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마웠다."
디젤이 물 정령 네레이드를 자유롭게 해 주며 말했다.
〈음.... 뭐,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어. 하지만 두 번은 사양하고 싶네.〉
정령이 물로 된 머리칼을 찰랑이며 말했다.
〈충고 하나만 할게. 다른 정령한테는 이런 힘을 막 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착하고 친절한 정령이니까 받아 줬지만, 다른 애들은 역으로 널 집어삼킬 수도 있어.〉
"그래. 참고하지."
디젤의 말에 정령이 싱긋 미소를 남기더니 이내 물보라를 일으키며 흩어졌다.
"후...."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누워 있는 제이슨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도 의식을 잃고 끙끙대던 그는 점점 호흡이 돌아오며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9형 물 정령이 치유해 주었으니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디젤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걸터앉아 방금 벌어진 전투의 여파를 정리했다.
아티팩트를 써야 했다.
어금니에 보관된 힘이 줄어든 게 느껴졌다.
엄청난 분량의 액상 마나를 한 번에 긴급 투여했다.
한동안 마나 보충제를 복용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마나 회복력이 줄어드는 부작용을 겪어야 할 것이다.
귀신의 공격을 피하느라 워낙 급히 움직인 탓에 인공 근육들이 무참히 찢겨 나갔다.
이 정도면 수리하는 것보다 의체를 새로 맞추는 게 더 싸게 먹힐지도 모른다.
그리고....
안드로이드가 죽었다.
그냥 안드로이드가 아닌, 자신을 사람이라 믿었던 하프 안드로이드가.
이제 대답을 들을 차례였다.
이런 짓을 저지른 원흉에게.
그때, 디젤의 품에서 아르가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주인. 아르가 해킹 시도를 막아 냄.〉
"...?"
〈방금 누군가 주인 몸의 제어권을 해킹하려 시도했습니다.〉
디젤의 의체에는 별다른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굳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아 움직이는 강력한 방화벽인 아르가 그를 지켜 주고 있었으니.
〈방금 또 시도를 막아 냄. 어떤 해커인지 아르가 역추적하나?〉
굳이 추적하지 않아도 상대가 누구인지는 너무 뻔했다.
"아니. 기다려 봐."
〈음...?〉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그것은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좋은 기회였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원흉에게.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해킹 성공
[성공했다, 성공했어. 히히히.]
참으려 해 봐도 웃음이 새어 나온다.
멍청한 놈, 헛똑똑이,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
몸에 의체를 설치해 놓고 단순한 방화벽 하나 구비해 놓지 않았다니.
[나보고 뭐라고 했었지? 너도 해킹당하면 끝이라고? 히히히.]
그렇게 일침을 해놓고는 지금 자기가 어떻게 됐는지 꼴 좀 봐라.
[어설퍼, 어설퍼. 신입은 역시 신입이라니까.]
처음에는 해킹 시도가 계속 실패하길래 뭔가 잘못된 건가 싶었다.
뭐, 가끔 전계에 폭풍이 불면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으니 그런 거였겠지.
아무튼 중요한 건 결국 해킹에 성공했고, 지금 저 마법사 놈은 자기 몸의 제어권을 뺏긴 채 좌절 중일 거란 사실이다.
한마디로, 이 제온 님의 완벽한 승리였다.
[근데 갑자기 그게 나올 줄은 몰랐네.]
귀신이라니.
모니터 너머로 보고 있었는데도 오금이 저려 왔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저 마법사가 그 귀신을 베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과거 '진짜' 착귀갑사들이 했던 것처럼.
하지만 애써 머리를 흔들며 그런 점을 잊어버린다.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지금은 눈 하나 깜빡이지 못할 텐데.]
히히히, 소리가 계속 입에서 흘러나온다.
아직 현장에 가 보는 건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놈이 좌절하는 꼴을 두 눈으로 직접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미 이 주변에 있는 CCTV들은 전부 해킹해 놨다.
그 말은 지금부터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현장으로 가지 않을 수 없잖아?
권총을 품에 하나 챙겨서 말이야.
가서 두 눈을 부릅뜨고 움직이지 못하는 마법사 미간에 직접 총알을 박아 넣을 작정이다.
너무 나쁜 생각이고, 너무 좋은 생각이다.
[히히히, 역시 난 천재라니까.]
그렇게 거의 폐허가 되어 버린 연구실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저 망할 마법사 놈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멀뚱멀뚱 서 있다.
그의 뒤에 쓰러져 있는 건 멍청한 오크겠지.
그리고 안드로이드는....
우웩, 더러운 놈.
죽는 것도 더럽게 죽네.
아야.
방금 뭐지?
뭔가 내 손을 깨물었는데.
대형 모기라도 있는 건가?
혹시 모르니 권총을 미리 장전해 둔다.
이곳에서의 벌레는 어지간한 야생동물보다 위험하니까.
그렇게 총을 들고 마법사 앞에 섰다.
직접 얼굴을 보니 히히히, 소리가 절로 새어 나온다.
멍청한 놈, 그렇게 잘난 척을 해 대더니.
봐라.
결국 마지막에 이긴 건 누구지?
바로 나다.
바로 이 천재 해커님이시다.
[바로 이 천재 해커, '제온' 님이시...!]
그렇게 마법사를 보며 크게 외치는데.
응?
뭐야.
이상하다.
내가 잘못 봤나?
분명 움직이지 못하게 해 놨었는데.
분명 몸에 있는 근육 한 줄기 제어하지 못하도록 고정해 놨는데.
근데....
왜 이 마법사....
눈을 깜빡이고 있지...?
* * *
"넌 선을 넘었어."
디젤이 말했다.
