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소식 들었네. 미안하게 됐어. 내가 섭섭지 않게 더 챙겨 넣었으니 마음 풀게."
며칠 뒤, 잠시 휴식하며 몸을 회복한 디젤이 만둣집의 냉장고를 다시 찾았다.
김 사장은 디젤이 먼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원래 금액의 두 배가 넘는 추가금을 얹어 주었다.
그의 행동과 말투를 보아하니 지난 작업 때 메가 코프의 전차가 디젤에게 온 것은 적어도 계산에 있던 수는 아닌 듯했다.
"이거 혜성 같은 신입을 내가 몰라봤구먼."
게일 컨소시엄의 군용 병기를 홀로 때려잡은 마법사라니.
김 사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껄껄 웃었다.
"그만하면 다른 실력 검증이 필요하지 않겠지. 그럼 이제 본격적인 작업을 한번 해 볼 텐가?"
드워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하지만 디젤은 제안을 거절하고는 냉장고 밖으로 나섰다.
"당장은 준비할 게 좀 있어서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점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자신에게 엄청난 재능이 있다고 해도 그것 하나만을 과신하기에 이 세상은 너무 위험했다.
'특히 그 홍살문이라는 기적.... 엄청난 위력이었어.'
무엇보다 그런 것들로부터 당장 제 몸을 보호할 방어구가 절실했다.
해킹과 관련한 전계 물품은 차치해 두고서라도 말이다.
"혹시 추천해 주실 만한 방어구점이 있습니까?"
"방어구점? 흐음...."
그의 질문에 김 사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도 이제 착귀갑사니까."
* * *
서울 북촌, 작은 연못이 딸린 고즈넉한 기와집 구역.
조선의 황실 경복궁 바로 옆에 위치한 이곳은 한때 유명한 관광지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세계정세가 격변한 이후에는 1-8 섹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초고급 한옥이 들어선 부자들의 전용 거주지가 되었다.
이제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두 종류뿐이었다.
하나는 여기에 사는 높으신 분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작업을 준비하는 착귀갑사들이었다.
이유는 1-8 섹터 구석진 곳에 숨겨진 '지하대청'이라는 비밀스러운 장소 때문이었다.
디젤은 세련된 찻집으로 위장한 건물로 다가갔다.
비록 지상으로는 2층 정도밖에 되지 않는 높이지만, 그가 딛고 있는 땅 아래로는 역(逆)마천루라 불러도 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신원 확인하겠습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입구를 지키는 가드가 정중히 물었다.
이곳은 철저하게 착귀갑사를 위한 시설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착귀갑사와 관련이 없는 자들은 출입조차 하지 못했다.
디젤이 김 사장에게 받은 칩을 건네자, 사내는 그걸 귀 밑 포트에 삽입해 확인하더니 이내 길을 비켜 주었다.
지하대청에는 다양한 시설이 있었다.
지하 1층에는 '카운트 제로'라는 이름의 주점이, 2층부터는 각종 상점과 의체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간이 수술실, 그 아래로는 여러 부대시설이 딸린 호텔까지 있었다.
'방어구는 4층인가. 시간이 되면 5층에 있는 마법 용품점에도 들러 봐야겠어.'
디젤은 시끄러운 일렉트로닉 음악이 흐르는 주점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전계에 연결된 정보가 너무 많습니다.〉
그의 품 안에서 몸을 돌돌 말고 있던 아르가 혼란스러운 듯 말했다.
언젠가부터 아르는 특유의 기계 같은 말투에서 조금씩 벗어나 나름 정상적인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여긴 위험한 곳이 아니니까."
지하대청에는 엄격한 규율이 하나 있었다.
절대 평화 지대.
이곳은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는 무력, 초현실 능력, 해킹 등을 철저하게 금하는 곳이었다.
〈주인,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르는 정령이다. 신경 안 쓰려고 해도 써져.〉
"존댓말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인마."
가끔은 제대로 할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곧 목적지인 지하 4층에 들어서자, 한글로 된 네온 간판과 함께 브랜드의 로고송이 흘러나왔다.
[보상! 부상! 보부상!]
조선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소매 거래는 저 보부상이라는 물류 기업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가게 근처로 다가가자 얼굴에 커다란 렌즈가 달린 로봇 상인이 그를 반겼다.
그 금속으로 된 기계가 머리에 쓴 강철 패랭이를 한 바퀴 팽그르르 돌리더니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지하대청 최고의 봇짐장수 퍼즈입니다! 무엇을 찾으시는지요?]
"방어구를 좀 보려고 왔습니다."
[예에! 방어구 말이십니까! 여기서 골라보시죠! 목록에 있는 건 전부 판매하고 있습니다.]
퍼즈는 크롬 도색으로 번쩍이는 팔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홀로그램 카탈로그가 뿜어 나오는 단말기를 들이 밀었다.
[오늘 막 들어 온 방호 의류 회사 '멋'의 신상품입니다! 권총탄쯤은 거뜬히 막는 방탄 재질에, 영적 투사가 불가능하도록 무당의 굿이 발린 달린 택티컬 두루마기이지요!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 방호 기능은 덤입니다! 전문 디자이너 771께서 손수 직조한 아름다운 디자인과, 넉넉한 수납공간의 실용성까지 잡은 두루마기가 단돈 삼천만 큐빗!]
엄두도 나지 않는 가격에 디젤은 곧바로 다음 물건으로 화면을 넘겼다.
[메가 코프 '쿠사나기'사의 기업군이 한때 전투복으로 운용하던 강화 슈트입니다! 방탄 및 방검 설계가 되어 있어 무게가 조금 무겁습니다마는 방어력 하나만큼은 확실하지요! 특히 고성능의 해킹 대응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어서 고객님의 전자 의체들을 보호하는 데에 탁월합니다!]
그렇게 몇 가지 물품들을 둘러보다 어느 물건에서 멈춰 섰다.
그러자 퍼즈가 헛, 하는 소리를 내며 당황해했다.
[아이고, 고객님. 죄송합니다. 그것은 파는 물품이 아닌데....]
퍼즈는 이게 왜 여기에... 등짐장수가 그랬나? 라고 중얼거리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때, 디젤의 품속에서 아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주인, 쓸 만한 물건 찾았다.〉
아마도 이 작은 전계 정령이 카탈로그를 해킹해 숨겨져 있던 목록을 꺼낸 듯 보였다.
아르는 가끔가다 디젤의 심리를 읽고는 딱히 명령하지 않아도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아서 척척 가져다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보상으로 마법으로 만든 전기, '찌르'를 주었는데 그걸 더 먹고 싶어서인지 점점 스스로 찾아오는 정확도와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가끔 보면 동물 기르는 것 같다니까.'
아르가 디젤에게 조르듯이 말했다.
〈찌르, 필요.〉
〈여기선 마법 못 써. 나중에 줄 테니까 계속 숨어 있어.〉
그렇게 생각을 전달하며 아르를 집어넣으려 하자, 정령이 손을 콱 깨물더니 품속으로 들어갔다.
[에.... 그러니까. 이것은 파는 물품은 아니옵고....]
"아까 목록에 있는 건 전부 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분명 그랬지만 말입죠....]
"적어도 무슨 물건인지 설명이라도 해 주시죠."
[그것이... 이것은 아주 특별한 물건인데....]
퍼즈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로봇의 뒤에서 낯익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칸트라의 여섯 번째 어금니. 전설적인 장인 마그누스가 만든 아티팩트야. 지금 내가 거래 중인 물건이기도 하고."
그녀는 지난번 편의점 작업에서 전차를 해체하던 쾌활한 여자였다.
"디젤, 맞지?"
"그쪽은?"
무미건조한 디젤의 답에 여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제대로 못 했었네. 나는 리틀 시스터. '시스'라고 불러도 돼. 전에 봐서 알겠지만 해커이자 테커야."
해커는 말 그대로 해킹을 하는 전문가이고, 테커는 여러 복잡한 전투용 기계들을 다루는 이들이었다.
두 포지션 다 입문하기는 상대적으로 쉽지만 마스터하기에는 어려운 직군에 속했다.
그런데 둘을 겸업하다니.
'둘 다 실력이 어정쩡하거나, 아니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스페셜리스트라거나.
이 여자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데뷔하자마자 벌써 아티팩트에 관심을 두는 거야?"
"그래 봤자 금액 때문에 못 살 것 같은데."
디젤의 말에 시스가 흐음, 하며 턱을 괴더니 말했다.
"좋아. 내가 선물로 줄게."
[예, 예, 예? 리틀 시스터님! 그건 계약과 다른....]
"가만히 있어, 퍼즈.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뚜벅, 뚜벅.
그녀가 디젤 쪽으로 걸어왔다.
"당연히 그냥 준다는 건 아니고."
"...."
이내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더니, 작게 속삭였다.
"그쪽 품 안에 있는 정령, 조금 흥미로워서 말이야."
그러고는 디젤의 가슴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아르를 쳐다보았다.
'아르가 보이는 건가?'
정령이 마음먹고 몸을 숨긴다면 계약한 사람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말이다.
생각지 못했던 정령 이야기에 디젤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전계 정령에 관심이 좀 많아서."
아르를 소환한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전계 정령의 존재는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밝혀낼 게 많은 불가사의한 존재였기에 많은 곳에서 눈독 들이고 있었다.
"안심해. 해치려는 건 아니니까."
"...."
"자세한 얘기는 밑에 가서 하는 게 어때?"
시스가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눈짓했다.
"VIP 레벨에서 말이야."
* * *
'장관이 따로 없네.'
디젤은 투명한 엘리베이터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하대청의 일정 층 이하에 있는 'VIP 레벨'은 높은 수준을 갖춘 고위 착귀갑사들만 이용할 수 있는 전용 시설이었다.
그래서인지 위층과는 생김새부터가 달랐다.
해변처럼 파도가 들이치는 곳, 천장에 별들이 반짝이는 곳, 용암이 분수처럼 뿜어지는 곳....
무엇에 쓰이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겠는 층들이 연달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불조차 켜지지 않은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리틀 시스터 님.]
시스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발을 내딛자,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조명이 들어왔다.
"여기는 '화이트 플로어'. 내 개인 층이야. 특별히 전계와의 감응력이 높도록 설계된 공간이지."
개인 층이라....
시스의 말대로 이곳은 조금 특별해 보였다.
〈여기, 편안하다.〉
갑자기 아르가 디젤의 품에서 벗어나 널찍한 공중을 빙글빙글 돌았다.
"오.... 굉장히 활발한 정령인데."
시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아르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디젤이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질질 끄는 건 싫다 이거야? 좋아."
시스가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기자 눈앞에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마치 갑옷을 두른 고래와 같은 생명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 아이는 '스켈융어'라 부르는 아이야."
아직 살아 있는 건지, 호흡할 때마다 거대한 몸체가 들썩인다.
"네가 데리고 다니는 귀여운 정령과 같은 전계 정령이지."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해커와의 거래
저게 아르와 같은 전계 정령이라니.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르처럼 간헐적으로 회백색 노이즈가 튀고 있었다.
시스는 누워 있는 정령 쪽으로 다가가 단단해 보이는 갑옷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정령은 내가 어느 기업 실험실에서 구해 낸 정령이야. 그러니까 지금은 계약 상태가 아닌 자유 정령이라 할 수 있겠지."
"자유 정령.... 그런데도 전계로 돌아가지 않았네."
디젤의 말에 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이 아이를 가둬놓고 있는 게 아니야. 얘는 일부러 자기 자신을 현실계에 구속하고 있어. 전계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듯이."
"왜지?"
그녀가 뒤를 돌아 디젤을 쳐다보았다.
"그걸 알아내고 싶어. 네 정령을 통해서."
이전과는 다른 사뭇 진지한 표정이다.
"내 부탁은 간단해. 네가 데리고 다니는 정령이 이 아이와 대화를 나누어 봤으면 좋겠어."
디젤이 정령을 지그시 쳐다보자, 시스가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직접 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난 계약한 정령이 없어서 말이야. 정령 감응력이 좋은 편은 아니거든. 정령을 계약으로 부린다는 거에 조금 부정적이기도 하고. 아, 너한테 뭐라 하는 건 아니야. 적어도 네 정령은 행복해 보이니까."
그녀가 아르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세상에 전계 정령이 그리 흔하진 않잖아. 그나마 해커들이 다루는데, 해커 놈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문제가 있는 놈들이거든. 그놈들 말고 전계 정령을 다루는 포지션은 너 같이 정령 교감력이 높으면서 전계에 관심이 많은 소수의 마법사뿐인데, 이 인간들은 정신이 멀쩡한 해커보다 더 찾기 어렵지."
시스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어떻게든 이 정령을 구하고 싶어."
디젤은 그녀를 보며 뭔가 특이한 인상을 받았다.
황금만능주의가 당연시되는 세상에서 정령을 구하기 위해 선뜻 귀한 물건을 내놓는 해커라니.
예전의 환경운동가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이해하면 될까.
'뭐, 나한텐 아무래도 상관없지.'
중요한 건 시스가 주겠다고 하는 아티팩트였다.
오히려 이런 찝찝하지 않은 종류의 일이라면 몇 번이라도 환영이다.
"그러니까 왜 이 정령이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는지, 그걸 알아내고 싶은 거지?"
"바로 그거야."
단순히 정령과 교감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
하지만 디젤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딜을 해 볼까.'
그런 생각으로 말했다.
"그 대가는?"
"...?"
시스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건 내가 이미 제시한 거로 아는데."
"아니."
그녀와 눈을 마주하던 디젤이 고개를 정령 쪽으로 돌렸다.
"이 정령을 구속에서 벗어나게 했을 때의 대가 말이야."
"뭐...?"
그 말에 시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벌써 거기까지 생각한다고? 대단한 자신감인데."
"...."
"좋아. 만약 정령을 해방해 주기까지 한다면 추가로 선물 하나 더 줄게."
제시가 너무 애매한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시스가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말했다.
"섭섭하진 않을 거야. 장담해."
"그렇다면야."
디젤이 속으로 아르를 불렀다.
〈아르, 어때?〉
〈으음....〉
아르는 대답을 망설이더니 스켈융어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적대적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협조적이지도 않다.〉
〈잠이라도 자는 거야?〉
〈정령은 잠을 자지 않음. 다만 움직일 의지가 없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대화 정도는 가능하다는 뜻이다.
〈네가 직접 말을 걸 순 없겠어?〉
디젤의 말에 아르가 스켈융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으으으음....〉
하지만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돌아왔다.
〈기분 나쁘다.〉
그러더니 주인의 품 안으로 쏙 안겼다.
'내가 직접 해 봐야겠네.'
고래에게 가까이 다가간 디젤이 손을 올려놓으며 눈을 슬며시 감았다.
그러자 정령에게 맴도는 어떤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건....'
언어로 표현하자면 무엇이 적합할까.
아마 '감정'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스켈융어의 심정에 동화될수록 그런 감정이 점점 강해졌다.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 같기도 했고.
해 질 녘 산등성이를 비추는 주황빛 노을 같기도 했으며.
한겨울 바깥에서 돌아온 사람에게서 나는 추운 냄새 같기도 했다.
'왜 정령한테서 이런 기억이....'
〈그건 정령의 것이 아니다.〉
정령의 것이 아니라니.
디젤은 제 생각을 읽은 아르의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래, 이건 내가 가진 기억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령의 감정에 동화되어 떠오른 기억.
그렇다면 이 정령은 지금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때 평화로웠던 어떤 과거를.
'그게 무슨 뜻일까.'
정령의 심상 속으로 조금 더 깊숙이 들어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몰아쳤다.
고통, 상실, 그리고 후회.
마치 깊은 심해를 마주한 듯한 어둑한 감정이다.
그 소용돌이치는 곳으로 한 발짝 걸음을 내디디자, 격렬한 감정이 파도처럼 디젤을 덮쳤다.
아주 살짝 다가갔을 뿐인데도 이 정도라니.
디젤은 여기서 더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걸 감지하고는 심적 동화를 멈췄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어느새 디젤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음.... 그렇군.'
이제 정령이 왜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디젤이 나지막이 말했다.
"혹시 그 실험실에 말이야."
"응?"
"이 정령 말고 다른 정령은 없었어?"
그에 시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내가 갔을 땐 이 아이뿐이었어."
그 정도 대답이면 충분하다.
디젤이 정령을 바라보며 결론을 내렸다.
"이 정령은 지금 참회하는 중이야."
"참회...?"
"아마 처음에는 애도였겠지."
손을 뻗어 갑옷과도 같은 정령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얼마나 오래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실험실에는 상당히 많은 정령이 있었어. 그리고 이 아이를 빼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고."
무수한 미련이 느껴진다.
정령이라는 존재에도 가족 같은 이들이 있는 걸까.
스켈융어는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잠시 손 내밀어 보겠어?"
디젤이 정령에게 손을 맞댄 채로 다른 쪽 손을 시스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살며시 붙잡았다.
"이러면 너도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야."
"...."
정령에 대한 감응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심적 전이'.
정령이 품는 감정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아...."
스켈융어가 품은 깊은 비탄을 직접 마주하자.
시스는 저도 모르게 작은 탄식을 뱉었다.
"아마 이 참회가 끝나야 속박을 풀 것 같아."
"그렇구나...."
"미안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
그렇게 말하고는 시스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시스에게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말투가 들려왔다.
"불쌍한 아이야."
그녀의 눈가에서 떨어진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내 이름은 안드레이나 아페르기스."
소중한 것을 대하듯 정령의 갑옷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내 진명을 걸고 약속하마."
이어 눈빛 하나 바뀌지 않고서 섬뜩한 말을 던졌다.
"그곳에 있던 놈들.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찾아, 사지를 찢어 놓겠다고."
옆에서 디젤이 듣고 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진명을 밝히며 다진 맹세.
그게 허튼 것이 아님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전계 정령이 갖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이름을 걸 정도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디젤은 잠시 둘만의 시간을 위해 자리를 피해 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려는 순간.
리틀 시스터가 그를 불러 세웠다.
"원래 조건과는 다르지만...."
그녀가 휙, 손짓하자 어디선가 동그란 드론이 나타나더니 허공에 카드를 한 장 인쇄하기 시작했다.
"받아. 이건 내 작은 성의야."
그걸 집어 들고는 디젤에게 건넨다.
"퍼즈한테 이걸 보여 주면 카탈로그에 있는 어떤 물건이든 공짜로 하나 내 줄 거야."
상점 지정 선택권이란 건가.
조금 전 가격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던 물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티팩트도 미리 말해 뒀으니 알아서 잘 찾아가."
"고마워. 잘 받아 둘게."
"디젤이라고 했지?"
그녀가 마지막으로 디젤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에 또 보자."
"그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디젤은 뒤를 돌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후....'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작게 되뇌었다.
'저 여자 앞에서는 절대 정령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되겠어.'
그런 주인의 생각을 읽은 걸까.
품에 있던 아르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주인, 아르를 함부로 다루려고 했나?〉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콱...!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는 동안, 아르는 디젤의 손을 여러 번 깨물었다.
* * *
지하대청에서는 의외의 소득이 있었다.
시스에게서 받은 '칸트라의 여섯 번째 어금니'는 무척 훌륭한 아티팩트였다.
활성화하면 엄청난 각성 효과를 얻게 되는 치아형 의체.
마치 각성형 약물을 복용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사고할 수 있게 만들어 주지만, 부작용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단점이 있다면 사용 횟수가 정해져 있다는 점이었다.
'아주 중요한 순간에만 써야겠어.'
물건을 받은 디젤은 곧바로 간이 수술실에서 아티팩트를 이식했다.
새롭게 대체된 은빛 어금니는 원래부터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러면서 전계에 접속할 수 있도록 '포트 플러그' 시술을 받았다.
아무래도 뇌를 건드리는 작업이라 거부감이 조금 들긴 했지만, 언제까지 스마트글라스를 쓰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세상에서 포트 플러그가 없는 사람은 어떠한 신념을 가진 이들이거나, 아니면 선천적으로 전자 의체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아주 소수의 사람뿐이었다.
어린아이부터 반백이 된 노인까지, 심지어 거리를 떠도는 걸인들의 귀 아래에도 포트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디젤은 시스에게서 받은 티켓으로 마법 방호 기능이 있는 신상 택티컬 두루마기까지 구매한 뒤에 지하대청에서의 쇼핑을 마쳤다.
