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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 소속 직원들에 의한 허브 공습이 일어난 지도 이틀이 지났다.

다행히 신속하게 상황을 정리한 덕에 A동만 피해를 보았을 뿐, 다른 건물에서는 정상적인 업무가 가능했다.

하루라도 가동을 멈추면 그 손해가 어마어마했기에 꽤나 걱정했지만. 뭐,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건물 안에 있던 직원들은 작은 부상만 있을 뿐,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밖에서 전투를 벌였던 현지 작전팀 또한 마찬가지.

전혀 대비하지 못한 공격이었음에도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된 것이다.

뭐… 일등 공신이 웨슬리 사무총장이라는 건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그만큼 국제협회 입장에서도 곤란한 일이었겠지.'

만약 누군가 죽기라도 했다면, 우리는 물론 국제협회 또한 최악의 상황이 될 터였다.

허브를 공격해서 민간인이 피해를 보았다는 사실이 퍼지면 국제협회에 대한 반발심이 더욱 커질 테니까.

그리고 그 반발심이 극에 달하면 각국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베트남이 던전에서 완전히 해방됐다는 소식이 곧 전 세계에 퍼질 것이다.

물론 그 소식을 듣고 다른 나라들 또한 단번에 토벌을 포기할 리는 없지만, 최소한 고려는 해볼 수 있는 선택지가 되겠지.

민간인마저 학살하는 국제협회에 협력하느니 피해를 감수하고 깔끔하게 던전을 포기하는 게 나을 테니까.

실제로 베트남은 던전에서 해방되고도 그다지 큰 타격이 없기도 했고.

아무리 통제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본인들에게 협력할 세력을 넓힐 필요가 있는 국제협회로서는 가장 피해야 할 상황일 것이다.

웨슬리 사무총장 또한 그것을 알고 있기에 직접 행차하면서까지 손을 쓴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놔줘도 됐을까요?"

베트남 지부.

아니, 이젠 토벌 인력 관리 센터로 명칭이 변경된 그곳에서 이아영 본부장이 넌지시 물었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저랑 근본적으로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놈입니다. 그놈이 싸울 생각이 없는 한, 저 또한 어떻게 할 수가 없죠."

"같은 힘이라뇨? 아무리 같은 스킬이라도 힘이 상쇄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일반적인 스킬이라면 그렇겠죠. 다만, 제 스킬은 검술과 마법처럼 한 가지 능력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잠시 말을 끊고는 숨을 골랐다.

나 또한 내 스킬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머릿속으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제 스킬은 사람에게 이능력을 부여하는 차원의 힘, 그 자체입니다. 다른 이들처럼 한 가지 특성이 있는 게 아니라, 의지대로 능력을 변형시킬 수 있죠."

"그런 건 처음 들어보는데요...."

"뭐, 저도 처음입니다."

나 말고 원형의 이능력을 가진 놈이 있다는 건.

"사실 그 자리에서 싸우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을 겁니다. 웨슬리도 말했듯, 민간인이 휘말릴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최소한 션 지부장이랑 직원들은 저희가 맡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어차피 우리가 데리고 있어도 경찰에 넘기는 것밖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는 말이죠! 국제협회에 맡기면 아무런 처벌도 안 받고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거잖아요. 최소한 죗값을 치르게 해야 했는데...."

"뭐,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네?"

이아영 본부장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올린다.

"죗값은 우리 쪽에서보다 그쪽이 더 달게 치러줄 테니까."

"...."

이아영 본부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뭐, 어쨌든 이렇게라도 끝나서 다행입니다. 업무도 정상화됐고, 허브 복구 비용도 국제협회에서 지불해준다고 했으니… 이젠 정말 마무리되겠군요."

그렇게 말하며 이아영 본부장을 향해 물었다.

"협력 기업들 상황은 어떻습니까?"

"뭐, 헤르메스 빼고는 다 좋아요. 바로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 예정이에요."

"그렇군요."

나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베트남은 완전히 국제협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닐 것이다.

현재 국제협회는 우리를 완전히 고립시킴으로써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베트남을 잃었다고 여기서 멈출 리가 없겠지.

또다시 우리 지부를 건드리려 할 게 뻔하다.

그러니 우리 또한 준비해야 하겠지만....

'쯧, 귀찮게....'

이번에는 운이 좋아 잘 해결됐지만, 다음에도 국제협회의 계획을 방어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순 없다.

던전 봉쇄 미끼가 먹히지 않을 테니 다른 방법을 쓸 텐데....

'차라리 베트남처럼 다른 나라도 모두 던전에서 해방시키면....'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이번엔 이것밖에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모든 나라가 던전에서 해방돼버리면 WDSO의 의의도 사라지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WDSO도 해체될 거고, 당연히 사무총장 자리도 물 건너간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던 그때, 마침 내 핸드폰이 울렸다.

「어떻게 됐냐?」

다름 아닌, 박인범 사무총장이었다.

"대충 해결됐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그 말에 나는 대답을 아끼길 잠시.

"저, 혹시 말입니다. 이제 슬슬...."

「안 돼.」

"...."

뭐, 뭐야?

뭔데 바로 거절해?

"아니,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안 된다는...."

「뻔하지, 인마. 이제 슬슬 사무총장 자리 넘겨 달라는 거 아니야?」

"...."

노인네, 눈치가 아주....

「세력을 키울 때까진 앞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하지 않겠다고 한 건 자네잖아? 왜? 빡센 일 한 번 하니까 후회돼?」

"그, 그건 아니고...."

「그래도 안 돼. 국제협회를 완전히 무너트릴 때까진 못 넘겨줘.」

"...."

쯧.

내가 양보 안 했으면 그 자리에 앉지도 못했을 거면서 이제 와서 꼬장을 부리네.

「그것보다… 그쪽 일 마무리 됐으면 이제 빨리 복귀해.」

"빨리 복귀하라뇨.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일본 지부에서 연락이 왔거든.」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본 지부에서 말입니까?"

「그래.」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국제협회에서 또 협박했다거나...."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다만....」

박인범 사무총장이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일본 내에서 보이드가 유통되고 있는 것 같다는 소식이야.」

"...정말입니까?"

「확실한 건 아니야. 유통 정황이 포착된 것도 아니고, 지부 쪽에서도 아직 확답을 못 주고 있긴 한데....」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럼 보이드가 유통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답니까?"

「지부 내에 중독자가 발생했댄다.」

"...!"

순간 미간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유통 루트도, 판매책도 아무것도 파악이 안 됐어. 다만, 자네도 알다시피 원 생산조직인 우노 엠피레가 해체된 이후로 보이드 제조법은 국제협회로 들어갔지.」

"어떻게 건너왔는지는 몰라도, 어디서 온 건지는 뻔하군요."

「그래.」

나는 잠시 대답을 아끼고는 생각을 정리했다.

뭔가 이상하다.

또다시 움직일 거라는 건 알았어도, 이건 너무 빠르지 않은가.

제조 시간도 그렇고, 유통책도 준비해야 했을 텐데... 베트남 건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렇게 움직인다고?

'설마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

곤란하게 됐군.

우린 아직 아무런 대책도 세운 게 없는데.

「아무튼, 지금 바로 복귀해. 나머진 얼굴 보고 얘기하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끊으며 곧바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이아영 본부장이 나를 흘기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바로 또 일이에요?"

"그럴 것 같습니다."

"쉴 시간도 없네요."

그녀의 말에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

"쉴 시간도 안 주시는군요."

대한민국 서울.

전 카르마 코퍼레이션, 현 WDSO 본부.

박인범 사무총장이 통화를 끝내자마자 마주 앉아 있던 이두식 이사가 말했다.

"이 상황에 쉴 시간이 어디 있나."

"하하, 여전히 엄격하십니다. 예전에도 연가 한 번 쓰겠다고 하면 아주 역정을 내시지 않았습니까."

"그거랑 이거랑 같냐? 뭐… 애초에 쉬라고 해도 말을 들어 먹을 놈도 아니고."

"그렇긴 합니다."

두 남자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내 박인범 사무총장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던전에서 완전히 해방됐다라...."

말을 하면서도 어째 잘 와닿지를 않았다.

벌써 이런 세상이 된 지도 50년이 훌쩍 지났다.

대다수는 이전의 세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노인네들 대부분도 던전이 없던 시절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그게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이두식 이사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던전이 출현하고 나서, 한때는 전 세계가 똘똘 뭉쳤던 적이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랬었지."

"그땐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요?"

"...어떻게 알았겠냐. 던전을 무기 삼아 두 쪽이 돼서 싸우게 될 줄."

두 남자는 각자 옛 생각에 빠진 듯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쯧, 생각해서 뭐하겠냐. 이미 요지경이 됐는데. 앞일이나 걱정하자고."

박인범 사무총장이 고개를 털며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근본적인 물음이었지만, 그 누구도 답할 수 없는 물음이기도 했다.

박인범 사무총장 또한 본인도 알고 싶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길 한 차례.

"뭐, 이번처럼 계속해서 각국을 본인들의 영향권에 두려고 하겠지."

"이미 던전 통제권을 쥐고 있지 않습니까. 여태 그랬던 것처럼 막무가내로 나가도 될 텐데, 왜 굳이 우리 지부를 노리는 건지...."

"생각은 있다는 거지."

"…네?"

이두식 이사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역사적으로 봐도 모든 걸 쥐고 흔들려고 한 독재자의 끝은 늘 좋지 않았어. 통제라는 게 어느 정도까지는 효과가 있어도, 어느 선을 넘기 시작하면 도리어 저항감을 불러일으키거든."

"...."

"따지자면 지금은 딱 '어느 정도'인 셈이야. 국제협회가 통제권을 쥐고는 있지만, 정작 그것을 휘두르지는 않는 상태. 뭐, 이미 그것만으로 전 세계가 눈치를 보게 만들었으니 효과는 좋다고 볼 수 있겠지."

박인범 사무총장은 목이 타는지 차를 홀짝이곤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국제협회 놈들이 과연 이걸로 만족할까?"

"…그럴 리가 없겠죠."

"고작 눈치를 보게 만들려는 게 목적이었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거야. 그놈들은 말 그대로의 통제를 원하겠지. 뭐… 굳이 표현하자면 '하나의 정부' 같은 거."

그 표현에 이두식 이사의 표정이 굳었다.

박인범 사무총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 무턱대고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상황은 역전이 될 거야. 궁지에 몰린 인간의 결속력은 늘 상식을 뛰어넘거든. 우리나라도 예전엔 그랬잖아?"

"희생을 치르더라도 맞서 싸우려 할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박인범 사무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지부를 하나라도 더 본인들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거야. 권력에 대한 저항심을 억제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저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거거든."

"편 가르기군요."

"전통적인 방법이지."

그 말을 끝으로 두 남자는 또다시 침묵했다.

그들이 겪어온 세월 속에서 그와 비슷했던 수많은 일들이 떠올랐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두식 이사가 침묵을 깨고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이제 저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긴. 정해져 있지 않냐."

"네…?"

"전 세계가… 던전에서 해방되는 거. 그거밖에 더 있겠어."

"하지만 토벌 산업을 포기하는 건 아무래도...."

"쯧, 그까짓 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박인범 사무총장은 이두식 이사의 말을 끊으며 길게 숨을 늘어뜨렸다.

"그냥… 던전이고 뭐고 이젠 다 지긋지긋해."

박인범 사무총장은 그 말을 끝으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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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지 마, 새끼야."

일본, 오사카.

도심 외곽에 위치한 어느 뒷골목.

테츠야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겐타가 가져온 봉지에 고정된 채였다.

"거짓말 아니라니까! 진짜 믿을 만한 형님이 준 거야!"

"형님? 너랑 친하다는 그 흥신소 형님 말하는 거야?"

"맞아."

"그 형님, 뭐 야쿠자야? 그걸 어떻게 구해!"

"아 씨, 진짜라니까! 직접 확인해보던가!"

겐타는 억울하다는 듯, 봉지를 열어 테츠야에게 직접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안에는 영롱한 빛으로 반짝이는 보라색 가루가 담겨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있던 테츠야는 그 가루를 보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이내 무언가에 홀린 듯, 한 차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이게… 진짜 보이드라고?"

"그렇다니까!"

겐타가 격양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테츠야는 여전히 미심쩍은 듯했다.

"카르텔 소탕됐다고 하지 않았어? 네 형님은 이걸 일본에서 어떻게 구한 거야?"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형님이 저번에 큰 건 하나 맡았거든. 아무래도 그때 사례로 받은 것 같아."

"그런데 이 비싼 걸 왜 너한테…?"

"왜긴 왜야."

겐타가 주변을 확인한 후, 목소리를 팍 낮춰 말했다.

"내 친구가 승급을 못 해서 퇴사하려고 한다니까 형님이 조금 챙겨준 거야."

"너...."

테츠야는 퍽 감동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형님이 가지고 있는 물량이 장난이 아니야. 혹시 더 필요하면 내가 얘기해볼게. 근데… 아마 그땐 돈을 줘야 할 수도 있어."

"그거야 당연하지. 야, 진짜 너밖에 없다."

"됐어, 인마.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어디 가서 말이나 하지 마."

"당연하다마다!"

테츠야는 그렇게 즉답하며 겐타에게 봉지를 건네받았다.

"아, 그리고 너한테만 특별히 준 거니까 다른 헌터한테는 절대 나눠주지 마라."

"야 이 새끼야. 그걸 말이라고! 아무튼, 고맙다."

"그래. 들어가 봐."

테츠야는 이내 봉지를 품속에 욱여넣은 뒤, 쏜살같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홀로 골목에 남은 겐타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 형님."

그리고 뱉은 첫 마디.

하지만 형님이라고 했던 그의 말과 다르게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는 명백히 여성이었다.

「잘 전달했어요?」

"예. 말씀하신 대로 양도 넉넉히 챙겨줬습니다."

「잘하셨군요.」

"그런데 정말 공짜로 뿌려도 되는 건가요? 베트남이 그렇게 되고 나서 본부 상황 모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손해를 보는 건 아닌지...."

「뭐, 원래 첫 거래는 후한 법이죠.」

그녀가 대답했다.

「조금 전의 한 명이 곧 10명의 고객을 만들어줄 거예요. 그 10명이 백 명을, 백 명은 곧 만 명이 돼서 돌아오겠죠.」

"거래는 그때 시작해도 되겠군요."

「맞아요. 뭐, 이후로 찾아올 때마다 가격을 두 배씩 올리도록 해요. 그러면 최소한 원룟값은 메울 수 있겠죠.」

"알겠습니다."

겐타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성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뭐, 처음은 우리가 직접 시작한다고 해도… 다음부터는 대신해줄 조직이 필요할 거예요.」

"야쿠자 놈들을 좀 알아볼까요?"

「아니. 그놈들은 안 돼요.」

여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듣자 하니 한유빈이 싹 통합했다죠? 그 이후로는 지부에 붙어서 정보책을 자처하고 있고. 어울리지 않게.」

"아...."

「아무튼, 야쿠자들은 써먹을 패가 못 돼요. 다른 놈들로 알아봐요.」

"네."

「아무튼, 첫 단추는 대충 끼웠으니… 이제 우리는 슬슬 다음 준비를 해보죠.」

여성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실소를 뱉었다.

「그동안 친구 사귀느라 수고했어요. 클로이 팀장.」

"아닙니다. 대표님."

어느샌가 바뀐 호칭.

겐타는 이내 통화를 종료하고는 검은색 가발을 벗어 던졌다.

동시에 금색 단발이 드러났고, 겐타… 아니 클로이 팀장은 곧바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

"잘 다녀오셨어요?"

WDSO, 서울 본부.

귀국하자마자 이아영 본부장과 함께 복귀하자 김민주가 우리를 맞이했다.

"뭐. 그럭저럭."

"이번에도 꽤나 고생하셨다면서요?"

나는 대답을 아꼈다.

말해 뭐하겠냐는 의미였다.

김민주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곧바로 다음 업무 미팅 있으시죠? 좀 쉬셔야 할 텐데."

"그 인간이 쉬게 내버려둘 리가 없잖아."

"…그렇긴 하네요."

그 인간이 누굴 말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차린 듯, 김민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일본 지부에서 보이드 중독자가 발생했다는 거, 사실이야?"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이제 막 확인해본 거긴 한데, 자세한 건 사무총장님한테...."

그녀가 그렇게 말을 잇던 그때.

"뭐야? 여기 있었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박인범 사무총장이 떡 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귀국했으면 바로 찾아왔어야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

"숨 돌릴 시간은 좀 주시죠.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클클클, 자네도 사람이긴 한가 보군."

"...."

뭐라는 거지?

그럼 그동안 일하는 기계쯤으로 본 건가?

"일단 올라가시죠. 자세한 이야기도 들어야 하니...."

"아니, 여기서 하도록 하지. 그리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아니고."

박인범 사무총장은 이내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도쿄 본부 작전팀에서만 벌써 12명의 중독자가 나왔어. 지방 지부는 더 심해. 오사카 지부에서 30명, 홋카이도 지부에서 27명."

"...너무 많은데요?"

"맞아. 절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야. 아마 일주일도 더 전부터 유통되고 있었던 것 같아."

일주일이나 됐다고?

"딜러들에 대한 정보는요? 중독자들 대상으로 조사는 들어갔을 거 아닙니까."

"대체로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나마 제정신인 놈을 조사해보니, 친구였다더군. 이름은 겐타. 한 달 전쯤에 동네 술집에서 만났다나 봐."

"겐타라… 그럼 그쪽부터 알아봐야겠군요."

"이미 알아봤지. 그런데… 그런 이름의 인물은 찾을 수가 없다더군. 아니, 정확히는 중독자가 만났던 겐타라는 인간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다는 거지만."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짜 신상이었던 거군요."

"그래. 보이드를 유통하기 위해 가짜 신분을 만든 거야. 때문에 헌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고."

"쯧, 귀찮은 짓을 하는군요."

"그런데 말이야. 이상한 게 하나 더 있네."

박인범 사무총장이 옅은 한숨을 내쉬길 한 차례, 퍽 답답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쿄 본부뿐만 아니라, 각 지방 헌터들 입에서도 그 이름이 나왔다는 거야."

"...예?"

"모든 중독자가 그 겐타라는 사람한테서 처음 보이드를 받은 거라고. 이상하지?"

"한 사람인 겁니까? 아니면 모두가 같은 이름을 쓰는 조직?"

"글쎄...."

그때, 박인범 사무총장이 말끝을 흐리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이제부터 자네가 알아봐야겠지."

"...."

빌어먹을 노인네.

"표는 끊어놨어. 일단 오늘은 집에 가서 좀 쉬고, 내일 다시 짐 싸서 나와."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번엔 작전 본부장도 같이 다녀와."

"네? 제가요?"

갑작스러운 지명에 김민주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왜, 문제 있어?"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아무래도 저보단 유빈 씨가 더 낫지 않을까요. 한 번 갔다 와서 그쪽 사정을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말했잖냐. 보이드가 유통되고 있다고."

박인범 사무총장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김민주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듯했다.

"한 번 당한 녀석을 또 내몰기는 미안하지."

"...알겠습니다."

이내 김민주 또한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상황이 심상치 않아. 내가 볼 땐 어중이떠중이들이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야."

박인범 사무총장이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확실해. 보다 대물이다. 이번엔 꽤나 어려울지도 모르겠어."

"그럼… 우리도 준비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음?"

박인범 사무총장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는 옆에 잠자코 서 있던 이아영 본부장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이아영 본부장님. 이클립스 가동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지금 당장.

***

WDSO 소속, 일본 도쿄 지부.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하라무라 지부장의 집무실.

그곳을 찾은 히나 보좌관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작전 2팀에서 또 중독자가 발견됐습니다. 폭주는 하지 않았지만 여러 부작용 때문에 당분간 작전 투입은 힘들 것 같습니다."

