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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멕시코 티후아나.

김민주는 국제협회 멕시코 지부의 지원을 받아 카르텔 소탕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아니, 이젠 카르마 코퍼레이션 지부라고 해야겠지.

사건이 터지자마자 국제협회를 탈퇴하고 우리 쪽에 붙었으니까.

"신호 맞춰서 A팀은 저랑 같이 진입, B팀은 밖에서 도주 인원 맡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확인했습니다.」

당국의 작전팀을 대동한 김민주는 한 세탁 공장 앞에서 무전기로 지시를 내렸다.

현장 인원들은 카르마에서 작전을 지휘할 전문가가 올 거라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하니 저렇게 젊은 여성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그중 몇 명은 대놓고 무시하는 이도 있었다.

무엇보다 국제협회까지 연루된 일이지 않은가.

그러니 보다 경험이 많고, 숙련된 전문가가 작전을 맡아줬으면 하는 게 당연했다.

그렇기에 젊은 여성이 작전 지휘를 맡는 게 영 못 미더웠지만....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진입!"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일(六觀音中一)]

쾅―!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작전 본부장이자, 대한민국 작전팀 최고 전력.

그녀가 이곳에서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쌓은 숙련된 전문가라는 걸 말이다.

[제1격 - 성관음(聖觀音)]

공장에 진입한 김민주의 눈이 번뜩였다.

"...?"

하지만 곧 긴장감은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그도 그럴 게....

"뭐, 뭐야!"

"이게 무슨...?"

공장 안에는 버려진 제조 장비만 즐비했다.

사람이라곤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 어디 간 거야?"

"설마 정보가 새어 나갔나."

"시발, 우리 쪽에 스파이가 있는 거야?!"

"빌어먹을!"

김민주와 함께 진입한 멕시코 작전팀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한 그들은 이내 본인들의 지휘관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작전, 제대로 준비한 거 맞습니까?"

"대체 어떻게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습니까!"

"...."

하지만 김민주는 그들의 질책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공장 안을 살폈다.

그 모습에 더욱 화가 난 작전팀은 이내 점점 더 언성을 높였다.

"이봐, 당신! 가만히 있지 말고 설명을…!"

"도망친 게 아니에요."

김민주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망친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 제조 도구를 훑길 한 차례.

손에 묻는 먼지를 탁탁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 먼저 처리했어요."

"...!"

"...!"

그 순간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망칠 거였다면 우선 본인들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을 텐데... 도구들을 보면 모두 멀쩡해요. 이건 흔적을 지울 틈도 없이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말이죠."

"하, 하지만...."

"대체 누가…?"

"우리 쪽 사람은 아니겠죠."

뭐, 소리소문없이 카르텔 하나를 박살 낼 만한 놈이라면… 한 곳밖에 없지.

"아무래도 국제협회가 먼저 손을 썼나 보네요."

"...."

"...."

이내 작전팀의 표정에 그늘이 드리웠다.

우리에게 잡히기 전에 꼬리를 자른 건가?

하지만 이미 본색이 드러난 이상, 굳이 보이드 생산책을 버릴 이유가 없을 텐데.

그들에게 보이드는 현재로서 전 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이자 수단이다.

각국의 헌터, 나아가 국가를 통제하기 위해선 보이드를 전 세계에 대량으로 유통해야 할 테니까.

그저 꼬리를 자르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처리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설마... 제조법을 손에 넣은 건가.'

그 생각이 스친 순간, 김민주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 작전은 어떻게 됐어?」

곧바로 전화를 받은 김준우가 먼저 상황을 물었다.

"이미 국제협회 쪽에서 손을 쓴 것 같아요. 제조 장비는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인원만 사라졌어요."

「뭐? 그럴 리가. 그놈들이 보이드를 포기할 리가 없는....」

이내 그가 말끝을 흐리길 잠시.

「...제조법을 손에 넣었나 보네.」

곧바로 결론에 다다랐다.

「어차피 본색도 드러났겠다, 다른 놈한테 맡기는 것보다 본인들이 직접 제조하는 게 낫다 이건가.」

"그런 것 같아요."

「쯧, 귀찮게 됐군.」

김민주 또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니까 더 알아볼게요. 장비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아영 씨한테 가져가면 반작용제를 만들 수 있을지도...."

「아니. 제조법을 손에 넣었다면 이미 늦었어.」

"네…?"

「지금 전 세계 정상들이 납치됐거든.」

"...!!"

김준우가 충격적인 소식을 전달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웨슬리 사무총장의 요청으로 정상회담이 열렸는데, 현장에 있던 모두가 납치됐어. 미국 대통령부터 UN사무총장까지. 전부.」

"마, 말도 안 돼요! 그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거나 다름이 없는데…!"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거야.」

김준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던전 통제가 가능한 차원석, 몰래 모아둔 수십만의 병력, 각국 정상들의 신병 확보. 거기다 보이드까지. 모든 무기가 다 모였어. 이젠 섣불리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리겠지.」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국제협회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는 건, 다시 말해서 각국 또한 상당한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뜻이야. 잃을 게 많은 나라들과 잃을 게 없는 놈들. 누가 더 유리할지는 뻔한 일이지.」

"...."

김민주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통제가 시작될 거야. 단순히 토벌권을 넘어서 정치, 경제, 안보, 모든 것을.」

"이게 대체 무슨...."

「일단 복귀해. 난 이제부터 회의 참가해야 하니까 연락이 힘들 거야. 자세한 건 이아영 씨한테 듣고.」

그의 명령에 김민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알겠어요."

어렵사리 말을 뱉고 통화를 종료했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위로 쳐들고는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대한민국, 서울.

소집된 각국 토벌 협회 비상 대책 회의.

"국제협회가 정상들의 신변을 쥐고 협박하고 있다고요!"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요!"

"그것보다 이러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공격해야 합니다!"

각국의 협회장들이 모두 모인 그곳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의견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화를 내는 건지 모를 그들의 모습을 나는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회의 장소를 서울로 정한 이유는 유일하게 한국이 국제협회의 통제권 밖에 있는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미 국제협회의 공격이 무서워 가장 안전한 장소로 모여든 주제에 공격이니, 전쟁이니 큰 목소리를 내는 거였다.

"하아...."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뭡니까?"

"지금 한숨 쉰 거예요?"

그 소리가 들린 건지 협회장들이 곧바로 날을 세웠다.

"그나저나 당신은 왜 입 다물고 있죠?"

"따지고 보면 이번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은 당신한테 있습니다!"

"맞아요! 애당초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국제협회를 자극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죠!"

"가만히 있지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보세요!"

그들의 고함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국의 무능하신 여러분들의 의견, 잘 들었습니다."

"...?"

"...?!"

"정말이지 하나 같이 머저리 같은 의견이군요."

캐나다 협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뭐라고?! 당신 미쳤어?!"

그를 따라 다른 협회장들도 목소리를 높였지만, 나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국제협회는 애초에 전 세계를 통제할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자극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갑자기 나쁜 마음을 먹어서도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는 겁니다."

"뭐, 뭐…?"

"그게 무슨...."

"뭘 놀라십니까. 제가 그동안 몇 번이나 국제협회의 실태를 까발리기 위해 노력했는데. 불법 무기 밀매, 미국 지부 습격, 홍콩 지부 공습 등등… 제가 언론에 퍼트린 사건만 해도 수두룩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이들을 한 명씩 바라봤다.

"그런데 당신들은 어땠습니까. 눈 감고 귀 막고 그래도 국제협회가 최고다, 짖어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본색이 드러나니 그게 다 내 책임이다?"

이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딴 개 같은 소리를 잘도 하시는군요."

"...큼큼."

"...."

모두가 시선을 회피하며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누구 책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가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애초에 그걸 위해 모인 자리고요."

베트남 지부의 후인 지부장과 일본 지부의 하라무라 지부장이 나를 대신해 발언했다.

"말해 뭐하겠습니까."

"문답 무용입니다. 지금 당장 공습을 해야 합니다."

호전적인 의견에 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무리입니다. 국제협회가 보유하고 있는 병력만 해도 수십만입니다."

"고작 그 정도 인원으로 전 세계랑 전쟁을 벌일 수는...."

"당신은 이능력자랑 전쟁을 벌여본 적이 있습니까?"

"...!"

그 순간, 캐나다 협회장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까지의 전쟁과는 궤가 다릅니다. 이능력자와 이능력자가 전면전을 벌인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겠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만약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 그다음 전쟁은 나뭇가지와 돌로 싸우게 될 거라고.

만약 여기서 전쟁을 벌인다면 그 말은 진실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던전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토벌을 뒤로하고 모든 인원을 전쟁에 동원한다면... 시민들은 누가 지킵니까?"

"그, 그건...."

"저도 이 사태의 심각성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토벌 조직으로서의 본분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전쟁이고, 공습이고 어떻게든 대항해야 한다는 건 나 또한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우리 쪽엔 병력도 없을뿐더러, 무리하게 토벌 인력을 빼돌렸다간 정말 되돌릴 수 없게 될 테니까.

그건 다시 말해....

'지금으로선 마땅히 방법이 없다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하지만 이대로 국제협회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않습니까."

미국 지부의 마이클 지부장이 슬쩍 손을 들며 발언했다.

"이대로 두면 전 세계가 국제협회의 손아귀에 놓이게 될 겁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됐다고 보는 게 맞겠죠."

이내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치, 경제, 언론, 안보… 모든 분야가 국제협회의 통제를 받을 겁니다. 무엇보다 우린 지금 지도자를 잃은 상황이고요. 희생을 치르더라도 누군가는 어떻게든 국제협회에 대항할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

나는 대답을 아꼈다.

많은 국가가 지도자를 잃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리고 국제협회는 그 틈을 타, 본인들만의 통제 시스템을 구축하겠지.

만약 그것이 완성되면 더 이상 그들은 기구가 아니라... 하나의 국가가 된다.

그렇게 되면 마이클 지부장의 말처럼, 전 세계가 그들의 통제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대항해야 한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전쟁은 안 된다.

'그럼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겠군.

"저희 지원본부장이 준비한 계획이 있습니다. 물론 아직 구체화 된 것은 아니라 미리 말씀드릴 순 없지만...."

나는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그 방법을 써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각국 협회는 평소처럼 토벌에 집중해주십시오. 그것마저 흔들리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

"그, 그렇긴 합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내가 묻자 각국 협회장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내 이성을 찾은 캐나다 협회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협회 중 대다수는 국제협회 지부였습니다. 토벌 지휘 및 기획 모두 본부의 지원을 받았죠."

"그 말씀은...."

"예. 부끄럽지만 누군가가 지휘를 해주는 게 아닌 이상, 우리끼리의 독립 토벌은 불가능합니다."

빌어먹을.

저것도 토벌 기구라고....

'이건 좀 큰일인데....'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자격이 되는 이에게 국제 토벌 지휘권을 맡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잠자코 있던 이두식 이사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예?"

"지휘권이라니… 국제협회를 대신할 조직을 만들겠다는 겁니까?"

"하지만 전 세계 토벌을 관리할 만큼 실력 있는 사람이...."

모두가 의문을 품던 그 순간.

그곳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국제 헌터 협회를 국제기구에서 박탈하고,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공식적인 국제 토벌 기구로 인정해주십시오. 그리고...."

곧바로 이두식 이사가 말을 이었다.

"김준우 대표를 새로운 국제 헌터 협회의 사무총장으로 임명하는 겁니다."

"...."

"...."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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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헌터 협회를 대신해,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국제 토벌 기구로 인정해주시고 김준우 대표를 사무총장으로 임명해주십시오."

"...."

"...."

이두식 이사가 다시 한번 그 말을 전했고, 동시에 격양되어 있던 장내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솔직히 김준우 대표보다 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급하게 결정할 일은...."

각국의 협회장들은 고민하는 듯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아시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아니… 최악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군요."

그러자 이두식 이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국제협회가 기어이 전 세계를 향해 야망을 드러냈고, 곧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들 겁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안 돼 있을뿐더러, 심지어는 각국의 지도자마저 잃었죠."

조용해진 회의실.

이두식 이사는 각국의 협회장을 한 명씩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김 대표가 말했듯, 이런 상황에서 토벌마저 흔들린다면 그땐 정말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러니 실력과 자격이 되는 누군가가 총지휘권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마침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우리 앞에 있군요."

"...."

"...."

"더 이상 고민하는 건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그의 말에 모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알겠습니다."

이내 의견이 모이기 시작했고, 덩달아 내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그리고 그때.

"아, 당사자의 의견을 묻지 않았군요."

이두식 이사가 잊고 있었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번 내게 향했다.

"어떱니까, 김준우 대표."

"...."

나는 입을 다문 채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굉장히 복잡해진 까닭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국제 토벌 기구로 인정하고, 나를 사무총장으로 임명한다고?

그걸 각국의 협회장들이 찬성했고?

그러니까....

'내가… 공식적으로 국제 협회의 사무총장이 된다 이거야…?'

그 순간, 머릿속에서 거의 잊고 있었던 음성이 들려왔다.

[귀하의 현 목표 달성 현황이 갱신되었습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듣는 그 음성에,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머릿속의 음성은 여전히 기계적인 투로 담담히 갱신된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히든 스킬 : 업보]

[스킬 해제 조건 : 국제 헌터 협회의 사무총장 달성]

[현재 직책 : 대한민국 민간 토벌 기업 카르마 코퍼레이션 대표]

[현재 스킬 해금률 : 100.0%]

[현재 클래스 : 절대군주]

[현재 비공식 랭크 : SSS]

[현재 비공식 랭킹 : 국내 1위, 세계 1위]

[현 시간 기준, 목표 달성 확률]

[100.0%]

[사무총장으로 위임하는 즉시 귀하는 '헌터 김준우'의 사망 직전으로 귀환합니다.]

내 화려한 커리어를 모두 잃어버린 채, 밑바닥부터 올라온 게 2년째.

드디어 목표 달성이 코앞에 놓였다.

여기서 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순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

전 세계 최초 SSS랭크.

세계 랭킹 1위.

최고의 헌터라 불렸던 그때의 김준우로.

다만....

'그럼 남은 녀석들은…?'

내가 돌아가면 지금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

'....'

사실 물어볼 것도 없다.

국제협회는 기어이 모든 통제권을 손에 쥐었고, 우린 그들에게 대항할 수단이 현재로선 거의 전무하다.

그런 상황에서 토벌 지휘권조차 잃는다면… 전 세계는 그야말로 웨슬리의 손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경제, 정치, 언론, 안보, 토벌.

정치인부터 일반 시민들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모든 행위를 통제받게 되겠지.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있는 녀석 중에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놈은 없다.

다시 말해 내가 돌아가 버리면, 남아 있는 녀석들은....

'뺑이 좀 치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대뜸 웃음이 나왔다.

이아영 본부장을 비롯해 남은 녀석들이 나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는 모습을 상상하니 꽤나 신선했던 까닭이었다.

물론 지금 돌아가든 나중에 돌아가든, 결과적으로 나와는 상관없어질 녀석들이다.

그들이 어떤 상황에 놓이든 내가 알 바는 아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선택해야 할 것은, 단순히 주변 녀석들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 따위가 아니다.

지금 내가 선택해야 하는 건, 그저....

"김준우 대표."

"...예."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무총장… 결정을 하시죠."

"...."

그저 아무것도 해결된 것 없이 돌아가는 것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가.

"어서 선택하세요."

그것뿐이다.

***

프랑스 파리, 국회의사당.

한 국가의 국정과 정책을 논의하는 곳이자, 국가 정부의 중심.

...이라고 불리는 것도 이젠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곳의 명칭은 불과 몇 분 전,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으니.

"아이고...."

웨슬리 사무총장이 널브러진 시체들 위에 털썩 앉으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곤 몇 분 전까지 국회의사당이라 불리던 그곳의 내부를 천천히 훑었다.

건물은 바닥과 천장을 가리지 않고 피칠갑이 되어 있었고, 고고한 조각상과 인테리어는 그 흔적도 남지 않은 채 박살이 난 채였다.

하지만 그 광경은 국회 바깥과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국제협회 본부에서부터 국회까지 이어진 그 길목에는 수천, 수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아주 엉망이 됐군요. 청소팀 불러서 여기 청소 좀 해야겠습니다."

그때, 웨슬리 사무총장이 상황을 확인하고 있던 직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우리가 쓸 건물인데 깨끗이 해야죠."

"알겠습니다. 바로 본부 청소팀 파견하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직원은 이내 곧바로 그곳을 벗어났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한 차례 깊게 숨을 뱉어냈다.

이것으로 계속 벼르고 있던 이사를 끝마쳤다.

한때 프랑스의 국회의사당이었던 이곳은, 이 시간부로 다른 이름을 갖게 됐다.

국제 헌터 및 던전 관리 협회.

절대 권력을 갖게 된 조직의 본부가 된 것이다.

"상황 종료됐어."

"말씀하신 대로 총리는 생포해뒀습니다."

그때, 두 여성이 그에게 다가오며 상황을 보고했다.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은 몸을 일으켜 그들 앞에 똑바로 섰다.

PB 코퍼레이션 대표이자 오랜 친구 에마.

그리고 웨슬리 사무총장의 든든한 오른팔이자 수행비서인 케이트.

그녀들의 뒤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각 부서의 총 책임자들과 팀장들.

마지막으로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의 병력이 웨슬리 사무총장을 향해 예를 갖췄다.

비로소 그의 앞에 새로이 탄생한 국제협회의 전신이 모두 모인 것이다.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인원들 앞에서 웨슬리 사무총장이 입을 열었다.

"뭐, 조금 급하게 시행한 감이 없진 않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목표를 달성했군요."

"...."

"...."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이 순간부로 관리 권한, 국제 조약, 규율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겐 전 세계를 통제할 수단과 방법이, 그리고 권한이 생겼습니다. 또한, 여기 있는 모두는 그 권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던전 통제권에 이어 보이드 제조법.

그리고 국가 단위의 지휘 시스템까지.

이 모든 것들이 손에 들어왔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진정한 의미의 권력자, 전 세계 머리 꼭대기에 선 강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때, 에마 대표가 물었다.

"우리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왔으니 카르마 코퍼레이션 놈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무엇보다 이능석과 반능석이 그놈들에게 있으니, 그걸 가공한다면 어느 정도는 대항할 거고."

"물론 당장 전쟁을 일으킬 리는 없겠지만, 연합을 구축해서 토벌 지휘 체계를 단일화할 가능성이 큽니다."

에마 대표의 첨언에 이어 케이트 비서가 거들자, 웨슬리 사무총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겠지.

지금쯤이면 전 세계 협회장이 모여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부족한 토벌 인원을 병력으로 빼는 건 불가능할 테니, 일단은 토벌에 전념하면서 대비책을 세우려고 할 것이다.

'뭐, 대비책이라고 해봤자 그동안 우리가 관리하고 있던 토벌 시스템에서 독립하는 것뿐이겠지만....'

독립 토벌이 가능하다면 그나마 본인들의 통제를 덜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지휘를 받아온 그들이 하루아침에 독립 토벌을 시행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뭐, 우선은 통제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실감시켜줄 필요가 있겠군요."

웨슬리 사무총장이 에마 대표를 바라봤다.

"클로이 팀장에게 차원석 가동하라고 해줘."

"차원석…?"

"지금부터 전 세계 출현 던전 수를 두 배로 올릴 거야."

웨슬리 사무총장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한번 어떻게 되나 보자고."

물론, 이건 맛보기에 불과했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한, 그저 작은 기믹.

당연히 이건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작전본부, 지휘 통제팀.

평소와 다르게 꽤나 어수선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던전 출현이 두 배로 늘었다고요?!"

그때, 김민주 작전 본부장이 그곳으로 들어서며 상황을 물었다.

"네, 네! 전국적으로 출현이 급증했습니다."

