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과거의 잔재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장면이 무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자, 즐거운 실험 시간이다, 꼬마. 크크크.
정체 모를 붉은 시약과 함께 톱과 망치, 못 등을 들고 들어오는 남자.
- 대체 어떻게 버티는 거야!? 왜 세뇌가 안 돼! 빌어먹을 자식!!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퍽, 퍽퍽.
수도 없이 계속되는 폭력과 실험을 빙자한 가혹 행위들.
그 방에는 언제나 피가 흘러넘쳤었다.
바로 자신의 피가.
- 네가 감히 탈출을 시도해!!? 쇠붙이 조종하는 능력 따위로...!
트라우마로 남은 그 끔찍한 기억 속에서 앞장서서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잔인한 실험을 자행하던, 그곳의 하수인.
지금 눈앞의 노인은 그놈보다 훨씬 늙어 보이지만, 분명히 같은 사람이었다.
그놈의 이름은 토이네가 아니라....
"애머스!"
촤르륵.
펑!
무노의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오른손에서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터트리며 뻗어 나간 검은 쇠사슬이, 놈의 머리를 향해 벼락처럼 쏘아졌다.
"헛!?"
놀란 토이네, 아니 애머스의 눈동자가 커지는 순간.
그 눈동자를 마주 보던 무노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이성이 돌아왔다.
'지금 죽이면 안 돼!'
놈에겐 물어봐야 할 것이 많았다.
그 생각에, 뻗어 나가던 쇠사슬에서 힘이 조금 빠졌고.
덕분에 놈에겐 반사적으로 치켜든 지팡이로 투명한 방어벽을 만들어 낼 틈이 생겼다.
쾅!
"흐, 흐으!? 네놈이 감히...!"
그사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친 애머스는 놀란 표정을 숨기려는 듯 호통을 쳤지만.
콰드득.
이내 무언가가 찢겨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방어벽이 쇠사슬에 흡수되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다시 지팡이를 움직였다.
쿵.
파지지지직.
놈이 지팡이로 바닥을 찍자, 검은 가시덤불 형태의 마기가 솟구쳐 오르더니 방 안을 가득 채우며 무노를 향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용없어."
촤르르륵.
무노가 살기에 찬 웃음을 지어 보인 순간, 그의 반대쪽 손과 양쪽 발목에서도 쇠사슬이 튀어나와 그 검은 가시덤불 형태의 기운을 향해 쏘아졌다.
콰드드드득.
그의 자신감을 반영하듯, 순식간에 검은 가시덤불을 분쇄하고 흡수해 버리는 쇠사슬들.
콰드드드득.
콰콰콰.
그 쇠사슬의 범위 밖의 가시덤불만이 애꿎은 방문을 뚫고 밖으로 쏟아져 나갈 뿐이었다.
"어, 어떻게...!?"
경악하는 애머스의 표정을 보며 무노는 그대로 놈에게 뛰어들었다.
"...말도 안 돼!"
쿵.
콰콰콰콰콰콰콰.
그러자 다시금 바닥을 두드린 놈의 지팡이에서 불길의 파도가 일어나 전면을 뒤덮으며 무노에게 쏟아졌다.
콰아아아아앙!
한순간에 벽면을 터트리고 건물 밖으로까지 쏟아지는 화염의 파도.
그러나.
"흥!"
파아아아아앙.
검은 쇠사슬을 휘감은 채 그 불길을 뚫고 튀어나온 무노의 전신에는 작은 화상조차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검은 눈동자만큼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으니.
기겁을 한 애머스가 또다시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어림없다!!"
쿵.
번쩍.
콰아아아아아앙!
일순간 지팡이에서 솟구친 번개가 그대로 무노의 몸을 덮쳐 무너진 벽면 너머까지 샛노란 빛을 뿌렸다.
우르르르릉.
그러나 역시.
무노는 그 벼락을 뚫고, 그의 코앞에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파지지지직.
벼락을 완전히 무시하진 못했는지, 뻗친 머리와 이 사이로 전격을 뿜어내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진심으로...!"
허옇게 이를 드러낸 얼굴에 피어나는 살기는 애머스를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반갑다!"
촤르르륵.
사지의 쇠사슬이 놈의 몸을 봉쇄함과 동시에, 그의 주먹이 애머스의 얼굴을 그대로 후려쳤다.
뻐어억!
"컥!"
출렁.
콰드드득.
"끄으으윽!"
얼굴이 반쯤 뭉개지며 나가떨어져야 할 놈의 몸을, 쇠사슬이 구속해 다시 무노의 코앞으로 당겨 왔다.
"자. 나야말로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애머스."
- 죽여! 죽여!
또다시 머릿속을 울리는 악마포식자의 살의에 찬 충동과, 동시에 불현듯 떠오르기 시작한 먼 기억 속의 트라우마.
그것들을 애써 억누르며 말을 내뱉는 무노의 목소리에는 섬뜩한 살기가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어떻게 네놈들이 살아 있지? 분명히 그때 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흐, 흐으, 어떻, 어떻게...."
아직도 현실감을 찾지 못한 듯, 애머스의 눈동자는 갈피를 못 잡고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무노는 쇠사슬에 묶인 놈의 몸을 바닥으로 처박았다.
쾅!
"컥!?"
연달아.
쾅.
"켁!?"
몇 번이나.
꽈앙.
"끄으으...."
쿨럭.
그 결과, 놈은 피거품을 물기는 했지만 눈동자는 제자리를 찾았다.
"자. 이제 대답할 기분이 됐나?"
"너, 어떻게, 어떻게 네가...."
다만,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쾅!
"질문은 내가 해."
"끄으으. 쿨럭."
다시 한번 바닥에 처박힌 뒤 피를 토해 낸 애머스의 공포에 질린 얼굴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왔다.
잊고 있던 기억 속, 학대받던 어린아이였던 무노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광경.
하지만.
"어떻게 네놈이 살아 있는 거냐? 네놈들 전부 끝장난 게 아니었냐?"
"...푸흐흐."
바라던 대답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대답해!"
쾅!
"...꺼흑."
쿨럭.
다시금 쇠사슬로 굉음을 내며 바닥을 후려쳐 보지만, 애머스의 얼굴에는 체념한 듯한 표정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무노!"
"무노 공자!"
부서진 벽 너머로 일행이 뛰어 들어왔다.
'이런....'
무노의 시선이 그들을 향하는 순간.