"...."

"벌써 저희 쪽에서만 20명 이상이 보이드 투약 혐의로 작전 불능 상태입니다. 지방 쪽은 더 심각하고요. 이대로 가다간 관동, 관서 할 거 없이 작전 스탑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빌어먹을...."

보고를 듣던 하라무라 지부장의 시선이 이내 천장으로 향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건가.

분명 원 제조 조직과 함께 공중 분해됐다고 들었는데, 대체 이 망할 보이드는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대체 누가 이걸 들여왔단 말인가.

다른 건 다 좋다 이거다.

왜 하필 일본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그런다고 해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기에 하라무라 지부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용의자 수사는 어떻게 되고 있어?"

"겐타 말씀이십니까? 지금 관할 수사대가 대대적으로 움직이고 있긴 한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하, 젠장할."

신종 마약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아직도 단서 하나 못 찾는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이렇게 되면 지부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일단 작전팀 대상으로 한 번 더 교육 일정 잡아. 투약 적발 시 무관용 원칙 고수하겠다고 공문 내리고, 원 스트라이크 아웃 도입해."

"아시잖아요. 별로 효과 없다는 거...."

"그럼 뭐 어떻게 하자고!"

답답한 마음에 하라무라 지부장이 고함을 질렀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유통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뭘 어쩌자고! 그나마 유일하게 아는 게 판매책인 겐타뿐인데, 그마저 정보가 하나도 없다면서!"

"...."

"정황도, 정보도, 연관성도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어. 이걸 봐도 모르겠어?"

그가 침을 꿀꺽 삼키길 한 차례.

이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사태... 누군가 작정하고 계획한 일이야."

"그 말씀은...."

"그래."

하라무라 지부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제협회.

그놈들이 기어이 일본에 손을 뻗기 시작한 것이다.

'베트남이 그렇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가 이를 으득 씹었다.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한다고 했는데... 결국 뚫려 버렸다.

아니, 이건 애초에 알아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저희에겐 아무것도 요구한 게 없지 않나요? 약만 유통하는 게 국제협회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그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보이드가 유통되고 있는 것보다 무서운 건... 이 사태를 벌인 목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유통 루트를 파악해서 공급책을 잡는 수밖에...."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지부장실로 들어왔다.

"누구…?"

하라무라 지부장은 그 불청객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금색 단발의 젊은 여성.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PB 코퍼레이션 소속, 클로이 팀장이라고 합니다."

"PB 코퍼레이션…?"

당연히도 하라무라 지부장에겐 처음 듣는 조직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체 뭐 하는 분입니까. 아니, 그것보다… 그럴 필요 없다는 건 무슨...."

"아무런 정보도 없으면서 어느 세월에 잡겠습니까. 괜히 힘 빼지 마세요."

"뭐…?"

"더 쉬운 길을 알려드리겠다는 거예요."

클로이는 신문 한 장을 내밀었다.

이를 확인한 하라무라 지부장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다름 아닌, 그 신문의 발행 일자가 내일로 적혀 있었으니.

"보시다시피 내일 자 신문입니다. 헤드라인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

클로이 팀장의 말에 하라무라 지부장의 시선이 신문의 중앙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 문구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의 손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하라무라 공방의 대표이자 WDSO 일본 지부장, 하라무라 류헤이. 대량의 옥타보이드암페타민 유통 정황 포착.」

바로 내일 자로 일본 전역에 뿌려질 신문의 헤드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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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무라 공방의 대표이자 WDSO 일본 지부장, 하라무라 류헤이. 대량의 옥타보이드암페타민 유통 정황 포착.」

"이, 이게 무슨…!

내일 날짜가 찍힌 신문의 헤드라인을 확인하자마자, 하라무라 지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개수작 부리지 마! 이런 게 먹힐 것 같아?! 증거가 어디 있다고…!"

"증거...? 그래요, 증거."

클로이 팀장이 하라무라를 바라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까짓 증거, 못 만들 것 같나요?"

"...!"

"지금쯤 지부장님 댁에 택배가 도착했을 겁니다. 뭐, 내용물은… 굳이 말씀 안 드려도 아시겠죠?"

하라무라 지부장의 얼굴이 바싹 굳었다.

던지기.

마약을 구매자에게 직접 유통하지 않고 특정 장소, 혹은 제삼자에게 넘기는 행위.

대개 마약 구매 현장을 들키지 않으려고 쓰는 수법이지만....

공급책이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의도적으로 수사 타깃을 돌리기 위해 유통 루트가 포착된 마약을 특정 인물에게 고의로 떠넘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다시 말해 이 순간 일본 지부의 총 책임자가 하루아침에 마약 유통에 연루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집에서 마약이 발견됐다고 해서 무조건 지부장님의 유통 혐의가 입증되는 건 아니겠죠. 조사를 해보면 던지기를 당했다는 건 금방 드러날 겁니다."

클로이는 크게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말했다.

물론 그 말이 하라무라 지부장에게 위로가 될 리는 없었지만.

"...그걸 알면서도 던진 거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거냐?"

"뭐, 아시다시피 마약 범죄는 구속 수사가 원칙입니다. 내일 지부장님이 체포되시면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최소한 반년은 구치소에 계실 겁니다. 뭐, 운이 나빠서 결백이 입증되지 않으면 영영 못 나오실 수도 있고."

"...."

"그사이 중독자는 계속해서 늘어날 테고, 총 책임자가 자리에 없으니 지부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겁니다. 만약 중독자들이 폭주까지 하게 되면 더는 작전을 진행할 수 없게 되겠죠."

말을 잇던 클로이가 이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 같나요?"

하라무라 지부장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클로이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저흰 일본 지부를 원합니다. 한번 신중하게 고민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아쉽게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진 않겠군요."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목적은 지부였다.

"내일 아침, 이 신문이 일본 전역에 뿌려지기 전까지 연락 주세요. 더 늦으면 지부가 아수라장이 되는 걸 구치소 안에서 구경하시게 될 겁니다. 이도 저도 싫으시면 그 안에 공급책을 잡으시던가."

"...."

"뭐가 됐든 빨리 선택하셔야 할 겁니다. 이제 14시간 남았으니 말이죠."

클로이는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책상 위에 놓고는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히나 보좌관이 핸드폰을 들었다.

"지, 지금 대기 중인 작전팀 전부 본부 앞으로 보내주세요! 지금 나가는 사람, 반드시 잡아야…!"

"아서라. 소용없는 짓이야."

클로이 팀장을 붙잡기 위해 급하게 지원을 부르려고 한 것이지만, 하라무라 지부장이 제지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네, 네? 그게 무슨 말씀...."

"지금 저놈을 잡아봐야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아니 애초에 잡을 수 있는 놈도 아니고.

하라무라 지부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장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클로이는 본인이 공급책이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국제협회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집으로 보낸 물건이 마약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나올 수 있다는 건 이미 고위 인사들도 포섭해놨다는 거겠지.

무엇보다 여기서 저놈을 잡는다고 한들, 이 신문은 예정대로 내일 발행될 것이다.

'빌어먹을....'

일주일 내내 수사를 했는데도 단서 하나 못 찾았는데, 14시간 안에 잡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결국, 우리 순서가 이렇게 오는군....'

지부가 망가지게 두느냐.

아니면 지부를 넘기느냐.

베트남 지부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해결할 방법이 있는 건가.

하지만 고민을 거듭하면 할수록 머릿속만 하얘졌고, 그렇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게 된 그때였다.

"지, 지부장님."

직원 하나가 집무실로 들어오며 그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지금 공항에서 연락이 왔는데...."

"공항…?"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친 듯, 그의 얼굴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았다.

김준우.

그가 일본에 온 게 틀림없다.

그래, 그가 나선다면 어떻게든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분명 어떻게든 될 것이다.

"김 대표가 입국한 거냐? 뭐 하고 있어! 지금 당장 데리러 가야…!"

"그, 입국하신 건 맞는데...."

이내 직원이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지금… 출입국 관리소에 구금되셨답니다."

"...?"

뭐?

***

하네다 공항, 출입국 관리소.

"아니, 구금당한 이유라도 좀 압시다. 불과 몇 달 전에도 문제없이 입국했었는데, 대체 왜 입국이 안 된다는 겁니까?!"

나는 참다못해 관리소 직원을 향해 언성을 높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조사 중이니 기다려주세요."

"...하아."

벌써 이곳에 억류된 지 3시간이 지났지만, 그동안 들은 말이라곤 저게 전부였다.

하지만 조사 중이라는 말과 다르게 우리에겐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저 방치한 채 내버려두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뭘까요...?"

자리로 돌아와 앉자, 김민주가 넌지시 물었다.

그녀 또한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듯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동행한 청소 3팀원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본부에는 연락해 보셨나요?"

"했는데... 그쪽에서도 이유를 모르겠단다. 비자 문제인가 싶어서 외무성에도 알아봤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럼…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아니면 만들고 있을 수도 있고."

내 대답에 김민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우리가 대체 뭘 했다고...."

"뭘 해서 그런 게 아니라, 뭘 할까 봐 그런 걸 수도 있지."

"...네?"

나는 관리소 직원과 팀원들을 한 번씩 바라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일본에 입국하는 걸 막고 싶어 하는 놈들이 있는 것 같네."

"...."

그 말에 그녀가 대답을 아꼈다.

뭐, 굳이 말을 꺼낼 필요도 없이 누굴 지칭하는 건지 자명했으니.

애초에 한 나라의 부서를 끌어들일 수 있는 이들이 그들 말고 누가 있겠는가.

"얼마나 더 여기에 있어야 할까요?"

"그건… 내가 더 알고 싶다."

한숨을 팍 내쉬며 대답했다.

답답한 건 둘째치고 상황이 어떤지라도 알고 싶은데.

이곳에 꼼짝없이 붙잡혀 있는 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따르릉―.

팔짱을 낀 채 하염없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김 대표, 하라무라일세.」

다름 아닌, 하라무라 지부장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아, 마침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저희가 오늘 지부로 찾아뵈려고 했습니다만, 지금 출입국 관리소에 구금이 돼서...."

「이야기는 들었네. 우리 쪽에서도 가능한 한 조치를 했지만, 아무래도 외압이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야.」

"뭐, 놀랄 일도 아니군요."

그럼 그렇지.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별다른 반응 없이, 곧바로 본론부터 물었다.

"지금 지부 상황은 어떻습니까?"

「...좋지 않아.」

"좋지 않다뇨? 중독자가 그새 더 늘어나기라도 했습니까?"

「그것도 그거지만... 국제협회 쪽 사람이 찾아왔었네.」

"...!"

순간 내 미간이 확 좁아졌다.

그들이 지부로 직접 갔다는 건, 본격적으로 지부를 빼앗기 위해 손을 쓰기 시작했다는 의미였으니까.

「김 대표도 예상했겠지만, 지부를 넘기라고 요구했네.」

"조건은요?"

「내일 아침 신문에 내가 보이드를 유통했다는 기사가 나갈 걸세. 던지기를 당했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던지기라....'

그렇게까지 준비해온 건가.

"혐의 입증은 둘째치고, 구류되시면 몇 개월은 밖에 나오기 힘드시겠군요."

「내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지부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테지.」

"그걸 노렸군요. 지부가 약쟁이 소굴이 되는 걸 지켜보든가, 아니면 곱게 지부를 넘기든가."

「그래....」

하라무라 지부장의 목소리가 팍 가라앉았다.

「물론 그 안에 공급책을 잡는다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고위 인사들을 포섭한 이상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네.」

"신문 발행까지 몇 시간 남았죠?"

「14시간… 아니, 이제 13시간 남았군.」

"하, 그래서 이렇게...."

나는 통화를 하다 말고 관리소 직원을 슬쩍 흘겼다.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다시 연락드리죠."

「그래, 기다리고 있겠네.」

전화를 끊고는 곧바로 김민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겠네."

"네?"

"13시간이 지나면 하라무라 지부장은 체포될 거야. 그 안에 지부를 넘길지 말지 선택하라는 거지."

"그게 무슨...."

"혹여나 그 시간 동안 우리가 공급책을 찾아낼 것을 막으려고 여기에 붙잡아두고 있는 것 같아."

"...."

김민주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여기 잡혀 있는 한 도와줄 수도 없고. 하라무라 지부장님이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한테는 최악의 상황이 될 텐데...."

"흐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베트남 때와 같이 어중이떠중이들의 머릿속에서 나올 법한 작전이 아니다.

준비 단계에서부터 작정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

박인범 사무총장의 말대로 꽤나 거물이 움직이는 모양이다.

'쯧....'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최소한 팀원들이라도 나갈 수 있다면 지시를 내려서 뭐라도 해보겠는데, WDSO 소속이라면 아무도 못 나가게 하고 있으니....

일 났군.

나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공항에 던전이라도 생기길 바라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속절없이 시간은 흐르고 있다.

방법을 찾아 그 어느 때보다도 머리를 굴려대던 그때.

한 인물이 머릿속으로 번뜩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라면 이 상황을 해결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런 일로 연락드리는 건 꽤나 송구하긴 해도 어쩔 수 없지.

잠시 망설이던 끝에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김준우입니다. 혹시 지금 통화 괜찮으십니까?"

「아, 예. 말씀하세요.」

긴장된 목소리로 첫마디를 떼자, 곧바로 돌아온 대답.

"지금 문제가 좀 생겨서...."

나는 천천히 본론을 꺼내 들었다.

"대통령님이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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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법무성.

코바야시 장관에게 직통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실례합니다. 코바야시 장관님이신가요.」

"아, 예.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코바야시 장관은 처음 듣는 목소리에 한껏 경계를 한 채 물었다.

「아, 불쑥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 조현민입니다.」

"...!"

코바야시 장관의 표정이 순간 바짝 굳었다.

그도 그럴 게, 한 나라의 수장이 장관에게 직통으로 전화를 해오는 경우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것도 아무런 언질도 없이.

물론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기존의 절차를 무시한 채 직접 연락을 해올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거겠지.

그리고 그 일이라 함은, 예의 그것이겠고.

"대, 대통령님께서 무슨 일로 저한테 직접 연락을...."

하지만 그럼에도 코바야시 장관은 모른 척 물었다.

「지금 하네다 공항, 출입국 관리소에서 대한민국 국민을 불법으로 구금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코바야시 장관은 대답을 아꼈다.

역시나, 예상대로 그 일 때문이었다.

코바야시 장관은 서둘러 침착함을 유지했다.

두어 번 헛기침을 한 뒤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출입국 심사를 제가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관리소에 구금되었다면 분명한 사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럼 저희가 시정할 수 있도록 무엇이 문제인지라도 확인해주십시오.」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잘 이해가 안 가는군요. 이게 대통령님께서 직접 부탁할 만한 일인가요?"

「예. 그럴 만한 일입니다.」

조현민 대통령이 즉답했다.

「이건 매우 중대한 사항입니다. 아시다시피 일본 지부는 WDSO 직속 관할이며, 현재 구금되어 있는 이들은 최근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직원들입니다. 그러니 일본을 위해서라도 조속히 입국시켜주시길 요청합니다.」

"...."

코바야시 장관은 이빨을 꾹 깨물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다른 것도 아니고 너희 나라를 도와주려는 거니, 빨리 해결해라.

이 요청을 거절한다면 모양이 꽤나 이상하게 흘러간다.

본인의 나라가, 본인 부서의 실수로 위험에 처하는 걸 원하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대놓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수를 뒀다.

하지만....

"저희는 원칙대로 합니다. 관리소 인사가 구금을 결정한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한 사항을 제 독단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없던 일인 척할 수는 없지만.

「원칙이라....」

그러자 조현민 대통령이 중얼거렸다.

이내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길 한 차례.

「정말 원칙대로 해보시겠습니까?」

"...예?"

도발 섞인 말투에 코바야시 장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알겠습니다. 장관님의 말씀처럼 원칙대로 해보죠.」

"지금 무슨...."

코바야시 장관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응답 없는 전화기를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길 잠시.

"...쯧."

그가 혀를 차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설마하니 대통령이 직접 연락을 해올 줄이야.

예상치 못한 거물의 등장에 조금은 불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그쪽에서 받아 놓은 게 있지 않은가.

이제 와서 그들의 제안을 무시하고 뒤통수를 치고 싶지도, 또 그럴 이유도 없었다.

코바야시 장관은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코바야시입니다."

「제가 직접 연락하는 건 피해달라고 했을 텐데요.」

전화를 받은 이는 PB 코퍼레이션의 에마 대표였다.

"그 다른 게 아니고… 조현민 대통령에게서 직접 연락이 왔습니다."

「....」

그 소식을 전하자 에마 대표가 잠시 침묵했다.

코바야시 장관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 관리소에 구금하고 있는 사람들을 조속히 입국시켜 달라고 요청해왔습니다. 당연히 김준우를 말하는 것 같은데… 대통령까지 직접 나선 걸 보니, 아무래도 이쪽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원칙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잘했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 봤자 몇 시간 안 남았으니까, 계속 모른 척해요. 어차피 이런 일이야 비일비재하니 당신한테 책임을 묻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해요. 아, 그리고 말했듯이 내일 아침 그 시간에 하라무라 구속 영장 바로 발급해두세요.」

"물론입니다."

코바야시 장관은 그렇게 대답하곤 통화를 종료했다.

하지만 핸드폰을 내려놓기도 전에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그의 대학 선배이자 정계 선배.

현 외무성의 후지와라 장관이었다.

"네, 선배. 웬일로 연락을 다..."

「야 이 새끼야, 너 뭐야?!」

"예…?"

후지와라 장관은 욕설부터 내뱉었다.

「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했길래, 조현민 대통령이 나한테 직접 연락하냐고!」

"그, 그게 무슨…?"

그 말을 듣는 순간, 코바야시 장관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40년 전, 던전 강제노역에 대한 보상 판결, 일주일 안으로 강제 집행하겠댄다!」

"예,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거 판결은 그렇게 나도 진짜 집행은 못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외교적으로 완전히 척을 두는 거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시발, 갑자기 이렇게 나올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냐고!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데!」

코바야시 장관의 머릿속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뿐만이 아니야! 부산물 무역 업체랑 장비 연구소도 연락받았댄다. 앞으로 부산물 및 장비 수출입 규제하겠다고!」

"그, 그건 또 무슨...."

「애초에 일본 지부가 한국으로 넘어간 후에도 우리랑 무역을 계속한 이유는 100% 외교 때문이었어! 이제 와서 계약이 끊기면 진짜 X 된다고!」

"하, 하지만… 그게 왜 저 때문입니까…?"

코바야시 장관이 조심스럽게 발뺌했다.

애초에 본인 부서와는 관련도 없고, 언젠가는 터질 만한 일이 터진 게 아닌가.

어째서 본인에게 화풀이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조현민 대통령이 네 이름을 언급했어! 지금 모든 부서에 네 이름이 돌고 있다고!」

"...!!"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저, 저는 그저 원칙대로...."

「너 말이야. 이대로 조현민이 칼 휘두르면, 넌 평생 일본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 거야. 너는 물론이고 네 가족까지 앞으로 일본 땅에 발 못 붙일 거라고.」

"...."

「그러니까 원칙이고 나발이고 당장 해결해! 총리 귀에 들어가면 너 진짜 끝이야!」

후지와라 장관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동시에 코바야시는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고작 출입국 관리소에 몇 시간 붙잡아 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나온다고?

일본을 적으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김준우 한 명이 더 중요하다 이건가?

'빌어먹을....'

코바야시 장관은 상상도 못 한 상황에 주먹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

"…가셔도 좋습니다."

하네다 공항, 출입국 관리소.

몇 시간이 더 지나고 드디어 입국 허가가 떨어졌다.

나와 김민주 그리고 청소 3팀원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짐을 챙겨 관리소를 나왔다.

