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먹히나?'
지금 나는 속으로 잔뜩 긴장한 채 마법을 유지하고 있었다.
"초절정의 고수!"
옆에서 들려온 당황한 음성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전략이 잘 먹힌 모양이었다.
당연히 지금 내 손에서 뻗어 나온 건 형상화된 검기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라이트 마법을 실드에 덧씌워 발현시킨 것뿐이었다. 마치 야광봉처럼 말이다.
다만 주위의 녀석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경악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2,400냥. 첫 계약대로 일괄 적용하지."
내 말에 전당포 관리자가 두려워하면서도 고민하는 기색이 보였다. 상인으로서의 감이 밀리면 안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많이 양보한 것 같은데?"
그러나 이어지는 내 말은 그 일말의 망설임마저 지워 버렸다. 결국 관리인은 두 눈을 질끈 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2,400냥짜리 전표를 계산해 주고선 제례용 단검들을 받았다.
'마음 같아선 2,000냥까지 깎고 싶었지만.'
괜히 모험은 하지 않기로 했다.
상인들의 돈에 대한 집념은 무서울 정도다. 목에 칼이 들어온 순간에도 이해관계를 따질 만큼.
만일 그 순간에서 이익을 보자고 값을 후려쳤으면 합의가 무산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애써 만든 위압적인 분위기도 풀려 버렸을 테고 말이다. 어쩌면 내 실력에 의심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계약서도 넘겨라."
추후에 말이 나올까 싶어 계약서까지 받아 챙겼다. 어차피 거래 장부는 따로 있을 테니 이건 없애는 편이 나았다.
"…여기 있습니다."
녀석이 내민 계약서가 진짜인지 확인한 후에 곧장 화염 마법으로 계약서를 태워 버렸다. 그 모습에 전당포 관리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삼매진화!"
그의 안경에 불길이 반사되었다 사라지자 크게 뜬 눈만이 남았다.
혹여나 이 일로 후환이 생길까 싶어 위력 행사용으로 한 것일 뿐이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컸다.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예, 옙!"
무림이란 이런 곳이었다. 힘만 있다면 계약도 멋대로 바꿀 수 있었으며, 그 대우도 눈에 띄게 달라지는 세계.
나는 최선을 다해 굽실거리는 전당포 관리자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왔다.
'이것으로 준비물은 전부 갖춰졌군.'
이제 남은 건 금문세가의 영약 밭을 터는 것뿐이었다.
20화 영약 털기 (2)
지도에 표시된 대로 이동하니 산세가 험한 지형이 나타났다.
'벌써 힘드네.'
아무리 체력이 올랐다고 해도 여전히 다른 생도들처럼 움직이기엔 부족했다.
'이러니 영약이 필요한 건데.'
매번 살 수 없는 상황이니 이렇게 몸으로 뛸 수밖에.
'고원태가 요구한 것은 약성신선초.'
그걸 몇 뿌리 뽑아 오면 내 쇠약한 체질을 완화할 수 있는 약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 리스크는 있지만 그만큼 보상이 확실한 일이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슬슬 위험하기도 했고.'
[시한부] 디버프가 수명을 깎아 먹고 있는 지금, 어떻게든 건강해질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산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하자 [절대마도]의 기감에 잡히는 기운이 있었다.
"인식 저해 진법인가."
어지간한 심마니들도 길을 잃게 만들어 돌려보내는 종류의 미로 진법.
나는 상당히 넓은 영역에 걸쳐 있는 이 진법을 감지하며 감탄했다.
'용케도 이 정도로 감춰 뒀군.'
이만한 규모의 대형진법을 티 나지 않게 펼치려면 엄청난 비용과 계산이 필요했다.
'그만큼 영약 밭이 가치가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진법의 영향이 옅은 지점으로 돌파하며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간격에 맞춰 자라 있는 침엽수나 참나무 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경우에는 수림(樹林)진인가?'
문득 진법서에서 본 내용을 떠올렸다. 수림(樹林)진은 지형에 맞는 품종의 나무를 심고 다듬어 진법의 효과를 내는 방식을 뜻한다.
보통 비용을 줄이고 그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서 쓰였다.
무림학원의 수련용 산에 있던 진법이 지맥 위에 있는 돌산을 깎아 만든 것처럼 말이다.
진법이 만들어 내는 방향 상실 효과를 중화하며 나아가자 어느덧 산 중턱의 옅게 깔린 안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작게 허공에 떠오른 이슬과 물방울들이 마치 프리즘처럼 시야를 현혹한다.
이처럼 목(木)의 기운과 수(水)의 기운이 뒤섞여 환각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 말려들면 그대로 부랑자 신세가 되겠어.'
나는 앞으로 나아가며 진법을 파훼해 나갔다.
희뿌연 안개는 때론 녹빛의 초원이 되기도 하고, 어쩔 땐 하얀 서리가 맺힌 설원이 되기도 했다.
그저 눈앞을 어지럽게 하는 낮은 심도의 환상이었으나 수준 낮은 진법가는 그대로 휘말려 버릴 법한 수준의 진법이었다.
'이제 곧 내부진에 도달하겠군.'
한참을 걸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저 앞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분위기의 돌무덤들이 보였다.
"진짜가 나타났군."
대형진은 보통 일반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외부진과 본격적으로 침입자를 배제하는 내부진으로 구성된다.
저 앞에 있는 돌무덤이 의미하는 건 본격적으로 내부진에 도달했다는 증거.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나는 조심스레 진법의 구조를 살펴 나갔다.
"방범진도 같이 섞어 놨네."
진법 안에 들어서면 인근의 막사에 신호가 가는 구조의 방범진이었다.
감지되는 순간 방범이 울리는 빼도 박도 못하는 구조의 진법.
하지만 내겐 나름의 방법이 있었다.
'이런 대형진법의 허술함을 이용하는 거지.'
자동 진법의 경우 대개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는 레이더와 비슷했다. 작을수록 탐지가 어려웠다.
애초에 대형진은 민감한 감도로 인식이 어려운 데다가, 기껏 비용을 들여 고감도 진법을 만들어 놔도 산토끼가 지나가는 것에도 무인이 달려와야 했기에 비효율적이었다.
그런 만큼 대형진법의 경우에는 적당한 수준의 민감도로 설정해 두곤 했다.
'그러니 그 틈을 파고든다.'
나는 가져온 수석(水石)에 마력을 담아 장벽의 기운이 옅은 지점에 흩뿌렸다.
그러자 주변에 넘치던 토(土)의 기운이 서서히 스며들듯 희미해지더니 진법에 옅은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창호지가 물에 젖듯이.
'이제 신호를 차단한다.'
이런 종류의 대형진법에는 위기 상황에 대비한 방범진 역시 존재한다. 진법을 뚫었다고 무작정 덤벼들다간 침입자로 몰려 사냥당할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간 씨름한 끝에 나는 돌무덤 아래쪽에 광케이블처럼 땅 밑에 숨겨져 있던 진법을 감지했다.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고 확신하지 않았다면 알아채기 어려웠을 정도로 교묘하게 감춰 둔 방범진이었다.
해킹과 비슷한 이치였다. 해킹으로 보안을 뚫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이를 걸리지 않는 건 매우 어려웠다.
나는 품 안에서 제례용 단검들을 꺼냈다.
지금 이 방범진의 속성은 토(土)와 금(金)의 기운을 품고 있다. 즉발적이고 안정적이라서 함정에도 자주 쓰이는 속성의 진법이었다.
'그러면 이에 맞춰야겠지.'
나는 두 개의 단검에 마력을 불어넣어 전격 마법과 대지 속성의 강화 마법을 동시에 담았다.
"쉽지 않군."
동시에 두 가지 속성의 마법을 다루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절대마도]의 재능이 없었다면 1서클에 융합 마법을 시도할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고속으로 진동하는 칼날. 모든 준비를 마친 후 곧바로 진법의 경계면에 양 단검을 찔렀다.
파지지직!
그러자 전기가 튀더니 두 단검 사이로 전류가 흘렀다.
난 마력의 출력과 성질을 조절해가며 방범진이 작동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쏟았다.
"…더럽게 까다롭군."
역류하는 기운에 서클이 과열되고 전신에 식은땀이 새어 나왔다. 지금 나는 고압선에서 전선 교체 작업을 하는 기술자와 같은 입장이었다.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방범진의 기운에 그대로 휘말려 폭사하겠지.
나는 숨 쉬는 것도 잊고 눈앞에서 번뜩이는 기류를 읽어 내려갔다.
'지금이다!'
마침내 목표했던 심도까지 단검의 파장을 맞춘 다음 마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웅!
그러자 일순 공명하듯 떨다 이내 잠잠해지는 방범진. 그와 함께 전방을 가로막고 있던 진법이 열리는 게 느껴졌다.
"됐다!"
성공의 순간, 난 거친 심호흡을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박아 둔 저 두 단검은 마치 회로처럼 진법을 중간에서 끊었다가 다시 연결했다.
만일 방범진이 발동되기 전에 파장을 맞추지 못해 진법을 연결하는 데 실패했다면 지금쯤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금문상가의 정예 무인들과 마주했겠지.
'이걸로 20분은 벌었다.'
나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딛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내가 한 건 방범진을 우회하는 프로그램을 중간에 삽입한 셈이었다.
다만 컴퓨터의 전원과 달리 내가 꽂은 단검에 불어넣은 마력은 한계가 있었고, 자연스레 시간제한이 생기게 됐다.
만일 내 수준이 높았다면 방범진의 기운을 오히려 역이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힘이 부족해.'
그렇게 진법을 통과하자, 시야가 격변하더니 일순 눈앞에 솟아오르듯 험지가 펼쳐졌다. 진법의 기운보단 자연적으로 충만한 마나가 고여 있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여기가 영약 밭인가?'
마력에 오감을 집중하자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수묵화에서나 볼 법한 뾰족한 고산 지형이 보였다.
밭이라길래 정말 평지에다 영약을 재배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지맥이 고인 험지에 영약의 씨앗을 옮겨 심은 듯한 모양새였다.
'이게 금문상가를 중원 6대 상단 중 하나로 있게 만든 원동력이로군.'
나는 암벽 사이에 파묻힌 다수의 영초들을 보며 분류를 시작했다. 약초보감을 읽어 둔 덕에 영약과 관련한 지식은 충분했다.
저기의 파란 꽃은 사령화, 저기에 빨간 건 백년하수오. 그리고 저기에 있는 건….
'찾았다!'
시선 끝에 있는 건 영롱한 빛깔의 약성신선초였다.
약성신선초가 있는 위치는 암벽으로 된 산꼭대기 아래쪽. 보아하니 꼼짝없이 산을 타야만 할 듯했다.
'쉽게 되는 게 없군.'
그렇게 슬쩍 발을 떼려는 순간 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주변의 지형에서 뭔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주변이 기울어져 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뿐만 아니라, 진법의 경계면이 모두 낮고 평탄한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마치 중앙의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보기 좋게 설계된 것처럼.
나는 조심스레 복면을 올려 쓰고는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는 마력을 담은 돌멩이 몇 개를 뿌려 은신진을 만들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저 멀리 누군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교대로 순찰을 다니고 있는 무인이었다.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군.'
이런 곳에는 대개 영약을 지키는 산지기가 있기 마련이다.
워낙 넓고 험한 지형인지라 잘만 하면 쉬이 들키지 않을 테지만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내 존재감을 옅게 만들어야겠어.'
