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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뭡니까?!"

포항의 한 대학 병원.

나는 이아영 본부장의 연락을 받고 곧바로 응급실을 찾았고, 초조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폭발 사고라뇨. 대체 무슨…?"

"모르겠어요. 고배수 반장이 강 의원을 연행하려던 순간에 갑자기 폭발이...."

그녀의 시선이 두 개의 침대로 향했다.

두 남자가 누워 있는 침대에는 온갖 기계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둘 다 의식이 없는 듯했고, 상태가 꽤나 심각해 보였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쪽이 강종구 의원은 어떻게 만난 겁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나름대로 알아보는 중이었어요. 마침 주 대표 시신이 발견됐고, 이능력을 쓴 정황이 확인돼서 불법 헌터 조직 건으로 관련 인물을 조사해보라고 강력반 반장님을 설득했죠. 그런데...."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뭐, 그녀 성격에 가만히 있으랬다고 정말 가만히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그녀 나름대로 움직일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이 타이밍에 갑자기 폭발 사고라니....'

그것도 최종혁 외에 유일한 연결고리였던 강종구 의원이.

이걸 과연 우연이라고 봐야 할까?

"그래도 알아내긴 했어요. 강 의원을 도와준 그 의원...."

"정훈 의원이죠. 알고 있습니다."

즉답하자 그녀가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최종혁이 헌터 조직의 지역구 팀장이더군요. 운 좋게 연락이 닿았고, 조금 겁을 주니까 어렵지 않게 이름을 댔습니다."

"그럼 역시 최종혁이 주 대표님을...."

"정황상 그렇겠지만, 아직 증거가 없습니다. 애초에 수사가 종료돼서 더 이상 파고들 수도 없고요."

"아니."

그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민유진이 입을 열었다.

"이건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어. 어떻게든 범인을 잡지 않으면 피해자가 계속해서 생길 거야."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라면서? 그럼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서장님을 설득해볼게."

"힘들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야 네 서장님도...."

그 말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고 반장 어디 있어?"

풍채 좋은 중년 남성이 응급실로 들어섰다.

민유진과 아는 사이인 듯한 그는, 익숙하게 그녀의 인사를 받고는 곧바로 침대로 향했다.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는, 이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돌렸다.

"포항 남부경찰서 지선웅 서장일세."

나와 이아영을 향해 다가오며 자신을 소개했다.

"서장님…?"

"내가 연락드렸어."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민유진이 대신 대답했다.

이내 지선웅 서장은 나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자네가 김준우 대표인가? 오면서 대충 이야기는 들었네."

"그렇습니까."

"그래서… 확실한 건가? 조 대표 사망 건이랑 불법 헌터 조직 운영, 리조트 사업이 전부 연관되어 있다는 거."

"하나 더 있습니다."

"뭐…?"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일어난 폭발 사고까지 포함입니다."

"...."

그 순간, 지선웅 서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나저나 서장이 직접 행차할 줄이야.

이렇게 되면 굳이 찾아갈 수고는 덜었지만, 수사 재개를 부탁하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훈 의원. 불법 조직원 중 한 명이 제게 알려준 이름입니다. 그 사람이 모든 사건의 중심이죠. 그런데…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지 않습니까?"

"...!"

"서장님에게 조 대표 건 수사 종료를 명령했던 분과 같은 이름이죠?"

내가 묻자, 그의 얼굴이 바싹 굳었다.

동시에 민유진을 비롯한 강력반 형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지선웅 서장은 그곳에 있던 이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모른 척 잡아뗄 것인지, 아니면 순순히 이실직고할 것인지 고민하는 듯한 표정.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더니.

"서장 자리라는 게, 참 애매해."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나도 젊었을 적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직접 이 자리에 올라오니 무시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게 생기더군."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자네 말이 맞아. 정훈 의원… 그 사람이 수사 종료를 지시했어. 윗줄을 잡고 직통으로 명령을 내려 버리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네."

"이해합니다. 출세를 앞두고, 굳이 중요한 인사와 척을 질 이유가 없죠. 다만...."

나는 그를 향해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

"정훈 의원은 꼭꼭 숨어있던 정체를 들켰으니, 어떻게든 수습하려 할 겁니다. 꼬리를 남겼다간 모든 혐의가 들통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가 정훈 의원의 혐의를 입증할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해봤자 최종혁과 강종구 의원을 수사하는 게 전부죠. 하지만 수사가 종료된 판국에 최종혁을 잡는 건 불가능할 테니, 남은 건...."

"강종구 의원...."

이아영이 나를 이어 대답했다.

그러자 서장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강 의원을 죽여서 꼬리를 자르려 했다? 아무리 그래도 현직 국회의원을 그렇게 멋대로...."

"실제로 어떻게 됐는지 보시죠. 우린 이제 정훈 의원에게 다가갈 연결고리를 모두 잃었습니다. 최종혁은 다시 모습을 감출 테고, 유일한 증인이던 강 의원은 저 꼴이 됐으니까요."

"그럼 이제 어떻게...."

"그런데, 정훈 의원이 한 가지 실수한 게 있습니다."

나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서장님의 분노를 샀다는 겁니다."

"...!"

그 순간, 지선웅 서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경찰이 공격받았습니다. 애초에 조 대표 건을 철저하게 수사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죠."

"...."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대로 부하의 희생을 발판 삼아 출세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떳떳하게 경찰로서 의무를 다하시겠습니까."

이걸로 승부수를 던졌다.

나머지는 지선웅 서장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내 말을 무시한다면 욕은 좀 먹겠지만 아마 앞으로 퇴직까지는 보장된 길이 열릴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아무런 보상이 없다. 오히려 자존심을 지키다가 퇴직까지 불구덩이를 걸어야 할지도 모르지.

누가 봐도 당연한 선택지였지만, 그럼에도 지 서장은 한참을 고민했다.

"...지금부터 조 대표 사망 건, 살인사건으로 돌린다."

응급실에 있던 경찰들을 향해 돌아서며 그가 입을 열었다.

"네, 네?"

"그 말씀은...."

"수사 재개해."

이윽고 그의 입에서 기다리던 명령이 떨어졌다.

"위 네 가지 건, 한 사건으로 묶고 특본팀 꾸려. 2반은 조 대표 실종 경위부터, 주변 인물 탐문까지 다시 시작해! 3반은 이분들의 증언을 토대로 불법 헌터 조직 추적하고, 정보팀은 GT건설 로비 건 알아봐!"

"네, 네!"

"아, 알겠습니다!"

"지원 아끼지 말고 가능한 모든 인원 투입해. 뭐 하고 있어! 빨리빨리 움직여!"

서장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지선웅 서장은 여전히 응급실에서 발을 떼질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나에게 할 말이 남은 듯했다.

"저…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아니나 다를까, 나를 바라보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정말 헌터 조직이라면… 우리 애들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걸세. 혹시 카르마에서 손을 좀 보태주실 수 있겠나."

"유감스럽지만, 이건 개인적으로 알아보고 있는 사건이라 공식적으로 작전팀을 투입하는 건 힘듭니다."

"...그런가."

그의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걱정과 불안이 뒤섞인 표정.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대신 휴가 중인 직원들을 한번 알아보죠."

"...!"

반색하는 서장을 뒤로하고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그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바쁘냐?"

「아뇨. 잘 놀고 계세요?」

"그럼, 아주 재밌어."

「....」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너 며칠 휴가 좀 내라."

「...네?」

"설명은 나중에 해줄 테니까, 지금 당장 포항으로 튀어와."

「네, 네.」

"아, 그리고 한유빈 씨도 데려오고."

조금 격해질 것 같으니까.

"그럼 지원군도 생겼겠다...."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으며 말을 이었다.

"모조리 쓸어버립시다."

222

수원에 위치한 어느 오래된 성당 건물.

본당은 꽤나 오래전에 다른 곳으로 이전한 듯, 낡은 건물만 남은 그곳으로 한 여성이 발을 들여놓았다.

"뭐야. 누구야?"

그와 동시에 성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십수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막 들어와?"

"길 잃은 거 아니야?"

"오늘 미사 없습니다. 돌아가십쇼."

남자들은 씨알도 안 먹힐 말로 여성을 내보려고 했다.

하지만 여성은 가볍게 무시하며 첫마디를 뱉었다.

"당신들 팀장, 지금 어디 있어요?"

"...?"

"너 뭐야?"

"경찰이야?!"

남자들은 그 한마디에 갑자기 돌변하며 여성을 둘러쌌다.

인상을 팍 쓰며 되지도 않는 위협을 했지만, 여성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흘겨볼 뿐이었다.

"…잠깐. 낯이 좀 익은데?"

그리고 그때.

"이 여자, 작전 본부장 아니야?"

한 남자가 뒤늦게 여성의 정체를 알아봤다.

"무슨 소리야?"

"카르마 작전 본부장이잖아, 병신아. 김민주!"

"어…? 진짜네?"

남자들은 예상치 못한 손님의 정체에 꽤나 놀란 듯했다.

하지만 금세 본인들의 상관이 아니라는 걸 어필하는 듯 이름으로 그녀를 불러댔지만, 여성은 오히려 반색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을 알아봤다는 건 오히려 본인들의 정체를 알려준 셈이었으니까.

'…제대로 찾아왔네.'

김민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들을 훑었다.

15명쯤 되는 인원.

하지만 그중에 팀장은 없다. 여기 있는 놈들은 끽해야 C, D급이었다.

'여기서 더 기다려야 하나…?'

물론 이곳에 있는 놈들이 그걸 순순히 허락해줄 리는 없겠지만.

"설마 우릴 잡으러 온 건가?"

"우리를 어떻게 알고?"

"다른 팀에서 꼬리 잡힌 거 아니야?"

"에이, 그럴 리가."

이내 그들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저들끼리 떠들어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뭐… 잘됐네."

"얼마나 실력이 좋길래 B급에서 1년 만에 그 자리까지 갔나 싶었는데."

"예전부터 계급장 떼고 한번 붙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오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망설임 없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김민주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무슨 휴가야....'

꽤나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놀러 간 게 아니라, 정말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도 정상적인 건 아니다만....

이러나저러나, 한유빈의 혜안이 감탄스러웠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우린 이미 헌터 자격 박탈된 놈들입니다."

"잃을 게 없는 놈들 상대로 괜찮을까 몰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여기 들어온 이상 살아서는 못 나가십니다, 작전 본부장님."

"재수도 없으시지, 하필 우리 팀을...."

"진짜 말 많네."

김민주가 그들의 말을 끊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이내.

"싸울 거면 닥치고 덤비세요."

그녀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순간,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조금 전의 부드러운 인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마치 전설 속의 신장(神將)을 마주한 느낌이다.

압도적인 무언가가 느껴진 것인지 남자들은 순간 주춤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하!"

"이게 진짜…!"

남자들은 전투태세를 갖추자마자 달려들었다.

김민주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호흡했다.

이윽고 시퍼런 검들이 무차별적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고유 스킬 : 이도류 - 공개처형]

[고유 스킬 : 귀검유희(鬼劍遊戱)]

[고유 스킬 : 접신 - 요하네스 리히테나워]

스슥―!

스스스슥―!!

하지만.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오(六觀音中五)]

[제5격 - 준세관음]

캉―.

카가가강―!

김민주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그 모든 검격을 막아냈다.

"뭐, 뭐야…?"

"마, 말도 안 돼...."

그 한 번의 합에 남자들은 크게 당황했다.

마치 모든 공격이 자동으로 그녀의 검에 달라붙는 듯한 느낌.

여태껏 경험해본 적이 없던 상황이었다.

"설마 전부 검사 클래스일 줄이야."

김민주도 퍽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흔한 클래스이긴 해도, 설마하니 한 팀 전체가 검사라니.

'다른 클래스는 어두운 쪽에서 일하기엔 눈에 띄고 흔적도 많이 남아서 그런가.'

하긴, 검사라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뭐, 뭐야. 낙하산 아니었어…?"

"우연이야 새끼야. 설마 이걸 다 막는 게 말이 돼?"

"이번에는 제대로 간다!"

이윽고 남자들은 다시 한번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다는 걸,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실책은 하나였다.

바로 헌터를 그만둔 지 꽤 시간이 지났다는 것.

그야 현직 헌터라면 절대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최근 그녀가 국내 최초 S랭크, 국내 랭킹 1위로 승급했다는 사실을.

"후우...."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일(六觀音中一)]

이윽고 김민주의 눈이 푸른빛으로 번뜩이길 한 차례.

[제1격 - 성관음(聖觀音)]

슥, 스윽―.

두 번의 고요하고 날카로운 검격이 허공을 갈랐다.

***

대전광역시, 버려진 목욕탕 건물.

온몸에 문신이 있는 이들이 물도 없는 욕탕에서 한창 식사 중이었다.

쾅―!

그때, 누군가 손으로 열 생각 따윈 없다는 듯 그대로 문을 걷어차며 들이닥쳤다.

"뭐, 뭐야!"

"시발, 누구야!"

그곳에 있던 이들은 때아닌 불청객의 등장에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 불청객은 그들에겐 관심도 없는 듯했다.

"웬일로 휴가 준대서 수영복까지 챙겨왔는데... 이게 뭐야."

왜인지 기분이 무척이나 언짢아 보이는 불청객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회사길래, 요즘 시대에 강제로 개인 연차 써서 일을 시켜? 그래 안 그래?!"

"...."

"...."

남자들은 다짜고짜 알 수 없는 이유로 화를 내는 그녀를 바라보며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아, 몰라. 마음대로 패줘도 상관없다고 했으니까, 이번만 그냥 넘어가 준다."

다음에도 이러면 얄짤 없이 노동청에 신고할 거다.

한유빈은 진심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패줘?"

"누굴? 설마 우리를?"

"꼬맹아, 좋은 말로 할 때...."

"아가리 닥치고."

한유빈은 그들의 말을 끊으며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현재 단 1분도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빨리 일을 끝내면 최소한 하루는 진짜 휴가를 보낼 수도 있을 테니까.

때문에 누구처럼 팀장의 소재를 파악하고 상대의 정보를 수집, 전략을 세우는 과정 따윈 쿨하게 생략했다.

뭐, 애당초 그녀에겐 필요 없는 일이긴 했지만.

"한꺼번에 덤벼."

이윽고 그녀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피로 물든 기류가 터져 나오며 공간 전체를 물들였다.

***

"의, 의원님!"

국회의사당, 미래민주당 정훈 의원 집무실.

정훈 의원의 보좌관이 그곳에 들어서며 다급하게 그를 찾았다.

"뭐야? 왜 그래."

정훈 의원이 눈썹을 치켜뜨며 묻자, 보좌관은 주변을 살피곤 목소리를 팍 낮추며 입을 열었다.

"지금… 각 지역 팀이 동시다발적으로 습격당하고 있답니다."

"...뭐?"

"아무래도 김준우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쯧, 결국 이렇게 나오는 건가."

정훈 의원은 혀를 차며 표정을 구겼다.

하지만 아직까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어차피 여기까진 예상한 일이니까.

당장 본인의 명백한 혐의가 드러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아직까진 카르마 코퍼레이션과는 관련 없는 일들뿐이다.

당연히 그들 또한 공식적으로 전력을 움직일 수는 없겠지.

'그래봤자 최측근 몇 명만 가세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하나하나가 괴물급 전력이다.

팀장급들이라면 몰라도 밑에 놈들이 그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애초에 그런 것 따윈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쓰다 버리는 말들이 아닌가.

그냥 말만 잘 듣도록 훈련만 잘돼 있으면 그만이다.

잔챙이들은 애초에 본인의 윗선이 누군지 모르고, 팀장급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불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조직을 소탕한다고 해도 그들의 우두머리가 본인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다.

'최종혁, 그 새끼만 닥치고 있었으면....'

정훈 의원은 아쉬운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뭐, 너무 걱정하진 마. 그보다 강 의원 건은 어떻게 됐나?"

"잘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경찰이 휘말렸다고 합니다."

"경찰?"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법 헌터 조직 건을 조사하고 있었다나 봅니다. 이건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경찰이 휘말리는 바람에 자칫하면 일이 커질 수도...."

"그럴 리는 없어."

"예?"

정훈 의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알잖나. 그쪽 서장, 나한테 꼼짝 못하는 거. 출셋길이 걸린 이상, 절대 일 크게 못...."

그때였다.

- 속보입니다.

TV에서 난데없이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포항에서 한 달 전에 실종됐던 세훈 화학 대표, 주세훈 씨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 당시 상황이나 정황으로 보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

정훈 의원이 그것 보라는 듯, 보좌관을 향해 턱짓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 부검 결과, 이능흔을 발견. 이능력자에 의한 타살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찰이 재조사에 착수했습니다.

"...?"

예상치 못한 내용에 정훈 의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한편, 주세훈 대표와 부지 입찰 건으로 마찰이 있었던 GT건설과 강종구 의원 또한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맡은 민유진 형사는 정치권과 기업 그리고 불법 헌터 조직 간의 유착 관계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보고 있다며 못을 박았습니다.

"무, 무슨...."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 뉴스에 정훈 의원이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 또한, 사건 관할인 포항 남부경찰서는 세 세력 간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 철저하게 조사하겠다고 밝히며, 특수본부를 꾸려 대대적인 수사에....

"이런 시발!!"

쾅―!

아나운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정훈 의원은 테이블을 내리쳤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내가 분명 수사 종료하라고 했잖아!"

"제, 제가 확인했을 땐 실제로 관할 내에서 수사가 종료됐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수사를 재개하는 건데!"

고함을 지르는 정훈 의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건 절대 지선웅이 독자적으로 내린 지시가 아니다.

그의 성격상 혼자 이런 대담한 선택을 할 리가 없다.

누군가가... 어떤 빌어먹을 누군가가 그를 설득한 것이다.

'김준우, 이 개새끼가....'

대체 뭘 어떻게 설득했길래, 출셋길까지 포기하게 만든 건가.

이내 정훈 의원의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건 위험하다.

물론 강종구 의원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한 혐의를 입증할 순 없겠지만, 그것도 결국 시간문제다.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면 언젠간 꼬리를 밟힐지도 모른다.

'시발,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던 그때, 정훈 의원은 결국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저장조차 되지 않은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미스터 정.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국제 협회 웨슬리 사무총장.

그에게 있어 마지막 보루나 다름없는 선택이었다.

"그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요?」

"김준우와 함께 경찰이 대대적으로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

"당장 위험한 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꼬리가 밟힐 수도 있습니다. 혹시 도와주실 수 있는지...."

정훈 의원이 말끝을 흐리자, 웨슬리 사무총장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내 친구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223

223

서울 서초동, 어느 회사 건물.

나는 여느 건물과 마찬가지로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그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겉보기엔 평범한 건물이지만, 어째 로비부터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기묘한 곳.

1층부터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현재 김민주과 한유빈은 동시다발적으로 각 지역의 불법 헌터 조직을 소탕 중이다.

물론 단 두 명이 전국에 있는 조직을 전부 소탕하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기에, 민유진 팀 또한 손을 보태주고는 있지만....

형사들이라곤 해도 일반인이지 않은가.

