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태양 마탑 -3-

'뭐지?'

왜 위기 감지가 발동해?

설마 훈련 프로그램으로 날 어쩌려는 인간이 있나?

급히 통찰만 장착하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빨간색 선이 사방에 보인다.

보이는 마법사들마다 내게 적의를 쏘아 보내고 있었다.

'난감하네.'

이래서야 누가 수를 쓰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위기 감지는 금방 끊어졌다.

당장 뭘 할 생각은 없는 모양.

'전격 저항부터 빨리 얻자.'

전격 저항만 얻으면 된다.

그러면 여기 훈련 프로그램을 어떻게 돌리든 날 어쩔 수가 없다.

이미 내게는 신성, 암흑, 화염, 냉기, 대지, 이렇게 저항 다섯 개가 모여 있으니까.

"훈련 시작."

명령어를 읊자 마법 정령들이 휙휙 날아왔다.

[전격 마법 시전 훈련을 시작합니다.]

[지금부터 마법 정령들이 전격 마법을 영창합니다.]

[전격 마법을 사용하여 마법 정령을 맞추셔야 합니다. 시간 내에 맞추지 못하면 전격 마법이 사용자를 공격합니다.]

우웅······

귀가 울렸다.

마법 정령이 목소리 대신 저주파를 내며 마법을 영창하는 것.

차분히 기다렸다.

정석은 인공지능의 안내처럼 전격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마탑의 마법 훈련장은 마법 사용 말고도 다른 쓰임새가 있었다.

내가 가만히 서 있자 주위 마법사들이 수군거렸다.

"뭐야, 저놈은?"

"마법은 안 쓰고 뭐한데?"

"전사잖아. 전사."

"난 마검사라도 되는 줄 알았지."

"변태 아냐? 전기 찜질 당하고 싶어서 왔나 본데."

"으하하. 그거 말 된다."

"전사들이 다 그렇지 뭐."

이윽고 기다리던 시간이 도래했다.

파짓!

마법 정령들이 시간 차로 전기를 내뿜었다.

찌릿, 하고 전기가 올랐다.

별로 아프진 않다.

조금 따끔한 정도?

신열에 고통받아도 보고, 쌩으로 살도 째본 내게는 귀엽기만 했다.

제어 마법 정령을 향해 손짓하자 마법 정령이 둥둥 다가왔다.

"전격 강도 최대로."

[경고. 경고. 최대 강도 전격은 심장 마비 혹은 심장 박동 이상으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강도를 높이더라도 중간 단계에서 멈추시길 권고합니다.]

"다시, 전격 강도 최대로."

[최대 강도 전격으로 인한 책임은 오로지 사용자에게 귀속되며 태양 마탑과 태양 마탑 관리부에는 일절 민사상 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한다."

[전격 마법 강도를 최대한으로 올립니다. 마법 강도를 내리고 싶다면 두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법사들의 눈이 차가워진 것을.

"전격 강도 최대? 죽으려고 환장했나."

"저번 주에도 한 놈 실려 갔었지?"

"전사잖아, 전사. 몸 단단한 거 자신 있다 이거지."

"내기할까? 몇 분 만에 쓰러지는지."

"몇 분? 나는 30초도 못 버틴다에 10만 원 건다. 전격 마법을 어떻게 몸으로 버텨? 전격 마법은 신경계에 작용한다고. 불수의근이 경련하는데 서 있을 수가 없지. 오줌 지리면서 쓰러질걸."

"좋아. 난 20초에 10만 원."

"나는 15초."

"나는 10초."

10초? 15초?

너무 짠 거 아니냐?

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영창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법 정령들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영창은 진작에 끝났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라도 주는 모양.

경고음이 내 고막으로 파고들었다.

[최대 강도 전격 마법 발사합니다. 3, 2, 1, 발사!]

파지지직!

번개가 나를 덮쳤다.

새하얀 섬광이 나를 지지고 또 지진다.

몸이 떨렸다.

전신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심장이 멎어버린 것 같다.

신경계를 불태우는 이 느낌.

이가 따닥따닥 마주치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자칫 쓰러질 뻔했으나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버텼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전격을, 번개를, 순수한 속성 마법을 흡수한다고.

전기가 내 몸을 지지면서도 해체된다.

마력으로 변환되어 조금이나마 흡수된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시도.

평범한 사람 같았으면 내부 장기까지 구워져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세 가지 특성이 조금씩이나마 마력을 흡수하게끔 도와주었다.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마력 흡수]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선택한 특성 셋.

[인내][결의][소생]

인내는 모든 피해를 감소시킨다.

결의는 정신 방어에 특화된 한편으로 마법 피해를 방어한다.

소생은 몸이 위험할 때 회복 능력을 크게 높인다.

이 여섯 특성의 조합으로 나는 멀쩡할 수 있었다.

비록 고통스럽고 몸이 푸들푸들 떨리긴 하지만 정자세를 유지했다.

10초 20초가 아니라.

무려 5분 이상을.

그쯤 되자 마법사들도 이상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어······"

"뭐지? 왜 안 쓰러져?"

"저게 가능해?"

"마력 방어막 쓰고 있는 거 아냐?"

"아니야! 그냥 서 있어!"

"나도 예전에 최대 강도 도전했다가 한 대 맞고 실려 갔었는데······"

합쳐서 10분쯤 지났을까?

미친 듯이 날 지져대던 전기가 확연히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엄밀하게 말하면 마법이 약해진 게 아니라 내 방어 능력이 강해진 거였다.

[전격 저항]!

드디어 마지막 조각!

'그만할까?'

아니지.

여기까지 와서 그건 아쉽지.

제어 정령을 불러 훈련 방식을 바꿨다.

"시전 훈련 중단. 방어 훈련으로. 난이도 최상. 전격 강도는 최대."

[경고. 경고. 최대 강도 전격은······]

"오케 오케. 패스 패스."

마법 정령들이 재정렬했다.

불규칙하게 떠 있던 것에서 내 정면에 벽처럼 늘어선 것.

마법사들이 대놓고 입방아를 찧었다.

"최상 난이도? 어쭈, 자신 있다 이거지."

"전기 좀 지져져도 안 아픈가 보지."

"전격 저항 아티팩트 가져온 거 아니야?"

"그거 말 된다."

"그래서 그런 거였어? 어쩐지."

"신성한 마법의 전당에 아티팩트로 사기를 치다니······"

"저런 놈은 본때를 보여줘야 해."

하여간 입만 살아서는.

다 무시하고 전방에 정신을 집중했다.

마법 정령들이 붉게 달아오르다가 경고를 발했다.

[경고. 경고. 전격 강도가 재조정되었습니다.]

[훈련 프로그램을 심각하게 벗어났습니다.]

[훈련 프로그램 재조정. 경고 시스템 미작동.]

[현재 선택 마법, 정규 3레벨 마법.]

[3레벨 초인도 마비되는 수준입니다.]

[훈련 중이던 사용자들은 모든 훈련을 중지하고 시설을 이탈하시기 바랍니다.]

응?

전격 강도 재조정? 정규 3레벨 마법?

마법 정령들이 미묘하게 각도를 틀었다.

나를 정조준하는데 이상하게 목덜미가 섬찟하다.

더불어 빽빽 우는 위기 감각 반지.

즉시 통찰 특성 장착.

보였다.

겉으로는 마법 영창 중인 것 같던 마법 정령 중 몇이 이미 빨간색으로 변해 있는 것이.

"우웃!"

가까스로 몸을 날렸다.

번쩍!

허연 섬광이 내가 있던 자리를 지진다.

조금 전까지 맞았던 번개와는 차원이 다른 강도.

실전에서도 통할 전격 마법.

가슴이 서늘해지는 한편 분통이 터졌다.

'어떤 새끼야!'

빠르게 주위를 돌아본다.

마법사들은 다 시설 밖으로 도망치는 중이다.

그중 한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유리벽 너머 바깥.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 손을 감춘.

아까 책임 마법사에게 따귀를 맞았던 선임 마법사.

'저 새끼가!'

마법사가 나를 보고 웃는다.

음흉하게.

한 마리 하이에나처럼.

지가 맞을 짓을 해놓고 아주 염병을 하네.

내게 망신을 주고 싶은 모양.

초인도 마비당할 정도의 강도라고 했다.

마비당하는 게 무슨 문제냐고?

전격 마법이다. 전격 마법!

마법사들이 말한 것처럼 전격 마법에 당해 쓰러지면 괄약근이 풀리면서 똥오줌을 지리게 된다.

마탑에서 수련하다가 똥오줌을 지린 전사가 있다?

백 년은 비웃음을 당하고도 남겠지.

머리가 차가워졌다.

울컥, 화가 치솟는 한편 상황을 냉정하게 보게 된다.

'그냥 나갈까?'

그래도 된다.

인공지능이 대피령을 내렸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저 찌질이가 날 비웃는 꼴을 봐라!

여기서 도망치면 저놈에게 지는 거 아니냐!

나는 몸을 바로 세웠다.

죽으면 죽었지 저딴 찌질한 마법사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사실 믿는 구석도 있었고.

아무리 강도를 높인다고 해도 훈련 프로그램.

공급되는 마력량에 한계가 있었고, 내 계산대로라면 나한테는 제대로 피해를 못 입힌다.

마법 정령들이 정렬한다.

미묘하게 각도를 틀어서 내 주위를 차례차례 조준한다.

피할 곳이 안 나왔다.

어디로 피하든 번개 몇 방은 맞아야 했다.

그 상태로 벌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공격 직전.

