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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공

형은 제일검, 여동생은 대마법사. 근데 나는?

메가 코퍼레이션이 지배하는 새로운 조선에서 눈을 떴다.

마법, 기적, 해킹이 조화를 이루는 사이버펑크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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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ㅂㅇㄹㄴㄷ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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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네오 조선 (1)

죽으면 다 끝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기보다는 별 관심이 없었다.

삶이 더 중요하지, 죽은 뒤의 세계가 뭐가 중요한가.

그렇게 생각했다.

직접 죽어 보기 전까지는.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이하진은 죽었다.

교통사고로 허무하게.

그렇게 그의 생각대로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이야.'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죽었는데 갑자기 눈을 뜬 것도 모자라 '조선'이라 불리는 곳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사 초입에 나오는 고조선이나, 태조 이성계가 세운 옛조선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곳은 부활한 세종이 황제로 있는 국가이자, 새로이 탄생한 미래의 조선이었다.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나타난 홀로그램 영상은 그런 미친 소리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고 있었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나라를 만드노니....]

화려한 곤룡포를 입은 세종대왕, 아니 세종 황제의 연설이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황실로 탈바꿈한 위엄 넘치는 경복궁의 전경이 나타났고, 새로운 조선의 역사 다큐멘터리가 이어졌다.

가짜라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자세한 영상들이.

"이제 좀 아시겠사옵니까."

재생이 끝나자 홀로그램을 보여 주던 여성이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러면 이제 소녀가 조상 어르신께 몇 가지 질문을 여쭈어도 될는지...."

"조상 어르신이요...? 제가요?"

"예. 어르신. 소녀는...."

"아니, 잠시만요."

이하진은 본인이 이해한 걸 차분하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저 여자가 유교의 '기적'으로 날 되살렸다고?'

잘 믿기지 않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죽었던 자신이 이승에서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었으니까.

"그럼 당신은... 무슨 선비 같은 겁니까?"

"부끄럽지만 그렇게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소녀는 유교의 이(理)와 기(氣)를 사용하기 위해 군자의 발걸음을 좇는 일개 유생일 뿐이옵니다."

"아무튼 그쪽이 무슨 제사 같은 걸 해서 죽은 저를 불러냈다는 거죠?"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이하진은 잠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어색했지만 분명 움직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육체였다.

"어르신. 육신을 입으신 후유증 때문에 조금 혼란스러우신 것 같은데, 부디 이것을...."

여성은 가느다란 두 손을 내밀어 앞에 있는 식탁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유교라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각종 음식이 제사 형식으로 차려져 있었다.

'이게 내 제사상인 건가.... 직접 보니 기분이 묘하네.'

다만 음식의 메뉴가 조금 특이했다.

햄버거, 감자튀김, 치킨....

모두 그가 살아 있던 시대의 음식들이다.

먹을 것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입가에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왜 이래. 지금 밥이나 먹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

유혹을 떨치려 머리를 흔든다.

하지만 이내 배 속이 꾸르륵거리더니 허기가 걷잡을 수 없이 몰려왔다.

그런 변화를 눈치챘는지 엎드려 있던 후손이 권유했다.

"특별히 어르신께서 좋아하시는 음식들로 준비해 두었으니, 마음껏 즐겨 주시옵소서."

그 말에 어쩔 수 없는 척 조심스레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포장지를 벗기자 먹음직스러운 소스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그녀의 말대로 햄버거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치즈버거였다.

거기에 감자튀김은 바삭하게, 치킨은 살짝 매운 양념치킨 등으로 모두 취향을 저격한 음식들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마실 것은....

'크으.... 그래, 역시 음료는 사이다지.'

백 년 넘게 지났음에도 사이다의 맛이 그대로인 걸 보면 그의 입맛은 틀리지 않았나 보다.

그렇게 한동안 식사를 마치자, 내도록 절을 하고 있던 여성이 몸을 슬며시 들었다.

"음식은 입에 좀 맞으신지요."

먹는 데 너무 심취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괜스레 멋쩍어져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소녀가 몇 가지 질문을 여쭈어 보아도 되겠사옵니까?"

"예.... 그러시죠."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물음이 날아왔다.

"어르신께서는 태성 이씨 26세손, 이 태 자 백 자 어르신의 아드님이 맞으시옵니까?"

이태백.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아버지의 이름.

"맞습니다."

그 대답에 여성의 얼굴이 환해졌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하진과 눈을 맞췄다.

"소녀는 태성 이씨 31세손, 이혜나라고 하옵니다."

제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한 이혜나는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손녀가 고조할아버님께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그러더니 한껏 예를 갖춰 절을 올린다.

하지만 그걸 보고 있던 이하진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조할아버지요? 제가요?"

"그렇사옵니다. 제 생각에는 특히 여기 눈 쪽이 할아버님을 닮은 것 같사온데, 어떠신지요?"

"그럴 리가 없는데요."

"예?"

"저는 자식을 낳은 적이 없어요."

그 말에 미소를 짓던 이혜나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식은 무슨, 결혼도 못 하고 죽었습니다."

"...?"

"스물다섯에 교통사고로요."

그녀의 얼굴이 점점 구겨진다.

그러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애써 다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러더니 스크린이 달린 단말기를 꺼내 무언가를 찾더니 물었다.

"죄송스럽지만,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어르신께서는 태성 이씨 27세손.... 존함은... 이 하 자 민 자 맞으신지요...?"

"이하민.... 그건 제 형이고, 저는 동생 이하진입니다."

돌아 온 대답에 그녀가 흡, 하며 옅게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그 짧은 호흡만으로도 당황해하는 기색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러면 이 음식은... 이하민 고조할아버님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치즈버거가 아닌가요? 토마토 빼고 치즈랑 패티 한 장씩 추가한...."

"아뇨. 우리 형은 햄버거 안 좋아했어요. 뜨끈한 국밥 파였지."

"감자튀김은 바삭한 걸 좋아하셨다고...."

"감자튀김 좋아하긴 했는데. 바삭한 거 말고 눅눅한 거 좋아했어요."

"음료는 사이다...."

"그것 때문에 어렸을 때 많이 싸웠죠. 전 사이다 파였고 형은 콜라 파였으니까."

"이게 무슨... 아닙니다. 어르신께서 제사의 후유증 때문에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게 분명해요. 제가 실수했을 리가...."

단말기를 마구 조작해가며 정보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표정이 일그러질 뿐이다.

이하진은 그녀가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머리 좋고 능력 좋은 형을 불렀어야 했는데, 엉뚱한 인간이 나와 버린 상황.

그것도 생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린 쓸모없는 동생이 말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조상 뽑기 대실패.'

"이게 어떻게 준비한 기회인데...."

이혜나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더는 감정을 숨길 기운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

이하진은 그녀의 심정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자신 또한 초월적인 누군가에게 간절히 소원을 빌었지만 실망스러운 결과만 돌아왔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잘못된 사람을 되살렸으니 다시 저승으로 돌려보내려나.

그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뭐, 돌아가라고 하면 그래야겠지.'

애초에 자신은 원래 죽었던 몸.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세계에 별다른 흥미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먼 후손의 말에 협조해 줄 생각이었다.

다음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 쯧, 이게 뭔 개고생이야. 돈 날리고 시간 날리고."

그녀는 어디서 났는지 곰방대 비슷한 걸 꺼내 입에 물더니 칙칙, 불을 붙였다.

그러더니 방금까지 깍듯이 모시던 조상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툭 뱉었다.

"저기요, 이거 다 드신 거 맞죠?"

질문이 아니었다.

답을 듣기도 전에 밥상을 치우기 시작했으니.

'허....'

갑작스러운 태세 변환에 말문이 막힌 사이, 이혜나는 담배 연기를 뻑뻑 뿜으며 상에 놓인 음식들을 깔끔하게 치웠다.

"이거... 갑자기 태도가 변하니까 좀 당황스럽네요?"

"이해하세요. 제가 일정이 좀 바빠서."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 싶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유교 어쩌고 하지 않았어요? 유교걸이라면서 이래도 되는 건가?"

그 말에 이혜나가 풋, 웃음을 흘렸다.

"유교걸? 어르신이 살아생전 쓰시던 단어예요?"

"아니, 군자의 발걸음을 좇는 선비 어쩌고라면서요. 그럼 삼강이고 오륜이고, 뭐 그런 거 없어요?"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같은데요. 지금의 현대 유교는 예전의 그 꼰대 유교랑은 달라도 한참은 달라요."

어찌 된 게 한마디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하진은 그런 대화에서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수없이 겪어 본, 티격태격하는 이 느낌.

'이거 완전....'

필요한 게 있을 때는 방긋 웃으면서 살갑게 대하다가, 볼일이 끝나면 싸늘하게 돌변하는 인간.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나왔는데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른지 알 수가 없는 혈육.

바로 그의 여동생, 이하연이었다.

"보다 보니까 형이 아니라 동생 쪽 핏줄 같은데. 족보 제대로 본 거 맞아요?"

이제 보니 생긴 것도 머리카락이 조금 길다 뿐이지 그 외에는 동생과 꽤 닮았다.

"동생이라면.... 이하연 할머님? 그거 되게 칭찬인 거 아시죠?"

"칭찬이라니.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요? 제 동생이 얼마나 폐급이었는데."

"세상에...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구나. 쯧, 진작 눈치챘어야 했는데.... 하기야, 어르신께선 모르는 게 당연하겠죠. 세상이 이렇게 변하기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그러더니 아까 주머니에 넣었던 홀로그램 영사기를 꺼내 작동시켰다.

