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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시시 웃는 한유빈.

김민주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너무 무모했어요."

"난 그쪽처럼 테크니컬하지 못하잖아요. 어떻게,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그래도 다음부턴 이러지 마요. 죽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참 나, 본인이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에 김민주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다른 구역은요? 그쪽도 공격받았대요?"

"네. 각 구역을 동시에 습격한 모양이에요. 서부 본부는 상황 종료됐고, 연합 토벌대 쪽이랑 미국 지부 쪽은 아직 접전 중인가 봐요."

"네, 네? 그럼 우리가 빨리 지원해줘야... 윽!"

"우, 움직이시면 안 돼요!"

한유빈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의료진이 바로 그녀를 제지했다.

그럼에도 한유빈은 김민주를 붙잡고 고집을 부렸다.

"국제 협회가 세계 랭커들을 풀었어요. 그쪽 인원만으로는 위험할 거예요. 지금이라도 우리가 지원을...."

"알고 있어요. 그래도 유빈 씨는 안 돼요."

김민주가 꽤나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 기세에 한유빈이 잠시 주춤하던 그때.

"누나!!"

전투 소식을 들은 한상혁이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꽤나 놀란 듯, 곧바로 한유빈에게 달려들었다.

"피, 피 뭐야?! 괜찮은 거 맞아?! 이거 보여?! 몇 개야?!"

"참 나, 다쳤다니까 걱정은 되디?"

"...뭐, 뭐래 병신이. 안 죽었으면 됐어!"

한유빈이 너스레를 떨자, 한상혁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김민주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짓다가, 이내 검을 들고는 몸을 일으켰다.

"미, 민주 씨? 어디 가려고?"

"다른 구역 지원해줘야 한다면서요."

"그니까 저도 같이…!"

"유빈 씨는 꼼짝 말고 쉬고 계세요. 지원은 제가 갈 테니까."

김민주는 그 말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한유빈의 성격상 아무리 뜯어말려도 따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순간 김민주의 얼굴에 여태껏 본 적 없는 극도의 분노가 내비친 채였으니까.

덕분에 한유빈조차 순간 얼어붙어 멀어지는 김민주에게 더 이상 토를 달 수가 없었다.

***

"유이토 헌터님!'

미국 동부.

지부 연합 임시 작전본부.

국제 협회 소속의 한 헌터가 젊은 남성에게 다가와 황급히 보고를 올렸다.

"북부의 쌍둥이와 서부의 샤오화, 남부의 레오 모두 연락이 안 됩니다."

"...뭐?"

젊은 남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작전 실패한 건가요?"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서부랑 북부는 그렇다 쳐도. 남부는 왜? 어쭙잖은 독립협회 연합에다가 랭커도 없을 텐데요?"

"저도 거기까진 잘... 아무래도 다른 쪽에서 지원을 나온 모양입니다."

"에휴, 머저리 같은 새끼들."

남성이 고개를 저으며 옅은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그때.

"너, 너희들… 대체 뭐야...."

그의 발밑에서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동부 토벌대를 맡은 숀 작전팀장이었다.

"흐음...."

하지만 젊은 남성은 대답 대신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와타나베 유이토.

전 일본 지부 소속의 작전 1팀장이었지만, 몇 년 전 돌연 협회를 떠나 프리랜서로 전향한 헌터.

현 SS랭크의 메카닉 클래스.

현 일본 랭킹 1위.

그리고, 현 세계 랭킹 2위.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어마어마한 실력자.

그의 싸늘한 시선이 숀 작전팀장을 떠나 주변으로 향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인원이 피를 흘린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처참한 광경이 그의 눈에 담겼다.

"대,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숀 작전팀장이 절규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잘못이라...."

유이토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길 잠시.

"약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 아닐까요?"

"...뭐?"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하, 하하… 어이가 없군."

"뭐, 이해 못 하면 어쩔 수 없고."

유이토가 숀 작전팀장의 말을 자르며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메카닉 클래스가 사용하는 트랜스 웨폰.

스킬에 따라 자유자재로 모습이 변하는 그 무기를 쥐자, 회중시계가 조잡한 칼날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그 칼날이 숀 작전팀장의 목에 날아들던 그때였다.

"맞는 말이야."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약한 게 잘못이지. 세상이 그래. 허구한 날 당하기만 하고, 아무리 억울해도 찍소리 한 번 못하고 말이야."

"...."

"그게 다 힘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

유이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봤다.

"예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듯이 말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동양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 적 없는 얼굴이었지만, 유이토는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김준우.

비공식 SS랭크로 판정된 이레귤러.

이 바닥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그 남자.

"설마 남부 쪽을 처리한 게 당신인가...?"

유이토가 물었지만, 김준우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유이토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그가 잘 나가던 작전팀장 자리를 내려놓고 프리랜서로 전향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몬스터가 아닌 다른 것과 싸우고 싶었으니까.

제아무리 강한 몬스터를 쓰러뜨려도, 수백 수천 마리의 몬스터를 죽여도 가슴 속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는다.

성취감과 쾌감.

오로지 강자에게 굴복하는 약자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만 얻을 수 있지, 짐승에 불과한 몬스터를 잡는 거로는 절대 채울 수 없다.

프리랜서로 전향한 뒤로는 토벌보다 세계 랭커를 찾아다니기에 바빴다.

자칭 강자라고 착각하는 그들이 죽음 앞에서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이지 가슴이 벅차올랐으니까.

세계 랭커 킬러.

혼자서 전 9위부터 2위까지 모조리 죽여 버린 미친놈.

세계 랭커들 사이에서 비상이 걸리기 시작할 때쯤, 유이토는 기어이 세계 랭킹 2위에 올라섰다.

김준우에 대한 소문은 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유이토가 국제 협회에 들어온 이유도 오로지 그 때문이었다.

김준우를 만나기 위해.

그를 쓰러뜨려 성취감을 채우기 위해.

그렇기에 이번 작전에서도 중앙통제실을 맡고 싶었는데, 웨슬리 사무총장이 절대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지 않았던가.

너무나 아쉽지만, 이번 작전에선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제 발로 찾아오다니.

"운이 좋네요!"

유이토가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며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고유 스킬 : 태엽 시계]

[되감기 - 정각]

"아니. 넌 운이 존나 나빠."

김준우의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각성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시전자는 기존의 클래스를 초월합니다]

"이번만큼은 옛날 기분 좀 낼 거거든."

그 순간, 김준우의 두 눈에서 검은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각성 클래스 : 절대 군주]

***

전투가 끝난 현장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와타나베 유이토.

회귀 전에도 세계 랭커만 골라 살인을 일삼던 미친놈이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수백 명의 헌터를 투입했지만, 모두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다.

결국, 국제 협회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나는 유이토를 마주한 지 단 10분 만에 그의 무릎을 꿇렸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노아 때처럼 자비를 베풀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초토화가 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생존자를 확인하고 있던 그때였다.

"선생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김민주가 몇 명의 헌터를 이끌고 현장에 도착한 채였다.

"북부 구역은 어떻게 하고 여길 왔냐?"

"저희 쪽은 상황 종료됐어요. 혹시 몰라서 지원 나온 건데...."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이거… 선생님이 한 거예요…?"

너무나 처참한 현장에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뭐, 그렇겠지.

회귀한 이후로부턴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었으니까.

"...."

"...."

무거운 침묵이 흐르길 잠시.

"…어쨌든 이걸로 다 끝난 거죠?"

그녀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는 듯,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래. 수고했어."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각 구역에 전달합니다. 현 시간부로 모든 상황 종료됐습니다. 긴급 방어 체제 해제하겠습니다. 각 구역의 의료진은 부상자 우선으로 처치하고 현장 수습 마무리되면 피해 상황 보고해주십시오. 반복합니다. 현 시간부로...."

그리고 그 순간.

"대단하네요. 정말."

한 남자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

"...!"

예상치 못한 손님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소한 본부 하나는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도 정말 곤란해지는데 말이죠."

불청객은 현장을 두리번거리며 말했고, 나는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대답했다.

"총책임자라는 분이 상황 다 끝나서야 오시는군요. 조금 늦으신 거 아닙니까?"

"하하. 부릴 말이 많으면 당신처럼 직접 나설 이유가 없죠."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정면에서 마주한 나는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드디어 그가 직접 행차했다.

"반갑습니다, 웨슬리입니다."

국제 헌터 협회 사무총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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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미스터 김."

웨슬리 마틴.

현 국제 헌터 협회 사무총장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걸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차려입고 올 걸 그랬군요."

"…괜찮습니다. 피차 우리가 격식을 차릴 사이도 아니고."

"하하, 그렇게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입니다."

서로 어쭙잖은 격식을 차리던 그때, 웨슬리와 내 눈빛이 서로 교차했다.

나를 회귀하게 만든 장본인.

이 모든 일의 원흉.

드디어 그를 만났다는 고양감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래서, 여태껏 직원들이 죽어 나가도 본부에서 가만히 박혀만 계시던 분이 이번엔 어쩐 일이십니까?"

"그만큼 상황이 상황이라는 거겠죠. 솔직히… 랭커들까지 막아낼 줄은 몰랐습니다."

"저를 너무 얕보신 거 아닙니까? 그동안의 일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예상했을 텐데요."

"글쎄요, 당신을 얕봤다기보단 랭커들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군요."

웨슬리 사무총장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유이토를 향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세계 랭킹 2위였던 그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웨슬리 사무총장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아랫놈들에게 맡기기 힘들 것 같아서 말이죠."

"이제 와서 큰일 났다 싶으니까, 허겁지겁 달려왔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하하하! 착각하지 마세요, 미스터 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더 이상 토벌을 진행하기 힘들다는 거,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글쎄요. 본부가 무너져도 팀원들만 있으면 어떻게든 진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팀원들도 계속 토벌을 진행할 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나는 주변을 살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 현장.

갑작스러운 습격 때문에 발생한 수많은 부상자.

어떻게든 막아냈긴 했지만, 대부분이 무기를 쥘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그건… 김민주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깟 랭커 몇 명 상대로 이 꼴이라니....'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억울하긴 하지만 웨슬리의 말이 맞다.

다들 이 상태라면 더 이상의 토벌은 힘들다.

"물론 당신 성격상 어떻게 해서든 또다시 에덴을 찾으려 하겠죠. 뭐, 그때마다 막는 거야 어렵진 않은데... 우리 쪽 손해도 만만치 않아서 말이죠. 어쨌든 우리로서도 소모전은 피하고 싶군요."

"막을 순 있지만, 수지가 맞지 않는다?"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국제 협회가 그렇게 싫으면 무력으로라도 무너뜨릴 수 있잖아요. 하지만 당신도 그만큼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니, 아직 그 방법은 쓰고 싶지 않겠죠."

맞는 말이다.

솔직히 사무총장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무력으로 국제 협회를 점거해서 강제로 자리를 빼앗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실패했을 경우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느니, 차라리 조금 돌아가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전쟁은 늘 최후의 보루였던 겁니다. 이기든 지든 피차 손해를 보는 건 마찬가지고. 특히나 요즘 같은 세상에선 이득을 보는 것보단 손해를 보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굳이 둘 다 손해를 볼 필요가 있냐는 겁니다. 보아하니 충분히 합의할 수 있는 내용 같은데."

"협상하자 이겁니까? 당신이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내가 묻자, 웨슬리가 가만히 노려보며 말했다.

"앞으로 전 세계 토벌은 우리 국제 협회가 관리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들을 포함해, 모든 독립 토벌 기구들은 전부 길거리에 나앉게 되겠죠. 하지만… 당신은 그걸 막고 싶은 거죠?"

"...뭐?"

"그러려고 과거로 온 거 아닙니까? 국제 협회의 독주를 막고, 나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

그 순간, 내 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뭐야, 이 새끼....

내가 회귀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큰 충격에 잠시 이성이 마비된 그때, 웨슬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 놀랄 필요 없어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 알 수 있는 건데."

"...."

"뭐, 대의를 위해 희생한 것엔 박수를 보내 드리고 싶은데… 솔직히 누가 알아줍니까?"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의? 희생?

그건 대체 무슨 개소리인가.

"미스터 김, 국제 협회로 들어오십시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드리죠. 필요한 게 있으면 전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보군요. 좋습니다. 그럼… 차기 사무총장 자리까지 약속드리죠."

뭐라고?

"어떻습니까. 제 밑에서 몇 년만 버티면 전 세계가 당신의 손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 대신 더 이상 에덴을 찾지 마라…?"

"정확하게는, 저희를 방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애써 숨겼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시간석에 대해 조사를 해본 건가?

아니 그런 건 둘째치고....

'혹시 내가 본인을 막기 위해 회귀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뭐,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결과적으로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제시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옳다구나 덥석 물 수는 없다.

"제가 그걸 받아들일 이유가 있습니까?"

"음?"

"여기서 내가 당신을 죽이면 다 해결되는 건데, 뭐하러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겠습니까."

"하하하! 해보시든가요. 할 수 있으면."

그가 두 팔을 벌리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여기서 저놈을 죽이는 거야 어렵지 않다.

여태까지 나에게 해온 짓거리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렇게 수다나 떨 이유가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다.

여기서 저 인간을 죽인다고 해도 내가 사무총장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아직까진 국제 협회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지부를 포함해 전 세계 대다수가 아직은 국제 협회를 신뢰하고 있으니.

그런 상황에 사무총장이 죽어버리면 비공식 토벌 조직에 맞서다 순직한 영웅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우린 전 세계의 표적이 되겠지.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제2의 국제 협회로 인정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그건 너무나 치명적이다.

웨슬리가 이제 와서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방법이 없나....'

솔직히, 내가 먼저 에덴을 찾는다고 해도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애초에 내 유일한 목표인 사무총장 자리까지 약속했다.

그렇다면 굳이 더 싸울 필요가 있는가.

굳이 힘들게 카르마를 제2의 국제 협회로 만들 필요가 있는가.

굳이 멀리 돌아갈 이유가 있는가.

이제 와서 저놈한테 고개를 숙이는 건 뭣 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선 저놈 말대로 합의를 보는 게....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옆에 있던 김민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선 불안도, 걱정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목숨이 오갔을 전투를 마치고 다들 피투성이가 된 채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는 팀원들.

그 모두가 숨죽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국제 협회에 들어가길 바라는 건가....'

하긴, 그들과 척을 진다면 또다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날이 계속될 테니.

아무리 나를 따르고 있다고 해도, 결국 본인의 안전이 최우선이겠지.

그때,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유감이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

도저히 저 새끼 밑으로 들어갈 맘이 생기질 않는다.

그럴 바엔 차라리 돌아가지 않는 편이 낫지.

다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 상태로 계속 에덴을 찾는 건 확실히 무리다.

게다가 유예 기간이 지나면 공식적으로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해체된다.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가진 패가 너무도 없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던 그때였다.

지지직―.

때마침 내 통신기가 울렸다.

"예."

다름 아닌, 이아영 본부장으로부터 온 통신이었다.

"...정말입니까? …알겠습니다."

짧은 통신을 마친 후, 나는 다시 웨슬리 사무총장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협상은 결렬된 것 같군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 김준우 앞에서 웨슬리 사무총장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어떤 놈이건,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손해 볼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국제 협회에 들어오기만 하면 본인이 원하는 대로 토벌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

기존 팀 그대로, 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차기 사무총장 자리까지 내걸었다.

이 모든 게, 에덴을 찾지 않겠다는 조건 하나에 걸린 것들이다.

똑똑한 놈이라면 이걸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대의를 위해서 과거로 온 자라고 해도, 당장 눈앞에 놓인 권력을 외면할 리가 없으니까.

'뭐, 다른 놈들은 거절하길 바라는 눈치인데....'

웨슬리가 주변을 곁눈질로 살피며 생각했다.

하긴, 김준우라면 지옥이라도 따라갈 놈들이니 그의 옆에서 어떤 고생을 하든 신경도 안 쓰겠지.

그저 김준우가 절대 고개 숙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헛된 희망이다.

김준우도 결국 인간인 이상, 무조건 협상을 받아들인다.

김준우만 손에 넣으면 더 이상 자신을 방해할 수 있는 놈은 없다.

사무총장 자리?

그깟 이름뿐인 자리, 얼마든지 넘겨줄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런 명함이 아니라, 누가 실질적으로 토벌권을 쥐고 있냐는 거니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김준우를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아무래도... 협상은 결렬된 것 같군요."

그가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었다.

"뭐, 뭐…?"

"저희가 방금 원하는 걸 얻어서."

"...!"

웨슬리 사무총장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설마....

에덴을 찾은 건가?

'시발, 왜 하필 지금…!'

웨슬리 사무총장의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아니,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타이밍 좋게 에덴을 찾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냥 패가 없는 놈의 블러핑일 수도 있다.

여기선 일단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하, 하하. 뭐 이 타이밍에 에덴이라도 찾은 겁니까? 우연치곤 기가 막히는군요."

"뭐, 대답해드릴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그럼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으니 전 이만...."

김준우가 일말의 아쉬운 기색조차 없이 등을 돌린다.

그 모습에 웨슬리 사무총장은 꽤나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거짓말이라고 계속 중얼거렸지만, 머릿속은 그렇지 못했다.

만약 거짓말이 아니라면?

만에 하나라도, 정말 에덴을 찾은 거라면?

'빌어먹을....'

심증만으로 판단하기엔 그 만에 하나에 걸려 있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던전과 이능력, 몬스터와 헌터.

50년간 이어져 온 이 원인 모를 현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스위치.

그 물건이 정말 저 새끼 손에 들어갔다면....

국제 협회고 뭐고, 모든 게 사라진다.

'시발, 어떻게 해야....'

그가 이를 으득 씹었다.

그런 와중에도 김준우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고, 초조함과 불안함에 판단력이 점점 흐려져만 갔다.

"...잠깐."

결국, 웨슬리 사무총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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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거 말입니까?"

미련 없이 등을 돌린 그 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웨슬리 사무총장은 다급하게 나를 불러 세웠다.

슬쩍 걸음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협상할 생각입니까?"

"우리한테 원하는 게 있으니, 그렇게 에덴을 찾았던 거 아닌가요? 뭐든 말씀하시죠. 최대한 들어드릴 테니."

웨슬리 사무총장은 애써 침착하게 말했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뭐, 당연하겠지.

절대적인 칼자루가 우리한테 넘어왔으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의 목적은 전 세계 토벌권을 통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첫 번째는 전 세계 던전과 이능력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뱅크 아이템들을 모두 소유해야 할 것.

두 번째는 에덴이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반드시 막을 것.

에덴은 50년간 이어져 온 기현상의 가장 큰 원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다시 말해, 에덴을 이용한다면 이 기현상을 없앨 수도 있다는 뜻이다.