나는 두 손을 모았다.

특성을 교체한다.

성녀의 세례와 싸우면서 가져온 [신성 저항].

마력천 물을 끓여 몸을 지져가며 얻었던 [화염 저항].

청소부 협회의 강령술사 카론이 선사한 [암흑 저항].

유령 집합체의 냉기 폭풍 속에서 획득한 [냉기 저항].

인간 사냥꾼의 마법 함정을 벗어나느라 개화한 [대지 저항].

마지막으로, 조금 전 훈련으로 맞춘 [전격 저항].

오로지 6대 속성 저항으로만 특성 칸을 꽉 채운다.

몸이 진동한다.

견고하게 자리 잡은 마력 회로.

거기 깃든 여섯 특성이 서로 공명하며 새로운 힘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게임이었다면 캐릭터 특성 칸이 흔들렸겠지.

네모 칸 자체가 와장창 깨지면서 글자들이 솟구치고, 글자 파편 사이에서 새로운 글자가 조립되었을 것이다.

현실에서도 비슷했다.

마력 회로가 깨지고 재조립되고 있었다.

어릿한 통증이 혈맥을 타고 심장으로 치달린다.

"크윽."

내가 신음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마법 정령들이 번뜩였다.

선명한 백색 벼락이 나를 향해 질주한다!

콰지직!

벼락이 나를 강타했다.

확실히 강력한 벼락.

조금 전의 나였다면 바닥에 엎어져 추한 모습을 보였겠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당당하게 몸을 일으켰다.

보란 듯이 어깨를 펴고 벼락 찜질을 맞았다.

그런 나를 어떤 상위 특성이 수호하고 있었다.

[마법 저항]

여기에 전격 저항과 인내, 결의를 추가로 넣자 맞아도 맞은 것 같지가 않다.

그냥 간지러울 뿐이다.

처음 맞았던 훈련용 최저 강도 마법처럼.

"맙소사!"

"저거 뭐야!"

"가짜 아냐?"

"전격 마법이 아니고 섬광 마법이겠지?"

"어디······ 이크! 아니잖아! 3레벨 마법 맞아!"

"3레벨 마법을 그냥 몸으로 막는다고?"

"인간 맞아?"

나는 선임 마법사를 보며 여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그걸 도발로 받아들인 걸까?

하지만 뭘 어쩌지는 못한다.

호주머니 속에서 손을 꿈틀거릴 뿐, 훈련 프로그램을 또 조정한다거나 하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선을 심각하게 넘게 되니까.

태양 마탑은 삼국 시대부터 이 땅에 있었던 유서 깊은 명문.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해도, 규율을 어긴 제자까지 싸고 돌 정도로 만만한 조직은 아니다.

결국 선임 마법사는 이를 악물면서 손을 호주머니에서 뺐다.

[경고. 경고.]

[사용자들은 모든 훈련을 중지하고 시설을 이탈하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훈련 프로그램은 폭주하고 있다.

번개가 미친 듯이 날아온다.

맞아줘도 되지만 조금 아쉽다.

언제 또 마탑에 올지 모르는데 뽕을 뽑아야 하지 않겠어?

더구나 아케인 서울의 특성 획득은 훈련보단 실전에서 얻기가 쉽다.

시간 효율로 따지면 거의 서너 배는 보정이 붙는 느낌.

지금도 선임 마법사가 조작을 한 덕에 실전 취급이잖아.

[마법 저항][전격 저항][인내]

[통찰][기동][질주]

살짝 특성을 바꿨다.

맞고만 있는 게 아니라 피하기 위해서.

통찰로 보는 마법 정령이 붉어지다가, 공격 시점을 예보하듯 빨갛게 물들었다.

파파팟!

번개가 꽂힌다.

허연 전기 다발이 나를 쫓아온다.

나는 이미 그 지점에 없다.

기동으로 방향을 꺾고 질주로 몸을 날리며, 신속의 보조를 받으며 요리조리 피해 나간다.

3레벨 마법은 확실히 강력하다.

그러나 맞지 않으면 다 소용없는 법.

몇십 번을 그렇게 피하자 내가 기대하던 특성이 떠올랐다.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몸.

자각한 즉시 공중제비를 돌면서 몸을 뒤로 날렸다.

어지럽게 쏘아지는 전격 사이를 유연하게 빠져나가며 거리를 벌리는 나.

[이탈] 특성이었다.

인간 사냥꾼이 썼던 바로 그 특성.

'완성이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상위 특성 대공습.

그 조각을 다 모았기 때문에.

이제 신발의 신속 특성만 체화하면 조합해서 대공습을 완성할 수 있다.

"빌어먹을."

감각을 최대한으로 높여서일까?

낮게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맹렬하게 번개를 쏘던 마법 정령들이 푸시시 힘을 잃었다.

[훈련 프로그램 재조정. 훈련 프로그램 재조정.]

[훈련 프로그램이 정상화되었습니다.]

[현재 선택 마법, 기초 0레벨 마법.]

[평범한 사람이 맞아도 살짝 찌릿한 수준입니다.]

[언제든지 훈련 프로그램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선임 마법사는 이미 등을 돌리고 걸어나가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어안이 벙벙해서는 선임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머리가 좋기로 말하면 서러울 인종이 바로 마법사.

오늘 왜 이런 사단이 났는지 이미 다 간파했을 것이다.

"뭔 일이야?"

"왜 저래?"

"저 인간 박형주잖아."

"아, 그 조 장로 제자? 재수없는 금수저 새끼."

"저 인간이 원래 전사들 싫어하긴 하는데······"

"지가 뭐라고 훈련 프로그램에 손을 대?"

이번만은 나도 참지 않았다.

바로 책임 마법사한테 달려가서 선임 마법사가 벌인 짓을 항의했다.

훈련 프로그램 로그를 확인한 책임 마법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개새끼가 진짜······"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바로 다음 날 징계 위원회가 열렸다.

죄목은 기밀 유출과 권한 남용, 특수 폭행.

결정된 형벌은 추방.

마법사들이 파문 다음으로 두려워하는 형벌이었다.

태양 마탑 -4-

"으아아아! 안 돼!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스승님! 도와주세요!"

선임 마법사가 짐승처럼 끌려갔다.

나는 가만히 선임 마법사를 지켜보았다.

"의외네요."

"뭐가 말입니까?"

"솔직히 저는 박 마법사가 근신 처분 정도 받고 끝날 줄 알았습니다."

선임 마법사, 박형주에 대해서는 최 소장에게 들었다.

태양 마탑 아홉 장로 중 한 명의 제자라고.

사적으로도 외조카라던가?

그래서 그 개판을 치고도 여태 잘 붙어 있던 거지.

이번에도 자기 배경을 믿고 망나니짓을 했고.

책임 마법사가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외부에서 우리 마탑을 어떻게 보는지는 압니다만, 우리 마탑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조직이 아닙니다."

"그건 알죠. 어설픈 조직이 천년 넘게 살아 있을 리가 없잖아요. 태양 마탑은 삼국 시대부터 있었다면서요."

"허허, 잘 알고 계십니다그려. 예,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탑이 그 오랜 기간 살아남은 것은 엄격한 규율과 오직 진리를 추구한다는 신념 때문이었지요.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한들, 장로의 혈족이라 한들 선을 넘은 자는 가차 없이 쳐냈습니다."

"선을 넘었다······"

"그동안 박 마법사가 경징계만 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마탑 내에서 사고를 쳤기 때문입니다. 조 장로가 고생 많이 했지요. 하지만 마탑 내 기밀을 외부에 팔아먹고, 자기 권한을 남용해서 제가 초빙한 초인님을 욕보이려 들다니요? 조 장로가 아니었으면, 추방이 아니라 파문당하고도 남았을 짓입니다."

책임 마법사는 여러모로 시원하다는 얼굴이다.

얼마나 깽판을 쳤으면 저래?

나는 슬며시 성검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 녀석을 저놈 배때기에 박아주지 못한 것.

"추방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뇌에 마법 낙인을 찍고 더는 새로운 마법을 배우지 못하게 만듭니다. 제자를 들이는 것도 불가능하지요."

"마법사 생명이 끝나는 거네요."

"파문보다는 낫습니다. 파문은 척추와 전신 신경계 마력 회로를 완전히 제거합니다. 사람 하나 폐인되는 건 순식간이지요. 추방은 어쨌든 지금까지 익힌 마법을 쓸 수는 있습니다."

무협식으로 얘기하면 단전 파괴에 사지근맥 절단.

"쌓인 게 많으셨나 봅니다."

"조 장로가 오냐오냐한 게 잘못이지요. 마법 교육과 마력 훈련만큼 중요한 게 인성 교육입니다."

마법사는 옷만 한 벌 달랑 걸치고 쫓겨났다.

책임 마법사가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탑주님께서는 저놈 뒤에 재벌 하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재벌이요?"

"예. 요즘 우리 마탑이 조용히 마법 연구만 하다 보니 졸부놈이 우릴 만만하게 본 모양인데 저놈 가는 거 추적해서 아주 본때를 보여줄 작정입니다."

내가 모르는 뒷사정이 있는 모양.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책임 마법사가 내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그리고 초인님. 부족하지만 이번 일에 대한 심심한 사과의 선물입니다."

한 손에 들어올 크기의 나무 상자.

즉석에서 열어보았다.

황금색 물약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엘릭서.

게임에서는 피 1만 있어도, 어떤 상태 이상에 빠져도 단번에 회복시키는 기적의 물약이다.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목이 잘려도 심장이 부서져도 뇌파만 정지하지만 않았다면 살려낼 수 있는 보물 중의 보물.

