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로 만들어주실 겁니까?"
성기사가 조철에게 대놓고 물었다.
조철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성녀님께서 명령하신 걸 거부하란 말이냐? 저 작자가 우리 교단의 빛이고 구원자라는데."
"인정할 수 없습니다!"
"네놈이 인정하고 말 것도 없다. 너나 나나 옛 아버지의 촉수 끝에 달린 기포 같은 존재야. 성녀님께서 지시하신 일만 잘 치르면 된다. 네놈은 이번 임무를 마쳐야 정식으로 성기사가 된다며? 네 애비 얼굴을 봐서 응석을 받아주고는 있다만 적당히 해라. 지금의 넌 이 사장네 첫째 아들이 아니라 우리 교단의 견습 성기사야. 알아들어?"
성기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완전히 밀폐된 투구 속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저놈······'
인정할 수 없었다.
빛이자 구원자?
불신자 주제에 그런 영광스러운 칭호가 가당키나 하나?
'분명히 착오가 있었을 거야.'
옛 아버지는 육체가 죽고 영체와 자아만 남은 상태.
사도인 성녀를 통해 목소리를 들려주고는 있으나 계시는 명징하지 않다.
대부분 모호하며 간혹 뚜렷해질 뿐.
'그래. 분명해.'
해석이 잘못 됐을 거다.
저런 불경하고 건방진 불신자가 구원자일 리 없다.
치밀어오르는 살의.
그 뿌리에서 음험하게 번들거리는 질투심과 시기심.
'인사 정도는 괜찮겠지.'
그저 가벼운 인사.
정말로 구원자라면 인사는 가뿐히 이겨내겠지.
이겨내지 못한다면?
극복하지도 못하고 죽어 자빠진다면?
'애초에 구원자도 뭣도 아니었던 거지.'
자기 합리화 완료.
이윽고 해가 완전히 졌다.
오늘따라 우중충한,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
성기사의 스마트폰에 은밀하게 어떤 전화번호가 찍혔다.
인간 사냥꾼 -1-
인간 사냥꾼
까만 약병 뚜껑을 땄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쓰디쓴 냄새가 풍긴다.
한약 냄새라고 할까?
건강에는 좋을 것 같지만 꺼려지는 냄새.
고물상이 싱글거리며 웃었다.
"어떻습니까? 완벽한 진품입니다. 저도 어렵게 구했다고요."
"냄새 보니 확실하네요."
살짝 흔들어 본다.
박카스병 닮은 약병 안, 까만 액체가 잔뜩 뭉쳐서는 움직이질 않는다.
이 정도면 액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거의 고약 수준.
고물상이 작은 티스푼을 건네주었다.
"마시기는 힘드실 겁니다. 이걸로 퍼먹어야지요."
"꼭 홍삼 같네요."
"예. 홍삼이랑 비슷합니다. 효과는 훨씬 좋고요."
만드라고라의 비약.
게임에서는 탈진 상태에 빠진 초인을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수술 후유증에 특효약으로 쓰이고, 또 남자에게 매우 좋다고 알려졌다.
나는 티스푼을 받아 비약을 단번에 떠먹었다.
고물상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초인님! 그거 그렇게 드시면 안 됩니다! 삼 분의 일씩 사흘에 걸쳐 나눠 드셔야 합니다! 물에 타서요!"
나는 약병을 던져 버리고 눈을 감았다.
후욱, 열기가 올라온다.
위장부터 시작하여 용암이 용솟음치는 듯한 감각.
"두 개 더 주세요."
"어, 설마 바로 드실 건 아니죠?"
"바로 먹을 겁니다."
"그, 그러다 부작용 납니다. 아무리 법제 잘한 물건이어도 만드라고라는 영약이면서 독약이에요!"
"다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아, 돈을 안 드렸네요."
골프백에서 현금을 꺼내 건넸다.
세종대왕님 세 묶음.
즉, 3백만 원.
게임에서 보던 시세보다 조금 비쌌으나 이리 빨리 구해 왔으니 프리미엄을 좀 줘야지.
고물상이 돈을 챙기고는 쭈뼛쭈뼛 약병을 주었다.
"안 되는데······"
나머지 두 병도 단숨에 입에 넣었다.
덕택에 온몸이 불덩이가 된다.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은 물론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마력이 끓어 오르며 공기 중 수분과 반응하는 것.
"어?"
"뭔 일이야?"
"김 사장. 초인님께서 뭐 하셨어?"
"끄응. 그게······"
고물상은 뭐라 대꾸하지 않고 입맛만 다셨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꼿꼿이 선 채로 마력 연공법을 운용했다.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마력 안정]
[심호흡][집중][명상]
정신을 모아 마력을 이끈다.
마력이 내 위장에 머문 막대한 힘을 끌어당긴다.
호흡 한 번에 한 걸음, 다시 호흡 한 번에 한 걸음.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을 겨우 억제.
어느 순간, 그 뜨거운 힘이 흩어지며 전신으로 번졌다.
성공이다!
용암 같은 맹렬함에서 뜨거운 물 정도로 격하된 기운.
대신 도도히 내 전신을 흐르며 어마어마한 활력을 선사하고 있었다.
[원기왕성] 특성.
[불사] 특성의 마지막 조각.
방호복이 완성되면 [거인의 힘] 재료 여섯 중 다섯이 모이고, [금강체]는 재료가 모두 갖춰진다.
갑옷에서 이식해야 하는 만큼 다이아를 쓰든 시간을 보내든 해야 하지만.
"꺼어억."
길게 트림을 한 다음 약병을 눈에 보이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고맙습니다. 역시 사장님이시네요. 이렇게 빨리 구해올 줄은 몰랐습니다."
"어······ 괜찮으신 거죠?"
"그럼요."
나는 주변을 쓰윽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찾아서일까?
신원 시장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어두컴컴하고 상인도 별로 없던 예전.
지금은 상인과 손님으로 넘쳐 난다.
어디를 보든 흥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든 점포가 영업을 개시했고, 예전엔 안 보이던 점포가 새로 들어섰다.
"많이 복잡해졌네요."
"그렇지요? 다 초인님 덕분입니다. 장사하기 좋고 상황도 안정되어서 초짜들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초짜들요?"
"신입 사장님들 말입니다. 사장님들이 상인회에 기부도 많이 해주셔서 시장 전체적으로 활기가 돕니다. 확장 이야기도 나오고 있어요."
나는 무심히 머리를 끄덕였다.
신원 시장이 커지면 내게도 좋은 일이다.
직접적으로 돈이 들어오진 않아도, 내가 원하는 물건을 쉽고 빠르게 구하게 되니까.
"어쩐지 못 본 얼굴이 많다 했습니다."
"하하하. 그럴 겁니다. 저도 여기서 장사 오래 했지만, 이렇게 초짜들이 많이 들어오는 건 처음입니다. 모두 초인님 덕이지요."
흥정을 하면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상인들.
이상하게도 마음에 걸렸다.
그냥 초인이라서 보는 게 아니다.
훨씬 집요하고 의도를 가지고 보는 눈길.
아무도 모르게 통찰 특성을 장착했다.
그러자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분명하게.
모든 신경을 내게 쏟으면서.
심지어 흥정하는 것처럼 보였던 손님들마저도.
"으음."
"어디 불편하십니까? 비약이 잘못된 건 아니지요?"
"아닙니다. 참, 물건은 들어왔습니까?"
"예. 많지는 않습니다만······"
고물상이 내게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다이아 두 개.
확실히 물량이 적긴 적다.
이거 가지고는 흡혈 장갑의 강건도, 목걸이의 치유도 가져오지 못한다.
"더 구할 수는 없을까요?"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보니······"
"부탁드립니다."
"음, 조만간 작은 기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거기서라면 다이아를 더 구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작은 자리?
어째 좀 수상쩍어 보인다?
하지만 기회가 생기면 잡아야 한다.
다이아 없이 상위 특성 조합은 정말 한 세월이 걸리니까.
"네. 기회가 생기면 연락 주세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을 돌렸다.
통찰을 통해 뒤통수로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진다.
여전히 은밀하고도 끈질긴 시선.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대략 대여섯 명.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누구냐?'
후보는 많다.
내가 해치운 놈이 워낙 많았어야지.
갱단 중에서는 독약파와 나체파.
합법 세력 중에서는 청소부 협회 관계자나 박대엽의 지인.
어쩌면 옛 아버지 교단에서 손을 썼을 수도 있다.
마법 갑옷을 맞추러 가서 느꼈잖아.
조철도 썩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이었고, 호위 중이던 성기사는 대화 내내 나를 노려보았다.
'어쩐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대비해야 한다.
나는 늘 들고 다니는 골프백을 더듬었다.
안에 든 총기와 폭탄이 손가락 끝에 느껴진다.
아예 저놈들을 족쳐?
아서라.
단순한 끄나풀이다. 저놈들이 뭘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괜히 경각심만 주느니 평소대로 행동하는 게 낫다.
최 소장이랑 김철권 통해서 알아봐야지.
둘이 정보를 물어올 때까지는 집에서 훈련만 하는 거다.
집에 쳐들어 와도 대처할 시간은 있다.
김사제가 준 성역 신상이 있으니까.
정 걱정스러우면 아예 중화기를 들여와서 요새화시켜도 되고.
"안녕하십니까!"
불 꺼진 지상층으로 올라왔을 때였다.
신원 시장을 지키던, 그래서 얼굴을 아는 철권파 갱단원이 내게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어, 그래. 고생한다."
무심히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가려 했는데 갱단원이 난처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저기, 형님. 잠시 시간 좀 괜찮으십니까? 실은 저희 형님이 전사 형님을 꼭 모셔오라고 해서 말입니다."
"너희 형님? 김 사장?"
"아뇨아뇨, 큰형님 말고 저희 형님이요. 고준범 형님. 그, 형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번에 독약파랑 나체파 그 새끼들이랑 한 따까리 할 때 도와주셨잖아요."
아, 그 인간.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일 있으면 지가 직접 올 것이지 왜 오라 마라야."
"그게,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고······"
"중요하면 김 사장 통해서 말하던가."
"그, 그러면 저희 형님 큰일 납니다!"
갱단원이 펄쩍 뛰었다.
"큰형님 아시면 저희 형님 죽어요!"
"왜 또? 뭐 사고 쳤어?"
"사고 친 건 아니고 말입니다······"
갱단원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통찰로 느끼는 심장 소리가 이상하게 크다.
이건 단순히 내게 느끼는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 직속 간부가 갱단 보스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형님 혹시 못 느끼셨습니까?"
"뭘?"
"신원 시장 말입니다. 요새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그렇긴 하더라. 사람이 많이 유입돼서 그런 거 아냐?"
"그놈들 중에 첩자들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느낀 것과 같다.
철권파 쪽에선 경쟁 갱단으로 생각하는 모양.
독약파나 나체파 같은.
'정말 이쪽인가?'
확실히 말이 된다.
여전히 신림동을 노리는 두 갱단.
요즘 철권파가 부쩍 강해지고 있으니 슬슬 애가 탈 것이다.
가만히 놔두면 자기네들이 잡아먹힐 테니.
어떻게든 수를 쓰는 게 정상이었다.
"그거 때문에 뵙자고 말씀드린 겁니다. 손 놓고 있다가는 저희 형님 진짜 큰형님한테 죽어요."
"왜 직접 안 오고?"
"큰형님이 어디 보통 분이십니까? 이 근처에는 벽에도 큰형님 눈이 있어요. 제발 저희 형님 좀 살려주세요."
갱단원이 허리를 연거푸 굽힌다.
가만히 놔두면 무릎까지 꿇을 기세.
나는 모르는 척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지 들어나 보자. 안내해."
"예, 형님. 이쪽입니다."
내가 수락한 순간.
갱단원의 몸이 화악 늘어졌다.
긴장이 풀린 것.
그런데 아직도 심장은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둠 때문에 눈동자는 보이지 않으나 전신에 식은땀이 가득하다.
날 설득해서 데려가는 게 그렇게 어렵고 무서운 일이었어?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넘어갔을 일.
신원 시장에서 모종의 시선을 받아서일까?
이상하게도 마음에 걸렸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골프백이, 날 때리는 유탄 발사기가 위험을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괜스레 조여오는 심장.
막히는 숨통.
나는 드디어 이 느낌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위기 감지]
최 소장이 태양 마탑에서 받아온 반지가 작동하는 것.
그렇게 따라간 주차장.
갱단원이 까만 리무진 앞에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형님, 여기 타십쇼.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까만 리무진.
창문이 짙게 선팅되어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
바깥을 특이한 금속으로 도금하여 이 어둠 속에서도 유독 반짝반짝 빛났다.
갱단원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고급 방탄 리무진입니다. 형님의 격에 어울리는 물건이죠. 힘들게 빌려왔습니다."
순간 어떤 인물의 대사가 생각났다.
[고급 방탄 리무진이었지. 내 격에 어울리는 물건이라고, 힘들게 빌려왔다고 했어. 그게 함정이었지. 방심하고 있다가 보기 좋게 함정에 걸렸어.]
김철권.
철권파의 보스였던 그가 게임에서는 튜토리얼 캐릭터로 합류했던 이유.
2레벨이 아니라 1레벨로 떨어져 있던 이유.
배신당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쓰인 게 이 방탄 리무진.
선명히 기억이 떠올랐다.
김철권의 회상 장면에서 쓰인 배경.
그 안 방탄 리무진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것과 똑같았다.
나는 속내를 숨기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멋있네. 잘 부탁해."
"예, 형님."
갱단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속내를 비치지 않고 조수석 뒷자리에 탔다.
부들부들한 가죽 좌석에 몸을 묻고 운전석을 노려본다.
'너였단 말이지.'
간부가 끼어 있는지, 배신한 갱단원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른다.
게임에서 김철권을 축출한 후 단검파는 철권파를 해체하다시피 했으니까.
혹시 몰라서 김철권의 친동생까지 끌고 갔고.
상관없다.
배신자를 파악한 이상 흐름은 내 쪽으로 불고 있으니까.
딸깍.
갱단원 모르게 문손잡이를 당겨 보았다.
잠겨 있다.
아직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그렇다.
역시 확실해.
게임 지식과 직감이 일치하고 있었다.
내가 마음속으로 칼을 벼리는 것도 모르고, 갱단원이 한껏 웃으며 나를 돌아본다.
"출발하겠습니다, 형님. 좀 멀리 가니까 한숨 주무십쇼."
"안전운전해."
"옙!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구우웅.
리무진이 둔중하게 출발한다.
밤의 신림동은 완연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가로등은 희미하게 깜빡거리고 오가는 사람도 없다.
자동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도로를 그림자처럼 질주하는 리무진.
도림천을 따라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구로 방향이네.'
이 세계에서도 치안이 특히 안 좋은 곳.
금천구가 지배 갱단이 손을 놔서 막장 상태라면, 구로구는 아예 지배 갱단이라고 부를 게 없다.
구 단위가 아니라 동 단위로 가도 그렇다.
고만고만한 갱단들이 전국시대를 찍고 있는 곳.
경찰도 포기하고 뒷짐 지고 있는 지역.
돈만 주면 누구든 죽여준다는 인간쓰레기가 넘쳐나는 동네.
나는 창밖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대림국밥]
간판을 보는 즉시 깨달았다.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당장이라도 멎을 듯 막혀오는 숨통은 덤.
"어?"
잘 운전하던 갱단원이 노골적으로 묘한 소리를 낸다.
"형님. 기름이 없어서 기름 좀 넣고 가겠습니다."
바로 앞에 주유소가 보인다.
[대림 주유소]
능숙하게 차를 주유기 옆에 대는 갱단원.
막 문손잡이에 손을 가져갈 때, 나는 발로 운전석을 툭툭 건드렸다.
"야."
"예? 뭐 시키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빙신 핫바지로 보이냐?"
어디서 수작을 부려?
"예에에?"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갱단원이 되물었다.
콰악!
갱단원은 무시하고 몸을 돌려 문을 걷어찼다.
두꺼운 문이 한껏 찌그러진다.
또 한 번 힘껏, 전력을 다해 때렸다.
[근력][괴력][맷집]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강타]
근력과 괴력을 동원하고 강타까지 때려 박은 일격!
꽈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자동차 문이 떨어져 나갔다.
즉시 몸을 날린다.
그런 나를 갱단원이 멍청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놈에게 중지를 한 번 세워준 다음, 미리 꺼내 쥐고 있던 수류탄을 던졌다.
"어? 어어? 안 돼!"
이어 특성 전환.
[질주][도약][기동]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민감]
전력으로 달린다.
모든 힘을 쥐어짜 다리에 보낸다.
허리띠와 신발도 미친 듯이 발광하고 있다.
내가 한계까지 마력을 꾹꾹 눌러담은 탓.
약 3초 후.
기다리던 폭발이 터졌다.
꽈아앙!
수류탄 하나가 터졌다고 보기에는 절대 힘든 폭발.
화광이 충천하고 폭음이 내 고막을 찢으려 달려들었다.
충격파가 등을 후려치고 큼직한 철판이 츄리닝을 찢으며 방호복에 박혔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더 빠르게 달렸다.
쇼핑몰 금역에서 벗어나던 때처럼 이를 악물고 뛰어올랐다.
타아앗!
내가 허공을 남과 동시에 2차 폭발이 터졌다.
꽈르릉!
송두리째 폭발하는 주유소.
후끈한 열풍이 먼저 치달리고, 이어 눅눅한 기름 냄새가 나를 추월하여 인근을 덮쳤다.
"으윽!"
도약으로 건물 뒤에 숨지 않았으면 화염을 다 뒤집어썼겠다.
게임 속 김철권은 여기서 살아남았단 말이지?
리무진에 숨긴 폭탄과 주유소 2차 폭발을 견디면서.
안 죽고 레벨다운만 된 게 용하다.
철컥.
소총에 탄창을 결합하며 일어섰다.
"흐흐흐."
"저기 있다! 사진으로 본 그놈이야!"
"10억! 10억! 10억!"
"엔빵하는 거다. 혼자 처먹으면 뒈질 줄 알아!"
화광이 하늘을 불태우는 도시.
불길이 춤출 때마다 기괴하게 춤추는 그림자.
그 사이에서 부랑자들이 머리를 내민다.
마약에 취해 풀린 눈. 흐느적거리는 손발.
무시할 수는 없다.
저마다 기관단총과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니까.
탕!
불길을 꿰뚫는 총성.
부랑자들이 달려들었다.
인간 사냥꾼 -2-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다.
부랑자들에게 포위당한 상황.
정체불명의 적은 치밀하게 그림을 그렸고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날 잡을 거라고 생각하면 섭섭하지.
헬멧을 썼다.
탐지 능력이 가동된다.
내가 장착한 통찰 특성과 결합하여 부랑자들의 배치가, 그들의 공격 방향이 선명하게 인지되었다.
누군가 총을 겨눈다.
내게로.
가슴을 향해, 심장을 향해서.
"젠장!"
바로 몸을 던졌다.
도약.
내가 자리를 이탈하여 십 미터 이상 거리를 벌리기 무섭게 총성이 터졌다.
타타탕!
정확한 삼점사.
1초만 늦었어도 죽었다.
콘크리트 벽에 총알이 박히고 돌가루가 다다닥 튀었다.
부랑자들이 날 보고 고함을 질렀다.
"10억이다!"
"놈이 도망친다!"
"죽여버려!"
마약에 취해 흐느적대는 몸.
하지만 조준만큼은 정교했다.
통찰 특성이 선명한 빨간불을 피웠다.
찌릿한 직감이 뇌리를 관통한다.
이건 못 피한다고.
"젠장!"
즉석에서 특성 교체.
[마력 방어막][방어][철갑]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마력 안정]
모든 것을 방어 능력에 때려 박았다.
왼팔을 들어 가슴과 얼굴을 동시에 방어한다.
방패가 전개되고 성채가 내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투명한 역장이 번지는 것과 함께 벼락이 쳤다.
타타타타타타탕!
수십 명의 일제 연사.
무슨 마약을 처먹었는지 베테랑 군인 뺨치는 정확도.
총알이 수백 발도 넘게 날 두들긴다.
3레벨이 된 지금, 나는 마력 방어막으로 소총탄 정도는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게 한두 발이 아니라면?
수십 발을 넘어 수백 발이 넘게 박힌다면?
"커허억!"
둔중한 충격이 나를 후려갈겼다.
마력 방어막이 깨지고 마력이 역류한다.
폭주하기 직전.
나는 피를 토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몸을 던졌다.
바로 앞에 보이는 편의점 유리벽을 향해서.
쨍그랑!
유리가 산산히 깨지며 내 츄리닝을 찢어발겼다.
몇몇 조각은 방호복에 박혔다.
그것으로 끝난 게 다행.
타타타타탕!
또 한 번 총격이 쏟아지며 내가 있던 자리는 걸레짝이 되어 버렸으니까.
'미친놈들.'
야외 전투는 절대 불가.
수가 너무 많다. 지금까지 내가 상대했던 놈들과 다르게 총기 다루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다.
다시 몸을 날렸다.
건물 내부로 통하는 유리문을 뭉개고 진입한다.
이어, 근처에 보이는 계단을 타고 빠르게 3층까지 올라갔다.
부랑자들이 희희낙락 뒤를 쫓아왔다.
"죽이자!"
"돈 벌자!"
"약! 약을 줘!"
"저놈만 죽이면 부자 된다!"
나는 심장을 어루만지며 인상을 썼다.
찢어질 듯이 아프다.
피 대신 끓는 물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전신 혈맥이 부글부글 끓고 마력 회로에도 과부하가 걸린 상태.
병원이나 신전에 가야 할 시점이지만 나는 특성만 교체했다.
[에인헤랴르 연공법][활기][원기왕성]
이 세 개가 어느 정도 해줄 테니.
[사격][통찰][은신]
전투는 이 셋으로 치르자.
나는 3층 복도에 숨어 동태를 살폈다.
