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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물의 보옥 (2)

"다들 고생했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무기술 훈련이 끝난 뒤, 나는 마침내 오늘 훈련의 성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예, '검술(F)'을 습득하였습니다.]

기예.

특수한 조건으로 얻으며, 몇몇 성장형 특성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성장이 불가능한 특성과는 다르게 기예는 스스로 단련한 힘을 말한다.

F급.

이 세계에서 현재 내 검술 수준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니, 바꿔서 생각하면 고작 하루 훈련을 했을 뿐인데 검술 특성을 개방한 것부터 꽤 좋은 소식이었다.

아무리 겉으로 보고 베낀 것에 불과하다 한들, 베이스 자체가 워낙 좋다 보니 평가가 꽤 후했던 모양이었다.

일단 겨울성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걸음은 내디딘 셈이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고 생각해야겠지.'

겨울성의 나날이 계속됐다.

* * *

──────────────

이름 : 벨 블랙우드

레벨 : 1

체력 : 1

근력 : 1

정신력 : 2

특성 : [멸망 유예자(EX)], [병기 소환(??)]

기예 : [검술(F)]

마법 : ─

──────────────

* * *

"오늘 전할 말이 있네."

어제의 무기술 훈련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은 에드릭이 말했다.

"원래였다면 오늘도 기초 체력 훈련과 무기술 훈련을 해야 하지만... 내부 사정으로 인해서 일정이 바뀌었네. 오늘 훈련은 실전 훈련일세."

"실전 훈련이라면 어떤 훈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수 사냥이라네."

훈련을 시작한 지 이제 고작 이틀 차가 되었을 뿐이건만, 실전 훈련도 모자라서 마수 토벌이라니....

과연 겨울성다웠다.

"비록 체력적으로는 충분하지 않지만, 나는 대원들이 잘해 낼 수 있을 거라 믿네. 또한, 그에 대한 포상으로 이번 마수 사냥에서 가장 뛰어난 훈련 성과를 보인 대원에게는 하루 휴가를 주지."

"그 휴가 동안은 자유입니까?"

"그렇네. 원한다면 겨울성 밖으로 외출해도 좋고."

외출이라....

아무래도 생각보다 물의 보옥을 손에 넣을 기회가 빨리 찾아온 듯했다.

"실전 훈련이라."

"마침 겨울성 주변 지형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는데, 잘됐어."

훈련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실전에 돌입한다는 말이 나왔음에도 제4 특무대원 중에서 긴장한 이는 누구도 없었다.

"흐암...."

콘란 같은 경우는 아예 대놓고 하품을 하며 지루함을 표할 정도.

죄수 호송 마차에서처럼 마봉석에 팔다리가 묶여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들에게 있어서 마수와의 실전은 그리 특별할 게 없는 일이라는 소리였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 다들 만만치 않은 이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마경으로 가는 겁니까?"

내 질문에 에드릭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우리는 타스만으로 간다."

타스만이라면 겨울성의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 당연히 겨울성 북쪽인 마경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마수들의 출몰이 꽤 잦은 곳이다.

실제로 죄수 호송대가 겨울성으로 올 때 마두견 무리에 의해서 습격을 받기도 했고 말이다.

"최근 타스만 지역에서의 마수 출몰이 잦아졌다. 대규모 무리는 겨울성을 넘지 못하지만, 간혹 겨울산맥을 넘어오는 소규모 무리가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많아졌어. 마침 우리가 실전 훈련을 하기에 좋은 기회인 셈이지."

그게 왜 입대한 지 이틀째인 우리에게 좋은 기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나로서도 좋은 기회인 건 사실이었기에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질문 있나? 없다면 각자 군장 결속 후에 바로 출발하겠다."

"없습니다!"

"여전히 목소리 좋군. 아주 좋아."

에드릭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나같이 보통 성질머리가 아닌 제4 특무대원들이 유독 에드릭에게만큼은 맥을 못 추는 이유는 그가 바로 어제 우리를 개처럼 굴린 우리의 직속상관이라서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에드릭이 명백한 강자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걸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함을 지닌 알비노조차도 에드릭 앞에서는 한 명의 군인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뭐... 알리시아 같은 경우는 또 모르겠지만.'

알리시아는 제4 특무대원 중에서 대장인 에드릭만큼이나 의미심장한 여자다.

특히, 이전에 콘란과 맞붙을 때 보였던 마법은 나 또한 알고 있는 마법이었다.

'분명히 징벌 교단의 마법이었다.'

징벌 교단은 마법사를 척결하는 종교이지만, 정작 교단 내에서도 마법을 배우는 이들은 존재한다.

징벌 교단의 이단 심문관들.

알리시아가 콘란을 상대할 때 썼던 마법은 징벌 교단이 죄인을 제압할 때 주로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이단 심문관이라....'

징벌 교단의 이단 심문관이 징벌 교단에 의해서 겨울성으로 차출되는 죄수가 되었다라....

척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일단은 경계하는 게 좋겠지.'

뭐... 애초부터 제4 특무대 내에서 믿을 놈은 하나도 없었지만 말이다.

* * *

특무대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인지 지급된 기본 보급품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상 필수품이라고 볼 수 있는 두터운 방한 장비는 물론이고, 특수하게 제작된 수통은 혹한의 환경 속에서도 물이 잘 얼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서 방어구 역시도 움직임이 제약되는 무거운 쇠갑옷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마수의 가죽을 가공한 갑옷을 지급했다.

마수 가공 장비는 보통 상당한 가격을 자랑하지만, 상대적으로 마수 부산물 수급이 손쉬운 겨울성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지급된 모든 장비가 겨울성이라는 혹한의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허약한 내 육체로 이걸 입은 채로 군장을 메니 그대로 뒤로 나자빠질 것 같단 점이다.

아무리 마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 쇠갑옷보다는 가볍다고 해도, 나에게 있어서는 무거운 건 둘 다 같았다.

"쯧. 똑바로 서라."

그렇게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불쑥 콘란이 나를 잡아 세우며 혀를 찼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의외였기에 명경지수의 마음을 지닌 나조차도 잠시 떨떠름할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

"준비나 해라. 너 때문에 늦어지면 대장이 또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렇게 툭 내뱉으며 뒤돌아서는 모습이 그, 뭐랄까... 나로서 하여금 츤 뭐시기로 시작하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콘란은 처음에 죄수 호송 마차에 있을 때부터 친절히 내 질문에 답해 주었던 녀석이었다.

단지 관계의 첫 단추를 잘못 꿰었기에 이 꼴이 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렇게 악독한 녀석이 아닐지도 모른다.

'흉악 범죄자지만 말이지.'

그러나 모든 건 상대적인 법.

주변에 알비노나 알리시아 같은 수상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만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겉과 속이 같아 보이는 콘란이 아주 좋은 녀석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척진 녀석이 있는 마당에 더 이상 적을 늘리는 건 그리 좋아 보이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굳이 나쁘게 대할 필요는 없겠지.'

집합 시간이 머지않았다.

* * *

"왔군. 바로 타라."

집합 시간이 된 이후 겨울성의 남문에 도착하자, 에드릭이 마차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 상태로 어떻게 타스만까지 걸어가나 했는데, 다행히도 이동은 마차로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마차라기보다는 그저 말 두 마리가 이끄는 짐수레 같은 느낌이 더 강했지만, 이게 어디인가.

"지금 당장은 자네들 중 누가 말을 탈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이렇게 이동하지만, 다음부터는 말을 타고 이동할 테니 알아 두도록."

에드릭은 이제 우리가 막 이틀째가 된 병사라는 걸 똑바로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경험이 이전에도 숱하게 있었다는 듯이.

'아니... 그럴 수밖에 없나.'

에드릭은 어째서 새로 만들어진 제4 특무대를 책임지게 되었을까.

원래 에드릭이 있던 곳은 어디고?

무려 6레벨 이상의 강자인 에드릭이 고작 대원이 넷뿐인 특무대에 부임한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무튼, 수상해.'

그러나 나는 그쯤에서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에드릭은 우리와 같은 마차에 타지 않고 따로 말을 탔다.

검은 갈기가 돋보이는 엄청난 덩치의 흑마였다.

"말이 멋지군요."

"필레온이라고 하지. 듣기로는 마수의 피가 조금 섞였다고 하더군. 나와 함께 무수한 전장을 헤쳐 온 녀석이야. 이쯤 되면 전우라고도 할 수 있지."

에드릭이 뿌듯해하듯이 말했다.

조금 잘 보일까 해서 말 칭찬을 해 봤더니, 필요 이상으로 잘 먹힌 느낌이었다.

"임무가 정확히 뭡니까?"

"임무가 아니라 훈련이야. 훈련 내용은 타스만 지역 순찰 및 해당 지역에서 출몰하는 마수 토벌이고."

대체 그게 무슨 차이인가 싶었지만, 에드릭은 당당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네."

나와 에드릭의 대화가 끝나자, 마차 위는 고요했다.

애초에 그나마 사이가 나은 편이었던 콘란과 알비노의 사이가 틀어지고, 평소에도 말이 없는 알리시아까지 더해지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달리는 마차 위에서 북부의 차가운 냉기가 그대로 칼바람이 되어서 피부를 스친다.

'...이렇게 껴입어도 춥긴 춥네.'

마음 같아서는 이동 시간 동안 게시판이라도 보고 싶었으나,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마차는 사실상 사방이 뚫려 있는 짐수레에 가까운 형태를 가지고 있다.

어디서 눈먼 돌팔매질이라도 해 온다면 그대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나는 게시판을 보는 대신에 조심스레 주머니 안에 있는 콜트 패리슨 B-09을 어루만졌다.

평상시였다면 굳이 먼저 소환해 두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은 전투에 나서는 만큼 쿨타임을 돌려 둘 겸 미리 소환해 둔 것이었다.

일전에 틈틈이 확인해 본 바에 따르면, 병기 소환 특성의 쿨타임은 소환한 직후부터 돌기 시작한다.

즉, 지금 나는 한 번에 총 12발의 총알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다.

이 정도 화력이라면 웬만한 마수 무리가 달려들어도 내 한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을 터.

'총알이 전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마수도 있지만... 마경도 아니고 겨울성 남부에 그런 게 있을 가능성은 낮겠지.'

F급에 불과한 내 검술은 아직 실전에서 목숨을 걸고 활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일단 오늘 있을 실전 훈련에서는 근접 전투는 웬만해서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경계의 기색을 늦추지 않은 채로 얼마나 이동했을까.

"다들 준비하도록."

"예?"

의문은 그리 길지 않았다.

-끽, 끼긱!

-크루루! 크루루루!

멀찍이서 들려오는 마수의 울음.

근처에 마수 무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훈련 내용은 기억하겠지? 가장 큰 성과를 보이는 자에게 하루 휴가를 주지."

제4 특무대원들이 모두 각자의 무기를 쥐고서 마차에서 내렸으나, 에드릭은 여전히 말 위에 탄 그대로였다.

"대장님은 안 도와주십니까?"

"응? 내가 말하지 않았나, 훈련이라고. 내가 나서면 훈련이 너무 쉬워지지 않겠나?"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철컥-

멀찍이 있는 마수가 보인다.

거리는 약 200m.

권총으로는 맞히기 쉽지 않은 거리였지만, 에드릭 앞에서 임팩트를 주기에는 더없이 적당한 거리다.

타아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총구에서 번개가 튀었다.

11화 물의 보옥 (3)

총성의 굉음은 이것을 생전 처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천둥이 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끼엑!

특별히 명중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운 좋게도 총알이 적중했는지 수풀 너머의 마수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공정의 세계는 중세 판타지 세계관으로서 총이라는 것이 아예 원형조차 개발되지 않은 세계관이다.

그렇기에 과학보다는 마법이 친숙한 이 세계에서 모든 이적은 마법으로 치부된다.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역시 엄청난 마법이군."

"...."

콘란과 알비노, 심지어 알리시아까지도 단 한 발의 총격이 만들어 낸 일에 입을 떡 벌렸다.

이들은 이미 한 차례 내가 총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긴 했으나, 그건 죄수 호송 마차 내에서 마봉석을 끊어 낼 때의 이야기였다.

총이 지닌 파괴력과 유효사거리는 천방지축 날뛰던 제4 특무대원들조차도 잠시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과연, 그게 자네의 마법인가. 호송대장이 그렇게 칭찬하더니 듣던 대로 엄청나군."

6레벨 이상의 강자, 에드릭조차도 총의 위력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는지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꾸륵, 꾸루룩!

-꾸루루!

첫 번째 총성을 일종의 신호탄으로 마수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온다!"

콘란의 외침과 함께 수풀 사이에서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Lv.1]

[변이 토드]

일전에 상대했던 마두견들이 개의 형태를 띠고 있다면, 지금 모습을 드러낸 변이 토드는 덩치가 큰 두꺼비와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첫 여섯 발은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당장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총알의 수는 총 12발.

본래였다면 아끼고 아꼈을 테지만, 애초에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생존이 아닌 사냥이다.

나 또한 성과를 보여야 하는 입장인 만큼 어느 정도까지는 날뛰어 볼 생각이었다.

철컥─

다양한 근육을 사용해야 하는 궁술과는 달리, 총을 사용하는 건 총을 들 수 있는 최소한의 근력 사용과 더불어서 그저 손가락만 당기기만 하면 된다.

물론 총의 반동이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그건 총을 발사한 이후지 발사하기 전이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속도가 아닌 정확도가 중요한 사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나 냉정함일 것이다.

이미 말했듯 과거의 포수들은 호랑이가 눈앞에서 달려오는데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서 기회를 엿봤다고 한다.

내가 그들만큼의 용맹함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멸망 유예자 특성은 나에게 그 이상의 냉정함을 부여했다.

타앙─!!

다시금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또 한 마리의 변이 토드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조금 전의 사격이 요행이었다면, 이번 사격은 거리가 워낙 가까웠기에 빗나가려야 빗나갈 수가 없었다.

"...저 정도의 마법을 연달아서 사용한다고? 미쳤군."

강력한 마법은 그만큼 강력한 대가를 필요로 한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인 알비노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금 총구를 돌렸다.

지금 내가 잡은 변이 토드는 둘.

아직 한 마리도 채 잡지 못한 다른 경쟁자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앞서 나가고 있는 셈이었다.

"우오오!"

콘란의 철퇴가 변이 토드의 몸을 후려치자, 변이 토드의 몸이 날아갔다.

이미 알고 있던 대로 콘란의 거체에서 나오는 신력은 이미 보통의 것을 넘어서 있었다.

"흥!"

알비노 역시도 이에 질세라 마법을 펼쳐 내며 변이 토드를 제압했다.

[끄룩!]

변이 토드의 몸이 굳었다.

푸욱!

알비노는 몸이 굳은 변이 토드의 심장에 너무나도 쉽게 검을 찔러 넣었다.

'정신계 마법인가? 아니, 어쩌면 감각계 마법일 수도 있겠어.'

뭐가 되었든 간에 매우 강력한 마법인 만큼, 알비노가 지금껏 보였던 자신감이 이해될 정도였다.

알리시아 또한 유려한 몸놀림으로 변이 토드를 상대했다.

비록 일전에 보였던 징벌 교단의 마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단순한 움직임만으로도 변이 토드를 농락하는 데는 차고 넘쳤다.

'과연.'

나도 놀고 있을 틈은 없었다.

당장은 내가 조금 앞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내가 지닌 총알은 한정적이었으니까.

초조해질 법도 한 상황이었지만, 멸망 유예자가 나에게 부여한 냉정함은 쉽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조준, 발사.

타아아앙!!!

총성과 함께 또 한 마리의 변이 토드의 머리가 터졌다.

[꾸룩!]

이미 알고 있었던 대로라고 해야 할지, 제4 특무대는 대장인 에드릭이 나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쉽게 변이 토드 무리를 상대했다.

물론 그 와중에 연계나 협동 같은 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워낙 개개인의 전투력이 막강하기에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으랴압!"

내 방아쇠가 또다시 당겨지기 무섭게 콘란의 철퇴가 빙글 돌았다.

그 순간.

[꾸루루!]

콘란의 뒤를 노리는 변이 토드.

저대로라면 콘란의 반응이 늦을 게 분명했기에 나는 총구를 돌렸다.

철컥─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타앙!─

[끄룩!]

총성과 함께 콘란의 배후를 덮치려던 변이 토드가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방심했군. 고맙다."

"무슨."

콘란이 감사함을 표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새삼스레 낯간지러운 것을 느끼면서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변이 토드는 남아 있었다.

'계속해 보자고.'

사냥이 계속됐다.

* * *

"후우... 끝인가?"

"그런 것 같군."

제4 특무대의 활약과 함께 열 마리 남짓이었던 변이 토드 무리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모두 쓸려 나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사냥한 변이 토드 무리 중에서는 마 속성을 지닌 존재는 없었다.

당연히 승천석 파편 역시도 없었고.

덕분에 그리 어렵지 않게 정리가 되었지만, 승천석 파편을 쉽게 손에 넣을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깝기도 했다.

'뭐... 기회가 있겠지.'

내가 잡은 변이 토드는 총 다섯 마리.

다른 이들이 정확히 몇 마리씩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반절 정도를 내가 사냥했으니 누가 가장 큰 성과를 보였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다들 훌륭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잘해 주었어. 앞으로가 더욱더 기대가 되는군."

에드릭은 진심으로 자랑스럽다는 듯이 우리를 치하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다. 오늘은 복귀해서 다들 푹 쉬도록. 또한, 오늘 훈련 성과를 보아서 저녁부터는 벨과 콘란의 금식령을 해제하겠다."

"저, 정말입니까?"

콘란이 목소리까지 떨면서 되물었다.

그 정도로 이틀 동안의 굶주림은 콘란은 물론이고 나 또한 꽤 힘들었다.

"그래. 내가 따로 이야기해 놓을 테니, 저녁 식사는 기대해도 좋을 거다."

"오, 오오...."

콘란은 진심으로 감격한 듯했다.

"가장 큰 성과를 보인 자는 벨이다. 너희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테니 이견은 없을 테지."

"...없습니다."

"...."

알비노는 탐탁지 않은 듯했으나 나서지 않았고, 알리시아는 언제나처럼 침묵했다.

무언가 꼬투리를 잡기에는 실제로 내가 이번 마수 사냥에서 보인 성과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바로 복귀한다. 다들 마차에 오르도록."

"그냥 짐수레 아닙니까?"

"마차다."

에드릭은 꽤 완고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짐수레인데.

"그러고 보니, 오늘 체력 훈련을 하지 않았군. 겨울성까지 구보로 가는 것도 좋겠어."

"마차가 참 아늑합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해 주니 기쁘군."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 * *

이제 고작 이틀째가 되었을 뿐이지만, 왜인지 겨울성으로 돌아가는 길이 꼭 집으로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군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막사로 돌아갈 때, 집에 가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은 기분이랄까.

뭐... 엄밀히 따지면 지금 내가 있는 이곳도 군대이긴 했지만 말이다.

마침내 겨울성에 도착하자, 에드릭이 말했다.

"다들 막사로 복귀한 후, 군장 정리를 마치고 식사할 수 있도록. 그리고 벨은 잠깐 나 좀 보지."

"저 말입니까?"

"그래, 자네."

에드릭은 나를 자신의 집무실에 불렀다.

제4 특무대장이라는 직함 때문인지 아니면 에드릭의 강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에드릭의 집무실은 꽤 좋은 편이었다.

나름대로 겨울성 내에서의 위치가 낮지 않다는 뜻이었다.

"자네가 사용하는 마법을 봤네. 믿기지 않는 위력이더군. 그 정도 마법이라면 필시 엄청난 대가를 치렀을 텐데, 그 정도로 하루 휴가를 나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

에드릭은 내가 어떻게든 휴가를 받아서 나가고자 한다는 사실을 꿰뚫었다.