그야말로 여벌의 목숨.

나는 기쁘게 선물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생명을 선물로 주셨네요."

"어흠! 개인의 일탈이라고는 하나 마탑 일원이 마탑 내에서 사고를 쳤으니 당연한 대가이지요."

책임 마법사가 내게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일 크게 만들지 말자는 뜻.

그건 나도 동감이다.

태양 마탑이 오리발을 내밀었으면 모를까 성의를 보여줬으니 더더욱.

아쉬운 점은 보상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는 엘릭서보다는 태양불꽃을 원했다고.

'태양불꽃을 달라고 해볼까?'

안타깝지만 불가능하다.

태양불꽃은 태양 마탑의 간판 마법이니까.

짧은 시전 시간, 준수한 마력 소모, 막강한 화력.

유구한 역사 속, 태양 마탑이 개발한 마법 중에서도 손꼽히는 상위권 마법.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말씀해 보시지요."

"예전부터 제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4대 마탑의 4대 마법을 겪어 보는 겁니다."

"음? 4대 마법을요?"

"예."

책임 마법사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양불꽃의 설계자였으니까.

완성은 마탑주가 직접 했지만.

"초인님은 아직 3레벨 아닙니까. 제가 초인님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3레벨 초인은 태양불꽃을 아주 잠깐도 버티지 못합니다. 1초만 노출돼도 타죽고 맙니다. 나중에, 5레벨 정도 되셔서 다시 오시면 어떻습니까? 이번 일도 있고 연구 일도 있고 하니, 태양불꽃을 겪는 정도는 제 직권으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5레벨이 되어서?

나쁘지 않다.

어차피 지고화를 조합해도 마력 소모 때문에 5레벨이 된 다음에나 쓸 수 있으니.

하지만 말이다.

지금 얻을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그때까지 기다려야 해?

조곤조곤 설득에 들어갔다.

"마법사님도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마법 방어에 강점이 있습니다."

"음······ 봤습니다. 훈련 시설 로그를 보니 마법 저항 초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방어 능력을 보여주셨지요. 아, 이 자료는 기밀이니 밖으로 유출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 정도는 알지요. 이번에 보여주신 공평한 처리만으로도 믿음이 갑니다. 어쨌든 제가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는 태양불꽃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략 30초 정도?"

"허허허, 30초라니요. 5레벨 초인도 그렇게는 못 합니다."

"마법 방어 능력만 한해서 그렇습니다. 흑염 때문이기도 하고요."

"오호. 흑염······"

"아시잖습니까? 화염 속성 마법 상대로 흑염이 어떤 능력을 보여주는지. 마법사님도 직접 보신 적은 없으시겠습니다만."

꿀꺽.

책임 마법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흑염의 능력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상대의 모든 마력을 불태우며 고통을 주는 것으로.

당연히 화염 마법도 잡아먹는다.

그렇다면 말이다.

태양불꽃 같은 상위 마법을 상대로 하면 어떨까?

잡아먹을까?

아니면 잡아먹힐까?

책임 마법사의 눈이 번뜩였다.

태양불꽃의 설계자로서 호승심이 드나 보다.

흑염에 대한 호기심도 한몫했고.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흑염 자료를 얻을 수 있으니 저흰 좋습니다만 초인님 신상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보고 놀라지나 마세요."

"으허허, 그렇게 자신 있으십니까? 자그마치 태양불꽃인데요."

"흑염이 있으니까요."

"그러시다면야 탑주님 허가를 받아오겠습니다. 제가 직접 조작할 테니 불상사는 없을 겁니다. 부디 최대한 오래 버텨주시기 바랍니다."

책임 마법사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탑주와는 사형제 사이라 그럴까?

금방 허가가 떨어졌다.

태양 마탑 연구부에서도 가장 내밀한 곳.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실험실.

대포를 연상시키는 원통형 구조물이 내게 겨눠졌다.

실험실 바깥에는 참관인들이 바글바글하다.

그중에는 내가 아케인 서울에서 수만 번은 봤던 태양 마탑주도 있었다.

마탑주의 눈에 어린 흥미를 읽고, 나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태양불꽃을 얻는 방법은 세 가지.'

첫째, 마탑주의 제자로 들어가는 것.

둘째, 마탑주를 일대일 결투로 꺾고 굴복시키는 것.

둘 다 나에겐 불가능한 방법이다.

마법사 계열 초인에게만 가능한 경로였으니까.

마지막 세 번째.

태양 마탑의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

그리고 히든 퀘스트는 마탑주의 호감도를 일정 이상으로 올려야 개방된다.

[시작하겠습니다.]

원통형 구조물이 나를 겨눈다.

그 끝에는 태양을 연상시키는 금빛 구체가 매달려 있다.

과아아아아.

마력 집중진이 마력을 공급한다.

공기가 빨려 들어가며 와류를 형성한다.

기이한 진동이 공간을 뒤흔든다.

마력 파장이 진중하게 퍼지며 내 감각을 억누른다.

준비만으로도 사위를 짓누르는 위력.

책임 마법사가 마이크로 외쳤다.

[태양불꽃, 15초간 사출합니다!]

딸깍, 불이 들어왔다.

잠시 정적.

이내 세상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콰콰콰콰.

화염이 쏟아진다.

세계를 태우고도 남을 불길이다.

불꽃이 닿지도 않았는데 피부가 쓰라리다.

본능적인 공포가 뇌를 마비시킨다.

하지만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마법 저항][화염 저항][흑염]

[마력 방어막][인내][결의]

여기에 내 방호복 하의에 부여된 [극기].

모든 능력을 발현하며 태양불꽃에 맞섰다.

눈을 부릅뜨고 황금색 불길을 노려본다.

아울러 마력 방어막 전개.

섬세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정신을 집중하여 오로지 내 몸에, 방호복과 결합하듯이 펼쳤다.

원래는 구체 형태로 전개되어야 할 마력 방어막.

여태 무수히 많이 쓰고, 또 실전에서 그렇게 활용한 보람이 있었다.

방호복의 유려한 표면을 따라 방어막이 흐르듯 완성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방어막은 차라리 어떤 물체를 닮았다.

방호복을.

혹은 갑옷을.

[마력 갑옷].

아쉽지만 내 마력량으로는 마력 갑옷을 유지하기 어렵다.

특성 획득으로 만족하고 마력 방어막을 그대로 사용.

마침내 태양불꽃이 나를 덮쳤다.

'으으으으윽!'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방어막으로 막아도, 마법 저항과 화염 저항으로 견뎌도 이 정도라니!

뇌리가 새하얗게 변한다.

신열을 온몸으로 겪던 때와 같다.

어떻게 보면 더 힘들었다.

신열을 강제로 정신을 현실에 고정시켰지만, 태양불꽃은 정신줄조차 태워버릴 만큼 강력했으니까!

'괜찮아. 버틸 수 있어.'

아랫입술을 깨물며 견뎠다.

혀를 몇 번이나 짓씹으며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핏발 선 눈으로 정면만 노려본다.

흑염이 번지는 것이 보인다.

꾸물꾸물 턱없이 느린 속도지만, 굼벵이 솔잎 갉아먹듯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어쩌면 이거······

[15초 경과! 태양불꽃 사출 중단합니다!]

벌써 15초가 지났어?

황금색 빛이 뚝 끊어졌다.

하도 강한 빛을 정면에서 봐서일까?

눈이 흐리고 아팠다.

본능적으로 눈을 비비던 때, 갑자기 바깥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저, 저럴 수가!"

"태양불꽃이!"

"3레벨이라고요? 저 초인이? 6레벨이 아니고요?"

"3레벨 주제에 어떻게!"

"마력 공급이 제대로 안 된 것 아닙니까?"

왜들 저러지?

나는 내 상태부터 먼저 확인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다.

노출된 얼굴 피부도 손도 멀쩡했다.

다만 방호복 표면이 조금 녹아서 눌어붙어 있었다.

조금 자랐던 머리카락도 모조리 타 버렸고.

이 정도면 태양불꽃에 15초나 노출된 것 치곤 굉장히 선방한 거다.

흑염의 영향이 컸다.

태양불꽃이 아니라 다른 마탑의 간판 마법이었으면 여기서 끝나진 않았겠지.

누군가 탄식하듯 흘리는 말이 내 귀에 꽂혔다.

"지극화 개발을 서둘러야겠습니다."

이게 그거냐?

나비효과?

어쩌면 지극화는, 지극화를 고유 특성으로 가진 캐릭터는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빠르게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참관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몇 명만 빼고.

낯익은 노인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가왔다.

"대단히 인상 깊었네. 김 초인."

머리를 까맣게 염색한 노인.

정장에 넥타이 차림.

누가 보면 대기업 회장님 같은 풍모.

태양 마탑주.

나는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영광입니다, 마탑주님."

"나를 아나?"

"대한민국 사람 중에 마탑주님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4대 세력.

군단, 재벌, 마탑, 교단.

그 안에서도 강중약이 있다.

태양 마탑은 명백히 강에 속하는 세력.

특히 마탑주는 대한민국에 5명밖에 없는 8레벨 캐릭터 중의 하나다.

그 성녀와 동급의 괴물이라고.

'미리 특성을 전환해 놓길 잘했지.'

혹시 성녀처럼 내 특성 전환을 알아볼지 모르는 일이니.

마탑주가 빙그레 웃었다.