'네 명.'
둘씩 짝을 지어 계단을 올라오는 중이다.
철저히 사주 경계를 해가면서.
여기서 확신할 수 있었다.
저들이 먹은 마약이 평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흔히 전투 마약, 유저끼리는 도핑이라고만 불렀던 그것.
빈 상가 유리벽에 비친 내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거 익숙한데······'
아케인 서울을 하다 보면 돌발 이벤트가 가끔 발생한다.
대표적인 것이 습격.
그중 부랑자들에게 전투 마약을 먹이고 총기류를 들려 공격해 오는 초인이 몇 있었다.
제압해서 영입해도 좋고, 죽이고 본거지를 털어 파밍해도 좋았다.
'지금 시점에 대림동이면 하나, 아니 셋 중 하나지.'
오래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탓.
둔탁한 발소리가 지척에서 울려퍼진다.
나는 사격을 투척으로 바꾸고 미리 쥐고 있던 수류탄을 굴렸다.
또르르륵 굴러가서는 똑똑똑 하고 계단 아래로 떨어지는 수류탄.
"어?"
"어?"
부랑자들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 시점에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꽝!
폭음과 함께 파편이 부랑자들을 쓸어버린다.
계단 위로 올라온 넷은 물론 아래에서 대기하던 부랑자들까지.
"죽어!"
나는 상반신만 내밀고 3점사를 긁었다.
엎어진 부랑자들은 물론, 2층에 보이는 부랑자에게도 총알을 박아준다.
부랑자들이 털썩털썩 쓰러졌다.
'이탈하자.'
유탄 발사기나 로켓포는 안 보이긴 했다.
하지만 부랑자들도 수류탄 정도는 있겠지.
수류탄을 마구 던지면서 3층 전체를 청소하면 나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빠르게 옥상으로 올라갔다.
꽝! 꽝!
뒤늦게 발아래에서 폭음이 터졌다.
"흐."
옥상 철문을 박차고 나온 다음, 흐리게 잇소리를 냈다.
사방이 포위당해 있었다.
건물 입구는 물론 건물 전체를 인간 띠처럼 두르고 총을 겨눈다.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옥상이다! 옥상이야!"
"쏴! 쏴!"
"돈이 옥상에 있다!"
타타타탕!
지긋지긋한 총소리.
그러나 건물 아래에서 옥상의 나를 맞추기란 어려운 법.
나는 차분하게 골프백을 끌렀다.
소총을 집어넣고 유탄 발사기를 꺼냈다.
예전에 쓰던 언더배럴형 단발 유탄 발사기가 아니다.
새로 장만한 6연발 스탠드얼론 유탄 발사기.
리볼버를 닮은 회전형 실린더가 뚱뚱하고 무겁지만 화력만큼은 발군.
초인도 뭣도 아닌 약쟁이쯤은 간단히 쓸어버릴 수 있었다.
유탄을 한 발 한 발 실린더에 밀어 넣는다.
다른 손으로는 수류탄을 까서 사방에 던졌다.
"이거나 먹어라!"
슈욱! 슈우욱!
이내 수류탄이 작동해서 매캐한 연기를 뿜는다.
최루탄.
나는 방독면을 착용하고 있어 괜찮지만 부랑자들은 어떨까?
바로 반응이 있었다.
"켁! 케엑!"
"아오, 씹!"
"최루탄이다!"
"시발! 방독면 있는 새끼!"
"방독면이 어딨어 병신아!"
지상은 금세 아비규환으로 변한다.
약 기운으로 취한 가운데 부랑자들은 눈물 콧물을 아주 쏙 뺐다.
지금이 내가 나서야 할 시간.
골프백을 짊어지고, 유탄만 최대한 빼서 검총 허리띠에 한 땀 한 땀 결합했다.
척.
난간에 발을 딛는다.
총소리가 산발적으로 울리지만 위협적인 공격은 없다.
통찰과 탐지를 극한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가올 반격에 가슴이 설렐 뿐.
휘익!
날아올랐다.
도약으로 맞은편 건물 옥상에 착지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달린다.
옥상을, 건물과 건물 위를, 한 마리 날다람쥐처럼 신속하게 질주한다.
"어어?"
"저기! 저기!"
한 부랑자가 날 가리키지만 이미 늦었다.
내 총이, 유탄 발사기가 바로 그 부랑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범한 총과는 확연히 다른 생김새.
훨씬 뚱뚱하고 짧은 총신.
퉁!
방아쇠를 당겼다.
둔탁한 반동이 내 어깨를 밀 듯이 때렸다.
그리고 선명히 보이는 검은 점 하나.
부랑자들 틈으로 파고드는 장면이 내 망막에 또렷이 맺혔다.
꽈앙!
화염은 없었다.
폭음이 터지고 먼지가 화악 일어났을 뿐이다.
그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인마살상용 유탄이 터지고 파편이 휩쓸면서 반경 5미터 내 생명을 모조리 꼬꾸라뜨린 것.
"크악!"
"으어억!"
부랑자들이 나자빠졌다.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신을 찾고 세상을 저주하며 숨통이 끊어진다.
더 무서운 점이 뭔지 알아?
내 유탄 발사기는 무려 6연발이라는 것이다.
퉁 퉁 퉁 퉁 퉁!
다섯 번 더 발사!
내 눈에 보이는 부랑자들 전원이 시체가 되었다.
타타탕!
산발적인 반격이 날아오지만 위협적인 건 없었다.
그걸 증거하듯 위기 감지 특성도 조용했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되지.
다시 자리에서 이탈했다.
멀찍이 돌아가서, 골목을 뛰어넘은 다음 자리를 잡고 유탄을 갈겼다.
쾅 쾅 쾅 쾅 쾅 쾅!
부랑자들이 속절없이 쓸려나간다.
유탄에 당한 부랑자만 수십 이상.
안타깝지만 더는 학살할 수가 없었다.
유탄이 바닥난 까닭.
'유탄 좀 많이 살걸.'
부피와 무게 때문에 조금밖에 못 산 게 아쉬울 지경.
유탄 발사기를 대충 아무렇게나 던졌다.
소총을 꺼낸 다음 가슴을 어루만져 본다.
잠깐 사이 역류가 멈추고 마력 흐름이 정상화되었다.
[사격][조준][저격]
[통찰][민감][은신]
사냥의 시간이다.
망원조준경과 소염기를 소총에 장착한 다음 자리를 떴다.
호쾌하게 도약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옥상 한 곳에서 한 번 저격을 하고 반드시 위치를 옮겼다.
그렇게 저격, 저격, 저격, 저격, 저격을 했다.
부랑자들이 우왕좌왕하는 게 보였다.
"젠장! 어디야! 어디에 있냐고!"
"안 보여!"
"튀어야 하는 거 아냐?"
"튀면? 그 새끼가 우리를 가만히 두겠냐? 어? 가만히 두겠냐고!"
"빌어먹을. 해독제 받아야 하는데······"
민감 특성을 장착해서일까?
아니면 부랑자들 목소리가 커서일까?
옥상에 있는데도 떠드는 소리가 귓속까지 들어왔다.
거기서 결정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해독제.'
현상금을 거는 독에 중독시키고 습격해 오는 초인.
구로구, 특히 대림동에서 활동하는 초인.
이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놈은 하나밖에 없다.
[R 인간 사냥꾼]
등급이 낮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치사, 졸렬, 비겁한 전투의 대가니까.
인간 사냥꾼만 아니라 그 동생인 폭탄마, 해체 전문가도 그렇지.
사실 내가 대인 전투 시에 쓰는 전술도 이놈에게 유래했다.
철저히 안전한 지역에 숨어서 고화력을 퍼부어 승리를 따내는 것.
'어디 있지?'
함정은 파훼했다.
제 2파 부랑자 습격도 사실상 끝났다.
제 3파, 저격이 날아올 차례였다.
마력 방어막으로는 못 막는다.
대구경 대물 저격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걸 막으려면 마력 방패는 사용해야 하는데 어디서 날아올 줄 알고 마력 방패를 쓰겠나.
'후퇴할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머리를 흔들었다.
여기서 놓치면 인간 사냥꾼은 보다 치명적인 계획을 세워서 공격해 온다.
심지어 동생인 폭탄마와 해체 전문가도 합류한다.
생각해봐라.
오늘 동원한 자원만 철권파 갱단원, 대림동 부랑자 수십, 폭탄, 독, 마약, 소총, 기관단총, 수류탄 등등이다.
적어도 십몇억은 썼을걸?
그런데 이것보다 더 장대한 규모로 습격한다?
그쯤 되면 지금의 나로서는 대처하기가 힘들다.
끝을 봐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사기가 털려 갈팡질팡하는 부랑자들.
그들 중심으로 힘껏 뛰어들었다.
[도약]
5층 건물에서의 투신.
주유소 화재가 어느덧 이곳까지 번져왔다.
이글대는 화염 속, 열풍이 불어와 나를 할퀴고 지나간다.
그러나 뜨겁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고도로 집중된 정신 아래 가늠자와 가늠쇠가 성표처럼 크게 확대될 뿐이다.
[집중][사격][조준]
탕! 탕탕탕!
신들린 듯이 방아쇠를 당긴다.
연발이 아니라 단발.
삼점사도 아니라 단발.
부랑자가 픽픽 쓰러진다.
하늘에서 덮쳐오는 총알에 어느 하나 대항하지 못했다.
누구는 정수리에 누구는 미간에 누구는 관자놀이에 총알이 박혀 피와 뇌수를 함께 쏟을 뿐.
콰앙!
사람이 착지했는데 폭음이 울렸다.
가까이 있던 부랑자가 총을 들이댔지만 내가 더 빨랐다.
총을 거꾸로 쥐고 휘두른다.
개머리판이 얼굴을 으깨고 부랑자를 날려버렸다.
[총격술][강타]
옆에 있는 부랑자 둘이 반응하며 총을 들었다.
타타탕!
이번에는 늦었다.
코앞에서 총알을 뒤집어썼다.
그러나 쉽게 막고 만다.
이미 특성을 교체한 다음이었으니.
[마력 방어막][방어]
총알 수십 발이 쏟아졌지만 마력 방어막은 굳건하다.
철컥. 철컥.
삽시간에 비어버린 탄창.
부랑자 둘이 당황해서는 서로를 마주 본다.
씨익, 나는 방독면에 가려 보이지 않을 미소를 지었다.
허리띠에 꽂아둔 탄창을 꺼내 교체한다.
쇳소리가 울리고 부랑자들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곧, 너 나 할 것 없이 등을 돌렸다.
"튀, 튀어!"
"사, 살려줘!"
자비는 없다.
먼저 총을 겨눈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정도로 나는 무른 인간이 아니다.
타앙! 타앙!
단 두 발.
도망치던 부랑자들이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작은 소란이 번졌다.
다들 봤으니까.
눈앞에서 난사한 총을 내가 마력 방어막으로 막아내는 광경을.
거기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듯 낙하하며 총을 쏴서 한 발 한 발 명중시키고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부순 건 또 어떠냐.
이 모든 것이 오직 한 가지 가능성을 가리켰다.
"씨발! 초인이잖아!"
"최소한 3레벨이야!"
"초인이란 말은 없었잖아!"
"튀어! 다 죽는다! 다 죽어!"
소총이고 기관단총이고 다 내팽개치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상황 파악이 너무 느린 거 아니냐?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독에 중독되고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무슨 판단을 하겠냐고.
전투 마약이니까 총기 조준하는 솜씨야 늘려줬겠다만.
타타탕!
개의치 않고 총을 쏘았다.
타타타타탕!
연사로 갈겼다.
탕! 탕! 탕!
좀 멀면 단발로 꿰뚫었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칼날처럼 벼려진 정신이 주위 모든 것을 시야에 담는다.
그래서 부랑자들은 벗어나지 못했다.
단 한 명도.
최소한 내가 인지한 부랑자들은 모조리 죽었다.
유탄에 갈기갈기 찢어 죽든, 총알에 머리나 심장이 관통당하든 해서.
머리가 뜨거웠다.
소총 총열에선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하도 탄창을 갈아대며 싸워서일까?
손이 유독 가볍고 마지막 탄창이 빨려들 듯 손아귀에 들어온다.
[급속 장전] 특성.
철컥.
1초도 걸리지 않는 재장전.
더는 총을 쏴야 할 상대가 없다.
그래서 더 긴장했다.
인간 사냥꾼이 저격한다면 바로 지금이니까.
역시나 그랬다.
정면에서 약간 비껴간 11시 방향.
홍염을 배경처럼 깔고 앉은 5층 건물.
옥상에서 사금파리 같은 빛이 일순 번쩍였다.
조준경 반사광.
저격수가 내리는 죽음의 선언.
뒷목이 당긴다.
전신 솜털이 뻣뻣하게 일어선다.
통찰과 위기 감지가 한꺼번에 작동한다.
급속히 확대되는 고글 화면 속.
작은 불꽃이 소담하게 피어난다.
격발염.
총알보다 먼저 살의가 내 이마를 꿰뚫었다.
뒤늦은 총성이 날 덮치기 직전.
나는 쓰지 않았던 마법칩을 쥐고 차갑게 웃었다.
인간 사냥꾼 -3-
쇼핑몰 금역에 들어갈 때 준비했던 그 마법칩.
단숨에 부러뜨렸다.
빛이 날 감싸고 공간 이동시킨다.
수십 미터를 뛰어넘자 총알은 허무하게 저 뒤에 박혔다.
"거기냐?"
땅을 박찬다.
전력을 다해 질주한다.
화르륵!
하필이면 불타는 주유소가 눈앞에 있었다.
멀리 돌아간다?
그럴 시간은 없었다.
저격수는, 인간 사냥꾼은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단 1분만 늦어져도 다른 위치에 자리를 잡고 날 저격하겠지.
혹은 도망가거나.
그 꼴은 못 본다.
입을 삐뚜름하게 들어올렸다.
특성을 교체하고 과감하게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화염 저항][인내][에인헤랴르 연공법]
[질주][도약][흑염]
화염이 날 잡아먹기 직전.
흑염을 피어올리며 날아올랐다.
화아악!
세상이 붉게 변한다.
뜨거운 공기가 나를 뒤덮었다.
그러나 견딜 만하다.
흑염이 일차적으로 걸러주고, 화염 저항과 인내가 막아주었으니까. 일반적인 불꽃도 아니고 기름이 연소하며 타오르는 화염인데도 그러했다.
숨 참고 질주한 것은 고작 몇 초.
불지옥이 된 주유소를 뚫고, 그 인근의 화마까지 관통하여 대로변 맞은편에 도착했다.
반사광이 보인 5층 건물까진 바로 지척.
기다렸다는 듯 또 빛이 번뜩였다.
탕!
"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특성을 교체하고 몸을 꺾었다.
[회피][기동]
몸이 확 틀어진다.
관성을 무시하는 것처럼 수직으로 이동하고, 여릿하게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어릿한 충격이 느껴졌다.
총알이 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간 것.
소름이 돋는 한편으로 피가 올라 머리가 뜨거워졌다.
"거기냐!"
다시 기동.
정면을 향해 도약한다.
5층 건물을 향해. 지상에서는 높게만 보이는 옥상 방향으로.
비상하는 새처럼 날아오른 나.
단숨에 5층 건물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대신 중간쯤, 3층 유리창을 깨부수며 진입했다.
와장창!
유리창이 요란하게 깨진다.
나는 바닥을 구르며 눈을 번뜩였다.
[통찰]
헬멧의 탐지 능력과 결합하여 순간적으로 3층 상태를 판단한다.
함정은 없다.
그것을 깨달은 즉시 신속 질주.
4층을 가로지르고 5층을 넘어 옥상에 도달한다.
꽝! 꽝! 꽝!
옥상 철문을 열고 수류탄 투척.
설치된 함정들이 발동하며 붉은 화염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소이탄 함정.
역시 인간 사냥꾼이다.
게임에서 보이는 패턴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 갔지?'
재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고글이 광량을 조절해주지만 인기척은 이미 없다.
내가 3층에 진입한 시점에 자리를 피한 것.
더 자세히 확인하려 몸을 내밀 때 차가운 경고가 내 목덜미를 핥았다.
투투투투투!
"헙!"
위기 감지가 아니었으면 죽었다.
통찰도 장착하지 않은 상태였잖아.
내가 몸을 숙이자마자 총알이 날아왔다.
완전히 연사로 긁어대는 경쾌한 총성.
소총과는 다른, 좀 더 날카로우면서 가벼운 소리.
기관총이다!
저기 노출되면 마력 방어막으로도 못 막는다.
아까 집중 사격 당했을 때처럼 깨져 버린다고.
마력 방패를 쓸까?
아니다. 마력 방패는 마력 소모가 너무 크다. 차라리 다른 방법을 쓰도록 하자.
딸깍.
수류탄을 꺼내 안전핀을 제거했다.
투투투투투!
총소리를 듣고 거리와 방향을 계산한다.
정확히 정면.
거리는 의외로 가깝다.
기껏해야 20미터 앞.
철저히 계산을 마친 다음 연달아 던졌다.
[투척]
특성을 장착한 상태로.
슈욱! 쉬익! 쌔액!
연속으로 투척한 수류탄만 다섯 발!
이내 반응이 있었다.
번쩍 빛이 터지면서 세상이 하얗게 물든 것.
잠시 후 푸시시 소리와 함께 새하얀 연막이 피어오른다.
섬광탄 한 발에 최루탄 네 발.
이것만으로 인간 사냥꾼이 제압되진 않는다.
인간 사냥꾼은 나처럼 고글과 방독면이 딸린 헬멧을 쓰고 다니니까.
그래도 시야를 방해할 수는 있겠지.
고글이 막아준다고 하나 섬광탄은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고, 최루탄이 피우는 연막을 꿰뚫어 보는 건 인간 사냥꾼의 특성으로는 불가능하니까.
탁! 타닥!
달렸다.
질주, 기동, 도약, 돌진을 장착하고 뛰쳐나갔다.
투투투!
총알이 날아오지만 공격 영역을 빠져나간 다음.
총알이 나를 쫓아온다.
빨랫줄 같은 예광탄이 가까워지고 있다.
바로 지척까지 도달한 오렌지색 빛줄기를 보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하여 막 내 몸을 뚫기 직전.
힘차게 날아올랐다.
"으아압!"
사실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것은 자살 행위.
더는 회피 기동할 수 없게 되니까.
그래서였을까?
움찔, 예광탄 줄기가 끊겼다.
잠깐의 적막.
인간 사냥꾼은 분명 나를 조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더 빨랐다.
예광탄이 알려준 인간 사냥꾼의 위치.
거기다 대고 소총을 겨눈다.
공중에 뜬 채 실시간으로 특성 교체.
[사격][조준][저격]
[집중][심호흡][통찰]
집중력이 고조된다.
머리가 뜨거운 가운데 시야가 흐릿해진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한 점.
조준경 속 보이는 흐릿한 그림자 하나.
위장포를 덮어쓴 채 거무튀튀한 총신을 길쭉이 내민 그것.
인간 사냥꾼!
타앙!
누가 먼저였을까?
확실한 것은 내가 방아쇠를 당긴 순간, 위장포가 크게 출렁이면서 검은 액체가 한 줄기 튀어올랐다는 점이다.
투투투투!
반격해오는 인간 사냥꾼.
오렌지빛 예광탄이 내 전신을 두들긴다.
그러나 사격 직후 나는 특성을 교체한 다음이었다.
마력 방어막이 빵빵하게 부풀어 총알을 막았다고.
피격 충격으로 조준이 크게 빗나간 기관총.
몇 발은 운 좋게 날 맞췄지만 그 직후 영점이 흩어지며 사방팔방으로 덧없이 퍼져 버렸다.
이 정도로 내 마력 방어막을 깨뜨릴 수는 없다.
끔찍하도록 길게 느껴진 체공을 마치고 착지.
벼락처럼 특성을 교체했다.
몸이 가벼워진다.
한 발짝 땅을 박찼을 때 이미 건물 옥상을 반쯤 가로질렀고, 두 발짝째에는 옥상 난간에 도달했으며, 세 발짝째에는 비상하여 인간 사냥꾼이 있는 건물에 내리꽂혔다.
"비, 빌어먹을!"
인간 사냥꾼이 새된 소리를 지른다.
침착하게 소총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그러나 빗나갔다.
총구가 불을 뿜기 직전 인간 사냥꾼이 몸을 빼낸 까닭이다.
엎드린 상태에서 뒤로 공중돌기를 한, 실로 곡예에 가까운 동작.
아니,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서 있는 상태라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엎드린 자세에서는 불가능한 움직임.
이걸 설명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이탈] 특성.
인간 사냥꾼의 시작 특성 중 하나였다.
[저격]과 [이탈].
여담이지만 뽑기가 아니라 퀘스트로 영입하는 3레벨 인간 사냥꾼은 [조제]와 [함정]이 추가된다.
"먹고 떨어져!"
인간 사냥꾼이 허리띠에서 보석 같은 것을 꺼내 던졌다.
은은한 누런색으로 빛나는 유리 뭉치.
내가 착지할 지점에 먼저 부딪혀서는 깨지고, 입체 마법진을 순식간에 구축한다.
입체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
당황하지 않았다.
무슨 함정인지 아니까.
소총을 난사하여 인간 사냥꾼을 견제한 다음, 총알이 다한 소총을 미련 없이 버렸다.
파앗!
입체 마법진이 작동한다.
거의 동시에 마총을 뽑았다.
반지에 저장된 마력이 마총을 일깨우고 입체 마법진이 화려한 섬광을 뿜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인간 사냥꾼이 착지.
숙련된 손길로 기관총을 내게 겨눈다.
내가 기다리던 타이밍이었다.
게임과 똑같았다.
행동 패턴도, 패턴 소화에 걸리는 시간도.
결과적으로 나는 완벽하게 인간 사냥꾼의 시간을 빼앗았다.
푸슉!
돌진하듯 뛰쳐나간 검은 불꽃.
