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 *

―우진이의 어깨에 얹어진 무게를 덜어줘야 해.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그럼 오늘 하루도 열심히 해볼까.

무의미한 과거 기억의 조각들이 날아든다.

'우진이가 누구지?'

분명 안우정 스스로가 했던 생각들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중간중간 떠오르는 기억들에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마계, 판데모니엄.

거대한 궁전 앞에 내려준 제파르가 수문 악마들에게 눈짓했다.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러자 곧장 문을 열어주는 수문 악마들.

"어서 오거라."

오만의 궁전으로 들어가자, 왕좌에 앉아 있던 한 사내가 안우정을 맞이했다.

사내는 왕좌에 삐딱하게 앉은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나한테 힘을 준다던 목소리의 주인인가 본데.'

남성을 똑바로 바라보던 안우정이 입을 열었다.

"당신인가? 나한테 힘을······."

그때였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뭐야!'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온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안우정을 짓눌렀다.

숨이 턱 막히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이 굽혀졌다.

'이익······!'

안우정은 이를 앙다물고 힘에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쿵!

"그래, 앞으로는 이곳에 들어오면 그렇게 무릎을 꿇도록 하거라. 얼마나 보기 좋은가."

"끄으윽······."

"제파르."

"옛, 왕이시여."

남성의 말에, 여기까지 안우정을 태워주었던 제파르라는 악마가 부복했다.

당당함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왕······ 이라고?'

그 말에 안우정은 눈을 번쩍 떴다.

왕.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릴 정도로 매력적인 단어.

가장 강한, 단 한 명의 존재에게 주어지는 수식어.

'누구도 날 내려다보지 못할 거야.'

그 단어가 주는 깊은 울림이 안우정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교육 후에 다시 데려오도록."

"······알겠습니다! 가시죠."

여전히 알 수 없는 힘이 짓누르고 있는 상황.

제파르가 안우정의 한쪽 팔을 잡은 채 질질 끌었다.

그럼에도 안우정은 왕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가지고 싶어, 저 자리.'

강해져서 저 자리에 앉고 싶다.

왜 강해지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 동생아. 꼭, 다시 만나.

꼭 저 자리를 가지고 싶었다.

< 213화. 폭풍의 서막(3) > 끝

< 214화. 폭풍의 서막(4) >

"아세리안 님, 끝났습니다."

"앗, 벌써요? 그럼 이것도 부탁해요!"

쾅!

"······!"

내 말에 아세리안이 한 무더기 서류 뭉치를 척! 하고 올려놨다.

어찌나 양이 많은지, 분명 서류 뭉치임에도 불구하고 망치로 때리는 듯한 소리가 날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내 키만큼 쌓여 있는 온갖 서류 더미.

그 속에 파묻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하위 리그 블러드나이트 297 오퍼 계약서

―경기 : 9경기 코메인 이벤트

―대상 :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 '레빈'

한 무더기로 쌓여 있는 오퍼의 첫 장은 레빈.

이제는 팀 투지 플레이어가 너무 많아서, 얼굴을 보지 않는 한 누구인지도 모른다.

'플레잉 코치 시스템.'

띠링!

[이름 : 레빈 콘라드 폰 아이히호른(닉네임 : 레빈)]

[근력 : 76] [민첩 : 77] [체력 : 77]

[정신 : 61] [지력 : 34] [마력 : 70]

[아세리안 코멘트 : 발리노르의 라미아 왕국 출신.]

[피넛엘 코멘트 : 전직 기사. 준네임드 급. 7기수로 들어옴.]

[포르도엘 코멘트 : 대화 나눠봤는데 재미없음.]

스텟은 양호하다.

아니, 코메인 이벤트 경기에 투입되기엔 지나치게 높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아세리안과 피넛엘의 코멘트를 체크한 나는, 아세리안의 직인이 새겨진 도장을 쾅! 찍었다.

"클라라 님, 7기수 레빈 님께 블러드나이트 297 코메인 이벤트에 참가하게 됐다고 전해주세요."

"네, 내일 중으로 전달하겠습니다!"

바로 곁에 시립해 있던 사용인이, 들고 있던 종이에 슥슥- 적었다.

'끝이 없군.'

들고 있던 계약서를 한쪽에 놓고, 또 다른 계약서를 확인한다.

플레잉 코치 시스템을 열어서 스텟을 체크한다.

그리고 아세리안과 피넛엘의 코멘트까지 본 뒤에 다시 도장을 찍는다.

마지막으로 곁에 있는 사용인에게 알려준다.

'단순노동이나 다름없지.'

이런 식으로 같은 일을 계속해서 반복했더니, 어느덧 세 시간가량 지나 있었다.

"하아······ 눈알이 빠질 것 가타요······."

책상에 엎어진 채, 녹초가 된 포르도엘이 앓는 소리를 냈다.

"후우, 앉아만 있었는데도 땀이 나는군."

옆에 앉아 있던 피넛엘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가 좀 뻐근한데.'

나는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었다.

정신없이 서류를 확인했더니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안우진 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아뇨,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원래 오퍼 체크는 아세리안과 두 천사만 담당한다.

하지만 천상계 비상 위원회에서 중간계를 정리하겠다고 공언한 뒤, 오퍼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상황.

평소 1주일에 1,000개 내외로 오던 오퍼가 이제는 5배 가까이 들어오다 보니, 세 명으로는 처리하기가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똑똑―

"아세리안 님, 이세연이에요!"

"네, 들어오세요!"

아세리안의 집무실 문이 열리자, 이세연과 4명의 사용인들이 양손에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고생 많으셨나 보네요. 점심 식사 가져왔어요!"

"잠시만요."

"앗, 네."

잠시 이세연을 멈춰 세운 나는 아세리안과 포르도엘의 책상을 합쳤다.

그리고 피넛엘과 내 책상을 합쳐, 자리를 두 개로 나누었다.

아세리안과 두 천사 사이에 껴서 눈치 보면서 먹을까 싶어, 일부러 자리를 나눈 것이다.

"사용인분들은 여기서 편하게 드세요."

"앗,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안우진 님!"

그러자 업무를 돕던 여섯 사용인이 고마움을 표했다.

함께 식사하기에 우리 넷은, 그들의 입장에선 까마득한 존재일 테니까.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자, 얼른 식사하죠! 포르도엘, 얼른 일어나."

"으으으응······ 1분만······."

"차라리 얼른 먹고 쉬어. 안우진 님이 도와주셔서 오후엔 쉴 수 있잖니."

"눼에."

아세리안의 말에 흐느적거리며 일어나는 포르도엘.

그때부터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안우진 님께 실례일 수 있는데, 지옥이 조용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수프, 빵, 그리고 샐러드에 스테이크.

무겁지도 않으면서, 배를 채우기에 적당한 식단.

샐러드를 오물거리던 아세리안이 말했다.

"저도 좀 의외이긴 했습니다."

열두 성계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구를 제외한 열한 성계에 뿌리내린 마계의 잔재를 정리하기로 공표한 상황.

당연히 그를 저지하기 위해 마계 쪽에서 액션을 취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 결과가 멈춰 있던 고위·초월 리그의 정상화.

"어떻게든 무스펠하임을 뚫고 들어올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강림을 통해서만 방해할 줄이야······."

하지만 마계의 전략은 천계의 예상을 빗나갔다.

니플헤임-무스펠하임의 외갈래 길을 뚫는 대신, 중간계에 하급과 중급 악마들이 강림하는 수를 낸 것이다.

덕분에 리그를 재오픈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직조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뭐, 나야 상관없지.'

플레잉 코치로 들어오는 포인트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해서, 내가 손해 본 건 딱히 없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더 좋았다.

"승급샷이 몇 개 들어왔습니까? 제가 검토하던 서류엔 세 개 있던데요."

"저도 안우진 님처럼 세 개 들어왔어요."

"으으음, 먹으니까 좀 살 것 같당. 제 쪽엔 다섯 개여."

"나는 네 개 들어왔다."

내 물음에 아세리안, 포르도엘, 피넛엘이 대답했다.

이번 주에 들어온 승급샷만 열다섯 개.

'나쁘지 않은데?'

그 숫자를 듣자 기분이 좋았다.

2기수는 전부 상위 리그에 올라왔고, 3기수도 70% 이상.

이제는 4기수한테도 승급샷이 오고 있는 것이다.

'상위 리그로 올라가는 관문의 높이가 낮아졌어.'

이대로만 흘러가면 팀 투지 소속 상위 플레이어의 숫자가 세 자리를 넘길 날이 머지않았다.

한마디로, 나한테 들어오는 포인트도 훨씬 많아질 거라는 뜻.

'권속 천사 권능이 나왔다는 말에 아세리안이 경악할 만했네.'

포인트가 많이 들어오면 내가 올릴 스텟도 많아진다.

그럼 권속 계약을 맺은 플레이어들은 더 많이 상승한다.

'권속 플레이어들이 고위 리그로 승급하는 게 꿈만은 아니겠군.'

다가올 그 날이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 * *

"어서 오십시오, 오딘 님."

"음, 한창 바쁠 텐데 도와줘서 고맙군."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발할라.

