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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이두식 이사의 집무실.

"그래서, 현재까지 파견은 문제없이 진행됐고, 토벌도 바로 착수한 거로 보고받았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국가도 없고요."

"다행이군."

하성일 본부장이 현황을 보고하자 이두식 이사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탈락자도 하루 100명꼴로 안정권에 들어섰습니다."

"현재까지 빠져나간 인원은 얼마나 되나?"

"대략 20만 명 정도가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인원 보충 계획은?"

"현재 전 세계에 모집 공고를 냈습니다. 하루 만에 지원자가 10만 명을 돌파했고요. 물론 심사도 해야 하고, 등록에, 교육까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하성일 본부장이 서류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늦어도 반년 안에는 모두 메워질 거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음."

이두식 이사가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 달 동안 파견 및 토벌 수당, 기타 발생하는 비용까지 대략 1,000억가량으로 추정됩니다. 다행히 할아버님… 아니, 한별 그룹의 하덕수 회장님께 받은 투자로 큰 손해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뭐,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입니다."

"김준우 그놈이 본사로 쳐들어간 게 효과가 있었나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두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두식 이사는 여전히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급한 불은 껐다고 해도 아직 찝찝한 것이 남아 있었다.

다름 아닌, 이번 사태가 정말 국제협회가 관여해서 고의로 탈락자를 발생시킨 거라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였다.

물론 김준우가 전달한 내용 덕에 확실해지긴 했지만, 그 또한 이미 대충은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국제협회가 보여준 행동들.

그리고 그들의 목적과 현재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입지.

이 모두를 종합했을 때, 그들이 수많은 탈락자를 발생시킨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비공식 인력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목적은 당연히....

'최후의 수단....'

이두식 이사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분명히 수년 전까지만 해도 국제협회는 세계 최고의 토벌 기구였다.

그들은 이 사태의 최전선에서 각국의 협회들을 이끌며, 시민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동시에 각국 협회와 힘을 합쳐 이 끔찍한 사태를 해결해 나갔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위기와 고귀한 희생들이 있었다.

그 당시 영웅이라고 말해도 손색없는 그들의 희생 속에서 우리의 염원은 단 하나였다.

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사태가 하루빨리 종식되는 것.

그 중심에 국제협회가 있었다.

여태껏 그들의 실력과 저의를 의심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전 세계 시민들을 구원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 사태는 무려 50년간이나 지속되었고, 아직까지 종식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아니.

끝낼 수 있어도 끝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세계의 영웅이라 불리던 국제협회는 권력과 힘을 위한 기구로 전락해버렸다.

이두식 이사 또한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분명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설립된 기구인데....'

기어이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을 상대로 칼을 갈고 있다니.

역시 설립 취지고 나발이고,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이렇게 되는 건가.

이두식 이사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 본부장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퍽 답답한 마음에 하성일 본부장에게 의견을 물었다.

"…네?"

"앞으로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냐고?"

"...."

하성일 본부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답을 정해놓은 후였다.

그저 말을 꺼내기 껄끄러웠을 뿐.

"애초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국제협회를 견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뭐, 이젠 견제 수준이 아니라 집어삼킬 생각을 해야겠지만."

"그렇다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이내 그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저희도 맞서야죠."

"…역시 그래야겠지?"

"물론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무조건 옳은 일일 겁니다. 다만, 그럴 수 없다는 건 이사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비수를 꽂는 그 말에 이두식 이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도 어쩔 수가 없죠."

"토벌 조직들끼리 전쟁을 벌이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거야."

"알고 있습니다. 전쟁 후엔 석기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겠죠."

"그런데도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나?"

"이사님, 저희는 약자입니다."

하성일 본부장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국제협회는 이미 권력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그 모습을 봤는데도 싸우지 않으면 우린 평생을 국제협회의 발밑에서 약자로 살아갈 겁니다."

"...."

"그럴 바엔 죽기 살기로 물어뜯기라도 해봐야죠."

이두식 이사는 그 대답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능력자도 아니면서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군."

"하하하!"

호쾌한 웃음소리를 내뱉길 한 차례.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현실적으로 보면 힘들겠지만요."

"음?"

"국제협회에 무력으로 대항할 만큼 저희는 몸집이 크지 않습니다. 전 세계 협회를 우리 편으로 만든다면 모를까, 지금 인원으로는 사실상 결과는 보나마나겠죠."

"흐음...."

이두식 이사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맞는 말이다.

전쟁 대비고 나발이고, 애초에 우린 군사 병력으로 쓸 인원이 없다.

그렇다고 국제협회처럼 수십만 명에 달하는 비공식 인원을 모을 수도 없고....

그렇게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좋아."

이내 이두식 이사는 마음을 굳힌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 나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지원 본부장, 그의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웬일이세요? 저한테 직접 연락을 다 하고.」

"저번에 반능석 가공한 거, 결과는 어땠냐?"

「...그건 갑자기 왜요?」

"아, 잔말 말고! 어땠어?"

「뭐, 성공적이었어요. 뱅크 아이템 가공은 처음이었지만,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두식 이사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이내 그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혹시… 이능석도 가공할 수 있겠냐?"

「네…?」

"이능석 말이야. 사물에 이능력을 부여한다는 뱅크 아이템."

「그거야 저도 알죠! 그걸 어디다 쓰려고 물어보는 건데요?」

"국제협회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린 그놈들한테 맞설 여건이 전혀 안 되잖냐. 그래도 일단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

이아영 본부장의 대답이 잠시 끊겼다.

그녀 또한 이두식 이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어렴풋이 낌새를 눈치챈 듯했다.

그렇게 말을 아낀 채 고민하길 잠시.

「뭐, 못할 거야 없긴 하죠.」

원했던 대답이 나왔다.

「그런데, 우리끼리 독단적으로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에요. 윗선에 허가를 받아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이두식 이사는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뚝,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하성일 본부장을 돌아보며 손짓했다.

"자네도 따라와. 갈 데가 있으니까."

"네, 네? 어딜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하성일 본부장이 당황하자, 이두식 이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청와대."

그는 곧바로 외투를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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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헌터 협회 본부.

"사무총장님."

수행비서가 웨슬리의 집무실로 들어오며 조심스레 말을 전했다.

"인터폴에서 또다시 수사가 들어왔습니다."

"미스터 지 때문인가."

"...네."

웨슬리 사무총장은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보원.

서울 중부 지역 본부 세관, 세관장.

본인의 연결책 중 하나이자,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둔 인맥.

...이었다. 그런데 그가 꼬리를 밟히는 바람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파견을 의도적으로 막았다는 뉴스가 각국 언론에 의해 퍼지는 중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을 대비하지 못한 건 아니었으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수사 들어오면 팀장급 아무나 골라서 이 서류 가져다 놓으세요."

"이건…?"

"지령서입니다. 파견을 막으라는 지령서."

수행비서는 그 말의 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모든 일을 아래 직원이 독단으로 진행한 것처럼 덮어씌우라는 거였다.

"대충 원하는 만큼 쥐여 주고 총대 메게 하세요. 뭐… 나중에 딴소리 못 하게 에마 대표한테도 얘기 좀 해놓으시고요."

"…네."

"이 정도만 해도 우리한테까지 불똥이 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웨슬리 사무총장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그렇게 빨리 꼬리를 잡았지?'

그는 곧바로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바로 조사를 한다고 해도 다른 곳에 신경이 쏠려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빨리 찾을 수는 없을 텐데....

'설령 찾았다고 해도 민간 기업이 세관장을 상대로 협박을 할 수 있을 리가....'

그리고 그때,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무언가.

그래.

공식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일이라면 비공식적으로 접근하면 되지 않는가.

비공식 인원으로 채워진 비공식 조직으로.

'김준우... 재밌는 걸 만들었나 보군.'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때, 수행비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말이죠?"

"아마 저희가 발을 뺀 걸 보고, 확신했을 겁니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거."

"물론 눈치챘겠죠. 그런데 뭐, 상관없습니다."

"네? 하,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쪽도 준비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말입니까?"

수행비서의 질문에 그가 되물었다.

"전 세계 헌터들에게 우리를 공격하라고 명령이라도 할까요? 그런다고 그놈들이 우리를 공격할까요? 당장 본인들 밥그릇 걱정이나 하는 놈이 대부분인데?"

"...."

"아니면 이제 와서 새 헌터를 육성해서 병력이라도 만들까요? 한국이 그럴 인구는 되나 모르겠군요."

웨슬리 사무총장은 볼 것도 없다는 듯 막힘없이 대답을 쏟아냈다.

"당연히 준비는 하겠죠. 하지만 개미들이 아무리 모여 봤자 결국 개미입니다. 약자들은 아무리 모여도 약자예요.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더욱."

"...."

"카르마가 우리와 동등한 위치가 되려면, 전 세계 모든 협회를 본인의 편으로 만들어야 할 겁니다. 세계 화합? 인류 역사의 그 위대한 성인들도 실패한 일을 그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김준우는 조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수행비서의 그 말에 사무총장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직접 만나보고 알았습니다."

"…네?"

"김준우는 절 못 이깁니다."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하지만 수행비서는 왜 그렇게까지 확신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튼, 헌터들 훈련 들어가세요. 토벌이 아니라, 군사 훈련으로."

"알겠습니다."

지령을 받은 수행비서가 사무실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사, 사무총장님…!"

해외사업팀 소속의 한 직원이 헐레벌떡 사무실로 들어왔다.

"지금 카르마가 각국 협회에서 일괄적으로 신입 헌터를 모집하고 있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예…?"

"하루에 10만 명, 오늘까지 누적 100만 명이 지원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렇게 많은 미등록 이능력자가 있었습니까…?"

"아뇨! 저희 쪽 데이터로는 언 랭크를 제외해도 헌터 외 이능력자는 채 70만 명이 안 됩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럼 나머지 30만 명의 이능력자는 어디서 나타난 거란 말이지?

그새 이능력이 새로 발현된 건가?

'그렇다고 해도 타이밍이 너무 적절하지 않나…?'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눈을 굴리길 잠시.

직원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전했다.

"아무래도 카르마 놈들이 이능석을 이용해서 이능력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그와 동시에 사무총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

"안 됩니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이두식 이사의 제안에 조현민 대통령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그, 그러지 마시고 다시 한번 고려를...."

"고려할 가치도 없습니다. 이능석으로 이능력자를 만들어내자니. 애초에 뱅크 아이템은 2차 가공이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국제협회는 몇 번이나 가공된 뱅크 아이템을 사용했습니다! 그런 이들을 상대하려면 저희도…!"

"그들이 사용했으니 우리도 사용해도 된다는 건 무슨 논리입니까?"

"...!"

조현민 대통령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단호함이었다.

"이건 엄연히 금지된 일입니다. 그들이 법을 어긴 거지, 우리가 뒤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목적이 다르다고 해도 그들을 따라 하게 되면, 우리가 그들과 다를 게 뭡니까?"

"...."

이두식 이사는 그 말에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시선을 떨어트린 채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자 조현민 대통령은 옅은 한숨과 함께 한결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 이성적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김 대표가 목숨을 걸고 확인한 사항입니다. 국제협회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는 대항할 여건도, 힘도 없습니다."

조현민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않았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건 옳지 못한 방법입니다."

그가 두 손을 모으며 말을 이었다.

"이능석을 이용해서 일반인들을 국제협회에 맞설 이능력자로 만든다는 건, 도의적으로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전쟁을 부추기는 신호탄이 될 겁니다."

"...."

"무엇보다 현재 이능력자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발현되어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범죄를 저지르는 이능력자가 판을 치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이능력을 얻은 일반인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들을 통제하실 수 있겠습니까?"

맞는 말이다.

너무 맞는 말이라 무어라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능력은 80%가 12세 이하에 처음 발현된다.

나머지도 20세가 되기 전에 발현되며, 아주 극소수만이 성인이 된 후에 발현되곤 한다.

그렇기에 모든 국가는 이능력이 발현된 아이들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교육한다.

그들이 가진 힘은 인류를 구원할 힘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인류를 위협할 수도 있는 힘이기도 하니까.

힘을 올바른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어린 시절부터 교육하지만, 그런다고 모두가 시민들을 위해 헌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힘이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청부업에 뛰어드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예 마음먹고 범죄에 가담하는 이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은 이능력자들도 그렇게 변질되는데, 하물며 일반인들에게 그런 힘을 쥐여 준다면... 문제가 없을 수가 없겠지.

"그런 고로 이 건은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이두식 이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정중히 인사를 올리던 그때.

띠리링―.

누군가의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고.

"…아, 아. 죄송합니다!"

뒤늦게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하성일 본부장이 급하게 전원을 끄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조현민 대통령이 이를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받으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그는 한 번 더 양해를 구하고 고개를 돌려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예, 하성일입니다."

"아, 부장님. 예예."

"...예?"

이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그의 눈이 갑자기 동그래졌다.

"화, 확실한 겁니까?"

"…알겠습니다. 확인해보도록 하죠."

그러곤 꽤나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 모습을 보자 조현민 대통령이 먼저 궁금증이 생긴 듯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아, 그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 뜸을 들이길 잠시.

"지금 각국 협회에서 인원 보충을 위해 신규 헌터를 모집하고 있는데... 신청자가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뭐, 뭐…?!"

"...? 그게 왜 문제입니까?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요?"

경악하는 이두식 이사와 다르게 조현민 대통령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이내 하성일 본부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저희가 가진 데이터로는 토벌 가능한 수준의 스킬을 보유한 이능력자가 100만 명이 안 됩니다. 언 랭크를 제외하고 모두 해봤자 70만 명 정도인데...."

"...예?"

조현민 대통령은 그제야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원래는 없던 30만 명의 이능력자가 갑자기 생겨났다는 소립니까?"

"네, 네. 그렇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조현민 대통령의 시선이 이두식 이사에게 향했다.

그러자 이두식 이사가 곧바로 손을 저었다.

"아, 아닙니다! 설마 저희가 허가도 없이 이능석을 썼겠습니까! 저희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사이에 타이밍 좋게 30만 명씩이나 새롭게 이능력이 발현된 것도 아닐 텐데."

"...."

"...."

날카로운 목소리에 두 남자는 서로 시선을 회피한 채 입을 닫았다.

그렇게 그대로 생각에 잠기길 잠시.

"아무래도 조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성일 본부장이 먼저 그 말을 전했다.

"…뭔가 알아내는 즉시 보고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 말을 뒤로하고 두 남자는 곧장 집무실을 나섰다.

***

"데이터에 없던 이능력자들이 갑자기 나타났다고요?"

파리에 위치한 숙소.

쉬고 있는 가운데 하성일 본부장에게서 급한 연락이 도착했다.

「네! 혹시 또 국제협회에서 뭔가 수작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혹시 뭔가 알고 계시는 게 있으십니까?」

"국제협회는 아닐 겁니다."

「네?」

"그럴 이유가 없어요. 몰래 병력을 모으고 있는 놈들인데, 데이터에 없는 이능력자가 있다면 본인들에게 우선적으로 편성시키겠죠. 작전팀 지원을 하고 있다면, 국제협회가 움직인 건 아닙니다."

「그럼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혹시… 이능석을 쓴 건 아니죠?"

「아, 아닙니다!」

"그러면 말이 안 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굴리길 잠시.

'...잠깐.'

희미한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시발, 설마....'

이윽고 모든 아귀가 맞춰지는 순간.

"정보팀 집합시켜주십시오. 지금 바로 귀국할 테니."

「네? 아, 알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뭐예요?"

하지만 상황을 모르는 한유빈은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물론 설명을 해줄 여유는 없었다.

"가면서 설명해드릴 테니까 일단 짐부터 챙기세요."

나는 곧바로 캐리어에 짐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거… 늦으면 진짜 X될 수도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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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그러니까...."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나는 귀국하자마자 모든 본부장을 소집해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러자 이아영 본부장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데이터에 없는 이능력자가 갑자기 생겨난 게... 약물 때문이라고요?"

"옥타보이드암페타민."

나는 한 단어를 내뱉었다.

"흔히 보이드라고 불리는 신종 마약입니다."

"마약?"

"뭐, 몬스터 부산물을 정제하다가 우연히 만들어진 마약입니다. 여느 마약처럼 강력한 환각, 각성, 중독성이 있긴 한데. 사실 그런 건 제쳐두고 이 약물의 진짜 주된 효과는...."

나는 본부장들을 번갈아 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능력을 순간적으로 증폭시켜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

알려져 있다, 라는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로 그럴 게 보이드가 세상에 드러난 건 훨씬 더 이후의 일이니까.

그들로선 처음 듣는 게 당연했다.

그때, 이아영 본부장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잠깐만요. 이능력을 증폭시키는 거라면, 이능력이 없는 일반인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물론,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그럼 갑자기 새로운 이능력자들이 나타났다는 건...."

"예. 보이드를 투약한 이들 중 일반인도, 그렇다고 헌터도 아닌 이들이겠죠."

이능력은 있지만 기존 랭크 시스템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이들.

언 랭크.

그들을 대상으로 약물이 퍼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전 세계의 언 랭크들이 보이드를 투약하고 작전팀에 지원하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죠."

"하아, 몬스터 부산물로 마약을 만든다는 건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뭐, 약 자체는 처음 들어본다고 해도 원료는 그쪽도 알고 있을 겁니다."

"네?"

"보이드는 프렉탈을 정제해서 만든 약물이거든요."

"...!"

이아영 본부장의 눈썹이 크게 요동쳤다.

프렉탈.

A랭크 이상의 무기를 만들 때 반드시 필요한 최고급 부산물.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부산물이지만. 몇 달 전, 최대 출토지인 중앙아프리카와 독점 납품 계약을 맺은 덕에 우리나라에선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다.

과거 일본 지부에서 프렉탈을 이용해서 더욱 강력한 효과를 뽑아내기 위한 연구를 하던 중, 새로운 물질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종 약물은 회귀 전 일본에서 시작해 남미와 멕시코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일반 마약과 달리 이능력을 가진 자에게만 작용하는 약물이었고, 능력을 단기간에 증폭시켜주는 어마어마한 효과가 있었지만....

여느 마약이 그렇듯, 강한 중독성과 심각한 부작용이 잇따랐다.

그중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이능력 과다 자극으로 인한 폭주 상태.

마약 약물 복용으로 인한 능력 폭주로 만에 하나 인명 피해라도 일으킨다면, 랭크 해지는 물론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목숨보다 명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헌터들에겐 굳이 시도할 이유가 없는 약물이었다.

다행히도 이 신종 마약은 그리 널리 퍼지진 못했다. 무엇보다 가격도 어마어마했고.

결국, 극소수의 헌터들 사이에서만 잠깐 유행했고, 주 제조원이었던 멕시코 카르텔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던 탓에 사업을 접고 모든 약물을 폐기했다.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발각되었지만. 이미 제조, 유통, 소비자 모두가 약물에서 손을 뗀 시점이라 크게 문제가 발생하진 않았다.

다시 말해, 회귀 전에는 아무도 모르게 나왔다가 아무도 모르게 완전히 사라진 초유의 마약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거지.'

현재 전 세계에선 부족한 인원을 충당하기 위해 대대적인 모집이 이루어지는 상황이다.

평소 지원 자격조차 없었던 이들 또한 작전팀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리라.

전 세계의 헌터 모집 공고.

이능력을 증폭시켜주는 약물.

가장 최악의 두 가지 조건이 딱 맞물렸다.

누군가에겐 기회가, 또 누군가에겐 최고의 사업장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이드를 유통한다면 그 여파는 회귀 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재능이 없는 것보다 모호한 재능이 더 고통스럽다고 했던가.

이능력은 있지만, 그것으로 뭔가를 할 수는 없는, 그럼에도 헌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못한 이들에겐 이만한 방법이 없을 테니.

