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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카리나

"공자님!!! 무노 공자님!!"

우당탕탕.

"어맛!"

"조심해!"

"미, 미안! 급해서....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공자님!!"

에스나는 언제나처럼 요란하게 내성의 복도를 질주했다.

아니, 평소보다 조금 더 급박했다.

이러면 지금 찾고 있는 공자님한테 혼난다는 걸 알면서도,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내 복도를 비틀비틀 걸어가는 목표를 발견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무노 공자님! 대박! 대박 소식...!!"

헉헉 숨을 고르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에스나를 무노가 퀭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또, 뭔데...?"

다크서클이 코까지 내려온, 반 시체 상태처럼 보이는 창백한 얼굴.

순간 흠칫하던 에스나는 이내 억지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사, 상태가 더 안 좋아지셨네요. 그래도 이 소식은 정말, 힘이 나실 거...예요. 아마."

"그러니까. 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체 같은 눈길에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는데.

그래도 요즘 이렇게 기운이 없는 공자님에게 힘을 주고 싶은 마음에 애써 용기를 냈다.

하지만.

"트리안의 꽃! 백작가의 대공녀께서 오셨어요! 얼마나 예쁘냐면...."

"킁. 그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좀비 공자님은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

"아, 아니 공자님! 왕국 북부에서 최고 미녀로 불리는 분이 오셨다니까요!? '그 사건' 때문에 오느니 마느니 하시던 분인데, 공자님을 보러...."

"알았다니까."

돌아보지도 않고 나온 대답.

터벅터벅 걸어가는 좀비의 힘없는 목소리는 누가 봐도 지금 전한 소식에 하등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 순간 에스나는 얼마 전 마님과 나눈 대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 무노가 파티나 약혼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큰일이야.

- 예?

- 리안이 드라센을 물려받게 되면, 무노가 있을 자리가 애매해져. 리안이나 우리가 같이 살길 원한다 해도, 아버지나 큰 오라버니가 무노를 가만둘 리 없어.

- 그, 그러면요?

- 무노가 최대한 좋은 집안 여식과 이어져서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해야지. 그게 그 아이를 위해서도 좋아. 트리안이면 더 좋고.

- 그, 그렇게 될까요?

- 당연하지. 이제 무노의 약점은 없어졌어. 거기다 성년 이전에 각성을 한 건 아버지께서도 주목하실 만한 성과야. 내가 소문도 많이 퍼트려 놨으니 가능성은 충분해. 물론 무노가 원하기만 한다면 말이야.

- ...왜, 왜 거부하시는 걸까요?

- 글쎄.... 역시, 아직은 어려서 그러는 거겠지. 흠.... 에스나, 네가 바람 좀 넣어 보도록 해.

- 예에!? 제가요!?

- 너는 무노의 몸종이니, 무노가 좋은 집안과 연결될수록 네 팔자도 펴는 거란다. 명심해.

솔직히 마님께서 앞서 하신 말은 잘 이해하지 못했기에, 에스나에겐 마지막 말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난 무노 공자님을 따라 떠나야 하는 거였어.'

후읍.

자신이 드라센을 떠나는 모습은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마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야. 똑똑하신 분이니까.'

그리고 사실은, 그게 싫지도 않았다.

에스나는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시끄럽고 실수도 자주 하는 시종에게 관대한 무노 같은 귀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거기다.

- 겨, 겨울, 배고픈, 계절이야. 너희 집, 괜찮아?

겨울이나 흉년마다 시종의 가족들 식량까지 챙겨 주는 자상한 공자님과 떨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면, 말이 어눌해서 그랬지 예전에도 똑똑하셨어.'

이보다 좋은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남은 생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공자님을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멋진 아가씨를 만나게 해야 돼'

에스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금 무노의 뒤로 따라붙었다.

다만.

"그, 대공녀님이 얼마나 예쁘시냐면요. 얼굴은 달덩이 같고, 피부는 뽀얗고...."

당장 할 수 있는 노력이, 예쁜 아가씨의 외모를 묘사하는 일밖에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왜 너까지 이러냐....'

무노는 속으로 연신 한숨을 내쉬며 재잘거리는 에스나를 흘깃 노려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미인...."

아으.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 상기되어 있고 빨간 머리가 신이 난 듯 찰랑대는 게, 마치 약 올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 또한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재잘거리며 전한 정보가 그에게 아예 쓸모없는 것도 아니었다.

'트리안의 꽃인지 뭔지, 결국 왔네? 안 올 수 있다더니.'

가장 신경 쓰이는 말은 그거였다.

트리안 백작령 산하에 있는 정식 귀족은 모두 아홉. 세 명의 자작과 여섯 명의 남작이 있다.

남작이 자작보다 낮은 작위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인 드라센이 다른 자작가에게 무조건 머리를 숙일 필요는 없었다.

즉, 다른 귀족들의 영예들은 적당히 상대하고 돌려보내도 아무 지장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트리안 백작가의 공녀라면 얘기가 달랐다.

명목상 아버지의 장인이지만, 그 전에 주군이기도 한 에녹 트리안 백작의 손녀.

'대공녀가 혹시라도 날 찍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물론 전생이건 현생이건 여자들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받아 본 적은 별로 없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지금 자신은 일종의 상품으로 걸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열여섯 생일이 지나기 전에 각성한 천재.

막 각성한 주제에 2성 기사를 제압한 무력의 소유자.

드라센에 묶일 일이 없는 양자.

'즉, 데릴사윗감으로 딱이라는 거지.'

마법사가 테러를 저질렀다는 소문을 덮기 위해 퍼트린 말이 주변 귀족들에게 어찌 비쳤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대공녀가 외부로 시집가지 않고 트리안에 머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자신이 선택받을 가능성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트리안의 대공녀가 하찮은 양자 나부랭이한테 관심 안 가지길 바라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또 드라센까지 왔다는 것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으니.

"에휴...."

절로 한숨만 나오는데.

그것을 보았는지, 에스나가 갑자기 주제를 바꿨다.

"아 참, 귀족들 따라 기사님들도 오셨는데요! 엄청 덩치 큰 거인 같은 분부터, 여자 기사분까지...."

그가 딱 솔깃해할 만한 얘기를 꺼낸 것이다.

'아, 맞다. 그렇지.'

귀족들이 왔으면 수행 기사들도 따라왔겠지.

"...자세히 말해 봐."

일라이를 제압하고 로드니를 두들겨 패 버린 이후, 영지의 기사들은 자신과 대련하는 것을 이상할 정도로 피하기 시작했다.

'뭐, 이해는 가.'

평기사들 여섯이야 각성 전에도 상대가 아니었는데, 이제 2성 기사들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다는 퍼포먼스를 보이기까지 했으니 그럴 만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 자신과 대련할 만한 사람이라곤 아버지와 기사 대장 격인 3성의 기사 군터 경밖에 없었는데.

요즘엔 둘 다 성년식과 몬스터 웨이브 준비로 바빠서 대련은커녕 문서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판이다.

즉 어머니한테 관심도 없는 파티 예절을 배우느라 자신의 스트레스는 하늘을 뚫고 올라갈 지경인데, 그걸 풀 구멍이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 생겼다.

"다른 귀족 기사들이라면, 내 실력을 궁금해하겠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에스나를 바라보자 녀석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창백해지는 것이 보였다.

'아차, 실수!' 하는 생각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에스나의 순수함에 다시금 피식 웃음이 나오는데, 녀석은 식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사, 사고 치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어요! 마님께서! 절대!"

"알아, 알아. 내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 아니야."

"사고 치실 것 같은데요!?"

"에이, 그럴 리가."

"고, 공자님! 진짜죠!? 정말 사고 치시면 안 돼요...!"

에스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도, 발걸음은 자연스레 손님용 관저로 향하는데.

'자, 다른 영지 기사들 실력은 어떠려나.'

짜릿한 대련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예절 교육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관저를 나가기도 전에.

그의 앞을 크고 작은 두 인영이 가로막았다.

"검은 머리, 특이한 각반과 팔목 보호대.... 맞는 것 같네."

"흐에엑!"

무노를 위아래로 훑어 내려 보는 어마어마한 덩치의 중갑 기사를 보고 에스나가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칠 때.

그 옆에 있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모의 여기사가 말을 걸어 왔다.

"무노 드라센 공자님이 맞으십니까?"

"어, 그렇습...니다만?"

상대의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데다가, 현생에서 처음 보는 엄청난 미인이 갑자기 정중하게 말을 거는 터라 무노는 말을 조금 더듬고 말았다.

그가 멍한 눈으로 여기사를 바라보는 순간.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는 트리안 백작가의 기사 록암, 그리고 카리나입니다."

쿵.

2m는 훌쩍 넘을 듯한 거인과 금발 미녀가 오른손으로 심장 부위의 갑옷을 두드리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동시에.

"로안나 트리안 공녀님의 명령으로, 공자님의 실력을 확인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이게 이렇게 되네...."

"무슨 말씀이시죠?"

"아, 뭐 바라던 바였다는 뜻입니다."

무노는 여기사, 카리나의 말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진심이신가요?"

"그럼요. 안 그래도 귀빈관에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말에 록암과 카리나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솔직히 그들의 요청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무례한 것이었다.

- 무례한 제안에 어찌 반응하는지 보는 것도 성품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이겠지.

로안나 아가씨의 명령을 떠올린 카리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상대가 대련 신청을 오히려 좋아할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으니까.

'뭐, 상관은 없으려나?'

어쨌건 오늘 그들의 주요 목적은 무노 드라센의 성품을 보는 게 아니었으니.

상대방이 원한다면 오히려 다행이라.

"...각성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2성 기사를 제압하셨다고요."

"뭐, 상성이 좋았던 덕분입니다만."

어깨를 으쓱하는 무노를 보며 카리나는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일이 로안나 아가씨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부친이신 대공자의 반대에도 이리로 행차하실 만큼요."

"...그거 영광이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무노.

'아가씨 소문을 못 들었나?'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 카리나가 이내 덤덤히 말을 이었다.

"만약 공자님의 실력이 소문만 못하다면, 아가씨께서는 이대로 가문으로 돌아가실 생각입니다. 트리안의 꽃이 가진 명...."

"거. 난 괜히 말 많은 거 싫은데, 그냥 한판 붙읍시다. 그러려고 오셨다면서?"

무노가 사납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자르는 순간, 그 뒤에 서 있던 거인 기사 록암 역시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쿵.

"트리안 기사단 평기사, 록암. 드라센의 대공자께 대련을 청하오."

덩치만큼 엄청난 크기의 대검을 땅에 꽂으며 인사를 하는 록암.

왕국에서도 최고 수준인 트리안 기사단의 평기사라면 2성일 것이고, 저 어마어마한 덩치에서 느껴지는 기세와 잘해야 20대로 보이는 얼굴을 보면 그중에서도 촉망받는 기재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무노의 시선은 그런 그가 아닌, 카리나를 향해 있었다.

"난 당신과 대결하고 싶은데?"

그 말에 록암과 카리나 두 사람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카리나 경이 여자라서 만만히 본 것이라면 착각이...."

"아니, 당신이 더 강해 보이니까. 적어도 3성 아닌가?"

"하...."

록암의 말을 끊고 나온 무노의 대답에 카리나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감이 좋으시군요. 그런데 그만큼 무모하다는 것은 알고 계시나요?"

그녀의 말은 자신이 세 번의 진화를 거친 초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평생 1성이나 2성에 머무른 채 더 이상 성장 못 하는 이들이 태반인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나이에 3성이라는 것은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천재라는 의미였으니, 그 자신감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무노에겐, 그것이 대련을 하지 않을 이유가 될 리는 없었다.

"무모하다니? 현명한 거지. 강자와 목숨 걱정 없이 붙어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아, 혹시 횟수에 제한이 없는 거라면 거기 록암 경과도 붙어 보고 싶고."

그 말에 록암과 카리나의 얼굴에 동시에 미소가 떠올랐다.

전해 받은 진화인자에 따라 차이는 있다지만, 강체술이란 기본적으로 육체를 극한으로 몰아 그 한계를 넘는 것이다.

그렇게 보통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어 육체를 진화시킨 초인인 강체술사들은, 자연히 기본적으로 투쟁심이 강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무노가 보인 반응에서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이런 미인과 겨뤄 볼 수 있다는 것도 영광이고."

무노 딴에는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너스레를 떤 거였는데.

그 말을 들은 순간, 카리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확 굳었다.