물론 따질 게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모두가 서둘러 공항을 나가고 있던 그때,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다름 아닌 조현민 대통령이었다.

"예, 대통령님."

「입국하셨습니까?」

"예. 방금 막 허가가 났습니다."

「다행이군요.」

그가 진심으로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개인적인 일로 부탁드려서 죄송합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지금 국제협회가 일본 지부를 중심으로 보이드를 퍼트리고 있다면서요. 그게 어떻게 개인적인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허가를 받아내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묻자 조현민 대통령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원칙대로 했습니다.」

"...?"

「뭐, 자세하게는 모르셔도 됩니다. 그냥… 이번 일에 실패하면 앞으로 일본과 모든 외교적, 경제적 교류가 끊길 거라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뭐야.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말 안 해줄 거면 아예 말하질 말지....'

꽤나 큰 부담을 느끼고 있자니, 그가 다시 말했다.

「아무튼, 입국하셨다면 서둘러 움직여주십시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통화를 마치며 곧바로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고작 8시간 남짓.

이 8시간에 일본 지부의 목숨이 달려 있다.

어떻게든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김 대표!"

그리고 그때.

공항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라무라 지부장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헐레벌떡 다가왔다.

"무사히 나왔군! 다행이야!"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긴 했지만요."

"이제라도 움직일 수 있는 게 어디인가."

"그보다… 지부장님 댁에 배송됐다는 택배는 확인해보셨습니까?"

"아니, 겁이 나서 못 열어 봤네."

"설마 처리하신 건 아니죠?"

내가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세. 어딘가에 묻어 버릴까도 생각해봤는데.... 오히려 들키면 상황만 더 악화할 것 같아서 관뒀네."

"잘하셨습니다. 지부장님이 처리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까요."

"그럼 내가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건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하라무라 지부장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정말 해결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군...."

그가 중얼거리길 한 차례.

초조하고 절박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뭐…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진짜 공급책을 찾아야죠."

내가 즉답했지만, 하라무라 지부장은 여전히 불안한 듯 보였다.

"그거야 그렇긴 한데... 아무런 단서도 없어. 일주일 동안 수사했는데도 진전이 없었는데, 고작 8시간 안에 찾을 수가...."

"외부에서 찾을 시간은 없습니다."

"으, 응?"

"하지만 바로 내부로 투입할 수 있다면 또 모르죠."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제부터 저희는 보이드를 구매하기 위해, '겐지'와 직접 접촉할 예정입니다."

"뭐, 뭐…?"

"네?!"

그 순간, 하라무라와 김민주가 누구랄 것 없이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공급책을 찾으려면 그보다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국제협회가 벌인 짓이 맞는다면 선생님이 입국했다는 소식도 전달받았을 거예요. 그러면 그쪽도 만반의 준비를 할 거구요."

김민주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또 선생님이 직접 접촉하신다고 해도 이미 얼굴이 알려져서 힘들 것 같은...."

"아니."

하지만 그녀의 말을 모두 듣기도 전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설마 내가 그런 것도 생각 안 했을까.

"당연히 내가 사는 게 아니야."

"…그럼요?"

김민주의 물음에 나는 몸을 돌려 뒤에 있던 이들을 바라봤다.

"...?"

"...?"

내 시선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청소 3팀원들이었다.

"자, 잠깐! 설마 우리보고 하라는 건 아니지…?"

"저, 저희가 어떻게 국제협회랑 접촉해요?!"

"야, 야 준우야… 그건 좀...."

그들은 곧바로 그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는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 그리고 보이드는 일반인들한테는 효과가 없다면서! 이능력자도 아닌 우리가 보이드를 구매한다고 하면 분명 의심받을 텐데?!"

한상혁이 덧붙였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 마."

시선을 옮겨 하라무라 지부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부분은 지부장님이 도와주실 테니까."

"...."

하라무라 지부장 또한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여기서 설명할 시간은 없습니다. 자세한 건 움직이면서 얘기하도록 하죠."

그럴 시간이 없었으니까.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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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우가 입국했다고요?"

에마 대표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확인해보니 그렇습니다."

"대체 어떻게?"

"대한민국 대통령이 직접 나선 모양입니다."

"...허."

클로이 팀장의 보고에 에마 대표는 기가 차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뭐… 됐어요. 애초에 완전히 막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고. 시간을 끈 것만으로 이미 목적의 반은 이뤘으니까."

그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사실 이미 상정한 일이다.

그동안 몇 번이고 봐오지 않았던가.

김준우가 마음을 먹고 움직인다면, 법무부 장관이 아니라 총리를 매수했어도 벗어났을 것이다.

뭐, 물론 그렇다고 해도....

"우리 돈을 받아먹고도 뒤통수를 친 값은 치러야겠죠."

"그 말씀은...."

"코바야시 장관, 처리해두세요."

클로이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김준우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까요?"

"뭐, 뻔하겠죠. 지부를 구하는 방법은 공급책을 찾는 수밖에 없을 테니. 아마 구매자로 위장해서 딜러와 접촉하려고 할 겁니다."

"그러면… 위험한 거 아닌가요. 우리가 관여하고 있다는 건 이미 눈치챘을 텐데. 제삼자를 시켜서 접촉을 시도한다면 꼬리가 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할 조직이 필요하다고 했던 거예요. 딜러와 접촉해도 우리까지는 올 수 없게."

"아...."

클로이 팀장이 작게 감탄했다.

"그래서, 좀 알아봤나요?"

"아, 네. 관서에서 활동하는 쿄쿠세이(極星)구미라고 있습니다. 그놈들에게 맡겨볼까 합니다."

"쿄쿠세이? 뭐 하는 놈들이죠?"

"모체는 인터넷상에서 활동하는 극우 집단이었는데, 호리에라는 남자가 수장이 된 이후로는 오프라인 시위나 조직원 양성에 힘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금 조달을 위해 온갖 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하고요."

"음, 딱 적당하네요."

에마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남아 있는 보이드는 다 그쪽으로 넘기고, 알아서 공급하라고 해둬요. 우리는 이제 발 빼도록 하죠."

"…공짜로 넘기라는 말씀인가요?"

"돈을 받으면 꼬리가 길어지잖아요. 목표만 생각하고, 그 외는 깔끔하게 포기하는 버릇을 들이세요."

"...알겠습니다."

클로이 팀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의 말이 맞았다.

여태껏 PB 코퍼레이션과 국제협회 본부가 김준우를 견제하는 것에 실패했던 이유의 대다수는 욕심 때문이었으니.

하지만 PB 코퍼레이션의 수장이 직접 나선 만큼, 그런 초보적인 실수는 없을 터였다.

물론, 그게 클로이 팀장 본인에게도 잘된 일인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 맞아. 쿄쿠세이에 보이드 넘길 때 우리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을 쓰도록 해요. 만약 김준우가 쿄쿠세이를 찾는다고 해도 좀 더 헤맬 수 있게."

"…알겠습니다."

클로이 팀장이 대답했다.

"그럼… 우린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헛짓거리하는 모습이나 구경하도록 하죠."

에마 대표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덫은 완벽하게 쳐놨다.

김준우가 이제 와서 공급책을 찾으려고 해도 이미 우리와의 연결고리는 모두 끊어뒀다.

애써서 접촉해도 전혀 엉뚱한 조직을 잡게 되겠지.

그들은 절대 우리를 찾을 수 없다.

최소한 8시간 안에는.

그렇게 중얼거리던 에마 대표의 입가에 이내 미소가 번져 나갔다.

***

"후우...."

이미 해가 저문 시각.

도쿄, 우에노역 근처.

한상혁은 벌써부터 긴장이 되는지 연신 심호흡을 했다.

우린 오사카 지부에서 보이드를 구하기 위해 도쿄까지 올라온 헌터를 연기하며 사방팔방으로 거래처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머지않아 도쿄 지부에 아직 복용 혐의가 발각되지 않은 어느 헌터로부터 거래 장소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 헌터는 우리에게 거래 시 필요한 서류와 주의 사항에 대해 간략히 알려주었고, 이내 딜러와 연결해 주었다.

그렇게 미리 도착한 접선 장소.

약속 시각까지 10분 정도를 남겨둔 상황.

"긴장 풀어. 너무 떨면 의심받는다."

나는 거래에 들어가기 전, 최종 점검을 하며 말했다.

"어떻게 긴장을 안 하냐. 이런 건 처음인데."

한상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속 장소에 나갈 사람이 그로 정해진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일단 나와 김민주는 얼굴이 알려졌을 걸 대비해 제외되었고, 그렇게 남은 청소팀원끼리 가위바위보로 정했다.

"시벌, 내 살다 살다 마약 거래를 해볼 줄이야."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내가 말해준 건 다 외웠지?"

"당연하지."

"그럼 소속부터 말해봐."

"오사카 지부 작전 4팀 소속 다나카 신이치. 검사 클래스, D랭크. 재일교포 3세."

막힘없는 그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서류는?"

"잘 챙겨뒀어."

그가 재킷 안 주머니를 툭툭 치며 대답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넥타이에 도청 장치를 달았고, 한상혁은 소형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걸로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나는 이내 시계를 확인했고.

"시간 됐다. 가봐."

"...."

이내 한상혁의 등을 떠밀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나 또한 자리를 옮겨 멀찍이 떨어진 골목에서 나머지 팀원들과 합류했다.

"생각보다 빨리 접촉할 수 있었네요. 저희가 입국했다는 걸 알면 꼭꼭 숨어버릴 줄 알았는데."

대기하고 있던 김민주가 다행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국제협회가 일부러 손을 쓴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가 입국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을 것이다.

당연히 당분간은 거래를 전면 중지할 줄 알았는데....

'그만큼 급하다는 건가…?'

하지만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거래를 할 필요가 있나?

이런저런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든 일단은 유통책과 접촉하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나머지는 일단 '겐타'를 잡은 다음에....'

그렇게 중얼거리던 순간.

「실례합니다. 역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한상혁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타고 들려왔다.

접선 암호였다.

누군가와 접촉한 것이다.

우린 숨죽여 대답을 기다렸다.

「…공원을 지나치세요.」

어느 남자가 물음에 정확하게 대답했다.

「아, 안녕하세요. 연락드린 오사카 지부 소속의....」

「됐고, 서류나 줘.」

남자는 한상혁의 말을 자르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 서류는 구매자의 신상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우린 한상혁의 헌터증과 소속 지부의 재직 증명서를 준비해야 했다.

물론 한상혁은 그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 부분은 하라무라 지부장이 힘을 써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음....」

남자의 작은 신음이 들려오길 잠시.

「좋아, 확실하네. 나카무라 소개로 온 거지?」

「네, 네.」

「얼마나 필요해.」

「정확한 양을 잘 몰라서. C랭크까지 올라가고 싶은데....」

「그럼 10g이면 충분하겠네. 자 받아.」

「...이건?」

그 순간, 한상혁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 종이인데요?」

「잉크 재질이야. 찢어서 물에 녹이면 분해될 거야.」

「아....」

별수단을 다 쓰는군.

「입금은 가상화폐인 거 알지?」

「아, 네. 지금 바로 전송하겠습니다.」

그 말이 들려오는 순간.

"움직여."

김민주를 향해 말했다.

그녀는 대답 대신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골목을 빠져나가 거래 장소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무전기를 들었다.

"청소 3팀, 해당 구역 봉쇄해주십시오. 10m 반경으로 던전 청소 표지판 설치해주시고요."

「네.」

「오케이~.」

이거로 사냥감은 완전히 몰아넣었다.

이제 남은 건....

「뭐, 뭐야?! 너 누구야?!」

때마침 통신기에서 남자의 격양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발…! 이거 놔! 빌어먹을… 윽! 으윽!」

고통스러운 듯한 신음.

이를 마지막으로 이어폰을 귀에서 빼곤 거래 장소로 향했다.

머지않아 그곳에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시발, 너 경찰이었어?! 크윽…!"

김민주에게 제압된 남자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자세를 낮추곤 입을 열었다.

"당신이 겐타입니까?"

"…뭐?"

"겐타냐고요."

"뭔 개소리야!"

그가 소리쳤다.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표정으로 보나 말투로 보나…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곤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겐타라는 이름은 일본 전역의 보이드 구매자에게서 나온 이름이다.

만약 공급책의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모두가 같은 이름을 쓰는 거라면, 이 남자가 그 이름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이 남자가 겐타라는 이름을 모른다는 건... 딱 한 가지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빌어먹을....'

이놈은 기존의 유통책이 아니다.

국제협회가 아닌 다른 조직이 공급책을 맡은 것이다.

"이미 꼬리를 잘랐나 보네...."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설마 우리가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을 뗀 걸까요?"

"고작 몇 시간 만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아마 그 전부터 준비해놓은 일이겠지."

우리가 언젠간 입국할 거라고 예상한 것이다.

"그럼 지금 이놈은...."

"확실한 건 국제협회 놈은 아니야. 다른 조직이겠지."

지부를 공격하기 위해서라도 보이드는 계속 유통돼야 한다. 하지만 본인들이 직접 유통하다간 언젠간 꼬리를 밟히겠지.

그걸 방지하기 위해 우리가 입국하기 전부터 본인들을 대체할 조직을 미리 구해놨다.

그리고 우리가 입국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공급에서 손을 떼고 그 조직에 보이드를 넘겨버렸다.

마치 우리가 어떻게 움직일지 훤히 알고 있다는 움직임.

그동안의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일 처리 자체가 다르다.

이건....

'고위 간부가 직접 나선 거군....'

나는 이를 으득 갈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한번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 소속이 어딥니까?"

"하! 내가 동료를 팔 거 같아?"

"말하는 게 좋을 텐데요."

진심으로 말했지만, 그는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말 안 하면? 고문이라도 하게? 나 이래 봬도 법대 출신이야! 폭력에 의한 자백은 아무런 법적 효력이...."

뚜둑―!

이내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지금 우리가 시간이 없습니다."

부러진 다리를 움켜쥐고 바닥을 뒹구는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동료든 조직이든 당신이 팔 수 있는 건 모두 파십시오. 죽여버리기 전에."

그 말에 남자가 나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빛에는 어느샌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럼에도 입을 열진 않았다.

뭐, 어쩔 수 없지.

나는 남은 다리 한쪽을 쥐었다.

그 순간.

"선생님."

김민주가 내 팔을 붙잡으며 제지했다.

동시에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마음이 여린 녀석이라는 건 알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다리는 안 돼요. 걷지 못하면 안내를 해줄 수가 없잖아요. 다리 말고 팔로 해요."

"...."

이상하군.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그새 한유빈한테 옮았나?

뭐, 아무튼 지당한 말이다.

나는 자세를 바꿔 다리 대신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 알았어! 말할게! 말한다고!"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남자가 황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쿄, 쿄쿠세이구미. 호리에 형님이 운영하는 조직이야."

"누가 당신들한테 보이드를 넘겼습니까?"

"그, 그건...."

그가 대답을 망설였다.

몇 초가 흐르고,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하, 하라무라...."

가히 충격적이었다.

"뭐…?"

"우리도 직접 만나서 거래한 건 아니야. 그런데 거래처 이름에 하라무라 지부장의 이름이 있었어. 진짜야!"

"이런 시발...."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나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 새끼들 봐라....'

당연히 하라무라 지부장이 공급책일 리는 없다.

이건, 혹시라도 우리가 유통책을 잡았을 경우 원출처를 들키지 않기 위한 수작이다.

낭패다.

하라무라의 결백을 위해 공급책을 조사하고 있는데, 그 공급책이 하라무라가 되어버리면....

모든 게 원점이다.

'정말 철저하게 준비했네....'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움직임을 꿰고 있다.

이건…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군.

"이제 어떻게 하죠?"

김민주가 조심스레 물었고, 나는 고민하길 잠시.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일단 쿄쿠세이 사무실로 가보자고."

일단은 호리에라는 인간을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지.

"사무실로 안내해."

나는 남자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신문 발행까지 남은 시간은 단 4시간.

꼬리를 끊어버린 국제협회.

전혀 다른 공급책과 하라무라 이름으로 거래된 보이드.

나는 진심으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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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무성 코바야시 히로토 장관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일본 지부.

하라무라 지부장이 틀어놓은 인터넷 뉴스에서 격양된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오늘 오후 8시경, 코바야시 장관은 업무를 마치고 집무실을 나오며 아내에게 퇴근했다는 문자를 보냈지만, 현재까지 귀가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CCTV에는 집무실을 나서는 코바야시 장관의 모습이 보였지만 전용 차량을 탑승하지 않고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기에, 경찰 당국은 납치에 초점을 두고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만약 코바야시 장관을 목격하신 분이나 소식을 알고 계신 분들께선 아래 번호로 연락을....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각.

하라무라 지부장은 여전히 퇴근하지 않은 채, 집무실에서 그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남의 나라에서 아주 깽판을 치고 있군...."

이내 그가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이젠 하다 하다 장관까지 건드릴 줄이야.

새삼 국제협회의 영향력이 실감 났다.

그리고 그때.

"…이제 3시간 남았습니다."

함께 자리를 지키던 히나 보좌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락을...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김 대표한테? 됐어. 어련히 잘하고 있겠지."

"아뇨. 그 여성이 준 연락처로 말입니다."

"하! 뭐, 지부를 넘기라는 소리야?"

"...."

히나 보좌관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지부가 국제협회에 넘어간다고 뭐 그리 대수겠는가.

지부가 약쟁이들로 잠식당해서 토벌에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그녀는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하라무라 지부장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말했잖아. 우린 절대 지부를 넘겨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상황이...."

"알아. 내가 이대로 구속되면 지부는 약쟁이 소굴이 되겠지."

"책임자가 없는 조직을 무너뜨리는 것만큼 쉬운 건 없으니까요."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하라무라 지부장이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만약 내가 잡혀 들어가면 자네가 내 자리를 맡아주게."

"네…?"

히나 보좌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부터 자네에게 지부의 모든 권한을 위임하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제가 어떻게 지부장님을 대신해요! 전 그래 봤자 보좌관...."

"못할 거 뭐 있어? 따지고 보면 나도 김 대표, 그 인간이 떠넘겨서 얼떨결에 맡게 된 거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하다 보면 하게 돼.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봐온 자네라면 그 누구보다 잘할 거라고 생각하네."

"...."

히나 보좌관은 도저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고개를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나요...."

그녀가 망설이던 끝에 그 말을 뱉었다.

"아무리 김준우 대표와 의리를 지킨다고 해도, 어쨌든 우리 협회잖아요. 지부가 무너지면 그 누구보다 우리나라가 위험해지는 건데...."

이내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아무리 김준우에게 도움을 받았다지만 지부가, 자국민의 안전이 인질로 잡힌 이상 다시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하라무라 지부장의 대답은 꽤나 뜻밖이었다.

"내가 사춘기 고등학생도 아니고, 그깟 의리가 뭐가 중요하겠나."

"...네?"

"딱 한 번만 고개 숙이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지만, 그 한 번이 평생의 족쇄가 될 거야. 국제협회에 지부를 넘긴다고 해서 정말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나? "

천만에.

하라무라 지부장은 그렇게 말을 이었다.

"오히려 이번 일을 빌미로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겠지. 그럼 우린 앞으로 평생 고개를 숙인 채 살아야 할 거야."

"...."

"오해하지 말게. 이건 김 대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위해서야."

하라무라 지부장은 두 손을 포개며 중얼거렸다.

"뭐… 본인 잇속이 더 중요하신 어느 분들께선 생각이 좀 다른 모양이긴 하지만."

그는 코바야시 장관의 실종을 보도하고 있는 뉴스를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히나 보좌관을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끝난 것도 아니잖나."

"...3시간 안에 공급책을 잡을 수 있을까요?"

"힘들겠지.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하라무라 지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째 불안하지가 않네."

***

X됐다.

'X됐다, X됐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3시간.

