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아름다운 사내
몸을 돌려 떠나려던 고약운이 시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고역운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자, 수려한 얼굴에 차분한 미소가 번졌다.
“북야는 제가 주운 게 맞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따라오라고 한 적은 없어요. 소저와 북야가 서로 인연이라면, 왜 북야가 시운 소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요?”
“고 소저, 내 말에 별다른 뜻은 없어요. 난 공교롭게도 이 남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깊은 인연이 있지요. 안타깝게도 날 기억 못 하는 것 같아서 일깨워 주려는 거예요. 거짓말을 많이 하면, 언젠가는 들킬 겁니다.”
천북야는 시운 자신의 옆에 있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고약운이 먼저 그를 만났으며 그를 계속 옆에 두려고 거짓 내용을 주입시켰다. 시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시운 소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능의를 순식간에 죽인 저 남자가 소저의 사람인데, 기억을 잃고 고약운을 소저인 줄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고약운이 이렇게까지 파렴치할 줄이야. 어떻게 이런 거짓말을 하지? 하긴 저런 얼굴로 어떻게 절세미남과 어울릴 수 있겠어?”
“고약운은 시운 소저와 함께 서 있기만 해도 그야말로 봉황 옆에 선 꿩 신세가 아닙니까? 더군다나 시운 소저는 연기종의 계승자로 어린 나이에 무왕을 돌파한 세기의 천재 아닙니까? 어떻게 고약운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많은 이들이 잇달아 수군거리며 고약운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 * *
한편, 고약운과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남자가 깃털 부채를 들고 의자 위에 나른하게 앉아있었다. 그의 주변에 있던 시녀가 그에게 무언가를 설명했다.
매혹적인 긴 눈매를 지닌 남자는 사람들 속에 자리한 고약운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유아독존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미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저 아이가 고생소의 폐물 동생이라고? 재밌구나. 정말 재밌어. 그리고 저렇게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아이가 폐물로 여겨지는 것도 웃기고 말이야.”
저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 폐물이라면, 아마 이 세상에 천재란 없을 것이었다.
수련자는 수련을 하면 할수록 다음 경지를 돌파하기 어려워지기 마련이었다. 매번 경지를 돌파할 때마다 난관에 부딪히는데, 누군가는 난관을 넘지 못해 평생 다음 경지를 돌파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자들은 그 난관을 무시해버렸다. 비록 지금의 고약운이 다른 천재들보다 경지를 돌파하는 속도가 느리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이 빛을 발할 터였다.
고약운은 그 어떤 천재들보다도 더 넓은 영해를 가지고 있으니,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이런 생각을 한 후에 소리 없이 웃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탄복했던 자는 고생소뿐이었어. 그 여동생이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청룡국에 온 보람은 있군.”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청의(青衣), 네가 고약운에 대해서 좀 알아봐 줘야겠다.”
“네, 그러겠습니다.”
청의라는 여인이 검을 들고 몸을 굽히며 답하더니 얼른 뒤로 물러났다.
* * *
백신당 밖에서 고약운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상대를 무시하는 듯 보였다.
이때, 끼어들지 말아야 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약운, 네가 이렇게 비겁할 줄 몰랐다!”
마치 자신이 정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고반반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고약운이 모두를 속인 악마라도 되는 것처럼 힘껏 노려보았다.
“할아버지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셔서 너 같은 걸 쫓아내셨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네가 고가의 명성에 얼마나 누를 끼쳤겠어?”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고가한테 명성이라는 게 있나? 처음 들어보네.”
라음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고반반, 여긴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얼른 입 다물고 귀찮게 좀 하지 마라. 너 같은 건 오이로도 찔러 죽일 수 있으니까.”
“너……. 너!”
고반반은 얼굴이 새빨개져 이를 악물었다.
“이 염치도 모르는 게 어디서!”
“그래, 차라리 염치도 모르는 게 낫지. 너처럼 착하고 순진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여우보단. 아니다, 네 덜떨어지는 머리로는 여우도 되기 어렵겠다.”
라음은 차갑게 웃으며 앞에 있는 시운을 쳐다봤다. 주근깨 가득한 라음의 얼굴에 일순 경멸과 조롱 어린 기색이 가득 찼다. 시운은 하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라음의 눈에는 매우 더럽게 보였다.
시운의 눈빛도 일순 어두워졌다. 그녀에게 라음은 고작해야 어린 여인에 불과했으니, 그녀를 죽여 그 피로 검을 더럽히게 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시운보다도 먼저 라음에게 덤비는 사람이 있었다.
갑자기 고반반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라음에 대한 분노를 못 이긴 탓에, 그녀는 격노한 사자처럼 괴성을 지르고 팔을 흔들며 라음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라음은 발을 들어 고반반의 몸을 날려버렸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신발을 닦으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이제 내 신발도 명이 다했구나. 고반반을 차 버렸으니, 이제 이 신발을 버려야겠어. 어휴, 진짜 손해가 막심하다 막심해!”
“너…….”
고반반은 피가 얼굴에 쏠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정도로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이 뻔뻔한 것 같으니!”
안타까워하는 라음을 보며, 고약운은 실소를 터트렸다.
“고반반한테 닿았다고 진짜로 신발을 버리는 거야? 신발 새로 살 돈을 모으는 게 밥 먹는 일처럼 쉽지는 않잖아.”
“그렇긴 해. 근데 이 천한 신발은 이제 동전 한 닢의 가치도 없어. 저 고반반을 내다 판다 해도, 새 신발을 살 수 있을지 의문이야.”
