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단약 (1)

4화. 단약 (1)

“네가 20년을 더 살았다면…… 지금이라도 뜨거운 밤을 보내보는 게 어떻겠어?”

고약운이 저항하려고 하자, 자사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매혹적인 웃음소리를 흘렸다.

“안타깝지만, 말라비틀어진 건 딱 질색이야. 안고 있을 때 불편한 건 싫어서 말이다. 살이 좀 더 찌면 그때 보자꾸나.”

퍽.

고약운은 자사가 자신을 놓아주려 손힘을 푸는 틈을 타 그의 얼굴을 가격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손이 고약운의 주먹을 막았다.

“너, 정말 잔인하구나. 모진 계집애 같으니.”

자사는 고약운의 주먹을 놓아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 때리고 싶으면 때려라. 인정사정 봐주지 마. 그런데 지금은 안 되겠다. 신탑에 온 지 너무 오래되었어. 그러니 다른 이에게 들키지 않도록 이제 그만 떠나는 게 좋겠다. 나가서 취기단(聚气丹)의 약재를 모두 사와. 그럼 단약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자사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고약운이 한 달 넘게 집을 비운다 한들, 고 씨 가문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녀의 부재를 눈치 채지 못할 거란 사실을 말이다.

* * *

일순 가벼운 바람이 불자, 단풍잎이 나무 끝에서 떨어졌다.

고약운은 뒷산을 내려오자마자 우악스럽게 움직이는 한 소녀를 보게 되었다. 그 소녀는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대략 열다섯 살 정도 된 것 같았으며, 화려한 금빛 옷을 입고 있었다.

소녀는 완벽한 몸매를 가졌으나, 하얀 피부에는 주근깨가 가득했다. 마치 흰 손수건에 얼룩이 묻은 것 같았다.

고약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저 소녀의 정체를 알기 위해 머릿속을 뒤졌다.

그 사이, 주근깨 소녀는 빠른 걸음으로 고약운에게 다가와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소녀의 이름은 바로 라음(罗音)이었다.

“약운아, 네가 능 공자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며?”

고약운은 별말하지 않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

“소식이 아주 빠르구나? 왜, 너도 내가 질 거 같아?”

그러자 라음은 크게 웃으며 고약운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약운. 네가 누구야? 너희 아버지는 청룡국의 제일가는 천재셨지. 하늘은 역시 천재를 질투하는 걸까? 너희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고, 이젠 너희 오라버니가 청룡국의 제일가는 천재가 됐잖아. 약운아, 넌 고천(顾天)의 딸이면서 고생소의 동생이야. 그런 네가 어찌 무능한 폐물이겠어? 그런데 오래된 친우인 나까지 속이다니…… 너무해.”

그 즈음 거리에는 고약운이 사실은 강한데, 지금까지 약한 척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라음은 고약운이 가장 친한 친우인 자신에게도 그 사실을 숨겼다고 생각하자 섭섭함이 몰려왔다.

“라음.”

고약운은 오랜 친우를 보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네 도움이 필요해.”

“무슨 일이야?”

“금화를 좀…… 빌려줄 수 있어?”

고약운이 쑥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전생에 하 씨 가문 정실부인의 여식이었던지라, 살면서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폐물 취급 받는 고약운일 뿐이라, 그녀가 가진 돈은 한 달 용돈인 동전 세 개가 전부였다. 이 돈으로 어떻게 약재를 살 수 있겠는가?

라음은 별생각 없이 흔쾌히 물었다.

“얼마나?”

고약운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라음의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백 개 정도 필요해. 부담스럽겠지만, 네가 빌려주면 금화 백 개보다 더 큰 보답을 할게!”

고약운은 전생에서 평생을 살며 남에게 빚지고는 못 살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라음이 금화 백 개를 빌려준다면, 고약운은 그보다 더 큰 값어치를 지닌 단약으로 보답할 생각이었다.

“금화 백 개?”

라음은 고약운이 이렇게나 많은 금화를 필요로 할 줄은 몰랐다. 사실 라음에게도 금화 백 개는 일 년 동안 모은 용돈과 맞먹는 액수의 돈이었다.

그러나 라음은 고약운이 허투루 돈을 빌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돈 가지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그리고…… 약운이 네가 금화를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을 리 없으니까 갚을 필요는 없어.”

라음의 대답은 고약운이 말한 보답이 무엇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취기단 하나의 가치는, 금화 백 개를 뛰어넘고도 남았다.

* * *

백신당(百神堂).

백신당(百神堂)은 청룡국에서 가장 큰 약방이었다. 이곳에서 살 수 없는 약재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백신당 안에선 회색 머리의 노인이 눈을 감고 앉아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때, 가벼운 발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오자, 노인은 감고 있던 눈을 뜨면서 약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소녀는 매우 수척해보였으며, 넓은 회색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회색 천 옷은 소녀와 그리 어울리지 않았고, 그저 소녀의 마른 몸을 가려줄 뿐이었다.

그리고 소녀의 하얗고 아름다운 상아색 피부는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무척 고왔다.

회색 머리 노인은 소녀를 한번 흘끔 보곤 다시 눈을 감았다.

“소저, 무엇이 필요하시오?”

백신당 주인은 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백신당은 청룡국에서 가장 큰 약방이오. 어떤 약재든 찾아 드리겠소. 만년 된 산삼도 드릴 수 있다오!”

“만년 된 산삼은 필요 없습니다. 이 약방문대로 주시지요.”

고약운은 주인에게 약방문을 건넸다. 그러자 주인은 그 약방문을 눈으로 훑곤 웃으며 말했다.

“모두 흔한 약재들이군.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감사합니다.”

