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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을 들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온 최종혁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예, 이사님."

「어떻게 되고 있어?」

"...진행 중입니다."

「웃기고 있네. 근데 왜 아직도 소식이 없어.」

"...."

「에휴, 시벌. 이럴 줄 알았다.」

중년의 남성이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심사 종료까지 3일밖에 안 남았어. 내가 뭐 어려운 거 부탁했냐? 김민주, 그년 인적성 평가만 조져 놓으면 된다니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이런 시발, 내가 지금 그딴 소리 들으려고 너 승급시켜준 거 같냐?」

"...."

최종혁은 속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그렇다.

그가 심사 내용을 알려주는 대가로 요구한 것은, 다름 아닌 김민주 작전 본부장의 실격 처리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이 잘 해결될 시, 국제 협회 스카우트라는 어마어마한 딜을 추가로 내걸었다.

모든 헌터들의 워너비자, 최종 목표.

국제 협회 소속의 헌터가 될 기회라는데 그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최종혁 또한 그 어마어마한 거래에 혹해 앞뒤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막상 본인이 그 값을 치러야 할 때가 되니,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상대는 김민주가 아닌가.

실력, 인성, 평판, 실적.

그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게 없는 인간이다.

무엇보다 모든 관심이 토벌에만 쏠려 있는 탓에, 횡령이나 뇌물 같은 게 통할 리도 없다.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긴 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그 인간의 꼬투리를 잡는다는 건, 본인이 S랭크가 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래서 최종혁은 그의 부탁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뭐, 이렇게 재촉 전화까지 한 걸 보면 더 이상은 모른 척할 순 없겠지만.

「이번에 너희 팀에 인턴 들어왔다며? 너 설마 걔한테 수작 치느라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거 아니지?」

핸드폰 너머 중년의 남성이 날카로운 투로 쏟아냈다.

"...아닙니다."

「아니긴, 시발. 너 아무튼 허튼짓하지 말고 시킨 것만 해라. 아니면 뭐, 심사 내용만 받아먹고 모른 척하겠다 이거야?」

"…설마요."

「내가 말했지. 이거 국제 협회에서 나한테 직접 부탁한 거라고. 너 이번 일 잘되면 국제 협회 갈 수 있다니까.」

"하아...."

「정 꼬투리 잡을 게 없다 싶으면 너 잘하는 거 하면 되잖아.」

"...예?"

「내가 왜 이번 일을 너한테 맡긴 것 같냐? 토벌은 뒷전이고 맨날 헌터 명함 내세워서 여자만 꼬시는 파렴치한 놈이 뭐가 이쁘다고.」

그 순간, 건너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무슨 소린가 싶어 대답을 아끼기도 잠시.

"뭐… 본부장이랑 스캔들이라도 만들라고요?"

「그래 새끼야. 네가 잘하는 게 그거 말고 뭐가 있어?」

이내 그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둘이서 술자리라도 한번 만들어 봐. 그 후엔 알아서 하고. 그림 좋잖아? 완전무결한 줄 알았던 작전 본부장이 스캔들에 휘말리면 충격적이기도 하고. 당연히 인적성 평가에도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 어때, 한 번에 보내기 딱 좋은 소스 아니냐?」

"아니… 그러다가 저까지 잘리면 어떡하라고."

「야, 이 새끼야! 내가 그 정도도 커버 못 쳐줄까 봐? 그리고 어차피 이번 일 끝나면 한국 뜰 텐데, 얼굴 팔리는 거 정도야 감수할 만하지.」

최종혁은 이마를 턱 짚었다.

노인네, 말이라고 너무 쉽게 지껄이고 있다.

그 천하의 작전 본부장과 스캔들을 만들라니.

아니, 스캔들이고 나발이고 일단 전제부터가 글러 먹었다.

애초에 그 인간, 김준우 외의 사람에겐 관심도 없지 않은가.

술자리는 고사하고, 그 어떤 남자와도 단둘이 사적으로 만날 이유가 전혀 없는....

"야! 최종혁!"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멀리서 이태범 팀장이 다급하게 달려오며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최종혁은 통화를 하다 말고, 핸드폰을 슬쩍 감추며 대답했다.

"그 이번 주 작전 스케줄 정리한 거, 혹시 네가 확인했냐?!"

"...아뇨.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지금 통제팀에서 연락 왔는데, 3팀 일정이랑 완전히 겹쳐서 동선 꼬였댄다. 이미 우리 쪽에선 토벌 투입 보냈고.... 아 씨, 귀찮게 됐네."

"인턴한테 맡기셨잖습니까. 그쪽이 실수했나 보죠. 가서 한마디 하시죠."

"...아, 아니 뭐 그렇게까지 큰일 난 건 또 아니고."

인턴 이야기가 나오자, 이 팀장이 어째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잠시 망설이던 끝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일단 네가 수정 좀 해주라. 괜찮지?"

"아니 그걸 왜 제가...."

"부탁 좀 하자, 이놈아. 나 다시 회의하러 가야 해. 한 번만 좀 도와줘라."

"...하아."

"아, 그리고 이것 좀 내 책상에다가 가져다 놔줘. 급하게 가느라 들고 와버렸네."

그가 건넨 것은 다름 아닌 모텔 키였다.

집이 멀기도 했고, 작전이 잡힌 날에는 밤낮없이 본부에서 살아야 했기에 그는 며칠씩 방을 빌려 생활하곤 했다.

보아하니 요즘에도 모텔에서 출퇴근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부탁 좀 한다!"

"...."

이태범 팀장은 막무가내로 그에게 일을 떠맡기곤, 왔던 길로 황급히 돌아갔다.

최종혁은 이 팀장이 건넨 열쇠와 그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봤다.

「…야, 야! 최종혁! 내 말 안 들려?!」

"생각해보니까 말입니다...."

마침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굳이 제가 엮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뭐?」

"뭐, 일단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최종혁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내 그가 사무실 문을 박차며 들어갔다.

"야, 인턴!!"

그 목청에 자리에 앉아 있던 문소연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방금 통제팀에서 연락 왔는데, 덕분에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팀까지 완전히 일정 꼬여서 지금 난리도 아니란다. 너 대체 일을 어떻게 한 거야?"

"네, 네…?"

"너 때문에 작전 다 날리게 생겼다고.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작전 하나에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너 그거 물어낼 수 있어?!"

"...."

물론 그 정도까지 큰일이 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최종혁은 최대한 과장되게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정직원 전환에 사활을 건 인턴에게 위기감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제, 제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보겠습니다...."

기다렸던 대답이 들려오자, 최종혁은 애써 미소를 감추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고?"

"네? 네...."

"그럼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할 수 있겠냐?"

"...네?"

최종혁은 조금 전 이 팀장에게 받았던 모텔 키를 꺼내 들었다.

***

"위원회에 최종혁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고요?"

서울 본부, 랭크 심사 평가 위원회 사무실.

이때까지 알아낸 걸 말해주자, 그녀 또한 꽤나 놀란 반응을 보였다.

"아니, 그 인간 쓸 데가 어디 있다고…?

"그거야 모르죠. 혈연이나 학연일 수도 있고."

물론 대충 알아본 결과, 최종혁과 친분이 있을 만한 사람은 없었지만....

"위원회에 심사 내용을 미리 알고 귀띔해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많이 없어요. 저랑 당신, 아빠를 제외하면...."

"고병철 사외이사, 금은숙, 박장목 이사. 이렇게 세 명뿐이죠."

"금은숙 이사님은 이번 실기 시험 논의 때 다른 일 때문에 참가 못 하셨으니 아니에요."

"그럼 남은 건 두 명이군요."

나는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솔직히 둘 다 의심스럽다.

고병철 이사는 어떤 인물인지 정보가 없고, 박장목 이사는 협회 시절부터 특정 정당의 접대 의혹으로 이래저래 말이 많았던 놈이고.

'이제 와서 인원을 갈아치우기엔 아직 심사 기간이 3일이나 남았으니....'

답답한 마음에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누가 범인인지는 둘째 치고. 대체 목적이 뭘까요?"

이아영 본부장이 의아한 목소리로 질문을 이어갔다.

"랭크 심사는 헌터들에게나 중요한 사안이지, 민간인들한테는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잖아요. 특정 누군가를 승급시킨다고 해도 본인들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없을 텐데?"

"누군가를 올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떨어트리는 거라면 이득이 될 수도 있겠죠."

"...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심사 설명회 때 못을 박지 않았습니까. 인적성 평가에서 실격되면, 헌터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아, 설마...."

"그걸 이용해서 눈엣가시였던 누군가를 고의로 떨어트리려는 거라면, 누군가에겐 분명히 이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생각보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걸 느낀 건지, 이아영 본부장의 표정이 퍽 굳었다.

"그래서, 누구를 떨어트리려고 하는 걸까요?"

"헌터 자격이 박탈되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이득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하면...."

뭐, 한 명밖에 없지 않은가.

현재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주축이자 최고 전력.

"김민주 작전 본부장."

"...!"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이아영 본부장이 반사적으로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래, 그녀가 아무리 작전 본부장이고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주축이라고 해도 지금은 여느 헌터와 마찬가지로 심사 대상 중 한 명일 뿐이다.

만약 그녀가 모종의 이유로 인적성 평가에서 실격 처리된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자격 박탈을 막을 수가 없겠지.

"하지만… 민주 씨가 떨어진다고 해서 협회 내에서 이득을 볼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 자리에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맞습니다. 그 녀석이 떨어진다고 해서 이득 볼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 협회 내에는 없죠."

나는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국제 협회라면 또 모를까."

"...!"

김민주는 명실공히,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최고 전력이다.

단순히 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것뿐만 아니라, 현재 거의 모든 작전을 진두지휘하며 엄청난 실적을 올리고 있다.

무엇보다 내 오른팔로써 그 어떤 임무도 성공적으로 해결해내는 든든한 전력이다.

그런 인물이 떨어져 나간다면, 필연적으로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정말로 이번 심사에 누군가 개입해서 김민주를 떨어트리려고 한다면, 그건 분명히 높은 확률로 국제 협회일 것이다.

"이사 중 한 명이 국제 협회와 접촉했을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자세한 건 이제부터 확인을 해봐야겠죠."

나는 이아영 본부장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고병철 이사랑 박장목 이사, 두 사람 다 여기로 불러주세요. 한 명씩 대화를 좀 해봐야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녀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대표님!"

문소연이 꽤나 다급한 얼굴로 사무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문소연 씨…? 무슨 일이십니까?"

"그, 그게 최종혁 씨가 방금 저한테 이걸 주면서, 민주 씨 사무실에 가져다 놓으라고 하던데...."

그 말과 함께 문소연이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모텔 키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

"...."

허.

이 새끼 봐라?

***

"아니, 진짜로?!"

"조용히 해, 인마."

본부 옥상.

그의 동기인 고현종, 박태하와 함께 담배를 피우던 최종혁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마. 내가 잘못 본 걸 수도 있으니까."

"아니, 어쨌든 팀장님이랑 본부장이랑 모텔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거 아니야?"

"팀장님, 이번에 둘째 돌이라면서? 사모님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러냐...."

"아, 잘못 봤을 수도 있다니까. 호텔에서 회의라도 했을 수 있잖아."

최종혁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애써 수습하는 척 손을 저었다.

물론 진심으로 그들을 감싸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야, 그게 말이 되냐!"

"대표한테 꽂혀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 여우네."

"그러니까 말이다. 충격이다, 충격이야."

그저 이런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이내 최종혁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속삭였다.

"아무튼, 이거 비밀이다. 내가 오해한 거면 두 사람한테 미안하잖아. 알았지?"

"알았어, 새끼야."

"당연히 입단속 해야지."

그렇게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지만, 사실 최종혁은 알고 있었다.

이 스캔들이 퍼지는데, 하루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209

209

"뭐라고요…?"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작전 본부실.

오랜만에 그곳을 찾은 송혜연 대리가 김민주 본부장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했다.

"제가 이태범 팀장님이랑 그런 관계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서울 본부 내에 그런 이야기가 돌고 있어요. 실제로 둘이 같이 다니는 걸 봤다는 소리도...."

송혜연 대리가 우물쭈물하던 끝에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아, 아니시죠? 그냥 헛소문이죠?"

"당연히 아니죠. 대체 누가 그딴 개소리를 퍼트린 거예요?"

"그것까진 저도 잘.... 나름대로 알아보려고 했는데, 소문이 너무 빨리 퍼져서 아무래도 원출처를 찾긴 힘들 것 같아요."

"하, 대체 이게 무슨...."

김민주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오히려 당황할 틈도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그동안 본부장님 이미지 때문에 더 달려드는 것 같아요. 완벽주의 그 자체였던 사람이 불륜이라고 하니… 이목을 끌기엔 안성맞춤이잖아요."

"...."

"일단 빨리 해명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더 내버려두었다간 정말 걷잡을 수 없이 퍼질 수도...."

"해명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김민주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어차피 우리가 그런 관계라는 증거도 없고, 이태범 팀장님이랑 같이 입장을 발표하면 헛소문이라는 것쯤은 쉽게 밝혀지겠죠."

"그러면 지체할 거 없이…!"

"하지만 이미 한 번 입에 오르내린 소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네?"

"특히 저처럼 연차도 무시하고 한 번에 본부장까지 꿰찬 젊은 여성일 경우에는 더더욱 심하겠죠."

"...."

송혜연 대리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닫았다.

모두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금 돌고 있는 이야기가 헛소문이라는 것쯤은 알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녀의 커리어에 의문을 갖는 사람이라면... 안 봐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다.

능력만 좋으면 뭐 하냐.

이럴 줄 알았다.

본부장 자리도 윗사람들 상대해서 꿰찬 거 아니냐, 등등.

그들에겐 소문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상관이 없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열등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소문을 퍼트린 놈을 잡는다면 어떻게든 책임을 물게 하고 수습할 수 있겠죠. 다만...."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송혜연 대리가 거의 울상이 된 채 대답했다.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소문을 거슬러 올라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당사자가 자신이 퍼트린 소문이라고 밝힐 리도 없다.

이번 일에 가장 책임을 져야 하는 놈이, 가장 뒤에 숨어 있는 것이다.

"소문을 퍼트린 놈을 잡지 못하면,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모두 제가 져야 해요. 그리고 그 책임이라고 하면… 결국 인적성 평가에 반영되는 거겠죠."

"그건 말도 안 돼요! 본부장님 잘못도 아닌데 어떻게…!"

"품위유지."

김민주가 송혜연 대리의 말을 자르며 그 단어를 내뱉었다.

"엄연히 인적성 평가에 포함된 항목이에요. 모든 헌터의 귀감이 되어야 하는 작전 본부장이 이런 구설에 휘말렸다는 건,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미 그 항목에서 실격된 거고요."

"...."

"그런 자리에요. 여긴."

담담한 김민주의 말에 송혜연 대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결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 건지,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그, 그래도 평가 위원회가 융통성이 있다면 실격처리까지는 안 하겠죠? 게다가 대표님이랑 개인적인 친분도 있으니, 어떻게 잘 얘기하면 충분히...."

"글쎄요."

김민주가 말끝을 흐렸다.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본부 전체에 소문이 퍼진 이상, 김준우가 섣불리 자신을 두둔하려 들다간 오히려 역풍을 맞을지도 모른다.

친분이 있기에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김준우는 물론, 다른 본부장과 인사들까지 줄줄이 엮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일단은 대표님께 이야기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글쎄요,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닌 분이라...."

김민주는 그것조차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지금 심사만으로도 벅찰 텐데 괜히 짐을 짊어지게 하는 것 같았으니까.

"일단 조금 더 지켜보다가...."

"조금 더 언제. 뭐, 잘려 나간 다음에 말하게?"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길 걸 숨겨. 지금 모가지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다른 사람 생각할 때야?"

"서, 선생님…?"

다름 아닌, 김준우 대표가 직접 본부장실에 들이닥친 것이다.

"너 아주 유명 인사 됐더라."

"다, 다 거짓말이에요. 누가 의도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 같은…!"

"조용히 하고 앉아. 다 아니까."

"...네?"

김준우는 어째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았다.

곧바로 책상 위에 무언가를 툭, 던졌다.

"이건…?"

김민주는 받아들며 물었다.

모텔 키 같았지만, 자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그 물건을 왜 꺼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태범 팀장 숙소 열쇠야. 최종혁 그 새끼가 이걸 네 사무실에 가져다 놓으라고 시켰댄다."

"네?! 그, 그게 무슨…!"

"만약 다른 놈이 이걸 네 사무실에서 찾았으면 그땐 진짜 손도 못 썼을 거야. 아마 소문을 퍼트린 놈도 그 새끼겠지."

"...."

김민주는 입을 꾹 닫았다.

이 상황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던 까닭이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공격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나름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잠깐만요! 소문을 퍼트린 사람이 최종혁이라고요? 그럼 범인을 잡은 거잖아요! 빨리 그놈을 잡아다가 실토하게 하면…!"

"아뇨."

김준우는 송혜연 대리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심증만 있는 거지, 증거가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잡아서 심문한다고 해도 모르쇠로 나온다면 우리로서 더 확인할 방법도 없고요."

"열쇠를 가져다 놓으라고 시켰다면서요! 그건 진짜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 아니에요?"

"그것도 착각했다, 오해가 있었다는 식으로 나오면 별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내 김준우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최종혁의 덜미를 잡는다고 해도, 그의 윗선을 잡지 못하면 실격처리는 막지 못할 겁니다."

"...!"

"...."

송혜연 대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김민주는 도리어 담담한 반응이었다.

이내 김준우의 시선이 다시금 김민주에게 향했다.

"지금 우리가 추측하기로는… 평가 위원회 소속의 누군가가 최종혁에게 사주해서 너를 끌어내리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의 배후에 국제 협회가 있다는 것 정도야."

"…국제 협회요?"

김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턱을 괴며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축을 무너뜨려서 어떻게든 조직을 약화시킬 생각인 것 같은데. 시기도 그렇고, 방법도 그렇고 작정하고 들어온 것 같아."

"...."

"이미 구설에 휘말린 이상 품위유지 항목에서 감점 사유가 될 텐데, 최종혁의 윗선이 그걸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서 실격으로 처리하려 들겠지."

"그렇겠죠...."

"그러니 심사 기간이 끝나기 전까지 최종혁과 그 윗선의 자백을 받아내든, 물증을 찾아내든 해서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해야 해. 만약 그러지 못하면...."

"제가 책임을 지게 되겠죠."

김민주가 고개를 떨어트리며 대답했다.

그리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마."

"...네?"

"해명도, 반박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도 안 되는 헛소문 때문에 하지도 않은 짓을 증명할 필요는 없으니까."

위로인지 야단인지 모를 그 말에 김민주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야. 넌 허튼 생각 말고 토벌에나 신경 쓰라고."

"하지만...."

"됐으니까 신경 꺼. 나머진 나한테 맡기고."

김준우는 그 말을 남기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드시 찾아서 조져 놓을 테니까."

***

"정말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새끼네요."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이아영 본부장이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개수작도 이런 개수작이 없군요."

"민주 씨… 겉보기엔 강해 보여도 여린 사람이에요. 아마 마음고생 엄청 할 텐데...."

"뭐, 어쩌겠습니까. 다 본인이 잘나서 그런 건데, 감수해야죠."

"...참 나."

생각 없이 흘린 그 말에, 이아영 본부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뱉었다.