이능력자를 상대하기엔 이래저래 위험했기에 소재 파악이나 기타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중점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탕 작전과 더불어 주 대표 청부 살인, GT 건설 로비, 불법 부지 계약 등… 관련된 모든 사건이 대대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경찰 교사, 국회의원 테러 등등, 뒷골목에서 벌인 온갖 일들이 언론을 타기 시작했다.

당연히 인터넷 또한 난리가 났고, 이 모든 사건을 지휘한 '어느 높은 분'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렇듯 사방에서 포위망이 좁혀지는 중이다.

꼬리가 밟히는 건 시간문제겠지.

'뭐, 이렇게 되면 정훈 의원도 뒤에서 잠자코 있진 않겠지만.'

자신의 목을 조여 오는데, 언제까지 숨어만 있을 순 없을 것이다.

분명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려고 하겠지.

'일단 가장 첫 번째로....'

헌터 조직을 숨기는 것.

애초에 밑에 놈들은 윗선과 접점이 없다.

팀장급을 잡는 게 아닌 이상 정훈 의원의 혐의는 입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팀장들만 한데 모아 대피시켜 놓으면 급한 불은 끌 수 있다.

하지만 김민주와 한유빈이 벌써 각각 3개의 팀을 박살 냈음에도 팀장들은 찾지 못했다.

그 말은 즉.

"어딘가에 단체로 숨어 있다는 거지."

18층 높이의 빌딩.

3층, 간판도 달려 있지 않은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뭐야?"

"기, 김준우…?"

"김준우가 여길 어떻게…!"

그곳에 한데 모여 있던 이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정훈 의원 명의로 된 건물을 죄다 뒤져봤습니다. 뭐, 단체로 몸을 숨기려면 사람이 많은 곳이 제일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나는 빠르게 있는 이들을 훑었다.

15명쯤 되는 인원에, 대부분이 처음 보는 얼굴들.

내가 얼굴을 모른다는 건 그만큼 경력이 길지 않다는 뜻일 테니 해봐야 B급들이겠지.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낯익은 놈이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최종혁 씨."

"...."

다름 아닌, 최종혁이었다.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당신 부하들은 죄다 잡혀 들어가고 있는데."

"그놈들은 백날 잡아가도 아무것도 못 건져"

"알고 있습니다. 뭐… 여기 있는 분들한테 건지면 되죠."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각 지역 팀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그 모습에 난 헛웃음을 뱉었다.

이쪽 일에 너무 심취한 건가.

본인들이 뭐라도 되는 양, 상대도 못 알아보고 이빨을 드러내는 꼴이... 꽤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최종혁이 혼자 내 앞으로 나섰다는 사실이다.

"선배님들은 세이프 하우스 발각됐다고 의원님한테 전해주십시오."

"무슨 개소리야!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너 혼자 나서?"

"여기 있는 인원이 전부 싸우면 분명 사람들 눈에 띌 겁니다. 애초에 저놈한텐 개인적으로 볼일도 있고. 무엇보다...."

이내 최종혁이 내게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청소부 출신 상대로 여러 명이 필요하겠습니까?"

"...."

나는 대답 대신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이내 팀장들은 그의 말이 꽤 일리가 있다고 느낀 건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러네."

"그럼 부탁한다."

"의원님께 연락해둘 테니, 끝나면 바로 합류해."

그 말과 함께 팀장들은 나를 가로질러 먼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도망가는 녀석들을 보고도 나는 굳이 쫓지 않았다.

이윽고 모두가 빠져나간 후, 단둘이 남게 된 사무실.

"기억나십니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 실기 시험 때, 제 실력을 보고 싶다고 하신 거 말입니다."

"그랬었지."

"그때 제가 언젠가 보여줄 날이 올 거라고 했었죠. 아무래도... 오늘이 그날인가 봅니다."

외투를 벗고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운 나쁘게도."

[고유 스킬 : 마왕]

검은 기류가 사무실 전체로 퍼져나갔다.

***

쿠구구구구―!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기류가 터져 나오는 순간, 최종혁은 반사적으로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 기류가 피부에 닿자 온몸이 저릿저릿해졌다.

'뭐, 뭐야…?!'

엄청난 기세.

생각지도 못한 분위기에 그는 퍽 당황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소문… 네가 퍼트린 거냐?"

김준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소문?"

"내가 김민주한테 들이댔다가 까였다는 거."

"아, 그거...."

김준우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었다.

"사실 아니었습니까?"

대놓고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조롱했다.

최종혁은 이를 뿌득, 씹었다.

저 새끼 때문에 어떤 시선을 받아야 했는지, 어떤 말을 들으며 다녀야 했는지 생각하면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다 저 새끼 때문이다.

저 새끼만 아니었으면 이전처럼 헌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저 새끼만 아니었으면 예전보다 훨씬 잘 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밑바닥 생활을 하진 않았겠지.

"다 너 때문이라고, 이 개새끼야!"

[고유 스킬 : 블리자드 피닉스]

사아아아―.

최종혁의 분노에 맞춰, 냉기에 휩싸인 커다란 불사조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곧바로 크게 날갯짓을 하며 얼어붙은 깃털을 쏟아냈다.

"그거 아십니까?"

하지만 김준우는 그 거대한 얼음송곳들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실력도, 힘도 없으면 함부로 이빨을 드러내는 게 아닙니다."

"…뭐?"

"상대를 보고 까불라는 거야, 이 멍청한 새끼야."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각성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시전자는 기존의 클래스를 초월합니다.]

김준우의 형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각성 클래스 : 절대 군주]

[시전자는 차원의 힘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무, 무슨!!"

최종혁의 몸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공포보다 분노가 조금 더 앞선 듯했다.

"시, 시발, 죽어!!"

[고유 스킬 : 블리자드 피닉스]

콰과과광―!

스킬을 쏟아부었다.

사무실이 크게 흔들릴 정도의 충격과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김준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먼지 속을 걸어 나왔다.

방금 그 어떤 공격도 김준우의 털끝에도 닿지 못한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장비가 생성되었습니다.]

[마검 : 타르타토스]

[마갑 : 악몽의 베네]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형상.

그야말로 악마, 그 자체였다.

[소환 : 군단]

끄그그극―.

까각, 까가각―.

그와 동시에 바닥에 깔린 검은 기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마물들.

최종혁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잘못 생각했다.

이길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 살려… 살려줘...."

그 절대적인 강함 앞에서, 최종혁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 계속해서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와 함께 바짓가랑이에서 소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실력도 없으면서 어쭙잖은 악당 흉내 내지 마십쇼."

김준우가 검을 높게 치켜든 순간, 그의 검고 공허한 눈빛이 최종혁을 관통했다.

"안 어울리니까."

스윽―.

검이 허공을 가르길 한 차례.

18층 건물이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

"하아...."

"아오, 시발…!"

팀장들은 서둘러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빌어먹을, 어떻게 이렇게 금방 찾은 거야?"

"그러니까!"

"그나저나 최종혁, 그 새끼 혼자서 괜찮으려나."

"괜찮겠지. 듣자 하니 그놈 B랭크까지 승급할 뻔했다면서."

"그런데 김준우도 만만치 않다잖아.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거 보면 A랭크 수준이라던데."

"그걸 믿냐? 기업 총수가 과대 마케팅하는 거지. 청소부 출신이 A랭크가 말이 되냐."

"하긴… 생각해 보니까 그놈이 전투하는 걸 직접 본 적은 없네."

"그놈 협회에 있었을 때도 작전 기획이랑 전략 때문에 본부장까지 올라간 거잖아. 혼자서 어딜 다 쓸어버렸다느니, 다 언론 플레이야."

팀장들은 저들끼리 떠들어대며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든 좋게 해석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어쨌든 빨리 의원님께 연락을...."

쾅―!!!!

"...?!"

"뭐, 뭐야?!"

조금 전까지 본인들이 있던 건물이 두 동강이 난 것이다.

"뭐야 시발! 무슨 일이야?!"

"설마 최종혁이…?"

"크하하! 역시 B급은 다르네!"

하지만 어째선지 자축을 하는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아직도 여기들 계시네."

김준우 대표였다.

"...어, 어떻게."

"다,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건 최종혁이...."

팀장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사색이 됐다.

건물을 빠져나온 게 김준우라는 사실보다, 건물이 두 동강 날 정도의 전투에서 먼지 하나 안 묻은 모습이라는 것에 더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빌어먹을…!"

"다 무기 꺼내!!"

모두가 서둘러 전투태세를 갖췄다.

김준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허튼짓하지 마십쇼.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당신들한테는 가망이 없으니까."

"뭐, 뭐…?"

"설마 혼자서 우리를 이길 수 있다는 거야?!"

"그것도 그렇긴 한데… 굳이 안 싸워도 어차피 당신들은 살 수 없습니다."

김준우의 그 말에 팀장들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표정들.

김준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 수장, 정훈 의원은 국제 협회와 손을 잡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았으면 곱게 보내주는 게…!"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장담하는데, 당신들 이대로 정훈 의원한테 가면...."

김준우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다 죽습니다."

"...?"

"...뭐, 뭐?"

김준우는 아비규환이 된 건물 앞에서 주변을 슬쩍 둘러보곤, 빠르게 입을 열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경찰은 대대적으로 수사를 시작했고, 언론과 인터넷에도 모두의 관심이 쏠려 있죠. 물론 당장 정훈 의원의 혐의를 입증할 순 없겠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로 팀장급들을 숨기는 것으로 급한 불은 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언제까지 십수 명의 인원을 숨겨둘 수도 없으며, 수사가 계속되는 한 언젠간 반드시 꼬리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국제 협회에 도움을 요청하겠지.

그럼 국제 협회가 이 상황에서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그게 바로 세 번째 수단.

"그들은 우선... 꼬리를 끊어 버리겠죠."

김준우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약속 장소로 가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정훈 의원이 아니라, 국제 협회 소속의 암살자들일 겁니다."

"...!"

"...!"

어차피 길바닥에 돌아다니던 개를 주워 쓴 것뿐이다.

쉽게 손에 넣은 만큼, 쉽게 버릴 수도 있는 존재.

처리한다고 한들 뒤탈도 없을 것이고, 딱히 아쉬울 게 없다.

언제든 새로 구할 수 있는 이들이니까.

"선택하십시오. 끝까지 충성을 맹세하며 개죽음당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순간, 김준우의 눈이 번뜩였다.

"주인을 물겠습니까."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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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외곽, 공사가 중단된 어느 건설부지.

정훈 의원은 초조한 얼굴로 팀장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곳은 벌써 몇 년째 방치된 탓에 꽤나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주위 풍경 또한 퍽 흉물스럽기 그지없었다.

술을 마시러 몰래 침입하는 고등학생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접근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에 이곳을 합류 장소로 정한 것인데....

'왜 안 오는 거야....'

어째선지 시간이 지나도 팀장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김준우에게 세이프 하우스가 들켰다고 연락 온 게 벌써 30분 전이다.

아무리 늦는다고 해도 충분히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지 않은가.

설마 경찰에 잡히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굳이 김준우가 직접 행차했다는 건 그들에게 볼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그가 바로 경찰을 부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대체 왜....'

정훈 의원은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때.

"오는 거 맞습니까?"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오, 올 겁니다."

"30분이나 지났잖아요. 한번 연락이라도 해보시죠."

그 남자의 말에 정훈 의원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팀장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돌렸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 누구도 받지 않았다.

"쯧, 뭔 일이 생기긴 한 모양이네요."

남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동시에 정훈 의원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의 이름은 황동휘.

현 PB 코퍼레이션 밸런스 조정팀 소속으로 일본 파트장을 맡고 있었다.

웨슬리 사무총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는 꼬리를 자를 수 있도록 적임자를 보내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파견된 자가 바로 저 남자였다.

주워 쓰던 개들을 한꺼번에 처리해줄 적임자.

물론 황동휘 파트장은 이전 한국에서 도망치면서 다신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을 거라 다짐했지만, 상부의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마 김준우랑 충돌한 건… 아니겠지요."

정훈 의원은 한참 어린 그에게 존대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입니다. 어차피 죽을 놈들이지 않습니까."

"...."

황동휘 파트장의 말이 꽤나 무서웠던 건지, 정훈 의원은 애써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누가 죽이든, 결과만 같다면 상관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시발, 불안한데....'

정훈 의원은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자꾸만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실루엣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 박 팀장?"

다름 아닌 수원 지역 팀장, 박정우였다.

정훈 의원은 한 번에 알아보곤 곧바로 그에게 다가갔다.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왜 혼자 와? 다른 놈들은?"

"의, 의원님...."

그때, 박 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뭐…?"

알 수 없는 사과를 내뱉은 그 순간.

"오랜만입니다. 정 의원님."

"...!"

"...!"

정훈 의원도, 황동휘 파트장도 오랫동안 잊고 지낸 남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대표이자, 현 대한민국 토벌의 총 책임자.

그리고 국제 협회로부터 전 세계 헌터 관리 권한을 빼앗아간 남자.

김준우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황동휘 파트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곤 순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간만에 보는 얼굴이 있네."

"...."

두 남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날 잡으러 온 건가…?"

정훈 의원이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김준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유감스럽게도 아직 혐의 입증이 안 됐습니다. 뭐, 조만간이긴 하겠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온 건 아닙니다."

"그럼…?"

"제안을 하나 드릴까 해서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갑자기 제안이라니...."

"포항에 있는 탐지 시설, 정 의원님 계획대로 이전할 생각입니다."

"...!"

그 순간, 정훈 의원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걸 어떻게...."

"설마 제가 목적도 모르고 의원님을 잡으려고 했겠습니까."

김준우가 미소를 짓자, 이내 정훈 의원의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의원님이 국제 협회에서 받은 지령, 제가 들어드리겠다는 겁니다. 그럼 국제 협회와의 관계도 유지할 수 있겠죠. 여기서 추하게 잡혀가시는 것보단 그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모, 목적이 뭔가...?"

정훈 의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이런 제안을 할 이유가 없다.

만약 목적이 있다면, 분명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속셈이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김준우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습득 스킬 : 소환 - 수어사이드 구울]

콰과광―!!!

강력한 폭발이 김준우에게 직격했다.

"파, 파트장님?!"

정훈 의원이 놀란 표정으로 황동휘 파트장을 바라봤다.

줄곧 잠자코 있던 그가 난데없이 김준우를 공격했으니까.

"듣지 마십쇼."

이내 그가 전투태세를 갖추며 말했다.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겁니다. 그리고 뭐가 됐든,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저희한테 죽습니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듣지 마시고…!"

"역시 황 대리, 눈치는 빠르네."

저벅―.

머지않아, 피어오른 연기 속에서 김준우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알았다고 해도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멋대로 끼어들면 안 되지."

"무슨 수작인지는 몰라도 당신 마음대로는 안될 겁니다."

"방해하려고?"

"네."

"하하하!"

이내 김준우가 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그러다 죽어."

[고유 스킬 : 마왕]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모습이 바뀌었다.

***

내 앞을 가로막은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황동휘 대리.

전 이능차원관리 협회 통제팀 소속이자, PB 코퍼레이션 밸런스 조정팀 한국 파트장.

최호성 본부장을 살해한 범인이자, 양민호와 함께 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놈.

당연히 회귀 전 나는 그가 스파이인지도, 이능력자인지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아마 나에 대한 정보를 팔아넘긴 게 저놈이겠지.

당장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이지만....

'어째 요즘 따라 영 귀찮네....'

회귀한 지 1년이나 지나서 그런가.

요즘엔 복수니, 뭐니 하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그보단 어떻게 하면 국제 협회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뿐.

뭐, 하지만.

[고유스킬 : 마왕 - 독재자]

쿠구구구구―.

그렇다고 굳이 살려둘 필요도 없겠지.

"무엇보다 둘이 이야기하는 데 방해되고."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홀리 피스트]

파앙―!!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 엄청난 충격이 그의 복부를 관통했다.

"…쿨럭!"

이내 그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방금 공격으로 배에 머리통만 한 구멍이 났는데....

[고유 스킬 : 이터널 리턴]

스스스슥―.

살이 꿈틀거리며 곧바로 그 구멍이 메워졌다.

"후우...."

다시 숨이 돌아온 그가 깊게 호흡했다.

"별 해괴망측한 꼴을 다 보네."

꽤나 징그러운 모습에 나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꽤나 주춤하고 있었다.

네크로맨서.

대개는 사령이나 구울을 소환하는 클래스지만, 본인을 죽음에서 불러올 수 있는 고유 클래스.

언다잉.

"PB 코퍼레이션이 물갈이를 했는데도, 왜 제가 살아 있는지 아십니까?"

황동휘 파트장이 입을 열었다.

"절 죽일 수 없어서입니다."

"...."

"그런데, 당신이 절 죽이겠다고요?"

참 나.

내 살다 살다 저런 스킬을 다 보네.

기가 찬 얼굴로 헛웃음을 터트린 순간.

[고유 스킬 : 이터널 리턴]

[소환 - 데스 엔젤]

카가가가각―!

허공으로 거대한 낫을 든 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

불사 클래스에 사신 소환까지?

'이 정도면 네크로맨서 클래스 중에선 최상위 랭크겠군.'

내심 감탄하고 있던 사이.

서걱―.

사신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낫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공사 중이었던 건물이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

그 공격에 난 속으로 당혹했다.

생각보다 꽤 강력한 공격인 탓도 있지만, 그보단 막지 않은 낫이 어째선지 내 몸을 그냥 통과한 까닭이었다.

"역시...."

그때, 황동휘 파트장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왜 공격이 통하지 않은 건지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저놈의 능력이... 내 능력이랑 근본적으로 같은 힘이라는 것을.

'상성이 좋지 않네.'

나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저놈은 나를 죽일 수 없다.

하지만 그 말은 곧, 나 또한 저놈을 죽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로 죽일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이건 오히려 나한테 불리하다.

나는 어떻게든 정훈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녀석을 처리해야 하지만, 저놈은 정훈 의원이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만 끌면 그만이니까.

'어떻게 해야 한담....'

잠시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 순간.

[고유 스킬 : 이터널 리턴]

[소환 - 데스 엔젤]

[데스 페널티]

스스스슥―!

사신의 낫이 숨 쉴 틈 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내가 아닌, 내가 딛고 있는 바닥을 향해서.

'떨어트려 죽이겠다 이건가?'

타다닷―!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며 무너져내리는 바닥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놈을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빌어먹을....'

이를 으득 씹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만난 상대 중에서 제일 까다로울지도 모른다.

조금씩 무너지는 건물에서 이리저리 몸을 피하고 있던 그때,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도망가고 있는 정훈 의원이 보였다.

젠장, 여기서 놓치면 다 끝장이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이내 제자리에 멈춰 서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황동휘 파트장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포기한 겁니까?"

"응."

인정해야 한다.

나는 저놈을 못 이긴다.

그러니.

"이아영 씨, 준비한 거 꺼내시죠."

다른 방법을 써야지.

「알았어요.」

이윽고 무전기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피융―!

"...!"

이내 어디선가 날아든 총알이 그의 어깨에 정확히 박혔다.

