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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남은 포인트 : 1,977,300]

보유 포인트를 정신에 다 때려 박은지 어느덧 2달째.

그사이 200만 포인트 가까이 모여 있었다.

'상승 폭이 어마어마하게 커졌어.'

석 달 전에 플레잉 코치로 들어온 게 25만 포인트가량이었으니, 단숨에 몇 배나 뛰어버린 것이다.

'중간계 정리 덕분이지.'

서너 달에 한 번 출전하던 하위 리그 메인 이벤터들이, 한 달에 한 번꼴로 출전 중인 상황.

거기다 상위 리그의 경기 폭도 두 배로 줄어들었다.

기존에 팀 투지로 들어오던 오퍼의 다섯 배로 늘어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포인트가 미친 듯이 쌓일 수밖에.

'올려볼까.'

<포인트 상점>으로 접속한 나는, 권속 플레이어들에게 미리 전달한 대로 스텟을 상승시켰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2,000 P를 소모하셨습니다.]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5,000 P를 소모하셨습니다.]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2,000 P를 소모하셨······.]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고위 리그]

[근력 : 220] [민첩 : 227] [체력 : 220]

[정신 : 181] [지력 : 104] [마력 : 159]

근력 스텟 20, 민첩 17, 체력 20.

근민체에서 총 57 포인트나 스텟이 상승했다.

이제 더 이상, 기초 스텟에서 다른 고위 플레이어들에게 꿀리지 않게 된 것이다.

'후우······.'

스텟창을 보던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9기수는 훈련이 한창이라, 아직 투입되지 않은 상태인데도 어마어마한 거액이 들어왔다.

그런데 만약 9기수 플레이어들까지 리그에 참가한다면?

45,000명이라는 대군단이 포인트를 벌어들인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들어오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초월 리그라는 거대한 벽도 단숨에 뚫을 수 있을 것이다.

스텟 상승폭에서 게임 자체가 안 될 테니까.

이걸로 포인트 정산은 끝.

'클로에한테 받은 것들 좀 볼까.'

그다음으로 내가 한 일은 클로에가 전달한 아이템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두 개의 보석, 한 권의 스킬북, 그리고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완드.

―안우진 님이 정립한 훈련법들로 대박을 쳤으니까요. 이것들은 전부 안우진 님의 몫이에요.

아세리안은 이 아이템들의 처분을 내게 맡겼다.

하지만 여기서 내게 필요한 건 딱 하나뿐.

나는 주홍빛 보석을 집어 들었다.

'시간의 각성.'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에서, 내가 MVP로 받았던 아이템.

사용하면 장비의 등급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

그때 당시엔 준신화 등급이었던 몽환의 달빛을, 신화 등급인 영롱한 달빛으로 각성시켰었다.

'이번에 업그레이드시킬 아이템은 하나밖에 없지.'

나는 망설임 없이 시간의 각성을 사용했다.

띠링!

[<보석:시간의 각성>을 사용했습니다.]

[<창:벽력섬전>을 각성하시겠습니까?]

[한 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창:신벌神罰>]

['간장'과 '막야'가 수천 번의 벼락을 맞은 운철로 제작한 창이다. 벼락을 너무 많이 맞아 창 전체가 까맣게 변했다고 알려져 있다.]

[<창:신벌>의 주인으로 선택된 존재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근력 스텟이 +10% 상승합니다.]

[착용 시 마나에 강한 뇌전의 힘이 깃듭니다.]

[착용 시 <청천벽력>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착용 시 <전광석화>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청천벽력> ― 공격 시 3%의 확률로 하늘에서 강한 벼락이 떨어집니다. 실내에선 발동되지 않습니다.]

[<전광석화> ― 1분 동안 민첩 스텟이 +40% 상승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24시간)]

[등급 : 준신화]

기존에 전설 등급이었던 벽력섬전이 신벌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엄청 좋아졌는데?'

아이템 설명을 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준신화 등급답게, 옵션이 무척 훌륭했기 때문.

기존에 1%였던 청천벽력의 발동확률이 3%로 상승했다.

거기다 일반 벼락이 떨어지는 것에서 강한 벼락으로 바뀌었고, 전광석화 능력도 대폭 상향되었다.

이 정도면 공격력 측면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좋은 효율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하나는 끝났고.'

이제 남은 건 고결한 수정과, 스킬북, 완드뿐.

나는 그중에서 완드를 집어 들었다.

'이것도 옵션이 미쳤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마법을 저장해 두는 메모라이즈 능력 사용 가능.

주변의 마나를 흡수해서 마력 회복.

마력의 총량에 비례하는 보호막 생성.

한 달에 한번이지만, 1초간 무적으로 만들어주는 특수 능력.

거기다 마력 스텟 30% 상승까지.

'대박인데?'

완드는 과연 신화 등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미친 옵션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카이로시아 줘야겠군.'

어차피 마법사 전용이라 내가 쓸 수 없는 아이템이니, 이번에 마력 훈련을 위한 마법진도 만들어 준 카이로시아에게 줄 생각이었다.

골드가 궁한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이걸로 남은 아이템은 두 개.

'이건 모용악한테 주면 되겠고. 어? 마력으로 형상을 만들어? 고건하한테 딱 좋겠는데.'

나는 고결한 수정과 플래티넘 스킬북의 사용처도 깔끔하게 결정했다.

내 스펙을 업그레이드시키지 못한다면, 권속 플레이어들에게 밀어주는 것이 지금으로선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후우, 이제 오현석 좀 볼까.'

집무실에서 처리할 일을 모두 마친 나는 곧장 특수 중력 대련장으로 향했다.

들어가 보니 오현석은 이미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들어가 보니 오현석은 이미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예? 검이랑······ 방패요?"

내 제안에 고개를 갸웃하는 오현석.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네, 어차피 처음 들어왔을 때 검방술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저는 이제 정령사 아닙니까?"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검과 방패를 쓰면 오현석 님이 엄청나게 강해질 거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아르웬과 싸웠을 때 느꼈다.

정령사는 영창 없이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특수 직업군.

완드나 지팡이 같은 걸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아르웬은 그냥 맨손으로 다녔지.'

그때 만약 그녀의 손에 검과 방패가 들려 있었다면, 아무리 운이 좋아도 내가 그녀를 죽일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원거리에선 정령 마법을 펑펑 날리고, 가까워지면 탱커로 바뀌는 겁니다. 상대하는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일이죠."

어차피 오현석은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사.

화력은 이미 차고도 넘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창범에게 맡겨, 오현석을 철벽으로 바꿔줄 생각이었다.

"아······. 그럼 저도 상위 리그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요?"

"고위 리그로 올라오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

내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오현석이 눈을 번쩍 떴다.

'엄청난 괴물로 만들어 주지.'

권속 계약으로 내 스킬들을 공유하고 있는 데다가, 스텟 상승분도 전달받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하, 하겠습니다. 검과 방패를 들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가시죠. 제가 이미 주창범을 호출해 뒀거든요."

고위 리그라는 단어 때문인지, 힘차게 대답하는 오현석.

나는 그를 데리고 대련장의 중심부로 향했다.

그때였다.

띠링!

[비상! 비사아아아앙!]

[긴급 미션이 내려왔어요!]

[지금 당장 게이트로 입장해 주세여!]

[..・ヾ(. ̄□ ̄)ツ]

'긴급 미션!'

"어?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미안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다음에 다시 얘기하죠."

펄럭! 펄럭!

알림창을 본 나는 곧바로 특수 중력 대련장을 나섰다.

그러고는 게이트가 생성되는 공터로 향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카이로시아 님?"

"시간 없어요. 달려요, 어서!"

팜으로 나와 보니, 몇몇 팀원들도 분주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위 플레이어들도 호출된 모양.

"카이로시아, 받아."

"어어, 이게 뭐예요?"

"모용악 님, 시간 없으니까 가지고 있는 스킬 중 가장 쓸모 있는 걸로 올리세요."

"예?"

"고건하 님, 이거 얼른 익히시죠."

나는 가는 길에 신화 아이템과 고결한 수정, 플래티넘 스킬북을 뿌렸다.

그러고는 곧장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무스펠하임에 입장하셨습니다.]

[<달의 메아리> 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모두들 니플헤임 입구로 향한다!"

"이봐, 거기! 멍때리지 말고 얼른 움직여!"

'여긴?'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탁 트인 광장,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는 첨탑.

그리고 방대한 크기치고는, 몇 개 되지 않은 건물.

'록탄 성이군.'

상위 플레이어 시절 내가 점령했던 록탄 성이었다.

"렌! 이리로!"

고개를 들자, 나와 함께 얼마 전까지 당직 근무를 수행했던 조원들이 보인다.

모두들 예상치 못한 긴급 미션에 안색이 굳어 있었다.

"휴우, 다 모였군. 일단······."

띠링!

[모두 전력을 다해 니플헤임 입구로!]

펄럭! 펄럭!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짧고 간결한 메시지를 보아,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는 모양.

상태창을 본 우리는 서로 시선을 맞췄다.

"바로 가지!"

그리고는 전속력으로 날갯짓했다.

< 219화. 폭풍의 서막(9) > 끝

< 220화. 대격돌(1) >

무스펠하임-니플헤임 입구.

챙! 채챙! 챙! 챙!

"서두르지 마라! 우린 버티기만 하면 된다!"

"마법사! 광역 마법부터 떨궈!"

"뒤로 넘어가게 하지 마, 이 병신아!"

꽈과과과과과과광!

'난리가 났군.'

니플헤임 입구에 도착해 보니, 이미 대규모 전투가 한창이었다.

플레이어의 숫자는 많아 봐야 수백.

반면에 악마들의 숫자는 만 단위가 넘는다.

그럼에도 적들을 압도할 수 있는 건, 중급·상급 악마가 대다수인 마계에 비해, 우리 쪽은 전부 고위 플레이어 이상이었기 때문.

'금방 처리할 수 있겠는데?'

거기다 실시간으로 이 성 저 성에서 플레이어들이 날아들고 있다.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고작 저 정도 규모의 군단을 처리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띠링!

[구트룬 조! 어떻게든 마계의 저지선을 돌파해, 니플헤임으로 진입하세요!]

[목적지는 엘린 성과 알츠카인 성입니다!]

"역시 마계에서 수를 썼군."

'목적지가 엘린이랑 알츠카인이라고?'

상태창을 본 나는 내심 의아했다.

사실 대규모 소집 때부터 니플헤임에 뭔가 변고가 생긴 게 아닐까 예상하고 있던 상황.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펄럭! 펄럭!

"볼티노 님, 입구를 마계가 막고 있을 게 뻔한데, 왜 록탄 성에 우릴 소환한 겁니까?"

"케파가 안 나온 모양일세."

"케파요?"

공장의 생산 능력이나, 혹은 역량을 의미하는 단어다.

"신성석엔 자동 충전 시스템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하더군. 일정량 이상 쓰면 더 이상 비프로스트를 열 수 없는 걸로 알고 있다네."

'어쩐지.'

볼티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 성 저 성에 나눠서 소환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 것이다.

펄럭! 펄럭! 펄럭!

"우리도 바로 돌파하겠다!"

"예, 조장."

선두로 나서며 방패를 꺼내 드는 구트룬.

그 뒤로 다른 조원들이 열을 맞춰 모여들었다.

마치 허공에서 이동하는 모습이 하나의 송곳 같았다.

'얼마나 강해졌나 체크해 볼까.'

나는 준신화로 업그레이드된 창, 신벌을 고쳐잡았다.

"놈들이 돌파를 시도한다!"

"탱커들 모두 모여!"

"절대 뒤로 보내지 마라! 안 되면 몸으로라도 막아!"

꽈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러고는 니플헤임 쪽에서 불어닥치는 충격파를 뒤로하고, 적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모두 산개해서 사냥을 시작한다!"

띠링!

[<청천벽력>이 발동합니다.]

꽈앙!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열두 줄기 벼락이 허공을 관통한다.

"······!"

벼락의 범위 내에 있던 악마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데미지가 더 강해졌네.'

준신화 등급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뇌전이 강한 뇌전으로 더 강화됐다.

거기다 1%였던 발동 확률이 3%로 상승한 상태.

산술적으로 33번 휘두르면 한 번 발동된다는 말이었으니, 한마디로 1분에 서너 번씩 벼락이 친다는 뜻이다.

[<청천벽력>이 발동합니다.]

[<청천벽력>이 발동합니다.]

[<청천벽력>이 발동······.]

꽈광! 꽈아앙! 꽈과과광!

"우와······."

하늘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벼락.

그 광경에 정신없이 싸우던 플레이어들조차 멍하니 바라본다.

빼곡하게 몰려서 벽을 쌓고 있던 중급 악마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상황에 따라선 벽력보다 더 좋을 때도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벽력에 비해 활용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뇌전을 응축해서 강한 폭발력을 발휘하는 벽력.

거기다 근력 혹은 민첩 스텟이 찰나의 순간이지만 50%나 상승한다.

반면에 청천벽력은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임팩트가 있을 뿐, 마나로 내뿜은 뇌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내심, 없는 능력이라며 마음 한 켠에 밀어뒀었는데, 업그레이드되고 보니 활용도가 제법 많을 것 같았다.

서걱! 서걱! 꽈앙! 콰지지직―

"끄으으읏. 모, 몸이······!"

"끄아아아악!"

"누가 잡아 줘! 날개가! 잡아, 잡······!"

스텟이 제법 많이 상승한 덕분인지, 이전보다 한결 빠르고 날렵해진 움직임.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서너 명의 악마들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이번에 스텟을 구입하면서, 근민체 전부 10%가량 상승한 상황.

특전과 스킬로 인해 오르는 것까지 합치면 상승분이 더욱 커진다.

거기다 주변으론 쉴 새 없이 벼락이 떨어지고 있다.

'이제 상급 악마 정도는 별것 아니군.'

그로 인해 내 공격을 막아내는 존재를 찾을 수 없을 정도.

"젠장! 무슨 광역딜이 계속······!"

"저 자식부터 노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임팩트가 너무 요란한데.'

번쩍하며 떨어지는 벼락과 굉음 탓에, 나한테 어그로가 몰리게 된다는 것.

펄럭! 펄럭!

"이노오오옴!"

"헛, 데스모스 님이다!"

"모두 비켜!"

악마들 사이를 종횡무진 휘젓고 있자, 세 쌍의 날개를 가진 한 악마가 날아든다.

최상급 악마.

타깃은 바로 나였다.

챙! 콰지직! 챙! 채챙! 꽈아앙! 콰지지직!

무기를 맞대자 부서진 마력이 칼날이 되어 녀석에게 되돌아가고, 뇌전의 스파크가 터진다.

"헉, 무슨!"

하늘에서 떨어진 열두 줄기의 벼락이 주변을 난도질한다.

'제법 찌릿찌릿할 거야.'

마력 갑옷으로 인한 반사 데미지, 뇌전 데미지, 그리고 벼락의 데미지까지.

3중첩된 데미지에 당한 최상급 악마가 허공에서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끄어어어······."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녀석.

나는 경직된 최상급 악마에게 창을 휘둘렀다.

서걱!

"데스모스 님!"

"젠장! 이대로 죽을 순······!"

서걱! 서걱!

그러고는 주변에 있던 악마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그때였다.

"지원군! 지원군이 온다!"

"모두 더 힘을 내라! 우릴 돕기 위해 62군단이 오고 있다!"

'쯧.'

뿌우우우우우우우―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전장을 가득 채운다.

쿵. 쿵. 쿵. 쿵.

수만 명이나 되는 하급 악마들이 제식을 맞추며 진군해 오고, 그 위를 어마어마한 숫자의 검은 날개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볼티노! 사브르! 스벤! 송화경! 렌!"

"옛!"

"모두 뒤로 빠진다. 일단 상황을 체크한 뒤에 다시 돌파하겠다!"

"알겠습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니플헤임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뒤로하고, 우리는 조금씩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긴급 속보. 니플헤임에 여섯 군주 중 한 명 출현. (1보)

└????????

└?????????????

└????뭐냐 이거? 실화임?

└특보. 니플헤임에 등장한 군주, 분노의 사탄. (1보)

└와 ㅆㅂ 실화인가 본데ㄷㄷ

└미친;; 2차 대전쟁 시작이네.. 군주가 나온 거면 선전 포고나 다름없는 거 아니냐?

└아싸 개꿀~ 안 그래도 요즘 볼 거 없었는데 신난당 ㅎㅎ!

└개꿀거리고 있네 ㅂㅅ 대가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냐? 대전쟁 시작되면 신들도 자동 참전인 거 모름?

└근데 차라리 잘 된 거 아니냐 ㅋㅋ 요새 천계 굴러가는 꼬라지 보면 그냥 마계한테 멸망당하는 게 나을 수도 있음 ㅇㅇ

└요즘 개나 소나 지가 신이라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물갈이 될 필요도 있지ㅎ 대전쟁 가즈아아아아!

└전쟁 코인 가나여? 상가염?? 몰빵해염?! 집 팔까염?!?!!?!

└커뮤니티가 애들 다 배려 놨네 씹 ㅡㅡ

"녀석들이 물러난다!"

"그렇지! 이 광대 새끼들, 감히 어딜 넘어오려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원군에, 우리는 천천히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간간이 고위 악마들도 보였던 탓에 모두들 재정비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그게 낫지.'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여기서 계속 싸우다가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띠링!

[모두들 뒤로 빼주세여······.]

[ (꒰ঌ ๑•́ -•̀)໒꒱ ]

[고생 많으셨어여 ㅠ 일단 적들이 무스펠하임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데 최선을 다해주시길 부탁드릴게여 ㅠ]

마침 후퇴를 종용하는 고위 게임 메이커.

근데 뭔가 이상했다.

'봉쇄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작전상 후퇴가 아닌, 아예 뒤로 빼라는 듯한 뉘앙스.

순간 나는 니플헤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땅이 찌르르 울릴 정도의 굉음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들려오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

악마들이 뒤로 뺐거나, 그게 아니라면.

'벌써 성이 함락됐다고?'

이미 전투가 끝났거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후자인 모양이었다.

"뭐야, 더 이상 굉음이 안 들리는데?"

"어? 아예 뒤로 빼라고?"

"엘린이랑 알츠카인 둘 다 함락됐나 보군."