던전과 몬스터, 헌터와 이능력 모두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웠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토벌권 통제고 나발이고 국제 협회 자체가 사라지겠지.

웨슬리 입장에선 그것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그에게 있어 던전은 재앙이 아닌, 그저 사업 수단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나 또한 에덴을 손에 넣었다고 한들, 이용할 수 없다.

내 목표는 국제 협회 사무총장이 되는 거다.

당연히 던전과 헌터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 목표를 달성할 순 없으니, 내게도 에덴은 휘두를 수 없는 칼자루인 셈이다.

그럼에도 기를 쓰고 에덴을 찾으려고 했던 건, 에덴이 웨슬리 손에 들어가는 걸 막음과 동시에... 협상을 통해 국제 협회가 전 세계를 통제하려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다.

"스읍,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협상을 할 이유가 없군요. 뭘 내걸든 이 현상을 없애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당신도 이 바닥에서 돈을 벌고 있는 이상, 던전이 사라지는 것보단 보다 실리적인 이득을 챙기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의 목소리는 간절함을 넘어 절박함까지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다.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사무총장님이 내세울 조건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일단 말씀하시죠."

"제가 만약 전 세계 토벌권 통제를 철회하라고 하면, 하실 겁니까?"

"...."

절대 못 하지.

토벌권 통제만을 위해 그렇게 기를 쓰고 뱅크 아이템을 모아왔는데.

"거 보세요. 당신은 통제를 원하고, 저는 독립을 원합니다. 서로 이해관계가 완전히 반대인데, 이게 협상이 될 것 같습니까?"

"...."

웨슬리 사무총장이 이를 빠득 갈았다.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좋습니다."

무언가를 각오한 듯,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한발 물러나도록 하죠."

"어떻게 말입니까?"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독립 토벌 기구로 인정해드리겠습니다. 또한, 토벌권을 저희가 관리하는 대신 헌터 관리 권한은 그쪽에 넘겨드리죠."

나는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헌터 관리 권한을 주고, 토벌권을 갖겠다.

이는 여전히 국제 협회의 허가 없이는 독자적인 토벌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반대로, 국제 협회 또한 우리 쪽의 파견 허가 없이는 함부로 토벌을 진행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이 통제권을 갖지 않는, 나에겐 더 없이 이상적인 조건.

두 가지 통제권 중 하나를 뚝 떼어주겠다는, 꽤나 파격적인 조건임은 틀림없지만....

"글쎄요. 그거로는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할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지.

"...더 원하는 게 있습니까?"

"솔직히 이번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희를 독립 기구뿐만 아니라, 작전 관리 기구로도 인정해주셔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앞으로 국제 협회에서 진행하는 모든 작전을 관리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으면 한다는 겁니다."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작전 관리 감독 권한까지 갖게 되면, 국제 협회는 더 이상 이번과 같은 작전을 진행할 수 없다.

동시에 음지에서 활동할 수도 없을뿐더러, 우리를 뒤통수치려는 작전은 시도조차 못 하겠지.

다시 말해, 앞으로는 우리를 건드릴 수 없게 쐐기를 박겠다는 뜻이다.

물론.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시간석과 차원석은 국제 협회에서, 이능석과 반능석을 저희 쪽에서 관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로만 권한을 넘겨주겠다고 하면 신뢰성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너무 과하군요."

"에덴을 걸고 하는 협상인데, 이 정도는 돼야지 않겠습니까."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웨슬리 사무총장이 떨리는 한숨을 쏟아냈다.

얼굴은 누가 봐도 분노를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 조건을 모두 들어주면 에덴을 저희에게 넘겨주실 겁니까?"

"글쎄요, 에덴을 어느 한쪽이 가지고 있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조건을 받아들이신다면 저희 쪽에서 책임지고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고...."

"못 믿으시면 어쩔 수 없죠."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었지만, 심지어 에덴은 넘겨주지도 않겠다.

얼핏 보면 절대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불합리한 협상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국제 협회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물건인 이상....

"...빠른 시일 내에 연락드리죠."

웨슬리는 이번 협상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번엔 내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넸다.

하지만 그는 애써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그 찰나의 순간 분노로 구겨진 표정이 보였지만, 어쩌겠는가.

칼자루는 이미 내 손에 넘어왔는데.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내 인사를 뒤로 한 채 대동한 직원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괜찮을까요?"

옆으로 다가온 김민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헌터 관리 권한에, 작전 관리 감독 권한까지. 조건은 더할 나위 없는데, 뭐가 또 걱정이야."

"그 좋은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인 게 걱정이에요. 나중에 뒤통수칠 수도 있잖아요. 특히나 여태까지 해왔던 짓을 보면...."

"지금은 걸린 게 무게가 달라. 에덴은 저들에게 있어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이 없거든. 아마 뒤통수칠 생각은 죽어도 못할 거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쨌든 뱅크 아이템도 나눠 받게 됐고, 독립 기구로 인정도 받았어. 국제 협회의 권한이 공식적으로 분할된 셈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그 조건으로 기껏 찾은 에덴을 다시 놔줘야 하잖아요. 권한 분할이 아니라 전 세계를 뒤집을 수도 있었는데...."

"뭐, 확실히 그랬을 수도 있지."

나는 김민주를 슬쩍 흘기며 말을 이었다.

"정말 에덴을 찾았다면."

"...네?"

순간 김민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한쪽 입꼬리를 쓰윽 올릴 뿐이었다.

***

미국 지부, 중앙통제실.

이아영 본부장은 그곳에 홀로 남아 연신 손톱을 물어뜯었다.

남부로 지원을 나간 김준우가 벌써 몇 시간 째 연락이 없던 까닭이었다.

뭐, 그 남자가 죽었을 리는 없겠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꽤나 초조한 표정으로 몇 분째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하던 도중.

결국, 불안함을 참지 못하고 통신기를 들었다.

「예.」

"여, 여보세요?"

짧은 연결음이 끝나고, 김준우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됐어요?! 상황은요? 다친 사람 있어요? 왜 이렇게 연락을 안 줘요, 걱정되게!"

「....」

안도함과 동시에 잔소리를 쏟아냈지만, 어째선지 김준우는 대답이 없었다.

이아영 본부장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요? 왜 말이 없...."

「…정말입니까?」

그러자 날아든 상당히 뜬금없는 대답.

"...? 갑자기 뭔 소리예요. 뭐가 정말이에요?"

이아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김준우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갈 테니, 잘 보관해주세요.」

"아니, 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좀 알아듣게 설명을…!"

뚝―.

그렇게 일방적으로 끊긴 통신.

이아영 본부장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꺼진 통신기를 바라봤다.

대체 뭐야, 이 인간?

***

"...."

웨슬리 사무총장의 전용기가 미국 상공을 가로지르며 국제 협회 본부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륙 직후부터 기내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앉은 채였다.

사실 직원들은 방금 협상에 대해 할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굉장히 분노한 듯한 웨슬리의 표정에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저...."

그때, 한 직원이 총대를 메고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사무총장님, 이번 협상은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되는...."

[고유 스킬 : 천지창조]

[11차원의 고유 공간을 창조합니다]

서걱―.

그 순간, 입을 연 직원의 상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동시에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몸뚱이.

충격적인 광경에 다른 직원들 모두가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순식간에 반 토막이 난 직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공포감에 휩싸여 모두가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던 그때였다.

"정말 조건을 들어주실 건가요?"

웨슬리의 수행비서가 싸늘하게 식은 직원을 대신해 말을 이었다.

그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도 꽤나 담담한 목소리였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이 타이밍에 갑자기 에덴을 찾았다뇨. 거짓말인 게 분명...."

"아니면?"

"...네?"

웨슬리 사무총장의 서슬 퍼런 눈빛이 그녀에게 닿았다.

"만에 하나라도 거짓말이 아니면, 그땐 당신이 책임질 겁니까?"

"그건...."

"도박을 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이 크게 호흡했다.

"뼈아프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저들의 조건을 들어주는 수밖에."

"하지만 헌터 관리 권한에 뱅크 아이템까지 넘겨주면, 저희는...."

"원래 계획대로는 안 되겠죠."

전 세계 던전과 헌터를 통제한다는 그 계획.

김준우의 조건을 들어준다면 그건 모두 물거품이 된다.

하지만 이미 그가 에덴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계획에는 차질이 생긴 셈이다.

그러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여기선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나야 한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봅시다. 이후에 에덴을 처리한 게 확실해지면... 우리도 손해를 감수해보죠."

"그 말씀은...."

"최후의 보루를 준비하자는 말입니다."

최후의 보루.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꺼내 들어야 하는 마지막 수단.

그건 곧, 전쟁을 의미했다.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에 수행비서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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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을 걸고 협상을 했다고요…?"

미국 지부, 중앙통제실.

현장을 수습하고 복귀한 직후, 나는 이아영 본부장에게 웨슬리 사무총장과 있었던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찾지도 못한 에덴을 가지고요?"

그녀는 당연히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뭐, 다행히 잘 넘어갔습니다."

"그럼 전에 통화로 자꾸 이상한 말을 한 게...."

"연기 좀 해봤습니다."

"아, 아니… 들키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했어요?!"

"안 들켰으니 된 거 아닙니까?"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아영 본부장은 이마를 턱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잖아요!"

"그럼 어떡합니까. 그놈 밑으로 들어가는 건 죽기보다 싫고, 그렇다고 가진 것도 없이 협상할 수도 없는데."

이러나저러나 최악의 상황이라면, 칼자루를 쥔 척이라도 해야지.

"그리고 전 에덴을 찾았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그쪽이 지레짐작으로 착각한 거니 들켜도 할 말 없겠죠."

"그런 변명이 통할 것 같진 않은데요...."

이아영 본부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어쨌든 최악은 면했잖습니까. 아니, 우리한텐 오히려 이게 최선이라고 해야겠죠."

"...그렇긴 하죠. 독립 기구 인정에 헌터 관리 권한, 작전 감독 권한. 거기에 뱅크 아이템까지 나눠 받게 됐으니."

"앞으로는 자체 토벌과 지부 활동도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겁니다. 국제 협회의 독재를 견제할 수 있는 건 덤이고요."

"그렇게만 보면 더할 나위 없긴 한데...."

이아영 본부장이 말끝을 흐리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다음이 문제라는 겁니까?"

"그렇죠. 국제 협회는 어쨌든 전 세계 던전과 헌터를 독점하는 게 목표잖아요. 지금이야 우리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발 물러났겠지만...."

"칼자루가 없어지면 또다시 이빨을 들이밀겠죠."

당연한 소리다.

그들이 정말 좋아서 우리에게 통제권을 뚝 떼어줬겠는가.

그건 그저 울며 겨자 먹기로 잠시 빌려준 권한일 뿐이다.

언젠간 기한이 되면 반드시 돌려받으려고 하겠지.

그리고 그 방법은 아마....

"최후의 보루를 꺼내 들지도 모르겠군요."

"그 말은...?"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아영 본부장의 표정이 굉장히 심각해졌다.

"더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뭐, 너무 그러지 마십쇼. 국제 협회에 대적하고 있는 이상, 언젠간 닥칠 일이었으니."

"대비책은 있어요?"

"지금은 없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만, 앞으로 준비할 수는 있죠."

"어떻게요…?"

"국제 협회가 빌려준 권한이 있지 않습니까."

돌려줘야 할 기한이 오기 전까지 그 권한들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야겠지.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독립 기구가 됐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인수하는 조직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렇다면 가능한 한 많은 아군을 만들어 놔야겠죠."

"...."

"물론 말이 쉽지, 실제론 꽤나 어려울 겁니다. 남아 있는 독립 조직은 실정이 그다지 좋지 못하니."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들이 최대한 제 몫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줘야 하고, 고질적인 문제도 해결해줘야 하는 데다가 조직들이 우리를 신뢰할 수 있도록 신경도 써야 합니다. 거기에 직원들의 신임까지 받아야 하니...."

내가 말끝을 흐렸다.

말을 뱉고 보니 나조차 가능할까 싶은 의문이 들었던 까닭이었다.

뭐, 이아영 본부장도 아무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걸 보니 같은 생각인 것 같은....

"그러니까 여태껏 하던 대로 하겠다는 소리네요?"

"…예?"

"...네?"

그게 왜 그렇게 되지?

내 말 이해한 거 맞나?

서로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채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던 그때.

"대표님!"

마이클 지부장이 격양된 얼굴로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지금 전 세계 뉴스가 난리가 났습니다! 국제 협회에 대한 맹비난이 쏟아지고 있어요! 아무래도 이번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간 모양…!"

"아, 벌써 반응이 오고 있군요."

"...네?"

마이클 지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표정이다.

"본부에서 작전 방해하겠다고 이 난리를 쳐놨는데, 저희라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그, 그럼 대표님이…?"

"예. 제가 제보했습니다. 이번 습격에 대한 일들 전부."

물론 습격에 성공했다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넘어갔겠지. 이번 일에 대해서 입을 열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보기 좋게 실패한 이상, 우리도 묵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마이클 지부장은 대놓고 국제 협회를 공격한 게 퍽 불안한 모양이었다.

"협상도 잘됐다고 들었는데 왜 굳이 이런...."

"협상은 협상일 뿐이죠. 겁도 없이 내 팀원들을 죽이려고 한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국제 협회에 한 방 먹일 생각만으로 이 일을 알린 게 아니다.

"이번 일이 세간에 알려진 이상, 생각이 있는 협회들이라면 국제 협회에서 떨어져 나올 겁니다. 그리고 우린...."

이번 일은 앞으로 우리가 준비할 대비책을 위한 발판이다.

"그 협회들부터 노릴 생각입니다."

***

[속보 - 국제 헌터 협회, 작전 중인 미국 지부 습격]

[해당 습격으로 인해 미국 지부를 포함한, 각국의 작전팀 사상자 다수 발생]

['대체 왜?' 시민의 안전을 위한 기구의 충격적인 이면!]

[일방적인 탈퇴 명령에 이어 작전팀 습격까지. 국제 사회, '명백히 선을 넘은 침략 행위' 일축]

[중국 협회 측, '이러려고 전 세계 토벌권을 통제한 것인가' 유감 표명. 국제 협회 탈퇴하나?]

['문답무용' 러시아, 국제 협회 가입 일주일 만에 탈퇴. 각국 또한 뒤따라 탈퇴 이어져....]

[국제 헌터 협회 입장표명, '작전 철회 협상 중 발생한 예상치 못한 사고']

[웨슬리 사무총장 曰 '깊이 사죄하겠다' 이어 '이번 작전을 지휘한 조직은 독립 기구로 인정하겠다' 발언 화제]

[해당 작전 총 책임자가 카르마 코퍼레이션 김준우 대표로 밝혀져....]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 협회의 전신을 이어받은 카르마 코퍼레이션, 전 세계 유일한 독립 토벌 조직으로 인정받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제2의 국제 협회 가능성 대두]

"이, 이게 무슨...."

뉴스를 확인하던 이두식 이사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국 지부에서 대규모 작전을 벌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국제 협회로부터 습격을 받았다니.

이두식 이사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이아영을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뭐, 별다른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무사하다는 뜻이겠지....'

그런 생각도 잠시, 이두식 이사의 시선이 다시금 헤드라인으로 향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독립 토벌 조직으로 인정받다.'

그 밑에는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국제 협회로부터 얻어낸 권한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를 확인한 이두식 이사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대체 거기서 뭔 짓거리를 한 거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단순히 국제 협회에 한 방 먹인 수준이 아니었다.

며칠 전 국제 협회가 토벌권을 통제하겠다고 통보했을 때 별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건, 당연히 국제 협회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그간 국제 협회는 '시민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누구보다 토벌에 열을 올리지 않았던가.

전 세계 시민들에게 있어 국제 협회는, 자신의 목숨을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이자 영웅이었다.

그 두터운 신뢰 때문에 몇 번의 구설수에도 국제 협회는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기어이 그 신뢰가 무너져 내렸다.

이게 계획된 일이든, 아니면 정말 사고이든 간에 미국 지부를 일방적으로 탈퇴시킨 것도 모자라, 작전 중인 이들을 습격했으니....

덕분에 전 세계에서 국제 협회를 향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동시에, 토벌권 통제에 대한 시각 또한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국제 협회에 있어서 이번 일은, 그야말로 치명상인 셈.

'그런데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반대지....'

오히려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이번 일로 인해 수면 위로 올라섰다.

전 세계 유일한 독립 토벌 조직.

헌터 관리 권한 및 국제 협회의 작전 관리 감독 권한.

이로써 국제 협회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 되었다.

해외 지부 사업이니, 제2의 국제 협회니, 김준우가 떠들어댔던 것들이 정말 조금씩 실체화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거…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이내 이두식 이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주 앉은 박인범 전 협회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박인범 전 협회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난 좀 걱정이다."

"국제 협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으십니까?"

"같은 게 아니라, 절대 가만히 안 있지."

그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여태까지 행보를 봐라. 그놈들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전쟁이라도 벌일 놈들이야."

"...설마 요즘 시대에 정말 전쟁이라도 일으키려고요."

"설마가 사람 잡지."

박인범 전 협회장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이두식 이사도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김준우 그놈한테도 말해둘까요?"

"아니, 그놈이 모를 리가 없지. 다 생각이 있지 않겠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불안은 떨칠 수가 없었다.

한발 물러났다곤 해도 아직 국제 협회가 뱅크 아이템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뱅크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한 언제든 이 상황은 역전될 수 있는....

"저, 이사님...."

그 순간, 한 직원이 조심스레 이두식 이사를 찾았다.

"뭔가?"

"방금 국제 협회에서 보낸 특수 화물이 도착했는데. 저희 쪽에서 확인해보니, 이능석이랑 반능석인 것 같습니다."

"...뭐?"

이두식 이사와 박인범 전 협회장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

미국 북부, 한국 임시 작전본부.

처참했던 현장도 보수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김민주의 표정은 어째선지 계속 어두웠다.

-그러려고 과거로 온 거 아닙니까? 국제 협회의 독주를 막고, 나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웨슬리가 김준우에게 했던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던 까닭이었다.

"죽을 뻔한 사람은 난데, 왜 그쪽이 똥 씹은 표정이에요?"

결국, 보다 못한 한유빈이 그녀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어요?"

"...."

김민주는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유빈 씨는... 선생님이 없어지면 어떨 것 같아요?"

"갑자기 뭔 소리래."

"누가 그러더라고요. 선생님은 지금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희생한 거라고. 그리고 목표를 이루면 사라질 수도 있다고."

"...?"

"그런데 좋은 세상이든 뭐든, 선생님이 없으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요."

한유빈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김민주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던 까닭이었다.

혹시 지금 장난치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김민주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기에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한유빈은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입을 열었다.

"뭐, 확실히 그건 싫네. 솔직히 민주 씨나 나나 이 일이 좋아서 하고 있다기보단, 그 사람이랑 같이 일하는 게 좋아서 하는 거기도 하고."