하지만 황동휘 파트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기껏 생각해 낸 게 저격입니까?"

"...."

"천하의 김준우도 한물갔네요. 타이탄을 가져와도 날 죽일 수는 없…!"

그리고 그 순간.

"커억…!"

그가 피를 토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난 천천히 당황한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곧바로 다시 사신을 소환하려고 했지만....

"뭐, 뭐야…?"

생각대로 스킬이 발동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너희들이 선물해줬잖아."

녀석의 의문에 답하며 주머니에서 은회색 작은 총알을 하나 꺼내 보였다.

익숙한 물건을 본 황동휘 파트장의 동공이 커졌다.

"서, 설마 반능석…?"

"너희도 가공해서 쓰는데 우리라고 못 할 거 있나?"

그의 얼굴에 총알을 던졌다.

"마, 말도 안 돼.... 당신들이 뱅크 아이템을 가공할 수 있는 기술력이 있을 리가…!"

"영광인 줄 알아. 우리 이클립스 총 책임자님께서 심혈을 기울인 물건이니까."

"이, 이건 반칙…!"

"지랄하고 있네, 실전에 반칙이 어디 있어?"

[고유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나는 손가락을 그의 이마에 가져다 댔고.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원샷 원킬]

파앙―!

작은 총성과 함께 황동휘 파트장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225

225

"자, 그럼 방해꾼도 사라졌겠다...."

공사가 중단된 건물 한구석에서 말없이 몸을 늘어뜨린 황동휘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정훈 의원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겁에 질린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야기를 계속해보죠."

"사, 살려...."

"걱정 마세요. 말씀드렸다시피, 의원님이 원하는 대로 해주려는 거니까."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대, 대체 뭘 바라는 건가. 미리 말하지만 나는 그냥 국제협회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야. 그쪽 정보라면 나도 아는 게...."

"아뇨. 그들이 의원님에게 부탁하는 일들, 그 자체만으로 저에겐 정보가 됩니다."

"뭐, 뭐…?"

"이번에도 보시죠. 꽤나 배배 꼬았지만 결국 목적은 우리 쪽 탐지 시설을 없애는 것이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 지금 그들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죠."

"...."

천천히 말을 이었다.

"국제협회는 지금 꽤 절박한 상황입니다. 수십 년간 준비해온 계획도 물거품 됐고, 거기에 우리는 그들 뒤를 바짝 쫓아가는 중이죠."

"그래서...."

"궁지에 몰린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입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쟁."

"...!"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다는 듯, 그는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의원님 외에도 국제협회와 손을 잡은 이들이 몇 명이나 더 있을 겁니다. 의원님이 잡혀 들어가면 그들에게 지령이 내려오겠죠. 그럼 또 우린 그들을 찾기 위해 수고를 해야 하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럴 바엔 그냥 의원님이 계속해달라는 소립니다."

"그, 그럼 날 풀어주겠다는 건가…?"

그 말에 미간을 좁혔다.

"무슨 착각을 하시는 겁니까. 의원님은... 사람을 죽이셨잖습니까. 아무 잘못도,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을."

"...."

"어디서 파렴치하게 도망갈 생각을 하십니까."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낡은 핸드폰을 던져주었다.

"추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진 조용히 기다리고 계십시오."

그 말을 뒤로 한 채, 나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

프랑스 파리,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연락이 안 오는군요."

묵묵부답인 전화기 앞에서, 웨슬리 사무총장이 답답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러자 수행비서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김준우한테 들킨 게 아닐까요?"

"흐음...."

아직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만약 김준우가 눈치챘다면 이제 정훈과는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겠지.

'일 하나는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아쉽게 됐군.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 드디어 전화벨이 울렸다.

「사, 사무총장님.」

기다리던 목소리에 웨슬리 사무총장이 반색했다.

"미스터 정! 마침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잘 빠져나왔습니까?"

「아뇨. 아무래도 구속은 피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워낙 언론에도 크게 퍼진 사건이라....」

"그럼 제가 부탁한 일은…?"

「탐지 시설 건은 문제없이 진행될 것 같습니다. 제 혐의는 불법 헌터 조직 운영이고, 리조트 사업 건은 입증할 수 없을 겁니다.」

"다행이군요. "

웨슬리 사무총장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뭐, 구속은 걱정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빼 드릴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황동휘 파트장은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도 연락이 안 되던데."

「아, 그게....」

정훈 의원이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길 잠시.

「주, 죽었습니다.」

"…죽었다고요?"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대체 누가 그를 죽일 수 있다고?

「기, 김준우가 무슨 수작을 벌인 모양입니다.」

"김준우가요…?"

「네, 네.」

"당신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순간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니까… 김준우가 당신을 찾아왔는데, 기껏 황동휘 파트장까지 죽여 놓고 당신을 풀어줬다?"

「...네.」

그 얼토당토않은 대답에 웨슬리 사무총장은 하아, 한숨을 토해냈다.

"미스터 정."

그리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저한테 숨기는 게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절 속이려는 거면...."

웨슬리 사무총장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 죽습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 가족들까지 모두."

「....」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리길 한 차례.

「기, 김준우는 저한테 경고하기 위해서 찾아온 거였습니다. 도망갈 생각 말고 죗값을 치르라고.... 그 자리에서 잡지 않은 걸 보면 아직 혐의 입증은 안 된 모양이었습니다.」

"그런가요...."

「그리고 황동휘 파트장은... 지난 일에 대한 복수라고....」

웨슬리 사무총장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알겠습니다. 일단 상황 지켜보고 다시 연락드리죠."

「네, 네.」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웨슬리 사무총장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거짓말인 것 같군요."

수행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우가 직접 행차했다는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섭니다. 경고나 하자고 찾아갈 놈이 아니죠."

"그와 거래를 한 걸까요?"

"그렇겠죠. 뭐… 탐지 시설을 이전해줄 테니 앞으로는 본인에게 보고하라고 했다거나."

뻔하군.

웨슬리 사무총장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럼, 정훈 의원은 처리해둘까요?"

"아뇨. 그러면 김준우는 또다시 다른 놈을 조사하려 들겠죠. 살려두고 이용하는 편이 우리한텐 더 좋을 겁니다."

그가 널브러진 서류를 훑었다.

정훈 의원을 비롯한 여러 명의 프로필이 담긴 서류였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정훈 의원의 서류를 집어 들곤 부욱 찢었다.

"앞으로 정훈 의원한테는 별개 지령을 내리세요."

"네?"

"중요한 정보처럼 보이지만, 시간과 돈만 쓰게 만드는 그런 지령 말입니다."

이내 수행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

작전 개시 나흘째.

- 오늘 오전 7시, 불법 헌터 조직에 연루된 총 152명의 전직 헌터들이 모두 입건되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사건의 종료를 알리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아는 내용이었기에 귀담아듣지 않고 채널을 돌렸다.

- 비밀리에 불법 헌터 조직을 운영한 정훈 의원이 또다시 입건되었습니다. 미래민주당 소속 정훈 의원은 몇 달 전 한별 그룹 하성태 본부장과의 뇌물 수수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무혐의 처분을 받으며 풀려난 것으로....

삑―.

- 하지만 경찰 당국은 정훈 의원과 GT건설 사이에 유착 관계가 있었다는 주장은 아직 이렇다 할 증거가 없는 것으로 발표했습니다. 더불어 조 대표 살인사건의 범인은 최종혁 전직 헌터로 밝혀진 가운데, 정훈 의원이 사주한 일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각 채널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뉴스의 내용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내 텔레비전을 껐다.

지선웅 서장처럼, 이미 정훈 의원의 손이 닿은 인사들이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상황이다.

그들이 힘을 쓰고 있는 이상, 리조트 사업 건과 정훈 의원을 엮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조 대표를 죽이라고 사주한 것도 입증할 수 없겠지.

처음부터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그와 거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선.

"그나저나… 정훈 의원이 국제협회를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까요?"

그때, 옆에서 같이 뉴스를 보던 이아영 본부장이 넌지시 물었다.

"사무총장도 눈치가 장난이 아닐 텐데, 나중에 들키면 괜히 더 곤란해지는 거 아닐까 몰라."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실소를 뱉었다.

"이미 들켰을 겁니다."

"...?"

"당연하겠죠. 내가 그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냥 풀어줬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요. 분명 저와 거래했다는 걸 눈치챘을 겁니다."

"그, 그럼 정훈 의원에게 더는 지령을 내리지 않을 텐데요?! 다 무용지물인 거 아녜요?!"

"아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령은 계속 내릴 겁니다. 본인들이 눈치챘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요. 다만… 별 의미 없는 지령이겠죠."

"...."

이아영 본부장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뭐, 그렇게 국제협회의 가호를 받는다고 착각한 채, 의미 없는 지령에 힘을 쏟다 보면... 결국엔 스스로 파멸할 겁니다."

"자, 잠깐만요. 그럼 정훈 의원이랑 거래한 게...."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죗값은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사회가 그를 처벌하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겠죠."

"...."

"아마 그 인간, 몇 달만 지나면 가지고 있던 인맥도, 돈도 모두 탕진한 채 밑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을 겁니다."

이아영 본부장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럼… 이제 이걸로 다 끝난 거예요?"

"설마요. 아직 여기저기에 국제협회의 지령을 받는 놈들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놈들을 모두 찾아서 뿌리를 뽑아야죠."

"어느 세월에요? 설마 이 짓을 계속하자고요?"

"이제 휴가도 거의 다 끝났는데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나는 뒤통수에 두 팔을 가져다 대며 말을 이었다.

"뭐, 그래서 그쪽 일을 담당해줄 새로운 팀을 꾸려볼까 합니다."

"토벌도 벅찬데 인원을 어디서 찾을 건데요?"

"봐둔 곳이 있습니다."

"어디요?"

"뭐, 자세한 건 허가가 나면 말씀드리죠."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김이 샜다는 듯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쏘아봤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지금 이야기했다간 질색을 하며 기를 쓰고 반대할 게 뻔하니까.

"아무튼, 휴가 하루 남았으니까 푹 쉬시고...."

똑똑―.

그때, 누군가 노크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섰다.

다름 아닌 민유진이었다.

"...."

"...."

이아영 본부장은 그녀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으니 자리 비켜드릴게요. 두 분이서 대화 나누세요."

"...."

"전 신경 쓰지 마시고요. 정말로."

이아영 본부장은 끝까지 쿨한 척 웃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이윽고 둘만 남게 된 사무실.

"…수고했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덕분에 불법 헌터 조직 건은 완전히 마무리됐어. 정훈 의원도 구속될 거고."

"아쉽진 않아? GT건설 로비 건이랑 주 대표 살인 청탁 건까진 못 엮었잖아."

"그거야 어쩔 수 없지 뭐."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음을 뱉었다.

"이번 건으로 나도 승진할 것 같아."

"잘됐네."

"...고마워."

나지막한 그 목소리에 나는 잠시 주춤했다.

괜히 불길한 기분이 든 까닭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저번에 네가 다시 잘해볼 생각 없냐고 물어봤지?"

"...."

점점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아,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나는 애써 긴장한 기색을 감추며 대답했다.

"그, 그랬지."

"내가 생각해봤는데...."

시선을 돌리며 말끝을 흐리길 한 차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안 될 것 같아."

그녀가 웃으며 그 말을 전했다.

동시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쏟아냈다.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안 돼."

"뭐, 그럼 됐어."

우리는 그렇게 마주 본 채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뭐, 또 도움 필요하면 연락할게. 다음 분기부터는 작전팀 지원해볼 생각이니까 잘 봐주면 더 좋고."

"...."

이게 목적이었나?

회귀 전이나 후나 여전히 집요하군.

'작전팀이라....'

내가 직접 본 그녀는, 확실히 강했다.

어쭙잖은 E, D급 헌터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다.

"아무튼, 난 이만 가볼게."

그렇게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그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또다시 회귀 전 리젠 던전 때의 일이 눈앞에 드리웠다.

그래, 저 녀석은 강하다.

하지만 이곳은 그녀보다 수십 배, 수백 배 강한 놈들도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는 곳이다.

리젠 던전 출현 때 죽어 나간 그 수백 명의 헌터들도 충분히 강한 놈들이었으니까.

그들이 결코 약해서 죽은 게 아닌, 단지 그런 곳일 뿐이다.

A, S랭크조차 허무하게 죽어 나가는 곳.

하지만 나는 그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설득하고 회유하려고 한들, 저 녀석의 고집을 절대 꺾을 수 없다는 걸.

그러니....

"민유진."

나는 사무실을 나서던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

그녀가 눈을 끔뻑이며 나를 돌아봤다.

나는 싸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너 불합격이야."

226

226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대표이사실.

"예, 김준웁니다. 다름이 아니라 일전에 말씀드렸던 신설팀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을 좀 해보셨습니까?"

나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정훈 의원처럼 아직 남아 있는 국제 협회의 연결책들을 찾기 위한 팀.

그 새로운 조직을 꾸리기 위해선 이곳저곳의 허가가 필요했다.

원치 않게도 휴가 마지막 날까지 온갖 곳에 전화를 돌려야 했다.

이윽고 대한민국 최고 결정권자에게까지 연락하게 됐다.

「보내주신 기획서는 검토해봤습니다. 뭐… 대표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응당 필요한 것일 테니, 장관들을 어떻게든 설득해볼 수는 있겠지만....」

조현민 대통령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해당 팀을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거야 제가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대표님이 직접 관리하시겠다고요? 정훈 의원이 그렇게 잡혀가는 거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십니까?」

"...."

의외로 꽤나 강경한 입장이었다.

「아시겠지만, 대표님이 만들려는 팀은 명백히 불법입니다. 치외법권을 주었다는 게 세간에 알려지면 정말 걷잡을 수 없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조심하려는 거고요."

「그렇다면 더욱이 카르마 코퍼레이션과는 분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움직일 수 있는 관리자를 구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 그쪽 업계 사람이면 더 좋고요.」

"그게 뭐 제가 구하고 싶다고 구해지겠습니까."

「제 역할은 허가를 내주는 것뿐이지, 그 이상은 대표님께서 직접 하셔야 합니다. 아무튼, 직접 관리하는 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귀찮게 됐다.

애써 한숨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팀원은 어디서 구하실 예정입니까?」

"딱 좋은 곳이 있지 않습니까."

「역시 거기서 직접 데려가시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그쪽 기관에 연락을 넣어두겠습니다. 그쪽에서도 허가가 나면 한번 찾아가 보시지요.」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전하며 통화를 종료했다.

이걸로 준비는 다 됐다.

나머진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지.

"하아...."

아침부터 여기저기 전화를 하느라 기가 다 빠진 탓에 나도 모르게 힘이 스르륵 풀렸다.

그렇게 잠시 의자에 반쯤 누워 멍을 때리고 있던 그때.

"오늘 휴가 마지막 날인데 놀러 좀 가죠?"

한유빈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목소리를 높였다.

…쉴 시간도 안 주는구먼.

"설마 휴가 끝날 때까지 일만 시킬 생각은 아니죠? 그럼 저 진짜 노동청에 신고할 거예요."

"…누가 보면 그쪽만 일 시킨 줄 알겠습니다. 저도 일 하고 있는 거 안 보입니까."

"뭔 일이야. 멍 때리고 있었으면서."

"...."

미친 건가?

"놀러 갈 거면 혼자 가면 되지, 굳이 같이 갈 필요가 있습니까?"

"다 같이 쉬는 날이 언제 또 있겠어요."

"같이 놀 사람이 우리 말곤 없습니까?"

"...."

어째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다.

그러더니 도끼눈을 뜨며 나를 노려본다.

"치, 친구 없는 건 피차일반 아닌가?"

"전 친구 많습니다."

"친구 누구? 이름 대봐요."

"...."

휴가 마지막 날에 열 받게 하네, 진짜.

"아무튼, 전 됐습니다. 피곤하기도 하고."

"피곤하면 집에서 쉬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대?"

"남이사 어디서 쉬든 무슨 상관입니까?"

왜 자꾸 신경을 건드리는 걸까.

그렇게 서로 묘한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자.

"전 좋아요. 우리 회사 워크샵도 안 가는데, 이럴 때라도 놀아야죠."

밖에까지 다 들린 모양인지, 이아영 본부장이 사무실로 들어오며 거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유빈이 물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 워크샵은 왜 안 가는 거예요?"

"왜겠어요? 누가 쓸데없이 시간 버리기 싫다고 못 박아서 그렇지."

"...."

이아영의 시선이 슬쩍 나에게 향했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회귀 전에도 그런 건 딱 질색이었다.

말이 워크샵이지, 결국 가서 하는 건 똑같지 않은가.

그럴 바엔 집에서 잠이나 자는 게 낫다는 주의였다.

하지만… 두 여자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무튼, 어떻게 사람이 일만 해요. 바람도 좀 쐬고 그래야지."

"그러니까요!"

나는 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 오늘 연락 올 데 있어서 안 됩니다."

"어디서요?"

"저번에 말했잖습니까. 팀 하나 꾸릴 생각이라고. 이래저래 허가를 좀 받아야 하는데, 오늘까지 결정해서 연락 준다고 했습니다."

"어디에 뭘 부탁했길래 허가까지 받아요?"

"…그런 게 있습니다."

이아영 본부장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도 안 돼요. 휴가 기간 동안 우리 멋대로 굴려 먹었으니까, 오늘은 당신이 양보해요."

"...."

씨알도 안 먹히는군.

"장소는 정해 놓고 놀러 가자는 겁니까?"

"그러네요. 벌써 점심시간이니까 멀리 가긴 좀 그렇고...."

"요 앞에 복합쇼핑센터 생겼던데, 거긴 어때요?"

미리 생각해둔 듯, 한유빈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아영 본부장도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괜찮겠네요. 쇼핑도 하고 밥도 먹고."

"...."

그냥 자기들 놀려고 나 끌고 가겠다는 소리 같은데.

"오케이. 정해졌으면 지금 당장 나가요."

"뭐해요. 일어나요!"

"...."

아주 둘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네.

'쯧....'

버틴다고 순순히 물러설 것 같지도 않고.

어쩔 수 없지 뭐.

그렇게 두 사람의 등쌀에 떠밀려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때였다.

"저...."

역시나 밖에서 소란을 들은 건지, 김민주가 조심스레 사무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

"저, 저도 데려가면 안 돼요…?"

"...."

"...."

저런 녀석이 작전 본부장이라는 게 유머네.

***

"와… 진짜예요, 그거?"

"그렇다니까요?"

"미쳤네, 미쳤어. 그걸 어떻게 참았대."

그렇게 억지로 끌려온 쇼핑몰.

점심을 먹고 본격적인 쇼핑에 나선 세 여자는 한참을 앞서 걸으며 수다 삼매경이었다.

'이럴 거면 왜 데려온 거야.'

나는 굉장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뒤따라 걸었다.

그런 내 손에는 쇼핑백이 잔뜩 들려 있었다.

회사 대표를 지들 짐꾼으로 쓰다니....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상황인가?

'옛날 같았으면 그냥 싹 다 해고인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나에겐 그 정도의 힘은 없다.

애초에 저것들… 죄다 각 부서 최고 책임자들이라 자르면 나만 손해고.

