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더 파렴치한 것들

17화. 더 파렴치한 것들

“하하하.”

라홍천이 크게 웃었다.

“약운아, 포부 한 번 좋구나. 나 라홍천, 오늘 네가 한 말을 믿겠다. 폐하께 불리한 일이 아니라면, 내가 무기를 만들어주마.”

이 말을 듣곤 고약운의 눈빛이 반짝였다.

“장군. 감사합니다. 오늘 장군 앞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청룡국의 황제께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신다면, 저도 그분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라 장군의 청룡국을 저도 함께 지키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러나 황제께서 제게 갚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신다면, 죄송하지만, 청룡국의 황제도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전 울분을 참지 않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 나라의 황제께서 제게 떳떳하지 못할 일을 저지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라홍천은 개의치 않고 웃어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사람이 누구던가?

바로 고천의 여식이자, 고생소의 동생 고약운이다. 최근 그녀의 변화를 가까이서 지켜본 라홍천은, 그녀가 후에 황제를 바꿀 수도 있는 인물이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그럼 나도 약속하마. 폐하께서 너를 해치신다면 나 라홍천은 절대 이 나라를 지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네 결정을 지지하마.”

“고맙습니다, 장군.”

고약운은 라홍천의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맞부딪쳤다. 그녀는 라홍천이 한 약속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고약운은 곧 고개를 돌려, 곁에 계속 서 있던 라음을 바라봤다.

“라음, 난 지금 백신당에서 머물고 있어. 그러니 날 찾을 일이 있으면 백신당으로 와. 백신당 주인에게 네가 오면 들여보내 달라고 이미 말해놨어.”

말을 마치자마자 고약운은 웃으며 장군부를 떠나갔다.

라음은 한동안 멍하니 선 채 고약운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저 사람이 위험에만 처하면 자신의 뒤에 섰던 그 고약운이 맞는 걸까? 도대체 언제 이런 패기가 생겼단 말인가?

“라음아, 저 아이가 어떻게 폐물이더냐? 시간이 지날수록 용이 될 아이다.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분명 고천보다 더 뛰어난 천재가 될 게다. 흥, 고 영감이 손녀를 내쫓은 건 평생의 잘못일 게야. 머지않아 약운이의 재능이 완전히 드러나고 온 세상을 놀라게 하겠지. 우리는 좋은 구경을 할 때를 기다리자꾸나.”

능 씨 영감도 고약운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암암리에 고약운을 견제할 리 없었다. 웃긴 건, 고약운과 같은 핏줄인 고 씨 가문만이 그녀를 폐물로 여긴다는 점이었다.

생각을 마친 라홍천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잔뜩 일그러진 그 고가 영감의 얼굴을 상상해 버렸기 때문이다.

‘정말 재밌겠군!’

* * *

고약운은 백신당으로 돌아가자마자, 사람들로 가로막힌 대문 앞에서 익숙한 누군가를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과 다른 게 있다면, 뚱뚱한 사람 하나가 그자 곁에 있다는 점이었다.

“고약운. 너 정말 여기 있었구나.”

고가의 둘째 부인은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고약운을 흘끗 바라보더니, 낯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저 망할 것! 숙부랑 숙모가 마중을 나왔는데도, 우리한테 인사도 안 하고 말이야. 버르장머리하곤. 도대체 누가 저러라고 가르친 게야?’

부인이 비웃는 얼굴로 고약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흥, 대단하구나. 감히 숙모를 보고도 아는 척도 안 하다니, 버르장머리 없긴! 좀 전에 백신당 사람들이 네 숙부를 기어이 내쫓았다. 어떻게 우리 고가에 너 같은 게 있는 건지!”

고약운은 미소를 지으며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곤 둘째 부인을 흘겨보았다.

“전 이미 고가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겐 숙부도, 숙모도 없습니다. 제 가족은 오직 한 명, 제 오라버니 고생소뿐입니다. 그 외에는 혈연관계가 없는 낯선 사람일 뿐이죠.”

