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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중앙 경찰서.
나와 이아영 본부장 그리고 클로이는 위장 신분이 발각되자마자 경찰관에게 연행되었고, 그대로 유치장에 구류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
"...."
"...."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따금 작은 한숨만 내뱉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던 그때, 이아영 본부장이 멍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한별건설이랑 이야기가 안 됐던 모양이군요."
"그게 무슨...?"
"보아하니 하성일 본부장이 독단으로 벌인 일인 것 같습니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이아영 본부장이 기가 차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기가 찬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골치 아프게 됐다.
보아하니 한별건설을 설득한 게 아니라, 몰래 소속만 옮기고 계약서를 훔쳐 온 것 같은데....
'안 될 것 같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던가....'
꽤나 복잡한 상황에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안 되면 되게 하는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다만...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덕분에 우리만 곤란해지지 않았는가.
한국에 돌아가면 한마디 따끔하게 해줘야겠군.
그렇게 다짐하고 있자니, 이아영 본부장이 다시 한번 물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해요? 풀려날 순 있는 거예요?"
"본부에서 손을 써주면 풀려나기야 하겠지만, 아마 바로 추방당할 겁니다."
"그럼 공습 대비는…?"
"대비는커녕, 독일협회에는 발도 못 들이겠죠."
"하아...."
이아영 본부장의 깊은 한숨이 유치장에 울려 퍼졌다.
누구랄 것 없이 착잡한 표정으로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나름 번듯한 조직인 줄 알았는데, 개차반도 이런 개차반이 없네."
구석에 앉아 있던 클로이가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지금 뭐라 그랬어요?"
그와 동시에 이아영 본부장이 바로 반응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발끈한대?"
"받아달라고 별 생쇼를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하니까 기가 차서 그러죠."
"참 나, 그땐 그때고. "
클로이가 대놓고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내가 뭐 틀린 말 했어요? 국제기구라는 곳이 무슨 민간 기업 계약서를 말도 안 하고 빼돌려서 일을 이렇게 만들어요?"
"그, 그건...."
클로이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이아영 본부장이 주춤했다.
사실 지금 상황에선 누가 봐도 클로이의 말이 맞았지만, 그럼에도 이아영 본부장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쪽이 뭐 대책이라도 세워보던가! 일 다 터질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구시렁거리는 건 누가 못해요?!"
"아니,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왜 내가 대책을 세워요? 잘 나신 지원 본부장님이 해보세요."
"아오! 진짜 열 받게 하네! 너 한국 돌아가면 두고…!"
"그만들 하시죠."
점점 과열되는 분위기.
경찰관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더 귀찮아질 게 뻔했기에 내가 서둘러 그들을 제지했다.
"그 왜 서로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입니까. 그것도 남의 나라까지 와서."
"아니, 이 여자가 먼저…!"
"지원 본부장님 성격 참 이상하시네. 저기요. 그냥 저 사람 자르고 날 앉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뭐?! 야 너 말 다 했어?!"
"어? 한 대 치시려고?"
"...."
기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두 여자.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다 꺼져버렸으면 좋겠군....'
그렇게 중얼거리길 잠시.
"둘 다 진정하고 앉으시죠. 애도 아니고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다 큰 어른들이 창피하게."
화를 꾹꾹 눌러 담은 채 입을 열었다.
"이미 일이 틀어진 이상, 이제 와서 징징대봤자 달라질 건 없습니다. 싸울 시간 있으면 대책이라도 세워봅시다."
"...."
"...."
그렇게 말하자, 두 여자는 그제야 감정을 식히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단… 클로이 씨."
"왜요?"
"국제협회가 언제 공습을 감행할지 혹시 알고 있습니까?"
"그럴 리가요."
그녀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공습 지역도 그냥 추측일 뿐이었잖아요. 정확한 날짜를 알 리가 없죠."
"하긴, 그렇군요."
"그래도 뭐…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클로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웨슬리 사무총장은 겁이 많고 성격이 급해요. 세력이 위협받는 이 상황을 절대 오래 둘 리가 없어요. 아마 이번 달 안… 빠르면 이번 주 안으로도 가능하겠죠."
"...."
이아영 본부장이 그녀를 슬쩍 흘겼다.
사람은 미워도 그녀의 말에 근거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으니, 그 점이 더욱 얄미운 모양이었다.
"그럼 더욱 시간이 없군요."
"그렇죠. 계속 여기 있다간 아무것도 못 해보고 죽을 수도 있을걸요?"
"...."
클로이의 극단적인 농담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지금이야 농담일지 몰라도 이 상황이라면 곧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독일 협회장을 설득해서 공습 대비를 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갇혀 버리다니.
게다가 언제까지 갇혀 있을지도 모르니, 최악의 경우에는 우리가 갇힌 채로 공습이 시작될 수도 있다.
그러면 클로이의 말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되겠지.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부수고 나가면 안 되나?"
"...?"
그때, 클로이가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던졌다.
"애초에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 얌전히 갇혀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경찰서고 유치장이고 나가려면 충분히 나갈 수 있잖아요."
"그게 무슨.... 사회에는 규칙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필요하다면 깰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참으로 국제협회식 사고방식이군요."
할 말이 없군.
"위기 상황이잖아요. 나쁜 일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깟 규칙이 중요해요, 아니면 전쟁 막는 게 중요해요?"
"둘 다 중요합니다. 특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수록 규칙을 더 잘 지켜야… 아니, 이런 걸 굳이 설명해줘야 합니까?"
어처구니가 없네.
지금이 무슨 도덕 시간도 아니고....
'확실히 출신은 어디 안 가는군.'
독기는 빠졌다고 해도, 사상을 개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무튼, 국회나 협회에서 무슨 조치가 있어도 있을 겁니다. 지금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고...."
내가 말을 꺼낸 그 순간.
따르릉―.
경찰서에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경찰이 그 전화를 받은 직후,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더니.
"───!!"
다른 경찰들을 향해 무어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순식간에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저기요! 무슨 일입니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
내가 다급하게 그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모두가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
확실하다.
무슨 일이 터져도 터졌다.
'설마 벌써 베를린까지 진격해온 건가…?'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갇혀 있는 이상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정말로 공습이 시작된 거라면....
'어쩔 수 없지.'
[고유 스킬 : 극초식 - 어검술]
스윽―.
캉―!
일말의 고민도 없이 유치장의 철창을 잘랐다.
"...규칙이 중요하다는 사람 어디 갔대?"
동시에 클로이의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
베를린 국회의사당.
루카스 교통건설부 장관의 집무실.
조금 전 자신의 집무실에서 일어난 당혹스러운 상황에 대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
그의 앞에 세 장의 서류가 전달되었다.
'대체 뭐야....'
그것은 다름 아닌, 조금 전 연행된 김준우, 이아영 그리고 클로이 로스, 세 명의 신상이 담긴 서류였다.
루카스 장관이 무엇보다 혼란스러운 건 세 명이 한별건설 소속이 아니었다는 것보다....
'세 명 다 WDSO 소속이었다고…?'
세 명이 최근 국제기구로 인정된 WDSO 소속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WDSO라면 국제협회의 통제에 맞서기 위해 설립된 기구가 아닌가.
듣자 하니 보다 상식적이고 대의를 위한 조직이라고 했는데....
그런 이들이 어째서 신분까지 숨기고 자신과 접촉한 것인가.
그뿐만 아니라, 독일협회와의 접견도 부탁했다.
대체 왜?
무슨 의도로 이런 행동을 한 것인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지금 상황에 대해서 그 어떤 감도 잡히지 않아, 답답한 한숨만 쏟아내고 있던 그때.
따르릉―.
집무실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예, 루카스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장관님. 한별건설 하미연 사장입니다.」
"아, 하 사장님!"
진짜 계약처, 한별건설에서 온 연락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선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희 쪽에서 착오가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조사해보니 WDSO 소속들이던데, 왜 그들이 한별건설 소속으로 위장해서...."
「...장관님. 지금 제가 하는 말, 무조건 믿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사뭇 진지한 그녀의 목소리에 루카스 장관이 덩달아 긴장했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지금, 국제협회가 베를린을 공습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예? 그, 그게 무슨…?"
「WDSO 소속은 그것을 막기 위해 장관님을 만나 뵌 거라고 합니다. 아니… 장관님을 통해 독일협회와 접촉하려고 한 것입니다.」
"...."
충격적인 이야기에 루카스 장관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있자니, 하미연 사장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장관님도 아시다시피 현재 독일은 각국과의 교류를 거의 차단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WDSO 소속이라고 해도 위장 신분이 아니고서는 접촉조차 불가능할 거라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거야 그쪽 상황이고. 그걸 왜 하 사장님이 해명하시는 겁니까? 따지고 보면 하 사장님도 피해를 보신 게...."
그녀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길 한 차례.
「제가 좀 모자란 동생을 두고 있어서 말이죠.」
"...?"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튼, 정중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들의 말을 한 번이라도 자세히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독일협회를 설득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
루카스 장관이 침묵하길 잠시.
"죄송합니다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야기 때문에 범죄자들을 풀어줄 순 없겠군요. 그건 제 권한 밖입니다."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미연 사장은 다급하게 무언가를 호소했지만, 루카스 장관은 더 이상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대체 뭔 짓거리들을 하는 거야....'
우리가 우스운 건가?
아무리 교류를 중단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위장 입국을 해서 나를 속이려 들었단 말인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던 그때.
"자, 장관님."
그의 보좌관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지금 총리님께서 모든 부처 장관들을 호출하셨습니다."
"뭐…?"
모든 장관을 호출…?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 그게...."
보좌관이 잠시 망설이길 한 차례.
"국제협회가 스트라스부르크, 켈 국경을 넘어서 진격하고 있다는 보고가...."
"...!"
그 순간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눈을 굴리길 잠시.
"다, 당장 베를린 중앙 경찰서 연락해서 조금 전 연행했던 그 세 명, 국회로 데려오라고 해 주게!"
"아, 저 그게...."
또다시 그가 망설였다.
"그 세 명이 경찰서를 탈출했다고 합니다."
"...."
끝까지 아귀가 맞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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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WDSO 본부.
하성일 본부장의 집무실.
하미연 사장이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길 잠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옆에 있던 하성일 본부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성일 본부장은 그야말로 대역죄인이 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 하미연 사장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
"쯧, 이 미련 곰탱아. 이런 일이었으면 처음부터 말을 했어야지. 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
"말했어."
"...?"
하미연 사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하성일 본부장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다 듣지도 않고 계속 안 된다고만 했잖아."
"...."
그제야 하미연 사장의 머릿속에 어렴풋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확실히 독일 건이 뭐 어떻고, WDSO 상황이 어떻고 들은 것 같긴 한데....
"...난 또 뭐 쓸데없는 이야기하는 줄 알았지. 워낙 바쁘기도 했고."
그녀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계약서를 훔쳐 가냐? 법무팀 금고에 있었을 텐데,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 알고?"
"그냥 들어가서 누나가 가져오라고 했다고 하니까 주던데?"
"...."
하미연 사장이 눈을 끔뻑이길 몇 차례, 뒤에 있던 비서를 향해 손짓했다.
"김 비서님, 법무팀 전원 오늘 안으로 시말서 작성하라고 전해줘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 직후.
"그래서...."
이내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국제협회가 독일을 침공하는 거야?"
"우리 쪽 정보로는 그래."
"흐음...."
하미연 사장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뭐 더 도와줄 건 없어?"
"…도와주게?"
"모르면 몰랐지, 내 귀에도 들어온 이상 모른 척할 순 없잖아."
"그래도… 누나 회사는 한별그룹 주력 사업인데, 할아버지가 알면 뭐라고 하지 않을까?"
"참 나, 아직도 할아버님 성격 모르냐. 오히려 아직도 안 도와주고 뭐 하냐고 날뛰실걸."
"...그렇긴 하네."
하성일 본부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근데 지금 상황으로선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고...."
그리고 그때.
"하 본부장님!"
김민주 작전 본부장이 사무실로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다.
"국제협회가 독일 국경을 넘어서 진격하고 있대요!"
"네…?"
"...!"
더 이상 상황을 지켜볼 여유도 없는 소식을 전해왔다.
"3시간 전에 국경을 넘은 거로 확인되는데,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이대로라면 이틀 안에 베를린까지 도달할 거예요!"
"기, 김 팀장님은요? 연락이 됩니까?!"
"아뇨. 아무래도 연행되면서 소지품을 압수당하신 것 같아요."
"...."
하성일 본부장이 표정을 구기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의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독일도 부랴부랴 대비를 시작하겠지만... 역부족일 거예요. 그렇다고 허가도 없이 우리가 막무가내로 지원을 나갈 수도 없고...."
"김 팀장님도 연락 두절이니...."
"일단, 선생님이 어떻게든 해 주길 기다려 봐야 할까요?"
김민주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하지만 하성일 본부장은 그마저도 해답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물론 김준우라면 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해답을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현 상황에선 김준우 팀장은 베를린에 고립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애초에 구류된 상태라면 현재 상황에 대해 알지 못할 수도 있고.
풀려나서 상황을 파악하고, 독일협회를 설득해서 지원을 보내는 데까지 이틀은 너무 짧다.
하다못해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만 있다면....
"국제협회, 지금 어디까지 진격했는지 알 수 있나요?"
그때, 갑자기 하미연 사장이 김민주에게 물었다.
"저희 통제팀 말로는 슈투트가르트까지 도달했다고 해요."
"슈투트가르트라...."
그녀가 턱을 쓰다듬길 잠시,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 지부장님. 하미연입니다."
"네네,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그쪽에 철거용 다이너마이트… 얼마나 있죠?"
어디론가 연락을 넣었다.
***
독일, 베를린.
유치장을 탈출해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리의 눈에 들어온 건, 이미 아비규환이 된 도심의 모습이었다.
거리 전체에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
수백 대의 차량으로 꽉 막힌 도로.
패닉에 빠진 채 가족을 찾고 있는 시민들.
"공습이… 시작됐군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다.
국제협회가 독일 국경을 넘은 게 틀림없다.
'빌어먹을, 이렇게 빨리 개시할 줄이야....'
아직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클로이 씨, 지금 국제협회 전력으로 베를린까지 진격한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클로이도 어느새 퍽 진지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큰 전투 없이 최단 거리로 진격한다면... 이틀이면 도착할 거예요."
"너무 빠른데...."
"물론 독일 병력을 죄다 끌어모아서 최대한 막는다면 5일까지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으로선 한 곳으로 병력을 모으는 것 자체가 쉽지 않겠죠."
"그럼 이틀 안에 독일협회를 설득해서 지원군을 파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절대 불가능하죠."
"이러나저러나 진격을 막을 순 없다는 거군요."
"당연하죠. 이능력자로 구성된 군대를 일반 병력이 어떻게 막겠어요."
큰일이군.
"그럼 일단… 독단으로라도 본부에 지원 요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아영 본부장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물었다.
"아무런 허가도 안 났는데 우리 마음대로 지원을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요…?"
"일단은 독일협회 소속 작전팀이라도 배치해야겠죠."
"그 말은...."
"독일협회로 갑시다."
우린 곧바로 도시를 빠져나가는 인파들을 거슬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꽉 막힌 도로를 뚫으며 어렵게 도착한 협회.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밖과 마찬가지로 이곳 또한 아수라장이었다.
"저기요! 지금 협회장님 어디 계십니까?"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 중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신경질적으로 내 손을 쳐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지금 비상인 거 안 보여?! 여기 있지 말고 당장 피난부터 해!"
"WDSO 서울 본부 소속 청소 3팀장, 김준우입니다. 지금 당장 협회장님을 만나 뵈어야 합니다!"
"WDSO…?"
소속을 밝히자, 그제야 직원이 나에게 집중했다.
그렇게 무언가 고민하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짓길 잠시.
"따라와."
곧바로 우리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도착한 후, 어느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이능력자를 끌고 오는데, 일반 병력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희도 작전팀 전선 배치 허가 내려 주셔야 합니다!"
중년 여성이 전화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원칙은 무슨! 지금 전시 상황이라고! 쓸데없이 희생 치르지 말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런 시발!!"
쾅―!
무언가 이야기가 잘되지 않은 듯 전화기를 냅다 집어 던졌다.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듯 보였다.
그 상황에 우리를 데려온 직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아멜리 협회장님...."
"뭐야? 네가 여긴 왜 올라왔어! 작전팀 대기시키라고 했잖아!"
"지,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 인간들은 또 뭐야?!"
그제야 그녀의 시선이 우리에게 닿았다.
"WDSO 서울 본부 소속, 김준우 팀장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가며 소속을 밝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WDSO? WDSO가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입국조차 안 될 텐데?"
"뭐… 요령을 좀 부렸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당신들이 여긴 왜 있는 거야? 설마 당신들이 공습을…!"
"진정하십시오. 저희가 벌인 일이 아닙니다."
한껏 흥분한 상태인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WDSO에 국제협회가 독일을 공습할 계획이라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상황을 알려드리고 싶었지만, 독일협회와 접촉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겁니다."
"뭐…?"
그 말에 아멜리 협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WDSO가 그걸 무슨 수로 알았다는 건데?"
"그건...."
그 질문에 내가 뒤로 시선을 돌렸고, 동시에 클로이가 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알려준 정보입니다. 전 국제협회 소속으로서 이런저런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요."
"…전 국제협회 소속?"
"네."
"하!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아멜리 협회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우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그렇게 답답한 얼굴로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길 잠시.
"그래서? 이미 공습은 시작됐는데 날 찾아온 이유가 뭐야."
드디어 그녀가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시다시피 일반 병력으로는 국제협회를 막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모든 작전팀을 가용하셔야...."
"누가 그걸 몰라? 그런데 위에서 허가가 안 난다고! 이능력자는 전시 상황에서 전투 병력으로 배치할 수 없다는 법률을 어길 수 없다면서!"
이런 상황에서까지 규칙을 고수하는 건가.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
아무리 고지식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나올 리는 없는데.
정말 규칙을 지키려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아멜리 협회장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애초에 우리 쪽 작전팀은 수가 별로 없어! 저쪽은 확인된 병력만 6만 명인데 우리는 다 끌어모아도 2만 명도 안 된다고. 게다가 장비도 부족하고…!"
"걱정 마십시오, 부족한 인원과 장비는 저희가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뭐…?"
나는 비로소 본론을 꺼내 들었다.
"WDSO 본부 소속의 작전팀을 파견해드리겠다는 소리입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세계 최고 전력이라고 자부합니다. 분명히 공습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
아멜리 협회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허가가 안 날 거야.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지금 다른 국가와의 교류를 전면 중단한...."
"그거야 정부의 입장이고요."
"...뭐?"
"작전팀 파견 요청은 어디까지나 협회장님의 권한입니다. 정부 눈치 볼 필요 없이, 협회장님께서 허가만 해 주신다면 그만입니다."
"하, 그랬다간 나중에 전범 재판에 불려갈 텐데?"
"그렇겠죠. 뭐, 그건 어디까지나 협회장님의 선택입니다."
나는 협회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독일을 지키고 책임을 지시겠습니까, 아니면 무결하게 나라를 빼앗기겠습니까?"
"...."
나를 바라보길 잠시.
"...확실하게 막을 수 있는 거야?"
그녀가 물었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280
280
베를린, 국회의사당.
긴급 소집된 각 부처 장관들과 벤 총리가 한자리에 모인 회의실.
"상황이... 어떻습니까?"
무거운 침묵 속 모두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벤 총리가 내각들을 향해 물었다.
"이능력자로 구성된 병력이 오늘 새벽 4시경 국경을 넘었으며, 현재 슈투트가르트까지 진격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모나한 국방부 장관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현재 확인된 병력은 약 6만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 병력과 속도라면 베를린까지 이틀이면 도달할 것 같습니다."
"대책은요?"
"일단 근방 사단이 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에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입니다. 국제협회와 충돌 즉시 발포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라 곧 전면전이 시작될 겁니다."
"그들만으로 막을 수 있는 겁니까?"
"물론 한 개 사단으로는 역부족입니다. 하지만 현재 모든 병력이 집결 중이니, 방어선에서 시간만 끌어준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국방부 장관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다른 부처는 생각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막을 수 있다뇨! 상대는 이능력자로 이루어진 군대입니다! 일반 병력으로는 시간을 끄는 것조차 불가능할 겁니다!"