그렇게 바깥으로 나오자, 컴컴한 밤하늘에서 중금속 섞인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디젤은 흠뻑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택시를 잡으며 다음 단계를 구상했다.
'우선 거처를 구하는 게 제일 시급해.'
계속해서 모텔에서 묵을 수는 없었다.
아르를 먹이느라 들어가는 전기 때문이다.
곧 어떤 남자가 묵었다 하면 엄청난 전기세 폭탄이 떨어진다는 소문이 숙박업계에서 돌 테다.
'결국 또 돈이군.'
편안하게 쉴 틈은 없다.
디젤은 제 앞에서 멈춰 선 택시에 올라타 13-5 섹터의 이름 없는 만둣집으로 향했다.
* * *
"좋은 자세야. 쉬는 건 죽어서 해도 된다고."
김 사장이 껄껄 웃으며 디젤에게 브리핑용 데이터 칩을 건넸다.
그걸 받아 들고는 귀 아래에 새롭게 생긴 구멍에 집어넣자, 눈앞에 여러 데이터가 떠올랐다.
"빨리 끝나지만 보수가 자잘한 작업을 원하나? 아니면 오래 걸리지만 보수가 큰 작업을 원하나?"
"빠르지만 보수가 크면 좋겠는데요."
"화끈한 걸 원하는구먼. 그러기엔 이만한 게 없지."
그가 손을 휘휘 젓자, 디젤의 눈앞에 여러 인물의 증명사진들이 나타났다.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들이야. 죽이거나 생포하거나 보수는 비슷하지. 얼마만큼 위험한 놈을 얼마만큼 빠르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들어오는 수입의 자릿수가 달라지는 작업이라네."
드워프가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전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놈들이니 처리할 때 드는 찝찝함도 한결 덜할 걸세."
디젤은 사진을 넘기며 타깃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인신공양제를 올리려 사람들을 납치한 광신도.
디지털 마약 실험을 위해 가출 청소년을 이용한 마약쟁이.
해킹으로 몸을 마비시킨 뒤 산채로 인육 요리를 해 먹은 사이코....
떠오르는 목록들을 보자 이제야 본격적으로 착귀갑사라는 세계에 발을 들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회의용 냉장고
"자, 잠깐!"
디젤이 총구를 들이밀자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두 배! 그 새끼들이 내건 보수의 두 배를 줄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러자 남자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그러면 세 배. 아, 아니 다섯! 다섯 배까지 주지! 지금 당장 줄 수 있어!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중얼중얼 헛소리를 지껄이던 남자는 갑자기 품속에서 공업용 레이저 칼날을 꺼냈다.
"뒈져! 이 개 같은 새끼야!"
절단기의 고출력 광선이 불꽃을 튀기며 허공을 가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디젤의 자동 리볼버가 불을 뿜었다.
놈의 미간에 손톱만 한 구멍이 뚫리며 악의 가득한 눈동자가 힘을 잃는다.
짧은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한 사내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후...."
수십 명의 아동을 납치 후 인신매매한 인간.
디젤은 쓰레기를 치운 것뿐이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의 집행기관을 대신해서.
그렇게 생각하며 상념을 털었다.
이 세상에서의 현상금 제도란 그런 의미였다.
범죄자들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자, 이 나라는 결국 형벌의 집행권까지도 민간에 떠넘겼다.
'미친 세상이야.'
그가 혀를 내두른 것은 현상금이라는 제도 때문이 아니었다.
현상금을 걸어야 할 정도로 극악무도한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에 대한 비관이었다.
벌써 몇 명째인지.
디젤은 지난 몇 주 동안 도시의 뒷골목을 청소하고 다녔다.
대략 두 자릿수 이후부터는 의식적으로 숫자 세는 걸 그만두었다.
[작업 끝났나?]
귓가에서 김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좋아. 그럼 지금 바로 이쪽으로 올 수 있겠는가?]
"아직 시체 회수 전입니다."
[그냥 오게. 이번 건은 그냥 입금해 줄 테니.]
드워프가 조금은 진지한 톤이 되어 말을 이었다.
[자네가 찾던 '큰 작업'이 들어왔어.]
착귀갑사에게 현상금 걸린 범죄자를 사냥하는 일은 불량식품을 먹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 맛도 꽤 먹을 만하지만, 장기적인 건강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입의 효율만 따지고 본다면 현상금 사냥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작업만으로는 결국 디젤이 원하는 그림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의 목적은 이 도시에 눌러앉아 대충 먹고 살려던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 가장 최악의 경우는 디젤에게 '바운티 헌터'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었다.
적당히 수배범들만 노리며 살아가는 착귀갑사들을 부르는, 약간의 비하 섞인 명칭이다.
소문과 명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뒷세계에서 그런 이름표가 달리는 건 무척 치명적인 일이었다.
[올 텐가?]
"예."
쓰러져 있는 시체를 지나 밖으로 나선다.
방금까지 소란이 벌어졌던 방에는 고요한 침묵만 남았다.
* * *
이제는 익숙해진 이름 없는 만둣집.
디젤은 망치로 인공육을 두드리는 왕보를 지나 항상 들어가던 냉장고의 문고리를 잡았다.
"이번엔 이쪽이네."
반대편 냉장고 문이 벌컥 열리며 김 사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를 따라 새로운 냉장고로 들어서자 가운데에 커다란 탁자가 있는 넓은 장소가 나타났다.
"급하게 불러서 미안하네. 갑자기 원래 인원이 빠져서 말이야."
속된 말로 땜빵이라 이건가.
썩 기분 좋은 시작은 아니었다.
디젤에게서 그런 기운을 눈치챈 김 사장이 말을 덧붙였다.
"자네도 얼마간 경험해 봐서 알겠지만, 이런 큰 작업에 신입 착귀갑사를 받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어. 다들 증명된 갑사들만 찾으니까. 어떻게 보면 이번엔 운이 아주 좋은 경우야."
경력직을 우대하는 이 바닥의 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목숨이 걸린 작업을 하는데 제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신입과 함께 뛰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
"어떤 작업입니까?"
디젤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김 사장이 브리핑 칩을 건넸다.
이어 냉장고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려 보게. 곧...."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한 명은 방금 막 운동이라도 하고 온 듯 딱 붙는 주황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성이었다.
다른 한 명은 키가 2미터는 되어 보이는 남성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몸의 오른쪽 부분만이 전부 크롬으로 도금된 의체였다.
냉장고 안이 어둑어둑했기에 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다들 표정이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급하게 구했다는 게 이 남자야?"
트레이닝복의 여성이 짜증 섞인 말을 툭 던졌다.
이어 장신의 남성이 허리를 슬쩍 숙여 디젤을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듯한 행동들에 김 사장이 황급히 말했다.
"워, 왜들 이래. 우리 문명인답게 서로 인사라는 것부터 좀 하고 시작하자고."
"인사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최대한 빨리 끝내. 이 꺽다리 새끼랑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역겨우니까."
"그건 조금 상처가 되는 걸, 칼리."
남성이 난데없이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살덩이로 된 그의 왼쪽 어깨가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저건 또 뭐야.'
마치 액체 상태였던 무언가가 고체로 바뀌는 느낌.
점점 형상을 갖춰가는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머리'였다.
그렇게 남자에게 생겨난 또 다른 머리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상처가 되네. 그렇지, 조?"
"누가 밖으로 나오랬어, 잘?"
두 개의 머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미친...."
그에 칼리라 불린 여자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 새끼들은 생긴 것도 기분 나쁜데 작업할 때마다 옆에서 계속 조잘조잘...."
"나 그 별명 싫어하는데."
"별명이 아니라 그게 네 이름이야, 이 등신아."
"이름이라니, 나는 '조'인데."
"근데, 내 이름이 '잘'이긴 해."
"진정들 좀 하게. 뉴 페이스 앞에서 이러기야?"
김 사장이 작달막한 두 손을 휘휘 저어가며 착귀갑사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뉴 페이스고 나발이고 원래 나 이 멀대 새끼랑 같이 작업 안 하는 거 몰라? 왜 팀을 이따위로 꾸린 거야?"
"그보다 말이야. 저 신입, 검증은 된 거야?"
"맞아, 맞아, 신입은 검증이 필요하긴 해."
"어허, 이 사람들이. 다들 알고 온 거 아닌가. 그만큼 급한 작업이라는 거. 그래서 보수도 더 받는 거고."
픽서의 말에 냉장고에 침묵이 흘렀다.
사전에 이런 상황을 감수할 만큼의 보수가 타협되긴 한 건지, 다들 긍정의 의미로 보이는 침묵을 택하고 있었다.
오직 한 명, 디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난 빠지겠어."
"뭐라고?"
그의 폭탄 같은 선언에 김 사장이 놀란 표정이 되어 디젤을 돌아보았다.
다른 세 얼굴 또한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뭔 소리야, 이건 또."
"음.... 놀라운데."
"흠.... 놀랍긴 해."
이건 방금 김 사장에게서 받은 브리핑 칩을 훑어보고 내린 일종의 수였다.
'이 작업의 핵심은 마법사야.'
마법사가, 그중에서도 직접 주문을 투사하는 스펠캐스터가 꼭 필요한 작업.
하지만 팀원이 급하게 꾸려진 상태.
디젤이 판단하기에 만약 자신이 빠진다면 이번 작업은 아예 성립되지 않았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김 사장이 그런 디젤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다른 이들을 보며 말했다.
"이 친구가 빠지면 이번 작업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지."
"아니, 김 사장. 그게 뭔 말이야?"
"그냥 다른 스펠캐스터 구하면 되잖아."
"구하면 되긴 해."
"마법사 구하는 게 어디 역 앞에서 택시 잡듯 되는 줄 아나? 다들 알면서 왜 이래? 게다가 이 친구는 그냥 풋내기 마법사가 아니야."
드워프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무려 게일 컨소시엄의 AT-71을 혼자 무력화한 스펠캐스터라고."
"...."
지난 편의점에서 상대했던 메가 코퍼레이션의 다족보행전차, AT-71.
이미 조금은 소문이 퍼졌던 건지, 디젤을 쳐다보는 모두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그게 이 남자였어...?"
"으음,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으음, 안 믿기긴 해."
디젤이 꺼낸 한마디에 분위기가 바뀌었고, 김 사장의 첨언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확실히 쐐기를 박을 차례였다.
"수수료 뗀 금액의 절반. 못 주면 난 빠질 거야."
디젤의 말에 여성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뭐? 절반?"
"난 상관없어."
"나도 상관없긴 해."
얼굴이 두 개 달린 남자는 받는 금액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여성은 끝까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하.... 그래."
그러더니 디젤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칼리야. 밀리 메이지고. 이름이 뭐라고 했지?"
포지션을 듣자 아까부터 마력이 정갈하게 흐르는 그녀의 몸이 이해되었다.
밀리 메이지는 강화 마법으로 제 몸의 힘을 증강하며 교전을 벌이는 최전선 전투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디젤."
"좋아, 디젤. 어디 큰소리친 만큼 실력도 있는지 지켜보겠어."
묘한 기 싸움이 흐르는 악수를 마친다.
이어 옆에서 둘의 인사를 멀뚱멀뚱 지켜보던 멀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저 새끼들은 조랑 잘이야."
"어...."
"원래 몸인 조 새끼는 거너고, 그 옆에 달린 대가리 잘 새끼는 마법 사용자야."
"마법 사용자라니, 얘한테도 '테크 매지션'이라는 포지션 이름이 있는데."
"왜 그걸 네가 말해. 내가 말해야지, 조."
"너 대신 칼리가 말했으니 그러지, 잘."
"으악! 제발 닥쳐!"
칼리는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다시 디젤을 쳐다보았다.
"내가 이번 작업 리더야. 자세한 내용은 칩을 보면 알 테고, 궁금한 거 있으면 여기로 연락해."
그녀는 플라스틱으로 된 명함을 건네더니 곧장 냉장고 밖으로 향했다.
"어, 칼리. 같이 가."
"어, 같이 가. 칼리."
"따라오면 죽여 버린다."
잠시 시끌벅적한 퇴장 이후.
김 사장이 디젤에게 다가와 그의 등을 툭툭 쳤다.
"막상 작업 들어가면 괜찮을 걸세. 둘, 아니 셋 다 실력만큼은 알아주는 갑사들이니까."
* * *
디젤은 현상금 사냥으로 모은 돈으로 지낼 곳부터 마련했다.
어떻게 된 게 백 년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땅의 거주 형태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곰팡이 잔뜩 낀 반지하, 혹은 제대로 된 냉난방시설도 없는 옥탑방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디젤 또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뭐, 잠시 머물 곳이니....'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옥탑방 문을 열었다.
그나마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장소였기에 밖에서처럼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었다.
경험상 지역의 소득 수준이 올라갈수록 치안 수준 또한 올라갔다.
디젤은 그간 모은 돈을 짜내고 짜내서 겨우 부촌 끝자락에 위치한 허름한 옥탑방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창밖으로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부자들의 별천지인 화려한 고층 빌딩들이 보였다.
'경치 하나는 좋네.'
디젤이 외투를 벗자 품 안에 있던 아르가 집 안을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너무 정들이지 마. 이사 갈 거니까."
〈아르도 여기가 별로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정령은 이제 전용석이 되어 버린 콘센트 쪽으로 다가가더니, 물을 마시는 것처럼 혓바닥으로 전기를 핥았다.
"버는 돈의 절반쯤은 너한테 들어가는 거 같은데."
〈주인, 과장이 심하다.〉
디젤은 잠시 의자에 앉아 아르가 배를 채우기를 기다렸다.
"자, 밥 먹었으면 일해야지."
책상 위를 툭툭 치며 아르를 불렀다.
그러자 정령이 쪼르르 날아와 그의 앞에 사뿐히 앉았다.
포트 플러그 시술로 전계에 접속할 수 있게 되면서 디젤은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대로라면 전계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컴퓨터와 같은 매개체가 필요했다.
거기다 해킹 같은 전문적인 활동을 하려면 일반 컴퓨터가 아니라 값비싼 슈퍼컴퓨터, '사이버덱'이라는 물건이 있어야 했다.
〈주인, 전계 접속 시도.〉
하지만 디젤의 경우는 달랐다.
〈매개는... 아르.〉
그는 아르를 통해 전계에 접속할 수 있었다.
혹시 다른 이들도 가능한 건가 싶어 정보를 뒤져보았지만, 전계 정령을 사이버덱처럼 운용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작하는 것은 디젤 본인이 가진 능력이었다.
'혹시 해킹 또한 초현실의 범주에 들어가는 거라면....'
그가 지닌 '초현실 각성'이라는 말도 안 되는 힘.
모든 초현실을 보고, 다룰 수 있는 능력.
만약 전계에서의 해킹 또한 초현실이라면, 그 힘 또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테였다.
다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다.
기적이나 마법 같은 다른 힘은 처음부터 자연스레 사용할 수 있었지만, 해킹 쪽은 그럴 수가 없었으니.
'어쩌면 아직 전계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디젤이 의자에 눕듯이 기대며 눈을 감았다.
〈접속합니다.〉
이어 아르와 함께 무한한 정보의 공간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었다.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퍼리 랜드 (1)
착귀갑사의 세계에는 여러 경구가 있었다.
작은 벌레 조심해라.
해커한테 미움 사지 마라.
아이와 노인한테는 깝치지 마라, 같은 것들이다.
그중에서 다음의 것이 가장 유명했다.
'싸움은 최대한 피해라.'
어쩌면 무력이 가장 확실한 해결 수단인 이 뒷세계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경구일지도 모른다.
특히 생명 경시가 팽배한 오늘날의 감수성과도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저 말은 생명이나 인권 따위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경제적 논리로부터 나온 말이었다.
이 세계에서 싸움이란 곧 돈이었다.
총알과 폭탄을 퍼붓는 것도 돈, 마법과 기적을 일으키는 것도 돈, 해킹이나 드론을 지원하는 것도 전부 돈이다.
그러니 백만 큐빗어치 작업을 하면서 천만 큐빗어치 화력을 쏟는 건 제 목에 밧줄을 감는 꼴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번 작업은 꽤 이례적이었다.
애초에 브리핑에서부터 엄청난 화력이 필요한 전투를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퍼리 랜드라....'
번쩍이는 네온사인 아래로 낯선 모습을 한 인간들이 지나갔다.
고양이, 강아지 같은 친숙한 종부터 버펄로나 코끼리 같은 웬만하면 보기 힘든 거대 동물들까지.
과거 이태원이라 불리던 이곳 3-10A 섹터는 수인(獸人)들이 자주 찾는 동네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섹터 전체에 '퍼리 랜드'라는 드넓은 수인 전용 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는?"
어두운 뒷골목에서 칼리가 물었다.
"나는 됐어."
그렇게 대답한 조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왼쪽 어깨에서 잘의 머리가 튀어 나왔다.
"나는 아직이긴 해."
그러자 칼리가 정색을 하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미친 새끼야. 대가리 안 집어넣어?"
그녀의 역정에 잘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스르륵 사라졌다.
"잠입 도중에 튀어나오면 그땐 잘라 버릴 거야."
칼리가 험악한 말과 함께 작은 큐브를 하나씩 건넸다.
"충분히 씹은 다음에 불어."
디젤은 그녀가 내민 '퍼리 껌'이라 불리는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풍선껌처럼 크게 분 다음 마스크 팩 쓰듯 뒤집어쓰면 마치 수인이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종의 정신계 마법 용품이었다.
"음, 음, 음.... 맛은 없군."
[나도 먹어 보고 싶긴 해.]
조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중얼거리자, 잘이 폐쇄 채널로 말했다.
그렇게 풍선껌을 얼굴에 뒤집어쓴 셋은 순식간에 수인으로 변했다.
조는 기린, 칼리는 붉은여우, 그리고 디젤은 회색늑대였다.
"알겠지만 이 껌은 촉각까진 못 속이니까 누가 니네 얼굴 못 만지게 해. 뭐, 여기서 우리만 이걸 쓴 건 아닐 테지만."
퍼리 랜드 입구에는 '순수 수인만 출입 가능'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으나, 그에 대한 검사는 그다지 철저하지 않았다.
저 문구는 순전히 마케팅용이었다.
사람들에게 금지된 무언가를 한다는 쾌감을 주기 위한 목적의.
"명심해. 작업 시작 전까지는 절대 시선 끌지 마."
칼리가 특별히 조를 쳐다보며 주의를 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퍼리 랜드 입구는 고릴라 수인과 도베르만 수인이 지키고 서 있었다.
둘 다 겉모습은 복슬복슬한 털복숭이였지만, 그들의 몸에는 꽤 높은 등급의 의체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세 착귀갑사들이 다가가자 가드가 대충 얼굴을 한 번 스윽 훑어보더니 순순히 길을 비켜 주었다.
퍼리 랜드 안은 무슨 동물원에 온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동물의 모습을 한 수인들부터 시작해서, 그저 머리 위로 귀가 튀어 나왔을 뿐 나머지는 인간과 거의 흡사한 모습의 수인까지.
여러 다양한 짐승 모습을 한 이들이 독특한 목소리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뒤이어 눈에 들어 온 것은 엄청나게 높은 천장이었다.
왜 저렇게 높게 지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 찰나.
디젤의 앞으로 거대한 초식 공룡 수인이 쿵, 쿵,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미친 세상이라니까.'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들리는 클럽 형태의 라운지에 도착하자, 착귀갑사들이 자연스럽게 두 갈래로 흩어졌다.
칼리와 디젤은 라운지 옆에 딸린 개방형 칵테일 바 안으로 들어갔고, 조는 홀로 '열대우림 구역'으로 이동했다.
[위치 도착하면 보고해.]
[좀 외로운걸.]
[외롭긴 해.]
[닥쳐. 폐쇄 채널로 잡담하지 마.]
칼리가 통신망에 윽박지르더니 바텐더에게 술을 한 잔 시켰다.
이어 주변을 경계하듯 살펴보다 디젤에게 물었다.
"이번이 처음이야?"
"여럿이서 하는 건."
그 대답에 칼리가 훗, 하는 웃음을 흘렸다.
"이딴 더러운 일이 뭐가 좋다고 자꾸 신입이 기어들어 오는 건지."
"자아 성찰인가?"
"뭐, 그럴지도."
곧 주문한 술이 나오자 잔을 홀짝이더니 물었다.
"그 기계를 혼자 상대했다는 거, 정말이야?"
기계라.
메가 코프의 다족보행전차를 말하는 걸 테다.
