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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불청객 (9)

남쪽 성문에 다다른 나는 언제나처럼 경비조장을 마주했다.

"요즘 자주 보는군. 무슨 일인가?"

"잠시 바깥에 볼일이 있어서요."

"그런가? 잘 다녀오게."

경비조장은 별다른 말 없이 빠르게 나를 통과시켜 주었다.

겨울성을 나선 나는 동쪽을 향해서 하염없이 걸었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다.

그나마 있다고 한다면 최대한 겨울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할까.

설사 총성이 울려 퍼지더라도 겨울성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을, 그런 장소 말이다.

겨울성에서 시행한 대대적인 마수 토벌령 덕분인지, 동쪽으로 가는 동안 나는 마수 그림자조차도 보지 못했다.

간간이 겨울성 인근에서 출몰하던 마수 무리조차도 씨가 말랐기 때문이었다.

1시간, 2시간, 3시간....

꽤 빠른 속도로 이동한 덕분인지, 어느덧 지평선 너머에 있던 겨울성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동쪽에 있는 숲까지 도착한 나는 그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고는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이쯤이면 되겠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나는 적지 않은 흔적들을 남기면서 왔다.

그러니 이곳에서 기다린다면 곧 어떤 징조가 보일 터.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석양이 내려앉고, 어둑시니가 사방에 깔리며 밤이 찾아왔다.

사방이 어둠으로 물든 때에 있는 빛이라고는 업화의 송곳니로 피워 낸 모닥불 하나뿐.

그때였다.

부스럭─

수풀 사이로 느껴지는 기척.

그리고 그것은 마수나 짐승의 기척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냥 나와."

방문자는 자신을 감출 생각이 전혀 없었는지, 곧이어서 수풀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것 참. 갑자기 어딜 가시나 했더니 유인책이었군요. 저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곧이어서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당연히 내가 알고 있는 이였다.

데니스.

아니, 익명999.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밤손님을 초청한 기억은 없는데."

"하하, 말이 짧아진 걸 보니 이제야 조금 마법사다워지셨군요."

"불청객에게까지 존중을 해 줄 생각은 없어서."

"불청객이라.... 하하, 명색이 겨울성에 초청된 정식 손님인데 너무하시는군요."

"이곳이 겨울성으로 보이나?"

"그것도 그렇군요. 우문현답입니다."

데니스가 손짓하기 무섭게 사방에서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인기척이 드러났다.

데니스가 혼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역시.'

업화의 마법사 토벌 이후, 겨울성 내에서 내 명성은 상당히 퍼졌다.

즉, 그 소문에 대해서 알고 있는 데니스가 홀로 이곳에 왔을 리가 없었다.

"쓸데없는 반항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이 우레를 다룬다는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데니스가 가볍게 웃으면서 자신의 갑옷을 드러냈다.

"보이십니까? 뇌수 바쿰바라의 가죽과 스바이쿤의 힘줄을 엮어서 만든 갑옷입니다. 하나같이 절연성이 매우 뛰어난 소재들이지요. 물론 제 부하들 역시도 같은 것을 착용하고 있고요."

이것 봐라....

괜히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었는지, 데니스는 우레의 마법사에 대한 확실한 대책을 세워 온 듯했다.

확실히 저 정도의 소재라면 뇌명의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에게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터.

'어디까지나 내가 진짜 뇌명의 마법사라면 말이지만.'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로 데니스는 자신이 우위를 점했다고 여겼는지 싱긋 웃으면서 내 앞에 섰다.

"벨 블랙우드,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루한 선문답은 전부 끝난 것 아니었나?"

"아뇨, 이번에는 제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겨울의 보옥... 당신이 가지고 있죠?"

역시 목적은 그거였나.

"그게 뭔데?"

"하하. 선문답 시간은 끝났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로서는 그냥 쉽게 쉽게 가면 좋겠는데요."

"내가 모른다고 한다면?"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면야 저도 어쩔 수 없겠죠. 겨울의 보옥은 직접 찾겠습니다. 당신의 시체에서 말이죠."

그와 함께 사방에서 데니스와 같은 갑옷을 입은 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최소 열은 넘는군.'

열 명이 넘는 인원에게 바쿰바라와 스바이쿤으로 만든 장비를 모두 착용시키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과연 페가수스 상단의 자금력은 보통이 아닌 듯했다.

"나도 묻고 싶은 게 있다."

"말씀하세요."

"파편에 깃든 마기의 위험성을 알고 있더군. 그렇다면 너희는 파편을 취하지 않는 건가?"

"...과연, 역시 당신도 플레이어였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대답은?"

"물론 취하지 않습니다. 저희 벨레로폰은 파편으로 생기는 악용과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 파편을 모으고자 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니까요."

벨레로폰이라....

길드 게시판에서 그런 이름을 얼핏 본 것도 같은 기억이 난다.

즉, 데니스가 말하는 벨레로폰이라함은 페가수스 상단과 관련이 있는 유저들의 길드일 터.

"결국 그럴듯한 명목으로 너희가 파편을 독점하고 싶은 것뿐이잖나?"

"어떻게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대의는 저희에게 있으니. 사소한 오해 따위를 일일이 해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습군."

데니스가 말했다.

"벨 블랙우드, 저도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그게 당신 본명일 리는 없고... 게임 내 닉네임이 뭐였습니까? 당신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저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텐데요."

"궁금하나?"

"예, 무척이나."

그렇다면 답해 줄 수밖에.

"카인."

"...네?"

"내 닉네임은 카인이다."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카인이라는 닉네임은 공정의 세계에 있어서 무척이나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닉네임을 듣는 이가 자신의 청력을 의심할 정도로.

"잠깐, 카인이라니, 설마...!"

상대를 당황시키고, 허를 찌른다.

기습의 가장 기본적인 전술이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서 품속에 미리 소환해 두었던 콜트 패리슨 B-09을 꺼내 그대로 데니스를 향해서 겨누었다.

"초, 총?! 무슨─"

데니스의 당황성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그보다 방아쇠가 당겨지는 게 훨씬 더 빨랐으니까.

타앙!──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붉은 선혈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끄아아악!"

데니스의 비명과 함께 데니스의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피가 뿜어졌다.

총구를 본 순간 나름대로 반응을 한 모양.

애석하게도 데니스를 즉사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치명상이라는 건 명백했다.

"주, 죽여!"

데니스의 악과 함께 사방에서 데니스의 부하들이 달려들었다.

'어딜.'

바쿰바라와 스바이쿤의 소재로 만든 갑옷은 전열성은 뛰어나지만, 반대로 일정 이상의 물리력에는 상당히 약하다.

예를 들면, 총 같은.

데니스 나름대로 준비를 철저하게 해 온 거겠지만, 완전히 오판이었다는 소리다.

철컥-

굳이 섬세한 조준까지도 필요 없었다.

살아 움직이는 과녁판들이 알아서 내 앞으로 부나방처럼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타앙!

탕! 탕탕!

방아쇠가 연달아 당겨질 때마다 나를 향해서 달려들던 데니스의 부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커헉...!"

"으아아! 내 손! 내 손이!"

"끄륵...."

총은 그런 물건이었다.

비록 탄환의 크기는 별 볼 일 없을지언정, 화약의 폭발력에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운동에너지로 막대한 충격량을 쏟아 내는, 살인에 있어서 놀랍도록 효율적인 무기.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어떻게 이 세계에서 총을...!"

데니스가 악을 쓰면서 자신의 부하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막아! 막으라고!"

그러나 나는 데니스 또한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철컥-

데니스를 향해 총구를 들이밀기 무섭게 다른 부하들이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데니스를 쏘려면 쏠 수야 있었으나, 문제는 그렇게 하면 내가 부하들에게 공격당한다는 점이었다.

'쯧, 역시 방해가 많군.'

하지만 거리낄 건 없었다.

방해가 되는 게 있다면 치워 버리면 되는 법 아니겠는가.

탕!

타탕!!

계속해서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어둠으로 물들어 있던 숲속이 모닥불의 불빛과 더불어서 총구의 불꽃으로 번뜩였다.

그렇게 내가 데니스의 부하들을 향해서 연신 방아쇠를 당기던 순간.

"잡았다!"

은밀하게 내 배후에서 나타난 데니스의 부하 둘이 내 몸을 붙들었다.

놈들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으나,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을 상대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접근을 허용한 것이다.

"잘했어! 더 붙들고 있어!"

데니스가 쾌재를 부르면서 나를 향해서 다가오려고 했으나, 나는 순순히 저들에게 붙들려 있어 줄 생각이 없었다.

"어딜."

['하이마의 저주'가 발동 중입니다.]

['하이마의 저주'로 인하여 착용자의 피가 폭주합니다.]

['하이마의 저주' 효과로 신체 능력이 20% 향상됩니다.]

['하이마의 저주' 효과로 '출혈'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력이 감소합니다.]

꾸득, 꾸드득....

전신의 몸에 핏줄이 서고, 근육이 부풀어 맹렬히 오른다.

내가 팔을 휘두르기 무섭게 내 팔을 붙들고 있던 데니스의 부하가 날아갔다.

"우와악!"

"멍청한 자식! 놓치지 마!"

생각보다 훨씬 더 가볍게 날아간 데니스의 부하를 보며, 나는 잠시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음?'

본래였다면 아무리 하이마의 펜던트의 힘이 있다고 해도 이처럼 가볍게 저들을 뿌리치는 건 불가능했을 터.

그러나 어째서인지 내 손짓 한번에 데니스의 부하들이 나가떨어졌다.

내 저열한 육체 능력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마기 때문인가.'

마기는 위험한 기운이지만, 그것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더없이 강력한 무기가 되어 준다.

상식을 벗어난 신체 능력 향상 역시도 그 때문일 터.

'뭐가 어찌 됐든 지금은 잘된 일이라고 봐야겠지.'

어차피 마기가 지닌 위험성은 나에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 말이다.

철컥─

다시금 콜트 패리슨을 다잡은 나는 데니스의 부하들을 향해서 총구를 겨누었다.

"사,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아!!"

한 발에 한 명씩.

고작 여섯 발의 총탄으로 여섯 명의 운명을 바꾸고 나니, 이제 남아 있는 데니스의 부하는 다섯이 채 되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남은 이들 사이에서도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었으니, 감히 나에게 달려들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짤깍, 짤깍....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여유롭게 주머니에 넣어 둔 탄환을 꺼내서 리볼버의 실린더에 채워 넣었다.

리볼버에 장전되는 총알은 여섯 발이었고, 이제는 장전을 해야 할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지, 지금이야! 장전 중이잖아! 지금 공격해!"

총에 대해서 알고 있는 데니스가 악을 쓰면서 외쳤으나, 당연히 그 명령에 따를 부하는 없었다.

지금이 기회라고 백 번 천 번을 외쳐 봐야, 그 외침은 공포에 전염된 부하들에게 닿지 않을 테니까.

"이 머저리 같은 새끼들이...!"

나는 그대로 총구를 데니스에게로 겨누었다.

"그러면 끝내지."

그렇게 내가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

정체 모를 힘이 나를 휘감았다.

['탈취의 마법'이 발동합니다.]

[병기, '콜트 패리슨 B-09'의 소유권을 강탈당합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변과 함께 내 손에 있었던 콜트 패리슨 B-09이 사라졌다.

'이건....'

나는 이 마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탈취의 마법.'

그 마법의 주체가 누구일지야 뻔했다.

탈취의 마법은 탐욕의 악마와 계약을 맺어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었고, 탐욕의 악마는 대개 상인들과 무척이나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경우가 많은 악마였으니까.

"까부는 것도... 여기까지다, 이 개 같은 새끼야."

조금 전까지의 여유는 어디로 갔는지, 데니스는 쌍욕까지 섞어 가면서 씩씩댔다.

본디 내 것이었던 콜트 패리슨 B-09을 나에게 겨눈 채로.

"후욱... 그래, 인정하지. 나한테 마법까지 쓰게 하다니... 제법이었어, 벨 블랙우드."

모든 마법에는 대가가 있다.

특히 조금 전에 데니스가 펼친 탈취의 마법은 상대의 재물을 직접적으로 빼앗는 마법인 만큼, 그 대가 역시도 어마어마하게 거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탈취의 마법을 사용한 데니스의 모습이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왼쪽 다리를 절뚝이기 시작한 것이다.

'왼쪽의 근육 혹은 발가락 같은 걸 대가로 지불했군.'

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닐 터인데, 갑작스럽게 중심을 잡지 못한다는 건 그러한 사실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도대체 총을 어떻게 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때문에 네가 우레의 마법사라 불린 거겠지. 이제 끝이다."

데니스가 나에게서 탈취해 간 콜트 패리슨 B-09를 겨누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데니스는 또다시 실수를 범하고야 말았다.

"바로 당겼어야지."

"허세는 집어치워!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겨울의 보옥은 어디에 있지? 아,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시체에서 찾으면 되니까."

"한 가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만약 데니스가 탈취의 마법으로 내 허리춤에 있는 업화의 송곳니를 탈취했다면, 아마 이 싸움은 내 패배로 끝났을 것이다.

내가 업화의 악마와 계약을 맺을 때 걸었던 가장 큰 제약이 바로 업화의 송곳니의 소유권을 잃을 시 목숨을 바친다는 계약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탈취의 마법은 사실상 나에게 있어서 큰 약점이나 다름없는 매우 위험한 마법이었다.

'물론 데니스가 그런 계약의 내막을 알 리가 없지만.'

그렇기에 데니스는 지금 같은 실책을 범했다.

"그건 나만 쓸 수 있어."

데니스는 모르고 있다.

병기 소환을 통해서 소환된 병기가 재소환 시에 어떻게 되는지.

병기 소환을 통해서 소환된 병기의 오롯한 소유권은, 오직 나에게만 있다는 걸.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1'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콜트 패리슨 B-09'을 소환합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내가 병기 소환 특성을 다시금 사용하기 무섭게 기존에 소환되어 있던 콜트 패리슨 B-09이 사라지고 내 손에서 새로운 콜트 패리슨 B-09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 무슨!"

순식간에 빈손이 된 데니스가 조금 전의 득의양양한 표정은 어디 갔는지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만 끝내지."

나는 데니스처럼 방아쇠를 당기는 걸 주저하며 변수를 만들 생각은 없다.

모든 건 확실하게.

그게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으니까.

철컥-

타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총성이 울려 퍼지고.

"이런, 개 같은─"

데니스의 미간에 난 검은 구멍과 함께 데니스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50화 불청객 (10)

데니스는 마법사다.

욕심 많은 상인들이 으레 그렇듯이 탐욕의 악마와 계약을 맺은 마법사.

그렇기에 혹시 데니스가 마화(魔化)라도 사용하지 않을까 슬쩍 바라보았으나, 그러한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데니스는 죽었다.

미간에 구멍이 난 채로, 확실하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왼손을 뻗었다.

만약의 만약을 대비해서 확실하게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였다.

마법사라는 족속을 상대함에 있어서 방심 따위는 있어서는 안 됐으니 말이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2'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소환합니다.]

곧이어서 푸른 빛무리와 함께 내 왼손에서 B686 더블 배럴 샷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콰앙──!!

마치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날아간 70mm 12게이지 산탄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한때 데니스였던 무언가의 고기 파편뿐이었다.

마화(魔化)고 뭐고, 머리가 저렇게 통째로 날아갔다면 살아 있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확인 사살까지 끝낸 나는 살며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이곳에는 마무리해야 할 대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괴, 괴물...."

이제 몇 남지 않은 데니스의 부하들이 나를 바라본다.

마치 괴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고, 이 순간 나는 기꺼이 괴물이 되어 줄 생각이었다.

탕!

데니스가 완전히 죽었다는 걸 확인한 나는 곧이어서 남아 있는 데니스의 부하들 역시도 모조리 정리했다.

"사, 살려─"

목숨을 애걸하는 이도.

"끄흑, 집에 처자식이 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도.

"이 개새끼야아아─"

살기 위한 살의를 보이는 이도.

그들 모두가 몇 번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운명을 달리했다.