"그래서, 고병철 이사랑 박장목 이사는 호출해뒀습니까?"

"고병철 이사는 지금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어요. 박장목 이사는 밑에 직원한테 연락해놓으라고 했고요."

"좋습니다. 바로 만나보죠."

우리는 잡담할 시간도 없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도착한 사무실 앞.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고병철 사외이사가 몸을 일으키며 우리를 맞이했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갑작스럽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그래서, 어쩐 일로 부르신 겁니까?"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곤 이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지금 본부 내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더군요."

"아, 들었습니다. 작전 본부장과 이태범 팀장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서요?"

"그 이야기를 믿으십니까?"

"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있겠습니까."

고병철 이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내 주제를 바꿔, 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이사님 계신 곳이 두한그룹 맞으시죠?"

"예, 예."

"제가 듣기로는 그곳에서 아주 무서운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작년에는 구조조정으로 부서 하나를 날려 버리셨다던데. 덕분에 이상한 별명까지 붙으셨다고. 뭐라더라… 칼바람?"

"허허...."

고병철 이사가 굳은 표정으로 애써 입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긴 한데, 지금 갑자기 제 이야기를 꺼내시는 저의가 뭘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더 이상 돌려 말할 것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는 이번 스캔들이 누군가 악의적으로 퍼트린 거라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평가 위원회 소속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순간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콧방귀를 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게 저라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까? 수십 명 모가지 잘라낸 놈이니, 한 명 묻어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거니 싶어서?"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허, 참...."

기가 차다는 반응.

이윽고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제 사회적 지위가 있지, 그런 저급한 소문을 퍼트리면서까지 남의 기업 본부장을 왜 묻으려 하겠습니까. 그거 하면 누가 금덩이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나는 계속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이내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기도 잠시.

"알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드려 죄송합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알면 됐습니다."

고병철 이사는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슬쩍 고개를 돌려 한마디를 덧붙였다.

"혹시 김민주 본부장과 친분이 있어서 두둔하고 싶은 거라면…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

"내부 분위기도 안 좋은데, 괜히 감싸려 들다가 몰매 맞기 십상이니까."

"새겨듣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고병철 이사는 사무실 문을 쿵, 닫으며 나가버렸다.

"어때요?"

그와 동시에 이아영 본부장이 곧바로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저 인간은 아닙니다."

"…단호하네요."

"소문에 대해 물었을 때, 본인이 퍼트린 게 아니라고 하더군요. 만약 이 일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놈이었다면 본인이 시킨 게 아니라고 했을 겁니다."

"...그것만으로 확신할 수 있어요?"

"그냥 확률이 높다 이거죠. 무엇보다 계획을 들켰다는 것에 당황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에 더 화를 내더군요."

다른 감정은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분노는 그러지 못한다.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그의 분노만큼은 믿을 수 있다.

이아영 본부장도 그 점에 있어선 납득이 갔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뭐… 남은 건 박장목 이사뿐이네요."

"네. 당장 여기로 호출을...."

그리고 그 순간.

"본부장님!"

이아영의 부하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급하게 사무실로 들어섰다.

"뭐예요? 무슨 일인데?"

"박장목 이사님 말이에요. 계속 연락을 하는데 안 받으셔서 다른 부서에 좀 알아보니까...."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방금 일본으로 출국하셨대요. 일정상 심사 기간이 끝난 다음에야 돌아오신다고...."

"네?!"

"허...."

시발, 이런 빌어먹을 새끼를 봤나.

꼬리가 잡힐 것 같으니 아예 숨어 버리겠다 이거야?

210

210

"출국이라뇨? 그 인간이 거기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직원이 전달한 갑작스러운 소식에 이아영 본부장이 기가 차다는 듯 되물었다.

"하라무라 공방 무기 입찰 건으로 확인차 출국하셨다는데...."

"그 사람이 확인할 게 뭐가 있어. 그거 다 성일 씨 담당인데!"

"저, 저한테 그러셔도...."

직원이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이아영 또한 그제야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냈다는 걸 깨달았는지, 한숨을 쏟아내며 애써 열을 식혔다.

뭐, 이해는 간다.

이 타이밍에 출국이라니, 의도가 뻔히 않은가.

"괜히 꼬투리 잡히느니 차라리 심사가 끝날 때까지 숨어 있겠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증거만 못 찾게 하면 그만이니, 아예 빌미를 안 주겠다는 거겠죠."

"빌어먹을 놈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마를 턱 짚으며 대답했다.

고작 소문이 퍼진 지 하루 만에 해외로 뜰 생각까지 할 줄이야.

대체 어디까지 준비해둔 일이란 말인가.

'뭐, 덕분에 심증은 확실해졌네....'

다만 문제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내빼버린 이상 자백도, 증거도 손에 넣을 수가 없어졌다는 것.

"이제 어떻게 해요? 이대로 심사 기간이 끝나면 민주 씨는 무조건 실격 처리될 텐데...."

"...."

나 또한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어서 말을 아꼈다.

그리곤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번 일을 수습하기 위해선 반드시 최종혁과 박장목이 고의적으로 거짓 소문을 퍼트려 김민주를 끌어내리려 했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만약 실패한다면 모든 책임을 김민주가 떠안아야 한다.

하지만 현재까진 심증만 있을 뿐, 그들이 이번 사건의 주동자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그래서 박장목을 호출하려 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그와 최종혁 그리고 국제협회와의 관계를 입증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가 도망을 가버린 이상, 그들의 만행을 입증할 방법이 사라졌다.

"아뇨,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때, 이아영 본부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최종혁이 있잖아요. 그놈이 이번 일에 대해 자백한다면...."

"할 것 같습니까?"

"...."

이아영 본부장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말했듯, 우리에겐 심증만 있을 뿐 그가 이번 일의 주동자라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계속해서 모르쇠로 나온다면 우리도 더 이상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최종혁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겠지.

결국, 그가 스스로 털어놓지 않는 이상, 우리로선 방법이 없다.

"그럼 뭐 어떡하자고요! 이대로 손 놓고 있을 거예요?! 아니면 이대로 민주 씨가 쫓겨나도 좋다는 거예요?!"

"...."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만약 최악의 경우 헌터 자격이 박탈된다고 해도, 내 권한으로 계속 작전 본부장 자리에 앉혀 놓을 수는 있다.

헌터가 아니더라도 옆에서 나를 보좌하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하다.

단적인 예로, 한유빈 또한 그러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 녀석이 어떻게 되든 계속해서 써먹을 수는 있다.

다만....

'이딴 저급한 수작에 녀석의 헌터 인생이 쫑나야 한다고…?'

그 꼴은 못 보지.

내가 손수 키운 녀석이다.

이딴 불명예스러운 일에 휘말려 그만두게 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 못 한다.

"저는 가만히 못 있겠어요. 우리가 못하면 다른 사람이라도 시켜서 어떻게든 덜미를 잡아야죠!"

"...다른 사람?"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이라....'

계속해서 그 말을 되뇌길 잠시.

'어쩔 수 없지....'

잠시 망설이던 끝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김준우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가능해요.」

수신자는 다름 아닌 문소연이었다.

"일이 좀 틀어졌습니다. 박장목 이사가 꼬리를 안 잡히려고 해외로 튀었는데, 심사가 끝나기 전까진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네?! 그, 그러면 민주 언니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증거 없이는 그놈들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일의 책임은 그 녀석에게 돌아가게 되겠죠."

「그런....」

"그래서, 이런 부탁드려서 죄송한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최종혁 그놈이랑 한 번만 어울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저번 미팅 때 듣자 하니, 최종혁이 문소연 씨한테 관심이 좀 있는 것 같던데...."

그녀의 대답이 끊기길 잠시.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단번에 알아차린 그녀가 결의에 찬 목소리를 냈다.

「저한테 맡겨주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이내 전화를 끊고는 이아영 본부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럼 남은 건…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무력이라도 쓰게요?"

"늘 그렇듯 대비용이죠. 뭐, 심사 기간인 만큼 헌터는 안 되겠고. 그러면서도 헌터를 과격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한데...."

"흐음...."

둘이서 잠시 머릿속으로 적당한 사람을 골라보길 잠시.

"...."

"...."

아무래도 둘 다 머릿속에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괜찮을까요…?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조금 걱정스럽긴 해도, 어쩔 수 없지.

비뚤어진 일에는 늘 진심인 사람이니까.

"그래서… 한유빈 씨, 지금 어디 있습니까?"

***

"김민주 본부장이 이태범 팀장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본부 옥상.

담배를 피우고 있던 작전 2팀 소속의 헌터들은 여전히 그 소문에 관한 이야기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뭐야, 너 지금 알았어? 그거 때문에 하루 종일 난리였는데?"

이야기를 듣고 당황스러워하는 한 남자에게, 다른 남자가 오히려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 작전 갔다가 지금 들어왔잖아. 근데 그거 진짜야?"

"진짠지 아닌지는 나야 모르지."

"근데 진짜 본 사람도 있다던데? 4팀이랬나, 5팀이랬나...."

또 다른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물론 정확히 들은 건 아니었지만, 애초에 그들에게 정확성이나 사실 여부 따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와씨, 개충격이네. 절대 안 그럴 것처럼 생겨 가지고...."

"원래 반반한 애들이 뒤에서 더 구린 짓 많이 한다잖아."

"참 나, 그 청순한 얼굴을 해 갖고 뒤에선 남자나 밝히고 있었네."

"야, 혹시… 본부장 자리도 뒤에서 그 짓거리로 받아낸 거 아니냐?"

"에이 설마...."

"설마는 무슨!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솔직히 이 팀장이 뭐 인물이 되냐, 그렇다고 능력이 되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랑도 그런 관계면, 더 윗사람들이랑은 뭐 없었겠냐고?"

"듣고 보니 그러네."

"새끼… 일리가 있는데?"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소문에 또 다른 소문을 덧붙이고 있던 그때.

"일리가 있어?"

시퍼렇게 날이 선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스쳤다.

고개를 돌리자, 한 명의 여성이 본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누구?"

"아는 사람이야?"

"아니, 처음 보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여성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는 이내 그들을 향해 터벅터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뻐억―!

한 명을 향해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

"뭐, 뭔…!"

단 한 방에 그대로 고꾸라진 남자.

동료가 순식간에 당하자 크게 당황했지만, 정작 주먹을 날린 여자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묻잖아. 그게 일리가 있냐니까?"

"너, 너 뭐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헌터한테…!"

여자의 멱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으려 했지만....

"...!"

남자는 살기가 아른거리는 그녀의 눈을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뭐 하고 있어. 아까 하던 소리 더 해봐."

"너, 너 대체 누구...."

"해보라니까?"

여자는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두 남자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여자, 지금 본인들을 진심으로 죽일 생각이라는 것을.

"시, 시발! 오지 마…!"

[고유 스킬 : 레바테인]

결국, 목숨의 위협을 느낀 남자가 먼저 스킬을 시전했다.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터져 나오기 시작한 붉은 기류.

그 압도적인 기세에 그제야 두 남자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 잠깐...."

"대체 누구신데…!"

여자는 대답 대신 주먹을 쥐었다.

다시금 그들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거기까지 하시죠."

한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말렸다.

다름 아닌,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수장.

김준우 대표였다.

"대, 대표님…!"

"이 여자가 다짜고짜 폭력을…!"

"그쪽은 닥치고 있고요."

단숨에 그들을 침묵시킨 뒤, 김준우는 여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부탁할 게 있으니 따라오시죠. 가뜩이나 상황도 안 좋은데 괜히 일 키우지 마시고."

"...그럼 저 주둥아리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요?"

"잡아야 할 놈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기획 본부장이 이러고 있는 게 더 문젭니다."

그 말에 두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유빈은 그들을 흘겨보더니.

"…알았어요."

이내 단념하고 등을 돌렸다.

"다, 당신 가만히 안 놔둬!"

"심사 기간에 폭행이라니! 보, 본부장이면 다야?!"

"내 걱정 말고 니들 걱정이나 해. 만약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그 더러운 주둥이 놀리면...."

한유빈은 그들을 슬쩍 흘기며 말을 이었다.

"진짜 죽여 버릴 거니까."

"...."

"...."

그 진심 어린 경고에 남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유빈은 그들을 뒤로한 채 김준우를 따라갔다.

계단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한유빈이 물었다.

"그래서, 무슨 부탁인데요?"

한눈에 봐도 굉장히 언짢은 상태였다.

"이제부터 이 소문을 퍼트린 범인을 잡을 생각입니다. 그 전에 저와 약속 하나 하시죠."

"...?"

김준우는 웃음기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죽이지 않기로."

***

"예, 이사님."

작전 5팀 사무실 밖 복도.

최종혁은 또다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새끼, 머리 좀 썼더라?」

"하하. 감사합니다."

「아무튼, 심사 끝나면 돌아갈 테니까 너도 몸 사리고 있어. 특히 김준우 그놈은 조심하고. 촉이 장난이 아니니까.」

"걱정 마시죠. 만약 낌새를 눈치챘다고 해도 어차피 증거가 없어서 몰아붙이진 못할 겁니다."

「하긴, 그것도 그러네. 아무튼, 알았다. 나중에 밥 한번 먹자고. 비싼 거로 사마.」

"하하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전화를 끊고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본인의 생각대로 소문은 하루 만에 본부 전체로 퍼졌다.

사실 여부를 떠나 김민주의 이미지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계획대로 되고 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해....'

분명 계획대로는 되고 있는데, 아직 찝찝한 게 남아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인턴한테 맡겼던 모텔 키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시발, 설마 다른 놈한테 가져다준 건 아니겠지…?'

뭐, 설령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다른 일이랑 착각을 했다고, 심사 기간이라 정신이 없어서 실수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니까.

어차피 이 소문의 주동자가 본인이라는 걸 입증할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다.

김준우가 찾아와도 문제없다.

당당하게만 나가면 된다. 당당하게만.

그렇게 스스로 되뇌던 차였다.

"저… 선배님."

때마침 문소연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야, 너 내가 부탁한 거 어떻게 됐어. 갖다 놓은 거 맞아?"

"…네. 갖다 놨어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리곤 뭔가를 망설이는 듯,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끝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제가 그거 가져다 놓으면서 생각을 해봤는데요."

"...?"

"혹시, 저한테 부탁하신 일이 지금 본부에 도는 소문이랑 관련이 있는 일인가요…?"

최종혁은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바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건 그냥...."

"선배님, 저 정규직 돼야 해요."

문소연이 그의 말을 끊으며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가, 갑자기 뭔 소리야."

"만약 선배님이 이 소문이랑 관련이 있다면, 높은 분이랑도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해서...."

문소연은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천천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선배님께서 믿는 구석 하나쯤 만들어 두는 게 좋다고 그러셨죠?"

"…그, 그랬지."

"그러면...."

그 순간 문소연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최종혁과 눈을 맞추길 한 차례.

이내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혹시… 오늘 둘이서 술 한잔하실래요?"

211

211

본부에서 꽤 멀리 떨어진 선술집.

최종혁과 문소연은 함께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굳이 다른 지역까지 온 이유는 이곳이 유명한 가게인 것도 있었지만, 혹시 모를 직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원래 스스로 터득해서 배우는 게 가장 빠른 법이거든. 너무 도와주기만 하면 나중에 의지하려고만 하니까."

최종혁은 정종을 홀짝이며 묻지도 않은 말을 계속 내뱉는 중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냉정하게 대한 거지,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다 우리 소연 씨 생각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줄 수 있지?"

"물론이죠."

문소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반응이 퍽 마음에 드는지 최종혁이 병을 들며 말했다.

"자, 우리 소연 씨도 한 잔 받아."

어느새 그녀의 호칭은 우리 소연 씨가 되어 있었다.

30대 중반을 넘긴 그가 20대 초반의 여성에게 그런 호칭을 쓴다는 게 무슨 의도인지는 누가 봐도 뻔했지만, 그럼에도 문소연은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최종혁은 그 반응을 제멋대로 해석했다.

"그래서, 소연 씨."

"네?"

"믿는 구석을 만들고 싶다는 게 무슨 뜻일까? 내가 오해할 수도 있어서 그런데…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오해할 게 어디 있어요. 당연히 선배님한테 잘 보이고 싶다는 뜻인데."

"하하하!"

본인이 딱 원하던 대답이었는지, 최종혁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긴, 이번 심사 끝나면 승급도 확정이고. 이 팀장 쫓겨나면 잠깐 동안은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있으니까."

"잠깐 동안이요? 어디 다른 곳으로 가세요?"

"아...."

그 순간 최종혁이 말실수를 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손을 내저으며 얼버무렸다.

"뭐… 몰라도 돼."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전 선배님에 대해 더 알고 싶은데."

"...."

최종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당연하겠지만 그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꺼낼만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취기 때문일까, 최종혁은 왜인지 조금은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큼큼...."

그렇게 헛기침을 하길 한 차례.

"혹시 박장목 이사라고 알아?"

결국,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뇨. 처음 들어보는데, 높은 분이세요?"

"본사 내에서도 꽤나 높은 분이지. 아무튼, 어쩌다 보니 국제 협회랑 얘기가 좀 됐거든. 그리고 그 사람이 나한테 일을 맡겼고. 그래서 아마 이번 일 끝나면 국제 협회로 갈 것 같아."

"우와! 진짜요?! 역시 대단하신 분이었네요!"

문소연이 손뼉을 짝, 치며 크게 반응했다.

그리곤 이내 넌지시 물었다.

"그나저나 이번 일이라면…?"

"그거야 당연히 김민주 그년을...."

아차.

최종혁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곧바로 문소연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오히려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역시! 이번 일, 선배님이 다 계획하신 거였네요?"

"크흠... 그, 그렇긴 하지."

"진짜 대단하세요. 고작 소문을 퍼트리는 것만으로 작전 본부장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가시다니."

"뭐, 별거 아니야. 원래 겉으로 흠잡을 게 없는 인간들일수록 이런 소문이 잘 먹히거든."

"무섭진 않으세요? 제가 듣자 하니… 김준우 대표는 한번 물면 끝까지 안 놓는 사람이라던데. 꼬투리가 잡힐 수도 있잖아요."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퍼트렸다는 증거도 없고. 그냥 모른 척 잡아떼기만 하면 되니까."

"거기까지 다 생각하신 거군요! 진짜 대단하세요."

"뭐… 다 삶의 지혜지. 하하하!"

쉬지 않고 쏟아지는 칭찬에 멋쩍은 듯, 과장되게 웃었다.

"아무튼, 이제 김민주는 끝이야. 보아하니 주동자를 찾고는 있는 것 같은데, 확실한 증거도 없고. 혹시 몰라서 박장목 이사도 몸을 숨기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뭐, 그건 그렇고...."

이윽고, 최종혁의 음성이 사뭇 바뀌었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문소연의 눈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혹시 오늘 일찍 들어가야 해?"

"네, 네?"

"시간 괜찮으면 2차 가자고."

최종혁의 손이 문소연의 어깨로 향했다.

문소연은 갑작스러운 손길에 화들짝 놀라 곧바로 몸을 뺐지만, 그럴수록 최종혁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 소연 씨가 먼저 만나자고 한 거 아니야? 믿는 구석 만들고 싶다면서. 그럼 이 정도는 예상했을 거 아니야."

"아, 그, 그건...."

