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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8화. 엇갈림(7) >

까끌까끌한 콘크리트 바닥이 빨갛게 물들었다.

잘게 찢겨나간 살점들이 흩뿌려졌고, 여기저기에 박힌 악마들의 무기에서 싸늘한 예기가 흘러나온다.

띠링!

[<스킬:뇌룡의 포효>를 비활성화합니다.]

'후우, 전리품을 챙겨 볼까.'

바닥에 엎어진 여섯 구의 시체를 뒤로하고, 나는 자줏빛을 뿜어대는 마성석 쪽으로 향했다.

―와, 지는 줄 알았네. 심장 떨려서 죽을 뻔.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 성계 대항전 때보다 약해진 것 같은데?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군. 아무래도 가면을 안 써서 그런 거 아닐까.

―도대체 가면의 등급이 얼마나 높아야 그 정도 위용을 보일 수 있는 거지?

―자, 자. 잡담은 이따 하고 얼른 들어가자고.

뒤에서 상위 플레이어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2미터 정도의 거대한 크리스털.

루에타 요새보단 크고, 록탄 성과는 비슷한 크기의 마성석.

띠링!

[<목걸이:영롱한 달빛>이 달의 힘을 빌려와, 체력을 5% 회복합니다.]

[남은 체력 : 44%]

'흐읍.'

까아앙! 까앙! 까아앙!

짧게 숨을 들이쉰 나는 전력을 다해 창을 내리쳤다.

'크기에 비례한다면 두 개가 나올 가능성이 커.'

고결한 수정.

신성력, 마기, 마력 등 다양한 기운들이 집약되어야 만들어지는 희귀 광물.

그런 이유로 마기와 신성력이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삼지옥에서만 얻을 수 있는 온갖 기운의 집약체.

'마력 상쇄랑 뇌신雷身 둘 다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겠어.'

까아앙! 까앙!

그렇게 되면 스킬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는 어느 정도 완성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6개의 스킬이 모두 플래티넘 등급이 되니까.

더 이상 고결한 수정을 얻기 위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이후로는 스텟과 아이템만 신경 쓰면 될 것이다.

'권속 계약을 맺은 팀원들 전력도 훨씬 높아지겠지.'

까아앙! 까앙! 까아아아아앙!

"노바 님, 에드워드 님이 입구를 지켜주세요."

"알겠소."

"옙!"

까아앙! 깡! 까앙!

"바로 뒤에서, 창을 들고 있는 저와 사마천 님이 서겠습니다. 마법사님들은 조금 떨어져서 자리 잡아 주세요."

"알겠어요."

지하 공동으로 분주하게 들어오는 상위 플레이어들.

쿠 훌린이 곧바로 전열을 가다듬으며 전투를 준비시켰다.

그 외의 플레이어들은 나를 곁눈질할 뿐.

띠링!

[<목걸이:영롱한 달빛>이 달의 힘을 빌려와, 체력을 5% 회복합니다.]

[남은 체력 : 51%]

그 모든 게 마력장에 생생히 느껴졌지만, 나는 마성석을 두들기는 데 집중했다.

'조금만 더.'

그렇게 50번 정도를 내려쳤을 때였다.

까아앙! 쨍그랑!

지하 공동에 가득하던 자줏빛이 사라진다.

깨진 크리스털 파편 너머로, 고결한 수정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하나, 둘······.

개수를 세던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셋······?'

마성석 안에선 고결한 수정 세 개가 영롱한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대박이군.'

필요했던 개수는 두 개지만, 나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결한 수정을 챙겼다.

다다익선.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예비용으로 하나쯤 챙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스킬 업그레이드부터 해야겠어.'

하나를 인벤토리에 넣은 나는, 나머지 두 개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띠링!

[<소모품:고결한 수정>을 섭취했습니다.]

[<소모품:고결한 수정>을 섭취했습니다.]

[강화를 희망하는 두 개의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1. <스킬:천뢰십보>(선택 불가)]

[2. <스킬:뇌신>]

[3. <스킬:뇌룡의 포효>(선택 불가)]

[4. <스킬:마력 상쇄>]

[5. <스킬:그림자 표식>(선택 불가)]

[6. <스킬:열반>(선택 불가)]

그러자 눈앞에 나타난 상태창.

'고민할 것도 없지.'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꽈아아아아앙! 꽈과과과과광! 꽈아아아아아아앙!

작고 묵직한 폭음이 들려온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하 공동이 흔들리며, 천장에서 작은 모래 알갱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시작했군.'

마성석이 깨지자마자, 지상에서 고위 플레이어들과 악마들 간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

"······!"

그걸 깨달은 상위 플레이어들의 낯빛이 변해갔다.

바깥에 있는 엄청난 숫자의 악마들이 언젠가 이곳으로 들어올 테니까.

핵심 시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하 공동엔 400명의 상위 플레이어와.

'슬슬 준비해 볼까.'

그리고 딱 한 명의 고위 플레이어뿐.

띠링!

[<스킬:마력 상쇄>가 <스킬:마력 갑옷>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스킬:뇌신>이 <스킬:뇌정>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이걸로 플래티넘 등급 스킬 여섯 개가 완성되었다.

그중 하나는 조건에 따라, 다이아몬드 등급까지 강제 각성시킬 수 있는 스킬.

'이 정도면 최상급 악마가 오더라도 상대할 수 있어.'

창을 고쳐잡은 나는 뚜벅뚜벅 지하 공동 입구로 향했다.

내가 다가가자 입구 근처에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이 홍해가 갈라지듯 길을 만들어 주었다.

"제가 입구를 막죠."

입구로 향하는 내 발걸음엔 그 어느 때보다 힘이 넘쳐났다.

띠링!

[<목걸이:영롱한 달빛>이 달의 힘을 빌려와, 체력을 5% 회복합니다.]

[남은 체력 : 56%]

* * *

까만 하늘 가득 은하수가 펼쳐져 있다.

웅장하게 지어진 각종 건물, 그 옆에 반듯하게 나 있는 길가엔 각양각색의 꽃들이 활짝 피어있다.

신들의 도시라 불리는 엘리시온의 광장.

벤치에 앉아있던 오딘은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긴 특이 사항이 없군.'

대로를 우아하게 거니는 신들.

거기다 분주하게 하늘을 가르는 천사들까지.

이전의 분위기와 비교해서 달라진 게 없었다.

'발할라로 가봐야겠군.'

엘리시온이 신들의 거주지라면, 발할라는 천상계의 행정 도시.

게임 메이커, 주신과 대신의 집무실 등 다양한 업무 시설이 밀집해 있다.

벤치에서 일어나, 망토를 한번 탁! 털어버린 오딘이 비프로스트를 열기 위해 신성력을 개방했다.

그때였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액!

엘리시온의 창공을 빠르게 가르는 한 존재.

여덟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허공에서 날개를 접으며, 오딘 앞에 뚝 떨어져 내렸다.

"오딘이시여."

그리고 원피스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잡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지, 셀파엘?"

오딘을 수행하는 2급 지천사, 셀파엘이었다.

"주신회가 긴급 소집되었습니다."

"이유는?"

"무스펠하임과 니플헤임에 다수의 고위 악마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고위 악마라."

"제가 모시겠습니다."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셀파엘.

오딘이 허락한다는 뜻에서 턱짓하니, 그녀가 비프로스트를 열기 위해 신성력을 개방했다.

하지만 셀파엘은 이내 신성력 개방을 멈춰야만 했다.

쐐애애애애애액!

"오딘 님!"

또 다른 천사가 오딘을 부르며 급하게 날아왔기 때문.

마찬가지로 여덟 쌍의 날개를 가진 지천사, 레미엘의 모습에 셀파엘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레미엘? 네가 왜?'

오딘 님께는 자신이 알리겠다고 미리 레미엘에게 얘기해 뒀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녀가 왔다는 건.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만들어 내며 도착한 레미엘이 오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얼마나 급박한 일이 있는지, 그녀는 간소하게 예를 차릴 뿐이었다.

"열두 존자 중 한 분을 뵈어요, 긴급 상황입니다!"

"무슨 일이냐, 레미엘."

"타락 플레이어가 발생했습니다. 숫자는 열둘!"

"······."

"그로 인해 환웅 님께서, 대신님들과 주신님들이 함께 참석하시는 천상계 비상 위원회를 개최하셨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레미엘의 말에, 셀파엘이 눈을 번쩍 떴다.

천상계 비상 위원회.

10년 전에 끝난 대전쟁 때 만들어졌으며, 대전쟁이 끝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기구.

당장 치천사 중 한 명이었던 라파엘이 타락했을 때도 열리지 않았던 비상 위원회를 이번에 소집한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오딘의 반응에 셀파엘과 레미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시작됐군."

"······?"

"혼잣말이었다. 셀파엘?"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오딘의 부름에 셀파엘이 여덟 쌍의 날개를 펄럭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오딘의 말은 그녀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궁니르를 가져오너라."

"예?"

셀파엘은 깜짝 놀랐다.

궁니르.

대전쟁 이후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던.

그리고 주신 오딘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무기이자, 막아서는 모든 존재를 꿰뚫었던 황금의 창.

그래서 불경함을 알지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궁니르는 왜······?"

비상 위원회에 가야 하는데 궁니르를 가져가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시작됐으니까.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하지만 오딘은 알 수 없는 말만 내놓을 뿐이었다.

안대에 둘러싸여,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눈이 묘하게 빛났다.

"······?"

* * *

꽈아아아앙! 꽈과과과광! 꽈아아아앙!

천장의 떨림을 통해 끊임없이 들려오는 굉음.

'슬슬 준비해야겠군.'

지하 공동 입구에 기댄 채 쉬고 있던 나는, 등을 떼며 몸을 풀었다.

굉음의 횟수도 줄어들고, 강도 또한 약해져 가고 있다.

한마디로 격전지가 알츠카인 성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뜻.

미션도 무스펠하임의 입구를 봉쇄하라는 것이었으니, 전투가 오래 지속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올 때가 됐는데.'

―파바밧. 파바바밧.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좁은 내리막 복도 너머로 미약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느리고, 둔탁하다.

즉, 스텟이 낮다는 것.

아무래도 하급 악마들이 내리막길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고위 플레이어들을 사냥하는데, 날개가 없는 하급 악마들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알츠카인 성을 되찾으려는 거겠지.'

띠링!

[<목걸이:영롱한 달빛>이 달의 힘을 빌려와, 체력을 5% 회복합니다.]

[남은 체력 : 100%]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한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입구를 막아섰다.

잠깐 사이, 발소리가 제법 커져가고 있었다.

"적들이 오는 모양인데."

"후우. 스읍, 후우."

그러자 표정이 경직되는 일부 상위 플레이어들.

