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목적
사릉고홍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느긋하게 그의 뒤를 따라 걷는 사릉귀안의 눈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아버지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벌써 집을 나간 지 몇 년인데, 아내를 얻고도 기별을 안 하다니요. 우리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머니를 봐서라도 한번 오시랍니다. 어머니께 며느리는 소개시켜드려야지요. 어머니께서 그래도 형님을 가장 아끼시는데, 이것마저 거절하진 않겠지요?”
당염원은 사릉고홍의 분위기가 미세하게 변했음을 알아챘다. 얼굴에 푸른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리운 것을 보고, 당염원은 뒤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릉귀안을 사릉고홍의 어깨너머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은 사릉귀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당염원을 향해 선의의 매혹적인 미소를 보였다. 그러곤 말했다.
“아버지께서 그랬습니다. 만약 형님이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저도 여길 떠나지 말라고. 그러니…….”
비록 사릉고홍은 그를 등지고 있었지만, 사릉귀안은 여전히 불쌍한 표정을 한 채로 당염원을 향해 말했다.
“준비를 마친 후, 형님과 형수님은 저와 함께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사릉고홍은 무관심한 듯했다. 사릉귀안은 여전히 당염원을 바라보며 여우 같은 매혹적인 눈웃음을 짓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깃털처럼 마음을 간질였다.
“형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를 봐서라도…….”
바로 이때 사릉고홍이 고개를 돌려 사릉귀안을 바라봤다.
당염원은 사릉고홍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수축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허공을 가르더니 눈 쌓인 나뭇가지에 멈추었다. 그러자 곧 나뭇가지 위에 있던 하얀 눈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녀는 웃으면서 더 이상 사릉귀안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조금 전 사릉귀안의 목소리는 뭔가 이상했는데, 마치 섭혼술(攝魂術)을 펼친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당염원에게 섭혼술은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자는 사릉고홍의 남동생이 아닌가? 오직 그녀 때문에 동생을 공격하다니. 그렇다는 건 그녀가 동생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이 되었다.
사릉귀안은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오른손을 덮고 있던 옷감이 찢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냉정하군.”
사릉귀안은 조용히 혀로 자신의 상처를 핥아 피를 닦아 냈다. 마치 스스로 상처를 치료하는 한 마리의 표범 같았다. 만일 제때 피하지 않았더라면 상처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웃음을 머금은 눈 속에 분노의 빛이 어렸다. 그는 이미 그림자가 사라진 앞길을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누가 너의 것을 건드리는 걸 싫어할수록 난 더더욱 건드릴 것이다!”
팔에 난 상처는 이미 피가 멎었지만 벌어진 상처가 꽤 심각했다. 그러나 사릉귀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새하얀 눈밭 위에 떨어진 새빨간 핏방울들을 보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곤 전혀 부드럽지 않은 발짓으로 땅을 즈려밟아 자신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 * *
그렇게 사릉귀안은 설연산장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더 늘었다는 것 외에 산장의 생활은 여느 때와 같았다.
사릉귀안은 비록 이른 새벽 사릉고홍이 직접 당염원을 돌보는 걸 보진 못했지만, 사릉고홍이 당염원을 안고 직접 밥을 먹여 주는 것은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은 조용히 먹여 주고, 한 사람은 조용히 받아먹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는 사릉귀안의 얼굴에 부러움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저 괴물은 감정이라곤 없어. 저것도 그저 저 여인을 자신의 반려동물쯤으로 여기고 키우는 거겠지.’
사릉귀안은 또다시 당염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흰 바탕에 노란색 매화가 수놓아진 옷과 치마를 입고 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은 사릉고홍과 같이 빗질만 하여 정돈하고 옅은 노란색 끈으로 동여매 등 뒤로 내려뜨렸다. 화장을 하지 않아 말간 얼굴과 정교한 눈썹과 눈, 옅은 분홍색 입술이 선녀처럼 영기 넘치는 외모를 이루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땐 꿈을 꾸는 듯했는데, 다시 보니 더욱 눈을 뗄 수 없었다.
특히 그녀의 눈은 너무나 고요하고 맑아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사랑스러웠다. 지금 식사를 하는 그녀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고 영기가 흘러넘쳤다. 이따금 만족스러운 듯 눈을 찌푸리며 환히 웃는 모습은 매혹적으로 아름다웠다.
‘역시…… 사릉고홍의 애정을 받을 만하군. 그런데…….’
사릉귀안의 미소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 괴물은 감정이 없는걸! 어떻게 하면 한 여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도 모르지. 이렇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것이 처음엔 좋을 수 있어도, 시간이 흐르면 여인은 곧 싫증이 날 거다.’
당염원은 사릉귀안의 시선을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릉고홍이 자신의 입가를 닦아 줄 때 그녀가 물었다.
“오늘은 약밭에 먼저 갔다가 새로운 곡조를 배우는 거죠?”
“그렇소.”
사릉고홍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사릉귀안의 마음속 비웃음이 더욱 짙어짐과 동시에 얼굴에도 웃음기가 퍼졌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조차도 자세를 낮추어 물어봐야 한다니, 필히 불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릉귀안은 당염원이 아무런 불만도 없거니와 오히려 만족해하고 있음을 알 길이 없었다.
처음 시집을 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뜻을 말로 내뱉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릉고홍이 강자, 자신이 약자라는 신중한 판단 끝에 뭐든지 직접 물어보고 행동했다.
그러나 그녀가 명확히 아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녀가 뭐라고 하든 사릉고홍은 지금껏 거절한 적이 없었다.
눈치 빠른 설연산장의 사람들도 당염원이 무언가 물을 때 곧바로 그녀의 뜻대로 하도록 대답했다.