"도서 산간 지역도 10개 이상 출현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돼....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요?"

직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민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빌어먹을, 갑자기 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던전에 관한 연구가 완벽히 진행된 건 아니지만, 지구상에 출현하는 던전의 개수는 정해져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한 번 소멸된 던전은 차원 너머에서 다시 몬스터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가, 이내 다시 출현을 반복하는 구조.

그렇기에 던전 청소팀이라는 특수 조직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평균 출현에 소소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갑자기 전 지역이 두 배로 급증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

누군가 던전을 고의로 생성한 게 아니면.

'설마....'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치기도 잠시.

"김 본부장님!"

"민주 씨!"

하성일 본부장과 이아영 본부장 또한 다급하게 그녀를 찾았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던전 출현이 급증했다고 합니다!"

"국제협회가 관리하고 있던 토벌 체계가 무너지면서 각국 협회가 토벌을 거의 포기한 상태에요!"

설상가상으로 최악의 소식들이 연달아 전달됐다.

'빌어먹을....'

김민주는 이를 으득 씹었다.

그리고 그때.

"던전 출현이 급증했다고?"

구세주와 같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김준우 대표가 직접 지휘실을 찾은 것이다.

"서, 선생님!"

"대표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회의는요? 어떻게 됐어요?"

세 본부장이 동시에 반응했다.

김준우는 이내 회의의 결과를 간단히 축약했다.

"중앙 지휘 기구였던 국제협회가 사라졌으니, 각국 협회가 독립 토벌을 진행해야 하는데... 다들 경험이 부족한 터라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조직이 국제협회를 대신해서 전 세계 토벌 지휘권을 잡아야 한다는 안건이 나왔습니다."

그가 잠시 숨을 고르길 한 차례.

"그 기구로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선정됐습니다."

이내 그 소식을 전달했다.

"네…?"

"그, 그게 무슨...."

그와 동시에 김민주와 하성일 본부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 잠깐만요. 그럼 그 말은...."

하지만 이아영 본부장은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묻자, 김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현 시간부로 카르마 코퍼레이션이 공식 국제 토벌 기구로 인정받은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

모두가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설립 목적이자 목표를 비로소 이뤄냈으니까.

당연히 축배를 들어야 할 소식이었지만, 어째선지 이아영 본부장은 오히려 패닉에 빠진 듯 보였다.

"그럼 당신이 사무총장에...."

그리고 그녀가 어렵사리 입을 여는 순간.

"걱정 마십시오."

김준우가 곧바로 그녀의 말을 자르며 즉답했다.

"사무총장은 더 적합한 분이 맡을 테니."

"...네?"

이아영 본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리던 그 순간.

"이야, 생각보다 잘해놨네. 확실히 잘 나가긴 했나 봐."

지휘실로 한 노인이 들어섰다.

"뭐, 결국 이렇게 됐지만 말이야."

"…오셨습니까."

"이래서 젊은 놈들만 있으면 안 돼. 관록이 있어야지."

너스레를 떨며 우리에게 다가온 그는.

대한민국 토벌의 살아 있는 전설.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서 독립협회를 설립, 독자적인 토벌 체계를 정립시킨 영웅.

동시에 수십 년간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 협회장을 역임한 장본인.

그리고 비로소 현재 국제 토벌 기구,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사무총장이 된....

"이제 애송이들은 비켜."

박인범이었다.

"어른이 해결해 줄 테니까."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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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범 사무총장이 취임한 직후, 불과 하루 만에 조직 개편과 더불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우선 명칭이 변경되었다.

기존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라는 법인에서 공식적인 국제 던전 토벌 기구, WDSO(World Dungeon Suppress Organization)가 되었다.

나름 고심해서 만든 이름이 사라져 버린 건 아쉽긴 했지만, 아직 사람들의 입에는 카르마가 더욱 익숙한 듯했기에 그걸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역시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내가 대표직에서 내려왔다는 것.

뭐, 민간 기업에서 국제기구가 된 마당에 사무총장 자리를 거절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내가 갖게 된 새로운 직책은....

WDSO 대한민국 기획 본부 소속.

청소 3팀장.

'시발....'

다시 돌아와 버렸다.

일개 청소부로 시작해서 한국협회를 인수하고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세계적인 토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내가 다시 청소팀으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경우인가, 싶었지만....

'책임자로 전면에 나설 게 아니면 차라리 뒤로 빠져서 모습을 숨기는 게 나아.'

나를 대표직에서 다시 청소부로 한 큐에 꼬라박은 박인범 사무총장은, 내 면전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래가지 않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이제부터 우리는 국제협회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

그럴수록 국제협회 또한 더욱 거세게 우리를 통제하려 들겠지.

그리고 사무총장은 그 싸움의 최전선에서 우리를 이끌어야 하는 존재이며, 더불어 한국을 비롯해 모든 국가의 신임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모두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그 수많은 국가의 협회를 문제없이 지휘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내가 그 역할을 맡아왔었다.

그 과정에서 꽤나 많은 실적을 쌓았고, 또 많은 신뢰 관계를 형성했다.

그렇기에 만약 사무총장도 아닌 내가, 어정쩡한 직책으로 박인범 사무총장과 함께 일을 한다면 자연스레 그의 영향력은 떨어질 것이고....

'지휘 체계가 엉망이 되겠지.'

그렇기에 전면에 나서지 않을 거면 차라리 뒤로 빠지는 게 낫다는 것이다.

거기까지 이해한 나는, 박인범 사무총장에게 무엇을 하면 되냐고 물었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청소부가 청소해야지, 뭘 해?'

그 단호한 대답에, 나는 기겁을 하며 정말 청소만 해야 하냐고 되물었고.

'예전에는 자네가 뭐 청소부라고 청소만 했나? 그냥 하던 대로만 해.'

그는 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뭐, 그 말을 굳이 해석하자면... 직책은 되는 대로 갖다 붙인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알아서 움직이라는 소리겠다.

'협회장 자리에서 밀어냈다고 복수하는 건가?'

하여간 노인네, 속은 좁아 가지고.

나는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듯, 결과적으로 나는 사무총장 자리를 거절했다.

그리고 그 대신 박인범 전 협회장을 추천했다.

경험과 관록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였지만, 사실 반은 대충 둘러댄 거나 다름없다.

그저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나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할 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전생에서도 국제협회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번에도 그들 마음대로 날뛰게 내버려둔 채 돌아가는 건, 다른 걸 떠나서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뭐... 일을 이렇게 키워놓고 나 혼자 내빼는 것도 모양 빠지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조직 개편도 됐으니, 이제는 정말 앞으로가 중요하다.

사실 내가 박인범 사무총장을 추천한 이유 중 나머지 반은 진심이었다.

이전에는 국제협회와의 싸움이라고 해봤자, 각자의 세력과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보이지 않는 눈치 싸움과 작은 마찰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 전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규칙과 조약의 의미가 사라진 지금, 전 세계는 혼돈과 혼란에 빠져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진짜 혼돈을 겪고 살아남은 경험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박인범 사무총장만 한 사람이 없다.

50년 전 그는 아무것도 없이 라면 몇 개로 던전을 누비며, 살면 다행이고 죽으면 끝이었던 시절을 겪어온 장본인이다.

그리고 지금도 다를 것 없는 상황이리라.

자칫하면 빼앗기고,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

이제부턴 행동 하나하나가 위험해질 것이다.

황야를 지나온 노장의 경험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

벌컥―.

"...!"

카르마의 새로운 수장, 박인범 사무총장이 내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순간 당황하자, 그가 피식 웃음을 뱉었다.

"뭘 그리 놀라나. 죄지었어?"

"그렇게 갑자기 들어오시면 누구라도 놀랍니다. 노크라도 좀 하시지 그러십니까."

"내 평생 남의 문을 두드려 본 적이 없다."

"...."

...자랑이다.

"그래서, 어쩐 일이십니까?"

"흐음."

그가 신음하길 한 차례, 내 앞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국제협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더군. 현재 프랑스 정부를 장악하고, 본인들의 본부 아래 국가 체제를 손에 넣은 상황이야."

"...."

물론 나 또한 전해 들은 소식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세상이 두 쪽이 됐어."

"국제협회의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으로 나뉘었죠."

"그래."

그가 퍽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 연합 전체는 사실상 국제협회 소속이라고 봐야 해. 뭐… 앞으로는 더 세력을 넓혀가겠지."

"이미 나라 하나를 집어삼켰으니 두 번은 어렵지도 않겠죠."

"던전을 비롯해 정치적, 경제적으로 압박한다면 버틸 도리가 없지. 지금이야 아메리카, 아시아 쪽은 우리한테 붙어 있다고 해도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일이고."

"그렇겠죠."

"당연히 수익성을 내세워선 오래가지 못할 거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이제 기업이 아니야. 그러니 앞으로는 토벌 기구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할 거야."

"다시 이전의 협회로 돌아가겠군요."

"그래. 뭐… 이렇게까지 세워놓은 자네한테는 좀 아쉽게 됐지만."

"뭐, 선택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처음부터 돈이 목적도 아니었고.

이런 상황에 수익을 따지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

"그래서...."

그때, 박인범 사무총장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뱅크 아이템을 파괴하는 거로 그놈들한테 대항할 수 있겠나?"

"예."

내가 즉답했다.

"현재 국제협회의 권력은 뱅크 아이템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것들이 없다면 통제력을 잃게 될 겁니다."

"하지만 뱅크 아이템을 파괴하려면 에덴이 필요하다면서?"

"예. 뭐… 가설이지만요."

"그래서, 에덴은 어떻게 찾을 생각인데? 저번에도 미국에서 그 난리를 피워놓고도 못 찾았잖나."

"뭐...."

잠시 뜸을 들이길 한 차례.

"그게 이제부터 제가 할 일이겠죠."

"...?"

"저한테 늘 하던 대로 하라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슬쩍 미소를 지었지만, 박인범 사무총장은 어딘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아직 마음대로 움직이기엔 상황이 좋지 않아. 국가 관계도 그렇고, 자금도 그렇고."

"뭐,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음?"

내가 말을 이었다.

"그동안 여기저기 빚을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베트남, 중앙아프리카, 일본, 홍콩, 미국 등등. 그들이 도와줄 겁니다."

지금 상황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들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우리를 지원해줄 것이다.

무엇보다 자금 수급이 막혔다고 해도, 베트남 지부의 허브가 있지 않은가.

토벌 수익 외에 유일하게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또한, 홍콩 지부의 인원과 일본 지부의 장비.

미국 지부의 최첨단 탐지 시스템까지.

그들이 있는 한, 내 활동에 제한이 걸릴 일은 없다.

"뭐, 듣고 보니 그렇구만...."

이내 박인범 사무총장도 고개를 끄덕이길 한 차례.

"그래, 그럼… 일들 해보자고."

국제 토벌 기구로서의 첫 번째 업무가 시작되었다.

***

베트남, 하노이.

현 WDSO 베트남 지부.

"전부 무기 챙겨서 집합해!!"

"1급 비상 상태다!!"

"작전팀 전부 끌어모아!"

전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첫 번째 해외 지부인 그곳에 때아닌 비상이 걸렸다.

"환영 인사가 꽤 성대하군요."

다름 아닌, 국제 헌터 및 던전 관리 협회의 수장.

웨슬리 사무총장이 그곳을 찾은 것이다.

"뭐야, 혼자야?!"

"방심하지 마!"

"움직이면 바로 공격해!"

이윽고 지부의 모든 인원이 공격태세를 갖췄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저 씨익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후인 지부장님 안에 계시나요?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두 손을 들며 말했다.

"개소리하지 마!"

"설마 여길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놓고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디 한 발짝이라도 움직여 봐!"

하지만 베트남 지부의 헌터들은 이미 상당히 격양되어 있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공격을 쏟아부을 기세였다.

그 모습에 웨슬리 사무총장의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

이내 그가 두 손을 다시 내려놓는 그 순간.

"다들 무기 내려놓고 빠져."

모습을 드러낸 후인 지부장이 서둘러 작전팀을 제지했다.

"지, 지부장님!"

"하지만 이 새끼…!"

"우리가 떼로 덤벼도 손가락 하나 못 건드려. 괜한 객기 부리지 말고 물러나."

단호한 명령.

평소답지 않은 그의 호령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눈치를 보면서 천천히 무기를 거두었다.

그러자 웨슬리 사무총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똑똑하시군요."

"…과찬이십니다."

후인 지부장은 그를 지그시 노려보며 물었다.

"그래서, 전 세계적인 반군 세력의 수장님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하하하. 아직 감이 잘 안 오시나 보군요. 반군은 정부에 저항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정부는 권력을 가진 이들이고요. 그렇게 따지면 반군 세력은 제가 아니라 당신들이죠."

"...."

자신감이 드러나는 말투와 눈빛.

홀로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음에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자세였다.

웨슬리 사무총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뭐, 사실 다른 게 아니라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안…?"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탈퇴하고 국제협회로 들어오십시오."

"하…!"

그 순간, 후인 지부장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개소리를 하려나 했는데...."

"잘 생각하세요. 저는 지금 권력층에 붙을 기회를 주는 겁니다. 아무 조건도 없이요. 어차피 얼마 가지 못할 거라는 거, 당신들도 알고 있는...."

"필요 없으니까 꺼져."

후인 지부장이 그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웨슬리 사무총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의리를 지키겠다, 이겁니까? 그런 같잖은 것 때문에 포기할 만한 일이 아닐 텐데요?"

"도움을 요청했을 땐 눈길조차 안 주더니, 이제 와서 당신들 편에 서라고?"

이내 후인 지부장이 그를 죽일 듯 노려봤다.

"유령 협회 밑에서 목숨 내걸고 하루하루 버틸 때, 우릴 살려준 건 김준우 대표였어. 권력이니 뭐니 같잖은 혓바닥으로 이간질할 생각이면 번지수 잘못 찾았다."

"…역시나 신뢰가 두텁군요."

그의 단호함에 웨슬리 사무총장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알아들었으면 당장 꺼...."

"여보세요, 클로이 팀장?"

웨슬리 사무총장은 핸드폰을 꺼내 들어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렸다.

"베트남 전 지역, 던전 출현 봉쇄해주세요."

"...!"

후인 지부장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재앙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 그리고, 주변국들의 부산물 유통 관세도 세 배로 올리세요. 이후에 베트남으로 들어오는 부산물이 끊기면... 곧바로 허브 매각 준비합시다."

"그, 그게 무슨...."

웨슬리 사무총장의 그 지시에, 후인 지부장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던전 출현 봉쇄.

허브 매각.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 두 가지가 실제로 일어나면 베트남 지부는....

아니, 베트남은 끝이다.

"생각이 바뀌시면 다시 연락 주세요, 후인 지부장님."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 말을 흘리며 등을 돌렸다.

후인 지부장은 천천히 멀어지는 그의 등을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기어이…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고립시키고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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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방금 막 청소 작업이 마무리된 어느 던전 앞.

작업을 마치고 던전을 빠져나온 한상혁은 곧바로 방독면을 벗어젖히며 숨을 몰아쉬었다.

옆에서 같은 동작을 하고 있는 문소연을 향해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진짜 고맙다. 네 일도 바쁠 텐데 현장 일까지 도와주고...."

"아니에요. 상황이 상황이잖아요. 인원 부족한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책상에만 앉아 있겠어요."

문소연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 천하의 한상혁이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동기라지만 문소연은 엄연히 청소과장이었고, 본인은 청소팀장이었으니.

청소과장은 청소팀의 전반적인 일정 관리와 작전팀과의 일정 조율을 담당한다.

당연히 그런 직책을 가진 그녀가 직접 작업에 나올 만한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한상혁은 그녀에게 작업을 도와달라고 먼저 요청했다. 물론 그로서도 꽤나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최근 갑작스레 출현 던전 수가 두 배로 오르지 않았던가.

작전팀 대부분이 해외 파견 중이라 토벌 인원이 부족하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김민주와 한유빈 그리고 민간 길드가 어찌어찌 대응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토벌은 둘째치고, 던전이 두 배로 늘어났다는 건 그만큼 청소해야 할 던전도 두 배란 소리였다.

그동안 청소팀은 거의 증원이 없다시피 했으니 기존 인원만으로는 꽤나 벅찰 수밖에.

"유빈 씨가 어떻게든 인원을 보충해주겠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만 힘내 봐요."

"스읍, 글쎄...."

"뭐야, 친누나를 좀 믿어보는 게 어때요."

"아니, 믿고 자시고… 그쪽도 바쁠 텐데, 우리까지 어떻게 신경 쓰겠어."

한상혁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소팀은 기획 본부 소속이었으니, 본인의 친누나인 한유빈이 책임자였지만.

사실 그녀도 지금 토벌 투입으로 정신이 없을 게 뻔했다.

물론 그 인간이 다른 건 좀 빌어먹을지 몰라도, 최소한 빈말을 하진 않는다. 분명히 어떻게든 보충을 해주긴 해줄 것이다.

다만,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것뿐이지.

"에휴, 시벌. 대체 어쩌다가...."

한상혁이 이 상황이 퍽 답답한지 욕지거리를 했다.

그러자 문소연이 애써 밝게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 맞다. 우리 회사 이름 바뀌었다는 거 들었어요?"

"당연하지. WD...."

"WDSO. 국제 던전 토벌 기구요."

"쯧, 난 원래 이름이 더 좋은데."

"사실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국제기구가 됐다는 게 중요하지."

그녀의 말에 한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인범이 사무총장 자리에 취임한 직후.

아직 공식적인 성명이 발표되지 않았음에도, 내부 개편에 대한 소식은 빠르게 전 직원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자세한 것까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청소부 파견 업체에서 기어이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것.

"진짜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이제 우리도 엄연히 국제기구 소속이네요."

"그러니까 말이야! 김준우, 이 새끼 진짜 대단하다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전 세계가 어떤 상황인지, 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듣자 하니 국제협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던데...."

한상혁이 중얼거리자, 문소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준우 씨가 있잖아요. 지금쯤이면 벌써 국제협회를 박살 낼 계획을 세워두지 않았겠어요?"

"...하긴, 그 자식이 있는데 큰일이야 나겠어. 또 이전처럼 제일 앞에서 다 박살 내고 다니겠지."

"미안한데...."

그리고, 그때.

그들의 대화 도중에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건 힘들 것 같군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한상혁과 문소연이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김준우가 서 있었다.

"주, 준우 씨?!"

"네가 여기 왜 있어?! 일 안 해?!"

하지만 그들은 반가움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선 듯했다.

그도 그럴 게 김준우가 현장에 나올 이유도, 여유도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니까.

"일이라뇨. 이게 제 일입니다."

그런데 귀를 의심케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청소팀으로 좌천당했거든요."

"...?"

"...?"

이해할 수 없는 소식에 두 사람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대체 뭔 짓을 한 거냐…?"

침묵을 깨고 한상혁이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

"뭐, 이런저런 사정이 좀 있어서... 밉보인 건 아니니까 걱정 마시고요."

"...."

"...."

걱정 말라니.

카르마 코퍼레이션 창립과 더불어 여기까지 올려놓은 장본인이 좌천당했다는데,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는가.

그것도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럼… 진짜 다시 청소하는 거야?"

"그렇긴 합니다만... 이전이랑은 조금 다릅니다."

"네?"

아리송한 대답에 문소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랑 같이 일할 새 청소팀을 꾸릴 생각입니다. 여러 팀에서 지원을 받고 있는 중인데… 두 분한테도 제안을 드리고 싶군요."

그가 말하자 서로 눈치를 보던 끝에, 문소연이 넌지시 물었다.

"그게… 무슨 팀인데요?"

"음, 굳이 설명하자면 국제 던전… 관리 업무 정도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 말에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말씀드렸다시피 기본적으로는 청소팀입니다. 다만, 그 외에도 던전과 관련된 업무를 모두 맡는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국내가 아니라 국외를 대상으로 활동할 거고요."

