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폐물
하약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그녀의 푸른 머리칼이 춤추듯이 흩날렸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들자, 눈물이 가득한 얼굴 위에 본 적 없는 광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너희들 모두, 옥이의 장례를 치러라.”
쾅!
순식간에 하늘이 어두워졌으나, 천둥과 번개가 곧 하늘을 밝게 비추었다.
“저 정도의 중상을 입고도 자폭할 기력이 남았다니…….”
하명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명도 하약운이 천재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아이가 아니었다. 이대로 하약운을 계속 성장시킨다면 초설 모녀가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는 사랑하는 모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식을 위해서, 하약운이란 천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선 천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하!”
하약운은 정신 나간 듯이 웃으며 말했다.
“하명, 육심. 내가 죽는다 해도 너희들에 대한 원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야. 여기에 초설이가 없어서 안타깝군. 같이 지옥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쾅!
일순 강한 힘이 그녀의 온몸에서 퍼져 나와 산골짜기 전체를 흔들었다.
하명은 미친 듯한 하약운의 웃음소리를 듣자 심장이 절로 떨렸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내 천지가 고요해졌다.
“크흡.”
하약운은 곧 피를 토하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증오섞인 눈빛으로 앞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씩 쳐다봤다.
“왜 내 자폭을 막는 거야…….”
그녀는 주먹을 쥐고 분노했다.
방금 상고신탑이 자신의 자폭을 막았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상고신탑을 얻은 후, 처음으로 신탑을 느낀 순간이었다.
“내 영혼이 사라지는 걸 막고 싶은 거야? 하지만 복수를 할 수 있다면 내 영혼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혼비백산하더라도 지옥에 갈 거라고…….”
하약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에겐 더 이상 자폭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옥아, 미안해. 내가 무능해서 복수도 못하는구나.”
그녀의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또다시 광기에 차 미친 것처럼 크게 웃었다.
“나 하약운이 이 자리에서 맹세한다. 우리를 해친 이들에게 반드시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영원히 회복 못 할 지경에 이르도록 처참히 짓밟아줄 것이야! 지옥에 가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그녀의 목소리는 곧 저주가 되어 육심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 말을 듣자 육심은 당황스러워졌다. 뼈에 사무치는 원한으로 가득한 하약운의 눈을 감히 마주할 수가 없었다.
“커헉…….”
그녀는 또다시 피를 토하며 눈앞의 원수들을 한 명씩 훑어보았다. 마치 그들을 잊지 않고 머릿속에 깊이 새기려는 것처럼.
“어차피 심장을 찔렸으니, 더 이상은 살 수 없을 게다.”
하명이 하약운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눈앞의 그녀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 원수라도 되는 듯, 하명의 눈빛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하약운. 신탑을 내놓아라.”
그 말에 하약운이 차갑게 웃었다. 그녀는 차가워진 하임옥의 시신을 끌어안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곤 주저 없이 몸을 돌려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하약운의 시신을 찾아!”
하명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상고신탑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 * *
서령대륙(西灵大陆),청룡국(青龙国).
장군부(将军府)의 후원(後園)에 소녀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볏짚을 입에 문 그녀는 평상 위에서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했다.
“여긴 어디지? ……서령 대륙?”
하약운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기억을 받아들이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내 영혼이 환생을 한 건가? 난 이전까지 동악 대륙에 있었는데, 서령 대륙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거야? 곁에 있는 사람들도 동악 대륙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달라. 정말로 기회가 주어진 건가?”
이 세계는 무수한 대륙으로 이어져 있다. 비록 동악 대륙과 서령 대륙은 인접해있는 곳이긴 하나, 서령 대륙은 하층에 속해 있기에 그중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 이들만 동악대륙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이전 생에서 하약운은 동악대륙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전 생에서 천재였던 자신과 달리, 이 몸의 주인이었던 고약운(顾若云)라는 사람은 몹시도 무능했다. 고약운은 열다섯 살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취기(聚气) 3급에도 이르지 못했다. 장군부의 노복들마저 4급 이상인데 말이다.
물론 고약운의 신세도 비참했다. 그녀는 어릴 적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 있는 듯 없는 듯하게 살아가던 그녀에게 하나뿐인 오라버니의 비호마저 없었다면, 아마 그녀는 밖으로 한 걸음 내딛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오라버니는 어떤 세력으로부터 제자로 받아들여져 어쩔 수 없이 청룡국을 떠나게 되었다.
오라버니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능(凌)씨 가문의 소공자가 고약운 앞에서 그녀의 오라버니를 모욕했다. 그래서 고약운은 오라버니를 위해 소공자에게 맞서 대들었다. 그녀도 자신이 대들다가 능 씨 가문 노복에게 얻어맞아 반죽음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정말 웃긴 건, 고약운의 할아버지, 즉 장군부의 노장군 역시 이 같은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고약운을 죽도록 때렸다는 사실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하약운, 아니 고약운이 차갑게 웃었다.
“고약운. 내가 너의 몸을 차지한 이상, 이젠 안심해도 돼. 내가 대신 복수해 줄게. 네 몸을 차지하게 해 준 보답이라 생각해라.”
고약운이 혼잣말을 하던 중, 갑자기 후원 뒷문이 열렸다. 문을 연 소녀는 고약운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직 죽지 않은 거야?”
그 소녀를 비롯해서 그녀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경악했다.
“그렇게 맞고도 살아있다고?”