"그렇죠...."

"그런데 어쩌겠어요. 그 사람 목표가 그런 거라면 우리가 하지 말라고 막을 수도 없고. 그래도... 굳이 목숨까지 걸 필요는 있나 싶네."

한유빈이 김민주를 바라봤다.

"그럼 그냥 둘 다 욕심내면 안 돼요? 그 사람이 희생하지 않아도 좋은 세상이 되면 되잖아요."

"그게 무슨…?"

한유빈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 사람을 제일 높은 곳에 앉게 해줘요."

"...!"

"그럼 그 사람이 희생할 필요도 없고. 내가 볼 땐 그것보다 좋은 세상도 없을 것 같은데?"

김민주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우리가 좀 더 고생하면 되죠. 그 사람은 희생보단 높은 곳이 어울리니까."

"높은 곳이라면...."

"뭐겠어요."

한유빈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국제 협회 사무총장밖에 더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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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다는 말로도 부족하겠군."

카르마 코퍼레이션, 행정본부.

비록 에덴을 찾진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원하는 걸 얻었기에 우린 곧바로 미국에서 철수했다.

한국으로 귀국하자마자 이두식 이사가 나를 호출했다.

사무실로 들어서니 그나 나를 반기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뉴스에 나온 그대롭니다."

"참 나, 그게 다가 아니잖아. 뭘 어떻게 했길래 국제 협회가 이렇게까지 물러난 거냐니까?"

"뭐… 협상을 좀 했습니다."

"무슨 협상?"

대답을 아꼈다.

설명하기 위해선 할 이야기가 많은 까닭이었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뜸을 들이고 있자니, 이두식 이사가 손을 내저었다.

"됐다. 말하기 곤란하면 하지 마."

"괜찮겠습니까?"

"네가 한 일인데 안 괜찮을 건 뭐야."

이두식 이사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건 오히려 내가 할 소리야. 너, 진짜 괜찮겠냐?"

"안 괜찮을 건 뭐겠습니까."

"야 인마,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야. 이번 일로 국제 협회는 통제권도 반 토막이 났고, 뱅크 아이템도 분할 관리를 하게 됐어. 무엇보다 목숨보다 중요한 신임을 잃기 시작했다."

이두식 이사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 입장에선 호재일 수 있지만… 거꾸로 말하면, 국제 협회는 더는 잃을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해. 너도 알지? 잃을 게 없는 놈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놈들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극단적으로 나올 거야."

"…그렇겠죠."

"심지어 이제 넌 혼자도 아니잖아. 네가 지켜야 할 식구가 수백 수천인데.... 너 정말 감당할 수 있겠냐?"

그 질문에 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 긍정보단 부정에 가까운 미소였다.

그도 그럴 게, 직원들을 내가 왜 지켜야 하는가?

응당 본인 몸은 알아서 건사할 정도는 돼야지.

애초에 난 내 일에만 신경 쓰기에도 바쁘다.

대충 그런 의미의 미소였지만... 어째 이두식 이사는 조금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됐다.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 아무렴, 천하의 김준우가 감당 못 할 게 뭐 있겠어."

"...."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네.

"그건 그렇다 치고...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냐?"

"당분간은 국내에 머물며 동태를 좀 살필 생각입니다. 벌써 몇 개 협회가 국제 협회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습니까."

"때를 기다렸다가 한 번에 쓸어 담겠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선택지는 두 개밖에 없지 않습니까. 국제 협회가 아니라면 무조건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합류할 수밖에 없겠죠."

이전처럼 굳이 우리가 인수를 위해 발로 뛸 필요가 없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먼저 여기저기서 연락이 올 테니까.

"연락이 오는 족족 인수를 해버리는 것도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재정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물론 연락이 오는 협회를 전부 받아줄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곳만 받아야겠죠. 어차피 선택권은 저희한테 있으니까요."

"그래.... 이것 참, 해외에 지부 한번 세워보겠다고 그 난리를 피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골라잡는 입장이 되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내 이두식 이사가 새삼스럽다는 듯 팔짱을 꼈다.

"너도 알겠지만… 우린 지금 죽다 살아난 상황이야. 아마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신 없겠지."

"그렇겠죠."

"그러니까 제2의 국제 협회든 뭐든, 반드시 성공시켜. 네 주변에 있는 모두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거니까."

"글쎄요. 그건 어디까지 제 목표지, 다른 사람들 목표는 아니잖습니까. 지금까진 몰라도 앞으로도 계속 도와줄 것 같진 않은데요."

"참 나, 겸손한 건지 척하는 건지...."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 겸손을 떠나서 틀린 말이 아닌데 말이지.

"원래 조직이라는 건, 수많은 사람이 하나의 비전을 위해 모인 집단이야. 보통 우두머리는 그 비전을 결정하고, 아랫사람은 따르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조직의 비전이고 뭐고 알 게 뭐야. 그냥 월급만 따박따박 주면 그만이지. 안 그래?"

"...그렇죠."

갑자기 왜 이런 말을 꺼내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내 말이 그 말이다.

내 목표는 내 목표고, 그걸 직원들이 알 바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이두식 이사는 끝까지 들어보라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두머리는 어떻게 해서든 아랫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만들어야 해.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 지위를 이용해서 강압적으로 부려먹던가, 아니면 돈으로 해결하던가. 근데 그와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놈도 있어. 왜 그런 줄 알아?"

"글쎄요."

"그런 놈은 가만히 있어도 주변 사람이 알아서 따라오거든."

뭐, 나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들은 적은 있다.

물론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알 턱이 없지만.

'…그런데 왜 그걸 나한테 말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그 사람의 비전을 위해 모두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셈이야. 아무것도 안 해도 말이지. 그게 진짜 우두머리고, 진짜 조직인 거야. 알아들어?"

"...."

아니,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

"그러니까 지금 네 목표는, 네 주변 모두의 목표라는 소리야."

"…아, 네."

대낮부터 술을 자셨나.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는 그의 말에 대충 대답했다.

***

"어떻게, 작전은 순탄합니까?"

본사 사무실로 복귀한 나는, 그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알 거 없잖아. 간만 보고 빠진 주제에.」

곧바로 되돌아오는 날이 바짝 선 목소리.

상대는 다름 아닌, 노아였다.

"뭐, 어쨌든 저흰 원하는 걸 얻었으니 더 이상 계속할 이유가 없죠. 그래도 너무 섭섭해하지 마시죠. 계속 지원해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시발, 생색은....」

노아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우리가 철수한 지금도 길드원들과 함께 에덴을 찾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에덴이 아니라, 던전 속에서 잠들어 있는 그의 여동생을 찾는 거지만.

하여간 집념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나저나 국제 협회에선 연락 없습니까? 나름 PB 코퍼레이션 소속 밸런스 팀장이지 않습니까."

「하! 이미 한 판 거하게 붙은 마당에 이제 와서 날 다시 부르겠어?」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고요?"

「개소리할 거면 끊어.」

나는 작게 웃으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

대답이 끊기길 잠시.

오히려 그가 역으로 나에게 물었다.

「너야말로 어떻게 할 거지? 정말 국제 협회를 무너뜨릴 생각이냐?」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요."

「객기인지 패기인지 모르겠군.」

그가 실소를 터트리길 한 차례.

「알았어. 네가 그렇다면 뭐.」

"...예?"

「토벌 들어가야 하니까 그만 끊는다. 그리고 앞으로 연락은 자제해. 귀찮으니까.」

뚝―.

뭐야.

이러고 끝이야?

아니, 내 질문에는 왜 답이 없어?

'참, 사람하고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통화가 끊긴 전화기를 바라보는 가운데 사무실 문이 열렸다.

"현재까지 국제 협회 탈퇴 명단이에요."

이아영 본부장이 서류 뭉치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벌써 집계가 된 겁니까?"

"어제 밤새워서 한 거예요. 러시아를 필두로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북미에선 멕시코, 남미 쪽에선 브라질, 아르헨티나도 연이어 탈퇴했어요."

"흠, 러시아를 빼면 그리 토벌 강대국들은 아니군요."

"그래서 더 반감이 심한 거죠. 미국 지부조차 비공식 토벌 조직이라고 습격을 감행했으니, 힘이 없는 협회는 언제든 같은 꼴을 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에요."

"뭐, 딱히 틀린 판단이라고 할 순 없겠군요."

그놈들이라면 그러고도 남겠지.

차원석으로 던전 출현을 조정할 수 있다고 해도, 결국 그걸 토벌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춰야 한다.

국제 협회가 아무리 지부에 던전을 몰아준들 감당할 인원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겠지.

그렇다면 국제 협회에 있어 토벌 약소국은 그저 머릿수 채우는 용도,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 내팽개치려 들 것이다.

뭐… 어찌 됐든 우리한테는 좋은 기회지만.

"아, 그리고 중국 협회도 조만간 탈퇴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이건 좀 구미가 당기지 않아요? 토벌량으로 따지면 세계 3위의 강대국이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나는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졌다.

중국 협회라....

물론 협회의 규모와 인원, 토벌량만 봤을 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강대국이다.

하지만 워낙 폐쇄적인 곳이고, 주변국들과도 이런저런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지 않은가.

나로서도 섣불리 손을 대기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 조금 더 기다려 보죠."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마음에 안 든다기보단, 귀찮은 문제가 한둘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잖아요. 서둘러야 해요. 국제 협회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땐 늦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협회만큼은 우리한테 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들면 차라리 대놓고 제3세력을 자처할 놈들이니...."

"...그것도 그렇긴 하네요."

국제 협회에서 그걸 고분고분 인정해 줄 리는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항상 상식 밖의 무언가가 벌어지는 동네인 만큼, 그쪽은 늘 예외를 염두에 두어야겠지.

"일단은 연락이 오는 곳부터 천천히 검토해보고...."

"대표님!"

내가 말을 꺼내던 그때, 하성일 본부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주, 중국 협회에서 인수합병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네?!"

"…예?"

기가 막힌 타이밍에 당황하길 잠시, 이아영이 나를 대신해 먼저 물었다.

"주, 중국 협회에서요? 정말요?!"

"아... 그런데 이걸 중국 협회라고 해야 할지... 이게 좀 복잡한데...."

"무슨 말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이내 하성일 본부장이 뜸을 들이길 잠시.

"연락 온 곳이 중국 협회 산하 홍콩 지부입니다."

"홍콩 지부…?"

"하아...."

이마를 턱 짚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제일 귀찮은 곳이 걸려버렸다.

***

"통제권도 토막 나고, 작전 관리 권한도 넘어가고, 거기에 뱅크 아이템까지 다시 분할됐고...."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웨슬리 사무총장을 마주한 에마 대표가 넌지시 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

물론 웨슬리 사무총장은 말이 없었다.

그 의미를 에마 대표는 잘 알고 있었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렸다.

"전쟁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거, 정말이야?"

"권한이고 아이템이고, 다 잠깐 빌려준 것뿐이야. 언젠간 다시 돌려받아야겠지."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우린 이제 잃을 게 없어. 이러나저러나 똑같다면, 최후의 보루를 꺼내 들어야지."

웨슬리의 말에 에마 대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간부로 PB 코퍼레이션을 본부 직속 부서로 편입할 거야. 밸런스팀 산하에 전투 부대를 편성시켜서 최대한 쓸 만한 놈들로 싸그리 긁어모아."

웨슬리의 명령이 떨어졌다.

"어차피 전력은 이쪽이 우세해. 병력만 모을 수 있다면 전쟁이고 뭐고 일단은 먹고 들어가는 거야."

"글쎄...."

하지만 에마 대표는 어딘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중국 협회, 이번에 탈퇴할 거라면서?"

"...."

"그놈들이 정말 탈퇴해버리면, 병력 모으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하아...."

웨슬리 사무총장이 이를 꽉 물었다.

하여간, 꼭 필요할 땐 방해만 된다니까.

"어쩔 수 없지."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붙잡는 수밖에."

"방법은 있어?"

"그놈들이 원하는 건 일단 다 들어주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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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엄밀히 따지면...."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대표이사실.

나와 하성일 본부장 앞에서 이아영 본부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홍콩 지부도 어쨌든 중국 협회 소속 아니에요?"

"소속을 따지자면 그렇죠. 그런데... 그게 좀 복잡해요. 뭐, 대부분이 외교적인 문제긴 한데...."

하성일 본부장이 먼저 대답했다.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정리가 잘되지 않는 듯 자꾸만 뜸을 들였다.

결국, 내가 대신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처음 지부를 세울 때부터 말이 많았잖습니까. 정치고 경제고 엄연히 본토와 분리된 지역에 지부를 세운다고 하니 반발이 있는 건 당연하겠지만.... 뭐, 당시로선 강력하게 거부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죠."

아무래도 던전이 출현하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된 시기였으니까.

당시 홍콩은 다른 나라들이 그렇듯, 토벌 인프라가 전혀 잡혀있지 않았었다. 그러니 그들로서도 중국 협회의 지부가 들어오는 걸 기를 쓰고 막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본토에서 손대는 걸 원치 않더라도, 어쨌든 몬스터는 처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따지고 보면 중국이 머리를 잘 썼죠. 절대 뿌리칠 수 없는 손을 시기적절하게 내밀었으니. 덕분에 그간 쉽게 건드리지 못했던 홍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고요."

"그럼 더더욱 홍콩 지부는 중국 협회 직속이라는 소리잖아요. 어디가 복잡하다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몇 년 전에 홍콩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아...."

그제야 이아영 본부장 또한 머릿속에서 아귀가 맞춰진 듯했다.

뭐, 잊어버리고 있을 만도 하다.

몇 년 전이라고 해도 무려 20년 전 일이니까.

"물론 성공적인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성과는 있었죠. 지부 내 본토 출신 간부들을 싹 밀어냈으니까."

"아, 아니... 그 정도면 엄청난 거 아니에요?! 따지고 보면 본토를 상대로 지부를 독립시킨 건데?"

"뭐, 그 과정에서 죽어 나간 숫자를 생각하면 최소한의 결과였다고 봐야겠죠."

회귀 전 뉴스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전파를 그대로 탄 긴박했던 상황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중국이 정말 순순히 물러났어요?"

그때, 이아영 본부장이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죠. 당시에 꽤 많은 나라가 홍콩 독립을 지지하고 있던 터라 더 일을 벌이기엔 눈치가 보였을 테니까요."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쨌든 지금 홍콩 지부는 소속만 중국 협회일 뿐 실질적인 운영권은 홍콩이 가지고 있습니다. 던전 색출도, 작전도 모두 자체적으로 실시하고 있죠. 하지만 중국 입장에선...."

"거슬리겠죠. 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지부니...."

그녀의 즉답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홍콩이 독립적인 힘을 갖게 되는 걸 경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것도 아닌 토벌 조직이잖습니까. 아마 지금도 계속 지부를 뺏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겁니다."

물론 중국 입장에선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 있다.

아직까지 홍콩 지부가, 공식적으로는 중국 협회 소속이라는 점이겠지.

하지만 그런 상황에 우리가 홍콩 지부를 인수해버리면....

"중국이 가만있을 리 없겠죠...."

"예. 소속이 바뀌게 되면 더는 꿈도 꾸지 못할 테니까요."

이제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었는지 그녀의 표정이 퍽 굳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인수 제안은 단순한 사업의 일환이 아니다.

우리가 홍콩 지부를 건드리는 순간, 한국과 중국의 외교 문제로 번질 공산이 크다.

"그래서 제일 귀찮은 곳이 걸려들었다는 겁니다."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이아영 본부장이 팔짱을 끼며 인정했다.

"그러면 그냥 포기할 거예요?"

"글쎄요. 일단 홍콩 지부가 인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부터 파악을 해야겠죠."

그렇게 말하며 하성일 본부장을 바라봤다.

해외 사업 쪽은 그의 담당이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준비해온 서류를 내밀었다.

"솔직히 말해서, 사업적으로만 봤을 땐 저희에게 나쁠 것은 없습니다. 월 토벌량, 작전 성공률, 헌터 퀄리티 모두 훌륭한 곳입니다. 무엇보다 내부적인 문제도 크게 없는 것 같고요."

"흐음...."

"만약 우리가 인수하게 되면 필시 국제 협회를 견제하는 데 큰 힘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로선 좋겠지만. 그나저나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왜 굳이 우리 쪽에 인수 합병 제의를 한 걸까요?"

"그건...."

내가 묻자 하성일 본부장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공식적인 내용은 아닌데 말입니다...."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최근 중국 협회가 국제 협회에서 탈퇴한다는 소문, 알고 계십니까?"

"예, 그건 들었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국제 협회가 그걸 기를 쓰고 막으려 한다더군요."

"...?"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이제 와서?

중국 협회는 토벌에서 그렇게 이득이 되는 곳도 아닐 텐데?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앞으로의 일에 있어 중국 협회가 꼭 필요한 모양입니다."

"그게 이번 일과 상관이 있는 겁니까?"

"제 추측으로는 그렇습니다. 중국 협회의 탈퇴를 막기 위해서 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탈퇴만 막을 수 있다면 중국 측이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려고 하겠죠."

"잠깐, 지금 중국 협회가 원하는 거라면...."

"홍콩 지부겠죠."

하성일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중국 협회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국제 협회를 등에 업고요."

"그 소식이 홍콩 지부 귀에도 들어갔다는 겁니까…?"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우리에게 먼저 인수 합병 제의를 해온 게 납득이 간다.

현재 홍콩은 자체적으로 꽤나 견고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본질은 중국 협회의 소속이다.

그런 마당에 본토가 국제 협회까지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탈환을 시도한다면... 지부 입장에선 막을 방법이 없다.

과거, 수많은 희생 덕에 겨우 얻어낸 성과를 송두리째 빼앗기게 되겠지.

홍콩 지부 입장에선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제일 쉬운 방법은....

지부를 다른 곳에 넘겨버리는 것뿐.

'빌어먹을. 아예 대놓고 국가 문제가 얽혀 있네....'

이건 확률이 높은 수준이 아니다.

100%다.

이번 일은 우리가 홍콩 지부를 건드리는 순간 외교 문제로 번진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쓰읍, 확실히 탐나는 곳이긴 한데...."

홍콩 지부를 인수하면서 얻는 것?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두말할 것도 없이 이득이다.

하지만 딸린 리스크가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아무래도 이건 우리 선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아무래도 다른 수단이 필요하겠네.

"이아영 씨, 저번에 받아 놓은 청와대 비서실장 명함, 아직 가지고 있습니까?"

"…네, 네."

"당장 미팅 날짜 좀 잡아주세요.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나는 외투를 챙겼다.

"대통령과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습니다."

***

며칠 후, 청와대 접견실.