당염원이 무얼 말하건 그녀의 말이 곧 사릉고홍이 한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 * *
설연산장의 약밭은 줄곧 쌍둥이 자매 엽연교, 엽목향의 소관이었다. 당염원이 약초에 대해 흥미를 내비친 이후로 일 년 전 이 약밭은 좀 더 확장되어 약초들은 더욱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이 때문에 쌍둥이는 당염원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당염원이 약밭에 나타나기만 하면 그녀의 곁을 떠날 줄 몰랐다.
“주모님, 주모님! 듣자 하니 장주님과 며칠 동안 외출을 하신다구요?”
엽연교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미 확실히 그렇게 되었다는 걸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염원은 엽연교를 힐끗 보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약성(藥性)을 키우기 위해 그저 땅을 일궜다.
엽목향이 자신의 언니를 힐긋 보고는 재빨리 당염원의 비위를 맞추고자 가련하게 말했다.
“주모님, 저와 언니는 아주 오랫동안 여기서 나가질 못했어요. 이번에 장주님의 고향에 가신다고 들었는데……. 흠, 흠…… 저희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엽목향이 아양을 떨며 말했다.
당염원은 그저 금작초 한 줄기를 뽑으며 담담히 말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렇게 대답하자 쌍둥이의 표정이 일순간 밝아졌다. 엽연교가 말했다.
“그쵸! 하지만 장주님이 주모님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는 산장의 모든 사람이 다 알아요! 주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장주님께서 분명 허락하실 거예요!”
엽목향 역시 크고 동그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소리쳤다.
“맞아요, 맞아! 누구도 주모님에 대한 장주님의 총애를 의심할 순 없어요!”
나에 대한 사릉고홍의 총애?
당염원이 하던 것을 멈추고 간절함으로 가득 찬 쌍둥이 자매를 바라본 뒤 다시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곳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릉고홍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 그녀에게 잘해 줬다. 총애라고 해도 정말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가 무얼 요구하든 모두 승낙했다. 다만 그것들에는 모두 대가가 따랐다.
당염원의 눈 속에 문득 일었던 빛이 다시금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자유를 내어주고 얻은 총애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믿었다. 자신에게 힘이 더 있어야만 진정으로 모든 걸 가질 수 있었다.
쌍둥이는 당염원이 갑자기 말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잠시 당황해했다. 이내 엽목향이 의구심을 품고 물었다.
“주모님, 설마 정말로 장주님의 총애를 의심하시는 건 아니죠?”
그러자 당염원이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녀는 사릉고홍이 현재 자신에게 베푸는 총애가 진심인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엽연교와 엽목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엽목향은 과장된 손짓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휴, 참! 놀라라. 장주님과 주모님의 사이가 그렇게나 좋은데,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어?”
엽연교가 다시 조금 전의 주제로 되돌아와 당염원에게 애교를 부렸다.
“주모님, 한번 이야기만이라도 꺼내 주시와요. 만약 거절당한다면 저희도 더는 얘기하지 않을게요!”
엽목향 역시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욱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들은 당염원이 자신들보다 어림에도 자못 뻔뻔하게 그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당염원이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내뱉은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너희가 없으면 약밭은 어쩌니.”
쌍둥이 자매는 최대한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얼굴로 당염원을 바라보았다.
‘주모님껜 약밭이 저희보다 더 중요한 건가요?!’
당염원은 매우 침착했다. 그녀는 정말로 쌍둥이 자매보다 약밭이 더 중요했다.
엽연교가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저희 두 명 말고도 다른 약 노비가 많습니다.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엽목향이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이 얘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주모님, 저희를 봐서라도 한 번만 얘기해 주세요, 네? 불쌍한 저희를 봐서라도!”
“……알겠어.”
두 사람은 일제히 멍해졌다가 이내 너무나 기뻐하며 동시에 소리쳤다.
“허락하신 거죠!?”
당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쌍둥이의 기쁨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들은 또다시 짜 맞춘 듯 소리쳤다.
“주모님이 최고예요!”
둘은 이미 외출을 허락받은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당염원이 일단 말하기만 하면 일은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염원은 쌍둥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쉽게 오지 않는 외출의 기회를 틈타 도망쳐 자유를 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만약 정말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면 이곳의 진귀한 약재들을 잃게 될 텐데 그것이 퍽 아깝긴 했다.
당염원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주변에 가득한 싱싱한 영약들을 둘러보았다. 이것들을 지난 일 년 동안 마음껏 먹고, 마시고, 사용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앞으론 이런 대우를 못 받을 거라고 생각하니 정말 아쉬웠다.
그녀는 욕심이 상당히 많은 사람이었다.
「주인님, 너무 아쉬워 마세요!」
녹녹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벽곡 단계에 들어서면 녹녹의 내계(內界)를 열 수 있어요. 그곳에 여러 영약과 약초들을 심으면 돼요!」
“내계?”
내계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녹녹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내계란 녹녹이 만들어 낸 내부의 공간이에요. 지금은 주인님의 실력이 조금 부족하지만, 축기를 다 이루고 벽곡에 들어서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몸속에 항상 약밭을 지니고 원하는 영약을 다 가질 수 있어요! 정말 신나지 않나요?!」
당염원은 어렴풋이 녹녹의 말을 이해했다. 이내 기분이 좋아진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응! 신난다! 넌 정말 대단해!”
「헤헷……. 녹녹이 제일 대단하지요!」
녹녹이 칭찬을 받자 머릿속에 녹녹의 기쁨이 가득 찼다.
녹녹이 알려 준 이 정보 덕에 당염원의 아쉬운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제 그녀는 축기를 끝내고 벽곡으로 들어서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날도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