문소연은 당황스러운 상황에 계속해서 시선을 피했지만, 그럴수록 최종혁은 더욱 그녀에게 가까이 들러붙었다.

그리고 최종혁이 문소연의 손을 덥석 잡은 순간이었다.

뻐억―!

"끄아악!!"

둔탁한 무언가가 그의 안면을 강타했다.

그와 동시에 입과 코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시, 시발 뭐야!!"

최종혁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고개를 들었고.

"…다, 당신은?"

그곳엔 한유빈 기획 본부장이 살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건 한유빈뿐만이 아니었다.

"그 손 떼시죠."

때마침 구석진 자리에서 다가오는 한 남자.

"잘라버리기 전에."

다름 아닌,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수장.

김준우 대표였다.

***

"대,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최종혁 씨."

"대표님께서 여긴 어떻게...!"

최종혁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크게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그가 문소연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너, 너 설마...."

문소연이 화답하듯, 핸드폰을 꺼내 들어선 녹음된 음성을 재생했다.

「역시! 선배님이 다 계획하신 거였네요?」

「크흠... 그, 그렇긴 하지.」

「진짜 대단하세요. 그냥 소문을 퍼트리는 것만으로 작전 본부장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가시다니.」

「뭐, 별거 아니야. 원래 겉으로 흠잡을 게 없는 인간들일수록 이런 소문이 잘 먹히거든.」

명백한 자신의 음성에 최종혁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너, 너 이 썅…."

"최종혁 씨!"

그 순간, 문소연이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인적성 평가 담당자로서 근무태도, 대인관계, 인성 평가를 비롯한 모든 인적성 항목에서 실격처리 됐음을 통보합니다."

"...뭐?"

"더불어 조금 전 행동은 명백히 성희롱이고요. 그 건은 따로 고소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하, 하하...."

넋이 나간 듯 헛웃음을 내뱉는 최종혁.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가 인적성 평가 담당자라고…?"

"기획본부 소속 청소과장, 문소연. 엄연히 본사 평가 위원회 소속이에요."

그녀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꺼내 들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

마침내 최종혁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 제가 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왜 저한테 사과하십니까?"

나한테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사과하려는 대상을 잘못 찾았다.

최종혁도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는지, 다시금 문소연을 향해 돌아섰다.

"내, 내가 미안해. 아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네요. 저는 그냥 원칙대로 평가만 하는 사람이라."

"원하는 건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저, 정규직 전환도 제가 최대한...."

뭔가 아차 싶었는지, 최종혁이 말끝을 흐렸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그녀가 인적성 평가 담당자라는 것은, 정규직이고 나발이고 그가 가진 어떤 것으로도 거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애초에 그녀 쪽이 훨씬 높은 직급이기도 하고.

"하, 하하하...."

최종혁은 황망한 웃음을 흘렸다.

난 그에게 다가가 눈을 맞췄다. 그러자 곧바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대, 대표님! 오해입니다! 제가 말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니라…!"

"거 입 좀 다무시죠.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시고,"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책임을 물을 수 있긴 한데.... 여기서 끝내면 당신 뒤를 봐주고 있는 사람이 꼬리를 잘라버릴 수도 있겠죠. 그럼 또 우린 헛짓거리를 하는 거고."

지금 그를 놓치면 잡을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박장목 이사까지 엮어야 한다.

"지금 당장 그 인간한테 전화하시죠."

나는 그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며 말했다.

"사, 사실 다 농담이었습니다! 그냥 대단해 보이고 싶어서 제가 한 척한 거지, 사실은 전혀 아닌…!"

"에휴… 문소연 씨."

"네."

"손님들 다 물려주시고, 문 닫으세요."

잠시 후....

드르륵―.

그와 동시에.

뻐억―!

한유빈의 주먹이 그의 안면을 강타했다.

"끄으윽…!!"

최종혁이 바닥에 엎어진 채 얼굴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지,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 정도인 걸 다행으로 아세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당신 죽여 버린다는 거, 애써 말린 참이니까."

"...."

"자, '우리' 최종혁 헌터님의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그냥 본인이 다 뒤집어쓰고 퇴출 및 명예훼손으로 법정까지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박장목 이사를 팔고 정상참작을 받으시겠습니까."

"...."

"빨리 고르셔야 할 겁니다. 여기 계신 본부장님이 워낙 참을성이 없으셔서."

난 그렇게 말하며 한유빈을 흘겼다.

진심으로 살기가 느껴지는 그 눈빛에 최종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내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더니, 버튼을 눌렀다.

"예, 예… 이사님."

무슨 말을 해야 하냐는 듯, 나를 올려다본다.

미리 핸드폰에 타이핑한 메모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그걸 읽으며 통화를 이어나갔다.

"아, 다름이 아니라…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요."

"예예."

"아뇨 그게...."

"김민주 본부장이… 실종됐답니다."

***

"실종?"

일본, 도쿄 지부.

최종혁이 전한 갑작스러운 소식에 박장목 이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실종이라니. 뭐 잠수라도 탄 거야?"

「그,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출근하기 뭐하니까 잠잠해질 때까지 어디 짱박혀 있으려나 보지."

「그,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최종혁의 대답이 끊기길 잠시.

「사무실에서 유서로 보이는 메모가 발견됐답니다.」

"...뭐?"

가히 충격적인 이야기에 박장목 이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억울하다, 죽고 싶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던데… 이미 본사에서 경찰에 수사 의뢰를 한 모양입니다. 실종 수색과 함께 이번 일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이런, 시발...."

박장목 이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머리를 턱 짚었다.

이건 그냥 스캔들이다.

출처도, 근거도 모르는 그저 형태 없는 소문.

대상이 없으니 고소를 할 수도 없고, 그러니 범인을 잡을 수도 없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런데 경찰이 개입하게 된다면... 형태 없이 떠도는 소문에서 정확한 인과를 가진 사건이 되어버린다.

「벌써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작전팀 대상으로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는데…. 일단은 모른다고 잡아떼긴 했지만, 내버려 둬도 괜찮겠습니까?」

"시발, 당연히 안 되지."

박장목 이사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다.

그저 인적성 평가로 실격만 시킬 생각이었는데,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이야.

만약 본부장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엔... 그땐 정말 큰일 난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전수 조사에 들어간다면 본인들의 계획이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겠지.

계획은 고사하고 철창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건 위험하다.

어떻게든 자신이 먼저 수습해야 한다.

"김준우 대표는? 그놈 반응은 어때."

「본부장을 찾아다니고 있다는데… 아직 소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야, 걔 잘못되면 우리 다 X 된다. 경찰 조사 들어가기 전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해."

「네, 네? 하지만 저희가 무슨 수로....」

"일단 오늘 새벽 3시까지 저번에 거기로 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박장목 이사는 깊은숨을 토해내며 말을 이었다.

"나도 지금 바로 귀국할 테니까."

212

212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모던 바.

나는 최종혁과 함께 박장목 이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빈손으로 가게에 앉아 있을 순 없었기에 각자 마실 것을 시켰지만, 나도 그렇고 그 또한 음료에 입을 대진 않았다.

하긴, 이 상황에서 그 누가 느긋하게 칵테일이나 홀짝이겠는가.

'흐음....'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각인 새벽 3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 박장목 이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곳이 맞습니까?"

"네, 네. 이번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 곳이니 여기가 확실합니다."

"근데 왜 이렇게 안 오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대표님."

밖에 대기시켜놨던 직원이 허겁지겁 나에게 다가왔다.

"도착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최종혁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제가 일러준 대로만 하세요. 핸드폰 녹음기 꼭 켜두시고."

"저, 정말 시키는 대로만 하면 정상참작 해주시는 겁니까?"

"뭐… 그거야 본인 하기 나름이겠죠."

단호하게 대답하곤 곧장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야는 닿지 않지만 집중하면 목소리는 들릴만한 거리.

그곳에서 출입문을 바라보고 있자, 드디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사님, 여깁니다."

"그래. 택시가 안 잡혀서 좀 늦었어."

박장목 이사.

이능차원협회 시절, 박인범 협회장을 몰아내고 협회 내 권력을 쥐려고 했던 송철식 이사 라인 중 한 명.

물론 그중 대다수가 본부 개혁 당시 줄줄이 모가지가 잘려 나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자리만 지키는 수준이었던 그는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있는 둥 마는 둥 목숨만 부지하다가, 카르마 코퍼레이션과 합병이 되고 나서부터는 급속도로 영향력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엄청난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도, 입지를 한 방에 역전시킬 만한 계약을 따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쯤 되니 본인보다 힘센 놈들이 남아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래서 존버, 존버 하는 건가....'

그냥 운이 좋은 놈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다.

그것도 아주 더럽게 좋은 놈.

어쨌든 입지가 올라간 만큼, 이번 평가 위원회 소속이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국제 협회와 손잡은 놈이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전에 쳐냈겠지만.

"혼자 온 거지?"

"네, 네."

"본부 상황은 어때? 경찰 조사는?"

"아직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진 않았는데... 늦어도 내일 안에는 착수할 것 같습니다."

나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귀를 최대한 열었다.

아직까진 내가 지시한 대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본부장을 어떻게 찾으실 생각이십니까?"

"방법 있냐? 사람 풀어야지."

"그건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경찰도 곧 수색에 들어갈 텐데. 섣불리 사람을 풀었다가 괜히 눈에 띌 수도...."

"...."

박장목 이사는 대답을 아꼈다.

그 틈을 타 최종혁이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만약 우리가 먼저 찾는다고 해도… 그다음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와서 이실직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설득해서 복귀시키기에도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그 질문은 박장목 이사에게 꼭 물어보라고 지시한 것 중 하나였다.

자신에게 칼이 들어온 상황.

예상치 못한 그 위기를 해결하려다 보면 필시 본인이 숨기고 있는 패를 꺼내 들기 마련일 테니까.

본인들이 퍼트린 스캔들.

거기에 휘말린 김민주.

여태까지는 그저 출처 모를 소문에 불과했지만, 김민주가 실종되면서 모든 게 틀어져 버렸다.

이제 모두가 주시하는 사건이 된 이상, 언제까지고 익명 뒤에 숨어 있을 수가 없게 됐다.

나아가 경찰까지 나서게 되면 반드시 꼬리를 밟힐 것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사건을 무마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박장목 이사가 이 상황에서 정말 사건을 해결할 방법을 꺼내 든다면, 그것이 곧 그가 여태껏 숨기고 있던 패.

국제 협회와의 연결고리가 될 테니까.

"...방법이 있어."

이윽고 박장목 이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에 집중했다.

"들어와."

그 순간, 박장목 이사가 가게 출입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누군가를 향해 손짓했다.

이내 껄렁한 차림을 한 몇 명의 남자들이 박장목 이사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딱 봐도 동네 양아치들로 보이는 남자들이 최종혁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 이분들은…?"

"전직 헌터들. 지금은 자격 박탈되고 동네 클럽 관리하고 있어."

그 말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직 헌터로 이루어진 조직 폭력배?

'국제 협회가 아니라…?'

나는 이를 으득 씹었다.

이건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였다.

분명 국제 협회에 도움을 요청할 줄 알았는데....

'대체 저놈들이 여기서 왜 튀어나오는 거야…?'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그때였다.

"자, 잠시만요…!"

최종혁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믿고...."

"이봐, 최종혁이."

그 순간 박장목 이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 사람들을 소개해준 분이 누군지는 알아?"

"...예?"

"미래민주당 소속 의원님이야."

"그게 무슨...?"

또다시 등장한 제3의 인물에 내 귀가 맹렬히 반응했다.

이번엔 국회의원이야?

"국제 협회랑 딜을 했다고 했잖아. 사실 나한테 다이렉트로 연락이 온 게 아니야. 그분한테 먼저 본부 내에 쓸 만한 사람 없냐고 연락이 왔고, 나를 연결해 준 거지."

"그럼 이번 일도 그분이...."

"아니, 그분은 이번 일에 대해선 몰라. 김민주를 떨어트리라는 지시도 국제 협회 쪽에서 한 거고."

박장목 이사가 목이 타는지 앞에 놓인 칵테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군.

'이제야 연결고리가 좀 보이네....'

애써 미소를 숨기며 계속해서 그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귀국하면서 연락을 드리니까 이놈들을 소개해주더군. 소속도 연고도 없는 놈들이라, 잡을 수도 없고 꼬리 밟힐 위험도 없어. 이런 일엔 딱이지. 무엇보다 일 처리도 확실하고."

"...."

최종혁의 표정에 당혹감이 묻어 나왔다.

이렇게까지 일을 벌일 줄은 예상도 못 했다는 반응.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또 다른 꼬리가 숨어 있을 줄이야.

"우리가 먼저 찾으면, 익명으로 경찰에 제보하면 돼. 어차피 실종자 수색이 우선일 거 아니야. 본부장만 찾으면 주동자 조사는 시들해질 거다. 우리는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그게 가능할 리가...."

"내가 이 자리까지 오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게 뭔 줄 아나?"

박장목 이사가 눈을 부릅뜨곤 최종혁을 향해 물었다.

"버티기만 하면 이긴다는 거야. 어차피 김민주만 찾으면 경찰이 할 일은 끝나. 물론 내부적으로는 계속 주동자를 찾으려 하겠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겠어?"

"...."

"어차피 이런 가십은 금방 시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그렇잖아. 그러니까 우린 그냥 숨 틀어막고 쥐 죽은 듯이 버티기만 하면 돼. 알아들어?"

"...알겠습니다."

"에휴, 시발 이게 뭔 지랄이냐. 그러게 정도껏 했어야지. 무작정 밀어붙이니까 이 꼴이 나는 거 아니야."

"...."

"알아들었으면 이제 가봐. 난 내일 아침 비행기로 다시 일본으로 갈 테니까."

"다시 가시는 겁니까?"

"심사 기간에 해외 출장 간 놈이, 일 터지자마자 귀국하면 의심받을 거 아니야."

최종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박장목 이사가 그렇게 가게를 나서려던 그때.

"그나저나 이사님."

최종혁이 다시금 그를 불러 세웠다.

"그, 미래민주당 소속의 의원이라는 분 말입니다. 대체 어떤 분이신지...."

최종혁이 넌지시 묻자, 박장목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아, 아니. 한배를 탄 입장으로서 저도 알아두면...."

"이봐, 최종혁이."

그 순간, 그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네 분수를 알아. 넌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주제넘게 다른 것까지 넘보려고 하지 말고. 응?"

"…알겠습니다."

"뭐, 이번 일 잘 넘어가면 국제 협회 스카우트 건은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걱정은 마."

박장목 이사는 그 말을 뒤로하고 다시 등을 돌렸고.

그 순간.

삐리리―.

때마침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뭔데?"

"어어."

"...뭐?"

"그거 확실한 거야?"

"...알았어. 일단 끊어봐."

짧은 통화 후, 그는 최종혁을 향해 돌아섰다.

"최종혁이."

"네, 네?"

"김민주 본부장 말이야."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최종혁을 관통하길 한 차례.

"실종된 적 없다는데?"

"...."

그 비수에 최종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쯧, 생각보다 빨리 들켰군....'

급하게 내부 사람한테 알아보게 시킨 건가.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이윽고 그가 한 번 더 입을 뗀 순간, 그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길 잠시.

탓―!

이내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건지, 곧장 가게 문을 박차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론 난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 했던가.

그가 도망쳐 나간 바깥은, 호랑이 굴이었으니까.

***

"시발!"

뭔가 이상하다 했다.

그 천하의 김민주가 실종이라니.

애초부터 되지도 않은 말이지 않은가.

그럼 왜 최종혁은 그런 거짓말을 한 거지?

설마 다른 놈한테 들킨 건가?

들켰다면 어디까지?

자신도 연관되어 있다는 걸 불었나? 혹시 국제 협회 건까지?

'그것도 아니면....'

방금 대화 자체가 모두 자신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시발, 진짜!!"

박장목 이사의 머릿속에는 온갖 의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앞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퍽―!

갑자기 튀어나온 누군가와 부딪히며,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런 씨…! 눈 똑바로 안 뜨고 다녀?!"

"울고 있더라고."

누군가가 깊게 눌러 쓴 후드를 젖히며 입을 열었다.

"그 천하의 작전 본부장이 화장실에서 울고 있더라니까?"

"너, 너…!"

그녀는 다름 아닌, 박장목 이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한유빈 기획 본부장이었다.

"네가 여긴 어떻게…!"

"내가 웬만한 개새끼들은 다 만나봤는데… 넌 진짜 용서가 안 된다."

냉담한 목소리에 차가운 눈빛.

온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그 모습에 박장목 이사는 자기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를 향해 터벅 다가오자, 그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그, 그래서! 네가 뭘 어쩌게! 여기서 나 건드리면 네 딴 게 무사할 것 같아?! 너도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상관없어."

"...뭐?"

"상관없다고. 쫓겨나든 말든."

한유빈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이윽고 그를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고, 곧바로 그의 안면을 향해 내리꽂으려는 순간.

"어허."

저 멀리서 또다시 김준우가 그녀를 말렸다.

"약속했잖습니까. 안 죽이기로."

"…죽일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치면 죽습니다. 그 사람 일반인이에요."

한유빈은 어쩔 수 없이 주먹을 거뒀다.

그와 동시에 박장목 이사가 김준우를 향해 허겁지겁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기, 김 대표! 마침 잘 왔네! 글쎄 저년이 감히 날 건드리려고…!"

뚜둑―.

그 순간, 박장목 이사의 오른팔이 바깥쪽으로 완전히 돌아갔다.

"끄아아아아악!!!"

귀를 찢을 듯한 비명 소리.

그럼에도 김준우는 박장목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아시겠습니까?"

그는 한유빈을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든지 그렇게 폭력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보세요. 이렇게 팔다리만 부러뜨려도 얼마나 고분고분해집니까."

"...."

한유빈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와중에도 박장목 이사는 여전히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아프십니까?"

김준우는 그제야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박장목과 눈을 맞췄다.

"뭐, 너무 억울해하진 마시죠."

김준우는 그의 부러진 오른팔을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제 오른팔을 먼저 건드린 건 이사님이니까."

"으으...."

"아무튼, 은퇴 축하드립니다. 박장목 이사님."

"기, 김 대표… 내가 다 설명을...."

"그리고 이건...."

이내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

뚜둑―.

"끄아아아아악!!"

이번엔 그의 오른 다리가 돌아갔다.

"은퇴 선물입니다."

고통 섞인 비명과 김준우의 담담한 목소리가 함께 울려 퍼졌다.

213

213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새벽에 걸려온 김준우의 전화 한 통에, 이른 아침 급하게 소집된 징계 위원회.

이두식 이사를 필두로 본사 임원들이 대거 참석한 그 자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박장목 이사였다.

원칙대로라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일이었지만, 김준우는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이두식 이사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곧바로 소집령을 내렸다.

그렇게 박장목 이사가 귀국한 지 고작 5시간 만에 징계 위원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급하게 밀어붙인 이유는 심사 평가가 끝나기 전에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보단,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기둥이자 최고 에이스인 그녀를 건드렸다는 사실에 모두가 분노하고 있었던 게 크게 작용했다.

"다 참석한 것 같으니…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두식 이사의 발언에 맞춰, 이윽고 그를 둘러싼 임원들이 한 명씩 질문을 시작했다.

"그럼 먼저 소속을 밝혀주시겠습니까?"