새로 내려온 미션을 본 다른 플레이어들도 당혹스러워했다.

나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그게 되나?'

알츠카인은 내가 직접 공략했던 성.

좁은 길목이 많은 탓에, 농성을 벌이고자 한다면 시간을 제법 끌 수 있다.

그런데도 벌써 함락됐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외갈래 길의 끝과 끝을 서로가 점하면서 시작된 대치.

"후우, 이제야 숨 좀 돌리겠네."

"두 달 만이군. 다들 그간 잘 지냈나?"

사브르를 시작으로 조원들이 입을 열었다.

"렌, 그사이 제법 강해졌군."

"스벤 님."

"커뮤니티를 통해 얘기는 들었다. 육성법을 팔아서 거액을 챙겼다지?"

장난 반 부러움 반 섞인 스벤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한테 들어온 골드가 아니라서요."

"하긴, 팀이 다 꿀꺽했겠지. 그래도 자네한테 떨어지는 게 제법 있었을 텐데? 팀을 대표하는 플레이어 아닌가."

"큭큭, 안 그래도 우리 팀도 난리가 났지. 팀 투지에서 산 육성법을 적용한다고 말이야."

"이거 너도나도 다 샀으니까 하위 리그의 수준이 확 올라가겠는걸? 뒤차한테 추월당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가야겠어."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수다가 시작되었다.

모두들 그간 있었던 일들을 꺼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자네 팀도 그랬는가?"

"이번에도 팀 투지 얘기뿐이군."

고개를 돌려 보니, 다른 조들도 우리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긴장을 풀어줄 수 있을 때 풀어줘야 체력 소모가 적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

"······?"

"······?"

'뭐야?'

쐐애애애애애애애액!

뒤쪽에서 들리기 시작한 파공음.

고개를 돌려 보니, 엄청난 숫자의 하얀 날개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플레이어들이 당황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 모두 날개를 가진 존재.

그럼에도 시선이 모여든 이유는.

"천사?"

"저들이 왜?"

날아오는 존재들이, 지금껏 지옥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던 천사들이었기 때문.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전장에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숨죽인 채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어?'

그들을 지켜보던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거의 천 단위 가까이 되는 천사들.

그 사이에, 날개가 없는데도 둥둥 떠 있는 네 명의 존재가 있었다.

'날개가······ 없다고?'

천사 군단은 순식간에 전장으로 합류했다.

그러고는 날개가 없는 네 명 중, 안대를 쓰고 황금 창을 들고 있던 존재가 앞으로 나섰다.

―내 이름은 오딘. 지금부터 내가 지휘하겠다.

"······!"

순간 나는 뒷목이 쭈뼛했다.

'오딘이면······?'

천상계에서 가장 강한 열두 존재.

그들 중 한 명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

구트룬이나 볼티노 등등 다른 플레이어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던 모양.

모두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오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온 거지?'

불안감이 스멀스멀 날아들었다.

지옥에선 어지간하면 등장하지 않는 천사.

그리고 처음으로 전장에 나온 주신.

그 말은 즉.

'마계 군주가 등장한 건가?'

주신이나 천사가 직접 나와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적이 나타났다는 것.

창을 쥐고 있는 손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와 씨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하면 마계 육군주 vs 열두 주신의 싸움을 볼 수도 있을 듯!! 두근두근!

└오딘 vs 사탄 누가 이길 것 같냐? 난 사탄에 한 표 넣는다. 원래 한번 수렁에 빠졌다가 올라온 애들이 독기가 넘침. 반면에 오딘은 등 따숩고 배부른 곳에 있어서 예전만 못할 듯 ㅇㅇ

└"주신 vs 군주 토토 하실 분들은 발할라 명예의 정원으로 오세요."

└댓글 수준 가관이네.. 주신 급 존재 두 명이 싸우는데 내기를 걸질 않나; 오딘 님이 니들 친구냐..?

└맵도 딱 좋음 ㅋㅋㅋ 무스펠-니플 일자 길이라 무조건 정면 승부로 봐야 하니까 화끈한 전투 나올 듯 ㅋ

└마계 코인 가나여? 꺼억~

└"운영자"천상계 관리 위원회에서 알려드립니다.

└"운영자"최근 마계에서 시스템에 몰래 접근하여, 악의적으로 여론을 조작하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심 계정을 차단하오니, 이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운영자"혹시 무고하게 계정 정지가 된 분이 계신다면, 발할라에 있는 천상계 관리 위원회로 찾아오시면 바로 정지를 풀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 안 그래도 요즘 마계에서 자꾸 쳐들어오는 거 보고 불안 불안하다 싶긴 했음. 진짜 잘못하면 대전쟁 일어날 듯..

└오딘께서 별일 없으셔야 할 텐데 ㅠ

└오딘 니뮤ㅠㅠㅠ

└절 가져요 엉엉.. ㅠㅠ 어? 뭐냐? 갑자기 댓글 엄청 깨끗해졌는데?

< 220화. 대격돌(1) > 끝

< 221화. 대격돌(2) >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열두 주신이 여길 왜······?"

오딘의 등장에 플레이어들이 술렁거렸다.

그게 뭘 뜻하는 건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

'후우, 침착하자.'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군주가 등장했다고 해서 쫄 것 없어.'

우리끼리 싸우라고 했으면 절망스러웠겠지만, 천계에서도 주신과 천사들을 보내주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쯧, 오늘도 포인트나 넉넉하게 벌어가려고 했더니만."

"후우―, 잘못하면 이 자리에서 뼈를 묻게 될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모두들 긴장과 불안으로 동요하고 있다.

'젠장.'

그것들이 조금씩 전염되며, 분위기가 추욱 가라앉은 전장.

반대편에서 네 쌍에서 다섯 쌍의 날개를 가진 악마들이 속속 합류할 때마다, 싸늘한 침묵이 점차 무게를 더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상황이 왔다.

"······!"

저 멀리, 눈에 팍 뜨이는 검붉은 악마가 등장한 것이다.

후우웅! 후우웅!

거대한 날개가 힘차게 날갯짓한다.

이마에 달린 기다란 뿔, 그 아래에 자리한 붉은 눈동자.

모든 걸 다 부수고야 말겠다는 분노가 스멀스멀 풍겨 왔다.

"으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마계의 칠군주.'

팔뚝에 으스스 닭살이 돋았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장이라도 온몸이 찢겨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포식자와 마주하게 된 것 같달까.

파바바바바바밧!

"휴우, 겨우 도착······."

"······?"

"쉿―!"

등 뒤에서, 때마침 대규모의 상위 플레이어들이 도착했다.

모두들 전장에 흐르는 공포를 눈치챘는지, 숨죽인 채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펄럭! 펄럭!

"렌······?"

"잠시 팀원에게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도록."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구트룬.

이내 그가 착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작별 인사를 허락하겠다는 느낌이었다.

'어디 있지?'

상위 플레이어들이 있는 곳으로 저공비행을 한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카이로시아를 찾았다.

"안우······ 렌 님!"

때마침 들려오는 뾰족한 목소리.

'여기 있었군.'

펄럭! 펄럭!

"카이로시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에요? 분위기는 왜 이런 거구요."

그녀의 말끝이 잘게 떨려온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띠링!

[플레이어 '카이로시아'의 그림자에 표식을 남기시겠습니까?]

[그림자 표식 목록이 가득 찼습니다!]

[플레이어 '오현석'의 그림자에 남겨진 표식을 삭제합니다.]

나는 카이로시아의 그림자를 밟으며 입을 열었다.

"잘 들어. 후방에서 가벼운 마법만 쏘면서 대기해. 절대 눈에 띄면 안 돼."

"전에 긴급 미션 진행할 때처럼요?"

"어. 고위 마법은 내가 따로 신호를 줄게. 그 전까진 최대한 어그로를 끌지 마."

"알겠어요. 근데 이게 무슨 상황······."

쿵―! 쿵―! 쿵―! 쿵―!

갑자기 들려오는 거대한 진동.

고개를 돌려 보니, 악마들이 제자리에 서서 발을 구르고 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사기를 끌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명심해. 절대로 눈에 띄지 마."

"알겠어요."

카이로시아에게 다시 한번 당부한 나는 서둘러 조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걸로 세이프티 포인트는 만들었어.'

현대로 따지면 마법사는 포병.

주로 후방에서 화력 지원을 담당한다.

급박한 상황이 닥쳤을 때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쿵―! 쿵―! 쿵―! 쿵―!

'쉽지 않겠군.'

* * *

"오딘이시여······."

"이들이 대체 왜······?"

전장에 퍼진 공포.

플레이어들의 사기가 수직 하락한다.

실시간으로 싸늘해져 가는 분위기를 느낀 천사들이 당황했다.

"지금까지 잘만 싸워 오던 이들이 왜 이러는 겁니까? 이렇게까지 사기가 떨어질 일은 아닐 텐데요."

그러자 오딘의 오른쪽에서 그를 보좌하던 대신大神, 헤임달이 물었다.

하루 이틀 싸워본 것도 아닌 플레이어들이, 전투를 앞두고 이 정도로 당혹스러워하는 걸 처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딘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용병이나 마찬가지니까."

한 가지 소원을 이루겠다는 일념 하에 콜로세움에 들어 와, 대가를 받고자 싸움을 할 뿐.

저들에겐 천상계의 안위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죽음을 각오한 채, 군주급의 초월적인 존재와 싸우고 싶어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딘이시여."

오딘이 잠시 침묵하자, 또 다른 대신 티르가 우려를 표했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꿔달라는 뜻이리라.

"내가 한마디 하도록 하지."

"예, 부탁드립니다."

오딘이 앞으로 나서니, 티르가 슬쩍 뒤로 빠지며 예를 표했다.

다른 대신들과 천사들도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온전히 오딘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려는 것이다.

"후읍."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신성력이 전장을 뒤덮는다.

"······!"

그러자 자리해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오딘에게 집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연설.

―모두들 아는가. 이곳 무스펠하임-니플헤임의 외갈래 길이, 원래는 절망의 협곡으로 불렸다는 걸.

그리고 오딘이 입을 열었을 때, 모두들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플레이어들은 의아함을.

―과거 천계와 마계가 벌인 10년의 대전쟁 동안, 이곳에서 무수히 많은 존재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마계는 이곳을 뚫기 위해, 그리고 천계는 이곳을 막기 위해. 참혹했던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지 않고자, 지금은 절망의 협곡이라는 이름을 지워버렸다.

'왜 저런 말씀을······!'

'사기를 북돋아 주셔야 하는데 왜······?"

뒤이어 무슨 말이 나올지 아는 신과 천사들은 당혹스러움을.

―그리고 오늘, 이곳에 그날의 절망이 다시 펼쳐지려고 한다. 마계는 이곳을 뚫으려 하고, 우리는 이곳을 막고자 한다.

오딘이 궁니르로, 협곡 반대편에 있는 악마들을 가리켰다.

―아마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더 힘든 전투가 펼쳐질 것이다. 대전쟁 때보다 마계는 더 강성해졌기에!

"······."

싸늘함을 넘어, 차디찬 침묵이 전장에 내려앉았다.

스멀스멀 올라오던 불안감이 더욱 크게 확산되었다.

오딘은 한 무더기의 플레이어들을 바라보았다.

호인족, 하이엘프, 낭인족 등등 통칭 아인족亞人族이라고 불리는 이들이었다.

―루시웬, 성호, 사브르, 키아라, 아스카······.

호명된 플레이어들이 오딘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이종족들이 조화를 이루며 뛰노는, 알프헤임의 아이들이여. 이곳이 뚫리면 너희들의 아름다운 고향, 광활한 숲과 호수는 불에 타 잿더미만 남게 되겠지.

"······!"

"······!"

그러자 눈을 부릅뜨는 알프헤임 출신 플레이어들.

그들을 뒤로한 채 고개를 돌린 오딘이, 또다시 한 무더기의 플레이어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소연화, 국선우, 송화경, 연비월, 백천상······.

―의와 협을 행하며, 무를 숭상하는 무림의 아이들이여.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전각은 파괴되고,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은 악마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무림 출신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간간이 살기를 내뿜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일리아, 이멘드라, 에델린, 마브릭스, 루시덴, 에밀리오······.

다시 시작된 호명에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떨궜다.

―세상의 흐름과 질서, 진리를 탐구하는 티르너노그의 아이들이여. 너희들이 세운 아름다운 진리는 악마들에 의해 살육과 파괴, 방화로 바뀔 것이다.

고위 이상의 플레이어 중에선 티를 내는 사람이 없었지만, 상위 플레이어 중에선 공포에 잠겨, 간간이 앓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솔라리, 베이너, 스타인, 워록, 로닌······.

―한때 마계에 잠식당할 뻔했던 웨스테로스의 아이들이여! 너희들은 한때 혹한의 땅에서, 먹을 것이 없어 서로가 죽고 죽여야 하는 냉혹함 속에서 살아가지 않았는가!

오딘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강맹한 신성력이 담긴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말해보라, 그날의 기억을! 다시 그곳이 과거의 그날로 돌아가게 둘 것인가!

고개를 떨궜던 플레이어들의 눈빛이 번뜩인다.

모두 서서히 오딘을 향해 머리를 들어 올렸다.

―란스토르, 기네스, 레온, 카스퍼, 리처드······!

―평화를 사랑하며 약자를 지키는 기사의 세상, 발리노르의 아이들이여! 그곳이 지옥의 겁화에 휩싸이도록 검과 방패를 꺾을 것인가!

"아닙니다!"

"기사들이여! 모두 검을 들라!"

"우리의 고향을 지키자!"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발리노르 출신 플레이어들이 검을 들어 올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스벤! 레이프! 에릭! 헤드리그! 스타인! 발자르······!

―그대들의 이야기와 노래로 가득한, 용맹한 전사들이여! 미드가르드의 아이들이여!

"와아아아아아아아!"

"오딘이시여어어!"

"우리는 위대한 미드가르드의 전사들이다!"

쾅! 쾅! 쾅! 쾅! 쾅!

미드가르드 출신 플레이어들이 함성을 지르며, 무기로 방패를 두드렸다.

북을 두드리듯, 묵직한 소음이 전장을 집어삼켰다.

―배를 타고 세상을 모험하던 전사들이여! 그대들의 고향을 지킬 준비가 되었는가!

"오늘 이곳에서 절대 걸어 나오지 않으리라!"

"악마 놈들을 쳐부수자!"

"오딘이시여어어어어!"

―시하라딩! 네르칼! 아네리스! 발마리스······!

그 이후로도 오딘은 바빌론, 졸본, 하이퍼보리아, 지구, 탐리엘을 하나씩 호명하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쿵. 쿵. 쿵.

오딘의 말이 이어질수록 방패 두드리는 소리가 커졌다.

전장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성계에 상관없이 하나둘 합세하여 방패를 두드렸다.

―열두 성계의 위대한 전사들이여!

전장이 열기로 들끓었다.

어느덧 반대편에서 발을 구르던 악마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함성이 천지에 요동쳤다.

쿵. 쿵. 쿵.

방패 두드리는 소리가 지옥 끝까지 뻗어나갔다.

―우린 이곳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우리의 세상을 지켜낼 것이다!

―모두 걱정하지 마라! 내가 가장 선두에 설 것이며, 내가 이곳에서 가장 마지막에 걸어 나올 것이다!

―열두 성계의 위대한 전사들이여!

펄럭! 펄럭! 펄럭!

커지는 오딘의 목소리에 맞춰, 천사들이 힘차게 날갯짓한다.

신성력을 내뿜으며, 전의를 끌어올렸다.

쿵. 쿵. 쿵.

묵직한 방패 소리가 모두를 전율케 했다.

―오늘 이곳에서, 새로운 전설을 쓸 준비가 되었는가!

"와아아아아아아아!"

"새로운 전설을 위해!"

"오딘이시여어어어어!"

플레이어들의 함성이 무스펠하임을 넘어 니플헤임으로 뻗어 나간다.

그와 동시에 악마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여섯 군주 중 하나, 분노의 악마.

팔짱을 낀 채 미소 짓던 사탄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모두 천계의 위선자들을 찢어 죽여버려라!]

악의로 가득 찬 고함이 방패 두드리는 소리를 찢고 들어왔다.

발을 구르던 악마들이 돌진했다.

마치 까만 파도의 물결이 절망의 협곡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 같았다.

오딘도 지지 않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새로운 전설을 위해! 모두 진격하라!

펄럭! 펄럭!

하얀 깃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와 씨발.. 오딘 니뮤ㅠㅠㅠㅠ

└이미 한 번 이겼는데 두 번이라고 못 이김? 천계 가즈아아아아악!

└(과도한 욕설로 인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ㄹㅇ 우리는 지금 새로운 전설을 맞이하고 있는 거임!

└간만에 피가 끓는다 ㄷㄷ

└(과도한 욕설로 인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다들 흥분한 거 봨ㅋㅋㅋㅋㅋㅋㅋㅋ

* * *

열두 주신 중 하나, 오딘의 창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그에 맞춰, 플레이어들도 마력을 내뿜었다.

'대박인데?'

공포로 물들었던 전장을 바꾼 건 딱 하나였다.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려주었을 뿐.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도 분위기가 급변했다.

"송화경! 스벤! 사브르! 볼티노! 렌!"

"예, 조장!"

"우리도 사냥을 시작하자!"

평소 무뚝뚝하던 구트룬마저, 제법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힘차게 날갯짓하며 적들에게 향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콰지지지지지지직!

나도 뇌전을 끌어올리며 악마들에게 돌진했다.

띠링!

[천계의 영웅들이여! 그대들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협곡에 모여든 악마들을 쓸어버려 주세여!!!]

[ (づ ̄ ▽ ̄)づ ]

[가장 많은 킬 수를 달성한 열 명의 플레이어에게 어마어마한 보너스를 부여합니닷!]

[정말 입이 떡하고 벌어질 정도로 엄청날 거니까 기대하셔도 좋아여!]

[그럼 파이팅이에여!! 격렬한 응원!]

[ 〜( ̄△ ̄〜)]

[힘내라아아아아.]

< 221화. 대격돌(2) > 끝

< 222화. 대격돌(3) >

띠링!

[킬 수 계산 방식을 공개합니다.]

