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세자

5화. 세자

잠깐? 온유는 이제 와 문득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담장에서 떨어지고 나서는 그 복잡한 사람들의 생각을 한 번도 듣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왕부에서 장군부, 그리고 다시 온부까지 오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으니, 원래대로라면 누구의 생각도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왜지?

그저 우연인가, 아니면……. 온유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살짝 차가워진 입술을 더듬었다. 속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그런가?

아니면 거꾸로 전생에는 남의 생각을 읽는 그 능력 때문에 말을 못 했던 걸까?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생각에 잠겼던 온유는 다음 순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이 그녀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대가라면 수지맞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 남의 생각을 읽지 못하게 됐다는 건 대가를 치렀다기보다는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에 가까웠다.

“보주야, 붓과 먹을 가져와. 내가 목록을 써 줄 테니 넌 내일 그대로 물건을 사 오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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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온유는 옷을 갈아입고 침상 끝에 기대어 앞으로 할 일을 따져 봤다.

사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원한이든 은혜든 그대로 갚으면 된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해친 그 사람들에게서는 정의를 되찾을 것이다.

그녀를 도운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힘껏 보답할 것이다.

그때, 온유의 머릿속에 ‘그’ 남자의 아름다운 눈이 떠올랐다.

거센 눈보라 속에서 남자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안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품은 아주 따뜻했다.

두 사람의 뜨거운 피가 한데 섞인 채 한을 품고 죽어 가는 순간 느낀 마지막 따뜻함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사람은 자신을 노린 비도를 대신 막기 전에도 이미 다쳤던 것 같았다. 그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쫓기던 중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도 그는 몸을 던져 칼을 막아 주었다. 물론 그녀는 결국 죽음을 면하지 못했지만, 그 마음마저 의미가 없어진 건 아니었다.

아쉽게도 그의 얼굴을 보진 못했다. 상대의 신분을 알아내려면 천천히 궁리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피로감 때문에 온유는 어느새 잠에 빠졌다.

* * *

온선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몰래 온부를 나섰다. 그리고 보주도 온유가 시킨 일을 하러 나갔다.

한편 정왕부에서는 막 아침 식사를 마친 정왕비가 시녀에게서 세자가 왔다는 보고를 듣는 중이었다.

정왕세자 기삭은 도성에서 그리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정왕과 정왕비는 사이에 장남 기삭, 차남 기환(祁煥), 막내딸 기경이라는 2남 1녀를 두었다.

팔 년 전 태안제가 번왕을 도성으로 불러들인 이래로 각 봉지에 머물던 친왕들이 수도에 쭉 거주하게 되었다.

정왕세자는 도성에 오는 길에 병이 나서 한동안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반면에 둘째 기환은 여러 명문가 자제들과 어울려 다녔다.

기삭은 이미 열아홉 살이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조용히 생활하다 보니 왕공귀족들 특유의 오만방자한 면이 없을 뿐더러 조용하고 온유했다.

방에 들어오는 큰아들을 보자 정왕비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삭아, 무슨 일이 있느냐?”

기삭은 왕비에게 인사를 올린 뒤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모비(母妃)께서는 혹시 그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명문가 규수가 왕부의 세자를 훔쳐봤다는 소문도, 그리고 벙어리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문도 결코 평범한 소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일이 바로 정왕부에서 일어난 일이니 왕비의 귀에 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차분히 물었다.

“무슨 소문 말이냐?”

“온씨 집안의 이소저가…… 소자를 훔쳐봤다는 헛소문 말입니다…….”

정왕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헛소문?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냐?”

왕비가 들은 사실은 소문과 달랐지만, 그래도 자기 아들 기삭이 가슴이 아파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는 건 믿기지 않았기에 캐물었다.

누가 어미보다 자기 아들을 잘 알겠는가?

정왕비는 아들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 아닙니다. 어제도 모두에게 얘기했지만, 온 이소저는 소자가 살려 달라고 외치는 걸 듣고 담장을 넘은 겁니다.”

정왕비는 키는 크지만 마른 몸매의 아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 녀석이 왜 온씨 가문 둘째 아가씨를 감싸려고 하는 거지?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지만, 아들이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으니 어미 된 입장으로 면전에서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정왕비는 그저 살며시 웃었다.

“사람들은 원래 남의 말을 전하는 걸 좋아하지. 헛소문이 도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기삭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한 규수의 명예가 달린 일입니다.”

“삭이 너는 어찌하면 좋겠니?”

“모비께서 사람을 보내 온부로 선물을 보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를 구해 줘서 고맙다는 명목으로요.”

정왕부가 먼저 온부에 선물을 보낸다면 온 이소저가 담장을 넘은 게 정왕세자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도 대놓고 그런 소문을 퍼뜨리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정왕비는 기삭을 슬쩍 보고 웃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흠…… 꽤나 고심해서 생각한 방법이구나.”

기삭은 눈을 내리깔고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온 이소저가 소자를 구한 건 사실이니까요.”

정왕비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녀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리한다고 해도 그 규수는 혼사를 정하는 데 어려움이 생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결국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기 마련이거든.”

기삭은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듯 눈썹을 치켜떴다.

“만약 그렇다면…… 소자도 아직 정혼하지 않았으니 온부에 혼담을 넣으시는 것도…….”

콜록! 콜록!

정왕비는 너무 놀라 사레가 들고 말았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가 재빨리 왕비의 등을 두드렸다.