퇴로가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심리적 압박이 제법 심한 것 같았다.

'지휘관의 역할이라······.'

잠시 곰곰이 생각한 나는 입을 열었다.

"모두 침착하시죠. 아니, 그냥 편하게 쉬셔도 됩니다."

평소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내가 할 일만 했겠지.

하지만 저들을 지휘하던 고주몽을 보면서 깨달았다.

'이제부턴 달라져야 해.'

고위 리그부턴 지휘관의 역할을 맡는 경우도 생긴다는 것.

매 순간 최선을 다해도 초월 리그에 올라갈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에서, 이전의 태도를 고집하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당분간 저 말고 싸우게 될 분은 없을 테니까요. 이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체력을 아껴두세요."

"아······."

상위 플레이어들을 안심시킨 나는 오르막길을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점점 커지고, 저 멀리서 보이는 누군가의 실루엣.

"크크큭. 광대들이 여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군."

"어떻게 요리해 줄까? 응? 일단 사지를 다 잘라버리고 대화 좀 해보자고!"

"단숨에 뚫어버려!"

찰그락- 찰그락-

갑주의 이음쇠 소리를 내며 쿵, 쿵 뛰어온 악마들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돌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성인 남성의 몸통만 한 도끼를 휘두르는 악마.

붉은색 마기가 휘감긴 검으로 찔러 들어오는 악마.

갈고리 모양의 사슬낫을 던지는 악마까지.

'같잖긴.'

서걱!

다가오는 모든 악마가, 내 창에 양단되어 쓰러졌다.

"뭐, 뭐야!"

"모두 조심해! 고위 플레이어다!"

"방패! 뒤에 방패 들고 있는 녀석 있으면 앞으로 전달해!"

서걱! 서걱! 서걱!

지하 공동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의 폭은 3미터.

완만한 곡선 형태를 띤 좁은 내리막길 또한 비슷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건 막거나 혹은 공격하거나.

'이런 상황에서 승부의 경계를 가르는 건 딱 하나뿐이지.'

누가 방어를 더 잘하며, 누구의 화력이 더 강한가.

결국 누구의 스텟이 더 높은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띠링!

[<목걸이:영롱한 달빛>이 달의 힘을 빌려와, 체력을 5% 회복합니다.]

[남은 체력 : 100%]

뇌룡의 포효를 켜지 않았음에도, 야광석에 반사된 창날이 번뜩일 때마다 악마들이 우수수 쓰러진다.

본래 회색빛을 띠고 있던 좁은 복도가 어느새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괴, 괴물 같은 새끼······!"

"어어! 밀지 마! 밀지 말라고!"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가는 시체들.

그로 인해 더 좁아져 가는 입구.

악마들은 내 공격을 막으랴, 쌓인 시체를 치우랴 정신이 없을 것이다.

'별거 아닌데?'

나를 상대하는 것만 전념해도 가망이 없는데, 앞에 놓인 시체까지 치워야 한다?

이렇게 되면 볼 것도 없었다.

서걱! 서걱! 서걱!

추수를 당하는 한낱 벼처럼 목이 따이는 수밖에.

'굳이 지원조가 안 와도 충분하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기계적으로 창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반드시 찢어 죽여버리고 말겠다아아아!

"······!"

"······!"

멀리서 들려오는 거대한 포효.

순간 하급 악마들과 상위 플레이어들이 아찔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포효엔 듣는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을 만큼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벌써 2차전을 벌일 시간인가.'

중급, 아니 최소 상급 이상의 악마들이 지하 공동으로 내려오는 모양.

[남은 체력 : 100%]

상태창을 힐끗 살핀 나는 피식 웃었다.

깊이가 최소 500미터는 되는 지하 공동.

나는 묘지기처럼 그 입구를 지키고 선 채, 놈들을 기다렸다.

'여기가 누구 무덤이 되는지 보자고.'

폭뢰 스킬을 사용할 생각에 부푼 마음을 억누르면서.

< 208화. 엇갈림(7) > 끝

< 209화. 엇갈림(8) >

채애애앵! 콰직!

"헛, 미친!"

어깨너머로 두 쌍의 날개가 얼핏 보이는 상급 악마.

서로의 무기가 맞부딪히자, 녀석이 경악성을 토했다.

손아귀로 전해지는 데미지에 당황한 것 같았다.

'이제야 성능 테스트를 좀 해보겠군.'

[<스킬:마력 갑옷>]

[패시브]

[자신의 마력 수치에 비례하여 마력이 깃든 공격을 방어합니다.]

[마력 10 스텟당 5%의 마력 방어]

[최대 50%까지 방어할 수 있습니다.]

[방어한 마력의 10%는 상대방에게 '반사'합니다.]

이전과 다르게, 나한테도 이젠 반사 데미지가 생긴 상황.

'고생 좀 해보라고.'

주창범과의 대련에서 나를 쩔쩔매게 만든 능력은, 단연 반사 데미지였다.

왜냐하면, 반사 데미지는 상대가 강할수록 더 높은 효용을 가진 스킬이었기 때문.

채애앵! 콰직!

"끄으으윽! 이런 개같은 상황이!"

그 말은 즉, 하급 악마나 중급 악마보다, 상급 악마에게 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는 뜻이었다.

'이거 성능이 미쳤네.'

고통에 몸을 배배 꼬는 상급 악마.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지금껏 써오던 방법은, 상대의 공격을 막으며 빈틈을 노리는 것.

하지만 이제는 빈틈을 노리기 위해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

그냥 장기전으로만 가면 승기를 가져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비에 치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안정감이 더욱 상승했다.

'플래티넘 등급 뇌전도 제법 찌릿찌릿할 거야.'

폭 3미터의 비좁은 공간.

피하는 게 불가능하기에, 막거나 공격하거나 둘 중 하나뿐.

채앵! 챙! 콰지직!

"끄앗!"

공방이 지속될수록 상급 악마가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녀석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이제는 내 공격을 받아내는 것도 힘겨워하고 있달까.

'잘 가라.'

그걸로 싸움은 끝이었다.

서걱!

내 창이 훑고 지나가자, 녀석의 목에 가느다란 실선이 생겨난다.

"······!"

양손으로 목을 감싸 쥐는 상급 악마.

푸슈우우우우욱!

이내 가느다란 실선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오고, 목 위에 달려 있던 녀석의 머리통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털썩―

"······."

그리고 복도에 흐르는 싸늘한 정적.

'약점을 또 하나 지웠군.'

상급 악마와의 전투 결과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나와 엇비슷하거나, 나보다 더 강한 존재와의 전투에서도 상성에서 먹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쓸모없는 것들. 모두 비켜!"

내리막길 끝에서, 거칠게 밀치며 내려오는 한 악마.

방금 전에 죽은 상급 악마보다 몸집이 크고, 뿔도 더 기다란 녀석이었다.

등 뒤에는 세 쌍의 날개가 고이 접혀 있었다.

'최상급 악마.'

"앗, 나크리스 님이 오셨······!"

꽈아앙! 뿌지직―

최상급 악마의 등장에, 한 악마의 표정이 환해진다.

그러자 나크리스가 그 악마의 머리통을 으깨버렸다.

녀석의 주먹을 타고 뇌수와 피가 뚝, 뚝 바닥을 적셨다.

"겁쟁이 같은 새끼들. 고작 광대 한 마리를 어쩌지 못해서야······!"

"죄, 죄송합니다."

"흥! 썩 꺼져."

분기탱천한 나크리스의 모습에, 구겨지듯 좁은 복도에 낑겨 있던 다른 악마들이 벌벌 떨었다.

"모두 잘 봐둬라. 내가 저놈을 어떻게 찢어 죽이는지."

내게 이죽거리며 다가오는 나크리스.

나는 녀석을 무시한 채 귀를 쫑긋 세웠다.

'어지간한 놈들은 다 들어온 것 같은데.'

폭음도 들리지 않고, 미세한 진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알츠카인 성의 지상에선 더 이상 전투가 벌어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이렇게 버티고 있을 필요가 없지.'

생각을 마친 나는.

띠링!

[<스킬:뇌룡의 포효>를 활성화합니다.]

[<스킬:뇌룡의 포효>가 <스킬:뇌신 강림>으로 각성합니다.]

[근력과 민첩 스텟이 +40% 상승합니다.]

[체력 소모율이 10배 상승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뇌신 강림을 발동시켰다.

여기 있는 녀석들만 모조리 죽이면 굳이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자 오랜만에 보는 알림창이 나를 반겨주었다.

띠링

[<창:벽력섬전> <스킬:뇌신 강림> <스킬:천뢰십보> <스킬:뇌정>에 깃든 뇌전의 기운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스킬:뇌정>이 <스킬:폭뢰爆雷>로 각성합니다!]

* * *

"저기 타깃이 있다."

"체크 완료. 타깃을 최우선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챙! 챙! 펄럭! 펄럭! 채애애앵! 챙! 펄럭!

니플헤임의 입구.

방패를 들어 올린 채 길목을 막아서는 플레이어, 안우정에게 활을 겨누는 플레이어 등등.

무수히 많은 플레이어들이 안우정을 노리며 달려든다.

'지긋지긋한 것들.'

악마의 등에 올라탄 채 그 모습을 보던 안우정은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강해지는 걸 방해하려는 쓰레기들.'

대다수가 한 쌍에서 두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으나, 간간이 세 쌍 이상의 날개를 가진 플레이어도 존재했다.

그를 노리기 위해 초월 리그의 플레이어들까지 투입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안우정의 근처까지 도달한 플레이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길을 뚫어라."

"옛!"

"알겠습니다."

안우정을 등에 태운 악마가 명령을 내리자, 수천이 넘는 악마들이 그들을 막아선 것이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비켜!"

"형제들이여, 천계 위선자들의 날개를 노려라!"

악마들을 무시한 채 안우정에게 향하려던 플레이어들.

그리고 그들에게 악착같이 들러붙으며 경로를 막는 악마들.

두 집단 사이에서 마기와 마력이 폭발하고, 거대한 쇼크웨이브가 생성되었다.

'든든하군.'

그 광경을 보며 분을 삭이던 안우정이, 자신을 태우고 있는 널찍한 등을 내려다보았다.

오밀조밀하게 박혀 있는 등 근육, 그 위를 덮고 있는 여섯 쌍의 날개.

자신이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

'이름이 제파르라고 했던가.'

안우정의 눈빛에 호의가 가득 담겼다.

"제파르 님, 뚫어냈습니다!"

"수고했다. 데스카론, 플레이그의 부대는 남아서 저들이 뒤쫓지 못하도록 막아라."

"옛."

"나머지는 방원진防圓陣을 그리며 이동한다. 서둘러!"