"카, 카르마 코퍼레이션 이사회 소속, 박장목 사내 이사입니다."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한 박장목 이사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두식 이사는 그의 상태와 바짝 쫄아 있는 태도를 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현재는 랭크 심사 평가 위원회에도 소속되어 있으시고요?"

"예… 맞습니다."

"평가 위원회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고 계십니까?"

"헌터의 필기 및 실기 시험 평가와 공정 감사를 맡고 있습니다."

"하!"

모순적이기 그지없는 그의 소개에 이두식 이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두식 이사님...."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계속하시지요."

다른 임원이 조심스레 주의를 부탁하고 나서야 다시금 질문이 재개되었다.

"큼큼, 박장목 이사. 작전팀 헌터를 시켜 김민주 본부장에 대한 악의적인 스캔들을 퍼트린 사실이 있습니까?"

"...."

"박장목 이사, 대답하세요."

"…예, 예. 그렇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김민주 본부장을 이번 심사에서 떨어트려 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누구한테서요?"

"국제 협회에서...."

충격적인 이야기에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두식 이사가 그 무거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국제 협회의 청탁을 받고,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려 김민주 본부장을 떨어트리려고 했다. 이겁니까?"

"예, 예...."

"국제 협회가 왜 그런 청탁을 했습니까?"

"그건 잘...."

"그럼 그 대가로 무엇을 약속받았습니까?"

"국제 협회 본사 스카우트 제의를...."

이두식 이사가 고개를 저었다.

고작 그런 조건으로 사내 최고 에이스를 무너뜨리려 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엇보다 아직도 국제 협회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놈이 있었다니. 그것도 이사라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건가 싶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그때, 이두식 이사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장목 이사가 퍼트린 김민주 본부장에 대한 소문은 사실입니까?"

"...."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끝에.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결국 모든 걸 이실직고했다.

징계 위원회에 참석한 인사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뭐, 순순히 털어놓은 이상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모든 심사 과정을 공정히 처리해야 하는 직책임에도 청탁과 부정, 그리고 심사 조작을 위해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린 것은 해당 직무에 대한 책임과 자격이 부족한 행동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경위 조사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징계 위원회의 결과는 추후 통보하겠습니다. 이외 김민주 본부장에 대한 명예훼손 건은 따로 검찰 조사가 진행될 예정이니 참고해주시고요."

"...."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박장목 이사는 목발을 잡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결과도 처분도, 모두 자명했으니 더는 앉아 있어 봤자 시간 낭비였다.

그렇게 박장목 이사가 회의실을 나서려던 그때.

"박장목 이사."

이두식 이사가 다시금 그를 불러 세웠다.

"팔다리는 왜 그런 겁니까?"

"...."

못할 질문이라도 한 건지 박장목 이사의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표정만 본다면 홀로 토벌이라도 나섰다가 무서운 몬스터라도 마주한 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정말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

이두식 이사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미 대충 짐작이 갔다.

하지만.

"…넘어졌습니다."

박장목 이사는 끝내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

징계 위원회가 끝나자마자 연락을 받고 올라온 본부 옥상.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요."

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뭐, 오래 끌 것도 없었어. 혐의도 명백했고, 다 순순히 시인하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 질문에 이두식 이사가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사안이 크잖아. 부정 청탁에, 부정 심사까지. 안 봐도 해직이겠지."

"그렇군요."

"뭐, 법적인 문제는 법무팀에서 추가로 검찰에 넘길 예정이니까 죗값은 달게 치를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두식 이사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새끼… 하여간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진즉 쳐냈어야 했는데, 조금 봐주니까 결국 이 사달을 내네."

"뭐, 결과론적인 이야기잖습니까."

결국, 일을 저지르기 전까진 어떤 놈인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서, 대체 그놈은 어떻게 잡은 거야? 일본으로 튀었다면서."

"밑에 있는 놈을 좀 이용했습니다. 워낙 철저하게 계획하고 움직인 놈들이라 쉽진 않았지만… 뭐, 그래도 어떻게 꼬리를 밟긴 했습니다."

"꼬리를 부러트린 게 아니라?"

"...."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옅은 한숨을 내뱉는다.

"에휴, 죽이지 않은 게 용하다."

"내버려 뒀으면 아마 진짜 죽었을 겁니다."

"...미친놈."

이두식 이사가 학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저쪽에서 그걸로 트집 잡으면 어떡하려고? 정당방위도 쌍방으로 잡혀가는 마당에, 일방적인 폭행은 조금 위험했던 거 아니야?"

"아뇨. 박장목은 절대 저를 걸고넘어지지 못할 겁니다."

"뭐? 왜?"

"뒤를 봐주고 있는 놈이 있거든요."

이두식 이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했다.

"이번 일도 처음부터 그 뒤에 있는 놈이 소개해준 거랍니다. 애초에 국제 협회 연결책은 박장목이 아니라 그쪽이라는 거죠. 뭐, 끝까지 그놈에 대해선 함구하는 거로 봐선 꽤나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폭행 건으로 경찰 조사가 들어가면 당연히 그놈이 엮일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을 테니, 고소하고 싶어도 못 하겠죠."

"허… 그런 것까지 생각해두고 팼냐?"

"아뇨. 패고 나서 생각했습니다."

"...."

그땐 사실 나도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이두식 이사는 탁 트인 도심을 내려다보며 넌지시 말을 이었다.

"에휴, 국제 협회가 진짜로 개입하고 있었다는 게 참... 대체 언제쯤 조용해질는지."

"예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애초에 그걸 잡으려고 시작한 심사이기도 하고요."

"그것도 그렇긴 한데."

이두식 이사가 머리를 헝클이며 대답했다.

예상한 일이었다고 한들, 실제로 맞닥트리니 꽤나 착잡한 모양이었다.

"김민주는? 좀 괜찮아졌냐?"

"뭐, 애초에 티를 내는 녀석이 아니라서."

"쯧… 그 녀석이 제일 마음고생 했지. 그래도 잡혔으니까 좀 나아지지 않겠냐."

"그러길 바라야죠."

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결과적으로 사건은 마무리가 됐다.

박장목 이사는 모든 책임을 지게 됐고, 김민주의 명예도 곧 회복될 것이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뭐, 이번 일의 전말이 모든 직원에게 알려지진 않을 것이다.

국제 협회와 결탁해서 심사를 조작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봐야 좋을 건 없으니까.

그래도 최소한 김민주에 대한 소문이 누군가에 의해 악의적으로 생성되었다는 것만큼은 알릴 필요가 있다.

뭐, 그 부분은 이미 손을 써뒀으니 걱정할 건 없고.

다만 문제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게 남아 있다.

'미래민주당 의원이라....'

박장목 이사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그놈.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의 시작은 그놈이다.

무엇보다 국제 협회와 연결이 되어 있다면 절대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일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더군다나 박장목 이사처럼 또다시 자신의 심복을 회사에 심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잡아도 그놈을 잡아야 하는데... 박장목 이사는 끝내 그의 이름을 불지 않았다.

그 사람을 적으로 돌릴 바에야 본인이 모두 뒤집어쓰는 게 낫다는 거겠지.

'대체 어떤 놈이길래....'

혀를 차며 중얼거리던 그때.

"그나저나 최종혁, 그 새끼는 정말 정상 참작해줄 생각이야?"

이두식 이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공식적으로 징계를 먹일 생각은 없습니다."

"시발, 그런 새끼가 멀쩡히 고개 들고 다닐 거 생각하니까 영 껄끄럽네."

"글쎄요. 공식적인 징계를 안 먹인다는 거지, 봐준다는 뜻은 아니라서."

"...뭐?"

나는 대답 대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마 앞으로 고개 들고 다니기는 어려울 겁니다."

***

"후우...."

작전 5팀 사무실.

최종혁은 출근하자마자, 본인의 자리에서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징계 위원회가 끝났을 것이다. 보나 마나 박장목 이사의 모가지는 잘려 나가겠지.

'시발… 어떻게 전화 한 통으로 반나절도 안 돼서 징계 위원회를 열어 버리냐.'

최종혁은 아직도 생생한 어젯밤의 일에 작은 소름을 느꼈다.

설마하니 그 인턴이 평가 담당자였을 줄이야.

솔직히 이제 인생 쫑났구나 싶었지만....

박장목 이사를 판 대가로 김준우는 정말 그 어떤 처분도 내리지 않았다.

'그래도 약속은 지키네....'

최종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며칠째 비어 있는 팀장 자리를 슬쩍 흘겼다.

이태범 팀장은 결국 휴직을 신청했다.

뭐, 사실 여부를 떠나서 애도 있는 양반이 그런 소문에 휘말렸으니 더 이상 같은 곳에서 일하긴 힘들겠지.

게다가 김민주는 여전히 반응이 없고, 김준우 대표는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 약속했으니....

'이걸로 끝이군.'

최종혁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앞으로는 그저 모른 척, 버티기만 하면 된다.

박장목 이사가 말했던 것처럼, 어차피 이번 일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을 게 뻔하니.

그저 가만히 입 닫고 버티면, 자신이 소문을 퍼트렸다는 사실도 사라질 것이다.

그럼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수 있다.

뭐, 스카우트가 물 건너간 건 아쉽게 됐지만....

이런 상황에 욕심부릴 이유는 없다.

그저 잘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겠지.

최종혁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작전 스케줄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야, 김민주 본부장님 그 소문 말이야. 그거 다 거짓말이라던데?"

"엥? 누가 그래."

"지원팀에 아는 사람이 그러더라고."

"야, 지원팀 사람이 작전 본부장 얘기를 어떻게 알아. 넌 그걸 믿냐?"

"아니 진짜로. 주변에 본부장이랑 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 직접 들은 거래."

사무실 뒤편에서 다른 팀원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종혁은 벽에 걸린 일정표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귀를 쫑긋 세웠다.

"아무튼, 그 사람 말로는... 최종혁이 김민주 본부장한테 들이댔다가 차여서 복수하려고 퍼트린 거래."

"뭐? 진짜로?!"

"쉿!"

그 말에 최종혁의 동공이 확 벌어졌다.

"에이, 설마...."

"아냐, 저 새끼라면 그럴만해. 저 새끼 저거, 인턴한테도 엄청 들이댔었잖아."

"그니까. 서른 중반인데 주말마다 여자 꼬시러 클럽 간다면서? 헌터 명함 들고."

"와… 설마 그렇다고 작전 본부장한테까지 들이댈 줄은 몰랐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무슨 그런 소문을 내냐. 진짜 개찌질하네."

"본인 때문에 몇 명이 피해를 본 거야."

"쯧, 본부장님 불쌍해서 어떡하냐...."

"이 팀장님은 휴직서까지 냈잖아. 저런 건 고소 안 돼?"

벽을 바라보고 선 채, 그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가만히 듣길 잠시.

최종혁의 손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214

214

"그 인간, 퇴사했어요."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대표이사실.

랭크 심사 및 평가가 모두 끝난 후, 오랜만에 복귀하자 이아영 본부장이 뜬금없는 소식을 전했다.

"… 누가 말입니까?"

"누군 누구겠어요. 최종혁이지."

"아."

그 이름을 듣고 나서야 잠시 잊고 있었던 인물이 다시금 떠올랐다.

"뭐…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겠죠. 본부 전체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데."

"본부장한테 들이댔다가 차였다는 거 말입니까? 그래서 보복성으로 루머를 퍼트렸다죠, 아마."

"애초에 평소 행실도 별로 안 좋았나 봐요. 특히 여자 문제로는 팀 내에서도 유명했다고 하고. 괜히 입 잘못 놀렸다가 똑같이 되돌려 받은 거죠."

"뭐, 자업자득입니다."

"...뭘 그렇게 남 얘기하듯이 말해요. 당신이 퍼트린 거면서."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그 소문은 내가 퍼트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지시하고 이아영 본부장이 퍼트렸다.

바로 지원팀의 송혜연 대리를 통해.

뭐, 김민주랑 친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꽤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음에도 철석같이 믿은 모양이다.

그렇게 소문은 송혜연 대리에게서 지원팀으로, 지원팀에서 작전팀 전체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아마 본인 귀에 들어가기까지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대놓고 말하는 이는 없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태도도 달라졌을 거고.

버티는 자가 이기는 거라지만,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놈이어도 그런 상황에서 버티는 건 힘들겠지.

어찌 됐건 나는 그 어떤 공식적인 처분도 내리지 않았으니 약속은 지킨 셈이다.

이번 일로 걸고넘어질 수도 없을 것이다.

그가 그랬듯, 그 소문의 주동자는 평생 찾을 수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그 박장목 이사 뒤에 있는 사람에 대해선 좀 알아봤어요?"

그때, 이아영 본부장이 넌지시 물었다.

"시도는 해봤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더군요. 미래민주당 소속 의원만 200명이 넘잖습니까."

"그래도 우리 회사에 개입할 수 있을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이면 몇 명 안 될 텐데요."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얼굴에 쓰여 있는 게 아니니까 문제죠."

국제 협회와 연결 수단이 있으면서 회사 내부 사정에도 개입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분명 하고 다니는 일도 심상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미래민주당 소속의 거의 모든 의원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지역구, 공약, 사업, 정책, 보유 주택 및 부동산, 심지어는 선거 때 몇 표를 받았는지까지 샅샅이 뒤져봤지만, 이렇다 할만한 사람은 찾지 못했다.

어쩌면 박장목 이사가 검거됐으니, 혹시라도 그를 빼내 준다거나 변호사를 붙여주는 등 어떤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마저도 불발이었다.

한 번 엎어진 말은 두 번 다시 쓰지 않겠다는 건지....

어찌 됐건 현재로선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한 상태다.

더 깊게 파본다고 해서 뭐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이쯤 되면 그냥 포기하는 게 맞을지도....'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다른 소식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잠시 내려놓는 수밖에.

"아무튼, 심사도 끝났겠다. 당분간은 좀 쉬고 싶군요."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그런데 어째 이아영 본부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소리예요?"

"...예?"

"이제 겨우 서울 본부 끝난 거잖아요. 다음 주부터는 수원, 천안, 부산 지부 심사 들어갈 거예요."

"...."

"그다음에는 지방 지부 들어가고, 국내 심사 종료되면 각국 협회에 심사 데이터랑 평가 기준 항목 보내서 해외 심사 진행해야 하고요."

"그만… 알아들었습니다."

시발.

왜 일을 해도 해도 줄질 않는 거지?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그렇게 진심으로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이아영 본부장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업무 내용이고. 이제는 당신이 직접 심사를 담당할 필요는 없어요. 이번 심사를 토대로 각 지부가 알아서 진행할 테니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그래서, 휴가라도 다녀오시려고요?"

이아영 본부장이 서류를 집어넣으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속셈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간다고 하면 보내주실 겁니까?"

"아뇨."

"...."

역시.

그럴 거면 애초에 물어보질 말던가.

하여간 나 놀리는 것엔 진심이라니까.

"뭐… 저도 같이 가는 거면 생각해볼게요."

"어딜 갈 줄 알고?"

"어디든요."

그녀가 담담하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드디어 미친 건가.

아무리 루머라지만 스캔들 터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둘이 휴가야.

쌍으로 던전 인생 말아먹을 일 있나.

그렇게 생각하며 학을 떼기도 잠시.

'...잠깐.'

문득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

"아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그렇게 정색하면 오히려 당황스럽...."

"어디든 간다고 하셨죠?"

"...네, 네?"

"갑시다."

나는 이아영 본부장을 바라보며 한 번 더 말을 뱉었다.

"휴가, 가자고요."

"...진심이에요?"

"진심입니다."

"...."

단호하게 대답하자 그녀가 갑자기 획 등을 돌렸다.

"…뭡니까. 먼저 말 꺼내놓고."

"아, 아니 좀… 당황스러워서."

하지만 그것도 잠시.

"좋아요. 가요."

그녀는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날짜랑 장소는 정해지는 대로 연락드리죠."

"알았어요."

그녀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

"후우...."

김민주는 본부장실에 앉아 깊은 한숨을 털어냈다.

요 며칠, 일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토벌 스케줄이 많지 않아 그나마 망정이었지, 이 상태로 오렌지 등급 토벌이라도 나갔다간 분명 팔다리 어느 한쪽은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누구라고 다를까.

육체적으로 힘든 건 잘 참아도, 정신적 고통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무엇보다 이런 구설에 휘말리는 건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고, 그만큼 면역도 없었다.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꽤나 마음고생이 심했다.

'...밥이라도 사드려야겠지.'

김민주는 그를 떠올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론 밥 한 번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이번에 정말 옷을 벗을 수도 있었으니까.

섣불리 감싸다간 불똥이 튈 수도 있었는데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마음 같아선 더 크게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그의 성격상 받지 않게 뻔했다.

무엇보다 이제야 겨우 소문이 사그라든 참인데 자칫하다간 또다시 괜한 이야기가 돌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시 나한텐 과분한 자리야....'

이미 다 해결된 일이었지만, 김민주는 여전히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찔해졌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도 이런 일이 생기니 이젠 정말 자신이 없어졌다.

솔직히 본인이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자신의 실력으로 온 것도 아니고,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이지 않은가.

단지 김준우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수락한 자리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자리에 앉기에 자신은 아직 한참 모자라다.

'....'

김민주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번 기회에 본부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아직 이 자리는 본인에겐 시기상조다.

책임감이라는 명목으로 계속 붙들고 있기에는 다른 헌터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대표 라인 잘 타서 연차도 무시하고 낙하산으로 앉은 본부장.

이번에 최종혁이 그 생각을 겉으로 드러냈을 뿐이지, 솔직히 다른 헌터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작전팀 헌터로 몇 년 더 있다가, 모두가 인정할 만한 실력을 쌓은 다음에 다시 도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하던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돼요?"

다름 아닌, 한유빈이었다.

"...네, 네."

김민주는 황급히 표정을 관리하며 그녀를 맞이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한유빈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요?"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데? 얼굴이 꼭...."

한유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김민주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당장 오늘 사표 쓸 사람 같은데."

"...."

김민주는 순간 흠칫했지만, 이제 와서 숨길 것도 없었다.

"저… 그만둘까 하고요."

"헌터를?"

"아뇨. 본부장 자리요."

"그 자리가 원할 때 올라가고, 맘대로 내려갈 수 있는 자리예요?"

"그, 그건 아니지만...."

한유빈의 날카로운 질문에 김민주는 말끝을 흐렸다.

이내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 저한테는 많이 과분한 것 같아서요. 다른 헌터들도 안 좋게 보고 있는 것 같고...."

"허."

한유빈은 기가 차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리곤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며 조금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성격이 안 좋아서 입에 발린 소리 따윈 못 해요. 위로도 못 하고요."

"...알고 있어요."

"...."

한유빈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다.

순순히 인정하니까 어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큼큼… 아무튼 그래서, 제가 팩트만 알려줄게요."

한유빈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김민주에게 내밀었다.

"이건…?"

"사실 이거 주려고 온 거예요. 심사 결과 나왔거든요."

김민주는 그 말에 곧바로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긴장이 되긴 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봉투를 열어 서류를 확인했다.

세부 평가 항목에 대한 점수, 장황한 심사평.

그걸 모두 제치고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심사 결과, 귀하는 현 시간부로 S랭크로 승급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다름 아닌, 그 문장이었다.

"어, 어…?"

김민주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류와 한유빈을 번갈아 바라봤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S랭크가 됐다는 건, 그저 한 단계 승급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102번째.