"무기 하나로 몬스터를 사냥하는 이들입니다. 전차도 미사일도 무용지물일 텐데, 무슨 수로 막겠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지금 당장 협회에 연락해서 저희도 작전팀을 출격시켜야…!"
"지금은 전시 상황입니다."
내각들이 한마디씩 이의를 제기하던 그때, 모나한 국방부 장관이 그들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전시 상황에는 제가 모든 군사 결정권을 가집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
그 말에 모든 장관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사실 모나한 장관 본인 또한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일반 병사로 이능력자를 상대하겠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럼에도 그가 굳이 일반 병력을 고집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이게 얼마짜리 전쟁인데, 다른 놈들이 끼어들게 할 순 없지.'
전쟁은 누군가에겐 재앙이지만, 누군가에겐 기회다.
본인과 이런저런 거래를 하는 기업과 해외 정치인들.
그 모두에게 이번 전쟁은 어마어마한 기회였다.
만약 국방부가 독자적으로 이 상황을 해결한다면, 그 이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다른 놈들이 이번 전쟁에 손을 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일반 병사들만으로는 꽤나 어렵겠지만....
그거야 붙어볼 때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혹시 아는가.
우리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나한 장관은 다시 총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총리님도 아시겠지만, 독일 연방의 군사력은 유럽 제일입니다. 게다가 저희가 확인한 바로는 상대는 그 어떤 군사적 장비도 보유하지 않고 있습니다."
"...."
"제아무리 이능력자라고 해도, 결국 같은 인간입니다. 저희가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믿고 맡겨주신다면...."
"총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모나한 장관이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그때.
한 남자가 말을 자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교통건설부 루카스 장관.
현 상황과 가장 관련이 없는 부처였다.
주제넘은 행동에 모나한 장관이 그를 노려봤지만, 벤 총리는 일단 들어보기로 한 듯했다.
"말씀하세요."
"사실… 몇 시간 전에 WDSO 소속 직원들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뭐, 뭐?"
"WDSO가 어떻게…?"
루카스 장관의 발언에 회의실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WDSO가 정부의 허가 없이 입국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WDSO 직원이 찾아왔다고요…?"
총리 또한 그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마침 보고 드리려고 했던 사항입니다. 정부의 눈을 피하려고 민간 기업 소속으로 위장해서 입국했고, 정체가 발각되어 일단 연방 경찰에 연행됐는데...."
말끝을 흐리길 잠시, 그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WDSO는 이미 공습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알고 있었다…?"
"예. 그쪽 말로는 공습을 막기 위해 왔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우리도 몰랐던 정보를 어떻게 WDSO가 먼저 알고 있었다는 건데! 그리고 애초에 공습을 막으려고 온 거였다면 네가 아니라 날 찾아왔겠지!"
그 순간, 모나한 장관이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
"말했잖습니까. 위장 신분으로 입국한 거라고. 최대한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협회와 접촉하려고 했던 겁니다."
"협회랑…?"
"네. 그러니까… WDSO는 이미 일반 병력으로는 공습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 협회를 설득해서 작전팀을 전선에 배치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
모나한 장관이 입을 다물었다.
WDSO가 능력 있는 조직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의 실력이라면 이미 몇 번이나 증명되지 않았던가.
다만 어디까지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교류를 중단한 것뿐이다.
그런데 WDSO가 이렇게까지 나올 정도면....
"아무래도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루카스 장관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벤 총리가 물었다.
"그래서?"
"WDSO에 지원을 요청해보심이...."
"루카스!"
모나한 장관이 소리를 빽 질렀다.
다름 아닌, 위기의식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WDSO가 끼어든다면 이번 전쟁으로 인한 이득은 모두 그들이 가져갈지 모른다.
그렇게 둘 순 없었기에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모든 결정권은 나한테 있다는 말 못 들었어?!"
"그 결정이 말도 안 되는 거니까 하는 소리 아닙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능력자를 상대로 일반 병사가 어떻게 이길 수 있다는 겁니까! 괜한 희생만 치를 게 뻔합니다!"
"지금 교건부가 뭘 안다고 그런 개소리를 함부로 지껄여! 군 경력만 30년이야! 내가 하라는 대로…!"
"조용!"
그 순간, 총리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그의 눈빛이 두 남자를 관통하길 한 차례.
"현 시간부로 전국에 실제 전시 상황 경보와 데프콘 원 발령하고, 모든 결정권을 국방부 장관에게 인계합니다. 그리고 타국 지원 요청은...."
이윽고 벤 총리의 명령이 떨어졌다.
"기각합니다."
그 결정에 국방부 장관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
"미친 새끼가!!"
쾅―!
회의가 끝난 직후.
루카스 장관이 복도로 나오며 벽을 가격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당장 협회 작전팀을 투입해도 모자랄 판에 모든 지원을 거절한다니.
프랑스 정부가 단 이틀 만에 무너지는 걸 보고도 느끼는 게 없는 건가?
'개새끼… 해외 군수 기업들이랑 붙어먹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놈이 이런 억지를 부리는 이유야 뻔하다.
이번 전쟁으로 모든 이권을 독식할 생각이겠지.
빌어먹을, 이런 상황에서까지 이권 다툼이라니.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이게 말이나 되는가.
'이대론 안 돼....'
루카스 장관이 이를 으득 씹었다.
물론 독일의 군사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건 궤가 다르지 않은가.
절대 이길 수 없다.
군사 전문가가 아닌 본인조차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대로라면 독일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탈출한 WDSO 직원들… 소재 파악됐나?"
그때, 루카스 장관이 옆에 있던 보좌관을 향해 물었다.
"아, 아뇨. 최선을 다해 찾고는 있지만,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쉽지 않습니다."
"협회는 확인해 봤어?"
"네, 네? 협회는 왜...."
"멍청아! 협회를 설득하려고 했다잖아! 그럼 당연히 협회를 먼저 찾아갔겠지!"
"아, 죄, 죄송합니다.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보좌관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 당장 협회로 가 봐. 만약 발견하면 바로 나한테 연락 주고."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찾아내야 해."
루카스 장관의 눈빛이 번뜩이길 한 차례.
"지금 그 사람들이 우리 마지막 목숨줄이다."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경찰에 넘긴 걸 진심으로 후회했다.
***
독일협회 본부.
"어, 나야."
나는 그곳의 전화를 빌려 본부에 연락을 취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지금 어디세요?」
곧바로 김민주의 격양된 목소리가 쏟아졌다.
보아하니 본부도 현재 이곳의 상황을 알고 있는 듯했다.
"걱정 마. 지금 독일협회야. 협회장 만나서 설득하느라 좀 걸렸어."
「어떻게 됐어요…?」
"지원 허가 떨어졌다."
대답하자 떨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안도한 모양이었다.
"일단 지금은 현지 작전팀 먼저 파견시킬 거야. 그런데 인원도 장비도 부족해서 오래 버티진 못할 거니까, 지금 당장 본부 인력 최대한 끌어모아서 파견 보내."
「알겠어요.」
"그리고...."
나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유빈 씨랑 너도 합류해. 준비 단단히 해서."
「...네.」
그렇게 통화를 마쳤다.
바로 옆에 있던 이아영 본부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나저나…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뭐가 또 걱정입니까?"
"아니, 그렇잖아요. 정부에서 허가가 난 것도 아니고 협회가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인데… 파견 다 해놓고, 만약 정부에서 투입 자체를 막으면 손도 못 써볼 텐데요?"
"이런 상황에서 지원 병력 투입을 막는다고요? 그런 멍청한 새끼가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단독 결정을 안 좋게 볼 순 있겠지만, 정부가 더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본인들만으로는 절대 국제협회를 상대할 수 없다는 걸.
나중에 책임을 묻긴 하겠지만, 전투 투입 자체를 막을 리가 없다.
제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글쎄요."
그때, 클로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또 모르는 일이죠. 워낙 세상에 또라이가 많아서...."
"...."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의미심장한 말을 뱉는다.
쯧, 부정 타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아멜리 협회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파견 지시 내린 거야?"
"예. 최대한 빨리 보내 달라고 했으니…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진 우리끼리 버텨야겠죠. 준비되셨습니까?"
"가능한 인원 모두 집합시켜 놨어. 출동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해서 와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헛짓거리를 하고 있군."
그때, 한 남자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아멜리 협회장, 지금 대체 누구 명령을 받고 병력을 집합시킨 거지?"
"...모나한 장관님."
날카로운 목소리에 아멜리 협회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누구길래…?
"데프콘 원 발령됐다. 이제부터 모든 군사 결정권은 나한테 있어. 그리고 작전팀 투입은 공식적으로 기각됐다."
"...!"
"다 해산시켜!"
남자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가끔은 맞는 말도 하시는군요."
나는 클로이를 바라보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있었네.
제정신이 아닌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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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들었나?"
독일협회, 베를린 본부.
아멜리 협회장 앞에 나타난 한 남자가 눈을 부릅뜨며 다시 한번 명령을 내렸다.
"당장 해산시키라니까?"
"...."
하지만 아멜리 협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던 날 슬쩍 흘기길 한 차례.
"거절하겠습니다."
그녀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뭐라고?"
"거절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장관님도 아시다시피 지금은 전시 상황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가를 수호하는 게 첫 번째 아닙니까?"
"...."
"이미 모든 인원 대기시켜놨습니다. 이제 출격만 하면 되는데, 왜 굳이 해산시키려는 겁니까?"
남자는 그녀의 물음에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뭐, 그럴 줄 알았어."
그가 실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아멜리 뮐러, 전시 명령 불복종 및 국가 교란 행위로 긴급 체포한다."
"...뭐라고요?"
"연행해."
사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헌병대가 들이닥치며 곧바로 아멜리 협회장을 포박했다.
"자, 장관님!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말했잖나. 모든 결정권은 내게 있다고. 전시 상황에선 내가 판단하고 결정한 일에 그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어."
"정말 일반 병력만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이게 무슨…!"
"미친 건 네년이 아닌가? 철저하게 통제되어야 할 헌터를 전투에 투입하려고 하다니.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당신, 설마 이런 상황에서까지 잇속을 챙기려고…!"
"이봐, 아멜리."
아멜리 협회장이 그 말을 뱉는 순간, 남자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기세로 그녀를 노려보길 잠시.
"한마디만 더 하면 즉결처형이다."
"...."
기어이 최후통첩을 날렸다.
아멜리 협회장은 결국 입을 닫았다.
그렇게 헌병대가 그녀를 연행해서 사무실을 나서려던 그때.
"그런데... 자네들은 누구지?"
그제야 남자의 시선이 우리에게 닿았다.
난 대답에 앞서 잠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여기서 WDSO 소속이라는 걸 밝혔다간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자칫하다간 저기 협회장과 나란히 끌려갈지도 모르지.
일단은 적당히 둘러대야겠군.
"저희는 독일협회에 파견된...."
"청소팀입니다."
"...?"
나 대신 그 말을 뱉은 건, 다름 아닌 포박당한 아멜리 협회장이었다.
"청소팀…?'
"네. 협회 소속 청소 인원이 부족해서 이번에 계약했습니다."
"타국과의 교류는 금지되어 있지 않나? 죄목이 추가되겠군."
"민간 던전 청소 업체입니다. 기업과의 거래는 문제없는 거로 아는데?"
"...."
아멜리 협회장이 담담하게 말하자, 남자는 퍽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 뭐… 문제는 없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곤 나를 향해 턱짓했다.
"외부인은 꺼져."
"…알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시선을 아래로 깔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들을 가로질러 먼저 사무실에서 나서던 그때였다.
"내가 없어도 계약대로 이행해. 필요한 게 있으면 내 보좌관한테 이야기하고."
아멜리 협회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그 말을 흘렸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복도로 나와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고 있자니, 이아영 본부장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 저거 막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협회장이 저렇게 연행되면 투입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어지는데?!"
"그렇긴 하지만… 아쉽게도 연행을 막을 명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내버려 두면…!"
"아멜리 협회장도 우리 정체를 숨겼습니다. 분명 생각이 있으니까 우리를 남겨둔 거겠죠. 그런데 우리까지 발각돼서 붙잡히게 되면 그땐 정말 끝입니다."
나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좀 피합시다."
"...."
이아영 본부장은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진 않았다.
그대로 우리가 협회 건물을 빠져나온 직후였다.
"허억, 허억…!"
"잠시… 잠시만요."
갑자기 튀어나온 양복 무리의 남자들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쯧, 그 남자의 부하들인가....'
협회장이 끌려간 이상, 몸을 숨기는 게 급선무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지만 계속 막아서면 쓰러트려서라도....
"혹시 WDSO 직원분들입니까?"
"...!"
뭐야.
우리 정체를 알고 있다고?
"뭡니까? 당신들은 누구고."
"맞나 보네."
그들은 내 물음에는 답도 하지 않은 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 장관님. 세 분 모두 찾았습니다."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들은 몇 마디의 짧은 통화를 마치곤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지금 장관님께서 오고 계신다고 하니."
"장관님이라니, 대체 무슨...."
"자세한 이야기는 장관님께서 도착하시면 하도록 합시다. 지금은...."
그 순간, 그들의 시선이 내 뒤를 향했다.
그곳엔 헌병대와 함께 건물을 나오는 그 남자가 보였다.
나는 대충 눈치를 채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다.
이들은 아멜리 협회장을 연행한 남자와 다른 소속이다.
하지만 우리 정체를 알만한 사람이라고는....
"역시 여기 있었군."
급하게 협회 앞으로 차 한 대가 멈춰서며 문이 열렸다.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스 장관님…?"
다름 아닌, 교통건설부의 루카스 장관이었다.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 그냥 유치장에 곱게 갇혀 있었으면 수고를 덜었을 텐데."
"저희를 찾았다고요? 직접 경찰서에 넘기신 분이 왜 이제 와서?"
내 물음에 그가 침묵하길 잠시.
"도와주게."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독일은 매우 위급한 상황이야. 국제협회가 공습을 시작했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군사력으로는 그들을 막는 건 불가능해."
"…그래서 이제 와서 WDSO의 도움을 받고 싶으시다, 이겁니까? 제 이야기는 듣지도 않으셨으면서?"
"미안하네. 그땐 우리도 믿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잖나."
루카스 장관의 말에 맥이 빠졌다.
퍽 고까웠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잘잘못을 따질 순 없었다.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굳이 부탁하지 않으셔도, 벌써 본부에 파견 요청을 보내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는 데 최소한 이틀은 걸립니다. 그사이에 현지 작전팀이라도 빨리 투입을 해야 하는데...."
내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어떤 남자가 들이닥쳐선, 아멜리 협회장을 연행하고 대기 중인 작전팀을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뭐?"
루카스 장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떤 남자라니, 대체 누가…?"
"저야 모르죠. 그런데 협회장님이 그를 모나한 장관이라고 부르더군요."
"...이런 빌어먹을."
"아는 분입니까?"
내가 묻자 루카스 장관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
"독일 연방의 국방부 장관이야."
"…예?"
"전시 상황에서 모든 결정권을 가진 놈이지. 안 그래도 조금 전 회의에서 국내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모든 지원을 막았지. 총리는 그걸 받아들였고."
"그게 무슨…?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예전부터 해외 기업, 정치인들과 유착 관계가 있었던 놈이거든."
"허."
국방부 장관이라는 놈이 국가의 존망을 담보로 잇속 놀음을 하고 있군.
"뭐… 아멜리 협회장이라면 당연히 명령을 무시하고 작전팀을 출격시킬 거라는 걸 알았던 거겠지. 그렇다고 설마하니 직접 협회에 행차할 줄이야...."
"말씀드렸다시피, 본부 인원이 올 때까지 최소 이틀은 버텨야 합니다. 책임자가 체포된 이상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다시금 입을 여는 순간.
"아멜리 협회장님의 보좌관입니다. WDSO 소속 직원분들 맞으십니까?"
난데없이 한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맞습니다만...."
"아멜리 협회장님께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준비해두신 서류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상사가 연행됐음에도 꽤나 담담한 얼굴로 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퍽 의아한 표정으로 서류를 확인했다.
"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WDSO 인수 합병 동의서…?"
"네. 만약 협회장님이 어떠한 사정으로 더 이상 협회를 운영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당신에게 이걸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될 걸 알고 준비해뒀다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신 겁니다."
여전히 담담한 보좌관의 말에 이아영 본부장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독한 분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렇게 되면 다행이다.
독일협회를 인수할 수 있다면 모든 지휘권은 우리에게 넘어온다.
그럼 아멜리 협회장이 없어도 작전팀을 투입할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곧바로 펜을 꺼냈다.
"자, 잠깐!"
그 순간 갑자기 루카스 장관이 나를 막아섰다.
"또 뭡니까?"
"그 서명을 자네가 해도 되는 건가? 직원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잖나."
"WDSO에선 선조치 후보고가 원칙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책임자에게 먼저 보고를 하고...."
"루카스 장관님."
이런 상황에서까지 원리 원칙을 따져대는 건가.
나는 답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WDSO의 책임자는 사무총장님이지만, 최종 결정권자는 접니다."
"...뭐라고?"
"소개가 늦었군요. WDSO 서울 본부 소속, 청소 3팀장."
나는 이내 서류에 서명을 휘갈기며 말했다.
"김준우입니다."
***
쾅―!!
퍼버버벙―!
쿵, 콰과광―!!
슈투트가르트에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81번 고속도로.
목숨을 걸고 방어선을 지키는 군인들이 총알과 포탄을 퍼부어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희생을 비웃기라도 하듯, 국제협회 소속 부대는 너무나 손쉽게 공격을 막아내며 천천히 진격하고 있었다.
"계속 쏴!! 한 발짝이라도 늦추란 말이야!!"
독일 제1기갑사단 보병 3대대 1중대 3소대.
첫 번째 방어선 수호 임무를 맡은 덴버 소위가 소리쳤다.
"소대장님! 탄약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공격해도 진격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막긴커녕 더는 버틸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지원 병력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6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6시간?! 시발, 전멸한 다음에 오면 무슨 소용이야! 무조건 3시간 안에 오라고 해!!"
덴버 소위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됐다.
사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전장이었으니.
1초라도 지체되면 그 값은 목숨으로 치러야 하는 전장.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저희 병력으로는 역부족입니다!"
"방어선 포기하고 일단 후퇴하시는 게…!"
병사들은 더 이상의 전투는 자살행위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덴버 소위를 향해 후퇴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조금 전에 모나한 장관님한테 직통으로 연락이 왔다."
"네?! 국장부 장관한테서 직접요?!"
"전국 병력이 집결하는 중이니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방어하라신다."
덴버 소위의 그 말에 병사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상대는 이능력자들입니다!!"
"벌써 500m 앞까지 전진해왔습니다! 300m부터는 저희도 공격 사거리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대로는 다 죽을 겁니다!!"
"시발, 그걸 누가 몰라?! 위에서 시킨 걸 어떻게 하라고!!"
이 상황에 답이 없다는 것쯤은 덴버 소위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결국 명령을 받는 군인인 이상,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럼 최소한 협회에 연락해서 작전팀이라도 파견해달라고 해보시죠! 우리끼리는 절대 못 막습니다!"
"...안 돼."
"예?"
"안 된다고! 모나한 장관이 방금 아멜리 협회장을 연행했다! 대기 중이던 작전팀은 죄다 해산시켰고!"
"대, 대체 왜…?"
"시발, 내가 어떻게 알아!"
덴버 소위가 이를 으득 씹었다.
그렇게 소대원들이 실랑이를 벌이던 그 와중에도 국제협회는 계속해서 진격해왔다.
기어이 방어선 전체가 그들의 공격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시발....'
벌써 수십 발의 포탄과 수만 발의 총알을 쏟아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인간인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괴물.
어쩌면 처음 이능력자가 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건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겠지.
마음만 먹는다면 수백 명의 이능력자가 수만, 수십 만의 병력을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래.
애초부터 그런 놈들을 상대로 방어선이니, 전투니 하는 것들은 말이 안 됐다.
이건 그저....
일방적인 학살이 아닌가.
소대원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국제협회 부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
[고유 스킬 : 크리스탈라이즈]
[고유 스킬 : 섀도우 라이트닝]
[고유 스킬 : 아토믹 스피어]
슈우우웅―!
기어이 그들의 스킬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
"...."