카르텔 입장에서도 언 랭크는 정말이지 완벽한 타깃이겠고.

'지원자 현황이 100만 명이 넘은 걸 보면 벌써 상당히 퍼진 것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네요."

이아영 본부장이 조심스레 그 말을 뱉었다.

"프렉탈 최대 출토지인 중앙아프리카와 독점 납품을 했잖아요. 전 세계 프렉탈의 70%는 우리가 취급하고 있으니까… 대량 제조가 쉽진 않겠죠."

"그건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야 가지고 있던 원료를 죄다 쏟아부어서 만들었다고 해도, 계속해서 사업을 확장하고 유통하려면 대량의 프렉탈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쥐고 있는 이상, 프렉탈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이겠지.

물론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진짜 문제는 중독성이고 부작용이고를 떠나서, 체내 검출이 안 된다는 겁니다. 정말 강한 이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보이드를 투약한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거죠."

"그럼… 잘못 뽑으면 또다시 토벌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거예요?"

"무조건 생깁니다. 투약을 중지하면 다시 언 랭크로 돌아오고, 계속해서 투약한다고 해도 부작용 때문에 멀쩡할 리가 없죠."

꽤나 심각한 이야기에 모두가 잠시 대답을 아낀 채 침묵했다.

"일단 채용 심사는 잠시 중단하도록 하죠."

"…그게 좋겠어요."

"마약이 더 퍼지긴 힘들다고 해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죠. 문제가 될 만한 건 뿌리 뽑는 게 원칙이니까요."

나는 이아영 본부장과 김민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보이드를 제조, 유통하고 있는 카르텔부터 소탕합시다."

"알았어요."

"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딱 한 사람... 그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에요...."

기획 본부장, 한유빈.

줄곧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녀는 대답 대신 넌지시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그쪽은 대체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예?"

"뉴스에 보도도 안 된 사항이고, 알려지지도 않은 약물에, 심지어 이클립스 총 책임자인 이아영 씨도 몰랐던 건데… 그쪽이 어떻게 알고 있냐고요."

"...."

날카로운 목소리와 다르게 덤덤한 눈빛.

이건 누가 봐도 이전에 했던 질문의 연장선이었다.

'아직도 의심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피식 미소를 흘리며 문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죠."

그 말과 함께 조심스레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온 한 남자.

"아, 안녕하십니까! 정보팀 소속 경남 지역을 맡고 있는 강재석 파트장입니다."

바로 내가 직접 뽑은 전직 헌터, 정보팀 소속의 사람이었다.

이내 강재석은 곧바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사실 제가 사회에 있었을 때 보이드 유통책 제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하!"

"...?!"

"...!"

그 말에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남미랑 유럽 사이에서 밀매 일을 하던 브로커였는데, 신종 약물이 있으니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더군요."

"그, 그래서? 수락했어요?!"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원래 그쪽이 한 번 발 들여놓으면 못 빼잖습니까?"

강재석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 내가 말했다.

"제가 뉴스에도 안 나온 걸 어떻게 알고 있겠습니까. 자세한 건 이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

한유빈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길 잠시.

"뭐, 알았어요."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그 유통책을 제안했던 사람이랑 만나볼 수 있어요?"

"아, 네! 조금만 알아보면 어떻게 연락은 될 겁니다."

"그럼 그쪽부터 조지면 되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재석 씨는 가서 홍 팀장님한테 작전팀 전원 소집해달라고 전해주십시오. 해외 나가서 쓸 인력이 필요할 것 같으니."

"넵,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한유빈 씨와 같이 가겠습니다. 이아영 씨랑 김민주 그리고 하 본부장님은 본사에 남아서 연락 대기해주십시오."

"네? 이번엔 저도 같이 가는 게…!"

김민주가 나섰지만,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안 돼. 국내 토벌 지휘할 사람도 필요하고. 아직 파견 지원도 안 끝났잖아."

"...."

대놓고 아쉬워하는 표정.

뭐, 어쩌겠는가. 애초에 그녀의 성격상 이번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데.

"대개 사람은 몽둥이를 들면 말을 듣는데, 약쟁이는 아니야. 그러니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상대할 사람이 더 어울려."

"…듣고 보니 좀 그러네?"

"...."

어째선지 그 말에 발끈한 한유빈이 나를 획 쏘아봤다.

"…자, 자 어쨌든 일들 합시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

멕시코, 티후아나.

겉보기엔 평범한 세탁 공장이었지만, 실상은 멕시코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마약 카르텔, 우노 엠피레의 본거지.

세계 최대의 옥타보이드암페타민 제조 공장이었다.

"다들 주목."

그때, 공장의 총 책임을 맡고 있는 호세가 한창 업무 중인 직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주까지 300kg을 납품해야 한다. 오늘부터 쉬는 날 없이 작업 들어가자."

"사, 삼 백이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벌써 텍사스 쪽 조직이랑 계약도 잡아 놨다고."

"...."

"...."

제조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미적지근한 반응에 호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뭐야, 불만 있는 놈은 지금 나와."

"저, 그게 아니라...."

"원료가 모자랍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프렉탈로는 고작해야 20kg이 최대라...."

"...뭐?"

"그게… 프렉탈 최대 생산지가 중앙아프리카인데 거긴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맡고 있는 곳이라 원료를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

제조원들의 말에 호세가 인상을 구겼다.

"그럼 다른 데서는 구할 데 없는 거야? 놓치기엔 아까운 기회라고. 지금 전 세계 언 랭크들이 줄을 서고 있는데!"

"...."

하지만 그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가격 대비 제한적인 효과 때문에 폐기하려던 약물이 아닌가.

이제 와서 원료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손을 놀릴 수도 없었다.

지금 전 세계 협회에서 대대적으로 헌터를 모집하는 이 기간이 물건을 유통할 최고의 적기가 아닌가.

이미 언 랭크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기에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일찍이 이 상황을 눈치챈 각국 마피아들도 벌써부터 제발 본인들과 계약해달라고 들러붙고 있다.

이번이 절호의 기회다.

흐름을 타서 사업을 확장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멕시코 최대 카르텔, 엘 오호스를 제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업이다.

'그렇다고 없는 원료를 만들어낼 수도 없고....'

방법이 없는 건가 싶던, 그때.

"티, 팀장님! 지, 지금 밖에 침입자가…!"

"…뭐?!"

다급하게 공장으로 들어온 직원이 소리쳤다.

"뭐야! 오호스 놈들이야?!"

"아, 아뇨...."

그 직원이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능력자입니다."

"...!"

"...!"

그 말에 곧바로 호세를 포함한 모든 조제원들이 총을 꺼내 드는 순간.

쾅―!!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박살 나며 누군가가 그곳으로 들어왔다.

"꼼짝 마!!"

"시발, 너 뭐야!!"

모두가 그 사람에게 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그곳에 나타난 이는 백인의 중년 여성이었다.

호세는 예상치 못한 상대에 꽤나 당황한 듯했지만, 여성은 담담하게 그곳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진정하세요. 도와드리려고 온 거니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뭐?"

"국제 헌터 협회 산하 PB 코퍼레이션 대표, 에마라고 합니다."

"국제협회가 우리한테 무슨 볼일이야?"

"보이드를 여기서 만드는 건가요?"

"...?"

"생각보다 규모가 작네요. 시설도 열악하고.... 이래서 전 세계에 납품할 수 있겠어요?"

"지금 무슨...?"

"보아하니 원료도 많이 부족한 것 같은데."

철컥―.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여성의 말.

호세는 그녀의 머리를 향해 정확히 총구를 겨누며 다시 한번 물었다.

"너 대체 뭐야.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그 부족한 원료, 저희가 공급해드리죠."

그 순간, 에마 대표가 호세의 말을 자르며 달콤한 제안을 건넸다.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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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라고…?"

멕시코, 우노 엠피레의 보이드 제조공장.

에마 대표의 제안에 호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못 들었나요? 프렉탈, 저희가 구해주겠다고요."

에마 대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에 호세는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나? 프렉탈은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거의 독점하고 있는데, 대체 무슨 수로?"

"물론 전 세계 출토량의 80%를 카르마가 쥐고 있지만, 나머지 20%는 저희가 쥐고 있으니까요. 뭐, 그렇게 많은 물량은 아니지만. 최소한 지금 계약 잡힌 곳에 전부 납품할 정도는 될 거예요."

"...가지고 있는 걸 전부 주겠다는 소린가?"

"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좋은 시설과 장비도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이런 곳에선 물량을 다 채우지도 못할 거 아니에요?"

"무슨 속셈이지? 돈을 요구하는 거면, 미안하지만 기대하는 만큼은...."

"아뇨. 돈은 필요 없어요. 무상으로 지원해줄 생각이니까."

"...?!"

호세는 총을 쥔 손에 힘이 빠질 정도로 당황했다.

"그, 그게 무슨… 대체 왜…?"

"과거, 대국이라고 불리던 중국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 건, 총도 칼도 아닌 꽃 한 송이었어요."

"...?"

이내 에마 대표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 턱이 없는 호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편. 그게 아시아를 주름잡고 있던 한 나라를 멸망시킬 뻔했죠. 목숨은 부지했지만, 서양 국가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고요."

"...."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에요. 지금의 국제협회는 영국이고, 카르마는 중국인 셈이죠. 우린 그쪽한테 받아야 할 게 있고요."

"그러면… 우리가 아편이라는 건가?"

"맞아요. 그러니 어떻게 도와주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

호세는 그녀의 대답에 침묵했다.

역사는 잘 몰랐지만,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 것 같았다.

물론 그녀의 말을 100%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 같진 않았다.

애초에 이런 거짓말을 해서 얻는 이득이 없었으니까.

"당신들은 그냥 열심히 제조만 해주면 되는 거예요. 그게 계약 조건입니다. 알겠죠?"

"...."

이내 호세는 총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녀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일단 이건 계약금."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트럭 한 대가 무너져 내린 건물 안까지 들어왔다.

트럭에 실린 수많은 드럼통.

"프렉탈 1톤. 이 정도면 이번 주 목표치는 거뜬하게 채울 것 같은데?"

"...."

호세는 그 엄청난 양의 원료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에마에게 자세를 낮췄다.

"고, 고맙군...."

"인사는 됐으니까 열심히 일들 해요."

에마 대표는 볼일을 다 봤다는 듯, 그 말을 뒤로하곤 곧바로 공장을 나섰다.

그리곤 핸드폰을 꺼내 들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정대로 전해줬어."

「수고했어.」

수신자는 웨슬리 사무총장이었다.

"더 필요한 건 없어?"

「없어. 우린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돼. 보이드를 투약한 언 랭크들이 위로 치고 올라오면, 기존 헌터들도 위기의식을 느낄 거야. 그럴수록 보이드는 순식간에 퍼져나가겠지.」

"연쇄반응이네."

「그렇지.」

에마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이 어떻게 될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훤했다.

「사실 저번에 밟아놓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런 무기가 들어올 줄이야.」

웨슬리 사무총장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에마 대표는 아직도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약물이 유통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정보팀에서는 카르마가 이능석을 가공한 거로 추정했다면서."

「그럴 리가 없으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이 즉답했다.

「이능석은 시간석 다음으로 가공이 어려울뿐더러, 설령 가공했다고 해도 단기간에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이능력자를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김준우 성격상 일반인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할 것 같아?」

"...아니지."

그녀가 대답했다.

「우리 쪽에서도, 카르마 쪽에서도 벌인 일이 아니라면 생각해볼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지.」

"보이드에 대해선 알고 있었던 거야?"

「예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어. 그런데 뭐… 별로 돈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무시했는데, 지금 상황에선 돈을 떠나 너무 좋은 패가 됐군.」

에마 대표는 그 목소리만 들어도 웨슬리가 미소 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카르텔 놈들은 잘 감시해둬.」

"알았어."

「아, 노아는 아직도 연락 안 돼?」

"아니. 가끔 본사로 찾아오긴 해"

아직까진 밸런스 팀장이라는 직책을 유지하고는 있다만, 미국 사태 때부터 이미 국제협회에 적대감을 드러낸 놈이다.

지금도 지령을 받긴커녕 어디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놈을 계속 데리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필요해서 데리고 있는 게 아니야. 감시하려고 그러는 거지. 이편이 더 효율적이니까.」

"...조만간 우리를 물 놈이야."

「알고 있어. 뭐,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김준우랑 한 번에 보내버릴 생각이니까.」

***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어느 바닷가.

나는 강재석과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놀러 나온 사람들과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이곳은, 아무리 봐도 비밀 접선 장소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여기서 만나기로 한 거 맞습니까? 보는 눈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사람이 없는 곳에는 또 다른 눈이 있는 법이죠. 아마 친근한 척 접근할 테니까 적당히 맞춰주시면 됩니다."

"…그러도록 하죠."

나는 바다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정보팀 소속, 경남 지역 파트장 강재석.

과거 프리랜서 헌터로 활동했지만, 돈에 눈이 멀어 부산물 밀매에 손을 댔다가 체포된 놈.

전적 때문에 이곳저곳 어두운 인맥이 많다곤 들었는데....

'설마하니 이탈리아 마피아와도 연이 있을 줄이야.'

하여간 내가 사람은 제대로 뽑았다니까.

"지금 만날 사람은 구아르디아노 조직 소속의 브로커입니다. 남부 최대 조직에서 갈라져 나온 신생 놈들인데, 온갖 사업장에 손을 대면서 급속도로 성장세를 올리고 있죠."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다만 아직 모체 조직과 전쟁 중이기도 하고, 규모든 인원으로든 따라잡질 못해서 다른 사업에도 손을 뻗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찾은 게 보이드군요."

"그렇죠."

이탈리아 마피아까지 손을 대기 시작한 사업이라면 퍼지는 건 순식간이겠군.

'그나마 우리가 원료를 독점하고 있어서 다행이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주변을 슬쩍 훑었다.

현장에는 홍두식 팀장을 비롯한 정보팀의 모든 파트장과 한유빈이 주변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지만, 사실 그리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마이 프랜드!"

누군가 친근한 반응을 보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안드레아! 잘 지냈어?"

"물론이지. 시칠리아에는 무슨 일이야?"

"일 때문에 들렀다가 생각나서 연락했어."

강재석 또한 스스럼없이 그 남자를 대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오랜 친구 사이인 듯한 대화.

그 사이에서 멀뚱히 서 있자, 그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이 친구는 누구야?"

"아, 우리 사장님이야."

"오! 강의 보스구나. 안드레아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 네...."

그가 악수를 건넸고, 나는 떨떠름하게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왔는데, 한잔해야지? 늘 가던 거기로 갈까?"

"하하!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아쉽게도 오늘은 일 때문에 온 거라."

"...."

그 순간, 안드레아의 표정에 긴장감이 돌았다.

강재석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네가 저번에 제안한 그 일 말이야, 혹시 지금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

"우리 사장님이 관심을 보여서 말이지."

강재석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가짜 명함을 안드레아에게 건넸다.

"한국에서 무역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돈 되는 거라면 뭐든지 하고 있죠."

"오…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는군요."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조업체랑 이야기하고 싶은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더군요."

"...그런데?"

"듣자 하니 안드레아 씨가 그쪽 물건을 이탈리아로 들여오는 일을 맡고 있다던데...."

나는 이내 본론을 꺼내 들었다.

"혹시 소개 좀 시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

안드레아가 나를 노려보길 잠시.

"하하하!"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강! 오랜만에 만나서 일 얘기뿐이야? 이러지 말고 한잔하러 가자고!"

"...."

이내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강재석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따라오라는 겁니다."

"…어렵군요."

도통 알 수가 없네.

"팀원들은 어떻게 할까요?"

"두고 가야겠죠. 우르르 가다간 눈치챌 게 분명하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팀원들을 향해 슬며시 고갯짓했다.

따라오지 말고 여기서 대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안드레아를 따라 계속해서 이동했다.

그러더니 어느 골목 앞에 멈춰 서선 우리를 돌아봤다.

"알고 있지?"

그렇게 묻자 강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턴 다른 놈들이 안내해줄 겁니다. 당황하지 말고 하라는 대로 협조하면 됩니다."

"알겠습…!"

그 순간, 불쑥 뒤에서 나타난 놈들이 내 얼굴에 자루를 덮어씌우고는 양옆에서 나를 붙잡고 강제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손님 접대 한번 참 요란하네....'

그렇게 또다시 몇 분을 이동하던 끝에.

"...!"

얼굴에 씌워졌던 자루가 벗겨지며 밝은 빛이 쏟아졌다.

넓고 깔끔한 공간.

마치 어느 기업의 회의실을 연상케 하는 그곳에서 깔끔한 양복 차림의 한 남자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사 따윈 쿨하게 생략하며 입을 열었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보이드 제조업체와 거래를 하고 싶다고?"

"...예."

"뭐, 마침 우리도 내일 만나서 추가 납품 계약을 하기로 했지."

"그러면 그 자리에 저희를 소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왜?"

그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린 장사꾼이지, 중개인이 아니야.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나?"

"소개만 시켜주신다면 좋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음?"

나는 곧바로 준비해둔 카드를 꺼내 들었다.

"보이드의 원료가 프렉탈인데, 현재 카르마 코퍼레이션 놈들이 독점하고 있어서 부족하지 않습니까. 마침 제가 한국에서 비슷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재고가 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적당한 가격에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럼 당신은 그 원료를 가지고 멕시코 카르텔과 조금 더 유리한 계약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 하하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가 갑자기 폭소를 터트렸다.

"이 시장에 대해서 정보가 꽤 늦군."

"…예?"

"그건 거래 조건이 못 돼."

"...?"

"못 들었나? 어느 후원자에게서 이미 대량의 원료를 지원받았다던데?"

"...!!"

그 순간 내 눈이 크게 벌어졌다.

우리가 80%를 쥐고 있는데... 원료를 구했다고?

대체 누가....

아니 그건 둘째 치고.

'X 됐다....'

그나마 이번 사태가 크게 심각하지 않은 건, 원료를 구할 수 없기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량의 원료를 손에 넣었다면....

전 세계로 퍼지는 건 시간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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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에 거점을 두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마피아, 구아르디아노.

그들 본거지에서 조직의 우두머리에게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은 나는, 잠시 말문이 막힌 채 눈을 끔뻑였다.

'보이드의 원료, 프랙탈을 지원받았다라....'

머리가 띵해질 정도의 충격.

이건 실로 엄청난 복병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번 신종 마약 유통 건의 주도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 세계에 유통되는 프랙탈의 80%를 우리가 쥐고 있었으니, 그 점을 이용하면 일이 커지기 전에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카르텔과 접촉하려고 했던 것이다.

원료를 지원해주겠다는 미끼로 원생산지인 멕시코 카르텔과 접촉해서 본거지를 찾아낼 생각이었는데....

미끼를 물지 않는다면 초장부터 완전히 틀어진 셈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어, 어떡합니까, 대표님. 원료를 구했다면 더 이상 유통을 막을 수가...."

"...."

강재석 파트장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지원해준 건지 몰라도 원료를 받았다면 이미 제조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각국의 마피아들에게서도 거래 요청이 쇄도할 테고, 약쟁이가 약쟁이를 끌어들이는 최악의 굴레가 만들어지겠지.

'물론 얼마나 지원받았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든 거래처에 납품하고도 남을 정도의 물량이라면....

한 달.

그 기간이면 전 세계에 보이드가 퍼질 것이다.

그럼 더 이상 걷잡을 수 없다.

그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카르텔 놈들과 접촉해야 한다.

"아쉽게 됐어. 자네들도 돈 냄새를 맡은 모양인데... 한발 늦었네."

그때, 조직의 우두머리가 시가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조건을 떠나서 자네 부탁을 들어줄 이유도 없고. 자네들도 발을 얹으면 우리 쪽으로 들어오는 물건이 줄어드는 건 당연할 테니까."