그리고 국내 최초.

다시 말해, 이 시간부로 김민주가 국내 랭킹 1위가 되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쪽이 아무리 본인을 후려쳐도 팩트는 그거예요. 한국 최초 S랭크를 받은 사람이 작전 본부장에 안 어울리면, 대체 누가 어울린다는 거예요?"

"...."

"그래서, 어때요?"

한유빈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 최고가 된 기분은?"

"제가 잘한 게 아니라, 다 선생님이 도와주셔서...."

"아 진짜!"

한유빈은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소평가는 그쯤 하죠? 그 인간 대단하다는 건 아는데! 그거랑 그쪽이 S랭크 받은 건 별개거든요? 순수하게 그쪽 실력으로 받은 거니까 좀 기뻐해 봐요!"

"...."

그 말에 김민주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꽤나 복합적인 감정이 북받치는 듯했다.

한유빈은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승급도 했겠다, 며칠 쉬라고 하고 싶은데… 그건 안 되겠네요."

"네?"

"국내 최초 S랭크잖아요."

한유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당분간 기자들한테 애 좀 먹을걸요?"

"아...."

김민주는 그제야 작게 미소를 지었다.

훈훈한 분위기가 사무실에 흐르던 그때였다.

"크, 큰일! 큰일 났어요!"

이아영 본부장이 다짜고짜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뭐, 뭐예요?"

"무슨 일 났어요?"

그와 동시에 한유빈과 김민주가 곧바로 심각하게 반응했다.

꽤나 상기된 이아영 본부장의 얼굴.

게다가 평소답지 않게 꽤나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걸 보니, 심상치 않은 일이 터진 듯했다.

"주, 준우 씨가...."

이아영 본부장은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휴가, 같이 가재요."

"...?"

"...?"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사무실에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 잠깐…!"

"그 인간이 진짜 그런 말을 했다고요?!"

"저, 정말로요?! 선생님이 정말 아영 씨한테 같이 가자고 했어요?!"

"대체 왜?! 아, 아니… 그 인간, 그쪽한테 관심 있었던 거예요?!"

다시 천천히 생각해보니 가히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천하의 김준우가 여자한테 같이 휴가를 가자고 했다고?

도저히 상상조차 안 되는 그 상황에 한유빈과 김민주는 기겁하고 달려들었다.

"아, 아니 그게… 농담으로 해본 소리였는데 그쪽에서 덥석 물더라고요."

"허...."

"선생님… 아영 씨가 취향이었구나...."

모두가 충격에 빠진 듯, 한동안 말을 잇질 못했다.

"그래서...."

그러던 중 한유빈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쪽은 어때요?"

"뭐, 뭐가요."

"뭐긴 뭐예요. 갈 마음 있냐고요."

"...."

이아영은 퍽 어색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길 잠시.

"대, 대표님 지시인데 거절할 수가...."

"참 나, 핑계도 가지가지네."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뭘 그리 둘러대는가.

한유빈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일단...."

그리곤 이아영 본부장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가서 입을 옷부터 사러 가죠."

215

215

"...."

"...."

휴가 첫날, 이른 아침.

나는 약속 장소에서 이아영 본부장과 마주치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사도 생략한 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애써 내 시선을 피하며 꽤나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옷이 왜 저따구야…?'

맨날 정장 아니면 단정한 셔츠만 입던 그녀가 원피스를 입고 나왔으니.

심지어 회귀 전에도 본 적 없는 그 모습에, 나는 어질어질한 기분까지 들었다.

심지어 풀 메이크업?

이건 대체 무슨 꿍꿍이지?

"저, 저는 그냥 가도 된다고 했는데. 유빈 씨가 억지로...."

"...."

본인도 자신의 모습이 어색한지 말끝을 흐린다.

나는 그녀가 들고 온 짐으로 슬쩍 시선을 흘겼다.

피난이라도 가는 건지, 짐도 아주 한가득이었다.

대체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건가.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요.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으니까 너무 창피한데요."

"어...."

나는 잠시 망설이던 끝에 입을 열었다.

"그 옷 입고 어떻게 조사를 하려는 겁니까?"

"...네?"

"...?"

잠시 벙찐 표정을 짓던 그녀가 이내 넌지시 물었다.

"조, 조사라뇨…? 놀러 가는 게 아니라…?"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박장목 이사 뒤를 봐주고 있는 의원 조사하러 가는 건데."

"...."

그 순간이었다.

이아영 본부장의 얼굴이 여태껏 본 적 없는 수준으로 싸늘하게 식었다.

***

본사, 기획본부장실.

"두 분 지금쯤이면 만났겠죠?"

한적해진 시간에 한유빈을 찾아온 김민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한유빈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왜요. 질투 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김민주는 이 복잡한 심경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렸다.

그도 그럴 게, 김준우는 자신에게 무척이나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김준우를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감정을 추슬러왔다.

김준우는 그저 존경의 대상일 뿐, 그 이상의 관계는 주제넘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이아영 본부장과 단둘이 휴가를 간다고 해도... 아니, 설령 둘이 연인이 된다고 해도 본인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오묘한 기분이 드는 건, 그저 어린애 같은 심술 때문이겠지. 존경의 대상을 누군가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물론 그것도 이 복잡한 마음을 확실하게 설명해주는 건 아니다.

김민주는 턱을 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좀… 복잡하네요."

"풉…!"

"...?"

"아, 미안해요."

한유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연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김민주는 그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그냥… 반응이 귀여워서."

"네…?"

"설마 그 인간이 같이 휴가 가자고 한 거 진짜로 믿는 건 아니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진짜로 같이 가자고 한 거 맞지 않아요?"

"풉, 푸하하!"

한유빈은 결국 폭소를 터트렸다.

그리곤 새어 나온 눈물을 닦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 인간에 대해선 그쪽이 제일 잘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

"...무슨 소리예요?"

"일밖에 모르는 인간이잖아요. 아마 이번에도 그냥 일손이 필요한 거뿐일걸요?"

"서, 설마요...."

"설마는 무슨. 그 인간이 정말 단둘이 놀러 가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요?"

"...."

김민주는 대답을 아꼈다.

실제로 김준우가 그럴 거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었던 거고.

"뭐, 보나 마나 누구 뒷조사나 아니면 이번 일 마무리하려는 거겠죠."

한유빈은 안 봐도 뻔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 그럼 유빈 씨는 왜 굳이 아영 씨한테 쇼핑하러 가자고 한 거예요…?"

"그거야...."

한유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재밌을 것 같아서?"

"...."

"지금쯤 둘 다 당황해서 서로 벙쪄 있을걸? 뭐, 그쪽 반응도 재밌었고."

한유빈은 생각만 해도 재밌는지 자꾸만 쿡쿡 웃음을 뱉었다.

김민주는 그런 그녀를 보며 진심으로 고개를 저었다.

***

"…화 푸시죠?"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는 차 안.

아까부터 꽤나 험악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이아영을 향해 말했다.

"뭐래. 화 안 났거든요?"

"...표정은 안 그런 것 같은데."

"화 안 났다니까?!"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소리를 질러.

됐다, 신경 끄자.

본인이 아니라는데 더 말 걸어봐야 나만 답답하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아 씨! 생각할수록 열 받네?!"

"…화난 거 맞구만."

"아니, 단둘이 휴가 가자고 하면 당연히 오해할 만하지 않아요?! 기껏 꾸미고 왔더니, 뭐? 조사?! 이게 말이야 방귀야!"

"그러게 제가 편하게 오라고 했잖습니까."

"그게 그런 말인 줄 누가 알아요! 나만 완전 바보 됐잖아! 쪽팔려 죽겠네, 진짜!"

"본인이 오해한 걸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그리고 막말로, 저희가 뭐 단둘이 여행 갈 사이도 아니잖습니까."

"그 말이 더 열 받네!!"

이아영 본부장은 짜증을 주체할 수가 없는 건지, 몸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알았습니다. 제가 사과할 테니까 이제 그만...."

"아, 저 새낀 왜 끼어들고 지랄이야! 야, 꺼져!"

"...."

입을 꾹 다문 채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됐다, 건들지 말자.

이러다 한 대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말을 아끼기도 잠시.

"그래서, 대체 무슨 조사를 하려고 휴가까지 내서 가는 거예요?"

그녀가 분이 삭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 대놓고 하기엔 조금 찜찜한 일이라...."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번에 박장목 이사 캘 때, 그가 데려온 놈들이 있었습니다. 뒤를 봐주고 있는 의원님이 소개해줬다고 하는데, 뒷세계에서 활동하는 전직 헌터들이더군요."

"전직 헌터?"

"예."

내 대답을 들은 이아영 본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그런 놈들이 남아 있어요? 예전에 다 처리하지 않았나?"

"저도 그런 줄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몰랐다고만 할 문제가 아닌데요? 자격 박탈된 헌터는 5년 동안 정부에서 감시를 받잖아요.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폭력 조직에서 활동하는 걸 안 걸릴 수 있나요?"

"말했잖습니까. 그 의원님이 소개해준 사람들이라고."

"...설마."

"예."

나는 창문에 팔을 괴며 대답했다.

"우리 잘나신 의원님께서 개인적으로 몰래 투견을 기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헌터의 자격이 박탈될 만한 사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횡령, 뇌물, 폭행, 보복, 협박....

그리고 살인까지.

통상의 힘을 초월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건 일어날 수 있는 일 중, 가장 최악의 경우다.

특히나 자격이 박탈되어 협회의 통제권을 벗어난 헌터들은 더더욱 범죄에 쉽게 노출된다.

그래서 전직 헌터… 특히, 강력 범죄 사유로 자격이 박탈된 헌터들은 국가에서도 가장 위험인물로 분류된다.

이능의 힘을 지닌 그들이 던전이 아닌 곳에서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니까.

그런 놈들이 폭력 조직을 만들어서 활동한다는 건, 단순히 불법 수준이 아니라 국가안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항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음만 먹는다면 군대도 박살 낼 수 있는 이능력자들이 비공식적으로 모여 있는 것 아닌가.

심지어 멀쩡한 놈들도 아니고, 이미 한 번씩 일을 저지른 놈들이니, 그 위험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정부에서는 두 번째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불법 헌터 조직을 박멸하는 데 나섰다.

물론 회귀 전 나 또한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게 벌써 5년 전 일이고, 이후로도 자격 박탈 헌터는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기에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그런 놈들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그것도 국회의원 밑에서?

이건 누가 봐도 뻔하지.

조직을 박장목 이사의 뒤를 봐줬다는 의원님께서 직접 키우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든 혹은 다른 사업을 위해서든.

"그래서, 그 조직을 캐면 위에 누가 있는지도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이아영 본부장이 이내 이해가 간다는 듯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조직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최근, 포항에 2만 평가량의 리조트 건설이 확정되었답니다."

꽤나 뜬금없는 대답이었는지, 이아영 본부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포항이요?"

"예. 골프장이랑 스키장, 워터파크까지 들어선다는 모양이더군요. 시공은 GT건설이 입찰을 따냈고요. 그런데 다른 업체랑 마찰이 좀 있었던 모양입니다."

"입찰 경쟁이라도 붙었대요?"

"그런 게 아니라... 해당 부지에 어느 중소기업의 공장이 들어서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답니다. 계약도 다 됐고, 착공 날짜만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업이 엎어진 거죠."

"네? 그게 말이 돼요? 이미 계약까지 된 땅을 어떻게 억지로…!"

"자세히는 모릅니다.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은 거라. 다만, 해당 지역구 의원이 미래민주당 소속이더군요."

"...!"

그 순간,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엇보다 예전부터 GT그룹이랑 미래민주당 관계에 대해선 말이 많지 않았습니까. 아마 의원이랑 GT건설이 합심해서 작당을 벌인 거겠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반발은 없었어요?"

"없었겠습니까. 그 중소기업 대표가 직접 나서서 시위했답니다. 직원들도 모두 발 벗고 나섰고요. 그러다 보니 지역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죠. 덕분에 여론도 조금씩 중소기업 쪽으로 쏠렸고요."

"그런데도 리조트 사업을 진행한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밀어붙였다간 일이 더 커질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럴 일은 없었습니다."

"네?"

난 대답 대신 신문 한 장을 내밀었다.

헤드라인도 아닌, 중간 페이지 구석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 기업 대표, 죽었거든요."

"...!"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정확히 말하면 실종이지만. 의미가 달라지진 않겠죠."

"그, 그게 대체 무슨...."

"아무튼, 대표가 사라지고 나서 거짓말처럼 모든 언론에서 이번 사건을 싹 내려버렸습니다. 인터넷도 조용하고요. 그나마 있는 게 신문 구석의 기사 한 줄이죠."

이아영 본부장은 꽤나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설마 그 지역구 의원이...."

"그건 아닐 겁니다. 그 사람은 이번이 초선이거든요. 아직 영향력도 없는 새내기 국회의원이 그렇게까지 언론을 통제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하겠죠."

"그럼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거예요?"

"뭐, 지역구 의원은 우리가 찾는 그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가 찾고 있는 그 사람이 벌인 짓인 건 확실합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이번 리조트 건설 건이 본인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손을 보태준 거겠죠. 그런데 중소기업 대표가 생각보다 끈질기게 나오니...."

"헌터 조직을 써서 처리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입니다. 확실한 건 직접 가봐야 알겠죠."

그래서 우리가 지금 포항으로 가는 것이다.

정확히는 그 실종된 대표의 회사로 향하는 중이고.

워낙에 묻힌 사건이기에 기사로 확인하는 건 한계가 있다.

직접 가서 알아보는 것만큼 확실한 게 없겠지.

"하아...."

그때, 이아영 본부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이면 미리 말을 좀 해주시지. 아무리 봐도 원피스 입고 갈 만한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

"뭐 어떻습니까. 공식적인 자리도 아닌데."

"...말은 참 쉽네요."

이아영 본부장은 볼멘소리를 내면서도 포항을 향해 계속해서 차를 몰았다.

216

216

포항 남부 경찰서 강력계.

강력 2반, 사무실.

"야, 이거 오늘 내로 확인해서 내일부터 수사 착수해."

고배수 반장이 민유진 형사의 자리에 서류철을 턱, 내려놓으며 말했다.

민유진은 서류를 집어 들며, 앉은 채로 고 반장을 바라봤다.

"이건…?"

"상가 건물 강도 살인 건이야. CCTV도, 목격자도 없다더라. 일단 유족들 좀 만나보고 주변 인물부터 탐문해봐."

"...."

평소와 다름없는 업무 지시였지만, 어째선지 민유진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뭐, 그도 그럴 게.

"아직 주세훈 대표 실종 건 수사 중인데요."

"아… 그 세훈 화학 대표?"

본인이 맡은 사건이 아직 진행 중이었다.

물론 고배수 반장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거 수사 종료하래."

"…네?!"

고 반장이 떨떠름하게 말하자, 민유진 형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실종된 지 한 달이 다 돼 가는데 뭐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색도 소득이 없잖아."

"아직 한 달밖에 안 됐잖습니까."

"그러니까! 그 한 달 동안 얻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계속하냐는 거지, 인마."

"애초에 실종 경위부터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건 보복성 납치에 초점을 맞추고 주변 인물부터 다시 조사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우린 인력이 남아도냐?"

"저 혼자라도..."

"하, 이 새끼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네."

고 반장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대놓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야, 너 혼자 형사야? 너 혼자 조사하고 너 혼자 범인 잡냐? 이게 어디서...."

"...."

"...하아."

고 반장은 그녀의 굳센 눈빛을 보자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건 본인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저 녀석은 오죽하겠는가.

고 반장은 이내 화를 낼 마음도 없어졌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주 대표 건은 수사 종료하고, 강도 살인 건이나 맡아."

"반장님…!"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야. 토 달지 마. 이번 주까지 용의자 추려서 내 책상 위에 올려놔라."

고 반장은 더 이상의 이의는 듣지 않겠다는 듯, 그 말과 함께 곧바로 등을 돌렸다.

하지만 민유진 형사는 끝까지 그를 귀찮게 했다.

"얼마나 높은 분 지시입니까?"

"...."

"서장님입니까? 아니면 더 위?"

고 반장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해줄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그 정도뿐이었다.

"...."

민유진 형사는 굉장히 언짢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길 잠시.

이내 외투를 챙겨 들었다.

"야, 야! 너 어디가!"

"세훈 화학 직원들 조사하러요."

"내 말 못 들었어?! 너 가면 가만 안 둬! 야! 야 이 새끼야!!"

고 반장이 계속해서 고함을 질렀지만, 민유진 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고 반장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시발, 어디서 저런 또라이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자, 옆자리에 있던 다른 형사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반장님, 모르는 척하세요. 쟤 요즘 예민하잖아요."

"…뭔 일 있대?"

"남자친구가 갑자기 어느 날부터 연락이 안 되더니 그대로 잠수 탔대요. 1년씩이나."

"하!

고 반장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고작 그런 개인적인 일 때문에 감정 조절도 못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동료 형사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친구를 최근에 TV에서 봤대요. 지금 엄청 유명해졌다던데? 뭐 화날 만하죠. 그래도 나름 연인이었는데, 말도 없이 잠수 타놓고 혼자만 잘나가는 걸 보면."

"...뭐 얼마나 유명해졌길래? 나도 아는 사람이냐?"

"글쎄요. 거기까진 말을 안 해주네요."

동료 형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어차피 단서도, 용의자도 없는 사건이잖습니까. 하루 이틀 지나면 쟤도 포기하겠죠."

"하아… 아주 개판이네 진짜."

고 반장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개판이라는 말은 단순히 자리를 박차고 나간 민유진만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수사 종료 명령.

물론 고 반장 또한 그 명령을 내린 이가 누군지는 모른다.

다만 나름 중소기업 대표의 실종 사건을 덮어버릴 정도니, 꽤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하지만 대체 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윗선에서부터 그 실종 건을 덮으라고 하는 건가.

'쯧....'

고 반장은 굉장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

"여기예요?"

"네."

점심시간쯤 도착한 회사 건물 앞.

사업이 엎어지고 시위를 벌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주세훈 대표의 회사.

세훈 화학.

나와 이아영 본부장은 그 앞에 서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공장 건설이 예정되어 있던 부지.

갑자기 엎어진 사업.

곧바로 리조트 건설 사업을 추진한 GT건설.

여러모로 GT그룹과 관계가 깊은 미래민주당 소속의 지역구 의원.

게다가 갑자기 실종된 대표와 미래민주당 소속의 '그분'이 기르고 있는 전직 헌터 조직.

사건을 나열만 했음에도 어느 정도 연결 고리가 이어진다.

추측이라곤 해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수준.

만약 정말로 이 모든 사건이 우리가 찾는 '그분'이 개입하고 있다면... 반드시 이곳에 단서가 남아 있을 것이다.

"들어갑시다."

나는 그렇게 입을 열며 걸음을 옮겼다.

회사 내부는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우린 복도를 따라 계속해서 사무실을 두리번거렸고, 그러던 중 영업팀이라 쓰여 있는 사무실 앞에서 한 젊은 남자를 발견했다.

"어… 어떻게 오셨어요?"

젊은 남자 또한 우리를 발견하곤 꽤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김준우 대표입니다. 볼일이 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명함을 건네자, 그가 뜨억 하는 표정으로 허리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대표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못 들어서…!"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서 온 거라 따로 연락을 안 드렸습니다. 제가 미안하죠."