[하급 악마 : 0킬 / 중급 악마 : 1킬 / 상급 악마 : 2킬 / 최상급 악마 : 3킬 / 고위 악마 : 5킬]

[고위 플레이어 킬 수 현황]

[1위. - ]

"새로운 전설을 위하여!"

"기고만장한 천계의 광대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수만이 넘는 악마와 플레이어가 좁은 협곡에서 격돌했다.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스케일의 전투.

플레이어와 악마가 순식간에 뒤엉키며 난전이 펼쳐졌다.

"스벤! 볼티노! 렌! 건투를 빈다!"

검은 해일 앞에서 조원들에게 외친 구트룬.

그를 시작으로 뿔뿔이 흩어진 우리는 검은 물결 안을 파고들었다.

챙! 콰지지지직!

'숫자는 적지만, 전력은 우리가 더 높아.'

고위·초월 플레이어뿐만 아니라, 이곳엔 주신과 대신, 천사들까지 합류했다.

고급 전력이 훨씬 많으니, 눈먼 칼만 조심하면 될 것이다.

'일단 체력을 아끼면서······ 어?'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대규모 전투가 펼쳐지고 있는 상황.

'크윽.'

신성력과 마기가 섞인 엄청난 충격파가 불어닥쳤다.

얼마나 강한지, 협곡 전체가 흔들리고 충격파만으로 날개가 꺾일 정도였다.

"······!"

"······!"

'이런 미친.'

협곡의 중심부에서 싸우고 있는 오딘과 마계 군주.

황금빛으로 물든 창과 검붉은 손톱이 격돌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져 나온다.

"오랜만이군, 겁쟁이 티르! 그동안 꼭꼭 숨어 있어서 감이 다 죽은 건 아니겠지!"

"혀가 길구나, 거짓의 푸르푸르여."

꽈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앙!

그 옆에서 다른 고위 존재들의 싸움이 펼쳐진다.

대신은 타락 천사와.

초월 플레이어와 천사들은 고위 악마들과 뒤엉켜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조심해야 해.'

나는 날개를 펄럭이며, 중심부에서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고래와 상어의 싸움.

반면에 우리는 피라미에 불과하다.

싸움 충격파에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입을 것이다.

'체력을 아끼는 건 포기해야겠군.'

띠링!

[<스킬:뇌룡의 포효>가 활성화됩니다.]

[근력과 민첩 스텟이 + 25% 상승합니다.]

판단을 내린 나는 곧장 뇌룡의 포효부터 켰다.

저들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최상급 악마부터 고위 악마까지 한가득한 상황.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강자가 몰려 있어서, 자칫 잘못했다간 단숨에 찢겨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 죽어! 죽어!"

쩌억! 쩌어억!

"한 놈이라도 더 죽여 버려!"

생사 대적을 만난 듯 눈에 불을 켠 채 싸우는 플레이어와 악마들.

하지만 나는 적들의 공격을 피하며, 마력장에 집중했다.

'이 정도면 제법 성장한 줄 알았는데.'

인외人外의 존재들이 중심부에서 싸우는 걸 보니, 아직 한참 멀었다.

나는 저들에게 발끝에도 못 미치는 수준.

거기다 악마들에게 한 번 납치당할 뻔하면서, 내 신경은 무척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챙! 콰지지직!

띠링!

[초승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목걸이:영롱한 달빛>이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10% 상승합니다.]

[달빛의 힘으로 인해 <영롱한 달빛>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1분당 체력과 마력이 5%씩 회복됩니다.]

[<스킬:열반>이 활성화됩니다.]

[정신 이상 기운 상쇄율 : 90%]

'후우,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겠군.'

때마침 달이 뜨면서 남아 있던 특전들이 활성화된 상황.

보름달이 아닌 건 아쉽지만, 모든 스텟이 11%나 상승했다.

거기다 분당 5%씩 체력도 회복될 테니,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적들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챙! 콰지지지직!

"크윽, 제기랄······!"

번쩍! 꽈아아앙!

열두 줄기의 벼락이 흩뿌려지고, 간간이 빛기둥이 터진다.

"저놈이 렌이다!"

"죽여!"

그 화려한 임팩트 탓에 주변의 시선이 내게 모여들었다.

'조심해야 해.'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위험하다.

나보다 강한 존재가 주변에 한가득 널려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흥, 같잖은 녀석이."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네 쌍의 날개를 가진 고위 악마가 덤벼들었다.

채애앵! 콰직! 채애애앵! 콰지지직!

띠링!

[<청천벽력>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앙!

뇌전의 스파크가 터지고, 벼락이 흩뿌려진다.

'젠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위 악마는 미간만을 찌푸릴 뿐, 연신 나를 몰아붙였다.

'스텟의 차이가 너무 심해.'

서로의 무기가 맞부딪힐 때마다, 창을 쥐고 있던 팔이 기형적으로 꺾여나간다.

거리를 벌리며 장기전으로 끌고 가고 싶지만, 주변을 가득 메운 날개들 때문에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다.

"끝이다."

단숨에 내 품속으로 파고든 고위 악마의 검이 내 목을 겨눈 채 날아들었다.

'그림자 이동.'

띠링!

[플레이어 '고건하'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찍어 누르는 모래의 늪!]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삭풍의 노래!]

[흔들리는 염화의 춤!]

[소성의 새벽 폭풍!]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자, 마법을 영창 하는 상위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보였다.

핑! 핑! 핑!

"헉, 누구······ 우진······ 렌 님?"

"허억, 허억, 헉, 허억."

화들짝 놀라며 뒤를 쳐다보던 고건하가, 내 얼굴을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하셨군요, 렌 님."

"후우, 예, 적들에게 어그로를 끌지 말고,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세요. 저는 이만."

"알겠습니다. 렌 님도 조심하십시오."

펄럭! 펄럭!

고건하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 나는 곧장 허공에 몸을 띄웠다.

'이대로는 안 돼.'

꽈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앙!

온갖 고위 존재들로 가득한 전장.

이곳에서 살아남기에 내 스텟은 너무 낮다.

거기다 나는 원거리 딜러가 아닌, 최전방에서 싸우는 근접 딜러.

심지어 임팩트도 화려해서 어그로 끌리기가 쉽다.

까딱 잘못했다간, 방금 전처럼 고위 악마가 붙을 가능성이 컸다.

'어쩔 수 없지.'

긴 한숨을 내쉰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러고는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놨던 한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하얀 바탕에 그려진 악귀가 내게 눈인사하는 느낌이었다.

'버틸 수 있을까?'

나는 냉정하게 판단하기로 했다.

달이 뜨면서 열반이 활성화되어 있다.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에서도 형이 죽는 모습을 보기 전까진 버틸 수 있었다.

'정신만 차리면 충분히 버틸 수 있어.'

거기다 지금은 정신 스텟이 두 배나 상승한 상태.

'후우, 다시 시작해 볼까.'

펄럭! 펄럭!

가면을 쓴 나는, 충격파가 뿜어져 나오는 전방으로 향했다.

"헉, 렌이 가면을 썼다!"

악귀가 그려진 가면을 본 플레이어들이, 기대 어린 눈빛을 보내왔다.

* * *

마계, 판데모니엄.

"절망의 협곡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나태의 군주께서도 무사히 스며들었다고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

"분노의 군주께서 시선을 끄는 사이에 움직인다면, 틀림없이 숙주를 납치해 올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음, 수고했노라."

고위 악마 제파르의 보고에, 왕좌의 팔걸이를 쓰다듬는 왕.

'다행히 부족함 없도록 처리했군.'

그 모습에서 제파르는 안도할 수 있었다.

왕께서 기분 좋을 때 나오는 버릇임을 알기 때문.

"그럼 저는 나태의 군주께서 숙주를 잡아 왔을 때 바로 인계받을 수 있도록, 이만 헬하임에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깊게 고개를 숙인 제파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받거라."

품속에서 꺼낸 물건을 툭, 하고 던지는 왕.

얼떨결에 받아 든 제파르가 물건을 보곤 눈을 번쩍 떴다.

길이가 30센티미터를 넘는, 거대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기다란 뿔.

뿔의 크기가 힘의 척도를 증명하는 마계에서, 이 정도 크기의 뿔을 만들 수 있는 존재는 겨우 일곱 뿐이었다.

'아니, 이젠 여섯이지.'

군주급의 뿔.

"이건······?"

"대전쟁의 잔재니라."

아무 감흥도 없다는 듯 읊조리는 왕.

하지만 뿔을 받아 든 제파르의 손은 파르르 떨렸다.

'이걸 지금까지······ 가지고 계셨다니······.'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게, 대전쟁 때 미카엘에게 잘려 나간 왕의 뿔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

소중하게 뿔을 들고 있던 제파르는 이어지는 왕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레비아탄이 장난질을 쳐놨더군. 가서 그릇에게 심어주거라."

"그릇에게······?"

왕의 말에 제파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레비아탄의 마기가 이미 그릇을 채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파르가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는 딱 하나.

'마몬께서 자리를 잡으시면 어차피 다 해결될 텐데, 어째서······?'

탐욕의 군주의 씨앗이 발아하면 다 해결될 문제였으니까.

굳이 이 뿔을 심어주는 건, 힘을 낭비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제파르 본인에게 심어주면 모를까.

"감히 연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바닥에 납작 엎드린 제파르는, 왕을 자극하지 않도록 최대한 공손하게 물었다.

"그릇의 내용물에 뭐가 담길지는 끝까지 두고 봐야 아는 법이지."

"그릇의 내용물······?"

말끝을 흐리며 물었으나,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아버린 왕.

얘기해주는 건 여기까지란 뜻이었다.

'마몬께서 그릇에 들어가시는 게 아닌가?'

제파르는 납작 엎드린 상태로 왕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서 숙주에다가 마몬 님의 잔재를 심고······ 그걸 이식······ 헉!'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제파르의 몸이 파르르 떨리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설마······?'

숙주를 이용해서, 그릇이 받을 부담감을 줄인다.

그 상태로 씨앗을 옮겨, 그릇에서 발아한다.

지금까지는 그게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제파르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탐욕의 군주도, 그릇에 그려지는 그림일 뿐이었다면?

여전히 내용물을 담을 수 있는 상태로 남게 된다면?

'다른 군주님 중 한 분이 들어가실 수도 있어.'

턱이 덜덜 떨렸다.

알아선 안 되는 걸 알아버린 것 같았다.

'왕께서 마몬 님의 힘까지 얻으실 수만 있다면······.'

그 모습을 상상하자, 제파르의 눈동자에 희열이 담겼다.

* * *

'대박이네.'

오랜만에 쓴 블라디미르 가면의 효과는 대단했다.

서걱! 서걱! 서걱!

"끄윽······."

"제, 젠장······."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민첩 스텟을 흡수합니다.]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30/100)]

스텟이 상승하면서, 상급·최상급 악마들을 단숨에 쓸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체력도 100%로 회복되면서, 뇌룡의 포효 스킬에 대한 페널티도 사라져 버렸다.

'진짜 미친 성능이야.'

"크흐흐, 꽁지 빠져라 도망가더니 가면을 쓰고 다시 돌아왔군."

네 쌍의 날개를 가진 고위 악마가 날아든다.

아까 나를 몰아붙여서,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게 만든 녀석이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악마의 눈으로 녀석의 스텟을 체크한 나는 피식 웃었다.

'이번엔 다를 거다.'

띠링!

[<스킬:뇌룡의 포효>가 <스킬:뇌신 강림>으로 각성합니다.]

[<창:신벌神罰> <스킬:뇌신 강림> <스킬:천뢰십보> <스킬:뇌정>에 깃든 뇌전의 기운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스킬:뇌정>이 <스킬:폭뢰(爆雷)>로 각성합니다!]

꽈아아아앙! 꽈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앙!

"무, 무슨······!"

녀석에게 창을 내리칠 때마다 공기 터지는 소리가 난다.

뇌전의 플라즈마가 공기 중으로 뻗어 나가며 이리저리 날뛴다.

피의 강화 특전과 뇌신 강림, 그리고 폭뢰까지 활성화된 상황.

이전과 180도 달라진 모습에, 고위 악마가 눈을 부릅떴다.

"끝이다."

아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나는, 녀석에게 전력으로 창을 내리쳤다.

꽈아아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상반신이 통째로 사라진 채 추락하는 고깃덩이.

'후우.'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위 악마를 처치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고위 리그]

[근력 : 507(+5)(+282)] [민첩 : 568(+5)(+336)] [체력 : 397(+5)(+172)]

[정신 : 454(+5)(+268)] [지력 : 185(+81)] [마력 : 340(+5)(+147)]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지간한 고위 플레이어들과 싸워도 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스택을 초기화시켜야겠군.'

고위 악마를 처치한 나는, 가면을 해제해서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띠링!

[<피의 강화> 옵션이 사라집니다.]

[<피의 각성> 옵션이 사라집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초기화됩니다.]

열반도 있고 정신 스텟도 높지만, <피의 각성>은 어지간하면 활성화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

가면을 집어넣자, 온몸에 흘러 넘치던 힘이 쭈욱 빠졌다.

500이 넘던 스텟도 단숨에 400 가까이 수직 하락했다.

"카론! 렌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부상을 입은 게 분명해!"

"내가 처치하지. 놈! 어딜 가느냐!"

그러자 내게 덤벼드는 수많은 악마들.

녀석들을 단숨에 베어버린 나는, 다시 가면을 꺼내 썼다.

서걱! 서걱!

"끄윽! 노, 놈이 다시 강해진다!"

"젠장. 그냥 밀어 붙여! 다시 약해지는 순간이 올 거다!"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피의 강화 스텍이 빠르게 상승한다.

결국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다시 피의 강화 특전이 활성화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끝도 없이 달려드는군.'

다시 가면을 벗어서 스텍을 초기화하려 했지만, 악마들이 날 악착 같이 붙잡고 늘어지는 탓에, 가면을 넣을 틈이 없다는 것.

이래서는 가면을 넣었다 빼며, 피의 강화 특전만 유지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나.'

어느새 피의 각성 스텍이 90포인트까지 치솟은 상황.

이대로는 피의 각성이 발동된다.

'피의 각성은 견딜 수 있어.'

상태창을 힐끗 살핀 나는 빠르게 판단했다.

피의 강화 특전 없인, 생존 확률이 떨어진다.

즉, 현재 가면은 필수 아이템이나 마찬가지.

'좋아. 스택 초기화는 포기하자.'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적들 사이를 휘저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꽈아아앙! 꽈과과광!

잠시 뜸했던 벼락이 쉴 새 없이 몰아치며 주변을 난도질했다.

그리고.

띠링!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100/100)]

[<피의 각성>이 발동합니다.]

[<피의 각성>이 <피의 흡수>를 강화시켰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피의 흡수> 능력의 효과가 100% 증가합니다.]

오랜만에 피의 각성이 발동되었다.

< 222화. 대격돌(3) > 끝

< 223화. 대격돌(4) >

―더 강한 힘을 원하는가.

[차가운 염화의 칼날!]

[사자死者의 넋두리!]

꽈과과과과과과광!

오색 빛깔 영롱한 마법들이 지상을 두들기자, 일렁이는 먼지구름 안에서 피가 한가득 흩뿌려진다.

"이 개자식! 죽어! 죽으라고!"

"허억, 헉. 사, 살았다······!"

신, 천사, 인간, 악마 구분할 것 없이, 모두 피를 잔뜩 흘리며 격전을 펼치고 있다.

살겠다는 집념, 죽이겠다는 광기로 가득한 전장.

'후우.'

싸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흥분했는지 살기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어서 저 사이로 뛰어들고 싶은 욕망으로 목덜미가 쭈뼛해질 정도.

띠링!

[정신 스텟이 1 하락합니다.]

'나쁘지 않은데?'

손바닥을 쥐었다 펴길 반복한 나는 피식 웃었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피의 각성이 발동되며 들끓기 시작한 살의.

'이 정도면 충분히 제어가 가능하겠어.'

하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정신적 데미지가 현저히 낮아졌다.

살기를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수준에 이른 내게 있어서, 이 정도는 약간 흥분한 상태에 불과하다고나 할까.

'역시 정신 스텟을 올리는 게 정답이었군.'

정신 스텟이 하락하는 것도 줄어들었다.

내부에서 또 다른 욕망이 흘러나오지만, 컨트롤 가능한 수준.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사냥을 시작해 볼까.'

각성을 통해 효율이 2배나 상승한 <피의 흡수>로, 스텟을 끌어올리는 것.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진 나는, 주위에 존재하는 악마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띠링!

[<벽력>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폭뢰가 활성화된 상태에서 터진 벽력.

"끄아아아악!"

"사, 살려 줘! 누, 누가 나 좀······."

"저게 마법이 아니라니······?"

뇌전의 플라즈마가 사방을 집어삼킨다.

그 무시무시한 공격에 근처에 있던 악마들이 녹아내렸다.

서걱! 서걱!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민첩 스텟이 1 상승······.]

'정신 스텟이 하락하는 것에 비해 훨씬 많이 오르네.'

최상급 악마들 위주로 죽이고 다니자, 스텟이 빠르게 상승했다.

기초 스텟의 차이는 얼마 안 나는데, 나는 각종 특전으로 도배를 하고 있는 상황.

'최대한 스텟을 올려서 제대로 뽕을 뽑아야겠군.'

녀석들은 내게 있어서, 날아다니는 경험치나 마찬가지였다.

[이벤트 : 협곡에 모여든 악마들을 쓸어버려 주세여!!!]

[보상 : 가장 많은 킬 수를 달성한 열 명의 플레이어에게 어마어마한 보너스를 부여합니닷!]

[하급 악마 : 0킬 / 중급 악마 : 1킬 / 상급 악마 : 2킬 / 최상급 악마 : 3킬 / 고위 악마 : 5킬]

[고위 플레이어 킬 수 현황]

[1위. '고담덕' 2,817킬]

[2위. '연비월' 2,733킬]

[3위. '이멘드라' 2,482킬]

[4위. '워록' 2,309킬]

[5위. '기네스' 2,002킬]

.

.

[297위. '렌' 777킬]

킬 수 현황을 체크하니, 어느새 상위 10명과의 차이가 크게 벌어져 있었다.