짤막한 설명과 함께 그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같이 가실 생각 있으십니까?"

"...."

"...."

이내 두 사람이 서로 눈치를 살피길 잠시.

"그래."

"좋아요."

누구랄 것 없이 동시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가 말한 게 무슨 팀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완전히 이해한 게 아니다.

그저 이전의 청소 3팀이 다시 뭉칠 수 있다는 게, 보다 큰 이유였다.

"자세한 내용은 추후 서류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출국은 준비되는 대로 연락드릴 테니, 일단 계속 작업해 주시면...."

김준우가 말을 하던 그때,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아, 예."

이내 그가 전화를 받은 그 순간.

"...뭐라고요?"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확실한 겁니까?!"

무슨 대답을 들은 건지, 그가 이를 으득 씹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죠."

그렇게 전화를 끊은 그의 표정은 굉장히 심각해 보였다.

문소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무, 무슨 일이에요…?"

"베트남 지부가… 국제협회로 넘어갔답니다."

대답하는 김준우의 눈빛에는 분노가 그득그득 담겨있었다.

***

"대체 어떻게 우리를 배신할 수 있습니까!"

박인범 사무총장 아래, 각 본부장이 모두 모인 자리.

하성일 해외사업본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밑바닥에 떨어져 있던 협회를 세계 10위권 협회로 만들어준 게 누군데! 어떻게 이제 와서…!"

"진정하세요."

하성일 본부장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자, 이아영 지원본부장이 평소답지 않은 진지한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베트남 지부가 설마 아무 이유 없이 국제협회에 붙었겠어요?"

"맞아요. 분명 뭔가 빌미를 잡고 협박을 했겠지."

이아영 본부장의 말에 한유빈 또한 동조했다.

하지만 김민주는 하성일 본부장의 말에 힘을 실었다.

"이유가 어쨌든 간에 돌아선 건 변함이 없어요. 심지어 다른 데도 아니고 베트남 지부에요. 허브까지 통째로 넘어간 이상, 우리한테 너무 큰 출혈인데...."

"...."

"...."

모두가 그 의견에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전처럼 수익성을 기대하지 못하는 지금으로선 베트남 지부의 허브는 그들의 유일한 자금줄이었다.

그런 허브가 지부와 함께 국제협회로 넘어갔다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이내 이아영 본부장이 나를 향해 물었다.

"설득이라도 해보는 게 어때요? 지금이라도 손을 쓴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 말에 줄곧 잠자코 있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돌아선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그냥 이대로 포기하자고요…?"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을 아꼈다.

그러자 하성일 본부장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포기할 땐 하더라도, 본보기는 보여줘야 합니다. 아무런 대처 없이 넘어가면 다른 지부들 또한 언제 등을 돌릴지 모릅니다."

"...맞는 말이군요. 다른 지부는 괜찮은 겁니까? 뭐, 베트남 지부 소식에 같이 등을 돌렸다든지...."

"아직 그런 움직임은 없습니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소식을 접한 다른 지부까지 덩달아 등을 돌린다면, 그땐 정말 최악의 상황이 될 테니까.

"뭐… 일단 본보기를 보여주든 아니면 다시 설득을 해보든, 어찌 됐건 여기선 해결이 안 됩니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끝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직접 지부로 가보죠."

"…괜찮으시겠어요?"

그러자 김민주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젠 국제협회로 넘어간 곳이에요. 안 그래도 주시하고 있을 텐데, 선생님이 직접 가셨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

"그럴까 봐 직급도 낮춘 거잖아. 난 이제 대표도 아니고 일개 청소부일 뿐인데 큰일이야 있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고 있자니, 상석에서 우리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박인범 사무총장이 드디어 입을 뗐다.

"신 청소 3팀의 첫 업무가 되겠군."

"예."

내가 대답하자 그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물었다.

"그래도 전투 인원이라도 좀 데려가는 게 어떠냐. 애들 말대로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정말 싸우자는 소리잖습니까. 오히려 우리끼리 가는 게 더 안전할 겁니다."

"쯧, 불안해서 그러지 인마."

"정 그렇게 걱정되시면...."

나는 본부장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끝에.

"이아영 본부장님이라도 데려가겠습니다."

"...저, 저요?"

이아영 본부장이 자신을 가리키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저, 저도 비전투 인원인데요? 차라리 민주 씨나 유빈 씨를 데려가는 게...."

"저 사람들을 데려가면 토벌은 누가 합니까. 안 그래도 인원 부족해서 간당간당한대. 무엇보다 한유빈 씨는...."

나는 순간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녀를 기각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그녀가 나를 도와주겠다고 선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녀의 성격상 또다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앞뒤 없이 덤벼들 위험이 있었다.

몇 번이나 죽을 뻔했던 그녀가 이번에도 또 난리를 피운다면, 이번에야말로 내 성실한 일꾼 하나를 잃게 되겠지.

하지만 그런 이유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로 말할 순 없었기에.

"너무 폭력적이어서 안 됩니다."

"...."

서둘러 다른 이유를 둘러댔다.

물론 당사자는 뜬금없이 한 대 얻어맞은 덕에 벙찐 표정이 됐지만.

"아니면 뭐, 저랑 가기 싫으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그녀가 말끝을 흐리기도 잠시.

"에휴, 알았어요. 같이 가요."

피식 실소를 뱉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결정이 나자 박인범 사무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영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괜찮겠지. 암튼 가서 일 생기면 바로 연락 주고. 만약 그러지도 못할 만큼 위험한 상황이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 그조차 모르겠다는 표정.

"모르겠다, 시벌. 그땐 그냥 자네가 알아서 해."

"...그러겠습니다."

"아, 그리고 거기서 너무 시간 오래 끌지 마. 알고 있지? 자네 진짜 업무가 뭔지는."

"물론입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곤 이아영 본부장을 향해 말했다.

"그럼 곧바로 팀원들 대기시켜주시고… 출국 준비하시죠."

"알았어요."

지시를 받은 그녀는 곧바로 본인의 역할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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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

대한민국 이능차원관리 협회의 첫 해외지부이자,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자금줄.

이곳을 직접 찾는 건 인수 이후 처음이었다.

"어이구, 후덥지근하구먼!"

"그러게요. 비행기는 추웠는데."

"근데 이 날씨면 사체도 훨씬 빨리 부패할 거 같은데... 얘네들은 어떻게 작업하려나."

청소 3팀의 원년 멤버.

박근태와 문소연 그리고 한상혁이 공항을 빠져나오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 부패 속도가 빠르면 그만큼 작업 속도도 빨라야 할 텐데.... 장비를 좋은 걸 쓰나?"

"투입 인원이 많지 않을까요? 우리는 5명이 가장 효율이 높지만, 이런 환경이라면 7~8명은 돼야 할 거 같네요."

"에이, 과장님 감 다 죽었네. 차원형 던전이 아니고서야 그 정도 인원은 오히려 방해된다니까? 아마 박 부장님 말대로 좋은 장비를 쓰는 게...."

얼씨구.

누가 청소팀 아니랄까 봐....

'도착하자마자 청소 이야기뿐이군.'

자기들끼리 신명 나게 토론을 이어가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때.

"연락하고 온 게 아니라서 지부까지는 직접 이동해야 해요. 뭐… 미리 말했어도 마중 나오진 않았겠지만."

동행한 이아영 본부장이 말했다.

"그리고 당연한 거긴 한데, 국제협회에 붙은 이후로 우리 쪽이랑은 완전히 연락을 끊었어요. 이유라도 들어보고 싶은데 연락이 안 되니 우리로선 알 도리가 없고요."

"서운하군요."

"누가 아니래요."

이아영 본부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 봤자 한 달 정도 머물며 본 게 다지만, 후인 지부장이 본인의 잇속을 위해 우리를 배신하고 국제협회에 붙을 만한 인물은 아니다.

과거, 유령 협회 밑에서 아무런 지원도 없이 목숨을 내걸며 토벌을 이어갔던 사람이다.

그것도 오직 본인의 나라의 안전을 위해서.

물론 자리가 사람을 바꾼다고, 이제 와서 더 높은 자리가 욕심났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으면 진작 돌아섰겠지.'

여태까지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닐 테고.

"그런데 말이에요...."

그때, 이아영 본부장이 청소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왜 굳이 팀으로 온 거예요?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는 거면 당신이랑 나만 와도 되지 않나?"

"청소부들이 뭘 할 수 있다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냐, 이겁니까?"

"누, 누가 그렇대요?! 그냥 역할이 좀 안 맞지 않냐는 거죠! 무슨 말을 그렇게 한대."

기겁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 반응에 나는 피식 미소를 흘렸다.

"뭐, 해본 소립니다."

"...."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본다.

"그래서, 진짜로 청소팀을 데려온 이유가 뭐예요?"

"이제 저는 조직의 대표도 아니고, 당신처럼 책임자도 아닙니다. 일개 청소부가 지부장 만나서 이것저것 책임을 묻는 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런 게 의미가 있긴 해요? 이 바닥에선 당신 이름이 곧 직급인데."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청소팀장으로 내려왔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직급일 뿐, 여태까지 내가 해온 게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중요한 건 직급이 아니라, 내가 김준우라는 것이다.

당연히 내가 청소팀장이라고 해서 못 만날 것도 아니고, 책임을 못 물을 것도 아니다.

다만....

"제가 이전처럼 행동하다간 자칫하면 조직의 위계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

그 한마디에 이아영 본부장은 곧바로 납득한 듯했다.

"우리끼리 있는 회사라면 사실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이제 엄연히 국제기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다른 것도 아니고, 토벌 기구로 인정받았죠."

모든 토벌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다.

위계가 흔들리면 지휘 체계가 흔들린다.

그리고 그건 곧 토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겠지.

다시 말해, 우리의 위계는 곧 사람의 목숨과 직결된다는 의미이다.

"각국의 토벌을 지휘하고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선, 그리고 국제협회에 대항할 힘을 기르기 위해선, 무엇보다 조직의 위계가 지켜져야 합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러니까 전 청소팀장으로서 그저 베트남 지부에 청소지원을 나온 것뿐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책임을 묻기 위해 온 게 아니라요."

"표면적으로는 그렇다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표정이 어째 떨떠름한데."

"다른 건 아니고, 당신이 위계 이야기를 하니까 좀 새삼스러워서요."

그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위계를 무너뜨리던 사람이 이젠 위계를 지키려고 하고 있잖아요."

"무슨 소립니까? 전 그때도 딱히 위계를 무너뜨린 건 아닙니다."

"...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초에 나는 위계질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곳에서의 위계는 필수적이다.

다른 조직은 몰라도, 최소한 협회는 그래야 한다.

부하들을 흐트러짐 없이 통솔할 수 있어야 목숨이 오가는 던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당연히 어떤 상황이 닥쳐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겠지.

작전팀장이 조직 내 실세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장 최고 책임자인 그들이 대부분의 권한과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당연히 팀원들은 그 권한에 반기를 들 수 없어야 한다.

목이 날아갈 수도 있거든.

하지만 이 위계질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저는 위계를 무너뜨린 게 아니라… 그냥 능력도, 실력도 없는 머저리들을 쳐낸 겁니다."

권한을 가지고 있는 책임자가 그만한 자격이 되는 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격도 없는 놈이 권한만 내세우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면....

그건 위계가 아니다.

그냥 자리에 심취한 병신일 뿐이지.

"뭐... 맞는 말이네요."

이아영 본부장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우린 그냥 우리 일을 하러 온 겁니다. 청소부로서."

그 말과 함께 택시에 탔다.

도로를 달리며 풍경을 바라봤다.

반듯한 건물들과 표정에서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사람들.

2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도시의 모습에 퍽 감회가 새로웠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택시 기사의 목소리에 눈을 뜨자, 어두컴컴한 하늘이 먼저 보였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

"...."

머지않아 택시 안에 있는 모두가 말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게, 그곳은 베트남 지부가 아닌… 사방이 캄캄한 숲속이었으니까.

"뭐, 뭐야. 여기가 어디야?"

"제대로 온 거 맞아요?"

"지부로 가자고 한 거 아니에요? 왜 이런 곳으로...."

"자, 잠깐… 저기 누가 있는데?"

그리고 그 순간.

복면을 쓴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숲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우리가 탄 택시를 포위했다.

"뭐, 뭐여...."

"이게 지금 무슨…?"

모두가 크게 당황했지만, 나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거 어째....'

처음 왔을 때랑 상황이 비슷한데?

***

국제 헌터 협회, 베트남 지부.

"지부장님."

지부장실로 응우옌 작전 본부장이 들어섰다.

"전 직원들 대상으로 인사 개편 통보 완료했습니다. 총 11개 작전팀 포함, 지원팀, 통제팀. 그리고 모두 내일부터 국제협회... 아니, 본부 인원들로 재편성할 예정입니다."

"그래."

"그리고 전문 경영인도 파견하겠다고 합니다."

"...."

그 말은 곧, 지부의 책임자 또한 기어이 국제협회 인사로 바뀐다는 의미였지만, 그럼에도 후인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응우옌 본부장을 등진 채 연신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후인이 이내 그를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응우옌이 아닌 바닥을 향해 있었다.

차마 두 눈 똑바로 뜬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볼 면목이 없던 까닭이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어차피 이 바닥에 동료가 어디 있어. 다 이득 따라, 상황 따라 움직이는 거지. 안 그래?"

"그건 그렇습니다만...."

응우옌 본부장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길 잠시.

"지부장님이 괜찮으신 거냐고요."

"...."

후인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응우옌은 후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독립협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하루하루 목숨을 버리던 시절을 같이 지내온 사이가 아닌가.

그는 누구보다 올곧은 남자다.

그런 남자가 은혜를 입은 상대에게 등을 돌린 이 상황이 괜찮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후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안 괜찮으면 어쩌겠냐.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솔직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았을 것 같아."

"...예."

응우옌 본부장이 힘없이 대답했다.

그것을 끝으로 두 남자는 아무 말도 없이 정적을 이어갔다.

그렇게 사무실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던 그때.

똑똑―.

누군가 사무실을 두드리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저, 지부장님. 방금 공항 입국심사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지원팀 소속의 한 직원이 퍽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김준우 씨가 입국했다고 합니다."

"...!"

"...!"

그와 동시에 두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이전 같았으면 버선발로 뛰쳐나가 맞이할 반가운 손님이었겠지만, 지금으로선 저승사자나 다름이 없었다.

지금 그가 베트남을 방문했다는 건, 결코 좋은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어, 어떻게 합니까. 분명 책임을 물을 텐데....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

"본부에 연락해서 병력 파견이라도 요청해보심이...."

"그건… 그냥 싸우자는 거잖아."

"하지만 방법이 없잖습니까."

응우옌 본부장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됐다.

하지만 후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 은혜를 입고도 뒤통수를 쳤는데, 기어이 그에게 칼까지 들어 밀어야 한다고?

그게 과연 맞는 건가?

"...."

후인은 입을 다문 채 한참을 고민했다.

"작전팀에 아직 우리 직원들 남아 있지?"

이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예, 뭐… 인사 개편은 내일이니까...."

"유령 협회 때부터 같이 일했던 놈들 몇 명만 추려서 대기시켜놔."

"네?"

"우리가 직접 마중 나가자고."

후인은 먼저 사무실을 벗어났다.

***

"김 대표님."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속.

우리를 포위한 괴한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후인 지부장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인 지부장님."

나는 그를 발견하곤 택시에서 내리며 인사를 건넸다.

"예,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글쎄요. 국제기구가 되면서 청소팀으로 좌천당한 것 빼고는 그럭저럭 지낼만합니다."

"...."

그의 표정이 퍽 굳었다.

"그나저나 환대가 여전히 변함없으십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내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를 또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뭡니까. 책임을 묻기 전에 처리하려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그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게는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선 무척이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알고 계시니 다행이군요. 난 또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계신 줄 알았는데."

대놓고 비꼬았지만, 후인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결국, 답답한 마음에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후인이 쓴웃음을 짓길 한 차례.

"며칠 전에… 웨슬리 사무총장이 직접 지부를 찾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국제협회에 붙으라고 하더군요. 물론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만.... 그랬더니 베트남 전 지역의 던전 출현을 중지시키겠다고 했습니다."

"...!"

"그뿐만 아니라, 주변국에 압박을 넣어서 허브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고요."

그렇군.

"아시다시피 우리 베트남은 아직 토벌 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기존 산업과 기업들이 유령 협회 시절에 거의 다 무너져 내렸으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물론 조금씩 다른 산업도 시작하고 있고 여러 기업에 지원도 하고 있지만, 만약 지금 당장 토벌이 막혀버린다면 모두 파산하게 될 겁니다."

그가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웨슬리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변명으로 들리시겠지만, 저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뭐, 사실 이럴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국가 전체의 토벌 산업을 가지고 협박을 했을 줄이야.

'그놈들이 통제권을 쥐었다는 게 실감이 좀 나네....'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

"그래서 정말 염치없고 죄송한 말씀인 건 알지만...."

이내 후인 지부장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퍽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희를 그냥 내버려 두시면 안 되겠습니까?"

배신해놓고 못 본 척해달라는,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소리.

동시에 벼랑 끝에 내몰린 채 선택을 강요받은 자의 절규.

그 딜레마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던 끝에.

"죄송하지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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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하노이 인근, 어딘지 모를 깊은 숲속.

해가 완전히 저물어 주위가 어둑해졌다.

자신들을 내버려달라는 후인 지부장의 절박한 요청에 나는 이내 사과로 운을 띄웠다.

"죄송하지만....'

그러자 후인 지부장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지는 게 보였다.

동행한 응우옌 작전 본부장을 비롯한 다른 직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정은 이해하지만, 못 본 척 넘어가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른 지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요."

"...."

"...."

단호한 내 대답에 모두 침묵했다.

하지만 후인 지부장은 포기하지 않고 나를 설득했다.

"물론 위약금이라면 드릴 수 있습니다. 기타 추가적인 보상 또한 충분히 지급해드릴...."

"그런 걸로 되려나 모르겠군요. 허브 운영은 지부에 맡겼지만, 실질적인 소유권은 저희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걸 통째로 국제협회에 넘겼는데, 고작 위약금 몇 푼 받고 없었던 일로 하기엔 수지가 맞지 않죠."

"...."

잠시 침묵하던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건가요?"

"글쎄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군요."

"...예?"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제 대표도 아니고 지부 관리 책임자도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권한도 없죠. 이 건에 대해선 사무총장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후인 지부장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내게 있어 직급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당신 말씀은... 이 자리에서 책임을 묻지 않으시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왜 굳이 여기까지 직접 오신 건지...."

그가 말끝을 흐렸고,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청소 지원 계약 건으로 온 겁니다."

"예…?"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이번에 청소팀으로 발령 나면서 국제 던전 관리 업무를 같이 맡게 됐습니다. 그래서 일단 저희 소속 지부들 대상으로 청소 지원을 나온 겁니다."

"고작 그걸로 직접 방문하셨다고요? 저흰 이제 카르마… 아니, WDSO 소속이 아니잖습니까."

"뭐, 그 정도야 첫 개시 혜택인 셈 치죠."

"하지만 저희도 청소 지원은 딱히 필요하지 않은...."

"후인 지부장님."

내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네.

"저는 베트남 지부의 문제를 공식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예…? 뭐, 뭐… 그건 방금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건 이해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공식적'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겁니다."

"...!"

그 순간, 후인 지부장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제 막 국제기구로 인정받은 이 상황에, 청소팀장인 제가 권한도 없는 일을 해결해주겠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요."

"...."

"그러니 여기서 확실히 대답해주셔야 합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부장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이대로 국제협회에 잡아먹히실 겁니까, 아니면 지부장님 걸 되찾아 오시겠습니까?"

"...."