말을 마친 라음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이런 수모를 겪었으니, 아무리 낯짝이 두꺼운 고반반이라도 기절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잠깐!”
고약운이 다시 등을 돌리려고 하자, 시운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대로 가겠단 겁니까?”
발걸음을 멈춘 고약운이 차갑고 날카로운 검과 같은 눈빛으로 시운을 바라봤다.
“소저, 저를 어떻게 막으실 겁니까?”
이 말을 마치고 그녀는 더 이상 시운을 상대하기 싫다는 듯, 백신당 안으로 사라졌다.
시운은 고약운을 보던 매서운 눈빛을 거두고 천북야를 바라봤다. 그를 바라보는 시운의 눈빛에는 슬픈 기색이 어려 있었다.
“정말, 저를 잊으셨습니까?”
시운은 눈앞의 이 남자가 자신을 잊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전생에서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자신의 꿈에 이 남자가 자주 나타났을 리가 없었다. 현실에서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해도, 시운은 그간 꿈속에서 남자가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모습을 내내 지켜봐왔다. 그렇게 매일매일 남자를 꿈에서 보았으니, 눈앞의 그가 자신이 평생 기다리던 남자이며, 자신의 남자라는 걸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남자가 구애를 해도 시운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홀로 이 사람을 기다려왔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만약 자신과 남자가 서로 조금이라도 연이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남자가 매번 자신의 꿈에 나타났단 말인가?
게다가 시운은 전생을 믿었다.
“네 눈빛, 역겨워.”
천북야의 눈빛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마치 내 옷을 다 벗기고 싶다는 그런 음흉한 눈빛이야. 넌 고약운이 아니야. 약운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이 날 그런 식으로 보는 건 원하지 않아.”
천북야는 시운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제게 가까이 다가오면 밥맛이 뚝 떨어질 정도였다.
‘기분 나빠.’
천북야의 말을 듣고 시운은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하고픈 말이 있었지만,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강한 살기에 순간 말을 잃고,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졌다.
곧이어 서늘한 기운이 시운을 뒤덮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시운은 아름답지만 사악한 천북야를 바라보며 말했다.
“북야…….”
그러자 천북야가 얼굴을 찡그렸다.
“내 이름 부르지 마.”
그 말에 시운은 몸에서 오한이 나는 걸 느꼈다. 그녀는 입을 열었지만, 천북야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때, 천북야의 기운이 갑자기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사악한 기운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북야, 뭐해? 안 들어올 거야?”
그때, 백신당 안에서 고약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기적처럼 살기가 사라지더니 하늘로 솟구칠 것 같던 힘도 단번에 가라앉았다. 순간 시운은 방금 자신이 느꼈던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고 생각했다.
아마 시운은 모를 것이다. 고약운이 방금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말이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자, 시운은 숨을 헐떡이며 땅에 엎드렸다. 그녀의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약운, 금방 갈게.”
천북야는 고약운이 부르자마자, 시운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고 백신당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분명 음산하고 살기가 가득했던 남자였는데, 고약운의 부름에 토끼보다 더 온순하게 변했다. 사람을 죽이려고 살기까지 내보내던 조금 전의 그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아가씨…….”
“괜찮아요.”
시운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이를 악물었다.
“혼비 장로, 이만하면 됐으니 가죠.”
말을 하면서도 시운은 천북야가 떠난 자리를 슬픈 표정으로 바라봤다.
‘천북야, 이렇게까지 세뇌를 당한 거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네가 다른 사람 품에 안겨 있는 걸, 그저 지켜만 보지는 않겠어. 네가 기억을 되찾고, 직접 고약운을 죽이게 할 거야.’
* * *
같은 시각, 백신당 뒷마당에서 자사가 고약운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어때?”
“이상해.”
고약운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능의의 공격으로 가해진 힘이 내 몸으로 흡수되었어. 몇 대 더 맞았으면 아마 취기 7급을 돌파할 수 있었을 거야.”
그러자 자사가 그녀를 보며 웃었다.
“네 영혼과 육체는 상고신탑을 통해 단련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보다 훨씬 강하지. 그렇지만 진정한 강자를 만났을 때는 또 달라. 진정한 고수는 너를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으니, 지금처럼 상처 조금 입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자사는 그녀를 상고신탑을 통해 단련시키고자 했기에, 직접 수련을 도와주진 않았다. 그러나 그 외에 자사가 그녀에게 준 도움은 너무나도 많았다.
이윽고 자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시운이라는 여자를 조심해.”
“시운? 자사, 그 여자를 알아?”
“아니.”
자사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매우 위험한 사람이란 건 느낄 수 있었어. 당분간은 그 여자와 맞서지 마. 네 재능으론 아마 5년 안에 그 여자의 실력을 추월하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어떤 일들에 대해선 아직 고약운에게 알릴 수 없었다.
이내 자사가 생각에 잠겼다.
‘그 여자에게서 왜 그 기운이 느껴진 거지? 설마 시운이 그자와 관계가 있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자사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고약운을 바라봤다.
“고약운, 네가 빨리 성장했으면 좋겠구나. 실력도 그렇고…….”
말꼬리를 늘이던 그가 곧 음흉한 눈빛으로 고약운을 위아래로 훑으며 사악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름답고 고귀하게 미소짓는 얼굴을 보니, 사람을 홀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고약운은 그를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그 음흉한 눈빛 좀 치워. 난 너한테 아무런 흥미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