제온의 손이 벌벌 떨리면서 총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니 거기서 발사된 탄환이 목표를 제대로 맞출 리 없다.
물론 똑바로 조준하고 쐈더라도 미리 펼쳐 놓은 방어막에 막혔겠지만.
[으아악!]
놈은 자기 무기에서 나온 총격음에 깜짝 놀랐는지 귀를 막으며 괴성을 질렀다.
아마 총을 제대로 쏴 본 적도 없는 듯했다.
"쯧...."
혀끝을 찬 디젤이 제온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자 놈이 다시 권총을 부여잡는다.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탕, 탕, 탕, 탕...!
총구가 연속해서 불을 뿜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디젤을 향해 제대로 날아 온 총알은 한 발도 없었다.
[오지 말라고오오아아악!]
기계음 섞인 고함과 함께 탄창 하나가 순식간에 비워진다.
제온은 자기 손에 들린 무기에서 나는 틱, 틱,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계속 방아쇠를 당겨 댔다.
"한심한 놈."
결국 디젤이 제온 앞에 섰다.
그러자 놈이 마지막 발악을 했다.
[너, 너. 내 뒤에 누가 있는 줄 알아?]
"...."
[리, 리틀 시스터라고 들어 봤어? 응? 내 뒤에는 리틀 시스터가 있어! 전설적인 해커이면서 테커인 리틀 시스터! 누군지 알지?]
리틀 시스터라.
그 이름을 믿고 이렇게 설친 건가?
"근데 어쩌라고."
[내가 호출하기만 하면 그 리틀 시스터가 바로 달려올 거야!]
"그래?"
그럼 오랜만에 얼굴 한번 보면 되겠네.
디젤은 제온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뒤.
주먹을 힘껏 쥐고서 저 초라한 복부를 향해 날렸다.
[커억...!]
자리에 철퍼덕 엎어진 놈이 헛구역질을 해 댔다.
"일어나. 엄살 피우지 말고."
살면서 한 번도 맞아 본 적 없던 건지, 마력도 실리지 않은 평범한 주먹에 죽으려고 한다.
그에 디젤이 쓰러진 제온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붙잡고는 짐짝처럼 들어 올렸다.
[아, 아악!]
"어디 얼굴 좀 보자."
[아... 아... 안 돼...! 안 돼....!]
제온은 자기 목소리에 위협적인 저음을 섞으며 커다란 경고음을 내뿜었다.
[꺼져!]
그와 함께 팔다리를 저어 가며 필사적으로 저항해 보지만, 소용없다.
억지로 시커먼 기계 가면을 으드득, 잡아 뜯는다.
그러자 의외의 얼굴이 그 속에 들어 있었다.
햇빛을 제대로 쐬지 못해서인지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하얀 피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지만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
침과 콧물로 뒤덮인 작고 얇은 턱선.
영락없는 여자애의 모습이다.
"뭐야...."
몇 살쯤 될까.
성인은 분명 아닌 것 같은데.
"흐으읍, 흐으으읍, 흐읍...."
제온은 습기 가득한 호흡을 불규칙적으로 들이켜더니 이내 눈물을 터트렸다.
"흐으으으.... 때, 때리지 마세요...."
원래대로라면 죽을 때까지 패 주려고 했지만, 저 새파랗게 어린 얼굴을 보니 그럴 마음이 싹 가셨다.
대신 팽개치듯 바닥에 내려놓는다.
"아악...!"
쇳소리 같은 앳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 너 몇 살이야?"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자, 디젤이 주먹을 쥐는 시늉을 했다.
"여, 열다섯.... 아, 아니, 열넷이에요.... 저는 그, 귀, 귀신까지 부르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폐수 정령을 응집체로 만들어서 상황을 조금 버겁게 만들 정도로만, 그냥 딱 그 정도로만 하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때리지 마세요...."
말을 한바탕 뱉어 내더니 이젠 아예 엉엉 소리를 내며 운다.
커다란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새하얀 도화지 같은 얼굴에 번졌다.
열넷이면 대충 초등학교를 졸업할 정도의 나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이딴 핏덩이한테 이게 무슨.... 하...."
그때, 그의 뒤쪽으로 무언가가 쿵 소리를 내며 착지했다.
이어 어떤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디젤?]
익숙한 목소리.
뒤를 돌아보자 높은 등급의 전신 강화 외골격 슈트가 우뚝 서 있었다.
슈트에 달린 마스크가 벗겨지자, 디젤이 알고 있던 리틀 시스터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렇게 단숨에 날아 온 걸 보니 그녀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다.
"이, 이모...!"
"세라야, 너 이게 무슨...."
"이모오오오...! 왜 이렇게 늦게 와아아!"
제온이 벌떡 일어나 엉엉 울며 시스를 향해 달려갔다.
이 망할 꼬맹이의 이모가 리틀 시스터라니.
세상사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디젤."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
화를 간신히 참으며 묻는 어투.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눈앞에서 자기 조카가 저렇게 엉망이 됐는데,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겠지.
"설명이라고?"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까.
아니, 그보다는 직접 상황을 보는 게 빠를 테다.
디젤은 말 대신 아르에게 손짓했다.
"네가 한번 봐."
전계 정령 아르가 제 주인의 의사를 읽고서 방금 있었던 일들을 순식간에 편집했다.
그러더니 깔끔하게 정리된 데이터를 입에 물고는 시스에게 쪼르르 날아갔다.
시스는 제가 가진 전계 투사 능력으로 그것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 부분을 보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험한 인상으로 변했다.
"...."
그러더니 디젤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애를 잘못 가르친 탓이야. 대신 사과할게. 미안해."
스스럼 없이 고개를 푹 숙인다.
