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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대로하다

21화. 대로하다

방 안에는 육 씨 모녀와 추 이낭 모자, 그리고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한쪽에 서 있는 몇몇 시녀들만이 남았다.

“너희는 먼저 물러가거라.”

육 씨는 하죽과 시녀들을 내보낸 뒤, 고개를 들고는 담담한 눈으로 추 이낭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 제정광의 앞에서 보였던 상냥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의 눈가엔 서늘함이 어렸다.

“집안엔 아무 일 없겠지?”

추 이낭은 감히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답했다.

“집안의 관리인들은 모두 부인께서 직접 안배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 덕에 모든 것이 아주 질서 정연하게 잘 이뤄지고 있습니다. 다만…… 연 이낭이 몇 번이나 집안의 장부가 보관된 방에 자신의 사람을 배치하려 해, 총관리인 장씨(張氏)가 계속해서 이를 막았습니다.

그러자 연 이낭이 노야께 몇 번 이 일을 곧장 일러바쳤고요. 가뜩이나 부인께서 댁에 계시지 않은데, 아랫것들이 손버릇이 나빠 염려가 된다고 말하며, 부인을 대신해 자신이 집안의 대소사를 잘 관리하겠다 말했습니다…….”

말을 하던 도중 추 이낭은 조심스레 육 씨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육 씨가 아무런 반응 없이 평온한 낯빛인 것을 보고는 도리어 더욱 긴장하기 시작했다.

“노야께서 이후에 총관리인 장씨와 이(李) 어멈을 찾아가 몇 가지를 하문하셨으나, 이후 뭐라 더 말씀하신 바는 없으셨습니다.”

경도의 제부(齊府)를 떠나올 때, 육 씨는 자신의 심복 몇 명을 남겨두고 그녀를 대신해 집안일을 돌보라 명했었다. 사소한 일들은 이 어멈에게 처리하라 분부하는 동시에 혹여라도 큰일에 대해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겠다면 이부인(二夫人)을 찾아가 물어보라 당부해 놓았었다.

육 씨는 제가의 안일을 담당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 덕분에 저택 안 곳곳의 인력들은 모두 진작 그녀의 수중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제부의 인력들은 누군가가 이자들을 대신하기도, 또 누군가가 하인을 꽂아 넣기도 쉽지 않았다.

“연 이낭이 날 대신해 집안일을 돌보겠다고 했다? 수 해 동안, 어째 연 이낭의 야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가는 듯하구나.”

육 씨의 얼굴에는 날 선 조소가 번졌다.

추 이낭은 고개를 숙이며 감히 단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움직임은 없더냐?”

육 씨가 별 대수롭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없습니다. 부인께서 제부를 떠나신 뒤, 다른 이낭들은 집 밖 출입을 거의 삼가고 있습니다. 소인이 말씀드렸던 것들은 모두 이 어멈이 부인께서 반드시 아셔야 한다며 소인에게 말해주었던 것들이고요. 그리고 이 어멈이 부인께 편지를 전해 달라 했습니다.”

추 이낭은 황망히 품속에서 밀봉된 편지 한 통을 꺼냈고, 이를 건네받은 육 씨는 곧장 열어 보지 않은 채 추 이낭에게 말했다.

“고생했다. 내가 집에 없으니 너도 분명 잘 지내지는 못했겠지. 우선은 서를 데리고 물러가도록 하거라.”

추 이낭은 힘없이 그녀의 명에 답했다.

육 씨의 말마따나 집에 그녀가 없으니, 연 이낭이 아주 판을 치고 다녀 집안의 다른 첩실들과 통방 시녀들은 어쩔 도리 없이 쥐 죽은 듯 억눌려 있었다. 만약 이번에 이 어멈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이곳 금주성에 올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 제서는 제완의 곁에 있겠다고 억지 부리는 대신 고분고분 추 이낭을 따라 방을 나섰다. 그는 비록 어머님과 이낭이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럴 때는 마음대로 성질을 부려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이미 눈치코치로 다 알고 있었다.