정왕비는 손을 휘휘 저어 시녀를 물러가도록 한 다음,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아들을 마주 봤다.

“이 어미는 방금 식사를 마쳤으니 그런 사람 놀라게 하는 농담은 하지 말거라.”

“소자는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온 이소저는 제 목숨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정왕비는 하마터면 왕비답지 못하게 도끼눈을 뜰 뻔했다. 하지만 겨우 참고 심호흡을 한 다음 말했다.

“아들아, 이 어미는 네가 사람이 선하고 도량이 넓어 온 이소저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건 잘 안다. 하지만 혼사는 인륜지대사인데 넌 어찌 자신을 낮춰서…….”

기삭이 가볍게 웃었다.

“제가 자신을 낮추다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온 이소저는 천향국색(天香國色)의 미모에 가문도 훌륭하지 않습니까? 소자 때문에 혼삿길이 막힌다면 소자가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왕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쾅 소리가 나도록 탁자를 내리쳤다.

“삭아, 너 설마 그 온 규수의 미모에 혹한 것이냐?”

자신의 큰아들이자 정왕부의 세자가 여자의 미모에 홀리다니!

기삭이 난감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모비께서는 어떤 며느리를 원하십니까? 외모가 그저 그런…….”

“그럴 순 없지!”

정왕비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세자비가 될 규수는 당연히 미모도 뛰어나야 했다. 훗날 태어날 손주들을 어미 때문에 외모가 떨어지게 만들 순 없지 않은가?

하긴…… 그렇게 보면 온가의 이소저도 나쁘지는 않겠어.

정왕비는 차 한 모금을 천천히 마시며 생각했다.

“하긴, 너도 올해 열아홉이니 혼사를 정할 때가 되고 남음이 있지. 네 뜻이 그렇다면 네 아버지와 의논해 보마. 네 아버지만 좋다고 하면 온씨 가문의 뜻을 물어봐도 될 것 같구나…….”

기삭은 어머니의 생각이 이렇게 쉽게 바뀔 줄 몰랐기에 오히려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삭아?”

기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네, 모비.”

정왕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혼사 얘기를 하니까 벌써 다른 데 정신이 팔리는 것 같구나.”

기삭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혼인은 중대사이니 부모님의 뜻이 중요하지요. 소자는 그대로 두 분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정왕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불퉁거렸다.

“더 할 말 없으면 돌아가거라. 난 할 일이 있다.”

“소자, 물러가겠습니다.”

기삭이 물러가자, 정왕비가 심복인 시녀 진주(珍珠)를 불렀다.

“진주야, 어깨를 좀 주물러라.”

정왕비는 속으로 이러다가 아들 녀석들 때문에 화병이 나지 싶었다.

* * *

낙영거에는 봄의 아침 햇빛이 찬란했다. 물건을 사고 돌아온 보주가 늦잠을 잔 온유를 업어서 정원의 등나무 의자에 앉혔다. 온유를 비추는 햇볕이 따뜻했다.

“작약(芍藥)아, 임소화(林小花)를 끌고 와.”

온유가 자기 처소의 여종 하나에게 명했다.

작약은 대답하고 바로 뒤쪽 월량문(月亮門)으로 가서 당나귀 한 마리를 끌고 왔다.

당나귀는 온몸이 회색이었고 머리 부분에만 한 줌 흰 털이 나 있었다. 당나귀는 온유를 보더니 신이 나서 그녀의 손에 머리를 비벼 댔다.

임소화는 온유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받은 할아버지의 생일 선물이었다.

성질이 있는 큰 말과 비교하면 당나귀는 키도 작고 성격도 온순한 편이라 어린 소녀가 타기에 적합했다.

온유는 당나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빗질해 주었다.

전생에 아버지와 계모의 속셈을 알았을 때, 그녀는 바로 임소화를 타고 도망갔었다.

임소화는 그녀를 등에 태운 채 계속 달리다가, 결국은 비적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둘째야, 왜 정원에 나와 있어?”

그때, 한 소년이 문을 들어서며 말했다.

온유는 한 손으로는 계속 당나귀 등을 쓰다듬으면서 들어오는 소년을 바라봤다.

그는 외사촌인 정수(程樹)였다. 하지만 사실 그녀와 진짜 혈연관계는 아니었다.

정수의 아버지는 외할아버지의 수양아들이었다. 그는 혼인하여 정수를 낳고 나서 먼 곳으로 떠났다.

그래서 정수는 어릴 때부터 장군부에서 머물렀다. 그는 온유의 어머니 임 씨를 고모라고 부르며 자랐고, 온유와는 자연스럽게 사촌 사이로 지냈다.

온유는 정수가 다가오는 걸 보고 불렀다.

“오라버니.”

정수는 이미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소녀의 아름답고 맑은 목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말을 할 수 있게 됐구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온유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정수를 금오위(金吾衛)에 넣으셨다. 하지만 나중에 이런저런 변고로 인해 그녀가 도성에서 도망치고 삼 년이 지나 그의 소식을 알아봤을 때, 그는 무시무시한 명성을 떨치는 금린위(錦麟衛)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만사에 조심하느라 정수와 접촉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왜 외할아버지가 혐오하던 금린위가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오라버니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오늘은 근무 서는 날 아니에요?”

햇빛 아래에서 온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했다.

“네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지. 일부러 휴가를 내고 온 거야.”

훤칠하게 생긴 소년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온유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소문이 그것 하나는 아니었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