차마 밖으로 드러내진 못하고,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뒤를 따랐다.

툭―.

그때, 어느 커플이 바닥에 대놓고 쓰레기를 던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도 매장 바닥을 쓸고 있는 청소 여사님 바로 옆으로.

"…손님."

이내 중년의 청소 여사님이 커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우리가 왜요?"

어이가 털리는 대답이 우리 귓가를 때리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이 동시에 우뚝 멈췄다.

"지금 우리보고 다시 주우라는 건 아니죠?"

"어차피 지금 청소하고 있잖아. 아줌마, 괜히 시비 걸지 말고 청소나 하세요."

"...."

그 커플은 적반하장으로 나오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락부락한 덩치의 남자는 청소 여사님에게 바짝 다가가며 위협을 했고, 여자는 그런 상황을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기도 잠시.

'됐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히 사소한 일에 끼어들 거 없었다.

애초에 우리와 관련된 일도 아니고.

그렇게 무시하며 그냥 지나가려고 했지만.

"야!"

불길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아 제발....'

간절히 빌며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한유빈이 그새를 못 참고 커플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쓰레기 줍고 사과드려."

"야? 지금 우리한테 한 말이야?"

"가던 길 가세요, 끼어들지 말고."

커플은 뻔뻔하게 받아쳤다.

그러자 한유빈의 눈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이내 소란을 감지한 듯, 주변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유빈은 주위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커플을 노려봤다.

"당장 안 주우면… 너희 큰일 난다?"

"참 나! 너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하하, 죄송합니다."

일이 커질 것을 느낀 나는 곧바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곤 서둘러 그녀를 멀찌감치 끌어냈다.

하지만 한유빈은 귀찮다는 듯 내 손을 뿌리치며 툭 쏘아댔다.

"뭐야, 왜 말려요?"

"쉬러 온 거 아닙니까? 놀러 와서까지 싸울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렇다고 저런 싸가지 없는 새끼들을 그냥 내버려둬요?!"

"안 내버려두면 뭐 어쩌려고요. 일반인을 패기라도 할 겁니까?"

"...."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닙니다. 에휴, 이렇게 사회성이 부족해서야...."

그제야 한유빈은 혀를 차며 감정을 식혔다.

커플도 주위의 시선 때문인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상대가 없어진 이상 더는 소란 피울 이유는 없었다.

한유빈은 답 없는 커플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대신 주워 여사님이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고마워요."

"...."

감사 인사를 받자, 그녀는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이더니 이내 획 등을 돌렸다.

"뭐, 뭐해요? 빨리 가요."

이아영 본부장과 김민주는 어색해하는 한유빈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아, 전 잠시 화장실 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손을 들며 말했다.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답 없는 커플 쪽 남자와 다시 마주쳤다. 그는 손을 씻고 있었다.

"손은 씻네요."

"뭐야…?"

"깨끗한 게 좋긴 한가 봅니다."

남자가 인상을 구기며 나를 향해 돌아섰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 같았으면 신경도 안 썼을 겁니다. 뭐, 따지고 보면 당신이랑 다를 게 없기도 했고. 그런데 고작 1년 있었다고 화가 나는 걸 보면...."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도 청소부긴 한가 봅니다."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못 알아먹어도 상관없다.

이건 그냥 과거의 내게 하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언젠가는 당신이 한 행동은 반드시 돌려받을 겁니다. 그러니 가서 정중하게 사과하시죠."

"싫은데?"

"...."

"근데 시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놈이고 저놈이고 아까부터 자꾸 지랄들이야?"

그가 핏대를 세우며 나를 노려봤다.

그리곤 갑자기 소매를 걷는다.

그와 함께 드러난 양팔의 문신.

그 순간, 오늘 아침에 조현민 대통령이 내게 조언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너 내가 누군지는 알고 시비 거는 거냐? 시발, 내가 전화 한번 돌려봐?! 어디서 X도 아닌 새끼가 자꾸…!"

그리고 그때.

쿠구구구궁―!

갑자기 건물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누가 빨리 신고 좀 해 봐!!"

아수라장이 된 쇼핑몰.

나는 단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있었다.

던전이다.

지금 이곳에 던전이 출현한 것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바, 방금 건물 내부에서 던전이 출현한 것 같아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위치는요?"

"아직 거기까진 파악이...."

이아영 본부장이 말끝을 흐리길 한 차례.

"다만 출현 시 충격 강도로 봐선 블루에서 그린 등급 같아요."

"다행히 그리 높진 않군요. 작전팀은 호출했어?"

"지금 연락 돌리고 있는데, 모든 팀이 파견 상태라 오는 데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

김민주가 대답했다.

블루에서 그린 등급이라면 그리 위험한 던전은 아니다.

두 시간 정도 기다리는 거야 크게 상관없지만... 위치가 좋지 않다.

밖에 출현한 거라면 몰라도, 건물 내부에 출현한 거라면 붕괴 위험이 있다.

기다릴 시간이 없다.

우리끼리라도 토벌해야 한다.

"이아영 씨."

"네?"

"지금 당장 건물 관리실로 가서 매장 CCTV로 던전 위치 좀 파악해주세요. 한유빈 씨는 시민 대피시켜주시고...."

나는 이내 김민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넌 나랑 같이 진입한다."

"알겠어요."

"자, 잠깐만요!"

그렇게 역할을 분담하고 움직이려던 차에 한유빈이 제동을 걸었다.

"건물이 너무 넓어서 저 혼자 모두 대피시키는 건 힘들어요. 내부 구조도 잘 모르고요. 도와줄 직원이 필요한데...."

"이 상황에 누구한테 도움을...."

그 순간, 내 시선이 근처에 있던 청소 여사님에게 향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정중한 태도로 부탁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작전팀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 작전팀이면… 헌터님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이 사람과 함께 시민들을 대피시켜주십시오. 비상구, 화장실 등 사람들이 있을 만한 곳은 전부 확인해주셔야 합니다."

"저, 전 그냥 청소부인데...."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건물 내 사람이 오가는 곳이라면 여사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안전은 걱정 마십시오. 이 사람, 꽤 실력 있는 사람입니다. 목숨 걸고 지켜드릴 겁니다."

"아, 알았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세요! 고층 비상구랑 화장실은 외진 곳에 있어서 거기부터 가야 해요!"

"네, 네!"

이내 여사님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고, 한유빈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머지않아.

「위치 파악됐어요. 11층 남성 의류 매장에 소규모 던전이에요.」

건물 안내 방송으로 이아영 본부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김민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휴가 마지막 날까지 일이네요."

"어쩌겠냐."

"오늘 거도 수당 나오죠?"

"...."

하여간 비싸게 구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나는 급히 말을 돌리며 먼저 걸음을 뗐다.

"가자."

227

227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복합쇼핑몰, 1층 비상구.

김준우와 같이 황급히 화장실을 빠져나온 남자, 노상구는 여자 친구와 함께 그곳에 몸을 숨긴 채였다.

여자 친구는 계속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노상구 또한 알 길이 없었다.

지진?

그러면 밖으로 도망쳐야 하나?

아니… 오히려 밖으로 나가는 게 더 위험하댔나?

노상구는 모든 게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와중에도 건물은 점점 더 거세게 흔들렸다.

"아, 오빠! 어떻게 좀 해봐!"

"나보고 뭘 어떡하라고!"

"그럼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여기 있는 게 제일 안전해!!"

둘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비상구 벽면이 쩌저적 소리를 내며 크게 벌어졌다.

균열은 조금씩 퍼져나가 천장까지 이어졌고, 진동과 함께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런 곳에서 두 남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이 묶여 있었다.

빌어먹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위험한 일인가?

설마 이렇게 죽는 건 아니겠지.

'시발, 재수가 없으려니....'

노상구는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그리고 그때.

"여기에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비상구 문이 열리며 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빨리 나오세요!"

"...."

"...."

두 남녀는 그 여성을 보고는 잠시 벙찐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을 구하러 온 그녀는 다름 아닌, 조금 전 자신들과 시비가 붙었던 청소 아줌마였으니.

"뭐, 뭐야! 왜 아줌마가 와?! 119는 어디 있고!!"

"그럴 시간 없어요! 지금 당장 나가야 하니까 빨리 나오세요!"

"아줌마를 어떻게 믿고! 여기 있는 게 더 안전…!"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균열을 버티지 못하고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쾅―!!

그때, 조금 전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어왔던 여성이 튀어나와 온몸으로 잔해를 막아냈다.

"...."

"...."

전신에 맴도는 붉은 기류.

살기가 아른거리는 눈빛.

도깨비와도 같은 모습에 남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 나와. 뒈지기 싫으면."

"네, 네...."

그녀가 붉은 눈빛을 번뜩이며 경고하자 노상구는 저도 모르게 대답하며 빠져나왔다.

그들은 두 여성의 안내를 받으며 곧장 대피하기 시작했다.

대피하면서도 노상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건물이 흔들리고 천장이 무너지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과 시비가 붙었던 저 여자가 헌터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윽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자, 그곳엔 이미 수많은 사람이 대피해 있었다.

"던전이 출현했다고?"

"아까 방송 못 들었어?"

"미친… 어떻게 건물에 던전이 나오냐. 작전팀은 출동했대?"

"카르마 코퍼레이션 간부들이 있었다던데?"

"간부들이?"

"작전 본부장이랑, 기획, 지원 본부장이 다 있었대. 김준우 대표도."

"그 사람들이 여기 다 있었다고?"

"와 씨… 운 좋았네."

"그러니까...."

마치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듯한 사람들의 대화 소리.

노상구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훔쳐 들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본부장들이라면 대한민국 토벌 최고 전력들이 아닌가.

그런 인간들이 이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는 건....

'그럼 저 여자도 카르마 간부…?'

노상구는 한유빈을 슬쩍 흘겼다.

빌어먹을, 대체 누구한테 시비를 건 거야.

뒤늦은 후회를 하던 그때.

'잠깐. 그렇다는 건 화장실까지 따라왔던 그 남자가....'

김준우 대표?

뒤늦게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노상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시발, 카르마한테 잘못 찍히면 영영 사람 구실 못하게 된다던데....

이제라도 사과해야 하나?

아니, 생각해보면 먼저 시비를 건 건 그쪽이지 않은가.

아무리 봐도 내가 잘못한 게 없다.

그래, 쫄지 말고 당당하게 나가자.

여자 친구도 보고 있는데 모양 빠지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던 사이, 누군가 나타났다.

"나, 나온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검은 기류를 흘려대는 남자와 무덤덤한 표정으로 검을 거두는 여자가 건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흡사 마왕와 전사.

압도적인 존재의 형상.

"...."

그 모습을 마주한 노상구는, 그냥 사과드리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토벌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서자, 시민들의 감사 인사가 쏟아졌다.

'대피하라고 했더니, 여기서 구경들이나 하고 있었네.'

상황이 퍽 달갑지는 않았지만,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기에 대충 인사를 받아줬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어째선지 상당히 초조한 표정의 그는 조금 전, 한유빈과 시비가 붙었던 그 남자였다.

그는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바짝 긴장한 채 우물쭈물하는 그를 보곤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이제야 우리가 누군지 알게 된 모양이었다.

'뭐… 이참에 몰아붙이면 어찌어찌 사과는 하겠다만....'

보는 눈도 많으니 조금 더 신사적인 방법을 써야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이내 청소 여사님을 돌아봤다.

그리곤 그녀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니에요. 전 아무것도...."

"아뇨. 여사님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신 덕분에 모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남자에게로 시선을 흘겼다.

이건 퍼포먼스다.

지금 그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퍼포먼스.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가 모든 공을 청소부에게 돌렸는데,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그가 과연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저, 저 아까 그건...."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내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김준우 대표님이신지도 모르고...."

"그게 무슨 소립니까?!"

어딘가 굉장히 핀트가 어긋난 이야기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대표가 아니었으면 사과하지 않았을 거라는 소립니까?"

"...."

"그리고, 애초에 사과드릴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남자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그런 그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자, 남자는 결국 청소 여사님을 향해 돌아섰다.

"...."

그리곤 아무 말 없이 푹 허리를 숙였다.

마지막 자존심인 건지, 아니면 이제 와서 사과하기엔 염치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지만.

뭐, 저게 어디인가.

그 모습을 바라보길 잠시, 그의 팔에 새겨진 커다란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뭐 그건 그렇고, 당신 어디 소속입니까?"

"...예?"

"조직 생활하는 분 아닙니까? 당신 형님이 누구냐고요."

"그, 그게, 지금은 덕수 형님 밑에서...."

덕수.

덕수라....

머릿속을 뒤적이자 기억 저편에서 그 이름이 문득 떠올랐다.

'홍덕수…?'

이것도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당신 형님이 알면 굉장히 실망하시겠군요."

"우, 우리 형님을 아십니까…?"

"어느 정도는."

뭐, 회귀 전에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니까.

나는 잠시 옛 기억을 곱씹었다.

그리곤 머지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그놈이 좋겠군.

"당신 형님 좀 만납시다."

"예, 예…?"

"못 들었습니까? 홍덕수 씨를 지금 좀 만나보자고요."

"아, 저 그게...."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형님 만나시려면 한 15년은 기다리셔야 하는데...."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

휴가 같지도 않았던 휴가가 끝난 지도 하루가 지났다.

나는 업무에 복귀하자마자 이아영 본부장을 데리고 곧장 안산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 장소에 도착하자.

"…여긴 왜 왔어요?"

이아영 본부장이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새 팀을 꾸릴 거라고. 팀원 모집하러 온 겁니다."

"그, 그런데 왜 이런 곳으로 와요? 여긴...."

이내 이아영 본부장의 시선이 앞에 있는 넓은 건물로 향했다.

"교도소잖아요...."

"그냥 교도소가 아니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이능력자 특수 격리 시설입니다."

"...더 불안한데요."

이아영 본부장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나를 바라봤다.

이능력자 특수 격리 시설.

일명 안산 교도소.

이능력자들이 생겨나면서부터 꾸준히 발생해온 이능력 범죄들.

다른 강력 범죄보다 훨씬 쉽게, 또 크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기에 그들에 대한 처벌 또한 매우 강력한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범죄자들을 격리해 놓는다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탈출할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그래서 이곳엔 조금 특수한 몇 가지 규칙이 존재한다.

첫 번째, 이곳에 수감된 모든 재소자는 절대 햇빛을 볼 수 없다.

두 번째, 식사는 무조건 하루 1식으로 제한한다.

마지막으로 물도 6시간에 한 컵만 지급한다.

이토록 극단적인 규칙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능력자들의 체력을 최대치로 떨어트려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벌어지는 폭동 때문에, 모든 교도관 또한 이능력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정부에 소속된 유일한 이능력자들인 셈이다.

아무튼, 이곳을 찾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정훈 의원이 만든 헌터 조직… 조금 놀랐습니다. 점조직으로 꼬리를 밟힐 위험도 적으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이들. 그러면서도 일 처리는 또 확실했죠."

"설마 당신...."

"예."

이아영 본부장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거기에 대답 대신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저도 따라 해 볼 생각입니다."

"...."

이아영 본부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법 헌터 조직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시끄러웠는데, 이제 와서 또 그런 놈들을 만들겠다고요…?"

"너무 걱정 마시죠. 어설프게 따라 할 생각은 없으니까. 뭐, 여기저기 이야기도 해놨고… 대통령님의 허가도 떨어졌으니까."

"대, 대통령이 허가를 내줬다고요?!"

"물론 이 이야기는 밖에선 비밀입니다."

"당연하죠! 입 잘못 놀렸다간 감당 못 해요!"

"아무튼, 여기 소장에게도 이야기해놨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할 필욘 없을 겁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건물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곧바로 정복을 차려입은 중년의 남성이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재윤 소장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준우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는 간단한 인사를 마치곤 곧바로 우리를 본인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래서...."

천 소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섰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전과가 있는 이능력자들로 새 팀을 꾸리시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흠, 이 건은 저희 쪽 극소수의 임원과 대통령님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저희는 현재 국제협회와 전쟁 중입니다."

"...네?"

"물론 무력을 통한 전쟁은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해야겠죠."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는지, 천 소장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무튼, 저희는 국제협회에 대항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내의 몇몇 인사들이 국제협회와 손을 잡았다는 정보가 있더군요."

"그, 그게 누구입니까…?"

"대표적으로 정훈 의원."

"...!"

천 소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긴, 뉴스에서는 불법 헌터 조직을 운영했다고만 나왔지 자세한 전말은 보도되지 않았으니 놀랄 만도 하다.

"그 말고도 몇 명이나 더 있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할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그들을 찾아내시려는 겁니까?"

"겸사겸사 공식적으로 못 하는 일들도 맡기고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마저 설명했다.

"저들이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는 만큼, 저희 또한 양지에서 조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멀쩡한 헌터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건 인력 낭비니, 여기서 찾는 수밖에요."

"그렇군요.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여쭤본 겁니다. 대통령님의 지시가 내려온 이상 어차피 선택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천 소장은 대답이 됐다는 듯, 준비해둔 서류를 꺼내 들었다.

"모범수들로 추려봤습니다. 강력 범죄 전과자들은 제외했고요."

"흐음."

나는 서류를 훑어봤다.

강력 범죄를 제외하고 보니 대부분 시답잖은 것들로 잡혀 온 놈들이었다.

사기, 절도, 기타 등등.

대부분이 별 볼 일 없는 놈들이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눈에 띄는 몇 명이 있었다.

나는 빠르게 그들을 추려내선 다시 소장에게 프로필을 건넸다.

"여기 있는 놈들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준비시키겠습니다."

천 소장은 서류를 받아들며 대답했지만, 어째 아직도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신설팀은 대표님께서 직접 운영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시다시피 이능력자들이라 통제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뭐, 제가 직접 맡을 생각이었는데, 대통령님이 극구 반대를 하셔서.... 뭐, 일단 적당한 사람을 찾아뒀습니다."

"오, 그게 누굽니까?"

"홍덕수."

"...!"

그 이름이 나오자 소장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마침 그 사람도 여기 있는 거로 아는데... 여기까지 온 김에 그놈 얼굴 좀 보고 가도 되겠습니까."

"그… 대표님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놈은 안 됩니다. 무지막지한 놈이에요. 여기 직원들도 그놈이라면 치를 떱니다. 격리하는 데도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뭐, 그쯤 돼야 밑에 놈들이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소장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애초에 그놈이 어떤 놈인지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놈을 선택한 거고.

"뭐, 너무 걱정 마시죠."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잘 교육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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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이능력자 특수 격리 시설, 면회실.

잠시 대기하고 있자니, 수갑을 찬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대한민국에서 젤루 잘나가시는 양반이 나를 다 보자고 말이여."

"반갑습니다."

"그려, 그려."

남자는 나를 마주 보고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나는 그를 빠르게 훑었다.

힘찬 목소리.

멀쩡히 걸어 다닐 정도의 기력.

여유가 느껴지는 표정.

멀쩡한 모습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운이 좀 있으신가 봅니다. 듣자 하니 여기 재소자들은 사람 몰골이 아니라던데."