"이, 이모...! 지금 뭐 하는 거야...!"
하지만 정작 사과해야 할 당사자는 펄쩍 뛰어 올랐다.
"이모가 왜 사과해? 나 맞는 거 못 봤어? 저 인간이 주먹으로 때렸다고! 심지어 내 배를! 얼마나 아팠는...."
제온의 말에 대한 시스의 반응은 단호했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조카의 뺨을 강하게 후려갈긴다.
짝, 소리와 함께 제온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게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제온은 어, 어, 하는 소리만 낼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얘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자라서 버릇이 좀 없어. 다시 사과할게. 이건 전부 오냐오냐 키운 내 탓이야. 내가 죽은 우리 언니 대신 잘 가르쳤어야 했는데...."
그녀의 말에 제온이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시스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 이모.... 왜... 왜 그래?"
"세라야. 넌 지금 네가 벌인 일이 뭔지 모르고 있어."
그러더니 저 멀리 반으로 쪼개진 귀신의 사체를 가리켰다.
"저게 뭔지 알아?"
"저, 저거...? 알지.... 옛날에 나왔던 괴물이잖아...."
제온의 허술한 답변에 시스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저건 괴물이 아니야."
시스가 뒷말을 강조하며 말했다.
"저건 '귀신'이야."
"그래. 저게 귀신인 건 나도 나도 안다니깐."
"아니, 넌 아무것도 몰라."
시스는 대답과 함께 무언가를 조작했다.
"내가 이 외골격을 입고 날아오면서 뭘 했는지 알아?"
그녀가 공중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그러자 어떤 심볼이 나타났다.
"이단심판관이 이쪽으로 오려는 걸 막고 있었어."
날카로운 검 뒤로 불타는 화염이 그려진 위협적인 그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초법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국제기관, 이단심판관의 문장이다.
"이, 이단심판관...?"
"저 문장이 뜻하는 게 뭔지는 아무리 어린 너라도 알고 있겠지."
"이단심판관이 여기는 왜...."
"왜냐면, 귀신을 부른 행위는 이단심판관의 최우선 처리 과제 중 하나니까."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제온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이단심판관이 이 상황에 대해 알게 되면 널 즉결에서 처형하려 들 거야. 이유를 불문하고 이 자리에서 네 목을 벨 거라고."
"뭐, 뭐, 뭐?"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되니?"
"나, 나는 모, 모, 몰랐어.... 사실 난 귀신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해...."
"그런 건 이단심판관들한테 중요하지 않아."
"나, 난 아, 아직 어리잖아. 응? 그치, 이모? 아무리 이단심판관이래도 어린 애들까지 건들진 않겠지?"
"그딴 것도 놈들한텐 중요하지 않아."
시스가 다시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단순히 어리다고 해서 네가 저지른 잘못들이 전부 괜찮아지는 게 아니야. 하.... 널 어디서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는 걸까...."
그러더니 디젤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듭 사과할게, 디젤. 너하고는 공교롭게도 인연이 계속 겹치네."
낮은 자세로 고개를 숙인 그녀는 디젤에게 플라스틱으로 된 카드를 하나 건넸다.
"방금 내 조카 때문에 입은 손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배상해 줄게. 그것도 웃돈을 얹어서."
디젤이 카드를 받아 들자, 시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부탁하는데...."
"됐어. 여기서 있던 일은 함구하지."
굳이 이단심판관에게 저 꼬맹이를 고발하지는 않을 거다.
적절히 배상해 준다는 시스의 말도 있었지만, 그것보단 이단심판관 쪽이랑 엮이면 일이 상당히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고마워."
"대신 이 오크 좀 바래다줘."
디젤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이슨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물론 그래야지. 저분께도 합당한 배상을 드려야 되니까."
"그건 알아서 하고."
디젤이 마지막으로 제온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시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다그쳤다.
"사과드려."
"응...?"
"사과드리라고. 고개 숙여서 정중하게."
제 이모의 말에 제온은 한동안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그게 유일한 살길이라는 걸 깨달은 듯 몸을 추욱 늘어트렸다.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끔뻑 숙이며 울음을 터트린다.
"죄송합니다.... 잘못.... 흐읍....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으아아앙!"
더 이상 듣고 있기가 괴로울 지경이다.
디젤은 뒤를 돌아 울음소리와 한숨 소리를 배경으로 한 그 지긋지긋한 자리를 떠났다.
* * *
"정말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모두가 떠난 블랙 워터 인스티튜트의 실험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현장을 씻어 내리고 있었다.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픽서 알프레드 한이 제가 키우던 거너, 알프레드 박의 시체 위에서 중얼거렸다.
"혹시 저랑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알프레드 박?"
허리를 숙여 알프레드 박의 머리를 집는다.
이어 그의 멀쩡했던 한쪽 눈알을 억지로 뽑아 버리고는 자신의 눈에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혼자서 대화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알프레드 한."
"역시 우리는 의견이 일치하는군요, 알프레드 박."
"저 마법사는 우리 알프레드 가문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그렇지요."
알프레드 한은 마지막으로 현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 남자는 '귀신을 베는 자'이니까요."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해커의 제안
"그리 어렵지 않네. 잘했어, 아르."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옥탑방.
디젤이 전계에 접속한 채 아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 작업으로부터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클라이언트가 정령 구호 단체였던 만큼 폐수 정령을 만들어 낸 걸 문제 삼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시설이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것에 흡족했는지 의외로 관대하게 넘어갔다.
"이번엔 3등급으로 올려 봐."
〈아르, 전자 빨대를 보호하는 방화벽 수준을 3등급으로 강화합니다.〉
"음.... 이게 3등급 정도."