추 이낭이 물러간 뒤, 그제야 육 씨는 이 어멈이 그녀에게 쓴 편지를 열어 보았다. 서신을 끝까지 모두 읽은 그녀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편지지를 탁자 위에 아주 둔탁히 내려치며 성난 목소리로 욕을 뱉어냈다.

“연설심(連雪心), 이 못된 년 같으니라고!”

제완은 이제껏 육 씨가 화를 내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듯 크게 노여워하며 누군가를 욕하는 건 정말이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어머니,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던가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방금 읽었던 그 편지 때문이라는 걸 안 제완은 육 씨의 곁으로 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슴팍을 마구 들썩이던 육 씨는 다소 시간이 흐른 뒤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가에 서린 분노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연설심 고것이 머리를 아주 잘 쓴 듯하구나. 네 부친에게 제여를 내 이름 밑으로 넣어 적녀의 신분으로 혼처를 정하고 싶다 얘기했다는구나. 그리하면, 추후에 혼사를 쉬이 결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래에 제가에 큰 이익을 가져다줄 일이 될 것이라며 말이다! 고것이 지금 무슨 꿍꿍이인지를 내 모를 듯하더냐! 제여를 이용해 자기 신분 상승을 꾀하려 한다는 건, 굳이 머리를 쓰지 않더라도 훤히 다 알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제완은 이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연 이낭은 언제나 기를 쓰며 그녀의 아들딸을 적출로 만들고자 했고, 육 씨 앞에서도 결코 그 뜻을 굽힌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제정광에게 승낙을 받기만 한다면, 육 씨도 더는 거절할 수가 없을 거라 여긴 것이 틀림없었다.

이 수법은 실로 대단한 듯했다. 제서를 통해 제완에게 그런 소식을 알게 하고, 동시에 육 씨에게 이러한 일을 전해 듣도록 한 것이었다. 만약 제완이 상대의 숨은 속셈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제여가 자신의 혼인을 빼앗아 간다고만 생각해, 홧김에 그대로 혼례를 올리겠다 정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아직 아니야!’

그때 불현듯 제완의 눈이 번쩍였다. 이 일은 지금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연 이낭이 이러한 꿍꿍이를 품었던 건 양군유가 나타난 다음, 그녀가 연 이낭에게 은근히 바람을 넣으며 그렇게 하도록 부추겼던 때부터였다. 이렇게 일찍 제정광에게 이 말을 꺼냈을 리 없었다.

“어머니, 노여움 푸세요. 이 일은 꼭 진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아버지께서 이 일에 대해 어머니께 단 한 번도 언급하시지 않았다는 건, 연 이낭이 일부러 아랫사람들을 시켜 이런 소문을 내게끔 만든 걸지도 몰라요.”

제완은 한껏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제여가 고의로 제서에게 그런 말을 전하게 했다는 걸 고려해 봤을 땐, 이 호적 변경에 관한 일들은 그저 그 두 모녀가 판 함정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반드시 해보아야 했다.

어쩌면 연설심은 제정광에게 입도 뻥긋하지 않은 채, 일부러 이 어멈에게 말을 흘린 것일지도 몰랐다. 이 어멈이 육 씨에게 이 얘기를 전하면, 육 씨는 자연히 제정광 앞에서 제여를 자신의 호적에 올리는 일에 대해 반대하고 나설 것이 자명하니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도리어 육 씨가 괜히 있지도 않은 말을 꺼내는 옹졸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네 부친께서 아직 적당한 때를 찾지 못하셨을 뿐인 듯하구나!”

육 씨가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제완은 육 씨의 팔을 잡아당기며 살며시 웃어 보였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둘째 동생이 어머니의 딸이 되는 게, 뭐 안 좋을 게 있나요?”

육 씨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딸을 쳐다보며 의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니?”

“아버지께서는 현재 태자를 위해 인맥을 넓히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건, 명리(*名利: 명예와 이익)가 관계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명예와 이익을 굳이 따로 내어주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지요. 혼인을 할 수 있다면 말이에요…….