"...."

"내가 정중히 이야기할 때 여기서 빠져줬으면 하는데."

중저음의 목소리.

부탁하는 말투에 그렇지 못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두목은 두목이라는 건가....'

여기서 물러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여기서 무력을 쓰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다.

카르텔과 접촉하기 전까지 최대한 눈에 띄는 짓은 피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여기선 조금 도발을 해보는 수밖에.

"제가 듣자 하니 남부 최대 조직에서 갈라져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생이라던데...."

우두머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눈앞에 있는 기회를 보고도 거절하시는 걸 보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뻔하군요."

"...뭐?"

"이런 식으로 사업을 하셔서 살아남을 수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내뱉는 동시에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보시죠. 당신은 운이 좋아 보이드에 대한 정보를 먼저 입수한 것뿐이지, 조금만 지나면 다른 조직들도 모두 이 시장에 뛰어들 겁니다."

"...."

"그렇게 되면 이탈리아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조직 간에 전쟁이 벌어지겠죠. 그래서, 그냥 받는 물건이나 파는 것으로 그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나 있겠습니까?"

쾅―!

그 순간, 남자가 의자를 집어 던지며 내 멱살을 끌어올렸다.

"뭐야 이 새끼야. 너 '일 코르포' 놈이냐?"

"...?"

알 수 없는 단어에 강재석을 슬쩍 흘기자, 그가 작은 목소리로 황급히 말했다.

"이, 이들의 모체 조직입니다. 남부 최대 마피아요."

그렇군.

뭐,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사이가 안 좋긴 한가 보네.

"당장 모가지를 따서 신호등에 걸어버릴…!"

"진정하십시오. 말했다시피 전 한국 사람입니다. 그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물론 당신이 제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 뒤에도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요."

"여기서 안 되면 일 코르포 놈들한테 가서 똑같은 제안을 하겠다, 이거군."

"정확합니다."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이라 정중히 대접해주려고 했는데... 그렇게는 안 되겠군."

그가 당장이라도 씹어먹을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놈들을 입에 올린 순간부터 자네들은 살아서 못 나가게 됐어."

"...하, 하하하."

그와 함께 나는 웃음을 흘렸다.

"이러니 아직도 신생 조직 티를 못 벗는 거 아닙니까!"

"...."

이내 그의 눈에 점점 분노가 차오르는 게 보였다.

"제가 원료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죽일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그 원료를 손에 넣을 건지부터 생각을 하셔야죠."

"헛소리. 말했듯이, 이미 카르텔 놈들은 충분히 원료를 지원받아서 아무런 쓸모가...."

그 순간,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차린 듯했다.

"너 설마...."

"맞습니다."

이윽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미끼를 꺼내 들었다.

"원료만 있다면, 보이드의 제조법을 손에 넣는 순간 당신들이 생산자가 되는 겁니다."

"...!"

"카르텔로부터 물건을 사들이고, 그렇게 사들인 물건을 더 비싼 값에 파는 건 돈은 될지언정 세력을 확장하는 데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시장을 노리는 다른 조직의 타깃이 될 뿐이겠지.

"하지만 당신이, 구아르디아노가 보이드의 생산자가 된다면... 일 코르포, 북부 지역 마피아 가릴 것 없이 이탈리아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습니다."

그가 입을 다문 채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누가 봐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그렇게 한참 뒤에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말씀드렸다시피, 원료를 납품해드리겠습니다. 제조법도 저희가 구해드리죠."

"조건은?"

"일단은 내일 카르텔과 접선할 수 있게 해주셔야겠죠."

"그리고 또."

"그리고...."

나는 잠시 눈을 굴리며 말끝을 흐렸다.

사실 카르텔과 접촉하는 게 목적이지, 나머진 그냥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당연히 다른 조건이 있을 리가 없었다.

뭐, 그렇다고 아무 조건도 없다고 하면 당연히 의심을 사겠지.

여기선 오히려 조금 더 뻔뻔하게 나가야 한다.

"보이드 총생산량의 10%를 우리에게 납품해주십시오."

"10%나…?"

"원료도 저희가 대주고, 제조법까지 구해주는 건데 그 정도는 오히려 적은 거 아닐까요?"

"...."

이내 남자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겨보는 듯, 대답을 아끼길 잠시.

"...좋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로 다시금 물었다.

"그런데… 원료도 가지고 있고, 제조법도 구할 수 있으면 네가 직접 만들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 굳이 우리를 끼려고 하지?"

"제가 한국에선 비밀스럽게 움직일 수가 없는 몸이라...."

"하, 뭐 얼마나 유명한 놈이길래?"

"뭐…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고. 한번 추측해보시죠. 가장 희귀한 부산물을 대뜸 납품하겠다고 한 것만 봐도 대충 알 것 같은데."

"...."

그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나를 빤히 바라보길 잠시.

"너, 너… 설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카르마 코퍼...."

"거기까지만."

나는 황급히 그의 말을 자르며 입술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 있는 모두가 내 정체를 알아차린 듯했다.

"...뭐, 뭐야?"

"카, 카르마가 여길 왜…?"

"안드레아! 너 대체 누굴 데려온 거야!"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회의실.

주변 조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우리를 힐끔거렸다.

우두머리 또한 잠시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로베르토."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김준우입니다."

나 또한 웃으며 그의 악수를 받았다.

됐다.

억지로 미끼를 입에 쑤셔 넣었다.

나머진 때를 기다렸다가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말이야… 대체 제조법을 어떻게 구할 생각인가?"

"아, 그건...."

내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영업 비밀입니다."

구하긴 뭘 구하는가.

다 없애버릴 건데.

***

"뭔가 이상합니다."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 돌아간 뒤.

조직 내 브레인이자 그의 수행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너무 저희에게 유리한 조건입니다. 원료와 제조법을 모두 넘기겠다뇨. 다른 속셈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다른 속셈…?"

"이를테면, 우리를 미끼로 카르텔을 알아내서 유통 자체를 막으려 한다거나...."

수행원의 극단적인 추측에 로베르토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유통을 막는다니. 뭐하러 그런 돈도 안 되는 짓을 해."

"뉴스에도 몇 번 나오지 않았습니까. 보아하니 꽤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것 같습니다. 청소부에서 시작해서 그 자리까지 간 사람인데, 그 과정에서 악덕 권력층들을 모조리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마약 사업에 뛰어들려고 한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클클클."

이내 로베르토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내 어릴 적 꿈이 뭐였는지 아나?"

"네?"

"경찰이었어."

손질해둔 시가에 다시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부모 얼굴도 못 보고 길거리에 버려졌거든. 거긴 법이 없는 곳이었어. 죽고 죽이는 건 예삿일이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훔쳐 쓰는 게 당연한 곳이었지."

"...."

"그래서 경찰이 되고 싶었어. 그 지옥 같은 꼴을 보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됐지?"

로베르토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은 다 바뀌게 마련이야. 출신도, 직업도 다 의미 없지. 딱 하나 바뀌지 않는 게 있다면... 돈이야."

이내 그가 수행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뀌지 않아. 그래서 더 돈에 집착하는 거고, 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추악해질 수 있는 거지."

"...."

"카르마 대표도 그런 사람일 뿐이야.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니라."

말을 마친 그가 시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동시에 수행원은 그의 말에 깊이 감탄했다.

그의 친형제, 까를로와 함께 이탈리아 남부 최대 조직, 일 코르포를 이끌던 남자.

비록 세력 싸움에서 밀려 도망치듯 조직을 분할했지만, 사람을 다루는 실력만큼은 비할 자가 없었다.

수행원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본인의 추측이 정확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그리고 뭐, 우리야 나쁠 것 없지. 원료와 제조법을 모두 손에 넣으면 이번에야말로 일 코르포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이내 로베르토가 시가를 비벼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르텔 놈들이랑은 연락됐나?"

"네. 위치랑 장소까지 모두 정해졌습니다."

"그래."

그리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내일 계약 끝나자마자 일 코르포 놈들한테 선전 포고한다."

"…알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까를로, 그 개새끼 모가지를 찢어버릴 수 있겠어."

로베르토는 평생을 함께했던 형제를 향해 기어이 이빨을 드러냈다.

240

240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나와 강재석 파트장은 구아르디아노 본거지에서 빠져나와 다시 길거리로 들어섰다.

"대체 누가 카르텔에 원료를 지원해준 걸까요?"

강재석 파트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애초에 중앙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1년에 5톤도 채 안 나오지 않습니까?"

"잘 알고 있군요."

"하하… 밀매 일 할 때 프랙탈도 몇 번 취급한 적이 있어서...."

그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자랑이다 참....

"뭐, 말씀하셨다시피 전 세계에서 출토되는 프랙탈 중 중앙아프리카 산이 80%고 나머지 20%가 세계 각지에서 드물게 나오죠. 그 20%도 다른 협회와 민간 기업들이 나눠서 취급하고 있으니, 정확히 누가 지원해줬다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중앙아프리카에 통합 지부를 세운 게 반년밖에 안 됐다는 걸 감안하면… 대충 감이 오는군요."

"네?"

"저희 이전에 중앙아프리카를 어디서 관리했습니까?"

"...!"

그제야 강재석 또한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뭐, 애초에 이런 접근이 아니라도 원료를 대줄 만한 놈들은 아무리 봐도 그놈들밖에 없지.

'지긋지긋하게 얽히네, 정말....'

나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겨우 인원 이탈을 막아놨더니, 이젠 약물 유통인가.

심각성으로 따지면 오히려 이쪽이 더 위험하다.

이번 일을 초기에 막지 못하면... 상상 이상의 일들이 벌어질 테니까.

어떻게든 헌터가 되기 위해 약물을 구하려는 언 랭크.

수요에 발맞춰 빠르게 세력을 넓힐 카르텔과 마피아.

치고 올라오는 언 랭크를 의식해서 약에 손을 댈 헌터들.

최악의 삼박자가 반복되면, 사회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약에 취한 이능력자가 거리 한복판에 나돌아다닌다?

이건 그냥 호랑이를 길거리에 풀어 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을... 또다시 우리에게 뒤집어씌우겠지.

'대체 어디까지 우리를 끌어내려는 건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리던 그때.

"대표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놈들이 허튼짓한 건 아니죠!"

대기시켜놨던 정보팀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그사이.

"…어떻게 됐어요?"

한유빈 또한 나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그녀 또한 퍽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이었지만, 생각보다 내 꼴이 멀쩡했는지 이내 피식 미소를 흘렸다.

"일단 미끼는 잘 물었습니다. 내일 카르텔과 만나기 전에 따로 연락 준다더군요."

"다행이네요."

"뭐, 만난 다음이 문제겠지만요."

"생각해둔 계획이라도 있어요?"

"계획이랄 게 있습니까."

두들겨 패서라도 본거지를 알아내기만 하면 그만인데.

"카르텔 본거지… 보이드 제조공장을 알아내면 인터폴에 정보를 넘겨줄 겁니다."

"인터폴이요? 저희가 직접 가는 게 아니고요?"

"전 세계 마피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시장입니다. 괜히 눈에 띄는 짓을 했다간 귀찮아질 겁니다."

"흐음...."

한유빈은 뭔가 떨떠름한 듯했다.

뭐, 이해는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직접 처리하는 게 확실하긴 하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 바닥에 너무 깊이 관여해서 우리에게 좋을 게 없으니.

"그럼 구아르디아노 놈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본인들을 속인 걸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걱정 마시죠. 알아서 자멸해 줄 테니."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모체 조직이랑 더 사이가 안 좋아 보이더군요. 어떻게든 그놈들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마침 최고의 무기가 들어올 예정이니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겠죠."

물론 실제로 구아르디아노가 무기를 쥐는 일은 없겠지만.

평생 쥐지 못할 허상의 무기를 철석같이 믿은 채 무작정 전쟁을 벌일 것이고, 그렇게 저들끼리 먹고 먹히며 스스로 자멸하겠지.

일단 이것으로 기반은 다져놨다.

나머진 내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그럼… 일단 숙소로 돌아갑시다. 준비할 게 많으니."

"넵!"

"알겠습니다!"

정보팀 직원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

시칠리아 섬에 위치한 어느 호텔.

침대에 누워 머릿속으로 한창 앞으로의 일을 정리하던 그때였다.

똑똑똑똑―.

요란한 노크 소리가 사색에서 날 깨웠다.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한유빈인가 싶어 슬그머니 현관으로 가 문을 열어보니.

"바쁘신가벼?"

홍두식 정보팀장이 서 있었다.

"한참 뚜드렸는디 답도 없고 말이여."

"아, 미안합니다. 뭣 좀 생각하느라....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별건 아니고… 야그 좀 할 게 있어서."

이내 홍 팀장은 자연스럽게 내 방으로 들어와선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짝 말이여...."

그리곤 나를 지그시 바라보길 잠시.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여?"

"...예?"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아, 물론 나도 대충 야그는 들었어야. 국제협회를 잡아먹고 제2의 국제협회가 되려고 한담서?"

"…예. 그렇습니다."

"그럼, 당연 그짝이 사무총장이 되겠구먼."

"다른 적임자가 없다면요."

"하하하! 말도 안 디는 소리 말어. 그짝 말고 또 누가 그런 귀찮은 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겄어."

그가 고개를 위로 젖힌 채 호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서, 이유가 뭐여?"

이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또다시 물음을 던졌다.

"이유라뇨?"

"목적이 있으면 당연히 이유도 있어야 하지 않겄어? 부자가 되는 게 목표면, 돈을 많이 벌어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이유가 있듯이 말이여."

"...."

저의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유야 당연히 뻔하지 않은가.

사무총장이 되어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이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다.

이렇게까지 일을 벌여놓고 돌아간다고 하면, 그 누가 곱게 보내주겠는가.

어쩌면 그동안 내 편을 들어줬던 이들이 나를 방해하려 들지도 모른다.

한유빈에게 끝까지 말하지 않은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녀석은 책임 운운하며 어떻게든 나를 막아설 인간이니.

'뭐, 다 말할 순 없다고 해도....'

너무 진지한 반응이라 거짓말을 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냥 살짝 언질만 줄까.

"죄송하지만 홍 팀장님이 기대하는 것만큼 정의로운 이유는 아닙니다. 대의를 위한 이유도 아니고요. 굳이 따지자면... 개인적인 이유에 가깝습니다."

"다른 놈들은 그짝이 시민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국제협회를 몰아내고 전 세계 토벌의 질서를 잡으려고 한다는 것 같은디? 말만 들으면 아주 영웅이여, 영웅."

"...글쎄요."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당분간은 그렇게 생각하게 두고 싶군요."

"...그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암튼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정의로운 이유 때문은 아니다 이거제? 그냥 개인적인 목적일 뿐이고 사람들은 오해한 거다?"

"예."

"증말로?"

"...?"

그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다른 놈들이 그짝에 대해 뭐라고 떠들던 난 관심 없어. 난 내 눈으로 본 것만 믿거든. 근디 내가 볼 땐 그짝은... 나쁜 놈인 척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시."

"...."

"다른 사람한테 관심 없는 척. 자비 없는 척, 대의가 아닌 개인을 위해 움직이는 척… 본인이 가장 중요한 척. 그런 거 말여."

홍두식 팀장은 그 말과 함께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근디 내가 볼 땐, 그짝은 나쁜 척은 할 수 있어도, 나쁜 놈은 못 돼야."

"...하하하."

나는 결국 실소를 터트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나쁜 척이라뇨."

"됐으야. 모른 척하고 싶은 거면 그냥 내가 개소리한다 생각허고 들어."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말투.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내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난 그짝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또 진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몰러. 근디 말이여… 내가 여태까지 쭉 보니께… 너무 물러."

"무르다고요…?"

"그려. 아주 물러 빠졌어."

이내 그가 담배를 꺼내 들며 말을 이었다.

"국제협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어. 그런데 그짝은 늘 최소한만 움직이려고 하잖여."

"그야 굳이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주변 사람을 잃기 싫은 게 아니고?"

"...!"

뭐야 이 인간.

시발 대체 어떻게....

"아랫사람의 희생 없이 우두머리가 되는 건 말이여 말도 안 되는 모순이여. 그짝은 지금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거고."

"...."

"물론 이해는 혀. 근디… 앞으로도 그래가지고는 사무총장은커녕 마을 이장도 못 될 거여."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는 담담하게 팔짱을 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제 슬슬 선택해야 할 거여. 사무총장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주변이라도 챙기든지, 아니면 독하게 마음먹고 끝까지 가든지. 뭐… 선택은 그짝 맘이긴 한디, 만약 끝까지 갈 생각이믄...."

이내 그가 말끝을 흐리길 잠시.

"이젠 나쁜 척만으로는 안 돼야."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 말을 전했다.

"개인적인 이유든 뭐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목표를 이뤄야 한다면... 이제부턴 진짜 나쁜 놈이 돼야 할 거여."

"...."

"아이고, 할 말도 끝났으니 난 이만 가야 쓰겄다. 그짝도 푹 쉬어야."

홍 팀장은 비로소 할 말이 끝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대답할 생각도 없이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였다.

홍 팀장 또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

나는 그 뒤로도 같은 자세로 한참 동안 생각에 빠져 있었다.

***

같은 시각, 한유빈의 숙소.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있는 그녀 또한 한창 생각에 잠겨 있었다.

국제협회 본부를 찾아갔던 때부터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그 생각.

벌써 며칠째 같은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혼자선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기나긴 고민 끝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잠결에 받은 듯한 이아영 본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다른 게 아니라 뭣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요…?」

"그, 시간석 말이에요...."

「…? 갑자기 시간석은 왜요.」

"그걸 이용하면 사람이 과거로 올 수도 있어요?"

「...?」

그 순간, 한유빈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닌 게 아니라, 방금 건 너무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아, 미, 미안해요. 지금 건 그냥...."

「둘이 뭔 얘기를 한 거예요?」

"…네?"

뜬금없는 물음에 한유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준우 씨랑 뭔 얘기 한 거 아니에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본대?」

"...이해가 안 가는데. 그 사람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요?"

「아니, 그거야....」

이내 이아영 본부장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예전에도 준우 씨가 똑같은 질문을 했었거든요.」

"...."

한유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튼, 이론적으로는....」

"됐어요."

「...네?」

"끊을게요."

「아니, 자는 사람 깨워놓고 이게 뭔…!」

이아영 본부장이 무어라 불만을 쏟아냈지만, 한유빈은 깔끔하게 무시한 채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맴돌았던 작은 의심은 이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래.

그러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됐다.

'보고도 안 된 약물을 미리 알고 있는 게 말이 되냐고....'

이번뿐만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그의 모든 행동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이다.

'대체 이게 무슨....'

한유빈은 본인이 생각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김준우가 시간석을 통해서 과거로 온 사람이라면... 그리고 정말 목적을 달성하고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그럼 여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김준우가 돌아가도록 내버려둘까?

그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는 순간, 한유빈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모두가 기를 쓰고 막으려 할 것이다.

본인을 포함해서.

지금 김준우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모두가 의지하고 있고, 모두가 그를 신뢰하고 있다.

그가 없는 카르마 코퍼레이션... 아니, 토벌 바닥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당연히 돌아가도록 내버려둘 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막을 수도 없다.

감히 어떻게 그러겠는가.

자신을 미국 지부 때의 트라우마에서 꺼내준 것도, 헌터 퇴출을 당하고도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해준 것도 모두 그의 덕인데... 어떻게 그를 막는단 말인가.

그래도 김준우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그를 막을 명분도, 자격도 없다.

그렇다면 그가 정말 목표를 코앞에 뒀을 때, 본인은 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241

241

거래 당일.

구아르디아노의 보스, 로베르토에게 연락을 받고 향한 그곳에는 이미 두 조직이 거래 준비를 마친 채였다.