의체 수리 겸 휴식을 취하던 디젤은 아르와 함께 직접 해킹을 시도해 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해커에게 공격당해 본 이후 전계에 대해 좀 더 파악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장 먼저 시도한 건 방화벽 돌파였다.
해킹 때 첫 번째로 마주치는 보안 대책이 바로 방화벽이었으니.
〈주인, 잘못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3등급의 방화벽부터는 감시망 범위가 대폭 넓어지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회해서 돌파하는 게 불가능하다.〉
"알겠으니까 가만히 있어 봐."
〈아르가 주인에게 추천하는 방법은....〉
"쓰읍, 훈수 그만. 내가 혼자 알아낼 수 있어."
디젤이 손을 휘휘 저으며 아르의 말을 멈춰 세우자, 정령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의 손을 콱 깨물어 버렸다.
"아야야, 오늘은 손 아파서 찌르 못 주겠네."
찌르라는 단어가 나오자 아르가 흠칫 놀라더니 방금 깨문 자리를 조심스레 혓바닥으로 핥았다.
"자, 뚫었어. 네 말대로 우회하는 건 불가능한데 감시망이 넓어진 만큼 퀄리티가 떨어지는 부분들이 듬성듬성 보이네. 그쪽 위주로 공략하니까 엄청 쉬운데."
〈음.... 이번엔 같은 3등급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전개해 보겠음.〉
"좋아. 3등급은 종류가 몇 개나 돼?"
〈3등급은 총 987종류의 서로 다른 방화벽 생성 가능.〉
"음... 2등급이 89종류였으니까 11배가 조금 넘네. 이 단계에서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구나. 랜덤하게 100개 연속 성공하면 다음 등급으로 넘어가자."
〈손은?〉
"응?"
〈손은 괜찮은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디젤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아르가 다시 그의 손을 콱 깨물었다.
* * *
"자네, 요즘 좀 바빴던 것 같던데?"
김 사장의 만둣집.
오랜만에 냉장고에 들른 디젤이 만두와 맥주 한 캔을 대접받고 있었다.
"그랬죠."
블랙 워터 소속 레벨 4 정령술사와 폐수 정령의 응집체를 동시에 처리한 착귀갑사가 있다.
그런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는 듯했다.
다만 귀신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그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리틀 시스터가 철저하게 관리한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자신의 명성이 슬슬 퍼지고 있다는 걸 가장 먼저 체감한 건 김 사장으로부터였다.
이 드워프 픽서는 지난 작업이 끝난 다음 날부터 디젤을 끈질기게 찾아 댔다.
하지만 디젤은 지난 며칠간 김 사장을 포함한 다른 모든 연락을 일절 받지 않았다.
이제 마음이 급한 건 저들이지 그가 아니었으니까.
"어땠나? 그 알프레드 한이라는 픽서가 줬던 작업은."
김 사장은 단단한 피부에 미소를 새기며 물었다.
그에 디젤이 대충 톤을 조절하며 답했다.
"뭐, 이번에도 위험한 장면이 몇 번 있었죠. 뒷골목 일이란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대답에 김 사장이 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벌써 이쪽 사람 다 됐구먼."
그러고는 다시 디젤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내 질문 하나 해도 되겠나?"
평소와는 조금 다른 진지한 어투에 디젤이 적당히 표정을 맞춰 주며 대답했다.
"예."
드워프가 책상에 두꺼운 손을 올리더니 말했다.
"대체 어떻게 한 건가?"
무언가가 빠진 말.
그가 생략한 요소가 뭔지 추측하기에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디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뭘 말입니까?"
그에 김 사장이 솔직하게 본론을 꺼냈다.
"귀신 말일세. 대체 무슨 수로 죽인 건가?"
어떻게 알아낸 건진 모르겠지만 김 사장은 디젤이 한 일에 대해 눈치챈 것 같았다.
역시 오랫동안 뒷골목에서 구른 픽서답게 그런 고급 정보만큼은 빠삭한 듯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귀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는, 모든 걸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귀신은 그런 역설적인 존재야."
역설적인 존재.
직접 귀신을 만나 본 디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형이 말한 '귀신을 베려면, 베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에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으니.
"이 세상에 귀신을 벨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네. 그리고 죽일 수 있는 사람은 그보다 더 없고."
다만 형처럼 결연한 마음가짐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귀신을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마 김 사장이 던진 질문도 그런 뜻이었을 테다.
"내가 너무 꼬치꼬치 캐묻고 있나?"
"아닙니다."
"자네가 왜 그만한 능력을 감추고 있는지 따지고 들 생각은 없네. 하지만...."
김 사장이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품속에 있는 태양을 밤새 숨길 순 없는 법일세."
품속에 있는 태양이라....
한껏 시적인 표현을 들이민 드워프가 표정을 풀며 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혼자서는 불가능하지. 자네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야."
디젤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과의 관계를 잘 부탁한다는 의미였다.
그에 디젤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새겨 두도록 하죠."
그러자 드워프가 껄껄 웃으며 들고 있던 맥주를 꿀꺽꿀꺽 넘겼다.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자네랑 전속 계약을 맺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이거 아쉽구먼."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냉장고 안을 뒤흔들었다.
"저도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이제 김 사장의 차례가 끝났으니 디젤이 물을 차례였다.
"그래. 말해 보게."
"리틀 시스터라는 해커는 어떤 사람입니까?"
"시스?"
"예. 해커이면서 테커이기도 한 것 같더군요."
"그렇지. 일단 엄청난 실력자인 건 알고 있을 테니, 그런 게 궁금한 건 아닐 거고...."
드워프가 말끝을 흐리자 디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흠...."