"홍콩 지부에서요?"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준 조현민 대통령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몇 마디의 말에 모든 맥락을 이해한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섣불리 받아들였다가는 중국과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대통령님의 판단이 필요할 것 같아, 이렇게 찾아뵌 겁니다."

"하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현민 대통령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정부는 홍콩 지부를 인수하는 것으로 얻는 이득이 크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그건 사업적인 요소가 크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저희가 져야 할 리스크는 너무 큽니다. 아시겠지만, 솔직히 우리나라가 중국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지 않습니까."

조현민 대통령이 꽤나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이해한다.

각국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외교라는 건 감정적으로만 나설 문제가 아니니까.

국가 관계를 마음대로 맺고 끊을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겠지.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대통령이 저렇게 말하는 이상 홍콩 지부 건은....

"하지만, 요 며칠 새에 상황이 많이 변했습니다."

그때, 조현민 대통령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

"국제 협회가 토벌권을 독점하겠다고 통보한 그날, 솔직히 저는 이제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척을 지고 있는 이상 국제 협회 가입을 받아줄 리도 없으니, 아마 더는 자체 토벌이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죠."

"...."

"그런데 웬걸, 어느 호인이 목숨을 걸고 그걸 막아주더군요. 그것도 군대도, 정부도 아닌 사업가가요."

...내 얘기를 하는 건가?

뭔가 너무 많이 미화된 것 같은데.

"그 호인 덕에 한국은 기사회생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의 입장만 밀어붙이는 것도 웃긴 일이겠죠. 우린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말이에요."

"아닙니다. 그것도 대통령님이 계셔서...."

"그러지 마세요. 더 부끄러워집니다."

입에 발린 말을 하려고 하자, 조현민 대통령이 단호하게 막아섰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딱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홍콩 지부를 인수하면 국제 협회를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까?"

"장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즉답하자, 조현민 대통령이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럼 됐습니다. 진행하십시오."

"...정말 괜찮겠습니까?"

"참된 리더는 입이 아닌, 발자국으로 말하는 법이죠."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전 김 대표님이 그동안 남겨오신 발자국을 믿습니다."

"....

뭔 소리야?

"김 대표님은 이제부터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시고 인수에만 집중해주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뭐, 누가 봐도 가시밭길이긴 한데....

그래도 허가도 났겠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봐야겠지.

나는 한쪽 입꼬리를 쓱 올렸다.

***

홍콩 젠사쥐에 위치한, 중국 협회 홍콩 지부.

"본부 쪽에서 이번에 부서 개편을 진행한다고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며칠째 심각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수행비서가 황가휘 지부장에게 다급한 보고를 전달했다.

"아무래도... 이젠 정말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것 같습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선 아직 연락 없나?"

"예, 아직은. 아무래도 그쪽에서도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을 테니...."

"빌어먹을!"

황 지부장이 쾅, 책상을 내리쳤다.

그래, 알고 있다.

그쪽 대표가 굉장히 똑똑한 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내민 손을 잡았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렇게 큰 리스크를 감안하고 우리를 인수할 이유도 없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도 이해한다.

이해는 한다만....

'그럼 우린 이제 어떡하라고....'

수많은 시민의 희생으로 겨우 얻어낸 운영권이다.

이걸 빼앗긴다면 홍콩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간다.

무엇보다 본토에 의한, 본토를 위한 토벌만 진행할 게 분명하다.

홍콩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부를 사수해야 한다.

하지만....

'더는 방법이 없어....'

황 지부장은 깊은 절망감에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런데 그때.

"지, 지부장님!"

느닷없이 행정부 직원이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전한 한마디.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뒤늦게나마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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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었다고요?"

내가 되묻자 이아영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참 나...."

아닌 게 아니라, 인수 건으로 홍콩 지부에 회신하자 그쪽 지부장이 거의 오열을 했단다.

뭐, 절박한 상황이었을 테니 마음은 이해한다만....

'그래도 뭘 울어 울긴....'

어떤 성격인지 대충 알 거 같네.

"뭐, 그쪽이 더 급한 상황인 만큼 아마 협상 자체는 금방 끝날 거 같아요."

"그렇겠죠."

"그래서, 출국은 언제 하실 거예요?"

"예? 제가 갑니까?"

"…? 그럼 누가 가요?"

"아니, 책임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하성일 본부장이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이아영 본부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 그동안은 책임자가 없어서 직접 출장 다녔어요?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아니, 그동안은 상황이 좀 특별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엔 그쪽 말대로 금방 끝날 일인데, 굳이 제가 갈 필요는 없죠."

"뭐, 중국 협회 귀에 들어가기 전에 진행할 수 있으면 하 본부장님이 가도 상관없긴 한데... 사람 일이라는 게 또 모르잖아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썩 틀린 말은 아니다.

협상 전에 본부가 인수를 진행하고 있다는 걸 알아버리면 꽤 귀찮아질 것이다.

어떻게든 기를 쓰고 방해하려 할 테니까.

"만약 나중에 가서 일이 생기면 어차피 당신이 움직여야 해요. 그럴 바엔 그냥 처음부터 당신이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일리는 있군요."

내가 귀찮다는 것만 빼면.

이럴 거면 직원은 왜 뽑았대.

"아무튼, 출국 날짜는 되도록 빨리 정해줘요. 저도 스케줄 맞춰야 하니까."

"그쪽도 가는 겁니까?"

"...왜요. 싫어요?"

"아니, 싫다기보다… 금방 끝날 일이라고 하기엔 어째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 같아서 말이죠."

"뭐...."

이내 이아영 본부장이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그냥 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요."

"늘 하던 일인데 뭘 이제 와서 그러십니까. 예민해서 그런 겁니다."

"뭐, 그런 거면 다행이고요."

그녀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볼일을 마친 듯 사무실을 나가려던 그때, 그녀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혹시 민주 씨 요즘 무슨 일 있었어요?"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다른 게 아니라... 미국 지부 다녀와서 갑자기 토벌 스케줄이 확 늘었거든요. 거의 자는 시간 빼고 가능한 모든 작전에 참여하고 있어요."

"...?"

갑자기?

나도 처음 듣는 소린데.

"작전 본부장이잖아요. 필수 참가 인원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하나 싶어서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글쎄요. 딱히 짐작 가는 건 없는데."

대개 헌터들이 작전에 열을 올리는 경우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 단기간에 랭크를 올리기 위해서.

두 번째는 실전 경험을 통해 순수하게 강해지기 위해서.

뭐, 전자는 조금이라도 야망이 있는 헌터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시도해봤을 일이다.

최대한 실적을 쌓아서 랭크 심사에 가산점을 챙기는 동시에, 자신의 이능력을 극한까지 갈고 닦아 보다 높은 랭크를 노리는 거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여기가 뭐 중원도 아니고.

요즘 시대에 누가 강해지는 데 목숨까지 건단 말인가.

다만....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긴 한데....'

나이에 맞지 않게 쓸데없이 무도가 기질이 있는 녀석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이제 와서?

지금도 충분히 강하다는 걸 걸 본인도 알 텐데, 왜 더 욕심을 내는 거지?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요."

"한번 직접 만나서 물어봐요. 무슨 일 있냐고."

"흐음...."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이내 손사래를 쳤다.

"됐습니다. 개인사까지 물을 필욘 없겠죠. 에이스가 작전에 많이 참여해주면 회사 차원에서 좋은 일이기도 하고요."

"...그러면 말고요."

이아영 본부장은 떨떠름하게 대답하곤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흐음....'

말은 그렇게 했다만 어째 신경이 쓰이긴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제2의 국제 협회 프로젝트가 점점 윤곽이 잡혀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 갑자기 실적에 열을 올린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게 아닌 이상은.

'그럼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턱을 쓰다듬으며 하나씩 짚어보기 시작했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국제 협회가 된다면, 한 가지 중대한 사항을 결정해야 한다.

바로, 누가 새로운 국제 협회의 사무총장이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물론 그건 당연히 나여야 하고, 상황적으로도 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능력 향상에 힘쓰고 있다고?

새로운 국제 협회의 탄생.

사무총장 결정 사항.

그리고 뜬금없이 무언가에 욕심을 내고 있는 그 녀석.

이거 설마....

'사무총장 자리를 노리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 가능성 없는 소리는 아니다.

랭크나 연봉에는 관심 없어도, 야망은 있는 녀석이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배은망덕하게 내 자리를 노려?

'하, 절대 그렇겐 못 하지.'

어디 해볼 테면 해보든가.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후우...."

일산에 위치한 어느 던전 앞.

막 토벌을 마친 김민주가 던전을 빠져나오며 한숨을 쏟아냈다.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마침 청소 작업을 위해 그곳을 찾은 한유빈이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갑자기 랭크 욕심이라도 생기셨나?"

"아하하, 그런 거 아니에요."

김민주가 멋쩍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럼 왜…?"

"저번에 유빈 씨가 그랬잖아요. 선생님을 사무총장 자리에 올려놓자고."

"그런데요?"

"그러려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국제 협회와 부딪혀야 하는데... 그때마다 선생님만 나설 순 없잖아요."

어째 낯간지러운 이야기에 김민주는 시선을 슥 피하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랭커와 붙었을 때를 생각해 보니까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

그 말에 한유빈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부족하다고?

세계 랭킹 11, 12위를 거의 혼자서 상대해놓고?

'겸손한 건지, 바보인 건지....'

속으로 중얼거리길 잠시.

"하여간 고집은 알아줘야 해. 뭐… 열심히 해봐요."

공감은 못 해도 그녀를 이해해주기로 했다.

"유빈 씨도 같이하는 건 어때요?"

"글쎄요, 난 별로 앞날을 준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래도 모르잖아요. 정말 위험한 순간이 오면 저희가 선생님을 지켜야 하는데."

"뭐...."

한유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정말 그런 날이 오면, 그땐 몸으로 때울게요."

"...."

그 말을 뒤로하고 한유빈은 청소팀을 이끌고 던전으로 들어섰다.

김민주는 이내 시간을 확인하곤, 곧바로 다음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아, 선생님?"

다름 아닌 김준우에게 온 전화였다.

「너 지금 어디야?」

"지금 일산이에요. 방금 막 작전 끝내고 서울로 이동하려고...."

「아니, 가지 마.」

"…네, 네?"

「가지 말라고. 너 지금 며칠째 작전 참가 중이야?」

"일주일 정도...."

「너 미쳤냐?」

화가 잔뜩 난 목소리.

여태 들어본 적 없는 그 단호함에 김민주는 순간 움츠러들었다.

「작전 본부장이라는 놈이 기본 규칙도 몰라? 누가 허락도 없이 연속 참가하래?」

"...죄, 죄송합니다."

김민주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게, 사실 이건 엄연히 규칙 위반이었다.

헌터는 컨디션과 안전을 위해서 원칙적으로 이틀 연속 작전 참가가 불가능했으니까.

「그리고 작전 본부장이 그렇게 쉬지도 않고 작전 참가하면 밑에 놈들은 어떡하라고? 쉬고 싶어도 눈치 보여서 못 쉬는 거 몰라?」

"...."

그녀의 고개가 점점 떨어졌다.

「하아, 다 알만한 녀석이 왜 그러냐.」

"...."

「아무튼, 나 조만간 홍콩 갔다 올 거니까 그때까지 작전 참가 중지야.」

"그, 그건…!"

「토 달지 마. 명령이니까.」

"...."

「에휴, 지 몸 하나 관리 못 하는 녀석이 무슨 작전 본부장이라고....」

그 중얼거림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

김준우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야단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기분이 나쁠 만도 했지만, 실상 김민주의 표정은 그와 정반대였다.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런 사람이다.

본인의 비전보다 부하의 상태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명령을 어떻게 거스를 수 있겠는가.

'아쉽긴 하지만....'

김민주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

중국 베이징.

국제 헌터 협회 소속 중국 지부.

리제이징 지부장은 계약서를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 중이었다.

"신중하시군요."

몇 분이 지났음에도 펜대나 굴리고 있자, 마주 앉은 백인 여성이 슬쩍 입을 열었다.

PB 코퍼레이션의 수장, 에마 대표였다.

"어려울 것 없지 않습니까. 중국 지부가 원하는 걸 본부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겠다는 것뿐입니다. 물론 국제 협회에서 탈퇴하지 않겠다는 조건만 지켜주신다면요."

"흐음...."

리 지부장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사실 그로서도 중국 협회가 이렇게 된 것에 꽤나 뼈가 아팠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단연 최고의 독립 협회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언젠가부터 한국 협회가 치고 올라오면서부터는 그것도 옛말이 되었다.

무엇보다 한국 놈들이 국제 협회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외에 지부를 두기 시작하자 완전히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러던 중 국제 협회가 토벌권 통제를 발표했다.

기회다 싶어 곧바로 가입했지만... 결과적으로 실책이었다.

고작 일주일 만에 한국 놈들이 독립 기구로 인정을 받아버렸으니.

이렇게 되면 대국의 입장이 뭐가 되겠는가.

가뜩이나 국제 협회의 습격 건 때문에 조사까지 들어갔고, 이미지도 나락 끝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 더는 국제 협회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일단 탈퇴를 하고 한국처럼 독립 기구 인정을 요구해볼 생각이었다.

만약 안 되면 그냥 다 무시해버리고 제3세력을 만들면 되니까.

그렇게 공식적으로 탈퇴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예상외의 변수가 발생했다.

국제 협회 본부에서 딜이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꽤나 어마어마한 딜이.

"우선, 중국 지부에 한해서만 자체 운영권과 토벌권을 넘겨드릴 생각입니다. 소속만 국제 협회일 뿐, 성격은 독립 협회라고 보시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나요?"

"...이해합니다."

소속은 있지만, 독립 협회의 성격을 지니는 곳.

리 지부장은 이미 그런 곳을 한 군데 알고 있었다.

당국의 골칫거리인 동시에 요충지인 그곳.

바로 홍콩 지부였다.

에마 대표는 리 지부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는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부장님이 요청하신 대로, 홍콩 지부 탈환 또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

"아시겠지만,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홍콩 지부는 독립하게 될 겁니다. 홍콩 하나 떨어져 나가는 건 그렇다 쳐도, 홍콩이 독립하게 되면 다른 자치구도 가만히 있지 않겠죠."

리 지부장 또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자치구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난다면 당국이 본인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책임을 물려서 처형할지도 모른다.

여긴 그런 곳이니까.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홍콩 지부를 탈환해야 한다.

다만, 지금까지는 국제 사회의 눈치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국제 협회가 도와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게다가 운영권까지 넘겨준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대신 본부가 요청할 때엔 언제든 협력하겠다는 조건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그건 기밀 사항입니다."

에마 대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리 지부장은 다시 펜을 쥐었다.

그렇게 계약서에 펜을 가져다 대던 그 순간.

"지부장님!"

한 직원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홍콩 지부에 심어둔 저희 쪽 직원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이내 그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홍콩 지부가 이번에 카르마 코퍼레이션과 인수합병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뭐?!"

날벼락 같은 소식에 리 지부장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시선이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길 잠시.

그의 시선이 에마 대표에게 향했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원하시는 대로."

에마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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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국제공항.

이젠 슬슬 이 낯선 상황이 익숙해진 건지, 나는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주변부터 훑었다.

마중 나올 직원을 찾기 위해서였지만, 어째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이상하네요. 지부에서 시간 맞춰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이아영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동시에 내가 볼멘소리를 냈다.

"출장을 많이 다닌 건 아니지만, 어째 제시간 맞춰 나오는 적이 없군요."

"뭐, 조금 늦을 수도 있죠. 전화 한번 해봐요."

이아영의 요청에 저장해둔 담당자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응답 없는 연결음만 계속해서 들려올 뿐, 어째 전화를 받질 않는다.

그 후로 몇 번이나 다시 걸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것 참...."

결국, 나는 통화를 포기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공항에는 나오지도 않고, 연락은 안 되고… 급하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매너가 없어서야."

"긴급 출동이라도 걸린 거 아니에요?"

"뭐 얼마나 긴급이라고 약속 시각까지 어긴답니까?"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건 매너가 아니지 않은가.

백번 양보해서 시간에 늦을 수는 있다고 쳐도, 최소한 연락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나?

나오지도 않고, 연락도 안 받으면 우리보고 뭐 어쩌라는 건데.

"뭐, 그냥 택시 타고 가도 되긴 하는데, 우리가 그냥 가버리면 엇갈릴 수도 있으니까 좀 더 기다려보죠. 근처 카페라도 갈래요?"

"하아...."

시작도 전에 영 기분이 언짢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우린 이내 공항 안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공항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이 붐비는 그곳에서 가만히 연락을 기다리길 10분, 20분.

그리고 어언 1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연락은 없었다.

"슬슬 화가 나는군요."

"이상하네요.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할 리가 없을 텐데."

"이 정도면 그냥 까먹은 거 아닙니까? 이 사람들,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일 처리가 개판이네."

이건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다.

만나면 단단히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위이이이잉―.

난데없이 공항에 사이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공항 내 승객분들께 긴급 속보를 전달해드립니다.」

곧바로 공항 내부에 긴급 방송이 울려 퍼졌다.

「현재 홍콩 지부에서 2시간 전에 출현한 레드 등급 던전의 작전 실패를 선언했습니다.」

"...뭐?"

전혀 예상치도 못한 소식에 나와 이아영 본부장이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충격적인 소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더불어 동 시간대 출현한 옐로우 등급 던전의 토벌 상황 또한 좋지 않으며, 몬스터 탈출 움직임이 보고되었으므로 승객분들께선 서둘러 안전한 장소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저, 저게 무슨 말이에요…?"

"레드 등급이랑 옐로우 등급이 동 시간대에 출현했다고?"

「새로 들어온 소식입니다. 현재 동부에서 옐로우 등급 던전이 추가 출현했다고 합니다.」

"...!"

레드, 옐로우 등급이 동시에 출현한 것도 모자라서 두 시간 만에 옐로우 등급이 추가 출현했다고?

대체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또한, 의회에서 현 시간부로 2급 비상령을 발령했습니다.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몬스터 탈출 위험이 있으니, 승객 여러분들께선 가까운 지하철역 및 대피소로 서둘러 대피하시길....」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페를 포함해 공항에 있던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패닉에 빠진 얼굴들.

사람들이 출구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덕분에 공항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때 마침 울리는 핸드폰.

비로소 홍콩 지부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미처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어디십니까? 무사하신 겁니까?」

"아직 공항입니다. 그것보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1년에 한 번 출현할까 말까 한 던전들이 2시간 만에 세 개나 출현하다니요."

「저희도 지금 상황 파악 중에 있습니다. 일단 저희 쪽에서 바로 구조팀을 보낼 테니… 거기서 움직… 마시고… 대피소로… 피신....」

"여보세요, 여보세요!"

지지직―.

전파가 불안정해진 듯, 통화가 끊겨버렸다.

