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마법사
제18화
18화. 첫 걸음
이혁은 손을 흔들어 선수 교체를 지시한 뒤, 조지를 불러들였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이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땠어? 쉽지 않지?”
조지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헐떡거렸다. 그는 확실히 프로 축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안 것 같았다.
“이건 단지 훈련일 뿐이야. 실제 경기는 이보다 몇 배는 더 힘들고 어렵지. 지금 네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어. 네가 프로팀에 있고 싶어하는 거야 충분히 이해한다만 여기 있으려면 거기에 걸맞은 실력이 있어야 하지. 솔직히 말해서 방금은 아주 엉망이었어.”
조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유스팀으로 가서 차근차근 훈련을 받자. 거기 있어도 돈은 받을 수 있어.”
그 말에 조지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진짜에요?”
“내가 왜 널 속이겠니?”
“얼마나 받아요?”
이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기왕이면 좋은 조건으로 계약서를 써주고 싶었다.
“한 주에 80파운드, 경기에 출전한다면 매월 35파운드의 비용을 지급, 한 골당 7파운드의 보너스가 주어지고 어시스트의 경우에는 3파운드. 이 정도면 유스팀 최고의 계약이야.”
이혁은 사실대로 말했다. 마이클 도슨과 앤리 레이드도 이 같은 조건으로 첫 계약을 했다.
그러나 조지는 망설이는 듯했다. 이혁이 물었다.
“왜 그래?”
“정말 가장 좋은 건가요?”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군.’
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슨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키 큰 사람 보여? 얼마 전에 1군으로 올라온 선수인데, 유소년팀에서 항상 최고의 대우를 받았지. 정 믿기지 않는다면 도슨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불러올까?”
조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이혁이 자신을 속이려는 것은 아닐 거라고 믿는 듯했다.
“이삿짐센터에서는 일주일에 얼마나 벌지?”
이혁이 물었다.
“이백 파운드요.”
그 정도 차이면 조지가 망설일 만도 했다.
“확실히 유스팀에서 축구를 하는 건 돈이 되는 일은 아니지. 하지만 프로가 되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야. 그리고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제안이기도 하고. 루니가 유스에 있을 때 받던 돈도 일주일에 80파운드를 넘지 않았어.”
“루니가 누군데요?”
축구팬이라면 그를 모를 수가 없지만 조지는 정말 축구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루니는 현재 잉글랜드에서 가장 주목 받는 신인이었다. 2002년에 16세의 나이로 프리미어리그에 첫 출전, 그리고 10월 19일에는 첫 골을 터뜨려 아스널의 30연승을 저지했다. 2004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 2007년에는 이미 최고의 축구 스타가 되어 있었다.
“음, 대단한 실력의 천재 선수고 너와 같은 나이지. 그가 지금 주급 얼마를 받는지 알아?”
조지가 알 리가 없다.
“그건 나도 몰라.”
이혁은 입을 벌려 웃었다.
“하지만 나중에 얼마를 받게 될지는 알지.”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20만 파운드, 그것도 주급으로!”
조지의 눈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감독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뭐, 예상이지. 하지만 거의 맞을 거야.”
4년 반 후의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니까 조급해할 필요는 절대 없어. 유스팀에서 열심히 훈련하고 배워 뛰어난 선수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지. 지금 버는 돈에 연연하지 말란 얘기야.”
이혁은 조지 우드가 나중에 어떤 선수가 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프로 데뷔도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보여줄 때였다. 그래야만 그가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스스로에게 달린 것이지만.
“지금 일주일에 80파운드의 계약을 하고 미래를 위한 훈련을 할래? 아니면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면서 매주 200파운드씩 벌래? 선택은 네 몫이야.”
여기까지 했으면 자기가 할 일은 다 했다. 이혁은 조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몸을 돌려 선수들이 훈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뒤,
“유소년 팀에 가겠습니다.”
조지가 말했다. 이혁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이건 네가 선택한 거야.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혁은 무조건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이 어린 아이에게 설명을 덧붙일 필요성을 느꼈다.