물론 그건 내가 사용하는 게 마법이라고 생각하기에 생긴 오해였지만, 어쨌거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는 점은 분명했다.

나 또한 여기서 어설픈 거짓말을 해 봐야 소용없었기에 차라리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겨울성 밖에서 찾아야 할 게 있습니다."

"휴가는 하루뿐일세. 찾고자 하는 게 고작 하루 정도로 찾을 수 있는 건가?"

"해 봐야겠죠."

"흐음... 그렇다면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하게, 혹시라도 지원이 미비하여 자네 정도의 마법사를 잃기라도 한다면, 겨울성의 입장에서는 큰 손해일 테니."

마침 그 말을 기다렸다.

"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염치 불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장교용 방한복과 모자를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갈 곳이 조금 많이 추워서요. 그리고 쉽게 젖지 않는 레코스 가죽으로 만든 신발과 여분의 부싯돌, 록그의 가죽으로 만든 수통, 하루 치 건식과 응급처치용 약초와 붕대, 부목이면 됩니다."

"...."

에드릭의 표정이 그대로 벙쪘다.

12화 물의 보옥 (4)

일전에도 말한 적 있듯이, 겨울성 병사에게 주어지는 기본 보급품 수준은 상당히 괜찮은 편에 속한다.

제국의 최북단이자 마경과의 국경 지대인 겨울성 크로이츠는 그만큼 제국 내에서 막대한 예산과 지원이 퍼부어지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겨울성에서 수급되는 마수 부산물의 양 역시도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관점에서였고, 이곳이 바로 북부의 최전선인 겨울성임을 생각한다면 기본적인 병사 보급품보다 더 괜찮은 장비가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바로 장교에게 기본적으로 보급되는 장교용 보급품이다.

병사용과 장교용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는 역시나 장교용 방한복이나 장갑과 부츠에는 마수 소재가 재료로 들어간다는 점일 것이다.

마수 소재는 의류나 방어구 부분에 있어서 매우 좋은 재료로서, 어떤 마수의 어떤 부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방어구의 용도와 수준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기에 장교용 방한복이나 방어구는 기본적으로 병사용보다 훨씬 더 가볍고 방한 성능도 뛰어난 데다가, 심지어 방어 성능까지도 더 좋다.

그렇게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장교용 보급품이지만, 애석하게도 보통 장교쯤 되는 겨울성의 군인들은 보급품보다는 개인적으로 마련한 방어구를 주로 선호한다.

늘 목숨을 내놓고 전장에 나서야 하는 겨울성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장비를 원하기 때문이다.

제4 특무대장이자 내 직속상관인 에드릭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에드릭은 많고 많은 겨울성 장교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장비를 착용한 이로서,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나는 저 장비들이 어떤 마수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것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바그돈의 가죽에 기르의 비늘을 덧댔군. 거기에 더해서 오우거의 힘줄까지 소재로 사용했어. 저 정도면 겨울성의 장교들이 입은 장비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이라고 봐야겠지.'

즉, 지금 에드릭이 겨울성에서 보급 받은 장교용 보급품은 현재 에드릭의 집무실 어딘가에서 썩어 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얼핏 내 부탁이 무리해 보이면서도 무리가 아닌 근거였다.

"...흠흠, 그 정도라면 충분히 내 직권으로도 지원해 줄 수 있네. 장교용 방한복은 내 걸 빌려줄 테니 지금 바로 가져가도 좋아. 나머지도 바로 준비해 주지."

"감사합니다."

조금 전 마수 토벌 때 활약한 보람이 있었는지, 에드릭은 순순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아니면 그 정도 부탁쯤은 별로 어렵지도 않은 부탁이라고 생각했거나.

그중 무엇이든지 간에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내일 바로 출발할 건가?"

"예. 서두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알았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잘 해결하고 오기를 바라겠네."

에드릭은 순순히 내 휴가를 허가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대놓고 지원까지 해 주었다.

입대 이틀 차에 휴가를 가는 군인은 세상천지에 나밖에 없을 것이다.

뭐... 애초에 탈영을 하려야 할 수 없는 겨울성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애초에 탈영 같은 건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는 거겠지.'

겨울성을 떠나 봤자 이 근처에서는 갈 곳이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사람이 지낼 수 있는 장소는 모두 겨울성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만약 탈영을 한다면 혹한의 추위와 마수 무리를 뚫고서 홀로 북부 지대를 벗어나야 한다.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일단 이것부터 받게. 나머지 필요 물품들은 출발 전까지 준비하도록 지시해 놓지."

에드릭에게 받아 든 장교용 방한복과 모자, 신발은 사실상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소위 말하는 A급 상태.

예상했던 대로 애초에 에드릭 본인은 거의 쓴 적이 없는 듯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대원의 첫 휴가 아닌가? 당연히 이 정도는 신경 써 줘야지."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아, 그리고."

에드릭의 웃음이 멎었다.

"강력한 마법은 그에 걸맞은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이지. 부디 자네의 이번 볼일이 그만한 대가를 치를 만한 일이었기를 바라지."

에드릭의 그 말이 어딘가 묘하게 들려왔다.

* * *

에드릭의 장비를 한 아름 끌어안고서 막사로 돌아가자, 막사 내의 분위기가 무언가 이상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원래도 막사 내의 분위기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평소보다도 더 이상했다.

"이봐."

그 기묘한 분위기를 깬 건 콘란이었다.

"왜?"

"대장이 너를 왜 불렀지?"

아, 그것 때문이었나.

하긴 이들의 입장에서는 에드릭이 따로 누군가를 부른다는 게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휴가 잘 다녀오라던데."

"...그게 전부인가?"

"어."

콘란이 턱짓으로 내가 들고 온 짐 꾸러미를 가리켰다.

"그건?"

"방한복이랑 몇 가지 장비. 내일 휴가 때 입고 다녀오라고 빌려주시더군."

"흐음... 그런가. 의외로군."

"첫 휴가잖나."

물론 입대 이틀 차의 휴가지만 말이다.

"이봐."

그렇게 자리로 돌아가려던 찰나, 알비노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나한테 볼일 있나?"

"...너, 엄청난 마법사더군. 강력한 마법을 지닌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

"할 말이 뭐지?"

"내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 왜 순순히 겨울성으로 끌려온 거지? 너 정도의 마법사라면 이런 신세가 되지 않고도 다른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런 말이었나.

나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이지만, 나를 엄청난 마법사로 알고 있는 알비노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이곳에서 할 일이 있어. 그뿐이야."

어차피 진실을 말해 봐야 먹히지 않을 테니, 나는 이 정도로 말해 두었다.

의외로 사람들은 뻔한 진실 따위를 잘 믿고 싶지 않아 하는 법이었으니까.

"...과연. 알았다. 지난날의 앙금은 잊지, 앞으로 함께 지낼 사이인데."

의외라면 의외로 알비노가 먼저 화해를 청해 왔다.

괜히 위험한 마법사인 나와 척을 져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을 한 것인지 앞에서 화해를 청하면서 뒤에서 뒤통수를 칠 생각을 하는 화전양면전술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은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알비노를 믿는 건 아니다.

다만, 나 또한 알비노와 계속해서 대치하는 건 조금 피곤하기도 했으니 이쯤에서 쓸데없는 신경전은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좋아. 앞으로 잘 지내 보자고."

알비노가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 손을 맞잡았다.

서로가 무슨 생각을 숨기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채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날 것 같았던 알비노와의 대립은 잠시 일시적 휴전 상태로 접어들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그런 휴전 상태 말이다.

* * *

고작 하루 외출에 불과했으나, 향하는 장소가 장소인 만큼 준비할 건 꽤 많았다.

에드릭에게 받은 방한 장비부터 시작해서 군장에 넣을 건식과 부싯돌, 수통과 무기와 기타 장비.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에드릭의 서명이 들어간 외출 허가증 역시도 놓치지 않고 챙겼다.

거기에 더해서 혹시나 해서 게시판에 아이추웡의 닉네임을 검색해 보았으나, 이미 알고 있던 대로 새로 갱신된 게시 글은 없었다.

얼마 전까지 물의 보옥을 노리던 아이추웡은 사라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객관적인 정보들만을 나열한다면 역시 죽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면....'

확인해야 할 건 대충 다 끝났다.

남은 건, 움직이는 것뿐.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겨울성의 남문에 섰다.

"음?"

그와 함께 얼마 전에 보았던 경비조장이 나를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에 온 그 마법사 친구로군. 여긴 어쩐 일인가?"

"휴가입니다."

내가 경비조장에게 에드릭의 공식 서명이 들어간 외출증을 내밀자, 경비조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휴가...? 자네 크로이츠에 공식적으로 입대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일주일도 안 된 걸로 기억하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가? 뭐, 그건 특무대장님의 개인 직권이니 내가 개입할 건 아니지. 잘 다녀오게. 성문 개방해!"

경비조장은 입대 이틀 만의 휴가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내 외출을 막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 일이 이전에도 전혀 없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끼기긱....

쇠사슬이 오르내리는 소리와 함께 겨울성의 굳건한 남문이 마침내 열렸다.

"후우...."

겨울성을 나서기 무섭게 북부의 한파가 피부를 스친다.

그나마 철저하게 방한에 대비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맨몸으로 나왔다면 얼어 죽기 딱 좋은 날씨였다.

다행히 날짜가 나쁘지 않았던 건지, 매일같이 몰아치던 눈보라가 오늘따라 조금 덜했다.

'가 볼까.'

물의 보옥이 잠들어 있는 장소는 비교적 마경에서 초입에 해당하는 장소다.

그러나 마경은 마경.

아무리 초입이라고 해도 약간의 실수가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신만만하게 겨울성을 나선 근거는 간단했다.

'저기쯤이었던가.'

겨울성에서 마경으로 향하는 지름길.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13화 물의 보옥 (5)

푹!

푸푹!

과연 북부답다고 해야 할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발목까지 눈에 푹 빠졌다.

만약 일반 보급 신발을 신고 왔더라면 슬슬 발에 한기가 전해졌겠지만, 과연 장교용 신발답게 신발이 젖기는커녕 한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발에 한기가 침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눈밭을 걷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나처럼 허약한 몸뚱어리를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훅, 후욱...!"

얼마 가지도 않았건만, 눈밭을 헤쳐 나가다 보니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로 인해서 순식간에 등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이 날씨에 땀이라니... 새삼스레 방한 성능이 너무 좋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행히 근처에서 마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나한테 총이 있다고 해도, 만약 마수 무리를 마주친다면 위험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이쯤일 텐데....'

내가 나선 곳은 겨울성 남문 쪽.

마경과는 정반대 방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쪽으로 온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물의 보옥이 있는 곳으로 바로 가는 지름길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혹시라도 발밑이 빠질까 조심하면서 눈밭을 걷다 보니, 어느덧 나는 얼어 있는 강줄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분명히 여기일 텐데....'

내가 위치를 착각했을 리는 없다.

이곳은 내가 수십, 수백 번도 더 다녔던 길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강줄기가 얼어 있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원래 이곳의 물은 얼지 않는다.

아무리 북부의 한파가 몰아쳐도, 물의 보옥의 힘이 이곳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얼었다라....

'확실히... 물의 보옥에 무언가 문제가 있긴 한 것 같군.'

아이추웡은 물의 보옥을 가리켜서 겨울의 보옥이라 불렀다.

실제로 새로운 속성의 보옥이 마경에서 발견된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여러 정황상 그보다는 물의 보옥의 성질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바뀌었을 가능성이 컸다.

다만, 의문점은 여전히 있었다.

마경의 혹독한 환경이 물의 보옥을 약화시키는 건 사실이지만, 그 성질 자체를 바꿀 정도는 아니다.

이를 종합해 본다면, 물의 보옥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래도 가야겠지.'

이곳까지 오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많은 생각을 했다.

아니, 만약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냉철해진 판단력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고, 뒤돌아서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물의 보옥을 손에 넣지 못한다면, 나 또한 겨울성에서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걸.

'총을 통한 공격 능력은 상당하지만, 문제는 내 육체 능력이 거의 최악이라는 점이다.'

겨울성에서는 그야말로 매일같이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난다.

그만큼 마수들의 출몰이 잦고, 간혹 웨이브라 불릴 정도의 대규모 마수 군단이 공격해 오기도 한다.

실제로 나 또한 당장 입대 이틀 차의 훈련병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마수와의 실전까지 치르지 않았던가.

그만큼 겨울성은 늘 죽음이 도사리는 장소였고, 두려움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결국 겨울성의 혹독함에 스러질 수밖에 없다.

지금 물의 보옥을 얻지 못한다면 언젠가 죽는다는 결과는 똑같다는 소리였다.

'일단 얼음부터 깨야겠지.'

어차피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여러 준비를 해 왔기에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카앙──!!!

야전삽으로 얼음을 내리치기 무섭게 손끝으로 찌릿찌릿한 감각이 전해졌다.

자칫 잘못했으면 그대로 손아귀가 찢어질 뻔했을 정도였다.

"으...."

얼음을 내리친 순간 느꼈다.

아, 이건 내 힘으로는 절대로 못 깨겠다.

'...할 수 없나.'

방법은 있었다.

철컥─

인간은 도구를 쓰는 동물이다.

그래서 나는 야전삽보다 더욱더 강력한 도구를 사용해 볼까 한다.

바로, 콜트 패리슨 B-09이라는 도구를.

타앙!!─

짤막한 총성과 함께 콜트 패리슨 B-09의 총알이 단번에 얼음을 후려치며 얼음 파편이 바닥에 작게 튀었다.

총알의 궤적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채 얼음을 뚫지 못한 총알이 빙판 위에서 고속으로 회전했다.

"...뭐야?"

나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었기에 나는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내 시선을 옮겼다.

빙판에 균열이 가 있었다.

과정이 조금 묘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시도는 성공이었다.

'그러면....'

망설일 시간은 없다.

나는 다시금 야전삽을 잡고서 얼음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카앙!

그와 함께 조금 전까지 끄떡도 하지 않았던 얼음이 균열을 따라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적!

그것을 징조로 나는 더욱더 거칠게 야전삽을 내리쳤다.

캉!

카앙!

야전삽을 내리칠수록 빙판의 균열이 마치 거미줄처럼 번져 나갔다.

만약 얼음이 조금만 더 두꺼웠다면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겠지만, 다행히도 얼음의 두께가 적당했다.

채채챙!

마지막 내려침을 끝으로 마침내 깨진 빙판 밑으로 작은 소용돌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우웅....

예상했던 대로, 물의 보옥이 만들어 낸 지름길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지름길은 아니지만.'

사실 앞서서 지름길이라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물의 보옥의 권능이 만들어 낸 일종의 함정에 가까웠다.

죽음에 이르는 함정.

그러나 대처 방법을 알고 있다면 물의 보옥에게 이르는 꽤 유용한 지름길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후우...."

결심은 이미 오래전에 마쳤다.

가져온 군장을 자리에 내려놓은 나는 입고 있던 장교용 방한복과 모자, 신발을 벗고서 그것을 묶었다.

장교용 방한복의 방수 기능을 이용해서 일종의 튜브를 만들 셈이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그렇게 만들어 낸 임시 튜브를 몸에 묶은 나는 심호흡을 했다.

"후아...."

폐부에 스며드는 한기.

이 한기가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똑똑히 알려 주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그대로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뛰어내렸다.

첨벙!

소용돌이에 뛰어들기 무섭게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살을 에는 것 같은 강물의 냉기였다.

[물의 함정에 빠졌습니다!]

[치명적인 함정입니다! 생로(生路)를 찾으십시오! 제한 시간 내에 찾지 못할 경우, 죽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익숙한 알림 창이다.

더없이 보고 싶던 알림 창이기도 했고.

물의 함정 내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생(生)과 사(死)로 향하는 길목.

당연하게도 그중에서 내가 선택할 길목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꾸르륵!

강물의 냉기가 몸의 감각을 마비시켜 갔으나, 나는 멈추지 않고서 몸을 움직였다.

여기서 멈췄다가는 죽는다.

그런 어리석은 죽음을 맞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뿌글, 뿌글....

숨이 턱끝까지 찬다.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몸뚱어리답게 심폐 지구력 역시도 형편없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가야 해.'

손발의 감각이 없다.

아니, 팔다리를 내젓고 있다는 감각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다.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물의 함정을 빠져나가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물의 함정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진입하였습니다.]

이윽고 한 줄기의 빛이 보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 빛을 향해서 나아갔다.

"푸하!"

무척이나 오랜만에 맛보는 세상의 공기는 너무나도 달콤했다.

동시에, 더없이 차가웠다.

"콜록! 콜록!"

나는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억지로 올려서 물 밖으로 몸을 빼냈다.

내가 나온 곳은 어느 동굴 안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익숙한 장소.

바로, 물의 보옥이 봉인된 그 동굴이었다.

'저건가.'

동굴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있는 보옥.

분명히 물의 보옥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어딘가 내가 알고 있는 물의 보옥의 모습과는 확실히 어딘가 달랐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나 보옥의 주변에서 풍겨 오는 압도적인 냉기였다.

본래도 이 장소 자체가 물의 보옥을 약화시키기는 했으나, 지금 물의 보옥이 풍기는 냉기는 명백히 이질적이었다.

'...안 되겠어.'

나는 몸에 묶어 두었던 방한복을 풀고는 그것을 입었다.

몸이 물에 젖어 있는 터라 입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지금 안 입었다가는 그대로 동사할 것 같았다.

"후우...."

방한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을 에는 것 같은 한기는 여전했다.

아무리 준비를 철저하게 했어도 이 장소에서 오래 버티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체내에 한기가 엄습합니다!]

[체온을 유지하십시오. 상태가 지속될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딱, 딱딱.

나는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보옥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물의 보옥에게서 풍겨 오는 냉기와 함께 느껴지는 정체 모를 기운을.

'...과연. 그렇게 된 건가.'

마기.

본래였다면 물의 보옥이 절대로 풍겨서는 안 될 기운이 물의 보옥 주변에서 느껴졌다.

아마 이것이 본디 물의 보옥을 약화시키기만 했던 냉기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냈을 터.

'마 속성이라....'

이전에도 말한 적이 있듯이, 본디 마 속성은 매우 드물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왠지 그 원인이 승천석 파편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잘됐어.'

물의 보옥이 변질된 이유가 마 속성 때문이라면, 나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철컥─

총알은 답을 알고 있다.

늘 그랬듯이.

타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콜트 패리슨 B-09의 총알이 물의 보옥에 둘러진 기운을 향해 쇄도했다.

['멸망 유예자' 특성 효과로, 마(魔) 속성을 지닌 대상을 몰아냅니다.]

파지직!

그와 함께 일어난 강렬한 스파크가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다.

프스스....

깃든 마(魔)가 워낙 강력한 탓인지 총알 한 발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총알은 아직 많았으니까.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연달아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마(魔)를 쫓는 총알이 물의 보옥에 깃든 마의 기운을 거침없이 몰아냈다.

['멸망 유예자' 특성 효과로, 마(魔) 속성을 지닌 대상을 몰아냅니다.]]

['멸망 유예자' 특성 효과로, 마(魔)에게 대적합니다!]

['멸망 유예자' 특성 효과로, 마(魔)에 대한 절대적인 상성 우위를 점합니다!]

우우웅....

물의 보옥에서 뿜어지던 냉기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지금.'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달려든 나는 단번에 물의 보옥을 낚아챘다.

['물의 보옥'이 저항합니다!]

[강렬한 냉기가 당신의 몸에 엄습합니다!]

['멸망 유예자' 특성 효과로, '물의 보옥'이 품은 마(魔)를 억제합니다!]

내 손아귀에 잡힌 물의 보옥이 거칠게 요동치며 냉기를 뿜어냈으나, 나는 손에 동상이 걸리는 와중에도 물의 보옥을 놓지 않았다.