후인 지부장은 대답 대신 옆에 있던 응우옌 작전 본부장과 직원들을 한 명씩 훑어보았다.

"저흰 여태까지 힘을 가진 이들에게 계속 휘둘리기만 했습니다."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지부로 있었던 이 2년 동안은 저희 스스로 주권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모두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고, 당연히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할 필요도 없었지요."

"...."

"그러니… 또다시 누군가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군요."

"그 말씀은?"

"청소 지원…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기다렸던 대답에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얼마든지."

그에게 악수를 건넸다.

***

"베트남 지부가 국제협회에 붙었다고?"

국제 던전 토벌 기구, WDSO 일본 도쿄 지부.

베트남 지부의 소식은 다른 지부에도 빠르게 퍼져 나갔고, 이내 하라무라 지부장에게까지 전달되었다.

"대체 왜? 베트남 지부면 한국과 신뢰 관계가 꽤 두터울 텐데?"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허브까지 통째로 넘어갔다는 걸 보면 작정하고 등을 돌린 것 같습니다."

지원팀 소속의 히나 보좌관이 대답하자, 하라무라 지부장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대체 이게 뭔....'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찬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본인도 그렇지만, 베트남 지부는 김준우에게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회생 불가능한 수준의 협회를 다시 일으켜준 것도 모자라, 나라 전체를 먹여 살리지 않았던가.

그런 지부가 이제 와서 김준우를 배신했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야."

하라무라 지부장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유라뇨...."

"이전에 미팅에서 후인 지부장을 몇 번 만나봤는데, 돈이나 권력 때문에 도의를 저버릴 사람은 아니었어."

"태어날 때부터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지부장 자리에 있다 보니 더 높은 곳에 욕심이 났던 게 아니겠습니까."

"글쎄다. 단순히 김준우를 배신할 생각이었으면 그동안 충분히 기회가 있었을 텐데?"

"...."

하라무라 지부장의 말에 히나 보좌관은 잠시 대답을 아꼈다.

그의 말에서 반박할 만한 점을 찾을 수가 없던 까닭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올곧은 사람조차 김준우를 배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겠지."

"그럼, 국제협회에서 무슨 수작이라도?"

"그러지 않았겠냐. 다른 건 몰라도 허브는 욕심이 날만 하잖아. 그게 아니면...."

하라무라 지부장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일부러 한국 본부를 고립시키려고 하는 걸 수도 있고."

"...."

그러자 히나 보좌관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국제협회라고 해도… 굳이 그렇게까지 할까요."

"자국을 상대로 쿠데타도 감행한 놈들이야. 그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지."

"...그럼, 언젠간 저희 지부에도 손을 뻗을 수 있겠군요."

"우리뿐만이면 다행이지."

하라무라 지부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른 지부들에도 연락해놔. 국제협회에 약점 잡힐 만한 건 모조리 처리해두라고. 그리고… 우리도 준비를 해두자고."

"준비라면…?"

"그놈들이 우리 쪽에 물고 늘어질 만한 게 뭐가 있지?"

그가 묻자, 히나 보좌관이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베트남 지부의 허브를 통째로 가져갔다는 걸 보면… 저희 쪽에선 하라무라 공방의 간판을 노리지 않을까요?"

"음, 확실히 그럴 확률이 높겠네."

"하지만 그렇다면 저희도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만약 국제협회가 하라무라 공방을 빌미로 협박이라도 한다면...."

"흐음...."

하라무라 지부장이 작게 신음했다.

만약 하라무라 공방과 일본 지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확실히 그건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지금이야 본인이 지부장으로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일 뿐이다.

더 어울리는 이가 나타나면 언제든 자리를 물려줄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하라무라 공방은 다르다.

공방의 대표는 아직 하라무라 자신이며, 몇 대를 이어온 가업인 만큼 앞으로도 본인이 책임지고 이어가야 할 유산이니까.

언젠간 물러나야 할 지부와 평생을 책임져야 할 공방.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상식적으로 후자의 편을 들어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까짓 간판이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어. 원한다면 그냥 줘버려."

하라무라 지부장은 이미 각오를 한 듯했다.

"저, 정말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공방을 넘겨주는 건...."

"그래 봤자 이름뿐인 공방이야. 물론 나도 이전까지는 가업의 명예니, 장인정신이니 떠들어 댔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런 걸 챙길 만큼 멍청하진 않아."

하라무라 지부장은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린 절대 그놈들 손에 놀아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히나 보좌관은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듯, 작게 고개를 꾸벅였다.

그렇게 그녀는 사무실을 나섰다.

그 직후 하라무라 지부장은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나저나...."

그리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한국 본부에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국제협회로부터 다시 빼앗아 오기엔 아직 본부가 자리를 못 잡은 상황이고, 그렇다고 내버려 두기엔 사안이 심상치 않다.

물론 김준우의 성격상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다.

분명 뭔가 손을 써도 쓰겠지.

하지만 그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지, 어떤 방법을 쓸지, 그로서는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았다.

***

다음 날, 하노이 지부.

"반갑습니다. 국제 던전 및 헌터 관리 협회 기획재정부 소속, 션이라고 합니다."

후인이 업무를 보고 있던 그때, 지부장실로 한 남자가 찾아왔다.

자신을 대뜸 션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곧장 후인 지부장에게 악수를 건넸다.

후인은 담담하게 그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오신다는 연락 받았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베트남 지부가 저희와 함께해주신다는데, 당연한 일이죠."

가식이 넘쳐흐르는 대화에 후인은 속으로 실소를 뱉었다.

션이 먼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연락받으셨다니 아시겠지만, 오늘부로 베트남 협회는 공식적으로 국제협회 소속이 되었습니다."

"...네."

"작전팀을 비롯한 지원, 통제, 재무, 사업부 등 모든 부서에 국제협회 소속 직원들이 배치될 겁니다. 물론… 최고 운영 책임자 자리 또한 포함해서."

"그럼, 저는 이제 해고당하는 겁니까?"

"하하하,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그저 지부장님 자리만 잠시 빌릴 뿐입니다. 그래도 2년 가까이 지부를 이끌어주셨던 분인데, 그렇게 내칠 리가 있겠습니까."

션이 생색을 내며 말을 이었다.

"후인 지부장님께선 남아 계셔도 됩니다. 물론 직급과 직책은 조금 달라지겠지만."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를 전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딱히 지금 상황에 할 말도 없었다.

"음? 아직 볼일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때, 션이 익살스러운 표정과 함께 손가락을 슥슥 비비며 말했다.

"허브 운영권 말입니다."

"아."

후인은 깜빡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한 장의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다름 아닌, 허브 운영권 위임에 대한 계약서였다.

션은 미소와 함께 자신의 만년필로 계약서에 사인을 휘갈겼고, 곧바로 후인과 위치를 바꿨다.

지부장 자리에 선 션과 사무실 문 앞에 선 후인.

비로소 뒤바뀐 위치에 후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전 이만...."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인은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아, 혹시 말입니다."

그때, 무언가를 잊은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션 지부장을 향해 물었다.

"청소팀도 인원 교체가 있습니까?"

"청소팀…?"

션 지부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청소팀은 예정이 없습니다. 뭐 누굴 쓰든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다른 건 아니고… 사실 당신이 오기 전에 청소 지원 계약을 받아 놨습니다."

"...청소 지원?"

"인원 교체 예정이 없다고 하시니, 계속 쓰시면 될 것 같군요."

의미심장한 말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션 지부장이 그 말의 꿍꿍이를 생각해보기도 전에 한 젊은 여성이 곧바로 사무실로 들어섰다.

"당신이 새로운 지부장님이신가요?"

션 지부장은 처음 보는 얼굴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누구...?"

"이번에 청소 지원으로 베트남 지부에 파견된 청소 3팀 총 책임자, 이아영입니다. 지부 소속은 아니지만,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손을 내밀며 싱긋 웃었다.

션 지부장은 대체 뭔가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예, 뭐… 잘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제가 청소팀 업무까지 신경 쓸 일은 없겠지만."

"알고 있어요. 아, 그래도 이 서류는 바로 결재 부탁드려도 될까요? 업무 투입 전에 이것저것 허가가 필요해서 말이죠."

"음…?"

션 지부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아영 본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지고 온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곤 꽤나 사무적인 말투로 보고를 시작했다.

"청소팀 일정과 작업 방식에 변경이 있을 예정이라서요. 장비랑 인원도 소소한 개편이 있을 거라, 한번 자세히 읽어보시고...."

"됐습니다."

션 지부장은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서류를 읽어보지도 않고 곧장 사인을 휘갈겼고, 이내 퍽 귀찮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청소 쪽 업무는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청소 일로 여기까지 올라오지 마시고 후인 씨랑 상의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 주의할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길 한 차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션 지부장님."

이아영 본부장은 사무실을 나섰다.

그와 동시에 줄곧 참아왔던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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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재, 받아오셨습니까?"

시내에 위치한 베트남 지부 소속의 청소 관리실.

나는 지부 건물과 독립된 그 너저분한 곳에서 이아영 본부장을 만났다.

애초에 잘 사용하지 않는 사무실이기도 했고, 본부와 별개 건물인 덕에 보는 눈도 없는 곳이었다.

굳이 그런 곳에서 만난 이유는 되도록 지부 직원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국제협회에서 파견된 놈들은 날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어디까지나 비밀스럽게 침투한 상황이다.

내 얼굴을 알고 있는 놈을 만난다면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떠나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내 정체를 알고 있는 현지 직원은 후인과 응우옌 작전본부장 그리고 몇 명의 팀장급이 전부다.

당연히 션 지부장 또한 우리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다.

"네, 뭐. 예상대로 읽어보지도 않더라고요."

이아영 본부장은 결재받은 서류를 내밀며 대답했다.

나는 서류를 재차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겠죠. 앞으로 허브 운영과 부산물 유통, 토벌 기획이랑 인사 개편 등등… 신경 쓸 게 차고 넘쳤을 텐데 청소 일이 안중에나 있겠습니까."

"그럼 차라리 결재 서류인 척하고 다른 서류를 내밀어도 됐지 않았을까요. 예를 들면 지부 운영권 인계 계약서라던가. 어차피 읽어보지도 않았을 텐데."

그녀의 말에 나는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기이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도의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니라, 효력을 말하는 겁니다."

이아영 본부장은 그제야 본인이 간과하고 있었다는 듯, 작게 감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션 지부장의 서명이 박힌 서류를 툭툭 건드렸다.

"그래도 뭔가 아쉬운데요. 이건 정말로 청소 업무 내용에 관한 서류잖아요. 해봤자 전체 청소팀 관리 권한 정도고. 이걸로 뭘 할 수 있다고?"

"뭘 하긴 뭘 합니까. 청소해야지."

"...."

그녀가 도끼눈을 뜨고 바라본다.

"여기서까지 이러기에요? 무슨 생각인지 제대로 말 안 하면 저 돌아갈 거예요."

"...."

쯧, 성질머리하고는.

나는 이내 작게 숨을 몰아쉬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처음 베트남 지부에 왔을 때, 다 쓰러진 협회를 어떻게 다시 일으켰는지 기억하십니까?"

"당연하죠. 청소팀 확대로 인한 부산물 회수율 증가 및 토벌 수익 최대화, 지원팀에 이어 작전팀도 확대. 결과적으로 연쇄 작용을 통한 토벌 시스템 확대. 이거 아직도 본부에 교본으로 있어요."

"...?"

참 나, 별걸 다....

뭐 아무튼 알고 있으면 됐다.

"이미 국제협회에 넘어간 지부를 무턱대고 뺏어오는 건 불가능합니다. 베트남 전역의 토벌 산업을 인질로 쥐고 있는 한, 자칫하다간 지부가 아니라 국가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겠죠."

"그거야… 그렇겠죠."

"무엇보다 섣불리 국제협회와 마찰을 일으켰다가 지기라도 한다면 다른 지부들의 신뢰까지 잃을 겁니다. 국제기구로써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저희에겐 그보다 치명적인 건 없죠."

다시 말해 정면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국제협회 소속으로 남겨두되, 지부 운영에 대한 모든 권한을 되찾는 걸 목표로 할 겁니다."

"그게 가능해요?"

"어렵지만… 불가능할 것도 없죠."

모호한 대답에 그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튼, 국제협회 스스로 지부에서 손을 떼게 만들 생각입니다.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혹은 투자 대비 얻는 이득이 압도적으로 마이너스거나."

"잠깐, 당신 설마...?"

"예."

나는 미소를 지었다.

"우린 이제부터 베트남 지부를 무너트릴 겁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이마를 턱 짚었다.

"그리고 청소팀 확대로 무너진 협회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건, 그 반대로 하면 번듯한 협회도 무너트릴 수 있다는 소리겠죠."

"...."

"인원은 최대로 감축, 장비도 최소한만 남겨두고 전부 가져다 팔 겁니다. 당연히 작업 일정은 팀당 하루 3개 이하로 맞출 거고요. 그리고 열 팀에서 다섯 팀으로 줄이고...."

"잠깐! 잠깐만요!"

그녀가 내 말을 끊으며 반론을 제기했다.

"당신 말은 그러니까.... 청소팀 구조조정을 하겠다는 거예요? 그것도 지부를 망하게 하려고?"

"그렇죠."

내 대답에 이아영 본부장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우리가 2년 전에 직접 뽑은 사람들이에요. 이제 와서 내치겠다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이대로 지부가 국제협회에 넘어가는 것보다야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최소한 청소팀 사람들 의견이라도 들어봐야죠!"

"그래서 따르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그, 그건...."

갑작스레 말문이 막힌 듯 그녀가 주춤했다.

시선을 피한 채 대답도 없이 한참 동안 생각에 빠졌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고, 그녀는 조금 진정됐는지 이내 차분해진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직원들은… 협회가 누구한테 넘어가는지 별로 관심 없고 신경도 안 써요. 월급만 제때 주면 주인이 누구든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특히나 하위 직급이라면 더더욱 그렇고요."

"뭐… 그렇긴 합니다."

"그런데 우리끼리 판단하고 결정한 일이, 이번 일과 가장 관련 없는 사람들을 내치는 거라면...."

이내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저는 동의할 수 없어요."

"...."

"아니 솔직히 말해서… 청소팀 직원들한테는 오히려 국제협회 소속이 되는 게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르죠."

나는 그녀의 대답에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회귀 전 내 보좌관으로 일했던 시간과 회귀 후 나와 동료로서 함께 일했던 시간을 모두 통틀어... 그녀가 처음으로 내 결정에 반기를 든 것이다.

'뭐, 생각해보면 원래 이런 사람이긴 했지...."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애초에 그런 위계에 질려 협회를 떠나려 했던 인물이다.

이제 와서 본인이 가장 혐오하던 짓을,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낄 만도 하지.

무엇보다 그녀의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다.

지부가 그리고 허브가 어디로 넘어가느냐의 문제는 그것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의 문제지, 직원들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말대로 직원들 입장에선 국제협회에 넘어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부의 주권을 되찾겠다는 명목으로 직원들을 쳐내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아영 본부장님, 우린 지금 전쟁 중입니다."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전쟁.

조금이라도 약점을 보이는 순간, 다음에 거리로 나 안게 될 건 청소팀뿐만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방법이 없다면 모를까,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

나는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이아영 본부장은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위에 앉은 사람이 입지를 지키기 위해선, 아랫사람의 희생이 필수불가결하다.

회사를 위한 것이다, 모두를 위한 것이다, 아무리 포장해도 아랫사람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 관련도 없는 그들의 희생이 강요된다.

그것이 조직이며 나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그런 모순은 딜레마에 속하지도 않는다.

진짜 딜레마는... 내칠 수 있을 때 내치지 않으면, 누군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매번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번이라고 다를 건 없다.

"물론 바로 진행하진 않을 겁니다. 구조조정 명단도 작성해야 하고, 현지 작업 방법과 축소된 인원에 맞춰 다시 일정을 조율해야 하니까요."

"...."

"뭐, 일주일간은 청소 지원하면서 이것저것 확인해볼 생각입니다. 작업 방식이 어떻게 되는지, 어느 팀에서 몇 명을 축소해야 할지, 남은 인원으로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지 알아둬야겠죠."

이아영 본부장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할 말 없으시면...."

그 말과 함께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가보시죠."

"...."

그럼에도 이아영 본부장은 제자리에서 시선을 떨어트린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쿵―.

이내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사무실을 벗어났다.

"...."

나 또한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나간 자리를 바라봤다.

***

"어, 왔다, 왔어!"

"준우 씨! 빨리 와 봐요!"

청소 지원이 예정된 던전 앞에 도착하자, 박근태 부장과 문소연 그리고 한상혁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잡아끌었다.

가까이 가보니 현지 청소팀 직원들과 무슨 문제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뭡니까?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여기 보스가 슬라임 계열인데 전기톱을 가져가려고 하잖아!"

"이건 가져가 봤자 날에 살점이 다 엉겨 붙어서 쓰지도 못한다고, 그냥 칼을 가져가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 통해야 말이지."

한상혁에 이어 박근태 부장이 상황을 설명했다.

'대체 뭔....'

누군 청소팀 구조조정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는데, 누군 장비 지적이나 하고 있네.

하여간, 여기까지 와서도 청소에 진심인 사람들이다.

"…뭐,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현지 직원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아니, 지금 뭐 하자는 건가요!"

"우리 빨리 작업 들어가야 하는데, 왜 못 들어가게 막는 겁니까!"

"도와주러 온 거 아니에요?!"

현지 직원들이 잔뜩 뿔이 난 표정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뭐… 영문을 모르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겠지.

나는 그들을 진정시키며 박근태 부장이 지적했던 부분을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아!"

"그런 겁니까…?"

"그 부분은 미처 생각 못 했네요...."

그제야 자신들의 실수를 잡아주려고 했다는 걸 알게 된 현지 청소부들이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곤 3팀원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 강사한니다."

"감사함미다."

어색한 한국어로 인사를 전했다.

"하하! 오해가 풀렸다니 다행이네. 우리야말로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작업 들어가죠."

"시간 다 잡아먹었네. 서둘러야겠는데?"

3팀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작업 준비에 들어갔다.

모두와 함께 던전으로 입장했다.

뭐, 다행히 작업 자체는 꽤나 순조로웠다.

"거기 약품 좀 주십쇼. 어… 캐미컬, 캐미컬!"

"아, 오케이."

"슬라임 크기가 생각보다 큰데… 5등분 해야겠지?"

"흐음, 처리 시설에서 많이 분해한 건 싫어하긴 하는데… 어쩔 수 없네요."

"헤이, 파이브 등분. 아, 그러니까… 파이브 피스!"

"파이브? 오케이!"

"조심해. 비 케어풀! 오케이?!"

"오케이, 오케이."

모두가 어설픈 언어로도 별문제 없이 작업을 이어갔다.

국적은 달라도 해야 할 일은 같았기에, 눈짓과 몸짓만으로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딱히 긴 대화도 필요 없이 그들과 소통했고....

그러한 관계는 일주일 내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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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베트남에 와서 청소 지원을 시작한 지도 일주일이 흘렀다.

나를 포함한 청소 3팀원들은 매번 다른 팀과 함께 작업을 진행했고, 그사이 나는 모든 청소부의 업무 능력 평가를 완료했다.

"4팀, 5팀, 8팀, 10팀은 숙련도나 경험에서 다른 팀에 비해 많이 부족하더군요."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는 청소 관리실에서 이아영 본부장에게 서류를 전달하며 말했다.

"일단 그 4개 팀을 우선 감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녀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 기계 같은 말투와 표정을 보고 있자니, 회귀 전 이 실장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머지 하나는요?"

이아영 본부장의 담담한 물음에 턱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나머지는… 2팀이랑 7팀 중에서 고민이긴 합니다. 둘 다 숙련도는 비슷한데, 그다지 효율이 나지 않는 팀이라."