"기사는 모욕을 참지 않습니다, 공자."

챙.

대번에 빼어 든 세검에는 이미 넘실거리는 살기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왜?

12화. 대련

'내가 말을 그렇게 잘못했나?'

무노가 어리둥절해하던 순간.

"너무하셨어요...."

도망간 줄 알았던 에스나가 어느새 뒤에서 이해 못 할 소리를 하고 있었다.

"뭐가?"

영문을 몰라서 물었는데.

"그, 그게...."

"공자, 검을 드시지요. 드라센의 대검술이 그리 강맹하다던데. 오늘 제대로 한 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에스나의 말을 끊은 카리나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전까지 띠고 있던 고상한 미소는 어디로 갔을까.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세검을 겨눈 카리나의 태도는 대련이 아니라 흡사 생사결을 앞둔 사람처럼 보였다.

'갑자기 왜 저러냐...?'

미친 여자인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살기에 피부에 닭살이 돋고, 은근히 차오르던 호감마저 싹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차피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다만.

"연무장으로 가지. 보다시피 예절 교육을 받던 차림이라서. 날 정말 찔러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그 보검도 넣어 두고."

카리나가 든 번뜩이는 세검은 한눈에 봐도 보통 검이 아니었다.

보통 세검이라 함은 검날이 워낙 가늘어 작은 움직임에도 낭창낭창하게 휘어지기 마련인데.

저 검은 유독 꼿꼿한 데다 푸르스름한 빛까지 번뜩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아버지의 애검처럼 아티팩트(Artifact)인 듯했다.

정령사라 불리는 이들이 명장과 함께 만들어 내는, 자연의 힘이 깃든 무구.

아무리 하급이라 해도, 보통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보물이다.

그런데.

'이 여자, 소개할 때 성도 밝히지 않았으니....'

카리나를 보는 무노의 눈빛이 조금 더 무거워졌다.

평민 신분으로 아티팩트를 직접 구했을 리는 없으니, 저건 분명 하사받은 물건일 터.

하지만 그녀는 끽해야 3성(星).

강체술 수련자 열 명 중 한 명만이 진화를 거쳐 1성의 기사가 될 수 있는 거라면, 2성은 그런 기사 열 명 중 한 명뿐.

그리고 3성은 또 그 2성의 기사 열에 하나만이 도달하는 경지이니, 귀한 초인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왕국에서도 이름 높은 트리안 기사단이라면 그 정도 인재는 열 명 이상 거느리고 있을 터.

아무리 변경백이라 해도 그런 이들 모두에게 아티팩트를 하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나이까지 고려하면, 이 아가씨가 트리안 기사단의 차기 단장감이라는 건데.'

아마도 자신처럼 성년식 즈음, 혹은 그 한참 전에 각성을 한 천재일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카리나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언제까지 그렇게 빤히 보고만 있으실 거죠? 어서 연무장으로 안내해 주시죠?"

"아, 아니. 그냥 예뻐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둘러댄 말인데.

"계속해서 절 모욕하실 생각입니까?"

또 격한 반응이 돌아왔다.

'왜 저래?'

손까지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니 진짜 미친 여자구나 싶은데.

쿵.

이번에는 그녀 뒤에 있던 거인, 록암까지 불쾌하다는 듯 거칠게 발을 굴렀고.

거기다.

"그만하세요! 쫌! 대체 왜 그러세요!?"

에스나까지 옆구리를 푹 찌르면서 속삭이니, 자신이 정말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 세상에서 여자를 보고 예쁘다는 말을 해 본 건 처음이긴 했다.

그동안은 딱히 여자로 보이는 이들도 없었으니까.

자연히.

'예쁘다는 말이 욕이었나?'

슬슬 상식에 혼동이 오기 시작하는데.

"거기, 시종!"

"예, 옛!?"

"연무장으로 안내해라. 아무래도 공자님이 너무 느긋하신 성격인 듯하니."

이젠 아예 눈으로 불을 뿜기 시작한 카리나가 에스나를 재촉했다.

"아니, 내가 앞장서지. 거참...."

그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무노가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연무장으로 가는 내내, 뒤통수에 불꽃처럼 뜨거운 시선을 느끼면서.

* * *

작은 문제가 있었다.

연무장에 비치된 무딘 무기들 중엔, 카리나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세검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적당히 검신의 폭이 좁은 롱소드를 선택한 카리나는 그 검을 몇 번 휘둘러 보더니 연무장 가운데로 나섰다.

"이건 구멍이 좀 크게 날 것 같은데...."

구멍? 무슨 구멍?

설마 내 몸에?

'진짜 미친....'

아마도 자신보다 강할 것이 확실한 상대의 살벌한 중얼거림에 무노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심지어 이어진 말은 더했다.

"둘 중 한 명이 무기를 놓치거나 항복 선언을 하거나, 혹은 전투 불능이 되면 대련을 멈추겠습니다."

전투 불능?

'보통 전투 불능까지 가냐? 대련에서?!'

소름이 끼쳤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알겠다."

"록암, 증인 부탁해."

"그러지."

증인? 심판 아니고?

'...진짜 날 죽일 셈이냐?!'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상대가 여전히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꼴을 보니 오히려 투지가 불타는 것 같았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진짜 날 죽일 리도 없고.

'흐, 그래. 해보자.'

무노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 무기들 가운데에서 커다란 대검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길이가 자신의 키만 한 투핸드 소드.

그 적당한 무게감이 무거운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 때.

카리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한마디 보탰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제 장기는 속도입니다."

"짐작하고 있어."

아무리 강체술사라 해도 저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세검을 쓰면서 힘 계열일 리는 없으니까.

"그런데도 그런 대검을 쓰시겠다고요?"

"뭐, 익숙하지도 않은 가벼운 무기를 쓰면 뭐가 달라지나? 나도 장기로 승부해야지."

"...자신감 하나는 대단하시군요."

카리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얇은 롱소드를 무노에게 겨누었다.

'과연 얼마나 재능이 있을지.'

짜증 나는 상대지만, 그녀의 입장에선 기대가 되기도 했다.

진화란 기본적으로 진화인자(進化因子)에 영향을 받는 것이지만, 그 인자를 활용하는 강체술의 특징이나 본인의 의지에 따라서도 수많은 갈래로 나뉘어진다.

심지어 똑같은 강체술을 배웠다 하더라도 전수자와 계승자가 전혀 다른 진화를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그렇게 진화의 방향이 다양한 만큼 강체술사들끼리 서로 상성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 상성도 육체에 품은 진화의 별(星) 앞에서는 의미를 잃는다.

진화를 거듭할수록, 당사자의 육체 능력을 비롯한 역량의 폭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똑같이 속도나 힘 계열로 진화한다 해도 그 성장 폭은 전 단계와 비교할 수 없이 커질 것이고, 그 진화를 감당하기 위해 육체는 특기가 아닌 방향으로도 어느 정도는 강해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아무리 상성이 좋아도, 경지가 낮은 이가 위 단계의 강체술사를 이기는 것은 지난한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눈앞의 무노 드라센이 특별한 것이기도 했고.

'각성하기 전에도 1성 기사는 이겼다고 했다는데.'

그 정도면 거의 괴물 같은 재능으로 봐도 될 만했다.

그러니까.

"...바라건대, 쉽게 죽지 마십시오."

카리나가 살벌한 웃음을 보이는 순간.

"죽지 말라니? 이봐, 지금 대련...."

쿵.

록암이 커다란 대검을 연무장 바닥에 내리찍으며 대련의 시작을 알렸고.

그대로 카리나의 몸이 무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흡!?'

각오는 했지만, 카리나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섬뜩한 느낌이 목 근처에 느껴지는 순간.

무노는 반사적으로 쇠사슬을 움직이려다가 말았다.

- 금속 조종 능력이나 쇠사슬은 가능한 한 외부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거라. 생사결일 때 비장의 한수로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아버지의 말이 머리를 스치자, 반사적으로 목을 젖혔다.

'큭!'

우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꺾는 순간 그의 머리 위로 롱소드의 차가운 검날이 지나갔다.

무너진 자세로나마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그 반동으로 자세를 고쳐 잡아 보는데.

파아아앙.

"감각은 최고 수준...."

대검이 후려치는 곳은 빈 허공이요,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카리나의 짤막한 평가뿐이었다.

'X발.'

그리고 곧바로, 사방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전후좌우 전체에서 공격이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에 무노의 표정이 사납게 굳었다.

속도가 주력인 기사가, 적이 이만한 틈을 보였는데도 부상을 입힐 만한 공격도 하지 않고 여유롭게 장난질을 치고 있는 것이다.

'날 가지고 놀아?'

분노가 치솟는 순간.

파박.

무노가 강하게 한 발 내디딤과 동시에, 대검이 그를 중심으로 가속하며 한 바퀴 원을 그렸다.

파아아아아앙!

'잡았다.'

아주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된 번개와 같은 회전 참격에 쉴 틈 없이 몰아치던 카리나의 움직임이 한순간 그의 눈에 들어왔지만.

카가가각.

"큭!?"

얇은 롱소드가 대검의 아래쪽을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수차례 후려치는 순간, 궤도가 엇나간 검격이 그녀의 머리 위를 스쳤다.

그리고 그렇게 무노의 자세가 다시 한번 무너진 사이, 섬뜩한 살기가 목으로 다가왔다.

'흐!'

그 궤도를 감지한 무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목을 비틀었다.

스팟.

목의 살갗을 아주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검날.

동시에 그의 대검은, 실체가 드러난 카리나의 옆구리를 향해 그대로 횡으로 휘둘러졌다.

'잡았...!'

파아아아아아앙!

하지만 그사이 검을 거두고 그대로 점프해 버린 카리나는 그의 머리 위에서 다시 한번 빛살처럼 검을 뻗어 냈다.

그에 무노가 검을 휘두른 반동을 이용해 자연스레 몸을 틀며 왼쪽 팔목을 들어 올리자.

타-앙!

그녀의 공격은 자연히 그의 팔목 보호대에 맞고 튕겨 나갔다.

그대로 튕겨 나간 카리나는 다시 지면에 착지하며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힘, 투지, 모두 최상. 확실히 재능이 있어요...."

울려 퍼지는 카리나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감탄이 어려 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무노의 분노를 부채질할 뿐이었다.

"재능이 있다라...."

흐.

그런 말은 상대를 내려다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을 테니까.

물론 상대가 자신보다 강자라는 것은 알지만, 알면서도 열이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계속하시겠습니까? 더 이상 의미는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노골적인 도발이 섞이면 말이다.

"아니지. 이제부터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건데."

"고, 공자님. 이, 이제 그만하심이...!"

그 짧은 공방을 지켜보면서 이미 안색이 창백해진 에스나의 목소리도 오히려 투지를 북돋우는 듯했다.

"더 보여 주실 게 있나요?"

"그럼. 많지."

카리나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자존심을 잔뜩 구긴 무노의 눈은 오히려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카리나의 특기가 속도일 것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렇게까지 속도 차이가 나면, 보통은 대련도 성립 못 해.'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백작령을 넘어 왕국 전체에서도 이름이 높은 드라센 대검술의 핵심은 검을 휘두르는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었으니.

'이미 한번 성공했어. 그러니....'

결심을 하는 순간, 동시에 온몸의 체온이 급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된다.'

능력을 쓰지 않고 드라센 대검술만으로 싸운다면 지금 자신의 무력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그 호기심을 이제부터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조심해, 카리나 경. 이건 나도 조절 못 해. 그러니까...."

"설마...."

"...죽지 마."

쾅.

한없이 달아오른 몸 안에서 분해된 열량을 한순간의 폭발적인 에너지로 치환한 무노가, 엄청난 속도로 카리나를 향해 쏘아졌다.

아득했던 속도의 차이를 상당 부분 메꿔 버린 그 엄청난 움직임에 카리나의 눈이 크게 확대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반격하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도, 이제는 고스란히 읽혔다.

'역시.'

가속.

체내의 열량을 태워 신체 능력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드라센 가문의 비기의 핵심.

폭식의 기사라 불리는 아버지, 라이언 드라센은 이 가속을 바탕으로 한 비기들의 연계기로 5성급으로 평가되는 거대 몬스터 스노우 트롤을 단숨에 찢어발겨 죽인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한동안 탈진해서 일어나지 못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스으으.

지금 무노의 몸에서 뿜어지는 힘은, 체내의 열량을 소모해 만든 에너지가 전부는 아니었다.