모두가 도망가거나 막을 생각조차 없었다.
애초에 그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저 가만히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는 스킬들을 바라봤다.
그렇게 총 30명의 소대원이 죽음을 각오한 그 순간.
[습득 스킬 : 전능]
파지지직―!
갑자기 뒤편에서 거대한 순백의 창이 날아들었다.
그 창은 소대원들을 향해 떨어지던 모든 스킬들을 집어삼켰다.
쾅―!!!
그리고 그대로 적들을 향해 내리꽂혔다.
"뭐, 뭐야...."
"우리 산 거야…?"
소대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덴버 소위만큼은 당황해할 틈도 없이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고하셨습니다."
수백 명의 인원을 대동한 어느 동양인 남자가 서 있었다.
"이제부터 1번 방어선은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282
282
슈투트가르트 외곽, 81번 고속도로.
베를린으로 향하는 도로의 첫 번째 방어선.
나는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상황부터 살폈다.
"다행히 늦진 않았군요."
30명 남짓한 병력.
아직 다른 병력이 도착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이네....'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여기 있는 이들 모두 먼지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시선을 돌려 방어선 너머 국제협회 병력을 살폈다.
다행히 조금 전 내 공격에 그들 또한 꽤나 대미지를 받은 듯, 주춤거렸다.
다시 진격해올 때까지 조금의 시간은 벌었다.
이 틈에 우리도 진영을 가다듬어야겠지.
나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제부터 전면전은 저희가 맡을 테니 여러분들은 방어선 후방으로 이동해서 지원사격만 부탁드립니다."
"뭐, 뭐야. 다, 당신들 누구야…?"
하지만 그는 아직 우리가 누군지가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독일협회 소속 작전팀입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고...."
"뭐, 뭐…? 해산 명령 떨어진 거 아니었나? 협회장이 그 자리에서 명령 불복종으로 연행되었다고 했는데...."
"맞긴 한데, 지금 일단 급한 불부터 끕시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작전팀을 돌아봤다.
"1팀이랑 2팀은 지금 바로 소대 병력이랑 포지션 교체하시죠. 전방은 근접 포지션 위주로 세우고, 나머지는 측면 배치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3, 4팀은 원거리 포지션 위주로 소대 병력과 함께 중후방 지원해주세요. 타격 여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되는 대로 스킬 퍼부으시고요."
"넵!"
내 지시에 작전팀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대원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리를 비켜주었고, 그들을 대신해 방어선을 맡은 우리는 이내 공성 준비를 마쳤다.
"유효타를 날릴 필요는 없습니다. 최대한 스킬을 쏟아부어서 대치만 이어가도 충분합니다. 어차피 소모전으로 간다면 저쪽도 마력을 보충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우렁찬 대답이 들려오길 한 차례.
국제협회 병력 또한 다시금 공격 태세를 갖췄다.
쾅―!
콰과광―!!
이윽고 두 진영 간에 스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디언 클래스!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포격 방어에만 집중하십쇼!"
"알겠습니다!"
"네, 넵!"
[고유 스킬 : 수프림 미러]
[고유 스킬 : 트라이앵글 실드]
쿵―!
쿠구구구―!!
우리는 국제협회 진영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계속해서 막아냈고, 마찬가지로 우리 쪽에서 가한 공격 또한 가볍게 막혔다.
서로에게 피해를 줄 수 없는 싸움.
어차피 여기서 승부를 볼 생각은 없다.
본부 병력이 오기 전까지 시간을 끌기 위해선 소모전으로 가야 한다.
"대, 대체 뭡니까? 협회 작전팀이 어떻게...."
상황이 고착화되자, 지휘관이 다시금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말투는 어째선지 조금 전과 달라져 있었다.
"갑작스럽겠지만, 독일협회는 오늘부로 WDSO에 인수되었습니다."
"...예, 예?!"
"고로 투입 명령, 작전 지시도 이제부터 저희 독단으로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뭐, 물론...."
나는 남자를 슬쩍 흘기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만으로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면야, 굳이 귀찮게 하진 않겠습니다만."
"...."
남자의 표정이 바짝 굳었다.
그리고 이내.
"…도와주십시오."
진지한 표정으로 그 말을 전했다.
"저희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지원 병력을 요청해도 오고 있다는 말만 하고 계속 막으라는 명령뿐입니다."
"씁, 지원 병력은 아마 안 올 겁니다."
"예…?"
"국방부 장관님께서 굉장히 극적인 걸 좋아하시는 모양입니다. 듣자 하니 이번에 군수 기업이 새로 개발한 무기를 실사용하겠다는 것 같은데.... 그러려면 꽤 준비할 게 많아서 아마 그쪽으로 갔을 겁니다."
"그, 그게 무슨…!"
믿을 수 없다는 표정.
뭐, 나 또한 이게 말이나 되나 싶었지만, 루카스 장관이 해준 이야기니 틀린 사실은 아닐 것이다.
'이능력자와의 전쟁을 동네 패싸움 정도로 생각하는 건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81번 도로 방어선은 이제부터 제가 맡겠습니다. 일단 상황부터 간략히 브리핑해주십시오."
"저, 저희도 많은 정보가 있진 않습니다. 지금 진격해오는 인원은 대략 5천 명 정도라는 것밖에는...."
나는 그의 말에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확인된 총 병력이 6만이라고 했으니… 나머지는 다른 길로 가고 있나 보군요."
"베를린으로 향하는 도로는 총 5개입니다. 81번이 직통 도로지만, 52번, 9번, 11번 그리고 101번 국도도 이어져 있습니다. 각 도로의 방어선은 다른 소대들이 맡고 있습니다만...."
남자가 내가 대동한 작전팀을 슬쩍 흘기며 말했다.
"다른 쪽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저, 저희는 어차피 가망이 없으니 차라리 다른 방어선을 지원해주시는 게...."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들었습니까? 51번, 9번, 11번, 101번 국도입니다."
「지금 남은 작전팀, 각 도로로 이동 중이에요! 저도 101번 도로로 가고 있고요!」
"알겠습니다. 이아영 씨는 도착하는 즉시 임시 지원시설 설치부터 해주시고, 각 방어선에 보급망 구축해서 포션이랑 장비, 계속 공급 부탁합니다."
「알았어요!」
이아영 본부장의 대답을 듣고 난 후, 채널을 돌려 이번엔 클로이에게 물었다.
"클로이 씨는 지금 어딥니까?"
「52번 도로로 가고 있어요.」
"그쪽은 도착하는 대로 진영 재정비하고...."
「알아서 할 테니까 연락하지 마요.」
"...."
미친 건가?
'한국 돌아가서 보자.'
나는 애써 분을 삭이며 다시금 지휘관을 향해 말했다.
"지금 모든 작전팀이 각 방어선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제협회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지원 병력이 오기 전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하, 하지만 다른 도로를 이용한다면 돌아가긴 해도 충분히 베를린까지 진격할 수 있습니다! 모든 도로를 막는 건 불가능할 텐데...."
지휘관이 입을 연 그 순간이었다.
쾅―!
콰과과광―!!
멀리서 폭발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하성일 본부장에게 전해 들은 게 있었으니.
"방금 5개 메인 도로를 제외한 모든 도로가 파괴되었습니다."
"예, 예…?"
"아는 건설사가 손을 좀 보태주고 있어서."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36시간만 버티면 WDSO 본부 병력이 도착할 겁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버텨봅시다."
"...."
사뭇 굳은 표정으로 날 응시하길 잠시.
"독일 연방 제1기갑사단 보병 3대대 1중대 3소대장, 덴버 소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가 경례와 함께 결연한 목소리를 냈다.
"WDSO 본부 소속 청소 3팀장, 김준우입니다."
"...김준우? 설마 그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김준우 대표…?"
"하하, 알고 계시는군요."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동시에 그의 표정에서 안도감이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뭐, 아무리 교류를 끊었다고 해도 내 이름값은 여기서도 통하는....
"그럼 김민주 작전 본부장님도 와 계신 겁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
김민주…?
내가 아니라?
"야, 이 새끼들아! 우리 이제 살았다! 김민주 헌터가 왔다고!"
"저, 정말입니까?!"
"김민주 헌터가 와 있다고요?!"
"저...."
이미 전쟁에서 승리한 듯, 함성을 지르는 그들을 향해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초 쳐서 미안한데… 김민주 본부장은 아직 안 왔습니다."
"...아."
갑자기 병사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발.
그냥 때려치울까.
***
슈투트가르트에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5개의 도로.
그중 제3 방어선이 위치한 52번 국도.
"쯧, 어련히 알아서 할까."
그곳에서 클로이는 무전기 전원을 끄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게, 바쁘니까 통신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에도 5분에 한 번씩 상황 브리핑을 요구하고 있다.
본인이 걱정돼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게 걱정되는 건지.
'뭐, 이제 와서 내가 도망이라도 칠까 봐?'
이럴 시간이 있으면 본인 여자친구나 한 번 더 챙기던가.
클로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와중에 어느새 진영을 갖춘 작전팀이 전방을 향해 공격 태세를 취했다.
"멍청한 새끼들...."
그들을 바라보던 클로이가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뭐, 뭐…?"
"지금 우리 보고 한 소리야?!"
그와 동시에 작전팀 헌터들이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클로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국제협회는 일반적인 토벌식 배치를 쓰지 않아. 대부분의 화력이 전면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눈앞의 적만 신경 써. 그리고 국제협회의 장비는 모두 화력에만 치중돼있어. 그 대신 시전자의 마력 소모는 고려하지 않으니까 계속 공격을 유도하면 소모전에서는 우리가 유리해."
"그,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내가 만들었으니까."
"...?"
"...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놈들이 쓰는 장비, 무기, 포션, 거의 대부분 내가 만든 거라고."
여전히 담담한 말투.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말을 뱉자, 모두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러니까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이윽고 시야에 나타난 국제협회 병력.
클로이는 그들을 바라보며.
"여기가 뚫리면 너희들은 몰라도… 난 절대 곱게 못 죽을 거거든."
평소답지 않게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슈투트가르트.
이미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심 한복판.
웨슬리 사무총장은 핵심 병력과 함께 아직 그곳에 남아, 진격 현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무총장님."
그때, 케이트 수행비서가 사무총장을 찾았다.
"방금 각 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독일 방어선에 현지 작전팀이 투입됐다고 합니다."
"작전팀이?"
그와 동시에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물론 화력에서는 한참 부족하지만, 소모전으로 끌고 가면서 진격을 막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베를린까지 도달하는데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쯧, 날파리들이 귀찮게 하는군요."
그가 혀를 차길 한 차례.
"그나저나… 현지 작전팀이 어떻게 투입된 거죠? 모나한 장관이 그걸 허락했을 리가 없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인간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잇속과 권력에만 눈이 먼 남자.
얻을 게 많은 전쟁에 다른 놈이 손대는 걸 두고 볼 리가 없다.
다른 나라의 지원은 고사하고, 본국 협회의 도움도 모두 고사할 놈이다.
그런데 어떻게 현지 작전팀이....
"아무래도 WDSO가 나선 것 같습니다."
"하...."
웨슬리 사무총장이 실소를 뱉었다.
역시 그런 건가.
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생겼다면 십중팔구 그놈들 짓이지.
독일은 현재 타국과의 교류가 막혀 있어서 정공법으로는 절대 협회를 설득할 수 없었을 텐데... 또 무슨 꼼수를 썼나 보군.
"다행인 건 인원을 보아하니 현지 작전팀만 급하게 투입한 것 같고, WDSO 본부 인원은 아직 파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도착하려면 이틀은 걸릴 겁니다. 아마 그때까지 시간을 끌려고 할 텐데… 그 전에 어떻게든 돌파해야겠죠."
"화력으로 밀어붙여 볼까요?"
"그건 위험합니다. 자칫 한 곳이라도 실패하면 꽤 타격이 클 테니."
"그럼...."
"여러 곳을 동시에 뚫을 수 없다면, 한 곳만 집중해서 노리면 됩니다."
케이트의 물음에 웨슬리 사무총장이 검지를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거리로 본다면 81번이 제일 좋긴 하지만… 그만큼 더 많은 병력을 배치했겠죠. 보다 덜 중요하고 인원이 덜 배치됐을 만한 도로가...."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이 손가락으로 지도를 턱 짚었다.
"52번 국도. 여기가 좋겠군요."
그의 결정에 케이트 비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견도 없다는 듯했다.
"다른 진격로에 있는 병력, 모두 52번 도로로 집결시키세요. 저도 그리로 간다고 전해두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따라오세요."
이내 웨슬리 사무총장이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실력 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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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독일 연방군 지휘통제사령부.
국가 수뇌부가 모여 있는 컨트롤 센터이자 모든 병력을 지휘하는 그곳.
실시간으로 상황을 체크하던 모나한 국방부 장관에게 청천벽력 같은 보고가 날아들었다.
"81번 도로의 제 1방어선을 포함, 총 5개 도로 방어선에 협회 작전팀이 투입됐다고 합니다!"
"시발, 그게 무슨 개소리야!"
토마스 중장의 보고에 모나한 장관이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질렀다.
"내가 분명히 해산시켰잖아! 혹시 몰라서 아멜리까지 잡아넣었는데, 대체 어떤 놈이 투입시킨 거야! 보좌관? 아니면 작전 본부장?!"
"그, 그게...."
"누군지는 몰라도 내가 만만했나 보네. 당장 투입 명령 내린 새끼 잡아 와! 저항하면 사살해도 좋으니까!"
"모, 모나한 장관님...."
토마스 중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아본 바로는… 현재 독일협회가…?"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미리 뭔가를 준비해둔 게 아닐까 추측은 하지만...."
"준비를 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빨리...."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기억.
아멜리 협회장을 연행하던 그때, 함께 있었던 동양인 남자가 떠올랐다.
'시발, 설마 그 새끼가…?'
이를 으득 씹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아멜리 그년이 무슨 수작을 벌인 게 분명하다.
본인이 잡혀갈 걸 예상해서 미리 서류를 준비해놨다거나....
"죄송한 말씀이지만, 공식적으로 WDSO에 합병됐다면 저희 쪽에선 더 이상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국제기구로서 분쟁 지역 지원은 고유 권한이기도 하고...."
토마스 중장이 조곤조곤 말했다.
동시에 모나한 장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어떻게든 제삼자가 개입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는데, 기어이 이렇게 돼버리다니.
모나한 장관이 크게 분개한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쏟아내길 한 차례.
"...박스 인더스트리에서 연락은 왔나? '스콜' 배치는 어떻게 됐어?"
뜬금없이 다른 질문을 꺼내 들었다.
"아, 예… 거의 완성 단계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시발! 프로토타입 완성됐다고 한 게 벌써 3주 전인데, 왜 아직도 기다리라는 거야! 배치할 수 있는 거, 맞긴 해?!"
"...."
토마스 중장은 그저 연락을 받고 보고를 한 것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다그쳐봤자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부터 3시간 내로 배치 끝내라고 해. 아니면 정식 계약이고 나발이고 나도 더 이상은 몰라!"
"…알겠습니다."
토마스 중장은 짧은 대답과 함께 곧바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와 동시에 모나한 장관이 주먹을 불끈 쥔 채 눈을 부릅떴다.
박스 인더스트리는 독일의 군수 기업이었다.
설립된 지 1년도 안 된 신생 기업이지만 국방부와의 정식 계약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게 가능했던 것은 모나한 장관의 적극적인 푸쉬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가 신생 기업 따위를 밀어주는 이유는 보다 복잡한 관계가 얽혀 있었다.
모나한 장관은 몇 년 전부터 러시아에 무기를 납품해주는 대가로 거액의 로비 자금을 받아왔다.
그 거래를 주도한 이는 다름 아닌 러시아의 국방부 장관, 블라디미르.
물론 자국의 무기를 타국에 로비를 받고 넘기는 게 결코 합법일 수는 없지만, 세상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게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블라디미르 장관 덕에 다른 나라와도 연줄이 생기며 주변에서 날아드는 로비 금액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이처럼 블라디미르 장관은 모나한에게 너무나 중요한 클라이언트였다.
그리고 그런 자의 사위가 바로, 박스 인더스트리의 대표였다.
앞으로도 블라디미르 장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박스 인더스트리와의 정식 계약을 체결해야 했다.
하지만 군수 업체 계약은 아무리 국방부 장관이라고 해도 독단으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다른 인사들의 허가도 필요했으며, 최종적으로는 투표를 통해 진행하는 사항이었다.
고로 모나한 장관이 할 수 있는 건, 박스 인더스트리가 개발한 신형 집속탄 '스콜'을 긴급 실전 배치해 다른 장성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것.
오직 그것뿐이었다.
모나한 장관이 전시 상황임에도 최소한의 인력 배치로 계속 지원을 미루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이었다.
'스콜'을 더욱 효과적으로 각인시키기 위해선 보다 위급한 전장이 적합했으니까.
그러나 제삼자가 투입된 이상, 자칫하면 스콜이 배치되기 전에 상황이 마무리될지도 모른다.
'어서 조치를 취해야....'
모나한 장관은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사실 상황은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인 출신도, 그렇다고 헌터 출신도 아닌 모나한 장관이었기에 이능력자의 전투에 대한 감이 없어 애초에 이 전투의 성립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스콜이 배치될 때까지 어떻게든 작전팀 해산시켜야 해. 알겠나? 이번 전쟁의 주인공은 스콜이 돼야 한다고."
모나한 장관이 다시금 입을 열자 토마스 중장이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장관님…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여기서 작전팀을 해산시키면 적이 베를린까지 진격할 동안 저희는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 명령에 따르지 못하겠다?"
"그, 그건...."
"이봐, 토마스. 여긴 독일이야. 우리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고, 누구도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해. 알아들어?"
"...."
쓸데없는 자존심.
그 자존심 때문에 국방부 장관이라는 이가 국가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었지만....
본인은 그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쯧, 됐어. 네가 못하겠으면 내가 직접 한다. 당장 헬기 준비해."
"예, 예…?"
"못 들었어? 내가 직접 가겠다고."
모나한 장관은 그 말을 뒤로하곤 곧바로 지휘실을 빠져나갔다.
***
81번 고속도로, 제 1방어선.
"거리를 좁힐 틈을 줘선 안 됩니다! 계속 공격하세요!"
쾅―!!
쾅, 콰과광―!!
현지 작전팀과 국제협회 병력 사이로 수많은 스킬이 쉴 틈 없이 빗발쳤다.
"탄창 아끼지 마!"
"남은 탄약 다 쏟아부어!!"
두두두두―!!
방어선 후방을 맡은 병사들 또한 견제 사격을 이어갔다.
물론 일반 총알로는 저들에게 피해를 줄 순 없지만, 진격을 저지하는 데는 충분했다.
벌써 12시간째 이어진 소모전.
토벌에서도 이 정도 긴 작전은 거의 없었을 테니, 다들 상당히 지쳐 있었지만....
"포션 도착했습니다!"
"현재 부상자 있습니까?"
이아영 본부장이 맡은 임시 지원시설에서 계속해서 장비와 포션, 그리고 사제 클래스로 이루어진 구급팀을 보내주고 있다.
"구급팀 도착했답니다. 1팀이랑 2팀 포지션 교체하시고 치료받으십시오. 그사이에 2팀이 계속 교전 이어가 주시고요."
"네, 네!"
"알겠습니다!"
내가 교전 중이던 작전팀에게 지시를 내리자 그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였다.
현재 우리는 두 팀으로 나누어, 한 시간 간격으로 교전을 이어가고 있다.
한 팀이 교전하는 동안 다른 팀은 부상 처치와 회복 그리고 간단한 버프를 받는다.
이후엔 또다시 포지션 교체.
구급팀은 다른 방어선을 계속 순회하며 같은 역할을 반복한다.
이처럼 우리는 교전과 회복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덕에 끊임없는 공격이 가능했다.
반면 국제협회 진영은 공격만 가능할 뿐, 회복이 불가능했다.
아무리 수적으로 열세고, 화력이 부족해도 이 순환만 유지한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앞으로 12시간....'
12시간만 버티면 WDSO 본부 인원이 도착한다.
승부는 그때 보면 된다.
우린 그저 최대한 소모전을 이어가며 상대의 체력을 빼놓는 게 중요하다.
그런 계획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데.'
조금 전부터 국제협회 진영의 동태가 바뀌었다.