"...."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않고 있었다.

나는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물었다.

"아직도 탐탁지 않으십니까?"

"...."

"말했잖습니까.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모두 신경 쓰다간 정작 중요한 걸 놓칠 수도...."

"알아요, 당연히 알죠. 그래도… 그래도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잖아요."

나는 대답을 아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 그러시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나는 그 말을 전했다.

내키지도 않는 일을 억지로 한다면 방해만 될 것이다.

그러니 계속 그런 어정쩡한 태도로 일할 거면 그냥 가라는 의미였지만....

어째 그 말에 그녀가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전 신경 안 써도 돼요. 당신이 더 힘들 거 아는데 뭘."

"...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판단하고 결정한 일이잖아요. 저도 마음이 이런데, 당신은 오죽하겠어요. 그렇다고 흔들리는 모습 보일 수도 없고… 속상하지만 그래도 참고하는 거 다 알아요."

"...."

뭔 개소린가 싶었지만....

그래도 얼굴이 조금 펴진 걸 보니, 할 맘은 있는 것 같았기에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4개 팀 먼저 명단 작성해둘게요. 2팀과 7팀은 언제쯤 결정하실 거예요?"

"...2팀으로 명단 올려주세요."

"알았어요. 작전팀과 일정 조율 결재받아둘까요?"

"그건 미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했듯이 우린 지부를 무너트리는 게 목적이니."

"알았어요."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가지고 관리실을 나섰다.

나 또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나갈 준비를 했다.

오후 작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물품을 챙겨 사무실을 나와 던전으로 향하던 중.

"김 팀장님."

어떻게 알고 온 건지 후인이 나를 찾아왔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시간이 좀 났어요. 오후에 작업 있다고 하던데…, 운이 좋았네요."

그가 반갑게 악수를 건넸다.

얼굴이 어째 일주일 새에 꽤나 수척해 보였다.

"새 자리가 잘 안 맞는가 봅니다."

"맞고 안 맞고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 봤자 잡일인데. 결정권은 하나도 없으면서 서류 확인만 주구장창 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권한도 주지 않고 조언만 받아먹겠다는 거군요."

그가 대답 대신 웃음을 보였다.

긍정의 뜻인 듯했다.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그때, 나와 같이 걸음을 옮기던 후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래도 이게 본론인 듯했다.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청소팀 축소를 통해서 지원, 통제, 사업, 운영까지 연쇄적으로 무너트릴 겁니다."

"그러면 토벌 자체에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닌가요? 자칫하면 아예 토벌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게...."

그의 걱정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문제가 발생했다는 걸 알게 되면 국제협회에서 돈을 쏟아부을 테니까요. 허브는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해결될 가망이 없어 보인다면 그들로서도 방법이 없을 겁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지부를 놔줄 수밖에 없겠죠. 물론 운영권만 넘길 뿐, 계속 지부로 가지고 있으려고 하겠지만... 그게 어딘가요."

"본인들이 책임지고 싶지 않으니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돈은 돈대로 잡아먹으면서 정작 수익은 없는, 다시 놔주는 건 손해지만 계속 붙잡고 있는 건 더더욱 손해인 지부.

그게 이번 계획의 목표다.

후인 또한 그것을 이해한 듯 입을 열었다.

"그 시작이 청소팀 감축이라는 거군요."

"예.

"인원은 정해두셨습니까?"

"예, 뭐 일단 정해는 뒀는데...."

내가 말을 꺼내던 그때였다.

우리는 어느샌가 작업 던전 앞에 도착했다.

3팀원들과 현지 청소팀이 나를 발견하곤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야, 준우야! 여기 르앙 씨가 오늘 작업 끝나고 저녁 식사 대접하고 싶다는데, 너도 올 거지?"

"네…?"

박근태 부장이 뜬금없는 소식을 전했다.

퍽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현지 청소 2팀의 르앙이 활짝 웃으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김! 이제 다음 주면 돌아간다고 들었습니다. 가기 전에 꼭 대접을 하고 싶어요. 꼭 와주십시오!"

"...."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이번엔 한상혁이 또 다른 소식을 꺼내 들었다.

"아 맞다, 그거 들었냐? 4팀에 도안 씨 아내, 오늘 아침에 무사히 출산했다더라. 딸이래."

"거봐! 내가 딸이랬지? 인생 57년 짬밥 무시하지 말라고, 이놈아."

"참 나, 그래 봤자 50프로 확률인데 뭘 생색을 내신데?"

"우리끼리 선물이라도 할까요? 일하느라 옆에 있지도 못하셨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죠."

"...."

나는 저들끼리 떠들며 웃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일주일 동안 모든 팀을 오가며 작업을 지원한 결과, 현지 청소부들과 꽤나 돈독한 사이가 된 듯했다.

물론 3팀원들은 진짜 목적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고 있다.

일부러 숨긴 건 아니지만, 굳이 미리 말할 필요가 있겠나 싶었던 까닭이었다.

뭐, 애초에 구조조정 건에 대해 알고 있었으면 저렇게 가까이 지내지도 않았겠지.

"...."

어째 꽤나 복잡한 기분이었다.

이렇게까지 사이가 가까워질 줄 알았다면 그냥 처음부터 말을 해둘걸.

"다들 김 팀장님에게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협회가 해체되고 하루아침에 일거리를 잃은 이들을, 다시 먹고 살 수 있게 해준 은인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런 후회를 하고 있자니, 옆에 있던 후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물론 지금의 김 팀장님이 그때 그 은인이라는 건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본성이라는 게 어디 가진 않죠. 아마 몇 번을 다른 신분으로 방문해도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겁니다."

"...."

"그만큼 김 팀장님이 직원들을 아끼는 마음은 숨길 수가 없다는 거겠죠."

그가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비록 이번에는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됐지만, 김 팀장님의 진심이 그렇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힘드시겠지만...."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네?"

"힘들 게 뭐가 있겠습니까. 누가 죽는 것도 아닌데."

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사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전달할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음?"

"뭐야, 갑자기 왜 분위기 잡냐."

사뭇 진지하게 입을 열었지만, 모두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농담을 던지며 웃어댔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론을 전했다.

"지부 운영 및 재정상의 이유로 베트남 지부 소속의 청소 2팀, 4팀, 5팀, 8팀, 10팀은 해체될 예정입니다."

"...?"

"...뭐, 뭐?"

"해당 팀에 소속된 청소부들은 한 달 뒤에 공식적으로 계약이 종료될 겁니다. 퇴직금 및 연금 관련 문의는 관리실로 오시면 상담해드리겠습니다."

이내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버린 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고개를 꾸벅였다.

***

국제 던전 및 헌터 관리 협회, 베트남 지부.

지부장실.

「새 자리가 꽤 적성에 맞나 봅니다.」

션 지부장과 통화를 하고 있던 웨슬리 사무총장이 그렇게 운을 띄웠다.

"하하, 다 사무총장님 덕분입니다."

션 지부장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일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토벌도 안정적이고, 허브 운영에도 차질이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뭐, 아시다시피 허브는 앞으로 저희 활동에 있어 중요한 자금줄이 될 겁니다. 모쪼록 잘 신경 써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남자의 대화는 꽤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나저나… 한국에서는 무슨 소식 없습니까?」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국이요?"

「카르마 코퍼레이션 말입니다. 아… 듣자 하니 이번에 국제기구로 명칭이 바뀌었다죠. WDSO인가.」

"예,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

「베트남 지부는 그들에게도 꽤나 중요한 경제적 요충지였습니다. 눈 뜨고 빼앗겼으니 분명 뭔가 움직임이 있었을 텐데.」

"뭐… 몇 번 연락이 오긴 했지만 전부 거부했습니다. 요즘에는 연락도 안 오고 특별한 낌새도 없었고요."

「흐음....」

웨슬리 사무총장이 뭔가 탐탁지 않은 듯 신음했다.

그러자 모두 기우라는 듯, 션 지부장이 첨언했다.

"아직 국제기구로 자리를 잡지 못한 놈들입니다. 섣불리 저희에게 대항했다가 자칫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지부들의 신뢰를 잃고 무너져 내릴 수도 있죠. 리스크를 생각했을 땐 억울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하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여전히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물론 그게 상식적인 선택이겠지만, 김준우를 상식선에 놓는 것부터가 상식 밖의 일이라.」

"...그렇습니까."

「분명 우리 몰래 뭔가 꿍꿍이를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경계를 늦추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션 지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실 말은 알겠다고 했지만, 그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왜 벌써부터 걱정을 하고 있는 건가.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다른 이들과 다르게, 사무실 업무만 했던 그로서는 김준우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해봤자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문과 뉴스만 접한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신격화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이다.

그놈도 결국 인간이지 않은가.

「또 다른 특이 사항 있나요?」

"음...."

그때, 웨슬리 사무총장이 통화를 마무리하려는 듯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션 지부장은 청소 지원을 받고 있다는 걸 이야기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일일이 보고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무엇보다 청소 지원 담당자도 중국인이지 않은가.

'이'라는 성은 중국에서 쓰는 거라고 들었으니, 아마 확실할 것이다.

"아뇨. 별다른 건 없습니다."

짧은 시간에 판단을 내린 션 지부장은 그렇게 대답했다.

「앞으로도 수고해주세요.」

"네."

션 지부장은 전화를 끊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사무총장의 말처럼 베트남 지부와 함께 허브가 손에 들어왔으니 앞으로는 더욱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 정부까지 뒤에 업었다.

외교, 무역, 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토벌 기구를 초월하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지.

이를 바탕으로 완벽한 통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

허브는 그것을 위한 첫 단추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머지는.

'WDSO의 지부를 차례로 뺏어오는 것....'

그것으로 그들을 완벽히 고립시킨다.

물론 이것 또한 이미 진행 단계다.

베트남 지부를 손에 넣었으니, 다음에는 아마....

'일본 지부였나…?'

뭐, 그놈들도 어려울 건 없겠지.

션 지부장이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

"지부장님."

지부장실로 한 직원들이 들어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국제협회 본부에서 파견된 직원이었다.

"무슨 일이야?"

"해외에서 파견된 청소 지원 담당자가, 지부 청소팀 인원 감축을 제안했습니다."

"…뭐?"

"기존 10개 팀에서 5개 팀으로 줄이겠다고 하는데...."

갑작스러운 소식에 션 지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당황스럽기도 잠시, 이내 그의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빠르게 움직였다.

"팀을 반으로 줄인다는 건... 그만큼 인건비를 아낄 수 있다는 소리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괜찮을까요? 남은 인원이 작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이래저래 문제가...."

션 지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토벌도 아니고, 그깟 청소 조금 늦어진다고 뭐가 문제겠어. 애초에 5개 팀으로도 충분히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리 제안한 거겠지."

"예, 뭐… 제안서를 보니 확실히 가능하긴 할 것 같습니다."

"그럼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

이내 션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축 안건을 허가한다는 의미였다.

'생각보다 쓸 만한 놈들이네....'

물론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모두 맡긴 거긴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예산을 아낄 수 있게 해주다니.

이거 참… 정식 계약이라도 해야 하나.

션 지부장은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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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지부 청소팀에 대한 구조조정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2팀, 4팀, 5팀, 8팀, 10팀.

총 5개 팀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나머지 팀이 남은 던전을 모조리 떠맡았다.

물론 그렇다고 업무량이 늘어나진 않았다.

하루 3개 던전만 작업하라고 지시해뒀기에 좋든 싫든 정해진 양만 작업해야 했다.

그래서 구조조정이 됐다고 한들, 이전과 그다지 다를 건 없었다.

해체된 팀 소속의 청소부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만 제외하면.

"...."

"...."

"...."

청소 관리실.

이젠 거의 우리 아지트처럼 쓰이고 있는 그곳에서 작업 대기하던 청소 3팀원들은 하나 같이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자신의 업무가 단순히 지원이 아니었다는 당혹감.

일주일간 동료이자 친구로 지냈던 이들을 해고시켰다는 죄책감.

그리고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배신감.

그런 감정들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뭐, 딱히 말이 없는 걸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긴 한데....'

내가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니, 어쨌든 따르겠다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이유를 굳이 물어보지도 않는다는 건, 나한테 그만큼 실망했다는 소리이겠고.

'그렇다고 전부 말해 주기엔 상황이 여의치 못했고....'

무엇보다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금은 마음껏 실망해도 좋다.

어차피 오래 가진 않을 거니까.

"자, 오후 작업 준비합시다."

"...."

"...."

내가 입을 열자, 모두가 대답도 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는 오늘부터 다른 일 때문에 작업 참가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인원이 부족한 만큼 작업이 늦어지겠지만, 무리하지 마시고 정해진 개수만 작업해주세요."

"…알겠다."

"...네."

미적지근한 대답.

심정을 이해했기에, 굳이 꼬투리를 잡진 않았다.

팀원들은 뭉그적거리며 사무실을 나섰고, 이내 나와 이아영 본부장만이 남았다.

"뭐, 이 정도는 예상했죠?"

그때, 팀원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이아영 본부장이 슬쩍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여기선 그렇다 쳐도… 한국에 돌아가선 어떻게 할 거예요. 새 팀원을 구해야 할지도 모를 텐데?"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즉답하자, 이아영 본부장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한테 실망했다고 팀에서 떠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확신해요? 사람이라는 게 원래 100번 좋아도 한 번 밉보이면 그대로 끝나기도 하는 건데."

"...."

나는 대답을 아꼈다.

굳이 더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낀 까닭이었다.

나는 황급히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이제 청소팀이 반토막 났으니 슬슬 일정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토벌 수익에만 온 신경이 팔려서 토벌은 계속 진행할 텐데, 청소팀은 그 일정을 따라갈 수가 없으니 작업이 계속 밀리겠죠."

"뭐… 그렇겠죠."

"하지만 저희가 청소팀을 관리하고 있는 이상, 지부가 해당 문제를 알아차렸을 땐 이미 손을 쓸 수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국제협회 본부가 움직이겠죠?"

"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청소팀을 증원하거나, 급하게 토벌량을 줄일 테지만…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이미 틀어진 일정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작전 올스탑을 걸면요?"

"그게 유일한 해결책이긴 합니다. 다만 그것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진 못할 겁니다. 재정이 미친 듯이 나빠질 테니까요."

내가 말을 이었다.

"돈은 돈대로 쏟아부었는데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결국 작전까지 올스탑이 걸린다면 지부도, 본부도 엄청난 타격입니다. 하지만 보다 더 큰 문제는...."

"미청소 던전...."

그녀가 이어 대답했다.

"청소 작업이 밀린다는 건, 그만큼 미청소 던전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겠죠."

"...."

"아시다시피 미청소 던전 토벌은 훨씬 어려운 작전입니다. 투입되는 인원과 지원도 몇 배는 많이 필요하죠. 토벌 수익까지 끊겼는데, 당장 미청소 던전에 수천억을 쏟아부어야 한다면 지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겠죠."

내가 말하자 이아영 본부장이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부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당장 미청소 던전 하나만 생겨도 비상인데, 그렇게 우후죽순으로 발생하게 되면...."

"재앙이 일어나겠죠."

이아영 본부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그걸 알면서도 진행하겠느냐는 반응.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미청소 던전을 모두 처리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아무리 저라도 그건 무리입니다. 아니, 제가 아니라 그 누가 와도 이 문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아, 아니 그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작전 스탑, 심각한 재정 악화, 해결 불가능한 수준의 미청소 던전까지... 그렇게 되면 국제협회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자르며 말을 이었다.

"그 선택이 우리에겐 해결책이 될 겁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마쳤다.

이제부턴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2년 전 내가 필사적으로 살려놓은 지부가, 땅끝까지 무너져 내리는 것을.

***

베트남 지부, 작전 본부장실.

응우옌 작전 본부장은 이번 달 작전 기획과 토벌 일정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그는 며칠 전 이루어진 인사 개편에서 경력을 우대받아 겨우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그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모든 결정권을 빼앗긴 채 자리만 지키는 꼴이었다.

션 지부장의 허가 없이는 작전 명령 하나 제대로 내릴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의 업무는 그저 보고서 결재와 작전 일정 검토가 전부인 셈이다.

'이게 어떻게 작전 본부장이라는 건지....'

응우옌 지부장이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

"본부장님."

한 남자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다름 아닌 이번에 본부에서 파견된 새로운 작전 1팀장, 크리스였다.

"이번 주 작전 현황입니다. 확인하고 결재 부탁드립니다."

"...."

대체 누가 상사인 건지 알 수 없는 말투.

응우옌 본부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쯧, 대놓고 무시하고 있군....'

하지만 그를 무시하는 건 말투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 팀장이 책상 위로 서류를 툭, 내던진 것이다.

물론 그의 태도를 지적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기에 응우옌 본부장은 애써 분을 삭이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

그리고 이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점을 발견한 듯,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곧바로 서랍에서 다른 서류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이아영 본부장이 건네준 청소 작업 현황 보고서였다.

응우옌 작전 본부장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두 서류를 번갈아 보며 확인했고, 머지않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야 이거....'

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청소 작업 현황과 토벌 현황이 3배 이상 차이가 나고 있었다.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서류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건 꽤나 상황이 심각하다.

지금 당장 일정을 조율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토벌에 문제가 발생하고 말 것이다.

지금 당장 지부장에게 작전 중지를 요청해야....

'잠깐....'

그 순간, 응우옌 본부장의 머릿속에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생각해 보니 청소팀은 모두 김준우가 관리하고 있지 않은가.

그가 아무 생각도 없이 이런 일정을 짰을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계획의 일부라는 건가....'

하지만 김준우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그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그 순간, 그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곤 크리스 작전 1팀장이 물었다.

"아… 어…?"

그와 동시에 응우옌 본부장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 아냐. 아무것도."

그리곤 곧바로 청소 작업 현황 서류를 서랍 속으로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김준우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건 들키면 안 된다.

"뭐, 잘하고 있네. 계속 이대로만 하면 될 것 같아. 확인했으니 가봐."

"...알겠습니다."

크리스 팀장은 뭔가 미심쩍은 듯했지만, 이내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렇게 그가 사무실을 나서려던 그때.

"그런데 말입니다, 본부장님...."

크리스 팀장이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뭐, 뭔가?"

애써 긴장한 마음을 숨기며 묻자, 그가 말했다.

"존칭 쓰십시오. 본부장이라고 해도, 전 엄연히 본부 소속입니다."

"...그러도록… 하죠."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크리스 팀장은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을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응우옌 본부장은 숨겨 놓은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

'....'

김준우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니 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건지, 그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뭘 하려는 건지 몰라도....

'이왕 시작한 거… 들키지 마시죠.'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부욱―!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응우옌 본부장은, 이내 망설임 없이 청소 현황 서류를 찢어버렸다.

업무 서류 은폐.

작전 본부장으로서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중대한 실책을 벌인 것이다.

***

청소팀 구조조정이 진행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지부에는 때아닌 비상이 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지부 소속의 지휘통제실.

션 지부장은 격양된 얼굴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작전 스탑 허가를 내려달라니! 대체 뭐가 문젠데!"

"지, 지부장님…!"

그때, 모니터로 작전 현황을 확인하던 조나단 통제팀장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청소 작업이 너무 많이 밀렸습니다. 이미 10개의 미청소 던전이 발생했고요."

"뭐…?"

그와 동시에 션 지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청소 대기 중인 던전만 30개가 넘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전부 미청소 던전으로 넘어가게 될 겁니다. 이 정도로 밀리려면 최소 2주 전부터 문제가 발생한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문제가 있다는 보고는 없었다고! 청소에 문제가 있었으면 나한테 바로 보고가 날아왔을…!"

그가 목소리를 높이다가 이내 말끝을 흐렸다.

아닌 게 아니라, 본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던 까닭이었다.

'청소 일로 여기까지 올라오지 마시고, 후인 씨랑 상의하세요.'