"버틸 만하던디? 뭐, 원체 튼튼한 놈이라 그런가 벼."

남자가 크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잠시, 이내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 대표님이 나 같은 놈한텐 무슨 볼일이당가? 여까지 직접 찾아온 걸 보면 예삿일은 아닌 듯싶은디."

"홍덕수 씨… 이능력을 사용한 폭행 건으로 5년째 복역 중이시죠?"

"그런디?"

"그전에는 서울 본부 작전팀에서 근무하셨고요."

"...."

"그러다 4명의 헌터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해서 입건. 피해자들은 전치 16주에 달하는 중상을 입었고, 아직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고요."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정보를 줄줄이 읊었다.

그러자 홍두식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봤다.

그가 흥미를 보이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아내분에 대한 복수인데 죽이지 않은 게 용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 순간, 홍두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서…? 뭔 말이 하고 싶은 거여?"

"너무 그렇게 쏘아보지 마시죠. 딱히 비꼬는 건 아니니까."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그를 향해, 작게 너스레를 떨었다.

아직 본론도 안 꺼냈는데 벌써 이러면 곤란하니까.

홍덕수.

과거 서울 본부 작전팀 소속의 헌터로, 작전 3팀장을 맡았던 인물.

회귀 전, 내가 막 서울 본부에 입사했을 때도 현역이었기에 모두 기억하고 있다.

나름 실적도 좋고 부하들에게 평판도 좋은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쓰고 잠적했다.

정확히는 그의 아내가 사망한 직후의 일이었다.

그가 퇴사한 후, 누구도 그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때쯤, 나는 뉴스를 통해 그의 근황을 알게 됐다.

돌연 행방이 밝혀진 그가 헌터 4명을 무차별하게 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전직 헌터가 현직 헌터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사건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홍두식은 모든 범행을 순순히 자백했고, 항소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이 지속하기엔 너무 심심하게 끝이 난 것이다.

그래서 사건의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물론 나는 전부 알고 있었지만.

홍두식은 퇴사 직후 사람을 모아 1년간 4명의 헌터를 찾아다녔다.

그 이유는 말했듯, 죽은 아내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사건의 시작은 이러했다.

언제부터 돈에 눈이 먼 작전팀 소속의 헌터들이 불법으로 프리랜서 헌터에게 악성 재고로 남은 던전을 매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돈을 챙긴 뒤 상부에는 토벌을 완료했다고 보고하면, 토벌 수당까지 이중으로 받아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행위가 계속되던 어느 날.

경험이 부족한 프리랜서 헌터에게 던전을 매각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 프리랜서 헌터의 실력으로는 토벌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프리랜서 헌터는 던전을 팔았던 이들에게 환불을 요청했지만, 이미 상부에는 토벌된 던전으로 보고가 된 터라 그건 불가능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민간 길드 또한 찾아가 봤지만, 불법 매매된 던전을 받을 수 없다고 모두 거절.

물론 그제라도 정식으로 던전 출현 신고를 하면 그만이었지만....

불법 매매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웠던 프리랜서 헌터는 결국 던전을 그냥 방치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던전에서 몬스터가 탈출해 산속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며칠 후 산림 공무원이던 홍덕수의 아내가 몬스터에게 습격당해 사망한다.

그제야 뒤늦게 사건이 세간이 드러나자, 홍덕수는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로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던전을 불법으로 매각한 작전팀 소속의 헌터 세 명은 정직 및 500만 원 벌금, 던전을 방치한 프리랜서 헌터는 고작 징역 1년의 처벌을 받는다.

1년.

그 말도 안 되는 형량에 홍덕수는 결국 본인이 직접 그들을 처벌하기로 했다.

홍덕수는 그렇게 사퇴를 하고 오랜 준비 기간 끝에, 네 명의 헌터를 한 명씩 찾아가 자신 기준의 정의를 실현했다.

다신 헌터 생활을 못 하게 말이다.

실제로 사건 이후, 네 명 모두 헌터직을 내려놨다.

'아니… 내려놓은 게 아니라 못하게 된 건가.'

부상이 너무나 심해서 더 이상의 토벌은 불가능했으니까.

아무튼, 그런 사건이다.

내가 어째서 이걸 알고 있는가 하면... 그 사건을 담당했던 게 내 전 여친, 민유진이었거든.

나는 옛 기억을 곱씹으며 다시금 그에게 물었다.

"몇 년 받으셨죠?"

"15년."

"뭐 사람을 거의 반송장을 만들어놓은 것치곤 적은 편이군요."

홍두식이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여?"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범죄는 범죄니까요. 사연이 어찌 됐든 당신이 한 행동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를 향해 상체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게 다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은 그냥 당신이 하고 싶어서 한 건데. 정당화고 나발이고, 알 게 뭡니까."

"...."

이내 홍두식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은 그냥 당신이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입니다. 거기에 가타부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겠죠."

"...."

"애초에 그들을 죽이지 않은 것도 받을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평생을 고통받게 하고 싶었던 것 거 아닙니까?"

그냥 편하게 죽는 것보다 사람 구실 못하며 살아있는 게 확실히 더 고통스러울 테니까.

"우리 대표님… 조사 마이 하셨네."

"감사합니다."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디? 아까부터 왜 그것만 쏙 빼놓는 거여."

"뭐, 이 말을 하려고 뵙자 한 건 아니고...."

나는 서류 봉투를 슥 내밀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게 뭐여?"

"헤드헌팅입니다. 이번에 저희 쪽에서 새로 팀을 하나 만들 생각인데, 그 팀의 팀장으로 와주십시오."

"…푸하하하!"

그가 폭소를 터트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담당 업무는 제안을 받아주시면 알려드릴 생각이고, 보수는...."

"감형이여?"

"감이 좋으시네요."

"뭐시기 드라마랑 영화에서 허구헌 날 나오는 소재 아녀. 나한테도 순번이 올 줄은 몰랐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하시겠습니까?"

"...."

내가 묻자 그가 미소를 지었다.

"관심 없으야."

"...."

"우리 대표님이 그랬자녀. 고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짓이라고. 감형이 나한테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겨?"

하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감형은 전혀 메리트가 없다.

그가 이리도 팔팔한데, 탈출 시도를 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이리라.

감옥에 있든 사회에 있든 그 어떤 것도 그에겐 상관이 없는 일이다.

이미 그는 아내가 죽었을 때 같이 죽은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감형 따위로는 거래가 안 되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이 이 남자가 아니면 안 된다.

실력, 정보력, 행동력.

그리고 이미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는 자.

내 팀을 맡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조건은 없다.

"…그럼 이렇게 하죠."

나는 잠시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최후의 보루를 쓰는 수밖에.

"일이 모두 끝나면...."

나는 옆에 있던 교도관의 눈치를 살피곤, 이내 귓속말로 그 말을 전했다.

"...."

그와 동시에 그의 눈빛이 순간 바뀌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반응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언제든 마음이 바뀌시면 소장님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럼 좋은 대답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뒤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면회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홍두식은 그 자리에 앉아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

며칠이 흐르고, 소집 당일.

깊은 산 속에 위치한 소집 장소.

나와 이아영 본부장은 이제 막 그곳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여기에요?"

이아영 본부장은 거친 산행에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녀 또한 알고 있는 곳이었기에, 꽤 의아한 모양이었다.

그야 이곳은, 한때 박인범 협회장이 잠적할 때 지냈던 그 오두막이었으니까.

"눈에도 안 띄고, 위치도 우리밖에 모르고. 딱 좋지 않습니까."

"협회장님이 허락은 해줬어요?"

"그건 이제 받아야죠."

"...정말이지."

이내 우린 오두막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나저나 홍두식 씨가 왔을까요?"

"모르죠.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안 오면 팀장은 누가 맡아요?"

"뭐, 어쩔 수 있겠습니까. 대충 뽑아야죠."

"...."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들어갑시다."

나는 오두막 문을 열었다.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곧바로 쏟아졌다.

내가 직접 뽑은 10명의 헌터들.

인사에 앞서 그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하지만 기다리던 얼굴은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쯧....'

어쩔 수 없지.

애써 아쉬운 마음을 넘기고 그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카르마 코퍼레이션, 김준우 대표입니다. 뭐, 여러분들에겐 아직 협회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겠군요."

"...."

"...."

그들은 대답 대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하여간, 범죄자들 아니랄까 봐 쓸데없는 기 싸움은....

"제가 오늘 여러분을 소집한 이유는...."

애써 그들의 반응을 무시하며 다시 말을 이어가던 그때였다.

"어이고, 벌써 시작해부렀네."

이미 마음 한편으로 단념해 버렸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오셨군요."

좀 늦었지만 그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뭐, 할 것도 없고 해서."

"핑계가 좋군요."

"...."

그러자 홍두식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때 말했던 약속… 꼭 지켜야 합니다잉?"

"물론입니다."

확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다 오신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 모인 이유는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새로운 팀을 꾸리기 위해서입니다."

"...?"

"뭐야?"

"새로운 팀?"

가지각색의 반응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은 각자가 조장이 되어 각 분야 및 지역을 맡을 겁니다. 그 분야와 지역에서는 자유롭게 여러분들의 조를 꾸려도 되지만 절대 30명 이상의 직속 조원들을 두지 마십시오. 당연히 언론에 노출되거나 지역 경찰들에게 걸려서도 안 되고요."

"질문,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정보 수색, 미행, 납치… 때론 폭행과 협박. 기타 등등."

"...."

"...."

어째 다들 벙찐 표정이다.

왜들 그럴까.

내가 특별히 신경 써서 본인들의 전문 분야로 골라왔는데.

"그리고 여러분들의 총 책임자, 그러니까… 이 팀의 팀장은 여기 있는 이분입니다."

홍두식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저는 홍두식 씨에게만 업무 지시를 내릴 거고, 홍두식 씨가 각자의 역할에 맞춰 분배한 후 자세한 업무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전달할 겁니다."

그러자 열 명의 헌터의 시선이 홍두식에게 향했다.

홍두식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꾸벅였다.

"아, 그리고… 앞으로 약 한 달간 교육이 있습니다. 제가 직접 담당할 거고, 교육이 모두 끝난 뒤에 본격적인 업무 배치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교육?"

"예. 그럼 설마 범죄자 여러분을 아무런 조치 없이 사회에 풀어놓겠습니까?"

"...거 말이 좀 심하네."

"예의는 지킵시다, 우리?"

"하, 예의는 얼어 죽을...."

얼토당토않은 말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인간들이 뭔 소릴 하는 거야.

"그러게, 꼬우면 법을 좀 지키고 살지 그러셨습니까!"

"...."

"...."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내 할 말을 계속했다.

"아무튼, 이것으로 오리엔테이션은 끝내겠습니다.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저… 자유롭게 조를 꾸려도 된다고 했는데, 그러다 영영 도망치면 어떻게 하려고요?"

"교육 과정이 끝나면 아마 그럴 생각은 못 할 겁니다. 다음 질문."

"월급은 줍니까?"

"감형해주면 됐지, 범죄자 주제에 돈까지 바라는 겁니까? 다음 질문."

그때, 아까부터 계속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던 한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우리가 당신 말을 따라야 할 이유는?"

"...."

"당장 이곳에서 당신 죽이고 도망치면 감형받을 필요도 없는 거 아닌가?"

"자신 있습니까?"

"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잘 됐군요. 마침 교육 과정에도 있던 내용이고."

"...?"

"교육 과정…?"

"예. 저분 말대로, 여기서 절 죽이면 여러분들은 모두 자유입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헌터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물론 홍덕수를 제외하고.

"자신 있는 사람부터 덤비십시오."

"...하, 하하."

"지금 뭐라고…?"

"하하하! 진심입니까?"

대놓고 판을 깔아줬는데 뭘 그리 눈치를 보는지,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이들.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진심입니다. 한꺼번에 덤비든 한 명씩 덤비든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단, 진심으로 죽일 각오로 덤비셔야 할 겁니다."

첫 번째 교육 과정.

서열 정리.

법보다 폭력이 가까운 이들에게 완벽한 서열을 심어주기 위해선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너무 걱정 마세요. 살살해드릴 테니까."

그 순간, 이곳에 모인 헌터들의 눈이 번뜩였다.

229

229

"으으윽...."

"끄윽…!"

깊은 산속, 오두막.

오두막이란 걸 알기 힘들 만큼 박살이 난 건물 내부에서는 힘겨운 다수의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바닥에 널브러진 10명의 헌터를 지그시 바라봤다.

처음엔 자만심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실력을 뽐내고 싶었던 건지, 무차별적으로 덤벼들었지만.... 그런 중구난방의 공격이 나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건 그다음부터였다.

개별로 싸워선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는 각자 클래스별로 포지션을 나눠 협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10명 모두 오늘 초면인 이들이다. 같이 토벌을 나가본 적도 없고, 각자 어떤 스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사전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합도 맞춰보지 않은 상황에서 그 짧은 시간에 각자의 전력을 파악해서 본인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썩어도 준치라 이건가....'

전직 작전팀 소속의 헌터들이라 그런지 확실히 전투에 대한 감이 좋다.

무엇보다 힘을 쓰는 데 망설임이 없다.

뭐, 이미 한 번 선을 넘은 범죄자들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개개인의 전투력은 고작 해 봐야 C급 수준이지만, 사실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만들려는 건 작전팀이 아니니까.

'잘만 키우면 쓸모 있겠어.'

물론 이 정도로 끝낼 수는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교육이니까.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확실히 서열을 각인시켜 놓아야 한다.

"이게 답니까?"

그래서 일부러 도발을 날렸다.

"솔직히 기대했던 것보다 한참 못 미치는군요. 고작 이 정도로 절 죽인다느니, 그런 허세를 떤 거였습니까?"

"큭…!"

"대체 뭐야? 저 새끼...."

"협회에 저런 놈이 있었다고…?"

당혹감, 분노,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인 표정들이었다.

"본인들이 뭐라도 된 것처럼 우월감에 취해서 그 같잖은 힘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나는군요."

대놓고 한심하다고 질타했다.

"결국, 본인들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

"이, 이 새끼가…!"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반응이 왔다.

다시금 몸을 일으켜 전투태세를 취하는 이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고유스킬 : 마왕 - 독재자]

검은 기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패닉 룸]

흘러나온 검은 기류가 그들을 휘감으며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낯선 공간에 그들이 당황하기도 잠시.

[고유 스킬 : 귀검 - 백귀야행]

[고유 스킬 : 하이 인챈트]

[고유 스킬 : 마스터 오브 부두]

스킬들이 내게 쏟아졌다.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각성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시전자는 기존의 클래스를 초월합니다.]

[각성 클래스 : 절대 군주]

이에 대항해 허공에 손날을 휘둘렀다.

사악―!

"...!"

"...!!"

그들의 목이 몸뚱이에서 분리됐다.

[패닉룸 - 효과 종료]

[모든 사건이 패닉룸 이전으로 되돌아갑니다.]

"커억…!!"

"허억, 허억...."

"콜록, 콜록!!"

이내 곧바로 그들을 감쌌던 검은 기류가 사라졌다.

다시금 정신이 돌아온 그들은, 자신의 목을 붙잡고는 헛구역질을 쏟아냈다. 눈물을 쏟아내는 이도 있었고, 바짓가랑이가 축축해진 이도 있었다.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탓인지 모두가 완전히 넋이 나간 채 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죽음을 맞본 이상, 두려움이 뼛속 깊이 새겨졌겠지.

"뭣들 하고 계십니까. 계속 덤비지 않고."

"…자, 잘못...."

"자, 잘못했습니다…!"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예상대로 효과가 좋았던 건지, 다들 전의를 상실한 채 자세를 낮췄다.

나는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나저나...."

아까부터 무심한 표정으로 멀찌감치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다른 헌터들과는 달리 서열정리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 전투에도 끼지 않은 채 그는 어떻게 돌아가나 지켜볼 뿐이었다.

"당신은 싸우지 않는 겁니까?"

"난 됐으야."

홍두식이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뭐더러 일 시작도 전에 힘을 빼. 딱 봐도 나보다 센 것 같응께 난 그냥 넘어가."

"보기보다 현명하시군요."

"포장하지 말어. 그냥 쫄아서 그런 거니께."

그는 클클 웃음을 흘렸다.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딱 봐도 알 수 있다.

저 남자는 여기 있는 10명보다 훨씬 강하다.

'나름 작전팀장까지 맡았던 사람이니....'

그런 사람이 쫄았다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냥 흥미가 없을 뿐이다.

'이 기회에 실력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군.

그렇다고 싸우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싸우게 만들 수도 없고.

"뭐, 첫 교육은 이걸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서열은 정리된 것 같았기에, 나는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다음 과정은 실습입니다."

"…네, 네?"

"실습이라면...."

헌터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한 달간, 던전 및 길거리 청소부로 파견될 겁니다."

"...?"

"…청소?"

"뭐, 청소가 제 경험상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갱생하는 방법이더군요."

문득 떠오르는 1년간의 기억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모든 교육 과정이 끝나고 나면 여러분들은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있을 겁니다."

한 번 해본 내가 장담할 수 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조현민 대통령을 대면한 오명진 법무부 장관이 조심스레 의견을 전했다.

범죄자로 이루어진 헌터 조직을 만드는 건 명백히 불법이 아닌가.

이미 정훈 의원이 같은 혐의로 구속된 마당에, 아무리 김준우라도 해도 이를 허가해준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하지만 조현민 대통령의 태도는 단호했다.

"상의도 없이 그런 허가를 내주시다뇨! 언론에라도 알려지면 어떡하시려고 그럽니까."

"그건 걱정 마시죠."

"아니, 어떻게 잘 숨긴다고 해도 결국 범죄자들입니다. 그런 놈들을 대체 어떻게 믿습니까. 어떤 식으로든 일을 벌일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김 대표가 잘해주지 않겠습니까."

"...하아."

오명진 장관은 외골수인 대통령의 대답에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그 사람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그래 봤자 고작...."

그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청소부 출신 아닙니까...."

"...."

그 말에 조 대통령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조 대통령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물론 김 대표를 신뢰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만,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

"아실지 모르겠지만,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현재 국제협회와 전쟁 중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싸움을 하고 있죠."

조현민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국제협회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선 결국 다른 국가들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뿐입니다. 쉽고 간단한 목표지만,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랭크 시스템 개편도 시행한 거 아닙니까. 헌터 자격에 맞지 않은 이들을 솎아내기 위해서...."

"그게 문제입니다."

조 대통령의 대답에 오명진 장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현재 우리나라의 랭크 심사가 모두 끝나고 각국 협회를 대상으로 심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예상보다 너무 많은 탈락자가 발생하고 있답니다."

"그, 그게 무슨…?"

"협회당 10%에 달하는 인력이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수치죠."

"...."

"헌터 인력 부족은 곧 토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이는 당연히 국가 안보에도 위협을 끼칩니다. 그 때문인지 현재 각국 협회에서 우리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명진 장관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결코, 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 또한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굉장히 심상치 않은 일이.

"국제협회와의 문제는 단순히 사업체 간의 영역 다툼이 아닙니다."