"얌전히, 말 들어."

나는 손에 쥐고 있는 물의 보옥을 그대로 바닥에 내리쳤다.

캉!

카앙!!─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렇게 몇 번이고 물의 보옥을 무식하게 바닥에 내리치자, 당장이라도 나를 얼려 버릴 것 같았던 물의 보옥의 반항이 점차 잠잠해졌다.

['물의 보옥'이 당신을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물의 보옥'을 획득하였습니다.]

마침내, 물의 보옥이 나를 주인으로 받아들였다.

역시 사람이나 물건이나 때려야 말을 듣는다.

"후아...."

나는 물의 보옥을 쥔 채로 그대로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동상을 입은 손에서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지만, 고통보다는 기쁨이 앞섰다.

'드디어인가.'

나는 곧장 물의 보옥을 확인했다.

────────────

[물의 보옥]

분류 : 일반

등급 : 전설

물의 기운을 품고 있는 보옥.

주인으로 인정한 자를 수호한다.

────────────

당장 물의 보옥의 힘을 억압하던 마(魔)의 기운은 거의 몰아냈으나, 이곳의 환경 자체가 물의 보옥의 힘을 억제하다 보니 본래의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에 북부 지대를 벗어난다면, 그때 비로소 물의 보옥의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터.

'물론 지금으로도 충분하지만.'

내가 가장 먼저 물의 보옥을 찾으려 한 이유는 간단하다.

물의 보옥은 현재 나에게 있어서 가장 약한 부분인 방어력 부분을 일부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갑자기 비명횡사할 가능성은 조금 줄었다고 해도 되겠지.'

그 순간.

쐐애애액!!!───

갑작스레 들려온 파공음과 함께 나를 향해서 무언가 날아왔다.

반응하기에는 늦었다.

아니, 설령 반응했다 한들 저걸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죽는다.'

내가 죽음을 직감한 순간.

['물의 보옥'이 사용자를 수호합니다.]

그와 함께 물의 보옥에서 뿜어진 얼음 방패가 내 앞을 막아섰다.

콰지징!

얼음 방패에 의해서 가로막힌 그것은 한 자루의 창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동굴 너머에서 그 투창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상한 굉음이 들려서 와 봤더니... 넌 뭐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이는 물의 보옥이 잠들어 있는 이 동굴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내 도출되는 한 가지 결론.

"...아이추웡?"

"아하, 불청객인 줄 알았는데 손님이었네? 길게 기다린 보람이 있구만."

아이추웡이 씨익 웃었다.

14화 물의 보옥 (6)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오랜만에 같은 유저를 만나서 참 반갑고 그러네."

솔직히 말해서 아이추웡이 살아 있을 거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상 내 마음속에서 사망 선고를 내린 상태였다.

여러 가지 정황이 적나라할 정도로 아이추웡의 사망을 가리켰으니까.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의도적으로 연출되고, 만들어진 착각.

"조금 전에 내 공격을 막은 게 겨울의 보옥의 힘이지? 역시 대단해. 생각했던 것 이상이야."

"일부러 기다린 건가."

"여기서 죽치고 기다리다 보면 너처럼 겨울의 보옥을 노리는 자들이 올 줄 알았지. 기다린 보람이 있다니까."

아이추웡이 어깨를 으쓱했다.

"겨울의 보옥을 찾은 지는 좀 됐는데, 도저히 봉인을 풀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익명 게시판에 글을 써 놓고 여기서 기다리다 보면 누가 대신 와서 풀어 주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했던 대로였지."

처음부터 모든 게 아이추웡이 짜 놓은 판이었다.

다만, 아이추웡이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내가 이 동굴의 입구가 아닌 물의 보옥이 만들어 낸 함정을 통해서 이곳에 들어왔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추웡은 내 방문을 미리 알지 못했고, 아이추웡이 나섰을 때는 이미 물의 보옥이 내 손에 들어온 뒤였다.

"자, 그러니까 그것 좀 나한테 넘겨주겠어? 아무리 주인이 안 보여도 그렇지, 남의 물건을 함부로 도둑질해 가면 쓰나."

역시나 아이추웡은 물의 보옥을 순순히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싫다면?"

"이봐, 왜 그래? 그건 처음부터 내 물건이었어. 남의 걸 몰래 가져갔으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상식 아니야?"

"내가 돌려주면, 그다음은?"

"서로 갈 길 가면 되지. 이 얼마나 간단하고 깔끔해?"

그럴 생각도 없는 주제에 너무나도 뻔뻔하게 지껄이는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을 뻔했다.

당장 내가 왔을 때 창부터 냅다 던진 것부터 해서, 애초에 아이추웡에게 나를 살려서 보낼 생각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거절하지."

"음, 왜 아까운 목숨을 버리려고 하지? 이 좋은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려야지. 안 그래?"

"좋은 세계?"

"그래, 여기가 현실보다 훨씬 낫지. 여기서라면 우리는 조금만 노력해도 귀족처럼 군림할 수 있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주지 않는 현실과는 달리."

조금 알 것 같다.

아이추웡이 어떠한 부류의 인간인지.

"그러면 너는 현실로 돌아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건가?"

"원래 게임은 그러려고 하는 거잖아?"

아이추웡이 사납게 웃으면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척 봐도 심상치 않은 무기들.

'아르콘의 뼈 창과 로구스의 직검인가.'

그것만으로도 아이추웡이 어느 정도의 유저인지 말해 주었다.

"뭐, 좋아. 마침 겨울의 보옥의 힘도 시험할 겸, 잘됐어."

아무리 이곳이 마경의 초입 부분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마경을 제집 드나들듯이 드나든다면 최소 4레벨은 넘을 터.

거기에 더해서 보이는 장비 수준까지 고려한다면 아이추웡은 지금의 나와는 감히 비교조차 안 되는 강자일 터였다.

"하나만 묻지."

"뭔데?"

"당신이 뉴비 사냥꾼인가?"

"뉴비 사냥꾼? 하하! 순진하다 싶더라니 그런 게시판 괴담을 진짜로 믿고 있어? 그런 게 어딨어?"

"아니라는 소리군."

묻고 싶은 건 이제 다 물었다.

어차피 아이추웡에게 순순히 물러날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으니, 나 또한 선공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근접전은... 불가능하겠지.'

현재 내가 지닌 검술의 수준은 기껏해야 F급 수준.

거기에 더해서 다른 신체 능력 차이까지 생각한다면 아무리 물의 보옥이 있다고 해도 근접전은 어불성설이었다.

철컥─

품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콜트 패리슨 B-09의 총구가 아이추웡을 겨눈다.

"...어?"

이 세계에서 더없이 낯선 문명의 이기의 등장에 아이추웡의 반응이 조금 늦어졌다.

"총?"

동시에 총이라는 무기가 주는 위압감에 아이추웡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과연 이 세계에서 총의 위력은 어디까지 통할까.

1레벨에서 2레벨 정도의 하급 마수들에게는 통한다는 게 이미 증명되었으나, 그 이상의 마수들에게도 통할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아이추웡처럼 마수 소재를 가공해서 장비로 착용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총이 제대로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노려야 할 곳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방어구가 채 보호하지 못하는 곳.

머리.

그중에서도 훤히 드러난 미간이 바로 내가 노려야 할 곳이었다.

타아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울려 퍼진 총성.

그리고 흩뿌려지는 선혈.

"아악! X발!"

애석하게도 내 기습은 아이추웡의 오른쪽 귀를 날려 버리는 것으로 그쳤다.

기습과 더불어서 총이라는 물건을 보여 주며 당황을 유도했으나, 믿기지 않는 초인적인 반응속도로 아슬아슬하게 총구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총을 대체 어떻게...!"

총의 위력을 본 덕분일까.

아이추웡은 더 이상 이전처럼 여유롭게 나를 깔보지 못했다.

그 필요 이상의 경계심은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과녁판이 되어 주었다.

탕!

타탕!!─

연달아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총알들이 아이추웡을 노리고 날아들며 아이추웡의 어깨와 옆구리에 적중했다.

"큭!"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이추웡이 착용하고 있는 방어구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아이추웡은 충격을 받기는 했어도 관통상을 입지는 않았다.

'라듄의 소재를 사용한 방어구는 뚫지 못하는군. 이 정도는 상정 내야.'

라듄은 4레벨로 분류되는 마수로서, 가죽이 질기고 단단해서 그 가죽은 주로 방어구의 소재로 사용된다.

일단 콜트 패리슨 B-09의 화력으로는 4레벨 이상의 마수의 가죽을 뚫지 못한다는 게 공식적으로 확인이 된 셈이었다.

"X새끼가!"

그러는 사이에도 아이추웡의 검이 나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피할 수는 없다.

내가 지닌 저열한 육체 능력으로 맹렬하게 달려드는 저 공격을 피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였다.

"죽어."

아이추웡이 승리를 확신한 듯 사나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아이추웡이 채 잊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내가 물의 보옥의 주인이 되었다는 걸 말이다.

['물의 보옥'이 사용자를 수호합니다.]

내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얼음의 장막이 아이추웡의 검격을 한 차례 막아 냈다.

카앙!

아이추웡의 검격에 의해서 얼음 장막이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갈라졌으나,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찰나의 기회.

나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1'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콜트 패리슨 B-09'을 소환합니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콜트 패리슨 B-09이 빛 입자와 함께 사라지며 이내 새로운 콜트 패리슨 B-09이 왼손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씨─"

당황한 아이추웡의 얼굴에서 정체 모를 돌가루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명백한 마법의 징조.

이 세계에서 마법을 사용할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생각한다면, 아이추웡 역시도 지금이 위기라는 걸 직감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내가 더 빨라.'

아이추웡의 욕이 채 이어지기 전에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총성이 울려 퍼졌다.

타아아앙!!!───

아이추웡의 이마에서 핏줄기가 튀어 오르며 그대로 아이추웡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쿵.

나는 아이추웡이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방심하지 않고서 몇 발의 총알을 더 머리에 확인 사살로 박아 넣었다.

보통 이쯤 했으면 머리가 수박처럼 깨져서 사방에 흩어졌어야 했지만, 아이추웡의 얼굴은 산산조각 나기는커녕 마치 돌이 깨진 것처럼 금이 쩍쩍 가 있었다.

아무래도 바위의 악마와 계약해서 얻어 낸 방어계 마법인 듯했다.

'만약 마법이 완성됐더라면 위험했겠어.'

설마하니 이런 마법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만일 아이추웡이 처음부터 방심하지 않고서 대가를 감수하고서 마법을 사용했다면 나는 절대로 아이추웡을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운과 방심 그리고 공정의 세계 유저들이 으레 가지고 있을 법한 마법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만든 승리인 셈이었다.

"후우...."

크게 숨을 몰아쉰 나는 이제 시체가 된 아이추웡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죽였다.

아무리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그건 절대적인 사실이었다.

"...흠."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다.

마치 살인 따위로는 내 명경지수의 마음에 파동 하나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듯이.

그 사실이 뭔가 스스로 괴물이 된 것처럼 느껴졌지만, 우습게도 그러한 자기 고찰마저도 더없이 평온했다.

'할 건 해야겠지.'

나에게 주어진 휴가는 고작 하루.

원하던 바도 이루었겠다, 새삼스레 이런 곳에서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역시나 아이추웡이 입고 있는 장비를 비롯한 소지품을 모조리 챙기는 일이었다.

아이추웡이 착용하고 있는 라듄 가죽으로 만든 방한복은 총알조차 막아 낼 수 있을 정도의 상등품이다.

당장 내가 에드릭에게서 빌려 온 겨울성 장교용 보급품보다도 더 좋은 장비들이라는 소리.

거기에 더해서 아이추웡이 사용하던 무기들 역시도 상당한 것들이었으니, 그런 귀중품들을 고작 시체가 입고 있었다는 이유로 꺼려 할 생각은 없었다.

'있는 걸 안 챙길 이유는 없지.'

나는 시체가 된 아이추웡이 입고 있는 장비를 벗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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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구스의 직검]

분류 : 무기

등급 : 고급

장인 로구스의 손에 의해서 탄생한 직검.

찌르기와 베기 모두에 용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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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콘의 뼈 창]

분류 : 무기

등급 : 고급

아르콘의 뼈를 갈아서 만든 창.

매우 날카로우며, 찔린 상대의 상처를 찢어발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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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듄 가죽 방한복]

분류 : 장비

등급 : 고급

라듄의 가죽으로 만든 방한복.

보온성과 단열성이 매우 뛰어나며, 방어력 역시도 매우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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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듄 가죽 방한 장화]

분류 : 장비

등급 : 고급

라듄의 가죽으로 만든 장화.

보온성과 단열성이 매우 뛰어나며, 방어력 역시도 매우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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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콘의 비늘을 덧댄 장갑]

분류 : 장비

등급 : 고급

아르콘의 비늘을 덧대서 만든 장갑.

보온 성능과 방어력이 뛰어나며, 비늘을 직접 덧댄 부분은 매우 단단한 강도를 지녔다.

────────────

"과연."

이미 알고 있던 대로 하나같이 상등품뿐이었다.

그렇게 내가 아이추웡이 사용했던 장비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음?"

아이추웡의 시체에서 익숙한 빛 하나가 보였다.

"저건...."

나는 저 빛을 알고 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아이추웡의 품속에서 나오고 있는 빛은, 다름 아닌 승천석 파편의 그것과 같았으니까.

내가 무엇인가에 이끌리듯이 그 빛을 향해서 손을 뻗은 순간.

['승천석 파편'을 흡수합니다.]

['병기 소환(??)' 특성이 성장합니다.]

['병기 소환(??)'의 소환 가능 목록에 'Lv.1' 탄환 목록이 추가됩니다.]

──────────────

[병기 소환]

등급 : ??

종류 : 액티브

레벨 : 1

병기와 탄환을 소환한다.

레벨에 따라서 소환할 수 있는 병기와 탄환의 종류가 증가한다.

현재 소환 가능한 병기 종류 : 1

현재 소환 가능한 탄환 종류 : 1

──────────────

15화 물의 보옥 (7)

빛무리가 내 손을 휘감으며 이윽고 나에게 흡수되듯이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처럼.

'그런데... 이게 전부인가?'

자연스레 피어오른 의문.

그도 그럴 것이, 일전의 뉴들박77의 게시 글에 따르면 승천석 파편을 손에 넣으면 게시판 레벨이 올라간다고 했건만, 게시판 레벨이 올라갔다는 알림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추웡의 시체에 있던 승천석 파편을 흡수했다는 문구가 뜨기도 했고 말이다.

'병기 소환 특성 때문인가? 아니면 게시판 레벨 업에 필요 경험치 같은 게 부족했나?'

게시판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부족하다는 추론은 꽤 그럴듯했다.

실제로 병기 소환 특성 역시도 성장형 특성임에도 불구하고 소환 가능한 대상이 추가되었을 뿐, 레벨 업을 하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흐음...."

애석하게도 병기 소환 특성에 대한 것이나 게시판 등급에 대한 것이나 모두 알고 있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당장 내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더 있다.'

아이추웡이 지니고 있던 게 승천석 파편이라는 게 확인된 이상, 자연스레 익명 게시판에서 유저들이 말하던 ■■■ 파편의 정체 역시도 승천석 파편이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의문.

'대체 왜 다른 유저들이 나보다 빨리 이 세계에 온 거지?'

익명 게시판에서 슬쩍 살펴본 바에 따르면, 다른 유저들이 이 세계에 온 시기는 최소 나보다 몇 달 혹은 몇 년 이상 빠르다.

만약 이 사태가 내가 멸망룡을 사냥한 뒤에 승천석 파편을 사용한 게 원인이라면, 내가 그들보다 훨씬 더 늦게 이 세계에 온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그들보다 빠르거나, 혹은 비슷하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으음....'

당연하게도 앉은 자리에서 생각해 봤자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당장 떠오르는 건 그저 막연한 추측들뿐이었으니.

실제로 일전에 보았던 뉴들박77의 게시 글에서도 유저들이 공정의 세계로 온 순서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라고 했으니까.

'승천석 파편과 게시판 레벨에 대한 건 나중에 차차 알아보고....'

그렇기에 나는 당장 알 수 없는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눈앞에 있는 병기 소환 특성에 집중했다.

승천석 파편을 흡수하면서 지금껏 어떻게 성장시키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병기 소환 특성이 한 차례 진화했다.

비록 레벨 업을 한 건 아니지만, 무려 병기 소환을 통해서 소환할 수 있는 탄환 카테고리가 새로이 생겨난 것이다.

지금까지 만성적인 총알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나로서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인 셈이었다.

'병기 소환 특성을 레벨 업 하는 조건은 승천석 파편을 흡수하는 거였나?'

성장형 특성은 워낙 드문 데다가 각각 성장시키는 방법 역시도 달라서 정보가 무척이나 제한적이다.

하물며 병기 소환 특성 같은 경우에는 본디 내가 지니고 있었던 모든 걸 바쳐서 얻어 낸 특성인 만큼, 그 잠재력은 감히 예상할 수조차 없었다.

'가장 좋은 건, 역시 직접 시험해 보는 거겠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든가.

나는 곧장 특성을 발동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1' 탄환이 소환됩니다.]

[탄환, '9×33mmR 357 매그넘 일반탄'을 소환합니다.]

푸른 빛무리와 함께 내 손에 올라온 12발의 탄.

콜트 패리슨 B-09에 사용하는 탄이었다.

"호오...."

본디 내가 병기 소환을 통해서 한 번에 수급할 수 있는 총알이 고작 6발에 불과했던 걸 생각한다면, 무려 한 번에 2배의 총알이 더 생긴 셈이었다.

'그건 그렇고... 재사용 대기 시간은 어떻게 적용되는 거지?'

만약 병기를 소환하는 것과 탄환을 소환하는 것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서로 겹친다면, 아무리 2배의 총알을 더 소환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효율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당장이라도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병기 소환을 발동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아이추웡을 상대하며 이미 특성을 한 차례 발동했기에 아직 재사용 대기 시간이 남아 있었다.

'뭐, 가는 동안에 천천히 확인해 보면 되겠지.'

어차피 돌아가는 길은 절대로 가깝지 않았다.

물의 보옥이 내 손에 들어오면서 지금껏 물의 보옥이 만들어 냈던 물의 함정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만약 물의 보옥의 힘이 온전했다면 물에서 물로 이동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무리겠지.'

물의 길은 물의 보옥이 지닌 권능 중에서도 매우 강력한 권능 중 하나다.

아무리 내가 물의 보옥에 깃들어 있던 마를 몰아냈다고는 하나, 애초에 북부 지대의 환경 자체가 물의 보옥에 있어서는 쥐약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아직 그런 권능을 발휘할 수는 없을 터.

"흐음...."

일단 해야 할 일은 마쳤다.

그렇기에 돌아갈 준비를 하려고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늘어나 버린 짐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아이추웡이 사용하던 장비들과 소지품들이었다.

애초에 내가 물의 보옥을 찾는 여정을 시작할 때는 이런 식의 소득을 얻게 될 줄은 몰랐기에 아이추웡의 장비와 소지품들은 나에게 있어서 계륵이나 다름없었다.

'과연 이걸 가져갈 수 있을까?'

공정의 세계에는 인벤토리 시스템이 없다.

후에 공간의 악마와 계약을 맺거나 하는 방법으로 그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마법을 손에 넣을 수는 있어도, 일단 공식적으로는 인벤토리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꼭 나쁘다고만 볼 수 없는 게, 실제로 이 덕분에 내가 아이추웡의 모든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단지, 그 사실이 지금만큼은 원망스럽게 느껴질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아이추웡의 물건들을 그냥 여기에 놓고서 가자니, 언제 다시 가지러 올 수 있을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중간에 없어질 위험성까지 있었다.