[이하연. 세계 최초의 대마법사이자, 승정원 소속 초대初代황제비서실장. 이하연 대마법사는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 마법 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음.]

하늘에서 벼락이 쏟아지고 땅에서 불이 뿜어 나온다.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 홀로그램으로 펼쳐졌다.

그리고 그 화려한 광경의 중심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이하진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그의 여동생이.

"이게 뭔...."

저게 방구석에서 드라마나 보면서 낄낄대던 내 동생이 맞나?

보고도 믿을 수 없어 두 눈을 비볐다.

"그리고 이하민 고조할아버님께서는 더 대단하셨어요. 원래대로라면 지금 이 자리에 계셨어야 할 분 말이죠."

홀로그램의 상이 바뀌며 이번엔 어떤 남자의 인영이 나타났다.

[제일검 이하민. 제3차 세계대전의 화마에서 조선을 지켜 낸 특수작전부 소령이자, 끔찍한 귀신들로부터 온 세상을 구한 대귀연합군 사령관.]

"고조할아버님께선 그 흔하디흔한 디지털 사진 한 장도 없으세요. 그래서 지금은 거의 전설처럼 취급되는 베일에 싸인 분이시죠."

사진이 없다는 게 정말인지 그림과 그래픽으로 표현된 형의 모습이 나타났다.

포격을 뚫고 사람을 구하는 장면, 거대한 괴물처럼 생긴 것들을 검으로 베는 장면 등이다.

"이게 대체 뭔.... 내가 죽고 나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그의 질문에 이혜나는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살짝 얼굴을 풀며 말했다.

"뭐, 그래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이야기 몇 마디 정도야."

이어 담배 연기를 옆으로 길게 내뿜더니 말문을 열었다.

"어르신께서 돌아가시고 몇 년 뒤, 갑자기 세상에 마법이고 기적이고 하는 것들이 생겨났어요. 그러면서 소수의 사람이 '각성'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고요."

"각성...?"

"마법은 마력 핵만 뚫려 있다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고, 기적은 종교의 교리만 실천한다면 누구나 일으킬 수 있지만, 각성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발현되는 능력이에요."

이혜나가 곰방대에서 재를 툭툭 털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각성 능력 중 전 세계에서 딱 두 사람에게만 나타난 아주 강력한 능력이 있었어요. 운 좋게도 두 분 다 이 조선 땅에 사는 분들이셨죠. 그중 한 분이 바로 이하민 고조할아버님이셨고, 다른 한 분은...."

이혜나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다 이내 사뭇 진지한 얼굴이 되어 위쪽을 가리켰다.

"저기 높은 곳에 있는 분이세요."

"높은 곳이라면...."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이하진이 짐작한 것을 물었다.

"설마... 세종이요?"

"그래요. 저 높은 곳에서 우리를 굽어살피시는 주상전하."

이혜나가 다시 곰방대를 뻑뻑 피웠다.

곧 그녀의 입에서 나온 연기가 슬금슬금 주변에 쌓여 갔다.

"그러니까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단순히 아무 조상님의 힘이 필요한 게 아니라, 세종 황제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거니까요."

"그게 뭔데요? 형이 가졌다는 능력."

그 질문에 이혜나가 이하진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입에서 곰방대를 떼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통찰하는 눈동자."

"...."

"뭔지 묻지 마세요. 말해 봤자 모르실 테니."

이어 다시 담배를 뻐끔거리자, 어느새 연기가 방 안을 뿌옇게 메웠다.

"그럼 매우 실례되는 말이지만 어르신께서 입으신 그 몸, 다시 돌려받아야겠어요. 그게 아주 비싼 거라서요."

좋게 말해서 돌려받겠다, 직설적으로는 다시 저세상으로 돌아가라.

이하진이 이해한 뜻은 그랬다.

원래대로라면 그녀의 말대로 순순히 응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그래도 제가 잠시나마 이렇게 불러내 드려서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드실 수 있으신 거잖아요?"

저 말투.

마치 그의 여동생과 대화하는 것 같은, 어딘가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저 말투 때문에라도 고분고분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이혜나가 연기로 가득한 허공에 무언가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불신자의 저승은 무의식으로 된 불가해한 곳이잖아요. 그런 곳에 계시다가 잠시나마 맛있는 음식을 맛보게 해 드린 거니, 너무 노여워 말아 주셨으면 해요."

혼자 주절거리며 손으로는 알 수 없는 행위를 이어 갔다.

마치 커다란 붓으로 글자를 쓰는 것 같은 동작이다.

"원래 제사는 4대 조부모까지만 모시는 법인데 어르신은 제가 특별히 챙겨 드릴게요. 그러니 오늘 일은 부디 마음에 두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러다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공중에 점 하나를 크게 찍었다.

그와 함께 대충 인사하듯 고개를 까딱 숙인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어르신."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이혜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뭔가 사소한 실수라도 있었나, 하는 생각을 중얼거리며 다시 허공에 손짓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그녀가 또 한 번 마침표를 찍었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자 이혜나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게 무슨...."

기적의 문(文)을 쓸 때마다 무언가가 방해하고 있었다.

외부로부터 들어 온 훼방인가?

아니,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시설에 얼마를 들이부었는데.'

거기다 간섭을 차단하는 연기로 방을 가득 채우기까지 했으니, 지금 이곳은 완벽하게 독립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설령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이혜나가 일으키려는 기적을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법칙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년 단위로 시간이 걸리는, 유교 기적의 절정 '현신제(現身祭)'의 기적을 말이다.

이번에 이혜나는 자신을 도와줄 정령을 소환했다.

허공에 마침표를 찍자, 붉은빛 하나가 어른거렸다.

빛은 곧 불꽃이 되고 불꽃은 곧 살아 있는 정령이 된다.

"오, 그건 또 뭡니까?"

이하진이 감탄 섞인 질문을 던졌으나 그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서 정령의 도움을 받아 온 힘을 다해 기적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

그렇게 한 번도 아닌 두 차례를 더 시도하고 나서야.

지금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떨리는 동공으로 제 눈앞에 있는 조상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이하진의 손이 움직인다.

허공에 무언가를 쓰는 듯한 동작.

저것은 멋모르는 이가 휘두르는 막무가내의 손짓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어찌 보면 당장 손을 써야 하는 종류의 것이었지만.

떨림, 흥분, 두려움, 호기심....

그녀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채로 다음에 벌어질 일을 그저 관람할 뿐이었다.

이번에 마침표를 찍는 건 이하진이었다.

그와 함께 공중에서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혜나가 소환한 정령과 같은 종류의 불꽃이.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네오 조선 (2)

3년.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이혜나가 처음으로 정령을 소환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당시에는 꽤 기록적인 일이었다.

종교의 기적 중에서 정령을 소환하는 기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종교의 교리를 잘 알더라도 특정 수준 이상의 정령 감응력이 없다면 정령을 소환할 수 없었다.

이혜나가 천재라 불리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복잡한 유교의 교리들을 이해하는 비상한 머리와 함께, 뛰어난 정령 감응력까지 갖췄으니.

그리고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빨간 불덩이가 천진난만하게 주변을 빙빙 맴돈다.

저것은 분명 유교 정령인 '불도령'이었다.

'대체 어떻게 정령을....'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일이긴 했다.

종교 정령은 교리만 알고 있다면 감응력만으로도 불러낼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저 남자는 방금 막 세상에 현신한, 게다가 기적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던 과거 사람이다.

그런 이가 매우 복잡한 유교 정령의 소환문을 정확하게 쓸 수 있다고?

'이건....'

이혜나의 머릿속에 온갖 가정들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녀는 제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건가요?"

* * *

'어떻게 했냐고?'

이하진은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그냥 됐으니까.

마치 처음부터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조금 전 이혜나가 난데없이 허공에 손짓을 할 때,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공중에 나타나는 어떤 '문자'들이 말이다.

'저게 유교의 기적을 일으키는 방법인건가?'

이혜나가 써 내려간 문자들은 커다란 원 형태를 이루며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다 보니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해석이 되잖아?'

생전 처음 보는 문자였지만 무슨 뜻인지 읽을 수 있었다.

그것들을 이 세상의 언어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았다.

「태성 이씨 31세손의 효녀가 감히 조상님께 바라는 바를 여쭈옵나이다. 부디 입으신 육신을 다시 벗으시옵고...」

그녀는 아주 공손한 문체로 저승으로 되돌아가라는 호소문을 적어 가고 있었다.

입으로는 예의 같은 건 말아 먹은 듯한 언행을 하고 있었으면서 손으로는 전혀 다른 일을 한 셈이다.

왠지 그게 아니꼬워 자신의 근처로 다가 온 문자 하나를 손으로 스윽 문질러 지웠다.

'...?'

지워진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다른 문자도 지워 보았는데 역시 쉽게 지워졌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어르신."

어느새 이혜나가 문자를 쓰는 걸 마무리 지었는지 고개를 끔뻑 숙였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

무덤덤하던 그녀의 얼굴에 물음표가 찍혔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하진이 몇몇 문자를 지운 탓에 문법적으로 말이 안 되는 문장이 되어 버렸으니까.

이혜나는 그 뒤로도 같은 시도를 몇 번 더 했지만 모두 손쉽게 망쳐 놓을 수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다른 느낌의 문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령인 존재여. 그대와 계약된 이가 뜻하는 바가 있으니 지금 계약자의 부름에 응해...」

'이번엔 뭔가 불러내려는 건가?'

아까와는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문체도 달랐다.

