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얼굴이 빨개지다
사릉고홍이 가만히 자는 모습은 너무나 조용해서 마치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두 눈이 감기자 검은 날개처럼 가늘고 촘촘한 그의 속눈썹이 더 잘 보였다. 빽빽하고 기다란 속눈썹은 그의 두 눈동자를 몽롱하고 희뿌옇게 가려 주었다. 사릉고홍의 입술은 색이 옅어서 다소 서늘해 보였다. 마치 얇은 눈 결정이 덮여 있는 듯한 입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만지고 맛보고 싶게 만들었다.
“…….”
당염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별안간 갈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바로 코앞에 있는 사릉고홍의 얇은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 샘솟았다. 천마독 때문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맛보고 싶었다.
으음…… 핥아 봐?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고……,
당염원은 유혹에 휩싸였다. 그리고 약간 메마른 듯한 자신의 입술을 핥더니 천천히 그의 얼굴 쪽으로 다가갔다.
작은 혀가 그의 얇은 입술에 닿자 익숙하면서 부드럽고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당염원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더 욕심을 내며 갈망을 좇아 계속 입술을 핥고, 가볍게 물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당염원은 실눈을 떴다. 지금 이 느낌이 어딘지 모르게 좋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약간의 의구심도 들었다. 왜 이전에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지? 전에는 너무 천마독에만 집중해서 이런 기분 좋은 느낌을 알아채지 못했던 건가?
당염원은 무심코 눈을 들다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 몽롱하면서도 그윽한 눈과 마주쳤다.
사릉고홍이 언제부터 눈을 뜨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흑백이 분명한 두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당황하거나 난처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에게 들킨 이상 굳이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당염원은 편한 자세를 잡기 위해 두 팔을 사릉고홍의 목에 걸고 그에게 온전히 몸을 기댔다. 그리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세 두 사람의 입술이 촉촉하고 발갛게 부어올랐다.
사릉고홍은 움직이지 않고 당염원에게 모든 걸 맡겼다. 반쯤 드리워진 눈은 흐린 듯 어두워서 누구도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당염원은 어리둥절해져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내 다소 아쉬워하며 입술을 놓아주고는 사릉고홍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상했다. 이전까지와는 좀 다른 반응인데?
“염원.”
사릉고홍의 목소리는 다소 어두웠다.
“이 행동의 의미를 아시오?”
당염원은 멈칫했다. 입맞춤에 관해서 두 번째로 물어보는 것이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의미? 의미라니. 하지만 어떻게 솔직하게 천마독 때문이라고 말하겠는가?
당염원은 말이 없었다. 당염원은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모르고 있었다. 당염원은 짐짓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사릉고홍은 가볍게 당염원의 볼을 어루만지며 이전의 온화한 말투로 돌아와 물었다.
“그럼 왜 이렇게 하는 것이오?”
왜?
당염원은 추운 겨울날 내리쬐는 따뜻한 햇빛 같은 그의 말투에 마음 한쪽이 녹는 듯했다.
“좋아서요.”
사릉고홍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좋아서?”
“네.”
멍해진 그의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당염원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지하고 신중했던 마음도 웃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사릉고홍의 빨갛고 촉촉한 입술을 바라보며 회상하듯 말했다.
“보기만 해도 목이 마른 것 같고, 맛보고 싶어요. 그러면 또 핥고 싶고, 핥으면 또 물고 싶고, 너무 좋으면서 맛있어요…….”
“응?”
당염원의 시선이 상대방의 입술에서 얼굴 전체로 옮겨 갔다. 그녀는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고홍, 얼굴이 붉어요. 더운가요?”
“……덥구나.”
사릉고홍이 눈알을 굴리며 답했다.
“열이 나나요?”
“아니.”
“하기야, 병이 날 리가 없지요.”
“그래.”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당염원은 상대방의 안색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보고 의아한 듯, 그리고 무언가를 원하는 듯 물었다.
“절 벌하지 않으시나요?”
“벌이라니?”
당염원의 눈이 반짝였다.
“제가 당신을 핥았는데, 그와 똑같이 안 하시는 건가요?”
사릉고홍의 눈동자가 갑자기 깊어졌다.
당염원은 이러한 위험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사릉고홍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자.”
천마독을 향한 욕심으로 당염원은 더욱 뻔뻔하게 사릉고홍을 향해 다가갔다.
덕분에 사릉고홍의 몸이 뒤로 밀렸지만, 땅에 깔린 부드러운 담요 덕분에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사릉고홍의 머리 쪽으로 당염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그의 몸도 기울어졌다.
백요마차 안은 더없이 고요했다.
.
.
.
바깥에선 여전히 눈발이 흩날렸다.
몇 사람은 짐승 위에 올라타 매우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다른 이에게 허설산은 아득히 넓고 방향을 분간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설연산장의 사람에게는 방향 찾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이곳은 그들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사릉귀안이 백요마차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웃으며 주묘랑에게 말했다.
“형님이 이렇게 온종일 형수님을 옆에 끼고 다니는데, 형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 안 되나?”
그러자 주묘랑이 웃었다.
“주모님의 성품이 곱기도 하고 장주님과의 궁합은 더욱 말할 것도 없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하, 그렇군.”