"개, 개인적인 볼일이요?"

"예. 주세훈 대표님 관련해서... 제가 대표님과 연이 좀 있었거든요."

"네? 저희 대표님이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랑요…?"

"아, 그게 그러니까...."

나는 직원의 물음에 재빨리 사무실을 훑으며 둘러댈 만한 것을 찾았다.

그러던 중 제품 브로셔가 눈에 띄었다.

"약품! 청소팀에서 쓸 약품 계약 건으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아...."

직원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자를 만나 뵙고 싶은데, 다들 식사하러 가셨나 봅니다."

"아… 제, 제가 책임자입니다. 하하하...."

"…예?"

직원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 사람이 책임자라고?

끽해야 20대 중반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대표님 그렇게 되시고 나서 직원들이 줄줄이 퇴사했거든요. 아무래도 일이 일인지라.... 지금은 저랑 개발팀장님 그리고 전무님만 남은 상태입니다."

"세 명으로 회사 운영이 됩니까?"

"그래서… 뭐, 다음 주 안으로 정리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꽤나 무거운 소식에 이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자 직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대표님이 워낙에 내성적이 분이라 주변에 아는 사람이... 설마하니 김 대표님의 지인이었다니."

"...주 대표님은 아직 소식이 없는 겁니까?"

"예… 경찰도 수색은 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직은...."

그의 시선이 땅으로 향했다.

나는 잠시 텀을 두고 다시금 말을 이었다.

"사실 주 대표님 일에 대해서 몇 가지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저는 영업팀장 이상우라고 합니다. 잠시만요. 차라도 한 잔...."

"아니, 괜찮습니다. 금방 끝날 테니."

나는 그렇게 말하며, 너저분한 사무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자신을 이상우라고 소개한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넌지시 운을 뗐다.

"그…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실종 건에 대해선 아마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저희한테도 아무런 연락 없이 사라지셨거든요."

"그 부분은 괜찮습니다."

손사래를 치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섰다.

"그… 주세훈 대표님은 평소에 어떤 분이셨습니까?"

"음, 좋게 말하면 열정적이셨고, 나쁘게 말하면... 재미는 없는 분이셨죠. 평일에도 일 아니면 운동만 하셨으니까요."

"직원들과의 관계는 좋았습니까?"

"당연하다마다요. 워낙 솔선수범으로 일을 하시니 직원들도 많이 믿고 따랐죠."

"그렇군요."

"보시다시피 저희 회사가 그리 크진 않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굉장히 어려웠죠. 그런데도 직원들 월급 한 번 안 밀리고 챙겨주셨어요. 명절이나 경조사 때는 보너스도 잊지 않으셨고요."

이상우 팀장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행히 올해 매출이 오르면서 상황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엄청난 매출은 아니지만, 새 공장을 신설할 수 있을 정도는 됐죠."

"아, 그 리조트 부지에...."

이상우 팀장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습니다. 직원들도 굉장히 좋아했고요."

"...."

"그런데 계약이 갑자기 엎어지게 되면서 대표님이 굉장히 힘들어하셨습니다. 저희도 어떻게든 도와드리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어느 날 출근해보니 종이 한 장만 남기신 채 사라지셨습니다."

"종이요?"

"네. 잠시만요."

그가 곧장 서랍을 뒤적거리길 잠시.

이내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종이엔 프린트된 글자 몇 개가 적혀 있었다.

"모두 내 책임이다, 회사를 지키지 못한 나는 쓰레기다, 너무 힘들다, 이쯤에서 포기하고 싶다...."

꽤나 비관적인 내용에 나는 눈썹을 구겼다.

분명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거 경찰에도 보여줬습니까?"

"네, 네. 경찰은 이런 글을 남긴 거로 봐서, 부지를 빼앗긴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잠적하신 것 같다고...."

그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상우 팀장은, 결코 대표가 모든 걸 내려놓고 스스로 잠적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실종되신 날짜가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하십니까?"

"네, 저번 달 21일이었습니다."

"혹시 주변에 대표님과 원한을 가질 만한 분은?"

"전혀요. 말씀드렸다시피 대표님은 주변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있다고 해도 원한을 살 리도 없고요."

"그럼 모르는 사람이 회사를 찾아오거나 한 적은요?"

"흐음.... "

그가 턱을 긁적이며 곰곰이 생각해보길 잠시.

"아… 그러고 보니, 있었습니다!"

이윽고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날이 시위가 있는 날이어서 최소 직원만 남기고 모두가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었는데, 어떤 남자가 대표님을 찾아왔었습니다."

"그게 누구였죠?"

"이름을 여쭤봤는데, 대답이 없었습니다. 다만… 차림새가 헌터 같았습니다. 그 왜, 헌터 분들이 작전 나갈 때 입는 옷 말입니다."

"...!"

"...!"

그의 진술에 나와 이아영 본부장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헌터 유니폼이었다면 오른쪽 어깨에 소속이 붙어 있었을 겁니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저도 그건 알고 있어서 한번 슬쩍 확인해 봤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소속을 확인할 수 없는 유니폼.

그런 걸 입고 다닐 수 있는 놈은 딱 한 부류다.

최근 한 달 안에 퇴직한 전직 작전팀 소속의 헌터.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최근 작전팀 퇴사자는 한 명뿐이다.

'...최종혁.'

그 새끼다.

"설마 그 인간도 조직에 합류한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 당장 최종혁 헌터 정보 남아 있는지 확인 좀 해주십시오. 주거지, 연락처, 뭐 가지고 있는 건 전부 보내 달라고 해주시고요!"

"네, 네!"

"우린 차로 갑시다. 연락 오는 대로 바로 찾아갈 수 있게…!"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벗어나려던 그때였다.

"광주 남부 경찰서 강력계 민유진 형사입니다. 잠시 시간 좀...."

"...?"

마침 사무실로 들어오던 한 여성과 마주쳤다.

'...어, 어?!'

나는 그 여성의 얼굴과 이름을 보자마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당혹감 수준이 아니라 머리가 아득해질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 여성은....

'미, 민유진…?!'

회귀 전, 죽일 듯이 싸우고 헤어진 전 여친이었으니까.

'얘, 얘가 왜 여기에…?'

고향이 포항이라는 건 알았는데, 근무지는 서울 아니었나?

여긴 무슨 볼일인 거지?

그나저나 얘도 이땐 젊었네.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나는 애써 그것들을 털어내며 진정했다.

그래.

지금 나는 10년 전으로 회귀한 상태다.

이 녀석을 기억하는 건 나 혼자뿐이고, 얘는 나에 대해 모른다.

그러니 당황할 필요도 없....

"이, 이...."

그때, 민유진이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이 개새끼야…!!"

뻐억―!

정확히 내 안면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217

217

"나쁜 새끼! 개새끼!"

퍽, 퍼억―!

"니가 무슨 낯짝으로 내 앞에 나타나?!"

"자, 잠깐…!"

무차별적인 폭행 현장.

가까스로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나, 날 알아…?"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봐! 왜?! 그렇게 잠수 타면 아 그런가 보다, 하고 다 까먹을 줄 알았냐?!"

퍽, 퍼억―!

또다시 날아드는 주먹과 발.

정신이 아득해질 때까지 얻어맞던 중, 불현듯 한 가지를 깨달았다.

회귀한 후, 지금까지 이들은 모두 협회에 들어와서 알게 된 사람들이지만, 민유진은 고등학교 때 만난 사이였다는 것을.

'시발… 10년 전의 관계는 이어지는 거였어?'

회귀한 지 무려 1년이나 지나 알게 된 새로운 사실에 나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뭐, 일단 그건 둘째 치고.... 지금은 내가 먼저 좀 살아야겠다.

"이, 일단 진정하고…!"

"진정? 진저엉?! 너 같으면 진정하겠어?!"

"내, 내가 다 설명을…!"

"필요 없어 새끼야! 그냥 오늘 나한테 죽어!!"

민유진이 다시금 주먹을 들던 그때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거기까지만 하시죠."

이아영 본부장이 나서서 그녀의 팔을 턱 잡았다.

"경찰이라면서요. 이렇게 일방적으로 폭행한 거, 당신 상사한테 말하면 그리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당신은 누구…?"

"카르마 코퍼레이션 지원 본부장이에요. 김준우 대표님 비서도 겸하고 있고요."

"...."

민유진이 그녀를 아래에서 위로 훑길 한 차례.

"큼큼...."

헛기침과 함께 손을 내려놨다.

이내 우리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중이었다. 나 또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그 얼굴에, 문득 옛일이 떠올랐다.

***

"야, 김준우."

서울 작전본부, 작전 1팀 사무실.

연락도 없이 민유진이 다짜고짜 나를 찾아왔다.

내심 당황했지만, 애써 기색을 감추며 물었다.

"뭐야.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너 나한테 뭐 할 말 없냐?"

"...."

민유진의 싸늘한 눈빛이 날 관통했지만,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겠는데."

대답하자, 그녀가 내 책상에 서류 한 장을 툭 내던졌다.

다름 아닌, 서울 본부 작전팀 지원 불합격 통지서였다.

"아, 뭐… 그럴 수도 있지. 너무 낙심하지 말고...."

"기만 떨지 마. 네가 상부에 요청해서 떨어트렸다더라? 그것도 작년부터 계속."

"...."

순간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역시 눈치채고 찾아온 거였나.

"진짜냐? 진짜 네가 날 떨어트린 거야?"

"...."

"왜 대답을 못 해. 말을 해 봐. 진짜냐고!"

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내가 떨어트렸어."

"왜? 대체 왜 그런 거야? 같이 헌터 되자고 약속했잖아! 내가 작전팀 들어가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면서, 대체 왜…!"

"노력하면 뭐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도 언 랭크면서."

"...!"

민유진의 얼굴이 싸악 굳었다.

언 랭크.

헌터 최소 자격인 E랭크에도 미달인 이능력자.

범죄 이력이 있거나, 토벌이 불가능할 정도로 미미한 능력을 지닌 자는 랭킹 시스템에 등록할 수 없다.

그리고 민유진은 후자의 경우였다.

그녀와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나 현재까지 10년을 사귀었다.

둘 다 이능력자였기에, 고등학생 시절부터 우리의 목표는 자연스레 헌터가 되는 것이었지만. 우린 출발점부터 크게 차이가 났다.

첫 랭크 심사 때부터 B랭크를 받았던 나와 달리 그녀는 언 랭크를 받았으니까.

나는 졸업하자마자 서울 본부에 헌터로 들어갔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언 랭크로 헌터가 되는 건 기본 신체가 병기 수준이거나, 모든 토벌 전략을 마스터한 게 아니고서야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니 포기할 만도 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여군 부사관으로 입대.

4년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 후, 경찰 지원.

몇 년간 근무하다가 형사과 강력팀으로 발령.

누군가에겐 꿈과 같은 코스를 밟았지만, 그녀에겐 그 모든 경력이 헌터가 되기 위한 밑거름일 뿐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그녀는 정말로 언 랭크로 작전팀에 들어올 수 있을 만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작년부터 다시금 헌터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는 촉망 받는 유망주로 시작해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며 어느새 작전 1팀장 자리에 오른 상황이었다.

난 그녀의 말대로 상부에 요청해서 지원을 막았다.

"너도 지금 네 자리에서 잘나가고 있잖아. 굳이 이제 와서 헌터가 될 필요가 있어?"

이내 내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게 뭔 헛소리야? 내가 뭐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 너도 알잖아!"

"학생 때 한 약속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

"약속이 문제야? 10년이야, 10년. 작전팀 들어가려고 10년을 들이부었어! 근데 네가 어떻게...."

"하아...."

그녀의 말을 끊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언 랭크 주제에 10년이고 20년이고 무슨 상관이야."

"...뭐?"

"작전팀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낄 데 못 낄 데 좀 가려. 주제넘게 무슨."

"너, 너 지금 뭐라고...."

그녀의 두 눈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했다.

"나도 이제 팀장이야. 여태까지 언 랭크 이능력자가 작전팀에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나랑 10년을 사귄 네가 들어와 버리면 당연히 말 나오지 않겠냐?"

"그러니까… 지금 너, 자리 때문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애초에 사람은 각자한테 맞는 역할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만 포기하고 네 일이나...."

"그걸 왜 네가 정해?"

"뭐?"

"네가 뭔데 내 역할을 정해? 네가 뭔데 내 앞길을 막냐고!!"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기 시작했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응원한다고 했잖아! 나 작전팀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네가 그랬잖아!! 근데 이제 와서 주제넘어서 떨어트렸다고? 내 역할이 아니라고?!"

"어.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그렇게 들어오고 싶으면 가서 E랭크라도 받아오던가, 아니면...."

"야, 이 개새끼야! 니가 사람이야?!"

팍―.

그 순간, 민유진이 서류를 내 얼굴에 집어 던졌다.

곧바로 등을 돌리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

"그땐 진짜 죽여 버릴 거니까."

그 말을 뒤로하고 민유진은 내 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나간 자리를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그와 함께 재작년, 서울에 출현했던 리젠 던전 때의 일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

뭐, 크게 충격을 받은 건지 아니면 내 말에 조금이라도 공감을 한 건지, 민유진은 그 뒤로 더 이상 작전팀에 지원하지 않았다.

우린 그렇게 갈라졌고, 소식도 끊겼다.

그리곤 한참 뒤에 우연히 TV에서 강력팀 최연소 여성 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미련이고 뭐고 아무것도.

어쨌든 앞으로는 평생 마주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이야....'

물론 회귀 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으니, 내가 작전팀 지원을 일부러 떨어트린 건 여기선 일어난 적 없는 일이겠지.

그렇다면 이전에는 그녀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문득 궁금해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 상황에서 물어볼 만한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애써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던 중.

"너 잘나가더라?"

마주 앉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던 민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잠수 타더니 성공해서 좋냐?"

"아니 뭐...."

"야, 좋겠다. 부러워 아주. 새 애인도 만들고 ...예쁘시네."

민유진이 이아영 본부장을 슬쩍 흘기며 말했다.

그러자 이아영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주 코가 하늘을 찌르는 표정.

'제발 가만히 있어 줘라....'

나는 고개를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이야?"

내가 묻자, 민유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형사가 조사하러 왔지, 무슨 일이겠어. 너야말로 여긴 왜 왔는데?"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여기 대표님 실종된 거랑 연관이 좀 있는 것 같아서."

"뭐…?"

그 순간, 민유진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너 뭐 아는 게 있는 거야?!"

"조용히 해. 그냥 추측이니까."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경찰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어? 수색은 계속하고 있는 거야?"

"아니. 수사 종료됐어."

"...뭐?"

"윗선에서 내려온 명령이야. 단서도 없고, 진척도 없으니 인력 낭비하지 말고 딴 사건에나 집중하라고."

순간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중소기업의 대표가 실종됐는데, 진척이 없다고 고작 한 달 만에 수사를 종료시킨다고?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인가?

"뭐, 다들 쉬쉬하는 거 보면 내부에서 내려온 건 아닌 것 같고, 아마 외부 인사 명령일 거야. 쯧, 뭐 얼마나 높은 분이길래...."

"...."

"그래서, 이번 일이랑 관련이 있는 것 같다는 건 무슨 소리야?"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래민주당 의원 중에 전직 헌터 조직을 키우고 있는 사람이 있어. 우린 그 의원을 찾고 있고."

"…뭐, 뭐?!"

"그러던 중에 포항 리조트 사업 건을 봤는데... 아무래도 이래저래 의심스러워서 말이지."

"그러니까 이게 전부 네가 찾고 있는 그 의원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네가 방금 말했잖아. 대체 얼마나 높은 분의 지시길래 한 달 만에 수사가 종료되냐고."

"...."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직접 서에 지시한 거라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않나?"

민유진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게다가 지역구 의원이 같은 소속인 것도 의심스럽고.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리조트가 들어서면 여기 의원한테 어떤 이득이 있는 거야?"

"강종구 의원? 이득이 없는 게 뭐냐고 묻는 게 빠르지. 관광 사업, VIP 유치, 기타 등등. 표를 끌어모으기에 이만큼 좋은 사업이 또 있나?"

"흐음...."

그럼 동기는 확실하군.

"좋아. 정리하자면 이래."

이아영 본부장과 민유진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지역구 의원인 강종구 의원이 재선을 앞두고 표를 끌어모으기 위한 사업을 시행하고 싶었다. 고심 끝에 생각한 게 리조트 사업이었는데, 알맞은 부지가 이미 세훈 화학에 넘어간 상태였다. 여기까지 이해되지?"

거기까지 끊고 따라오고 있는지 반응을 살폈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세훈 화학을 몰아내고 싶었지만, 강종구는 초선 의원이었기에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같은 미래민주당 소속의 어떤 의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가 찾고 있는 바로 그놈한테."

나는 이아영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녀 또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그 의원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세훈 화학을 몰아내고 GT건설을 끌어들여 리조트 사업을 추진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주세훈 대표가 생각보다 강경하게 나왔다는 거예요?"

"바로 그겁니다."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대답했다.

"이후 조금씩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급하게 언론을 통제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전직 헌터 조직을 이용해 주세훈 대표를 처리했다?"

민유진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 추측으로는 주세훈 대표를 납치한 놈이, 최근 서울 본부에서 퇴사한 최종혁이라는 놈일 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어."

"뭐?! 확실해? 그놈 정보는?!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알아?"

"그건 지금...."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지원팀에서 온 연락이었다.

나는 빠르게 문자를 확인하고 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찾았어요?"

"네. 갑시다."

이아영 본부장과 곧바로 사무실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자, 잠깐…!"

민유진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나도 끼워줘."

"무슨 소리야. 수사 종료됐다면서."

"...."

그녀는 대답 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왜 저러나 싶기도 잠시,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아영 본부장님."

"네?"

"이쪽에서 대기해주세요. 추가적인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저한테 연락 주시고요."

"네, 네?! 저도 같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민유진을 슬쩍 흘겼다.

"아무래도 저랑 할 말이 좀 있나 봅니다."

"...."

그러자 이아영 본부장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알았어요. 갔다 와요."

그리곤 시선을 획 돌리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었기에 나는 곧장 민유진을 향해 손짓했다.

"가자."

"…어, 어."

그렇게 우린 사무실을 나섰다.

218

218

지원팀에서 정보를 받고, 민유진의 차로 함께 이동하던 중.

"그래서?"

한참을 말없이 운전만 하고 있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왜 잠수 탄 거야. 그것도 1년 동안."

"...."

당연히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잠수를 타고 자시고, 회귀 후에도 그녀와 관계를 유지 중이었다는 걸 알지도 못했으니까.

"헤어질 거면 최소한 말이라도 하던가. 내가 니 소식을 뉴스에서 들어야겠어?"

"그냥 좀… 바빴어."

한참을 생각하다가 내놓은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민유진은 더더욱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너 설마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헌터 되면 너 평생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그 말에 나는 가만히 머리를 긁적였다.

보아하니 내가 기억하는 관계와 꽤나 많이 다른 것 같은데...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게 잠시 끙끙거리고 있던 끝에, 나는 작은 묘수를 떠올렸다.

"…사실 사고가 있었어."

"뭐?!"

그 한마디에 민유진의 시선이 곧바로 내게 향했다.

"출근 둘째 날에 던전에 들어갔다가 방독면이 벗겨지면서 가스를 좀 들이마셨는데, 그거 때문에 뇌 신경에 손상이 생겼다더라."