굉장히 사무적인 데다가 약간은 강압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음... 이건 따라 해 볼 수 있겠는데.'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녀가 쓴 문장은 '계약된 존재'를 불러내는 문장이었다.

'큰 문제는 아니야.'

계약된 존재를 불러낼 수 없다면 계약할 존재를 부르면 그만이다.

이번엔 이하진이 손을 움직여 문자를 적어 갔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막힘이 없다.

거기다 원래의 문장에서 약간의 변형까지 가해, 원래는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추가하기도 했다.

'친밀함'을 뜻하는 미사여구를 말이다.

이건 쓰면서 깨달은 일종의 법칙이었다.

아마도 기적은 그에 맞는 문체를 사용했을 때 힘이 강해지는 듯했다.

자신을 돌려보내려던 기적을 극도로 공손한 문체로 적은 것도 그런 이유 같았다.

'유교의 기적은 공손해야 한다는 거지.'

그런 생각으로 정령 소환을 위한 문자를 써 내렸다.

'그러면 정령 소환문은 이렇게 써야 해.'

이혜나가 했던 대로 사무적이고 강압적인 문체가 아닌, 친밀함이 한껏 느껴지는 문체로 문장을 마무리 짓고는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람대로였다.

어쩌면 조금 과할 정도로.

불로 된 정령의 명랑한 목수리가 울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가 아니라 머릿속에 직접 말을 거는 느낌이다.

손을 뻗어 정령을 어루만졌다.

분명 불타고 있었는데 뜨겁지 않다.

그의 손길에 정령은 어린아이처럼 까르르 웃으며 산만하게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다 좋은데, 좀 시끄럽네.'

그렇게 한동안 정령을 관찰하고 있는데, 이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떻게... 하신 건가요?"

아까와는 달리 당황이 잔뜩 섞인, 하지만 여전히 당돌함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그에 이하진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모르겠네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주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하던 일 마저 하세요. 이제 가만히 있을 테니."

이어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양팔을 위로 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멀뚱히 지켜만 보았다.

"뭐 해요? 저 돌려보내려던 거 아니었어요?"

"..."

"바쁘다면서요. 이 몸도 비싼 몸이라 회수해야 하고."

"그게..."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더니, 이내 손을 움켜쥐며 말을 뱉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뭘요?"

"이하린 고조할아버님의 동생이시자, 이하연 대마법사님의 오라버니 되시는 분이시라면 분명 평범하지 않으실 텐데...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그러면서 넙죽 허리를 숙인다.

다시 공손함을 되찾은 태도 변환은 감탄마저 나올 지경이다.

"그럼 뭐 하나만 물어보죠."

이하진은 그녀의 고분고분해진 태도에 아까부터 계속해서 궁금하던 질문을 던졌다.

"이 몸은 뭡니까?"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어색하지만 왠지 낯이 익다.

분명 원래 자기 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뭔지 모를 익숙함은 뭘까.

"그 몸은 이하민 고조할아버님의 것입니다."

그녀의 대답에 이하진이 양손을 천천히 움직이며 되뇌었다.

'이게 형의 몸이라고?'

"정확히 말하자면 고조할아버님의 유해를 기반으로 만들어낸 육체이지요."

'유해...'

하기야, 형도 자신과 같은 백여 년 전 사람인데 아직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잠시 형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이혜나가 물었다.

"혹시 기억나는 게 있으신가요?"

"기억요?"

"예. 어르신께서 고조할아버님의 육체를 입으셨으니, 그 안에 담겼던 기억 또한 있으실지 하고요."

육체에 담긴 기억이라.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머릿속에 어렴풋이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 듯 계속 맴돌고 있었다.

'이게 형의 기억인 건가...?'

그렇게 생각의 도화선을 곱씹는 순간.

갑자기 폭탄이 터진 것처럼 어떤 상념들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윽...'

하늘에서 거대한 외우주 고래가 바다로 떨어진다.

그로부터 발생한 해일이 지구를 덮치며, 온 세상을 덮었던 장막이 벗겨진다.

신화였던 것들은 역사가 되고, 현실 너머 잃어버렸던 초현실이 돌아온다.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머릿속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와 함께 여러 이미지와 소리가 엉망진창으로 마구 소용돌이치다가.

종국엔 거대한 생물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아득한 공간.

공허를 등진 길쭉한 동공이 그를 주시했다.

'이건...'

그러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연거푸 나타난 상들에 정신이 아찔해진 그는 잠시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제... 알겠어...'

갑작스레 혼란에 빠진 세계, 그 속에서 발버둥 치던 형의 몸부림.

그걸 목격하며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형이 평생에 걸쳐 싸우던 존재가 무엇이고, 앞으로 세계에 닥칠 일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미래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까지도.

'내가 가진 능력은...'

경악스러울 정도의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방금 그가 기적이라는 힘을 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자신에게는 형이 가졌다는 능력인 '통찰하는 눈동자'라는 힘이 있었다.

모든 초현실을 직접 볼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이.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혜나의 기적문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동생에게 있었던 또 다른 각성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초현실을 다룰 수 있는, '조작하는 손'이라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이.

'그러니까 이건...'

형의 기억에서 어떤 단어 하나가 떠 올랐다.

오직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단어가.

'초현실 각성.'

형과 동생의 능력이 합쳐진.

모든 초현실을 볼 수도, 다룰 수도 있는 유일무이한 각성.

이하진은 자신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이 땅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이혜나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녀는 한껏 결연해진 얼굴이 되어 말을 이어 갔다.

"백 년 가까이 만인장성으로 나라의 문을 봉쇄했던 중원이 몸을 일으킬 조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각종 재해로 쓰러져 가던 극동의 섬에서는 새롭게 탄생한 세력을 중심으로 온 나라가 뭉치고 있고요."

옆 나라들의 이야기다.

이 땅이 엉망이 된 것처럼 그들도 무사하지 못했으나, 이제 서서히 다시 힘을 되찾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절대적인 권력을 가신 메가 코퍼레이션들이 이 나라를 집어삼키려 들고 있습니다. 한때 천연자원이 부족하여 저주받은 땅이라 불렸지만, 알고 보니 신화시대의 유물이 가득찬 이곳을요."

아니.

그것들은 아주 사소한 문제들이다.

앞으로 다가올 운명에 비해서는.

"어르신께서 정말로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곳에서 두 번째 삶을 살고 싶으시다면..."

두 번째 삶이라.

이전의 삶은 미련이 많은 삶이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죽어 버렸으니까.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혜나는 희망이 섞인 호소를 토하며 생각했다.

'혹시...'

살면서 온갖 일을 겪으며 사람이라는 존재를 쉽사리 믿지 못하게 된 그녀였으나.

'이 사람이라면...'

전설적인 영웅의 동생이자.

최초로 대마법사가 된 이의 오라버니라면.

온 세상의 존망지추가 걸린 작금의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와 함께 이 땅에 정의를 세워 주십시오."

'정의...?'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던 이하진은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가 형 고손녀 아니랄까 봐 하는 짓도 똑같네.'

천성이 선하던 형은 무슨 의무라도 진 것처럼 남들을 도우며 살았다.

제 동생이 사고로 죽던 날에도 연탄을 나르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을 관철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

형이란 사람을 한 줄 요약하자면 그랬다.

'그때 형 말 따라 연탄 나르러 갔으면 난 안 죽었을지도 모르지.'

잠시 과거를 떠올리며 이혜나를 쳐다보았다.

저 부드러우면서도 굳센 눈빛.

자세히 보니 정말 눈 쪽이 형하고 닮았다.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그에 대한 이하진의 대답은 간결했다.

"싫습니다."

아마 형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도와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형과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어쩌면 형보다도 눈만 마주치면 싸웠던 여동생과 더 통하는 구석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

그의 대답에 이혜나의 얼굴에서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능숙하게 표정을 감췄다.

"그렇다고 저승으로 돌아가지도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걸까.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는 질문을 이었다.

"이제 어쩌실 건가요?"

"일단 밖으로 나가야죠."

그러자 이혜나가 품에서 플라스틱으로 된 명함을 한 장 꺼냈다.

"그럼,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녀가 건넨 명함에는 이혜나라는 이름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의 소개가 쓰여 있었다.

"저는 서울에서 활동 중인 픽서, '리버'라고 합니다."

"픽서..."

"뒷골목에서 여러 작업들을 중개해 주는 사람이에요. 제 진명(眞名)인 이혜나는 밖에서 쓰지 않습니다. 어르신께서도 되도록이면 가명을 쓰시는 게 좋으실 거예요."

누군가의 진명을 안다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기적과 같은 능력을 행할 때 일종의 좌표가 되는 것이 진명이었으니까.

형의 기억으로 얻은 정보에 의하면 그랬다.

"마음 같아서는 어르신께서 이 세상에 적응하실 때까지 도와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면 세간에 쓸데없는 주목을 받게 될 겁니다."

그 말에는 어느 정도 동감했다.

오늘 이 방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는 게 좋아 보였다.

"그래서 추천드리는 건데..."

"아뇨."

일부러 말을 툭 끊었다.

이미 형의 기억 속에서 어디로 갈지 봐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김 사장이란 사람, 아직 살아 있습니까?"

"김 사장이라면..."

그의 의도를 빠르게 파악한 이혜나가 작은 카드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다른 픽서를 찾아가시려는 거지요? 제가 직접 작업거리를 드리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네요. 이런 말씀드리기는 뭐 하지만, 제가 다루는 작업 대부분은 베테랑만 가능한 것들이라서요. 하지만 김 사장 정도면 꽤 적절한 선택 같아 보입니다."