악마들이 혹시 또 납치를 시도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초반에는 몸을 사렸기 때문.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어.'

10위의 킬 수가 1,800킬 정도.

나랑은 무려 세 배 가까이 차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의치 않았다.

서걱! 서걱!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블라디미르 가면은 약한 다수를 학살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는 장비였으니까.

거기다 청천벽력 등 다수의 광역기를 보유하고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전력을 다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펄럭! 펄럭! 펄럭!

"이 광역 데미지부터 처리해야겠어! 모두 가면 쓴 놈부터 노려라!"

"젠장! 이 벼락의 쿨 타임은 도대체 얼마나 짧은 거냐······!"

열두 줄기의 벼락이 쉴 새 없이 내리치자, 주변에 있던 악마들이 나를 타깃으로 잡고 몰려든다.

모두들 어떻게든 나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

'어림없지.'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씨발, 마법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크으윽······."

그러나 녀석들의 시도는, 벽력이 딱 한 번 발동하는 것만으로도 와해되었다.

오히려 내 스텟의 제물이 되었을 뿐.

'슬슬 2차 각성이 활성화될 때가 됐는데.'

1,000킬을 채우면 2차 피의 각성이 열린다.

피의 각성이 켜지고, 어느덧 수백이 넘는 악마를 죽인 상황.

조금만 더 죽이면 피의 흡수 효율이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악마들 사이를 휘젓고 있을 때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같잖구나, 오딘이여. 뒷방 늙은이 주제에 이 몸을 상대하려 하다니!

―그 불쾌한 입담은 여전하군.

여전히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오딘과 마계 군주.

두 존재의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거대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마치 두 존재를 중심으로, 직경 50미터 안에 보이지 않는 막이라도 처져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저게 초월자에 근접한 존재들 간의 싸움.'

중심부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멀리 피해서 돌아가던 나는, 주신과 군주의 싸움을 보며 감탄했다.

황금빛의 신성력으로 물든 창과, 검붉은 빛의 마기로 물든 검이 부딪친다.

그러자 어지간한 고위 마법이 터졌을 때 발산하는 충격파가 뿜어져 나온다.

특별한 스킬이나 권능을 사용하는 게 아님에도, 두 존재의 공격 하나하나에 어마어마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쯧, 나도 아직 한참 멀었군.'

그걸 보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 도착지가 여전히 까마득하다는걸.

'다시 사냥을 시작해야겠······.'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내곤, 다시 악마들을 학살하려 할 때였다.

오딘의 어깨 너머로, 나를 힐끗 바라보는 사탄.

'으윽······.'

순간 숨이 턱 하고 가빠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딱히 살기를 흘리거나, 내게 어떠한 권능을 사용한 건 아니었다.

그저 눈이 마주친 것뿐.

―감히 날 앞에 두고 한눈을 팔다니!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크게 포효하며 사탄의 눈길을 막아선 오딘.

"허억, 헉, 헉, 허억, 허억."

온몸을 옭아매던 눈빛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거친 숨을 토할 수 있었다.

'이런 미친······.'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쿵쾅쿵쾅 뛰었다.

'고작 눈빛을 받은 것만으로도 옴짝달싹 못 하다니.'

나는 창을 으스러지도록 꾸욱 쥐었다.

저런 인외의 존재들 앞에선, 나는 너무 무력했다.

하지만 초월 리그에 올라간다면, 언젠가 저런 존재들과도 싸워야 한다는 뜻.

'더 강해져야 해.'

지금 이 순간, 확실하게 깨달았다.

스텟을 더 올려야 한다.

지금보다 최소 두 배는 높아야, 저런 존재들과 무기라도 한 번 섞어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잘 됐어.'

챙! 채챙! 챙! 챙!

"크흐흐흐, 광대답게 춤이라도 추는 게냐."

"그 뚫린 입을 금방 찢어주지."

이곳은 전장.

내 스텟의 제물이 되어줄 악마들은 충분하다.

거기다 2차 피의 각성이 남아 있는 상황.

'이곳에서 최대한 올려야겠군.'

주저 없이 악마들 사이를 파고든 나는, 거침없이 창을 휘둘렀다.

띠링!

[<청천벽력>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앙! 꽈과광!

└무스펠하임-니플헤임 입구 전투 천계가 압승 중임 ㅅㅅㅅㅅㅅㅅㅅ

└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 가즈아아아아!

└ㄷㄷ이거 잘하면 사탄도 죽일 수 있겠는데?

└확실히 콜로세움 시스템이 정답이긴 한 듯. 플레이어들이 악마들 그냥 압도해 버리네ㅋㅋㅋㅋ

└ㅇㅈㅇㅈ 악마들 계속 합류하고 있긴 한데 저 정도면 그냥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수준인 듯 ㅎ

└ㅋㅋㅋㅋㅋ 마계 여섯 군주가 누구 애 이름이냐 ㅋㅋㅋ 좀 밀린다 싶으면 사탄은 걍 튀면 됨 ㅋㅋㅋ 주신 두 명은 붙어야 죽일 수 있음 ㅋㅋㅋ

└근데 슬슬 튈 때 된 거 같은데 걍 밀어붙이네 ㅋㅋㅋ 악으로 깡으로 버티다가 뒤지면 진짜 개레전드인데 ㅋㅋㅋㅋㅋ

외갈래 길, 절망의 협곡 안에 빼곡하던 악마의 숫자가 차츰차츰 줄어갔다.

계속해서 악마들이 추가되고 있음에도, 어느덧 처음보다 3분의 2 정도만이 남아 있는 상황.

"젠장, 지원군이 오고 있는데도 어째서 밀리는······!"

서걱!

[<피의 각성>이 1 포인트 상승합니다. (1,000/1,000)]

[2차 <피의 각성>이 발동합니다.]

[2차 <피의 각성>이 <피의 흡수>를 강화시켰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피의 흡수> 능력의 효과가 700% 증가합니다.]

'이제야 떴군.'

눈앞에 뜬 알림창에 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벌레들의 숫자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고 있어서, 언제 발동되나 오매불망 기다리던 상태였으니까.

드디어 2차 피의 각성이 발동된 것이다.

'효율이 700퍼센트라.'

게다가, 예상했던 것보다 각성 수치가 훨씬 크게 나온 상황.

각성 전에 스텟이 1 올랐다면, 이제부턴 7이나 오른다는 뜻이었다.

싸아아아아아아아아아―

'후우, 침착하자.'

내 몸에서 1차 각성 때보다 더 진득한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성을 잃거나, 제어가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

'제대로 날뛰어 볼까.'

[74위. '렌' 2,192킬]

전투가 지속됨에 따라, 내가 경계해야 할 강자의 숫자도 크게 줄어들고 있다.

이제부턴 슬슬 적들 사이를 파고들어도 안전할 것이다.

콰지지지지지지직!

판단을 내린 나는 과감하게 적들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띠링!

[<벽력>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때마침 터진 벽력.

빛기둥이 하늘로 솟구치고, 뇌전의 칼날이 사방을 휩쓸었다.

허공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거대한 충격파를 발산했다.

"커헉······."

근처에 있던 중급·상급 악마 수십 명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폭뢰가 활성화되어 있는 데다가, 스텟이 워낙 높다 보니, 벽력의 임팩트도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킬 수도 5위권 안에는 들어야 안정적으로 보너스를 탈 수 있을 거야.'

스텟 때문이 아니더라도, 킬 수 하나하나가 소중한 상황.

그때부터 나는 악마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26위. '렌' 2,433킬]

킬 수가 수직 상승한다.

스텟이 빠르게 오르면서, 움직임이 더욱 가벼워진다.

그로 인해 킬 수가 더 빠르게 상승한다.

'대박이군.'

피의 흡수 효율 700%는 그 연쇄 작용을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미친!"

"이런 자식이 왜 날개가 한 쌍밖에······!"

그 압도적 무위에, 부나방처럼 날아들던 악마들이 입을 쩍 하고 벌릴 정도.

[10위. '렌' 2,901킬]

꽈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앙!

'모두들 잘하고 있나 보네.'

지상 곳곳에서 빛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벽력이 터질 때의 임팩트.

권속 천사의 권능을 열어 보니, 목록엔 여전히 열 명의 팀원들이 자리해 있다.

대규모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사망자가 없던 것이다.

'그림자 표식이 사기긴 하지.'

내 스킬을 따라 쓸 수 있게 되면서, 권속 플레이어들 모두 그림자 표식을 쓸 수 있는 상황.

위기의 순간에 안전한 곳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으니, 여벌의 목숨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모두들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더 분발해 볼······ 어?'

그런 생각을 하며 창을 고쳐잡고 있을 때였다.

'뭐지?'

순간 위화감이 들었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

내게 검을 겨눈 채 숨을 몰아쉬는 악마.

주신과 군주가 뿜어대는 충격파에 날개 각도를 조정하는 악마.

방패를 내밀며 거리를 좁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악마 등등.

모두들 나를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

언제 어디서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간간이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체크해야 했으니까.

'저 녀석은······?'

하지만 딱 한 명.

펄럭! 펄럭!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중급 악마, 딱 한 명만큼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난전이 펼쳐지는 전장에선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지.'

마치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듯한 모습.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인데.'

그런 이유로, 나는 녀석에게 악마의 눈을 사용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베리알]

[성향 : 나태]

[근력 : ????(+?)] [민첩 : ????(+?)] [체력 : ????(+?)]

[정신 : ????(+?)] [지력 : ????(+?)] [마력 : ????(+?)]

[각성 능력 : 대상의 격이 너무 높아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업적 특전 : 대상의 격이 너무 높아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종족 특전 : 대상의 격이 너무 높아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보이는, 물음표로 가득한 상태창.

'어······?'

이게 뭐지?

피의 각성 때문에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씨익, 웃는다.

처음 느껴보는 섬뜩함이 내 목을 옥죄어 온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스킬을 사용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무의식이 시켰을 뿐.

띠링!

[플레이어 '카이로시아'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순식간에 시야가 반전된다.

파밧!

그 마지막 찰나,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팔을 뻗는 베리알.

"······!"

빠아아아악!

"끄으으으윽!"

오른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타들어 가는 통증에, 나는 눈을 부릅 떴다.

< 223화. 대격돌(4) > 끝

< 224화. 대격돌(5) >

니플헤임에 위치한 마계의 거점, 프레미어.

―빠아아아악!

"······!"

사령실에서 수정구를 통해 전장을 보고 있던 레비아탄.

베리알의 납치 시도 실패에 그가 벌떡 일어났다.

"당장 전군 출격 준비하라."

"알겠습니다!"

그의 명령에, 보좌 악마 발레톤이 서둘러 사령실을 나섰다.

레비아탄과 둘만 남게 되자, 셀레오스가 넌지시 물었다.

"첫 시도를 실패했지만, 나태의 군주께 잡히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굳이 전군을 출격시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마 십중팔구 성공하겠지."

"헌데 왜······?"

레비아탄이 털썩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이게 마지막 기회이니라."

"예?"

"군주까지 나서서 납치하려 했는데, 천계에서 의심할 건 불 보듯 뻔할 터. 여기서 만약 실패하면 더 이상 숙주를 잡을 기회가 없다는 뜻이다."

"아······!"

"그리고 베리알의 등장으로 인해 천계에서도 대규모 병력을 출정시키겠지. 만일에 대비해서 우리도 절망의 협곡으로 가야 한다."

"속하属下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레비아탄의 말에 고개를 숙이는 셀레오스.

잠시 후, 사령실을 나섰던 발레톤이 뛰어 들어와 보고했다.

"준비 완료됐습니다."

"음, 가지."

"옛!"

레비아탄은 두 보좌 악마를 데리고 사령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보이는 거점 프레미어의 공터.

뿌우우우우우우우우―

질투의 군주 레비아탄이 모습을 드러내자,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

펄럭! 펄럭! 펄럭!

수만 명의 악마들이 허공에서 날갯짓하며, 검은 날개로 하늘을 가득 메웠다.

모두들 군주의 명령을 기다리는 상황.

잠시 그들을 쓸어 보던 레비아탄이 입을 열었다.

"목적지는 절망의 협곡이다."

―후!

수만 명의 악마들이 동시에 외쳤다.

"가서 천계의 위선자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후!

절도 있는 기합 소리가 거점 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거대한 날개를 펼치는 레비아탄.

"모두 출격하라!"

마기가 담긴 지배자의 외침에, 수만 명의 악마들이 화답했다.

펄럭! 펄럭! 펄럭!

하늘이 새까맣게 변했다.

* * *

"절망의 협곡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의 수치가 급상승합니다!"

"이, 이럴 수가! 사탄이 내뿜는 것과 수치가 비슷합니다!"

"여섯 군주 중 한 명이 추가로 등장한 게 틀림없습니다!"

절망의 협곡에서 펼쳐진 대규모 전투.

혹시 모를 변수를 예의주시하느라 고요함을 유지하던 고위 게임 메이커의 집무실이,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곳곳에서 천사들의 뾰족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찰그락― 찰그락―

따로 지시를 하지 않았음에도, 무장을 마친 일부 천사들이 출격할 준비를 했다.

"미네르엘!"

그런 상황에서 고위 게임 메이커, 가브리엘이 보좌 천사를 불렀다.

"영원한 빛을 위하여! 2급 지천사, 미네르엘!"

"그대에게 고위 리그 게임 메이커를 위임합니다! 지금부터 그대가 내 대행이에요!"

"알겠습니다, 가브리엘 님!"

"비상사태를 가동합니다. 발키리 부대는 엘리사르 성으로!"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가브리엘.

신성력을 개방해, 비프로스트를 생성한 그녀가 곧장 공간의 왜곡을 넘었다.

화륵! 화르륵!

불꽃이 넘실거리고, 뜨거운 열기가 코끝을 찌른다.

불의 세계, 무스펠하임.

'다른 분들도 빨리 오셔야 할 텐데······!'

주변에선 쉴 새 없이 비프로스트가 열리며, 공간이 왜곡됐다.

그 사이에서, 가브리엘이 찾던 한 존재가 보였다.

"1급 치천사 가브리엘, 주신님을 뵈어요."

열두 존재 중 하나, 알프헤임의 주신 위그드라실이었다.

'휴우, 다행이야.'

가브리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 대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던 그녀로서는 마계의 여섯 군주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으니까.

1급 치천사와 발키리 부대로는 한 명의 군주도 제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예는 됐어요. 어서 가죠!"

분신과도 같은 무기, 쿠투네시르카를 흔드는 위그드라실.

신성력으로 몸을 띄운 그녀가 절망의 협곡으로 향한다.

"네! 그럼 바로······."

그 모습에 가브리엘도 곧장 날개를 펴려고 할 때였다.

"어······?"

그 순간 그녀의 눈에,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들이 보였다.

"저희도 함께하겠어요."

팀 투지의 주인인 고신 아세리안과, 그녀의 휘하 두 천사가 엘리사르 성에 등장한 것이다.

세 존재를 본 가브리엘이 경악했다.

"어서 돌아가. 이곳은 너희들이 올 곳이 아니야."

얼마나 놀랐는지, 저도 모르게 과거에 대하던 것처럼 반말을 할 정도였다.

"하, 하지만······!"

"두 번 얘기하지 않겠어. 지금이라면 내 권한으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가게 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어서 돌아가. 렌은 우리가 어떻게든 구해낼 테니까."

가브리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콜로세움의 규칙상, 팀의 주인과 천사들은 계엄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필드로 나와선 안 된다.

아끼는 플레이어가 죽을 때마다 신과 천사들이 개입하면, 아수라장이 펼쳐질 수도 있기 때문.

만약 여기서 걸리면, 자칫 잘못했다간 팀이 공중 분해될 수도 있었다.

그러자 입술을 짓무는 아세리안.

시간이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그녀의 선택은 무척 빨랐다.

"어, 어서 가셔요. 저희는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아세리안이 얼른 가라며 손을 내저었다.

다행히 뜻을 꺾은 것이다.

"음."

"잘 부탁드려요······! 제, 제발!"

애절함이 가득 담긴 그녀의 말을 뒤로하고, 가브리엘은 아홉 쌍의 날개를 폈다.

그러고는 곧장 절망의 협곡으로 향했다.

'늦지 않았길.'

엘리사르는 절망의 협곡과 가장 가까운 성.

가브리엘의 속도라면 10분 남짓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유독 그 거리가 길게 느껴졌다.

'군주가 둘이나 등장했어.'

무척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플레이어 렌에게, 천계가 모르는 무언가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뜻.

'절대 뺏기면 안 돼.'

가브리엘이 더욱 힘차게 날갯짓했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액!

그녀의 등 뒤로, 악마 사냥이라면 이골이 난 발키리 부대의 하얀 날개가 창공을 뒤덮었다.

* * *

"끄으으으윽!"

오른쪽 어깨에서 몸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분명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는데도, 내 몸은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팍! 푸스스스스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내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등에서 느껴지는 아릿함을 뒤로하고, 나는 주변 상황부터 체크했다.

띠링!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체력이 18% 남았습니다.]

근처에서 상위 플레이어들이 벌집을 건드린 듯 분주하게 움직인다.

저 멀리, 나를 공격했던 베리알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튕겨 나간 거였어.'

나는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그림자 이동 스킬을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공격을 당해서, 카이로시아 뒤에서 튕겨져 나간 게 분명했다.

'후우······.'

힘겹게 상체를 들자,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흘러나오고 있는 상반신이 보였다.

고작 한 번의 공격만으로 상체의 30% 정도가 찢겨 나간 것이다.

―베리알, 이노오오오옴!

―크흐흐흐. 날 두고 어딜 가느냐, 오딘.

―빌어먹을. 티르, 헤임달! 그대들이 저 간악한······!

―그렇겐 안 되지. 벨레폭스! 스카르토!

베리알의 등장에, 전장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오딘이 포효하자, 사탄이 막아선다.

대신大神과 초월 플레이어들이 움직이려 하자, 고위 악마와 타락 천사가 들러붙는다.

그 탓에 베리알은 자유로운 상태였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나는 대천사의 눈물에 딸린 능력, 갱생을 사용했다.

띠링!

[<갱생> 능력을 사용합니다.]

[손상된 육체를 100% 회복시켰습니다!]

치이이이이이익! 우드득― 우드득―

상반신에서 몸이 불타는 것처럼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크으으윽."

