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상고 봉황, 자사
이 순간 모두들 고약운이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한낱 취기 2급이 5급을 상대한단 말인가? 그녀는 본인이 미쳤다고 생각하지 못한단 말인가?
“할아버지, 제가 대신 대답하겠습니다.”
능의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능 공자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높은 곳에서 고약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진정 죽고 싶나 보구나? 네 도전은 기꺼이 받아주지.”
“잠깐만요.”
능 공자가 손을 쓰려는 순간, 고약운이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왜, 무서우냐? 무서우면 어서 무릎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빌어라. 내가 네 목숨 정도는 살려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
능 공자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고약운은 그런 능 공자를 보며 씩 웃었다.
“무서우면 도전을 했겠습니까? 다만, 저는 1월 이후에 겨루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때가 아니지요.”
능 공자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겠다. 한 달은 더 살고 싶은 모양이로군. 뭐, 내가 그렇게 인정머리 없진 않으니, 한 달 정도는 더 살게 해주마.”
말을 마친 능 공자가 이번엔 고 장군을 보며 말했다.
“고 노장군, 한 달 후 제가 이 무능한 폐물을 죽이겠습니다. 장군부의 식량을 아끼는 데 기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말뜻은 매우 분명했다. 감히 능 씨 가문의 공자에게 도전한 고약운을 죽일 것이며, 장군부의 식량만 축내는 폐물을 대신 처리해주는 자신에게 감사하라는 뜻이었다.
* * *
능 씨 가문의 사람들이 떠난 뒤, 고 장군은 안색이 나빠졌다.
‘죽으려면 혼자 죽을 것이지, 왜 능 공자의 손에 죽는다는 게야? 쓸모없는 것이 그저 담만 커서, 이 기회에 장군부의 체면을 깎으려는 셈인가?’
“휴…….”
고 장군은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곤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옷소매를 세차게 떨친 뒤 성큼성큼 대청을 나섰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고약운을 쳐다보지 않았다.
“고약운. 네 주제를 모르는구나.”
그러다 대청을 빠져나가려던 차에, 고 장군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고약운을 쳐다보며 말했다.
“능가 공자가 누군지 아느냐? 능가 공자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귀비의 친정 가문 자제이며, 청룡국 첫째 고수의 제자를 스승으로 모시는 인물이다. 그런 청룡국의 고수가 고작 네 오라비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
그는 고약운을 비웃곤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곧장 사라졌다.
* * *
뒷산에서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고약운은 바위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돌연 그녀가 눈을 뜨자, 그녀의 눈이 번개처럼 한줄기 빛을 발했다.
“맞아. 상고신탑. 상고신탑은 어떻게 된 거지?”
상고신탑이 그녀의 죽음을 막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쯤 하명 등과 함께 죽은 후 혼비백산하여 영혼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그녀에겐 동악 대륙으로 넘어가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미 제 몸속에 녹아든 상고신탑을 어떻게 꺼낼 수 있단 말인가?
“일단 신탑이 내 몸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고약운은 눈을 감고 영안(靈眼)으로 자신의 몸을 훑었다. 바로 이때, 그녀는 자신의 영해(靈海)가 일반인에 비해 훨씬 넓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공 수련에 있어, 수행자는 자신의 모든 영기(灵气)를 영해에 응집해야 한다. 영해에 영기를 가득 채워야 다음 관문을 돌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수련자가 그릇 크기 정도의 영해를 가지고 있다면, 고약운의 영해는 넓은 바다와도 같았다.
그러나 청룡국 내에는 진정한 강자가 없기에, 넓은 영해의 장점을 아는 이가 드물었다. 실력이 높아질수록 수련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오성(*悟性: 깨달음, 통찰력)이었다.
영해가 넓을수록 수련자의 오성 또한 강해진다. 만약 그녀가 전생에 이토록 넓은 영해를 가지고 있었다면, 무존(武尊)을 돌파하고 무제(武帝)의 등급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취기 8급 이후의 등급을 살펴보자면 이러했다. 무자(武者),무사(武士),무장(武将),무왕(武王),무황(武皇),무존(武尊),무제(武帝),무성(武圣),무신(武神). 이들은 각각 저급, 중급, 고급으로 분류된다.