"흐.... 흐흐."
얼굴에 체념의 빛이 짙어지던 애머스가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동시에 솟구치는 마기.
"전부, 죽어...!"
획 돌아간 눈으로 스산한 말을 내뱉은 애머스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콰드드드득.
- 죽여!
우드드득.
그러자 악마포식자의 외침이 무노의 머릿속을 울렸고, 본능적으로 움직인 쇠사슬이 놈의 몸을 압박했다.
푸시시시식.
치솟던 마기가 사슬에 흡수되자 부풀어 오르던 애머스의 몸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히고, 비릿한 웃음을 짓던 애머스의 얼굴에는 다시 절망이 내려앉았다.
"어, 어떻게...?"
"또 그 소리냐? 흥. 과연 언제까지 입을 다물지 보자."
콰드득.
이번엔 놈의 몸을 아예 압착해 버릴 생각으로 쇠사슬에 힘을 주려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무노, 어떻게 된 거냐!?"
동시에 쏟아지는 그레먼과 카리나의 눈길.
아버지만 있다면 모를까, 그 두 사람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시다시피, 마법사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래. 그건 보면 안다. 그러니 이제 놈을 내려놓거라."
"아버지?"
"충분하다, 무노."
그 말에 무노는 그제야 아버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엉망으로 뻗친 머리, 전신에 솟구치는 살기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
마법을 흡수하고 마기를 빨아들인 탓에 기력이 넘쳐서 생긴 변화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자명했다.
거기다 마법사를 속박하고 있는 사지의 쇠사슬까지 드러내고 있으니, 자못 충격적인 광경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애머스를 놓고 싶진 않았다.
"아버지. 이놈, 10년 전 그날에 살아남은 놈입니다."
"뭐!?"
"형님. 설마 저 말이...."
"무슨 말씀이시죠? 무노 공자님, 이 모습은 또 뭐고요?"
그 말에 그레먼과 카리나가 격한 반응을 보이는데.
"알겠다. 내가 처리하마. 그러니 넘기거라. "
아버지는 언제 놀랐냐는 듯, 다시 침착한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무노의 팔을 붙잡았다.
"너, 지금 너무 흥분했다. 이래서는 될 것도 안 돼. 아티팩트의 힘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정신 차려!"
아티팩트?
무슨 헛....
'아....'
아버지가 지금 자신의 모습을 설명할 핑곗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느낀 무노는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고.
거기다.
욱씬.
아버지가 움켜쥔 팔뚝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자, 살갗 아래로 검은 핏줄이 드러나는 게 보였다.
그제야 머릿속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마기를 흡수하면서 생긴 변화가 생각보다 더 눈에 띄는 것 같았다.
자연스레 그레먼과 카리나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고, 그들의 눈에 어린 의혹을 보면서 자연스레 쇠사슬에 힘이 빠져 갔다.
그런데.
"흐. 누, 누구 마음대로...."
"??"
잠시간 힘이 빠져 있던 틈에 애머스의 얼굴에 검은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놈의 입가로 흘러나오던 핏줄기도 어느새 검게 물들어 있는데.
"독!?"
"이런 씨...!"
황급히 쇠사슬을 풀어 보지만, 털썩 바닥에 떨어진 애머스는 이미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느, 늦었다. 흐...."
쿨럭.
흘러나오는 검은 피.
"살려야 해요! 아버지! 사제를.... 아, 여긴 그런 게 없지? 젠장, 이 망할 시골 동네!"
무노가 자신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지르는데.
죽어 가는 애머스는 오히려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괴, 괴물 새끼. 마법을 먹...."
이런...!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짐작한 순간, 의지에 반응한 쇠사슬이 죽어 가는 놈을 거세게 후려쳤다.
뻐어억.
쿵.
털썩.
반대편 벽에 부딪쳐서 나뒹구는 애머스를 본 일행이 일순간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좀 전에는 살리라고 하지 않았나...?"
"하.... 그게, 그.... 놈이 다시 마법을 쓰려 해서...."
어이없는 표정의 그레먼의 지적에 뜨끔한 무노가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는 순간.
쿨럭. 쿨럭.
"너, 넌, 어떻게든, 조직이 회...."
"지랄!"
쾅!
놈이 더 떠들려는 기색을 보이자마자, 쇠사슬이 그대로 놈의 머리를 부숴 버렸다.
오랜 악연에게 제대로 복수하지 못한 것은 허망했지만, 멋대로 정보를 떠들려고 하는 놈의 입을 막는 게 더 급했다.
마법사 사냥의 증인으로서 초빙된 일행이, 오히려 복수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죽어 가는 놈이, 말도 많다. 쌍....'
식겁한 마음을 달래며 돌아서는 순간, 일행이 전부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형님, 아들이 좀 난폭한 거 아닙...."
"공자...?"
크흠.
"마법사가 죽기로 작정하고 독을 먹었으면, 사로잡아 봤자 의미 없...다고 들어서요. 일부러 헛소리를 불어서 정보를 교란할지도 모르고요. 하, 하하."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는 무노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를 말을 되는대로 주워섬겨 봤는데.
"...그건 그렇지."
다행스럽게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레먼과 카리나는 여전히 어이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 영지의 장자이자 마법사를 제압한 장본인인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데, 태클은 걸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무노는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아, 카리나 경. 그 기사 놈들은 잘 제압해 두셨겠죠?"
"아...."
이 방을 지키고 있던 두 기사.
그놈들은 자신이 마법을 먹는 광경을 보진 못했지만, 분명히 애머스 아니, 토이네의 속셈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으니까.
'증인은 충분하다.'
그렇게 웃으며 물었는데.
"살아는 있습니다만...."
"예?"
살아는...?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피하는 카리나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반문하고 말았다.
"저, 그게.... 놈들이 기사의 명예도 모르고, 모욕적인 말을 계속하는 바람에 징계 차원에서...."
"죽였...습니까?"
"아니, 살아는 있어요! 살아는...."
그 말은 어쩐지 죽였다는 말보다 더 살벌하게 들렸다.
'뭘 어떻게 한 건데!'
더 따지고 들고 싶었지만, 붉어진 얼굴로 '더 캐물으면 재미없어요!'라는 눈빛을 쏘아 내는 카리나를 보니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그럼...."
"그, 살아 있는 기사들 심문은 맡겨 두거라."
"직접 하시게요?"