나는 전신의 마력과 기를 갈무리하며 은신진을 빠져나왔다. 이런 곳을 지키는 무인이라면 상당한 고수일 터.
걸리면 그 순간 끝이다.
'원래라면 조심스레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내가 확보한 시간은 한 20분 정도. 방범진이 발동되기 전에 얼른 움직여야 한다.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앞에 선 내 눈빛이 가라앉았다.
"후우."
지금 내 상태로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러나 전신의 근육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올라가야 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악력을 발휘해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부족한 근력은 마력 강화로 일부 보조하고, 잡을 곳이 없는 상황에는 허공에 실드를 발생시켜 발판을 만들었다.
그렇게 십여 미터를 올라가자 마침내 경로상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영초가 나타났다.
'우선 하나.'
백년하수오 한 뿌리를 캐내서 미리 가져온 망태기에 담아 넣고는 다음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다음 경로에 있는 건 푸른빛의 사령화. 품고 있는 음기가 강해서 음공(陰功)을 익히는 무인들에게는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었다.
'사방이 돈 덩어리로군.'
한 뿌리당 수천 냥에서 수만 냥까지도 하는 영약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그중 가장 높이 있는 건 약성신선초다. 신선초를 인위적으로 재배한 거다. 자연적인 영초보다 효과는 떨어지지만 일반 영초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약효를 지니고 있다.
나는 조심스레 약성신선초의 뿌리를 캤다.
'여기서 끝내야겠군.'
더 욕심부리고 싶었지만 슬슬 시간이 부족했다. 곧바로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움직여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위험하네.'
보통 절벽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훨씬 힘들다.
그러나 내겐 마법 실드가 있었다.
'이게 마법이지.'
나는 허공에 실드를 띄워 그걸 밟고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아예 마법 실드를 타고 오르내리고 싶었지만, 고정 좌표가 아닌 유동 좌표를 다룰 줄 알아야 하는 염동 마법은 3서클 이상부터 쓸 수 있는 능력인지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가 지면까지 도달한 그때 저 위에서 소름 끼치는 기척이 느껴졌다.
카앙!
동시에 깨지는 마법 실드. 반사적으로 몸을 숙인 덕에 스치는 정도로 끝났지, 아니었다면 진작에 머리통이 날아갔을 거다.
'제길!'
저 멀리 산꼭대기에서 화살이 쏘아지고 있었다. 금문상가에서 고용한 산지기였다.
산지기라 부르지만 그 실체는 상위급 무인이었다.
'궁사인가?'
거리가 이렇게나 먼데도 화살은 믿을 수 없이 빨랐다.
나는 실드를 재구성함과 동시에 빛의 구체를 터뜨려 상대의 시야를 방해했다.
파창!
다시금 깨져 나가는 마법 실드.
다행히 플래시 라이트 때문에 조준이 흐트러졌는지 비켜 맞았지만, 두세 겹씩 겹친 마법이 한 방에 깨져 나간 여파로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미치겠군."
마력이 부족했다. 아무리 빛 마법으로 플래시를 터뜨려 시야를 방해한다 해도 한계가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도 전에 저격당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지. 최후의 수단을 써먹을 수밖에.'
도망치던 와중에 나는 망태기에 담아 둔 영약을 하나 꺼내 씹었다. 익숙한 쓴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아까 캔 백년하수오였다.
순간적으로 체내에서 마력이 부푼다. 마력 회로를 따라 기운이 흘러 들어오더니 전신에 힘이 넘쳐났다.
그 찰나 쏘아진 화살. 나는 즉시 등 뒤로 마력 실드를 형성했다.
카아앙!
이번엔 깨지지 않고 허공에 박힌 화살. 방금 방어로 마력이 확 빠졌지만 괜찮았다. 아직 영약은 많았으니까.
문제는 실시간으로 달려오고 있는 산지기의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는 점이었다. 수십 초 내로 따라잡힐 정도로.
'2번 안을 써야겠군.'
이런 상황을 대비해 준비해 둔 계획이 있었다. 곧 돌무더기가 군집해 있는 진법 가장자리에 도달한 내가 제례용 단검들을 뽑아 챙겼다.
우우웅-
그러자 작동하기 시작하는 대형진법. 어느새 저 앞까지 다가온 산지기가 속도를 높이는 것이 보였다.
어차피 저런 고수를 상대로 기동력을 내세워 따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추가로 사령초를 집어삼켰다. 전신에 감도는 한기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아직 백년하수오의 기운이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극도로 위험했다.
농밀한 기운의 충돌. 당장 주화입마에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절대마도]와 [무극지체]의 재능은 이를 가능케 했다.
전신에 퍼지는 고양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느새 나는 진법의 한가운데에 진입해 있었다.
잠시 주변을 살피자 진법 한쪽에서 무언가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경로상의 사문(死門)을 모조리 회피하며 돌진하는 모습을 보니 진법에도 일가견이 있는 듯했다.
"그래도 혼자서 돌입한 건 실수한 거야."
나는 오늘을 위해 공수해 온 옥석들을 품 안에서 꺼내 상당한 밀도의 마력을 부여했다. 그리고는 점집에서 쌀알을 나무판 위로 흩뿌리듯 바닥에 옥석을 뿌렸다.
그러자 마치 미니맵처럼 일대의 상황에 따라 옥석이 진동하듯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를 확인한 후 바로 망태기에서 또 다른 영초를 꺼내 베어 물었다. 어차피 들킨 이상 저쪽도 곱게 보내 줄 리 없었다.
그러니 이참에 제대로 보여 줄 생각이었다.
"한번 해보자고."
마력을 무한대로 쓸 수 있는 마법사가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21화 영약 털기 (3)
"침입자입니다! 영약 지대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한 무인의 다급한 외침이 금문상가 지부 내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뭣이?! 피해는?"
금문상가의 원로인 금둔복이 순간 눈앞에 누가 있는지도 잊고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열 뿌리가량으로 추정됩니다."
"이 미련한 것들!"
금둔복이 격분했다. 그 수가 적어도 보여도 하나하나가 연 단위로 애지중지 키우던 것들이다. 열 뿌리라 해도 족히 수만 냥은 호가하는 양이었다.
"적은?"
"아직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진법에 들어가 있어 지금 동쪽 담당 산지기가 찾는 중입니다."
"동쪽이라고?"
금둔복이 표정을 구겼다. 동쪽 봉우리는 영약 지대에서도 단 둘뿐인 약성신선초가 있는 구역이었다.
하지만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 약성신선초에 관한 내용은 꺼내기 적합하지 않았다.
그게 금둔복의 화를 더욱 부추겼다.
"멍청하긴! 진법이 있는 데도 털렸단 말이냐?"
"그게 진법이 작동하지 않았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그때 끼어든 나지막한 목소리. 그제야 금둔복은 자신의 앞에 있던 손님의 존재를 깨닫고는 양해를 구했다.
"이거 추태를 보였군요. 장여 호법.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실례했습니다."
"괜찮소. 만일 진법 문제면 우리 제갈세가 측에서도 대응해야 하니 말이오."
포권을 만류하는 덩치 큰 사내는 장여였다. 하지만 그 말과 달리 그의 심기는 좋지 않았다.
'하필 내가 책임자로 왔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금문상가의 진법은 제갈세가에서 유지 및 보수해 주는 곳 중 하나였다. 아무리 금문상가에서도 진법가를 고용한다지만 제갈세가의 진법가에 비할 바가 못 되니까.
그러나 지금처럼 일이 터진 후라면 금문상가에서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제갈세가가 진법에 있어서는 제일이긴 했으나 그래도 경쟁자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잘못하다간 중요한 고객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여가 재차 무인에게 물었다.
"그래서 적의 규모는?"
"그, 그게. 지금까지 보고된 것으로는 한 명이라고 합니다."
"뭐?"
그 정도 수준의 대형진법을 뚫고서 영약을 털 정도면 상당한 수준의 진법가가 여럿 있어야 했다.
그런데 고작 한 명이라니. 말도 안 된다.
'몸을 숨기는 데 익숙한 상대로군.'
장여가 그리 판단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맞았다.
"겁대가리 없는 녀석이군."
그리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장여가 무인을 내려다보며 명했다.
"현장으로 안내해라."
* * *
장여가 제갈세가의 진법가들과 함께 현장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이미 금문상가의 무인들이 진법에 가로막혀 선 채였다.
"상황 설명을 듣고 싶군."
"진법 자체가 변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금문상가 소속 진법가의 설명에 장여가 미간을 구겼다.
진법 통과가 안 된다는 건, 저쪽에서 진법 주도권을 가져갔다는 뜻이었다.
"보통 놈은 아니라는 건가."
장여가 허공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파지직거리는 정전기와 함께 반발이 느껴졌다.
억지로 들어가려 하다간 일류급 무인 이하는 내상을 입겠지.
'이쪽에서 대형진법을 부술 리가 없을 테니 농성전에 들어간 건가? 영악하군.'
진법이 마냥 만능은 아니다. 까다로운 외부적 조건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 외부에서 건물 철거하듯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경우에는 적을 잡는 것보다 진법 자체가 지닌 가치가 훨씬 크다는 점이었다.
"귀찮게 구는군."
보통 이런 대형진법을 만들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다.
그런데 고작 영약 몇 개 훔쳐 간 범인 때문에 진법을 철거하는 건 빈대 하나 잡자고 초가집을 태우는 격이었다.
계산을 마친 장여가 입을 열었다.
"가문의 진법가들을 불러라. 진법전을 해야겠다."
그가 택할 수 있는 방안은 하나였다. 바로 진법의 주도권을 가져와 적을 안에서부터 사냥하는 것.
동시에 내부에 무인들을 투입시켜 제압하게 되면 이쪽의 승리라는 계산 하에서 내린 판단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곧 여덟 명의 제갈세가 소속 진법가들이 장여에게로 왔다.
1급 진법가 둘에 2급 진법가 여섯으로 구성된 구성이었다.
보통 3급 진법가만 되어도 어느 성에서든 대접받는 인재라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상당한 고급 전력들이었다.
'이 정도면 차고 넘친다.'
장여가 그들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우선 진법의 생문부터 연다. 진법을 분석하도록."
""예!""
곧 그들이 진법 앞에 선 채로 저마다의 기물을 꺼내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경악했다.
"이건…!"
"말도 안 돼."
겨우 진법의 안쪽을 들여다본 곳에 펼쳐진 건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회오리치는 물줄기들과 이에 휘말리는 금문상가의 무인들.
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공세를 피해 움직이고 있었다.
"흩어지지 마라!"
개중 선두에 있던 산지기가 금문상가의 무인들을 향해 말했다.
그들이 다시금 몰려오는 물줄기를 피하려던 그때 음산한 안개가 깔리더니 발목까지 고여 있던 물웅덩이로 음기가 모여 순간 얼어붙었다.
"충격에 대비해라!"
그러나 산지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개 너머로 발생한 전격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파지지직!
섬광과 함께 밀려든 충격에 무인들 몇몇이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고, 산지기 역시 경직된 몸을 갈무리하며 안개 너머를 노려봤다.
설마 이렇게까지 밀릴 줄은 몰랐다. 도저히 보이지 않는 적과 끝없이 밀려드는 진법의 함정까지.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자신들이 고작 한 명에게 이렇게까지 위협을 당할 줄이야.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처음 저격할 때 놓친 게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우우웅-
그렇게 다시금 요동치는 진법을 보며 산지기가 이를 갈았다.