멕시코 카르텔과 이탈리아 마피아.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인상의 두 조직이 마주하고 있는 상황.

보이드가 유럽 대륙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근데 원래 이렇게 떼거리로 만나나…?'

하지만 나는 다른 것보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에 잠시 당황했다.

모두는 뒤늦게 나타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건 뭐야. 웬 동양인?"

그때, 멕시코 카르텔 쪽에 있던 한 남자가 물었다.

동시에 로베르토가 대답했다.

"내가 불렀네. 저들도 거래하고 싶다고 하더군."

"거래 장소에 제삼자를 데려오다니…. 아무리 나라가 달라도 이건 너무 매너 없는 짓 아닌가?"

"미안하게 됐군. 워낙 간절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두 남자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한쪽은 불청객의 등장에 불쾌감을, 한쪽은 독단적인 고집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담담하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김준우라고 합니다."

먼저 날 소개하자, 두 남자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구아르디아노의 로베르토다."

"…우노 엠피레 제조공정 총 책임자, 호세다."

한국, 이탈리아, 멕시코.

그렇게 세 조직의 우두머리들이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일단 우리 거래 먼저 진행하지."

멕시코 카르텔, 우노 엠피레 소속의 남자가 먼저 운을 띄웠다.

곧바로 준비해둔 가방을 앞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옥타보이드암페타민 10kg이다."

"... 10kg? 계약된 건 20kg 아니었나?"

"공장을 이전 중이라서 양을 맞출 수가 없더군. 일단 10kg 먼저 받고, 나중에 추가로 넘겨주지."

"...."

뻔뻔한 호세의 태도에 로베르토의 표정이 굳었다.

"어이가 없군. 카르텔은 원래 거래를 이런 식으로 하나?"

"불만이면 다른 곳에서 구해보시던가. 어차피 아쉬운 건 그쪽 아닌가?"

"...."

호세가 대놓고 그를 비웃었지만, 로베르토는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조법만 손에 넣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좋아. 거래하도록 하지."

"가격은 고지했다시피 7,300만 유로다."

"결제는?"

"가상화폐로."

그 어마어마한 액수에 나는 순간 손으로 입을 가렸다.

고작 가루 몇 킬로가 1,000억 원씩이나 한다고?

'어마어마하군....'

설마하니 이 정도 스케일일 줄은 몰랐는데.

"오케이, 정확하군. 추가 물건은 한 달 안으로 다시 날짜를 잡도록 하지."

"알았다."

"그럼 뭐… 또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고."

생각보다 순식간에 끝난 거래.

로베르토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물건을 챙기곤 곧바로 등을 돌렸다.

먼저 자리를 뜨던 그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머진 약속대로 잘 부탁하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그래서, 당신은 우리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기다렸다는 듯 호세가 나를 향해 물었다.

"뭐, 다른 건 아니고...."

나는 구아르디아노 조직원들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윽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당신들 제조공장 위치 좀 알고 싶어서요."

"…뭐?"

"우노 펠리스의 본거지 말입니다. 대충 티후아니에 있다는 건 알고 있는데... 정확한 소재를 몰라서."

그를 노려보며 미소를 짓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대동한 조직원들이 곧바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너 뭐야!"

"경찰이냐?"

"누가 보낸 놈이야!"

"하아...."

뻔하디뻔한 반응에 한숨을 내뱉길 한 차례.

"제가 지금 기분이 좀 그렇습니다. 좀 복잡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생각하기도 귀찮으니까 제조공장 위치나 부십시오,"

[고유 스킬 : 마왕]

"진짜 나쁜 놈 되기 전에."

검은 기류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거래를 마친 로베르토는 조직원들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끼익―!

"뭐야 저 새끼들?"

"야, 안 비켜?!"

정체불명의 놈들이 도로로 들어와 그들 앞을 막아섰다.

단체로 입은 검은 옷,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눌러 쓴 모자.

다름 아닌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비공식 조직, 정보팀 직원들이었다.

물론 구아르디아노가 알고 있을 리는 없었지만.

"뭐야…?"

그때, 차 안에 있던 로베르토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리곤 귀찮다는 듯 손짓을 하자, 곧바로 조직원들이 차에서 내렸다.

"야, 빨리 안 꺼져?"

"지금 누굴 막고 있는지 알기나 해?"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

조직원들이 대놓고 위협을 하던 그때, 가장 앞에 있던 작은 체구의 여성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물건 넘겨."

"...뭐?"

"못 들었어? 물건 넘기라고."

그녀의 말에 구아르디아노 조직원들이 크게 당황했다.

"뭐, 뭐야. 설마 일 코르포 놈들이냐?"

"시발, 어떻게 알고…!"

조직원들이 주춤하던 사이, 한유빈은 더는 말하지 않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쿠구구구구―!

동시에 붉은 기운이 미친 듯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 시발 뭐야!"

"이 새끼들 기어이 헌터까지 고용한 거야?!"

"다 총 꺼내!"

"공격! 일단 쏴!!"

철컥―.

두두두두두―!

조직원들 또한 서둘러 공격 태세를 갖추고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쇠붙이가 통할 리 만무했다.

파바바바박―!

인간을 넘어선 속도로 거리를 가로지르며 총알을 피하는 여성.

구아르디아노 조직원들은 그 모습에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헌터를 본 것도 처음이었거니와, 그들의 능력을 실제로 보는 건 더더욱 처음이었던 것이다.

본인들이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그제야 깨달은 건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파앙―!!

틈을 놓치지 않고 여성이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재앙.

구아르디아노 조직원들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쾅―!!

곧바로 엄청난 위력의 주먹이 가장 앞에 있던 조직원의 배에 직격했다.

그리고 곧이어.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스테이터스 해제]

[모든 스테이터스가 근력으로 전환됩니다.]

[근력 : 18,955 (9,107↑)]

[체력 : 1 (2,289↓)]

[민첩 : 1 (5,799↓)]

[마력 : 1 (1,019↓)]

한유빈이 본 모습을 드러냈다.

"...."

"도, 도망...."

조직원들은 그 악마의 형상에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릴 뿐, 모두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은 로베르토가 차에서 걸어 나왔다.

"까를로가 보냈나?"

"...."

"친동생을 죽이려고 작정을 했군."

한유빈은 대답을 아꼈다.

자신들을 일 코르포 조직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섣불리 대꾸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걸 노린 것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우리가 물건을 받았다는 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

"답답하군."

그가 피식 실소를 뱉었다.

"뭐,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거래만 끝나면 우리가 치려고 했는데... 찾아갈 수고는 덜었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지금 당장 애들 전부 모아서...."

로베르토가 그 말을 뱉는 순간.

퍼억―!

핸드폰이 손목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갔다.

"...!!"

비명도 나오지 않는 듯, 일그러지는 얼굴.

이윽고 여성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가 우습게 보여?"

어색한 이탈리아어였지만, 이미 그에겐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끄아아아악!!"

뻑―!

귀를 찢는 비명을 막듯 한유빈의 주먹이 그의 안면을 강타했다.

그걸 시작으로 일방적인 폭행이 이어졌다.

뻐억, 뻐억, 뻐억―!!

그녀는 아무 말도 안 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주먹을 내리꽂았다.

"사, 살려…!"

만신창이가 된 로베르토가 피를 토하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살려줘...."

"...."

"물건은 트렁크에 있어… 다, 다 가져가고 제발 목숨만은...."

그는 바짓가랑이를 붙들고는 목숨을 구걸했다.

한유빈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보다가, 이내 뒤에 있던 이들을 향해 고갯짓했다.

정보팀 직원들은 곧바로 트렁크를 열어, 방금 거래한 따끈따끈한 물건을 회수했다.

내용물을 빠르게 확인한 뒤 신호를 보내자,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 있으면 본부로 찾아와. 어딘지는 알지?"

"...."

로베르토를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뒤, 서둘러 자리를 떴다.

***

"그쪽이 주제도 모르고 팔아대는 약 때문에 우리만 곤란하게 생겼습니다."

나는 멕시코 카르텔과 마주한 채, 호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알아서 정리해드릴 테니, 얌전히 공장 위치나 말하시죠."

"이 노다지 사업을 포기하라고? 웃기고 있군."

"에휴...."

더는 대화가 무의미한 듯했다.

어쩔 수 없지.

[고유 스킬 : 마왕]

쉽고 빠르게 가는 수밖에.

"...!"

"...!!"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류에 카르텔 조직원들은 잠시 주춤했지만.

"이봐, 우리가 외국까지 준비도 없이 온 것 같나?"

호세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조직원들을 향해 고갯짓했다.

푹―.

그걸 신호 삼아, 조직원 전원이 주사기를 자신의 목에 찔러 넣었다.

...저거 설마.

"끄으으윽…!"

"으아아악!!"

약을 투여한 그들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능력이 새어 나왔다.

'조직원들에게 보이드를 배급해둔 건가....'

뭐, 오히려 잘 됐다.

일반인을 상대로 힘을 쓰는 건 아무래도 좀 그랬는데... 약쟁이들이라면 말이 다르지.

[고유 스킬 : 플레임 서커스]

[고유 스킬 : 인비저블 단델리온]

쿠구구궁―!

이내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이 앞뒤 없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고유 스킬 : 마왕 - 강자 독식]

[고유 스킬이 지속하는 동안 시전자보다 마력이 낮을 경우, 모든 공격은 무효화 됩니다.]

쾅―!

퍼버버벙―!

하지만 단 한 명도 나에게 닿지 못하고, 모두가 나가떨어졌다.

"크흐흐흐...."

"카하하하하!!"

분명 꽤 충격이 컸을 법도 한데. 고통도, 공포도 느끼지 못하는 듯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곧바로 몸을 일으킨다.

이미 눈이 풀린 채, 완전히 이성을 놓아버린 이들은 곧바로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미친놈들."

한 번에 처리하지 않으면 계속 귀찮게 하겠군.

[고유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스킬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제작 스킬 : 블랙아웃]

이내 검은 기류가 달려오는 그들을 덮쳤다.

쿠웅―!

마치 벽이 짓누르듯 그들 머리 위로 검은 기운이 내려앉았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의식이 픽, 나가며 모두가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E급… 아니, 언 랭크들이었나 보네.'

너무나 쉽게 제압된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방금 스킬은 B랭크 이상만 돼도 먹히지 않는 공격이었다. 그런데 맥없이 나가떨어진 걸 보면 잔챙이들인 모양이었다.

물론 애초에 저놈들을 상대로 전력을 낼 생각도 없었지만. 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시시하네.

"그래서...."

나는 이내 홀로 남은 호세를 향해 다가갔다.

"공장 위치가 어디라고요?"

"...."

그의 몸이 조금씩 떨려오는 게 보였다.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겁을 먹어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공장 위치가...."

그 순간이었다.

그의 시선이 내가 아닌, 나의 뒤로 향하는 걸 알아차렸다.

"...!"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주사기를 들고 날 향해 달려드는 조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푸욱―.

"뭐, 뭡니까...?!"

내 앞으로 예상치 못한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회수 업무가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와봤는데...."

한유빈 기획 본부장.

조직원이 찔러 넣은 주사기는, 나를 대신해 정확히 그녀의 어깨에 꽂혀 있었다.

"와보길 잘했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런, 시발…!"

[고유 스킬 : 마왕]

콰악―!

잔존한 조직원을 보지도 않고 날려버리고는 곧바로 한유빈의 상태를 살폈다.

"한유빈 씨! 한유빈 씨…!"

"...."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미동도 없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따라온 정보팀을 향해 소리쳤다.

"빌어먹을…! 홍 팀장님! 강 파트장!! 빨리 병원으로…!"

그리고 그 순간.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그그그그그―.

의식을 잃은 한유빈에게서 검붉은 기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242

242

쾅―!!

"큭…!"

한유빈이 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자, 아스팔트를 뚫고 지반이 크게 튀어 올랐다.

가까스로 허공으로 뛰어올라 거리를 벌리며, 다시 한번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사실 살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한유빈의 눈은 이미 완전히 초점을 잃은 채였으니.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스테이터스 해제]

[모든 스테이터스가 근력으로 전환됩니다.]

[근력 : 18,955 (9,107↑)]

[체력 : 1 (2,289↓)]

[민첩 : 1 (5,799↓)]

[마력 : 1 (1,019↓)]

쿠구구구궁―!

거리가 있음에도 공간이 떨려오는 게 느껴질 정도의 기세.

저걸 어떻게 막아야 하나 고민하던 그 순간.

파앙―!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발…!"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콰광―!!

그녀의 주먹이 닿기 직전 근거리에서 터진 폭발.

가까스로 그녀를 밀쳐내긴 했다만....

한유빈은 뒤로 한참을 날아간 후 땅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음에도 전혀 대미지를 받지 않은 듯, 곧바로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니, 대미지를 받지 않은 게 아니라....

'느끼지 못하는 건가....'

대체 저걸 어떻게 해야 할지, 서둘러 머리를 굴리던 사이....

타앗―.

그녀는 다시금 나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쾅, 쾅, 쾅―!!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무슨 힘이...!'

살기가 서린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주변 공기가 터져나가며 굉음을 만들어냈다.

공격은 가까스로 피하고 있지만, 직접 맞지 않았음에도 그 충격이 느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력.

애초에 순수 근력으로 따지면 노아와 견주는 수준이다.

그런 괴물이 이성을 잃고 앞뒤 없이 힘을 쏟아낸다는 건...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한유빈 본인에게 있다.

버서커 클래스는 다른 클래스에 비해 스킬 의존도가 높지 않다.

육탄전에 특화된 신체 강화 능력. 맨몸으로 몬스터와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극한의 전투력.

엄청난 위력을 순간적으로 끌어올리는 만큼 당연히 시전자의 몸에도 큰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버서커 클래스는 절대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한유빈도 마찬가지.

하지만 현재 보이드로 제어 능력을 잃어버린 이상,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은 완전히 망가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진정시켜야....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갈증]

[시전자의 신체 능력 리미트를 해제합니다.]

"끄으으으으…!"

그 순간,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그녀의 몸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붉은 기류를 따라 주변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콰앙―!

"...!"

땅을 박차고 달려드는 순간, 굉음과 함께 가공할 속도의 공격이 쏟아졌다.

뻑, 뻐버버버벅―!

"크윽…!"

나는 최대한 속도를 끌어올려 몸을 움직였지만. 언제까지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한 대라도 스치는 순간 나조차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서둘러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유 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블랙 커튼]

콱―!

이내 검은 기류가 그녀를 휘감으며 강하게 구속했다.

그제야 겨우 그녀를 잡아놓을 수 있었다.

그 틈을 타서 서둘러 그녀를 진정시키려 다가갔다.

"제발 정신 좀…!"

"크아아아악!!"

투두두둑―!

그 순간, 귀를 찢는 괴성과 함께 그녀를 휘감고 있던 검은 기류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런, 미친...."

내 스킬을 파훼한다고?

그것도 순전히 힘으로만?

"대체 뭐 저런 인간이...."

그 모습에 나조차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의 지금 모습은 도저히 인간이 아니었다.

괴물.

그저 죽고 죽이기 위해 태어난 괴물, 그 자체.

"당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감이 좀 오십니까?"

"...."

"...."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던 멕시코 카르텔, 우노 엠피레 조직원들을 향해 슬쩍 입을 열었다.

하지만 괴물을 눈앞에 둔 그들은 대답할 정신조차 없는 듯했다.

그건 정보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 대표님…!"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도움을 자처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나서지 마십쇼."

그렇게 벌벌 떨면서 뭘 도와주겠다는 건가.

깊게 심호흡을 하며 외투를 벗었다.

눈앞의 괴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쪽이랑 싸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녀의 눈에는 광기와 살기만이 남아 있었다.

절대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

어쭙잖게 상대하다간 나는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해진다.

세계 버서커 클래스 랭킹 1위.

전 국제 협회 소속 미국 지부 최연소 작전 팀장.

순수 전투력으로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괴물.

한유빈.

저 괴물을 막으려면....

"이렇게 된 거, 어디 실력 좀 봅시다."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나 또한 전력으로 가야겠지.

***

"미친...."

물건 회수 일을 끝내고 한유빈을 따라 다시 거래 현장에 도착한 홍두식 팀장.

그는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보이드.

이능력을 단기간에 극도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환각, 각성 상태에 빠트리는 신종 마약.

그 약물을 기획본부장이 맞아버렸다.

그것도 하필이면 버서커 클래스가.

'듣자 허니 미국 지부에서 상사 다리몽댕이 뽀개 버리고 나온 미친년이라던디....'

홍 팀장은 이성을 잃고 계속해서 김 대표에게 달려드는 한유빈을 잠자코 바라봤다.

싸움에 미친 괴물과 모든 존재의 꼭대기에 있는 악마.

홍 팀장의 눈에 두 사람은 딱 그런 모습이었다.

저건 위험하다.

섣불리 저들 사이에 끼어들었다간 본인의 목이 먼저 날아갈지도 모른다.

저건 이미 정보팀을 포함해, 본인이 어떻게 해볼 수준을 넘어섰다.

그렇다면 그럼 지금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강재석이!"

"네, 네!"

이내 홍 팀장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파트장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당장 경찰한테 연락혀서 주변 통제혀!"

"바, 반경은요!"

"10km… 아니 30km. 아니, 시벌 그냥 섬 전체 출입 통제혀! 나머진 시민들 몽땅 대피시키고!!"

"네, 넵!"

"알겠습니다!"

"빨랑빨랑 움직여! 저기에 휘말리면 죄다 뒈진 목숨이니께!"

그의 명령에 얼어붙어 있던 파트장들이 가까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 팀장은 이내 자리에 주저앉은 채 벌벌 떨고 있는 카르텔 제조 총 책임자, 호세에게 다가갔다.

"야, 이 시벌롬아!"

"윽…!"

곧바로 그의 멱살을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해독제! 시벌, 해독제 있제?! 다 뒈지는 꼴 보고 싶지 않음 언넝 내놔야!!"

"해, 해독제라니...."

잠시 초점을 잃었던 그가 가까스로 정신을 잡으며 대답했다.

"계약처 거래일 맞추기도 벅찬데, 그런 걸 만들 시간이 어디...."

"지럴 허지 말고!! 내가 약쟁이들 어디 한두 번 만나본 줄 알어?! 이빨 털지 말고 당장…!"

홍 팀장이 고래고래 소리치던 그 순간.

쾅―!!!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머리가 쭈뼛쭈뼛해질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 일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시선을 돌린 그곳에서 검은 기류와 붉은 기류가 뒤섞였다.

악마와 괴물.

그 두 명이 서로를 죽일 기세로 힘을 쏟아내고 있었다.

"...."

호세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곧장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 보스… 지금 반작용제가 필요할 것 같은데, 아직 본부에 남아 있습니까?"

「뭐, 왜?」

상황을 알 턱이 없는 우노 엠피레의 보스가 되묻자 호세는 급히 대답했다.

"지, 지금 거래 중에 문제가… 카르마 코퍼레이션 소속의 버서커 한 명이 약을 맞았는데, 이거 잘못하면 큰일 날 것 같습니다."

「...! 지금… 누가 막고 있지?」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가 직접 상대하고 있습니다!"

「카르마 대표라면... 김준우?」

"네, 네!"

「....」

"사,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아무래도 빨리 보내주시는 게...."

「아니.」

그때, 보스가 호세의 말을 끊고 즉답했다.

「내버려두고 후퇴해.」

"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거기까지 가는 데 한나절은 걸려. 어차피 늦을 거다.」

"그, 그래도…!"

「그리고... 오히려 우리한테는 좋은 기회인 것 같은데.」

이어 핸드폰 너머에서 의미심장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보이드를 투약한 헌터, 카르마 대표마저 압도하다.」

"...."