"그럴 리가. 난 그런 일은 영 성미에 안 맞는다. 그냥 군터 녀석에게 맡기면 돼."
"예?"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군터 경은 사실상 드라센 기사들의 수장이자 3성에 이른 기사지만, 그 실력과는 별개로 항상 허허 웃고 다니는 사람 좋은 아저씨였다.
그렇다 보니 무노는 그 말뜻을 멋대로 추론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 군터 경이 망가진 사람 치료도 할 줄 아셨습니까?"
"무슨 소리냐?"
"예?"
부자는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라이언이 무언가 깨달은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군터라면, 숨만 붙어 있으면 갓난아기 시절 기억까지 끄집어낼 수 있다."
"예?"
"녀석은 내가 아는 한 최고의 고문 기술자니까."
...무슨 기술자요?
'그 사람 좋은 아저씨가요?'
머릿속 군터 경의 이미지와 아버지의 말이 충돌하며 다시 멍해지는데.
"형님, 군터 경 요즘에도 직접 고문합니까? 웃으면서요?"
"요즘이야 안 하지. 그럴 일이 통 없으니. 하지만...."
그레먼 경과 아버지가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자연스레 상상하고 말았다.
그 허허 웃고 다니는 콧수염 아저씨가 그 표정 그대로 고문을 하는 광경을....
'하....'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새삼 사람은 겉만 보고 알 수 없다는 생각을 되새기는 순간.
다시 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그리고 아들."
"예?"
"시골 동네라서 미안하구나. 내가 어떻게든 영지를 키워서 반드시 신전이 들어서게 해 보마."
헉....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다. 신전도 사제도 없는 시골 영지가 잘못한 거지, 뭐. 올바른 지적이었는데 어쩌겠느냐...."
...삐졌다.
제대로 삐졌다.
무노에겐 난장판이 된 귀빈실보다, 아버지의 저 뒤끝을 수습하는 것이 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화. 원수의 꼬리
"자, 그레먼 자네와 카리나 경. 오늘 이 자리에 있었던 마법사는 우리가 제압한 것으로 하세."
"예?"
"그게 무슨...?"
라이언의 말에 그레먼과 카리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자가 저들끼리 쿵짝을 맞추며 사건을 수습한 끝에 내린 그 결론을 납득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크흠. 그게, 내 아들이 가진 아티팩트의 힘을 비밀로 하고 싶어서 그러네. 자네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보물을 가진 것은 죄가 아니지만, 그것을 지킬 힘이 없는 것은 죄가 되네."
요컨대, 아직은 약한(?) 무노가 아티팩트를 스스로 지키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된다는 말.
그에 그레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터져 나간 불꽃이나 벼락의 흔적을 봤을 때, 상대는 적어도 2서클의 마법사였습니다. 심지어 준비 과정도 없이 연달아 쏟아 낸 것을 보면 저 지팡이는 마도구인 것 같은데요, 그걸 감안하면 3서클 수준이라 봐도 무방하고요."
마도구(魔道具).
정령과 자연의 힘이 부여된 아티팩트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악마의 힘이 부여된 아티팩트(Devil's Artifact)를 말함이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섭니까? 마도구를 쓰는 2서클 마법사를 제압한 아들보고 지금 약자라는 겁니까? 그거 과보호입니다, 형님."
2서클의 마법사는 등급상 동격인 2성의 기사보다 더 윗줄로 보는 것이 세간의 인식이었으니.
카리나 역시 그 말이 맞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럼에도 라이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아들이 잘난 덕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티팩트가 대(對)마법사용이라서 가능했던 거야. 그러니 더욱 조심해야 하고."
아니, 그걸 말하면....
그 말에 무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지만, 다행히 그레먼과 카리나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고.
두 사람은 오히려 라이언의 발언에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을 굳혔다.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한 아티팩트라니, 그런 귀물을 어떻게 형님께서...."
"미안하지만 자세한 사정을 말해 줄 수는 없네. 이해해 주게."
"아니, 뭐 그런 아티팩트라면 이해...해야죠. 허. 조심해야겠네, 무노 공자."
"제국에 알려지면 안 되겠군요. 저 역시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남작님."
아....
카리나까지 그리 말한 뒤에야, 무노는 아버지의 뜻을 이해했다.
아들의 능력이 아티팩트라고 거짓말을 해 놓고서는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을 일부 털어놓은 것이 이상했는데.
'대마법사용 아티팩트라는 게 원래 있는 거였구나.'
그렇게 납득이 된 것이다.
이내 라이언은 엉망이 된 귀빈실을 슬쩍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이곳은 한 게 없는 늙은이들이 정리할 테니, 무노 너는 카리나 경을 바래다주고 들어가서 쉬거라."
"예?"
괜히 삐져서 하는 말인가 싶었는데.
"무리하지 않았느냐. 보기만큼 쉽게 제압한 것도 아닐 테고."
아버지는 아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레먼까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거들었다.
"그럼, 그럼. 수고한 젊은이들은 쉬어야지. 뒤는 한 것도 없는 늙은이들에게 맡기게."
"내가 했던 말 반복하지 말게, 그레먼. 정말 쓸모없는 늙은이가 된 것 같으니까."
"푸하하. 찔리는 구석이 있으신가 봅니다, 형님? 저는 아직 팔팔...."
콰드득.
웃으며 너스레를 떨던 그레먼은 라이언의 손안에서 구겨지는 대검'이었던 것'을 보며 급격히 말끝을 흐렸다.
"팔... 팔이 건장하시네요. 형님도. 커흠."
두 중년인의 만담을 지켜보던 무노가 살짝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피곤하긴 하군.'
직전의 전투에서 가속을 살짝 응용해 봤었는데, 몸에 무리 안 갈 정도로만 쓴다고 한 것이 마력을 쥐어짜는 수준까지 가고 말았다.
물론 애머스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흡수한 마력이 다시 몸을 채우웠지만, 육체에 꽤나 큰 부담을 준 것은 사실이다.
정신적 피로도 많이 쌓였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놈은 10년 전 거기에 있던 놈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신 거죠?"
무노가 살벌한 표정으로 내뱉은 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그놈들이 온전히 토벌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심어 준 놈들에 대한 증오와, 부모의 원한을 자신의 손으로 갚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그것들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무노의 말에 고스란히 묻어나는데.
두 중년인의 표정도 그를 따라서 급격히 굳어졌다.
"...일단 기사들을 심문한 결과를 기다려 봐야지."