"허허, 말을 참 잘하는구려. 김 초인, 이 늙은이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주겠나? 차 한 잔 대접해 드리리다."

"영광입니다. 염치없지만 한 잔 얻어 마시겠습니다."

마탑주를 따라나섰다.

유독 날 표독하게 쏘아보는 할머니 마법사가 있었으나 무시.

게임에서도 악역이었던 인간이니 여기서도 비슷하겠지.

마탑주가 날 데려간 곳은 마탑에서도 가장 높은 곳.

본인의 집무실이었다.

"굉장하네요."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던 것과는 박력이 다르다.

바닥은 지상.

분명히 마탑 고도가 이 정도로 높지 않은데 서울과 부산, 심지어 백두산과 한라산이 한 시야에 담겼다.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광경.

반대로 천장은 우주였다.

태양을 보면 태양이 내게 확 다가와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고, 달을 보면 곰보투성이 얼굴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마법적으로 구현한 장소.

그곳이 마탑주의 집무실.

마탑주가 소탈하게 웃고는 직접 커피를 내려 내게 건넸다.

"드시구려. 그럭저럭 마실 만할 거요."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나는 커피에 대해 잘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커피믹스가 가장 맛있다고.

하지만 향을 한 번 맡는 순간 몸이 이완되고 정신이 맑아지는 게 좋은 원두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좋네요."

"후후, 이 늙은이의 유일한 취미라네."

커피향이 침묵 위로 아른아른 피어올랐다.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마탑주도.

그러다 마탑주가 침묵을 깨트렸다.

"오늘 일은 매우 인상 깊었네. 아무리 흑염이라 한들 태양불꽃을 그리 효과적으로 분쇄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왜 유 마법사가 그리도 김 초인의 역성을 들었는지 알겠더군."

"과찬이십니다."

"지극화 개발은 우리 마탑의 숙원이라네. 하지만 지극화 개발만큼이나 숙원인 사업이 또 하나 있지."

마탑주가 가만히 마력 파장을 뿜었다.

집무실 쪽문이 열리고 20대 초반 남자가 들어왔다.

"할아버지. 부르셨습니까?"

대나무처럼 비쩍 마르고 뿔테 안경을 쓴 남자.

누군지 안다. 모를 수가 없지.

저 얼굴을 스마트폰 화면에서 얼마나 많이 봤는데.

아케인 서울의 튜토리얼 캐릭터 중 하나.

튜토리얼 캐릭터 중에서는 유일한 금수저.

김마법이었다.

화염 쌓는 김마법 -1-

화염 쌓는 김마법

"인사하거라. 3레벨 초인 김전사 씨다."

김마법이 입을 살짝 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전사······ 초인님? 김마법이라고 합니다."

호기심과 놀라움이 뒤섞인 눈초리.

신기한 동물 보는 듯한 표정이다.

김마법은 눈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 이름이 김전사?

얌마, 너도 만만치 않거든.

어떻게 사람 이름이 김마법이냐?

"반갑습니다. 김마법 씨. 김전사입니다."

"편하게 대해주세요. 전 일개 견습 마법사입니다. 이제 겨우 1레벨이에요."

"그래도 태양 마탑의 일원 아니십니까. 마탑주님 손자분이시면 언젠가 고레벨로 날아오르시겠지요."

"그게······"

난처하다는 듯 흐리게 웃는 김마법.

마탑주가 혀를 끌끌 찼다.

"바로 그게 문제라네. 우리 마탑의 숙원이지."

"예?"

사실 나는 제반 사정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도 모르는 척해야 하는 법.

마탑주가 알아서 설명을 시작했다.

"이놈은 마법사가 되기엔 너무 멍청해. 어떻게 1레벨로 각성은 시켰는데 도저히 그 위로 나아갈 수가 없어. 잠재력만 따지면 5레벨까지는 충분하다고 나오는데 머리가 딸려서 1레벨에 멈추게 한 할아비의 심정을 아나?"

문제는 이거다.

지능.

튜토리얼 캐릭터답게, 태생 N급 캐릭터답게 김마법은 나사 하나가 빠져 있다.

힘, 민첩, 체력, 지능, 정신, 마력 6대 능력치 중 지능이 다른 마법사들보다 낮은 것.

시작 특성은 [마력탄].

태양 마탑 출신인데도 [화염구]가 아니다.

그나마 학원 보내서 [마법] 특성을 장착하거나 개인 퀘스트를 완료해서 전직시켜야 쓸만해진다.

김전사가 시작 특성이 없고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낮다는 것을 생각하면 비슷한 처지.

내가 괜히 처음 근린 공원에서 훈련하면서 헥헥거린 게 아니라는 뜻이다.

"머리가 안 좋다고요? 설마요. 똑똑해 보이시는데요."

"할아버지 기대가 너무 높으셔서 그렇습니다."

김마법이 내게 하소연하고 나섰다.

"제가 이래 뵈도 서울대 경영학과 다닙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마음에 안 들어하시니······"

"떽! 마법 학과에 입학했어야지 문과 선택한 놈이 말이 많다! 최소한 의예과나 물리학과 갔으면 내가 이러지도 않아! 원 참, 애비 애미가 둘 다 마법사인데 도대체 누굴 닮았는지 원."

"할아버지 닮아서 그렇다니까요?"

"그랬으면 욘석아, 전교 1등이 아니라 전국 1등을 했겠지!"

대충 상황을 알겠다.

수포자라 이거지.

마법사인데 수학을 못 한다?

이것만큼 치명적인 게 없다.

게임에서 낮은 지능이 여기서는 이런 식으로 적용된 모양.

흥미진진하게 조손의 입씨름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마법 씨가 수학을 못 하는 게 문제입니까?"

"그래! 이놈 아주 문과 머리라니까? 얼마 전에는 뭐, 웹소설 쓰겠다고 야단을 피워서 내 속을 썩게 만들었어."

"할아버지도 젊을 때 시 쓰셨다면서요!"

"그거야 잠깐 취미 생활 즐긴 거지. 너도 취미로 해라. 안 말리마. 대신 초인 레벨부터 5레벨까진 올리고."

"마법이 머리에 안 들어오는 걸 어떻게 해요?"

"노력이 부족해서 그래, 요놈아!"

"언제는 머리가 문제라면서요!"

"요놈이?"

마탑주가 과장되게 팔을 들자 김마법이 머리를 감싸는 시늉을 했다.

사이좋은 조손이네.

내가 빙긋 웃자 마탑주가 헛기침을 했다.

"험, 험, 손님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군."

"아닙니다. 사이 좋으셔서 부럽습니다."

"내 손주라곤 요 녀석밖에 없거든. 다른 놈들은 손자 손녀 많이도 낳아놨는데 난 이놈뿐이야. 내가 유일하게 부러운 게 그거라네. 아들놈이 힘을 좀 썼어야 했는데······ 에잉!"

"많이 낳는 것이 중요합니까? 얼마나 번듯하게 키우냐가 중요하죠. 서울대 경영 다닐 정도면 대한민국에서 0.1% 아닙니까."

"끄응! 그건 아무래도 좋아. 그래도 어엿한 마법사로 성장하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되니 문제야. 재능은 솔직히 말해서 부족하지 않아. 우리 마탑과 동떨어져서 문제지."

드디어 본론이 나온다.

마탑주가 커피를 원샷 때리고는 푸념하듯이 말했다.

"다른 마탑도 그렇지만 우리 마탑은 좀 심한 감이 있다네. 마법 구현에 대단히 정밀한 수학적 계산이 필요하다는 거지. 공식 계산에 실수하면 마법이 역류하거나 터져서 마법사를 병신 만들기 십상이야."

"아티팩트나 마법 정령, 컴퓨터 의체의 도움을 받으면요? 하다못해 단말기만 삽입해도 되지 않습니까."

"한계가 있으니까. 3, 4레벨까지는 자네가 말한 것들을 이용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지. 5레벨부터가 문제야. 적당히 넘긴 레벨의 벽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 앞을 가로막을 걸세. 넥타르나 암브로시아를 써도 소용없을 정도야. 할애비 입장에서 손자의 미래를 팔아 현재를 사줄 수는 없지."

"하긴 그렇겠습니다. 그럼 말입니다. 수학적 계산이 필요 없는 마법을 가르치면 어떨까요?"

바로 정답을 짚었다.

마탑주도 머리를 끄덕였다.

"바로 그게 우리 마탑이 생각한 해결책이었다네. 사실 잠재력은 있는데 머리가 딸려서 마법사가 못 되는 녀석들이 꽤 있거든. 내 사촌형님도 결국 전향해서 사제가 되었고."

어딜 가나 있을 법한 문제다.

마법사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치는 지능, 마력, 체력.

마법사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문과 머리다?

그만큼 비참한 게 없지.

초인이 되더라도 마법사는 되지 못할 테니.

"태양 마탑이면 역사가 긴 만큼 오래 연구했을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숙원으로 남아 있는 겁니까?"

"우리 마탑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네. 조선 시대, 아니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개인이 모자란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갔어. 개인의 개성을 인정한 것은 세계대전 이후일세."

"그렇습니까······"

조선시대 양반들이 유교 경전만 파던 것과 비슷한 모양.

"연구는 했지만 결과가 지지부진한 것도 문제일세. 일단 마력 회로 몇 개 개발은 했어. 그런데 파괴력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네. 아니, 3레벨 마력 회로가 그냥 불 좀 일으키고 끝나면 어쩌자는 건가? 이래서야 마법사라고 할 수가 없지. 마검사 마력 회로로는 괜찮지만 이 비리비리한 몸을 보게. 어디 전사 계열 초인으로 써먹을 수 있는 몸인가?"