부러지거나 뒤틀린 뼈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찢겨 나갔던 피부 조직에 새살이 돋아 오른다.

죽어가던 육체가 순식간에 100% 회복되었다.

'일단 어디로든 가야 해.'

몸을 벌떡 일으킨 나는, 곧장 날개를 펴고 록탄 성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간다고 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생각할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거기 있었군.

"······!"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등 뒤에서 베리알이 귓속말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나를 발견한 베리알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온다.

전력으로 날갯짓하고 있는데도, 녀석과의 거리가 실시간으로 줄어들었다.

―네 놈의 상대는 우리다!

―어딜 가려고!

악마들에게 붙잡히지 않아 자유로운, 일부 초월 플레이어들이 베리알을 뒤쫓았지만, 그다지 희망적이진 못했다.

'내가 먼저 붙잡히고 말 거야.'

띠링!

[<전광석화> 능력을 사용합니다.]

[1분 동안 민첩 스텟이 + 40% 상승합니다.]

[민첩 : 658(+5)(+427)]

신벌에 들어 있는 능력, 전광석화를 사용하자 날갯짓이 더욱 빨라진다.

이제는 주변의 사물이 잔상만 남긴 채 지나갈 정도.

그럼에도 베리알과의 거리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후우, 생각하자. 생각해야 해, 안우진!'

이대로는 록탄 성까지 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전에 붙잡히고 말 것이다.

지금 상태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맞서 싸우는 건 안 돼.'

애초에 성립조차 안 될 것이다.

굳이 비행 생명체 중에서 비교하자면, 잠자리와 모기의 싸움이랄까.

모기가 아무리 크고 잘 날아다녀도, 먹이 사슬의 정점에 있는 피지컬 깡패 잠자리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그럼 남은 방법은 딱 하나였다.

―이만 포기하거라. 발버둥 쳐 봤자 서로가 귀찮은 결과만 나올 뿐이다.

'어쩔 수 없지.'

바로 뒤에서 근접해 오는 베리알.

녀석의 손에 붙잡히기 직전,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그림자 표식을 사용했다.

띠링!

[플레이어 '주창범'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챙! 채챙! 챙! 콰지지직!

"죽어! 죽으라고!"

"우웩! 누, 누가 포션 하나······."

[설화난무雪花亂舞!]

꽈과과과과과과광!

순간 시야가 반전되며, 여전히 격전을 치르고 있는 전장의 모습이 보였다.

"거의 다 뚫었어요! 어? 우진이 형! 괜찮으세요?"

악마들을 향해 거대한 방패를 휘두르던 주창범이, 나를 발견하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억, 헉. 잠깐만 비켜 줘."

현재 남은 체력은 9%.

고작 1, 2분 정도밖에 날지 않았음에도 뇌신 강림이 활성화되어 있었던 탓에, 어느새 체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다.

주창범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하급 악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번쩍! 꽈광! 꽈과과광!

"끄아아악!"

"뭐, 뭐야!"

"모두 피······."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

창을 휘두를 때마다 서너 명의 머리가 허공을 날고, 주변으론 벼락이 떨어진다.

'후우, 좀 살 것 같군.'

단숨에 수십 명을 처치해, 체력을 70%까지 회복시킨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체력 회복은 블라디미르 가면 만한 게 없었다.

"여기 렌이 있다!"

"모두 저놈부터 노려!"

"막아! 악마들이 렌한테 붙지 못하게 해야 해!"

나를 발견한 악마들이 떼거지로 몰려든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플레이어들이 방패벽을 쌓으며 막는다.

그 사이에서,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지?'

이곳에 있는 악마들은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베리알.

'1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어.'

좁은 협곡에서 도주로는 딱 두 군데뿐이다.

베리알이 돌아올 무스펠하임 방향.

그리고 마계가 완전히 점령한 니플헤임 방향.

'도주는 불가능해.'

니플헤임으로 가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곳에서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 한다는 뜻.

그때였다.

펄럭! 펄럭! 펄럭!

네 쌍의 날개를 가진 플레이어 다섯 명이 내 주변으로 몰려든다.

"렌! 우리가 지켜주겠다!"

"이 사이로 들어와라!"

날개 없이 허공을 날아다니던 대신大神 한 명도 추가되었다.

"안심해라. 이제부터 그대의 몸에 손댈 수 있는 존재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대신 하나와 초월 플레이어 다섯.

그들이 오로지 나 하나만을 지키기 위해 방진을 짜기 시작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꽈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무스펠하임 쪽에서 날아온 거대한 충격파가 우릴 덮쳤다.

저 멀리서 초월 플레이어들을 뚫어낸 베리알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다.

"온다, 모두 준비."

"오늘 군주를 막아섰다는 전설을 한번 세워보죠. 스읍―"

'후우······.'

나도 신벌을 고쳐잡은 채 자세를 낮췄다.

―감히 이 몸을 농락하다니!

격렬하게 전투 중인 전장의 한복판.

단번에 나를 찾아낸 베리알이 쇄도한다.

스으읍―

나를 감싼 인외의 존재들이 숨을 짧게 들이쉰다.

그때였다.

―모두 조심!

쐐애애애애애액!

주신, 오딘의 목소리와 동시에, 섬광처럼 날아오는 하나의 검.

채애애애앵!

정면에 서 있던 대신이, 검을 막다가 튕겨 나간다.

심장이 철렁했다.

가장 중요한 부위를 지키고 있던 존재가 사라졌으니까.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

"······!"

그로 인해 철벽같던 방어막에 생긴 빈틈.

그 사이를 베리알이 찌르고 들어온다.

'젠장!'

나는 본능적으로 섬전을 사용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224화. 대격돌(5) > 끝

< 225화. 대격돌(6) >

섬전을 사용하자 순식간에 바뀐 시야.

나는 곧장 창을 들어 올리며, 이어질 베리알의 공격을 경계했다.

'뭐지······?'

근데 뭔가 이상했다.

단거리 순간 이동인 섬전을 사용한 것치고 주변 분위기가 확 달라진 것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시구르드, 놓치면 안 돼!"

두리번두리번 고개를 돌려 보니, 저 멀리에서 초월 플레이어들이 베리알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다.

거리는 대략 600미터 정도.

그 너머로 누군가가 튕겨져 날아가고 있었다.

'이건 그림자 이동인데?'

그래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잠시나마 내가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나 의아했을 정도.

'나한테 남은 표식은 하나도 없······ 어?'

그 순간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장거리 순간 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능력.

'그림자 교환······?'

새롭게 얻은 권능으로 인해, 권속 플레이어들도 내가 보유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

'누가 나한테 그림자 교환을 써준 거였어.'

곧바로 주변을 둘러본 나는,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다.

여긴, 카이로시아가 마법을 뻥뻥 날려대던 자리였으니까.

'카이로시아? 카이로시아는?'

―이 벌레 같은 것들. 귀찮게 하지 마라!

꽈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원래 있던 위치를 바라보니, 초월 플레이어 다섯과, 튕겨 나갔다가 다시 합류한 대신大神에게 붙잡힌 베리알이 날개를 파닥이고 있다.

몸에 상처가 가득한 게, 무리하게 나를 노리다가 공격을 허용한 모양.

저런 상태로는 방금 전처럼 나를 노릴 수 없다.

'카이로시아를 찾아야 해.'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나는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그때였다.

펄럭! 펄럭! 펄럭!

무스펠하임 쪽에서 들려오는 무수한 날갯짓 소리.

"······!"

고개를 돌려 보니, 하얀 날개가 창공을 가득 메우고 있다.

'원군이 도착했어.'

그 사이에서 열 쌍의 날개를 가진 미카엘과, 아홉 쌍의 날개를 가진 치천사熾天使熾, 그리고 날개가 없는 몇몇 존재들이 보였다.

아마 대신이거나, 주신일 것이다.

―발키리 부대! 악마들을 모조리 쓸어 버려라!

―멸악을 위해!

―영원한 빛을 위하여!

그때부터 전세가 확 바뀌었다.

순식간에 날아든 천사들이 악마들을 찢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틈에 카이로시아를 찾아야 해.'

[등록된 권속(10/10)]

[플레이어 '카이로시아']

[플레이어 '주창범']

[플레이어 '모용악']

[플레이어 ······.]

권속 플레이어의 목록을 확인해 보니, 카이로시아의 닉네임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었다.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걸 수도 있으니까.

―쯧, 겁쟁이들답게 잔뜩 몰려왔군.

―몰래 군주를 숨겨 두었던 네 놈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구나, 사탄이여.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 주지.

―동료를 두고 가서야 되겠는가. 조금 더 발악해 보시게.

―흥.

오딘과 싸우고 있던 검붉은 색의 악마가 뒤로 물러난다.

그걸 시작으로 악마들이 니플헤임 쪽을 향해 우수수 빠져나갔다.

'제발 무사하길. 제발.'

황급히 하늘 위로 날아오른 나는, 카이로시아를 찾기 위해 지상을 두리번거렸다.

"씨발, 우린 왜 지원군을 안 보내주는 거야!"

"헛소리할 시간에 얼른 튀어!"

"죽여! 어서 죽여!"

"간악한 악마들을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날개가 없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악마들.

도주하는 악마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천사와 플레이어.

그 사이에서, 내 눈에 확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후우······.'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인 새까만 로브와, 후드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찬란한 은발.

거기다 들어오기 직전에 내가 준 신화 등급의 완드까지.

'정말 다행이야······.'

그녀를 발견한 나는 가장 먼저 주변을 체크했다.

마음 같아선 바로 날아가고 싶지만, 현재 나는 악마들의 표적이 되어 있는 상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티르! 위그드라실! 놈을 절대 놓쳐선 안 되오!

―걱정 마세요, 오딘 님!

―이익! 이 위선자 새끼들이······!

검붉은 악마, 사탄이 빠져나가고, 절망의 협곡에서 내가 조심해야 할 악마는 베리알 뿐이다.

그런데 녀석은 현재 인외의 존재들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고 있는 상태.

나를 노릴 때 입었던 상처 때문인지, 악마들이 모두 빠져 나간 상황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 정도면 괜찮아.'

삥 둘러서 돌아 나온 나는 서둘러 카이로시아에게 날아내렸다.

"렌 님!"

"카이로시아, 괜찮아?"

위아래를 훑어보니 약간 긁힌 자국만 있을 뿐, 큰 상처는 없다.

그녀의 상태를 체크한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 렌 님이 주신 완드에 있는 1초 무적 스킬을 사용했어요."

'휴우.'

그리고 한 편으로는 그녀의 센스에 감탄했다.

'카이로시아한테 완드를 줘서 정말 다행이야.'

들어오기 직전에 신화 등급의 완드를 줬는데, 카이로시아가 곧바로 응용해서 사용한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이걸 이렇게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각성 능력에 '천재' 가 들어있을만 했달까.

"일단 뒤로 빠지자."

나는 그녀를 안아 들고, 곧장 최후방으로 이동했다.

꽈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

협곡 내부는 이미 소강상태.

싸우고 있는 건 인외의 존재들뿐이다.

천사와 플레이어들은 입구를 점한 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렌 형!"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후방에 도착하니, 주창범을 비롯한 권속 플레이어들이 모여들었다.

"카이로시아 님, 렌 님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워."

"딱히 렌 님을 위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렌 님이 죽으면 권속 천사의 권능도 사라지잖아요?"

팀원들이 고마움을 표하자,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치켜드는 카이로시아.

냉기가 풀풀 풍겨 나오는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나한텐 조금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카이로시아는 카이로시아였다.

"······."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모여든 팀원들을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했던가.'

인디언 속담에서 나오는 말이다.

'초월 리그까지 가야겠어.'

이들과 함께, 최대한 멀리 가보고 싶었다.

―그만 포기해라, 나태의 악마여!

―오늘 드디어 그 낯짝에 칼을 그어주겠군!

―젠장······! 사탄! 사타아아아아안! 어서 나를······!

―발악해 봤자 소용없다!

꽈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슬슬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 인외들 간의 전투.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머리가 복잡했다.

'젠장.'

온몸에 상처로 가득한 베리알.

녀석은 그 상태로 오딘과 다른 신들, 그리고 두 명의 대천사를 상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막고 있는 상황.

'저런 존재들까지 날 잡으러 오다니.'

그 압도적 무위에 가슴 한 켠이 섬뜩했다.

카이로시아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마계로 끌려가고 있었을 테니까.

'곤란한데.'

녀석들이 노리는 건 명확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블라디미르 가면을 회수하려는 거겠지.

거센 충격파 속에서, 한동안 전투를 지켜보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가면을 쓰면 안 되겠군.'

이 정도의 리스크를 짊어지고 가면을 사용하는 건 어리석은 일.

그렇다고 아예 인벤토리에 넣어놓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가면은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었으니까.

'팔아버리면 되겠지.'

가면의 옵션을 생각했을 때, 비슷한 등급의 장비에다가 골드를 얹어달라고 하면 충분히 수요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모두 전투 준비!

"젠장. 지긋지긋한 것들."

"후우······. 이걸로 끝일 줄 알았는데."

누군가의 외침에 작게 푸념하는 플레이어들.

고개를 돌려 보니, 니플헤임 쪽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군단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쉽지 않겠군.'

"형, 저흰 다시 전방으로 가볼게요."

"몸조심하십시오, 렌 님."

"표식 쿨 타임이 돌아왔으면, 렌 님께 남겨드리는 건데······."

대군단이 오고 있음에도,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팀원들.

'나쁘지 않네.'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팀원들에게 걱정을 받는 날이 올 줄이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테니, 여러분도 몸조심하세요."

펄럭! 펄럭!

팀원들을 안심시킨 나는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러고는 신벌을 고쳐 잡으며, 블라디미르 가면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킬 수 보너스는 포기해야겠군.'

규모를 보아하니, 지원군으로 온 대군단을 지휘하는 건 군주급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번에도 날 납치하려는 시도가 있을 거라는 뜻.

그래서 나는 무리하게 파고들지 않고, 후방에서 경계를 하고 있을 생각이었다.

―이대로 놓칠 것 같으냐!

적의 공세를 대비하고 있자, 오딘의 포효가 협곡에 울려 퍼진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창을 휘두를 때마다 흩뿌려지는 황금빛 신성력에 눈이 부실 정도.

'어떻게든 죽이려는 심산인가 본데.'

꽈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오딘과 함께 베리알을 몰아붙이는 여인에게선 초록 바람이 휘몰아친다.

베리알에게 깨져 나간 초록 바람이 모여들어,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어냈다.

'잘하면 죽일 수도 있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앙다문 채 여전히 잘 막아내고 있는 베리알.

하지만 이어지는 공격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화르륵! 화륵!

상위 게임 메이커, 미카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하얀 불꽃이, 베리알을 단숨에 집어삼킨 것이다.

―끄아아아악!

하얀 불꽃에 휘감긴 베리알이 바둥대며 날갯짓했다.

그리고.

―젠장······. 어쩐지 거점을 벗어나기가 귀찮더라니······.

서걱!

영원처럼 이어질 것 같던 인외의 존재들 간의 전투.

작게 읊조리는 베리알의 목이, 오딘의 창에 떨어져 나갔다.

"······."

"······."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수라장이었던 협곡이, 거짓말처럼 침묵에 잠겼다.

―전투 중지! 전 병력은 지금 당장 협곡 밖으로 빠져나가시오!

―모두 전투 중지! 전투 중지!

베리알을 죽이고, 후퇴를 지시하는 오딘.

막 대규모 전투에 대비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악마들을 경계하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군주급을 하나 죽였으니, 크게 무리하진 않으려는 모양.

"오딘이시여, 1분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베리알의 시체를 불태워 버리겠습니다."

그 사이에서 미카엘이 다급하게 날갯짓 했으나, 오딘이 고개를 저었다.

"모두들 많이 지쳤다. 여기서 나태의 악마를 욕보이면, 저들은 눈에 불을 켠 채 달려들 터."

"······."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작은 이득은 포기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니라."

"알겠습니다."

오딘의 말에 납득한 미카엘이 천사들을 지휘하며 천천히 뒤로 빠졌다.

―뒤쫓지 마라! 모두 현 자리를 고수한다!

다행히 마계 쪽에서도 굳이 무리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와 일정 거리를 벌린 채, 협곡의 중심부를 점하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선 것이다.

'후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납치극을 벌일 수 있기에, 2차전이 펼쳐지면 곤란한 상황.

적어도 오늘만큼은 이대로 마무리가 되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악마 대군단 사이에서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앞으로 나서는 한 악마.

'역시 군주 급이 있었어.'

기다란 뿔을 가진 검청黔靑빛 악마였는데, 사탄이라 불린 군주가 있는데도 앞으로 나섰으니, 녀석 또한 군주 급일 것이다.

녀석을 보자, 우리 쪽에서도 오딘이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이군. 질투의 악마여. 이제 다섯 군주라고 불러야겠더군.

오딘의 비아냥에,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트리는 검청색 악마.

잠시 오딘을 노려보던 녀석이, 이내 혀를 찼다.

―쯧, 베리알의 시신을 수습하라.

―옛.

―모두 이만 돌아간다!

그러고는 오딘을 무시한 채, 베리알의 시체를 수습하더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휴우."

"살았다······."

순간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적들이 물러나고 있으니, 진짜 전투가 끝난 것이다.

―우리가 이겼노라!

하늘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며, 크게 포효하는 오딘.

"와아아아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그 선언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함성이 협곡에 울려 퍼졌다.

└ㅅㅅㅅㅅㅅㅅㅅㅅㅅ 베리알 처치!

└ㄹㅇ 드디어 한 방 먹임 ㅅㅂ 라파엘을 타락시킨 복수다 ㅡㅡ

└이 틈에 중간계부터 싹 정리하자. 더 이상 악마들이 못 나오도록 아예 뿌리째 뽑아버려야 함.

└군주 1 처치 + 중간계 정리 + 무스펠하임 사수까지. 몇 년 만에 초특급 대승이네 ㅋㅋㅋㅋ

└이제야 천계가 좀 제대로 돌아가는 느낌임..

