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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런 돌발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고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이쪽도 그간 병실에서 놀고만 있진 않았으니까.

다만 이런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대책이 많지는 않았다.

졸지에 시선이 쏠린 바람에 주변을 돌아봤다.

한쪽에선 팽근우가 어떻게 할 거냐는 듯 팔짱을 낀 채 날 응시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선 백청이 흥미롭다는 듯이 날 지켜보고 있었다.

"그와 붙어 볼 자 없나?"

계속되는 남궁도혁의 도발 어린 외침에도 의외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수석. 다들 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다.

의외의 상황임에도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군가 나와라!'

이대로 시간이 끌리면 결국 내 자질을 의심하던 팽근우가 내게 도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시점에서도 팽근우는 절정급에 다다른 후기지수. 지금 내 수준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데, 문득 일전에 마련해 둔 계책을 하나 떠올렸다.

'아냐 이 경우에는 오히려…!'

"남궁도혁 무공 교수님!"

기습적으로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순간 팔을 들어 올리려던 몇몇 생도들이 움찔하고 주위의 시선이 모두 내게 돌아왔다.

"제가 훈련에 뒤늦게 참여하게 되어 모르는 얼굴이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생도들과 붙어 보고 싶습니다."

즉 유급생들과 한판 붙어 보고 싶다는 이야기. 그 말에 소수의 유급생도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을 곡해해서 듣자면 신입생들 중 괴물과 싸울 바에 승급에 떨어진 녀석과 붙는 게 쉽겠다고 판단한 것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의도이기도 했고.

'팽근우나 백청보다는 유급생들과 붙는 게 훨씬 나아.'

승급에 떨어졌다는 건 일류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거나 걸친 채 좌절했다는 뜻. 적어도 상대하기 불가능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장수생도 중에 도전할 사람 있나?"

혹시 있을까 싶어 주변을 훑자 이쪽의 시선을 오해한 유급생들이 발끈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중 호기롭게 도전하는 이는 없었다.

올해가 마지막 기회인 유급생들은 이런 평가 점수 하나하나가 간절한 상황.

당연하지만 수석 합격생과 싸우는 위험을 짊어질 이는 많지 않았다. 아무리 그것이 거품이란 소문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들은 이미 작년에 이미 최상위권의 강자가 어떤지 뼈저리게 느꼈을 테니까.'

직접 1년간 천재들과 경쟁해 본 그들이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는 거다. 현 신입생 수석과의 전투를 말이다.

이 역시 예상했던 일이다. 이런 형국을 답답하다는 듯이 지켜보던 남궁도혁이 결국 추가 점수를 빌미로 유급생들의 참여를 유도하려는 순간.

"남궁도혁 무공 교수님!"

나는 다시금 손을 번쩍 들었다.

"…뭐지?"

남궁도혁이 성가시다는 티를 감추지 않으며 내게 물었다.

"저들 중에 오늘 제게 모욕을 준 이가 있습니다. 제가 정당한 시험으로 수석이 되었다는 걸 믿지 못하거나 비아냥거리는 이들입니다. 명예 회복을 위해 그들과 대련을 붙여 줄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일순 남궁도혁의 눈매가 슬쩍 좁혀졌다.

1차적으로 뒤에서 수군거리는 장수생도들의 행보에 한 번 한심함을 느끼고, 2차적으로 교수들이 판단한 시험 성적에 근거 없이 불만을 표했다는 점에 짜증을 느낀 듯했다.

나는 일부러 시험의 공정성을 들먹이면서 자신의 명예와 연관 지었다.

이렇게 대련의 정당성을 가져온다면 남궁도혁 역시 마땅히 거절할 말을 찾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도록 해라. 다만 상대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경우 내 재량껏 따로 붙이겠다."

그 생각대로 남궁도혁은 내 제안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

혹여나 내가 일부러 약해 보이는 상대를 골라 싸울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계획대로다.'

그 정도쯤은 예상했다. 나는 속으로 실소를 지으며 유급생도 중 한 녀석을 가리켰다.

"저자와 붙고 싶습니다."

근육질에 튼튼해 보이는 체구의 사내였다. 특히 두 다리가 두꺼운 것이 생도복 너머로 엿보였다.

그러자 웅성거리는 생도들.

"도소기를?"

"수석과 붙기엔 애매하지 않나?"

반응이 엇갈렸다.

"꽤 어려운 상대를 골랐구려. 저자의 이름은 도소기. 일전에 대련하는 걸 봤는데 달려는 게 엄청 빨랐으니 염두에 두는 게 좋소."

그때 옆에서 구동이 말했다. 그 말을 받아 이희문이 부연 설명 했다.

"너라면 상관없겠지만 저 녀석의 돌진은 조심해야 해. 모용문파의 검을 익힌 녀석이야. 저번 대련 때도 초반에 달려드는 첫수에 당했어. 나와는 다른 의미로 빠른 녀석이다."

'나도 알아. 그래서 고른 거니까.'

병실에서 요양하면서 연무장에 훈련 중인 생도들을 틈틈이 분석했다. 그중 내 나름의 방식으로 파훼법을 마련한 녀석도 몇몇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도소기였다.

특이하게 돌진기를 사용하는 무인.

완벽히 승리하기 위해선 꼭 저 녀석이어야 했다.

그들의 조언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남궁도혁 역시 이 정도 상대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따로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렇게 내가 가만히 서 있자 곧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의 도소기가 무대 위로 나왔다.

"내가 우습게 보였나 보군."

그래도 짬밥은 무시 못 하는지 자신이 그나마 약체로 지정되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챈 모양.

사실 이런 대련 때 가장 먼저 호명되는 인물은 보통 기대주거나 희생양인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도소기를 무시할 수 있는 입장은 전혀 아니었다.

'이렇게 보니 꽤 박력 있군.'

막상 일대일로 붙으려고 보니 꽤 긴장됐다. 남궁도혁이 손속을 둔 입학시험 때와는 달리 진짜배기 전투이자 내게 있어 첫 실전이다.

'전략대로 간다.'

나는 속으로 생각해 둔 방안을 떠올리며 검을 뽑았다.

이희문의 발도술과 달리 도소기의 시그니처 무공은 돌진술이었다. 빠르게 쇄도해 올려 베는 [쇄천검].

나는 상대의 이런 특성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후우."

타이밍을 재기 위해 마력으로 전신의 감각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

"저 비리비리한 몸으로 이길 수나 있겠어?"

"저번에는 진법이니까 통과했겠지. 배때기에 칼날이 들어오면 제갈세가라 해도 별수 없지."

저마다의 나를 무시하는 이들의 목소리.

"애초에 쓰러졌다는 것 자체가 약하다는 거잖아."

나는 조롱 속에서 홀로 섰다.

"웃기고 있네. 그럼 네가 저기서 싸우지 그래?"

"뒤에서 구시렁대는 건 무인의 도리가 아니오."

허나 이윽고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들.

뭐 그래도 이 연무장에 완전히 나 혼자만은 아닌 듯했다.

"준비."

곧 남궁도혁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고 내가 호흡을 다잡았다.

한편 도소기는 자세를 낮춰 양 허벅지를 내기로 부풀리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우리 사이에 흘렀다. 그리고.

"시작!"

신호음과 함께 도소기가 자리를 박찼다. 멀리서 지켜보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맹렬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한 줄기의 잔상이 되어 내게 쏘아지는 도소기.

그 육중한 몸이 이내 나와 겹쳐지듯 달려들었다.

퍼억!

곧 살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뒤늦게 가속을 따라온 먼지바람이 일대에 일었다.

"이… 이게 무슨!"

생도들이 저마다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몇몇은 놀라서 입을 떡 벌리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호오."

팽근우도 영문을 모른 채 미간을 좁혔고 백청 역시도 흥미롭다는 듯이 입술을 모았다.

수석이 패배했다, 라고 하는 일이 아닌 정반대의 사건. 많은 이들이 당연하다고 판단하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왜냐면 지금 도소기는 허공에서 달리던 자세 그대로 안면이 뭉개진 채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한 번도 휘두르지 않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돌진이 빨라서 대응하기 어렵다면 허공에 벽을 세우면 되잖아?'

내 전략은 간단했다. 일전에 비해 커진 서클의 마력을 몽땅 쏟아부어 경로상에 투명한 실드를 만들었다.

그러면 돌진하는 상대가 알아서 부딪혀 쓰러진다. 상대의 장점을 역으로 이용한 공략법.

어처구니없는 전략이지만 그렇기에 유효했다.

설마 허공에 화살도 뚫지 못하는 투명하면서도 단단한 벽이 세워져 있을 거라고 누가 믿겠는가.

'왜 저런 돌진력을 가지고서도 유급됐는지 알겠군.'

기감이 아예 없다. 저러면 그냥 무식한 멧돼지일 뿐.

그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이건…!'

입안이 근질거리는 이 감각.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고.

'지금껏 잠잠하다 왜 하필이면 지금!'

어쩌면 지금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혹감이 가득한 내 눈동자에 절망이 어렸다.

[오만한 귀공자]의 특성이 [간헐적 디버프 강화]와 합쳐져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단 한마디로 드러났다.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군."

차가운 한마디. 마치 만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 주인공이 나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꺄아아아악!'

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전신이 오그라드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었으나 겉으로는 전혀 티 내지 않았다.

그게 [오만한 귀공자]였으니까.

내가 차가운 기색을 내비치며 도소기로부터 시선을 떼자 남궁도혁의 선언이 연무장 내에 울려 퍼졌다.

"승자 제갈천우!"

모두의 열띤 시선 속에서 나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실전에서의 첫 승리는 어째서인지 씁쓸한 맛이 났다.

14화 검을 뽑을 새도 없이 (2)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난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

웅성거리는 생도들. 저마다 다른 무공과 성취를 지닌 이들이지만 지금만큼은 대부분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바로 당혹감.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어도 믿기 어려울 만큼 대련 양상은 충격적이었다.

"설마, 도소기가 아무것도 못 한 채 당할 줄이야."

"거기다 검을 뽑을 필요조차 없다니. 저게… 수석?"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생도들의 호들갑 떠는 목소리로 연무장은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정작 그 소란의 주인공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무표정으로 연무장에 한쪽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만 좀 떠들어라.'

실제론 자신이 저질렀던 발언을 상당히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자세조차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수석이란 이유만으로 생도들에게는 선망 어린 눈빛을 받기 충분했다.

물론 시기 어린 시선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그거 진법 아냐? 중간에 가로막힌 것 같은데?"

"뭐? 진법이라니! 사술이잖아."

"그럼 대련이라 하기엔 어폐가 있지 않나?"

몇몇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리 떠들어 대고 있었다.