제파르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악마들.

곧 안우정과 제파르 주변으로 거대한 원을 그리는 하나의 진이 완성되었다.

"젠장, 놓치면 안 돼!"

"일리아! 마법은 아직 멀었나!"

"악마들이 너무 많아서 영창 할 시간이 없어요!"

"이 개같은 악마 새끼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뚝 솟아 있는 얼음 장벽.

그 한가운데에 조그맣게 난, 마치 홍해가 갈라진 듯한 모습의 외갈래 길.

욕지거리를 내뱉는 플레이어들을 뒤로하고, 안우정 일행은 유유히 외갈래 길로 들어갔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

냉기를 머금은 칼바람이 휘몰아친다.

두꺼운 눈발이 이리저리 휘날리며 안우정의 시야를 가렸다.

'여기가 니플헤임.'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새하얀 세상.

'조금만 더 가면.'

제파르의 등에 타고 있던 안우정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보다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안우정의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결국 뚫렸군. 여기서라도 어떻게든 막아낸다. 구트룬, 근접 계열 지휘를 맡아라."

"알겠습니다."

"구트룬이 방어진을 부수면 우리는 타깃만 노린다. 모두 집중하도록."

"옛!"

니플헤임으로 들어오니, 안우정을 기다리고 있는 스물두 명의 플레이어.

챙! 챙! 챙! 콰과과과과광! 챙! 과과광!

하지만 그들의 발악과 집요함 그 무엇도 안우정을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곁에는 여전히 수백이 넘는 악마들이 존재했기 때문.

"타깃이 이동합니다!"

"최상급 악마가 오십이 넘습니다!"

"쯧, 무리하지 말고 모두 주변을 정리하는 데 집중하라."

"젠장, 제대로 작정했군요. 도대체 누구기에 고위 악마까지?"

초월 플레이어가 있어도 막지 못했는데, 고위 플레이어들만으로는 안우정을 잡기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찾아온 평화.

"휴우, 다행히 별일 없이 지나왔군요."

네 쌍의 날개를 가진 악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주위에는 새하얀 눈의 세상과, 그 위를 까맣게 뒤덮은 날개들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파르는 다가온 악마를 꾸짖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우리의 임무가 완수되었나?"

"예? 아, 죄송합니다."

"마계에 들어가기 전까진 모두 긴장을 풀지 마라! 만약 안일한 모습을 보이는 놈이 있다면 사지를 절단내버릴 것이다!"

"옛!"

그런 제파르가 안우정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때였다.

"앗, 제파르 님! 저기 천계의 종이 있습니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 한쪽에서 보이는 한 쌍의 하얀 날개.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냥 무시해라. 우리의 임무는 마계까지 무사히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리가 제법 있기 때문인지, 악마 군단은 굳이 녀석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옛!"

펄럭! 펄럭!

말을 마치고 더욱 힘차게 날갯짓하는 제파르.

'아주 좋아.'

시원한 바람이 안우정을 간질였다.

저 멀리, 까맣게 솟아오른 거대한 산이 보인다.

"저기가 헬하임의 입구인가."

안우정의 물음에 제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에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

'얼마나 강한 힘을 줄지 기대되는군.'

그러자 안우정의 입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떨어지지 않도록 제파르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 * *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내 몸에서 눈이 시릴 정도의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한계의 한계까지 압축된 뇌전의 기운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

"······!"

그 모습에 경악하는 악마들.

나는 녀석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따라오세요."

상위 플레이어들에게 한 마디만을 남긴 채, 나크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꽈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끄억······."

근력과 민첩 40% 상승.

마력에 벽력의 기운이 깃드는 폭뢰.

그 두 가지를 예상하지 못한 최상급 악마가, 고작 세 번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채 몸이 터져나갔다.

갈기갈기 찢어진 내장과 근육들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시뻘건 피가 흩뿌려졌다.

"모, 모두 도망······."

"이럴 수가······."

그때부터 나는 창을 마구 휘두르며 학살을 시작했다.

'단숨에 뚫어주지.'

꽈아아아아앙!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악마들이 폭뢰의 기운에 녹아내렸다.

직전보다 몇 배는 증가한 화력 덕분에, 내 창이 닿기만 해도 거대한 폭음과 진동을 만들어 냈다.

'정말 미친 데미지야.'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구트룬이나 고주몽과 맞상대해도 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저 정도는 돼야 고위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건가······."

뒤따르던 누군가의 읊조림이 미약하게 들려왔다.

└씨바 깜짝이야!

└ㅋㅋㅋㅋㅋㅋ 방금 전까지만 해도 ㅈㄴ 단조로운 싸움이었는뎈ㅋㅋㅋ 갑자기 왜 미쳐 날뛰는 거냐곸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윗댓 졸다가 깜놀했나 보넼ㅋㅋ(동지)

└크으 드뎌 예전의 렌으로 돌아왔다아아악!

'벌써 다 죽였군.'

좁은 복도를 빠져나오자, 거대한 성벽이 보인다.

"뭐, 뭐야! 놈이 어떻게······!"

"적이다!"

마법으로 초토화된 알츠카인 성 내부엔 몇몇 악마들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모두 날개가 없는 하급 악마들.

"나머지는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뒤따라오던 쿠 훌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뇌신 강림을 해제했다.

[남은 체력 : 51%]

'아직은 가면의 빈자리가 크네.'

영롱한 달빛이 분당 5%의 체력을 회복시켜 주었지만, 그럼에도 남은 체력이 51%밖에 되지 않았다.

피의 회복이 아닌 이상, 뇌신 강림의 체력 소모율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 개새끼들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죽어!"

지상에 있던 하급 악마의 숫자는 50 정도.

반면에 상위 플레이어들은 400명이 넘는다.

그 덕에 악마들을 정리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띠링!

[렌 니이이이임! O(╥﹏╥)o]

[무스펠하임 입구를 도와주세여······!]

[고생 많으신 건 알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서 ㅠ__ㅠ]

[알츠카인 성 근처에 '칼 빈슨' 산이라고 동굴이 많은 곳 이써여!]

[상위 플레이어들은 그곳에 숨으라고 지시하고 합류 부탁드립니당······!]

[부탁드려여! (b˙◁˙ )b]

"······쯧."

상태창을 본 나는 한숨을 내쉬며 쿠 훌린을 불렀다.

"쿠 훌린 님."

"예, 렌 님. 부르셨습니까."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보니, 무스펠하임의 입구 쪽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모양.

아무래도 그곳으로 급히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저런 이모티콘 때문에 상황의 심각성이 잘 와닿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저기 저 산 보입니까."

"네."

"저기에 동굴이 많습니다. 그러니 플레이어들을 이끌고 저기 어딘가에 숨어 계세요."

"······예. 근데 어디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전 아무래도 무스펠하임 입구로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부탁합니다."

펄럭!

말을 마친 나는 바닥을 박차며 날개를 폈다.

'얻을 건 다 얻었어.'

그러고는 무스펠하임의 입구를 향해,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고결한 수정 세 개.

생각지 못했던 대박을 터트린 상황이기에, 날개가 무척 가볍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헉.'

고도를 높여가며 날아가고 있던 나는, 숨을 들이켜며 급하게 회피 기동을 했다.

저 멀리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악마 군단이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

'미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최소 세 쌍에서, 많게는 네 쌍.

그리고 간간이 다섯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악마까지.

'마주치면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지겠지.'

초감각 덕분에 미리 발견할 수 있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놈들과 거리를 벌렸다.

최상급 악마가 고위 플레이어들과 비슷한 수준.

그렇다면 네 쌍이나 다섯 쌍은 초월 플레이어나 돼야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후우, 굳이 쫓아오진 않네.'

다행히 악마들은 나를 무시한 채, 가던 방향으로 쭉 뻗어나가고 있었다.

'요즘 운이 정말 좋아졌어.'

고결한 수정 세 개도 얻은 데다가, 위험할 뻔한 순간도 잘 넘어갔다.

그 덕분에 무스펠하임 입구로 향하는 내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209화. 엇갈림(8) > 끝

< 210화. 엇갈림(9) >

챙! 채챙! 챙! 꽈아아아아앙!

거대한 빙벽과, 그 한 가운데에 일자로 쭉 뻗어나 있는 외갈래 길.

무스펠하임 입구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아직도 싸우고 있었군.'

플레이어의 숫자는 100명 정도.

그리고 악마의 숫자도 그와 비슷해 보인다.

그럼에도 전투는 쉬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쉽지 않겠는데.'

최소 상급 악마 이상, 간간이 다섯 쌍의 날개를 가진 고위 악마들도 보였기 때문.

플레이어 쪽에도 초월 리그의 플레이어가 넷이나 있었지만, 여섯이나 되는 고위 악마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꽈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저기에 휘말리면 안 돼.'

인간의 범주를 넘어 신위까지 도달한 존재들의 전투.

로브를 뒤흔드는 충격파 속에서, 나는 상급 악마만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펄럭! 챙! 채챙! 서걱!

"꺽······!"

"오, 렌. 무사했군. 도와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고주몽 님."

"일단 여기부터 정리하고 마저 얘기하지."

다수 대 다수의 전투.

변한 건 딱 하나, 내가 합류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전장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워낙 팽팽하게 흘러가던 탓에, 나 하나 추가된 것만으로도 전세가 기울게 된 것이다.

거기다 내가 원거리 딜러인 고주몽부터 자유롭게 풀어주니, 강기가 깃든 화살비가 전장 곳곳에 흩뿌려졌다.

펄럭! 펄럭! 채앵! 콰지지직! 서걱!

"볼티노 님, 괜찮으십니까?"

"헛, 렌! 고맙다. 근데 어떻게 여길? 구조대가 왔나?"

"아뇨, 그냥 혼자 뚫고 나왔습니다."

"혼자서 그 많은 병력을?"

"예."

"정말 대단하군!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나는 위급해 보이는 플레이어들을 도우며, 전장을 바쁘게 누볐다.

거대한 스노우볼도 작은 눈덩이가 구르며 만들어지는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날아다니는 악마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어 갔다.

그때였다.

꽈아아아아앙! 챙! 채챙! 꽈아아아앙!

다섯 쌍의 고위 악마와 세 쌍의 초월 플레이어.

"오늘이야말로 네 놈을 꼭 죽여주지, 단탈리온."

"흥, 광대 짓을 오래 하더니 말로도 웃기는 재주가 생겼구나, 시구르드."

거대한 충격파를 발산하는 진원지.

두 천상계 간의 전투가 내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전세를 뒤집어 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얼핏 보면 전투 중에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것 같지만, 여섯 명이나 되는 고위 악마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의도는 명확했다.