김마법을 한 번 보았다.

확실히 호리호리하고 근육 하나 없는 몸이다.

학자나 마법사는 할망정 마검사는 절대로 불가능한 육체.

"마탑주님께서 고심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전사입니다. 마법사용 마력 회로 개발에 크게 도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이래 뵈도 내가 한 마탑의 수장이다 보니 들은 게 좀 있다네."

마탑주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서 대표네 아들을 치료한 게 자네라면서?"

"알고 계셨습니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그리고 오늘 흑염을 내 눈으로 보기도 했고.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걸세. 나도 마법사지만, 마법사들은 마법 만능주의에 빠져서 편협해질 때가 많거든. 지구 최고의 화염 능력 중 하나를 가진 자네라면 기똥찬 아이디어를 떠올릴지도 모르잖나?"

기대 섞인 눈빛.

물론 100%는 아니다.

기대보다 의구심이, 냉정한 관찰이 기저에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럼 파괴해드려야지.

이 퀘스트의 종막이, 태양 마탑의 숙원이 어떤 식으로 해소되는지 그 정답을 아주 잘 알고 있거든.

"정령을 활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정령?"

"예. 인조 정령 말고 진짜 정령이요. 문제는 마법 영창 아닙니까. 수식 계산이 안 되어서 마법을 시전할 수 없는 거니까요. 그런 건 정령한테 맡기고 마력만 공급하면 되지요."

"흠, 그건 불가하네."

마탑주가 대놓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신들이 죽고 정령계와의 문도 닫혔다네. 마도과학 혁명 이후에는 자연계에서 정령들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 가끔 엄청난 정령 친화력을 타고난 자들이나 겨우 정령사가 되는 판국이야. 당장 이놈한테 정령 친화력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어떻게 정령사가 되겠나?"

"정령과 계약을 맺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정령을 활용하라고 말씀드렸지요."

"정확히,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게."

"태양 마탑의 마력 회로는 기본적으로 불과 열, 태양을 재현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네."

"그럼 불의 정령을 재현하지 못할 게 뭡니까?"

"으응?"

"마력 회로에 딱 하나의 마법만 새기는 겁니다. 물론 발현 형태나 강도는 조절할 수 있어야겠지요. 마력은 사용자가, 마법은 마력 회로가, 이렇게 분담하면 문과 머리 아니라 돌머리도 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

"흠."

마탑주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마법사가 아닌데?"

"마법사는 아니지요."

"음······"

"선택은 마탑주님과 마법사님들 몫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손자분을 마법 정령과 아티팩트 들이부어서 3레벨, 잘 풀려봐야 4레벨 마법사로 끝나게 만들겠습니까? 아니면 잘 교육시켜서 6레벨, 어쩌면 7레벨이 될 화염술사로 키우시겠습니까?"

화염술사!

마탑주는 그 단어에 팍 꽂힌 모양이었다.

김마법의 올바른 성장 방향이기도 하다.

넥타르 먹여가며 화염술사로 전직시키느니, 태생 R급 화염술사를 채용하는 게 훨씬 낫지만.

"화염술사, 화염술사라······"

마탑주가 네 글자 단어를 입속에서 굴려본다.

이내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화염술사도 어쨌든 마법사 계열 초인이니까.

그러나 곧 얼굴을 굳혔다.

"한 가지 문제가 있네."

"뭡니까?"

"정령계와의 문이 닫혀서 불의 정령을 소환할 수가 없어."

현재 세상에 알려진 정령사는 단 한 명.

그나마 물과 얼음의 정령사다.

고려조부터 태양 마탑이 보관하고 있던 정령화는 엄격히 말해서 불의 정령과는 다르다.

설마 나보고 정령계 문을 열어달라는 얘기는 아니지?

다행히도 나는 대안을 알고 있었다.

"정령수를 사용하시지요."

"정령수? 신수 말인가?"

"예."

"신수, 신수라······ 그렇지! 불사조가 있었어!"

마탑주가 자기 무릎을 내리쳤다.

"불사조를 잡아 심장과 혈맥, 신경계를 복제해서 마력 회로를 만들면······ 이건 되겠군! 아니, 아예 불사조 회로를 그냥 이식해도 되겠어! 화염술, 불사조 화염술이야! 으하하! 왜 내가 이걸 몰랐지? 역시 자네에게 조언을 구한 게 신의 한 수였어! 하하하! 세상에 이런 복덩이가 있다니!"

"으헉!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긴! 이 좋은 날에 춤을 춰야지!"

마탑주가 날 잡아 일으키곤 막춤을 추었다.

근엄한 얼굴, 엄격한 정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흥겨움이었다.

여든 넘은 노인이 그러고 있으니 나도 가만히 있기 뭐하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춤을 추었다.

삐뚤빼뚤 고장 난 나무 인형이 된 듯이.

김마법도 한숨을 폭폭 내쉬면서 합류했다.

알고 보니 마탑주가 기분 좋을 때면 남몰래 손자와 막춤을 추곤 했다는 모양.

"하하하!"

마탑주가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작 전사를 초대해서 얘기를 나눠볼 걸 그랬어. 확실히 전사는 마법사와는 시각이 다르다니까. 에잉, 머리 굳은 할배 할매들끼리만 백 번 회의를 하면 뭐해. 항상 똑같은 얘기만 나오는데."

사실 그렇진 않다.

결국 마탑주는 불사조를 잡아 그 심장과 혈맥, 신경계를 이식한다는 결론을 내리거든.

거기서 만들어지는 게 [불사조 화염술] 특성.

지극화와 태양불꽃 만큼은 아니어도 꽤 쓸 만하다.

마탑주가 웃다가 말고 정색했다.

그러더니 날 주시한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보던 바로 그 표정.

"그래서 말인데, 자네에게 의뢰하고 싶은 것이 있네."

"말씀하시지요."

"불사조를 잡아 올 수 있겠나? 천년 묵은 신수까지는 필요 없네. 오십 년, 아니 이십 년 정도 묵은 새끼들이 가장 좋지. 그래야 거부반응 없이 내 손자놈에게 이식할 수 있으니까."

"불사조 계곡을 찾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정확하게 들었네."

불사조 계곡.

쉽게 말해서 불사조 군락지.

위대한 신수 불사조가 주기적으로 들러서 알을 까는 장소다.

당연히 불사조의 권능에 의해 감춰져 있고, 고레벨 초인들조차 찾아내기 힘들다.

"혹시나 해서 의뢰하는 걸세."

마탑주가 명확히 조건을 달았다.

"불사조 계곡을 찾으면 자네가 원하는 어떤 것이든 보상으로 주겠네. 마탑주 명예 장로 자리를 달라고 해도 수락하지. 꼭 불사조 계곡이 아니더라도 괜찮네. 이십 년짜리 새끼 불사조, 내 손자 녀석에게 이식할 놈만 하나 가져와도 섭섭지 않게 보상하지."

그러나 보상에서는 크게 차이가 날 것이다.

새끼 불사조?

진귀한 동물이긴 하지만 태양 마탑이 못 구할 정도는 아니다.

핵심은 불사조 계곡.

그렇다면 여기서 딜을 거는 게 좋겠다.

나는 정자세를 취하고 마탑주를 주시했다.

"무엇이든 주신다고요?"

"불사조 계곡을 발견했을 때의 일이네."

"저도 새끼 불사조 몇 마리로 생색낼 생각은 없습니다."

"다시 한번 약속하네만, 불사조 계곡 탐색에 성공하면 무엇이든 주겠네."

"태양불꽃도요?"

"으음?"

"태양불꽃이요. 태양불꽃."

당황해서 나를 보는 마탑주.

이내 피식 웃는다.

그냥 질러본 거라고 생각한 모양.

"아, 뭐, 태양불꽃도 내줄 수 있지. 자네가 쓸 수 있다면 말일세."

"기억칩으로 주시는 겁니다. 기초 마법 배워야 한다느니, 마력 회로 각인해야 한다느니 하시면서 시간 끄시면 안 됩니다."

"글쎄. 불사조 계곡만 발견하면 바로 준다니까. 왜, 내 말 못 믿겠나?"

"아뇨. 믿습니다."

마탑주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며 웃었다.

나도 웃었다.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왜냐하면.

불사조 계곡 위치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화염 쌓는 김마법 -2-

"여깁니다."

살짝 비켜주었다.

두꺼운 안개 장막을 뚫고 들어가면 신세계가 열린다.

"우와!"

김마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총천연색으로 물든 별천지.

초록색 소담한 나무들 사이 흐드러지게 핀 빨갛고 노랗고 파란 꽃송이들 사이로 불꽃송이 새들이 한가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삐이익!"

"빼액!"

맑은 노래와 함께 군무를 추는 불사조들.

기이하게도 뜨겁지 않다.

따스한 봄바람만 첫사랑 추억처럼 살랑살랑 피어오를 뿐이다.

허공을 가득 채운 붉은 궤적이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정말로 불사조 계곡이네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래도 이렇게 쉽게 찾을 줄은 몰랐죠.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도 몰랐고요."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죠."

사실은 신수 불사조가 설치한 결계 때문이지만.

김마법이 부리나케 동영상을 찍었다.

전파도 차단되는 결계 밖으로 나가 동영상을 보내자 마탑주가 빛과 함께 공간이동해서 넘어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어제 태양불꽃 방어 시현에서 본 장로들을 동반하고 있었다.