공격하면 할수록 더 거세게 반격하던 아까와는 다르게, 지금은 그저 우리의 공격을 받아내기만 하고 있다.
심지어는 슬금슬금 진영을 뒤로 물리고 있다.
마치 들키지 않게 조금씩 후퇴하는 듯한 움직임.
아무리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이 정도로 체력이 고갈될 놈들은 아닐 텐데....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들을 계속해서 살피던 그때.
"지금 뭐 하는 거야!!"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누구 명령받고 작전팀을 투입한 거야! 당장 철수시켜!"
"...쯧."
아니나 다를까, 모나한 장관이 잔뜩 뿔이 난 얼굴로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기어이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못 들었어?! 지금 당장 철수시키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
"여기까지 직접 오신 거 보면 소식 들으셨을 텐데요. 독일협회는 WDSO에 합병됐다는 거."
"...!"
내가 담담하게 입을 열자 그가 잠시 주춤했다.
설마 목소리만 크게 내면 내가 고분고분 따를 줄 알았던 건가?
"독일협회는 이제 엄연히 독립된 국제기구 소속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번 일을 심각한 국가 침략 행위로 규정, 국제협회로부터 국가와 시민을 수호하기 위한 역할을 수행 중입니다."
나는 모나한 장관은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저희가 장관님의 명령에 따를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
이내 그의 얼굴이 마구 구겨졌다.
"개소리하지 마. 국제기구고 나발이고 이건 명백히 국가 교란 행위다. 다 집어처넣기 전에 당장 철수해!"
"하아...."
말이 안 통하는군.
'이건 뭐 원숭이랑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현재 상황을 슬쩍 살폈다.
아직까진 큰 문제 없이 버티고 있지만, 이대로 철수하면 베를린까지 단숨에 뚫린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손을 써볼 수도 없겠지.
그런데도 철수를 지시한다는 건....
'전혀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네....'
멍청한 놈.
본인이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모나한 장관님."
그때, 덴버 소위가 앞으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넌 뭐야?"
"1기갑사단 보병3 대대 1중대 3소대장, 덴버 소위입니다. 제가 대신해서 현 상황을 보고드려도 되겠습니까?"
모나한 장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덴버 소위는 멋대로 보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문제없이 교전 중이지만, 현 소대원 30명으로서는 진격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입니다. 그리고 그건 1방어선뿐만 아니라 모든 방어선이 마찬가지라고 사료됩니다."
"그래서?"
"만약 여기서 작전팀이 철수한다면... 모든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지원 병력을 보내주시거나, 철수 요청을 철회해주시는 게...."
"지금 '스콜'이 배치되고 있다."
"…네?"
모나한 장관이 꺼낸 뜬금없는 이야기에 덴버 소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거만 배치되면 국제협회고 이능력자고 다 막을 수 있어.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버텨."
"아, 아니… 저희로는 단 5분도 못 버티...."
"시발, 니들 군인 아니야? 군인이면 목숨 걸고 버텨!"
"...."
어이가 없군.
목숨 걸고 버티면 뭐 스킬이 피해가기라도 하나?
총 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정신론도 상황을 보면서 지껄여야지.
'잠깐, 스콜…?'
어딘가 익숙한 이름인데.
어디서 들어 봤더라....
급히 기억 속을 뒤적이길 잠시.
"혹시… 박스 인더스트리의 그 신형 집속탄 말씀하시는 겁니까?"
회귀 전 보았던 한 뉴스를 떠올리며 내가 물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뭐… 당연하겠지.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직 발표도 안 된 프로토타입일 테니까.
'믿는 구석이 뭔가 했더니… 설마 그 장난감보다 못한 미사일일 줄이야.'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게, 회귀 전 '스콜'은 시연 현장에서 모든 탄두가 불발되면서 꽤나 부끄러운 오명을 남긴 물건이었다.
"묻잖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장관님. 정말 그깟 미사일 하나로 이능력자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장관님의 지능을 의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철컥―.
기어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 그가 권총을 내 머리에 가져다 댔다.
"한 번 더 말해봐!"
"...."
그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렸다.
나는 말 없이 그를 노려보길 잠시.
"멍청하고 무식하고 덜 떨어지셨다고요. 장관님."
입꼬리를 올리며 그 말을 뱉은 순간.
탕―!
귀를 찢는 듯한 단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284
284
탕―!
귀를 찢는 듯한 단발의 총성.
비유가 아닌, 사실 그대로의 표현이었다.
총알이 내 귓가를 스쳐 지나가며 찢어진 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
"...."
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모나한 장관을 계속해서 노려봤다.
그 또한 여전히 총을 거두지 않고 내 머리를 겨냥한 채였다.
이내 교전 병력을 제외한 모든 인원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덴버 소위 또한 갑작스러운 총격에 크게 당황한 듯,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그저 눈만 굴리며 우리를 살폈다.
"…지금 분쟁 지원을 위해 파견된 국제기구 직원에게 발포하셨습니다."
내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모나한 장관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방금 이 행동,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개소리하지 마. 국방부 장관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으로 행동한 건 네놈이잖아. 내가 책임질 이유가 없는데."
"...."
지리멸렬해지는 말싸움.
더 이상은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리고 말이야, 솔직히 이젠 딱히 지원해 줄 필요도 없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봐. 저쪽도 이미 후퇴하고 있는 거 아닌가?"
모나한 장관이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국제협회 병력은 아까부터 더 진격해오긴커녕 계속해서 조금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좋은 소식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후퇴가 아니라, 무의미한 소모전을 피하고 다른 곳으로 화력을 집중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건 오히려 위험한 상황...."
"야 이 새끼야, 네가 뭘 안다고 나불대?"
"...하하."
꽉 막힌 대화에 나는 기어이 실소를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장관님 뜻이 정 그러시다면...."
모나한 장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원하는 대로 해드리죠."
그와 동시에 등을 돌려 교전 중인 작전팀 전원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작전팀, 전원 철수합니다."
"예, 예?!"
"철수라뇨…?!"
"저희가 철수하면 방어선은…!"
"철수하세요."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작전팀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모든 작전팀이 교전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
"...."
그들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됐다.
더 이상은 나도 도와줄 이유가 없다.
무릎 꿇고 박박 빌어도 모자랄 판에, 당장 꺼지라고 생떼를 쓰는 놈을 뭐하러 도와주겠는가.
지가 알아서 하라고....
「52번 도로 제3 방어선, 긴급 상황 발생!」
「모나한 장관님!!」
그렇게 서로 등을 돌린 그 순간이었다.
나와 모나한 장관의 무전이 동시에 울렸다.
「현재 3 방어선으로 국제협회 병력이 계속 모여들고 있습니다!」
「지금 스콜 총 11기 배치 완료됐습니다!」
각자의 상황이 전달되는 순간, 모나한 장관은 웃음을 지었고 내 표정은 바짝 굳었다.
"끝났군."
"X됐네...."
서로 받아들인 상황이 완전히 정반대였다.
***
52번 도로, 제3 방어선.
"...."
"...."
작전팀을 비롯해 소대 병력 모두가 교전을 멈춘 채,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수백 명에 불과했던 국제협회의 병력이 어느샌가 수천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일 났네....'
제 3방어선을 맡은 클로이 또한 그 상황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아하니 동시에 5개 방어선을 모두 뚫는 건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손해가 크다고 판단한 듯했다.
따라서 계획을 변경해, 한 곳으로 병력을 집중시켜 뚫으려고 하는 것이다.
'왜 하필....'
여기인가.
차라리 김준우, 그 인간이 있는 방어선으로 갈 것이지.
클로이는 5분의 1로 선택된 자신의 운을 원망했다.
하지만 병력이 몰려들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따로 있었다.
"여기서 뵙는군요."
익숙한 실루엣과 목소리.
"오랜만입니다. 클로이 팀장."
다름 아닌, 증원된 병력과 함께 웨슬리 사무총장이 직접 행차한 것이다.
"하...."
X 됐네.
그와 눈이 마주친 클로이가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우리와 함께 오래 일했는데, 그렇게 하루아침에 뒤통수를 칠 줄이야. 꽤 서운하군요."
"전 그냥 일개 직장인일 뿐입니다. 그냥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한 거라 생각해주세요."
"그러면 그냥 곱게 나갈 것이지, 이쪽 정보는 왜 흘렸을까요."
"...."
클로이가 쯧, 혀를 찼다.
그러자 웨슬리 사무총장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더 좋은 조건인 거 확실합니까? 듣자 하니 청소팀에서 일하고 있다던데?"
"…수습 기간이라서요."
"그럼 이쪽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다시 돌아올 생각이 있습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이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오며 물었다.
저건 회유일까 아니면 협박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 의미 없는 농담일까.
어떻게든 피해 다녀야 했던 남자와 마주친 이상, 절대 곱게 죽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냥 떠보는 걸 수도....'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클로이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래.
어차피 국제협회에서 도망쳐 나올 때부터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예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건, 김준우를 적으로 두는 것보다 차라리 저 남자를 적으로 돌리는 게 차라리 덜 위험할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태까지 자신이 봐왔던 김준우라면....
자신의 목숨을 베팅할 만한 가치가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마치 냉수를 끼얹은 듯 머릿속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냉정함을 되찾은 클로이는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
"X 까세요."
웨슬리 사무총장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고유 스킬 : 천지창조]
[11차원의 고유 공간을 창조합니다.]
서걱―.
그녀의 오른팔이 사라졌다.
"끅… 끄아아아아악!!"
동시에 울려 퍼지는 끔찍한 비명.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고통이 전신을 휘어 감았다.
"아무리 제가 미워도 그렇지, 전 직장 상사한테 그게 무슨 매너입니까?"
"끄윽, 끅…!!"
그녀의 귓가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엄청난 출혈과 함께 찾아온 과호흡.
그와 동시에 시야가 점점 멀어지며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애써 정신을 붙잡으며 겨우겨우 고통 섞인 신음을 토해내던 그사이 들려온 한마디.
"진격하세요."
웨슬리 사무총장의 그 지시와 함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끄으윽...."
하지만 클로이는 결국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업보인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긴, 아무리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해도 과오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래도....'
결국, 다 살려고 한 일이다.
그런데 이대로 죽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에도 자꾸만 감겨오는 눈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의식을 잃어가던 그 순간.
"다들 괜찮나?"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순간적으로 돌아온 의식.
그녀는 남은 힘을 짜내 고개를 쳐들었다.
저 멀리서 수많은 인원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선두에 선 한 남자.
김준우가 온 건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클로이는 억지로 눈을 뜨며 올려다봤고, 이윽고 눈에 들어온 건....
"별로 많지도 않은데 호들갑은."
"...."
다름 아닌, 모나한 장관이었다.
"다들 내가 왔으니 걱정 말게. 이제부턴 내가 직접 지휘하겠네."
"시… 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
"왜… 하필 니가...."
힘겹게 말을 뱉었지만, 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철수라뇨! 그게 무슨 소리예요!"
철수 명령이 떨어진 직후.
각 방어선을 수호하던 현지 작전팀이 모두 집결지로 모여들었다.
그와 동시에 이아영 본부장이 격양된 목소리로 내게 다가왔다.
"무전 못 들었어요?! 클로이 씨가 맡은 방어선으로 병력이 모여들고 있다고요! 게다가 연락도 없는 거 보면 미처 철수도 못 한 것 같은데, 지금 도와주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날 수도…!"
"지금 그쪽으로 모나한 장관이 갔습니다."
"네…?"
이아영 본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스콜인지 뭔지 신형 미사일도 배치했다고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던데. 뭐, 철수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한 걸 보면 나름 자신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알아서 하겠죠."
"...."
내 말에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말 그깟 미사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이윽고 돌아온 날카로운 목소리.
그 뒤에 올 말을 왜인지 알 것 같았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면...."
"저도 압니다. 말도 안 되는 거."
너무 오래 붙어 있었나.
어째 말투도 나랑 비슷해지는 거 같네.
"그럼 왜 철수하려는 거예요?"
"방법이 없습니다."
그녀의 날 선 물음에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지금 상황에선 당연히 철수 명령 따윈 무시하고 계속 교전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본부 병력이 올 때까지 최소한의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모나한 장관이 그 꼴을 가만 보고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
"자기 분을 못 이겨 저한테 총까지 갈긴 놈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명령을 무시했다간 자칫 내분으로까지 이어질 겁니다. 그러면 더 큰 피해가 발생하겠죠."
내가 말하자 이아영 본부장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럼, 그냥 차라리...."
"국방부 장관을 죽이자는 건 아니겠죠."
"...안 되면 말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전쟁 막으려다 전쟁할 일 있나.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진짜 이대로 철수할 거예요? 클로이 씨는 아직 후퇴도 못 했는데 그대로 내버려 두고요?"
"하아...."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대로 정말 우리가 철수해 버리면 모든 병력이 전멸할 것이다.
나 또한 그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국방부 장관이 저렇게까지 개입을 막고 있다면… 막무가내로 버티는 게 오히려 더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지금 이렇게 고민하는 순간에도 국제협회는 계속해서 진격해오고 있다.
이러다 만약 방어선이 뚫리고 베를린이 함락된다면 전 세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시민들은 혼돈에 빠질 것이고 국제협회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전 세계 깊숙이 깔리겠지.
모든 것이 국제협회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된다.
그러면 더 이상 국제협회에 맞설 명분을 잃게 되겠지.
'시발, 진짜....'
이가 부서져라 씹어댔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상황에서 뭘 할 수 있는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머릿속이 지끈거리던 그때.
따르릉―.
내 핸드폰이 울렸다.
다름 아닌, 박인범 사무총장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나다. 상황은 좀 괜찮냐?」
"...최악입니다."
어렵게 입을 열자, 피식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줄 알았다. 모나한 장관이 방해하고 있지?」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래 봬도 협회장만 30년 가까이 했다. 웬만한 관료들 사정은 다 알고 있어.」
"...."
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 본인 인맥 자랑이나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다시 말해서, 모나한 장관이랑 결탁한 놈도 잘 알고 있다는 소리지.」
"...예?"
「블라디미르 장관 말이야. 러시아 국방부 장관. 내가 알기론 그놈이랑 벌써 10년 가까이 붙어먹고 있다던데....」
잠시 말끝을 흐리던 박인범 사무총장이 이내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 정도면 이제 다른 놈으로 바꿔 탈 때도 되지 않았겠냐?」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내가 블라디미르 장관이랑 연결해 주면… 자네가 설득해볼 수 있냐는 소리야.」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팽 치자고. 모나한 장관.」
"...."
그제야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거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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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본격적인 전면전이 발발한 52번 도로, 제3 방어선.
모나한 국방부 장관은 전선 후방에 위치한 임시 지휘통제실에서 상황을 모니터링 중이었다.
"계속 공격해! 레오파르트 계속해서 추가 투입하고, 토네이도랑 타이푼 추가 이륙 명령 내려!"
모나한 장관이 참모들을 향해 소리쳤다.
현재 제3 방어선에는 독일 내 거의 모든 병력이 집결됐다.
그동안 아끼고 있었던 전차와 전투기까지 투입하고, 실전 배치된 스콜이 방금 막 발사되었다.
WDSO가 철수한 지금, 반드시 여기서 끝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전력을 쏟아부은 것이다.
하지만....
"자, 장관님! 스콜 1기 불발입니다!"
꽤나 불길한 보고가 전달됐다.
"시발! 하필 이렇게 중요할 때…! 2기, 3기 같이 발사해!"
"알겠습니다!"
모나한 장관은 이를 으득 씹었다.
모든 전력을 투입하는데도 확실히 쉽지 않다.
큰 피해도 없는 모양이고, 진격 속도도 줄지 않은 걸 보면 정말 일반 화기로는 그들을 막기 역부족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할 수 있다.
독일이지 않은가.
유럽 땅에서 본인들을 이길 수 있는 이는 없다.
이능력자?
그래 봤자 몬스터나 잡고 다니는 놈들일 뿐이다.
제아무리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졌다고 해도 한 국가의 군대와 전쟁을 벌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스콜 2기, 3기 불발입니다!"
"뭐…?"
"현재 타이푼 총 56기 격추됐다고 합니다!"
"토네이도 ISD도 현재까지 총 41기 격추됐습니다! 상공에 스킬이 빗발치고 있어서 추가 이륙이 불가능합니다!"
"...."
어딘가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모나한 장관은 설마 하는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지만, 불길한 소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스콜 7기, 8기, 9기… 11기까지 전량 불발입니다!"
"더 이상 공군 전력 운용이 불가능합니다!"
"일단 방어선에서 후퇴하고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시는 게…!"
"...."
미친 듯이 날아드는 보고에 모나한 장관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순간 혼이 빠져나간 듯, 그저 멍하니 서 있던 그때.
"장관님!!"
누군가의 고함에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방금 제3 방어선... 돌파당했습니다."
모나한 장관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일단 장관님은 피신하셔야 합니다! 지통실까지 진격하는 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겁니다!"
"...."
장성들이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미 멘탈에 금이 간 모나한 장관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3 방어선이 뚫렸다면 지통실까지는 다이렉트다.
국방부 장관인 본인을 포함해 모든 장군이 모여 있는 이곳이 공격받는다면 전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모나한 장관은 이 상황이 되고 나서야 뒤늦게나마 김준우의 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우리만으로는 힘들다.
조금만....
조금만 도움을 받자.
스콜도 전량 불발이 난 상황에 눈치 볼 것도 없다.
공을 독식하지 못하더라도 일단은 이기고 봐야 할 게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모나한 장관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대로 익숙한 번호를 눌러 통화를 연결하자.
「무슨 일인가?」
이윽고 핸드폰 너머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자, 장관님… 지금 혹시 통화 가능하십니까?"
다름 아닌, 그와 10년째 관계를 지속해오고 있는 남자.
박스 인더스트리 대표의 장인.
러시아 국방부 장관, 블라디미르였다.
「음? 지금 전시 상황 아니었나? 나에게 연락할 여유가 있는 건가.」
"그것 때문에 도움이 필요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뭐?」
이내 모나한 장관이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습니다. 상대도 예상외의 전력인지라 저희 병력만으로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스콜이 있지 않나. 듣자 하니 이번에 실전 배치했다면서.」
"아, 그, 그건...."
모나한 장관이 말끝을 흐렸다.
차마 그에게 11기가 모두 불발이 났다는 말은 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못 들은 척 넘어가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 아무튼 지금 상황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조금이라도 좋은 지원군을 보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흐음....」
핸드폰 너머에서 깊은 호흡이 들려오길 잠시.
이윽고 블라디미르 장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러시아, 모스크바.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블라디미르 국방부 장관에게 꽤나 뜬금없는 전화 한 통이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장관님. WDSO 본부 소속 김준우라고 합니다.」
"…누구라고?"
「WDSO 소속 김준우입니다, 장관님.」
블라디미르 장관은 꽤나 황당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봤다.
WDSO 직원이 어떻게 본인의 개인 연락처로 연락을 한 거지?
그런 의문이 들기도 잠시.
「이렇게 갑작스럽게 연락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박인범 사무총장님을 통해 개인 연락처를 전달받았습니다.」
"…미스터 박이?"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박인범과는 꽤 오랜 인연이 있었다.
알고 지낸 지는 거의 20년 가까이 되었고, 자신이 진심으로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 친구라기 하기엔 꽤나 모호한 관계였다.
뭐랄까....
그냥 서로가 필요할 때나 연락하는 비즈니스적인 관계라고나 해야 하나.
그런 그가 갑자기 WDSO 소속 직원을 연결해줬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의미겠지.
가령 내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그럼 본인이 직접 연락할 것이지, 왜 일개 직원한테....'
블라디미르 장관은 은근히 기분이 나빴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현재 독일 상황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김준우가 던진 질문에 다른 생각이 곧바로 날아갔다.
"알다마다. 국제협회 병력이 침공했다면서? 베를린까지 진격하는 것을 모나한 장관이 막고 있고."
「아뇨. 막지 못할 겁니다.」
"…음?"
「모나한 장관은 이능력자와의 전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합니다. 일반 병력과 장비로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중입니다.」
"신형 미사일도 준비가 됐네. 자네 생각만큼 크게 걱정할 건...."
「장관님.」
그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박스 인더스트리에 연구개발 투자를 크게 하셨죠?」
"그, 그렇네만...."