* * *
"꽤 버티네."
한편 이런 상황을 유도한 나는 아직도 생존해 있는 무인들을 보며 옥석의 배치를 바꿨다.
지금까지 공세는 눈속임이고 사실 진짜는 따로 있었다. 미로진.
지금 모르고 있겠지만 저들은 한쪽을 빙빙 돌고 있었다.
'이대로 소모시키면서 자멸하게 하면 되겠지.'
그렇게 다음 공세를 준비하려던 그때, 진법에 걸리는 감각이 있었다.
'드디어 움직이나?'
아까까지 진법에 접근해 안을 파악하려 했던 녀석들이 이제야 진법에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먼저 침투하는 건 막고. 전선을 고착화시킨다.'
진법은 일종의 바둑과도 같다. 집을 지어 놓은 진법에 누군가 돌을 얹으면 이쪽에서는 저쪽으로 넘어가는 진법의 주도권을 다시 빼앗아 와야 하는 거다.
나는 먼저 상대의 움직임을 살폈다.
적이 한쪽에서 흡수되기 쉬운 물 속성 기운을 기반으로 진법에 침투하고 있었다.
'정석대로 하는군.'
바둑처럼 처음에는 부드럽게 주변을 파고들 수 있는 첫수를 둔다. 그리고 일정 이상 자신의 기반이 쌓이면 이내 압박하듯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이쪽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나는 우선 옥석 두 개에 흙 속성의 마력을 담아 던지고는 동시에 목 속성의 마력을 진법에 부여해 상대의 기운을 차단했다.
둘을 동시에 그것도 흙 속성의 원소 마법은 존재감을 옅게 해두었기에 지금 상대는 내가 정석대로 상극인 목 속성으로 대응하는 줄 알 거다.
그 생각대로 상대는 물의 기운에 음기를 부여해 이를 흡수하고 있던 나무의 기운을 그대로 얼려 버렸다.
"꽤 하는데."
물을 써 나무로 대응하게 한 후, 얼음으로 반격한다. 애초에 이쪽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서 준비한 카운터였다.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나는 마법으로 진법을 살짝 열어서 저쪽의 목소리를 통하게 만들었다.
진법으로는 구현하기 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마법으로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종의 꼼수였다.
비유하자면 저쪽은 전화기를 진법 내에 구현하기 위해서 전화선을 깔고 통신 중계기를 마련한 후 송신자와 수신자 간에 스피커폰을 다는 수고를 들여야 한다면, 이쪽은 마법 주머니에서 꺼낸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상대를 도청할 수 있는 셈이었다.
'꼬우면 마법사 하든가.'
그리 생각하며 진법 밖으로 귀를 기울이자 이내 적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습니다! 진법 외부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침투 및 압박 들어가겠습니다."
진법가로 보이는 녀석이 현장에서 브리핑하는 걸 엿듣다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작 얼어붙게 한 걸로 무력화시켰다라…."
[오만한 귀공자]의 효과 때문에 점차 시니컬해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군."
상대가 이내 양기를 활용해 진법에 얼려 둔 수 속성의 기운을 녹이기 시작했다.
음기에 침투당한 목 속성의 기운은 이미 흩어진 지 오래였기에 상대 진법가가 퍼뜨린 물의 기운이 진법의 끝자락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다만 여기까지가 내 노림수였다.
나는 아까 미리 던져 두었던 흙 속성의 옥석의 기운을 풀며 어릴 적에 해본 게임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함정 옥석 발동.'
"뭐야?!"
그러자 저쪽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 물 속성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게 느껴져서겠지. 흙은 물을 일부 흡수한다.
"목(木)인가? 아냐, 흙 속성? 고작 이런 걸로…!"
그래도 바로 알아채는 걸 보면 꽤 실력자였다.
다만 고작이라고 평한 부분은 아쉬웠다. 오행적으로 봤을 때 흙이 물의 상성이었음에도 말이다.
'고작 정도가 아니란 말이지.'
물은 지면을 따라 흐른다. 보통 그 과정에서 지면을 깎거나 둑을 허물기도 하지만 반대로 물의 방향이 꺾이기도 한다.
"어?"
바로 지금처럼. 내가 던진 옥석은 총 두 개. 하나는 단단한 흙이고 다른 쪽은 무딘 흙 성질을 지녔다.
'물은 부드러운 쪽으로 흐르지.'
그 말인즉 녀석이 물 속성의 기운을 다루기가 상당히 까다로워졌다는 걸 의미했다. 마치 파둔 도랑에 물이 유도되듯 흐르는 것처럼.
"이게 어째서?!"
'늦었어.'
진작에 알아챘으면 물의 기운을 뭉치거나 한 점에 모아 돌파했을 테지만, 이미 상대는 목의 기운을 뚫기 위해 물의 기운을 진법 여기저기에 퍼뜨린 상태.
그것이 패착이었다.
"얇은 물줄기는 그저 개울일 뿐이지."
물의 기운은 여러 갈래로 퍼지기 시작했고, 내가 준비한 무대를 따라 어느 쪽은 고이고, 다른 쪽은 흩어지면서 점차 그 힘을 잃어 갔다.
"믿을 수 없다. 대체 무슨…!"
순식간에 진법의 주도권을 잃은 상대의 경악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녀석이 주력으로 사용하던 물의 기운을 이용해 진법 한쪽에 미로를 만들어 놨으니 당분간 그쪽으로는 적들이 침투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둑으로 따지면 대마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내가 지, 지다니."
망연자실한 음성으로 자신의 패배를 시인하는 진법 밖 녀석. 동시에 나는 다른 방향에서 들어오는 진법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마치 여러 명과 대국을 두는 다면기 바둑 같군.'
물론 대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녀석보다 쉬운 녀석이 태반이었다.
함정 옥석을 꺼내기도 전에 허무하게 주도권을 빼앗긴 진법가가 수두룩할 정도로.
물론 이는 [절대마도]라는 압도적인 재능 덕이 컸다.
원래는 이렇게 옥석에 하나의 원소 속성을 담는 것조차 엄청난 노력과 숙달이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적들도 설마 이런 식으로 빠르고 연속적으로 진법전을 벌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못했겠지.
그렇게 마지막 진법가의 침투마저 저지한 그 찰나.
"그게 무슨 말이지? 진법에 간섭할 수 없다니. 우리 가문이 이거밖에 안 되나?"
진법 너머로 어쩐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일순 상대의 정체를 깨닫고는 눈을 크게 떴다.
'장여?! 저 사람이 여길 왜?'
그자는 불과 얼마 전에 만났던 제갈세가의 사내, 장여였다.
찰나의 시간 동안 추론을 마친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설마, 여기가 제갈세가의 관할이었을 줄이야."
장여가 일전에 말한 들릴 곳이 바로 여기였던 셈이었다. 어쩐지 진법이 정교하다 싶었다.
'일 났군.'
나는 눈썹을 슬쩍 모았다.
제갈세가의 혈족이 제갈세가의 진법을 털어먹었다니. 이걸 걸리면 그걸로 끝장이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상황이라면 그래도 잡혔을 때 가문 빨로 몸값 협상이라도 받았겠지만, 이런 상황이 겹치면 그런 것도 없다.
바로 가문 차원에서의 파문과 본보기로써의 처형이 기다리고 있겠지.
'팔자 한번 사납네.'
가만히 있어도 말라 죽고, 뭔가 해보려 해도 이런 일뿐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죽을 위기라면 최선을 다할 수밖에.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군."
정체를 들키지 않은 채 무사히 도주하는 것. 나는 복면을 더욱 올려 쓰며 품 안의 옥석을 쥐었다.
그 순간 저쪽에서 장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라. 지금부터 내가 직접 움직이지."
동시에 진법이 요동쳤다.
22화 영약 털기 (4)
'대체 어디서 이런 녀석이 나타난 거지?'
장여는 현 상황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데려온 가문의 진법가들이 순식간에 당했다. 심지어 개중엔 1급 진법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도 말이다.
"대단하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수를 했어.'
맹수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어떻단 말인가.
상대의 전력을 간과한 나머지 휘하의 진법가들의 전력을 깎아 먹지 않았나.
무림인들의 수 싸움이 그러하듯 진법가의 주도권 싸움 역시 많은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애초에 진법에 간섭하고 자연의 기운을 비트는 행위 자체가 술자에게 부담이 가는 행위인데, 주도권 싸움 중 강제로 간섭이 끊기게 되는 경우엔 말할 것도 없었다.
장여가 극심한 탈력감에 빠진 가문의 진법가들을 보며 혀를 찼다.
'진작에 나섰어야 했다.'
처음부터 자신이 개입해 전력으로 맞붙었으면 결과는 달랐을 터. 아무래도 오랜 평화로 감각이 무뎌진 모양이다.
'그래도 적도 심력을 어느 정도 소모했을 거다. 여럿의 진법가들을 물리치는 건 나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수로 밀어붙이면 강자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천혜의 요새라 할지라도 포위한 상태에서 말려 죽이면 답이 없었으니까.
"무인들은 얼마나 준비됐소?"
장여가 금문상가의 원로에게 물었다.
"진법 경험이 있는 무인으로 10명 정도요."
이미 투입된 무인까지 합치면 한 개 소대에 달하는 인원수였다.
"신호를 보내면 돌입하시오. 지금부터는 내가 개입할 테니."
"오오! 알겠습니다."
장여가 그나마 기운을 되찾은 가문의 진법가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가 무인을 보조해라. 나는 그동안 진법의 주도권을 가져올 테니."
진법에 직접 무인을 침투시킴과 동시에 진법의 주도권까지 빼앗아 오는 양동 작전이었다. 비자동 진법의 정석적인 파훼법이었다.
장여가 품 안에서 자신의 기물인 피처럼 붉은 홍보석(紅寶石) 반지를 꺼내 꼈다.
"감히 제갈세가의 진법을 건드리다니. 후회하게 해주마."
어느 간 큰 녀석인지 몰라도 곱게 보내 주지 않으리라. 장여가 진법에 손을 뻗었다.
* * *
"드디어 움직이나?"
문득 진법이 요동치더니 여러 명의 무인이 우르르 밀려들어 오는 게 감지됐다. 진형을 짜서 들어오는 걸 보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인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위협적이네. 수상할 만큼 말이야."
하지만 이건 눈속임일 뿐. 진짜는 따로 있었다. 나는 기감을 높여 진법 내에 이루어지는 미세한 변화를 감응했다.
파사사삭-
진법 끝자락에 갈대들이 깔리기 시작했다. 나무도 아니고 갈대. [절대마도]로 발달한 기감이 아니었다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한 침투였다.
"신중하군."
잎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종류의 식목. 물론 진짜 나무가 아니다. 그저 목의 기운을 진법의 개념으로 형상화한 모습일 뿐이다.
다만 그 안에 담긴 힘만큼은 진짜였다. 언제든지 진법 전체를 뒤덮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확실히 정석대로 나오니까 까다롭네."
갈대의 침범을 알아채도 당장에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나는 우선 옥석을 던져 진법의 중심으로 오는 길목을 먼저 변화시켰다.
대응 이전에 저 무인부터 막아야 했다. 진법가 간의 싸움이 바둑이라면 무인과의 싸움은 장기와 비슷했다.
왕을 잃으면 모든 게 끝이다. 그리고 지금 이 진법의 왕은 나였다.