하물며 아이추웡이 사용하던 장비들은 하나같이 수준급의 장비들이다.

단순히 방어구를 떠나서 아이추웡이 사용하던 창과 검 역시도 범상치 않은 물건들이었으니, 일단 챙겨 갈 수만 있다면 내가 직접 사용하거나 여차하면 겨울성 내에서 팔아 버려도 될 정도였다.

'힘들어도 가지고 가야 해.'

내려진 결론은 간단했다.

어떻게든 아이추웡이 사용하던 장비와 소지품을 가지고서 돌아간다.

비록 그 여정이 쉽지는 않을 테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얻는 게 있으면 어느 정도 희생도 치러야 하는 법이다.

"후우...."

이젠, 겨울성으로 돌아갈 때다.

* * *

이 막대한 짐을 짊어지고서 돌아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밧줄로 잡아끌 수 있는 작은 짐수레를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당장 이 자리에서 내가 가진 도구들로 바퀴 같은 정밀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 문제는 물의 보옥으로 해결했다.

물의 보옥의 힘으로 얼음 바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비록 아이추웡이 가지고 있던 배낭에 바퀴를 단 조잡하기 짝이 없는 형태였으나, 나에게는 이 정도만으로도 이동성이 크게 나아졌다.

'이 정도면 되겠지.'

본격적으로 겨울성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저벅. 저벅.

제아무리 겨울성과 인접한 초입이라고 해도 마경은 마경이었기에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마경에서 긴장을 늦춘다는 건, 곧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으니까.

"후우...."

아무리 바퀴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에서 바퀴를 끄는 건 쉽지 않았다.

그나마 바퀴가 물의 보옥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기에 망정이지, 만약 일반적인 바퀴였다면 이미 수십 번은 진창에 빠져서 이동이 멈췄을 것이다.

'거기다가, 물의 보옥의 도움도 있고.'

물의 보옥은 본디 착용자를 수호하고 회복시키는 권능을 지닌 아이템이다.

비록 지금은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마경의 혹한 속에서 봉인되어 있었기에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 지녔던 권능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수호합니다.]

['물의 보옥'의 효과로 체력 재생 속도가 증가합니다.]

"후우...."

그러한 물의 보옥의 효과 덕분일까.

확실히 이런 짐을 끌면서 눈밭을 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력 소모가 덜하다는 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소모된 체력의 회복 속도가 체감이 될 정도로 빠르다고 해야 할까.

"후욱... 후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는 길 자체가 워낙 강행군이다 보니, 역시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돌아가는 동안 나는 비로소 병기 소환 특성과 관련된 사항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재사용 대기 시간과 관련된 것이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1'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콜트 패리슨 B-09'을 소환합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1' 탄환이 소환됩니다.]

[탄환, '9×33mmR 357 매그넘 일반탄'을 소환합니다.]

본디 병기 소환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약 30분 정도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이 생겨난 탄환 소환은 재사용 대기 시간이 고작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재사용 대기 시간이 각각 따로 적용이 된다는 점이었다.

즉, 지금 내가 미리 콜트 패리슨 B-09와 9×33mmR 357 매그넘탄을 소환해서 가지고 다닌다면 한 번에 총 36발의 총알을 사용할 수 있는 셈이었다.

기존의 12발에서 무려 3배로 늘어난 셈이었으니, 내가 뿜어낼 수 있는 순간적인 화력 역시도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한 가지 아쉬운 사실이 있다면, 병기 소환을 통해서 소환된 9×33mmR 357 매그넘탄 역시도 콜트 패리슨 B-09와 마찬가지로 재소환 시 먼저 소환되어 있던 기존의 병기나 탄환이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즉, 마구잡이로 탄환을 미리 소환해 두고서 쌓아 두는 건 할 수 없다는 소리.

'조금 아쉽기는 해도, 이것도 감지덕지라고 보는 게 맞겠지.'

아니, 어떤 관점으로 본다면 차라리 이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만약 병기 소환에 이러한 특성이 없었다면, 만약의 사태에 내가 총기나 탄환을 분실하거나 적에게 빼앗겼을 때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병기 소환을 재소환했을 때 기존의 병기가 사라진다면 적어도 그럴 일은 없다는 거겠지.'

화력 면에서는 조금 아쉬울 수 있어도 보안이나 안전성 면에서는 차라리 이게 더 나았다.

단점과 장점이 공존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당장은 병기 소환을 쓸 일이 없는 게 더 좋지만.'

아무리 지금의 내가 36발로 늘어난 탄환과 물의 보옥 그리고 아이추웡의 장비를 얻었다고는 해도 마경에서 전투가 일어나는 건 피해야 했다.

만약 전투가 일어난다면 총이라는 것 자체가 큰 굉음을 일으키기에 다른 마수를 불러올 수도 있는 데다가, 혹시라도 지금 내가 지닌 화력으로 뚫어 낼 수 없는 마수가 온다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안전한 길을 골라서 움직였다.

오는 동안 몇 번인가 멀찍이서 마수 무리를 보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내 계획은 돌아갈 때는 도보로 이동해 가는 것까지 포함이었기에, 안전하고 빠른 루트 몇 가지 정도는 이미 준비해 두었던 덕분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안전한 길이라 한다면, 역시나 마수들의 영역이 서로 겹치는 길일 것이다.

마경에서 마수들은 각기 다른 영역을 가지고 있고, 웬만해서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영역을 침범한다는 건, 곧 상대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니까.

어쨌거나 그 덕분에 나는 어둠이 내리깔린 시간에서야 마경의 초입을 벗어날 수 있었다.

워낙 무리를 한 탓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중요한 건 지금 눈보라 사이에서 겨울성에서 타오르는 횃불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드디어....'

마침내, 겨울성에 도착했다.

[지독한 강행군을 이겨냈습니다!]

[특성, '인내(D)'를 습득하였습니다.]

──────────────

[인내]

등급 : D

종류 : 패시브

체력 소모가 20% 감소한다.

──────────────

16화 은원

'호오....'

물의 보옥과 더불어서 아이추웡의 아이템들만 해도 이번 여정의 성과로는 충분했건만, 이어진 강행군 덕분에 새로운 특성까지 얻었다.

고생한 보람이 없지는 않은 셈.

특히 인내 특성 같은 경우는 모든 일의 기본인 체력과 관련된 특성인 만큼 얻어 두어서 절대로 나쁠 게 없었다.

'그건 그렇고....'

어둑시니가 내려앉은 사이,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고고히 자리를 잡은 겨울성의 모습은 흡사 다른 세계 너머 같았다.

그 사이로 비치는 횃불의 불빛이 마치 나를 인도하는 구원의 불빛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감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정지! 신원을 밝혀라!"

내가 성문에 다다르자, 성문 위에 있는 경비대장이 나를 내려다보며 외쳤기 때문이다.

몽환 속에 빠져 있던 내가 마침내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휴가 복귀입니다."

어둠이 내리깔린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근무 중인 경비대장이 내가 내민 휴가 증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벨 블랙우드, 복귀 확인했네. 조금만 더 늦었다면 탈영이었겠어."

경비대장이 농담하듯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것참 다행이군요."

"어서 가 보게."

탈영이라.

에드릭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조금 늦는 것 정도는 봐줄 것도 같지만, 겨울성처럼 항시 전시체제인 곳에서 군율이 어떻게 적용될지는 알 수 없었다.

군대라는 곳이 늘 그렇듯이 합리보다는 비합리가 만연한 곳이었으니까.

어쨌거나 드디어 집에 왔다.

내가 겨울성에 입대한 지 이제 고작 삼 일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오늘 하루가 적잖이 고단하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으...."

마침내 성문 안으로 돌아온 나는 제4 특무대가 사용하고 있는 막사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에서 쓰러지기에는 짊어지고 온 게 너무 많았기에 나는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했다.

아마 물의 보옥의 힘이나 멸망 유예자가 나에게 부여한 강력한 정신 중에서 무엇 하나 없었다면 겨울성에 돌아오기 전에 나자빠지지 않았을까.

막사에 도착한 나는 휴가 복귀를 보고할 겸 가장 먼저 제4 특무대장 에드릭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게."

시간이 제법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릭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보통 이 시간이면 전투복을 벗고서 다른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 법도 했건만, 항시 전시체제인 겨울성에서 그런 일은 바라기 어려운 듯했다.

"잘 다녀왔나?"

"예."

"무사히 돌아와서 기쁘군. 그것들이 자네가 오늘 겨울성 밖으로 외출한 용무인가?"

에드릭이 내가 질질 끌고 오다시피한 짐꾸러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추웡이 지니고 있던 장비와 소지품들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이번에 얻은 물의 보옥은 나로서는 일종의 비장의 수단이다.

아무리 에드릭이 내 상관이라고는 하지만 일단 감출 수 있으면 최대한 감춰 두는 게 좋았다.

"흠, 그렇군. 고생했어.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예. 빌린 물건들은 옷만 갈아입고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도록."

아무리 눈보라를 헤쳐 오며 많이 희석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아이추웡이 입고 있던 장비에는 미세한 피 냄새가 남아 있다.

에드릭 정도 되는 인물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그에 대해서 지적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낀 건가.'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만약 에드릭이 이에 대해서 추궁했다면 나도 대답하기 조금 귀찮았을 테니까.

에드릭에게 보고를 마친 나는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막사 안으로 돌아가니 제4 특무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혹독한 훈련으로 인해서 다 죽어 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제4 특무대원들의 면면이 너무나도 멀쩡했다.

"아, 왔나."

가장 먼저 콘란이 나를 알은체했다.

"겨울성 밖으로 갔다 왔다더니, 이것저것 주렁주렁 많이도 달고 왔군. 어디서 훔쳐 오기라도 했나? 마땅히 그럴 만한 곳도 없었을 텐데."

"죽여서 빼앗았지."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농담 같지가 않군. 뭐, 상관없긴 하지만."

혹여 내가 가져온 물건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캐물을까 해서 진실 속에 진실을 묻으려고 한 말이건만, 콘란은 애초에 범죄자 출신답게 사람을 죽여서 빼앗았다는 말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니면 애초에 농담으로 받아들였거나.

"그나저나, 오늘 훈련은 별로 힘들지 않았나 본데?"

보통 훈련이 끝났다면 다들 초주검이 되어 있었어야 했건만, 콘란은 물론이고 알비노나 알리시아 모두 상태가 뽀송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하루를 그야말로 개고생과 함께한 나로서는 그 모습이 뭔가 아니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쉬었어. 대장이 어차피 결원도 있는 데다가 어제 성과가 좋다고 쉬라더군."

"뭐?"

"아, 그리고 내일부터 다시 기초 체력 훈련을 한다고 하더군. 승마 훈련도 한다고 하던가?"

"...."

뭔가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 또한 에드릭이 범죄자로 가득찬 특무대를 이끄는 방법이겠거니 하며 넘겼다.

중요한 건 내가 물의 보옥을 손에 넣고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 아니겠는가.

'거기다가 예상치 못한 소득도 있었고 말이지.'

아이추웡의 장비와 더불어서 새로운 특성까지.

나중에 자세히 살펴봐야겠지만, 이미 확인한 아이추웡의 장비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소지품의 가치 역시도 절대로 낮지 않았다.

만약 제대로 정리를 해 본다면 사실상 빈털털이인 나에게 있어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겨울성은 거대한 요새인 만큼 당연히 성내에도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었으니, 기회가 있다면 한번쯤 방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건 그렇고....'

짐을 대충 정리한 나는 옷을 갈아입은 뒤에 곧장 에드릭에게 빌린 장교용 장비를 반납한 뒤 막사를 나섰다.

목적지는 겨울성 내에 있는 거대 모닥불.

내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이끌고서 그곳으로 가는 이유는 얼어붙은 몸을 녹이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목적이 더 컸다.

'슬슬 물의 보옥의 힘을 활용해야겠지.'

현재 물의 보옥은 북부 지대가 지닌 혹한의 기후와 마경이 내뿜는 마기로 인해서 제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혹한의 기후를 외부 힘으로 일시적으로나마 해결한다면?

본디 물의 보옥이 지니고 있던 권능이 일부나마 발휘될 수 있다.

지금 눈앞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은 그걸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라면 물의 보옥의 힘을 억제하고 있는 냉기도 조금이나마 가실 테니까.

그것을 증명하듯이 내 품 안에 있던 물의 보옥의 냉기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비록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마경의 냉기에 노출되어 있었기에 잠깐의 모닥불로는 힘을 온전히 회복할 수 없겠지만, 일시적으로는 힘을 회복할 수 있었다.

['물의 보옥'에 약간의 온기가 전해집니다.]

['물의 보옥'의 냉기가 일시적으로 완화됩니다.]

그와 함께 물의 보옥이 품고 있는 냉기가 일시적으로 사라지며, 물의 보옥이 품고 있는 힘이 살며시 내 피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물의 보옥'의 힘이 사용자에 스며듭니다.]

['물의 보옥'이 사용자를 치유합니다.]

물의 보옥이 지닌 진정한 힘은 사용자를 보호함과 동시에 치유하는 것이다.

그 진정한 권능이 일부나마 발휘되면서 엉망진창에 가까웠던 몸이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또한, 찢어진 근육이 회복된다는 건 한 가지 의미를 더 지니고 있었다.

본래였다면 성장하는 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어야 할 근 성장 시간이 놀라울 정도로 단축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지친 몸에 활력이 깃들며 찢어졌던 근육들이 성장합니다.]

[체력이 상승합니다. (+1)]

[1 → 2]

무려 체력 능력치가 올랐다.

본래였다면 능력치를 올리는 데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겠지만, 물의 보옥의 힘으로 인해서 성장이 엄청나게 가속된 것이다.

'호오....'

체력 능력치 같은 경우는 모든 능력치의 기본이나 다름없는 만큼, 일단 올려 두면 절대로 배신하는 일이 없다.

당장 지금부터가 몸이 어딘가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찢어진 근육이 회복되며 근육이 성장합니다.]

[근력이 상승합니다. (+1)]

[1 → 2]

근력 능력치까지 상승했다.

하긴, 원래도 근력 능력치와 체력 능력치는 유산소운동과 무산소운동의 차이 정도였기에 함께 성장하는 게 일반적이긴 했다.

'이런 식이라면 육체 능력치를 훨씬 더 빨리 올릴 수 있겠어.'

그도 그럴 것이, 물의 보옥을 이용한다면 본디 근육이 성장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인 회복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으니 말이다.

'뭐... 여전히 근육을 찢는 과정은 고통스럽겠지만.'

그거야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긴 했다.

'한번 볼까.'

나는 오랜만에 내 정보를 확인했다.

──────────────

이름 : 벨 블랙우드

레벨 : 1

체력 : 2

근력 : 2

정신력 : 2

특성 : [멸망 유예자(EX)], [병기 소환(??)], [인내(D)]

기예 : [검술(F)]

마법 : ─

──────────────

비록 보유 능력치가 세 개뿐이기는 해도, 모든 능력치가 드디어 2가 되었다.

물의 보옥의 권능과 더불어서 인내 특성의 효과까지 생각한다면 내 신체 능력이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상승했다는 뜻이었다.

'좋아.'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나는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정말로 자야 할 때다.

* * *

새벽에 잠이 깼다.

그토록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쉽게 잠이 들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서 그런 듯했다.

어쩌면, 물의 보옥이 내 피로를 빠르게 회복시킨 덕분인지도 모르고.

"...."

미처 예상치 못한 아이추웡과의 만남은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가져다주었다.

바로 익명 게시판에 대한 생각이었다.

나는 이제껏 익명 게시판을 조금 다른 세계처럼 보아 왔었다.

당장 나와 어떠한 감정을 공유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나와 엮일 리 없는 이들.

동시에 머나먼 곳에 있는 이들.

그러나 이번 아이추웡과의 만남은 나에게 있어서 그러한 사실을 똑똑히 일깨워 주었다.

익명 게시판 너머의 유저들은 실제로 나에게 얼마든지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존재들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나와 좋은 관계를 맺어 갈 수 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확률상 그렇지 않은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특히, 익명 게시판에 떠도는 뉴비 사냥꾼 괴담 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아이추웡은 뉴비 사냥꾼이 일개 괴담이라고 했지만... 글쎄.'

물론 정말로 일개 괴담일 수도 있으나, 나는 어쩌면 뉴비 사냥꾼이라는 것 자체가 한 명이 아닌 불특정 다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익명 게시판에 자신의 신원을 드러내면, 익명 게시판 내에 있는 불특정 누군가가 찾아간다.

그러한 일들이 겹쳐서 뉴비 사냥꾼이라는 하나의 괴담이 탄생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익명 게시판 내에서 그런 흉흉한 괴담이 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다른 유저를 노리는 이들이 있다.'

그게 단수인지 아니면 다수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러한 생각을 지닌 이들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점.

특히, 나는 이번에 아이추웡과의 사건을 통해서 ■■■ 파편이 승천석 파편임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실제로 뉴들박77의 추측 글에서 보았듯이, 승천석 파편을 모으고자 하는 유저들 역시도 있을 터.

'만약 누군가 지금 나를 노린다면 살아남기에는 어려워.'

아무리 나에게 병기 소환 특성이 있고 이제 물의 보옥까지 얻었다지만, 이러한 것들은 진짜배기 강자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총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 세계 속 원주민들과는 달리, 유저들은 총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즉,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라면 총구를 보고서 총알의 궤적을 피해 내는 것 역시도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혹은 총알 자체가 통하지 않거나.

'가장 좋은 방법은 익명 게시판 내에서 나에 대해서 노출하지 않는 거겠지만... 과연 그걸로 충분할까?'

만약 누군가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겨울성을 찾아온다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 내가 공정의 세계를 한창 플레이를 하던 당시에 나에게 원한 같은 걸 가진 이가 있지는 않을까?

만약 그러한 이가 지금 나를 찾고 있다면?

물론 지금 나는 공정의 세계를 플레이 했던 당시의 모습과 전혀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익명 게시판에 접속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곧장 익명 게시판에 접속했다.

-섭종기원344일차 : 이 존망겜 대체 언제 망함? 개X발 진짜.

-돈좀주세요 : 10실버만 빌려줄 사람 없음? 진짜 2주 동안 굶었다...

-익명55 : 심심하네.

게시판 첫 페이지에 있는 언제나처럼 쓸데없는 게시 글들을 뒤로한 채로, 나는 곧장 검색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목 검색 : 카인]

카인.

내가 공정의 세계를 플레이 했던 당시의 닉네임.

그렇게 검색을 하니, 의외로 적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루나 : 카인 기억하시는 분?

-익명23 : 카인도 여기 있을까?

-추측성뇌피셜3 : 카인이 뉴비 사냥꾼 아니냐?

-익명12 : 카인 뉴비 사냥꾼 가능성 있음 ㅇㅇ 걔 인성 터진 거로 유명했잖아. 그냥 거슬리면 다 죽여서.

-익명1 : 카인 없는 듯. 있었으면 진작 다 죽이고 파편 다 가져갔지.

아무래도 내가 공정의 세계를 플레이 하던 당시에 해 온 일들이 있다 보니 대부분 뒷담화 가까운 게시 글들이 많았다.

당시의 나는 그저 패배자들의 읊조림으로 치부했던 글들이었으나, 이제는 마냥 무시할 수 없게 된 글들이었다.

그런데 게시 글 중에서 유독 한 닉네임이 나를 많이 언급했다.

정확히는, 나를 찾고 있었다.

-루나 : 카인 본 사람 있어?

-루나 : 카인 님 계신가요?

-루나 : 카인 님 찾아요.

왜인지 간담이 서늘해졌다.

17화 아키로의 미궁

내가 공정의 세계를 플레이 하던 당시, 딱히 의도적인 비매너 행위를 하거나 다른 유저를 찾아다니면서 죽이거나 한 건 아니다.