「그럼 박스 인더스트리의 대표이사… 그러니까, 장관님의 사위분이 그 투자금 대부분을 본인 주머니에 챙긴 것도 알고 계십니까?」
"뭐, 뭐…?!"
블라디미르 장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봐, 지금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나?"
「물론 알고 있습니다.」
"증거도 없이 그따위 소리를…!"
「증거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그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블라디미르 장관의 말을 잘랐다.
「중요한 건, 장관님의 사위분이 거액의 연구비를 빼돌려 부동산 투자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구멍이 난 비용 덕분에 제대로 개발되지 못했고요.」
"그게 무슨...."
「제가 감히 장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실전 배치된 11기의 스콜, 모두 불발이 날 겁니다.」
"...!"
동시에 블라디미르 장관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연한 일이겠죠. 애초에 제대로 만들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
블라디미르 장관은 대답을 아꼈다.
당연히 쉬이 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을 거라곤 생각하기 어렵다.
모나한 장관과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전 세계를 통틀어 극소수의 정상급뿐이었으니까.
심지어 미스터 박이 연결해준 인물이다.
그가 소개해준 이가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밀어준 사업이 폭삭 내려앉는 동시에 자신의 명예마저 실추될 것이다.
"그래서? 그걸 나한테 알려주는 이유가 뭔가. 당장 내 사위 놈을 처리하기라도 하라고?"
「아닙니다. 아직 아셔야 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아직… 남았다고?"
「예. 장관님의 사위를 꼬드겨 부동산에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게 한 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 잠깐!"
블라디미르 장관의 전신이 꿈틀거렸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입을 뗐다.
"그게 모나한 장관이라는 소리는...."
「맞습니다.」
그의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모나한 장관이 과거 매입한 땅이 있습니다. 교통 인프라가 없는 지역의 미개발 토지인데, 그곳에 교량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그런데?"
「해당 토지는 교량 건설을 시작으로 다양한 개발이 이루어질 겁니다. 다만 법적 문제 때문에 모나한 장관이 계속 그 땅을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죠. 그렇다고 노다지가 될 곳을 팔아버릴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그 땅을 믿을 만한 놈한테 넘기려고 한다?"
「그렇습니다.」
"그게 내 사위고?"
「....」
상대편은 대답조차 필요 없다는 듯했다.
"하, 하하하…!"
갑작스러운 충격 때문일까, 기어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동안 뒤를 봐줬더니, 기어이 둘이 붙어서 자신을 농락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가만히 둘 수 없겠군.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지."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단, 확인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
여전히 무미건조한 말투.
하지만 이유 모를 당당함이 묻어나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잘 알았어. 그런데 왜 굳이 나에게 알려주는 거지?"
블라디미르 장관은 애써 냉정함을 되찾으며 물었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모나한 장관을 협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겠나."
「저는 멍청한 인간과는 거래하지 않습니다.」
"...."
예상치도 못한 대답.
근거도, 논리도 없는 대답이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신뢰가 가는 말이었다.
"원하는 게 뭐야?"
블라디미르 장관이 다시금 물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내게 이 정보를 넘길 리가 없잖나. 원하는 게 뭔지 말해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윽고 김준우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첫 번째는 모나한 장관과의 관계를 정리해주십시오.」
"그거야 정해진 수순 아닌가? 내가 그런 소리를 듣고도 그놈을 감싸줄 것 같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동안 모나한 장관과의 거래를 폭로해주십시오.」
"뭐?"
「그냥 관계만 정리한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꼬리를 자르려면 제대로 나락까지 떨어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랬다간 나까지 무사하지 못할 텐데?"
「그거야 준비할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장비와 거래 내역, 전부 다른 놈에게 넘겨버리십시오.」
"총알받이를 세우라 이건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애초에 이건 장관님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신중하게 생각해주십시오.」
"...."
대답을 아끼길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블라디미르 장관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곧바로 내선 전화를 들어 해외첩보부서에 연락을 취했다.
"어, 나다. 혹시 베를린 근처에 교량 건설 사업이 잡혀 있는 게 있나?"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이윽고 키보드 치는 소리가 들려오길 잠시.
「아, 네 지금 확인해보니… 한국의 한별건설이라는 곳에서 독일 교통건설부와 교량 사업이 계약되어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정말 사실이었군.
'빌어먹을....'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 다시금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무슨 일인가?"
다름 아닌, 그와 10년째 관계를 지속해오고 있는 남자.
모나한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는 이내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하며 지원군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흐음."
블라디미르 장관이 고민하길 잠시.
"그건 힘들 것 같군."
「예, 예…?」
"나와 친분이 있는 건 자네지, 독일이 아니지 않은가. 대놓고 독일에 증원군을 보내 주기엔 이래저래 문제가 많아서 말이지."
「그, 그건 제가 어떻게든....」
"자네가 뭘 할 수 있는데?"
「....」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쏘아붙였다.
"장사꾼 출신이었던 자네를 그 자리에 앉힌 게 나야.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네."
「하지만 장관님… 여기서 저희가 밀리면 박스 인더스트리와의 계약도 장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봐, 모나한."
블라디미르 장관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스콜이 불발이 났나?"
「...!」
숨이 턱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놈 말이 사실인가 보군."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놈이 내 사위랑 합심해서 내 돈을 빼돌린 거 말이야."
「그, 그게 무슨…!」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당황하는 기색.
모나한 장관이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결단코 한 번도…!」
"자네, 혹시 말이야...."
블라디미르 장관이 그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홍차 좋아하나?"
「...!」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저쪽이 더 잘 알고 있겠지.
「한 번만 더 연락하면 나랑 차 한잔하게 될 거야.」
블라디미르 장관은 그 말을 뒤로하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집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좌관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지금 당장 동부 마피아에 연락해."
"네, 네?"
"그동안 모나한한테 받은 장비랑 거래 내역, 전부 마피아한테 넘겨버리라고."
"그, 그게 무슨...."
자꾸만 이유를 묻고 있는 보좌관을 향해, 블라디미르 장관의 눈이 번뜩였다.
"닥치고 당장 시키는 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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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장관과의 통화를 마치자마자 이아영 본부장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어, 언제 그렇게까지 조사한 거예요?"
"뭘 말입니까?"
"뭐긴 뭐예요. 모나한 장관이랑 박스 인더스트리 대표가 결탁해서 부동산 투기했다는 거요!"
"아...."
나는 잠시 말을 아끼던 끝에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거 거짓말입니다."
"...에?"
"이 상황에 그걸 조사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애초에 세 사람의 관계도 방금 사무총장님이 알려줘서 알았는데."
"....'
그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가만히 눈을 끔뻑였다.
뭐, 말 그대로다.
작전지휘권을 모나한 장관이 가지고 있는 한 우리가 무턱대고 끼어들 수가 없다. 그러니 그가 가진 권한을 빼앗든, 혹은 박탈시키든 해야 했다.
하지만 한 나라의 국방부 장관을, 그것도 전시 상황에 해임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지.
당장 국가의 근간이 무너질 정도로 큰일이 아니고서야.
'결국, 러시아와 무기 거래를 했다는 걸 폭로하는 수밖에 없는데....'
러시아 국방부 장관과도 연관된 일을 섣불리 까발렸다간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의 관계가 10년째 아무런 문제 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건, 꼬리가 밟혀도 충분히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놨다는 의미일 테니까.
물론....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간다면 말이 달라지겠지.'
블라디미르에게 더 이상 모나한 장관이 필요 없어진다면 그를 보호해줄 이유도 없어진다.
어떻게든 두 사람의 관계를 끊어내는 게 급선무였다.
마침 한별건설 교량 사업이라는 실질적인 계약도 있지 않은가.
물론 나중에 토지 매매 내역을 대조해본다면 들킬 수도 있겠지만, 지금을 넘기기엔 충분할 것이다.
"어차피 둘 중 한 명은 손절 각을 보고 있었을 겁니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도 10년씩이나 이어지다 보면, 상대방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이득에 의문이 갈 테니까요."
내가 굳이 이간질하지 않아도 언젠간 멀어질 사이였다.
나는 그날을 조금 더 앞당기기 위해 작은 구실을 만들어준 것뿐이다.
"그리고 뭐… 불법 암거래를 한 건 사실이잖습니까."
"그렇긴 해도...."
그럼에도 이아영 본부장은 여전히 어딘가 찜찜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진짜 괜찮겠어요?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거짓말을 해도? 무엇보다 사무총장님이 연결해준 사람인데, 거짓말이 들통나면 괜히 사무총장님한테 불똥이 튈 수도...."
"애초에 사무총장님도 그게 걱정이었으면 저한테 연락처를 알려주지도 않았겠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제가 어떻게 나올 거라는 것쯤은 사무총장님도 알고 계셨을 겁니다. 그럼에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의미였겠죠."
"…그래도 불안하긴 한데요."
"알게 뭡니까. 어차피 두 번 만날 사이도 아니고."
내가 담담히 대꾸했다.
"아무튼, 조금만 기다려봅시다."
1시간.
아니, 30분만 있으면 모나한 장관이 실시간으로 무너져 내리는 걸 보게 될 테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던 그때.
박인범 사무총장에게서 다시 전화가 울렸다.
"예."
「잘 해결했냐?」
"예, 뭐… 대충 명분을 만들어서 모든 혐의를 모나한 장관에게 뒤집어씌웠습니다. 아마 곧 반응이 올 겁니다."
「…? 명분을 만들다니?」
"당신 사위와 손잡고 당신 돈을 꿀꺽했다고 하니까 바로 넘어오더군요."
「그러니까 지금… 구라를 쳤다는 거냐?」
"예."
내가 당당하게 대답하자, 잠시 후.
「미친놈아! 그럼 나는 어쩌라고?!」
"...."
「내가 설득하랬지, 구라를 치랬어?! 소개해준 나는 생각 안 하냐?!」
"...."
안 되는 거였나?
***
베를린, 국회의사당.
"총리님!"
벤 총리의 보좌관이 다급하게 그를 부르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전시 상황인 만큼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에 벤 총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보좌관의 반응을 보아하니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닌 듯했다.
"무슨 일인가? 설마 전선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러시아 국방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러시아?"
벤 총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러시아라니.
갑자기 러시아가 왜?
아니 그것보다 국방부에서 직접 연락을 해왔다고?
"설마 증원군을 보내준다거나 그런 건가? 그건 좀 곤란한데. 타국이 참전하기 시작하면 자칫 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보좌관은 잠시 망설이던 끝에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러시아 국방부에서 모나한 장관에 대한 수사 의뢰를 정식으로 요청했습니다."
"…뭐?"
동시에 벤 총리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모나한 장관을 왜?"
"러시아 마피아 쪽과의 무기 밀매 거래 내역이 나왔다고 합니다."
"...!"
상상하지도 못한 대답에 벤 총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 무기 밀매라니, 그게 사실인가…?"
"국방부에서 이쪽으로 보내준 서류를 확인해봤는데 확실한 것 같습니다. 퇴역 장비나 기타 누락 무기를 넘겨, 10년 동안 벌어들인 이익이 대략 1억 유로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가히 충격적인 소식에 벤 총리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인데… 아무래도 이번에 타국 지원을 받지 않은 것도 이러한 유착 관계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보좌관이 조심스레 의견을 덧붙였다.
이내 벤 총리의 주먹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한 나라의 국방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타국의 범죄조직과 암거래를 해왔다고?
그것도 자국의 무기를 가지고?
'이런 미친놈이....'
그래서 협회 지원팀과 WDSO의 지원을 그렇게 극구 거절했던 건가.
이번 전쟁을 무기 홍보를 위한 시연회로 사용하려고?
'그게 사실이라면 절대 내버려둘 수 없겠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맡기다니.
당장 모가지를 쳐도 시원치 않은 사항이다.
원칙대로라면 지금 당장 모나한 장관을 소환해서 조사에 착수해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전시 상황이다.
최전선에서 직접 병력을 지휘하고 있는 그를 불러내는 건 아직 위험하다.
당연히 당장 해임할 수도 없다.
전시 상황에 지휘자를 잃는 것만큼 커다란 타격도 없기 때문이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일단은 전쟁이 끝난 다음에...."
벤 총리가 그 말을 뱉는 순간.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독일은 지도에서 사라진 후일 겁니다."
누군가가 집무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다름 아닌 교통건설부 장관, 루카스였다.
"자네가 여길 왜…?"
"독일협회가 WDSO에 합병됐다는 보고는 들으셨습니까?"
"…들었네."
"책임자인 김준우의 지휘 아래 현지 작전팀이 현장에 투입됐었습니다. WDSO 본부 병력이 오기 전까지 버티려는 작전이었죠. 그런데 모나한 장관이 모두 철수시켰습니다."
루카스 장관은 벤 총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현재 모든 방어선이 돌파당했습니다."
"...!"
"지금 이 속도라면 국제협회 병력이 베를린까지 도착하기까지 1시간… 아니, 30분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 말에 벤 총리의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상대는 이능력자들입니다. 애초에 일반 병력과 무기로 막아볼 수 있는 이들이 아닙니다."
"...."
"만일 모나한 장관이 그걸 알고도 작전팀을 철수시켰다면 당장 국가 교란 행위로 지휘권을 박탈시켜야 할 것이고, 만일 몰랐다고 하면 국방부 장관으로서 자격이 부족한 것이겠죠."
루카스 장관이 날이 바짝 선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느 쪽이 독일을 위한 선택인지 신중하게 선택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지금 모나한을 해임하면 대체 누가 지휘를...."
"누가 와도 그보다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루카스 장관이 즉답했다.
"하물며 WDSO의 전신이었던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대표라면 오죽하겠습니까."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대표라니?"
"김준우. 그가 현재 현장에 있습니다."
그 이름에 벤 총리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마치 그 또한 김준우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루카스 장관이 재촉하자, 깊게 고민하길 잠시.
"전시작전통제권… WDSO에 넘긴다."
기어이 해당 지시가 떨어졌다.
***
52번 도로의 제3 방어선이 뚫린 직후.
계속해서 후퇴를 반복하던 끝에, 기어이 베를린 근처까지 도달해서 서둘러 최종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뚜루루, 뚜루루―.
모나한 장관은 벌써 수십 번째 블라디미르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뚝―.
"이 시발 진짜!!"
여전히 블라디미르 장관은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대체 뭔데! 어떤 개새끼가 그딴 개소리를 지껄인 거냐고!!"
모나한 장관은 길길이 날뛰며 고함을 질러댔다.
본인이 박스 인더스트리 대표와 손을 잡고 블라디미르 장관이 투자한 연구비를 꿀꺽했다니.
이게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인가.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제 손으로 그딴 짓을 하겠는가!
대체 누가 그딴 소리를 한 건가.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자신을 모함에 빠트릴 만한 놈이 국회에 있나?
'설마 루카스 그 새끼가…?'
아니.
그놈은 블라디미르 장관에게 대놓고 거짓말을 할 만큼 배짱 있는 놈이 아니다.
시발, 그럼 대체 누가?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모나한 장관이 이를 으득 씹었다.
이렇게 되면 정말 위험하다.
최초 방어선은 모두 뚫렸고, 국제협회 병력은 이 순간에도 계속 진격하고 있다.
물론 후퇴를 하면서 몇 개의 방어선을 추가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얼마나 시간을 끌어줄지는 미지수다.
그러다가 만약 최종 방어선인 이곳까지 돌파당한다면....
'...이건 안 돼.'
이건 더 이상 가망이 없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누가 와도 막지 못한다.
차라리 처음부터 현지 작전팀 투입을 허가했다면....
'시발....'
뒤늦은 후회에 모나한 장관은 속으로 울분을 토해냈다.
무엇보다 만약 이대로 베를린이 함락당한다면 협회 개입을 반대한 자신이 모든 책임을 물게 될 것이다.
그랬다간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겠지.
그것만큼은 안 된다.
그래, 그것만큼은....
"장관님! 헬기 준비됐습니다! 일단 후방으로 피하십시오! 여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
모나한 장관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일단은 후방으로 가자.
그리고 거기서 미국으로 피신하자.
러시아 국방부 정보를 내어준다면 분명히 받아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헬기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때.
"장관님! 총리님 연락입니다!"
한 병사가 통신기를 들고 다가왔다.
'...!'
그와 동시에 그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이 상황에 총리가 직접 연락을 해왔다고?
모나한 장관은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끼며 조심스레 통신기를 받아들었다.
"...예, 모나한입니다."
이내 천천히 입을 떼는 순간.
"마이클 모나한. 이 시간부로 장관직에서 해임됐음을 통보하네."
"...예?"
청천벽력 같은 말이 들려왔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해임이라뇨! 제가 대체 왜…!"
"그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벤 총리가 담담한 투로 대답했다.
설마 그 소식이 총리한테까지 전달된 것인가.
"초, 총리님!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누군가 절 음해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거래 내역이 버젓이 있는데 거짓말이라고?"
"...!"
그게 어떻게…?
설마 블라디미르 장관이 폭로한 건가?
하지만 그랬다간 본인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제, 제가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지 않습니까! 제가 없으면 누가 병력을 지휘...."
"그래서 지금까지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하고 방어선이 뚫렸나?"
"...."
말문이 턱 막혔다.
"그건 병사들이 겁을 먹고 지휘에 따르지 않아서...."
"이번엔 또 병사 탓인가? 그럼 자네는 상식 밖의 힘을 쓰는 괴물들을 상대로 총 하나 들고 버티라고 하면 할 수 있겠나?"
모나한 장관의 두 손이 덜덜 떨려왔다.
"얌전히 베를린으로 복귀해."
"초, 총리님…!"
"어기면 즉결처형도 고려하겠네."
그의 눈앞이 하얘지는 순간, 통신이 일방적으로 끊겼다.
이내 그는 황망한 표정으로 주변 병사들을 둘러봤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굉장히 싸늘했다.
"시발...."
모나한 장관은 그제야 자신의 위치를 깨달은 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때.
"어떻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리님께 연락은 받으셨습니까?"
딱 맞춘 듯 그의 앞에 다시금 김준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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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너…!"
베를린 근처까지 후퇴한 끝에 만들어진 최종 방어선.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모나한 장관은 예상했던 대로 내 멱살부터 부여잡았다.
"너지? 네놈이 블라디미르 장관님한테 그딴 개소리를 한 거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치미 떼지 마, 시발!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나도 쥐고 있는 거 많아! 내가 입 열면…!"
"장관님!"
아니, 이젠 장관도 아니지.
"당신, 이 상황 해결할 수 있습니까?"
"...뭐, 뭐?"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스콜은 모두 불발, 당신이 타국 개입을 극구 반대한 덕에 병력 증원도 불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쥐고 있는 게 많으면 뭐 합니까? 지금 당장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
모나한 장관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
"국가와 국민을 수호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잇속 때문에 국가를 사지로 내몰고 계신다는 걸 알고는 있습니까?"
"네, 네깟 놈이 감히 어디서 그런 말을…!"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독일을 멸망시키든 말든 제가 알 바는 아닙니다. 다만, 최소한 제 일은 방해하지 마셔야죠."
그의 말을 끊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입을 열든 말든 알아서 하시고 능력도, 실력도, 염치도 없으면 그만 좀 꺼지십시오. 걸리적거리니까."
그를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뒤에서 무어라 욕설이 들려왔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모나한 장관님."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뭐, 뭐야? 이거 안 놔?! 너희 시발, 내가 누군지 몰라?! 이거 놓으라고!!"
곧바로 나타난 헌병대가 그를 연행하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순순히 따라갈 리가 없던 그는 끊임없이 발버둥쳤다.
"계속 동행에 불응하시면 포박하겠습니다."
"뭐, 뭐…?!"
"수갑 채워."
결국, 끝까지 추한 꼴을 보이며 강제로 연행되었다.
뭐, 추후 어떤 조치가 있을지는 안 봐도 뻔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그나저나....'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
최초 방어선은 이미 뚫린 지 오래.
최후방인 이곳까지 진격하는 데 3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마저 뚫리면 그다음은 베를린이다.
어떻게든 여기서 끝을 봐야 한다.
"일단 각자 포지션대로 이동하십시오."
나는 대동한 현지 작전팀을 향해 입을 열었다.
"트랩, 기습, 공중 요격,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해둬야 합니다. 전면전이 시작되면 어떤 클래스든 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진영을 유지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네!"