여기저기 큰소리쳐놓고, 대통령 도움까지 받았는데 아직 공급책을 잡긴커녕 제대로 된 단서 하나 못 찾았다.

'시발 어떡하지…?'

이렇게 해서는 절대 못 찾는다.

이대로는 지부를 제 손으로 넘기든, 아니든 국제협회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다.

이제라도 다른 방법을....

"저… 더 물어보실 거 없으면 전 이만 가도 될까요…?"

쿄쿠세이구미의 사무실.

수장인 호리에는 멍이 든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넌지시 입을 열었다.

"...."

나는 그를 말 없이 바라보다가.

퍽, 퍼억―!

"왜! 대체 왜 몰라! 보이드를 그만큼이나 받아 챙겼는데, 얼굴도 못 봤다는 게 말이 돼?"

"악, 아악!"

성질이 뻗쳐올라 나도 모르게 또다시 주먹이 나갔다.

"마, 말씀드렸잖아요.... 대화는 전화로만 했고, 물건은 던지기로 받아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고...."

그가 기어이 울먹이며 말했다.

물론 그따위 변명을 듣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게 아니었다.

"결제는? 거래한 계좌라도 있을 거 아니야."

"그게… 전량 공짜로 넘겨줘서...."

뭐…?

"저도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첫 거래 서비스라고 해서 그냥 받았어요."

"그럼 통화한 번호는? 그건 남았을 거 아니야."

"공중전화로 한 건지, 번호도 안 남았는...."

퍽―!

시발, 도움이 안 되는군.

"어떡하죠. 접촉도 안 했고, 번호도 안 남았으면 도저히 단서를 찾을 수가 없는데...."

그때, 옆에 있던 김민주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나는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솔직히 나도 별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완전히 막다른 골목.

이대로는 전혀 가망이 없는....

"아!"

그 순간, 호리에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통화할 때, 그 여자가 그런 말을 했어요. 누군가 찾아오면 자기한테 연락하라고."

"뭐…?"

"그래서 연락처라도 남기실 거냐고 물어보니까… 이미 남겼다고 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아무것도 남긴 게 없으면서, 이미 남겼다는 건 대체....'

나는 가만히 눈을 굴리길 잠시.

'...!'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는 기분이었다.

"뭐, 아무것도 남긴 게 없으니 그냥 해본 소리겠... 아악!"

나는 그를 향해 마지막으로 꿀밤을 박아 넣었다.

억울하다는 듯 올려다보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제일 중요한 걸 제일 늦게 말한 값이야."

"...예, 예?"

"김민주, 핸드폰 줘 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설명 따윈 생략하고 곧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됐나?」

핸드폰 너머에서 하라무라 지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급책은 찾았지만 미끼였습니다. 듣자 하니 지부장님 이름으로 물건을 받았다더군요."

「...뭐?」

"원출처를 잡아야 하는데… 그에 대한 단서는 아직 못 찾았습니다."

「낭패군....」

"말씀드렸잖습니까. 아직은, 이라고."

그의 대답이 순간 끊겼다.

나는 그 틈을 타 말을 이었다.

"혹시 말입니다. 국제협회 사람이 지부장님을 찾아왔을 때…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습니까?"

「음? 어, 어. 지부를 넘길 거면 시간 내로 연락 달라고 하면서 번호를 주고 가긴 했는데....」

"그 번호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려주는 거야, 알려주는 건데… 이유가 있나? 그쪽으로 연락을 한다고 뭐가 해결될 것 같진 않은데.」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도록 하죠."

나는 설명을 뒤로하곤 번호를 받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핸드폰에 그 번호를 입력하고 있자, 이번엔 김민주가 물었다.

"그건 지부 거래를 위한 연락처잖아요. 의미가 있을까요?"

"철두철미하게 모습을 감추고 모든 꼬리를 끊어버린 놈들이야. 아무리 핵심 거래를 위한 핫라인이라고 해도 다른 방법을 썼겠지. 연락처를 남길 리 없잖아."

"네…?"

"누가 이번 작전을 계획했는지는 몰라도, 연락처를 남기고 간 건 그 계획에 없는 일이야."

나는 김민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해서, 같이 움직이는 수행원의 단독 행동이라는 소리지."

"...!"

동시에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그럼 일부러 우리가 연락할 수 있도록 번호를 남긴 거라는...."

"쉿."

통화 버튼을 누르고, 연결음이 들려오는 순간 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뭐, 대충 누군지는 알 것 같지만.

딸각―.

그 순간, 통화가 연결되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준우입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연락하라고 번호를 남긴 거 아닙니까?"

「....」

"뭐라고 말을 좀...."

「밖으로 나가는 중이니까 조금 기다려요.」

드디어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자.

「쿄쿠세이는 찾았나 보네요.」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 뭐. 그런데 그쪽이 누군지는 안 알려주는 겁니까?"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닌가?」

"하...."

뭐, 맞는 말이다.

국제협회 소속 중에서 나에게 개인적인 연락을 유도할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지.

PB 코퍼레이션 소속, 뱅크 아이템 관리팀장.

클로이.

"그래서, 번호는 왜 남긴 겁니까? 아무리 봐도 당신 윗선이 시킨 건 아닌 것 같은데. "

「왜, 영업 사원들도 자기 잇속은 자기가 챙기잖아요. 저라고 못 할 거 있나요.」

"개인적인 거래를 하고 싶다…?"

그 물음에 클로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그렇잖아요. 일본 지부가 어떻게 되든 나랑 무슨 상관이겠어요. 이왕 일하는 거 나도 챙길 거 챙겨가면서 하면 좋잖아요.」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묻자 대답이 끊기길 잠시.

「이클립스.」

그녀가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이클립스는 세계 최고 시설, 최대 규모의 연구소예요. 솔직히 말해서… 연구원 입장에선 탐낼 만한 곳이죠.」

"…설마 이클립스를 넘기라는 겁니까?"

「아뇨.」

그녀가 즉답했다.

「취직시켜달라는 거예요.」

"...?"

이건 또 무슨....

「솔직히 PB 코퍼레이션에서 오래 일하긴 했지만, 연구 시설을 제공해준다는 것 외엔 딱히 나랑 맞지 않더라고요.」

"그동안 나를 그렇게 방해하더니, 이제 와서?"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다 시키니까 한 거지.」

"어이가 없군요."

「뭐,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녀가 피식 실소를 뱉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내 조건은 이클립스 총 책임자 자리예요. 솔직히 그 정도 실력은 되는 것 같은데? 뭐, 이력서라도 보내드릴까요?」

"그건 됐고, 저한테는 뭘 줄 수 있습니까?"

「무사시노 신문.」

"...?"

생소한 이름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3시간 후에 하라무라 지부장에 관련한 내용을 발행할 신문사예요.」

"...."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우리를 잡지는 못해도 당장 지부를 구하는 건 충분할 텐데?」

알고 있다.

공급책을 잡지 못했어도, 일단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어마어마한 단서다.

하지만....

"이유가 뭡니까?"

「네?」

"그걸 알려준 이상, 당신도 위험해질 겁니다. 설마 이제 와서 반성하고 착한 일이라도 해보려는 겁니까?」

「착각하지 마요.」

그녀가 말했다.

「난 그냥 나한테 좀 더 이득이 되는 걸 선택한 것뿐이니까.」

"…그냥 단서만 받아 챙기고 당신 조건은 안 들어줄 수도 있는데?"

「그럼 전 그년한테 죽겠죠. 뭐… 진짜 그러겠다면 어쩔 수 없고.」

...미쳤군.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이전 같았으면 귓등으로도 안 들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일단은 받아들여야겠지.

「빨리 움직여야 할 거예요.」

"참고하도록 하죠."

나는 그 말을 뒤로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사시노 신문. 하라무라 지부장에 관한 기사를 거기서 발행한답니다. 위치 찍고 지금 바로 이동하십쇼."

"그, 그래!"

"네!"

박 부장을 포함한 청소 3팀원들은 곧장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선생님은요…?"

김민주는 그 자리에 남아 주춤거리며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따로 준비할 게 있어."

"네?"

"느낌이 안 좋아서 말이지. 아무튼, 먼저 가 봐."

김민주는 여전히 떨떠름한 듯했지만, 더 입을 열지 않고 팀원들을 뒤따라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을 먼저 보내고, 나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 접니다."

이윽고 들려오는 목소리.

"혹시 전에 부탁한 거, 준비됐습니까?"

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보스전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270

270

김준우와의 통화를 마친 클로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몸을 숨기고 있는 세이프 하우스, 그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바닷가.

클로이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길 잠시, 다시 세이프 하우스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중요한 전화였나 봐요?"

"...!"

어째선지 에마 대표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동시에 클로이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떨리는 손을 애써 꽉 쥐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입니다."

"흠?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처음 듣는데."

"뭐…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

에마 대표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됐어요. 직원 사생활까지 뭐라 할 생각은 없어요."

이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에마 대표는 관심 없다는 듯, 먼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이를 지켜보던 클로이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깊은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때.

"아, 그 무사시노 신문사 말인데...."

에마 대표가 순간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클로이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네…?"

"기사 내용 컨펌했어요? 3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아...."

점점 멘탈이 흔들렸지만, 클로이는 정신을 꽉 붙잡고 대답했다.

"아뇨. 이미 기사 전문을 건네줬으니 따로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에이, 그래도 중요한 일인데 최종 확인은 했어야죠."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까진 없어요. 뭐, 지금이라도 가서 확인해보죠."

"...네?"

에마 대표의 말에 클로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뭘 그렇게 놀래? 확인하자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아, 아니 그게… 어차피 지금쯤이면 인쇄도 다 마치고 발행 준비 중일 텐데 굳이 지금 가서 확인하실 필요가 있나 해서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예요. 물론 문제는 없겠지만, 마지막에 확인하고 안 하고는 또 큰 차이가 있으니까."

"그, 그렇긴 하지만...."

클로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에마 대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이렇게 말리려는 거죠? 내가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잠깐, 당신 설마...."

그 순간, 에마 대표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을 끊었다.

"귀찮아서 그런 건가?"

"...아, 하하. 사실 조금 피곤하긴 했습니다."

"뭐, 그럴 만도 하지. 그럼 클로이 팀장은 여기 남아 있어요. 나 혼자 갔다 와도 되니까."

에마 대표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등을 돌렸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클로이 팀장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이건 심장이 몇 개라도 모자랄 판국이다.

그녀가 김준우에게 무사시노 신문사에 대해 알려준 건, 당연히 이제 와서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지금이라도 선한 일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말했듯, 그녀는 보다 자신에게 이득이 될 만한 일을 선택했을 뿐이다.

국제협회는 현재 프랑스를 거점으로, 거대한 중앙 권력을 내세우고 있다.

뱅크 아이템을 이용한 중앙 통제는 그 효과가 점점 드러나고 있으며, 이에 뒤늦게 국제협회에 협력하는 국가 또한 늘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전 세계를 국제협회 통제하에 두는 건 시간문제라는 뜻이다.

그래, 시간문제였다.

김준우, 그 인간만 아니라면 말이지.

여태껏 몇 번이나 그의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전무후무한 이레귤러.

분석 자체가 불가능한 능력자.

청소부 출신으로 시작해서 아무런 인맥도, 자본도 없이 단 2년 만에 세계 최고의 민간 기업을 키워낸 인물.

현재는 세계 각국에 지부를 세우고, 수천 명에 달하는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자.

무엇보다 공포정치나 압박 없이 오로지 실력만으로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덕분에 모든 지부, 모든 직원이 진심으로 그를 믿고 따르고 있다.

이미 그에 대한 수식어는 명불허전이 되었다.

물론 국제협회 입장에선 너무나 큰 걸림돌이었다.

모든 인력과 지원을 쏟아부어 계속해서 그를 견제하고 있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지....'

확신할 수 있다.

김준우가 살아 있는 한, 국제협회는 언젠가 반드시 무너진다.

김준우의 손에 의해, 그리고 김준우가 가진 영향력에 의해서.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노선을 갈아타는 게 현명한 일이리라.

물론 그동안 PB 코퍼레이션에서의 업무가 자신과 맞지 않은 이유도 있긴 했지만.

뭐, 이것도 어디까지나 직장일 뿐이다.

비전에 따라 직장을 옮기는 건 당연한 권리이지 않은가.

다만 문제는....

'걸리면 뒤진다는 거지.'

클로이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어쨌든 지금은 그런 것보다 빨리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에마 대표가 무사시노 신문사로 간다면 김준우와 마주치게 된다.

그랬다간 시칠리아에서 미처 끝을 보지 못한 전쟁이 다시금 시작될 것이다.

아니, 둘이 싸우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이 만나면, 본인이 무사시노 신문사에 대해 알려줬다는 게 바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이라도 에마 대표를 말려야 하나?

아니, 그럴 명분이 없다.

그러면 김준우한테 연락해서 지금은 피해 있으라고....

'그걸 들어 처먹을 리가 없잖아....'

그놈들도 일분일초가 급박한 상황이다.

이제 와서 가지 말라고 해봐야 곧이곧대로 따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도망치자.'

그래.

그냥 지금 도망치자.

차라리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다.

일단 몸을 숨기고, 상황이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김준우에게 연락하면 된다.

아무리 적이었다고 해도 본인에게 도움을 준 사람을 모른 척하진 않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클로이는 짐을 챙기기 위해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필요한 것만 대충 챙겨서 일단 일본을 뜨자.

그렇게 생각하며 사무실의 문을 여는 순간.

"정말이지...."

마치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성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

웨슬리 사무총장의 오랜 친구이자, PB 코퍼레이션의 수장.

과거 세계 랭킹 1위를 10년간 지켜온 헌터.

에마 대표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

도쿄 인근, 무사시노시.

그곳에 위치한 무사시노 신문사 본사.

그렇게 유명한 신문사는 아니지만 연예인의 열애설, 정치인의 불륜 등 늘 자극적인 기사로 여러 대형 스캔들을 터트리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꽤나 적절한 곳을 골랐다는 생각과 함께 신문사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도착한 김민주와 팀원들에 의해 난장판이 된 인쇄소 내부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깽판을 쳤군....'

천천히 둘러보다가, 이내 한 구석에서 신문을 확인하고 있던 팀원들과 마주했다.

"좀 살살들 하지, 뭐 이렇게...."

"선생님...."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자, 김민주와 팀원들이 황망한 표정으로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 이내.

"여기… 아니에요."

김민주가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뭐…?"

"하라무라 지부장 기사 발행할 신문사… 여기 아니라고요."

"그게 대체 무슨...."

김민주는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신문을 나에게 건넸고, 곧바로 그것을 낚아챘다.

그리고 확인한 기사 내용은....

「연예인 A양의 사생활 폭로.」

"시발...."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뒷장도 모조리 확인했지만, 하라무라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래도 클로이가 우리를 속인 거 같아요."

"...."

아니.

굳이 본인의 연락처를 남기면서까지 함정을 팔 이유가 없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결과는 매한가지였을 테니까.

이거는....

"...걸려들었네."

"네, 네?"

"클로이가 국제협회를 배신할 거라는 걸 알고, 일부러 그쪽한테도 거짓 정보를 흘린 거야."

"대체 왜요…?"

"왜긴."

우리를 일부러 여기로 부르려고 한 거겠지.

그리고 이런 짓을 할 만한 인간은....

"오랜만이네요."

때마침 뒤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이거 미안해서 어떡해?"

PB 코퍼레이션의 수장.

에마 대표가 서 있었다.

"...."

"나 찾던 거 아니었어요? 표정이 왜들 그래."

"어떻게 알았습니까?"

"뭐? 클로이가 뒤통수를 칠 거라는 거?"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서 낌새가 영 안 좋았거든. 저번 홍콩 지부 때도 독단적으로 당신한테 연락했더라고."

"고작 그거 하나로 이렇게까지 준비했다는 겁니까?"

"물론 그거 하나 때문만은 아니죠. 애초부터 우리 쪽이랑 잘 안 맞는 것 같기도 했고. 그리고 원래 나이를 먹다 보면 그… 감이라는 게 있어요."

에마 대표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클로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죽였어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라고 말하고 싶은데,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못 죽여요. 뱅크 아이템 컨트롤 센터 가동 키를 그년이 가지고 있거든."

에마 대표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알아내야 죽이든 말든 할 텐데.... 뭐, 어쨌든 지금은 살아 있어요. 어디에 좀 매달려 있긴 한데."

"...."

"왜, 동료인 척 좀 했다고 이제 와서 갑자기 걱정돼요?"

에마 대표가 비꼬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실소를 뱉었다.

그럴 리가.

클로이의 상태를 물어본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들키면 바로 죽을 수도 있는 짓을 왜 한 건가 궁금했으니까.

뭐, 듣자 하니 보험이 있었군.

설령 들킨다고 해도 가동 키를 쥐고 있는 한 바로 죽이진 못할 걸 알고 있었던 건가.

"아무튼, 그년 얘기는 됐고. 그래도 시간도 모자랐는데, 여기까지 온 건 꽤나 대단했어요."

이내 에마 대표가 내게 다가오며 대놓고 조롱했다.

나는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고....

이미 발행 시간이 10분이나 지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끝났다.

이제는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다.

그렇게 천장을 바라보며 분노 섞인 한숨을 토해내길 한 차례.

"그래서? 시간도 다 지났는데, 굳이 내 앞에 나타난 이유는 뭡니까. 약 올리는 겁니까?"

"뭐, 그것도 있고...."

내가 쏘아대자, 에마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못 끝낸 일, 이번에 끝낼까 해서."

"...."

그녀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지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 저랑 여기서 싸우겠다는 겁니까?"

"그럼, 뭐 대화로 끝낸다는 뜻일까 봐?"

"잘해오다가 끝에서 실수하시는군요. 당신이 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여기서 에마 대표를 붙잡으면, 불리한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거다.

내게 있어선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는....

"하하, 하하하!"

"...?"

"설마 내가 그것도 모르고 왔을까 봐?"

그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제야 나 또한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날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그녀 또한 모를 리가 없다.

무엇보다 여기서 붙잡힌다면 지금껏 준비해온 일들이 모조리 도루묵이 될 거라는 것도.

그럼에도 당당히 내 앞에 나타났다는 건....

'시발, 설마…!'

푹―.

그 순간, 에마 대표가 자신의 팔뚝에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고유 스킬 : 병기 확보 - 각성]

[조정간 - 투하]

[시전자의 각성 스킬이 시전이 확인되었습니다.]

[고유 화기에 접속합니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접속 확인.]

[생체 - 화기 원격 투하 프로토콜 개시]

그녀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기어이 보이드까지 투약하다니....

진심으로 여기서 끝장을 볼 생각인 건가.

"김민주...."

에마 대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팀원들 데리고 최대한 멀리 대피해."

"네, 네…!"

"아, 그리고 만약에 내가 죽으면...."

그들이 곧바로 몸을 움직이려던 그때, 내가 말을 이었다.

"청소용품 사느라 대금 밀린 거 있거든? 그거 대신 좀 갚아주라."

"...."

김민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팀원들을 데리고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그럼...."

이윽고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각성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시전자는 기존의 클래스를 초월합니다.]

"우리 대표님 실력 좀 보죠."

[각성 클래스 : 절대 군주]

여유 부릴 틈도 없이, 곧바로 전력을 끌어냈다.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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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예요?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청소 3팀원들이 김민주와 함께 무사시노 신문사를 빠져나온 직후.

문소연이 황망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김준우, 그 자식 위험한 거 아니야?"

"도,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냐?"

한상혁과 박근태 부장 또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김민주 또한 이 상황을 완벽히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녀만큼은 바짝 정신을 차려야 했다.

본인마저 우왕좌왕한다면, 누군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으니까.