그걸 받아 들자 짤막한 위치 정보가 담긴 홀로그램 문자열이 보였다.

"카드 안에 차비 정도는 넣어 두었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겉옷을 챙겨 입고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이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또 뵐 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형의 고손녀 이혜나.

아니, 픽서 리버와는 분명 언젠가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 * *

바깥으로 나서자 꺼져 버린 모니터 같은 밤하늘이 그를 마중했다.

미세먼지 가득 섞인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켜니 그제야 서울에 온 것이 실감 났다.

"후..."

저 멀리 보이는 도시는 별처럼 반짝였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빌딩의 숲, 그 아래로 자글자글 깔려 있는 콘크리트 정글.

빛 공해라는 말이 너무 당연한 나머지 사어가 되어 버린 세상인 만큼, 온갖 조명들이 밤을 비추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저곳은 예전에 자신이 알던 그 서울이 아니다.

우승열패의 야생으로 변해 버린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힘을 갖는 것.'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힘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힘과 재화는 동음이의어였다.

그렇기에 첫 번째 목표를 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돈이 필요해'

그가 시커먼 도시의 뒷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착귀갑사

무인 운행하는 지하철이 역에 멈춰 섰다.

열차에서 내린 이하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가 홍대역이라니.'

오랜만에 익숙했던 장소에 온다는 건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전의 모습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바뀐 점이 크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14-9 섹터'라는 낯선 이름이 된 홍대입구역은 깔끔했던 과거 모습과는 달리 방치되어 낡아 가고 있었다.

특히 역 벽면은 쓰레기장처럼 지저분했다.

깜빡거리는 전등 밑으로 각양각색의 불법 광고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전계 감시 해커 요원 모집」

「미등록 환상 생물 구해 드립니다」

「5분이면 끝나는 의체 시술, 상담 무료」

「기적이 필요하십니까? 24시 원격 종교인 대기 중」

벽을 살펴보던 이하진이 어떤 문구를 발견하고는 멈췄다.

「인공육 손만두」

다른 정보 하나 없이 음식 이름만 덩그러니 쓰여 있는 광고물.

그걸 벽에서 떼어 주머니에 넣고는 걸음을 옮겼다.

역 밖으로 나오자 시커먼 도로 위에 안드로이드 택시들이 기다랗게 줄지어 있었다.

맨 앞에 있는 택시에 올라타니 운전석에 앉은 안드로이드가 청량한 기계음으로 말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대답 대신 만둣집 광고물을 건넨다.

그걸 받아 든 안드로이드는 짧게 무언가를 연산하더니 차량을 움직였다.

[빠르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택시가 이동하는 동안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 눈을 감았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몸, 그리고 새로운 능력.

그중에서 특히 자기가 가진 능력이 어떤 것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형의 기억을 떠올렸다.

거기서 낯선 단어 하나를 발견한다.

'초현실 각성.'

모든 초현실을 읽고, 다루는 능력.

아직 그게 어떤 건지 잘 체감이 되진 않았지만 엄청난 능력이라는 것만큼은 잘 알 수 있었다.

'절대 들켜선 안 돼.'

적어도 제 몸을 지킬 힘이 생길 때까지는 이 능력에 대해 철저히 숨겨야 한다.

함부로 나댔다가는 어느 기업의 연구실에서 실험체행이 되어 버릴 테니.

'포장할 거리가 필요하겠는데.'

이 도시의 뒷골목에서 활동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본인의 능력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해커, 거너 따위의 '포지션'이라 불리는 프레임들 말이다.

'어떤 게 좋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종교인이었다.

기적을 행하며 이계 정령을 부리는 이들.

하지만 종교인 행세를 하려면 번거로운 점이 무척 많았다.

종교의 여러 의식(儀式)들을 칼같이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선 봉헌까지도 필요했으니까.

'그럼 정령을 다루는 정령술사는....'

정령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각종 종교의 이계에서 불러낸 '이계 정령'과,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 기거하는 '원소 정령'.

보통 정령술사라는 말은 후자의 원소 정령을 다루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 정령들을 다루는 정령술사로 위장하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바에야....

'마법사 행세를 하는 게 낫지.'

어차피 원소 정령을 다루려면 마법에 대해 알아야 했다.

이계 정령을 소환하는 데 교리라는 지식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정체를 숨긴다는 면에서 따져 봤을 때, 정령술사보다는 마법사 쪽이 훨씬 나아 보였다.

이곳은 마법이 무척 흔하게 쓰였지만, 정작 마법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은 무척 비밀스럽게 전승되었으니까.

그런 만큼 마법사라고 소개하고 다닌다면 여러 다양한 능력을 사용할 때 의심을 덜 받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 몸은....'

형의 몸에 흐르는 마력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자신이 보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매끄러웠다.

'마법이 우리 집안 내력이었던 건가. 이하연 걔도 대마법사까지 됐다니까.'

문제는 마법을 구현하는 식(式)이었다.

마법식은 배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다시 형의 기억을 뒤적거렸다.

혹시나 형이 마법을 배웠다면 그걸 떠올려 사용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커다란 소득은 없었다.

'이 양반, 마법하고는 아예 담을 쌓았었네.'

이런 재능을 지닌 몸으로 마법을 익히지 않았다니.

과거에도 외골수였던 형은 미래에도 오직 '검' 하나만을 고집한 듯 보였다.

'하여간 미련할 정도로 우직한 인간이라니까.'

지금 당장은 형처럼 검을 쓰고 싶진 않았다.

이곳은 미간에 총탄을 맞는 순간 누구나 공평하게 머리가 터지는 세상이다.

아무리 골격을 강화해 두개골을 강철처럼 만들더라도, 그걸 뚫을 더 강한 총알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곳에서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근접 무기를 사용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혹시 형이 마법사를 상대하던 기억이라도 있을까 하고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 봤으나, 기억의 모든 부분이 완전하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입문자 수준의 마법 지식 정도는 익혔다는 점이었다.

'한번 해 볼까.'

운전용 안드로이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손을 들고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어 구상할 마력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마나라는 잉크로 심상을 구현해 갔다.

'흠.... 마법은 정교함이 생명인 것 같네.'

마법을 직조하는 데에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적당히 문법에만 맞게 문자들을 이어 주면 되었던 기적과는 무척 다른 느낌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기적은 문학의 문장, 마법은 수학의 공식과도 같았다.

'불, 얼음, 전기, 중력, 염동....'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마나 배열이 그의 손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내 마나는 여러 속성의 마력으로 구현되며 작은 불꽃으로 빛났다가, 얼음으로 반짝였다가, 전기 스파크를 일으켰다.

'미친 능력이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형의 기억 속에 있는 한 줄로 설명할 수 있었다.

'마법사 대부분은 평생 하나의 속성만을 구현해 보고 죽는다.'

어쩌면 형이 마법을 배우지 않은 것도 그것을 실전에서 사용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형은 초현실을 읽을 수 있을 뿐이지, 자신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는 없었으니까.

'좋아. 이제 대충 감이 오네.'

떠오르는 모든 속성을 한 번씩 사용해 본 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몇 개 골라 집중적으로 연습하기 시작했다.

[곧 도착합니다.]

어느새 택시가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실험할 게 산더미같이 많았지만 우선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목적지에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멋대로 지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굽이진 골목을 만들어 내는 동네였다.

이내 발작하듯 껌뻑이는 가로등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저기인가?'

저 멀리 어떤 건물에서 마치 불이라도 난 것처럼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만두 찜기에서 뿜어지는 증기였다.

정상적인 만둣집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제대로 된 간판조차 없었으니.

오래되어 보이는 가게로 가까이 다가가자 인간형 로봇이 고기를 다지고 있는 게 보였다.

[뭘 드릴까요?]

로봇은 쳐다보지도 않고 저장된 접객용 멘트를 재생했다.

그 기계는 가게만큼이나 낡아 보였는데, 저장 공간을 늘리는 불법 개조를 했는지 배가 불뚝 튀어나와 있었다.

"사장님 계십니까?"

[뭘 드릴까요?]

"픽서를 찾아왔습니다."

[뭘 드릴까요?]

이야기가 계속 맴돌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기 '최산'이란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러자 로봇이 흠집이 잔뜩 난 렌즈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참이나 그 상태로 멀뚱히 있길래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가게 안쪽에서 녹슨 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굴 찾아왔다고?"

짤막한 신장과 단단해 보이는 머리.

허리까지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

김 사장, 진명 최산은 드워프였다.

"김 사장님이십니까?"

"아까 그 이름은 어떻게 알았나?"

질문에 차마 대답하기도 전에 드워프가 헛기침을 크게 하며 가게 안쪽으로 턱짓을 했다.

"들어오게."

* * *

만둣집 안은 찜통 같았다.

찜기에서 나오는 증기가 실내를 맴돌며 온도와 습도를 미친 듯이 높이고 있었다.

"더워도 조금만 참게나. 염병할 환기 시스템이 고장 나서 말이야. 왕보! 오늘은 이만 가게 문 닫아!"

사장이 소리치자 왕보라고 불린 로봇이 녹슨 관절 모터를 끼익거리며 움직였다.

"픽서를 찾아왔다고?"

그는 이번에도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가게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드워프를 따라 좁다란 통로와 계단을 몇 개 지나자, 커다란 냉장고들로 가득찬 방이 하나 나왔다.

김 사장은 웅웅거리는 냉장고 문고리 앞에서 우뚝 멈추더니 뒤를 돌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혹시 형의 얼굴을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외모나 목소리 같은 외형은 형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으니까.

'쓸데없는 여지를 남기려 하지 않은 거겠지.'