고약운은 고개를 끄덕인 후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곧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노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노인을 바라보던 고약운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보통이 아닌데…… 적어도 무왕은 되겠어. 저런 강자는 청룡국에서도 손꼽힐 텐데, 이 백신당에서 대체 뭘 하는 거지?’

보아하니 백신당은 고약운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곳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이 계산대 앞에서 기세등등하게 탁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약재를 판 거야? 분명 이 약재로 내 목에 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째서 왜 조금도 효과가 없는 거지?”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피부에선 윤기가 흐르는 데다 눈썹은 초승달처럼 정교하고 가늘었다. 또한 그녀의 밝은 두 눈은 꼭 어두운 밤하늘 속 별빛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나 아름다운 그녀는 마치 입으로 불길이라도 뿜어내는 것처럼,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여인의 말대로 그녀의 아름다움에 흠을 내듯, 목에 뚜렷한 상처가 자리해 있었다.

“능 소저, 하루밖에 안 쓰셨지 않습니까? 하루 만에 효과를 보긴 힘들지요.”

주인은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소저, 보름 정도만 사용해 보십시오. 분명 원래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나 능옥(凌玉)은 그런 것 따위 필요 없어! 당장 효과를 보는 약재를 달라고 했잖아! 당신, 내가 누군지 알아?”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 능옥이 가슴을 쫙 펴곤 큰소리로 외쳤다.

“난 능옥이고, 황궁의 귀비마마께서 내 고모이시다! 나를 화나게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이러는 거야? 고모에게 말씀드려, 당장이라도 백신당을 청룡국에서 없애버리겠어!”

‘귀비마마?’

고약운은 잠시 멍해졌다.

백신당은 청룡국에만 존재하는 세력이 아니었다. 저 능옥이란 여인은 이들이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고 저러는 것일까?

보아하니 능옥은 그렇게 머리를 잘 굴리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한편 능옥이 보기에 백신당은 그저 작은 상단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큰 세력이라 할지라도 감히 황권을 넘볼 수준은 못 될 터였다.

“소저, 목소리가 참 크십니다그려.”

그때, 눈을 감고 있던 노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에 주인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여로(余老)…… 이번 일은…….”

여로는 안절부절못하는 주인을 보지도 않고, 매서운 눈빛으로 능옥을 바라봤다.

“소저, 백신당에서는 일반 백성이든 관직을 하는 가문 사람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권력으로 사람을 압박하려 든다면, 백신당은 능 씨 가문 사람들의 출입을 허락치 않을 것입니다.”

“뭐라고……?”

능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을 거라곤 예상도 못했다.

“감히 나를 업신여겨? 겨우 의원 주제에 나를 똑바로 쳐다보다니?”

여로는 눈을 감고 침묵했다.

“그래. 당신들, 내가 똑똑히 기억할 거야! 그래, 이 원수를 반드시 갚으리라 맹세하겠어. 그때가서 용서받을 기회라도 달라고 할 걸 하면서 후회하지나 마!”

여로는 다시 눈을 감을 뿐, 능옥이 소리를 치든 발을 구르든 신경 쓰지 않았다.

“소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금방 약재를 가져오겠소.”

능옥이 떠나자, 주인이 고약운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인장, 저분이 백신당의 의원이신가요?”

고약운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

“아…….”

주인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여로를 살폈다. 그는 여로가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곤, 다시 고약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소. 저분은 여로 선생으로, 백신당의 의원이시오.”

“오…….”

고약운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가 보기엔 그렇게 의술이 뛰어나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왜 간단한 흉터 하나 치료하지 못하실까요?”

“뭐라고?”

여로가 갑자기 눈을 뜨곤 차갑게 웃었다.

“간단한 흉터? 간단한 건 능 소저의 흉터가 아니라 소저가 아무렇게나 뱉은 그 말이네. 흉터를 없애는 건 어렵지 않지만, 짧은 시간 내에는 불가능하지. 어떤 상처나 병이든 다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법일세.”

“의술이 부족하신 건 아닙니까? 어르신, 그냥 인정하시죠?”

“소저!”

주인은 여로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다급히 고약운의 말을 끊었다.

“소저, 그만하시오. 여로 선생의 의술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오. 황제 폐하의 태의도 여로 선생보다 못하지.”

“그래요?”

고약운은 비웃는 듯 음흉한 눈빛을 보였다.

“여로 선생, 그렇게 대단한 의술을 가지고 계신다면, 이 후배와 겨뤄보시겠습니까?”

“좋다.”

여로는 탁상을 탁 치고 일어나 고약운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겨룰 것이냐?”

“간단합니다. 만약 제가 진다면 제 잘못을 인정하고, 선생의 의술이 천하제일이란 것도 인정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기면…… 이 백신당을 제게 주시지요.”

고약운은 옷소매를 흔들며 씩 웃었다.

여로는 잠시 멍해졌다가 곧 하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입만 살았나보군! 백신당을 네게 달라고? 백신당을 가질 실력은 되느냐?”

“왜요?”

고약운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면서 말했다.

“이렇게 어린 계집애와 겨룰 용기가 없으십니까? 설마…… 질까 봐 그러십니까?”

“진다고? 내가? 나는 지는 게 뭔지 모른다. 설사 네가 이긴들 백신당은 내 것이 아니니, 너 또한 주인이 될 수 없다. 굳이 나와 겨루겠다면…… 소주(少主)에게 묻고 결정하마.”

고약운은 여로의 신분을 알아차린 지 오래였다.

주인이 여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여로는 절대로 평범한 의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의 지위가 높더라도 백신당의 주인은 아닐 터, 고약운의 목적은 백신당 배후에 있는 자였다. 지금 고약운은 자신을 지지해줄 세력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백신당은 최고의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앞으로 약재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