덕분에 지금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일단 나가서 상황을 좀 살펴보는 게 어떨까요?"

이아영 본부장이 슬쩍 물었다.

나는 대답을 아끼곤 생각을 정리했다.

정말 몬스터가 탈출했다면 조기 대응이 너무나 중요하다.

하지만 작전이 실패했다고 하는 걸 보면, 현재 지부 상황으로선 시가전 준비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아영 본부장 말대로 우리가 일단 수습이라도 해놓는 게 낫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이었다.

쿵―!!

무언가 거대한 것이 건물을 들이받은 듯, 공항 전체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쩌저적―!

천장이 갈라지며 잔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밑에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수백, 수천 명의 시민이 있었다.

"주, 준우 씨!!"

"…빌어먹을!"

[습득 스킬 : 프로텍션 블라섬]

곧바로 꽃의 형상으로 방어막이 펼쳐졌다.

쿠구구궁―!!

공항이 그대로 폭삭 무너져 내렸다.

***

"시발 대체 이게 무슨…!"

황가휘 지부장은 이 상황을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홍콩은 애초에 던전 출현이 많은 곳이 아니다.

해봐야 월평균 100개 안팎.

평균 출현 등급은 고작 블루.

게다가 마지막으로 레드 등급 던전이 출현한 건 무려 8년 전이었다.

그런데 이능파가 감지도 안 된 레드 등급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 옐로우 등급이 동시에 출현한다고?

황 지부장은 본인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현실은 보다 냉혹했다.

"지부장님, 지금 홍콩 국제공항이 공격받아서 무너졌다고 합니다!"

채 상황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또 다른 재앙이 날아들었으니.

"고, 공항이 무너졌다고…?"

"네! 구조대가 바로 출동했는데, 입구고 뭐고 완전히 붕괴돼서 생존자 파악도 안 된답니다. 아직 대피하지 못한 인원이 수천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빌어먹을…!"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레드 등급 토벌은 실패.

상황을 수습하기도 전에 추가로 출현한 옐로우 등급 던전.

몬스터 탈출 임박.

거기에 기어이 공항까지 공격을 받았다.

이건 명백히 지부가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본토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아니면 국제 협회에....'

아니,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다.

서둘러 지부를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넘겨버린다면, 그들이 알아서 처리해줄 수도 있다.

그래, 미국 지부에서 대규모 작전도 지휘하던 이들이 아닌가.

이 정도 상황은 충분히 해결해줄 수....

"잠깐."

그 순간, 황 지부장이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

"김 대표… 김 대표는 어떻게 됐어? 그 사람도 공항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구조한 거야?!"

"그, 그게 바로 출동은 했는데, 한발 늦어서...."

"...."

이내 황 지부장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김 대표가 아직 공항에 있다고?

종이짝처럼 내려앉은 저 건물 안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며, 황 지부장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X 됐다."

진짜 X 됐다.

***

"크윽...."

어두컴컴한 공간 속,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방어막을 펼쳤는데도 모든 충격을 흡수하지 못한 듯,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쥐포가 됐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그곳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뿐이었다.

"준우 씨, 준우 씨!"

이아영 본부장이 핸드폰 플래시를 비추며 나를 찾았다.

"주, 준우 씨! 괜찮아요?!"

"예. 뭐.... 다른 사람들은 무사합니까?"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이아영 본부장이 플래시로 주변을 비췄다.

그와 동시에 함께 이곳에 갇힌 수백 명 생존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 모두가 하나 같이 넋이 나간 얼굴로 온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모두가 패닉에 빠진 상황.

난데없이 닥친 재앙 앞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아영 본부장이 중얼거렸다.

그리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몬스터가 공격한 걸까요?"

"정황상 그렇겠죠. 다만...."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흐렸다.

그래, 일순간에 공항 전체가 무너질 정도면 몬스터의 공격을 받은 게 확실하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몬스터 탈출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아무리 레드 등급이라고 해도, 던전 출현 2시간 만에 몬스터가 탈출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몬스터가 던전을 탈출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시간이 흐를수록 던전의 이능파가 점점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던전을 이 세계에 유지시키는 힘, 이능파.

던전 등급과 안정도는 이 이능파의 강도에 비례한다.

하지만 던전 유지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능파는 점점 불안정해지고, 동시에 던전 또한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더 이상 던전을 유지하기 힘들어지면, 그때 비로소 몬스터가 탈출한다.

그러니 고작 2시간 만에 몬스터가 던전을 탈출하려면, 출현할 때부터 이능파가 극도로 불안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문제는 애초에 그 정도로 이능파가 불안정하다면 던전 출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상황은 아예 말이 안 된다는 것.

연속으로 출현하고 있는 고위험도 등급 던전.

출현 직후부터 극도로 불안정한 이능파.

출현 2시간 만에 던전을 탈출해버린 몬스터들....

나는 그것들을 곰곰이 짚어보던 도중.

'시발, 설마....'

머릿속에 무언가가 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국제 협회 짓인가…?

만약 국제 협회가 차원석으로 던전을 임의 생성한 거라면 모두 설명이 된다.

이전에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어째서…?

우리를 공격한 건 적대적 인수합병을 위해서였다고 해도, 홍콩 지부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직 가입 유예 기간까진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굳이 홍콩 지부를 공격할 이유가....

"...아무래도 들켰나 보군요."

이내, 생각을 마친 나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들켰다니, 뭘요?"

"저희가 홍콩 지부를 인수하려는 것 말입니다. 기어이 중국 협회 귀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

이아영 본부장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보나 마나 국제 협회에 도움을 요청한 거겠죠."

"설마 차원석으로 던전을 임의로 생성했다는 소리예요?"

"그것 외엔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최대한 난장판을 만들어서 계약을 지연시키려는 거겠죠."

"그렇다는 건...."

"예."

내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저희가 여기 갇혀 있는 동안, 홍콩 지부를 탈환하려고 하는 겁니다."

"...."

이아영 본부장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단순한 재앙이 아닌, 계획된 인재.

그 사실에 분노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부수고 나가죠."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요. 당신이라면 이 정도 잔해는 그냥 부숴버릴 수 있으니까...."

"안 됩니다."

"네?! 어째서요?!"

"공간이 너무 좁지 않습니까."

내가 주변을 훑으며 말하자, 그제야 이아영 본부장이 작게 탄식했다.

그래, 잔해에 파묻힌 것 정도야 스킬을 쓴다면 어렵지 않게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불가능하다.

좁디좁은 공간에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있다. 이런 곳에서 스킬을 썼다간 저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어디에, 얼마나 더 생존자가 남아 있는지도 모르니 섣불리 잔해를 치울 수도 없다.

"그럼 어떡해요? 이대로 있다가 홍콩 지부가 넘어가 버리면...."

"뭐, 어쩌겠습니까."

나 또한 착잡한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전에 구조대가 오길 바라는 수밖에."

193

193

"이게 무슨...."

베이징, 중국 협회 본부.

현재 홍콩 상황에 대한 소식이 곧바로 전달됐다.

참혹한 소식에 리제이징 협회장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홍콩이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지부를 넘기려고 한다는 이야기에 초조해진 건 사실이다.

그들이 중국 협회로부터 완전히 독립된다면 당국으로부터 무슨 처벌을 받을지 모르니, 어떻게든 인수를 막아야 했다.

그래서 에마 대표라는 사람에게 최대한 빨리 홍콩 지부를 탈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곤 했지만──.

설마하니 도시 한복판에 던전을 생성시킬 줄이야.

그것도 레드와 옐로우 등급을 무더기로.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무리 추락해도 국제 협회는 국제 협회라는 건가....'

던전까지 임의로 생성할 힘을 가지고 있다면, 습격 건으로 신뢰가 바닥을 쳤다고 해도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압도적인 통제력 앞에 신뢰고 나발이고 뭐가 대수겠는가.

전 세계 토벌권을 통제하겠다는 게 허세는 아니었군.

하긴, 저 정도의 힘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나오겠지.

더군다나 하는 행동도 꽤나 극단적이다.

지금 홍콩에서 벌어진 현상은 철저하게 국제 협회 쪽에서 계획한 대로 이뤄졌다.

인수를 진행하기 전에 도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서 지부가 먼저 본부에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는 것.

그걸 위해 홍콩 지부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도록 계속해서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도저히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놈들이 떠올릴 만한 계획이 아닌데....'

목적을 위해서라면 시민들의 희생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

그 모습에 리 협회장마저 치를 떨 정도였다.

중국 협회 또한 여태껏 나름 강경한 태도를 보여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군.'

리 협회장은 묘하게 불안했다.

물론 국제 협회가 던전을 임의로 생성해서 도심을 공격했다는 건 증거가 없으니 들킬 걱정은 없다.

그건 그렇다 쳐도....

문제는 공항 폭격 건이었다.

에마 대표는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대표가 공항에 있다는 소식을 입수하자마자 바로 그곳을 공격했다.

공항 안에 몇 명의 사람이 있는지는 그들에게 전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그저 인수만 진행하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라는 듯.

'무서운 놈들....'

리 협회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놈들과 척을 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대체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무슨 배짱으로 이런 놈들과 대립하고 있는 건가.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런 놈들을 상대로 통제권을 나눠 받은 것인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나, 그런 놈들을 상대로 주도권을 빼앗은 놈들이나....

어느 쪽이건 정상은 아니다.

"하여간. 미친놈들이 너무 많다니까."

리 협회장이 혀를 차던 그때, 장홍쯔 수행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장 비서가 가볍게 인사를 하며 말하자, 리 협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쪽 상황은 어때?"

"예상했던 대로 최악입니다. 레드 등급 던전 최초 토벌에 실패한 덕에 추가 작전 인원 편성도 힘들어졌습니다. 옐로우 등급 던전에 투입할 작전팀도 부족하고요. 일단 시민 대피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장 비서가 잠시 숨을 고르곤 다시 말을 이었다.

"탈출한 몬스터들이 날뛰고 있어서 그마저도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흐음...."

"공항 쪽으로 구조대를 보냈다는데, 건물이 완전히 주저앉아서 바로 구조 작업에 들어가긴 힘들 것 같습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는? 그 사람 소식은 어떻게 됐어?"

"그 사람도 함께 갇힌 거로 보입니다."

그 대답에 리 협회장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됐다.

이걸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김 대표가 죽었든 살았든, 발이 묶인 이상 인수 진행은 불가능하다.

서둘러 구조 작업에 들어간다고 해도, 현재 홍콩 지부 상황으로는 그때까지 기다려줄 시간이 없다.

물론 운영권이 분리된 이후, 홍콩 지부는 꾸준히 성장세를 올려왔다. 거기에 맞춰 헌터의 퀄리티도 토벌 체계도 매우 높은 수준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지휘본부가 제대로 작동할 때의 이야기다.

홍콩 지부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여 이미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탈출한 몬스터도 처리해야 하고 시민들도 대피시켜야 하는데, 현재로선 그 어느 쪽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순간이었다.

"협회장님!"

행정부 직원이 다짜고짜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홍콩 지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마침내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다.

***

"...예, 그럼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홍콩 지부.

황 지부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통화를 마쳤다.

"뭐라고 합니까?"

줄곧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류 통제팀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추가 작전 병력이랑 지휘 인원을 보내준대. 이곳에 도착하는 대로 작전통제권을 인계받을 거야. 그때부턴 본부가 작전을 지휘하겠지."

"...."

류 팀장은 잠시 대답을 아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부장님, 이거 정말 괜찮은 겁니까?"

그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걱정스러운 듯, 조심스레 물었다.

"본부에 지원을 요청하다뇨. 게다가 통제권 인계까지.... 이번 일을 빌미로 운영권을 탈환하려고 들 수도 있습니다."

"아니, 백 퍼센트 탈환하려고 할 거야."

"네, 네?! 그걸 아시면서 왜 지원을…!"

"너, 지금 이 상황 해결할 수 있어?"

"...."

갑작스러운 물음에 류 팀장은 말문이 막힌 듯, 대답을 아꼈다.

"...시간만 있으면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시간이 어디 있어! 지금 도심 한복판에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통제팀이 방법이 없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이걸 막아!"

"아, 아무리 그래도 본부에 지원을 받는 건...."

"그럼 시발 어떡하라고! 시민들이 죽어 가는데 가만히 손 놓고 있으라는 거야?!"

황 지부장이 듣다못해 핏대를 세웠다.

물론 그 또한 류 통제팀장이 우려하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애초에 홍콩 지부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경험이 너무나 부족하다.

그런 와중에 초기 대응까지 실패해버렸으니, 지금 통제팀은 그야말로 패닉에 빠져 있다.

무너진 지휘 체계.

가까스로 몬스터를 저지하며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있지만, 그것도 오래 버티진 못한다.

최악의 경우, 홍콩이 무너질 수도 있다.

"나도 알아, 시발. 호시탐탐 탈환하려고 각 재고 있었는데,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민 이상 기를 쓰고 탈환하려고 하겠지. 그런데 어쩌겠어...."

황 지부장이 화를 추스르며 말을 이었다.

"빼앗기더라도 사람은 살려야 하지 않겠냐."

"...."

류 팀장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지부장을 설득할 말을 생각하는 대신, 20년도 더 지난 옛일을 떠올렸다.

20년 전, 독립운동 당시.

황 지부장은 늘 최전선에서 시민들을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형제를 잃었고, 가족을 잃었다.

그런 그가 이 지부가 얼마나 많은 희생으로 얻어낸 결과인지, 홍콩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를 리가 없다.

아니…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차라리 목숨을 내놓으라면 내놓았지, 절대 지부를 포기할 리가 없는 그가 기어이 본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지부를 포기한 게 아니라 더 중요한 걸 선택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이상, 통제팀장은 더는 토를 달 수 없었다.

"일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자고."

황 지부장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류 팀장을 향해 물었다.

"몬스터 탈출 던전은 확인했냐?"

"네. 예상대로 초기 토벌에 실패한 레드 등급 던전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현재 몬스터 동향은?"

"확인된 개체만 총 19마리로, 탈출 던전 반경 10km까지 점령당한 상태입니다. 다행히 인구가 많은 지역은 아니지만 계속 전진하고 있는 걸 보면 중앙 구역까지 뚫리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일단은 시민 대피가 우선이야. 몬스터 진행 방향 1km 간격으로 방어선 구축하고 최소한의 인원만 배치해. 모두 대피할 때까지 어떻게든 시간만 끌어보자고."

"…알겠습니다."

"아, 공항 쪽은 어떻게 됐어?"

"지금 구조 작업 진행 중입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알았어. 지금부턴 통제실에서 계속 모니터링 해. 조금이라도 진척 생기면 바로 보고해 주고."

"네."

류 팀장은 가볍게 묵례를 하곤 이내 등을 돌렸다.

그렇게 그가 사무실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잠깐, 잠깐만!"

황 지부장이 무언가가 떠오른 듯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방금 몬스터가 점령한 구역이 던전 반경 10km라고 했냐?"

"네? 네, 그렇습니다만...."

"그거 확실한 거야?

"네, 확실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황 지부장은 꽤나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러면 공항에서 족히 50km는 떨어져 있다는 소리잖아."

"...네?"

그 순간 류 팀장 또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황 지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이었다.

"그럼… 공항은 누가 공격한 거냐?"

***

"훌쩍, 훌쩍...."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

몇몇 아이들의 울음소리만 들려올 뿐,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입을 열 힘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잔해 속에 갇힌 지 몇 시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구조대는 도착하지 않고 있었으니.

다들 핸드폰을 붙잡고 쉴 틈 없이 누군가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파가 끊긴 마당에 연결이 되길 만무했다.

"이래선 본부에 지원 요청도 못 하겠네요."

그때, 이아영 본부장 또한 먹통이 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지원을 요청해도 공항이 무너진 이상, 여기까지 오려면 한참 걸릴 겁니다."

"그것도 그러네요."

"뭐, 소식은 들었을 테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하고 있겠죠."

"하아...."

그녀가 꽉 막힌 천장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5시간 가까이 지났는데, 밖에 상황은 어떨까요...."

"좋지 않을 겁니다. 홍콩 지부가 다른 건 다 괜찮아도, 이런 상황에 대한 경험은 거의 전무한 편이니."

뭐, 그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긴 하지만.

"아마 몬스터 저지는커녕 당장 시민을 대피시키는 것만으로도 벅찰 겁니다. 물론 그것도 얼마 못 가겠지만."

"그럼...."

"아마 지금쯤 본토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최악이네요."

이아영 본부장이 푹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확실히 그렇다.

아마 당국이 지휘권을 인계받았겠지.

이대로 중국 본부가 상황을 해결해버리면, 그 이후는 안 봐도 뻔하다.

우리가 어떻게 손을 써보기도 전에 지부의 운영권을 손에 쥘 거다.

그러니 그 전에 어떻게든 움직여야 하는데....

'쯧, 하필 이럴 때 발이 묶이냐고.'

급한 상황임에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답답함에 연신 혀를 찼다.

쿠구구궁―!

갑자기 무너져 내린 잔해가 또다시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설마… 구조댄가?!"

"구조대가 온 거야!"

줄곧 패닉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껏 살면서 이와 같은 현상을 수백, 수천 번을 봐왔다.

"주, 준우 씨… 이거 설마...."

"...예."

이아영 본부장도 낌새를 눈치챈 듯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그래, 이건 구조대가 온 게 아니라....

이곳에 던전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시발, 하필 이럴 때....'

하여간 귀찮게 굴러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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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라고요…?"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뒤늦게 소식을 들은 김민주가 벌떡 일어났다.

"홍콩에서 몬스터가 탈출했답니다! 던전도 계속 출현하고 있고요. 완전히 도심이 쑥대밭이 됐다고 합니다!"

하성일 본부장이 격양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소식을 전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괜찮은 거예요?"

"마지막으로 연락 온 게 공항입니다만, 지금 그 공항이 무너져 내렸다고...."

"...!"

김민주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시선이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민주는 곧바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이성을 붙잡았다.

그래, 천하의 김준우다.

그 남자가 고작 공항이 붕괴됐다고 죽었을 리가 없다.

미리 도망쳤거나, 설령 미처 대피하지 못했다고 해도 어떻게든 살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현재 김준우는 연락이 안 된다는 것.

그런 상황에 본인마저 평정심을 잃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그렇게 몇 번이나 중얼거리길 잠시.

"…사고 시각은 언젠가요?"

이내 냉정함을 되찾고 하성일 본부장에게 물었다.

"5시간 전입니다."

"홍콩 지부 단독으로는 이 상황을 수습하기 어려울 거예요. 5시간이나 지났다면, 이미 본부에 지원을 요청했겠네요. 선생님은 발이 묶인 상황이니 손을 쓸 수도 없을 거고...."

김민주는 차근차근 상황을 정리했다.