형의 고손녀는 상당히 철두철미한 성격 같았다.

"리버가 보냈나?"

김 사장이 의심 어린 눈으로 말했다.

왜 갑자기 그녀의 이름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맞는 말이기도, 틀린 말이기도 했다.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고 있자니, 드워프가 마음대로 추측해 들어갔다.

"그렇겠지. 이 도시에서 내 진명을 아는 건 그 애뿐이니까."

드워프가 쯧, 하며 혀를 차더니 이야기를 이어 갔다.

"작업거리를 달라고 온 거겠군. 근데 요즘 내가 정신이 좀 없거든. 그래서 신입한테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아무리 리버가 보냈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거절하시는 겁니까?"

"그건 뭐...."

김 사장이 턱을 까딱 들어 올렸다.

"자네 하기에 달렸지."

그게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날 만족시켜 보아라.

그러지 못한다면 완곡하게 거절하겠다.

'낙하산 같은 건 없는 세계군.'

그렇게 생각하며 오른손을 위로 들어 마력을 끌어 올렸다.

말로 하는 소개보다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떠올리는 이미지는 차가운 얼음.

눈보라 치는 겨울날의 한기를 담는다.

곧,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한 식이 조화를 이루더니 손아귀 위에 뾰족한 고드름이 맺혔다.

"음.... 냉기계 마법 사용자인가?"

드워프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시연되는 마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

전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며 손 위에 새로운 마력을 구현한다.

그러자 고드름 주위로 시퍼런 전기가 파지지직! 소리를 내며 번쩍였다.

냉기계의 관통력과 전격계의 파괴력을 조합한 간단한 투사체 마법.

그가 만든 이중 볼트는 마법을 모르는 일반인의 눈으로 보더라도 위협적인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

수염을 만지는 드워프의 손이 점점 바빠졌다.

"스펠캐스터였군. 그것도 더블."

김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감탄했다.

"리버 그 애가 사람 보는 눈은 있었지."

이어 껄껄 웃더니 갑자기 냉장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들어오게."

들어오라니, 어디로?

그런 의문을 품는데 김 사장이 스스럼없이 냉장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냉장고에는 왜....'

어이가 없어 가만히 서 있자, 드워프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재촉했다.

"뭐 해? 냉장고 처음 들어가 봐?"

그에 어쩔 수 없이 김 사장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 *

냉장고 문은 드워프의 신장을 기준으로 만들어져서인지 드나들기 무척 불편했다.

고개를 숙여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차가워진 온도에 옷깃을 여몄다.

그곳은 냉장고라기보다 냉동 창고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천장에는 인공육을 매다는 뾰족한 고기 걸이가 달려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자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왜 냉장고를 이렇게 크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을 법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컴퓨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거기서부터 뿜어지는 열기를 냉장고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냉각수가 식히고 있었다.

'발열을 잡으려고 아예 냉장고에 집어넣은 건가.'

저 컴퓨터는 높은 보안 등급을 뚫거나, 혹은 그 반대로 무언가를 보호하는 데 쓰이는 물건인 듯했다.

"좋아.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얘기해 볼까."

김 사장이 탁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뭘 원하나?"

"말씀하신 대로 일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 확실히 해 두지. 자네는 지금 착귀갑사가 되겠다는 건가?"

착귀갑사(捉鬼甲士).

이 도시의 뒷면에서 활동하는 자유로운 프리랜서.

과거에는 세상에 나타난 귀신들을 처리하는 전문가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뒷골목에서 온갖 궂은일들을 해결하는 이들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일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흠.... 그래. 우리는 일이 아니라 '작업'이라 부르지."

김 사장이 울퉁불퉁한 주먹으로 탁자를 툭 치더니 서랍을 열어젖혔다.

"솔직히 말해 벌써 중개에 들어가는 건 좀 조심스럽군. 대신 내가 직접 간단한 작업을 하나 의뢰하겠네."

그가 서랍을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 기분 나빠 하지는 말라고. 무법지대 같아 보이는 이 뒷세계에도 나름 절차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자네가 아무리 더블 스펠캐스터라지만 소중한 고객님께 실전 검증도 안 된 초짜를 연결해 드릴 수야 없는 일 아니겠나?"

그러더니 조그마한 데이터 칩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 브리핑용 칩이야. 포트에 꽂게."

칩을 받고 서 있자 김 사장이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야. 자네 설마 포트 플러그 시술도 안 받은 건가?"

"예."

"맙소사. 무슨 한국시대에서 온 사람도 아니고.... 기다려 보게."

그러면서 다시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더라.... 아, 여기 있네."

그가 꺼낸 것은 안경처럼 생긴 스마트글라스였다.

건네받은 물건을 착용하자, 칩 안에 들어있던 정보가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적 드문 골목에 있는 편의점.

카운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안드로이드 종업원.

가게 뒤편에 있는 넓은 창고....

스마트글라스 알 위로 여러 정보가 휙휙 지나갔다.

"평범한 편의점 같아 보이나?"

드워프가 단단해 보이는 피부에 미소를 새기며 말했다.

"위치는 여기서 북쪽에 있는 12-6B 섹터라네. 편의점 창고에 보관된 목표물을 터트리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작업이지."

터트리다니?

김 사장의 말에 창고 사진을 자세히 살피자, 금속으로 된 무언가가 보였다.

"질산암모늄 탱크야."

절대 편의점에 있을 법한 물건이 아니었지만, 정말로 창고에는 길쭉한 저장 탱크가 놓여 있었다.

"방법은 상관없어. 사제 폭탄을 설치하든지, 멀리서 마법을 날리든지 마음대로 해도 돼."

"터트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중요한 건 폭발이야. 시선을 끌 수 있을 정도로 최대한 시끄럽고 화려한 폭발.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하진은 그 대목에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질문을 던졌다.

"시선을 끈다뇨. 설마 미끼라도 되는 겁니까?"

그의 말에 드워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워, 미끼라니. 그런 게 아니야. '교란'이라고 하는 걸세."

그의 변명에도 이하진이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자 드워프가 진지한 톤으로 말했다.

"좋아. 원래 이런 얘기는 안 해 주는데, 자네는 리버 지인이기도 하니 특별히 말해 주겠네. 그 편의점하고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착귀갑사들이 어떤 물건 하나를 탈취하는 작업이 있을 거야. 자네는 그쪽이 일하기 수월하도록 아주 약간의 도움을 주는 거고."

분명 뭔가 위험한 냄새가 나긴 하지만, 이쪽 일이라는 게 대체로 그런 종류의 것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건 폭발을 일으키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인 건 사실이기도 했고.

"대신, 선급금을 좀 받아야겠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얻어 낼 수 있는 건 얻어 내야 했다.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새로운 이름

"허허. 이거 당돌한 친구구먼."

"총 백만 큐빗, 선급금은 절반으로 하죠."

대충 과거 원 단위로 환산하면 똑같이 백만 원 정도 되려나.

아직은 생소한 화폐의 단위를 부르자, 웃고 있던 김 사장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봐, 친구. 아직 이 바닥 시세를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이건 오십 정도면 충분한 작업이야. 그것도 후하게 쳐준 거라고."

"편의점 종업원 안드로이드, 전투형 모델 같은데요.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걸 듣자하니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잖습니까. 그러니 미리 위험수당을 좀 받아야겠습니다."

그의 말에 드워프가 앓는 소리를 냈다.

"팔십에 하지. 이것도 정말 많이 봐준 거네."

"그럼 쓸 만한 총기 하나만 구해 주시죠. 제가 아직 무기가 없어서요."

계속 뻔뻔하게 나서자, 김 사장이 다시 허허 하는 웃음을 지었다.

"이거 아주 지독한 친구네. 하.... 좋아. 팔십만 큐빗에 쓸 만한 권총 하나 내주지. 이게 다 아까 자네가 보여 준 마법이 인상 깊어서 그런 거야."

드워프는 질렸다는 듯 양팔을 벌리며 구석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어 벽에 달린 손잡이를 옆으로 드르륵 밀자, 각종 무기가 주렁주렁 매달린 진열장이 나왔다.

그중 튼튼해 보이는 리볼버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모델 6 유니크, 클래식한 자동 리볼버야. 마법 공학으로 유명한 메가 코프 '스펠테크'에서 만든 물건이니만큼 마법 부여에 무척 친화적이지. 게다가 전자 부품 하나 안 들어간 백 퍼센트 기계식 무기라고. 이런 총은 요즘 보기 드물어."

기계식 권총이라.

확실히 전자 부품 하나 없는 무기는 희귀했다.

빨대에도 반도체가 들어가는 세상이니 말이다.

기계식 무기의 장점은 해킹당할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 자동 리볼버는 전자식 무기의 다양한 보조 기능을 포기한 대신 안전성을 높인 듯 보였다.

"내 특별히 탄약 한 박스 정도는 챙겨 주지."

김 사장은 진열장 아래에서 탄약 상자를 꺼내 권총과 함께 건넸다.

리볼버를 집어 들고는 사격 자세를 취해 보았다.

'음.... 나쁘지 않네.'

과거에 사격술 정도는 익혔던 건지, 자연스레 형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물건들을 챙기자 김 사장이 냉장고 문간에 서서 말했다.

"작업일은 나흘 뒤 23시 정각. 시간 엄수 잊지 말게."

이어 따라오라는 듯 턱짓을 하더니 가게 뒷문 쪽으로 향했다.

그를 따라 도착한 만둣집 뒤편은 무척 고요했다.

고작 힘없는 가로등 하나가 비출 뿐인 어두운 골목.