하위 리그 게임 메이커인 아나엘의 집무실에서, 오딘은 아나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카레브엘, 차와 다과 좀 부탁해. 전에 미카엘 님이 선물로 주신 것 있지?"

"예, 순향차로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나엘의 지시에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카레브엘.

그러자 오딘이 만류했다.

"오기 전에 이미 먹고 와서, 차랑 다과는 괜찮다네."

하위 리그를 운영하느라 정신없을 아나엘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카레브엘? 필요한 게 있다면 다시 부를게."

"알겠습니다."

다섯 쌍의 날개를 가진 카레브엘이 물러나고, 접견실에는 아나엘과 오딘 두 존재만이 남게 되었다.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확인해 보니, 플레이어 룬의 특이점이 발생한 건 블러드나이트 242부터였습니다. 그날을 기점으로 네임드라고 불리기 시작했더군요."

플레이어 룬.

팀 불굴 소속이자, 지구에서 나온 두 번째 네임드.

타락한 열두 플레이어 중 유일한 생존자.

그리고 고위 플레이어인 렌의 친형.

"당시 미션은 바빌론 성계의 누비아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때 오벨리스크로 들어가면서 시야가 차단된 적 있었는데, 안에서 어떤 아이템을 주운 것 같습니다."

"어떤 식으로 강해졌는지도 알아냈는가?"

"예. 원래 불꽃 속성의 스킬을 다뤘는데, 그 이후로 그의 불꽃이 훨씬 강해졌습니다."

"불꽃이 강해졌다라······."

오딘이 턱을 쓰다듬었다.

'둘 중 하나겠군.'

어떤 속성이든 강화시켜주거나, 아니면 불꽃 속성의 아이템이거나.

하지만 오딘은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어떤 속성이든 강화시켜주는 아이템이었다면, 룬의 성장률을 보이기 힘들 테니까.

불꽃 속성의 아이템이 아니고서야, 강해지는 건 한계가 존재했다.

"속성 강화인가? 아니면 불꽃 속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딘은 아나엘의 생각을 물었다.

실무자인 그녀의 입장은 다를 수도 있기 때문.

"불꽃 속성의 아이템으로 보입니다."

허나, 아나엘의 생각 또한 오딘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레비아탄······."

마계 칠 군주 중 하나.

불과 질투의 레비아탄.

아무래도 그의 아이템이 룬에게 흘러 들어간 것 같았다.

"바쁠 텐데 조사해 줘서 고맙네."

오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닙니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지요."

"바쁜 분들을 붙잡고 있어야 쓰겠나? 그럼 또 보도록 하지."

그러고는 곧바로 아나엘의 집무실을 나섰다.

은하수가 흩뿌려지는 발할라의 밤.

'뭔가 이상해.'

거리를 거닐던 오딘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플레이어 룬에게 고위 악마가 대거 붙어 있었던 이유.

그리고 친형제인 렌의 가면에서 느낀 묘한 위화감.

기분 탓일지는 모르지만, 왠지 마계에서 그들 형제를 노리는 느낌이었다.

―오딘께서는 오늘도 발할라를 돌고 계시는군.

―정말 부지런한 분이야.

―차 한잔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

이전과 다르게, 경의가 담긴 눈빛이 오딘에게 모여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깊은 생각에 빠진 채 부지런히 발을 놀리고 있었다.

오딘이 향하는 방향은 상위 리그 게임 메이커의 집무실.

'왜 그들 형제를 노리는 거지?'

렌·룬 형제가 뛰어나긴 하지만 초월 리그, 그리고 고위 리그엔 그보다 더 대단한 플레이어들이 많다.

굳이 렌과 룬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나씩 풀어나가는 수밖에.'

실마리를 풀기 위해선,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렌이 쓰고 있었던 기묘한 느낌을 주던 가면.

그게 뭔지 알아야,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카엘에게 가봐야겠군.'

그 아이는 렌을 직접 만나봤으니까.

그녀도 모르는 눈치였지만, 대략적인 감상이라도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오늘도 바쁘시군요, 오딘이시여."

미카엘의 집무실 앞.

새하얀 의복을 입은 한 남성이 오딘을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퀴리오스."

지구의 주신, 퀴리오스였다.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하고 싶군요."

"미안하오. 급한 용무가 있어서."

퀴리오스의 말에, 오딘이 고개를 저었다.

'이 자도 뭔가 미심쩍단 말이지.'

이전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지구의 주신이 된 존재.

조용히 천사들을 통해 알아봤음에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던 베일에 싸인 신.

그로 인해 오딘은 내심 퀴리오스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럼, 이만."

그래서 그를 지나쳐 미카엘의 집무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

순간 오딘은 궁니르를 소환할 뻔했다.

갑자기 퀴리오스가 바짝 다가왔기 때문.

하지만 그는 다 알고 있다는 듯,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다가와.

"정말 고생이 많구나."

작게 속삭였다.

"아들아."

"······!"

* * *

펄럭! 펄럭!

'욕심이 나는데.'

특수 중력 대련장.

허공을 날아다니던 나는 팀원들이 대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챙! 채애앵! 채챙!

"흥, 어제 당한 걸 또 당할 줄 알았냐!"

"바람의 시원함을, 불의 포근함을, 물의 깨끗함을 느껴보라. 그리고 진동하라, 땅의 거인이여."

"크윽! 젠장. 이걸로 144전 72승 72패로군."

검을 잡고 얼어붙던 8기수 플레이어들.

초보 티가 확 나던 그들이, 어느새 노련한 용병처럼 체력을 분배하며 대련을 펼치고 있다.

거리가 줄어들면 우왕좌왕하던 마법사들이, 주먹을 뻗고 발차기를 내지르며 상대를 견제한다.

은·엄폐물이 없으면 종잇장처럼 쓰러지던 암살자들도, 주변 환경을 이용하여 치고 빠지는 식으로 공격을 퍼붓는다.

'실력이 많이 올랐어.'

그래서 욕심이 났다.

관문이 낮아짐에 따라서, 상위 리그로 올라오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대거 늘어난 상황.

언제 다시 관문이 높아질지 모르니,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이 승급시켜 둘 생각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지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팀원들이 대련하는 모습을 보며, 더 획기적인 훈련법을 찾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효율이 높아지면, 금세 상위 플레이어들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

그때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뭐야?'

현재 특수 중력 대련장에 적용된 맵은 나무로 울창한 거대한 밀림.

그 한쪽 끝에서 떨어진 고위 마법에, 나는 눈을 치켜떴다.

팀 투지에서 저런 마법을 쓸 수 있는 플레이어는 딱 하나.

펄럭! 펄럭!

―안우진 니이이이이임!

거대한 버섯구름이 생성된 곳으로 향하자, 예상대로 카이로시아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쯧.'

요 근래 새로운 훈련법을 만들겠다며 두문불출하던 그녀가, 대련을 위해 저런 고위 마법을 펼칠 리가 없었으니까.

가벼운 한숨을 내쉰 나는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무슨 일이지?"

"에고, 한참 동안 찾아다녔잖아요!"

"뭔 일 있어?"

내 물음에 카이로시아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훗, 전에 그랬죠? 제가 훠어어얼씬 더 좋은 훈련법을 만들겠다고!"

'그랬었지.'

당소소의 독으로 정신력 훈련을 진행했을 때였던가.

―참나, 별꼴이야. 그냥 제조법만 알려주면 될 걸.

―흥! 저도 효율적인 훈련법을 만들어 내고 말겠어요.

―네, 안우진 님이 깜짝 놀랄 만한 걸로요!

아마 그때부터 카이로시아가 연구실에 처박혀 있었던 것 같았다.

"해냈어요."

"뭘?"

"아주아주아아아아아주 좋은 훈련법을 만들었다구요!"

"······!"

'진짜로?'

카이로시아의 말을 들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 214화. 폭풍의 서막(4) > 끝

< 215화. 폭풍의 서막(5) >

아세리안이 고신의 위位에 오르면서 직경 5킬로미터까지 커진 팜.

연구실로 가기 위해, 나는 카이로시아를 안은 채 하늘을 날았다.

카이로시아의 연구실은 8시 방향 끝에 있기에, 걸어서 가면 시간에 제법 걸리기 때문.

펄럭! 펄럭!

"여기지?"

"네, 보시면 진짜 깜짝 놀라실걸요?"

문 앞에 내려주니, 카이로시아가 호언장담하며 연구실 문을 열었다.

"······?"

'뭐야 이게?'

진짜 깜짝 놀랐다.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이야?'

문 너머에는 전투라도 펼쳐진 듯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50평 정도 크기의 방.

각종 선반과 테이블이 주르륵 늘어져 있고, 그 위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놓여 있다.

바닥에는 빈 유리병이 나뒹굴고, 대충 구겨버린 종이가 바닥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영화에서 본 어느 미치광이 과학자의 실험실이 떠오를 정도로 개판 오 분 전.

거기다 쉰내인지, 꾸릿꾸릿한 냄새인지, 청량한 향기인지 모를 온갖 것들이 섞여나오며 코끝을 자극했다.

'여길 들어가야 한다고?'