그는 다음 말을 신중히 고르더니 답했다.
"그래. 시스는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야. 해커들 중 거의 유일한 정상인이기도 하고."
"그렇군요."
"근데 그건 왜 묻나? 벌써 그런 고위 착귀갑사 쪽에 인맥이라도 생긴 건가?"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오, 대단한데. 나는 이제 찬밥 신세가 되겠구먼."
그럴 일은 없었다.
디젤이 형의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이 이름도 없는 허름한 만둣집에 찾아온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으니까.
물론 그중에는 자잘한 작업을 하면서 이 세계에 적응할 기본적인 기반을 잡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찬밥이라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냉장고에 찬밥이 있지 더운밥이 있겠나?"
드워프의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냉장고에 쩌렁쩌렁 울렸다.
* * *
서울 1-8 섹터, 지하대청.
세련된 찻집으로 위장한 거대 시설물.
디젤은 이제 꽤 익숙해진 건물의 전경을 올려다보았다.
'이쪽은 처음이네.'
그는 원래 들어가던 뒷골목이 아니라, 1층 찻집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어서 오십시오."
요즘엔 보기 드문 살아 있는 종업원이 그를 맞았다.
딱 봐도 귀태가 흐르는, 세련된 한복을 입은 여성 엘프였다.
"예약하셨습니까?"
대답 대신 리틀 시스터의 명함을 건넨다.
그러자 엘프가 조심스레 받아 들더니 인사를 꾸벅 올렸다.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조선 황궁의 잔잔한 야경이 보이는 아늑한 방이었다.
찻집은 2층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궁궐이 내려다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풍경 앞에, 리틀 시스터가 새하얀 백자에 담긴 차를 홀짝 들이켜고 있었다.
"오, 왔구나. 디젤."
그가 자리에 앉자 종업원 엘프가 인사를 꾸벅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의체 수리는 잘했어?"
"그래. 덕분에 전부 새 걸로 교체했어."
"당연히 해 줘야 하는 건데, 뭐."
디젤은 리틀 시스터가 보낸 차고 넘치는 배상금으로 의체를 수리하는 건 물론이고 한 단계 좋은 재질로 업그레이드까지 마쳤다.
그러면서 시스는 따로 제안할 게 있다며 그를 찾았는데, 디젤은 그녀의 메시지에 한동안 답신을 하지 않았었다.
"좀 더 일찍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약간 투덜거리는 듯한 뉘앙스였지만 디젤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안이란 게 뭐지?"
"뭐야. 벌써 바로 그렇게 치고 들어오는 거야? 근황이라든가 그날 있었던 뒤처리라든가 그런 거 안 궁금해?"
딱히 궁금할 건 없었다.
어차피 알아서 잘했을 테니까.
하지만 왠지 물어봐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예의상 대충 말을 맞춰 주었다.
"적당히 잘 해결한 거 같던데."
"뭐, 그렇긴 했지. 얼마나 정신없었는데. 일단 세라... 아니, 제온 그 애는 한동안 외출 금지, 전계 접속 금지야. 집에 돌아가서 캐물어 보니까 나한테 칭찬받고 싶어서 일부러 정령을 구출하는 작업을 맡은 거 같은데.... 그 과정에서 자기감정을 주체 못 하고 그런 일을 벌렸나 봐. 아무튼 이번 기회에 인성 교육부터 시작해서 내가 직접 아주 철저히 가르치려고 해."
교육한다고 바뀔 수 있을까.
그런 회의가 잠시 들었지만, 아무튼 이제 그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
"그래도 결국 현장에 이단심판관들이 찾아오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어. 어쨌든 귀신이 등장한 건 사실이니 말이야. 혹시 너한테까지 연락 가고 그런 건 없었지?"
"없었어."
"그래. 다행이네."
대체 무슨 짓을 하면 이단심판관 정도 되는 단체의 움직임을 저렇게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건지.
리틀 시스터라는 여자의 수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나도 엄청 바빴다고. 원래 하고 있던 작업들도 전부 스톱되고. 난리도 아니었어. 근데, 그래도 말이야...."
시스가 싱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하나 건진 건 있지."
"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디젤을 가리켰다.
"너."
"...?"
"그땐 정신없어서 제대로 말 못 했지만, 너... 귀신을 죽인 거잖아?"
"...."
"물론 그날 나왔던 건 귀신 중에서도 가장 약한 9급 백색종이었지만, 그래도 귀신을 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 거라고 생각해."
시스가 남은 차를 한 번에 털어넣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러 가 볼까."
허공에 손가락을 딱, 튀기자 방금까지 창문으로 보이던 유리창이 양옆으로 스르륵 열리며 엘리베이터가 나왔다.
"자세한 건 아래에서. 어딘진 알지?"
* * *
사방이 새하얀 빛뿐인 화이트 플로어.
그곳에 고래 형상의 전계 정령, 스켈융어가 둥둥 떠다닌다.
그 옆으로는 크기를 비교하기조차 민망한 조그만 고양이 정령 하나가 고래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여전히 활발하네, 네 정령."
"이름은 아르야."
"오, 아르.... 이름 귀엽다."
〈...? 이 여자가 내 이름을 부른다.〉
아르가 시스에게 다가가 손을 콱 물었다.
"아하하, 간지러워."
〈간지러워...?〉
아르는 그녀의 말에 충격받았는지 한참이나 멍하니 시스를 쳐다보았다.
"저 고래, 상태가 많이 좋아진 거 같아 보이네."
"그렇지? 구속구에서도 벗어났고, 가끔은 노래도 불러."
시스가 조금은 슬픈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래도 아직 여기를 떠나진 못하고 있지만 말이야."