"김 초인! 정말로 불사조 계곡을 찾은 거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나는 귀찮게 밀땅하고 어쩌고 하지 않았다.

마탑주가 불사조 계곡을 언급했을 때, 바로 위치를 알고 있다고 까발렸다.

그래서 김마법과 대동했고 이곳으로 직행했다.

"허허, 참."

마탑주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앞으로는 뒷골목 소문에도 신경을 써야겠구먼. 불사조 계곡 위치 같은 특급 비밀이 뒷골목에 굴러다닐 줄 누가 알았겠어?"

"워낙 쓰레기 정보가 많으니까요. 저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믿지 않았을 겁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스마트폰 화면 통해서 많이 봤으니까.

나는 미리 준비한 은신 마법칩을 쓰고 마탑주를 인도했다.

마탑주와 다른 마법사들은 각기 비슷한 마법을 쓰고, 김마법은 마탑주가 준 은신의 망토를 쓰고는 나를 따라왔다.

결계 안.

마탑주가 보인 반응도 김마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허허허!"

불사조들이 들을까봐 웃음을 터뜨리는 마탑주.

"이야!"

"불사조가 이렇게 많다니!"

"허······ 정말 놀랄 노자로군."

장로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탑주가 기꺼운 얼굴로 내 등을 두드렸다.

"앞으로 불사조 공급은 걱정 안 해도 되겠군! 저 정도 숫자면 백 년은 쓰고도 남겠어!"

"대놓고 잡아가면 불사조가 눈치채고 산란장을 옮길 겁니다."

"흠, 적당히 잡을 것이냐, 최대한 잡고 볼 것이냐, 그게 문제로군. 양식만 가능하면 좋은데 말이지."

"신수 사냥하시게요?"

"그건 불가능하지. 내가 9레벨도 아니고."

마탑주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기색이다.

"탑주님. 약속하신 것은······"

"그건 내가 책임지고 지급하도록 하겠네. 아무렴 탑주씩이나 되어서 한 입으로 두말 하겠나? 자네가 우리 탑의 숙원을 해결해 주었어. 어쩌면 우리 마탑에 또 하나의 학파가 설립될 지도 모르지. 그깟 마법 하나쯤은 전혀 아깝지 않아."

마탑주의 확탑.

새벽같이 일어나 산을 탄 보람이 있었다.

빙그레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려고 할 때였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탑주님? 마법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흠, 조 장로."

표독한 인상의 할머니 마법사.

나한테 수작을 부렸다가 추방된 마법사의 스승이었다.

마탑주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내가 불사조 계곡 탐색 보상으로 건 게 있다네."

"그러니까 무엇을 거셨는데요?"

"흠. 태양불꽃을 걸었지."

"예에?"

"불사조 계곡 위치를 알려주고 그걸 확인하면, 내가 개인적으로 태양불꽃을 전수하기로 약조했네."

"말도 안 됩니다!"

조 장로가 바로 반발하고 나섰다.

"태양불꽃은 우리 마탑의 대표 마법입니다. 아무리 탑주님이라고 한들, 개인적인 보상으로 내결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인 보상?"

마탑주가 대놓고 얹짢은 기색을 비쳤다.

"개인적인 보상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군. 우리 마탑의 2대 연구 목표가 뭔가? 지극화 구현과 새로운 마력 회로 설계가 아닌가? 불사조 계곡은 새로운 마력 회로를 위해 필요한 거였네. 그 보상으로 태양불꽃을 건 것인데, 내 사리사욕을 위해 쓴 것처럼 호도하면 참 곤란해."

"개인적인 감정이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오로지 마탑을 위해서였다고요? 정말로 그렇습니까?"

"조 장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슬슬 마탑주의 눈에 열기가 돌기 시작한다.

아무리 자기 손자를 위해 움직인 거여도 대놓고 지적하면 누가 좋아하겠어?

아예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니고.

조 장로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마탑주가 한 발 빨랐다.

"내 손자를 들먹일 거라면 그 입 닥치시게. 감히 탑의 기밀을 유출하고 탑의 손님을 죽이려 한 개새끼와 교육을 잘못한 그 부모, 그 스승까지 찢어 죽이기 전에. 알아듣겠냐? 이 씨발 창년아?"

와, 급발진 쩐다.

누가 화염 속성 마법사 아니랄까 봐 성질 한 번 화끈하네.

책임 마법사도 그렇고 마탑주도 그렇고.

과연 그 사제에 그 사형이다.

다른 장로들이 급히 진화에 나섰다.

"자, 자. 조금만 진정하십시다."

"탑주님, 이 좋은 날에 왜 그러십니까."

"조 장로 자네도 그래. 이번 일로 감정이 썩 좋지 않은 건 알겠지만 탑주님께 그러면 쓰나."

"마법에 입문하지 못한 건 탑주님 손자분만이 아니네. 내 손자 다섯 중에 둘이나 제대로 마법을 못 쓰고 있어."

"마탑 마법사 중에 자식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탑주님께서 말씀하신 불사조 화염술이라면 그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걸세."

"우리 마탑 전체로 봐도 이득이고."

"됐습니다."

욕을 얻어먹은 조 장로는 단단히 마음이 상한 모양.

찬 바람을 폴폴 날리며 몸을 돌리더니 마법을 사용해 사라졌다.

마탑주가 대놓고 혀를 찼다.

"쯧쯧. 조 장로는 젊었을 때만 해도 안 저랬는데 돈맛을 보더니 사람이 변했어."

"자식처럼 키우던 제자를 추방해야 했으니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탑주님께서 이해하시지요."

"다 지가 교육을 잘못한 거지 누구를 탓해? 에잉, 쯧쯧쯧."

마탑주가 서늘한 눈으로 다른 장로들을 돌아보았다.

"하여간 내 직권으로 태양불꽃을 여기 이 김 초인에게 주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걸로 알겠네."

"잠시만요. 탑주님. 그래도 제한은 걸어야 합니다."

"무슨 제한?"

"다른 마탑이나 금오 그룹에 유출되면 큰일 아닙니까. 안 그래도 우리 마탑 마법 하나라도 훔쳐가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이번에 추방된 박 마법사에게도 그것 때문에 공들여서 마법을 걸지 않았습니까."

"으흠."

마탑주가 한 번 헛기침을 한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일리가 있을 테니 당연한 일.

내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그것은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탑주님과 장로님들 보는 앞에서 기억칩을 사용하고, 필요하다면 마법 맹약을 하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씀입니다. 어떤 내용으로 맹약하시겠습니까?"

"사용 불가, 유출 불가, 복사 불가입니다."

"오호."

장로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내게는 의미 없는 항목이다.

애초에 태양불꽃은 마법사 계열 제한이 걸린 마법이자 특성이니까.

복사 불가는 나를 위해서도 필요했다.

아니면 누군가 나를 납치해서 뇌에서 태양불꽃 마법만 뽑아낼 수도 있잖아.

"확실히 저 정도면 괜찮겠습니다."

"전사 계열 초인이신데도 말이 통하는 분입니다그려."

"이름이 전사라고 해서 뇌도 근육으로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늘."

"장로님도 그러셨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허허허."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장로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잠깐만. 김 초인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본인이 쓰지도 않을 거고, 팔아먹을 것도 아니면 태양불꽃을 원하는 이유가 뭡니까? 차라리 태양불꽃이 깃든 마법석을 몇 개 받아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합리적인 의심.

나는 조용히 흑염을 일으켰다.

아주 약하게, 손가락 하나 끝에만, 촛불 켠 것처럼.

장로들은 물론 마탑주, 김마법의 시선이 내 손끝에 집중된다.

"이걸 강화하고 싶어서요."

"허?"

"으흠?"

"전 전사지만 흑염을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태양 마탑에 와서 지극화에 대해 듣고 욕심이 생겼지요. 바로 저만의 지극화를 피우고 싶다는 겁니다."

"허허허!"

"거참."

"그게 쉬운 일인 줄 아는가? 우리도 벌써 십 년 이상을 투자한 사업이라네!"

"안 될 수도 있지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 잘 압니다. 하지만 마법사분들의 수학적 접근과 전사로서의 감각적 접근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혹시 아나요. 제 지극화가 태양 마탑 분들 지극화보다 더 나을지요."

장로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으허허!"

"원, 농담도 잘 하시구먼."

"자네 혼자 대충 만든 지극화가 우리 마탑에서 전력으로 만든 지극화보다 나을 거라고?"

"그렇게 확정적으로 말씀드리진 않았습니다만? 그리고 대충이라니요. 절대 대충 만들지 않을 겁니다."

다들 말도 안 된다는 기색.

희미한 조소와 우월감이 날 보는 시선 아래에 깔려 있었다.

이래서 전사란,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들렸고.

"재미있군, 재미있어."

마탑주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끼어들었다.

"그럼 내기하겠나?"

"내기라뇨?"

"자네가 만든 지극화, 우리 마탑이 만든 지극화를 비교해서 누가 더 잘 만들었는지 겨뤄보세."

"그거 재미있겠네요."

지극화와 지고화 사이에 우열은 없다.

파괴력은 지극화가 강하지만 소모 마력이나 시전 시간은 지고화가 나으니까.

"그렇지? 좋아. 그럼 판돈은 뭘 걸겠나?"

"진심으로 내기하시게요?"

"당연하지! 판돈 없이 하는 내기가 어디 있나? 왜? 자신 없어?"

마탑주가 빙글빙글 웃는다.

나는 두 손을 살짝 벌려 보였다.