└진짜 그동안 커뮤니티랑 주신회 보면서 걱정 많았는데 ㅋㅋㅋㅋㅋ 최근에 보면 이보다 더 잘할 수가 없음 ㅠㅠ

└이 정도면 세력 비율 크게 꺾였다. 기세를 몰아서 아예 마계도 섬멸해 버려야 됨. 싸그리 다 불살라 버려야 함 ㄱㄱㄱ

└ㅇㅇ 더 이상 골머리 아플 필요 없이 이번 기회에 정리해 버리는 게 ㄱㄱㄱㄱㄱ

'후우, 이제야 좀 쉬겠네.'

마계 대군단이 완전히 물러갔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절망의 협곡을 점한 채 대기했다.

다만, 일부 몇몇 플레이어가 경계를 서는 걸 제외하곤 모두들 편하게 쉬고 있는 상태.

"모두 수고했다."

"조장도 고생 많았습니다. 아구구, 죽겠다."

"포션 필요한 사람 있나?"

"나는 빵빵하게 챙겨왔소. 언제 또 올지 모르니 얼른 먹고 쉬어야겠군."

"렌, 혹시 포션 필요한가?"

"아뇨, 저도 넉넉하게 챙겨왔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편하게 앉아서 각자 할 것을 하는 조원들.

왜 군주에게 쫓겼는지 궁금할 법도 할 텐데, 그 누구도 내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라는 말뿐.

그때였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나."

따로 중심부 쪽에 모여서 휴식 시간을 갖던 주신, 오딘.

어느새 다가온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올 게 왔군.'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바로 그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한쪽에 따로 빠져나온 오딘과 나.

"······."

"······."

신, 천사, 플레이어 할 것 없이 힐끔힐끔 나를 곁눈질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인내심을 갖고 오딘이 할 말을 기다렸다.

아마 가면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거겠지.

"누가 형을 그렇게 만든 건지 궁금하지 않나?"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오딘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

"그대의 형, 플레이어 룬 말일세."

"형을······ 그렇게······?"

순간 내 미간이 굳어졌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형을 타락시킨 거란 말씀이십니까?"

차갑고 싸늘한 목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빠져나왔다.

< 225화. 대격돌(6) > 끝

< 226화. 숙성 시간(1) >

"아세리안 님."

"어떻게 하면 좋지? 병력을 추가로 투입할 방법이 없을까?"

팜으로 다시 돌아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아세리안.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다.

"아세리안 님."

"아! 천상계 비상 위원회가 열리고 있었어. 일단 그곳으로 가서······."

'후우.'

그 모습에 숨을 크게 들이쉰 피넛엘이, 크게 외쳤다.

"언니!"

"······?"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멍하니 벌리는 그녀.

평소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피넛엘이 예상외의 호칭을 입에 담은 덕분인지, 조금은 놀란 모습이었다.

그 틈을 타서, 평소 까불까불하던 포르도엘이 슬며시 다가가 아세리안의 손을 꼬옥 잡았다.

"일단 침착하세요. 플레이어들이 보고 있습니다."

"아······."

"팀의 기둥이 되어야 할 분께서 흔들리는 모습은 좋지 않습니다. 일단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부터 하시겠습니까."

"알겠어요. 스읍, 후우."

피넛엘의 조언에 따라, 크게 호흡을 하는 아세리안.

그러자 잘게 떨리던 그녀의 몸이 조금씩 진정을 되찾아 갔다.

'다행이야.'

피넛엘은 요즈음 아세리안을 보면 위태롭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안우진이 경기에 출전할 때마다, 손을 가슴께에 모은 채 바들바들 떨었기 때문.

오죽했으면 수명을 깎아가며 관전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걱정 마십시오. 카이로시아의 재치 덕분에 안우진 님은 이미 위기에서 벗어났으니까요."

끄덕.

"이후로도 카이로시아가 그랬듯, 다른 팀원들도 안우진 님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끄덕.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끄······ 덕.

'후우.'

아세리안의 혈색이 돌아오는 걸 본 피넛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넛엘이라고 해서 안우진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누구보다 안우진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세리안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기 전까지, 여러 팀을 돌아다니며 트레이너 엔젤로서 활동한 피넛엘.

그 덕분에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플레이어를 만났고, 가르쳤다.

그런 의미에서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다.

'안우진은 특별해.'

팀 투지의 정신적 지주이자, 가장 두터운 기둥.

누가 만들어 준 것도 아닌, 스스로 쌓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인 아세리안만큼 압도적인 입지.

거기다 안우진 한 명으로 인해 명문 팀의 반열로 오르기까지.

안우진은 애초에 다른 플레이어들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언니한테 얘기하길 잘했어.'

사실 안우진이 팀 투지에 들어온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팀 성장의 관리자, 시노엘이 안우진을 더미로 출전시켰을 때.

당시 안우진이 범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피넛엘이, 아세리안에게 급히 연락했던 것이었다.

죽으면 구입한 포인트가 날아가겠지만, 그래봤자 1,200포인트 정도기에 투자금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

결과는?

'완전 초대박이었지.'

들어온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성계 대항전을 우승시키고, 상위 리그로 승급한 안우진.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바늘구멍과도 같은 고위 리그까지 올라가 버린 것이다.

투자금만 따지자면, 무려 몇만 배나 이득 본 셈.

네임드급이 아닌, 심지어 지구 출신 플레이어가 이만큼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한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안우진을 잃어선 절대 안 돼.'

그래서 지금 상황이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안우진이 무너지는 순간, 견고한 성처럼 보이는 팀 투지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피넛엘이 아세리안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였다.

―어어! 어어어어!

띄워놨던 홀로그램 창 너머로 들려오는 해설신의 외침.

"······!"

순간 세 존재는 고개를 번쩍 들어, 각자의 상태창을 쳐다봤다.

오딘과 위그드라실이 베리알을 몰아붙이고, 미카엘과 가브리엘이 엄호한다.

티르, 헤임달, 아테나, 풍사, 복희까지 다섯 대신大神이 빈틈을 노리고 찔러 들어간다.

"어어······!"

황금빛, 초록빛, 하얀빛이 뒤섞이며, 하나의 선을 만들어 냈다.

서걱!

그리고 이어진, 한 존재의 죽음.

―어어어어어어!

―베리알이! 베, 베리알이······!

고작 한 명이 죽은 것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파장은 무척 거대했다.

해설신들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언니! 군주가 죽었어여!"

"휴우······ 됐어. 안우진 님이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어."

아세리안과 포르도엘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언니이이! 꺅!"

'정말 다행이야.'

그 모습에 피넛엘 또한 굳었던 안색을 펼 수 있었다.

이걸로 됐다.

마계 쪽에서도 당황한 듯 주춤거리는 상황.

이걸로 격돌이 끝날 가능성이 크니, 안우진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피넛엘이 긴장을 풀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든 해야겠어······."

"······?"

"안우진 님께 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내가 강하게 만들고 말 거야."

"뭐라고여, 언니?"

"조금만 있으면 대신에 오를 수 있으니까······."

포르도엘을 꼬옥 껴안은 채 묘한 말을 읊조리는 아세리안.

그 소리를 들은 피넛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신에 오르면 뭐가 달라지나?'

* * *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형을 타락시킨 거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지금까지 룬의 타락이 자연 발생한 건 줄 알고 있었나 보지?"

긍정하는 오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팔이 바르르 떨렸다.

'누가 형을 타락시켰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그 말은 즉, 형의 타락을 조장한 존재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순간 내 숨이 거칠어졌다.

예상외의 일격에, 심장이 쿵― 쿵― 거세게 뛰었다.

그런 내 표정을 보곤 입가에 포근한 미소를 짓는 오딘.

"플레이어 렌, 그대도 아마 알겠지. 자네의 가면 말일세."

그가 한 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예. 마계 칠군주 중 한 명이 쓰던 가면이라고 하더군요."

오딘의 웃음이 진해졌다.

마치 형사가 범죄자를 앞에 두고, 살살 구슬리는 듯한 모습.

"전에 타락할 뻔한 적도 있지 않은가."

"맞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불러내 이런 얘기를 했다는 것.

그리고 우리 형의 타락화.

그 모든 것들을 조사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럴 때는 최대한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좋지.'

어차피 이제 가면을 쓸 생각이 없었기도 하고.

"플레이어 룬도 마찬가지였노라. 마계의 다섯 군주 중 하나, 레비아탄의 신물을 사용하고 있더군."

"······."

"형제가 나란히, 마계 군주들의 아이템을 쓰고 있었단 말일세. 마치······."

한쪽 눈에 안대를 쓴 오딘이, 남은 한 쪽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마치 자네 형제 둘 다 타락하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지."

"······!"

'뭐라고?'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일곱 군주일세. 딱 일곱 명만 존재한다는 뜻이지."

그 순간, 왕에게 영혼을 내어주며 회귀했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게 두 눈을 바쳐 초감각을 얻고도 그런 한심한 모습이라니.

―나를 탓할 것 없다. 그대의 재능이 여기까지였을 뿐.

"그런데 그런 존재들의 신물이, 수십억 아니 수백억의 확률을 뚫고 자네 형제에게 나란히 들어간다? 그게 말이 된다고 보는가?"

주소월에게 초주검이 되어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던 순간.

왕을 불러내, 영혼을 담보로 거래했던 것은 내 의지였다.

―초월 리그에 올라가면 반신半神이 돼서 영혼을 수확할 수 없다. 그건 거래라고 부를 수 없는 조건이지.

―그대의 영혼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급하노라. 초월 리그까지 올라가지 못한다면 그대의 영혼은 내 것이 될 것이다.

"차라리, 그들이 의도적으로 자네 형제에게 신물을 내어주었다고 보는 게 훨씬 타당하지 않겠나."

왕은 거절하려 했으나 끝끝내 거래에 응하며, 대가로 내게 회귀를 주었다.

그 어느 것에도 왕의 의지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사실 의도된 거였다고?

'잠깐만. 그러고 보니, 왕은 왜 나한테 그 책을 준 거지?'

1회차 대가의 제단.

눈을 바쳐 초감각을 얻었을 때, 왕은 내게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을 주었다.

또 다른 거래를 할 생각이 있으면 칼로 찌르라며 준 책이었다.

'대가의 제단에 갔던 게 나 혼자뿐일까?'

아마 제법 많은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무언가를 바치고 대가를 얻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자신을 다시 부를 수 있던 책을 주었던 건, 뭔가 내게 얻어갈 게 있었다는 뜻.

'가면이 내 손에 흘러들어온 게 우연이 아니었어.'

왕이 직접 회귀를 시켜줬으니, 그 또한 내가 언제쯤 중개 거래소에 들어갈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명판매권을 썼겠지.'

지명한 상대에게만 노출이 되는 지명판매권을 통해, 내게 가면을 넘겨준 것이리라.

내 표정이 차갑게 식자, 오딘이 헛기침을 했다.

"흠, 흠. 그런 의구심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자네와 룬을 조사했다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지."

"어떤······?"

"자네들의 육체가, 다른 영혼을 담기에 아주 적절하다는 것이지."

"다른 영혼을 담기에 좋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영靈과 육肉에는 궁합이란 게 존재하지. 맞지 않은 육체에 영혼을 담을 경우, 육체는 금방 무너지고 말아. 그런데 아주 간혹, 특이 체질을 가진 인간이 태어나곤 한다네. 자네가 아덴마하에서 구했던 그 제물처럼 말이지."

아덴마하는 내가 <빛의 이면> 코메인 스토리 미션을 진행했던 곳.

당시 게빈의 모습으로 숨어든 레기아로 인해, 애를 먹었던 미션이었다.

그때 내가 구한 제물이라면.

'루시아를 말하는 거군.'

그녀 또한 특이 체질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엄청난 숫자의 제물을 바치지 않더라도 악마를 불러낼 수 있는, 신이 내려준 생명의 정수.

오딘은 지금, 루시아처럼 우리 형제도 특이 체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이 체질을 가지고 있다라······. 근데 그게 마계랑 무슨 상관입니까."

오딘은 천계에서 가장 높은 열두 존재.

그럼에도 그에게 묻는 내 목소리는 무척 싸늘했다.

하지만 오딘은 개의치 않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예를 들자면······. 음, 그래. 마침 적절한 예시가 생각났군. 가령······."

"······."

"이미 죽은 일곱 군주 중 하나를 부활시키고 싶다면, 자네 형제는 영靈을 담기에 마땅한 육체가 아닌가."

"······!"

"영의 힘이 너무 강해서 육이 무너질 것을 우려해, 두 육신 중 하나로 영靈을 완성시킨 후, 다른 육체로 부활시키려는 거겠지. 자네가 죽은 마몬의 가면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 증거 아니겠나."

오딘의 말에, 순간 움찔했다.

'충분히 가능성 있어.'

오딘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다.

고작 영혼을 대가로 회귀라는 거대한 선물을 주었다는 것.

그동안 내가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것들이, 그의 논리대로라면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까지 왕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군.'

형도, 그리고 나도.

여태껏 판 위에서 왕의 손에 이리저리 놀아나는 장기 말에 불과했던 것이다.

'후후.'

문득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

그러자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오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더욱더 진한 미소를 지으며, 오딘에게 고개를 저었다.

'기분 나쁠 일이 아니야.'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

내 육체가 가지고 있는 희귀 체질 덕분에 회귀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상위 리그를 넘어, 어느덧 고위 리그까지 온 상태.

'이젠 초월 리그까지 갈 자신도 있지.'

형이 타락한 건 기분이 무척 나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소원을 이루게 되면 다 해결될 문제.

'이제야 좀 속이 후련하네.'

그동안 내심 찜찜했었다.

대가의 제단 원칙은 등가 교환.

그동안 내 영혼이 과연 회귀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원하는 대로는 안 될 거야.'

지금까진 왕이 원하는 대로 휘둘렸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이제 녀석이 뭘 노리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그걸 알고 모르고는 정말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따로 부르셨다는 건, 제게 뭔가를 요구할 게 있다는 뜻이시겠죠."

내 물음에 오딘이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든 내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겠다는 의도가 담긴 웃음이었다.

"요구라고 하긴 그렇고, 양해라고 하지."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흠, 흠. 콜로세움의 원칙상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당분간 오퍼를 거절해 주게. 당직 근무까지 포함해서, 아예 필드에 나오지 않는 게 좋겠어."

"마계가 조급하게 나오길 바라시는 거군요."

"한 번에 딱 알아듣는군."

오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를 통해 블라디미르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마계.

그 일환으로 우리 형을 타락시켰다.

그런데 내가 팜에 꽁꽁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면, 마계 입장에선 답답함에 무리수를 둘 수도 있을 터.

'차라리 잘 됐어.'

가면만 팔아넘기면, 더 이상 표적이 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계는 가면뿐만 아니라, 나까지 노리고 있는 상황.

"얼마의 기간을 원하십니까."

"최소 일 년. 그 정도면 마계 입장에서도 조급하게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일세."

'일 년이면 기간도 딱 적당해.'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게 뭘 주시겠습니까?"

"······?"

"방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콜로세움의 원칙에 위배된다고요."

끄덕.

"초월 리그를 노리고 있는 입장에서, 일 년이면 손해가 너무 크군요. 당연히 합당한 보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씨익.

내 말에, 오딘이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 226화. 숙성 시간(1) > 끝

< 227화. 숙성 시간(2) >

"저는 팀 투지의 간판 플레이어. 제가 벌어들이는 포인트만 절반 가까이 되죠. 제가 쉬는 건 단순히, 저만의 손해가 아닙니다."

어디 한 번 얘기해 보라는 듯한 오딘의 모습에, 나는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현재 팀 투지에 소속된 플레이어의 숫자만 8만 명.

1인당 천 포인트만 벌어도 8천만 포인트다.

당연히 내가 벌어들이는 포인트가 절반 가까이 될 수가 없다.

'하지만 오딘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거기다 천계 입장에선 저라는 중요 전략 물자를 통해 큰 이득을 노리는 상황 아닙니까?"

내 물음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오딘.

"제 손해를 강요해서, 천계만 이득을 보려고 하셨던 건 아니겠지요."

나는 그에게 현실적인 부분을 찌르고 들어갔다.

대의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건, 천사들에게나 가능한 협상법.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기며 여기까지 올라온 플레이어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천상계 높은 자리에 있는 오딘 또한 그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후후, 알겠노라. 원하는 게 뭔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오딘.

'뭐야?'

밀려오는 허탈감에, 나는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썼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내게 무언가를 내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오딘이 거리낌 없이 협상에 임하기 시작했기 때문.

"스텟 마의 구간을 해제해 주십시오. 포인트를 벌어서 스텟을 올릴 수 없다면, 훈련으로라도 어떻게든 따라가고 싶습니다."

"불가. 인간의 육체가 가진 한계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른 보상을 말해 보거라."

첫 번째 요구는 마의 구간 해제.

그러자 오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쉽군. 마의 구간이 해제됐으면 엄청나게 올릴 수 있었을 텐데.'

그 모습에서 고위 리그 승급식을 해주었던 천사, 카시미엘의 말이 떠올랐다.

―맞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견딜 수 있는 한계라는 게 존재하거든요. 그러나 고위 플레이어부턴 조금 다릅니다.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넘게 해주죠. 그건 아버지만이 가능한 일이구요.

'아버지만이 가능한 일이라······.'

내심 의외였다.

주신이라면 천상계에서 가장 높은 열두 존재를 일컫는 호칭이었으니까.

그런 열두 존재 또한 결국 인간보다 더 강하다는 것뿐, 차별점이라는 게 없다.

결국 이 세상에서 정말 신神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딱 한 명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하지. 쉬고 싶어서 쉬는 게 아니니까 그 또한 근무의 연장선일 터. 매달 기본급만큼 급여를 주겠네. 어떠한가?"

내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침묵하자, 오딘이 먼저 카드를 내밀었다.

'기본급을 매달 준다고?'

현재 내 기본급은 20만 포인트.

1년이면 240만 포인트다.

가만히 팜에 틀어박혀 있는 대가치고는 굉장히 후한 편.

"······."

나는 힐끗, 오딘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 아무것도 읽을 수 없군.'

과연 주신.

살아온 세월이 아득하게 긴 존재답게, 표정에 드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근데 이상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뭐랄까.

읽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왠지 여기서 더 불러도 될 것 같은 기분.

근거는 없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한번 질러 보자.'