머릿속까지 무공으로만 채워진 이들에게는 진법 같은 건 모조리 사특한 술법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테니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무엇보다 제갈천우는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승리했지 않나. 무를 숭상하는 무인들로서는 깔끔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승부였다.

"뭐가 됐든 간에 승부에서 이긴 건 제갈천우다. 도소기가 쉬운 상대인가? 꼬우면 너희들이 직접 싸워 보든지 해라."

그때 이희문이 장본인 대신 나서서 낭설을 저지했다.

"저 정도의 진법을 선 채로 펼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거 아니겠소."

이에 구동 역시 옆에서 거들었다. 그런 말들이 곳곳에서 새어 나오자 다른 이들도 억측을 자제하는 분위기로 변했다.

어쨌든 승자는 제갈천우였고, 그가 수석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라도 납득하지 않으면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제갈천우가 보여 준 모습은 그들로서 쉬이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그들이 보기엔 승부와 동시에 도소기가 달려 나가다 제풀에 쓰러진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사실 자리에 있던 생도 중 그 누구도, 아니 아주 특별한 기감을 지닌 극소수를 제외하고선 어떤 이들도 제갈천우가 보인 무위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의 마법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제갈천우로서는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처럼 특별한 기감을 지닌 이는 비단 연무장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와. 뭐야 방금?"

제갈천우의 대련을 목격한 우희령이 눈을 빛냈다.

방금 그건 진법 같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화경의 고수들이 쓰는 허공섭물과 닮아 있었다. 아무런 기운도 머금지 않은 세상에 자신의 의지만으로 간섭해 현상을 구현하는.

"저 녀석… 화경의 고수였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녀의 추측을 듣고 있던 정묵이 옆에서 지적했다. 어쩌다 보니 끌려오게 되었지만 덕분에 귀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의 시선이 깊어졌다.

"다만 이번 수석은 주의해서 지켜볼 필요는 있겠군요. 어쩌면 기물을 사용한 건지도 모릅니다."

"흠. 좀 더 가까이서 봤으면 괜찮았겠는데."

본분을 잊고 신입생도를 건드리려는 그녀를 정묵이 제지했다.

"그러지 마시죠. 중급생도들은 안 맡습니까?"

"내가 없어도 잘 성장할 녀석들이야."

"생도들이 섭섭해할 겁니다."

"흥 내가 없으면 섭섭해지는 건 너겠지."

그녀의 농담에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정묵이 침묵했다.

아주 희귀한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보이는 우희령 특유의 분방함에 말려들면 피곤해지는 건 언제나 그였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우희령의 반응도 이해가 됐다. 제갈천우가 보인 그 한 수. 그건 대체 뭐였을까?

처음 입학시험에서 봤을 때도 그렇고 정말 신기한 녀석이었다.

"그래도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군요."

"응? 뭘? 날?"

우희령의 짓궂은 미소에 정묵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어떤 녀석인지 말이죠. 학원에 쥐새끼는 필요 없으니까요."

* * *

"제길!"

눈을 뜬 도소기가 거칠게 생도실의 문을 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오후 훈련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아니 훈련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자신이 그 신입에게 철저히 패배했다는 열패감이야말로 그가 분노하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아무리 그 상대가 수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설령 그 상대가 화산파의 기재인 백청이나 하북팽가의 둘째 공자인 팽근우라 해도 한 수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그런데 그 제갈세가의 망나니로 유명한 제갈천우에게 이렇게 처참하게 지다니.

거기다 주변 생도들의 증언으로는 그때 자신이 진 이유가 진법 때문이라 평했다.

무인이 그것도 일대일 결투에서 진법가에게 놀아나다니!

도소기로서는 도저히 참기 어려운 굴욕이었다. 아니 수치였다.

"내 반드시 복수할 테다…!"

도소기는 아직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제갈천우가 사술로 자신을 꺾은 것이라 믿었고, 무공으로 붙으면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 수모를 어떻게 갚아야 하지?"

도소기가 중얼거렸다. 평소 자신의 생각을 말로 중얼거리며 정리하는 습관이 초조한 심정에 도진 것이었다.

수모를 갚는 방법은 간단하게 생각하면 제갈천우에게 도전해서 이기면 된다.

하지만 정말 다시 붙었을 때 제갈천우에게서 승리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확신할 수 없었다.

사술이 왜 사술인가. 예상치 못하게 비겁하고 사특하기에 사술이다.

도소기가 대련 당시를 떠올렸다.

빠르게 상대에게 쇄도하는 자신.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이쪽을 보고만 있는 제갈천우.

이겼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거리에서 검만 뽑아 휘두르면 그걸로 끝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지금에서야 직감하는 건 거대한 충격이 자신의 턱과 얼굴에 전해졌다는 감상뿐.

공격적인 진법이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참기 힘든 절망감을 느꼈다.

만일 제갈천우가 정말로 그런 공격진을 바로 쓸 수 있는 진법가라면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쉬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늘 대련에서 패배하고 훈련을 통째로 빠지게 되면서 자신에 대한 평가 역시 떨어졌을 터.

어떻게든 올해는 중급생도가 되어야 했는데 괜히 복수하겠답시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한다…."

그렇게 도소기가 심마에 빠져 고민하고 있을 때.

"고민이십니까?"

누군가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도소기가 고개를 들어 곱상한 얼굴의 상대를 바라봤다. 그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자신과 같은 장수생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도소기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는 확실히 다른 종류의 장수생이라고. 어쩔 수 없이 떨어진 존재가 아닌 일부러 '잔류'한 괴짜라는 걸 말이다.

상대는 분명 중급생도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일부러 유급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그 연기가 워낙 감쪽같아서 모두가 속아 넘어갔지만.

만일 도소기도 최종 시험 중에 그가 일부러 탈락한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지 않았다면 이 녀석도 자신과 같은 장수생이라고 믿었을 거다.

도소기는 그가 왜 그랬는지는 몰랐지만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친하지 않았을뿐더러 왠지 모르게 저 생글거리는 얼굴 뒤에 숨겨진 본 모습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왜 날 찾아온 거지?"

도소기가 속에서 올라오는 긴장감을 감추며 물었다.

"오후의 대련이 너무하다고 생각돼서요."

"너무해?"

분명 경계하고 있었건만 녀석에게는 사람의 의심을 허무는 무언가가 있었다. 도소기는 내심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그에게 되묻고 말았다.

"네, 제갈천우가 보여 준 그 한 수. 진법이잖아요."

"그쯤은 나도 알고 있다."

도소기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 말에 상대가 싱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만일 그 진법을 발동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다면 어쩌겠어요?"

"그게 가능하다고?"

도소기가 알기론 이 녀석은 진법가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갈세가의 진법을 파훼한다는 것일까.

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능해요. 이것들만 있으면요."

녀석이 건넨 건 검에다 매는 장식품 하나와 적갈색의 환약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곧 조원 단위의 시험이 치러질 거예요. 집단전이니만큼 제갈천우는 분명 진법을 활용하겠죠. 그때 이걸 쓰면 그런 진법 따윈 얼마든지 허물 수 있을 거예요."

"…대체 내게 이걸 왜 주는 거지?"

"말했잖아요. 너무하다고 생각했다고."

상대의 말에 도소기가 표정을 구겼다. 자신은 이렇게 성의 없는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납득하기 어려우면 서로 이득이라고 생각해요. 그쪽은 이걸로 시험 점수를 끌어 올리고 저는 제갈천우를 견제하는 거죠."

그 말에 도소기가 자신에게 주어진 장식품과 환을 바라보며 갈등했다. 조별 시험이라. 돌진에 특화된 자신이 가장 자신 없는 게 조별 시험이었다.

무공의 파괴력에만 집중하느라 상대의 기감을 포착하는 게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자신의 성격상 단체로 전략을 짜고 협동하는 부분이 약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조원이 어디에 있는지, 전체적인 전략이나 구도 속에서 행동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위험하다.'

올해는 유독 뛰어난 실력의 신입생도들이 많았다. 그로 인해 장수생도끼리의 아귀전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이런 와중에 벌써부터 제갈천우에게 지고, 조별 시험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정말 올해로 무림학원에서 방출될지도 몰랐다.

도소기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만일 그가 조금만 더 이 사안을 객관적으로 생각해 봤다면 이 상황 자체가 상당히 위험하다고 느낄 수 있었겠지만, 지금 그는 조급함에 시야가 좁아진 상황이었다.

결국 갈등 끝에 도소기가 입을 열었다.

"내가 뭘 하면 되지?"

* * *

"대단하오."

"대단하지."

양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금 나는 골치가 아팠다.

오후 대련 이후 두 녀석들은 날 골리려는 듯이 대련 때의 일들을 재잘거리고 있었다.

"검을 뽑을 필요도 없군… 이라니 이 무슨 대단한 기백이란 말이오!"

구동은 정말로 감명 깊게 지켜본 듯 내가 한 말을 회상했고, 이희문은 내가 보여 준 무위를 궁금해했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정말 진법이냐? 아니면 타격?"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후에 이어진 다른 생도들의 대련을 분석하며 대응 방식을 고찰하는데 바빴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서클의 마력을 키우거나 [역천심공]도 연마해야 했고 말이다.

하지만 이 끈덕진 녀석들은 도무지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생도실로 향했다. 단련 중독자들인 이 녀석들이 견딜 수 없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 생각대로 내가 생도실로 향하자 아쉬운 기색으로 대화를 마치고는 연무장으로 향하는 녀석들. 아마 거기서 다른 교관에게 자유 지도를 받으며 단련을 이어 나갈 게 분명했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무공 성취를 이룬 교관이 많은 것이 바로 이 무림학원의 최대 장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드디어 나만의 시간인가.'

그렇게 홀로 남게 된 내가 침대에 은신진을 만들어 명상하려던 그때.

천장에서 미세한 기척을 느꼈다.

'쥐가 다니나?'

그 일정하고도 미약한 기운이 어쩐지 소동물의 움직임처럼 느껴졌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가려던 찰나에 두 눈을 부릅떴다.

쥐가 이토록 일정한 기척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동시에 내 목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닿았다. 독사 앞의 쥐처럼 온몸이 경직된 와중에 심장만이 빠르게 뛰었다.

호흡조차 희박해지고 섬뜩한 고요가 방 안을 메웠다. 이내 서릿발처럼 차가운 음성이 이어졌다.

"조용. 죽고 싶지 않다면 따라와라."

15화 공개 비무 (1)

반응조차 못 하고 제압당했다. 알아챈 순간에는 이미 상대에게 배후를 점령당한 후였다.

'엄청난 고수다.'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대응할 수 없었을 거다. 그만큼 상대와 나의 실력 차는 압도적이었다.