굳이 저들을 정리하는 데 Lv.2 병기인 B686 더블 배럴 샷건이나 아직 채 확인하지 않은 Lv.3 병기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노동에 가까운 단순 반복 행위.

솔직히 말해서 조금은 불쾌한 과정이었다.

공포에 물든 이들은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내가 한 일은 그런 생명들을 덧없이 거두는 것일 뿐이었으니.

'끝났군.'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감정에 휘둘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멸망 유예자가 나에게 부여한 냉정함은, 감정의 동요조차도 사치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남은 일은 이곳을 정리하는 것뿐.

시체야 어차피 내버려 두면 언젠가 마수들이 와서 먹어 치울 테니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지만, 챙길 만한 건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이것부터 하는 게 낫겠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역시나 데니스의 시체였다.

데니스는 과연 페가수스 상단의 고위직답게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나 장비들이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았다.

'뇌수 바쿰바라의 가죽과 스바이쿤의 소재로 만든 갑옷은 둘째 치고, 저 펜던트는 낙스의 유산 중 하나고, 반지는 명장 소린의 작품 중 하나군.'

낙스의 유산과 소린의 작품.

하나같이 명품이라 불리는 장신구들이었다.

'거기다가... 장갑과 신발은 추낙 지방에 사는 거대 뱀의 비늘을 베이스로 안에 바쿰바라의 가죽을 덧대서 전열성을 덧붙인 거군. 이거라면 바쿰바라의 가죽이 지닌 약점인 물리력에 대한 저항성도 매우 강한 물건이야.'

나는 곧장 그 물건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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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스의 유산─전(電)]

분류 : 펜던트

등급 : 영웅

위대한 현자, 낙스의 유산.

벼락의 힘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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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의 벼락 반지]

분류 : 반지

등급 : 희귀

벼락 맞은 나뭇가지를 가공해서 만든 반지.

매우 강한 전열성을 지니고 있으며, 전격을 약간 휘게 하는 힘이 있다.

명장 소린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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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낙 장갑]

분류 : 장갑

등급 : 희귀

추낙 지방의 거대 뱀의 비늘에 바쿰바라의 가죽을 덧댄 장갑.

매우 강한 물리 방어력과 냉기 내성 및 전열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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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낙 장화]

분류 : 신발

등급 : 희귀

추낙 지방의 거대 뱀의 비늘에 바쿰바라의 가죽을 덧댄 장화.

매우 강한 물리 방어력과 냉기 내성 및 전열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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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해야 할까.... 애초에 나를 우레의 마법사로 알고 있었던 만큼, 데니스가 지닌 장비들에는 대(對)뇌명의 마법사전에 유효한 장비들이 많았다.

만약 정말로 내가 평범한 뇌명의 마법사였더라면 이 자리에서 죽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오히려 그 때문에 비교적 전투가 쉽게 끝난 거기도 하지만.'

만약 데니스가 이런 대(對)뇌명의 마법사전 장비들이 아닌, 착용하고 있었던 추낙 장갑이나 추낙 장화 정도 수준의 장비를 방어구에 전부 둘렀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처음의 총격도 무위로 돌아갔을 테고, 나는 데니스에게 예상치 못한 반격을 허용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에게 있어서 꽤 운이 따라 주었다고 볼 수 있었다.

'내가 직접 쓸 건 쓰고, 처분할 건 하면 되겠지.'

쓸 물건은 낙스의 유산과 소린의 벼락 반지 그리고 추낙 세트고, 처분할 물건은 그 외 나머지다.

아무래도 뇌수 바쿰바라의 가죽과 스바이쿤의 소재로 만든 갑옷은 전열성은 뛰어나도 방어구로서 근본적인 방어력이 영 형편없었으니, 굳이 내가 직접 쓸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 상황에 따라서 쓸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갑옷 같은 걸 여분으로 들고 다니는 건 쉽지 않으니까.'

다른 액세사리나 장갑, 장화 등은 착용과 운반이 비교적 편하니 여분을 가지고 다니면서 상황에 따라서 스위칭을 해도 되지만, 갑옷처럼 크고 갑자기 갈아입기 힘든 것들은 대개 보편적인 상황에서 유용한 갑옷이 좋다.

아무래도 특정 상황마다 일일이 갑옷을 갈아입는다는 게 실전성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그냥 끼면 되겠지.'

나는 낙스의 유산을 목에 걸고, 손가락에 소린의 벼락 반지를 끼웠다.

그리고 기존에 착용하고 있던 아이추웡의 장갑과 장화를 벗고 추낙 세트로 갈아 끼웠다.

아이추웡의 장갑과 장화보다 데니스가 착용하고 있던 추낙 세트가 월등히 좋은 장비였기 때문이다.

'음음, 좋아.'

이 자식 이거, 완전 황금 고블린이었잖아?

역시 약탈을 하더라도 돈 많은 상인을 털라는 공정의 세계의 고언이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거기다가....'

데니스가 지니고 있었던 것은 비단 장비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이게 가장 중요한 물건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쯤일 텐데....'

곧이어서 데니스의 품속에서 기묘한 빛깔을 내면서 빛나고 있는 광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 데니스가 가지고 있었던 것과 데니스가 죽으면서 데니스가 품고 있던 승천석 파편이 각각 하나씩이었다.

'승천석 파편.'

내가 그것들을 집어 들기 무섭게 두 개의 승천석 파편들이 부르르 떨리면서 조금씩 나에게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승천석 파편'을 흡수합니다.]

[위대한 하늘이 당신을 봅니다.]

.

.

.

[마(魔)가 침식합니다.]

['멸망 유예자' 효과로, 침식한 마(魔)의 기운이 흡수됩니다.]

[마기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 → 2]

느껴진다.

나를 향해서 침범하려던 마(魔)가, 멸망 유예자의 힘에 되레 잡아먹혀서 나에게로 흡수되는 것이.

"후우...."

마기는 무척이나 위험한 힘이지만, 나처럼 마기를 온전히 다룰 수 있다면 이만큼 파괴적인 힘이 없다.

비록 데니스와 싸울 때는 사용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마기는 나에게 있어서 매우 강력한 무기가 되어 줄 것이다.

'방패가 되어 주기도 하고 말이지.'

어쨌거나 마기에 대해서 일단 생각을 접은 나는 시선을 옮겼다.

승천석 파편을 흡수한 것에 대한 변화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병기 소환(??)' 특성이 성장합니다.]

['병기 소환(??)'의 특수 능력이 해금됩니다.]

[특수 능력, '병기 등록'이 해금됩니다.]

──────────────

[병기 등록]

기존의 병기를 병기 목록에 등록한다.

등록한 병기는 병기 소환을 통하여 소환할 수 있다.

병기 등록 시점을 기준으로 병기의 내구도 및 상태가 고정되며, 재소환 시 병기의 모든 상태는 병기 등록 시점으로 리셋된다.

[현재 등록된 병기 목록]

-

──────────────

'이건....'

과연 성장형 특성이라고 할까.

병기 소환의 성장으로 단순히 소환 가능한 병기나 탄환의 숫자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능력까지 생겨났다.

그것도, 지금 나에게 있어서 더없이 필요한 능력이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 싸움을 겪으면서 나는 탈취의 마법을 사용하는 상대를 만났다.

조금 전에야 내가 주력 무기로 총기를 사용했으니 상대의 시선이 온통 총기에 쏠려 있어서 업화의 송곳니를 빼앗기지 않았다지만,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내가 내 목을 조르는 결과가 되어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

업화의 송곳니는 특정 상황을 넘어서 내가 실전에서도 충분히 사용하는 물건이었고, 당연히 내가 무기로 사용할 일도 많은 장비다.

비단 데니스뿐만이 아니라 탈취의 마법을 지닌 이라면 충분히 노릴 만하다는 이야기.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번에 새롭게 얻은 병기 소환의 기능은 무척이나 훌륭한 기능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업화의 송곳니의 소유권을 잃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장비의 내구도나 상태가 병기 등록 시점으로 고정이 된다는 건... 사실상 장비가 파손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즉, 혹여 업화의 송곳니가 파손되거나 하는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병기 소환으로 재소환한다면 멀쩡한 상태로 돌아온다는 소리.

이건 현재 내가 업화의 악마와의 계약의 매개체로 삼은 업화의 송곳니에 걸린 제약을 완전히 무효화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거 원... 이래서야 내가 업화의 악마한테 사기라도 친 것 같군.'

만약 내가 업화의 송곳니를 병기 등록을 한다면, 사실상 내가 업화의 악마와 계약할 때 걸었던 생명의 제약은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업화의 송곳니의 소유권을 잃어버릴 일도, 업화의 송곳니가 파괴될 일도 아예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사기 계약.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절대로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좋으면 좋았지.

'그러면 해 볼까.'

나는 업화의 송곳니를 들고는 그것을 향해서 능력을 발동했다.

['업화의 송곳니'를 개인 병기 목록에 등록하였습니다.]

[현재 등록된 개인 병기 수 : 1]

잠깐의 푸른 빛무리가 업화의 송곳니를 감싸더니, 이내 다시금 사라졌다.

얼핏 보면 변한 게 전혀 없는 것 같았으나, 나는 왜인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업화의 송곳니와 내가 무언가의 힘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말이다.

'한번 직접 해 볼까.'

나는 업화의 송곳니를 왼손으로 옮겨 잡은 뒤, 오른손을 뻗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개인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업화의 송곳니'를 소환합니다.]

병기 소환을 사용하자, 내 왼손에 있었던 업화의 송곳니가 사라지고 그것이 곧 오른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이런 식이군.'

이로써 나는 지금껏 나에게 있었던 가장 큰 약점을 지우게 되었다.

엄청난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대충 할 건 다 한 건가.'

데니스가 지니고 있었던 장비들도 챙기고, 승천석 파편 역시도 흡수했다.

이제 남은 건, 바닥에 널려 있는 장비들을 줍는 것뿐.

'전부 들고 가기에는 어렵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지.'

데니스와 부하들이 착용하고 있었던 뇌수 바쿰바라의 가죽과 스바이쿤의 힘줄을 엮어서 만든 갑옷은 비록 방어력 측면에서는 그리 효율적이지 못해도, 특정 상황에서 매우 좋은 장비였기에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곧, 팔아먹기에도 꽤 적합한 장비들이라는 소리였고, 나는 장비들을 이 자리에서 처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경매장을 열람합니다.]

지금부터, 떼돈을 벌 시간이다.

51화 불청객 (11)

물건을 팔 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적당한 시세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 물건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 또 얼마 정도면 팔릴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이 세계의 시세에 대해서 그리 잘 아는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세계는, 공정의 세계와 같으면서도 다른 세계였으니 말이다.

'특히 유저들에게 있어서는 더 그렇지.'

그중 가장 큰 예시 중 하나가 바로 내가 경매장에서 자주 사서 즐겨 먹는 육포라 볼 수 있었다.

만약 이것이 공정의 세계였다면 내가 먹는 육포는 큰 가치를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시스템적 포만감을 채워 주는 간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나 게임이 아닌 현실이기에 존재하는 맛과 영양이라는 별도의 가치가 육포에게 또 다른 가치를 부여했고, 그렇기에 육포는 게임이었던 시절보다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다.

'뭐, 그래도 겨울성의 살인적인 식재룟값을 생각한다면 싼 거지만.'

내가 경매장에서 육포를 자주 사 먹는 이유이기도 했다.

겨울성 같은 장소에서 이런 세속적인 맛과 양질의 단백질을 한꺼번에 챙길 수 있는 음식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겨울성에서 기본적으로 보급해 주는 음식들도 엄청나게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소모 칼로리가 많은 이런 환경에서는 먹어도 먹어도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뭐, 어쨌거나....'

나는 이번에 얻은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경매장을 켰다.

대략적인 시세를 파악해야 물건을 처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흐음.'

애석하게도 현재 경매장에 올라와 있는 물품 중에서 뇌수 바쿰바라의 가죽과 스바이쿤의 힘줄 소재로 만든 물건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데니스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매물이 전부 쓸려 나간 모양.

'원래도 구하기 쉬운 물건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서 시세를 알아보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해당 물건이 없다면, 그것과 비슷한 물건의 시세를 통해서 대략적으로나마 시세를 유추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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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중인 경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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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품목]

◆만드레타 가죽 망토

[입찰 목록]

◆67골드(제국 금화 67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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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레타의 소재는 뇌수 바쿰바라와 마찬가지로 전열성을 지녔지만, 바쿰바라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전열성과 강한 물리 방어력을 지닌 소재다.

그렇기에 바쿰바라의 소재와 만드레타의 소재는 동급으로 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만드레타 가죽으로 만든 망토가 저 정도라면... 갑옷은 대충 한 개에 70골드에 올리면 되겠군.'

아무래도 망토보다는 갑옷이 만드는 데 손이 더 든다는 걸 감안한 가격 책정이었다.

뭐, 현재 경매장에 바쿰바라 소재의 물건이 없다는 걸 감안한다면 조금 더 프리미엄을 붙여도 되겠지만, 그랬다가는 파는 데 시간이 더 걸릴 테니 썩 끌리지 않았다.

만약 내가 장사꾼이나 상인이었다면 몰라도, 지금 나에게는 현금이 더 중요했으니 말이다.

'이건 나한테 필요 없으니 팔고.... 이것도 꽤 값이 나가겠어.'

그렇게 내가 직접 쓸 물건은 따로 챙겨 놓고, 쓸모없는 물건들은 경매장에 올리니 경매장에 올린 물건들의 금액이 도합 천 골드를 훌쩍 넘어가게 되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거금.

물론 어디까지나 내가 올린 가격대로 팔린다는 가정하에이지만, 객관적으로 내가 올린 가격대는 꽤 합리적이었음으로 안 팔릴 이유는 없었다.

'천 골드 정도면 꽤 괜찮을 장비를 맞출 수 있겠어.'

현재 경매장에는 천 골드가 넘는 고가의 아이템들 역시도 적지 않게 올라와 있었다.

그중에서는 내 기준을 만족하는 아이템들 또한 있었으니, 상당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번 데니스의 습격은 나에게 있어서 꽤 좋은 결과로 남은 것 같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뒷감당이라는 게 존재했으니 말이다.

'이대로 좋게 끝나면 좋겠지만... 그런 행운을 바라는 것 자체가 이성적이지 못하겠지.'

지금 내가 경매장에 올린 물건들은 모두 페가수스 상단을 통해서 구해진 물건일 터.

당연히 데니스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면 이 물건들을 알아볼 가능성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경매장은 철저한 익명 시스템이라서 나에 대한 정보가 노출되지 않는다는 점 정도일까.

'벨레로폰이라고 했었나.'

데니스는 자신을 가리켜서 벨레로폰이라고 했다.

일전에 길드 게시판에서도 얼핏 본 적이 있는 길드 이름.

페가수스 상단과 벨레로폰.

실제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페가수스의 주인이 벨레로폰이었으니, 이름만 봐도 그 둘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인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곧, 벨레로폰의 인물이라면 경매장에 올라온 바쿰바라 갑옷들을 보고서 데니스에게 생긴 일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 습격에 다른 유저가 동행하지 않았던 걸 생각한다면 나에 대한 정보가 벨레로폰을 통해서 퍼졌을 가능성은 낮겠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겠지.'

지금의 나로서는 데니스가 개인적으로 움직인 것인지, 아니면 길드 차원에서 움직인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벨레로폰이라.'

페가수스 상단과 벨레로폰.

아마 그들과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설령 당장 그들이 내 존재를 모른다 하더라도, 나라는 존재를 찾으려고 할 터.

'그때가 되면 충돌을 피할 수 없겠지.'

그리고 그때의 충돌은 조금 전에 있었던 것처럼 소규모 교전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실력이 있는 자들을 보낼 것이고, 어쩌면 군대까지도 보내올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겁에 질려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피할 수 있는 싸움이라면 기꺼이 피하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순순히 당해 줄 생각 또한 없었으니까.

그것이 카인의 방식이었다.

'뭐 그건 그렇고... 일단은 겨울성으로 돌아가야겠지.'

그 순간.

-크르르릉....

-캬오오오! 캬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마수의 울음소리.