그에 디젤이 고래의 감정을 읽고는 말했다.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이전과는 많이 다른데."
"응...?"
"이제 이 고래는 고마워하고 있어. 시스, 너한테."
"아...."
디젤의 말에 시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건 좀 기쁘네."
과거 그 어두운 감정의 늪에 깊이 빠져 있던 정령을 어떻게 끌어 올린 걸까.
디젤은 문득 시스가 읊었던 섬뜩한 선언이 떠올랐지만 깊게 추측해 들진 않았다.
"아무튼, 디젤 너도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다고 했지?"
"그래."
디젤이 리틀 시스터를 찾아온 건 무언가를 제안할 게 있다는 그녀의 연락 때문이기도 했지만, 디젤 본인도 부탁할 거리가 있었다.
그는 지금 일류 해커에게 어느 정도 마음의 빚을 지운 상태였다.
게다가 때마침 이제 막 해킹에 대해 관심을 가지던 차,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디젤이 곧바로 본인의 용건을 말했다.
"해킹에 대해 좀 알려줘."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해킹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해킹?"
해킹을 가르쳐 달란 말에 시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갑자기 마법사에서 해커로 진로 변경이라도 하려는 거야?"
"그런 건 아니야. 전계 정령을 다루려니까 아무래도 해킹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음... 나름 그럴듯한 이유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 될 건 없지. 그러려면 먼저 전계가 뭔지 알아야 해."
"기본적인 건 이미 알고 있어."
"그래? 그럼 일단 전계에 접속해 보자고."
그녀의 말에 디젤은 눈속임용으로 구비한 중고 사이버덱을 꺼냈다.
남대문 시장 좌판 상인에게서 구입한 저가형 모델이다.
그걸 발견한 시스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으.... 그건 또 뭐야?"
그러더니 강조하듯 말을 이어 나갔다.
"해킹에서의 절대 법칙 하나. '해킹 실력의 90%는 장비에서 나온다.' 내가 입문용 사이버덱 추천 좀 해 줄까?"
"아니. 난 이거면 됐어."
디젤의 말에 시스가 흠, 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기본적인 지식만 필요한 거라면. 근데 설마 그걸로 해킹하고 다니려는 건 아니지? 그러다 너 죽는다."
"...."
"농담이 아니라 정말 죽을 수도 있어. 뇌가 타 버리거나, 녹아 버리거나, 펑 터지거나 하는,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 다양한 방법들로 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고물로 해킹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마. 진짜 걱정돼서 그래."
"알겠어."
"좋아. 그럼 제일 기본부터 해 볼까. 해킹은 역시 이걸 뚫는 일부터 시작이지."
시스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방화벽을 펼쳤다.
전계에 접속한 디젤의 눈에는 마치 거대한 장벽이 눈앞에 세워진 느낌이었다.
'이건... 대체 몇 등급짜리 방화벽인 거야...?"
어느새 아르가 디젤의 어깨 위에 쪼르르 날아와 앉았다.
〈최소 6등급 이상. 정확히 추정하려면 분석이 필요.〉
아르는 시스가 펼친 방화벽을 보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해킹을 하려면 먼저 전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 알겠지만, 전계는 어떤 기술자가 발명해 낸 공간이 아니야. 인류가 새롭게 발견한 하나의 '계(界)'지. 혹시 전계를 발견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알아?"
"마법사들이라고 알고 있는데."
"오, 맞아. 잘 알고 있네. 당시 마법사들은 자신들만의 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열등의식 같은 걸 가지고 있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논리지. 고유의 계가 없다고 마법이 열등해지는 건 아닌데 말이야. 아무튼 마법사들은 마법이라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 찾아내려고 온갖 차원들을 샅샅이 뒤졌대. 그러다 빠밤! 우연히 전계라는 곳을 발견한 거야. 엄청난 발견이었지."
시스가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해킹을 '전계에서 부리는 마법'이라고 설명하는 걸 참 좋아해. 꽤 맞는 말이거든."
그녀는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 '방화벽'은 '보호 마법'이라고 생각하면 돼. 보호 마법에도 등급하고 종류가 많지? 방화벽도 마찬가지야. 보통은 1등급에서 9등급 정도가 있는데, 1에서 2가 약한 방화벽, 3에서 4가 보통 수준, 5에서 6정도 되면 그때부터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지고 7, 8이면 정말 정말 뚫기 어려워져. 그리고 마지막으로 9등급 이상인 초고등급 방화벽은 여러 명의 수준 높은 해커가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수준이니 해킹은커녕 근처에 얼씬도 하면 안 돼."
시스가 허공에 이리저리 손짓하자 방화벽의 등급이 자유자재로 휙휙 바뀌었다.
그러자 디젤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아르가 다시 몸을 벌벌 떨며 말했다.
〈주인, 저 여자에게는 함부로 덤비지 않길 바람.〉
〈...네 주인이 그렇게까지 약하진 않거든?〉
〈아르의 계산은 정확하다.〉
"이런 방화벽 해킹에 성공했으면 그다음 단계로 '아이스'를 처리할 차례야. 얼음이라는 뜻의 영단어가 아니라, '침입 대항 장치'의 줄임말이야."
허공에 'ICE, Intrusion Countermeasures Electronics'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방화벽이 전자기기를 보호하는 장벽이라면, 아이스는 방화벽 안에서 활동하는 경비병이라고 보면 돼."
방화벽을 순식간에 거둔 시스가 이번엔 아이스를 펼쳤다.
그러자 어디선가 거대한 괴수가 내는 듯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해커들의 가장 큰 적이 바로 이 아이스야. 왜냐면 이놈들은 이름처럼 침입한 해커를 강제로 내쫓거나, 죽이기 위해 설계된 놈들이거든."