콰드드득.

땀이 증발해 피어오른 수증기와 함께 무노의 온몸에서 기묘한 기운이 퍼져 나가고.

이윽고 그의 거대한 대검이 휘둘러지자, 카리나를 향해 태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꽈과과과과과광!!!

검이 휘둘러지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폭음이 연무장을 강타하며 동시에 돌풍이 일어나는데.

"저런...!?"

지켜보던 록암이 놀라 벌떡 일어서고, 에스나가 입을 쩍 벌린 채 그 광경을 지켜보는 순간.

한순간 연무장을 몰아치던 그 태풍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럴 수가...."

창백한 안색으로 부스러지는 롱소드를 쥔 채 멀찌감치 밀려난 카리나가 감탄사를 내뱉을 때.

"씨, X발...."

한순간에 살이 쪽 빠져 홀쭉해진 무노는, 멀쩡한 그녀를 확인한 채 한 마디 욕설만을 남기고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털썩.

"공자님!!!!"

에스나의 비명 소리가 연무장에 가득 울려 퍼진 후에야.

당황한 트리안의 기사들이 무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3화. 아름다움은 기준에 따라 다르다

- 젠장, 좀 이르지만 어쩔 수 없지.

- 네놈을 바치고 ...를 폭주시킨다. 그럼 변경백의 병력 따위....

- ...대주교께 할 말은 생기겠지.

백발이 성성한 누군가의 뒷모습. 가끔 돌아보는 얼굴은 흐릿하기만 했지만, 분명히 아는 이었다.

여전히 아득하기만 한 기억 속에서도 그에게 끌려가던 더러운 기분만은 생생히 떠올랐으니까.

그리고 그 흐릿한 얼굴이 자신을 보면서 기분 나쁘게 웃을 때.

무노는 소름 끼치는 느낌과 함께 눈을 번쩍 떴다.

"...흐."

잊고 있던 기억 중 일부가 꿈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런데 그조차 선명하지는 않아서, 무언가 중요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깨어나는 순간부터 다시 머릿속에 노이즈가 낀 것처럼 생각이 나질 않았다.

'뭐였더라?'

애써 기억을 더듬어 보려 하는데.

꼬르르륵.

배에서 무시할 수 없는 생체 신호가 울리며 엄청난 공복감이 느껴지자, 그 생각은 한순간에 잊혀 버렸다.

"으, 음식을...."

그제야 몸을 벌떡 일으키며 침대에 내려서려는데, 그 순간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머리가 핑 돌았다.

"윽!?"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서서 몸을 내려다보니, 확연하게 홀쭉해진 팔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제야 기절하기 전 대련의 상황이 떠올랐다.

특히 그 마지막 순간의 기억이.

'...마력으로 에너지 소모를 대체했는데도 이 정도인가.'

역시나 자신의 수준에 아직 가속은 무리인 듯싶다는 생각을 새겨 두는데.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공자님!?"

사람을 유혹하는 향기가 가득한 음식들을 위아래로 가득 채운 3단 서빙 카트를 낑낑대며 밀고 들어오는, 주근깨 가득한 얼굴.

"정말이군요. 영주님이 이때쯤 깨어나실 거라고 말씀하시기는 했.... 어맛!"

에스나는 이내 날 듯이 덮쳐드는 무노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우당탕탕.

와구와구.

"...안 됐, 흠. 흠."

하지만 곧 거의 짐승처럼 두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아니 아예 입 안으로 쏟아 넣는 무노를 보고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하다가.

"흐아아...."

콰드득. 콰드득.

쩝쩝.

도무지 그치지 않는 폭식의 광경에, 이내 질린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컥, 컥. 무, 물!"

"여, 여기요!"

꿀꺽꿀꺽.

"고맙다, 에스나!"

"천천히 드세...!"

와구와구.

쩝쩝.

"...요. 탈 날라. 히익."

커다란 3단 서빙 카트에 채워져 있던 음식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데.

그 와중에 실시간으로 무노의 몸에 살이 차오르는 광경은, 보기에 따라서는 정말 기괴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영주의 전투 후 모습을 익히 보아 온 드라센의 가솔들에게 있어서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20인분에 가까운 음식을 순식간에 먹어 치운 무노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양념으로 엉망이 된 두 손을 들며 멋쩍은 표정을 짓다가.

"여기요."

에스나가 재빨리 건네준 냅킨으로 양손을 닦으며 슬쩍 얼굴을 붉혔다.

"그, 너도 알다시피, 이게 집안 비기의 부작용 같은 거라서...."

"네. 네. 알겠습니다, 먹보 공자님."

"아니! 내가 평소에는 이렇지 않잖아! 힘을 너무 많이 써서 회복하려고...."

"뉘예. 뉘예. 덕분에 가져갈 때는 가벼워서 좋겠네요."

"...크흠."

남들에게 보이긴 부끄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나마 에스나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 같은 존재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물론 그 전에 스스로 놀란 것이 더 컸다.

이 어마어마한 폭식 능력도, 그것으로 인한 급속 회복 능력도.

'이건 분명히 폭식의 강체술인데....'

어떻게 된 걸까 싶었지만,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좋은 일이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어차피 진화인자도 아버지에게 받은 것이었고, 어려서는 폭식의 강체술을 배워 보겠다고 그 비전을 억지로 외우고 다니기도 했었으니 아마 그 영향일 것이다.

악마포식자의 특성이 단순히 악마만을 먹는 것이 아니라 폭식의 강체술 특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어딘가.

'아버지는 이것을 예상하셨을까?'

잠시 의문이 스쳤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물 잔해를 슬쩍 보는 순간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만한 음식을 가져다주신 걸 보면 알고 계셨던 것 같았다.

"...그, 트리안 기사들은 어떻게 됐지?"

뻘쭘한 마음에 말을 돌리자, 에스나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곧장 그 공녀님 곁으로 돌아갔어요. 그 여기사님이 공자님 대단하다고 칭찬하셨고요."

"대단하기는 개뿔...."

그 말을 듣자마자, 기절하기 전 마지막 광경이 떠올랐다.

고작 대련용 얇은 롱소드 하나만으로 자신의 대검 난타를 버텨 냈던 카리나.

자신은 무리하게 가속까지 썼지만, 그녀의 안색을 창백하게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속 상태에서 바람 가르기까지 썼으면 달랐.... 아니, 그럼 내가 말라비틀어져서 죽었겠지.'

확실한 패배의 기억을 떠올리자 방금 전 달콤한 폭식을 끝낸 입 안에 쓴맛이 도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에스나가 음식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뭐라셔?"

"그게, 그...."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버지의 반응이 그리 좋진 않았을 것 같은데.

"성년식 파티 전에 기절이나 하고, 잘하는 짓거리다. 라고...."

"역시...."

역시나 씁쓸한 대답이 돌아왔다.

"근데, 그 말씀 하시면서 웃으셨어요! 분명!"

"응?"

"벌써, 가속까지.... 라고 하시면서요."

"크흠...."

솔직하지 못한 양반 같으니.

아무튼 대련은 씁쓸하게 마무리되었지만, 상대가 전투에서 최고로 꼽히는 속도 계열의 특성을 가진 3성의 기사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선전했다 볼 수 있었다.

'거기다 난 사슬이나 능력도 안 썼고....'

스스로 페널티까지 안고 한 대련이었으니 그 결과는 충분히 만족할 만했다.

사실 그 카리나라는 여기사도 아티팩트 세검을 안 썼다는 것은 애써 무시하면서, 무노는 스스로를 위안했다.

"아, 그리고 이제 슬슬 준비하셔야 해요!"

"뭐?"

"오늘이 파티 당일이라고요!"

그 말에 무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하루 넘게 기절해 있었다고?"

"네, 하루하고 반나절 동안이요!! 그러니까 얼른 준비하셔야 해요. 예쁜 아가씨들이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

에스나가 웃으면서 그를 일으키려고 하는데.

꾸르르륵.

무노는 일어서려다 말고 다시금 배에서 우렁찬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그 전에, 밥 좀 더 갖다 줄래?"

그러자 멍한 얼굴의 에스나가 잠시간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는데.

"...뱃속에 거지가...."

"뭐?"

"아, 아니에요. 얼른 준비할게요! 쳇. 엄청 힘들게 가져왔는데.... 씨...."

궁시렁대면서 서빙 카트를 정리하는 에스나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음식 빨리 갖다 주면, 이번 달 월급 두 배."

"번개처럼 다녀오겠습니다!"

우당탕탕.

언제나처럼 요란하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는 에스나를 보고 있자니 패배의 쓰라린 맛이 그나마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벌써 오늘이라니...."

코앞까지 다가온 난관을 생각하니, 자꾸 한숨만 나올 뿐이었는데.

그 이후로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 * *

"어머. 우리 아들, 이렇게 차려입으니 멋지구나!"

"...."

감탄하는 어머니, 엘리나의 앞에서 무노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투박한 전신 거울 안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

홀쭉해졌던 몸은 연이은 폭식으로 거의 복구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뽕이 잔뜩 들어가 어깨가 아예 산처럼 솟아 있는 회색 상의와, 중심부가 민망할 정도로 도드라져 보이는 새하얀 쫄바지.

아마 전생의 사회에서는 어지간한 관종도 입기 힘들 듯한 이 아이언 왕국식 예복은, 무노에겐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옆에 있는 어머니나 에스나, 리안의 표정을 보니 정말 감탄하는 기색이라.

"...이게요?"

"그럼! 오늘 우리 아들이 제일 멋지다!"

"멋져요. 공자님!"

"형님, 멋있어요!"

도무지 동조할 수 없는 그들의 의견에 어색한 웃음만 나오는데.

더 이상은 갈아입을 옷도 없고, 어차피 여태 입어 본 옷들도 다 그게 그거였다.

거기다, 이젠 시간도 없었다.

"파티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슬슬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님."

"알겠네."

시종의 그 말에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고.

무노는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드라센의 대공자!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신 무노 드라센 공자님 드십니다!!"

시종의 거창한 고함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파티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휑하던 드라센의 대전을 거짓말처럼 화려하게 꾸며 놓은 장식들이었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와, 식탁에 놓인 유리잔 위에서 황홀한 빛을 반사하는 촛불들.

평소 칙칙하기만 하던 대전이 정말 사치스러운 연회장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팔머가 신경을 많이 썼다더니....'

대전의 구석에서 자신과 비슷한 예복을 챙겨입은 채 외눈 안경을 번뜩이는 집사의 얼굴에 왜인지 주름이 는 것 같아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는데.

사방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저 친구가...."

"오늘 열여섯 생일인데 체격이 벌써...."

"2성의 기사를 쉽게 이겼다는데...."

억지로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던, 자신과 비슷한 추한 복장의 남자들과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정확히는 생일이 아니라 입양된 날이고, 나이도 추측인데....'

살짝 걸리는 말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파티 시작 전에는 눈인사가 기본이다. 친분이 있다면 미리 나서서 인사를 나눠도 되지만....

대다수가 처음 보는 얼굴들이지만 신분은 알 수 있었다.

트리안 백작가에 소속된 아홉 명의 귀족 중 한 명이거나 그 대리인, 혹은 그들의 수행원들.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족족 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어 올리는 이들을 보며, 무노는 어색하게 눈인사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굳이 다가서고 싶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그대로, 남자든 여자든 가릴 것 없이 짙은 향수 냄새가 섞인 악취를 대전 가득 풍기며 그의 예민한 감각을 건드리고 있었으니.

'우욱.'

...토하면 안 된다.

스스로 세뇌하듯 속을 다스리며 억지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엊그제, 질풍의 기사와 무승부를 이뤘다고...."

"트리안의 그 칼날 같은 여기사?"

"설마요?"

"사실이랍니다. 트리안 쪽에서 나온 말이라...."

주변에서 들려오는 정보들은 기억해 두는데, 좀 희한하기도 했다.

싸움은 솔직히 힘보다는 속도가 중요한 것이니, 속도 계열로 진화한 3성의 기사 카리나에게 거창한 이명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지만.

'무승부 아닌데? 트리안에서 직접 소문을 냈다고? 호오....'

그 소문은 마치 자신을 배려한 듯 와전되어 있었다.

'칼날 같은 여기사라니? 그 외모로...? 역시....'

카리나가 생각보다 더 성격이 더러울 것이라는 사실도 마음에 새겨 두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한 남자.