고층 건물들에 폭 둘러싸여 있는 모양새라 잘 숨겨진 아지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업 마치면 여기로 찾아오면 돼. 정문 말고 이 뒷골목으로."

김 사장이 주머니에서 네모난 카드를 꺼내 들이밀었다.

겉면에 적힌 Qubit이라는 영문을 보아하니 아까 말한 선급금이 담긴 지갑 카드 같았다.

돈을 건네받자 드워프가 두꺼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뭐라고 부르면 되겠나?"

이름이라.

형의 고손녀 말처럼 진명을 쓸 수는 없었다.

'흠.... 뭐가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저 멀리 폐주유소에 있는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과거 전 세계를 견인한 존재였지만, 지금은 처량하게 잊힌 연료의 이름이.

그것은 한때 이 몸의 주인이었던 형을 기리기에 나름 적절한 것 같았다.

이하진이 김 사장의 손을 잡으며 그의 새로운 이름을 말했다.

"디젤입니다."

* * *

디젤은 멀지 않은 곳에 적당한 가격의 모텔을 잡았다.

'나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동안 최대한 마법에 대해 파악해 놔야 해.'

동묘 좌판 시장에서 구매한 중고 스마트글라스를 쓰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웹 사이트에 접속했다.

이제 웹이라 불리는 인터넷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계(電界)'라 불리는 새로운 디지털 공간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계에 접속하려면 뇌가 전자 신호를 해석할 수 있도록 따로 시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지금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인터넷뿐이었다.

그렇게 구식 웹 안을 헤매기를 몇 시간.

'음.... 쓸모 있는 게 거의 없네.'

고작 인터넷에서 마법과도 같은 고급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결국 다 쓰러져 가는 국립 도서관이라도 가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때쯤.

아주 특이한 홈페이지 하나를 발견했다.

「전계 정령 가이드」

최근 글이 70년 전쯤 되는 어떤 인도인의 블로그.

보아하니 전계가 지금처럼 인터넷을 완벽하게 대체하지는 못한 시기인 듯했다.

'전계 정령이라....'

흥미를 느껴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자, 블로그의 주인은 전계에도 정령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정보 탈취, 보안 무력화, 연산 보조 등 전계 해킹에 도움이 되는 정령으로....」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블로그 주인을 믿지 않았는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닌데.'

정령이라는 존재는 어떤 세계에 기거하는 령으로 된 생명체였다.

그러므로 전계에도 정령이 존재할 법했다.

전계는 인간이 발명해 낸 공간이 아니라, 새로이 발견한 하나의 독특한 계(界)였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블로그를 살펴보다 동영상 하나를 발견했다.

곧바로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인도식 억양으로 된 영어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제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전계 정령을 소환해 보려고 합니다. 이 영상은 이계 정령을 볼 수 있도록 특별한 기적이 부여된 렌즈로 촬영했으며....]

영상의 주인공은 한동안 이론 설명을 줄줄 읊더니 갑자기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컴퓨터에 대뜸 물을 한 바가지 뿌린다.

'뭐 하는 짓이야?'

전자기기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망측한 행위.

이어서는 기도를 올리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등 온갖 기행을 이어 갔다.

'이러니 사람들이 안 믿은 거군.'

하지만 영상을 계속 지켜보자 상황이 달라졌다.

인도인이 하는 행위에서 어떤 '문자'가 나타난 것이다.

오직 디젤의 능력으로만 알아볼 수 있는 문자가.

'이건....'

이혜나가 새겼던 것과는 전혀 다른 체계의 언어.

그것은 마치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인도인은 기이한 행위들로 그런 문자를 적어 나갔다.

하지만 결국 정령을 소환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흠....'

디젤은 영상을 여러 번 반복해서 돌려보며 분석하기 시작했다.

'언어는 정확했는데, 문법 체계가 틀렸어.'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는 손을 들어 허공에 문자를 써나갔다.

블로그 주인이 한 것처럼 굳이 춤을 출 필요는 없었다.

'문자를 쓰는 방법은 개인차가 있는 듯하네.'

다른 세계의 문자를 쓰는 것은 영적 행위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영적 행위에는 '믿음'이 굉장히 중요했다.

남들이 보기에 우스꽝스럽더라도 이렇게 했을 때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인도인의 몸짓에는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전계 정령 언어를 사용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믿음으로 정령의 문자를 쓸 수 있게 된다고 해서 항상 정령이 응해 준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정령 감응력.

즉 정령이 어떤 것을 원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아는, 그 마음을 느끼는 능력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이 문장의 목적.'

머리글에는 정령을 소환하려는 목적을 정확히 명시한다.

그 뒤로는 문장을 쓰는 필자의 진명과 현재 시각, 위치 등 현실계에 대한 정보들을 적어 나간다.

유교의 기적문을 쓸 때 공손한 문체가 중요했던 것처럼, 전계 정령의 소환문은 정확한 맥락이 중요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디젤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문체로 소환문을 채워 나갔다.

'이 정도면 됐어.'

완성된 정령 소환문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오묘한 지지직거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

전기가 번쩍이는 것도 아니고, 불꽃이 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주시하던 디젤은 문득 떠오른 감상을 뱉었다.

'방송 끝난 텔레비전 같네.'

검은색과 흰색 점들이 빠르게 교차하며 회백색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디지털로 이루어진 세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보이는 걸까.

저건 아직 제대로 형태를 이루지 못한 전계 정령의 순수한 모습이었다.

그런 잿빛 지지직거림의 크기가 점점 커져 갔다.

디젤은 한동안 원시적인 정령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이제 슬슬 형상이 잡혀야 할 텐데....'

하지만 정령은 계속해서 이리저리 스파크를 튀기는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안 돼.'

곧바로 눈을 살짝 감고는 제 앞에 있는 정령과 교감을 시도했다.

그러자 얕게 떨리는 어떤 마음의 동요가 그의 감정에 맞닿았다.

처음 딛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

호기심 많은 성격에서 비롯된 궁금증.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혼란.

그것들을 세심히 읽은 디젤이 결론을 지었다.

'지금 어떤 형상을 취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어.'

그럴 만도 했다.

전계는 현실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일 테니.

지금까지는 오로지 정보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령이었으니 어찌 보면 혼란스러워하는 게 당연하다.

'뭐가 좋을까.'

디젤은 잠깐의 고민 끝에 소환문에 새로운 문자 몇 개를 더했다.

그러자 노이즈가 잦아들며 일정 형태로 모습이 변해 갔다.

오묘한 회백색 빛깔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곧 형상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모양이 잡히기 시작했다.

작은 역삼각형 얼굴에 달린 커다란 눈.

그 위로 쫑긋 솟은 두 개의 귀.

유선형의 우아한 몸과 기다란 꼬리까지.

전계 정령은 고양이와 비슷한 형상을 취했다.

테이블에 사뿐히 앉은 정령이 눈을 깜빡이며 디젤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청아한 목소리로 주인의 머릿속에 직접 말을 걸었다.

〈알 수 없는 세계, 정보 요청.〉

"알 수 없는 세계라고?"

정령의 말에 디젤이 의문을 품었다.

전계에 돌아다니는 정보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이 현실계에 대한 정보일 텐데, 알 수 없다니.

"무슨 뜻이지?"

정령은 대답 대신 잿빛 노이즈가 튀는 기다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에 디젤이 말했다.

"전계에서 키워드 '현실계'로 검색해 봐."

〈전계? 알 수 없는 정보.〉

"뭐? 전계까지 모른다고?"

정령이 자기가 살던 곳을 모르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에 차근차근 설명했다.

"네가 원래 있던 곳이 전계야. 정보로 이루어진 무한한 네트워크 공간 말이야."

그러자 정령이 몸을 공처럼 동그랗게 말았다.

〈학습 시작.〉

그렇게 한동안 제 몸을 꼬옥 붙잡고 있더니, 이내 다시 중얼거렸다.

〈전계에 대해 학습 완료. 학습한 정보를 기반으로 '현실계'에 대한 정보 다수 발견. 곧바로 현실계에 대한 학습 시작.〉

'뭔가 이상한데....'

보통 정령들은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던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제 세계에 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정령을 쓰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혜나가 유교의 기적문을 쓰는 데에 굳이 정령을 부른 것도 그들이 유교의 기적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디젤의 눈앞에 있는 정령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거 설마....'

곧, 정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뿐사뿐 디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존재에 대한 정의를 요청.〉

"그게 무슨 말이야?"

그가 되묻자 정령은 아직 이 세계에 적응 중인 디젤조차 놀랄 만한 말을 던졌다.

〈이름이라 불리는 것이 필요.〉

'맙소사....'

이름을 지어 달라는 정령이라니.

만약 전문가가 봤더라면 학계가 뒤집힐 법한 일이다.

정령들은 령으로 되어 있었기에 자아가 무척 강했다.

육체가 없는 정령에게 자아를 잃는 것은 곧 자신을 잃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정령들은 자신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건 물론이고, 애칭으로 부르는 것조차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 정령이 이름을 지어 달라니.

이건 둘 중 하나였다.

디젤이 갑자기 정신이 나가서 망상적 대화를 하는 중이거나.

아니면....

〈존재,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음.〉

눈앞에 있는 정령이 방금 막 태어난 정령이거나.

'허.... 이게 가능한 일인 건가.'

디젤이 헛웃음을 터트리자 정령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답을 대기 중.〉

약간은 짜증이 섞인 말투.

그에 적당한 이름을 던져 주었다.

"네 이름은 '아르'야."

별 뜻은 없다.