시스가 만들어 낸 아이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신화 속 케르베로스에서 모습을 따 온 듯,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짐승이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아르가 화들짝 놀라더니 디젤의 품속으로 숨어 버렸다.
"어머. 미안해, 아르. 널 놀래키려고 한 건 아닌데."
시스가 허공에 손가락을 딱, 튀기자 케르베로스가 귀여운 강아지로 변했다.
"이거면 좀 괜찮니?"
하지만 아르는 여전히 디젤의 품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별 차이 없나 본데."
"맞아. 방금 그 케르베로스에서 모습만 바뀐 것뿐이지 능력은 그대로야."
그러면서 아이스를 도로 집어넣었다.
"아이스에는 종류도 다양하고, 형상도 다양해. 보통은 위협적이게 생길수록 강한 아이스인데, 방금 보여 준 것처럼 모습만 귀엽고 실상은 그렇지 않은 아이스들도 많아."
시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통 그런 아이스들을 다루지."
사람이 특정 경지에 오르면 외형을 이상하게 꾸미는 걸 즐긴다더니, 아마도 시스가 그런 부류가 아닐까 싶었다.
"자, 그럼 저런 무시무시한 아이스들은 어떻게 돌파할까? 혹시 알고 있어?"
시스의 질문에 디젤이 답했다.
"아이스 브레이커로?"
"맞아! 아이스 브레이커는 말 그대로 아이스를 깨부수는 해커의 '무기'라고 생각하면 돼."
시스가 눈앞에 허수아비 모양의 더미용 아이스를 하나 전개했다.
"아이스 브레이커는 크게 네 종류야. 검이나 도끼 같은 근접 무기. 활, 총 같은 원거리 무기. 마법 같은 주문 무기. 그리고 여러 성질이 합쳐진 복합 무기."
설명과 함께 한손을 위로 치켜들자, 손에 길쭉한 검이 하나 쥐어졌다.
"이 검은 복합 무기의 일종이야. 근접 무기로도 쓰이지만 검격을 발산해 원거리 무기로도, 빛을 내뿜는 마법 주문처럼도 다룰 수 있어."
이어 무기를 높이 들어 올리더니, 아이스를 향해 올곧게 내리찍었다.
그러자 오묘한 색으로 빛나는 검격이 허수아비를 향했다.
목표와 맞닿은 빛줄기에서 눈부신 폭발이 일어나더니, 허수아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전계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우리는 '해킹'이라고 불러."
단순히 자리에 앉아 사이버덱이나 두드리는 일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상당히 격동적인 작업이다.
"아마 디젤 네가 아이스를 볼 일은 없을 거야. 네 레벨 정도에서 해킹할 수 있는 디바이스라면 보통 1에서 2등급의 방화벽일 테니까. 그런 기기에는 아이스까지 설치되어 있진 않을 거거든. 아까도 말했지만, 해킹을 하거나 혹은 해킹으로부터 보호하는 건 장비, 즉 돈이 가장 중요하니까."
시스가 돈 모양의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특히 아이스랑 아이스 브레이커는 엄청나게 비싼 '프로그램'이야. 아이스는 그걸 지킬 디바이스에다가, 아이스 브레이커는 해커의 사이버덱에다 비싼 돈을 내고 설치해야 하지. 그리고 좋은 아이스 브레이커일수록 용량도 엄청 크고, 연산 능력도 많이 필요해. 그럼 어떻겠어? 더 좋은 사이버덱이 필요하겠지? 그리고 더 좋은 사이버덱 가격은.... 여기까지만 말해도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 거라 생각해."
아주 비싼 돈을 내고 아주 비싼 사이버덱에 설치하는 프로그램이라.
디젤은 그 대목에서 시스 몰래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방금 시스가 시연한 아이스 브레이커의 '코드'가 보였기 때문이다.
'저게 프로그램을 이루는 코드인건가.'
원래라면 프로그램의 코드는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다.
코드란 말 그대로 해당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분석할 수 있는 수단이었으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저 코드만 알고 있다면 아이스 브레이커를 직접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코드가 내 눈에 보인다는 건....'
마치 그가 다른 이들이 사용하는 마법을 보고 그대로 학습하는 것처럼, 전계에서의 프로그램도 그와 비슷하게 따라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별다른 전문가의 부연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니까.'
다만, 하나 거슬리는 점은 있었다.
프로그램의 코드를 알게 되었더라도 그걸 '연산'하는 과정은 조금 버거웠다.
낮은 등급의 프로그램이라면 별 상관 없겠지만, 연산이 많이 필요한 높은 등급의 프로그램을 자칫 무리해서 사용하려 했다간 뇌가 과열되어 타 버릴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내게는 연산을 도와 줄 든든한 파트너가 있지.'
〈음...?〉
날이 갈수록 고성능 사이버덱 못지않게 능력이 쑥쑥 자라나는 자랑스러운 전계 정령, 아르.
디젤이 품속에 손을 넣어 아르를 쓰다듬었다.
'이제 저 코드를 다루는 방법을 알면 되는데....'
종교의 기적이나 마법의 법식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전계의 코드는 그러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을 해 보았지만 결국 명확한 답은 나오질 않은 상태였다.
'해킹에 대해 좀 더 파고들어 보면 알게 될 수도 있어.'
"자, 이 정도가 해킹의 기본적인 내용이야. 이것 말고도 공성방벽, 매트릭스, 전계 망령, 기업 태그 등등 여러 키워드들이 있지만 그건 뭐, 심화 과정이니까."
"그것들에 대해서도 좀 배울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말고 나중에 읽을 수 있는 파일이면 좋겠는데."