"군터 경의 솜씨라면 뭐...."
"아. 카리나 경, 그 기사들은 어디에 있나?"
"아. 저, 그.... 복도 끝에 모아 뒀습니다."
"모아...둬?"
묘한 단어 선택에 라이언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하는 순간.
"예. 예! 그렇습니다. 하. 하. 무노 공자! 저, 저희는 빨리 돌아가죠. 저, 저도 피곤해서...."
무언가 찔리는 것이 있는 듯 카리나가 갑자기 무노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뭘 어쩐 건데...?'
무노는 새삼 그 기사들의 상태가 궁금해졌지만, 슬쩍 팔짱을 끼는 카리나 때문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확실히 딴 여자들과 다르게 향기도 좋.... 으아아! 나 무슨 생각 하냐!!'
그저 자신도 모르게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자 굳은 표정이던 아버지는, 어느새 흐뭇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살이 난 문을 통해 두 사람이 방을 나서는 순간.
"악!?"
카리나는 팔짱을 낀 자신의 팔과 무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떨어졌다.
살짝 붉어진 얼굴.
"...왜...?"
사라진 체온과 향기가 아쉬워 반응이 조금 늦게 나왔는데.
다행히 카리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 연신 고개를 숙이며 엉뚱하게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재촉하다 보니 무례하게 팔짱을...."
...오히려 좋았다고 말하면 변태 취급하려나?
전생을 포함하면 대략 40년에 가까운 모태 솔로의 본능이 순간적으로 이성과 심각한 충돌을 일으키다가.
가까스로 이성이 승리했다.
"아, 아닙니다. 결례랄 거까지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아, 자꾸 제가 너무 큰 일을 저지른 것 같아서요."
"큰일이요?"
"그, 기사들이 계속 모욕적인 소리를 해서.... 손이 좀 과하게 나갔거든요."
"뭘 그 정도 가지고요. 죽이진 않았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긴 한데요."
자꾸 쭈뼛대는 카리나의 모습이 유독 귀여워 보여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뒷일은 아버지와 그레먼 경에게 맡기기로 했으니.
- 저기다! 귀빈관!
무노는 멀리서 다가오기 시작한 병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레 카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두 분이 말씀하신 대로 저희는 쉬도록 하죠. 이리로...."
쭈뼛대던 그녀가 그 손을 마주 잡은 순간.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보는 무노의 심장 소리가 점차 커져만 갔고.
'자식은 일단 둘만 낳....'
모태 솔로의 망상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조차 오래 이어지진 못했다.
그 복도의 끝에서, 갑옷을 입은 누군가의 팔과 다리들이 '각기' 나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으니까.
쿨럭.
심지어.
'하나, 둘, 셋.... 여덟?!'
허으....
"...크, 크흠. '저게' 아까 그 기사들...?"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에 말끝을 흐려 보지만.
야속하게도 그의 손을 잡은 님.... 아니, 악귀님은 붉어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도 기사니까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지, 지혈도 잘해 놨고...."
어우야....
'팔다리 다 잘리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군터 경이 아무리 고문의 달인이라 해도, 한순간에 저런 꼴이 된 기사한테 무슨 증언을 들을 수 있을까.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던 무노의 머릿속에, 이내 다시 망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직전까지는 자식들을 잘 키워서 손주까지 보는 상상을 했었는데.
그 망상 속의 아리따운 아내가, 지금은 도끼눈을 뜨고 살벌하게 웃고 있었다.
- 여보, 지금 딴 여자 봤죠!? 눈알 파 드려요?
꿀꺽.
갑자기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하고.
살짝 움켜쥔 그녀의 손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크흠. 돌아, 돌아가죠. 레이디 눈에 험한 건 안 보는 게 좋으니."
그 험한 광경을 만들어 낸 당사자가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잊고 헛소리를 내뱉었는데.
다행히.
"레이디라니...."
악귀, 아니 카리나는 그 말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고개를 숙이며 살짝 얼굴을 붉히는, 화사한 드레스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미녀의 모습에 또 철없이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정신 차리자. 인생 조지는 거 한순간이야.'
무노는 이를 악물고 스스로 뺨을 철썩 때렸다.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었는데, 옆에 있는 카리나가 미친놈 보듯이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왜...요?"
"아. 아니, 모기가 있어서.... "
이 추운 북방의 가을에 모기라니.
참 내 입이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만 지껄인다 싶은데.
그때, 카리나가 푸훗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웃긴 건데? 같이 웃자, 좀.
무노가 어리둥절해하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공자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살살 눈웃음을 치는 표정.
'정말, 이쁘긴 오지게 이쁘다.'
다시 한번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데.
이제는 이게 설레서 두근거리는 건지 무서워서 심장이 뛰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정말 자기 좋아하냐고 하면 어쩌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온갖 모태 솔로다운 망상이 다시 휘몰아치는데.
다행히 그 망상은 망상으로 그쳤다.
"아, 아까 보니 그 사슬, 대마법사 전투용이라곤 해도 꽤나 다양한 응용이 가능할 것 같던데...요. 저, 저와의 대련에서는 왜 사용하지 않으셨나요?"
여전히 부끄러운 듯 살짝 붉어진 얼굴로 꺼낸 그 질문은, 분명 이성이 아닌 기사로서 묻는 것이었다.
덕분에 달아오른 머리가 조금 식었다.
"...경이 그 아티팩트 검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와 같은 겁니다. 어디까지나 대련이었으니까요."
"그, 그래도 많이 아쉽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 다시 서로 전력으로 겨뤄 보고 싶어요."
이 여자가 누굴 죽이려고....
섬뜩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면 이것은 카리나 나름의 호감 표현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여전히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는 시선과 붉어진 얼굴, 더듬거리는 말투가 그 생각에 확신이 들게 만들자.
다시 이 위험한 여자가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안 돼!'
이럴 땐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라면 그것도 괜찮겠군요."
그런데 주책맞은 주둥이는 생각에도 없던 말을 멋대로 나불거렸다.
"정말요!?"
"그럼요. 카리나 경과의 대련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럼 저...!"
"강자와의 대련을 마다하면 기사가 아니지요."
"...아, 강자...요?"
...왜? 뭐?
카리나의 표정이 빠르게 식어 가는 게 보이자 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어째 안심이 되면서도 묘하게 안타까운 느낌이랄까?
그때, 혓바닥이 또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카리나 경을 다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니까요."