내가 한 것처럼, 약자들부터 하나씩 정리해 가려고 하는 거겠지.

그리고 첫 번째 목표는······.

'난가 보군.'

나는 피식 웃으며, 마찬가지로 조금씩 이동했다.

저들이 눈치챌 수 없도록, 자연스럽게 상급 악마들을 노리며.

"뒤를 조심해, 니모슈!"

"이 비겁한 자식!"

펄럭! 펄럭!

슬금슬금 가까워져 오는 고위 악마들.

펄럭! 펄럭!

그럼 나 또한 티가 나지 않도록 조금씩 거리를 벌린다.

그렇게 서너 번가량 눈치 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다.

'뭐야, 왜 이래?'

"헛. 놓치지 않겠다, 단탈리온!"

"고위 플레이어들은 모두 조심하라!"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여섯 고위 악마가 노골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푹! 푹! 서걱!

초월 플레이어들에게 일부 공격을 허용하면서까지 날아드는 고위 악마들.

'노리는 대상이 이미 정해져 있었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녀석들은 날 노리고 있다.

금세 놈들의 의도를 파악한 나는 재빨리 날갯짓하며, 플레이어들이 많이 뭉쳐 있는 곳 뒤로 숨어들었다.

쐐애애애애액!

'젠장.'

고위 악마의 검이 내 날개를 스쳐 지나간다.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서 공격을 피하긴 했지만, 스텟의 차이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

그와 동시에 뒤따르던 두 고위 악마가 쇄도해 들어온다.

'뭐지?'

이상한 건, 놈들이 검 대신 맨손을 뻗고 있다는 것.

이건 마치 날 납치하려는 모양새······.

'아.'

젠장.

그것 때문이었나.

띠링!

[플레이어 '구트룬'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헛, 누구······ 렌!"

그림자 이동으로 고위 악마들의 마수에서 벗어난 나는 입술을 짓물었다.

'블라디미르 가면.'

확실했다.

칠 군주 중 한 명이라던, 블라디미르의 가면.

놈들은 그걸 노리고 날 납치하려는 것이다.

서걱!

"이럴 수가! 단탈리온 님이······!"

"고위 악마 하나를 죽였다!"

그림자 이동으로 도망친 사이, 고위 악마 하나가 두 동강이 난 채 추락했다.

나한테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초월 플레이어가 사냥에 성공한 것.

"······?"

"뭐, 뭐야? 저 녀석을 노려!"

그러자 이상함을 감지한 최상급 악마들 또한 내게 달려든다.

"막아! 놈들이 렌을 노리고 있다!"

갑자기 급변한 상황에 플레이어들이 당혹스러워하며 내게 모여든다.

넓게 펼쳐져 있던 전장이, 그때부터 날 중심으로 강하게 압축되었다.

마치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침착하자.'

놈들은 전투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나를 중점적으로 노리고 있다.

시간만 끌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펄럭! 펄럭!

나는 굳이 무리하지 않고, 무수히 날아드는 악마들의 공격을 피하는 데 집중했다.

'열두 시 방향 47. 아홉 시 35. 열한 시 38.'

이곳에 있는 존재 중 내가 조심해야 하는 건 다섯 명뿐.

상급 혹은 최상급 악마들과는 스텟 차이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위협적이지 않다.

고위 악마들의 공격을 피하는 건 어렵지만, 그 또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면.

띠링!

[플레이어 '고주몽'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그림자 이동으로 도망가면 되니까.

서걱! 서걱! 서걱!

"젠장! 세이르 님마저 전사하시다니······!"

"저 새끼 장거리 순간 이동 쿨 타임이 왜 이렇게 짧아!"

그림자 이동으로 도망갈 때마다, 악마들이 지상으로 떨어져 나간다.

'아직 표식이 한 개 남았어.'

이제 고위 악마는 셋, 이외에는 40명가량뿐.

그때였다.

―까마귀 새끼들! 모조리 찢어 죽여주마!

무스펠하임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포효.

고개를 돌려 보니, 네 쌍의 날개를 가진 두 명의 초월 플레이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헤라클래스다!"

"자간 님! 놈들의 지원 병력이 옵니다!"

"개같은 헤라클래스! 모두 퇴각하라!"

꽈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미친, 뭐야?'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날아든 두 명의 초월 플레이어가 악마들을 학살한다.

한 번 공격을 퍼부을 때마다, 허공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압도적인 무위에, 남은 악마들이 우수수 추락했다.

"젠장 조금만 더 있었······!"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고위 악마 셋, 40명가량의 악마들이 정리되는 데에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걸로 전투는 끝.

'후우······ 끝났군.'

거대한 빙벽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전투.

나는 눈보라를 맞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짙은 피로감이 전신을 내리눌렀다.

고위 악마 여섯에게 쫓긴다는 건, 정말 아찔한 일이었기 때문.

전투가 끝나자, 고주몽이 크게 날갯짓하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테세우스, 정비가 필요한가?"

"괜찮습니다."

"셀릭스, 이안, 구트룬은?"

"저희도 멀쩡합니다."

"좋다, 테세우스, 셀릭스, 이안, 구트룬이 경계를 맡는다. 나머지는 편하게 쉬도록!"

그의 외침에, 회복의 물약을 꺼내 마시는 플레이어들.

[남은 체력 : 23%]

'피곤하네.'

나도 인벤토리에서 꺼낸 고급 회복 물약 하나를 들이켰다.

영롱한 달빛 덕분에 분당 5%씩 체력이 회복되는데도 불구하고, 워낙 전력으로 움직였더니 어느새 체력이 바닥을 찍고 있었다.

"악마들이랑 원수라도 졌는가?"

그때, 검을 늘어뜨린 채 내게 말을 걸어오는 볼티노.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근데 왜 녀석들이 그렇게 미친놈처럼 달려들어?"

"잘 모르겠네요. 제가 더 당황했습니다."

'블라디미르 가면 때문이라고 말할 순 없지.'

대략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흠. 그래도 무사해서 천만다행이군. 피곤해 보이는데 일단 좀 쉬게나."

다행히 볼티노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곤 다른 조원들에게 향할 뿐.

[남은 타락 플레이어 수 : 3명]

5분간의 휴식 후.

"모두 집합!"

고주몽의 외침에, 모든 플레이어가 모여들었다.

그 잠깐 사이, 고주몽은 헤라클래스라는 초월 플레이어와 가벼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헤라클래스."

"고주몽 님, 아직도 고위 리그에 계셨습니까?"

"위에서 빠져주질 않으니 순번을 기다리는 수밖에."

"흐흐흐, 조금만 기다려 보십쇼. 위에서 초월 리그 인원을 더 늘린다고 그랬으니까요."

이전부터 제법 친분이 있던 모양.

그러다 플레이어들이 모두 모이자, 고주몽이 이내 안색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남은 타깃은 세 명. 한 명은 놓쳤다."

"지독한 녀석이군요. 결국 여길 뚫고 지나가다니."

"제파르가 직접 호위하고 있었다."

"······제파르가 직접 말씀입니까?"

"놓친 녀석이 이 사건의 원흉으로 보이더군."

"도대체 누구기에······."

헤라클래스가 말끝을 흐리자, 고주몽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모른다. 어쨌든, 중요한 건 더 이상 대규모 병력이 무스펠하임에서 넘어오진 않을 거란 거다. 그러니 이만 전력을 분산시킬까 하는······."

꽈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앙! 꽈과과과광!

고주몽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무스펠하임 쪽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시작했군요."

그 모습에 헤라클래스가 작게 읊조렸다.

"뭐지?"

"무스펠하임 내부 악마들이 거의 다 정리가 돼서요. 위에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스펠하임 전역을 천계의 영역으로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흠, 이미 움직이고 있었군."

"예. 만약 그렇게 되면, 지금 우리가 있는 길목만 지키면 되니까요."

헤라클래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쁘지 않은데?'

천계나 마계가 지옥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었던 건, 마성석과 신성력이라는 특별한 매개체가 있었던 덕분.

그런데 무스펠하임에 설치된 마성석이 모조리 부서진다면, 마계 입장에선 무스펠하임에 게이트를 열 수 없다.

헤라클래스의 말대로, 이 길목만 지키고 있으면 순찰을 돌아다닐 필요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젠 니플헤임의 영향력만 넓히면 되겠군."

"맞습니······ 아, 마침 다음 손님이 오는군요."

고주몽의 말에 동의하던 헤라클래스가 무스펠하임 쪽을 응시했다.

'어?'

고개를 돌려 보니, 중급 악마 네 명과 날개가 달려있지 않은 여인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처리하지."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거는 고주몽.

핑! 쐐애애애애액!

벼락처럼 날아간 화살이 네 명의 중급 악마를 단숨에 꿰뚫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깃을 향해 화살을 겨눈다.

"잠시만요."

그 모습에 나는 팔을 뻗어 고주몽을 만류했다.

"무슨 일이지, 렌?"

"제가 처리할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아는 사람인가?"

"······예."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보석이 박혀 있는 핀으로, 정갈하게 틀어 올린 머리.

내가 만나본 무림인 중, 유일하게 무복이 아닌 나풀거리는 궁장宮粧을 입고 있는 여인.

손에 들려있는 새하얀 쥘부채까지.

'주소월······.'

타락했다는 열두 명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이 주소월이었던 것이다.

"원한이라도 있나 보군."

고주몽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갚아야 할 빚이 있어서요."

"흠. 네 명을 처리했으니, 내가 할 몫은 다 한 것 같군."

그러자 활시위를 거두는 고주몽.

그에게 감사함을 담아 묵례한 나는 지상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주소월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너, 넌!"

'왠지 좀 씁쓸하네.'

1회차 때는 고위 리그까지 올라갔던 주소월.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미션에 태만하게 임하는 경우 강등당하기도 한다.

그녀 역시 다시 상위 리그로 내려오긴 했지만, 어쨌든 고위 리그까지 올라갔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포텐은 가지고 있다는 뜻.

"너만 없었으면······. 네가 날 가로막았어······. 너만 없었어도 자유로운 바람처럼 계속 살았을 텐데······!"

그런데 2회차엔 우리 두 사람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나는 고위 리그.

그리고 주소월은 상위 리그.

'이게 나비 효과인가.'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아아악!"

주소월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온다.

여유 넘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상대를 약 올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귀신에 씐 듯 악의로 가득 차 있다.

완전히 타락한 듯 제정신이 아닌 모습이었다.

'이게 너와 나의 차이겠지.'

"너 때문에······!"

주소월은 이전 싸움의 결과를 내 탓으로 돌리고 있다.

반면에 난.

―내가 이렇게 포기할 거 같아?

1회차 때, 주소월에게 죽기 직전에도.

―내가 이겼어.