어머니께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아버지의 바둑돌로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잖아요. 그러니까 기왕에 연 이낭이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어머니께서는 그저 이낭의 뜻을 그대로 이뤄주시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럼 이후 아버지께서 어머니의 현숙함을 칭찬하실 뿐 아니라, 연 이낭도 더 이상은 그런 간교한 계책을 낼 수 없지 않겠어요.”

제완은 가뿐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저 물의 흐름에 따라 배가 가도록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설심 모녀의 뜻을 이루게 해준다면, 그 두 사람은 그녀를 대신해 성가신 일들을 적지 않게 막아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본래 제완은 이전의 복수를 다시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제여가 선공을 해 왔다. 그러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몇 배로 갚아준다 해도 뭐라 반박할 자격이 없지 않겠는가!

육 씨는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 조금 전까진 너무 한순간에 부아가 치밀어올라서 많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제완의 말을 듣고는 불현 듯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아, 혹 뭔가를 알게 된 것이냐?”

이에 제완은 차디찬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머니, 아버지가 이 시기에 금주성에 온 게 무엇 때문인지 혹시 알고 계시나요? 당 선생까지 함께 왔다는 건, 당연히 저희를 위해서는 아닐 거라는 얘기지요. 저도 서에게서 들은 건데, 진작에 제여가 연 이낭에게 아버지께서 제 혼처를 정하고자 하신다는 얘기를 했다고 해요 이 말인즉슨, 그들 모녀는 일부러 저희에게 이걸 알리려 했다는 게 틀림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 생각엔 아버지가 이번에 금주성에 오신 건, 어쩌면 어느 집 세도가와 결친(*結親: 친분을 맺음)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를 것 같아요…….”

제완의 말에 잠시 당황하던 육 씨는 이내 성을 내며 말했다.

“금주성이 아무리 좋다 해도 경도와 자그마치 만 몇천 리(*里: 약 4,000km 이상) 떨어진 곳이지 않으냐? 완이 너는 내 하나뿐인 딸인데, 내가 어찌 너를 이리 먼 곳으로 기꺼이 시집 보낼 수 있단 말이야? 나중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울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인데. 게다가 금주성에 어디 우리 제가와 견줄 수 있는 가문이 있다더냐?”

“아버지의 딸이 비단 저 하나인 건 아니지만, 적녀는 오로지 저 하나뿐이에요. 태자와 이후의 앞날을 위해 아버지는 이리하지 않으실 수 없는 거지요.”

제완의 말을 듣고 근심 어린 얼굴로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육 씨가 비로소 천천히 입을 뗐다.

“연설심이 그리도 자기 여식을 내 이름 밑에 올리고 싶다 한다면, 내 승낙하지. 이는 분명 자신의 딸을 좋은 가문에 시집 보내고 싶어서겠지. 하지만 이리한다면 내가 연설심을 대신해 결정권을 가지게 될 텐데, 그때 가서 고것이 감히 딴말을 할지 어떨지를 내 한 번 봐야겠구나!”

누군가에게 영광을 쥐여 주는 건, 꼭 당사자를 떠받들어 주어야만 가능한 건 아니었다. 이미 한차례 죽어 봤던 제완은 제가가 가진 지위 따윈 전혀 중요하지 않다 여겼다. 제여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냥 가져가게 던져주면 될 일이었다.

다만 이번엔, 제여가 지난 생에서처럼 원하는 남편에게 시집가는 일 같은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일어날 수 없을 터였다.

“어머니, 이 일은 그저 한 다리 건너 들은 것뿐이라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절대 경거망동하셔선 안 돼요.”

제완은 육 씨에게 신신당부했다. 아직은 먼저 제정광의 생각이 어떤지를 명확히 알아봐야만 했다.

육 씨는 제완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우선은 내가 네 부친의 뜻을 떠볼 것이니, 넌 심려 말거라.”

조금 안심이 된 제완은 천천히 의자에서 내려와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육 씨의 두 무릎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러고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저는 그저 영원히 어머니의 곁에 있고 싶어요. 누구한테도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으이구!”

육 씨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