사릉귀안의 웃음소리가 설원을 향해 널리 퍼졌다. 이목을 끄는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그의 웃는 눈에는 핏빛과 같은 매혹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성품을 가진 분이시라면 우리 어르신이 분명 좋아하겠어. 이번에 집에 가면 꽤나 떠들썩하겠는데?”
주묘랑은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백려가 가늘고 긴 눈으로 사릉귀안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듯하지만 날카로운 눈이었다.
‘이 사람은 어쩜 이리 우리 종족을 닮았을까?’
* * *
허설산의 산자락에는 작은 마을 몇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곳곳의 논밭과 과수원에서는 수확이 끊이지 않았다. 샘물이 흐르고 오곡백과와 과일이 영그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허설산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도둑이나 강도는 감히 마을에 얼씬거릴 수 없었다. 그들은 설연산장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매년 이따금 제철 과일과 채소들을 보내주기도 했다.
설연산장을 두려워하는 대다수의 사람과 달리 이곳 마을 사람들은 설연산장에 대해 경외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산장의 사람들을 신처럼 숭배했고, 두려움의 감정 따위 가지지 않았다.
백요수가 두 날개를 펼치고 하늘 위를 날았다. 네 다리는 마치 달리는 듯했고 금색의 눈동자는 횃불을 연상케 했다.
산 너머에서 날아오는 백요수들의 사이로 얼음 조각 같은 마차는 그들의 보호를 받는 듯 날아갔다. 바람을 가르는 거센소리가 머릿속을 텅 비게 만들었다.
밭에서 놀고 있던 한 아이가 하늘을 보더니 놀란 나머지 그대로 표정이 굳었다. 너무 놀란 아이는 손에 있던 먹다 남은 고기만두를 땅에 떨어뜨렸지만, 그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다.
백요마차가 하나의 흰 무지개처럼 하늘을 가르고 나타나자, 엄청난 바람이 주변의 나무들을 휘청하게 만들었다. 거센 바람을 맞고서야 정신을 차린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다.
“으아아! 어머니! 어머니! 선인(仙人)의 마차가 산 뒤편에서 날아왔어요! 신선의 마차예요! 하늘에서 날아왔는데, 엄청 크고, 엄청 빠르고……!”
산길에서는 사릉귀안이 검은 늑대를 타고 날아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이경 등 나머지 사람이 따라가고 있었다.
백요마차는 마치 흰색의 무지개가 되어, 지나는 곳마다 파도를 일으켰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마차 안에서 당염원이 창을 열었다.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푸른 물결을 간직한 듯한 투명한 눈동자가 창문 너머로 바깥을 살피기 시작했다.
강, 숲, 마을, 망루, 날아가는 새…….
당염원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문득 창밖으로 뛰쳐나가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저 광활한 들판에서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뒤이어 깨달았다. 창밖으로 도망친다고 자유로워질 게 아니라, 실패를 맛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때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안고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바깥이 좋소?”
당염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그대가 가고 싶은 곳에 나와 함께 가도록 하지.”
당염원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멍한 채로 옆에 있는 사릉고홍을 바라보았다. 그 말의 요지는…… 내가 가고 싶은 곳? 아니면 나와 함께?
아무튼 그날을 상상한 당염원은 그의 말에 넘어가고 말았다.
“좋아요!”
당염원의 두 눈에선 단호함이 엿보였다.
‘아름다운 이 사람을 가지고 싶어. 언젠가 꼭 이 사람을 이겨서 그의 자유를 내 손안에 넣을 거야. 그러곤 그가 가고 싶은 곳에 내가 그를 데리고 가겠어.’
사릉고홍은 당염원의 이러한 생각을 알지 못한 채 그저 확고한 당염원의 태도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다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날 조금은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구나.’
그는 마치 사내아이처럼 만면에 만족감과 기쁨을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이 사내, 날 따르는 걸 어느 정도 원하는 것 같은데?’
당염원 역시 해맑게 웃어 보였다.
사릉귀안은 검은 늑대 위에 올라탄 채 마차 안의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웃고 있는 모습을 창 너머로 보았다. 바람에 휘날린 머리칼이 그의 두 눈앞에서 어른거리며 그의 눈동자를 가렸다.
“풉.”
알 수 없는 웃음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웃음소리는 널리 퍼지지 못하고 곧바로 흩어져 사라졌다.
* * *
북쪽의 우수성(禹水城)은 사방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날씨가 한랭한 곳이었다. 우수성은 매화청주를 생산하는 곳이기도 했다. 항상 사람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아 상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우수성에서는 한매주거(寒梅酒居)가 가장 유명했다. 그래서 우수성에 온 사람들이라면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무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수성 내 매실 종류가 가장 다채로운 곳인 한매주거에서 이곳만의 매화청주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매주거의 북쪽에는 석목(石木) 정자가 있었다. 사방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그 가운데 두 사람이 무릎을 꿇은 채 마주 앉아있었다. 가운데에는 다리가 낮은 네모난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엔 몇 가지의 음식과 백자 술주전자 하나, 그리고 청자 술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두 사람 중 왼쪽에 앉은 사람은 검은 귀밑머리를 곱게 넘기고 마치 그간 참아왔던 번민을 드러내듯 다소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두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비취색 비녀로 검은 머리칼을 틀어 올린 채 월백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에는 우아한 구름무늬가 청색으로 수놓아져 있었고, 머리 위의 비취색 비녀와 어우러져 더 멋있게 빛났다. 그때, 별안간 그의 몸에서 희고 맑은 정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