동악 대륙에서도 무제는 손에 꼽을 만 한 등급으로, 이 등급에 도달하면 스스로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한편 청룡국의 첫째 고수는 겨우 무장(武将) 고급에 불과했다.
“응?”
이내 고약운은 보라색 보탑이 영해에 잠긴 것을 발견하고 기쁘게 미소를 지었다.
“상고신탑, 드디어 널 찾았다.”
쿵!
그때, 강한 충격이 영해를 거쳐 고약운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그녀의 머리를 크게 울렸다.
그 때문에 고약운은 잠시 정신을 잃었다.
* * *
고약운이 곧 정신을 차리자, 자주색 긴 옷을 입은 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고약운은 옷자락을 따라 점점 시선을 위로 움직였다.
자주색 장포를 입고 있는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잘생긴 남자였다.
고약운이 동악 대륙에서 본 남자 중 제일 미남이었던 이는 바로 금제(金帝)였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외모로만 따지면 금제보다 한수 위였다.
남자가 입고 있는 자주색 장포는 옷소매에 금색 실로 자수가 놓여있어, 그걸 입고 있으니 남자는 퍽 존귀하고 화려해보였다.
이윽고 가벼운 바람이 주위를 한 번 훑고 지나가자, 마음을 사로잡는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남자의 얼굴은 그를 제외하고 온 세상이 한순간 색을 잃을 정도로 몹시 아름다웠다. 곧이어 바람이 가볍게 그를 스치자 자주색 옷소매가 살짝 펄럭이더니, 머리카락도 흩날렸다.
순간 그의 미간에 자줏빛으로 된 괴이한 화염이 어려 있는 게 고약운의 눈에 들어왔다. 미간에 화염이 어려 있으니 꼭 악신처럼 보여, 기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남자는 손을 들어 가벼운 바람을 일으키며 고약운에게로 다가왔다. 정신을 차리자, 고약운은 어느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네가 바로 상고신탑이 선택한 주인이야? 몸이 말라서 안에 뭐가 든 것 같지도 않구나. 영양 보충 좀 잘하고 다녀라. 그럼…… 살이 좀 오른 후에 내 침상에서 다시 볼까?”
그 말에 고약운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고약운이 막 발을 들어 올려 상대를 걷어차려던 순간,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그녀의 발을 잡아챘다.
“넌 이전에 정말 강했지. 하지만 지금은 겨우 취기 2급일 뿐인데, 날 기습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자 고약운은 발을 거두고 눈앞의 아름다운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누구세요?”
“고약운, 너무 몰인정한데? 내가 널 동악 대륙에서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내가 누군지 그새 잊은 거야?”
남자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네 목숨을 구했다. 안 그랬으면 넌 벌써 혼비백산했을 거야.”
‘동악 대륙?’
고약운은 순간 멍해졌다.
“당신은 설마, 상고신탑?”
그 말에 남자는 웃음을 참으려 애쓰며 말했다.
“상고신탑? 재밌구나. 넌 탑이 사람이 되는 걸 본 적이 있나보군. 난 상고신탑의 반생수(伴生兽) 자사다.”
“자사? 상고 봉황 자사?”
서령 대륙 사람들은 자사의 존재를 모를 수도 있지만, 동악 대륙 내에서 자사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상고 봉황 자사는 천지개벽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단숨에 제국 전체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는 데다 모두가 두려워할 만큼 실력이 강했다. 그런데 수만 년 전 사라져버린 자사가 이렇게 나타날 줄이야.
“충격을 받은 모양이군.”
자사가 씩 웃으며 말했다.
“넌 도망치면서 상고신탑과 계약을 했어. 너의 영혼이 사라지지 않는 한, 신탑은 너를 영원히 따를 것이다. 다만, 나와 상고신탑은 모두 봉인되어 있어. 만약 동악대륙에서 봉인을 해제했다면, 오래된 괴물들에게 들켰을 거야. 그래서 서령 대륙에 올 때까진 널 도울 수가 없었지. 그리고 이젠…… 봉인을 해제할 수 있다.”