아르웬이라는 강자와 만나 싸울 때도.

―어디 한 번 받아보시지.

마교의 교주, 천세운에게 밀릴 때 마저.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어.'

언제나 내 목표만을 바라보며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독을 먹고 피를 토하면서도, 정신 스텟이 오른다는 이유 하나로 웃음이 나왔다.

그 사소한 차이가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거겠지.

'고마웠다.'

콰지지지지직!

창날에서 눈이 시릴 만큼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어느덧 30미터 안으로 들어온 주소월에게 창끝을 겨누었다.

그리고.

"너, 너만 죽이면······!"

1회차 때 나를 죽인 여인에게.

'편하게 보내 주지.'

전력을 다해 내리쳤다.

서걱!

주소월과 내 몸이 잠시 겹쳤다가 떨어졌다.

"······."

숨을 내쉬자, 입김이 길게 뻗어나간다.

그녀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생겨난 가느다란 실선.

푸슈우우우욱!

이내 반으로 갈라지며 어마어마한 피가 뿜어져 나온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더미가 붉게 물들었다.

띠링!

[플레이어 '주소월'을 처치했습니다.]

[기본급 x1의 수당이 지급됩니다.]

'부디 그곳에선 자유롭길.'

< 210화. 엇갈림(9) > 끝

< 211화. 폭풍의 서막(1) >

'부디 그곳에선 자유롭길.'

쐐애애애애애애액―

거센 바람에 내 로브가 깃발처럼 나부낀다.

죽은 주소월의 몸 위로 한가득 내려앉는 눈송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타락했으면 이런 모습이었겠지.'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 때, 나 또한 타락 직전까지 갔었으니까.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탓인지, 그때의 기억은 무척 희미하다.

'블라디미르 가면······.'

하지만 타락화가 남긴 여운은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다.

'아직은 역부족이야.'

손바닥을 내밀자, 그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이기 시작한다.

블라디미르 가면.

초월 리그의 챔피언이 되기 위해선 언젠가 다시 써야 할, 마계 칠군주가 남긴 잔재.

'그땐 내가 잡아먹어 주지.'

나는 주먹을 꾸욱 쥐어, 손바닥 위에 쌓인 눈을 움켜쥐었다.

언젠가 다시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온전히 내 힘으로 만들 것이다.

펄럭!

상념을 마친 나는 고주몽과 플레이어들에게 향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잘 보내줬으면 됐다."

진심을 담아 목례하자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젓는 고주몽.

천사가 아닌 플레이어가 타락했기 때문인지, 모두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

눈발이 휘날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띠링!

[남은 타락 플레이어 수 : 1명]

[새로운 미션을 전달드립니당!]

[가슴 아픈 일이 있긴 했지만, 무스펠하임에서 대승을 거뒀습니다! 모두 고생 많으셨어요! 짝짝짝짝짝!]

[(๑•̀ – •́)و]

[이제는 무스펠하임-니플헤임 간의 입구 봉쇄에 집중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연합 파티장의 지휘하에 병력 재편성을 부탁드려요 ♡]

[남은 시간도 화이티이이잉! (づ ̄ ▽ ̄)づ]

그때 등장한 새로운 미션창.

'소모전은 완전히 끝났나 본데.'

내용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은 타깃은 이미 마계로 향했고 나머지는 모두 정리된 상황.

더 이상 이곳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어진 탓에, 새로운 미션이 내려온 것이다.

"흠, 얼추 마무리되고 있나 보군. 모두 하달된 지시 사항은 확인했겠지? 지금부터 병력을 세 개로 쪼개겠다. 헤라클래스?"

"예, 고주몽 님."

"함께 온 플레이어들과 함께 무스펠하임으로 복귀한다. 무스펠하임 완전 점령에 힘을 실어주도록. 블레이드 조와 루시엔 조, 레빈 조는 헤라클래스를 따라가라."

"알겠습니다."

"카시우스 조, 맥스웰 조, 아더 조, 데릭 조, 에반 조는 여기 남아서 입구를 계속 봉쇄한다."

"옛!"

그때부터 시작된 병력 재편성.

"그 외에는······."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속한 구트룬 조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따로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건가.'

"고주몽 님, 저희 조는 빠졌습니다."

구트룬 또한 그 부분을 의아하게 생각한 모양.

그러자 고주몽이 무스펠하임 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구트룬. 그대 조는 잠시 후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마침 오는군."

'마침 온다고?'

고주몽의 말에, 나를 포함한 조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

"아!"

고주몽이 가리킨 곳에서, 스물네 명의 천사가 날갯짓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다섯 쌍의 날개를 가진 역천사 스물셋이, 7쌍의 날개를 가진 좌천사를 호위하듯 감싼 채 오는 중이었다.

"평소에는 다섯 명만 오더니 비상사태라 그런가 제법 많이 왔군."

쐐애애애애액! 파아아아아아앙!

고주몽의 읊조림과 동시에, 창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우리를 덮쳐왔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불과 50미터를 남겨두고 멈춰 선 스물넷의 천사들.

"전략 요충지를 지켜낸 용감한 플레이어들이여."

"세라엘 님."

록탄 성 점령 때 만났던, 신성석을 들고 왔던 좌천사 세라엘이었다.

'또 만났네.'

그녀를 보자, 고주몽이 얘기해주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조는 알츠카인을 재점령하라는 거였군.'

"그대들의 무용담을 천둥소리처럼 듣고 있었다. 모두들 고생 많았노라."

"아닙니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이해해다오."

3급 좌천사, 세라엘의 말에 고개를 가로젓는 고주몽.

"괜찮습니다. 알츠카인 성까지는 여기 있는 구트룬이 모실 겁니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구트룬이 세라엘에게 다가가 예를 표했다.

"음, 잘 부탁하노라."

세라엘이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조원들을 한 명씩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구트룬.

펄럭! 펄럭!

천천히 속도를 끌어올리는 그의 움직임에 맞춰, 나도 볼티노를 따라 분주하게 날갯짓을 했다.

스물네 명의 천사를 앞에서 셋, 뒤에서 셋이 감싸는 형태.

천사 스물넷, 고위 플레이어 여섯이 동시에 비행하니, 마치 허공을 가르는 거대한 전투 순양함 같은 모습이었다.

'니플헤임은 조용하네.'

그렇게 한동안 알츠카인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앙! 꽈과과과과광! 꽈아아아아아아앙!

무스펠하임 쪽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는 굉음.

대규모 전투라도 펼쳐지는 듯, 하늘 위로 거대한 버섯 구름이 솟아오른다.

그와 반면에 니플헤임은 무척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직전까지 워낙 격전을 펼쳤던 탓인지, 미친 듯이 불어닥치는 칼바람과 쏟아지는 눈보라도 친숙하게 느껴졌다.

"아. 너무 아쉬워요, 브리엘 님."

"뭐가?"

"이런 분위기면 니플헤임의 영향력도 많이 넓힐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나도 그래. 그치만 어쩌겠니, 무스펠하임을 완전히 장악해야 중간계가 안전해지는걸."

"그래도요. 이후에 여길 점령하려면 굉장히 많은 피를 흘려야 될 텐데······."

오죽했으면 천사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정도.

'마계는 뭘 노리고 있는 걸까.'

천사들의 말을 들으며 나도 머리를 굴려봤지만, 마계와 천계가 취하는 대전략을 알지 못하고 있기에,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렇게 10분가량을 비행해서 도착하게 된 알츠카인 성.

거대한 성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곳곳에 잔재한 전투의 흔적 때문인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구트룬, 잘 부탁한다."

"맡겨주십시오. 각자 성벽을 경계로 한 방향씩 맡는다!"

스물네 명의 천사가 지하로 들어가고, 우리는 성의 상공에서 주변을 경계했다.

내가 맡은 곳은 헬하임의 입구가 있는 아홉 시 방향.

'무료하군.'

주변에는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몬스터 뿐, 악마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며 한동안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쏴아아아아아아앙―

"······!"

순간 알츠카인 성 내부에서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얼마나 밀도가 높은지, 투명한 막이 나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신성석 설치가 완료됐나 본데.'

띠링!

[니플헤임 '알츠카인' 성이 천계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습니다.]

[당직 근무 중인 '구트룬' 조에 새로운 미션을 전달드려여~]

[엘린 성은 추가 당직조가 투입될 예정!]

['구트룬' 조는 남은 시간 동안 알츠카인의 순찰을 부탁드립니당!]

[(๑•̀ – •́)و]

'당직이 아직 안 끝났었지.'

당직 근무는 총 1주일.

그중 우리는 4일을 수행했다.

'앞으로 3일 더 해야겠군.'

"렌! 이쪽으로!"

짙은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나는 구트룬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쩔 수 없지.'

3일이라는 시간 동안 별일 없길 바라는 수밖에.

* * *

거대한 돔형 건물.

하얀 대리석으로 고급스럽게 인테리어 된 바닥과 벽.

천장에 그려진 대전쟁의 영웅들이 악마를 물리치는 그림.

중심부에는 한 권의 책을 들고 있는 천사 조각상이 있고, 그 주변으로 둥그렇게 놓인 두 겹의 원형 테이블에 155명의 신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천상계 비상 위원회.

'후우, 요즘 들어 사건이 끊이질 않네.'

앞 열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위그드라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중간계에서 벌어지는 악마 소환 의식.

이전보다 잦아진 천사들과 플레이어들의 타락화.

다섯 기둥 중 하나인 라파엘의 타락까지.

'대전쟁의 전조 증상이야.'

대전쟁.

천상계와 마계가 10년 동안 펼친 거대한 파괴의 소용돌이.

천계의 전력 50%가 산화된 지옥의 불구덩이.

떠올리기조차 싫을 정도로 참혹했던 그 날이, 다시 다가오려고 하고 있었다.

'천상계를 지킬 수······ 있을까······.'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멍하니 빈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위그드라실.

그녀가 이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당연히 지켜내야지.'

수많은 생명들이, 다양한 문명들의 존폐 여부가 달려 있다.

지켜내야만 한다.

반드시.

그리고 다시금 천상계와 열두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굳게 다짐한 위그드라실이 두 주먹을 꼬옥 쥐었다.

'결국 완벽한 평화를 위해선 마계를 완전히 정리해야 해.'

이 사태를 잘 수습하더라도, 마계는 또다시 힘을 키워서 침공할 것이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대전쟁 당시, 칠군주 중 한 명인 마몬이 죽고, 마계의 판데모니엄이 불타서 완전히 잿더미가 됐었다.

남은 여섯 군주는 패배를 직감하고, 나락 어딘가로 숨어들었을 정도.

결국 녀석들을 찾는 걸 포기한 채, 천계는 섣불리 샴페인을 터트리며 대전쟁의 승리를 자축했다.