'일단 무인들부터 막는다.'
나는 옥석으로 진법의 구조를 바꾸거나 함정을 만들어 무인들을 쫓아냈다.
'안개진을 펼쳤으니 당분간은 이쪽으로 오지 못할 거다.'
그렇게 잠시 한숨을 돌린 나는 진법의 끝자락을 확인했다.
"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어느덧 갈대가 드넓게 자라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빠른 침투 속도였다.
'이걸 막으려면….'
머릿속에서 계산을 마친 나는 옥석을 꺼내려 했으나 저쪽이 한발 빨랐다.
화륵-
불길이 피어오르더니 갈대를 휘감고는 화염의 물결을 이루었다.
"화공이라."
나무에 불의 기운을 더해 화기를 강화한 거다.
'꽤 하는군.'
합성식을 사용할 줄 안다. 하나의 속성도 활용하기 어려운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그것도 조화에 맞춰서 사용한다는 건 상당한 기교가 필요했다.
나는 정석대로 이를 물 속성의 옥석으로 막으려다 문득 자리에 멈췄다. 상대의 역량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첫 출수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빠르게 전략을 세운 난 옥석 세 개를 꺼내 동시에 내던졌다.
쿠드드득-
그러자 진법의 바닥이 진동하더니 흙의 성채가 떠올랐다. 흙 역시도 불에 강한 속성을 타고났기에 내린 대응이었다.
"부족해."
하지만 저쪽은 불+나무의 강화 합성식. 곧 거센 불길이 성채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쩌저적!
빠르게 갈라지는 흙의 장벽. 이대로라면 밀린다.
"합성에는 합성이지."
나는 흙의 장벽 속에 숨겨 두었던 물의 기운을 발현했다. 그러자 흙의 기운에 물의 기운이 더해져 갈라지던 흙벽을 메우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엄청난 열기에 증기가 빠르게 솟구쳤다. 이대로 불과 흙의 힘겨루기가 되려던 그때, 진법 너머로 뚫어 둔 경로를 통해 장여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신중했지만 그뿐이구나. 애송아."
휘이이잉-
진법 내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곧 증기가 만든 와류에 주변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걸 노렸나.'
내 눈빛이 가라앉았다. 내가 불을 봤을 때 바로 극상성인 물로 방어하지 않은 이유가 저기 있었다.
열대 지방에 왜 태풍이 자주 부는가. 그건 바로 뜨거운 증기와 기압 차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의 원리는 이 진법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됐다.
대기의 기류가 한데 뭉쳐 몰아치는 소음. 공기가 떨리면서 발생하는 특유의 진동이 일대를 뒤덮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
이변을 감지한 나는 품 안에서 옥석을 꺼냈다.
나무의 생기+불+물, 이 세 속성의 조화는 바람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양기를 더했군."
장여는 그 찰나에 음기의 축축한 성질을 날려 건조하면서도 뜨거운 바람을 형성한 거다.
곧 불길이 마른 바람을 타고 화염의 소용돌이를 이루며 진법 안에 솟구쳤다.
엄청난 열기. 솟구치는 불기둥은 마치 화룡 같은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이게, 제갈세가의 호법인가."
나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상대의 대응까지 고려해 합성식을 만들다니.
다만 장여가 착각한 점이 있다면 나는 신중하기만 한 성격이 아니라는 거다.
"뒤끝도 있지."
품 안에서 꺼낸 옥석을 하나 툭 던졌다. 그러자 화기에 말라 부스러지던 흙의 성채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지면 아래가 드드드드 떨리더니 갈라지다 못해 절벽이 생기기 시작했다.
"잘 봐 둬. 그쪽 수하들이 장난쳐 둔 게 한둘이 아니거든."
지면이 쪼개지며 드러난 건 계곡을 따라 소용돌이치는 지하수였다.
지금 이곳은 아까 제갈세가 쪽 진법가와 싸울 때 만들어 둔 미로를 지하 수로처럼 깔아놓은 상태였다.
그 말인즉슨 이 일대 전부가 지하수가 가득한 상황이라는 뜻.
"이곳이 내 영역이라는 걸 유념했어야지."
입가를 말아 올린 나는 지면을 유지하고 있던 흙의 기운을 모조리 회수했다.
콰르르릉!
그러자 흙의 성채가 허물어지고 그 안에 지금껏 숨겨 둔 지하수들이 드러났다.
"무슨?!"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장여가 당황하는 사이 나는 지하 수로를 조작해 하늘로 솟듯 휘몰아치는 화룡을 둘러쌌다.
"그럼 한번 붙어 보자고."
고등 기술과 압도적인 힘. 그중 누가 이길지 말이다.
"가라."
이쪽의 손짓을 따라 지하수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곧 거대한 불의 소용돌이와 드넓은 호수가 부딪쳤다.
치이이익!
시작은 허공에 떠오르는 여러 가닥의 물줄기들이었다. 소용돌이가 주변의 물길을 빨아들여 올리기 시작했다.
이내 불길과 물줄기가 서로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증기가 내뿜어졌다.
그 엄청난 열량의 증기는 폭발하듯 비산해 소용돌이의 힘 자체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증기 막이 형성되고 뿌옇게 덩치를 키운 운무(雲霧)가 소용돌이에 집어삼켜지길 한참.
불길이 서서히 꺼지고, 제멋대로 일직선으로 솟구치는 기류는 오히려 소용돌이와 충돌해 와류를 일으켜 점점 작아졌다.
"…함정이었나? 대체 언제부터 말려든 거지?"
결계 너머에서 장여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아직 놀라긴 이르다. 제대로 된 반격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까.
전신의 마력을 모조리 진법에 부여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쿠르릉!
승천에 실패한 용처럼 사그라드는 불 소용돌이 위로 부처님 손바닥같이 부풀어 오른 거대한 구름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힘겹게 중얼거렸다.
"…만약 대규모의 화(火)기와 수(水)기가 토(土)기를 머금고 충돌하면 어떻게 될까?"
물론 듣지 못할 질문이겠지만. 상관없다. 이제 두 눈으로 체감하게 될 테니까.
결계 너머로 장여의 경악성이 들려왔다.
"이건?! 말도 안 돼! 이 정도 수준의 진법가가 어째서!!!"
내가 노린 곳은 장여가 진법에 침입하기 위해 끝자락에 마련해 둔 간섭 지대.
진법가의 감각과 이어진 핵심 지대라 이곳이 당하면 당분간은 진법에 간섭할 수 없다.
"…괴물인가."
어느새 체념한 듯한 장여의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대기에 감도는 묵직한 고요.
화기에 부서지고 그을린 지면의 돌조각들이 서서히 떠오른다. 어둑한 하늘이 뒤틀리며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한 점을 향해 뭉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비급서고에서 읽었던 최고위 진법술 중 하나.
암천벽력(暗天霹靂)
번쩍!
일순 섬광과 함께 눈부신 빛줄기가 지면에 내리꽂혔다.
세상 모든 것이 찬란히 번뜩였다가 이내 그 빛을 잃었다.
뒤이어 몰아치는 천지가 부서질 듯한 굉음.
소리가 사라진 세계 속에서 하늘에서 쏟아지던 비가 잠시 멈추고, 세계가 원래의 색을 되찾는 동시에 빗방울이 쏟아지는 나지막한 음이 이어졌다.
쏴아아아-
모든 것이 소멸한 지면 한가운데에서 장여의 기운이 끊어진 것이 느껴졌다. 이걸로 제갈세가 쪽의 진법가들은 당분간 나설 수 없다.
나는 진법의 중심에서 이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하늘로 올라갔던 물방울들이 소나기가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굳어지는 법이지."
대지가 젖어 들었다. 남은 불길마저 모조리 사라지고,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물줄기는 생명력이 가득했다.
그 순간 나는 처음에 흙 속에 숨겨 둔 옥석의 힘을 개방했다. 목 속성의 기운이 대지에 퍼지자, 지면이 뜯겨 나가면서 쌍잎이 발아하기 시작했다.
곧 물과 흙, 그리고 재를 머금은 생명력이 넘치는 땅에 거대한 수목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전의 수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게.
만패불청(萬覇不聽). 거대한 패는 더 이상 상대와 어울릴 필요가 없다. 너무 큰 패가 나버렸기에. 상대의 힘을 이용해 강화한 진법은 이제 뚫리지 않는다.
"그럼 이제 침입자를 처리해 볼까."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내가 진정으로 쌓아 온 것들은 쉬이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진법은 바둑의 묘리와 닮아 있었다.
* * *
"…괴물이다."
장여의 턱 밑에 맺힌 식은땀이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그가 파리한 안색으로 자신이 본 것을 떠올렸다.
상대의 진법을 역이용해 만든 자신의 상위 진법술을 비웃기라도 하듯 역으로 함정을 파 무력화시킨 그 위용을.
"설마 그만한 진법술을 곧장 해낼 줄이야."
무엇보다 암천벽력(暗天霹靂)으로 넘어가는 수 싸움과 실력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마치 제갈세가의 가주와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최후의 일격, 시야가 하얗게 쇄도하는 그 순간은 지금도 아찔했다.
동시에 그 아득한 재능에 짜릿한 감각 역시 느꼈지만 말이다.
언젠가 반드시 한 번은 마주해 보고 싶은 고수였다. 물론 그전에 할 일이 남아 있었지만.
"…보고부터 해야겠군."
그자가 가문의 1급 진법가들을 막아 낼 때만 해도 이 정도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 아이들은 아직 1급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한때 준특급 진법가 후보에도 올랐던 자신이 이렇게 압도적으로 패배할 줄은 몰랐다.
"대체 누구지?"
상대는 고작 한 명이었다. 비록 진법에 가려져 얼굴조차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괴물은 홀로 진법을 감당하고 있었다.'
가문의 진법가 수십 명이 달라붙어 만든 그 대형진을 말이다.
"장여 호법, 어떻게 됐습니까?"
그때 금문상가 측 원로가 다급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실패했소. 보통내기가 아니오."
"아니! 호법도 하지 못하면 대체 누가 이 진법을 뚫는단 말입니까?"
순식간에 얼굴을 바꾼 원로의 힐난이 이어졌다. 평소라면 듣지 못할 거친 언사였지만 지금 사태에서는 장여도 할 말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무인들을 물려야 하오."
"무슨 말입니까? 무인을 물리라니요? 설마 이대로 보내 주라는 거요?!"
원로의 어이없다는 반응에도 장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소."
"대체 무슨 말이요? 애초에 이 일은 진법이 제대로 작동이 안 돼서 그런 것 아닙니까!"
"저 정도 수준의 상대면 무해진(無解陣)이 아니고서야 무용하오. 정 잡고 싶거든 저 진법 자체를 부술 수밖에."
"그럴 순 없소!"
원로가 소리를 내질렀다. 저 대형진법에 들어간 금액만 해도 수백만 냥은 족히 된다. 영약 지대의 지맥과 공존하며 약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의 총체가 저 안에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걸 포기하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뢰배 따위를 잡기 위해 저 귀한 대형진법을 부수라니, 어불성설이요! 아무튼 절대 안 되니 그런 줄 아십시오!"
원로가 금문상가의 무인들을 이끌고선 사라졌다. 그 규모가 한 개의 소대만 했다.
이미 그만한 수의 무인들 역시 들어가 있었으니 진법 안에 투입된 무인만 해도 50~60명은 될 터.
