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거절
정수는 순간 표정이 이상해졌지만 이내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것뿐이었는데? 휴우, 아무튼 네가 말을 할 수 있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안심이야. 난 할 일이 남아서 가 봐야겠어. 나중에 제대로 축하해 줄게.”
정수는 누이동생이 그 헛소문 때문에 너무 화가 나서 다시 입을 닫아 버릴까 봐 걱정이 됐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건 또 익숙하지 않아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한 것이다.
정수는 쏜살같이 달려가다가 하마터면 낙영거 쪽으로 걸어오던 한 시녀와 부딪힐 뻔했다.
“공자.”
정수는 시녀 뒤에서 상자를 들고 오는 하인들을 슬쩍 보고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그건 다 무슨…….”
“부인께서 이 선물들을 둘째 아가씨 처소에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정수는 고모님이 둘째 누이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낙영거의 여종이 시녀와 하인들을 보고 고했다.
“아가씨, 부인을 모시는 방비(芳菲)가 하인들과 함께 왔습니다.”
방비는 온유에게 다가와 무릎을 굽혀 예를 올렸다.
“둘째 아가씨, 부인께서 소인에게 이 선물들을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는 거라고?”
온유는 깜짝 놀라 상자들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지참금이 넉넉했기 때문에 종종 소녀들이 좋아하는 작은 물건들을 언니와 자신의 처소에 보내 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선물을 이렇게 몇 상자나 보내 주신 적은 없었다.
또 한 가지 놀란 이유는 전생에는 이런 선물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비가 웃으며 설명했다.
“정왕부에서 아가씨에게 감사의 표시로 보낸 물건입니다. 부인께서 그대로 둘째 아가씨 처소로 옮기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부인께서는 정왕부에서 온 집사와 담소를 나누시는 중이십니다.”
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방비가 돌아간 다음 선물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결국 이번에도 전생과 다른 사건은 정왕세자와 관련이 있었다.
이번에는 정왕세자가 나서서 온유가 자신을 돕기 위해서 담장을 넘었다고 했다. 이 선물은 그래서 답례로 보낸 것이었다.
어젯밤 잠들기 전 온유는 이번에 왜 다른 일이 일어났는지 꼼꼼히 되짚어 봤다.
맞아. 이번에는 담장에서 떨어질 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지. 하지만 전생에는 그대로 세자 앞에 떨어졌고. 쿵 하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어.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정왕세자가 전생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 건가?
전생에는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지나가 버렸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임소화의 머리를 쓰다듬던 온유는 살포시 웃었다.
어쨌든 이번에는 그녀를 도와줬는데 전생의 일로 세자에게 따지는 건 너무했나?
온유는 나름대로 이번에 세자의 반응이 달랐던 이유를 알아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 *
그날 저녁, 정왕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정왕비의 처소를 찾았다. 왕비는 그에게 큰아들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삭이를 온씨 집안 이소저와 혼인시키자는 것이오?”
크게 떠진 두 눈으로 보아 정왕은 왕비의 말에 꽤 놀란 것 같았다.
“왕야(*王爺: 왕 작위가 있는 사람에 대한 존칭), 목소리를 낮추세요.”
왕비는 살짝 흘기며 말했다.
“지금 왕야께 상의드리는 거잖아요. 결정되면 온씨 가문의 의향도 물어야 하고요.”
정왕은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바로 이것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순 없었다.
“삭이는 정왕부의 세자이고, 그 아내가 될 사람은 세자비가 될 테니, 이렇게 급히 결정할 문제는 아니오.”
“그럼 조금 더 골라 볼까요?”
“……하긴 우리가 고르고 또 골라 봐야, 그분 마음에는 들지 않을 수도 있겠구려.”
정왕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친왕은 자신의 봉지에서는 만인지상의 지위였지만, 도성에 살게 된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황제는 형제들이 멀리 있어 보지 못하는 게 싫다며 친왕들을 도성에 살게 했다. 하지만 이는 솔직히 말하면 자신의 눈앞에서 얌전히 살라는 뜻이었다.
현 황제인 태안제 본인이 자신의 봉지에서 병력을 모아 황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친왕들을 도성에 묶어 둔 것이었다.
다만 황제 본인의 입으로 그런 의심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당신이 보기에는 온 이소저가 괜찮은 것이오? 아니면 삭이 그 녀석의 생각이오?”
정왕비는 솔직히 아들을 ‘팔아넘겼다’.
“삭이 녀석이 온 이소저 미모에 반한 거죠.”
“미모에 홀리다니! 철없는 녀석!”
정왕은 당장이라도 큰아들을 혼찌검 낼 것처럼 굴었지만 곧 왕비의 웃는 듯 마는 듯한 눈빛에 멋쩍은 듯 웃었다.
“……뭐, 얼굴이 예쁜 여인이 마음도 예쁜 경우도 있지만 말이오.”
정왕 본인도 처음 왕비의 미색을 보고 한눈에 반해 그녀와 혼인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부황(父皇)에게 크게 혼난 과거가 있었다.
“온씨 가문이라면 우리 왕부와 수준이 맞기는 하구려. 삭이 녀석도 마음에 들어 한다니……. 왕비가 며칠 뒤에 사람을 보내 의향을 떠보시오.”
* * *
그 며칠 동안 온유는 자신의 거처인 낙영거에서 삔 발목을 치료하며 곧 다가올 위기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임 씨가 낙영거를 찾았다.
“너희 아가씨는 어디 있느냐?”
“아가씨는 서재에 계십니…….”
여종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임 씨가 급히 서재로 들어섰다.
온유는 비단으로 상자를 덮고 있다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어머니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임 씨는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와서 막내딸을 응시했다.