「우리 입장에서 이보다 더 완벽한 마케팅이 어디 있겠어?」

그 말에 호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싸움이 격렬해지고, 관심을 받을수록 수요는 올라간다. 공짜로 홍보를 해주겠다는데 굳이 막을 이유가 없지.」

"…알겠습니다."

「뭐, 네 목숨은 알아서 잘 챙겨봐.」

보스는 그 말을 남기곤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홍 팀장이 곧바로 그를 닦달했다.

"연락했어? 얼마나 걸리는 거여! 금방 가져올 수 있는 거제?!"

"...."

하지만 호세는 대답 대신 조용히 눈치 살피길 잠시.

타앗―.

이내 홍 팀장의 손을 뿌리치며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 뭐여! 거기 안 서! 야, 이 시발!!"

홍 팀장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의 뒤에 대고 욕지거리를 퍼부었지만, 그는 빠른 속도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이런 염병헐…!"

홍 팀장이 이를 으득 씹었다.

저렇게 도망가 버리면 저 둘은 어떻게 하라는 건가.

이건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다.

만약 여기서 누군가 죽기라도 하면, 그게 누가 됐든 카르마 코퍼레이션엔 너무나 치명적이다.

김 대표가 죽는다면 전 세계 약쟁이들이 보이드를 사기 위해 줄을 설 것이고, 만약 한유빈이 죽는다면....

'회사는 고걸로 끝장 나겄제....'

부하 직원을 죽인 대표.

오명을 뒤집어쓴 채 모든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국제협회고, 사무총장이고 돌이킬 수 없겠지.

물론 깜빵 신세를 지고 있는 본인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시벌, 왜 자꾸 옛날 생각이 나는 겨.'

자신의 아내는 본분을 잊고 돈에 눈이 먼 헌터들의 욕심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 어느 언론도 그들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거나, 책임을 요구하지 않았다.

사실 당시에 헌터를 비난하는 건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시민들을 위해 던전에 뛰어드는 헌터는 그야말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으니까.

그 증거로 본분을 잊고 시민을 죽음까지 몰고 간 놈들이 모두 솜방망이 처벌로 끝이 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만약 그때 김준우가 있었다면.

지금처럼 그때도 김준우가 책임자였다면....

그런 놈들이 나왔을까?

'....'

홍 팀장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무총장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영웅이라는 가면을 쓴 극악무도한 강자들에게 피해받는 이들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 여기선 그 누구도 다쳐선 안 된다.

물론.

'그게 말이 쉽지....'

홍 팀장은 눈앞의 광경에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괴물과 악마의 싸움.

적당히 힘 조절을 해가며 제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김 대표가 뛰어난 실력자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다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식선일 것이다.

이성을 잃고 폭주하고 있는 저 괴물을 상대로는 절대....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각성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시전자는 기존의 클래스를 초월합니다.]

[각성 클래스 : 절대 군주]

"...으이?"

243

243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각성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시전자는 기존의 클래스를 초월합니다.]

[각성 클래스 : 절대 군주]

흘러나오던 검은 기류가 자아를 가진 듯, 한층 조용하고 무겁게 움직였다.

이내 손으로 훑었다.

[장비가 생성되었습니다.]

[마검 : 타르타토스]

[마갑 : 악몽의 베네]

묵직한 감각과 함께 내 고유 장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장식도, 화려함도 없는 원초적 형태의 검.

끊임없이 나를 집어삼키려 드는 중갑.

"...."

완벽하게 전투태세를 갖춘 나는 여전히 시뻘건 기운이 펄펄 끓어오르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 또한 앞뒤 없이 달려들던 조금 전과 다르게, 지금은 거리를 유지한 채 나를 경계했다.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두고 어디부터 물어뜯을지 고민하는 맹수와도 같은 모습.

이윽고 선택을 내린 듯, 그녀의 입꼬리가 쭉 찢어지는 순간.

쾅―!!

한 번 더 폭발적인 속도로 돌진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나는 곧바로 검을 빗겨 들었다.

캉―.

검신으로 그녀의 주먹을 막아내자, 실로 어마어마한 충격이 온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예상보다 훨씬 웃도는 힘에 잠시 주춤하던 그때.

캉, 카강, 캉―!

한유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미친 듯이 공격을 이어 나갔다.

그에 맞춰 나 또한 계속해서 검으로 그녀의 주먹을 막아냈지만....

'이래선 끝도 없겠는데.'

초근접 육탄전.

한유빈에게 너무나 유리한 조건인 동시에 내겐 너무나 불편한 거리.

한유빈은 계속해서 파고들며 공격을 연계할 수 있는 반면에,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그리 많지 않다.

그녀는 본인이 유리한 거리를 확보하며 동시에 내 공격 수단을 철저하게 틀어막고 있었다.

'이성은 잃었어도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군. 이거 약에 취한 거 맞아?'

전투 센스 자체가 본능이라 이건가.

어찌 됐든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하는 건 좋지 않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려야겠지.

[타락 : 우리엘]

파앗―.

쉴 틈 없이 공격을 막아내며 스킬을 발동시켰다.

날 감싼 갑옷에서 8쌍의 검은 날개가 돋아났다.

난 곧바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그녀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손을 스윽 들어 올렸다.

파바바바바박―!!

검은 기류가 수백 개의 송곳으로 응축되며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수백 개의 송곳 중 단 하나도 허투루 날린 것이 없다.

모든 송곳을 정확히 그녀를 향해 겨냥했다.

"크흐흐흐…!"

파밧, 팟―!

타다다다닷―!

하지만 한유빈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기괴한 소리를 흘리며 피하기 시작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공격을 방어 스킬 하나 없이 동체 시력과 신체 능력 하나만으로.

'원거리는 다 피하고, 근거리는 불리하고....'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인간인가.

광역 스킬을 써야 하나?

아니, 광역 공격은 그만큼 위력이 떨어진다.

그녀는 의식이 있는 한, 아무리 대미지를 받더라도 몇 번이고 달려들 것이다.

한 번에 제압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면 어쭙잖은 상처만 늘릴 뿐이다.

'쯧....'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검을 꽉 움켜쥐었다.

슈욱―!

날개를 접으며 지상으로 급강하했다.

다시금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완전히 가까워지는 순간, 들고 있던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지이이잉―.

동시에 한쪽 손에서는 보이지 않게 마력을 응축시켰다.

그녀가 검을 회피하는 순간, 초근거리에서 마력을 터뜨렸다.

푸욱―!

"...이런 미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 예상과 달리 한유빈은 검을 피하긴커녕 그대로 받았다.

검이 정확히 그녀의 복부를 관통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배에 꽂힌 검을 맨손으로 꾸욱, 움켜쥐었다.

완전히 날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아두고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발...."

곧 그녀의 주먹이 내 안면에 직격했다.

―――!!

어마어마한 충격에 뇌까지 흔들렸다.

그리고 채 몸을 추스르기도 전.

쾅―!

쾅, 쾅―!!

뻐억, 뻐억, 뻑―!

광기에 젖은 웃음소리와 함께 미친 듯이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해주진 않았다.

파앙―!

날 감싸고 있던 검은 기류가 폭발하며, 한유빈을 저 멀리 떨어뜨렸다.

가까스로 한유빈을 떼어놓을 수 있었다.

"하, 하하하...."

미소와 함께 소매로 피를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어처구니없었지만,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 그녀는 김민주도, 노아도 넘어섰다.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SSS랭크에 근접했다.

"너무 만만히 봤나 보네...."

그래.

그러면 이 정도로도 부족하겠지.

"일어나라."

[소환 : 군단]

끄그그극―.

까각, 까가각―.

내 명령을 받은 마물들이 검은 기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각성]

[현 시간부로 시전자의 모든 공격이 체내 혈액을 소모합니다.]

물론 그녀 또한 소름 끼치는 웃음과 함께 그 스킬을 시전했다.

승패, 생사.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눈앞의 적을 처치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

[자살행위]

한유빈이 전력을 드러낸 것이다.

***

에마 대표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요 며칠 자주 대화를 나눴던 멕시코 카르텔.

우노 엠피레의 보스였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직원이 보이드를 투약했다고요…?"

「네. 조직원 중 한 명이 휘두른 주사기에 맞았다고 합니다.」

생각도 못 한 상황에 에마 대표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당연히 폭주하고 있습니다. 듣자 하니 전직 작전팀장이었다더군요. 랭크도 꽤나 상위권인 듯하고요. 현재 김준우 대표가 단신으로 막고 있는데... 아무래도 꽤 벅찬 모양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후퇴하라고 지시해뒀습니다. 좋은 기회인 것 같아서 말이죠.」

"...."

에마 대표는 좋은 기회라는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했다.

이내 의미를 깨달았는지,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격렬해지면 격렬해질수록 홍보가 된다는 건가요?"

「누군가 죽어준다면 더욱 금상첨화겠죠.」

"그렇군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잘하셨어요. 생각보다 머리를 잘 쓰시는군요."

「원료도 지원해 주셨는데, 이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요.」

핸드폰에서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에마 대표도 그를 따라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직원이라고 하면...."

「버서커라는 것 같습니다.」

"버서커? 버서커라...."

에마 대표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머릿속을 뒤적였다.

전직 작전팀장 출신의 버서커 클래스라면....

"한유빈…?"

이윽고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작전팀장 출신의 버서커라면 그년밖에 없다.

미국 지부, 제이슨 통제팀장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헌터 자격을 정지당한 여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실력만큼은 미국 지부 내에서도 최상위권이지 않았던가.

그런 인간이 보이드를 맞고 폭주하고 있다고?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이만 끊어야겠네요."

「아, 네! 알겠습니다.」

"계속 수고해주세요."

서둘러 전화를 끊고는, 곧바로 유선전화로 국제협회 본부로 통화를 돌렸다.

그렇게 신호음이 들려오길 잠시.

「무슨 일이야?」

이윽고 웨슬리 사무총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시칠리아에서 한유빈이랑 김준우가 맞붙고 있다는데?"

「...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 둘이 거기서 왜 맞붙어?」

"이탈리아 마피아와 보이드 거래 중에 문제가 생겼다나 봐. 아무튼, 지금 한유빈이 보이드를 맞고 폭주 상태래."

「허… 별일이 다 있군.」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리기도 잠시.

「잠깐....」

이내 그 또한 같은 생각에 도달한 건지, 사뭇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너 설마… 기회라고 생각하는 거야?」

"왜 아니겠어."

그녀가 미소를 흘렸다.

"괴물이랑 괴물이 싸우는데, 어느 쪽이 됐건 멀쩡하겠어?"

「그렇긴 하지....」

"너무 좋은 기회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았어.」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밸런스팀 전원, 지금 당장 투입해!」

기다리던 명령이 떨어졌다.

***

"뭐, 뭐야...."

"말도 안 돼...."

"가, 같은 이능력자 맞아…?"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현장에 있던 작전팀 소속의 파트장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압도적인 실력.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한 움직임.

저들을 보고 있자니, 이능력자랍시고 범죄를 저지른 행동이 창피하게만 느껴질 정도였다.

그건 홍두식 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과소평가했나 보구먼....'

눈으로 좇기도 힘든 그들의 싸움을 보며 홍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엄청난 전투였지만,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보아하니 김준우는 최대한 한유빈이 다치지 않게 제압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실책이다.

슬슬 한유빈의 몸에 과부하가 올 것이다.

물론 폭주 상태인 만큼,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움직이겠지.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너무도 자명했다.

완전한 괴물.

던전을 탈출한 몬스터와 다름없게 될 것이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

이제는 결정해야 한다.

한유빈이냐, 아니면 시민이냐.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소환 : 군단]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각성]

[자살행위]

두 사람의 기류가 한 번 더 바뀌었다.

"어야!"

그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홍 팀장은 김준우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김준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눈동자.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깊고 어두운 눈빛에 주춤하기도 잠시.

"내가 했던 말... 기억하제?"

홍 팀장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모두 챙기면서 올라갈 순 없어야.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한당께. 뭔 말인지 알제?"

"...."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을 아끼길 잠시.

"홍 팀장님. 선택은 어쭙잖은 놈들이나 하는 겁니다."

"...뭬?"

그가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었다.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실력도 없는 어쭙잖은 놈들이나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 겁니다. 하지만 전 여태까지 제가 원하는 걸 모두 손에 넣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 같습니까?"

홍 팀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만한 실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압도적인 실력이.

김준우는 그렇게 말을 덧붙였다.

"그, 그기 무슨...."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들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입니다."

그 한가운데서 김준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동시에 한유빈 또한 다시금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기류는 어느새 스파크가 되어 튀어 오르고 있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녀가 땅을 박차는 순간.

"저 나쁜 놈 맞습니다."

타앗―!

파바바바박―!!

한유빈은 이윽고 수백 마리의 마물 사이를 맨몸으로 돌파하기 시작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살이 찢기는 소리.

그리고 광기에 사로잡힌 그녀의 웃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주먹, 발, 머리.

그녀의 모든 공격에선 붉은빛의 번개가 내리쳤다. 동시에 속도와 위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마물들은 이내 몸을 던져 그녀를 구속하려 했지만.

파지지직―!!

그마저도 무용지물이었다.

"크흐흐흐…!"

그녀는 혈혈단신으로 악마 군단을 박살 내며 빠르게 전진했다.

모든 마물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이윽고 김준우에게 도달한 그 순간.

한유빈은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다.

빠각―.

그와 동시에 한유빈의 팔이 바깥쪽으로 완전히 틀어졌다.

"끄아아아악!!!"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들렸지만, 김준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천천히 검을 치켜들 뿐이었다.

죽일 셈이다.

정말로 그녀를 죽일 생각이다.

바라보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스윽―!

이윽고 완전한 악마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내며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쿨럭…!"

한유빈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쏟아졌다.

김준우의 검이 큰 궤적을 그리며 정확히 그녀를 베어 넘긴 것이다.

"…윽, 으윽...."

이윽고 한참을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녀는 결국.

털썩―.

그대로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

"...."

"...."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설마 진짜 끝을 낼 줄이야....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이었지만, 오직 홍 팀장만이 결연한 표정으로 김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설마 정말로 죽인 거야?"

그때, 난데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뭐, 우리야 할 일이 줄었으니 좋긴 하다만... 조금 충격이긴 하네."

수십 명의 헌터들을 대동한 백인의 중년 여성.

PB 코퍼레이션의 대표, 에마가 서 있었다.

"설마하니 그 천하의 김준우가 자기 손으로 부하를 죽일 줄이야."

이내 그녀는 그 참상을 보며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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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B 코퍼레이션의 수장.

에마 대표.

때아닌 그녀의 등장에 나는 시선을 옮겼다.

"아무리 폭주 상태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부하를 죽여요?"

현장을 슬쩍 흘기던 그녀가 조롱하듯 입을 열었다.

"…그쪽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무미건조하게 대답하자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에마 대표는 쓰러져 있는 한유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됐어요. 뭐, 우리 일을 덜어줬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용케 상황을 전달받았군요."

"카르텔이랑 거래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그럼 원료를 누가 지원해줬는지도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요즘 그쪽 보스랑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니 이 정도 일은 금방 귀에 들어올 수밖에요."

"...."

나는 대답 대신 그녀가 대동한 인원들을 흘겼다.

수십 명의 헌터들.

딱 봐도 밸런스팀을 모조리 긁어온 듯했다.

눈에 보이는 인원은 생각보다 많진 않지만, 경험상 이들은 모든 인원을 정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들까지 합치면 백 명은 족히 넘겠지.

'쯧....'

퍽 귀찮아진 상황에 표정을 구겼다.

작정하고 전투가 벌어진 다음을 노렸다.

지금 당장 저들을 상대하기엔, 각성 스킬을 너무 오래 사용했다.

더 이상 전투를 벌이다간 자칫하면 홍콩 때처럼 또다시 폭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정보팀이 밸런스팀을 상대하기엔 한참 역부족이고.

뭐, 그나마....

'저 녀석이라도 빠져 있어서 다행이네.'

바닥으로 시선을 슬쩍 내리며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은 눈앞에 있는 상황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다.

뭐, 저들이 찾아올 거라는 걸 아주 예상을 못 한 건 아니다만... 설마하니 이렇게 빨리 오다니.

지금 당장은 싸우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다면 일단은 시간이라도 끌어봐야겠지.

"절 죽일 생각입니까?"

큰 의미 없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가능하다면요."

다행히 에마 대표는 그 물음에 미소를 지으며 친절히 답해주었다.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까요? 보니까 서 있는 게 겨우인 것 같은데."

"제가 그렇게 만만해 보입니까?"

"허세 부리지 말아요. S랭크 이상이 각성 스킬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30분 미만이라는 건 기본 상식이니까. 그 이상 쓰면 폭주할 수도 있을 텐데?"

역시나 다 알고 있다는 듯, 에마 대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오히려 당신들이 위험해질 텐데요. 폭주한 날 상대로 당신들에게 승산이 있을 것 같습니까?"

"싸워서 이기진 못하겠죠. 뭐,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이길 거예요."

"...."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저번에는 운이 좋아 큰 사고로 번지지 않았다고 해도, 이번에도 그러라는 보장은 없다.

만약 이전처럼 일말의 이성을 유지할 틈도 없이 폭주한다면 그때부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인명 피해... 아니, 그보다 더 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국제협회 입장에서는 오히려 기회일 것이다.

내 실수가 전 세계로 일파만파 퍼지며, 작게나마 쌓아가고 있던 신뢰를 모조리 잃게 되겠지.

더불어 지금까지 국제협회로부터 겨우겨우 빼앗아 온 권리 또한 한순간에 모조리 빼앗기게 될 것이다.

섣불리 싸울 수도, 그렇다고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정말이지… 지긋지긋하게 얽히는군요."

진심으로 짜증이 몰려오는 그 상황에 나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생각한 순간부터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죠."

그러자 에마 대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게, 왜 다 차린 밥상에 재를 뿌려요. 그냥 우리가 통제하도록 내버려뒀으면 더 엮일 일도 없잖아요. 아니면 뭐 그런 거예요? 우리가 전 세계를 손에 쥐고 뒤흔드는 걸 막을 거다?"

그녀는 본인이 말을 하면서도 풋, 실소를 뱉었다.

"설마 우리가 토벌권을 통제한다고 해서 시민들 목숨을 가지고 협박이라도 하겠어요. 영화도 아니고."

"...."

"애초에 우리만 그러는 것도 아니잖아요. 경제, 종교, 정치… 원래 모든 분야는 타고 올라가다 보면 결국 힘 있는 한 명이 쥐고 있어요. 토벌이라고 안 그럴 건 또 뭐야."

에마 대표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뭐, 거대 권력으로부터 시민들을 구할 거다… 이런 생각 하고 있어요? 오히려 그 쓸데없는 영웅 심리 때문에 지금 몇 명이 피해를 보고 있는지나 알아요?"

"…하하,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영웅 심리? 시민을 구한다? 대체 뭔 개소리를 하는 겁니까?"

"...?"

"제가 설마 그깟 되지도 않는 대의 때문에 국제협회를 무너뜨리려는 건 줄 아십니까? 미안하지만, 전 그런 영웅이랑은 거리가 멉니다. 전 그냥...."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앞길을 가로막는 걸 원체 싫어할 뿐입니다."

"...?"

"뭐, 그쪽이 존나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

에마 대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고, 부하를 희생시킨다고요?"

"후려치지 마시죠. 그게 왜 제 탓입니까? 위기의식 느낀 누군가가 자꾸 상식 밖의 개짓거리를 한 탓이지."

"…대화가 안 되는군요."

"애초에 기대도 안 했습니다."

"그럼 뭐...."

에마 대표가 작게 한숨을 쉬는 순간이었다.

[고유 스킬 : 병기 확보]

"결국, 이 방법뿐이겠네요."

철컥―.

철컥, 철컥, 철컥―.

그녀의 주변으로 수백의 화기가 소환되었다.