아무래도 무력을 동원해 처리할 모양이었다. 아무리 잘 설계된 진법이라 해도 그 수용 인원과 효과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장여는 진법 너머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무뢰배 따위보다 진법이 더 귀하다라…."
이곳에서 그자의 진가를 들여다본 사람은 장여 자신만이 유일했다.
"헛소리."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저 안에 있는 존재는 고작 수백만 냥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괴물이라는걸.
23화 영약 털기 (5)
"끝없이 밀려드는군."
계속된 침입 신호에 나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서 허세를 부려 봤지만, 사실 현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여전히 밖에서는 회복한 진법가들의 침투 시도가 이어지고 있었고, 그 와중에 내부의 적까지 처리해야 했다.
바둑과 디펜스 게임을 동시에 하는 셈.
"골치 아프게 됐어."
보통 진법을 유지하기 위해선 기둥으로 비유되는 핵이 필요했다.
거기다 이런 대형진법의 경우 그 핵은 여러 개인 편이어서 지키기가 까다로웠다.
거대한 건물일수록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지만 그만큼 지켜야 할 문과 기둥이 많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금문상가 측에선 값비싼 진법을 부수지 않으려 들 테니 이번 경우에는 내가 있는 진법의 중심만 지키면 됐다.
'덕분에 이렇게 혼자서도 버틸 수 있는 거지만 말이지.'
만약 상대가 처음부터 진법을 무시한 채 날 죽이려 들었다면 전황은 완전히 뒤바뀌었을 거다.
현재 이곳을 향해 곧장 다가오는 무리는 3개 조.
진법전이 능숙한 이들인지라 진법으로 막거나 감각을 속이는 식으로 시간을 버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 슬슬 빠질 때가 됐어. 이 녀석들만 격퇴하고 도주한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마력을 끌어모았다.
"어?"
그 순간 머리가 핑 돌더니 시야가 흔들렸다.
전신이 무겁게 축 늘어지는 걸 겨우 이를 악물고서 버티고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손끝이 알콜 중독자처럼 떨리고 심장 부근의 코어가 위험하게 요동쳤다.
전형적인 마력 중독 현상이었다.
너무 많은 마력을 단시간에 쓴 결과다.
다양한 약성을 한 번에 섭취하고 녹여 내느라 육체에 피로가 쌓인 상황.
'이 이상은 위험해.'
무리해서 마력을 함부로 썼다간 주화입마에 걸릴지도 몰랐다.
"예상보단 빠르지만 슬슬 탈출해야겠군."
영약도 세 개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서 시간이 더 끌리면 끝장이다. 나는 진법의 흐름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우웅-
떨리기 시작하는 진법. 나는 중심을 지키던 진법의 기운을 모조리 거둬들였다.
무인들을 막던 절벽이 무너지고, 안개가 사그라들며, 빽빽했던 나무가 쪼그라들었다.
'미친.'
상상 이상으로 빡셌다. [절대마도]가 아니었다면, 지금 영약으로 도핑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제어할 수조차 없었을 거다.
대형진법의 기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내가 감당할 수 없기에 진법가의 부담을 줄인 대신 진법의 수명을 깎아 먹으며 가동시킨 거다.
진법 중심을 지키고 있던 방어진이 사라지자 다른 무인들이 잠시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온다.'
곧 정신을 되찾은 무인들이 미친 듯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조금이나마 경계하며 오길 바랐는데, 과연 전문가다운 살벌함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나는 숨겨 두었던 진법 내 함정을 발동했다. 침입자들의 발밑에서 불기둥이 솟구치며 공세를 저지했지만 그뿐이었다.
'역시 이걸로는 안 되나.'
이런 식으로 저 녀석들을 다 처리하려면 한세월이었다.
애초에 쓰러뜨릴 수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진법은 만능이 아니니까.
"쉴 틈이 없군."
나는 진법 내에서 고속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감지하며 서클 내 마력을 끌어모았다.
엄청난 속도. 이대로라면 1분 뒤에는 내 목이 날아가겠지.
진법 함정들을 미친 듯이 부수며 다가오는 수십 명에 달하는 무인들을 보며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저자가 범인이다!"
"함정일 수 있으니 선발대만 접근하고 나머진 포위한다!"
개중 수장 격으로 있는 자들이 외쳤다.
빠르게 쇄도하는 무인들. 확실히 노련한 사냥꾼들이다. 아무리 숙달된 진법가라 해도 이 거리에서 저들을 상대할 순 없었다.
다만 그들이 간과한 게 있다면 내 진법 감응력이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라는 거였다.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무인들을 보며 나는 전신의 마력을 발에 담아 바닥을 굴렀다.
쿵!
가벼운 발길질이었으나 그 진동은 진법 전체를 요동치게 했다.
갑자기 일어난 지진에 달려오던 무인들이 휘청이던 그 순간.
뒤늦게 몰려오는 기운을 알아챈 조장 격 인물이 외쳤다.
"피해라!!"
"이미 늦었어."
나는 하얗게 질린 안색을 띤 채 비릿하게 웃었다.
일순 나를 중심으로 바닥의 균열이 점차 퍼지더니 마치 거미줄처럼 일대를 가득 메웠다.
지면, 말라붙은 고목, 부서진 성채, 나아가 진법을 뒤덮은 천장까지도.
"오늘은 이걸로 끝이다. 우리 무승부로 하자고."
눈앞까지 다가온 칼날이 멈추더니 이내 멀어지는 걸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동시에 균열이 뒤집혔다. 지면이 솟구치고 천장이 내려앉았다.
진법 역전.
대형진법과 거대한 지맥, 그리고 진법가들이 남기고 간 간섭력을 하나의 거대한 폭탄처럼 엮어 터뜨린 거다.
쩌저저적-!
세상이 산산조각 나는 굉음과 함께 진법으로 한자리에 모였던 이들이 마치 부풀어 오르는 풍선 위의 점처럼 비약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자식!!"
진법이 폭주하며 흩어지자 달려오던 무인들 역시도 빠르게 멀어진다. 분한 듯 이를 악물며 달려오는 무인들을 유유히 지켜보며 진법을 마저 터뜨렸다.
'이제 도주하기만 하면 된다.'
지금 대형진법 주변에는 도주 방지를 위해 무인들이 깔려 있을 터.
하지만 상관없다. 진법을 통째로 폭주시켜 아예 찾을 수 없게 해줄 테니.
그렇게 내심 후련한 미소를 지으려던 그때.
쐐액!
무언가 이쪽으로 쇄도했다. 엄청난 속도의 잔상. [무극지체]의 재능으로 반응했음에도 미처 베지 못했다.
"커헉!"
검으로 막았는데도 내부가 진탕했다. 목에 핏줄이 돋은 채 시선을 들어 바라보니 저 멀리 흐릿하게 활을 든 존재가 보였다.
"산지기…!"
순간 각혈하려는 걸 이를 꽉 깨물며 참았다.
진작 죽여 놨어야 했는데. 물론 저 녀석이 잘 살아남은 것이지만 말이다.
그나마 기력을 완전히 빼두었던 덕에 이렇게 막을 수라도 있었던 걸 감안하면 무승부라 봐도 무방했다.
물론 나는 죽을 맛이었지만 말이다.
"공략 X같이 하네."
그렇게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폭주하기 시작하는 진법 밖으로 밀려 나갔다.
* * *
"망할."
나는 덜덜 떨리는 두 다리로 안개 낀 숲을 주파해 나갔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지만 지금 멈추면 진짜 죽는다.
마력중독에 영약의 과복용 그리고 내부 진탕까지. [극한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나마 마지막 수가 먹혀서 다행이었어.'
내가 마지막에 한 진법 역전은 진법 내 물의 기운과 목의 기운을 잘 배합해 일대에 안개를 내뿜는 거였다.
당장 1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연 연기가 산맥을 뒤덮고 있었다.
미리 진법 내에서 방위를 파악해 둔 터라 내가 도주해야 할 방향은 인지하고 있는 상태.
나는 거칠 게 없는 하얀 세상 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 거기에 [절대마도]와 [무극지체]의 재능을 활용해 기감을 확연히 줄인 내 모습은 누구도 감지하기 어려울 터였다.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해 일대를 살폈다. 바람 마법을 미세하게 내보내 주변의 지형이나 인원 등을 파악해 나갔다.
'됐다.'
다행히도 주변에 무인은 없었다.
예상대로였다. 이 넓은 산맥을 천라지망처럼 감싸려면 못해도 수천의 무인은 있어야 할 터.
당연하지만 금문상가로 해도 그 정도 인력을 단기간에 투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도 어떻게든 인원수라도 채우려고 고용한 이류에서 일류급 무인들이 대다수.
'진법 안에 들어온 이들이 정예였을 테니까.'
이 정도 안개에서는 일류급 무인이라 해도 날 알아채긴 어려웠다.
제갈세가의 진법가들을 처리해 경계심을 높인 게 득이 된 셈이었다.
남은 건 이제 유유히 돌아갈 뿐.
'진짜 죽겠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의식의 끈을 겨우 부여잡으며 유유히 산맥을 빠져나왔다.
고작 하급생도 하나가 중원 6대 상단 중 하나를 발칵 뒤집은 날이었다.
* * *
"대체 그 침입자는 어디 있단 말이냐!!"
금문상가의 원로가 내지른 노기 섞인 목소리가 일대에 울려 퍼졌다.
그 앞에 있는 무인들은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몰골은 저마다 초라했다.
물에 잔뜩 젖은 자, 흙에 뒹굴어 진흙이 잔뜩 묻은 자, 가시덩굴에 베여 피가 새어 나오는 자 등등 다양했다.
정체불명의 상대에게 영약도 잃은 데다 금문상가의 무인들마저 이 꼴이라니.
그 초라한 모습이 원로를 더욱 분노케 했다. 표정을 구긴 그가 노호성을 내지르려 했다.
"그만하세요."
그 순간 고혹적인 외모의 여인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그녀의 등장에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가주님."
"사건 경위와 피해 규모를 말하세요."
나긋나긋한 목소리 속 밀려오는 압박감을 느낀 원로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게… 정체불명의 침입자에 의해 영약 열 뿌리가량을 잃었습니다. 무인들이 다치긴 했으나 사망자는 없고, 진법도 뒤틀리긴 했으나 제갈세가 측 호법의 말로는 복구는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게 책임자가 할 말인가요?"
날 선 시선이 원로에게로 향했다.
영약이 털린 데다 무인들도 다치고, 심지어 진법마저 보수해야 했다.
무엇보다 문제인 건 이곳의 보안책이 뚫렸다는 점과 야심차게 개발 중인 약성신선초를 빼앗겼다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적은요?"
"산지기의 말로는 한 명이라고 합니다."
"하나? 겨우 한 명에게 금문상가가 당했다는 말입니까?"
금문상가의 가주 금미란이 눈썹을 찡그렸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금문상가의 직속 무인들을 골탕 먹인 것도 모자라 제갈세가의 호법한테 진법의 주도권을 빼앗은 괴물의 정체가 고작 한 명이라니.
"흥미롭군요."
금미란이 눈빛을 빛냈다. 손해는 손해고, 인재는 인재다. 원한은 풀어야겠지만 이익이 우선이었다.
잠시 고심하던 그녀의 입에서 이내 차가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자를 수배하세요. 잡아야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 * *
버틸 수가 없다. 산맥을 벗어난 이후부터 전신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생각보다 후유증이 심하군.'