근데 결과는?

'외려 마계가 힘을 키울 시간을 준 것 밖에 안 됐지.'

처음엔 미약한 꿈틀거림이었으나, 어느새 마계를 재탈환한 여섯 군주.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삼지옥의 대다수를 차지해버린 것도 모자라, 중간계에 악의 씨앗을 뿌리며 새로운 악마들을 육성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뿌리째 뽑아버려야 해.'

위그드라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천상계의 열두 기둥, 오딘 님이 입장하십니다!"

수문 천사의 외침과 동시에 거대한 회의장 문이 열리며, 한 노인이 뚜벅뚜벅 들어온다.

'하, 늦은 것도 모자라서 여유롭게 걸어 들어와? 자기 하나 때문에 155명의 신들이 기다리게 됐는데?'

최근 그녀와 사사건건 부딪치던.

아니, 파벌을 형성하며 하나로 똘똘 뭉쳐 있던 주신회를 갈라놓은 미드가르드의 주신.

오딘이 여유로운 얼굴로 뭉그적뭉그적 걸어들어오고 있다.

그 모습에 위그드라실이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이제는 치가 떨릴 정도야.'

평소 그녀의 의견에 하나하나 딴지를 걸던 오딘.

위그드라실은 한 때 나마 그를 이해하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다.

내가 올린 안건이 부족했던 거야.

내가 낸 의견에 문제점이 있던 거야.

하지만 그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론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오딘은 그저, 그녀의 의견에 무작정 태클을 거는 거라는 걸.

그런 일련의 과정들 때문인지, 지각한 오딘의 그 모습이 더욱 밉상처럼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천상계에 도움이 안 되는 존재지.'

파벌을 만들어 천상계라는 거목의 뿌리를 흔들고 있는 분란 조성자.

내놓는 안건마다 딴지를 거는 전형적인 소인배.

열심히 일하고 있는 천사들을 괜히 들쑤시고 다니는 한량.

위그드라실의 마음 속에 있는 오딘의 이미지는 가히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계와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쳐내야 해.'

거대한 고목도 뿌리가 흔들리면 죽는다.

가지를 뻗어 더 넓은 그늘을 만들고 탐스러운 과실을 맺기 위해선, 죽은 뿌리를 쳐내는 게 가장 급선무였다.

"늦었군요."

원형 테이블의 열두 시 방향에 앉아 있던, 주신회의 의장 환웅.

그가 오딘을 가볍게 타박했다.

"미안하오. 퍼즐을 맞추고 있었는데, 금방 끝날 거라 생각했소만 제법 오래 걸리더군."

하지만 돌아오는 오딘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위그드라실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늦은 것도 실례인데, 고작 그따위 퍼즐을 맞추느라 그랬다고?'

이 비상 시국에?

"······."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신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모든 신들이 모여야 위원회를 개최할 수 있다는 규칙 때문에, 모두들 하염없이 오딘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으니까.

"······그래서 퍼즐은 다 맞추셨습니까?"

그러자 무표정한 얼굴로 되묻는 환웅.

말투와 표정은 정중했지만, 앞뒤 맥락 상 돌려서 핀잔을 주는 것이다.

"다 맞추지 못했소. 왜 안 맞춰지나 했는데, 다른 퍼즐 조각이 섞여 들어온 것 같더군."

태연한 오딘의 말에 환웅이 손깍지를 낀 채 턱을 받쳤다.

그가 뭔가 생각할 게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이 양반은 왜 아직도 안 앉은 거야?'

위그드라실이 오딘에게 눈총을 보냈다.

오딘이 아직까지도 자리에 앉지 않은 채, 꾸물거리고 있었기 때문.

"안 맞는 조각은 찾으셨습니까?"

이어지는 환웅의 물음에 오딘이 고개를 저었다.

"찾지 못했소. 아무래도······."

후우우우우우웅!

오딘의 손에, 금빛이 번쩍이는 길다란 창이 소환된다.

"······?"

"······!"

"······?"

오딘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창.

궁니르.

'뭐야?'

순간 위화감이 든 위그드라실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일 없겠지만, 만에 하나 공격할 경우 무방비 상태로 있을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위그드라실보다 오딘의 행동이 더 빨랐다.

"뒤엎고 찾는 게 더 빠르겠더군······ 흡!"

오딘이 들고 있던 궁니르를, 위그드라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마르둑을 향해 던진 것이다.

한 줄기 섬광이 회당의 한 가운데를 가로 지른다.

그리고 들려오는.

푹! 푹!

생살을 찢는 두 번의 피륙음.

마르둑과 그 정반대 편에 있던 아마츠카미가 털썩 쓰러졌다.

푸슈우우우우우욱!

두 주신의 가슴에 만들어진 거대한 구멍에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이런 미친!"

주신이라는 체면도 잊은 채 위그드라실이 경악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무기, 쿠투네시르카를 꺼내들었다.

'설마 타락화가 진행 중인 건가······!'

< 211화. 폭풍의 서막(1) > 끝

< 212화. 폭풍의 서막(2) >

3일이란 시간 동안 나는 무척 바쁘게 돌아다녀야만 했다.

첫날 볼티노와 짝을 이루고 시작된 순찰.

다음 날엔 구트룬, 그다음 날엔 스벤, 이런 식으로 로테이션을 3개로 나뉜 영역을 모두 마스터해야만 했으니까.

그렇게 찾아온 당직 마지막 날.

'드디어 끝났군.'

"여기, 그리고 여기를 기점으로 돌아야 합니다. 중간에 아이스 스네이크가 파둔 거대한 굴이 있으니 찾기 쉬울 겁니다."

"음, 친절한 설명 고맙소, 구트룬."

"무운을 빕니다, 닐."

구트룬이 다음 당직조의 조장, 닐에게 꼼꼼하게 인수인계를 했다.

원래는 그냥 바톤 터치식 교대가 이루어지지만, 알츠카인 성은 이번에 천계가 새롭게 얻은 영역.

조금이나마 효율적으로 순찰 근무를 하기 위해서 인수인계는 필수였다.

"그럼 우린 가 보겠소. 한 주간 수고 많았소!"

"건투를 빕니다."

펄럭! 펄럭! 펄럭!

다음 당직조에 속한 여섯 명의 고위 플레이어들이 흩어지고, 알츠카인 성 내부엔 우리 조원만 남게 된 상황.

"모두들 1주일이란 시간 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조장도 고생 많았소."

"수고하셨습니다."

"이번엔 좀 힘든 근무였지."

구트룬의 말에, 다른 조원들이 서로에게 덕담을 건넸다.

"렌, 그대가 이번에 제일 고생 많았다."

"크하하, 내가 첫날 말했지 않나. 공중 전투든 경계든, 뭐든 잘한다고!"

1주일간 함께 돌아다니고 싸우고 했더니, 이제는 제법 유대감이 쌓인 걸까.

모두들 내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해 주었다.

"잘 알려주신 덕분입니다."

"아니, 그대가 잘한 덕분이다. 렌, 앞으로도 잘해 보자."

내게 주먹을 내미는 구트룬.

그를 시작으로, 다른 네 명의 조원들도 내게 주먹을 내밀었다.

'다들 완전히 나를 동료로 받아들인 모양이군.'

피식 웃은 나는 일일이 주먹을 맞대며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띠링!

[고위 당직조 '구트룬' 조의 당직 근무가 종료됐습니다!]

[모두 고생 많으셨어여! 짝짝짝짝짝!]

[바로 정산을 시작하겠습니닷!]

[( ੭ ・ᴗ・ )੭]

[성공적으로 당직 근무를 마쳤습니다.]

[기본급이 지급됩니다.]

[순찰 중 83회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기본급 x 1 의 수당이 지급됩니다.]

[순찰 중 244명의 중급 악마, 99명의 상급 악마를 처치했습니다.]

[기본급 x 1 의 수당이 지급됩니다.]

[마계의 영역, 알츠카인 성을 공략했습니다!]

[기본급 x 3 의 수당이 지급됩니다!]

[알츠카인 성의 마성석을 파괴하셨습니다!]

[기본급 x 1 의 수당이 지급됩니다!]

그리고 주르륵 나타나는 알림창.

'뭐야?'

내용을 본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기본급을 얻는 선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엄청 많은 추가 수당이 껴 있던 것이다.

'그럼 1주일 동안 얼마를 번 거지?'

지금 내 기본급이 20만 포인트니까······.

[<니플헤임 당직 미션>을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1,440,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360,000 P 차감)]

[기본급 +200,000 P / 침투 저지 수당 +200,000 P / 타락 플레이어 처치 수당 +200,000 P / 추가 보너스 +1,200,000 P / 수수료 -360,000 P]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144만 포인트!'

고작 일주일간 고생한 대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거액.

나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중간에 긴급하게 내려온 미션들이 있었긴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양의 포인트를 벌어들인 것이다.

각종 전투와 성 공략, 이후 무스펠하임 입구에서 치러진 회전 등등.

'대박이네.'

힘들었던 지난날의 노고를 게임 메이커가 확실하게 보상해 주었다.

* * *

하얀빛이 점차 사그라든다.

이제는 울타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해진 팀 투지의 팜.

'역시 기다리고 있었군.'

게이트를 나선 내 입꼬리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아세리안과 두 천사, 오현석을 제외한 권속 플레이어들이 마중 나와 있었기 때문.

이제 곧 있으면 모두들 호들갑을 떨며 고생했다고······.

흠칫!

한 발자국 내딛으려던 나는 멈칫했다.

'뭐야.'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온한 표정의 아세리안, 하지만 맞잡은 두 손이 잘게 떨리고 있다.

까불까불하던 포르도엘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상태.

피넛엘과 다른 플레이어들도 사색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거기다가 팜 내부에 아세리안의 신성력이 가득 퍼져 있었다.

포근하고, 따뜻한 기운.

'뭔가 일이 벌어졌군.'

처음 겪어보는 분위기에, 불안감이 척추를 타고 엄습해 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어······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유감이에요, 안우진 님."

아세리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온다.

그럴수록 내 심장 박동이 더욱 거칠어졌다.

"안우진 님의······."

"네."

"형님분께서······ 타락했어요."

"······?"

아세리안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어떤 정보를 담고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라는 거지? 우리 형이 타락······.

'뭐?'

순간 눈을 부릅떴다.

그런 내 표정을 본 아세리안의 손이 더욱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번에 타락 플레이어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 형님분이세요."

"······."

내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형이 타락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형이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내 모든 걸 걸고 확신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형은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삐이이이이―

귀에서 이명이 들려온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로······ 형이 타락했다고?'