...의식 분리 능력이 혓바닥과 뇌를 나눈 기분이랄까.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말이 멋대로 튀어나오는데.
그에 카리나는 다시 얼굴을 확 붉히더니.
"그, 그럼 조만간 다시 뵐게요!!"
뜬금없이 확 고함을 지르고는 후다닥 뛰어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 이거....
'잘된 거.... 아니, X 된 건가?'
무노는 복잡한 마음에 그녀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 차리자.
짝.
그는 다시 한번 스스로 뺨을 때리고, 박살이 난 귀빈관으로 모여드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이건 분명히 문제가 된다.'
단순히 뜬금없이 마법사가 등장한 사건이라 치부하기엔, 10년 전 그 일과 분명 관련이 있는 듯하니.
'...그냥 쉽게 쉬쉬하며 넘어가진 못할 거야.'
그리고 어쩌면.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사실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친부모의 복수를 내 손으로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살기에 찬 미소를 지은 무노는, 달빛이 들기 시작한 귀빈관의 정경을 눈에 담은 채 천천히 돌아섰다.
20화. 깨어나는 기억
치지지직.
[좌표 확인, 드라센 영지.... 대상 확인했습니다. 라이언 드라센 남작님?]
"각하를 연결해 주시게. 빨리. 지급 사항이네."
라이언의 말에 통신구를 지키고 있던 관리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마 후 수정구 앞에 나타난 얼굴은 그의 기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이전에 자네가 올린 보고 때문에 출타 중이시네. 그런데 또 무슨 급보라는 건가, 라이언?]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중과 귀밑에서 턱까지 이어진 구레나룻을 기른 금발의 중년인.
라이언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케인 대공자...."
[아, 내가 인사도 없이 너무 본론만 말했나? 오랜만일세, 라이언.]
파티에 참석한 로안나 대공녀의 아버지이자, 정정한 에녹 트리안 백작 때문에 아직도 차기 백작 혹은 대공자라고만 불리는 이.
그리고.
[설마 아직 작위도 없는 내가 이름을 불렀다고 기분 나빠하는 건 아니겠지?]
젊을 때부터 언제나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뭘 또, 농담 한마디 한 것 가지고 인상을 구기나? 자넨 매사 너무 진지한 게 문제야.]
언제나 농을 던지듯 사람을 떠보고, 반응을 마음에 담아 두는 이.
케인을 볼 때면 주군의 말이 떠올랐다.
- 그릇이 작아서 그래. 항상 상대의 반응을 확인해야 불안하지 않은 거지. 그러면서도 욕심은 많고....
- 그러니 내가 어찌 물러날 수가 있겠나. 세월이 녀석의 욕심을 깎고 그릇을 넓혀 주길 바라는 수밖에.
- 녀석이 같은 나이인 자네를 반만 닮았어도. 허허....
하지만 그가 본 케인은 젊었을 적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이를 먹어 가며 약간 신경질적인 모습이 더해지는 것도 같았다.
지금처럼.
[또, 또. 그런 눈으로 본단 말이지. 그게 얼마나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지....]
이렇듯 케인이 주도하는 대화는 사람을 진 빠지게 할 뿐이라.
라이언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콘넬 자작의 대리인이 마법사였습니다."
[...뭐라!?]
"어젯밤에 제압 후 사살에 성공했고, 놈을 호위하던 기사 둘에게 자백을 받아 냈습니다."
[설마 자네, 모에노 콘넬과 사이가 안 좋기로서니 그에게 허물을 씌우고자 지어낸 것은....]
"질풍의 기사 카리나 경과 에쉬남의 그레먼 경이 직접 목격했습니다. 마법사가 남긴 마도구 역시 증거로 남겨 두었습니다."
[으음....]
표정을 구긴 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전에 자네 아들을 습격했다는 기사와의 연관성은?]
더 이상 트집을 잡지 않는 것을 보니, 적어도 사태의 심각성만큼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아직 확인된 바 없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사료됩니다."
[...그래. 그렇겠지. 이런, 그럼 아버님은 엉뚱한 곳으로 가신 건가.]
"예?"
[토이젠 자작령으로 향하셨네. 그곳에 마법사가 있다는 의혹이 나와서....]
"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소식이었다.
"티넬 토이젠 자작은 각하의 최측근...."
[그래. 아버님께서 자네보다 더 아끼시는 오른팔이지. 그래서 직접 확인하시겠다며 가셨네. 그런데 정작 콘넬이라.... 마법사 놈들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나 보군. 하필 우리 트리안에서, 썩을 놈들이....]
중얼거리는 케인의 표정에는 이 상황에 대한 불쾌감과 곤혹스러움이 공존해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인 소식이 오고 간 거였지만.
라이언은 거기에 하나의 충격을 더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죽은 마법사 놈이 10년 전 그 사교 집단의 일원이었습니다."
[뭐!!?]
그 순간 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그의 얼굴이 수정구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10년 전 그 토벌은 트리안 백작가의 자랑이자 상처였으니.
통신구 너머에서 잠시간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상기된 얼굴의 케인이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놈들은 이미 몰살됐어! 아버지께서 당시 6서클 마법사까지 참살하셨는데!]
"예,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니까요."
[...어제 척살했다는 마법사가 10년 전에 봤던 놈이던가?]
"...제가 본 건 아닙니다."
[자네가 아니다? 그럼?]
"제 큰아들이 확인했습니다."
[큰아들? 그 양자? 이제 성년식 했다는 아들이 10년 전 사건을 어떻게 알아!!]
"충분히 알 법합니다. 그곳에 있었던 아이니까요."
[뭐!? 자네 지금 그 말은...!]
케인의 표정이 황당함에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라이언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도 알고 계신 일입니다."
[허어....]
케인은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무거운 눈으로 잠시간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러다 이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그 말은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하지 말게.]
"예?"
[어제 죽은 마법사가 10년 전 그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말. 그 얘기는 결코 다른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돼.]
"무슨...."
라이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케인의 태도는 강경했다.
[우리는 당시 사교를 토벌한 대가로 왕실의 포상을 받았어. 그리고 자네 역시 그렇게 '슬레이어'를 하사받았지!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임무가 사실 실패였다고 시인하자고!?]
10년째 잘 사용해 온 애검의 이름이 나오자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완전히 실패했다는 게 아니라, 잔당이 남아 있을 수...."