"어디로… ㄱ."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일순 전음과 함께 옆구리에 막대한 충격이 전해졌다. 내기를 담아 때렸는지 장기가 다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었다.

'더럽게 아프군.'

나는 통증에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녀석이 이끄는 대로 끌려 나갔다.

용의주도하게도 생도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침 교대 시간이 된 건지 이런 학원 안쪽까지 침입자가 없을 거라 생각해 순찰의 여유를 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지금 날 발견해 줄 이는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만일 여기서 내가 소란을 부리면 주변을 순찰하던 교관들이 바로 달려와 주겠지.'

이곳은 엄연히 무림학원의 중심부다. 당연히 다수의 교관을 비롯한 고수들이 밀집되어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즉 소란이 일면 다수의 고수가 즉시 달려와 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였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내가 도리어 위험해진다는 거지만.'

내 두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 정도의 격차가 있는 고수 앞에서 그런 방식의 도박을 한다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당장 눈앞의 주먹이냐 언젠가 도래할 공권력이냐의 난제. 이는 동서고금 어디나 적용되는 딜레마였으나 대개 상황이 급박할수록 전자가 우세했다.

'그러니 몰래 할 수밖에.'

나는 걷는 척하면서 조심스레 바람 마법을 준비했다. 이대로 담장 너머로 바람 마법을 몇 개 쏴 이쪽으로 시선을 유도할 생각이었다.

"무슨 짓이지?"

그러나 그 순간 들려온 음성에 긴장했다. 설마 이걸 들킬 줄이야. [절대마도] 덕분에 마력 제어 능력만큼은 극한에 다다른 상태였기에 솔직히 충격이었다.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네가 말하지 말라며를 핑계 삼아 생각할 시간을 벌 요량이었다.

'1서클로는 부족했나.'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반성이었다.

서클이 올라갈수록 마력 감응도를 비롯한 마력 컨트롤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서클이 낮을수록 마력 컨트롤이 확연히 떨어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무리 [절대마도]의 재능이 있다 해도 고작 1서클로는 이렇게 근접한 고수를 상대로 마력을 사용했을 때 들키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

'그동안 통한다고 해서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반성은 짧았고 현실은 당장 코앞까지 닥쳐와 있었다. 녀석의 재촉이 이어졌다.

"대답."

"말… 하지 말라면서?"

미리 준비한 핑계를 꺼내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지금이라도 마법을 사용해 주변 이들을 불러 모으고 그동안 이자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없다.'

결론과 동시에 자력 탈출을 깔끔히 포기한 나는 변명을 꺼냈다.

"내가 절맥증이 있어서 말이지. 가끔 이렇게 긴장하면 내기가 요동친다."

"그런 것치곤 침착해 보이는군."

망할. 고수답게 눈썰미가 상당했다. 나는 아직 내 뜻대로 움직이는 양손의 감각을 느끼며 어떤 종류의 믿음을 상기시켰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너도 말이지. 무림학원에 침입한 고수치고는 말이야."

퍽!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부의 충격이 올라오더니 이내 숨이 막혔다.

"크헉!"

곧 헛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침입자가 매몰차게 입을 열었다.

"그만, 일어서라."

하지만 나는 일어서지 않았다. 대신 숨넘어가는 소리만을 꺽꺽거리며 낼 뿐이었다.

"어어억!"

내가 아예 바닥에 뒹굴기 시작하자 침입자도 예상 밖이었는지 당장 내 목을 젖히고는 숨구멍을 열려 했다.

"쿨럭! 쿨럭!"

거기에 내기를 담아 복부를 압박하는 무림식 심폐 소생술까지 곁들여지자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남은 숨을 토해 냈다.

"이 자식…! 다음에도 꾀를 부린다면 죽여 버리겠다."

침입자의 눈매가 구겨졌다.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확실히 눈치가 빠르군.'

방금 내 혈도를 짚으면서 그는 파악했을 것이다. 내가 쓰러진 건 정말로 발작 때문이 아닌 일부러 내가 숨을 쉬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는 걸.

"…살려 놓고선 다시 죽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아닌가?"

건방지다 못해 오만하다고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제정신이 박혔으면 자신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상대에게 이따위 말을 할 순 없겠지.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침입자는 날 해하러 온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상대 역시 당황했는지 역으로 이를 감추기 위해 살기를 드러냈다.

그러나 [극한의 의지]의 재능이 있는 내게 통할 리가 없었고 오히려 내게 상대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는 여지를 줬다.

나는 이전과는 다른 톤으로 말을 꺼냈다.

"이제 슬슬 진짜 목적을 말하시죠. 왜 절 찾아온 겁니까? 그것도 학원 관계자가 변장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내 말에 일순 그가 멈칫거렸다. 본래라면 절대 티 내지 않았겠지만 너무나도 확고한 내 태도에 잠시 평정을 잃은 것이었다.

"…언제부터 알았지?"

발뺌하기엔 이미 늦었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속여 넘기기 어려웠기에 정묵이 복면을 벗으며 물었다.

그는 지금 꽤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무리 즉석으로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들킬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납치당하는 것치고는 제 몸이 너무 자유로웠거든요."

그는 목에 단검을 들이미는 와중에도 내 점혈을 짚지 않았다.

만약 정말 그가 나를 납치하려고 했거나, 내게서 정보만 듣고자 했다면 혈도를 제압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입을 움직일 수 있는 아혈만 남겨 놓으면 됐으니까.

하지만 정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말인즉 나의 완전한 제압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

'그가 관계자라는 걸 확신한 건 내가 쓰러진 척을 한 후였지만 말이지.'

자칫하면 위험할 뻔한 자충수였으나 내겐 모종의 근거가 있었다.

앞서 그가 내기를 담아 공격할 때 어딘가 손속을 둔 듯한 감각이 있었으니까.

일전의 미태을이 그러했듯 [무극지체]의 재능을 지닌 나는 본능적으로 내게 가해진 공격의 강도나 의도를 얼핏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묵의 주먹은 분명 거칠긴 했어도 장기에 손상을 일으키는 종류의 공격이 아니었다. 내 말에 잠시 침묵하던 정묵이 다시 물었다.

"만약 내가 실력에 자신 있어서 제압을 하지 않은 거라면?"

"그랬다면 제가 입을 놀렸을 때 이미 박살 났겠죠. 그만큼 오만한 자라면."

앞서 보여 준 그 건방진 태도마저도 다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거다. 그 사실을 알아챈 정묵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보통 녀석이 아니야.'

이럴수록 의심은 커졌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도 상대를 떠보는 배짱과 행동력 거기에 작은 단서로 사건의 진위를 밝히는 총명함까지.

어쩌면 외부에서 보낸 첩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정말 제갈천우가 모종의 첩자였다면 이렇게 자신의 비범함을 밝힐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순수하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너는 왜 무림학원에 온 거지?"

정묵이 검결지를 세워 내 목의 맥박을 짚었다. 심박수로 거짓말의 유무를 판단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물론 훈련된 살수라면 통하지 않는 방식이지만 그는 내 쇠약한 몸과 내기로 미루어 봤을 때 그다지 훈련되지 않은 존재라고 여긴 듯했다.

순간 허공에 우리 둘의 시선이 얽히고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나로서도 쉬이 판단하기 어려운 화두였다. 처음에는 그저 살기 위해서였다.

낯선 세계에서 클리어하라는 의문의 메시지에 자극받은 것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였다.

언제나 나는 생존만을 추구했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와 마법의 기적을 체험하고, 파천마의 심득을 이해하며 그걸 몸으로 체화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내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건 변화가 아닌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복잡한 상념이 떠올랐지만 결국 나는 간단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대답을 내놓았다.

"살아남으려고요. 강해져서."

그런 내 말에 정묵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마 내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리라.

"그런 주제에 살수를 도발하고선 나중엔 그 복면까지 벗겨 냈다라…."

정묵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물음이라기엔 내 행동에 대한 평가가 새어 나온 결과일 거다.

"과대평가입니다."

나는 슬며시 겸양을 떨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과감히 행동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무림학원]에서의 납치 이벤트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렇게 빨리 맞닥뜨릴 줄은 몰랐지만.'

[무림학원]의 초반부가 욕을 먹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갑자기 활약하고 잘나간다 싶으면 모종의 고수가 찾아와서 납치해 가는 미친 전개가 여럿 있었다.

다음 에피소드를 대비하면서 수련하고 있는 유저 입장에선 캐릭터가 생뚱맞은 고수에게 납치를 당하니 어이가 없을 터였다.

거기다 선택지를 잘못 고르면 그대로 야산에 묻히는 살해 엔딩이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어째서 이렇게 하신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이유가 있다고 믿겠습니다. 추후 궁금한 점이 있다면 정식으로 불러 주세요."

그리 말하면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나름 유하게 납치 이벤트를 끝낸 셈이었다.

사실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하는 일들을 할 순 있었지만 지금으로써는 그냥 넘기는 편이 나았다.

나도 감추고 싶은 게 있었고 은근히 빚을 지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무엇보다 교관들을 완전히 믿을 수 없어.'

[무림학원]은 매 회차 플레이할 때마다 첩자 같은 빌런이 아주 조금씩 달라지는 구조의 게임이었기에 지금 학원 내 어떤 교관과 교수가 첩자인지에 대해선 완전히 알 수 있는 바가 없었다.

정묵 역시 어디까지 연관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만큼 신중해야 했다.

그런 나를 정묵이 가만히 응시하더니 이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이러니 못 피했지.'

황망한 심정으로 정묵이 사라진 길목을 바라봤다. 굳이 [오감저하]가 아니었어도 그의 움직임을 포착할 순 없었을 거다.

재능을 가졌기에 알 수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아득한 차이가 있었다.

"언제 저만큼 강해지냐."

나는 한탄하듯 중얼거리고선 생도실로 향했다.

* * *

"너는 대체 배우는 무공이 뭐지?"

정묵의 재방문은 의외로 빨랐다. 바로 다음 훈련 때부터 날 찾아온 것이었다.

평소 과묵한 주임 교관이었던 정묵이 날 찾아온 탓에 연무장의 시선은 온통 나와 정묵에게로 쏠려 있었다.

결국 나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 준비한 말을 꺼냈다.

"그냥 삼재검법입니다."

어디서나 배울 수 있는 싸구려 무공.

대무공시대가 열린 이후로는 빈민가에서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무공의 이름에 순간 주변의 이목이 확 집중됐다.

"말도 안 돼. 삼재검법이라고?"

"거짓말이겠지. 그 제갈세가잖아."

"아무리 수석이라도 농이 지나치군."