이런 기회가 또 오진 않을 테니, 나는 과감하게 판단했다.

"매달 기본급만큼······. 좋습니다. 여기서 아이템 하나만 더 얹어주시면, 기쁜 마음으로 팜에 틀어박혀 있겠습니다."

제시한 카드에 플러스알파를 요구한 것이다.

"훗,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

그러자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무언가를 꺼내는 오딘.

그가 조그마한 돌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그거면 대가로는 충분할 것이다."

띠링!

[<소모품:만뢰석萬雷石>을 획득하셨습니다.]

돌을 받아 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만뢰석? 이게 뭐지?'

이름만 봤을 때는 어디다 써야 할 아이템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소모품:만뢰석>]

[벼락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돌멩이.]

[억겁의 시간 동안 벼락을 맞으면서, 돌멩이에 벼락의 기운이 깃들었다.]

[아이템에 가져다 대면 돌멩이에 깃든 벼락의 기운을 얻을 수 있습니다.]

[등급 : 신화]

'신화 등급!'

아이템의 설명을 본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무기나 방어구 같은 장비가 아닌, 고작 소모품에 책정된 게 신화 등급이라는 것.

그 말은 즉, 이 아이템을 적용한 장비 또한 최소 신화 등급으로 상승한다는 뜻이었다.

"그대의 스킬과 아이템이 벼락에 집중되어 있더군. 그거면 차고도 넘칠 것이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나는 오딘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최소 준신화 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바라긴 했지만, 이렇게 순순히 내어줄 줄이야.

"그럼 슬슬 마무리하도록 하지."

말을 마치곤 절망의 협곡을 향해 손가락을 튕기는 오딘.

그러자 아홉 쌍의 날개를 가진 한 천사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끝나셨습니까?"

"음, 이 노인네의 억지를 들어줘서 고맙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몰라서 말이야."

"아닙니다. 그럼 이만 당직 근무 체계로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함세."

천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오딘이, 뒷짐을 진 채 절망의 협곡으로 향했다.

'후우, 이제 좀 쉴 수 있겠군.'

용건이 끝났기에, 나 또한 오딘의 뒤를 따랐다.

"플레이어 렌."

그러자 뒤에서 나를 부르는 천사.

"예, 천사님."

"이렇게 실제로 인사를 나누는 건 처음이군요. 고위 게임 메이커, 가브리엘이라고 합니다."

가브리엘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천사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

'이 천사가 고위 게임 메이커라고?'

그 모습에 나는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남은 시간도 파이팅이에요! (づ ̄ ▽ ̄)づ

―슝슝! (꒰ঌ ๑•́ -•̀)໒꒱

―렌 니이이이임! O(╥﹏╥)o 무스펠하임 입구를 도와주세여······!

―부탁드려여! (b˙◁˙ )b

―그럼 파이팅이에여!! 격렬한 응원! 〜( ̄△ ̄〜)

'이 천사가 정말······ 고위 게임 메이커가 맞다고?'

"플레이어 렌, 왜 그러십니까?"

상태창으로 미션을 내려주던 말투와, 절도 있게 움직이는 눈앞의 천사가 전혀 매칭되지 않았기 때문.

거기다 플레이어에게조차 깍듯하게 존댓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원리원칙주의자일 가능성이 컸다.

"아닙니다. 뭐랄까, 제가 그려온 게임 메이커님과 조금 괴리감이 있어서요."

나는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흐음, 의외로군요. 그대가 지금껏 보여온 통찰력이라면, 제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그러자 고개를 갸웃하는 치천사 가브리엘.

'도대체 어딜 봐서?'

그와 동시에 나도 고개를 갸웃······ 할 뻔했다.

"아무튼 무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번 전투도 고생 많았습니다."

"구하러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다시 한번 가브리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또 만나도록 하죠."

인사를 받아준 가브리엘이, 하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띠링!

[성공적으로 전투를 마쳤습니다.]

[<무스펠하임-니플헤임 입구 사수전>을 종료합니다.]

[기본급이 지급됩니다.]

[이벤트 : 협곡에 모여든 악마들을 쓸어버려 주세여!!!]

[보상 : 가장 많은 킬 수를 달성한 열 명의 플레이어에게 어마어마한 보너스를 부여합니닷!]

[고위 플레이어 킬 수 현황]

[1위. '고담덕' 4,358킬]

[2위. '연비월' 4,001킬]

[3위. '이멘드라' 3,886킬]

[4위. '워록' 3,597킬]

[5위. '기네스' 3,302킬]

.

.

[10위. '렌' 2,946킬]

그리고 귓가로 들려오는 경기 종료 콜.

베리알에게 쫓겼던 터라,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팽팽하던 집중력이 탁- 하고 풀렸다.

짙은 피로감이 나를 짓눌렀다.

'다행히 10위에 턱걸이로 안착했군.'

킬 수 현황을 본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베리알에 쫓기는 순간부터 킬 수를 거의 올리지 못한 상태.

다행히 다른 플레이어들의 킬 수 또한 큰 변동이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숨어 있다가 갑자기 등장한 마계 군주 탓에, 사냥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모양.

'어마어마한 보너스를 준다고 그랬는데.'

진이 빠지는 상황에서,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이어질 알림창을 기다렸다.

[킬 수 ― 2,946킬]

[고위 플레이어 킬 수 10위를 기록했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가장 많은 킬 수를 달성한 열 명의 플레이어> 를 기록했기 때문에 2,500,000 P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이번 전투에서 마계 여섯 군주 중 하나, 나태의 악마 베리알을 사살했습니다.]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기본급 x 3 의 수당이 지급됩니다.]

[이번 전투로 인해, 열두 개의 중간계를 성공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기본급 x 1 의 수당이 지급됩니다.]

그리고 주르륵 나타나는 알림창.

'뭐야?'

내용을 본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저번 당직 근무에서 144만 포인트를 벌어들인 것도 대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보너스만 도대체 얼마를 받은 거지?'

기본급에 곱하기 4니까 80만.

거기다 킬 수 보너스까지 합치면 무려 330만에 달하는 보너스를 얻은 것이다.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본급의 네 배에 해당하는 보너스를 모든 플레이어에게 뿌린다고?'

이번 전투에 참가한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의 숫자는 18명.

상위 플레이어들이다 보니, 기본급이 제법 된다.

거기다 나와 다르게, 그들은 수수료가 30%.

그들이 받을 포인트의 일부에서도, 플레잉 코치 정산금으로 들어올 것이다.

[<무스펠하임-니플헤임 입구 사수전>을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2,800,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700,000 P 차감)]

[기본급 +200,000 P / 킬 수 보너스 +2,500,000 P / 군주 처치 +600,000 P / 중간계 정리 +200,000 P / 수수료 -700,000 P]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화륵! 화르륵!

'죽을 뻔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네.'

거대한 얼음 방벽과, 그 한가운데에 난 외갈래 길.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혈향.

공기마저 끓어오르는 뜨거운 열기.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날 감싸는 하얀 빛에 몸을 맡겼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게이트가 열리며 한 걸음 내딛자,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후아! 다녀왔습니다."

"으어어, 집에 돌아오니까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어, 악이 형. 표정이 왜 그래요?"

"더워 죽을 뻔했거든. 거기다 좁은 곳에서 빼곡하게 붙어 있었더니, 땀 냄새가 너무 심하더군."

이번 절망의 협곡 전투에 참가했던 상위 플레이어들이었다.

'하나, 둘, 셋, 넷······. 열여덟 명. 다들 무사했군.'

가장 먼저 인원 파악부터 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팀 투지의 중요 전력.

제법 큰 전투였기에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모두 멀쩡한 모습이었다.

"어서 오세요, 모두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팜 내부에서는 오늘도 아세리안과 피넛엘, 포르도엘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아세리안이 다가와, 한 명 한 명 상태를 살피며 반겨주었다.

"안우진 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내 손을 잡으며 방긋 웃는 아세리안에게,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주창범 씨, 다친 곳은 없죠?"

"앗, 여신님. 다녀왔습니다! 저야 언제나 말짱하죠!"

"고건하 씨. 활약상은 익히 보았답니다."

"여신님의 응원 덕분에 임무를 마치고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네에, 모두 고생 많았어요. 특히 카이로시아 씨. 정말정말 수고 많았어요."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카이로시아를 과하게 반기는 느낌이었다.

다가가 손을 잡는 건 물론, 한 번 꼬옥 끌어안기까지.

"······?"

이례적인 상황에, 오히려 카이로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였다.

그 모습을 곁에서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피넛엘과 포르도엘.

"그대, 정말 수고 많았다."

"예. 근데 왜 그러십니까, 피넛엘 님?"

"흠, 흠. 아니다. 혹시 시장하진 않은가?"

"괜찮습니다."

의아한 마음에 물어보니, 피넛엘이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다.

'아세리안이랑 무슨 일 있었나?'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

짝!

"모두들 고생했으니 파티를 해야겠죠? 오늘은 언제 끝날지 몰라서 미리 준비해 놓고 있지 못했어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여신님."

"저희도 함께 준비하겠습니다!"

"그럴까요? 그럼 주창범 씨가 숙소 안에 있는 분들을 데리고 나와주시겠어요? 지그 님은 5기수님들을 데리고 테이블 좀 부탁할게요! 아, 당소소 님. 이세연 씨 부르러 가시는 거죠? 그럼 식재료 있는 거 전부 꺼내와 달라고 말씀 좀 전해주세요."

"넵!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여신님."

암흑이 내려앉은 늦은 밤.

팀 투지는 때아니게 분주해졌다.

'뭐지?'

그 와중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모르게 아세리안이 오늘따라 이상해 보였기 때문.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나 본데.'

아세리안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피넛엘.

평소와 다르게 까불거리지 않는 포르도엘.

거기다 마치 쾌활함을 연기하는 것 같은 아세리안의 모습까지.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파티가 시작되면 넌지시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 227화. 숙성 시간(2) > 끝

< 228화. 숙성 시간(3) >

팀 투지의 규율은 제법 엄격한 편이다.

어느덧 1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는 대도시가 된 팀 투지의 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통금이 있는 것처럼, 밤 9시만 되면 발길이 뚝 끊겼다.

땀을 흘리며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활기가 넘치는 낮 시간대와 비교하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흐를 정도.

물론 밤 9시 이후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규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음 날 훈련에 지장이 있으면 아주 크게 혼난다는 것뿐.

'혼난다는 개념이 지구와는 많이 다르지만.'

이곳은 콜로세움.

각종 무기와 마법이 난무하는 살육의 전장.

대련을 빙자한 구타 같은 것들이 가능한 곳이다.

제각기 다른 성계에서 모여든 플레이어들이라고 해도, 진리는 어디서나 통하는 법이었다.

아무리 막 나가는 망나니라고 해도, 죽기 직전까지 맞으면 말을 듣는다는 것.

그런 이유로 하늘에 달만 뜨면 정적이 내려앉던 팀 투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현재 시각 : 11:17:45]

"크으······!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먹는 술이냐!"

"악준, 오늘은 우리 성계의 음식을 대접해 주지."

"아직 보여주지 못한 무림 성계의 음식들이 많이 남았는데?"

"무림 성계 전통식도 맛있긴 했지만, 우리 쪽도 괜찮은 게 많다고. 오늘은 티르너노그 전통식으로 하지."

"이봐, 이봐. 싸우지 말고, 각자 음식을 하나씩 만들자고. 그럼 되잖아?"

"크하하! 역시 마법사라 그런가 똑똑한데?"

야심한 밤임에도 불구하고, 팀 투지의 팜엔 웃고 떠드는 활기찬 분위기가 흐른다.

갑작스럽게 진행된 파티.

대부분 같은 선임 훈육자를 둔 사람들끼리 조를 짜서 앉아 있다.

미리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탓에, 식재료를 쫙 깔아 놓은 채 알아서 먹고 싶은 걸 만들어 먹고 있었다.

"여신님, 드시고 싶으신 것 있으십니까?"

"으으으음, 저는 안우진 님이 좋아하는 삼겹살이요."

"피넛엘 님은 뭐 드시겠습니까?"

"나도 삼겹살이 좋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삼겹살을 굽도록 하겠습니다."

"어어! 잠깐만요! 왜 언니랑 피넛엘만 물어보고 저한테는 안 물어봐요?"

현재 우리 테이블엔 권속 플레이어들, 아세리안, 두 천사가 함께 앉아 있는 상황.

나는 모용악과 포르도엘의 대화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제가 굽겠습니다. 집게 좀 주시겠습니까?"

그러고는 모용악에게 고기와 집게를 건네받았다.

"엇, 우진이 형!"

"제가 구울게요. 그냥 편히 계세요."

그러자 당황하는 팀원들과 세 존재.

내가 집게로 고기를 집자, 주창범과 당소소가 재빨리 다가와 나를 만류했다.

"아뇨, 오늘은 제가 여러분께 대접하고 싶어서요."

치이이이익!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저으며, 그릴에 고기를 올렸다.

지금까지 나는 파티에서 뭔가를 해본 적이 없었다.

술을 따라 주면 마시고, 구워주면 먹을 뿐.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지.'

훈련시켜주고, 아이템을 챙겨 주며, 스킬북을 뿌린다.

그러니까 나는 이 정도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지금까지 내 행동의 기저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었다.

일방적으로 내가 손해를 보고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달까.

'너무 멍청했어.'

카이로시아가 사용한 그림자 교환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다시 후방으로 돌아왔을 때 느꼈다.

'아직 보답할 기회가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었지.'

내가 일방적으로 주는 관계가 아니라는 걸.

당시 내게 몰려든 권속 플레이어들의 표정을 봤을 때, 등록된 표식만 있었다면 누구라도 그림자 교환을 사용했을 기세였다.

그래서였다.

오늘만큼은 내가, 마음을 담아서 이들에게 대접해 주고 싶었다.

"안우진 님께 구워달라고 하죠.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얻어먹겠어요?"

그런 내 모습에, 다리를 꼰 채 미소 지으며 말하는 카이로시아.

그릴 바로 옆에 앉아 있던 그녀가 어서 구워보라며 턱짓했다.

내가 고기를 굽는 이유가, 그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

"으음······. 필요한 거 있으시면 바로 말해주세요, 형."

계속해서 사양하자, 주창범과 당소소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시작된 고기 굽기.

'깜짝 놀라게 해주지.'

사실 나는 고기를 제법 잘 굽는 편이었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 탓에, 별의별 일을 다 했었으니까.

노가다, 택배 상하차, 이삿짐센터는 물론, 고깃집에서 알바도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삼겹살을 굽는 것쯤은 나한테 식은 죽 먹기.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온 뇌전이 그릴 위에서 춤을 춘다.

"······!"

"뭐, 뭐예요?"

그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팀원과 천사들.

'이걸 고기 굽는 데 쓸 줄이야.'

피식 웃은 나는, 노릇노릇하게 익은 삼겹살을 먹기 좋게 잘라서 테이블에 올려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고기를 한 움큼 집어, 그릴에 올렸다.

불향을 입히는 것과 동시에 뇌전으로 자글자글 굽는다.

순식간에 익은 고기를 또 먹기 좋게 자른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네요."

"하하, 이게 재능 낭비라는 거구나?"

"악마들을 벌벌 떨게 하던 뇌전이 고기 굽는 데 쓰일 줄이야······."

그렇게 서너 번가량 반복했더니, 혼자서 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세 명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고기가 수북하게 쌓일 정도였다.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바로 구워드리겠습니다."

"평소에도 느꼈지만, 안우진 님 마나 컨트롤이 장난 아니네요. 너무 세면 다 타버릴 텐데."

"어떻게 해야 이렇게 섬세하게 다룰 수 있는 거죠?"

그 광경에 팀원들이 입을 벌린 채 감탄했다.

"자, 안우진 님이 모처럼 구워주셨는데,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다행히 아세리안이 끼어들며 상황을 정리해준 덕분에, 무사히 웃고 떠들며 식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네요."

"······앞으로 저도 뇌전으로 고기 굽는 걸 연습해 봐야겠습니다."

맛있게 먹는 팀원들의 모습에, 내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앞으로 간간이 구워줘야겠군.'

그동안 많이 챙긴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내가 무심했던 모양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돈만 많이 벌어다 주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달까.

잠시 속으로 반성한 나는 그릴에 고기를 한 움큼 올렸다.

치이이이이이익!

"안우진 님도 고기만 굽지 말고 좀 드세요."

"아, 네. 먹고 있습니다."

아세리안의 말에도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집게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뭘 먹어요. 계속 보고 있었는데. 자, 아아 해보세요."

그러자 상추 한 쌈을 싸서 내게 건네는 그녀.

"······?"

"아아아."

어서 받아먹으라며 아세리안이 턱짓한다.

순간, 열심히 고기를 먹고 있던 팀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쩔 수 없지.'

먹기 전까지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아세리안의 눈빛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쌈을 받아먹는 수밖에 없었다.

"잘 드시네요. 이제 그만 저한테 집게 주고, 좀 드세요. 삼겹살 좋아하시잖아요."

"이것까지만 굽겠습니다."

"어서요."

"······예."

단호한 아세리안의 요구에, 나는 집게를 넘겨주곤 자리에 앉았다.

그때부터 연출된, 여신이 직접 고기를 굽는 희귀한 광경.

화륵! 화르륵!

따로 신성력이나 마법을 쓴 게 아닌, 오직 고기의 기름만으로 불이 치솟는다.

그 위에서 아세리안의 집게가 춤을 추자, 순식간에 노릇노릇하게 익은 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우진 님. 한 번 드셔 보세요."

"예. 잘 먹겠습니다."

고기 한 점을 먹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에서 삼겹살이 사르르 녹았기 때문.

"······?"

"헉, 엄청 맛있는데요?"

다른 팀원들 또한 맛있는지, 고기를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아세리안이 요리도 제법 잘했지, 참.'

팜에 들어온 초창기에는 매일같이 그녀가 식사를 차려줬었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팀원들은 모르겠지만.

'벌써 2년이 넘었군.'

아세리안이 직접 구워준 고기를 먹으니,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제 막 만들어진 신생 팀이었기에, 아무것도 없던 빈 공터.

그곳에서 처음 만난, 조금은 못 미더워 보였던 여신.