흔한 갈색 머리를 가진 푸근한 인상의 중년인이 잔을 들어 자신과 눈을 맞추는데.

그 순간, 무노는 표정이 일그러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 죽여, 죽여, 죽여! 죽여서 먹어!!

중년인을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솟구치는 살의와 충동.

그것은 한순간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후우...."

무노는 질끈 눈을 감으며 그 충동을 부추기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자신의 의식과 분리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 남자를 향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는데.

"수줍음을 많이 타나 보군요. 어린 친구라 그런가."

수군거리는 주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

그리고 그럴수록, 머릿속의 악마포식자가 난리를 쳤다.

- 죽여! 먹어!

'닥쳐!'

자신의 의식의 한 부분을 억지로 분리하고 달래 가며, 무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의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저놈.

'뭐지? 왜 마법사가 여기에....'

이곳에 예복을 입고 모여 있는 이들은 모두 트리안 백작가 산하의 귀족들이거나 그 대행인들이다.

즉 모두가 마도 제국과 대립하는 아이언 왕국의 사람들이라는 건데, 그중 한 사람이 마법사라니?

'말이 안 돼. 주변에서 왜 모르지?'

혼란스러운 상황.

'설마 일라이 사건에 관계된 마법사가 저놈....'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미욱한 아들의 성년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오신 모든 귀빈분들께 삼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대전의 계단 위에서 파티의 호스트로서 큰 목소리를 내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본격적인 파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주군이신 에녹 트리안 백작님께서 제 아들에게 큰 선물을 보내셨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그 선물을 로안나 트리안 공녀님께서 직접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장내의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오오!"

"북부의 빛!"

"트리안의 꽃이, 정말...?"

"트리안의 꽃, 로안나 트리안 공녀님을 환영해 주십시오!"

동시에 대전의 입구가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우와아아아!"

터져 나오는 함성.

성년식의 주인공보다 손님이 더 환영받는 상황이었지만,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트리안 백작가는 굳이 따지자면 북부의 왕족이니, 그 가문의 공녀라면 왕가의 공주나 마찬가지인 신분이니까.

하지만.

"정말, 정말 예뻐요, 아빠. 저 자신이 부족...."

"괜찮다. 저분의 선택에 달린 것이니...."

"피부가 어쩜 저리 뽀얄까?"

"얼굴은 저렇게 달덩이같이 환하고...."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이들 중 가장 앞쪽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 소녀와 여인의 경계에 있는 듯한 그 아가씨에게 쏟아지는 말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귀엽긴 한데.... 뭘 저렇게까지?'

무노에게는 완전히 동글동글한 얼굴과 통통한 체형을 가진 귀염상의 소녀 정도로만 보이는 아가씨에게, 너무 과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참 사회생활 열심히 한다 싶으면서도,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진심 같아서 아리송해지는데.

거기다.

"반면에 저 여기사는.... 참 듣던 대로군요."

"질풍의 기사...."

"너무 날카롭게 생겼네. 왜 살찌울 생각을 안 할까요? 옆에 공녀님을 보면서도...."

"기사라고 해도 너무 말랐네요. 저래서 시집가서 애나 낳을 수 있을지."

"뭐, 기사로만 살 생각인가 보죠. 호호."

"여기사 중엔 체격이 엄청 큰 이도 있던데, 차라리 그게 낫지...."

"에이, 그건 아니지. 뭐든 적당한 게 아름다운 거지. 살도...."

로안나 공녀의 뒤를 따르는, 파티장에서도 남성형 정장과 부분 갑옷을 입은 카리나에게 쏟아지는 말들은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말랐다고? 저 탄탄한 체형이?

'...겁나 예쁜데?'

거인 록암의 옆에서도 눈에 확 띄는 그녀의 미모는, 앞서 걷는 로안나 공녀를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뭐지?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주변에서 모두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표정을 보면 하나같이 진심인 듯했다.

심지어 어느새 곁에 다가온 어머니도.

"얘, 정말 예쁘지 않니?"

"예. 정말...."

"저렇게 복스럽고 둥근 얼굴이 얼마나 부러운지."

"예에?"

"나도 소싯적에는 살찌우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었는데, 안 되더라. 뭐, 너희 아버지는 이런 나도 사랑해 주었지만."

"에?"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여태 어머니를 '예쁜' 귀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생각하고 있던 무노는, 어머니의 난데없는 자기 고백에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아....'

동글동글하고 통통한 얼굴이 귀엽게만 보이는 공녀와, 그 뒤편의 눈에 띄게 아름다운 호위 기사 카리나.

그들을 향한 주변의 반응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서야.

'헐....'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왜 예쁘다는 말에 카리나가 그렇게 발작하듯 반응했는지를.

'아름다움은 문화에 따라 기준이 다르지. 그래.... 이 옷도 그렇고.... 흐....'

카리나와 로안나를 번갈아 보는 무노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오르는데.

그 와중에, 사방에서 그를 향해 시선이 몰려들고 있었다.

로안나 공녀가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14화. 공녀의 야망

'왜....'

당황하던 것도 잠시.

이내 이것이 파티 관례상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은 무노는, 공녀가 지근거리까지 다가오는 즉시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북부의 지배자, 강철 위에 핀 장미, 트리안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조금은 어색했지만 그래도 틀리지는 않았는지, 흘깃 본 공녀의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무노 드라센 공자. 만나서 반가워요."

공녀가 슬쩍 내민 왼손에 배운 대로 가볍게 키스를 하고 일어서려 하는데.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던 카리나가 한 발 앞으로 나서 검을 뽑아 들었다.

챙!

'뭐지?'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가만히 서 있는데, 공녀는 카리나가 거꾸로 내민 검을 받아들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다시 정중히 무릎을 꿇으세요, 공자."

뭐지?

'갑자기 시비를?'

이런 건 들은 바가 없는데?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자 왜인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아버지가 눈짓을 보내 왔고, 무노는 그 뜻을 알아듣고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공녀가 바로 그의 어깨 위에 검을 올렸다.

"강철 위에 핀 장미. 그 주인의 뜻에 따라, 충분한 자격을 갖춘 드라센 가문의 장자 무노 드라센에게 트리안 백작가의 이름으로 기사의 작위를 내립니다."

그 검이 그의 양어깨와 머리를 한 번씩 짚고 떠난 다음.

공녀는 다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무노 드라센'이라는 이름과 회색 장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준귀족을 상징하는 은빛 신분패가 들려 있었다.

"일전의 무례한 시험을 용서해 주세요. 할아버님의 뜻이기도 했답니다. 이 선물이 정말 적합한지를 보기 위한."

그리고 그 순간이 되어서야 사방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오...!"

"정말...?"

"허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노 드라센은 드라센 가문에서도 양자이며, 결국은 트리안의 핏줄과 이어진 둘째가 이 영지를 물려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다만 그 빛나는 재능에 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타 가문의 기사로 들어갈 자격은 차고 넘친다는 것도.

그런데, 왕국에서 이름 높은 트리안 백작가가 그 이름으로 충성의 서약도 받지 않고 기사 작위를 내린다는 뜻은.

"트리안에서 신분을 보장하는 자유 기사가 되신 겁니다. 왕국 내에서 그 이름을 무시하는 자는 없을 거예요. 물론 공자가 원한다면 바로 트리안 기사단의 정기사로 서임할 수도 있답니다."

공녀의 말대로, 왕국 북부를 지키는 변경백이 직접 준귀족의 신분을 보장하는 것이었으니.

지금 무노가 받은 신분패는, 왕국 어디에서도 웬만한 하급 귀족 이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만능 통행패나 다름없었다.

어중간한 선물 따위보다 훨씬 나은 값진 선물.

다만, 어차피 기사 작위는 어디서든 받을 자신이 있던 무노에게는 그마저도 애매하게만 느껴졌는데.

'차라리 아티팩트나 주지. 아니, 그건 욕심인가? 씁.... 아!'

잠시 잡념에 빠져 있던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짓을 인식한 후에나 뒤늦게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그 은패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단순히 은이 아닌 듯, 무언가 특별한 힘에 의해 단단하게 굳어 있는 신분패의 촉감에 다시금 눈을 빛냈다.

마치 주인을 알아보고 손길에 반응하는 듯한 기운.

'이게 정령술인가.'

자연과 원소의 힘을 의지로 가공해 내는 이능, 정령술.

이계의 힘인 마력에 악마포식자가 이상 반응을 보였던 것과는 다르게, 이 신분패에서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기분만 느껴졌다.

아마도 이것은 단순히 그에게만 내린 선물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의 눈치를 흘깃 살핀 무노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각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에 공녀는 화사한 미소로 그 인사를 받았다.

"할아버님께서는 인재를 사랑하시지요. 그것은 곧 작위를 이어받게 되실 저희 아버님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트리안은 언제나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공녀의 마지막 말에 뒤에 시립해 있던 카리나가 움찔하는 순간, 주변 사람들도 눈을 빛냈다.

무노는 트리안의 꽃이 이 성년식에 온 건 자신을 반려로 점지하기 위함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었고,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예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공녀의 말은, 마치 무노가 자신의 반려가 아닌 기사로서 트리안에 와 주기를 바란다는 말 같았다.

백작가의 사연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다시금 로안나 트리안의 성년식 때부터 무성했던 소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에녹 트리탄 백작이 너무나 손녀를 사랑하여 약혼도 안 시킨다는 소문 이전에 퍼졌던 말.

- 트리안의 꽃은 결혼 생각이 없다.

그렇게 모두의 머릿속에 파문을 남겨 놓은 귀여운 공녀는 그대로 무노의 앞에서 물러났고.

그때부터 무노에겐 다른 귀족들이 차례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별의별 성년식 선물을 든 시종과, 무노 또래의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데리고.

* * *

"으.... 지치네요."

따지고 보면 공녀까지 포함해도 고작 아홉 번의 인사일 뿐이었는데, 무노의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곁에 다가온 아버지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 하나같이 어여쁜 숙녀들이던데, 정말 그게 감상의 끝이냐?"

"어여쁘긴 무슨... 아, 아니. 무엇보다 냄새가 좀...."

무노가 목소리를 낮추며 아버지 앞에서 살짝 코를 틀어막는 순간, 그제야 라이언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자신의 큰아들이 냄새에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것을.

'이런....'

아들의 생각을 돌리려던 계획이 무너지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다.

"뭐,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드디어 어린애 취급은 안 받게 되었으니까요."

무노가 술잔을 들어 보이며 씩 웃는데, 그 살짝 상기된 얼굴을 보고서야 다시 헛웃음이 나왔다.

인사를 건네오는 영애들과 건배를 올린 건 공녀를 제외하면 고작 여덟 번.

처음 술을 먹는 아들의 꼴이 웃기기만 한 것이다.

"아직은 이르다, 이놈아. 올 겨울이 지나고 나거든, 그때나 이 애비랑 제대로 한잔하자꾸나."

벌써 술기운이 도는 듯한 아들의 모습에 가볍게 잔을 빼앗아 드는데.

손이 스치는 그 순간, 무노가 그의 손바닥에 빠르게 글자를 썼다.

그에 라이언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자, 아들이 몸을 더 휘청이기 시작했다.

"아, 어지러...."

"녀석, 술은 더 마시지 말거라. 바람이나 쐬고 와."

자꾸 비틀거리는 아들을 그가 슬쩍 부축하자.

"아, 예. 좀...."

그의 어깨를 붙든 무노의 손가락이 다시 빠르게 글씨를 썼다.

이번에는 더욱 확실히 느껴졌다.

[모에노 칸넬 자작 대행, 마법사.]

"으음...."

연기를 잘 못 하는 그가 어색한 신음 소리를 내는 순간.

'확실히 인지하셨다.'

골치 아픈 문제를 아버지에게 떠넘긴 무노가 정신을 차리러 2층의 발코니를 향해 움직였다.

취한 척 과장해서 연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몸으로 처음 마시는 술이라서 그런지 정말로 살짝 어지러웠으니까.

그런데.

"아. 공자, 조금 취하신 모양입니다?"

방금 전 아버지에게 정체를 전달했던 그 마법사가 어느새 그의 앞에 나타났다.

"저런. 많이 힘드신 모양이군요."

"으?"

푸근한 인상의 갈색 머리 중년인.

트리안 백작령 3명의 자작 중 한 명인 모에노 콘넬 자작의 대행으로 왔다는, 토이네 란델 준남작이라는 자였다.