고약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 상고신탑은 할아버지께서 주셨는데……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어.”
“상고신탑에 대해선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건 상고시대에 남겨진 물건이지. 상고시대의 신기(神器)가 어떻게 쓸모가 없겠어? 그리고…….”
자사가 웃으며 고약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그자에게 도전을 했잖아. 상고신탑도 도움이 될 거다. 1월 전에 그자를 능가할 실력으로 만들어 줄게.”
자사는 고약운이 전생의 실력으로 능 공자를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능 공자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이겨야 한다는 점이었다.
* * *
신탑 안에는 빛나는 네 가지 벽이 있었으며, 중앙에는 커다란 약솥이 놓여 있었다.
그걸 본 고약운이 자사에게 물었다.
“여기가 상고신탑이야?”
“응, 상고신탑 1층이다. 내 힘으로는 1층 봉인만 풀 수 있어. 이제 이곳의 봉인을 풀 수 있는 건, 너뿐이고.”
“어떻게 해야 봉인을 풀 수 있는데?”
고약운은 신탑을 둘러보다 발걸음을 멈추고 자사를 쳐다봤다.
“아주 간단해.”
자사는 고약운의 얼굴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취기 8급을 돌파하고, 무자(武者)로 승급하면 돼. 무자를 달성하면 2층에 갈 수 있게 되지. 한 층을 돌파할 때마다 그 층만의 물품을 하나씩 얻을 수 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약운의 시선이 신탑 중앙의 약솥으로 향했다.
“1층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이 약솥인가?”
“그래.”
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솥뿐만 아니라 밑바닥에 단방(*丹方: 단약을 제조하는 기술)도 있지.”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몇 개의 단방을 고약운 앞에 내놓았다.
“취기단(聚气丹). 취기의 단계에서 영기를 더욱 잘 느낄 수 있지. 평소보다 다섯 배 빠르게 수련할 수 있어. 이건 세수단(洗髓丹). 세수단을 쓰면 불순물을 씻어내고, 평소보다 적게 수련을 해도 그 배의 성과를 낼 수 있지. 그리고 미용환부단(美容换肤丹). 오십 대 여인이라도 이 미용환부단만 있으면, 이십 대의 미모를 되찾을 수 있다.”
자사가 아직 설명해주지 않은 단방이 하나 더 있었으나, 이 단방들만으로도 고약운은 이미 가슴이 설렜다.
수만 년 전에는 단방을 만드는 연단사(炼丹师)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만 년 전 대륙 전쟁에서 대부분의 연단사가 살해되었고, 현재 대륙에는 모양을 갖춘 단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시장에선 가루 형태의 단약(丹药)이 팔리고 있지만, 그것들을 단약이라 하기는 애매했다. 그래서 단방을 본 고약운은 더욱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금세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 모습에 자사는 의아하다는 듯 고약운을 살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금방이라도 단방을 써 보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텐데, 눈앞의 여인은 달랐다.
“귀한 단방들이지만, 안타깝게도 난 연단(炼丹)을 배운 적이 없어. 단방과 약솥이 있다 해도, 배운 적도 없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넌 지금까지 봐왔던 탐욕스러운 인간들이랑은 뭔가 달라. 점점 관심이 생기는데?”
자사가 음흉하게 웃자, 미간 사이의 불꽃이 점점 타올라 기괴하게 보였다.
“네가 빨리 자라야 할 텐데. 그래야 우리가 뜨거운 밤을 보내지. 지금 넌 너무 말라서, 너랑 부딪힐 때마다 너무 아플 거 같아.”
그러자 고약운은 입꼬리를 올리며 자사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내가 클 동안…… 네 것도 더 클 수 있어?”
“내 거라니?”
자사는 고약운의 엉큼한 눈빛을 보고, 방금 그녀가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순간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내가 이래 봬도 지금 이 몸의 원래 주인보다 20년은 더 살았다는 걸 잊지 마.”
“아, 그래?”
자사는 눈썹을 들썩이더니 고약운을 재빠르게 품에 안았다. 실눈을 뜬 그의 모습은 다소 위협적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