"일단…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게 우선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신문 발행은 결국 막지도 못했는데, 그런 우리 앞에 PB 코퍼레이션의 대표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직접 보이드까지 투약하면서 김준우와 못다 한 결판을 짓기 위해.

이건 위험하다.

결과가 어떻게 되던 저 둘이 전력으로 맞붙는다는 것만으로 재앙이 닥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나마 근처에 민가가 많진 않지만, 싸움에 휘말린다면 아무리 본인이 나선다 한들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모두를 대피시켜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민주는 팀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반경 1km 이내에 모든 시민을 대피시켜야 해요. 도와줄 수 있나요."

"…당연하다마다."

"그거야 우리 전문이지."

"하지만 저희끼리 1km 내 모두를 대피시키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해요. 한 번에 대피시킬 만한 방법이 필요한데...."

문소연이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과연 그녀다운 판단이었다.

지금 인원은 고작 4명.

1km 반경을 직접 발로 뛰면서 대피시키기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던전 출현 경보."

"…네?"

"도심에는 던전이 출현했을 때를 대비해서 경보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어요. 그걸 작동하면 돼요."

김민주가 잠시 생각을 하던 끝에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고 진짜 던전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순 없으니까, 하라무라 지부장님한테 연락해서 수동으로 경보를...."

하지만 그 순간.

쾅―!!!

갑자기 하늘에서 거대한 광선이 떨어지며, 방금 그들이 빠져나온 무사시노 신문사 건물을 직격했다.

그와 동시에.

쿠구구구구―!!

"꺄아아아악!"

"뭐, 뭐야!!"

그 충격으로 인해 주변의 지반이 허공에 떠올랐다.

김민주를 포함한 팀원들은 그 강력한 충격파에 미처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큰 포물선을 그리며 뒤로 날아갔다.

"...!!"

김민주가 재빨리 몸을 가누며 상황을 파악했을 땐, 이미 신문사의 건물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초토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펄펄 끓는 검은 기운을 내뿜는 김준우와 푸른 스파크가 튀고 있는 에마 대표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

물론 김민주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몇 번이나 경험했지만, 이번엔 매우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큰일 났네....'

이전과는 그 분위기부터 차원이 달랐으니까.

***

"...."

"...."

에마 대표의 갑작스러운 선공으로 건물이 날아간 직후.

주변 지반이 날아가며 생긴 거대한 구덩이 가운데에서 나와 그녀는 서로 마주 본 채 대치를 이어갔다.

지직, 지지직―.

보이드를 투약한 에마 대표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세는 확실히 이전과는 비교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런데....

'폭주는 하지 않는 건가.'

어째선지 이성을 잃은 채 날뛰던 한유빈과 다르게 그녀는 꽤나 냉정해 보였다.

단순히 파괴 본능만 끌어올린 것이 아닌 판단력과 집중력, 그리고 침착함 등 전투를 위한 모든 요소가 비약적으로 상승한 듯했다.

'설마… 그새 개량한 건가.'

보이드 제조법을 손에 넣은 지도 며칠이 지났는데 왜 바로 유통하지 않나 했더니, 개량 때문이었군.

쯧, 더 까다로워졌다.

차라리 이성을 잃고 앞뒤 없이 달려든다면 받아 쳐주기만 해도 될 텐데.

이렇게 되면 나 또한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뭐, 그렇긴 해도....'

시칠리아에서도 봤듯, 그녀는 위성을 무기로 사용하는 저격수 클래스다.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위성을 통해 직접 포격하는 공격은 정확히 조준하기엔 한계가 있다.

강력하긴 해도 피하기는 쉬운....

[고유 스킬 : 병기 확보 - 각성]

[조정간 - 투하]

[가르강튀아 최대 출력]

[조준 시스템을 수동으로 변경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 주변의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습득 스킬 : 좌표 변경]

[시전자의 스킬을 차원 텔레포트를 통해 전송합니다.]

이내 푸른빛의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다.

마치 던전 입구와 비슷한 형태의 차원 구멍.

이윽고 그 구멍 사이로.

지이이잉―.

파앙―!!

"...!"

방금 하늘 위에서 떨어진 광선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쏟아진 공격.

이렇게 되면 피할 틈이 없다.

[고유 스킬 : 마왕 - 강자 독식]

[고유 스킬이 지속하는 동안 시전자보다 마력이 낮을 경우, 모든 공격은 무효화 됩니다.]

곧바로 손을 들어 검은 기류를 끌어모았지만.

쿠구구궁―!!!

"큭…!"

검은 기류가 맥없이 뚫리며 광선이 내 왼쪽 어깨를 직격했다.

머리까지 파고드는 엄청난 통증.

다행히 팔이 떨어져 나가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움직이질 않는 걸 보니, 제 기능을 잃은 듯했다.

"하, 하하...."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시칠리아에서 만났을 때도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최소한 이 정도는 아니었다.

세계 랭킹 1위인 노아도 스테이터스가 최고치에 도달해야 겨우 내 마력을 넘어섰는데....

'버프 스킬 하나 없이 내 마력을 웃돈다고…?'

이래서 시발, 약쟁이들은....

그녀를 노려보며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위성이 발사한 광선을 텔레포트로 전송해서 직접적인 타격을 유도하고 있다.

정확한 조준에 한계가 있다는 약점을 차원 텔레포트로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괜히 대표직에 있는 건 아닌가 보네...'

저건 성가시다.

일단 저 텔레포트부터 어떻게든 해야겠군.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이내 검은 기류가 주변 공간을 뒤덮은 순간.

나는 곧바로 주변에 떠 있는 텔레포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유 스킬 : 병기 확보]

[조정간 - 연발]

파바바박―!!

콰과광―!!

이번엔 텔레포트가 아닌 에마 대표가 직접 공격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텔레포트를 파괴하지 못하게 방해하려는 듯, 계속해서 공격이 쏟아졌다.

결국, 나는 타깃을 바꿔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고유 스킬 : 병기 확보 - 각성]

[조정간 - 투하]

[습득 스킬 : 좌표 변경]

지이잉―!

쾅―!!!

이번엔 또다시 허공에 떠 있는 텔레포트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크윽…!"

그 충격에 내 몸이 허공에 떠오르길 잠시, 이내 곧 땅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아스팔트 바닥을 몇 번이나 나뒹굴었다.

전신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가까스로 피하긴 했지만, 충격을 모두 막을 순 없었다.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는 왼쪽 팔과 더불어 온몸이 심히 저릿저릿했다.

'귀찮게 됐네....'

텔레포트를 막으려고 하면 직접 공격으로 방해하고, 본인을 공격하려고 하면 사방에서 공격이 빗발친다.

아니, 귀찮은 수준이 아니라… 완벽하다.

거리를 좁히지도, 그렇다고 떨어지지도 못하는 상태.

지금 그녀는 포지션 선정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다.

이대로는 소모전이다.

스킬을 유지하는데 엄청난 마력을 소모하는 나와 다르게 저격수 클래스인 그녀가 소모하는 건 오로지 탄환뿐. 이 싸움을 오래 끌면 불리해지는 건 나다.

무엇보다 지금 몇 번이나 공격을 허용한 탓,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일단은 다리라도 회복할 수 있게 조금만 시간을 끌어볼까.

"그나저나 도통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는데...."

잠시 공격을 멈추고 에마 대표를 향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싸움, 사무총장이 허가한 일입니까?"

"...."

"베트남에서 실패한 전적도 있겠다, 사무총장은 무조건 일본 지부를 빼앗는 게 1순위일 텐데. 굳이 이런 도박을 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아니면...."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여기서 저를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계속되는 물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물론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긴 했다.

이번 일은 변명의 여지 없이 완벽하게 우리의 패배였다.

시작부터 시간을 끌린 것도 모자라, 모든 움직임을 간파당하고. 심지어 본인의 부하까지 속임으로써 끝끝내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

이대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어도 일본 지부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굳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칫 모든 것이 도루묵이 될 수 있음에도.

웨슬리 사무총장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명령한 게 분명....

"그 인간은 몰라요."

그 순간,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당연히 허가한 일도 아니고요."

"그럼 대체 왜…?"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만약 여기서 그녀가 패배한다면 나는 보이드 유통의 모든 혐의를 그녀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고, 덩달아 일본 지부도 되살아날 것이다.

그걸 그녀 또한 모를 리가 없다.

그 모든 리스크를 짊어지면서까지 싸울 이유가....

"사실, 난 일본 지부고 나발이고 관심 없어요."

"...뭐?"

"그거야 웨슬리, 그놈한테나 중요한 거지,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게 대체 무슨...."

"난 그냥… 당신이랑 싸우고 싶어서 온 거야."

그 순간, 에마 대표의 입꼬리가 쭉 찢어졌다.

"재밌잖아요? 서로 목숨마저 내던지는 싸움. 내가 그날 이후로 얼마나 좀이 쑤셨는지 몰라. 방해꾼 없이 둘이서 싸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텐데, 고작 지부 하나 때문에 놓칠 순 없잖아?"

"...."

"그러니까 이제 움직일 수 있으면 계속해 보자고."

죽고 싶지 않으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텔레포트를 소환했다.

[습득 스킬 : 좌표 변경]

지이잉―!

이윽고 나를 향한 그 구멍들에서 밝은 빛이 보인 순간.

"에휴...."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어트렸다.

덜 맞으면서 싸울 생각은 접어야겠군.

뭐… 이미 많이 맞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 몸에서 검은 기류가 다시 한번 뿜어져 나왔다.

[고유 전장 : 악몽의 곶]

스스스―!

이내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검은 하늘과 검은 바다.

기괴하게 솟은 절벽들 사이로 음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

나는 그 공기를 크게 들이쉬길 한 차례.

"일어나라."

[원형 소환 : 대원수 - 바엘]

[원형 소환 : 정복자 - 아가레스]

[원형 소환 : 지배자 - 가미긴]

[소환 : 군단]

키에에에에―!!

내 전력을 불러일으켰다.

그와 함께.

[장비가 생성되었습니다.]

[마검 : 타르타토스]

[마갑 : 악몽의 베네]

이내 에마 대표를 향해 검을 겨누며 군단에 진격 명령을 내렸다.

구구구구구―!!

그들의 움직임에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272

272

PB 코퍼레이션.

국제협회의 산하 비밀 조직이자 암살, 납치, 적대적 인수합병 등 음지에서 국제협회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활동하는 기구.

에마가 처음 웨슬리 사무총장에게 처음 그곳의 대표직을 제안받았을 땐, 솔직히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마침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토벌에도 질린 참이었다.

무엇보다 그맘때쯤 헌터에 대한 회의감으로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시기였다.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왜 약자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

그런 회의감.

그 때문에 국제협회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직은, 당시 그녀에게 있어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에마 대표는 웨슬리의 제안으로 PB 코퍼레이션의 수장이 되었다.

처음 몇 년은 예상했던 대로 무척이나 적성에 맞았다.

그저 희생을 강요당하던 헌터와 다르게, 그곳은 힘과 실력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했으니까.

마치 이 세상의 꼭대기에 선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오롯이 본인의 판단에 따라 헌터든, 정치인이든 전 세계 그 누구라도 죽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왕의 기분 또한 오래가진 않았다.

또다시 몇 년이 지나, PB 코퍼레이션에서 처리해온 이들이 세 자릿수를 넘어갈 때쯤 되니 또다시 지루함이 찾아온 것이다.

이곳도 결국 직장이었고, 아무리 특별한 일을 한다고 해도 결국 일일 뿐이었다.

이젠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아무런 감흥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싸움과 지배에 대한 욕망을 애써 참아가던 그때.

김준우가 나타났다.

당연히 처음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청소부 출신의 이레귤러라고 해봤자, 누가 관심이나 두겠는가.

하지만 그 생각이 바뀌게 될 때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인과 웨슬리가 쌓아 올린 걸 아무렇지 않게 무너뜨리는 그를 보며, 에마 대표는 확신했다.

PB 코퍼레이션이고 국제협회고, 저 남자가 살아 있는 한 그 누구도 정점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그래.

완전한 정점에 서기 위해선, 반드시 김준우를 넘어서야 한다.

어차피 그를 넘지 못하면 평생 이인자 신세일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기어이 그 기회가 찾아왔다.

에마 대표는 시칠리아에서 보지 못한 끝을 여기서 보겠노라 다짐했다.

마침 보이드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개량을 통해 폭주 위험성을 낮추고, 대신 이능력과 함께 동체 시력과 판단력 등 전반적인 전투력을 대폭 상승시킨 물건이다.

김준우가 아무리 규격 외의 괴물이라고 해도 최소한 비벼볼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쿨럭…!"

에마 대표의 입에서 핏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던전 속에 들어온 듯, 현실과는 전혀 다른 공간.

거친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그 어두운 절벽 위.

크르르르―.

키에에에에―!

에마 대표의 눈앞에는 수백, 수천 마리의 몬스터.

그리고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 믿긴 힘든 모습의 김준우가 자신을 집어삼킬 듯 진을 치고 있었다.

이제 겨우 한 번 진격해온 뒤였다.

온 힘을 끌어모아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를 어떻게든 처리해나갔지만....

"…흐, 흐흐흐."

역부족이다.

절대 이길 수가 없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멀리서 군단을 지휘하고 있는 김준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건 전투가 아니다.

상식을 벗어난 존재와 그가 이끄는 대규모 군단을 혈혈단신으로 상대하는 게 어떻게 전투인가.

학살이라면 또 모를까.

그가 여태껏 몇 번이나 다른 존재를 이 공간에 초대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 모두가 이 말도 안 되는 전장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며 죽어갔을 거라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하물며 그게 몬스터라고 해도.

"나름 철저하게 분석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과소평가였나 보네."

한쪽 팔을 잃은 그녀가 자리에 주저앉은 채 입을 열었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당한 건 그 사람 이후로 처음이야."

"…그 사람이라면?"

"웨슬리."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내.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에마 대표가 친근한 말투로 물었다.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살아?"

"…무슨 말입니까?"

"청소부 출신이었다면서?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있으면 높은 곳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었잖아. 왜 굳이 그런 밑바닥을 선택한 거냐고."

"...."

김준우의 표정이 꽤나 복잡해 보였다.

하지만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진 않았다.

그 대신.

"업보입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청소부가 딱히 밑바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솔직히 따지고 보면 힘도 권력도 모두 가진 당신들마저 제 역할은 미뤄두고 다른 짓에 힘을 쏟고 있지 않습니까. 최소한 제가 일했던 곳은 그러진 않았습니다."

김준우가 말을 덧붙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시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본인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을 텐데 말이죠. 나름 국제협회 소속인 당신과는 다르게요."

"...."

"누가 더 밑바닥 인생인 것 같습니까?"

그 물음에 에마 대표가 피식, 실소를 뱉었다.

"맡은 바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그건 그냥 다른 짓을 할 힘이 없는 인간들의 변명이야. 너도 알잖아. 원래 세상은 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돌아가고, 우린 그걸 누릴 권리가 있다는 거."

"...."

김준우는 대답을 아꼈다.

그 틈에 그녀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너도 우리랑 같이 일했으면 좋았을 텐데. 너 정도 실력이라면 정말 혼자서도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었을지 몰라."

"...."

"어때, 지금이라도 우리랑...."

"그러려고 했습니다."

"뭐…?"

그리고 그때,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과거엔 당신들, 국제협회와 같이 세상을 다 먹을 생각이었다고요."

"그럼 왜...."

"왜 지금은 당신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요?"

그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내가 꼭대기에 서려고 했던 건, 작전에 방해되는 놈들을 모조리 쳐내고 싶어서였습니다. 한때는 청소팀이 그중 하나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이내 김준우의 시선이 에마 대표를 향했다.

"알고 보니 진짜 방해되는 놈들은 따로 있더군요."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힘 있는 자의 권리? 초등학생입니까? 애초에 내가 그딴 거에 관심이 있었으면 정치를 했지, 헌터를 했겠습니까?"

"...."

"날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으면, 국제협회는 맡은 바 역할을 다하셨어야 했습니다. 시민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김준우의 그 말에 에마 대표가 고개를 떨어트리길 잠시.

"흐, 흐흐흐…!"

그녀가 흐느끼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

"아무래도 우린 평생 가도 서로를 이해 못 할 것 같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왕 시작한 거 진짜 꼭대기까지 가봐. 근데 웨슬리, 그놈은 조심해야 할 거야. 겁쟁이 새끼인데, 실력 하나는 좋거든."

"…항복하려는 겁니까?"

"하면 살려주게?"

"하라무라 지부장의 혐의를 풀어주고, 보이드 유통 및 민가 습격에 대한 모든 책임을 국제협회가 지겠다고 약속한다면... 못할 것도 없죠."

김준우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힘들 것 같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에마 대표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고유 스킬 : 병기 확보 - 각성]

[조정간 - 투하]

[시전자의 각성 스킬이 시전이 확인되었습니다.]

[고유 화기에 접속합니다.]

다시 한번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이윽고 모든 힘을 끌어모아 김준우를 향해 공격을 시도했지만.

키에에에에―!!

크아아아아―!

수천 마리의 마물들이 곧바로 김준우를 향해 몸을 던졌다.

콰과광―!!

그렇게 그녀의 마지막 공격은 김준우에게 채 닿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날아갔다.

"하하...."

포기한 건지, 아니면 마지막 희열을 느낀 건지 모를 웃음소리가 들려오길 한 차례.

[고유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카르마]

───!!

이윽고 거대한 업화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

"...."

방금까지 에마 대표가 서 있던 곳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전생에서 나를 죽이고, 여기서도 수십 명의 사람을 죽여 온 국제협회의 산하 조직, PB 코퍼레이션.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조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것으로 하라무라 지부장의 혐의도 무사히 벗을 수 있을 것이고, 일본 지부도 무사하겠지.

내 복수를 달성한 건 덤이고.

"...."

싸움은 끝이 났지만, 그럼에도 나는 고유 전장에서 나오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기뻐해야 마땅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한 건 처음이었으니.

막상 입 밖으로 꺼내고 보니,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어질렀다.

"쯧...."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나는 이내 고개를 털며 잡념을 닦아냈다.

그 후 스킬을 거두자, 이내 검은 하늘에 가려졌던 일본의 밤하늘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님…!"

김민주가 한걸음에 나를 향해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어."

"자, 잠깐만요! 파, 팔이…!"

"괜찮다니까."

크게 찢어진 탓에 피가 나고 있었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뭐가 그리 대수겠는가.

그럼에도 김민주는 자신의 소매를 찢어 내 팔을 지혈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지금은 그냥 내버려 뒀으면 했지만, 아쉽게도 그녀를 뿌리칠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잠자코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그녀가 넌지시 물었다.

"몸 생각 좀 하세요. 아픈 채로 돌아가면 억울하잖아요."

"...?!"

그와 동시에 내 눈이 동그래졌다.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어딜 돌아간다고...."

"숨기지 않으셔도 돼요. 아영 씨가 얘기해줬거든요."

"...."

아니, 장난해?

얘기 안 하겠다고 했으면서!

"아영 씨한테는 화내지 마세요. 대화하다가 실수로 튀어나온 걸 제가 꼬치꼬치 캐물은 거니까."

"넌 그걸 냅다 믿었고?"

"당연히 처음엔 안 믿었죠. 그런데… 아영 씨 표정을 보니까 안 믿을 수가 없던데요?"

"에휴...."

하여간 그 인간.

거짓말은 또 못 해 가지고.

"유빈 씨한테는 정말로 비밀로 할게요."

"그 인간은 이미 알고 있다."

"잠깐... 그럼 두 사람한테는 말해줬으면서 저한테만 비밀로 한 거예요?"

아, 아아.

어째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은데?

"내가 설마 내 입으로 떠들었겠냐. 어째 다들 눈치가 좋더라고."

김민주는 그제야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전혀 의도치 않았는데... 이걸로 주변 사람은 다 알게 된 건가.

시발.