그 탓에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쯧."

"어? 왜 안 들어오세요?"

문 앞에서 서성이는 나를 카이로시아가 강하게 잡아끌었다.

"······들어가야지."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밟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카이로시아를 가볍게 타박했다.

"웬만하면 정리 좀 하지. 사용인들을 한 번 불러야겠군."

꼭 깔끔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정도라는 게 있다.

그녀의 연구실은 생활이 되나 싶을 만큼,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위험해서 안 돼요. 잘못 만지면 다칠 만한 게 너무 많거든요."

'위험하다고?'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접시 위에 혼자 둥둥 떠 있는 파란 구체를 톡 하고 건드렸다.

찌리리리리리리릿!

그러자 콘센트에 젓가락을 꽂았을 때처럼 엄청난 전류가 내 몸을 관통했다.

순간 내 몸에서 고기 타는 냄새가 났다.

"······."

'사용인들에게 정리를 맡기는 건 안 되겠군.'

이 주변엔 파란 구체처럼 희한한 게 한가득 있는 상황.

나는 사용인들에게 청소 지시를 하려던 생각을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자, 여기예요!"

연구실 안쪽 끝에 달려 있는 또 다른 문.

카이로시아가 방긋 웃으며 문을 열자, 새로운 세계가 나타났다.

졸졸졸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 위엔 태양이 떠 있다.

빼곡하게 서 있는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나비와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연구실 너머에 존재할 수 없는 공간.

"여긴 뭐지?"

"후후, 여신님께 휴게실 좀 만들어 달라고 부탁드렸죠."

휴게실.

중력 특수 대련장처럼 맵을 로딩할 수 있는 특수 건물.

일부 팀이 이런 식으로 휴양지처럼 만들어서 바비큐도 구워 먹으면서 놀기도 한다.

특별한 방법이 아니고서야 팜 외부로 나갈 수 없기에, 아예 팜 내부에다가 휴가처럼 보낼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근데 이거 엄청 비쌀 텐데?'

순간 미간을 찡그리는 아세리안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카이로시아가 끌고 간 곳은 시냇물 너머에 있는 작은 공터.

바닥엔 직경 100미터 정도 되는 기하학 문양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내부에 새겨진 육각형의 꼭짓점에 각각 유니콘의 뿔, 원소석, 불꽃 바실리스크의 심장, 얼음 드레이크의 송곳니 등등 고순도 마력을 품고 있는 아이템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법인데?'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 복잡한 고위 마법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

"어디에 쓰는 마법진이지?"

"후후, 들어가 보시면 알아요. 쩌어기 중앙에 가셔서 눈을 감고 명상해 보세요."

카이로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장 중심부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녀가 얘기한 것처럼 바닥에 자리를 잡고 두 눈을 감았다.

'명상하기 좋은 분위기네.'

시냇물 소리가 들려온다.

물기를 머금은 흙냄새가 폐를 청량하게 만든다.

시원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땀을 닦아준다.

그리고.

띠링!

[<마법진:초특급슈퍼울트라마나집약마법진>에 입장했습니다.]

[제작자 : 플레이어 '카이로시아']

[기능 : 마나를 극단적으로 응축하는 효과. 내부에서 마력 수련 시 50배 더 빠르게 상승한다.]

마나를 응축하는 마법진.

용도는······.

'뭐? 50배?'

마력 수련을 50배 더 빠르게 해주는 마법진이었다.

* * *

니플헤임, 마계의 거점 프레미어.

"생각보다 손해가 너무 막심합니다. 타락 플레이어들을 잡는 데 혈안이 될 줄 알았던 천계가 무스펠하임을 통째로 차지하면서, 중간계에 대한 지원이 끊긴 게 너무 컸습니다."

고위 악마 살레오스가 상석에 앉은 레비아탄에게 순찰 내용을 보고했다.

"강림을 통한 견제에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이대로 두면 중간계가 완전히 정리될 수도 있습니다."

"······."

"무스펠하임 입구를 봉쇄하고 있는 천계의 병력을 어떻게든 뚫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침묵.

그 모습에 계속 말을 이어가려던 셀레오스가, 입을 콱! 다물었다.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던 레비아탄이 눈을 떴기 때문.

"무스펠하임 입구를 뚫어야 한다고 했는가."

"예, 군주시여."

"그 전에 니플헤임부터 정리하는 걸로 하지."

레비아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지형도로 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검은 말 대다수를 엘린 성과 알츠카인 성으로 슥- 옮겼다.

회전을 펼치다가, 잘못해서 후방을 공격당할 것을 염려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레비아탄의 말에 셀레오스는 부정적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들도 두 개의 성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입니다. 공성전을 펼치기엔 피해가 너무 클 것으로 사료됩니다."

천계에선 마계가 두 개의 성을 노릴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는 상황.

기습이 아닌 정공으로 공성전을 펼쳤다간, 엄청난 피해를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레비아탄의 말에 셀레오스는 경악했다.

"분노의 군주가 곧 도착할 것이다."

"사탄께서? 허나, 그러면 천계에서도 칼을 뽑아 들 겁니다."

대전쟁 이후, 천계와 마계 사이에 암묵적인 룰이 생겼다.

군주 급, 그리고 주신 급은 전장에 나오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룰은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었다.

마계에서는 주로 최상급 악마를, 천계에서는 플레이어들만을 내보내며 소모전을 펼치고 있었으니까.

"전력을 다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하는 법. 간 보는 건 끝났다. 이제는 밀어붙여야 할 때."

그러나 레비아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미 뜻을 확고하게 정한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레비아탄의 말에 셀레오스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군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맞아.'

중간계가 완전히 정리되는 순간, 마계는 영혼을 수급할 방법이 사라진다.

차라리 영혼이 폭발적으로 들어오고 있는 지금, 승부를 거는 게 맞을 것이다.

"마계도 다녀왔다고 했던가. 그릇의 상태는?"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큭큭큭큭, 내 마기가 골수까지 침투한 모양이군."

그러자 레비아탄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

지금껏 셀레오스가 보지 못한, 아주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어서 숙주를 잡아 와야겠군. 니플헤임을 차지하고 나서 총공세를 준비하라."

"총공세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셀레오스.

레비아탄이 지형도에 있는 검은 말들을 무스펠하임 입구로 옮겼다.

그리고 암흑의 세계, 헬하임에 있던 당나귀 모양의 말을 집었다.

다른 그 어느 것보다 훨씬 거대한 말이었다.

"나태의 군주를 숨겨뒀다가, 놈들이 방심하는 틈에 바로 숙주를 낚아채면 되겠지."

* * *

"이, 이게 뭐예요?"

"카이로시아가 고안한 마법진이라더군요."

연구실 옆에 딸려 있던 휴게실.

"에엑? 마력 효율 오십 배? 이 정도로 대단한 진은 처음이에요!"

거대한 마법진을 본 아세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카이로시아는 천재가 분명해요! 이럴 수가······."

아세리안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마법진 여기저기를 뜯어보았다.

무척 감탄한 듯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천재라······.'

나도 아세리안의 말에 동의한다.

당소소에게 경쟁심을 불태우며 더 좋은 훈련법을 만들겠다고 두문불출한 지 고작 2달.

그 사이에 카이로시아는 기존에 있던 마법진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새로운 걸 창조해 버린 것이다.

"휴우우우, 이제 유니콘의 뿔 값을 아낄 수 있겠어요!"

아세리안이 연신 기뻐했다.

'자금 압박이 제법 심했던 모양이군.'

지금까지 팀 투지는 유니콘의 뿔을 이용해 마력을 올리고 있던 상황.

하지만 유니콘의 뿔을 녹이려면 발리노르 성계의 안타레스에서 나오는 마력의 호숫물이 필요하다.

그로 인해 서브 미션을 내리는 등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력을 안 올릴 수도 없지.'

단순히 스킬을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기에 마력을 씌우거나, 성질을 바꿔 절벽을 오르는 등 마력은 정말 많은 곳에 이용된다.

다만, 마력을 수련할 시간에 근민체를 올리고, 골드로 때려 박는 게 더 효율적이어서 그랬을 뿐.

'2만 명이 넘으니까 이젠 그것도 쉽지 않았을 거야.'

그런 의미에서 아세리안이 저렇게 기뻐하는 게 이해가 됐다.

"당장 이 수련법을 상용화 해야겠어요. 안 그래도 요즘 유니콘의 뿔 물량이 줄어들어서 마력을 못 올리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많았거든요."

"제가 피넛엘님께 전달하겠습니다. 아, 아세리안 님."

"네?"

"슬슬 9기수 플레이어들을 뽑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뚝!

"······아, 9기수요?"

순간 몸을 흠칫하는 아세리안.

그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뽑긴 뽑아야죠. 근데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요."

"골드 때문에 그러십니까?"

"······네에."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8기수로 들어온 플레이어의 숫자가 만 오천 명.

그중 3,800명 정도가 사망했다.

즉, 9기수로 들어올 신입 플레이어의 숫자는 대략 45,000명가량.