당시 나는 사냥에 미쳐 있었고, 유저들과의 분란 같은 건 그저 귀찮다고 여겼으니까.

다만, 내 무시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나를 귀찮게 하거나 거슬리게 하는 이는 모두 죽였다.

당연히 그로 인해서 원한을 가지거나 비난하는 이들도 많았고, 실제로 나를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다.

물론 그들도 전부 죽였다.

나중에 가서는 대형 길드 같은 세력들이 직접 움직이기도 했지만, 끝내 모조리 죽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나를 건드리는 이들이 점차 없어졌고, 현재에 이르렀다.

'흐음....'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지금 누군가 나를 찾는 이유 역시도 좋은 의미로 나를 찾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게시 글 내에서는 카인 님이라 칭한다고 하더라도, 일단 통계적으로 공정의 세계 내에서 나에게 좋은 감정을 지닌 유저보다는 그렇지 않은 유저가 훨씬 더 많을 테니 말이다.

'루나라....'

아무리 내가 게임을 막 했다고는 해도, 내가 공정의 세계를 플레이 할 때 당시 친하게 지냈던 유저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중에서 루나라는 닉네임이나 별명을 지닌 이는 없었다.

'일단 무시하는 게 최선이겠지.'

내가 모르는 누군가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꺼림칙했지만, 어차피 내가 무시한다면 그쪽에서 내 존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금의 나는 카인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루나라는 유저에 대해서 조금 궁금한 건 사실이었기에 나는 약간의 정보를 찾아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루나가 내가 아는 인물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또 아니었으니 말이다.

[작성자 검색 : 루나]

그와 함께 지금껏 루나가 작성했던 무수한 게시 글이 나왔다.

-루나 : (루나의 요리 시간) 오늘 양념치킨 만들어 봄!

-루나 : 카인 본 사람 있어?

-루나 : 익명55 너 경고한다. 함부로 입 털고 다니지 마라.

.

.

.

-루나 : (사냥 인증) 오늘 코쿤다라 잡았음.

루나가 작성한 게시 글에서는 상당히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평균적인 개체의 레벨이 6레벨 이상인 마수 코쿤다라를 아무렇지도 않게 잡았다는 인증 글을 보았을 때 꽤 수준급의 유저로 보였다.

'흐음....'

나는 루나가 작성한 게시 글을 더 살폈다.

-루나 : 아 ㅅㅂ 개 ㅈ 같네.

-루나 : (오늘의 루나 요리) 카레 만들어 봄! 개존맛!

-루나 : 오늘은 혼자 있고 싶으니까 다들 나가 주세요.

대부분 요리나 일상적인, 소위 말하는 뻘글들이었으나,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가지 게시물을 발견했다.

-루나 : (고민 글) 진짜 찾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찾아야 할지를 모르겠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게시 글을 눌렀다.

──────────────

예전에 나 도와줬던 진짜진짜 고마운 사람이 있거든?

근데 찾을 수가 없네...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찾을 수 없을까?

──────────────

-익명99 : 그게 누군데?

-추측성뇌피셜3 : 얘 맨날 카인 찾는데 카인 말하는 거 아님?

-헤슨 : 누가 봐도 카인이긴 함 ㄹㅇ ㅋㅋ

-익명97 : 익게 공식 카인빠 루나 ㄷㄷ

-기사단장임 : 흠... 그 정도인가?

-익명55 : 카인 죽이려고 벼르고 있네 ㄷㄷ

-뉴들박77 : 위험한 사람 찾고 있네;; 진짜로 찾아오면 어쩌려고...

──────────────

댓글에 달린 말마따나 일단 익명 게시판만 본다면 루나가 찾고 있는 사람은 카인 같았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아이추웡의 게시 글을 통해서 익명 게시판을 통해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다.

익명 게시판에 올라오는 게시 글들은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함정을 파고서 사냥감을 기다리는 덫과도 같다.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건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역시 엮이지 않는 게 좋겠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루나라는 인물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루나가 작성한 게시 글을 봐도, 그 어떤 것 하나 내가 알고 있는 인물과 겹치는 게 없었다.

즉, 루나는 평소 내가 알고 있었던 지인이 닉네임을 바꾼 것이 아닌 모종의 목적으로 나를 찾고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컸다.

그리고 그 목적은 아마 좋은 목적보다는 원한 등의 좋지 않은 목적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겠지.

루나를 잠정적 위험인물로 분류한 나는 익명 게시판의 다른 게시 글들로 시선을 옮겼다.

가장 먼저 살펴본 건 역시나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추천 글 목록이었다.

아무래도 요즘 통 익명 게시판을 보지 못했으니, 새로운 게시 글이 있나 싶어서였다.

-DoDo : (보상 있음) 혹시 아키로의 미궁 2층 어떻게 하는지 아시는 분 계심? [★]

그러다가 유독 한 가지 게시 글이 눈에 들어왔다.

──────────────

아키로의 미궁 2층 공략 아시는 분 제보 부탁.

제대로 된 공략이면 크게 사례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보상금 지급은 직접 만날 필요 없이 경매장 기능으로 미리 약속한 잡템 하나 올리시면 그거 제가 입찰하는 걸로 할게요.

혹시 아직 게시판 등급 2레벨 달성 못 한 분은 나중에 2레벨 달성하시면 그때 드림.

댓 바람.

──────────────

아키로의 미궁.

공정의 세계 내에서도 몇 없는 미궁 중 하나로서, 공정의 세계의 썩은 물 중 썩은 물인 나 또한 9층까지밖에 클리어 하지 못한 극악의 던전이다.

고작 2층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직접 아키로의 미궁을 겪은 나로서는 미궁 2층이 얼마나 공략하기 난해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익명21 : 그거 예전에 깨긴 깼었는데 어케 깼는지 까먹음.

-늅늅이 : 게시판 2레벨 기능이 경매장이었음? ㅁㅊ 바로 렙업하러 간다.

-뉴들박77 : 오... 아키로의 미궁 추억이네 ㅋㅋ 화이팅입니다.

└DoDo : 감사합니다. 너무 어려워요 ㅜㅜ

-익명651 : 아키로의 미궁이 어디 있는 거임? 예전에 들어 본 것 같긴한데.

-김박사 : 거기 2층이 좀 빡세긴 하지.

-기사단장임 : 흠... 상금까지 걸 정도인가?

-익명1426 : 질문 글인데 막상 내용은 게시판 2레벨 기능 정보 글이네 ㅋㅋ 개꿀 정보.

-익명23 : [비밀 댓글입니다.]

└DoDo : [비밀 댓글입니다.

└익명23 : [비밀 댓글입니다.]

└DoDo : [비밀 댓글입니다.]

-구사다 : 먼저 입금하면 알려 줌 ㅇㅇ 4층까지 깬 경험자임.

└DoDo : [비밀 댓글입니다.]

-익명536 : 마감 끝남?

└DoDo : 아직입니다. 알려 주시면 바로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보상이 있다는 말 때문일까.

아니면 그 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이 꽤 구체적이고 안전하기 때문일까.

어찌 보면 단순 질문 글에 가까운 아키로의 미궁 공략을 찾는다는 글이 무려 추천 글 목록에 오를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거기에는 이제껏 거의 공개되지 않았던 게시판 2레벨 권한에 대한 정보가 있기 때문도 있을 터.

'호오....'

이제껏 게시판 2레벨 권한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기회로 그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경매장 기능이라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기능일 테니, 게시판 등급을 올릴 이유가 많아진 셈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키로의 미궁이라....'

아키로의 2층 공략법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미 수백 번은 넘게 트라이 했던 던전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댓글을 달까 말까 잠시 고민했으나, 문제는 지금 내가 경매장 기능을 개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 답변해 주면 나중에 보상해 준다고는 하지만....'

소위 말하는 먹튀를 당할 가능성도 있는 상황.

물론 아키로의 미궁 2층 공략 정도야 먹튀를 당해도 나한테는 큰 지장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이 됐다.

'저것 자체가 어떤 함정일 가능성은 없는 건가?'

가능성은 낮았다.

도도가 말한 대로 보상을 지급한다면, 어떤 함정 같은 게 끼어들기에는 어려운 게 사실이었으니까.

'흐으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차피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아키로의 미궁은 분명히 극악의 던전이지만, 고층도 아닌 2층 정도라면 나 말고도 공략법을 아는 이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실제로 댓글에서 몇몇 이들은 공략법을 아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문제는, 답변에 쓸 닉네임을 어떻게 짓느냐인데....'

엄밀히 따지면 전혀 고민할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민이 됐다.

실제로 나는 게임을 할 때 캐릭터 닉네임 생성에 꽤 고민을 하는 유형이었으니까.

카인이나 그와 관련된 닉네임은 당연히 기각이다.

실제로 익명 게시판 내에 카인을 찾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는 만큼, 그런 닉네임을 짓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와도 같다.

'가장 무난한 건 게시판에 가장 많은 익명 시리즈인데....'

실리적으로만 따진다면 익명 시리즈로 닉네임을 짓는 게 가장 무난할 것이다.

실제로 다른 유저들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익명 시리즈로 닉네임을 짓는 것 아니겠는가.

괜히 익명 게시판 내에서 가장 많은 닉네임을 차지하는 게 익명 시리즈가 아니라는 뜻.

그런데 왜일까.

익명 닉네임은 왠지 끌리지 않았다.

나 자신의 정체성을 익명 속에 묻는 듯한 느낌이 든달까?

'...좋아.'

마침내 닉네임을 정한 나는 도도의 질문 글에 답변 댓글을 작성했다.

기나긴 고심 끝에 정한 익명 게시판에서 사용할 닉네임은 간단했다.

[용잡이]

카인과는 전혀 관계없으면서 동시에 내심 멸망룡을 잡고 나서 자랑하고 싶었던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한 닉네임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그토록 무리해서 멸망룡을 잡고자 했던 이유 중 하나에는 명예욕 또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거기에 더해서 닉네임에 있는 약간의 귀여움까지도 잡았으니 닉네임을 짓고도 스스로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음, 충분해.'

답변은 비밀 댓글로 작성했다.

아키로의 미궁 2층 공략이 엄청난 비밀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란 늘 가치가 있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더해서 설령 도도에게 아키로의 미궁 2층 공략을 먹튀당하더라도, 정보가 불특정 다수에게 아예 공개되는 것보다는 낫기도 했고.

-용잡이 : 아키로의 미궁 2층 공략에 대해서.

'뭐, 진짜로 먹튀를 한다면 공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러나 내가 지닌 정보 하나하나 모두가 어찌 보면 귀중한 자산이나 다름없다.

아낄 수 있다면 최대한 아끼는 게 옳았다.

아키로의 미궁 2층 공략은 계속해서 미궁 구조가 변하는 탓에 얼핏 보면 복잡하기 짝이 없지만, 그 규칙과 법칙을 안다면 의외로 간단하게 돌파할 수 있다.

물론 내가 그걸 깨닫기까지 2층만 해도 약 105번의 트라이가 있었으니, 도도가 저렇게 공략을 찾아 헤매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니었다.

무수한 트라이를 할 수 있었던 나와는 달리, 지금 공략에 실패한다는 건 말 그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되겠지.'

대댓글 3개를 사용하며 작성한 공략을 쓴 후, 나는 게시판을 닫았다.

도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일단 지금 내 시점으로는 새벽이었으니 게시 글을 확인할 때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터.

나도 굳이 초조해할 필요 없이 천천히 도도의 확인을 기다릴 셈이었다.

만약 먹튀를 한다면 그건 그때 가서 따로 생각을 해 볼 일이었으니 말이다.

18화 승마 훈련

-전원 기상!

아침을 알리는 분주함과 함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새벽이 지나갔다.

다시금 시작된 하루와 함께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어찌 보면 오지 않기를 바랐던 하루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총원 넷, 결원 없습니다."

"그래. 아침 식사 후에 훈련장으로 집합하도록."

늘 있었던 가벼운 점호가 끝난 뒤에 나는 식당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배식장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 메뉴는 무슨 동물인지 모를 고기 몇 조각과 온갖 야채가 들어간 괴상한 빛깔의 스튜였다.

"...음?"

의외로 맛은 좋았다.

그러고 보니, 중세 여관에는 소위 영원한 스튜라 불리는 요리가 있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24시간 365일 끊임없이 끓이면서 양이 줄어들 때마다 매번 다른 재료를 추가했다고 하던가.

그 탓에 겉보기에는 썩 좋지 못해도 온갖 재료의 감칠맛이 흘러나와서 의외로 맛있었다고 했다.

아마 지금 겨울성에서 배급되고 있는 스튜 역시도 그것과 비슷한 음식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겨울성에 온 뒤로 스튜 메뉴가 꽤 자주 나오기도 했고 말이다.

'뭐, 이런 날씨에는 스튜 같은 음식이 딱 좋긴 하지.'

뜨끈해서 이런 혹한의 환경에서는 딱 먹기 좋은 데다가, 스튜라는 요리 자체가 군대 특성상 대량 조리에도 용이했으니 자주 나올 수밖에 없긴 했다.

그렇게 의외로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저쪽에 있는 게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특무대에 들어왔다는 마법사인가?"

"그래, 듣기로는 실력이 상당하다던데. 엄청난 마법을 지녔다더군."

"그래 봤자 범죄자지."

겨울성 병사들이 힐끗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하는 게 들려왔다.

아니, 대놓고 들으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범죄자 비율이 한없이 높은 겨울성에서 저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걸 보면 입대한 지 그리 오래된 이들은 아닌 듯했다.

'뭐, 상관없지.'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히 식사를 이어 갔다.

저 정도로 생각이 없는 이들이라면 어차피 내가 뭘 하지 않아도 오래 살아남지는 못할 테니까.

그 순간.

"흥."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불쑥 옆으로 다가왔다.

"버러지들이 뒤에서 지껄이는 건 잘하는군. 앞에서도 해 보지 그래?"

척 봐도 위압적인 외모를 지닌 콘란이 으르렁대며 말하자, 조금 전까지 신나게 말하던 병사들이 입을 꾹 닫았다.

"다 먹었으면 이만 가지."

"그러자고."

"퉷."

그 광경을 보고 있으니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미친놈은 적일 때는 더없이 거슬리지만, 막상 아군이 되면 그 누구보다도 든든하다고.

지금 콘란이 그러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무슨. 어차피 저런 놈들은 너한테 걸리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 알아. 다 먹었으면 이만 가자고. 집합 시간이다."

"벌써?"

"아직도 먹고 있는 게 이상한 거다. 그 정도는 후루룩 먹고 진작 일어났어야지. 깨작깨작 먹어서 언제 다 먹어?"

아무래도 아직 현대인으로서의 식습관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이 시대의 이들에게 있어서 밥이란 식사보다는 생존을 위한 섭취가 더 어울릴 테니 말이다.

"알았어. 이것만 먹고."

"대장이 기다린다니까?"

"알았다니까."

그렇게 나는 마저 식사를 마친 후에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식사 시간을 방해받는 것만큼은 참지 못하겠다고 해야 할까.

"대장한테 한 소리 듣겠군."

나 때문에 함께 집합 시간에 늦게 생겼다고 콘란이 투덜댔다.

"명색이 군대인데 밥 먹는 시간 정도는 보장해 줘야지."

"아직도 그런 배부른 소리나 하나? 마법사답지 않다 했더니, 괴상한 건 또 마법사답군."

나름대로 서둘러서 훈련장에 도착하자, 에드릭이 말했다.

"다들 왔군. 식사들은 맛있게 했나?"

"예."

"하루 쉬었다고 목소리들이 또 영 안 좋군. 좋아, 오늘은 기초 체력 훈련을 진행하겠다."

"아닙니다!"

"아니긴. 목소리들에 힘이 빠진 걸 보니, 아무래도 체력 훈련이 좀 필요해 보여. 그래... 우선, 선착순 한 명."

이런 X발.

* * *

에드릭의 담백한 선언과 함께 제4 특무대원들이 부랴부랴 뛰기 시작했다.

알비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흠.'

알비노로서도 지긋지긋한 선착순 뜀박질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상관이 시키니 할 수밖에 없었다.

원치 않았던 겨울성의 군인이 된 이상, 겨울성을 탈출할 기회가 생기기 전까지는 괜히 소란을 피우지 않는 게 현명했으니까.

물론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늘 그랬듯이 에드릭의 무식하기 짝이 없는 선착순 경쟁에서 꼴등을 하는 것은 벨 블랙우드일 테니 말이다.

벨 블랙우드가 매우 강력한 마법을 소유한 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에 반해서 형편없는 몸뚱어리를 지녔다.

그렇기에 알비노는 내심 벨 블랙우드를 무시했다.

'운 좋게 좋은 마법을 얻은 모양이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겠지.'

강력한 마법은 그에 걸맞은 대가를 요구한다.

그것은 라크나 대륙에서 피할 수 없는 황금률으로 이루어진 공정한 계약이었고, 그 어떤 존재도 그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벨 블랙우드가 마법을 믿고서 저렇게 오만하게 구는 것도 얼마 가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다.

"무리하지 말고 얌전히 뒤꽁무니나 쫓아오... 응?"

알비노가 언제나처럼 벨 블랙우드를 향해 조롱의 말을 내뱉으려던 순간.

"후욱, 후욱...!"

이변이 일어났다.

본래였다면 한참 뒤에서 자신의 뒤꽁무니나 쫓고 있어야 했을 벨 블랙우드가 자신을 추월하기 시작한 것이다.

'뭐지?'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벨 블랙우드는 자신의 뒤꽁무니조차 쫓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알비노는 여유롭게 훈련에 임할 생각이었지만, 벨 블랙우드가 갑작스럽게 치고 나가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힘을 숨겼나?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알비노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지금 뒤처지면 에드릭의 선착순에 희생되는 건 자신일 테니 말이다.

"망할! 내가 저따위 녀석에게...!"

알비노 역시도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였으나, 어째서인지 벨 블랙우드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마치 이제는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알비노의 경악 속에서 벨 블랙우드의 뒷모습이 점차 멀어졌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 * *

속이 울렁거린다.

훈련 첫째 날과 같은 기초 체력 훈련을 빙자한 고문 속에서 아침에 든든하게 먹은 걸 다시 게워 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드디어 제4 특무대원 중 한 명인 알비노를 선착순 달리기에서 완전히 제친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콘란과 알리시아처럼 압도적인 육체 능력을 지닌 이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저 흰 머리는 제쳤어도 나는 쉽지 않을걸! 천천히 오라고! 하하!"

가볍게 내 등을 두드리며 앞서 나가는 콘란의 뒤통수에 총구를 겨누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 인내심 수양이 깊어서가 아니라 총을 꺼낼 힘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뛰고,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뛰고 지쳐서 잠시 쓰러져 있을 때, 에드릭이 말했다.

"훈련 성과가 있는 것 같군. 예전보다 움직임이 훨씬 좋아졌어."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자, 몸풀기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고, 그러면 본격적으로 오늘 훈련을 시작하겠다."

"...이미 한 것 아닙니까?"

힘없는 항변을 해 보았지만,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원 농담도. 지금까지는 늘 하던 기초적인 체조 정도지 않나?"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특무대원 중 그 누구도 웃지 못했다.

"특무대는 앞으로 마경을 비롯한 외부 임무에 나설 일이 많을 거다. 그때마다 마차를 타고 다닐 수는 없으니, 승마 정도는 할 수 있어야겠지. 혹시 대원 중에서 말 탈 줄 모르는 사람 있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나만 빼놓고.

"좋아, 부족한 건 이번에 새로 배우면 되는 법이지. 바로 시작하지."

에드릭의 말과 함께 오늘의 진짜 훈련이라고 할 수 있는 승마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으랴!"

"워워워."

"...."