다른 생도들이 저마다 날 보며 한마디씩 던졌다. 저들의 입장에서 나는 자율 훈련 때마다 연무장 한 번 제대로 나오지 않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괴짜일 거다.

게다가 그런 주제에 수석을 차지한 재수 없는 명문세가 망나니 출신 자제겠지.

물론 그들은 내가 생도실에서 서클과 심법을 연마하고, 그렇지 않은 남은 시간은 뒷산에서 기초체력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 역시 이걸 굳이 해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방치한 감도 있었다. 어차피 저렇게 떠드는 것들은 대부분 조연일 뿐이었으니까.

"그럼 내가 가르쳐 주지."

정묵이 대뜸 내게 말했다. 삼재검법이라는 말에 황당할 법도 한데 그걸 진지하게 알려 주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삼재검법을 배우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무리 없이 육체를 단련하기엔 이것만 한 게 많지 않아서였다.

"먼저 수준을 봐야 하니 덤벼 봐라."

정묵이 자신의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꽤 곤란하게 됐다.

주위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대놓고 이쪽으로 와 자리를 잡은 백청에 아닌 척 이쪽을 흘겨보는 팽근우, 거기에 이희문과 구동까지.

이들의 날카로운 눈초리 속에서 선보이기엔 아직 내 실력은 무르익지 않았다.

여태껏 핑계를 대면서 이런 식의 대련을 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외통수가 걸린 것이었다.

'하는 수 없지.'

단념과 함께 천천히 검을 뽑았다.

망설임은 끝났다. 그간 숨겨온 실력을 선보여야 할 때였다.

16화 공개 비무 (2)

"첫수, 세 합은 양보하지. 이쪽은 소지와 검지를 손잡이에서 뗀 채 왼손만으로 상대하며, 내기도 쓰지 않겠다."

정묵의 말에 나는 종단 자세로 검을 세운 채 그를 바라봤다.

그냥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파고들 틈이 없다. 숨이 턱 막히는 압박을 이겨 내며 검날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 한 방에 내 모든 걸 건다.'

첫수를 양보한다는 말은 보통 대결에서 선공을 양보하는 걸 뜻한다.

하지만 지금 같은 지도 대련에서는 어떤 수를 펼치든 한 번은 제대로 받아 준다는 함의가 깔려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정묵에게 제대로 된 일격을 먹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내 검 끝을 바라보던 정묵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꽤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서클이 미친 듯이 맥동한다. 마력 회로를 따라 흘러간 마력이 허벅지와 종아리, 팔뚝과 손목에 이르기까지 근육이 붙은 모든 부위를 전부 강화한다.

'오래는 못 버틴다.'

온 신경을 전방에 집중한 채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지금 내가 펼칠 초식은 태산압정(泰山壓頂). 태산조차 짓누른다는 명칭을 지닌 가장 기본적인 베기였다.

나는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쿵-

연무장 바닥이 진동할 만큼 묵직한 한 발짝.

동시에 하단전에서 역천심법이 발현되면서 마력으로 투박하게 강화한 육체의 흐름이 훨씬 부드럽게 변했다.

허벅다리에서부터 허리, 어깨, 팔뚝까지 유려하게 이어지는 가속의 연쇄 [무극지체]의 재능이 어김없이 발현됐다.

곧 전신의 힘이 담긴 검이 정묵을 향해 쏘아졌다.

키이잉!

순간 검을 뽑아 막아 내는 정묵. 그는 생각 외로 묵직한 일격에 흥미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어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에 정묵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주변 풍경이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마치 세상만이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는 듯이.

'말도 안 돼…!'

정묵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이 엄청난 기세로 뒤로 밀려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튕겨 나갔다고?"

고작 하급생도에게? 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분명 완벽하게 막았다. 나쁘지 않은 일격이었지만 상대보다 자신의 내공이 월등히 높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밀려나다니. 고작 하급생도에게 주임 교관이 튕겨 나간 것이었다.

정묵이 뒤로 밀려나는 틈을 이용해 쏘아지는 제갈천우의 다음 공세를 막아 내며 자신의 실책을 눈치챘다.

'지지가 되지 않았어.'

바닥이 너무나 미끄러웠다. 마치 설 녹은 얼음장 위에서 싸우는 것만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런데 그때 그의 오금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무릎 뒤쪽을 후려친 것처럼.

"무슨?"

순간적으로 자세가 무너진 정묵이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제갈천우를 바라봤다.

* * *

나는 전력을 다해 정묵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그러나 순간 휘어지듯 뽑힌 정묵의 검이 이를 가로막았다.

검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엄청난 반탄력이 느껴졌다.

'더럽게 강하군.'

과연 대단한 힘과 기술이었다. 마력과 내기, 마법과 무공, 내 모든 걸 쏟아부은 일격이 이렇게 간단하게 막히다니.

그러나 내가 준비한 수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리스(Grease).'

마력을 얼음물처럼 옅게 깔아 바닥의 마찰을 줄이는 1서클 마법.

선공을 취해 덤벼들기도 전에 난 이미 정묵의 발밑에 그리스 마법을 부여해 놓은 상태였다.

그 덕에 순간적으로 뒤로 크게 밀려나는 정묵. 검 너머로 그가 놀란 눈을 하는 게 여실히 보였다.

만약 이게 정말 실전이라면 통하지 않았겠지. 저번에도 마력을 사용한 것만으로도 들킨 전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지도 대련. 정묵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기에 정작 자신의 주변에 벌어진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직접 몸에 작용하는 힘이 아니었으니 더더욱 감지하기 어려웠겠지. 거기에 내가 대놓고 마력을 검에 씌워 시선을 분산시킨 것도 한몫했다.

'지금이 기회다.'

뒤로 미끄러지는 정묵을 향해 나는 연속해서 삼재검법의 두 번째 초식 횡소천군(橫掃千軍)을 내질렀다. 가로로 빠르게 이어지는 검격.

"어어?"

"말도 안 돼!"

주변에 구경하던 다른 생도들 역시 이 광경에 놀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키잉!

그러나 허점을 찔렀음에도 검격은 막히고 말았다.

심지어는 불안정한 자세임에도 정묵이 공격을 흘리기까지 했다. 언제 놀랐다는 양 그는 이미 침착한 대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한 수가 남았다.'

내 두 번째 일격에 밀려나던 정묵이 어느 순간 뒤로 미끄러지던 자세 그대로 허리가 젖혀졌다.

허공에 세워 둔 실드 때문이었다. 정묵이 미끄러지는 방향에 맞춰 무릎 언저리쯤 허공에 실드를 발동시켜 둔 것.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얼음판에 미끄러지는 와중에 예상치 못하게 무릎 뒤쪽까지 걸리면 넘어질 수밖에.'

정묵의 눈동자가 당혹으로 물들고 그의 상체가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검술의 기본인 양다리와 허리의 균형이 어그러졌다. 본래 뚜렷했던 검 끝 역시 본래의 검로를 잃고 허공을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여기서 승부를 봐야 한다고 느꼈다. 이미 이 두 번의 일격과 마법 사용에 내 마력과 내공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마지막이다.'

나는 허공에 막힌 검날을 세워 그대로 정묵을 향해 겨누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의식이 가속했다. 마치 슬로 모션처럼 검 끝이 천천히 정묵의 심장부를 향해 기울었다.

직도황룡(直到黃龍). 가장 간단한 찌르기이자 어떤 기교도 품고 있지 않아 단순하게 빠른 삼재검법의 마지막 초식.

나는 그대로 체내의 모든 마력과 내기를 터뜨려 검 끝을 내질렀다.

파앙!

공기가 찢기는 소리와 함께 검날 끝이 잔상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건 정묵의 심장이었다.

그리고 칼날이 그 육신을 꿰뚫으려는 순간. 한 줄기 빛살이 그 사이를 갈랐다.

서걱!

이윽고 손끝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감각에 나는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이미 내 몸은 한계까지 가속한 상태.

양다리의 힘도 극한까지 짜낸 탓에 무너진 자세를 복구할 겨를 없이 디딤 발째로 무릎이 꺾여 그대로 쓰러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바닥에 넘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내가 내지른 손끝에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있는 건 한 치도 남지 않은 검의 자루와 허공으로 솟구치는 검날 그리고 섬뜩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있는 정묵의 표정이었다.

검이 베였다.

그 사실을 인지한 나는 쏘아지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 * *

"방금 봤어?"

"수석이 정묵 주임 교관님을 날려 버렸잖아?"

"도소기가 괜히 한 방에 진 게 아니었군."

뒤늦게 들려오는 놀라움에 찬 음성들. 이내 가속했던 의식이 돌아오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나를 내려다보는 정묵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멈칫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나는 겨우 후들거리는 다리를 딛고 서 포권을 취했다. 깔끔한 패배 승복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검도 잘린 데다 서 있는 것도 고작인 상태니 이쯤에서 대련을 끝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정묵은 나와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직 대련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투기는 끊기지 않았다. 여전히 한판 해볼 생각이 만연한 눈빛이었다. 무언가 스위치가 눌린 듯한 느낌. 그 증거로 그가 쥐고 있는 검날이 은은한 황색을 띠고 있었다.

'검기.'

저게 방금 그 기행을 가능하게 한 괴멸적인 힘의 정체였다.

내가 라이트 마법으로 흉내 내거나 마력으로 덧씌우는 것에 그치는 가짜가 아닌 그 자체로 쇳덩이를 베는 진짜배기 검기.

만일 저게 내게 곧장 쏘아졌다면 지금쯤 고깃덩이가 되었겠지. 두 번씩 저런 걸 마주할 수는 없었다.

"전 이미 제 모든 걸 보여드린 것 같습니다. 검도 이 모양이고 말이죠."

"뭐?"

정면으로 쏟아지는 기백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묵이 뭐에 꽂혔는지는 몰라도 지금 내 서클의 마력과 단전의 내기는 바닥이었다.

심장부의 서클을 중단전, 단전 쪽을 하단전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사실상 선천진기 빼고는 모조리 소모한 셈.

무리해서 싸우느라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 내 상태를 본 정묵이 그의 검을 내게 던졌다.

"내 검을 주지. 이번엔 맨손으로 싸우겠다."

그대로 연무장 바닥에 박히는 검. 좋은 검이다. 아무리 검기를 머금었다지만 절삭력이 상당했으니.

이런 걸 내게 쥐여 주면서까지 싸우고자 하다니. 나는 뭔가 잘못됨을 느끼며 정묵의 검을 다잡았다.

'제길, 일부러 마법도 최소한으로 썼는데.'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그나마 사술 소리 안 듣기 위해서 최대한 무공의 형식을 빌려 공격한 건데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이제 정공법으로 상대할 수 있는 건 끝이다. 마법도 무공도 안 된다면 남은 건 하나.