정보를 물으면 가서 알아 오라는 뜻이다.

〈아르....〉

제 이름을 들은 아르는 고양이다운 갸르릉 소리를 내며 몸을 돌돌 말았다.

〈아르, 다시 학습에 들어감. 주인은 아르를 방해하지 않길 요청.〉

'흠.... 왠지 말투가 좀 건방진데.'

형태를 고양이로 설정해 놓아서 그런 건가.

다른 동물로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드는 디젤이었다.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첫 번째 작업

나흘 동안 디젤은 모텔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정보 탐색과 마법식을 익히는 데에 매진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전계 정령인 아르 덕분이었다.

아르는 전계에 접속할 수 없는 디젤을 대신해 여러 정보를 찾아다 주었다.

다만 아직 정령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아서인지 전계의 얕은 곳에 있는 정보만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아무런 지식 기반이 없는 디젤에게는 감지덕지였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을 꼽아 보자면 아르가 먹는 '밥'이었다.

'앞으로 전기세 많이 들겠어.'

아르는 전계 정령이라는 이름답게 주기적으로 전기를 요구했다.

그걸 알지 못했던 첫날에는 아르가 완전히 방전되어 몇 시간 동안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모텔, 전기의 질 좋지 않음.〉

콘센트 근처에서 전기를 빨아들이던 아르가 꼬리로 바닥을 쓸며 중얼거렸다.

어제 디젤이 실험 삼아 전격계 마법으로 만든 전기를 줘 보았는데, 그 이후로 아르는 모텔의 전기를 통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전계 정령에게 마법으로 구현한 전기와 공장에서 만든 전기는 뭔가 맛이 다른 듯했다.

〈찌르, 필요.〉

아르는 어디서 학습한 용어인지 디젤이 마법으로 만든 전기를 찌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디젤은 자신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아르에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그 콘센트에서 나오는 전기가 네 주식이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르를 완전히 충전하려면 꽤 많은 양의 전기가 들어갔다.

그걸 전부 디젤의 마력으로 채우기에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좋은 건 가끔 줘야 하기도 하고.'

찌르는 칭찬할 일이 있을 때나 주는 보상으로 취급하기로 했다.

〈마음에 들지 않음.〉

아르가 눈을 스르르 감고는 다시 전기를 충전해 나갔다.

* * *

작업 시각, 12-6B 섹터.

디젤이 골목 속에 몸을 숨기고 건물을 살피고 있었다.

그곳은 왜 편의점이 있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후미진 곳이었다.

덕분에 작업 도중에 손님이 들이닥친다거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르, 전계 스캔해.〉

디젤의 말에 품 안에 있던 아르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더니 전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전계와 연결된 두 종류의 접속 발견.〉

하나는 편의점 내부 서버일 테고, 다른 하나는 점원용 안드로이드일 테다.

그렇게 결론 내린 디젤이 아르에게 물었다.

〈서버 쪽 해킹할 수 있겠어?〉

작업을 쉽게 풀어 나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해킹'이 필수였다.

기계 장치를 무력화할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으니까.

〈서버에 설치된 방화벽은 2등급. 해킹 성공 확률 매우 높음.〉

〈좋아. 시도해 봐.〉

곧 아르가 해킹에 성공했다는 알림을 보냈다.

디젤은 가게 CCTV를 반복 재생 화면으로 바꿔치기하고, 혹시 울릴지도 모르는 경보 체계를 무력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저 안드로이드 모델 정보 좀 보여 줘.〉

내부 시스템에 저장된 파일 하나가 디젤의 스마트글라스 위에 나타났다.

'역시 단순한 점원용 안드로이드가 아니었어.'

가녀린 여성처럼 보이는 몸체에는 두꺼운 방탄 장갑이 내장되어 있었다.

게다가 한쪽 팔에는 산탄을 발사할 수 있는 배럴이, 다른 쪽 팔에는 날카로운 전투 칼날이 숨겨져 있다.

〈안드로이드 쪽 해킹은 어때?〉

들려오는 대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안드로이드의 방화벽은 5등급, 해킹 실패 확률 높음.〉

해킹 실패에는 큰 대가가 따랐다.

당분간 해킹 대상을 다시 해킹할 수 없게 되는 건 기본이고, 최악의 경우 관련 보험이 들려 있어서 중무장한 기업 요원이 들이닥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디젤은 조금 다른 접근 방식을 사용하기로 했다.

"어서 오십시오."

편의점에 들어서자 안드로이드의 인공 성대에서 울리는 맑은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인간과 똑같이 생긴 여성형 안드로이드는 미소를 띤 표정으로 정면 약간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님을 직접 바라보지 말라는 매뉴얼 때문이다.

하지만 300도 시야각을 가진 안드로이드의 인공 렌즈는 이미 디젤의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녹화해 내부 블랙박스에 저장하고 있을 것이다.

디젤은 상품을 고르는 척 진열대 사이를 지났다.

그냥 걷는 평범한 걸음이 아니다.

발길 하나하나에 마력을 담으며 편의점 바닥에 마법식을 새겨 나갔다.

"도시락 카피 푸드는 어디 있죠?"

디젤이 던진 질문에 안드로이드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고객님 반대편 끝에 있는 B-6번 진열대입니다."

"못 찾겠는데요."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빤히 응시하자, 안드로이드는 매대에 달린 플라스틱판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차가운 서리가 내리깔리며 기계의 발을 서서히 묶는다.

안드로이드가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발이 느려지는 이유에 대해 제 기능 고장을 의심했지 마법을 의심하진 않을 것이다.

곧 안드로이드가 완벽히 움직임을 정지하자, 디젤이 손에 전격을 시퍼렇게 세우고는 뒤쪽으로 다가갔다.

"고객님. 찾으시는 물건은 저쪽, 에에에에...."

마력으로 만든 칼날이 안드로이드의 등에 꽂힌다.

고압의 전격계 마법이 안드로이드의 회로를 전부 태워 버렸다.

이 정도 공격이면 방금 촬영된 블랙박스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기분이 썩 좋진 않네.'

아무리 기계라지만 그래도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를 찌른다는 건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익숙해져야 해.'

빼앗는 걸 주저한다면 언젠가 빼앗길 상황이 올 테다.

그렇게 마음을 다지며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편의점 뒤에 있는 문으로 나서자 꽤 넓은 공터가 나왔다.

공터 끝에는 지붕뿐인 창고가 보였는데, 그 아래 이번 작업 목표인 탱크가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는 작네.'

저 정도 용량이면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마법을 던져도 될 정도의 폭발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럼 어디....'

모텔에서는 마법을 직접 시연해 볼 수가 없어 답답하던 차였다.

그런데 여기는 딱 적당히 넓은 공터.

익힌 마법을 연습해 보기에 최적의 장소다.

'떠올리는 이미지가 중요해.'

기적이 믿음의 응답이라면, 마법은 계산의 산물이다.

마법의 성공 여부는 마음속에 그린 이미지를 얼마나 정확한 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정해졌다.

눈을 감았다.

떠올리는 것은 새하얀 빙산 위를 거니는 괴물.

정확히는 놈에게서 떨어져 나온 부산물이다.

빙룡의 비늘.

그런 이름이었지.

디젤의 손에 뾰족한 얼음 조각 하나가 맺히기 시작했다.

'이걸로는 부족해.'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얼음 속에 새파란 전격의 에너지를 심었다.

그러자 파지직거리는 요란한 소음이 사방에 울리며.

단순한 전격계 부여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전격의 힘이 단단한 얼음에 담겼다.

이윽고 눈을 뜬 디젤이 목표를 바라보았다.

'살짝 쥐어서, 힘껏 던진다.'

창을 던지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어 힘껏 앞으로 내뻗으며 전격으로 뒤덮인 얼음을 투사했다.

파괴적인 에너지가 공중을 가른다.

저장 탱크 철판에 날아가 박힌 그것은 정확히 디젤이 기대한 반응을 보였다.

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커다란 불꽃이 터져 나왔다.

간혹 디젤에게까지 튀기는 금속 파편은 그가 미리 펼친 방어막에 막혀 튕겨 나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떠나려는데.

저 멀리서 독특한 소리가 들려 왔다.

우우웅...!

마치 거대한 선박에서 울리는 듯한 뱃고동 소리.

'뭐지...?'

그냥 지나치기에는 특이한 경고음이다.

디젤이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품에 있던 아르가 급하게 무언가를 알려 왔다.

〈경고, 무언가 다가오고 있....〉

정령이 채 경고를 끝마치기도 전에.

하늘에서 육중한 금속이 쿵, 떨어져 공터에 내리꽂혔다.

어쩌면 창고에서 일어난 폭발보다 더 큰 충격.

낙하한 물체를 마주한 디젤은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여러 개의 실린더가 움직이는 치익, 소리가 들린다.

우우웅...!

온 몸을 떨리는 위협적인 진동과 함께.

거대한 기계가 몸을 일으켰다.

저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자, 메가 코퍼레이션의 군용병기.

고성능의 인공지능으로 운용되며, 여러 개의 두꺼운 금속 다리를 가진.

다족보행전차였다.

〈아르.... 해킹은?〉

〈해킹 성공 확률... 없음. 예상되는 방화벽, 6등급 이상. 정확한 수치는 측정 불가.〉

아르가 작은 몸을 벌벌 떨며 디젤의 품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김 사장이 말한 작업 중인 물건이란 게....'

저 기계인 건가.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왜 이쪽으로 온 거지?'

디젤이 교란 작업을 너무 성공적으로 수행한 탓인 걸까.

이유야 어쨌건, 지금 당장 그런 질문은 중요치 않았다.