그 말에 둘째 부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제 남편 고명이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는 걸 생각하기만 하면 너무나도 분했다. 이 빌어먹을 천것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네 아버지가 죽고 나서, 네 목도 졸랐어야 했다. 고약운! 감히 내 딸을 해친 것도 모자라서, 이젠 내 남편까지 해치려 드느냐? 일찍이 죽었어야 했는데, 어찌 살아남아서 이렇게 소란을 피워!”

고약운만 아니었어도, 딸 고반반이 남편에게 뺨을 맞을 리 없었다. 그녀는 딸이 어렸을 적부터 애지중지하며 키워왔기에, 이 일의 원흉인 고약운을 죽도록 미워했다.

가능하다면, 저 천한 것을 손으로 때려죽이고 싶었다.

“입 다무시오!”

고명이 놀라서 급히 소리쳤다.

“이래서 따라오지 말라고 했더니, 도대체 왜 이러는 게요? 동방세가 귀에라도 들어가면 어쩌려고 이러오?”

그러나 둘째 부인은 여전히 분노를 참지 못했다.

“류옥 그 뻔뻔한 계집은 어떻게 동방소택과 의남매를 맺었답니까? 하늘도 참 애석하시지. 이런 폐물을 데려가지도 않으시고! 흥, 그저 동방세가의 식량만 축낼 뿐일 텐데, 아무리 강한 세력이라도 이 계집을 받아들이진 못할 겁니다.”

둘째 부인이 말한 류옥(柳玉)은 사실 동방옥이었다. 그 옛날 동방옥은 동방세가를 벗어나기 위해 본인의 이름을 바꾸었다.

둘째 부인은 속으로 생각해봤다.

‘어차피 류옥은 동방세가의 친딸도 아니니, 동방세가 전체가 나서지도 않을 거야. 감히 동방소택 혼자서 경성에서 소란을 피우겠단 건가?’

둘째 부인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 동방소택의 실력을 멋대로 가늠했다.

사실 그녀는 고명에게 시집을 가기 전, 남몰래 고천을 연모했었다. 세기의 천재를 그 누가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고천은 혼처를 구하지도 않으며,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않았다.

둘째 부인은 연모하는 이와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고명에게 시집을 갔다. 사실 그녀는 세기의 천재인 고천이 여인에겐 관심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천이 집으로 류옥이란 여인을 데려왔다.

류옥은 그야말로 절세미녀였다. 그런 그녀가 고천과 함께 서 있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였다.

일반적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을 보면 축복을 해주는 것이 당연하지만, 둘째 부인은 달랐다. 그녀는 고천이 평생 혼인도 하지 않고, 평생 어떤 여인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건만, 고천은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류옥이란 여인을 데려왔다. 그래서 그녀는 류옥에게 원한이 생겨, 자신의 남편인 고명이 두 사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 동참했었다.

짝!

고명이 자기 부인의 뺨을 내리쳤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소! 당신이 오면 될 일도 안 된다고! 한마디만 더 해보시오. 그럼 당장 당신을 내쫓을 테니까.”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부인에게 시선을 거두곤 고약운을 쳐다봤다.

“약운아, 숙부가 널 데리러 왔다. 할아버지께서 네 걱정을 하고 계신다. 나도 마찬가지야. 네 형편없는 실력으로 도대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이냐? 우리와 함께 가자. 약운이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편하게 지내게 해 주마.”

그러자 둘째 부인의 눈빛에서 분노의 불길이 뿜어져 나왔는데, 그 눈에서 고약운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다는 갈망이 언뜻 비쳤다.

그러나 그녀는 고명의 경고에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저를 데려가겠다고요?”

고약운이 고명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꼭 저를 마중 나오시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고가에선 저를 연기종에 맡길 생각 아닙니까? 하지만 저는 이미 고가의 사람이 아니니, 고가의 문턱을 넘지도 않을 것입니다. 두 분 다 어서 돌아가세요.”

그 말에 고명의 얼굴이 붉어졌다.