'진법의 정수를 보여 줄 수밖에.'

그리 생각하며 품 안의 돌멩이들을 만지작거리려던 그때.

"재미있는 걸 봤군."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어조.

갑작스러운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건 구자범이었다.

"주임 교수님?"

순간 좌중에 정적이 깔렸다. 주임 교수라 하면 이곳에서 학원장 바로 다음 가는 인물이었으니까.

정묵의 검결지에 맺힌 검기가 순간 사라지고 날 압박하던 기운 역시 흩어졌다.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이미 승부가 난 것 같아서 말이야."

구자범이 나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사실 지금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과도한 힘의 사용으로 인해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혈색이 더욱 나빠져 있었다.

"지도 대련 중에 검기를 쓰는 건 자중해야 하지 않겠나."

"…제가 너무 흥분했군요. 대련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정묵이 가만히 심호흡을 내뱉더니 내게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깔끔한 검로였다. 다만 깊이가 부족하고 연계가 정직해. 한 가지 묻지. 그 미끄러운 바닥과 다리 쪽의 수작은 모두 네가 한 것이 맞나?"

당사자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을 거다.

마법의 정체를 모르는 그에게 있어서는 마치 여러 명에게 합공을 당한 것만 같이 느껴졌을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순순히 답했다.

"예."

내 말에 정묵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침묵하던 그가 이내 내 옆을 지나치며 덧붙였다.

"그 검은 가져라. 다음에 또 가르침을 주도록 하지. 그리고 그날 일은 미… 크흠, 사과하마."

그렇게 정묵이 사라지자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마력이든 내기든 전부 써 버린 탓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자 구자범이 내 어깨를 짚는 척 나를 부축했다.

"흥미로운 발현이로군. 연구 중인 무공인가? 설마 정묵에게 한 방 먹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그저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가? 그럼 앞으로도 기대하지."

구자범이 내기를 불어넣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그 덕에 간신히 홀로 걸을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감사합…."

고마움을 표하려 고개를 돌렸으나 구자범은 이미 모습을 감춘 후였다.

졸지에 나만 덩그러니 연무장에 서 있게 되자 그제야 긴장이 탁 풀렸다.

'정말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어찌 보면 꼴사납게 질 뻔한 걸 무난하게, 아니 화려하게 넘긴 것으로 볼 수 있었으나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각오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자 날 둘러싸고 큰 동심원을 그리고 있던 생도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역시 수석은 수석인가."

"어쩌면 뺀질거리는 게 심상치 않다 싶더니."

"그런데 만약 내가 제갈천우를 꺾으면 그만큼 강하다는 거 아닌가?"

어느새 주변에서 날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귀찮게 됐군.'

교관에게 공식적인 검증도 받았으니 이제 슬슬 진짜배기들이 꼬일 터다. 명성치가 높아질수록 돌발 이벤트 역시 늘어나니까.

처음 수석 했을 때부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빨랐다.

'이젠 마법이고 뭐고 가릴 처치가 아니다.'

상위권의 생도들이 덤벼들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놓고 마법을 쓰기엔 학원 내에 존재하는 모종의 세력들이 걱정됐다.

'특별한 힘이라면 사족 못 쓰는 인간들이 널렸으니.'

괜히 잘못 찍혔다간 저번처럼 납치될지도 몰랐다.

결국 마법에 대한 명확한 핑곗거리가 필요하다는 뜻인데. 이를 해결할 방법이 내겐 있었다.

'비급서고.'

그곳에 지금 내 상황에서 쓰기 좋은 진법서가 숨겨져 있었다.

'겸사겸사 진법 공부도 제대로 하고 말이야.'

뒤쪽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는 구동과 이희문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는 힘겹게 학원 안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수석 입학 때 부여받은 자격 중 하나인 중급서고 열람권을 사용할 차례였다.

17화 중급서고 (1)

중급서고에 들리기 전에 나는 우선 의료실을 찾았다. 몸 상태가 생각보다 최악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보면 살수와 사흘 밤낮으로 혈전을 벌인 줄 알겠네."

나이 지긋한 의원, 고원태가 혀를 끌끌 차며 내게 침을 놓았다.

"원체 쇠약한 몸에서 진기를 이렇게 소진했으니 원."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옅은 숨을 내뱉었다. 싸움의 여파가 뒤늦게 왔는지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마치 앓는 것처럼 의식이 혼미했고 전신은 불덩이 같았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 같으니.'

[극한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의식을 잃었을 터. 그 정도로 정묵과의 대련은 반동이 컸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네. 이런 몸으론 생도는커녕 환자도 못 되겠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소리네."

고원태가 호통을 치듯 꾸짖으며 내 맥을 짚었다. 그의 손끝이 내게 닿는 감각이 무감했다. 육체가 점점 멀어지는 기분. 내 안의 생명이 서서히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진단서를 끊어 주지. 이번 고비를 넘기게 되면 학원을 떠나게. 자네는 어디 한적한 곳에서 요양부터 해야겠어."

고원태가 진지한 기색으로 조언해 왔다. 괴팍해 보여도 실력 있는 의원인 만큼 아는 것이다. 지금 내 몸 상태가 얼마나 엉망인지.

"…안 됩니다."

나는 남아 있는 힘을 짜내 간신히 읊조렸다.

"객기 부리지 말게. 외상도 내상도 없이 단순히 기력 소진만으로 이렇게 되는 데 뭘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습니다."

의식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서 고원태와 시선을 맞췄다. 수십 년의 회한이 깃든 주름진 눈매가 천천히 감겼다.

"죽을 수도 있는데도?"

"네."

꼭 이래야만 했다. 지금 내게 걸린 디버프 중 가장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시한부]를 해결하기 위해선 [생명연장] 재능을 강화해 중화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명연장]을 강화하기 위해선 죽음에 준하는 경험을 계속 겪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초월성장]의 힘을 빌려 극적인 성장을 이룩해야 겨우 [시한부]의 디버프를 이겨 낼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반드시 버텨 주마.'

그런 내 각오를 고원태도 엿보았는지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아마 수많은 환자의 생과 사를 지켜보면서 이런 경우를 몇 번이나 경험한 거겠지.

나는 말없이 치료를 이어 가는 고원태를 보다 눈을 감았다.

[불면증] 때문에 깊이 잠들 순 없었지만, 그가 혈도를 짚고 뜸향을 놓아 주자 겨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의료실에서 눈을 뜬 나는 몸 상태를 살폈다.

'기력이 확실히 쇠했군.'

고작 전력 한 번 냈다고 전신이 반쯤 망가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전신의 기맥을 포함한 서클, 하단전이 조금씩 성장했다는 점이었다. [초월성장]의 재능 덕분이었다.

'[절대마도]와 [무극지체]의 시너지가 사기이긴 해.'

본래 못해도 며칠은 요양해야 할 정도였으나 하루 만에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어났나?"

"예."

고원태가 약탕을 내밀며 혀를 끌끌 찼다.

"명줄 하나는 질기군. 회복이 빠르다고 해야 할지, 위기에 강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고약한 냄새가 올라오는 약탕을 단숨에 들이켜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자네가 먹은 약값만 해도 상당한데 그래야지. 자칫하면 올해가 가기 전에 금행단에 불려가게 생겼어."

"더 열심히 해서 보답하겠습니다."

멋쩍게 반응하고 있자니 고원태가 코웃음을 쳤다.

"자네 몸은 지금 상당히 불균형한 상태네. 선천적으로 몸 자체는 쇠약한 주제에 근맥과 골격, 기맥은 더할 나위 없이 타고났지."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몸이 강해질수록 선천적으로 약한 신체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기에 내가 되물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이의 선천진기로 대호(大虎)의 몸을 움직일 수 있겠나? 심장도 장기도 쇠약한 상태네. 이건 체질 자체를 바꿔야 해."

고원태가 지적하는 건 내 장기를 비롯한 선천적인 체질 자체의 약함이었다.

심장이나 심폐 기능을 비롯해 소화 기관조차 엉망인 내 상태를 봤을 때 당연한 진단이었다.

'물론 내기를 늘리는 과정에서 신체 전반의 기능이 보완되지만 말이지.'

괜히 고수들이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다만 고원태의 말은 그게 능사는 아니라는 것.

나 역시 [무극지체]로 [쇠약]을 비롯한 디버프를 극복한 경우를 알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막 나가지 않았을 거다.

"그렇다고 선천적인 체질을 바꿀 순 없지 않습니까?"

"가능하네. 그만한 능력과 각오가 되어 있다면 말이야."

"네?"

내 물음에 고원태가 설명했다.

"아무래도 자네를 진단하면서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어서 말이네. 개인적인 연구이지만 겸사겸사 자네의 체질도 고쳐 주지."

그러면서 그가 복잡한 표식이 여럿 새겨진 지도를 하나 내밀었다.

"여긴?"

어디서 본 듯한 지형도에 내가 되묻자 고원태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금문상가의 영약 밭이네. 여기서 내가 말한 재료들을 가져온다면 체질을 바꾸는 약을 지어 주지."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머릿속에서 이 지도가 어떤 것인지 떠올랐다. 바로 심마니 이벤트.

하급생도로 영약을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몇 가지 특이 조건을 취했을 때 랜덤으로 나타나는 이벤트였는데 아무래도 이번 입원으로 인해 당첨된 모양이었다.

'내 특이 체질 덕분인가?'

어쨌든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너무 쉽게 긍정하면 오히려 수상쩍게 여길지 모르기에 우선 이유부터 물었다.

"왜 저죠?"

"간절함이 남다르기 때문이지. 목표를 위해선 불구덩이에도 뛰어들 녀석이 필요했네."

내가 보여 준 악다구니가 마음에 든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근거가 부족했다.

"그런 거라면 저보단 다른 뛰어난 무인도 많을 텐데요."

"아쉽게도 그중에서 무림맹의 도리를 어기면서까지 날 도울 이는 많지 않지. 금문상가와 척을 지면서까지 말이네."

"그럼 저는 가능하다는 말이군요."

"제갈세가라 했지? 그럼 진법도 잘 피하지 않겠나."

고원태의 그 말에 심마니 이벤트가 발생하는 조건 중 하나가 떠올랐다. 진법 관련 숙련도가 높을 것.

"왜 저를 선택하신지 알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바라봤다. 표시된 지점은 무림학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하겠나? 만약 실패한다고 해도 자네가 책임져야 하네."

고원태가 날 바라보며 단언했다.

어차피 그럴 일 따윈 없다. 금문상가의 영약 밭에서 걸리면 즉결 처형이다.