"아무리 장비를 대여해 준다고 해도 몇만 세트는 사야 하잖아요. 거기다 스킬북도 엄청 많이 필요하구요. 식재료비, 생필품, 거기다 독까지······. 지금 재정 상태로는 2만 명 정도가 최대에요."

"음······ 얼마 정도가 필요하십니까?"

"최소 10억 골드요."

아세리안의 입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금액이 튀어나왔다.

엄청난 금액의 골드를 보유하고 있는 나조차 당황할 정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지간한 대형 팀에서 데리고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1만 명 정도.

그것보다 5배가량을 뽑는 건데, 골드가 어마어마하게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비나 스킬북 같은 건 공산품이 아니라서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지 않으니까.

오히려 수요가 많아지면서 가격이 더 오르는 게 당연했다.

"그럼 이건 어떠십니까?"

"방법이 있으신가요?"

내가 운을 떼자, 아세리안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슬슬 훈련법 일부를 팔죠."

"훈련법이요?"

"예, 며칠 전에 포르도엘 님이 그러시더군요. 천계를 돌아다니다 보니, 우리 팀과 비슷한 훈련법을 적용한 곳이 간간이 보인다고요."

당시, 포르도엘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다른 팀들이 1회차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훈련법을 알아냈기 때문.

아무래도 팀 투지라는 초신성이 탄생하다 보니, 그에 자극받아서 연구를 시작한 팀들이 많은 것 같았다.

한마디로, 내가 회귀한 나비효과랄까.

"물론 아예 다 오픈하자는 건 아닙니다. 휴식의 방을 이용한 훈련법이라든가, 유니콘의 뿔로 마력을 올리는 방법같이 기초적인 거 몇 개 묶어서 팔자는 뜻이죠."

"음······."

"그렇게 되면 유니콘의 뿔 가격도 폭등할 겁니다. 지금 사재기 해뒀다가 풀면 엄청난 차익을 남기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제 우리 팀은 초특급······ 카이로시아가 만든 좋은 마법진이 있어서 유니콘의 뿔이 필요 없는 상황.

유니콘의 뿔을 쟁여놨다가 팔면 1억 골드쯤은 우습게 벌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런 방법이 있네요! 아직 여유분도 제법 남았거든요. 그럼 가격은 얼마 정도 생각하시나요?"

직전까지만 해도 시든 꽃이었던 아세리안이 활짝 웃었다.

볼이 빨갛게 상기된 게, 돈 벌 생각에 제법 흥분한 모양.

"삼백만 골드로 하죠."

"삼백만 골드요······?"

아세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별로 비싼 금액은 아닐 겁니다."

"아뇨, 아뇨. 오히려 너무 싸서요. 천만 골드는 돼야 하지 않을까요?"

"······천만 골드면 아무도 안 살 것 같습니다만."

"글쎄요, 오히려 비싸서 잘 팔릴걸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천만 골드.

어지간한 소형 팀은 쳐다도 못 볼 정도로 엄청난 거액이다.

당장 초대형 사이즈로 들어선 우리 팀도 10억 골드가 없어서 확장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차라리 박리다매 전략을 취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러자 아세리안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우리 팀은 생존율 1위, 승률 1위 팀이잖아요. 프리미엄이라는 게 붙을 수밖에 없죠. 그리고 골드가 없으면 그에 준하는 아이템을 달라고 해도 되구요."

"흠······."

"한번 저만 믿어보세요!"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215화. 폭풍의 서막(5) > 끝

< 216화. 폭풍의 서막(6) >

"이것으로 초월 리그의 정원을 100명에서 120명으로 20퍼센트 늘리는 안건이 통과되었습니다."

땅― 땅― 땅―

"후우······."

천상계 비상 위원회 의장, 환웅이 나무망치로 된 의사봉議事棒을 내려치자, 곳곳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게 오늘의 마지막 안건이었군요.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모두들 수고 많았소이다."

처리할 안건이 너무 많다 보니, 리그가 열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대신 이상의 신들이 발할라에 모여 있던 상황.

자리에서 일어난 신들이 서둘러 회당을 나섰다.

'너무 오래 걸렸어.'

팀 '절망'의 주인, 대신 로키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로키 님. 바로 비프로스트를 열겠습니다."

회당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오는 천사.

"음, 팜으로 가지."

"네."

[무지개 다리!]

눈앞에 등장한 공간의 왜곡을 넘자, 팀 절망의 팜이 보인다.

'쯧, 골치가 아프군.'

그날의 여파가 곳곳에 남아있는 걸 본 로키가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건물들 사이로, 일부 새롭게 지어진 깨끗한 건물들.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아 곳곳에 얼룩진 피.

"6급 능천사, 오리엘이 로키 님을 뵙습니다."

"4급 주천사, 디나엘이 고귀한 분을 뵈어요."

"신이시여."

그리고 잔뜩 어두워진 천사와 플레이어들의 표정까지.

팜에 퍼져 있는 암울한 분위기에 로키가 탄식했다.

'고작 한 명 때문에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어.'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 이후 멘탈이 무너진 주소월.

점점 맛이 가던 탓에, 같은 팀의 플레이어들조차 점점 그녀를 멀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설마 점심시간에, 그것도 식당에서 난리를 칠 줄이야.

'젠장, 젠장!'

생존자들의 진술을 들어 보니, 딱 한 번이었다고 한다.

딱 한 번의 공격.

그로 인해 식사에 집중하던 고위 플레이어 한 명, 그리고 열셋의 상위 플레이어가 죽었다.

모두 팀 절망을 이끌어가는 대들보였다.

주소월이 상위 넘버링 플레이어였던 탓에, 그녀 근처에서 식사하는 팀원들 또한 높은 수준의 플레이어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

'차라리 그 개같은 년을 찢어 죽였더라면 이 정도로 사기가 낮아지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주소월은 그 한 번의 공격 직후 지옥으로 튕겨 나갔다.

플레이어들이 화풀이할 대상조차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예를 차릴 것 없다. 모두들 하던 일을 마저 하라."

로키가 애써 분을 삭히며 차분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모여든 천사와 플레이어들을 물린 로키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상태창을 열어, 이제 막 시작된 상위 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 149를 관람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경기의 중계를 맡게 된 고신 디온입니다. 옆에는 해설을 맡아주실 고신 베론 님입니다. 안녕하세요, 베론 님.

―예, 안녕하세요. 1경기가 치러지는 곳은 알프하임의 타이샨 산맥이네요. 수많은 이종족들이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곳이죠. 참가 인원은 천 명. 미션은 아크 리치 사냥입니다.

해설자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언데드 군단과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대규모 전투가 펼쳐졌다.

수십만 언데드 한복판을 각종 마법이 폭격하고, 검과 방패가 곳곳에서 번쩍인다.

그 사이에서 로키는 팀 절망 소속의 플레이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잘 해줘야 할 텐데.'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선 소속 플레이어들이 빨리 성장해야 하는 상황.

그 어느 때보다 차세대 유망주에게 많은 기대가 쏠릴 수밖에 없었다.

콰지직! 콰직! 꽈아아아아아아아앙!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절망 소속 플레이어들이 아니었다.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 모용악과 루치아노. 승급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둘 다 정말 잘 싸우네요.

―저는 지금까지 뇌전 속성 스킬을 새로 배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아이템의 성능인 것 같습니다. 스킬 슬롯은 5개밖에 안 되니까요.

모용악의 검이 북두칠성을 그리며 사방을 휘젓는다.

그 안에 담긴 뇌전의 기운이 주변을 난도질한다.

간간이 벼락이 터지며 블랭크 스킬을 쓰고, 위기의 순간에는 장거리 이동도 사용한다.

'미친.'

└와 씨바 개사기네 ㅋㅋㅋㅋㅋ 도대체 스킬이 몇 개나 있는 거임?

└ㄴㄴ 스킬이 아니라 아이템인 듯.

└그럼 더 개쩌는 거지. 고위 등급 아이템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다는 거여 ㅡㅡ

└하위 리그를 팀 투지가 휩쓸고 있다는 얘기 들었을 땐 별생각 없었는데 ㄷㄷ 렌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ㅈㄴ 잘 싸움;;

└난 모용악이랑 루치아노를 하위 리그부터 봐왔는데, 볼 때마다 성장률이 어마어마함. 쟤네는 스텟 마의 구간이 없는 느낌임 ㄷㄷ

└조금만 더 지나면 팀 투지가 상위 리그도 씹어 먹는다에 내 왼쪽 손목 건다.

그 광경을 본 신들이 극찬을 쏟아낼 정도였다.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냐고.'

로키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단순히 스킬을 궁금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팀원 하나하나가 저렇게 강할 수 있는 거지?'

팀 절망도 그동안 육성법을 개량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쉬는 시간도 없이 플레이어들을 굴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커뮤니티에서 긁어모은 어렵고 힘들다는 훈련으로 커리큘럼을 꽉 채워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꽝.

'오히려 더 안 좋아졌어.'

처음 1주일 정도는 효과가 있었으나 점점 시간이 갈수록 효율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쉬는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의욕도 떨어지고, 과로로 쓰러지는 플레이어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반대로 쉬는 시간을 충분히 줘가면서 육성해 봤지만, 그러자니 또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어떻게든 육성법을 알아내야 하는데.'