식은땀이 턱 끝에 맺혀 아래로 떨어졌다.
신체 반응으로 보면 몸에 열이 차 있어야 하는데, 오한으로 뼈가 다 시렸다. 그런데도 혈도 곳곳은 불탈 듯 뜨거웠다.
미처 흡수하지 못한 양기와 음기가 제멋대로 체내에 휘몰아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언제 주화입마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원래라면 최대한 현장에서 멀리 도망쳐야 했지만, 이 꼴로는 학원까지 갈 수 없었다. 당장 한 걸음 떼는 것조차 미칠 듯이 힘겨웠으니까.
"이대로 죽을 순…."
당장이라도 감길 것 같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을 바라봤다.
'민가인가?'
힘겹게 여관으로 보이는 대문을 거칠게 열었다. 예의 따위를 차릴 겨를이 없었다.
"…한 달 치를 한꺼번에 지불하지. 혹여 내가 이튿날까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돈으로 의원을 부르도록."
곧장 여관 주인에게 전표를 넘겨주며 말했다. 지금 자고 일어나면 언제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예, 예!"
얼결에 큰돈을 본 여관 주인이 이를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학원의 학생임을 증명하는 신분패를 보여주니 더욱 빠릿빠릿한 반응을 보였다.
'이걸로 시원찮은 수작은 하지 않겠지.'
원래라면 이런 식으로 의심스러운 요구를 하거나 신원을 밝히지 않았겠지만 한시가 급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전에 영약과 전표를 숨겨야 한다.'
안내받은 방으로 간신히 들어간 나는 옥석을 굴려 한쪽 구석에 은신진을 만들었다.
그곳에 가져온 영약과 돈을 숨기고는 그대로 침대로 가 엎어지듯 쓰러졌다.
그리고 의식이 끊겼다.
* * *
"…으윽!"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격통에 정신이 들었다. 불구덩이 같은 머리는 깨질 듯이 지끈거렸고, 온몸은 내부에서부터 난도질한 것처럼 마구 욱신거렸다.
무엇보다 근육이 녹아내린 듯 전신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 깼어요!"
그때 점소이로 보이는 소년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내 이마 위로 차가운 수건이 놓여 있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일어났나?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한다네."
점소이 옆에 앉아 있던 노파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구석으로 돌렸다. 다행히도 영약 보따리는 아직 숨겨져 있었다.
'어쨌든 고비는 넘겼나.'
아무래도 부실한 몸에 비해 명줄은 질긴 모양. 겨우 안도하던 차에 의원의 말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공이 훨씬 더 들었어. 이 노쇠한 몸으로 며칠 밤이나 지새웠는지, 지금까지 받은 진료비로는 택도 없네."
노파의 말에 나는 순간 긴장했다. 단순히 금액이 아니라, 앞서 그녀가 한 언급 때문이었다.
'며칠?'
갈라진 입술을 모아 간신히 물었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죠?"
"자네가 쓰러진 지 3일이 지났지."
그러자 충격적인 소식이 돌아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무림학원의 주말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것도 한참이나.
"망했다…."
나는 파리한 안색으로 두 눈을 감았다.
신학기 첫 외출부터 외박을 해 버렸다.
24화 내 지각에는 낭만이 있다 (1)
"어서 가야…!"
나는 억지로 일어서려다 머리가 핑 도는 감각에 그대로 풀썩 침대에 쓰러졌다.
"산송장이 날뛰는구먼. 포기해라 이놈아!"
노파가 장침으로 쇄골 안쪽을 찔러 왔다. 그러자 탈력감과 함께 전신의 힘이 빠지더니 몸이 축 늘어졌다.
"…전 가야 합니다."
"쯧쯔, 몇 걸음 안 가 비실거리다 쓰러질 것이 허세는."
노파가 혀를 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보내 줄 생각이 없는 모양.
하는 수 없이 나는 아주 극소량만 남은 마력으로 전신을 살폈다.
몸 상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심각했다.
전신의 마력 회로는 과열된 여파로 못 써먹을 정도였고, 육체에 관여하는 기맥은 마구 긁힌 듯 거칠었다.
대형진법 속에서 그만한 힘을 다루었으니 후유증이 상당할 수밖에.
'큰일 났네.'
몸으로는 쉬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머리로는 그럴 수 없었다.
하급생도가 첫 외출부터 외박을 했다? 그것도 수석이라는 놈이? 최소 징계고 최악의 경우 퇴학이었다.
'미치겠군.'
더 시급한 문제는 지금이 바로 수강 신청 기간이라는 점이었다.
맛보기 강의가 넘쳐나는 첫 주가 지나고 본격적인 수강 신청을 해야 하는 주차인데, 다른 생도들이 저마다 꿀 강의를 찾아 헤맬 때 나만이 무단결석 중인 셈이었다.
'어떻게 한다.'
이대로라면 징계와 수강 신청 실패 콤보로 신학기부터 제대로 학원 생활이 꼬일 터였다.
뭔가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필요했다.
"우선 몸부터 추스르고 생각해야겠어."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생명연장]의 재능 덕에 숨만 겨우 붙어 있던 신체는 빠르게 회복됐다.
"운 좋은 줄 알아."
노파가 내 진맥을 살피며 말했다. 호전됐다는 의미일 거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나는 100냥짜리 전표 여러 장을 노파에게 넘겨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전신에 기운이 없고 내부에 통증이 있었으나 걸을 수는 있었다.
벌써 4일째였으니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여관을 나서려는데, 무인들이 여관 주인을 몰아세운 채 무언가를 묻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상쩍은 모습에 은근슬쩍 마력으로 청력을 강화시켜 말소리를 엿들었다.
"나흘 전에 수상한 자를 못 보았소?"
순간 들려온 충격적인 소식에 걸음을 멈출 뻔했다. 저 복식 어디선가 봤다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금문상가의 무인들이었다.
'수소문을 하고 있었나?'
그날 죽을 것 같은 상태에서도 최대한 멀리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쫓아온 모양.
"그게… 나흘 전이면…."
여관 주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흘 전 수상한 투숙객은 나 하나밖에 없을 터.
"저 손님 외에는 없었습니다."
'빌어먹을.'
조금만 일찍 나설 걸 그랬다. 무인들의 시선이 내게 향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는 수 없다. 이럴 때는 자연스럽게 대처할 수밖에.
"무슨 일이시오?"
나는 괜히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그러나 얕보이지도 않게 대꾸했다.
"나흘 전에 무슨 일을 했지?"
금문상가의 무인들이 취조를 시작했다. 나는 적당히 사정을 꾸며 이야기했다.
"몸을 다쳐서 왔다고?"
그들이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자 나는 품 안에서 무림학원의 생도패를 꺼내 보여 줬다.
"이건? 생도이지 않나."
"그러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그들의 반응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생도가 대형진법을 운용해 금문상가의 정예 무인들을 골탕 먹였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거다.
"보따리에 든 게 뭐지?"
"그저 짐일 뿐이오."
"한 번 보여 주게. 형식적인 검문이니."
그들이 은근히 검을 내보이며 말했다. 거부하면 강제로 집행할 요량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이렇게 위기가 찾아올 줄이야.
'머리를 굴려야 된다.'
여기서 검문당하면 끝이다. 저 보따리에는 영약이 들어 있었으니까.
긴장된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내 물건이니 직접 열겠소."
그렇게 잠시의 유예를 얻어 낸 뒤 보따리를 바닥에 놓았다. 그러다 문득 무릎에 힘이 빠진 것처럼 비틀거리며 보따리 위에 쓰러졌다.
"이거, 몸이 안 좋아서…."
"빨리하시오."
그런 내 변명에도 아랑곳 않고 무인이 재촉했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던 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보따리 끈을 잡았다.
"뭐 하시오? 어서 안 하고?"
이어지는 재촉. 당장이라도 다가올 것 같은 기세에도 일부러 천천히 보따리를 풀었다.
"이건…!"
순간 두 무인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보따리 안, 그곳에는 전표 다발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됐소?"
대놓고 전표 다발이 보이자 시선을 뗄 수 없는지 큼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두 무인.
'살았다.'
나는 손바닥에 난 땀을 바지춤에 닦으며 아까 비틀거릴 때 마력을 부여해 떨어뜨린 옥석의 배치를 살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내가 한 것은 낮게 깔아 둔 은신진이었다.
은신진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배경에 녹여 내 본래 인물이나 사물이 보이지 않게 하는 은신진 역시 있었다.
이 경우 빛이 왜곡되도록 하는 범위 설정이 주요했는데, 나는 은신진의 높이를 낮게 조정해 영약이 깔린 바닥은 숨기고 그 위에 쌓아 둔 전표 다발만 보이게 한 것이었다.
외부에선 바닥에서 손바닥 반 뼘 높이만큼의 사물만을 볼 수 있었으니 영약을 보지 못했다.
진법의 고인물적인 활용인 셈이었다.
그렇게 내가 보따리를 묶으려던 그때.
"잠깐."
두 무인 중 선임자로 보이는 사내가 굳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뭐지?'
"아무래도 수상하네만. 생도라면서 어떻게 그런 금액의 전표를 들고 다니는 거지?"
당연한 질문이기도 했지만, 은근한 물음이기도 했다. 목소리의 뉘앙스를 보면 알 수 있거든.
'이 자식들. 그새 목표를 바꿨나.'
어디서나 힘 있는 쪽의 사고방식은 마찬가지였다. 네가 잘사는 것 같으니 돈 좀 달라는 거다.
웃기는 일이다.
차라리 강하게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건 내가 가문에서 받은 금액이오."
"가문?"
무인들의 물음에 나는 제갈세가의 신분패와 함께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제례용 단검들을 품 안에서 꺼내 보였다.
"제갈세가."
"헉!"
순간 헛숨을 삼키는 무인들. 사칭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신분패에 제갈세가의 문양이 양각된 단검들, 거기에 수상쩍은 전표 다발까지 보니 의심 따윈 달아난 후였다.
상황 파악이 빠른 선임 무인 쪽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진작에 이럴 걸 그랬나?'
너무도 쉽게 일이 풀리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저쪽도 나름의 임무를 부여받은 무인인 만큼 집요하게 내 짐을 살펴봤을 가능성이 컸다.
지금 보이는 깍듯한 태도도 전표 다발과 내게 어떤 혐의도 없음이 드러났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 사람이…! 우리가 언제 수상한 사람을 알려 달라 했지. 도련님을 곤란하게 하라고 했나?"
어느새 무인들이 여관 주인을 가리키며 태세 전환을 하고 있었기에 이쪽에서 적당히 만류했다.
"됐습니다. 볼일 끝났으면 저는 가보도록 하죠."
"예."
나는 금문상가의 무인들과 적당히 인사를 나누며 돌아섰다.
한 차례 고비를 넘겼지만 진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징계를 어떻게 피해 낸다?'
이대로 바로 학원으로 복귀해 봤자 징계는 확정이었다.
나는 입학시험 때 구자범과 내기를 통해 얻은 사고를 쳐도 단 한 번은 눈감아 준다는 약속을 떠올렸다.
'그래도 그걸로는 부족한데.'
구자범이 눈감아 준다 해도 다른 교수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주임 교수라 해도 별다른 명분 없이는 이쪽 편을 들어주기 애매할 터.
'어떻게 방법이 없나?'
그렇게 나 홀로 고민을 이어가고 있던 그때.