혹여 혈도를 제압당해 뇌옥에 갇힌다 하더라도 지금 내 몸뚱이로는 고문을 견딜 수 없을 테지.

당장 얻을 이익보다 그 위험 부담이 훨씬 큰 임무였다.

'원래 같으면 거절해야겠지만 지금 나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야.'

저번에 정묵의 습격에서도 느꼈지만 이 세계는 그야말로 불합리의 극치였다.

아무리 그 재능과 가문의 위세가 대단해도 강자의 암살에 허무하게 스러지는, 항거할 수 없는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

'강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번엔 교관이어서 살아남은 거지만 다음에는?

클리어, 즉 세계의 엔딩을 보기 위해 활동하다 보면 앞으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거다.

'결국 죽기 아니면 살기다.'

강해질 수 있을 때 그 기회를 잡아야 했다. 무엇보다 공략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지도를 품 안에 집어넣으며 대꾸했다.

"그러죠."

그렇게 모종의 임무를 부여받은 뒤 밖으로 나오자 벌써 오후 무렵이 되어 있었다.

'수업을 많이 빼먹는 것 같지만. 출석이 꼭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첫 주는 서로 간 탐색 및 자율적인 수련 위주였으니 상관없었다. 진짜는 이론과 실기 수업이 병행되는 둘째 주 이후였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실전이 벌어지기 전에 이 망할 체질을 조금이라도 개선시킨다.'

나는 당장 이번 주에 일을 저지를 생각이었다. 수석인 나는 주말마다 외출권을 활용할 수 있었으니 적격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금문상가의 약초밭 전체에 펼쳐진 고위 진법을 어떻게 뚫을지로군.'

팽근우가 던져 준 기초 진법서로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군.'

진법 문제와 마법에 대한 핑곗거리도 해결할 겸 내가 향한 곳은 비급서고의 2층에 있는 중급서고였다.

경호 무인을 지나쳐 들어선 그곳은 그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다른 생도들이 꽤 있군.'

널찍한 공간에 저마다 의자에 앉아 공부하는 이들은 중급생도들이었다. 무공에 대한 정보가 풀린 만큼 배우고 고민해야 할 것도 넘쳐나는 탓이었다.

마치 현대의 도서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조용히 사방에 깔린 서적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남궁세가의 폭뢰신권(爆雷神拳)과 황보세가의 벽력신권(霹靂神拳)의 오행적 유사성과 권법으로서의 차이]

어디 논문에서나 볼 법한 제목의 문서들. 1층에는 과거의 고전들만 모았다면 중급서고에는 최신 편찬된 서적들이 많았다.

주로 근래 연구 중이거나 개발 및 접목 중인 무공들이었다.

'이런 건 또 특이하단 말이지.'

대무공시대가 열린 이래로 무림 내에서 가장 활발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무공들의 교류와 분석이다.

그 이면에는 하나의 거대한 명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과연 어떤 무공이 가장 강한가.

과거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결국 사람의 문제로 귀결됐다. 얼마나 많은 고수를 배출했는가.

그리고 당대 천하제일인이 어느 문파에서 나왔는가가 가장 중요한 지표이자 증명이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그 기준이 꽤 달라졌다. 각종 기록과 분석을 통해 각 무공들의 평균적인 강함 정도를 더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연구와 각종 검증을 통해 살아남은 21종류의 무공을 상위 21무파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21개의 무파를 더욱 완벽하게 개량하려는 연구가 근 100년간 이어져 온 흐름이었다.

'무림학원은 그 중심이지.'

파천마와 그 제자가 남긴 모든 무공 복사본과 연구 결과가 무림학원에 있었으니 자연히 연구 역시 이곳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분주하게 책을 쌓고서 이동하는 우락부락한 팔뚝의 중급생도를 지나치며 낯설음을 느꼈다.

이 학원에서 생도들은 본인 스스로 자신만의 무를 얻어 가야만 했다.

상위 학파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가든 다른 학파를 접목해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무학을 시험해 보든 간에 생도라면 자신만의 무학을 증명해야만 했다.

특히 상급생도가 되기 위해선 말이다.

짧게나마 생각을 정리한 뒤 한쪽 구석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도들이 별로 다니지 않았는지 손때가 거의 묻지 않은 책장 하나. 난 그곳에서 앞서 필요로 하던 것을 찾았다.

[중급진법개론서]

'이거다.'

진법서를 펼치자 곧 내가 원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부적 작성법.

보통 진법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게 맞으나 실전은 언제나 갑작스러운 법.

이를 대비하기 위해 즉발성 진법을 미리 준비해 둘 수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게 바로 부적이다.

오행의 힘이 짙게 담긴 매개 가루를 피에 녹인 후 부적에 그려 회로로 쓰는 거다. 거대한 공간에 걸친 진법의 구조를 부적 안에 축소화한 것.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부적은 가격 대비 그 위력이나 효율이 상당히 낮지만 어차피 나는 부적을 쓰는 척 마법을 쓸 테니까 상관없었다.

'제갈세가의 숨겨진 비술이라고 말하면 알아서 생각하겠지.'

당분간 내가 쓰는 마법은 다 이 부적의 소행으로 여기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무림학원에선 생도가 직접 준비한 경우 장비 사용에 크게 제한을 두지 않기에 가능한 꼼수였다.

그렇게 진법서를 들고서 이동하려는데 문득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쪽이 왜 여기 있죠?"

평소에 수련의 일환으로 [오감저하]로 낮아진 청력을 마력 강화로 보완했기에 똑똑히 알아챌 수 있었다.

이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을.

'미치겠군. 운도 없지.'

"무시하지 말고 대답해 보시죠. 제갈세가 출신의 망나니 폭행범 씨."

나는 내심 철렁한 마음을 감추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건 한 손에 서책을 든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남궁비화였다.

18화 중급서고 (2)

'하필 여기서 만나네.'

그러고 보니 남궁비화는 중급생도였다. 나는 굳어지려는 입꼬리를 애써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또 뵙네요. 이번에 하급생도로 입학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뭐? 당신이?! 하급생도라니… 그러면 그쪽이 상위 입학자라고요?"

남궁비화가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수석은 조건 없이 중급서고 열람 가능, 상위 입학자는 조건부로 열람 가능했기에 아무래도 날 상위 입학자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수석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하고 있군.'

지금이라면 중급생도 사이에서도 얼핏 나에 관한 정보가 풀릴 때도 됐을 텐데.

소문에 그리 밝지 않은 성격인 듯했다.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전 그럼 이만."

괜히 엮였다간 귀찮아질 것 같아 슬며시 지나치려 했다. 그때 남궁비화가 날 붙잡았다.

"잠시만요."

"…왜 그러시죠?"

괜히 당신은 무림학원에 들어올 자격이 없습니다! 같은 일을 겪을까 봐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그 검은 대체?"

다행히도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일전에 정묵에게서 받은 검이었다.

"이게 왜요?"

"그거 무학검이잖아요?"

아무래도 이 검의 이름이 무학검인 듯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했는데 워낙 예전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 그렇겠죠."

별생각 없는 듯한 내 반응에 남궁비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훔친 건가요?"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내가 되묻자 남궁비화가 납득이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왜 그쪽이 가지고 있는 거죠?"

날 선 기색. 아무래도 일전의 일 때문에 나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듯했다.

억울하지만 저지른 업보가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는 수없이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았다.

"받았습니다. 직접."

그 말에 순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그녀.

"교관에게 무학검을 받았다고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비화의 반응에서 무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중급생도 시험에 무학검을 얻는 게 있었지.'

중급생도에도 상급생도로 가기 위한 몇 가지 시험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1년 내로 교관과의 대련에서 인정을 받고 무학검을 얻어 내는 것이었다.

내가 가만히 이와 관련한 내용을 떠올리고 있자 상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자세히 말을…!"

그렇게 남궁비화가 내게 다가와 뭐라 더 말을 하려는데, 순간 사방에서 묵직한 살기가 마구 날아왔다.

'이거 참.'

주변을 돌아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서재 내 생도들의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떠들면 욕먹는 건 어디나 똑같군.'

당황했는지 입을 꾹 닫은 채 주변의 눈치를 보는 남궁비화를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서고에서 너무 떠드는 것도 좋지 않겠죠.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침묵하는 남궁비화를 두고서 중급서고 한쪽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두 눈을 빛냈다.

'가만,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자동 통과인 건가. 미래에 치를 시험 중 하나를 벌써 해치운 셈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운이 좋다고 넘어가기엔 뭔가 신경이 쓰였다. 정묵이 이 검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어쩌면 귀찮게 될 수도 있겠어.'

나는 이쪽을 향해 슬며시 느껴지는 시선들을 뒤로한 채 서재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중급진법개론서]를 읽어 내려갔다.

확실히 1층의 비급서고에서 볼 수 있는 기본 진법서와는 다른 면이 있었다.

'수학적인 접근이 두드러지는군.'

지뢰 찾기 같은 부분도 있었다. 여기에 5의 기운이 있고 저기에 1의 기운이 있다면 여기에는 함정이 존재한다는 식의 접근법이었다.

음양오행에 수치와 법칙이 개입하니 내용은 훨씬 복잡해졌지만 그 덕에 더 체계적이고 견고한 진법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왜 파천마가 무공은 뿌렸어도 진법서는 마구잡이로 안 배포했는지 알겠어.'

고도로 전문화된 인력과 끝없이 들어가는 막대한 금력이 필요한 기예.

진법이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닌 집단의 힘을 공고히 해주는 종류의 지식이다.

모두에게 무공을 돌려주겠다는 파천마의 생각과는 다른 종류의 힘인 셈.

물론 이 때문에 과거 파천마의 시대에 제갈세가가 그 덕을 보기도 했다.

'가장 위상이나 세력이 덜 움츠러들었으니 말이지.'

가진 건 진법 지식과 머리뿐인 제갈세가의 밑천이 이때 전부 다 밝혀졌다면 지금쯤 오대세가 출신 망나니인 제갈천우는 없었을 터.

'여러모로 신세 지는군.'

속으로 파천마에게 감사하며, 다시금 흥미로운 눈빛으로 진법서를 읽어 내려갔다.

* * *

"이봐, 하급생."

저녁 무렵, 독서를 마친 나는 비급서고를 나와 식당으로 향하려는데 문득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있는 건 턱을 위로 치켜올린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사내였다.

청색 무늬가 새겨진 의복을 보아하니 중급생도인 듯해 일단 존대를 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게 선배가 불렀으면 곱게 대답이나 할 것이지 용건부터 물어?"

신경질적인 인상의 그가 표정을 구기더니 이내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위압감을 조성하기 위해 전신에 기를 끌어 올리며 다가오는 모습에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네가 잘 모르나 본데 그 검은 하급생도 따위가 차고 다닐 물건이 아니다."