"...아, 예. 조금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제가 아까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무슨?"

- 죽여!! 먹어!!

아까도 그랬지만, 가까이에서 보는 순간 악마포식자가 머릿속에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살짝 취한 상태에서 억지로 의식을 분리하려니 인상이 찌푸려졌다.

'잡것이....'

불쾌한 느낌은 둘째 치고, 일라이 사건의 당사자가 어쩌면 눈앞의 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심문하고 싶었지만.

악마도 아닌 마법사를 죽여 봤자, 일반인의 시체가 남을뿐이다.

경지에 달한 대마법사 중에서는 죽는 순간에 무슨 괴물로 변한 이도 있다고 하지만, 대다수의 마법사들이 가진 마력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질적인 에너지이기에 그냥 허공에 사라져 버리기 마련이었다.

그 대가로 급속도로 썩어 가는 시체 하나가 남는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스치듯 흘려들은 얘기일 뿐이다.

그것을 확인해 보겠답시고, 무턱대고 파티장에서 사람을 죽일 수도 없고.

'그래선 안 되지.'

놈이 마법사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괜히 성급히 일을 벌였다가는 괜히 드라센 영지와 콘넬 자작령 사이에 문제만 생길 뿐이다.

놈을 어찌하려면, 마법사라는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했다.

그리고 그때.

"제 선물에 담긴 향이 사람을 조금 취하게 한다는 것을요."

"뭐?"

가까이에 다가온 토이네의 두 눈이 요사스러운 빛을 냈다.

그 순간 무노의 머릿속에 이상한 기운이 번지며 사고력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사이 더욱 가까이 다가온 토이네가 그의 귓가에 가볍게 속삭였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데, 장소가 좀 그렇군. 밤에 날 찾아와라. 알겠지?"

"...예."

무노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흡족한 미소를 지은 토이네가 무노의 어깨를 두드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멋진 공자님이시군요. 대단합니다! 전 그럼 이만...."

남들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인사하며 친근하게 포옹을 해 오는 토이네.

그 순간 다시 무노의 눈에 빛이 돌아오는데.

토이네가 웃으며 돌아서는 순간, 그 뒷모습을 보는 무노의 입가에도 싸늘한 미소가 스쳤다.

'이 새끼 봐라....'

머릿속에 마기가 일어나는 순간 그의 의식을 잠식한 것은, 토이네의 마법이 아니라 그에 반응한 악마포식자였다.

그 덕인지 취기는 한순간에 사라졌고, 오히려 배 속이 약간 든든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멍한 눈빛 연기야 의식을 분리해서 과거의 어눌했던 상태로 잠시 되돌아가기만 하면 쉬운 일이었다.

어쩐지 이 몸의 체력으로 너무 쉽게 취한다 싶었다.

'그럼 마기와 별도로, 마법을 증폭시키는 재료도 있다는 거네....'

뭐 알아서 무덤을 파 놓겠다면, 직접 눕혀 주면 그만.

"무노, 지금...."

"아, 별일 아닙니다. 제가 좀 취해서."

아버지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는데.

무노는 다시 취한 척 비틀거리다가 아버지의 어깨에 기댔고, 그 순간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 저...."

"무력과는 별개로 술이 많이 약한가 보군."

"...저건 단점이야."

남들이 보기에는 술에 취한 무노가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았지만.

[저한테 마법으로 수작을 부리더군요.]

[괜찮으냐?]

[예상하신 대로, 제게는 마법이 안 통합니다. 오늘 밤에 찾아오라고 부르던데,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조심하거라. 나도 나름의 준비는 해 놓으마.]

실상은 많이 달랐다.

부축하는 손길로 필담을 나누는 부자의 눈이 살벌하게 번뜩였고.

무노는 여전히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그대로 발코니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하필 트리안 공녀의 일행이 있었다.

"오, 무노 공자."

공녀가 손에 든 잔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하는 순간.

'이런.'

당황스러웠지만, 번개처럼 머리를 굴려 적합한 말을 골랐다.

"이곳에 계셨군요. 안 보이시던데."

"저를 찾으셨나요?"

"과한 선물에 감사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나름 잘 둘러댔다 생각했는데, 공녀는 피식 웃었다.

"알고 있겠죠? 그건 그대가 카리나 경을 놀라게 할 만한 실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선물이었어요. 만약 그대의 소문이 그저 소문으로 끝이었다면...."

"끝이었다면?"

"질 좋은 라마산 다이아몬드 한 알로 끝이었겠죠."

휘유.

'그것도 좋은데?'

그 속마음이 들킬까 봐, 무노는 놀란 표정 그대로 웃어 보였다.

"카리나 경이 잘 봐주신 덕분이지요."

그리고 시선을 공녀의 등 뒤로 옮겨 잠깐 고개를 숙이자, 카리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슬쩍 목례할 뿐이었다.

"실력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요. 아무튼 저 역시 감탄했습니다. 열여섯에 3성 기사와 대등한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인재. 차라리 같은 3성이라면 덜 놀랐을 텐데요."

"...과찬이십니다."

귀염상의 얼굴과는 다르게 이 소녀, 아니 여인은 이 세상의 귀족으로서 완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제게 반했어도, 안타깝지만 저는 무노 공자와 결혼을 할 생각이 없답니다."

...모든 남자가 자신에게 반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조금 문제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녀에겐 삶의 경험이 만들어 준 당연한 상식일지 몰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말은 무노에게는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왔다.

"풉...!"

통통한 귀염상의 꼬마가 지나치게 도도한 척하는 느낌에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걸 억지로 참았지만.

'젠장!'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무슨 뜻이죠? 그 웃음?"

X발.

'X 됐다.'

순간적으로 둘러댈 말을 다급히 찾느라 머리에 다시 과부하가 걸리는데.

공녀의 차가운 눈을 보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웬만한 거짓말은 그냥 간파해 버릴 것 같은 투명한 푸른 눈.

결국 무노는 직감을 믿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냥 질러 버리고 말았다.

"공녀님, 죄송하지만 제가 취향이 조금 독특한지라.... 저는 만인이 흠모하는 공녀님 같은 분보다는, 저기 카리나 경 같은 외모를 더 좋아합니다."

공녀의 뒤쪽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카리나의 얼굴이 다시금 확 굳어지는데.

"일전의 대련에서도 카리나 경의 약점을 가지고 도발했다는 말은 들었어요. 그런데 또... 아니, 아니군요. 설마 진심인가요? 이거 재밌네요. 호호호."

공녀는 무노의 눈동자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웃었고.

여태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거인 록암도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에 카리나 역시 눈이 슬쩍 커지더니 무노를 살짝 보다가 시선을 획 돌렸다.

그녀의 뒷덜미가 눈에 띄게 붉어진 것이 보이는데.

그런 그들의 반응을 살핀 무노의 표정은 살짝 굳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진짜?'

지금 자신의 발언은 아마도 이 세상의 상식을 벗어났을 터. 그런데 공녀는 그 말을 대번에 믿었고, 주변인들 역시 의심하지 않는다.

'혹시나 했는데....'

무슨 재능을 타고난 건지 아니면 자신이 모를 술수를 쓰는 건지는 몰라도, 공녀에겐 거짓을 간파하는 눈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야 저런 반응이 나올 테니까.

'역시 판타지 세상인가. 별게 다 있네.'

극히 드물긴 하지만, 이 세상에는 자신의 금속 조종 능력처럼 마법과 정령술이나 강체술에 속하지 않는 특이한 능력도 존재한다고 들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타고난다는 고유한 능력.

'아마 한계도 있을 테고.'

조금 곤란해지긴 했지만, 여자 취향 밝혀진 게 뭐 어떤가 싶은 생각에 피식 웃고 마는데.

공녀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엉뚱한 말을 꺼냈다.

"공자께서 속내를 털어놓으셨으니, 저도 제 얘기를 하나 해 드리죠."

...아니, 그럴 필요 없는데.

"저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작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주변에서 모두 그러더군요. 그럴 수 없다고. 할아버지 다음에는 아버지, 그다음에는 큰오빠. 그렇게 정해져 있다고."

아이씨....

괜히 심각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 같아서 무노의 표정이 슬슬 굳어 가는데, 공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백작이 될 수 없다면 더 높은 신분이 되고 말겠다고."

손에 들린 유리잔 너머로 굴절되어 보이는 눈동자에서, 그녀의 은밀한 야망이 비쳐 보이는 듯했다.

이내 그녀는 밤하늘에 뜬 달을 향해 잔을 높이 들어 보였다.

마치 그 잔에 저 달을 가득 채우길 바라는 것처럼.

"그러기 위해서는, 한낱 기사나 백작령 소속 귀족 따위가 제 남편이 되어서는 안 되죠. 좀 더 크고 이름 높은 가문, 이를테면...."

"왕족...."

무노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하늘을 바라보던 로안나가 귀여운 얼굴로 야심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역시 어눌하다는 소문은 틀린 모양이네요. 그래서 더 흥미가 가요. 열여섯에 그 무력, 그리고 나쁘지 않은 머리...."

음? 눈빛이 이상한데?

"솔직히 요즘 내 신변에 위협이 좀 있어서 믿을 만한 호위 기사가 더 필요하거든요."

"아가씨."

록암의 제지에도 로안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카리나 경과 이어지도록 매파가 되어 주면 나를 도와주겠어요, 무노 경?"

잔을 들어 무노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는 분명히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가씨!?"

"아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공녀는 웃어넘겼지만, 주변의 누구도 웃지 못했다.

15화. 로안나 트리안

'진심인 것 같은데....'

살짝 상기된 얼굴과 취한 듯한 웃음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고 있지만, 상대를 떠보려는 의도가 강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전현생을 통틀어서 손에 꼽을 만한 미모의 여인인 카리나가 눈앞에 있으니 혹한 마음도 없잖아 있지만.

'그럴 수야 없지.'

가문에 은혜도 갚지 못했는데 벌써 집을 떠날 수는 없었다.

"제의는 감사하지만, 양자인 저는 가문의 은혜도 갚아야 하는 몸이라서요.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정을 이해해 주십시오."

"...농담이라니까요, 무노 공자."

그렇다기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

거기다 왜인지 그 뒤에 서 있는 카리나의 눈길이 사나워진 것 같은 기분도 드는데.

'...착각이겠지.'

찜찜한 기분 속에서, 무노는 머리를 굴렸다.

'공식적으로는 제안할 수 없기에 취한 척 농담조로 꺼낸 거겠지....'

게다가 공녀가 처해 있는 상황도 얼추 짐작이 되었다.

결혼에 대한 공녀의 의지와 야망.

트리안 본가의 수많은 기사들을 두고 굳이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사정.

신변의 위협.

그것들을 합치면....

"백작가에서 공녀님의 결혼을 서두르는 겁니까? 그것도 여차하면 공녀님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라도 이행할 정도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공녀 일행 모두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록암 경과 카리나 경은 가문의 의사보다 공녀님의 의사를 존중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고... 말이죠?"

어쩐지 백작의 사랑을 받는 손녀치고 호위가 적다 싶었다.

확신 어린 그 눈빛에 로안나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내가 실언을 했나 보군요. 공자님에 대한 소문은 완전히 잘못됐네요?"

뭐, 그리 어려운 추론이라고.

어깨를 으쓱하려다가....

"대체 이런 사람이 왜 드라센의 수치로 소문이 나 있던 거죠?"

"...눼?"

쿨럭.

이어진 공녀의 감탄에 말이 꼬이고, 헛기침이 나왔다.

'수치?'

나, 그렇게 막장 소문까지 났었어?

"허으...."

"아. 처음, 들으셨나요? 이거 실례했어요. 무노 공자."

"아. 아닙니다. 나름의 사정의 있어서. 하. 하하...."

과거의 아픈 사정이 현재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찌르고 있는 와중에.

"아무튼 제 사정을 대충 파악하신 것 같으니, 발뺌하기도 그렇네요. 예, 맞아요. 제가 조금 곤란한 상황에 처했어요."

대놓고 후련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공녀를 보니, 실수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할아버님께서 수도로 가시기 전에 제가 결혼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시거든요. 무노 공자도 그 후보 중 하나였고."

...날 작정하고 엮으려는 모양새다.

"성년식 때부터 2년이나 제 어리광을 받아 주셨으니, 더 할 말도 없구요."

쓰읍.