그때, 조현민 대통령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민들의 목숨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로선 국제협회가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다만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그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국제협회가 어떤 일을 벌이든 그 시작은 바로 여기! 대한민국이라는 겁니다."

"...."

오명진 장관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 단 한 군데도 없던 까닭이었다.

"그걸 막을 수 있다면 뭔 짓을 못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러다 문제라도 생기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뭐,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되면...."

이내 조현민 대통령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도록 하죠."

***

집무실을 나온 오명진 장관은 굉장히 복잡한 표정이었다.

물론 대통령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백번 맞는 말이다.

국제협회가 전 세계 토벌권을 쥔 이후부터는 모든 게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다.

만약 그들이 토벌권을 마음대로 쥐고 흔든다면, 전 세계는 그야말로 불바다가 될 것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그들은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그걸 막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겠지만....

'그건 내 역할도 아니고....'

본인은 어디까지나 한 나라의 법무부 장관일 뿐이다.

세계를 구하는 건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지만, 불법 헌터 조직을 막는 건 본인의 역할이지 않은가.

애초에 범죄자들로 국제협회의 계략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부터 동의할 수 없다.

아무리 잘 교육해도, 결국 범죄자는 범죄자 아닌가.

힘적 우월감에 취해, 이능력 범죄를 저지른 극악무도한 쓰레기들이다.

물론 김준우 대표가 정훈 의원처럼 그들을 데리고 나쁜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고, 본인 나름대로 철저하게 교육한다고는 했지만....

10명이나 되는 쓰레기들을 교육한다고, 그들이 갱생할 리가 없다.

애초에 김준우 대표 혼자서 그들을 완벽히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언젠가는 사고를 쳐도 칠 게 뻔하지.

'안 되겠어....'

직접 가서 상황을 봐야겠다.

직접 보고 도저히 통제가 안 될 것 같으면 윗선의 지시를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프로젝트가 폐기되도록 할 것이다.

그게 본인의 역할이니까.

오명진 장관은 그렇게 다짐하며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올랐다.

이윽고 청와대를 빠져나와 도심으로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어…?"

거리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다름 아닌, 김준우 대표가 선택한 10명의 범죄자, 즉 쓰레기들이었다.

"저, 저…! 저놈들이 그냥 저렇게 거리를 활보하게 둔 거야?! 관리자도 없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게 무슨 짓인가.

안 되겠다.

이건 선을 넘었다.

당장 다시 격리 시설로 돌려보내야…!

"어이, 아저씨!"

그때, 헌터 중 한 명이 길을 가던 일반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저놈은....'

술에 취해 일반인들을 폭행한 혐의로 구속된 그놈이 아닌가.

젠장, 일 났다.

일단 빨리 경찰에....

"거 쓰레기를 막 바닥에 버리고 가시면 어떡합니까?"

"...네, 네?"

"빨랑 도로 주우쇼. 그리고 저기 앞에 쓰레기통 있으니까 거기다가 버리시고."

"아, 네… 죄송합니다."

"거참, 알만한 양반이...."

그 대화 소리에 오명진 장관은 본인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뒤늦게 다시 자세히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빗자루와 쓰레기봉투.

그리고 단체로 입고 있는 형광색 조끼.

등과 가슴에 쓰여진 '봉사'라는 단어.

설마 지금 저놈들....

'처, 청소하고 있는 거야…?'

오명진 장관은 그 충격적인 광경에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230

230

프랑스 파리,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웨슬리 사무총장은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현재 국제협회는 카르마 코퍼레이션과 전쟁 중이다.

칼과 총으로 싸우는 전쟁이 아닌,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서로가 가진 권력을 마구잡이로 쥐고 흔드는 보이지 않는 전쟁.

이전처럼 서로 직접적인 충돌은 없어졌지만, 그렇기에 더욱 치밀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만큼 어디서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무엇보다 헌터 관리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이상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고....'

웨슬리 사무총장은 입맛을 다셨다.

이전처럼 대놓고 그들을 공격했다가 국제협회 지부에 대해서 토벌 파견을 중지해버린다면 본인들만 손해다.

물론 그렇다고 손을 놓고만 있을 수는 없다.

김준우의 목표가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인 만큼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국제협회를, 그리고 자신을 집어삼키기 위해서.

하지만 신경 쓰이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황동휘 파트장의 사망.

반능석을 가공해서 불사에 가까운 그를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기어이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뱅크 아이템을 가공해서 무기로 상용화할 수 있는 기술을 획득했다는 의미다.

전 세계에 무서운 속도로 세워지고 있는 지부.

높은 충성도의 직원들.

헌터 관리 권한.

이능석과 반능석.

그리고 그것을 가공할 수 있는 기술력.

국제기구라는 타이틀을 두고 본인들과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다.

이제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단순히 작은 나라의 토벌 기업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들의 성장을 막아야 한다.

막는 게 힘들다면 사건을 일으켜서라도 저지해야 한다.

'그래서 탐지 시설을 처리하려고 했던 건데....'

다 된 마당에 정훈 의원이 꼬리를 밟혀 버렸으니 그건 물 건너갔고.

"...현재로선 마땅히 견제할 수단이 없습니다."

그때,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수행비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은 일단 나중을 대비해서 전력을 모으는 것에 집중하시는 게 어떨까요?"

"나중이라...."

웨슬리 사무총장이 깊게 한숨을 늘어뜨렸다.

맞는 말이다.

만약 카르마를 막을 수가 없다면 꺼내 들어야 할 최후의 수단.

전쟁.

당연히 준비를 위해선 지금부터 전력을 모을 필요가 있다.

뭐, 사실 중국 협회를 계속 가지고 있으려던 이유 또한 보다 쉽게 인원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는데, 이젠 그마저도 떨어져 나갔으니....

"전쟁을 대비할 만큼 많은 인원을 어디서 충당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겠군요."

웨슬리 사무총장의 말에 수행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랭크 시스템에 등록된 헌터는 모두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관리하고 있어서 비밀리에 병력을 모으는 건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지금 전 세계에서 랭크 심사가 진행 중이라 눈을 피할 수도 없고요."

"그렇겠죠."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길 잠시.

"그럼… 랭크 등록이 해지된 놈들이면 상관없지 않나요?"

이내 그가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동시에 수행비서는 그 말의 진짜 의도를 알아차리곤 물었다.

"이미 해지가 된 인원만 모으는 건가요, 아니면... 필요한 만큼 해지를 시키는 건가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예상 인원은 얼마나...."

"뭐, 넉넉하게."

웨슬리 사무총장은 머릿속으로 숫자를 두드렸다.

"30만 명쯤?"

생각보다 너무 큰 수에 수행비서는 퍽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30만 명은 너무 많지 않을까요. 국제적으로 토벌에 지장이 생길 것 같은데...."

"그거야말로 우리가 알 바는 아니죠."

웨슬리 사무총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헌터 관리 권한은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헌터 인원 부족 또한 그쪽이 책임져야 할 일이겠죠."

"...."

웨슬리 사무총장은 미소를 흘렸다.

그래.

이거라면 우리는 우리대로 최후의 수단을 준비하며, 동시에 카르마 코퍼레이션 또한 견제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헌터 인원이 부족하게 되면, 당연히 그 문제를 해결할 책임은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있다.

하지만 아무리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라고 해도 30만 명이나 되는 공백을 바로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본사 인력이라도 파견하겠지.

"그렇게 되면 당연히 외부적인 일에는 신경을 못 쓰겠죠."

"...그럼."

"연결책들, 대기시켜 놓으세요. 조만간 지령을 내려야 할 것 같으니 말이죠."

"알겠습니다."

수행비서는 대답하곤 곧바로 등을 돌렸다.

그렇게 집무실을 나서면서 그녀는 내심 사무총장의 책략에 감탄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청소부 출신이 세운 조직을 이렇게까지 견제를 하는 게 과연 정상적인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

"그래서, 어떻게 되고 있어요?"

카르마 본사, 대표이사실.

한유빈이 업무 보고를 마치고는 슬쩍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교육이요. 강력범죄자들은 아니라고 해도 통제가 잘 되는 놈들은 아닐 텐데... 어떻게 말은 잘 들어요?"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서열 정리를 잘해놔서."

"...?"

그녀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뭣하면 직접 한번 보시겠습니까?"

"…지금요?"

"이번 달 기획도 끝내서 널널하지 않습니까. 뭐, 저도 그놈들한테 전할 말도 있고요."

뭐,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겠지.

일일이 설명해주기도 귀찮고.

"따라오시죠."

나는 한유빈을 데리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물을 빠져나와 근처 거리로 들어서자, 머지않아 '봉사'라고 쓰인 형광 조끼를 입은 채 거리를 청소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야, 이건 플라스틱이냐 캔이냐?"

"밑에 보면 모르냐? 플라스틱이잖아."

"아니 근데 위에는 캔인데…?"

"…아니 뭐 이따구로 만들었어?"

"반으로 쪼개서 버려야 되나?"

"아 씨, 그렇게까지 해야 해?"

"그럼 어떡해. 막 버릴 수는 없잖아."

"대표님한테 여쭤볼까?"

"…누가 물어볼 건데?"

"...."

"...."

그들은 빗자루와 쓰레기봉투를 하나씩 들고 성실하게 길거리를 청소하는 중이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쓸만해지지 않았습니까?"

"...."

한유빈은 자신이 지금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 정도면 교육이 아니라 개조인데요?"

"오명진 법무부 장관님도 같은 소리를 하더군요."

"법무부 장관이 그쪽을 찾아왔어요?"

"예, 뭐… 이번 프로젝트에 꽤나 걱정이 많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한테 오는 길에 저놈들 청소하는 걸 봤다고 하시더군요. 아무래도 꽤나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

"뭐, 그래도 다들 시답지 않은 전과자들이라 가능한 거지, 눈 돌아간 놈들이었으면 힘들었을 겁니다."

"...어련하시겠어요."

한유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청소 삼매경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다들 수고하십니다."

"…대, 대표님?!"

"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나를 발견하자마자 그들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독기가 그득그득하던 한 달 전과 비교하면 이제야 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 주가 교육 마지막 주차입니다. 이번 주가 끝나면 이제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갈 겁니다."

"엥?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오, 할 만하셨나 봅니다."

"생각보다 재밌었습니다."

"천직 같더라니까요? 하하하!"

그들이 너스레를 떨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 또한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홍두식 팀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아까부터 연락이 안 되던데."

"아, 아 그게...."

"티, 팀장님은 지금, 그러니까...."

갑자기 서로 눈치를 보며 말을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던 그 순간.

"그… 쓰레기 버리러 가셨는데,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오신다고...."

"야, 그거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럼 대표님한테 거짓말해?"

"...."

...그 인간은 신경 쓸 것도 없군.

아주 만사가 태평하신 사람이네.

"아무튼, 수고하시고. 여기 작업 끝나면 천호동 쪽 던전 청소 작업에 들어가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그렇게 등을 돌리던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다름 아닌 하성일 해외사업 본부장이었다.

보자마자 불길한 느낌부터 스쳤다.

해외사업 쪽은 그에게 전권을 위임했기에, 업무 보고를 제외하면 그가 내게 직접 연락을 해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개인 번호로 연락을 했다는 건… 대개는 문제가 생겼다거나 좋지 않은 일들뿐이었다.

"...예, 김준우입니다."

나는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대표님! 크, 큰일 났습니다!」

"...하아."

불길한 느낌이 딱 맞아떨어졌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전 세계 협회에서 랭크 심사 탈락자가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예?"

그게 무슨 큰일인가.

애초에 그러려고 시작한 심사인데.

「우습게 볼 게 아닙니다. 그 숫자가 15만 명을 넘었습니다!」

"...!!"

15만 명…?

그게 말이 되는 수치인가?

「아무리 봐도 자연스러운 수치는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탈락자가 발생하고 있고요!」

"그게 대체 무슨...."

「다른 것보다 각 협회의 토벌에 지장이 생기고 있습니다. 인원 부족은 저희 쪽 책임이라, 일단은 급한 대로 본사 인원을 파견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나는 잠시 대답을 아낀 채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파견 가능한 인원, 최대로 모아보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으면 바로 연락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고는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길 잠시.

"무슨 일이에요?"

"...."

한유빈이 물었지만, 나는 대답을 아꼈다.

랭크 심사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15만 명의 탈락자가 발생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럽다.

이건 누군가 심사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100% 확률로.

'국제협회....'

그놈들이겠지.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심사에서 탈락시키는 게 그들한테 무슨 의미가 있다고?

'....'

그 어느 때보다도 머리를 굴리길 잠시.

"...교육, 조금 일찍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앞에 있던 10명의 헌터들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업무 투입 준비하십시오."

"…예?"

"무,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자세히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조만간 뭔가가 크게 터질 것 같군요."

갑작스럽게 수십만 단위로 등록이 해지된 헌터들.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부족해진 토벌 인원.

헌터 관리 권한의 책임.

이건 아무리 봐도....

녀석들이 최후의 수단을 준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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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 현재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시행한 랭크 심사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탈락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 현재까지 총 15만 명 이상의 헌터가 랭크 해지 처분을 받았으며, 이만한 수의 헌터가 한 번에 일자리를 잃은 것은 토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 이로 인해 각국 협회의 토벌 인원이 갑작스레 부족해진 상황이며, 약소 협회는 당장 토벌이 불가능해진 수준이라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 이번 사태로 인해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국제 사회는 갑작스럽게 무리한 심사를 진행한 탓에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의견입니다.

- 한편, 국제 헌터 협회 또한 전 세계 헌터 관리 권한을 가진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어떻게든 책임을 지고 이번 일을 해결해야 할 것이라며 성명을 낸 가운데....

대표이사실.

심각한 얼굴로 뉴스를 보고 있던 그때였다.

"뭐예요?!"

이아영 본부장을 비롯한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모든 간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예요?! 탈락자가 15만 명을 넘겼다뇨!"

"지금 이사회도 발칵 뒤집혔어요. 각국 협회에서 어떻게든 책임지라고 난리도 아니고, 주가는 뭐 말할 것도 없고."

"방법이 있는 거예요, 선생님?!"

한유빈과 김민주 또한 한마디씩 보탰다.

팔짱을 낀 채 잠시 대답을 아꼈다.

나 또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아,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니까요! 헌터 관리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 이상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고요!"

하지만 그런 반응이 퍽 답답했는지, 한유빈 본부장이 기다리다 못해 빽 소리를 질렀다.

"일단… 어떻게든 인원을 보충해야겠죠."

내가 담담히 입을 열자, 이번엔 이아영 본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15만 명을 단시일에 채우는 건 불가능해요. 심지어 전 세계 협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일이잖아요. 그걸 모두 메우려면 최소한 1년은 필요해요."

"무엇보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앞으로 탈락자가 더 발생할 겁니다. 저희 쪽 예상으로는 최소 20만 명에서 30만 명까지는 빠져나갈 거라고...."

하성일 본부장까지 의견을 보탰다.

그들의 조언에 나는 한숨을 길게 늘어트렸다.

나도 알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15만 명에 달하는 헌터가 한 번에 빠져나가면 당연히 토벌에 지장이 생긴다는 것도. 짧은 시간 안에 그만한 인원을 메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도.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네?"

"이번 사태 말입니다...."

나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국제협회에서 벌인 일인 것 같습니다."

"...네?"

"뭐, 뭐라고요?!"

"고작 요 며칠 새에 15만 명이나 탈락할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계속해서 탈락자가 발생하고 있는 걸 보면…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심사에 개입하고 있는 거겠죠."

"하, 하지만 국제협회가 왜 그런…? 탈락자가 많아져서 토벌에 지장이 생기면 본인들한테도 피해가 갈 텐데요?"

이아영 본부장이 이해할 수 없다며 물었다.

"헌터 관리 권한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탈락자들은 등록이 해지되니까 더 이상 관리 대상이 아니게 되죠."

"그럼…?"

"국제협회는 우리 눈을 피해서 본인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필요한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적이 이어졌다.

다들 그게 무슨 뜻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자, 잠깐…!"

얼마 지나지 않아, 한유빈 본부장이 무언가를 눈치챈 듯 입을 열었다.

"설마 그놈들...."

"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국제협회는 지금,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

"...!"

그 말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그게 무슨…!"

"우리 눈을 피해서 전쟁 병력을 준비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토벌 조직이 전쟁이라뇨! 다 같이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뭐야!"

"당장 대통령한테 말씀드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 아니, 그것보단 일단 UN에…!"

"다들 진정하시죠."

패닉에 빠진 듯 주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난 손을 내저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유감스럽게도… 국제협회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든 아니든, 지금으로선 우린 그걸 막을 수가 없습니다."

"증거가 없다는 거예요?"

"여유가 없다는 겁니다."

이아영 본부장의 물음에 즉답했다.

"다들 말씀하셨다시피, 이대로 계속 탈락자가 발생하면 전 세계적으로 토벌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니, 이미 그런 것 같군요."

나는 켜두었던 뉴스를 슬쩍 흘기곤 말을 이었다.

"만약 이번 사태로 인해 각국에 피해가 발생하면, 모두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만약 인명 사고라도 난다면... 걷잡을 수가 없겠죠. 최악의 경우, 국제협회에서 인정받은 토벌권과 헌터 관리권을 다시 빼앗기게 될 수도 있고요."

그 순간 모두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이해한 듯했다.

더 이상 전 세계 토벌 시장에 그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는 뜻.

다시 말해 국제협회에 완전히 잡아먹힌다는 의미였으니까.

"어떻게든 각국 협회가 토벌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파견을 보내든 지원을 해주든 말이죠. 다만 문제는...."

잠시 뜸을 들이다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국제협회가 그 기간 동안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는 거겠죠."

"...."

"...."

다들 침묵하는 걸 보니, 모두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우리가 인원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다른 쪽으로는 신경 쓰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국제협회는 어떻게든 우리를 내외적으로 견제하려고 들겠죠. 정훈 의원이 그랬던 것처럼."

"…어렵네요."

"하,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이아영 본부장과 김민주가 말끝을 흐렸다.

분명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절망하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다간 정말 걷잡을 수 없을 테니까.

"일단 지금은 인원 문제부터 어떻게든 해결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하성일 본부장님?"

"네, 네."

"지금 탈락자 비율이 10% 이상인 협회와 당장 토벌에 지장이 생길 수 있는 약소 협회 리스트를 만들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김민주는 그 리스트를 토대로 파견 우선순위를 정해서 파견팀 좀 꾸려주고. 이아영 본부장님은 오늘부터 이클립스 풀가동으로 돌려주세요. 인원 부족 협회 상대로 우선 장비라도 공급해줘야 할 것 같으니."

"알았어요."

"그리고… 홍두식 팀장님."

"어야."

사무실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침묵을 지키던 그가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저희가 이쪽 일에 뛰어드는 순간부터 국제협회의 견제가 들어올 겁니다. 전국의 연결책들에게 지령을 내릴 텐데, 모두 찾아서 저에게 보고해주세요."

그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는 뭘 하면 돼요?"

끝까지 호명되지 않은 한유빈 본부장이 슬쩍 손을 들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다른 말을 먼저 입에 올렸다.