그런데 어째 생각을 정리할수록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었다.

모든 상황이 이상하리만치 딱딱 맞아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인수를 위해 홍콩으로 가자마자 갑자기 발생한 사고.

처음으로 공격받은 곳이 정확히 김준우가 있던 공항.

이게 정녕 우연인가?

'일부러 선생님의 발을 묶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홍콩 지부를 탈환하려는 게 아니고서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민주는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한유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빈 씨, 지금 어디예요?"

「의정부에요. 그것보다 소식 들었어요? 지금 홍콩에서…!」

"들었어요."

단호한 목소리.

"지금 소집 가능한 인원 전부 모아주세요."

「설마 직접 가려고요?」

"이대로 있다간 손을 써보기도 전에 홍콩 지부가 넘어갈 거예요."

「준우 씨 명령이에요?」

"아뇨. 선생님과는 연락이 안 돼요."

「네, 네?! 무슨 사고라도 난 거예요?! 그럼 준우 씨를 먼저 구해야죠!」

"선생님은 괜찮을 거예요."

「그게 무슨…!」

"유빈 씨, 선생님은 괜찮아요."

김민주가 딱 잘라 말했다.

그 단호함에 한유빈은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지금 선생님은 본인이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저희도 저희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죠."

「공항이 파괴됐다면서요. 어떻게 가려고요?」

"...."

정곡이었다.

공항이 무너져 내린 마당에 어떻게 홍콩으로 가겠는가.

애초에 상황이 상황인 터라 착륙 허가가 날 리도 만무하다.

무엇보다....

「미국 지부 때는 항공기를 빌려줘서 인원 파견이 수월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족히 100명이 넘는 인원을 한 번에 파견할 만한 수단이 없어요. 중국 협회가 제삼자가 끼어드는 걸 반길 리도 없고요.」

"...."

김민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중국이 수송기를 보내줄 거란 기대는 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아예 홍콩으로 갈 방법이....

"광저우 공항으로 가면 됩니다. 거기가 홍콩과 제일 가까운 곳이니."

그때였다.

한 남자가 수행원들과 함께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김민주, 하성일 본부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 대통령님…?"

예상치 못한 그 손님은 다름 아닌 조현민 대통령이었으니.

"착륙 허가는 이미 받아놨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세요."

"하지만, 인원과 장비를 실을 만한 항공편이...."

"청와대 전용기를 대기시켜놨습니다."

"...!"

조현민 대통령이 굳센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파견팀은 물론 장비를 싣기에도 충분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허가한 사업입니다. 당연히 할 수 있는 한 도와드려야겠죠."

조현민 대통령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다만, 문제는 광저우에 도착한 이후입니다. 저희 쪽에서 알아본 바로는 이미 홍콩으로 들어가는 모든 도로가 차단됐다고 하더군요. 헬기를 이용해야 할 텐데...."

"광저우에 한별 건설 지부가 있습니다."

그때, 이번엔 하성일 본부장이 나섰다.

"거기서 수송용 헬기를 이용하면 될 겁니다. 제가 누나한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대표님 관련 일이라면 도와줄 거예요."

조현민 대통령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김민주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들었죠? 지금 당장 파견팀 편성해서 대기시켜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홍콩으로 갑시다."

***

"본부 통제팀입니다."

홍콩 지부.

드디어 도착한 본토의 지원병력.

그들의 선두에 선 라이비우 통제팀장이 황 지부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현 시간부로 홍콩 지부 작전지휘권은 저희가 인계받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 지부장은 본인보다 한참 어린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라이 통제팀장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물었다.

"그래서,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시민 대피는 거의 완료했지만, 탈출한 몬스터가 기어이 도심지역까지 침범했습니다."

"흠, 알겠습니다. 이제부턴 저희가 맡을 테니 지부장님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윽고 그가 손짓하자, 본부 소속 통제팀원들이 무전기를 귀에 꽂고는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위치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 지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안심해도 된다고…?'

개소리를 하는군.

이번 사건이 어떻게 잘 처리된다고 해도, 후속 조치와 추후 대비 같은 핑계로 지휘권을 계속 붙들고 있을 게 뻔하지 않은가.

여기까지 온 이상 지부는 이미 본부에 넘어간 거나 다름이 없다.

"아, 혹시 공항 구조 작업은 계속 진행 중입니까?"

그때, 라이 통제팀장이 황 지부장에게 물었다.

"네? 네, 그렇습니다만...."

"당장 모두 철수해주시죠. 지금 상황에서 작업을 이어갔다간 구조팀이 위험해질 겁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있을지도 모르는 거지, 확인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황 지부장의 말문이 턱 막혔다.

"솔직히 그 정도로 파괴됐다면 생존자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희박한 확률 때문에 지부 인원까지 위험해지는 건 피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지부장님."

라이 팀장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건 명령입니다. 지금 총 책임자는 저라는 거, 잊으신 건 아니겠죠?"

"...."

결국, 황 지부장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끝났군....'

이젠 정말 지부가 본인의 손을 떠났다는 현실에,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럼 이만 나가보십시오."

"...예."

황 지부장은 그 말을 뒤로한 채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아… 혹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라이 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죠."

"공항 말입니다. 시간적으로도 위치적으로도 몬스터한테 공격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황 지부장의 날카로운 시선이 라이 팀장에게 향했다.

"대체 무엇에 공격을 받은 건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

그 순간, 라이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피식 실소를 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전 그냥 소식 듣고 지원 나온 사람일 뿐인데."

"...그렇군요."

마치 처음부터 정해놓은 것 같은 대답에 황 지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통제실을 빠져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부 소속 류 통제팀장이 곧바로 다가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뻔하지. 이제부터 지부는 당국이 지휘할 거야."

"공항 건은 물어보셨습니까?"

"...모른다더라."

류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도저히 공항이 공격을 받을만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

"이거 설마 당국이 일부러 지부를 탈환하려고 공격한 게...."

"쉿!"

황 지부장이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그리곤 통제실 문을 슬쩍 흘기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여기선 안 돼."

"...."

"일단 믿을 만한 놈 몇 명만 모아봐."

황 지부장이 날 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항 근처 수색 좀 해보자고."

류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

"뭐, 뭐야...."

"구조대가 아니었어?!"

"잠깐! 저, 저거 설마…?"

몇 차례나 계속된 진동.

이윽고 천장이 한 번 더 무너져 내렸고, 그곳에 방금 막 생성된 던전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더, 던전이야…?"

"던전이 여기 왜...."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생존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구조대가 아니었다는 절망감과 던전이 눈앞에 나타났다는 두려움이 섞인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됐습니다."

잠시 던전 입구를 바라보던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보단, 차라리 던전 안이 더 안전할 겁니다."

그 말에 생존자들의 시선이 단숨에 쏠렸다.

나 또한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려 큰 소리로 말했다.

"일단 다들 던전으로 들어갑시다. 보아하니 그리 위험한 등급도 아닌 것 같습니다."

"더, 던전에 들어가라고…?"

"괜찮은 거 맞아…?"

"몬스터라도 마주치면 어떡해!"

역시나 술렁이는 반응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에이, 시발 몰라! 여기서 죽치고 있는 것보단 낫겠지!"

누군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내 망설임 없이 던전 입구로 향했다.

"그, 그래! 여기서 죽나 저기서 죽나 똑같지 뭐!"

"차라리 던전이 더 안전할 수도 있어!"

몇몇 사람이 그를 뒤따라 일어섰다.

이를 시작으로 계속 눈치를 보던 이들 또한 몸을 일으켰다.

생존자들은 줄을 지어 던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도 가죠."

이아영 본부장이 나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 들어가 계시죠."

"...네?"

"전 잠시 여기서 바깥과 연락을 취할 수단을 좀 알아보겠습니다."

"그게 무슨...?"

그녀는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대신 바로 따라와야 해요. 여차하면 여기서 저 사람들 지켜줄 사람, 당신밖에 없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이아영은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던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모든 생존자가 던전에 입장한 직후.

나는 홀로 남아 심호흡을 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스킬을 써서 아예 잔해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지만....

아직 어딘가에 다른 생존자들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자칫하다간 2차 붕괴로 다른 이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아직까진 탈출 시도는 못 한다.

하지만 최소한 구멍을 뚫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2차 붕괴가 일어나지 않도록, 아주 강력하면서 날카로운 한 방이 필요하다.

"후우...."

[고유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제작 스킬 : 싱글 포인트]

손가락으로 총의 형태를 만들어 천장을 겨냥했다.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싱글 포인트 스킬로 인해, 해당 스킬의 타격점이 최대치로 압축됩니다.]

한쪽 눈을 감고 검지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순간.

피융―!

가늘지만 날카로운 위력의 스킬이 그대로 천장을 관통했다.

팔뚝 정도 굵기의 구멍.

거길 통해 바깥바람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파를 받기엔 부족했다.

나는 던전이 출현하면서 생긴 공간을 천천히 기어 올라갔다.

그렇게 계속 위로 올라가며 전파를 잡던 끝에.

띠리링―.

마침내 핸드폰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들이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많이도 왔네....'

천천히 문자를 확인하던 그때였다.

"뭐, 뭐야!"

"거기 누구 있습니까?!"

"저기요! 대답해보세요!"

구멍을 타고 위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나 반가운 그 소리에 나는 곧바로 목청을 키웠다.

"예! 여기 사람 있습니다! 지부 소속의 구조대입니까?"

"아, 아닙니다. 구조대는 모두 철수했습니다."

뭐…?

구조대가 철수했다고?

아무리 작업이 어렵다고 해도 그렇지, 생존자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쯧....'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지부에서 내릴 만한 명령이 아니다.

기어이 당국이 지휘권을 잡았나 보군.

"저흰 지부장님 명령으로 수색을 나온 수색팀입니다."

"실례지만, 선생님의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혹시 안에 생존자들이 더 있습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구멍을 타고 들려왔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김준우 대표라고 합니다. 생존자는 더 있는데, 안쪽에 던전이 출현해서 일단 그쪽으로 대피시켰습니다. 저희 말고도 아직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 김 대표님?"

"정말 김 대표님입니까?!"

화들짝 놀란 목소리.

그리곤 곧바로 말을 잇는다.

"조,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지부장님에게 연락해서 다시 구조 작업을...."

"아뇨. 당국이 지휘권을 잡은 이상 지부 소속인 당신들이 움직이면 위험합니다."

"그, 그걸 어떻게…?"

뭘 어떻게야.

그 정도야 뻔할 뻔 자지.

"그럼…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은 복귀하셔서 지부장님께 생존자가 있다는 것만 전달하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턴...."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읽다가 만 문자를 한 번 더 확인했다.

「현재 본사 파견팀 광저우 공항 도착! 한별 건설 쪽에서 헬기 지원받아서 홍콩으로 갈 겁니다. 혹시 연락 가능해지면 바로 전화 주세요.」

"제삼자가 움직일 겁니다."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미소를 흘렸다.

195

황 지부장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나가자 라이 통제팀장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눈치챈 건가....'

애초에 황 지부장은 늘 본부를 불신하고 있는 인간이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있다면 어떻게든 파헤치려고 하겠지.

뭐, 던전 생성도 이쪽에서 계획한 거라는 건 모르고 있는 듯하지만.

애초에 그건 들켜도 증거가 없으니 상관이 없다.

다만 공항 폭격 건은 아니다.

본부가 허가하고, 국제 협회가 실행한 계획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되면 여러모로 귀찮아진다.

최악의 경우 세간에까지 퍼져나갈지도 모른다.

'쯧....'

라이 통제팀장이 곤란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국제 사회의 시선은 둘째 치고, 당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본보기로 몇 명은 제거될지도 모른다.

귀찮아졌군, 그렇게 생각한 라이 통제팀장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협회장님, 라이비우입니다."

「어. 무슨 일이야?」

라이 팀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공항 건 말입니다. 아무래도 황 지부장이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뭐…?」

"아마 던전 출현 지역과 몬스터 탈출 현황을 파악하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쯧, 뭘 어떻게 해. 처리해야지.」

"명분은...."

「비리 몇 건 묶어볼게.」

"알겠습니다."

그제야 라우 팀장은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어때. 지휘권은 인계받았나?」

"예, 문제없이 인계받았고, 지금 파견팀 작전 투입 중입니다. 아마 지금쯤 현장에 도착했을 겁니다"

「그래, 특별히 정예들로 편성했으니 잘해보라고. 실수 없이 끝내야 지휘권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 있으니까. 뭐, 이번 일 잘 끝나면 약속대로 홍콩 지부는 자네가 맡게 해줄 테니.」

"감사합니다."

기다렸던 소식에 라이 통제팀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걸로 필요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나머진 탈출한 몬스터와 던전만 처리하면 된다.

뭐, 그래 봤자 레드 등급 하나에 옐로우 등급 두 개.

지금 파견된 5개 팀 모두 전원 정예로 편성되었으니, 그 정도야 금방....

삐빅―.

그 순간이었다.

"…뭐야?"

통제실에 설치된 던전 현황 모니터에 작은 점 하나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던전 출현을 알리는 표시였다.

라이 팀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이상은 계획에 없던 던전이었다.

이건 그냥 자연 출현인가?

그런 생각이 라이 팀장의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삐빅, 삐빅, 삐빅, 삐빅, 삐빅―.

갑자기 모니터에 미친 듯이 점이 찍히기 시작했다.

***

프랑스 파리.

PB 코퍼레이션, 관리팀 산하 뱅크 아이템 컨트롤 센터.

"뭐, 뭐라고요?"

그곳의 책임자, 클로이 팀장에게 갑작스러운 지시가 떨어졌다.

"못 들었나요? 차원석 이능파, 최대치로 올리라고요."

에마 대표가 냉담한 표정으로 다시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클로이는 원래 계획에서 벗어난 그 지시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지금만으로도 차원석 억제기가 불안정합니다. 최대치로 올렸다간 폭주할 수도 있어요! 애초에 던전은 세 개만 생성하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랬죠. 그랬는데... 사무총장님 특별 지시가 떨어졌어요. 이참에 중국 협회에도 본보기를 좀 보여주는 게 어떻겠냐고."

"그게 무슨...."

에마 대표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녀로서도 원래 계획을 갑자기 변경하는 건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최종 결정권은 그에게 있는 것을.

'뭐, 아주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긴 한데....'

이대로 중국 협회가 홍콩 지부를 무사히 탈환해버리면, 또다시 국제 협회 탈퇴를 무기 삼아 다른 자치구도 계속해서 흡수하려 들 수도 있다.

가뜩이나 헌터 인원도, 협회 지부도 너무 거대해서 늘 신경이 쓰이는 곳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몸집을 키웠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금이야 옥이야 키운 개가 주인을 물려고 들지.

웨슬리 사무총장은 원하는 것을 쥐여주되 쉽게 주진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더불어 도시 하나쯤 쑥대밭 만드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보여줄 겸, 던전을 추가로 생성하자고 했다.

다시 말해, 이건 순수하게 중국 협회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머릿속에 확실한 서열을 심어주려는 것뿐.

"아무튼, 시키는 대로 해요. 괜히 토 달지 말고."

"너무 위험합니다. 자칫 차원석이 폭주하면 던전이 걷잡을 수 없게 생성될 수도....

"클로이 팀장!"

에마 대표의 서슬 퍼런 눈빛이 그녀를 관통했다.

"제가 왜 당신을 살려뒀는지 잊지 마세요."

"...."

클로이 팀장은 이를 꽉 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직원들을 향해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차원석 이능파... 최대치로 가동해!"

지이이잉―.

명령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원석에서 보라색 빛이 미친 듯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서, 선생님?!」

여전히 잔해 속.

「괜찮은 거예요? 지금 어디예요! 아영 씨는요?!」

김민주에게 전화를 걸자마자 곧바로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공항 잔해에 깔려있지만 모두 괜찮아. 생존자도 있고."

「지금 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저희 쪽 파견팀이 바로 작전 투입해서…!」

"아니, 늦었어."

「네, 네?」

"이미 당국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지휘권을 인계받고 본부 파견팀이 토벌을 시작했을 거야. 지금은 우리가 끼어들 권한도, 명분도 없어."

「그, 그럼 직접 나서지 말고 지부 병력을 지원하는 쪽으로....」

"그것도 힘들 거야. 당국 입장에선 이번 작전은 온전히 본부의 지휘와 병력으로 성공시켜야 할 테니까. 지부 병력이 이 작전에 손을 댔다간 큰일 날 수도 있어."

「그럼… 어떡하려고요? 이대로 중국이 수습해버리면 지휘권은 영영 못 돌려받을 텐데요.」

"혹시 본토에서 보낸 병력, 얼마나 되는지 파악되냐?"

「잠시만요.」

1분 정도 지나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본부 통제팀장을 비롯한 지휘 병력 10명, 작전 병력 50명 이상 파견된 거로 추정하고 있어요. 적어 보이긴 해도 모두 정예로 편성된 팀이라 아마 충분할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네."

「다행이라뇨…?」

"그 정도 인원으로는 절대 이번 일 수습 못 하거든."

이내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방금까지 내가 갇혀 있는 곳에 던전이 생성됐어. 입구 색깔을 보아하니 등급은 또 옐로우."

「네, 네?!」

"너도 알겠지만, 지금 홍콩에서 출현한 던전은 국제 협회가 차원석으로 임의 생성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뭐, 국제 협회를 탈퇴하지 않는 대가로 탈환을 도와주려는 거겠지."

정황상, 이것도 국제 협회 쪽에서 생성한 던전일 것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미 출현한 세 개의 던전만으로도 홍콩 지부는 지휘권을 잃었다.

지부 탈환을 도와주는 목적이라면 굳이 추가로 던전을 생성시킬 이유가 없다.

오히려 당국이 일을 수습하기가 더 어려워지기만 할 뿐이니까.

그런데도 추가로 던전을 생성했다?

'이건 한 가지로밖에 설명이 안 되지.'

아예 현장을 초토화해서 이번 기회에 중국 협회도 눌러버리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쿠구구구궁―!

또다시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통화를 이어갔다.

"이 새끼들, 던전을 계속해서 생성 중이야. 이참에 중국 협회도 한번 눌러주려는 생각인 것 같은데... 아무리 정예라고 해도 이 정도 숫자를 토벌하는 건 불가능해."

「그럼....」

"반드시 본토에 추가 병력을 요청하겠지."

「결국, 이러나저러나 똑같은 거 아니에요? 혹시 헌터 관리 권한으로 후퇴시키려고요? 유예 기간 동안엔 저희도 권한 행사가 불가능하잖아요.」

"후퇴시키는 게 아니야. 추가 병력이 도착하지 못하게 하려는 거지."

아무리 본토에 병력을 요청해도, 그들이 홍콩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현재 인원으로는 계속해서 생성되는 던전을 막을 수 없으니, 좋든 싫든 살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겠지.

