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새로운 삶
“장군부 노부인이 나오셨어!”
순천부 밖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판결이 났나?”
다들 궁금해서 고개를 내밀었다.
“노부인의 당당한 표정을 보니 승소하신 게 틀림없구려.”
“그럼 그렇지!”
여기저기에서 환호 소리가 들리고 힘찬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온유는 마침내 가슴에 얹혀 있던 가장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은 것 같았다.
해냈어.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다 무사하셔. 나도 언니도 이제 괜찮을 거야.
그녀는 이제 임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아버지’와는 이제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외할머니, 마차를 타고 가요. 오늘 너무 무리하셨어요.”
온선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부인은 자세를 더 꼿꼿하게 하고 말했다.
“아니다. 우리 걸어서 돌아가자꾸나. 도성 사람들에게 우리 장군부가 비록 아녀자만 남았어도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걸 똑똑히 보여 줘야 한다!”
노부인 일행은 무수히 많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군부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일행을 따르던 구경꾼들 중에는 온여생도 섞여 있었다.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장군부 안으로 사라지는 온유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따라갈 것처럼 한 걸음 나섰다가 이내 멈춰서 애가 타는 마음으로 제자리를 맴돌았다.
자신은 유아가 시킨 대로 모두 따랐다. 그럼 이제 유아도 우리 봉이를 풀어 주겠지?
헉, 설마 봉이가 이미 유아에게 잡아먹힌 건 아니겠지?
아까 유아가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도 태연하게 ‘그걸’ 씹어 먹던 장면이 떠오른 온여생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 서, 설마……. 설마 그게 봉이의 손가락은 아니었겠지?
온여생은 장군부 대문 쪽을 눈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늘 장군부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러나 온여생의 눈에는 그것이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저긴 절대 들어갈 수 없어. 아니, 들어가면 안 돼!
온여생은 우왕좌왕하면서 사람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러다 장군부를 둘러싼 담장 밑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앞에 한 쌍의 다리가 나타났다.
천천히 고개를 든 온여생의 눈에 집사 온평의 착잡한 얼굴이 비쳤다.
“만두 하나 드시겠습니까?”
온평이 쭈그리고 앉아 하얗고 통통한 만두를 하나 건넸다.
온여생은 만두를 받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쫄깃한 만두피가 씹히며 맛있는 육즙이 흘러나왔다.
온여생은 만두를 허겁지겁 먹은 다음 그제야 온평에게 물었다.
“왜 나에게 만두를 준 겐가?”
온평도 만두를 한입 먹더니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노야나 저나 같은 신세 아닙니까?”
팔노야도 그와 마찬가지로 둘째 아가씨에게 약점을 잡힌 게 틀림없었다.
그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주인을 있는 힘껏 물어뜯었다. 이제 오늘의 일은 마무리된 셈이었지만, 그의 앞길은 깜깜하기만 했다.
주인 어르신을 모시던 심복이 이제 배신자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주인도 고꾸라진 신세였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그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온평이 온여생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만두를 건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온여생은 그의 말을 듣자 눈물이 핑 돌았다.
“온 집사, 혹시 자네 아들도 유아가 잡아먹은 겐가?”
온평은 너무 놀라 입에 물고 있던 만두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온여생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뻣뻣한 동작을 통해 그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자네에게만 말해 주겠네. 유아는 사실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라네. 오늘 온부 앞에서도 사람 손가락을 꺼내 먹더군.”
“미쳤구만!”
온평은 온여생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소매를 떨치고 사라졌다.
동병상련인 동료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미치광이였다. 괜히 서 푼짜리 만두만 하나 날렸네.
온여생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담 구석에 기대었다.
“아무도 날 안 믿어. 아무도 안 믿는다고. 유아 그 아이 말이 맞았어…….”
“아버지, 여기서 뭐 하십니까?”