"그런데 저는 걸 만한 게 없습니다만."

"있잖나."

마탑주가 날 똑바로 쳐다본다.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입가.

그러나 웃지 않는 눈.

농담인 것 같으면서도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자네 자신."

"예?"

"내기에서 지면 우리 마탑 보안실로 들어오게. 아, 무료 봉사하라는 소리가 아니야. 대우는 업계 최고 수준으로 해주겠네. 최고 연봉, 최대 복지, 최적 워라밸이 뭔지 보여주지."

내기를 빙자한 실질적인 영입 제안.

장로들이 피식 웃었다.

"허허. 탑주님 너무 노골적인 것 아닙니까?"

"김 초인이 아주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그럴 만 하지요."

"김 초인이 우리 탑에 해준 게 있으니······"

장로들도 호의적인 반응.

태양불꽃 방어 시범에서도 그렇고 불사조 계곡 탐색에서도 그렇고 점수를 많이 딴 모양이다.

하지만 말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면 어떻게 해?

"좋습니다."

나는 선선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 조건, 받아들이지요."

"잘 생각했네!"

마탑주가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럼 바로 계약서부터 써······"

"제가 이기면 마탑 차원에서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으응?"

마탑주가 손을 품에 넣다 말고 정지한다.

자기 귀를 못 믿겠다는 표정.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자네 혹시 뭐라고 했나?"

"제가 이기면 마탑 차원에서 제 소원을 한 가지 들어달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자네가 이기면? 자네가 이기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설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하는 법이죠."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장로들은 머리를 흔들고 마탑주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정말이지 재미있는 농담이군. 좋네. 자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본데 그래야 더 재미있는 법이지. 내 이름으로 확답하겠네. 만약 자네가 만든 지극화가 우리 마탑이 만든 지극화보다 나으면, 아니 비슷하기만 해도 우리 마탑의 패배를 인정하고 마탑 차원에서 자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지!"

"탑주님, 너무 가혹한 조건 아닙니까?"

"비슷해야 승리라니요."

"최소한 80점, 아니 70점 정도만 쫓아와도 엄청나게 잘한 거지요."

"인간적으로 70점까지는 봐 줍시다."

장로들도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70점? 80점?

웃음밖에 안 나온다.

나중에 결과 나오면 아주 기절하시겠어.

완벽한 동률.

즉, 100점이 나올 테니까.

"어떤가? 파괴력, 사정거리, 마력 소모, 시전 시간, 난이도 이렇게 다섯 항목에서 각각 채점하여 총합을 견주겠네. 70점 이상이면 자네 승리야. 그 밑이면 우리 마탑 보안실로 들어오는 거고. 동의하나?"

"동의합니다."

"으하하! 잘 생각했네. 미래의 보안실장! 아니, 태양보안 사장! 우리도 이 기회에 민간군사기업 시장에 진출해야겠어!"

"축하드립니다, 탑주님."

"역시 탑주님이십니다."

"인재 보는 눈은 탑주님을 따라올 사람이 없지요."

기한은 2년.

그 안에 각자의 지극화를 만들어서 확인하기로 했다.

2년이 되기 전이라도 둘이 협의하면 바로 시작하는 거고.

'2년이면 충분해.'

어쩌면 태양 마탑이 지극화 완성하기 전에 내가 지고화 만들지도 모르겠는데?

가장 얻기 힘든 태양불꽃을 이미 가져왔잖아.

좋아.

상향 조정이다.

목표는 120점.

마탑주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지.

"초인님. 괜찮으세요? 괜히 하기 싫으신데 할아버지한테 말린 거 아니에요?"

조용히 있던 김마법이 묻는다.

"그럴 리가요. 제가 하고 싶어서 수락한 겁니다."

"어······ 정말 자신 있으세요?"

"그렇다니까요."

벌써부터 그날이 기대된다.

태양 마탑에 요구할 소원을 미리 생각해 둬야지.

8레벨 마법검도, 사치 끝판왕 비공선도, 강남 건물주도 다 가능할 것이다.

"검증부터 하지."

마탑주가 손을 뻗었다.

무형의 마력이 가까이 있던 새끼 불사조를 잡아서 끌어왔다.

불사조 계곡을 탐사했던 목적.

김마법이 화염술사로 전직할 시간이었다.

화염 쌓는 김마법 -3- [3권 끝]

마탑으로 돌아온 직후.

김마법은 바로 불사조 회로 이식 수술을 받았다.

집도의는 마탑주.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거라고 했다. 처음 시도하는 수술이라 신중하게 움직일 테니 더더욱.

"못 본 사이에 일을 많이 만드셨습니다."

나를 초대했던 책임 마법사가 다가왔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허허, 초인님을 초대한 보람이 있습니다그려. 흑염 데이터만 얻어도 대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학파가 만들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마요."

"벌써 소문이 파다합니다. 화염술의 길이 열렸다고요. 마탑에 마력은 타고났지만 암산을 못 해서 마법사의 길을 걷지 못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들이 모두 마탑주 손자님의 성공만 기원하고 있습니다."

"컴퓨터로 보조할 수 있으면 참 좋은데요."

"그러다가 EMP 폭탄 한 방 얻어맞으면 끝장입니다. 그리고 5레벨 이상으로 올라가려면 본인이 다 직접 계산해야 해요. 그게 안 되면 4레벨이 한계입니다."

책임 마법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자기도 사실은 손녀가 있다는 둥, 마력은 훌륭한데 머리가 영 안 따라줘서 걱정이었다는 둥, 이번에 한 시름 놨다는 둥······

그러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내게 속삭였다.

"초인님. 이건 제 손녀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 저번에 있잖습니까. 저번에 추방된 마법사요."

"아······ 예. 기억합니다."

"제가 은밀히 알아 보았는데 금오 그룹 뒷돈을 받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금오 그룹.

5대 재벌 중 하나.

재계 2위.

굉장히 공격적이면서 약탈적인 사업 확장으로 유명하다.

게임에서는 빌런에 가깝게 묘사되고.

"금오 그룹이요?"

"예. 우리 마탑 정보를 빼간 거면 마탑 차원에서 경고를 했겠습니다만 특이하게 초인님 정보만 요구했습니다. 그것도 그 마법사만 아니라, 제 제자에게도 초인님 정보를 사겠다고 제안했고요."

"콕 찝어서 저만요?"

"예. 콕 찝어서 초인님만."

나는 얼굴을 살짝 굳혔다.

재벌이 마탑 정보를 은밀하게 빼내는 거?

있을 수 있다.

그게 바로 산업 스파이 아니냐.

그런데 내 정보를 사려고 했다고?

"아마 초인님을 영입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초인님은 어디서나 탐내는 인재입니다. 마탑주님도 영입 제안을 하셨다면서요?"

"예. 그랬지요."

"허허. 2년 뒤에는 한솥밥을 먹겠습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알지요."

"허허허허."

금오 그룹. 금오 그룹이라.

기억만 해두자.

다만 피해다니는 게 좋겠다.

거기 회장이 굉장히 권위주의적인 인물이라 자기 영입 제안을 거절하면 싸우자는 뜻으로 받아들이거든.

어디 소속될 생각은 없지만 금오 그룹이나 옛 아버지 교단은 절대 싫다.

차라리 태양 마탑에 들어가고 말지.

벌컥!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수술실 문이 열렸다.

마탑주가 활짝 웃으며 나왔다.

"으하하! 대성공이야!"

날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등을 후려갈겼다.

"김 초인! 다 자네 덕분일세! 우리 손자가 드디어 마법사가, 아니 초인이 됐어!"

"축하드립니다. 탑주님."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으하하! 김 초인 자네가 정말로 큰 공을 세웠어! 사장 자리가 아깝지가 않다니까? 굳이 2년 기다릴 필요가 뭐 있나? 어때? 지금 바로 취임식 하는 게?"

"벌써 다 이긴 것처럼 말씀하지 마세요. 그러다 나중에 정말 큰코 다치십니다."

"으하하하! 패기하고는! 50년 전 나를 보는 것 같다니까! 으허허허!"

마탑주가 탑이 떠나가도록 쩌렁쩌렁 웃는다.

마력 실린 웃음에 탑이 진동할 지경.

소식을 들은 마법사들이 몰려나왔다.

다들 축하합니다를 앵무새처럼 외치고, 장로들도 기뻐하며 마법 폭죽을 터뜨렸다.

웃지 못하는 마법사는 단 한 명.

조 장로.

똥 씹은 듯한 얼굴로 마탑주를, 나를 한 번씩 쳐다보곤 자기 연구실로 돌아갔다.

쾅!

문 닫히는 소리가 시위하듯 멀리서 울렸다.

"요놈아! 정신 차렸으면 나와봐라!"

"예, 예, 나갑니다."

백지장처럼 새하얀 얼굴을 한 김마법이 밖으로 나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몸.

그러나 달라졌다.

마력 파장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시각화한다면 노을처럼 은은한 붉은색.

나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이 느낌······

이 위협······

나보다 그리 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제대로 느끼지 못할 만큼 강하지도 않았다.

마탑주가 자랑스럽게 외쳤다.

"마법 이놈아! 불 한 번 대차게 뿜어봐라! 마탑 역사에서 첫 번째로 화염술사가 탄생했으니 시범을 보여줘야지!"

"여기서요?"

"그래! 흠, 그렇지. 김 초인 자네가 한번 막아보면 어떻겠나?"

"좋습니다. 제가 해보죠."

마법 저항과 화염 저항, 흑염은 계속 장착하고 있다.