그래.

청소 일은 보고하지 말라고 본인이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이런, 빌어먹을…!"

션 지부장이 이를 으득 씹었다.

"지, 직접 보고를 하지 않더라도 이건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조나단 통제팀장은 생각이 조금 다른 듯했다.

"작전팀과 청소팀의 일정 조율은 작전 본부장이 직접 확인합니다. 분명 청소팀 현황 보고가 올라왔을 거고, 그럼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작전 본부장이 확인한다고…?"

그 말을 들은 션 지부장이 이내 실소를 내뱉었다.

'응우옌 이 새끼가....'

청소팀 현황 보고를 고의로 숨겼다 이건가.

하지만 대체 왜?

"아무튼, 지금 상황이 심각합니다. 어떻게든 밀린 던전을 처리하지 않으면 작전을 스탑 할 수밖에 없습니다."

"...."

션 지부장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 겨우 안정화되는가 했더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일단… 본부에 연락해둘까요?"

조나단 팀장이 물었고, 션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야지, 뭐 별수...."

그리고 그때.

-분명 우리 몰래 뭔가 꿍꿍이를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경계를 늦추지 마세요.

웨슬리 사무총장이 당부했던 그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와 동시에 션 지부장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의문의 청소 지원.

갑작스러운 구조조정.

청소 현황을 고의로 감춘 응우옌.

그리고 문제가 발생할 때까지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은 후인.

'설마....'

이내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려왔다.

그는 곧바로 모니터에 앉아 있던 한 직원을 밀쳐내곤, 그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국제협회 본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서 무언가를 검색했고, 곧바로 그의 앞에 떠오른 화면은....

「이아영, 현 WDSO 지원 본부장.」

청소 지원 담당자의 프로필이었다.

'X 됐다....'

김준우다.

김준우가 움직이고 있었다.

몰래 내부에 침투했고, 기존 직원들도 그에게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본부에는… 알리지 마!"

모든 상황을 알게 된 션 지부장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 하, 하지만 저희로서는 해결할 수가...."

"못 들었어? 본부에 알리지 말라고!"

갑작스레 고함을 지르자, 조나단 팀장은 퍽 당황스러워했다.

사무총장이 직접 신신당부를 했는데…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걸 알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다.

어떻게든 본인 선에서 해결해야 한다.

'김준우, 이 개새끼....'

션 지부장이 이를 마구 갈아대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관련 인물 전부 데려와. 후인이랑, 청소 지원 담당자 전부!"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내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응우옌 그 새끼, 죽여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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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팀 구조조정 이후, 상황을 지켜보던 중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응우옌 작전 본부장이 하루아침에 뜬금없이 해고를 당한 것이다.

무슨 일인가 파악하기도 전에 지부장은 곧바로 나와 이아영 그리고 후인을 호출했다.

드디어 지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응우옌 작전 본부장의 해고 사유는 고의적 업무 누락 및 토벌 방해 행위로 인한 징계 처분이었다.

딱히 말도 안 했는데, 그가 알아서 청소 현황 보고서를 숨긴 건 나 또한 의외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본부장이 내부 작전 서류를 고의로 은폐한 건 꽤나 중대한 사안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지부장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챈 이상, 대놓고 우리 편에 붙은 그를 징계로 끝낼 리가 없다는 거겠지.

'연락을 좀 해둬야겠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렇게 베트남에 오고 나서 무려 한 달 만에 새로운 지부장과 만나게 되었다.

"당신이 김준우?"

지부장의 표정과 목소리는 딱 봐도 무척이나 분노한 상태였다.

"그렇습니다."

내 대답에 그가 한숨을 내쉬길 한 차례.

"진짜 전쟁이라도 하자는 건가?"

두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쟁이라뇨. 저희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작정하고 지부를 공격하고 있으면서, 전쟁하려는 건 아니라고?"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희는 이미 베트남 지부와 계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담담하게 대답하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계약 내용은 청소팀 업무 개편과 더불어 청소팀의 전체적인 사이즈 다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해당 내용에 관련해서는 지부장님의 결재까지 받지 않았습니까."

"...."

"저는 그저 계약대로 이행했을 뿐입니다. 국제협회와 맞설 생각도 아니었고, 작전을 망칠 생각은 더더욱 아니었죠. 그리고 애초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청소팀으로 좌천당한 몸입니다. 대표도, 본부장도 아닌 제가 무슨 권한으로 지부 운영까지 건드리겠습니까."

대놓고 시치미를 떼자, 그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게 보였다.

물론 그는 내가 한 말이 모두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적으로 따지자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해당 계약이 진짜로 존재하는 한 내가 지부를 공격했다는 물증은 어디에도 없으며, 몰아갈 수도 없다.

다시 말해, 션 지부장은 내가 지부를 공격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에게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이지.

"그럼 응우옌은 왜 네 보고를 누락시킨 거지? 그건 아무리 봐도 고의였는데?"

하지만 션 지부장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고 시도했다.

물론 그게 먹힐 리는 없겠지만.

"제가 압니까? 지부장님이 청소팀 일은 알아서 하라고 하니까 그냥 넘어간 걸 수도 있겠죠."

"…하, 하하하!"

내 대답에 그가 육성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 미친놈이… 이봐, 지금 장난하는 것 같아?"

"션 지부장님."

나 또한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게 장난 같습니까?"

"...."

날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는 것을 느꼈다.

나 또한 피하지 않고 응시했고,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길 잠시.

"계약이고 나발이고, 네가 직접 해결해. 그럼 없던 일로 해줄 테니."

"일어난 일을 어떻게 없던 거로 합니까. 그리고… 미청소 던전이 발생한 순간부터 이미 해결하기엔 늦었습니다. 얌전히 본부 지원 기다리시죠."

그 말에 션 지부장의 눈썹이 찌그러졌다.

나는 그 반응이 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이것 봐라…?'

설마 아직 본부에 연락하지 않은 건가.

책임을 질게 두려워 어떻게든 본인 선에서 해결하려고?

'멍청하기 짝이 없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실소를 뱉었다.

아직도 이 상황이 본인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보는 건가?

"지금 네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정작 누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건지 아직도 모르는 듯, 션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여긴 엄연히 국제협회 지부야. 그리고 네놈은 우리의 1순위 타깃이고. 일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무사히 돌아가겠다면? 지부장님이 뭐 어쩌실 수 있겠습니까?"

"뭐…?"

"본부에서 파견된 분이시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번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밸런스팀과의 전투…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

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곳 인원으로 저한테 손가락 하나 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말에 션 지부장이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든 저를 협박해서 해결하려는 것 같은데.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때를 놓쳤습니다. 이제 와서 제가 손을 쓴다고 어떻게 될 문제가 아닙니다. 본부에 지원 요청하시든지, 아니면 작전 올스탑 하십시오."

"...."

그가 이를 으득 씹었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예?"

"일을 키워놓고 협상하려는 거 다 알아! 원하는 게 뭐냐고!"

"제가 원하는 거라...."

나는 미소와 함께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부장님 목이라고 하면, 줄 수 있겠습니까?"

"...!"

그 순간 지부장이 주춤했다.

하지만 나는 농담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가 원하는 건 없습니다. 말했듯이, 전 그냥 계약 내용을 이행하고 있을 뿐이니."

"너… 절대 곱게는 못 돌아갈 거야."

"저도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더 하실 말 없으면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추가 작업이 잡혀 있어서."

나는 이아영, 후인과 함께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고고한 척은 다 하더니, 너도 결국 똑같은 놈이었군."

션 지부장이 내 등에 대고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네놈 자리를 지키겠다고 아무 상관도 없는 직원들을 내쫓았잖아. 너도 결국 권력에는 어쩔 수 없는 족속이었던 거야."

"...."

추잡하게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흔드는 건가.

그의 말에 그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는 그대로 사무실을 나왔다.

"이대로 괜찮은 거예요?"

복도로 나오자 이아영 본부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보아하니 어떻게든 본인 선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 기회에 허브를 걸고 협상을 하면 넘어가지 않았겠어요?"

얼핏 일리가 있는 말이긴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허브 때문에 지부를 먹은 건데, 허브를 달라고 하면 주객전도가 되지 않습니까.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아무렴.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건이었으면 애초에 일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궁지에 몰렸다고 무력을 쓰진 않겠죠?"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 와서 아무리 우리를 협박한다고 해도 이미 일은 벌어졌고, 무력을 쓴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니까요."

뭐, 어디까지나 '지금은' 말이지만.

"일단 응우옌 본부장부터 찾아봅시다. 혼자 내버려뒀다간 위험할 수도 있으니."

"네, 안 그래도 본부에 연락해뒀어요. 오후쯤이면 지원이 올 거예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곤 이번엔 후인을 향해 말했다.

"후인 씨, 혹시 베트남 기업인들과 친분이 좀 있습니까?"

"네? 네 뭐… 몇 명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분들과 미팅 좀 잡아주시죠.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미팅이라뇨? 그건 갑자기 왜...."

그의 물음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션 지부장이 어떻게 나올지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시선을 앞으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이제 막바지입니다."

***

쾅―!

지부장실.

김준우가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션 지부장이 책상을 내리쳤다.

"이런 시발…!"

동시에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때를 놓쳤다.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알았다면 협박을 하든 협상을 하든 해볼 수 있었을 텐데....

김준우의 말대로 이미 일은 터졌고, 본인들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실수다.

처음부터 청소팀을 외부에 맡기면 안 됐다.

아니, 최소한 확인이라도 해봤어야 했다.

션 지부장은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시발, 이렇게 될 줄 알았냐고....'

다시 생각해도 본인으로선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입술을 씹어대던 그때.

"당장 청소팀을 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크리스 작전 1팀장이 말했다.

그러자 조나단 통제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청소팀 인원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미 미청소 던전이 발생했고, 앞으로도 계속 늘어갈 겁니다. 이걸 해결하려면 청소팀은 물론, 작전팀까지 함께 증원해야 합니다. 미청소 던전인 만큼 당연히 지원팀도 풀가동 해야 할 테고요."

"...."

그의 말에 션 지부장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지금 가진 예산으로 청소팀과 작전팀 증원 비용 그리고 지원팀 가동 비용까지 충당할 수 있나?

'아니....'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다.

지금의 예산으로는 턱도 없다.

그럼 본부에 추가 예산을 부탁하는 건?

그랬다간 본인의 실수가 드러나게 된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이렇게 된 이상, 무력으로 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 또다시 크리스 작전팀장이 발언했다.

션 지부장이 그를 획 노려보며 쏘아댔다.

"김준우를 상대로? 너 자신 있어?"

"아, 아니 제 말은... 그 여자랑 동료들 말입니다. 그들을 인질로 잡고, 당장 해결하라고 협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그러고 싶지만, 그것 또한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되지 못한다.

딱 봐도 국제협회가 베트남 지부를 먹을 거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계획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황금알을 뺏길 바엔 아무도 갖지 못하게 부숴버리겠다는 거겠지.

다시 말해 그놈들은 애초부터 이 일을 해결할 방법 따윈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건 결국 본인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고.

"…자금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냐?"

이내 한참을 고민하던 션 지부장이 통제팀장에게 물었다.

"자금만 있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겠지만… 최소한 시도는 해볼 수 있습니다."

"돈을 끌어올 수 있는 곳은."

"아직 현지 투자자 서치가 안 된 상황입니다. 해봤자 허브 수익금뿐인데... 3개월은 더 있어야 합니다."

"후우...."

투자를 받을 수도 없고, 당장 수익금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럼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겠군.

어쩔 수 없지.

"허브를 담보로 기업에서 대출받자."

"네, 네…?"

조나단 통제팀장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자칫 해결 못 하면 허브를 잃을 수도...."

"어차피 이거 해결 못 하면 허브고 나발이고 다 끝장이야."

션 지부장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허브를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 놓고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허브는 지부의 손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이 본부 귀에 들어간다면… 본인의 숨통이 도마 위에 올라가겠지.

하지만 만약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칼자루는 본인들이 쥐게 된다.

"다들 잘 들어."

이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마친 션 지부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해야 해. 예산이고 대출금이고 앞뒤 생각하지 말고 모조리 때려 부어."

"...."

"...."

"그리고 사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그때 본부에 연락한다. 연락해서… 김준우가 선전포고했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션 지부장이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김준우 출국 금지하고, 한국 WDSO 본부 공습 요청한다."

계약을 이행하는 것뿐이라고 궤변을 늘어뜨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부에 한정된 이야기다.

본부가 끼어든다면 계약이고 나발이고 명백히 선전포고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말했잖아. 곱게는 못 돌아갈 거라고."

감히 본인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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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션 지부장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남자는 퍽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브를 담보로 투자를 받으시겠다고요?"

"예."

션 지부장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베트남의 유통 기업, 헤르메스.

굴지의 대기업까지는 아니지만, 꽤나 오랜 기간 꾸준한 성장을 이룬 기업이다.

그곳의 대표를 만난 션 지부장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돌려서 운을 띄울 여유가 없던 까닭이었다.

사실 당장 필요한 금액을 고려한다면 믿을 만한 대기업이나, 해외 기업과 거래를 하는 게 맞았지만.

본부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면 보다 규모가 작은 기업이 아무래도 안전했다.

물론 그럼에도 신뢰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거액을 투자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입지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헤르메스는 그 조건에 꽤나 안성맞춤인 기업이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허브를 담보로 거실 정도면 꽤나 심각한 상황 같은데... 내부적으로 문제가 발생한 건가요? 아니면 외부적으로...."

션 지부장과 마주 앉은 남자, 헤르메스의 롱 사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협회는 대체로 문제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시민들이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롱 사장이 물어보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기밀 사항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해 줄 리 없지만.

"그나저나 왜 은행이 아니라 저희에게 오신 건가요. 은행을 통해서 대출을 진행하는 게 더 많이 받으실 수 있을 텐데요."

"그것 또한… 기밀 사항이라."

션 지부장은 이번에도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롱 사장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사실 션 지부장으로선 이것만큼 정직한 대답은 없었다.

허브를 담보로 자금을 빌린다는 건, 본인과 조나단 통제팀장을 포함해 지부 내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사항이다.

당연히 주변에 알려져서도, 본부 귀에 들어가서도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금융기관을 통해 대출을 진행한다면 필연적으로 본부가 알 수밖에 없다.

언론에 퍼지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그건 김준우에게 자신의 패를 까 보이는 행위인 것과 동시에, 그의 계획대로 궁지에 몰렸다는 걸 인정하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대한 아무도 모르게 진행하기 위해선, 투자의 형식으로 기업에 돈을 빌리는 게 가장 안전했다.

"일단 허브라면 별다른 심사를 할 것도 없을 겁니다. 명실공히 최고의 황금알이잖습니까."

대놓고 거래를 제시하자 롱 사장 또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얼마나 원하십니까?"

"3억 달러."

"...."

션 지부장이 즉답하자, 롱 사장이 순간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게, 한화로 약 3,000억 원에 가까운 거금이었으니 말이다.

"꽤… 큰돈이군요."

롱 사장이 당혹감을 애써 숨기며 대답했다.

"힘드시겠습니까?"

"아뇨, 아닙니다. 힘든 건 아닌데… 오히려 지부장님이 괜찮으신 겁니까?"

션 지부장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고말고요."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것도 웃기겠지만,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국제협회 지부라고 하지만, 3억 달러를 갚는 게 쉽진 않을 겁니다."

"아뇨. 이미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션 지부장이 몇 번이나 단호하게 대답하자, 그제야 롱 사장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계약 진행하도록 하죠."

그는 준비해둔 서류를 꺼내 들었다.

"헤르메스는 앞으로 국제협회 소속 베트남 지부에 1년간 3억 달러를 투자할 겁니다."

곧바로 계약 내용을 구두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상환 기간은 3년이지만... 6개월 동안 원금의 10% 이상 상환 못 하거나 1년 동안 30% 이상 상환을 못 할 시, 베트남 국제 부산물 허브의 매각 절차가 진행됩니다. 확인하셨습니까?"

"예."

정말 확인한 건지 모를 정도로 빠른 대답.

이내 션 지부장은 곧바로 계약서 하단에 서명을 휘갈겼다.

"이거 참, 이런 규모의 계약은 창립 이래 처음입니다. 제가 다 심장이 벌렁거리는군요.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롱 사장이 서류를 정리하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션 지부장은 더 이상의 볼일은 없다는 듯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어, 나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그는 핸드폰을 꺼내 조나단 통제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되셨습니까?」

"예정대로 3억 달러 계약 체결했어. 지금부터 국내, 해외 가릴 것 없이 헌터들 끌어모아. 지원팀 가동 준비하고, 청소팀도 확대해."

「아, 처, 청소팀 확대 말입니까? 청소팀 운영 권한은 저희에게 없는데....」

"멍청한 새끼야. 일단 청소부들 데려다가 이름만 다르게 붙이면 되잖아. 대충 던전 관리팀으로 지어서 닥치는 대로 모집해."

「아, 넵. 알겠....」

대답을 채 듣지도 않고는 통화를 종료했다.

자금줄도 생겼겠다, 이젠 걱정할 것 없다.

미청소 던전만 해결되면 모두 없던 일로 넘겨버릴 수 있다.

그럼 이후 본부에 연락해서 작은 실수가 있었지만, 문제없이 해결했다고 보고하면 끝이다.

아무리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이미 해결했다는데, 어쩌겠는가.

웨슬리 사무총장님도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 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김준우가 지부를 상대로 한 행위를 명백한 선전포고로 간주, 공습을 요청해서 WDSO를 날려버린다.

김준우는 이곳에 발이 묶인 채 폭격당하는 본부를 바라만 보게 되겠지.

'우리를 무너트리려다가 역으로 본인이 무너지게 되겠군....'

그러게 어디서 개수작을 벌이는가.

션 지부장의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

프랑스, 파리.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일본 지부 건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웨슬리 사무총장이 케이트 수행비서에게 물었다.

"준비는 끝마쳤다고 합니다. 다음 주면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녀는 준비해둔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확인했다.

간만에 퍽 상쾌한 기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생각보다 일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으니.

카르마… 아니 WDSO 놈들도 조용하고 말이지.

'막상 국제기구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니 움직이기가 겁이 나는 모양이군....'

그래, 패배자들끼리 모여서 국제기구라고 정한 게 뭐 그리 큰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의 토벌을 모두 관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굳이 우리와 대항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국제기구가 되자마자 김준우는 청소팀으로 좌천당했고, 새롭게 책임자가 된 박 사무총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니.

굳이 우리와 싸울 이유가 없다.

리스크를 짊어질 필요 없이, 토벌 관리만 해줘도 국제기구로서의 영향력은 유지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대로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라.

우리가 잡아먹기 편하게.

그렇게 미소 짓던 그때였다.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를 받아 보니, 다름 아닌 션 지부장이었다.

"통화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이번엔 또 어쩐 일이신가요?"

「그, 다른 게 아니라....」

웨슬리 사무총장이 묻자, 션 지부장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사실… 며칠 전, 사소한 실수 때문에 미청소 던전이 발생했었습니다.」

"...네?"

사무총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청소 던전이라니, 대체 어쩌다가…?"

「김준우가 몰래 지부에 잠입해 있었습니다.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던 틈을 타서 지부 청소팀을 반토막 내버렸고, 그 때문에 작업 일정이 계속 밀렸던 것 같습니다.」

"하."

멍청한 놈.

그렇게 주의하라고 당부하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 약 3일간의 작전 중지와 더불어, 총 30개의 미청소 던전이 발생했지만....」

"...."

그런 중대한 문제를 이제 와서 보고하는 꼴이 무척이나 괘씸했지만, 굳이 화를 낼 것까진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본인의 실수를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직접 연락을 해왔다는 건, 이미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대응에… 실패했습니다.」

"...네?"

그 순간, 귀를 의심케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시, 실패했다니. 그게 무슨...."