돌아가는 분위기, 아세리안과 두 천사, 팀원들의 표정을 봐선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곧이 곧대로 믿기엔.

'그럴 리가······.'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듯이 박동했다.

'왜?'

밀려오는 분노에 이를 빠득 갈았다.

'왜 우리 가족한테 자꾸 나쁜 일이 생기는 거지?'

온몸의 피가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었다.

'왜? 어째서? 그럴 거면 차라리 날 괴롭히지······ 왜 우리 가족에게······.'

"포르도엘! 피넛엘!"

"알겠습니다."

"바로 시작할게요!"

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인간을 초월한 세 존재의 신성력이 내 주변으로 모여든다.

"후우우우우."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때려 부수고 싶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제발.

제발 침착해야 해, 안우진.

제발······.

'내가 무너지면 안 돼.'

어떻게든 초월 리그까지 가야만 한다.

내가 무너져선 안 된다.

그 순간 우리 가족은, 그저 비운의 가족으로 남을 뿐.

형 마저 타락한 이상 내가 유일한 희망이다.

'내가 이번 당직에서 얼마를 벌었더라.'

포인트 정산창을 본 지 5분도 채 안 됐지만,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 기본급이 20만, 그리고 추가로 160만 포인트의 수당을 받았으니까, 20퍼센트의 수수료를 떼면······.

아, 그래. 144만 포인트를 벌었지.

'형한테 못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그리고 고결한 수정 세 개도 얻었어.

그중 두 개로 뇌신이랑 마력 상쇄를 업그레이드했고, 한 개는 킵.

사용처는 조금 더 고민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딱 한 번만 더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건, 얻은 포인트를 어디에 사용하냐는 것.

정신 스텟을 올릴 차례지만 고위 악마들과 싸워 보니 근민체가 아직 낮다는 걸 깨달았다.

근민체랑 정신을 골고루 올리는 게 좋을 것이다.

'젠장.'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분노가 가라앉질 않는다.

[11,000 P 를 소모하셨습니다.]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1,000 P 를 소모하셨습니다.]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1,000 P 를 소모하셨······.]

나는 이번 당직 근무에서 벌었던 모든 포인트를 정신 스텟에 때려박았다.

터질 것처럼 부풀었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아직 부족해.'

하지만 여전히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엔 무리였다.

"카이로시아."

"네, 넷!"

내 부름에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대답하는 카이로시아.

"나한테 얼음물 좀 뿌려 줘."

아무래도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부터 식혀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빙하의 노래!]

그러자 단 10초 만에 영창을 마치고 마법을 시전하는 카이로시아.

촤라라라락―

뼛속까지 시릴 만큼 냉기로 가득한 물이 머리 위에 한가득 뿌려진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던 머리가 조금이나마 식는 느낌.

'후우.'

요즘 들어 플레잉 코치로 정산되는 포인트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벌어들인 포인트를 전부 투자해 정신을 올렸지만, 조금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근민체도 제법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형한테 보내줄 아이템도 아직 많이 남았는······.'

"카이로시아."

"네!"

"얼음물."

촤라라라라락―

다시 한번 얼음물을 뒤집어쓰자, 정신이 맑아진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들던 분노가 고개를 내밀었다.

"얼음물."

촤라라라락―

안쓰럽게 바라보는, 열두 쌍의 눈빛.

나는 그 눈빛들을 무시한 채, 카이로시아에게 부탁했다.

"얼음물."

촤라라락!

밤하늘에 별이 떠오를 때까지.

"얼음물."

한참 동안.

* * *

"무, 무슨 짓이오!"

"대체 왜!"

마르둑과 아마츠카미가 죽는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나는 신들.

쓰아아아아아앙!

모두들 각자의 무기를 소환해, 오딘을 향해 겨누었다.

'시간을 주면 안 돼.'

그 사이에서, 빠르게 판단을 내린 위그드라실.

그녀는 쿠투네시르카를 오딘에게 겨냥했다.

오딘은 열두 주신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자.

이곳에 있는 신들을 믿은 채 마음 놓고 있었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다.

그때였다.

"모두 그만!"

천둥소리 같은 외침과 동시에 묵직한 신성력이 회당을 짓누른다.

그녀를 포함한 모든 신들이 우뚝 멈춰 섰다.

'뭐?'

예상외의 인물에게서, 예상외의 대사가 흘러나왔기 때문.

'어째서?'

오딘과 사사건건 부딪치며 날을 세웠던 환웅이, 신성력을 내뿜으며 회당 안의 살기를 흩어버리고 있었다.

그 사이, 이 거대한 혼돈의 원흉이었던 오딘이 평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거기 있었군, 거짓의 나베리우스."

"······?"

거짓의 나베리우스.

마계에서 대신 급의 서열을 가진 고위 악마.

'나베리우스?'

그녀는 오딘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널 찾으려고 정말 오랜 시간 공을 들였지."

모두들 오딘을 향해 무기를 빼든 채 경계하고 있다.

근데 단 한 명.

"······?"

열두 존재 중 하나인 하이퍼보리아의 주신, 제우스만은 묘한 자세로 얼어붙어 있었다.

마치 기다란 손톱이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할퀴려는 듯한 모습.

'제우스가 나베리우스라고?'

그걸 본 위그드라실의 마음 속에 위화감이 피어올랐다.

제우스는 아스트라페라는 창을 사용하는 창술사.

기다란 손톱이 있어본 적도, 갈퀴가 달린 너클을 사용한 적도 없다.

그때였다.

꿈틀.

꿈틀꿈틀―

"뭐, 뭐냐!"

"이럴 수가!"

죽은 아마츠카미와 마르둑의 몸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그러더니, 뻥 뚫린 가슴의 구멍 안에서 박쥐와 전갈이 빠져나왔다.

주신들의 몸 안에 어떤 존재가 기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여!"

순간 회당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푹! 푹!

"끄억······!"

"대계가 이루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거늘······."

근처에 있던 신들이 무기를 휘둘러, 두 불청객을 단숨에 도륙했다.

그러자 나타난 여섯 쌍의 검은 날개와 머리에 달린 뿔.

"헛! 저건!"

"악마······!"

156명 만이 존재하던 회당에, 두 개의 사체가 추가되었다.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야······?'

그 모습을 본 제우스가 안색을 굳힌 채 허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젠장,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었군. 분명 퍼즐 조각을 찾지 못했다고 그랬는데······."

"네 놈을 찾는 데 참으로 오래 걸렸구나. 마기를 어찌나 꼭꼭 숨겼던지, 미카엘 그 아이도 못 찾겠다고 했지. 거짓의 악마라는 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더군."

"······."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연기를 오랫동안 해야만 했지."

'그랬구나.'

오딘의 말을 들은 위그드라실은, 그제야 어떻게 돌아간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녔구나.'

왜 오딘이 환웅에게 의장 자리를 양보했는지.

그랬던 오딘이 왜 갑자기 환웅을 견제하며 파벌을 만들었는지.

왜 사사건건 따지고 들며, 이 신 저 신 찔러보고 다녔는지.

'다른 신들의 반응을 살펴보려던 거였어.'

이유를 알게 되자, 그동안의 행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오딘 또한 자신처럼, 썩은 뿌리를 도려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던 것이다.

'환웅 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거였어.'

그동안 내심 의아했었다.

의장이란 자리에 있는데도 왜 오딘을 제지하지 않는지.

어째서 분위기가 과열될 때마다 중재하는 데에만 집중했는지.

하지만 상황을 알고 나니, 그 모든 것들이 설명 되었다.

그랬으니 그동안 칼을 빼 들지 않았으리라.

그가 천상계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은 위그드라실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크크큭. 라파엘이 타락하고도 의심하지 않기에, 완전히 속아 넘겼다고 생각했거늘."

"놈······."

"조금만 더 있었으면 아버지라는 작자······!"

그때, 오연한 얼굴로 환웅이 화살을 날린다.

쐐애애애애액! 빠아아아아아아앙!

"쿨럭, 쿨럭······."

그에 적중당한 제우스, 아니 나베리우스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아버지라는 작자의 면상에······."

푸우욱!

"끄윽······."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을 텐데도, 나베리우스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는 데에만 전념을 다하고 있었다.

천계의 모든 주신, 그리고 대신들이 있는 자리.

애초에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접은 것이다.

쏴아아아아― 퍼어어엉!

제우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

그 위에 환웅이 날린 화살이 꽂히자, 거대한 뿔을 가진 악마의 사체로 바뀌었다.

"······."

회당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딘 님."

이어지는 환웅의 목소리가 정적을 꿰뚫었다.

그러자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오딘.

"미안하오. 너무 오래 걸렸소."

"아닙니다. 정말 잘해 주셨습니다."

"너무······ 오래 걸렸소, 너무. 그동안 피 흘리며 사라진 우리 형제가 얼마나 많았던가. 얼마나 많은 자매들이 타락을 겪어야 했는가······."

환웅이 위로를 전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풀어지질 않았다.

"······."

그동안 오딘은 뒤에서 알게 모르게 손가락질을 당했다.

그럼에도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 위해, 단 한 번의 내색 없이 맡은 임무를 해낸 것이다.

'정말······ 고생 많았겠네.'

그의 진심을 알게 된 위그드라실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쿵!

"모두 주목."

환웅이 들고 있던 활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오늘로써 천계의 암덩이를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지금쯤 밑에선 미카엘이 남은 잔가지들을 베고 있을 겁니다. 내부의 적은 완벽하게 처리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

"그러니 이제, 외부로 눈길을 돌릴 차례입니다."

"오오······!"

드르륵―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환웅을 따라, 모든 주신과 대신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눈을 빛내면서 환웅을 바라보았다.

위그드라실 또한 그 행렬에 동참하며, 뒤이어 나올 말을 기대했다.

"······."

"······."

잠시 오딘과 무언의 눈빛을 교환한 환웅.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격을, 시작해 봅시다."

"······!"

순간 위그드라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212화. 폭풍의 서막(2) > 끝

< 213화. 폭풍의 서막(3) >

다음 날 아침.

'여긴?'

눈을 뜬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통유리로 된 천장, 침대 옆의 고풍스러운 협탁, 익숙한 구조의 방.

나한테 배정된, 달빛이 들어오는 숙소.

"······!"

순간 화들짝 놀란 나는 곧바로 상태창부터 확인했다.

플래티넘 등급으로 업그레이드된 두 개의 스킬.

가지고 있던 모든 포인트를 때려 박아, 181까지 올린 정신 스텟.

'꿈이······ 아니었어······.'

그것들을 보자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형의 타락.

'꿈이길 바랐는데.'

그때부터 무려 5시간 가까이 뒤집어쓴 얼음물.

시간이 지날수록 어쩔 줄 몰라 하던 팀원들의 모습까지.