"워... 굉장히 적극적인데? 그래. 보내 줄게. 이러다 어느 순간 전문 해커 되겠다고 찾아오는 거 아니야?"
시스가 간단한 조작을 하더니 디젤에게 데이터 파일을 건넸다.
"이제 더 궁금한 건?"
"없어. 고마워."
"좋아. 그러면 아까 내가 말한 '제안'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 보자고."
그녀가 디젤을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나랑 작업 하나 같이하자."
"작업?"
리틀 시스터와의 작업이라.
'나야 환영이지.'
이건 디젤에게는 기회이기도 했다.
능력을 빠르게 발전시키려면 높은 수준의 착귀갑사들과 함께 뛰어 보는 게 가장 좋았으니까.
"사실 데뷔한 지 일 년도 안 된 뉴비가 여기에 끼는 건 어림도 없긴 한데.... 그래도 내가 데려왔다 하면 다들 어찌어찌 수긍할 거야."
그녀의 말이 섭섭하다거나 그렇진 않았다.
이 뒷세계가 경력에 무척 민감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오히려 이렇게 제안해 주는 게 고마울 지경이다.
하지만 디젤은 표정을 관리하며 물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려 주면 좋겠는데."
그러자 리틀 시스터가 조금은 생소한 이름을 말했다.
"혹시 들어 봤어?"
"...?"
"전계의 마녀라고."
네오 조선 사이버펑크
서프라이즈
"전계의 마녀?"
디젤이 모르는 눈치자, 시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전계의 마녀. 전계 속을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미스터리한 존재야. 전계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걸로 유명하지."
"...."
"전계라는 곳은 밝혀지지 않은 게 무궁무진한 미지의 장소야. 우리는 아직 전계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못 할 뿐더러, 그 기원에 대해서도 온갖 추측들밖에 없는 상태지. 전계가 생활에 얼마나 밀접하게 침투해 있는지 생각해 보면 참 웃기는 일이야. 근데...."
시스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방금 말한 '전계의 마녀'가 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거야."
"뭔가 음모론 비슷한 거 같은데."
디젤의 추측에 시스가 솔직하게 답했다.
"맞아. 어느 정도는 그래. 설령 전계의 마녀라는 존재가 실재한다더라도 전계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하지만 사람들이 이 음모론에 열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 애초에 전계의 마녀라는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부터가 좀 재밌거든."
그녀가 허공에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그러자 시커먼 건물들이 잔뜩 솟아 있는 어떤 도시의 전경이 나타났다.
"미국 동부, 메가 코퍼레이션 게일 컨소시엄의 '도시'야."
세계를 지배하는 10대 거대 기업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름, 게일 컨소시엄.
도시 하나가 통째로 본인들의 것일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메가콥이다.
예전 디젤이 상대한 다족보행전차 AT-71이 바로 저 게일 컨소시엄의 병기였다.
"이 도시 중심에는 게일 컨소시엄의 본사가 있어. 본인들이 소유한 도시 속에 있는 건물인 만큼, 보안이 어느 정도일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시스가 손가락을 하나 치켜세우며 말했다.
"딱 한 번."
"...?"
"역사상 딱 한 번, 게일 컨소시엄의 본사가 정전된 적이 있어. 고작 3분 정도였지만 전 세계가 뒤집힌 사건이었지."
그녀가 새로운 사진을 하나 띄웠다.
불 꺼진 건물 위에 홀로그램 글자가 새겨진 사진이었다.
"이건...."
"처음 보는 언어지? 신화시대의 유물에서만 등장하는 고대 언어야."
그 문자들을 보고 있던 디젤은 잠시 표정을 관리하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이거... 읽을 수 있는데...?'
"이 고대어의 뜻을 해석하자면 이런 문장이 나와."
시스가 말한 문장의 뜻은 디젤이 해석한 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전계의 마녀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전계의 마녀는 모든 걸 알고 있다."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게일 컨소시엄의 본사를 해킹해서 정전을 일으키는 것도 모자라 건물에 홀로그램까지 띄워 놓다니.... 나는 아직도 저걸 볼 때마다.... 으으, 매번 전율이 일어."
"저게 전계의 마녀가 한 짓이라고?"
"그래. 처음에 사람들은 회사에 앙심을 품은 내부 직원이 목숨을 걸고 한 사건 정도로 여겼어. 하지만...."
여러 장의 사진들이 나타난다.
모두 정전이 일어난 건물 위에 홀로그램이 떠 있는 사진들이었다.
다만 건물들의 생김새가 각각 달랐다.
"같은 날, 같은 시각. 세계 10대 메가 코퍼레이션들이 전부 저 테러를 겪었다는 게 밝혀진 거야."
"...그게 가능해?"
"불가능하니까 난리가 났었지!"
"기업들이 가만히 있었을 거 같지 않은데."
"맞아. 곧바로 기업연합수사청에서 수사가 진행됐어.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지. 결국 미제로 남은 저 사건은 사람들에게 '전계의 마녀'라는 이름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어."
시스는 사진을 전부 치운 뒤에 새로운 것들을 보여 주었다.
"그 이후로도 기업군 항공모함이 항구에 전속으로 꼬라박은 사건이라든지, 인공위성이 어느 기업 회장 머리 위로 떨어진 사건이라든지 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는데, 사람들은 그런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전부 전계의 마녀 짓일 거라고 확신했어."
"음...."
"그러면서 점점 믿게 된 거야. 전계에서 전계의 마녀는 신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전계의 마녀는 전계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라고 말이야."
꽤 흥미로운 내용에 디젤이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마녀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겠어. 근데 그게 이 작업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의 말에 시스가 디젤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가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그 전계의 마녀를 잡을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