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진실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얼굴도, 성별도 없이 도구 취급을 받는 예전의 존재가 아니었다. 이름을 가진 떳떳한 인간이었고, 인간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존재였다.
당염원의 단호한 대답에 유 씨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의구심을 더 이상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의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저자가 어떻게 당염원일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온몸을 휘감는 극심한 고통에 유 씨는 이 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땅바닥에서 경련을 일으킬 뿐이었다.
그렇게 유 씨는 다시 투옥되었다.
* * *
사릉고홍이 당염원을 안아 매림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변화라고는 전혀 없었다. 오직 뒤편에서 따라오던 주묘랑의 표정만 굳어져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계속해서 요동치고 있었고, 복잡한 심경으로 앞서가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식사를 할 때에도 주묘랑은 당염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치 조금 전 유 씨를 고문했던 일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당염원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당염원은 사릉고홍이 떠 주는 국을 받아먹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주묘랑을 응시했다.
“아까부터 나만 보고 있구나.”
사릉고홍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주묘랑을 보았다.
주묘랑이 사릉고홍의 시선에는 대꾸하지 않은 채 당염원을 향해 고개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저는 그저 이해가 잘되지 않는 일이 있어서요.”
당염원이 사릉고홍을 한 번 쳐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렴.”
“주모님께선 유 씨에 대한 형벌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지 않으시나요?”
이 말을 하며 주묘랑은 숙였던 고개를 들고 가만히 당염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결코 주묘랑이 선해서 그런 질문을 한 건 아니었다. 그녀의 손에 죽어 나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설연산장에서 살인이라는 것은 결코 큰일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는 본래 강자가 섬김을 받는 것이 마땅했다. 단지 조금 전 당염원의 모든 말과 행동이 너무 악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묘랑은 사릉고홍의 곁에 있는 여인이 고문을 즐기는 악독한 살인자가 아니길 바랐다.
“과하다?”
당염원이 차분하게 되물었다.
당염원의 고요한 눈이 맑고 그윽하게 빛났다. 조금의 흥분도 없이 더없이 차분한 눈빛이었다. 조금 전 그녀가 누군가를 처참하게 고문했다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주묘랑은 일순간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당염원이 주는 인상이 누군가와 매우 비슷했다. 겉모습은 다르더라도 그 본질이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묘랑이 이런 생각을 할 때, 당염원이 당연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날 다치게 했으니 그걸 두 배로 돌려준 건데, 그게 잘못됐니?”
당염원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내가 유 씨보다 강했고. 그게 잘못된 거야?”
주묘랑은 입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났다. 그제야 그녀는 당염원이 누구를 닮은 건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사릉고홍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죽일 때 죄책감이 전혀 없고, 죽인 후에도 마음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살의 없이 살인을 저질렀다.
주묘랑은 깨달았다. 당염원은 마음이 비뚤어진 무자비한 살인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설연산장의 장주와 꼭 닮은 사람이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인 것이다.
당염원 역시 주묘랑에게 더 묻지 않고 사릉고홍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을 뿐이었다. 습관이 정말 무서운 것이, 당염원은 이미 사릉고홍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겨 주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상황 파악을 잘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지금은 편한 것이 장땡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식사가 끝난 뒤, 주묘랑은 또 궁금한 것이 생겨 당염원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아, 그리고…… 주모님, 도대체 언제 유 씨에게 약을 썼던 건가요? 전혀 보지 못했는데!”
당염원이 약을 쓰는 것을 사릉고홍은 알아챘다. 그 말은 곧 주묘랑의 실력 문제라는 뜻이었다. 당염원은 질문을 무시하지는 않고, 그저 아무렇게나 “응.” 하고 대답하며 넘겼다.
주묘랑은 잔뜩 풀이 죽었다.
‘방금 내 질문이 무례해서 주모님의 심기가 불편해지셨나 보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어.’
* * *
허설산에는 사계절이 없이 일 년 내내 눈발이 날렸다. 아득하게 펼쳐진 들판은 온통 하얘서 살아 있는 생물이라곤 볼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서서 잠시 한눈이라도 팔았다간 시간 감각마저 없어지는 듯했다.
외부에서 보았을 때, 허설산에 숨겨진 설연산장은 마치 세상 밖의 무릉도원, 전설 속 신들의 세상 같았다. 속세와 단절된 허설산은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항상 그 모습 그대로였다. 설연산장에서 눈 한 번 깜빡이면 이미 몇 년이 지나가 있다는 말들이 나돌 정도였다. 그만큼 설연산장에선 세월의 흐름을 느끼기 힘들었고, 정신 차려 허설산을 벗어나면 그제야 사계절이 이미 지나갔음을 알게 되었다.
당염원이 설연산장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일 년간의 생활은 단조롭기 그지없었지만, 그녀는 그 어떤 공허함이나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다.
수련 외에도 항상 단(丹)과 약을 연마했고, 독서를 하거나 사릉고홍과 칠현금, 바둑, 서예, 그림 등 다양한 것을 함께하고 무예도 배웠다.
의식주가 해결되었고 약재를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며, 영기가 충만한 수련 장소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누군가의 미움도 받지 않았다. 당염원은 이런 생활이 너무나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일 년 동안 당염원의 수련은 축기 초기에서 축기 정상에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빠르게 수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단연 사릉고홍의 공이 컸다. 그녀의 뛰어난 기억력과 사릉고홍의 섬세한 가르침으로, 당염원은 문맹에서 벗어나 이 세계의 다양한 서적을 통해 많은 정보를 접했다.
