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마법사
제17화
17화. 프로 축구의 벽
조지의 엄마인 소피아와 대화 중, 이혁은 조지가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 소피아는 자메이카인이었으며, 17살 때 영국에서 온 선원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녀는 가족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 먹은 상태였고 그녀의 배 속엔 3개월 된 아이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가족들과 멀어지게 된 그녀는 남자친구를 따라 영국까지 온 것이다.
헌데 남자친구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했으나 소피아는 낳기를 고집했다. 이 문제 때문에 두 사람은 싸웠고 남자친구는 곧 그녀를 떠나고 말았다.
소피아는 조지를 낳은 뒤, 무슨 일이건 닥치는 대로 하면서 17년이라는 세월을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조지는 15세 이후로 학교에 가기보다는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길을 선택했다. 슈퍼마켓, 택배, 주유소, 이삿짐 센터 등 그는 닥치는 대로 일만 했다. 하지만 조지가 버는 돈은 아픈 어머니를 모시기에는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이혁은 그가 왜 프로 선수가 될 생각을 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미디어에서는 프로 축구 선수를 오로지 자기 몸만 가지고, 억만장자까지 오르는 그런 존재로 포장해 방송하곤 한다.
소피아의 건강은 확실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조금만 해도 멈춘 뒤, 숨을 내쉬어야 했으며 가끔 격렬하게 기침을 하곤 했다. 아무 연고도 없이 영국에 홀로 남겨진 어린 여성이, 17년 동안 아이를 기르다 보면 누구라도 건강이 악화될 것이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이혁은 화제를 좀 전환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며칠 전 경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소피아가 축구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꽤나 열심히 듣고 있었다. 마지막에 이혁이 글렌 로드와 악수를 했던 일, 그때 자신이 한 마디 뱉은 말과 그와 동시에 글렌 로드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을 묘사했을 때, 소피아는 크게 웃었다.
* * *
조지는 문을 부서질 듯 세게 열고 들어와 단숨에 2층으로 뛰어왔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소피아와 로니가 식탁에 앉아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소피아는 놀란 눈으로 시계를 쳐다봤다.
“15분밖에 안 됐는데……. 조지, 다녀오긴 한 거니?”
조지가 비닐봉지를 꺼내 들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사오라고 했던 마스카르포네 치즈가 들어 있었다.
이혁은 조지의 얼굴이 새빨갛게 되고 또 숨을 헐떡거리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분명 쉬지 않고 뛰어갔다 왔을 것이다. 하지만 40분은 걸리는 거리를 15분 만에 주파하다니 신체 능력이 꽤 뛰어난 것 같았다.
이혁은 이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소피아는 그를 잡지 않았다. 단지 조지에게 그를 잘 배웅하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곳은 분명 낯선 이에게 호의적인 동네는 아니었다.
이혁과 조지는 집 밖으로 나왔다. 조지에 관한 얘기를 듣고 나니 왠지 그가 성숙해 보였다. 조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엄마하고 아무 일도 없었죠?”
“그냥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야. 내 직업에 대한 얘기, 뭐 이런저런 이야기, 너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들었고.”
그 말을 들은 조지는 안심하는 듯했다.
“어머니가 엄청 동안에다가 미인이시던데? 열일곱 살짜리 아들이 있는 여자라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이혁은 그저 칭찬을 한 것이지만 조지는 걸음을 멈추고 이혁을 노려보았다.
“엄마한테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는데.”
“하여튼! 엄마한테 수작을 부리는 놈이 있다면 그게 누구건 간에 내가 다 죽여버릴 거예요!”
그는 정말로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이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걱정 마. 난 죽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대로변까지 나오자 이혁은 이제 조지에게 들어가 보라고 했다. 그는 꾸벅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잠깐.”
이혁이 돌아가려는 조지를 불러 세웠다. 그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노트에서 종이 한 장을 찢은 후,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훈련장의 주소 등을 적어 조지에게 건넸다.
“내일 아침 9시 반까지 여기 적힌 주소로 와서 날 찾아. 경비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다면 내가 널 오라고 했다고 말하면 될 거야.”
갑자기 이혁이 기회를 주자 조지는 얼떨떨한 것 같았다. 쉽게 종이를 받지 못하자 이혁은 직접 손에 쥐어주었다.
“한 번의 기회를 줄 수는 있어. 하지만 선수가 될 수 있을지는 스스로에게 달린 문제다.”
말을 마치고 이혁은 그와 헤어져 택시를 잡았다. 과연 그가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을까? 17세인 조지가 온 힘을 다해 다른 일을 한다 하더라도 고등학교 학력조차 없는 그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분명 축구는 그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일 수 있었다.
기회야 그건 자신이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과연 붙잡을 수 있을지. 거기부터는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1월 7일 화요일.
이틀간의 휴가가 끝나고 다시 훈련장으로 돌아온 선수들은 모두 축 늘어져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이혁은 연신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국, 그는 훈련 중지를 외치고 체력 코치인 앤디 스토웰과 보조 코치들을 불러 오늘은 신체 능력 회복 훈련만 하는 것으로 바꿨다.
이혁은 훈련에 대한 지식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훈련은 모두 코치인 데비 워커와 이안 보이어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골키퍼 훈련은 골키퍼 코치가 담당했고 선수들의 운동이나 체력, 에어로빅 훈련은 체력 코치가 맡아서 했다. 모든 훈련마다 담당자가 정해져 있어서 사실 이혁이 신경 쓸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조정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갔다.