"그러긴 했지."
"말이 안 되는데. 어떻게 마법사 한 명이...."
그녀는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조용히 덧붙였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AT-71은 과거에 게일 컨소시엄이 스펠테크를 상대하려고 만든 전차야. 방산 기술로 압도적 세계 1위에 오른 메가 코프가, 마법 공학으로 자기 턱밑까지 치고 올라 온 또 다른 메가 코프를 상대하려 특별히 개발한 병기라고. 뭔 말인지 이해돼?"
한마디로 그때 만난 다족보행전차는 대마법병기라는 뜻이다.
이 사실은 디젤도 알고 있었다.
그날 AT-71이 편의점을 향해 온 것은 디젤에게서 뿜어 나온 엄청난 마법 출력을 최우선 위협으로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일반적인 전차였다면 그 정도까지 예민하게 반응하지는 않았을 테다.
"운이 좋았을 뿐이야."
절반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당시 전차에 탑재된 무기가 적절하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라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놈이 제대로 된 대인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면 아마 싸움을 시도할 기회조차 없었을 테다.
"뭐, 단순한 운이었는지는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칼리가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자, 조에게서 통신이 왔다.
[칼리, 나 도착했어.]
[우리가 도착한 거긴 해.]
[조용히 대기하고 있어. 혼잣말 중얼거리다가 눈에 띄지 말고.]
그녀는 지시를 내리고는 미리 고용한 외부 해커와 통신했다.
그 틈에 디젤이 아르에게 말을 걸었다.
〈아르, 혹시 모르니까 이 건물 해킹 가능한지 봐 둬.〉
〈아르는 이미 움직이고 있다.〉
잠시 후 칼리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퍼엉!
저 멀리서 커다란 폭발음이 울렸다.
위치는 대서양 구역.
조가 있는 열대우림 구역 반대편에 위치한 곳이다.
"꺄아악...!"
"무, 무슨 일이야?"
"가스 폭발인가?"
비명과 함께 건물 내부의 조명이 모두 나간다.
하지만 채 1초도 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멀쩡하게 복구되었다.
[1차 예비 전력 활성화 확인.]
칼리가 통신으로 보고하자 이번에는 조와 잘이 말했다.
[간다?]
[간다!]
열대우림 구역에서 들리는 콰앙! 하는 폭발음과 함께, 건물에 전기가 다시 나갔다.
이번 정전은 이전처럼 쉽게 복구되지 않았다.
"도망쳐!"
"테러다! 테러야!"
"아무것도 안 보여!"
순식간에 퍼리 랜드는 혼돈에 빠졌다.
사방에서 울리는 여러 동물의 다양한 울음소리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렇게 한차례 의도된 혼란이 지난 뒤.
곧 어두컴컴한 라운지에는 디젤과 칼리만이 남았다.
외부 해커에게 무언가 전달받은 칼리가 폐쇄 채널에 보고했다.
[2차 예비 전력 구동까지 1분.]
그녀의 눈동자가 주황빛으로 반짝였다.
밀리 메이지들에게 나타나는 마력 반동 현상이다.
칼리는 허공에 기다란 잔상을 남기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목적지였던 어느 경비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절도 있게 잠겨 있는 문손잡이를 부수고는 안으로 들어간다.
이어 어리둥절해하는 포메라니안 수인 경비원의 목덜미를 툭 쳐서 기절시켰다.
[위치 도착. 남은 시간 57초.]
이번엔 디젤이 움직였다.
그는 눈을 감고 마력의 흐름에 집중했다.
한기가 담긴 손으로 옆에 있던 벽을 짚는다.
그러자 새하얀 서리가 콘크리트를 타고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갔다.
디젤이 마법식을 끝맺자, 쩌저적! 복도에서 얼음이 튀어나와 외부 통로를 막아 버렸다.
빙상장벽.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부술 수 없는 단단한 얼음.
이제 무장한 가드들이 라운지로 들어오려면 저 얼음벽을 깨부숴야 했다.
[공간 격리시켰다.]
[확인했어.]
이걸로 한동안 퍼리 랜드의 라운지는 세 착귀갑사 통제하에 있었다.
[조, 어디야?]
[4초면 돼. 아니, 2초. 아니, 도착.]
조가 또 다른 곳에 있는 경비실에 도착하자, 칼리가 신호를 보냈다.
[셋에 눌러. 하나, 둘, 셋.]
두 착귀갑사가 서로 다른 경비실에 있는 버튼을 동시에 눌렀다.
그러자 퍼리 랜드의 넓은 라운지 바닥에서 거대한 원통형 구조물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얼음벽 나쁘지 않은데. 시간은 제대로 벌리겠어."
어느새 디젤 옆에 도착한 칼리는 내려오면서 빙상장벽까지 확인하고 온 듯했다.
곧 2차 예비 전력이 들어왔는지, 라운지에 잔잔한 전등이 들어왔다.
칼리가 허리춤에 찬 원형 방패를 꺼내 우산처럼 펼치며 말했다.
"준비해. 이제 시작이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로 올라오던 원통이 우뚝 멈춰 섰다.
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뿜어지더니 앞부분이 툭 떨어져 나왔다.
'저게 바로 그....'
흰 연기가 조금씩 걷히자, 이번 작업의 목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소문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칼리가 긴장했는지 말끝을 살짝 떨었다.
이윽고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뾰족한 흰 털이 촘촘히 박힌 육중한 거체.
으르렁거릴 때마다 조금씩 스치는 날카로운 송곳니.
백웅(白熊) 우르무스라 불리는 아신(亞神)이었다.
'미쳤군.'
힘 그 자체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존재.
굳이 그와 닮은 생물을 꼽자면 북극곰을 들 수 있겠으나, 우선 그 크기부터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백웅의 신장은 일반적인 생명체가 아니라 건축물과 비교해야할 정도였으니.
"어떤 잡놈이냐. 내 잠을 깨우려는 게."
묵직한 성대에서 깊은 저음이 울렸다.
"죄송합니다. 우르무스 님. 긴히 전할 말씀이 있어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수면을 방해했습니다."
칼리가 예의를 갖춰 꾸벅 인사를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폭력적인 반응이다.
"너냐? 이 벌레 새끼."
굵은 목소리와 함께 앞발이 날아온다.
차마 저 거대한 몸체에서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는 속도.
그에 칼리는 눈을 주황빛으로 반짝이며 겨우 공격을 피했다.
"잠시 진정하시고...."
"피해? 하! 어디 그럼 이것도 피해 보거라."
곧바로 엄청난 위력의 공격들이 이어진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으며, 손뼉 치듯 양손을 한 번에, 곧바로 바닥을 잔뜩 긁으며 위로.
공격이 점점 정확해지자, 칼리는 미리 손에 들고 있던 방패로 백웅의 공격을 겨우 흘려 냈다.
"어르신, 잠시 정신 차리시고 제 말을...."
"하하하하! 벌레치고는 나쁘지 않구나!"
우르무스는 아예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결국 칼리가 폐쇄 채널에 도움을 요청했다.
[역시 대화로는 어림도 없겠어. 다음 플랜으로.]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멀리서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날아왔다.
이어 퍼엉! 커다란 폭발이 우르무스의 얼굴 바로 옆에서 터졌다.
"크으으.... 이건 또 무슨 벌레지?"
하지만 백웅은 약간 불쾌한 정도의 반응을 보이더니 본인을 공격한 게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저쪽 멀리서 자신을 조준하는 조와 잘을 발견했다.
"거기 있었구나. 파리 같은 놈."
조가 유탄발사기로 개조된 오른 다리에 탄을 장전하자, 잘이 개조되지 않은 왼손으로 유탄에 마력을 부여했다.
다시 한번 퐁, 소리가 났다.
아까와는 다른 푸른빛 폭발이 공중에서 터진다.
"크으으.... 이 불쾌한 기분.... 마력을 쓰는 벌레였느냐."
백웅이 조와 잘을 바라보며 거대한 노호를 내질렀다.
끔찍한 음파의 진동이 피부를 뚫고 뼛속까지 파고든다.
"온다, 조."
"알아, 잘."
괴수가 쿵, 소리를 내며 네 다리를 땅에 짚었다.
이어 믿기지 않는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여러 발의 유탄이 백웅 앞에 폭발하며 진로를 방해했으나, 그 엄청난 돌진을 막지는 못했다.
"...!"
조의 코앞까지 다가온 아신이 육중한 아가리를 쩍 벌렸다.
그렇게 연약한 목덜미를 물어뜯기 직전.
조가 마력이 담긴 대(對)괴수용 섬광탄을 터트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크흠...! 웬 잔재주냐 이 벌레야!"
[우리도 여기까지야.]
[할 건 다 했긴 해.]
이제 디젤의 차례였다.
그는 아까부터 준비하던 마법식을 거의 마무리했다.
드넓은 라운지 안에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울리며, 공중에서 스파크가 튄다.
그제야 마법의 기운을 느낀 백웅은 인상적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디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 그래도 제대로 된 마법사가 하나 있긴 했구나."
그러더니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과연, 네놈이 나를 깨울 수 있는지 한번 볼까?"
거체의 근육이 꿈틀거린다.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퍼리 랜드 (2)
마법.
마력을 매개로 초현실의 힘을 행하는 일.
과거 일부 학자들은 주장했다.
이 세상의 마법들은 '마법계'라 불리는 계에서 온 힘이라고.
천사의 회복 기도가 야훼의 계인 천계에서 온 힘이고.
나찰의 전투 권법이 붓다의 계인 불계에서 온 힘인 것처럼.
마법 또한 다른 계에서 온 힘일 거라고.
외우주 고래가 태평양 한가운데에 떨어지며 거대한 해일이 전 지구를 덮쳤고.
그게 현실계와 마법계 사이의 틈을 약하게 만들어 마법이 나타난 거라고.
'아니야.'
어떤 계이든 그 세계에서만 작동하는 힘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힘을 빌려오는 행위를 '기적'이라 불렀다.
하지만 마법은 다른 계에서 불러오는 힘이 아니다.
마법이야말로 우리 세계 고유의 힘이자, 우리 계가 가진 기적이었다.
'여기는 대기 중 마나 농도가 너무 낮아.'
퍼리 랜드의 라운지는 마법을 쓰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디젤은 '슈퍼 마나 소다, 150ml'라고 적힌 보충제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하나에 십만 큐빗이 넘어가는 비싼 음료가 벌써 세 캔째.
디젤은 칼리가 백웅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할 동안, 이 넓은 공간에 마법식을 촘촘히 새겨 넣기 시작했다.
저 전설속에서나 나오는 아신을 상대하려면 보통의 마법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렇게 조와 잘이 쏘아 댄 유탄의 폭발이 들릴 즈음에는 식이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아르.〉
〈시뮬레이션합니다. 결과, 성공할 확률 99.9999%〉
〈나머지는 뭐야.〉
〈운명이라 불리는 겁니다.〉
또 어디서 배워 온 말인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백웅이 그를 향해 돌진해 왔다.
"어디 이 몸을 깨워 보거라!"
네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건물 전체가 흔들린다.
혹시 몰라 깔아 두었던 냉기계 속박 마법이 발동되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빨라진 거 같은데.'
움직임을 묶기 위해 시커먼 곰의 발톱 사이로 냉기가 얼어붙는다.
하지만 백웅이 거대한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를 붙잡아두던 얼음은 과자 부서지듯 산산조각 났다.
"좀 더 잘해야 할 게야!"
마치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말투.
그에 디젤은 동요하지 않고 준비한 마법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자 파지직, 작게 튀던 스파크가 점차 커다란 소용돌이로 바뀌었다.
"오호...."
드넓은 라운지 전체에 마력으로 생성된 촘촘한 전기장.
'일렉트릭 필드'가 깔린다.
그 마법에 질주하던 아신의 발걸음이 약간은 늦어졌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아르, 지금.〉
〈가동합니다.〉
디젤의 신호에 전계 정령이 미리 해킹해 둔 3차 예비 발전기를 가동했다.
그러자 발전기가 과부하될 정도로 무섭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곧 이 거대한 시설 전체를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엄청난 전력이, 디젤이 만든 일렉트릭 필드 안으로 쏟아졌다.
[근육하나 움직이지 마세요.]
디젤이 폐쇄 채널을 통해 팀원들에게 경고했다.
"세상에...."
멀리 안전한 곳에서 상황을 살피던 칼리가 작은 감탄사를 뱉었다.
그와 함께 결코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백웅의 거체가 우뚝 멈춰 섰다.
"음.... 이건...."
우르무스가 시커먼 코를 킁킁거리며 말을 이었다.
"조금 위험해 보이는군."
허공에 초고압의 전류가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스쳤다.
전기로 만들어진 용을 마주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웬만한 사람이 저걸 맞으면 형체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백웅은 조심스레 한 발짝 내디뎌 보려 했다.
그러자 공중에 맺혀 있던 전류가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번쩍이더니, 그의 발에 내리꽂혔다.
"으하하하! 이건 좀 따갑구나! 하마터면 깨어날 뻔했어."
이제 일을 마무리 지을 차례였다.
이 작업에 마법사가 필요했던 이유.
그것도 공격 주문을 투사하는 스펠캐스터가 필요했던 것은 바로 저 아신, 백웅을 잠에서 깨우기 위함이었다.
'지금 저게 잠을 자는 상태라니.'
백웅을 잠에서 완전히 깨우려면 그에게 마법으로 '살짝' 충격을 주어야 했다.
신에 버금가는 아신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잠버릇조차 범상치 않나 보다.
"이제 슬슬 일어나셔야지요."
"흐흐흐. 그래, 어디 깨워 보거라."
이 드넓은 라운지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한 명의 생명체.
디젤이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은 차마 닿을 수 없는 위대한 전격계 별.
그곳의 상층대기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마력 플라스마가 그의 손아귀에 쥐어진다.
'기간틱 제트.'
원래의 디젤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하는 마법이었지만, 발전기라는 기계 장치의 도움을 받아 완성해 낼 수 있었다.
'엄청난 힘이야.'
장창처럼 길게 뻗은 마법에서 천 개의 드론이 동시에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그 소음이 낸 진동만으로 온몸이 벌벌 떨린다.
"오.... 그 마법은...."
백웅이 디젤의 손아귀에 담긴 마법을 보고는 옅은 감탄사를 뱉었다.
'이거라면 왠지 저 아신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정도라고 생각되는 고위력의 마법.
디젤이 한쪽 발을 내딛고 번개로 된 창을 투사할 준비를 했다.
"기침하실 시간이십니다. 백웅 어르신."
짧은 한마디와 함께, 아신 전용 알람이 그를 향해 쏘아졌다.
음속에 버금가는 속도로 날아간 마법은 정확히 백웅의 미간을 향했다.
콰아아아아...!
빛이 쏟아진다.
제대로 마주 보았으면 실명했을 정도의 빛이.
그와 함께 벌어진 정전.
퍼리 랜드의 건물뿐 아니라 주변 일대의 모든 전기가 나가버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끔뻑끔뻑 불이 들어왔다.
디젤은 눈을 들어 조준했던 대상을 바라보았다.
설마 정말로 저 괴물을 쓰러트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으며.
하지만.
"이거, 손님이 왔었군."
아신이라 이름 붙은 존재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짙게 깔렸던 먼지가 걷히자, 백웅 우르무스의 모습이 보였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어느새 일반적인 북극곰 수인 정도의 크기가 되어 있었다.
디젤의 기대와는 달리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의 나신에는 작은 흠집 하나 없었다.
"우르무스 님!"
얼음으로 된 빙상장벽이 허물어지자, 바깥에서 무장한 가드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 중 일부는 헐벗은 백웅에게 검은 정장을 가져다 바쳤고, 다른 일부는 착귀갑사들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워...."
하지만 백웅이 옷을 갖춰 입으며 허공에 손을 휘휘 젓자, 총구가 일제히 내려갔다.
"이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날 깨웠다. 그러니 물러들 가."
아신의 말에 가드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이어 우르무스가 정장 손목 단추를 채우며 디젤을 향해 다가왔다.
"근데, 아까 그 마법 말이야. 살기가 조금 담겨 있던 것 같던데. 내가 잠결에 착각한 거겠지?"
디젤은 내심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럴 리가요. 그럴 생각도, 그게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방금은 정말 죽을 뻔했다네.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라운지에 울렸다.
죽을 뻔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디젤은 마법이 백웅에게 닿기 직전, 그 찰나의 순간에 아신의 힘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방금 그 빛....'
전격계 마법이 아신을 직격하기 직전 뿜어진 엄청난 빛.
그것은 디젤의 마법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백웅이 내뱉은 '숨결'이 마법을 상쇄시키며 뿜어 나온 빛이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백웅 우르무스가 디젤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디젤입니다."
"음.... 내 기억해 두지."
아신 격인 존재가 이름을 기억한다는 게 과연 긍정적인 일일까.
옷을 다 갈아입은 백웅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목이 좀 마르군."
그의 말에 어느새 아신의 옆으로 다가온 칼리가 자신의 넓적다리 안쪽에 달린 냉장 트렁크를 열었다.
이어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시커먼 병 음료였다.
백웅은 그걸 보자마자 무척 반가워하며 말했다.
"오오, 그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청량음료, 콜라가 아닌가!"
그는 앞발로 능숙하게 병뚜껑을 툭, 까더니 새까만 탄산을 벌컥벌컥 마셨다.
"크으! 이 맛은 언제나 한결같구나!"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그렇게 순식간에 음료 한 병을 다 비운 우르무스가 물었다.
"그래서, 날 깨운 용무가 무엇이더냐?"
그제야 칼리가 본론을 꺼냈다.
"어르신의 손녀분께서 자녀를 출산하셨습니다."
"뭐라?"
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어 커다란 손을 허둥지둥 움직이더니 다시 물었다.
"내 손녀가 어쨌다고?"
"어여쁜 따님을 낳으셨습니다."
칼리가 공중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그곳에는 귀엽게 생긴 북극곰 수인이 손을 꼬물거리고 있었다.
"맙소사...."
"어르신께서 이름을 지어 주시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웅은 믿기지 않는지 홀로그램을 보며 한참을 서 있다가, 곧 크게 웃기 시작했다.
"이게 얼마만의 경사인가!"
그러더니 앞에 있는 디젤과 칼리, 방금 막 도착한 조와 잘을 와락 끌어안았다.
"윽, 어르신.... 숨이...."
"보, 보드라워."
"보드랍긴 해."
격렬한 포옹에 착귀갑사들이 취하고 있던 수인 위장이 전부 벗겨졌다.
"가만있어 보자. 내 자네들이 수인이 아닌 건 진작 알고 있었네만, 우리 손녀와는 무슨 관계인가?"
"저희는 그저 대리인일 뿐입니다."
"대리인이라면 착귀갑사들이겠군."
"그렇습니다."
칼리와의 짧은 문답 이후 백웅이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튀기며 말했다.
"이런 경사를 전해 주었으니 그에 마땅한 보상을 내려야겠지."
아신의 명령에 정장을 갖춰 입은 북극여우 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수행원들은 착귀갑사들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건넸다.
"각각 천만 큐빗이네. 그리고 디젤, 자네에게는 그것 말고도 특별히...."
백웅이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수행원에게 손짓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자네에게는 내가 특별히 사례하고 싶으니, 따라오게나."
그의 말에 디젤이 칼리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얼른 가 보라는 듯 이마를 옆으로 숙였다.
[우리 먼저 돌아갈 테니까, 나중에 만둣집에서 봐.]
디젤이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벌써 저만큼 출발한 백웅의 뒤를 따라나섰다.
* * *
퍼리 랜드에서 백웅은 절대 군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손녀의 출산이라는 중대사가 있더라도 퍼리 랜드의 직원들이 그를 직접 깨우지 못했던 게 그런 이유 같았다.
아마도 백웅은 자신을 깨우지 말라는 명을 내리고서 긴 수면에 들어갔고, 그런 명령을 받은 직원들은 어떤 예외가 있더라도 절대복종해야 했을 테다.
아까 그가 말한 '정당한 방법으로 깨웠다'라는 건 자신을 섬기는 직원들의 생태를 잘 알기 때문에 만든 특별한 규칙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엄청 무식한 방법이야.'
암살 위협 같은 경우의 수는 완전히 배제한, 제 실력을 온전히 믿어야만 나올 수 있는 룰이다.
"자네와는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붙어 보고 싶군."