작은 콩알 같은 빛줄기가 인간 사냥꾼을 직격했다.
그 가슴을.
방탄복을 입었는지 유독 두툼하고, 방어 마법 아티팩트를 활성화하여 은은히 굴절되어 보이는 지점을.
인간 사냥꾼이 딱 정지했다.
몸이 굳는 것이 보인다.
막 내게 조준하던 기관총이 흔들린다.
이내 터지는 비명.
"끄아아악!"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절규.
이쯤에야 함정 마법진이 발동했다.
내가 디딘 콘크리트 옥상이 늪처럼 변해서 날 빨아들인다.
아울러 석순이 자라나 내 몸을 꽁꽁 묶었다.
대지 속성 함정 마법.
이거야말로 인간 사냥꾼의 장기였다.
일단 묶어놓고 기관총이나 폭탄을 갈기는 것.
하지만 지금은 흑염에 당했으니 그럴 정신이 없을 것이다.
"끄아악! 끄아아악!"
인간 사냥꾼이 비명을 지르면서도 기관총을 쏜다.
총알이 사방팔방으로 빗나갔다.
불에 타면서 총을 조준한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베트남 틱광득 스님의 소신공양이 괜히 세계적인 충격을 가져온 게 아니라고.
신열은 정신이라도 맑아지지 흑염은 그런 것도 없고.
"후읍!"
나는 묵직하게 심호흡을 했다.
벌써 무릎까지 콘크리트 늪에 잠겼다.
몸통과 팔을 석순이 꽁꽁 얽매어 움직이기 어려웠다.
방심하고 있다가 눈먼 총알에 맞기라도 하면 낭패.
[마력 방어막][인내][결의]
세 특성으로 마법 피해를 줄인다.
[근력][괴력]
두 특성으로 조금씩 늪에서 헤쳐나온다.
오른손 장갑이 피를 빨고 허리띠가 빛을 발하며 날 돕고 있었다.
[정화]
체내에 침습한 대지 속성 마력은 이걸로 소멸시킨다.
콘크리트 늪을 허우적대며 차분히 전진.
약 십여 초 만에 빠져나왔다.
성수를 붓고 아티팩트를 작동시켜 흑염을 꺼뜨린 인간 사냥꾼이 몸을 떨며 나를 쳐다본다.
"빌어 처먹을!"
기관총은 없다.
몸부림치며 자기도 모르게 던져 버린 까닭.
허리띠에 찬 권총과 기관단총을 만져보고는 냅다 도망친다.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마법 함정을 연거푸 깔면서.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차분히 쫓아갔다.
마법 함정이 절묘한 위치에 깔려 있었지만 무시한다.
그냥 몸으로 들이받았다.
신속, 질주, 도약, 돌진을 절묘하게 섞어 쓴 까닭에 마법 함정에 걸리면서도 속도가 꽤 나았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대지 저항]
바로 이 특성.
새롭게 얻은 특성 때문에 함정에 걸려도 2, 3초면 헤쳐나올 수 있었다.
인간 사냥꾼이 신속, 하다못해 질주나 가속 정도만 있었어도 도망쳤겠으나 인간 사냥꾼이 가진 건 위기 탈출용 이탈뿐이다.
진득하게 쫓아가서일까?
내 시야에 붉은 화살표가 생겨 인간 사냥꾼을 가리켰다.
[추적] 특성.
이제 인간 사냥꾼은 나를 벗어날 수 없다.
"젠장할! 죽어!"
타타타탕! 탕탕!
콰콰쾅!
인간 사냥꾼이 악에 받쳐서는 반격해 온다.
기관단총 난사.
권총 사격.
수류탄 투척.
다 의미 없었다.
빵빵한 마력 방어막 믿고 대놓고 들이댔으니까.
그나마 수류탄이 위협적이었으나 내겐 통찰이 있다.
인간 사냥꾼이 안전핀을 뽑으려고 하면 마총을 연사해서 제대로 던지지 못하게 견제했다.
이미 한 차례 뜨거운 맛을 본 몸.
성수도 아티팩트도 바닥났을 것이다.
결국 인간 사냥꾼은 유효한 반격을 하지 못한 채 구석에 몰렸다.
대로변 어느 상가 건물 옥상.
맞은편에는 지나치게 넓은 대로.
옆에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아파트 단지.
뒤쪽으로는 조그마한 초등학교 운동장.
더는 파쿠르하여 도망칠 구석이 없다.
인간 사냥꾼이 힐끔 뒤를 보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으흐흐······ 으하하하!"
철컥.
나는 골프백에서 산탄총을 꺼내 장전했다.
"유언은?"
"시이발······"
인간 사냥꾼이 손을 떤다.
더는 남은 것이 없을 것이다.
총, 폭탄, 함정, 소모품 모두 썼을 테니.
이 경우 인간 사냥꾼은 두 가지 행동 중 하나를 보인다.
마지막 발악 아니면 항복.
"후우우."
길게 숨결을 불어낸 인간 사냥꾼.
"마지막으로 담배 하나만 태워도 되나?"
"마음대로."
인간 사냥꾼이 떨리는 손을 방탄복 가슴주머니에 가져갔다.
거기서 꺼낸 것은 두툼한 시가 하나.
방독면을 벗는다.
고글도 뜯어 던져 버린다.
오직 어떤 행동을 할 때만 보여주는, 인생사 우여곡절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중늙은이의 얼굴.
주름진 얼굴이 시가를 베어문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오색 마력광이 반짝이고 청록색 마력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참으로 맛나다는 듯이 시가를 쪽쪽 빠는 인간 사냥꾼.
나는 속으로 숫자를 다섯까지 센 후 물었다.
"맛있냐?"
"음?"
"맛있냐고."
"흐, 당연히 맛있지. 아주 개꿀맛이야. 애송이 뒤통수를 맛깔나게 후려갈기는 맛!"
인간 사냥꾼이 시가를 뱉는다.
시가가 공중으로 치솟는다.
한 바퀴 두 바퀴 돌아가며 마력광과 마력 연기를 제멋대로 뿜는다.
그와 함께 인간 사냥꾼의 육체가 경직된다.
동공이 일점으로 축소되고 입은 길게 찢어졌다.
명백한 돌연변이 현상.
그러나 거기서 강제로 멈추게 된다.
탕!
이 한 발의 총성 때문에.
내가 속으로 숫자를 열까지 센 후 발사한 총알 때문에.
"어······"
인간 사냥꾼이 자기 가슴을 내려다본다.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대구경 슬러그탄이 관통하고 지나간 것.
구멍 속에는 심장이 없다.
뭉개진 살점과 핏물이 뚝뚝 떨어질 뿐이다.
"이게······ 이게 무슨······"
심장이야말로 변이의 시작점.
변이체의 최중심.
마력핵이 괜히 심장에서 생성되는 게 아니다.
변이가 완료한 다음이라면 모를까 막 시작하는 때라면 총질 한 방으로 끝장낼 수 있었다.
"크억, 커억, 커어억."
육체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살갗도 근육도 죄다 흘러내리며 뼈와 분리되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서 말했다.
"차라리 항복하지."
"흐어어, 흐어어억."
"그럼 살려줬을 건데."
진심이었다.
명색이 R 등급 초인이다.
나중에 배반하지도 않는다.
능력도 막 부리기에 딱 좋다.
굳이 죽일 이유가 있어?
인간 사냥꾼이 머리를 들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는 필사적으로 입을 연다.
"허억, 흐어억, 내, 내 동생들이 너를, 너를······"
"어, 알아."
그래봐야 내 밥이지.
어떤 식으로 습격해 올지 어떤 특성과 능력이 있는지 다 아는데.
"잘 가라."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인간 사냥꾼.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다.
탕!
산탄총이 불을 뿜고.
머리 잃은 시체가 앞으로 쓰러졌다.
증거 -1-
증거
'왜지?'
나는 머리 잃은 시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앞서 말했듯 인간 사냥꾼은 궁지에 몰리면 마지막 발악을 하거나 항복한다.
그중 항복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래서 좀 뜻밖이었다.
인간 사냥꾼은 왜 발악하는 걸 선택했을까?
그것도 특수한 마약을 사용해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한 번 변이체가 되면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는데도.
'이유가 있겠지.'
인간 사냥꾼의 시체를 뒤졌다.
허리띠, 방호복 호주머니, 방호복 아래 받쳐 입은 옷을 자세히 확인한다.
건진 건 딱 하나. 얍실한 반지갑이 전부였다.
그 흔한 스마트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반지갑에는 신분증과 카드키, 신용카드가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신분증.
얼굴은 똑같은데 이름은 여럿.
카드키마다 주소와 함께 이름이 적혀 있다.
[종로구 사직동 A 스테이트 b동 cde호]
[김대식]
이런 식으로.
활활.
불길이 다가온다.
주유소에서 시작된 화재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그러나 삐뽀삐뽀 하는 경보음은 들리지 않는다.
당연히 질주해야 할 소방차는 없다.
대신 주민들이, 또 험상궂은 덩치들이 나와 자체적으로 진화 작업에 나섰을 뿐이다.
"젠장! 어떤 새끼야!"
"또 개판이 났네."
"옘병. 이 엿 같은 동네를 뜨든지 해야지."
"뜨면 어디로 갈 건데? 강남 안 가면 다 똑같아. 정부 새끼들은 우리 같은 서민한테는 관심 하나 없다고."
"사람 넘쳐난다 이거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나 보다.
분말 폭탄을 터뜨리고 물을 뿌리는 솜씨가 굉장히 능숙했다.
나는 은신 특성을 활성화해서 슬며시 몸을 뺐다.
괜히 저들과 마주치면 좋을 일이 없으니까.
'진짜 무법지대구나.'
동쪽으로 한참을 걸었다.
동작구를 지나 신림동에 들어와서야 마음이 놓였다.
"후우우."
비로소 긴장이 풀린다.
슬슬 새벽.
아직 날이 어두웠다. 길가에는 인기척 하나 없다.
굶주린 들개가 길고양이를 사냥하다 말고 날 보고 짖어댔다.
"컹컹! 컹!"
한두 마리가 아니다.
슬며시 모여드는 들개들.
최소한 열 마리 이상.
힘 빼고 앉아 있으니 내가 사냥감으로 보였나 보다.
나는 실소를 한 번 흘리고 특성을 하나 바꿨다.
[위압]
"꺼져."
목소리를 잔뜩 깔고 내뱉은 한 마디.
즉각 효과가 나타났다.
"깨갱! 깽!"
"깨개갱!"
들개들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친 것.
그걸 보고 새삼 실감하게 된다.
여기는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을 습격하는 들개 무리?
원래 세계였다면 뉴스를 타고도 남을 일이다.
하물며 서울에서 들개가 사람을 보고 입맛을 다신다?
"쯧."
혀를 차며 일어섰다.
이러고 늘어져 있을 때가 아니지 싶어서.
인간 사냥꾼은 기본적으로 살인청부업자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를 노릴 때는 항상 뒤에 누군가 있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넋 놓고 있다간 들개 같은 인간들에게 뜯어먹힌다.
청부살인업자들에게 몰이 사냥당하고, 결국은 목이 따이고 만다!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
나는 인간 사냥꾼에게 빼앗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키를 일일이 확인한다.
[종로]
[홍대]
[건대]
[가디]
[반포]
정확히 다섯 개.
스마트폰으로 주소를 검색해 보니 모두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다섯 개 모두 쓰는 이름과 신분이 달랐다.
'집이 다섯 개나 있어?'
안전가옥 같은 걸까?
스파이 영화에서 많이 나오잖아.
서울 곳곳에 거점을 두고 활동했으면 말이 되지.
보급하기도 편하고 위험하다 싶으면 신분 하나 버리고 다른 집으로 도망치면 되니까.
"가디로 가주세요."
택시를 불렀다.
선글라스를 낀 택시 기사가 말없이 가산 디지털 단지로 날 옮겨준다.
현금으로 계산하고 내렸다.
이곳은 불야성.
새벽 2시 늦은 시간인데도 건물마다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도로는 넓고 가로수는 잘 관리되어 있으며, 저층 건물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멀지 않은 대림동과 또 대비되는 구역.
'여기구나.'
마침 내가 가야 할 오피스텔이 근처에 있었다.
편의점에서 마스크와 모자를 사서 얼굴을 가렸다.
무장은 마총만 빼고 골프백에 넣은 다음 진입.
경비는 엎드려 자느라 내가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삐익!
카드키를 대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고속 엘리베이터가 순식간에 솟구치고 꼭대기 층에 정지한다.
상당히 좋은 집에 사는 모양.
하긴 1레벨 초인만 해도 억대 연봉은 우습다.
그런데 3레벨에 청부살인업자다.
억대가 아니라 수십 수백억을 벌고 있겠지.
띠리링.
카드키로 도어락을 열고 들어갔다.
혹시 한패가 있을지도 모른다.
게임에서는 아니었지만 여기는 현실이니까.
나는 마총을 움켜쥐고 살금살금 진입했다.
은신을 활성화한 상태.
탐지와 통찰을 최대한 발휘해서 안을 살펴본다.
전형적인 투룸형 오피스텔.
화이트톤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예쁘다.
거실 통창을 통해 바깥의 불야성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열린 방문.
언뜻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가구들.
푹신해 보이는 킹사이즈 침대 위에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이불을 다 걷어차고 몸매를 다 드러낸 채 잠든 여성.
어려 보인다.
20대 초반이나 될까 싶다.
연예인을 해도 될 법한 화려한 외모.
딸일까?
50대로 보이던 인간 사냥꾼을 생각하면 20대 초반 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그럴 리가 없지.'
나는 속으로 냉소를 보냈다.
둘이 무슨 관계인지는 명확하다.
애인이겠지.
돈과 권력으로 맺어진.
이 세상 초인들은 애인 여럿을 만드는 게 다반사니까.
뭐, 원래 세계에서는 안 그랬나.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하다.
'잘못 왔나?'
투구에 마력을 주입해 탐지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걸리는 것은 없었다.
침대에 누운 여자가 숨을 쉬느라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만 보일 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인간 사냥꾼이 자기 애인 집에 뭘 좀 숨겨놨을까?
나라면 절대 안 한다.
급할 때 쓸 현금, 총 정도는 둘 수 있지.
최악의 순간에는 그거라도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비밀 장부나 고객 명부, 거래 증거, 중화기나 폭탄, 마법 함정 같은 민감한 물건을 두려고 할까?
결혼한 것도 아니고 피가 이어진 것도 아니다.
돌아서면 그냥 남.
협박당하든 회유당하든 해서 자기 적에게 넘어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여자를 협박해서 취조할 수도 있겠으나······
아는 게 없을 확률이 99%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몸을 돌릴 때였다.
"으으응······"
여자가 길게 숨을 뱉었다.
내 기척을 느낀 걸까?
그럴 리 없다.
나는 지금 은신을 활성화하고 있으니까.
당황하지 않고 벽 너머로 몸을 숨겼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몸을 반대쪽으로 틀며 잠꼬대를 했다.
"흐응······ 스테이크 맛있어······"
스테이크 먹는 꿈이라도 꾸나?
속으로 열을 세고 문을 열고 나갔다.
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탄 다음 가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십 년 감수했네."
주머니에 넣어둔 카드키를 만져본다.
이러면 다른 집도 비슷한 상황일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 애인한테 얻어준 집이겠지.
일주일에 한두 번 가서 성욕만 풀었을 거고.
설마 진짜 집은 아예 머릿속으로만 기억해 둔 거 아냐?
'그건 아냐.'
확실하다.
왜냐하면 게임에서 그랬거든.
인간 사냥꾼 시체를 털면 반드시 카드키가 나왔고, 그 카드키를 사용하는 것으로 인간 사냥꾼의 아지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서 인간 사냥꾼이 쓰던 여러 장비와 소모품, 습격을 사주한 진범의 정체를 알아내게 되고.
게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상.
하지만 뼈대만큼은 게임과 굉장히 흡사한 만큼 이 기본 골자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반포.
여기는 집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달짝지근한 향이 풍기던 다른 네 집과 다르게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냄새가 훅 풍겼다.
화약 냄새.
또, 마약 냄새.
"빙고."
여기서 조제 특성으로 총알을 마개조하고 독과 마약을 만든 모양이다.
현관에 서서 차분히 집을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갔던 집보다 훨씬 크다.
50평대 포룸 구조.
그런데 삭막했다.
사람 사는 느낌이 안 났다. 가구는 거의 보이지도 않고 거실에 TV 하나 소파 하나 놔두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서류 더미뿐.
'이건 너무 하네.'
설마 이 안에서 증거를 찾아야 하나?
일단 방부터 확인했다.
가장 큰 방은 총기 작업실이었다.
작업대 위에 곱게 갈린 화약과 마법 촉매, 탄피가 가득 쌓여 있었다.
진짜는 그 뒤쪽.
벽면 타공판에 총기가 촘촘히 걸려 있었다.
"쩐다."
종류도 다양하다.
권총, 기관단총, 소총, 산탄총, 기관총, 저격총 등등.
심지어 로켓포와 유탄 발사기, 휴대용 미사일까지.
방호복과 고글, 방독면 같은 장비도 여럿 보였다.
죄다 쓸어가고 싶지만 손이 두 개라 한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방호복 한 벌에 저격총과 소총, 잡다한 소모품만 챙겼다.
'옷 생겨서 다행이다.'
원래 쓰던 방호복은 오늘밤 전투로 다 망가진지 오래.
조철이 마법 방호복을 완성할 때까지 임시로 쓰기 딱 좋다.
"이 새낀 돈도 많네.
그리고 타공판 옆에 탑처럼 설치한 투명 보관함.
노란색 보석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은은한 마력향을 풍기는 그것들.
다름 아닌 마법 함정.
인간 사냥꾼이 엎드려 있다가 이탈하면서 내게 던졌던 물건.
대지 속성 마법 함정은 내게도 유용하다.
묶어놓고 패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어디 있겠어?
내 골프백이 빵빵하게 차올랐다.
오늘 소모한 모든 자원을 채우고도 모자라 플러스 알파가 되었다.
최고급 방호복에 총 여러 자루, 마법 함정까지 확보했으니까.
마개조 탄환도 나쁘진 않지만······
'공산품 쓰는 게 낫지.'
당장 화력은 올릴 수 있어도 총기에 악영향을 주잖아.
부족한 화력은 내 특성으로 보충하면 된다.
골프백은 잠깐 내려놓고 다음 방으로 향했다.
두 번째 방은 약 조제실이었다.
플라스크마다 독액이 끓고 밀봉한 유리 실린더에서는 오색 마력광이 깜빡였다.
마약.
얼굴을 찌푸리고 지나치려다 말고 멈칫했다.
'비약은 괜찮지 않나?'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제작, 개조, 수리 특성.
인간 사냥꾼은 조제 하나만 가지고 마법 함정도 만들고 총알도 개조하고 독과 마약도 제작했다.
나도 충분히 가능하다.
조제 특성은 가져오면 그만이고.
마약은 부작용이 심하니 그렇다 쳐도 중요할 때 비약 복용 정도는 괜찮지.
전에 박대엽과 싸울 때도 광분 안경알을 썼었잖아.
'독은······ 안 쓰는 게 낫겠다.'
독보다 더 좋은 게 있으니까.
내가 암살자 빌드를 탄다면 생각해 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이거랑, 이거랑, 이거.'
완성품은 놔두고 철저히 재료만 챙겼다.
게임할 때 필수로 썼던 비약 레시피 정도는 내 머릿속에 들어 있다.
그것만 만들어도 조제 특성이 생길 거고 여러모로 도움이 되겠지.
세 번째 방은 침실이었다.
작은방에 커다란 침대 하나가 전부.
다른 가구는 아예 없었다.
눈으로 힐끗 한 번 본 후 지나쳤다.
대망의 마지막 방.
서재처럼 꾸며놓았다.
한쪽 벽면을 고급 원목 책장이 온통 차지했다.
책장에는 가죽 표지 한자 제목 서적이 꽉 차 있다.
그리고 책장을 배경처럼 서 있는 원목 책상, 날렵한 노트북 하나, 마지막으로 방문 바로 옆에 설치된 카메라.
뭔지 알겠다.
화상회의용 장소다.
그렇다면······
저 노트북 안에 증거가 숨겨져 있겠지.
무심코 노트북을 잡으려 손을 뻗었는데, 갑작스레 머리카락이 쭈뼛 솟으면서 식은땀이 흘렀다.
"어?"
왼손 검지에 낀 반지가 낮게 진동하고 있었다.
위기 감지 특성이 발동한 것.
급히 통찰을 장착하니 비로소 느낌이 왔다.
노트북에 손을 대는 순간 치명적인 결과가 있을 거라고.
함정을 설치한 걸까?
하지만 노트북 말고 다른 곳에서 느껴지는 위험 요소는 없다.
함정 특성을 장착하고 살펴봐도 그랬다.
한참 서재를 뒤지고 확인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와, 음흉한 새끼 봐라."
노트북 자체가 함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노트북처럼 생긴 폭탄.
손을 대기만 하면 폭발해서 집 전체를 날려 버린다고.
위기 감지 아니었으면 진짜 죽었겠다.
누가 봐도 업무용 물건처럼 연출해 놓고 함정을 설치했을 줄이야.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팔짱을 끼고 서재를 한 번 본 후 난잡한 거실과 이미 방문했던 총기 작업실, 약 조제실, 침실에 차례대로 시선을 던졌다.
과연 어디 있을까?
이럴 때 쓸만한 특성이 하나 있었다.
[추적] 특성 활성화.
인간 사냥꾼이 선물한 특성.
머릿속에서 작은 화살표가 떴다.
처음에는 갈피를 못 잡고 팽그르르 돌아가던 화살표.
내가 인간 사냥꾼에게, 인간 사냥꾼이 남겼을 증거에 정신을 집중하자 이내 한쪽으로 고정되었다.
침실.