"선생님이 있던 곳에선 저랑 무슨 관계였나요?"

그때, 김민주가 내 팔에 감은 천을 단단히 고정하며 물었다.

"내 부하였지."

"…딱히 지금이랑 다를 건 없네요."

"그런데 내가 잘랐어. 어깨 다쳐서 수술했다고."

"풉! 거짓말."

...?

거짓말이라고?

면전에 대고 쌍욕도 뱉었는데?

"뭐,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충분히 그럴 만할 것 같아요."

"…무슨 뜻이야?"

"검사가 어깨를 다치면 아무리 수술을 했다고 해도 이전으로 돌아가진 못해요. 1초, 아니 0.1초라도 차이가 생길 거고, 토벌에서 0.1초의 차이는...."

"목숨이 오가지."

그녀를 대신해 대답했다.

그러자 김민주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쪽에서도 선생님은 절 살려준 거네요."

"...."

아까부터 자꾸 뭐라는 거야.

"그런데 말이에요.... 정말 모든 일이 끝나면 돌아가실 건가요?"

그때, 김민주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나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민주 또한 더 이상 물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렇게 무거운 정적만이 흐르던 그때.

"주, 준우 씨! 민주 언니! 큰일 났어요!"

문소연을 비롯한 청소 3팀원들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큰일이라뇨? 시민들 대피 완료한 거 아니었어요?"

"대피는 무사히 끝냈어요. 그런데 방금 지부에서 연락이 와서는...."

망설이길 잠시, 문소연이 말을 이었다.

"보이드가 대량으로 유통됐다고 해요."

"네, 네?!"

"출처도 심지어 쿄쿠세이구미가 아니래요. 또 다른 조직에도 보이드를 맡겼었나 봐요!"

한유빈이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이렇게 될 걸 대비해서 다른 놈들한테 여분을 맡겨둔 건가?

"선생님! 전 지금 당장 유통 루트부터 파악해 볼게요. 선생님은 병원에...."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네?! 지금 본인 상태가 어떤신지 모르는 거예요?! 지금 당장 병원부터…!"

"그게 아니라. 유통 루트 파악 안 해도 된다고."

"...네?"

김민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이번만큼은 나도 예상했다.

혹시 모를 자폭을 대비해, 일본에 오기 전부터 이아영 본부장한테 부탁해놨으니까.

273

273

"뭐…라고?"

프랑스, 파리.

전 프랑스 국회, 현 국제협회 본부.

업무를 보고 있던 웨슬리 사무총장에게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에마 루시아 대표가… 일본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대, 대체 왜…? 김준우한테 들킨 겁니까?"

"아뇨. 작전은 완벽했다고 하는데...."

수행비서 케이트가 잠시 망설이던 끝에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스스로 김준우을 찾아가서 전투를 벌인 것 같습니다."

"...."

웨슬리 사무총장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그녀가 어떤 인간인지, 어떤 성격인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권력욕과 지배욕이 누구보다 강한 여자.

헌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고, 그렇기에 PB 코퍼레이션의 대표직을 제안했었다.

본인도 처음에는 꽤나 만족해하는 듯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늘 그렇듯 금세 따분해했으니까.

그녀는 항상 보다 위에 서고 싶어 했고, 누군가를 굴복시켜 자신의 존재의의를 확인하던 여자였지만....

그렇다고 설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아니, 사실 예상을 못 한 것도 아니다.

언젠간 터져도 터질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왜 하필 지금이냔 말이다.

에마 대표는 지금 국제협회에 너무나 필요한 존재였다.

그런데 다 된 작전에 재를 뿌린 것도 모자라, 국제협회의 가장 큰 전력이 스스로 목숨을 내던졌다.

손해?

감히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그가 주먹을 으스러질 듯 쥐었다.

베트남과 일본 지부를 공격한 것은, 어디까지나 WDSO를 고립시키기 위함이었다.

베트남은 실패했지만, 일본만이라도 성공했다면 이후 지부도 차례로 진행할 원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돼버리면....

'더는 불가능하겠지....'

가장 큰 문제는 계획이 틀어진 것뿐만 아니라, PB 코퍼레이션까지 잃을 판국이라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PB 코퍼레이션만큼은 어떻게든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일단은… 클로이 팀장을 대표로 올립시다."

"저, 그게...."

웨슬리 사무총장의 지시에 케이트 비서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클로이 팀장도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뭐?"

"아무래도 에마 대표가 그렇게 된 직후에 소속을 이탈한 것 같습니다."

이런 시발.

웨슬리 사무총장의 핏줄이 빳빳하게 섰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시민들의 저항도 거세지고… 무리하게 정부까지 장악한 이상 어떻게든 세력을 키워야 하는데, 이대로는 그나마 붙어 있는 협회들까지 등을 돌릴 수도...."

쾅―!!

웨슬리 사무총장은 듣다못해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를 집어 던졌다. 그와 동시에 케이트 뒤편에 있던 문이 박살 났다.

"내가 그걸 모를까요?"

"…죄송합니다."

공포심을 통해 힘으로 통제권을 잡은 지도자는 더 이상 뒤로 돌아갈 수 없다.

프랑스 정부까지 장악하고 국제사회를 모두 적으로 돌린 이상, 웨슬리 사무총장이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다.

무조건 전진하는 것.

시민들이 아직 반기를 들지 못하는 이유는, 공포감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공포감을 유지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세력이 약해지거나 약점을 잡힌다면 모두 끝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동네 개새끼보다 못하잖아....'

이대로 저항하기 시작하면, 그 말로는 최악의 테러리스트로 남고 만다.

그럴 순 없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렇게 끝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용납할 수 없다.

"병력 대기시키세요."

"예…?"

"공포를 재충전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

케이트 비서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자세한 내용을 묻는 대신, 핵심 질문을 던졌다.

"...지휘는 누구에게 맡기시겠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웨슬리 사무총장이 눈을 번뜩였고.

"제가 직접 합니다."

기어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일본 도쿄 지부.

막 일본에 입국한 이아영 본부장이 하라무라 지부장에게 약물의 샘플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1인 5mg만 투약해도 앞으로 보이드에 대해선 완벽하게 면역이 될 거예요. 1만 명분이니까, 일단 도쿄 지부 소속 작전팀부터 투약 시작하면 돼요."

"이, 이걸 언제 만든 건가…?"

"일주일 정도 걸렸네요."

"일주일 만에 이걸 만들었다고…?"

"뭐, 어느 팀장님께서 단단히 부탁하셔서…. 덕분에 집에도 못 가고 일주일을 꼬박 새웠죠."

이아영 본부장이 나를 슬쩍 흘기며 대답했다.

그 약물은 내가 출국 전에 이아영 본부장에게 부탁했던 것.

바로 보이드 전용 중화제였다.

이번에 개발된 약은 단순히 약물 효과를 진정시키는 약효만 있는 건 아니었다.

"1회 투약만으로 보이드 효과를 영구히 차단할 수 있어요. 이걸로 약물이 퍼지는 걸 막을 수 있겠죠."

"..."

이아영 본부장의 설명에 하라무라 지부장은 어안이 벙벙한 듯한 표정이었다.

"도쿄 다음에는 오사카, 후쿠오카, 홋카이도 순으로 투약해주시고... 언 랭크도 잊지 말고 반드시 해주셔야 합니다."

이내 내가 설명을 덧붙였다.

"…알겠네."

하라무라 지부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것으로 보이드 유통으로 인한 피해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곧 우린 남은 일에만 신경 쓰면 된다는 의미였다.

뭐, 예상했던 대로 하라무라 지부장의 자택에서 대량의 보이드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는 예정대로 발행되었다.

하지만 그가 구속되는 일은 없었다.

PB 코퍼레이션과 에마 대표에 대한 사실이 빠르게 전 세계 언론에 뿌려지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당에 증거가 있을 리는 없었지만....

그 부분은 클로이 팀장이 거들어주었다.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껴 내부 고발을 결심한 직원 연기를 충실히 해낸 것이다.

뭐, 본인 말로는 죽다 살아난 기념이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땐 그냥 본인을 영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신뢰를 보여주기 위한 행동에 가까웠다.

국제협회와 연루되었던 일본의 고위 인사들 또한 속속히 구속됐다.

하라무라 지부장 말로는 역사 이래 가장 큰 게이트라고 한다.

추가로 유통된 보이드에 대해서는 조사를 진행 중인데... 뭐,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일본 지부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생에 이어 이곳에서도 나와 지독한 악연을 이어갔던 PB 코퍼레이션 또한 해체되었다.

물론 국제협회에 꼭 필요한 조직이니, 다른 놈을 대표로 앉혀서 어떻게든 이어가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시간이 걸리겠지.

"고맙네."

하라무라 지부장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곤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과거 일본 지부가 어떤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네. 앙금이 있는 나라의 협회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내가 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뭐가 좋다고 일본을 위해서 도와드렸겠습니까. 전 그저 일본 지부가 무너지면 우리에게도 너무나 큰 손해이기에 나선 것뿐입니다."

"...."

"지부장님이 끝까지 국제협회에 넘기지 않은 이유도 같잖은 의리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일본을 생각해서 한 선택이지 않습니까.'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의 이득이 되는 선에서 도와드린 겁니다. 그리고 우린 아직 딱 그 정도 관계가 좋은 것 같군요."

"...."

명백히 선을 그은 것이지만, 그럼에도 하라무라 지부장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또한 그게 마음이 편한 모양이었다.

"그럼 뭐… 중화제도 전달했겠다, 슬슬 돌아가 볼...."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짓던 그때.

"가긴 어딜 가요!"

집무실로 한 여성이 들이치며 목소리를 냈다.

금발의 젊은 여성.

그녀는 다름 아닌....

"설마 모른 척하려는 건 아니죠?"

PB 코퍼레이션의 뱅크 아이템 관리팀장.

클로이였다.

"뭐, 뭐야…? 저 인간이 여길 왜 와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이아영 본부장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대충 상황을 알고 있던 김민주 또한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뭐, 환영받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이번에 우리를 도왔다고 해도, 이전에 적대적 인수합병을 통해 모두를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

내가 잠시 대답을 아끼고 있자, 이아영 본부장이 또다시 격양된 목소리를 냈다.

"저 인간이 여기 왜 왔냐니까요?! 설마 저 없는 새에 또 무슨 짓 한 거예요?!"

"…거래를 좀 했습니다."

"거래? 무슨 거래?!"

"이번에 우리를 도와주는 대가로 이클립스에 꽂아달라고...."

"미친!"

이아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짜 미쳤어요?! 인천 앞바다에 우리 작전팀 죄다 수장시키려고 했던 거 잊었어요?!"

"...."

"그리고! 그런 인간이 진짜 국제협회를 등질 것 같아요?! 저년, 저거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예요! 절대 안 돼. 이번만큼은 절대 안 돼요!"

고막 찢어지겠네....

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한다만 일단은 진정하고 천천히 대화를 나눠보면....

"본인보다 능력 있는 것 같으니까 쫄려서 그러는 건가요? 내가 들어가면 본인 자리 빼앗길까 봐?"

그때, 클로이가 대놓고 그녀를 도발했다.

그러자 이아영 본부장은 진심으로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지금 나보고 한 말이에요? 하!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아니면 이렇게까지 견제할 이유가 없잖아요."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우릴 죽이려고 한 인간이 이제 와서 우리랑 같이 일하겠다는데 어느 누가 좋다고 데려가요?!"

"아무도 안 죽었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닌가?"

"와, 나 진짜 이런 미친년은 또 처음이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점점 과열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당장이라도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이빨을 세웠다.

나는 말릴 생각 없이 그저 지켜봤다.

싸우면 누가 이길지 내심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그때.

"선생님."

잠자코 있던 김민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도 탐탁지 않아요. 물론 PB 코퍼레이션 출신이니까 국제협회나 웨슬리 사무총장에 대한 정보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만, 우리와 같이 일하는 건 좀...."

"흐음."

그녀 또한 같은 의견인 듯했다.

뭐, 확실히 맞는 말이다.

이전의 일은 어떻게든 넘어간다고 해도, 앞으로 또다시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혹은 스파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도 없고.

같이 일하기엔 이래저래 신뢰가 가지 않는 건 사실이다.

"미리 말하지만, 전 그냥 일을 한 거예요. 솔직히 팀장직이라고 해도 제일 힘이 없는 팀이었고, 무엇보다 대표의 말이 절대적인 곳이었으니까. 사적인 감정은 없었다고요."

그때, 내 시선을 눈치챈 건지 클로이가 묻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해서 그쪽이 했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그럼요? 이제 와서 거래를 무르려고요?"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군요. 직원들도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고."

"뭐, 상관없어요."

클로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전 일주일 안에 변사체로 발견되겠지만."

"...."

"흑흑, 이렇게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를 죽음으로 내몰 정도로 냉혈한이었다니. 흑흑."

이런 미친.

정신이 나갔나?

'제정신이 아니군....'

아주 대놓고 우는 척을 하던 그녀는, 나를 슬쩍 흘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사이 이아영 본부장은 쉴 새 없이 옆에서 빽빽 소리를 질러댔고, 김민주 또한 조곤조곤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그러고 있자니.

"쯧, 알았어요. 조건 하나 더 얹을게요."

이내 클로이 팀장이 답답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조건 말입니까?"

"지부를 빼앗는 것도 실패한 데다가 PB 코퍼레이션까지 사라진 이상 웨슬리 사무총장은 궁지에 몰린 거나 다름이 없어요."

"그걸 누가 모릅니까?"

"쿠데타까지 일으켜서 정부를 장악한 상황이에요. 어떻게든 세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텐데… 지금 이대로는 약화하기만 하겠죠."

"오히려 다행이군요. 시민들이 그 틈을 놓칠 리가 없으니, 더욱 영향력을 깎아나갈 겁니다."

"그게 문제에요."

이내 사뭇 진지한 얼굴이 된 클로이 팀장이 손가락으로 나를 짚었다.

"국제협회는 공포심과 힘을 이용해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 때문에 시민들이 더 이상 자신들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는 건 반드시 피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어떻게든 공포심을 조장할 필요가 있겠죠."

"...그렇다는 건?"

"조만간 웨슬리 사무총장은 전쟁을 벌일 거예요."

그녀의 말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나라를 정해서, 국제협회의 전력을 보여주는 무대로 삼을 거라는 얘기에요. 거기엔 목적도 없고 자비도 없겠죠."

"...."

나는 대답을 아끼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난 웨슬리 사무총장이 어떤 나라를 공격할지 알고 있어요."

"...!"

"어떻게, 이 정도면 영입할 마음이 좀 들려나?"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잠시 이마를 짚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물론 그녀의 말에 근거는 없다.

하지만… 확실히 일리는 있는 말이다.

철저하게 준비했던 계획도 실패로 돌아갔고, 더불어 PB 코퍼레이션까지 잃은 마당에 웨슬리 사무총장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좋습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입을 열었다.

"일단… 한국으로 갑시다."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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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WDSO 서울 본부.

그곳에 불어닥친 굉장히 갑작스러운 소식에 사내가 발칵 뒤집혔다.

황급히 이사회가 소집되었다.

클로이 로스.

전 PB 코퍼레이션 소속 뱅크 아이템 관리팀장.

동시에 2년 전, 한국협회를 공격하여 적대적 인수합병을 주도했던 장본인.

그런 그녀를 WDSO에 영입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것도 이아영 지원 본부장을 대신해 이클립스 총 책임자로.

"절대 안 됩니다!"

"2년 전, 작전팀을 모조리 죽이려 했던 인간입니다!"

"맞습니다.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데려온답니까!"

"데려오긴커녕, 그냥 경찰에 넘겨버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사들은 착석하기도 전에 꽤나 격양된 반응들을 보였다.

"대체 누가 이런 안건을 올린 겁니까?"

"설마… 이번에도 김준우 팀장입니까?"

"사무총장님, 이번만큼은 단호하게 대처하셔야 합니다!"

심지어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모두가 범인까지 알아냈다.

"...일단 모두 앉게."

박인범 사무총장은 그렇게 말하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평소와 다르게 사뭇 무거운 목소리와 표정.

그제야 이사들은 사무총장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착석했다.

그와 동시에 박인범 사무총장이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또한 클로이 영입이 영 탐탁지 않은 까닭이었다.

여태 김준우의 말이라면 맹목적으로 지지해줬던 그마저도 이러한데, 다른 이사들은 오죽할까.

만약 단순히 클로이의 WDSO 영입을 판단하는 문제였으면, 아무리 김준우가 올린 안건이라고 해도 이사회에 올라올 일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이… 곧 공습을 개시할 거라는 정보가 있네."

박인범 사무총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고, 공습이라니 그게 무슨...."

그러자 이사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박인범 사무총장은 꽤나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일본 지부 건으로 국제협회는 그 어느 때보다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네. 이대로라면 통제력을 잃을 수도 있겠지.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전력을 보여주려고 할 걸세."

"어디를 공습한다는 겁니까…?"

"설마 우리나라입니까?"

"그거야 모르지. 다만...."

박인범 사무총장이 이사들을 번뜩이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클로이, 그 여자가 알고 있네."

"...!"

"...!"

그와 동시에 이사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국제협회와 전쟁 중일세. 서로가 세력을 키우는 것을 견제하고, 가능한 방법으로 공격을 가하는 건… 전시 상황에서야 당연한 일이지."

박인범 사무총장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우리의 최우선 순위는 시민의 안전일세. 두 조직 간의 세력다툼으로 민간인이 목숨을 잃는다면... 정치나 외교를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 우린 국제기구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야."

그러곤 다시 한번 이사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공습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막아야 하네."

"...."

"...."

그 단호한 발언에 격양되어 있던 이사들 또한 대답을 아낀 채 침묵했다.

공습을 막아야 한다....

그거야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지당한 이야기였다.

사실 궁지에 몰린 국제협회가 공습을 감행한다면, 그에 분노한 국가들 사이에서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날지 모른다.

지금까지는 피해를 받는 게 두려워서 다들 눈치만 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국제협회에 대항하려 들겠지.

그야말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각 진영에 따라 국가들이 연합하여 어느 한쪽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치열한 공세를 펼치게 된다면… 사실상 WDSO는 딱히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어진다.

전쟁은 각 국가가 알아서 지휘할 테니, 우리는 그저 뒤에서 무기와 부족한 병력만 지원해주면 그만이다.

공습을 계기로 발발한 대전.

눈치 볼 것 없이 전력으로 대항할 기회.

우리가 직접 손을 쓰지 않고도 국제협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겠지.

하지만, 시민의 안전을 위해 국제협회를 무너뜨리려는 목표가 시민의 희생으로 이뤄진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럼 우리가 국제협회와 다를 게 무엇인가.

'어려운 걸 떠넘기는군....'

박인범 사무총장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덥석 받아들이기엔 영 껄끄럽고, 또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앞으로 미칠 악영향을 가늠할 수도 없다.

이사들 또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건지, 모두가 말을 아낀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런데 말입니다. 국제협회가 공습을 감행할 거라는 그 정보… 믿을 수 있긴 한 겁니까?."

연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고병철 사외이사가 넌지시 물었다.

뒤늦게 깨달은 다른 이사들이 소리를 높였다.

"그러고 보니...."

"설마 그 여자의 말을 믿는 건 아니시죠?"

"우리 쪽에 붙기 위한 거짓말인 게 뻔하지 않습니까!"

박인범 협회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지금 이 상황에 그녀의 정보가 신뢰받지 못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네."

그럼에도 박인범 사무총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출처를 떠나서, 여태까지 국제협회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지 않나."

"그, 그거야 그렇지만...."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 아닐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는데...."

박인범 사무총장은 잠시 말을 흐리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꼭 말로 해야 하나, 싶은 표정.

이윽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라도 사실이면 그땐 어찌 할 건가?"

"그건...."

"...."