"저, 정말로?! 지금은 괜찮은 거야?"

"몸에 큰 지장은 없대. 그런데 이전 일 기억을 잘 못 해."

"...!"

꽤나 충격을 받은 듯,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연락 못 했어. 핸드폰도 고장 났는데 네 번호도 기억 안 나고, 그동안 있었던 일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냥...."

"그냥 그대로 잠수 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놈.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뭐 너 아프다 그러면 귀찮아서 버릴 것 같았냐?"

"...."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한데… 거짓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기억이 잘 안 난다 이거지?"

"어."

"너 졸업하고 몇 년 동안 취직 안 돼서 내가 많이 도와줬잖아. 그건 기억나?"

"아니...."

내가 취직이 안 돼서 도와줬다고?

정말 내가 기억하는 거랑 달라도 너무 다르군.

"밥도 맨날 내가 사줬잖아. 근데 뭐… 너는 부담스러워했지. 나한테 빌붙는 것 같다고. 그때마다 헌터 되면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

"...헌터?"

"그것도 기억 안 나? 우리 고등학생 때 같이 헌터 되기로 한 거."

"아, 그건 기억나."

그건 똑같았군.

"근데 뭐… 거의 불가능한 꿈이었지. 너는 비능력자고, 나는 언 랭크니까."

"...아직도 헌터가 되고 싶어?"

"응."

그녀가 즉답했다.

"그것 때문에 부사관 지원한 거고, 형사도 된 거잖아. 뭐,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잘 안 되네."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말을 이었다.

"참 나… 그동안 취직 안 돼서 내가 먹여 살리던 놈이 이젠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놈이 됐네. 그러고 보니 네가 카르마 대표잖아? 이젠 너한테 잘 보여야 하나?"

"...."

의미심장한 그 말에 내 표정이 굳었다.

그리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다시 시작할 생각인 건...."

"미안."

또 한 번의 즉답.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화도 나고, 배신감도 느끼고, 그러면서도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아무 감정이 없어."

"...."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군.

나에겐 10년도 더 전에 끝난 관계인데,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해봤자 좋을 건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렇게라도 이야기는 들었으니 됐어."

"…그래."

"그나저나 그건 둘째 치고, 용의자 정보나 더 자세히 말해 봐. 이번에 잘린 이유가 뭐야?"

"최종혁? 잘린 게 아니라 나갔어. 심사 기간 때 사내 이사랑 손을 잡고 작전 본부장을 음해하다가 걸렸거든."

"아직도 그런 짓을 해…?"

"그러게. 뭐, 아무튼 그 사내 이사의 윗선이 우리가 찾고 있다는 의원이야."

"찾는 이유는?"

"국제 협회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

"흐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지원팀에서 보내 준 정보로는… 주거지는 서울인데 한 달 전부터 행방이 확인이 안 된대. 근처에 사는 동료한테 물어보니까 집에 안 들어온 지 좀 됐다던데."

"한 달 전이면...."

"주 대표가 실종된 시기랑 겹치지."

나는 지원팀에서 보낸 문자를 열어 다시금 내용을 확인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울산 어느 편의점에서 신용카드를 쓴 내역이 있어. 위치는… 여기."

운전대를 잡고 있는 민유진에게 핸드폰을 내밀어 주소를 보여줬다.

그러자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기 확실해? 여기 근처엔 아무것도 없어. 폐 공장 단지거든."

"그럼 오히려 다행이네."

"뭐…?"

"최종혁이 그 의원과 붙어서 헌터 조직에 들어갔다고 하면 단체 생활을 하고 있을 거야. 존재 자체가 불법인 조직이니까 단체로 몸을 숨길 필요가 있겠지. 기숙사나 숙소 같은 곳에서."

"폐공장...."

"그래."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거기가 불법 헌터 조직의 은거지야."

"…어째 네가 나보다 더 형사 같다."

"칭찬으로 들을게."

민유진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내가 찍어준 위치를 향해 빠르게 차를 몰았다.

그렇게 또다시 조용해진 차 안.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

"이아영 본부장… 나랑 아무 관계도 아니야."

내가 조심스레 그 말을 전했다.

그러자 민유진이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글쎄...."

나를 슬쩍 흘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던데."

***

"...."

"...."

세훈 화학, 영업팀 사무실.

그곳에 남겨진 이아영 본부장과 이상우 팀장은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는 중이었다.

이상우는 계속해서 이아영 본부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인 까닭이었다.

"…저, 차라도 타 드릴까요?"

"...."

"탕비실에 과자 있으니까 마음껏 꺼내 드셔도 돼요."

"...."

이상우 팀장은 조금이라도 냉랭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계속 말을 걸었지만, 이아영 본부장은 다른 생각을 하는 듯 전혀 대답이 없었다.

결국, 이상우 팀장은 그 숨 막히는 곳에서 대피하기 위해 꼼수를 부렸다.

"아,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계약처 사장님한테 연락드린다는 걸 깜빡했네. 그럼 전 이만 일 하러...."

"헤어진 전 애인이랑 다시 이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돼요?"

"네, 네…?"

하지만 이아영 본부장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뭐, 뭐…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요."

"보니까 꽤 오래 사귄 사이 같던데… 설마 이제 와서 다시 잘해볼 생각은 아니겠죠?"

"글쎄요, 저한테 물어보셔도...."

이상우 팀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아영 본부장도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닌 듯, 혼잣말을 이어갔다.

"아니, 그 여자도 그 여자야. 헤어졌으면 끝이지, 뭔 할 말이 있다고 들러붙어? 그것도 모자라서 단둘이 드라이브까지 간다고?!"

"...? 두 분은 그냥 조사하러 가신 거...."

"아 씨!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같이 휴가 가자고 해서 기대했더니 뒷조사를 시키질 않나, 꾹 참고 따라왔더니 전 여친을 소개해주질 않나! 이거 내가 화내도 되는 거 맞죠?!"

"...."

이상우 팀장은 퍽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조사하러 왔으면 조사만 할 것이지, 웬 연애 상담을 하고 있는 건가.

"하아... 애인이 있었다는 것도 충격이네. 여자한테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아영 본부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결국, 보다 못한 이상우 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관심이 있으시면 직접 말씀을 해보시는 것이 어떤지...."

"...."

이아영 본부장은 꽤나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더 이상 생각하기 싫은 건지 고개를 털었다.

"됐어요. 일단은 지금 일이나 신경 쓸래요."

"...."

이랬다저랬다, 참 피곤한 사람이군.

이상우 팀장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직원들도 다 같이 시위를 나갔다고 했죠? 시위 분위기는 어땠어요?"

"두말할 것도 없이 좋았습니다. 시청 쪽에서 GT건설과 강종구 의원을 다시 검토해 보겠다고까지 했고요. 지역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나와서 이거 잘하면 정말 되겠구나 싶었는데...."

이상우 팀장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모습에 이아영 본부장은 조금 더 조심스레 물었다.

"강종구 의원과 GT건설에선 무슨 입장표명 같은 건 없었나요?"

"네.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직접 찾아가도 봤지만, 만나주지도 않더군요."

모르쇠로 나오겠다, 이건가.

하긴, 뒤를 봐주는 인간이 그 정도로 대단한 놈이라면 오히려 대응하는 게 이상하겠지.

"그럼… 우린 GT건설이랑 강종구 의원 쪽을 좀 알아봐야겠네요."

"네?"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헌터 조직을 찾지 못했을 경우도 대비해둬야 하고요. 뭐, 알아볼 수 있는 건 최대한 알아봐야죠."

이아영 본부장은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하 본부장님. 부탁드릴 게 있어서 전화 드렸는데."

「엥? 이 본부장님, 휴가 가신 거 아니셨습니까?」

다름 아닌, 하성일 해외사업본부장이었다.

"…말하자면 좀 복잡해요. 아무튼, 혹시 GT건설 쪽에 아는 사람 있나요?"

「저희 누나가 좀 알고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경쟁사니까요. 그런데 그건 왜요?」

"저희가 지금 포항 리조트 사업 건을 알아보고 있거든요. 원래 해당 부지를 이미 입찰한 사람이 있었는데, GT건설에서 날치기를 했더라고요."

「그, 그래요?」

"누군가 도와준 게 확실한데… 누구 손을 빌렸는지 좀 알아봐 줄 수 있겠어요?"

「흐음, 쉽지 않을 텐데....」

"준우 씨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어요. 부탁할게요."

「대표님이 직접 나선 일이라면 어쩔 수 없군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감사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은 그 순간이었다.

사무실에 사복 차림의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포항 남부 경찰서 강력팀에서 나왔습니다. 혹시 이상우 씨 되십니까?"

"마, 맞습니다. 어쩐 일로...."

"주세훈 대표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확인을 위해 동행해주셨으면 하는데."

"네, 네…?"

그 말을 들은 이아영 본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어느새 도착한 폐공장 앞.

누군가 살고 있다고 상상도 못 할 만큼 을씨년스러운 그곳에서, 민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들어가자."

"잠깐,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넌 밖에서...."

말려보려 했지만, 민유진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공장으로 향했다.

넓고 어두운 공간.

꽤 오래전에 가동이 중지된 듯, 완전히 고물이 된 기계들이 즐비했고 곳곳에서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편에 아무렇게나 놓인 침구과 각종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누군가 살고 있는 흔적이었다.

그것도 꽤나 많은 인원이.

'정확히 짚었군.'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 순간.

"뭐야? 니들 누구야!"

어디선가 나타난 한 남자가 우리를 발견하곤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민유진이 신분증을 꺼내 들었다.

"남부 경찰서 강력 2팀 민유진 형사입니다. 주 대표 실종 용의자 조사 중인데, 혹시 최종혁 씨라고 알고 계십니까?"

"...."

"…알고 있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종혁, 지금 여기 있어?"

"그런 사람 모르겠는데?"

"피곤하게 하지 말고 쉽게 가자. 말 안 하면 그만일 것 같아? 어떻게, 니들부터 싹 잡아 넣어줘?"

"하! 영장 있냐?"

"...."

오 새끼.

무적기를 쓰네?

잠시 주춤한 그때, 어디 숨어 있었던 건지 남자의 동료들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뭘 했다고 잡아넣네, 마네야!"

"너 시발, 상관 누구야. 강력 2팀이면 고배수 반장인가?"

"요즘 경찰은 선량한 시민을 이렇게 막 체포해도 되나?"

"좋은 말로 할 때 나가세요.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각자가 최대한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위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이놈들도 헌터 조직의 일원들이겠지. 물론 혐의가 없어서 체포는 할 수 없겠지만....

'일단 쥐어패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조금 손 봐준다고 해도 어차피 신고도 못 할 테고.

그렇게 생각하며 민유진의 어깨를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뒤로 빠져 있어. 내가 해결할...."

그리고 그 순간.

뻐억―!

"...?"

눈앞에 있던 남자의 턱이 돌아갔다.

"하여간 말로 해서 듣는 새끼가 없어."

민유진은 대놓고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풀었다.

나는 그 모습에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지, 지금 무슨....'

그도 그럴 게 그녀는 민간인이나 다름이 없는 언 랭크이지 않은가.

근데 전직 헌터 출신의 범죄조직원을 맨손으로 한 방에 눕혔다고?

"열 셀 동안 말해. 앞으로 밥 먹을 때 턱받이 차기 싫으면."

"...."

"...."

민유진의 눈빛이 번뜩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219

219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시신 부검실.

담당 부검의와 조사관 그리고 해당 사건을 담당했던 포항남부경찰서 강력 2팀의 고배수 반장이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 열겠습니다."

이내 부검의는 동행한 이상우 팀장 앞에서 보관소의 문을 당겼고, 이윽고 한 남성의 시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시신 훼손이 없어서 신원은 바로 파악이 됐는데, 어쨌든 확인은 시켜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예… 대표님 맞네요."

이상우 팀장이 시신을 바라보며 먹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곤 조사관을 향해 물었다.

"어디서 발견됐습니까?"

"산에서 심마니들이 발견했습니다. 목을 맨 채로요. 직접적인 사인 또한 질식사인 것 같습니다."

부검의도 그 의견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몇 마디를 덧붙였다.

"사인도 그렇고, 정황으로 미뤄봤을 땐 자살일 확률이 높은...."

"아닙니다!"

하지만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상우 팀장이 소리쳤다.

"실종되기 전날에도 저희한테 조금만 더 힘내자고 하신 분입니다. 절대 스스로 목숨을 끊으실 분이 아니에요! 이건 누군가 대표님을...."

"하아...."

담당 부검의는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상우 팀장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타살이라고 의심될 만한 단서가 전혀 없습니다."

"여, 여기 가슴에 멍 자국이 있지 않습니까!"

"실종되기 전 몇 주 동안이나 시위를 하셨다면서요. 무엇보다 평소 운동도 즐기셨다고 하고. 그것만으로는 타살이라고 할 수가...."

"아뇨."

그때, 뒤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아영 본부장이 보다못해 앞으로 나섰다.

"이건 그런 것 때문에 생긴 멍이 아니에요."

"…네?"

"이건 이능흔이거든요. 스킬을 맞았을 때 생기는 상처요. 색깔도 그렇고, 앞뒤로 관통한 듯한 형태도 그렇고."

그녀가 말을 꺼내자 그곳에 있던 모두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이내 조사관이 그녀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죄송하지만 누구…?"

"카르마 코퍼레이션 지원본부에 이아영 본부장입니다. 이클립스 총 책임자이기도 하고요."

이아영 본부장이 명함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명함을 받아든 조사관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지, 지원본부장…?"

"카르마 간부가 여긴 왜...."

담당 부검의도 꽤나 놀란 듯했다.

당연히 이곳에선 담당 부검의가 총 책임자이며, 그의 부검이 곧 공식적인 결과가 된다.

그러니 이곳에서 감히 그에게 토를 달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이능력에 관해선 그녀가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였으니.

"국제 협회와 관련된 사람을 조사하던 중에, 조 대표님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아 확인하고 있었어요."

"그게 무슨…?"

"저희가 찾고 있는 사람이 조 대표님을 처리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고 추측하고 있어서요. 뭐...."

이내 이아영 본부장의 시선이 시신으로 향했다.

"시신 상태를 보니 확신이 서긴 하네요. 제가 좀 자세히 봐도 될까요?"

"네? 아, 그러시죠. 이미 부검은 다 끝났으니...."

그녀는 부검의에게 허락을 맡곤 장갑을 착용했다.

그리곤 직접 시신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시신은 전체적으로 깔끔한데, 딱 가슴에만 멍이 들었죠? 한 방에 제압했다는 뜻이에요. 상흔으로 봐서는 마법 계열 스킬인데… 흔히 쓰는 폭발형이나 투사형은 아니에요. 충격형이나 디버프형이겠죠."

뭐, 애초에 일반인을 상대로 그런 큰 스킬을 썼다간 그 자리에서 즉사했겠지만.

이아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크기나 심도로 봐선 C랭크에서 B랭크 정도. 해당 랭크에 충격형 스킬을 사용하는 마법사 클래스라고 하면...."

"누, 누굽니까?"

"...."

최종혁.

역시 그놈밖에 없지.

하지만 이아영 본부장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글쎄요. 거기까진 모르겠네요."

"...그, 그렇습니까."

"뭐, 그건 그렇고. 일반인이 스킬을 맞고 기절한 뒤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면... 꽤나 사안이 커질 것 같은데."

장갑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참고하셔서 수사해주신다면 좋을 것 같네요."

"그건… 어려울 것 같군요."

"네?"

조용히 있던 강력 2팀, 고배수 반장이 대신 입을 열었다.

"이 사건, 벌써 위에서 수사 종료 명령이 내려왔거든요. 부검 끝나면 바로 가족한테 인계할 예정입니다."

"...그게 무슨."

이아영 본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가 내린 명령이죠, 그건?"

"글쎄요. 저도 그것까지는...."

고배수 반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아영 본부장은 단호한 표정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멀쩡한 일반인이 스킬을 맞고 목을 맨 채로 발견됐어요. 제가 볼 땐 도저히 비관에 의한 자살로는 안 보이는데… 반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이내 그가 마지못해 내뱉은 말은.

"저희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아...."

이아영은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머리를 헝클었다.

그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요. 조 대표님 건은 이렇게 끝낸다고 치고...."

시신의 상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일반인이 스킬에 피해를 봤어요. 저희 본부 눈을 피해서 움직일 수 있는 헌터는 없으니까, 카르마 소속은 아닐 거고… 당연히 전직 헌터겠죠."

"전직 헌터…?"

"네. 전직 헌터가 일반인을 상대로 피해를 줬다? 이것만 해도 수사 대상 아닌가요?"

전직이든 아니든, 헌터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스킬을 사용해 무력을 행사했다면 이는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전직 헌터가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으니,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게 틀림없고요. 이건 주 대표님 건이랑은 아예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사주라니, 누가 그런...."

"그건 저도 모르죠. 다만, 이번 일로 제일 이득을 본 사람을 먼저 조사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미래민주당 소속, 포항 지역구 강종구 의원. 듣자 하니 재선을 앞두고 있다죠?"

"...."

"...."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고배수 반장이 드디어 휴대폰을 들었다.

이아영 본부장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김준우는 조직을, 본인은 GT건설을… 그리고 경찰은 강종구 의원을 조사하게 됐다.

연관이 있는 모든 놈들을 동시에 공략.

포위망을 좁혀 나가다 보면, 반드시 한 놈이 추려질 것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냥 내버려 뒀다간 앞으로 무슨 짓을 더 벌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 가서 찾은들 이미 늦은 뒤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휴가가 끝나기 전에 붙잡는다.

***

"잘 처리했나?"

"예."

서울에 위치한 어느 포장마차.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한 중년 남성을 향해 최종혁이 경직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자살로 보이도록 위장해뒀습니다. 제압 과정에서 스킬을 쓰긴 했습니다만… 이능력 관련 전문가가 아닌 이상, 알아보긴 힘들 겁니다."

"그래."

남성이 술잔을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김민주 건도 다 자네 아이디어였다면서? 박장목 그 자식은 그냥 떠넘겼던 거고."

"…그렇습니다. 조금 더 철두철미하게 진행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뭐, 운이 나빴지. 한 번 눈에 들어온 건 뭐가 됐든 끝을 봐야 하는 놈이니까, 김준우는."

그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자네를 데려온 걸 후회하지 않도록 앞으로도 잘 해봐. 밑에 놈들은 원하는 대로 부려도 좋으니까."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대답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또다시 잔에 술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이래서 조직이 좋아. 개인한테 부탁하는 건 어찌 됐건 한계가 있거든."

"개인… 말씀이십니까?"

"그 왜, 전 국내 랭킹 1위였던 놈 있잖나. 양민호라고. 이 바닥에선 꽤 유명한 해결사였는데… 소문만 번지르르했지. 결국, 제대로 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렇습니까...."

"그리곤 작년부터 소식이 끊겼더군. 모르지, 그동안 번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어디서 객사한 건지. 그놈뿐만이 아니야. 한별 그룹의 장남도 마찬가지였지. 쯧, 그 새끼 때문에 잡혀 들어갔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울화가 치민다니까."

남자가 쯧, 혀를 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뭐, 그 덕에 국제 협회와 손을 잡게 됐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만."

"...."

그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미래민주당 소속 정훈 의원.