"이놈들이!"
노파의 목소리가 여관 내에 울려 퍼졌다.
"칼 든 사내라면 산적들이나 잡을 것이지. 뭘 이런 곳까지 와서 샅샅이 뒤지는 거야?"
노파의 쏘아붙임에 귀찮음을 느꼈는지 무인들이 여관 주인에게 나흘 전의 투숙객에 대한 정보를 더 묻고는 여관을 빠져나갔다.
"이놈들. 칼만 든다고 다 무림인이 아니다!"
노파의 외침을 듣던 내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발상이 떠올랐다. 지금 내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생각이.
"여기 산적이 있습니까?"
"으잉? 그래. 요 근래 이 근처에서 원성이 자자하지. 작은 마을만 털어서 힘 있는 놈들은 나서지도 않아. 쯧쯧."
"어느 정도의 규모입니까?"
"그건 저 여관 주인이 더 잘 알겠지. 소문은 빠삭한 양반이니까."
여관 주인을 바라보자 그가 움찔 목을 움츠렸다. 자신이 한 일이 떠올랐겠지.
중원 어디든 서민이 무인과 척지면 좋을 게 없다. 그것도 제갈세가의 일원이라면 더더욱.
"아, 그게…."
그의 망설이는 모습에 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저자가 의원을 불러 주었기에 살 수 있었다. 만일 악인이었다면 진작에 날 죽이고서 가지고 있는 걸 다 빼앗았겠지.
그는 그저 소시민일 뿐이었다.
'그래도 목숨값이 있지.'
"신경 쓰지 마시고 말해 보세요."
"아, 네. 제가 듣기론 스무 명 정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럭저럭 많은 수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새로운 계획을 확정했다.
'그 녀석들을 잡는다.'
지금 내 의도는 이랬다. 저 산적 떼를 잡고, 이 녀석들 때문에 늦었다고 하는 거다.
무인으로서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는 식으로 포장하면 나름의 변명이 될 수 있었다.
'먹힐지 안 먹힐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안 해보는 것보단 나았다. 학원 입장에선 4일 지각하나, 5일 지각하나 둘 다 괘씸하기 그지없을 테니까.
"그래서 어디입니까. 그 녀석들이 출몰하는 구역이."
* * *
산지 깊숙한 골짜기, 한때 화전민들이 터를 잡았던 그곳에 산적들의 거점이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찾았군.'
기껏해야 인근의 소규모 행상이나 터는 산적들이라 그런지 추적이 어렵지 않았다.
산적이라 해봐야 어차피 먹을 게 없으면 굶어 죽는 빈민 집단.
노파의 증언대로 수상쩍은 사내가 주기적으로 건조식품을 잔뜩 사는 모습을 추적한 덕분에 거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오히려 너무 간단해서 어째서 여태 잡히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
'보초는 둘뿐.'
낮에 행인들을 터는 것 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집단인 만큼,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은 대다수가 산 중턱에서 잡아 온 멧돼지를 구워 먹거나 술을 퍼마시든지 하고 있었다.
그 수는 약 스무 명 정도.
휴식을 취했더니 서클도 꽤 회복된 직후다.
'이 정도라면 해볼 만은 하겠어.'
은신진 속에서 산적 무리를 바라보던 나는 두 눈을 빛냈다.
그렇게 날이 어둑해지고 달이 올라오는 새벽녘. 보초들이 저마다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그때.
돌멩이 몇 개가 날아와 그들의 주변을 감쌌다.
투둑-
"어?"
그들의 목소리가 채 새어 나오기도 전에 기막이 형성되고, 동시에 나는 그들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
남궁도혁의 비도류를 모방한 일격. 심후한 내공이 깃든 공격은 아니었으나 산적들에게 자상을 입히기에는 충분했다.
동시에 발동하는 전격 마법.
파지지직!
선명한 푸른 전류가 상처 입은 살갗을 꿰뚫고 작열하자, 두 산적이 경련하며 쓰러졌다.
진법과 마법을 활용한 암살이었다.
나는 그들을 묶어 수풀 저 너머에 던졌다.
아까 차후 불침번을 깨우고 왔으니 이제 곧 다음 교대자가 올 터.
지난 몇 시간 동안 관찰한 패턴을 떠올리며 은신진 속에서 다가오는 다음 적들을 바라봤다.
'이걸로 넷.'
상대는 기껏해야 삼류 정도의 산적들인지라 준비해 온 비수와 전격 마법만으로도 충분히 통했다.
'이렇게 야금야금 파먹는다.'
지금 몸뚱이로는 근접전은 어려웠기에, 내 전략은 어디까지나 마법과 진법에 의지한 히트 앤 런 방식이었다.
보초가 없는 오두막들을 향해 다가간 나는 곧 주변에 옥석을 하나둘씩 깔기 시작했다.
음기가 가득한 산골짜기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하나하나 꼼꼼히 배치해 나갔다.
그럴수록 확연히 체감할 수 있었다.
'그 대형진법은 진짜 공들여 만든 거구나.'
지금 내가 구성했던 진법과는 수준이 달랐다.
많은 시간과 인력, 값비싼 소재와 풍수지리적인 요건이 모두 갖춰져야 가능한 대형진법과 기껏해야 중소 규모의 일회용 진법과는 아득한 격차가 있었다.
'확실히 진법은 느리고 비효율적이지만, 오래 쌓으면 쌓을수록 그 진가를 발휘한다.'
내가 진법 내에서 분에 넘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진법 자체가 뛰어난 덕이 컸다.
이를테면 일전의 나는 다 만들어진 전함의 조타실만 점거한 셈이었다.
그에 반해 지금 내가 만든 진법은 어촌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소형 선박 수준이었다.
이걸로 거친 물고기 떼를 잡아야 하는 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로 준비한다.'
여기에 사활을 걸 생각으로 진법을 손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진법을 짜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쪽을 보완하면 저쪽이 불안정해지거나 겨우 진법을 구성해도 기의 효율이 떨어지는 등의 수많은 문제가 끝없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몰입의 와중 한계에 다다르면 또 다른 영역이 펼쳐졌다. 이대로 됐다 싶으면 새로운 영감이 떠올랐다.
범인들은 평생 몇 느껴 보지 못하는 순간. 재능의 연쇄였다.
무아지경 속 나는 모든 변수를 통제해 나가며 진법을 확장했다.
이제 내 손에서 발현된 기의 순환은 단순한 진법이 아닌 예술이었고, 또 하나의 세계였다.
그렇게 별무리가 선명해지고 새벽녘 구름 사이로 달빛이 새어 나올 때 즈음.
우웅-
"됐다."
마침내 진법이 울었다.
25화 내 지각에는 낭만이 있다 (2)
어둑한 산골짜기, 음산한 기류와 함께 오두막 두어 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태풍이라도 온 듯한 전조에 낡은 나무 문들이 벌컥 열렸다.
"뭐야?!"
"기습이다!"
산적들이 부산스레 검을 쥔 채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들 앞에 나타난 건 의문의 낭인도, 현상금 사냥꾼도 아닌 지나치게 어둑한 평야였다.
"뭐야?"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들이 저마다 공터 앞으로 모여 섰다.
그때 한 산적의 발밑에 까드득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밟혔다.
"얼음?"
산적이 수염 난 입가에서 나오는 김을 내뱉으며 중얼거리던 그 순간.
파차차창!
산적들이 서 있던 바닥이 무너지면서 절반 가까이 되는 인원들이 그대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우왁! 어푸!"
"차가워!?!"
"함정이다! 정신 차려!"
저마다 혼비백산하며 얼음장 같은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려는 산적들.
그러나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의 번쩍임이 그 시도를 무산시켰다.
"끄아아악!"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 속에 빠진 산적들 위로 쏟아지는 스파크.
안 그래도 낮은 온도에 잔뜩 수축한 근육이 전격에 경직되자 쇼크로 쓰러지는 녀석들이 속출했다.
그 모습에 이번엔 진법을 조종해 새벽의 찬 바람이 몰아치도록 조절했다.
휘이잉!
한파처럼 거칠게 밀려드는 돌풍.
어느새 산적 중 몇몇은 입술이 하얗게 질리는 저체온증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방금 습격으로 절반 정도는 무력화됐군.'
밤이라 음기가 가득한 산지의 냉기를 동굴처럼 웅덩이에 고이도록 해놨으니 훨씬 빠르게 체온을 빼앗길 수밖에.
이대로 얼음장에 빠진 산적들은 버둥거리다 끝날 운명이었다.
'이제 남은 건 10명 정도.'
나는 영약의 잔해를 마구 흡수해 비대해진 서클을 회전시키며 다음 마법을 발동했다.
"저게 뭐야?!"
사아아아-
한순간 일대의 수분이 증발하더니 주변에 깔리기 시작한 안개.
"아, 안 보여!"
"귀신인가?!"
한 치 앞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자욱해진 일대에 산적들이 패닉에 빠졌다.
그러나 미리 일대에 탐색진을 구성해 둔 내겐 산적들의 위치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일단 시야를 확보해!"
"어떻게요?"
"팔이라도 휘둘러!"
불시의 사태에 허둥대는 산적들을 보며 나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쩌저적!
손끝에서부터 주변의 증기가 얼어붙어 얼음 조각으로 응결됐다.
이윽고 허공에 떠오른 얼음의 칼날이 응축된 바람을 타고 쏘아졌다.
"끄아아악!"
얼음 칼날이 제각기 꽂히며 산적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목에 꽂혀 울컥 새어 나오는 피를 다급히 지혈하는 자, 그대로 관자놀이에 꽂혀 눈깔을 뒤집으며 쓰러지는 자 등.
고작 얼음 조각일 뿐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 불시에 기습을 당하면 저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기껏해야 삼류 정도의 산적들이지 않나.
나는 재차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영약의 잔재가 남은 탓인지 여전히 충만한 마력이 느껴졌다.
'이참에 제대로 한번 써봐야겠군.'
나는 한 손을 들어 감각을 조정했다. 그러자 주변에 퍼지는 마력들.
이윽고 마력의 흐름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
일순 쥐어지는 주먹.
쩌저적!
동시에 산적들의 어깨 너머를 감싸던 안개가 응축되며 얼음 결정화 됐다.
허공에서 날카롭게 얼어붙은 얼음의 칼날이 한순간에 산적 목 주변을 둘러쌌다.
"응?"
"어, 보인다?"
순간 걷힌 안개 너머로 산적들이 볼 수 있는 건 저마다 멍한 표정으로 얼음 칼날이 겨눠진 채 서 있는 동료들의 얼굴뿐이었다.
"어, 얼음이 떠 있어?"
"있을 수 없…!"
촤아아악!
고속으로 쏘아진 얼음 칼날이 산적들의 대동맥을 찢어발겼다.
"제기랄!! 이 미친 건 뭐야?!"
"악령이다! 악령이 노했다!!!"
시야를 가득 메운 안개뿐인 세계 속 불시에 날아오는 공격에 그야말로 혼비백산한 산적들.
동료의 뜨거운 피를 뒤집어쓴 그들이 저마다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 봐도 진법이 만든 미로를, 안개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딜 가도 같은 광경뿐.
그러다가 눈앞의 동료가 불시의 공격에 하나둘씩 쓰러지고,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싸매는 이들이 속출했다.
무엇도 볼 수 없고,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하얀 지옥.
어디에도 활로가 보이지 않는 상황.
