턱을 뚫었다.
본인보다 몇십 배나 더 거대한 괴물들의 몸에 달라붙어 쉴 틈 없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주먹, 발, 팔꿈치, 머리.
물어뜯기, 할퀴기, 조르기.
오로지 눈앞의 적을 쓰러트린다는 일념 하나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처절한 공격들.
그리고 그때.
크으으으으―.
푸욱―!!
"크아악…!"
스핑크스의 거대한 이빨이 그녀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오로지 공격에 모든 걸 쏟아붓는 스킬.
그만큼 본인 또한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기에, 모든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하지만 지금 한유빈에겐 그런 것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그렇다면 죽어서라도 죽인다.
한유빈은 피를 쏟으며 두 괴물을 끈질기게 몰아붙였다.
"유, 유빈 씨…!"
"닥치고 본인 할 일에나 신경 써요!"
한유빈이 그렇게 소리치고 나서야 김민주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몇 초.
김민주는 비로소 호흡을 가다듬고 검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수고했어요."
[육관음중외(六觀音中外)]
[접신 - 관세음(觀世音)]
[정법명왕여래(正法明王如來)]
[열반]
스윽―.
김민주의 검이 강렬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허공을 갈랐다.
그 직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괴물들의 비명도 한유빈의 절규도 들리지 않았다.
털썩―.
이윽고 두 괴물의 목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왔다.
차석현과 유지우 길드장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다른 헌터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팀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몇 초가 더 흐르고 나서야.
"유빈 씨… 유빈 씨!!"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한유빈을 발견했다.
185
185
북부, 한국 임시 작전 본부.
국제 협회와의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긴박했다.
"제세동기 가져와!"
"출혈이 너무 많습니다!!"
"혈액 팩 여분 없어?!"
"RH+ AB형! 긴급 헌혈 가능하신 분 있습니까?"
한유빈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의료진은 계속해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고, 다른 이들 또한 분주하게 움직이며 응급처치를 도왔다.
김민주를 비롯한 각 팀장들은 꽤나 긴장된 모습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살행위.
본인의 피를 소모하여 어마어마한 힘을 끌어올리는 한유빈의 각성 스킬.
하지만 그만큼 큰 부작용이 따르는 스킬이며, 한유빈 또한 처음 클래스를 각성했을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그 스킬을 쓴 적이 없을 정도였다.
스킬 시전 직후부터 목숨을 위협하는 부작용.
1분간 스킬을 유지하면 몸속 혈액의 10%가 증발하며, 2분 이상 유지하면 30%에 달하는 혈액이 증발한다.
그리고 그 이상 스킬을 사용하면 당연히 사망에 이른다.
그런 스킬을 이곳에서 썼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쓰러뜨리려는 게 아닌, 오로지 김민주가 집중할 틈을 만들어주기 위해.
만약 김민주가 조금이라도 주춤했거나 혹은 공격에 실패했다면... 한유빈은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김민주는 굉장히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의식 돌아왔습니다!"
"한유빈 씨! 호흡하세요! 호흡!"
의료진의 그 말에 김민주와 차석현, 유지우는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유빈 씨! 괜찮아요? 유빈 씨!"
"…소리 지르지 마요. 골 울리니까."
겨우 의식을 찾은 한유빈이 힘겨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됐어요...?"
"상황 종료됐어요. 다들 무사해요."
"...다행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