그리고 그때.

"그짝은 쉬어야."

홍두식 팀장이 앞으로 나섰다.

"괴물은 몰러도… 나도 사람 정도는 상대할 줄 알어."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맡겠습니다!"

"...."

나서지 말아라. 상대가 안 된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나도 지금 상태가 아슬아슬했다.

밸런스팀 전원과 정보팀이 서로 마주했고, 각자 전투태세를 갖추던 그때.

"오늘은 헛걸음 안 하겠네."

이윽고 기다리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벌써 한바탕하셨나 봐. 꼴이 아주 말이 아니네."

"연락한 게 언젠데 이제 오십니까."

"나는 뭐 날아서 오나. 이 정도면 빨리 온 거지."

그의 말에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노아 웨스턴우드.

현 세계 랭킹 1위의 헌터이자 PB 코퍼레이션 밸런스 팀장.

그가 이끄는 세계 1위의 민간 조직.

노아 길드.

그들이 드디어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여길…?"

에마 대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등장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쪽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카르텔에 누가 원료를 대줬는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냐고."

내가 대신 대답했다.

"국제협회가 카르텔과 연관이 있다면, 오늘같이 중요한 거래는 반드시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게 뻔하지 않습니까."

거래 중 변수가 발생하면 곧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도록 말이지.

애초에 카르텔과 거래 할 때부터 국제협회와의 접촉은 상정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거래 전에 노아에게 연락해놓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보험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건 나 또한 예상하지 못했지만.

'준비해놓길 잘했네....'

노아를 슬쩍 흘기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결국, 주인을 무는군요."

에마 대표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노아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언제부터 그쪽이 내 주인이었지?"

"이래서 진즉 내쳐야 한다고 했던 건데...."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뭐, 차라리 잘 됐어요. 이참에 한 번에 처리하지 뭐."

"그게 되려나 모르겠네?"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노아가 스킬을 시전하는 순간, 수백 명의 인원이 함께 공격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쿵―!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전혀 예상치 못한 누군가.

"김민주…?"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작전 본부장이자, 작전팀 최고 전력.

한국 랭킹 1위, 검사 클래스 세계 랭킹 2위.

김민주였다.

"너, 네가 여길 어떻게 알고…?"

"홍 팀장님이 연락하셨어요. 마침 터키에서 파견 토벌 중이라 바로 헬기로 날아왔어요."

"...."

아니 근데 왜 하늘에서 떨어지냐?

설마 헬기에서 그냥 뛰어내린 거야?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

김민주는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한유빈을 발견하곤 사뭇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유빈 씨는...."

"...걱정 마."

그 한마디가 대답이 된 건지 김민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저희가 맡을게요."

"저희…?"

김민주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파견을 나와 있던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작전팀이 모습을 드러냈다.

"...."

순식간에 모여든 수백 명의 헌터들.

그 인원 앞에서 에마 대표의 표정이 굳었다.

"…이쯤 되면 진짜 전쟁이네요.'

그녀가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김민주와 노아는 피식, 미소를 흘릴 뿐이었다.

"어쩌라고?"

"이제 와서 겁먹은 건가요?"

"하하하...."

작게 미소를 흘린 순간.

각 진영이 곧바로 공격 태세를 갖췄다.

기어이 국제협회와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

"뭐라고…?"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이두식 이사가 놀란 눈으로 되묻자, 이아영 본부장이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국제협회와 전투가 발생했다고요."

"이런 미친…!"

갑작스러운 소식에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왜? 대체 어쩌다가?!"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카르텔의 본거지를 알아내다가 변수가 좀 있었나 봐요."

"빌어먹을...."

그가 이를 으득 씹었다.

전면전이라니....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건가.

이두식 이사는 머리를 짚었다.

여태까지 국제협회가 아무리 수작을 벌여도 최소한으로 대응했던 건 어떻게든 전면전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국제적인 입지를 쌓지 못한 현재로선 그들과 전면전을 벌여봤자 좋을 게 하나 없었으니까.

지금으로선 전투의 승패가 의미 없다.

져도 손해고, 이겨도 손해다.

국제협회와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진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만약 이 싸움에서 진다면 김준우가 국제협회로부터 받아낸 헌터 관리 권한은 물론 이능석과 반능석을 도로 빼앗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겨우겨우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무너지겠지.

하지만 싸움에서 이긴다고 한들, 아무런 이득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피해자인 척 언론을 조작하려 들겠지.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막을 방법은 없는 거지…?"

"이미 노아 길드랑 민주 씨까지 합류했대요. 이제 와서 서로 웃으면서 화해할 리가 없죠."

"그렇군...."

그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토해내길 한 차례.

"지든 이기든 어차피 결과가 같다면...."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왕이면 이기는 게 낫겠지?"

"...당연한 소리를."

이아영 본부장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좀 도와주자고. 그쪽은 그쪽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다뇨? 어떻게...."

"뒤처리가 또 우리 전문이잖냐."

"...."

이두식 이사의 말에 이아영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이아영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항상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부녀가 간만에 합심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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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한유빈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크게 당황했다.

그녀의 기억은 카르텔 조직원이 김준우에게 주사를 놓으려던 걸 몸으로 막은 것까지였다.

그런데 왜 정신을 잃었던 건지? 왜 본인이 피범벅인 거지?

그리고 대체....

"정신 똑바로 차려!"

"고도로 훈련된 킬러들이다!"

"토벌이 아니야! 죽을 각오로 싸워!"

[고유 스킬 : 레인보우 디멘션]

[고유 스킬 : 아토믹 스피어]

[고유 스킬 : 비스트 - 피닉스]

쾅―!

콰과과광―!!

왜 눈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건가.

'뭐가 어떻게 된....'

한유빈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범위가 큰 스킬은 쓰지 마! 아직 시민들이 다 대피하지 못했어!"

"알겠습니다!"

"마법 계열 스킬은 최소한으로만 사용하고, 최대한 육탄전으로 끌어들여! 2팀, 3팀은 뒤에서 백업! 나머지는 나랑 같이 파고든다! 딱 붙어서 따라와!"

김민주 작전 본부장.

"다른 놈들 도와줄 생각하지 말고, 우리 일에 집중해."

"네!"

"우리 목표는 저 빌어먹을 에마 대표의 목이다. 그것만 신경 써."

노아 웨스턴우드.

그를 필두로 한 수십 명의 작전팀과 길드원.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투를 벌이고 있다.

최고 전력이라 불리는 저들이 힘을 합칠 만한 상대라면… 분명 국제협회 소속 놈들이겠지.

규모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이건 이전과 같은 사소한 마찰이 아니다.

이건 전쟁이다.

"도와줘야...."

그녀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뇌를 직격했다.

마치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에 한유빈은 다시 풀썩 쓰러졌다.

그때였다.

"움직이지 마십쇼."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김준우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출혈이 딱 죽기 직전까지 났습니다. 움직이다간 그대로 요단강 건널 수도 있습니다."

"그, 그게 무슨… 아니 그것보다! 지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뭐...."

김준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보신 대로, PB 코퍼레이션에서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쪽이 폭주하고 있는 동안 우리를 치려고 준비를 했더군요."

"…폭주?"

"기억 안 나십니까? 보이드를 맞고 미친 듯이 날뛰셨는데."

"...!"

그 주사가 보이드였다고?

능력을 증폭시킨다는 그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유빈은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패닉에 빠졌다.

"서, 설마… 내가 사람들을 공격한 건...."

"걱정 마시죠. 그러기 전에 막았으니까. 여기서 다친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

김준우의 말에 그녀는 자신의 몸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제야 어깨에서부터 복부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상처를 발견했다.

본인이 피범벅인 이유도 그 때문인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하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해요?"

"그렇게까지 안 했으면 당신, 죽었습니다. 내 손에 죽든, 아니면 저들 손에 죽든."

김준우는 밸런스팀을 바라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당연하겠지만, 김준우를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라도 해서 자신을 막은 거에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만약 폭주한 자신을 상대로 시간을 더 끌었으면, 어찌 됐든 좋은 결말은 아니었을 거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기어이 이렇게 되는군요. 어떻게든 직접적인 마찰은 피하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김준우의 넋두리에 한유빈이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왜 그쪽이 사과합니까?"

"괜히 나서서… 제가 폭주하지 않았으면 최소한 이런 일은 안 일어났을 텐데...."

"그러니까 그걸 왜 그쪽이 사과하냐고요."

"...네?"

"그쪽은 피해자입니다. 피해자가 사과해야 합니까?"

"...."

한유빈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 저런 사람이다.

냉정하지만 상식적이고, 강하지만 따뜻한 사람.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그의 모습에 작게 미소를 짓길 잠시.

"그런데 왜 그쪽은 구경만 하고 있어요? 지금 다들 싸우고 있는데…!"

"그쪽 상대하느라 힘이 다 빠졌습니다. 솔직히, 지금 서 있는 게 고작입니다."

"...."

한유빈은 애써 시선을 회피했다.

그녀답지 않게 숙연한 반응이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괜찮겠어요? 안 도와줘도."

"뭐, 저도 처음에는 걱정했는데...."

김준우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고유스킬 : 천수관음 - 각성]

김민주였다.

[육관음중일(六觀音中一)]

[제1격 - 성관음(聖觀音)]

슥, 스윽―.

스스슥―!

"...."

한유빈 또한 김준우를 따라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완벽에 가까운 스킬 운용.

팀원을 보호하면서도 서슴없이 공격을 쏟아붓는 판단력.

그 모든 게, 가히 아름답다고 해도 될 만한 모습이었다.

"이제 보니까 괜찮을 것 같군요."

"...."

김준우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때.

"두 분, 괜찮으십니까?"

작전팀 소속의 한 헌터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한유빈은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작전 2팀 소속의 사제 클래스라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치료해드릴 테니까."

이윽고 그가 한유빈의 상체에 두 손을 얹었고.

[고유 스킬 : 퍼펙트 큐어]

지이잉―.

밝은 빛과 함께 벌어진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온몸에 힘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남자는 김준우에게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사제 스킬은 어디까지나 응급처치입니다. 출혈도 많고 내상은 치료가 안 돼서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셔야...."

"아니."

하지만 한유빈은 남자의 말을 끊으며 곧바로 벌떡 일어났다.

"움직일 수만 있으면 됐어."

"네, 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남자는 크게 당황하며 제지했다.

"아, 안 됩니다! 지금 골절만 몇 군데인데요! 출혈도 너무 많았고, 더 이상 움직이시면…!"

"조용히 해. 그럼 앉아서 구경이나 하라고?"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

결국, 말이 안 통한다 싶었는지, 김준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빨리 끝내고 돌아갑시다."

이미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손목과 어깨를 풀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때.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한유빈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전 상관없어요."

"…뭐가 말입니까?"

"그쪽이 미래에서 왔든, 일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든 말이에요."

"아직도 그 소립니까? 말했잖습니까. 그건 그냥...."

"그러니까…."

한유빈이 김준우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상관없다고요."

"...."

벙찐 김준우의 표정.

"그쪽은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만 가요. 방해꾼은 내가 처리해줄 테니까."

그 말에 김준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자의식 과잉 아닙니까. 제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도와준대도 지랄이야."

"...."

한마디를 안 지는군.

김준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 나중에 얘기하는 거로 하고. 일단은 눈앞에 있는 일에나 집중합시다."

"그래요."

이내 두 사람의 눈빛이 반짝이는 순간.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고유 스킬 : 마왕]

터져 나온 두 개의 기운이 섞이기 시작했다.

***

"시칠리아에서 헌터들끼리 전투가 벌어졌다고?"

이탈리아 로마, 알프레도 총리의 집무실.

다급하게 사무실을 찾은 수행비서가 총리에게 그 소식을 전달했다.

"대체 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자, 잘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멕시코 카르텔이랑 구아르디아노 사이에서 무슨 거래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 사이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끼어서...."

"뭐…?"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알프레도 총리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구아르디아노라면 남부 지역 서열 2위의 마피아가 아닌가.

그놈들이 멕시코 카르텔이랑 거래가 있었다고?

아니, 그것보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거기에 왜 끼어 있는 건가.

아니, 잠깐만!

싸울 거면 지들 나라에서 할 것이지, 대체 왜 남의 나라에서 지랄들인가!

"듣자 하니 마찰 수준이 아닙니다. 당장 확인된 수만 해도 수백 명입니다. 이건 그냥...."

"대낮에 전쟁이 벌어졌군...."

알프레도 총리의 말에 수행비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길거리 한복판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그것도 헌터들끼리의 전쟁이.

총리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도 감이 오질 않았다.

"일단은… 협회에 연락해서 작전팀 투입해! 경찰이랑 군대도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진압해!"

"아, 알겠습니다."

"빌어먹을 새끼들… 미국, 홍콩에서도 그 난리를 피우더니, 이젠 여기서까지...."

감히 국제기구도 아닌, 한낱 민간 기업이 각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솔직히 그놈들이 다른 나라에서 무슨 짓을 하든 알 바는 아니지만, 이탈리아가 그 타깃이 됐다면 말이 달라진다.

이건 명백히 선을 넘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건지는 몰라도, 절대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다.

만약 단 한 명의 시민이라도 피해를 받는 순간.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물론, 한국 정부에도 엄중한 책임을 물게 할 것이다.

설령 교류를 영구히 끊는 한이 있더라도.

알프레도 총리가 그렇게 다짐한 순간.

따르릉―.

집무실의 유선전화가 울렸다.

시칠리아의 상황 보고가 들어온 것이라 생각한 그는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알프레도 총리님.」

이내 처음 듣는 목소리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미스러운 일로 연락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 조현민입니다.」

"...?!"

전화 건너편 상대가 정체를 밝히자 알프레도 총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지금 이 상황에 대통령이 직접 연락해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빌어먹을,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머릿속이 복잡해진 탓에, 총리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시칠리아에서 헌터들끼리 마찰이 발생했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예, 방금 보고 받았습니다. 듣자 하니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주축이라던데, 이건 엄연히 국제법 위반 행위입니다. 지금 당장 철수 명령을 내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죄송합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민간 기업이라 저에게는 통제권이 없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럼 지금 그냥 저렇게 내버려 두겠다는 겁니까?!"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지금 벌어진 사태의 진상을 알려드리려는 겁니다.」

"진상…?"

조 대통령이 말끝을 흐리길 잠시, 이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모두 국제협회 측에서 벌인 일입니다.」

"...하아."

그러자 별로 놀랄 것도 없다는 듯, 알프레도 총리가 한숨을 내뱉었다.

"한국이 국제협회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몇 번이나 마찰이 있었던 것도요. 그런데 이번에도 국제협회 탓으로 몰고 가는 건 너무 파렴치한 거 아닙니까?"

「몰고 가려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꽤나 강인한 기백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알프레도 총리는 잠시 대답을 아꼈다.

그러자 조현민 대통령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옥타보이드암페타민이라는 신종 마약 루트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이탈리아 남부 마피아, 구아르디아노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아냈고요.」

"신종 마약…?"

「예. 워낙 위험성이 높은 약물이라, 김준우 대표를 포함한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직원들은 원 생산 조직인 멕시코 카르텔과 접촉하여 루트를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국제협회가 난입한 것이, 지금 벌어진 전투의 원인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국제협회가 대체 왜…?"

총리의 물음에 조 대통령이` 뜸을 들이길 잠시.

이내 진중한 목소리로 그 말을 뱉었다.

「보이드 유통은 그들이 지원하는 사업이니까요.」

"...!"

그 충격적인 발언에 알프레도 총리는 할 말을 잊은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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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

알프레도 총리의 집무실.

「보이드 유통은 국제협회가 직접 지원하고 있는 사업이니까요.」

"...."

유선으로 조현민 대통령의 말을 전해 들은 알프레도 총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 알고 계십니까?"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대로였다.

「알고 있습니다.」

"...."

조 대통령의 단호한 목소리에 알프레도 총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조 대통령의 말을 백 프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발언임은 틀림없었다.

조 대통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전 세계 시민을 지켜야 할 국제협회가 마약 사업을 주도했다는 의미고, 거짓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구를 상대로 음해를 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한 발언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책임과 그 파장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조현민 대통령 또한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겠지.

그러니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가 이러한 발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만한 각오를 했다는 뜻이리라.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제협회가 멕시코 카르텔에 보이드의 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

「원료인 프렉탈의 가격과 전 세계 물량을 생각해보면 꽤나 엄청난 투자인 셈입니다. 그들로선 포기할 수 없는 사업일 테니,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움직이는 게 달가울 리 없겠죠.」

"하지만 국제협회가 대체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건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굳이 추측해보자면... 국제기구로서의 입지겠죠.」

"예?"

조현민 대통령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잘 모르시겠지만, 현재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국제협회와 냉전 중입니다. 아니, 냉전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겠군요. 실제로 몇 번 마찰이 있었으니.」

"…그건 알고 있습니다."

「이유와 과정은 제쳐두고. 결과적으로 국제협회는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본인들의 영향력을 일부 나누어주었습니다. 덕분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유일하게 인정받은 민간 토벌 조직으로서 세계 각국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죠.」

알프레도 총리는 가만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저번에 일어난 헌터 대거 이탈 사태와 맞물려,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자칫하면 조직 전체가 와해될 수도 있는 큰일이었죠.」

"그건 이미 해결된 일 아닙니까?"

「물론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보이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요.」

"...."

「아직 이전의 일도 다 해결되지 않은 마당에, 대량의 신종 약물까지 전 세계로 유통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한순간에 무너지겠죠."

알프레도 총리가 대신 말을 내뱉자 조 대통령은 잠시 침묵했다.

그 또한 같은 의견인 듯했다.

「...그 때문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헌터들은 마약 카르텔을 소탕하기 위해서, 또 이탈리아의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겁니다.」

이내 조현민 대통령이 무겁게 말을 이었다.

「국제협회로부터 말입니다.」

"...."

알프레도 총리는 깊게 호흡하곤 입을 열었다.

"그 발언… 책임지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조현민 대통령이 즉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프레도 총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로선 믿기 힘든 사실이군요."

「이해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린다 한들, 믿기 어려우시겠죠.」

알프레도 총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제협회가 그간 구설에 휘말린 건 알고 있다만, 세상 어느 기구인들 그러지 않을까.

그 중 어느 하나도 증명된 게 없을뿐더러, 아직 그들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으니.

무엇보다 이탈리아 협회 또한 국제협회 소속의 지부다.

당장 그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증거라고 하긴 뭐하지만, 곧 카르마 코퍼레이션 직원이 찾아갈 겁니다. 그가 가져온 물건을 확인해주십시오.」

"예…?"

조현민 대통령이 의미심장한 말을 뱉은 그 순간이었다.

"총리님!"

한 직원이 다급하게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를 따라 한 남자가 막무가내로 집무실로 들어섰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정보팀 소속, 강재석이라고 합니다. 혹시 대통령님께 연락받으셨습니까?"

"아, 뭐. 예...."

갑작스러운 난입에 알프레도 총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걸 내비칠 틈도 없이 남자가 가방을 내밀었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가방.

그와 동시에 안에서 하늘색의 가루가 담긴 비닐들이 뭉텅이로 쏟아져 나왔다.

"이건...?"

"구아르디아노가 카르텔과 거래한 보이드입니다. 저희 쪽에서 거래 물건 전량 회수했습니다."

"그럼, 이게 그 신종 마약이라는 겁니까?"

"예."

알프레도 총리는 그 내용물을 말없이 바라보며 점점 이성을 되찾아갔다.

저게 진짜 마약인지 아닌지는 연구소에 보내면 금방 확인이 가능하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족히 100kg은 돼 보이는데....'

일반적인 마약이라 생각해도 수십만 명은 족히 투약할 수 있는 양이다.

만약 저 물량이 그대로 유통된다면...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가 흔들릴 수 있을 정도.