침대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
덩그러니 놓여 있는 킹사이즈 침대를 향해서.
과연 거기 있었다.
푹신하고 두꺼운 매트리스 안.
손으로 더듬어서는 못 찾고, 매트리스를 뜯은 다음 팔을 들이밀어야 잡히는 깊숙한 지점.
작은 USB 하나가 손가락 끝에 닿았다.
증거 -2-
USB와 전리품을 챙겨서 집에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노트북 하나 없었다.
최 소장에게 연락해서 하나 구해달라고 하자 최 소장이 최신형 노트북을 챙겨서 제트기처럼 날아왔다.
"아니, 초인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하. 티 납니까?"
"초인님 머리카락이······ 흠, 그리고 이게 무슨 냄새죠? 밤에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돌아와서 확인한 내 몰골은 아주 가관이었다.
먼저 머리카락이 홀랑 다 타버렸다.
한 번 씻긴 했는데 몸에서 탄내와 비린내가 풍긴다.
인간 사냥꾼의 집에서 최신형 방호복이라도 챙겨 입어서 사람처럼 보이지, 아니면 어디 노숙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실 어젯밤에 습격당했습니다."
"습격이라니요?"
"어디부터 말해야 하나······ 아, 잠깐만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TV를 켰다.
쭉쭉 채널을 넘긴다.
뉴스 전문 케이블 방송에서 마침 내가 생각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어젯밤, 자정을 조금 넘은 야심한 시각에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갱단들 간에 대규모 총격전이 있었습니다. 폭탄과 중화기를 동반한 총격전에 주유소가 폭발하고 상가 건물 다섯 채, 주택 이십여 채가 전소되는 피해가 잇따랐습니다. 자료 화면 보시겠습니다.]
누군가 스마트폰으로 찍은 화면.
흐릿한 영상 속 한 건물을 포위한 부랑자 무리.
곧 픽픽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놀랐는지 영상이 흔들렸으나 폭발이 연속으로 터지는 것만은 확실하게 찍혔다.
[확인된 사망자만 수십 명이 넘습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영등포 경찰서는 치안 지역 바깥, 무법지대라는 이유로 뒷수습도 범인 색출도 손을 놓고 있습니다. 심지어 소방차도 출동하지 않아서 시민들이 직접 불을 끄고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했습니다. 현장 연결하겠습니다. 박대원 기자?]
[예, 박대원입니다. 이곳은 영등포구 대림동······]
TV를 껐다.
최 소장이 잠깐 어리둥절해 하다가 뭔가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저거 초인님께서 하신 겁니까?"
"예. 수가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저기까지 가셨습니까? 대림동이면 이 근방에선 최악의 무법지대인데요?"
"제가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닙니다."
차근차근 설명했다.
철권파 갱단원이 나를 불렀던 것.
방탄 리무진.
주유소 폭발과 부랑자 떼 습격, 인간 사냥꾼의 저격까지.
최 소장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설마, 김 사장이?"
"그건 아닐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철권 씨가 제 덕을 많이 보고 있는 거. 제가 사라지면 철권파는 신림동을 상실합니다. 독약파랑 나체파가 바로 쳐들어와요."
"하긴 철권파가 지금 쭉쭉 커지고 있지요. 김 사장은 벌써 3레벨이고, 그 밑에 대장들도 2레벨 찍었답니다."
"어? 그럼 이미 독약파랑 나체파 잡아먹을 수준 된 거 아닙니까?"
"그래서 요즘 계속 회동하고 있답니다. 간부진은 철권파가 확실히 우위니까요. 독약파랑 나체파 모두 보스가 2레벨 아닙니까. 철권파가 1레벨만 몇 명 더 확보하면 둘 다 끝입니다."
김철권은 용의선상에서 제외.
하지만 최 소장은 김철권을 불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어쨌든 갱단원이 개입되었으니 김철권도 자기 결백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맞는 말.
즉석에서 김철권에게 전화를 걸어 호출했다.
김철권이 깜짝 놀라서는 갱단 간부들을 데리고 뛰어왔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제 부하놈이 초인님을 습격했다니?"
나는 앉은 채 철권파 간부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
개중 낯익은 얼굴을 쏘아보았다.
신원 시장을 관리하는 그놈.
"너 말이야."
"예? 왜 그러십니까?"
"너 직속 부하 중에 키 좀 작고, 빡빡 민 머리에 전갈 문신 있는 놈 있지? 신원 시장 지키던 놈."
"어······ 있지요. 대훈이 말하는 거 아닙니까?"
간부가 스마트폰을 열어 사진을 보여준다.
날 유인한 갱단원이 맞았다.
"맞아. 그놈. 어젯밤 12시쯤에 그놈이 날 대림동으로 데려갔다."
"예? 대림동이요? 왜요?"
"니가 불렀다던데?"
"예? 제가요? 형님을 아니, 초인님을요? 제가? 절대 안 그럽니다! 일이 있으면 제가 직접 찾아뵙지요! 철권 형님이랑 친구분이신데!"
간부가 억울하다는 듯이 펄쩍 뛰었다.
김철권이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아서는 묻는다.
"초인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제가 말씀드리지요."
최 소장이 대신 나서서 설명했다.
시간 순서대로 차근차근.
설명을 들을수록 김철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TV 다시 보기로 뉴스를 보여주자 화를 참지 못하고 벌컥 일어났다.
"에라, 이 병신아!"
"어억, 형님!"
간부를 거칠게 후려갈기는 김철권.
그새 교체했는지 훨씬 더 두툼해진 의수다.
내리치는 순간 팔꿈치 관절이 열리며 푸화학! 화염을 분출하기까지 했다.
간부가 얻어맞고는 자리에 엎어졌다.
얼굴을 바닥에 처박는 바람에 눈코입에서 피를 줄줄 흘린다.
김철권이 내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초인님. 제가 부하놈들 간수를 잘못했습니다. 이 점, 분명하게 사과드립니다."
"혀, 형님?"
"저 새끼 잘못인데 형님이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당황하는 간부들.
얻어맞은 간부가 얼른 바닥에 엎드렸다.
힘껏 머리를 처박고는 외친다.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부하놈 관리를 못 해서 이 사단이 났습니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형님은 전혀 모르셨던 일입니다! 형님은 대훈이놈 이름도 몰라요! 다 제 잘못입니다!"
"시끄러우니까 넌 조용히 해."
"혀, 형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초인님. 제가 이놈들 단도리를 제대로 하겠습니다. 부디 제 얼굴을 봐서 목숨만 살려주셨으면 합니다."
뭐지?
김철권이 내 생각보다 훨씬 저자세로 나온다.
내가 피에 미친 놈인 줄 아나?
목숨만 살려달라고 하게.
······생각해 보니 그럴 만하다.
지금도 틀어놓은 TV 속.
내가 공중을 방방 날아다니며 부랑자들을 학살하고 있으니까.
여기에 김철권이 보는 나는 어떨까.
청소부 협회를, 4레벨 박대엽을 단신으로 사냥한 괴물이다.
또 나를 천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언제 발작해서 자기들을 죽이려 들지 모른다고.
나 같아도 고개 한 번 숙이고 만다.
"좋습니다. 사과를 받아들이지요. 솔직히 사장님이 아무리 보스라고 해도 말단 갱단원까지 어떻게 통제합니까? 제가 생각할 때는 아마 그놈이 뒷돈 좀 받아먹고 절 유인해 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차에 태울 때부터 수상하긴 했어요. 여기 있는, 음······ 고 팀장도 전화 한 통 없이 쫄따구 하나 보내서 오라 가라 할 사람은 아니거든요."
가까스로 성씨를 떠올렸다.
고 팀장, 즉 간부가 활짝 웃었다.
"알아주시는군요!"
"우린 전우잖아. 전우. 사이가 틀어질 수는 있어도 이렇게 배신할 사이는 아니지."
"그럼요! 그럼요!"
"대신 알지? 누가 사주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야 해. 그게 안 되면 나도 너를 의심할 수밖에 없어."
간부가 맹렬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맡겨 주십쇼! 대훈이 그놈, 아니 그 개새끼 집이랑 애인이랑 가족들까지 어디 사는지 싹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 어느 개잡놈이 사주했는지 꼭 알아 오겠습니다!"
"그렇게 해."
"가 봐라. 준범아. 못 찾으면 살아올 생각은 하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간부가 급히 일어나 달려나갔다.
김철권이 침착해진 얼굴로 날 쳐다본다.
"초인님, 혹시 짚이는 게 있습니까?"
"이제 찾아봐야죠."
나는 최 소장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최 소장이 오른손 검지와 엄지로 O자를 만들었다.
나와 김철권이 대화하는 사이 해킹 프로그램을 작동시켜 보안을 풀고 있었던 것.
이런 쪽에도 재주가 있는 모양.
USB 안.
파일들이 유형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장부]
[명단]
[화상 회의]
[녹음]
[녹취록]
이런 식으로.
최 소장이 바쁘게 터치패드를 뒤적인다.
"이거 대박이네요."
"뭐가요?"
"초인 사냥꾼 아닙니까, 초인 사냥꾼. 여태 죽인 초인만 스무 명을 훨씬 넘습니다."
"스무 명!"
김철권이 놀라 기함을 했다.
그러더니 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이런 인간이 습격했는데 살아남았느냐고.
"다른 건 놔두고 가장 최근 의뢰 확인해주세요."
"예. 찾는 중입니다. 최근 거, 최근 거······ 아. 여기 있네요. 사흘 전 받은 의뢰입니다. 원래는 거절하려고 했는데 성공 보수가 세서 받았다고 메모되어 있네요. 성공 보수가, 성공 보수가······ 200억?"
"200억이요?"
"200억!"
김철권과 최 소장이 서로를 마주본다.
둘 다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이야?
나는 어깨만 한 번 으쓱였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제가 나름대로 대인전 전문가인데 그 정도 보수는 붙죠."
"아무리 그래도 200억이라니······"
"3레벨 초인은 보통 얼마 정도 합니까?"
"여기 기록 보니까 50억에서 60억 정도랍니다. 비용은 별도고요."
"세상에."
"그런 분을 모시고 있었다니, 자손 대대로 영광입니다."
김철권은 입만 벌리고 있고, 최 소장은 그 와중에도 내 비위를 맞췄다.
"그 대상이 저였고요?"
"아, 예. 그걸 빼먹었네요. 맞습니다. 초인님 대상으로 어······ 승천그룹에서 의뢰를 넣었다는데요?"
그 말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김철권은 벌렸던 입을 다물고 최 소장이 눈을 가늘게 뜬다.
승천그룹.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
나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까딱까딱 좌우로 움직였다.
"승천그룹이 아니라 승천보안일 겁니다."
"승천보안이요? 어, 잠시만요. 그러네요. 승천보안 비서실 통해서 의뢰가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서실이요? 사장 비서 맞습니까?"
"잠시만요. 비서실에서······ 어, 비서실이 아니라네요. 비서실 명함을 쓰긴 했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랍니다."
슬슬 윤곽이 드러난다.
터치패드를 조작하던 최 소장이 함성을 질렀다.
"찾았습니다! 이재열, 이재열입니다! 몇 번이나 손 갈아타면서 숨겼지만 이 인간이 미리 다 조사하고 의뢰 받았나 봅니다."
"이재열이라······"
역시.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나랑은 잠깐 얼굴 본 게 다인데 왜 그런 거지?
아무리 금수저라고 해도 200억이나 써가면서 날 죽이려 들게?
내가 모르는 이유라도 있나?
"이재열이요?"
김철권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
최 소장이 슥슥 화면을 전환하여 승천그룹 조직도를 보여주었다.
"승천보안은 아시죠? 승천그룹 계열 민간군사기업입니다."
"그건 알죠."
"이재열은 승천보안 사장 장남입니다. 지금은 옛 아버지 교단 성전사······ 아, 성기사로 승급했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놈이 왜 초인님을 암살하려고 했답니까?"
"거기까진 저도 잘······"
"그 부분은 제가 설명하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알겠다.
갑옷 맞추러 조철과 만났을 때 조철이 나보고 그랬잖아.
성녀가 말하기를, 내가 옛 아버지 교단의 [빛이자 구원자]가 될 거라고.
그때는 대충 듣고 넘겼는데 지나고 생각하니 의미심장하다.
신멸 전쟁으로 죽은 신.
몇 년 후면 부활하고, 교단은 거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빛이자 구원자라······
그 의미는 천천히 생각해 보더라도, 이재열 입장에서 보면 배알이 꼴렸을 것이다.
똑같은 신열에 당했어도 자기는 바닥에서 벅벅 기어 올라가고 있는데 나는 빛이자 구원자 소리를 듣고, 6레벨 장인에게 맞춤 갑옷을 만들고 있으면.
'그때 그 성기사가 이재열이었나?'
조철의 집을 지키던 성기사.
유독 적대적인 느낌이었지.
그게 이재열이었으면 비로소 이해가 된다.
둘에게 내 추리를 짧게 설명했다.
최 소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확실히 조철 장인도 그렇고, 거기 서 있던 성기사도 그렇고 분위기가 썩 좋지는 않았지요."
"알만합니다."
듣고 있던 김철권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열등감이네요, 열등감. 잘 나가던 부잣집 아들이 자기보다 더 잘난 초인님을 봤으니 얼마나 속이 뒤틀리겠습니까? 용돈 조금 쓴다는 느낌으로 암살 의뢰를 넣는 거, 사실 이 바닥에서 정말 흔한 일입니다."
최 소장이 노트북을 보며 이를 갈았다.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바로 김철권이 냉소를 날렸다.
"어떻게요?"
"예?"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어디 중소기업 사장 정도만 되어도 쳐들어가서 다 죽여놓겠지만 승천보안입니다. 승천보안이요. 잘못 건드렸다간 승천그룹 전체가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최 소장을 보고 말했지만 나중에는 나를 보고 말하는 김철권.
포기하라는 것이다.
승천그룹은 공룡. 공룡에서도 티라노사우루스.
나는 찍찍대는 생쥐 정도 될까?
아니, 생쥐도 과대평가한 거고 모기쯤으로 봐야 적절하겠다.
최 소장이 입을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고소하지요. 괜찮은 변호사 끼고 고소하면······"
"전관예우 아시잖습니까. 증거가 명확하니 초인님이 이기긴 이기겠죠. 한 3, 4년 지난 다음에요. 그래 봤자 벌금 몇 푼에 손해배상 조금 나오는 게 답니다. 사과도 못 듣고 콩밥도 못 먹여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니까요?"
"그럼 언론사에 폭로를······"
"어느 언론사에서 실어주겠습니까? TV? 신문? 둘 다 불가능합니다. 데스크에서 철저히 막고 뒷돈 받아먹어요. 작은 인터넷 신문이나 개인 방송에선 가능하겠습니다만 그걸로 폭로한다고 승천그룹에서 콧방귀나 뀌겠습니까? 안 됩니다. 안 돼요."
철저히 부와 권력이 극소수에게 집중된 세계.
사실상의 신분제 사회.
이 세상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짓밟아도 찍 소리를 못한다.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
절대 그럴 수 없다!
"이재열을 협박하죠."
"예?"
"협박이라뇨?"
"협박해서 뭐하시게요?"
"결투장으로 끌어낼 겁니다."
"아, 결투······"
개인의 무력이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는 세상.
그러다 보니 초인끼리 시비가 붙었을 때 결투로 끝을 보는 관습이 있었다.
그게 확대된 게 콜로세움이었고.
"이재열이 순순히 결투장에 나올까요?"
"생각해 보세요. 이재열의 목표가 뭐겠습니까? 가업을 승계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죠."
"이재열은 장남이지만, 세례받으면서 거의 추방당한 처지고요."
"아······"
내 시선이 노트북 화면에 꽂혀 있었다.
최 소장도 김철권도 화면을 보고는 납득한다.
승천보안의 가계도.
이재열은 장남이고, 현재 어머니는 계모였으니까.
3레벨 인증 받으러 갔을 때 들었잖아.
정당한 자기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을.
서우진에게도 몇 마디 얻어들은 게 있고.
그런 처지에 암살 사건에 연루되면 썩 좋지는 않을 것이다.
"확실히······"
최 소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건 먹히겠습니다."
반면 김철권은 아직 부족하다는 눈치다.
"가능하겠습니까? 이재열이 무시하고 공격하면요? 놈이 작정하고 자기 아버지 회사를 부리면 우리는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고 해도 이번 일처럼 회사 일부를 동원하는 건 가능해요."
"그건 그렇습니다."
나도 김철권의 말에 동의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있었다.
"그럼 우리도 체급을 불리죠."
"어떻게 말입니까?"
"인맥을 동원합시다."
내게도 인맥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몇몇 있지.
얼굴 여럿이 스치고 지나간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서우진이었다.
증거 -3-
소식을 들은 서우진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 미친 새끼!"
설명을 듣더니 자기 일처럼 분노를 토했다.
"이건 볼 것도 없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우리도 암살자를 보내죠!"
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되면 그렇게 했겠지.
김철권이 서우진의 눈치를 살피다가 끼어들었다.
"저기, 도련님?"
"본부장이라고 부르세요."
"예, 서 본부장님. 본부장님이야 그렇게 하셔도 뒤탈이 없지만 우리 김 초인님은 다릅니다. 암살자 보냈다간 바로 승천보안 무력팀이 벌떼처럼 달려듭니다. 이번에 왔던 놈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놈들이요."
"그거야······"
"김 사장님께서 옳은 말씀 하셨네요. 또 문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끼어든 최 소장.
서우진이 힐끗 쳐다보자 최 소장이 오른손 검지와 엄지를 오므려 O자 모양을 만들었다.
"이게 없습니다."
"아······"
"명색이 승천보안 장남입니다. 무소속 초인도 아니고 옛 아버지 교단 소속 성기사에 재벌 계열사 아들내미 죽이려면 얼마를 줘야 할까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 그러네요."
언제 불을 토했냐 싶게 쪼그라드는 서우진.
나는 탁자에 손을 잡고 몸을 내밀었다.
"내 생각에는 결투 말고는 답이 없어."
"차라리 고소를 하시는 건요? 결투는 너무 위험해요."
최 소장이 옆에서 웃었다.
"아휴, 본부장님도. 우리 초인님이 어떤 분인지 다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겨우 애송이 성기사 하나 못 잡을까요?"
"본인이 직접 나온다면 그렇겠죠."
"예? 본인이 안 나오면 누가 나와요?"
"대전사를 쓰겠지."
질 거 뻔히 알면서 결투장 나올 바보가 어디 있어.
그것도 금수저가.
결투 한 번에 200억, 아니 100억만 써도 대전사 하겠다고 나설 초인은 쌔고 쌨다.
최 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대전사······ 그게 있었지요. 본인이 직접 나오게 할 방법은 없을까요?"
"그런 게 있겠습니까?"
"아니 그럼 결투하는 보람이 없는데? 우리 초인님만 고생하시는 거 아닙니까?"
"사과받고 보상받고 끝내야죠."
"그걸로 되겠습니까?"
김철권이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당신 같은 살인마가 사과와 보상으로 만족하겠냐는 눈치.
나는 그저 웃었다.
한 마리 육식 동물처럼.
"부족하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제가 힘이 부족한데요. 그리고 말이죠······"
거실 유리창 너머를 쏘아본다.
작은 정원.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잡초가 듬성듬성 자라 있다.
그 잡초들이 이재열이 된 것처럼 노려보며 한마디 한마디 씹어먹듯이 말했다.
"개가 똥을 끊지 금수저가 결투에서 줬다고 자기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넘어가겠습니까? 자기한테 모욕을 줬다며 뒤에서 이를 갈겠죠. 언젠가 반드시 뭔 짓을 저질러도 저지를 거고, 그날이 그놈 제삿날이 될 겁니다."
"하긴 그렇겠습니다."
"지금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선생님, 생각보다 무서운 분이셨네요."
"내가 속이 좀 좁아. 날 죽이려고 한 놈을 가만히 놔둘 정도로 성인군자가 아니다."
"초인님. 그건 성인군자가 아니라 호구라고 합니다."
"그렇죠! 일단 건드린 놈은 완전히 박살을 내줘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놈들한테 얕보이질 않아요."
"뭐, 저도 동의합니다."
작전을 짰다.
어떻게 하면 이재열을 결투장으로 끌고 나올 것인가?
김철권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이 부분은 제가 처리하지요. 저한테 맡겨주시면 이재열을 초인님 앞에 대령하겠습니다."
"어떻게요?"
"최 소장님. 저한테 노트북 좀······ 감사합니다. 자, 여기 보시면 이재열 그놈이 청부한 경로가 보이죠? 어이쿠, 세탁도 많이 했네요. 무려 세 번이나 손을 바꿨습니다."
"신경 좀 썼네요."
"돈도 썼고요."
"저도 솔직히 말해서 이거 비슷한 일을 몇 번 해봐서 압니다. 부자놈들은 손만 몇 번 바꿔서 돈이랑 의뢰 전달하면 자기가 한 줄 모를 줄 알거든요? 절대 아닙니다. 역추적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역추적해서 찌르면 당황하는 거죠. 아무리 뒤 구린 짓을 돈으로 막을 수 있다고 해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가 않잖습니까."
"그렇죠."
"하여튼 그렇게 니가 저번 주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좋게 말할 때 나와라! 하는 거죠. 뭐, 아마 본인이 직접 오진 않고 대리인 보내고 끝내겠지만 거기서부터 시작이라고 봅니다."
"그럼 그때 제가 나서지요."
최 소장이 손을 들었다.
"대전사 가능한 비밀 결투라고 하면 이재열도 수락할 겁니다. 뭐, 저흴 묻으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서 본부장님?"
서우진이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제가 도와드려야죠. 선생님 일인데.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저희 측 인사로 오실 필요까진 없고 공증인을 부탁드립니다."
"어렵진 않은데 괜찮으시겠어요? 결투 공증은 나이 좀 있고 이름도 있으신 분이 맡으시는 게 좋아요. 법조계 분이면 더 좋고요. 아, 맞다. 이렇게 하죠."