그 이후로, 로키는 팀 투지의 육성법을 얻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육성법을 알아내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했다.

팀 투지 소속 천사들에게도 접근해 보고, 팀 투지에서 판매로 나온 매물이 없나 매일 같이 확인하는 건 물론, 아예 주인인 아세리안에게 직접 연락해 보기까지 했을 정도.

하지만 그 무엇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팀 투지 소속 천사들은 단둘뿐.

초대형 팜을 운영하는 것 치고 천사의 숫자가 너무 적은 데다가, 그 두 명도 아세리안의 친자매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팀이 굴러가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어찌 됐든 팀 투지는 경기 성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심지어 투지에서 판매하는 플레이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아세리안에겐 제의는 감사하나 거절한다는 연락만 받은 것이다.

―오오! 말씀드리는 순간, 플레이어 모용악이 측면 돌파에 성공합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루치아노가 곧장 길을 만들어 내네요. 정말 대단한 판단력이네요.

―과감하기도 하죠. 지금 모습을 유지한다면 고위 리그 승급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팀 투지 얘기밖에 없군.'

침을 튀겨 가며 모용악과 루치아노를 극찬하는 해설자들.

반면에 팀 절망의 차세대 유망주들의 닉네임은 단 한 번도 언급이 되질 않았다.

아이템과 스킬 등 온갖 지원을 몰아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이블러드나이트 149의 1경기는 팀 투지가 가져갑니다!

결국 모용악이 아크 리치를 베는 걸 끝으로 경기 종료.

'짜증 나는군.'

로키는 신경질적으로 홀로그램을 닫았다.

기분이 무척 더러웠다.

누구는 미친년 하나 때문에 피해를 봐서 허덕이고 있는데, 팀 투지는 계속해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급신 나부랭이가 이끌던 팀이.

'후우, 다른 팀에서 쓸 만한 플레이어들이라도 영입해야 하나.'

유망주들은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들의 성장률을 따라가지 못한다.

결국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플레이어를 영입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로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커뮤니티로 접속했다.

상위 리그 이상의 플레이어들은 비싼 가격 탓에 중개 거래소에 올라오지 않기 때문.

직접 커뮤니티에서 컨택 후 가격을 조율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때였다.

'뭐야?'

커뮤니티를 보던 로키가 눈을 번쩍 떴다.

올라온 지 37분밖에 안 된 게시글의 조회수가 100만을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팀 투지 훈련법 판매합······ 뭐라고?'

글의 제목에 투지의 육성법을 판매한다고 쓰여 있었던 것.

로키는 곧장 게시글을 눌러, 내용을 확인했다.

서문은 온갖 수식어구로 잔뜩 꾸며진 문장이었다.

천계의 안위에 대한 걱정, 그리고 주저리주저리 펼쳐놓은 안부 인사.

그 모든 것을 무시한 로키는 바로 본론을 보기 위해 스크롤을 쭈욱 내렸다.

「······그런 이유로 팀 투지의 훈련법 일부를 판매하고자 합니다. 가격은 1천만 골드.

아이템 or 스킬북으로 대체할 수 있으며, 이 게시글로 인해 물가가 급등할 우려가 있으니 시세는 1주일 전으로 계산하고자 합니다.」

팀 투지의 육성법 판매.

가격은 1천만 골드.

'씨발······.'

로키는 게시글을 보는 순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팀 투지의 육성법이 궁금하긴 했지만, 이런 방식은 원하지 않았으니까.

1천만 골드에 육성법 구매?

'안 살 신이 누가 있나!'

이건 구입하지 않는 신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선착순 몇 명에게만 판매하는 게 아니기 때문.

구입한 팀들이 승승장구할 게 뻔한 상황에서, 1천만 골드가 아깝다며 투자하지 않는 신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반면에 팀 투지는 육성법을 판 수익으로 또 한 단계 성장할테고.

'커뮤니티에 풀리는 일도 없겠지.'

팀 투지의 육성법을 구입한 신들도 투자한 금액이 있어서 보안에 철저히 대비할 것이 분명했다.

천사들에겐 신성을 걸고 맹세시키고, 커뮤니티에 글을 쓸 수 없는 플레이어에게는 판매 자체를 안 해버리면 충분하니까.

한마디로, 도태되지 않으려면 팀 투지에게 1천만 골드를 내고 육성법을 얻는 수밖에 없다는 뜻.

'어쩔 수 없군.'

씩씩거리던 로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 또한 이 거대한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다.

―팀 '절망' 구입하겠음.

* * *

다음 날 저녁.

"제 말이 맞죠?"

집무실 의자에 앉은 아세리안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얼마나 팔렸습니까?"

"총 122억 골드요. 대부분은 스킬북 혹은 아이템이고, 골드는 7억밖에 안 들어왔어요. 생각보다 현찰을 많이 가지고 있는 팀이 없더라구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떡- 하고 벌렸다.

'대박이네.'

122억 골드.

매물만 있다면 다이아몬드 등급의 스킬도 몇 개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거액.

순간 나도 모르게, 차라리 조금 일찍 풀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지.'

아세리안이 게시글을 올린 건 어제 오후.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100억 골드 정도는 더 들어올 수도 있었다.

"스킬북이나 아이템은 뭐가 들어왔습니까?"

"저도 아직 몰라요. 목록 들어오면 클로에 씨한테 가격 체크하고, 등급별로 나눠달라고 부탁했거든요."

클로에는 중개 거래소를 전문적으로 체크하기 위해 내가 뽑아 달라고 부탁한 사용인이다.

'쉽지 않을 텐데?'

몇 개월 전, 내가 추가로 세 명의 사용인을 휘하로 붙여주긴 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처리하기엔 감당하기 힘든 업무량이었다.

"클로에 휘하 사용인이 세 명밖에 없지 않습니까? 고작 세 명으로는 쉽지 않을 텐데요."

"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여덟 명을 추가로 지원해 줬어요."

122억 골드 중 115억가량이 아이템과 스킬북으로 들어온 상황.

일전에 내가 마교의 서고에서 10억 골드치 스킬북을 가지고 왔을 때도 한참 걸렸었으니, 못해도 1주일 이상은 분류에만 전념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스킬북이랑 아이템이 많이 들어와서 다행이군.'

8기수로 들어온 플레이어의 숫자가 15,000 명이 넘으면서, 장비 대여나 스킬북 지원이 상대적으로 부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115억 골드 분량의 물량이 터지면, 8기수의 수준이 단숨에 몇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어쨌든.

'준비는 완벽해.'

피식 미소 지은 나는 아세리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슬슬 9기수를 뽑을 시간이군요."

이제, 5만 명 가까이 되는 초특급 대형 스노우볼을 굴릴 차례.

내 말에 아세리안이 방긋 웃었다.

"좋아요!"

< 216화. 폭풍의 서막(6) > 끝

< 217화. 폭풍의 서막(7) >

평소 팀 투지의 팜은 열정으로 가득 찬 분화구 같은 분위기가 흐른다.

하지만 오늘은 아수라장이라는 표현이 딱 적당할 듯 싶었다.

"이봐요, 신입! 이쪽으로 와요!"

"어어! 거긴 안 돼! 4기수 이상 선배님들의 숙소라고!"

"세이셀, 왜 네 명이지? 한 명은 어디 갔어!"

시장통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인파가 팜을 돌아다닌다.

곳곳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고, 간간이 길을 잃어서 미아가 된 신입들이 보인다.

길을 지나다닐 때마다 다른 사람과 어깨가 부딪힌다.

'완전히 난리가 났군.'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여신님. 7기수 헥스입니다. 왼쪽부터 8기수 콜턴과 피기정, 제레미, 파블로라고 합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 지금부터 콜턴 씨, 피기정 씨, 제레미 씨, 파블로 씨에게 배정될 신입 플레이어를 뽑겠습니다."

이전과 달리 랜덤 뽑기를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상황.

한 번에 뽑으면 통제가 안 될 것을 우려해, 최대한 가이드 라인을 세우고 했는데도 이 난리 통이 벌어진 것이다.

"여, 여긴······?"

"이곳이 콜로세움인가······."

"천사다! 대, 대체!"

"조용, 조용!"

7기수 팀원이 네 명의 휘하 8기수 플레이어들을 데려오면, 아세리안이 랜덤 뽑기로 열여섯 명을 뽑는다.

그러면 피넛엘과 포르도엘이 곁에서 스텟 등등을 체크하며, 코멘트를 남긴다.

네임드, 혹은 준네임드급이 아니면 8기수에게 각각 네 명씩 붙이고, 교육을 위탁한다.

이런 식으로 진행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숫자가 숫자인지라 난리 통이 쉽사리 사그라들 것 같지 않았다.

"안우진 님, 제7 체력단련실 근처에서 싸움이 났습니다. 신입 플레이어끼리 시비가 붙은 모양입니다."

"선임 훈육자가 누굽니까."

"8기수 아이덴입니다."

"아이덴 님보고 중력 특수 대련장으로 데려가서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라고 하세요."

"옛!"