아무래도 겨울성의 마수 토벌령으로 인해서 잠시 이곳을 떠났던 마수 무리가 돌아온 듯했다.

혹은, 내가 낸 총성이 다른 곳에 있었던 마수 무리를 불러들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피 냄새를 맡았거나 말이지.'

인간의 피 냄새에는 마수들을 불러 모으는 힘이 있었으니.

뭐... 정확히는 마수들이 인간의 피 냄새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보는 게 옳았지만 말이다.

부스럭, 부스럭....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에 대해서 더 생각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괴성이 들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방에서 마수들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둘이 아니군.'

이 정도면 완전히 나를 포위했다고 보는 게 옳은 상황.

또한, 이런 식으로 무리를 이루는 것으로 보건대, 무리형 마수인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이 근방에서 이런 식으로 무리를 이룰 마수 무리라면... 대충 다섯 종류 정도인가.'

거기다가 아까 들었던 울음소리를 생각해 보면, 마수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이어드 울프 무리로군.'

주로 무리 생활을 하는 다이어드 울프는 평균적으로 3레벨에서 4레벨 사이에 위치한 마수들로, 이름에 들어가는 울프에서 알 수 있듯이 늑대와 비슷한 외견 및 습성을 지닌 마수들이다.

누군가 다이어드 울프 자체가 늑대에서 변형이 된 어떠한 종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늘어놓았으나, 당연히 확인이 된 정보는 아니었다.

'지금 나를 포위한 게 다이어드 울프 무리라면... 현재 내가 지닌 탄 숫자로는 쉽지 않겠군.'

다이어드 울프는 평균적인 개체들의 레벨이 3레벨에서 4레벨 사이였으니, 일전에 마두견을 상대했을 때처럼 급소를 맞히더라도 총알 한두 방에 잡는 건 어려울 가능성이 높았다.

설사 2레벨 병기인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70mm 12게이지 산탄의 숫자가 썩 여유로운 편은 아니었다.

물론 나에게는 그 외에도 물의 보옥이나 업화의 송곳니 같은 무기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보다 다른 것에 시선을 돌렸다.

'차라리 잘됐어.'

마침,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험해 보기 딱 좋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크르르...!

-아우우우우우!

순순히 나를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는지, 사방에서 마수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크릉, 크르릉!]

[캬우우우...!]

그와 함께 사방에서 다이어드 울프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Lv.3]

[다이어드 울프]

[Lv.4]

[은 갈기 다이어드 울프]

하나, 둘, 셋, 넷, 다섯....

'척 봐도 스물 이상이군.'

무려 3레벨과 4레벨 마수들이 스물 가까이 모여 있다.

이 정도면 이전의 나였다면 그럴듯한 반항도 못 해 보고 목이 뜯겼을 수준의 어마어마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지금 나에게는 새로운 병기가 있었으니 말이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3'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AKX-67 돌격 소총'을 소환합니다.]

내 손에서 피어오른 푸른 빛무리와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인 무기 중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찾고자 하는 이가 있었다.

그를 찾는 여정은 마치 끝이 없는 미로를 바닥만 짚고서 가는 것 같았다.

그러던 도중, 빛이 보였다.

그녀는 빛을 따라서 걸었고, 마침내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착각에 불과했다는 걸 알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언제나처럼 익명 게시판을 살피던 루나는 조용히 자신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오래전, 카인이 직접 사용하던 펜던트가 경매장에서 팔렸을 때, 루나는 마침내 카인이 이 세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이후로 카인의 흔적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대체 왜?'

루나의 의문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카인쯤 되는 인물이 이 세계에 나타났다면 어디서든지 그에 대한 반향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정작 익명 게시판을 포함한 온갖 정보 매체에서 카인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카인이 이 세계에 없는 것처럼.

경매장에 올렸던 카인의 펜던트가 팔린 건 그저 우연에 불과했던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루나는 그 가능성을 애써 부정했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그런 근본 모를 고물 펜던트를 누군가 거액을 주고 사 갈 리도 만무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믿고 싶지 않았다.

이 세계에 카인이 없고, 자신이 이 세계에 혼자 버려졌다는 사실을.

'카인은 있어.'

그렇다면 카인은 어째서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가?

루나는 그에 대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분명해. 멸망룡과의 전투가 쉽지 않았던 거야.'

멸망룡이 어떤 존재인가.

라크나 대륙을 능히 재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겨졌던 피할 수 없는 종말이자, 대적하는 게 의미없는 세계의 파멸 그 자체로 여겨졌던 존재.

그런 존재와 맞섰으니, 제아무리 카인이라 할지라도 무사한 게 오히려 이상했다.

'괜찮아.'

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인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신이 직접 카인을 찾으면 된다.

그렇기에 루나는 결심했다.

직접 보고 들은 게 아닌, 한낱 정보에 의지하는 건 이제 그만두기로 말이다.

'직접 가야겠어.'

물론 여전히 카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단서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껏 카인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는 건, 반대로 말하자면 지금 카인이 인간의 발걸음이 거의 닿지 않는 곳 중 한 곳에 있다는 뜻과도 같았으니까.

그곳이 어디라도 상관없다.

갈라진 사막이든, 기적의 바다든, 아니면 금역이라 불리는 마경이든.

루나는 카인을 찾고야 말 것이다.

설령 그녀 자신의 존재가 카인에게 있어서 불청객이 될지라도.

52화 불청객 (12)

AKR-74 돌격 소총.

이 총기는 지금껏 내가 사용했던 콜트 패리슨 B-09이나 B686 더블 배럴 샷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총기다.

앞선 두 개의 총기가 개인 방어용이나 은닉용 혹은 사냥용으로 사용이 된다면, AKR-74 돌격 소총은 철저하게 인간을 효율적으로 죽이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대량 살상에 특화된 무기.

수렵용이나 인간을 지키기 위함이 아닌, 오로지 같은 인간을 죽이는 전쟁을 위해서 만들어진 무기.

실제로 총기가 합법화된 국가에서조차도 연사가 가능한 자동소총이 민간에 철저하게 금지되는 이유 또한 총기 관련 사고가 났을 때 인명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커지기 때문이다.

괜히 AKR-74 돌격 소총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인 무기 중 하나인 게 아니라는 소리.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바로 그러한 무기가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다는 점이었다.

나의 적을 말살하기 위해서.

[캬오오오!]

사방에서 다이어드 울프들이 달려든다.

찰칵.

AKR-74 돌격 소총은 제작된 배경부터가 그렇듯,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도록 설계된 총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리 어려울 것 없이 직관적으로 AKR-74 돌격 소총을 다루는 법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하면....'

철컥, 철컥.

여기서는 어려울 게 없다.

그저, 방아쇠를 당길 뿐이었으니.

타앙!!!───

AKR-74 돌격 소총은 7.62×39mm 탄을 사용한다.

곧, 그에 걸맞은 파괴력을 지녔다.

바로 지금처럼.

콰앙──!

방아쇠가 당겨지기 무섭게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던 다이어드 울프의 머리가 마치 폭발하듯이 터져 나갔다.

[캬오오!]

그것을 마치 신호탄으로 사방에서 다이어드 울프들이 달려들었다.

[Lv.3]

[다이어드 울프]

척 봐도 다섯 이상의 다이어드 울프가 일제히 달려든다.

한 발씩 쏴서 맞히기에는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은 상황.

'그렇다면....'

나는 반사적으로 엄지손가락 끝에 걸리는 AKR-74 돌격 소총의 조정간을 어루만졌다.

워낙 직관적인 설계 덕분인지는 몰라도, 나는 무엇이 자동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느낌이 왔다.

[AUTO]

조정간이 연사로 바뀌고, 사방에서 달려들던 다이어드 울프를 향해서 마치 휩쓸 듯이 난사가 가해졌다.

투두두두두!!!

단 한 차례.

그것만으로도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던 다이어드 울프들이 벌집이 된 채로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끼잉, 끼이잉....]

[컹! 커허헝!]

그다지 정밀한 사격이 아니었던 탓에 몇몇 다이어드 울프들의 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나,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 다이어드 울프들이 전투 불능에 빠졌다는 점이었으니까.

'아무리 마수들의 생명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저 정도의 치명상이라면 얼마 버티지 못하겠지.'

조금 전의 총격이 만들어 낸 효과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난사로 인해서 나머지 다이어드 울프들이 나에 대해서 크게 경계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크르르....]

[컹! 커허허헝!]

놈들도 아는 것이다.

지금 가장 먼저 달려드는 개체가 가장 먼저 죽을 거라는 사실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수 또한 생명체다.

당연히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녔고, 이렇게 사냥에 나서는 것 역시도 본질적으로 보면 먹이를 구하는 일련의 행위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달려드는 건 그러한 본능에 위배되는 행동이었으니, 망설이는 건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놈들이 망설이는 빈틈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대치 상황을 이어 가 봤자 나한테 좋을 게 없어.'

시간이 흐르면 결국 놈들의 망설임도 조금씩 희석이 될 테고, 그때 놈들이 포위망을 다시 짜서 온다면 나로서도 귀찮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다이어드 울프 무리의 포위망이 무너졌을 때 확실하게 끝을 낼 생각이었다.

타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슬금슬금 나를 포위하고 있던 다이어드 울프 중 한 마리가 나가떨어졌다.

그것을 일종의 신호탄으로 눈치만 보고 있던 다이어드 울프들이 다시금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크르르릉!]

그중에는 이제껏 뒤에서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4레벨 개체 역시도 있었다.

[Lv.4]

[은 갈기 다이어드 울프]

내가 총구를 돌려서 놈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긴 순간.

철컥, 철컥.

방아쇠를 당겼음에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총알이 전부 떨어진 것이다.

'쯧.'

슬슬 총알이 떨어질 때가 됐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하필이면 지금 떨어질 줄이야....

[캬오오오오!!!]

나에게 일어난 이변을 알아차렸는지, 은 갈기 다이어드 울프가 흉성을 토해 내면서 달려들었다.

새삼스레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나에게는 비단 AKR-74 돌격 소총뿐만 아니라 다른 무기도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2'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소환합니다.]

내 왼손에서 모습을 드러낸 B686 더블 배럴 샷건이 나를 향해 아가리를 벌린 은 갈기 다이어드 울프를 향해 겨누어졌다.

[캬오오!]

"어딜."

코앞까지 다다른 은 갈기 다이어드 울프의 송곳니가 보인다.

그러나 그 송곳니가 나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콰앙!!!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B686 더블 배럴 샷건에서 뿜어진 70mm 12게이지 산탄이 단번에 은 갈기 다이어드 울프의 턱을 날려 버렸다.

[꾸우우우!]

턱이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은 갈기 다이어드 울프는 끈질기게 나를 노려보았다.

과연 4레벨 개체다운 생명력.

그 틈에 배후에서 다른 다이어드 울프가 나를 향해 덮쳐 왔다.

피하기에는 늦은 상황.

['물의 보옥'이 착용자를 수호합니다.]

['물의 보옥'이 '선전수적순패(旋轉水的盾牌)'를 전개합니다.]

그 순간, 착용자를 수호하는 물의 보옥의 힘이 발동되며 회전하는 물의 방패가 다이어드 울프를 후려쳤다.

[깨갱!]

그리고 나는 오른손에 있던 AKR-74 돌격 소총을 내팽개치고는 오른손을 뻗었다.

['병기 소환(??)'을 발동합니다.]

['Lv.1'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콜트 패리슨 B-09'을 소환합니다.]

왼손에는 B686 더블 배럴 샷건.

오른손에는 콜트 패리슨 B-09.

보통 사람이었다면 한 손으로 B686 더블 배럴 샷건을 들고서 그 반동을 감당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지금 내 능력치나 그것을 보조하는 하이마의 펜던트의 능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쾅!

타앙!──

총성과 총성이 겹친다.

하지만 물의 보옥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 틈을 노린 다이어드 울프 한 마리가 내 오른팔을 물었다.

콱!

['하이마의 저주'가 발동 중입니다.]

['하이마의 저주'로 인하여 착용자의 피가 폭주합니다.]

['출혈' 상태 이상이 회복되지 않고 지속됩니다.]

다이어드 울프가 문 자리에서 나는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흐른다.

하이마의 펜던트의 효과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분명히 고통에 몸부림을 쳤어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침착하게 왼팔에 있는 샷건의 총구를 다이어드 울프의 턱에 겨누었다.

"그래, 잘 물고 있어라."

철컥.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다이어드 울프의 머리가 통째로 터져 나갔다.

터져 나간 육편과 피가 사방에 튀었으나, 나는 개의치 않고서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 나갔다.

콱!

콰콱!

계속해서 다이어드 울프들이 나를 물고 늘어진다.

아무리 물의 보옥이 있다고 해도 다이어드 울프의 모든 공격을 막아 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큭!"

아프다.

더럽게 아프다.

멸망 유예자의 정신조차 고통을 감춰 주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이 자리에서 기절하는 나약함만은 피하게 해 주었다.

"이 개 새끼들이...!"

나는 몸을 흔들어서 놈들을 떨쳐 내려고 했으나, 마기로 인해서 강화된 육체 능력으로도 3레벨 마수의 치악력을 이기지는 못했다.

'지긋지긋한 놈들....'

하는 수 없이 나는 양손을 움직여서 총구를 서로 교차한 후,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그와 함께 다이어드 울프들의 머리가 터져 나가면서 끈질기게 나를 물고 늘어지던 다이어드 울프들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드러난 팔을 비롯한 전신의 방어구가 걸레짝처럼 너덜거렸으나, 다행히 방어구의 성능 덕분인지 치명상까지는 아니었다.

[크와아앙!!]

그러는 사이에도 다이어드 울프들은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두 번은 안 당해."

그와 함께 내 주위에서 서서히 서리가 낀 물보라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의 보옥'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물의 보옥'이 '흉용적파도(洶涌的波濤)'를 전개합니다.]

콰콰콰!!!

물의 보옥의 힘이 한차례 다이어드 울프들을 휩쓸고, 이어진 권능이 내 상처를 회복시켰다.

['물의 보옥'의 힘이 사용자에 스며듭니다.]

['물의 보옥'이 사용자를 치유합니다.]

물의 보옥의 힘이 나를 감싸자 조금은 몸이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후우...."

잠시 여유를 얻은 나는 다이어드 울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조금 전, 물의 보옥의 힘으로 인해서 다이어드 울프들의 몸이 젖어 있다는 것을.

마침 이럴 때 활용하기 좋은 장비를 이번에 하나 구하지 않았던가?

'이번에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장비와 장비 간의 시너지를 활용하는 것.

공정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낙스의 유산─전(電)'의 권능이 발휘됩니다.]

['수호전(守護電)'을 발동합니다.]

그와 함께 내 주위에서 일어난 전격들이 물의 보옥이 만들어 낸 물길을 따라서 사방으로 퍼졌다.

파직, 파지직──!

비록 전격 자체가 강한 전격은 아니었으나, 일시적으로 다이어드 울프들의 몸을 움찔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크켁, 켁!]

[깽!]

다이어드 울프들이 몸서리를 치며 잠시 물러난 잠깐의 틈.

나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이제는 내 차례다, 이 개 새끼들아."

연신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일방적인 사냥의 시간이 시작됐다.

[끄우우우...!]

[컹! 커허헝!]

곧이어서 다이어드 울프 무리는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었고, 곧장 몸을 돌려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도망치는 마수들을 내버려 둘 리가 만무했지만 말이다.

탕──!

콰앙!!─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기고.

총구에서 불꽃이 뿜어질 때마다 다이어드 울프들의 머리가 터지고, 몸에 구멍이 났다.

아무리 3레벨 마수의 가죽이 두껍다 하더라도 총이 지닌 물리력은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틱, 틱틱....

'음.'

어느덧 모든 총알을 소진했는지 양손에서 뿜어지던 불길이 멎었다.

총알이 전부 떨어진 것이다.

[키히잉....]

[크릉! 크르릉!]

그러나 아직 다이어드 울프들은 남아 있다.

당장 나에게 달려들고 있지는 못했어도, 몇몇 놈들은 두려움에 떨고, 몇몇 놈들은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여전히 이빨을 보이고 있었다.