그리고 절망 속에서 막 회귀했기에, 가진 것도 쥐뿔 없으면서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던 나.

그랬던 우리 둘이 어느새, 1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책임지는 자리에 올라와 있었다.

'1년이라······.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까.'

그래서 더 기대됐다.

내게 주어진 1년이란 시간 이후, 팀 투지가 어떤 모습일지.

나는 얼마나 더 강해져 있을지.

'절대 헛되게 사용하지 않겠어.'

화륵! 화르륵!

하얀 원피스에, 길게 흘러내린 백금발 머리칼.

일렁이는 그릴의 불꽃 앞에서 열심히 고기를 굽는 아세리안.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잘 먹었습니다, 여신님."

"여신님이랑 안우진 님이 구워주신 고기가 제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고기였습니다."

테이블 위에 한가득 쌓여 있던 고기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모두들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더 이상 수저를 놀리는 사람이 없었다.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아, 정말 맛있게 먹긴 했던 모양.

"앞으로도 간간이 해드리겠습니다."

"안우진 님이 해주신다면, 저도 가끔 옆에서 손을 보태 볼게요."

나랑 아세리안은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배도 채웠으니까, 슬슬 마셔 볼까요?"

그리고 시작된 술자리.

"그래서 제가 그림자 이동을 썼거든요? 그랬더니 제이스 형이 우와악 뭐야! 이러면서 소리를 지르더라구요."

"푸하하! 이봐, 제이스. 유령이라도 본 거야?"

"야, 인마! 내가 언제 그랬어!"

"어어! 지금 딱 저 표정이에요! 저 표정으로 우와악! 그랬다니까요?"

"푸하하하하하!"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자, 분위기가 단숨에 활기차게 변했다.

주창범과 제이스의 만담에 모두들 왁자지껄 떠들며 웃고 있었다.

그때였다.

"안우진 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당소소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네, 소소 님."

"혹시 나태의 악마가 왜 안우진 님을 쫓아다닌 건지 짐작 가시는 게 있나요?"

그러고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귓속말 했다.

어찌 보면 민감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보니, 내게 조용히 물어보려고 했던 모양.

하지만 그녀가 간과하고 있던 게 있었다.

"크흐흐, 나도 다음에 제이스한테 표식을 남겨······."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존재 중, 오현석을 제외하곤 모두 그녀보다 스텟이 높다는 것.

감각이 예민하다 보니, 이런 작은 목소리를 듣지 못할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테이블이,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아······. 죄, 죄송합니다······."

그 극적인 분위기 변화에 오히려 당소소가 당황할 정도.

하지만 나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언젠가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긴 했지.'

1년 동안 오퍼를 받지 않겠다고 오딘과의 협상에 응한 상황이었으니까.

당소소를 배려해,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쓰던 가면이 마계 칠군주의 아이템이었거든요."

"마계 칠군주······? 오늘 죽었던 베리알이랑 동급의 악마라는 건가요?"

"예, 과거 대전쟁에서 죽었던 마몬이라는 군주의 가면이라더군요. 마계는 그걸 뺏으려고 저를 노리는 거구요."

"세상에······!"

내 말에 경악하는 팀원들.

다만, 피넛엘이나 포르도엘은 아세리안에게 이미 들었던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가면을 안 쓰셨군요. 근데 오늘은 다시 쓰셨던데······? 앞으로는 그냥 가면 안 쓰시면 안 되나요?"

"맞아요, 형. 가면 안 쓰셔도 형은 엄청나게 강하시잖아요."

"제 생각도 안 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안우진 님."

우려를 표하는 당소소의 말에, 다른 팀원들이 동의했다.

모두들 한마음 한뜻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는 상황.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도 계속 쓸 겁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법이 있거든요."

사실, 직전까지만 해도 가면을 팔아넘기려고 했었다.

그런데 오딘을 통해, 마계에서 노리는 게 나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가면을 팔아넘기더라도 표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가면을 사용하는 게 생존에 훨씬 유리할 테니까.

내가 가면을 팔아야 할 이유 자체가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더군다나 정신 스텟이 크게 오르면서 피의 각성에 대한 부작용도 한결 줄어든 상태.

'차라리 잘 됐어.'

가면이 있으면 언젠가 초월 리그에 올라가는 것도 수월할 것이다.

"방법이 있으시다면야, 뭐."

자신감에 찬 내 대답에,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깊게 파고드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완벽하게 믿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러자 한쪽에서 조용히 있던 아세리안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 오딘 님과 따로 독대하셨잖아요. 그때는 무슨 대화를 나누셨어요?"

"아, 마계에서 저를 납치해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 같다고, 1년 정도만 필드에 나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

어차피 내일 아세리안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기에,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안우진 님은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달마다 기본급만큼 포인트를 주신다기에, 수락했습니다."

"정말 잘 선택하셨어요!"

내 대답에 반색하는 아세리안.

그녀를 시작으로 다른 팀원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들 괜히 잘못 나갔다가 잘못될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아, 좋겠당. 한동안 푹 쉬시겠네요오."

그러자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은 채 말하는 포르도엘.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잘 됐군.'

"그럼 저랑 같이 노시겠습니까?"

"안 돼요. 언니······ 아세리안 님이 허락 안하실걸요?"

"아세리안 님, 제가 포르도엘 님과 같이 다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아세리안이 즉답했다.

너무나 쉽게 떨어진 허락에 오히려 포르도엘이 눈을 굴릴 정도.

"그럼 같이 재미있게 놀아보시죠."

나는 포르도엘을 향해 진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아침.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 속에서.

"같이 놀자며!"

포르도엘이 절규했다.

< 228화. 숙성 시간(3) > 끝

< 229화. 숙성 시간(4) >

1년이란 여유 시간.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핵심이지.'

플레이어의 특성상, 경기에 참가하지 못하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특히 나처럼 고위 플레이어의 경우 더더욱.

스텟이 마의 구간을 한참 넘어섰기에, 훈련을 해도 스텟이 오르지 않는다.

대련을 하자니 수준이 맞는 플레이어도 없고, 날개를 가진 천사들은 본인들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쁠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경우라면, 1년이란 시간이 휴가처럼 되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을 한번 싹 정리해야겠어.'

팀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의 성과에 따라 급여를 받고 있었으니까.

팜의 시스템을 내가 직접 설계했고, 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효율성이 극대화될 수 있는지도 얼추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진 시간이 부족해서 미처 하지 못했던 상황.

'오현석 같은 케이스를 또 발굴해야지.'

개인의 성장과 팀의 내실, 그 경계선 어딘가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내실을 확실하게 다져둘 생각이었다.

"안우진 님. 첫 번째 목록에 있는 플레이어 분들을 데려왔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바로 다음 목록에 있는 플레이어들도 부탁합니다."

"네!"

사용인 에밀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네 명의 플레이어가 쭈뼛거리며 집무실로 들어온다.

긴장했는지, 숨을 짧게 끊어서 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8기수로 들어온 제레미라고 합니다!"

"제, 제이크입니다."

"티르너노그에서 온 파블로라고 합니다."

"더스틴입니다. 웨스테로스에서 왔습니다!"

마치 면접을 보는 것 마냥, 들어오자마자 자기소개를 하는 8기수 플레이어들.

"네, 반갑습니다. 모두들 앉으시죠."

내가 자리를 권하자, 네 사람이 일렬로 세팅된 의자에 앉아 침을 꿀꺽 삼켰다.

'플레잉 코치 시스템.'

[이름 : 제레미 아르데르 드모니악(닉네임 : 제레미)]

[근력 : 49] [민첩 : 47] [체력 : 49]

[정신 : 44] [지력 : 13] [마력 : 58]

[아세리안 코멘트 : 발리노르 출신의 견습 기사. 스텟은 낮지만 기본기가 훌륭함.]

[피넛엘 코멘트 : 기사 출신이라 그런가 멘탈이 좋음. 이외 특별한 것 없음.]

[포르도엘 코멘트 : 대화 나눠봤는데 재미없음.]

[피넛엘 추가 코멘트 : 굉장히 성실함. 특히 검방술에 대한 깊은 이해도가 엿보임. 성장 등급 : B로 상향 조정.]

플레잉 코치 시스템을 열자, 이름과 스텟, 그리고 코멘트가 주르륵 펼쳐진다.

'나쁘지 않네.'

멘탈이 좋고 성실한 데다가, 피넛엘의 추가 코멘트로 봤을 때, 성장세도 나쁘지 않다.

성장 등급은 최근에 내가 피넛엘에게 부탁했다.

첫 인상만으로 체크하긴 쉽지 않기 때문.

그래서 혹시 눈에 띄는 플레이어들이 있다면, 따로 코멘트를 달아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그녀는 육성을 위해 항상 플레이어들 사이에 있으니, 플레이어들의 평가를 내리기가 수월할 테니까.

'피넛엘이 잘 해주고 있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이어서 악마의 눈을 사용했다.

[각성 능력 : <상급검방술> <상급검술> <중급방패술> <중급마나운용> <하급박투술> <하급치료술>]

"······!"

그러자 몸을 움찔 떠는 플레이어들.

악마의 눈 임팩트로 눈동자가 빨갛게 변하는데, 그걸 보고 당황한 것 같았다.

'딱히 눈에 띄는 건 없네.'

각성 능력을 체크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실함, 강한 멘탈, 그리고 성장세.

이런 가치를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제레미는 제법 훌륭한 원석이라고 할 수 있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재능은 각성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현석 같은 경우가 특별한 거지.'

나는 종이에다가 「4기수 퓨리언에게 배정할 것」 이라고 적었다.

그러고는 어떤 스텟을 더 집중적으로 훈련해야 하는지, 대련은 누구와 붙는 게 좋은지, 어떤 테크닉을 주로 연마해야 하는지도 슥슥 써내려갔다.

퓨리언은 탱커.

주창범 만큼은 아니지만, 제레미를 잘 이끌어줄 것이다.

"포르도엘님, 여기 있습니다."

"······넹."

종이를 건네자, 흐물흐물거리는 몸짓으로 받아드는 포르도엘.

시원치 않은 대답과 다르게, 그녀는 곧장 종이에 추가로 이것저것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대략적인 뼈대를 세우면, 그녀가 시간과 장소, 식사 등등 디테일하게 살을 붙여서 커리큘럼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제이크.'

나는 제레미 옆에 앉은 삼인방도 똑같은 방식으로 훑었다.

"······."

꿀꺽.

앞에 나란히 앉은 8기수 플레이어들은, 내가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없이 적자, 각잡고 앉은 채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무슨 대화라도 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르게 침묵만 흐르다 보니 내심 당황한 거겠지.

"이제 나가보셔도 됩니다. 에밀린 님? 다음 조 부탁드립니다."

"옛!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안우진 님!"

내가 이만 나가보라고 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후다닥 일어나는 플레이어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8기수 네 명의 플레이어가 들어온다.

'리드, 이 플레이어는 제법 쓸만 하군.'

'피넛엘은 서문강의 성장 등급을 C로 줬네. 의외인데?'

'흐음, 마법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왜 검객을 하고 있지? 지금이라도 마법사를 추천할까.'

나는 새로 들어온 이들을 분석해, 포르도엘에게 종이를 건넨다.

"다음 조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또 다른 플레이어들을 살핀다.

"점심 도시락이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세연 님. 여기 두시면 됩니다."

"저녁 도시락도 준비해 드릴까요?"

"예.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하루 종일 했더니, 무려 5천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을 분석할 수 있었다.

"포르도엘님, 여기 있습니다."

"느에에에엥."

마지막 종이를 건네자 숫제 녹아내리는 것처럼 받아드는 포르도엘.

얼마나 고생했는지, 고작 12시간 사이에 진한 다크서클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많이 힘드십니까?"

"어제의 제가 이렇게 원망스러운 건 처음이에여······. 이놈의 입이 문제지! 에잇! 이제 끝난 거져?"

"예. 지금 들고 계신 것까지만 하신다면요."

"앗 그럼 빨리 해야겠네여!"

포르도엘의 손에 들린 펜이 종이 위에서 춤을 춘다.

뼈때를 짜는데 내가 걸린 시간이 3분 정도였는데, 그녀는 디테일한 부분을 처리하면서도 고작 1분 안에 완성시켜 버렸다.

"제대로 하고 계신 것 맞습니까? 대충했다간,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자, 여기여!"

내가 우려를 표하자, 자신있게 종이를 건네는 포르도엘.

종이에는 어느새 빼곡하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걸 고작 1분 만에 적었다고?'

대박인데?

나는 내심 감탄했다.

아무 생각 없이 숫자 일이삼사를 순서대로 써도, 이 속도로 완성시키지는 못할 것 같았기 때문.

내용은 더더욱 대단했다.

'생각의 속도가 이걸 따라갈 수 있어?'

포르도엘이 적은 커리큘럼은 모두 합리적인 것들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적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 와중에 디테일한 부분을 하나하나 생각했다는 것.

'자매는 자매구나.'

아세리안의 정보 분석 및 필기 속도도 엄청나다고 생각했지만, 포르도엘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수준이었다.

'앞으로는 이런 쪽으로도 많이 도움을 받아야 겠군.'

마음 속에서, 포르도엘의 가치가 급상승했다.

"아주 좋네요."

"그럼 끝난 거져? 저 이제 가도 되는 거 맞져?"

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지개를 쭈욱 켜는 포르도엘.

"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른 쉬시죠. 내일도 제법 고된 하루가 될 것 같으니까요."

"에에에? 오늘 하루만 도와드리는 거 아니었어여?"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포르도엘.

이내 그녀의 눈망울이 그렁그렁 해졌다.

"아니져?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여······!"

그런 포르도엘에게.

"5천 명을 했는데, 아직 6만 명이 넘게 남았군요. 대충 2주 정도만 더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툭, 하고 한 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아······ 안 돼애애애애!"

집무실을 나서자, 등 뒤에서 포르도엘의 절규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원석이 진짜 많았구나.'

8기수와 9기수를 합치면 6만 5천 명.

나는 그 중에서 500명 가량을 권속 플레이어들에게, 2천 명 정도를 3기수와 4기수 플레이어들에게 보냈다.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검객은 지그와 모용악에게.

대검은 제이스, 창은 루치아노, 탱커는 주창범, 궁수는 고건하, 수인족은 수호에게.

그리고 마법사는 카이로시아, 암살 계열은 당소소.

이런 식으로 분류해서 그들의 재능을 살릴 수 있도록 뿌려버린 것이다.

'한 명만이라도 있기를 바랐는데.'

하지만 오현석 같은 재능을 가진 팀원은 없었다.

'확률적으로 그 정도의 재능을 가진 사람을 찾기 쉬울 리가 없지.'

대다수가 지그나 루치아노 수준의 재능이었고, 그 중 아주 일부 만이 주창범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달까.

물론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였지만.

'이것도 슬슬 사용해 보긴 해야 하는데.'

집무실 의자에 털썩 앉은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러고는 오딘에게서 받은 영롱한 빛깔의 돌멩이를 꺼내들었다.

'만뢰석.'

벼락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돌멩이, 만뢰석.

아이템에 가져다 대면 벼락의 기운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원래는 팜에 들어온 바로 다음 날 쓰려고 했지만.

'어차피 당분간 경기에 안 나가니까 미리 사용할 필요가 없어.'

미래에 어떤 아이템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인벤토리에 박아둔 상태였다.

그리고 팜의 내실을 다지는 게 훨씬 더 급선무였기도 하고.

똑― 똑―

"안우진 님, 클로에예요."

"네, 들어오셔도 됩니다."

의자에 앉아 만뢰석을 보고 있자, 가슴깨에 서류철 하나를 끌어안은 채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클로에.

만뢰석을 인벤토리에 넣은 나는 서류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게 제가 부탁드린 목록입니까?"

"네, 앞으로 팜의 다양한 곳에서 정보를 수집해 줄 사용인들 목록입니다."

서류철을 받아 들자, 사용인 500명 가량의 인적 사항이 적힌 종이들이 보였다.

어디 출신의 누구이고, 팜에 들어오기 전에 어떤 일을 했으며, 이번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이유 등등 클로에의 코멘트가 자세하게 적혀져 있었다.

'꼼꼼하게 잘 정리해 놨군.'

내가 팜의 내실에 집중하면서, 어수선했던 팜이 빠르게 안정되었다.

그로 인해 최근엔 사건·사고가 10% 이하로 줄어든 상황.

내가 관리를 잘해서라기 보단, 애초에 팜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포르도엘은 천계의 정보통 역할을 하면서, 사용인들을 관리하고 있고, 피넛엘은 플레이어 교육 총 책임자로서 커리큘럼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아세리안은 경영·재무·오퍼·인사 등등 두 천사보다 훨씬 더 할 게 많다.

한마디로, 팜을 관리할 만한 중간 관리자가 지금껏 없었달까.

'이러니 내가 돕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안정화될 수 밖에 없지.'

그러다 보니 붕 떠 있는 것 같던 9기수 플레이어들이, 요즘엔 팀에 잘 녹아든 상태였다.

'이 상태를 계속해서 이어가야 해.'

나는 목록을 내려다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에게 지시한 건, 체력 단련실, 대련장 등등 각종 건물에 배치되어 플레이어들을 관찰할 사용인들의 목록.

이번 기회에 전력 분석팀을 운영할 계획이었다.

'매번 악마의 눈으로 중간 점검을 할 순 없어.'

이번에 새로 뽑은 전력 분석팀의 사용인들이, 훈련이나 대련, 식사 등등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한다.

모인 정보들을 하나로 합쳐 데이터 베이스화 한다.

그런 식으로 데이터가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무시하지 못할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대로 진행하시죠."

나는 어느덧 내 전담 비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클로에에게 서류철을 돌려주었다.

"네. 당장 오늘부터 전력 분석팀 신설을 진행하겠습니다."

"제 다음 일정은 뭡니까?"

"2주 뒤에 경기에 참가할, 오현석 님의 수준을 중간 점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 맞네요. 그럼 저는 대련장에 있을 테니, 특이사항이 있으면 대련장으로 부탁드립니다."

클로에의 말에 나는 서둘러 집무실을 나섰다.

'얼마나 늘었나 볼까.'

우리 귀한 보물께서 경기에 참가한다는데, 지금 어떤 수준인지 한번 체크해 봐야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