왼쪽 팔뚝에 찬 방패를 펼치고 앞으로 나섰다.

김마법이 난처한 얼굴로 날 쳐다본다.

"죄송합니다, 초인님. 할아버지가 워낙에 극성이셔서요."

"그럴 만도 하죠. 김마법 씨······ 김마법 초인님께서 전직한 역사적인 순간 아닙니까."

"헤헤헤."

"전력을 다해 공격해 보세요. 아시죠? 저 태양불꽃도 15초는 버틴 거. 아무리 불사조 화염이라도 전 안 죽습니다."

"그럼 갈게요."

널찍한 마탑 복도가 졸지에 화염술 시현장이 되었다.

김마법이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팡이도 마력 증폭 장치도 없다.

대신 전신 피부가 달아오르더니 마력 회로가 붉게 빛났다.

피부 바깥으로 뚫고 나올 듯이 강렬하게.

화아악!

두 손 사이에서 분출되는 화염!

뜨겁다.

열풍이 나를 덮친다.

이글대는 열기가, 맹렬한 불길이 날 잡아먹겠다고 달려든다.

치익, 치지직.

살갗이 짓무르고 내 머리카락은 또다시 수난을 겪었다.

나는 냉정하게 화염술의 위력을 평가했다.

'제법이네.'

화염 방사기나 소이탄 위력은 된다.

어엿한 3레벨 초인.

알보병은 수십이든 수백이든 학살하고도 남겠지.

하지만 약점이 있다.

"좋네요. 3레벨 초인이 된 걸 축하드립니다."

"아······"

잠깐 몸을 떨며 감흥에 잠기는 김마법.

금방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초인님한테는 안 통하네요."

"당연하죠. 제가 이래 뵈도 마법에 좀 강합니다."

"그래도요······"

"앞으로 많이 노력하셔야지요. 화염 속성 영약 같은 거 없습니까? 그거 퍼먹으세요. 영약 많이 먹고 마력 많이 쌓는 게 최곱니다. 마법사처럼 마력, 신체, 정신 균형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진짜요?"

"그럼요."

김마법이 눈을 반짝였다.

당장이라도 영약 창고에 달려가고 싶다는 눈치.

마탑주가 크게 한 번 웃고는 나를 자기 집무실로 데려갔다.

이번에는 단둘이 아니었다.

김마법은 물론 장로들도 함께 둘러앉았다.

"우선 사의를 표하고 싶네."

마탑주가 운을 뗐다.

"자네 덕에 우리 마탑의 숙원 하나가 해결되었어. 자네는 내 손자만이 아니라 마탑의 유망주들, 부모들의 한을 해소해 준 거라네."

"별말씀을. 의뢰받고 한 일인데요."

"허허허. 겸손하기는. 사람이 어찌 그리고 실력도 좋고 성품도 그리 뛰어난가?"

"타고난 천품이지요."

"우리 마탑에 어울리는 인재입니다."

"어서 2년이 지났으면 좋겠습니다. 허허허."

장로들도 덕담한다고 흘흘 웃었다.

마탑주가 웃다 말고 정색한다.

허공에 손짓을 하자 빛이 터지면서 수정 상자 하나가 나타났다.

수정 상자 안.

작은 투명 USB처럼 생긴 기억칩이 둥둥 떠 있었다.

"약속한 태양불꽃일세."

"감사합니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군. 어째서 필요도 없는 걸 달라고 한 건가?"

"저한텐 필요합니다."

"불사조 화염술의 단초를 준 것은 고맙네만 그냥 줄 수는 없네. 당초 자네가 얘기했던 대로 마법 맹약을 하도록 하세나."

사용 불가, 유출 불가, 복사 불가.

기쁜 마음으로 마법 맹약을 마쳤다.

기억칩을 깨뜨리자 내 머릿속에 황금빛 태양이 떠오른다.

숫자와 마법 문자,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조성된 태양.

장착할 수는 있지만 쓰지는 못한다.

그놈의 마법사 제한 때문에.

마탑주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떤가. 좀 알겠나?"

"전혀요."

특성 전환 시도도 안 했다.

성녀가 내게 강제 세례 하던 때가 눈에 선하다고.

마탑주도 성녀와 동급의 괴물이니 눈앞에서 특성 전환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지금이야 호의적으로 나오고 있지만 언제 표변할지 어떻게 알아?

"자네가 원한다면 마법 대학에 입학시켜주겠네. 마검사로 전직하는 건 어떤가?"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저도 머리가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요."

"그거 아쉽군."

말만 그렇지 별로 아쉬워하는 기색이 아니다.

그냥 해본 말.

"태양불꽃만으로는 좀 아쉽지 않나? 자네가 갖고 싶다고 해서 주긴 했는데 어쨌든 당장 쓸 수는 없으니 말일세."

"전 충분히 만족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만족이 안 돼. 자네한테 받은 게 있으니 나도 그만큼 보답해야지. 가져오게."

끼이익.

문이 열리고 마법사 넷이 골프백 하나를 낑낑대며 들고 가져왔다.

내가 들고 다니던 골프백과 비슷한 형태.

훨씬 고급스러웠다.

까만 마력사를 엮어서 만들었고, 표면에는 금실로 마법진을 아름답게 조형해 놓았다.

막 들고 다니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어?'

그런데 이상하다.

고작 골프백 하나인데, 안이 텅 빈 것처럼 겉이 보송보송한데, 마법사 넷이 달라붙어서 낑낑대고 있지 않나.

쿵!

골프백을 내려놓자 땅이 울렸다.

마탑주가 빙글거리며 골프백을 가리켰다.

"들어보게나."

뭐지? 함정 카든가?

골프백을 한 손으로 들고 바로······

어?

무겁다.

내가 평소 들고 다니던 그 골프백보다, 총과 수류탄을 꾸역꾸역 집어넣은 그 골프백보다 배는 무거운 느낌이었다.

1레벨이었으면 근력 없이는 못 들었을 정도.

"도대체 안에 뭘 넣으신 겁니까?"

"글쎄? 뭘까?"

마탑주는 악동처럼 웃기만 했다.

겉을 만져도 묘한 질감만 느껴졌다.

내용물이 만져지질 않았다.

구름처럼 푹신하고 슬라임처럼 물컹한 감촉이 전부.

'혹시?'

들어본 적이 있다.

급히 골프백을 열고 안을 살폈다.

5만 원권 지폐가 골프백 안 가득 차 있었다.

골프백이 아니라 자동차 트렁크처럼 광활한 공간 안에.

고작 스무 뭉치 서른 뭉치가 아닌, 최소한 백 단위로 세어야 할 개수로.

"맙소사!"

저절로 입이 떡 벌어진다.

마법 가방이다!

그것도 평범한 생활 마법이 아니라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마법 중에 가방 부여하기 힘든 게 시간 마법과 공간 마법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 골프백은 4배율 정도 되는 것 같다.

이만하면 부르는 게 값.

거의 자동차 트렁크 하나를 가지고 다니는 거잖아.

무게 감소 마법은 안 걸려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청나다.

"어떤가, 마음에 드나?"

"예. 정말로 마음에 듭니다. 어, 혹시 이거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이 정도는 줘야지. 안 그래도 자네 골프백이 영 눈에 거슬렸다네. 3레벨 초인씩이나 되는 인간이 뭐 그딴 쓰레기 같은 걸 들고 다녀?"

그야 공짜니까.

총포상 주인이 서비스라고 줬던 물건.

그래도 튼튼해서 막 쓰기 좋았다고.

"안에 돈은 뭡니까? 설마 이것도 주시게요?"

"어, 그래. 용돈하게."

"용돈이요? 하하하. 거의 50억은 되는 것 같습니다만."

"그 정도 되지."

"50억이 용돈이라고요?"

"암, 용돈이지. 입 심심할 때 과자 하나씩 사 먹게."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마탑주.

이게 8레벨의 삶이냐?

예전에 제일보안 서 대표도 용돈이라며 10억을 찔러주더니 마탑주는 한술 더 뜬다.

나는 골프백을 어깨 하나로 들어보았다.

무려 100킬로그램에 가까운 무게.

정중히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그래, 그래. 앞으로도 혹시 힘들거나 곤란한 일 생기면 언제든지 전화하게."

마탑주가 자기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주었다.

황금도 태양도 없는 밋밋한 사각 흰색 명함.

장로들이 눈을 빛냈다.

"탑주님께서 김 초인이 아주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저걸 주실 줄이야."

"탑주님 개인 번호 아닌가?"

"거참. 대통령한테도 안 주신 번호를······"

어쩌면 이 명함 한 장이 태양불꽃보다, 공간 확장 골프백보다, 현금 50억보다 더 값지지 않을까.

폭풍 같았던 출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마법 욕조에 몸을 담그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8레벨이라······"

동네 친근한 할아버지처럼 굴던 마탑주.

그러나 언뜻언뜻 내비치는 마력 파장은 진짜였다.

격노해서 마법을 일으키면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메우고도 남겠지.

나도 8레벨이 되고 싶다.

8레벨을 넘어 세상의 정점, 9레벨에 등극하고 싶다.

그러려면 4레벨부터 되어야겠지.

나는 마력천 물에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금이 딱 적당해."

신체는 충분히 발달했다.

마력 회로도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실전 경험도 충분히 쌓았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어디 탈 난 곳도 없다.

모든 지표가 레벨 업 시점이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셔줘야지.

아껴둔 넥타르를.

그리고 도약하는 거다.

4레벨로.

[3권 끝]

호랑이 사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