한창 훈련이 진행되던 중, 의사 두 명이 훈련장에 도착했다. 콘스탄틴 교수의 부탁으로 온 것이었다. 이혁은 그들을 데리고 의무실로 가서 팀닥터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현재 노팅엄 포레스트의 팀닥터는 35세의 아일랜드인 게리 플레밍과 58세의 존 하셀던 두 사람이었다.
새로 온 두 명의 의사는 모두 55세 이상으로 노팅엄 대학병원에서 은퇴한 의사들이었다. 그들 또한 노팅엄 포레스트의 열혈팬이기도 했다. 이들이 팀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두 분은 스티브 더윈, 로그 라리즈라고 합니다. 당신들의 새로운 동료이기도 하죠. 게리, 이분들에게 지금 우리 팀의 상황과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해주세요. 전 이만…….”
간단한 소개를 마치자 이혁은 그들과 악수를 하고 자리를 떴다. 훈련장으로 돌아오자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네, 여보세요?”
“로니 감독님, 여기 어떤 소년이 감독님을 찾는데요. 이 아이 말로는 감독님이 부르셨다고 합니다.”
이안 맥날의 목소리였다. 이혁은 시계를 보았다. 9시 30분, 1분의 오차도 없었다.
“네 맞아요. 제가 부른 겁니다. 데리고 와주세요.”
10분이 지났다. 이안은 조지를 이혁의 앞까지 데리고 왔다.
이혁은 그의 앞에 선 조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제보다 얼굴이 깨끗해졌고 새 옷을 입고 새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아침은 먹었나?”
이건 아주 한국인스러운 질문이었다. 조지는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먹었어요.”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이혁도 이게 이상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아서 바로 화제를 돌렸다.
“버스를 탄 다음에 내려서 뛰어왔어요.”
조지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혁은 어제 그가 40분은 걸리는 거리를 15분 걸려 다녀왔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조지는 확실히 건강한 소년이었다.
“아주 좋아, 날 따라와. 네가 앞으로 있어야 할 곳은 북쪽에 있어.”
조지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여기가 아니구요? 여기가 바로 훈련장 아닌가요?”
“여긴 프로팀 훈련장이지. 네가 가야 할 곳은 유소년팀 훈련장이야.”
그 말에 조지가 걸음을 멈췄다.
“유소년팀이요? 거긴 가고 싶지 않아요. 전 프로 선수가 돼서 주급과 상금을 받아야 한다고요!”
이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축구를 안 해봐서 모르는 것 같은데, 여긴 성인팀이야. 유소년팀을 거치지 않고 프로가 되는 선수는 없어!”
그러나 조지는 그 자리에 뿌리를 박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전 꼭 이곳에 있겠어요. 프로가 돼야만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잖아요!”
다른 사람이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린다면 짜증이 났겠지만 조지의 상황을 알기 때문에 화를 낼 수도, 그를 비웃을 수도 없었다. 이혁은 그를 달래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좋아, 그럼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지. 저기 저 사람들 보이지?”
이혁은 훈련 중인 선수들을 가리켰다.
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 뛸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면 프로팀에 넣어주지. 네가 실력이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도 납득해야 하잖아?”
“어떻게 증명해야 하죠?”
“간단해. 경기를 한번 해 보면 되지.”
조지는 축구를 너무 쉽게 보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졸라서 프로가 될 수 있다면 프로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에게 쓴맛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초보자와 프로 선수 간의 경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자명했다.
“좋아요!”
이혁은 큰 소리로 훈련을 중지하라고 외쳤다. 데비 워커가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감독님?”
“간단하게 연습 경기나 한 판 괜찮으신가요? 이 애를 넣어서 말이죠.”
워커가 기묘한 표정으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혁이 다른 코치 한 명을 불렀다.
“이 애를 데리고 라커룸으로 가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게 해주세요.”
조지가 코치를 따라가자 워커가 입을 열었다.
“저 아이는 누구죠?”
“음. 길거리에서 만났는데 재능이 있어 보이고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하길래 오늘 한 번 와보라고 했습니다. 뛰는 것을 보고 싶기도 하고 유스팀에 넣기 전에 프로 축구가 어떤 건지 겪어보면 좋겠다 싶어서 연습 경기를 했으면 하는 거고요.”
곧, 조지가 옷을 갈아입고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유니폼을 입자 그는 꽤나 축구 선수처럼 보였다.
“음, 잘 어울리는군. 저쪽 조끼를 입지 않은 팀으로 가서 뛰어봐. 워커, 코치님은 심판을 봐주세요.”
그리고 이혁은 팔짱을 낀 채 경기장 옆에 서서 경기를 지켜보았다.
조지가 축구를 못 한다는 사실은 금방 드러났다. 그는 팀원들과 전혀 호흡을 맞추지 못했다. 그의 포지션은 공격수였는데 공이 있는 곳을 따라 달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공을 따라잡을 쯤이면 선수들은 공을 다른 곳으로 패스했고 그러면 조지는 또 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경기가 시작된 지 10분이 지났지만, 그는 공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워커는 그런 그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조지에게서 어떠한 재능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이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체력이 좋고 속도가 빠르다는 것 외에는 축구 선수로서의 자질이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 육상을 하면 되지 굳이 축구 선수가 될 필요가 없었다.
조지와 한 팀인 선수들도 왜 전혀 축구를 할 줄 모르는 사람과 같이 경기를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듯했다. 심지어 그는 축구를 제대로 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