어두컴컴한 심해 지구의 터널을 지날 때쯤 백웅이 섬뜩한 말을 던졌다.
십몇 년을 내리 자다가 가수면 상태로 맞선 게 그 정도였는데, 이 아신이 기력을 회복하고 나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질지 차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오랜 친우를 만난 것 같아 두근거렸어."
"친우라 하심은...?"
디젤의 질문에 백웅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허, 자네 아비가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겐가? 아니면 할아비라든가."
이게 무슨 소리지.
디젤은 지금 백웅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골똘해졌다.
그러다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설마....'
뒤이어 아신에게서 나온 이름은 디젤이 짐작한 대로였다.
"이하민 사령관 말일세. 자네 아비인지 할아비인지 모르겠지만."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퍼리 랜드 (3)
여기서 형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이야.
우르무스는 형의 유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디젤의 몸을 보고 착각한 듯했다.
"흠.... 사령관한테 내 얘기를 못 들었을 리는 없고."
디젤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자, 백웅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자네가 이하민 사령관의 핏줄인 건 맞는 겐가?"
디젤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뭐, 그렇다면 됐네. 굳이 구구절절 사연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어. 착귀갑사들은 비밀을 하나씩 품고 사는 이들이니까. 어쨌든 이것 또한 인연 아니겠는가."
아신이 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하민이라는 사내는 참 대단했네. 전장에서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우던 게 아직도 생생해."
그의 회고에 디젤은 얼핏 무언가가 떠올랐다.
조각난 기억의 파편 중, 멸망의 귀신과 싸웠던 '최후의 날'에 대한 기억이.
"이거 늙은이가 잡설이 너무 길었구먼."
그렇게 도착한 곳은 고급스러운 카펫과 가구들로 장식된 엘리베이터였다.
응접실로 써도 될 정도로 넓고 쾌적한 방이었기에, 위로 움직이기 전까지 엘리베이터인 줄도 몰랐다.
[환영합니다. 우르무스 님.]
엘리베이터의 안내 목소리와 함께 창밖으로 퍼리 랜드의 전경이 펼쳐졌다.
지구의 모든 환경을 구현해 놓은 거대한 테라리움과 아쿠아리움들이 그들의 발밑으로 내리깔렸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어느새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여기에 들어와 본 인간은 세상에 몇 없네."
멀리서 들리는 폭포 소리와 함께 아신의 거처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방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거대한 얼음덩어리였다.
그곳에서 뿜어 나온 차가운 한기가 바닥에 연기처럼 내려앉았다.
"북극점의 거룩한 산에서 직접 가져온 빙산일세."
"산요? 북극점은 바다가 아니었습니까?"
"으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겐가?"
백웅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말했다.
"거룩한 산은 내가 태어난 곳이라네."
그러더니 빙산에 다가가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는 손으로 툭툭 긁었다.
저 엄청난 발톱이 긁어 대는 데도 얼음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이걸 옮길 때도 이하민 사령관이 도움을 줬었지."
비록 디젤에게 떠오르는 기억들은 조각조각 난 단편적인 장면뿐이었지만, 그것만 보더라도 백웅과 형은 꽤 친한 사이 같아 보였다.
아신이라는 존재가 '친우'라는 호칭으로 부를 만큼.
"무척 끔찍한 시기였지만, 아주 가끔은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네."
백웅이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어 빙산을 향해 천천히 숨결을 뱉었다.
긴 주둥이에서 흰 숨이 뿜어 나온다.
그것은 단순한 날숨이 아니다.
디젤의 마법을 순식간에 소멸시킨 것과 비슷한 성질의 숨결.
그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백웅이라는 아신이 지닌 능력 중 하나인 듯 보였다.
흰 숨이 얼음 표면에 닿자 단단하던 빙산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가 끝까지 후우, 하며 숨을 뱉자 얼음이 쩌저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백웅은 그렇게 벌어진 빙산 틈에 손을 집어넣고는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뭔지 알겠나?"
백웅이 보여 준 것은 엄지손톱만 한 빙하 조각이었다.
빛 하나 통과하지 못하는 새까만 얼음.
그 속에 작은 심장이라도 들어있는 건지, 주변으로 차가운 한기를 두근두근 내뿜고 있었다.
"설하만년빙이라 불리는 얼음일세."
설하만년빙(舌下萬年氷).
그의 손에 들린 빙하는 단순히 오랫동안 얼어 있던 만년빙이 아니었다.
"거룩한 산이 제 혀 아래에 보관하던 아주 귀한 얼음이지."
디젤은 전계에서 마법에 대한 정보를 뒤지다 잠깐 스쳐 지나가듯 읽었던 그 이름을 기억했다.
저건 손에 넣은 이가 세상에 몇 명 되지 않는다는 강력한 '기물'이었다.
대상에게 특정한 힘을 얻게 해 주는 물건을 일컫는 말, 기물.
그중에서도 설하만년빙은 냉기계 마력을 완전히 바꿔 '속성개화' 현상이라는 것을 일으키는 마법계 기물이었다.
"이하민 사령관에게는 갚지 못한 빚이 있어서 말이지. 허나 만약 자네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렇게 부르지도 않았을 거야. 이건 이하민 사령관에게 갚는 빚이자, 자네가 보여 준 잠재력에 대한 내 선물이네."
지금의 디젤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전설적인 물건.
아니, 어쩌면 시간이 지나 강해지더라도 쉽사리 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걸 얻으려면 아신 백웅의 보금자리에 들어가 거룩한 산의 조각을 갈라야 했으니.
'그걸 시도하는 미친 인간은 세상에 없겠지.'
하지만 단순히 저 기물을 손에 넣는다고만 해서 속성개화라는 힘을 얻게 되는 건 아니었다.
설하만년빙을 제대로 취하려면 그 기운을 한 치의 넘침 없이 전부 담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온전히 디젤의 몫이었다.
"버텨 낼 수 있겠나?"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백웅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버텨 내야겠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야 했다.
어떤 수련을 하더라도 설하만년빙처럼 마력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힘은 없었으니까.
디젤은 백웅이 건넨 기물을 조심스레 받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피부에 닿자마자 빙하의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분명 어떤 생명 활동도 없는 자연물의 일부였지만,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입에 넣게."
"...."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디젤은 호흡을 한 번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설화만년빙을 혀 밑으로 집어넣었다.
'윽....'
참을 수 없는 오한이 턱밑까지 파고든다.
그 끔찍한 한기가 천천히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생전 느껴 보지 못한 종류의 통증이 밀려온다.
입에서는 얼어붙은 입김이 토해졌고, 두개골을 망치로 두들기는 것 같은 두통이 울렸다.
〈주인, 괜찮나?〉
그가 겪는 고통은 아르가 주인의 감정을 읽고 걱정할 정도로 대단했다.
어찌나 차가운지 디젤이 딛고 있는 바닥이 얼어붙으며 사방으로 서리가 퍼져 나갔다.
그걸 지켜보던 백웅이 조심스레 발을 굴러 한기를 몰아냈다.
"견디게."
이 기물의 힘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든다.
디젤은 오직 그런 생각으로 덜덜 떨리는 이를 악물고는, 감각이 없어진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이윽고 설하만년빙의 한기가 디젤의 심장 부근에 맞닿자, 기물의 기운이 서서히 그의 몸을 잠식해 나갔다.
'이건 생각보다 더....'
원래 디젤이 가지고 있던 마력에 새로운 힘이 더해지지만, 제대로 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기존에 똬리를 틀고 있던 힘을 완전히 다른 성질의 힘이 침범하는 격이니.
그에 디젤은 일부러 마력을 크게 동요시켜 옛것과 새것을 요동치게 했다.
그러자 온 내장을 뒤집어 놓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크윽....'
일반인이라면 정신을 잃을 정도의 통증.
아니, 고통은 차치해 두더라도 자칫 잘못하면 두 번 다시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디젤에게 주어진 재능은 그 모든 걸 뛰어넘게 했다.
초현실을 읽는 능력.
그런 특별한 각성에서부터 비롯된 말도 안 되는 마력 지각력이 그에게 있었다.
마력을 낱낱이 훑으며 그것을 깊게 들여다본 디젤은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
마나라는 원천이 개인의 섭취에 따라 각각의 형태로 소화된, 마력이라는 힘의 본질을 깨우친다.
그와 함께 마력을 다루는 조작력이 극한으로 상승한다.
디젤은 그 조작력으로 설하만년빙의 힘을 더는 나눌 수 없을 때까지 잘게 해체했다.
기물에서 비롯된 마력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제어가 불가능할 정도의 단계가 된다.
하지만 근원 단위로 마력을 조작할 수 있게 된 디젤은 그 낱알을 모조리 붙잡아 자신이 원래 지녔던 마력 안에 촘촘히 섞어 넣었다.
말 그대로 물에 기름을 섞는 것보다 수천 배는 어려운 행위를 아무런 외부의 도움 없이 해낸 것이다.
"오... 이건, 완벽하군...."
디젤의 마력 흐름을 지켜보던 백웅이 짧은 감탄을 토했다.
아신의 입에서 나온 완벽이라는 단어는 아무 데나 덧붙이는 말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이 세상에 살면서 설하만년빙을 이처럼 완벽하게 흡수한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네에게는 사령관보다 더 뛰어난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신에 버금가는 경지에 오른 자의 통찰이 디젤의 능력을 꿰뚫었다.
"후...."
이제 디젤의 마력에는 설하만년빙의 힘이 자연스레 흐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끝마치고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직 머리는 깨질 듯 아프고 손발이 벌벌 떨리지만,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잘했네. 이제 확인해 보게."
백웅은 디젤에게 마법을 사용해 보라는 듯 손짓했다.
그에 디젤은 제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느낌이 완전히 달라.'
매끄러웠던 본인의 마력 속에 설하만년빙의 한기가 서려 있다.
그는 새롭게 얻은 냉기계 마력을 끌어 올려 작은 얼음 조각을 하나 맺었다.
원래대로라면 마력으로 만들어 낸 얼음은 투명하거나 약간 푸른빛이어야 했다.
하지만 디젤이 손바닥 위에 구현한 얼음 조각은 완벽하게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이게 속성개화라 불리는 변화....'
모든 마력 계열에는 성질이 완전히 변하는 속성개화 현상이 존재했다.
그 중 설하만년빙으로 얻게 되는 속성개화는 다음과 같이 불렀다.
'흑빙(黑氷).'
냉기계 속성개화 중 하나인 검은 얼음.
그가 만들어 낸 흑빛 조각은 극한의 한기를 담은 물질을 보는 듯했다.
"어때. 마음에 드나?"
백웅의 물음에 디젤은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친우에게 빚을 갚은 것 같군."
그가 형에게 진 빚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어쨌든 보통 일이 아니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양반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백웅은 아직 입에서 한기를 내뿜고 있는 디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야."
아신의 둥지에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이름 없는 만둣집 뒤편의 골목길.
칼리가 디젤에게 거액의 큐빗이 담긴 지갑 카드를 건넸다.
"자, 네 몫. 약속한 대로 수수료 뗀 절반이야."
확인해 보자 카드에는 정확한 금액이 들어 있었다.
한 번의 작업으로 꽤 많은 돈이 수중에 생겼다.
이걸 어디에 써야 효율이 좋을지 고민하는 디젤에게 칼리가 말을 걸었다.
"그리고 의뢰인이 고맙다고 전해달래."
"의뢰인이라면, 백웅 손녀?"
"그래. 억지를 써서 급하게 진행한 작업인데 네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뭐, 난 맡은 작업을 한 것뿐이야. 백웅이 손녀 출산 소식에 기뻐해서 다행이었지."
디젤의 말에 칼리가 어깨를 으쓱 하며 말했다.
"그렇다니까. 백웅의 손녀가 속도위반이라니. 애 아빠는 배짱이 얼마나 두둑한 건지 모르겠네. 그 콜라곰 할아범이 화라도 냈으면 우리까지 곤란해질 뻔했어. 아무튼 너한테 감사하다고 꼭 전해 달라더라."
"그래."
"그리고, 나도 꽤 인상 깊었어. 네가 전개했던 그 전격계 마법 말이야, 3차 예비 발전기에서 전력을 빼 온 거지?"
의외로 날카로운 분석에 디젤이 살짝 놀라며 대답했다.
"맞아."
"그 정도 해커는 언제 또 고용했대. 뭐, 깔끔히 인정할게. 절반 값은 톡톡히 했네."
칼리가 디젤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근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아니."
"...."
분명 백웅에게 받은 게 뭔지 묻는 걸 테다.
디젤은 자신의 거절에 급격하게 시무룩해진 칼리를 보며 말을 바꿨다.
"농담이야. 물어봐."
"뭐 받았어?"
예상했던 질문이 날아왔다.
"보통 물건은 아니었을 거 같은데."
그에 디젤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글쎄."
"에이 씨. 물어봐도 된다며."
"대답해 준다고는 안 했는데."
"아니, 하.... 차라리 못 물어보게 하든가."
칼리의 얼굴은 궁금해 터질 지경이 되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신에 버금가는 격의 존재가 특별히 따로 불러 보상을 주었는데, 그게 뭔지 궁금해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테다.
"아.... 찝찝해."
칼리가 약간 진지한 얼굴이 되더니 흥정하듯 말했다.
"5만."
"...?"
"왜. 너무 적어? 그러면 십만 큐빗. 뭔지 말해 주면 바로 줄게."
"마나 음료 한 캔값이네."
"아이, 그럼 이십만. 더는 안 돼."
떡 줄 사람은 관심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벌컥벌컥 들이켠다.
애초부터 디젤은 뭘 받았는지 별로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좋아. 20만에 술 한잔. 어때?"
"내가 술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럼 마나 사탕 한 박스 구해다 줄게. 신상 맛으로."
"사탕도 별로."
"아니 무슨 마법사가 마나 사탕을 거절해! 하.... 그러면...."
지금 와서야 안 건데, 이 여자.
은근 놀려 먹는 타격감이 괜찮았다.
* * *
디젤은 지하대청을 다시 찾았다.
지난 작업에서 꽤 많은 큐빗을 만졌으니, 이제 그걸 힘으로 바꿀 차례였다.
가장 먼저 마나를 주입하는 임플란트를 하나 설치했다.
마력순환계에 직접 투여하는 방식이니만큼 입으로 섭취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도 빠르고 흡수 효율도 좋았다.
물론 마나를 그런 식으로 직접 때려 박으면 장기적인 마력 건강에는 좋지 않았기에,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해야 했다.
거기다 예전부터 생각하던 다리 쪽을 의체로 강화했다.
골격을 알루미늄 합금으로 교체하고, 근육을 마법 친화적인 소재로 덧씌우는 작업이었다.
개조되지 않은 생다리는 아무리 강화 마법으로 힘을 증강하더라도 그 한계가 명확한 데다가 후유증도 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꽤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려 주점 옆 으슥한 복도를 지나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르신."
디젤의 시야에 얼핏 흰색 한복이 스쳤다.
돌아보니 그곳에는 형의 고손녀이자 서울에서 픽서로 활동하는 '리버'가 서 있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
대뜸 말을 놓았지만 리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디젤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래. 이제 그게 내 이름이니까."
그렇지 않아도 디젤은 리버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던 참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두 번째 삶을 살 수 있게 된 건 전부 그녀 덕, 혹은 탓이었으니까.
정보의 형태로 마주한 리버라는 픽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거물이었다.
그녀가 첫 만남에서 말했던, 자신이 직접 돕는다면 세간의 주목을 받을 거라는 말이 결코 허세가 아니었을 정도로.
리버와 작업하는 착귀갑사들은 최소 이 지하대청의 VIP 레벨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들뿐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랬는지 모르겠네. 몇 번 죽을 뻔했거든."
"잘 지내셨네요."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짓더니 합석을 권유하듯 복도 너머 테이블 쪽을 가리켰다.
"잠시 어떠신지요?"
"내가 그렇게 한가하진 않은데."
"재미있는 소식이 있는 데도요?"
"얼마나 재미있길래?"
"최소한 지금 어르신의 표정에 웃음꽃이 피어날 정도로요."
짧은 기 싸움이 오고 간다.
일부러 디젤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아니면 우연히 여기 있다가 만난 걸까.
리버 같은 성격을 가진 인간이라면 당연히 전자일 테다.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한 번쯤 들어 볼 만했다.
벌써부터 피곤해진 디젤은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이쪽입니다."
하지만 리버는 그보다 훨씬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따라 좁다란 복도를 지나자, 철저한 보안이 지켜지는 프라이빗 룸이 나왔다.
"뭔가 불쾌한데."
리버가 먼저 자리에 앉자, 디젤이 선 채로 말했다.
"왜죠?"
"그냥 뭔가 느낌이 불쾌해."
"제 이야기를 들으시면 좀 유쾌해지실 거예요."
디젤은 예전 이하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던 때부터 특유의 감이 있었다.
항상 정확하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부정적인 감, 특히 지금과 같은 불쾌한 느낌의 감은 틀린 적이 많이 없었다.
"질질 끌지 말자."
"뭐, 그러길 원하시면."
디젤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가 느낀 불쾌함의 정체가 곧바로 드러났다.
"어르신의 여동생께서 아직 살아계십니다."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대마법사의 흔적
"뭐?"
이게 무슨 말인가.
이하연, 그 애가 아직 살아 있다고?
"제가 너무 단정 지어서 말했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어르신의 여동생, 그러니까 이하연 대마법사께서 아직 살아 계실 수도 있는 '가능성'이 발견됐습니다."
디젤은 농담인 건가 싶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미있네. 정말 웃음꽃이 활짝 피는 농담이야."
"농담이 아니에요."
리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했다.
"한번 보시겠어요?"
대략 손바닥만 한 크기의 짙은 회색 돌멩이.
방금 길바닥에서 주워 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흠...."
"어떠신가요."
그건 자연에서 떨어져 나온 암석이 아니라, 누군가가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콘크리트였다.
하지만 평범한 콘크리트 조각이었으면 리버가 이렇게 보여 줄 리 없었다.
돌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역시나 그 안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는 게 보였다.
'마법식이야.'
그것도 아주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종류의 마법식이 콘크리트에 각인되어 있었다.
'아니. 콘크리트에 마법식이 새겨져 있다기보다는.... 마법식이 이 콘크리트를 만든 것 같아.'
대체 무엇을 위한 법식일까.
디젤은 조각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결론 내렸다.
"이건 그냥 콘크리트가 아니라 골렘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 같은데. 콘크리트로 만든 골렘 말이야. 원래 크기는 상당히 컸을 것 같고."
돌멩이에 새겨진 마법식으로 전체 크기를 대략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작게 잡아도 2층 건물 정도는 훌쩍 넘는 골렘으로 보였다.
디젤의 분석에 리버가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전문가들도 거기까지 해석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는데, 역시 우리 어르신은 대단하십니다."
입에 발린 칭찬을 하더니 골렘 조각을 집어 들었다.
"다만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걸 누가, 언제 만들었냐겠죠."
그걸 알아내기에는 디젤조차 쉽지 않았다.
일단 식이 새겨진 방식을 보아하니 평범한 범인(凡人)이 만든 것은 아니다.
골렘을 창조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긴 했다.
매우 복잡한 마법식을 정교하게 새겨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걸 가동하려면 엄청난 양의 마력을 쏟아부었어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최소 대륙급 실력자라 불리는 레벨 5 수준의 마법사일 테다.
그런 자가 마법식 안에 자기 정보를 함부로 흘릴 리 없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저 조각은 골렘을 지지하는 부분, 즉 하체 쪽에서 나온 조각이었기에 애초에 별다른 정보가 새겨져 있을 수가 없었다.
'다리의 움직임이 어떻고, 최대 하중이 몇이고.... 이런 같은 정보들밖에 없어.'
리버 또한 그걸 알고 있었는지 돌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내려놓았다.
"이 조각만으로 그걸 밝혀내는 건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파편이 발견되었던 남해 쪽 해안가를 전부 조사해서 다른 조각 몇 개를 찾았습니다. 그것들로 타깃을 좁힌 결과, 이건 이하연 대마법사님이 만드신 골렘이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이하연 대마법사라.
두 낱말의 조합은 아직도 어색하다.
디젤은 돌멩이를 집어 들어 제 동생의 손길이 담긴 마법식을 다시 한번 보았다.
'이걸 걔가 만들었다고.'