[그게 그 말 아닌가!! 그 모든 것을 지금 무를 수 있을 것 같나!? 곧 수도 입성을 앞둔 아버님의 정치적 입지는 어떻게 하고!?]
"...."
그 마지막 말에는 라이언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주군의 앞길을 막게 된다는 생각은, 귀족이기 전에 기사를 자처하는 그에게는 더없이 무거운 짐이었으니까.
[절대로! 절대로 그 말은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돼!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려던 순간, 머릿속으로 큰아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직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려 하면 식은땀을 흘리는 불쌍한 아들의 모습이.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이가 악물렸다.
"...그럴 수 없습니다."
[뭐?! 지금 뭐라고...!]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네, 지금 남작 주제에...!]
"당신은 모릅니다, 케인 대공자! 정작 그 토벌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니까!"
[하!? 이, 이런 미친놈이...!?]
단지 위험하다는 핑계로 10년 전 토벌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실은 케인의 역린이었다.
그리고 사교의 수괴를 참살한 에녹 트리안 백작을 제외하면, 그 토벌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기사가 바로 폭식의 기사라 불리는 라이언이었다.
"그놈들이 얼마나 미친 놈들인지 아십니까!? 당신은 그저 서류만 봤겠지요! 그저 잔당이 살아남은 거라면 좋겠지만, 10년 전 그 일이 정말 실패였다면 일이 생각보다 커질 수 있습니다! 다시 재앙이 생기기 전에 뿌리를 뽑아야 한단 말입니다!"
[라이언 드라센....]
까드득 하고 이를 악무는 소리가 수정구 너머로까지 들려왔다.
그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후회는 되지 않았다.
아들 생각에 충동적으로 대든 것이긴 했지만, 그의 말 역시 한 점 가감 없는 진실이었기에.
라이언은 수정구 너머, 항상 속 좁은 소리만 하는 주군의 아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것이 통했을까, 한참을 마주 보던 케인이 이내 '흥' 하고 콧김을 뿜더니 말을 이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아버님께 직접 보고를 올릴 것이다. 자네의 그 무례한 태도까지도.]
"좋을 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콘넬 자작가에 대한 수사와 그 사교에 대한 조사는 반드시 착수해야 한다는 말씀도 똑똑히 전해 주십시오."
[모든 것은 아버님이 선택하실 일이다, 라이언. 나야말로 경고하지. 내 말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아버님의 허락 없이 10년 전 일을 그 사건에 연관 지을 생각 하지 마! 절대!]
라이언이 강하게 나가자 케인 역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두 사람의 뜨겁고도 차가운 눈빛이 교차한 얼마 후에야, 통신구에 불이 꺼졌다.
* * *
무노는 또다시 꿈을 꾸었다.
그 오래된 기억 속에서 어린 그가 이를 악물었다.
- 이놈들, 내가 반드시....
의식을 둘로 나뉘어 현실을 도피했어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끔찍한 지옥을 겪으며 머릿속이 온통 증오로 채워져 가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겼다.
- 에녹 변경백이...!
- 대체 어떻게 알...?
- 막아!!
- 첩자나 경계조는...?
- 아아아아악!
악마 같던, 증오스러운 원수들이 하나둘씩 힘없이 쓰러져 갔다.
그러던 와중, 다급한 안색의 원수 중 한 놈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 젠장, 좀 이르지만 어쩔 수 없지.
- 네놈을 바치고 ...를 폭주시킨다. 그럼 변경백의 병력 따위....
- ...대주교께 할 말은 생기겠지.
놈은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음침하고 피비린내 나는 장소로 자신을 끌고 갔다.
바닥에 이상한 문양이 그려진 방. 그 중심에 던져진 순간부터의 기억은, 단편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됐다. 크하하하하.
자신을 그곳으로 끌고 간 놈이 환호성을 지르며 어디론가 사라지는 광경.
무언가 소름 끼치는 기운이 몸을 파고드는 느낌.
그리고 머릿속을 울리던 목소리.
- 나는 사슬의 악마, '&%@#'. 속박하고 억압하는 자.
- 멋진 제물이로다.
- 너는 이제 내 것이다.
끔찍한 느낌과 함께 자신의 온몸을 장악해 가던 이상한 기운.
그때, 그는 발작하듯 반항했었다.
- 누구 마음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속박, 그리고 억압.
그것은 힘겨운 세상에서 자유를 꿈꾸며 살다가 허무하게 죽은 한문호의 전생과, 환생하자마자 부모를 잃고 구속당한 현생의 트라우마를 동시에 건드리는 최악의 단어들이었다.
한순간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미 몸속을 파고든 무언가를, 고작해야 금속을 다루는 능력으로 어떻게 하겠는가.
한탄할 수밖에 없던 그때.
촤르르르륵.
콰아아아앙.
갑자기 그의 몸에 채워진 족쇄와 쇠사슬이 추르륵 늘어나더니 사방의 석벽을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 제물이 많구나. 많아. 전부 내 것이다!]
'사슬'의 악마.
그 단어가 생각나는 순간,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슬의 움직임에 간섭해 보기 시작했다.
물론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에 저항하기엔 역부족이었으니, 그가 시도한 것은 그 흐름을 아주 살짝 비트는 것뿐이었다.
느껴지는 기운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되지 않을 작은 힘으로.
하지만 효과가 있었다.
그러자 엄청난 힘을 품고 요동치던 쇠사슬이 갑자기 부르르 떨기 시작했고.
- 아니...!?
끔찍하게만 느껴지던 목소리가 당황하는가 싶더니.
- 안 돼!!
번쩍.
이내 방 안을 가득 울리는 악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눈앞이 새하얗게 백열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폐허가 된 돌 더미 위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 얘야. 널 괴롭히던 사람들은 전부 죽... 흠, 흠. 쫓아냈단다. 괜찮니?"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괜찮....
"괜찮...!?"
눈이 부릅떠지는 순간, 무노는 온몸이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허윽!?"
한순간 과거와 현재의 감각들이 섞이며 머릿속이 멍해지다가, 이내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애머스!'
놈을 잡기 위해 꽤나 많은 힘을 쏟아 냈고, 돌아와서 쓰러지듯 잠들었던 일까지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지던 오래된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난 것은, 트라우마를 안겨 준 원흉 중 하나를 처리했기 때문일까.
온갖 복잡한 감정이 가슴을 가득 메웠지만, 그것에 빠져 있을 틈은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아니었으니.
"분명, 분명히...."