"물론 자네들 말도 이해하네.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지 않고, 최대한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건 사업가로서 꼭 필요한 마인드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린 이제 사업가가 아니지 않나."

박인범 사무총장의 그 말에 이사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래.

이제 민간 토벌 기업이었던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없다.

현재 WDSO는 엄연한 국제기구다.

이익을 위한 확실한 투자가 아닌,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조직.

그러니… 이제는 선택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박인범 사무총장은 여전히 고민에 빠져 있었다.

결국,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이두식 이사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땐 영입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야깁니다. 다른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고, 여차하면 또다시 배신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이내 이두식 이사가 나지막히 말을 이었다.

"한 달간 청소팀에서 일하는 조건을 두면 어떻겠습니까?"

"...."

박인범 사무총장이 대답을 아끼길 잠시.

"거기가 뭐 인간 갱생팀이냐?"

눈썹을 찌푸렸다.

***

WDSO 본부와 개별 건물에 위치한 청소 3팀 사무실.

나와 클로이는 이사회가 끝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

"...."

마땅히 갈 곳도 없었기에 여기로 데려온 거지만, 서로 할 이야기도 없었기에 둘 다 침묵만을 유지했다.

그렇게 30분째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멀뚱멀뚱 앉아있는 중이었고, 어색한 분위기가 극에 달하던 그때.

"쯧, 숨 막혀 죽겠네."

결국, 참다못한 그녀가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뭐, 차라도 대접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 나름 손님 아닌가?"

"손님은 무슨....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됩니까?"

"참 나… 그래 뭐, 대접은 그렇다 치고, 최소한 좀 더 깔끔한 곳에서 기다릴 수도 있잖아요. 여긴 왜 이렇게 더러워?"

"가만히 좀 계시지요. 당신 생각해서 여기로 데려온 거니까."

"뭔 소리?"

"작전팀 사무실에서 대기했다간 이사회가 끝나기도 전에 뼈도 안 남았을 겁니다."

2년 전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던 자가 눈앞에 나타났는데, 혈기왕성한 헌터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클로이 또한 그제야 내 말뜻을 이해한 것인지, 더 이상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런데 왜 날 빼두고 저들끼리 회의하는 거죠? 차라리 나한테 물어보는 게 이래저래 더 빠를 텐데."

이번엔 또 다른 이야기로 운을 띄웠다.

"당신이 하는 말은 하나도 믿을 게 못 된다, 이거 아니겠습니까."

"…하, 어이가 없어서 진짜."

"여기까지 온 이상 최소한 반성하는 척이라도 하시죠. 여기서 당신을 환영해줄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

내가 차갑게 대꾸하자, 그녀는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쯧, 반성하는 모습이라곤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군.

"그나저나...."

이번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민간인 목숨이 달려있는데 그걸로 협상을 하고 싶습니까? 공습 예상 지역, 그냥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그거 내 목숨줄인데요? 알려주면 바로 버릴 거 누가 모를까 봐?"

"오...."

눈치가 상당한데?

"전 국제협회의 뒤통수를 쳤어요. WDSO 못 들어가면 농담이 아니라 진짜 죽는다니까? 내 몸 하나 지킬 무기는 쥐고 있어야죠."

"...."

나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사실 이번에는 그녀의 말이 맞다.

본인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패를 깔 순 없겠지.

"아무튼, 이사회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저도 모릅니다. 최소한의 설득이라도 해보고 싶었는데... 안건이 안건인지라 아예 제 말은 듣지도 않으시더군요."

"당신이 대표 아니었어요?"

"지금 사무실 꼬라지 안 보입니까? 아직도 내가 대표 같아요?"

"...올라가는 건 어려워도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라더니."

그녀가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렸다.

딱 한 대만 칠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주먹을 불끈 쥐고 애써 참기로 했다.

"아무튼, 판단은 순전히 이사회의 몫입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잘 안 돼도 그냥 받아들이시죠."

"...."

그녀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길 잠시,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흑흑. 기어이 버리려고… 흑흑...."

"그 빌어먹을 우는 척, 한 번만 더 하면 영입이고 나발이고 없던 일로 합니다."

진심으로 경멸하며 말하자, 그녀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인다.

'아오, 열 받네....'

진짜 빌어먹을 여자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이어진 클로이의 도발에 애써 화를 참으며 이를 으득으득 갈아대고 있던 그때.

벌컥―.

이두식 이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끝났습니까?"

"어, 그래."

이두식 이사가 클로이를 슬쩍 흘기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영입은 허가하기로 했다."

"그렇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던 그 순간.

짝짝짝―.

난데없는 박수에 고개를 돌리니, 뒤에 앉아있던 클로이가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알아듣지도 못했을 텐데, 분위기로 대충 눈치를 챈 모양이다.

'하....'

사람 열 받게 하는 데는 선수네.

한 대 칠 수도 없고, 진짜.

나는 애써 그녀를 무시하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사들을 어떻게 설득하신 겁니까. 반발이 어마어마했을 텐데요."

"허가해주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었거든."

"조건이요?"

내가 되묻자, 이내 이두식 이사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한 달 동안 청소팀에서 일하게 하는 조건."

"...."

그리고 그 대답에 내 눈이 번뜩였다.

"…담당 팀은요?"

"3팀."

"근로 기준은?"

"그런 게 어디 있어. 아직 비자도 안 나왔는데."

"완벽하군요."

나도 모르게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

누구랄 것 없이, 나와 이두식 이사는 클로이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

물론 그녀는 무슨 상황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어딘가 불안한 낌새를 눈치챈 건지, 표정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275

275

클로이의 WDSO 영입 허가가 떨어졌다는 소식이 전달된 직후.

네 명의 본부장이 모두 작전 본부실에 모였다.

"괜찮을까요...?"

가장 먼저 작전 본부장, 김민주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물론 영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직 듣지 못했기에 걱정이 앞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몰라요. 알아서 하겠지, 뭐."

이아영 지원 본부장은 아직도 잔뜩 뿔이 나 있는 듯, 볼멘소리를 냈다.

"...대체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한유빈 기획 본부장은 아직도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고.

"그래도 이사회에서도 통과된 걸 보면 큰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성일 해외사업 본부장은 퍽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진짜 너무하다니까. 영입하는 것만으로도 복장 터질 일인데, 심지어 이클립스 총 책임자에 임명한다고? 이게 말이 돼요?!"

"...."

"...."

"...."

이아영 본부장의 목소리가 또다시 격양되기 시작했고, 나머지 본부장들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솔직히 나머지는 그냥 불안하다 정도지, 최소한 클로이에게 자리를 빼앗길 걱정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아영 본부장은 굴러온 돌 때문에 본인의 자리를 빼앗기게 생기지 않았는가.

이건 누구라도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김민주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맞아요. 이번에는 선생님이 잘못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아영 씨 자리를 빼앗는 건...."

"아, 그건 상관없어요."

"...?"

이아영이 손사래를 치며 즉답하자, 김민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히 귀찮긴 했거든요. 애초에 긴급 가동할 때 빼면 평소엔 다른 실장님이 운영하고 있고. 지원 본부 일도 산더미인데, 이클립스까지 어떻게 신경을 써요. 오히려 대신 맡아준다면 나야 땡큐지."

"...."

"...."

"...."

이아영 본부장의 말에 다른 이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럼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는...."

그러다 김민주가 조심스럽게 묻자.

"아, 예쁘잖아요!"

"...?"

"그것도 금발의 서양 여잔데! 안 불안하고 배겨요?!"

"...."

"...."

"...."

음.

시답잖은 이유였군.

다른 본부장들은 말을 아낀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아영 본부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튼, 단단히 삐졌으니까 앞으로 나한테 뭐 부탁하지 말라고...."

그렇게 엄포를 놓던 그때.

똑똑―.

누군가 작전 본부실로 들어섰다.

"어, 여기 다 모여 계셨네요?"

다름 아닌, 문소연 청소과장이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김민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맞이했다.

"소연 씨? 여긴 어쩐 일이이에요?"

"아, 이번에 클로이 씨 영입 건에 대해서 전달할 내용이 있어서요."

"네…?"

문소연은 이내 가져온 서류를 본부장들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이사회에서 클로이 씨 영입을 허가하는 조건으로 한 달간 청소팀에서 일하라고 했대요."

"청소팀에서…?"

그와 동시에 이아영 본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담당 팀은요?"

"저희 팀이에요. 청소 3팀."

"...."

"...."

"...."

"...."

그 소식이 전달되자, 사무실엔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럼 뭐… 전 찬성이에요."

"잘 걸렸네. 그 인간 밑에서 한 달 동안 청소 작업? 으… 나라면 그냥 죽고 만다."

김민주, 한유빈 본부장이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그리고.

"큼큼. 그 조건이면 뭐...."

이아영 본부장 또한 금세 태세를 바꾸었다.

하지만 딱 한 사람.

"저, 죄송한데… 청소팀에서 일하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나요?"

하성일 본부장만이 그 조건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단...."

그러자 이아영 본부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마 일주일만 지나면 그냥 돌려보내 달라고 할걸요?"

그렇게 말하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

"우왁! 이거 살아 있잖아!!"

영등포 근처, 그린 등급 던전.

고블린 해체 작업이 한창이던 가운데 클로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신경 때문에 움직이는 겁니다."

"뭐, 뭐야 이건?! 사체에서 뭐가 나오는… 우욱…!!"

"체액입니다."

"잠깐… 뭔 냄새 안 나요?"

"부패가 시작돼서 가스가 방출되고 있는… 아, 진짜 호들갑 그만 떨고 작업이나 하시죠. 지금 처리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일일이 그러고 있을 겁니까?"

"뭘 해야 하는지 알려는 줘야죠!"

답답한 마음에 격양된 반응을 보였지만, 그녀는 도리어 목소리를 높였다.

옅은 한숨과 함께 그녀 앞으로 단도 하나를 툭 내려놓았다.

"그거 가지고 이리 오세요. 일단 오늘은 해체 보조나 하면 됩니다."

"지, 지금 나보고 이걸 자르라고? 미친 거예요?! 나 이래 봬도 뱅크 아이템 관리팀장이었다고요!"

"...."

"....'

나를 포함해, 3팀원들 모두 할 말을 잃은 모양이었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살짝 불안하긴 했는데… 널브러진 몬스터 사체를 본 직후부터 계속 저러고 있다.

뭐, 애초에 헌터도 아니니 이해야 한다만....

지금 본인의 처지를 안다면 최소한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누가 보면 억지로 시키는 줄 알겠습니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시죠. 아쉬운 건 본인이지, 우리가 아니니까."

"...하, 진짜."

클로이가 가가 차다는 듯 실소를 뱉었다.

그제야 마지못해 장비를 들고 사체로 다가갔고,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깨작깨작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슬쩍 흘기고는 이내 팀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소연 씨, 한상혁이랑 같이 B구역 작업 좀 해주시겠습니까?"

"네? 저희 둘 다 가면 두 분이 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문소연은 그렇게 말하며 클로이를 슬쩍 흘겼다.

"뭐야, 그 눈빛? 저기요, 저년 방금 뭐라고 한 거예요? 지금 1인분도 못한다고 욕한 거 아니야? 야, 너 이리 와봐!"

그와 동시에 클로이가 시선을 눈치채곤 곧바로 쏘아붙였다.

문소연은 그녀의 격양된 반응에 스멀스멀 뒷걸음질을 치며 덜덜 떨었고.

"그럼, 본인이 자기 몫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어디서 상사한테 목소리를 높입니까! 한 번만 더 팀원들한테 소리 지르면 영입이고 뭐고 국제협회로 송환할 겁니다."

보다 못해 내가 나섰다.

"쯧... 못 해 먹겠네, 진짜."

그러자 클로이는 상당히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 그럼 저흰 B구역 작업하러 갈게요."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문소연이 이내 서둘러 한상혁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고, 그렇게 나와 클로이 단둘만이 남게 됐다.

그대로 정적이 이어지길 잠시.

"이제 말해보시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뭘요?"

"아무도 없잖습니까. 공습 지역, 말해보라고요."

"뭐야, 그거 때문에 보낸 거였어요?"

클로이는 그렇게 말하며 이내 칼을 바닥에 툭 던지곤 자리에 앉았다.

아예 작업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다.

이윽고 그녀가 꺼낸 첫마디는.

"사실…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에요."

"...갑자기 그게 뭔 개소립니까. 본인이 알고 있다면서요. 이건 말이 다르잖습니까."

"정확하게 알고 있다곤 안 했는데요? 애초에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하는 게 더 거짓말 아닌가?"

"...."

빌어먹을, 어이가 없네.

"됐습니다. 영입은 없던 일로 하고...."

"끝까지 들어요."

그때,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공습은, 국제협회의 전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것으로 공포심을 심어주려는 게 목적이에요. 당연히 어쭙잖은 국가를 공격하는 거로는 부족하죠."

"그거야 당연하겠죠."

"그럼 적당히 강한 국가를 고르겠죠?"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겁니까? 적당히 강한 국가가 한두 곳도 아니고."

"여기서 이제 PB 코퍼레이션 소속만 알고 있는 정보가 있죠."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PB 코퍼레이션이 한 번 물갈이 하기 전에, 토벌권 회수팀이 있었어요. 케인이라는 꼰대가 팀장이었는데...."

"관심 없으니까 본론만 말하시죠."

"…쯧, 아무튼 그 팀이 흡수해야 하는 최우선 국가는 딱 한 곳이었어요."

"우리나라?"

"그거야 최근이고, 훨씬 전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어딥니까?"

"프랑스."

"...?"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내 눈이 가늘어졌다.

프랑스라면 현재 국제협회 본부가 있는 국가가 아닌가.

그럼 국제협회는 본국을 흡수하려고 했다는 소리인가?

"프랑스는 웨슬리 사무총장에게 이전부터 골칫거리였어요. 국제기구라고 해도 본부가 프랑스에 있는 한 프랑스 정부의 입김을 직간접적으로 받아왔으니까."

"그런데요?"

"뭔가 파격적인 시도를 하고 싶어도 늘 본국이 걸림돌이었죠."

"그래서 프랑스를 흡수하고 싶었다? 그런 거라면 이미 이루지 않았습니까."

이미 웨슬리는 프랑스 정부를 함락시키지 않았던가.

쿠데타까지 성공한 이상, 이제 와선 걸림돌도 사라졌을 텐데.

"물론 그렇긴 한데… 근본적인 문제는 프랑스가 아니었어요."

"뭔 소립니까?"

"왜 프랑스가 그렇게 간섭을 했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클로이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프랑스는 항상 주변국을 견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어요. 뭐… 역사적으로 보나, 정치적으로 보나 유럽 연합은 늘 그래왔지만요."

"뭐, 한 땅덩어리에 수많은 나라가 붙어있으니 그럴 만도 하죠."

"그중 가장 거슬렸던 국가는… 독일이었어요."

"독일…?"

"독일 입장에선 프랑스가 눈엣가시였죠. 유럽 연합의 실세는 독일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국제협회가 프랑스에 만들어지면서부터 자신들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거든요."

그런 일이 있었군.

"독일은 지속적으로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경제, 외교적으로 압박을 많이 넣었어요."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국제협회에 간섭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협회가 조금이라도 세력을 키우려고 하면, 정부 차원에서 막은 거죠. 토벌 조직과 정권은 서로 지향하는 목표가 다르니까요."

그렇다면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간다.

과거 유럽의 실세였던 프랑스는 국제협회를 통해 다시금 옛 영광을 되찾고 싶어 했고.

현재 유럽의 실세인 독일은 그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온갖 압박을 가했다는 것이군.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때, 클로이가 넌지시 말을 이었다.

"현재 유럽 연합에서 유일하게 국제협회 세력이 아닌 국가는 딱 두 곳이에요. 이탈리아와 독일. 뭐, 이탈리아는 당신이 손을 썼으니 그렇다 치고...."

"독일은 건드린 적도 없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개입이 없어도 독일은 자체적으로 국제협회와 대립하고 있는 거예요. 유럽 연합의 실세인 독일이 그렇게 나오는 것만으로도 국제협회에는 걸림돌일 테고요."

"그렇다는 건...."

"이번 공습 지역, 독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거죠."

그렇게 결론에 도달한 순간, 나는 클로이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제야 좀 PB 코퍼레이션 출신 티가 나네.'

확실히 이건 국제협회 소속, 그것도 꽤 고위층만 알 수 있는 정보다.

"말했지만 확실한 건 아니에요. 괜히 나중에 가서 내 탓하지 말고."

"싫습니다."

"...."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뭐, 확실한 건 아니라고 했지만.

이 정도 근거라면 사실상 반박의 여지가 없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뭐 하고 있습니까? 얘기 끝났으면 장비 들고 이리 오시죠. 작업 아직 남았습니다."

"...."

그녀를 다시금 사체 앞으로 불렀다.

어딜 은근슬쩍 농땡이 치려고.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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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이가 WDSO에 들어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녀는 영입 허가 조건에 따라 아직 청소팀에서 일하고 있었고, 삐걱거렸던 첫날과 다르게 이젠 슬슬 익숙해지고 있는 듯했다.

물론 여전히 1인분도 못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과 비교하면 용 됐지.

어쨌든 나는 그녀의 보고와 더불어 향후 일정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이두식 이사를 찾았다.

"어떠냐. 할 만해 하는 것 같냐?"

찻잔을 기울이며 이두식 이사가 물었다.

"이제 고작 일주일인데 벌써 할 만해 하면 천직이죠. 아주 죽으려 그럽니다."

"하하하! 좋은 현상이군."

"처음엔 중간에 도망도 치고, 핸드폰 끄고 잠수 타고, 출근도 안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래도 시간 맞춰 나오긴 합니다."

"PB 코퍼레이션 출신 꼴이 말이 아니군. 작업은 잘 따라오냐?"

"말도 마십쇼. 해체 작업하다가 본인 손가락 날릴 뻔한 이후로는 걸레질만 시키고 있습니다."

연구만 해서 그런지 체력도 저질이고.

"그래도 뭐… 조금씩 열의는 보이는 것 같습니다."

"슬슬 독기가 빠지는 모양이군."

"예."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 본다면 청소팀에서 일을 시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의아해할 것이다.

사실 맞는 말이다.

청소팀에서 며칠 일한다고 사람이 바뀔 리가 없다.

청소팀에 무슨 특별한 갱생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이 사항이라고 해봐야 일이 좀 고되다는 것뿐이지 않은가.

고생 좀 하는 것으로 사람이 개과천선 되면 세상에 나쁜 놈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클로이를 청소팀에 넣은 건 갱생을 바란 게 아니라, 그곳에서 분명 스스로 느끼는 게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청소팀은 토벌 시스템의 가장 마지막 단계다.

그것은 곧 이전 단계의 모든 문제점을 볼 수 있는 팀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전 단계의 모든 문제점이 모여드는 단계.

그런 팀에 있다 보면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작전팀의 토벌 진행이 너무 빠르다던가.

던전 내부 매핑이 너무 간략화되어 있다던가.

평소 생각도 못 했던 것들이 보이는 순간 많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것들과의 괴리.

내가 항상 옳다고 생각했던 것과 판단했던 것들이 모두 부정당하는 기분.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지난 선택에 대한 회의감이 들 것이다.

특히 오랫동안 상부에서 일했던 사람일수록 더욱이.

변화는 그때부터 시작한다.

장담컨대, 한 번 그 기분을 느낀 이는 이후로 이 업계를 보는 시야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뭐, 클로이는 둘째치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이두식 이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독일이라는 거냐? 국제협회가 공격할 곳이."

"확실한 건 아니지만 확률이 높습니다."

"확실한 게 어디 있겠어.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의심스럽지."

그의 말에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두식 이사는 어딘가 곤란한 표정이었다.