조각에는 골렘을 움직이는 마법식의 아주 일부분만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동생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무척 복잡한 식이라 생각했으나,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오히려 얼마나 깔끔하게 구성되었는지 깨닫게 되는 마법식이었다.
'너도 형처럼 보통 인간이 아니었구나.'
"그런 추론이 가능했던 것은 골렘이 만들어진 장소 때문이었습니다. 이 골렘은 이하연 대마법사님이 마지막으로 발견되었던 섬에서 만들어졌거든요. 지금은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 제주도 말이에요. 그리고 이게 만들어진 날짜는...."
리버가 잠시 끝말을 흐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한 달 전이에요."
한 달 전.
생각보다 훨씬 최근이다.
"확실한 거야?"
"이름 있는 연구단이 심혈을 기울여 조사한 결과입니다."
"흠...."
잠시 디젤이 생각에 빠져 있자, 리버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일급 기밀로 관리되는 사항입니다."
그러더니 무언의 의미가 담긴 미소를 짓는다.
'입조심하라는 뜻이군.'
하지만 그녀의 단어 선택에서 무언가 거슬리는 점을 발견한 디젤이 질문을 던졌다.
"일급 기밀이면, 어디 소속의 기밀이라는 거지?"
지금 여기서 나눈 이야기의 중요도가 높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저런 말까지 써 가며 경고를 한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테다.
'기밀'이란 단어에는 어떤 단체가 비밀을 관리하고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때로는 비밀 그 자체보다 그 비밀을 숨기는 자들이 누구인지가 더 중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예리한 질문을 던지시네요."
디젤의 물음에 리버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조금은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이건 내금위가 관리하는 사항입니다."
"내금위...?"
내금위라면 조선의 황제를 보호하는 직속 정예 부대였다.
"그럼 넌 내금위랑 같이 일하는 건가?"
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그쪽이랑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금위의 감시를 받는 요주의 인물이죠. 제가 이 파편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는 동안 내금위에게 들키지 않도록 무척 조심해야 했어요. 그 인간들은 이 골렘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녀는 다음 말에 약간 강조하듯 힘을 주었다.
"정확히는 이하연 대마법사님을 향한 관심이겠죠."
동생의 이름에서 내금위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마법사 이하연은 초대 황제비서실장이라는 직책으로 황제를 섬긴 이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디젤이 알기로 황제비서실은 내금위 소속이 아닌, 승정원 소속이었다.
"왜 내금위가 내 동생한테 관심을 갖는 거지?"
이미 오래 전에 은퇴한 대마법사를 다시 섭외하기라도 하려는 걸까.
"왜냐하면...."
황제의 예하에 있는 국가급 정예 부대가
초대 황제비서실장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
디젤의 머릿속에 여러 가설이 떠올랐으나.
바로 다음에 들린 리버의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하연 대마법사님이 과거 세종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 * *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이 망할 옥탑방은 방수 처리를 제대로 안 한 건지 천장에서 비가 뚝뚝 샜다.
'빨리 이사를 가든가 해야겠어.'
임시로 받쳐 놓은 금속 대야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디젤의 주변을 맴돌던 아르는 그 물소리가 신기했는지 물결이 이는 수면을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이런 짜증 나는 상황과는 별개로, 디젤은 비 오는 날을 꽤 좋아했다.
먼지가 가득한 세상을 깨끗하게 씻어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에도 유해 물질이 잔뜩 섞여 있을 테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아침은 온통 물로 뒤덮여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창문을 열어 비 냄새를 한껏 맡고 싶었으나, 이곳의 비는 예전의 그 향취를 잃었다는 걸 알았기에 그저 눈으로 바라보며 상상할 뿐이다.
디젤은 유리창에 비친 자기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얼굴.
원래 제 것도, 그렇다고 형의 것도 아닌 완전히 다른 누군가의 얼굴이다.
그렇게 한동안 창가에 서 있다가 책상에 돌아와 앉았다.
그러자 아르가 쪼르르 날아와 디젤 앞에 사뿐히 내려왔다.
〈주인, 고민이 많다.〉
아르는 고개를 옆으로 까딱 움직이며 디젤을 쳐다보았다.
아마 제 방식대로 걱정해 주는 거겠지.
"괜찮아."
디젤은 아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찾아도 기억이 없어.'
어젯밤 지하대청에서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디젤은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형의 기억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그중 여동생과 관련된 기억은 어디에도 없었다.
형이 가진 기억이 완전치 못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최후의 날'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딱 두 부분, 멸망의 귀신과 백웅이라는 두 키워드만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다행인 건 기억이 영원히 없어진 건 아니라는 건데....'
아마도 특정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어떤 계기만 있다면 감춰져 있던 기억의 일부가 돌아오는 듯했다.
백웅의 경우가 그랬다.
그 아신과 헤어진 이후 디젤에게는 형과 백웅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문득문득 떠올랐으니까.
디젤은 잠시 눈을 감고 지난밤 픽서 리버와 했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세종 황제를 암살하려 했다니....'
이하연 그것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리버도 동생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자세히 말해 주지는 않았다.
잘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감추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후...."
동생이 살아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소식이었다.
점점 타인이 되어 가는 것 같은 '이하진'이라는 자아와 겨우 다시 연결되는 느낌이었으니.
디젤은 리버의 말을 기억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골렘이 발견된 제주도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1급 특수 재난 경보 구역.
제주도에 내려진 국가급 조치였다.
각종 이상 현상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대외적으로는 그렇지.'
리버가 뒷면에 감춰진 진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제주도는 이하연 대마법사님이 돌아가셨다고 알려진 곳이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제주도는 내금위를 포함한 조선의 모든 정예부대들이 모여 전투를 치른 곳이었다.
오직 한 명의 대마법사, 이하연을 죽이기 위해서 말이다.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동생은 패배했다.
그와 함께 아름다웠던 섬 제주도는 더 이상 발을 들일 수조차 없는 극한의 땅이 되었다.
동생이 쓰러진 그때, 형은 어디에 있었을까.
동생과 전쟁을 벌인 정예부대 중에 형 이하민 또한 있었을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애써 봐도 작은 기억 하나 떠오르지 않았으니.
-나한테 이걸 말하는 이유는?
리버는 디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 골렘이 창조된 날은 어르신께서 이 세상에 현신한 날과 같습니다. 그에 뭔가 연관이 있을까 싶어 여쭌 거예요. 하지만 어르신의 반응을 보니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네요.
이하진이 두 번째 삶을 얻게 된 것과 동시에 그의 동생 쪽에서 움직임이 발견되었다.
제 오빠가 다시 살아난 날, 온 세상이 죽은 줄로 알고 있던 대마법사 또한 몸을 일으킨 것이다.
'혹시 그럼 형도....'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곧바로 머리를 털어 버렸다.
확인할 수도 없는 정보에 쓸데없는 가정을 내리진 말자.
그대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 목표는 처음 정했던 것에서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렬의 상황들에 더 확고해졌을 뿐.
힘을 길러야 한다.
제 몸 하나를 건사할 뿐일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 세상의 비사들을 스스로 밝혀 낼 수 있을 정도의 힘이 필요했다.
'가능할까?'
디젤이 주먹을 쥐며 자문했다.
자답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움직이자, 아르."
겉옷을 챙겨 입고 자리를 나선다.
그의 곁을 아르가 지켰다.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었다.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하프 안드로이드
[관심 있으십니까, 디젤 님?]
길을 걷고 있었는데, 누군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김 사장이 중개해 준 자잘한 작업 하나를 끝내고 귀가 중인데, 처음 듣는 이름의 픽서에게서 작업 제안이 들어왔다.
[글쎄요. 더 들어봐야겠는데요.]
[사무실로 오시면 직접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픽서가 무척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통신의 잡음을 감안하더라도 묘하게 기계적인 목소리를 지닌 사내였다.
[생각해 보죠.]
[예. 언제든 편하게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디젤이 아르에게 물었다.
〈어때?〉
그러자 아르가 디젤의 눈앞에 정보를 띄우며 말했다.
〈알프레드 한. 경기 북부에서 활동하는 픽서. 종족은 하프 안드로이드입니다.〉
〈하프 안드로이드? 흠....〉
본인을 인격체라고 주장하는 안드로이드들을 일컫는 말, 하프 안드로이드.
강인공지능을 지닌 안드로이드 중 자의식이 생겨난 일부 안드로이드들은 자신이 하나의 인격체라며 다른 지성체들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이런 이들을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라는 의미로 '하프 안드로이드'라 불렀다.
'인권이 타고나는 게 아니라 부여되는 시대이니 가능한 거지.'
사람이 완벽한 기계가 되고, 기계가 완벽히 사람처럼 행동하는 세상이다.
그런 기술의 발전은 곧 인권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 그런 혼란은 곧 기회였다.
'그 어떤 이들이 바로 기업이었고.'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 기업들은 혼란에 질서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신원보장번호'라는 이름의 새로운 인권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물론 부여의 기준은 무한히 우상향해야만 하는 기업 가치에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였다.
안드로이드 중 자신만의 재산을 보유하던 일부 하프 안드들이 그런 인권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대 기업의 보증을 받았더라도 그들은 제대로 된 인격체 취급을 받지 못했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흐름이었다.
진짜 인격이 있는 종족들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마당에, 원래 누군가의 소유였던 안드로이드에 갑자기 인권이라니.
세상이 그걸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소수의 하프 안드로이드들은 그들이 지닌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며 점점 본인만의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이 알프레드 한이라는 픽서도 그런 실력자 중 하나였다.
'뭐, 나한텐 오히려 기회일지도.'
디젤에게는 그가 하프 안드로이드든 지옥에서 온 사탄이든 별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건 얼마나 신뢰할 수 있고, 얼마나 중요한 작업을 물어올 수 있는지 뿐.
〈주인, 이동합니까?〉
아르가 디젤의 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그래. 마침 시간이 비기도 하고."
대답이 끝나자마자 아르가 곧바로 택시를 잡았다.
'슬슬 탈것도 구해야겠는데.'
그런 생각을 중얼거리며 멈춰서는 차량에 올랐다.
* * *
아파트로 가득 찼던 경기 북부는 지난 3차 세계 대전 때 거의 폐허가 되었다.
종전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복구가 완벽히 진행되지 않아 아직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디젤은 깔끔한 거주 구역이었던 과거의 풍경 대신 온종일 뿌연 매연과 시커먼 폐수를 뿜어대는 무인 공장들을 마주했다.
그 광경을 보니 새삼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떤 세계인지 다시 깨달았다.
빼곡한 원통형 건축물 사이에 투박한 사각형 건물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다.
소방 관련 건축법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 지은 건물이다.
입구로 들어가자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안드로이드 모델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디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쪽이 알프레드 한입니까?"
"아니요. 저는 알프레드 최입니다. 이쪽으로 오시길."
하프 안드로이드를 따라 복도에 들어서자 똑같은 얼굴들이 연신 스쳐 지나갔다.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르 너는 저게 구별이 돼?〉
〈전부 다르다.〉
다르다니, 다 똑같이 생겼는데.
전계 정령이 보는 시야로는 저 찍어 낸 것 같은 안드로이드들에게서 뭔가 개성이라도 읽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건물에서 가장 커 보이는 방에 도착하자, 알프레드 최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알프레드 한 님, 착귀갑사께서 오셨습니다."
이어 문을 열자 역시나 똑같은 모델의 안드로이드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다만 그는 다른 안드로이드들과는 다르게 왼쪽 눈알 전체가 새까만 흑색이었다.
"오셨습니까! 소문으로만 듣던 디젤 님이시군요. 영광입니다."
알프레드 한이 손을 들어 악수를 청하고는 손님용 소파로 디젤을 안내했다.
"오시느라 힘드시진 않으셨습니까?"
"산 좋고 물 맑은 곳이던데요."
"하하! 이해해 주십시오. 저희 같은 상것들이 차릴 수 있는 사무실은 이런 곳밖에 없어서요."
픽서가 자학적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으며 웃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알게 된 거죠?"
"아, 디젤 님 말이십니까? 그렇군요. 전화로는 제대로 말씀드리질 못했지요."
알프레드 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픽서 세계에도 커뮤니티가 있습니다만, 요즘 그쪽에서 디젤 님이 꽤 유명하십니다. 루키 착귀갑사 중에 특별히 반짝이는 스펠캐스터가 있다고."
자신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퍼지고 있다는 건 이미 김 사장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별다른 제안이 오지 않았던 것은 경력을 중요시하는 이 뒷세계의 특성 때문이었을 테다.
"그걸 보고 이렇게 연락을 드리게 된 것이지요. 제가 우리 루키분들께 특별히 관심이 많아서 말입니다."
신인들에게 관심이 많은 픽서라.
디젤은 그 이유를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프 안드로이드라서 고생이 많나 보군.'
출신과 경력 때문에 베테랑 착귀갑사들에게 거절당해 어쩔 수 없이 신인에게까지 눈을 돌리는 걸 테다.
뒷세계의 갑사들이 따지는 건 작업 동료뿐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는지요?"
알프레드 한이 허리춤에서 브리핑 칩을 꺼내며 말했다.
디젤은 대답 대신 칩을 받아 포트에 꽂았다.
그러자 보안 때문에 일반 전화로 나누지 못했던 내용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작업은 총 4인이 투입되는 작업입니다. 해커 한 분, 피지컬 가드 한 분, 거너 한 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펠캐스터, 디젤 님이시지요."
설명에 따라 사진 몇 개가 슥슥 지나갔다.
그걸 살펴보던 디젤은 무언가 거슬리는 점을 발견하고는 잠깐 말을 멈춰 세웠다.
"그쪽하고 똑같은 얼굴이 보이는데요."
"아, 알프레드 박을 말하시는 거군요. 저희 쪽에서 거너로 키우고 있는 착귀갑사입니다."
"흠.... 알겠습니다."
'키운다'라는 표현이 조금 걸렸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작업 리더는 해커인 제온 씨입니다. 경력은 적으시지만 꽤 유능한 해커이시지요. 피지컬 가드이신 제이슨 씨도 과거 보안 업체에서 현역으로 뛰었던 분이신 데다, 지금은 무교의 기적을 다루시는 박수무당이십니다."
디젤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해커와, 건장한 오크의 프로필에 눈길을 주었다.
"본격적인 작업은 일주일 뒤입니다만, 그 전에 팀원들이 모여서 간단한 사전 작업을 한번 할 겁니다. 이하 내용들은 전화상으로 전달해 드린 것과 비슷하고요."
간단히 말하자면 어딘가에 침투해서 물건을 빼 오는 일이었다.
그 어딘가가 폐수 정화 시설이었고, 빼 오는 물건이 물 정령일 뿐이다.
"혹시 궁금하신 점 있으신지?"
"사전 작업은 언젭니까?"
"작업 하루 전입니다. 아마 리더분께서 따로 연락을 드릴 겁니다."
"알겠습니다."
디젤의 긍정에 알프레드 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계약서에...."
그러면서 홀로그램 서류를 건네려 하자, 디젤이 잠시 그의 말을 끊었다.
"대신, 말한 대로 보수는 정확해야 할 겁니다."
무엇보다 디젤이 이번 작업에 관심이 가게 된 것은 알프레드 한이 중개 수수료를 떼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픽서들은 보통 수수료 명목으로 기본은 20%, 많게는 30%, 정말 도둑놈들은 절반 가까이 되는 금액을 떼어 갔다.
디젤이 알프레드 한 같은 인기 없는 픽서를 찾아 굳이 이 멀리까지 온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절박한 픽서일수록 중개료도 상대적으로 덜 받을 테니까.
"물론입니다."
하프 안드로이드가 얼굴에 주름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 * *
〈살펴봤어?〉
〈수상한 기운은 없었음.〉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 디젤이 아르에게 물었다.
〈수고했어.〉
그가 품속에 있는 아르에게 찌르를 만들어 주자 평소보다 더 허겁지겁 받아먹었다.
아무래도 원래 다니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인 데다, 주변에 전계에 연결된 안드로이드들이 많아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것 같았다.
〈좀 쉬었다가 이번 작업 관련 정보 좀 정리해 줘.〉
〈아르는 이미 움직이고 있다.〉
〈그래?〉
가끔 너무 부려 먹는 건가 싶었지만 아르는 정보를 찾는 걸 꽤 즐겼다.
전계 정령의 특징인 건지, 아르의 성격인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디젤은 찌르를 먹여 주던 손으로 아르의 귀 뒷부분을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부족합니다.〉
〈응?〉
〈더 강한 칭찬이 필요.〉
저런 소리는 한 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오늘 피곤하긴 했나 보다.
〈수고했다.〉
〈으음....〉
〈아주 대단해.〉
〈으으음....〉
아르는 칭찬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말할 때마다 디젤의 손을 콱 깨물었다.
〈넌 최고의 정령이야?〉
〈음....〉
이번 건 마음에 들었는지 정전기 튀는 혓바닥으로 디젤의 손을 몇 번 핥더니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아르, 전계 탐색에 집중함. 주인은 방해하지 않길 요망.〉
집에 가서 해도 되는데.
누굴 닮은 건지 참으로 부지런한 정령이 아닐 수 없다.
* * *
며칠 뒤, 해커 제온이라는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접견 위치와 약속 시간이 적힌 짤막한 단문.
메시지에는 이중으로 암호가 걸려 있어 번거로운 해독 처리를 거쳐야 했다.
'철저한 인간이군.'
이 세계에 오게 된 뒤 직접 만나 본 해커라고는 리틀 시스터밖에 없었다.
디젤은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해커 놈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문제가 있는 놈들이거든.
과연 그 말이 맞을까.
미리 팀원들의 뒷조사를 살짝 해 보았으나 그 중 제온이라는 해커는 유독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전계의 더 깊은 층으로 들어간다면 정보가 나올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시간을 투자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 디젤은 새롭게 발견한 능력에 취해 있었다.
'워우....'
지금 그의 눈앞에는 전계에 연결해야만 확인할 수 있는 각종 정보가 보였다.
아직 전계에 연결하지 않았는 데도 말이다.
'전계 투사라 불리는 거랬지.'
전계 지각력이 일정 수준 이상에 달한 해커들에게만 나타난다는 능력.
전계와의 연결 없이도 전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투사력이다.
하지만 디젤의 전계 투사는 단순히 전계에 연결된 것을 보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전계를 구성하고 있는 문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것들은 '코드'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았다.
'역시 전계도 초현실의 일부가 맞았어.'
기적의 '문장'이나 마법의 '법식'을 볼 수 있던 것처럼 전계의 코드 또한 볼 수 있다니.
디젤은 전계 투사를 하며 제 보금자리인 옥탑방에 연결된 가전제품들을 둘러보았다.
'정보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말이 이런 거였구나.'
마치 코드로 된 문자열만으로 세상을 그린다면 이런 느낌일 테다.
디젤의 눈에 전계에 연결된 물건들은 그런 식으로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전계에서 보이는 코드들을 만들거나 지우는 간섭을 할 순 없었다.
기적의 문자나 마법의 식은 그걸 볼 수 있을 때부터 자연스레 다룰 수 있었지만, 어째선지 코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전계 정령을 소환할 때랑은 느낌이 다르단 말이지.'
전계에서의 언어 체계는 두 개 이상인 걸까.
어쩌면 전계의 고유 언어와, 인위적으로 전계를 이용하기 위해 새롭게 창조된 언어의 차이일 수도 있었다.
디젤이 한껏 몰입해서 전계를 들여다보고 있자, 곧 머리가 과열된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에 제 주인 옆에서 빙글빙글 날아다니던 아르가 경고했다.
〈조심하십시오. 전계에서 연산하는 일에는 필연적으로 발열이 발생. 인간의 육체, 열에 약하다.〉
디젤이 전계 투사를 멈추자, 아르가 뜨거워진 그의 뒤통수를 혓바닥으로 핥았다.
"후.... 이래서 해커들이 냉각 패치를 쓰는 거구나. 나도 몇 개 사 둬야겠어."
디젤이 구입 목록에 한 줄을 추가하며 중얼거렸다.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폐쇄된 아파트
경기 북부의 폐쇄된 아파트 지구.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아파트는 비밀리에 만나는 장소로 쓰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조용하고, 복잡하고, 무엇보다 빈방이 많다는 점에서.
〈기분 나쁨.〉
디젤의 품속에 있던 아르가 아파트 단지 안을 떠도는 그림자 형태의 정령을 보더니 털을 잔뜩 곤두세웠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장소에는 필연적으로 영적 에너지가 깃들기 마련이다.