「제, 제가 잘못 판단했습니다. 인력과 지원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션 지부장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에 못지않게 웨슬리 사무총장의 핏대 또한 떨리기 시작했다.

「현재 105개 이상의 미청소 던전이 출현했고... 더 이상의 작전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

웨슬리 사무총장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리고 이내.

"어쩔 수 없죠. 베트남 지부... 포기합시다."

「저, 그, 그런데...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시발, 이번에는 또 뭔가.

「허브를 담보로 투자를 받았는데... 지부를 포기해버리면 허브가....」

"하… 하하하."

기어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브를 담보로 넘겼다고?

진짜 쳐 돈 건가?

믿고 맡겼더니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얼마를 받았습니까?"

애써 분노를 참으며 물었다.

「3억 달러....」

그 어마어마한 액수에 기어이 이성의 끈이 뚝 끊어져 버렸다.

"지금 당장 모든 직원 데리고 본부로 복귀하세요."

「네, 네? 그럼 지부는....」

"한마디만 더 하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죽여 버릴 것 같으니, 닥치고 복귀하세요."

「....」

전화기 너머에서 겁에 질린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은 전화기를 부술 듯이 끊었고, 거친 숨을 내몰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케이트, 우리 예산 얼마나 남아 있죠?"

"...5억 달러쯤 있습니다."

"5억 달러…? 저번 달에 10억 달러 이상은 있지 않았나요?"

웨슬리 사무총장이 날카롭게 쏘아대자, 케이트 수행비서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최근 일본 지부 건에 예산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또한, 아직 이번 분기 토벌 수익이 모두 정산되지 않았고요. 앞으로 6개월간은 이 예산에 맞춰 운영해야 합니다."

"빌어먹을...."

3억 달러를 갚고 나면 2억 달러밖에 남지 않는다.

2억 달러로 6개월간 모든 지부를 운영할 수 있나?

'가능할 리가 없지....'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허브를 되찾겠다고 스스로 구덩이에 빠질 수는 없다.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뿐.

"허브고 뭐고, 베트남 지부를 포기합니다. 모두 철수시키세요."

"그럼 지부 운영권은...."

"그건 현지에서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고, 직원들만 모두 데려오라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수행비서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럼 미청소 던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빌어먹을, 그걸 왜 우리가 해결해야 합니까?"

"이대로 내버려두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위험해질 겁니다. 이 상황에서 저희의 실수는 WDSO에 기회가 될 거고요."

"...."

한숨을 푹 내쉬길 한 차례.

"지금 당장 뱅크 아이템 관리팀에 연락해서...."

어쩌겠는가.

100개가 넘는 미청소 던전을 이제 와서 처리할 수도 없는데.

"베트남 전 지역, 던전 출현 봉쇄시키세요."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

세 남자가 마주 보고 있는 테이블.

그 자리에서 후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현재 본부 소속 직원들 중심으로 철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철수라뇨? 그럼 투자금은...."

"못 돌려받겠죠."

그와 동시에 헤르메스의 롱 사장이 아연실색하며 물었고, 이내 내가 대답했다.

"모두 WDSO에서 지원해준 금액이니 저희야 상관없겠지만, 김 팀장님이야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대로 철수해버리면 투자금은 일절 회수하지 못할 텐데...."

"글쎄요."

나는 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베트남의 유통 기업, 헤르메스.

션 지부장이 그곳을 찾아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롱 사장과 접촉했다.

그리곤 곧 허브를 담보로 투자 계약을 체결하려는 사람이 올 테니, 반드시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투자금은 WDSO에서 모두 지원해준다는 조건으로.

"아직 1억 달러도 채 투자하지 않았는데, 상환을 포기한다면 오히려 저희에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허브를 고작 1억 달러에 매각한 거나 다름이 없으니."

"...."

롱 사장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지부가 철수할 걸 알고 계셨던 겁니까?"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었다기보단... 뻔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번 사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돈과 인력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절대 수습할 수 없도록 계획한 일이니까.

시도는 해보겠지만, 아마 얼마 가지 않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겠지.

그러고 나면 그때야 본부에 연락을 취할 것이다.

오늘부로 베트남 전역에 총 100개가 넘는 미청소 던전이 출현했다.

모든 작전은 올스탑이 될 것이고.

게다가 허브를 담보로 거액이 묶여 있는 상태.

이런 상황에서 본부가 선택할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모두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 외엔.

이것으로 지부와 허브는 다시금 우리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남은 한 가지 문제.

"하지만... 그럼 미청소 던전은 어떻게 하죠? 아무도 해결할 수 없다는 건, 그걸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는 건가요?"

마침 후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걱정스레 물었다.

"내버려두고 자시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예?"

"베트남은 이제부터 던전에서 해방될 예정이니까요."

"...!"

"...?!"

그 대답에 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시민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던전이 사라진다면 기뻐하는 게 맞을 겁니다. 그런데도 던전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겠죠."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던전을 봉쇄한다는 웨슬리 사무총장의 협박에 넘어간 건, 아직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만약, 준비가 됐다면 어떻겠습니까?"

후인 지부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토벌 수익이 없어도 충분히 산업이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도 던전이 필요할 것 같습니까?"

"하,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후인이 이의를 제기하려 했지만, 그 순간 곧바로 무언가를 눈치챈 듯, 스스로 말을 끊었다.

"설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트남은 앞으로 허브와 유통에 올인할 겁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두 남자를 바라봤다.

"이미 그걸 위한 기업도, 직원도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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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금 김의 말은... 토벌 산업을 포기하고, 헤르메스에 투자하시겠다는 건가요?"

후인이 퍽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맞습니다. 뭐, 사실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하, 하지만 저희는 토벌 사업을 대체할 만큼 큰 규모의 회사가 아닙니다."

내 대답에 헤르메스의 롱 사장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 또한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인 듯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충분히 성장하실 때까지 WDSO에서 전폭적으로 투자할 생각이니."

"그, 그게 무슨...."

"이아영 본부장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녀를 호출했다.

그러자 그녀는 준비해둔 서류를 꺼내 들며 자세한 사업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헤르메스는 허브 운영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들의 부산물 유통을 총괄할 예정입니다. 추정 수익은 첫 분기 천만 달러, 최초 1년 동안 2억 달러 이상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

"...."

"나아가 아시아 전체 부산물 유통을 총괄하게 된다면, 기대 수익은 7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뭐, 사실 최대한으로 봤을 때의 수치지만.

"기존 협회 수익이 연 5억 달러 안팎이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토벌 산업을 대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묻자 두 남자가 눈치를 보며 대답을 아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롱 사장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저희 회사를 토벌 산업을 대체할 기업으로 키워주신다는 건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왜 하필 저희입니까? 그동안 카르마 코퍼레이션이랑 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만한 자격이 되는 것도 아닌데...."

"오해가 있으시군요. 제가 토벌 산업 대체 기업으로 선택한 건, 헤르메스뿐만이 아닙니다."

"예?"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고, 나는 대답 대신 회의실 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오십시오."

그와 동시에 사무실로 몇 명의 인원이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우리를 향해 꾸벅 인사를 건네는 이들.

후인은 대체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지만.

"자, 잠깐만요. 저분들은...."

롱 사장은 그들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오, 서로 구면이신가 보군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죠."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 등장한 이들 앞에 서며 말을 이었다.

"지부가 사라진다면 헌터와 통제팀 인원 그리고 지원팀 전문가들이 갈 곳을 잃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각자의 역할에 맞춰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필요가 있겠죠."

곧바로 가장 앞에 있는 남성을 소개했다.

"IT 기업, 망고 소프트의 훙 대표님입니다. 오늘부로 망고 소프트는 기존의 통제팀과 함께 WDSO의 공식적인 국제 던전 출현 탐지 시스템을 개발할 예정입니다."

"반갑습니다."

훙 대표가 꾸벅 인사를 했다.

이어 옆에 있는 여성을 가리켰다.

"바이오 기업, 호라이즌 바이오로직스의 즈엉 사장님입니다. 앞으로 지원팀과 함께 이클립스 베트남 지부에서 활동할 것입니다. 당연히 허브와도 교류를 이어가실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PMC 업체, 블랙벙커의 꾸옥 대표님입니다. 블랭벙커는 이후 기존 작전팀과 함께 국제 토벌 파견팀을 신설할 계획입니다."

내 소개에 중년 남성이 말없이 고개를 꾸벅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롱 사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헤르메스는 국제 부산물 유통을 책임질 예정입니다. 기존 청소팀과 함께."

"...."

"...."

두 남자는 입을 다문 채 두 눈을 끔뻑였다.

아직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하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김 팀장님."

때마침 응우옌 전 작전 본부장이 조심스럽게 회의실로 들어왔다.

해고당한 직후부터 그는 계속 내 옆에서 머물렀다.

혹시 모를 암살이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지부가 난리가 난 통에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눈에 띄지 않게 지부 상황을 지켜봐달라고 요청했고, 드디어 지금 그 결과를 가지고 온 것이다.

"직원들을 시켜서 알아봤는데, 오후 두 시 경부터 베트남 전역에 던전 출현이 멈췄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기다렸던 소식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역시나 예상대로 움직여줬다.

차원석을 이용한 전 지역 던전 봉쇄.

하긴 100개가 넘는 미청소 던전을 내버려뒀다간 본인들에게도 어마어마한 타격일 테니, 당연한 선택이겠지.

"제가 말했죠? 국제협회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고, 그 선택이 우리에겐 해결책이 될 거라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모인 모든 이들을 번갈아 바라보길 한 차례.

"오늘부로 베트남은 던전에서 완전히 해방된 첫 번째 국가가 되었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축하드립니다."

***

충격의 연속이었던 회의가 끝나고 김준우와 이아영이 돌아간 직후.

"...."

"...."

후인과 롱 사장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애초에 이 소식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있긴 할까.

"대체 저분은 언제부터 이걸 계획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때, 롱 사장이 넌지시 물었다.

후인은 속으로 날짜를 센 뒤 대답했다.

"한 달… 조금 안 됐군요."

"허, 세상에...."

기가 찬다는 반응.

그건 후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작 한 달 만에 완벽하게 지부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아니, 주도권을 찾은 게 아니라....

토벌 사업 자체를 없애버렸다.

'더 이상 남에게 휘둘리기 싫다곤 했지만, 그렇다고 설마하니 던전 자체를 없애버릴 줄이야....'

후인은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사실 김준우가 말했듯, 시민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던전이 사라지면 응당 기뻐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매일매일 수십 번씩 일어나는 전쟁이 없어진다는데, 그걸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렇기에 웨슬리가 던전을 없애겠다고 협박을 한 것도, 또 그 협박에 넘어간 것도 사실상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던전을 포기하지 못할 만큼, 토벌 산업이 국가 산업으로 깊게 자리매김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걸 도려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시민들의 안전이 위태로운 걸 알면서도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토벌이 아니더라도 대체할 수 있는 사업이 있다면, 그리고 지부의 모든 인원이 일자리를 잃는 일 없이 자신의 분야를 이어갈 수 있다면....

던전은 없어도 그만이다.

아니, 애초에 없어져야 할 문제였다.

김준우는 그 첫 단추로 청소팀을 축소했다.

이로써 전체적인 토벌 일정에 문제를 야기시켰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부장이 어떻게 움직일지, 웨슬리 사무총장이 어떤 선택을 할지를 정확하게 예상하고 모든 것을 준비했다.

국제협회는 처음부터 김준우의 손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협회가 이렇게 쉽게 물러날 줄이야. 그것도 두 번이나....'

후인이 실소를 뱉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아닌 게 아니라, 불현듯 불길한 기분이 스친 까닭이었다.

***

"수고했어요."

대책회의 겸 사업 설명회를 마친 후, 숙소로 돌아가던 중.

운전대를 잡은 이아영 본부장이 넌지시 그 말을 건넸다.

"수고는 무슨... 한 게 뭐가 있다고. 다 저쪽에서 알아서 움직여준 것뿐인데요."

"그걸 다 예상하고 미리 준비해놨다는 게 대단한 거 아니에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띄워줍니까?"

평소답지 않은 칭찬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자, 그녀가 피식 미소를 흘렸다.

"이전에 구조조정 당한 청소부들...."

그리곤 나를 슬쩍 흘기며 말을 이었다.

"최근에 전부 헤르메스로 이직했다던데요? 어느 분의 추천을 받고."

"...."

소식 한번 빠르군.

"그래서 그렇게 망설임 없이 진행했던 거예요? 어차피 지부는 무너질 거고, 청소팀을 다른 회사와 합병할 계획이었으니. 애초에 누가 구조조정 당하든 상관없는 일이어서?"

"뭐...."

나는 어물쩍 대답을 피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곧이곧대로 긍정하기엔 꽤나 낯간지러웠던 까닭이었다.

"미리 말해주면 오해하지도 않았을 텐데. 팀원들이 실망하지도 않았을 거고."

"지금이야 계획대로 됐으니 상관없지만. 당시엔 확실하지 않은 일이었잖습니까."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근거도 없이 던전이 없어질 거고, 청소팀은 다른 회사로 이직할 거라는 소리를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오히려 구차하게 변명한다고 더 뭐라 했겠죠."

"뭐, 그것도 그러네요."

내 대답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다행이에요."

"…뭐가 말입니까?"

그녀는 이내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가 알고 있던 당신이어서."

"...."

뭐라는 거야.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일단 대충 윤곽이 잡힐 때까지는 지켜볼 생각입니다. 크게 할 일은 없을 것 같고, 저 혼자여도 충분할 테니 먼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됐어요."

그녀가 즉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당신 없이 돌아가서 뭘 하겠어요. 좀 더 어울려줄게요."

"...."

태세 전환 한번 빠르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지금 시간 좀 되십니까?"

"음? 시간이야 되죠. 어디 가게요?"

"백화점에 갔으면 해서요."

내가 말하자, 그녀의 눈썹이 물결쳤다.

"갑자기 백화점은 왜요…?"

"4팀에 도안 씨, 이번에 아빠가 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여자아이한테는 어떤 선물이 좋을지 모르겠군요."

그녀가 작게 미소를 짓길 한 차례.

"좋아요. 가요."

대답과 함께 운전대를 돌리는 순간, 내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해보니, 허브 답사를 보냈던 현지 청소부 중 한 명이었다.

"여보세요?"

「김! 지, 지금 허브가…!」

쿵―!

쿠구궁―!!

그 순간, 귀를 울리는 폭음이 핸드폰 너머로 생생히 전달되었다.

내 표정이 바짝 굳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지금 그 소리 뭡니까!"

「…지, 지금 션 지부장이랑 국제협회 소속 직원들이...」

건너편에선 무어라 계속 떠드는 듯했지만, 쉬지 않고 이어지는 굉음에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허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가 정확하게 들렸다.

"...뭐, 뭐라고요?"

「빠, 빨리 와보셔야 할 것 같습…!」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굳은 표정으로 조용해진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나온다고…?'

물론 궁지에 몰린 국제협회가 이판사판으로 무력을 쓰는 상황을 아주 상정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다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웨슬리 사무총장이 그런 선택을 내릴 리가 없다.

약점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 그의 성격상 절대 명분 없는 일은 벌이지 않으니까.

이미 베트남에 대한 모든 걸 포기하고 철수하는 마당에, 보복성으로 공격을 시도하는 건... 그들에게 아무런 명분도, 이득도 없다.

아니, 오히려 그들에게 손해만 가져올 뿐이다.

'설마 현장에서 독단적으로 벌인 건가.'

명령이 떨어진 게 아니라면 일을 벌였을 사람은 뻔하다.

션 지부장....

설마 이 정도로 멍청한 인간일 줄이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쇼핑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네요."

상황을 파악한 이아영 본부장이 냉정하게 말했다.

끼이이익―.

그리곤 운전대를 확 꺾으며 속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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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북부, 라이 차우.

라오스, 중국, 베트남, 세 국경이 맞닿아 있는 그곳에 위치한 부산물 허브.

대륙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관문이자, 주변 국가들의 모든 부산물이 모여드는 그곳에서 션 지부장은....

쾅, 콰광―!

"...."

아무 말 없이 허브가 공격받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히도 지금 공격을 퍼부어대는 이들은, 그와 함께 철수 명령이 내려진 본부 소속의 직원들이었다.

션 지부장은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얼굴 서린 깊은 두려움은 숨기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철수 명령이 내려진 지금, 본부로 돌아가면 어떤 처분을 받을지 너무나 자명했으니.

"지, 지부장님...."

그때, 옆에서 함께 상황을 지켜보던 조나단 통제팀장이 불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본부에서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일단 그냥 돌아가는 게...."

"너 말이야. 이대로 돌아가면 살 수 있을 것 같냐?"

션 지부장은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우린 지금 다 X 됐어. 허브는 물론이고, 베트남 전체를 우리 때문에 포기하게 됐다고. 수십억 달러의 빚은 또 어쩌고. 사무총장님이 그 손해를 그냥 넘어갈 것 같아?"

"...."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비는 게 나을지도 몰라."

션 지부장의 그 말이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나단 팀장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그럴 바엔 조금이라도 손을 쓰는 게 낫지."

션 지부장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는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김준우의 손에서 놀아났다는 것을.

애초에 무슨 짓을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돈과 인원이 있어도 초기에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이상, 결코 되돌릴 수 없었다.

김준우는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협상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덕분에 허브를 담보로 수억 달러의 빚을 졌고, 이를 시작으로 지부와 베트남 전체를 통째로 넘겨주게 되었다.

본인의 실수 한 번으로, 사무총장님의 계획에 먹칠을 해버린 것이다.

그 값은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턴... 앞뒤 가릴 것 없이 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

여기서 허브를 박살 내 버린다면, 최소한 다른 놈에게 넘어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겠지.

본부의 손해를 메우진 못해도 그 누구도 이득을 보지 못하게는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다면....

어쩌면 조금은 참작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부장님!"

머릿속으로 최대한 긍정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던 그때, 이번엔 크리스 작전 1팀장이 다가오며 소리쳤다.

"뭐야?"

"확인해보니 아직 안에 민간인이 있습니다. 일단 공격을 멈추고 그들이 모두 대피하면 다시 공격하는 게...."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네?"

"안에 민간인이 뭐 어쩌라고?!"

션 지부장이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지금 남의 목숨 신경 쓸 때야? 김준우, 그 새끼가 오기 전에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상관하지 말고 공격해!"

"...."

그의 눈은 이미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

크리스 팀장 또한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이내 단념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부하들에게 공격을 속행하라는 명령을 내리려던 그 순간.

"곱게 돌아갈 기회를 줘도 마다하시는군요."

등골이 오싹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그 목소리에 일제히 고개를 돌리자….

"지금, 기어이 선을 넘으셨습니다."

[고유 스킬 : 마왕]

어느 악마와 마주했다.

***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온 허브.

아니나 다를까, 션 지부장과 본부 소속의 직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션 지부장님, 미쳤습니까?"

"...."

션 지부장을 향해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안에 민간인이 있는 거 알고도 공격하신 거, 국제협회 본부도 그리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

션 지부장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입을 열진 않았다.

보아하니 이미 눈이 맛탱이가 갔다.

저 상태로는 설득도 의미가 없다.

뭐,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긴 했지만.

[고유 스킬 : 마왕]

스스스―.

검은 기류가 뿜어져 나오며 공격태세를 갖추던 그 순간.

"무, 무시해! 무시하고 허브만 공격해!!"

션 지부장이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부하들 또한 그 명령을 곧바로 받아들였다.

쿠구구궁―!

콰광―!!

"이런, 시발…!"

또다시 허브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한 공격.

나는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고유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더 데이 오브 다크 문]

스으으으―,

하늘 위로 검은 그믐달이 떠올랐다.

파바바바박―!!

희끄무레한 달빛이 검은 칼날로 변하며 땅 위로 쏟아졌다.