"어떻게요?"
"제 친구들이요. 제 친구들도 부르고 부모님들도 부르죠."
"어······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닙니까?"
최 소장이 우려섞인 말을 했지만 내가 듣기에는 괜찮은 생각이었다.
"저는 찬성입니다. 다른 분들도 도와주신다면 저도 좋죠."
"그렇죠? 그래야 이재열 그 야비한 새끼가 말을 못 바꿉니다."
"나도 동의해. 내가 직접 전화할게."
"어? 제가 해도 돼요."
"아니야. 내가 부탁하는 입장인데 다른 사람 통해서 연락드리면 조금 그렇지. 그리고 이번에 소원권을 쓰려고."
"아······"
"흠, 초인님. 아깝지 않습니까?"
"괜히 빚 달아놓는 것보단 그게 낫죠. 승천보안이 승천그룹 계열사 말석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재벌 중 일부인데요."
기브 앤 테이크는 확실해야 한다.
줄 게 없으면 소원권이라도 써야지.
특별한 관계가 아닌 이상은.
"그런데 초인님."
김철권이 정색하고 나를 보았다.
"결투에서 이길 자신은 있으신 거지요?"
"아니, 그럼 우리 선생님이 지신다는 겁니까?"
나는 가만히 있는데 서우진이 벌컥 화를 냈다.
김철권이 진정하라는 듯 손을 들며 말했다.
"실례지만 여기서 저만큼 초인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청소부 협회를 혼자 쓸어버리고, 4레벨 초인인 협회장을 일대일로 쓰러뜨리는 것을 직접 봤으니까요. 하지만 이재열이라고 그걸 모를까요? 초인님 이력은 다 알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 말씀은······"
"예. 대전사로 3레벨 초인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4레벨 초인이 나옵니다."
4레벨 초인.
1레벨 2레벨은 차이가 크지 않지만 3레벨 4레벨은 차이가 좀 있다.
위로 갈수록 심해지지.
레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무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니까.
"5레벨이 나올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5레벨이면 고레벨 초인인데 자존심이 있지, 2레벨이나 낮은 초인을 상대하려고 하지는 않지요. 초인님께서 4레벨 초인을 이긴 적이 있으니 4레벨 초인은 나서려고 하겠습니다만."
내 생각에도 그렇다.
그리고 5레벨 초인 몸값이 오죽 비싸야지.
3레벨 인간 사냥꾼도 200억이나 받아먹었다.
암살이 아니니 의뢰비가 떨어지긴 하겠다만, 5레벨 앞에서는 200억으로도 모자라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5레벨은 원래 세계의 국회의원만큼 대우를 받는 귀족이라고.
"4레벨이라 이거죠."
잠시 숙고한다.
현재 능력으로 도핑 없이, 돌연변이 없이 4레벨을 이길 수 있겠나 하고.
아슬아슬하다.
허접한 놈이 나오면 내가 이긴다.
하지만 특성 충실하게 갖추고 장비도 빵빵한 놈이 나온다면?
정말로 쉽지 않다.
돌연변이를 노출할 게 아니라면 더 그렇다.
아니, 돌연변이는 아예 봉인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3레벨이 된 지금 썼다간 다시는 못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옛 아버지 교단에 즐비하게 늘어선 4레벨 초인.
그중 성전사 이재열과 접점이 있는 인간.
누가 나올지는 뻔하다.
쉽지는 않겠지만.
나도 죽기 직전까지 가겠지만.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내 목이 잘리겠지만.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초인님을 믿겠습니다."
김철권은 나와 한배를 탔다는 얼굴.
최 소장과 서우진은 말없이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낸다.
어깨가 무거웠다.
원래 세계에서는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던 감정이라.
"오늘 바로 접촉하겠습니다. 결론이 나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니까 초인님께서는 몸만 만들고 계세요."
"규칙은 어떻게 됩니까?"
"협의해야겠지만 관례대로 갈 겁니다."
"관례라고 하시면?"
"당사자 둘을 제외한 타인이 개입하지 않는 한 무제한 허용이죠."
정해진 무기도 반칙도 없다.
어떤 치사한 방법을 쓰더라도 자유.
독을 써도 되고 암기를 써도 된다.
당한 놈이 바보고, 초인의 능력 발현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나는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도핑은 어떻습니까? 써도 됩니까?"
"아, 도핑······"
서우진이 대신 답했다.
"약을 먹든 독을 쓰든 자윤데 본인이 직접 만들어야 해요."
"사 오면 안 되고?"
"네. 재료를 가져와서 결투장에서 결투 직전에 직접 만든 물건만 허용돼요. 미리 어떤 약을 쓸 거라고 고지해야 하고요."
"그건 너무하네. 약은 그렇다 쳐도 독 쓰는 초인들한텐 패널티 아니야?"
"대신 해독약도 직접 만들어야 해요. 아니면 독 저항 아티팩트나 정화 아티팩트 차고 와야죠."
"괜히 암살자들이 결투에서 힘을 못 쓰는 게 아닙니다."
어쨌든 도핑해도 된다 이거지.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저는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예. 바로 시작하지요."
"어, 초인님. 갑옷은 어떻게 하지요?"
갑옷.
조철이 만들어 준다고 한 마법 갑옷.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조철이나 이재열이나 한통속인데 시간에 맞춰서 만들어 주겠습니까? 조철이 대충 만들거나 함정을 파놓진 않겠지만 일정 정도는 미룰 거예요. 그거 기다리느니 최대한 빨리 일정 잡는 걸로 합시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두 잘 부탁드립니다. 똥 밟았거니 하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습니까? 세 분 모두, 나중에 보답을 확실히 하겠습니다."
"보답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초인님을 도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제 기쁨입니다. 언제든 불러만 주십쇼!"
"서로 돕고 사는 거지요. 나중에 제가, 제 조직이 위험해질 때 도와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선생님이랑 제 사이에 무슨 보답이에요. 선생님께서 제 인생을 구해주셨는데요. 아, 차라리 선생님 대전사로 제가 나갈까요?"
"일이 너무 커집니다. 공증만 해주셔도 충분해요."
"하하, 맡겨만 주세요. 제가 전 대법관 출신 변호사도 한 분 모셔와서 확실하게 공증을 해드릴 거예요."
"듣기만 해도 든든합니다."
작전 회의를 마쳤다.
셋이 떠나고 나는 즉시 인터넷으로 물건 몇 가지를 주문했다.
연금술 작업대.
그리고 소모품과 필요한 재료도 몽땅.
퀵으로 배달받아서 바로 약 제조에 들어갔다.
비약.
그것도 효과 좋고 후유증 없기로 유명한 레시피로만.
쾅!
"우읍!"
몇 번이나 실패했다.
폭발이 터지고 시커먼 연기가 무럭무럭 솟구쳤다.
비치된 소화기를 몇 번이나 쓰는 바람에 새로 주문해야 했다.
고생은 했지만 목표는 확실하게 달성했다.
[조제] 특성.
인간 사냥꾼이 갖고 있던 그것.
독과 약 제조에 특화되어 있으며, 제작과 개조 특성과 함께 쓰면 성공 확률도 비약 효과도 올라간다.
내가 만든 비약 종류는 세 가지.
[강체의 비약]
[섬전의 비약]
[마룡의 비약]
효과는 간단하다.
각각 힘과 맷집을 크게 올려주고, 감각을 예민하게 하여 민첩하게 움직이게끔 하고, 마력 재생을 증폭시킨다.
더 좋은 비약도 많지만 3레벨에서, 내가 구할 수 있는 재료로는 이게 한계.
그나마 인간 사냥꾼의 집에서 얻은 재료가 없었으면 마룡의 비약은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천상금, 지옥은, 세계철이라고 하셨지요?]
"예.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특수한 강화 촉매의 재료.
옛 아버지 교단의 성기사와 사제를 상대할 때는 이 강화 촉매가 필수였다.
"후욱, 후욱."
비약을 만드는 한편으로 성검을 휘둘렀다.
총도 당연히 가져간다.
유탄 발사기와 각종 수류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과연 통할까?
내 짐작대로라면 4레벨 성기사가 대전사로 나올 텐데 총알과 유탄 좀 갈긴다고 순순히 죽어줄까?
그럴 리가 없지.
결국 판가름은 검에서 날 것이다.
상대적으로 내가 검술이 취약한 것이 사실.
믿을 것은 특성 전환밖에 없었다.
파산검법을 연마하는 한편 특성 전환 기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공격 순간 근력, 강타, 참격 같은 공격 관련 특성을 장착하도록.
방어 순간 맷집, 방어, 마력 방어막 같은 방어 관련 특성을 사용하게끔.
"후욱, 후아아."
땀이 비 오듯이 났다.
배가 터지도록 먹고, 또 쓰러져 죽고 싶을 정도로 땀을 빼고, 마력천 욕조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다시 먹고, 힘껏 검을 휘두르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모든 걸 다 잊었다.
오로지 나 자신을 계발하는 것에만 골몰했다.
바깥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정도 파산검법과 특성 전환 연계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가상의 적을 세워놓고 칼질을 했다.
"으으윽!"
쉽진 않았다.
내가 뭐 전투의 달인도 아니고 솔직히 특성빨이잖아.
소설과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완전 쉽게 섀도복싱을 하던데 직접 해보려니 잘되지 않았다.
상대를 잘 몰라서 더 그랬다.
게임 속 패턴이야 잘 알지만 현실 속 초인들이 어디 게임처럼만 움직이겠어?
결국 SOS를 쳤다.
"우진아. 대련 좀 부탁할게."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값싼 자존심 따위 접어두고 서우진에게, 제자에게 검을 배웠다.
솔직히 말할까?
나는 이미 서우진의 상대가 안 되었다.
각성하기 전에도 날 잡아먹으려 들었던 서우진이다.
5레벨이 된 지금은 거의 날 갖고 놀다시피 했다.
그러면서도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는 게 고마웠다.
"선생님. 한 번 더 갈까요?"
"거기서는 이렇게 받아치셨어야 해요. 이렇게."
"오, 좋았어요."
"선생님 3레벨은 맞아요? 진짜 4레벨이랑 싸워도 안 밀리겠어요."
"이거 이상한데······ 선생님 능력이 진짜 뭐에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수십 개는 되는 줄 알겠어요."
검에 찔리고 베여가며 배우기를 며칠.
각 잡고 검술을 배운 영향이었을까.
[검술] 특성이 생성되었고 서우진과 조금은 검을 맞댈 수 있게 되었다.
최 소장에게서 연락이 온 것도 이즈음.
[초인님. 결투 일정이 잡혔습니다.]
"언젭니까?"
[사흘 후입니다.]
사흘이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완벽하진 않지만 최선의 준비를 마치고.
약속한 비밀 결투장으로 향했다.
사자 기사 -1-
사자 기사
서울시 외곽.
한 비밀 결투장.
평소라면 구경꾼과 도박꾼으로 넘쳐났을 곳.
오늘은 조용하기 짝이 없다.
공증을 맡은 서우진이 통째로 빌렸기 때문이다.
나는 결투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서우진이 내게 다가왔다.
"선생님, 오셨어요?"
"이재열은?"
"아직입니다. 아마 가장 늦게 올 거예요. 아, 여기 이분은 전직 대법관이신 정명수 변호사님이세요. 오늘 공식적으로 공증을 맡아 주실 거예요."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초인 변호사는 아닌가 보다.
중후한 분위기의 신사가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악수를 하며 인사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 그럼요. 초인님께서 우진이 은인이라면서요? 우진이 살려주셨으면 제게도 남이 아닙니다. 깔끔하게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초인님께서는 결투 이길 생각만 하세요."
속속 모여든다.
최 소장도, 서우진의 친구들도.
생각지도 못한 얼굴도 하나 있었다.
가볍게 무장한 백소린이 방방 뛰어온 것.
"선생님!"
"어떻게 알고 왔어?"
"다 아는 방법이 있죠!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선생님이 승천보안이랑 결투를 왜 해요?"
"최 소장한테 물어봐. 난 결투 준비해야 해서."
"선생님이 꼭 이길 거예요! 누가 대전사로 나오든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세요!"
"말이라도 고맙다."
펑! 펑! 펑!
드디어 결투 시간.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천장과 벽면에 설치된 조명이 결투장 중심을 비춘다.
이재열측 인사들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시간은 더 지난 후.
똥 씹은 얼굴을 한 이재열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나는 이재열 대신 그 옆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흑금 갑옷을 빈틈없이 차려입었다.
등에 짊어진 거대 방패, 전쟁 망치, 대구경 산탄총은 전형적이기까지 하다.
뻗친 머리칼에 수북한 구렛나룻. 부리부리한 눈동자는 사자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오른손에 낀 강철 장갑.
손등에 새겨진 사자 조각.
아는 얼굴이다. 예상했던 인간이기도 하고.
'사자 기사 오두식.'
3레벨 인증 받으러 갔을 때 초인탑에서 봤던 그자.
옛 아버지 교단 인간치곤 예의가 발랐지.
광신도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저벅저벅.
오두식이 내게 걸어왔다.
이재열이 그 뒤를 따라오며 쩔쩔맨다.
"대장님. 대장님께서 굳이 여기 오실 필요까진 없으셨습니다."
오두식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조용. 뭘 잘했다고 입을 여는 것이냐. 넌 성기사의 자격도 없는 놈이다. 당장 파문하지 않는 것을 감사히 여겨라."
"대, 대장님. 파문은······"
"쯧쯧. 성녀님께서 너를 직접 세례하신 것이 아니었다면 진작 쫓겨났을 것이다. 성기사 서임 취소로 끝난 것을 감사히 여겨라."
저벅저벅.
오두식이 나를 향해 정면으로 다가왔다.
나는 새삼스레 그 뒤의 이재열에게 시선을 던졌다.
성전사 갑옷을 입고 있다.
분명히 3레벨이 되면 성기사 서임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꼴 좋다.'
암살자를 보낸 게 문제가 되긴 한 모양.
고소한 느낌이 들면서도 경계심이 들었다.
옛 아버지 교단이 정석적인 대처를 하는 게 오히려 수상했으니까.
차라리 대놓고 이재열 편을 들었으면 도리어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다시 뵙습니다. 김전사 초인님."
"아, 예."
오두식이 내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더니 허리를 90도로 꺾고는 사과의 뜻을 밝힌다.
"먼저 이번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개인적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단원 교육을 잘못했습니다. 전적으로 제 개인의 잘못이며, 이번 일에 위대하신 옛 아버지와 고귀한 성녀님, 그리고 대주교님들께서는 아시는 바가 없습니다."
뭐지?
사과를 해?
나는 팔짱을 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너무 늦게 사과하시는 것 아닙니까? 정말로 사과하고 싶으셨다면 최소한 결투 전에 사과를 하셨어야죠."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드리는 사과입니다. 교단의 공식적인 입장은 다릅니다."
"그렇겠죠. 말씀해 보세요."
"조금 전, 성녀님께서 저를 친히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허리를 굽혔던 오두식이 고개를 든다.
두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막 분출하는 화산처럼.
시커먼 화산재를, 광신을 어둠처럼 두르고 지독한 광기를 안광으로 빚어내어 나를 쏘아본다.
"위대한 옛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녀님께서 계시를 받아 인간의 언어로 옮기시기를, 김전사 초인님이야말로 우리 교단의 빛이자 구원자가 되실 거라고요."
덩달아 내 눈도 어둑해진다.
빛이자 구원자.
그 말을 또 듣는다는 생각에.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는 그쪽 교단하곤 아무 관련도 없는데 빛이자 구원자요? 누구 마음대로요?"
"이제는 관계가 있어질 겁니다."
"하, 결투 조건으로 제 입교라도 걸 생각이신가 보죠?"
"예. 그렇습니다. 저는 김전사 초인님을 죽이지 않겠습니다. 제 조건은 오직 하나, 제가 승리한다면 김전사 초인님이 우리 교단에 입교하는 겁니다."
나한테 꿀 발라놨냐?
어?
성녀부터 사자 기사까지 아주 위아래가 쌍으로 입교시키지 못해서 난리네.
나는 가만히 얼굴을 구겼다.
반지가 진동하고 있었다.
가슴이 섬뜩하게 옥죄이는 것은 물론, 전신의 솜털이 올올이 일어났다.
"도대체 그 빛이자 구원자라는 게 뭡니까? 들어나 봅시다."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 교단의 희망이자 소금이며 궁극적인 지향점입니다. 우리 교단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 세상을 다가올 종말로부터 구할 승리자이기도 하고요."
말은 거창하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뭔데?
다시 따져 물으려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영감이 있었다.
'옛 아버지는 죽어 있지.'
그리고 몇 년 뒤 부활이 예정되어 있다.
성녀의 손에 의해서.
게임에서는 촉수 덩어리로만 표현이 됐었다.
한참 부활 의식 진행 중 파티가 진입하여 보스전을 벌이는 게 게임 스토리.
그렇다면 성녀가 말하는 빛이자 구원자는 결국······
"그릇입니까?"
대놓고 묻자 오두식이 경건하게 두 손을 모았다.
"바로 그렇습니다."
"하! 미친! 절 그릇으로 쓰겠다고요? 제가 그걸 동의할 것 같습니까?"
"실로 고결한 헌신이며 성스러운 봉헌입니다. 저는 기꺼이 초인님이 위대한 옛 아버지의 그릇이자 제물이 되도록 돕겠습니다. 김전사 초인님의 영육은 옛 아버지의 일부이자 화신이 되실 겁니다."
"이 미친 새끼가!"
소름이 쫙 돋았다.
진짜 미친 거 아냐?
누구 마음대로 날 제물로 써?
이건 사육하는 돼지나 다를 게 없다.
몇 년 동안 최대한 키우고 부활 의식 때 바치겠다는 거잖아.
여기서 지면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낫다.
영육 어쩌고 하는 걸로 봐선 부활 의식의 제물이 됐다간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옛 아버지에게 잡아먹힐 테니까.
"초인님의 자유 의지에 반한다는 사실은 압니다."
오두식이 나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저 또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필코 초인님을 옛 아버지께 바치고 말겠습니다."
"하······ 좆 같은 광신도 새끼."
"칭찬 감사합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후퇴따윈 고려하지 않았다.
내가 준비한 대로만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으니까.
"흠, 흠."
우리 측 변호사가 헛기침을 했다.
"시간이 지체됐으니 결투를 시작하지요. 이재열 성기사······ 아니지, 성전사님 공증인은 어디에 계십니까?"
"여기 있습니다. 결투 맹약서를 확인하지요."
맹약서는 여기 오기 전에 확인한지 오래.
단순히 법적 계약이 아니라 마법 맹약이다.
어기면 심장이 터져 죽게 되는.
변호사들이 중요한 항목만 짚었다.
"양쪽 요구사항 확인하겠습니다. 우선 이재열 성전사님. 성전사님이 승리하면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며 김전사 초인님이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옛 아버지 교단에 입교한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반대로 김전사 님이 승리하면 이재열 성전사님이 문서로 본인의 암살 의뢰를 인정하고 사과하며 추후 김전사 초인님에게 직간접적으로 위해하는 행위를 일절 하지 않겠다고 옛 아버지에게 맹세한다. 또한 소정의 배상금을 보낸다. 맞습니까?"
사실 이재열은 배상금으로 퉁치려고 했다.
100억을 주겠다고 했지.
그건 내가 거부했다.
100억은 물론 큰돈이지만 나도 돈이 아쉬운 처지가 아니니까.
돈을 받느니 사과문을 받고 더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 받는 게 낫다.
물론 이걸로 끝은 아니다.
나 뒤끝 있는 인간이야.
언젠가 내가 승천보안이 아니라 승천그룹과 맞설 힘을 얻게 되는 날.
이재열은 내 축적된 분노를 맛봐야 할 것이다.
'옛 아버지 교단이 문젠데······'
지금이라도 강제 입교 행위 불가 조항을 넣을까?
······의미가 없다.
그런 조항을 결정할 수 있는 건 성녀뿐.
성녀가 날아와서 수작을 부리기라도 하면 일이 더 어려워진다.
지금은 옛 아버지 교단의 흉계를 안 것에서 만족하고, 눈앞의 사자 기사를 쓰러뜨리는 것에 집중하는 게 낫다.
"다음은 결투 규칙입니다. 결투 규칙은 국제 초인 연맹에서 정립한 국제 표준 규칙을 따릅니다. 모든 초능력, 무구 사용이 가능합니다. 단, 본인의 소유가 명확해야 하며 본인 소유가 아닌 무구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최근 일주일 내에 새로 획득한 무구가 있다면 미리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없습니다."
"저도 없습니다."
"다음은 소모품입니다. 소모품은 지금 이 자리에서 본인이 직접 제작하신 물건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두 분께선 어떤 소모품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오두식이 전쟁 망치 자루를 툭 건드렸다.
"옛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니, 어떤 소모품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김전사 초인님은 어떻습니까?"
"전 조금 많습니다."
골프백을 열고 준비해온 물건을 주섬주섬 꺼냈다.
"우선 비약 세 개를 사용하겠습니다. 강체의 비약, 섬전의 비약, 마룡의 비약,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세 가지나 말입니까?"
"예. 바로 제작하지요."
바닥에 비약 재료와 작업 기구를 빠르게 늘어놓았다.
정식 작업대는 못 가져왔다.
대신 접이식 앉은뱅이 탁자를 놓고 초소형 마법 화로에 불을 지폈다.
변호사들이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다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제한 시간은 비약 하나마다 10분입니다. 그 이상 걸리면 숙련도가 부족한 것으로 간주하고 사용을 금지하겠습니다."
"충분합니다."
조제, 제작, 개조 특성으로 순식간에 끝내고 비약 세 개를 제출했다.
"비약 3종 확인했습니다. 여기서 끝입니까?"
"하나 더 있습니다. 강화 촉매를 제작하겠습니다."