특히나 전쟁 때문에 목숨이 많이 희생된 부정적인 공간에는 기운이 더욱 강하게 남아 있었는데, 그런 에너지는 현실계에 기거하는 정령들을 끌어들이고는 했다.
〈신경 쓰지 마. 쟤들도 우리한테 별 관심 없을 테니까.〉
그림자 정령을 무시하며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저 멀리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여깁니다, 디젤 씨!"
알프레드 박이 팔을 높이 휘저으며 디젤을 맞이했다.
그는 픽서 알프레드 한처럼 한쪽 눈이 까만색이었다.
"왜 나와 있는 겁니까?"
"리더께서 마중을 좀 나가라 하셔서요. 디젤 님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분이라 이쪽 지리를 잘 모르실 테니, 안내도 해 드릴 겸."
아마도 해커 제온이 내린 명령에 알프레드 박이 제 생각을 덧붙인 것 같았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요. 다들 벌써 도착했습니까?"
"예. 제이슨 씨는 여기가 안전한지 둘러보시겠다고 먼저 오셨습니다. 제온 씨는 방금 막 도착하셨고요."
"그럼 그쪽이 제일 먼저 왔었나 보네요."
가장 먼저 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정보들이다.
디젤의 말에 알프레드 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습니다. 버릇이 되어서 말이죠."
쓸데없는 잡담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4인 가구가 쓸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아파트의 거실.
집을 비울 때 급하게 떠난 건지 온갖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 잔뜩 낡은 상태일 뿐이다.
"왔나?"
건장한 오크가 묵직한 저음으로 디젤을 반겼다.
"제이슨이네. 피지컬 가드면서 무당도 겸하고 있어."
그는 활짝 미소를 짓더니 악수를 청했다.
"디젤입니다."
"그래. 자네가 그 유명한 마법사구먼. 무려 백웅을 깨웠다는."
제이슨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물어볼 것이 산더미같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디젤은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거실 구석에서 사이버덱을 만지작거리는 아담한 체구의 해커를 발견했다.
두꺼운 가면을 쓴 그는 얼굴은커녕 피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유일하게 드러난 부분은 손이었는데, 양쪽 다 번쩍이는 금으로 도금된 의체였다.
[왜 늦었지?]
해커 제온이 대뜸 기계로 변조된 음성을 뱉었다.
그 퉁명스러운 태도에 디젤 또한 같은 응대를 했다.
"늦었다니? 정시에 왔는데."
[아니, 늦었다. 정확히 0.374초.]
"허허, 이거 왜 이러나. 그 정도 가지고."
옆에 있던 오크가 사람 좋게 웃었지만, 제온은 그러지 못했다.
[전장에서는 밀리초 단위로 생사가 바뀐다는 거 모르나? 0.374초면 내가 저 안드로이드 놈을 해킹해서 권총 방아쇠를 당기게까지 할 수 있는 시간이야.]
제온이 가면에 달린 렌즈로 디젤을 쳐다보며 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디젤은 오히려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뭔가 착각했나 본데. 난 늦지 않았어."
[뭐? 늦었다니까. 자, 봐. 내가 여기에 이렇게 기록까지 해 놨는데 계속 발뺌을....]
제온은 자신의 사이버덱을 집어 들어 디젤에게 보여 주려다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뭐, 뭐야.]
가면 너머 얼굴에서 당황함이 느껴진다.
[아, 아니.... 분명 확인했는데.... 0.374초 늦었다고....]
제온은 제 말을 되뇌며 사이버덱의 모니터를 재차 확인했지만, 화면에 떠 있는 0이라는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당연했다.
조금 전 아르가 그의 화면을 해킹해 문구를 살짝 변경해 놓았으니까.
〈생각보다 간단.〉
디젤은 넋이 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제온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뭐랬나. 늦지 않았다니까."
[....]
"생사람을 잡아 놓고서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건가?"
그의 말에 침묵하던 제온이 갑자기 알프레드 박을 보며 버럭 화를 냈다.
[이...! 네가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야! 쓰레기 같은 기계 새끼....]
"예...?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전 제온 님이 시키신 대로 디젤 님을 마중했을 뿐인데...."
[최대한 천천히 오라고 했잖아 내가!]
"최대한 '안전하게'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분명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닥쳐!]
디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작업 시작 전에 내 기를 꺾어 놓으려고 했던 건가.'
리더인 제온은 아마 디젤의 명성이 꽤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했다. 메가 코프의 병기 AT-71을 혼자 상대하고, 아신 백웅을 깨웠다는 신인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그렇기에 초창에 기를 확 꺾어 주도권을 가져갈 계획이었을 테다.
'자기가 주도하는 작업에서 신입 착귀갑사가 나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이 말귀도 못 알아먹는 로봇 청소기 새끼야...!]
"제온, 그만하게. 여기 있는 알프레드 박은 엄연히 인권이 있는 하프 안드로이드인데."
제온의 말이 점점 거칠어지자 제이슨이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제온은 멈추지 않고 끝까지 말을 쏘아 댔다.
[하! 해킹당하면 끝인 기계한테 인권은 무슨....]
해킹당하면 끝이라니.
디젤은 그 말이 꽤 우스워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
[뭐라고...?]
"그쪽도 해킹당하면 아무것도 못 할 텐데."
[그게 뭔....]
정곡을 찔렸는지, 제온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매우 어색한 침묵이 착귀갑사들 사이에 흐르자, 제이슨이 손뼉을 짝 짝 치며 말했다.
"자, 자, 이거 시작부터 뭔가 조금 꼬였군. 먼저 자기소개부터 좀 하자고. 응?"
그의 말에 제온이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말했다.
[후.... 그래. 이름은 제온이다. 포지션은 해커고. 이번 작업의 '리더'야.]
리더라는 말을 굳이 강조한 제온이 디젤에게 작은 칩을 툭 던지며 말했다.
[보안 통신용 칩이다. 앞으로는 이걸로만 연락할 거야. 지금부터 꼽아 둬.]
"폐쇄 채널은 안 쓰나 보군."
[그딴 허술한 통신은 안 써.]
"폐쇄 채널도 보안이 나쁜 건 아니라네."
제온의 말에 오크가 반박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코웃음뿐이다.
[무식한 가드들한테는 그렇게 보이겠지.]
"크흠...."
[전계에서 진정한 '폐쇄'란 건 없어.]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렇기에 폐쇄 채널은 그걸 보호하는 해커의 실력이 무척 중요했다.
어떻게 본다면 제온의 저런 행동은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잡설은 이만하고, 바로 사전 작업하러 이동하지.]
제온이 구석에 있는 묵직한 기계 장치 두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이슨하고 안드로이드, 저거 들고. 디젤은 제이슨을 호위한다. 위치는 여기서 남쪽에 있는 하수도와 하천이야.]
"목적은 뭐지?"
디젤이 묻자 제온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근방 정령들의 유도.]
* * *
현실계의 원소 정령들은 사업 용도로 쓰이고는 했다.
특히 발전소를 돌리는 전기 정령이라든가, 소각장에서 물건을 태우는 불 정령, 상하수도를 정화하는 물 정령은 꽤 잘 알려져 있었다.
흥미롭게도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존재했다.
정령 또한 생명체의 일종이니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기업의 이윤 증가가 무엇보다 중요시되는 세상에서 그런 목소리는 당연하게도 무시당했다.
그러나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환경 단체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이번 디젤이 참가하는 작업의 클라이언트가 바로 그런 환경 단체 중 하나였다.
그들은 폐수 정화 시설에 있는 물 정령을 자유롭게 해 주길 원했다.
'리틀 시스터가 생각나네.'
시스가 보호하려 했던 건 현실계의 원소 정령이 아닌 전계 정령이었지만 아마 정신만큼은 같을 테다.
[디젤, 위치 도착했나?]
[아니. 아직 남았어.]
[서둘러.]
제온이 짜증 섞인 말로 명령했다.
정작 짜증이 나야 할 것은 냄새나는 하수도를 걷고 있는 디젤과 제이슨이어야 할 텐데 말이다.
"자네가 좀 참게. 해커란 인간들이 원래 좀 그렇잖나."
제이슨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경험상 해커들은 대부분 좀생이 같은 성격인 데다가 기억력까지 좋아서 뒤끝이 무척 심하다네. 오죽하면 해커한테 미움 사지 말라는 말까지 있지 않은가.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대충 참게."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저딴 사소한 것에 마음을 쓰기에는 다른 중요한 일들이 더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무례한 짓을 지켜보고만 있을 건 아니었다.
디젤이 정한 어떤 선을 넘는 순간 제대로 된 반응을 보여 주려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까 물어보려던 게 있었는데 말이야...."
"말씀하세요."
"그... 자네가 정말 백웅을 깨운 그 착귀갑사인가?"
"예, 뭐.... 그렇습니다."
디젤의 대답에 제이슨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정말이었군! 백웅의 원래 모습은 어땠나? 정말 크기가 작은 산정도 되었나?"
"산까지는 아니었고, 적당한 빌딩 정도는 되었죠."
"세상에, 빌딩이라니.... 생김새는 어땠나? 얼굴이 북극곰 같다는 말이 있고 실제로는 회색곰에 가깝다는 말도 있던데."
"북극곰하고 비슷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의 일방적인 질답 시간을 가진 이후, 이번엔 역으로 디젤이 물었다.
"백웅에게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까?"
그러자 제이슨이 너털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세상에 백웅에게 관심이 없는 오크가 어디에 있겠나."
"그렇습니까?"
"그렇지. 힘을 신성시하는 오크들이 힘 그 자체를 상징하는 백웅에게 끌리는 건 당연하지."
백웅이 힘을 상징한다라.
디젤은 그날 밤의 전투를 다시 떠올렸다가 살짝 몸서리쳤다.
"아무튼, 알려 줘서 고맙네. 나도 언젠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군."
"긴 잠에서 깨어나 활발히 활동 중이니 언젠가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러면 소원이 없겠어!"
그렇게 대화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번엔 오크가 제온에게 연락을 취했다.
[도착했네.]
[왜 이렇게 굼떠?]
[하수도가 생각보다 질척여서 말이야.]
[그럼 물건 설치하고 다시 연락해.]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하수도가 모이는 넓은 공동이었다.
그 한가운데로 걸어간 제이슨이 등에 메고 온 둥그런 기계장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변에 정령을 꼬이게 하는 장치랬지.'
설치를 마친 오크가 제온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장치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동을 시작했다.
디젤은 곧바로 주변에 있던 정령들에게서 반응이 오는 것을 느꼈다.
〈아르, 괜찮아?〉
저 주파수에 아르까지 영향을 받을까 조금 걱정이 되어 품속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전계 정령에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지, 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디젤을 쳐다볼 뿐이었다.
"흠, 벌써 정령들이 반응하는 것 같구먼. 얼른 나가세나."
제이슨은 피지컬 가드이면서 동시에 박수무당을 겸해서인지 정령 감응력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뒤를 돌아 하수구를 빠져나가려던 순간.
'뭔가 이상한데. 이건 너무 과해.'
수상한 기운을 느낌과 동시에, 뒤쪽에서 처음 들어보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음의 원인을 마주한 제이슨이 차마 무기를 손에 들지도 못한 채 중얼거렸다.
곧 깊이 고여 있던 하수도의 물이 꾸물거리며 어떤 형상을 취하기 시작했다.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무인 공장 지대
여인의 모습을 한 정령이 물보라로 된 머리칼을 찰랑이며 제 앞에 놓인 두 생명체를 주시했다.
"최, 최소 5형 이상 정령이야!"
정신을 차린 제이슨이 방패를 펼쳐 들며 말했다.
"전투는 예정에 없었어! 내가 막고 있을 테니 빠져나가게!"
그러면서 디젤의 앞으로 나섰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제이슨과는 달리 디젤은 평온한 표정으로 물 정령을 관찰하고 있었다.
'흠.... 저 정도가 5형 정령인 건가.'
숫자가 높아질수록 강해지는 원소 정령의 등급 중 5형은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한번 붙어 보고 싶었지만, 내일 있을 작업에는 저 정령이 필요했다.
지금 무력화시켜 놓는다면 애써 이 깊은 하수구까지 온 게 헛수고가 될 테니까.
"먼저 나가게!"
제이슨은 물 정령이 뿜어낸 고압의 물줄기를 방패로 막아 내며 외쳤다.
그가 나서지 않아도 저 공격이 디젤에게 상처를 입힐 리는 없었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제이슨은 제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적어도 이 남자는 믿을 만할지도.'
처음 만난 오크에 대한 짧은 감상을 남기고는 뒤를 돌아 하수구 밖으로 향했다.
방패를 든 제이슨은 디젤이 멀리 몸을 피하는 걸 확인하며 끝까지 물줄기를 막아 내더니 이내 자신도 발걸음을 돌렸다.
* * *
잠시 뒤, 쓰러져 가는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
먼저 도착해 있던 알프레드 박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그가 다녀온 곳은 하수도가 아니어서 그런지 디젤과 제이슨만큼 엉망진창인 꼴을 하고 있진 않았다.
"괜찮네. 하천 쪽은 어땠나? 우리랑 같은 장치를 설치했을 텐데."
"저는 다행히 별일 없었습니다."
[안드로이드 쪽은 아직 가동을 안 했으니까.]
제온이 아파트 입구에서 걸어 나오며 중얼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제이슨이 제온을 향해 호소하듯 묻자,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가끔 예상 밖의 사고가 일어나고는 하지. 뭐가 불만이야? 그런 일에 대처하라고 돈을 받는 건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확실히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었다.
디젤이 그런 생각으로 말했다.
"이건 사고가 아니라 네 실수잖아."
[그게 무슨 헛소리야?]
"기계에 수치를 입력할 때 계산을 제대로 못 한 것 같던데."
[뭐? 내 수치는 정확했어!]
"그렇겠지. 방금 거기가 어디 한적한 시골에 있는 하수도였다면 말이야."
하수구에서 빠져나오기 전, 디젤은 새로 얻은 전계 투사 능력으로 제이슨이 설치한 기계를 살펴보았었다.
"여기는 과거에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 살던 아파트 단지였어. 그러니 영적 에너지 파동값을 절반 정도로 낮췄어야 했다."
그때 분석했던 결과들을 읊자, 제온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혹시 정령을 상대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건가?"
아니면 일부러 그랬다든지.
하지만 그런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오늘 작업은 이걸로 끝이니까 이만 해산해!]
그러더니 씩씩거리며 저 멀리 뛰쳐나간다.
그를 지켜보던 제이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고, 알프레드 박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길을 나섰다.
* * *
[건방진 놈. 건방진 새끼. 건방진 망할 새끼.]
어두컴컴한 방에 기계음으로 된 혼잣말이 울린다.
이어 너저분한 침대에 가면 하나가 툭 떨어졌다.
"지가 뭔데.... 씨이...."
그러자 앳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린다.
"지가 뭔데 잘난 듯이 설교질이야...? 이번 작업은 내가 리더인데, 내가 이번 작업을 이끌어 가는 중심인데. 우연찮게 팀원 잘 만나서 작업 몇 번 성공한 거 가지고 기고만장해져서는 어디서 리더한테 두 눈 부릅뜨고 따박따박 설교질을.... 감히 나한테에에에... 꺄아아아악!"
제 분을 참지 못하고 허공에 쇳소리를 꽥 질렀다.
그러다 황급히 화장실로 향하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우웩! 우웨에엑!"
한참 동안 토사물을 게워 냈다.
"허억, 허억.... 그 눈, 그 표정, 다 기억해...."
비틀비틀 거실로 나온 제온은 책상에 놓인 사이버덱을 거칠게 집어 들었다.
이어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손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좋아. 내가 다 망가트려 줄 거야. 그 자신감 넘치는 얼굴, 어떻게 바뀌는지 보자고. 응? 볼만 할 거야. 정말로. 안 그래?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 * *
작업 당일, 경기 북부 무인 공장 지대 근처.
디젤은 사람이 직접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접선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이 일대에 내려 달라는 손님은 또 오랜만이네요. 여기 주변은 죄다 기계로만 돌아가는 자동 공장이라서 말입니다. 알고는 계시고 오신 거죠, 손님?"
택시 기사라는 직업은 자율주행 자동차와 안드로이드의 등장으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기계를 믿지 못하는 부류들이 억척스럽게 이런 택시만을 이용했기에 아직 소수의 운전기사만큼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 사회가 피폐해진 것도 다 그 기계 놈들 때문입니다. 그놈들이 세상을 지배하기 전에는 얼마나 살기 좋았다고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여기는 인간 세상을 멸망시킨 전초기지 같은 곳이에요. 길도 어두컴컴하니, 완전 악마의 소굴 같잖아요."
'빨리 탈것을 사야 되겠어.'
디젤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 택시 기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짐했다.
그가 굳이 사람이 운전하는 택시를 탄 건 이유가 있었다.
기업이 운영하는 안드로이드 택시 서비스는 해킹으로 지우기 번거로운 기록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런 택시를 타고 작업 장소 근처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타고 있는 택시는 기본적인 운전 보조 프로그램은커녕, 내비게이션조차 달리지 않은 탈(脫)전자화 택시였다.
"어디쯤 세워 드리면 될까요?"
"세 블록쯤 더 가서 세워 주십시오."
"예이, 알겠습니다."
디젤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내릴 수 있게 미리 큐빗이 담긴 지갑 카드를 꺼내 준비했다.
"무슨 일로 여기 오신 건진 몰라도 조심하세요. 이 근방에는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으니까요."
근거 없는 헛소문에 디젤이 눈살을 찌푸리자, 택시 기사는 그걸 흥미로워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신나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옛날 3차 세계대전 때 이 근방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대요. 그래서 여기 귀신이 그렇게 많이 꼬였었다네. 얼마나 많았는지 침공이 멈춘 이후로도 한동안 착귀갑사들이 여기서 아주 살다시피 했다고 그러더라고. 근데 그래도 귀신 놈들이 워낙 많으니까 다 처리는 못 하고, 그대신 사람 안 사는 무인 공장 지대로 싸악 다 덮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쪽도 조심하시라고. 혹시 알아요? 정말 귀신이 나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귀신을 처리하기 위해 공장으로 덮었다니.
놈들은 그런 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택시 기사는 중얼거리던 말보다 차를 더 먼저 멈춰 세웠다.
디젤은 그가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기억에 혼란을 주는 향수를 큐빗 카드에 뿌린 뒤에 건넸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혹시 귀신 쫓는 부적이라도 필요하시면 제가 아주 용한 곳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연락처라도.... 어.... 어...."
마법이 효력을 발휘하자 택시 기사는 약간 멍한 얼굴이 되더니 눈을 천천히 끔뻑이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의 저항력만 있더라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마법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정신계 용품.
하지만 일반인인 택시 기사에게는 효과가 제대로 먹혀들었다.
저 남자는 곧 자신이 여기에 왜 왔는지 완전히 잊어버리고는 원래 왔던 장소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택시에서 내린 뒤에 차가 멀리 떠나는 것까지 확인한 디젤은 발걸음을 옮겼다.
접선지까지는 여기서 조금 더 걸어야 했다.
그렇게 걷고 있자니 품속에서 아르가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아르, 불편하다.〉
점점 가까워지는 공장 지대에서 대량의 기계 신호들이 잡히자 조금 힘든 모양이다.
〈잠깐 전계로 돌아가 있어. 이번 작업은 굳이 너까지 나설 필요 없으니까.〉
〈아님. 주인은 아르가 필요함.〉
그 말에 디젤이 아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짜식. 조금만 참아. 돌아가서 찌르 잔뜩 줄 테니까.〉
그 말에 아르는 눈을 반짝이며 다시 품속으로 들어갔다.
* * *
무인 공장 지대 입구 근방.
시커먼 밤하늘 아래 세 착귀갑사가 모였다.
"제온은 어디 있습니까?"
"오늘은 뒤에서 관제 지시를 하겠다는군."
해커가 굳이 전면에 나설 필요는 없었지만, 현장에 함께 있을 때 얻는 이득은 생각보다 컸다.
전계를 통한 해킹이 아니라 디바이스에 직접 잭을 연결하여 해킹하는 경우, 기기에 설치된 몇몇 방화벽을 우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는 통신으로 말을 주고받는 것보다 본인의 눈으로 확인, 대처하는 게 훨씬 빠르고 정확했다.
"그래도 근처에 있긴 하다네."