“왜? 내가 죽었으면 했어?”
고약운은 키들키들 웃으며 앞에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흥, 죽지 않았으면 대청에 계시는 할아버지께 가 봐.”
말을 마친 소녀는 고약운을 신경 쓰지도 않고 바로 떠났다.
고약운은 눈을 가늘게 떴다. 떠오르는 기억을 통해 저 소녀가 둘째 숙부 고명(顾明)의 딸 고반반(顾盼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오라비 고향림(顾向林)은 장군부에선 천재로 불렸으나, 고약운의 오라버니 고생소(顾笙箫)에겐 한참 뒤쳐졌다. 그 때문인지 고반반은 고향림을 대신하여, 고생소가 집에 없을 때 고약운을 괴롭혔다.
그러나 고약운은 오라버니가 걱정할까 봐 이에 대해 말을 꺼낸 적도 없었다.
* * *
고 장군부의 대청.
고약운은 들어서자마자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고(顾) 노(老)장군을 바라봤다.
고 장군의 오른쪽에는 노인 한 명이 자리해 있었다. 그 노인은 바로 능 씨 가문의 가주, 능의(凌毅)였다.
“마침 깨어났구나.”
고 장군은 차가운 눈빛으로 엄숙하게 말했다.
“감히 능가 공자를 괴롭히다니, 당장 사과해라.”
황제의 후궁 중 귀비 한 명이 바로 이 능 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이는 결코 능 씨 가문의 미움을 사선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고 장군은 능 씨 가문의 미움을 사느니, 무능한 여식 한 명을 희생 시키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저렇게 나약한 손녀가 어떻게 능 씨 가문의 공자에게 덤빈 거란 말인가. 이건 고 장군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애석하게도 고약운은 무능했으며, 별 쓸모가 없었다. 만약 그녀가 그녀의 오라버니 고생소처럼 천재였다면, 아무리 귀비의 가문이라 할지라도 그녀를 쉽게 건들지 못했을 것이다.
“사과?”
고약운은 차갑게 웃으며 되물었다.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되신 것입니까? 제가 능 공자를 괴롭혔다니요? 화도 낼 줄 모르는, 무능한 취기 2급 폐물인 제가요? 능 공자께선 취기 5급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공자를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할아버지, 제가 청룡국 최고의 고수를 괴롭혔다면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고 장군은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 손으로 탁상을 탕 내리쳤다.
“이젠 네 조부의 명도 거역하는 것이냐? 능가에서 네 잘못이라고 말한 이상, 네가 잘못한 게 틀림없다. 능가 가주께서 너를 용서해 주실 때까지 무릎을 꿇어라.”
“하하하!”
고약운은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분명 능 공자께서 오라버니의 실력을 질투해 먼저 저희 남매를 모욕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것이 제 잘못이란 말씀이십니까? 또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데다, 두 눈이 멀쩡하시다면 누가 괴롭힘을 당했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괴롭힌 사람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괴롭힘을 당한 사람은 멀쩡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할아버지께선 진정 저를 도와주실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고 장군은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러다 잠시 후, 그는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고약운을 바라봤다.
“넌 도대체 누구냐?”
고 장군의 살기가 대청을 가득 채웠다.
고약운은 남보다 실력이 떨어지긴 하나, 정신력을 동원하면 살기에 저항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녀의 허점이 드러날 수 있었다.
“왜요? 저를 죽이고 싶으십니까?”
고약운은 창백한 얼굴로 비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한번 죽도록 때리셨으니, 두 번 때리는 것쯤이야 쉬우실 테지요. 제 생명력이 이렇게 강할 줄 몰랐습니다만, 사실 그때 전 죽었을 수도 있었어요. 지금 저를 죽이신다면, 저도 이 자리에서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돌아오시면 제 죽음을 뭐라고 설명하실 겁니까?”
고 장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고 장군도 고약운을 때린 뒤 후회했었다. 그녀의 오라비 고생소가 그녀를 끔찍하게 아끼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무능한 손녀는 잠시 호흡을 잃었을 뿐, 심장은 다시금 뛰기 시작했었다.
그 짧은 순간에 고약운의 영혼이 바뀌었다는 것을 고 장군이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그는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손녀의 모습을 보며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그렇지. 네가 정녕 고약운이라면, 나도 생소에게 해명을 해야겠지. 그런데 무능한 내 손녀라면 면전에서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넌 누구냐?”
고 장군이 차갑게 말했다.
그러자 대청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고약운에게 집중됐다.
“제가 고약운이지 누구겠습니까? 사실 전 몇 년 동안 약한 척을 해왔습니다. 제 안위를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무능하다 할지라도, 이렇게 나약하게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나약하게 굴면 이런 일밖에 더 생기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모두 크게 놀랐다.
‘어쩐지 저런 폐물이 말도 안 되는 객기를 부린다더니……. 지금까지 나약하게 굴었던 건 모두 엄살을 부린 거란 말인가?’
고 장군은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능의가 탁자를 내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누구든 상관없다. 고약운, 어서 무릎을 꿇고 네 잘못을 인정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에게 천재 오라비가 있든 없든, 널 이 자리에서 죽일 것이다.”
고약운은 능의의 주름진 얼굴을 보고 씩 웃었다.
“저 같은 것을 직접 죽이신다면, 청룡국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실 것입니다. 가주, 그것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대체 뭐라는 것이냐?”
“가주의 손자와 결투를 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