이번에 뽑을 신입 플레이어의 숫자는 4만 5천 명.

인원이 너무 많은 데다가, 각각 문화와 상식이 다른 열두 성계에서 모여든 이들이다.

때문에 싸움과 폭행 등 온갖 사건 사고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

'미리 팀원들을 배치해 놓아서 다행이야.'

이 정도의 난리를 예상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소란이 있을 거라고 판단한 나는, 당분간 오퍼가 없는 모든 플레이어를 총동원했다.

그리고 팜 곳곳에 깔아놓은 후,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매뉴얼을 넘겨주며 통제를 부탁한 상태.

덕분에 그나마 큰 문제 없이 랜덤 뽑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우진이 형, 제2 식당 앞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어요. 무림 출신 플레이어가 지구인을 죽였어요."

다만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탓에, 간간이 살인 사건도 벌어졌다.

나는 그때마다 가차 없이 얘기했다.

"죽여."

"······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콜로세움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존재한다.

특히 팜에서의 살인 사건은 굉장히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수틀리면 무기 빼 들고 철천지원수처럼 싸울 수도 있었으니까.

이런 건 초장에 확실하게 잡아둬야만 했다.

"다음 조 누구예요!"

"예, 여신님! 7기수 피넬릭입니다! 각자 자기소개를······."

띠링!

[보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5% 상승합니다.]

[<목걸이:영롱한 달빛>이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그렇게 별이 쏟아지는 밤이 되었다.

"다음, 어?"

깜깜하고 조용한 공터로 고개를 돌린 아세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조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아세리안 님."

"하······ 다들 고생 많았어요."

내 말에 긴 한숨을 내쉬는 아세리안.

그녀의 눈가에 짙은 다크서클이 흘러내렸다.

아침 일찍 시작한 랜덤 뽑기가, 밤늦게나 되어서야 끝난 것이다.

"포르도엘은 주글 거 가타여······."

"정말 오랜만에 진이 빠지는 기분이다."

흐느적거리는 포르도엘과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 피넛엘.

두 천사를 보니 정말 고된 일정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짜 대박이네.'

나는 팜을 한번 쓸어보았다.

오늘 뽑은 플레이어의 숫자는 45,714명.

우린 네트워크 시스템이 갖춰진 데다가, 미리 어느 정도 대비도 해뒀다.

그런데도 이 정도로 개판이었으니, 아마 다른 팀들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아세리안 님, 대신으로 승급까지 얼마나 남으셨습니까?"

"어······ 왜요?"

"팜이 비좁아 보여서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직경 5킬로미터의 거대한 팜.

넓이가 20km² 정도니까, 면적으로만 보면 서울의 한 개 구 사이즈와 비슷할 것이다.

그럼에도 플레이어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비좁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하나의 사회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야.'

9기수 45,000명, 사용인 15,000명을 추가로 뽑으면서 어느덧 10만 명에 육박하게 된 상황.

아파트처럼 고층 건물이 없는 데다가, 대련장이나 체력단련실, 연구실, 훈련소, 식당 등등 훈련을 위한 건물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필요한 면적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아, 조금 넓혀야 할 것 같긴 해요. 근데 고신부터는 딱 얼마의 포인트가 필요하다, 같은 개념이 없어요."

"그럼요?"

"상위 156명. 그 안에 들면 천상계 관리 위원회에서 연락이 오는 시스템이거든요."

"서열제라는 뜻이군요."

상위 156명.

그중에 주신 열두 명을 제외하면, 144명이 남는다.

한마디로 주신이 열두 명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대신 또한 144명으로 숫자 제한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주신 세 명이 죽지 않았습니까?"

"네, 맞아요. 근데 새롭게 채워졌다는 얘기는 없었어요. 주신부터는 또 아버지께서 직접 임명하셔야 하거든요."

'복잡하군.'

"혹시 승급 말고 팜을 넓힐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네. 딱 정해져 있는 거라서요."

"흠, 알겠습니다."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팜의 절대 면적을 넓힐 순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크기를 키울 수 없다면, 내부 배치를 바꾸면 된다.

'오랜만에 심시티를 해야겠군.'

일단은 낭비되는 공간을 최대한 줄여나가는 수밖에.

* * *

"이번에 들어온 아이템은 총 219,154개입니다. 전설 등급이 521개, 고귀 등급이 20,893개, 희귀 등급이 197,740개입니다."

"······!"

내 집무실.

1기수부터 3기수까지 모인 자리에서, 클로에가 정리한 결과를 보고했다.

"거의 20만 개 가까이 되는군요. 분류하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인력을 충원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끝냈습니다. 스킬도 바로 보고드릴까요?"

"네, 부탁합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1티어 등급이 40,992개, 2티어가 153,447개······."

"우와······."

"1티어가 4만 개······?"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함께 자리한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감탄을 넘어 경악이 흘러나왔다.

"3티어 등급이······."

"그만. 3티어는 얘기 안 해도 됩니다."

"네!"

"총 어느 정도 들어온 겁니까?"

"700억 골드가량입니다."

내 물음에 클로에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700억 골드.

한 팀당 천만 골드에 팔았으니, 대충 7천 개의 팀이 훈련법을 구입해 간 것이다.

팜을 운영하는 팀이 몇 개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팀이 데리고 있는 대략적인 플레이어의 숫자로 역계산 하면, 거의 대다수의 팀이 구입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아뇨, 오히려 비싸서 잘 팔릴걸요?

대박을 장담하던 아세리안.

'아세리안의 말이 맞았군.'

나는 깔끔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그녀가 천만 골드에 팔자고 한 덕분에, 진짜 초특급 대박이 터진 것이다.

"수고 많았습니다. 이제 볼일 보셔도 됩니다."

"네."

말을 끝내자, 클로에가 집무실 한쪽 구석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투명 인간인 것처럼 조용히 시립했다.

'아직 용건이 남았나?'

아무래도 나랑 단둘이 할 얘기가 있는 모양.

"모두 들었겠지만, 우리 팀의 훈련법 일부를 제법 비싼 가격에 판매했습니다."

"정말 대박이네요. 저는 제가 숫자를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이 정도면 우리 팀이 상위 리그도 휩쓸어 버리겠는데요?"

내가 화두를 꺼내자, 2기수 사인방과 3기수 플레이어들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흥분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지.'

나는 루치아노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이템과 스킬은 즉시 전력을 향상시켜주는 요소들.

예상을 크게 상회할 정도로 많이 들어온 덕분에, 팀원들에게 전부 돌려도 충분할 물량이 쌓여있다.

거기다 상위 리그로 올라가는 관문이 낮아졌고,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구간도 어느 정도 줄어든 상황.

'이대로면 얼마 안 가서 상위 플레이어들이 쏟아져 나오겠지.'

당장, 클로에를 제외하고 이 자리에 있는 열여덟 명 전부 상위 플레이어.

거기다 4기수에서도 요 근래 승급하는 플레이어들이 등장하고 있다.

만약 5기수에서도 상위 플레이어가 나온다면, 그 밑에도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장비는 기존처럼 대여 시스템으로 갈 겁니다. 다만, 일부 높은 등급 중에 희망하는 장비가 있다면, 피넛엘 님께 면담을 신청하세요."

"넵!"

"알겠어요, 형."

"스킬은 1티어 한 개, 2티어 네 개를 분배할 겁니다. 1티어 스킬로 꽉 채우지 못했다면 기수에 상관없이 누구든 포르도엘 님을 찾아가면 됩니다."

나는 팀원들에게, 아세리안에게 전달받은 내용을 전했다.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나쁘지 않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플레잉 코치로 들어오는 포인트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고 있었으니까.

일주일에 들어오는 포인트가 대략 40만 정도.

지금 상태에서 9기수 플레이어들이 경기에 투입되는 순간, 어마어마한 포인트가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네트워크 시스템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군.'

그날을 생각하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밑에다가 확실하게 전달하세요. 빨리 훈련을 시작하는 것보다 기본적인 걸 확실하게 잡고 가는 게 중요합니다."

"예."

"팜에 적응하는 것, 이곳의 규칙, 문화, 예절 등등. 반드시 이걸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바쁘겠지만, 어긋나지 않도록 여러분들도 간간이 확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나는 한동안 플레이어들에게 주의해야 할 것들을 전달했다.

처음에 뿌리가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거기다 이번에는 초대형 규모.

중요한 부분을 두 번 세 번 짚어 주며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사건 사고가 잦아져서 규율이 더 빡세진 거 알죠? 모두 언행에 각별히 주의해 주시죠."

"예!"

"좋습니다. 이만 나가보셔도 됩니다."

내 말을 끝으로 2기수와 3기수 플레이어들이 벌떡 일어났다.

각자 자신이 맡은 후임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이 또 밑에서 밑으로 전달하려면 부지런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그리고 둘만 남게 된 집무실.

"클로에 님, 무슨 일 있습니까?"

나는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클로에를 손짓했다.

"아, 네.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뭐죠?"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내 물음에, 종이 한 장을 내미는 클로에.

내용은 딱 세 줄밖에 없다.

"······!"

그럼에도 나는 내용을 보곤,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템들이 들어왔다고요?"