온여생은 혼자서 중얼거리던 것을 뚝 그치더니 눈앞에 나타난 청년을 보고 팔짝팔짝 뛰었다.
“봉아, 별일 없었느냐?”
그는 아들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다가 다시 손을 쓰다듬다가 했다.
따뜻하구나! 살아 있었어!
온여생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온봉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버지, 울지 마십시오. 당숙의 일은 오는 길에 들었는데…….”
“아들아, 네가 살아 있으면 됐다!”
온여생은 온봉을 힘껏 안았다.
온봉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아버지,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너 유아에게 잡혀갔던 것 아니냐? 걔가 널 잡아먹으려고 하지 않았어?”
잡혀가? 잡아먹어? ……온봉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시는 거지?
“벗 하나가 평성(平城)에 사시는 훌륭한 유학자를 소개해 주어 그분을 뵈러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오는 길에 다리가 끊어져서 멀리 돌아오느라…….”
온봉이 이틀 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아버지, 그런데 유아가 절 잡아먹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온여생은 이미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서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벗과 놀러 갔었다고……?”
“놀러 간 게 아니라 팔고문에 정통한 선배 유학자를 뵈러 다녀온 겁니다. 이번 회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아버지의 기분이 영 안 좋은 듯하여 온봉은 허둥지둥 변명했다.
온여생은 한참을 어안이 벙벙해했다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요괴가 사람을 속이기도 하는구나!
아버지가 서럽게 우는 모습에 온봉은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켰다.
“아버지, 오는 길에 다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대의를 위해 일족의 정을 저버리셨으니 열째 당숙께 미안함이야 있으시겠지요. 하지만 이 아들은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 말씀이 옳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당당하게 사는 것이니까요…….”
온여생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아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옷소매로 눈가의 눈물을 닦아 냈다.
앞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일로 아들의 진심 어린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뜻밖의 수확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본보기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는 온봉이 너무 뛰어나서 오랫동안 아버지로서 모범을 보이고 아들의 존경을 받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아들은 학문이 뛰어나고 아는 것도 많으니 영 말발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이 아비는 이제 괜찮다. 봉아, 넌 이번 회시 준비만 열심히 하면 된다. 네 열째 당숙의 일에 신경 쓸 것 없다.”
“걱정 마십시오. 소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부자는 장군부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 * *
온 시랑이 정실부인 임 씨와 의절했다는 소문은 날개 달린 것처럼 도성 곳곳에 퍼졌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다음 날 온여귀를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처럼 쏟아져 태안제의 책상 위에 안착했다.
태안제는 쌓여 있는 상소문을 펼쳐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온 시랑 이자는 참으로 인심을 얻지 못했구나.
일이 이 지경이 된 건 단순히 인심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임 노장군에겐 오래된 동료와 부하들이 있었다. 그들이 온여귀가 임 노장군을 모함하며 노장군의 딸을 정실부인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시도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장군부에서 이미 전광석화같이 빠른 대처로 온여귀와 의절한 후였다. 그래서 돕고 싶어도 당장은 도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 날부터 준비한 상소문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자기 목소리를 내는 어사와 언관들도 직책상 가만히 있지 않았다.
특히 언관은 본시 풍문거핵(*風聞擧劾: 소문만으로 탄핵할 수 있음)의 권한이 있었다. 하물며 이번 일에는 증인까지 있었다.
또 한 무리는 바로 원래부터 온여귀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이들이었다. 또한 병부시랑의 자리가 비면 자신에게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고 여긴 기회주의자나 순천부윤이 재고의 여지도 없이 장군부의 요구대로 일사천리 처리한 것을 보고 그 뒤에 천자의 뜻이 있었다는 걸 눈치챈 부류도 있었다.
‘담이 무너지려고 하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민다’는 옛말이 딱 맞았다.
시랑의 자리에 오른 만큼 온여귀도 나름의 재주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세상을 바로잡을 정도의 왕좌지재는 아니었다. 대주 조정이 온여귀 하나 빠진다고 해서 돌아가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태후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태안제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그를 삭탈관직한다는 성지를 내렸다.