온유는 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쓰다듬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혹시 어머니가 상자 속 물건을 본 건가……?
자리에 앉은 임 씨의 표정은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유아야, 참으로 이상한 일이 생겼구나.”
“무슨 일인데요? 뜸 좀 그만 들이고 어서 말해 보세요.”
“정왕부에서 사람을 보내 네 혼인에 대해 묻더라.”
온유는 깜짝 놀랐다.
“혼인이요? 정왕부에서요?”
“정왕부에서는 너를 세자의 짝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말을 돌릴 줄 모르는 임 씨는 단숨에 내막을 밝혔다.
“이럴 리 없는데…….”
온유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다. 이 어미도 놀랐다.”
딸의 눈을 바라보며 임 씨가 급하게 부연했다.
“우리 딸이 정왕세자에게 부족하다는 건 아냐. 우리 유아는 황자의 배필로도 넘치는 규수이지. 다만 일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말이다. 이 어미는 정왕비와 평소 왕래가 잦은 편이었지만, 정왕비는 한 번도 그런 의사를 보인 적이 없었거든…….”
온유도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해야 했다.
“어머니, 설마 허락한 건 아니죠?”
임 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담을 듣자마자 덥석 받아들일 순 없지. 네 의사도 중요하잖니.”
온유는 코끝이 찡해져서 임 씨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머니가 있으니 과연 달랐다. 왕부의 혼담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그녀의 뜻을 물어보니 말이다.
“유아야, 네 뜻은 어떠니?”
온유는 임 씨의 눈빛에서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이번 혼사가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머니를 실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아끼는 가족이 비극을 당하지 않게 하려면 아버지의 숨겨진 진짜 모습을 드러내면 그만이었다. 그건 누가 뭐라고 해도 결국 집안일이었다.
하지만 정왕부의 경우는 달랐다.
전생에 그녀가 도성에 돌아왔을 때, 정왕부는 역모죄로 몰려 왕부의 모두가 참수형에 처했다.
만약 정왕부에 시집간다면 자신의 가족들까지도 진흙탕 속으로 몰아넣는 일이 될 터였다.
“유아야,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야?”
임 씨는 딸의 뜻을 꺾을 생각은 없었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왕세자는 오랜 세월 두문불출하였지만, 정왕부가 친정인 장군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었기에 임 씨도 여러 번 볼 기회가 있었다. 정왕세자는 생긴 것도 훤칠했고 몸가짐도 반듯했다.
“정왕세자는…… 건강이 안 좋잖아요.”
온유는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임 씨는 깜짝 놀라 온유의 손을 꼭 잡았다.
“유아 네 생각이 맞다. 이 어미가 그 중요한 걸 깜빡했구나.”
맞아! 정왕세자는 도성으로 오는 길에 크게 앓은 적이 있었지. 건강이 안 좋으니, 우리 유아와 백년해로하기 힘들 수 있어…….
우리 유아를 그런 사람에게 시집 보낼 순 없지.
임 씨는 속으로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하면서 돌아가 정왕비에게 사람을 보내 완곡한 거절의 뜻을 밝혔다.
* * *
정왕비는 온부에서 거절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화가 나 밥이 넘어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세자를 들라 해라.”
그 불효막심한 놈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기삭이 오자 정왕비는 굳은 얼굴로 맞이했다.
“모비, 왜 그러세요?”
정왕비는 아들을 살짝 흘겨봤다.
생김새도 훤칠하고 행동에도 절도가 있어 아무리 보아도 흠잡을 데 없는 사윗감인 내 아들이 온 시랑에게서 퇴짜를 맞다니!
정왕비는 이미 이번 혼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사람이 누군지 나름대로 분석을 마친 상태였다.
온가의 뜻을 떠보기 위해 보냈던 자가 고한 바에 따르면, 임 부인은 정왕부가 자신의 딸을 며느리로 생각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기뻐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딸 가진 집안으로서의 입장이 있으니 남편과 상의해 보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거절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럼 누가 거절했는지 확실했다.
“왜 그러긴! 당연히 온가 때문이지. 시랑부 따위가 뭘 그리 재는 건지…….”
“온씨 가문에서 사돈을 맺기 싫다고 했습니까?”
기삭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정왕비는 원래 아들 때문에 망신당했다고 나무랄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반응을 보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삭아, 세상에 예쁜 규수는 많다. 이 어미가 온 이소저보다 훨씬 예쁜 규수를 골라 주마.”
기삭이 가볍게 웃었다.
“모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소자는 혼인이 급하지 않습니다.”
급하지 않다고?
정왕비는 아들의 눈빛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삭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었다.
“처음부터 온 이소저가 소자 때문에 추문에 휘말릴까 봐 혼담을 넣은 것 아닙니까? 소자가 혼인할 마음이 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렇구나!”
정왕비는 차를 호로록 마시고 말했다.
“네 뜻은 알았다. 이번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거라.”
“모비께서도 너무 불쾌해하지 마세요.”
“그럴 리 있겠느냐. 이 어미가 이 정도 일로 마음 불편해할 사람이더냐?”
점심때가 되어 정왕이 왕비의 처소를 찾자, 왕비는 온씨 가문이 혼담을 거절한 일을 고했다.
“가문의 급을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 삭이 정도면 최고의 신랑감인데, 시랑 주제에 눈이 정수리에 달리지 않았습니까?”
“왕비, 고정하시구려.”
“화난 건 아니에요. 그저 식욕이 없어 아침, 점심을 걸렀을 뿐입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정왕비가 도끼눈을 뜨자 정왕은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내 말은 온여귀 그자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는 것이오.”
“그런 사람 볼 줄 모르는 자 얘기는 그만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