제삼자에게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홍콩으로 통하는 도로랑 헬리포트 전부 부숴버리자고."

「....」

"나머지는 뭐… 자칭 정예라는 놈들이 도망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돼."

「알았어요.」

"그러니까 일단...."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나부터 좀 꺼내줘."

일단 여기서 나가야 뭘 하든 말든 하지.

***

"마, 말도 안 돼...."

홍콩 젠사쥐 구.

공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그곳에 막 발을 들여놓은 본부 파견팀은 눈앞의 광경에 충격을 받은 얼굴들이었다.

"마치 폭격이라도 당한 것 같군."

"아수라장이 따로 없네요."

"분명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아직 피해가 크진 않다고 했는데...."

파견 1팀원들은 그 참혹한 풍경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하지만 그들의 리더, 장시엔 팀장은 말없이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생성 던전은 총 세 개.

그중 하나에서 몬스터가 탈출했다곤 하지만, 도심까지의 진격은 하루 이상 걸릴 것이었다.

근데 고작 몇 시간 만에 도심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홍콩 지부가 경험이 부족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될 리가 없는데....'

장 팀장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쿠구구구궁―.

눈앞에서 갑자기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타난 또 다른 던전.

옐로우 등급의 던전이 추가로 출현했다.

"뭐, 뭐야!"

"던전이 또 출현했다고…?"

"이거 계획에 있는 거야?"

예상치 못한 던전의 출현에 팀원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건 장 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달받은 대로라면, 임의 생성한 던전은 레드 하나에 옐로우 두 개.

그 이상 던전이 출현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그런데 왜....'

던전이 계속 생성되고 있는 것인가.

더 이상은 안 된다.

이 이상 던전이 출현하면 현재 전력으론 막을 수가 없다.

장 팀장은 곧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라이 팀장님, 장시엔입니다!"

「아, 마침 잘 됐다! 혹시 지금 그쪽에 던전 출현했냐?!」

"네? 마, 맞습니다!"

「이런 시발…!」

라이 통제팀장의 분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 지금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겁니까? 왜 던전이 계속 생성되는 건지.... 혹시 이것도 계획된 겁니까?"

「시발, 그럴 리가 없잖아. 나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몰라. 일단 본부에 얘기는 해놨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럼…?"

대답이 끊기길 잠시.

「지금 젠사쥐 구에만 생성된 옐로우 등급이 10개가 넘었다.」

"...!"

「이거, 너희들만으로 토벌 가능하냐…?」

장 팀장은 그 물음에 침을 꿀꺽 삼켰다.

옐로두 등급 10개를 토벌하라고?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무전기마저 떨어트린 채, 황망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던 그때.

"빨리빨리 움직여주세요!"

"크레인 진입 조심하시고요! 바닥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김 대표님 위치는 확인됐으니까, 일단 거기부터 구조 시작해 주세요! 수색조는 다른 생존자 위치 파악 부탁드립니다!"

"네!"

저 멀리에서, 수십 명의 인원이 온갖 중장비를 이끌고 어디론가 급히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196

196

"이봐, 당신들 뭐야!"

막 현장에 도착한 카르마 코퍼레이션 파견팀.

한별 건설의 도움을 받아 구조 작업을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데 웬 헌터들이 김민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희들 어디 소속이야! 여긴 어떻게 들어 왔어?"

"아, 저희는...."

김민주는 말을 하다 말고는 자신을 막아선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보아하니 중국 협회 본부에서 나온 지원 병력인 듯했다.

다시 말해, 지금 홍콩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들이라는 거겠지.

"저는 카르마 코퍼레이션 소속, 작전 본부장 김민주입니다. 구조 작업을 위해 공항으로 가는 중이니 비켜주십시오."

"카르마 코퍼레이션…?"

남자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는 험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긴 명백히 중국 협회 본부의 작전 구역이다. 누구 허락을 받고 구조 작업을 하고 있는 거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에 무슨 허가가 필요한가요?"

"하! 당연한 거 아닌가? 여긴 중국이야. 아무 관련도 없는 제삼자가 멋대로 끼어들면 안 되지."

"아무 관련이 없진 않습니다. 지금 공항에 저희 대표님이 갇혀 있으니까요."

"...!"

그 순간, 남자가 잠시 주춤했다.

"공항에... 생존자가 있다고…?"

"네."

"그럴 리가. 분명 확실하게...."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남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민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 아무튼! 아무리 구조 작전이라고 해도, 작전 구역에서 허가 없이 활동은 안 돼! 돌아가!"

"듣자 듣자 하니까 못 봐주겠네! 사람 구하겠다는데, 그걸 막는 미친놈이 어디 있는…!"

"유빈 씨!"

보다 못한 한유빈이 나서자, 김민주가 곧바로 제지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본인들 작전 구역이라도 해도 구조 작업을 나온 인원을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막는다고?

김민주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끝에 조심스레 물었다.

"듣자 하니 중국 협회는 구조 작전을 포기했다고 하던데, 맞나요?"

"그, 그거야! 지금 무리하게 구조 작업을 진행했다간 구조팀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이상하네요. 몬스터 탈출 상황에선 무조건 시민 대피와 구조 작전이 최우선 아닌가요? 이건 국가를 떠나서 무조건 지켜야 하는 방침일 텐데요."

"...."

남자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기본적인 수색도 안 하고, 생존자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데 무작정 철수를 하다니.... 이건 상식을 벗어난 것 같은데요."

김민주가 남자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아무리 이 상황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라고는 해도, 구조 작전을 포기하고 철수할 것까진 없다.

오히려 토벌에 성공하고 사망자가 나오는 것보다, 생존자를 구출하는 것이 이미지 메이킹으로는 더 효과적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굳이 구조 작업을 포기했다?

고작 구조팀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유만으로?

'백번 양보해서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해도....'

제삼자가 대신 구조를 하겠다면 오히려 반길 일이 아닌가.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도 있는데.

그것마저 기를 쓰고 막는다는 건, 분명히 수상한 일이다.

마치 생존자가 없을 거라 확신했거나, 아니면 있더라도 죽길 바랐거나.

그것도 아니면....

"다른 사람이 공항을 수색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거나."

"...!"

남자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김민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설마 공항을 공격한 게 당신들인 건 아니겠죠?"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러지 않고서야 구조 작업을 막을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가 공항을 수색하다가 스킬 사용 흔적이라도 발견할까 봐 막는 거 아닌가요?"

"듣자 듣자 하니까 이것들이 진짜! 더 이상 헛소리 지껄이면 우리도 가만히 안 있어!"

"그럼 당신들이 공격한 게 아닌가요?"

"당연히 아니지!"

"아니면 비키세요."

그 순간, 김민주의 눈이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제 손으로 치워드리기 전에."

[고유 스킬 : 천수관음(千手觀音)]

[스킬 발동]

스스스―.

푸른 기류가 김민주의 전신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하…! 지금 중국에서 중국 협회와 싸우겠다는 거야? 너희들 감당할 수 있겠어?"

"저희가 원래 앞뒤 재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서요."

"참 나, 해볼 테면 해보던가."

[고유 스킬 : 국사무쌍(國士無雙)]

남자 또한 스킬을 발동하며 허리춤에서 커다란 쌍검을 꺼내 들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에 두 진영은 서둘러 각자 전투태세를 갖췄다.

누군가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

"....'

시선을 마주한 채 신경전을 이어가던 그때였다.

쿠구구궁―!

또다시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티, 팀장님! 또 던전이 출현한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어느 헌터의 보고에 남자가 표정을 구겼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키에에에에―!

그르르―!!

저 멀리에서 몬스터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쪽의 기척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시발, 하필 이럴 때…!"

남자는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몬스터와 맞은편의 김민주를 번갈아 보며 이를 으득 씹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김민주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괜찮겠어요? 지금 저거 못 막으면 큰일 날 텐데."

"칫…!"

남자가 혀를 찼다.

"허튼짓하지 마. 난 분명히 경고했어."

"명심할게요."

"전원 전투 준비!"

이내 남자를 비롯한 본부 병력이 달려오는 몬스터를 향해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유빈이 고개를 저었다.

"저놈들... 전멸할걸요?"

"그렇진 않을 거예요. 제 목숨 소중한 줄은 아는 것 같으니까요. 아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도망치겠죠."

김민주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자, 우리도 서두르죠. 더 지체하면 위험해요."

"알았어요."

그들은 다시금 서둘러 현장으로 향했다.

***

"뭐?"

홍콩 지부, 중앙 통제실.

지부의 지휘권을 손에 넣은 라이비우 통제 팀장에게 갑작스러운 무전이 날아들었다.

다름 아닌 현장에 있는 장시엔 팀장에게서 온 무전이었다.

「현장에 카르마 코퍼레이션 소속 놈들이 있었습니다! 공항에 그들 대표가 살아 있다고 구조 작업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설마 진행하게 내버려둔 건 아니겠지?"

「그게... 몬스터를 막아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야, 이 멍청한 새끼야! 그렇다고 그냥 보내면 어떻게 해!"

「저, 저희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빌어먹을…!"

라이 팀장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계획에 없던 던전들이 생성되고 있는 것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이젠 하다 하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놈들까지 움직이다니.

이건 위험하다.

그들이 공항을 수색하다가 스킬 흔적이라도 발견한다면, 정말 큰일이다.

게다가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도 멀쩡히 살아 있다는 건....

'시발, 꼬일 대로 꼬이는군....'

라이 통제팀장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곤 통제팀 직원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본부에선 아직 얘기 없어? 왜 계속 던전이 생성되는 건지 이유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아, 아직 회신이 없습니다. 본부도 그저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만...."

"이런 시발 진짜!"

라이 팀장이 쾅,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일단 본부에 추가 병력 요청해. 지금 인원으론 이거 감당 안 돼."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라이 팀장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그 순간, 호출을 받은 황 지부장이 마침 통제실로 들어왔다.

동시에 라이 팀장의 머리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이거다.

저놈을 이용하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소가 번지는 걸 애써 숨기며 입을 열었다.

"황 지부장님. 지금 제가 지부 현황을 살펴보다가 발견한 건데… 저번 분기 예산이 꽤 많이 비더군요."

"예, 예? 그럴 리가...."

"그뿐만 아니라, 홍콩 내 기업들로부터 거액의 현금을 받은 내역도 발견했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거긴 애초에 몇 년 전부터 후원을 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닌...."

"조용."

라이 팀장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변명은 본부에 가서 하십시오. 끌고 가."

"예?! 자, 잠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직원들이 황 지부장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갑자기 이게 무슨…!"

"하여간, 이래서 지부에 운영권을 주면 안 된다니까. 본부가 신경을 못 쓰니까 대놓고 이런 비리를 저지르지. 그렇지 않습니까?"

"뭐, 뭐…?"

그제야 황 지부장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렴풋이 눈치챘다.

"이,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공항 공격한 것도 너희들이지?! 쓰레기 같은 새끼들! 그 더러운 민낯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아?!"

"글쎄, 본부 눈을 피해 비리를 일삼는 그쪽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개소리! 조금만 조사하면 헛소리라는 게 다 나올…!"

"하아... 황 지부장님."

라이 팀장이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비리를 저지를 만큼 그릇이 큰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뭐, 뭐…?"

"이건 그저 벌입니다. 감히 겁도 없이 본부를 의심한 벌."

황 지부장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물론 정식으로 법정 싸움을 한다면 그것들이 증거가 될 순 없겠지만, 아시다시피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전에 한 고위 공무원 비리 건이 재판부터 처형까지 하루도 채 안 걸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으시죠?"

"...."

"당신은 몇 시간이나 걸릴 것 같습니까?"

라이 팀장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천천히 말을 이었다.

"뭐, 이대로 보내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그래도 한 가지 선택지를 드릴까 합니다."

"그게 무슨...."

"지부 인원들한테 공항 폭격 명령을 내리십시오. 지금 당장."

"...!"

라이 팀장은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

설령 한국 놈들이 공항을 수색한다고 해도, 들키기 전에 다시 한번 묻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비리 건, 없던 거로 해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지부장이 직접.

***

"하아, 하아...."

잔해 속에 출현한 던전을 토벌한 직후.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던전을 빠져나왔다.

확실히 옐로우 등급을 혼자 토벌하는 건 벅차네.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건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두 번 다신 하고 싶지 않은 토벌이다.

나는 중얼거리며 잔해 속에서 털썩 궁둥이를 붙였다.

"괜찮아요?"

그때, 이아영 본부장이 다가오며 걱정스레 물었다.

"예, 뭐...."

"그러게 그냥 내버려 두지, 왜 굳이 토벌한 거예요?"

"임의로 생성된 던전이라면 언제 몬스터가 탈출할지 모르니까요. 단기간 몸을 피하기엔 좋을지 몰라도 계속 내버려두는 건 오히려 위험해집니다."

"…그렇군요."

"뭐, 구조팀이 오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본사 놈들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공항도 파괴된 마당에 어떻게 한 건지...."

"뭐, 당신이 위험하다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이아영 본부장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였다.

쾅! 쿠구구구―!

갑자기 땅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던전이 출현한 건가 싶어 벌떡 일어났지만... 보아하니 그건 아닌 듯했다.

"천천히! 최대한 천천히 들어 올려!"

"밑에 지지대 받쳐주고!"

"2차 붕괴 위험이 있으니까 조심해!"

머리 위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천장을 틀어막고 있던 잔해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틈으로 눈 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선생님! 아영 씨!"

꽤나 반가운 모습이 나타났다.

"오랜만이다?"

"다들 괜찮으신 거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지금 크레인 내려보낼게요!"

"우린 괜찮으니까 여기 시민들부터 먼저 구조해."

"아, 네!"

한시름 덜었군.

옅은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뭐야 저거?"

잔해 위로 드러난 하늘에서 무언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게 보였다.

이내 점점 더 반짝이며 정확히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야, 야! 피해!!"

"네…?"

구조팀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순간.

쾅―!!!!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충격이 일어났다.

197

197

"뭐, 뭐야 방금?!"

"공항 쪽인 것 같은데…?"

멀리서 울려 퍼진 굉음.

현장에 도착한 중국 협회 소속, 파견팀은 난데없는 소리에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한눈을 팔 시간 따윈 없었다.

"뭐해 이 새끼들아! 집중 안 해?!"

그들은 지금, 던전을 탈출한 수십 마리의 몬스터를 마주한 상태였으니까.

"다가가지 말고 저지만 해! 어차피 이거 지금 인원으로 다 수습 못 해. 본부 추가 병력 요청했다니까, 지원 올 때까지만 버티자."

"네, 네!"

"알겠습니다."

이내 그들은 다시금 눈앞에 놓인 적을 향해 돌아섰다.

[고유 스킬 : 인페르노 써클]

[고유 스킬 : 소환 - 아이스에이지]

[고유 스킬 : 환무검주(幻舞劍主)]

쾅, 콰과광―!

퍼버버벙―!

이윽고 이어진 공세.

장 팀장의 명령에 맞춰 모두가 한꺼번에 스킬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다행히 홍콩 지부에서 우선적으로 시민들을 대피시킨 덕에 인명 피해는 크지 않다. 그러니 굳이 무리해서 토벌할 필요는 없다.

현 상황에선 탈출한 몬스터가 더 진격하지 못하게 하면 충분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인데....'

장시엔 팀장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게, 너무 많은 던전이 출현하지 않았는가.

젠사쥐 구에만 10개가 넘는 옐로우 던전이 남아있다.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거기서도 몬스터가 탈출하기 시작한다면 그땐 진짜 큰일이 난다.

홍콩 지부 탈환은 둘째 치고, 홍콩 자체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빨리 와라. 제발....'

간절한 마음으로 중얼거리는 가운데, 거센 공격에도 여전히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가 쉴 새 없이 들이닥쳤다.

키에에에에―!

크르르르―!

"시발, 많기도 하네."

도마뱀형 몬스터, 플레임 리자드.

위험한 놈들은 아니지만, 늘 떼를 지어 다니는 통에 수적으로 까다로운 놈들이다.

"공격! 계속 공격해!!"

"쉬지 마! 마력 부족한 놈들은 뒤로 빠지고, 포션 보충해!"

"후방! 다시 앞으로 교대!"

벌써 몇 번이나 플레임 리자드 무리를 막아내고 있었다.

사실 까다롭다 뿐, 이 정도면 토벌을 못 할 정도는 아니다.

홍콩 지부 인원만으로도 충분히 수습할 수 있었을 텐데....

카아아아악―!!

그때, 어디선가 귀를 찢는 듯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굉음에 모두가 무기를 떨어트리고 귀를 틀어막았다.

서걱―!

가장 앞에 있던 팀원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뭐, 뭐야…?"

"방금 뭐가 지나갔나…?"

"아,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갑작스러운 공격에 술렁이기 시작하는 진영.

모두가 당황한 채로 우왕좌왕하던 그 순간.

서걱―!

"윽…!"

또다시 누군가의 목이 잘려 나갔다.

"뭐, 뭐야 시발!!"

"대체 뭐냐고!"

"도, 도망가!"

"으아아악!!"

결국, 팀원들은 보이지 않는 공포에 혼비백산하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서걱―.

하지만 그 모두가 죽어 나갔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우, 움직이지 마!!"

뒤늦게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장 팀장이 소리쳤다.

보스가 출현한 것이다.

레드 등급 던전의 보스가.

"움직이면 공격한다. 절대 움직이지 마."

"...!"

"...!"

그제야 쥐죽은 듯 내려앉은 정적.

장 팀장은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리자드형 몬스터의 특성상, 그들을 통솔하는 리더가 있다는 걸.

'보이지 않는 몬스터....'

상식을 벗어나는 위장색을 갖춘 놈이라 까다로운 수준을 넘어 위험하다.

홍콩 지부가 작전에 실패한 것도 무리는 아니겠군.

이미 리더의 사정권 안으로 들어와 있다.

이 상태로는 후퇴도, 그렇다고 공격도 할 수 없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던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다른 방향에서 거대한 기척이 느껴졌다.

키에에에에―!

크으으으―!

"일 났네...."

기어이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다른 던전에서도 몬스터가 탈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

홍콩 지부, 지휘통제실.

"거절하겠습니다."

황가휘 지부장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라이 팀장을 향해 대답했다.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공항을 공격하라고요? 설마 제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협상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죠?"

"...."

단호한 거절에 라이 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애초에 당신들이 공항을 공격했다는 걸 저한테 덮어씌우려는 거,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지부장님,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라이 팀장이 황 지부장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이건 협상이 아니라, 통보입니다."

"...."

"못 하시겠다면, 이대로 본부로 이송됩니다. 그 후론 어떻게 될지 제 입으로 말 안 해도 아시겠죠?"

"그깟 목숨, 이미 20년 전에 한 번 내놨습니다."