"물론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인원으로나 화력으로나 애초부터 불리한 싸움이니, 저흰 그저 본부 병력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나는 이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반 병력은 모두 방어선 후방으로 이동했고, 가디언 클래스를 비롯한 근접 포지션이 최전방에 진영을 잡았다.
마법사 클래스를 비롯한 모든 원거리 포지션은 방어선 중앙에서 요격 거리를 계산 중이었다. 그 외 모든 인원은 장비 체크 및 보급 운반을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역할을 준비했고, 이내 머지않아.
"...왔군."
저 멀리서 엄청난 숫자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저기요! 정신 차려 봐요!"
정신을 잃었음에도 신경을 긁는 목소리.
클로이는 자신을 부르는 그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고, 이내 흐릿한 모습이 보였다.
점점 초점이 돌아오자 자신을 깨운 사람의 얼굴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괜찮은 거예요?!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빨리도 오네."
다름 아닌 이아영 지원본부장이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그쪽 팔이…!"
"호들갑 좀 떨지 마요. 안 죽었으면 됐지, 뭐."
클로이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그리곤 자신의 오른팔을 확인했다.
팔뚝까지 잘려 나간 채 붕대로 감겨 있었다.
출혈도 통증도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사제 클래스가 응급처치한 듯했다.
'쯧....'
하지만 클로이는 퍽 담담한 반응이었다.
그저 한 차례 혀를 차곤, 곧바로 자신이 있는 곳을 살폈다.
분명 방어선 한복판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어째선지 눈을 뜬 곳은 허름한 천막 안이었다.
"여긴…?"
이아영 본부장을 향해 묻자 그녀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최종 방어선 후방의 임시 의무대에요. 근처 도시까지 옮길 여유가 없어서 급한 대로 여기로 데려왔어요. 방금 사제 클래스가 응급처치는 해줬고요."
"최종 방어선? 철수 명령 떨어진 거 아닌가? 모나한 장관이 총지휘를 맡겠다고 한 거 같은데."
클로이는 정신을 잃는 순간 들었던 음성을 떠올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방금 해임됐어요. 모나한 장관."
"...?"
"그리고 전시작전통제권이 WDSO에 인계됐고요."
굉장히 뜬금없는 소식에 그녀가 가만히 눈을 끔뻑였다.
그렇게 오래 정신을 잃은 것 같진 않은데…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싶었다.
하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안 봐도 김준우가 움직이지 않았겠는가.
그라면 상황을 역전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겠지.
"그래서, 상황은 어떻게 됐어요?"
클로이는 지난 일 대신, 지금의 상황을 물었다.
"일단 최초 방어선은 모두 뚫렸어요. 국제협회는 52번 국도를 따라 계속해서 진격 중이고요."
"김준우는…?"
"현지 작전팀이랑 같이 현장에 가 있어요. 3시간만 있으면 본부 병력이 도착할 테니, 그때까지 직접 막겠다고...."
"안 돼요."
그때, 클로이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웨슬리가 직접 참전했어요. 아무리 김준우라고 해도 그 인원으로는 3시간은커녕 30분도 못 버텨요."
"네, 네…?"
"일단 내가 직접 가서...."
클로이는 그 말과 함께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아영 본부장이 곧바로 제지했다.
"우, 움직이면 안 돼요! 지금 그쪽 상태가 어떤지 몰라요?! 응급처치는 했지만 당장 병원으로 가서 제대로 치료해야 한다고요!"
"...."
이아영 본부장이 한껏 격양된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클로이가 퍽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예요?"
"...아니, 그쪽이 여기서 죽으면 이클립스는 또 내가 맡아야 하잖아요."
"나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
이아영 본부장이 대답을 아끼길 잠시.
"싫어해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싫어하는데… 그렇다고 죽는 걸 바라는 건 아니에요."
"...."
클로이는 그 대답에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다.
꽤나 의외의 대답이 싫지만은 않았지만.
"어차피 당신 비전투 인원이잖아요. 지금 가서 뭘 할 수 있겠어요. 괜히 꼴값 떨지 말고 얌전히 치료나 받아요."
"...."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래요?"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클로이가 대뜸 물었다.
"정말 만에 하나 본부 병력이 올 때까지 진격을 막아냈다고 쳐도 그다음에는요? 철저하게 준비한 국제협회 병력을 상대로 WDSO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
"물론 김준우를 포함해서 꽤 뛰어난 인력들이라는 건 인정해요. 그런데… 철저하게 대비해도 어려울 판국에 인원도, 보급도, 준비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들을 막는 건 불가능할 텐데요?"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아영 본부장 또한 같은 생각인 듯, 잠시 대답을 아꼈다.
"…방법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클로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반능석을 쓰면 가능성은 있어요."
"…반능석?"
그와 동시에 이아영 본부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혹시 몰라서 파견 중인 본부 인력 편으로 반능석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했어요. 당신들이 했던 것처럼 반능석을 사용한다면 부족한 인원으로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가공해 본 적은 있고?"
"이전에 한 번요. 소량이긴 했지만."
"그거랑은 비교도 안 될 텐데? 가공량이 늘어날수록 뱅크 아이템이 폭주할 확률도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고, 자칫 뱅크 아이템 자체가 파괴될 수도 있어요. 설령 가공에 성공한다고 해도 실용화에 성공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아영 본부장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실용화는 내 전문이거든요. 대신… 뱅크 아이템 가공은 그쪽이 맡아줘요."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도와달라는 거예요? 진심으로?"
"뭐야. 난 그래도 그쪽이 뱅크 아이템에 대해서라면 세계 최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어이가 없네."
"그래서 도와줄 거예요, 말 거예요."
"...."
이내 클로이가 피식 실소를 뱉길 한 차례.
"방해나 되지 말아요."
그 말과 함께 입꼬리를 올렸다.
***
52번 도로.
그 길을 따라 진격 중인 국제협회의 모든 병력.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사실 걸어서 베를린까지 진격하는 건 꽤나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차원석을 가공한다면 차원 통로를 만들 수도 있으니, 바로 베를린으로 향할 수도 있었다.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하더라도 보다 편한 이동 수단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럼에도 굳이 걸어서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것을 선택한 건 일종의 퍼포먼스 적인 이유가 컸다.
그래.
이 전쟁은 서로의 이득을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이 아닌, 전 세계를 향한 경고다.
그렇기에 이편이 가장 효과적이다.
우리가 걸음을 옮기는 모든 곳이 파괴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
아직까진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
그럼에도 웨슬리 사무총장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항상 만약을 대비하긴 했지만, 솔직히 1년 전만 하더라도 전면전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또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할 날이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고작 청소부 출신 한 명 때문에.
'김준우....'
웨슬리 사무총장이 작게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은 둘 중 한 명이 죽어야 끝이 난다는 것을.
그러니 좋든 싫든 김준우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면, 그것이 오늘이어야 할 것이다.
「사무총장님.」
한창 사색에 빠져있던 그때, 선두에 있던 케이트 수행비서에게서 무전이 울렸다.
「정면에 방어선이 있습니다.」
"…또?"
「보아하니 이게 최종 방어선인 것 같은데....」
그녀가 말을 흐리길 잠시,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김준우가 복귀한 모양입니다.」
"...잠시 대기."
웨슬리 사무총장은 모든 병력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혼자서 선두로 향했다.
이윽고 진영을 빠져나와 방어선과 마주한 순간.
"오랜만입니다. 사무총장님."
저 멀리서 김준우가 자신을 알아보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대꾸하지 않고, 방어선의 병력을 먼저 살폈다.
그리곤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그 인원으로 우리를 막을 생각인가요?"
"그럴 리가요. 제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국제협회를 상대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눈빛은 여기서 끝을 볼 생각인 것 같은데?"
웨슬리 사무총장이 말하자, 김준우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때 못 끝낸 이야기, 오늘 여기서 다 해볼 생각인데...."
[고유 스킬 : 마왕]
김준우의 전신에서 검은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같이 어울려주시겠습니까?"
"...."
웨슬리 사무총장은 대답을 아끼던 끝에.
"뭐… 주제도 모르는 애송이 교육은 또 내 전문이죠."
[고유 스킬 : 천지창조]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288
288
[고유 스킬 : 마왕]
스스스―.
검은 기류가 내 전신을 감싸는 순간.
"공격하세요."
[고유 스킬 : 팬데믹 오브 네크로맨스]
[고유 스킬 : 오픈 리로드]
[고유 스킬 : 화랑청천(化浪晴天)]
쾅―!!
콰과과광―!!
국제협회의 진격을 막기 위한 총공이 시작됐다.
"원거리 포지션은 끊이지 않게 계속 스킬을 퍼부으십쇼. 조금이라도 늦춰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만약 돌진해오는 적이 있다면 근접 포지션이 진영을 갖춰 방어선을 지키십시오. 진영만 유지한다면 몇 명 정도로는 절대 뚫지 못할 겁니다."
현지 작전팀은 내 지시에 맞춰 진영을 가다듬었다.
물론 국제협회가 우세한 병력을 내세워 일제히 돌격한다면 우리만으로는 막지 못하겠지만....
'저놈들은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니까....'
이번 공습은 어디까지나 전 세계에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일 뿐.
치열한 전투 끝에 가까스로 승리하는 건 의미가 없다.
보다 압도적으로, 아무런 피해도 없이 베를린을 점령해야 전 세계에 공포심을 심어준다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러니 아무리 저쪽 진영이 우세해도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무작정 돌격하진 못한다.
"계속 쏟아부어!"
"마력 부족하면 바로 뒤로 빠지고, 다음 인원 투입해!"
"아직 포션 여분 충분합니다!"
내가 지시하지 않아도 현지 작전팀은 이제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였다.
소모전은 우리에게 유리하다.
아직 버티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이게 언제까지 먹힐지는 모른다.
물론 나 또한 전력을 낸다면 몇 명 정도는 쓸어버릴 수 있겠지만....
'웨슬리....'
그러기엔 저놈이 거슬린다.
난 아직 그의 전력을 모른다.
알고 있는 건, 그가 나와 같은 힘을 사용한다는 것뿐.
그에 비해 웨슬리는 나에 대한 데이터가 이미 차고 넘칠 것이다.
당연히 대비책도 세워뒀겠지.
아직 본부 병력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섣불리 전력을 드러냈다간 도리어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러니 일단은 계속 방어하면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티, 팀장님!"
"놈들이 계속해서 진격해옵니다!"
작전팀의 보고에 다시금 상황을 확인하니, 속도는 느리지만 조금씩 방어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쯧....'
역시 화력이 부족한 건가.
어쩔 수 없지. 조금 손을 보태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고유 스킬 : 마왕 - 독재자]
[시전자의 상념에 따라 일회용 스킬을 제작합니다.]
[스킬 제작 중.]
[스킬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나이트메어 웨이브]
쿠구구구―!
거대한 검은 파도가 적들을 집어삼킬 듯 밀려가던 그 순간.
[고유 스킬 : 천지창조]
[11차원의 고유 공간을 창조합니다]
지이이잉―.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기류가 내 스킬을 뒤덮었고, 그대로 거대한 파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오길 한 차례.
진영 한가운데에서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웨슬리 사무총장이 눈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역시나 내 공격이 통하질 않는다.
이능력의 원형.
이능력을 만들어내는 힘 그 자체.
똑같은 힘을 가진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그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투에 힘을 보태지 않는 건가....'
누가 먼저 공격하든 어차피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이건 확실히 귀찮다.
내가 전력을 낼 수 없다면 저들을 막는 건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다른 스킬로라도 최대한 막아보는 수밖에.
나는 그렇게 깊게 숨을 들이켰다.
[S랭크 스킬의 안전장치 해제 시퀀스를 시작합니다.]
[발동 조건 확인 중]
[발동 조건이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스킬의 안전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하십시오.]
[습득 스킬 : 전능]
허공에 순백의 창이 떠올랐다.
이내 그 창을 상대 진영을 향해 힘껏 던졌다.
[고유 스킬 : 퍼스트 블러드]
[3번 폼 - 컷팅]
그그그그극―.
그 순간, 누군가가 곧바로 앞으로 튀어나오며 검으로 창을 막았다.
캉―!
귀를 찢는 쇳소리와 함께 창의 궤도를 빗겨냈다.
"...뭐야 저건 또?!"
그와 동시에 내 시선이 그 사람에게 향했다.
가느다란 레이피어로 자신의 몸집보다 몇 배가 넘는 창을 막아내는 움직임.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표정하게 레이피어를 가다듬는 여자.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국제협회 본부를 찾아갔을 때, 웨슬리 사무총장을 보좌하던 수행비서였으니까.
'이능력자였어…?'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내 공격을 이렇게 쉽게 막을 수 있는 이능력자?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까 말까 한 수준이다.
다시 말해서 저 여자....
이곳에 굴러다니는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김민주... 아니, 어쩌면 더 강하려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늙은 아저씨 비서로 있기엔 아까운 실력이군요."
"...."
내가 먼저 입을 열었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레이피어를 들어 올리며 나를 가만히 노려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가 천천히 방어선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는 직감했다.
저 여자가 이곳 최고 전력이라는 것을.
"…작전을 변경해야겠습니다."
내가 작전팀을 향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예, 예…?"
"변수가 생겼습니다. 진영을 유지한 채 저 여자를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 같군요."
"그, 그러면 어떻게...."
"누군가는 방어선 밖에서 막아야겠군요."
나는 그 말과 함께 방어선을 둘러봤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에휴.'
그래 뭐, 둘러보나 마나....
나밖에 더 있겠는가.
"제가 가겠습니다."
"네, 네…?"
"티, 팀장님?!"
"어딜 가시겠다는 겁니까! 위험합니다!"
모두의 우려를 가볍게 무시하며 방어선을 벗어났다.
[고유 스킬 : 마왕 - 각성]
[장비가 생성되었습니다]
[마검 : 타르타토스]
[마갑 : 악몽의 베네]
스스스―.
완전 무장을 하며 천천히 국제협회 진영을 향해 다가갔다.
그렇게 뒤로 늘어진 수만 명의 병력과 그 선두에 서 있는 여자와 마주했다.
"...."
"...."
무미건조하고 무표정한 얼굴.
사람인가 의심이 들 정도의 기계 같은 모습.
마치 회귀 전 내 보좌관이었던 이아영 실장의 모습과 같았다.
"보아하니 고생 좀 하셨나 봅니다."
"...."
대답을 아끼길 잠시.
"…혼자 막으려는 건가요?"
드디어 그녀가 첫마디를 뗐다.
"그쪽을 막을 만한 적당한 인재가 없어서… 뭐, 어쩌겠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원치 않아도 나서야 할 때가 있으니까. 책임자는."
"...."
그러자 그녀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고,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길 잠시.
'잠깐, 설마…!'
잊고 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혹시 당신...."
그리곤 여자를 향해 물었다.
"케이트 미셸입니까?"
"...."
이번만큼은 대답하지 않아도 속내를 알 수 있었다.
딱 봐도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얼굴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내 쪽이 더 충격이었다.
케이트 미셸.
과거 몇 번이나 매스컴을 탔던 인물이자, 전 세계 최연소 헌터.
무려 17살의 나이로 작전팀에 소속되어 활동한 천재 중의 천재.
그리고....
검사 클래스 세계 랭킹 1위.
고유 클래스, 검신.
자타공인 세계 최강의 검사.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두 번 없을 천재라고 시끌벅적했었는데.... 그런 분이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마치 과거 따윈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자신의 병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진영을 유지한 채로는 결국 소모전입니다. 더 시간을 끌리면 불리해질 테니, 이번에 무조건 뚫겠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겠다는 듯, 곧바로 그녀가 지시를 내렸다.
"선두는 제가 맡습니다. 잘 따라오세요."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길 잠시.
"돌격하세요."
구구구구―!
결국, 모든 병력이 일제히 방어선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포기한 것이다.
피해를 감수하지 않고 이곳을 뚫는 것을.
압도적인 승리 이전에, 나를 포함한 모두를 이곳에서 처리하기로 선택한 듯했다.
"...일 났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쩔 수 없이 공격 태세를 갖춘 그 순간.
[고유 스킬 : 퍼스트 블러드]
스슥―.
케이트가 순간 눈앞에서 사라졌다.
[14번 폼 - 아울]
푸욱―!
채 방어할 틈도 없이 그녀의 레이피어가 내 배를 관통했다.
***
"...."
케이트는 눈앞의 적을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김준우.
국제협회에서도 인정한 전무후무한 이레귤러이자 비공식 SS랭크로 분류한 남자.
숱한 전투 보고와 정보를 통해 꽤나 대단한 실력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보고서에 쓰인 정보와는 비교도 안 되네.'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의 첫 공격을 허락하면서 몸에 관통상을 입었는데도.
[습득 스킬 : 과몰입]
[전투 중 시전자가 사용하는 모든 스킬의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어]
쾅―!!!
"크읏…!"
가히 엄청난 전투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첫 공격은 운이 좋은 거였나....'
돌격 명령을 내린 이상, 쉽사리 돌파할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 그 한 번의 공격 이후로는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는 듯, 거리조차 내주지 않으면서 다른 병력을 상대하고 있었다.
'후우....'
케이트는 잠시 숨을 고르며 김준우의 움직임을 살폈다.
[습득 스킬 : 극초식 - 어검술]
슥―.
스스스슥―!
"끄아아악!"
"으윽…!"
전장에는 몇 초마다 그에게 당한 이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하고 있어! 한 명이잖아! 한꺼번에 달려들어!!"
"가디언! 포박해!!"
"스, 스킬이 먹히질 않습니다!!"
"시발, 대체 뭐야…!"
동시에 혼비백산한 얼굴들과 당혹감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당백?
그런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김준우 혼자서 거의 수백, 수천의 병력을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B랭크 이하의 잔챙이들은 그의 몸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있다.
웨슬리 사무총장이 계속해서 그의 고유 스킬을 막아내는데도 도저히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유 스킬 : 형상 - 우리엘]
[고유 스킬 : 타천사]
[고유 스킬 : 레플리카]
쿵―!
콰과과광―!!
대체 어떤 클래스인지 분간도 하지 못할 만큼 수십 개의 스킬을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 그 스킬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고유 스킬 수준.
하지만 그것보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는 무기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에마 대표가 당한 이유가 있었네....'
케이트가 검을 꾸욱 움켜쥐었다.
자신 또한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지만, 지금 눈앞의 광경을 보자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럼 본인이 천재라면… 저 남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사람이 맞긴 한 건가?
「뭐 하고 있습니까. 왜 가만히 서 있는 거죠?」
그리고 그때, 후방에서 상황을 관찰하고 있던 웨슬리 사무총장이 무전을 보냈다.
"김준우의 공격이 너무 매섭습니다. 위력도 그렇고, 전투 경험 자체가 다른 이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입니다. 무시하고 돌격하기엔...."
「누가 무시하라고 했나요? 김준우를 먼저 처리하면 되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저 혼자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하아....」
웨슬리 사무총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길 한 차례.
「제가 도와드리죠. 몇 초 정도는 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놓치지 않고 파고들 수 있겠죠?」
계속해서 병력 사이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그가, 참전을 선언했다.
그리고 케이트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
[고유 스킬 : 천지창조]
[11차원의 고유 공간을 창조합니다.]
지이잉―.
김준우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경계를 기준으로 마치 다른 시간이 흐르는 듯, 김준우의 움직임이 갑자기 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고유 스킬 : 마왕]
그의 전신에서 검은 기류가 흘러나오자 경계가 흐려졌다.
5초도 채 되지 않은 시간, 이내 그가 움직임을 되찾기 시작했다.
물론.
[고유 스킬 : 퍼스트 블러드]
케이트에게 5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택틱컬 콤보 - 4단]
[1번 - 7번 - 9번 - 4번]
스슥―.
일말의 군더더기도 없는 완벽하고 정확한 동작.
마치 물 흐르듯 유연한 움직임으로 김준우와의 거리를 좁혔다.
[18번 폼 - 고스트 컷]
슈욱―!
이내 그녀의 날카로운 검이 정확하게 김준우의 목을 향해 떨어지는 순간.
캉―!
"...!"
갑자기 그녀의 손에서 레이피어가 튕겨 나갔다.
289
289
캉―!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동작.
일말의 빈틈도 찾을 수 없는 케이트의 공격이 김준우의 목으로 향하는 순간, 그녀의 검이 튕겨 나갔다.