그가 내 허리춤에 있는 무학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나 이걸 노리고 온 거였나.'

나는 그제야 정묵의 의도를 이해했다. 내게 무학검을 내준 것은 그 나름의 인정이자 꼬장이었던 셈.

만일 무학검을 차고 다니면 중급생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를 빼앗으려 달려들 테니 말이다.

물론 상위권 생도들은 굳이 모양 빠지게 내 것을 노릴 필요 없이 교관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만한 실력을 지닌 것은 아니지.'

무학검을 얻지 못한 건 애매한 성적의 생도들뿐. 지금 나는 하위권 중급생도들이 노리기 좋은 표적이 된 셈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죠?"

내가 오히려 순진한 어투로 녀석에게 되묻자 상대가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바닥을 까닥거렸다.

"내게 맡겨라. 추후 책임지고 교관께 전해드릴 테니."

속이 뻔해 보이는 수작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거 어떻게 하죠? 이미 드리기로 한 분이 있는데."

"뭐? 대체 어느 놈이냐?"

그러자 순간 일그러지는 녀석의 표정. 그걸 본 내가 한 생도의 이름을 팔았다.

"남궁비화님입니다."

"뭣?"

순간 놀란 얼굴을 한 상대가 굳은 채 내게 손가락질했다.

"웃기지 마라! 그녀가 왜 그런단 말이냐?"

"글쎄요. 아무래도 선배님과 똑같은 이유 아니겠습니까. 사실 아까 비급서재에서 이야기한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속으로 녀석을 비웃으며 말을 마쳤다.

'무림인이라는 자가 자신의 검이 아닌 상대의 이름만 듣고는 벌벌 떠는 꼴이라니.'

이자가 어떻게 내가 무학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겠나. 당연히 비급서고에서 남궁비화가 무학검을 언급하며 놀랐을 때 알아챈 거겠지.

그전까지는 조용히 말하고 있었으니 녀석도 우리가 일전에 나눈 대화까지는 미처 듣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 그럴듯한 거짓말을 섞으면 믿을 수밖에.'

"왜 하필…! 이미 시험에 통과했으면서."

그 생각대로 상대가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여 왔다.

남궁비화는 중급생도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 녀석으로서는 절대로 척지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럼 가보겠습니다. 남궁비화님이 저 앞에서 기다리시기로 해서요."

"뭐? 이런… 망할!"

내 말에 녀석은 차마 날 잡지 못하고 단념했다. 참 한심한 모습이었다.

뭐, 저러니 만만한 후배의 검을 빼앗아 시험을 통과하려는 발상을 한 거겠지만.

'최대한 안 싸우고 넘어가는 게 좋지.'

애초에 싸울 일을 없게 만드는 게 최고의 병법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물론 거짓말이라는 점이 걸리지만 남궁비화의 탓도 약간은 있었으니 이쯤은 전가해도 될 듯했다. 어차피 저 녀석이라면 남궁비화에게 따지지도 못할 듯했으니.

그렇게 얼른 자리를 뜨려는데 뒤에서 중얼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차라리 지금 빼앗으면… 그래! 내가 직접 가져다주겠다. 부탁을 받았거든."

'역시 그냥은 안 넘어가나.'

적당히 속여 넘기려 했건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곳은 엄연히 무림. 눈앞의 이득에 칼이 먼저 나가는 세계였다.

"본인에게서요?"

"그래!"

눈 하나 깜빡 않고서 거짓말이라니. 거기다 아까부터 자꾸만 나와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혹여 도망치지 못하도록.

'허투루 승급한 건 아니라는 건가.'

아무리 하위권이라 해도 나름 중급생도까지 올라간 일류급 무인이다. 최소한의 머리도 없진 않은 모양이다.

거기다 추후 남궁비화에게 직접 전해 주겠다며 보험까지 까는 비열한 수작까지.

그 노력, 인정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이런 양아치 짓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그러니 지금 넘겨라!"

동시에 녀석이 곧장 내게 쏘아지듯 달려왔다. 그 모습에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

곧 자신의 간격 안으로 파고든 녀석이 검집을 쥔 채 그대로 검의 손잡이를 다잡았다.

확신에 찬 얼굴. 곧 상대가 검을 쥔 손을 힘차게 내뻗으려 했다.

끼긱-

그러나 순간 상대가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윽고 당황스러운 기색이 녀석의 얼굴에 퍼졌다.

"뭐, 뭐야?"

검이 뽑히지 않았다. 마치 검집에 검을 용접이라도 해둔 것처럼.

동시에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찼다.

'당연히 안 뽑히지. 내가 뭣 때문에 너와 어울려 준 줄 아냐.'

대화하면서 물 생성 마법으로 녀석의 검집 안에 물을 집어넣었다.

기름칠을 잘해 둔 덕에 투입시키기는 어려웠지만. 무방비한 상태에서 꽤 시간을 끈 덕에 해낼 수 있었다.

거기에 빙결 마법을 써 검집째로 얼려 버렸다. 검집 입구부터 검 끝까지 전부.

틈 사이에 낀 얼음은 탱크도 멈춘다. 그 마찰 계수를 생각해 봤을 때 어지간한 근력으로는 저 검을 뽑을 수조차 없을 터.

곧 녀석에게 쇄도한 내가 무학검을 뽑았다.

"선배가 먼저 뽑으신 겁니다."

"난, 안 뽑았는…?!"

콰앙!

그대로 칼등으로 녀석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쇳덩이로 얻어맞은 만큼 단 한 방에 허공으로 날아가는 녀석.

'마력 강화에 내기까지 둘러서 휘두른 거니 당분간은 일어날 수 없을 거다.'

이내 추락 후 쓰러지는 녀석을 보며 무학검을 집어넣었다. 생각보다 잘 통해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중급생도 중 하위권이라 해도 상대는 최소 일류급의 무인.

원래라면 저쪽이 맨손으로 싸워도 날 이길 수 있을 터지만 지금은 한순간 당황한 틈을 타 기습한 것이 컸다.

설마 검이 안 뽑힐 줄은 몰랐을 테니까.

더구나 녀석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리스(Grease) 마법으로 발밑을 미끄럽게 만들어 둬서 급하게 권법으로 대응하려 했어도 막기는 어려웠을 거다.

주임 교관인 정묵도 처음에 방심했다 당한 전략이었는데, 고작 중급생도 따위가 응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움찔!

그때 쓰러진 상대를 본 탓인지 [오만한 귀공자]가 발동해 입이 근질거렸다.

차가운 눈동자로 녀석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자신의 검조차 뽑지 못하나. 그렇다면 내 검을 가지기엔 한참 부족하다."

말하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대사였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평생 치 흑역사를 요 근래 갱신하고 있었다.

아찔한 심정을 애써 감추며 발길을 돌렸다. 저 녀석은 저대로 방치해도 괜찮을 거다.

'본인도 하급생에게 털린 게 쪽팔리는 줄 알면 말도 꺼내지 않겠지.'

그렇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찰나, 불현듯 나는 발길을 멈췄다. 어디선가 모종의 기척이 느껴졌다.

'설마…?'

불길한 예감과 함께 내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나는 전신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늘진 담벼락 아래, 그곳에 남궁비화가 서 있었다.

19화 영약 털기 (1)

어디서부터 변명을 해야 할까. 중급생도를 쓰러뜨린 것? 남궁비화의 이름을 판 것? 마법을 쓴 것?

무엇보다 나는 방금 그 대사를 그녀가 들은 것이 아닐 거라 믿고 싶었다.

모종의 혼란 속에서 내가 말을 고르는 사이 남궁비화의 두 입술이 벌어졌다.

"그게 무슨 괴상한 혼잣말이죠?"

빌어먹을 역시나 그 부분인가? 나는 당장 은신진 속으로 숨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큼큼 목청을 다듬었다.

"엿보는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는데요."

"저도 그런 걸 듣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제길.'

과연 고수다운 응수였다. 은근한 심적 내상을 입었지만, 생존 본능을 발휘해 재빠르게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서 여긴 왜 오신 겁니까?"

"갑자기 제 이름이 들려왔으니까요. 설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남궁세가의 이름을 파는 후배가 생길 줄은 몰랐거든요."

나긋나긋하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쉽지 않겠어.'

종종 어떤 인간은 내기가 아닌 그 자체로 존재감을 내뿜는 기품을 지니고 있다.

남궁비화가 지닌 분위기는 그런 종류의 기류였으며 지금 그 아우라는 이쪽에 있어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오해?"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차갑게 휘어졌다.

"제 앞에서 거짓말이라, 배짱도 좋군요."

남궁비화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미인이 저런 식으로 웃으니 오히려 살벌했다. 하지만 더욱 섬뜩한 건 그녀가 은연중에 내뿜고 있는 기도였다.

'장난 아니군.'

교관 못지않게 정돈된 기운이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교관들보다도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지금 상태로는 상대도 안 되겠어.'

상대는 최소 절정급의 고수. 거기다 이미 중급생도를 쓰러뜨린 걸 목격한 후라 기습도 먹힐 것 같지 않았다. 반면 지금 내 서클의 마력은 거의 바닥난 상태. 괜히 드잡이질 했다가 얻어맞는 건 이쪽이었다.

'차라리 사실대로 용서를 구하고 넘어가는 게 낫겠지.'

그렇게 생각한 내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일 때였다.

"죄송… 하다고 할 줄 알았습니까?"

"...?"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순간 남궁비화가 눈을 깜빡거렸다. 설마 이런 반응이 나올 줄 몰랐을 거다.

나도 그랬으니까. 지금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까지 [오만한 귀공자]의 효과가 남아 있을 줄이야.'

더불어 [간헐적 디버프 강화]가 겹쳤기에 이런 건방진 소리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극한의 의지]로도 미처 주둥이는 단속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고개를 든 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남궁비화의 얼굴에 드러난 놀람이 분노로 번지기 직전에 어떻게든 수를 써야 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적반하장으로 나가기로 했다. 물론 나름의 논리를 덧붙여서 말이다.

"애초에 이 일은 선배님이 비급서고에서 무학검을 큰 목소리로 언급한 것이 원인입니다."

"네?"

"만일 그때 말하지 않았다면 제가 이렇게 습격받을 일도 없었겠죠. 제 말의 요지는 선배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남궁비화가 이 근처에 있었던 것도 그 일을 신경 썼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물론 그런 배려는 중요치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이 상황을 무마하는 거다.

나는 조각상처럼 굳어 있는 남궁비화를 향해 기습적으로 무학검을 내밀었다. 약간은 분하면서도 슬픈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가지고 싶으셨으면 받으세요."