“계약서를 쓸 거야. 이를 어긴다면 벌금을 물어야 할 거고.”
조지는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렇다면 좋아. 라커룸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날 따라와.”
이혁은 조지를 데리고 유스팀 훈련장으로 향했다. 로니 감독은 유스팀 감독 출신이었지만 이혁으로써 그곳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프로팀 훈련장에 비해 이곳은 더 최신식이었다. 자동문에 제복을 잘 차려입은 경비까지, 다 새것의 느낌이었다.
로니 감독은 유스팀을 떠날 때, 코치였던 데이비드 커슬레이크에게 감독직을 물려주었다. 예전의 오랜 파트너였다 보니 로니를 보고 반갑게 반겼다. 이혁은 조금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용건을 말했다.
“조지 우드입니다.”
이혁은 조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이는 체격과 신체 능력이 괜찮더군요. 훈련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앞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보죠.”
데이비드는 조지를 한번 흩어보고 난 뒤, 이혁의 평가에 동의했다.
“확실히 몸은 좋네요. 어깨도 넓고 키도 크고.”
데이비드는 다소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조지에게 다가가 물었다.
“몇 살이지?”
“17세입니다.”
“어느 포지션을 좋아해?”
“포워드요.”
조지가 이렇게 말한 것에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었다. 포워드는 골을 넣는 포지션이고 골만 넣는다면 비교적 이름을 날리기 쉬울 거라는 착각 때문이었다. 조지는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 브라질의 전설 펠레, 한일 월드컵에서 조금 부진했지만 영국에서도 유명한 티에리 앙리 등 정말 유명한 축구선수 밖에 몰랐는데 그들이 모두 포워드였다는 사실에 편견을 가진 것이다. 이 때문에 축구를 잘 알지 못하는 조지는 공격수를 하는 것이 비교적 돈을 벌기 좋다는 착각을 가진 채 대답한 것이다.
“좋아. 라커룸에 가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와. 훈련을 시작해 보면 알겠지.”
조지가 멀어지자 데이비드가 물었다.
“로니, 무슨 일 있어요? 어째 표정이…….”
“음, 미처 말을 못한 게 있어서요. 저 아이는 축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네?”
“아마도 교과서로만 축구를 접한 애들보다도 더 모를 거예요.”
농담인 줄 알았던 커슬레이크는 이혁의 표정을 보고 그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로니…….”
“조지의 가정환경이 너무 복잡하고 또 많이 가난한 편이라…… 거기다 저를 한번 도와주기도 했고요! 그래서 유스팀에서 훈련을 받을 기회를 주기로 한 거에요. 어쩌면 프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 수도 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겠죠.”
데이비드는 한숨을 쉰 뒤 말했다.
“최선을 다 해 보겠습니다. 신체적 조건은 확실히 좋으니. 다만 처음 배우는 건데 벌써 나이가…….”
이혁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지만 어느 일이건 예외는 있으니까요. 조지가 예외가 될지 누가 알겠어요? 그에게 필요한 건 기회와 희망이에요. 우린 그걸 줄 수 있고요.”
“알았어요, 로니. 일단 맡기로 했으니 최선을 다해 가르쳐 볼게요.”
이혁은 웃으며 데이비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린 모두 폴 하트가 뽑은 사람이니……. 전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그들은 둘 다 폴 하트에 의해 발탁되었고 그로 인한 유대감이 있었다. 덕분에 이혁은 별다른 트러블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대화가 끝나자 이혁은 유스팀 훈련장을 나왔다. 이제 그가 조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다 해준 것이다.
* * *
프로팀 훈련장으로 돌아오자 워커가 다가와 구단주와 그의 아들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했다. 데겔티는 아들과 선수들을 인사시켰고 로니가 돌아온다면 사무실로 오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다른 말은 없으셨나요?”
워커는 고개를 저었고 이혁은 직접 가보기로 했다. 그가 막 발을 떼려고 했을 때, 워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구단주님 표정이 꽤나 심각해 보였어요.”