최연소 헌터.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린 그녀의 검을 막은 자는 다름 아닌 WDSO 서울 본부의 작전 본부장이자 대한민국의 최고 전력.
"혼자서 또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김민주였다.
"…버티다 죽는 줄 알았다. 좀 더 빨리 왔으면 좀 좋아."
케이트와 마찬가지로 김준우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는지, 크게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이래 봬도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빨리 온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다 도착했어요."
김민주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어이구, 많기도 하네."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그곳에 한유빈 기획 본부장을 비롯한 WDSO가 자랑하는 최정예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국제협회와 WDSO의 모든 전력.
모든 인원이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했고, 두 진영 사이에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기어이 이렇게 됐네요."
김준우와 같이 가장 선두에 나와 있던 김민주가 주변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상황은 뭐… 말 안 해도 알겠지?"
"네."
"정신 똑바로 차려. 이번엔 진짜 죽을 수도 있으니까."
김준우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그러자 김민주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선생님이 한 명한테 계속 시간을 끌리면 전력적으로 손해예요. 여긴 제가 맡을 테니, 선생님은 유빈 씨랑 다른 병력을 막아주세요."
"괜찮겠냐? 저 여자 저래 봬도...."
"괜찮아요."
김민주가 그의 말을 끊으며 즉답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계속해서 케이트를 향해 있었다.
"그래 뭐… 잘해봐."
김준우 또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듯, 더는 말하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가 멀어지는 순간.
[고유 스킬 : 천수관음]
스슥―.
김민주는 곧바로 자세를 고쳐 잡고는 케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케이트는 허리를 완전히 꺾어 손쉽게 공격을 회피했고, 그와 동시에.
[고유 스킬 : 퍼스트 블러드]
슈욱―.
튕겨 나갔던 레이피어를 곧바로 주워들고는 곧바로 반격을 시도했다.
"...!"
김민주는 그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당황하기도 잠시.
곧장 검을 치켜들어 가까스로 그 공격을 막아냈다.
캉―!
이내 두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
"...."
마치 회피부터 무기를 줍고 다시 반격하는 것까지가 처음부터 한 동작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
그 모든 동작이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은 시간에 끊김 없이 이루어졌다.
'역시....'
김민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그극―.
서로의 호흡마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검을 맞댄 채 대치를 이어가던 그때.
"처음 뵙겠습니다. 케이트 미셸."
김민주가 먼저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절 아는 사람이 많네요."
"모를 리가 있나요."
김민주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한때 가장 존경하던 사람이었는데."
"...."
이내 김민주의 눈빛이 번뜩였고, 케이트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당신, 이름이…?"
"WDSO 대한민국 본부 소속, 작전 본부장 김민주라고 합니다."
"아 혹시 검사 클래스 랭킹 2위의…?"
"맞습니다."
"…그렇군요."
케이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날 혼자 상대해도 괜찮겠어요? 당신이 왜 1위를 하지 못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이내 푸른빛이 그녀의 전신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검사 클래스 랭킹 1위가 될 기회인데."
기세가 사뭇 달라졌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에도 케이트는 그저 피식 미소를 흘렸다.
"주제넘은 소리를 하네?"
[고유 스킬 : 퍼스트 블러드 - 각성]
케이트의 레이피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기어이 두 천재의 검이 맞붙는 순간이었다.
***
최종 방어선 최후방.
이아영 본부장과 현지 지원팀의 협력으로 설치된 임시 지원시설.
"반능석 도착했습니다!"
본부 편대에 부탁했던 물건이 도착하자마자, 그곳은 순식간에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이능파 추출기 전원 켜!"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건, 반능석의 가공을 맡은 클로이였다.
오른팔을 잃었음에도 최소한의 응급처치만을 하곤 곧바로 업무에 뛰어들었지만, 과연 해당 분야 최고 전문가답게 통증마저 잊은 듯 보였다.
"전압은 1600v 정확하게 맞추고, 50v씩 천천히 상승시켜."
"네, 네!"
"조금이라도 잘못 조절하면 폭발할 수도 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가공된 반능석은 탄두 당 정확하게 0.05mg씩이에요! 기존 화약량으로는 자칫 사격과 동시에 이능파가 반응해서 터질 수 있으니까 9% 줄이고요!"
"네, 넵!"
이아영 본부장이 가공된 반능석을 담을 탄환을 만드는 중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서둘러 준비를 시작한 그때.
"그래서, 가공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이아영 본부장이 클로이를 향해 물었다.
"이게 뭐 쉬운 줄 알아요? 세 시간은 잡아야 해요."
"그럼 한 시간 안에 끝내요!"
"...."
클로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아영을 바라봤다.
그러길 잠시.
"그러는 그쪽은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요?"
"정확한 양을 수천 발 안에 담아야 하는데, 빨리 끝나겠어요?! 이쪽은 4시간은 걸려요."
"그럼 그쪽은 한 시간 반 안에 끝내면 되겠네."
"...."
바쁜 와중에도 한마디씩 주고받는 이들.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기도 잠시.
"…야, 야! 너 뭐 하는 거야! 내가 50v씩 올리랬지? 여기 있는 사람 다 죽이려는 거야?!"
"어, 어?! 저기요! 그거 그렇게 손으로 만지면 오차 발생해요! 로봇 팔 사용해서 작업하세요!"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각자의 역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일일이 조정해볼 시간 없어. 1차 가공하고 바로 탄환 가공 쪽으로 보내서 테스트해봐."
동시에 두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시설.
두 사람은 각자의 구역에만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딱 하나.
아직 앙금은 있을지 몰라도, 서로의 실력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숨소리조차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시간이 조금씩 흘렀고.
이윽고 가공이 진행된 지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각.
"1차 가공 완료. 테스트 준비해줘요."
클로이가 먼저 입을 뗐다.
"45구경 탄환 준비됐어요. 테스트실은 따로 없으니까 밖에 나가서 쏘고 오세요."
"갔다 올 테니까, 불발 나면 곧바로 재가공할 수 있게 추출기 전압 좀 유지해줘요."
"알았어요."
이윽고 클로이는 가공된 반능석을 담은 탄환과 총기를 들고는 시설을 나섰다.
그리고 머지않아 울려 퍼지는 총성.
다시 시설로 복귀한 클로이는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나쁘진 않은데 화력이 약하네. 더 세게는 못 만들어요?"
"5.52mm 탄환으로 다시 준비해 볼게요. 전압은 유지 해뒀으니까 계속 가공해줘요."
"그럼 이대로 2차 가공해 볼 테니까, 다시 한번 테스트해 보고 괜찮으면 바로 대량 제조 들어가요."
"네!"
모든 대화가 막힘이 없었다.
그렇게 그 뒤로도 둘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았고, 그 과정에서 단 한 번의 의견 충돌도 없었다.
직원들은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는 두 사람의 움직임에 할 말을 잃은 채, 그저 시키는 대로만 움직였다.
이내 다시금 시작된 가공.
그리고 그 속도는.
"말도 안 돼...."
"정말 한 시간 만에 가공부터 생산까지 끝내려는 거야?"
가히 보고도 믿지 못할 수준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두 전문가가 완벽히 합을 맞추고 있었으니.
전 세계 어디서도 보지 못할 광경.
으르렁거리며 다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서로에게 온전히 필요한 작업을 믿고 맡겼다.
테스트와 재가공을 계속해서 반복하던 그때.
"성공적입니다!"
"효과도 즉각적이고, 화력도 좋아요!"
기어이 한 시간 만에 반능석 가공에 성공했다.
"좋아! 바로 2차 가공 시작할 테니까 탄환 준비 해둬요."
"그럼 이대로 제조 들어갈게요!"
두 천재가 호흡을 맞추자,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
베를린으로 향하는 도로에 설치된 최종 방어선.
그곳에서 마주한 국제협회와 WDSO의 모든 전력.
쾅―!!
콰콰과광―!!
퍼버벙―!!
쿠구구구―!!
기어이 두 진영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1팀, 2팀은 최대한 밀고 나가세요! 나머지 팀은 진영 유지해주시고, 각 팀 팀장들은 최대한 상대 전력을 파악해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각 팀을 지휘해야 했다.
작전 본부장인 김민주가 여유가 없었기에 나 말고는 병력을 지휘할 사람이 없던 까닭이었다.
'저 녀석....'
나는 김민주와 케이트의 전투를 슬쩍 바라봤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내 눈으로도 쉽사리 쫓을 수가 없는 정도였다.
천재라 불리던 케이트는 둘째 쳐도… 김민주 또한 이제는 내가 더 이상 조언을 해줄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뭐....'
더 이상 그녀를 걱정할 이유는 없다.
나는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김준우다!"
"저놈만 죽이면 돼!!"
그와 동시에 곧장 나를 향해 달려드는 수십 명의 병력.
[습득 스킬 : 디스트로이....]
서둘러 스킬을 시전 하려던 그때.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뻐억―!
뻐버버버벅―!
갑자기 튀어나온 한유빈이 나보다 앞서 그들을 처리했다.
"왜 멍 때리고 있어요?"
"…그쪽이 갑자기 끼어든 거잖습니까."
"불만이면 먼저 처리하던가."
한유빈이 나를 바라보며 피식 실소를 뱉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타앗―!
또다시 땅을 박차고 나가, 전장을 이리저리 누비기 시작했다.
여전히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고 보는 스타일.
이전 같았으면 위험하다고 말렸겠지만....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스테이터스 해제]
[모든 스테이터스가 근력으로 전환됩니다.]
[근력 : 18,955 (9,107↑)]
[체력 : 1 (2,289↓)]
[민첩 : 1 (5,799↓)]
[마력 : 1 (1,019↓)]
슥, 스스슥―.
뻐억―!!
무작정 달려드는 것 같으면서도, 전후좌우를 모두 살피며 정확히 공격을 찔러 넣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모한 공격이지만, 한유빈 단 한 명 때문에 진영이 흐트러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이젠 전투에 여유가 생긴 건지 다른 팀원들까지 보호해주고 있다.
'...신기하네.'
그도 그럴 게, 나는 그녀에게 전투에 대해선 단 하나도 가르쳐 준 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더 정확하게 싸울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 모든 것을 몇 번이나 생사를 오가며 그녀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헌터 자격을 박탈당한 지 2년.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그녀는 현역 시절보다 훨씬 압도적인 실력을 갖게 된 것이다.
'굳이 참견할 필요도 없겠네....'
그녀를 슬쩍 흘기길 한 차례.
나는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고유 스킬 : 6서클 - 엘리멘탈 헤븐]
[고유 스킬 : 마스터 오브 부두]
슈우우웅―.
쾅―!!!
어디선가 날아든 공격이 정확히 나를 직격했다.
"크윽…!"
서둘러 방어 스킬을 펼쳤지만, 모든 충격을 흡수하지 못해서 뒤로 날아가며 땅바닥을 몇 차례나 뒹굴었다.
"뭐, 뭐야!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와 동시에 한유빈이 곧바로 달려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살피니, 두 남자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국제협회 본부 소속 작전 팀장들이에요."
그때, 한유빈이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는 사람들입니까?"
"본 적은 있죠. 실제로 붙어본 적은 없지만, 본부 팀장이면 세계 랭커 수준은 될 거예요."
"쯧...."
이젠 팀장급까지 나서서 방해하고 있군.
'낭패네....'
아까 허용한 케이트의 공격 때문에 움직임이 둔하다.
이 몸으로 팀장급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기엔 시간이 많이 끌릴 것이다.
이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딱 두 가지뿐이다.
내가 죽거나, 혹은 웨슬리 사무총장이 죽거나.
다시 말해… 내가 웨슬리를 죽이기 전까지는 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본부 병력은 내가 인정하는 녀석들이다.
김민주, 한유빈을 포함해 수많은 실력자가 있지만, 그들은 웨슬리 사무총장을 죽일 수가 없다.
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오직 나뿐.
내가 이런 곳에서 시간을 끌릴수록 전쟁의 승패는 기울어지는 것이다.
쯧,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빨리 끝낸다면....
"두 사람은 제가 맡을게요."
그때, 한유빈이 담담한 목소리로 그 말을 전했다.
"...괜찮겠습니까?"
"그쪽이 잔챙이나 잡고 있을 순 없잖아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쪽은 가서 대가리나 맡아요."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각성]
"금방 끝내고 따라갈 테니까."
이윽고 그녀의 전신에서 검붉은 기운이 터져 나오는 순간.
마치 악마와 같은 형상으로 두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290
290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사(六觀音中四)]
[제4격 -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고유 스킬 : 퍼스트 블러드 - 각성]
[도플갱어]
[3번 - 11번 - 8번 - 13번]
[3번 - 11번 - 8번 - 13번]
캉―!
카가가강―!
김민주와 케이트 사이에는 서로의 검이 맞닿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가공할 속도의 참격과 가공할 속도의 방어.
'분신술…?'
김민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케이트의 움직임을 살폈다.
도플갱어.
마치 동양의 분신술처럼 자신의 공격을 모방하는 그림자를 소환하는 스킬.
검사는 다른 클래스와 다르게 개인의 육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아무리 뛰어난 스킬을 가졌다고 한들, 결국 검을 휘두르는 건 본인이니까.
세계 랭커 중에 검사 클래스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아무리 S랭크 스킬과 S랭크의 무기를 가져도, 결국 본인의 신체와 검술이 따라주지 못하면 단 한 번의 실수로도 목숨을 잃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니.
가장 기본적인 클래스인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클래스.
상식 밖의 공격을 퍼붓는 것이 아닌, 한 번의 움직임으로 한 번의 동작밖에 할 수 없기에 무조건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번의 움직임으로 여러 개의 동작을 수행할 수 있는 검사가 있다면?
그건 곧 약점이 없다는 의미이다.
[고유 스킬 : 퍼스트 블러드 - 각성]
[도플갱어]
[1번 - 4번 - 8번 - 19번 - 1번]
스스슥―!
스스스스슥―!
"큿…!"
김민주는 이번에도 동시에 날아드는 두 번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마치 두 명과 싸우는 기분.
아니… 두 명이어도 각자의 동작만 살핀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데, 이건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눈으로 보고 반응하면 늦는다.
감.
오로지 감으로만 상대해야 한다.
'후우....'
김민주는 숨소리조차 함부로 흘리지 않은 채 케이트의 검에만 집중했다.
각성 스킬을 제외하고도, 그녀의 스킬 자체도 매우 위협적이다.
한 번의 호흡으로 수차례의 움직임을 물 흐르듯이 이어간다.
품에서 품으로, 모든 동작이 일말의 빈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몇 번 검을 맞대본 결과 그녀가 가지고 있는 품은 모두 20가지.
그걸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공격이 된다.
다시 말해, 그녀가 가용할 수 있는 공격은... 수만 가지가 넘는 것이다.
'젠장....'
김민주는 이를 으득 씹었다.
기존대로 싸워선 전혀 승산이 없다.
자신의 스킬 또한 6가지의 자세가 있지만, 이는 모두 일격에 특화되어 있다.
저 괴물 같은 검사를 상대하기 위해선 자신 또한 스킬을 이어가야 한다.
"흐읍!"
전신에서 힘을 끌어와 작게 기합을 내지르길 한 차례.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일(六觀音中一)]
[제1격 - 성관음(聖觀音)]
스윽―.
[육관음중육(六觀音中六)]
[제6격 - 여의륜관음]
슈욱―!
억지로 두 자세를 연계했지만.
캉, 카강―!
아니나 다를까.
"어쭙잖은 흉내를 내네요."
케이트에게 너무나 쉽게 막혀버렸다.
"...따라가려면 어쩔 수 없죠."
"그쪽 스킬은 한 호흡에 연계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에요."
"...."
"괜히 무리해서 따라 하지 말고, 본인 스타일대로 싸우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케이트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맞는 말이다.
일격에 특화된 스킬.
이를 억지로 연계하려고 하면 위력도 떨어질뿐더러 빈틈만 생겨난다.
애초에 훈련도 없이 랭킹 1위의 흉내를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김민주 또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번씩 공격해서는 절대 못 이겨....'
지금껏 해본 적 없어도 상관없다.
여기서 할 수 있게 만들면 그만이니.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중외(六觀音中外)]
[접신 - 관세음(觀世音)]
이내 그녀의 전신에서 푸른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케이트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 순간.
[육관음(六觀音)]
[제1격 - 성관음(聖觀音)]
[제4격 -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제3격 - 마두관음]
슥, 스윽―.
스스스슥―!
그그그그극―!!
"...!"
조금 전보다 훨씬 다듬어진 공격.
케이트는 서둘러 공격을 막아냈지만, 예상보다 훨씬 날카로웠는지 잠시 주춤하는 듯 보였다.
"2위 이름값은 하네요."
케이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김민주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로지.
'할 수 있다....'
그 생각뿐이었으니까.
수십 개의 품을 자유자재로 연계하는 그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공격 하나하나의 위력은 그녀보다 한 수 앞선다.
이대로만 케이트의 공격을 따라갈 수 있다면 이길 수 있다.
김민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고유 스킬 : 퍼스트 블러드]
[도플갱어 x4]
"...?!"
"제가 두 번씩만 공격할 수 있는 줄 알았나요?"
그것마저도 오래가진 못했지만.
[택틱컬 콤보]
[5번 - 3번 - 15번 - 1번 - 9번 - 6번]
[x4]
스스스슥―.
스스슥―!
스윽, 스스슥―!
마치 폭풍우와 같이 미친 듯이 쏟아지는 공격.
김민주는 황급히 검을 들어 방어 태세를 취했지만, 수십 번의 참격을 모두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큭, 크읏…!"
어깨, 팔, 다리. 뺨.
그녀의 전신에서 붉은 피가 스며 나왔다.
애초에 그녀의 공격을 모두 막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지금도 가까스로 치명상만 피한 정도였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김민주는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몸을 추슬렀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다음엔 목이 날아간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그런 김민주의 모습을 보던 케이트가 슬쩍 입을 열었다.
"기세는 좋은데, 1위는 아직 한참 부족하네."
"...역시 사람들이 천재라고 하는 데엔 이유가 있네요."
김민주는 애써 담담한 척 대답했다.
케이트가 대놓고 실소를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놈의 천재, 천재… 그깟 칼 좀 쓰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다들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들, 아무리 노력하고 매일 같이 훈련을 한다고 한들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게 있어요."
그때, 케이트가 의미심장한 말을 뱉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웨슬리 사무총장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케이트의 시선이 다시금 김민주에게 닿았다.
"이것 봐요. 수행비서가 된 이후로 검을 몇 년 동안 안 들었는데도, 나한테 손가락 하나 못 대고 있잖아."
"...."
"노력이니 뭐니,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뭐… 차라리 검사가 아니라 다른 클래스였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케이트가 퍽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검사는 결국 상식을 벗어나지 못해요. 그리고 상식을 벗어나는 수많은 이능력자들 사이에서 그건 매우 큰 약점이죠."
그 말을 하는 케이트의 눈빛은 허무에 차 있었고, 무척이나 공허해 보였다.
"마법을 쏘고 괴물을 소환하는 세상에서 이깟 쇳덩이 하나 휘두르는 사람이 뭘 할 수 있겠어요."
"...."
김민주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경청하길 잠시.
이내 피식, 미소를 흘렸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네요."
그녀가 대답했다.
"전 그냥… 평범한 검사라서."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六觀音)]
이내 그녀가 다시금 자세를 고쳐 잡은 순간.
[제3격 - 마두관음]
[제6격 - 여의륜관음]
[제5격 - 준세관음]
[제1격 - 성관음(聖觀音)]
"...!"
이전보다 하나의 자세가 더 추가된 4연격이 케이트를 향해 매섭게 날아들었다.
케이트는 곧바로 검을 치켜들었다.
[도플갱어 x4]
[18번 - 17번 - 9번 - 8번 - 1번]
[x4]
캉―!
카가가강―!!
다시금 검과 검 사이에 맹렬한 불꽃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도플갱어 x8]
[20번 - 3번 - 7번 - 3번 - 13번]
[x8]
케이트가 먼저 한 템포를 올렸다.
[육관음(六觀音)]
[제6격 - 여의륜관음]
[제4격 -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제1격 - 성관음(聖觀音)]
[제2격 - 불공견삭관음(不空羂索觀音)]
[제6격 - 여의륜관음]
카가가가강―!!