“약운아, 넌 고가의 사람이다. 그러니 고가를 난처하게 해선 안 돼. 제발 우리를 도와다오. 그렇지 않으면 동방 공자가 우릴 가만두지 않을 게다.”

고 씨 가문은 매우 탐욕스러웠다. 동방소택에게 고약운의 위치만 알려주면 될 것인데, 그러지 않고 굳이 고약운을 찾아와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하고 있었다. 고 씨 가문이 생각하기에 고약운과 동방소택이 만날 수 있게 자신들이 도와준다면, 그 대가로 자신들도 얻을 게 있어야 했다.

지금 고명은 자신이 생각한 것만큼 일이 잘 풀리고 있지 않아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제가 돌아가기 싫다면요?”

고약운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럼 저를 어찌하실 겁니까?”

“고약운! 정말 건방지구나.”

둘째 부인은 더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양심 없는 천것 같으니, 우리가 널 이만큼 키워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게냐? 정말 죽고 싶은 게로구나? 역시, 어디서 온 줄도 모르는 여자가 낳은 딸답구나. 너도 그 여자랑 똑같아. 이 폐물 계집!”

고약운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어머니는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한 역린이었다. 그녀는 둘째 부인의 말을 듣곤 차갑게 웃었다.

“당신은 지금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한 거야.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실수를 말이야.”

둘째 부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까지 그녀는 이런 모습의 고약운을 본 적이 없었다.

산들바람처럼 청초한 얼굴을 한 소녀의 몸에 돌연 찬 기운이 감돌았다. 모두로 하여금 왠지 우러러보고 싶어지게 하는 거센 기운이었다. 천지 제왕의 패기. 그녀가 숨기고 있던 엄청난 패기가 겉으로 드러났다.

‘저 아이가 그 폐물이 맞나?’

주변 사람들은 고약운이 폐물이라는 소문이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 고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 헛수고는 그만 하세요.”

고약운은 이 말을 마치며 둘째 부인을 흘겨보았다. 마치 둘째 부인 때문에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하듯 말이다.

“고약운 너…….”

고명이 무슨 말을 더하려고 할 때, 한쪽에서 노발대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이렇게 행패를 부리는 게냐? 조 씨는 대체 어디 있지? 이 여로에게 죽고 싶은 자가 대체 누구더냐?”

여로는 백신당 주변에서 상황을 살피다가, 뜻밖에도 고 씨 가문 사람들이 고약운을 가로막고 선 모습을 보자 분노를 참지 못했다.

옆에 있던 심부름꾼이 여로의 말을 듣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주인께선…… 진찰을 하러 가셨습니다…….”

“진찰? 흥, 하필이면 이럴 때 진찰을 나간단 말이냐? 아가…… 아니, 고 소저께선 백신당에 들어오셨으니, 이제 소저를 방해할 수 없다. 저 잡것들은 전에 밖으로 내쫓았는데도 또 찾아오다니. 고가는 도대체 체면이란 게 있는 것들인가? 창피해서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나 보지?”

고약운은 백신당 주인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고 싶지 않아서, 고가 사람들이 찾아와도 여로에게 자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했었다.

하지만 고약운은 명실상부 백신당의 주인이었다. 고 씨 가문은 더 이상 그녀를 앞서려야 앞설 수가 없었다.

여로는 호위들을 불러 모았다. 이내 호위들은 고 씨 가문 사람들에게 반항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들을 잡고서 질질 끌어서 군중 속으로 다시 던져버렸다. 고명은 이런 일을 당한 게 이번이 두 번째라 잃을 체면도 없다고 쳐도, 처음 이런 모욕을 당한 둘째 부인은 한이 맺혀 고약운에 대한 분노가 더욱 짙어졌다.

“고약운 이 폐물 계집! 내가 기필코 널 죽일 것이다! 흥, 그것뿐일 것 같으냐! 온갖 고통을 네게 다 주겠다!”

고약운은 둘째 부인의 원망 어린 시선을 보면서도, 맑은 눈으로 흔들림 없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고 씨 가문의 두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어쩜 저렇게 낯가죽이 두꺼울까? 집안 망신이 따로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