몇 달 전 한별 그룹의 장남, 하성태와의 사건으로 뇌물수수 혐의를 뒤집어쓰고 재판에 들어간 그 사람이었다.

그 후로 재판 결과를 기다리며, 당연히 정계 인생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기회는 위기 속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국제 협회에서 그에게 연락해온 것이다.

그들은 다시 정계에 복귀시켜주는 것은 물론, 원하는 모든 것을 줄 테니 자신들을 도와달라는 제안을 내밀었다.

이미 벼랑 끝에 매달려 있던 정훈 의원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후 정훈 의원은 지난 실패를 교훈 삼아, 가장 먼저 전직 헌터로 이루어진 조직을 만들었다.

물론 국제 협회의 도움을 받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만족스러운 놈들이 탄생했다.

그 후 재판에서 무혐의를 받고, 바로 정계 복귀.

대체 국제 헌터 기구가 어떻게 다른 나라 정치권에 개입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보아하니, 본인 외에도 이미 그들과 관련된 인사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모양이었다.

뭐, 그건 비단 한국만 그런 건 아니겠지.

아무튼 정훈 의원은 현재, 국제 협회를 도와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은밀하고, 치밀하게.

"저…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때, 잠시 눈치를 보던 최종혁이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해봐."

"이번 리조트 사업을 도와주는 게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랑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

"아, 그 이야기를 안 했군."

정훈 의원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말을 이었다.

"현재 토벌 시스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나?"

"예? 뭐, 그야 작전팀 전력...."

"아니."

그가 말을 끊으며 즉답했다.

"가장 중요한 건 던전 출현 현황 파악이야. 위치, 등급, 기타 특이사항을 빨리, 또 정확하게 알아내야 그다음으로 넘어가지."

"...."

최종혁은 대답을 아꼈다.

그 부분은 통제팀의 업무였으니, 작전팀 소속이었던 그는 잘 모르는 부분이었던 까닭이었다.

"우리나라는 땅덩이도 좁고 도로가 잘 되어 있는 것이 한몫했지만, 그보단 탐지 시스템이 꽤나 잘 돼 있는 게 크지."

"…그렇군요."

"그중 가장 큰 규모의 탐지 시설이 어디 있을 것 같나?"

"...설마 포항에?"

"그래."

정훈 의원이 손가락을 튕기며 대답했다.

"리조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어. 아니, 거의 붙어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리고 국제 협회의 목표는 그 시설을 처리하는 거야."

"하지만... 리조트 사업을 추진한다고 탐지 시설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애초에 우리가 직접 탐지 시설을 건드리면 김준우가 곧바로 눈치챌 거야."

"그럼 대체 어떻게...."

"우리랑 전혀 관련 없는 놈들이 처리하게 해야겠지."

그 순간 정훈 의원의 눈이 번뜩였다.

"이번 리조트 건은 꽤 커. 최대 규모의 CC도 들어올 거고, 승마와 기타 부대시설도 마련할 예정이야. 당연히 그 대상은 VIP들이고."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봐. 자네가 황금 같은 휴가에 거금을 주고 마음 편히 쉬러 왔는데, 바로 눈앞에서 커다란 안테나들이 24시간 내내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면… 어떨 것 같나?"

"상당히 거슬릴 것 같습니다."

"바로 그거야."

최종혁은 그제야 그가 무엇을 계획하고, 무엇을 노리는 건지 깨달았다.

"탐지 시설은 우리가 건드리지 않아. 그건 리조트를 방문한 VIP들의 몫이지. 한 사람이 아니라, 권력이 있는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덤벼들면 김준우도 어쩔 도리가 없을 테지."

"그래서 강종구, 그 새내기 의원을 도와주신 거군요."

"맞아. 일부러 그 부지를 선택한 것도 탐지 시설이랑 가깝기 때문이었지."

최종혁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말대로, 직접 탐지 시설을 폐쇄하려고 했다면 김준우가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계획대로라면 불특정 다수가 한마음으로 김준우를 포위할 것이다.

당연히 공격 방법도 가지각색이겠지.

누군가는 정치적으로, 또 누군가는 경제적으로.

그렇다면 김준우는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

어느 한 명을 잡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닐뿐더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이상 그 수많은 VIP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김준우는 절대 나를 찾지 못해. 아니, 설령 찾는다고 해도 나한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지. 내가 직접 그를 건드리는 게 아니니."

정훈 의원이 그에게 술잔을 건넸다.

가볍게 건배를 하곤 두 남자는 술을 털어 넘겼다.

"이번엔 무조건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어."

이내 정훈 의원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220

220

뻑, 뻐억―!

먼지가 풀풀 날리는 폐공장 안.

민유진은 대여섯 명의 헌터를 상대로 홀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콰직, 콱―!

뚜두두둑―

"으아아아악!!"

"이, 이 년 대체 무슨 힘이… 끄윽!"

전직 헌터들의 고통 섞인 음성만이 울려 퍼졌다.

크라브 마가, 킥복싱, 주짓수.

온갖 무술을 섭렵한 그녀는 이미 일반인들을 상대로는 괴물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에게나 통하는 말이다.

언 랭크가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한들, 이능력을 지닌 헌터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 그건 말이 안 된다.

태생부터 순수한 괴물이 아니고서야.

'...미쳤네.'

민간인이 맞나 싶을 정도의 움직임과 힘.

E, D급 헌터 정도는 가볍게 제칠 수 있을 정도의 전투 센스.

흡사 싸움을 위해서 만들어진 기계와 같았다.

'괜히 작전팀에 들어간다고 했던 게 아니었네....'

나는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발, 진짜…!"

"너무 성가신데… 어떻게 해?"

"모르겠다, 시발. 그냥 죽여!"

[고유 스킬 : 플레임 샷]

[고유 스킬 : 핑거 피스톨]

피융―!

놈들은 참다못해 스킬을 시전했다. 날카로운 마법 덩어리들이 정확히 민유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야, 야…!"

서둘러 그녀를 향해 소리쳤지만 이미 피하기엔 늦었다.

결국, 나는 곧바로 땅을 박차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습득 스킬 : 수프림 미러]

쾅―!!

곧바로 그녀를 껴안으며 온몸으로 막아냈다.

"...너, 너."

하지만 민유진은 자신이 공격받을 뻔했다는 것보다, 내가 스킬을 썼다는 게 더 충격인 듯했다.

뭐, 그녀의 기억상에는 비능력자였을 테니.

"어, 언제 이능력자가 된 거야?!"

"뭐… 어쩌다 보니."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설명하려면 하루 밤낮을 새워야 했으니.

뭐, 설명해준다고 믿어줄 리도 없고.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남자들을 향해 돌아섰다.

"지금 민간인을… 그것도 경찰을 상대로 스킬을 쓴 겁니까?"

"시, 시발...."

"저놈도 헌터였어…?"

"쫄지 마! 쪽수는 우리가 훨씬 더 많아!"

한때 자신들의 수장이었던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또다시 공격 태세를 갖췄다.

뭐,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주 쳐 돌았지, 그냥.

"이거, 정당방위입니다."

나는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와 동시에.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쾅―!!

공장의 천장이 박살 날 정도의 강력한 폭발과 함께 그곳에 있던 모두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머지않아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 몸뚱이들.

"끄으윽...."

"으윽, 윽…!"

가까스로 숨만 붙은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놈들에게 다가갔다.

"당신들, 조직 이름이 뭡니까?"

"으윽...."

친절하게 물었지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지 대답이 없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뚜둑―.

"끄아아악!!"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시죠. 당신들, 조직 이름이 뭡니까?"

한 남자의 다리를 발로 짓이기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건지 남자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 이름 따위는 없어!"

"…없다고?"

"그래, 없다고! 이름이 있으면 꼬리를 잡힌다고 처음부터 안 붙였어!"

"그럼 당신들 보스는 누굽니까?"

"그, 그건…!"

또다시 대답이 끊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뚜둑―!

"끄아아아악!!"

반대쪽 다리도 마저 부러뜨리자,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우, 우리도 몰라!"

"뭐…?"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우린 한 조직이 아니야. 각 지역에 여러 팀으로 나뉘어 있고, 보스는 각 팀장에게 지시를 내려. 우린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거고!"

"그러니까… 보스는 당신들 팀장만 알고 있다?"

"마, 맞아! 우린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자세를 낮춰 그와 눈을 맞췄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을 죽였습니까?"

"...."

눈을 번뜩이며 묻자, 그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음 같아선 싹 다 갈아 마셔 버리고 싶은데, 지금 내가 휴가 중이라 봐주는 겁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남자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전화해서 여기로 오라고 하세요."

"뭐, 뭐…?"

"당신들 팀장 말입니다."

그들을 내려다보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최종혁한테 전화하라고!"

***

정훈 의원과 만남을 끝낸 직후.

최종혁은 자신의 차를 타고 다시금 포항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가만히 달리고 있자니, 며칠 동안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누군가 퍼트린 그 소문 때문에 작전팀에서 반강제적으로 퇴사를 하고 나선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는 건 물론, 대인 기피에 공황까지 겹치며 밖에 나가지도 못한 채 집에 틀어박혀 있길 며칠.

시간이 갈수록 그의 마음속에는 충격보단 김준우에 대한 분노가 쌓여갔다.

그냥 본부 채로 날려버리고 감옥에 갈까, 하루에도 수십 번을 더 상상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왔다.

다름 아닌 정훈 의원의 보좌관이었다.

그가 말하길, 정 의원이 자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최종혁 또한 그에 대해선 얼추 알고 있었다.

한별 그룹의 장남, 하성태와 손을 잡았다가 덜미를 잡혀 재판에 넘겨진 국회의원.

그런데 그가 왜 자신을 찾는 건가?

설마 정계에 복귀한 건가?

대체 어떻게?

하지만 정훈 의원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순간,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래.

이 자가 박장목 이사가 말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훈 의원은 자신이 기르고 있는 조직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고, 최종혁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김준우에게 복수하기 위해.

직접 찾아가 패고 죽이는 게 아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손에 무너져 내리도록.

그렇게 다시 한번 자신의 목적을 상기하고 있던 그때였다.

"어, 왜?"

그의 핸드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다름 아닌, 자신이 맡고 있는 울산 지역 팀원 중 한 명이었다.

「티, 팀장님… 무,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뭐…?"

「숙소에 형사가 들이닥쳐서는....」

그 순간, 누군가 핸드폰을 낚아채는 소리가 들렸다.

「잘 지내셨습니까, 최종혁 씨.」

이윽고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그 목소리.

"대표님…?"

김준우였다.

"대표님이 거긴 어떻게 알고 가셨습니까?"

「다 알면서 뭘 물어봅니까.」

그가 웃음을 흘리길 한 차례.

「최종혁 씨. 당신 위에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

비수를 꽂는 한마디가 날아들었다.

뭐지?

거기까지 알아낸 거야?

포위망을 좁힐 만한 단서는 없었을 텐데....

'무시무시한 새끼...!'

최종혁은 잠시 주춤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무슨 소립니까? 제가 그놈들 수장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시죠. 제가 알고 있는 당신은 이렇게까지 일을 벌일 만큼 똑똑하지 않으니.」

"...하하하."

최종혁은 입만 웃었다.

그리고 그때.

「말로 할 때 부는 게 좋을 겁니다.」

「끄아아아악…!!」

「당신 부하들, 반병신 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귀를 찢는 비명이 전파를 타고 몇 번씩이나 들려왔다.

"하, 하하하! 대표님, 협박할 거면 그럴싸한 걸로 하셔야죠."

「....」

"그놈들은 협상 조건이 되질 않습니다. 어차피 쓰다 버려지는 놈들이니까.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죠."

「...그렇군요. 그럼 어떤 게 구미가 당길까요.」

이내 김준우가 입에 담은 것은....

「병원에 있는 당신 동생? 아니면 홀로 지내는 당신 어머니?」

"...!"

최종혁의 가족이었다.

"시발, 너 뭐야. 내 가족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역시, 이건 먹히는군요.」

김준우는 담담하게 대답했고, 최종혁은 이를 빠득 씹었다.

「걱정 마시죠. 가족을 건드릴 생각은 없으니까. 물론, 당신이 순순히 의원님의 이름을 분다면.」

"이런 미친 새끼! 대표라는 인간이 가족을 걸고 협박을 해?!"

「유감스럽게도 제가 지금 휴가 중이라....」

김준우가 피식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공식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서요.」

"너, 너… 내 가족 건드리면 가만 안 둬. 진짜로 죽여 버릴 거야!"

「그럼 순순히 말씀하시죠. 당신 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이 개새끼야!!"

최종혁은 핸드폰에 대고 고함을 질러댔다.

덩달아 차가 마구 흔들거렸지만,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는 선택해야 했다.

정훈 의원과 가족, 둘 중 하나를.

'시발, 시발…!'

핸드폰이 부서져라 꽈악 쥔 채로 한참을 고민하던 그때.

"정훈...."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훈 의원이라고! 우리 위에 있는 사람!"

「그럴 리가… 뇌물수수 혐의로 재판 중인....」

김준우는 곧바로 말끝을 흐렸다.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하나만 더 물어보죠.」

그리고 이내, 김준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주세훈 대표... 당신이 죽였습니까?」

"...."

그 질문에 최종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설마하니 그것까지 눈치챘을 줄이야.

하지만 최종혁은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글쎄?"

어차피 증거는 없다.

김준우도 그저 떠보는 것뿐이다.

그러니 굳이 바른대로 대답할 필요는 없다.

"처음 들어보는 사람인데."

「…뭐, 알겠습니다.」

그러자 김준우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아무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되도록 제 눈에 띄지 마십쇼. 다음에 만나게 되면 지금처럼 대화로는 안 끝날 것 같으니.」

"엿이나 먹어. 개새끼야."

최종혁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는, 곧바로 정훈 의원에게 연락을 취했다.

"의원님, 김준우 대표가 알아차렸습니다."

「…뭐? 대체 어떻게?」

"그게, 가족으로 협박을 해서... 죄송합니다."

핸드폰 너머로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됐어. 어차피 자네한테까지 연락이 닿은 걸 보면 이미 어느 정도는 알아냈다는 거니까. 그쯤 되면 자네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불었을 일이야.」

"…죄송합니다."

거듭 사과를 전했지만, 정훈 의원은 정말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하여간 대단한 놈이야. 본인들이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었을 텐데, 또다시 꼬리를 잡다니.」

"확실히 무서운 놈입니다."

「뭐, 그래도 걱정할 건 없어. 어차피 날 찾았어도 잡진 못할 테니까.」

"알고 있습니다. 의원님은 표면상으로 그저 강종구 의원을 도와준 것뿐이니."

「그렇지.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 그런데....」

그 순간, 정훈 의원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자네는 아니지?」

"...예?"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길 한 차례.

이내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자네는 사람을 죽였잖아.」

"...!"

최종혁은 그게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자네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말했겠지만, 어쨌든 결국 말을 한 건 자네잖아. 그 대가는 치러야지.」

"...."

「선택해. 여기서 끝낼지, 아니면… 끝까지 갈지.」

시발, 결국 이렇게 되는군.

최종혁은 점점 자신의 목이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정훈 의원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관련 인물, 전부 처리해.」

"…전부 말입니까?"

「그래. 꼬리는 확실하게 잘라야지.」

기어이 그 명령이 떨어졌다.

221

221

포항의 한 카페.

고배수 반장과 이아영 본부장 그리고 이상우 팀장은 그곳에서 강종구 의원을 만났다.

다시 서울까지 올라가야 하나 싶었지만, 마침 강 의원이 출장 차 포항에 내려와 있던 덕에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고배수 반장은 서둘러 강 의원에게 접근해 면담을 요청했고, 실랑이 끝에 30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바쁜 사람 붙잡은 겁니까?"

강종구 의원이 불쾌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러자 고 반장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잘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

"리조트 사업 추진 건 말입니다. 이미 입찰 된 땅이 하루아침에 GT건설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봐도 GT건설이나 의원님이 단독으로 벌일 만한 스케일이 아닌 것 같아서...."

이내 고 반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혹시 의원님에게 손을 보태준 사람이 있습니까?"

"…하하하."

강종혁 의원이 입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제가 누군가와 손을 잡고 이번 일을 추진했다는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었고요."

"...주세훈 대표?"

고 반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 의원은 오히려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하군요. 그 건은 수사가 종료된 거로 알고 있는데?"

"...."

"재수사 허가는 떨어진 겁니까? 그쪽 서장이 알게 되면 그리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반협박성 발언에 고배수 반장이 입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그때.

"우린 주 대표님 건이 아니라, 다른 건을 수사하고 있어요."

동석하고 있던 이아영 본부장이 대신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누군가가 불법 헌터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아서요. 그리고 우린 그 사람이 강종구 의원님이랑도 연관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고요."

"...."

찰나의 순간,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증거는?"

강 의원은 이내 여유를 되찾으며 입을 열었다.

"그만한 사건에 나를 엮으려는 거면, 당연히 증거는 있겠죠?"

"...."

고배수 반장이 이아영 본부장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 또한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증거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꼬리를 잡지 못하게 마구 꼬아놓은 사건이다.

이 한 가지 일에 끌어들인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니고.

강 의원이 이번 일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결국 의혹일 뿐,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었다.

"참 나, 증거도 없으면서 그런 악의적인 음모성 발언을 막 내뱉어도 되는 겁니까?"

"...."

"더 대화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요. 전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결국, 강종구 의원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황급히 카페를 나서려던 그때였다.

"네, 하 본부장님."

때마침 이아영 본부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다름 아닌, 하성일 본부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이아영 본부장은 서둘러 그곳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제 누님이 전략사업부 쪽 사람한테 좀 알아봤는데... 맞는다고 합니다.」

이윽고 하성일 본부장의 목소리가 카페 전체에 울려 퍼졌다.

「미래민주당 쪽에서 푸시가 들어온 거 말입니다. 애초에 GT건설은 부산 쪽에 추진하려고 했는데....」

그는 이내 목소리를 더 낮춰 말을 이었다.

「미래민주당 쪽에서 로비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포항에 추진해달라고요.」

"그게 누구죠?"

「…강종구 의원.」

그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이아영 본부장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미 입찰 된 부지라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그 부분은 따로 도와줄 분이 계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누군지는....」

"거기부턴 제가 알아볼게요. 수고했어요."

「넵, 또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 주시고요.」

그렇게 통화를 마치자, 그곳에 있던 모두가 강종구 의원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있었다.

"어떻게, 이 정도면 증거가 될까요?"

"..."

"뭐, 지금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수갑 채울 이유는 될 것 같은데...."

이아영 본부장이 강 의원에게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이왕 가는 거, 곱게 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나,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결국, 궁지에 몰린 강종구 의원이 입을 열었다.

"다 그 사람이 시킨 겁니다! 그냥 도와준다고만 했지, 설마 사람까지 죽일 줄은 몰랐어요! 정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죠?"

"...."

강 의원이 침을 꿀꺽 삼키길 한 차례.

"미래민주당의 정훈 의원...."

그 이름을 내뱉었다.

동시에 이아영 본부장의 표정이 굳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길 잠시.

"뭐, 자세한 건 서에 가서 말씀하시죠."

이내 고배수 반장은 강종구 의원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 밖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그 순간.

쾅―!!!

어디선가 날아든 강력한 폭발에 이아영 본부장의 눈앞에서 두 사람이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