"어?"

"필요해서 그런 거라면서요? 아까 그 중급생도는 절 노릴 때 남궁비화님이 시켜서 그랬다고 하던데요. 어쩐지 제 무학검을 뚫어져라 쳐다보시더군요. 네, 여기 있습니다. 저 같은 하급생도의 검을 뺏으려 하지 마시고 그냥 가져가세요."

남궁비화는 어이가 없었다. 그건 딱 봐도 저 바닥에 쓰러진 양아치가 무학검을 갈취하려던 핑계 아니었나.

"저를 그런 양아치와 동급으로 보지 마시죠."

"그렇지만 제 검을 샅샅이 훑어보셨잖아요. 그 날카로운 눈매로요."

"훑지 않았어요.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도 아니구요."

남궁비화가 찌릿 날 노려보더니 따지듯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저자가 당신을 노린 건 무학검이 진급 시험에 중요한 물건이라 그런 거예요. 저랑은 상관없어요."

"그러면 기다리고 있었던 건?"

"저는 단지 제 이름을 핑계 삼은 걸 탓하러 온 것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오만한 귀공자]가 해제되는 게 느껴졌다. 척수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오만한 충동이 사라지자 다음 전개는 빨랐다.

"그런가요. 멋대로 이름을 댄 건 사과드리겠습니다. 다음번에는 이럴 일 없을 겁니다."

"어? 네?"

설마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는지 수상쩍은 눈초리로 날 보는 남궁비화.

아마 아까처럼 말을 바꾸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거겠지. 그러나 내가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내 경계를 풀고는 순순히 말해 왔다.

"알면 됐어요. 저도 부주의한 점이 있었으니까요."

첫인상이 안 좋게 엮었어도 그녀는 심성 자체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핍박받는 노인을 구하려 하고, 중급생도에게 털릴 뻔한 후배를 신경 써주는 선한 부류의 인물상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 입장에서 나는 천상 나쁜 놈이군.'

노인 폭행에 정당방위를 빙자한 선배 구타 그리고 사칭까지. 전력이 화려했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더 뭐라 하기는 어렵겠지.'

그녀가 앞서 이야기했듯 이 일은 한 중급생도의 욕심으로 일어난 사고에 불과했으니까. 이제 이 일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슬슬 저녁 시간이라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물러나려 할 찰나 남궁비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이 뭐죠?"

"…왜 물으시는 건가요?"

"그냥 궁금해서요. 사칭범 이름은 알아야죠."

고개를 들자 저녁놀을 배경으로 남궁비화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직접 이름을 밝힌 적이 없었다.

새삼 이 상황에 낯섦을 느끼며 슬며시 입을 뗐다.

"제갈천우입니다."

* * *

그렇게 주말이 되자 나는 수석의 특권 중 하나인 외출권을 발급받아 학원 밖으로 나왔다.

거의 보름만의 외출.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참 많은 게 바뀌었다. 하지만 그런 감회를 미처 만끽하기도 전에 나는 큰 위기에 직면했다.

"공자님! 수석 축하드립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나가니 시종과 호위들이 저마다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것 아닌가.

남사스럽고 창피한 것도 있었으나, 진짜 문제는 그 인원의 한가운데 선 듬직한 체구의 노인이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점이었다.

나는 순순히 그에게 다가가 예를 갖췄다.

"오랜만입니다. 장여 호법."

그는 제갈세가의 무력을 담당하는 대표적인 호법 중 한 명이었다.

'미리 기억을 떠올려 놓길 잘했군.'

일전의 무학검과 같은 실책을 범하지 않도록 여러모로 과거의 정보를 짜내어 놨던 것이 도움이 됐다.

"…너 내가 알던 그 양아치가 맞냐?"

장여가 눈가에 난 흉터를 꿈틀거리더니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대꾸 없이 이쪽을 훑는 시선을 감내했다.

호법이면 보통 장로급에 준하는 권력자. 더구나 장여는 가문 내에서도 괴짜로 여겨지는 인물인 만큼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 뺀질한 녀석이 완전히 딴 놈이 됐구먼. 뭐 지금도 약해 빠진 건 매한가지지만."

그러면서 장여가 내 몸을 툭툭 건드렸다. 제갈세가답지 않은 장골의 손길에 충격이 여기저기 퍼졌다.

'내기가 담겨 있다.'

그냥 손이 커서 그런가 보다 싶은 게 아닌, 미세한 기운을 내 몸에 퍼뜨려 신체 곳곳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거 왜 이리 허약해? 어릴 때에 비해 전체적인 골격이나 균형은 더 나아진 것 같은데 상태가…."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과감한 바디터치를 행하고 있었다.

'쯧.'

자칫 이대로 나뒀다간 서클과 단전까지 울릴 듯해 나는 기운을 끌어 올려 장여가 내보낸 기운의 침투를 차단했다.

"허? 이걸 막아?"

그러자 순간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는 장여.

"인사가 너무 거치십니다."

내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자, 장여의 표정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폭소로 변했다.

"크하하! 많이 변했구나. 아니, 드러낸 건가? 이거 수석 이야기가 거짓부렁인 줄 알았더니 사실인 모양이야."

"그것 때문에 온 겁니까?"

사전에 나는 수석이 되자마자 학원 내에서 서신을 보내 소식을 보냈었다. 그런데 가문 측에선 믿지 않은 모양.

"물론 그런 것도 있지. 네 전과가 워낙 화려하지 않으냐."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기에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도 말이다. 최대한 많이 달라고 했지?"

그가 전표를 내밀었다. 3,000냥짜리였다. 수석 한 번 했다고 하급무사 연봉 치를 덥석 주다니. 과연 오대세가다웠다. 나는 순순히 전표를 받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장여가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수석을 했다고 하니 가문에서도 거는 기대가 생긴 모양이더구나. 잘 증명해 보거라. 이왕 본색을 드러냈으니 말이다."

장여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그는 새로운 후계자 구도를 염두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신분은 제갈세가 직계의 셋째 공자. 계승 순위 3위의 후계자였다.

장여가 보기엔 내가 본격적으로 후계자 구도에 뛰어들었다고 생각될 터. 물론 지금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

'나 살기도 바쁘니까.'

"그럼 이쪽도 할 일이 바쁘니 슬슬 가보마."

그렇게 전표만 주고는 사라지는 장여에게 예를 표한 나는 직속 시종을 향해 명했다.

"저번의 전당포로 안내해라."

"예?"

"보름 전에 돈을 빌린 그곳 말이다."

"예, 예! 알겠습니다."

빠르게 앞서 나가는 시종의 모습에 나 역시 발길을 옮겼다. 이제 그 제례용 단검들이 필요할 때가 됐다.

곧 전당포에 도착한 나는 어이없는 소식을 마주하게 됐다.

"4,000냥입니다."

"뭐?"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염소수염을 한 전당포의 관리자였다. 두 배나 늘어난 가격에 내가 미간을 좁히자 그가 비열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게 그간 가격이 부쩍 뛰었지 뭡니까."

중지로 안경을 밀어 올리는 모습이 안 그래도 불편한 심기를 건드렸다. 이곳에 그런 욕은 없을 텐데도 말이다.

"기간 내에 갚으러 왔을 텐데?"

전당포에서 기다려 주는 기간은 때에 따라 다르다. 이 경우에는 그 금액이 큰 만큼 한 달의 변제 기간을 두었을 텐데 갑자기 말을 바꾼 것이다.

"아, 그게 시종이 계약을 잘못 안듯 합니다. 저희는 최대 한 달까지 맡아 둘 뿐이지 돌려드릴 때의 가격에 대해선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정도가 있지 않나?"

"저희 계약대로 할 뿐입니다."

나는 이곳으로 안내한 직속 시종을 바라봤다. 그러자 해명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시종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말이 다릅니다! 전에는 전당 잡힌 가격의 2할을 넘기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첫 거래라면서…!"

그러자 끼어드는 전당포 관리자.

"네, 처음에 계약한 단검 하나에 한해서 말이죠. 제가 맡은 건 단검 두 자루입니다."

"그, 그런?!"

당황하는 시종이 말을 더듬었다.

한편 나는 그제야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종이 가지고 간 단검은 두 개. 아무래도 이 전당포는 그 단검에 각각 따로 계약을 맺은 모양이었다.

당시 책정된 단검당 가격은 1,000냥. 첫 번째 계약한 건 2할의 이자를 붙여 1,200냥. 두 번째 계약한 건 멋대로 가격을 부풀려 2,800냥으로 받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처음 원금의 두 배인 4,000냥이라는 가격이 나온 셈.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마음 같아선 저 건방진 녀석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싶었으나 지금 전당포 주변에 있는 고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교관들과 비슷하거나 그 밑인가.'

최소 절정급의 강자들. 지금 내 수준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었다. 다만 이대로 넘어갈 생각도 없었다.

"이것들이 상도를 어기는군."

내가 다가가자 녀석의 눈매가 휘어졌다. 마치 이런 사건은 익숙하다는 듯. 안경을 끼고 있어 그런지 안 그래도 좁은 눈이 더 작게만 보였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저희도 최소한의 호위를 보유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시지요."

안다. 그러니 이렇게 태연하게 굴 수 있는 거겠지. 다만 녀석이 간과한 점이 있었다.

첫째는 내가 이곳에 있는 호위 무인들의 정체를 잊지 않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내가 보통 녀석들이 호구 잡던 무인이 아닌 마법사라는 사실이다.

"화나게 하는군."

"허억!"

순간 내 손날을 타고 푸른 기운이 발광했다. 마치 달빛처럼 서늘한 빛무리에 관리자가 눈을 뱁새처럼 뜨고는 몸을 뒤로 물렸다.

"이게 무슨 짓이오!"

동시에 옆에 있던 무인들이 나섰다. 다만 그들은 검을 뽑을 수 없었다.

"무, 무슨…!"

어느새 내 손끝에서 뻗어 나온 검기, 아니 광기(光氣)가 관리자의 목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절정의 고수!"

순간 무인의 경악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기를 날에 두르는 게 아닌 마치 무기처럼 발현하여 유지할 수 있는 건 초절정 수준의 고수가 아니고선 불가능했다.

그 사실을 직감한 모양인지 다른 무인들 역시 섣불리 달려들지 못한 채 서로 마른침만을 삼킬 뿐이었다.

만일 그가 정말 초절정의 고수라면 이곳에 있는 무인 전부가 덤벼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긴장 속에서 침묵했다. 압도적인 강자 앞에서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린 셈.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태연스레 말을 이을 뿐이었다.

"2,400냥, 첫 계약대로 일괄 적용하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