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사릉귀안

18화. 사릉귀안

“고홍…….”

원하는 걸 얻기 위한 대가이긴 했지만, 파렴치하게도 당염원은 도망가고 싶었다. 그녀의 몽롱한 두 눈동자는 마치 용서라도 구하듯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콤하면서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절로 약해지게 만들었다.

“고홍, 고홍. 잘못했어요, 고홍…….”

이 방법은 그야말로 백발백중이었다. 약간 가벼운 목소리로 상대의 이름을 부르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면 상대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걸 들어줬다. 자유만 빼고. 자유만큼은 당염원도 감히 시도할 수가 없었다.

이 표정은 엽씨 쌍둥이 자매가 키우는 여우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그때 당염원은 여우가 이런 부드러운 표정으로 엽연교와 엽목향을 바라보면 그들이 무척 좋아하면서 온갖 맛있는 것들을 먹이로 주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다만 천마독을 얻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일에 있어서 이 방법은 효과가 아주 좋지는 못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염원을 바라보는 사릉고홍의 눈빛은 오히려 더 깊고 어두워졌다. 이런 표정으로 나긋하게 상대의 이름을 부르면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는 것을 당염원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아…….”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과 목을 핥는 촉감으로 당염원의 몸이 떨렸고 반사적으로 낮은 신음 소리가 났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이번 시도도 실패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벌 아닌 벌을 받을 준비를 했다.

당염원이 쓴 교묘한 방법은 활활 타오르는 사릉고홍의 마음에 기름을 들이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안에서부터 바깥까지 모두 맹렬한 화염에 둘러싸인 듯했지만, 정작 불을 붙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릉고홍은 당염원의 이마부터 턱까지 부드럽지만 거칠게 입술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소중히 아끼는 듯 핥다가, 또 통제력을 상실한 것처럼 가볍게 물었다. 자신의 몸 아래에 있는 여인이 가볍게 떠는 것이 느껴지자 엄청난 쾌락이 마음속에서 샘솟았다. 이는 또 다른 마념을 낳았다.

“앗!”

당염원이 아픔을 느끼고 가볍게 소리쳤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지만 얼마 움직이지는 못했다. 갑자기 정상인의 체온보다 좀 더 차가운 손이 옷섶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상대와의 체온 차이 때문인지 상대방 피부의 감촉 때문인지 둘의 몸이 조금씩 떨렸다.

“원아.”

사릉고홍은 자신에게 물려 붉게 자국이 남은 당염원의 피부를 핥으며 말했다. 그 느낌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서로 밀착해 있었기에 사릉고홍이 말을 할 때마다 따뜻하고 습한 입김이 당염원의 귓가를 적셨다. 귀가 뜨겁고 간질거렸다.

“네?”

당염원의 시선이 마침내 하늘에서 사릉고홍에게로 옮겨졌다.

사릉고홍이 고개를 들어 당염원의 두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어둡고 깊은 그의 시선은 예전과 아주 달라져 있었다. 마치 당염원을 자신의 뼛속에 새기는 듯했고, 당염원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당염원은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무시하곤 가식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사릉고홍의 두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워졌다. 당염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의 모습을 눈치챘다. 사릉고홍이 소리 없이 이유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비록 겉모습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녀는 무언가 느낄 수 있었다.

“고홍…….”

당염원이 살짝 주저하며 그를 불렀다.

“…….”

마음속에 가득 찬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자, 사릉고홍은 그윽한 눈동자를 빛내며 당염원의 입을 막았다.

두 사람 사이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아는 어떠한 기운이 있었다. 두 입술이 포개어져 점점 더 깊게 뒤엉켰다.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져 갔다. 그때 별안간 당염원의 옷 속으로 손 하나가 들어와 그녀의 몸 위를 헤매 저릿저릿한 마비를 불러일으켰다.

당염원은 이런 때를 위해 터득해 둔 호흡법 덕분에 입맞춤으로 인해 숨이 찬 것쯤은 상관없었다. 그저 오늘은 유난히 길게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릉고홍의 천마독을 흡수하는 것은 좋았지만, 당염원은 자신조차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당혹스러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당염원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혼란스러울 때, 그녀 위의 뜨거운 몸에서 갑작스레 차가운 서리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당염원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면서 당염원은 그의 품속에 안긴 채 똑바로 일어났다.

당염원이 눈을 돌리자 매림에서 나오는 주묘랑이 보였다.

주묘랑은 적잖이 곤란했다. 그들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들이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간 더 골치 아파질 것 같단 생각에 온 것이었다.

“장주님과 주모님께 인사 올립니다.”

주묘랑은 예를 갖춰 인사한 후 사릉고홍을 바라보았다. 온화했던 눈빛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장주님, 귀안(歸雁) 도련님이 산장을 방문하시어 현재 비설전(飛雪殿)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 *

하늘에선 여전히 가는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흰 배꽃과 버들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

당염원은 가만히 사릉고홍의 품 안에 있었다. 그의 걸음에 따라 가볍게 흔들리면서도 그녀는 손을 뻗어 흩날리는 눈을 받았다. 눈꽃이 손에서 녹아내리며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당염원은 옅게 미소 지었다.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해 봤던 행동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것이 기분 좋았다.

주묘랑과 수람은 두 사람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수람은 한 달 전에서야 당염원의 곁으로 갈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식사 때부터 저녁 식사 때까지 당염원의 곁을 지켰고, 그 이후에는 백앵각에 가서 공부를 했다. 말이 곁에 있는 것이지, 수람은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는 게 없었다. 유일하게 하는 것은 당염원이 부를 수 있는 거리 내에서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었다.