- ...대주교께 할 말은 생기겠지.
"그래, 그랬어."
자신을 그 피범벅 제단으로 끌고 갔던 그곳의 우두머리.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놈의 윗선이 있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분명해!'
그 사교 무리는 완전히 토벌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그 오래된 악몽들을, 내 손으로 부숴 줄 수 있다.'
식은땀을 흘리는 몸으로 스산한 미소를 지은 무노가 이내 튕기듯 침상에서 일어났다.
21화. 미끼
"공자님!? 아침 식사가...!"
"에스나, 미안. 나중에!"
"어딜 그리 급히 가...!"
휘이이이잉.
펑.
에스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도 저편으로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무노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세요? 20인분이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힝."
음식이 한가득 쌓인 3단 서빙 카트를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에스나.
그 모습을 뒤로한 채, 무노는 영주 집무실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꼬르르륵.
마법사를 상대하며 소모한 기력이 재충전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당장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쾅!
"아버지!!!"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는데.
"무노?"
"...사냥제는 일단 미루시는 게, 음?"
집무실에는 아버지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외눈 안경을 빛내며 뭔가를 보고하다 말고 돌아보는 노인 팔머와, 그 옆에 서 있는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인.
"무노 공자님? 아침부터 씩씩하시군요."
갈색 머리와 같은 색의 눈동자, 적당히 배가 나온 체형과 크지 않은 덩치, 부드럽게 웃는 얼굴은 누가 봐도 사람 좋은 옆집 아저씨처럼 보이지만.
그는 무려 3성의 기사이자, 드라센 남작령의 수석 기사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군터 경."
그리고 무노가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어른들 중 가장 성격 좋은 아저씨인데.
"안 그래도 어제의 일 때문에 영주님께서 부르신다 하셨는데, 어떻게 미리 알고 오셨군요. 허허"
그런 사람이 그 누구보다 뛰어난 고문 기술자라는 말을, 바로 어제 들었었다.
그래서일까.
"아, 예. 그런...가요? 하. 하."
갑자기 군터 경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 변한 모습으로 다시 만났을 때도 마냥 기뻐해 주던 사람이었는데.
"왜 그러십니까?"
군터는 여전히 평소처럼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그래, 뭐 우리 편인데.'
다시 웃으며 인사하려던 차에, 문득 그의 소매 끝에 묻은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거요? 괜찮습니다. 제 피 아니니까요. 걱정 마십시오."
...그렇겠지.
아무리 우리 편이라 해도, 겉모습과 전혀 다른 이면이 있는 사람은 한문호 시절에도 꺼리던 터라.
아무래도 다시 군터를 보며 웃게 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아. 예...."
무노가 그렇게 어색하게 서 있던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왜 그리 급히 뛰어오느냐? 뭐, 나야 시간 낭비 하지 않아서 좋다만."
"아! 그게, 제가 꿈을 꿨는데...."
"꿈?"
아버지의 반문을 듣는 순간에야, 그는 군터와 팔머의 존재를 의식하고 말끝을 흐렸다.
둘 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임에는 분명했지만, 자신의 과거나 악마와 관련된 이야기는 언제나 아버지 외의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었으니.
다행히 아버지의 눈치가 빨랐다.
"아. 팔머, 사냥제는 일단 하루만 미뤄서 내일 바로 시작하겠네. 상황이 시끄러워진 것은 알지만,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나? 귀족들과 기사들을 언제까지 드라센에 머물게 할 수도 없으니."
"뜻대로 하십시오. 하면, 소문은...."
"이미 알려진 사실만 그대로 공표하고, 에녹 각하께서 직접 나서셨다는 말도 덧붙이게. 그럼 잦아들겠지."
"알겠습니다."
"군터 자네도, 그놈들 죽지 않게 간수 잘하게. 숨만 붙여 놔."
"그럼 더 쥐어짜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래. 어차피 더 이상 중요한 정보가 나오지도 않을 것 같으니."
...사람이 걸레도 아닌데 뭘 쥐어짜.
소름 끼치는 상상을 한 무노가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자네 둘은 나가 보게. 일단 나는 무노와 얘기를 해 봐야겠으니."
"알겠습니다, 영주님."
"예, 로드."
팔머와 군터, 드라센의 행정과 병력 운용을 관리하는 두 책임자들은 별다른 서운한 내색 없이 그대로 물러났다.
그리고.
"꿈이라니, 무슨 꿈?"
아버지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순간, 무노는 간밤에 꿈을 통해 떠오른 선명한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했다.
잠시 후.
"대주교라.... 정말로 그 사교 놈들이 일부일 뿐이었다고?"
아버지, 라이언의 입에서 나오는 한탄은 매우 무겁게만 느껴졌다.
"나도 그놈들의 잔당이 살아남은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악마교주의 윗선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만...."
"하지만 분명합니다. 그놈이...!"
"네가 말한 그곳의 책임자라는 놈이, 얼굴에 십자의 상처가 있는 붉은 눈의 백발 마법사가 맞느냐?"
"예, 그놈 이름이...."
"크레이멀."
"...예, 맞습니다."
"허...."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은, 6성 기사 에녹 트리안과 그 휘하의 기사단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잡은 사교의 수괴였다.
"6서클의 마법사가 정말 하수인에 불과했다고? 하...."
연이은 한숨에 무노의 표정 역시 무거워졌다.
당시에도 정확한 집단의 명칭을 알 수 없어 그저 악마교라 불렸던 사교의 무리.
그중 악마교주(惡魔敎主) 크레이멀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는 아이언 왕국 최악의 범죄자였고, 트리안의 재앙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더욱 문제였다.
"6서클 마법사의 윗선이라니? 마법사 놈들이 자신보다 못한 자를 따를 리가 없는데...."
놈들은 일반인은 물론이고 자신보다 서클이 낮은 마법사조차 사람 취급 안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그리고.
"정말 그 대주교라는 자를 두려워하는 느낌이었더냐?"
"예, 분명히."
무노의 기억에 따르면, 크레이멀은 분명 '상관의 질책을 조금이라도 회피하기 위해' 그를 제물로 바치려 했었다.
단순히 경지는 같되 지위만 더 높은 사람에게 보일 만한 마법사의 태도가 아니었다.
즉.
"그럼 그 윗선이 7서클의 마법사, 마도사(魔道士)라는 뜻이다. 마도사는 마도 제국에도 소수만 존재할 뿐이라는 거, 너도 알고 있겠지?"