"여러분들 앞에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지금 이건 무조건 우리가 지는 싸움입니다."

"...."

"만약 해결한다고 해도 손해가 어마어마할 거고,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몰락할 겁니다.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얻어맞기만 하다가 죽을 순 없죠."

그 말에 한유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그쪽은 저랑 국제협회로 갈 겁니다."

"...네, 네?!"

눈을 크게 뜬 채 당황하기도 잠시.

"…알았어요."

이내 질문은 잠시 접어두겠다는 듯,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내 나는 내 앞에 모인 이들을 향해 한마디를 뱉었다.

"일들 합시다."

짧았던 평화가 깨진 그 순간,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렇게 각 본부장이 본인의 임무에 돌입한 시각.

그들 못지않게 이사회 또한 비상이 걸렸다.

"지금 이거, 해결할 수 있는 거 맞긴 한 겁니까?!"

"해결한다고 해도 문제에요! 모든 파견과 지원을 무상으로 해야 하는데, 그 손해는 어떻게 메울 생각입니까?!"

긴급 소집된 이사회.

그곳에 자리한 모두가 격양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가망이 없습니다!"

"지금 회사 재정으로는 채 한 달도 못 버텨요!"

"젠장! 그러게 왜 랭크 심사 같은 걸 해서는...."

"차라리 이참에 김 대표가 책임지고 사퇴하는 게…!"

"하, 시발."

그 순간, 난데없이 울려 퍼진 욕설.

이사들은 곧바로 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이두식 이사가 있었다.

"김 대표가 차려놓은 밥상에 아무런 노력도 없이 눌러앉아서 꿀이란 꿀은 다 빠셔놓고, 이제 와서 내치자? 하다못해 말 못 하는 짐승도 그러진 않습니다."

"이, 이봐. 이 이사!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이성적으로 생각해야지! 이게 다 회사의 미래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 아닌가!"

"예예, 어련하실까요."

이두식 이사가 대놓고 빈정대자, 이사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리곤 결국 참다못한 이사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어디서 배신자 취급이야! 그럼 당신은 김 대표가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하… 하하하하!"

그 질문에 이두식 이사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한참을 웃어대던 그가 말하길.

"언제는 안 그랬습니까?"

"...."

"...."

회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하,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힘들 겁니다."

"당장 파견 비용만 해도 수십억 원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들어갈지도 모르고, 설령 어떻게든 해결한다고 해도 그 엄청난 적자를 메울 수가...."

조용히 있던 이사들 또한 이번에는 이두식 이사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했다.

"본부장들이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건 알지만, 결국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으면 다 무용지물입니다."

"더 큰 문제는 지금 이 상황에서 투자자들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거고요."

"...."

늘 김준우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냈던 이두식 이사조차도 그 말에는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파견 비용, 지원 비용, 이클립스 가동 비용… 이번 사태에 들어가는 돈만 해도 이미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하지만 모든 책임이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있는 한, 각국 협회에 비용을 청구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전 세계적인 문제가 터진 마당에 누가 투자를 해주겠는가.

물론 그곳에 있는 이사들 또한 꽤나 쟁쟁한 인맥이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투자를 받아낼 명분이 없었다.

'빌어먹을....'

이두식 이사조차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키던 그때.

"카르마가 돈 걱정을 하는 날이 다 오는군."

한 노년의 남성이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품격과 기품이 느껴지는 목소리.

마치 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강렬한 인상.

"회, 회장님…?!"

"애초에 돈이 필요하면 나를 찾아왔어야지. 내가 도와줌세."

명불허전. 국내 최대 기업이자 10년 연속 시가총액 500조를 자랑하는 대기업, 한별 그룹의 총수 하덕수 회장이었다.

"마,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돼서 회사가 망하면...."

"무슨 소리인가. 지금 자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 줄 알고."

하덕수 회장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투자를 시작한 이상, 자네들은 망하고 싶어도 못 망해. 알겠나?"

"...."

이두식 이사는 그 압도적인 한마디에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현재 카르마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이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헌터, 기업가, 정치인.

그뿐만 아니라 전국의 부산물 처리시설 기업과 며칠 전 납품 계약을 맺은 세훈 화학까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실세들과 도움을 받았던 이들 모두, 오직 한 명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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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작전 본부실.

"한별 그룹에서 투자를 받아냈다고요?"

이아영 본부장이 전화로 전한 그 소식에 김민주가 화색을 띠며 되물었다.

「네! 아빠한테 들었는데 하덕수 회장이 직접 찾아오셨대요. 하성일 본부장님도 모르고 있었다고 하고요」

"하...."

김민주는 그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헛웃음을 뱉었다.

「아무튼, 파견 비용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준우 씨한테는 제가 전해둘 테니까, 민주 씨는 작전에만 집중해줘요.」

"...고마워요."

「제가 뭘 했다고... 다 우리 잘나신 대표님 덕분이지.」

"뭐, 그건 그러네요."

김민주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덕수 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아무 조건 없이 이런 상황에서 투자를 결정했다는 건 사업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그가 움직였다는 건, 모두 김준우의 공덕이라는 것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이걸로 일단 한시름 덜었고....'

김민주는 통화를 끝냈다.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파견팀을 꾸려야 한다.

다행히 인력에 여력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사이, 마침 기다리던 이가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김민주 본부장님!"

다름 아닌, 우선 파견 국가 리스트를 작성해주기로 한 하성일 본부장이었다.

그는 서류 뭉텅이를 책상 위에 턱 올려놓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토벌 비상 협회 리스트입니다. 소말리아랑 시리아, 체코, 베네수엘라, 미얀마 포함해서 총 22개국입니다."

"22개국이요?"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김민주 본부장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인원은 힘들어요. 다 파견 보내면 국내 토벌에 문제가 생길 텐데...."

"알고는 있습니다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이 국가들은 지금 국정도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초기에 지원하지 못하면 바로 인명 피해로 이어질 겁니다."

"하아...."

김민주가 깊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예상치 못한 딜레마였다.

하성일 본부장이 말한 것처럼, 저 나라들은 조금이라도 토벌에 영향이 생기면 문제가 걷잡을 수가 없다.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국 시민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의 존망이냐, 자국 시민들의 안전이냐.

당연하게도 그 무엇 하나 쉽사리 선택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아, 이를 으득 깨물며 머리를 쥐어짜던 그때였다.

"소식 들었습니다!"

작전 본부실에 예상치 못한 손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본부장님!"

"못 본 지 벌써 몇 달은 됐죠?"

"차 대표님? 유 대표님도…?"

그들은 다름 아닌, 아레스 길드의 차석현 대표와 아프로디테 길드의 유지우 대표였다.

"대, 대표님들이 여긴 왜...?"

"왜냐뇨. 당연한 거 아닙니까!"

"토벌 인원이 부족하다면서요. 저희도 손을 좀 보태드릴까 해서요."

그들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국제협회가 전 세계 토벌권을 관리하게 된 후, 당연히 토벌권이 사라진 국내 민간 길드는 모두 카르마 코퍼레이션 소속으로 흡수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속만 옮겼을 뿐, 기본급이 나온다는 것만 제외하면 운영 자체는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당연히 정식 작전팀이 아니었기에 의무 토벌도 없었고, 실적도 적용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이 지금 작전팀을 대신해서 토벌을 진행한다고 해도 작전팀과 같은 토벌 수당은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괘, 괜찮으시겠어요? 아시겠지만 토벌 수당은...."

"비상 상황 아닙니까. 그동안 받은 게 있는데 모른 척할 순 없죠."

"걱정 말고 본부장님은 파견에만 집중하세요. 국내 토벌은 저희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순수한 호의로 나선 그들이었지만, 김민주는 그럼에도 미안한 감정이 앞섰다.

"거의 모든 작전팀을 파견해야 할 상황이에요. 그래서 국내 토벌을 모두 맡겨야 하는데… 두 길드만으로는 힘들 거예요."

"하하하! 무슨 말씀입니까. 두 길드라뇨!"

그때, 차석현 길드장이 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전국에 있는 모든 길드가 대기 중인데!"

"...."

김민주는 그 말에 벙쪄 있길 잠시.

'선생님....'

모든 게 그의 공덕이라는 걸 알고 있는 김민주는 그에게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네!"

"맡겨 주십쇼!"

전국 최고의 두 길드.

그리고 그 길드를 이끄는 두 대표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국의 모든 현역 헌터가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

공항에 도착해 입국 심사를 마치자마자 김민주에게 전화가 왔다.

"국내 토벌은 길드들이 맡기로 했다고?"

「네! 전국 모든 길드가 토벌에 나서줬어요.」

별일이군.

우리랑 달리 오로지 수익을 위한 집단인데, 토벌 수당도 못 받는 일에 뛰어들다니.

'대체 왜…?'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뭐… 아무튼 다행이네."

「여긴 걱정 말고 선생님 일에 집중해주세요.」

"알았어. 너도 수고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또다시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번엔 홍두식 팀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어이, 대표님. 아들 배치 다 끝났어야. 경상, 전라 각 두 명씩. 충청, 강원 한 명씩. 나머진 다 경기여.」

"수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뭘 조사하면 되는 겨?」

"어디에 있는 누가 지령을 받고 움직일지 정보가 전혀 없는 이상,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한 게 있다 싶으면 모조리 뒤져봐 주십시오. 특히 정치랑 언론 쪽 인사들은 늘 주시해주시고요."

「그건 경기 쪽 애들이 밑 작업을 다 해놓았으니 걱정 말어.」

"돈줄과 관련된 곳도요. 은행, 기업 같은 곳이요."

「알았어야.」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있으면 바로 보고해 주시고요."

「알았다니까, 그려. 암튼 우리 걱정은 말고, 그 짝이나 조심혀. 호랭이 굴로 들어가야 되는디 정신 똑띠 차리고.」

"알겠습니다."

모든 통화를 끝내고 나서야 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대충 준비는 다 됐군요."

"이제 우리만 잘하면 되겠네요."

나와 동행한 한유빈이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그렇게 공항을 빠져나가던 중, 한유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는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예…?"

"본부에 가는 이유요. 상황이 상황이니까 일단 따라오긴 했는데, 이제는 알고 있어야죠."

"뭐… 말했잖습니까. 이건 무조건 지는 싸움이라고."

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파견을 보내고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죠. 결국, 부족한 인원을 다시 보충하기 전까지 이번 사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죠…?"

"빠져나간 15만 명을 다시 복구하는데 최소 1년.... 계속해서 빠져나간다면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린 파견과 지원을 유지해야 한다는 얘기죠."

한유빈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문제는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설령 해결한다고 해도 손해가 너무 큽니다. 자칫하다간 계속 운영할 수 없게 될 수도 있고요."

"...."

그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회사가 어떻게 되든 나랑은 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돌아가면 다 사라지는 것들이니까.

그보다 나에게 중요한 건 시간이다.

벌써 회귀한 지 1년하고도 반년이 지났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단 3년 6개월.

그런데 이 일을 수습하느라 2, 3년을 소모한다면... 사무총장이 되는 건 사실상 물 건너가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겠지만. 뭐, 그걸 떠나서....

'이번에도 국제협회에 질 순 없지....'

회귀 전에도 내 인생을 막은 놈들인데, 이번에도 그놈들에게 막힐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일단은 급한 불은 끄되,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걸 해결해야겠죠."

"설마… 그만 탈락시켜 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아니죠?"

"부탁뿐이겠습니까? 안 되면 무릎을 꿇기라도 해야죠. 말했듯, 이번만큼은 우리가 철저하게 불리한 입장입니다. 그러니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닙니다."

"...."

한유빈은 대답을 아낀 채 시선을 피했다.

누가 봐도 꽤나 분한 얼굴이었다.

"뭐, 너무 그러지 마십쇼. 애초부터 출발선이 다른 싸움 아니었습니까. 오히려 여태까지 선방한 게 기적인 거지. 언젠간 한 번은 이렇게 될 거란 거, 그쪽도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한데...."

"사람 목숨이 달린 일에 쓸데없이 자존심 세우지 마십쇼. 빌든 꿇든, 살아남는 게 우선이니까."

그제야 한유빈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못마땅해 보였지만.

"뭐, 일단 그건 둘째 치고.... 어찌 됐든 보험은 들어놔야겠죠."

"...?"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며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이어진 아주 짧은 통화.

10초도 채 걸리지 않아 핸드폰을 집어넣자, 한유빈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누구한테 전화한 거예요?"

"보면 압니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

똑똑―.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사무총장 집무실.

수행비서가 노크와 함께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요?"

웨슬리 사무총장이 묻자,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가 본부를 방문했습니다."

"...."

뜬금없는 소식에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아....'

이내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린 듯,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하하하! 설마하니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군요."

"올라오라고 할까요?"

"귀한 분들이 오셨는데 그럴 순 없죠.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이상하리만치 신이 나 보였다.

그렇게 1층 로비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그는, 마침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마주했다.

"오랜만이군요, 미스터 김. 이렇게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를 향해 반갑게 악수를 건넸다.

하지만 김준우는 손을 잡지 않았다.

"오늘은 간곡히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

"오, 천하의 김 대표가 저한테 부탁이요?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웨슬리 사무총장은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그가 찾아온 이유야 뻔했고, 무엇을 부탁할지는 더더욱 뻔했다.

그럼에도 웨슬리는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 그때, 김준우가 허리를 푹 숙였다.

"랭크 심사 탈락자, 재심사를 통해서 다시금 복귀시켜주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예상에서 한 치를 벗어나지 않은 부탁.

그 말에 웨슬리 사무총장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누가 들으면 제가 일부러 탈락자를 만들고 있는 줄 알겠습니다."

"일부러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현재 너무 많은 탈락자가 발생한 탓에 각국 협회가 토벌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거야말로 카르마 코퍼레이션 책임 아닙니까? 랭크 심사를 시행한 것도, 헌터 관리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쪽인데?"

"물론 책임은 질 생각입니다."

"그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웨슬리 사무총장은 애써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설령 내가 한 일이라고 해도, 그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있습니다."

그때, 김준우가 무거운 목소리로 즉답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이윽고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웨슬리 사무총장을 향했다.

"살려드리겠습니다."

"...뭐?"

귀를 의심하는 한마디가 날아들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 탈락자 발생을 멈추고 재심사를 해주신다면, 저는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다만,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이내 김준우는 허리를 바짝 세우곤 웨슬리 사무총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로 국제 헌터 협회 본부에 전쟁을 선포하겠습니다."

"...."

"아,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웨슬리 사무총장의 입가에서 사라진 미소는 어느새 김준우에게 옮겨가 있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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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전쟁이라뇨…!"

"진정하시죠."

한유빈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지만, 나는 곧바로 그녀를 제지했다.

애초에 내가 정말 무릎이나 꿇으려고 여길 왔겠는가.

아니, 그럴 거였으면 왜 그녀를 데려왔겠는가.

"그러니까 김 대표님 말씀은...."

그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웨슬리 사무총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국제협회 본부에서, 국제협회와 전쟁을 벌이겠다는 건가요?"

"설마요. 부탁만 들어주신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 감히 누구 앞에서 그딴 말을 내뱉는 건지 알고는 있습니까?"

"웨슬리 사무총장님 앞이죠."

"하…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리길 한 차례.

그의 눈이 번뜩였다.

"나랑 장난치자는 겁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그의 눈빛에 맞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진심이라고."

내 마음이 전해진 건지, 웨슬리 사무총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이면... 그만한 각오는 돼 있겠죠?"

그리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언제 상황을 알린 건지, 곧바로 들이닥친 군인들과 헌터들이 우리를 둘러쌌다.

그중에는 PB 코퍼레이션의 에마 대표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슥 둘러보았다.

"어째 많이 부족합니다?"

"...뭐?"

"제일 잘 아시는 분이잖습니까. 이 정도로는 저 못 막는 거."

"...."

"장난하지 마시고 모든 병력을 동원하시죠. 아니면 뭐… 탈락한 헌터들로 어디서 군사훈련이라도 시키고 있는 겁니까?"

대놓고 도발하자, 웨슬리 사무총장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미스터 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들은 김을 막으려고 온 게 아니에요."

"...?"

"내가 폭주할 걸 대비해서 온 거지."

그리고 그 순간.

[고유 스킬 : 천지창조]

주변의 공간이 마구 휘어지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공간을 컨트롤 하는 스킬이라니....

마법사 클래스…?

아니 이건....

'시발, 설마…!'

나와 같은, 초월 클래스다.

능구렁이 같은 새끼.

이런 힘을 잘도 숨기고 있었군.

"...진짜로 싸워야 해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한유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길 한 차례.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고유 스킬 : 마왕]

콰과과과광―!!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검붉은 기류가 한데 뒤섞이기 시작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이야. 매번 절 놀라게 하는군요, 미스터 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뒤에 숨어서 펜대만 굴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설마 이능력자였을 줄이야. 그런 힘을 숨기고 몸이 근지러워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덕분에 오늘 몸 좀 풀겠군요. 뭐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얼마든지."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오는 건가요?"

그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아무리 봐도 평소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와 전쟁을 해봤자 당신에게 이득 될 게 전혀 없는데?"

"아무렴요. 오히려 일 저질러 놓고 엄한데 화풀이한다며 국제 사회의 몰매를 맞겠죠."

"더군다나 우린 국제협회입니다. 국제적인 기구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가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아시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사무총장님이 했던 말, 제대로 대답을 못 해 드린 것 같아서... 이 자리에서 정확하게 말씀드리죠."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사무총장님 말씀대로 전 시간석을 통해서 과거로 온 사람입니다."

"...."

"저는 목표를 이루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무총장님이 자꾸 제 일을 방해하시더군요."

웨슬리 사무총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전 처음부터 잃을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차피 제가 이룬 것들 모두 미래로 돌아가면 의미 없는 것들이고요. 국제 사회의 비난? 시민들의 몰매? 제가 그런 거 한두 번 맞아본 줄 아십니까? 그까짓 거 백 번도 더 당해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제 앞길을 방해하는 쓰레기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군요."

"...."

"어차피 그쪽도 준비하고 있던 일 아닙니까. 조금 빨리 왔다고 생각하십시오."

"진짜 전쟁을 벌일 생각이군요."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자신 있어요?"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각성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시전자는 기존의 클래스를 초월합니다.]

[각성 클래스 : 절대 군주]

쿠구구구궁―!!

"국제 헌터 협회, 웨슬리 사무총장님."

시커먼 기류가 휘몰아치는 공간에 뒤섞였다.

"절 막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나와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저 말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

서울 중부 지역 본부 세관.

모든 수출입화물의 통관을 진행하는 국가 기관이다.

"세, 세관장님…!"

그곳의 책임자, 지보원 세관장의 집무실로 한 직원이 들이닥쳤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계속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조속히 처리해줘야 할 것 같은데 아직 심사 중인 겁니까?"

"...."

직원의 다급한 물음에도 지보원 세관장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곤 앞에 놓인 몇 장의 서류를 흘겨보길 한 차례.

"모두 기각시켜."

"네, 네?!"

"못 들었어? 모두 기각시키라고."

"하, 하지만…!"