"더구나 아버님과 큰오라버니는 아슬란 공작가의 망나니와 저를 어떻게든 엮으려 하고 계세요. 마법사가 얽힌 사건이 생겼다고 드라센에 오지도 못하게 하셨을 정도예요."

"예?"

"할아버님께 억지로 우겨서 나온 거예요. 이번 기회가 아니면 가문에서 나오지도 못할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나?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가 싶을 때, 공녀가 푸념하듯 말했다.

"어쩌면 다시 돌아갔을 때는 혼처가 결정될 때까지 나오지 못할 수도 있겠죠. 무노 공자, 그럼 지금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걸 왜 나보고....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조금도 흔들리지도 않는 공녀의 눈빛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미 생각해 놓은 바가 있으신 듯합니다만?"

"음.... 눈치도 빠르시고. 점점 탐이 나는데요, 공자?"

"물론 호위 기사로서겠죠?"

"신랑감이고 싶어요?"

"신랑감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진심으로."

다시금 유독 파랗게 빛나기 시작한 공녀의 눈동자를 보며 단호하게 농담을 끊어 내는데.

"그럼 카리나 경은 어때요?"

"제의는 거절한 걸로 아는데요."

"아까의 제의랑 상관없다면요?"

"아가씨!?"

"내 자매 같은 친구라, 좋은 혼처를 소개해 주고 싶거든요."

카리나의 고함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공녀는 빙긋 웃었다.

"...예?"

공녀의 농담에 말려드는 것을 알면서도 카리나에게 다시금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는데.

그 순간, 공녀의 푸른 눈이 다시 한번 반짝하고 빛났다.

"어머, 카리나! 무노 공자, 정말로 너한테 반해 있어!!"

...아예 고유 능력 있다고 광고를 해라.

"아니, 아직 반한 것까진...!"

"아직, 아직이래!! 어머머!"

하. X바....

진지한 말이 이어질 것 같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공녀는 호들갑을 떨고, 카리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록암은 어이없는 눈으로 무노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한숨을 쉬며 은근슬쩍 상황을 무마해 버리려던 공녀를 떠봤다.

"그럼 제 도움은 필요 없으신 거겠죠?"

그 질문이, 카리나와 억지로 손을 맞잡고 꺅꺅거리던 열여덟 살 소녀를 다시 공녀로 만들었다.

"아.... 질척거리는 남자는 별론데요, 무노 공자님."

이미 없던 일이 된 제안을 왜 굳이 다시 꺼내 드냐는 뜻.

"그래서 꺼져 드리려고 확인차 여쭤본 겁니다."

"흠...."

그 말에 로안나가 무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사실, 당신 말대로 계획이 있었어요."

"아가씨. 그건...."

여태 가만히 있던 록암이 로안나를 말려 보지만, 그녀의 말은 그대로 이어졌다.

"저는 지난 2년간 수도의 사교 파티에 여러 번 참석해 왔죠. 그곳에서 부끄러운 별명도 얻었습니다. 들어 보셨겠지만요."

'부끄럽기는, 이렇게 뿌듯한 표정으로?'

무노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로안나의 표정이 다시금 살짝 굳었지만, 이내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뭐, 그러다 보니 좀 과분한 분에게 청혼도 받았답니다."

"예!?"

그런데 왜...?

"문제는 할아버님이 그 사실을 아시고는 서둘러 저를 다른 사람과 연결하려 하신다는 거죠. 그분과의 결혼을 허락해 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이거 느낌 쎄한데.

"설마...."

"할아버님은, 아니 트리안은 왕위 계승 분쟁에 끼어들고 싶어하지 않거든요. 가문의 전통이랍시고."

"아...."

X발.

'괜히 들었다.'

공녀와의 연줄을 만들고자 혀를 나불거렸던 몇 분 전의 자신을 뒈지게 패고 싶어졌다.

역시, 지나친 욕심이 사람을 죽이는 법이다.

"아. 하. 하하하. 그렇군요. 그럼 저는 이만...."

그 과분한 분, 왕자의 이름을 듣기 전에 서둘러 발코니를 탈출하고 싶었는데.

쿵.

거인이 앞을 막아섰다.

"아가씨의 말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자."

알아. 그래서 빨리 튀고 싶은 거다.

라는 솔직한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하. 씨....'

똥 밟았다.

"...공녀님 일에 제가 도움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돌아선 무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냥 야망 좀 있는 귀족가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사람을 단단히 잘못 본 모양이다.

"저와 진지한 이야기를 해 보시려는 것 아니었나요?"

...처음엔 그랬었지.

'이렇게 바로 후회하게 될 줄 모르고 말이야. X발.'

눈앞의 금발 푸른 눈의 공녀는, 미래를 위한 연줄이 아니라 자신과 집안을 박살 낼지도 모를 악귀였다.

"...드라센은 에녹 트리안 백작님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 선을 넘는 행동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공녀님."

최대한 예를 지키면서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표해 보는데.

"그래서 사실, 드라센 방문 후에 일행에서 빠져나와서 수도로 향할 생각이에요. 그분을 뵙기 위해서죠. 그 계획을 좀 도와주시겠어요, 무노 공자?"

...통하지 않았다.

'기껏 생각해 낸 게 가출이라니.'

생각보다 더 무모한 아가씨였다.

당연히, 그 부탁을 따를 수는 없었다.

"드라센 영지에서 아가씨께서 실종되신다면, 그 책임은 저희 가문이 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무노 공자께서 개인적으로 좀 도와주셨으면 해요."

"그러니까. 그게 안...."

"아니면, 저는 곧 있을 '사냥' 기간 중에 갑자기 드라센에서 사라지는 수밖에 없답니다?"

"...된, 예?"

성년식 파티가 끝나면, 몰려든 귀족들과 그 호위 병력들의 사냥 행사가 일주일간 계속될 예정이었다.

다가올 드라센 영지의 연례 행사, 몬스터 웨이브의 규모를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한 것.

가장 뛰어난 '몬스터의 부산물'을 얻어 낸 이에게 상금까지 걸어 놨으니, 각지에서 몰려든 용병들은 이미 관청의 허가를 받고 북부 산맥 지대의 초입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 상황.

귀빈들을 이용해서 올겨울을 쉽게 나기 위한 팔머 회심의 계책 중 하나였는데.

"...그 기간 중에 사라지실 생각이었다고요? 그리고 그걸 지금 제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말 민폐를 끼치기 싫은 솔직한 마음이라고 알아 주셨으면 해요."

"제가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먼저 알린다면요?"

"그럼 공자는 사랑스러운 카리나 경을 다시는 못 보게 될...."

"아가씨!!!"

"...노, 농담이야. 진짜, 농담. 미, 미안해."

무노가 뭐라 태클을 걸기도 전에, 타오를 듯 붉어진 얼굴의 카리나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쩔쩔매는 공녀와 어이없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무노.

그러자 그를 의식하며 헛기침을 몇 번 한 로안나가 멋쩍게 웃더니.

"전 그럼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무노 공자가 저를 모욕했다고 몰고 갈 겁니다. 사람들이 누구 말을 믿을까요?"

무서운 소리를 내뱉었다.

'이런 쌍....'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 순간 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러실 생각이라면 굳이 왜 지금 저에게 말씀하신 겁니까?"

"인재를 사랑하는 것은 할아버님이나 아버지뿐만 아니라,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무노 공자님의 특별함이 제 마음에도 들었거든요. 특별한 인연으로 남겨 두고 싶어요."

"허...."

"혹시 알아요? 제가 왕비가 되면, 무노 공자님이나 드라센에 얼마나 큰 이득이 생길지?"

...이 여자, 진심이다.

"그리고 드라센의 대공자가 협력해 준다면, 전 굳이 할아버님의 충실한 기사인 라이언 드라센 남작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사라질 수도 있겠지요. 조금 더 수월하게 말이에요."

"후자가 본래의 목적이신 것 같습니다만."

"그럴 리가요. 어쩌면 먼 훗날 세븐스타의 초인이 될지도 모르는 무노 공자님과의 인연이 더 중요한 거죠."

찡긋 윙크를 하는 공녀, 로안나 트리안의 모습은 직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다가도.

"아, 그러고 보니 여기 카리나 경도 딱 열여섯 생일 직전에 각성했었답니다. 지금은 스물둘인데, 여섯 살 차이 정도는 극복 가능하시죠? 그럼 어쩌면 훗날 세븐스타 부부가 탄생할지도...."

"아가씨!!!"

"어머, 이건 농담...이 아닌데?"

메롱.

혀까지 내밀며 카리나를 놀리는 모습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밉살스러웠지만.

"로안나! 진짜, 너!!!"

"어? 딴 사람 있는 데서 반말... 악! 자, 잘못했어. 언니! 그만!"

카리나와 옥신각신하는 모양새는 또 딱 그 나이 때 소녀 같기도 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소탈하면서 야망도 있고, 행동력은 미친 수준이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이게 열여덟 살이라....'

로안나 트리안은 참 여러모로 인상적인 여자였다.

이성으로서 어떨진 몰라도, 분명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사람.

심지어 그런 여자가 이 세상 기준으로는 최고의 미녀 중 한 사람이라 하니.

어쩌면.

'역사에 남을 왕비가 될지도 모르겠네.'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 세상은 전생의 서양 중세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점 하나는 바로 여성의 사회 활동이 꽤나 강력하게 보장이 된다는 것.

성별에 따른 힘의 차이를 무시하는 이능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뭐 좋습니다. 협력하죠.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위험성을 감안해도, 잡아 볼 만한 인연인 듯했다.

"으우...?"

카리나에게 볼살을 잡혀 당겨지던 공녀가 그를 보며 눈을 반짝였고.

"다만, 확실히 보장해 주십시오. 드라센에 피해를 끼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설령 가출, 아니 잠행을 하신다 해도 공식적으로 드라센에서의 일정이 끝난 이후에 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이에요."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웃어 보이는 공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뭔가를 떠올린 무노는 한 가지 부탁을 덧붙였다.

"아. 그럼 협조하기로 한 김에.... 오늘 밤에, 제가 먼저 잠깐 손을 빌릴 수 있을까요? 기왕이면 카리나 경이 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법사 놈을 잡을 때, 드라센 외부의 인물이 목격자로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게 트리안 백작가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고.

그런데 그 말이 또 공녀의 호들갑을 불렀다.

"어머. '오늘 밤'에? 카리나 경을요? 진도가 너무 빠른...."

"아가씨!!"

"...아, 아니, 이번엔 내가 아니라, 무노 공자가...."

...백작가의 공녀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아가씨였다.

16화. 파티의 마무리

"모에노 콘넬 자작 대행이 마법사라고요?"

"예."

이왕 손을 잡기로 한 거, 무노는 로안나 공녀 앞에서 카리나 경의 도움이 필요한 이유를 이실직고했다.

"일이 틀어져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도, 놈이 마법을 쓰는 것을 다른 가문의 사람이 보았으면 합니다. 그게 트리안에 계신 분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그 말에 공녀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아셨는지는 둘째 치고, 공자는 마치 이미 마법사를 다 잡은 것처럼 얘기하시는군요?"

"아.... 그야. 저희 아버지께서도 함께하실 테니까요."

그냥 둘러댄 말이었는데.

"아, 폭식의 기사가 직접 나서신다면 그럴 만하죠. 마법사 사냥도 여러 번 하신 걸로 알고 있으니...."

뭐? 아버지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은 아는 척 넘어갔다.

그러자 공녀는 짚이는 구석이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모에노 콘넬 자작 대행이라.... 하긴 그 주인도 좀 수상한 사람이긴 했죠."

"예?"

"모에노 콘넬 자작.... 할아버님의 최측근이긴 한데, 제 '능력'을 눈치챈 후부터는 아예 제 앞에 서질 않더라고요. 뭐 많이들 그러긴 하지만, 그 사람은 유독 심했다고 해야 하나?"

아....

이젠 대놓고 능력이라고 밝히는 게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을 할 때 스치는 씁쓸한 표정이 신경 쓰였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공녀는 금세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할아버님과 '그분' 말고는 제 능력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 사람은 못 봤으니까요. 아, 맞다. 지금 한 명 더 늘었네요. 무노 공자. 아까부터 눈치채셨죠? 그런데도 별로 꺼리지도 않고."

"아 예. 뭐, 저야 그다지 숨길 만한 게 없으니까요."

사실은 많다.

전생부터 악마포식자의 능력까지.

하지만.

'그래 봤자지.'