나를 제외하고 모두 말을 타 봤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콘란과 알리시아는 물론이고 알비노조차도 말을 타는 데 꽤 능숙했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는 말을 타는 게 기본적인 차량 운전과 비슷한 게 아닐까?

"으랴!"

-히이잉!

말을 타는 건 쉽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재능이 있었던 건지 다행히 점차 익숙해졌다.

"...흥."

어째 나를 보는 알비노의 시선이 조금 묘한 걸 보니, 아무래도 조금 전 선착순 달리기에서 나에게 제쳐진 게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에드릭이 말했다.

"좋아, 처음치고는 곧잘 하는군. 그렇게만 타면 되네."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지금처럼만 하게. 느낌이 중요해, 느낌이."

에드릭의 승마 훈련은 체계적인 교육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으나, 그래도 효과는 꽤 있었다.

백 마디 말보다 직접 한 번 타 보는 게 더 낫다는 게 에드릭의 주요 훈련 지론이었다.

-히이잉!

그런 무식한 훈련이다 보니, 아무리 내가 승마에 재능이 있어도 가끔은 낙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다행히도 물의 보옥이 은연중에 나를 보호했는지 낙마의 충격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뒈질 뻔했네.'

아무튼 그렇게 몸으로 직접 부딪치면서 승마 훈련을 받다 보니 어느덧 말을 타는 게 빠르게 숙련되어 갔다.

숙련된 기마병들처럼 말을 타고서 여러 묘기를 부릴 정도는 아니어도, 일단 고삐를 잡고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는 된 것 같달까?

본래의 내가 말은커녕 당나귀조차 몰 줄 몰랐다는 걸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다. 다들 들어가서 개인 정비 후에 쉬도록."

마침내 고단했던 오늘 하루 훈련이 끝났다.

막사로 돌아가던 중, 알비노가 나에게 다가왔다.

"너,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뭘?"

"갑자기 신체 능력이 좋아졌더군. 혹시 마법을 사용한 건가?"

하긴, 물의 보옥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신체 능력 상승이 마법처럼 보일 법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아이템발이었으니 그리 틀린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훈련에 성실히 임한 덕분이지."

"웃기지도 않는 소리. 아무리 훈련을 했다 하더라도 신체 능력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증가하는 건 불가능해."

"그걸 해낸 걸 어쩌겠어?"

"순순히 말해 줄 생각은 없다는 건가.... 그래, 그렇겠지."

알비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는 쉽지 않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알비노가 성큼성큼 막사로 돌아갔다.

"왜 저래?"

그에 근처에 있던 콘란이 나에게로 살며시 다가왔다.

"자존심이 상한 거지."

"흠. 달리기 좀 제쳐졌다고? 생긴 대로 소심하군."

"너도 곧 제칠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

"하하! 도전은 얼마든지 받아 주지."

콘란이 호탕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을 제칠 리는 절대로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두고 보라고."

"기대하지."

그 순간.

─부우우우우우우...!

어디선가 들려오는 거대한 뿔피리 소리.

나는 이 소리를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마수다!

-각자 위치로!

뿔피리 소리와 섞인 군인들의 다급한 외침.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겨울성이 공격받고 있다.

19화 변종 토벌

겨울성 크로이츠는 늘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장소다.

마경에서 쏟아지는 마수들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방패이자, 북부의 최전선.

그렇기에 겨울성이 공격받고 있다는 건 어찌 보면 그리 특이할 것이 없는 이야기였으나, 문제는 이제 내가 그 전쟁의 당사자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제4 특무대 전원 집합!"

쩌렁쩌렁 울려 퍼진 에드릭의 외침과 함께 제4 특무대원들이 하고 있던 모든 행동을 멈추고서 순식간에 에드릭 앞에 모였다.

"현재 겨울성이 공격받고 있다. 따라서 긴급조치에 따라 제4 특무대는 훈련병 신분에서 이등병으로 조기 진급이 될 것이며, 제4 특무대는 바로 임무에 투입될 것이다."

이미 알고 있던 대로 겨울성은 현재 공격을 받고 있는 듯했다.

또한, 훈련병 신분인 제4 특무대까지 긴급히 차출이 될 정도로 상황이 다급한 듯했고.

"각자 전투태세를 갖춘 후에 3분 후에 이곳에서 집합하겠다. 움직여!"

늘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던 에드릭의 진지한 모습이 지금 사태가 어떤지 말해 주었다.

"예!"

힘찬 외침과 함께 제4 특무대원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막사로 돌아간 나는 가장 먼저 겨울성에서 보급 받은 방한복 대신에 아이추웡의 장비를 입었다.

이제부터는 목숨을 건 실전이다.

아무리 귀중한 장비라고 해도 괜히 아끼다가 개죽음을 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이, 그건 뭐야? 평소에 입던 게 아닌 것 같은데. 이번 휴가 때 가져온 게 그거였나?"

"새로 하나 장만했지."

"꽤 좋아 보이는데. 남는 건 없나?"

"유감스럽게도."

"아쉽군."

콘란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겨울성은 환경이 환경인 탓에 복장에 대한 규율이 그리 강하지는 않다.

아니,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대부분의 군인들이 겨울성에서 보급해 주는 방한복보다 뛰어난 장비가 없었기에 그냥 보급해 주는 것을 입고 있었을 뿐.

그렇기에 콘란을 비롯한 제4 특무대원들 역시도 처음 겨울성에 끌려올 때 입고 있었던 옷을 곳곳에 껴입고 있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다른 지역에서 입던 옷들이다 보니 겨울성에서는 크게 도움이 안 되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가만히 이를 지켜보던 알비노 역시도 한마디 했다.

"라듄의 가죽을 소재로 만든 물건이군. 그런 걸 어디서 구했지? 보통 귀한 게 아닐 텐데."

"주웠지."

"흠. 그런 것치고는 피 냄새가 좀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뭐, 상관없지."

아직 아이추웡의 피 냄새가 남아 있었던 모양.

날을 잡고 빨래라도 한번 해야겠다 싶었으나, 이런 엄동설한에 가급적이면 빨래는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라듄의 가죽이라는 소리 때문인지 알리시아와 내가 눈이 마주쳤다가 알리시아가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

왜인지 저 기계 같은 여자의 인간다운 구석 조금은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준비를 마친 나는 마지막으로 가져갈 무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보급용 무기는 당연히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고민하는 건 당연히 아이추웡이 사용하던 창과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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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구스의 직검]

분류 : 무기

등급 : 고급

장인 로구스의 손에 의해서 탄생한 직검.

찌르기와 베기 모두에 용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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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콘의 뼈 창]

분류 : 무기

등급 : 고급

아르콘의 뼈를 갈아서 만든 창.

매우 날카로우며, 찔린 상대의 상처를 찢어발긴다.

────────────

성능상으로는 모두 비슷한 수준.

그렇기에 더욱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가져가는 건 아무래도 힘들겠지.'

보통 이렇게 두 종류의 무기가 있으면 창을 주 무기로 사용하고 검을 보조 무장으로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애초에 나는 마수와 얼굴을 맞댄 근접 전투를 할 생각이 없다.

라듄의 가죽 장비를 입고 더 나아가서 물의 보옥을 지녔다 하더라도, 마수와 얼굴을 맞대는 건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무리 능력치가 올랐다고 해도, 여전히 저열하기 짝이 없는 내 육체 능력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곧, 나는 그중에서 어느 것을 챙겨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로구스의 직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내가 이 무기들을 쓸 일이 있다면 상당히 다급한 상황일 텐데, 긴 사거리를 가진 대신 다급히 사용하기 어려운 창보다는 뽑아서 곧장 휘두를 수 있는 검 쪽이 더 맞는 것 같아서였다.

'엄밀히 따지면 검도 쓰기는 어렵겠지만... 일단은 이 정도로 해 두는 게 좋겠지.'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로구스의 직검은 무게나 크기에서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마찬가지로 다른 제4 특무대원들 역시도 모든 준비를 마쳤는지 집합 장소로 모여들었다.

여전히 제4 특무대원들 사이에 유대감이나 전우애 같은 건 없었으나, 적어도 같은 운명을 공유한 공동체 비스름한 느낌은 조금 생긴 것 같았다.

"전부 왔군. 임무를 설명하겠다."

우리가 집합 장소에 모이기 무섭게 에드릭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상황은 이미 대충 알겠지만, 현재 겨울성이 공격받고 있다. 적의 규모는 최소 3천 이상의 마수 무리로 추정되며, 현재 아군이 교전 중이다."

에드릭이 계속해서 말했다.

"제4 특무대의 임무는 이번 공격의 주체로 파악된 변종을 추격 및 토벌하는 거다. 질문 있나?"

변종.

나로서도 처음 듣는 명칭이다.

"변종이 뭡니까?"

"최근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마수 유형이다. 일반적인 마수보다 덩치가 크고 강하며, 거기에 더해서 상당한 수준의 지능까지도 지닌 것으로 파악됐다."

"일반적인 우두머리 개체 아닙니까?"

"아니, 우두머리 개체는 아니다. 그것만큼은 확실해."

어째서일까.

저 듣도 보도 못 한 변종이라는 존재가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다른 질문 없으면 바로 출발하겠다. 시간이 얼마 없어."

에드릭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4 특무대가 막사를 나서기 무섭게 괴성과 굉음이 울려 퍼졌다.

-끼에에엑!

-크룩, 크루루룩!

-카아악!

쿵!

쿠우웅!

"빨리빨리 움직여!"

"북쪽 성문 더 보강해! 대형 마수가 출몰했다!"

"화살 더 가져와!"

당장 이곳의 위치는 직접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성문 쪽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기는 보통이 아니었다.

에드릭이 말했다.

"북쪽 성문은 한창 교전 중이라서 우리가 나갈 수 없다. 우리는 남문으로 나선 뒤에 변종을 추격할 거다."

말이 추격이지, 사실상 3천 마리가 넘는 마수 무리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요인 암살을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으음.'

제4 특무대라는 이름에서 알아봤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배척받는 존재인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범죄자 출신들을 데려다가 새로운 부대를 만들었을 때부터 알아보았어야 했다.

우리가 맡은 임무는 일반적인 겨울성 병사들이 맡은 임무가 아니었다.

"...흠. 쉽지 않겠군."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내내 여유롭기 짝이 없었던 콘란과 알비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그나마 알리시아 같은 경우는 평소에도 무표정이었기에 그게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로 그녀가 긴장을 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남문에 도착하자, 경비조장이 에드릭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셨군요. 무운을 빌겠습니다."

"그래, 자네도."

이제 훈련을 받은 지 일주일도 채 안 된 훈련병들이 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임무였지만, 애초부터 그런 건 겨울성에 있어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마법사 출신의 범죄자들로 만든 부대.

이는 곧 겨울성에 있어서 죽어도 되는 이들이라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쯧.'

그러나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 * *

이동은 도보였다.

애초에 작전 지역이 겨울성 인근인 데다가, 최대한 은밀성이 요구되는 이번 임무에서 말 같은 걸 탔다가는 마수 무리에 발각된 뒤 포위되어서 죽을 테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에드릭이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서부터 변종을 추격한다."

"변종은 어떻게 알아봅니까?"

"그냥 보면 알 수 있을 거다."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으나, 대개 저렇게 말하는 데에는 그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변종을 찾을 때까지 교전은 피한다."

이견은 없었다.

무려 3천이 넘는 마수 무리 한복판에서 난동을 부리고 싶은 이는 적어도 제4 특무대원 중에서는 없었으니까.

사박, 사박-

모두가 숨을 죽인 채로 조심스럽게 눈으로 뒤덮인 땅을 밟았다.

비록 우리가 전문적으로 은밀 기동을 훈련한 건 아니었지만, 다행히 한창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전투의 괴성과 굉음이 우리가 움직이는 소리를 감춰 주었다.

-카아악!

-끼이익, 끼이익...!

그리고, 그 전쟁의 괴성은 우리가 걸음을 옮길수록 더욱더 가까워졌다.

가까워지는 건 비단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무언가 타들어 가는 냄새, 쇠 냄새 그리고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생각보다 잘 따라오는데."

슬쩍 나를 돌아본 알비노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 말마따나 예전의 나였다면 진작 이 강행군을 이겨 내지 못하고 퍼졌을 테지만, 물의 보옥으로 인해서 신체 능력이 향상된 지금은 간신히 제4 특무대의 진격 속도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지.'

물의 보옥이 나에게 가져다준 건 비단 빠른 근육 회복뿐만이 아닌, 소소한 체력 회복, 재생력 상승 또한 있었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의 기력 회복을 돕습니다.]

비록 모닥불 앞에 있을 때처럼 극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지는 못했지만, 그 소소한 효과가 내가 조금이나마 덜 지치게 만들어 주었다.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까.

"이 정도야 가뿐하지."

"말은 잘하는군."

"나한테 진 주제에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알비노의 눈이 가늘게 나를 보았다.

이제껏 체력 훈련 때마다 가장 먼저 나가떨어지던 모습을 알고 있었을 테니, 지금의 내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렇게 수풀 사이로 은밀하게 이동을 하고 있을 때, 선두에 있던 에드릭이 멈추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 이유야 뻔했다.

-크루루루....

마수가 바로 앞에 있다.

그것도 한두 마리도 아닌, 무려 수십 마리에 달하는 마수들이.

[Lv.5]

[불태우는 하르스]

무려 5레벨의 네임드 개체.

거기에 더해서 불태우는 하르스의 이마에 마치 뿔처럼 돋아나 있는 그것을 내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 특유의 빛깔은 도저히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승천석 파편!'

그 순간.

[쿠루루루!]

놈이 우릴 보았다.

20화 변종 토벌 (2)

하르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해 꽂히기 무섭게 주변 마수들의 시선 역시도 우리에게 향했다.

[Lv.3]

[화염 꼬리 도마뱀]

마치 불길 수십 개가 일제히 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다.

수십 마리의 화염 꼬리 도마뱀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전투는 피할 수 없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에드릭이 무기를 꺼내 들며 외쳤다.

"전투 준비!"

그에 콘란과 알비노, 알리시아가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화염 꼬리 도마뱀은 이 부근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마수다.

그도 그럴 것이, 마경이 아무리 넓다 해도 겨울성과 인접한 북부 지대의 기후는 대개 혹한의 기후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화염 속성을 지닌 화염 꼬리 도마뱀들은 거의 서식하지 않건만, 어째서인지 수십 마리나 되는 화염 꼬리 도마뱀들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이유야 뻔했다.

'저것 때문이겠지.'

[Lv.5]

[불태우는 하르스]

화염 꼬리 도마뱀의 변종.

무려 5레벨 개체답게 놈이 내뿜는 맹렬한 화염이 주위의 환경을 화염 꼬리 도마뱀이 살 수 있게 만들고 있었다.

곧,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 역시도 뻔했다.

'놈을 노려야 해.'

그러나 애석하게도 콜트 패리슨 B-09를 꺼내 들기 무섭게 화염 꼬리 도마뱀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루, 쿠루루!!]

어설프게 총알을 아낀다는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무려 3레벨의 마수.

이를 바꿔 말하자면 접근을 허용하는 순간 나를 순식간에 죽일 수 있는 마수라는 뜻이었으니까.

타아아앙!!!───

콜트 패리슨 B-09의 요란한 총성은 은밀성을 요구하는 이번 임무에 그리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쓸 때는 아니었다.

[쿠루룩!]

과연 3레벨 마수라는 걸까.

아니면 긴박한 상황 탓에 급소를 맞히지 못했기 때문일까.

격발된 총알이 제대로 적중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염 꼬리 도마뱀은 잠시 주춤했을 뿐, 곧이어 다시금 나를 향해서 화염 꼬리를 휘둘렀다.

부우웅!

위험하다.

그리 느끼며 다급히 공격을 피해 냈으나, 비루한 육체 능력으로는 그것을 완전히 피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순간.

['물의 보옥'이 사용자를 보호합니다.]

내 앞에서 일어난 얼음의 장막이 화염 꼬리에서 뿜어지던 불길을 막아 냈다.

물의 보옥의 힘이었다.

치이익...!

그로 인해서 생겨난 찰나의 빈틈.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타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날아든 총알은 이번에는 목표물을 놓치지 않았다.

[쿠룩!]

단번에 화염 꼬리 도마뱀의 미간을 파고든 총알에 화염 꼬리 도마뱀이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일단 위기는 넘겼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상황은 여전히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

"이 파충류 새끼들이!"

콘란이 포효하며 거대한 양날 도끼를 휘둘렀으나, 날랜 움직임을 지닌 화염 꼬리 도마뱀은 그 무식한 도끼질에 쉽사리 맞아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콘란이 그렇게 헛손질을 할 때마다 불꽃을 내뿜는 꼬리를 흔들며 콘란의 몸을 불태웠다.

"으아아!"

그나마 주변에 눈이 가득 쌓여 있었기에 타오르는 불길은 금방 끌 수 있었으나, 저 불길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키룩!]

그나마 알비노 같은 경우는 콘란보다는 잘 대응하고 있었다.

푹!

푸푸푹!

콘란이 요란하게 날뛰며 화염 꼬리 도마뱀들의 시선을 끄는 동안, 알비노는 어느덧 한 마리의 화염 꼬리 도마뱀의 심장에 단검을 찔러 넣는 데 성공했다.

그제야 나는 알비노가 사용하는 마법이 정확히 어떤 마법인지 완벽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상대의 감각을 통제하는 마법이군.'

화염 꼬리 도마뱀이 알비노의 마법에 당하자, 마치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듯이 겁에 질린 게 바로 그 증거였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마법은 매우 강력한 마법에 속한다.

강력한 마법은 그에 걸맞은 대가를 요구한다.

나는 보았다.

마법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알비노의 흰머리가 더욱 하얗게 물들고, 안 그래도 앙상했던 몸이 더욱더 가늘어지는 것을.

'수명을 대가로 사용하는 마법인가.'

마법의 대가 중에서도 최악이라 불리는 대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대로 알비노는 지금 그러한 대가를 치러 가면서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과할 정도로 무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외쳤다.

"알비노! 마법 사용을 자중해! 그러다가는 네가 죽는다!"

"닥쳐! 네깟 놈 주제에 나한테 명령하지 마!"

조금 알 것 같았다.

알비노가 어째서 저렇게까지 무리를 하는지.

"...쯧."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이 있다면, 역시나 제4 특무대의 대장인 에드릭의 활약이었다.

촤악!

에드릭의 검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화염 꼬리 도마뱀의 목이 날아갔다.

그 솜씨가 어찌나 유려한지 화염 꼬리 도마뱀들이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목이 댕겅 잘려 나갔다.

내가 그 모습을 보며 알아낸 사실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식으로 배운 검술이다.'

알리시아의 활약 또한 두드러졌다.

평소 과묵한 터라 그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일단 한번 제대로 날뛰기 시작하니 확실히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일전에 콘란을 단번에 제압한 게 우연이 아니라는 뜻.

'역시 징벌 교단의 이단 심문관인가.'

대체 징벌 교단의 이단 심문관이 어떤 목적으로 죄인 신분으로 겨울성에 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지금 당장 알리시아가 매우 큰 전력이 된다는 점이었다.

나 또한 멈추지 않고서 방아쇠를 당겼다.

순식간에 5마리의 화염 꼬리 도마뱀을 쓰러뜨리고, 도합 12발의 총알을 소모했다.

아무리 특성의 진화로 인해서 총알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지만, 상상 이상의 소모 속도였다.

화염 꼬리 도마뱀 자체가 워낙 날쌘 움직임을 가진 데다가, 두르고 있는 가죽과 비늘 역시도 일전에 상대했던 마두견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안 돼.'

적지 않은 수의 화염 꼬리 도마뱀이 쓰러졌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화염 꼬리 도마뱀들이 여전히 건재한 채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단순히 기회를 엿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약간이라도 빈틈을 드러내면 곧장 달려들었다.

바로 지금처럼.