"연금술에 정말로 일가견이 있으신가 봅니다. 이번에도 제한 시간은 10분입니다."
골프백에서 비장의 마법 촉매 셋을 꺼냈다.
천상금, 지옥은, 세계철.
셋을 1:3:16의 비율로 섞고 흑염을 뿜어 달군다.
화악, 신령한 불길이 번지고 기이한 색채가 피어났다.
그 색채를 본 오두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살신자······"
이재열이 눈을 부릅뜬다.
"살신자? 이게 살신자라고요?"
"그렇다. 후, 확실히 많이 준비해 오셨군. 하지만 승리는 옛 아버지의 것이다."
"대장님께서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살신자 합금.
신멸 전쟁 당시 옛 아버지의 심장을 찔렀던 바로 그 검을 만들었던 금속을 재현한 게 이 강화 촉매다.
옛 아버지가 이 비율의 합금검에 쓰러짐에 따라 옛 아버지의 모든 권속에게 약점이 생겼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 정확히 10분.
골프백을 탈탈 털어 부무장을 꺼냈다.
유탄 발사기 네 점이 툭툭 떨어진다.
동일한 모델, 심지어 챙겨온 유탄도 동일했다.
오로지 대인 유탄.
"유탄도 개조하겠습니다. 제한 시간은 똑같죠?"
"허허······ 손재주가 대단하십니다. 예. 10분입니다. 10분 내에 쓰실 탄환 개조가 끝나야 합니다."
유탄 탄두를 열고 강화 촉매를 적당히 넣었다.
미리 연습했던 거라서, 또 관련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
오두식이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흔들고, 서우진과 백소린은 주먹을 꽉 쥐고 나를 쳐다보았다.
탄두 개조를 마친 후 강화 촉매를 마법 기름에 반죽하여 내 성검에 치덕치덕 발랐다.
유탄 발사기와 성검이 묘한 파장을 발하는 것으로 준비 완료.
변호사들이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비약 셋, 강화 촉매, 강화 기름. 이렇게 세 종류로 끝입니까?"
"예. 다 끝났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모품, 특히 독이나 약을 사용하시면 몰수패입니다."
"동의합니다."
마력 물약도 치유 물약도 만들지 않았다.
명색이 성기사.
게임에서는 터치 한 번으로 물약을 마실 수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물약 마실 시간이 나지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0초의 공방.
그렇다면 모든 것을 쏟아부어 공방에 집중하는 게 낫다.
완성된 비약 셋을 연달아 마셨다.
뜨겁고 찌릿하고 서늘한 기운이 뱃속으로 퍼진다.
느껴진다.
몸이 강화되고, 감각이 예민해지고, 심장에서 마력이 용솟음치는 것이.
"시작하겠습니다. 당사자 두 분만 남고 모두 관중석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행들이 다가왔다.
다들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내가 준비를 많이 한 것은 알지만 레벨 차이가 나니까.
상대가 물렙도 아니고 장비와 실력 모두 충실한, 그들도 이름을 들어본 명성 높은 기사이기도 하고.
"초인님. 꼭 이기셔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본때를 보여주십쇼. 박대엽도 이긴 초인님이신데, 성기사 하나가 대숩니까?"
"고맙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이기실 겁니다! 전 선생님만 믿습니다!"
"고맙다. 걱정하지 말고 보고 있어."
"선생님! 꼭 이기고 오셔야 해요! 여기서 지면 안 돼요!"
"그래. 너도 잘 보고 있어. 너라면 얻는 게 있을 거다."
공증을 맡은 변호사들도 관중석으로 빠져나갔다.
이제 결투장에는 나와 오두식만 남았다.
철컥. 철컥.
나는 유탄 발사기 둘을 어깨에 걸치고, 나머지 둘을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이미 조정간 사격으로 밀어놓은 상태.
오두식이 크게 팔을 돌렸다.
자기 산탄총을 힐끗 보더니 한쪽으로 던져 버린다.
선택한 무장은 방패와 망치가 전부.
오두식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인님. 옛 아버지께 영육을 바치는 것은 실로 복되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어 자발적으로 입교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약에 초인님께서 그리 하시면, 제가 성녀님께 청하여 이 단원에게 합당한 처분이 내려지도록 하겠습니다."
"대, 대장님!"
이재열이 퍼뜩 놀라서는 오두식을 부른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오두식.
하지만 내 답은 정해져 있었다.
신한테 셀프 인신 공양하라는 게 말이 돼?
"개소리 하지 말고."
"허······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제가 초인님을 옛 아버지께 바치겠습니다. 조금 아프시겠지만 잘 참으시기 바랍니다."
오두식이 전투 자세를 취했다.
나도 유탄 발사기를 오두식에게 조준했다.
팟!
그러자 천장이 크게 한 번 반짝였다.
[10] 숫자가 새겨짐과 동시에 인공지능이 숫자를 읊었다.
[10, 9, 8······]
눈이 마주친다.
불꽃이 튀고 있다.
성난 수사자처럼 머리카락이 잔뜩 곤두섰다.
그리고 뿜어내는 마력 파장.
손발이 저린다.
방호복 아래 피부가 따끔따끔하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은 압박감.
시야가 좁아지고 주변 시야가 몽땅 날아간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망치와 방패를 치켜든 오두식뿐!
영겁과도 같은 10초가 지났다.
적색등이 결투장 전체를 비췄다.
[······0, 시작!]
"우어어어!"
함성.
그리고 돌진.
오두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미터를 단축한다.
공간을 뛰어넘는 듯한 광경.
내 바로 앞에 도달하여 전쟁 망치를 휘두르는 오두식.
광기 섞인 눈동자가 광신을 품고 속삭였다.
너는 반드시 신이 될 거라고.
사자 기사 -2-
다 예측했던 바.
사자 기사는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돌진]을 갈기니까.
돌진은 빠르기로만 따지면 아케인 서울에서도 순위권에 꼽히는 특성.
그러나 내가 더 빨랐다.
당연하지.
아무리 돌진이 빨라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는 법.
퉁! 퉁!
유탄 발사기가 진동한다.
둔중한 소음을 토한다.
오두식이 눈을 부릅떴다.
"같이 죽자는 겁니까!"
급히 검을 회수한다.
방패를 내민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
방패에서는 어두운 색채의 빛이, 몸에서는 무형의 파장이 번진다.
신성 방패와 신성 방어막의 조합.
나도 똑같았다.
전투 시작 직전에 이미 특성을 교체했고 지금은 방어막을 전개하고 있었다.
[영역 방어막][마력 방패][마력 방어막]
[방어][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
무려 3중 방어막을!
신성 방패와 마력 방패의 사이.
중간 지점에서 유탄이 은빛으로 폭발했다.
꽈르릉!
"큭!"
"커억!"
나도 오두식도 신음을 터뜨린다.
코앞에서 터진 유탄이다.
방어 특화 초인이라 해도 견디기 어렵다.
충격과 파편이 3중 방어막을 거칠게 두드렸다.
방어막 일부가 깨지고 마력이 역류했다.
속이 쓰라리고 핏물이 올라오지만 억지로 참았다.
여기서 밀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내가 아는, 아케인 서울의 사자 기사라면 이 정도는 버틸 것이다.
신살자의 은빛 섬광이 터졌어도 어떻게든 견뎌낼 것이다.
다 이겨내고 전진하여 망치로 내 뚝배기를 깰 것이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죽는다.
잘 다져진 고깃덩이가 되고 만다!
"죽어!"
방아쇠를 당긴다.
퉁! 퉁!
유탄 발사기 실린더가 돌아간다.
콰아앙! 쾅!
폭풍과 우박이 내 전신을 찢어발길 듯 덮쳐온다.
그러나 무시한다.
또, 또, 또 방아쇠를 당긴다.
둔중한 반동과 함께 뛰쳐나가는 유탄.
정면에서 폭발을 뒤집어쓴 3중 방어막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어느새 내 마력이 텅 비어버렸다.
탈력감이 밀물처럼 몰려오기 전 반지를 작동시켰다.
저장되어 있던 마력이 밀물처럼 내 전신을 휩쓸었다.
찰랑찰랑 차오르는 충만감.
떵그랑!
어느새 6연발 유탄을 다 쐈다.
미련 없이 유탄 발사기를 버렸다.
그리고 어깨에 교차하여 차고 있던 유탄 발사기를 그대로 쥐고 또 쏴 제꼈다.
쾅쾅쾅쾅쾅쾅!
"저, 저 미친!"
"세상에!"
"선생님! 너무 위험해요!"
"조심하세요!"
"허, 정말 독한 인간이네."
"아니. 아직 3레벨 아니었나? 어떻게 3중 방어막을 쓰는 거지?"
"3레벨 초인이 마력이 저렇게 많다고?"
참관하던 자들이 웅성거리며 내는 소리.
그러나 지각될 뿐 인지되지 않는다.
내 정신은 온통 정면을 향해 있었으니까.
시커멓게 일어선 그림자.
시야를 가리는 흙먼지.
그 안을 향해 유탄을 꽂아넣는다.
까맣게 번들거리는 방패를 향해 꽂고 또 꽂는다.
폭발마다 흔들리는 세계.
그러나 그 충격을 담금질 삼아 내 집중력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깨어나고 있었다.
철컥. 철컥.
모든 유탄을 소모했다.
유탄 발사기를 떨어뜨린다.
방패 너머로 고개를 드는 오두식.
처참한 행색이다.
신성 방패도 신성 방어막도 너덜너덜 넝마처럼 변했다.
파편 여럿이 갑옷에 박혀 여기저기 움푹 파여 있었다.
그러나 눈만큼은 살아 있다.
입에서 피를 흘릴망정, 눈이 충혈되었을망정 전의만큼은 굳건하다.
"죽어어!"
내가 먼저 공격한다.
왼손으로 도끼를 뽑아 들며 땅을 박찼다.
강력한 마력이 휘몰아친다.
마력의 흐름이 나를 밀쳐내듯 앞으로 쏘아보낸다.
돌진!
성난 멧돼지를 방불케하는 기세.
잔뜩 낮춘 내 몸이 강렬하게 오두식을 들이받았다.
"으음!"
오두식에게서 신음이 터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유탄 발사기를 떨어뜨리면서 특성을 싹 바꿨으니까.
[강타][돌진][맷집]
[근력][괴력][인내]
조금 전의 퓨어탱커 조합과는 완전히 다른, 돌격형 전사를 위한 세팅!
철갑 성채 같던 오두식이 잠깐 흔들릴 지경.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미 손도끼가 빛을 발하고 있다.
격노가 발동한다.
전신에 걸친 마법 무구가 하나같이 타오르듯 빛나며 내게 힘을 선사하는 중이다.
"죽어!"
투박하게 검을 휘두른다.
거칠게 날아드는 검.
그러나 예리하다.
희미한 빛을 품고서 오두식의 심장을 노린다.
"허!"
오두식조차 탄성을 지를 정도.
팔을 몸에 붙이며 방패를 기울인다.
아쉽게도 그 한 수에 내 성검이 저지되었다.
그러나 내 공격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있는 힘껏 왼손에 쥔 손도끼를 찍었다.
꽝!
이번에도 오두식은 방패로 도끼를 막았다.
역시 성기사는 성기사.
거대한 벽을 보는 것만 같다.
하지만 여기서 막히려고 그렇게 단련한 게 아니다.
고작 성기사 하나, 4레벨따리 초인에게 죽으려고 아득바득 살아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를 갈며 덤빈다.
대뇌가 끓는 것 같다.
머리가 지끈지끈 뜨겁다.
그 와중에도 집중력만큼은 지독히 날카롭다.
느릿느릿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지는 세상, 신들린 듯 공격을 퍼부었다.
검을 길게 내리긋는다.
[파산검법][검술][참격]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 안정][집중]
춤추는 은빛 성검.
허공에 빛나는 궤적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땅땅땅땅!
오두식이 검꽃을 튕겨낸다.
더 달라붙었다.
서로의 호흡을 코끝으로 느낄 거리.
손도끼를 힘껏 휘두른다.
[근력][괴력][맷집]
[강타][연격][인내]
폭격하듯 오두식을 맹공하는 손도끼.
폭음이 거푸 터진다.
막을 때마다 방패가 크게 흔들린다.
번들거리는 눈동자.
오두식의 동공에 비친 나는 광전사처럼 웃고 있었다.
"허, 제법이십니다!"
오두식이 몸을 뒤집었다.
방패 뒤로 전쟁 망치가 송곳니를 드러낸다.
정확히 내 복부를 노리는 궤적.
손도끼를 내리친 다음이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피할 생각도 없었고.
막아낸다.
몸을 살짝 돌리며 왼팔을 붙이고 방패를 전개한다.
촤르륵 펼쳐지는 방패.
그 위를 칠흑 광채 두른 전쟁 망치가 거칠게 강타했다.
꽈아앙!
순간, 방패가 박살나는 줄 알았다.
어마어마한 굉음이 고막을 찢어버릴 듯 폭발했다.
균형을 잃을 뻔했으나 버틴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여섯 특성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킨다.
[방어][맷집][인내]
[결의][활기][원기왕성]
"으아아아!"
검을 찌른다.
통렬한 반격이다.
잠깐 드러난 빈틈을 찌른 공격에 오두식은 유효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큭!"
그러나 얕다.
제대로 들어간 공격조차 성갑을 뚫지는 못했던 것.
"부족하다!"
전투의 흥분 때문이었을까?
오두식이 존대 따위 집어치우고 방패를 휘두른다.
지근거리에서 가해진 방패 치기!
나도 똑같이 받아쳤다.
방어 전사가 된 것처럼, 아니 완전히 방어 전사가 되어서 방패를 끊어쳤다.
꽝!
"우읍!"
"크으윽!"
믿기지 않는 결과가 나온다.
3레벨 전사 대 4레벨 성기사.
당연히 내가 멀찍이 나가떨어져야 맞다.
하지만 충돌 결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세 발짝을, 4레벨 성기사인 오두식은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상식과는 전혀 다른 결과.
오두식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앉아서 참관하던 자들마저 벌떡 일어섰다.
"저, 저럴 수가!"
"말도 안 돼!"
"대장님이 물러서시다니!"
"죽여버리세요! 사정 봐주지 말란 말입니다!"
"대장님!"
다 무시했다.
아니, 아예 들리지 않았다.
관중석이 소란스럽건 말건 오롯이 오두식에게만 집중한다.
내 모든 힘을, 내 모든 잠재력을 오두식에게 쏟아붓는다.
"으아아아!"
"옛 아버지시어!"
돌진.
서로를 향해서.
폭주하는 기관차가 되어.
꽈아앙!
충돌.
나도 오두식도 튕겨나간다.
균형을 잃는 자는 없다.
피를 뿜으면서도 파열된 근육에 치를 떨면서도 상대에게 달라붙는다.
초근접 박투가 이어진다.
검과 망치, 도끼가 맹렬한 열기를 뿜는다.
공기가 뜨겁다.
땀방울이 마력에 증발하여 자욱한 수증기를 뿜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백열된다.
당장이라도 증발할 것만 같은 이성.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수없이 특성을 전환한다.
1초 단위도 아니다.
거의 0.1초에 한 번씩 전환하는 것 같다.
성검을 찌르고 벨 때는 무사처럼!
손도끼를 쳐내는 순간에는 광전사가 되고!
방패로 막고 성검으로 방어하는 것은 방어 전사!
서로가 잠깐 떨어지면 돌격 전사로 돌진!
카멜레온처럼 표변한다.
게임에서였다면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직업으로.
완벽히 다른 형태의 김전사로!
네 명의 김전사가 빙의한 것과 같다.
나 혼자 한 파티를 구현하여 오두식을 두들기고 있었다.
맹공, 맹공, 맹공을 거듭한다.
오두식의 방어가 조금씩 뚫렸다.
성검이, 도끼가 간헐적으로 마법 갑옷에 생채기를 남겼다.
마침내 한 발 뒤로 물러난다.
한 번 물러난 이상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두 발짝을, 세 발짝을, 네 발짝을, 그렇게 쭉쭉 밀린다.
"으어어어!"
완전히 기세를 탄 나.
죽어라 달라붙는다.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 초근접 거리에서 공격을 퍼붓는다.
깡깡 하는 쇳소리가 연거푸 울린다.
그때마다 오두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이익!"
마침내 분노를 토한다.
크게 방패를 휘둘러 나를 견제하는 오두식.
전쟁 망치가 선홍색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대지 충격!
이건 피해야 한다.
[기동] 몸을 꺾었다.
[질주] 전력으로 달린다.
[신속] 속도가 붙는다.
[도약] 발을 굴러 힘껏 뛰었다.
꽈르릉!
기다렸다는 듯 터져나오는 벽력음!
충격파가 쫓아와 등을 후려갈겼다.
턱, 숨이 막혔다.
허리가 접히는 것만 같다.
비릿한 핏물이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정신이 혼미해지며 하마터면 끊어질 뻔했다.
그러나 견뎠다.
특성을 교체해가면서!
[결의][인내][맷집]
[집중][활기][원기왕성]
바닥을 한 바퀴 뒹굴었다.
벌떡 일어선다.
오두식이 나를 보고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크게 들썩이는 어깨.
마력에 반응하여 뿌옇게 증발하는 땀.
한계였다.
나도 오두식도.
"이이익!"
그러나 부정하겠다.
인정하지 않겠다.
여기가 내 한계라는 것을, 내 마지막 지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나아간다.
몸이 부서질 것 같지만 돌진한다.
뼈가 으스러지는 격통 따위 모조리 씹어먹으며 오두식을 들이받는다!
"옛 아버지시어!"
오두식도 그러했다.
눈코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방패를 내민다.
그 큰 덩치가 화아악 확대된다.
정면충돌!
방패 대 방패끼리, 초인 대 초인끼리, 전사 대 전사끼리!
꽈아앙!
이건 숫제 쇳소리 천둥.
범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대기를 난자한다.
고막이 터지고 반고리관이 흔들린다.
척수를 관통하는 타격에 너 나 할 것 없이 바닥을 나뒹굴게 된다.
그러나 오뚜기처럼 일어난다.
성검을 찌른다.
방패에 막힌다.
전쟁 망치가 무시무시한 빛을 발하며 날아든다.
겨우 받아냈다.
왼팔이 부러지며 통증이 번진다.
이를 갈며 몸통으로 오두식을 들이받는다.
오두식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버텼다.
이어지는 난타, 난타, 난타!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다.
알고 있으니까.
여기서 반 발짝이라도 물러나면 그 순간 승패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핏발 선 시선이 교차한다.
둘 다 피범벅이다.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진 듯이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마력도 고갈 직전.
당장 쓰러져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금.
여기서 끝날 수 없다는 독기만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오두식의 눈에 광기에 가까운 열기가 이글거렸다.
"끝을 보자!"
뚜앙!
망치를 던져 버린다.
방패 중심에서 폭발적으로 칠흑빛이 번진다.
그것은 벽.
아니, 수평선까지 뒤덮은 파도.
던전 보스 사자 기사의 최종기 [어둠 해일]이 세상 가득 넘실대고 있었다.
의심이 독사처럼 고개를 쳐든다.
저걸 뚫을 수 있을까?
겨우 며칠 준비했다고 해서? 검에 조금 익숙해졌다고 해서?
모른다.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좌절하는 대신 성검을 고쳐 쥐었다.
나를 믿는다.
내가 쌓은 시간을 믿는다.
김전사로서 쌓아온 특성을 믿는다!
파앗!
검이 폭사된다.
새하얀 섬광이 피어난다.
이 한 수에 내 모든 것을 담았다.
꾸준히 수련했던 [파산검법].
서우진에게 두들겨 맞으며 익힌 [검술].
공들여 키운 [에인헤랴르 연공법].
나와 함께 성장한 [마력심].
필사의 의지를 담아 선택한 [돌진].
그리고······
박대엽의 목숨을 거뒀던 [섬광]까지.
내 전신이 빛나고 있었다.
남은 마력으로도 모자라 마력 회로 일부까지 희생한 일격이다.
마법 무구 전부가 번쩍이며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 줄기 유성이 되었다.
번쩍!
빛이 어둠을 꿰뚫었다.
어둠이 빛을 깨트렸다.
오두식을 지나친 나.
방패를 내밀고 정지한 오두식.
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커억!"
내가 먼저 무릎을 꿇었다.
피가, 으깨진 내장 조각이 입에서 왈칵 튀어나왔다.
"아!"
"선생님!"
비명이 터졌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몇 번이고 피를 토했다.
그러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성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일어서서 정지한 오두식을 돌아본다.
"어······"
"대장님?"
한참이나 묵묵히 서 있던 오두식.
몸을 돌린다.
삐걱삐걱 고장 난 양철로봇을 보는 듯한 광경.
그 속에서 공허한 눈동자가 나를 주시한다.
주르륵.
그리고 흘러나오는 피.
어느새 벌어진 흉갑의 구멍을 통해 피가 벌컥벌컥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떵그랑!
오두식이 방패를 떨어뜨린다.
방패 중심.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검이 관통했다면 생겼을 크기로, 정확하게.
"안 돼!"
"이럴 수가!"
비탄에 젖은 목소리.
하지만 오두식은 관중석 쪽을 보지 않는다.
꺼져가는 눈으로 내가 있는 곳을 더듬을 뿐이다.
"멋진 한 수. 이름이 무엇인가."
진중하고 묵직한 물음.
나 또한 가볍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섬광······"
어째서였을까?
답하려고 하는 이때.
아쉽고도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던 한 남자가 생각난 것은?
"아니, 유성검이다."
"유성검······"
흐릿하던 동공에 빛이 돌아왔다.
크게 휘청이는 오두식.
마지막 힘을 짜낸다.
최후의 마력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그 상태에서 오두식이 내게 머리를 숙였다.
"훌륭한 결투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
"전사여."
사자 기사 -3-
그 후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번지는 핏물.
축 늘어지는 몸뚱이.