저런 종류의 능력에도 한계라는 게 존재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피하지 않는 것뿐이다.

방금 아버지에 대해 변명할 때 공녀가 눈치채지 못한 것만 봐도, 한 가지가 벌써 추측된다.

'일부의 진실만 말해도, 거짓을 알아채지 못한다.'

거기다 분명히 다른 제약도 있을 것이다.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정해져 있다든가, 쓸수록 체력이 소모된다든가.

뭐, 이 또한 다른 계통의 고유 능력을 지닌 자신이기에 추측할 수 있는 걸지도 몰랐다.

고유 능력자는 그만큼 희귀하다고 들었으니까.

"아니에요. 확실히 대단하신 분이세요, 무노 공자는."

"별거 아니...."

"저희 아버지도 절 피하시는데요. 뭐."

"...진 않겠죠. 예. 뭐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거고. 아닐 수도 있는 거고."

내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으....

무노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괜히 눈알을 굴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을 때.

"푸훗."

공녀의 웃음을 시작으로, 일행의 얼굴에 동시에 웃음이 맺혔다.

"아하하하. 예. 뭐. 별거 아닌 사람들도 있고요. 그래서 내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는 거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새삼 마음에 드네요. 무노 공자."

"...기사로서겠죠?"

"물론이죠. 카리나 언니의 남자를 뺏을 수는 없.... 아얏! 왜 꼬집...!?"

공녀의 너스레 덕인지, 무겁기만 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벼워졌다.

그리고 자연스레 결론이 나왔다.

"좋아요. 마법사를 잡는 일이면, 그것도 트리안 내부의 기생충을 잡는 일이라면 기꺼이 나서야죠. 그렇죠, 카리나 경?"

"물론입니다. 아가씨."

"그 김에 카리나 경의 영광스러운 첫 데이트가.... 농담! 농담! 꼬집지 마! 살 빠져!"

협상(?)은 너무나도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발코니에서 연달아 퍼진 웃음소리가 너무 컸는지.

그들이 다시 연회장 내부로 들어섰을 때는, 다른 모든 이의 시선을 동시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웃지 마세요.'

크르르.

무노는 왜인지 자신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해 힘껏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고, 일부러 공녀와 떨어져서 걷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의사는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 않았다.

부모님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저기, 혹시 로안나 님과 어떤...."

그가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다가온 에쉬남 남작가의 차녀가 말끝을 흐리며 그리 묻는 순간, 무노는 좀 더 입장을 정확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 아닙니다. 로안나 공녀님은 저에게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냥 다른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에 화색이 돈 아가씨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럼, 저와 산책 좀 하시겠어요...?"

"예? 아,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너무 오래 나가 있어서, 지금은 자리를 지켜야 할 것 같군요."

나름 예의를 지켜 정중히 거절을 한 것 같은데.

아가씨의 반응이 이상했다.

울먹울먹.

어...?

"어떻게, 이런..., 흐으윽."

그 아가씨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서 파티장을 뛰어나가 버렸다.

"어...?"

당황하던 순간, 주변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저런 쯧쯧...."

"...성격이 좋지 않은가 봅니다."

"저렇게 모욕을 주다니."

모욕?

'내가?'

분명히 내가 배운 파티 예절 중에 이런 건 없었는데?

당혹스러운 마음에 돌아보자, 이마를 짚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내가 뭘?'

산책 안 간 게 모욕이야? 주인공은 자리 지키는 게 맞지 않아?

그때부터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하나둘씩 다가온 아가씨들이 턱도 없는 미사여구를 늘어놓기 시작할 때쯤에는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무노 공자,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욱 헌앙하고 든든하세요."

"어쩜, 당신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아요."

"괜찮으시다면 이따 밤에...."

이게 무려 열여섯에서 열여덟 살짜리 소녀들이 한 말이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이.

"공자님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건배."

...라고 할 때는 온몸에 닭살이 우수수 돋았다.

'그냥 확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고 싶다!'

다가올 때 풍기는 냄새는 둘째 치고, 그 낯간지러운 멘트 자체에 절로 살이 떨려 왔으니 확실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좀 겉늙어서요."

"피곤하신 것 같군요. 쉬세요."

"안 괜찮습니다. 푹 주무세요."

"술을 끊으세요."

이렇게 답할 때마다 일그러지는 아가씨들의 표정에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거절은 확실히 해야지.'

어차피 이곳에 온 아가씨들도 저마다 가문의 차녀나 삼녀, 혹은 양녀들일 터.

현재의 즉시 전력이자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이 될 무노 드라센이라는 재원을 자기 가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일 뿐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재능이 남달라 보인다고 해도, 언젠가 드라센 가문을 떠나야 할 양자의 미래를 섣불리 보장할 수는 없을 테니.

진짜 아끼는 자녀들은 이미 다 결혼을 했거나, 다른 귀족 집안에 줄을 댈 패로써 준비 중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다시 씁쓸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여긴 그런 세상이지.'

스스로 노력해서 초인이 될 수 있다는 것 빼고는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

일상에서 불편함을 겪는 건 기본이고,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도 너무 많다.

'나는 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났을까?'

나를 이곳에 오게 한 신, 혹은 악마는 내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기어이 근원적인 의문까지 떠올리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때.

"잘하고 있어요."

"...??"

"카리나 경이 좋아하더군요.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요."

갑자기 곁에 다가온 로안나 공녀가 엉뚱한 말을 남기며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목덜미까지 붉어진 카리나가 그녀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그 뒤를 따르는 것이 뒤늦게 눈에 들어오는데.

"하아...."

깊은 한숨 소리가 뒤이어 귀를 때렸다.

아버지였다.

"이놈아, 정말 마음에 드는 처자가 없느냐?"

"예. 다들 냄새가 고약하더군요. 한 명만 빼고...."

"한 명? 누구?"

아버지가 눈을 반짝이는 순간, 무노는 아차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방금 지나간 카리나를 떠올린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녀가 지나칠 때 느껴진 포근한 향이 다시 생각났다.

기사니까 독한 향수를 뿌리지 않는 것은 그렇다 쳐도, 특이하게도 이 세상 기사 특유의 악취도 나지 않았다.

괜히 걸어가는 카리나를 향해 다시금 시선을 돌리는데.

그 모습을 본 아버지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공녀냐?"

"아, 아니에요. 그러다 큰일 납니다, 아버지!"

"큰일? 왜?"

아버지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서야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아. 그게.... 저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무튼 공녀는 아닙니다."

"호오. 그럼 이 녀석, 설마 저 여기사더냐?"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는데, 그게 또 아버지에게 빌미를 주고 말았다.

"호오. 이 녀석...!"

다만 이어진 반응은 예상과는 꽤 달랐다.

"누가 내 아들 아니랄까 봐, 취향이...!"

...뭐요?

왜인지 흐뭇해하는 듯한 아버지를 보며 어리둥절하는데.

"여보, 뭐래요? 마음에 드는 아가씨 있데요?"

뒤늦게 다가온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이 녀석이 당신 닮은 아가씨를 눈여겨본 것 같아요. 허허. 확실히 당신이 잘 챙겨 준 덕이라 생각하니 왠지 뿌듯해서...."

"그래요?!"

이게 얘기가 왜 이렇게....

"아, 아닙니다! 절대!"

"...내가 잘 못 해 줬다는 거니, 아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공녀 앞에서도 안 그랬는데, 지금은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가 당황하면 당황할수록 부모님은 흐뭇해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아가씨 이름은 뭐니? 그래도 아이 낳으려면 나보다는 살집이 있어야 하는데."

"기사니까 체력은 충분할 것 같소이다, 부인."

"아버지!"

"기사라고요?"

"호오. 이 녀석 반응을 보니 확실하군. 질풍의 기사라는 이명도 있던데, 카트리나였던가?"

"카리나...입니다만, 절대 그게 아니고요!"

"오. 칭호도 있을 정도면 유망한 기사인가 보네요. 그럼 뭐, 저도 불만은 없어요."

"어머니!?"

"아. 그런데 여기사라면 백작님께 허락을 받아야겠는데? 뭐, 무노가 트리안 기사단에 들어가면 간단한 문제일 수 있지만...."

"아니. 그게 아니라고요!"

자유롭게 세상을 보고 싶었는데, 이러다가 졸지에 결혼을 하게 생겼다.

물론 카리나가 마음에 들지 않냐 하면 그럴 리가 있겠냐마는....

'아니, 절대! 난 정략결혼이 아니라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보고 싶다...고.'

전생 24년 현생 16년, 도합 40년 모쏠 인생의 영혼이 솔직한 갈증을 토로하는 순간.

'헐....'

스스로가 멍해지고 말았다.

누가 속마음을 읽은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굉장히 부끄러웠다.

'말로 안 꺼낸 게 얼마나 다행이냐....'

그렇게 가슴을 쓸어내리려는 순간.

멀리서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로안나 트리안의 푸른 눈과 딱 시선이 마주쳤다.

...에이, 설마.

입 밖으로 꺼낸 것도 아닌데.

'아니겠지?'

아니어야 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괜히 찔려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으.

'아. X나, 쪽팔려.... X발.'

나란 놈은 정말....

"하...."

한숨과 함께 현타가 찾아올 때,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흠. 흠. 주변에서 보는구나. 일단 우리 아들이 짝을 찾았으니, 오늘 파티는 이쯤에서 끝내자꾸나."

아버지가 팔머를 향해 신호를 보내자, 그에 연회장에 울려 퍼지던 음악들이 서서히 멈춰 가기 시작했다.

"역시 아들이 무례했다는 것은 아는 건가?"

"뭐, 남작 입장에서도 답답했겠지요. 장가를 보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뭐, 오늘은 이쯤 합시다. 내일부터 이어질 사냥제를 위해서라도. 그때 다시 연이 생길지도 모르죠."

"그럽시다."

그리고 귀족들이 호스트의 뜻을 헤아리며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할 때.

라이언은 그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아 주고 난 뒤에야 비로소 다시 아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자세히 얘기해 볼까? 그 아가씨에 대해."

"그래. 너무 다행이다, 무노."

무노는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듯한 부모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정말 그게, 그게 아닌데.... 죄송하지만 저는 정말로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정말로."

그 고백에 멈칫하는 부모님을 보며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어찌 모를까.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의 은혜를 일부라도 갚은 다음에, 자유롭게 세상을 둘러보고 싶습니다. 그전에는 결혼도, 어느 곳에 의탁할 생각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솔직한 마음을 재차 토로해 보는데.

한숨을 내쉬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새삼 가슴이 살짝 쓰려 왔다.

"아. 물론 리안이 성년식 치를 때까지는 어떻게든 은혜를...."

그런데 그 말에 부모님이 정색하며 답했다.

"은혜를 갚는다니, 그런 생각은 할 필요 없다. 아들."

"그럼. 무노처럼 순한 아들이 있어 줘서 우리가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거라. 이미 말했듯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럼. 우리 아들, 언제든 응원할 거야. 그래도 결혼할 땐 우리 불러야 한다? 알겠지? 아니, 가능하면 결혼식은 집으로 돌아와서 해 주면 더 좋고."

따스하게 어깨를 감싸 주시는 두 분에게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게 되자, 갑자기 울컥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말로 할 수 없는 따뜻한 그 무언가를 느끼며, 아까 전 떠올랐던 이 생에 대한 의문이 사라져 갔다.

'그래, 이 세상에 온 이유가 뭐가 중요할까.'

전생에도 없었던 이런 가족이 생겼는데.

"감사...합니다."

울컥한 마음을 억누르며 억지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순간.

[달이 뜨면, 내 방으로 찾아와라.]

사이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머릿속으로 음습한 기운이 스며들어왔다.

이 새끼가....

17화. 마법사 사냥

[달이 뜨면, 내 방으로 찾아와라.]

흘깃 돌아보는 순간, 푸근한 인상의 중년인이 기묘한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토이네 란델....'

가족들과의 훈훈한 한때를 방해한 마법사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 아구창을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무노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표정 관리를 하며 멍한 눈빛으로 슬쩍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놈이 건 마법의 마기는 이미 삼켜 버린 지 오래지만.

- 현혹류의 마법이라면, 마법이 심어지는 순간이나 발현하는 순간에 이성이 흐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걸로 알고 있어요

공녀에게 들은 말을 떠올리며 연기를 한 것이다.

그것을 본 놈이 웃으며 돌아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무노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굳은 표정의 아버지와 걱정스러운 표정의 어머니를 마주했다.