"으아악!!"

"끄으윽…!"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수많은 비명.

하지만....

쾅, 콰과광―!

퍼버벙―!

옆의 동료가 쓰러지든 말든 허브에 계속 공격을 퍼부어댔다.

이미 그곳에 있는 모두가 이성을 잃었다.

그저, 허브를 무너뜨리기만 하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이 지배된 채였다.

"빌어먹을…!"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습득 스킬 : 퀘이사]

쾅―!!

콰과광―!!

그들을 막기 위해 나 또한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지만....

'시발, 너무 산개해 있어....'

수백 명의 인원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허브를 둘러싸고 있다.

허브와 함께 주변을 통째로 날려버리지 않는 한 저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일일이 처리하기엔 시간이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던 그 순간.

쿠구구궁―!

"시발...."

기어이 허브 메인 출고지 A동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저 안에는 허브 직원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이 있다. 지금 당장 구출하지 않으면 늦는다.

'시발, 그럼 이 새끼들은 어떻게 해야…!'

불과 몇 초 사이.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가 터지도록 수십 수백 번을 고민하던 그때였다.

"김 팀장님은 안에 있는 사람들 먼저 구출해주십시오."

"...!"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응우옌 작전 본부장이었다.

"밖에 놈들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저희라니...."

내가 묻자,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내 응우옌 본부장의 뒤를 따라 수백 명의 현지 작전팀 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저 인원을 다 소집했대....'

뭐, 타이밍은 훌륭하다만.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

"안에 얼마나 있는지 확인이 안 됩니다. 저 혼자는 어렵습니다. 지원을 요청해야...."

"걱정 마십시오."

"…예?

"이미 요청했습니다."

응우옌 팀장이 그 말을 전하는 순간이었다.

"준우야!"

"준우 씨!"

"야 이, 새끼야! 죽고 싶으면 말을 해!"

저 멀리서 청소 3팀 전원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는 게 보였다.

지원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김!"

"혼자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김!"

"이런 일이 있으면 바로 불렀어야죠!"

현지 청소팀.

몇 주 동안 함께 작업을 이어갔던 그 모두가 이 자리에 모여든 것이다.

"…뭡니까?"

"잊었냐, 이놈아? 우리 업무 중에 던전에 갇힌 헌터들 구출도 포함되는 거?"

"저 새끼 저거, 또 혼자서 멋있는 척하려는 거야."

"혹시 몰라서 장비도 챙겨왔어요. 지하에 대피소가 있어서 직원들이 잘 대피했다면 아직 늦진 않았을 거예요."

박근태 부장과 한상혁 그리고 문소연은 그렇게 한마디씩 거들고는.

"상혁아 로프 꼭 챙겨라. 소연이는 방독면 체크 좀 해주고."

"건물 내부 지도 PDA에 업로드해 놨습니다. 다들 한 번씩 확인해주세요. 1층 대피소 먼저 확인할 거고, 이후 2, 3층 차례로 수색할 겁니다."

"현장 지휘는 제가 맡을게요. 다들 무전기 채널 열어두세요."

"오케이!"

"알겠습니다."

"...."

나는 그 분주한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 뭐.

이 정도면 믿을만하겠지.

"들어가십시오. 엄호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응우옌 본부장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등을 돌렸다.

"청소 3팀, 진입합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쾅, 콰광―!!

쉴 새 없이 공격이 빗발치는 그곳.

크리스 작전팀장 또한 이성을 잃은 채, 허브를 향해 공격을 이어가던 그때였다.

펑―!!

"윽…!"

어디선가 날아온 공격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퍼뜩 고개를 들어 보니.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눈앞에는 다름 아닌 응우옌 작전 본부장이 서 있었다.

"이 새끼가...."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작전팀의 리더라는 분이 지금 무슨 개짓거리를 하고 계신 겁니까?"

그의 물음에, 크리스 팀장은 대답 대신 피식 실소를 뱉었다.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살려놨더니, 기어이 죽여 달라고 내 앞에 나타나네."

크리스 팀장은 곧바로 몸을 일으키며 응우옌 본부장을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응우옌 본부장이 실소를 뱉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찾아오길 내심 기대했습니다."

"...뭐?"

"위아래도 모르고 시건방 떠는 그 주둥이를 내 손으로 날려주고 싶었거든요."

"하, 이런 미친놈을 봤나…!"

[고유 스킬 : 지옥술사]

[헬 피스트]

응우옌 본부장의 도발에 순간 이성을 잃은 그가 이내 두 주먹을 치켜들었다.

쿵, 쿠웅―!!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자, 손에서 뿜어져 나온 응축된 화염이 응우옌을 향해 날아들었다.

물론 응우옌 또한 가만히 있진 않았다.

[고유 스킬 : 비스트 - 청룡]

그그그극―.

뿔과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하며, 푸른빛이 감도는 용인(龍人)의 형태로 모습을 바꿨다.

쾅―!!

크리스 팀장의 화염이 그에게 정면으로 직격했다.

그 충격에 응우옌 본부장이 순간 주춤했고, 크리스 팀장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진심으로 본부 출신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냐? 너희같이 밑바닥 놈들이랑은 격이 달라, 이 아시안 새끼야!"

[고유 스킬 : 지옥술사]

[헬 브레스]

[헬 피스트]

[헬 사운드]

쿠구구구구―!!

펑, 퍼버벙―!!

콰과광―!!

그는 응우옌 본부장을 향해 계속해서 스킬을 퍼부어댔다.

그를 가지고 논다거나, 격의 차이를 보여준다는 생각 따윈 없었다.

그저 분노에 몸을 맡긴 채, 눈앞의 남자를 죽인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허억, 허억...."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몇 번이고 스킬을 때려 박았는데, 어째선지 눈앞의 남자는 쓰러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맷집 하나는 좋네, 새끼가...."

이내 크리스 팀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미 허브를 공격하느라 힘이 꽤 빠진 상태였는데, 도발에 넘어가 앞뒤 없이 스킬을 쏟아냈으니 체력이 순식간에 고갈되어 버린 것이었다.

"동감입니다. 격이 다르죠."

결국, 크리스 팀장의 공격이 멈춘 그때.

몸을 웅크린 채 방어만 하고 있던 응우옌 본부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천천히 방어를 풀며 크리스 팀장을 바라봤다.

응우옌 작전 본부장.

그는 몇 년 동안이나 후인과 함께 지휘도, 지원도, 지부도 없이 매분 매초 목숨을 내걸고 작전에 뛰어들었다.

맨몸으로 수백 번 토벌에 나섰고, 그때마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수백 번, 모두 살아나왔다.

그의 무기는 강력한 스킬도, 명품 무기도, 높은 랭크도 아니다.

그저.

[고유 스킬 : 비스트 - 청룡]

[각성 - 용의 분노]

수백 차례의 토벌에서 목숨을 걸며 터득한 압도적인 경험.

오로지 생존을 위한 전투.

그 자체였다.

[동방태세신(東方太歲神)]

[첫 번째 권]

구구구구―!

이윽고 주변이 크게 요동치며 응우옌의 전신에서 푸른 기운이 맴돌았다.

"하, 그깟 B랭크 스킬로 무슨 허세를…!"

[용화각]

쾅―!!!

어마어마한 폭발음과 함께, 응우옌의 주먹이 크리스 팀장의 복부를 직격했다.

크리스 팀장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온몸의 장기가 뒤틀리는 고통에 움직이지도, 숨도 쉬지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지원을 받으면서 안전한 작전만 해온 당신이, 진심으로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았습니까?"

"...."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응우옌을 올려다보는 순간, 크리스 팀장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웠다.

전신이 떨려오기 시작했고, 그는 죽을힘을 짜내 입을 열었다.

"자, 잠깐...."

"아, 그리고."

하지만 응우옌 본부장은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존칭 쓰십시오."

슈욱―!

이윽고 푸른빛이 맴도는 그의 주먹이 다시 한번 크리스 팀장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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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브 메인 출고지, A동.

놈들의 공격에 기둥이 무너지며 붕괴하기 일보 직전인 내부는 심한 연기와 흙먼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어찌어찌 진입은 했다만....'

너무 어두워서 위치 파악도 힘든 데다가, 곳곳에 무너져 내린 잔해들 때문에 이동하는 것조차 꽤나 애를 먹는 중이었다.

거의 던전이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

더 이상 단체로 다니는 건 힘들다고 판단했기에, 나는 이동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길이 너무 좁군요. 한꺼번에 이동하는 건 힘들 것 같으니 갈라져야겠습니다."

현지 청소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현지 2팀, 5팀 분들은 2층. 6팀, 8팀 분들은 3층… 나머지 분들은 창고와 분류지를 수색해주십시오. 1층과 대피소는 저희 팀이 수색하겠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린 서로 갈라져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나를 포함한 청소 3팀 또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대피소로 향하는 복도의 모든 문을 열어보며 천천히 수색을 이어가던 도중.

"현지 청소팀 통째로 다른 기업이랑 합병된다면서? 구조조정 당했던 팀도 같이."

박근태 부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게 되긴, 이놈아. 처음부터 다 생각해둔 거 아니야?"

"...그렇긴 하죠."

내가 대답하자, 박근태 부장이 나를 슬쩍 흘기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말 좀 해라. 팀이잖냐."

"...."

대답을 아끼고 있자니 그가 다시 물었다.

"아니면 아직도 우리가 못 미덥냐?"

"…그건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는 우리도 좀 알고 하자, 이놈아."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다른 때와는 다르게 사뭇 진지한 목소리.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박근태 부장은 그제야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때.

"어, 저기요…?"

현장 지휘를 맡은 문소연이 앞장서서 동선을 확인하던 중, 무언가를 발견한 듯 우리를 불렀다.

"안내도를 보면 이 앞이 바로 대피소인데...."

"...이런."

"꽉 막혔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무너져 내린 잔해들이 길을 틀어막고 있었다.

"어떡하죠? 다른 길을 찾기에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쓰읍… 준우, 네가 스킬로 뚫어보는 건 어떠냐?"

박근태 부장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자칫하다간 완전히 내려앉을 수도 있어요."

"씨, 그럼 어떡하냐…?"

"중장비로 위에서부터 걷어내는 게 아니면 힘들 텐데...."

한상혁과 문소연 또한 뾰족한 수가 나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팀원 모두가 눈앞의 장애물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길 잠시.

"야, 혹시 드릴 갖고 왔냐?"

문득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라 한상혁에게 물었다.

"어, 갖고 오긴 했는데… 드릴로 뭐하게?"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분해해 보자."

"뭐…?"

"네, 네? 그, 그러다 무너지면 어떡하려고요?"

내가 대책을 제안하자 팀원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힘을 받고 있는 잔해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물론, 지탱하고 있는 잔해를 건드렸다간 무너져 내리겠지만...."

그 순간.

쿵, 쿠구궁―!

또다시 건물 전체에 충격이 울려 퍼졌다.

아직 공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균열이 발생하는 천장을 슬쩍 바라보곤 말을 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없습니다. 바닥을 조금 파내고 천천히 분해하면서 기어 나올 수 있을 만큼의 공간만 확보하면 됩니다."

"하지만… 돌무더기를 그렇게 정교하게 분해할 수 있는 거냐?"

"무슨 소립니까? 이미 수십 번도 더 해본 일인데."

"…그게 무슨 소리야?"

박근태 부장의 물음에,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대답했다.

"골렘 사체 분해 작업 말입니다."

"...!"

"...!"

그 대답에 팀원들 모두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골렘 사체 분해는 가장 까다로운 작업 중 하나다.

체액이 닿는 순간 목숨이 위험한 맹독형이나 죽어서도 움직이는 곤충형 몬스터는 아니지만, 마력이 깃든 바윗덩어리라는 것 자체만으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분해 자체가 웬만한 방법으로는 시도조차 불가능했으니까.

무엇보다 골렘은 죽어서도 바닥에 쓰러지지 않는다.

그저 배터리가 나간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가동을 멈출 뿐이다.

다시 말해, 수 미터나 되는 그 거대한 돌덩이들을 선 채로 분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렸다간 한 번에 무너져 내려 사고가 나기 십상이니, 최대한 이음새를 파악해서 조심스럽게 작업해야 한다.

지금도 그것과 다를 것 없다.

수십, 수백 번 청소해온 이들이라면 더욱이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다.

"…알겠어요."

"쯧,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보지 뭐, 시벌."

그렇게 우린 챙겨온 장비들을 이용해 천천히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최대한 힘을 덜 받고 있는 잔해들을 조금씩 파냈고, 느리지만 정확하게 공간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10분쯤 흘렀을까, 어느 정도 공간이 확보된 그 순간.

"바, 밖에 누구 있습니까?"

"여기! 여기 사람 있어요!"

구멍을 타고 반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구멍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구조팀입니다. 지금 거기 인원이 총 몇 명입니까?"

"하나, 둘… 초, 총 23명입니다!"

"나머지 직원분들은 어디 계시는지 아십니까?"

"아, 아마 2층 휴게실에 있을 겁니다. 물류 창고랑 이어지는데, 거기에 있을 수도 있어요."

그 대답을 듣자마자 문소연이 곧바로 무전기를 들었다.

"전달합니다. 2층 휴게실 피구조자 확인 바랍니다. 물류 창고 수색 진행해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확인하겠습니다.」

상황을 전달한 후, 우린 곧바로 구조작업에 착수했다.

한 명씩 천천히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고, 응급 처치를 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2팀, 2층 휴게실에서 생존자 8명 구조했습니다. 지금 바로 대피하겠습니다.」

「7팀입니다. 물류 창고 생존자 11명 구조 완료했습니다.」

「9팀, 내부 수색 전부 마쳤습니다. 피구조자 없습니다.」

각 팀에서도 속속 보고가 들려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전원, 지금 바로 건물 밖으로 대피하십시오."

그 무전을 끝으로 나와 청소 3팀원들 또한 곧바로 생존자를 이끌고 건물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은 이상한 점 하나.

'공격이…?'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건물에 충격이 전해지지 않았다.

드디어 공격이 멈춘 것이다.

'설마 현지 작전팀이 모두 처리한 건가…?'

나름대로 꽤 쓸만한 놈들이군.

그렇게 생각하며 건물을 빠져나온 순간이었다.

"...."

곧바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끄으윽...."

바닥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는 응우옌 작전 본부장.

그리고 그런 응우옌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오랜만입니다."

웨슬리 사무총장이었다.

***

베트남 지부에 파견된 모든 본부 소속 직원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린 지 불과 몇 시간.

웨슬리 사무총장에게 갑작스러운 소식이 전달됐다.

다름 아닌, 모든 직원이 션 지부장의 지시로 허브에 몰려들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 단번에 눈치를 챘다.

그 새끼는 지금, 허브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이대로 본부에 복귀하면 자신이 어떤 처분을 받을지 뻔했으니, 최소한 참작이라도 받겠다는 심산으로.

본인의 실수로 허브는 물론, 지부와 베트남 통제권 전체를 뺏기게 생겼으니 어떻게든 살 궁리를 한 것이리라.

뭐, 이해는 한다만....

이건 최악 중 최악의 선택이다.

우리가 갖지 못할 바엔 아무도 갖지 못하게 하겠다는 게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허브를 공격해버리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웨슬리 사무총장은 크게 분노하며 당장 철수 명령을 내리려고 했지만, 이미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었기에 방도가 없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직접 현장으로 향했다.

허브에 도착하니 이미 건물은 반파되어 있었고, 밖에서는 현지 작전팀과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눈 깜짝할 새 그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그리고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현장을 뜨려던 그때.

"...오랜만입니다."

김준우가 허브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그는 웨슬리 사무총장이 직접 행차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퍽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뭡니까?"

이내 웨슬리를 마주한 김준우가 첫마디를 뱉었다.

"저희 직원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어서 말이죠. 그것도 민간인을 상대로 공격을 하고 있다는데, 책임자로서 가만히 있을 순 없죠."

"...언제부터 그런 걸 생각했다고?"

김준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라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죽는 게 달갑진 않습니다."

"국제협회가 민간인을 공격했다는 게 알려지면 세력이 우리 쪽으로 기울까 봐 그런 건 아니고요?"

"...뭐, 그런 것도 있고."

웨슬리 사무총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김준우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노려봤다.

"그래도 설마 직접 행차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고유 스킬 : 마왕]

"어떻게… 저번에 못다 한 얘기나 마저 할까요?"

김준우의 전신에서 검은 기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현장을 슬쩍 둘러보며 피식 미소를 흘렸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싸웠다간 기껏 힘들게 구한 직원들이 또 위험해질 텐데요."

"...."

"아무튼, 이렇게 돼서 안타깝게 됐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할 줄은 몰랐거든요. 정말로."

웨슬리 사무총장이 김준우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션 지부장이랑 직원들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우리 소속 놈들이 벌인 일이니까, 우리 쪽에서 책임지고 처리하는 게 맞겠죠. 뭐, 알아서 잘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시고."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김준우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오길 한 차례.

[고유 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랫 케이지]

쿵―!

허공에서 커다란 철장이 뚝 떨어지며 웨슬리 사무총장을 가두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스윽―.

아무런 힘도 쓰지 않고 철장을 그대로 통과해 빠져나왔다.

"알고 있을 텐데요. 우리 스킬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거."

"...."

"저는 여기서 싸울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헛고생하지 말고 생존자들이나 챙기시죠. 뭐… 언젠간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 말을 뒤로 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션 지부장과 직원들이 서둘러 따라갔다.

대기시켜놓은 헬기에 다다르자 션 지부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헬기에 탑승하기 직전이었다.

"저... 사, 사무총장님. 살려주셔서 감사...."

그리고 그 순간.

[고유 스킬 : 천지창조]

[11차원의 고유 공간을 창조합니다.]

서걱―!

그의 목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동시에 몸뚱이가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

"...!"

그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인 상황에, 그를 따라오던 나머지 직원들이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깊은 한숨을 한차례 내뱉고 직원들을 향해 돌아섰다.

"제가 철수하라고 하지 않았나요?"

직원들은 그 물음에 대답은커녕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이토록 분노한 모습은 모두가 처음 보았다.

"누구 마음대로 허브를 공격한 거죠? 베트남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서 내 앞날까지 망치려고 작정한 건가요? 대체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거죠?"

"...."

"...."

모두가 여전히 대답 대신 그저 제자리에서 벌벌 떨어대고 있던 그때.

크리스 팀장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곧바로 바닥에 몸을 바짝 낮추며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

서걱―!

하지만 그 역시 미처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또한 목이 사라진 몸뚱이가 션 지부장 옆에 나란히 놓였다.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은 다시 등을 돌리며 케이트 수행 비서를 향해 손짓했다.

"다 처리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뒤로하며 홀로 헬기에 탑승했다.

곧 뒤에서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그는 관심조차 없었다.

'머저리 같은 새끼들....'

그가 이를 으득 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베트남은 이제 본인의 손을 떠났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더 신경을 쓰는 수밖에.

그렇게 이마를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하던 웨슬리는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PB 코퍼레이션 대표, 에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혹시 보이드 제조 완료했어?"

「안 그래도 방금 클로이 팀장이 샘플 가져왔어. 1톤 정도 준비됐대.」

"좋아."

베트남 다음으로 WDSO에서 떨어트려 놓기 위해 벌써 준비를 완료해둔 곳.

일본 지부.

결과적으로 베트남은 실패했지만, 일본 지부만큼은 그럴 수 없다.

"이제 어중이떠중이 같은 새끼들한테는 못 맡기겠어."

「동감이야.」

"그러니까 이번 일은 네가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웨슬리의 말에 에마 대표가 침묵하길 잠시.

「알았어.」

이내 그녀가 실소를 뱉으며 대답했다.

PB 코퍼레이션 대표이자 웨슬리 사무총장의 최측근.

에마 대표가 직접 나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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