눈앞에서 괴물이 움직이고 있으니.

도망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이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다른 착귀갑사들의 작업 공간에서부터 여기까지 단숨에 이동한 병기다.

그런 놈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판단이다.

지금 디젤의 경험과 실력으로 맞선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상대.

하지만.

'지금이라면....'

딱 한 번.

놈이 전열을 다듬는 틈을 노린 정확한 한 번이라면.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는 없더라도, 도망칠 여유 정도는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이를 악 물며 마력을 한껏 끌어냈다.

팔을 위로 들어 올리고는, 익숙하지 않은 힘을 발산했다.

상당한 양의 마력이 저 밤하늘 높은 곳으로 향한다.

그 수많은 입자 하나하나를 제어해 마력식을 아로 새긴다.

원래라면 마력 입자의 존재를 느끼는 데만도 까마득한 시간과 노력이 들었으나.

디젤에게는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력으로 발생한 푸른빛이 스치며 전격의 힘이 한데 모였다.

이어 오직 숙련된 전격계 마법사만이 다룰 수 있는 마법.

'낙뢰'가 하늘에 맺힌다.

그때, 마법을 눈치챈 전차가 급하게 회피 기동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빠르게.

콰광! 

벼락이 대지를 뒤흔들며 전격이 내리꽂혔다.

전차의 가장 큰 약점인 상부 갑판.

게다가 전자기기에 강한 전격계 속성의 마법이다.

이 정도 위력이면 아무리 저 괴물 같은 병기더라도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다.

그렇게 생각하며 퇴로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돈 순간.

철컥, 소름 끼치는 소음이 뒤에서 들렸다.

금속이 서로 맞물리며 내는 마찰음.

전차가 무기를 장전하며 내는 소리가.

'이런 미친....'

회피하는 걸 포기하고는 황급히 여러 겹의 방어막을 펼친다.

그와 거의 동시에 전차의 주포가 불꽃을 내뿜었다.

빠른 속도로 회전해 온 포탄이 방어막 다섯 겹을 뚫고 들어온다.

그러나 전격 마법에 맞은 충격 때문일까.

간발의 차이로 공격이 빗나갔다.

'...!'

콰아앙...!

저 멀리 도탄 된 탄이 굉음을 내며 폭발한다.

디젤은 그 폭음에도 정신을 부여잡고 빠르게 병기를 훑었다.

'방호 마법으로 피해를 보호하고 있어.'

곧 전차 하부에 마법식이 새겨진 걸 발견했다.

특별한 부재료까지 사용하면서 새겨 넣은 고성능의 방호술.

'저걸 해체하려면....'

근접해야 한다.

판단을 내리자마자 육체 강화 마법을 다리에 억지로 때려 박았다.

마력이 알맞지 않은 단순한 살덩이기에 마법이 풀린 뒤에 엄청난 후폭풍이 밀려오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전차 쪽으로 전력 질주했다.

다시 놈의 주포에서 불꽃이 일며 포탄이 뿜어 나온다.

하지만 갑자기 빨라진 목표의 속도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또다시 간발의 차이로 빗나간다.

근방에서 터진 포탄의 충격파가 온몸을 덮쳤다.

'윽, 조금 더 빨리....'

마력을 다리에 더 쑤셔 넣으며 땅을 박찬다.

그렇게 겨우 방호 마법식에 간섭할 수 있을 거리까지 닿자.

평범한 이들은 결코 불가능할 일을 저질렀다.

모든 마법사들이 한 번쯤 상상해 봤을 법한 방법.

손으로 법식을 잡아 뜯는다는 원시적인 행위.

디젤은 마법식의 결을 잡아 쥐더니.

억지로 거칠게 찢어 버렸다.

그러자 으드득, 하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해체된 마법의 여파가 사방으로 분출된다.

그 반동에 병기가 휘청거렸다.

저 찰나의 틈이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오른손을 타고 아까와는 전혀 다른 속성의 마력이 모였다.

이번에 떠올린 것은 냉기.

빙산 아래 깊은 바닷속, 햇빛조차 닿지 않는 심연의 한기가 손아귀에 서린다.

차가운 마력은 현실에 구현된 것만으로도 공중에 얼음조각을 맺기 시작했다.

디젤은 그것들을 한데 그러모아 마법식으로 직조해 나갔다.

그렇게 땅에 손을 짚자.

심해에서 자라나는 한 줄기 고드름이 피어오른다.

'브리니클.'

극점으로 모인 한기가 수직으로 소용돌이치듯 솟구친다.

이윽고 그것이 전차의 몸체와 맞닿자.

철판에 닭살이 돋는 것처럼 하얀 서리가 마구 일어나며, 순식간에 병기 전체가 꽁꽁 얼어붙었다.

"후...."

디젤이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상황을 살폈다.

이제 더는 쥐어 짜낼 마력도 없었다.

하지만.

〈개체.... 아직 활동 중....〉

아르의 경고와 함께, 금속 장갑을 덮은 얼음들이 깨어진다.

다리를 움직이는 실린더 소리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미친...."

거대 기업의 군용병기란 이렇게 압도적인 존재였나.

기계에 새겨진 '게일 컨소시엄'의 마크.

세계 10대 메가 코퍼레이션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그 이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움직여야.... 윽....'

억지로 강화 마법이 부여되었던 다리에서 마력이 빠져나가자 고통이 엄습했다.

빗나간 포격에서 뿜어진 충격파에 내장까지 타격을 입은 건지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겨우 서 있는 게 고작인 디젤을 향해 전차의 주포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때.

"뭐야. 이미 걸레짝인데?"

"물러서. 아직 움직인다."

낯선 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엣것은 쾌활한 것, 뒤엣것은 무뚝뚝한 것이다.

"홍살문."

무뚝뚝한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요란한 방울 소리가 울린다.

뒤를 돌아보자 공중에서 붉은 문이 나타나더니 쿵, 땅에 내리꽂혔다.

그 밑으로는 검은 한복을 입은 여인이 손에 활을 들고 서 있었다.

"...."

장미의 가시처럼 툭 튀어나온 귀.

엘프라 불리는 종족이다.

"비켜. 얼굴 뚫리기 싫으면."

차가운 목소리로 내린 경고와 함께, 빈손을 위로 뻗었다.

그러자 홍살문의 뾰족한 화살 중 하나가 밝게 빛나더니, 엘프의 손에 쥐어졌다.

처음 보는 종류의 기적.

아마도 이 땅에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무교(巫敎)'의 것 같았다.

엘프 무당이 홍살을 활시위에 걸고는 팽팽히 당겼다.

이어 손을 가볍게 놓자.

바람을 가르는 독특한 소리와 함께 붉은 화살이 쏜살같이 뿜어진다.

투쾅...!

뻗어 나간 한 줄기 붉은빛이 전차 상부에 깔끔한 구멍을 만들었다.

커다란 소리를 내며 자리에 쓰러진 병기는 이번에야말로 완전하게 침묵했다.

"야! 완전 박살을 내면 어떻게 해?"

"이건 메가 코프 물건이야. 확실히 끝내도 모자라."

"아니, 이미 거의 작동 중지 상태였다니까...."

"...."

그 말에 활을 들고 있는 엘프가 인상을 쓰더니 디젤을 쳐다보았다.

"당신, 어떻게 한 거야?"

디젤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옆에서 다른 여자가 튀어나와 말을 걸었다.

"미안해. 이놈이 여기 오는 건 우리도 예상 못 했어. 고작 질산암모늄 폭발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거든. 원래라면 2초 정도만 시선을 끌었어야 했던 건데 말이야."

그러고는 전차 위로 펄쩍 뛰어오르더니, 기계를 능숙하게 해체하며 외쳤다.

"편의점에서 마력 보충제 몇 개 빼 먹고 돌아 가! 김 사장한테 추가금 더 뜯어내는 거 잊지 말고!"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지하대청

"이상해."

무당 채설아가 자리를 떠난 마법사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왜?"

"알잖아. 일개 마법사에 이렇게 당할 무기가 아닌 거."

한편 전차를 해체하던 여성, '리틀 시스터'가 흥미롭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설아야, 이것 좀 봐."

"뭘 보라는 거야. 난 너처럼 전계 투사 못해."

리틀 시스터가 다족보행전차, AT-71의 머리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

"이 고철이 타깃을 바꾼 시기 말이야. 여기서 폭발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이었어."

"뭐?"

"그러니까 이놈은 저장 탱크에서 일어난 폭발 때문이 아니라, 저 마법사가 시전한 마법에 반응해서 여기 온 거라고."

그녀의 말에 채설아의 뾰족한 귀가 쫑긋거렸다.

"말이 안 되는데. 그럼 이게 우리보다 저 마법사를 더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다는 거잖아."

"그러게 말이야."

리틀 시스터가 바닥으로 뛰어 내리더니 채설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품에서 홀로그램 영사기를 꺼내 무언가를 재생했다.

"봐. 블랙박스에 찍힌 거야."

그곳에는 디젤이 치른 전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낙뢰가 내리치고, 방호 마법을 손으로 뜯어 버리고, 땅에서 고드름이 솟구친다.

영상을 지켜보던 채설아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대마법 병기가 이런 마법사의 마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

"더블 스펠캐스터에 순간 대처 능력도 꽤 괜찮은 거 같은데, 어때?"

"이 남자.... 누구야?"

"나도 몰라. 신입이라던데."

리틀 시스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관심 있으면 김 사장한테 물어보든가."

그러더니 다시 전차 위로 번쩍 뛰어올라 기계 해체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