"슬슬 끝내자."

지긋지긋한 늑대 놈들 같으니라고.

[개인 병기가 소환됩니다.]

[병기, '업화의 송곳니'를 소환합니다.]

푸른 빛무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업화의 송곳니가 불길을 뿜어냈다.

칼날이 춤을 춘다.

그럴듯한 기예도, 마법도 필요 없다.

그저 업화의 송곳니를 휘두르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불사를 뿐.

[캐헤에엥!]

[끄욱, 끄우우욱!]

짐승이, 마수가 운다.

모든 걸 불사르는 업화가 두려워서, 자신의 살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화염이 고통스러워서.

화르르륵──!

주변의 모든 게 업화의 색깔로 얼룩져 간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53화 불청객 (13)

세상에 불꽃이 넘실댄다.

모든 게 타오르고, 또 타오른다.

한때 살아 있는 마수였던 것들은 타오르는 업화에 휩쓸려서 잿더미가 되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몇몇 마수들만이 간신히 이 자리를 벗어났을 뿐이었다.

'몇 마리 놓치긴 했지만, 큰 상관은 없겠지.'

나는 몸에 덕지덕지 묻은 마수의 피와 땀 그리고 숯검정과 물의 보옥이 만들어 낸 물기를 털어 내고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후우...."

사방에 보이는 불길과 매연.

비릿한 피 냄새와 화약 냄새.

피와 고기 파편 그리고 가죽.

지금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건 딱 그 정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잘됐다고 봐야겠지.'

내가 겨울성을 나선 이유는 데니스를 끌어내기 위함이었지만, 그 사실을 어디 가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대외적인 명분이 필요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다이어드 울프들의 소재는 나에게 있어서 매우 훌륭한 명분이 되어 주었다.

밖에 나가서 겨울성주의 지시대로 마수 토벌에 참여하고 왔다고 한다면, 그 누가 나를 수상하게 보겠는가?

거기에 더해서 다이어드 울프들이 내 몸에 남긴 온갖 이빨 자국들이 내가 겪은 치열함을 증명해 주기도 했고 말이다.

'뭐... 마수 토벌을 혼자 다녀왔다는 게 조금 특이하기는 해도, 그런 이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실제로 겨울성 내에서도 이번 마수 토벌과 관련해서 단독 행동을 하는 이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겨울성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험지였고, 자연스레 홀로 마경 인근을 거닐어도 될 정도의 강자들이 즐비했으니까.

당장 내 직속상관인 에드릭부터가 제4 특무대의 대장으로서 있지 않은가.

'뭐... 에드릭 같은 경우는 겨울성 내에서도 꽤 특이한 것 같지만 말이지.'

나는 지금껏 에드릭을 6레벨 이상의 강자로 판별해 왔지만, 에드릭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처음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른 특무대의 대장들 역시도 만만한 자들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에드릭만큼 특별하지는 않았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

그게 지금 내가 판단하고 있는 에드릭이라는 인물이었다.

'뭐, 그건 그렇고....'

나는 업화의 송곳니를 휘둘러서 주변을 불태우고 있는 업화들을 조용히 잠재웠다.

아무래도 이 정도의 불길이라면 겨울성에서도 보일 수도 있을뿐더러, 태워야 할 건 거의 다 태웠기 때문이다.

쉬시식....

그렇게 모든 불길을 잠재운 나는 바닥에 널려 있는 다이어드 울프들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몇몇 사체들은 완전히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지만, 그렇지 않고 비교적 형체가 남아 있는 사체들 역시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들의 소재를 손질하기 위해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업화의 송곳니를 쓴다면 편하기야 하겠으나, 그런 고열의 화염 속성을 머금은 물건으로 마수 손질 같은 걸 했다가는 소재가 손상될 테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본격적으로 다이어드 울프 사체의 손질을 시작했다.

사각, 사각....

늘 느끼지만, 마수를 손질하는 일은 정말로 고된 일이다.

특히 가죽이나 다른 소재가 최대한 손상이 가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손질하려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확 다 버리고 갈까?'

손질을 하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다이어드 울프의 소재는 나름대로 값이 나가는 편이었기에 그건 또 아까웠다.

그나마 주변의 눈들이 녹아서 이 자리에 작은 물웅덩이가 몇 개 생겨난 덕에 손질이 조금 더 쉬워졌기에 망정이지, 만약 이것조차 없었더라면 나는 정말로 이것들을 전부 불태우고 자리를 일어났을 것이다.

'손질 후에 바로 경매장에 올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래서야 기껏 손질을 한 보람이 없겠지.'

애초에 이것들을 손질한 이유 중 하나가 내 외출의 명분을 위해서 겨울성에 이것들을 보이기 위함 아니었던가.

그렇게 다이어드 울프의 발톱과 가죽 등 쓸모 있는 소재를 모조리 손질한 나는 그것을 주변에 있던 나무로 만든 임시 수레에 옮긴 뒤, 물의 보옥으로 만든 바퀴를 달았다.

워낙 대충 만든 물건이다 보니 튼튼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일단 바퀴는 잘 굴러갔다.

"후우...."

어째 데니스를 비롯한 마수들과의 전투보다 그 뒤에 있었던 마수 손질이 더 힘든 것처럼 느껴지는 건 단지 기분 탓일까.

'실제로 시간도 더 걸렸지.'

어느새 완전히 새벽이 찾아온 걸 보면 말이다.

만약 에드릭이 아닌 다른 지휘관이었다면 나를 탈영으로 판단하지 않을까.

뭐... 에드릭도 모르는 거지만.

'그래도 성과는 있었어.'

비록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이번 외출 때는 얻은 게 참으로 많았다.

낙스의 유산과 소린의 작품.

거기에 더해서 추낙 세트 같은 상등품의 장비와 여러 가지 돈이 되는 물건들까지.

다만, 한 가지 유감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에 비례해서 귀찮은 일 역시도 함께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뭐... 상관없지.'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으로 인해서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이제껏 그랬듯이, 내 앞을 가로막는 건 모조리 치워 버릴 뿐이었으니까.

'그러면....'

나는 시선을 돌렸다.

이제 돌아갈 때다.

* * *

돌아가는 길.

데니스, 아니 익명999와 벨레로폰에 대한 정보를 살필 겸, 익명 게시판을 살피던 나는 묘한 게시 글 하나를 발견했다.

-루나 : (루나 선언) 더는 안 기다릴 거야.

-루나 : 곧 갈게.

"...."

기분 탓일까.

불청객의 방문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그래, 아마 기분 탓일 것이다.

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 * *

겨울성에 돌아온 나는 보고를 위해서 에드릭의 집무실을 찾았다.

똑똑-

그러나 안에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부재중인 모양.

에드릭이야 워낙 신출귀몰한 인물이었기에 나는 그러려니 하고서 막사로 발걸음을 돌렸다.

군대에서 복귀 후 보고는 매우 중요하지만, 보고 대상이 없다면야 별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오셨어요?"

막사로 돌아간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건 역시나 알리시아였다.

"어."

"얼굴에 상처가...."

"괜찮아. 별것 아니야."

어차피 이 정도 상처야 물의 보옥을 지닌 나에게 있어서는 하루 자고 일어나면 말끔히 나을 상처다.

실제로 회복하려면 할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온 이유 또한 금방 나을 상처라서 그런 거였다.

겸사겸사 겨울성과 페가수스 상단에도 내가 겪은 마수와의 전투를 슬쩍 알리기도 하고 말이다.

"아뇨. 안 괜찮아요."

그런데 알리시아는 단호하게 그렇게 말하더니, 어디에서 꺼내 온 건지 모를 연고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인근에서 구한 약초 몇 개를 배합한 거예요. 상처가 빨리 나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알리사아가 나에게 연고를 바르려 들자, 내가 말했다.

"내가 바를게."

"가만히."

알리시아는 단호하게 말하면서 내 뺨에 있는 상처 몇 개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으음....'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으나, 나에게 나쁠 것도 없는 일이었기에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다 됐어요."

"...고맙다."

"그런 말도 할 줄 아시네요."

알리시아가 그렇게 말하면서 가볍게 웃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미소를 넋 놓고 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나를 본 콘란이 말했다.

"왔나? 또 한바탕하고 온 모양이군. 할 거면 같이 좀 하지."

"골골대고 있는 주제에 말은 잘하네."

실제로 얼마 전에 있었던 마수 토벌 이후에 콘란은 크고 작은 부상들을 입었고, 당장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뭐, 설령 멀쩡했다 한들 콘란과 함께 나가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이런 건 침 바르면 나아."

"대장 같은 소리를 하네."

"그 괴물 같은 양반이랑 비교하면 쓰나."

콘란이 껄껄 웃었다.

왜인지 에드릭 같은 웃음이었다.

"됐고, 대장은?"

"응? 집무실에 없나? 어디 간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아, 원래 안 하고 다녔던가."

콘란도 에드릭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는 듯했다.

하긴, 복귀 보고가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으니 나는 그러려니 했다.

"그나저나... 아까 가져온 것들을 보니까 이번에 한몫 단단히 잡은 것 같던데 빨리 처분하지 그래? 페가수스 상단이 곧 떠난다더군."

"그래?"

슬슬 그럴 때가 됐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그때가 이제는 정말로 코앞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데니스 정도 되는 인물이 사라졌는데도 순순히 떠날지 조금 의문이기는 하지만... 상단 입장에서 언제까지고 겨울성에 눌러앉아 있을 수만도 없을 테지.'

이후 페가수스 상단이 어떻게 나올지는 한번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만약 페가수스 상단에서 데니스를 비롯한 사라진 상단원들을 찾겠다고 대규모 조사라도 시작한다면 나로서는 꽤 귀찮아질 수도 있었으니까.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어쨌거나 그건 그거고....

"그러면 말이 나온 김에 시간 되면 저것들 손질하는 것 좀 해 줄 수 있나? 다이어드 울프의 소재다. 내가 대충 하기는 했는데, 저대로 팔기에는 제값을 못 받을 것 같아서."

"흥, 내가 그딴 걸 할 것 같─"

"1골드 주지."

"뭐부터 하면 되지?"

어느새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콘란은 착실하게 내가 가져온 다이어드 울프의 소재를 손질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참으로 알기 쉬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저건 또 뭐야? 이젠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하는군."

지나가던 알비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으나, 콘란은 가볍게 무시했다.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제4 특무대의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 * *

콘란의 도움 덕분에 다이어드 울프들의 손질을 끝낸 나는 그것들을 페가수스 상단에 꽤 괜찮은 값을 받고 넘겼다.

아무래도 불에 그을리거나 총탄에 뚫린 자국들이 많았던 터라 제값을 받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았지만, 다이어드 울프의 소재 자체가 꽤 쓸모가 많은 편이었기에 나로서도 만족할 만한 금액을 받은 것이다.

또한, 페가수스 상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겨울성을 떠났다.

데니스를 비롯한 상단원 몇이 갑작스레 사라진 것에 대해서 큰 소란이 있었으나, 그로 인해서 상단 전체의 일정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조사를 멈추고 겨울성을 떠난 것이다.

듣기로는 페가수스 상단이 떠나기 전에 성주인 변경백이 직접 사라진 상단원들에 대해서 조사하겠다고 공언했다는데... 아마 지금쯤이면 그곳에 있던 시체들은 모두 마수들의 먹이가 되지 않았을까.

마경의 마수들은 인간의 뼈조차도 남기지 않고서 모조리 씹어 먹어 버리니 말이다.

'물론 그래도 흔적을 찾으려면야 찾을 수도 있지만....'

눈으로 뒤덮인 숲속에서 누구였는지도 모를 사체의 흔적을 알아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겨울성 측 병사들이 데니스의 신상을 알고 있을 리도 만무했을뿐더러, 그들의 신분을 나타낼 만한 건 이미 내가 모조리 챙겼으니 말이다.

그렇게 겨울성에 있어서 큰 행사였던 페가수스 상단의 방문과 나에게 있어서 상당한 위기였던 불청객의 난입이 모두 끝이 났다.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페가수스 상단의 방문이나, 불청객의 난입이나 모두 나에게 있어서 나쁠 게 없었지만, 그거야 나중에 봐야 알 일이었다.

이번 일은 언젠가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돌아올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날을 대비해서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고,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오랜만이군. 잘들 지냈나?"

그러던 도중, 한동안 보이지 않던 에드릭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뻔뻔한 얼굴에 실금 같은 상처가 드문드문 보이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기는 했던 모양.

뭐, 매일같이 지옥 같은 훈련을 주도하는 에드릭의 부재 덕분에 최근에는 조금 편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 딱히 불만은 없었지만 말이다.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개인적인 일이 있었네. 생각보다 일이 지연되어서 말이야. 대장으로서 자네들에게 면목이 없군."

"괜찮습니다."

실제로 그 덕분에 편하기도 했고.

"그런 의미로, 내가 자네들을 위해서 선물 한 가지를 가져왔네."

"선물?"

에드릭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임무라네."

옆에 있던 콘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그게 선물입니까?"

"그럼, 이 지긋지긋한 겨울성에 갇혀 있는 자네들에게 바깥나들이만큼 좋은 선물이 어딨겠나?"

아무렇지도 않게 궤변을 주워섬긴 에드릭이 언제나처럼 껄껄 웃었다.

"어떤 임무입니까?"

"변종 토벌일세."

변종 토벌이라....

원래 겨울성의 담당 지역인 북쪽 지역 임무에 에드릭이 구태여 선물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을 테니, 임지는 북쪽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베른하르크."

에드릭이 덧붙였다.

"낭만이 넘치는 자유도시지."

54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자유도시로, 표면적으로는 제국의 굳건한 동맹 도시 중 하나.

뭐... 말이 동맹이지,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제국의 위성도시나 다름없는 신세였지만 말이다.

"베른하르크 말입니까?"

"그렇다네."

"어째서입니까? 베른하르크라면 겨울성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인데 굳이 저희가 거기까지 갈 이유가 있습니까?"

그 말마따나 자유도시 베른하르크의 위치나 정치적 상황이나, 모든 걸 고려했을 때 겨울성에서 굳이 베른하르크까지 파견을 나가는 건 여러모로 이상한 일이었다.

물리적인 위치도 상당할뿐더러, 무엇보다도 자유도시 베른하르크는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국으로부터 거의 내정간섭에 가까운 수준으로 통제를 받기는 해도, 일단은 대외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

그런 상황에서 베른하르크까지 저 멀리 있는 겨울성에서 지원을 간다니... 척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베른하르크의 요청이 있었다고 하네. 제국의 황실이 그걸 받아들였고."

"그렇다면 더 이상한 것 아닙니까? 황실에서 직접 나서면 될 일을 굳이 저희가 갈 필요가 있습니까?"

제국 황실의 힘은 실로 막강하다.

그런데 그런 힘을 가지고서 직접 지원을 가기는커녕, 한창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겨울성에서 굳이 인원을 차출한다?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최근 황실 내에서도 이런저런 소란이 많은 모양이네. 거기에 더해서 남쪽 전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도 하고.... 이런 내외적인 상황에서 위성도시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다는 뜻이지."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여전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 아마 거기에는 제국과 베른하르크 그리고 겨울성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정치가 엮여 있으리라.

그런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에드릭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겨울성은 제국 황실로부터 많은 혜택과 지원을 받고 있네. 이번 임무 또한 그런 맥락일세."

에드릭이 덧붙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밥값은 하라는 소리지."

"그 대가로 마경으로부터 제국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그러지 말게. 지금 자네들이 그렇게 불평할 수 있는 것 또한 황실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어딘가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 말마따나, 본디 우리는 진작 화형을 당했어야 할 죄인 신분에 불과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제국과 징벌 교단 간의 은밀한 거래.

그에 대한 대가로 진작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어야 할 우리는 지금도 살아 있었다.

"쯧, 더러운 교단 놈들 같으니라고. 앞에서는 온갖 정의로운 척을 다 하더니, 뒤에서는 똑같지."

알비노가 조소했다.

"...."

알리시아는 그에 대해서 무언가 생각이 많았는지, 입술을 굳게 닫은 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고 보니... 벨 블랙우드가 어떤 죄로 겨울성까지 오게 됐는지는 안 알아봤군.'