이곳 세계와 수진계 모두 강자가 지배한다는 섭리를 따르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이곳의 수련자들은 원자(元者)라고 불렸다. 바로 원력이라는 힘을 수련하기 때문인데, 위에서부터 차례로 천(天), 지(地), 현(玄), 황(黃) 네 가지 품급으로 나뉘었다. 각 품급은 또다시 일곱 등급으로 나뉘는데, 지품 이후로 매 등급에 이름이 있었다. 1등급에서 7등급까지 각각 유(儒), 사(師), 후(侯), 왕(王), 군(君), 제(帝), 성(聖)으로 불렸다.
원자에는 특수한 직업이 몇 개 있는데, 약사, 수라(修羅), 유협(游俠), 은면(銀面)이 그것이었다. 그중 약사는 지위가 가장 높아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최상급 고수는 최상급 약을 조제했으며, 동시에 여러 고수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상급 고수가 반드시 약사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수라는 지옥의 저승사자를 의미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자객이었다. 유협은 대부분이 혼자 다니는 협객으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러 정보와 소식을 팔고 사람들이 특수한 물품을 찾는 것을 도와줬다. 은면은 일정한 대가나 보수를 지불하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 도와주는 사람들이었다. 은면들은 얼굴에 항상 은색 무광의 가면을 쓰고 다녔다.
반년 전 당염원은 주묘랑이 지사 품급의 약사에 지후 등급의 원자라는 걸 알고, 그 실력에 상응하는 요구를 했다. 주묘랑은 이에 두말하지 않고 동의했다. 그녀는 줄곧 당염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궁금해했다. 그러나 아랫사람으로서 감히 물어볼 수 없었던 찰나, 때마침 당염원이 자발적으로 한 요구는 주묘랑의 뜻과 완전히 부합했다.
한 차례의 교섭을 통해 당염원은 자신의 실력이 이 세계의 지후와 맞먹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약력은 원력보다 본질적으로 훨씬 뛰어났으며, 무궁무진한 생기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생겨나 소모되지 않았다. 당염원은 근거리 전투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든 불리했다. 하지만 독과 약을 사용하게 된다면 주묘랑조차도 당염원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만약 축기를 돌파하여 벽곡기에 진입하게 되면 그녀는 이 세계에서 천품 급의 고수가 되는 셈이었다.
둘 간의 교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릉고홍은 당염원에게 신법 무예를 알려 주었다. 당염원은 이를 거절하지 않고 한 번 보면 잊지 않고 머릿속에 새기는 비범한 재주를 십분 발휘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주묘랑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존경스럽기도 했고 놀라움에 굳어지기도 했다.
유유상종, 끼리끼리라고 했다. 장주 같은 요괴가 마음에 든 자도 당연히 같은 요괴의 수준인 것이다.
이 일을 들은 사방각주 네 사람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중 조철이 가장 흥분했다. 그는 득의양양하게 당염원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가 비범하다는 걸 알았다는 둥, 그래서 더 장주에게 시집을 보냈다는 둥 이야기를 해댔다.
일 년이 지나고, 설연산장 사람들은 이제 완전히 당염원을 ‘주모’로 모셨다. 사릉고홍의 끝없는 총애뿐 아니라 당염원이 드러낸 모든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복종하게 만들었다.
* * *
햇빛이 쨍쨍하게 떠오르자 얼음이 일곱 빛깔로 반짝였다. 매림의 매화는 지지 않고 항상 피어 있어 고아한 자태를 자랑했다.
넓은 소매 가장자리에 옅은 녹색 구름이 새겨진 긴 피풍을 입은 사내의 뒷모습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사내는 한쪽 손으로 똑같이 옅은 녹색 구름무늬가 새겨진 흰 치마를 입은 여인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다른 한쪽 손으로는 먹물이 묻은 늑대털 붓을 쥔 여인의 손을 감싸 쥐고서 새하얀 선지 위에 선을 긋고 있었다.
잠시 후, 사내는 여인의 손을 잡고 붓을 들고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어떠오?”
당염원은 사릉고홍에 의해 선 몇 개만 추가된 수묵화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전보다 그림에 생기가 생겼다. 당염원은 자세히 그림을 살피는 듯 가늘게 눈을 뜨고 진지하게 칭찬했다.
“정말 대단해요.”
사릉고홍은 당염원의 영롱한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이어 가볍게 떨리는 속눈썹과 얇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보았다. 이는 모두 사릉고홍을 기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당염원에게 입을 맞추었다.
“응?”
당염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두 눈을 반달처럼 휘며 예쁘게 웃었다. 두 눈동자는 자욱한 연기처럼 몽롱했고, 너무나 아리따웠다.
“고홍.”
사릉고홍의 눈빛이 점차 깊어졌다. 뒤이어 당염원이 사릉고홍의 몸 위로 올라와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일 년간 함께하면서 모든 것이 서서히 변해 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제 당염원은 더 적극적으로 천마독을 탐했다. 비결을 완전히 습득한 것일 수도, 더 이상 사릉고홍에게 겁먹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당염원은 입을 맞추는 것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그것은 그저 천마독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행위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서툴고 풋풋한 입맞춤이, 무언가를 즐기기 위해서 하는 입맞춤이, 상대의 마음을 더 간질였다.
당염원은 기쁘게 독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릉고홍에게 주객전도를 당했다. 맹수처럼 거칠지만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몸을 뒤척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당염원은 탁자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몽롱한 눈으로 자신의 위에 있는 사릉고홍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깊고 어두웠다. 언제든지 사냥감을 자신의 배 속으로 넣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염원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두려워하진 않았다. 그녀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겠지만 다치지도, 생명에 지장이 가지도 않을 터였다. 또 이런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당염원에게 이것은 이미 천마독을 흡수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 관문쯤으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