'후우.'

나는 거칠게 고개를 흔들어, 그 모든 것들을 털어내려 애썼다.

콜로세움, 그리고 팜이라는 특수한 환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켠엔 콜로세움에서 다시 형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상실감이 큰 거겠지.

'감정에 휘둘리면 안 돼.'

나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괜찮다.

다시 만날 그날이 조금 더 뒤로 밀려난 것뿐이다.

'하나만 생각하자.'

형의 타락으로 인해 내 목표가 달라졌는가?

'아니······.'

형의 타락으로 인해 내 목표가 더 어려워졌는가?

'아니.'

형의 타락으로 인해 내가 추가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는가?

'아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내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 될 뿐.

그러기 위해선.

'이러고 한가하게 앉아 있을 시간이 없지.'

마음을 다잡은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안녕하세요, 안우진 님."

"안우진 님, 좋은 아침입니다."

밖으로 나오자,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중형 도시에 가까울 만큼 거대해진 팀 투지의 팜.

아침 식사 후 짜여진 커리큘럼을 수행하려면 부지런하게 움직여야만 한다.

그래서 모두들 각자 정해진 목적지로 가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예, 모두들 좋은 아침입니다."

한 명 한 명 일일이 인사를 받아준 나는, 그대로 식당으로 향했다.

언제나 미리 시간을 정해놓고 루틴처럼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내 하루 일과의 시작은 아침 식사부터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형!"

"일찍 일어나셨네요, 안우진 님."

식당.

평소 앉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으니, 권속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서 내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크으, 벌써 독 수련을 하는 날이 돌아왔네."

"끔찍하군. 저번 훈련 때는 100번 넘게 기절한 것 같은데."

"모용악 님, 그때 고건하 님 눈물 콧물 다 쏟았습니다."

"이봐, 수호! 어디서 유언비어를······!"

"푸흡! 뭐야, 나한테는 별것도 아니라는 둥 온갖 허세를 다 떨더니만."

그리고 평소보다 더 활기찬 모습으로 식사를 이어갔다.

어제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마 모두들 나를 배려해주고 있는 거겠지.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정신 스텟이 크게 상승한 덕분일까.

타격을 입었던 멘탈의 회복 속도가 무척 빨랐다.

지금은 앞으로의 일에 대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꽉 차 있는 상태였다.

"우진이 형."

그때였다.

왁자지껄한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굳은 표정으로 식사를 이어가던 주창범.

그의 부름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따라 표정이 어두워 보였기 때문.

"예, 말씀하세요."

"괜찮으세요?"

"그럼 당소소 님께 더 센 독으로······."

"······."

그 순간,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테이블에 정적이 흘렀다.

저번 독 수련을 화제로 시끄럽게 떠들던 팀원들이, 동시에 나를 힐끔 살폈다.

그러고는 입을 콱! 다문 채 주창범에게 눈총을 쏘았다.

'얘 왜 이래?'

'창범이가 뭘 잘못 먹었나. 평소엔 빠릿빠릿한 녀석이······!'

'우읍, 체할 것 같아. 빨리 먹고 튀어야겠다.'

마치 그들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아무래도 얼른 먹고 일어나야, 팀원들이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

"······?"

"저는 외동이어서 형제가 없었어요."

그러자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를 꺼내는 주창범.

녀석이 식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탓에 다른 팀원들이 애절하게 보내는 눈빛은, 끝끝내 녀석에게 닿지 않았다.

"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15살 때 암으로 돌아가셨죠. 일가친척은 단 한 명도 없었고요."

외동에다가, 부모님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일가친척도 없다.

한마디로 고아였다는 뜻.

"······흐음."

갑작스레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수저를 놓은 채 팔짱을 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지금껏 주창범이 한 번도 꺼낸 적 없었던 과거.

집중해서 들어주는 게 녀석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전에 블러드나이트 249 경기 끝내고 돌아왔을 때, 형이 혼자 맞이해 주셨던 적 있죠?"

'블러드나이트 249?'

내가 혼자 맞이해 준 적이 있던가?

주창범의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을 되짚었다.

'아.'

―지낼 만합니까? 힘든 건 없구요?

―아, 네. 다른 형들이랑도 다 친하게 지내고 있고, 경기 성적도 잘 나오고 있어서 그런가 너무 좋아요.

―다행이군요. 앞으로도 힘든 일이 있으면 바로 얘기하세요. 전처럼 혼자서 끙끙대지 말고.

블러드나이트 249.

녀석이 이상하다는 아세리안의 말에, 내가 혼자 나와서 맞이해 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하라고 했었지.

"그랬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으로 향하는 형의 등을 보니까 안심이 되더라구요. 가족이 있으면, 나한테 형이 있으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그랬군요."

"형도 동생 갖고 싶다는 생각한 적 없으세요?"

동생이라······.

모든 막내들이 한 번쯤 갖게되는 생각 아닐까?

"있기야 했죠. 어렸을 적에."

"어······ 저는······."

내 말에 수저를 내려놓고 꼼지락거리는 주창범.

한동안 입을 오물거리던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응시했다.

"우진이 형을 제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요. 그렇게 마음 먹으니까 더이상 외롭지 않더라구요."

"······."

"그러니까 형도······ 혼자라고 느껴지신다면······ 저를 친동생으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주창범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정작 얘기를 꺼낸 녀석도 부끄러운지,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애도 아니고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주변에 앉아 쫑긋 귀를 세우고 있던 팀원들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친동생이라······.'

사실, 녀석은 그동안 나한테 참 많은 노력을 했다.

먼저 형, 형 거리면서 밝게 웃으며 다가왔고.

금주령이 풀렸을 땐 술 한잔하자며 내 팔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이외에도 내가 지시하는 거라면 군말 없이 따라와 주었다.

'어지간하면 마음을 안 주려고 했는데.'

나는 팔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

저런 말을 듣고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마음을 열고 있었던 모양.

"그래, 네 말이 맞다.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나는 녀석에게 말을 놓았다.

그러자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는 주창범.

"네, 형."

녀석이 힘차게 대답했다.

나이가 스물여섯이라고 했던가?

'나쁘지 않네.'

동생으로 삼기에 딱 좋은 나이였다.

―천상계 비상 위원회에서 무슨 일이?

―주신회 의장 환웅. "드디어 썩은 부분을 도려냈다."

―열두 주신 중 무려 세 명의 몸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악마. 그들을 5년이나 찾아다닌 오딘.

―천상계 비상 위원회의 선언. "반격의 시간."

―고위·초월 리그 정상화!

└뭔 소리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걸 보고도 이해를 못 하면 난독증 있는 거 아니냐?

└오딘 님이 의도적으로 환웅 님이랑 부딪히면서 다른 주신들 반응 체크. 그중에 의심 가는 두 명은 찾았는데, 두 명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타락 등 기타 사건 발생. 그걸 통해 세 명이라는 걸 추

└아, 씨. 엔터 잘못 눌렀다. 아무튼 추론해냄. 한 명은 끝끝내 찾지 못함. 이대로 흘러가면 천계가 무너지겠다고 판단, 과감하게 두 명 죽이면서 다른 주신들 반응 체크, 결국 거짓의 악마 나베리우스를 찾아냄.

└아니 그거 말고;; 밑에 내용이 이해가 안 된다는 거임.

└ㅁㅊ 고위 초월 애들로 니플헤임 입구 틀어막고, 열두 성계에 하위 상위 플레이어 대거 파견해서 이교도들 뿌리째 뽑아버리겠다는 게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임?

└결론적으로 마계에 들어가는 악마가 늘어난다는 뜻 아닌가? 그래서 지금까지 완전 박멸 안 시킨 거고?

└그거야 주신들 사이에 숨어 있던 악마가 방해해서 그런거고 ㅡㅡ 한번 싹 정리하면 단기적으로야 좀 어려워지겠지만, 장기적으론 마계 애들 수급 동력이 아예 사라지는 거임.

└휴우.. 주신 셋이 죽었다는 말에 천계 망하는 줄 알았네..

└ㅇㅇ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곤 생각했는데, 아예 손 놓고 있었던 게 아니었음 ㅠ

'중간계에 스며든 이교도 완전 박멸이라······.'

내 집무실.

의자에 앉아 커뮤니티 내용을 확인하던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쩐지 아세리안이 정신없이 바빠 보이더라니.'

어제 일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 위해 들렀는데, 너무 바빠 보여서 그냥 집무실로 왔다.

뭔 일이 있나 했더니, 아마 팀 투지에 들어온 오퍼를 처리하느라 그랬던 모양이었다.

하위, 상위 플레이어들을 대거 동원한다고 했으니까.

'그럼, 정산부터 해볼까.'

한 번 기지개를 쭈욱 켠 나는 서랍에서 빈 종이와 펜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이번 당직에서 벌어들인 걸 슥슥 적어나갔다.

고결한 수정 세 개와 144만 포인트.

저번 달에 들어온 플레잉 코치 정산 포인트는 29만 7천 포인트였다.

'고위 리그는 한 달에 한 번만 열린다고 했지.'

어제부로 고위 리그가 재오픈된 상황.

그럼 평균적으로 넉 달에서 다섯 달에 한 번씩 경기를 가질 것이다.

'경기 전까지 150만 포인트는 모을 수 있을 거야.'

나는 종이에 「150만 포인트 → 근력, 민첩, 체력 올리기」 라고 적었다.

원래는 144만 포인트로 스텟을 골고루 올리려고 계획했었다.

하지만 어제 정신에 몰빵한 상황.

이후 들어오는 포인트로 근민체를 상승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고결한 수정 한 개를 어디다 쓰냐는 건데.'

나는 검지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렸다.

가장 베스트는 내가 쓰는 거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올릴 스킬이 없는 상태.

스킬 슬롯을 추가로 얻지 않는 이상 쓸모가 없다.

그렇다고 팔기에도 애매했다.

'고결한 수정은 골드가 있어도 사기 어려운 아이템이지.'

내가 지금 골드가 궁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가지고 있다가 상위 넘버링에 올라오는 사람한테 주는 게 낫겠어.'

상위 넘버링에 올라왔다는 건 고위 리그에 도전할 자격이 생긴다는 뜻.

그때 가서 고결한 수정을 쥐여주면 확률이 더 높아질 것이다.

이걸로 집무실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끝.

'슬슬 움직여 볼까.'

다음 일정으론 권속 플레이어들과의 대련이 예정되어 있다.

나는 특수 중력 대련장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

테이블 한쪽에 놓여 있는 편지 봉투.

'후우.'

한동안 빤히 바라보던 나는 편지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뇌전을 끌어올려, 편지를 불태웠다.

콰직! 화르륵!

'꼭, 다시 만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