창백하게 질려가는 피부.
공증 변호사들이 결투 종료를 선언했다.
"결투 끝! 김전사 초인의 승리입니다."
승리!
낮은 경악이 비밀 결투장을 휩쓸었다.
이재열 쪽 인사들은 모두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눈을 부릅뜨고 몸을 떨며 오두식을, 오두식의 시체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이건 아니야······"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대장님께서 지셨다고? 대장님께서?"
현실 부정하고 싶은 태도.
그러나 진실은 잔인하도록 명확하다.
반대편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우아아아!"
서우진이 열광하며 뛰어왔다.
나를 들이받듯이 껴안는 바람에 숨이 꽉 막혔다.
"인마! 아파!"
"선생님! 역시 선생님이에요! 선생님이 이길 줄 알았어요! 선생님이 최고야! 우하하! 교단놈들 얼굴 좀 봐요! 쌤통이다! 푸하하!"
이기기는 내가 이겼는데 서우진이 가장 기뻐했다.
나를 껴안고 들어 올리고 춤을 추고 아주 난리가 났다.
"선생님!"
백소린이 질세라 쫓아왔다.
"최고였어요! 와, 어떻게 하신 거예요? 진짜 미친 줄 알았어요! 선생님 사람 맞아요? 솔직히 말해 보세요. 선생님 사람 아니죠? 완전 미쳤어!"
방방 뛰는 백소린.
두 눈 가득 경탄과 감탄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가왔다.
최 소장이 박수를 꽝꽝 쳤다.
"초인님! 믿고 있었습니다! 레벨 차이를 극복하시다니! 이길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명승부였습니다. 초인님은 정말 초인 역사에 길이 남으실 겁니다. 나중에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에 소중한 이 한 표를 걸겠습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허, 초인님······"
김철권 역시 자리하고 있다.
약간은 복잡한 표정.
경이에 젖고, 찬탄하면서도 약간은 씁쓸한 눈빛을 내비친다.
한때는 내가 김철권보다 약할 때가 있었지.
그러나 지금은?
김철권 개인이 아니라 철권파 전체를 가져 와도 나한테 안 된다.
"같은 3레벨이지만 같은 3레벨이 아니네요. 이 김철권, 진심으로 탄복했습니다. 초인님과 알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영광은요. 이번에 제가 김 사장님 도움을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솔직히 무모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압도하실 줄이야······ 언제든 제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불러만 주십쇼. 만사 제쳐두고 뛰어오겠습니다."
제일보안 대표 부부도 다른 회사의 대표들도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넨다.
그들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4레벨을 이긴 3레벨이다.
기습을 한 것도 아니고, 모든 전력을 노출한 상태에서 정면 대결했고.
또, 상대가 암살자나 저격수도 아닌 성기사였다.
단단하기로 따지면 초인 중 최고인 성기사.
그런 성기사를 이겼다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말이다.
나중에 4레벨, 5레벨이 된다면 어떨까?
혹은 7레벨 초월경에 발을 딛는다면?
상상이 안 된다.
대표들이 내 등을 두드렸다.
"허허, 축하합니다."
"역시 우리 김전사 선생님입니다. 우리 아이 치료하실 때부터 알아봤지요."
"신열을 극복한 것부터가 영웅의 증명 아닙니까?"
"암요. 그렇지요. 우리 김전사 선생님이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초인이지요."
"김 선생님. 혹시 필요한 것 없습니까? 지원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쇼. 우리 회사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지원하겠습니다."
완전히 축제 분위기.
반면 반대쪽은 초상집이 되고 말았다.
"대장님······"
"소용없어. 이미 돌아가셨어."
"이럴 수가. 그 지옥 같은 사교 토벌에서도 살아남으셨던 분이 여기서 이렇게 죽는다고?"
"꿈이야. 이건 꿈이라고!"
오두식을 수행한 성전사들이 머리를 쥐어뜯고 땅을 두드리고 크게 통곡한다.
가장 넋이 나간 것은 이재열.
아까부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눈에 빛이 들어왔다.
"너!"
망치를 쥐고 내게 달려드는 이재열.
"이 새끼가?"
서우진이 빠르게 반응했다.
검을 뽑을 것도 없이 주먹을 내친다.
주먹에서 발출된 마력 덩어리가 이재열을 후려쳤다.
"커억!"
이재열이 나가떨어지며 피를 토했다.
우리 쪽 공증 변호사가 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결투 결과에 승복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마법 맹약을 잊지 마십시오! 섣부르게 행동하면 맹약이 성전사님의 심장을 터뜨릴 겁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가슴에 손을 가져가는 이재열.
표독하게 나를 노려본다.
구겨진 눈가에 살의가 비수처럼 맺혀 있었다.
"너! 너 때문에!"
"내가 뭘?"
"너 때문에 대장님께서 돌아가셨다! 너 때문에!"
피를 토하듯 절절히 외치는 목소리.
다른 성전사들도 머리를 들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나를 쏘아본다.
눈동자 눈동자마다 원망과 분노, 증오가 십자 무늬처럼 교차하고 있었다.
"흥."
나는 콧방귀만 한 번 뀌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 짝이다.
"개소리하지 마라. 오두식은 내가 죽이지 않았어."
"무슨 개소리야!"
"이재열."
절뚝절뚝 걸어갔다.
천천히, 이재열을 향해서.
마력도 체력도 모두 바닥 난 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지만 휘청휘청 걸어간다.
그런 내 뒤를 서우진과 백소린이 따라왔다.
저마다 허리의 검을 꼭 움켜쥔 채로.
이윽고 이재열 앞에 도달.
"뭐, 뭐냐!"
이재열이 뒤로 물러난다.
추하게,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오두식의 죽음에 분노했던 것도 잠깐이었다.
이제 이재열의 얼굴에 깃든 것은 공포였다.
검 한 번 휘두를 수 없는 나를 상대로 진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이재열이라는 인간의 본성.
승천그룹 계열사의 차남이라는, 옛 아버지 교단 성전사단의 일원이라는 신분 뒤에 가려진 진실.
나는 꼿꼿이 서서 이재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선고하듯이 말했다.
"오두식은 네가 죽였다."
"헛소리!"
"그렇지 않아?"
이재열을 주시한다.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눈으로.
우악스러운 살기를 뿌리면서.
오두식은 내 적이었다.
그러나 잠깐의 만남으로도 알 수 있었다.
광신도이긴 해도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것을.
이렇게 죽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라는 사실도.
그래서 더욱 분노하게 된다.
이딴 망나니 때문에 오두식이 죽어야 했다는 사실 때문에.
"네가 나한테 암살자를 보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오두식이 죽었을까?"
"그, 그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사실이 밝혀지고 네가 나한테 사과했다면, 그래서 결투가 성사되지 않았어도 오두식이 죽었을까? 아니면 멀쩡히 살아 있었을까? 이재열! 오두식을 죽인 건 너다. 네 잘못 때문에 오두식이 죽었다고!"
이재열의 눈이 흔들린다.
다른 성전사들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이재열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곤 내게 적개심 어린 시선을 던진다.
"그만. 궤변이다."
"과연 궤변일까?"
"시작을 누가 했든, 과정이 어떻게 됐든 대장님의 심장을 찌른 것은 네 검이다. 우리는, 교단은 오늘을 잊지 않을 것이다."
"먼저 죽이려고 해놓고 결투에서 패해 죽으니까 다 내 탓이라고? 대단한 강도 납셨네. 니들이 죽이려고 하면 얌전히 죽어줘야 해?"
"감히 옛 아버지를 모욕하느냐!"
"모욕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지. 팩트 몰라 팩트? 그리고 너희 신이 아니라 너희 행동을 지적하는 건데 너희 신이 왜 여기서 나와? 니네 신 욕 먹이기 싫으면 니네가 행동을 똑바로 하던가."
팩트로 처맞으니까 아프냐?
강도 새끼들 같으니.
성전사들이 눈에서 불을 뿜는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허리에 찬 망치에 손을 가져가려는 찰나.
공증 변호사들이 끼어들었다.
"그만하시지요. 결투는 끝났고 김전사 초인님이 승리하셨습니다. 마법 맹약을 저버릴 생각이십니까?"
"으으윽."
이재열이 심장을 움켜쥐었다.
내 승리가 선언된 시점에서 마법 맹약이 작동하고 있다.
성전사들이 분기를 못 참고 날 공격하면 즉시 마법이 발동한다.
심장이 터지고 이재열이 죽겠지.
"제길!"
"빌어먹을!"
이재열이 죽게 놔둘 수는 없다.
성전사들이 이를 갈며 손을 털었다.
이걸 보면 아까 이재열이 날 공격하게 놔둘 걸 했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서우진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겠지만.
앞뒤 사정 다 따져가며 행동할 정도로 냉정한 녀석도 아니고.
공증 변호사들이 맹약 내용을 상기시켰다.
"결투 맹약에 따라, 성전사님께서는 지금부터 24시간 이내에 김전사 초인님께 자필 종이 사과문과 배상금 10억 원을 전달하셔야 합니다. 사과문 내용은 마도과학 인공지능에 의해 분석될 것이며, 제대로 된 내용이 아니라고 판별되면 24시간 이내에 재작성하셔야 합니다. 부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성심성의껏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죠."
"이로써 초인 김전사와 성전사 이재열의 결투는 초인 김전사의 승리로 종료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성전사들이 참담한 표정을 하고 물러났다.
흰 천에 덮이는 오두식.
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눈을 감은 얼굴이 기이하게도 편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이었을까?
이재열 일행이 완전히 결투장을 떠난 다음.
나는 비로소 긴장을 풀고 쓰러졌다.
"쿨럭!"
"선생님!"
"초인님! 괜찮으십니까!"
화들짝 놀라 달려드는 사람들.
나는 누운 채로 손을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조금 어지러워서 그렇습니다."
"선생님. 이거 드세요."
"응? 아, 고마워."
서우진이 내게 건넨 것은 최상급 치유 물약.
한 병에 억 소리 나는 물건이지만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뚜껑을 따고 마시자 후끈하면서 부드러운 기운이 전신으로 퍼졌다.
빠르게 회복되는 부상.
부러진 뼈가 저절로 붙고 피가 재생된다.
흐릿하던 정신이 또렷해지고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고맙다. 나중에 꼭 갚을게."
"아니에요. 선생님이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에요."
그래도 아직 어지럽다.
마침 비약 지속시간이 똑 끊겼고 결투에서 지나치게 많은 마력을 소모한 까닭이다.
마력 회로 일부까지 제물로 바쳤으니 오죽하겠나.
대신 얻은 게 있지.
수십 수백 번이나 방패를 부딪치며 획득한 [방패 치기].
그리고 온몸으로 전의를 불태우며 싸운 끝에 개방한 [투지].
아울러 오른손을 꼼지락거렸다.
지금도 내 피를 빨아먹는 가죽장갑.
이제는 필요 없다.
조금 전의 결투로 완전히 체화되었으니까.
[강건] 특성을 가져온 이상 벗어서 팔아 버리는 게 낫겠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난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여러분 덕에 제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대단하신 거죠. 저는 살짝 밀어드린 것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대단하세요! 레벨 차이를 극복하시다니!"
"공개 결투가 아니어서 아쉽습니다. 신문 1면, 뉴스 첫 꼭지에 나오고도 남을 일인데요."
"어휴, 그건 제가 싫습니다. 전 조용히 살고 싶어요."
"하하, 초인님. 그런 것 치고는 조금 과감하게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변에서 가만히 놔두질 않으니 어쩔 수 없죠."
"주머니 속의 송곳 아닙니까. 뚫고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번 일도 뉴스만 안 타지 알 사람은 다 알 겁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요."
서우진과 백소린은 뒤풀이를 하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정말로 죽을 것 같았거든.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나 또한 최 소장의 차를 얻어타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운 나의 집.
마력천 욕조에 몸을 담그자마자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
김전사가 잠든 사이.
어떤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뒷골목에서.
"그게 사실이야?"
"그렇다니까!"
"아니, 어떻게 3레벨짜리가 4레벨을 이겨?"
"그분이잖아! 혼자 청소부 협회를 쓸어버린 분! 그분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암!"
전화 통화를 통해서.
[허, 정말로 놀랍군. 성장세가 대단해. 그 초인 말이지, 초인 인증을 받은 것도 얼마 안 되지 않았나?]
[예. 두 달도 되지 않았습니다.]
[두 달 만에 상급 성기사를 꺾었다······ 기억해두길 잘했군. 자네도 계속 주시하게.]
[예. 회장님.]
술집에서.
"성기사놈 죽고 나니까 교단 새끼들이 어떻게 한 줄 알아? 완전 기가 죽어서는 꽁무니를 빼더라니까!"
"캬! 소주가 달다, 달어!"
"교단놈들 꼬라지 보라지!"
"교단의 적, 위대한 전사를 위하여 건배!"
"건배!"
인터넷에 게시물이 올라오고.
[주작 아님?]
[성전사군에 공지 떴음. 모레 발인이니까 조문할 사람 내일까지는 가라고.]
[와, 시발.]
[미친. 진짜야?]
[사자 기사 오두식이면 나도 이름은 들어봤는데······ 그런 사람을 이겼어?]
[세례도 극복하고 성기사도 때려잡고. 이쯤 되면 완전 교적 아니냐?]
[ㅋㅋㅋ 진짜 교적이네.]
높으신 분들 모인 자리에서도 회자되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 기세가 무섭습니다."
"들으셨습니까?"
"그럼요. 간만에 등장한 다크호스 아닙니까."
"어디까지 올라갈까요?"
"신열을 극복한 인물입니다. 못해도 7레벨은 하겠지요."
"그야 모르죠. 의지 견정한 것과 잠재력은 별개 아닙니까."
"흠······ 잡아다 잠재력 측정이라도 해볼까요?"
"이런, 욕심내지 마십쇼. 이미 침 바른 분이 있어요."
"쯧쯧. 그 인간은 욕심도 많아서······"
김전사는 몰랐다.
자신을 둘러싸고 어떤 말이 돌고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기절하듯이 잠에 취해 며칠을 흘려보낸 김전사.
활동을 시작한 것은 며칠 후.
[초인님! 마법 갑옷이 완성됐답니다!]
최 소장의 전화를 받은 다음이었다.
태양 마탑 -1-
태양 마탑
"이겁니다. 초인님."
최선수 인력사무소.
문도 잠그고, 고용한 용병들이 대기실을 지키는 가운데 최 소장이 커다란 상자를 개봉했다.
마력광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인다.
서서히 전모를 드러내는 갑옷.
아니, 방호복.
"이야!"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디자인.
대조적으로 장갑판 빼곡하게 세공된 마법진.
은은하게 번지는 후광까지.
셋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강렬한 인상을 선사하고 있었다.
"멋지네요. 성능은 어떻습니까?"
"그야말로 최상급입니다. 조철 장인의 말로는 저격총이나 유탄 파편은 충분히 막을 거라고 합니다. 대물 저격총까지 가면 힘들고요."
"그 정도나 된다고요?"
"예. 조철 장인은 기사단장급 갑옷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방호복이라 판금 갑옷에 비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나는 한 가닥 우려를 표했다.
"조철 장인이 방호복에 장난치진 않았겠죠? 저번에 보니까 저에 대한 감정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습니다만."
"사실 그래서 감정 마법서를 사용해 봤는데 특별한 문제가 있진 않았습니다. 방호복 성능과 부여된 [거구], [극기] 능력 역시 훌륭했고요. 조철이면 옛 아버지 교단 소속이라 그렇지 이름 높은 장인 아닙니까. 자존심이 있는데 자기 작품에 장난칠 위인은 아닙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벅찬 얼굴로 방호복을 쳐다보았다.
최 소장이 웃으며 내게 권했다.
"입어보시죠. 제가 나름대로 선물도 준비했습니다."
"선물이라뇨?"
"미리 알면 재미없잖습니까. 입고 나오시면 드리겠습니다."
옆방으로 가서 방호복을 입었다.
오늘 입고 온 방호복은 그냥 버리기로 했다.
인간 사냥꾼의 집에서 가져온 그거.
오두식과 결투할 때 써먹은 후로 여기저기 다 부서지고 구멍 나서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으니까.
"멋집니다, 초인님!"
방호복을 입고 나온 날 보고 최 소장이 박수를 쳤다.
그러더니 역시 고급스러운 상자를 꺼내서 내게 내민다.
"열어보세요."
"아니, 뭐 이런 걸 다······"
"흐흐. 결투 승리 축하 선물입니다. 초인님께서 워낙에 잘 해주신 덕에 저도 사업이 아주 잘 되고 있습니다. 차도 바꾸고, 개인 용병이랑 비서도 고용하고, 요 앞에 건물도 하나 샀다니까요?"
"어? 정말요? 건물주 되신 겁니까?"
"흐흐. 예. 조만간 사무소도 옮길 예정입니다. 대로변에 10층 건물이에요."
"성공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드리는 겁니다. 뇌물이죠."
나와 계약하고 있다는 것으로 어필해서 계약을 많이 딴 모양.
상자를 열었다.
다소 밋밋한 마력광 아래 옷 한 벌이 보였다.
츄리닝.
얼핏 보면 평범하기만 한 까만 츄리닝.
최 소장이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상급 마력사로, 초인 장인이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짠 수제 명품입니다. 소총탄은 힘들어도 권총탄은 가볍게 막아주는 물건이지요. 또, 자가 복구 마법과 청결 마법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막 입으시고 좀 찢어지고 해도 하루만 지나면 완벽히 원상복구 됩니다."
"마법이 두 개나 걸렸다고요? 비싼 거 아닙니까?"
"비싸기야 하지만 초인님께 이거 하나 못 해 드릴 정도로 저, 궁핍하지 않습니다. 마법 무구보다는 훨씬 싸요. 초인님 이름 팔고 다녔으니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나는 기쁘게 최 소장의 선물을 받아들었다.
츄리닝을 방호복 위에 덧입었다.
최 소장이 입맛을 다셨다.
"최고 명품은 자가 복구, 청결에 환경 적응 같은 마법이 몇 개 더 걸린다던데 아쉽게도 그런 물건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이 정도로도 좋습니다. 안 그래도 한 번 싸우고 나면 옷이 다 찢어져서 새로 사는 게 귀찮았거든요."
"하하.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초인님은 귀찮은 거 싫어하시잖습니까."
"극혐이죠."
"하하하."
최 소장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러더니 자리를 권하곤 커피를 타서 가져온다.
자기도 커피를 타는데 예전과는 다르게 분홍 우유와 파란 사탕을 타지 않았다.
"약은 안 타시는 겁니까?"
눈여겨보다가 묻자 최 소장이 잠깐 움찔했다.
"부끄럽습니다. 약이랑 술 때문에 그 사단이 났었는데 계속할 수는 없지요. 둘 다 끊었습니다. 저 센터도 다니고 있어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가끔, 아주 가끔 견디기 힘들 때만 커피에 브랜디 조금 넣어서 마시곤 합니다. 아시잖습니까. 이 엿 같은 세상, 맨정신으로 살기 힘든 거요."
"이해합니다."
잠깐 대화가 끊어졌다.
나는 말 없이 커피 향을 즐겼다.
설탕도 우유도 넣지 않은 커피 본연의 향.
고소하면서도 살짝 탄 듯한 향기가 내 코끝을 간지럽혔다.
"초인님."
"네?"
"사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그게, 사실 초인님과 제가 계약을 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의뢰를 받으신 적이 거의 없잖습니까? 서 본부장님 각성 의뢰 이후로는요."
어······ 그랬나?
기억을 뒤져보니 진짜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치고 박기만 했지 최 소장을 통해 의뢰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네요?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초인님께서 워낙 바쁘셨으니까요. 큰일도 많았고."
"적당한 의뢰를 하나 받아서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주시면 좋지요. 사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초인님께서 저랑 계약을 유지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저한테 크게 도움이 되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초인님께서 저랑 계약한 게 맞냐고 의심하는 분들이 자꾸 계셔서······"
"그러겠네요."
받은 것도 있고 평소에 부려먹은 것도 있으니 이런 건 상부상조해야지.
나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곤 머리를 주억거렸다.
"좋습니다. 적당한 의뢰를 하나 받지요."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혹시 추천하고 싶으신 의뢰가 있습니까?"
"음, 역시 간단히 끝낼 수 있는 의뢰가 좋겠지요? 제가 몇 개 뽑아놨는데······"
"꼭 쉬운 의뢰 아니어도 됩니다. 차라리 정식 의뢰가 낫죠. 조금 어려워도 좋으니 보상이 좋으면 더 좋습니다. 대신 너무 오래 걸리는 의뢰는 말고요. 짧게 끝나는 의뢰가 좋겠습니다."
"어······ 잠시만요. 보상 좋고 짧게 끝나는 의뢰가······"
최 소장이 모니터 하나를 돌려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메일함에 메일이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거의 폭주하다시피 하는 의뢰 중개.
괜히 몇 달 만에 차 바꾸고 건물 산 게 아니지 싶다.
마우스가 몇 가지 의뢰를 추려냈다.
[서부군 대외협력부]
[금오정보]
[태양 마탑 연구부]
[가이아 교단 인천 지부]
"4대 세력에서도 의뢰가 들어옵니까?"
"예. 저번 결투 이후로 갑자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비밀 결투였는데 결과는 다 아나 보네요."
"그럼요. 참관인이 그렇게 많았는데요. 공증 변호사들도 정보 넘기고 한몫씩 챙겼을 겁니다."
최 소장이 4대 세력 의뢰만 추려냈다.
꽤 많다.
군단, 재벌, 마탑, 교단 다 합치면 10개를 넘을 정도로.
"음······ 조건은 다 괜찮습니다. 서부군에서는 대련 몇 번만 하면 10억을 주겠다는데요?"
"나쁘지 않네요. 그런데 돈보단 마법 무구가 더 좋습니다."
"하긴 초인님은 돈 많이 버셨으니까요."