'....'

그쯤 되니 알프레도 총리는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조 대통령의 말을 믿고 말고를 떠나서, 정말 신종 약물이 유통될 뻔했다는 건 틀림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다시 전화를 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어떻게 했으면 하는 겁니까?"

「일단 현지에서 발생한 마찰의 모든 책임은 한국이 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총리님은 저희 직원이 회수한 보이드를 이탈리아 지부장에게 전달해주십시오.」

"네…?"

「분명 이탈리아 지부장도 이번 일과 연관되어 있을 겁니다. 잘 감시하시다 보면 국제협회 본부 쪽에서 움직임이 있겠죠. 만약 그런 움직임을 포착하신다면, 그걸 언론에 그대로 내보내 주십시오.」

"...만약 국제협회와 연관이 없다는 정황이 나오면 어떡하실 겁니까?"

「그땐 제 발언에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강경한 목소리에 알프레도 총리는 눈을 꾹 감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는 눈앞에 놓인 약물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순식간에 너무 엄청난 것들을 들은 탓에 머리가 지끈거려왔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만약 조현민 대통령의 말대로 국제협회가 이번 마약 유통에 연루되어 있다는 정황이 포착된다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

시칠리아섬, 도심 한복판.

"...!!"

그곳에서 김준우 사단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에마 대표는 갑자기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본능이 울부짖는 듯한 감각에, 곧바로 고개를 돌리자 눈에 들어온 한 남자.

김준우.

불길한 검은 기운을 펄펄 뿜어대며 전장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새 회복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사제 클래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결국 임시방편일 뿐이다.

여전히 한계인 건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래, 분명히 그럴 터인데.

'...빌어먹을.'

그가 내뿜는 기운에 에마 대표마저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래봤자 겨우 끌어낸 힘일 텐데도… 저 정도라니.

에마 대표가 그의 힘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사실 그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여태껏 본인의 팀과 몇 번이나 충돌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데이터를 모아오지 않았던가.

밸런스팀을 상대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남자.

어느 클래스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스킬과 전투 경험을 보유한 이능력자.

국제협회 비공식 SS랭크로 지정된 자.

그 천하의 웨슬리조차 인정한 존재.

데이터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데이터로는 말이다.

그런데....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장비가 생성되었습니다.]

스스스스스―.

[마검 : 타르타토스]

[마갑 : 악몽의 베네]

"...."

저건 데이터 따위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는가.

'...거품은 아니었나 보네.'

에마 대표는 실소를 뱉으며 김준우를 향해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고유 스킬 : 병기 확보]

[조정간 - 연발]

철컥―.

에마 대표 주변으로 소환된 온갖 화기가 일제히 김준우를 조준했다.

쾅―!!

파바바바방―!!

두두두두두―!!

수천 발의 탄환이 그를 향해 빗발치기 시작했다.

저격수 클래스.

특수한 총기와 탄환을 사용하는 소수의 클래스.

기본적으로 마법사 클래스와 같이 원거리 포지션이지만, 위치 선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그들과 달리 저격수 클래스는 위치 사수가 절대적이다.

그렇다고 마법사 클래스처럼 광범위한 공격이 가능한 것도 아니며, 몬스터와의 거리가 좁혀진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포지션이다.

가장 까다로운 공격 조건을 가진 클래스지만, 그 한 발이 명중했을 때의 위력은 감히 다른 클래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가장 까다롭고 위험한 클래스.

동시에 가장 강력한 한 방을 지닌 자들.

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자.

전 세계 저격수 클래스 1위.

에마 루시아.

[고유 스킬 : 병기 확보]

[조정간 - 포화]

쿠구구구구―.

이윽고 그녀가 스킬을 변형하자 땅속에서 거대한 포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쿵―!

콰과과과광―!!!

그리곤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갔다.

수백 개의 이능운용화기를 소환하는 고유 스킬과 비처럼 쏟아붓는 탄환들.

거기에 더해 기동력과 근접 스킬까지 갖춘 그녀는 현역 시절, 가장 올 라운더에 근접한 이능력자로 평가받았었다.

나이가 든 지금까지 그녀를 대적할 수 있는 현역은 극소수일 정도로 전설 같은 인물이다.

그런 그녀의 공격을.

"그렇게 다짜고짜 총알부터 쏟아붓는 걸 보니...."

서걱―.

콰과과광―!!!

"제가 어지간히 무섭긴 한가 봅니다."

김준우는 들고 있던 검 하나로 그 모든 걸 막아냈다.

아니, 막아낸 것이 아니라… 베어냈다.

단 한 번 검을 휘두르자 모든 탄환이 채 닿기도 전에 터져나갔다.

"...."

에마 대표는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이 한 번의 합으로 직감했다.

저 남자의 실력은 압도적이라는 것을.

저 검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무엇보다 그를 둘러싼 검은 기류를 이용한 정체불명의 공격.

웨슬리의 그것과 닮았다.

그렇다는 건 본인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놈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겠지.

'인간이 아니네....'

에마 대표는 눈앞의 악마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길 잠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공포감에 서서히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퇴할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기서 끝을 봐야 한다.

설령 본인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고유 스킬 : 병기 확보 - 각성]

[조정간 - 투하]

지이이잉―.

시간을 끌어서 그가 폭주하도록 유도하는 수밖에.

[시전자의 각성 스킬 시전이 확인되었습니다.]

[고유 화기에 접속합니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푸른빛으로 번뜩이길 한 차례.

[접속 확인]

[생체 - 화기 원격 투하 프로토콜 개시]

하늘에서 반짝거리는 점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순간.

쿵―!!!

정확하게 김준우의 머리 위로 광선이 직격했다.

우주 조약을 위반하면서까지 비밀리에 쏘아 올린 그녀의 고유 화기.

지구 주변을 돌고 있는 13기의 인공위성, 가르강튀아.

그곳에서 발사된 최대출력의 탄환.

실제 작전 중에는 해당 탄환을 다른 헌터의 스킬로 텔레포트 시켜야 했기에 실사용이 무척이나 까다로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쿵―!

쿵, 쿵, 쿵―!!

연달아 김준우를 향해 직격하는 광선.

지상에 닿을 때마다, 반경 수백 미터의 모든 것들이 초토화됐다.

물론 이것으로 김준우를 죽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최소한 그의 움직임을 막고 시간을 끌 수단은 되겠지.

에마 대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확실히...."

몇 차례나 광선에 직격당한 김준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먼지 속에서 걸어 나오기 전까지는.

"대표는 뭔가 다르긴 하군요."

"...!"

"시간을 끌려는 것 같은데… 저도 간당간당해서 어울려 줄 여유는 없겠군요."

이윽고 김준우는 자신의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전장]

그와 동시에 주변 공간이 검게 뒤덮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먹구름…?"

"시발,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여…!"

갑작스럽게 바뀐 풍경.

지구라고 하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던 모두가 누구랄 것 없이 움직임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원형 소환 : 대원수 - 바엘]

[원형 소환 : 정복자 - 아가레스]

[원형 소환 : 지배자 - 가미긴]

[소환 : 군단]

"...."

"...."

에마 대표와 그들의 눈앞에 마왕과 그의 모든 수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247

247

"...뭡니까, 이게?"

국제 헌터 협회, 이탈리아 지부.

그곳의 책임자, 마틴 지부장은 알프레도 총리가 가져온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얼굴은 어째선지 바짝 굳어 있었다.

알프레도 총리는 마틴 지부장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옥타보이드암페타민. 뒤쪽에서는 보이드라고 부르는 약물이다. 듣자 하니 이능력자의 스킬을 단기간에 증폭시켜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더군."

"...."

마틴 지부장이 대답을 아끼길 잠시.

"이걸…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구아르디아노가 멕시코 카르텔과 거래한 물건을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회수한 거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처분은 우리 쪽에 맡기겠다더군. 뭐, 그쪽 입장에선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골칫덩이일 테니까."

알프레도 총리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쪽에서 처분하려면 절차가 꽤나 까다롭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쪽도 별로 깨끗하지 않다는 거, 알고 있지 않나."

"마피아랑 연이 없는 놈이 없다는 건 들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뒤가 구린 놈들이 이걸 다시 빼돌린다면 정말 큰일이 나겠지."

"그래서 저한테 맡기시겠다는 건가요?"

알프레도 총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마틴 지부장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

"...."

마틴 지부장의 얼굴이 굳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구아르디아노가 가지고 있어야 할 보이드가 눈앞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그걸 총리가 직접 가지고 오다니.

아무리 봐도 예삿일은 아님이 분명했다.

마틴 지부장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잠시.

"알겠습니다. 저희 쪽에서 잘 처리하도록 하죠."

독이 될지, 득이 될지 모를 그것을 결국 받아들였다.

"그럼, 부탁함세."

"...예."

알프레도 총리는 그 말을 남기곤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그가 나간 후, 마틴 지부장은 살짝 문을 열어 복도를 한 번 더 살폈다.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그는 사무실 문을 잠그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사무총장님, 마틴입니다."

「아, 네. 무슨 일이신가요.」

웨슬리 사무총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게 아니라… 알프레도 총리가 보이드를 가져왔습니다."

「...예?」

"구아르디아노가 카르텔과 거래한 물건을 카르마 코퍼레이션 측에서 회수했다고 하는데… 양이 상당한 걸 보니, 아무래도 거래 전량인 것 같습니다."

「그걸 왜 당신한테 가져온 겁니까?」

"정부 쪽에서 처리하기 껄끄러우니 제게 처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버리기엔 조금 아까운 것 같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연락드렸습니다."

「....」

사무총장은 잠시 대답을 아꼈다.

그러자 마틴 지부장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번 달 안으로 유럽 전역에 유통하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 양을 다시 제조하려면 꽤나 늦어질 겁니다."

「…그렇겠죠.」

"무엇보다 카르마 쪽에서 벌써 냄새를 맡았다면 추후 밀매가 더 까다로워질 거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처분하지 않는 편이..."

마틴 지부장이 말끝을 흐리자,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금 시칠리아에서 카르마와 전투가 발생한 건 들으셨습니까?」

"네? 아, 네… 들었습니다."

「듣자 하니 김준우 대표가 상당히 힘이 빠졌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승리하기에는 역부족일 겁니다.」

"...."

마틴 지부장은 대답을 아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신이 도와 기적적으로 에마가 승리하거나, 혹은 김준우 대표가 폭주해서 시민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빠지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웨슬리 사무총장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우린 보이드도, PB 코퍼레이션도 모두 잃게 되는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드가 다시 손에 들어왔다면 굳이 리스크를 짊어질 필요는 없겠죠.」

핸드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길 잠시.

이윽고 웨슬리 사무총장이 본심을 내뱉었다.

「계획대로 보이드가 유럽 전역으로 유통된다면, 러시아와 중동, 동북아까지 퍼지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굳이 희생을 치르지 않더라도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무너뜨릴 수 있겠죠.」

"동감입니다."

「그렇다면 보이드가 우리한테 다시 돌아온 건 꽤나 행운이군요.」

"...."

마틴 지부장은 사무총장이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도록 하죠. 당신이 마피아와 직접 접촉하는 건 위험부담이 있으니, 그 사람에게 보이드를 넘기면 일 코르포에 전달해줄 겁니다.」

"일 코르포 말입니까? 구아르디아노가 아니라요…?"

그때, 마틴 지부장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니 문제는 아니지만. 일 코르포 놈들은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남부 최대 조직이라 이곳저곳 힘이 안 닿는 곳이 없는데, 보이드까지 손에 넣으면...."

「더 힘이 커질까 봐 걱정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보이드를 유럽 전체에 유통하기 위해선 반드시 마피아의 연결책이 필요했다.

그 연결책 후보로 일 코르포와 구아르디아노가 명단에 올랐지만. 일 코르포는 더 세력을 키웠다간 위험해질 거라 판단하여, 최종적으로는 구아르디아노를 선택했다.

이후 마틴 지부장은 직원을 시켜 보이드에 대한 정보를 구아르디아노에 살짝 흘렸다.

이후 그 정보를 덥석 문 로베트로는 곧바로 멕시코 카르텔과 접촉하여 거래를 시도했다.

국제협회의 유통책으로 이용당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그런데 왜 굳이....

"왜 갑자기 유통책을 변경하시려는 겁니까?"

「지금 그 보이드, 카르마 코퍼레이션에서 회수한 물건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마, 맞습니다."

「이미 한 번 눈에 띈 놈들이니, 계속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다시 구아르디아노에 맡겼다가 카르마 놈들에게 또 걸리게 되면... 꼬리가 잡힐 겁니다.」

"아...."

「무엇보다 까놓고 말해서 구아르디아노는 아직 힘도 없는 놈들이잖습니까. 상황도 상황인지라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전역으로 유통하는 게 중요한데, 그러려면 차라리 일 코르포 놈들이 믿음직스럽죠.」

"죄, 죄송합니다. 그런 깊은 뜻이 있는지도 모르고...."

마틴 지부장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괜찮습니다. 그럼… 저희 쪽 사람이 도착할 때까지 물건, 잘 보관해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마틴 지부장은 잘 해결됐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쏟아냈다.

알프레도 총리가 보이드를 가져왔을 때는 솔직히 식겁했다.

지부와 국제협회와의 관계, 또한 본인이 보이드 유통에 손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들켰다고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구아르디아노가 가지고 있어야 할 보이드가 이곳에 있다는 건 계획이 크게 틀어졌다는 뜻이기도 했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식은땀만 흘려댔지만....

보아하니 총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충분히 만회할 수도 있다.

눈에 띄지 않게 다시금 마피아에게 넘겨주면 그만이니까.

순간 어떻게 되나 싶었지만, 잘 해결됐다.

그 생각에 마틴 지부장은 등받이에 몸을 푹 늘어뜨렸다.

책상 밑에 달린 도청기에, 그의 모든 말이 녹음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

"후우...."

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내 주변을 뒤덮었던 검은 공기가 걷히자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 쏟아졌다.

그와 함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초토화된 현장이었다.

"...."

"...."

그곳에 있는 모두가 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슨 일이었을까요?"

이내 김민주가 정적을 깨고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나야 모르지."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쉽게도 전투는 끝을 보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며 전력을 내던 그 순간.

누군가 에마 대표에게 무언가를 전달했고, 그 직후 그녀가 갑자기 힘을 거둬들인 것이다.

그리곤 나를 지그시 바라보길 잠시, 이내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렸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모두가 매한가지였다.

어쨌거나 에마 대표는 그렇게 밸런스팀을 이끌고 미련 없이 현장을 벗어났다.

그렇게 우리만 남게 된 현장.

모두가 벙찐 얼굴로 상태 파악을 하고 있던 그때였다.

"그냥 보내줘도 되는 건가?"

노아가 다가오며 물었다.

"끝을 볼 기회였잖아. 저대로 보내면 분명 또다시 발목을 잡을 텐데."

"...."

나는 대답을 아꼈다.

알고 있다.

누가 모르겠는가. 그간 나를 계속 방해해온 PB 코퍼레이션을 뿌리째 뽑을 기회라는 걸.

나도 당연히 여기서 끝을 보고 싶었다.

다만....

"10초만 더 지났으면… 저도 위험했습니다."

"...."

이미 한유빈과의 싸움에서 한계에 다다랐었다.

사제가 응급처치를 해줬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그런 상황에서 전력을 끌어냈다.

전투는 고사하고, 힘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만약 그녀가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다면....

'절대 좋은 꼴은 못 봤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마 대표가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 또한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 없다.

괜히 무리하게 끝을 내려다 더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 상황에서 리스크를 짊어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 혼자 하는 일도 아니고....'

나는 주변을 훑었다.

김민주와 한유빈을 포함한 작전팀 전원은 굳은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직후 몰려든 허탈감, 공허함 그리고 불안감을 느끼는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민주가 다시금 물었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남은 건 본부가 대책을 세워놨길 바라는 수밖에."

에마 대표가 끝장을 보지 않고 돌아간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없다.

굳이 여기서 끝을 보지 않아도, 우리를 무너뜨릴 방법이 생긴 것이다.

가령 보이드를 유통하려고 했던 계획을 다시 실행할 수 있게 됐다거나, 아니면 관련 인사들을 포섭해서 이미 우리를 매장할 준비를 마쳤다거나.

그렇다면 굳이 이곳에서 불필요한 희생을 늘릴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할 텐데....'

일단 이아영 본부장에게 국제협회가 보이드 유통에 관여하고 있다는 증거나 관련된 인사들 조사를 맡기고, 우린 카르텔 본거지부터....

"대표님!"

그때였다.

어딜 갔다 온 건지, 정보팀 소속의 강재석 파트장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나를 불렀다.

"뭡니까?"

"구아르디아노와 일 코르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답니다!"

"...예?"

갑자기?

"보이드를 일 코르포 놈들이 가져갔다고 생각해서 본거지를 습격했는데... 정말 그곳에서 물건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

그의 말에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우리가 회수한 보이드가 일 코르포 놈들에게 들어갔다라....'

그래서 밸런스팀이 후퇴한 건가.

남부 최대 마피아가 유통책이 된다면, 굳이 우리를 여기서 막지 않아도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유통할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빨리 마피아에게 넘겨줬다는 건, 이탈리아 지부도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는 소리겠지.

우리가 이번 일을 수습하는 틈에 몰아붙이겠다, 이건가.

하지만 이 타이밍에 보이드가 그쪽으로 흘러 들어간 게 우연일 리는 없다.

누군가 국제협회가 유리해지게끔 의도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아니, 아니지....'

정말 유리해지게끔 하려고 했으면, 보이드가 일 코르포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을 거다.

이건… 보이드를 다시 놈들의 손에 넘김으로써 본인들이 유리해졌다고 생각하게끔 만들려는 수작이겠지.

하지만 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길 잠시.

대충 어떻게 된 건지 감이 온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본부에서 손을 쓴 모양이군요."

그럼 우리도 쉬고 있을 순 없지.

"일 끝나자마자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오늘부터 다들 야근하셔야겠습니다."

우리 쪽에서 일부러 보이드를 다시 풀었다면 반드시 꼬리가 잡힐 것이다.

다시 마피아의 손에 들어간 보이드.

구아르디아노와 일 코르포와의 전쟁.

그리고 유통 사업을 지원하고 있는 국제협회와 이탈리아 지부.

이 모든 꼬리가 드러나는 순간... 전면전이 시작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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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이탈리아, 로마.

총리 집무실.

알프레도 총리는 벌써 몇 시간 째 가만히 앉아 생각에 빠져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몰아쉬던 그의 손에는 작은 녹음기가 들려 있었다.

마틴 지부장 책상 밑에 달아두었던 바로 그것.

사무실에서 홀로 그 내용을 확인한 알프레도 총리는 엄청난 사실을 마주한 충격에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설마 진짜일 줄이야....'

조현민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정말 국제협회가 보이드 유통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간 국내 그 어떤 기구보다 가장 신뢰하던 이탈리아 지부 또한 한패였다.

보이드를 건네주자마자 곧바로 국제협회와 접촉.

그리곤 다시 마피아에게 돌아간 보이드.

처음부터 계획되었던 유통책.

모든 게 조현민 대통령이 추측한 대로였다.

아니… 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런 일에 직접 관여하여 모든 정황을 추측했을 리가 없다.

이건 분명....

'김준우 대표....'

그놈이 짠 판이다.

이 판에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조현민 대통령에게 부탁한 게 틀림없다.

미친놈.

일개 회사 대표가 대통령까지 포섭할 정도의 영향력이라니.

어쨌거나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나온 이상, 알프레도 총리 또한 진실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다만, 이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동안 여러 논란이 있긴 했지만, 국제협회가 전 세계 시민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애초에 그 논란들 또한 국제협회를 시기한 이들의 거짓 음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마약 유통에 관여하고 있었다는 건....