직원은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헌터 무기 반출을 기각하면 토벌 지원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지보원 세관장은 입을 꾹 닫았다.

그의 앞에 놓인 서류는 수백 개의 헌터 무기를 해외로 내보내기 위한 신청서였다.

매번 해외 파견 때마다 받은 서류였고, 또 그동안 한 번의 고민도 없이 허가를 내줬지만.

어째선지 이번에는 그걸 모조리 기각했다.

헌터 무기 반출을 기각한다는 건, 곧 파견을 막겠다는 의미와 다를 게 없었다.

직원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대체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지금 각국 협회가 인력 부족으로 난리인 거, 아시잖아요! 지금 이걸 기각하면 때를 놓칩니다!"

"...."

"세관장님…!"

"우리가 협회냐?"

그때, 계속 침묵하고 있던 지보원 세관장이 기어이 입을 열었다.

"다 카르마가 뻘짓하다가 생긴 일인데, 왜 우리가 그놈들한테 맞춰줘야 해?"

"그, 그게 무슨...."

직원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이게 사업체 간의 일도 아니고 전 세계 시민들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야, 이 새끼야. 우린 공무원이야. 유니세프가 아니라!"

지보원 세관장이 그의 말을 끊으며 윽박질렀다.

"여태까지 아무 제제 없이 다 보내줬잖아. 미국 때도 그렇고 홍콩 때도 그렇고. 그럴 때마다 뭔 일이 있었냐?"

"...?"

"미국 때는 국제 협회랑 정면으로 붙질 않나, 홍콩 때는 도시 하나를 부숴놓질 않나. 카르마가 파견을 보낼 때마다 꼭 하나씩 거하게 사고를 치는데, 우리가 이걸 언제까지 눈감아줘야 해?"

지보원 세관장이 자리에서 슥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사고만 치는 거면 차라리 이해를 해. 나갈 때마다 국제 협회든 타국이든, 꼭 하나씩 신경을 건드려서 매번 타깃이 되잖아. 카르마는 상관없을지 몰라도 국가적으로는 매번 손해를 본다고. 오죽하면 외교부랑 기재부에서 시도 때도 없이 지랄들을 하겠냐."

"...."

"게다가 이번엔 파견 규모도 역대 최고야. 이거 그냥 보내면 분명 뭔 일이 나도 날 거야."

그는 등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럼 카르마 쪽에는 뭐라고 해야...."

"우리가 그런 것까지 눈치 보면서 일해야 하냐? 그 정도는 알아서 해. 아무튼, 이번엔 그냥 못 보내주니까, 그렇게 알아."

"...."

직원은 차마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평소에도 워낙 고집이 센 사람이었기에,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고집과는 별개로 최소한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여기서 파견을 막아버리면 더 큰 국가적 손해가 아닌가.

초동 대응에 늦은 것으로 온갖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그걸 감당하는 게 사고를 수습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것 같은데....

'에휴, 시발 모르겠다.'

하지만 모두 속으로만 생각할 뿐, 직원은 더 말을 꺼낼 생각도 못 한 채 등을 돌렸다.

그래, 한낱 직원이 무슨 힘이 있다고 밀어붙이겠는가.

그냥 그렇다면 그런가 보다 해야지. 그게 정신 건강에 좋다.

그렇게 단념하며 사무실 문고리를 잡고 돌리는 순간.

쾅―!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그 짝이 지보원 세관장님 맞으쇼?"

폭발과 함께 들이닥친 정체불명의 남자들.

덕분에 직원은 뒤로 내동댕이쳐졌고, 지보원 세관장은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다, 당신들 누구야!"

"뭘 그런 걸 궁금해하십니까."

"이게 지금 장난하나…!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콰직―!

그가 입을 여는 그 순간, 난데없이 쳐들어온 그들이 인사 대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지보원 세관장은 두 동강이 난 책상을 바라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지금 이거 공무집행 방해야! 시발, 경비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보쇼."

그때, 남자들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지보원 세관장을 향해 다가갔다.

"나랏일 하는 양반이 그러면 안 되지."

"뭐, 뭐…?"

"국제협회한테 뭘 얼마나 받아 처먹었길래, 이딴 개수작을 벌여?"

"...!!"

남자들의 말에 지보원 세관장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부인하자 남자들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팀장님. 잡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알겠습니다."

뚝, 전화를 끊고는 조금 전 뒤로 나자빠진 직원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야, 거기."

"네, 네…?"

"넌 꺼져. 뒈지기 싫으면."

"네, 네!"

직원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곧바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철컥―.

남자들이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잘 들으세요, 지보원 세관장님."

이윽고 남자들은 준비해 온 장갑을 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이거 나름 합법으로 일하는 거거든요?"

"뭐, 뭐…?"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세관장님을 뒤지게 패도 합법이라는 겁니다."

"합법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누가 보낸 거야! 사주한 놈이 누구…!"

"대통령."

그의 얼굴이 바싹 굳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보냈습니다."

"...."

"잘 선택하시죠. 여기서 바른대로 불고 두 발로 걸어 나가실지. 아니면 어렵게 불고 개처럼 기어나가실지."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난 아무것도 모르는…!"

뚝―.

이내 그의 다리가 부러지는 순간, 귀를 찢는 비명이 사무실에 가득 울려 퍼졌다.

"천천히 해봅시다. 시간은 많으니까."

남자들은 그 모습에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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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 저희도 지금 해결책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작전본부실.

아까부터 쉼 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김민주 본부장은 입이 닳도록 통화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네네…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조처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네, 죄송합니다."

전화를 내려놓는 순간 또다시 울리는 전화.

다시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 할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김민주는 전화를 받는 대신 깊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때.

"대체 뭡니까?"

하성일 본부장이 황급히 사무실로 들어서며 잔뜩 격양된 목소리를 냈다.

"왜 아직도 통과가 안 되고 있어요?! 지금 각국에서 난리도 아닌데…!"

"세관에서 무기 반출이 허가가 나질 않고 있어요."

"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하성일 본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태까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요."

"저도 알아보는 중이에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하성일 본부장이 답답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급한 대로 일단 인력만이라도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무기는 각 협회에 구비된 걸 쓰면 되잖아요."

"그건 힘들어요. 검사랑 가디언 클래스는 몰라도 마법사, 사제, 메카닉, 저격수 클래스는 각자 고유 스킬에 맞춰 제작된 무기가 아니면 제힘을 발휘할 수 없어요."

"아...."

미처 몰랐던 사실에 하성일 본부장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나름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들어온 지도 수개월인데, 아직도 현장 쪽 일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꽤나 창피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그럼 어떡합니까. 각국 토벌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요. 파견이 더 늦어지면 인명 피해가 발생할 겁니다."

"...."

김민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떡하냐고 물은들, 그녀 또한 현재로선 뾰족한 수가 없었다.

물론 너무나 비상식적인 상황이었기에 김준우 직속의 '정보팀'에 조사를 부탁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단숨에 상황을 해결해줄 수는 없겠지.

절차니, 뭐니, 이것저것 또다시 시간이 걸릴 게 뻔했으니까.

"일단은 조금 더 기다려보는 수밖에는...."

이내 김민주가 그렇게 입을 여는 순간.

- 서울 중부 지역 본부 세관의 지보원 세관장이 뇌물수수 및 비리 혐의로 검찰에 입건되었습니다.

뜬금없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김민주와 하성일 본부장은 누구랄 것 없이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지 세관장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중, 갑자기 경찰을 불러 달라 요청하였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혐의 일체를 자백했습니다.

- 이후 조사에 따르면 지보원 세관장은, 국제 헌터 협회로부터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파견을 막는 조건으로 거액의 현금을 챙겼다고 밝혔습니다.

- 수출입 통관을 책임지는 공무원이 이러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과 국제 헌터 협회가 파견을 막으려 했다는 사실은 현재 전 세계 언론에 빠르게 보도되고 있으며, 전 세계적인 헌터 인력 부족 사태와 맞물려 많은 시민이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 한편 그는 교통사고로 인해 두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어디서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 당국은 물리적인 협박과 폭행이 있었는지 추가로 조사하겠다고 밝혔으며....

"뭐, 뭡니까 저건…?"

"설마 정보팀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빨리 꼬리를 잡아냈다고?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진짜로 세관이 국제 협회랑 얽혀 있던 거였어?

'대체 이게 무슨....'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자, 퍽 충격이었는지 김민주가 학을 떼던 그때였다.

"반출 허가 났어요!"

이아영 본부장이 문을 덜컥 열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네…?"

"세관장이 입건되자마자 대통령 재량으로 기재부 직속을 꽂았대요. 방금 무기 반출 모두 허가 났다고 연락 왔어요!"

"...하아."

벼랑 끝에서 겨우 기어 올라온 기분이었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길 한 차례.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죠."

"네!"

"좋습니다!"

이내 그들의 눈이 번뜩였다.

***

프랑스 파리, 국제 헌터 협회 본부.

멀리서 이곳을 찾은 손님이 전쟁을 선포한 탓에 잔존 병력이 긴급 출동까지 한 상황.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는 순간 유례없는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웨슬리 사무총장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김준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현재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궁지에 몰렸다는 건 이해한다.

애초에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게 본인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나올 정도로 방법이 없는 상황은 아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김준우이지 않은가.

그라면 얼마든지 다른 해결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이곳까지 찾아와 전쟁을 언급할 정도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이 중세시대도 아니고, 대책 없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유리한 입장에 있는 본인들도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온갖 밑 작업을 치고 있는데... 저들이 아무 대책 없이 자신들과 전쟁을 벌일 리가 없다.

저 남자는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김준우의 노골적인 도발에도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분명히 뭔가 있어....'

여기서 움직이는 순간, 그의 페이스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느낌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렇다고 계속 이대로 노려보고만 있을 수도 없고....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고 있던 그때였다.

"사무총장님."

뒤에서 다가온 수행비서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미스터 지가 발각됐습니다. 저희에게 로비를 받은 것과 지령을 받은 것까지 다 불어버린 모양입니다. 지금 한국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습니다."

"...뭐?"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렇군....'

이내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래, 그런 거였다.

김준우는 처음부터 싸울 생각 따윈 없었던 것이다.

그저 시간을 끌고 내 꼬리를 밟기 위한 연막이었을 뿐.

'또 말려들었군....'

분함에 작게 혀를 찼다.

"지금은 마찰을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꼬리가 드러난 이상, 저희도 신중히 움직일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게 좋겠군요."

비서의 말에 웨슬리 사무총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상황은 모두 저놈이 짜놓은 판이다.

만약 도발에 넘어가 여기서 전쟁을 벌인다면 저놈의 또 다른 계획에 말려들기만 할 뿐이겠지.

그것이 뭔지는 몰라도 저렇게까지 대놓고 도발을 하는 걸 보면 심상치 않은 계획임은 분명하다.

'하여간,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놈이군....'

아무튼, 모르면 몰랐지 알게 된 이상 굳이 낚일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발 물러나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지.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이 수행비서를 향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지금 확보된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대략 20만 명쯤 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요."

곧바로 김준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뭐, 장난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스킬을 거둬들였다.

"...뭐라고요?"

"오늘은 서로의 실력을 확인한 거로 만족합시다. 다 큰 어른들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싸움이라니, 웃기잖습니까."

"...."

김준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그렇게 도발을 했는데도 넘어오지 않으니 당황스럽겠지.

미안하지만, 네놈의 수에 두 번은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말한 내용은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다만 탈락자에 대해서 재심사를 시행하는 건 조금 어려울 것 같군요."

"...."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우린 전쟁을 준비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당신 취지에 맞춰 헌터에 어울리지 않는 놈들을 걸러냈을 뿐이죠."

물론 거짓말이다.

그 또한 이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 알고 있다고 한들, 사무총장이 직접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야말로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 되는 셈이니까.

섣불리 긍정했다간, 전 세계에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선언한 게 된다.

"아무튼, 오늘은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제안한 내용에 대해선 최대한 빨리 답변을 드리죠."

"...받아들이겠다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뭐."

그러자 김준우 또한 스킬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알고 기다리겠습니다."

굉장히 언짢은 표정으로 그는 등을 돌려 건물을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보자, 웨슬리 사무총장은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술수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묘한 승리감을 만끽했다.

***

싱겁게 끝난 협상에 한유빈과 나는 말없이 본부를 나왔다.

"...."

그런 와중에도 난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금 있었던 일로 머릿속이 꽤나 복잡했으니까.

하지만.

"역시 대단하네요."

"...예?"

한유빈은 그저 모든 상황이 다행이라는 듯,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결과적으로 싸우지 않고 원하는 걸 얻어냈잖아요."

"…그렇게 됐군요."

"뭘 모르는 척이야. 다 계획한 거면서."

그리곤 더욱 뜬금없는 말을 전했다.

"방금 이아영 씨한테 문자 왔어요. 지금 국제협회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던 고위 공무원이 검찰에 입건됐다고. 덕분에 전 세계에서 난리도 아니래요."

"...."

"꼬리를 잡을 때까지 시선을 끈 거죠? 다른 쪽에 신경 못 쓰게."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소식이 없어?」

다름 아닌 PB 코퍼레이션의 밸런스 팀장이자 노아 길드의 수장.

노아 웨스턴우드였다.

"그게… 뭐, 잘 해결됐습니다. 그러니 물러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뭐…? 대체 어떻게?!」

"저도 모릅니다. 갑자기 검토해보겠다며 보내주더군요."

「쯧, 기껏 인원도 다 모아뒀는데.」

"죄송합니다. 저도 이렇게 될 줄은 예상 못 해서."

「됐어. 다음에는 공치게 하지 마.」

"그러도록 하죠. 아무튼, 감사합니다. 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을 텐데...."

그 순간, 코웃음과 함께 대답도 없이 끊어버렸다.

쿨한 건지, 싸가지가 없는 건지....

"뭐, 뭐예요…?"

통화 내용을 들은 건지 어느새 눈이 동그래진 한유빈이 당황하며 물었다.

"보험을 들어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몰라서 노아 씨랑 노아 길드 전원 공격 명령 내려놨는데... 뭐, 헛걸음만 하게 했군요."

"자, 잠깐! 그럼 설마 시간 끌려고 했던 게 아니라…!"

"무슨 소립니까?"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군.

"전 정말 그 자리에서 전쟁을 벌일 생각이었습니다."

"...."

꼬리를 잡기 위해 시간을 끌었다고?

내가 무당도 아니고, 한국에서 꼬리를 잡을지 말지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뭐, 그쪽 말대로 싸우지 않고 원하는 걸 얻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다행이군요."

"...."

한유빈은 어째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뭐, 그건 둘째 치고....'

웨슬리 사무총장은 대체 왜 거기서 내 부탁을 순순히 들어준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본인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인데, 굳이 한발 물러나 주다니.

'설마 또 다른 계획이 있는 건가....'

그래, 그러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된다.

부탁을 들어주는 것조차 모두 계획된 일일 수도 있다.

하여간,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놈이군.

나는 학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볼일은 모두 마쳤으니, 조금만 쉬다가 바로 귀국을....

"그런데 말이에요."

갑자기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연 한유빈.

이내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 한 말, 무슨 소리예요?"

"...뭐가 말입니까."

"시간석을 통해서 과거로 왔다는 말이요."

"...."

빌어먹을.

들어버렸군.

"목적을 이루면 돌아간다는 건 또 무슨 말이고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그 목표라는 거 혹시...."

한유빈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막무가내로 말을 꺼냈다.

"국제협회를 잡아먹으려는 거랑 연관이 있는 거예요?"

"...."

"그럼 만약 우리가 그걸 이루면...."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쪽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그녀가 내 진짜 정체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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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한복판.

국제 협회 본부 앞에서 한유빈은 여태껏 본 적 없는 진지한 태도로 나를 바라봤다.

"…대체 뭐가 궁금한 겁니까?"

내가 묻자 그녀는 이미 알고 있지 않냐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래에서 왔다는 거, 목적을 이루면 다시 돌아간다는 거.... 그 목적이라는 게 국제협회를 무너뜨리는 거라는 거. 전부."

"...그게 왜 궁금합니까?"

"그래야 내가 그쪽을 계속 도와줄 수 있으니까."

단호한 대답에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실수다.

사무총장을 도발하려고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 말을 꺼내버렸다.

물론 내 정체가 절대 들켜선 안 될 비밀은 아니다.

애초에 스킬에도 타인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조건은 없었고.

그럼에도 내가 그동안 말을 하지 않은 건, 믿어줄 리 없다고 생각해서 굳이 꺼내지 않은 것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미래에서 회귀했다는 것, 히든 스킬에 대한 것.

지금 상황에선 그 어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해도 그녀는 믿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상황에 이걸 말하는 게 도움이 되겠냐는 거겠지.

'다른 문제가 차고 넘치는데 괜히 혼란만 줘서 좋을 게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큰 조직의 수장이 된 이상, 목적을 이루면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책임감 없이 도망친다며 더는 나를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지만....'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어물쩍 넘어가고 싶은데, 기세를 보니 어째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때였다.

타이밍 좋게 내 핸드폰이 울렸다.

김민주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일단 대답을 미루고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지금 거의 다 파견 완료했어요. 도착하자마자 토벌 지원 들어갔는데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요.」

"…그래."

「여긴 한시름 덜었으니, 선생님은 인원 보충만 신경 쓰시면 될 것 같아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김민주가 그걸 볼 리는 없었지만.

「아 참, 사무총장이랑은 어떻게 잘 얘기됐어요? 설마 거기까지 가서 싸운 건 아니죠?」

"그러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더라."

「...네?」

"걱정 마. 얘기는 잘 됐으니까."

과정이 어째 좀 찝찝하긴 하지만.

「국제협회가 정말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건가요?」

"...응."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만약 뭔가 준비하고 있는 게 없었다면 내가 도발했을 때 분명히 맞받아쳤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는 건 본인들도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거겠지."

내가 그곳에서 사무총장을 도발한 이유는, 진짜 싸울 생각이었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동시에 확인을 위한 의도도 있었다.

그런데 사무총장은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임에도 스스로 한 발짝 물러났지.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 새끼들 조만간 칼을 빼 들 거야."

「...역시 그런가요.」

그들은 아직 드러나선 안 될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겠지. 이 이야기는 다른 본부장들이랑 이두식 이사님한테만 전달해놔."

「…알았어요.」

그녀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생님은 바로 귀국하실 거예요?」

"모르겠어. 일단 조금 더 지켜보려고."

「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 주세요.」

나는 짧게 대답하곤 이내 전화를 끊었다.

"토벌 지원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군요."

"...."

한유빈에게 통화 내용을 전달했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에휴, 저 고집불통....'

여전히 대답을 듣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겠다는 얼굴.

나는 머리를 긁적이던 끝에 결국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거짓말입니다."

"...."

"타임머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미래에서 옵니까? 뭐, 사무총장이 혼자 이것저것 상상을 한 모양인데… 그걸 진짜 믿으면 안 되죠."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한유빈은 뭔가 석연치 않은 건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길 잠시.

"…알았어요. 그쪽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이내 피식, 실소를 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가요. 아직 할 일 많이 남았잖아요."

그리곤 나를 지나쳐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앞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