라이 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까다로운 새끼....'

이건 곤란하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카르마 코퍼레이션 놈들이 먼저 증거를 찾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이래저래 위험해진다.

"…어쩔 수 없군요."

라이 팀장이 옅은 한숨과 함께 그의 부하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부하가 종이 한 장을 들고 나타났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였다.

그걸 황 지부장 앞에 내려놓는 순간.

뻐억―!

"으윽…!"

라이 팀장이 황 지부장의 턱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몸이 크게 휘청이자, 라이 팀장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 지부장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 이게 무슨…!"

황 지부장이 뒤늦게 발버둥 쳤지만, 이미 눈 깜짝할 새에 일은 벌어졌다.

라이 팀장이 그의 팔을 잡고 강제로 백지에 서명을 휘갈긴 것이다.

"이거 가져가서 공항 폭격 허가서 작성하고, 남아있는 작전 인원한테 전달해."

"알겠습니다."

라이 팀장은 부하들에게 백지 서명을 건넸다.

"이, 이런 미친 새끼들…!"

힘겹게 몸을 일으킨 황 지부장이 분노에 찬 음성을 내뱉었다.

"언제까지 그 추잡한 짓거리를 덮을 수 있을 것 같아?! 언제까지 니들 마음대로 이렇게…!"

그렇게 입을 여는 순간.

쾅―!!!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에 황 지부장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지부장님, 공격 완료했습니다."

그의 부하가 담담하게 보고를 올렸다.

"언제까지 덮을 수 있을 것 같냐고요? 뭐, 뻔하지 않습니까."

라이 팀장이 뭘 물어보냐는 듯 여유롭게 답했다.

"우린 중국 협회 소속입니다. 당국이 무너지지 않는 한, 영원히 덮을 수 있습니다."

"...."

"뭐, 너무 그렇게 보지 마시죠. 덕분에 당신 목숨도 지키지 않았습니까."

라이 팀장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됐다.

이걸로 다 해결됐다.

자신들이 공항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방금 2차 폭격으로 영영 지하에 묻혔다.

황 지부장이 아무리 사실을 떠들어대도 그가 서명한 명령서가 있는 한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한 짓까지 모두 그에게 덮어씌울 수 있다.

그나마 신경 쓰였던 카르마 코퍼레이션 놈들도 방금 공격으로 한 번에 해결됐다.

파견된 구조팀은 물론, 혹시 살아있을지 모르는 김준우 대표도 이젠 영영 햇빛을 못 보겠지.

'이제 본부에서 추가 병력이 올 때까지만 기다리면....'

다 마무리가 되는 거였다.

위이이이잉―.

그때, 통제실에 비상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 지부장님!"

모니터링을 하던 직원 한 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금 다른 던전에서도 몬스터 탈출이 확인됐습니다!"

"뭐, 뭐…? 벌써?!"

기어이 우려하던 일이 터져버렸다.

"개체수는!"

"출현 던전이 너무 많아서 정확히 파악이 안 됩니다."

"추정이라도 해봐!"

"지, 지금 젠사쥐 구에만 총 12개 던전이 출현한 상태니까, 거기서 모두 탈출했다고 가정하면...."

직원이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던 끝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최소 200마리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미친…!"

그제야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라이 팀장은 다급하게 본부로 연락을 넣었다.

"어, 나야! 대체 추가 병력은 언제 도착하는 거야! 지금 여기 비상이라고!"

연락을 받은 본부 통제팀 직원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병력 지원이 힘들 것 같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방금 추가 지원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홍콩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전부 파괴돼서 안으로 진입할 수가 없답니다.」

"뭐?!"

라이 팀장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럼 헬기는? 헬기로 이동하면 되잖아!"

「그, 그게… 확인해본 결과 홍콩 내에 있는 헬리포트도 모두 파괴됐다고....」

"시발, 대체 그게 무슨…!"

그 순간 라이 팀장의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었다.

'설마 카르마 코퍼레이션, 그 새끼들이…?'

홍콩을 아예 가둬버린 건가?

본부 지원을 막으려고?

「일단 최대한 도로를 복구 중이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얼마나!"

「이틀 정도는 더....」

"이런 시발!"

라이 팀장이 쾅, 책상을 내리쳤다.

이미 탈출한 몬스터도 아직 처리하지 못했는데, 추가로 탈출한 몬스터만 200마리 이상이다.

심지어 활성화된 던전이 아직도 몇 개나 더 남아있다.

이건 정예 몇 명으로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본부 병력이 모조리 나서야 하는 국가 재난급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끼리 이틀을 더 버티라고?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X 됐다....'

이대론 탈환은커녕, 홍콩 자체가 사라진다.

그 책임은 고스란히 본인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것만큼은 안 된다.

모든 책임을 떠안을 바에야....

"...황 지부장님."

그때, 라이 팀장의 시선이 황가휘 지부장에게 향했다.

"지휘권, 다시 넘겨드리겠습니다."

"...뭐라고요?"

"당신 홍콩 지부 책임자잖아! 지휘권 다시 넘겨줄 테니까 이제부턴 당신이 책임지고 수습하라고!"

"하, 하하…!"

다급한 목소리에 황 지부장이 실소를 뱉었다.

"추합니다. 라이 팀장님. 이제 와서 나한테 떠넘기시겠다고요?"

"닥치고 내 말 들어. 이제부터 네가 여기 책임자야, 알았어?"

"싫다면요?"

"이런 미친…!"

라이 지부장이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받으십시오."

그 순간 누군가가 지휘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그곳에는....

"지휘권, 다시 받으세요. 지부를 돌려받을 기회 아닙니까."

다름 아닌,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대표.

김준우가 그곳에 서 있었다.

"대, 대표님? 여길 어떻게...."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이내 그가 라이 팀장을 향해 다가갔다.

귀신이라도 본 듯, 딱딱하게 굳은 그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부턴 내가 지휘할 테니까, 넌 꺼져 있어."

***

"대, 대체 어떻게...?"

중국 협회 소속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설마 그 정도 공격으로 우리가 죽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뭐, 거의 죽을 뻔하긴 했는데....'

다행히 김민주가 곧바로 공격을 빗겨 쳐준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참 나, 하다 하다 이젠 검으로 스킬을 빗겨 치다니.

괴물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지휘실을 한 차례 훑었다.

꼴을 보아하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감이 온다.

보아하니 처음 공항을 공격한 건 몬스터가 아닌, 중국 협회 쪽일 것이다.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게 지부 구조팀도 철수를 시킨 거라고 하면, 대충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제삼자가 끼어들었으니... 공항 채로 우리를 묻어버리려고 한 거겠지.

그 명령은 황가휘 지부장 서명으로 내린 거겠고.

'멍청한 짓거리들을 하는군.'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게 나 말고 누가 또 있다고.

고개를 젓자,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제삼자가 낄 일이 아니야! 이건 엄연히 당국에서 맡은…!"

"그럼 당신이 해결할 수 있습니까?"

"...!"

"능력도 없이 우기기만 하면 몬스터가 알아서 죽어준답니까? 못 하겠으면 손 털고 구경이나 하시죠."

"당신들... 이번 작전에 손대는 순간 당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한국에 정식으로 항의를...!"

"그쪽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질리지도 않는 건지, 계속 주절거리는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중국 협회도 부숴버릴 생각이니까."

그의 발언을 뭉개며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아, 아. 중앙통제실에서 김준우가 발신합니다. 각 팀, 현장 도착했습니까?"

「1팀장 김민주입니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2팀, 한유빈. 저희도 도착했어요.」

「현장 근처에 임시 지원실도 마련해뒀어요. 무기 공급이랑 헌터 케어는 바로바로 가능해요.」

김민주를 필두로 한 1팀과 한유빈을 필두로 한 2팀.

그리고 헌터 지원을 맡은 이아영 본부장이 동시에 응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홍콩 지도가 띄워진 모니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작전 개시합니다."

198

198

홍콩 지부, 중앙 작전통제실.

"1팀은 탈출 몬스터 저지에만 집중해. 던전 진입은 2팀에 맡기고."

「네!」

"2팀은 먼저 출현한 던전부터 차례로 토벌 진행하세요. 던전 정보는 전송해 놨으니 확인하고요."

「알았어요.」

1팀의 김민주, 2팀의 한유빈이 퍽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인원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이상 있으면 바로 이아영 본부장한테 보고하세요. 이상."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다시 작전 현황을 띄워 놓은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급조된 편성.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기획.

상황이 상황인지라, 미국 지부 때처럼 체계적으로 작전을 진행할 여유는 없다.

일단 탈출한 몬스터부터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근데 수가 너무 많아서 모든 팀을 투입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또 던전 토벌이 지체되고, 그사이에 또다시 몬스터가 탈출하겠지.

그야말로 악순환.

아무리 본사 정예를 싹싹 긁어모아 왔다곤 해도, 우리 인원만으로 작전을 진행하기엔 무리가 있다.

뭐,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홍콩 지부의 지휘권을 인계받았다는 거겠지.

"지부 소속 작전팀에게 알립니다. 작전 A팀, B팀은 1팀과 합류해서 몬스터 저지를, 작전 C팀, D팀은 2팀과 합류해서 토벌을 진행해주십시오."

그건 곧, 지부 소속 인원들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소리니까.

물론 그래도 전력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최소한 상황이 더 악화하는 건 막을 수 있다.

던전 생성이 멈출 때까지만 버티면, 그다음부턴 내가 직접 움직이면 된다.

그래. 그때까지만 버티면....

「이거 정말 끝나긴 하는 거예요?!」

그때, 이아영 본부장이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다급하게 물었다.

「국제 협회에서 계속 던전을 생성하고 있는 거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꼴이잖아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놈들의 목적은 중국 협회를 밟아주는 거지, 홍콩을 날려버리는 게 아닙니다. 이 정도면 그쪽도 슬슬 멈출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확실한 거죠?」

"물론입니다."

아무렴, 홍콩이 날아가 버리면 국제 협회도 곤란하다.

잃을 게 없어진 중국 협회가 곧바로 국제 협회를 등지고 탈퇴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개를 부리려면 목줄도 적당히 조여야 하는 법.

너무 조이려고 하다간 주인을 물고 만다.

"혹시라도 감당하기 힘든 몬스터가 출현하면, 곧바로 저한테 보고하세요. 괜히 나서려고 하다가 진영이 무너지면 진짜 큰일 나니까."

「알았어요. 그럼… 당신도 계속 수고해줘요.」

이아영이 무전을 종료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나머진 각자에게 맡기는 것뿐.

이전처럼 체계적인 작전은 아니지만, 다들 베테랑들이니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휘권도 인계받았으니, 이대로 작전만 완료한다면 홍콩 지부도 우리 손에....'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삐리리―.

내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의아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도와줘요.」

어느 여성이 대뜸 영어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무슨 소립니까? 아니 그것보다 누구시죠?"

「클로이에요.」

"...?"

클로이?

이 인간이 왜 갑자기 나한테…?

「길게 말할 시간 없어요. 이대로 있다간 당신이나 나나 다 X 될 거예요.」

***

PB 코퍼레이션 본사.

뱅크 아이템 관리팀 산하 뱅크 아이템 컨트롤 센터.

그곳은 아비규환이었다.

"차원석 이능파 수치가 너무 높습니다!"

"110%, 120%… 현재 수치 135%!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억제기 가동시켜!"

"이, 이미 억제 가능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차원석 이능파를 최대치로 올린 지 고작 2시간.

이능파 수치가 걷잡을 수 없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어…!'

상황을 지켜보던 클로이 팀장은 이를 으득 씹었다.

차원석은 아직 연구가 완료되지 않은 아이템이다.

던전을 생성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이능파를 뿜어낼 수 있는 물건이라 취급에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도 무리하게 출력을 올렸으니 이런 상황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래서 위험하다고 했는데....'

대표고 사무총장이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리다니.

머릿속엔 온통 토벌권밖에 없는 머저리 새끼들이!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위에서 내린 명령이라고 해도 더 이상은 안 된다.

"장비 정지해."

"네, 네? 그래도 됩니까? 본부 허가는...."

"여기 책임자가 본부야?! 억제기도 말 안 듣는다면서! 이대로 있다가 폭주라도 하면 진짜 X 되는 거 몰라?!"

"...."

"지금 당장 센터 전체 전력 차단하고, 시스템 재부팅 해!"

"아, 알겠습니다."

클로이의 명령에 센터 직원들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시스템을 종료하고, 센터의 모든 전력을 차단했지만.

지이이잉─.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어째선지 차원석 가동은 멈추질 않았다.

"티, 팀장님! 작동이 멈추질 않습니다!"

"수치도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시발...."

전력을 차단했는데도 차원석이 작동하고 있다.

과출력을 넘어 기어이 차원석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게 뜻하는 바는....

"...대피해."

"네, 네?!"

"도망치라고! 시설 전체에 멜트 다운 경보 울리고 당장 도망쳐!!"

뱅크 아이템의 과부하.

속칭, 멜트 다운.

뱅크 아이템 연구 시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자, 반드시 피해야 하는 현상.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X 됐다....'

클로이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제 더 이상 차원석을 제어할 수 없다.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기 시작한 차원석은 곧 홍콩을 비롯해 전 세계에 던전을 미친 듯이 만들어낼 것이다.

솔직히 그거야 어떻게 되든 본인이랑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 본인의 처사겠지.

'어떻게… 대체 어떻게 해야....'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깨물던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클로이의 머릿속에 한 남자가 떠올랐다.

당연히 내키진 않았지만, 이제 와서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클로이는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게 말할 시간 없어요. 이대로 있다간 당신이나 나나 다 X 될 거예요."

「대체 무슨 소립니까?」

"차원석이 폭주하고 있어요. 우리 쪽에선 더 이상 던전이 생성되는 걸 컨트롤 할 수가 없어요."

「예?! 그, 그게 무슨…!」

김준우 또한 당황스러운 소식에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당신, 홍콩에 있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예. 제가 지휘권을 인계받았습니다.」

"그럼, 이미 우리 쪽 계획은 물 건너갔네요."

클로이가 옅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폭주를 막으려면 지금 생성되고 있는 모든 던전을 동시에 토벌해야 해요.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그 주변으로 계속 생성될 테니까."

「지금 인원으로는 탈출 몬스터를 막는 게 고작입니다. 동시 토벌은 불가능....」

"지원 병력은 제가 마련해볼게요."

「....」

"왜요? 못 하겠어요?"

「이 상황에서 별수 있겠습니까. 해야지.」

이윽고 기다리던 대답이 들려왔다.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겁니까? 여기 상황은 당신이랑 딱히 상관도 없을 텐데.」

"왜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책임으로 떠넘길 텐데. 무엇보다 당신도 홍콩을 버릴 수 없잖아요?"

「쯧, 이유가 썩 내키진 않는군요.」

"떠들 시간 있으면 빨리 움직이기나 해요."

클로이는 그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대피, 대피!"

"다 두고 밖으로 나가!"

"백업할 시간 없어! 일단 도망쳐!!"

이미 시설에 있는 모든 직원은 허겁지겁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이이잉―!

그런 와중에도 차원석은 계속해서 진동하며 점점 더 강하게 발광하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쾅―!!!!

엄청난 충격과 함께 컨트롤 센터가 폭발했다.

***

"대체 왜 던전이 계속 생성되는 거야!"

리제이징 협회장이 격노한 음성으로로 핏대를 세웠다.

"국제 협회에선 아직도 연락 없어?!"

"네, 네. 확인해보겠다고만 하고 아직...."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그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분명히 처음에 말하길, 세 개의 던전만 생성한다고 했다.

홍콩 지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지만, 본부 인원으로는 충분히 감당 가능한 범위가 딱 그 정도였으니까.

홍콩 지부에서 본부에 도움을 요청하면, 지부 지휘권을 인계받아 본부가 대신 토벌을 진행.

토벌이 완료되면 후속 조치와 홍콩 재건을 핑계로 계속 지휘권을 붙잡고 있을 생각이었다.

이후에는 지부 수뇌부를 본부 인원으로 교체하기만 하면 성공적으로 지부를 탈환할 수 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인가.

'설마 국제 협회, 이 새끼들....'

본보기인가?

우리가 또다시 국제 협회 탈퇴를 빌미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아예 짓밟아주려고?

'처음부터 그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어....'

현재 홍콩의 상황은 최악 중 최악이다.

앞서 파견된 인원만으로는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없다. 남아 있는 본부 인원을 총출동시켜야 할 판인데.

문제는 홍콩 안으로 진입할 수단이 모두 막혀버렸다.

이번 작전에 너무 많은 인원이 엮여 있다.

당국의 고위 공무원은 물론, 장관들까지 주목하고 있는 작전이다.

그런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 버리면 그 관계자 또한 무사하지 못한다.

그 말은 곧, 궁지에 몰린 그 인간들이 작전에 실패한 본인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시발, 빌어먹을…!'

그리고 그때.

"리제이징."

한 중년 남성이 협회장실로 들어섰다.

"자, 장관님…?"

왕시엔.

이번 작전을 허가한 장본인이자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장관.

그가 직접 행차한 것이다.

"여, 여기까진 어쩐 일로...."

"지금 홍콩 상황이 말도 아니라던데."

"아, 그, 그건...."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왕 장관의 눈을 바라보며 담담한 척을 했다.

"던전이 계속 생성되고 있어서 어려운 상황이긴 하지만, 아직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어떻게?"

"도로 보수 작업이 완료되는 대로 본부 병력을 모조리 투입한다면, 충분히...."

"하!"

왕시엔 장관이 코웃음을 터트렸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지휘권을 잡았다."

"...네, 네?"

"귀먹었나? 김준우가 이미 홍콩 지부를 쥐었다고."

그 말에 리 협회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내 그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이건…?"

"봉쇄 명령이다."

"예?"

"던전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본토까지 위험해져. 무엇보다 어차피 카르마가 지휘권을 잡은 이상 탈환은 물 건너갔고."

"그럼...."

"이 시간부로 당국은 홍콩 자치구를 포기한다."

왕 장관이 굳은 얼굴로 그 말을 내뱉었다.

"이번 작전에 사활이 걸려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빼앗길 바엔 차라리 부숴버리는 게 낫지. 넌 지금 당장 홍콩으로 들어가는 모든 진입로를 차단, 본토로부터 완전 봉쇄시켜. 아무도 밖으로 못 나오고, 아무도 안으로 못 들어가게."

"자, 잠시만요! 아직 홍콩에 저희 인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민들도 아직 안에 있는데, 그들한테 문제라도 생기면…!"

"못 들었나?"

왕 장관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이 시간부로 홍콩 밖으로 아무도 못 나온다고."

"...."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틀어진 계획, 그냥 이대로 전부 묻어버리고 나머진 국제 협회에 모조리 덮어씌우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