'아무리 봐도 시민들을 위한 행동은 아니지....'

그럼 그동안 국제협회가 휘말렸던 논란 또한 모두 사실이라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의 국제협회는 설립 당시 시민들을 위해 희생하리라 다짐했던 국제협회가 맞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국제협회는....

정녕 시민들을 위한 기구가 맞는 건가?

'시발....'

이내 알프레도 총리는 녹음기를 꾸욱 움켜쥐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믿어온 것들이 송두리째 부정당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사실이라면 어쩔 수 없지.'

물론 국제협회가 변질됐다는 게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정의라는 뜻은 아니다.

카르마 또한 어떤 어두운 속내를 숨기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찌 됐든, 지금의 국제협회가 시민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앞만 보고 가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알프레도 총리는 이내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알프레도입니다."

「네, 총리님. 무슨 일이신가요.」

"지금 당장 국내 언론이랑 외신들… 모조리 소집하세요."

「네…?」

그가 침을 꿀꺽 삼키길 한 차례.

"우린 이제부터 국제협회와의 전쟁을 선포할 겁니다."

그 말을 내뱉었다.

***

"뭐라고…?"

프랑스 파리,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웨슬리 사무총장에게 귀를 의심케 하는 보고가 전달됐다.

"지금 시칠리아에서 일 코르포와 구아르디아노가 충돌했다고 합니다. 정황상 보이드 때문인 것 같은데...."

"아니, 대체 구아르디아노가 어떻게 알고…?"

그의 물음에 수행비서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처음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보이드를 회수할 때, 일 코르포인 척한 것 같습니다. 일 코르포에 빼앗겼다고 생각해서 본거지로 쳐들어갔는데...."

"거기에 진짜로 거래했던 보이드가 있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수행비서의 대답에 웨슬리 사무총장이 실소를 뱉었다.

이게 대체 무슨 우연인가.

하필 유통책을 바꾸고 보이드를 전달하자마자 구아르디아노에게 들켰다고?

아니, 이게 우연이 맞긴 한 건가?

'잠깐....'

그리고 그 순간.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일 코르포인 척, 보이드를 회수했다고요?"

"...네."

수행비서의 대답에 이윽고 그의 머릿속에서 아귀가 맞춰지기 시작했다.

일부러 일 코르포인 척하고 보이드를 회수한 카르마 코퍼레이션.

그렇게 회수한 보이드를 총리에게 가져다준 것 또한 카르마 코퍼레이션.

그리고 총리를 통해 다시금 우리에게 돌아온 보이드.

'시발, 설마…!'

전부 계획되어 있었던 건가?!

일부러 보이드를 넘겨줘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려고?

"빌어먹을! 지금 당장 마틴 지부장에게 연락해서 사무실 수색해보라고…!"

이윽고 웨슬리 사무총장이 자리를 박차며 일어난 그 순간.

"사, 사무총장님...."

한 직원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지금 뉴스에서...."

차마 끝까지 말하기 두려웠던 건지, 직원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감한 웨슬리 사무총장은 고개를 치켜들곤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실책이다.

보이드가 너무나도 손쉽게 다시 우리 손에 들어왔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그걸 다시 받아든 순간... 이미 함정에 빠졌다.

'김준우....'

누군 목숨을 잃을 각오로 싸우고 있는 와중에 그놈은 여기까지 생각했단 말인가.

"하, 하하하…!"

웨슬리 사무총장이 난데없이 폭소를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그가 이윽고 중얼거렸다.

"그래… 기어이 전쟁을 하자 이거지...."

그런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네?"

"괜히 이미지 챙기며 눈치 볼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요."

한 차례 미소 짓길 잠시.

"당장 멕시코 카르텔에 연락해서 가지고 있는 보이드 전량 무료로 풀라고 하세요. 값은 후에 우리가 대신 치러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은 눈빛을 번뜩이며.

"모든 병력 대기 시켜 놓으세요."

끝내 그 명령을 내뱉었다.

***

-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과거 잠비아 임시 협회와의 불법 무기 거래를 비롯해 홍콩 협회 습격, 로비 의혹 등 여러 차례 구설에 휘말렸던 국제 헌터 협회가 다시금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다름 아닌, 국제 헌터 협회가 멕시코 카르텔과 손을 잡고 신종 마약인 옥타보이드암페타민의 유통에 관여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지부 또한 긴밀하게 관여하고 있음이 드러났으며, 경찰 당국은 이탈리아 지부 외에도 훨씬 더 많은 지부가 연루되어 있을 거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의혹은 인터폴의 수사에도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이번만큼은 국제협회를 신뢰하는 전 세계 시민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번 의혹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증거를 제출하신 알프레도 총리의 성명이 있겠습니다.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자회견.

나는 부상 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TV를 통해 확인했다.

그런 내 옆에는 김민주와 한유빈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지부장과 국제협회 사무총장의 통화 내용이 방송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보이드 유통.

카르마 코퍼레이션 언급.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유럽 전체, 나아가 아시아 전체에 보이드를 유통하겠다는 계획.

그것을 위해 고의로 마피아들에게 정보를 흘렸다는 내용까지.

그 모든 것들이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전파를 타고 있었다.

"이걸로 국제협회가 대미지를 조금이라도 받았을까요."

방송을 지켜보던 김민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 대미지는 충분히 줬겠지. 나를 잡을 유일한 기회마저 포기했는데, 보이드를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 계획이 다 드러나 버렸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문제는 그다음이겠죠."

한유빈이 곧바로 그 말을 덧붙였다.

"...맞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더러운 꼬리가 드러난 이 순간부터, 국제협회는 더 이상 앞뒤 가릴 게 없어졌다.

서로 최대한 직접적인 마찰은 피하면서도 온갖 술수로 견제를 하던 냉전은 이제 끝났다.

지금 이 방송은, 국제협회와의 전면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

모두가 알고 있는 건지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고 있던 그때였다.

내 핸드폰이 울렸다.

「방송 보고 있어요?」

다름 아닌 이아영 본부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예,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당신 아이디어입니까? 보이드를 넘겨주는 거로 꼬리를 잡으려고 한 거."

「...아빠랑 같이했어요. 대통령님도 도와주셨고요.」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투가 있었다면서요? 이겨도 져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던데....」

"맞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약점을 잡아보려고....」

평소답지 않게 자꾸만 말꼬리를 흐린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가 죽어 있습니까?"

「그야… 이제부턴 진짜 전면전이 됐잖아요. 그냥 당신을 믿고 기다렸으면 이렇게까진 안 됐을 수도 있는데....」

"하."

정말이지 평소답지 않은 반응에 나도 모르게 그만 웃음을 흘렸다.

"결과론적으로 생각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상황에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고, 당신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뿐인데."

「....」

"그리고 당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보이드를 돌려주지 않았다면 전투가 계속됐을 테니까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뭐, 자세히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아무튼,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민낯이 드러난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 겁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죠."

「계획이라도 있어요?」

"일단 지금 당장은 보이드 유통부터 막는 게 급선무입니다. 모든 계획이 까발려졌으니 수사가 들어오기 전에 어떻게든 보이드를 유통하려고 할 테니까요."

「음? 보이드를 또 유통한다고요? 지금 와서 그게 의미가 있어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초기의 목표는 몰래 보이드를 유통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우리의 발목을 잡을 생각이었겠죠. 하지만 그것 말고도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중독."

내가 즉답했다.

"보이드가 유통됨에 따라 중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 그만큼 보이드를 찾는 이가 늘어나겠죠. 나중에는 약을 구하기 위해 모든 걸 내놓을 테고. 그때부터 국제협회는 수백만 명의 충실한 개를 손에 넣는 셈입니다."

「약을 빌미로 헌터들을 컨트롤 한다는 거예요?」

"헌터 관리 권한이 없어도, 전 세계 헌터를 주무를 수 있는 수단이 생기는 거죠."

거기서 더 나아가면 헌터뿐만이 아니라, 아예 국가 전체를 주무를 수도 있겠지.

그야말로 지금 상황에서 국제협회의 마지막 보루이자, 칼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국제협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많은 양을, 최대한 빨리 퍼트리려고 할 겁니다."

「그럼 우리는....」

"멕시코를 이 잡듯 뒤져야겠죠."

이아영 본부장은 어째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미안한데요. 나라 하나를 뒤질 만큼의 인원은 없어요. 아직 파견 업무도 몇 개월은 더 지속해야 하고....」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설마 또 당신이 직접 움직일 건 아니죠? 더 이상 무리하면 진짜 위험…!」

"언제 제가 움직인다고 했습니까?"

「...?」

"아무튼, 인원은 걱정하지 마십쇼."

나는 여전히 방송 화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우리 편이 줄을 설 테니까."

이내 작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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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도 총리의 기자회견이 있은 지도 3일이 지났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전 세계에서는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주목할 점은 그 어떤 논란이 터져도 구렁이처럼 빠져나갔던 웨슬리 사무총장이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는 부분이다.

너무나 명백한 증거에 웨슬리 사무총장은 결국 당국의 경찰 조사를 받게 됐다.

웨슬리가 이번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건지, 나아가 이번 사건과 연루되어 있는 다른 지부들을 색출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권력을 쥐고 있는 그가 수사 대상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리라.

이후 이번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몇몇 국제협회 지부들은 곧바로 국제협회에서 탈퇴하기도 했다.

아직 독립 토벌 조직은 인정되지 않았기에, 그들 모두가 카르마 코퍼레이션으로 들어왔다.

물론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지부들도 있었다.

뭐, 그들 모두가 국제협회 본부 직할 지부들인 걸 보면....

'그놈들은 본부랑 한패라는 소리겠지....'

난 옅은 한숨을 뱉었다.

솔직히 그 어느 때보다 큰 성과였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떨떠름하기도 했다.

국제협회가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게 특히나.

절대 당하고만 있을 놈들이 아니다.

분명 무슨 짓을 해도 할....

따르릉―.

홀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머릿속으로 가늠하던 차에 핸드폰이 울렸다.

「몸은 좀 어떠냐?」

꽤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박인범 전 협회장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너 말고 직원들 말이야. 듣자 하니 피 터지게 싸웠다면서.」

"...."

웬일로 내 걱정을 다 하나 했다.

"…다들 괜찮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핸드폰 너머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이탈리아냐?」

"예."

「한국에는 안 와 봐도 되겠어?」

"이 씨 부녀가 알아서 잘해주고 있잖습니까. 굳이 갈 필요는 없겠죠."

「그래도 재정비는 필요할 텐데.」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민낯이 드러난 국제협회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그래서, 앞으로 계획은?」

"뭐, 일단 국제협회를 탈퇴하고 저희 쪽으로 들어온 지부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카르텔 수색을 도와주고 있으니 본거지를 찾는 건 시간문제겠죠. 일단 보이드 유통부터 막고...."

「아니. 그거 말고.」

박인범 협회장이 내 말을 끊으며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다음 말이야.」

"...."

그 물음에 잠시 대답을 아꼈다.

그가 무엇을 묻고 싶은 건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여태까지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아왔고, 그때마다 내 대답은 똑같았다.

국제협회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국제협회가 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 국제협회를 무너뜨린다 함은 우리도 그만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준비해야겠죠."

「그럴 만한 각오는 돼 있고?」

"...."

하여간 노인네.

예전부터 촉 하나는 무시무시하다니까.

「자네를 알게 된 것도 얼마 안 됐는데, 이상하게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 같단 말이지.」

"…그런가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그가 사뭇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겁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

나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가 겁을 먹고 있다니요?"

「자네가 과거에 어떤 놈이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몰라. 별로 관심도 없고. 그런데 말이야… 무언가를 잃어본 적이 있는 놈은 본능적으로 겁을 먹게 돼 있어. 겉으로는 티를 안 내려고 해도 다 보인다 이거야.」

"...."

「그래서 하는 소린데....」

이내 박인범 협회장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도 잃어본 적이 있었던 거지?」

나는 대답을 아꼈다.

「뭐, 말하기 싫으면 말어. 이제 와서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다만, 조금은 편하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해서. 수천 명의 직원이 자네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데, 자네 혼자만 짐을 짊어질 필요가 있냐는 말이야.」

"...."

짧은 순간, 많은 기억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 많은 얼굴들이 떠올랐고.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제 이야기는 아닌데...."

「음?」

"제 친구 중에 딱 그런 놈이 있었습니다. 랭크니, 타이틀이니 하는 것들에 이상하리만치 목을 매는 놈이었는데… 그래서인지 평판이 아주 쓰레기 같은 놈이었죠. 주변에서 욕도 많이 먹었고요."

「호오, 그래서?」

"그래서 뭐, 저도 똑같이 말해줬습니다. 조금은 내려놓고 사람들한테 잘 좀 대해주라고. 그랬더니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내가 묻자 박인범 협회장은 대답을 아꼈다.

그냥 내 말에 집중하고 있는 건지, 혹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건지.

"자기는 늘 절대적인 우위에 있어야 한다더군요. 그래야 잃지 않는다고."

「....」

그대로 정적이 이어지길 잠시.

「…재미없는 이야기군.」

"동감입니다."

핸드폰 너머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뭐, 그건 자네 친구 일이고. 어쨌든 이번 일은 순전히 자네의 일이야.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난 자네를 믿네.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겠지.」

"...."

「그러니 마음대로 해. 대신....」

이내 그가 평소와 같은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왕 하는 거 끝까지 가. 이렇게 일 벌여놓고 나중에 가서 혼자 내빼면 가만 안 둬.」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정곡이군.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것 봐요."

한유빈이 기다렸다는 듯 뜬금없는 소리를 뱉었다.

"다른 사람은 그쪽이 사라진다고 하면 절대 가만히 안 있을 거라니까."

"...."

이젠 아예 믿기로 한 모양이군.

"협박할 생각입니까?"

"협박…?"

"뭐,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는 대신 그쪽 노예가 되라거나...."

"...대체 무슨 영화를 본 거예요?"

그녀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참 나, 날 뭘로 보고. 애초에 그럴 거였으면 도와준다고 하지도 않았지. 걱정 마요. 다른 사람한테는 말 안 할 테니까."

"그럼 다행이군요."

"그런데 뭐…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던데?"

...뭐라고?

"무, 무슨 소립니까. 누가 알고 있어요?"

"뭐야. 몰랐어요?"

오히려 한유빈이 더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그 여자 촉이 얼마나 좋은데."

그리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카르마 코퍼레이션 산하 아이템 제작 연구소.

이클립스.

거기서도 가장 깊은 곳인 뱅크 아이템 보관실.

이아영 지원본부장은 보관된 이능석과 반능석, 두 개의 뱅크아이템을 바라보며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사색에 잠겨 있었다.

"왜 그러고 계세요? 평소답지 않게."

그때, 하성일 해외사업본부장이 그녀에게 다가오며 넌지시 물었다.

그와 동시에 이아영 본부장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하 본부장님은 만약에… 준우 씨가 사라진다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술 드셨어요?"

"...."

이아영 본부장의 표정이 팍 가라앉았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대표님이 사라진다니."

"그래서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만약에, 준우 씨가 일 다 벌여놓고 혼자 사라져버리면 어떨 것 같냐고요."

"...뭐, 섭섭하긴 하겠죠."

그 말에 이아영 본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역시...."

"그래도… 대표님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럴 분은 아니잖습니까?"

하성일 본부장이 그녀의 말을 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면, 그것도 존중해드려야겠죠. 뭐, 사실 일개 직원이 대표님 결정에 이러쿵저러쿵할 자격도 없고."

"...."

이아영 본부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하성일 본부장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 본부장님은 어떻습니까?"

"뭐… 저도 당연히 존중해줘야죠. 존중해줘야 하는데...."

이내 시선을 회피하며 그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러기엔 이미 선을 너무 많이 넘었나 봐요."

의미심장한 말에 하성일 본부장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 이아영 본부장이 다시 평소처럼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바꿨다.

"암튼!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지."

"무슨 준비 말입니까?"

"궁지에 몰린 국제협회가 칼을 빼 들 걸 대비해서 우리도 그만한 칼을 쥐어야죠."

"나머지 뱅크 아이템도 가져오시려는 겁니까?"

"가져오려는 게 아니라 파괴할 거예요."

"예…?!"

담담히 꺼낸 이야기에 하성일 본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통제권이 그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죠."

"하, 하지만 제가 알기론 뱅크 아이템을 파괴하려면...."

"맞아요. 에덴이 필요하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모두가 잠시 잊었던 거였다.

"어디 숨어있는지 몰라도… 다시 시작해보자고요."

***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터지고, 긴급 소집된 정상 회담.

각국의 정상들을 비롯해 국제기구의 수장들, 그리고 이번 사건의 중심에 선 웨슬리 사무총장까지 참석한 자리였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입니다."

대한민국 조현민 대통령이 처음으로 발언했다.

그러자 모두가 그의 말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맞습니다."

"전 세계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움직여야 할 국제 헌터 협회가 뒤에서 마약 유통을 지원하고 있었다니요."

"그간 국제협회가 희생해온 건 알지만, 그렇다고 이번 일이 묵과되어선 안 됩니다."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아니, 두 번 안 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국제기구로서 자격을 박탈해야 합니다!"

의장을 맡은 UN 사무총장은 각자의 의견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사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모두가 같은 의견이었다.

UN 사무총장은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을 살폈다.

그는 날이 선 비난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데.'

무슨 생각인가 싶었다.

바로 경찰에 끌려가도 모자랄 판국에 정상 회담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요청 때문이었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만든 자리인데 어째 한마디를 하지 않고 있으니....

사실 그에게도 충격적인 일이긴 했다.

설마하니 가장 신뢰받아야 할 국제기구가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이야.

그렇다면 이전의 구설수 또한 마냥 의혹이라고만 할 수도 없게 된다.

"혹시 하실 말씀 있습니까, 웨슬리 사무총장님?"

그에게 발언권을 주자, 웨슬리 사무총장이 한 차례 호흡하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권력은 한 명이 통제하면 안 된다, 혹시 그런 생각들 하고 계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당연한 거 아닙니까!"

"건강한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경쟁과 공생이...."

그 순간, 웨슬리 사무총장이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왜 당신들은 그러고 있습니까?"

"...!"

"...!"

명백한 도발에 정상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당신들은 그렇게 청렴결백해서 저한테 돌을 던지고 있나요? 지금 이 자리엔 과거 해가 지지 않았던 나라도 있고, 세계 유가 폭등의 원인인 나라도 있습니다. 솔직히 입 밖으로 말만 안 꺼낼 뿐이지, 다들 무기 하나씩은 가지고 있잖습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토벌은 시민들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독점을 피하고 경쟁 구도를 통해 성장한다는 건 기업에나 먹힐 얘기지, 시민들의 목숨을 가지고 경쟁한다는 게 애초에 말이 되는 걸까요?"

궤변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음에도, 누구 하나 반박하지 못했다.

"솔직히 저도 관리라는 명목으로 통제권을 휘두르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이렇게 관리가 안 되니, '유일한' 국제 토벌 기구로써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모두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진짜 통제가 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검은색 유니폼을 착용한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국제 헌터 협회 산하 비공식 조직, PB 코퍼레이션이 기어이 양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시작해!"

그 한마디에 회의실에 들어선 괴한들은 곧바로 정상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거 안 놔?!"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야!"

"겨, 경호원! 경호원 어디 있어!!"

각국 정상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그들을 지켜줄 인원들은 모두 목이 달아난 후였으니까.

"다, 당신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우리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세계랑 전쟁이야!"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전 세계 군대를 상대로…!"

정상들은 눈에 불을 켜고 웨슬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

[고유 스킬 : 천지창조]

웨슬리 사무총장의 서슬 퍼런 눈빛이 그들을 향했다.

"바라던 바입니다."

결국, 국제협회가 전 세계를 상대로 본색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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