"...예."
이 판타지 세상에 존재하는 최강의 초인들 중 누군가가, 그 사교의 배후라는 뜻이다.
7성 이상의 기사거나, 7서클 이상의 마법사나 정령사, 혹은 사제.
개인의 능력만으로도 일인 군단으로 취급되는 초인들.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후로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초인들은 한 시대에 한둘뿐이었으니, 사람들은 사실상 최강인 그 초인들을 뭉뚱그려 세븐스타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는, 그 능력에 걸맞게 각국에서 최고 수준의 권력을 쥐고 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은둔한 세븐스타가 있길 바라야겠구나. 아니면 네 꿈이 잘못되었거나."
라이언이 이렇게 한탄하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은 존재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확실히 알려서 색출해 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트리안의 문제가 아니라 왕국이 뒤집힐 사건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무노가 그렇게 소신을 드러내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구나."
아버지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예?"
"증거가 없어, 증거가. 에녹 각하의 정치적 입지도 고려해야 하고."
정치적 입지?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무노가 인상을 찡그리자, 아버지가 안타까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당연히 네 말을 신뢰한다. 에녹 각하께서도 내가 강력히 주장한다면 믿음을 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
잠에서 깨자마자 흥분해서 달려왔던 무노의 머릿속에도 그제야 찬바람이 들어왔다.
"심지어 10년 전 소탕된 줄 알았던 사교 뒤에 더 큰 배후가 있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일부만을 토벌하고 악마교를 섬멸했다고 주장한 트리안의 입지는 아주 곤란해지겠지."
아....
"...그렇겠군요."
씁.
입 안에 쓴맛이 도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납득하며 고개를 숙이자 아버지가 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해하는 거냐?"
"예, 뭐 어려운 얘기도 아니잖습니까. 저 이제 바보 아닙니다."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네 원수이기도 한 놈들을 대놓고 토벌할 수 없는 상황을 납득하냐는 말이다."
"납득하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상황이 이런데."
"포기하겠다고?"
"그럴 리가요.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요."
마음처럼 되면 좋겠지만,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이리라 기대해 본 적 없었던 소시민 한문호의 정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눈을 유심히 지켜보던 아버지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역시, 다른 모든 게 변해도 네 똥고집은 변하지 않았구나. 혼자서라도 뭔가 해 보겠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아버지는 그의 말을 약간 오해한 듯했다.
당장 나서서 뭘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성향이 있듯이. 그 개인들이 모여서 이룬 조직에도 특정한 성향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뭐?"
"제가 아는 그놈들이라면, 이번 한 번 실패했다고 저를 그냥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또다시 일을 벌이겠죠. 그렇다면 그때 확실히 꼬리를 잡으면 됩니다."
이대로 있어도 놈들이 먼저 움직일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 말에 아버지의 표정이 슬쩍 굳었지만, 이내 그 굳은 얼굴은 투지 어린 미소로 바뀌었다.
"...좋다. 아비가 돼서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일단 나도 에녹 각하께 직접 보고해 보마. 그분 역시 중요한 것이 뭔지 아시는 분이니, 케인이 반대해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케인? 반대? 이번에는?
알 수 없는 말에 그가 어리둥절해하자, 아버지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설령 최악의 경우라도 최소한의 조치는 취하실 분이니, 일단 기다려 보자꾸나. 그리고 네 말대로 놈들이 다시 너를 노린다면, 그때 확실히 잡아챌 준비를 하자. 뭐, 그렇다고 내성 안에 꽁꽁 숨을 생각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미끼가 먹기 쉬워 보여야 사냥감이 덤비죠."
"...그렇지. 그래야 내 아들답지."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는 아들이나, 그걸 권장하는 아비나 보통은 아닌 듯했지만.
방금 전까지 강력한 초인이 배후에 있을 거라 했던 조직을 상대하겠다는 부자의 표정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부자가 투지 어린 미소로 서로를 마주 보는 순간.
꼬르르르륵.
동시에 서로의 배에서 울리는 소리가 그들을 뻘쭘하게 만들었다.
"크, 크흠."
"...그전에 밥부터 먹고요."
"그러자꾸나."
드라센 부자가 각오를 다지던 그 시각.
세상의 어느 한구석에서는, 무노가 예상한 그대로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실패? 아무리 하찮은 놈이라 해도 카르탄의 지팡이까지 줘서 보냈는데, 실패?]
수정구 속 그림자가 뱉어 낸 말에 로브를 둘러쓴 이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2서클까지의 마법을 주문 없이 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카르탄의 지팡이.
하급이긴 했지만, 마도구란 것 자체가 꽤나 비싼 물건이었다.
그 물건을 쥐여 준 녀석의 목숨보다 더.
"그게, 폭식의 기사에게 먹힌 모양입니다."
[흥. 폭식의 기사? 그딴 건 허명에 불과하다. 기사가 어찌 그 '장막'을 꿰뚫어 본단 말이냐!]
"그, 보낸 녀석이 실험체를 담당하던 놈인지라, 아무래도 과하게 욕심을 부린 듯합니다. 숙소에서 불벼락이 솟구쳤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 때문에...."
로브를 쓴 이의 입에서 트리안 백작에게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상세한 사정이 흘러나왔다.
[하.... 그리 조심하라 일렀거늘. 실험체 하나 못 잡아서....]
"어찌할까요? 콘넬 자작 쪽 꼬리를 끊어 내고 모른 척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만."
[헛소리! 크레이멀 녀석이 어이없이 죽은 이유를 밝혀내야지. 제물로 바쳐졌다는 그 실험체에게 단서가 있을 것이 뻔한데.]
"하면...."
[폭식의 기사까지 무력화시킬 만한 패를 보내서 반드시 회수하라. 트리안에 심어 놓은 꼬리를 전부 써서라도.]
"명대로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실패가 없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확실한 3서클, 아니 4서클의 중진을 파견하도록.]
"그렇게까지...!?"
그 말에 로브를 쓴 이가 움찔하긴 했지만.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폭식의 기사와 싸울 생각은 말라 이르도록. 목표는 오직 실험체 하나다. 잊지 마라. 뭐, 미덥지 못하면 네 녀석이 직접 가는 것도 좋겠지.]
미동도 없는 수정구 너머 상대의 눈빛에, 이내 얌전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수정구의 빛만이 존재하던 공간은 어둠에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