제이슨이 북쪽에 있는 꽤 높은 폐건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제온, 우리 보이나?]
[그래. 잘 보인다, 오크.]
'저기 숨어 있는 건가.'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
저 고약한 성격이면 분명 현장에서도 걸리적거릴 게 분명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슬슬 움직이실까요?"
알브레드 박의 말에 디젤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이어 나머지 두 갑사들이 그를 따라 공장 지대 입구로 향했다.
이곳에 나열된 무채색 공장들은 미관이라고는 일도 신경 쓰지 않은, 오로지 효율성만 극대화한 건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밤이 어둠을 짙게 깔아 그들의 울퉁불퉁한 단점들을 가려 주자 나름 볼만한 야경이 만들어졌다.
본격적으로 공장 지대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 중에서 매캐한 화학물질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에 제이슨과 알프레드 박은 호흡계에 달린 여과 필터를 가동했고, 디젤은 미리 준비해 온 특수 마스크를 착용했다.
공기의 질뿐 아니라 소음 또한 그냥 참아 줄 수 없는 지경이었다.
톱으로 철을 자르는 소리, 프레스로 무언가를 누르는 소리, 유압 실린더에서 증기가 빠져나오는 소리....
만약 여기서 일하는 사람 인부가 있었다면 몇 시간 내에 심각한 청력 이상을 호소했을 것이다.
[비가 올 거 같은데.]
제이슨의 말대로 하늘에서 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졌다.
이 지대에서 내리는 비는 절대 맞으면 안 됐다.
공장에서 뿜어지는 온갖 유독성 물질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제 쪽으로 오세요.]
디젤이 손가락을 하나 치켜들더니 그 끝에 마법을 새겨 넣고는 우산처럼 펼쳤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강한 독성을 띤 빗방울은 디젤이 두른 반구형의 마법장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흠. 이건 또 무슨 마법인가?"
"시중에서 파는 마법 우산입니다."
정확히는 그 우산에 새겨져 있던 기본적인 방호계 마법을 응용한 작업물이지만, 굳이 설명할 것까지는 없었다.
"이렇게 땅이 젖으면 우리에게는 좋겠네요."
"그렇긴 한데, 많이 내리지는 않을 거야. 오늘 예보에 비는 없었거든. 아마 간헐적 소나기겠지."
오크의 말처럼 목적지인 폐수 정화 시설이 보일 때쯤,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뚝 그쳤다.
시설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브리핑 정보에 의하면 높이가 10미터쯤 되는 데다가 벽 끝에는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까지 달려 있었다.
[여기인가요? 벽이 생각했던 것보다 높아 보이네요.]
알프레드 박이 벽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곧바로 제온이 반박했다.
[아니, 정확히 내가 예상한 대로야.]
한바탕 내린 비에 젖어 있어 벽면을 타고 올라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센서 해킹해서 무력화할 테니 뛰어넘을 준비해. 넘는 위치 확인 잘하고.]
제온은 팀원의 가상 인터페이스에 위치 정보가 담긴 신호를 찍었다.
[제이슨이 완력으로 다른 사람부터 올려보내. 안드로이드 먼저, 그다음 마법사, 마지막으로 오크. 착지하는 위치 계산 정확히 하고, 발 디딜 때 나는 소음 주의해.]
그에 제이슨이 벽 근처로 다가가 다른 이들을 올려 주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자, 힘껏 딛게.]
오크의 팔 근육에는 강화 의체가 설치되어 있었는지 입고 있던 겉옷이 터질 것처럼 잔뜩 부풀어 올랐다.
[3, 2, 1. 지금.]
제온의 신호에 맞춰 착귀갑사의 몸이 담장 위로 뛰어 올랐다.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폐수 정화 시설
담을 넘어 시설의 뒷마당에 잠입하자, 그들을 마주한 건 참을 수 없는 악취였다.
[윽, 무슨 냄새가....]
제이슨이 코를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후각 센서 끄는 게 좋을 거야. 혹시 코가 살덩이로 되어 있으면 유감이고.]
[공장 지대랑은 비교도 못 하겠군. 돌아가자마자 하나 달아야겠어.]
그렇게 적응되지 않는 악취를 어찌어찌 버텨 내고 있자 제온이 인터페이스에 신호를 찍으며 말했다.
[전방에 자율 포탑 주의해.]
해커의 말대로 수준 높은 자율 포탑 세 대가 시설을 감시하고 있었다.
착귀갑사들이 착지한 뒷마당은 정확히 포탑들의 사각지대였다.
디젤이 전계 투사로 포탑을 살펴보자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정보들이 나타났다.
6등급쯤 되어 보이는 방화벽으로 보호되고 있는 데다가, 내부에는 침입에 대항하는 프로그램까지 설치되어 있어 해킹으로 무력화하는 건 무척 어려워 보였다.
[슬슬 올 때가 되지 않았나?]
제이슨이 시간을 살피며 물었다.
사전 작업 때 번거롭게 하수구까지 들어갔던 것은 모두 저 기계들 때문이었다.
아무리 성능 좋은 포탑이라도 막아 내지 못하는 건 있었으니까.
그건 바로, 물량 공세였다.
'온다.'
가장 먼저 기운을 알아차린 건 디젤이었다.
멀리서 느껴지는 옅은 떨림.
마치 스피커에서 들리는 커다란 소리를 귀가 아닌 피부의 촉각으로 느끼는 것처럼, 정령들이 내뿜는 감정이 사방으로 넓게 퍼진다.
[준비하게.]
제이슨 또한 그런 기운을 느꼈는지 방패를 왼손에 들며 자세를 취했다.
곧 주변에 울리던 떨림이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아우성치듯 정령들의 감정이 터져 나왔다.
하수 배출 시설로 흘러가던 물이 정반대 방향으로 솟구치며 너울을 일으킨다.
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건 저게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는 증거기도 했다.
저 넘실거리는 물결은 각자의 감정과 의지를 지닌, 이 세계가 생겨났을 때부터 기거하던 '령'이었다.
무방향으로 이리저리 흘러 다니던 거센 물줄기가 한데 모이더니 형상을 취했다.
어떤 것은 해마의, 어떤 것은 어인의, 어떤 것은 촉수가 달린 연체동물의....
다만 어제 나타난 물 정령과는 그 빛깔이 조금 달랐다.
[잠깐.... 저것들, 그냥 물 정령이 아닌데.]
제이슨이 그런 이상함을 감지하고 보고했다.
[저건 오염된 폐수 정령이잖나.]
원래의 물 정령이 띠어야 할 투명하고 맑은 물 대신 시커멓게 오염된 폐수가 그들의 몸을 채우고 있었다.
[설마 어제 불러들인 물 정령들이 벌써 폐수가 되어 버린 건가?]
[우리 계획이랑은 별 상관없잖아.]
제이슨의 말에 제온이 퉁명스러운 투로 답했다.
[상관없긴, 오염된 정령은 우리가 제대로 이용할 수가....]
투두두두두...!
오크의 말을 자율 포탑의 총격음이 가로막았다.
곧 이리저리 날뛰는 폐수 정령들과 그것을 제압하려는 포탑의 불꽃으로 주변이 혼돈에 빠졌다.
[이제 알람이 울릴 겁니다.]
알프레드 박의 말과 함께 요란한 경보 소리가 시설 전체에 울렸다.
잠시 뒤, 공중에서 헬기 한 대가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착륙했다.
"1팀 하수 배출구 쪽으로! 2팀은 이곳을 진압한다!"
얼굴에 시커먼 방독면을 쓴 진압팀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제 착귀갑사들이 나설 차례였다.
[타깃 정확히 잘 잡아.]
제온이 주의를 주었다.
최우선으로 노려야 할 것은 정령술사.
손에 들고 있는 기다란 정령 구속구 덕에 쉽게 알 수 있었다.
'정확함이 필요한 마법이라면.'
디젤이 여러 선택 중 가장 효율적인 것 하나를 골랐다.
이어 푸른 전격 마력을 마법으로 구체화했다.
'번개의 창'이라 불리는 간단한 투사체 마법.
파지직, 요동치는 힘이 손아귀에서 이리저리 튄다.
'조금 변형해 볼까.'
전격으로 된 창 끝을 여러 갈래로 나누었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쉽사리 시도할 수 없는 조형.
하지만 설하만년빙을 제 것으로 만들며 깨달은 섬세한 마력 조작력이 있다면 손쉽게 가능한 일이다.
마법이 완성되자, 그제야 수상한 기운을 눈치챈 정령술사들이 디젤 쪽을 바라보았다.
"저기 마법사가...! 으그그그그극!"
그가 한 문장을 제대로 구사하기도 전에,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창이 정령술사들에게 내리꽂혔다.
전격에 맞은 다섯 명의 정령술사들은 감전으로 인한 발작을 일으키더니 자리에 쓰러졌다.
[워우! 이거 엄청나구먼.]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제이슨이 근육을 잔뜩 부풀리며 말했다.
[이번엔 내 차례군!]
둥그런 방패를 텅텅, 두드리더니 빈손을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묵직한 몽둥이 하나가 번쩍 나타났다.
"하하! 김 서방 아닌가! 여기는 또 어디더냐!"
"오랜만이오, 방망이 양반."
"오냐, 반갑다! 이 사람 죽이는 선무당 놈아!"
제이슨이 방망이와 짤막한 소회를 나누고는 방패를 앞세워 적진 한가운데로 돌진했다.
이어 둔기를 크게 휘두르자, 그 물건이 제 입으로 '뚝딱!' 소리를 냈다.
몽둥이질이 땅에 닿자, 쩌저적 소리와 함께 금빛과 은빛 가시가 솟구쳤다.
'기적의 세계란 오묘하네.'
[사격하겠습니다.]
알프레드 박이 기관단총을 견착하며 말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제이슨이 흩트려 놓은 진형 사이로 방독면을 쓴 정령술사들의 머리통이 터져 나간다.
안정적으로 현장을 하나씩 정리해 가던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
곧바로 그걸 알아챈 디젤이 얼굴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렇게 한눈을 팔고 있는 디젤에게 해골마 모양을 한 폐수 정령 하나가 달려들었다.
"조심하게!"
달려드는 정령을 발견한 제이슨이 외쳤다.
하지만 다급한 오크의 외침에도 디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방금 뭔....'
"디젤!"
해골마의 몸체가 디젤에게 부딪히기 직전.
그는 쳐다도 보지 않고서 제게 달려드는 폐수 정령에게 전격 마법을 날렸다.
파지직...!
산탄처럼 퍼져 나간 번개 줄기가 제 주인을 해치려는 대상을 강타한다.
그 엄청난 에너지에 폐수 정령은 흔적도 없이 산화해 버렸다.
"워우...."
"음... 저놈, 보통 마법사는 아니구나."
다급히 달려 온 제이슨이 말하는 방망이를 들고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기를 소환 해제한 뒤 디젤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나?"
"방금 뭔가 느껴지지 않았습니까?"
"응?"
오크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디젤을 바라봤다.
[외부는 다 처리됐습니다!]
[그 정도면 됐어. 이제 이동해.]
알프레드 박의 보고에 제온이 다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하프 안드로이드가 건물 입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입니다!]
그걸 확인한 제이슨이 디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일단 작전대로 이동부터 하지."
'....'
마지막까지 주변을 둘러보던 디젤 또한 그들을 따라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아르, 아까 뭔가 못 느꼈어?〉
〈음...?〉
아르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디젤을 바라보았다.
'아르도 못 느낀 거면 전계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야. 거기다 제이슨까지 못 느꼈다면....'
방금 그곳에서 디젤이 느낀 것은 어떤 심상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기분 나쁜 심상.
처음에는 폐수 정령들이 내보내는 부정적인 감정 때문인 줄 알았다.
오염된 정령에게서 나온 감정들이 방금 그 공간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었으니까.
하지만 분명 그것과는 또 다른 무언가였다.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이제 클라이맥스야.]
제이슨이 몸을 숙인 채 조용한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끝까지 집중하자고.]
이번 작업의 목적은 이 시설에 갇혀 있는 정령들을 풀어 주는 것이었다.
정령에게 자유를 주는 것, 그러니까 계약된 정령을 해방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계약자가 직접 계약을 파기하거나.
다른 하나는 계약자가 사망하거나.
당연히도 이번 작업에서는 후자의 방법으로 정령을 자유롭게 할 계획이었다.
[이 앞일세.]
건물 3층으로 잠입한 착귀갑사들은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널찍한 로비를 앞에 두고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그게.... 정령 폭주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무슨 폭주길래 진압팀으로 제압이 안 돼?"
"침입자도 있는 것 같다는데 저도 잘...."
"쯧, 소장님까지 나서면 큰일인데...."
시설 내부에는 연구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흰 가운을 입고 허둥지둥 돌아다니고 있었다.
[역시 그냥 폐수 정화 시설이 아니었군.]
제이슨이 중얼거렸다.
브리핑에 따르면 이곳은 폐수 정화 시설로 위장한 정령 연구 기관이었다.
[따라오게. 바로 앞이니.]
그렇게 더 안쪽으로 침입해 들어가자, 사방이 새하얀 벽지로 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특히 천장이 무척 높았는데, 이 연구 기관에서 가장 커다란 실험실이었다.
[세상에....]
위쪽 난간에서 실험실을 내려다본 알프레드 박이 안드로이드답지 않은 감정 표현을 뱉었다.
[환경 단체가 눈이 돌아간 이유가 있었구먼.]
실험실에서 그들이 마주한 것은 거대한 수조에 담긴 채 고통스러워하는 수많은 물 정령들이었다.
그것도 현신을 풀지 못하도록 몸에 구속구가 채워진.
그뿐 아니다.
한쪽 구석에서는 여인의 모습을 한 물 정령 하나가 연구원들에 의해 해부되고 있었다.
[정령도 해부라는 걸 할 수 있었습니까?]
알프레드 박의 질문에 제이슨이 인상을 찌푸렸다.
[글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아무래도 억지로 현신시킨다면 물질적인 육체가 생기는 거니까 그렇지 않겠나?]
'끔찍하군.'
디젤이 불쾌한 기분을 토하며 중얼거렸다.
그에게는 해부당하는 정령이 내지르는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옆에 있던 제이슨 또한 디젤과 같은 것을 느꼈는지 주먹을 꽉 쥐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령술사라면 정령들의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텐데,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사이코패스들인가?]
그렇게 상황을 살피고 있자니 제온에게서 연락이 왔다.
[곧 타깃 들어온다.]
[해킹은?]
디젤이 묻자 제온이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지금 처리 중이야. 해킹 완료되면 저 수조 안으로 정령들이 쏟아질 거다.]
[흠.... 나는 좀 걱정되는데.]
[뭐?]
제이슨이 해커의 짜증에도 말을 이어 나갔다.
[폐수 정령들 때문에 그러네. 오염된 정령은 감정이 너무 강해. 그것들을 이렇게 폐쇄된 공간에 모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그럼 어떻게 하려고? 이번 타깃이 어떤 놈인지 몰라서 그래? 무려 메가 코프 산하 연구기관인 블랙 워터 인스티튜트의 연구소장이야. 저 많은 정령을 동시에 제어하는 레벨 4 정령술사를 그냥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아?]
[크흠....]
오크가 입을 다물자 제온이 말을 이었다.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별일 없을 테니까.]
사뭇 일방적인 논쟁이 끝나자,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타깃으로 보이는 여성이 나타났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야?"
"시에나 소장님!"
검은 피부, 뾰족한 귀, 갸름한 몸매.
이번 작업의 주요 타깃인 다크 엘프가 실험실로 걸어 들어왔다.
"그게... 건물에 누군가 침입한 것 같다고 합니다."
"침입?"
소장은 그 단어를 듣자마자 연구원을 밀치며 해부 중인 정령에게 다가갔다.
"잠시만요! 그건 지금 연구가 거의 끝나 가는 정령...!"
다크 엘프는 제게 호소하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는 정령의 몸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거의 반쯤 죽어 가는 커다란 7형 정령이 액체로 해체되어 소장의 몸 주변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이, 이건 저희가 몇 개월 동안 연구하던 실험체입니다!"
"닥쳐! 이딴 대학원생 수준 연구보다 내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그러더니 수조를 들여다보며 말한다.
"하나 더 꺼내. 최소 6형 이상으로."
다크 엘프의 말에 수조에 담긴 정령 하나가 구속구에 잡혔다.
기계가 버둥거리는 그것을 난폭하게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데.
[해킹 끝났다. 작업 시작해.]
제온의 말과 동시에, 수조에 연결된 파이프에서 폐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블랙 워터 인스티튜트
"이게 무슨...."
다크 엘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서렸다.
"소장님, 소장님!"
곧 수조 밖으로 흘러넘친 폐수 정령들이 형상을 갖춰 갔다.
이어 연구실 바닥을 뱀처럼 기어 다니며 주변에 있는 연구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어떤 멍청한 것들이 폐수 정령을 이렇게 좁은 공간에...."
소장은 곧바로 뒤를 돌아 연구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문이, 문이 잠겼습니다!"
"...."
그와 함께 뒤쪽에서 드르륵 소리가 들렸다.
알프레드 박의 기관단총에서 뿜어진 수십 발의 탄이 정확하게 시에나의 뒤통수로 향했다.
하지만, 한 발의 탄환도 명중하지 못한다.
그녀 주변을 둥둥 떠다니던 고밀도의 액체가 총알을 전부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너희였구나. 이 쥐새끼 같은 놈들."
'음.... 정령을 저렇게도 다룰 수 있군.'
이젠 정령이라 부르기도 어색할 정도로 변형이 가해진 액체 속에 납탄 무더기가 힘을 잃고 부유했다.
시에나의 효율적인 정령 운용은 사뭇 놀라웠다.
필요할 때마다 제 마음대로 형태를 변형하여 사용하는 도구.
그게 시에나라는 술사가 내린 정령의 정의인 것 같았다.
[그런 일반적인 탄으로는 어림도 없을 걸세.]
제이슨이 방패를 허리춤에 메더니 3층 높이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이어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양손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시퍼런 칼날 두 개가 달린 작두가 그의 손에 쥐어진다.
쌍 작두는 건장한 오크가 두 손으로 들어야 할 정도로 거대했다.
"멍청한 것들. 지금 네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뭔지 모르는 거냐?"
"짓거리? 하! 이건 '정령 해방'이라고 부르는 고오오결한 일이다!"
제이슨이 작두를 질질 끌며 시에나에게 돌진했다.
그와 동시에 알프레드 박의 소총에서 발사된 수십 발의 수중탄이 공중을 가른다.
"정령 해방?"
이번엔 다크 엘프의 손에서 뻗어 나간 액체가 원뿔 모양으로 소용돌이 쳤다.
그 고수압의 물결에 탄환들이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튕겨 나갔다.
"흡...!"
뒤이어 오크가 작두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시퍼런 작두날에 노란 벼락이 파지직, 내리치며 기적의 힘이 담긴다.
"멍청한 것들...!"
정령술사가 손짓하자 새하얀 물보라가 그녀 앞으로 동그란 원을 이뤘다.
그 거센 물결이 원형 방패가 되어 무섭게 내리꽂히는 작두의 방향을 가볍게 바꾼다.
콰광! 땅에 처박힌 작두에서 의미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
"네놈들은 지금 본인들이 하는 짓이 뭔지도 모르고 있어!"
그녀의 호통과 함께 방금까지 방패로 쓰인 물결이 뾰족한 가시처럼 변하여 주변으로 파열된다.
"이런...!"
제이슨이 작두를 손에서 버리고 황급히 뒤로 물러나자, 원래 서 있던 자리에 액체로 된 가시들이 우수수 날아와 박혔다.
한 발만 더 늦었어도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레벨 4 정령술사는 저 정도인 건가.'
디젤은 한발 물러서서 전투를 흥미롭게 관람하고 있었다.
나름 적절한 공격 방법들이 한순간의 판단에 의해 간단히 허사가 되어 버린다.
저것이 바로 레벨 4라고 불리는 실력자의 전투.
레벨이라는 건 단순히 기술 위력의 총합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에나라는 정령술사가 그걸 몸소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실전에서는 기술의 강함보다는 저런 빠른 상황 판단과 시기적절한 응용이 훨씬 더 중요했다.
'몇몇은 나도 써 먹을 수 있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자, 실험실을 마구잡이로 떠돌며 학살을 자행하던 폐수 정령들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시에나는 그걸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봐라. 이제 너희가 저지른 실수가 뭔지 깨닫게 될 거다."