언제고 한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직접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제껏 벨 블랙우드가 어떤 인물인지는 나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큰 변화 없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알게 되겠지.'

지금 중요한 건 이번 임무로 가게 될 자유도시 베른하르크에 대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출발은 내일 아침일세. 다들 준비해 두도록."

에드릭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에드릭이 떠나고 난 막사 안의 분위기는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어수선했다.

"흠... 베른하르크라."

"왜, 아는 곳인가?"

콘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그곳에서 잠시 용병 일을 한 적이 있었지."

"그래? 마침 잘됐네."

"글쎄...."

콘란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베른하르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궁금하기는 했으나,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콘란은 입을 닫았다.

굳이 말하기 싫다는 이의 입을 억지로 열 정도로 궁금한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러려니 했다.

'그것보다는 베른하르크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는 게 더 중요하겠지.'

내가 알고 있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는 평화로운 도시였다.

비록 제국으로부터 내정간섭 수준을 넘어선 통치를 받고 있기는 했어도, 일단 표면적으로는 지방자치가 행해져 도시를 대표하는 시장과 의회가 제국과는 별개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모든 건 결국 멸망룡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베른하르크고, 지금의 베른하르크가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었다.

멸망룡의 등장 이후, 이 세계는 참으로 많은 게 바뀌어 버린 듯했으니까.

'그러면....'

정보를 얻기에 가장 만만한 건 역시나 익명 게시판이었다.

[익명 게시판에 접속합니다.]

[제목 검색 : 베른하르크]

베른하르크를 검색하기 무섭게 익명 게시판에서 적지 않은 정보들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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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슨 : 요즘 베른하르크 분위기 어수선하네.

-뉴들박77 : 베른하르크에 계신다는 분 지금 어디 계신가요? 저 도착했어요.

-익명12 : 혹시 툰드라의 정수 있으신 분? 고가에 사요. 베른하르크임.

-응애나애기뉴비 : 베른하르크에서 분쟁 지역 가실 용병 구함. 일급 10골, 전리품 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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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999 : 마수 소재 무한 매입 합니다. 베른하르크에서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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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공정의 세계에서도 그랬지만, 자유도시 베른하르크는 겨울성 크로이츠와는 달리 유동 인구가 매우 많은 도시다.

특히 지리로 인한 교통의 편리함을 비롯한 여러 이점들로 인해서 유저들이 많이 활동하는 장소이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분쟁 지역이라.... 베른하르크에 그런 게 있었나?'

내가 알기에 베른하르크 인근에 분쟁 지역이라 불릴 만한 지역은 없다.

앞서 말했듯이 본디 베른하르크는 무척이나 평화로운 도시였고, 그건 주변의 환경이 뒷받침되어 주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분쟁 지역이라 불릴 만한 곳이 생겼다는 건, 도시 내외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것은 베른하르크에서 제국에 지원을 요청한 배경 중 하나일 터였다.

아무리 베른하르크가 평화로운 도시라고 해도, 고작 변종이 출몰한 정도로 제국에까지 도움을 청한다는 건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몰라도, 도시 내외적으로 스스로 변종을 처리하기 어려운 사정에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거기다가 익명999라....'

베른하르크를 언급했던 게시물 중에는 익명999가 작성한 게시 글 또한 있었다.

아무래도 겨울성에 오기 전에 베른하르크에서 상업을 했던 모양.

아니, 어쩌면 아예 베른하르크가 익명999의 주요 활동지였을 수도 있다.

객과적으로 볼 때 베른하르크는 여러모로 상업 활동을 하기에 꽤 괜찮은 조건을 가진 도시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곧 베른하르크에도 페가수스 상단의 손이 뻗쳐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물론 라크나 대륙에서 페가수스 상단의 손길이 뻗쳐 있지 않은 곳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그럼에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컸다.

페가수스 상단 측에서 나에 대한 정보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일단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는 소리.

'여러모로 베른하르크에서는 웬만해서는 총기류 사용을 자중하는 게 좋겠지.'

페가수스 상단은 둘째 치고, 일단 유저들이 많이 활동하는 지역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들이 나를 적대할지 안 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 역시도 조심할 수 있으면 하는 게 좋았으니까.

이 세계에 있는 유저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의 목표가 있다.

바로, 승천석 파편.

물론 승천석 파편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모은 이들은 그게 어떤 위험성을 지녔는지 알기에 승천석 파편을 경계하는 이들 또한 있을 것이다.

당장 데니스와 벨레로폰부터가 승천석 파편이 지닌 힘을 경계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승천석 파편을 모으려는 이들이든 혹은 경계하는 이들이든, 공통적으로 승천석 파편을 모으려 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그 힘이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러한 배경들은 결국 유저들끼리 집단을 이루고 집단끼리 경쟁하고 맞서는 걸 유도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짜 놓은 판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그렇기에 이번 베른하르크 임무에서도 다른 유저와의 접촉은 최대한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혹시라도 그곳에 있던 유저 중 누군가 내 존재를 알아차릴 경우, 최악의 경우에는 내가 지닌 승천석 파편을 노릴 수도 있었으니까.

실제로 익명 게시판에 떠도는 뉴비 사냥꾼의 소문 같은 게 그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했다.

'베른하르크에 대해서 더 알아봐야겠어.'

나는 뜬눈으로 익명 게시판에 있는 베른하르크에 대한 정보를 계속해서 탐닉했다.

혹시라도 나에게 도움이 되거나, 위험할 수도 있는 정보를 찾기 위해서.

새벽이 깊었다.

* * *

다음 날 아침이 찾아오고, 제4 특무대원들이 막사 앞에 집합했다.

"다들 모였군. 그러면 출발하지. 거리가 거리인 만큼 서둘러야 할 것 같으니."

에드릭의 말마따나 겨울성 크로이츠에서 자유도시 베른하르크까지의 거리는 절대로 가깝지 않다.

아니, 애초에 겨울성에서 베른하르크까지 지원을 가는 게 이상할 정도로 멀다.

그렇기에 이동은 당연히 말이었다.

몇 차례의 승마 훈련으로 이제 제4 특무대원 중에서 말을 탈 줄 모르는 이는 없었을뿐더러, 마차보다는 이쪽이 더 즉각적인 행동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제 곧잘 타는군."

"낙마할 뻔한 게 몇 번인데 이 정도도 못 하겠습니까?"

"하하, 알고는 있군."

에드릭이 언제나처럼 껄껄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어딘가 무겁게 느껴지는 건 단지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정말로 변종 때문입니까?"

내가 던진 말과 함께 에드릭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글쎄... 그건 알 수 없지."

에드릭이 덧붙였다.

"하지만 나도 단순히 변종 하나 때문에 황실이 그런 명령을 내렸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 아무리 겨울성에게 일을 시키고 싶더라도 비효율적인 명령을 내리는 건 황실로서도 면이 살지 않거든."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비록 많은 걸 알아내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한 가지만은 알았다.

에드릭 역시도 이번 임무에 숨겨진 배경이나 의도가 있다고 여기고 있다.

곧, 에드릭 또한 이번 임무에 숨겨진 진의는 아직 알고 있지 못하다는 소리였다.

"뭔지는 몰라도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군요."

"동감일세."

그렇게 나와 에드릭이 떠드는 동안, 평소였다면 몇 마디 던졌을 콘란은 내내 침묵을 지킨 채로 말을 몰았다.

그 모습이 어째 조금 묘하게 느껴졌으나, 나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서두르지, 갈 길이 머니."

에드릭이 말을 몰았다.

그 말대로, 갈 길이 멀었다.

* * *

자유도시 베른하르크로 향하는 여정은 무척이나 길고, 지루했다.

그나마 한 가지 나은 점이 있다면, 물의 보옥이 없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눈먼 돌팔매질 걱정 없이 마음껏 익명 게시판을 살피면서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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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니는거좋아함 : 이번에 베른하르크 가 볼까 생각 중인데 요즘 어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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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베른하르크 한번 가 볼까 생각 중인데 어떰? 댓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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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97 : ㄴㄴ 오지 마라, 요즘 살벌해.

-헤슨 : 근데 요즘 안 살벌한 동네가 있었나?

└익명54 : ㄹㅇ ㅋㅋ

└돌아다니는거좋아함 : 흠... 그런가? ㅇㅋ 감사요.

-뉴들박77 : 혹시 도움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

익명 게시판을 보다 보니,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여정도 어느덧 빠르게 흘러갔다.

'흐음.'

온통 새하얗던 풍경 속에서 땅은 눈 덮인 얼음에서 녹아, 작은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나무들은 싹을 틔우고 푸른 잎새를 피웠고, 꽃들은 땅 위로 머리를 내밀어 화려한 꽃봉오리를 피우며 봄의 도래를 알렸다.

풀밭은 푸릇푸릇하게 무성하게 자라며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느끼게 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계절이 바뀌는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한 감상 속에서, 에드릭이 말했다.

"도착했네. 베른하르크네."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마침내 자유도시 베른하르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55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2)

지평선 너머에서 베른하르크의 모습이 보이기에 앞서서, 가장 먼저 보인 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숲과 도시의 양옆에 쌍둥이처럼 치솟아 있는 언덕이었다.

"베른하르크의 쌍둥이 언덕이네. 자유도시의 명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에드릭이 마치 관광 가이드처럼 그렇게 말하면서 껄껄 웃었다.

"명물이라...."

쌍둥이 언덕을 바라보며 콘란이 씁쓸해한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덩치, 문제라도 있나?"

알비노가 묻자, 콘란이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문제가 있으면 미리 말해라. 괜히 꽁꽁 숨겼다가 중요한 순간에 발목이 붙잡히는 건 질색이니."

"그러지."

"평소답지 않군. 뭐, 좋아. 나한테 방해만 안 된다면야 상관없어."

알비노의 모습을 바라보던 알리시아가 툭 던졌다.

"걱정하고 있네요."

"그런 것 같군."

나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거기, 시끄러워."

알비노가 우리를 바라보며 으르렁대며 말하자, 알리시아가 다시 툭 던졌다.

"걸렸네요."

"걸렸군."

이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자자, 사설은 그쯤 하고 계속 가지. 설마 오늘도 밖에서 야영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야영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

특히 이건 겨울성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생긴 문제인데, 날씨가 따뜻해지니 겨울성 인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기 같은 벌레들이 밤마다 아주 나를 귀찮게 했다.

하이마의 펜던트로 인해서 출혈 내성이 약한 나로서는 특히 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물의 보옥과 업화의 송곳니로 야영하는 내내 나를 보호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거라도 없었다면 진작 모기들에게 온몸이 뜯겨서 과다 출혈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겨울성에 있는 제4 특무대 막사의 삐걱거리는 침상이 그리워질 지경이었겠는가.

"이곳만 넘어가면 오늘은 밤은 푹신한 침대에서 잘 수 있을 거네. 다들 힘내게!"

"대장님은 괜찮으십니까?"

"뭘 말인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함께 고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릭은 마치 철인(鐵人)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뭐... 저 정도 수준의 강자라면 체력 역시도 보통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설 테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보름 넘게 강행군을 이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건 그저 에드릭 본인이 그런 성격이기 때문일 테고.

어쨌거나 그렇게 자유도시 베른하르크에 점점 다가서자, 숲 한가운데를 관통하듯이 나 있는 강줄기가 보였다.

아마 이 강줄기가 자유도시 베른하르크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수원지겠지.

마침내 베른하르크의 성문 앞에 다가서자, 경비가 우리를 막아섰다.

"통행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여깄네."

에드릭이 내민 통행증을 받아 든 경비가 습관적으로 통행증을 대충 살피다가, 이윽고 눈을 크게 떴다.

"겨, 겨울성 크로이츠에서 오신 분들이셨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의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이미 우리가 온다는 언질을 받았던 모양.

"의원님이라면 어떤 분을 말하는 건가?"

"아아! 개럿 메이슨 의원님입니다. 베른하르크의 농지들을 관리하고 계신 분입니다."

"개럿 메이슨 의원이라.... 들어 본 것도 같군. 가지."

그렇게 경비를 따라서 베른하르크의 성문으로 들어서자,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안의 풍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노이스에서 막 들어온 싱싱한 사과 있습니다! 한번 맛보고 가세요!

-골라! 골라!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잡화점입니다!

-제도의 명장, 카이란이 만든 무기들입니다! 한번 보고 가십쇼!

조금 황량했던 겨울성 내부의 풍경과는 달리 베른하르크는 들어서기 무섭게 활달한 시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페가수스 상단이 머물 때의 겨울성도 이 정도로 활발하지는 못했는데."

알비노의 말에 콘란이 코웃음 쳤다.

"흥, 당연한 소리를."

알비노는 그러한 콘란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무어라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말을 말지."

"할 말이 없나 보군."

"허."

알비노와 콘란이 언제나처럼 투닥거리는 동안, 경비의 안내에 따라서 시장을 지난 우리는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베른하르크 특유의 제국 양식과 동쪽의 양식이 뒤섞인 건물이었다.

똑똑-

"경비대입니다. 겨울성에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세요."

경비가 조심스레 문을 열자, 안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몇 번인가 들리더니, 서류 더미에서 한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에드릭이 웃으면서 말했다.

"실례가 됐다면 나중에 다시 오는 게 낫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의 대장답게 돌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서류 더미에 있던 사내가 간신히 서류 더미에서 빠져나온 뒤, 에드릭 앞에 섰다.

"겨울성에서 오셨다고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개럿 메이슨입니다. 부족하지만 이곳 베른하르크 의회에서 의원직을 맡고 있습니다."

"겨울성 크로이츠의 제4 특무대장 에드릭입니다."

"아아... 그 먼 겨울성에서 여기까지 오시다니...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오는 동안 경치 구경도 하고 좋더군요. 날씨도 따스하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무려 베른하르크의 의원쯤 되는 이가 일개 특무대장에 불과한 에드릭에게 이토록 저자세로 나온다는 것부터가, 현재 베른하르크의 상황이 어떤지 대략적으로 짐작하게 만들었다.

"머물 장소는 있으십니까? 아니, 당연히 제가 구해 드려야지요. 먼저 여독부터 푸시겠습니까?"

"그것도 좋지만, 일단은 이번 일에 대한 자세한 경위부터 듣고 싶군요. 여독을 푸는 건 그 이후에도 할 수 있으니까요."

"아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쪽에 앉으십시오."

개럿 메이슨과 에드릭이 탁상에 마주 앉았다.

"아, 다른 분들께서도 앉아서 같이 들어 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제 부하들이 워낙 강인한 이들인 터라, 그 정도 이야기는 서서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앉을 건데요."

"이봐, 여긴 내 자리야."

"비켜요."

"...."

에드릭이 한번 우리를 쏘아보았으나, 다리가 아파서 터질 것 같은데 어쩌겠는가.

모두가 에드릭처럼 철인은 아니었고,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흠흠, 그러면 계속해 주십시오."

"예. 그러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 뮐헨 곡창지대에서 마수들이 출몰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마수들을 퇴치해 주셨으면 합니다."

"뮐헨 곡창지대라면... 베른하르크 동쪽에 있는 그곳 말입니까?"

"예, 맞습니다. 현재 제국으로 수출되는 곡식의 삼 할가량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지요. 이는 제국의 식량 안보와도 직결된 중대한 문제입니다."

개럿 메이슨이 굳이 제국의 식량 안보를 들먹이는 이유야 뻔했으나,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거나 베른하르크의 문제를 해결하러 온 것이 우리의 임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마수 중에 변종도 있었던 거로군요."

에드릭의 말에 개럿 메이슨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변종...? 아! 예. 맞습니다. 그곳에는 변종도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에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전부입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뮐헨 곡창지대에 나타난 마수들을 토벌하는 것. 그게 저희가 할 일의 전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저희가 머물 숙소는 어디입니까?"

"아! 이쪽으로 오십시오."

개럿 메이슨의 안내에 따라서 우리는 베른하르크 내에서도 꽤 큰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마 이름이 나그네와 함께 춤을... 뭐야, 이거.