온 시랑이 벼슬을 떼였다!
이 소식은 전날 임가와 온가 두 가문이 갈라졌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사건의 후속 소식으로서 발빠르게 알려져 도성의 모두가 한가한 시간에 떠드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노부인은 이런 결과를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역시 반가운 소식이었기에 온선, 온유 자매가 왔을 때 아주 상쾌한 기분이었다.
“선아야, 유아야. 이미 족보도 정리가 끝났다. 앞으로 너희 자매의 성은 외할아버지 성을 따라 임씨다.”
임유(林惟)…….
온유, 아니 임유는 마음속으로 새 성과 이름을 붙여 되뇌어 본 다음 싱긋 웃었다.
외손녀, 아니 이제는 친손녀가 된 꽃처럼 어여쁜 두 자매를 보던 노부인은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온여귀의 삭탈관직 소식 때문에 두 자매가 혹시 마음이 안 좋을까 봐 걱정했다.
“너희 아비가 벼슬을 떼였다는 이야기는 들었느냐?”
자매는 서로 눈길을 주고받은 다음 입을 맞춘 것처럼 대답했다.
“들었어요.”
노부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멀쩡한 집안이 이렇게 되었으니 너희 마음이 어떨지 이 할미도 안다. 너희 아비가 그런 짓을 벌였다고는 해도 부녀간의 정이 어찌 쉽게 떨어지겠느냐.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꼭 기억해야 한다. 앞으로 너희 아비가 찾아오더라도 절대로 사사로이 처리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이 할미에게 말하거라. 알겠느냐?”
이번 일로 가장 큰 상처를 입은 건 딸 완청이었다. 하지만 가장 난감한 처지가 된 건 이 두 아이였다.
스무 해 동안 부귀영화를 누렸던 온여귀가 이제 모든 것을 잃었으니, 머잖아 두 딸을 찾아올 게 자명했다.
두 아이가 임씨가 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생부와의 혈연의 정을 끊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만약 온여귀가 찾아온다면 자신과 완청은 욕을 퍼붓고 매타작을 해서 쫓아낼 수 있었지만, 두 아이는 외면할 수 없을 터였다. 그랬다간 오히려 손가락질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노부인은 두 자매를 뒤에 숨기고 자기가 나설 생각이었다. 온여귀가 아버지 앞에서 마음 약해진 두 손녀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을 것이 걱정이었다.
“네, 알겠어요.”
임선은 눈을 내리깔고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틀 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그녀는 아버지가 정말 미웠다. 그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만약 아버지가 찾아온다면, 아버지가 죽든 살든 못 본 척 돌아설 수 있을까?
임선은 내적 갈등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노부인은 큰손녀가 어두운 표정이기는 하나 그러겠다고 하자 이번에는 둘째 손녀를 바라봤다.
언니가 괴로운 표정인 데 반해 임유는 마음이 한결 편해 보였다.
“할머니, 걱정 마세요. 전 이미 딱 잘랐어요.”
임유의 말에 노부인과 임선은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임유는 담담한 말투로 좀 더 분명하게 말했다.
“어제부터 저에게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밖에 없었어요. 이제 아버지는 없어요.”
그녀는 언니와 달랐다.
언니는 비록 아버지의 소행에 화가 났지만, 외할머니가 분을 참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또 어머니가 반미치광이가 되어 별채에 유폐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동생이 자기 집에서 도망쳐 한겨울에 길거리에서 죽어 눈에 파묻히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선량하고 순수한 사람은 혈연을 쉽게 끊을 수 없다. 하지만 최악의 절망을 맛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유아야…….”
하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그런 손녀가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손녀가 부녀의 정 때문에 그 썩을 놈에게 이용당할 것이 걱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손녀가 그런 아비에게 학을 떼고 극단적으로 변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