그렇게 남은 산적들마저 소탕하려던 그때.
"이 멍청이들이! 흩어지지 마라!"
개중 두목 격인 가장 큰 덩치의 산적이 쩌렁쩌렁 소리를 내지르며 나머지 산적들을 끌어모았다.
"뭉쳐라!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여길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다!"
'머리가 장식은 아니군.'
나는 안개 속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슬슬 마력이 떨어지는 상황.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이쪽이다!"
그때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적 두목이라 해도 나름대로 감각은 있는 모양.
'그러고 보니 두목은 일류급에 가깝다는 소문이 있었지.'
아무래도 체내의 기운을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다루는 경지다 보니 진법의 기운 역시 파악 가능한 모양.
'귀찮네.'
저렇게 겹쳐 있으면 급소를 노리기 어려워진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엔 말이다.
나는 진법의 기류를 슬쩍 바꾸었다.
휘이이잉-
그러자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마구 휘날리는 머리칼.
그 속에서 적을 조준해 마력을 담은 비수를 날렸다. 그러자 일순 휘어져 날아가는 칼날.
"컥!"
목덜미에 비수가 꽂힌 산적 하나가 그대로 자리에서 허물어진다.
험한 날씨가 까다로운 이유는 바람의 방향을 예상할 수 없기 때문.
하지만 만일 바람의 경로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오히려 이걸 이용할 수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끄륵! 옆구리가…!"
비수에 폐가 구멍이 뚫려 호흡곤란으로 쓰러지는 녀석.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적들을 보며 다음 비수를 쥐었다.
어차피 산적질을 하는 녀석들이다. 살해, 강도는 기본으로 하는 악인들인 만큼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어둠 속 비수가 번뜩였다.
차가운 바람. 굳은 피부. 그리고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렵게 깔린 안개와 거센 바람을 따라 궤도를 바꾸는 신출귀몰한 칼날까지.
산적들이 감당할 수 있는 공세가 아니었다.
그렇게 인원이 줄고, 마침내 산적이 다섯 정도만 남을 때였다.
"이대론 저, 전부 다 죽고 말 거야!!"
한 놈이 마침내 패닉에 빠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갈라지는 건 최악의 선택이다. 특히 진법 내에선.
촤악!
그러자 두목 녀석이 검을 내질러 도망치려는 산적을 베었다.
"흩어지지 마라!"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지금 대열이 흐트러지면 다 죽는다는 걸.
하지만 이성과 감정은 다른 법.
나는 그들의 분열을 노리고서 다음 비수를 날렸다. 지금껏 그래 왔듯 무방비한 산적의 옆구리로 날아가는 비수.
카앙!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산적 두목이 검을 뽑아 날아오는 비수를 막은 것이다.
"쫄지 말고 걷기나 해! 안개가 언제까지 이어지진 않을 거다!"
그 말대로다. 진법은 제한되어 있다.
안개에 헤매지 않고, 방향만 잘 잡고 걸어 나가면 어지간한 진법들은 파훼할 수 있다.
'역시 저 녀석이 문제인가.'
내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산적들이 우왕좌왕하다 조금씩 진법 끝자락으로 나아가는 것도 다 저 녀석의 감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해치우고 싶었으나 지금의 나로서는 근접전은 위험했다.
그간 육체에 부하가 상당히 쌓였기 때문.
'차라리 원거리에서 확실히 승부를 본다.'
"으아악!"
다시금 이어지는 비수. 이번엔 크게 꺾어 들어간 비수에 전투 불능이 된 산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걸로 셋.'
일부러 무릎을 부쉈다. 어차피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가는 게 산적들의 생태였으니까.
그 생각대로 그들이 쓰러진 산적을 버리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비수를 날려 홀로 남은 녀석을 처리하고는 그들을 쫓았다.
여기까진 순조로웠으나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어느새 산적들이 진법의 출구까지 발을 들여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개가 걷히고 생문과 사문. 두 가지 갈래의 길이 산적들 앞에 나타났다.
"컥!"
그때 산적 두목이 부하 하나의 멱살을 잡았다.
"이럴 때라도 쓸모가 있어야지."
그리고는 길 너머로 자신의 부하를 던져 넣었다.
"허억!"
순간 어둑한 배경이 산적의 부하를 집어삼켰다.
사문은 진법의 기운이 극도로 비거나 응축되는 곳.
기가 약한 사람은 저 안에 들어가는 순간 기절하거나, 거대한 압박에 감각을 잃고 진법 안을 배회하게 된다.
'이제 남은 건 둘.'
문제는 사문이 발동하는 데 진법의 기운이 상당수 소모된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건 진법 속 균열의 도래였다.
우웅-
곧 사문 발동의 여파로 반대 갈래 길이 일렁이더니, 기존의 칠흑 같던 배경이 사라지고 순간 기존의 산지가 펼쳐졌다.
'생문을 바로 찾았나.'
언짢은 심정을 담아 혀를 차며 다급히 비수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진법 속 바람의 기류를 조절하고, 공기 중에 섞인 수분에 음기를 섞어 눈보라를 일으켰다.
딱 시야를 가릴 수 있을 정도만.
쐐액!
'하나.'
비수가 산적 두목과 계속 붙어 있던 산적의 목을 꿰뚫는 것과 동시에, 마침내 녀석이 진법의 생문을 통과했다.
"나왔다!"
녀석이 외쳤다. 동시에 그의 급소를 향해 날아오는 비수들.
채채챙!
어둠 속에서 일순 불꽃이 튀고, 섬광 사이로 드러난 건 회전하는 대도가 날붙이들을 모조리 튕겨 내는 광경이었다.
"너로군."
힘없이 바닥에 박히는 비수들. 그 가운데서 산적 두목이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날 노려봤다.
'역시 비수로는 부족한가?'
그래도 진법을 뚫고 나올 정도의 기감은 지닌 녀석이다.
한편 나는 검을 제대로 휘두르기도 어려운 상태.
달빛 아래 훤히 드러난 내 모습을 훑어보더니 산적 두목이 이를 드러냈다.
"이거 샌님이 아주 큰 사고를 치셨어."
나는 녀석이 말하는 틈을 타 기습적으로 비수를 날렸다.
카강!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고, 금속 날들이 허공에 비산했다.
안개 속에서야 위협적이었지 이렇게 대놓고 날리면 비수의 위협은 반감된다.
"통하겠냐!"
순간 내게 달려드는 산적 두목.
동시에 이쪽에서 마력을 응축시킨 손바닥을 펼쳤다.
화륵-
붉게 피어오른 화염이 산적의 시야를 뒤덮었다.
"불?!"
뒤늦게 대도를 든 팔을 교차해 보지만 그건 악수였다.
"그러면 뭐로 막게?"
상대의 신체 곳곳에 꽂히는 비수들.
"이 정도쯤이야…!"
불길을 뚫고서 달려드는 녀석을 향해 딱밤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파지지직!
엄지와 중지 사이에 강렬하게 튀는 스파크.
순간 전격의 줄기가 허공을 찢고서 산적 두목의 박힌 비수를 향해 작렬했다.
"크아아악!"
전신을 뒤덮는 폭발적인 뇌격에 산적 두목이 달리던 자세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섰다.
"역시 이걸로는 부족한가."
확실히 아직 1서클 정도인지라 한 방에 처리하긴 어려웠다.
나는 겨우 버티고 서 있던 산적의 핏발 선 눈동자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될 때까지 하면 되지."
허공에 들어 올린 손끝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이내 작열하는 전격 마법. 일순 어둑했던 주변이 백색으로 환해졌다.
그러나 이번엔 앞선 모습과는 좀 달랐다.
산적 두목이 검을 땅에 박은 채 전류를 흘리고 있었던 것.
"머리 좀 썼네."
비척거리며 다가오는 산적 두목을 보며 비수를 들어 올렸다.
곧장 날아가는 비수와 그 궤적을 추적하듯 쏘아지는 전격.
이를 막고자 대도가 크게 휘둘러졌다.
카가강!
사방으로 비수가 튕겨 나오고 솟구친 전격이 빨려 들어가듯 대도에 흡수됐다.
완벽하진 않았으나 경직을 피하기에는 좋은 대처였다.
'오래 끌면 귀찮아지겠어.'
슬쩍 미간을 좁힌 나는 다가오는 산적 두목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상대의 발치에 비수를 던졌다.
어설픈 보법으로 이를 피하고는 대도로 몸을 가린 산적 두목.
하지만 기다리던 전격 공격은 오지 않았다.
의아한 눈빛으로 대도를 넘어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 동시에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파지지직!
어느새 내 손 안에 크게 덩치를 키운 전류의 구체가 일대를 밝히고 있었다.
"기회를 잡았으면 쫄지 말고 달려들었어야지."
나는 응축시킨 전격 마법을 그대로 쏘아 냈다. 그 광경을 본 산적 두목이 대도로 방어하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그러나 날아가던 전격 마법은 이내 허공에서 퍼지더니 바닥에 박아 둔 비수를 향해 다섯 방향으로 쪼개져 흩어졌다.
파지지직!
일순 지면에 오망성을 그리며 번뜩이는 전격들.
"이번엔 버티기 힘들 거다."
"커어어억…!"
마법과 진법으로 이루어 낸 구속진이 펼쳐지자 전류가 산적 두목의 전신을 마치 살아 있는 그물처럼 뒤덮었다.
곧 전신이 검게 타오른 채 바닥에 쓰러진 상대.
전신이 마비된 채 크게 뜬 눈으로 하늘만을 응시하는 녀석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네 현상금은 잘 쓰마."
그러자 눈으로 욕을 하는 녀석. 아직 의식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쪼그려 앉은 채 그를 내려다봤다.
"근데 너 훔친 장물 숨겨 둔 장소 있지? 순순히 말하면 목숨은 붙인 채로 관아로 보내 주마."
"어, 아…!"
아직 입이 잘 풀리지 않는 듯해 검을 빼 들자 이내 경련하는 입술로 떠듬떠듬 발음을 이어 나가는 녀석.
"자, 장깐! 놰가 누궁지 아라? 이 몽이 바러 눙림쉬찰채의…!"
"그래, 그래. 나도 마음속으로는 파천마의 진정한 후계자이고 싶고 막 그래."
헛소리를 하려는 녀석의 말을 끊고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근데 여긴 검이 더 가깝잖아? 그럼 지금부터 네 유일한 인맥은 나뿐인 거다. 내가 형이라면 형인 거고, 아빠라면 아빠인 거야. 알겠어?"
"이… 이 악랄한!"
검면으로 녀석의 뺨을 툭툭 치며 말하자 상대가 턱을 덜덜 떨며 날 노려봤다.
혈압이 올라서 그런지 근육의 경련이 심해지는 모양.
빨리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괜히 도적 잔당을 고문한 후에 오두막 근처를 사사로이 터는 수고를 들이고 싶진 않으니까.
"골라. 이대로 효수될래? 아니면 국경에서 노동형 받으면서 회개의 여지를 남겨 볼래? 어차피 가격은 같은데. 우리 쉽게 좀 가자."
"제길… 하필 이런 녀석에게 걸려서! 오두막 뒤쪽 바위 아래다. 이 사파만도 못한 자식아…."
경련이 풀린 입으로 겨우 욕지거리를 내뱉던 두목 녀석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래, 하면 할 수 있잖아."
마침내 나온 대답에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26화 내 지각에는 낭만이 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