['물의 보옥'이 사용자를 보호합니다.]

쩌적, 쩌저적!

다시금 일어난 얼음 방패가 덮쳐 오는 불길로부터 나를 지켰다.

만약 물의 보옥을 얻지 못했다면 몇 번은 타 죽었을 정도.

[꾸루루!]

그러나 물의 보옥의 힘은 절대로 무한하지 않다.

특히, 지금처럼 본래 가지고 있던 힘이 억제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아무리 물의 보옥이 화염 꼬리 도마뱀들을 상대로 상성상 우위를 점한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사실이 한 가지 있다면, 하르스가 만들어 내는 불의 영역 덕분에 물의 보옥 역시도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북부의 혹독한 기후가 억압하고 있던 건 단지 화염 꼬리 도마뱀들뿐만이 아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은 당장 내가 방어에 신경을 조금 덜 써도 된다는 근거가 돼 주었다.

'하르스를 노려야 해.'

화염 꼬리 도마뱀의 변종.

놈은 지금 가장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에드릭의 주위를 맴돌면서 에드릭이 제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었다.

만약 에드릭이 작은 빈틈이라도 드러낸다면 언제라도 달려들어서 목을 물어뜯겠다는 듯이.

그 때문인지 실제로 에드릭은 놀라운 신위를 보이면서도 동시에 조심스러움을 보였다.

하르스에게서 무언가 꺼림칙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쿠루루!]

하르스가 꼬리를 흔들어 대자, 주변의 눈이 녹으며 화염이 흩뿌려졌다.

또한, 흩뿌려지는 건 비단 화염뿐만이 아니었다.

질척질척하고 꺼림칙한 기운.

생명체를 갉아먹고 파먹는 벌레 같은 기운.

'마기.'

승천석 파편에서 비롯한 저주받은 힘이 주변에 퍼지며 모든 걸 죽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하르스 자기 자신조차도.

[꾸루루루!]

본격적으로 마기가 날뛰기 시작하자, 지금껏 잘 버텨 내던 특무대원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끄윽!"

"이 도마뱀 새끼들이!"

그와 함께 순간적으로 알리시아의 자세가 무너지며 그 위로 화염 꼬리 도마뱀들이 덮쳐 왔다.

에드릭과 더불어서 가장 위험한 위치를 자처했기에 위기 역시도 가장 빨리 찾아온 것이다.

"...읏."

알리시아의 얼굴에 칠흑같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철컥─

타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격발된 총알이 단번에 알리시아를 덮치려던 화염 꼬리 도마뱀의 머리를 터트렸다.

후두둑....

쏟아져 내리는 피의 비를 맞으며 다시금 자세를 잡은 알리시아의 검이 춤을 췄다.

촤악!

순식간에 주변의 화염 꼬리 도마뱀들을 도륙 낸 알리시아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설마하니 묵묵함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인물인 알리시아에게 감사 인사 같은 걸 받을 줄은 몰랐기에 나는 잠시 알리시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요?"

"아니, 뭐."

순간적인 위기는 간신히 벗어났지만, 위기를 맞고 있는 건 다른 특무대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우오오!"

"끄으으...."

콘란과 알비노의 몸에 있는 상처와 화상이 하나둘씩 늘어 갔다.

에드릭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면 전멸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

'하지만 틈은 만들었다.'

바로, 내가 불태우는 자 하르스를 노릴 수 있는 틈 말이다.

"대장!"

"말하게!"

에드릭은 다급한 와중에도 내 부름에 착실하게 응했다.

"변종을 끌어내 주십시오!"

"방법이 있나?!"

"예!"

"좋아! 믿지!"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할까....

나를 그만큼 믿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능력이 좋은 건지는 몰라도, 에드릭은 범죄자 출신일 터인 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어 주었다.

촤아악!

에드릭의 검무가 거칠어졌다.

거칠기 짝이 없는 검무는 순간적으로 무려 셋이 넘는 화염 꼬리 도마뱀을 베었지만, 그 탓에 빈틈이 드러났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착실하군.'

도대체 뭘 믿고 나를 저렇게까지 믿어 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뢰에는 그에 맞는 신의를 보일 뿐이다.

철컥─

총구가 불태우는 하루스를 조준한다.

놈과의 거리는 약 50m.

객관적인 거리 자체는 그리 멀지 않지만, 중간에 있는 방해물들과 타오르는 연기로 인해서 시야 확보가 원활하지 않다.

그러나 상관없다.

에드릭이 만든 찰나의 기회.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타아아앙!!!────

['멸망 유예자(EX)' 특성 효과로, 마(魔) 속성을 지닌 대상에게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강력한 마(魔)입니다! 추가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1,500%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불태우는 하르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으나, 죽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한 발로는 부족했던 모양.

하지만 상관없었다.

총알은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탕!!

타탕!!──

['멸망 유예자(EX)' 특성 효과로, 마(魔) 속성을 지닌 대상에게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강력한 마(魔)입니다! 추가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1,500%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멸망 유예자(EX)' 특성 효과로, 마(魔) 속성을 지닌 대상에게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강력한 마(魔)입니다! 추가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1,500%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연달아 날아든 총알들이 불태우는 하르스의 몸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크루루....]

그리고, 마침내 온 세상을 불태울 것만 같았던 변종 마수의 몸이 허물어졌다.

[네임드 마수, '불태우는 하르스'를 처치하였습니다!]

[화염 계통의 네임드 마수를 처치하였습니다! 화염에 대한 내성이 증가합니다.]

[특성, '화염 내성(D)'을 습득하였습니다.]

21화 변종 토벌 (3)

──────────────

[화염 내성]

등급 : D

종류 : 패시브

화염계 공격에 대한 피해량을 20% 감소시킨다.

──────────────

'흐음....'

솔직히 말해서 화염계 공격에 극상성인 물의 보옥을 지닌 나에게 있어서 굳이 필요한 특성은 아니었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었다.

나중에 화염 내성 특성이 일정 수준 이상에 다다르게 되면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해서 물의 보옥의 힘을 약화하고 있는 냉기를 억제할 수 있으리라.

'그건 그렇고....'

나는 상황을 살폈다.

불태우는 하르스가 죽음을 맞이하자, 자연스레 하르스로 인해서 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일대의 환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뜨끈했던 열기 가득한 곳에서, 북부 특유의 혹한의 기후로.

자연스레 그로 인해서 버틸 수 있었던 다른 화염 꼬리 도마뱀들의 몸이 빠르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꾸루루....]

[꾸루! 꾸루!]

그나마 몸에 온기가 남아 있는 화염 꼬리 도마뱀들이 뒤돌아서서 도망치려 했으나, 이런 혹한의 기후 속에서 도망칠 곳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으아아아!"

"이 X새끼들이... 뒈져!"

악에 찬 콘란과 알비노가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둘러 댔으나, 혼비백산인 화염 꼬리 도마뱀들은 그마저도 대항하지 못했다.

[쿠룩!]

[꾹!]

화염 꼬리 도마뱀들의 등 뒤로 도끼와 단도가 난무하며 녹다 만 눈 위로 피가 흩뿌려졌다.

조금 전까지 수세에 몰리던 처지에서 단번에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처지로 상황이 바뀐 것이다.

다만, 무리해서 추격했다가는 역습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그 학살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만─!"

조금 전까지 온갖 피를 뒤집어쓴 채로 날뛰던 콘란과 알비노가 에드릭의 외침 한 마디에 단번에 멈춰 섰다.

군율이 그만큼 엄격했던 건지, 아니면 에드릭이라는 인물의 힘인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에드릭의 외침이 반쯤 이성을 잃어 가던 콘란과 알비노를 제정신으로 돌렸다는 점이었다.

"화염 꼬리 도마뱀은 본래 이곳에서 살 수 없는 종이다.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자멸할 거다."

나 또한 에드릭과 같은 생각이었다.

화염 꼬리 도마뱀들이 이 기후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변종이 만들어 내던 특수한 환경 덕분이지, 화염 꼬리 도마뱀들이 북부의 기후에 적응했기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확실하게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보다는 대원들의 상태를 살피는 게 더 중요하다. 보아하니 화상과 부상이 심각하군."

에드릭 역시도 남말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들을 살피기를 선택했다.

"응급조치 후에 바로 복귀하겠네. 임무는 성공일세. 다들 고생했네."

에드릭의 임무 성공 선언이 들려오고서야 콘란과 알비노가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성공이라고?"

"후우... 그 괴물을 잡은 건가."

그제야 자신들의 몸 상태를 알아차린 건지, 콘란과 알비노가 앓는 소리를 했다.

"으... 남는 약초 같은 것 있나?"

"내가 쓸 것도 없어."

"이리들 와 보게."

에드릭은 자신 역시도 작지 않은 부상을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콘란과 알비노 그리고 알리시아에게 차례로 약초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서 임시 조치를 해 주었다.

"돌아가는 즉시 의무대부터 들르게. 화상과 상처가 얕지 않으니 덧나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할 거야."

덧난다고 말은 했지만, 항생제 같은 게 거의 없는 이 세계에서 이 정도의 부상은 죽음으로 직결되는 문제다.

물론 항생제를 대신할 마법이나 기적 같은 게 존재하기는 해도, 일반적인 병사가 그런 걸 받는 건 아무리 겨울성이라 할지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무대원들의 부상을 살핀 에드릭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벨 자네는... 멀쩡하군."

"여기 그을렸는데요."

"어디?"

"여기요."

"그냥 침 바르게."

"...."

뭔가 차별받는 기분이 들었지만, 실제로 내가 입은 부상이나 화상은 거의 없는 수준의 경미한 수준이었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이 정도 상처쯤은 단번에 회복시킬 수 있는 물의 보옥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이만 돌아가지."

"대장님은 치료 안 하셔도 괜찮은 겁니까? 상처가 심해 보이는데...."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낫네."

거참, 침 엄청 좋아하시네.

에드릭은 제4 특무대를 이끄는 자로서 가장 위험한 역할을 자처한 만큼 입은 부상 역시도 절대로 작지 않았으나, 애써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아마 저게 이끄는 자로서의 책임감이라는 것일 테지.

에드릭이 말했다.

"우선 서두르지. 이곳에 있다가는 다른 마수들에 의해서 포위될 수도 있으니."

나도 그 말에는 동의하는 바였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바로 불태우는 하르스의 이마에 달려 있던 승천석 파편을 챙겨야 하는 일이었다.

'흐음, 어쩐다....'

내가 하락카로부터 승천석 파편을 챙겼을 때는 상황이 어수선했기에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서로를 지켜보고 있으며, 또한 주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는 행동을 한다면 이목을 끌 수밖에 없을 터.

'할 수 없나.'

어설프게 움직이느니 차라리 대놓고 움직이는 게 낫다.

"대장님."

"뭔가?"

"저것도 가져가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불태우는 하르스의 사체를 가리키자, 에드릭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저걸? 물론 가치는 있겠지만 지금 우리는 서둘러야 하네."

"변종을 처치했다는 증거는 가져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알았네."

망설임은 없었다.

에드릭의 검이 번뜩이기 무섭게 불태우는 하르스의 목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솜씨.

"제가 들겠습니다."

"그러게."

놀라울 정도로 쉽게 불태우는 하르스의 머리를 손에 넣었다.

남은 건, 기회를 엿봐서 이마에 있는 승천석 파편을 내가 챙기는 것뿐.

'적당히 때를 보면 되겠지.'

어차피 나에게야 승천석 파편이지, 이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변종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물론 변종이라는 종 자체가 최근에 등장했으니 나름대로 연구 가치 같은 게 있기는 할 테지만, 지금의 소란 통이라면 없어져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겨울성으로 복귀하기 위한 이동이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더 하얗게 질린 알비노가 살며시 다가와 말했다.

"너, 괜찮나?"

"뭘?"

"아까 마법을 사용하는 걸 봤다. 알던 대로 엄청난 위력이더군. 그 정도 마법을 그렇게 남발했는데도 괜찮냐는 거다."

타당한 의문이었다.

실제로 알비노는 이번 전투에서 사용한 마법으로 인해서 훨씬 더 야위고 늙은 것 같았다.

"괜찮아."

"...대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아마 내 상상 따위는 넘는 엄청난 대가겠지."

어째서일까.

알비노의 말에서 씁쓸함이 느껴지는 게 그저 착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건.

"그럴지도 모르겠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후불이 아니라 선불이라는 점일 것이다.

나는 이미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렀으니까.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대가를.

* * *

돌아가는 길은 어수선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비록 우리가 변종 토벌이라는 임무를 성공하기는 했어도 여전히 겨울성에서는 마수 무리와 치열한 교전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쿵!

쿠우우웅!!!───

괴성, 굉음, 비명.

그 모든 게 뒤섞인 채로 겨울성을 뒤흔들고 있었다.

-카아아아악!

-다 죽여!

이런 말을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나로서는 잘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괜찮겠지.'

다른 대원들이 다른 곳에 시선이 팔려 있는 동안, 나는 살며시 하르스의 머리에 있는 승천석 파편에 손을 올렸다.

스스스....

그와 함께 하르스의 미간에 박힌 승천석 파편이 기묘한 빛을 내며 자연스럽게 나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승천석 파편'을 흡수합니다.]

[위대한 하늘에 이르는 길에 다시 한번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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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게시판 등급의 레벨 업.

아무래도 이번에 사냥한 하르스가 품고 있던 승천석 파편의 크기가 제법 되다 보니, 부족했던 필요 경험치를 마저 채운 모양이었다.

'경매장이라.... 이것도 알고 있던 그대로군.'

혹시나 익명 게시판에서 보았던 사실이 틀리면 어쩌나 했는데, 2레벨 권한이 경매장이라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이제 도도한테 보상도 받을 수 있겠군.'

도도가 내 답변을 확인했을지 안 했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일단 확인했다면 온갖 노하우가 집약된 내 답변이 진짜라는 걸 모를 수가 없을 터.

물론 도도가 먹튀를 할지 안 할지는 그때 가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직 승천석 파편으로부터 일어난 빛무리는 멈추지 않았다.

변화가 남았다는 뜻.

그걸 증명하듯이 곧이어서 내 특성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병기 소환(??)' 특성이 성장합니다.]

['병기 소환(??)'의 특성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Lv.1 → Lv.2]

['병기 소환(??)'의 소환 가능 목록에 'Lv.2' 병기 목록이 추가됩니다.]

[현재 소환 가능한 병기 종류 : 1 → 2]

──────────────

[병기 소환]

등급 : ??

종류 : 액티브

레벨 : 2

병기와 탄환을 소환한다.

레벨에 따라서 소환할 수 있는 병기와 탄환의 종류가 증가한다.

현재 소환 가능한 병기 종류 : 2

현재 소환 가능한 탄환 종류 : 1

──────────────

'이건....'

병기 소환 특성의 레벨 업.

게시판 등급을 올리는 방법이 승천석 파편을 모으는 거라는 사실은 이미 익명 게시판 내에서 알려진 정보였기에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병기 소환 특성의 레벨을 올리는 방법은 막연히 추측만 했을 뿐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병기 소환 특성이 성장하는 조건은 게시판 등급을 올리는 것과 같이 승천석 파편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아니, 동시에 레벨이 오른 걸 보면 어쩌면 게시판 등급이 오르는 것 자체가 조건일 수도 있겠으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지금껏 안개 속에 감춰져 있던 병기 소환 특성의 레벨 업 조건이 마침내 밝혀졌다는 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시험해 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무리겠지.'

병기 소환 특성은 어떤 의미로 본다면 내가 가지고 있던 대가를 모두 바쳐서 얻어 낸 것이다.

그렇기에 등급조차 '??'로 표기되는 병기 소환 특성에 대해서는 참으로 궁금한 게 많다.

이 특성은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지.

Lv.2로 소환되는 병기는 어떤 것일지.

또한, 그 병기는 기존 Lv.1의 병기의 재사용 대기 시간과 쿨타임이 공유되는 건지.

그 외 궁금한 게 참으로 많았으나, 일단 지금은 겨울성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이것저것 내 멋대로 실험을 하기에는, 이곳은 너무나도 위험했으니까.

'그러면....'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겨울성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22화 경매장

[크르릉....]

"정지."

나름대로 조심히 이동한다고 했건만, 상황이 워낙 난전이다 보니 무리를 이탈한 마수들이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크르르....]

[캬오오!]

[Lv.2]

[줄무늬 검치호]

[Lv.3]

[큰 이빨 검치호]

다만, 그 마수들은 애초에 우리를 노리려던 마수들이라기보다는 패잔병에 가까웠기에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특히, 제4 특무대장인 에드릭에게 있어서는.

"흠."

촤악!

마수들과 마주치기 무섭게 에드릭이 움직이며, 에드릭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마수들의 목이 너무나도 쉽게 잘려 나갔다.

저게 부상을 당한 자의 신위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

그러나 나는 에드릭의 뒷목에서 흐르는 한 줄기의 식은땀을 보았다.

'무리하고 있군.'

얼핏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에드릭은 분명히 조금 전에 있었던 변종과의 전투에서 작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에드릭도 한계라는 소리.

그렇기에 나 또한 망설이지 않고서 콜트 패리슨 B-09를 꺼냈다.

마침 슬슬 9×33mmR 357 매그넘 일반탄 소환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끝날 시간이었기에 총알에 어느 정도 여유는 있었다.

무엇보다도, 만약 에드릭이 쓰러진다면 특무대는 전멸할 게 뻔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1' 탄환이 소환됩니다.]

[탄환, '9×33mmR 357 매그넘 일반탄'을 소환합니다.]

나는 손바닥 위에서 빛무리와 함께 나타난 총알들을 콜트 패리슨 B-09에 하나씩 장전했다.

짤깍, 짤깍, 짤깍....

아무래도 기존에 병기 소환만 있을 때는 총알이 미리 장전이 된 채로 소환이 됐지만, 탄환 소환을 통한 소환은 총알만 덩그러니 소환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신기한 마법이군. 뭘 하는 거지?"

"보는 그대로 신기한 마법이지."

이를 지켜보던 알비노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지만, 굳이 대답해 줄 필요는 없었다.

철컥.

새삼스레 조준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할 일은 어디까지나 에드릭을 보조하는 것뿐이었으니까.

타앙!─

굉음과 함께 뻗어 나간 총알이 마수의 머리를 터트리자, 마수와 싸우고 있던 에드릭의 시선이 천천히 나에게로 향했다.

"...도와줄 거면 미리 말 좀 해 주면 참 고마울 텐데 말이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것참 기쁘군! 빨리 말해 준다면 더 기쁠 테고."

본격적으로 내가 지원사격을 하기 시작하자, 더욱더 거리낄 게 없어진 에드릭이 날뛰었다.

아마 내가 사용하는 총기가 대략적으로 어떤 위력과 사거리를 지녔는지 파악해 가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총에 대해서 에드릭에게 완전히 간파당하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런 걸 따질 때는 아니겠지.'

어차피 총이라는 무기는 너무나도 직관적이고 강력한 무기인 터라,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면 대강의 원리는 파악이 될 수밖에 없다.

총알이 어디서 나가는지.

총알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나가는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이 정도면 되겠지.'

순식간에 모든 총알을 쏟아 낸 내가 뒤돌아선 순간.

[캬오오!]

죽은 줄 알았던 마수가 고개를 치켜들며 알리시아가 있는 곳을 향해 덮쳐 왔다.

"...읏."

현재 알리시아는 콘란과 알비노를 부축하느라 손이 묶여 있는 상태.

"이런!"

에드릭조차도 이러한 상황은 대비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도움은 바랄 수 없다는 소리.

'쯧.'

긴박한 상황이 초 단위로 다가오고 있었으나, 새삼스레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설령 가진 총알을 모두 소모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비장의 방법은 남아 있었으니까.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2'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소환합니다.]