한때는 병원비 수천에 허덕대던 때가 있었지.
지금은 아니다.
최 소장이 대신 팔아치운 전리품만 해도 엄청나고, 이재열에게 받은 배상금 10억도 있으니까.
"마법 무구, 마법 무구······ 아, 가이아 교단 인천 지부 의뢰는 어떻습니까? 최근에 발견한 해안 동굴이 있는데, 거기서 악마의 흔적이 발견됐답니다. 탐사하고 정화하려고 하는데 성기사가 부족해서 못 들어가고 있다고 하네요. 사제님들 호위해주면 성물 하나 주고, 혹시 전리품이 있으면 우선권을 주겠답니다."
아. 뭔지 알겠다.
게임에서도 등장하는 해안 동굴 던전이다.
초중반에 쓰기 좋은 마검을 얻는 곳.
나는 허리에 찬 성검을 쓰다듬곤 머리를 저었다.
"나쁘진 않은데 끌리지도 않네요. 다른 의뢰는 어떻습니까? 빨리 끝나고, 마법 무구나 다른 옵션이 있는 의뢰가 좋겠습니다. 정 없으면 가이아 교단 의뢰를 받지요. 대신 위험해도 됩니다."
"으음, 금오정보 의뢰는 내용은 괜찮습니다만 보상이 현금이고, 신화보안쪽 의뢰도 보상이 현금이고······ 돈을 대가로 주겠다는 곳이 많습니다. 아, 여긴 좀 다르네요. 여기 어떻습니까? 태양 마탑 연구부에서 넣은 의뢰입니다."
"뭔데요?"
"보상은 회원권입니다. 초인님과 초인님이 지정하는 대리자 1인에게 태양 마탑을 자유롭게 출입하게 해주겠답니다."
그게 좋나?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최 소장이 부연 설명을 했다.
"4대 마탑은 아무나 못 들어갑니다. 최소한 초청장이나 회원권이 있어야 하지요. 그리고 마탑에 들어가야 마탑 상점이나 마탑에서 보증하는 경매장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상점이랑 경매장이요?"
"예. 그리고 아시죠? 4대 마탑이 공동으로 금융회사를 운영하는 거요. 경매장도 그 안에 들어갑니다. 명품 무구는 군단 경매장, 성물은 교단 경매장이 최고지만 일반적인 아티팩트나 소모품, 마법 재료는 마탑 경매장이 원탑이죠. 저번에 구해드린 위기 감지 반지도 마탑 경매장 통해 구했습니다. 저는 출입 권한이 없어서 중개료를 꽤 줬지요."
최 소장이 입맛을 다신다.
누가 봐도 마탑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모습.
나는 실소하면서도 곰곰이 따져 보았다.
마탑 출입 권한을 얻는다?
'나쁘지 않아.'
신원 시장을 통해 얻는 건 한계가 있다.
소위 말하는 어둠의 경로니까.
양지와 음지는 다르다.
이번 기회에 빛의 경로를 하나 뚫어놓는 것도 좋겠지.
태양 마탑.
아직 내가 못 만난 튜토리얼 캐릭터, 김마법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최 소장님은 어떻습니까? 제가 뭘 선택하는 게 좋을까요?"
"어흠, 어흠, 그야······"
최 소장은 날 한 번 보고는 솔직하게 말했다.
"특별히 끌리시는 게 없으면 마탑 회원권이 좋겠습니다."
"그래요?"
"예. 일단 뚫어놓으면 굉장히 편하거든요. 다른 마탑에 보증금만 조금 예치하고 회원권 얻는 것도 되고요. 원래는 수십억을 갖다 바쳐도 회원권을 안 내줍니다."
"하긴 있으면 편하지요. 그래서 의뢰 내용이 뭡니까?"
"마법 연구입니다. 세부적으로 말씀드리면······ 지극화? 지극화를 구현하는 게 목표라고 하네요."
지극화?
뭔지 안다.
태양 마탑 출신 SSR 마법사 캐릭터 고유 특성이니까.
"지극화 구현? 그건 좋은데 번지수 잘못 찾은 거 아닙니까? 전 전사인데요."
"흑염 때문입니다. 성화를 가진 성기사는 많지만 흑염을 가진 초인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도 초인님이 유일합니다."
"아, 흑염."
흑염이 원래 지극화에 들어가나?
아닌데.
지옥불에 태양불꽃, 성화, 귀화, 정령화, 용왕염을 합쳐서 만드는 게 지극화다.
SSR 캐릭터가 언제 나오는지 따져 본 다음 이해했다.
그 캐릭터가 업데이트된 것은 에피소드 5, 지옥문 때였다.
설정상 나이가 어리니 지금은 초등학교 다니고 있을까?
"흑염을 보태줄 수는 있는데 그걸로 지극화가 완성되는지 안 되는지는 장담 못 합니다."
"예. 태양 마탑에서도 초인님 참가에 의의를 두는 모양입니다. 지금은 연구 초기 단계라 여러 가지 속성의 화염 능력을 수집 중이라고 하네요."
흑염이 지극화의 재료가 될 수 있을까?
게임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럼, 이 세상에서는?
'힘들지. 다른 특성 재룐데.'
나야 회원권만 따먹고 나와도 이득이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지.
"만약에 지극화 생성에 기여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 그 부분은 진행이 확실해지면 재계약하는 것으로 여지를 남겼습니다. 마탑에서는 가능성이 크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겠죠."
어차피 지극화는 내가 못 쓴다.
고유 특성이고 마법사 계열 제한이 걸려 있으니까.
하지만 지고화라면?
마법사랑 사제 쓰라고 나온 특성.
계열 제한은 없지만 전사와 강화병에겐 안 어울린다.
마력을 엄청나게 소모하기 때문이다.
물론 난 상관없다.
특성 갈아 끼우고 쓰면 되니까.
'좀 과한가?'
사실 흑염도 잘 안 쓰는데 지고화까지 필요할까 싶다.
그래도 못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차이가 있지.
일단 수집해 놓으면 언젠가 쓸 일이 생길 것이다.
오두식과의 결투에서도 오랜만에 영역 방어막을 꺼내서 3중 방어막을 만들었듯이.
"태양 마탑 의뢰를 받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최 소장이 기뻐하며 전화를 걸었다.
바로 다음 날 태양 마탑으로 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목표는 지고화.
아니, 그 재료 특성.
오직 태양 마탑에서만 구할 수 있는 태양불꽃이었다.
태양 마탑 -2-
괴상하게 생긴 탑.
태양 마탑을 처음 본 내 첫 감상이었다.
"저게 탑이에요?"
"예. 특이하게 생겼죠?"
탑이 아니라 둥근 구체 같다.
그것도 허공에 둥실둥실 띄워놓은.
반중력 마법이나 부양 마법을 응용한 걸까?
거대한 황금색 구가, 지름 수백 미터는 될 법한 구조물이 하늘 높이 떠 있었다.
그 주위로는 붉은색 마법진 띠가 목성 고리처럼 황금색 구를 겹겹이 싸고 회전하는 중이다.
정말로 태양을 형상화한 듯한 모습.
"돈 엄청 들었겠네요. 초인탑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마법사들이 다 그렇죠. 다른 마탑도 장난 아닙니다."
"저걸 어떻게 띄웠을까요?"
"네? 하하하. 띄운 게 아닙니다."
"그럼요?"
"가까이 가시면 압니다."
최 소장이 속도를 냈다.
고급 세단이 빠르게 도로를 달린다.
일정 거리 안으로 접근하자 마탑이 비로소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휴대용 선풍기 같은 모습.
알고 보니 황금색 구를 뾰족한 원뿔 기둥이 지탱하고 있었다.
원래 세계의 대전 한빛탑을 연상시키는 형태.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인지 왜곡 마법을 건 겁니까?"
"예. 투명화 마법과 결합해서 어쩌고 했다는데 저도 정확한 건 모릅니다."
"돈지랄이네요."
"마법사들 과시욕 알아주지 않습니까. 곧 죽어도 있어 보여야 한다는 거죠. 4대 마탑끼리 경쟁이 붙은 것도 있고요."
이쯤 되면 다른 마탑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나중에 시간 나면 들러야지.
자동차가 마탑 정문에 도착했다.
경비병 대신 로봇 골렘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중세 기사를 닮은 로봇 골렘.
손에 든 도끼창에서는 마법 화염이 타오르고 반대쪽 팔뚝에는 소형 미사일이 폭발 마법을 품고 번들거린다.
로봇 골렘이 다가와 눈에서 레이저를 쏘았다.
곧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차량 번호 abcd 가흔, efgh. 방문자 3레벨 초인 김전사와 그 수행인. 방문 목적 마탑 연구 협조. 방문 장소 연구부. 확인되었습니다. 김전사 초인님, 태양 마탑 방문을 환영합니다. 충실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위이이잉.
문이 열리고 절벽 위로 마법 도로가 깔린다.
태양 마탑은 주위에 땅을 파서 절벽처럼 만들어 놓았던 것.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세계대전 잔재죠. 그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항쟁 시대 아니었습니까. 이 좁은 반도 안에서도 박 터지게 치고받았으니까요."
하긴 이 세계의 1차·2차 세계대전은 원래 세계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었으니까.
상념을 추스를 새도 없이 태양 마탑에 도착.
마법 정령이 날아와 우리를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김전사 초인님. 유명석 책임 연구 마법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기, 차는 어떻게 합니까?"
[차 키를 두고 내리시면 저희가 보관하겠습니다.]
차에서 내렸다.
마법 정령이 우리에게, 또 자동차에 옅은 광선을 발사했다.
나와 최 소장 발밑에 마법진이 생성되고, 자동차는 자동 주행하여 주차장을 향해 달렸다.
마법진이 우리를 공중에 띄우고 마탑 안으로 인도했다.
마법 발판이라고 하면 정확하겠다.
역시 마탑은 마탑.
최첨단에서도 최첨단을 달리는 곳.
서울에서 보던 것보다 확실히 발전된 기술이었다.
"오셨습니까!"
연구부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 있던 마법사가 날 맞이했다.
머리가 하얗게 샌, 일흔은 되어 보이는 노인.
그러나 은은하게 발해지는 마력 파장은 무시할 수가 없다.
아마도 6레벨.
지극화 구현의 책임 마법사.
나는 정중히 책임 마법사에게 인사했다.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레벨 초인 김전사입니다."
"허허,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재수 없는 시껌댕이의 저주를 극복한 것으로 모자라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고양이 기사를 일대일로 이긴 분이 아닙니까? 더구나 세계에서 유일한 흑염 소유자이시고요."
"과찬이십니다. 저도 유명석 마법사님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오호? 절 아십니까?"
"그럼요. 태양불꽃의 설계자이자 탑주님 사제 시잖습니까."
"이 사람을 아시다니, 초인님께서도 인맥이 상당하신가 봅니다."
책임 마법사가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나도 마법 정령이 말해준 이름을 듣고 간신히 기억해 낸 거다.
"어서 가시지요. 할 일이 많습니다."
"저는 흑염만 구현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흑염은 특성상 데이터로 담기가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신성력과 마법은 상극 아닙니까."
"아하, 마법 측정에 잘 안 담기나 보죠?"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그려. 오늘 내로 끝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며칠 자고 갈 각오하고 왔으니깐 부담 갖지 마세요."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책임 마법사가 날 데려간 곳은 연구부 깊숙한 곳.
언제 끝날지 모르니 최 소장은 돌아가고 나만 들어갔다.
마법진과 과학 연구실이 공존하는 장소.
벽면 모니터가 복잡한 데이터가 쉬지 않고 떠오르고 마법 정령들이 부산하게 연구 자료를 분석하고 있었다.
내가 그 광경을 구경하는 사이 책임 마법사가 잠깐 자리를 떴다.
"초인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준비할 게 조금 있습니다."
"아, 예. 얼마든지 하고 오십쇼.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 제 조수들이랑 인사 나누시고, 기본 측정만 먼저 하고 계세요."
남은 것은 책임 마법사의 조수들.
얕볼 수는 없다.
말이 조수지 선임 연구원 책임 연구원 직함을 달고 있고 레벨도 3레벨 4레벨, 심지어 5레벨도 한 명 있었으니까.
개중 5레벨 마법사.
20대 후반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선임 연구원 박형주입니다."
"김전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일부터 할까요?"
그저 무심한 눈.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는 듯하다.
내게 호의적으로 굴던 책임 마법사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
그럴 수밖에.
레벨이 높잖아.
게다가 마법사 계열 초인이고.
이 세상에선 레벨이 깡패고, 전사와 마법사는 썩 사이가 좋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천적이니까.
"그러죠."
상관없다.
며칠 보고 안 볼 사이.
어떻게든 책임 마법사를 구슬려 태양불꽃만 배워가면 그만.
선임 마법사를 따라 측정 장치로 향했다.
공간을 차지하는 다초점 입체 마법진.
중심에 우뚝 선 유리관 형태의 측정 장치.
어디서 많이 본 물건.
작은 충격이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초정밀 측정 장치잖아!'
게임에서는 일러스트 한 장으로만 존재하는 물건.
설정상, 뽑기로 영입한 캐릭터들은 이 장치 측정 결과를 가져온다고 되어 있다.
그 요약본이 캐릭터 카드.
여기에는 캐릭터의 모든 것이 다 기재된다.
키, 몸무게, 혈액형, 성격부터 시작 특성과 등급, 내밀한 비밀마저도.
이 세상의 초정밀 측정 장치가 게임과 완전히 똑같은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있지.
현재 내 특성과 내 성장 한계가 모조리 읽힐 거라는 점.
어쩌면······
특성 전환 능력까지도.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된다.
"저걸 쓰시겠다고요? 저한테?"
"예. 어디까지나 기본 측정입니다. 흑염 연구에 필요해서요. 어째서 흑염이 발현된 건지,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모든 자료가 필요합니다."
말은 그럴 듯하다.
그런데 그걸 회원권 하나 주고 뽑아먹겠다고?
지랄하지 마라!
나는 팔짱을 끼고 툭, 내뱉었다.
"거절하겠습니다."
"네, 그럼 들어가······ 예? 뭐라고요?"
"거절한다고요. 계약서 가져와 보세요. 거기 어디 초정밀 측정을 실행한다는 말이 있습니까? 제가 계약한 건 흑염 시현과 연구 협조, 둘 뿐입니다. 초정밀 측정에는 동의한 적 없습니다."
"흑염 연구에 필요한 절차입니다."
"그럼 없던 일로 하죠. 전 가보겠습니다."
어디서 약을 팔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을 굴리지만 눈동자 깊이 초조한 빛이 떠돌고 있었다.
구린내가 났다.
심하게.
책임 마법사가 그랬는지 다른 누가 사주했는지 모르겠지만 내 정보를 탐내는 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선임 마법사가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초인님,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정말로 필요한 절차입니다. 초인님에 대해 알지 못하면 흑염을 제대로 분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미리 계약서에 쓰셔야 할 것 아닙니까?"
"계약서를 미진하게 쓴 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너무 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보상해드릴 테니 화를 푸시고······"
"계약대로 해야지요, 계약대로! 계약대로 안 할 거면 왜 계약서를 씁니까? 인제 와서 말 바꾸면, 나중에 또 말 바꿀지 어떻게 알아요? 이거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책임 마법사님은 또 어디 가셨어요? 예?"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전사 계열 초인의 목청이다.
고함 특성도 포효 특성도 없지만 쩌렁쩌렁한 성량이 연구부 전체로 퍼져 나갔다.
바쁘고 소란스럽던 연구부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살며시 주먹을 쥐는 선임 마법사.
눈가에 살짝 붉은 기가 스친다.
열 받았다 이거지.
정식으로 싸우면 상대도 안 될 놈이 까부니까.
그것도 자기 홈그라운드에서.
하지만 세게 나가지 않으면 등골까지 쪽 빨아 먹힐 판.
죽을지언정 몇 놈은 죽여버리겠다는 각오로 눈을 부릅떴다.
허리에 찬 성검에는 손을 대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소리를 질러댔다.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책임 마법사가 돌아온 것은 그때.
선임 마법사가 쩔쩔매며 책임 마법사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 초인님께서 기본 측정을 거부하셔서 말입니다."
"기본 측정을? 왜? 초인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하려면 기본 측정만 해야죠. 초정밀 측정을 하겠다고 하는데, 제가 미쳤습니까? 제가 뭘 믿고 제 밑바닥까지 털어서 보여줘요?"
가만히 측정 장치를 가리켰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측정 장치.
절대 기본 측정 장치가 아닌, 초정밀 측정 장치를.
꿈틀.
책임 마법사가 한쪽 눈썹을 크게 치켜올렸다.
그러더니 있는 힘껏 선임 마법사의 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찰싹, 찰진 소리가 울렸다.
"박형주, 너 이 새끼! 또 그 짓거리냐!"
"채, 책임님. 오해이십니다!"
"새꺄! 5레벨이나 된 새끼가 마법 연구는 안 하고 또 엉뚱한 곳에 눈을 팔고 있어? 조 장로가 불쌍하다. 이번에야말로 네 손을 잘라줄까? 이 새끼, 데이터 갖다 팔 거면 니가 연구 파서 임상시험 대상자 모아서 데이터 뽑던가! 감히 내 연구에 똥을 뿌려? 지구에 시발, 흑염 가진 인간이 한 명밖에 없는데 파토나면 시발, 니가 다 책임질 거야?"
"그게 아닙니다!"
"뭐가 아냐 병신아! CCTV 가져와 볼까? 어? 조 장로 앞에서 징계 위원회라도 소집해 줘? 어?"
"그······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욕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책임 마법사.
성깔 있네.
누가 화염 속성 마법사 아니라고 할까 봐.
선임 마법사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머리를 정수리가 보이도록 숙였다.
그래도 분이 가시지 않나 보다.
책임 마법사가 선임 마법사의 명찰을 거칠게 잡아뜯었다.
나이 일흔이 넘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운 박력.
"꺼져! 넌 이제 선임 연구원도 뭣도 아니다!"
"책임님!"
"꺼지라고!"
선임 마법사가 우물쭈물하다가 뺨을 한 대 더 얻어맞고 도망쳤다.
발단이 된 나로서도 당황스러운 장면.
멍하니 보고 있자 책임 마법사가 내게 허리를 굽혔다.
"미안합니다. 김 초인님. 못 볼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머리 새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이러고 있으니 마음이 좀 그렇다.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란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아까 선임 마법사를 찰지게 때릴 때 조금 마음이 풀리기도 했고.
나는 얼른 책임 마법사를 잡아 일으켰다.
"아니, 아니. 괜찮습니다. 일어나세요."
"모든 건 이 늙은이가 연구원 간수를 잘못한 탓입니다. 조 장로가 아무리 부탁해도 연구원으로 받아주는 게 아니었는데······ 제 부덕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괜찮다니까요."
책임 마법사가 못 이기는 척 일어났다.
이거 혹시 노린 거 아냐?
그런데 의심을 품고 들여다본 눈이 너무 맑았다.
순진한 소년처럼.
오직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품고 반짝이고 있었다.
하도 뒤통수를 많이 맞아 사람 잘 파악하게 된 내가 보기에도 진심이구나, 싶을 정도로.
이게 연기면 연말 대상감이다.
"아까 그 분, 전적이 있었나 보죠?"
"예. 멍청한 놈이 도박에 눈이 어두워서 마탑 기밀을 빼돌려서 판 적이 있습니다. 저놈 스승이 조 장로가 아니었으면 진작 파문당했겠지요. 몇 년 자중하더니 이놈이 또······"
"그럼 이번에는요?"
"그, 그것이 말입니다······"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 법.
어떻게든 후폭풍을 최소화하고 싶어서 따귀를 날린 모양이다.
책임 마법사가 허둥지둥 허공에 손짓을 했다.
마력 파장이 번지더니 책임 마법사가 찬 손목시계가 반짝인다.
"사죄의 뜻으로 회원권 등급을 높여 드렸습니다. 뭔가 좋은 거라도 드려야 하는데 제가 워낙 가진 게 없다 보니 이게 한계입니다."
"회원권 등급이요?"
"예. 나름 쓸만할 겁니다. 우리 마탑 상업 시설이나 연계 금융 회사에서 혜택을 받으실 수 있거든요."
그래?
나쁘지 않다.
상점에서 마법 무구나 각종 재료 살 때 좋으니까.
은행 거래를 마탑 은행으로 갈아타도 좋고.
내가 심드렁하게 생각할 때, 책임 마법사가 비로소 귀가 확 뜨이는 장점을 언급했다.
"참. 우리 마탑 훈련 시설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훈련 시설이요? 마법사 양성 과정?"
"어,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
마법사 양성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특성이 몇 개 있다.
그중에 상당수를 확보한 다음이지만, 아직 획득하지 못한 특성도 많다.
특성 먹을 생각에 군침이 돌았다.
"그럼요. 알지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허허,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입니다."
책임 마법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무언의 눈짓을 보낸다.
적당히 이 정도로 합의하고 넘어가자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고작 3레벨 전사.
마탑 소속 마법사가 수작 좀 부렸다고 끝까지 갔다간 조용히 뒷골목에 파묻히는 수가 있다.
그 증거로 주변의 시선이 곱지 못했다.
책임 마법사를 빼고는 다들 싸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초인님,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예. 얼마든지요."
책임 마법사가 직접 진행한 측정은 깔끔했다.
모든 것이 계약서대로였다.
기분 좋게 측정을 마친 다음 마법 훈련장을 향해 달려갔다.
마법 훈련장에서도 전격 마법 훈련장.
[전격 저항] 특성이 코앞에 있었다.
6대 속성 중 마지막 조각.
"뭐야?"
"전사가 왜 여기 왔어?"
"아까 연구부에서······"
이미 소문이 다 퍼진 걸까?
백안시하는 마법사들을 무시하고 훈련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그때였다.
찌이잉!
반지가 진동한 것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으며 뒷목이 땡긴 것은.
태양 마탑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