"이곳에 머무르시면 됩니다. 아, 이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은 베른하르크 의회에서 부담하니 비용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호의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 베른하르크를 위해서 와 주신 건데, 이 정도는 당연한 겁니다. 그러면 쉬십시오."

개럿 메이슨이 숙소를 나선 후, 가만히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에드릭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언가 숨기고 있군."

"그렇겠죠."

"자네도 눈치챘나?"

"누가 봐도 눈치챘을 겁니다."

개럿 메이슨의 그 어색한 연기를 보았다면 더욱더 말이다.

"그것도 그렇군."

에드릭이 언제나처럼 껄껄 웃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말인가?"

"개럿 메이슨 의원이 무언가 숨기고 있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대로 순순히 뮐헨 곡창지대로 갈 생각입니까?"

"그래야겠지."

"어째서입니까?"

"그게 베른하르크의 요청이었고, 그게 우리의 임무니까. 그 외의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닐세."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얼핏 보면 참군인 같은 대답.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에드릭이 겉으로는 저렇게 말해도, 충직한 군인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는 걸.

아니, 오히려....

'두고 보면 알겠지.'

에드릭이 어떤 생각인지.

또,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오늘은 이만들 쉬게, 내일 바로 움직이게 될 테니."

그 말처럼 우리는 모두 숙소로 올라갔다.

여행자의 기분으로 놀러 다니기에는 고된 여정으로 인해서 우리 모두 지쳤기 때문이었다.

콘란이 목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드디어 씻겠군. 몸이 근질거려."

"평소에도 안 씻지 않았나?"

"기어이 오늘 장례를 치르고 싶은 모양이군. 좋아, 관은 어떤 나무로 짜 줄까?"

콘란과 알비노가 언제나처럼 으르렁거리는 동안, 알리시아가 퀭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잘 자요."

"그래."

마음 같아서는 뮐헨 곡창지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내 육체도 이제는 한계였다.

만약 물의 보옥이나 하이마의 펜던트 중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여정 도중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당장 이런저런 것들로 육체를 무장하고 있기는 했어도, 진짜 내 육체는 여전히 허약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이걸 에드릭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지.... 어이가 없군.'

그 말마따나 그나마 에드릭의 체력 훈련이 아니었더라면 이것마저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숙소 침대에 들어선 나는 간이 욕조에 몸을 뉘었다.

과연 베른하르크의 의원이 직접 마련한 고급 여관답게 미리 물이 덥혀 있었던 덕분이었다.

"후...."

오랜만에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니 그간의 피로가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목욕을 마친 나는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어떻게 버티면서 익명 게시판이라도 한번 켜 보려 했으나, 더 이상은 몸이 한계였다.

조금씩, 조금씩.

수마가 나를 반겼다.

.

.

.

쿵─!

쿵, 쿵쿵!

갑작스럽게 들린 소리와 함께 눈을 뜬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맡에 항상 두고 자는 콜트 패리슨을 다잡았다.

그 순간.

콰아앙!!!──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지면서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내가 반사적으로 불청객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 달빛 속에서 불청객의 모습이 드러났다.

"잠깐, 나일세."

"...대장님?"

불청객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에드릭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 밤중에."

"마수가 나타났네."

"마수요? 어디예요?"

"뮐헨 곡창지대일세."

"그곳이라면...."

에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우리의 이번 임지일세."

56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3)

곧이어서 나머지 제4 특무대원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에드릭에 의해서 강제로 기상당했다.

"으으... 마수 새끼들은 잠도 없나? 이 밤중에 지랄이야!"

"...동감이다."

"저도요."

콘란과 알비노가 끔뻑이는 눈으로 알리시아를 돌아보았다.

"뭐요."

알리시아가 퀭한 눈으로 노려보자, 콘란과 알비노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니, 아무것도."

"역시 사람은 환경이 만드는군."

나 또한 잠시 귀를 의심했을 정도였으니, 그러한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지금 알리시아의 태도는 뭐라고 해야 할까... 평소와 많이 달랐으니 말이다.

역시 사람이 잠이 부족하면 여러모로 문제가 생긴다니까.

'그건 그렇고....'

에드릭이 직접 피곤에 절어 있는 우리를 깨웠다는 건, 지금 상황이 꽤 다급하다는 뜻이었다.

"어느 정도의 규모입니까?"

"듣기로는 최소 백 마리 이상이라고 하더군."

"그 정도 숫자라면 저희만으로는 힘들 텐데요."

다수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총기들이 있다면 모를까, 지금 나는 총기류를 사용할 생각이 없었으니 말이다.

"베른하르크에서 고용한 용병들이 함께할 걸세. 뭐... 실력이야 보장하기 어렵겠지만, 숫자를 채워 주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크게 덜어질 테지."

용병들이라....

그러고 보니, 익명 게시판에서 베른하르크에서 용병을 구한다는 게시 글을 본 것 같았다.

'이번 용병들에 유저들이 섞여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은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어차피 이번 여정 동안은 총기류를 사용할 생각이 없었지만,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서두르지."

"예."

이미 여관 입구에서는 개럿 메이슨이 말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끌고 온 말들이 강행군 이후에 탈진해 버렸기에 개럿 메이슨이 신경을 써 준 듯했다.

"오셨군요. 이쪽입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앞장을 서는 개럿 메이슨의 모습에 에드릭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직접 가십니까?"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개럿 메이슨의 얼굴은 사뭇 결연해 보였다.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대장님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이상한 거지요."

개럿 메이슨이 씁쓸하게 웃었다.

"많은 이가 권리가 의무에서 비롯됨을 잊어버리고는 하니까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에드릭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서두르시죠.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군요."

"아닙니다. 베른하르크에 의원님 같은 분이 계시다니, 베른하르크의 미래도 밝은 것 같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것조차도 못 하는 위정자들이 많으니까요."

개럿 메이슨과 에드릭이 서로를 마주 보면서 옅게 웃었다. 어딘가 조금 씁쓸함이 감도는 미소였다.

본격적으로 제4 특무대가 말에 오른 뒤, 개럿 메이슨이 앞장섰다.

"현재 용병들 역시도 나서고 있기는 하지만, 뮐헨 곡창지대가 워낙 광활한 터라 용병들만으로는 마수들의 습격에 대응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 말마따나 뮐헨 곡창지대는 개럿 메이슨이 제국의 식량 안보를 언급할 정도로 광활한 평야다.

당연히 지키는 싸움을 한다면 불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아무래도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군요."

에드릭의 말에 개럿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용병들이 곡창지대를 수비하는 동안, 특무대분들께서는 마수들을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를 찾아 토벌해 주십시오."

"그 넓은 장소에서 우두머리라.... 찾는 게 쉽지는 않겠군요."

"예. 그래서 더욱더 마수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는 특무대분들이 필요한 겁니다. 용병들만으로는 마수들을 상대하기만도 벅차니까요."

흐음....

솔직히 말해서 개럿 메이슨의 말이 전부 납득이 되는 건 아니었다.

일전에 익명 게시판에서 보았던 바에 따르면 용병 중에는 유저들 역시도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유저가 있는데도 마수들의 우두머리를 처치하지 못해서 제국에까지 도움을 요청한다라....'

물론 유저들 사이에서도 수준 차이는 나기 마련이지만, 평균적으로 유저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원주민에 비해서 상당수 앞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직도 마수들을 어쩌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다?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뭐... 정말로 무언가 있다면 이번에 자연스레 알게 될 테지.'

물론 당장 이 자리에서 그 의문을 해소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은 할 일을 할 때였다.

말을 몰고서 단번에 베른하르크의 동쪽 성문을 지나자, 곧이어서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의 모습이 드러났다.

뮐헨 곡창지대였다.

-이 개 새끼가!

-막아! 어떻게든 막아!

-캬아아아악!!

곡창지대에 들어서기 무섭게 사방에서 보이는 요란한 불빛과 일렁거리는 수십 개의 그림자들 그리고 고함과 괴성이 한창 뮐헨 곡창지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투가 얼마나 치열한지 말해 주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용병들에게 가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상황을 정리할 사람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개럿 메이슨의 말에 에드릭이 답했다.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래 보여도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습니다."

단지 말뿐만이 아니라는 듯이 개럿 메이슨의 말안장에는 창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의원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이 습격을 주도하는 우두머리 마수가 어디에 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직접 고개를 숙여 부탁한 개럿 메이슨은 곧 용병들과 마수들이 전투를 벌이는 곳으로 내달려 나갔다.

잠자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드릭이 말고삐를 쥐며 말했다.

"그러면 우리도 움직이지."

"예."

제4 특무대가 어둠 속에서 뮐헨 곡창지대를 빠르게 내달렸다.

목표는 이 습격을 주도하고 있는 우두머리 마수를 찾기 위함이지만, 뮐헨 곡창지대의 광활함을 생각한다면 쉽지 않은 목표였다.

'애초에 그런 우두머리 마수가 있을지도 의문이고.'

여러모로 이번 임무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어둠이 내리깔린 평야를 내달리다 보니, 멀찍이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그림자 몇 개 보였다.

마수 무리였다.

"정지!"

에드릭의 외침과 함께 우리는 다급히 말을 세웠다.

"워, 워워!"

"멈춰!"

간신히 말을 멈춰 세운 뒤, 우리는 에드릭의 시선 너머에 있는 그림자들을 바라보았다.

-크르르르....

-컹! 커헝!

에드릭이 어둠 속에서 일렁거리는 그림자를 마주 보며 말했다.

"전원 전투 준비."

이견은 없었다.

나를 비롯한 제4 특무대원들은 에드릭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 말에서 뛰어내렸다.

기본적으로 기마병이 보병보다 우세한 건 사실이지만, 마수와의 전투는 자칫 말이 상할 수도 있을뿐더러 웬만한 군마가 아니고서야 마수들을 마주하고서는 제대로 싸울 수 없다.

마수들은 본질적으로 생태계의 포식자들이었고, 웬만한 말들은 그런 포식자를 마주하고서 패닉에 빠질 테니까.

그렇기에 대(對)마수전에서는 어지간한 명마가 아니고서야 말에서 내리는 게 일반적인 전술이었다.

하물며 검증된 말도 아닌 개럿 메이슨으로부터 빌린 말을 타고 있는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온다!"

콘란의 외침과 함께 어둠 속의 마수 무리가 우리를 향해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히이잉!

그에 말들이 난리를 치면서 단번에 등을 돌려 달아나는 걸 보니, 말을 내리는 선택은 옳았던 모양이었다.

-컹! 컹컹!

-크르르르!!!

우리 또한 각자의 무기를 쥔 채로 곧이어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어둠의 불청객들을 맞이했다.

[Lv.1]

[마두견]

Lv.1 마두견.

내가 이 세계에 왔을 때 처음으로 마주했던 마수들이었다.

스르릉─!

스산한 쇳소리와 함께 가장 먼저 달려들었던 마두견의 목이 잘려 나갔다.

에드릭의 솜씨였다.

"이 개 새끼들이!"

그에 맞춰서 콘란과 알비노가 튀어 나갔고, 알리시아는 내 곁에 선 채로 측면에서 날아드는 마두견을 베었다.

"강아지들, 다 죽어."

알리시아의 검이 오늘따라 더 서슬 퍼렇게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나 또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싸움에서 업화의 송곳니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곡창지대에서 그런 무지막지한 짓거리를 했다가는 벼룩 잡다가 초가삼간 다 태워 먹는 일이 될 테니까.

제아무리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 한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당장 교수형을 당할 게 분명했다.

총기는 물론이고 업화의 송곳니까지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소리.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지닌 무기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물의 보옥'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물의 보옥'이 '발천적랑화(潑?的浪花)'를 전개합니다.]

물의 보옥에서 뿜어진 물보라가 몰려드는 마두견들을 향해 흩뿌려졌다.

상대의 공격을 막는 것도, 그렇다고 해서 강력한 물의 압력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물보라를 흩뿌릴 뿐인 권능.

그렇기에 단지 이것만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할 수 있었으나, 나에게는 이것을 최강의 광역기로 바꿀 수단이 있었다.

츠츳, 츠츠츳─!

내 목에 있는 목걸이에서 번뜩거리는 전격.

그와 함께 데니스로부터 얻은 낙스의 유산에서 권능이 발하기 시작했다.

['낙스의 유산─전(電)'이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권능을 발동합니다.]

['낙스의 유산─전(電)'이 '섬전(閃電)'을 전개합니다.]

파직, 파지직──!

물에 젖은 마두견들을 타고서 뻗어 나간 전격이 단번에 일대를 휩쓸었다.

[켕, 케헤헹!]

[끼잉! 낑....]

1레벨 마수조차 죽이지 못할 정도로 전격의 위력은 약했지만, 적어도 마두견들을 일시적으로 마비 상태로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끄륵, 끄그극...!"

...뭐, 그 와중에 눈먼 전격에 휩쓸린 게 비단 마수뿐만은 아닌 모양이었지만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으리라.

콘란이야 보이는 그대로 워낙 튼튼한 녀석이기도 했고.

"역시 훌륭하군!"

에드릭이 사나운 웃음을 터트리면서 발작을 일으키는 마두견들의 급소를 깔끔하게 찔러 나갔다.

알비노와 알리시아 역시도 그에 질세라 움직였고, 나 또한 업화의 송곳니가 아닌 다른 검을 쥔 채로 마두견들의 숨통을 끊었다.

푹!

푸푸푹!

[끼이잉....]

마두견들의 단말마가 몇 번 들려오는 것을 끝으로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만 해도 죽음의 사신과도 같던 마수가, 이제는 한낱 동네 강아지 수준으로 전락한 것이다.

"후우...."

수십 마리의 마수 무리를 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행 중에는 땀 한 방울 흘리는 이가 없었다.

그만큼 쉬운 전투, 아니 전투라고 부르기도 뭣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다들 고생했네. 벨 자네 덕분에 쉽게 처리했군."

"어차피 마두견 정도의 마수는 쉽게 처리했을 겁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쉽게 처리할 수 있었던 건 자네 덕분이지."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그러는 사이, 알비노가 슬쩍 내 옆에 와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의 그것, 마법이 아니더군. 기물의 힘인가?"

"말해 줘야 하나?"

"흥, 그 정도는 척 보면 안다. 어디서 그런 걸 구했는지는 몰라도 운도 좋군."

그게 행운보다는 불운의 결과로 얻어진 성과라면 믿을까.

뭐, 알비노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별로 상관없지만.

"으으... 뒈질 뻔했네."

조금 전까지 게거품을 물고서 쓰러졌던 콘란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더 누워 있지 그래? 나자빠져 있는 꼴이 아주 잘 어울리는데."

"...입 닥쳐."

"아이고, 무서워라."

알비노가 이죽거릴 때마다 콘란의 이마에 내 천(川) 자가 그려졌다.

콘란이 살기 흉흉한 시선을 나에게로 향했다.

"이봐! 그런 걸 쓸 거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맞을 줄은 몰랐다."

"그걸 어떻게 피해!"

"다른 사람들은 다 피하던데."

"그건...."

콘란의 눈동자가 멀쩡한 모습으로 있는 에드릭을 비롯한 알비노와 알리시아를 돌아보았다.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

콘란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격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다음부터는 조심해라."

"그러지."

"끄응."

뭐라고 해야 할까... 참 쉬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저기."

"음?"

"아."

우리가 잠시 딴청을 부리는 사이, 주변을 살피고 있던 알리시아가 지평선을 가리켰다.

주황빛으로 서서히 물들어 가는 세상.

길고 길었던 새벽이 물러가고, 어느덧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57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4)

뮐헨 곡창지대의 광활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결국 우리는 해가 중천에 뜨고도 우두머리 마수를 찾는 일에 실패했다.

정확히는, 해가 떠오른 뒤부터 마수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마치 뮐헨 곡창지대를 습격했던 마수들이 일제히 물러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오늘은 이만 복귀하지."

한나절 내내 허탕을 치고서야 에드릭은 후퇴를 명령했다.

드디어 복귀였다.

"그런데... 걸어서 돌아갑니까?"

내내 걷고 뛰느라 진이 빠져 있는 콘란의 질문에 에드릭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다른 수가 있나?"