"갑자기 왜 그러니, 아들? 혹시 우리 말이 기분 나빴니? 굳이 여기 돌아오고 싶지 않다면...."

"아, 아니! 절대 아니에요! 당연히, 당연히 돌아와야죠. 드라센이 제 고향인데...!"

그가 손사래를 치며 서운해하는 어머니를 간신히 달래는 동안, 슬며시 고개를 기울인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몰래 물었다.

"그놈이냐?"

"예."

"뭐라더냐?"

"...달이 뜨면 찾아오랍니다."

놈에게 들은 말을 다시 읊는 순간 부자의 표정에 동시에 싸늘한 기색이 스쳤다.

"트리안에서 인력 지원을 해 주기로 했습니다."

"잘됐구나. 나도 적당한 '증인' 겸 전투원을 준비해 놨다."

"그럼 바로...."

"그러자꾸나. 곧 달이 뜰 테니."

파티를 마무리한 부자는 그렇게 '마법사 사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드라센 영지의 동쪽에 떠오른 달이 어두운 하늘에 빛무리를 뿌리기 시작할 때.

두 부자는 각자의 조력자를 데리고 귀빈관 근처에서 다시 만났다.

"드라센 남작님을 뵙습니다. 트리안의...."

"아. 알고 있네, 카리나 경. 내가 좀 늙긴 했어도 그새 까먹을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진 않아."

카리나의 인사에 라이언 드라센이 미소를 지으며 농으로 답했다.

거기다.

"그런 복장도 잘 어울리는군. 내 아들하고도."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자.

파티장에서도 입지 않았던 드레스 차림의 카리나가 어리둥절해 반문했다.

"네?"

"아, 아닐세. 무노가 제대로 선택한 것 같아서 말일세."

그 의미심장한 표현에 그녀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지만.

차마 로안나 공녀에게처럼 쏘아붙이지는 못했다.

더욱이.

"아, 이 작전을 위해서 경을 선택했단 말이었네. 오해하지 마시게."

능글맞은 중년인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바로 완벽하게 수습해 버렸으니.

그런 라이언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는 것은 오직 무노뿐이었다.

"요란스럽게 준비하지 말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그래서 단출하게 왔잖느냐."

하....

'그러기에는 너무 중무장 아닙니까.'

토이네 준남작이 마법으로 수작을 부리는 광경을 조심스레 현장 적발해야 하는데, 영주라는 사람이 오밤중에 완전무장 상태로 대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중갑을 챙겨 입고 창까지 든 기사가 있었다.

"저분은...?"

"에쉬먼 남작가의 수위 기사, 그레먼이다. 한때 내 전우였지. 믿을 만한 친구다."

"마법사 사냥은 오랜만이군. 나를 불러줘서 영광이네, 공자."

...내가 부른 게 아닌데.

무노가 뚱해 있는 동안, 그레먼은 카리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영락없는 레이디군요, 카리나 경. 그대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그 말에 카리나가 살짝 인상을 구기며 로안나에게 빌린, 체형에 맞지 않는 드레스의 매무새를 정돈했다.

"오늘 이후에는 잊어 주세요, 그레먼 경."

카리나와도 안면이 있는지 투구의 바이저를 올리며 정중히 인사하는 중년의 기사를 보며, 무노는 가까스로 한숨을 참아 냈다.

중무장한 두 중년 기사를 이제 와서 돌려 보낼 수도 없고.

"...시종 한 사람의 눈에도 띄지 말아야겠군요."

"응? 괜찮다."

"예?"

"이미 내일을 대비해 심야 수련한다고 말해 놨다."

"...."

영주가 파티날 밤에 심야 수련을, 그것도 귀빈관 근처에서?

'아이고 아버지....'

머리가 아파 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뭐. 영주는 말 그대로 이 땅의 주인인데, 수련이야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는 거지.'

쓰읍.

무노는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뭐래도 지금 드라센 성에 있는 최강의 기사는 바로 아버지 라이언 드라센이니.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자면 가장 든든한 원군인 건 확실했으니까.

"...왜 그렇게 보느냐?"

"아니, 아닙니다. 가시죠."

필요한 것은 토이네 준남작이 마법사라는 물증. 아니면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라도 남겨야 한다.

트리안과 에쉬먼의 수위 기사들이라면 증인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머릿속으로 작전을 정리한 무노는 일부러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귀빈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공. 자. 님. 왜 갑자기, 귀빈관으로, 가세요?"

굉장히 어색한 말투로 연기를 하는 카리나가 그런 그의 팔짱을 끼며 따라붙었다.

'하....'

답답했지만, 팔짱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 무노는 차마 따지고 들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해야 할 역할은 분명히 정해져 있었으니.

그렇게 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서로의 귓가에 속삭이며 밀담을 주고받았는데.

"호위 병력은 확실히...."

"맡겨 두세요."

그 내용은, 전혀 연인답지 않았다.

귀빈관에서 토이네 준남작에게 배정된 방 앞에는 두 명의 기사가 서 있었다.

드라센의 기사가 아닌, 콘넬 자작가의 기사들.

'병사도 아니고 기사가 둘이나 불침번을...? 준남작 하나를 다른 준남작 둘이 밤새 지켜 준다라? 흐.'

분명히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그들을 슥 훑어봐도 악마포식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적어도 기사들이 마법에 걸려 있지는 않다는 뜻.

경계를 서던 기사들은, 다가오는 무노와 카리나를 보고는 슬쩍 몸을 움직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자님? 레이디?"

무노를 바라볼 때는 아무렇지 않던 기사들의 표정이 카리나를 볼 때는 살짝 찌푸려졌다.

그에 무노가 먼저 답했다.

"토이네 준남작님께,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일부러 멍한 눈으로 살짝 더듬어 가며 말을 이었는데.

그런 그의 곁에서 카리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거들었다.

"아이, 공자님.... 딸꾹. 갑자기 왜 여기로 오냐니까요?"

...오.

걱정과는 다르게, 막상 실전에서는 술 취한 듯한 말투가 굉장히 자연스럽게 나왔다.

부끄러운지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정말 취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데 일조하는 듯했다.

'호?'

무노가 속으로 감탄할 때.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두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를 향해 말했다.

"토이네 님께서 공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레이디는 저희가 따로 모시겠습니다."

그 말에 무노의 눈이 살짝 빛났다.

'역시....'

이놈들은 마법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토이네와 한패인 건 분명하다.

"그럽시다...."

"공자님? 딸꾹, 왜?"

무노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기사 한 명이 웃으며 카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모시겠습니다, 레이디."

"에이.... 이게 아닌데...."

그에 카리나가 어리둥절하면서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자 그 기사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고, 다른 한 기사는 자신이 지키고 있던 방의 문을 두드렸다.

"토이네 님, 무노 공자가 왔습니다."

똑똑.

- 들어오라고 해.

방 안에서 답이 들려올 때.

"아윽.... 이거, 놔요. 공자님?"

카리나는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기사의 팔을 뿌리치며 진상을 부렸다.

"뭐 하는 거야?"

"아니, 이 여자 힘이...."

다른 기사가 동료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볼 때.

방 안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이냐?

"아닙니다. 무노 공자가 일행을 데려와서...."

- 일행?

"여자입니다."

- 푸흐흐흐.... 주제에 할 건 다 하는군. 조용히 돌려보내.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둘이서 대화하겠다.

"예, 토이네 님."

노골적인 비웃음이 들려오는데도, 기사도 무노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이내 두 명의 기사는 카리나를 좌우로 부축하며 복도 저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하필 재미도 볼 수 없게, 이런 비쩍 마른 여자하고...."

"저놈도 취향 참...."

기사들은 쓸데없는 말을 보탬으로써, 취한 척하고 있던 카리나의 목덜미까지 붉어지게 만들었다.

오래 본 사이는 아니지만, 그녀의 성미는 대충 짐작이 가는 상황.

'...너흰 죽었다.'

무노는 불쌍한 기사들의 미래를 상상해 보고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왔군."

오밤중에도 정장을 입고 있는 펑퍼짐한 체격의 중년인이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들어와라."

"...예."

방 안으로 들어서자, 명색이 귀빈관임에도 고작 10평 남짓한 공간에 별다른 사치품이나 장식 없이 실용적인 가구들만 놓여 있는 게 보였다.

그나마 같은 층의 반대쪽 끝에는 다른 귀족의 방이 있었으니, 영지에 기거하는 손님들에게 각각 별채를 내어 준다는 건 드라센에서는 별세계의 이야기였다.

"너 때문에 내가 이 촌구석까지 고생고생해 가며 와야 했다. 뭐, 네가 그걸 알 리는 없겠지만."

쿵.

우우웅.

토이네가 한 손으로 짚고 있던 신사용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는 순간, 거기서부터 검은 기운이 일어나 무노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 크르르르.

콰드드득.

물론 악마포식자는 그 기운을 그대로 집어삼켰지만.

기운이 그에게 스며든 것을 확인한 토이네의 입가에는 다시 기묘한 미소가 걸렸다.

"좋군. 그래, 이렇게 보니 확실히 그놈이 맞아. 외모가 좀 변하긴 했지만."

뭐?

토이네의 시선이 자신의 아래위를 훑는 것을 보며 의문이 생겼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제부터 다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보지. 일단 가장 궁금한 건 이거야."

놈의 히죽이는 미소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

'그래, 털어놔라. 네놈들이 대체 뭐 하는 놈들인지.'

무노 역시 속으로 비웃음을 지을 때.

"13번 실험체, 제물로 바쳐졌던 네가, 왜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뭐?!

이어진 말을 듣는 순간, 무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미간이 좁혀지는 토이네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다.

"으, 으음. 머, 머리가...."

황급히 두통이 일어난 척 연기를 해 보는데.

실제로도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리며 아파오고 있었다.

마치 토이네의 말이 잊고 있던 기억 속 무언가를 자극한 것처럼.

그리고 그때.

"흐음.... 그래, 마법이 잘 안 통했나?"

쿵.

좀 전과는 달리 가늘게 뜬 눈을 빛낸 토이네가 다시금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기며 검은 기운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드드드득.

한순간에 나무 바닥에서 자라난 검은 가시나무가 무노의 전신을 휘어 감았다.

"윽!?"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무노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토이네는 확신한 듯 이를 갈았다.

"역시, 정신 방벽! 빌어먹을! 감히 실험체 주제에 나를 기만하려 해!?"

우당탕탕.

촤르르륵.

당당한 말과는 다르게, 토이네는 황급히 창가로 뛰어가더니 커튼을 열어젖혀 건물 밖의 동정을 살폈고.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잠시 뭐라 꿍얼거리다가 지팡이로 다시금 '쿵' 하고 바닥을 찍으면서 검은 기운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눈을 감고 그 기운에 집중하는 토이네.

하지만 그러는 바람에, 그는 보지 못했다.

자신이 퍼트린 그 모든 기운이 무노에게 그대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마법을 온전히 전개했다고 믿는 마법사에게 큰 착오를 만들어 냈다.

"...호오? 혼자 왔다고? 감히?"

잔뜩 긴장하던 토이네는, 아무런 반응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이내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무노를 돌아보았다.

"흐흐흐흐. 고작 정신 방벽을 믿고? 어처구니가 없구나. 실험체 주제에 날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 설마 내가 지금 이 얼굴이라 그런 건가?"

푸흐흐흐.

실소를 흘린 토이네의 얼굴이 파지직 하고 홀로그램처럼 일그러지더니, 이내 주름 가득한 백발의 노인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 얼굴은 알아보겠지, 13번? 아니면 다시 기억이 나게 해 줄까?"

화르륵.

이가 몇 개 남지 않은 흐물거리는 입매로 음흉하게 웃어 보인 노인은, 두 손으로 사람 머리만 한 불덩어리를 만들어 내 허공에 띄웠다.

그 원인조차 알 수 없이 허공에 갑자기 튀어나온 불덩어리.

세상의 이치를 일그러트리는 악마의 힘, 마법(魔法).

그것이 노인의 손짓에 따라 무노의 얼굴을 향해 점점 다가가는데.

"...그래, 기억이 난다."

"오호?"

일그러진 얼굴의 무노가 내뱉은 대답에 노인의 눈이 빛나는 순간.

파직.

무노는 검은 가시나무들을 그대로 '흡수'해 버린 뒤, 노인에게 손을 뻗었다.

촤르륵.

18화. 과거의 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