이혁은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 때문인지 그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전화로 그를 격려하지 않았던가?
불안한 마음을 안고 구단주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은 건물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노크한 뒤, 문을 열자 넓은 책상에 앉아있는 니콜 데겔티가 보였다. 그 옆에는 그의 아들인 에반 데겔티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구단주님, 그리고 에반씨.”
그를 보자마자 니콜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 장의 종이를 들고 이혁에게 걸어왔다.
이혁은 바짝 긴장했다. 혹시 잘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데겔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건 축구협회에서 보내온 것인데…….”
그렇다면 해고 통지서는 아닌 모양이다.
“그들이 내일 있을 청문회에 자네를 소환했네.”
이혁은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경기 후, 제가 했던 말이 문제가 된 건가요?”
니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역시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잘린다 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니콜은 그리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 자네를 지지하네. 나도 영상을 봤지. 그 두 골은 아무 문제가 없었어!”
이혁은 니콜을 멍하니 바라봤다. 구단주는 얼굴에 웃음을 띤 채 그에게 말했다.
“준비를 좀 해야지. 내일 아들이 자네와 같이 런던으로 갈 거야.”
“네? 하지만…….”
“자네가 잘못하진 않았지만 뱉은 말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져야 하지 않겠나.”
탓하지는 않지만 책임은 져라.
니콜의 메시지는 간단했고 이혁 역시 그의 말이 합당하다고 느껴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전 9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세계는 아직도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부슬부슬 쏟아지는 비가 창문을 두드려 타닥타닥하는 소리를 냈다. 앞 유리에서는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쏟아져 내리는 빗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이래서 이 나라가 싫어요.”
에반 데겔티는 운전 중이었다. 그는 옆에 앉은 이혁에게 말했다.
“뭐가요?”
“튀긴 생선, 감자튀김, 차, 그리고 맛없는 음식. 그리고…….”
에반은 장난스럽게 투정을 부리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 망할 날씨까지! 어떻게 날씨가 이럴 수 있어요?”
차를 탔을 때, 운전하는 사람이 에반 데겔티라는 것을 보자 이혁은 좀 놀랐다. 구단주 아들이 이런 일까지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대화를 하면서 가는 동안 그는 그저 자신과 비슷한 남자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스의 아들이긴 해도 그와 별로 거리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가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의 말에 이혁은 웃었다.
“데겔티씨…….”
“그냥 에반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요, 에반. 당신은 아주 유쾌한 사람 같아요.”
그 말에 에반은 어깨를 으쓱였다.
“고리타분한 영국인들과는 조금 다르긴 하겠죠. 아, 물론 로니 씨를 겨냥한 말은 아닙니다만.”
“하하,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영국 사람이 아닌가요?”
“아니에요. 전 미국인이에요. 여권 보여 드릴까요?”
에반은 확실히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이혁은 미국식과 영국식의 차이를 잘 몰랐지만, 아무튼 다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미국 토박이들과 조금 다르긴 하겠죠. 전 6살 때 노팅엄을 떠나 고모가 계신 휴스턴으로 가서 살았어요. 그곳의 빛나는 모래사장, 이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 날씨. 전 그곳이 정말 좋았어요. 영국의 겨울은 정말 악몽이에요!”
이혁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에반, 당신은 전혀 45세처럼 보이지 않아요. 25세 같은데요.”
“아, 감사합니다. 그게 좋아요.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있는 거지, 전 자유분방한 사람이에요.”
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의 아버지인 니콜 데겔티는 확실히 고리타분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건 사실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했다. 전통을 중요시하고 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매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축구든 다른 것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이혁은 완전한 영국인이라고 할 수 없어서 니콜보다는 에반 쪽에 더 가까웠다.
차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축구협회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니 이혁은 머리가 아파졌다.
에반은 그런 이혁의 마음을 알아챈 듯,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감독님을 위해서 변호사를 선임했으니 모든 일은 그에게 맡기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차 안은 다시 침묵 속으로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