그 묵직하고 기다란 총신을 보는 순간, 더 이상의 생각은 필요 없었다.

필요한 행위는 그저 방아쇠를 당기는 것뿐이었으니.

쾅!

콰쾅!

마치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연달아 발사된 두 발의 산탄이 마수를 말 그대로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렸다.

후두둑....

떨어져 내린 고기 파편과 피가 알리시아를 비롯한 콘란과 알비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무식하기 짝이 없는 파괴력에 비한다면 이제껏 내가 사용했던 콜트 패리슨 B-09의 위력은 신사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무슨...."

에드릭조차도 더블 배럴 샷건의 무식하기 짝이 없는 소리와 위력에는 놀랐는지, 잠시 입을 작게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마법을 또 숨기고 있었나?"

"이봐! 방금 그건 뭐야?"

알비노와 콘란조차도 입을 떡 벌린 채로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

심지어 그 알리시아까지도 피로 범벅이 된 상태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움찔-

나도 모르게 느껴진 섬뜩한 느낌에 내가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서 에드릭이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닐세."

에드릭이 얼굴을 뒤덮은 마수의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여긴 대충 된 것 같으니, 바로 이동하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제4 특무대원들은 나를 신기한 동물 보듯이 바라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대체 뭔지.... 그만한 마법을 아직도 숨기고 있었다니...."

특히 마법의 위험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인 알비노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너, 악마냐?"

알비노가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그리 물어 왔다.

"그럴 리가."

알비노의 의구심에 슬쩍 장난을 쳐 볼까도 생각했지만, 이단 심문관 출신일지도 모르는 여자가 옆에 있는 상황에 그런 질 나쁜 농담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인간의 형상을 취하는 악마들도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악마라는 존재가 으레 그렇듯이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알비노는 무언가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으나, 나는 굳이 그 시선에 답해 주지는 않았다.

평소 알비노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어쩌면 그러한 의심이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 더 편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

알리시아 역시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것이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일은 없었다.

나 또한 굳이 말할 생각이 없는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이곳까지 온 자 중에서 사연 없는 자는 단언컨대 한 명도 없을 테니.

* * *

겨울성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어졌다.

"...흐음."

에드릭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작게 침음했다.

겨울성이 가까워질수록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와 풍겨 오는 피 냄새 또한 짙어졌다.

그나마 우리가 향하는 곳이 전선과는 반대인 남문 쪽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른 곳으로 갔다면 우릴 반기는 건 경비대가 아닌 마수들이었을 것이다.

"신원을 밝혀라!"

성문 위에서 경비대장이 외치자, 에드릭이 말했다.

"날세."

그와 함께 에드릭을 알아본 경비대장이 외쳤다.

"...에드릭 경? 무사히 오셨군요! 뭣들 해? 어서 성문 열어!"

마침내, 겨울성으로 돌아왔다.

시간만 따지면 그리 길지 않은 외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그건 조금 전에 사냥했던 변종이 화염 속성을 지닌 상대였기 때문도 있겠지만, 그만큼 고된 임무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려운 임무였을 텐데도 모두 잘해 주었네. 특히, 벨 자네가 아니었다면 자칫 특무대 전체가 전멸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변종이 위험했던 것도 사실이야. 정말로 큰 일을 해 주었어."

에드릭이 말했다.

"다들 고생했네. 복귀하면 의무대부터 찾도록."

변종 토벌 임무가 마침내 끝났다.

너무나도 길고, 또 길었던.

* * *

지난밤의 기습은 겨울성에 있어서 작지 않은 상흔을 남겼다.

찢어진 깃발과 부서진 방패들.

잿빛 연기와 타 버린 건물.

그리고 전투의 잔해로 얼룩지고 피투성이로 물든 땅 위에서 병사들이 상처 입은 몸을 애써 지탱하며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슬픔과 절망의 공기가 성안을 가득 채울 법도 했건만, 침묵은 이들에게 허락된 안식이 아니었다.

"자네들은 당분간 쉬어야겠군."

에드릭의 명령에 따라 콘란과 알비노는 당분간 의무대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알리시아 역시도, 의무대에 입원을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몸 곳곳에 붕대를 감은 꼴이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 알비노 같은 경우는 부상도 부상이지만 대가가 큰 마법을 너무 남발하였기에 상태가 더욱더 심각했다.

'미련하기는.'

악마와 계약한 자들의 공통된 착각 중 하나가, 자신들이 이 계약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적당히만 쓰면 되겠지.

이 정도면 되겠지.

그러나 그 모든 건 오만이다.

악마와의 계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 같은 건, 적어도 내가 알기에 없다.

'어쨌거나, 당분간 휴식인가.'

그 말마따나 제4 특무대의 훈련 역시도 무기한 연기됐다.

자연스레 익명 게시판을 할 시간도 많아졌는데, 가장 큰 성과라 한다면 역시나 도도에게 답변이 달렸다는 점이었다.

└DoDo : 써 주신 댓글 전부 확인했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고 다시 대댓 달아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내가 직접 쓴 공략집이 있다 하더라도 아키로의 미궁 2층이 쉽게 깰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나는 넓은 아량으로 도도의 미궁 공략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도도의 답변이 달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다른 공략도 아니고, 내 완벽한 공략을 들고서 미궁 공략에 시간을 잡아먹는 건 말이 안 되지.'

모든 변수를 고려하고, 최적화에 최적화를 거친 미궁 공략법이다.

실패 따위는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DoDo : 미궁 공략 하느라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정말로 완벽한 공략이네요! 비밀 댓글로 경매장에 올리실 잡템 이름 말씀해 주시고, 그거 올려 놓으시면 바로 제국 금화로 입찰하겠습니다!

시간이 제법 흐른 덕분일까.

내 완벽한 공략 덕분에 DoDo는 무사히 아키로의 미궁 2층 공략에 성공한 듯했다.

그와 더불어서 약속했던 보상 지급 역시도 확실하게 지급한다고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혹시나 도도가 먹고 튄다면 익명 게시판에 도도의 사기 행각을 알릴 생각이었지만, 지켜본 대로 익명 게시판 유저들은 나름대로 익명성 속에서도 자신의 명예와 신용을 중요시했다.

한번 잃어버린 신용을 다시 쌓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잡템이라....'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말로는 잡템 아무거나 올린다고 했지만, 사실 물건이라는 건 일정 부분 정보를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내가 별생각 없이 올린 잡템이 내 정체를 노출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그래도 일단은 조심하는 게 낫겠지.'

그렇게 선정된 잡템은 간단했다.

[나무 숟가락]

이 세계, 이 시대에서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물건.

이거라면 내가 있는 위치나 나에 대한 정보는 일절 얻을 수 없으리라.

그야말로 완벽한 잡템이 아닐 수 없었다.

['나무 숟가락' 아이템을 경매장에 등록하시겠습니까?]

[Y / N]

당연히 예스지.

그렇게 경매장에 나무 숟가락을 올린 나는 비밀 댓글로 이 사실을 작성해 두었다.

└용잡이 : 경매장에 나무 숟가락 올려 뒀습니다.

당연하게도 바로 댓글이 달리지는 않았다.

새삼스레 급할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다.

도도가 보상으로 얼마를 입찰할지는 모르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무릇 기대란 실망을 낳는 법이니.

'그러면....'

일단 당장 할 일은 끝났다.

시간도 조금 남겠다, 남은 시간엔 익명 게시판을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나에게 찾아온 휴가 아닌 휴가는 곧 끝이 날 테니까.

'음?'

익명 게시판을 누르려던 나는 문득 경매장에 있는 물품들로 시선을 옮겼다.

원래 쇼핑 같은 건 즐겨 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일단 눈에 들어오니 관심이 가는 게 사실이었다.

과연 지금 시점의 사람들이 취급하는 품목들은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흐음....'

하나같이 진귀하고 최저 입찰 금액이 말도 안 되는 수준들이었으나, 잡템에 가까운 아이템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어?"

그러다가 보았다.

──────────

[진행 중인 경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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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번호]

◆No.515

[경매 품목]

◆녹슬고 깨진 펜던트

[최저 입찰 가능 금액]

◆30골드

[현재 입찰 목록]

◆-

◆-

──────────

비록 본래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는 데다가 상태 역시도 좋지 않았지만, 내가 저걸 몰라볼 리가 없었다.

'저건....'

저 펜던트.

내가 사용하던 거다.

23화 경매장 (2)

본디 내가 사용하던 장비와 아이템은 모두 승천석의 사용 대가로 사라졌다.

분명히 그럴 텐데....

내가 사용하던 장비가 경매장에서 버젓이 거래되고 있는 건 무슨 의미인가.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멸망룡과 싸우던 당시에 내가 지닌 장비 중 적지 않은 수가 파괴되어서 바닥에 널브러졌다.

부서지거나 분실한 장비를 챙겨 올 여유는 당연히 없었고, 그렇기에 당연히 장비가 부서지면 새로운 장비를 꺼내 오고, 창고가 바닥나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새로 장만했다.

멸망룡과의 전투는 그러했다.

몇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아 왔던 모든 걸 쏟아붓고 또 붓고서야 마침내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절대로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일을 해낸 것이다.

당시에는 어차피 파괴된 장비니 그리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만약 그중에서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장비가 있었다면?

비록 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망가지고 녹슬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면?

'저 펜던트도 그중 하나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저 펜던트는 내가 직접 사용하던 장비인 만큼 보통 수준을 넘어선 성능을 지니고 있다.

어지간한 장비로는 멸망룡에게 대적할 수조차 없었을뿐더러, 애초에 내가 수준 이하의 장비는 취급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당장 저 펜던트가 깨지고 녹슬어서 제힘을 낼 수 없을지언정 그 본질은 유지하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다.

곧, 어떻게든 고칠 수만 있다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본래의 성능을 되찾는 것도 가능할 터.

'저건 무조건 사야 해.'

현재 펜던트의 최소 입찰 가격은 고작 30골드에 책정되어 있다.

저것을 주워서 경매장에 올린 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일단 30골드라는 입찰 금액을 본다면 펜던트의 진짜 가치는 모른다고 보는 게 옳았다.

저 펜던트의 진짜 가치는 수천 골드를 줘도 구하지 못하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당장 내 손에 있는 돈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아이추웡이 지니고 있었던 돈이 있기는 했지만,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니었다.

그것도 제국 금화가 아닌 군소 왕국들이 발행한 금화였기에 제국 금화를 기축통화로 사용하는 경매장 시스템의 기준으로 본다면 실제 가치는 더욱더 떨어질 터.

'30골드라....'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액수.

예전이었다면 고작 물약 한 병도 사지 못했을 돈이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금액이었다.

물론 얼마 지난다면 봉급이 나오긴 할 테지만,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아마 1골드도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으음.'

돈이 필요하다.

무려 30골드라는 거금이.

'에드릭에게 빌려 달라고 해 볼까?'

왠지 에드릭이라면 호탕하게 빌려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닐세."」

얼마 전에 보았던 에드릭의 묘한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이상으로 수상하게 보일 짓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안 그래도 내가 이미 충분히 수상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공정의 세계 내에서 이런 식으로 마구잡이로 마법을 난사하고 다니는 마법사는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매우 드물었으니까.

이미 제4 특무대라는 소속 안에 진하게 엮여 있기는 했으나, 언제까지고 겨울성 안에 있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설프게 탈영 같은 걸 할 생각은 없다.

이 세계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곳이었고, 그렇기에 괜한 꼬리표를 달고 있는 건 원하지 않았다.

비록 그로 인해서 겨울성을 나서는 게 꽤 많이 지체는 되겠지만, 무엇이든지 확실한 게 좋으니까.

'그건 그렇고....'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30골드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당장 가장 큰 가능성은 일전에 도도가 약속한 아키로의 미궁 2층 공략에 대한 보상이다.

보상으로 얼마를 입찰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당장 내 상황에서 돈이 나올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래도 30골드까지는 어려울 것 같은데... 따로 사냥이라도 해야 하나?'

만약 내가 보통의 군인이었다면 일과 시간 혹은 훈련이 끝나고 나서도 경계 근무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제4 특무대는 나름대로 특별한 부대답게 그러한 경계 근무에서는 제외되는 특권이 있었고, 그 덕분에 일단 일과 시간 이후에는 개인 정비 시간이라는 이름의 자유 시간이 존재했다.

즉, 그 시간 동안 에드릭과 잘 타협을 한다면 외부 사냥 정도는 할 수 있을 터.

'문제는, 겨울성 내에서 마수 소재의 가치가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이지.'

아무리 이번에 내가 병기 소환 레벨을 Lv.2까지 올리면서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지만, 안정성을 고려한다면 지금의 내가 사냥할 수 있는 마수는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마수들의 소재는 가치가 그리 높지 않다.

겨울성 내에서도 제법 돈이 될 만한 마수 소재를 얻으려면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주어진 시간이나 위험성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를 어쩐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사실이 한 가지 있다면, 펜던트의 가치를 알아본 게 나를 제외한다면 없다는 점이다.

아니, 나조차도 만약 저 펜던트가 내 것이 아니었다면 그냥 낡은 펜던트겠거니 하고 넘겼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방심할 수는 없었다.

30골드라는 금액 자체가 나에게는 커도, 있는 자들에게는 돈도 아닌 돈이었으니 호기심에 구매할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거기다가 판매자가 마음을 바꿔서 아이템을 내릴 가능성도 있어.'

가능성은 낮지만, 그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다.

이래저래 서둘러서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음.'

그렇게 고민을 하면서 익명 게시판과 경매장을 교대로 들락날락하고 있을 때.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다.

[+1]

마침내, 도도의 게시 글에 새로운 댓글이 달린 것이다.

└DoDo : 나무 숟가락 확인했습니다! 바로 입찰해 드리겠습니다!

내심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도도는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만약 지금 시점에서 도도가 입을 쓱 닦았다면 나는 단순히 도도를 익명 게시판에 박제하는 수준을 넘어서 도도를 직접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 나에게 돈이 중요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나는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경매장에 접속했다.

──────────

[진행 중인 경매 목록]

──────────

──────────

[경매 품목]

◆나무 숟가락

[입찰 목록]

◆10골드(제국 금화 10개)

◆-

──────────

제국 금화 10개.

즉, 10골드.

단순 정보료에 대해서 기대했던 금액보다 월등히 많은 숫자였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바라는 30골드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일단 낙찰해야겠지.'

어차피 이런 나무 숟가락에 더 입찰할 이가 있을 리도 없었으니, 나는 그대로 10골드에 나무 숟가락을 낙찰했다.

[경매가 완료되었습니다.]

['나무 숟가락'을 판매하였습니다.]

[입찰된 금액, '10골드(제국 금화 10개)'가 전송됩니다.]

그와 함께 작은 빛무리가 일어나며 내 손 위에 제국 금화 10개가 나타났다.

"흠."

손안에 있는 금화를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보라는 거, 꽤 돈이 되지 않나?

* * *

다시 돌아온 일상.

그 일상 속에서 한 가지 작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면, 한동안 보이지 않던 콘란이 마침내 막사로 복귀했다는 점일 것이다.

몸 곳곳에 여전히 붕대를 두르고 있기는 했으나, 사실상 거의 다 회복이 된 듯했다.

다만, 복귀한 것은 콘란 혼자뿐이었다.

"알비노는?"

"상태가 영 안 좋아서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다더군."

"아직도?"

"그냥 그렇게 알라던데?"

"그래?"

알비노가 아직도 의무대 신세를 지는 이유는 뻔했다.

마법의 대가.

그것도, 무려 수명을 대가로 한 마법을 그렇게 남발했으니 무사할 리가 만무했다.

"정 궁금하면 한번 가 보든가. 딱 봐도 상태 안 좋아 보이긴 하던데."

"굳이 그럴 필요야."

아무리 같은 제4 특무대원이라고는 해도 새삼스레 병문안 같은 걸 갈 의리는 없었다.

특히나 알비노 같은 경우는 얼마 전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기 전까지만 해도 언제고 내 뒤통수를 후려치려던 녀석이었다.

오히려 이 기회를 틈타서 내가 총을 들고 잠자는 알비노의 미간에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

"다들 왔군."

어쨌거나 콘란의 복귀를 계기로 제4 특무대의 훈련 역시도 재개되었다.

오늘 훈련은 기초 무기술 훈련이었다.

어찌 보면 마침내 진정한 겨울성의 군인다운 훈련에 돌입한 셈이었다.

"자네들은 강력한 마법을 지닌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네. 하지만 군인에게 있어서 무기를 다룬다는 건 마법과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일이야. 단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네. 그러니...."

에드릭이 웃으며 말했다.

"다들 덤비게. 아, 원한다면 마법도 사용해도 좋네."

에드릭이 마법을 사용해도 좋다고 하기는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상관을 상대로 면전에서 총질을 할 생각은 없었다.

대외적인 이유 역시도 충분했다.

훈련에 그토록 강력한 마법을 사용해서 대가를 치를 필요는 없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또한, 물의 보옥 역시도 잠시 비활성화해 두었다.

강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스스로 느끼고 있는 이상, 오늘만큼은 진심으로 훈련에 임할 생각이었다.

"우오오!"

내심 쌓인 게 많았던 건지, 콘란을 선두로 제4 특무대원들이 에드릭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머리로는 대충 감이 온다.

에드릭이 어떻게 움직일지, 또 어디로 공격을 해 올지, 어떻게 피할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 비루한 몸뚱어리는 내 생각의 절반조차 따라가 주지 못했다.

퍽!

퍼억!

"어억!"

아프다.

너무 아프다.

그렇게 목검으로 마구잡이로 구타를 당하다 보니, 자연스레 목검으로 공격을 막으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허리가 비었네."

"어깨도."

"이런, 이번에는 머리가 비지 않나? 가장 중요한 게 머리인데."

그런 시간이 며칠간 이어졌다.

"으으...."

"대장, 이제 그만합시다. 예?"

나름대로 반격을 한다고 했으나 당연하게도 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다만, 아예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벨, 처음보다는 조금 낫군."

에드릭에게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바로 그때, 변화가 생겼다.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검로를 찾았습니다!]

[기예, '검술(F)'이 진화합니다.]

[검술(F) → 생존 검술(D)]

"...."

나로서도 처음 보는 검술.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가 펼치고 있는 검술은 내가 모니터 바깥에서 보던 카인의 검술을 지금의 빈약한 육체 능력으로 어색하게 따라 하며 만들어진 이질적인 검술이었다.

당연히 기존에 존재하려야 할 수가 없는 검술이라는 소리.

'생존 검술이라....'

그러나 썩 틀린 이름도 아니었다.

그 이름 그대로 당장 이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한 검술이었으니까.

언젠가 이 근본 없는 이름의 검술이 내 목숨을 구해 줄 날이 있지 않을까.

그런 근거 없는 믿음 속에서 고통을 견디고, 또 견뎠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네. 다들 고생했네."

"으으...."

"...죽겠군."

이어진 고된 훈련에 제4 특무대원 중에서 멀쩡한 이는 없었다.

심지어 알리시아조차도 이를 꽉 물고서 작게 신음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동안의 훈련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만 해산!"

마침내 오늘의 훈련이 끝났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쉴 시간은 없었다.

아직 오늘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음? 어디 가나?"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

"뭐, 그래."

막사로 돌아가는 제4 특무대원들을 뒤로한 채로 나는 겨울성 내에 있는 한적한 장소를 찾았다.

아무래도 막사 안에서 익명 게시판에 접속하는 건 옆에서 보기에 이상해 보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익명 게시판에 접속합니다.]

그리고 계획했던 대로 익명 게시판을 뒤지기 시작했다.

최근 며칠 동안 고된 훈련 속에서도 잊지 않았던 일과였다.

-굿럭 : 혹시 푸른먼지초 위치 아시는 분? 보상 있음.

찾았다.

내 돈줄.

24화 경매장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