"쓰읍, 하필 독일이라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소식 못 들었냐? 국제협회가 쿠데타를 벌이고 프랑스 정부를 먹은 직후, 독일은 모든 국가와 교류를 중단했어."

"…예?"

그의 말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이두식 이사가 옅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뭐, 나름 유럽에서 힘깨나 쓴다는 프랑스마저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걸 보니 위기의식이 생긴 거겠지. 그 때문에 모든 일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분위기야."

"그렇다면...."

"우리가 도와주려고 해도 거절할 확률이 높아. 아니, 지금으로선 독일협회에 연락할 수단조차 없어."

"그건… 확실히 곤란하군요."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국제협회가 독일 공격에 성공한다면,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파장이 일 것이다.

어떻게든 사전에 막아야 하는데, 지원은커녕 연락조차 할 수 없다면....

"그래서 말인데… 일단은 지켜보는 게 어떻겠냐?"

그때, 이두식 이사가 넌지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래 봬도 유럽의 실세야. 아무리 국제협회라고 해도 그렇게 쉽게 무너뜨리긴 힘들지 않겠냐는 거지. 그리고 혹시 모르잖냐. 오히려 독일이 이길 수도...."

"그럴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국제협회는 이전부터 전면전에 대비해서 이능력자를 모아 병력을 꾸려왔습니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는 제아무리 독일이라고 해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독일도 이능력자 병력을 모아놨을 수도 있지 않냐."

"글쎄요. 국제법을 어기면서까지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옛 과오도 있고, 그런 거엔 또 엄격한 나라지 않습니까."

"...."

이두식 이사 또한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떡하냐."

"그러게 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퍽 답답한 상황에 심히 고뇌하던 그때.

"어디 있나 한참 찾았는데, 여기 있었네요."

이아영 본부장이 이사실을 찾았다.

"오후 작업은 반차 냈다고 하고, 청소팀 사무실에도 없고. 이 땡볕에 더워 죽는 줄 알았다니까. 어디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좀 해주지."

"…전화하면 되잖습니까."

"안 했겠어요?"

핸드폰을 확인하니 그녀로부터 부재중 통화가 수십 건이 찍혀 있었다.

뭐… 얘기하다 보면 못 받을 수도 있지.

"...그래서, 전 왜 찾은 겁니까?"

내가 묻자 그녀는 대답 대신 서류 뭉텅이를 올려놨다.

"뭡니까…?"

"청소팀에서 잘하고 있다면서요."

"예?"

"클로이 씨 말이에요."

…잘하고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이클립스 인수인계 대장이에요. 작업하면서 공부하라고 전해줘요."

그녀의 예상치 못한 말에 순간 헛웃음이 터졌다.

"뭡니까. 받아주기로 한 겁니까?"

"흥, 내가 안 받아준다고 하면 뭐가 달라져요? 이미 자기들끼리 다 정해놓고 무슨...."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볼멘소리를 냈다.

"아무튼, 이클립스 들어가도 며칠은 따라다닐 거라고 해줘요. 내가 어떻게 믿어요? 안에 뱅크 아이템도 다 있는데."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정중히 인사를 하자, 그녀는 괜히 멋쩍은 듯 황급히 화제를 돌린다.

"그래서, 독일이라고요?"

"예. 그런데 어떻게 접근할지 막막하군요."

"음? 왜요?"

"왜긴 왭니까. 우리 쪽에서 지원해 주려고 해도 교류를 중단한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각국 기업들이랑은 계속 교류하고 있던데요? 저번 주만 해도 우리나라 건설 회사랑 교량 사업 체결했어요."

"그거야 기업들 이야기고, 저희는 이제 민간 기업이 아니잖습니까. 엄연히 국제기구...."

그렇게 말을 꺼내던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었다.

"우리나라 건설 회사랑 계약했다고요?"

"네."

"무슨 회사입니까…?"

그리고 그제야 눈치챘냐는 듯, 이아영 본부장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한별건설이요."

그와 동시에 내 눈이 번뜩였다.

***

국제 헌터 협회 본부.

비밀리에 소집된 간부회의.

"그러면...."

각 작전 팀장들이 모두 모인 그 회의에서 웨슬리 사무총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각 팀별 병력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2팀 1만 명 전원 전투 준비 태세 완료했습니다."

"3팀 1만 8천 명, 준비돼있습니다."

"4팀도 완료했습니다."

각 팀장들이 순서대로 대답을 이어갔다.

현시점, 각 작전팀은 기존 토벌에 맞춘 편성에서 전투를 위한 대대급 전력으로 재편성되었다.

그리고 각 팀은 웨슬리 사무총장이 직접 임명한 팀장들이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야말로, 전쟁을 벌일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것이다.

"본부 소속 헌터 3만 명, 자격 박탈 헌터 2만 7천 명, 이외 추가 모집 헌터 1만 명… 총 6만 7천 명 전부 대기 중입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바로 진격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1팀장의 정리에 웨슬리 사무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작전은 예정대로 내일 새벽 3시에 개시합니다. 목표는 베를린,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낼 때까지 공격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내 그가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 공습은 전쟁이 아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작전입니다. 군인, 헌터, 민간인… 가리지 말고 공격하세요."

"...."

"...."

팀장들은 그의 지시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사무총장님."

케이트 비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방금 들어온 소식을 전달했다.

"클로이 팀장 소재가 확인됐다고 합니다. 현재 WDSO 소속 청소팀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허."

웨슬리 사무총장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기껏 들어간 데가 청소팀인가.

"그런데… 그 사람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 거죠?"

"WDSO가 순순히 그녀를 받아줬을 리 없습니다. 분명 정보를 요구했을 텐데… 그렇다면 독일 공습에 대한 정보가 WDSO에 넘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

순간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만약 WDSO가 알게 됐다면, 분명 독일을 지원하려고 할 겁니다. 아무래도 날짜를 미루시거나 지역을 수정하시는 편이...."

"아뇨."

하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네…?"

"독일은 현재 모든 국가와의 교류를 중단했습니다. 프랑스가 우리에게 무너진 상황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곤, 위기의식이 생긴 거겠죠."

"하지만 그거야 언제든 철회할 수도...."

"그 고지식하고 원리원칙주의자들이 철회할 리가 없죠."

웨슬리 사무총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독일은 WDSO가 아무리 도와주려고 해도 받지 않을 겁니다."

물론 공습하리란 사실이 독일 귀에 들어가게 되는 건 막을 수 없겠지만....

그것까진 크게 상관없다.

이제 와서 공습에 대비한다고 해도 이미 늦었으니까.

"그러니…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내일 새벽 3시입니다. 모두 명심해두세요."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려 퍼졌다.

***

"그러니까 팀장님 말씀은...."

청소팀 사무실.

내 설명을 들은 하성일 해외사업 본부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사업 계약을 빌미로 독일에 접근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한별건설이 이번에 베를린 교량 건축 사업을 맡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둘째 누님께서 상무로 계시죠?"

"이번에 사장으로 임명됐습니다."

"오, 그럼 더 잘 됐군요."

내가 화색을 띠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리송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교량 건축 사업과 이번 일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정확히 뭘 어떻게 하시려고…?"

"WDSO 소속으로서는 독일에 연락할 방법 자체가 없습니다. 당연히 입국도 어렵고요. 하지만 기업 소속이라면 다르죠."

"설마 한별건설 소속인 척 입국하시겠다는 겁니까?"

"예."

내가 즉답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나머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겁니다."

"흐음...."

이내 하성일 본부장이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알겠습니다. 누님께 부탁해보죠."

"감사합니다."

"뭘요. 팀장님 부탁인데. 아마 누님도 흔쾌히 허락하실 겁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나는 옆에서 우리 대화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클로이를 향해 물었다.

"이 정도면 국제협회도 예상하지 못할 작전 아닙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하지만 그녀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대답했다.

"정보를 줬으면 나머진 댁들이 알아서 해야지, 내가 컨펌까지 해줘야 돼요?"

"...오늘따라 유난히 더 까칠하시네."

"안 그래도 오늘 '운 나쁜 날'이라 바빠 죽겠는데,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까지 뺏으니까 그렇죠!"

"...."

얼씨구?

"아무튼, 얘기 끝났으면 나 먼저 갈게요. 딱히 중요한 얘기도 아니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짐 챙겨두십쇼."

"...뭐라고요?"

그녀를 굳이 여기로 부른 본 목적을 꺼내 들었다.

"짐 챙겨두시라고요. 이번에 독일 같이 갈 거니까."

"...왜요?"

"뭘 왭니까. 제가 독일협회를 설득하는 것보다, PB 코퍼레이션 출신인 당신이 하는 게 더 설득력 있지 않겠습니까?"

"...."

내 말에 그녀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길 한 차례.

"그럼 작업은 누가 해요?"

상상도 못 할 대답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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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

베를린 국제공항에 도착해 무사히 입국 심사를 통과한 직후.

"다행히 안 걸렸군요."

옅은 한숨과 함께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만약 우리가 WDSO 소속이라는 것을 들켰으면 입국은 고사하고 바로 송환됐을 것이다.

물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세 명의 소속을 한별건설로 잠시 옮겨놓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별건설 소속으로 위장하여 독일협회에 접근한다.

이 작전을 위해 하성일 본부장이 꽤나 노력해주었다.

우리야 공습을 막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당연하다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우리의 입장일 뿐이다.

민간 기업인 한별건설은 이번 일과 아무런 관련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섣불리 가담했다가 이미 체결된 사업마저 백지화될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한별건설이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성일 본부장은 한별건설의 사장… 그러니까, 본인의 누이에게 이번 일을 설득하느라 밤낮없이 매달렸다고 한다.

그 노고 덕에 정말이지 우린 어렵게 위장 소속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 내 소속은 베를린의 교량 건설 사업 총괄을 위해 파견된 한별건설 해외사업부 독일 파트장.

클로이는 현장 검토를 맡은 독일 현지 담당자.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저 여자만 데려오면 됐지, 대체 난 왜 데려온 거예요?"

현지 법적 자문을 맡은 이아영 본부장이었다.

"출국할 때부터 계속 그 소립니까.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면 안 됩니까?"

"당신이 출국할 때부터 대답을 안 해주니까 그렇죠!"

이아영 본부장은 뒤따라오고 있는 클로이를 한 번 흘기고는, 내 옆에 바짝 붙은 채 대답했다.

뭐… 첫 만남부터 사이가 영 별로였던 이들이다.

이클립스 총 책임자 자리를 인수인계해준다곤 했어도 금방 사이가 좋아질 리는 없겠지.

나 또한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두 사람을 같이 데려온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우린 지금 위장 입국을 한 셈입니다. 최소한 협회를 설득하기 전까지는 한별건설 소속인 척해야 하는데. 그건 저보단 당신이 더 전문이지 않습니까."

"그럼 저 여자는요? 역할이 뭔데요?"

"PB 코퍼레이션 출신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설득하는 것보다 전 국제협회 소속 출신이 말하는 게 더 신빙성이 있을 겁니다."

"하아...."

내 대답에 이아영 본부장이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나는 그 틈에 슬쩍 고개를 돌려 클로이를 흘겼다.

캐리어를 끌며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는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뭐 문제라기보단...."

내 물음에 그녀가 답하길.

"유럽이잖아요. 국제협회가 늘 주시하고 있는 곳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니 불안하긴 하네요."

"...."

"...."

저런 말을 꽤 담담하게도 하는군.

"거봐요. 저 여자는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니까?"

이아영 본부장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쯤 국제협회가 쥐 잡듯 찾고 있을 텐데, 괜히 같이 있다가 우리까지 걸리면 설득이고 뭐고 완전 도루묵 아니에요?"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닙니까? 공습 준비로 바쁠 텐데 고작 탈주한 팀장 한 명 찾으려고 힘을 뺄까요?"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이아영 본부장이 계속해서 투덜대던 그때.

"그런데,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우리 둘이 속삭이고 있자니, 클로이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둘이 사귀어요?"

"...."

"...."

뭐라는 거야, 시발.

"그건 또 뭔 개소리...."

"네."

"네?"

옆에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고, 나는 곧바로 이아영 본부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는 뭐가 넵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다고. 오해받기 싫으니까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아,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이래야 저 여자가 당신한테 허튼수작 안 부리지."

하지만 도리어 그녀가 나를 다그쳤다.

나는 얼척이 나간 얼굴로 되물었다.

"허튼수작은 무슨 허튼수작입니까?"

"영화도 안 봤어요? 저 여자가 당신을 유혹해서 정보를 빼갈 수도 있잖아요.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으면, 애인이 있다고 포기한답니까?"

"...."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는지 입을 앙다문다.

물론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아무튼! 혹시 모르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둬요."

"...하아."

저게 대체 무슨 말인가.

괜히 상황만 더 귀찮게 만드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에 꽤나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둘이서 뭘 하든 관심 없으니까, 그만 좀 속닥거리시죠?"

클로이가 대놓고 쏘아댔다.

"...큼큼."

"...."

그 말에 나와 이아영 본부장은 괜히 멋쩍어 슬쩍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튼… 우린 지금 베를린 교량 사업을 위해 파견된 직원들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말이죠. 다들 포지션은 숙지하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나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기 위해 다시금 본론을 꺼냈다.

"현재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신분을 최대한 숨기고 독일협회에 접근, 협회장을 설득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요?"

"당연히 국제협회의 공습을 막는 거죠."

이아영의 질문에 내가 즉답했다.

"그리고 다들 명심하셔야 할 게… 이번 일에 실패하면 한별건설에도 어마어마한 타격이 있을 거라는 겁니다."

"...그렇겠죠."

"듣자 하니 이번 건설 사업, 약 3천억 원대 계약이라더군요. 만약 우리가 위장 소속인 게 들통나면 한별건설의 사업도 송두리째 날아갈 겁니다."

내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별건설은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이번 일을, 저희에 대한 신의 하나로 도와준 겁니다. 다들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임해주세요."

"알았어요."

"...."

이아영 본부장은 언제나 그렇듯 곧바로 대답했지만, 클로이는 그냥 멀뚱멀뚱 서서 어깨만 으쓱였다.

...됐다.

저 인간한테 신의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본인 할 일에만 충실하면 그만이지.

"그럼 이제 어디 먼저 갈 거예요? 협회로 바로 갈 건 아니죠?"

"그러고 싶어도 못 하죠. 지금 우리는 협회와 접촉할 수 있는 명분이 전혀 없으니. 뭐, 일단은 교량 건설 사업을 체결한 곳으로 먼저 가봐야겠죠."

내가 말하자 두 사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내 먼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럼… 이제 가 봅시다."

국회의사당으로.

***

한국, 서울.

청소 3팀이 한 주 작업을 마치고 보고를 위해 본부를 찾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왜 이번엔 우리 안 데려간 걸까요...?"

문소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하루 종일 꿍해 있던 게 안 데려가서 삐진 거였어?"

"다른 데도 아니고 유럽이잖아요. 제 친구들은 다들 한 번씩은 갔다 왔다는데...."

한상혁의 빈정거림에 문소연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려, 아쉬울 만도 하지. 그런 거로 놀리고 그러냐."

"아니 뭐… 딱히 놀린 건 아닌데...."

박근태 부장이 가세하자, 한상혁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듣자 하니 김준우도 엄청 힘들게 갔다던데?"

나름 위로해주려는 건지, 그가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이야기해주었다.

"한별건설 소속으로 위장해서 사업 담당자인 척하고 겨우 들어갔다나 봐. WDSO 소속인 걸 들키면 바로 송환이라나 뭐라나."

"그, 그래요…?"

"나도 누나한테 들은 거라 잘은 몰라. 근데 뭐… 사람이 너무 많으면 아무래도 계속 위장하기도 힘들고 하니까 전문가들만 데려간 게 아닌가 싶은데."

물론 확실한 사실은 아니었지만, 나름 꽤나 근거는 있는 말이었다.

문소연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나저나 한별건설이면… 그 하성일 본부장 누이분이 사장으로 있는 거기 말하는 건가?"

그때, 박근태 부장이 물었다.

"네. 하성일 본부장님이 엄청 설득했다던데요."

"이야~ 대단하네. 아무리 동생 부탁이라고 해도 본인들 사업이 걸려있는 이상 쉽지 않았을 텐데. 원래 사이가 좋았나 보네."

"그러니까 말입니다. 세상 남매는 다 우리 같은 줄 알았는데. 크크크."

사이 좋은 남매라니.

만화에서나 보던 관계에 한상혁은 퍽 신기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하성일, 이 개새끼야!!"

한 여성이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며 본부 건물로 들이닥쳤다.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와 얼굴.

당장이라도 다 때려 부술 기세로 성큼성큼 들어온 그 여성의 정체는 다름 아닌....

"미친놈이 우리 계약서를 몰래 들고 튀어?! 이게 얼마짜리 계약인지 알기나 해?! 하성일 이 새끼 어디 있어!! 빨리 나와!!"

한별건설 사장이자 하성일의 첫째 누이.

하미연이었다.

"하, 하 사장님…?"

"여, 여긴 어쩐 일로...."

난데없는 거물의 등장에 본부 로비에 있던 직원들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가 말렸지만....

"다 필요 없으니까 하성일 불러와! 당장 내 앞으로 데려오라고!!"

그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

"...."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소 3팀원들은.

"남매는 다 거기서 거긴가 봅니다."

"...그러게 말이다."

누구랄 것 없이 고개를 저었다.

***

[김 팀장님, 아무래도 저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제가 없어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주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

하성일 본부장에게서 온 문자 한 통.

아니, 유서 한 통.

'대체 뭔 일이 있는 거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내용에 나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신경이 팔려있을 여유는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독일 베를린, 국회의사당.

건설교통부의 루카스 장관과 대면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말씀드렸다시피 착공까지 2주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토지도 검토해봐야 하고, 이것저것 허가를 받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 정도면 굉장히 빠른 겁니다. 더 걸려도 되니까 모든 변수를 차단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십시오. 빠른 것보다 안전한 게 베스트니까요."

전형적인 원리원칙주의자의 대답.

루카스 장관은 듣던 대로 꽤나 고지식한 사람인 듯했다.

그런 이에게 우리의 소속을 들킨다면 설득은커녕 관용 없이 한국으로 쫓겨나겠지만, 지금 저 고지식함은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좀 있습니다."

이내 내가 서류를 꺼내 들며 입을 열었다.

"문제라뇨…?"

"지금 예정된 지역이 하펠강인데 저희 쪽에서 조사를 좀 해보니, 던전 출현 빈도가 꽤 높은 곳이더군요."

"…그렇습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그 또한 모르고 있었던 사실인 듯했다.

"건설에 못 해도 석 달은 걸릴 텐데… 그사이에 던전이 출현한다면 인부들은 물론 건설 자체가 위험해질 것입니다."

"흠, 그건 확실히 큰일이군요."

"그래서 말씀인데...."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본론을 꺼냈다.

"혹시 독일협회에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을까요?"

"도, 독일협회 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사 지역 반경 1km 내에 작전팀을 배치한다면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겁니다."

"글쎄요… 이건 어디까지나 저희 부서 소관이라, 지정 토벌을 부탁하는 건 조금...."

그는 일단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무엇보다 독일협회는 외국 기업이나 조직을 꽤나 배척하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그렇게 되고 나선 더더욱 문을 닫은 상태라...."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밀고 나갔다.

인부의 안전을 걸고 베팅을 한 이상, 원리원칙주의자에 고지식한 그가 이걸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내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고.

"한번 연락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김 파트장님께서 직접 하셔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못해 내 제안을 수락했다.

드디어 독일협회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나머진 협회장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공습을 대비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무실을 나서려던 그 순간.

"예, 루카스입니다."

루카스 장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예, 예. 예...?"

그리고 이내,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별건설에서 아직 직원을 파견하지 않았다고요…?"

그 말이 들려오길 한 차례, 루카스 장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

나는 상황이 X 됐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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