"네."

종이에는 고결한 수정, 시간의 각성, 플래티넘 등급의 스킬북, 그리고 신화 등급 아이템이 각각 한 개씩 들어왔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대박인데?'

"한 팀당 천만 골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이 아이템들은 천만 골드를 가뿐히 넘어갈 텐데요."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골드가 없다면 그에 준하는 아이템과 스킬도 받겠다고 전달한 상황.

근데 플래티넘 등급 스킬북이나 고결한 수정, 시간의 각성, 그리고 신화 등급 아이템은 모두 그 가격을 크게 상회한다.

대략 5천만에서 1억 골드 정도.

'계산이 안 맞지.'

한마디로, 이 아이템들은 애초에 들어올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아, 포르도엘 님이 지시하셔서요······."

"······?"

'갑자기 포르도엘이 왜 나와?'

나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무슨 지시를 하든 계산이 안 맞는데?

"그······, 만약 신화 등급이나 플래티넘 등급 스킬, 고결한 수정 같은 아이템들을 팀 투지에 판매해 준다면, 훈련법은 공짜로 넘겨주겠다고······."

"······."

나는 눈을 꿈뻑꿈뻑했다.

그니까 정리하자면.

'고위 등급 아이템을 판매해 주면 서비스로 훈련법을 끼워준다고 했다는 건가?'

고결한 수정이나 플래티넘 등급 스킬북, 준신화 등급 이상의 아이템은 어지간하면 팔지 않는다.

근데 포르도엘이 '팔아만 준다면 훈련법도 줄게!'라며 원 플러스 원을 외쳤다는 뜻.

순간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천잰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지?

< 217화. 폭풍의 서막(7) > 끝

< 218화. 폭풍의 서막(8) >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오현석은 스스로가 불운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아, 씨발. 운빨좆망겜."

"왜 그러십니까, 군수 담당관님?"

"강화하다가 터졌어, 아놔."

"헐······. 그거 웬만하면 성공한다던데, 터지셨습니까?"

게임을 할 때도.

"이번에 보급 담당관 전역했지? 어디 보자······. 오 중사, 군수 담당 내려놓고 앞으로는 자네가 보급 맡아."

"저 말씀이십니까?"

군대 보직도.

―마지막 숫자는······ 42! 마지막 여섯 번째 숫자는 42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두 개만 동그라미가 쳐진, 구깃구깃한 로또를 볼 때도.

'아 씨. 이거 조작 아니야?'

무엇 하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런 오현석의 운세가, 콜로세움에 들어오면서 180도 뒤바뀌기 시작했다.

[<차원 특전:최강의 성계>]

[성계 대항전에서 우승한 성계에게 지급되는 특전.]

[적용 시 모든 스텟이 + 17% 상승합니다.]

콜로세움 입장과 동시에 받게 된 특전.

'뭐지? 다른 성계는 이것보다 더 좋은 특전 가지고 있나?'

혹시나 해서 물어봤으나, 다른 성계 사람들은 특전 자체가 없다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즉, 지구인은 애초에 시작부터 다른 성계보다 17% 더 앞서 있다는 뜻.

오현석의 행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 토할 것 같아.'

그가 소속된 팀 투지의 훈련은 굉장히 고강도에 속했다.

하지만 18시 이후는 자유 시간.

뭘 해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핸드폰도, 게임기도, 컴퓨터도 없는 콜로세움에서 지구인이 할 만한 취미는 딱 하나뿐이었다.

―진격의 팀 투지. 블러드나이트 298에서 네 개의 승리를 휩쓸다!

―정말 이 팀이 만들어진 지 2년밖에 안 된 팀이 맞는가? 벌써 상위 플레이어만 10명 넘게 배출한 팀 투지. 그중 한 명은 고위 플레이어 '렌'.

└95%가 넘는 생존율을 자랑하는 팀 투지! 참고로 역대 생존율 2위는 팀 불꽃의 79.8%이다.

바로 커뮤니티를 눈팅하는 것.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우리 팀이 이렇게 대단한 팀이었다고?'

역대 생존율 1위, 승률도 1위, 파오블·퍼오블 보너스 당첨률 1위, 성장률 1위 등등.

온갖 역대 기록을 휩쓸고 있는 명실상부 최고의 명문 팀 중 하나.

오현석은 자신이 어마어마한 뽑기 운에 당첨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 있으면 나도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어.'

남들보다 특출나지 않은, 아니 오히려 조금은 부족한 오현석은, 그때부터 최선을 다해 커리큘럼을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커리큘럼만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다른 팀 사람들보단 더 강해질 테니까.

'나도 언젠간 저 괴물들처럼······.'

8기수로 들어온 오현석의 눈에, 팀 투지엔 어마어마한 강자들이 득실거렸다.

눈으로 따라가기도 벅찬 움직임과, 미친 듯한 반응 속도,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 지나가는 검까지.

당장 5기수만 되어도, 그에겐 넘어설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질 정도.

'5기수 선배들도 저 정도인데, 도대체 안우진 님이나 2기수 3기수 선배님들은 얼마나 강하다는 거지?'

듣기로는 5기수 선배들 전원이 덤벼도, 주창범 님의 털끝 하나 건드리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오현석도 저들처럼 되고 싶었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으로 강한 플레이어가.

'후우, 나도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오현석이 그런 생각을 하며, 긴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마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정령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마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정령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마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정령력 스텟이 1 상승······.]

두 눈을 감고 있어, 암전된 시야에 주르륵 등장하는 상태창.

콜로세움은 뇌로 정보를 직접 입력해 주는지, 눈을 감고 있어도 상태창을 볼 수 있었다.

"현석! 끝났어, 나와도 돼!"

"아, 예."

포르도엘의 외침에 눈을 뜨자, 빼곡하게 서 있는 나무의 모습이 보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냇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바닥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오현석은 이곳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어렸을 적, 자신의 놀이터가 떠오르는 친숙한 자연의 향기.

'다시 돌아가고 싶어.'

마법진을 벗어나자, 포르도엘과 대화를 나누는 한 플레이어가 보였다.

"오늘 정령 계약도 한다고 하셨죠?"

"응, 맞아. 휴우, 이 생활도 오늘로 끝이야! 내일부턴 마음껏 놀고먹고 잘 거야······!"

뾰로통한 표정으로 볼을 빵빵하게 불리고 있는 포르도엘.

그 옆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미녀가 함께하고 있었다.

길게 흘러내린 은발, 약간은 차가운 눈매,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한 분위기.

4기수 선배인 카이로시아였다.

"현석! 일루 와. 이제 여기 들어가면 돼."

"여긴······?"

오현석의 손목을 잡아끈 포르도엘이 데려간 곳은 더 깊숙한 숲속이었다.

바닥엔, 열두 개의 크리스탈이 박힌 또 다른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음, 정말 잘 만들었네. 고마워, 카이로시아!"

"아뇨, 기존에 만든 마법진에서 조금만 손보면 되던걸요."

"아하하, 그걸 그렇게 쉽게 얘기하는 건 카이로시아밖에 없을 거야. 현석, 이 안으로 들어가!"

"네."

"이제 정령 계약을 맺을 거야. 눈을 감고 집중하면 돼!"

포르도엘의 지시에, 오현석이 익숙하다는 듯 마법진 중심부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 두 눈을 감았다.

뻐꾹― 뻐꾹―

귓가에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

'편안해.'

귓가를 간질이는 시원한 바람.

크게 숨을 들이쉬면 청량한 공기가 온몸을 가득 채운다.

'오랜만에 집에 온 것 같네.'

오현석은 강원도 태백 출신.

어릴 때부터 산으로 계곡으로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놀이터나 마찬가지.

'그래서 군인이 된 것도 있지.'

체력에 자신이 있어서 군인이 됐다.

물론 엄청나게 후회했지만.

그것도 뼈저릴 만큼 엄청.

"기대되네요. 정령이랑 계약하는 건 처음 봐요."

"그래? 의외네?"

"탐리엘에는 정령 마법을 쓰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아, 그럼 그럴 수 있지. 근데 별거 없어! 그냥 정령 하나 뿅! 하고 나타나서 계약? 응, 고고! 하면 끝이야."

카이로시아와 쑥덕대는 포르도엘.

'가이드는 안 해주나?'

보통 이럴 땐 어떻게 집중하고, 어떻게 감을 잡아야 하는지 알려줘야 하지만, 포르도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평소에도 그를 맡아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에 불만이 많았으니까.

'후우, 이러다가 계약 못 하면 어떡하······ 어?'

그때였다.

쏴아아아아―

오현석에게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신기하네.'

뭐랄까,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닌, 오현석에게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달까.

'저 기운을 느끼면 된다는 거지?'

그때부터 오현석은 고도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두 눈을 감고 있는데, 주위의 광경이 그려진다.

고개를 내려 보니 명상 중인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와서 주변을 둘러보는 느낌.

그러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정령이구나.'

연기가 뭉쳐있는 듯 흐릿한 실루엣.

반면에 눈동자는 또렷해서, 두 눈만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이리 와봐. 나랑 계약하지 않을래?'