"실수? 아니, 계획이다...!"
제이슨이 말끝을 살짝 떨며 외쳤다.
계획이라.
분명한 건 이번 작전의 계획은 저게 아니었다.
디젤은 오염된 정령들이 내뿜는 감정이 한데 모여 깊은 한(恨)으로 바뀌는 걸 느꼈다.
원래 정령들에게서 나오는 감정보다 몇 배는 강한 '원한'으로 말이다.
계획대로라면 저 자리에는 폐수 정령이 아니라 자유로운 물 정령들이 있어야 했다.
그것도 이 연구소의 인간들에게 화가 잔뜩 난 물 정령이.
착귀갑사들은 그런 정령들을 이용해 이곳을 전부 쓸어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폐수 정령은 그렇게 다룰 수가 없었다.
오염되어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정령들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적대시했기 때문이다.
곧 폐수 정령의 응집체가 끓는 듯한 소리를 내뿜으며 몸체를 일으켰다.
"윽, 이 망할 놈들...."
시에나가 건물 3층 높이를 훌쩍 넘긴 그것을 마주했다.
정령이 내뿜는 한이 어찌나 강한지, 무정한 성격의 다크 엘프조차 옅은 신음을 내뱉을 정도였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해 보이는데....'
작업의 최종 목표는 연구소장 시에나를 제거하는 것이지만, 디젤은 그 뒷일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저 응집체는 제 앞에 놓인 레벨 4의 정령술사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강한 정령이었으니.
시커먼 거인의 형상이 노호를 내지르며 두꺼운 액체로 된 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피하게!]
파괴적인 공격에 실험실이 뒤흔들린다.
그와 함께 콘크리트가 무너져 내리면서 건물 전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안 돼.... 내 시설이...!"
시에나가 허망한 표정으로 사방을 살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연구원들의 시체, 무너져 내리는 콘트리트 기둥, 어느새 구속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된 물 정령들까지.
그녀가 다음의 행동을 한 것은 어쩌면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은 몇 되지 않았으니.
"너희... 이 개 같은 새끼들아.... 여기서 살아 나갈 생각 하지 마라."
섬뜩한 목소리로 선언한 그녀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제 심장을 찔렀다.
"크윽...."
그와 함께 시에나의 통제 속에 있는 모든 물 정령들이 물보라로 변해 그녀를 고치처럼 감싼다.
'뭐 하는 거지?'
정령술사 주변을 맴돌던 새하얀 물길에 새빨간 핏빛이 섞였다.
그것은 목숨을 바쳐 단 한번만 사용할 수 있는 정령술사의 마지막 발악.
계약한 모든 정령을 자신의 몸속으로 불러들여 순식간에 한 단계 높은 격을 지니게 되는 비급.
'술사의 정령화(精靈化)'였다.
곧 적색 고치가 사방에 피를 뿜으며 터지더니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했다.
"하찮은 새끼들."
〈하찮은 새끼들.〉
정령의 것도 아닌, 그렇다고 다크 엘프의 것도 아닌 목소리가 울린다.
그녀의 위협을 감지한 건지, 폐수 정령의 응집체가 시에나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시에나는 코웃음치며 칼날같이 변형된 팔로 응집체를 크게 베어 넘겼다.
수압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놈의 팔뚝을 가르자, 폐수 정령의 몸체가 뭉텅 잘려 나갔다.
[저 응집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협공해야 하네!]
제이슨이 다시 방패를 치켜들고는 시에나에게 향하려 했다.
[아뇨.]
하지만, 디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뭐하는...?]
[뒤에 계십시오.]
[뒤라니?]
지금까지 그가 잠자코 지켜본 것은 레벨 4 정령술사의 마법을 더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에나의 마력식에서는 배울 게 무척 많았으니까.
지난 몇 달간 전계에서 얻은 정보들보다 방금 몇 번의 합으로 알게 된 마법의 질이 비교할 수도 없이 좋았다.
'원래는 뼈에 골수까지 빼 먹을 생각이었지만....'
그러자고 여기서 더 지켜보고만 있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다.
그런 생각으로 디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새로 얻은 냉기의 마력을 끌어 올린 채로.
디젤의 발자국을 따라 바닥에 고여 있던 물이 시커멓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마침 그의 눈앞에 있는 두 타깃은 새로 얻은 힘을 실험해 보기에 적당한 속성이었다.
'드디어 써 보는군.'
그렇게 디젤은 거대한 폐수 정령과 정령으로 변한 시에나의 사이로 다가갔다.
"뭐지? 정신이 나가 버린 건가?"
[다들 뒤로 더 물러서세요.]
디젤이 팀원에게 경고하자, 오크와 하프 안드로이드가 순순히 말을 따랐다.
"이 벌레 새끼야!"
시에나가 격정을 일으키며 피로 된 물을 뿜었다.
그와 동시에 옆에 있던 폐수 정령이 디젤에게 거대한 주먹을 내리꽂았다.
하지만.
'흑빙지대(黑氷地帶).'
디젤을 중심으로 검은 파동이 일더니, 극한의 한기가 퍼져 나간다.
바닥에 깔린 액체들이 파동과 같은 색으로 쩌저적 소리를 내며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오한의 이미지를 담은 마력을 넓게 퍼트리는 고등급 마법.
일반적인 냉기계 마력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절대영도 구역이 두 정령 사이에 깔렸다.
마력의 최저 냉점을 극한으로 낮춰 주는 속성개화, '흑빙'을 손에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경지였다.
그 혹한에 지성을 잃은 오염된 정령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그저 얼어붙었고.
뒤늦게나마 위험을 눈치채고 서둘러 손을 빼려던 또 다른 정령은.
자신이 부질없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안 돼...! 이 개 같은 새끼! 너만큼은 내가 반드시 죽이고...!"
시커먼 한기가 그녀의 입을 막기 전까지 날카로운 말들이 터져 나온다.
그와 함께 여러 갈래의 위협적인 물줄기들이 디젤을 향해 뿜어졌으나.
얼음 동상이 좀 더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게 될 뿐이다.
"흠...."
디젤은 본인이 일으킨 마법의 여파를 분석해 나갔다.
위력적인 마법인 건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위력엔 물과 냉기라는 극상성의 속성 덕분도 있을 터.
"맙소사...."
"소문으로만 들었던 게 정말이군요...."
뒤에서 믿기지 않는 얼굴을 한 제이슨과 알프레드 박이 나타났다.
"저 두 괴물을 이렇게 간단히 끝내다니.... 자네는 정말...."
"알프레드 한 님께서 말하신 실력 그대로이십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요."
그렇게 착귀갑사들은 한동안 본인의 감상을 내놓았다.
갑작스럽게 어떤 '기운'이 터져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음? 방금 뭐였나?"
디젤과 제이슨의 고개가 거의 동시에 돌아간다.
아까 시설 밖 마당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기운.
이번에는 제이슨마저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그에 디젤은 본능적인 감으로 느꼈다.
'뭔가 잘못됐어.'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다들 왜 그러십니...."
의문을 품으며 그를 쳐다보는 알프레드 박의 머리가.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
디젤은 무언가를 발견한다.
분수처럼 뿜어 나오는 안드로이드의 새파란 혈류 사이에서.
그와 동시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순수한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감히 그 한계를 측정할 수도 없는 깊은 적의에.
온몸에 가시가 박히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방금 터져 나온 부정적인 기운의 원인이 저거였나.
어쩌면 레벨 4의 정령술사가 그렇게 쉽게 제 목숨을 던진 것도.
저 존재가 나타날 것을 예측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어금니를 까드득 깨문다.
그러자 치아에 설치되었던 아티팩트, 칸트라의 여섯 번째 어금니가 발동되며 의식이 각성 상태로 돌입했다.
그 즉시 공간이 한없이 확장되는 느낌과 함께, 주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작동을 정지한 알프레드 박의 몸뚱이가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허나, 그것을 지켜보고 있을 시간은 없다.
하프 안드로이드의 머리를 자른 괴물이 다시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온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공포이자.
착귀갑사라는 새로운 전문가 집단을 탄생시킨 원흉이며.
갑작스레 나타났다가 갑작스레 사라졌기에 '전 인류가 동시에 꾸었던 악몽'이라는 이명을 가진....
'귀신'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이렇게 끔찍한 존재였다니....'
"————!"
송곳니가 촘촘히 달린 커다란 입이 기괴한 소음을 뱉는다.
땅을 딛고 있는 네 개의 발톱은 오직 무언가를 해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날카로웠으며.
발톱과 똑같이 생겼으나 대신 몸체의 앞부분에 달린 두 개의 손톱이
방금 알프레드 박의 머리를 자른 것처럼 디젤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걸 어떻게 피하지?
고민에 대한 대답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내렸다.
강화 마법을 온몸에 쏟아부은 뒤에 공격을 간신히 피해 냈다.
분명 아티팩트로 인해 감각이 확장되어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을 텐데도 귀신의 움직임은 전혀 느려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은?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아니, 저 괴물의 속도라면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여러 경우의 수 중에 하나의 답을 골랐다.
마나 주입기에 들어 있던 액상 마나를 순환계에 모조리 투여한다.
자그마치 일주일치 권장량을 까마득히 넘는 용량이지만 상관없다.
그렇게 한껏 채워 올린 마력으로 마법식을 새겨 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에 새긴 것은 처음 시도해 보는 것이었으나.
눈앞에 있는 적을 상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티팩트의 효과가 끝나 갈 때쯤.
디젤이 허공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자 어떤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물 정령의 기운이.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귀신
"귀신은 어떻게 베는 겁니까?"
남자가 물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다.
"저것들은 총알, 포탄은커녕 마법까지 안 통하고, 온갖 기적으로도 못 죽이는데. 대체 소령님은 어떻게 베신 겁니까?"
그러자 내가.
아니 형이 입을 열었다.
"귀신을 베는 법이라."
이어진 형이 대답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귀신이 내뱉은 끔찍한 울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저, 저게 무슨...."
제이슨은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귀신을 지켜보았다.
"도망치세요!"
디젤의 외침에 제이슨이 화들짝 놀라더니 뒤를 돌아 뛰기 시작했다.
그런 오크를 향해 귀신이 움직인다.
'미친!'
디젤이 황급히 마법을 맺었다.
새파란 전격으로 된 마력 줄기 하나가 디젤과 귀신의 사이에서 번쩍였다.
피해를 주는 것보다 움직임을 멈추는 데에 모든 것을 집중한 '전격의 채찍'.
마력을 있는 대로 때려 박으며 귀신의 손톱과 연결된 채찍 줄기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파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푸른 스파크가 이리저리 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놈의 공격을 완전히 막아 낼 순 없었다.
겨우 공격의 방향을 살짝 흩트려 놓았을 뿐.
"컥!"
원래대로라면 귀신의 날카로운 손톱이 제이슨의 척추를 관통해야 되었으나.
디젤이 전개한 마법으로 등에 깊은 자상을 남기는 데에서 끝났다.
피하 장갑 임플란트가 설치된 데다가 그 위에 방검복까지 착용했지만, 귀신의 칼날질 앞에서는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디젤 덕에 당장 즉사는 막았으나 몇 시간 내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저 오크는 목숨을 잃을 테다.
일단 그거면 족했다.
'왜 귀신이 벌써 나타난 거지?'
귀신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디젤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저것들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 모든 것을 종말로 이끌 거라고.
그렇지만 벌써?
이건 디젤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빨랐다.
'아니면....'
새로 나타난 귀신이 아니라 여태 이곳에 동면 중이던 귀신일 가능성도 있었다.
아마 방금 폐수 정령이 하나로 응집하면서 퍼져 나간 깊은 원한이 놈을 다시 깨웠을 테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무엇인지 추리하기에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아까부터 아무런 말이 없던 팀원.
디젤에게 여러 번 망신을 당한 자존심 강한 해커.
'제온.'
아마도 제온은 디젤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폐수 정령을 한데 모아 응집체란 강력한 적을 탄생시켰을 테다.
하지만 귀신을 불러내는 것까지도 그의 의도였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나중에 반드시 답을 들을 것이다.
일단 눈앞에 들이닥친 적을 처리한 뒤에.
"————!"
끔찍한 귀신의 울음소리가 다시 사방에 울렸다.
놈은 디젤을 쳐다보며 기다란 손톱으로 땅을 긁어 댔다.
그와 함께 디젤이 소환한 정령이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번도 불러내 본 적 없는 종류의 정령이.
과연 자신의 부름에 응할까 하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디젤에게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정령 감응력이 있었으니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급의 정령이 나오냐는 점이었다.
'최소 7형 이상은 되어야 해.'
방금 시에나 소장이 다뤘던 급인 7형.
그 정도는 되어야 저 귀신이란 존재를 상대할 수 있을 테다.
〈후아....〉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정령은 디젤이 기대하던 것 이상의 급이었다.
〈이 얼마만의 부름인지.〉
머릿속에 청량한 목소리가 울린다.
아름다운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인간형 몸.
한 치의 오염 없이 고고하게 흐르는 순수한 물줄기.
그것들만 보아도 평범한 정령들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쪽이 날 불러낸 인간이야?〉
게다가 제대로 된 대화까지 통한다니.
'8형. 아니, 9형인 것 같네.'
몸에 흐르는 힘을 보아하니 그렇게 추정하기에 충분했다.
〈이름은 네레이드. 반가워.〉
자기소개를 마친 물 정령이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귀신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건... 이 땅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던 불경한 존재네.〉
정령 네레이드가 귀신의 부정적인 심상을 읽고는 중얼거렸다.
〈마법사, 설마 나더러 저걸 처리해 달라고 부른 거야?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
〈응?〉
"설득할 시간 없으니까, 미리 사과부터 할게."
디젤은 조금 전 정령술사와의 전투에서 배운 마법식을 곧바로 응용했다.
〈윽, 지금 뭘 하는...!〉
"조금만 참아. 일이 끝나면 곧바로 원래대로 해 줄 테니까."
정령의 힘을 제 몸 쪽으로 끌어당긴다.
단순히 현신하고 있는 액체로 된 육체가 아니라, 그보다 좀 더 근원적인 힘을.
그러자 정령이 산산이 흩어지며 디젤에게 스며들었다.
'큭.... 한데로 모아야 해.'
전혀 다른 성질의 육체가 한데 섞이기 시작한다.
원래라면 수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
하지만 그가 가진 재능은 그 모든 걸 단번에 뛰어넘게 했다.
'이건.... 느낌이 마치....'
전혀 다른 종류의 시야가 뜨인다.
주변에 흐르는 온갖 감정들이 시각적인 형상으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게 정령이 보는 세상인가.'
왜 여태까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싶은 궁금증이 들 때쯤.
그의 안에서 네레이드가 당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법사, 너 지금 나랑 합체한 거야...?〉
"왜. 이런 건 처음인가?"
〈그래...!〉
이 땅에 오랜 세월을 산 9형 정령조차 처음 겪는 경험.
반(半)정령화라 불리는 정령술이다.
만약 시에나라는 정령술사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무슨 반응을 보였을까.
자신이 평생을 걸고 익혔던 정령화를 고작 멀리서 한 번 본 것만으로 완벽히 전개했으니.
그것도 육체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절반 정도만 취하는 응용까지 해냈다.
〈허락도 없이 날 이렇게 무식하게 다루다니....〉
"힘 좀 빌려줘."
〈벌써 빌려 갔잖아.〉
디젤이 손을 들어 새롭게 넘치는 힘을 바라보았다.
형태가 자유롭게 변하는 물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게다가 이 정령은 마을 하나를 통째로 수장시킬 힘을 지닌 9형 물 정령.
디젤의 손아귀에 정령의 육체였던 물이 응축되었다.
〈마법사, 온다.〉
정령의 경고와 함께, 귀신이 달려들었다.
다시 보아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그에 디젤은 손에 모인 정령의 힘을 동그란 구의 형태로 넓게 회전시켰다.
놈의 공격을 완전히 막아 내려는 것은 오만이다.
두꺼운 강철마저도 두부처럼 꿰뚫는 손톱이니.
그러나 찌르는 공격에는 분명한 단점이 있었다.
한 점으로 힘을 집중시킨 만큼 범위가 무척 좁았기에, 슬쩍 흘리거나 피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마치 빗맞은 총알처럼 말이지.'
귀신이 제 손톱을 물의 장벽 안으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하지만 고속으로 흐르는 액체에 방향을 살짝 잃는다.
그 살짝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냈다.
놈의 공격이 옆으로 빗나가며 허공을 가른다.
그러자 귀신이 뒤로 멀리 도약하며 자리를 물렸다.
"————!"
다시 끔찍한 소음을 내뱉더니 손톱을 기괴하게 변형시켰다.
〈지금 자기 손톱으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거야.〉
정령의 말과 함께 귀신의 손톱에서 여러 개의 가시가 나뭇가지처럼 툭툭 돋아난다.
'곧바로 전략을 수정하는 건가.'
확실히 공격하는 손톱 개수를 늘려 표면적을 넓힌다면 디젤이 펼친 물의 장막을 가볍게 파훼할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말도 안 되는 놈이야.'
귀신이란 존재의 강함은 단순히 물리적인 힘의 세기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놈들은 상대방의 능력을 분석해 응대법을 끊임없이 바꾸는 지능적인 전투를 펼쳤다.
거기다 제 뜻대로 변형되는 육체까지 지녔으니, 그야말로 공포의 존재라 불릴 만했다.
'시간 끌면 더 위험해지겠어.'
싸움을 통해 끝없이 강해지는 존재와 길게 전투를 벌인다는 건 미련한 짓이다.
어떻게든 다음 일격에 끝을 봐야만 했다.
디젤은 자신이 떠올린 상념을 구체화하여 정령에게 전달했다.
〈할 수 있겠어?〉
〈음.... 그래. 마음에 들진 않지만.〉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디젤이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다섯 손가락을 타고 정령의 육체가 한데 모인다.
이윽고 그것이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액체로 된 기다란 칼날.
푸른빛을 띤 물의 검이 그의 손에 쥐어진다.
하지만 디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해해라.〉
〈....〉
몸에서 마력을 끌어 올렸다.
설하만년빙에서 얻은 흑빙의 힘이 손바닥에 모였다.
디젤은 검으로 변한 정령을 흑빙으로 얼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보통 얼음 얼리듯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물 정령이 제 힘을 쓰지 못하게 될 테니.
흑빙의 마력을 세밀하게 조작해 검의 겉면에 집중시켰다.
내부에 정령의 기운이 흐를 수 있도록 형태를 남겨 두고서, 손잡이에서부터 칼끝까지 시커멓게 얼어 붙어갔다.
얼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예리함과 단단함.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9형 물 정령의 힘.
디젤이 서슬 퍼린 검을 움켜쥐었다.
'흑빙정령검. 너무 단순한 이름인가?'
생전 처음 잡아 보는 검이다.
당연히 어색한 움직임이어야겠으나, 디젤이 입은 몸은 그렇지 않았다.
멀리서 여러 갈래의 손톱을 단 귀신이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한때 제일검이라 불렸던 육체가 움직인다.
'운령검(運靈劍).'
형의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떠올린다.
정령의 기운을 다루는 검술을.
이어서는 초식 하나.
'해일 가르기.'
막을 수 없는 파도마저 베어 버리는 검격.
디젤이 쥔 검은빛 칼날이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기다란 획을 그었다.
거기에는 높은 등급의 정령이 뿜어낸 검기와, 뒤이어 모든 것을 얼리는 흑빙의 마력이 담겨 있었다.
형의 검술과 정령의 힘, 속성개화된 마력이 조화를 이룬 일섬이 지평선 위를 지난다.
그것이 디젤을 향해 거세게 밀려오던 귀신의 몸체에 닿았다.
-귀신을 베는 법이라.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신을 베려면....
디젤은 이어지는 대답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귀신을 베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어이없는 인간아.'
대답 같지 않은 대답.
하지만 이내 형이 뒷말을 붙였다.
-귀신을 베려는 게 아니라, 귀신으로부터 지키려 해야 한다.
형의 아침은 항상 그와 비슷한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내 검은 해치기 위한 검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검이다.
참으로 형다운 다짐이다.
'그래. 나도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검이긴 하지.'
형은 그게 타인이고.
나는 그게 자신일 뿐.
그런 생각과 함께
귀신의 희멀건 몸이 갈라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