"그... 없습죠. 예."

애석하게도 우리가 뮐헨 곡창지대까지 타고 왔던 말들은 아까 마두견 무리와의 전투 때 모두 도망쳤다.

만약 원래 우리가 길들인 말이었다면 다시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빌린 말에게 그런 것까지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아무리 에드릭이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정말로 하늘을 나는 재주는 없을 테니까.

"돌아가면 푹 쉴 수 있을 거네."

"...돌아간다면 말이죠."

"하하, 우는소리 하기는. 나는 자네들을 그렇게 약하게 단련하지 않았다네. 알고 있지 않나?"

"그것도... 그렇죠. 예."

콘란이 마지못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약 지금 부정을 했다가는 에드릭이 말하는 단련의 강도가 이제까지와는 달라질 테니, 어쩔 수 없는 대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나마 선착순 복귀를 선언하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일 정도였다.

"그 덩치로 징징거리기는. 걷기나 해. 아, 누워 있다 보니 여기가 꽤 아늑한가 보지? 그러면 계속 누워 있든가."

"입 닥쳐."

"한번 닥치게 해 보지 그래?"

"오냐,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콘란과 알비노가 언제나처럼 투닥거렸다.

말로 한참을 이동했던 거리를 도보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뜀박질은 우리가 늘 해 왔던 일이기도 했다.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새벽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뮐헨 곡창지대의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곳곳에 널려 있는 용병들과 마수들의 전투 흔적 역시도.

'이 정도 규모의 습격이 있었는데, 날이 밝자마자 모두 깔끔하게 돌아갔다라....'

예상했던 대로 뮐헨 곡창지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마수들의 대대적인 습격은 단순한 습격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 정도 규모의 마수의 습격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건 겨울성 외에는 거의 없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뭘 말입니까?"

"개럿 메이슨 의원의 말대로 이번 습격을 주도한 우두머리 마수가 있다고 생각하나?"

에드릭 또한 내가 품고 있는 의문에 대해서 정확히 짚고 있었다.

이번 임무는 무언가 이상하다.

당장 우리가 상대했던 마두견 무리에서도 마두견을 이끄는 우두머리의 존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즉, 이끄는 우두머리 없이 저들끼리 뮐헨 곡창지대에 왔다는 건데, 다른 마수들 또한 함께 움직였다는 걸 생각한다면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생태계의 마수들의 움직임이 아니야.'

이런 경우에는 크게 둘 중 하나다.

근처에 저 마수들의 움직임을 부자연스럽게 만들 정도로 강하고 두려운 마수가 똬리를 틀었거나.

혹은 저 마수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다른 모종의 이유가 존재하거나.

전자보다는 후자 쪽이 가능성이 더 높았으나, 아직 확신을 할 증거가 부족했다.

"일단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자네치고는 신중하군."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어서요."

"흐음... 알겠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알게 되면 알려 주게."

에드릭은 언제나처럼 나를 신뢰한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신뢰의 근원지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서도 나쁠 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서두르지. 오늘 안에는 돌아가야 침대에서 잘 것 아닌가?"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돌아가는 길은 확실히 쉽지 않았다.

그나마 물의 보옥을 비롯한 마기로 인해서 이전에 비해 확연히 내 육체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점이 다행이면 다행이었다.

"으으...."

"도대체 이 개 같은 평야는 언제 끝나는 거야!"

실제로 콘란과 알비노가 시체처럼 비척대면서 악을 내질렀다.

"괜찮아요?"

제4 특무대에서 가장 육체적인 능력이 강했던 알리시아조차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면서 힘겨워하고 있었건만, 나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물의 보옥과 하이마의 펜던트 그리고 얼마 전에 얻게 된 마기가 내 육체에 비정상적인 활력과 체력을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괜찮다."

"원래 약골이었잖아요."

"그런 적 없다."

"매일 제일 먼저 엎어지던데."

"...."

어째 알리시아의 성격이 나날이 갈수록 이상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원래 이런 환경에 있으면 사람이 변할 수밖에 없긴 했다.

"조금만 더 힘내게! 다 도착했으니."

에드릭의 말처럼, 어느덧 평야 너머에서 자유도시 베른하르크의 동쪽 성문이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길고 길었던 첫 번째 날의 여정이 끝을 보였다.

* * *

베른하르크에 돌아온 우리는 개럿 메이슨을 만나지 않고 곧장 숙소로 돌아갔다.

겨울성에서 베른하르크까지 오는 강행군 이후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이어서 마라톤까지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에드릭 또한 그러한 사정을 고려했다는 듯이, 우리가 다음 날 일어나서 집합한 시간은 해가 중천에 뜬 이후였다.

"다들 잘들 쉬었나?"

"...덜 쉰 것 같습니다만."

콘란이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내려온 수척한 얼굴로 힘없는 항변을 했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에드릭에게 먹힐 리가 만무했다.

"하하, 말하는 걸 보니 충분히 잘들 쉰 것 같군."

"못 쉬었다니까요."

"그러면 자네는 걸어가겠나? 지금 보니 말을 탈 기운도 없어 보이는군."

"생각해 보니 잘 쉰 것 같습니다."

"그럴 줄 알았네."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그러면 출발하지."

이견은 없었다.

그런 말을 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우리는 각자 말안장 옆에 말뚝 하나씩을 챙겼다.

마수와의 전투 시에 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땅에 박아 둘 말뚝이었다.

뮐헨 곡창지대 같은 드넓은 평야에서 말을 잃어버리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뼈저리게 느꼈기에 생긴 지혜라고 볼 수 있었다.

"잘 쉬셨어요?"

"글쎄."

알리시아의 물음에 나는 그렇게 답했다.

지난밤, 나는 한계에 다다른 몸을 누이기 전에 익명 게시판을 뒤졌다.

뮐헨 곡창지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정상적인 마수들의 습격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한 덕분에 익명 게시판을 뒤적거리던 나는 비로소 한 가지 게시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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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9545 : 근데 베른하르크 분쟁 지역에 있는 마수들은 계속 어디서 나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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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돈 벌고 좋은데,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네. 슬슬 지겨운데, 이 마수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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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게시 글은 내가 느끼고 있었던 의문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뮐헨 곡창지대에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는 마수들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그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고, 그에 대한 답은 의외로 댓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마법사114 : 그거 안 끝남 ㅇㅇ

└익명9545 : ? 왜요?

└마법사114 : 거기가 왜 분쟁 지역인지 생각해보셈.

└익명9545 : 진짜 몰라서 그런데 그냥 말해주시면 안 댐?

└마법사114 : ...뉴비인가 보네. 거기 베른하르크랑 하노버 분쟁 지역이라서 하노버 측에서 마수 계속 보내는 거 모르는 사람 없음 ㅇㅇ 그러니까 괜히 물리지 말고 적당히 한탕하고 빠지셈.

└익명9545 : 헐... ㄹㅇ?

마법사114의 댓글은 어찌 보면 꽤 충격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마법사114가 단 댓글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실제로 이 세계에는 마수를 인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무수한 방법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노버라....'

하노버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의 동쪽, 뮐헨 곡창지대의 광활한 평야를 국경으로 둔 군사도시다.

적어도 내가 알기에 이제껏 베른하르크와 하노버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멸망룡의 등장은 그러한 국제 관계 역시도 뒤엎을 만한 파괴력이 있었기에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실제로 정치를 떠나서 산술적으로만 봐도 하노버에서 뮐헨 곡창지대를 탐내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노버는 역사적으로 늘 국경의 완충지대를 원해 왔고, 거기에 더해서 뮐헨 곡창지대는 단순히 완충지대를 넘어서 엄청난 식량 생산이 가능한 매우 큰 가치가 있는 영토였다.

'어쨌든... 오늘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마법사114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그걸 확인하러 갈 때다.

* * *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바뀐다.

아무래도 바로 어제 말들이 마수들을 앞두고서 도망친 전례가 있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개럿 메이슨 의원 측에서 꽤 좋은 말을 빌려준 듯했다.

"그러고 보니 개럿 메이슨 의원이 면목이 없다고 하더군. 말이 그렇게 도망쳐 버릴 줄은 몰랐다고 말이야."

에드릭의 말에 콘란이 불평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와서 고개를 조아려도 모자랄 판 아닙니까?"

"불가피한 일이었으니 너무 그러지 말게. 오늘은 준비도 철저히 해 오지 않았는가?"

에드릭이 말안장에 걸려 있는 말뚝을 툭툭 치며 껄껄 웃었다.

그렇게 뮐헨 곡창지대를 내달리다 보니, 저편에서 한 무리의 마수 무리가 보였다.

"전원 전투 준비."

한번 말을 잃어버린 전적이 있었기에 에드릭은 조금 더 빠르게 전투 준비를 명령했다.

혹시라도 말뚝에 고정되어서 도망치지 못하게 된 말이 마수와의 전투에 휩쓸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4 특무대원들이 곧장 말에서 내린 뒤, 안장에 있는 말뚝을 바닥에 박고서 말을 고정했다.

"얌전히 있어."

콘란은 말을 향해서 경고하듯이 말하고는 주 무장인 도끼를 쥔 채로 마수 무리를 마주했다.

[Lv.2]

[그리드 캣]

-끼긱, 끼기기깃!

-키이이!

거대 고양이의 모습을 한 마수, 그리드 캣과의 전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2레벨 마수에 불과했던 데다가, 상정했던 것처럼 우두머리 마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에드릭이 있는 우리가 상대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별것도 아니군!"

"고작 이 정도 마수를 잡고 신 내기는.... 뭐, 그게 너한테 딱 어울리기는 한다만."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지?"

"얼마든지."

콘란과 알비노가 언제나처럼 서로 으르렁대던 그 순간.

쿵!

쿠우웅──!!

심상치 않은 진동이 울려 퍼지면서 작은 지진이 일어난다.

"...뭐야?"

그에 투닥거리고 있던 콘란과 알비노는 물론, 에드릭과 알리시아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조용히."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에드릭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저쪽."

알리시아의 손끝에 있는 지평선 너머에서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은 물결 같기도 했고, 혹은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재해 같기도 했다.

"저건...."

"망할... 저게 뭐야."

콘란과 알비노가 싸우는 것도 잠시 잊은 채로 몰려드는 검은 물결을 바라보았다.

'...웨이브(Wave).'

겨울성에서나 볼 법한 대규모 마수들의 공세가 베른하르크를 향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

58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5)

쿠구구구구...!

진동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에 맞춰서 말들이 두려움에 발광을 하기 시작하며 이리저리 날뛰었다.

-히이이잉!

-푸르르! 푸르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걸 파괴할 살아 있는 재해나 다름없었으니.

'역시 그렇게 된 건가.'

이제야 확실해졌다.

뮐헨 곡창지대에 나타나고 있는 마수들의 습격은 우두머리 마수 따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이 정도 규모의 습격을 이끌 수 있는 우두머리 마수는 마경에서조차도 몇 없었다.

하물며 그 습격이 웨이브까지 일어날 정도라면,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었다.

"대장님."

"뭔가 알아냈나?"

"예. 아무래도 개럿 메이슨 의원을 만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임무에 대해서 재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 알겠네. 서둘러서 복귀하지. 자칫 지체했다가는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으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에드릭은 베른하르크로의 복귀를 결정했다.

이런 평지에서 웨이브에 맞선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저건 일개 개인이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재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에드릭이 강하다고 한들 결국에는 인간이었다.

"그러면 서두르지."

우리는 점차 가까워지는 진동을 뒤로한 채로 베른하르크를 향해서 말을 몰았다.

-히이이잉!!!

다가오는 재해를 느낀 건 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는지, 말들은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내달렸다.

고오오오오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무수한 시선들로 인해서 뒤통수가 따가울 지경이었으나, 애써 무시하면서 말을 몰았다.

"이봐."

그렇게 말을 달리고 있을 때, 어느새 내 옆에 온 콘란이 말했다.

"뭐지?"

"저 뒤에 있는 것들... 설마 베른하르크까지 따라오는 건가?"

"그렇겠지. 애초에 우리를 따라오는 게 아니라 베른하르크로 향하고 있는 거니까."

"...망할."

콘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떻게 할 방법은 없나?"

"일단은 베른하르크로 돌아가는 게 최우선이다. 그 외의 방법은 없어. 저건 개인이 대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 베른하르크에 돌아가서 개럿 메이슨 의원을 만나는 게 순서다.

그에게 이 모든 전말을 전해 들어야 그에 대한 대응 역시도 적절하게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남겠다."

"그게 무슨 소리지?"

"누군가는 베른하르크가 방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하지 않나? 그걸 내가 하지."

"내가 하는 말 못 들었나? 저건 개인이 대항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최소 군대가 나서야 해. 네가 막는다고 설쳐 봤자 단 일 초도 지연시키지 못할 거다."

"그러면 어쩌라고!"

콘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체 무엇이 콘란을 이토록 흥분시키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필시 콘란이 과거에 베른하르크에서 용병 활동을 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방법은 있다."

"...조금 전까지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나랑 장난하나?"

콘란이 낮게 으르렁댔다.

원래도 야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짐승 같았다.

"그 방법이 베른하르크로 돌아가는 거다. 돌아가서 베른하르크에 이 사실을 알리고, 베른하르크가 대비하는 동안 이 사태를 끝낼 방법을 찾는 거다. 알겠나?"

"만약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 있나?"

콘란이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없지."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방법은 찾을 수 있을 테니."

"믿어도 되는 건가?"

"그래."

"...알았다."

콘란이 간신히 진정되고, 잠자코 이를 지켜보고 있던 에드릭이 슬쩍 내 옆으로 말을 몰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자네에게 하게 만들었군. 면목이 없어."

"진작 좀 하시지 그랬습니까."

"그런 것치고는 잘하던데."

"다음부터는 안 할 겁니다."

"어련하겠나? 하하."

에드릭이 껄껄 웃었다.

그러나 웃음 뒤에 흘러나온 말은 심상치 않았다.

"흠... 최악의 경우 베른하르크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겠어."

"진심이십니까?"

"어쩔 수 없지 않나? 저 군세는 베른하르크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걸세. 우리가 더해진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테고. 자네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나?"

에드릭이 덧붙였다.

"우리가 베른하르크를 도우러 온 입장이기는 하나, 그걸 위해서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네. 저 정도 규모의 마수라면 황실에서도 납득할 수밖에 없겠지."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도 우리의 뒤에서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재앙의 규모는 베른하르크 정도의 도시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워 보일 정도였으니까.

하물며 제대로 된 방어 준비도 되지 않은 채로 저런 규모의 웨이브를 맞이하게 된다면 말할 것도 없는 수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베른하르크 정도 되는 규모의 도시를 그냥 버린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게 훗날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나로서도 감히 알기 어려웠으니까.

"방법이 있을 겁니다."

"무리하지는 말게."

"그럴 겁니다."

이윽고 저 너머에서 평화롭기 그지없는 베른하르크의 모습이 보였다.

서둘러야 할 때다.

* * *

베른하르크로 돌아간 우리는 곧장 베른하르크 경비대에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 사실입니까?"

"사실이네. 곧 전망대에서도 그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할 테지. 그때부터 대비하면 늦을 걸세."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게."

일단 경비대에 전할 말은 모두 전했다.

이에 대비하는 건 순전히 베른하르크의 역량이겠으나, 이 평화로운 도시에 제대로 된 방어 체계가 갖춰졌을 거라는 생각은 그리 들지 않았다.

'그나마 이곳에 적지 않은 유저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겠지만....'

과연 그들이 베른하르크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워 줄까?

나로서는 부정적이었다.

만약 이곳이 여전히 게임 속이었다면 모를까, 지금 우리에게 이곳은 명백한 현실이었으니까.

'일단 지금은 서둘러야겠지.'

우리는 곧장 개럿 메이슨 의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쾅쾅!

"누구십니까?"

"제4 특무대장 에드릭입니다. 급한 일입니다."

급한 일이라는 말 때문인지, 안쪽에서 몇 번인가 우당탕 소리가 들리고서야 개럿 메이슨이 다급한 기색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무, 무슨 일입니까?"