하지만 오현석 곁으로 섣불리 다가오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해치지 않을게. 괜찮다니까?'

오현석과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오히려 한 발짝 뒤로 물러날 뿐.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 명 한 명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계약을 부탁한 것이다.

그때였다.

"······."

오현석과 눈이 마주친 한 정령.

다른 녀석들과 달리, 오현석의 눈빛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 순간 오현석은 확신했다.

이 정령이 자신과 계약해 줄 것임을.

'나랑 계약해 줄래?'

"······."

오현석의 말에 정령이 피식 웃는다.

뭐랄까 약간은 가소롭다는 듯, 그리고 조금은 흥미롭다는 듯.

'같이 놀자. 이리 와.'

재차 요구하자, 정령이 한 발짝 내딛는다.

'뭐야?'

그 순간 오현석은 흠칫 놀랐다.

고작 한 발자국일 뿐인데, 녀석의 존재감이 수십 배 상승한 것이다.

"머리 감을 때 편할 것 같아서요."

"편하긴 하지. 근데 하급 정령으로 할 수 있는 건 딱 그 정도까지야. 그 이상은······ 어?"

녀석이 다시 한 발짝 내딛는다.

'윽······.'

오현석의 숨이 턱- 하고 가빠왔다.

어마어마한 압력이 그를 짓누르는 기분.

"어어?"

또 한 발짝 내딛는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뭇잎이 흩날리고, 땅이 찌르르 울린다.

거센 바람에 나무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에에엑······?"

녀석이 마지막 한 발짝을 내딛는다.

거대한 그림자가 사방을 뒤덮는다.

그 순간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휘몰아치던 바람이, 뚝 하고 끊겼다.

오현석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눈을 떠라.

날개도 없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한 여인이 오현석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너머로 안색이 창백해진 포르도엘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카이로시아의 모습이 보인다.

'이게······ 정령이라고?'

오현석은 멍한 얼굴로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바람의 근원. 바람이 곧 나고, 내가 바람 그 자체인 존재.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아니, 세상 만물의 모든 것들과 공명하고 있다는 게 정확할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공허한 울림일 뿐.

―그대는 나와 계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다. 나와 계약하겠는가.

천천히 부유해 오던 여인이 오현석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나도······ 손을 내밀면 되는 건가?'

당황한 오현석이 포르도엘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어떻게 하면 되냐는, 무언의 눈빛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리고.

"딸꾹······! 딸꾹······!"

포르도엘이 대답했다.

* * *

내 집무실.

"정령왕이랑 계약이라니······! 대박이에요, 안우진 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얘기하는 아세리안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포르도엘과 함께, 오현석과의 권속 계약에 우려를 표하던 아세리안.

하지만 지금은 연신 대박!을 외치며 기뻐하고 있다.

'첫 계약부터 정령왕이라니, 대단한데.'

물론 나도 얼떨떨하긴 했다.

최상급 정령만 해도 엄청난 화력을 가지고 있는데, 무려 정령왕이라니.

그 정도면 하위 리그 정도는 가볍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아신 거예요, 안우진 님?"

"오현석의 잠재력 말씀이십니까?"

"네."

아세리안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가보니 자연의 향기가 진하게 나더군요. 저는 예전에 아르웬과 싸워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르웬은 내가 하위 리그에서 만났던 하이 엘프.

블러드나이트 200, 피의 여명전에서 3일 내내 나를 쫓아다니던 집착녀였다.

"와, 요즘 정말 꿈만 같아요. 이런 행운이······! 정령왕의 계약은 하이 엘프 중에서도 아주 일부만이 가능한데······!"

"대단한 일이긴 하죠."

"그 정도로 끝날 수준이 아니에요! 열두 성계의 역사를 다 뒤져도, 인간 중에선 두 번째? 세 번째? 아무튼 확률이 몇 조분의 일 수준이라구요."

아세리안이 잔뜩 흥분한 채로 말했다.

솔직히 나로서도 의외였다.

지구, 그것도 대한민국 출신에서 정령왕과 계약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 나올 줄이야.

"안우진 님, 혹시 다른 사람들도 봐 주시면 안 돼요?"

그때 아세리안이 내게 묘한 부탁을 했다.

"재능이 있는지 봐달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맞아요. 오현석 씨 같은 경우도 안우진 님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묻힐 뻔했잖아요. 정령원소석이 없었으면 정령력 개방이 힘들었을 거라고 하던데요?"

아세리안의 말은 사실이었다.

고위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는 것과, 잠재된 정령력을 개방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

포르도엘의 말로는 오현석 혼자 정령력을 개방할 수 있을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고 했으니,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냥 검이나 휘두르며 훈련하고 있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씩 체크해 보죠."

"정말요? 감사해요, 안우진 님! 안 그래도 바쁘실 텐데······."

'한 번 싹 훑어봐야겠군.'

2기수부터 7기수까진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숫자가 얼마 안 돼서 이미 한 번씩 각성 능력을 체크했기 때문.

8기수 15,000명, 그리고 9기수 45,000명.

총 6만 명 정도를 확인해야 한다.

'그중 오현석 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 한 명만 발굴해도 이득이지.'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 나한테 거액의 포인트로 돌아올 테니까.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아세리안이 방긋 웃는 얼굴로 집무실을 나섰다.

이걸로 외부 문제는 끝.

'슬슬 시작해 볼까.'

이제는 내부, 즉 나 자신을 발전시킬 차례.

[남은 포인트 : 1,977,300]

한마디로, 잠들어 있는 플레잉 코치 정산 포인트를 사용할 시간이었다.

< 218화. 폭풍의 서막(8) > 끝

< 219화. 폭풍의 서막(9) >

얼음의 세계, 니플헤임.

마계의 영역인 베라 성에서는, 악마들이 두 집단으로 분류되어, 각자의 임무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은 공성전 출전 준비를 위해, 그리고 다른 한쪽은 무스펠하임에서 넘어올 구원군을 막기 위해.

"빨리빨리 움직여!"

과거 2급 지천사였으며, 현재는 고위 악마인 타락 천사 사마엘은 그중 무스펠하임에서 넘어올 구원군을 막는 쪽이었다.

"공성전에 참가도 안 하는 것들이 느리기까지 하다는 소리를 들을 참이냐!"

사마엘의 목소리가 베라 성 내부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아, 아닙니다!"

"이봐, 장비 다 챙겼어?"

그녀의 포효에 악마들이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잽싸게 움직였다.

'다들 독기가 빠졌군.'

무스펠하임 봉쇄는, 그녀가 사령관으로서 참가하는 첫 번째 전투.

이번 전투의 결과에 따라 앞으로의 커리어가 달라진다.

그런 탓에 사마엘은 잔뜩 예민해진 상태였다.

'이번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르고, 쯧.'

무려 여섯 군주 중 하나, 사탄 님이 합류했다.

니플헤임을 완전히 장악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

그러면 천계 쪽에서도 고위 존재들을 파견하며 기민하게 반응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무스펠하임 입구가 좁아서 준비만 잘하면, 어?'

다가올 대규모 전투를 위해 바삐 돌아다니는 악마들.

그 사이에서 한 중급 악마가 느긋느긋 다가온다.

"이 새끼가 미······."

그래서 사마엘이 불호령을 터트리려는데,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잠깐만.'

중급 악마 주제에, 자신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긴장하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능글맞게 웃고 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였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거나, 아니면 중급 악마처럼 보이지만 그녀보다 더 고위 존재거나.

"혹시 베리알 님이십니까?"

사마엘이 공손하게 물었다.

여섯 군주 중 하나, 나태의 베리알.

니플헤임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이후, 그녀의 군단에 조용히 파견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고위 악마.

그녀의 촉은 정확했다.

"호오, 감이 좋군."

중급 악마로 위장한 채 씨익 웃는 베리알.

'휴.'

그 모습에 사마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여섯 군주 중 한 명에게 쌍욕을 퍼부은 타락 천사가 될 뻔한 것이다.

"사마엘이 고귀한 여섯 존재를 뵈옵니다.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오셨는지······?"

너 되게 게을러터졌잖아.

사마엘이 뒷말을 삼켰다.

"뒤늦게 몰래 숨어들어오는 것보다, 미리 기다리고 있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

"······?"

"숙주한테 장거리 이동 스킬도 있다지. 한 번에 못 잡으면 그게 더 귀찮으니라."

"아아."

이어지는 말에 사마엘은 납득했다.

'어쩐지.'

나태의 군주 베리알은, 이렇게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을 악마가 아니었으니까.

더 귀찮아질 일을 방지하기 위해 빨리 나왔다는 부분에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상황을 이해한 사마엘이 베리알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귀찮다는 듯 손을 젓는 베리알.

"됐다. 난 그냥 어디 조용한 곳에 짱박혀 있을 테니, 알아서 하거라."

"예."

그가 휘적휘적 무스펠하임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뒷모습만 봐도 베리알이 현재 무척 귀찮아 하는 상태라는 게 느껴졌다.

'불쌍하군.'

이번 전투의 목표가 렌이라고 했던가?

녀석은 분명 마계로 납치당할 것이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베리알이 직접 왔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