김민주도 그에 맞춰 속도를 올렸다.
"...큭!"
케이트는 점점 가열되는 김민주의 공격에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드러났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20년 가까이 연습해온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따라잡는 게 정말 가능한 건가?
"크윽...!"
[고유 스킬 : 퍼스트 블러드 - 각성]
[도플갱어 x16]
[1번 - 1번 - 1번 - 1번 - 1번 - 1번]
[x16]
케이트는 그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결국 자신의 힘을 최대치까지 끌어냈다.
그와 동시에.
[고유 스킬 : 천수관음 - 각성]
[육관음(六觀音) - 9연격]
스슥―.
김민주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
다른 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누가 이기고 있는 건지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검과 검이 맞닿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고, 두 사람의 참격이 끝없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이미 인간의 움직임을 초월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더 빠르게, 더 강력하게.
두 사람 모두 한계치까지 몸을 움직이던 그때.
"…잡았다."
"...!"
0.1초.
아니, 0.01초의 차이.
기어이 김민주가 케이트의 움직임을 따라잡았다.
한 번의 움직임으로 16번의 공격을 쏟아내는 랭킹 1위의 검사를... 오로지 하나의 자세, 하나의 신체로.
그렇게 김민주의 움직임이 조금 더 앞선 순간, 그녀는 확실하게 케이트의 빈틈을 포착했다.
[육관음중이(六觀音中二)]
[제2격 - 불공견삭관음(不空羂索觀音)]
사삭―!
그녀의 검이 순간 번쩍이며 허공을 갈랐다.
어마어마한 검풍이 대지를 휩쓸고 지나간 후.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쿨럭…!"
케이트가 검을 떨어트리며 피를 쏟아냈다.
"뭐야… 천재 아니라면서…?"
어깨에서부터 복부까지 그어진 붉은 선.
"아니에요. 당신에 비하면."
"겸손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케이트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아쉽네… 내가 현역일 때 그쪽을 만났으면 검을 놓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
"축하해. 랭킹 1위."
힘겹게 그 말을 뱉어내고는 이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
김민주는 잠시 침묵한 채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게 한때 최고의 검사에게, 자신의 우상에게, 마지막 예를 갖췄다.
그리고 그 직후.
"후우...."
긴장이 풀린 것인지, 그녀 또한 다리에 힘이 풀린 채 털썩 주저앉았다.
솔직히, 어떻게 싸운 건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살았다는 것에 진심으로 안도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고유 클래스 각성 :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劒)]
두 번째 고유 클래스 각성.
전 세계 5명밖에 없는 SS랭크의 승급 조건을, 방금 전투 중에 달성했다는 것을.
***
[고유 스킬 : 디스트로이어]
쾅―!!
"시발, 많기도 하네…!"
한유빈에게 뒤를 맡기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병력을 처리하면서 조금씩 진영 안으로 파고들던 그때였다.
사아아아아―!
"...!"
어디선가 머리카락이 쭈뼛거릴 정도의 소름 끼치는 검풍이 느껴졌다.
곧바로 고개를 돌려 김민주가 전투를 벌이던 곳을 바라보자.
'…끝난 건가?'
방금까지 치열한 싸움이 이어지던 그곳이 쥐죽은 듯 조용해져 있었다.
두 검사의 승패가 정해진 것이다.
"야, 김민주! 괜찮냐? 어떻게 됐어!"
곧바로 무전기를 들어 김민주에게 연락을 넣었다.
"대답해! 어떻게 됐냐니까?! 다쳤으면 말이라도…!"
「…전 괜찮아요.」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긴 거냐?"
「네. 저 이제 검사 클래스 1위에요.」
"참 나… 애도 아니고,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일부러 볼멘소리를 냈지만, 내심 크게 안도했다.
「선생님은 어떻게 됐어요? 유빈 씨는요?」
"그쪽은 팀장들 처리하고 있어. 난 웨슬리 찾으러 돌격 중이고."
「이길 수 있죠?」
그녀가 퍽 무거운 목소리로 묻자 나는 피식 실소를 뱉었다.
"너도 이겼는데, 나라고 못 할까."
「...그러네요. 괜한 걱정이었어요.」
"그래. 알았으면 뒤 좀 부탁한다. 아직 싸울 수 있지?"
「싸울 수 있긴 한데… 이제부터는 초과근무에요.」
"...."
말하는 거 보니까 멀쩡하네.
"수당 따따블로 챙겨줄 테니까, 잘 좀...."
그 말을 뱉는 순간, 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말끝을 흐렸다.
「선생님…? 무슨 일 있어요?」
"이따 연락할게."
무전기를 집어넣고는 정면을 바라봤다.
그리곤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찾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참 꼭꼭도 숨어 있으셨군요."
"젊은 놈이 찾아와야지, 제가 갈 순 없잖아요?"
"무서워서 숨어 계신 게 아니라?"
"하하하! 재밌는 말을 하는군요."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남자.
나는 그를 지그시 노려봤다.
국제협회 사무총장.
이 모든 일의 원흉.
웨슬리 다비드.
비로소 그와 마주한 것이다.
291
291
[고유 스킬 : 6서클 - 엘리멘탈 헤븐]
[고유 스킬 : 마스터 오브 부두]
쾅―!!
그그극―!!
"칫...!"
두 개의 스킬이 한유빈을 향해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공격을 회피했다.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
그것도 어쭙잖은 잔챙이가 아니라 국제협회 본부 소속의 팀장들.
헌터 자격을 정지당한 지 2년이나 된 그녀가 홀로 상대하기엔 꽤나 벅찰 수밖에 없었다.
이전 같았으면 본인이 다치든 말든 한 놈만 노렸겠지만....
'또 병원 신세 지면 이번엔 진짜 잘릴 수도 있단 말이지....'
그런 생각에 이전처럼 과격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거리를 둔 채, 두 사람의 움직임을 살피며 공격만 피하는 중이었다.
무턱대고 돌진했다간 까딱하는 순간에 결판이 나버릴 테니까.
이젠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다.
병원 신세 지는 것도 지겹고.
'근데 어째 현역일 때보다 더 많이 다치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잠시.
"...!"
어느 순간, 두 사람의 공격이 멈췄다.
스킬 시전 타이밍이 맞지 않아 공백이 생긴 듯했다.
한유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앗―!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고유 스킬 : 6서클 - 엘리멘탈 헤븐]
[프리즘 미러]
텅―!
한 명이 가까스로 타이밍을 잡은 탓에 회심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칫…!"
다시 거리를 둔 채 대치가 이어졌다.
공격을 피하는 게 어렵진 않지만, 계속 이대로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각성]
[자살행위]
[시전자의 모든 공격이 체내 혈액을 소모합니다.]
피를 증발시켜 힘을 대폭 증가시키는 고유 각성 스킬.
이성을 유지한 채 싸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분이 한계였다.
어떻게든 빨리 끝내야 하지만....
[고유 스킬 : 6서클 - 엘리멘탈 헤븐]
[각성 - 원소 합성]
[고유 스킬 : 마스터 오브 부두]
[각성 - 네크로필리아]
콰과광―!!
그그그극―!!
가공할 위력의 마법.
그리고 죽여도 죽지 않는 시체 무리.
끝을 내긴커녕 아까부터 다가가기조차 쉽지 않다.
버서커 클래스.
스킬 특성상 다가가지 못하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클래스이자 모든 클래스 중에 가장 짧은 사거리를 자랑하는 포지션.
물론 어떤 클래스보다 폭발적인 돌파력과 한 방의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거리를 좁혔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처럼 다가가는 것조차 못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많은 버서커 클래스가 검이나 마법을 익혀 다른 방향으로 노선을 변경하곤 한다.
하지만 한유빈은 버서커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클래스.
무기라곤 쥐어 본 적도, 다룰 줄도 모른다.
오로지 주먹으로만 여태껏 수많은 수라장에서 살아남은 광전사.
그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자 긍지였다.
그리고 그 자존심 덕분에....
[고유 스킬 : 6서클 - 엘리멘탈 헤븐]
[각성 - 원소 합성]
[플레임 아이스]
쾅―!!!
"윽…!"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거대한 얼음 불덩이가 스치면서 큰 충격을 받은 듯 한유빈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아, 하아...."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거친 숨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피를 너무 많이 소모한 탓에 시야도, 정신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본인이 할 줄 아는 거라곤 달라붙어서 두들겨 패는 것뿐인데... 그것이 막힌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말 이길 수 있는 건가?
아니.
아무리 머리가 나쁜 본인이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절대 불가능하다.
거리만 유지한다면 최강의 위력을 낼 수 있는 마법사.
그리고 상대의 발을 묶고, 다가오지 못하게 막는 네크로맨서.
하필 시너지가 좋은 두 클래스가 완벽한 호흡을 맞추고 있다.
김민주처럼 검사라면 몰라도, 버서커인 본인이 저 둘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폼은 다 잡아놓고, 쪽팔리게....'
그런 생각에 순간 실소가 새어 나왔다.
'만약 그 사람이라면....'
김준우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라면 무기도, 원거리 스킬도 없이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그라면… 압도적으로 불리한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
그렇게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그때.
"듣자 하니 국제협회 소속이었다면서?"
국제협회 본부 소속 작전 1팀장.
조나단이 입을 열었다.
"친구가 작전 중에 사망했다고 하극상을 벌였다지?"
그의 친구이자 같은 소속의 작전 2팀장, 윌리엄도 한마디를 보탰다.
"덕분에 국제협회에서 영구 퇴출... 거기다 헌터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말이야."
"억울하겠군."
조나단과 윌리엄이 합을 맞추기라도 한 듯 동시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만 참았으면 지금처럼 개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작전 중에 사망하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
한유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참아?
뭘?
누군가의 잇속 때문에 니콜은 홀로 던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충분히 살릴 방법과 시간이 있었음에도.
니콜은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갔는데....
그때 참았으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살면서 들은 말 중에...."
이내 한유빈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제일 개 X 같은 말이네."
억울한 죽음을 보고도 참아야 한다면, 그게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면....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다.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 각성]
[자살행위]
구구구구―!
한유빈의 전신에서 다시 한번 붉은 기운이 터져 나왔다.
기운은 붉다 못해 검은색을 띠었다.
[삼면육비(三面六譬)]
이내 그 기운이 모여들며 세 개의 머리와 6개의 팔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발악인가?"
"1분은 버티겠어?"
두 남자가 대놓고 조롱을 했지만, 한유빈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눈앞의 적이 아닌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한 상태였다.
'후우....'
그리고 이내.
쿵―!
발로 땅을 있는 힘껏 박찼다.
동시에 아스팔트와 함께 흙먼지가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연막?"
"시야를 가리고 접근하겠다 이건가."
두 남자는 금세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시야를 가려도 의미가 없다.
어차피 정면으로 돌진해올 게 뻔하니까.
[고유 스킬 : 6서클 - 엘리멘탈 헤븐]
[고유 스킬 : 마스터 오브 부두]
[스킬 융합]
[새크리파이스]
구구구구―!
윌리엄이 소환한 시체와 조나단의 마력 구체가 생성되었다.
시체들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이 요동치는 그 구체를 들고 흙먼지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그 순간, 흙먼지 속에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푸욱―!
"커억…!"
정확히 윌리엄의 어깨를 관통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조나단의 시선이 곧바로 향했지만, 윌리엄은 밀려오는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제야 조나단은 윌리엄에게 날아든 물체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 가드레일…?"
도로를 감싸고 있던 가드레일이었다.
조나단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 다시금 흙먼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타앗―!
아니나 다를까, 한 명이 쓰러진 틈을 타서 한유빈이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한 명만 쓰러트리면 이길 수 있다 이건가?"
조나단은 그 안일한 판단에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이래 봬도 국제협회 본부 소속의 정예팀장이다.
지부 팀장 출신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서걱―.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 조나단 팀장의 오른팔이 잘려 나갔다.
"뭐, 뭐야…?
고통보다 당혹감이 먼저 밀려온 듯 그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
그는 황망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이내 그의 눈앞에 완전히 드러난 한유빈의 모습은....
"...."
누군가가 떨어트린 검.
부러진 스태프.
아스팔트 조각과 돌.
그리고 쇠파이프와 철조망.
여섯 개의 손과 세 개의 입으로 온갖 무기를 든 붉은 귀신이었다.
[고유 스킬 : 6서클 - 엘리멘탈 헤븐]
[프리즘 미러]
조나단은 다급하게 방어 스킬을 시전했다.
끼이익―!!
하지만 한유빈이 한 발짝 빨랐다.
방어막이 채 그들을 감싸기 직전, 그녀가 찔러 넣은 쇠파이프가 균열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때부턴 지옥도가 펼쳐졌다.
콰직―!
쿵―!
푸욱―!
베고 찌르고 짓이기는 소리.
과격하다 못해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만큼 잔인하고 끔찍한 광경.
윌리엄과 조나단은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광적인 움직임으로 금세 따라붙는다.
그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한 번 공격을 허용한 순간, 그녀에게서 도망칠 방법은 없다는 것을.
"끄아아악!"
"힉, 히익…!"
결국, 그들은 도망치는 것조차 포기한 채,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비명을 질러댔다.
자존심? 긍지?
그런 것 따윈 머릿속에 없었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한유빈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존심도 긍지도, 전투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쓰러트리면 그만이다.
설령 자신의 피와 살을 깎아 먹는 한이 있더라도.
[고유 클래스 : 야차(夜叉)]
그그그극―.
이내 두 남자가 진정한 악마를 목도한 순간.
한유빈은 그들의 두 눈에 똑똑히 각인시켰다.
"자, 잠깐...."
"살려...."
진짜 공포가 무엇인지를.
***
베를린 최종 방어선.
국제협회와 WDSO 진영 간의 전투가 한창인 그곳.
하지만 나와 웨슬리 사무총장 주변만 그 시간이 멈춘 듯했다.
"부하들은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그를 향해 입을 열자, 웨슬리 사무총장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우두머리가 전선에 나서는 거 봤나요?"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나 보군요."
내가 즉답했다.
"우두머리는 누구보다 앞에 있는 게 당연한 겁니다."
"...."
심기를 건드린 듯, 그가 상당히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알고 있지 않나요. 당신은 절 죽일 수 없다는 거."
"그건 사무총장님도 마찬가지죠."
내 대답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고유 스킬 : 천지창조]
[11차원의 고유 공간을 창조합니다.]
지이이잉―.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뜬 순간 모든 풍경이 바뀌었다.
완전한 암흑.
땅도 하늘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무(無)의 공간.
그 이질적인 공간에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던 그때, 웨슬리 사무총장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당신은 공격 스킬을 만들어내지만, 저는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
"공격은 막을 수 있어도 공간을 막을 순 없죠."
웨슬리 사무총장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
내 몸이 마치 퍼즐처럼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손가락 마디마디, 팔다리와 모든 관절이 조각조각으로 나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숨이 턱 막혔고,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을 뻔한 순간.
딱―.
"커헉…!"
다시금 웨슬리 사무총장이 손가락을 튕기자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던 일인 양.
"당신은 절 죽이지 못하지만, 전 당신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요."
"허억, 허억...."
거친 숨을 쉬며 그를 올려다보자, 웨슬리 사무총장이 대놓고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이런… 그 천하의 김준우가 고작 공격 한 번에 무릎을 꿇다니. 나름 경쟁자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과대평가한 걸까요."
"흐, 흐흐흐...."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이 상황이 재밌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진짜 X 됐는데…?'
상식을 벗어난 힘.
누구보다 압도적인 능력.
나조차 주춤하게 만드는 기세.
전의를 상실할 것 같은 그의 전력에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292
292
"유, 유빈 씨?!"
온갖 스킬과 비명 그리고 유혈이 낭자한 전장 한복판.
김민주는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지원시설로 후퇴하고 있던 중, 피투성이가 되어 대자로 뻗어 있는 한유빈을 발견했다.
"괘,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왜 여기 누워 있어요!"
"일이 좀...."
"아니, 다쳤으면 무전이라도 쳐야죠!"
"그 정도로 멀쩡하지는… 쿨럭!"
한유빈의 입에서 핏덩이가 튀어 올랐다.
반쯤 죽어가는 몰골을 보아하니 상태가 꽤 심각한 듯했다.
김민주는 곧바로 무전기를 들었다.
"B-1 구역에 부상자 발생! 응급 처치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조금만 참아요. 어디를 다친 거예요?"
"발...."
"발이요? 잠깐만요. 일단 제가 지혈이라도…!"
"빼고 다요...."
쿨럭.
한 번 더 각혈.
아무래도 포기해야 하는 건가 싶던 찰나.
"지원팀입니다! 부상자는요?!"
몇 명의 의무병과 본부 소속의 사제 클래스가 다가왔다.
"아니, 또 본부장님이십니까?!"
"대한민국 O형 혈액은 본부장님이 다 빨아 드시겠습니다, 아주."
걱정보다 꾸중을 먼저 날렸다.
이내 시작된 긴급 수혈.
그제야 기력을 조금 되찾았는지 한유빈은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둘러본다.
"…팀장님은 어디 있어요?"
"웨슬리 사무총장과 만났어요."
"안 보이는데?"
김민주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두 개의 검은 기류가 서로 엉겨 붙어 만들어진 작은 구체가 있었다.
"저곳으로 둘 다 빨려 들어갔어요. 아마 다른 공간에서 싸우고 있을 거예요."
"…이길 수 있는 건가?"
"그거야 모르죠. 다만...."
김민주가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믿는 수밖에."
"...."
"뭐… 우리는 우리 할 일에나 집중해야죠."
한유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김민주에게 물었다.
"그래서, 전세는 어때요?"
"크게 불리하진 않은데… 인원 차이도 심하고 화력도 조금씩 밀리고 있어요."
"대책은요?"
"그나마 우리 쪽이 유리한 건 임시 지원시설에서 계속해서 보급받을 수 있다는 건데... 그것도 한계가 있어요."
"그럼 빨리 끝내면 된다는 거죠?"
"...그렇죠."
김민주는 어딘가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럼 뭐… 어쩔 수 없네…."
한유빈이 몸을 일으켰다.
"안 돼요! 유빈 씨는 가만히 있어요!"
"우리 없이 끝낼 수 있어요?"
"그, 그건...."
말끝을 흐리자, 한유빈이 거 보라는 듯 주삿바늘을 뽑으며 일어났다.
그러자 김민주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있다고 해도 끝낼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그래도 해봐야죠."
마찬가지로 한유빈 또한 퍽 진지한 표정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지는 거보다야 나으니까."
"...죽을 수도 있어요."
"뭐야. 그게 무서워요?"
"...."
김민주가 피식 입꼬리를 올린다.
"설마요."
그녀들의 눈이 번뜩이길 한 차례.
"저기, 폼 잡고 있는 와중에 미안한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히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거든요?"
고개를 돌리자, 이아영 지원본부장이 서 있었다.
"아영 씨가 여기까진 왜…?"
"뭐야, 시설에서 나오지 말라니까?"
"비전투 인원이라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볼멘소리를 하길 한 차례.
"선물 가져왔어요."
그녀의 뒤로 지원팀 전원이 수십 개의 케이스를 들고 나타났다.
"반능석 가공 끝났거든요."
"...네?"
"버, 벌써…?"
김민주와 한유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이제 겨우 두 시간 됐는데요…?"
"말도 안 돼.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뭐, 다 내 덕분이라고 하고 싶은데...."
이아영 본부장이 뒤를 흘기며 말했다.
"저 혼자였으면 당연히 못 했을 거예요. 클로이 씨가 거의 다 했죠."
"...."
공을 넘기자 예상치 못했다는 듯 클로이가 퍽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이내 시선을 피한다.
"수고했어요."
"아니, 뭐… 별거 아니었는데...."
진심으로 그 말을 전하자, 데면데면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아영 본부장이 본론을 꺼냈다.
"아무튼, 급하게 만든 거라 그렇게 많진 않아요. 총 만 발밖에 안 되지만, 일단은 일반 병력에 지급해서 계속해서 지원 사격 요청해요. 당연히 총알 자체가 대미지를 줄 순 없겠지만, 한 발이라도 맞으면 스킬 사용이 차단될 거예요."
"하지만 자칫하다간 아군이 휘말릴 수도 있잖아요."
"그땐 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나서야죠."
그리곤 씨익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