"마수 군대가 베른하르크를 향해서 진격하고 있습니다. 심상치 않은 규모입니다."

"마수 군대라니... 그런...."

"놀라셨겠지만 사실입니다."

"그,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장 의회를 소집하고, 이를 대비해야 합니다!"

"예,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번에 제국 측에 지원을 요청한 진짜 이유, 그걸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개럿 메이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짜 이유라니... 그런 건 없습니다."

"의원님, 시간이 없습니다. 진짜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지금 일어난 사태에 대한 해결책 역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

"말씀해 주시지 않겠다면, 저희는 이만 겨울성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까요."

에드릭이 뒤돌아서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개럿 메이슨이 외쳤다.

"자, 잠깐!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부요!"

"전부 말입니까?"

"무, 물론입니다!"

그와 함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연스럽게 몸을 돌린 에드릭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예. 얼마든지요."

그 얄미운 표정을 보면 개럿 메이슨으로서도 속았을 거라 느꼈을 법도 하건만, 개럿 메이슨의 표정은 여전히 무겁기 짝이 없었다.

"...이걸 어디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뮐헨 곡창지대에 마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무리에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더군요. 지금 당장은 용병들로 어떻게든 해결하고 있지만, 영원히 용병들을 고용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원인을 찾아야 했습니다. 저희만으로는 도저히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어서 제국 측에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변종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저희는 변종이 출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겁니다만."

"죄송합니다. 도통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지레짐작으로 새로운 변종 때문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꽤 그럴듯한 말이다.

만약 내가 진실을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냥 넘어갔을 정도로.

에드릭 역시도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는지,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뭐... 그렇다면 나도 기대에 부응을 해 줄 수밖에.

"이번 사건의 배후에 하노버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가 아닙니까?"

그와 함께 개럿 메이슨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걸 어떻게...?"

"모를 거라 생각하신 게 더욱더 의외네요. 제국을 아직도 모르십니까?"

사실은 익명 게시판에서 보고 안 거지만, 지금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로,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전부 알고 계셨군요. 그 말씀대로입니다. 저희는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하노버가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노버라는 이름이 가져다준 힘 덕분일까.

마침내 개럿 메이슨 의원은 지금까지 감추고 감췄던 진실을 내뱉기 시작했다.

"처음 뮐헨 곡창지대에 마수들이 나타났을 때, 우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계속되자 원인을 알고자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노버 측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배후를 하노버로 특정할 수 있었고요."

개럿 메이슨이 씁쓸해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저희는 하노버에서 대체 어떤 방법으로 마수들을 보내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설마하니 하노버의 연금술사들이 마수를 길들이는 데 성공이라도 한 건가 하는 억측도 들었으나, 마수들의 숫자를 보면 그 또한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개럿 메이슨이 덧붙였다.

"즉... 심증은 있었으나, 물증이 없었습니다."

"심증만 있는 상태에선 베른하르크에서 직접 하노버에 대해서 항의할 수가 없으니, 제국의 손을 빌리겠다는 계산이었군요. 제국에 공식적으로 그런 요청을 했다가는 하노버 측과 국제적인 문제가 생길 테니."

"...전부 꿰뚫고 계셨군요.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이번 사태의 배후에 하노버가 있다면, 제국에도 그 사실을 알렸으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굳이 숨길 필요가 있었습니까?"

개럿 메이슨이 고개를 떨궜다.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현재 베른하르크 의회는... 친하노버파가 장악한 상태니까요."

다소 충격적인 선언에 지금껏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드릭이 끼어들었다.

이제부터는 제4 특무대의 결정권자인 에드릭의 차례였다.

"친하노버파라, 그냥 넘겨들을 수 없는 말씀이군요. 하노버의 뒤에 연합이 있음을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말씀드리지 못한 겁니다. 제국에서 현 베른하르크의 상황을 알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일이 심각해지니까요."

"허."

에드릭이 낮게 웃었다.

더없이 사나운 웃음이었다.

"그 사실을 제국이 알게 된다면 지금까지 베른하르크가 받았던 제국의 호의는 모두 사라지겠지요. 황실 또한 크나큰 배신감과 모욕을 느낄 테고. 안 그렇습니까?"

"...그 말씀이 맞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제국과 베른하르크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겁니다. 저는 그러한 일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그 일이 결국 이렇게 현실이 되었군요. 안 그렇습니까?"

"그건...."

"자, 들으십시오. 지금 저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에드릭이 손가락 하나를 폈다.

"첫 번째로,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나서 겨울성으로 돌아간 후, 제국 측에 베른하르크의 멸망을 알릴 것인지."

"며, 멸망이라니! 그게 지금 무슨 말씀입니까!"

개럿 메이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으나, 에드릭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손가락 두 개를 폈다.

"두 번째로, 현재 베른하르크에 닥쳐 있는 사태를 해결한 뒤, 친하노버파와 관련된 모든 인사를 처단한 뒤에 베른하르크를 정상화할 것인지."

"저, 정상화라니... 서, 설마...!"

에드릭이 서슬 퍼런 시선으로 개럿 메이슨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그건...."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 결단하지 않으시겠다면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제국의 호의는 지난 며칠간 저희가 보인 성의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에드릭은 마치 개럿 메이슨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사실 이 대화에서 개럿 메이슨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그 무엇도 없었다.

"저는...."

개럿 메이슨의 시선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 곧이어서 나지막이 흘러나온 말이, 베른하르크의 운명을 결정했다.

59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6)

개럿 메이슨 의원은 결국 에드릭의 의도대로 베른하르크의 존속을 선택했다.

비록 그 결과로 머지않아 베른하르크에 거대한 피바람이 불어오겠지만, 그건 온전히 개럿 메이슨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렇게 개럿 메이슨이 의회를 소집하기 위해서 떠나고, 우리 또한 움직였다.

"...이걸로 괜찮은 거냐?"

콘란이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아마 지금부터가 중요하겠지."

"방법이 있는 거냐?"

"일단 전후 상황이 전부 드러났으니,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뭐?"

콘란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는 방법이 있다며?!"

"그러니까 찾을 수 있다고."

"너... 일이 잘 안 풀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마음대로 해, 할 수 있다면."

"이 자식이...!"

"그만."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알리시아가 콘란의 앞을 막아섰다.

"쓸데없는 소리, 나중에 해."

"너...!"

콘란의 우악스러운 손이 당장이라도 알리시아를 후려칠 것처럼 부들거렸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알리시아가 순순히 당해 줄 리도 만무할뿐더러, 콘란 스스로 화를 억누른 것이다.

"...부탁한다."

"서두르지."

마찬가지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에드릭이 말했다.

"자, 그러면 슬슬 궁금해지는군. 그래서 도대체 뭔가? 지금 베른하르크에 마수들이 몰려오고 있는 걸 막을 방법이."

"모르면서 개럿 메이슨 의원한테 그렇게 말한 겁니까?"

이쯤 되면 이 양반의 뻔뻔함에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다.

"모름지기 패는 많이 쥐고 있을수록 좋은 법 아니겠나? 설령 그 패가 아직 내 손에 없다고 해도 말이야."

"보통 그걸 사기라고 합니다."

"협상의 기술이라고도 하지."

에드릭이 언제나처럼 껄껄 웃었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웃을 수 있을까 싶었으나, 지금은 그보다는 다른 걸 생각해야 할 때였다.

"아마 마법일 겁니다."

"마법이라... 역시 그렇군. 그렇다면 어떤 마법이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 규모를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볼 때, 몇 가지 생각나는 마법이 있습니다."

마수를 인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마법은 적지 않지만, 이 정도 규모로 마수를 불러들일 수 있는 마법은 몇 없다.

하물며 그게 웨이브까지 일으킬 정도의 마법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천음(天音)의 마법.'

천음의 마법은 평범한 인간이 들을 수 없는 고주파수의 음파를 사방에 흩뿌리는 마법이다.

평범한 인간은 이 고주파를 들어도 큰 영향이 없지만, 감각이 예민한 마수들은 다르다.

마수들에게 있어서 천음의 마법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선사한다.

그렇기에 마수들은 본능적으로 천음의 마법에 노출되면 둘 중 하나의 행동을 취한다.

원인을 없애기 위해서 이 소리의 근원지를 쫓거나.

혹은 최대한 도망치거나.

그렇기에 천음의 마법 자체는 마수들에 매우 효과적인 마법이지만, 사용하기에 따라서 의도적으로 마수들을 불러오거나 물리치는 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지금 베른하르크를 향해서 진격하고 있는 마수 군대 역시도 그러한 천음의 마법에 의한 것일 터.

'즉, 지금도 천음의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마법사가 베른하르크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다.'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또한 정해졌다.

"대장."

"말하게."

"베른하르크 어딘가에 있을 천음의 마법사를 찾아야 합니다. 마법사가 마수들을 베른하르크로 부르고 있습니다."

"천음의 마법사?"

"예."

"흠... 그러고 보니 그런 마법이 있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군. 용케도 알아냈어."

"이 정도 규모의 마수를 불러올 수 있는 방법이 흔하지는 않으니까요."

"하긴."

지금껏 침묵하던 알비노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 그런 마법도 알고 있었나."

"내가 꽤 박식한 편이지."

"...그렇단 말이지."

알비노의 말이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들려왔으나,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에드릭이 말했다.

"천음의 마법사를 찾을 방법은?"

"천음의 마법은 고주파를 발산하는 마법입니다. 이 정도 마수를 불러올 정도의 고주파라면 주변이 탁 트인 곳에서 사용하고 있겠죠. 아마 높은 건물 위가 가장 가능성이 높습니다."

"높은 건물이라.... 베른하르크에 그런 건물이 한둘이 아닐 텐데?"

"어쩌겠습니까, 찾아야지."

"끙. 서둘러야겠군. 이럴 때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개럿 메이슨은 현재 베른하르크 의회를 소집하고 그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느라 부재중이다.

그 외 우리가 이곳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 같은 게 있을 리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그런 병력이 있었다면 진작 성벽 수비에 동원되었을 터.

베른하르크의 운명이 달린 일이건만, 정작 움직일 수 있는 게 외부인인 우리뿐이라는 소리였다.

"흠...."

잠시 고민하던 에드릭의 시선이 이내 자연스럽게 한쪽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콘란에게로 향했다.

"자네."

"...하실 말씀이라도?"

"듣자 하니 예전에 이곳에서 용병 생활을 했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예전에 함께 용병 일을 했던 동료들도 있겠군."

"그건...."

"베른하르크의 운명이 달려 있네. 도와줄 수 있겠나?"

"...."

콘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전에 베른하르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저 반응을 보면 쉽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상황이라고 느꼈던 건지, 콘란은 애써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해 보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자네는 옛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나머지는 바로 움직이지."

"알겠습니다."

콘란이 용병 시절의 옛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 사이, 우리는 천음의 마법사가 있을 법한 높은 건물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흩어지는 게 좋겠군. 움직이지."

"예."

발걸음을 옮기려던 알리시아가 나를 슬쩍 돌아보면서 말했다.

"조심해요."

"걱정할 필요 없다."

"그래도요."

알리시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나 또한 베른하르크에서 가장 높은 건물들을 향해서 시선을 옮겼다.

'천음의 마법사는 현재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커. 그렇다면 뮐헨 곡창지대 방향으로의 가시성 역시도 확보되어 있는 장소일 터.'

그렇기에 나는 우선적으로 동쪽에 있는 건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러면....'

나는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이닥쳤다.

쾅!

일일이 허락을 구할 시간은 없었다.

"꺄악! 누, 누구세요?"

"급한 용무입니다. 위층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허락을 구한 건 아니었습니다."

베른하르크 시민들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나를 보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검을 앞세우고는 무작정 건물들을 들쑤셨다.

"당신 뭐야? 당장 나가!"

"그럴 거야, 위층만 살펴보고."

"이 자식이!"

그 와중에 적지 않은 소란이 있기는 했으나, 제대로 된 훈련도 되지 않은 일반인이 지금의 나를 막아설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무, 무슨 힘이...!"

"비켜. 다친다."

"아악!"

"꺄아아악! 사, 살려 주세요."

"죽일 생각 없어. 살려 줄 생각이라면 모를까."

"저, 정말요?"

"어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건 아마 베른하르크에서 처리해야 할 일을 대신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전해 주는 짜증이겠지.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받아 내야겠어.'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에드릭 또한 동의하지 않을까.

그렇게 차후 베른하르크의 처분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새로이 들어선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겨, 경비대! 경비대를 불러!"

"경비대는 지금 바빠. 베른하르크가 멸망하기 직전이거든."

"그게 무슨 헛소리야!"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진동, 더 커졌다고 생각하지 않나?"

"헛소리도 작작...."

쿵!

쿠우웅──!!!

"...어?"

"쯧."

아니나 다를까.

아무래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더욱더 커진 진동과 함께 조금 전부터 바깥에서 마수들의 울음이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오오오오오오...!

-크룩! 크루루룩!

-끼에에에에에!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마수의 군세가 마침내 베른하르크의 지척까지 도달한 것이다.

* * *

"젠장, 젠장, 젠장...."

콘란은 홀로 계속 욕지거리를 뇌까리면서 달렸다.

일단 하겠다고 말은 했는데, 막상 옛 동료들을 찾으려니 과거의 기억들이 콘란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 배신자!"」

「"당장 꺼져, 죽여 버리기 전에."」

「"콘란, 어떻게 네가...."」

그러나 그러한 망설임은 곧이어서 울려 퍼진 한 가지 괴성과 함께 말끔히 사라졌다.

-크오오오오오오...!

인간을 본능적으로 공포로 물들게 하는 끔찍한 괴성.

마수의 울음소리다.

'벌써 여기까지 왔다고?'

마수들의 군세가 도착하려면 아직 약간의 시간이 더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마수는 감히 인간의 상식으로 재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진군 속도 역시도 예상을 뛰어넘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어.'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옛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건 콘란에게 있어서 더없는 사치가 되었다.

설령 과거의 인연들과 마주하게 되어서 좋지 못한 꼴을 보게 되더라도, 지금은 그것마저도 감내해야 할 때였다.

[레일라 용병 길드]

과거의 기억 속에 묻혀 있었던 장소에 비로소 도착한 콘란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였다면 꽤 붐볐어야 할 시간이었으나, 용병들 역시도 지금 베른하르크에서 일어난 불온함을 감지한 건지 길드 내는 꽤 한산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용병이란 본디 상인만큼이나 손익에 예민하고, 목숨을 건 전장을 오가면서도 목숨을 귀히 여기는 족속이었으니까.

"어떻게 오셨습니까?"

"레일라를 만나러 왔다."

"길드장님을 말입니까? 혹시 선약이 되어 있으십니까?"

"아니. 콘란이 왔다고 전하면 될 거다."

"...콘란? 잠깐, 설마...!"

용병 길드 직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그의 손이 다급히 탁상에 연결된 종을 울렸다.

땡땡땡!

격하게 울리는 종과 함께 길드 안에서 길드원들이 뛰쳐나왔다.

뛰쳐나온 길드원들은 당장이라도 콘란을 덮칠 기세였으나, 이내 그중 한 사내가 콘란을 알아보았는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콘란?"

"오랜만이다, 하뮬."

"네가 어떻게 여길...? 분명히 징벌 교단에 잡혀갔을 텐데...!"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 하! 도움?! 지금 네가 우리한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이 배신자야!"

"난 배신을 한 적 없다."

"웃기지 마!"

하뮬이라 불린 사내가 으르렁대면서 검을 뽑아 들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만!"

어디선가 울려 퍼진 날카로운 소리에 길드 내에 있던 모든 이들이 멈춰 섰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각, 또각─

그와 함께 계단 위에서 붉은 머리의 장신의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본 콘란이 작게 입을 벌렸다.

"...레일라."

피하고자 했다.

멀어지고자 했다.

그러나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어째서인지 콘란은 이 자리에 다시금 서게 되었다.

"오랜만이야, 콘란."

레일라가 사납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아니, 전남편이라고 불러야 하나?"

콘란은 지금껏 피하고자 했던 과거를 마주하게 되었다.

60화 자유도시 베른하르크 (7)