처음에 수람은 이 점이 꽤 당황스러웠지만, 주묘랑의 조언을 듣고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저 말을 줄이고 불필요한 행동을 줄이면 되었다. 당염원이 아무 말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게 그녀의 일이었다.

사실 수람은 여기 있으면서 기분이 좋았다. 당가에 비해 설연산장에서의 의식주가 훨씬 질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설연산장에서 유일하게 아가씨의 곁을 지키는 몸종이 되면서 산장 내 모든 시녀들 중 지위가 가장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모든 시녀가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게다가 이곳에서 그녀는 무예를 배우고 원자공법을 배웠다. 당가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수람은 자신이 이곳에서 이처럼 질 좋은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건 바로 당염원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당염원에게 달려 있었다. 수람이 해야 할 일은 오직 그녀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었다.

잠시 후, 모두가 비설전에 도착했다.

당염원은 사릉고홍에게 안긴 채 비설전에 들어섰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어찌 동생을 기다리게 하십니까. 아! 이분이 형수님? 과연 듣던 대로 절세미녀시군요! 역시!”

낭랑하지만 어딘가 잠긴 듯하면서도 경박한 말투, 듣고 있으면 마음이 울리고 간질간질해 어딘가 나른해지는 목소리였다. 남을 혹하게 하는 재주를 타고난 목소리였다.

당염원은 눈을 살짝 떠서 맞은편에 서 있는 사내를 제대로 보았다.

사내는 꽤 젊어 보였다. 혈색 없는 하얀 얼굴이 창백하기 그지없었으나, 초췌하게 보일 만한 창백함은 아니었다. 흰 얼굴에 먹으로 그린 듯한 짙은 눈썹은 매우 섬세해 눈길을 끌었다. 부드럽게 굴곡진 눈썹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붉은 입술은 빚은 듯 정교했으며, 우아함 속에 남을 홀리는 사악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흰 바탕에 붉은 연꽃무늬가 있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붉은 연꽃무늬는 하얀 물속에서 활짝 피어 매혹적인 자태를 자랑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도 이와 비슷했다. 겉에는 흰 여우 가죽 옷을 걸쳤는데, 여우의 흰털이 그의 목 부분을 가려 더욱 우아한 느낌이 났다.

사릉귀안이 웃자 아름답고 수려한 외모가 더욱 빛났다. 다른 이의 기분마저 좋게 만드는 미모였지만 여자로 오해받는 이목구비는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절대 거짓되고 부자연스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당염원은 다시 옆에 있는 사릉고홍을 바라보고 혼자 끄덕였다.

‘역시. 그래도 고홍보다는 못하군.’

“흠?”

사릉고홍이 왜 그러냐는 듯 당염원을 쳐다봤다.

그가 미소를 지은 건지 분명치는 않았지만, 당염원은 그의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웃음보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당신이 더 잘생겼어요.”

당염원이 솔직하게 말했다.

사릉고홍이 자신의 외모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계속 보시오.”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말고.’

그는 하고 싶은 진짜 얘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 장면을 본 사릉귀안의 웃음을 머금은 두 눈이 더욱 반짝였다.

사릉고홍은 당염원을 꼭 껴안은 채 자리에 앉았다. 사릉고홍의 이러한 무심한 태도에 이미 익숙해진 사릉귀안은 아무렇지 않게 옆에 앉더니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형님 얼굴이라도 보러 이렇게 와서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다과도 주지 않고 형수님만 바라보고 계시다니요!”

섭섭해하는 사릉귀안의 얼굴에서 여전히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저 다소 불쌍한 표정의 웃는 상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나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때 흰옷을 입은 시녀가 때맞춰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주묘랑이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

“제가 소홀했네요. 귀안 도련님, 저를 탓하시지요.”

사릉귀안이 미간을 찌푸리자 악한 매력이 한층 더 더해졌다.

“아이, 참. 묘랑 누님도 결국 형님의 사람인데, 내가 어찌 탓하겠어?”

메마른 목소리로 ‘묘랑 누님’이라는 말을 듣자, 주묘랑의 몸이 살짝 떨려 왔다. 이내 그녀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로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사릉귀안은 조금 전 시녀가 가져온 차를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그의 눈은 옆의 두 사람을 향해 있었다. 그는 찻잔을 다시 내려놓고 감탄하며 사릉고홍에게 말했다.

“형님, 이곳은 정말 무릉도원이군요. 한낱 차조차도 너무나 맑고 심신이 편안해져요.”

사릉고홍이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사릉귀안을 보는 것이었다. 사릉고홍의 얼굴은 사릉귀안의 웃는 얼굴과 완전히 반대되는 어두운 낯빛이었다. 마치 달그림자가 비치는 한밤중의 깊은 연못 같았다. 너무나 깊고 그윽했다.

“목적이 무엇이냐.”

사릉귀안이 뾰로통해져선 말했다.

“형님! 동생이 힘겹게 형님을 보러 왔는데 이러시면 섭섭합니다.”

사릉고홍이 당염원을 안고 일어선 뒤 비설전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주묘랑이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 뒤따라 일어나 사릉귀안에게 양해를 구했다.

“귀안 도련님, 제가 배웅해드리겠습니다.”

이는 손님을 내쫓겠다는 뜻이었다.

사릉귀안이 웃는 눈으로 주묘랑을 보더니 앞서가고 있는 사릉고홍을 따라가며 한숨을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